공부/종교와 나

사찰순례-경기도편1`

應觀 2017. 5. 7. 12:29

        예  정
   1. 서울   과천 관악산 연주암 (冠岳山 戀住庵 )羅漢
   2. 서울 구기동 북한산 문수사 (北漢山 文殊寺)文殊
   3. 서울 구기동 북한산 승가사 (北漢山 僧伽寺) 藥師
   4. 서울 은평구 북한산 삼천사 (北漢山 三千寺) 祈禱靈驗
   5. 경기 남양주 수락산 흥국사 (水落寺 興國寺)藥師
   6. 경기 안성 서운산 청룡사 (瑞雲山 靑龍寺)
   7. 경기 안성 백운산 운수암 (白雲山 雲水庵)
   8. 경기 여주 봉미산 신륵사 (鳳尾山 神勒寺 ) 懶翁 和尙
   9. 경기 동두천 소요산 자재암 (逍遙山 自在庵)
  10. 경기 파주 고령산 보광사 (高靈山 普光寺)
  11. 경기 파주 감악산 범륜사 (紺岳山 法輪寺)
  12. 서울 성북 삼각산 경국사(三角山 慶國寺)
  13. 경기  이천 설봉산 영월암 (雪峰山 映月庵)
  14. 경기 강화 고려산 적석사 (高麗山 積石寺)觀音
  15. 경기 강화 고려산 청련사 (高麗山 靑漣寺)
  16. 경기 군포 수리/견불산 수리사 (修理/見佛山 修理寺)
  17. 경기 여주 봉미산 신륵사 (鳳尾山 神勒寺)
  18. 경기 남양주 천마산 견성암 (天摩山 見聖庵)
  19. 경기 남양주 운길산 수종사 (雲吉山 水鍾寺)
  20. 경기 남양주 묘적산 묘적사 (妙寂山 妙寂寺)
  21. 경기 남양주 천마산 보광사 (天摩山 寶光寺) 
  22. 경기 남양주 운악산 봉선사 (雲岳山 奉先寺)
  23. 경기 남양주 천점산 봉영사 (泉岾(天見)山 奉永寺)
  24. 경기 남양주 수락산 흥국사 (水落山 興國寺)
  25. 경기 남양주 수락산 내원암 (水落山 內院庵)
  26. 경기 남양주 불암산 불암사 (佛岩山 佛巖寺)
  27. 경기 남양주 불암산 석천암 (佛岩山 石泉庵)
  28. 경기 남양주 불암산 학도암 (佛岩山 鶴到庵)



과천 관악산 연주암 (冠岳山 戀主庵)


 위 치 : 경기도 과천시 중앙동 관악산에 위치하고 있다.


 개 요 : 신라 문무왕 17년(677)에 해동 화엄 초조(初祖) 의상스님이 관악산에 의상대를 세우고 그 아래에 관악사를 창건했다고 한다.

           이 관악사가 연주암의 본래 이름이고 의상대는 지금의 연주대이다. 그러나 의상 스님이 연주암을 어떤 이유로 창건하게 됐는지,

           또 이곳에서 어떻게 수행 정진했는지는 알 수 없다.
           麗末朝初에 이르러?연주암?으로 이름이 바뀌게 되는데, 그 동기와 관련해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한다.

           하나는 고려가 망하자 강득룡(姜得龍), 서견(徐甄), 남을진(南乙珍) 등 유신들이 관악산에 은신하며 의상대에서

          고려 왕조를 그리워 한데서 유래한다는 것으로 이들이 고려 왕조 고려의 임금을 그리워했으므로 임금을 뜻하는?주(主)?를 써서

          ?임금을 그리워한다?는 뜻의 연주(戀主)?를 관악사의 새 이름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또 조선 태종의 맏아들인 양녕대군과 둘째 아들인 효령대군과 관련된 것으로 태종이 왕위를 셋째인 충녕대군(세종)에게 물려주려고 하자

          유랑길에 나선 이들은 관악사에 머물며 왕위에 대한 미련을 떨쳐 버리고자 했다고 한다.
          연주암에는 효령대군의 영정을 모신 효령각이 있어 효령대군을 기리고 있다. 고려의 유신들이 개성을 그리워하며 은거했다거나

          양녕, 효령 두 대군이 머물렀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까지 믿을 수 있을지 의문이지만  연주암이 조선왕조와 밀접한 관계에 있었던 것만은 틀림이 없다.
          연주암에서 4백여 미터 떨어진 곳에는 영험 있는 나한기도처로 유명한 연주대가 있다. 깎아지른 절벽에 나한을 모셨음을 나타내는

          응진전(應眞殿)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응진전 바로 옆에는 약사여래불이 있다.

          조선시대 말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이 부처님 또한 영험하기로 소문이 나 있다.


북한산(北漢山)


 북한산에는 옛날부터 무수한 사찰이 있었다.
   신혈사, 향림사, 적석사, 문수사, 승가사, 삼천사, 진관사, 조계사, 도성암 등. 그리고 임진왜란 이후 호국승병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북한산성을 축성하고 이들로 하여금 수비의 일익을 담당케 하기 위해 산성 안에 대대적인 불사의 건립을 추진하였다.
   용암사, 보국사, 보광사, 부왕사, 서암사, 원각사, 국녕사, 상운사, 태고사, 진국사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그 숱한 사찰들은 일제시대와

   한국전쟁으로 거의 사라지고 그 명맥을 유지해오는 절들도 다시 지어졌다.
   비봉 동쪽에 있는 僧伽寺는 신라 35대 경덕왕 15년(756)에 수대가 창건하고  西域의 승가대사를 추모하여 석굴을 파고 석불을 모셨다 한다.

   그리고 거대한 암벽에 조각된 5미터 높이의 석가여래 마애불이 있다.
   문수봉 중턱에 文殊寺는 고려 예종 4년에 탄연이 창건한 절로, 오백 소조 나한상과 문수굴 천장에서 떨어지는 맑은 약수가 이름 나 있다.
   부왕동 암문 밖 임진왜란 때 소실된 삼천동에 있던 삼천사터 암벽에는 우아하게 새겨진 마애여래입상이 있다. 용암문 동쪽 아래 신라 경문왕 2년(862)에

   도선국사가 창건한 도선사 외에 북한산에는 많은 절이 있다.
   백운대는 북한산의 主峰(837m)으로 岩峰이다. 정상에 올라서면 태극기가 바람에 날리고 있고 인수봉이 바로 눈앞에서 손에 닿을 듯하고

   암벽 등반하는 모습도 볼 수 있다.
   북한산은 국토의 중심부에 위치한 서울에 인접하여 우리나라의 2000년 역사와 그 궤를 같이하고 있다.

   북한산의 최초 명칭은 부아악(負兒嶽)이다. 부아악이란 명칭은 백운대, 인수봉, 만경대(국망봉)의 어느 암봉 뒤에 애를 업은

   형상의 바위가 붙어있다 해서 불렀다는 설(說)과 산봉이 뿔처럼 뾰족하게 생겨 불렀다는(부아→불→뿔) 설이 있다.

   삼국시대에 부아악 또는 횡악(橫岳)으로 불렀던 북한산은 고려시대 성종(成宗)이후부터 1900년대까지 약 1천년동안 정상의

   세 봉우리를 의미하는 삼각산(三角山), 또는 조선시대 중기까지 화산(華山), 화악(華嶽)으로 불리었다.

   북한산이란 명칭은 1711년 조선중기의 숙종(肅宗)이 축조한 북한   산성을 염두에 두고 남한산(성)과 대비하여

   "한강 북쪽의 큰 산"이란 의미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 삼국사기에 의하면, 기원전 18년경에 고구려 동명성왕의 아들인 온조와 비류가 한강이북지역을 도읍으로 물색코자 북한산(부아악)에 올랐다고 하며,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에 도읍을 정하였을 때 도성을 지키는 북방의 성으로 132년(개루왕 5)에 축성(築城)되었고 백제의 개루왕이

    서기 132년 산성을 쌓았으며 북한산성은 이때 백제의 주군력(主軍力)이 이성에서 고구려의 남진을 막았고

    삼국시대에는 전략요충지인 북한산을 서로 차지하려는 국경싸움이 그치지 않아 서기 555년 신라 진흥왕이 북한산을 국경으로 삼는다는

    순수비(巡狩碑)를 비봉에 세우고, 557년 한강 이북 지역에 행정구역인 북한산주(北漢山州)를 설치하였다.

    신라시대의 명승 원효대사와 의상대사가 북한산에 들어와 수도를 하여 원효봉과 의상봉이라는 지명을 남겼으며,

    원효대사가 상운사와 삼천사를 창건하였다. 이어 승가사와 도선사가 창건되었다.
 - 고려시대 태조 왕건이 중흥사를 창건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고려 8대 현종(顯宗)이 북한산에서 승려생활을 할 때

    진관(津寬)스님의 은공을 기려 그를 국사(國師)로 봉하고 1011년 진관사를 창건하였으며,

    거란족이 침입하였을 때 북한산성 계곡 중흥동에서 피난생활을 하였다. 고려 예종 1109년 탄연(坦然)이 문수사를 세웠다.

    고려말 우왕 1388년 최영장군은 중흥성(북한산성의 전신)을 축조하여 군대를 주둔시킨바 있으며,

    원증국사(圓證國師) 보우가 중흥사를 중건하고 그 옆에 태고암을 지었다.
 - 조선 건국 초에 무학대사가 한양을 조선의 도읍으로 삼기 위해 북한산을 답사하였으며, 수양대군(세조)이 천문관측을 위해

    보현봉을 올랐고, 많은 신하와 선비, 승려들이 풍수지리, 학문정진, 수도(修道)를 위해 출입했다는 기록이 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수도 한양이 점령당하고 왕이 멀리 피신하는 사태가 발생된 이후 북한산성 축조 필요성이 대두되었으며,

    이에 대한 오랜 기간의 찬반양론 끝에 숙종(肅宗)이 1711년 전란시 피난처 및 방어지로 삼기 위해

    단 6개월만에 석성(石城) 7,620보(步), 약 8.5㎞를 구간을 나누어 삼군문(三軍門)에 분담시킨후 각종 장인들과 도성의 백성들을

    축성에 참여시켰다. 축성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신속히 진행되어 불과 6개월만인

    그해 10월 19일 백운봉, 만경봉, 용암봉, 문수봉, 의상봉, 원효봉, 영취봉등 북한산의 연봉을 연결하는 석성을 완료하였으며

    길이는 21리 60보에 이르렀다. 성의 규모를 보면 대서문(大西門)․동북문(東北門)․북문 등 13개의 성문과,

    자단봉(紫丹峰)위에 동장대(東將臺)․나한봉(羅漢峰), 동북에 남장대(南將臺)․중성문(中城門), 서북에 북장대(北將臺)가 있었고,

    1712년에 건립한 130칸의 행궁(行宮)과 140칸의 군창(軍倉)이 있었다. 성내 중흥사(重興寺)는 승군(僧軍)을 배치한

    136칸의 大刹이었으며 12개의 사찰이 있었다. 이어 북한산성의 외성(外城)으로 1713년 탕춘대성을 축조하기 시작했으나 

    신하들의 반대의견이 많아 완성을 보지는 못하였다. 숙종 이후 북한산성에 대한 전략적 중요성이 약화되어

    거의 사용되지 않았으며, 이로 인한 방치와 전란시의 화재, 자연재해 등으로 성곽을 비롯한 주요시설, 사찰들이 크게 훼손되었다.
 - 일제시대 때에는 일본 헌병대가 주둔하여, 의병과 독립군이 북한산을 거점으로 삼을 것을 우려, 북한산성내 대부분의 시설과

   사찰을 불태웠다고 하며, 1927년 백운대에 쇠난간을 설치하고 철심을 박아 민족정기를 훼손하려 했다. 철심은 1980년대 모두 철거되었다. 
   인수봉은 높이 804m. 백운대(白雲臺)․만경대(萬景臺)와 함께 예로부터 삼각산(三角山)․삼봉산(三峰山)으로 불려왔다.

   화강암의 암벽이 노출된 경승으로 동쪽산기슭에는 우이동(牛耳洞)이 있고 남동쪽 기슭에는 도선사(道詵寺) 등이 있다.


북한산 문수사 (北漢山 文殊寺)


 위 치 : 서울 종로구 구기동 2번지
 개 요 : 1109년(예종 4)에 대감탄연국사(大鑑坦然國師)가 주위의 절묘한 기암괴석(奇岩怪石)과 경관(景觀) 천연동굴(天然洞窟)에 매료되어

           이곳을 불법의 유연찰토(有緣刹土)로 정하고 불우(佛宇)를 지어 문수암(文殊庵)이라고 하고 천연동굴(天然洞窟)을

           문수굴(文殊窟)이라 명명(命名)하였다.
           태고보우국사(太古普愚國師)께서도 이 동굴(洞窟)에서 정진삼매(精進三昧)중 청의동자(靑衣童子)로부터 차(茶)한잔 얻어 마시고

           활연대오(豁然大悟)하였다고 전해 내려오고 있다.
           현재는 법당, 삼성각, 요사, 나한전등의 건물이 있다. 동굴 천장에서 떨어지는 맑은 약수와 五百羅漢을 모신 祈禱處로 부처님을 주불로 하여

           부처님의 좌협시로慈氏彌勒菩薩과 우협시로 堤華竭羅菩薩가 모셔져 있다.
           현재 오래된 사적기는 전하는것이 없고 다만 근대에 권상로(權相老)가 찬한

          〈삼각산문수암기단청급불상봉안기(三角山文殊庵記丹靑及佛像泰安記)〉가 전한다.
           대웅전의 문수보살상은 명성황후(明成皇后)가 그리고 석가불상은 영친왕 이은(李垠)의 부인인 이방자(李方子)여사가 봉안한 것이라 한다.

           또한 현재 나한전에 모셔진 오백나한은 본래의 오백나한을 그대로 복원한 것으로 역시 진흙으로 빚었다. 
           암행어사(暗行御史) 박문수(朴文秀)도 그의 부친(父親)이 오랫동안 후사(後嗣)가 없어서

           이곳에서 기도(祈禱)로 얻어진 인물(人物)이며 이승만(李承晩) 전대통령(前大統領)도 그의 자당(慈堂)께서 이곳에서 기도로 얻어진 인물이다. 

           모친이 문수굴에서 백일 기도한 뒤 잉태한 연고로 이승만 박사는 82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몸소 이 절을 찾아?文殊寺?라고 쓴 편액을 남기기도 했었다.  비봉 동쪽에 있는 승가사(僧伽寺)에는

           거대한 암벽에 조각된 마애불과 석굴안에 모셔져 있는 승가대사의 석상이 있어 더욱 유명하다.
 
북한산 승가사 (北漢山 僧伽寺) 


 위 치 : 서울특별시 종로구 구기동 산1 379-2996, 9665


 개 요 : 신라경덕왕 15년(756)에 낭적사의 승려 수태(秀台)가 창건하고 당나라 고종때 천복사(薦福寺)에서 대중을 가르쳤던

           승가(僧伽)를 기리는 뜻에서 승가사라고 이름지었다.
           절 뒤편 자연 입석에 부조로 새긴 磨崖石佛釋迦如來坐像이 전하고, 석굴안에는 고려 현종 때 조성된 승가사 석조 승가대사상이 남아 있다.
           승가대사는 서역인으로 서기 640년에 출생하여 당나라로 건너와 53년 간 불교 전교에 헌신한 분으로

           갖가지 변화를 자유 자재로 하여 기적을 나타내어 동방의 불교 홍법에 큰 획을 이루어 관음 보살로 회신되어

           중국의 각지에 승가당이 설치되어 있다.

           위 쪽 암벽에 조각된 마애석불님상은 기실 32현상에 의한 관음보살상으로 승가대사와 인연을 깊게 하고 있다. 
           신라, 고려,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1,400년간 왕상공경 (王相公卿)이 국난 때마다 참배 기도드려 가피를 입었으며

           백성의 소원도 한가지만은 꼭 들어주는 영험이 따랐다고 한다.  승가사의 명칭도 승가대사를 기리기 위하여 창건의 취지가 담겨져 있다.
           ☞ : 143-1번을 타면 한번에 승가사 입구까지 갈 수 있다.
           지하철은 3호선 경북궁 역에서 하차해야 한다. 3번 출구로 나가 약 50m정도 전진하면 버스정류장이 나오는데 거기서 143-1번을 타고

           ?승가사 입구?에서 내리면 된다.

           종점 바로 전 정거장이므로 내리는 곳을 쉽게 알 수 있다. 버스 정류장에서 내리면 승가사와 문수사 등

           북한산 소재 사찰의 위치를 가리키는 방향판이 보인다. 그 표지판이 서 있는 골목을 따라 70m 정도 걸어 들어오면

           건덕 빌라 앞 공터가 바로 승가사에서 운행하는 순환 차량정류소다.

           출발 시간은 매 정각이며 아침 10시부터 오후 3시까지 하루 6번 운행된다.
           공터 앞 시멘트 길을 따라 올라가거나 건덕 빌라 8동을 지나 계곡을 질러 올라가는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기왕이면 후자쪽을 추천한다. 도보로 약 1시간쯤 걸린다.


북한산 삼천사 (北漢山 三千寺)  


 위 치 :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외동 산 127-1 02-353-3004/359-7766


 개 요 : 신라 문무왕 1년(661) 원효(元曉)대사와 진관조사에 의해서 창건되었으며.《고려사》에는

            1027년(고려 현종 18) 6월에 이 절과 장의사(莊義寺)․청연사(淸淵寺)의 승려들이 쌀 360여 석으로 술을 빚은 것이 발각되어 벌을 받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1481년(조선 성종12) 편찬된《동국여지승람》과《북한지(北漢誌)》에 따르면, 한때는 3,000여 명이 수도할 정도로 번창했다고 하며

            1592년(조선 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승병들의 집합소로 활용되었으나 이후 불에 타고 6․25전쟁 때 불에 탄 것을

            성운(聖雲)화상이 오대산 적멸보궁에서 정진 중 삼천동 암벽의 마애불을 현몽하여 그 가르침을 따라 이곳에 부임하니

            草庵에 磨崖石佛만이 남아 있었다. 미얀마에서 부처 사리 3과를 얻어와 석종탑을 세우고 모셔 두었다.
            대웅보전과 산령각․선실․요사채․인덕원복지관 등이 있다. 이 중 대웅보전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내부에 석가모니불과 관세음보살․대세지보살의 삼존불이 모셔져 있다.

            후불탱화는 영산회상도이며, 십육나한과 오백나한․신중탱화․지장보살 등이 함께 모셔져 있다.

            산령각은 정면 2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인데 다른 사찰의 산신각보다 규모가 커서 북한산의 산신을 적극적으로 수용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까닭에 이 절을?산신이 보좌를 튼 절?이라고도 부른다.
            대웅전 위쪽에 있는 마애석가여래입상이 있다.

            마애불은 옛부터 영험있는 부처님으로 알려져 불자들의 참배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 : 지하철 3호선 구파발 전철역 2번 출구에서 오전 8시 40분,10시,11시에 봉고차 출발(평일) 156번 일반버스 종점에서 하차,

           30분 거리 법회일 오전은 수시운행


안성 서운산 청룡사(瑞雲山547m  靑龍寺)


 위 치 : 경기 안성시 서운면 청룡리 62-4  (031-672-9103) 

   
 개 요 : 고려 원종 6년에 명본국사가 지어 대장암이라고 했다. 사찰 안에는 대웅전, 관음전, 봉향각, 명부전 등이 있고

           대웅전 앞에는 5톤 무게의 구리로 된 종이 있다. 대웅전의 휘어진 듯 곧은 기둥들이 이리저리 등 굽은 노송을 그대로 옮겨와

           가지만을 뚝뚝 잘라내고 기둥을 삼은 것이 청룡사만의 매력이다.
           碑文에 의하면 고려 말 승려 나옹이 이 절을 중창할 때 상서로운 구름을 타고 내려오는 청룡을 보아서 서운사 청룡사라고 했다.
           ☞ : 안성 시내에서 서운면 방향으로 다리를 건너 청룡사 이정표를 따라 직진한다. 서운면소재지 못미쳐 두 갈래길이 나오면

           57번 지방도로 진천방향. 34번 국도가 나오면 좌회전해 2㎞정도 고개길을 오르면 좌측에 청룡호수,

           둑방길을 지나 산으로 들어간다. 청룡사는 길 끝에 있다.
           ☞ : 안성 I.C~용두 삼거리(직진)~건지(대덕면) 삼거리(우회전)~안성 38번 국도 이용 (12.2km, 0:15 소요)

           안성(서운면 방향 339번 지방도)~인리(서운면)~산평 삼거리(좌회전) 339번 지방도 이용 (11.5km, 0:15 소요)

           도림 삼거리~청룡리~청룡사 34번 국도 이용 (4.2km, 0:05 소요)


안성 고성산 운수암(白雲山 雲水庵)


 위 치 : 안성 양성면 방신리 85  031-673-7372
 개 요 : 조선 영조 26(1750)년에 장씨부인이 창건하였다. 조선 제21대  대원군이 중건하고 시주하는 동시에

           운수암 이라는 친필로 쓴 현판을 하사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법당1동 외에 5동의 건물이 있으며 사찰을 중심으로

           주변에 과거 산성이 있던 흔적이 있고 운적 암이라고도 하는데 청상과부가 부처님 을 모시고 살아갈 생각으로

           무양성 바깥에다가 터를 닦았는데, 꿈에 성안에다 절을 지으라는 계시를 받고 성안으로 가서 쓰러진 풀과 소나무 치우고 보니

           사찰터로 적합하여, 그 자리에 사찰을 지었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현재 대웅전과 비로전, 요사채, 삼성각 등이 있다. 무량성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고 조선말기에 유행한 경기지역의 대방형식을 잘 보여준다. 
           비로자나불좌상 : 약 60년전 다른 곳에서 옮겨와 이곳에 안치 한 것으로   화강암 1석으로 조성되었는데, 파손된 부분이 있기는 하나

           백분을 칠하여 많이 감추어져 있다.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절 입구에서 대웅전까지 오르는 돌계단의 경관이 볼만하다. 석남사 왼편 산길을 500m 쯤 올라가다 보면

           5m 높이의 바위에 새겨진 마애불이 있는데, 흡사 무엇인가로 인해 괴로워하는 말없는 몸부림처럼 느껴진다.
           ☞ :
 
           건강나라 : 소나무숲과 어우러진 자연경관속에 동양 최대규모의 찜질마을이 들어서 있다. 불가마,옥석굴,피라미드,한방,원적외선 체험실 

           등 다양한 시설과 각종서 비스, 지친 생활에
           새로운 활력을 선사해 준다.
          (죽산면 매산리 247
                                                       031-674-8255)
                               
  동두천 소요산 자재암(逍遙山 自在庵) 


 위 치 : 경기 동두천시 상봉암동 (031-865-4045)(주차장에서 1.5㎞ )
 개 요 : 신라 무열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했다. 절 입구에 요석공주가 원효를 찾아와 기거했더는 집터가 있다.

           거대한 바위산 협곡에 위치하고 원효대사가 고행 수도하여 큰 도를 깨친 산으로서 무수한 승려들이 수도차 거쳐가는 곳이다.

           1994년 암자의 서책들을 정리하다 발견된<반야바라밀다심경>언해본이 전해오는데, 낙장 하나 없는 완벽한 언해본이다.

            신라의 원효대사(元曉大師)가 개산(開山)하여 자재암(自在庵)을 세운 이후 974년(고려 광종 25) 소요산이라 부르게 되었고,

            중대암(中臺庵)․소운암(小雲庵)․소요암․영원사(靈源寺) 등의 사찰과 암자가 있었다고 한다. 소요산에 들어서면

            먼저 청량폭포(淸凉瀑布)와 원효폭포의 장관에 부딪치게 되는데 이 지대를 하백운대(下白雲臺)라고 한다.

            그 오른쪽에 원효대(元曉臺)가 솟아 있고 원효대사가 수도한 곳이라고 전하는 옥로봉(玉露峰)을 넘어 북동쪽으로

            나한(羅漢)․의상대(義湘臺)․비룡폭포가 나온다. 또 원효대에서 약 30m쯤 되는 절벽 위를 상(上)백운대라고 하며,

            그 밑으로 선녀탕(仙女湯)을 볼 수 있다.

             ☞ :


파주 고령산 보광사(高靈山 普光寺)


 위 치 : 경기 파주시 광탄면 영장리 13번지 031-948-7700/1
 개 요 : 신라 진성여왕(894년)의 명으로 국가의 비보사찰로서 도선국사가 창건한 한강 이북의 6대 사찰 중의 하나다.

           고려 고종 2년(1215)원진국사가, 법민 대사가 불보살 5위를 봉안했고, 우왕 14년(1388)에 무학 왕사가 삼창했다고 한다.
           근대에 들어와서는 한국전쟁 당시 많은 피해를 입었으나 복원하였다.
           대웅전에는 목조불상인 비로자나삼존불과 영산후불탱화가 봉안돼있고 천정에는 동양화기법으로

           그린 화조화(花鳥畵)와 초충도(草蟲圖)가 있는데 이 같은 천정화는 그 유례가 드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범종각에 범종(인조9년1631)과 빼어난 수작으로 인정받는 목어가있다.
           ☞ : 1) 구파발 방향 - 통일로 1번국도- 대자동삼거리(벽제화장터)에서 우회전의정부 방향으로 5분정도직진

                    좌측 고양동 방향으로 좌회전 후 벽제동 삼거리(아시아 호텔 앞)에서 우회전 후 약2Km
                 2) 의정부 방향 - 39번 국도 장흥유원지 지나서, 서울 시립 용미리 묘지 방향우회전(315번 도로) 후

                    벽제동 삼거리(아시아호텔 앞)에서 우회전 후 2Km


화 고려산 적석사(高麗山 積石寺)


 위 치 : 강화군 내가면 고천리 74번지  032-932-6191
 개 요 : 고구려 장수왕 4년(416)에 천축스님이 고려산 꼭대기에서. 오색 연꽃이 피어있는 연못을 발견하고,

           다섯 송이의 연꽃을 날려 붉은 연꽃이 떨어진 곳에 세운 절이 적석사고, 처음의 이름은 적련사(赤蓮寺)였다. 
           대웅보전 : 석가. 관음. 대세지보살의 석가삼존상을 비롯해 치성광여래. 산신상. 독성상 및 목조지장보살입상이 있다.

           또 불화로는 영상회상도. 산신탱화. 독성탱화. 칠성탱화가 있다. 용왕각은 용왕상. 용왕탱화 등이 있고 용왕각 뒤편에는

           석조관음보살입상이 있고 낙조봉을 오르는 길목의 큰 바위 아래 산신각에 치성광여래. 산신. 독성상을 노천에 모셨다.
           대웅전 왼쪽 아래편에 있는 우물은 오래 전부터 돌 틈에서 맑고 시원한 물이 흘러나오는데, 나라에 무슨 변란이 일어나가나

           흉년이 들면 갑자기 말라버리거나 흐려져서 먹을 수가 없게 된다고 한다.
            ☞ : 강화읍→서문삼거리→내가면(왼쪽) →국화저수지→청련사 입구 →고려 고종 홍릉 입구 →산을 넘어 →

           내가면 연촌→적석사입구(서문삼거리 기점 6.0km) →적석사 표지판을 따라
           ※ 적석사 오르는 길은 약 20~30도의 급경사, 굽은길, 좁은 시멘트 포장도로이다. 초보 운전자 등 운전에 자신이 없는 분은,

              4륜 구동차 이외 출입금지 또는 길이 가파르다는 안내판이 있는 곳에 주차하고 걸어서 올라가는 것이 좋다.

              (0.7km) 눈이 오거나, 길에 조금이라도 눈이 남아있을 경우에는 차를 사용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니 반드시 걸어서 올라가실 것.

 
강화 고려산 청련사 (高麗山 五蓮山 靑漣寺)


 위 치 :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국화리 550번지
 개 요 : 416년(고구려 장수왕 4)에 한 인도 승려가 중국 진나라를 거쳐 우리나라 강화(江華)에 이르러 연못속에 다섯 빛깔의

          연꽃을 공중으로 날려 연꽃이 떨어지는 곳마다 절을 창건하면서 청련사라고 하였다 한다. 
         <전등본말사지(傳燈本末寺誌)>에<청련사단청기(1906년)>, 청련사산각중창기(1909년)>,

         <청련사불사기(靑蓮寺佛事記), 1916년>의 내용이 있고 연혁과 별다른 점은 없다.

         <강도지(江都誌)>라는 기록을 인용해서 말하기를 '절은 국정동천(國淨洞天)' 에 있는데

          주위 경치가 뛰어나며 숲과 샘도 아주 좋다. 그래서 흔히 절을 '국정상하사(國淨上下寺)'라 부르며,

          절에는 비구니들이 거주한다. 때문에 청련사. 원통사(圓通寺)라는 이름보다 국정승방(國淨僧房)이라는 속칭이

          더욱 유명하다'라고 해서 옛날부터 청련사라는 이름 외에 '국정사' 또는 '원통사'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다.
          큰법당 : 석가삼존불상이 봉안되어 있고, 그밖에 후불탱화, 감로탱화, 삼장탱화, 현왕탱화,

          신중탱화 등의 불화 및 銀범종이 하나 있다.
          삼장보살도(三藏菩薩圖) : 지장보살도가 확대되어天藏菩薩, 地藏菩薩,地持菩薩을 한 폭에 모두 그려 모신 것이다.

          청련사의 삼장보살도는 상하 두 개의 단으로 나뉘어 상단 중앙에 설법인의 천장보살과 왼쪽에 經冊을 들고 있는

          지지보살, 오른쪽에 보주를 들고 있는 지장보살이 그려져 있고, 하단에는 각 보살의 협시부처와 권속이 묘사되어 있다.
          현왕도(賢王圖) : 화면 중앙에 의자에 앉아있는 현왕의 모습과 주위에 판관과 사자(使者), 시자(侍者), 동자와 동녀들이 배치되어 있다.
          삼성각 : 大勢至菩薩像을 비롯해서 山神像, 天童女像과 獨聖圖 가 굽이쳐 흘러내리는 계곡과 한 그루 노송 사이에

          왼 무릎을 세우고 앉아 있는 독성의 모습, 지장탱화, 칠성탱화, 독성탱화, 산신탱화가 있다.
          원통전 : 아미타, 관음, 지장의 삼존불상이 있고 불화로서는 후불탱화를 비롯해서 감로 탱화, 신중탱화가 있다.
          ☞ :


이천 설봉산 영월암 (雪峰山 映月庵)

 
위 치 : 경기도 이천시 관고동 438번지 (031)635-3457
개 요 : 신라 문무왕 때 의상대사(625~702)가  북악사(北嶽寺)로 창건하고 산 이름도 북악산이라 하였다고 한다.
 현재 영월암에 관한 초기의 역사적 사실을 알려주는 것은 고려중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마애여래입상(보물 제822호)과 통일신라말 고려초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석조광배, 그리고 연화좌대입니다. 이러한 유물을 통해서 고려초기 이후 사세가 흥성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대웅전 뒤편 계단을 따라 30m쯤 올라가면 10m 정도높이의 마애조사상(보물 제822호)이 나오는데 고려 전기에 만들어졌으며 자연암석을 그대로 다듬었다. 이 마애불은 고려말 고승 나옹선사가 부모님을 천도하기 위해 조성한 것이라는 유래가 전해오고 있는 불상이다.
 절 앞에 있는 一根二柱의 아름드리 은행나무는 수령이 약 600여년을 헤아리는데, 이는 고려 말의 高僧 나옹대사가 이 절에 머물 때 꽂아놓은 지팡이가 자란 것이라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 : 영동고속도 → 이천 I/C → 3번국도 이천방향 → 오던 방향으로(광주방향) 계속 10분 직진하여 세계도자센터, 설봉공원 입간판보고 좌회전 → 설봉공원내 오른쪽 도로를 따라 세계 도자센터쪽으로 오르다보면 우측으로 영월암 이정표 → 비포장도로 → 설봉약수 근처에 주차 걸어서 영월암까지 20분
 이천읍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곳에 자리한 영월암은 3번 국도를 타고 가다 신둔을 지나 장암리 쪽으로 접어든다.
 설봉저수지에서 영월암까지는 1.4㎞. 시멘트로 포장돼 있는 오솔길을 따라 승용차가 갈 수 있다.
 경사가 급한 길을 400m쯤 올라가면 극락교를 건너게 되고 다시 400m를 가면 조그만 삼거리가 나온다. 곧바로 올라가면 영월암이고 오른쪽으로 접어들면 청암약수터이다. 영월암쪽으로 300m를 더 올라가면 ?차량통행불가?라는 팻말이 보인다. 경사가 너무 급하기 때문에이곳에 차를 세워두고 300m를 걸어가야 한다.


이천 원적산 영원사(圓寂山 靈源寺)


 위 치 : 경기도 이천 백사면 송말리 346 (031 632- 4404)
 개 요 : 신라 선덕여왕 7년(638년) 해호선사가 지금의 절터보다 약간 위쪽에 창건 후 영원암(靈源唵)이라 불렀으며 당시 수마노석(水瑪瑙石)으로 조성한 약사여래좌상을 봉안하였다.
  수마노석은 석영의 하나로써 매우 아름다운 빛과 광택이 있으며 홍. 흑. 백의 세 종류가 있다. 이 돌은 일명 수만호라고도 부르는데 공주 마곡사 법당 앞에는 수마노석으로 만든 수마노탑이 있다.
   그 후 400여년이 지난 1068년(고려 문종22)에 혜거국사가 불타버린 영원암을 중창하였다고 한다. 그 때 심었다고 하는 은행나무 두 그루가 경기도보호지정수로 지금도 경내에 대칭으로 서있다.
  약사여래좌상 : 약사전 안에 봉안된 수마노석으로 만든 약사여래좌상은 창건 당시에 조성된 羅末麗初기의 불상으로 추정된다.
  초창부터 400여년이 지난 1068년(고려문종 22) 혜거국사가 불타버린 영원암을 중창할 때 꿈에 약사여래께서 나타나 "왜 나를 버려두고 갔느냐?"고 몹시 호통을 치셨는데 같은 날 신도들도 똑 같은 꿈을 꾸었다. 다음 날 윗산인 안산으로 올라갔더니 사람의 힘을 빌지 않고 석불 스스로 내려와 계시므로 서둘러 약사전을 짓고 봉안하였다고 하며 지금도 자주 약사여래의 위신력을 보인다고 한다. (<기내사원지>이천군편. 136 영원사)
  범종 : 대웅전 안에 있는 이 종은 종신(鍾身)에 '건륭 34년 기축 5월 일 광주 천진사 60년 조성(乾隆 三十四年 己丑 五月 일 廣州 天眞寺 六十年 造成)'이란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어 영조 45년(1769)에 주조된 조선 후기의 종임을 알 수 있다.
☞ : 1) 중부고속도로 곤지암나들목-(3번 국도)-이천시내-(70번 지방도)-신대리- 현방리-도립리
2) 중부고속도로 서이천 IC 진출해서 3번 국도로 나온 다음 우회전 -> 6.1km -> 이천 -> 양평방면 383번 지방도 -> 13.3km ->백사면사무소에서 좌회전 ->영원사


 
 

 
 
파주 감악산 범륜사 (紺岳山 法輪寺)


 위  치 : 경기 파주시 적성면 설마리 
 개  요 : 의상대사가 창건했다가 불타 없어진 운계사터에 새로 지은 절로서 절 마당의 작은 탑하나와 대웅전 왼쪽에 서 있는 백옥석불이 옛날 운계사와 오늘의 법륜사간 역사의 고리를 잇고 있다.
  감악산에는 감악사, 운계사, 법륜사, 운림사 4개의 사찰이 있었다고 전해지나 현재는 모두 소실되었고, 지금의 법륜사는 1970년에 재 창건되었다.
  중앙에 대웅전을 중심으로 서쪽에는 머타전과 동양 최대의 백옥 11면 관세은보살상과 전면에는 9층 석탑과 자연석으로 세운 세계평화의 비가 있고, 절 입구에는 해탈교라는 작은 다리가 있고 경내에는 하얀 불상이 우뚝 서 있으며, 절 뒤편으로는 산신각이 있는데 그 안에서 시원한 석간수가 흘러나온다.
  절 바로 밑에는 높이 20여m의 운계폭포가 있으며, 감악산 등산은 여기서부터 시작하는 경우가 많으며, 등산에 약 4시간 정도 소요된다.
  법륜사 대웅전 뒤 우측 산비탈로 100여 미터 올라가면 암벽 밑에 움막으로 된 ?산신각?이 있다. 산신각의 외형은 주위를 비닐로 둘러싼 움막에 불과하나, 많은 무속인들이 찾아오는 곳이다.
* 감악산은 예로부터 과천 관악산 개성 송악산 포천 운악산 가평 화학산과 함께 경기 오악으로 숭상 받아온 산이다.
☞ : 1) 통일로 1번 국도를 타고 금촌에서 - 법원리 - 적성 - 남면 연곡 - 323지방도로 따라 가다 우회전하여 설마치고개 이용 
       2) 의정부에서 3번국도 - 덕계 4거리 (좌회전) - 316번 지방도 - 상수리 (우회전) - 349번 지방도 - 신산 - 신암리 - 어룡고개 - 설마재 - 법륜사 입구


군포 수리/견불산 수리사 (修理/見佛山 修理寺)


 위  치 : 경기 군포시 속달동 329번지 031-438-1823
 개  요 : 신라 진흥왕 18년(558년)에 왕손인 운산대사(雲山大師)가 수도중에  부처님으로부터?夢佛受記??너는 다음 세에 부처가 되리라?는 예언을 받은 후 창건돼 ?도를 닦아 이치를 깨달았다 뜻?혹은 신심(信心)을 닦는 성지(聖地)의 사찰(절)이라하여?수리사?(修理寺)로 명명된 고찰이다.
현재 산내에는 주춧돌,  불족석판, 석수각, 기와편 등이 대량 발견되고 있으며 1955년 다시 재건되었다.  비구니의 수도처이다. 
50년대 말 한 스님이 대웅전 뒤편에서 낮잠을 자다가 부처님 호통소리에 놀라 잠을 깻는데 ,그 자리를 파보니 오동나무 상자에 든 금동불상이 나왔으며,그 이전에도 전쟁의 화(禍)를 피해 묻어둔 성보(聖寶)들이 지금도 사찰 주변에 묻혀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실제로 지난 98년에도 당시 수리사 신도회장이던 송만용 전시원의 부인 문옥순씨가 3번의 선몽(禪夢)을 꾼 끝에 대중전에서 약2백m 떨어진 산 중턱에서 고려초기 것으로 추정되는 돌부처와 좌대를 찾아내기도 했다.
을 하여 견불산(見佛山) 수리사(修理寺)라 이름하였으니 최근에 산 이름도 절이름을 따라 수리산이라 부르게 되었다. 의병장 곽재우 장군이 절을 재건하였으며 근래에 경허 큰스님이 수도하신 곳이라고 한다. 어쨌거나 수리사는 선(禪)과 관련이 많다.

☞ : 1번국도 이용. 안양역에서 병목안 방향으로 2㎞정도 직진.
☼ : ▷병목안 - 석탑이 있는 숲 - 백영약수터 - 힘기르는 숲 - 넝쿨터널
       숲 - 명상의 숲 - 진달래 숲 - 상록마을
    ▷현충탑 - 팔각정 - 수왕약수터 - 관모봉 - 태울봉 - 병목안
    ▷용진사입구 - 도유림임도 - 수리사입구 - 수리사
※ 태을봉(太乙峰)(489m)이며 풍수상 형세가 산태극, 수태극의 길지라서 태을선인이 기거할만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태을봉을 중심으로 슬기봉, 관모봉과 같은 영봉으로 이루어져 있다. 산 정상에 오르면 서해 앞바다와 인천, 수원의 시가지까지 볼 수 있으며 특히, 태을봉 일출시에는 산그림자가 의 형상을 이루는데 쉽게 접할 수 있는 광경은 아니다.


서울 성북 삼각산 경국사(三角山 慶國寺)


 위 치 :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3동
 개 요 : 고려 충숙왕 12년(1325) 정자율사(淨慈律師)가 창건하여 청암사(靑巖寺)라 했다. 1330년경 부암 운묵(浮菴 雲黙; 자가 無寄)이 머물면서 천태종의 교풍을 크게 떨쳤으며, 1352년(공민왕 1) 금강산 법기도량(法起道場)을 참배하고 남하한 인도  지공스님(指空)이 주석한 뒤부터 큰스님들의 수도처이자 호국안민을 위한 기도도량으로서 전승되었다. 1507년(조선 중종 1) 억불정책으로 퇴락 된 채 빈 절로 남아 있다가, 1546년 명종의 즉위로 문정왕후가 섭정을 하게 되자, 왕실의 시주로 건물을 전면 중수하고 낙성식과 함께 국태민안을 위한 호국대법회를 열었다. 그때 부처님의 가호로 나라에 경사스러운 일이 항상 있기를 기원하는 뜻에서 경국사라 이름을 바꿨다. 그 뒤 1693년(숙종 19) 승성(昇誠)이 건물을 중수하고 천태성전(天台聖殿)을 신축했으며, 낙암 의눌(落巖 義訥; 能虛도호), 천봉 태흘(天峰 泰屹), 한국 불교 계맥(戒脈)의 중흥주인 대은 낭오(大隱 朗旿)가 관음전을 신축했다. 1864년(고종 1) 왕의 등위축재(登位祝齋)를 열었고, 1868년호국대법회의 개설, 1878년(고종 15) 치능(致能)이, 1915년 석찰(錫察)이 중수, 1921년 단청과 탱화의 대가인 보경 보현(寶鏡 普賢)이 주지에 취임한 뒤 1979년까지 퇴락된 건물을 중수, 그의 후임으로 주지 이지관(李智冠)이 취임하여 현재까지 활발한 포교활동을 하고 있다.
  이승만이 대통령 시절 자주 찾았던 곳이며, 부통령 시절에 방한했던 미국의 닉슨(Nixon, R.M.)이 이 절에 참배했던 것을 수록하기도 했다.
극락보전, 명산전, 명부전, 관음전, 삼성보전, 천태성전, 산신각, 봉향각, 시방선원(十方禪院), 부림정사, 동별당, 요사 등17동의 건물이 있다. 극락보전에는 아미타삼존불을 비롯하여 목각탱화(보물제748호), 신중탱화, 팔상탱화 등이 봉안되어 있다.
여주 봉미산 신륵사 (鳳尾山 神勒寺)
 위 치 : 경기 여주군 북내면 천송리 282번지 031-885-2505
 개  요 : 신라진평왕때 원효대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하고 있다. 이 절은 강가쪽  암반 위에 벽돌로 쌓은 다층 전탑이 있어서, 고려 때부터 벽절이라고도 불렸다. 나옹화상이 이 절에서 입적을 했고, 그의 보제존자석종은 1379년에 제작된 것으로 고려 말의 대표적인 부도 양식을 띠고 있다. 성종 옆에 있는 석종비문은 목은 이색이 썼다. 역사가 깊고 규모도 웅장하며 주위의  경관도 뛰어난 사찰로 경내엔 화려한 극락전을 비롯, 조사당 명부전, 다층석탑, 다층전탑, 석종, 대장각기비 등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 8점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곳 일원은 1977년에  관광지로 지정되었다.
☞ : 1) 경부, 중부, 영동고속도로 여주 톨게이트 이용    
  어느 날 원효대사의  꿈에 흰  옷을 입은 노인이 나타나 지금의 절터에 있던 연못을 가리키며  신성한 가람이 설 곳이라고 일러준 후 사라지니, 그 말에 따라 연못을 메워 절을 지으려 하였으나 뜻대로 잘되지 않았다.  이에 원효대사가 7일동안 기도를 올리고 정성을 드리니 9마리의 용이  그 연못에서 나와 하늘로 승천한 후에야  그곳에 절을 지을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절 이름에 관한 유래는 고려 우왕 때 여주에서 신륵사에 이르는 마암 馬岩 이란 바위 부근에서 용마 龍馬 가 나타나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자 나옹선사가 신기한 굴레를 가지고 그 말을 다스렸다는 설화에서 유래했다는 설이다.
  또 하나는 고려 고종 高宗때 건너편 마을에 용마가 나타나 걷잡을 수 없이 사나우므로 이를 사람들이 붙잡을 수 없었는데, 이때 인당대사 印塘大師 가 나서서 고삐를 잡으니 말이  순해졌으므로 신력으로 제압하였다하여 신력 神力 의 신" 神 " 과 제압의 뜻인 륵" 勒 "을 합쳐 신륵사 " 神勒寺 "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예로부터 농경사회에서 용은 물의 변화신으로 여겨져 왔다. 이처럼 용과 관련된 설화는 신륵사가 강가에  있음으로 해서 생겨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홍수와 범람이  잦은 남한강의 자연환경과 지역적 단점을 극복하기 위하여  옛 선인들이 이 절을 세우고  강을 돌본 것에서  이러한 설화가 생긴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며 그 속에는 한국의 자생풍수에 따른 비보 裨補  적인 의미 역시 부여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고려 때에는 신륵사 내 동대 東臺 위에 서 있는 전탑 때문에 벽절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남양주 천마산 견성암(天摩山 見聖庵)


 위 치: 경기도 남양주군 진건면 송릉리 3번지 031-573-8901
 개 요 : 고려의 개국 공신인시중 조맹(趙孟)이 이 곳에 은거하여 도를 닦다가 약사여래를 친견했다고 하여, 고려 중기에 그 후손들이 선조의 유적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했다. 1860년(철종11) 조맹의 후손인 혜소(慧昭)가 법당 및 화양루(花兩樓)를 중수했고,1882년(고종19) 서린(瑞麟)이 중수했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법당과 화양루, 요사채가 있다.
  수양굴은 굴법당으로 대웅전 뒤편에 자리잡고 있는데 일찍이 조맹이 세속의 영달을 구하지 않고 수양하던 암혈이라 한다. 독정(獨井)은 조맹이 수양굴(修養窟)에서 혼자 수행하며 마셨다고 해서 붙여진 우물로 감무에도 물의 깊이가 더하거나 덜함이 없이 항상 일정하였다. 그 맛 또한 차고 단맛이 나는 감로수로 지금까지도 음료용으로 사용한다고 한다. 그래서 이 절을 '독쟁이절'이라 부르고, 이 마을을 '독정리'라고 부른다.
  조맹이 기거하던 수양굴(修養窟)이 약사전 뒤에 있으며, 조씨 문중에서 이름있는 사람이 죽으면 가지가 하나씩 말라죽는다는 기념송이 있다. 
☞ : 청량리역 쪽에서 망우리고개를 지나 쭉 직진하여 노동삼거리에서 마석방면으로 좌회전한다. 금곡동 옛 남양주시청 쪽에서 사릉방면으로 좌회전하여 진건면의 남양주시노인복지회관 앞에서 우회전해 들어가면 된다.
  청량리역에서 1시간 정도 걸린다. 


남양주 운길산 수종사(雲吉山 水鍾寺)


 위 치 : 남양주시 조안면 송촌리   031-576-8411
 개 요 : 1890년(고종27) 풍계 혜일 스님이 高宗에게서 8천 냥을 하사받아 폐허가 된 절을 중건하고, 이듬해 4천냥과 金帛紅絲를 시주받아 四尊佛을 개금할때 放光이 있었다고 하며 서거정(徐居正)이 "동방에서 제일 전망 좋은 사찰" 이라고 격찬한 곳이다.
   1458년 世祖가 만년에 지병인 나병으로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금강산 , 오대산까지 구경을 다녀오다가, 수로로 한강을 따라 환궁하는 도중 이수두(二水頭-두물머리)에서 하룻밤을 묵던 중 그 날 밤 어디선가 들려오는 은은한 종소리를 따라 발길을 옮겨보니 지금의 수종사 자리에 있는 토굴에서 18나한상을 발견하게 되었고, 그 바위틈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면서 종소리를 내는 것을 발견하여 나한을 모신 절을 짓고 수종사라 이름했다 한다.
  수종사 입구 돌계단에 올라서면서 바로 보이는 것이 선불장, 그 뒤로 약사전과 산신각 그리고 응진전이 차례로 보이고 절 안쪽으로 조금만 걸어 들어가면 이내 대웅보전과 마주해 있는 전망대는 나지막한 기와 담장 너머로 시원하게 뻗은 산줄기와 그 뒤로 북한강과 남한강이 합류하는 양수리의 풍경을 보고 대웅보전의 앞마당을 지나 몇 걸음 옮기면 허름한 불이문 안으로 고개 숙여 들어가면 550년전 世祖가 중창 기념으로 심었다는 은행나무 두 그루가 서 있다.
  물맛이라면 수종사가 오랫동안 지켜온 최고 중의 최고다. 수종사 인근 능내리에 묻힌 丁茶山은 맛좋은 이곳 샘물로 차를 끓여 마셨다 한다. 한국의 茶聖이라 불리는 草衣禪師도 함께 였으니, 차 맛은 보증 된 셈이나 마시보지 않고는 맛을 알 수 없다는 숱한 중생을 위하여 절에서는 2년 전, 두물머리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통유리인 찻집 삼정헌(三鼎軒)을 열고 불심을 다하여 지은 집에서 무료로 제공하며 기도시간(10시~12시)을 제외하고는 문닫을 때(오후 6시경)까지 언제나 마실 수 있다.
☞ : 서울 - 6번 국도 - 팔당 제1,2,3,4터널과 봉안터널을 빠져나와 청평방향 이정표 따라 오른쪽으로 빠져나옴 - 진중삼거리에서 양수대교쪽으로 우회전하지 말고 청평방향으로 직진 - 45번 국도를 따라 약1.8Km 정도를 진행 - 왼쪽으로 조안보건지소 건물이 보이는 삼거리에서 좌회전 - 보건소 앞마당이나 마을입구 진입로 300~400m정도 더 들어가면 등산안내도가 서 있는 수종사 진입로 입구 길가에 차량을 주차.
등산로 : 산행 약 2시간 30분 : 조안보건지소 - 마을길 - 수종사입구 등산안내도 - 수종사 진입로 - 40분 - 휴게소 - 일주문 - 석가여래입상 - 2분 - 수종사 아랫 삼거리 - 5분 - 수종사 은행나무 - 수종사 - 수종사입구 삼거리 - 20분 - 쉼터 - 능선삼거리 -  헬기장 - 15분 - 정상 - 헬기장 - 12분 - 능선삼거리 - 500봉 - 25분 - 수종사 은행나무 - 수종사 - 수종사입구 삼거리 - 석가여래입상 - 일주문 - 휴게소 - 수종사 진입로 - 35분
남양주 묘적산 묘적사(妙寂山 妙寂寺)
 위 치 : 남양주시 와부읍 월문리의 묘적산 
 개 요 : 신라 문무왕(661~690)때 원효대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진다. 묘적사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현재까지?신중동국여지승람?으로 양주목편에 기록도 있어 조선 세조 때에도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 증명되고 있다.
  신라 문무왕때 원효대사가 武術道倆으로 창건하였다는 묘적사가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 사찰은 조선 세종대왕때 학열대사가 불사를 새로 지었으며 그후 남북 군영을 세워 무과시험을 보다가 임진왜란때 사명대사가 僧兵을 訓練시켰던 곳으로 소실되었다가 재증축 하였다고 한다.
  절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묘적사에 대한 대표적인 이야기는 이 절은 과거 국왕 직속의 왕실산하 비밀요원을 훈련시키기 위한 사찰을 짓고 선발된 인원을 승려로 출가시켜 승려교육과 아울러 고도의 군사훈련을 받도록 했다는 것이다. 임진왜란 때에는 사명대사가 이 절에서 승군을 훈련시켜 왜적과의 전투에 출전시켰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후에는 승려들이 무과에 대비하는 훈련장으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묘적사는 흔하지 않은 건축양식으로 사찰의 건물 대부분이 다듬지 않은 원목을 그대로 기둥으로 사용하고 있다. 대웅전 왼쪽 뒷편으로 조금 올라가면 삼신각이 있고 옆에 경주의 석굴암을 떠오르게 하는 석굴이 있다. 사찰의 왼편 연못에 물래방아가 있었지만 지금은 그 흔적만 남아 있다. 연못 한쪽에 약수터는 물통에 침전물이 생기는 것으로 지하수는 아닌듯 하다.
☞ : 서울 6 국도 → 덕소 → 마석방면으로 6.7km직진 → 묘적사입구 표지판을 보고 좌회전하여 1.7km직진하면 묘적교를 지나 주차장 도착 (주차장에서 묘적사는 100여미터 거리)
☞ : 6번도로-덕소삼거리에서 좌회전-월문리 버스 종점 못미쳐 송촌리 방면으로 가면 머치골. 마석방면으로 직진하면 묘적사 계곡.
☞ : 덕소에서 양수리 가는 길이 막히면 바로 머치고개를 넘어서면 된다. 덕소4거리에서 우회전하면 월문리에서 마석으로 넘어간다. 마석으로 가기 전 송천리 푯말을 따라 넘어가면 45번 도로와 만나게 되는데 이 고개가 바로 머치골이다. 곧바로 직진해 시우리 약수터를 지나면 경춘가도와 만나는 마석이 나온다. 곧바로 직진해 5분정도 가면 백봉이 있는 묘적사계곡이 나온다. 바로 서울리조트에서 고개를 넘어서면 되는 자리다.

 
남양주 천마산 보광사(天摩山 寶光寺)


 위 치 : 남양주시 화도읍 가곡리  031-594-1316
 개 요 : 고려 초 949년에 혜거국사가 창건했다. 조선 후기에 영의정을 지낸 이유원(1814~1888)이 당대의 고승 화담선사를 위해 절을 중건했으며 자신의 원찰로 삼았다고 한다. 이유원이 조성한 화담선사의 진영은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 후 보광사는 1894년(고종 31) 봉성화상이 중수하였으나, 1950년 한국전쟁으로 큰방 20칸이 화재로 소실되었으며, 1960년에는 대웅전이 역시 화재로 소실되어 거의 폐허가 되었다. 그러다가 1982년 화담스님이 부임하면서 보광사는 그 모습을 일신하여 사세를 대폭확장하였는데, 지금은 협소한 법당을 새로지어 옛 보광사의 모습을 되찾기 위한 불사가 한창이다.
☞ : 청량리역 쪽에서 망우리고개를 지나 직진하여 도농삼거리에서 마석방면으로 좌회전하여 남양주시청, 마치터널을 지나 마석우리에서 362번 지방도로를 타고 가다가 수동국민관광지 못미쳐 왼쪽으로 접어들면 된다.  
     
  

남양주 운악산 봉선사 (雲岳山 奉先寺)


 위  치 : 경기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 031-527-1951~3  
 개  요 : 고려 광종 20년(969년) 법인국사(法印國師) 탄문(坦文)이 창건한 운악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여러차례 난리를 겪으며 폐허가 된 것을 조선 8대 예종 원년(1469) 정희왕후 윤씨 (7대 세조의 왕비)가 세조의 영혼을 봉안코자 다시 일으켜 세운 뒤 봉선사라 개칭했다. 이후 봉선사는 임진왜란, 병자호란, 한국전쟁등을 거치면서 소실과 중건을 7차례 했다.
봉선사에 가면 가장 먼저 찾아볼 것이 대웅전 처마 밑에 걸린 현판이다. 대웅전이라 하지 않고 큰 법당이라고 한글로 쓴 것이 이채롭다. 1970년 운허선사(춘원 이광수 팔촌 동생)가 대웅전을 세우면서 써서 달았다.
또한 경내에 봉선사 대종 (보물 제397호)이 있는데 임진왜란 이전에 만든 동종 중에서 몇 개 남지 않은 것으로 예종 원년(1469)에 왕실의 명령에 따라 만들었다. 조선왕조 전기 동종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절에서 100m 떨어진 곳에 큰 비석중 하나가 춘원 이광수선생 기념비다.
그는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 패하기 전 4년동안 남양주 사능 부근 작은 집에서 산적이 있는데 그때 한해 겨울을 봉선사에서 지낸 인연이 있다. 당시 주지 스님이 운허라 그런 인연을 맺은 것이다. 비석에는 그가 남긴 글중 일부를 빼곡히 새겨놓았는데 글은 주요한이 짓고 글씨는 서예가 원곡 김기승이 써서 1975년 가을에 세웠다.
절의 동쪽 가까이에 다시 숭은전을 세워 세조의 진영을 봉안하였으며, 세조의 아들인 예종은 ?봉선사?라는 친필 현판을 하사하기도 하였는데 ?선왕의 능을 받들어 모신다(奉護先王之陵)?라는 뜻에서 절 이름이 유래하였습니다.

☞ : 1) 의정부에서 포천 방향 43번 국도로 8.2 km 가 축석령 검문소에서 우회전, 314번 지방도를 타고 가면 임업 시험장, 광릉수목원을 지나 광릉 입구 도착(검문소에서 8.3 km).
    2) 퇴계원을 거쳐 47번 국도로 진접을 지나, 부평교에서  좌회전, 314번 지방도를 타고 가면 봉선사를 지나 광릉 입구 도착(부평교에서 3.9 km).
 
남양주 천점산 봉영사 (泉岾(天見)山 奉永寺)


 위 치 :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면 내각리 148번지 031-571-0555~7
 개 요 : 신라 진평왕 11년(589) 창건되어 봉인암(奉仁庵)이라 하였고, 1738년(조선 영조 14) 선조의 후궁인 인빈(仁嬪) 등의 묘가 순강원(順康園)으로 승격하면서 이 절을 인빈의 원찰(願刹)로 삼고 신실(神室)을 지었으며 절 이름을 봉영사라 하였다.
 ☞ : 서울에서 47번 국도를 따라 포천 방면으로 계속 직진하다가 밤섬유원지를 지나 내각리쪽으로 좌회전해서 순강원을 돌아가면 된다.
:: 여행쪽지 : 절 입구에 약수터와 '다원'이라는 전통찻집이 있어 차와 전통국수 등을 맛볼 수 있다.
  도성에서 100리 안에 왕릉이 만들어진 점에서 경기도는'왕릉의 땅'이다. 조선의 왕릉은 강원도 영월 땅에 있는 단종의 장릉(莊陵)을 제외하고 38선 이북 정종의 후릉(厚陵)까지 모두 경기도 땅에 있다.
   더욱이 조선 왕실의 대표적 능침이 구리․남양주에 몰려있는 만큼 능침을 수호하는 원찰 또한 유별나다. 그 대표가 봉선사(奉先寺)지만 봉영사․봉인사 등의 '봉(奉)'자 돌림의 사찰이 확연히 눈에 띄는 것도 그 때문이다. 19세기로 들어오면서 궁궐의 비빈과 상궁들의 원찰에 대한 시주는 이전 시기와 확연히 다르게 양성적인 형태로 이루어진다.
 이에 19세기 이전 불화(佛畵)는 수원 용주사․만의사, 남양주 흥국사 등의 불화를 그린 '화성성역의궤'에 나오는 연홍(演弘)의 불화가 대표적이었지만 19세기 들어와 경기지역 불화는 새롭게 화려한 장식성을 강조하며 원찰이 많은 이 지역에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 변화의 중심이 '흥국사'로 화사(畵師) 양성소였기 때문이다.

 

남양주 수락산 흥국사(水落山 興國寺)


 위 치 : 경기 남양주시 별내면 덕송리 331 (031-527-9557)
 개 요 : 599년(진평왕 21년) 원광(圓光)법사가 창건했고 처음에는 절 이름을 수락사(水落寺)라고 했다. 그 이후의 내력은 한동안 끊겼다가, 1568년(선조 1년)에 이르러 선조가 그의 아버지인 덕흥대원군의 원당(願堂)을 이곳에 지으면서 <흥덕사(興德寺)> 라는 편액을 하사했다. 그 뒤 1626년(인조 4)에 절 이름이 지금의 흥국사로 바뀌었다고 한다.
  흥국사는 조선중기 이후 왕실의 원당으로서 발전하였으며 1790년(정조 14)에는 봉은사, 봉선사, 용주사, 백련사 등과 함께 오규정소(五糾正所) 가운데 한 사찰로 선정되면서 사격(寺格)이 더욱 높아지기도 했다. 오규정소(五糾正所)는 나라에서 임명한 관리들이 머물면서 왕실의 안녕을 비는 동시에 관할 사찰들을 관리하던 곳이다.
   절 안에 법당 지붕보다 높은 향나무가 있어서 눈길을 끈다.
  ☞ : 상계역에서 흥국사행 버스(상계동-중계동-당고개-덕능고개-흥국사)


남양주 수락산 내원암 (水落山 內院庵)


 위 치 :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 청학리 578  (031)841-8794
ㅏ진60 개 요 : 신라시대에 창건했다고 하며 조선시대 숙종 때(1674-1720)부터 이 절은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 사세를 확장했다. 1693년(숙종 19) 숙종은 파계사(把溪寺)의 영원(靈源)을 불러 수락산에서 백일기도를 올리게 한 뒤 영조를 얻었다. 그 뒤 순정왕후(純貞王后)가 왕손을 얻고자 용파(龍波)를 시켜 이 절에서 300일기도를 올린 뒤 1790년(정조 14)순조를 출산했으므로, 1794년 칠성각을 짓고 관음전(觀音殿)이라고 쓴 어필을 내렸다. 또한 1795년(정조 20) 이 절을 성사(聖寺)라고 칭호했는데, 지금까지 이 절의 다른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1831년(순조 31) 상궁 최(崔)씨와 하경호(河敬鎬)가 순원왕후(純元王后)에게 청하여 건물을 모두 중창하고 '極樂寶殿'이라 글씨를 하사받았다. 그 뒤 1851년(철종 2)과 1880년(고종 17) 중수했으며, 1958년 중건하여 역사적 사실과 함께 영험한 기도처로 많은 사람이 찾는다. 미륵석불입상은 신라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 동쪽에 金流溪谷이 있다. 서쪽 비탈면에 雙岩寺․石林寺, 남쪽 비탈면에 鷄林庵․興國寺, 동쪽 비탈면에 內院庵이 있고, 내원암의 법당 뒤에는 고려시대 이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높이 2m의 석조미륵입상이 있다.
  당고개에서 정상을 거쳐 내원암을 지나 청학리로 하산한다.
  수락산 유원지가 있는 남양주시 청학리 방면으로 진입한다.
  청악리에서 수락산 입구까지는 도로를 따라 가야하는데 10여분거리다.
  수락산입구에서 내원암을 향해 차도를 따라 5분 정도 가면 옥류폭포가 나온다. 100여m, 더 가면 우측으로 약수터가 나온다.
☞ : 태능을 거쳐 43번 도로→ 의정부, 포천 방향→ 고가도로 못미쳐에서 청학리 방향진입→ 수락산으로 진입하여 유원지 음식점들이 많은 곳 도로변에 주차를 할 수 있는 공터가 있고 상계동을 거쳐 덕능고개를 넘어가 청악리 방향으로 갈 수도 있다.


남양주 불암산 불암사 (佛岩山 佛巖寺)


 위 치 :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 화접리 불암동 산 97번지 031-527-8345 
 개 요 : 신라 헌덕왕16년(824) 구산선문의 하나인 희양산파(曦陽山派)를 일으켰던 지증국사(智證國師)도헌이 불암산의 이름을 따 초창후 도선국사와 무학대사가 중창한 절로 전해진다. 그 후 조선 세조가 도성의 사방에 왕실의 원찰(왕족의 복을 비는 절. 궁에는 내원당이 있었음)을 하나씩 정할 때 동불암(불암사), 서진관(진관사), 남삼막(삼막사), 북승가(승가사)로 정해졌다는 것이다. 서쪽엔 진관사, 남쪽엔 삼막사, 북쪽엔 승가사 그리고 동쪽에는 불암사로 하였다 한다.
  또한 이 절은 朝鮮의 法寶寺刹로서 봉은사와 함께 오대 장경판(부처의 사적을 새겨 놓은 경판)이 있던 절이다. 빛 바랜 단청이 옛 절다운 풍치를 드러내는 보광명전에는 많은 수의 경판(釋氏源流 보물 제591호, 212매의 목판)등 보존되어 있다. 남쪽 기슭에 불암산 폭포․석천암(石泉岩)․불암굴과 학도암이, 서쪽기슭에도 정암사(淨岩寺)․약소암(藥昭庵)이 있다.
  불암사에 세워져 있는 진신사리보탑은 1989년에 태국과 스리랑카에서 부처님의 사리를 구해와 봉안한 것이다.
 ☞ : 지하철 4호선 당고개역 쪽에서 덕릉고개를 넘어 퇴계원방면 → 불암사 입구 → 이곳에서 우회전하여 조금 올라가면 불암사가 나온다.
☞ : 산행은 노원구 현대아파트 단지에서 천보사를 거쳐 불암산에 바로 오르는 길. 불암산공원 관리사무소에서 재현중고등학교를 들머리로 정암사를 거쳐 주능선 상에 오르는 길.
   은행동 현대아파트에서 학고암을 거쳐 299봉에 오르는 길 .
☞ : 오름길이 재현중고등학교 뒤로 난 산길을 따라 정암사를 거쳐 봉화대인 420봉과 불암산 사이의 안부로 올라선 후 주능선을 타고 불암산 정상에 올라서는 길이다. 정상에선 중계동과 남양주시 별내면 일대를 둘러본 후 석천암을 거쳐 불암사로 하산하면 된다.
  산행시간은 2시간 반에서 3시간 정도로 가장 짧은 시간에 불암산에 올라섰다가 하산하는 길이다. 또한 정암사와 석천암에서 식수를 구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불암사에서 버스정류장까지는 1.5킬로미터 정도를 걸어 내려와야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있다.
☞ : 불암산 전체를 감상하기 위해 중계동 현대아파트 뒤편 산길로 학도암을 거쳐 299봉에 이른 후 북쪽으로 길게 이어진 주능선을 타고 불암산 정상에 오른 후 406봉을 거쳐 덕능고개로 하산하는 방법이 있다. 이 길은 주릉종주를 즐기며 서울시 노원구의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즐거움이 있다.
※ : 불암산 산행은 능선에 올라서면 식수를 구할 수 없다. 또한 정상지대가 암봉으로 만큼 비가 온 다음에는 미끄러지지 않게 주의를 해야 한다.
  불암산 정상은 맑은 날은 북한산과 도봉산 일대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고 덕능고개로 하산했다면 동막골 입구 주차장까지 걸어 내려온 뒤 당고개로 가는 마을버스를 이용하면 된다.


남양주 불암산 석천암 (佛岩山 石泉庵)


 위 치 :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 화접리
 개 요 : 신라 헌덕왕 때 지증국사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전한다. 고종 19년(1882) 오위장(五衛將) 이씨가 군제개편에 따라 오위제도가 해체되자 입산하여 당시의 황폐한 절터에 지금의 석천암을 짓고 수도하였다고 한다. 불암사의 부속암자로 운영되며 석벽에 특이한 호인상의 마애불(미륵존불)이 양각되어 있으며, 석간수 또한 유명하다. 산 남쪽 사면에 있다
☞ : 남양주시 별내면 불암동에서 출발, 불암사와 석천암을 거쳐 정상 코스가 가장 대표적인 등산로이다.
   또 상계전철역에서 경수사와 천보사를 지나 제1야영장을 경유하여 주능선으로 연결되는 코스도 있다. 상계역에서 내려 전철길을 따라 가면 중소기업은행이 나온다. 그 맞은편의 심약국 골목으로 들어서 30분 정도 오르면 제1야영장의 폭포약수에 닿고 여기에서 왼쪽 길로 들어서면 주릉으로 올라가게 된다. 정상까지는 20분 정도. 정상에서 헬기장이 있는 420봉을 거쳐 학도암까지는 1시간 정도 걸린다. 다시 주택가 큰길까지는 10분 정도 걸린다.
  상계역에서 재현중고등학교와 정암사를 거쳐 제3야영장을 지나 주능선으로 오르는 길도 있으며, 당고개와 덕릉고개에서 오르기도 한다. 그리고 제1야영장과 제3야영장이 연결되는 코스, 학도암을 지나 주능선에 오르는 코스, 한전연수원 - 태릉선수촌 - 삼육대학을 거쳐 주능선으로 접근하는 코스도 있다. 상계동 - 경수사 - 쳔보사 - 불암산 (2.5km, 1시간20분)  불암산 정상에서 불암폭포로 하산하는 길은 제법 경사가 심해 주의를 요한다.
☞ : 지하철 4호선 상계역이나 당고개역을 기점으로 삼아 상계역에서는 235번 정류장에서 불암산공원관리소를 지나 재현중고등학교로 들어서면 학교 뒤로 등산로가 나타난다.
☞ : 당고개역에서는 현대아파트단지 옆으로 난 천보사 오름길로 들어서면 된다.
☞ : 학도암 오름은 지하철 7호선 중계역에서 마을버스를 이용, 현대아파트에 이른 후 콘크리트 포장길을 따라 학도암에 오르면 된다.
☞ : 시내버스를 이용할 경우 235번이나 235-1번 버스를 이용, 대림아파트 맞은편 정류장에서 하차해 정암사로 접근하거나 235번과 235-1번 종점에서 현대아파트로 접근하면 된다.
☞ : 남양주시 별내면 불암동으로 하산했다면 태릉에서 내려오는 35번이나 45-2번 버스를 이용, 1호선 석계역에서 하차한 후 지하철을 이용한다.


남양주 불암산 학도암 (佛岩山 鶴到庵)


 위 치 :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 화접리
 개 요 : 조선 인조 2년 무공화상이 불암산에 있던 엣절을 이곳으로 옮겨 창건하였다. 이후 고종 15년 벽운화상이 중창하고 고종 22년 벽운화상이 화승 경성화상을 불러와 불상 1구를 개금하고 탱화 6점을 그렸다. 대웅전, 불법당, , 삼성각 등의 전각이 있다. 대웅전은 ᄃ 자 형으로 법당과 요사채를 겸하여 사용하고 있다. 대웅전에는 아미타여래를 주불로 모시고 좌우에 지장보살과 관음보살이 협시하고 있다. 교리상 대웅전의 주불은 석가여래인데 어떤 이유로 아미타여래를 모셨는지 알수 없다. 아미타 여래 뒤에는 후불탱화와 신중탱화를 봉안하였다. 불법당은 자연 암벽을 뚫어 만든 석굴법당으로 아미타여래를 주불로 하고 간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협시하고 있다. 삼성각은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고 여기에는 독성탱화,지장탱화, 산신탱화가 봉안되어 있다. 대웅전 뒤편 암벽에는 명성황후의 염원에 의해 1872년 조성된 높이 22.7m 폭 7m 의 거대한 마애선각관음보살상이 있다. 1기의 석등이고 배례석 돌을 앞에 두고 자연 암벽을 깎고 그 위에 선각하였다. 관음상은 10개의 이중 연꽃으로 만든 대좌 위에 결가 부좌를 하고 있다.
   주위의 경치가 너무 아름다워 학이 이곳에 날아와 노닐었다는 학도암. 절의 이름과 같이 학도암이 자리한 곳의 풍경은 구름이 발 밑을 받치고 있는 듯하여 여기에서 아래를 내려보면 마치 불국의 세계에서 인간세상을 내려보는 듯하다.
   남쪽 능선 아래에 ᄃ자형의 학도암이 있다.
※ : 불암산이라는 명칭은 화강암의 큰 바위로 된 봉우리가 마치 송낙을 쓴 부처의 형상이라 하여 붙여졌다. 일명 필암산(筆岩山:붓바위산) 이라 하여 먹골, 벼루말과 함께 땅의 기우를 꺾는다는 문방사우의 이름을 빌린 풍수지명이며 천보산(天寶山)으로도 불렸다.
유스호스텔을 지나 조금 올라가면 불암사 일주문이 보이기 시작한다. 곧 이어 주차장이 나오고 그 다음은 불암사의 당우들이 눈에 띈다. 불암사는 신라의 헌덕왕때(서기 824년) 지증국사가 창건하고 도선국사와 무학대사가 중창한 절로 전해진다. 조선조 세조때 4대 원찰(왕가에서 부처에 빌 일이 있을 때 명복을 빌었던 절. 궁에는 내원당이 있었음)을 정했다는데 이때 동불암(불암사), 서진관(진관사), 남삼막(삼막사), 북승가(승가사)로 정해졌다는 것이다. 불암사의 문화재로는 조선조 현종 14년에 판각한 석씨원류경책목판 212판(보물 591호)과 지장경언해 30종 379판(유형문화재)이 있다.
  불암사경내에는 불암산 능선 방향으로 큰 바위에 마애불이 새겨져 있다. 근년에 새긴 마애불로 말하자면 현대 마애불이다. 우리나라 마애불의 전통을 이으려는 노력이 엿보이는 작품으로 평가된다. 산으로 올라가는 길은 경내에 들어서기 전 조그마한 개울을 건너 언덕 위에 높이 얹혀있는 바위쪽으로 나 있다.
  이 큰 바위에는 일종의 벽감같은 홈이 여러개 형성되어 있어서 기묘한 느낌을 준다. 이곳을 지나 올라가면 길이 나뉘는데 오른쪽으로 가는 길은 불암산 정상으로 바로 올라가는 길과 석천암쪽으로 가는 길이고 왼쪽 길은 폭포옆으로 난 길이다. 석천암쪽 길과 뒤에 말한 길은 나중에 능선 아래서 합쳐진다. 그러나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은 세미클라이밍이 필요한 길인 듯 길의 모양으로 보아 다니는 사람이 많지 않은 모양이다.
  폭포는 줄잡아 20m는 훨씬 넘을 듯한 규모가 큰 폭포이지만 워낙 계곡의 규모가 작아 수량이 시원치 않다. 그러나 이 폭포를 보면 불암산이 바위산이라는 것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한 여름 장마철에 오면 그런대로 볼만한 폭포를 구경할 수 있을 듯하다. 폭포위쪽은 밋밋한 육산 산사면으로 바위는 별로 보이지 않는다.
  소나무숲이 나오면서 경사가 급해진 뒤 마루턱을 올라서면 주능선이다. 봉화대가 있는 불암산 남봉격인 420m봉과의 안부에 해당되는 능선이다. 이정표가 서 있는데 여기서 용천약수가 300m, 불암산 입구가 700m라고 적혀 있다. 이 안부에서 서쪽을 바라보면 북한산, 도봉산이 서쪽 하늘 아래 스카이라인을 이루고 있고 상계동의 아파트지대가 산아래 보인다. 북한산-도봉산에서 수락산-불암산까지 사이의 들판은 모두 아파트지대로 변모하였다. 안부에서는 불암산 정상과 정상보다 조금 낮은 북쪽 암봉이 나란히 솟아 있는 것이 소나무숲 위로 보인다.
  조금 올라가면 화강암 암릉 사이사이로 소나무가 서있는 슬랩지대다. 불암산의 바위잔치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서쪽에서 올라왔다면 엄청난 규모의 슬랩을 이미 경험했겠지만 불암동에서 올라왔다면 여기서 본격적인 바위가 시작된다. 경사는 비교적 완만하여 초보자라도 조금만 익히면 금방 올라갈 수 있다. 그러나 경사가 급해지면서 당황해하는 사람들도 보인다. 이럴 경우 조금 완만한 쪽을 선택하여 올라가면 된다.
   문제는 그 다음 나타나는 본격적인 암릉길. 왼쪽 아래는 비스듬한 슬랩지대이지만 단애를 이루고 있고 오른쪽은 오른쪽대로 가파른 경사암반이어서 조금 신경이 쓰이는 곳이다. 여성등산객들이 긴장하면서 내려오는 것이 보인다. 이곳 코스의 발디디는 곳은 마치 샌드페이퍼로 갈아 놓은 것처럼 화강암의 미세한 알갱이가 모래를 이루고 있을 정도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다니면 바위가 이렇게 마모될 수도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들 정도다.
  이곳을 지나면 정상 바위군아래를 횡단하여 바위사이로 들어서서 약간의 세미클라이밍 끝에 정상아래에 설 수 있다. 정상은 다시 바위를 깎아 발 디딜 데를 만들어놓은 대로 계단식으로 올라가면 된다. 아니면 릿지화나 암벽화라면 암사면을 그냥 올라설 수도 있다. 그러면 정상이다. 불암산 주변에는 큰산이 없고 넓은 산간분지나 평야지대가 많아 전망이 좋다.
   현재 그곳은 태릉선수촌이 아닌가 싶다. 하산길은 교통편을 생각하여 어느 길이든지 원하는대로 잡을 수 있다. 불암사쪽으로 다시 내려온다면 석천암을 지나 내려올 때 동굴형 암자를 구경할 수 있다.  석계역에서 45-2번버스나 803번 탑승, 종점에서 하차
망월사지
 위 치 :
 개 요 : 인조대에 남한산성의 수축과 함께 건립된 다른 사찰과는 달리 옛 부터 망월암이 있었던 곳이라 남한산성의 9사중 가장 古寺이다. '남한지'에는 "고려 때 한양의 장의사가 있었는데 太祖께서 도성을 세울 때 이를 허물고 그 불상과 금자화엄경 한 벌과 금사 하나를 이리로 옮겨다 두었다고 하였다.
  이곳은 망월봉에서 남쪽과 북서쪽으로 뻗어내린 두 능선의 곡저부에 해당하는 지점으로 산복에 형성된 비교적 평탄지를 이용하여 사찰을 건립하였다. 망월사는 장경사에서 직선거리로 320m 정도이나, 장경사의 해발고도가 360m 정도인데 비해, 망월사는 해발 410m 내외로 장경사보다 90m 정도 높은 위치에 있다. 반면 망월사는 동장대에서 245m 정도 거리에 있어 동장대로 접근하기 가장 수월한 위치에 있다.
  일제에 의하여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훼손당시의 망월사는 일제가 1907년 8월 1일 성안의 화약과 무기를 수거할 때 폭파하여 모두 소실되었고 그후에 복원한 대웅전, 극락보전, 13층 적멸보궁탑, 요사체가 들어 섰으며, 입구에는 감로수 우물이 있다. 특히 13층 적멸보궁탑은 이 절을 중창한 성법스님이 인도의 간디수상으로부터 직접 받아온 부처님 진신사리를 봉안한 것이라고 한다.
  현재 이곳에 남아 있는 옛 망월사의 유강은 법당지 등을 마련하기 위해 쌓은 축대와 현 법당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이용된 장대석, 그리고 초석이 몇 개 있을 뿐 원래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되었다.
  '망월사'라는 망월은 보름달을 뜻하는 것으로 불가에서는 '달' 어둠을 비추는 광명의 주체로서, 세상의 괴로움을 깨닫고 벗어나게 하는 불법의 진리로 설명하고 있으므로 절 이름 '望月'은 깨달음을 향한 수행과 정진의 의미도 지니고 있다. 망월사는 비구니 수도원을 겸한 사찰이며, 이곳에는 직경 167cm의 대형 맷돌이 보존되어 있다.
☞ : 동북쪽으로 소로를 따라 약 250m 정도 올라가면 장경사쪽으로 가는 길로 갈라지는데 서쪽길을 택하여 200m 정도 더 올라가면 망월사에 도착




청량산 개원사지 남한산성내


 위 치 :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산성리 198-5 (031)743-6568
 개 요 : "참선도량, 시대 미상의 석불 3구와 오채현 선생 관음보살상의 묘한 대조"를 이루는 개원사는 남한산성관리사무소에서 남서쪽으로 316m 거리의 해발 360m 지점에 위치한다. 관리사무소 앞을 지나 산성천 다리를 건너 신선계곡 골짜기로 접어들면 개원사  일주문에 "청경산 개원사 회소문"이라고 되어 있다. 천왕문안에는 근래에 세운 비석군과 범종간, 화현전, 대현전, 요사체, 탑, 불유각 등이 들어 서 있다.
  '開元' 이란 근본을 새로 시작한다는 뜻, 또는 나라를 세운다는 뜻으로서 신생국가의 연호에 사용되는 예가 많다.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의 승군 본영을 두었던 절로 벽암 각성선사가 조선 8도의 도총섭이 되어 승려들을 지휘하여 남한산성을 축성하고, 수도를 방어하는 호국승군의 도장이었다.
  개원사는 창건 이후 의승방번제가 폐지되는 고종 3년(1894) 갑오경장 때까지 270년간 수도 한양을 지켜온 호국사찰로 번창했으며 전국 사찰의 승풍을 규찰하는 규정소가 설치되어 명실상부하게 조선 불교의 총본산 역할도 담당하게 되었다. 또한 이곳에는 인조 15년(1637) 이래 대장경이 보관되어 왔으나 1907년 8월 1일 일제의 산성의 무기 수거와 화약 현지 폭파 사건을 맞아 법당 누각 등의 부속건물들이 모두 전소되어 개원사는 하루아침에 폐사의 비운을 맞고 말았다.
  사찰 일주문을 들어서자마자 오채현 조각가님의 관음보살입상과 선재동자 입상을 친견하는 환희로운 시간을 가졌다. 오채현 조각가님의 관음보살입상과 선재동자상은 마치 우리의 조상들의 얼굴 모습으로 첫눈에 친근감을 느낄 수 있었다. 관음보살입상은 부드러운 미소와 납작한 코는 누구라도 안기면 머리를 쓰다듬으며 품어준 자야로운 어머니상이다. 부드러운 미소와 겸손을 겸비하신 오채현 조각가님의 일부 담긴듯하다. 이 귀한분이 석불선양회 같은 회원이시라는 것이 무척 신기하고 자랑스러웠다.
  또 개원사는 고려시대의 불상으로 추정되는 후덕한 모습의 석고약사여래좌상과 전각에 봉안된 자비한 모습의 석조약사여래입상이 있다.
 ☞ :
만해기념관 남한산성내
"만해 한용운 - 대쪽같은 성품의 호국승려.시인-일본인 간담 서늘케"
남한산성 안에 있는 개인 소장의 만해 기념관을 들려서, 만해 한용운 스님의 독립운동에 대한 의지와 행적 그리고 불교사상을 알아보는 귀한 시간을 마련했다. 이 답사를 위하여 송문호 회원님께서 수고로움을 주셨는데 이 기념관에는 만해에 대한 자료가 거의 빠짐없이 소장되어 있어서 민족의 자긍심을 드높였다.


하남 선법사 마애약사여래좌상(太平二年 名磨崖藥師如來坐像)


 위 치 : 경기도 하남시 교산동 55의 1
 개 요 : 고려 경종(景宗, 5대)2년(977) 제작된 태평2년명마애약사불좌상(보물 제 981호)이 바위 南面에 부조(浮彫)되어 있다. 이 불좌상에는 太平二年丁丑七月二十九日이라는 명문이 있어 그 제작 시기를 알 수 있다.
  비교적 마모 없이 선명하게 남아 있는 이 불상은 특히 확실한 명문으로 인하여 고려 초기 불상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전체높이 93㎝, 坐像높이 43㎝, 蓮花臺座 위에 結跏趺坐하고 있는 이 불상은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 보게 하고 그 위에 藥盒을 들고 있으며, 오른손은 施無畏印을 짓고 있다.
  "방정하고 자비한 미소에 가슴벅찬 환희심-<약사여래본원경> 봉독의 인연"
  약사여래좌상이 조성된 바위 전체의 모습은 마치 삼각대를 연상하게 했는데 생각보다 규모는 아주 아담하였다. 석불은 질병에서 모든 중생을 구제해 준다는 약사불을 형상화한 것으로 바위 남쪽 면에 높이 93센티미터로 새겨져 있었다. 조각의 균형미나 아름다운 자태는 약사불의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불자들의 눈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중생들을 질병에서 구해달라는"약사여래본원경"을 간곡한 기원을 담아 봉독하는 특별법회를 봉행했다.


남한산성 


 위 치 :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서울 송파구
 개 요 : 백제 온조때 하남위례성에 말갈족의 침입이 있으므로 청량산을 중심으로 고지대에 자연적으로 형성된 요새인 이곳으로 온조 14(BC5)년 천도하였으며

           신라 영역이 된 후로 문무왕 12년(AD672) 토성으로 축성하고 주장성(晝長城) 또는 일장성(日長城)이라 하였다.
           조선조에는 광해군 13년에 처음 남한산성을 경도 보장지로 정하고 후금의 침입을 막고자 토성을 석성으로 개축하여 이괄의 난을 치르고

           후금의 위협이 증가하므로 인조2년 수어사 이서에게 명하여 수축케 하였다.
           축성에는 벽암(각성)대사도 도총섭에 임명되어 팔도승군을 동원하여 축성공역에 임하였으며 2년만인 인조 4년에 준공되었다.

           그후 숙종때 외성을 축소하는 등 성의 시설물이나 성내의 영조물 조영은 조선말 순조때까지 계속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 당시 인조가 45일간 항전하던 곳이며 비록 스스로 항복하였으나 외침에 의하여 정복당한 적이 없는 성이다.
           성의 전체적인 형태가 주변부가 높고 협약한데 비해 성의 중심부가 낮고 평평한 평지를 이루어 수비가 용이하고

           성내의 주거가 평안하여 산성으로서 좋은 조건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성의 구성은 본성과 외성으로 구성되었으며, 둘레는 9.05Km이고 높이는 3m ~ 7.5m이고 4장대 (서장대만 존재),

           4문, 5옹성, 16암문, 2봉화대가 있고 성내에는 군포 125, 지당 45 정호 80, 수대 8개소가 있었다. 
           유사시에는 임금이 이어(移御)할수 행궁을 비롯하여 종묘, 사직, 관아 재옥, 객사, 종각등이 있었으나 현재 남아있는 것은 없다.
           寺刹은 축성 전부터 망월사, 옥정사, 가 있었으나 僧軍의 숙식과 훈련을 위하여

           천주사, 국청사, 개원사, 남단사, 한흥사, 장경사, 동림사를 지어 모두 9개의 사찰이 되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 일제에 의하여 폭파되었고 현재는 장경사, 망월사, 개원사, 국청사가 복원되어 있다.
           ☞ : 1) 성남시나 하남시를 경유하여 갈 수 있음. 성남시에서 산성으로 가는 308번 지방도를 따라가면 남문 앞에 도착
                 2) 하남시에서는 43번 국도를 이용, 만남의 광장에서 약 13km를 가서 광지원리 3거리에서 우회전, 308번 지방도로

                    약 7km 쯤 가면 남한산성 동문 앞 도착. ᄋ주차장 : 대형(2,000원), 소형(1,000원)



성남 영장산 봉국사(靈長山 奉國寺)


 위 치 : 성남시 수정구 태평동 216-2
 개 요 : 고려 현종 19년(1028)에 창건하였으며, 그 뒤 페허화된 것을 1395년(태조 4) 曇華(담화)가 태조의 명으로 중수하였다.

           1674년(현종 15)에는 요절한 현종의 공주 明惠(명혜)와 明善(명선)의 명복을 빌기 위해 공주의 능 근처에 있던 이 절을 중창하게 하였는데,

           당시의 역사를 맡은 승려는 금강산의 日竺尊者(일축존자) 였으며, 중창뒤 봉국사라고 하였다.
           뒤에 斗昌이 중수하였고, 1932년에는 주지 春城(춘성)이 서울 삼청동에다 이 절의 부속 암자를 만들었다.

           그 뒤 퇴락하여 폐허화된 것을 1958년에 비구니 法雲이 중수하였고, 1967년에는 慧星(혜성)이 三聖閣(삼성각)을 신축하였으며,

           1969년 4월에는 요사채를 신축하였다.1974년에는 완전 해체, 복원하였고 木造本尊佛(목조본존불) 을 改金(개금) 하였으며,

           1977년 5월에는 3층석탑과 석등을 조성하면서 부처님의 眞身舍利(진신사리) 를 봉안하였다.

            이 진신사리는 태국에서 가져온 3과중 1과로서 水晶函․金函․磁器․大理石函(수정함․금함․자기․대리석함)등에 차례로 넣어

            불경과 함께 3층석탑에 봉안되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01호인 大光明殿(대광명전) 외에

            三聖閣(삼성각)․요사체 등이 있으며, 일주문과 天王門․梵鐘樓(천왕문․범종루) 등의 부속건물을 갖추고 있다.

 
성남 영장산 망경암 (靈長山 望京庵)磨崖如來坐像


 위 치 : 성남 수정구 복정동 553-1
 개 요 : 여말선초에 임금이 친히 거둥하여 나라와 백성의 평안을 기원한 곳이라 하는데, 명문과 여러 기록에

           조선 고종대인 1897년에 李奎承이 불상을 새기고 佛事(불사)를 일으켰다고 한다.

           또한 세종의 아들 平原大君(평원대군)과 齊安大君(제안대군) 의 명복을 빌며 칠성단을 이끌었다는 점에서

           七星信仰(칠성신앙) 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망경암 마애여래좌상은 산중턱 서울시 일대가 내려다보이는 望京庵(망경암) 우측의 자연 암벽 상부에 작게 장방형의 감실을 파고

            그 안에 北向(북향)하여 안치되어 있다. 素髮(소발)에 相好(상호) 는 마모가 심해서 정확한 파악이 곤란하다. 
            法衣(법의)는 通肩(통견)이며, 結跏趺坐(결가부좌) 의 좌상으로 手印은 왼손을 가슴에 대고 오른손은 降魔觸地印을 취하고 있다. 
            마애여래좌상 우측과 아래로는 암벽을 평평하게 다듬은 다음 14곳에 얕은 감실을 파고

            그 안에?大皇帝陛下萬萬歲 皇后陛下萬萬歲 皇太子殿下萬萬歲(대황제폐하만만세 황후폐하만만세 황태자전하만만세

             )??上帝親○ 至公報施??奉國同心 法輪獻誠?佑我皇家?등의 銘文을 새겨 놓았다. 
            마당 어디를 둘러보아도 적멸의 계절이 가득하다. 온갖 수선을 벗어던지고 동안거(冬安居)에 들어가는 나무를 보니

            복잡하던 나의 마음도 가라앉는다. 나도 모든 인연을 끊어 버리고 동안거(冬安居)에 들어가면 좋겠다.
            다시 절마당에는 나뭇잎 하나 소리없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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