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종교와 나

有名寺刹 순례

應觀 2017. 5. 7. 12:18

有名寺刹 山行

순 서

해인사와 가야산(1,430m, 경남 합천), 매화산(1,010m)

통도사와 취서산(1,092m, 경남 울산)

송광사, 선암사와 조계산(884m, 전남 순천)

법주사와 속리산(1,58m, 충북 보은)

수덕사와 덕숭산(495m, 충남 예산)

월정사와 오대산(1,563m, 강원도 평창)

동화사와 팔공산(1,193m, 대구광역시)

불국사와 토함산(745m, 경북 경주)

대둔사(대흥사)와 두륜산(703m, 전남 해남)

보문사와 낙가산(267m, 인천 강화군 석모도)

금산사와 모악산(793m, 전북 김제)

동학사, 갑사와 계룡산(845m, 충남 공주)

화엄사와 지리산

기타 유명사찰과 산

해인사와 가야산(1,430m, 경남 합천), 매화산(1,010m)

세계적인 문화유산인 팔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는 해인사는 우리나라 대표적인 3보사찰 중 법보사찰이다. 이러한 해인사 답사와 산행을 겸비한다면 더 없이 좋은 여행이 된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가야산은 끝이 뾰족한 바위들이 나란히 늘어서서 불꽃이 공중에 솟는 듯하고 대단히 높으면서도 수려하다'고 적고 있다.

해인사에서 가야산 정상에 올랐다가 마애불상을 거쳐 내려오는 데 4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정상에서 서성재를 거쳐 백운동으로 하산할 수도 있다. 해인사와 가야산을 쳐다보고 있는 아기자기한 바위산이 매화산이다. 가야산 바위에 비하여 부드럽고 정답다. 비교적 산행코스가 짧아 가볍게 산행을 하고 해인사와 부속암자를 들러보기에 좋다.(3시간 정도)

 

 

통도사와 취서산(1,092m, 경남 울산)

해발 1,000m가 넘는 고봉이 길게 이어져 영남알프스라고 부르는 산군 남쪽 끝에 솟은 산이 취서산(영취산)이다. 취서산 남쪽 자락에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시고 있어 불보사찰로 불리는 통도사가 자리잡고 있다. 산 내에 무려 13개의 부속암자를 거느리고 있을 정도로 큰절이다.

신불산, 간월산과 연결되는 산줄기는 늦가을이면 광활한 억새천국을 이룬다. 억새가 피는 가을에 배내재에서 시작하여 간월산, 신불산과 취서산을 거쳐 통도사로 하산하는 코스는 환상적이다(7시간 소요). 취서산만을 목표로 한다면 취서암 쪽에서 정상에 올랐다가 백운암을 경유하여 내려오면 된다(4시간 소요).

 

 

송광사, 선암사와 조계산(884m, 전남 순천)

송광사는 보조국사 지눌을 비롯한 16명의 국사를 배출한 승보사찰로서 우리 불교계의 최대종단인 조계종의 근본사찰이다. 또한 선암사는 조계종 다음으로 큰 교세를 가진 태고종의 총본산인 총무원이 있는 절이다.

이렇듯 한국 불교의 양대 산맥인 조계종과 태고종의 대표적인 두 사찰을 끼고 있는 산이 조계산이다. 산은 전형적인 육산으로 숲이 울창하여 어느 계절에나 산행하기에 좋다. 선암사에서 시작하여 정상인 장군봉을 거쳐 송광사로 하산하는 코스가 일반적이다(5시간 소요). 정상을 거치지 않고 굴목이재를 통하여 넘어가는 길은 3시간 40분 정도 걸린다.

 

 

법주사와 속리산(1,58m, 충북 보은)

산세가 수려하여 한국 8경중의 하나로 손꼽히는 속리산은 소금강산이라 일컫기도 한다. 관음봉, 문장대, 신선대, 입석대 등 절경이 이어지는 산줄기는 많은 사람들의 발걸음을 재촉한다.

이러한 속리산에 법주사가 자리잡아 불심을 지피우고 있다. 법주사에는 국보 제5호 쌍사자석등, 국보 제55호 팔상전 등 문화재가 즐비하며 산내 암자도 많다. 법주사-문장대-신선대-법주사로 이어지는 코스가 가장 일반적이다(5시간 소요).

 

 

수덕사와 덕숭산(495m, 충남 예산)

안동 봉정사 극락전,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오래된 건물로 손꼽히는 목조건축물 수덕사 대웅전을 갖고 있는 절이다. 또한 수덕사는 우리나라 불교계 5대 총림의 하나인 덕숭총림을 갖고 있는 절이기도 하다.

이러한 수덕사를 품고 있는 덕숭산은 힘들이지 않고 가볍게 오를 수 있는 산이다. 2시간 정도면 산행을 할 수 있어 가족단위 산행지로도 좋다. 수덕사에는 한말의 최고 선승 경허스님과 그 제자 만공스님에 얽힌 일화나 일주문 아래 초가로 된 수덕여관과 고암 이응로에 대한 얘기도 귀담아 들어볼 만. 주위에 덕산온천도 자리잡고 있다.

 

월정사와 오대산(1,563m, 강원도 평창)

주봉인 비로봉을 비롯하여 호령봉, 상왕봉, 두로봉, 동대산 등 다섯 봉우리가 편편한 누대를 이루고 있어 오대산이라 부른다. 이 봉우리들에는 중대 사자암, 북대 미륵암, 서대 수정암, 동대 관음암, 남대 지장암 등 다섯 암자가 있다.

오대산은 산세가 웅장하나 험하지 않고 골이 깊고 삼림이 울창하다. 계곡 하류에 자리잡은 월정사는 89층석탑과 같은 국보급 문화재가 있으며 절 뒤편의 수령이 500년 이상 된 전나무 숲이 장관이다.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상원사도 꼭 들러볼 일. 상원사 앞까지 차량 진입이 가능하다. 상원사에서 중대 사자암을 거쳐 비로봉에 올랐다가 상왕봉-미륵암을 거쳐 내려오는 데 4시간 30분 정도 소요된다.

 

 

동화사와 팔공산(1,193m, 대구광역시)

대구의 진산으로 정상인 비로봉을 중심으로 1,000m 높이의 산줄기가 동서로 뻗어 산세가 웅장하다. 그러면서도 암릉과 암벽이 빼어난 풍치를 자랑한다. 이러한 팔공산에는 골마다 옛절이 있고, 봉우리나 능선에도 불상이나 탑이 남아 있다.

팔공산에 자리잡은 수많은 절 중에서도 대표주자는 동화사다. 신라 소지왕 때(493) 극달화상이 창건하였다고 전하는 동화사는 대웅전, 영산전 등 많은 당우가 자리잡고 있다. 정상은 출입이 통제되고 대신 동봉이 정상 역할을 한다. 동화사에서 동봉-염불봉-신령재-갓바위를 거쳐 하산하는데 5시간 정도 소요된다. 중간 중간 하산길이 많아 체력에 따라 코스를 조정할 수 있다.

 

 

불국사와 토함산(745m, 경북 경주)

석굴암과 석가탑, 다보탑 등 신라시대 아름다운 문화유산을 간직하고 있는 불국사는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는 절이다. 불국사와 석굴암을 품고 있는 산이 토함산인데, 새해 첫날 일출이 장관이다. 감포 앞 바다를 붉게 적시며 토함산 위로 떠오르는 태양은 자연에 대한 경외심을 일으킬 정도로 벅찬 감동을 자아낸다.

불국사에서 신라시대의 문화재를 감상하고 석굴암을 거쳐 정상에 올랐다가 추령으로 하산하는데 2시간 20분 정도 걸린다.

 

대둔사(대흥사)와 두륜산(703m, 전남 해남)

서산대사의 얼이 스며있고, 원교 이광사의 글씨가 있고, 우리 나라의 차문화를 일으킨 초의선사가 머물렀던 일지암이 있는 대둔사는 우리 나라 최남단에 위치한다. 대웅전 앞에서 보는 두륜산의 풍경은 장관이다.

 

, 여름, 가을, 겨울 구별없이 새로운 멋을 제공해 주는 두륜산은 사찰답사와 아기자기한 산행의 묘미를 접목할 수 있는 멋진 산이다. 대둔사에서 북암을 경유 정상인 가련봉-두륜봉-일지암을 거쳐 내려오는데 4시간 정도 소요된다.

 

 

보문사와 낙가산(267m, 인천 강화군 석모도)

보문사는 남해 금산 보리암, 낙산의 홍련암과 함께 우리 나라 3대 관음도량으로 불교신도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바다에서 건져 올린 나한상을 모신 석굴사원과 낙가산 중턱의 바위에 조성된 마애석불좌상이 특히 유명하다.

강화도에서 배를 타고 건너가 전득이고개에서 산행을 시작하여 섬을 가운데로 관통하고 있는 산줄기를 타고 가다보면 일망무제로 펼쳐지는 서해바다의 시원함을 맛본다. 보문사로 하산하는데 3시간이면 충분하다.

 

 

금산사와 모악산(793m, 전북 김제)

금산사는 우리 나라 미륵불교의 중심적인 사찰로서 국보 제62호인 미륵전을 비롯하여 수많은 문화재를 간직하고 있다. 금산사를 품고 있는 모악산은 계룡산과 더불어 민간신앙의 본거지로 꼽히고 있다. 대표적 민족종교인 증산교의 교주 강증산이 득도하여 증산교를 창시한 곳이 바로 금산사 바로 밑 구리골(동곡)이다.

모악산 산행은 금산사 답사 후 정상에 올라 끝없이 펼쳐지는 김제만경평야의 지평선을 바라보고 나서 전주 방향으로 하산한다. 이 경우 3시간 30분 정도 소요된다.

 

 

동학사, 갑사와 계룡산(845m, 충남 공주)

계룡산은 신라 이래로 토함산(東岳)태백산(北岳)지리산(南岳)팔공산(中岳)과 함께 오악(五岳)으로 지정되어 국가에서 직접 제사를 모실 만큼 명산으로 정평이 나 있는 산이다. 명산 계룡산은 자연경관도 아름다워 산행의 재미를 더한다.

이러한 계룡산에 대표적인 세 절이 있으니 비구니 강원이 있는 동학사와 5리 숲이라고도 부르는 진입로가 장관인 갑사, 외국인 선방과 유일하게 남아 있는 조선시대 산신단이 있는 신원사가 그것이다. 산행은 동학사와 갑사를 연결하거나 신원사에서 동학사나 갑사를 연결하는 코스가 좋다.

 

 

화엄사와 지리산

지리산 산세와 견주어도 위축됨이 없이 위풍당당한 모습의 화엄사는 각황전, 대웅전, 석등, 4사자삼층석탑, 오층석탑 등 국보급 문화재를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는 절 중 하나다. 따라서 항상 찾는 사람이 많다.

노고단으로 오르는 초입에 있어 종주를 하거나 노고단으로 오르기 전 꼭 들러보아야 할 절이다. 지리산에는 화엄사 외에도 천은사, 연곡사, 쌍계사, 대원사, 실상사, 벽송사 같은 천년 고찰이 사방의 산자락에 둥지를 틀고 있다. 산행코스에 따라서 꼭 들려보는 것이 좋다.

 

 

-. 기타 유명사찰과 산

도선사와 북한산 / 용문사와 용문산 / 전등사와 마니산 / 구룡사와 치악산 / 백담사와 설악산 / 개심사와 가야산(충남) / 장곡사와 칠갑산 / 탑사와 마이산 / 내소사와 내변산 / 선운사와 선운산 / 백양사와 백암산 / 대전사와 주왕산 / 보경사와 내연산 / 직지사와 황악산 / 운문사와 운문산 / 표충사와 천황산, 재약산 / 범어사와 금정산

 

    

가야산(1,430m, 경상남도 합천경상북도 성주)

 

'스님이여, 청산 좋다 이르지 말게'

가야산 만큼 걸출한 고승대덕(高僧大德)을 많이 배출한 산도 드물다. 균여와 대각국사 의천은 해인사에서 도()를 깨쳐 사풍(寺風)을 선양했고, 사명대사 유정은 해인사 홍제암에서 3년을 머물다가 입적했다. 근세말 최고의 선승으로 손꼽히는 경허스님 또한 노년기를 해인사에서 보냈다.

1993년 남루한 가사 한 벌만을 남긴 채 입적한 성철스님은 해인사에서 동산 큰스님으로부터 계()를 받고 주로 가야산에서 참선수행하여 '살아있는 부처'로 알려질 만큼 큰 족적을 남겼다. 성철스님은 가야산에 있는 암자 중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백련암에서 기거하다 팔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는 장경각 옆의 퇴설당에서 입적하였다.

 

이렇듯 가야산이 고승대덕을 많이 배출한 데에는 가야산의 산세와 무관치 않은 듯하다. 이중환은 택리지에 '가야산은 끝이 뾰족한 바위들이 나란히 늘어서서 불꽃이 공중에 솟는 듯하고 대단히 높으면서도 수려하다'고 적고 있다. 동국여지승람에서는 '가야산의 모양새는 천하의 으뜸이요 지덕(地德)이 또한 비길 데 없다'고 했다. 그리고 가야산은 옛날부터 정견모주(正見母主)라고 하는 산신이 머무는 신령스러운 산으로도 여겨졌다.

 

빼어난 산치고 대찰(大刹)을 품고 있는 산이 없는데 가야산만은 빼어나면서도 해인사와 같은 큰 절을 끼고 있다. 이는 가야산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산세 때문일 것이다. 빼어나면 안온하지 못하고 안온하면 빼어나지 못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인데 가야산만은 몸은 넉넉함으로, 머리는 우아함으로 뭉쳐있다.

 

가야산이 이러할 진데 해인사와 같은 대찰을 거느리지 않을 수 없고, 경허와 성철같은 큰 스님중의 큰 스님을 낳을 수 밖에. 한편으로 가야산이라는 육체는 해인사라고 하는 영혼이 결합되어 그 생명력을 키워왔는지도 모른다. 결국 가야산은 해인사를 품에 안음으로써 불법(佛法)의 향기가 진동하는 성산(聖山)이 되었다. 가야산의 이 골짜기 저 등성에 14개의 암자가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따지고 보면 가야산의 싹수는 신라 말 고운 최치원선생이 이곳을 찾으면서부터 이미 짐작이 되었는지 모른다. 최치원은 열두 살 나이에 당나라로 유학하여 열여덟에 급제하고 거기에서 10년 동안 벼슬을 지냈다. 스물여덟에 귀국한 최치원은 신라에서 한림학사까지 지내다가 서른여덟 나이에 가야산에 입산해 버린다. 유학의 대성가 최치원은 나중에 가족까지 가야산 홍류동 계곡으로 데리고와 평생을 이곳에서 살았다 한다.

스님이여 청산 좋다 이르지 말게

산이 좋다면 왜 다시 나오나

먼 훗날 내 종적 눈 여겨 보게

청산에 들면 다시는 나오지 않으리

그리고 최치원은 다시는 세상에 나타나지 않았다. 이렇게 홍류동에 은거하며 살던 최치원이 어느날 숲 속에 갓과 신발만 남겨둔 채 홀연히 자취를 감춰 사람들은 그가 마침내 신선이 되었다고 여겼다.

 

최치원이 신선이 되었다는 가야산은 들어서는 순간부터 우리들의 눈을 현혹시킨다. 88고속도로 해인사 인터체인지를 빠져나와 가야산으로 방향을 돌리자 톱날 같은 봉우리들이 병풍처럼 펼쳐진다. 들어가면서 볼 때 왼쪽의 봉우리가 매화산(1,010m)인데 조금은 여성스럽고, 오른쪽 봉우리는 가야산(1,430m)인데 매화산에 비하여 남성다운 느낌을 준다.

 

매표소를 지나 해인사로 들어가는 길을 따라 구불구불 이어지는 홍류동 계곡은 그야말로 장관이다. 홍류동 계곡에서 매화산 쪽으로 펼쳐지는 풍광이 마치 실경 산수화 한 폭을 보는 것 같다. 불꽃처럼 솟아오른 바위와 용틀임하듯 서 있는 소나무의 환상적인 어울림. 여기에 울창한 수림과 맑디 맑은 계류. 그 누가 선경이라 하지 않을손가. 예로부터 가야산을 조선 8경의 하나요, 전국 12대 명산의 하나로 꼽아온 사실이 설득력있게 다가온다.

 

주차장에 차를 주차시키고 해인사 쪽으로 발길을 재촉한다. 상가를 지나 넓게 닦인 길을 따라 걷는다. 기념품 파는 가게들에서도 성철스님의 향기가 물씬 풍긴다. '물은 물이요, 산은 산이다'는 큰 스님의 말씀을 판각한 벽걸이들이 여기저기서 눈에 띈다. 어디 그뿐인가. 전통찻집의 이름도 스님의 화두 '이 뭐꼬?'.

 

주차장에서 해인사 일주문까지는 15분 거리. 아름드리 참나무, 느티나무와 소나무들로 이루어진 이곳 숲은 사뭇 장엄하다. 나무룰 남벌하지 않은 수백 년의 노력이 가져다준 자연의 선물이다. 홍류동 계곡에서 다소 고조되었던 가슴이 착 가라앉으면서 금방 차분해 진다. 아름드리 나무들 사이에 낀 단풍나무들은 가야산의 가을 풍경을 한층 격조높게 가꾸어줄 듯 싶다.

 

해인사는 내려오면서 들르기로 하고 '정상 4km'라는 푯말을 따라 곧 바로 용탑선원을 지나 정상가는 길로 빠져든다. 일주문에서 5분 정도만 가면 마애불로 가는 길과 정상으로 곧바로 오르는 길이 갈린다. 마애불 또한 내려올 때 몫으로 남겨두고 마치 오솔길 같이 경사가 완만한 길을 따라 가야산의 내음을 맡으며 산행을 계속한다.

해인사 일주문을 지난지 40분쯤 되었을까, 서서히 가파른 길이 시작된다. 가파른 길을 15분 정도 오르니 능선 삼거리다. 해인사에서 2.5km, 정상까지는 1.5km 거리를 두고 있는 이곳은 마애불을 거쳐 올라오는 길과 만나는 곳이다.

 

마치 수탉의 벼슬같이 솟아오른 가야산의 봉우리들이 발가벗은 나무가지들 사이로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다. 오롯하게 앉아있는 정상 일대의 봉우리들이 그지없이 아름답다. 여기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후 정상을 향하여 출발한다. 돌 계단으로 된 오르막 길이 꽤 가파르다. 여전히 나무들이 우거져 숲을 이루고 있다.

능선 삼거리에서 15분 거리인 대피소에 도착하니 가야산의 암봉들이 머리 위를 누를 듯 웅장하게 서 있다. 암봉 밑으로는 작달막한 나무들이 온갖 풍상을 이겨낸 듯 서 있다. 대피소에서는 음료수, 막걸리 등을 판매하고 있다.

 

대피소를 지나면서부터 본격적인 암봉 산행이 시작된다. 때로는 바위를 타고 올라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돌자갈 길을 걸어야 했다. 지금까지는 흙만 밟고 걷다가 돌을 밟는 산행이 계속되면서 다리에 힘이 훨씬 더 들어간다.

다른 산 같았으면 여기저기에 철사다리 등을 놓을 법도 하지만 비교적 자연 상태를 그대로 보존하려고 노력한 흔적이 역력해 보인다. 이러한 노력은 상가에서 해인사까지 들어가는 차도(여기에는 차도와 인도가 따로 나 있음)를 포장하지 않은 데에서도 드러난다. 이 길도 원래 포장을 하려고 했는데 성철스님의 만류로 오늘의 비포장 길로 유지되었다 한다.

 

다만 홍류동 계곡 상류 해인사 주차장 위쪽에 여관촌과 상가를 조성하여 이곳 분위기를 깨뜨린 점에 대하여는 눈살이 찌뿌려진다. 해인사를 찾는 사람들에 대한 편의를 도모하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이로 인하여 빼앗겨버린 경건한 분위기나 훼손된 경관은 무엇으로 보상받을 것인가?

대피소 바로 위쪽의 암봉을 뒤로 돌아 오르니 가야산 정상이 지척이다. 근처에는 아직도 잔설이 곳곳에 남아 있다. 장갑을 벗고 슬며시 아직도 남아있는 눈을 만져본다. 불과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금방 잊혀져가던 겨울의 느낌을 다시 맛보는 것 같아 새롭다. 8부 능선까지는 완연한 봄이건만 이곳은 가는 겨울을 붙잡고 있다. 먼 거리에서 볼 때 불꽃같고 톱날 같던 봉우리는 근처에 와 보니 오히려 무뚝뚝한 모습이다.

 

이윽고 산행을 시작한지 2시간만에 해발 1,430m인 가야산 정상인 상왕봉에 도착한다. 경상남도 합천군과 경상북도 성주군을 가르고 있는 가야산은 본디 인도의 부다가야(Buddha gaya)에 있는 가야산으로부터 따왔다고 전해진다. 또한 이 지역이 대가야국의 영역이었으므로 가야라고 하는 국명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상당한 설득력을 갖고 주장되기도 한다.

 

범상치 않은 모양을 가진 가야산은 여러가지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많이 알려진 별명은 우두산(牛頭山)이다. 이 산의 바위가 소머리 같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란다. 정상의 바위 위에는 12평 됨직한 웅덩이가 있어 물이 고여 있다.

 

정상인 상왕봉 동쪽 100m쯤에는 칠불봉이 있고, 칠불봉에서 동쪽으로 이어지는 능선은 말 그대로 불꽃이 튀는 모양의 크고 작은 봉우리들이 길게 이어진다. 역시 머리는 빼어남으로 몸체는 넉넉함으로 뭉친 가야산의 진수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조물주의 전능한 조형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서쪽으로는 두리봉이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가야산의 북쪽으로 자리잡은 경상북도 성주 땅의 논 배미와 농촌 가옥들이 평화롭게 앉아 있다. 남서쪽으로는 우리가 올라왔던 골짜기 곳곳에 암자들의 지붕이 보이기도 한다.

 

날씨가 화창하면 멀리는 지리산과 덕유산에서부터 의상봉에 이르기까지 시야에 들어온다는데 일정 거리만 벗어나면 구름덩어리인지 산봉우리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로 전망이 좋지 않다.

 

오르면 내려가야 하는 것이 자연의 법칙. 우리는 다시 오던 길을 되돌아 하산을 한다. 대피소를 지나 능선 삼거리에서 해인사로 곧 바로 내려가는 길을 버리고 마애불 쪽으로 향한다. 이쪽 길은 국립공원 등산로 치고는 사람들의 통행이 많지 않은 듯 길도 좁고 울창한 숲이 우거져 호젓하다. 빛 바랜 단풍나무 잎들이 유난히도 많은 산등성을 10분 정도 내려오니 계곡이다.

 

여기에서 조그마한 계곡을 건너 왼쪽으로 산비탈을 올라서니 해발 960m 지점에 '초인리 마애불상'이 자애로운 표정으로 자리잡고 있다. 높이가 약 7.5m나 되는 한 장짜리 얇은 판암(板岩)에 고부조(高浮彫)로 새겨진 불상은 그 옷자락에 비하여 유달리 손발이 섬세하게 다듬어진 것이 인상적이다.

 

마애불상을 출발한 우리는 해인사를 향하여 발길을 재촉한다. 산행을 할 때면 산길을 걸으면서 산 그 자체에 취해 보기도 하지만 때로는 꼭 보아야할 곳이 있으면 발길이 빨라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생리일 게다. 그 장본인은 바로 해인사다.

 

마애불상을 출발한지 50분만에 해인사 경내에 도착한다. 불보사찰 통도사, 승보사찰 송광사와 더불어 한국의 삼보사찰 중의 하나인 법보사찰 해인사는 무릇 엄숙하다. 법보(法寶)란 불교교리인 부처님의 가르침을 집대성한 불전을 말하는데 해인사를 법보사찰이라 부르는 이유는 팔만대장경판을 보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해인사의 종파적 이념인 화엄종은 화엄경을 근본 경전으로 삼고 있는데, 이 화엄경에는 화엄사상의 요체를 암시하는 '해인삼매(海印三昧)'라는 개념이 나타난다. ()을 관조함이 마치 바닷가 만상을 비추는 것과 같다는 비유가 곧 '해인'의 의미이다. 따라서 해인삼매란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고 걸어 들어간 선정의 경지를 뜻한다. 여기에서 해인사라는 이름은 비롯되었다.

 

해인사의 가람 배치는 빼어난 정형의 완결성으로 돋보인다는 평을 듣고 있다. 일주문, 해탈문으로부터 화엄종의 주존불인 비로자나불을 비롯한 일곱 부처님이 모셔진 대적광전에 이르는 주요 당우들이 대체로 일직선상에 배열되었다. 해인사는 용케 임진왜란의 전화는 모면했지만 창건 이래 일곱차례의 큰 불을 만났다. 그 때마다 거듭 중창되었는데 현재의 건물들은 대개 조선 말엽에 중건하였다.

웅장한 건물들이 세인들을 압도해 버린다. 일단 우리의 관심은 팔만대장경. 부처의 은덕으로 나라를 수호하려고 제작된 대장경판은 현존하는 해인사의 것 이전에도 있었는데 그것을 초조대장경이라 한다. 그러나 고려 현종 때 만들어진 그 경판들은 1232년 몽고족의 침입으로 모조리 불타 버렸다.

 

이후 고려 고종이 1236년부터 16년에 걸쳐 다시 완성시킨 것이 오늘의 팔만대장경이다. 81,340판에 이르는 불가사의한 이 대장경판은 간절한 불심으로 나라를 수호하려는 고려왕조의 몸부림이 빚은 산물로서 세계적인 보물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 대장경판은 원래 강화도 선원사에 소장되었다가 조선 태조 8(1399)에 지금의 해인사 장경각으로 옮겨졌다. 대장경판이 수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원형대로 보존되고 있는 이유는 장경각의 독특한 설계 때문이라 한다. 온도, 통풍, 방습이 자연적으로 조절되는 등 오늘날의 과학으로도 풀기 힘든 불가사의한 건축기법은 우리를 또 한번 놀라게 한다.

 

불국사 석굴암이 그렇듯이 장경각의 건축도 그 때 당시의 건축기술이 지금보다 뛰어나서가 아니라 ''을 가지고 임했던 당시와 돈벌이를 우선적인 가치로 생각하는 요즈음의 차이가 아닐까? 해인사가 일곱 차례의 화재를 당하면서도 장경각 만큼은 불길이 미치지 않아 사람들은 이 구역을 삼재불입지처(三災不入之處)라 믿었다.

 

해인사를 나와 우리는 '이 뭐꼬?' 찻집에서 녹차를 마신다. 찻집의 벽면에는 중광스님의 그림 몇 점이 눈에 띈다. 부처님 앞에 결가부좌하고 수행중인 스님 왈 '알지 못합니다'라고 말하는 그림이 눈에 와 닿는다.

"이 뭐꼬?"

"알지 못합니다." (1997. 3. 22)

 

*산행코스

-.치인리 주차장(20) 해인사(1시간 10) 대피소(40) 정상(40) 마애불상 갈림길(20) 마애불상(50) 해인사(20) 치인리 주차장 (총 소요시간 : 4시간 20)

 

 

 

간월산신불산취서산(1,083m1,209m1,092m, 울산광역시경상남도 양산)

 

억새 바다에 핀 수만 송이 함박 꽃

 

 

백두대간에서 빠져나온 낙동정맥이 동해로 꼬리를 감추기 전에 남은 힘을 다해 불끈 솟구쳐 빚어놓은 산군(山群), 영남 알프스. 이 영남 알프스는 최고봉인 가지산(1,240m)을 비롯하여 운문산(1,196m)천황산(1,189m)재약산(1,115m)간월산(1,083m)신불산(1,209m)취서산(1,092m)1천 미터가 넘는 7개의 산과 수많은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다.

 

전체가 가지산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는 영남 알프스는 다시 3개의 덩치로 나누어진다. 경상남도 밀양과 경상북도 청도를 가르면서 동서로 뻗어 있는 가지산과 운문산이 그 첫째요, 석남재와 배내재 사이에 자리잡은 능동산에서 남서쪽으로 이어지는 천황산과 재약산이 그 둘째요, 배내재에서 남쪽으로 치닫는 간월산과 신불산취서산이 세번째 덩치다.

 

영남 알프스는 그 덩치 만큼이나 유명한 사찰과 문화재, 폭포, 억새군락 등 볼거리를 가득 안고 있다. 우선 우리나라 3보 사찰 중의 하나인 통도사를 비롯하여 가지산의 석남사, 천황산의 천황사, 재약산의 표충사 등 유서깊은 가람들이 산의 품격을 높혀준다.

 

그리고 흥룡폭포와 층층폭포, 구룡소폭포 등 크고 작은 폭포들이 계곡의 아름다움을 더해주고 있다. 이에 못지않게 이쪽 산군이 자신있게 내놓을 만한 것은 신불평원과 사자평 고원 등 산등성을 황금빛으로 수놓은 수백만 평에 이르는 억새군락이다.

 

이들 7개 산을 종주하려면 23일은 잡아야 하지만 세 덩치를 각기 다른 일정으로 잡아 당일 산행 코스로 찾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오늘 우리는 간월산신불산취서산으로 이어지는 코스를 택한다. 산행 팀을 2개 팀으로 나누었다. 한 팀은 석남고개에서 시작하여 능동산배내봉을 경유하여 세 개의 산을 타는 종주팀이고, 다른 한 팀은 흥룡폭포 쪽에서 간월재를 거쳐 신불산취서산으로 올라 통도사로 하산하는 팀이다. 물론 두 팀은 간월재부터는 같은 코스가 된다.

 

석남고개로 가기 위하여 우리를 실은 버스는 남해고속도로 진영인터체인지를 빠져나와 밀양을 거쳐 24번 국도를 타고 달린다.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빨간 사과의 물결이 밀양시 산내면의 논과 밭을 뒤덮고 있다. '얼음골 사과축제'를 알리는 현수막도 곳곳에 걸려 있다. 도로 변에서는 몇 십 미터 간격으로 가판을 설치해 놓고 사과를 판매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띈다. 이 고장이 신흥 사과단지로 정착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들이다. 버스는 굽이굽이 돌아가며 산허리를 깎아 만든 도로를 따라 산중턱까지 한참을 올라간다.

 

1030. 언양과 울산으로 통하는 석남터널 바로 앞에서 종주 팀을 내려주고 버스는 터널 속으로 사라진다. 나도 종주팀을 선택한다. 터널 왼쪽으로 난 길을 들머리로 오늘 산행을 시작한다. 낙엽들이 부스럭 부스럭 소리를 내며 우리 일행을 맞이한다. 길 위에는 낙엽이 수북수북 쌓여 있다. 길 옆의 반석으로 이루어진 계곡에는 가뭄 탓인지 흘러야 할 물은 없고 낙엽들만 뒹굴고 있다. 나무들은 누가 강요하지도 않았는데 여름 내내 달고 있던 이파리들을 대지에 헌납하듯 미련없이 떨구어 버린 것이다. 버릴 때는 주저하지 않고 던져버리는 나무의 '집착하지 않는 자세'가 부럽다.

 

10분 정도 가다가 계곡 길을 버리고 오른쪽으로 방향을 튼다. 여기에서 잠시 가픈 숨을 쉬면서 오르니 능선이다. '가지산 2.5km, 능동산 3.5km'라 쓰인 이정표를 따라 능동산 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사실 터널 옆에서 곧 바로 능선으로 오르는 길이 있다는데 우리는 이 길을 보지 못한 것이다. 어떠튼 능선에 올라서니 북쪽으로 가지산이 건너 보인다. 길은 사람이 많이 다니지 않은 듯 나무가지들이 손등을 때리기도 한다.

 

하기야 가지산운문산은 석남사에서 원서리로 연결되는 코스를, 천황산재약산은 천황사(얼음골)에서 표충사로 이어지는 코스를 이용하고, 간월산신불산취서산은 종주시 배내재에서 출발하고 그렇지 않으면 흥룡폭포쪽 계곡에서 출발하여 통도사로 하산하는 코스가 일반적이니 지금 우리가 걷고 있는 코스는 당연히 사람들의 발길이 뜸할 수밖에. 그러나 우리는 석남고개에서부터 산행을 하므로써 영남 알프스의 전체적인 산세와 산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부여받는다.

 

앙상한 가지만 남은 나무들과 제법 차갑게 불어오는 바람이 겨울을 예고하고 있다. 굽이굽이 돌아 올라오는 도로에는 차량 행열이 이어진다. 방금 우리가 지나왔던 길이다. 정면으로는 천황산이 모습을 드러낸다. 높이가 고만고만한 봉우리들을 넘고 넘어 마지막 가파른 길을 올라서니 배내재에서 올라오는 고개다. 이 고개를 중심으로 천황산재약산으로 연결되는 능선과 배내재를 거쳐 간월산신불산취서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갈린다. 일단 능동산을 들렀다 오기로 한다. 여기에서 5분 정도 거리에 능동산(981m)이 있다.

 

능동산에 올라서니 정면으로 두 개의 봉우리가 눈 앞에 우뚝 다가선다. 오른쪽이 천황산, 왼쪽이 재약산이다. 북쪽에는 가지산과 운문산이 여기저기 암봉을 거느리며 서 있다. 남쪽으로는 배내재 건너 배내봉이 정답게 다가온다. 고개를 이리 돌려도 산, 저리 돌려도 산이다. 능동산에서 오던 길로 고개까지 다시 돌아와 배내재로 내려 간다. 상당히 가파른 길이건만 사람들의 통행은 많다. 융단을 깔아 놓은 것처럼 부드러운 흙 길이다. 오랜 가뭄 탓에 한발 한발 내딛을 때 마다 먼지가 뿌옇게 일어난다. 앞 사람과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지 않으면 먼지 구덩이에서 걷는 것 같다.

 

경사진 산자락에는 억새가 벌판을 이루고 있다. 마침 불어오는 바람에 억새가 흔들리고 있다. 흔들리는 억새는 사람의 마음까지도 더욱 외롭고 쓸쓸하게 한다. 그러나 억새의 흔들림 속에서 오는 쓸쓸함은 무언가 허전하고 공허한 상태가 아니라 쓸쓸함 속에서도 속이 꽉 차 있는, 말하자면 무언가를 채워주는 그런 쓸쓸함이다.

 

남쪽으로 가파른 길을 내려 서니 배내재다. 비포장 찻길이 나있고 승용차승합차 등 차량들이 여기저기에 늘비하게 주차돼 있다. 여기에서 남서쪽으로 내려서면 배내골이고, 북동쪽으로 가면 언양으로 통하는 24번 국도와 만난다.

 

도로를 가로질러 배내봉으로 향한다. 넓은 등산로에 나무까지 드문드문하여 다소 황량한 느낌이 든다. 꽤 가파른 길이다. 올라갈수록 나무는 없어지고 넓은 억새밭이 전개된다. 솜털 옷을 입고 있는 억새도 상당한 부분은 바람에 날아가 버렸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씨다.

 

왼쪽(동쪽)으로는 들판이 펼쳐지면서 언양과 멀리 울산까지 시야에 들어온다. 그 뒤로 동해 바다가 엷은 구름이 덮힌 채 출렁이고 있다. 오른쪽(서쪽)으로는 천황산재약산과 사자평 고원이 듬직하게 자리잡고 있다. 그 밑으로 배내재에서 뻗어내린 골짜기, 배내골이 아늑하게 내려다 보인다. 이렇게 동쪽과 서쪽의 대조적인 모습을 보면서 걷는 것도 즐거운 일이다.

 

배내봉(966m)에 도착한다. 영남 알프스 7개 산 중에서 취서산만을 제외한 나머지 봉우리가 조망된다. 간월산과 신불산을 바라보며 걷는다. 배내봉을 벗어나니 억새밭은 사라지고 갈참나무와 철쭉이 주종을 이룬 작은 키의 나무 숲이 이어진다. 그리고 간간히 벼랑들이 나타나기도 한다. 중간에 점심을 먹고는 쉴 틈도 없이 곧 바로 출발한다. 갈 길이 멀기 때문이다.

 

벼랑과 나무가 있는 길이 이어지다 억새 길이 나타나고 다시 벼랑 길로 접어들기를 여러 번. 다른 봉우리보다 우뚝 솟은 한 봉우리로 오른다. 가파른 경사의 정점에 서 있는 간월산(1,083.1m)이다. 바람이 세차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간월산 산신령께 비나이다. 우리 모두에게 행운이 있기를 비나이다." 울산에서 왔다는 아저씨 아주머니 67명이 간월산 표지석 앞에 떡을 놓고 절을 한다.

 

간월산에서 간월재로 이어지는 산자락은 온통 억새밭이다. 억새밭에는 군데군데 입석(立石)들이 있어 운치를 더해준다. 마치 광주 무등산의 장불재나 중머리재에서 바라본 억새 분위기와 흡사하다.

 

간월재는 홍류폭포에서 올라오는 길과 백련암에서 파래소 폭포를 거쳐 오는 길이 만난다. 그리고 간월산에서 신불산으로 이어지는 안부에 위치해 있다. 간월재에는 임시대피소가 있어 라면과 막걸리 등을 팔고 있다. 고개 이쪽 저쪽으로는 임도가 거미줄치듯 보기싫게 뚫려 있다. 임도를 타고 올라와 주차해 놓은 차들의 모습도 볼썽사납다.

 

간월재는 사람들로 꽤 붐비고 있다. 신불산 쪽에서 내려오는 사람, 홍류폭포와 백련암 쪽에서 올라오는 사람들이 그들이다. 간월재에서 신불산 쪽으로 몇 발자국을 걷다가 다시 걸음을 멈춘다. 오른쪽의 평평한 억새밭이 나를 멈추게 한 것이다. 바람에 흔들리는 억새가 마치 바다에서 파도가 출렁거리는 것 같다.

 

또 나를 붙잡는 것은 홍류폭포 쪽(동쪽) 능선에 쭉쭉 뻗은 암봉들이다. 한 쪽은 부드러운 초원이 자리잡고, 또 한 쪽은 아기자기한 바위들이 배치되어 극적 효과를 드러내고 있다. 이런 풍경을 연출해 놓은 것은 이 세상 최고의 예술가인 조물주일 것이다.

 

다시 가파른 오르막이다. 뒤돌아 보면 간월재가 내려다 보이고 더 멀리는 가지산과 천황산재약산이 버티고 서 있다. 키 작은 갈참나무와 싸리나무산죽나무 숲을 지나 능선에 다시 올라서니 헬기장이 있다. 지척에 신불산이 자리잡고 있고, 취서산까지는 광활한 억새 밭이 펼쳐진다. 마른 억새 잎이 바람에 흔들리며 사각사각 소리를 낸다. 억새 잎 부딪치는 소리를 들으며 신불산으로 향한다.

 

완만한 길을 걷다가 커다란 돌탑 앞에 선다. 헬기장에서 오는 능선과 높이가 크게 차이나 보이지 않지만 여기가 해발 1,209m 신불산이다. 역시 끝없이 펼쳐지는 억새가 장관이다. 동쪽으로는 공룡능선이 이어진다. 마치 설악산의 공룡능선을 옮겨다 놓은 것 같은 불꽃 봉우리들이 펼쳐진 곳이다. 이곳의 드넓은 억새밭은 동쪽의 아기자기한 암봉들과 조화를 이루어 환상적인 광경을 만들어낸다.

 

취서산을 향하여 내리막 길을 치닫는다. 10분 만에 도착한 안부. 동쪽 가천 마을 쪽으로 100m 정도 위치에 샘터가 있다. 샘터 옆에는 간이 대피소도 있다. 1천 미터 이상의 고지에다 극심한 가을 가뭄에도 불구하고 물이 나오고 있다. 여기에서 먹는 물 한 모금이 그렇게 소중할 수가 없다.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다시 안부로 올라 오는데 햇빛이 정면으로 비췬다. 햇살을 받은 솜털 달린 억새가 수만 송이의 함박꽃이다.

 

안부에서 봉우리 하나를 넘어 신불평원을 향하여 걸어간다. 소변을 보기 위해서 길을 잠시 벗어나자 돌 무더기들이 군데군데 보인다. 다름아닌 단성산성(丹城山城)이다. 이 성은 신라 때부터 있었던 것으로 1592년 임진왜란이 나던 해에 길이 12천 미터에 이르는 석성을 축성하여 왜군과 격전을 벌였던 곳이다.

 

이윽고 신불평원에 이른다. 수십만 평에 이르는 평지가 1천 미터가 넘는 이런 고원에 어떻게 조성되었는지 신비스러울 정도다. 오늘 일정이 워낙 빡빡한 편이라 비교적 속도를 내면서 산행을 하고 있는 터이지만 여기에서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을 수 없다. 드넓게 펼쳐지는 억새군락은 끝없이 넓은 바다고, 그 사이를 걷는 나는 망망대해에 외롭게 떠 있는 한 편의 배다. 불어오는 바람에 억새 바다가 파도처럼 물결치면 나도 역시 억새 물결에 파도를 친다. 억새 바다가 햇살을 받아 반짝이면 나의 눈에서도 광채가 난다.

 

취서산(1,075m)에 올라 신불평원과 신불산을 바라본다. 광활한 억새밭 사이로 내가 걸어왔던 길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길은 동쪽 저 아래 경부고속도로에도 나 있다. 길을 찾아 나선 사람들이 앞서거니 뒷서거니 달리고 있다. 경부고속도로 뒤편으로 원효산과 천성산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취서산 자락에는 통도사와 여러 부속 암자들이 암봉들을 등지고 조용히 자리잡고 있다. 지도에는 취서산으로 나와 있지만 표지석에는 영취산으로 표기하고 ( )안에 취서산이라 부기(附記)해 놓았다. 그도 그럴 것이 통도사 일주문에는 '영취산 통도사'로 표기돼 있고 영남지역 사람들은 오히려 영취산으로 더 많이 부르고 있다.

 

취서산 정상에서 시살등 쪽으로 능선길을 걷는다. 금방 분위기가 바뀐다. 억새 천지는 온데간데 없고 조용한 숲 길이 이어진다. 대부분 사람들이 정상 근처에서 곧바로 극락암 쪽으로 하산하기 때문에 이 길은 참으로 조용하다. 뿐만 아니라 이어지는 암봉들이 나로 하여금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다소 무딘 듯 하면서도 아기자기한 모양을 가진 수많은 암봉들이 바로 그것이다. 여기에 용틀임하듯 서 있는 멋진 소나무가 한 폭의 그림을 만든다. 이렇게 취서산은 8부 능선 위로는 우뚝우뚝 솟은 바위 봉우리들이 병풍처럼 펼쳐지고, 그 밑으로는 편안한 육산이 자리잡고 있다. 이 속에 통도사를 비롯한 여러 암자들이 둥지를 틀고 있다. 이 가람들은 결국 바위가 상징하는 불()의 기운과 펑퍼짐한 육산이 띠고 있는 물()의 기운을 모두 받고 있는 셈이다.

 

한참을 걷다가 정면으로 화살촉처럼 날카롭게 솟은 바위 봉우리를 바라본다. 시살등이다. 비탈이라는 뜻의 등(?)과 활을 뜻하는 시()가 겹쳤으니 한 마디로 화살등이다. 한피기고개에서 시살등으로 이어지는 능선 길을 버리고 왼쪽으로 내려선다. 꽤나 가파른 비탈이다. 눈을 옆으로 돌리면 바위 봉우리가, 밑을 바라보면 울창한 숲이 이어진다. 금방 백운암에 이른다. 취서산에서는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암자다. 암자 뒤의 대나무와 전나무가 독야청청(獨也靑靑)하다.

 

백운암에서 내려가는 길에서 만나는 아름드리 소나무와 여러 종류의 활엽수들이 산의 무게를 더해주고 있다. 이러한 숲을 백운암으로 올라오면서 맞는다면 숲 자체는 물론 암자의 분위기에서도 그윽한 정취를 느낄 수 있도록 해줄 것이다.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나뭇잎들은 노랑빨강 옷을 그대로 입은 채 가는 가을을 아쉬워 하고 있다. 다람쥐 한 마리가 배웅을 한다. 새들의 합창 또한 이별의 노래다.

 

길은 이내 넓어지면서 극락암으로 이어진다. 현대 불교사에 있어 고승(高僧) 중의 한 분이었던 경봉스님이 머물렀던 암자다. 멀리 병풍처럼 펼쳐진 암봉들이 비경을 이루면서 암자의 배경이 되고 있다. 주위에는 고고한 모양의 아름드리 소나무와 대나무들이 항상 푸르름을 유지해 주고 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조화인가. 바위들이 신령스럽고 엄숙하다면 이런 푸르름은 항상 생기 발랄한 활력을 불어넣어 준다. 세월의 풍상을 간직한 극락암의 고풍스러운 모습이 더없는 숙연함으로 다가온다.

 

이제 통도사로 가자. 극락암에서 내려가는 길목의 소나무 숲이 그렇게 아늑할 수가 없는데 지나가는 승용차들 때문에 이런 분위기를 만끽 할 수 없으니 아쉽기만 하다. 아늑한 소나무 숲을 지나니 주위에는 논이 있을 정도의 평지가 나온다. 팍팍한 아시팔트 길이 계속된다. 그것도 30분 정도 걸리는 거리를.

 

통도사에 도착하니 서서히 땅거미가 깔리고 있다. 팔만대장경을 품고 있는 해인사를 법보(法寶)사찰이라 하고, 보조국사 이후 16국사를 배출한 송광사를 승보(僧寶)사찰이라 부르는 한편, 이곳 통도사는 부처님의 정골사리(頂骨舍利)와 가사를 간직하고 있어 불보(佛寶)사찰이라 한다. 자장율사가 여기에 불보를 갖추어 금강계단(金剛戒壇)을 쌓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설법할 때, 계를 받으러 모여든 인파가 구름 같았다고 전한다. 적멸보궁으로 향한다. 부처님이 없는 법당의 한 면에는 '적멸보궁'으로, 다른 면에는 '금강계단'으로, 또 다른 면에는 '대웅전'으로 쓰인 편액이 붙어있다.

 

대웅전의 처마 끝에서 들려오는 풍경 소리가 내 가슴 속으로 파고 든다. 저 풍경 소리야말로 천 년의 역사를 지켜온 설법일 터. 일주문을 나서는데 문득 선시(禪詩) 한 편이 생각난다.

 

 

성내지 않는 그 얼굴이 참다운 공양이요

 

부드러운 말 한 마디 그윽한 향이어라

 

마음 속에 티 없음이 진실이요

 

물들지 않으면 이것이 실상이네

 

(1997. 11. 2)

 

* 산행코스

 

-. 1코스(종주코스) : 석남터널(45) 능동산(20) 배내재(40) 배내봉(1시간) 간월산(15) 간월재(40) 신불산(1시간) 취서산(50) 한피기고개(1시간) 극락암(40) 매표소 (총 소요시간 : 7시간 10)

 

-. 2코스 : 등억리(40) 홍류폭포(1시간 20) 간월재(이후 제1코스 참조)

 

-. 3코스 : 가천리 버스정류장(2시간 20) 샘터(50) 취서산

 

 

      

조계산(884m, 전라남도 순천)

 

부처 향기 넘치는 한국 불교의 요람

우리 나라의 웬만한 산치고 절이 자리잡지 않은 곳이 없다. 가야산의 해인사, 취서산의 통도사, 오대산의 월정사, 속리산의 법주사, 지리산의 화엄사, 팔공산의 동화사, 토함산 불국사, 덕숭산 수덕사, 계룡산 동학사, 백암산의 백양사, 조계산의 송광사선암사……. 어디 이 뿐이랴. 산 속 깊숙이 자리잡은 암자들까지 헤아린다면 산과 절은 물과 물고기의 관계로 비유될 정도로 산 있는 곳에 절이 있고, 절 있는 곳에 산이 있다. 그래서 우리 나라 사람들에게는 절하면 흔히 산사(山寺)로 인식될 정도다.

 

그 중에서도 전라남도 순천 땅에 있는 조계산은 '우람하되 의젓하고 중후하여 건강한 아기를 낳아줄 것 같은 모체(母體)를 바라보는 듯한' 느낌 그대로 한국을 대표하는 절 두 개를 양쪽에 거느리고 있다. 송광사와 선암사가 그것이다.

 

송광사는 보조국사 지눌을 비롯한 16명의 국사를 배출한 승보(僧寶)사찰로서 법보(法寶)사찰 해인사, 불보(佛寶)사찰 통도사와 함께 우리 나라 3(三寶)사찰의 하나로 손꼽힌다. 더군다나 송광사는 우리 불교계의 최대종단인 조계종의 근본사찰이다.

 

또한 선암사는 조계종 다음으로 큰 교세를 가진 태고종의 총본산인 총무원이 있는 절이다. 그러니까 조계산은 한국 불교를 대표하는 두 교단의 근본 도량을 동쪽과 서쪽 자락에 끼고 있는 셈이다.

 

선암사 주차장에 도착한다. 여러 차례 이곳을 왔었지만 모든 것을 비워버린 겨울의 선암사를 찾는 경우는 오늘이 처음이다. 올 때마다 느끼는 바이지만 선암사로 통하는 비포장 길이 그렇게 정다울 수가 없다. 웬만한 절들이 일주문 코 밑까지 포장을 해놓은 것과 비교하면 비포장을 유지하고 있는 배려(?)에 감사할 따름이다.

 

선암사로 오르는 비포장 길은 아름드리 갈참나무를 비롯한 갖가지 낙엽활엽수로 이루어진 울창한 숲과 맑디맑은 계곡이 함께 어울린 운치있는 길이다. 평소에 그 많던 사람들도 겨울인데다가 더군다나 오늘은 성탄절이라 그런지 뜸한 편이다. 이러한 조건이 겨울 산사를 찾아가는 나그네의 가슴을 더욱 고요하게 한다.

 

나목들 너머로 멀리 조계산 정상인 장군봉과 배바위가 바라보인다. 부도밭을 지나자 호법선신(護法善神)방생정계(放生淨戒)라 쓰인 나무 장승이 근엄하면서도 정겨운 얼굴을 하고 서 있다.

 

절을 지키는 장승을 지나자 선계(仙界)가 펼쳐진다. 우선 작은 무지개다리가 선계로 들어서는 나그네를 맞아 큰 무지개다리로 안내한다. 이름하여 승선교(昇仙橋). 우리 나라에 남아있는 무지개다리 중 가장 자연스럽고 우아하다는 평을 들을 정도로 아름다운 다리다.

 

나는 이곳을 올 때마다 작은 무지개다리 옆으로 내려가 승선교 밑 너럭바위에 앉아 반원형의 다리 사이로 모습을 드러내는 강선루(降仙樓)를 바라보곤 한다. 아름다운 무지개다리와 누각(강선루)과 그 밑으로 흐르는 계류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내가 마치 신선이나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지곤 한다. 하늘에서 선녀가 내려와(降仙), 맑은 계곡물로 목욕하고 다시 하늘로 올라가는(昇仙) 곳이 바로 이곳이기 때문일 것이다.

 

강선루와 삼인당(三印塘)이라 불리는 연못을 지나 선암사로 올라간다. 측백나무 아래의 조그마한 차밭이 푸르르고, 느티나무갈참나무 고목이 고찰(古刹) 선암사로 들어가는 중생에게 그윽한 분위기를 제공해 준다.

 

'조계산 선암사'라 쓰인 일주문을 들어서니 절 안쪽에 '청량산 해천사(淸凉山 海泉寺)'라는 현액이 붙어있다. 통일신라 시대에 세워진 선암사가 크고 작은 화재를 여러 차례 당하자 산강수약(山强水弱)한 선암사의 지세 때문이라는 진단이 내려지고, 이에 따라 화재 예방을 위하여 조선 영조 37(1761)에 산 이름을 청량산으로, 절 이름을 해천사로 바꾸었다. 그러나 순조 때 다시 화재가 발생하여 대대적인 중창불사를 한 후 조계산 선암사라는 원래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다.

 

나는 선암사에 올 때마다 대부분의 절들이 중창불사로 요란한 풍토 속에서도 고풍스러운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는 데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정말 선암사는 '산사의 모범답안 같이 청정하고 아름다운 절'이다. 여기에 매화동백과 300년 묵은 철쭉이며 영산홍목련벚나무파초부용작약옥잠화상사화 등 온갖 가지 꽃들로 꾸며진 경내는 마치 수줍은 듯하면서 매력을 끄는 순박한 새악시를 연상케 한다.

 

고려 명종 때 입을 열면 문장이 되었다는 김극기가 선암사에서 읊은 시구를 오늘에도 그 느낌대로 되새겨본다.

'적적한 산골 속 절이요 / 쓸쓸한 절 아래 스님일세 / 마음 속 티끌은 모두 씻어 떨치고서 / 슬기로운 물만 정히 맑게 괴었네……'

 

대웅전을 비롯하여 팔상전, 원통전, 응진전 등 20여 동에 이르는 전각들을 둘러보고 우리 나라 절집 화장실 중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J자형의 선암사 뒷간에 들른다. 화장실 한쪽에 붙어있는 글씨에 눈이 멈춘다.

'대소변을 미련없이 버리듯

번뇌 망상을 미련없이 버리자.'

 

선암사 뒷간이 주는 화두를 부여안고 대각암으로 향한다. 측백나무 숲과 청신한 신의대 숲을 지나자 길 왼쪽에 수백 년을 말없이 지켜온 마애여래입상이 나그네를 맞이한다. 그리고 조그마한 대나무밭을 지나자 역시 고풍스러움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대각암이 기다리고 있다. 나를 먼저 맞이한 것은 신선을 기다린다는 뜻의 누각, 대선루(待仙樓).

 

대선루 밑을 통과하여 대각암 경내로 들어서자 암주인 듯한 스님이 전등을 갈고 있다. 화엄종과 법상종이 갈라져 대립하고 있을 때 불교계를 개혁하고자 천태종을 개창한 대각국사 의천이 선암사를 중창불사하면서 이 대각암에 머물렀다고 한다. 그래서 암자의 이름도 대각암이다.

 

신의대가 바람에 사각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정상 장군봉으로 향한다. 평소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곳이라 길은 넓다. 그런데 오늘은 사람 만나기가 힘들다. 사람 생각을 잃어버릴 만 하면 몇 사람이 나타나곤 하는 정도다.

 

울창한 활엽수 숲이 산의 정취를 더욱 깊게 한다. 이렇게 울창한 숲 속에서는 부처님의 자비와 예수님의 사랑이 싹튼다. 이러한 숲이야말로 사람의 마음을 포근하게 하고, 포근한 마음으로부터 자비와 사랑은 싹틀 것이기 때문이다.

 

낙엽활엽수가 많은 다른 산의 경우도 그렇지만 이곳에는 유별나게 산죽이 많다. 옛날에는 산죽을 쪼개어 설이나 정월 대보름에 거는 복조리나 돌을 골라내기 위하여 쌀을 일 때 쓰이는 조리를 만들었다. 그래서 산죽을 조릿대라고도 부른다. 산죽은 이런 쓰임새와 상관없이 잎을 모두 떨구어버린 나목들의 밑둥치를 감싸주어 나무들로 하여금 겨울을 따뜻하게 날 수 있도록 배려한다.

 

한참을 올라가니 향로암터다. 장군봉에서 내려오는 날등에 자리잡은 암자터에는 지금도 10평 정도의 흙돌담과 기왓장이 상당히 남아있다. 이런 정황으로 보아 폐사된지 그리 오랜 세월이 지난 것 같지는 않다. 암자 입구에는 샘터가 있으나 건조주의보가 내려질 정도의 극심한 가뭄 탓으로 물은 말라버렸다. 커다란 느티나무 고목 세 그루도 향로암의 한 식구였을 것이다.

 

암자터에서는 지리산과 광양 백운산을 바라볼 수 있을 정도로 전망이 시원하다. 멀리서 펼쳐지는 장엄한 지리산 줄기를 보면서 스님은 마음 속의 번뇌를 떨쳐버렸을 것이다.

 

향로암터를 출발하여 장군봉으로 오른다. 암자터 위 능선에서는 그만한 돌탑 한 기가 사라진 암자를 대신하고 있다. 길은 상당히 가팔라진다. 모든 사물의 이치가 그러하듯이 정상을 바로 앞두고서는 마지막 고행이 따르게 마련이다. "아이고, 인제 더 가라해도 못가것네."

"여보, 이제 다 왔어. 몇 걸음만 더 가면 정상이야." 부부인 듯한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마지막 힘을 낸다. 정상이 바로 저긴데.

 

정상 장군봉에 선다. 이곳에서 한참을 서 있는데 선암사 굴목재에서 배바위를 거쳐서 올라오는 사람, 송광사에서 출발하여 연산봉을 거쳐오는 사람, 그리고 선암사에서 소장군봉을 거쳐 올라오는 사람이 하나 둘 모여든다. 전부 합쳐보아야 10명도 채 안되는 숫자지만.

"여보세요. 나야. 메리 크리스마스! 성탄절 축하인사를 조계산 정상에서 보낸다."

 

핸드폰으로 산 위에서 보내는 성탄절 축하인사. 그것도 의미있는 일이다. 이 분은 육군 장교란다. 우리의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조계산을 둘러싸고 있는 산들로 모아진다. "아저씨, 저 산 지리산 맞지요?"

"그래요, 북동쪽으로 맨 뒤에서 하늘금을 가르고 있는 산이 지리산이지요. 저 장엄한 능선 좀 보세요. 천왕봉에서 반야봉, 노고단까지 길게 이어지는 지리산 주능선을 이렇게 선명하게 볼 수 있다니 이건 행운이어요."

"그럼, 지리산 앞 쪽 약간 남쪽으로 비켜 서 있는 산이 광양 백운산(1,218m)이겠군요."

"북서쪽 저기를 보세요. 약간 희미하지만 우뚝 서 있는 봉우리 하나가 보이지요? 그게 무등산(1,187m)입니다. 그리고 북서쪽으로 가까이 보이는 산이 모후산(919m)이구요."

"아저씨는 산을 잘 아시네요?" "산을 자주 찾다보니까 그런 거지요."

 

남서쪽으로는 영암 월출산(813m)과 더 멀리 해남 두륜산(703m)까지 아스라이 시야에 들어오고, 강진의 수인산(561m), 그리고 보성과 장흥에 걸쳐있는 제암산(779m)이 바라보인다. 결국 전라남도의 웬만한 산들이 거의 모습을 드러낸 셈이다.

 

남쪽으로 순천만의 쪽빛 물결도 아름다운 조계산의 조망에 일조를 한다. 동쪽 산자락에서는 선암사의 절집들이 부처의 향기를 뿜어내고, 상사 조절지댐의 푸른 물결도 햇빛에 반짝인다. 승주읍과 호남고속도로도 동쪽으로 내려 보인다. "아주머니, 아직도 더 못가시겠어요?"

아까 남편에게 더 이상 못가겠다고 하던 아주머니에게 농담을 건넨다. 아주머니는 겸연쩍었던지 빙그레 웃기만 한다.

 

연산봉을 향하여 출발한다. 정상에서도 그랬지만 북쪽으로 가는 길이라 바람이 세차다. 매서운 북풍을 이기느라 갈참나무도 키가 작다. 갈참나무 사이에는 철쭉나무가 어울려 있다. 북서쪽으로 이어지는 산비탈을 철 지난 억새들이 노랗게 장식하고 있다.

 

억새밭을 지나다가 산죽밭을 지나기도 하면서 방향은 서쪽으로 바뀐다. 오른쪽으로는 주암댐의 물결이 구불구불한 산자락을 감아 돌면서 넘실거리고 있다. 그리고 왼쪽에서는 장군봉과 배바위가 늠름하게 버티고 있다.

 

배바위에 얽힌 이야기를 생각한다. 조선 숙종 때 호암선사가 선암사를 중창 불사할 때의 일이다. 호암대사는 중창 불사를 위해 장군봉 아래 배바위에서 기도를 열심히 하였으나 효험이 없자 바위 밑으로 몸을 던지기에 이르렀다. 이 때 코끼리를 탄 여인이 하늘에서 내려와 보자기로 호암대사를 받아 다시 배바위 위에 올려놓으면서 "떨어지면 죽는 것인데, 어찌 무모한 짓을 하는가?"하고 사라졌다. 이 여인이 관세음보살이라는 것을 깨달은 호암대사는 배바위에서 친견한 모습대로 불상을 조성하고, 원통전을 지어 이 불상을 봉안하였다.

그런데 이 관세음보살상은 신통력을 지녀 후사가 없던 정조도 이곳에서 백일기도를 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바로 순조다. 선암사라는 이름도 지금은 한자 표기를 선암사(仙巖寺)로 하고 있지만 원래는 이 배바위(船岩)에서 비롯되었다.

 

'부드러운 능선의 흐름이 아주 부담없고 덕성스러워 모성애를 느끼게 할' 정도로 완만한 능선길을 걷는다. 다만 선암사 굴목재에서 남쪽으로 뻗어나간 깃대봉 아래의 산비탈에 임도를 내느라 험상굳게 파헤쳐 놓은 모습이 볼썽사납다.

 

연산봉(851m)에 도착한다. 원래 소나무가 많아 송광산(松廣山)이라 불렸던 봉우리다. 지금의 송광사라는 이름도 송광산에서 비롯되었다. 연산봉 역시 전망이 좋다. 가파른 길을 내려오니 갈참나무와 굴참나무 군락이다. 언제부터 수종이 바뀌었는지는 모르지만 송광산이라 할 만큼 소나무가 많았다는 이야기를 실감할 수가 없다.

 

어느새 송광사 굴목재가 나타난다. 굴목재는 선암사에서 송광사로 넘어갈 때 넘어야 하는 두 개의 고개인데, 선암사 쪽의 고개를 선암사 굴목재, 송광사 쪽 고개를 송광사 굴목재라 부른다.

 

나는 여기에서 홍골을 통하여 송광사로 손쉽게 내려가는 길을 택하지 않고 천자암으로 향한다. 키를 넘는 산죽을 뚫고 천자암산에 도착하니 남쪽으로 순천시 송광면과 외서면 땅이 내려다보인다. 논이며 마을, 그리고 벌교로 통하는 도로까지.

 

헬기장을 지나자 이내 신작로 길이다. 천자암이 가까워졌음을 금방 느낄 수 있다. 천자암으로 들어가 먼저 쌍향수를 찾는다. 천연기념물 88호로 지정된 두 그루의 곱향나무는 높이가 12.5m, 가슴높이 둘레가 각각 3.95m3.24m에 이른다. 보조국사와 담당국사가 중국에서 귀국하면서 짚고 온 지팡이를 꽂아 둔 것이 뿌리내렸다는 전설도 있다.

 

구불구불 뒤틀리며 곡선미를 자랑하는 줄기와 땅을 보며 살짝 굽은 가지들, 그리고 항상 푸르름을 잃지 않는 잎은 800여 년의 세월이 만들어낸 예술품이다. 법당의 처마 밑에서 울리는 풍경소리도 마치 쌍향수를 향하여 예불을 드리고 있는 것 같다.

 

천자암을 나오는데 범종각을 지나던 초등학생이 "종소리 울려라 종소리 울려"하며 캐롤 송을 부르며 지나간다. 이 어린이에게는 산사에서 울리는 범종소리나 교회의 종소리는 둘이 아닌 하나라는 순수한 의식이 있었을 것이다. 순수함은 이렇게 사물을 올바른 눈으로 본다.

 

천자암에서 곧바로 내려가면 순천시 송광면 이읍마을이지만, 나는 산허리길을 돌아 송광사 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비스듬한 산허리 길을 통하여 날등을 몇 개 넘자 천자암산에서 조계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이다. 여기에서 능선길로 조금 내려와 운구재를 만난다. 운구재는 이읍마을에서 송광사로 넘어가는 고개다.

 

운구재에서 송광사로 내려가는 길은 새 소리도 들리지 않을 만큼 조용하다. 고요한 산 속의 분위기를 깨는 것은 오히려 나의 발걸음일 뿐이다. 이런 곳에서는 아무 생각없이 그저 걸을 일이다. 이렇게 내려오다 보니 밭이 나오고 굴목재에서 내려오는 길과 만난다. 계곡의 티없이 맑은 물을 보면서 송광사를 만날 마음의 준비를 한다.

송광사는 뭇 사람을 그냥 경내로 들여보내지 않는다. 그것도 억지로가 아니라 아름다운 풍경으로서 말이다. 경내로 들어서기 위해서는 계류를 건너야 하는데, 거기에 놓인 능허교(凌虛橋)라는 무지개다리와 다리 위에 세워진 우화각(羽化閣)이라는 정자가 바로 그것이다. 맑은 계류와 능허교, 우화각이 만드는 풍경은 우화각 안에 빽빽하게 걸린 옛 시인 묵객들이 읊은 한시(漢詩)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이런 아름다운 풍광을 맛보게 하고서야 송광사는 웅장한 모습을 드러낸다. 대웅전 앞에 선다. 1988년에 새로 지은 108평이나 되는 넓은 크기와 아()자형의 건물이 중심을 잡고 있다. 대웅전은 웅장하되 고풍스러움이 없다. 뒷편의 자연석으로 쌓은 석축과 설법전(說法殿)을 비롯한 주위의 옛 전각들이 고풍스러움이 없는 대웅전을 보완한다.

여느 절과는 달리 송광사에는 탑이 없는 것 또한 특색이다. 관음전 뒤를 돌아 보조국사 부도가 있는 곳으로 올라간다. 이곳에서 송광사의 절집들을 내려다본다. 현재의 송광사도 50여 동의 건물이 있을 정도로 거대한 사찰이지만, 한국전쟁 이전까지는 건물 80여 동을 갖춘 대가람이었다.

 

보조국사 부도 앞에 서서 보조국사의 정혜결사(定慧結社)를 생각한다. 고려 후기 외적으로는 정치와 밀착하여 순수성을 잃어버리고 내적으로는 선()과 교()의 대립이 한참일 때 보조국사를 중심으로 기존 불교계를 반성하고자 펼친 수행운동인 정혜결사. 어쩌면 그런 결사가 현재의 우리 불교계에 필요한지도 모른다. (1998. 12. 25)

 

*산행코스

-. 1코스 : 선암사 주차장(20) 선암사(1시간) 향로암터(30) 장군봉(1시간 20) 연산봉(25) 송광사 굴목재(40) 천자암(30) 운구재(30) 송광사(15) 송광사 주차장 (총소요시간 : 5시간 30)

 

-. 2코스 : 선암사 주차장(20) 선암사(1시간 10) 선암사 굴목재(1시간) 장군봉(40) 멤산골산장(30) 송광사 굴목재(50) 송광사(15) 송광사 주차장 (총소요시간 : 4시간 45)

 

*교통

-. 승용차를 이용하는 경우 선암사는 호남고속도로 승주인터체인지를, 송광 사는 주암인터체인지를 빠져나와 이정표를 따라가면 된다.

-. 대중교통은 선암사의 경우 광주에서 11(07:48) 운행되는 직행버스나 순천행 직행버스를 타고 승주에서 내려 순천발 선암사행 시내버스(3040 분 간격)를 이용한다.

-. 송광사는 광주에서 19회 운행되는 송광사행 직행버스를 이용하거나 역 시 순천행 직행버스를 타고 광천에서 내려 송광사행 시내버스(2030분 간 격)를 이용한다.

-. 타지에서는 순천으로 일단 접근하여 순천역 앞에서 송광사나 선암사 가는 시내버스를 이용하면 된다.

법주사와 속리산(1,58m, 충북 보은)

 

산세가 수려하여 한국 8경중의 하나로 손꼽히는 속리산은 소금강산이라 일컫기도 한다. 관음봉, 문장대, 신선대, 입석대 등 절경이 이어지는 산줄기는 많은 사람들의 발걸음을 재촉한다.

 

이러한 속리산에 법주사가 자리잡아 불심을 지피우고 있다. 법주사에는 국보 제5호 쌍사자석등, 국보 제55호 팔상전 등 문화재가 즐비하며 산내 암자도 많다. 법주사-문장대-신선대-법주사로 이어지는 코스가 가장 일반적이다(5시간 소요).

      

덕숭산(495m, 충청남도 예산)

 

수덕사에서 들려오는 여승의 목탁소리  

평소 같으면 아침 7시가 넘어서야 일어나던 아이들이 6시도 못되어 일어났다. 오늘은 12일로 여행 겸 산행을 하기로 한 날이기 때문이다.

 

"아빠, 오늘은 무슨 산에 가요?"

 

", 덕숭산인데 거기에는 유명한 수덕사라고 하는 절이 있어. 도현이, 절 가봤지?"

 

", 부처님 있고 탑 있는데"

 

평소에도 말이 많은 일곱 살배기 도현이는 짐 챙기느라고 바쁜 나에게 계속 말을 걸어온다.

 

이렇게 우리 가족은 2월의 마지막 날 천안행 고속버스를 타고 여행을 떠난다. 천안을 거쳐 아산에 도착한다. 아산에 도착한 우리 가족은 외암리 민속마을과 온양민속박물관을 구경하고 나서 곧바로 예산 수덕사로 향한다.

 

나는 초행길이면 주로 운전석 맞은편 제일 앞좌석에 앉는다. 이 자리는 차창 너머로 펼쳐지는 풍경을 가장 넓게 볼 수 있어 여행의 즐거움을 배가시키기 때문이다. 오늘도 맨 앞좌석에 앉아서 밖을 내다본다. 낮은 산과 넓게 펼쳐진 들판이 부드럽고 평화롭게 다가온다. 충청권의 최대 평야지대인 내포평야의 모습이다.

 

버스는 서쪽으로 내달려 삽교를 지난다. 그리고 한참 후 비산비야(非山非野)의 낮은 평야지대만 지나다가 갑자기 앞을 가로막고 선 산줄기를 만난다. 가야산과 덕숭산이다. 차는 어느덧 덕산온천을 지나고 있다. 아산에서 수덕사까지 오는데 무려 세 개의 온천을 만난다. 온양온천과 도고온천, 덕산온천이 바로 그것이다.

 

덕숭산 자락에 위치한 덕산온천을 지나서 금방 수덕사 주차장에 도착한다. 일단 오늘 저녁 묵어야 할 숙소부터 찾는다. 물론 숙소는 마음 속으로는 정해 두었다. 국제적 화가인 고암 이응로 화백의 본부인이 운영했었던 수덕여관이다. 수덕사 매표소 바로 앞에 초가로 된 수덕여관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아파트 문화에 익숙해진 우리들에겐 다소 불편한 시설이지만 초가에다 한지로 바른 창살 문과 마루 등 옛 집같은 분위기가 정겹기도 하다.

 

"아주머니, 암각화 어디있어요?"

 

", 여관입구로 가보세요."

 

이렇게 이응로 화백의 암각화부터 찾는다. 수덕여관 입구 한쪽에 자리잡은 너럭바위 옆면에 우리의 문자를 사용하여 음각한 추상화를 바라본다. 이 암각화는 고암이 1968년 소위 '동백림사건'으로 1년여 동안 옥살이를 하고 나와 잠시 이곳에 머무를 때 새긴 그림이란다. 그러나 정작 이응로의 본부인은 다른 여자와 함께 빠리로 가버린 남편으로부터 철저히 버림을 받고 쓸쓸한 생을 살아야 했다.

 

수덕사로 향한다. 수덕사는 백제 때부터 내려오는 유서깊은 고찰. 천 년 가까운 세월 동안 쌓인 연륜 만큼이나 고풍스럽고 고즈넉한 모습의 수덕사를 상상해 본다. 그러나 이러한 나의 상상은 여지없이 빗나간다. 일주문에서 대웅전 앞으로 이어지는 길이 꽤 운치있었다고 하는데 몇 년 전 대대적인 중창불사를 하면서 그 자연스러운 길은 완전히 없어져버리고 삭막한 모습만이 남아있다.

 

사실 우리나라 여기저기에 산재해 있는 고찰들은 불교계의 소유라고만 생각해서는 안된다. 이러한 고찰들은 불교라는 종교행사를 갖는 사당이면서도 우리 민족의 거룩한 문화유산이기 때문이다. 필요에 따라 중창불사(重創佛事)를 하는 것이야 불교계가 해야할 일이겠지만 문화재적 요소들을 훼손시켜서는 안된다. 길 하나를 낼 때에도 수백 년 동안 이어져온 자연스러운 분위기를 충분히 살려내는 안목과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수덕사는 큰 절이다. 통도사, 해인사, 송광사, 백양사와 함께 우리나라 5대 총림의 하나인 덕숭총림을 갖고 있는 절이다. 또한 청도 운문사처럼 비구니(여승)들의 선방이 있어 청순한 이미지를 갖고 있다. 오죽했으면 '수덕사의 여승'이란 대중가요까지 나왔을까.

 

대웅전 앞에 선다.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남향으로 앉아있는 수덕사 대웅전은 고려 충렬왕 34(1308)에 세워진 건물로 안동 봉정사 극락전,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과 함께 우리나라에서는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이다.

 

주위 산자락의 노송들과 경내의 느티나무 고목이 대웅전의 단아한 모습과 함께 훼손된 수덕사 분위기를 그나마 아늑하게 지키고 있다. 대웅전에서 내려다보는 전망이 시원하다. 부석사 무량수전에서 아스라이 이어지는 산줄기들을 내려다보는 맛이 일품이듯이 수덕사 대웅전의 배흘림 기둥에서 내려다보는 들판 또한 그지없이 아름답다. 수덕사는 이러한 전망으로 인하여 호방한 분위기를 형성해 준다. 분지형 지형은 아늑한 분위기를, 지대가 높은 지형은 시원스러운 전망을 끌어안도록 터를 잡은 우리 조상들의 지혜는 한 마디로 감동적이다.

 

대웅전 서쪽 요사채 뒤에는 관음바위라 불리는 커다란 바위가 하나 있는데 여기에는 수덕사라 불리게된 전설이 서려있다. 통일신라시대 수덕사에서는 불사를 하기위해 안간 힘을 쓰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미모가 빼어난 여인이 찾아와서 공양주를 자청하고 나섰다. 그 뒤로 '수덕각시'로 알려진 이 미모의 여인을 보러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러던 중 돈 많은 재상의 아들인 '정혜'라는 청년이 나타나 수덕각시에게 청혼을 하였다. "이 불사가 원만하게 끝나면 청혼을 받아들이겠다"고 약속한 수덕각시의 말에 총각은 많은 재산을 투자하여 불사를 도왔다. 이리하여 10년은 족히 걸릴 불사가 3년만에 끝나게 되었다. 낙성식이 끝나자 마음이 부풀어 있던 청년은 수덕각시에게 같이 떠나자고 하였다.

 

그러나 옷을 갈아입고 오겠다던 수덕각시는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마음이 급한 총각이 방문을 열고 들어가자 수덕각시는 도망을 갔고, 총각이 뛰어가 잡으려는 순간 옆에 있던 바위가 갈라져 수덕각시는 버선 한 짝만 남기고 바위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 뒤로 이 여인의 이름을 따서 수덕사라고 불렀다.

 

관음바위를 돌아 산길로 접어든다. 수덕사에 얽힌 내력을 읽고 있는 사이 아이들과 아내는 먼저 올라가 버렸다. 노송 숲과 계곡의 물소리가 그윽한 분위기를 연출해 낸다. 넓은 길에 돌계단이 설치되어 한 계단 한 계단을 올라간다. 정혜사까지 연결되는 이 돌계단은 무려 1,200개에 이른다. 아름드리 굴참나무 등도 이 산의 무게를 더해 준다.

 

수덕사에서 15분 쯤 올라가니 매끈한 화강암이 수십 미터의 절벽을 이루고 있다. 이 바위에는 金仙洞(금선동)이라는 글씨가 음각되어 있다. 절벽 위에는 정사각형의 초가 한 채가 서 있다. 초가 뒤편도 그 만한 높이의 화강암 벼랑이다. 이 초가에는 소림초당(小林艸堂)이라는 문패가 걸려있다. 위 아래가 모두 절벽이지만 아슬아슬한 느낌은 커녕 편안한 생각이 드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초당 입구에서 먼저 올라온 아이들을 만난다. 오늘따라 산에 오르는 것이 재미있는 모양이다. 다른 때 같았으면 짜증을 내기도 했을 텐데 맨 앞에 서서 씩씩하게 올라간다. 초당에서 10분도 채 못가서 1924년 만공스님이 세웠다는 7m가 넘는 거대한 미륵불을 만난다. 마치 논산 관촉사 미륵불과 비슷한 모양을 한 이 석불은 그 예술적 가치보다 숱한 일화를 남긴 이 시대 최고의 선승, 만공스님이 남긴 자취라는데 의미가 있을 것이다.

 

자유분방하고 어찌보면 기인적 성격을 가진 만공의 수행은 한마디로 무애행(無涯行)이었다. 정해진 법도를 뛰어넘음으로써 오히려 법도를 지키는 경지라고나 할까? 어떠튼 만공의 일화에서는 기상천외한 기질을 서슴없이 엿볼 수 있다.

 

어느날 험한 산 길을 가는데 같이 가던 스님이 힘들어 더 이상 걷지 못하겠다고 했다. 마침 근처에는 화전을 일구고 있던 부부가 있었는데, 만공은 달려가 여자를 덥석 안고 입을 맞춰 버렸다. 놀란 남편은 쇠스랑을 들고 저 중놈들 죽여버린다고 쫓아왔다. 엉겁결에 동행승도 걸음아 날 살려라 달아났다. 숨을 헉헉대며 고갯마루까지 올라온 동행승은 부부가 보이지 않자 만공에게 그게 무슨 짓이냐고 꾸짖었다. 그러자 만공은 "이 사람아, 그게 자네 탓이라고. 그 바람에 고갯마루까지 한숨에 달려왔지 않나. 이젠 괜찮은가?"

 

만공이 있기까지는 그의 스승 경허 대선사가 있었다. 경허는 조선 말기 쇠락해 가는 우리나라 불교의 선풍(仙風)을 크게 일으킨 분이다. 서른 살 때에 길을 가다가 심한 폭풍우를 만난 경허스님은 돌림병이 돈다는 이유로 마을사람들이 문을 열어주지 않아 비를 피하지 못하고 마을 밖 큰 나무 밑에서 밤새 시달려야 했다. 이 과정에서 경허는 생사불이(生死不二)의 이치를 그동안 문자 속에서만 터득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이후 한 손에는 칼을 쥐고 목 밑에는 송곳을 꽂은 널빤지를 설치해 놓고는 졸음을 쫓으면서 정진하여 크게 깨달았다 한다.

 

이후 경허는 수많은 스님들을 길러냈다. 문둥이병 걸린 여자와 몇 달 동안 동침하는가 하면 술에 만취해 법당에 들어오기도 하는 등 경허 역시 거침없는 행동으로 일반 승려들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오늘날 수덕사가 전국 5대 총림의 하나로 불교계의 큰 흐름을 형성하고 있는 것은 일찌기 경허와 만공 같은 고승들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며 미륵탑 옆의 향운각(香雲閣)으로 들어간다. '일반인 출입금지'에도 불구하고 혼자서 조심스럽게 향운각으로 들어간다. 조그마한 향운각 마당에서 수덕사를 내려다 본다. 그리고 일망무제로 펼쳐지는 들판을 바라본다. 주위의 산비탈에는 부드러운 느낌의 화강암과 소나무들이 어울려 멋진 풍경을 만들어 내고 있다. 그윽한 솔향이 구름처럼 다가온다. 멀리 용봉산도 살며시 고개를 내민다.

 

향운각을 나와 한 굽이 돌아 올라가니 만공탑이라고 쓰인 만공스님의 사리탑이 있고, 여기에서 조금 더 올라가니 정혜사다. 능인선원이라고 하는 선방이 있는 정혜사는 일반인이 출입하지 못하도록 문이 굳게 잠겨있다.

 

아이들은 계속 앞장 서 간다. 둘째 도현이가 한 마디 던진다.

 

"아빠. 나 아빠보다 잘 간다?"

 

정혜사를 지나고 나니 흙길이다. 소나무들의 키도 어느새 작아졌다. 소나무 사이 사이에는 진달래가 봄을 준비하고 있다. 정혜사에서 30여분 걸려 정상에 도착한다.

 

무엇보다 전망이 장쾌하다. 동쪽으로는 덕산온천이 자리잡고 있고 계속하여 삽교예산으로 이어지는 내포평야가 끝없이 이어진다. 남쪽으로는 홍성 들판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북서쪽 건너편으로 가야산(678m)이 가깝게 다가선다.

 

대원군의 야심은 가야산에 있는 가야사라는 절을 허물고 아버지인 남연군 묘를 이장하기까지 이른다. 2대에 걸쳐 왕이 나온다는 지관의 말처럼 그의 아들과 손자가 임금(고종과 순종)이 되었으니 지관의 예언은 사실이 되었다. 그러나 순종 임금을 끝으로 조선의 역사는 막을 내리게 되었으니 땅 속에 있던 대원군인들 마음이 편했겠는가?

 

가야산과 덕숭산 사이에는 예산에서 해미읍을 거쳐 서산으로 연결되는 도로가 지나고 있다. 남동쪽으로는 비록 해발 381m에 불과하지만 기암괴석이 어울려 이 고장 사람들이 소금강이라고 부르는 용봉산의 암봉들이 그 자태를 뽐내고 있다.

 

봄이 오는 것을 시샘하는 바람이 꽤 차다. 정상에서 북동쪽 산등성을 타고 계속 가면 둔리마을에 이른다. 이 코스가 덕숭산 산행의 일반적인 코스지만 수덕사에서 1박을 해야하는 우리는 다시 수덕사로 내려갈 수밖에 없다. 내려갈 때는 오던 길을 택하지 않고 남동쪽 능선으로 방향을 잡는다. 올라 올 때의 넓은 길과는 대조적으로 비교적 좁은 길이 이어진다.

 

정상에서 조금 내려오다가 스님 한 분을 만난다.

 

"대머리 아저씨, 대머리 아저씨."

 

철없는 도현이의 장난기 어린 말소리가 스님의 귀에도 들렸음이다.

 

"그래, 내가 대머리 아저씨다."

 

스님은 웃으면서 올라간다.

 

"여보, 스님 얼굴 정말 맑지?"

 

아내가 한 마디 던진다.

 

10여분 능선을 타고 내려오니 약수터가 하나 있고 여기에서 왼쪽으로 난 길로 돌아 들어가니 허술한 슬레이트지붕을 한 암자 하나가 서 있다.

 

'묵언정진 중 면회 사절합니다. 대단히 미안합니다. 전월사 주인 백'이라 쓴 글씨가 대문을 막아선다. 깨끗하고 아기자기한 바위들과 노송들을 등지고 자리잡은 전월사는 절 사()가 아닌 집 사() 자를 쓰고 있다. 사람들의 통행도 별로 없는 곳에 조용하게 자리잡은 이곳 전월사는 세속에 찌는 나 같은 속인(俗人)이 보기에도 묵언정진(黙言精進)하기에 안성맞춤인 것 같다. 건물 옆에 45도 각도로 비스듬하게 누워있는 길쭉한 바위가 마치 부처님의 형상같기도 하고.

 

전월사를 나와 서쪽 산허리길로 비스듬하게 돌아가니 정혜사가 나온다. 정혜사에서 만공탑 미처 못가 견성암 쪽 갈림길 표시가 살짝 보인다. 거의 사람이 다니지 않은 듯 길조차 희미하다. 아내와 아이들은 오던 길로 내려가고 나는 혼자서 견성암 쪽으로 향한다. 정혜사에서 5분쯤 가니 전망 좋은 바위가 나타난다.

 

근처에는 고고하면서도 그지없이 아름다운 소나무가 깨끗한 바위들과 어울려 있고, 여기에 수명을 다한 소나무 고사목이 죽어서도 한 몫을 하고 있다. 양쪽 산줄기의 소나무와 바위가 만들어낸 멋진 풍경도 그대로 시야에 들어온다. 이러한 풍광 속에 절들이 어김없이 자리잡고 있다. 골짜기마다 자리잡고 있는 절들이 품어내는 부처의 향기는 높이로야 5m도 안되는 낮은 산을 1m 이상되는 산으로 그 품격을 놓혀 놓았다.

 

오른쪽 저 아래로 견성암이 앉아있고 견성암에서 정혜사 쪽으로 올라가는 구불구불한 도로도 보인다. 견성암 가는 저 도로와 만나려면 정혜사에서 뻗은 능선을 넘어 산비탈로 내려가야 했는데 능선을 타고 왔으니 길을 잘못 든 것이 확실하다. 그러나 후회는 없다. 덕숭산이 품고 있는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여기에서 감상할 수 있었고 산을 파헤쳐 낸 도로를 걷느니 차라리 이 쪽 길이 낫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가파른 길을 내려가니 수덕사 뒤편 돌계단 길이 나온다. 수덕사에서 오른쪽(서쪽)으로 나 있는 도로를 따라 견성암으로 간다. 엄청나게 큰 건물은 항시 100여명 이상의 비구니들이 수도하는 선방으로 쓰이고 있다. 참선하는 비구니들만 있는 곳에 이방인이 불쑥 들어가는 것도 쑥스러워 얼른 나온다. 다시 일주문으로 내려와 오른쪽으로 향하니 환희대다.

 

이 환희대가 있던 자리에는 원래 견성암이 있었다. 그 견성암의 현판은 비구니 선방인 지금의 견성암으로 옮겨가고 그 자리에는 환희대라는 새로운 당우가 생겼다. 옛 견성암에는 '일엽'이라고 하는 유명한 비구니 스님이 머물렀다.

 

1896년에 태어난 김원주는 이화여전과 일본유학까지 마친 신여성으로 당시 사회의 도덕율에 도전하는 과감한 글과 행동으로 숱한 풍문을 몰고 다녔던 여자였다. 그런 김원주가 38세 때 수덕사의 만공스님을 만나고는 머리를 깎고 일엽이라는 이름으로 견성암에 눌러앉아 버렸다. 젊은 시절 뜨거운 정열을 쏟았던 김원주는 이곳에서 나머지 인생 38년을 모범적인 승려로 살다가 1971년 열반하였다고 한다.

 

 

(1998. 2. 28)

 

*산행코스

 

-1코스 : 수덕사 주차장(10) 수덕사(20) 정혜사(30) 정상(10) 전월사(15) 정혜사(15) 수덕사(10) 수덕사주차장 (총소요시간 : 1시간 50)

 

-2코스 : 둔리(1시간) 정상

 

 

 

 

 

 

오대산(1,563m, 강원도 평창)

 

율동적인 산중풍경이 절 마당으로 다가오고

 

 

강원도는 산() 공화국이다. 강원도에서는 논도 밭도, 시냇물도 마을도 산의 일부가 된다. 그래서 강원도에 들어서면 내 자신이 불쑥불쑥 솟은 산봉우리들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그 중에서도 평창은 "하늘이 낮아 재() 위는 겨우 석 자 높이"라고 할만큼 지대가 높다. 그도 그럴 것이 평창군 전체의 평균고도가 500m가 넘을 정도로 높을뿐더러 영동고속도로도 산골짜기를 건너 높게 놓인 다리가 많아 공중에 떠서 달리는 것 같은 착각이 일어난다.

 

이러한 평창에 오대산이 자리잡음으로써 그 격이 한층 높아졌다. 주봉인 비로봉을 비롯하여 호령봉, 상왕봉, 두로봉, 동대산 등 다섯 개의 봉우리가 편편한 누대를 이루고 있어 오대산이란 이름을 얻었다. 다섯 봉우리에는 중대 사자암, 북대 미륵암, 서대 염불암, 동대 관음암, 남대 지장암 등 다섯 암자가 자리잡고 있다. 그래서 오대산에 들면 부처의 향기가 넘쳐흐른다.

 

오대산 가는 길은 늘 그랬다. 마치 사람이 고향을 찾는 귀향본능이랄까, 새들이 둥지를 찾아가는 귀소본능 같은 것이다. 매표소와 일주문을 지나 오대산의 깊고 포근한 품속으로 빠져든다. 월정사로 인도하는 위풍당당한 전나무 숲길을 바라보며 마음을 추스른다. 사람들은 이 길을 걸으며 세상의 묵은 때를 벗기고 부처를 만날 준비를 한다. 하지만 지금은 이 길을 걸어 월정사로 드는 사람은 거의 없다. 주차장에서 이 전나무 숲길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월정사를 들어갈 수 있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계류에 비췬 단풍은 동화 속의 한 장면

 

월정사는 내려오면서 들리기로 하고, 곧바로 상원사로 향한다. 월정사를 막 지나면서 만나는 찻길 양쪽으로 곧게 솟은 전나무 숲 또한 청신하다. 울창한 나무와 맑은 물이 어울린 오대천을 따라 달리는 버스도 자연 속의 한 부속품이 된다. 깔끔한 바위와 티없이 맑은 물은 그 자체로도 고운데, 고개를 내민 붉은 단풍이 물위에 비취어 어른거리는 모습은 동화 속의 한 장면이다.

 

봄에 움이 터서 여름에 녹음을 이루고 난 나뭇잎이 잎을 떨구기에 앞서 자신이 뽐낼 수 있는 최고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단풍은 기다림의 산물이다. 서두르거나 재촉하지 않고 계절의 순리에 따라 이루어지는 나무들의 순환 사이클은 인간에게 서두르지 말고 순리에 따르라고 한다.

 

주차장에서 상원사로 향한다. 먼저 반기는 것은 관대걸이다. 관대걸이는 조선조 세조가 상원사에 참배하러 올 때 목욕을 하면서 의관을 걸었던 돌로 만든 걸이다. 물푸레나무, 산벚나무, 잣나무 등 갖가지 나무들이 이룬 울창한 숲이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이렇게 아름다운 숲은 가을이 깊어지면서 여러 색상의 단풍으로 새롭게 단장이 되었다. 숲 속을 통과하여 들려오는 목탁소리가 우리의 발길을 자연스럽게 상원사로 인도한다.

 

높은 축대 위에 우뚝 서 있는 상원사에 올라서니 절 마당으로 밀려오는 산중 풍경이 파도를 치듯 율동적이고, 그 분위기는 적막감이 들 정도로 고요하다. 상원사에 들릴 때마다 나는 맨 먼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신라 성덕왕 24(725)에 만들어진 동종(국보 제36)을 찾는다. 동종 앞에 서서 부드럽게 펼쳐지는 건너편 산줄기를 바라본다. 맑고 고운 동종소리는 수많은 세월 동안 저 산줄기를 타고 세상에 전파되었을 것이다.

 

수능시험을 앞둔 학부모들이 법당 안은 물론 절 마당까지 가득 차 있다. 부모들의 간절한 소망을 지혜의 상징인 문수보살에게 빌고 있는 것이다. 상원사 법당 안에는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하게 문수보살상이 모셔져 있다.

 

많은 산중 사찰들이 한국전쟁 당시 불타 없어졌는데, 상원사가 그대로 유지될 수 있었던 데에는 한암 스님의 살신성인적인 태도가 있었다. 상원사를 불사르라는 상관의 명령을 받고 상원사에 나타난 군인들이 절 안에 있는 모든 스님들을 밖으로 나오도록 했다. 다른 스님들은 다 밖으로 나왔는데 한 스님만은 가사 장삼을 차려입고 법당 안에 들어가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이제는 절에 불을 질러도 좋습니다."

 

스님의 목소리는 비장했다. 군인들을 지휘하고 있는 젊은 장교는 당황했고, 그 스님에게 총부리를 겨누면서 법당 밖으로 빨리 나오라고 소리쳤다. 이렇게 법당을 지키던 스님은 당시 74세의 한암 스님이었다. 스님의 태도는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할 수 없다고 생각한 부대장은 부하들에게 요사채의 문짝 두 개와 장작 몇 아름을 마당에 쌓아놓고 불을 지르도록 했다. 연기를 피어오르게 함으로써 상사한테 명령대로 시행했음을 알리려는 것이었다.

 

상원사에서 나와 걷는 길도 절로 가는 길이다. 중대 사자암으로, 적멸보궁으로 이어지는 불가의 길이다. 그런데 중대 사자암은 한창 중창불사 중이다. 7년 전에 왔을 때 보았던, 초라한 건물에서 '가난한' 마음을 가다듬던 그런 모습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

 

불어오는 바람에 낙엽이 우수수 떨어진다. 내 마음이 쓸쓸해진다. 쓸쓸한 마음이야말로 나를 바로 볼 수 있는 마음이 아닌가. 적멸보궁 아래 샘터에서 마시는 물맛이 시원하다. 적멸보궁에 들기 전에 가슴속에 남아 있는 속세의 찌꺼기를 말끔히 씻으라는 뜻인 듯하다.

 

상원사 적멸보궁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우리나라 5대 적멸보궁 중의 하나다. 적멸보궁에 얽힌 설화를 음미한다. 신라 선덕여왕 5(636)에 자장율사가 당나라에 유학하여 태화지(太和地) 문수석상 앞에서 7일 동안 기도를 하니 문수보살이 부처님의 정골사리와 가사, 바루 등을 전해주면서 "당신의 나라 해동에 가면 명주경계(강릉)에 천하명산이 있으니 절을 세우고 사리를 봉안하라."는 부촉을 받는다. 귀국한 자장율사가 명주경계에 이르러 주저하고 있을 때 홀연히 새 한 마리가 나타나 지금의 상원사터로 길을 인도하였다. 이곳에서 7일을 기도하였더니 문수보살이 적멸보궁터에 나타났다. 그래서 지금의 적멸보궁터에 부처님 정골사리를 봉안하게 되었다는 얘기다.

 

 

자궁 자리에 자리잡은 적멸보궁

 

적멸보궁 터는 비로봉에서 굽이쳐 내린 산줄기들이 양쪽으로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고, 그 한 가운데로 뻗어 내린 줄기의 기운이 뭉친 '용이 여의주를 품은 형국의 혈 자리'에 자리잡고 있다. 적멸보궁에 서 있으니 오대산의 모든 정기가 이곳으로 모아지는 것 같다. 그래서 적멸보궁은 생명을 잉태하는 자궁이고, 생명수를 품어내는 옹달샘이다.

 

비로봉으로 오르는 길. 아름드리 나무들이 숭엄하고, 부드러운 산세가 어머니처럼 자애롭다. 양쪽으로 바라보이는 산비탈에는 형형색색으로 물든 단풍이 찬란하고, 전나무 같은 상록수의 녹색과 색상의 대비를 이룬다.

 

"아저씨, 비로봉 얼마나 더 가야 해요?"

 

"아가씨, 너무 힘들어하지 마세요. 거기에 천국이 있으니 힘내세요."

 

"무슨 천국이 있는데요?"

 

"가보면 알아요."

 

가파른 길을 오르며 힘들어하는 아가씨에게 그곳에 천국이 있노라고 일러준다. 나 역시 그 천국을 찾아가는 길이다. 천국으로 가는 길에는 땀방울이 필요하고, 인내가 필요하다. 그 대가를 지불하고서야 이윽고 비로봉에 오른다.

 

무엇보다도 내려 보이는 여성의 자궁 자리에 앉아 있는 적멸보궁이 인상적이다. 온 산을 붉게 물들인 단풍의 물결이 오대산의 멋을 한껏 끌어올리고 있다. 깊고도 깊은 오대산 골짜기와 끝없이 이어지는 첩첩한 산줄기들이 무궁무진한 깊이로 다가온다. 북쪽에서는 불꽃튀는 설악산이 아기자기하고, 남쪽으로는 곡선미를 띤 산줄기가 부드럽다. 첩첩이 겹쳐지는 산줄기에는 운무가 가볍게 덮여 심오한 느낌을 준다. 여기에 동해 바다가 아련하게 다가온다. 첩첩한 산 그리매와 수평선을 이룬 동해 바다. 그 모습이 동해 바다 저 멀리서 그리움을 싣고 와 깊고 깊은 산 속에 차곡차곡 채우는 것 같다. 비로봉이 내게 가져다주는 느낌이 이런 정도이니 천국이 아닐 수 없다.

 

상왕봉 가는 길에는 '살아서 천 년 죽어서 천 년'을 버틴다는 주목이 오대산의 부드러운 산자락을 감싸고 있다. 같은 나무에서도 한쪽은 이미 죽어 고사목 상태로, 다른 한쪽은 짙은 색깔의 나뭇잎을 달고서 조화를 이루고 있다. 곧게 솟은 듯하다가 굽이치고, 굽이치는 듯하다가 곧게 뻗은 모양이 '불균형의 조화'를 이룬다. 신비롭고 오묘하다.

 

상왕봉으로 가는 길은 부드럽고 포근하다. 마치 오솔길을 걷는 것 같다. 상왕봉을 거쳐 북대사로 내려오는 길도 마찬가지다. 오대산은 이런 부드러움 속에 심오한 깊이가 들어있다. 비포장 임도를 따라 내려오는데 온산이 만산홍엽(滿山紅葉)이다.

 

월정사 가는 길. 산 속의 평지에 자리잡은 월정사는 오대산이 품고 있는 큰 사찰이다. 대적광적 앞에 서 있는 국보 제48호인 팔각구층석탑이 경쾌하다. 한국전쟁으로 팔각구층석탑을 제외하고 건물 전체가 소각되어버린 월정사는 이후 새로 지어진 건물이라 고풍스러운 맛이 떨어지나 고요하고 정갈하다.

 

산문을 나서면서 월정사 옆 계류에서 유희하고 있는 낙엽을 바라본다. 자신을 미련 없이 버릴 줄 아는 저 낙엽들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승무를 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2003. 10. 5)

 

산행코스

-. 1코스 : 상원사 주차장(40) 적멸보궁(50) 비로봉(50) 상 왕봉(40) 북대사(1시간) 상원사 주차장(총 소요시간 : 4시간)

-.2코스(종주코스) : 오대산장(1시간 30) 동대산(3시간) 두로봉(1시 간 20) 상왕봉(50) 비로봉(40) 적멸보궁(30) 상원사 주차장(총 소요시간 : 7시간 50)

 

교통

-. 영동고속도로 진부교차로에서 6번 국도를 따라 진고개 쪽으로 2km 정도 달리다가 좌회전하면 오대산국립공원매표소를 거쳐 상원사까지 갈 수 있다.

-. 동서울터미널에서 3040분 간격으로 운행되는 진부 경유 강릉행이나 주 문진행 버스를 이용하여 진부에서 하차한다. 진부에서 상원사행 버스가 110(08:30, 09:30, 10:40, 11:40, 12:40, 14:10, 15:30, 16:30, 18:20, 19:40) 운행 된다.

 

 

 

 

팔공산(1,193m, 대구경북 군위영천)

 

자연과 함께 해온 천년 세월의 문화재들

 

 

자연은 자연 그대로도 아름답지만 그 속에 인공적인 문화가 결합되었을 때 훨씬 아름다워집니다. 문화는 오랜 세월을 거쳐오는 동안 사람에 의해서 창조됩니다. 그런 점에서 자연과 문화의 만남은 자연과 사람의 만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연과 사람이 서로를 길들이며 이어온 시간의 자취가 문화로 승화된 것입니다.

 

경주 남산에 오르면서 산 곳곳에 자리잡고 있는 불상과 절터들을 보며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습니다. 신라사람들이 부처님의 세계를 이루기 위하여 골마다 산자락마다 바위에는 마애불상을 새기고, 빈터에는 절집을 지은 정성이 1천년의 역사를 뛰어넘어 아름다운 문화로 남아있는 것입니다.

 

나는 오늘 팔공산을 오르면서도 경주 남산에서와 똑같이 팔공산에 깃들인 절집과 절집들이 만들어낸 문화를 떠올립니다. 팔공산 안에 현존하는 절과 암자만 해도 무려 55곳에 이르고, 갓바위 불상을 비롯하여 자연석에 새겨진 불상을 여기저기에서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라 때 토함산을 동악, 계룡산을 서악, 지리산을 남악, 태백산을 북악이라 하고 팔공산을 중악이라 하여 이 오악(五嶽)을 숭배하였다는 기록에서도 팔공산의 비중을 알 수 있습니다.

 

아름드리 소나무와 참나무들이 파계사로 들어가는 나그네에게 길 안내를 해줍니다. 하지만 절집 바로 아래까지 난 도로하며 주차장이 눈에 거슬립니다. 자동차가 생활필수품이 되어버린 현대인에게 도로나 주차시설은 어쩔 수 없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적당한 거리에 주차장을 두고 걸으면서 절을 만날 준비를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대구분지 감싸안은 대구의 진산

 

주변 골짜기의 지기(地氣)를 눌러준다는 뜻을 담고 있는 이층 누각 진동루(鎭洞樓)를 돌아 들어가니 정면으로 원통전이, 양옆으로는 설선당과 적묵당이 '?'자형의 공간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웅전이 따로 없는 파계사의 중심 법당으로 원통전이 자리잡고 있음을 한눈에 알 수 있습니다. '진리는 두루 원만하여 모든 것에 통해 있다'는 말을 줄인 원통전의 의미를 되새겨 봅니다. 절 뒤로는 부드러운 능선이 감싸고, 주변의 아름드리 나무들과 어울린 파계사의 절집들에서 세월이 만들어낸 무게를 느낍니다. 나목 너머로는 바깥세상이 내려 보이기도 합니다.

 

파계재로 오르는 울창한 숲길도 원통전에 있는 관음보살처럼 부드럽습니다. 주능선상의 파계재에 올라섭니다. 이 능선을 북쪽으로 넘어가면 제2석굴암이라 불리는 삼존석불에 닿습니다. 1962년에야 세상에 알려진 이 삼존석불(국보 제108)은 마애불천연석굴을 가공한 석굴인공석굴순으로 발전한 우리 나라 석불의 역사를 볼 수 있는 귀중한 문화재입니다.

 

그러니까 팔공산의 삼존석불은 경주의 석굴암에 앞서 조성된 석굴암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수십 미터에 달하는 벼랑의 아랫부분에 있는 천연석굴을 이용하여 본존불과 양쪽의 협시보살 등 삼존불을 모신 이 석굴암은 통일시대 초기인 7세기말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서봉과 동봉 그리고 정상인 비로봉을 바라보며 걷는 발걸음 너머로 멀리 대구분지가 드넓게 펼쳐집니다. 대구의 북쪽에 자리잡은 팔공산은 대구를 지켜주는 진산(鎭山)입니다. 넓은 분지를 이룬 대구시내를 적당한 간격을 두고 팔공산이 감싸고 있는 모습이 그것입니다. 이렇듯 팔공산은 대구시민들에게 어머니 같은 산입니다.

 

파계봉(991m)을 지나 바라보는 서봉쪽 능선이 바위들로 아기자기합니다. 그 동안의 포근한 육산 이미지를 벗고, 암릉길이 시작됩니다. 서봉에서 남쪽으로 뻗어 내린 날등 역시 암릉의 연속입니다. 수억 겁의 세월을 지탱해온 수많은 바위들은 팔공산의 형체를 만들어 부처의 향기가 넘치도록 하였습니다. 그래서 곳곳의 바위에 부처상을 새겨 부처의 세계를 이루려고 하였던 것이 아닐까요?

 

저 아래로는 동화사와 부인사도 내려 보입니다. 한창때는 39개 암자를 거느리고 2천여 명의 승려가 모여 살았으며 전국에서 유일하게 승려들끼리만 거래가 이루어지던 승시장(僧市場)이 서기도 했다는 부인사입니다만 과거의 그 명성은 몇 개의 석물(石物)로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더군다나 부인사가 해인사의 팔만대장경보다 앞선 고려 현종 때 이룩된 초조대장경을 보관했던 유서 깊은 절이라는 사실을 아는 이는 별로 없습니다. 비록 지금에는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더라도 '보이지 않는 것과의 대화'를 나누어 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듯 싶습니다.

 

서봉에 올라섭니다. 최고봉인 비로봉이 제2, 3봉인 동봉과 서봉 가운데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광주의 무등산과 대전 근교의 계룡산이 그렇듯이 팔공산 정상에도 어김없이 군사시설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전라도와 충청도와 경상도의 대표적인 세 도시의 진산에 한결같이 군사시설이 들어서 땅의 기운을 누르고 있으니 이는 분단의 비극인가요? 아니면 정책당국자들의 무지의 소치인가요?

 

서봉에서 바라봅니다. 파계봉에서 서봉, 동봉, 염불봉, 관봉으로 이어지는 주능선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모습이 감동적입니다. 곳곳에 보이는 동화사, 부인사를 비롯한 절들이 팔공산의 너른 품속에서 부처의 향기를 내뿜고 있습니다. 널따란 대구시내와 이를 적시고 흘러가는 금호강을 바라보고 있는 팔공산은 장중합니다. 서봉과 마찬가지로 동봉 또한 아기자기한 암봉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정상인 비로봉 북쪽 능선도 수십 미터에 이르는 절벽들이 이어집니다.

 

곳곳에서 만나는 불상과 절집들

 

동봉으로 향하다가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마애불상인 약사여래좌상을 만나러 잠시 길을 벗어납니다. 이목구비가 뚜렷한 마애불상은 우아한 모습으로 남쪽인 대구시내를 바라보며 마음이 병들어 있는 현대인들의 건강한 삶을 기원하고 있습니다. 동봉 바로 아래에도 자연석을 이용하여 조성한 6m에 이르는 거대한 약사여래입상이 정상인 비로봉과 눈맞춤을 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팔공산 곳곳에는 그 유명한 갓바위 불상을 비롯하여 수많은 석불과 마애불상들이 천 년의 세월을 지켜오고 있습니다. 동봉에서 바라본 세상은 아름답습니다. 여기에는 서로 앞서겠다고 이전투구하는 꼴불견도 없고, 내가 지금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고속 질주하는 인간의 처량한 모습도 없습니다. 혼탁한 거품을 걷어내 버리고 본 세상이니 그 어찌 아름답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왕건은 927년 팔공산 자락에서 벌어진 후백제와의 전투에서 쓰라린 패배를 맛보아야 했습니다. 이 전투에서 왕건은 왕의 옷으로 바꿔 입고 분전하다가 전사한 신숭겸과 김락 등의 도움으로 후백제군의 포위망을 뚫고 간신히 목숨만은 구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왕건이 일방적으로 패배한데는 견훤세력과 밀착되어 있던 백제계 법상종 사찰인 동화사 승려들의 후백제 지원이 큰 몫을 하였습니다. 당시만 해도 동화사는 김제 금산사, 보은 법주사와 함께 진표율사가 창시한 법상종 3대 사찰이었기 때문입니다.

 

동봉 바로 아래에서 따스한 햇살에 졸고 있는 염불암이 소박하게 사는 것이야말로 건강한 삶이라는 점을 일깨워줍니다. 염불봉을 지나 계속되는 암릉을 타고 오다가 신령재 조금 못 미쳐 날등을 따라 하산을 합니다. 뒤돌아보면 마치 병풍을 펼쳐놓은 듯한 병풍바위가 장관을 이루고, 눈앞에는 분재 같은 소나무가 어여쁩니다.

 

비구니 선방이 있는 부도암을 지나 동화사로 들어섭니다. 파계사와 마찬가지로 이층누각인 봉서루가 나그네를 맞이합니다. 봉서루 뒤편으로는 병풍바위가 마치 불상 뒤의 광배처럼 인상적입니다. 봉서루 계단을 올라서니 다포식 팔작지붕을 한 대웅전이 경쾌합니다. 부드러운 능선과 어울린 파계사 원통전은 맞배지붕을, 불꽃같은 바위들과 어울린 동화사 대웅전은 팔작지붕을 하여 주변환경과 조화를 이룬 건축양식이 돋보입니다. 대웅전을 감싸고 있는 푸른 대나무는 대웅전의 이미지를 청아하게 합니다.

 

그러나 사내의 여러 건물들이 신축되고, 건물과 건물을 연결하는 길 또한 넓게 뚫려 고즈넉한 분위기가 사라져버린 점이 아쉽습니다. 다시 봉서루 아래로 내려와 1995년 완공된 약사여래통일대불 앞에 섭니다. 56척에 이르는 거대한 불상이지만 별다른 느낌이 와 닿지 않습니다. 다만, 불상의 이름대로 우리 나라의 통일이 하루라도 빨리 이루어지기를 바랄 뿐입니다.

 

모든 조형물은 크고 거창한 것보다 주변환경과 자연스럽게 어울릴 때 감흥이 있습니다. 동화사를 나서면서 과거의 것에서 손을 적게 대면 댈수록 문화적 가치는 커져 간다는 사실을 음미합니다.

 

(2002. 2. 24)

 

*산행코스

 

-. 1코스(종주) : 파계사집단시설지구(30) 파계사(40) 파계재(50) 부인사갈림길(1시간 30) 서봉(40) 동봉(1시간 20) 신령재(1시간) 능성재(1시간) 갓바위(40) 주차장 (총소요시간 : 8시간 10)

 

-. 2코스 : 갓바위주차장(1시간) 갓바위(1시간) 능성재(1시간) 신령재(1시간 20) 동봉(40) 염불암(1시간) 동화사(10) 동화사집단시설지구(총소요시간 : 6시간 10)

 

-. 3코스 : 파계사집단시설지구(30) 파계사(40) 파계재(50) 부인사갈림길(1시간 30) 서봉(20) 염불봉(20) 염불암(1시간) 동화사(10) 동화사집단시설지구(총소요시간 : 5시간 20)

 

*교통

 

-. 중앙고속도로 칠곡교차로를 빠져 나와 군위 방향으로 북진하다가 908번 지방도로로 방향을 잡는다. 기성리 삼거리에서 팔공산순환도로를 따라 4.9km를 달리면 파계사주차장에 닿는다. 이 도로는 부인사, 동화사, 갓바위주차장으로 연결된다.

 

-. 대구에서 팔공산으로 가는 시내버스가 자주 있다. 파계사는 대구역에서 1시간 간격으로 320번 좌석버스가, 동화사는 서구청과 파티마병원에서 376번 좌석버스가, 갓바위는 동대구역과 파티마병원에서 337번 좌석버스가 운행된다.

 

 

 

 

 

불국사와 토함산(745m, 경북 경주)

 

석굴암과 석가탑, 다보탑 등 신라시대 아름다운 문화유산을 간직하고 있는 불국사는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는 절이다. 불국사와 석굴암을 품고 있는 산이 토함산인데, 새해 첫날 일출이 장관이다. 감포 앞 바다를 붉게 적시며 토함산 위로 떠오르는 태양은 자연에 대한 경외심을 일으킬 정도로 벅찬 감동을 자아낸다.

불국사에서 신라시대의 문화재를 감상하고 석굴암을 거쳐 정상에 올랐다가 추령으로 하산하는데 2시간 20분 정도 걸린다.

 

      

두륜산(703m, 전라남도 해남)

 

작은 것에 만족할 줄 아는 삶

 9월말 설악산에 불붙기 시작한 단풍은 11월 중순이 되어서야 육지의 최남단 전라남도 해남 땅을 물들이고는 나목(裸木)으로 돌아간다. 그러니까 한 달 반 가량을 남쪽으로 달려온 단풍이 마지막 휘날레를 해남, 그것도 두륜산에서 장식하는 것이다.

 더욱이 두륜산의 장엄하리 만치 울창한 숲, 그리고 맑은 계곡과 함께 한 단풍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찬란하다'는 단어가 절로 튀어나온다. 만추의 두륜산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대둔사를 비롯하여 일지암, 북미륵암, 남미륵암, 진불암, 관음암, 청신암 등 골짜기마다 오롯하게 자리잡은 사암(寺庵)들이 부처의 향기를 내뿜어 이곳을 찾는 나그네들의 마음을 더욱 아름답게 정화시킨다.

 

빼어난 풍경을 가진 산이라도 그 속에서 참된 자아를 찾아가는 사람들과 그러한 도량이 함께 했을 때 더욱 아름다워 보인다. 두륜산에 대둔사 대웅보전이나 천불전표충사가 없었다면, 산 중턱에 일지암이라고 하는 초당이 자리잡지 않았다면 우리는 숲이 울창하고 정상 부위에 바위 봉우리를 가진 그런대로 괜찮은 산 정도로 두륜산을 이해했을 것이다.

 

가을이 저물어 가는 길목에 우리는 두륜산을 찾아 남으로 남으로 달려간다. 월출산 자락을 휘돌아 강진 성전을 거쳐 해남으로 향한다. 성전으로 가는 길목의 월출산 동쪽 영암과 강진 경계 지점에는 '남도답사 일번지'라 쓰인 커다란 빗돌이 서있다.

 

강진과 해남이 문화적으로 각광을 받기 시작한 것은 '나의 문화유산답시기'를 쓴 유홍준교수의 덕이 크다. 그래서 강진군에서는 몇 년 전 유교수에게 명예군민증을 수여하기도 했다.

 

'거기에는 뜻있게 살다간 사람들의 살을 베어내는 듯한 아픔과 그 아픔 속에서 키워낸 진주같은 무형의 문화유산이 있고, 저항과 항쟁과 유배의 땅에 서려있는 역사의 체취가 살아 있으며, 이름 없는 도공 이름 없는 농투성이들이 지금도 그렇게 살아가는 꿋꿋함과 애잔함이 동시에 느껴지는 향토의 흙내음이 있으며, 무엇보다도 조국강산의 아름다움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산과 바다와 들판이 있기에 나는 주저없이 '일번지'라는 제목을 내걸고 있는 것이다.'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중에서)

 

 

이러한 강진과 해남에 산이 자리잡고 있으니 월출산이요, 만덕산이고, 두륜산이며, 달마산이다. 결국 산에 의지해서 사람이 살았고, 사람이 살았던 곳에 문화가 꽃피었던 것이다. 그래서 월출산 자락에 도갑사와 무위사월남사지가, 만덕산 자락에는 다산초당과 백련사가 있고, 두륜산에 대둔사와 윤선도 유적이 있으며, 달마산에 미황사가 자리잡아 남도의 유형문화를 꽃피우고 있는 것이다.

 

해남읍을 2km쯤 지나 삼산벌 왼편으로 보이는 산자락에 고산 윤선도의 고택(古宅)인 녹우당이 자리잡고 있다. 녹우당은 해남 윤씨 종가집으로 고산 윤선도와 그의 증손이며 선비화가인 공재 윤두서를 배출한 집으로 전라남도에 남아있는 민가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오래된 집이다.

 

우리 일행을 실은 차는 삼산벌을 뒤에 두고 두륜산 자락으로 빠져 들어간다. 대둔사로 발길을 옮긴다. 매표소에서 대둔사까지의 십 리 가까운 길은 울창한 숲과 맑디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이 어울린 요즘 세상에서는 보기 힘든 그야말로 운치 있는 길이다.

 

구림리(九林里) 장춘동(長春洞)으로 불리는 이곳은 숲이 울창하고 봄이 유난히 길어서 이렇게 불린다. 굴참나무, 소나무, 왕벚꽃나무, 편백나무, 동백나무, 느티나무 등의 노목들이 만든 숲 터널은 실로 장관이다. 여기에 계곡을 붉게 물들인 단풍의 빛깔은 사뭇 현란하다. 이렇게 수려한 길을 천진난만하게 걷고 있는 대학생들의 모습도 예쁘다.

 

결국은 경내버스 주차장 바로 위의 다리에서 계곡을 바라보며 모두들 넋을 잃어버린다. 빨갛게 물든 단풍나무 하나 하나의 모양은 자연이 만든 천혜의 예술품이다. 그리고 명경지수와 어울린 단풍의 모습은 말 그대로 선경이다. 이러한 선경 속에서 노니는 피라미들도 이미 하찮은 물고기가 아니다.

 

이렇게 두륜산의 가을은 고목 숲의 고즈넉함에 단풍의 현란함이 겹쳐 일대 장관을 이루며 저물어가고 있다. 고목에서 우수수 떨어지는 나뭇잎이 휘날려 얼굴에 부딪친다. 뒹구는 낙엽을 바라보며 저무는 가을을 아쉬워한다. 저문다는 것은 우리를 아쉽게 하고 쓸쓸하게 한다. 그렇지만 저무는 것은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기 위한 준비과정이다. 그래서 가을의 마무리는 활기찬 시작을 위한 갈무리다.

 

몇 년 전 대부분의 상가를 지금의 자리로 이전하면서도 유일하게 남은 여관, 유선여관에 잠깐 들린다. 요즈음에는 찾아보기 힘든 전통한옥으로 된 유선여관은 영화 '서편제', '장군의 아들'의 촬영지이기도 하다.

 

유선여관을 지나자 숲은 더욱 고풍스러움을 드러내고 이내 부도밭이 우리를 맞이한다. 서산대사 이후의 13대종사(大宗師)13대강사(大講師)의 납골을 모신 이 부도들이 번뇌와 탐욕에 찌들어사는 나그네의 마음을 정화시켜준다. 주위의 수명을 다해 가는 느티나무 고목도, 단아한 기품을 잃지 않은 아름드리 노송도, 최절정의 아름다움을 뽐내는 단풍나무도 부도와 함께 대둔사를 지켜온 스님들의 영혼을 담고 있는 것 같다.

 

부도밭에서 한 굽이를 돌아가자 두륜산 정상의 바위 봉우리가 위압적으로 다가오고 대둔사의 절집들이 조용히 다가선다. 일제시대 이후 대흥사로 불리다가 원래 이름인 대둔사로 자기 이름을 찾은 것은 1993. 그래서 지금도 대흥사라는 이름으로 더 익숙하게 불리는 절이다.

 

우리는 먼저 대웅전이 있는 북원으로 향한다. 나는 대둔사 대웅전을 들릴 때마다 대웅전 처마 밑에서 동쪽으로 우뚝 솟아있는 가련봉을 쳐다보며 한없는 희열에 빠지곤 한다. 더군다나 오늘같이 온 산이 붉게 물든 날에는 대웅전에서 보는 두륜산의 모습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 없다.

 

대웅보전(大雄寶殿)이라 쓰인 원교 이광사의 글씨를 쳐다보며 추사와 얽힌 이야기를 생각한다. 헌종 6(1840)에 제주도로 귀양가던 길에 초의선사를 만나러 대둔사에 들렀던 추사는 원교 이광사 글씨의 '촌스러움'을 타박하며 대웅보전 현판을 떼어내라고 하였다. 초의는 그 극성에 못이겨 원교 글씨의 현판을 떼어내고 추사의 글씨를 달았다.

 

제주도에서 73개월의 귀양생활 동안 추사는 외로움을 달래며 열심히 글씨를 쓰고 또 써서 소위 추사체를 완성하였다. 귀양살이를 끝내고 대둔사를 들른 추사는 원교의 현판을 다시 걸도록 했다. 외로움과 고통 속에서 오히려 원숙한 인품을 이룩해낸 추사의 모습을 볼 수 있는 대목이다.

 

나말여초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는 대둔사가 대사찰로 변신하기까지는 서산대사의 유언이 있었다. 16051월 어느 날, 묘향산 원적암에서 입적을 앞두고 서산대사는 제자인 사명당과 처영스님에게 자신의 가사와 발우를 해남 두륜산에 두라고 유언하였다. 두 제자가 그 이유를 물은 즉, 두륜산은 "만세토록 허물어지지 않을 땅"이라고 대답했다.

 

대웅전 뒷편의 후박동백나무 숲과 어울린 단풍 빛이 대둔사를 더욱 아름답게 한다. 느티나무 낙엽을 밟으며 천불전으로 들어가 옥돌 부처와 아름다운 창살무늬를 바라본다. 그리고는 표충사로 향한다.

 

지금의 표충사는 절에서는 흔하지 않은 유교 형식의 사당인데, 서산대사를 중심으로 두 제자인 사명당과 처영스님의 화상을 함께 봉안하고 있다. 표충사 편액의 글씨는 정조가 직접 써준 것이다.

 

표충사에서 북암 쪽으로 오른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되는 셈이다. 갖가지 활엽수가 동백나무 등과 어울린 숲 속에서는 이름 모를 새소리가 청량하게 들려온다. 고개를 삐쭉삐쭉 내민 단풍의 모습이 가슴을 풍족하게 해준다. 길은 조금 가다가 일지암 길과 북암 가는 길이 갈린다.

 

올라갈수록 활엽수는 입을 떨구고, 동백과 후박나무가 나목들 속에서 간간이 외로움을 달래준다. 길은 꽤 가파라진다.

 

"아저씨, 내려가시는 길이여요?"

 

길가에 앉아있는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아저씨에게 말을 건넨다.

 

"올라가는데 더 이상 못가겠어요. 내려갈래요."

 

대둔사에 부부가 함께 왔다가 가벼운 마음으로 산을 올라볼까 했던 모양이다. 세상에 땀 흘리지 않고 되는 일이 어디 있겠는가?

 

북암이라고도 불리는 북미륵암은 이렇게 땀을 흘리게 한 후에야 모습을 드러낸다. 남서쪽을 보고 있는 암자 양쪽에는 올망졸망한 커다란 바위가 사천왕상 마냥 절을 지키고 있다. 바위에 붙어서 끈질긴 생명력을 유지해 가고 있는 한 그루의 나무에 단풍든 모습이 군계일학처럼 돋보인다.

 

암자로 올라선다. 최근에 지은 듯한 요사채 한 채가 암자의 전망을 막아버려 대단히 아쉽다. 몇 년 전에 들렀을 때의 감정으로 암자를 오르던 나의 생각이 금방 바뀌어버린다. 여러 가지 이유로 중창불사를 하는 것이야 이해가 되지만 절 특유의 오롯한 분위기를 깨뜨리는 식이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전부 이리 와봐요. 북암에 와서 이것을 보지 않으면 여기까지 올라온 것이 무효야."

 

마애불을 모신 용화전의 문을 연다. 고려 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마애불이 대자대비한 모습으로 중생들을 바라본다. 그러니까 자연석에 조각된 부처를 본존불로 모시고 그 위에 법당을 지은 것이다. 빛 바랜 용화전의 건물 모습에서도 세월의 때를 본다.

 

포도송이처럼 뭉실뭉실 피어있는 수국이 삼층석탑 앞에서 우리를 맞이한다. 건너편의 연화봉에서 혈망봉으로 이어지는 부드러운 능선을 바라본다. 요사채가 없었다면 산줄기뿐만 아니라 그 밑으로 산자락이 시원스럽게 펼쳐지는 모습까지 바라보일 것이다. 동쪽으로 정상인 가련봉이 살짝 고개를 내민 모습은 예사롭지가 않다. 암자 바로 앞 능선의 자연석 위에도 이곳 석탑과 비슷한 모양을 한 삼층석탑이 서서 하계(下界)의 뭍대중을 아우르고 있다.

 

북암을 뒤로 하고 가련봉 산허리를 돌아가는 길은 호젓하다. 암봉으로 이루어진 고계봉이 우뚝 눈앞에 나타난다. 수북히 쌓인 낙엽을 밟으며 걷는다. 가지만 남은 나무 밑에는 산죽들이 푸르름을 간직하고 있다.

 

고계봉과 가련봉 사이 안부인 오심치에 도착한다. 주위에는 억새밭이 아름답게 펼쳐진다. 계절이 지나 윤기를 발하는 출렁이는 억새는 아니지만 솜털처럼 붙어있는 억새 송이가 여러 사람들을 즐겁게 해준다. 흔들릴 지언정 꺾이지 않는 모습 그대로다. 여기에서 길은 넷으로 갈린다. 지금까지 우리가 왔던 길과 노승봉가련봉으로 오르는 길, 고계봉으로 오르는 길, 그리고 오소재로 내려서는 길이 그것이다.

 

억새밭 사이를 지나 노승봉으로 오른다. 오심치(吾心峙)에서 마음을 깨우쳐서 그런지 발걸음도 가볍다. 키를 넘는 산죽 숲을 지나자 노승봉 벼랑 밑 헬기장이다. 암봉 뒤로 돌아 철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니 50명은 충분히 앉을 수 있는 넓은 너럭바위가 정수리를 이루고 있는 노승봉(685m).

 

노승봉은 두륜산 최고의 전망대로 두륜산을 이루고 있는 8개 봉우리 전체가 조망된다. 거친 바위로 이루어진 북쪽의 고계봉(638m)과 주위의 암봉들이 나름대로의 멋을 가져다준다. 남쪽으로는 노승봉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아기자기한 모양의 정상 가련봉(703m)이 양쪽으로 호위병을 세운 채 큰 형님 노릇을 하고 있다. 그리고 구름다리가 있는 두륜봉(630m), 대둔산이라고도 부르는 도솔봉(671m), 연화봉(613m), 혈망봉(379m), 향로봉(469m)이 대둔사를 가운데 두고 타원형을 이루고 있다. 내려다 보이는 대둔사는 북향(北向)이면서도 이러한 지형 때문에 한없이 포근해 보인다. 서산대사가 머나먼 남도의 끝, 대둔사에서 자신의 법맥을 잇고자 한 이유를 알 것도 같다.

 

적당하게 바위가 있고 너덜이 있으며, 울창한 숲이 있는가 하면 은빛 억새가 흔들리는 모습이 조화 그 자체다. 산비탈을 불태우고 있는 단풍은 마치 붉은 양탄자를 깔아 놓은 것 같다. 여기에 남해바다까지 가세한다. 그러나 오늘은 희뿌연 안개로 인하여 푸른 바다가 확연하게 시야에 들어오지는 않는다.

 

노승봉 바위에 앉아 점심을 먹는다. 최고의 경관에 최고의 밥맛이다. 식사를 마치고서 지척에 있는 가련봉으로 향한다. 세 개의 암봉으로 이루어진 가련봉을 넘어가는 길은 바위가 가파라 로프와 철사다리가 놓여있다. 평범한 길보다 이러한 길에서 스릴을 느낀다. 오른쪽 밑에는 천 년의 세월을 살아온 천년수가 옷을 다 벗어 던진 채 우람하게 서 있다. 세월의 연륜은 나무에게도 품격을 부여한다. 천년수 옆에는 석탑 하나가 서 있는데, 이곳이 만일암터다.

 

가파른 길을 내려가니 헬기장이 있는 안부다. 안부에서는 잎 떨어진 억새가 바람에 사각거리고 있다. 만추의 스산함이 가슴을 파고든다. 여기는 대둔사에서 곧바로 올라오는 곳이라 사람들이 많다. 두륜산을 찾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기에서 최고봉인 가련봉 쪽 보다는 구름다리가 있는 두륜봉 코스를 택한다. 1시간 정도만 다리 품을 더 판다면 북암과 오심치, 노승봉, 가련봉 같은 아름다운 경관까지를 볼 수 있을 텐데 하고 아쉬운 마음을 가져본다. 산행코스를 어떻게 잡느냐하는 것은 그래서 중요하다.

 

"구름다리라 해서 월출산 같이 출렁출렁한 철다리가 길게 이어진 준 알았더니 그게 아니구먼."

 

앞서가던 사람이 두륜산의 구름다리를 보며 한 마디 한다. 5m정도 길이의 넓적한 바위가 다리를 이루어 구름다리가 되었다. 결국 이 구름다리는 두륜봉으로 통하는 일주문이다.

 

두륜봉에 올라 넓은 바위에 다리를 쭉 뻗고 앉아 마치 붉은 치마를 입은 여인이 춤추는 것 같은 산자락을 바라보니 세상에 부러울 것이 하나도 없다. , 산행의 즐거움이란 이런 것인가?

 

"어머, 저 바위는 코가 삐쭉 나왔네?"

 

"그 옆 바위 좀 봐. 사이좋게 뽀뽀하고 있네."

 

두륜봉을 떠나 구름다리로 내려가지 않고, 진불암 쪽으로 막 내려서려다 이런 모양의 바위를 만난 것이다. 가파른 바위 길을 내려서니 좁은 길이 이어진다. 이 길은 대둔사에서 구름다리 쪽으로 오르는 고속도로 같이 넓은 길에 비하여 호젓해서 좋다. '좋은 길은 좁을 수록 좋고 나쁜 길은 넓을 수록 좋다'는 말이 실감난다.

 

내려갈 수록 거목의 후박나무와 동백나무가 숲을 이루어 오히려 어두컴컴할 정도다. 이러한 숲 터널을 지나자 짚차가 다닐 수 있을 정도의 넓은 길이 나온다. 마침 스님 한 분이 짚차에서 짐을 내려 지게에 지고 진불암에서 조금 떨어진 상원암으로 향한다.

 

진불암으로 들어선다. 밑에는 암키와를 엎어서 쌓고 맨 위에는 수키와를 얹어놓은 낮은 담장이 암자의 운치를 더한다. 넓적한 돌로 층층이 쌓은 돌탑들이 다른 절의 커다란 석탑을 대신한다. 멀리서는 두륜봉의 바위 봉우리가 내려다보고 있고 절 뒤편에서는 후박나무 등의 상록수가 암자를 안온하게 감싸고 있는 모습이 그렇게 편안할 수 없다. 산 속에서 울어대는 소쩍새의 몸부림도 암자의 한 식구로 다가온다.

 

소쩍새 울음소리를 들으며 우리는 일지암으로 향한다. 대둔사로 곧바로 내려가는 길을 버리고 두륜봉에서 뻗어 내린 날등으로 오른다. 날등에 올라서니 북암으로 가는 길과 일지암으로 내려가는 길이 갈린다. 일지암 가는 능선길은 사람의 통행이 많지 않은 듯 낙엽이 푹신하게 밟힌다.

 

일지암 초막에 막 들어서는데 보살 한 분이 조그마한 광주리에 차 꽃을 따온다. 잎도 지고 꽃도 진 깊은 가을에 피는 송화가루 빛깔의 꽃 수술에 눈처럼 하얀 차 꽃잎이 아닌가?

 

"보살님, 이 차 꽃을 어디에 쓰려고 따오세요?"

 

", 스님께서 오래 출타하셨다가 오늘 돌아오신다고 해서 녹차에 차 꽃을 띄워드리려고요. 그 동안 스님께서 일지암 차를 얼마나 드시고 싶었겠어요."

 

아마 출타하셨던 일지암의 암주 여연스님이 오늘 돌아오실 모양이다. 그래서 보살은 스님에게 좋은 차 한 잔을 공양하려고 온갖 정성을 다 쏟고 있는 것이다.

 

조선말 시(), (), (), ()에 일가를 이루었던 초의선사는 자신의 명성이 세상에 알려지자 지금의 자리에 일지암을 짓고 40년 동안 단 한 번도 암자를 떠나지 않을 정도로 올곧게 살다간 스님이다. 초의는 이곳에서 다산 정약용과 추사 김정희 같은 당대의 대학자문인들과 교류하면서 학문적 깊이를 더해 갔을 뿐더러 소치 허련에게 그림 공부를 시켜 남종화를 꽃피우게 하였다.

 

특히 차()와 선()을 하나의 경지로 이룩해낸 초의는 맥이 끊어져가던 우리 나라의 차()문화를 일으켜 낸 분이다. 그래서 일지암하면 차를 생각한다. 그도 그럴 것이 암자 앞 비탈에는 소담스럽게 핀 하얀 꽃을 달고 있는 차나무가 푸르르고, 곳곳에서 다향(茶香)이 진동을 한다. 초막 뒤 4개의 확돌이 대나무 대롱으로 연결된 '유천(流泉)'은 초의스님이 제일 아끼던 물건이었다 한다. 초의는 이 유천의 물로 차를 끓여 마시면서 선정삼매(禪定三昧)에 빠졌을 것이다.

 

주위를 둘러본 사이 누군가가 보살에게 차 한 잔을 마시고 싶다고 졸라대었던지 일행들은 산죽 지붕에 흙돌집으로 지은 요사채로 안내되고 있다. 보살이 정성스럽게 내준 차 한 잔을 마신다. 여연스님께서 직접 만드신 차라고 하는데 그 맛이 일품이다. 더군다나 아까 스님에게 대접하려고 딴 차 꽃까지 녹차에 띄워 준다. 진한 꽃향기와 함께 마시는 녹차 맛은 차를 통한 선(), 바로 그것이다. 문 밖의 대나무 대롱에서 떨어지는 물소리가 그렇게 청아하게 들릴 수 없다.

 

요사채의 창문 너머로 바라보이는 고계봉과 산비탈의 단풍든 모습은 차라리 선경이다. 이러한 선경 속에 일지암이 둥지를 틀고 있다. 대웅전 앞뜰에서는 서쪽 오도치 너머로 바다까지 보인다고 하니 일지암의 자연조건은 말로 이루다 표현해 낼 수 없다.

 

"어떨 때, 새벽에 일어나 별이 쏟아지고 조각달이 반짝이는 광경을 보고 있노라면 한없는 희열에 빠져요. , 이것이 바로 행복이구나 싶구요. 이곳에 눈이 오면 마치 소복을 입은 여인의 치맛자락이 휘날리는 것 같아요. 그 고요함 속에서 잔잔한 기쁨을 맛보지요. 나무 하나 풀 한 포기에서 전해져 오는 떨림을 느낄 때가 있어요. 그 떨림을 통해서 살아있음을 느끼고 결국은 인간과 자연이 하나라는 느낌을 갖기도 해요."

 

광주에 집이 있고 남편과 대학에 다니는 두 자녀를 둔 이 보살은 8년 전부터 금요일 오후에 이곳에 와서 월요일 아침까지 암자의 살림을 맡아 하다가 속세로 돌아가곤 한단다. 물론 속세에서도 올바른 차문화의 보급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는 얘기도 덧붙인다.

 

"일지암이라는 이름에 여러 가지 의미를 붙이지만 '작은 것에 만족할 줄 아는 삶'이라는 뜻이 제일 마음에 들어요."

 

보살과 작별을 하고 일지암을 나선다. 어느새 날은 어둑어둑해지고 있다. 멀리 대둔사에서 범종 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온다. 어둠이 주는 적막과 산이 가져다주는 고요가 나에게 '잔잔한 기쁨'을 불러일으킨다.

 

(1998. 11. 14)

 

*산행코스

 

-. 1코스 : 주차장(40) 대둔사(40) 북암(50) 가련봉(40) 두륜봉(30) 진불암(15) 일지암(50) 주차장 (총소요시간 : 4시간 25)

 

-. 2코스 : 주차장(40) 대둔사(20) 일지암(40) 만일암터(25) 두륜봉

 

-. 3코스 : 오소재(1시간) 가련봉

 

-. 4코스(종주코스) : 주차장 대둔사 북암 가련봉 두륜봉 연화봉 혈망봉 오도치 주차장 (총소요시간 : 6시간)

 

*교통

 

-. 두륜산을 가려면 일단 해남까지 가야 한다. 광주나 순천에서 해남까지 운행되는 직행버스가 수시로 있다. 해남에서 대둔사까지는 군내버스를 이용한다.

     

낙가산(267m, 인천광역시 강화군 석모도)

 

일망무제로 펼쳐지는 서해바다엔 갈매기 날아드는데

강화도 본섬에 있는 전등사에서 석모도를 가기 위해서 외포리 선착장으로 향한다. 말이 섬이지 달리는 차창 너머로 섬이라는 느낌이 전혀 와닿지 않는다. 넓은 들판과 오밀조밀한 산들이 마치 여느 시골 마을 같은 느낌이다.

 

이곳 강화도 땅은 고려시대 이래로 외세의 침범이 있을 때마다 한반도를 지키는 수호신 역할을 해 왔다. 똑 같은 풍경이지만 이러한 의미를 부여하고 바라보면 또 다른 모습으로 보인다. 산에는 성을 쌓고 해변에는 진지와 돈대를 만들어 외세를 막아내었던 그 얼을 생각한다.

 

외포리에 도착하니 바다 건너 지척으로 석모도가 보인다. 그리고 남북으로 길게 이어지는 산줄기가 한 눈에 들어온다. 오늘 우리가 타야 할 해명산낙가산상봉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다. 석모도의 등뼈를 이루고 있는 이 산줄기를 사이에 두고 마을과 농경지가 오밀조밀하게 달라붙어 있다. 새 개의 산이 섬의 등줄기를 이루고 있어 강화군 삼산면이라는 지명을 얻었다.

 

외포리 선착장에서 석모도로 가는 배를 탄다. 일요일이라 정해진 시간없이 한 대가 출발하면 다음 배가 사람과 차를 싣곤 한다. 그 만큼 많은 사람이 찾는 섬이 석모도다. 그것도 대부분이 차량을 그대로 싣고 바다를 건넌다. 우리를 실은 버스도 역시 배에 그대로 태워져 석모도로 건너간다.

 

나는 버스에서 내려와 갑판 위에 선다. 많은 사람들이 나와 있다. 갯내음이 코 끝을 스친다.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는 것은 나 같은 육지 촌놈에게는 언제나 가슴 설레는 일이다. 우리를 태운 배는 하얀 포말을 만들면서 물살을 가른다. 배 주위로 갈매기가 원을 그리면서 내려왔다 올라갔다 한다. 우리를 환영하는 몸짓일게다.

 

배는 10분만에 석모도 석포리 선착장에 도착한다. 싱겁다. 조금 더 타고 싶은데. 버스는 석포리에서 왼쪽 길로 바다를 끼고 달린다. 10분 정도 달리니 전득이고개다. 우리는 여기에서 산행을 시작한다. 중키 정도의 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다. 갈참나무와 굴참나무 등 참나무류에 서어나무가 섞인 숲이다. 멀리서 뱃고동 소리가 들려오고 갯내음을 품은 바닷 바람이 얼굴을 스친다. 여기에 새들의 노래가 없을 리 없다.

 

전득이고개에서 10분 쯤 올라갔을까? 전망좋은 바위가 나타난다. 동쪽 바다 건너 강화도가 마치 육지처럼 바라보이고, 뒤쪽으로는 서해바다가 평화롭게 다가온다.

 

오르락 내리락하는 능선길이 계속된다. 숲 길이 이어지다가 전망대 바위가 나타나 시원한 전망을 가져다주곤 한다. 양쪽으로 바다를 끼고 걷는 산행이 여간 즐겁지가 않다. 서쪽으로 주문도, 송모도, 포음도 등 섬들의 올망졸망 떠 있는 모습이 아련하고, 그 사이로 바닷 물결이 출렁인다. 이런 모습을 보는 것 만으로도 시원함과 경쾌함이 다가온다.

 

산줄기는 북서쪽으로 계속 이어진다. 경사가 가파른 것도 아니고 험한 바위지대가 있는 것도 아닌 그야말로 부드러운 산이다. 부드러우면서도 아기자기한 산이다. 조그마한 섬 산행지로 비슷한 조건이면서도 경상남도 통영의 사량도 지리망산의 험준한 암릉과는 대조적이다. 활엽수로만 이루어진 숲과 중간중간의 너럭바위는 계속된다.

 

이윽고 해명산이다. 석모도의 산 중에서는 해발 327m로 가장 높은 산이다. 해명산이 가장 높으면서도 낙가산을 석모도의 대표적인 산으로 여기는 데는 낙가산이 보문사라고 하는 유명한 절을 끼고 있기 때문이다. 넓직한 바위가 좋은 전망을 부여해 준다. 이곳에서 차분히 앉아 심호흡을 한다. 북서쪽으로 낙가산과 상봉산으로 길게 이어지는 아기자기한 산줄기가 한 눈에 들어온다.

 

서쪽 바로 밑에는 넓은 염전이 있다. 삼랑염전이다. 염전에 고여있는 바닷물도 햇살을 받아 반짝인다. 요즘은 소금을 생산하는 염전도 예전의 모습이 아니다. 인건비와 시간이 많이 소요되는 천일염은 점차 줄어들고 공장에서 제조한 소금이 판을 치고있는 세상이다. 그것도 외국에서 값싸게 들여와 경쟁력에서 밀려나는 실정이라 오늘날 천일염을 생산하는 사람들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다.

 

한참을 걷다가 뒤돌아보니 부드러운 암반이 산 중턱 곳곳에 자리잡고 있다. 이러한 모습들이 나의 마음을 매혹시킨다. 이름 모를 야생화도 조용히 피어 산을 더욱 풍요롭게 해주고 있다.

 

"얼마나 좋습니까? 도시의 시멘트 문화 속에서 아웅다웅하면서 살다가 이런 아름다운 자연과 함께하니 말이예요."

 

"그래요. 이런 곳에서 살면 온갖 스트레스나 병도 없어질 것 같아요."

 

"현실은 이런 곳에서 계속 살 수 없지만 주말이라도 산을 찾으니 얼마나 좋아요?"

 

"사람 사는 것은 누구나 비슷하지만 산과 함께 하다보면 마음이 넓어져 시시콜콜한 데까지 머리 싸매곤 하지 않지요."

 

같이 걷던 일행과 이런 이야기를 나눈다.

 

방개재를 넘어 봉우리 두 개를 넘으니 또 다시 전망 좋은 넓은 바위가 나타난다. 아마 240봉인 듯싶다. 서쪽으로 바다가 일망무제로 펼쳐진다. 끝없이 펼쳐지는 서해바다를 바라보면서 전망대 바위에 앉는다. 모든 번뇌와 망상이 일시에 사라지는 듯하다. 바다와 같은 넓은 품 안에, 산과 같은 깊은 품 속에 들어 마음이 평화롭고 가슴이 넓어지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한강과 임진강은 황해도 개풍 땅을 사이에 두고 김포반도를 만나 서해로 흘러든다. 내가 지금 밟고 서 있는 석모도 북쪽의 교동도 너머에서는 북녘 땅이 코 앞으로 다가설 것이다. 지척으로 느껴지는 북한 땅을 생각한다. 지척에 두고도 가지도 오지도 못하는 금단의 땅, 북한 땅을 자유스럽게 밟을 수 있는 날은 언제나 올지? 저 북쪽 바다 너머의 북한을 그리며 잠시 아픈 가슴을 어루만진다.

 

낙가산으로 향한다. 지금까지와 비슷한 분위기가 계속된다. 한참을 가다보니 커다란 절이 내려다 보인다. 저기가 바로 그 유명한 보문사다. 왼쪽으로 보문사를 내려다 보며 조금 더 걸어가니 커다란 너럭바위로 된 낙가산 정상이다. 낙가산은 이렇게 너럭바위를 이루며 보문사를 조용히 내려다 보고 있다.

 

그런데 낙가산에 올라서 우리는 낙가산과 눈썹바위를 계속 찾고 있었다. 문제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도에 낙가산 정상 표시가 여기보다 동쪽에 있는 능선상에 표시되었기 때문이다. 알고보니 지금 우리가 서 있는 곳이 낙가산 정상이고, 정상의 너럭바위 서쪽(보문사쪽) 밑에 눈썹바위와 마애불이 있었던 것이다.

 

낙가산에서 보는 서해낙조는 강화 8경의 하나로 석모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으로 손꼽힌다. 고기잡이 나갔던 배가 통통 소리를 내며 돌아오고 간간히 떠 있는 섬과 서해의 물결을 빨갛게 물들이며 지는 해의 모습이 환상적이라는 서해낙조. 그 낙조를 보지못하고 떠나야하는 몸이 아쉽기만 하다.

 

낙가산에서 게속 능선을 타고 가면 상봉산(316m)에 이른다. 상봉산을 다녀오려면 왕복 1시간 정도 소요된다고 하는데 우리는 상봉산까지 가는 것은 생략하기로 한다. 낙가산 너럭바위에서 내려와 보문사 쪽으로 하산한다.

 

다음은 눈썹바위를 찾는 일. 길을 따라 내려가다가 오른쪽으로 산허리를 질러 조금 돌아가니 계단이 보인다. 보문사에서 올라오는 계단이다. 눈썹바위 앞에 선다. 마치 눈썹처럼(모자의 차양처럼) 앞으로 튀어나오고 밑은 수직의 바위 모양을 하고 있어 '눈썹바위'라고 이름지었다.

 

눈썹바위 밑에는 대형 마애불이 조각되어 있다. 미끈한 바위면에 새겨진 높이 9.7m, 3.64m의 관세음보살상이다. 이 마애불은 1928년에 새겨진 것으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보문사의 상징처럼 되어있다. 마애불은 잔잔하다가도 때로는 성난 호랑이처럼 파도를 치는 서해의 바다를 안온하게 받아들이면서 뭍 중생들을 맞아들이고 있다.

 

눈썹바위로 오르는 행열은 끊이지 않고, 마애불 앞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불공을 드리고 있다. 마애불 앞 제단에는 타다 남은 촛불과 공양을 올린 쌀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연일 몰려드는 불공인파로 하여금 이곳 마애불에는 하루에 쌀이 한 가마, 촛 토막이 두 포대가 나올 정도라 한다.

 

보문사는 경상남도 남해 금산의 보리암, 강원도 양양 낙산사와 함께 우리나라 3대 관음도량이다. 다른 관음도량도 마찬가지지만 영험하다고 소문난 이곳 관세음보살상에도 수도자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다. 올라오는 인파가 워낙 많아 오래 있기가 민망할 정도다.

 

마침 비둘기 두 마리가 마애불 앞을 스쳐 눈썹바위 위로 날아 올라간다. 관음보살의 은덕으로 세상의 평화를 이루라는 듯이.

 

"이 앞에 올 때는 413개 같았는데 오늘은 417개네."

 

보문사 뒷편에서 시작되는 계단의 수를 세면서 올라왔던 모양이다. 계단의 수는 413개도 맞고 417개도 맞을 것이다. 가파른 계단을 올라오면서 정신을 집중하여 세어 보았기 때문이다. 가파른 계단을 뻘뻘 땀 흘리며 올라오면서 마음을 가다듬는 일 자체가 바로 관세음보살을 만나는 것이리라.

 

보문사로 내려간다. 신라 선덕여왕 4(635)에 회정선사가 개창한 천 년 고찰이지만 대웅전을 비롯한 당우들이 대부분 근래에 신축되어 전등사와 같이 고풍스러운 맛은 덜하다. 하지만 바다를 끼고 있는 절다운 호방한 분위기가 인상적이다. 그러면서도 웅장함까지 갖추었다.

 

수백 년 묵은 느티나무와 은행나무, 그리고 소나무에 둘러쌓인 절은 천 년 고찰의 연륜을 말해주고 신축 건물에 세월의 무게를 더해준다. 이러한 숲을 너머 절 마당 아래로는 서해바다가 출렁인다. 산 속에 자리잡은 절의 아늑함과 바다를 바라보는 경쾌함이 동시에 다가온다.

 

산과 바다. 이는 인간이 의지하고 사는 두 축이다. 그래서 힘들거나 고통스러울 때 산신(山神)에게 빌거나 해신(海神)에게 빈다. 유난히 바다를 끼고 있는 절에 불교 신도들이 몰려드는 것은 산과 바다, 두 의지처를 같이 가지고 있어 산 속에 자리잡은 절보다는 영험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대웅전 옆에 있는 석실법당으로 발길을 옮긴다. 이 석실은 폭 11.3m에 높이 4m의 자연석굴을 파내 조성한 것으로 22나한상이 모셔져 있다. 이 나한상은 신라 선덕여왕 때 한 어부가 고기를 잡으러가서 그물을 거두어보니 고기는 한 마리도 없고 22기의 나한상만이 딸려올라와 꿈에 나타난 노승의 명을 받아 보문사에 안치했더니 거부가 되었다는 전설이 전한다. 석실 앞에는 8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보문사를 지켜온 향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바위 틈에서 자라고 있는 이 향나무는 절 마당의 느티나무와 절 입구의 은행나무가 하늘 높이 솟아 있는데 비하여 절제된 모습으로 용트림하듯 서 있다.

 

향나무 옆에 있는 맷돌과 확돌도 보문사의 영화를 알게해 준다. 지금이야 맷돌이나 확돌을 사용하지 않지만 직경 69cm의 이 맷돌은 일반 맷돌의 두 배 이상 크기로 그 만큼 스님들이 많이 기거했다는 증거다. 많을 때는 300명 정도의 스님이 머문다고 하니 강화도의 외딴 섬에 자리잡은 절치고는 대단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차량들로 빽빽한 주차장에서 낙가산을 바라본다. 눈썹바위와 마애불은 변함없이 이쪽을 쳐다보고 있다. 보문사에서 들려오는 목탁소리가 가슴을 파고든다. 서해바다에서 출렁이는 바닷물결과 갈매기들의 울음소리도 평화롭다.

 

(1998. 5. 31)

 

*산행코스

 

-. 1코스 : 전득이고개(40) 해명산(40) 방개재(50) 낙가산(10) 눈썹바위(10) 보문사(10) 보문사 주차장 (총소요시간 : 2시간 40)

 

=낙가산에서 상봉산을 다녀오는 경우 왕복 1시간 소요

 

-. 2코스 : 석모리 농지개량조합 상봉산 낙가산 보문사 (총산행시간 : 2시간 10)

      

모악산(793m, 전라북도 김제전주)

 

가없는 평야 거느린 미륵신앙의 본거지

모악산은 언제 보아도 어머니 같이 푸근하다. 거기에다 우주만물을 아우르는 심오한 철학까지 스며있다.

그래서 모악산 가는 길은 편안하면서도 삶의 깊이를 천착할 수 있는 진한 멋이 배어있다.

 

차창 밖에서는 알알이 익어 가는 벼들의 옹골진 모습이 나의 마음을 넉넉하게 해준다. 금산사로 들기 전에 귀신사로 향한다. 청도 마을 입구에서부터 주렁주렁 달린 감나무 길이 나의 마음을 금방 고향 길로 인도한다. 땅바닥에 떨어져 있는 홍시를 주어먹는 맛도 각별하다.

 

마을 언저리의 때묻은 돌계단을 올라서자 소박한 농부 마냥 티없는 모습의 절 집들이 등장한다. 증축된 건물이 있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 고풍스러운 맛이 그대로 묻어 나온다. 절과 주변의 마을이 이웃사촌 마냥 어울려 있는 모습도 너무나 자연스럽다. 이런 절 마당에 서 있는 사람들의 마음도 더없이 편안하다. 대적광전의 고풍스러움 뒤에서는 백제계 삼층석탑과 사자상 등위에 세워진 남근석이 마을을 내려보고 있다.

 

"기름기 번지르르한 다른 절과는 달리 가난하고 예스러운 기운이 풍겨서 좋다."

 

"너무 친근하고, 소박해서 좋다."

 

귀신사 돌계단을 내려오면서 이심전심으로 이런 얘기가 오간다. 금산사, 귀신사 등 여러 절을 품고 있는 모악산은 계룡산과 더불어 우리나라 민간신앙의 본거지로 손꼽힌다. 대표적 민족종교인 증산교의 교주 강증산이 득도하여 증산교를 창시한 곳도 금산사 아래 구리골(銅谷)이다. 동학혁명이 실패한 이후 어디에도 마음을 둘 데가 없었던 민중들에게 증산교는 무서운 속도로 전파되었다.

 

금산사로 들어가는 초입의 금평저수지 근처에 증산법종교 교당이 있고, 교당 안 영대라는 건물에 강증산 부부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여기에서 금산사 쪽으로 약간 올라가 저수지가 끝나는 지점에서 조그마한 다리를 건너 왼쪽 동곡마을 가는 길로 돌아 700m 가량 들어가면 강증산이 도통한 후 9년 동안 머물며 민중을 교화했던 동곡약방이 있다.

 

 

아름다운 세상 꿈꾸는 미륵불

 

금산사 가는 길에는 늙은 벚나무와 수백 년 묵은 물참나무, 팽나무들이 우거져 있어 조용히 걸으면서 미륵불을 만날 마음의 준비를 하도록 한다. 포장된 길옆으로 야생화를 감상하며 걸을 수 있는 오솔길을 만들어놓아 정겹기도 하다.

 

우리는 일주문과 금강문, 천왕문, 보제루를 통과하면서 세속의 때를 한 가닥씩 벗고 나서야 참배공간에 도착한다. 너른 절 마당을 가운데 두고 보제루와 대적광전이 마주보고, 동쪽에는 국보 제62호인 미륵전이, 서쪽에는 대장전 등의 건물이 ?자형 구조를 이루고 있다.

 

제일 먼저 마음이 가는 곳은 미래의 부처인 미륵불을 모신 미륵전이다. 미륵불은 석가가 입적한 지 567천만년 후에 석가가 구제하지 못한 중생을 마저 구제하기 위하여 오는 부처(後世佛)이다. 삼국시대 말기 백제에서 크게 일어나 현세에 행복하지 못해 새 세상을 갈구하는 사람들의 신앙으로서 지금까지도 이어져오는 미륵신앙, 그 미륵신앙의 본거지가 이곳 금산사다.

 

미륵전에 모셔진 미륵불 앞에 선다. 11.89m 높이의 웅장한 미륵입상이 아름다운 세상을 염원하고 있다. 그러나 세상은 힘의 논리가 지배하고, 세상의 모태인 자연은 갈수록 황폐화되어 가는 현실을 보면 정말로 아름다운 세상은 만들어질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생길 때도 많다. 미륵부처는 나에게 그럴수록 너 자신부터라도 마음을 다스리고 소박하게 살아가라는 충고를 하는 것 같다.

 

미륵불 옆으로 계단을 올라가면 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신 석종형 부도와 오층석탑이 절 마당을 내려보고 있다. 절 마당 곳곳에는 석등과 육각다층석탑, 석련대 같은 석물들이 금산사의 아련한 역사를 말해준다.

 

금산사 미륵불을 뒤로하고 모악산 정상을 향하여 본격적인 산행을 시작한다. 모악산 정상의 모습이 눈앞에 들어온다. 길 오른쪽의 과수원에는 빨간 사과가 주렁주렁 열려 있다. 금산사를 출발한지 얼마 안되어 계곡을 옆에 낀 숲길이 이어진다. 밤나무, 도토리나무에서 떨어진 밤과 도토리를 주어먹는 다람쥐의 몸놀림이 귀엽다.

 

심원암으로 가는 길이 갈리는 지점에서 모악정으로 방향을 잡는다. 계곡 옆에 조용하게 자리잡은 모악정은 주위의 숲, 계곡들과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면서 사람들을 부르고 있다. 난간 안쪽의 길다란 나무에 걸터앉으니 골바람이 서늘하게 불어온다. 계곡의 물소리도 그지없이 시원하다. 저 멀리 살포시 내민 푸른 하늘이 호방할 수 없는 계곡의 답답함을 덜어주기에 안성맞춤이다.

 

모악정에서 장근재 쪽으로 가는 길을 버리고 헬기장으로 연결되는 능선 길을 택한다. 모악정 앞의 널따란 길을 벗어나자 곧바로 돌계단과 로프가 설치된 가파른 길이 기다리고 있다. 300m쯤 되는 가파른 길을 벗어나니 경사가 완만해진다. 길옆으로는 소나무, 굴참나무, 도토리나무 등이 우거져 있다.

 

8부 능선 근처에는 그리 크지 않은 바위들이 옹기종기 모여있어 그 동안 보여준 육산의 모습에서 약간의 변화를 준다. 이러한 둥그런 바위지대를 지나니 길가에 평평한 바위가 우리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신선들이 놀았다는 신선대다. 동쪽 대원사 밑에 위치한 선녀폭포에서 보름달이 뜨는 날이면 하늘나라 선녀들이 내려와 목욕을 즐긴 후 수왕사 약수를 마시고 이곳 신선대에서 신선들과 어울려 놀았다는 전설이 서려있는 곳이다.

 

오늘은 우리 일행이 선남과 선녀가 되기로 한다. 선남과 선녀들은 먼저 신선대 위에 편한 자세로 앉는다. 그리고 주위의 산세를 둘러본다. 건너편 위로 정상이 보이고 정상에서 장근재 쪽으로 부드러운 능선이 평화롭게 이어진다. 산비탈에는 울창한 숲이 조성되어 포근함을 더해 준다.

 

 

'산이 아니외다 어머니외다'

 

북쪽 중인리 쪽으로 연결되는 능선에 도착한다. 지척으로 정상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정상에는 송신소가 자리잡고 있어 송신소에서 설치해 놓은 철조망 앞에서 멈출 수밖에 없다.

 

여기에서 가없이 펼쳐지는 망망한 평야, 김만평야를 바라본다. 이곳 사람들에게 김만평야는 '징게맹게 외배미들'이다. '외배미''이 배미 저 배미 할 것 없이 모두 한 배미'로 툭 트였다는 데서 온 말이니 '김제만경의 너른 들판'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넓은 들 가운데 793m의 모악산이 우뚝 솟았으니 큰산일 수밖에. 모악산과 금산사는 원래 큰산을 뜻하는 고어 엄뫼, 큼뫼에서 비롯되었다. 한자가 들어오면서 엄은 어머니()의 뫼라는 뜻의 모악으로, 큼은 금()으로, 뫼는 산()으로 적게 되었다.

 

서쪽으로 김만평야가 지평선을 이루고 있다. 땅과 하늘이 닿아 이룬 지평선은 '징게 맹게'가 아니고서는 찾아보기 힘든 광경이다. 가없는 평야와 어울린 모악산, 이는 우뚝 솟은 산들이 자리잡고 그 사이에 들판이 조성된 우리나라의 일반적인 풍경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정상을 기준으로 서쪽은 김제시가, 북쪽은 전주시, 그리고 동쪽에는 완주군이 자리잡고 있다. 김제에는 김제(金堤)라는 이름부터 시작하여 금구, 금평, 금산, 금천 등 쇠 금()자가 들어간 이름이 유난히 많다. 옛날 백제 때부터 김제 땅에서는 사금이 많이 생산되어 이러한 지명이 붙었다.

 

정상 동쪽으로 조금 돌아가니 여기에서는 전주시내의 아파트들이 한 눈에 들어오고 구이 저수지와 경각산이 바로 앞에 와 있다. 서쪽은 지평선이 바라보인데 비하여 동쪽은 운장산, 연석산, 만덕산 등 완주진안무주장수 쪽의 산들이 첩첩하다. 멀리 덕유산 줄기가 아득하다.

 

동쪽의 첩첩한 산군이 가슴깊이 다가오는 정상 동쪽에는 구이저수지 방면에서 올라오는 사람들이 금산사쪽 등산로에 비하여 훨씬 많다. 전주에서 가깝기 때문이다. 수왕사 입구에서 는 많은 사람들이 쉬고 있다. 절벽 아래에 보금자리처럼 자리잡은 수왕사는 동쪽으로 구이저수지를 비롯하여 첩첩한 산줄기들을 바라볼 수 있는 빼어난 조망처다.

 

수왕사에서 20분쯤 내려오니 대원사 바로 옆 느티나무 숲이 우리를 붙잡는다. 절 마당에 들어서니 모악산 정상이 올려다 보이고 느티나무에서는 몇 마리의 새들이 사이좋게 놀고 있다. 강증산은 갑오년 동학혁명 실패이후 풀벌레만도 못하게 죽임을 당하고 강탈당했던 우리 민중의 후천개벽(後天開闢)을 염원하며 먼저 스스로 크게 깨우치기 위하여 이곳 대원사에서 수도하여 득도하였다. 모악산을 쳐다본다. 어머니처럼 한없이 포근하다. 고은의 시 '모악산'을 음미한다.

 

 

내 고장 모악산은 산이 아니외다

 

어머니외다

 

 

저 혼자 떨쳐 높지 않고

 

험하지 않고

 

먼데 사람들마저

 

어서 오라 어서 오라

 

내 자식으로 품에 안은 어머니외다.

 

 

여기 고스락 정상에 올라

 

거룩한 숨 내쉬며

 

저 아래 바람진 골마다

 

온갖 풀과 나무 어진 짐승들 한 핏줄이외다

 

세세생생

 

함께 살아가는 사람과도 한 핏줄이외다

 

이다지도 이다지도

 

내 고장 모악산은 천년의 사랑이외다.

 

오 내 마음 여기 두어

 

 

산행코스

 

-. 1코스 : 금산사주차장(20) 금산사(40) 모악정(1시간) 정상(20) 수왕사(20) 대원사(30) 구이 상학주차장 (총 소요시간 : 3시간 10)

 

-. 2코스 : 전주 중인동(20) 금선암(1시간 30) 정상

 

교통

 

-. 호남고속도로 금산사나들목에서 712번 지방도로를 따라가면 금산사주차장에 닿는다. 구이방면은 전주나 순창에서 27번 국도를 타고 간다.

 

-. 금산사는 전주(25분 간격)와 김제(30분 간격)에서 시내버스가 자주 있고, 구이면 상학은 전주에서 20분 간격으로 시내버스가 다닌다.

 

 

계룡산(845m, 충청남도 공주논산)

 

죽은 나무 한 그루에도 신()이 내려 있고

 계룡산은 풍수적으로 수도가 자리잡을 수 있는 땅이다. 조선을 개국하면서 태조 이성계가 신도안에 도읍을 정하고

  1년 가까이 공사를 하다가 한양으로 옮김으로써 무산된 곳이 바로 계룡산 자락이다.

 

특히 정감록(鄭鑑錄)에서는 '송도 5백년에 이씨(李氏)가 나라를 빼앗아 한양에 천도했다. 한양은 4백년에 정씨(鄭氏)가 국권을 찬탈하여 계룡산에 도읍한다. 신도(新都)는 산천이 풍부하고 조야(朝野)가 넓고 백성을 다스림에 모두 순하여 8백년 도읍의 땅이다'라고 예언했다. 어떠튼 지금의 신도안에는 비록 수도는 아니지만 육군해군공군본부가 자리잡은 계룡대가 들어서 있다.

 

계룡산은 신령스러운 산이다. '날이 어두울지라도 닭()은 반드시 울고야 말 것이요, 구름이 가린다 할 지라도 용()은 하늘로 올라 갈 것이다. 바다는 태평양이 사해(四海)의 중심이요, 산은 계룡산이 모든 산의 중심이 될 것이다.' 이 말은 풍수지리를 연구했거나 정감록에 심취한 사람들 속에서 입버릇 처럼 되뇌이던 말이다.

 

그래서 그런지 계룡산의 신비스러움과 영()적 오묘함은 익히 알려져 있다. 예전은 말할 것도 없고 지금도 무속인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이 계룡산이다. 또한 신흥종교집단이 가장 많이 자리잡고 있는 곳도 역시 계룡산 자락이다. 주로 신도안을 중심으로 무속인과 신흥종교 집단이 자리잡고 있었으나 계룡대가 들어오면서 밀려나 계룡산 남쪽 줄기인 향적산과 국사봉에 그 일부가 이주하여 이곳이 새로운 무속신앙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동학사, 갑사, 신원사 등 널리 알려진 절을 포함하여 골짜기 골짜기 마다 수 십 개의 암자가 자리잡은 사실로도 계룡산의 영적 기운은 입증된다. 계룡산은 신라 이래로 토함산(東岳)태백산(北岳)지리산(南岳)팔공산(中岳)과 함께 오악(五岳)으로 지정되어 국가에서 직접 제사를 모실 만큼 명산으로 정평이 나 있는 산이다.

 

 

우리 일행을 태운 차는 논산에서 공주로 가는 23번 국도를 따라 달려간다. 정면으로 계룡산이 모습을 드러낸다. 통신탑이 세워진 천황봉과 쌀개봉, 그리고 관음봉과 문필봉, 연천봉이 반원을 그리며 서 있다. 이 능선이 마치 닭의 볏처럼 생겼고, 봉우리들의 굼실거린 모습이 용처럼 생겼다 하여 계룡산(鷄龍山)으로 불린다.

 

신원사 주차장에 도착하니 여기가 국립공원 주차장이냐고 반문 할 정도로 한산하다. 입구에 변변한 상가 하나 없고 포장되지 않은 주차장은 겨우 몇 십 대의 차를 주차할 수 있을 정도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 지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비교적 손 때가 덜 묻은 이런 곳이 좋다.

 

신원사로 가는 길목은 빨갛게 익은 감과 노랗게 물든 은행 잎들이 소박한 풍경을 이루어 정다운 시골 길을 연상케 한다. 느티나무 고목들을 지나 신원사로 발길을 재촉한다. 요즈음에도 이렇게 때 묻지 않은 절이 있었던가 싶을 정도로 조용하고 아늑하다. 대웅전 앞에 깔려있는 잔디와 주위의 포근한 분위기가 더 없이 편안하다. 신원사에는 외국인 선방이 있어 세계 각국의 승려들이 와서 수도하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대웅전 동쪽에는 중악단(中嶽檀)이라 불리는 산신각이 있다. 산신각 치고는 전국 최대 규모인데 법당 만한 본당(本黨)에 요사채까지 딸려 있다. 계룡산 중악단은 묘향산 상악단, 지리산 하악단과 더불어 조선시대 3대 산신단(山神檀)이었다. 지리산의 하악단은 현재 터만 남아있고 묘향산의 상악단은 남북 분단으로 갈 수 없으니 계룡산 신원사의 중악단이 우리가 볼 수 있는 유일한 산신단인 셈이다. 단청되지 않은 중악단의 옛스런 모습이 산신각의 의미를 더욱 실감나게 전달해 주는 듯하다.

 

신원사를 벗어나 넓은 길을 따라 연천봉으로 향한다. 신원사에서 조금 올라가 소림원이 있고, 여기에서 몇 발자국 옮기니 길가에 돌탑 2기가 서 있다. 무속인들이 기도하는 곳임을 금방 알 수 있다.

 

계곡 가에 있는 금용암을 지나자 길은 좁아진다. 호젓한 산 길이 계속 이어진다. 수명을 다하여 땅에 떨어진 낙엽들을 밟으며 걷는다. 낙엽지는 가을은 사람의 마음을 쓸쓸하게 한다. 쓸쓸한 마음을 새 소리가 달래준다. 바람이 불 때마다 낙엽이 춤을 춘다. 바로 추풍낙엽(秋風落葉)이다. 신의대 숲이 청신하게 다가오면서 곧 암자가 나타난다. 고왕암이다.

 

암자에서 바라보는 전망이 일품이다. 절 앞의 느티나무 너머로 펼쳐지는 상월들판과 양화저수지가 평화롭다. 북쪽으로 멀리 연천봉이 암자를 내려다보고 있다. 이렇게 고왕암은 연천봉의 정기를 받고 있다. 암자 옆 바위에 우뚝 서 있는 소나무도 인상적이고.

 

비구니 스님 한 분과 절에 대한 내력이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고왕암(古王庵)은 그 이름에서 풍기 듯 태조 이성계가 도읍지를 정하려고 계룡산에 왔다가 머물렀던 절이다. 스님은 우리 일행에게 녹차를 대접한다. 산 속 암자에서 스님이 대접하는 녹차 한 잔의 정성이 그지없이 그윽하다.

 

스님은 대학에서 간호학을 전공하였다가 출가한 특이한 이력을 가지고 있었다. "출가하면 공부를 덜 할 줄 알았더니 오히려 공부를 훨씬 더 많이 하게 되더라."는 이야기며, "기독교나 불교나 결국은 같은 것"이라는 스님의 이야기들이 녹차 향기 속으로 스며든다.

 

필요할 때 머물렀다가 바랑 하나 짊어지고 또 다른 수행처로 떠나는 것이 스님들의 생활일 테지만 스님은 부자다. 평화로운 마음이 가슴 속에 가득하고 맑고 포근한 산천과 함께 하니 그 이상 부자가 어디 있겠는가? 비구니 스님이 따라 준 녹 차 한 잔과 여러 이야기를 가슴에 담고 나오는데 스님은 닫힌 사립문까지 손수 열어 주며 잘 가라고 배웅까지 해준다.

 

올 가을은 가뭄이 극심하다. 이로 인하여 수분이 부족한 나무들은 마지막 단풍을 제대로 물들이지도 못하고 시들어 버렸다. 10월 중순 이전에 물든 설악산의 단풍까지는 그래도 괜찮았는데 이후로 계속 비가 내리지 않아 중부 이남 지역의 단풍은 마음껏 채색해 보지도 못하고 시들어 버린 것이다. 이런 현상이 계룡산에도 예외는 아니어서 아쉬움이 남는다.

 

연천봉 고개를 거쳐 연천봉에 다다른다. 연천봉(739m)은 천황봉 주맥이 쌀개봉을 지나 관음봉에서 문필봉으로 이어지다가 마지막으로 우뚝 솟아 있는 봉우리다. 연천봉에 오르는 순간 범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진다. 이를 뒷받침하듯 연천봉 바위 부근에는 촛불을 켤 수 있는 시설물과 향로가 놓여 있다. 바위 밑에는 촛불을 켜고 불이 꺼지지 않도록 수키와로 막아 놓았다.

 

계룡산의 여러 봉우리 중에서 연천봉 처럼 무속인이 많이 찾는 곳도 없다. 대전에서 왔다는 아저씨 한 분의 설명에 따르면 "연천봉은 기도발이 제일 잘 받는 곳이다"고 한다. 그래서 연천봉은 평범한 하나의 봉우리가 아니라 계룡산의 정기를 한 몸에 안고 있는 신비스러운 영봉(靈峰)이다.

 

이러한 영봉에 조망이 없을 리 없다. 북동쪽으로 문필봉관음봉이, 그리고 관음봉에서 남동쪽으로 쌀개봉, 천황봉이 닭 벼슬 모양으로 암봉을 이루고 서 있다. 천황봉에서 시야를 조금 더 남쪽으로 돌리니 산등성 너머로 계룡대가 모습을 드러낸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의 도읍지로 삼으려 했던 땅, 신도안이 바로 저기다.

 

연천봉에서 관음봉을 바라볼 때 왼쪽에 갑사계곡이, 오른쪽에 신원사계곡이 펼쳐지고 갑사 아래에 계룡저수지가, 신원사 아래에 양화저수지가 자리잡아 주위 들판을 적셔줄 물을 공급해 준다. 부여 땅을 적시며 굽이굽이 흘러가는 백마강의 물결이 저 멀리서 금빛으로 반짝인다. 백마강을 붉게 물들이며 넘어가는 낙조가 계룡 팔경 중에서 제3경으로 꼽히고 있다.

 

계룡산 최고봉인 천황봉에 통신시설이 되어 있는 모습이 안타깝다. 이로 인하여 천황봉은 일반인 출입금지 구역이 돼 버렸으니 신령스러운 계룡산의 정기를 상당 부분 빼앗겨 버린 셈이다.

 

연천봉 바로 아래에 자리잡은 등운암으로 내려간다. 앞으로는 전망이 탁 트이고 뒤로는 봉우리가 받쳐주어 명당을 이루고 있다. 겹겹으로 늘어 선 산줄기와 크고 작은 봉우리들이 구름 위에 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절 이름도 구름 위에 떠 있는 암자라는 뜻으로 등운암(騰雲庵)인가? 등운암은 원래 연천사라고 불렸는데 조선조에는 압정사라고 했다. 정감록에서 말한 정()씨 성을 가진 사람이 왕이 된다는 사실을 막기 위하여 정씨(鄭氏)의 왕위를 누른다는 뜻으로 압정사(壓鄭寺)라 불렀다.

 

등운암을 이루고 있는 것은 양철 지붕을 한 건물 한 채 만이 아니다. 암자 뒤의 연천봉을 비롯하여 겹겹이 늘어선 산줄기도, 산줄기에 걸쳐 있는 구름 한 점도 다 암자다. 물론 암자 앞에서 푸릇 푸릇 자라고 있는 배추 포기들도 모두 부처일 것이고.

 

연천봉 고개를 지나 가파른 길을 오르니 문필봉(756m)이다. 아주머니 한 분이 돌로 쌓아 놓은 제단 앞에서 기도하고 있다. 제단과 기도하는 아주머니를 향 연기가 감싸고 돈다. 어쩌면 산의 정기는 산 자체 보다는 산을 바라보며 정성을 쏟는 사람들의 간절함에서 나오는 것 일지도 모른다.

 

지척으로 보이는 관음봉 전망대를 바라보며 걷는다. 왼쪽의 갑사계곡과 오른쪽의 천황봉과 신원사계곡이 시원스러운 전망으로 다가온다. 산자락에는 만족스럽지는 못하지만 아직 낙엽지지 않은 잎들이 붉은 색을 띠며 가을 산의 모양새를 갖추고 있다. 암봉 2개를 넘고 나서 밧줄을 타고 올라서니 관음봉(816m)이다. 천황봉에서 뻗어 나온 산줄기가 여기에서 남서쪽으로 문필봉과 연천봉을, 북쪽으로 삼불봉과 수정봉을 일구어 낸다.

 

관음봉에 오르니 삼불봉으로 연결되는 자연성릉과 그 아래로 동학사 계곡까지 모습을 드러낸다. 이렇게 계룡산 주요 봉우리와 능선, 계곡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곳이 관음봉이다. 뿐만 아니라 대전의 아파트들도 시야에 들어온다. 따라서 관음봉은 계룡산 최고의 전망대인 셈이다. 관음봉에는 6각 지붕의 정자가 있어 그 이름을 관음정이라 부른다. 여기에서 한가롭게 떠 다니는 구름을 보고 있노라면 우리 인생을 새롭게 느낄 수 있다고 하여 관음봉 한운(閑雲)을 계룡산 제4경으로 치고 있다.

 

관음봉에서 가파른 너덜 길로 내려서면 은선폭포를 거쳐 동학사로 내려가는 길이고, 철 계단을 따라 능선 길을 곧장 가면 자연성릉을 거쳐 삼불봉으로 이어진다. 오른쪽으로 비구니 강원(講院)이 있는 동학사가, 왼쪽으로는 아늑한 갑사가 각기 다른 분위기로 나의 시선을 사로 잡는다. 옛부터 동학사 쪽은 신록이 좋아 생동감 넘치는 분위기가, 갑사 쪽은 아늑하고 소박하여 편암함을 준다고 했다. 그래서 '봄 동학, 가을 갑사'라 불린다.

 

지금까지와 같이 자연성릉에서도 암릉은 계속된다. 그리고 갈수록 빼어난 경관이 펼쳐진다. 연천봉에서 관음봉까지의 봉우리들이 무뚝뚝하고 무딘 모습이었다면 자연성릉의 바위들은 나름대로의 암릉미를 갖추고 있다. 바위 봉우리에는 소나무들이 어울려 품격을 높혀준다. 소나무 위에서는 까악까악 소리를 내며 까마귀들이 날아들고 있다. 낮에 우는 까마귀는 길조(吉鳥)라 했던가? 오늘은 좋은 일이 많을 모양이다.

 

삼불봉 직전 삼거리에서 일행들은 금잔디고개로 바로 내려가고, 나는 삼불봉으로 가는 가파른 길을 올라선다. 삼불봉(775m)은 세 분의 부처님을 상징하는 세 개의 봉우리를 말한다. 세 개의 봉우리는 조물주가 만들었을 것이고, 그 의미는 인간이 부여했을 것이다. 수정봉이 그렇고, 관음봉과 연천봉이 그렇듯이 계룡산은 자비가 넘치고 신령스러운 기운이 감도는 산이라는 것을 봉우리 이름들에서도 알 수 있다.

 

삼불봉에서 내려서니 그윽한 오솔길 같은 분위기로 금방 바뀌고 곧 바로 오뉘탑에서 오는 길과 만나 금잔디 고개로 이어진다. 금잔디 고개에 도착하니 일행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다. 금잔디 고개는 연천봉 아래 등운암과 함께 너그러운 풀밭을 이루어 바위 산인 계룡산에 부드러움을 더해 주고 있는 곳이다. 갑사로 내려가는 계곡의 윤곽이 보이고 계룡저수지도 한 눈에 들어온다.

 

금잔디고개는 동학사에서 오뉘탑을 거쳐 갑사로 넘거나 그 반대로 산행하는 사람들로 꽤 붐비는 모습이다. 갑사로 내려가는 길이 그윽하다. 갖가지 종류의 나무들과 조용한 숲, 그 사이를 지나는 길이 내 마음까지도 포근하게 한다. 다만 단풍나무가 산재되어 있으면서도 잎들이 시들어 아름다운 단풍을 감상할 수 없다는 점이 아쉬울 뿐이다.

 

금잔디 고개에서 30분 정도 내려오니 천진보탑(天眞寶塔)이 있는 신흥암이다. 신흥암으로 들어가 왼쪽 천진보궁으로 올라간다. 법당 안에는 부처가 없다. 천진보궁 뒤에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안치해 놓은 천진보탑이 있기 때문이다. 이 탑은 인간이 만든 인조물이 아니고 자연(自然) 석탑이다. 천진보탑은 그 앞에서 진실한 마음을 가지고 기도하면 빛을 발하는 방광(放光) 현상이 나타난다고 하여 유명하다.

 

이 사실은 6.25 전쟁이 끝난 후 계룡산을 찾은 한 미군 병사가 천진보탑이 방광하는 모습을 최초로 카메라에 담아 세상에 전하므로써 알려지게 되었다. 수정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외호하고 주위의 여러 바위들과 고고함을 드러내는 소나무들이 둘러 싼 천하 명당에 암자는 자리잡고 있다.

 

암자를 나와 계곡길을 계속 걷는다. 바짝 말라 버린 계곡에는 낙엽만이 뒹굴고 있다. 포근한 분위기 임에도 불구하고 시든 단풍과 떨어진 낙엽, 말라 버린 계곡이 나의 마음을 허전하게 한다. 용문폭포 역시 흐르는 물이 없어 폭포의 기능을 못하고 있다. 용문폭포를 지나면서 부터 계곡에서 물 흐르는 소리가 조금씩 들리기 시작한다. 시들지 않은 단풍도 가끔씩 얼굴을 내민다. 갑사 계곡의 맑은 물과 빨갛고 노란 단풍이 어울려 그런대로 갑사의 가을 풍경을 드러내 주고 있다.

 

갑사를 들렀다가 주차장 쪽으로 향한다. '갑사에서 내려가는 길'이 운치있다. 느티나무, 갈참나무, 소나무, 비목나무 등의 고목(古木)이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고사목(枯死木) 한 그루가 작별 인사를 한다. 그 고사목에 새끼가 둘러처져 있다. '귀목대신(鬼木大神)'이라는 팻말과 함께. 죽은 나무 한 그루에도 신이 내려 있음이다.

 

(1997. 10. 25)

 

* 산행코스

 

-. 1코스 : 신원사(40) 고왕암(1시간 20) 연천봉(30) 관음봉(1시간) 삼불봉(20) 금잔디 고개(30) 신흥암(20) 갑사 (총 소요시간 : 4시간 40)

 

-. 2코스 : 동학사(40) 오뉘탑(30) 금잔디 고개(50) 갑사 (총 소요시간 : 2시간)

 

-. 3코스 : 동학사(40) 은선폭포(40) 관음봉

 

     

지리산 종석대(1,356m, 전라남도 구례)

 

어머니의 품속에서 신앙을 만나다

지리산은 이념과 종교와 빈부의 차이를 뛰어넘어 모든 사람을 포용하고, 인간의 잘잘못까지도 용서하는 산입니다. 마치 자식의 흠까지도 이해하고 감싸주는 어머니 같다고나 할까요. 그래서 지리산을 오르는 것은 어머니의 포근한 가슴속을 파고드는 모친회귀(母親回歸)입니다.

 

또한 지리산은 종교적인 신비로움과 신성함 그리고 영적인 기운이 넘치는 산입니다. 신라 때부터 우리 나라 5악 가운데 하나인 남악(南嶽)으로 불려져 국가에서 제사를 지내 왔으며, 우리 조상들의 가슴 깊이 남아있는 무속신앙의 발원지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먼 옛날 천신(天神)의 딸 성모마고가 지리산에 하강하여 딸 여덟 명을 낳아 모두 무당으로 길러 팔도에 보내 민속을 다스리게 했다는 무조설(巫祖設)이 그것입니다. 영신봉 아래의 영신대나 백무동의 굴바위당, 칠선계곡 등에서 기도하거나 치성을 드리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은 것도 신앙적인 산으로서의 지리산의 기운 때문입니다.

 

구례군 산동면은 구례에서도 산골마을의 대명사로 여겨지던 곳이었습니다. 이런 산동면에 지리산온천이 개발되면서 하루아침에 분위기가 확 바뀌어버렸습니다. 지리산온천이 자리잡은 산동면에서 접근할 수 있는 등산로는 만복대와 성삼재입니다. 물론 성삼재는 도로가 뚫려 다리품을 팔지 않고도 차량을 통하여 올라갈 수도 있지만 산동쪽에서 오르는 옛길을 밟는 것이 의미가 있습니다.

 

지리산온천을 지나 당동마을에 도착합니다. 소박한 산골마을이지만 지리산온천의 영향으로 곳곳에 식당과 민박집 간판이 걸려 있습니다. 마을 주변에는 산수유나무가 많아 산수유의 고장이라는 말이 실감납니다.

 

 

눈 덮인 지리산의 장엄함 앞에서

 

성삼재를 바라보며 산행을 시작합니다. 지리산 어느 지도에도 등산로 표시가 되어있지 않지만 당동마을에서 계곡을 따라 성삼재로 오르는 길이 확실하게 나 있습니다. 지리산 계곡치고는 규모가 작은 당골을 따라 오릅니다. 암갈색 바위에 앉아있는 하얀 눈과 바위에 붙어있는 고드름이 청아한 소리를 내며 흐르는 물소리와 함께 겨울 계곡의 멋을 부여해줍니다.

 

설중매라더니 계곡가의 버들강아지가 하얀 눈 속에서 피어 봄을 부르고 있습니다. 동쪽 능선 너머에서 비취는 햇살이 눈부시고, 봄을 기다리는 나무들의 간절함이 햇살과 만나 생명력으로 불타오릅니다. 하기야 입춘(立春)이 내일이니 봄을 기다리는 버들강아지나 여러 활엽수들의 바램이 헛된 것은 아닐 것입니다.

 

계곡과 헤어져 능선을 오르는데 산죽의 푸름과 하얀 눈이 대비를 이룹니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나무의 격()도 높아집니다. 하늘높이 솟은 적송이며 굴참나무들이 숭엄하기까지 합니다. 가슴속에 안겨오는 따스한 겨울햇살은 아파트 거실에서 따스하게 스며드는 햇살을 즐기며 가야금산조 가락과 함께 마시는 녹차 한 잔의 맛입니다.

 

땅에는 눈이 쌓여있고 나목에는 눈이 없어 마치 흰색 바탕에 그려진 수묵화 같습니다. 이곳은 비교적 사람의 통행이 적은 곳이라 호젓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오른쪽으로는 시암재가 바라보이고 왼쪽으로는 고리봉(1,248m)이 바라보입니다. 응달진 곳에는 무릎 있는 곳까지 눈이 빠지는 곳도 있습니다.

 

고리봉과 성삼재 사이의 주능선에 올라서니 눈 덮인 지리산이 장엄하게 펼쳐집니다. 거기다가 눈 덮인 지리산은 밝은 햇살에 눈부시기까지 합니다. 여느 산도 흉내 낼 수 없는 큰 덩치를 가진 지리산의 웅장함에 백발의 눈이 반짝이니 이는 신비로움입니다.

 

40대 여인의 젖가슴 같은 반야봉, 지리산 산신인 노고(老姑)에게 제사를 지내는 신단이 있는 노고단과 종 모양의 바위로 이루어진 종석대 그리고 가파른 경사로 우뚝 선 고리봉 등이 그것입니다. 반야봉에서 뱀사골 입구까지 뻗어나가는 심마니능선과 그 아래로 달궁계곡도 시야에 들어옵니다. 우리가 출발했던 지리산온천과 산 속의 분지를 이룬 산동면의 들판도 겨울바람을 맞고 있습니다.

 

성삼재와 코재를 거쳐 종석대에 올라섭니다. 눈앞으로 골 깊은 화엄사계곡이 그윽하고, 유유히 흘러가는 섬진강이 평화롭습니다. 노고단이 이웃집 형님 마냥 옆에서 지켜보고 있고, 북쪽에서는 고리봉 너머로 만복대(1,433m)가 흰 고깔을 쓰고 앉아 있습니다. 화엄사계곡 너머로는 형제봉과 왕시리봉이 고요하게 겨울을 나고 있습니다.

 

잠시 종석대를 들렀다가 코재로 내려옵니다. 계속되는 돌계단이 따분함을 주기도 합니다. 성삼재까지 도로가 뚫리기 전에는 지리산 종주시 오르곤 했던 길입니다. 너덜을 이룰 정도로 많은 돌 사이에서도 아름드리 나무들이 울창하게 자리잡고 있습니다. 인공적인 소리라고는 전혀 들리지 않은 골짜기에서는 새소리와 물소리가 화음을 맞추고 있습니다. 참샘터에서 마시는 약수 한 모금이 차고 맑습니다.

 

 

화엄사 사사자석탑에 서면 아름다운 마음이

 

화엄사계곡을 따라 내려가다가 연기암(緣起庵)에 들어섭니다. 차일봉 능선이 감싸고 있는 암자 주변을 아름드리 적송이 둘러싸 운치가 있습니다. 하지만 대대적인 중창불사로 웬만한 사찰보다도 규모가 커져버린 연기암에서는 깊은 산 속의 옹달샘 같은 청정함을 느낄 수가 없어 아쉽습니다. 이러한 아쉬움을 유유하게 흘러가는 섬진강이 달래줍니다. 섬진강을 내려보며 앉아 있는 암자에서는 창 소리가 불경을 대신해 주고 있습니다. 창을 한 곡조 뽑고 난 여고생에게 말을 겁니다.

 

"남원국악고등학교 학생이어요. 선생님을 따라서 왔어요. 선생님께서는 방에서 스님과 얘기하고 계시구요."

 

깔끔한 바위와 제법 규모가 커진 화엄사계곡을 따라 내려와 화엄사를 만납니다. 화엄사는 초등학교 때부터 시작하여 수십 번을 다녀간 절이지만 근처에 오면 꼭 들렀다 갈 정도로 매력 있는 절입니다. 일주문과 금강문, 천왕문, 보제루를 지나 각황전과 대웅전 영역에 들어서면 장엄하고 위풍당당한 화엄사의 모습이 드러납니다. 잠시 동,서오층석탑을 둘러보고 발길은 높은 석축 위에 있는 대웅전으로 향합니다. 대웅전은 화엄사의 중심건물이면서도 바로 옆의 각황전(국보 제67)의 위세 때문에 관람객들로 하여금 오래 머물 수 없도록 합니다.

 

우리 나라 불전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각황전은 거대하면서도 엄격한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위엄과 기품이 넘칩니다. 각황전 뒤편 소나무의 화려함까지 한눈에 들어온 순간 잔잔한 감동이 가슴 벅차게 합니다. 훌륭한 건축물이 아름다운 자연과 만나 이룬 조화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물론 각황전 앞에 서 있는 석등(국보 제12)의 섬세하면서도 위엄 있는 모습은 화엄사의 예술미를 한 단계 끌어올려 줍니다. 이 석등 앞에도 우리 나라는 물론 세계에서도 가장 큰 석등이라는 수식어가 붙습니다. 각황전과 석등을 바라보며 넋을 잃을 때쯤 발길은 나도 모르게 각황전 뒤편의 돌계단으로 향합니다.

 

울창한 동백 숲이 호젓함을 자아내는 계단을 올라서면 멋진 자태를 하고 있는 반송이 나그네를 맞이합니다. 아름다운 반송과 벗하며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사사자석탑(국보 제35)은 귀퉁이에 네 마리의 사자를, 가운데에 합장한 스님상을 세워 기단을 만들고, 그 위에 삼층석탑을 세웠습니다. 이처럼 화엄사의 사사자석탑은 경주 불국사 다보탑과 함께 일반적인 석탑과는 모양이 다른 우리 나라 최고의 이형(異形)석탑입니다.

 

그런데 국보는 석탑만이 아닙니다. 석탑 옆의 반송은 물론 화엄사 경내와 지리산의 청아한 산수를 바라보는 위치 또한 등록되지 않은 국보입니다. 나는 지금 화엄사 사사자석탑 앞에 서서 모든 차이를 초월한 '진리'를 생각해 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도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했던가요.

 

아름다운 마음은 아름다운 환경에서 온다고 했습니다. 사사자석탑에서 바라본 화엄사의 웅장함과 지리산자락의 숭엄함이 중생들의 가슴을 아름답게 합니다. 이 때문에 나는 지리산에 올랐고, 화엄사의 품속에 파묻혔나 봅니다. 그리고 당신에게 이렇게 편지를 띄웁니다.

 

(2002. 2. 3)

 

*산행코스

 

-. 1코스 : 당동마을(2시간) 성삼재(30) 코재(20) 종석대(10) 코재(1시간 40) 연기암(40) 화엄사(30) 주차장 (총소요시간 : 5시간 50)

 

-. 2코스 : 당동마을(2시간) 성삼재(30) 코재(20) 종석대(3시간) (차일봉 경유)화엄사 주차장 (총소요시간 : 5시간 50)

 

*교통

 

-. 88고속도로 남원교차로에서 구례방향으로 19번 국도를 따라 가면 지리산온천 이정표가 나온다. 지리산온천을 지나 중동마을 다리를 막 건너 오른쪽으로 난 도로를 따라가면 당동마을에 닿는다.

 

-. 남원이나 구례에서 3040분 간격으로 다니는 버스가 중동마을에서 선다. 중동마을에서 당동마을까지는 걸어서 30분 정도 걸린다. 중동마을에서 당동마을까지는 택시를 이용하면 쉽게 접근할 수 있다.

 

-. 화엄사에서 구례로 가는 버스가 수시로 있다.

      

지리산

지리산 종주(1,915m, 전라남도 구례전라북도 남원경상남도 산청함양하동) / 비바람 다 헤치고 천왕봉 머리에 올랐노라

지리산 도장골(1,704m, 경상남도 산청) / 비경 속에 서려있는 아물지 않은 상처

지리산 바래봉(1,165m, 전라북도 남원) / 넓은 초원에 철쭉이 만든 화원

지리산 만복대(1,433m, 전라남도 구례전라북도 남원) / 고요한 겨울 산에서 ''를 만나다

지리산 종석대(1,356m, 전라남도 구례) / 어머니의 품속에서 신앙을 만나다

지리산 반야봉(1,733m, 전라남도 구례전라북도 남원경상남도 하동)

/ 은은한 뱀사골과 강열한 피아골 단풍

지리산 왕시루봉(1,243m, 전남 구례) / 예쁜 철쭉 너머로 섬진강이 유유하고

지리산 삼정산(1,210m, 경상남도 함양전라북도 남원) / 주능선 바라보며 불가의 길 걷는다

지리산 세석평전(1,500m, 경상남도 함양하동) / 연분홍 철쭉에도 민족의 한 서려

지리산 작은새골(1,652m, 경상남도 함양) / 말없는 산, 떠드는 사람들

지리산 차일봉(1008m, 전라남도 구례) / 화엄사가 아름다운 것은

지리산 천왕봉(1,915m, 경상남도 산청함양) / '한국인의 기상, 여기서 발원되다'

지리산 하봉(1,781m, 경상남도 함양산청) / 6시간의 환희, 20시간의 사투(死鬪)

지리산 삼신봉(1,355m, 경상남도 하동) / 청학동 품은 지리산 남쪽 전망대

지리산 웅석봉(1,099m, 경상남도 산청) / 지리산의 장엄함과 경호강의 푸근함을 만나

지리산 삼봉산(1,187m, 전라북도 남원경상남도 함양) / 거대한 생명체, 지리산이 장엄하게 펼쳐지고

왕산필봉산(925m848m, 경상남도 산청) / 가락국 애환 서린 산에서 본 세상사

지리산 구곡봉황금능선(961m, 경상남도 산청) / 하늘이 무너져도 흔들리지 않는 기개

지리산 성제봉(1,115m, 경상남도 하동) / '토지'로 태어난 섬진강과 악양들녘

지리산 큰세개골(1,651m, 경상남도 하동) / 원시계곡에 서린 현대사의 아픔

지리산 와운골-도솔암(1,586m, 전라북도 남원경상남도 함양) / 곱고 근엄한 천년송이 와운(臥雲)에 휩싸이고

지리산 조개골(1,915m, 경상남도 산청) / 어머니의 품속 같은 숲과 계곡

지리산 상내봉(1,200m, 경상남도 함양) / 빨치산 루트에 핀 평화의 꽃

지리산 심마니능선(1,732m, 전라북도 남원) / 녹색바다가 내뿜는 반야(般若)의 향기 

지리산 종주(1,915m, 전라남도 구례전라북도 남원경상남도 산청함양하동)

 

비바람 다 헤치고 천왕봉 머리에 올랐노라

호남고속도로를 달리는 차창 너머로 배롱나무가 붉은 꽃을 피우고 있다. 백일홍으로 불리는 배롱나무는 남도의 마을이나 정자 근처에서 7월이 되면 피기 시작하여 벼가 익을 때까지 무려 100일 동안이나 무더운 여름을 화사하게 장식한다.

 

백일홍 피어있는 정겨운 마을들을 지나다보면 어느새 섬진강을 만난다. 언제 가도 항상 반갑게 맞아주는 강. 몇 번을 가고 또 가도 싫증나지 않는 강. 그런 섬진강에는 고운 모래와 급하지 않은 물 흐름이 있고, 산과 산 사이에 다소곳이 묻힌 마을이 있어 갈수록 소록소록 정이 든다.

 

섬진강은 구례구역에 이르면 강폭이 더욱 넓어지면서 시야를 지리산에게 양보한다. 군내버스를 타고 성삼재에 도착하니 840분이다.

 

고리봉, 만복대, 바래봉으로 이어지는 서북능선을 등뒤에 두고 지리산 종주의 첫발을 내딛는다. 잔뜩 낀 운무로 눈앞에 나타나야 할 노고단의 모습은 찾을 수가 없다. 제법 세차게 불어오는 바람은 시원하기보다 약간은 차갑다.

 

잠시 후 잔뜩 낀 운무가 옷을 벗자 노고단의 포근한 자태가 드러난다. 주능선에 올라선다. 나무로 만들어 놓은 전망대에 올라서니 유유히 흘러가는 섬진강과 구례벌판이 평화롭기만 하다. 노고단산장에서 노고단으로 오르는 길에는 다홍색 원추리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야생화들이 아름답게 피어있다.

 

노고단은 신라 때 박혁거세의 어머니 선도성모를 지리산 산신으로 받들고 나라의 수호신이라 여겨 남악사(南岳詞)라는 사당을 지어 매년 봄가을에 제사를 올리던 곳이었다. 그래서 선도성모의 높임말인 노고(老姑)에게 제사 지내는 신단이었다 하여 노고단이라 불렀다. 노고단에서 돼지평전 가는 길로 접어들자 이제부터 본격적인 숲길이 시작된다. 신갈나무, 노각나무, 층층나무 등의 활엽수들이 울창할 뿐더러 각종 넝쿨 식물이 나무를 휘감아 올라가는가 하면 맨 밑바닥에는 잎을 활짝 피운 고비들로 하여금 밀림을 연상케 한다.

 

 

옹골찬 삶의 질감 풍기는 야생화의 아름다움

 

 

숲길을 벗어나자 야생화 천지다. 다홍색의 담백한 원추리, 보라색으로 핀 이질풀, 비비추와 그 밖의 여러 가지 이름 모를 야생화들이 흰색과 노란색, 보라색, 핑크색 등 다양한 색상으로 지리산의 여름을 아름답게 수놓고 있다. 이 야생화들은 온갖 풍상을 다 겪으면서 피워낸, 그야말로 자연스러운 멋과 옹골찬 삶의 질감이 풍기는 꽃들이다.

 

그 중에서도 여름철 노고단 근처를 가장 아름답게 장식하는 것은 원추리꽃이다. 원추리꽃은 화려하기보다는 은은하고 담백한 모습으로 우리들의 가슴 속 깊이 파고든다. 그야말로 맑고 향기롭게 살아가는 비구니 같은 청량함과 완숙기에 접어든 40대 여인의 교양미 넘치는 멋이 스며있는 꽃이다.

 

산은 갑자기 구름이 몰려와 '구름 바다(雲海)'가 되기도 하고, 봉우리만 살며시 모습을 드러내 운해에 떠 있는 섬이 되기도 한다. 그러다가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파란 녹음을 드러내는 '나무의 바다(樹海)'가 되기도 한다.

 

돼지평전을 지나자 다시 울창한 숲이다. 작은 나무는 작은 대로, 큰 나무는 큰 대로, 그리고 죽은 나무는 죽은 대로 서로 상부상조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심지어 죽어서까지 후배 나무들을 위해서 그 자리에서 썩어간다. 여기에서는 크다고 으스대거나 작다고 위축되는 것이 없다. 자기 방식대로 살아가되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루는 질서가 있다.

 

피아골로 내려가는 길이 갈리는 임걸령 삼거리를 지나 임걸령 샘터에서 물을 한 모금 마신다. 조그마한 돌탑에서 놀고 있는 다람쥐가 사람이 가도 피하지 않는다. 다람쥐가 사람에게 두려움을 느끼지 않은 것을 보면 온갖 탐욕에 얽매여 사는 나 같은 사람도 지리산에 들어오면 세속의 때가 벗겨지는가 보다. 저 아래로 펼쳐지는 피아골이 더욱 깊어 보인다.

 

산의 고도가 높아짐에 따라 수종에도 변화가 생긴다. 침엽수는 구상나무 위주로 바뀌고, 활엽수는 기존의 신갈나무에다 자작나무과의 사스레나무와 야광나무 등 고산식물이 주종을 이룬다.

 

반야봉과 삼도봉 가는 길이 갈리는 노루목에서 바라 본 노고단까지의 꿈틀거리는 능선이 장엄하다. 삼도봉에서 남쪽으로 뻗은 불무장등 능선은 파도가 잔잔하게 일렁이는 바다와 같다.

 

2년 이상 도피행각을 벌인 탈옥수 신창원이 며칠 전 경찰에 붙잡혔는데, 그 일기장에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한가?"라는 글귀가 쓰여 있었다고 한다. 이는 신창원 같은 사람이 나올 수밖에 없는 우리 사회의 현실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산에서는 '만인이 평등'하다. 산은 특권층이라고 해서 특별하게 대우하고, 배경 없고 돈 없는 서민이라 해서 차별하지 않는다. 오히려 불평등한 사고를 가진 사람까지도 '평등사상'을 교육시켜 보낸다.

 

삼도봉(1,550m)에서 바라 본 반야봉은 짙은 구름으로 뒤덮인 봉우리와 진녹색을 띤 구상나무, 그리고 구상나무 고사목이 어울려 장관을 이루고 있다. 그러면서도 반야봉이라는 이름이 말해주듯이 그렇게 편안하고 자비로울 수가 없다.

 

삼도봉은 경상남도 하동과 전라남도 구례, 그리고 전라북도 남원이 갈리는 곳이다. 충청북도와 경상북도, 전라북도가 갈리는 민주지산의 삼도봉과 함께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봉우리다.

 

잠깐 사이에 노고단 쪽에서 구름이 몰려오기 시작하더니 금방 온 산을 덮어 버린다. 그리고 금방 소나기로 변한다. 비는 5분 정도 오다가 그친다. 화개재에서 가파른 길을 올라오는 사람들이 숨을 헉헉거린다.

 

 

새 소리마저 그쳐버린 숲 속의 적막

 

 

토끼봉으로 올라가는 울창한 숲 속에도 운무가 잔뜩 끼어 원시적 숭엄함이 느껴진다. 새소리마저 그쳐버린 숲 속이 적막하다. 길 가운데서 사람 오기를 기다리는 다람쥐도 외로움을 느낀 모양이다. 이러한 적막하고 외로운 분위기 속에서는 가슴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 고독 같은 것이 느껴진다. 심연의 고독을 통하여 나의 내면을 쳐다본다.

 

다시 비가 내린다. 금방 그칠 비가 아닌 것 같아 우의를 꺼내서 입는다. 토끼봉(1,534m)에 도착한 시각이 1220. 빗줄기는 더욱 굵어졌다. 몇 사람들이 비를 피해 나무 밑에서 점심을 먹고 있다. 연하천산장까지는 아직도 1시간 이상의 시간이 소요될 뿐더러 점심을 먹는 동안 비가 그친다면 다행이다 싶어 이곳에서 식사를 한다.

 

점심을 먹고 나서도 비는 그칠 줄 모른다. 어디서 나왔는지 개구리 한 마리가 슬며시 숲 속에서 기어 나온다. 내리는 비에 활기를 찾은 것은 나무와 야생화다. 가끔 만나는 원추리도 색상이 더욱 선명해졌고, 나뭇잎은 훨씬 푸릇푸릇해졌다.

 

"뱀사골산장까지 얼마나 남았습니까?"

 

우의도 입지 않은 채 걷고 있는 78명의 대학생들의 발걸음이 바쁘기만 하다. 총각샘을 지나 명선봉(1,586m)에 가까워지자 빗줄기가 조금은 가늘어진다. 빗방울이 맺혀있는 파랑 빛의 초롱꽃이 청초하다.

 

연하천산장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4년 전 직장동료들과 함께 지리산 종주를 하면서 이곳에서 첫 날 밤을 보낸 적이 있다. 휘영청 뜬 보름달의 운치와 함께.

 

연하천산장은 규모나 시설 면에서는 아주 보잘것없지만 지리산에 있는 산장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곳이다. 주위의 주목나무 군락하며 풍족한 물, 조용한 분위기와 더불어 한 여름 밤을 운치 있게 장식해주는 달빛이 있기 때문이다.

 

형제봉 쪽으로 갈수록 능선에 자리잡은 집채만한 거친 바위들을 가끔 만난다. 여전히 시계(視界)는 몇 미터 앞을 볼 수 없을 정도로 흐리다. 가랑비가 그치지 않고 계속 내린다. 여기저기 전망이 트일만한 장소에서도 깊고 유장한 맛이 풍기는 산줄기와 골짜기를 볼 수 없어서 아쉽다.

 

 

입산 수도하러 가는 사람을 만나

 

 

갑자기 높이가 10m15m 쯤 되는 우뚝 선 두 개의 바위가 길을 가로막고 나선다. 아름답다기보다는 위풍 당당하다. 위풍 당당한 바위에는 어김없이 용틀임하는 두 그루의 소나무가 끈질긴 생명력으로 아름다움을 꽃피우고 있다. 두 개의 바위가 봉우리를 이루어서 형제봉(1,433m)이다.

 

형제봉을 오른쪽으로 돌아 내려가니 바위 밑에서 비를 피하는 한 사람이 있다.

 

"세 시간 동안 여기에서 비오는 모습만 보고 있었어요."

 

"어디로 가시는데요?"

 

"여기서 두 시간 정도만 가면 됩니다."

 

"벽소령은 아닐 거고, 세석이요?"

 

"제가 가는 곳은 그런 곳이 아닙니다."

 

지리산에는 영신대를 비롯하여 등산객의 발길이 닿지 않은 여러 곳에 입산 수도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아마 그 곳으로 수도하러 가는 사람인 것 같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그러나 더 이상은 묻지 않는다.

 

형제봉을 지나자 빗줄기가 점점 커진다. 비를 잔뜩 맞고 오는 남녀 대학생들을 또 만난다. 서울 철도대학 학생들이라는데 뱀사골산장까지 간다는 것이다.

 

"아저씨, 너무 힘들어요."

 

"힘들지 않다고 생각하며 씩씩하게 걸어봐. 패잔병 같은 생각을 하면 패잔병이 되고, 개선장군 같은 생각을 하면 개선장군이 되는 거야."

 

벽소령에 도착해서도 비는 그치지 않는다. 벽소령에는 함양 마천에서 하동 화개로 이어지는 도로가 있는데, 이 도로는 1949년 빨치산을 토벌하기 위해서 개설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대부분 훼손되어 도로로서의 기능을 잃은 지 오래다.

 

명선봉, 형제봉, 벽소령 남쪽 자락으로 흘러내린 물줄기가 빗점골을 이루는데, 이 빗점골이야말로 빨치산 투쟁이 가장 극심했던 곳이다. 우리 현대사의 아픔을 알려주려는 듯 잠시 옷을 벗은 빗점골이 수해(樹海)를 이루며 장엄하게 펼쳐진다.

 

이렇듯 지리산은 우리 역사의 치유되기 힘든 상처까지도 끌어안고 도도한 세월을 말없이 지켜오고 있다. 지리산이 덩치가 크고, 원시림을 비롯한 수없이 많은 생물이 자생하고 있어서만 큰 산이 아니다. 이러한 고통까지도 대승적으로 품어낸 '큰 정신'이 있기 때문이다.

 

구벽소령을 지나 덕평봉 쪽으로 가는데 이제는 꽤 힘이 든다. 배낭도 무겁고 하루 종일 걸음을 걸어서 지친 게다.

 

칠선봉에서 영신봉으로 이어지는 아기자기한 바위 봉우리들과 여기에 어울린 구상나무들이 지친 발걸음에 힘을 불어 넣어준다. 칠선봉을 지나자 빗줄기가 더 굵어진다. 대성골 상류인 작은 세개골 쪽에서 움직이는 비 군단의 모습을 바라본다.

 

거대한 바위들과 고고한 구상나무 고목들만 보아도 신비로움이 느껴질텐데, 여기에 조용히 내리는 비까지 가세하니 그 분위기가 사뭇 숭엄하다. 내 머리를 짓누르고 있는 번뇌와 망상을 깨끗이 씻어 가버린 듯하다.

 

세석평전이 펼쳐지면서 보라색으로 핀 나도옥잠화가 빗속을 헤매고 있는 나그네를 반갑게 맞이한다. 거센 비바람 속에서도 의연함을 잃지 않는 나도옥잠화꽃은 이미 해탈한 모습이다. 나도옥잠화가 비바람을 견디며 아름다운 꽃을 피워내듯이 해탈은 좌절과 절망, 고통과 번뇌라는 긴 터널을 뚫고 이루어진다고 한다.

 

철쭉나무 사이를 지나 세석산장에 도착할 때까지도 비바람이 거세게 몰아친다. 신발을 벗고 보니 발이 탱탱 불어있다.

 

 

우리 민족 아픔 끌어안은 '큰 산'

 

 

시설 좋은 산장에서 폭풍우 소리를 들으며 잠이 든다. 새벽에 일어나 천왕봉을 향하여 출발한 시각이 530. 비는 그쳤으나 모자가 날아갈 정도로 바람이 세차다. 여기에 안개가 얼마나 짙게 끼어 있는지 몇 미터 앞이 안보인다.

 

이러한 날씨는 더 이상 상쾌한 아침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바람소리 속에서도 날이 새었음을 알리는 새들의 기상나팔 소리만이 상쾌할 따름이다. 붕긋붕긋 솟은 봉우리에 생명을 불어넣으며 산 위로 떠오를 찬란한 태양과 영롱한 아침햇살을 맞으며 걷는 행복함을 즐기려던 생각을 일찍이 포기한다.

 

촛대봉(1,704m)에서 본 휘날리는 운무가 마치 춤을 추는 무용수 같다. 암봉인 촛대봉을 지나자 암릉이 자주 나타난다. 어제 본 칠선봉에서 영신봉까지의 바위들이 우람하다면 이곳의 암릉은 비교적 아기자기하다. 구상나무, 가문비나무들도 키가 작다.

 

이러한 풍경은 연하봉(1,667m)에서 절정을 이룬다. 바위의 모양도 훨씬 다양하고 주목과 구상나무가 이러한 바위들과 어울린 모습은 선경 바로 그것이다. 특히 주목과 구상나무의 흔들림 없는 자태는 불의와 세태에 타협하지 않는 고고한 선비의 기품이다. 여기에 춤을 추는 운무가 함께 하여 꿈속 같은 풍경을 만든다. '연하선경'을 지리산 10경중의 하나로 꼽는 이유를 알 것 같다.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더니 짙은 안개에 어느 새 옷이 축축해졌다. 장터목산장에 도착해서도 가랑비에 가까운 운무와 거센 바람은 계속된다. 취사장에서 간단히 아침식사를 해 먹고 천왕봉으로 향한다.

 

제석봉(1,806m)의 고사목을 볼 때면 벌목 후 흔적을 없애려고 불을 질러버린 인간의 욕심에 분노가 느껴진다. 몇 년 전 심어놓은 주목이 어느 정도 숲의 모양을 갖추려면 1백 년 이상은 걸릴 것이다.

 

통천문(通天門)을 통과한다. 이 문은 하늘로 통하는 문이다. 통천문을 지나면서 다시 한 번 세속의 묵은 때를 벗긴다. 제석봉에서 천왕봉까지 가면서도 수 없는 바위와 야생화를 만난다.

 

드디어 지리산의 정수리, 천왕봉에 선다. 이곳은 바다로부터 무려 1,915m나 높이 솟은 한반도 남쪽의 지붕이다. 지리산은 우리 나라에서 덩치가 가장 큰산으로 행정구역상으로 3개 도, 5개 시, 15개 면을 거느리고 있다.

 

1천 미터 이상 되는 봉우리가 40개에 가깝고, 1천 미터가 넘는 재만 해도 15개에 달한다. 이러한 지리산은 단순한 ''의 의미를 넘어선다. '지이산(地異山)'으로 쓰고 '지리산'으로 부르는 이 산은 예로부터 봉래산(금강산), 영주산(한라산)과 더불어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인 방장산으로 일컬어 왔다. 노고단의 남악사나 태고 때 천신(天神)의 딸 성모 마고가 지리산에 하강했다는 설 뿐 아니라 골짜기마다 자리잡은 유서 깊은 절들은 지리산을 이미 어떤 '신앙적인 산'으로 자리 매김 하였다.

 

또한 지리산은 우리 민족의 한과 아픔을 끌어안고 있다. 구례군 토지면에 있는 석주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정유재란 때 왜군의 침입을 막다가 전사한 승병과 의병들의 혼이 곳곳에 잠들어 있고, 해방 이후 좌우대립의 결과물인 빨치산을 통해 드러난 우리의 아픔이 골짜기마다 배어 있다. 여기에 가진 자들의 수탈 속에서 이름 없이 살다간 민초들의 애환과 서러움까지 어려 있다.

 

참 선비 정신으로 평생을 살다간 남명 조식이 회갑 되던 해에 산청군 시천면으로 들어와 생을 마칠 때까지 10년 동안을 지리산과 함께 했으며, 1910년 한일합방이 이루어지자 4()의 절명시(絶命詩)를 남기고 자결한 매천 황현의 의로운 정기도 지리산 자락에서 불타고 있다.

 

정상에서 한참 동안 앉아 있는데, 갑자기 하늘이 벗어지는가 싶더니 햇볕이 비춰온다. 이 순간 가을처럼 청명한 하늘과 함께 바위와 구상나무가 만든 무대가 등장한다. 이 때는 어김없이 관객들로부터 환호성이 터진다. 그러나 그것은 순간이다. 어느새 사방은 다시 운무에 휩싸인다.

 

30분 동안이나 천왕봉이 준 정기를 흠뻑 받고, 아름다운 공연까지 감상한 후 중봉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치밭목산장을 거쳐 대원사로 내려가기 위해서다. 중봉 가는 길로 들어서자 사람들의 통행이 뚝 끊어진다. 천왕봉에 오른 대부분의 사람들이 중산리나 백무동으로 하산해 버리기 때문이다.

 

 

써리봉에서 만난 서울 사람의 산 즐기기

 

 

천왕봉에서 들려오는 '야호' 소리가 가끔 들릴 뿐 한없이 고요하다. 천왕봉 다음으로 하늘에 가까운 중봉(1,875m)은 지극히 평범한 모습이다. 중봉에서 100m 쯤 더 가서 하봉 길과 헤어져 써리봉으로 방향을 잡는다.

 

가끔 순간적으로 운무가 옷을 벗어 하봉을 거쳐 쑥밭재, 왕등재로 이어지는 능선이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이럴 때는 대원사계곡 최상류인 조개골도 내려 보인다. 여기에 인공적인 모습이나 인공적인 소리는 전혀 찾아 볼 수가 없다.

 

여전히 구상나무와 주목 등이 돋보인다. 써리봉 근처로 갈수록 이런 모습은 더욱 장관을 이룬다. 어떤 사람은 연하선경 보다 써리봉이 오히려 낫다는 주장을 할 정도로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는 곳이다.

 

써리봉(1,642m)에서 천왕봉을 출발한 이후 처음으로 사람을 만나니 반갑다. 서울에서 혼자 왔다는 30대 후반의 남자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어젯밤, 비만 오지 않았으면 여기에서 1박을 했을 거예요. 작년에 여기에서 혼자 비박을 하는데 환상적이었어요. 어두워지기 전에는 천왕봉이 장엄하게 바라보이고, 그 아래로 중산리 골짜기가 평화롭게 내려 보이지요."

 

오늘은 구름이 잔뜩 끼어 주위 전망을 전혀 바라볼 수 없지만 맑은 날씨라면 여기에서 남쪽으로 뻗어나간 황금능선은 물론이고 하봉에서 쑥밭재로 이어지는 능선이 한 눈에 들어오고, 주위로 펼쳐지는 광활한 숲과 골짜기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진짜 풍경은 별이 쏟아지는 밤이지요. 이런 별들과 함께 보내는 한 여름 밤을 상상해 보세요."

 

'정말로 의미 있는 산행은 이 사람처럼 해야 하는데…….'

 

내려갈수록 수종이 다시 신갈나무 중심의 활엽수로 바뀐다. 새들의 합창을 들으며 도착한 곳은 치밭목산장. 개 두 마리가 반갑게 꼬리를 친다. 산장 뜨락에 있는 통나무 탁자와 의자에서는 78명의 등산객이 이른 점심을 들고 있다.

 

산장이 자리잡고 있는 능선마루 일대는 취나물이 밭을 이루고 있어 '취밭목'인데, 경상도 발음으로 '치밭목'이라 부르면서 현재의 이름으로 정착되어 버렸다.

 

치밭목에서 능선을 버리고 계곡으로 내려선다. 아름드리 나무 사이를 뚫고 내려서는데 금방 물소리가 들린다. 숲과 계곡에도 운무가 가득 끼어 있다. 이런 모습에서 원시적 순수성을 느낀다. 이러한 원시적 순수성은 인간의 본래성을 불러일으켜 과학철학종교이념사상을 초월한 자유인에 이르도록 하는 토양이 된다.

 

무재치기폭포가 어제의 비로 인하여 우렁찬 소리를 내며 쏟아진다. 1015m 높이에, 폭이 2030m씩 되는 넓은 바위를 타고 3단으로 내려오는 폭포는 두 갈래 또는 여러 갈래의 물줄기가 내려오면서 폭포를 이룬다. 수량이 많은 데다가 운무까지 뒤덮인 폭포의 모습은 신선이 사는 웅장한 궁전 같다. 나는 폭포 앞 바위에서 신발을 벗고 앉아 궁전의 주인이 된다. 무재치기폭포를 끼고 있는 장당골과 헤어져 낮은 능선을 하나 넘어 한판골로 접어든다. 지칠 대로 지친 데다가 날씨마저 얼마나 더운지 물이 보이기만 하면 꿀꺽꿀꺽 마시고 머리에도 끼얹는다.

 

 

부처는 우리 집에 있더라

 

 

유평리에 도착하자 대원사계곡이 크고 아름답다. 새재 쪽에서 내려오는 시멘트 길을 따라 대원사로 향한다. 유평리에 있는 '가랑잎'초등학교를 잠시 들러본다. 공식적인 이름은 유평초등학교지만 일반적으로 가랑잎초등학교로 불린다. 대원사 계곡 가에 자리잡은 이 학교는 이곳에 취재 왔던 어느 기자가 붙여준 이름인데, 이름이 너무 예뻐 정감이 흘러 넘친다.

 

유평리에서 만난 계곡을 끼고 대원사로 향하는 길은 깊고 맑은 물과 널찍한 소(), 시원스럽고 큼직큼직한 바위, 울창하고 고요한 숲이 어울린 그야말로 운치 있는 산책 코스다. 어느 새 지치고 피곤하다는 생각이 사라져 버렸다. 이렇듯 아름다운 풍경은 육체적 고통까지도 잊혀지게 하는 마력이 있다.

 

대원사는 대웅전원통보전응향각봉상루 등의 건물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음에도 오히려 시원한 느낌을 준다. 대원사는 신라 진흥왕 때 창건되어 수 차례 소실되었다가 1955년에 지어진 건물들이라 고색창연함을 찾아보기는 힘들지만 비구니 도량답게 깔끔하고 정갈하다. 그리고 주위의 장대한 계곡과 울창한 숲, 그리고 청정한 비구니들의 모습들이 어울려 그지없이 청량하다.

 

어떤 사람이 부처를 찾으려고 3년 동안을 여행을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그는 결국 집으로 돌아와서야 부처를 찾았단다. 자신을 기다리던, 반가워서 맨발로 뛰어나오는 자신의 어머니가 바로 부처라는 깨달음을 얻었다는 이야기다.

 

"여보, 나 산에서 내려와 버스 기다리고 있어. 애들도 잘 있지?"

 

"그래요. 기다리고 있을께요."

 

전화기를 타고 전해지는 아내의 목소리가 지리산의 숨결처럼 들려온다.

 

(1999. 7. 20 21)

 

*산행코스

 

-.1코스 : 성삼재(50) 노고단 산장(1시간 20) 임걸령 삼거리(1시간 10) 반야봉(40) 화개재(2시간) 연하천산장(1시간 30) 벽소령산장(1시간) 선비샘(2시간) 세석산장(1시간 40) 장터목산장(1시간) 천왕봉(30) 중봉(1시간) 써리봉(40) 치밭목산장(30) 무재치기폭포(2시간 30) 유평리(20) 대원사(30) 주차장 (총소요시간 : 19시간 10)

 

-. 2코스 : 천왕봉(2시간) 칼바위(1시간) 중산리

 

*교통

 

-. 성삼재까지는 구례에서 5회 운행(6, 8, 12, 14, 17)되는 군내버스를 이용한다.

 

-. 대원사와 중산리에서 진주로 가는 시외버스가 3040분 간격으로 있다.

 

 

지리산 도장골(1,704m, 경상남도 산청)

 

비경 속에 서려있는 아물지 않은 상처

지리산 골짜기마다 역사의 아픔이 서려 있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이현상이 최후로 사망했다는 빗점골에도, 여순반란사건의 주모자 김지회가 죽었다는 반선에도, 최후의 여자 빨치산 정순덕이 체포된 내원골에도 좌우대립으로 상징되는 우리 현대사의 아물지 않은 상처가 남아 있습니다.

 

지리산의 빨치산투쟁은 194810월 여순사건 관련자들이 산악지대로 들어가 무장투쟁을 전개하면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이후로 남로당에서는 19497월 무장투쟁을 보다 조직적으로 전개하기 위해 인민유격대를 편성하였습니다. 인민유격대는 오대산과 지리산, 태백산 등 세 지역에 3개 병단으로 편성되었습니다. 지리산 지구의 제2병단은 이현상이 사령관을 맡아 산하에 4개 연대로 편성되었고, 각 연대는 몇 개 군을 대상으로 하는 활동지역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주로 야간을 이용하여 인근의 관공서나 군부대를 공격하여 타격을 가하기도 하였지만 한편으로는 군경토벌대에 의하여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습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산악지대에서 활동하고 있던 빨치산들은 인민군과 협동작전을 벌였습니다.

 

남한지역에서 활동하던 빨치산들은 인민군이 북쪽으로 후퇴함에 따라 다시 산악지대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당의 지휘를 받아 가면서 무장투쟁을 벌였습니다. 이즈음 남로당은 기존의 3개 병단으로 편성된 남한의 인민유격대를 사단제로 개편하고 지리산에 통일적인 지휘 본부를 설치하였습니다. 남부군이라는 불리는 인민유격대가 그것인데, 사령관으로 이현상이 임명되었습니다.

 

그러나 195112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국군에 의한 본격적인 동계 토벌작전으로 호남 일대 인민유격대는 큰 타격을 받게 됩니다. 1952년 중반기 이후에도 비록 약화되기는 했지만 빨치산의 투쟁은 계속되었습니다.

 

 

한신계곡뱀사골칠선계곡 합쳐놓은 도장골

 

19544월부터 5월에 이르기까지 군 토벌작전으로 많은 수의 빨치산 전투부대들이 사라졌습니다. 19557월 이후 분산되어 있던 빨치산들이 다시 집결하여 조직을 복구하고 점차로 활동을 강화하였지만 이미 최후를 앞둔 시점이었습니다. 결국 1955년 후반기부터 1956년까지 실시된 경찰의 토벌작전으로 빨치산은 거의 궤멸되었습니다. 그리고 1963년 최후의 빨치산 정순덕이 생포됨으로써 빨치산의 역사는 종지부를 찍게 됩니다.

 

이러한 빨치산의 역사는 아직도 제대로 평가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 이들은 추위와 굶주림에 떨며 지리산에서, 덕유산에서 겨울을 나야 했고, 왜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싸워야 했는지에 대한 냉정한 평가는 없습니다.

 

"나는 저 산만 보면 피가 끊는다"고 노래한 시구를 음미하면서 지리산으로 향합니다. 산자락을 따라 덕천강의 물줄기가 굽이굽이 이어집니다. 산 곳곳에 밤꽃이 하얗게 피어 진한 향기를 전해줍니다.

 

거림에서 세석평전으로 통하는 거림골 주계곡에서 도장골로 발길을 돌립니다. 도장골 초입에 길상사라고 하는 큰절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조그마한 암자였는데 근래에 대대적인 불사를 하여 거대한 사찰로 변했습니다.

 

도장골에 접어들자 짙푸른 숲과 깔끔한 계곡이 반갑게 맞이합니다. 수많은 세월이 만들어놓은 둥글고 커다란 바위들과 이런 바위를 타고 넘는 맑은 물줄기가 도장골의 분위기를 알려줍니다. 작은 폭포 하나가 바위 사이를 뚫고 떨어져 짙푸른 소() 하나를 만들었으니 용소입니다.

 

도장골을 가리켜 '지리산 최다폭포의 한신계곡, 소와 담의 뱀사골, 원시적 경관을 자랑하는 칠선계곡의 특징을 합쳐놓은 것 같다'고 한 표현이 실감납니다. 다만 도장골 하류부는 길이 계곡에서 약간 떨어져 있어 일부러 들르지 않으면 아름다운 계곡을 제대로 볼 수 없다는 점이 아쉽습니다.

 

길상사에서 700800m쯤 올랐을까요? 조그마한 안내문이 붙어 있습니다. '이영회부대 아지트'라 쓰여 있습니다. 이영회는 19515, 인민유격대가 남부군으로 재편될 때 부사령관을 맡은 인물입니다. 이영회가 직접 지휘한 부대는 여순사건 당시에 입산했던 구빨치산을 주축으로 산청군인민유격대, 진양군인민유격대를 통합하여 재편성한 빨치산부대입니다. 이들은 거창이나 합천까지 활동범위를 넓히면서 가회지서, 대병지서 등에 대한 야간 기습공격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특히 지리산 전설적인 여자빨치산 정순덕이 남편을 찾아 최초로 입산한 곳도 이곳 도장골입니다.

 

돌담을 쌓은 초소의 흔적이며, 그 위에 은둔지의 돌 흔적들을 바라보며 쓰라린 우리 역사의 상기합니다. 그 때의 그 아픔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깔나무만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자라 있습니다.

 

큰 나무 아래에서 무성히 자라고 있는 산죽이 얼굴까지 침범해오지만 길은 뚜렷하게 잘 나 있습니다. 그러다가 계곡을 만날 때면 도장골의 비경이 펼쳐집니다. 반들반들한 바위로 떨어지는 여러 줄기의 와폭은 말 그대로 절경이고, 매끄러운 반석위로 흐르는 물은 신선수(神仙水)입니다. 와룡폭포의 모습이 그렇습니다.

 

도장골에서 왼쪽으로 갈라진 촛대봉골로 방향을 잡습니다. 길은 뚜렷하고 여전히 계곡은 깔끔합니다. 대개의 계곡이 상류로 가면 초라해지는데, 이곳만은 깔끔한 품위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습니다. 작지만 정교한 바위와 35m쯤 되는 작은 폭포들이 계속됩니다. 쉽게 찾아보기 힘든 비경입니다. 특히 단풍나무가 계곡 주위로 우거져 환상적인 가을 풍경을 연상시킵니다.

 

 

"봄은, 우리들 가슴속에서 움트리라"

 

수량이 적어진 계곡의 물소리는 가냘픕니다. 촛대봉골과 헤어져 날등으로 오르는 급경사를 올라갑니다, 날등에서 나무 사이로 언뜻 보니 촛대봉의 바위 봉우리가 우람하게 서 있습니다.

 

시루봉에 올라서자 숲이라고 하는 폐쇄된 공간이 해소되고 먼 거리까지 볼 수 있는 조망처가 확보됩니다. 이럴 때는 어떤 해방감 같은 것이 가슴에 안겨 옵니다. 촛대봉으로 이어지는 길은 암릉입니다. 지리산 능선에서 만나는 바위들은 아기자기하지 않습니다. 거칠고 무뚝뚝한 남성미가 넘치는 그런 바위들이고, 암봉입니다. 지리산은 능선의 바위가 그렇듯이 특별히 멋을 부리려고 애쓰지 않아도, 넓고 깊은 품 자체가 매력입니다.

 

촛대봉에서 연하봉쪽으로 가면서 바라본 연하봉 주변의 봉우리들이 운무에 살짝 뒤덮여 신비감을 더해 줍니다. 지리산의 멋은 바로 운무가 봉우리나 골짜기를 살짝 덮었을 때 극치를 이룹니다. 키 작은 구상나무가 고사목과 함께 일정한 질서를 이루고 있습니다. 북풍에 견디느라 가지를 남쪽으로 뻗은 구상나무는 불균형한 것 같으면서도 균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연하봉에서 남쪽으로 뻗은 병풍을 친 것 같은 바위 봉우리들이 고사목과 어울려 선경을 이루고 있습니다.

 

연하봉(1,730m)은 장터목쪽으로 가다가 뒤돌아볼 때 제 맛이 납니다. 우뚝우뚝 솟은 바위들이 설악산 같은 멋을 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장터목산장에 도착하자 늦은 점심을 먹는 사람, 휴식을 취하고 있는 사람들로 한가하지가 않습니다. 장터목에서 곧장 중산리로 내려가는 길은 급경사의 연속입니다.

 

낮은 지대 같으면 5월 중순에 피었어야 할 이팝꽃과 쪽동백(함박꽃)이 이제야 하얗게 꽃을 피웠습니다. 계곡은 암반과 크고 작은 폭포로 이어지면서 나그네를 자꾸만 유혹합니다. 그 중에서도 자그마치 해발 1,240m에 자리잡은 유암폭포는 압권입니다. 수십 미터의 암반 위를 흘러온 계류는 직사각형 모양의 직벽을 만나 폭포를 만들어 냅니다. 6m 정도 높이에서 90도 각도로 떨어지는 폭포수는 나그네의 발길을 붙잡아 두기에 충분합니다. 다만 1998년의 산사태로 상류부에서 흘러내린 돌더미들이 폭포 아래를 메워버린 점이 아쉬울 따름입니다.

 

어느 정도 내려오자 계곡은 평상시 모습을 보여줍니다. 집채만한 바위와 암반 위로 흐르는 계류는 가끔 폭포와 소를 만들고 주변의 푸른 숲과 어울려 빼어난 계곡미를 보여줍니다. 천왕봉으로 오르는 길이 갈리는 지점에 빨치산 칼바위 아지트가 있습니다. 칼바위 아지트는 주로 보급투쟁을 통하여 획득한 물자를 집합시키는 곳이었습니다. 때로는 주민들도 여기까지 보급품을 지고 왔었고, 이후로는 보안을 위하여 자신들이 직접 지휘본부가 있었던 법계사로 옮겼습니다.

 

빨치산아지트는 순두류, 소막골, 조개골 등 지리산 곳곳에 있었습니다. 중산리 버스주차장에 있는 '빨치산 토벌전시관'에 들러 봅니다. 전시관에 들러 보았지만 균형 있는 역사의식을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다만 전시관 주변의 서 있는 신동엽의 시비가 눈길을 끕니다.

 

봄은

봄은/남해에서도 북녘에서도/오지 않는다 //

너그럽고/빛나는/봄의 그 눈짓은,/제주에서 두만까지/우리가 디딘/아름다운 논밭에서 움튼다//

겨울은,/바다와 대륙 밖에서/그 매운 눈보라 몰고 왔지만/이제 올/너그러운 봄은, 삼천리 마을마다/우리들 가슴속에서/움트리라. //

움터서,/강산을 덮은 그 미움의 쇠붙이들/눈 녹이듯 흐물흐물/녹여버리겠지

 

(2002. 6.9)

 

산행코스

 

-. 1코스 : 거림(1시간 30) 와룡폭포(1시간 40) 촛대봉(1시간 20) 장터목산장(1시간) 유암폭포(1시간 30) 칼바위(1시간) 중산리 주차장 (총 소요시간 : 8시간)

 

-. 2코스 : 거림(1시간 30) 와룡폭포(1시간 40) 촛대봉(10) 세석평전(2시간 30) 거림 (총 소요시간 : 5시간 50)

 

교통

-. 대전-통영간 고속도로 단성교차로를 빠져 나와 20번 국도를 따라 지리산 방향(서쪽)으로 달리면 덕산이 나온다. 덕산에서 중산리, 거림(내대리) 쪽으로 달리다가 거림(내대리) 방향으로 좌회전하여 길 끝나는 곳까지 가면 거림이다.

-. 거림은 진주시외버스정류장에서 하루 3(09:40, 13:30, 19:40) 시외버스가 운행된다. 진주시외버스정류장에서 덕산행 버스가 20분 간격(06:4021:10)으로 운행되기 때문에 덕산에서 택시를 이용하여 거림까지 갈 수도 있다.

 

-. 진주에서 중산리까지는 시외버스가 하루 18(06:4020:35) 운행된다.

 

지리산 도장골(1,704m, 경상남도 산청)

 

비경 속에 서려있는 아물지 않은 상처

지리산 골짜기마다 역사의 아픔이 서려 있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이현상이 최후로 사망했다는 빗점골에도, 여순반란사건의 주모자 김지회가 죽었다는 반선에도, 최후의 여자 빨치산 정순덕이 체포된 내원골에도 좌우대립으로 상징되는 우리 현대사의 아물지 않은 상처가 남아 있습니다.

 

지리산의 빨치산투쟁은 194810월 여순사건 관련자들이 산악지대로 들어가 무장투쟁을 전개하면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이후로 남로당에서는 19497월 무장투쟁을 보다 조직적으로 전개하기 위해 인민유격대를 편성하였습니다. 인민유격대는 오대산과 지리산, 태백산 등 세 지역에 3개 병단으로 편성되었습니다. 지리산 지구의 제2병단은 이현상이 사령관을 맡아 산하에 4개 연대로 편성되었고, 각 연대는 몇 개 군을 대상으로 하는 활동지역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주로 야간을 이용하여 인근의 관공서나 군부대를 공격하여 타격을 가하기도 하였지만 한편으로는 군경토벌대에 의하여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습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산악지대에서 활동하고 있던 빨치산들은 인민군과 협동작전을 벌였습니다.

 

남한지역에서 활동하던 빨치산들은 인민군이 북쪽으로 후퇴함에 따라 다시 산악지대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당의 지휘를 받아 가면서 무장투쟁을 벌였습니다. 이즈음 남로당은 기존의 3개 병단으로 편성된 남한의 인민유격대를 사단제로 개편하고 지리산에 통일적인 지휘 본부를 설치하였습니다. 남부군이라는 불리는 인민유격대가 그것인데, 사령관으로 이현상이 임명되었습니다.

 

그러나 195112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국군에 의한 본격적인 동계 토벌작전으로 호남 일대 인민유격대는 큰 타격을 받게 됩니다. 1952년 중반기 이후에도 비록 약화되기는 했지만 빨치산의 투쟁은 계속되었습니다.

 

 

한신계곡뱀사골․칠선계곡 합쳐놓은 도장골

 

19544월부터 5월에 이르기까지 군 토벌작전으로 많은 수의 빨치산 전투부대들이 사라졌습니다. 19557월 이후 분산되어 있던 빨치산들이 다시 집결하여 조직을 복구하고 점차로 활동을 강화하였지만 이미 최후를 앞둔 시점이었습니다. 결국 1955년 후반기부터 1956년까지 실시된 경찰의 토벌작전으로 빨치산은 거의 궤멸되었습니다. 그리고 1963년 최후의 빨치산 정순덕이 생포됨으로써 빨치산의 역사는 종지부를 찍게 됩니다.

 

이러한 빨치산의 역사는 아직도 제대로 평가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 이들은 추위와 굶주림에 떨며 지리산에서, 덕유산에서 겨울을 나야 했고, 왜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싸워야 했는지에 대한 냉정한 평가는 없습니다.

 

"나는 저 산만 보면 피가 끊는다"고 노래한 시구를 음미하면서 지리산으로 향합니다. 산자락을 따라 덕천강의 물줄기가 굽이굽이 이어집니다. 산 곳곳에 밤꽃이 하얗게 피어 진한 향기를 전해줍니다.

 

거림에서 세석평전으로 통하는 거림골 주계곡에서 도장골로 발길을 돌립니다. 도장골 초입에 길상사라고 하는 큰절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조그마한 암자였는데 근래에 대대적인 불사를 하여 거대한 사찰로 변했습니다.

 

도장골에 접어들자 짙푸른 숲과 깔끔한 계곡이 반갑게 맞이합니다. 수많은 세월이 만들어놓은 둥글고 커다란 바위들과 이런 바위를 타고 넘는 맑은 물줄기가 도장골의 분위기를 알려줍니다. 작은 폭포 하나가 바위 사이를 뚫고 떨어져 짙푸른 소() 하나를 만들었으니 용소입니다.

 

도장골을 가리켜 '지리산 최다폭포의 한신계곡, 소와 담의 뱀사골, 원시적 경관을 자랑하는 칠선계곡의 특징을 합쳐놓은 것 같다'고 한 표현이 실감납니다. 다만 도장골 하류부는 길이 계곡에서 약간 떨어져 있어 일부러 들르지 않으면 아름다운 계곡을 제대로 볼 수 없다는 점이 아쉽습니다.

 

길상사에서 700800m쯤 올랐을까요? 조그마한 안내문이 붙어 있습니다. '이영회부대 아지트'라 쓰여 있습니다. 이영회는 19515, 인민유격대가 남부군으로 재편될 때 부사령관을 맡은 인물입니다. 이영회가 직접 지휘한 부대는 여순사건 당시에 입산했던 구빨치산을 주축으로 산청군인민유격대, 진양군인민유격대를 통합하여 재편성한 빨치산부대입니다. 이들은 거창이나 합천까지 활동범위를 넓히면서 가회지서, 대병지서 등에 대한 야간 기습공격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특히 지리산 전설적인 여자빨치산 정순덕이 남편을 찾아 최초로 입산한 곳도 이곳 도장골입니다.

 

돌담을 쌓은 초소의 흔적이며, 그 위에 은둔지의 돌 흔적들을 바라보며 쓰라린 우리 역사의 상기합니다. 그 때의 그 아픔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깔나무만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자라 있습니다.

 

큰 나무 아래에서 무성히 자라고 있는 산죽이 얼굴까지 침범해오지만 길은 뚜렷하게 잘 나 있습니다. 그러다가 계곡을 만날 때면 도장골의 비경이 펼쳐집니다. 반들반들한 바위로 떨어지는 여러 줄기의 와폭은 말 그대로 절경이고, 매끄러운 반석위로 흐르는 물은 신선수(神仙水)입니다. 와룡폭포의 모습이 그렇습니다.

 

도장골에서 왼쪽으로 갈라진 촛대봉골로 방향을 잡습니다. 길은 뚜렷하고 여전히 계곡은 깔끔합니다. 대개의 계곡이 상류로 가면 초라해지는데, 이곳만은 깔끔한 품위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습니다. 작지만 정교한 바위와 35m쯤 되는 작은 폭포들이 계속됩니다. 쉽게 찾아보기 힘든 비경입니다. 특히 단풍나무가 계곡 주위로 우거져 환상적인 가을 풍경을 연상시킵니다.

 

 

"봄은, 우리들 가슴속에서 움트리라"

 

수량이 적어진 계곡의 물소리는 가냘픕니다. 촛대봉골과 헤어져 날등으로 오르는 급경사를 올라갑니다, 날등에서 나무 사이로 언뜻 보니 촛대봉의 바위 봉우리가 우람하게 서 있습니다.

 

시루봉에 올라서자 숲이라고 하는 폐쇄된 공간이 해소되고 먼 거리까지 볼 수 있는 조망처가 확보됩니다. 이럴 때는 어떤 해방감 같은 것이 가슴에 안겨 옵니다. 촛대봉으로 이어지는 길은 암릉입니다. 지리산 능선에서 만나는 바위들은 아기자기하지 않습니다. 거칠고 무뚝뚝한 남성미가 넘치는 그런 바위들이고, 암봉입니다. 지리산은 능선의 바위가 그렇듯이 특별히 멋을 부리려고 애쓰지 않아도, 넓고 깊은 품 자체가 매력입니다.

 

촛대봉에서 연하봉쪽으로 가면서 바라본 연하봉 주변의 봉우리들이 운무에 살짝 뒤덮여 신비감을 더해 줍니다. 지리산의 멋은 바로 운무가 봉우리나 골짜기를 살짝 덮었을 때 극치를 이룹니다. 키 작은 구상나무가 고사목과 함께 일정한 질서를 이루고 있습니다. 북풍에 견디느라 가지를 남쪽으로 뻗은 구상나무는 불균형한 것 같으면서도 균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연하봉에서 남쪽으로 뻗은 병풍을 친 것 같은 바위 봉우리들이 고사목과 어울려 선경을 이루고 있습니다.

 

연하봉(1,730m)은 장터목쪽으로 가다가 뒤돌아볼 때 제 맛이 납니다. 우뚝우뚝 솟은 바위들이 설악산 같은 멋을 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장터목산장에 도착하자 늦은 점심을 먹는 사람, 휴식을 취하고 있는 사람들로 한가하지가 않습니다. 장터목에서 곧장 중산리로 내려가는 길은 급경사의 연속입니다.

 

낮은 지대 같으면 5월 중순에 피었어야 할 이팝꽃과 쪽동백(함박꽃)이 이제야 하얗게 꽃을 피웠습니다. 계곡은 암반과 크고 작은 폭포로 이어지면서 나그네를 자꾸만 유혹합니다. 그 중에서도 자그마치 해발 1,240m에 자리잡은 유암폭포는 압권입니다. 수십 미터의 암반 위를 흘러온 계류는 직사각형 모양의 직벽을 만나 폭포를 만들어 냅니다. 6m 정도 높이에서 90도 각도로 떨어지는 폭포수는 나그네의 발길을 붙잡아 두기에 충분합니다. 다만 1998년의 산사태로 상류부에서 흘러내린 돌더미들이 폭포 아래를 메워버린 점이 아쉬울 따름입니다.

 

어느 정도 내려오자 계곡은 평상시 모습을 보여줍니다. 집채만한 바위와 암반 위로 흐르는 계류는 가끔 폭포와 소를 만들고 주변의 푸른 숲과 어울려 빼어난 계곡미를 보여줍니다. 천왕봉으로 오르는 길이 갈리는 지점에 빨치산 칼바위 아지트가 있습니다. 칼바위 아지트는 주로 보급투쟁을 통하여 획득한 물자를 집합시키는 곳이었습니다. 때로는 주민들도 여기까지 보급품을 지고 왔었고, 이후로는 보안을 위하여 자신들이 직접 지휘본부가 있었던 법계사로 옮겼습니다.

 

빨치산아지트는 순두류, 소막골, 조개골 등 지리산 곳곳에 있었습니다. 중산리 버스주차장에 있는 '빨치산 토벌전시관'에 들러 봅니다. 전시관에 들러 보았지만 균형 있는 역사의식을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다만 전시관 주변의 서 있는 신동엽의 시비가 눈길을 끕니다.

 

봄은

 

봄은/남해에서도 북녘에서도/오지 않는다 //

 

너그럽고/빛나는/봄의 그 눈짓은,/제주에서 두만까지/우리가 디딘/아름다운 논밭에서 움튼다//

 

겨울은,/바다와 대륙 밖에서/그 매운 눈보라 몰고 왔지만/이제 올/너그러운 봄은, 삼천리 마을마다/우리들 가슴속에서/움트리라. //

 

움터서,/강산을 덮은 그 미움의 쇠붙이들/눈 녹이듯 흐물흐물/녹여버리겠지

 

(2002. 6.9)

 

산행코스

 

-. 1코스 : 거림(1시간 30) 와룡폭포(1시간 40) 촛대봉(1시간 20) 장터목산장(1시간) 유암폭포(1시간 30) 칼바위(1시간) 중산리 주차장 (총 소요시간 : 8시간)

 

-. 2코스 : 거림(1시간 30) 와룡폭포(1시간 40) 촛대봉(10) 세석평전(2시간 30) 거림 (총 소요시간 : 5시간 50)

 

교통

 

-. 대전-통영간 고속도로 단성교차로를 빠져 나와 20번 국도를 따라 지리산 방향(서쪽)으로 달리면 덕산이 나온다. 덕산에서 중산리, 거림(내대리) 쪽으로 달리다가 거림(내대리) 방향으로 좌회전하여 길 끝나는 곳까지 가면 거림이다.

 

-. 거림은 진주시외버스정류장에서 하루 3(09:40, 13:30, 19:40) 시외버스가 운행된다. 진주시외버스정류장에서 덕산행 버스가 20분 간격(06:4021:10)으로 운행되기 때문에 덕산에서 택시를 이용하여 거림까지 갈 수도 있다.

 

-. 진주에서 중산리까지는 시외버스가 하루 18(06:4020:35) 운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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