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설거사의 전설이 깃든 월명암 부설전. 처마 뒤로 보이는 산이 내변산 능가산이다. 재가불자가 아라한이 됐다는 연유를 알기 위해 이 길을 택했고 부설전에서 그 의미를 깨달았다. |
전나무 기둥이 떠받치는 숲 속
검은 고딕 나무가 자라서
연등 천장의 내면이다
고딕 숲에서 내 목울대는 하늘거리는 풀처럼
검은색 너머 기웃기웃,
수사복 사내들의 뼈가
나무의 뼈라면
내 이야기의 시작은 주인공의 죽음/자살이다
누군가의 메마른 입술에서
나뭇잎이 꾸역꾸역 자랄 때
내 안에서도 밖에서도
열고 닫히는 새눗 아가미들의 연쇄반응들,
숲을 떠다니는 부레族 나뭇잎을 만나도
놀랍지 않다
고딕 숲의 부력이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어떤 관습들에서 열거되는 투니카와 쿠쿨라의
수도복 입은 발자국이 모여들겠다
오래된 불빛이 鬱鬱 침엽수를 밝히려 한다면
내 묵언은 천천히 닫아야 할 입이 너무 많다
송재학 시인의 ‘고딕 숲’의 전문이다. 절에 드는 전나무 숲길에서 하필이면 중세 유럽의 기독교 건축 양식을 떠올렸을까. 고딕 숲을 읽어선지 능가산(楞伽山)을 넘어 내려오느라 가뜩이나 걸음이 더뎌진 나는 600미터에 이른다는 전나무 숲을 만만하게 통과하기 어려울 성싶었다. 검은 수사복의 사내처럼 입을 닫아버린 채 나는 터덜터덜 일주문을 향해 걸었다.
제행무상 가르치는 내변산 능가산
월명암엔 아라한과 증득 전설이
소생의미는 내생까지 이어져
내소사(來蘇寺)는 절도 절이거니와, 절 입구를 이루는 전나무 숲이 아름답기로 유명이다. 그 때문인지 내소사를 다녀온 사람들이 전나무 숲을 관행적으로 찬탄할 뿐인데 송재학 시인은 죽음을, 그것도 자살을 언급한다. 이미 나무의 뼈를 보았으므로 그로선 당연히 그렇게 말할 권리가 있겠지만, 가벼운 걸음으로 절에 가려던 사람에게는 섬뜩한 느낌이 아닐 수 없다.
전나무 숲이 워낙 무거웠기 때문인지 일주문 가는 길에서 고개를 돌려 올려다본 능가산 관음봉이 가벼이 허공에 떠 있는 듯 보였다. 변산이라 부르는 이 산은 석가모니가 능가경을 전파했다고 하여 능가산이다.
직소폭포의 물줄기가 호쾌하게 느껴진다. |
산 어디쯤에선가 이따금 곰소만이 은비늘을 털곤 했던 변산은, 산과 바다가 어우러지는 곳이다. 산줄기로 둘러싸인 반도의 중앙부는 내변산이다. 그 바깥의 해식단애를 따라서 채석강·적벽강·모항·변산 해수욕장이 병풍을 펼치는데 이것은 외변산이다. 한마디로 천의 얼굴을 가진 변산이므로 부처의 제행무상을 가르치는 능가산인 것이다.
나는 일부러 월명암(月明庵)을 거쳐 능가산 제1봉인 관음봉에 올랐고, 올랐던 길을 되돌아 나와 내소사로 내려왔다. 그러자니 직소폭포와 재백이 고개를 거쳐야 했다. 아무리 내소사가 좋기로 곧장 가기보다 재가불자가 아라한이 되었다는 월명암에 들러 그 연유를 담아 가고 싶었다.
월명암에 가자마자 나는 부설전을 찾았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부설전(殿)이 아니라 부설전(傳)으로 부설 거사에 관한 고문 필사본을 대웅전에 모셔 둔 것이었다. 인도의 유마 거사, 중국의 방온 거사와 함께 세계 3대 거사라는 부설 거사. 거사란 산스크리트의 그리하파티(gr.hapati)의 역어로, 불도를 수행하는 속세의 남자를 이른다. 그중 웬만한 불자라면 모르는 이 없는 인도의 유마 거사는 자주 칭병(稱病)하고 누웠는데, 문병 오는 불자들에게 ‘중생이 아프니 어찌 내가 아프지 않겠느냐’고 말했던 성자이다.
월명암 고문서를 보니 부설 거사는 본래 스님이었다. 스님이었던 그가 환속하지 않을 수 없었던 건 여자와의 스캔들 때문이었지만, 거기에는 원효 스님과 요석 공주 사이처럼 세속적인 판단을 쉽사리 내릴 수 없는 사연이 있다. 기록에는 재가자인 그가 도반인 영조 스님보다 앞서 아라한과를 얻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부설 거사의 딸 이름인 월명이 암자 이름으로 전해 내려오는 월명암은 내변산에 흐릿하게 배어 있는 운무 때문인지, 본래 그런 풍수 때문인지 유독 부드럽고 따스한 기운이 넘친다. 이곳이 우리나라에서 꼽는 산상수행처인 까닭을 알 것도 같았다.
능가산의 산그림자를 드리운 내변산 직소보 모습. |
직소폭포에서 관음봉과 내소사에 이르는 길에 잔돌이 많고, 돋아난 바위는 곧 쪼개질 듯 날카롭고, 계곡은 가뭄을 벗어나지 못한 채 겨우 흐르고 있었지만, 이내 우리는 내소사를 발아래 두고 능가산을 내려서고 있었다. 그때 함께 산행했던 도반이 ‘내려다보이는 절’이 좋아 산에 간다고 내게 건넸다. 나는 빙긋이 웃었다. 절을 찾아 산을 몇 구비 넘은 사람만이 느끼는 기쁨을 그렇게 표현할 수도 있겠구나.
내소사는 백제 무왕 때 혜구 스님이 소래사(蘇來寺)라는 이름으로 창건했다. 소래사는 고려시대 정지상의 ‘제변산소래사’를 비롯한 시문들과 조선조 중종 25년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등장한다. 김정호의 ‘대동지지’는 소래사와 내소사를 혼용하다가 숙종 26년 조성된 ‘영산회 괘불’부터 내소사란 이름으로만 기록한다.
소래사에서 내소사로 바뀐 데는 단순히 글자 순서를 바꾼 것 이상의 심오함이 있다. 내소사란, 이곳에 오는 모든 것이 다시 소생하기 바란다는 뜻이니, 절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의 공간인지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내소사는 ‘ㅁ’자의 가람배치를 보여 주는데 그 중심에 대웅보전이 있다. 유홍준 교수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극찬한 설선당의 구부러진 기둥과 서까래를 보러도 관광객들이 몰린다.
내소사는 그 이름부터가 소생을 약속한 절이다. 누구라도 내소사에 다녀오면 다시 태어날 수 있다. 혹시 우리는 이성복 시인이 오래전에 진단한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는 이상한 병에 걸려 있지는 않을까.
유홍준이 극찬한 내소사 설선당. |
윤회의 차원에서 본다면 소생은 지금의 상황만이 아니라 내생까지도 이어진다. 수행자가 아닌 나는 이생에서 깨우칠 자격도 없고 윤회를 벗어날 길도 없다. 어디로 가서 무엇으로 태어날지 모르겠지만, 기왕이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고 싶은 소망이 나에겐 있다.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서 내가 후회했던 일들을 되풀이하지 않고 싶다.
내가 만일 사람으로 태어난다면 내생에서도 나는 내소사를 찾아 걸어갈 것이다. 그때 나는 관광객의 가벼운 걸음으로 내소사를 향해 걸을 것인가? 아니, 송재학 시인처럼 내소사로 가는 입구인 전나무 숲길에서부터 죽음의 무거움을 노래하겠다.
걷는길 : 남여치- 월명암- 직소폭포 - 자백이 고개- 관음봉 - 내소사 거리와 시간 : 약 13km, 5시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