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법연화경 강좌 제1강-3
- 교육원 불교전문강당 2009. 08. 25 -
그 다음에 상서가 나타나다. 중요한 대목입니다.
상서에는 차토의 상서. 바로 우리가 사는 이 국토에도 상서가 여섯 가지가 있고, 그 다음에 타토의 상서. 해서 다른 국토에도 상서가 나타난다.
왜 다른 국토에까지 상서가 나타나는가? 그것은 차토상서에서 그 열쇠가 있습니다. 그 다음에 상서에 대한 의문을 대중들과 미륵보살이 제기를 해요. 그런데 누가 이 상서에 대한 문제를 풀어줄 수 있을까?
곰곰이 생각한 끝에 문수보살. 문수보살은 지혜도 많거니와 과거 천불의 스승이다. 이런 표현이 있을 정도로 그야말로 “지혜”하면 무조건 문수보살로 대변 될 정도로 중요한 인물이지요.
그래서 문수보살에게 물어서 모든 것을 풀어나가는 그런 내용입니다. 서품은 그야말로 법화경의 서장. 서론에 해당되는 그런 내용들로 되어있습니다. 아주 중요한 열쇠입니다. 법화경을 이해하고, 우리들 자신을 이해하고, 남을 이해하고, 부처님을 이해하는 데에 중요한 열쇠입니다.
本門. 그것은 本來人. 또 사람ㆍ사람이 갖추고 있는 根本ㆍ本性. 그것을 부처라고 해도 좋고, 마음이라고 해도 좋고, 사람이라고 해도 좋고, 무슨 심지어 乾屎橛(간시궐)이라고 해도 좋고, 無位眞人(무위진인)이라고 해도 좋고요. 뭐라고 불러도 상관은 없습니다.
그러나 다 맞지 않습니다. 그저 부득이 해서 本人. 또는 本佛ㆍ本門의 세계ㆍ궁극적 차원ㆍ본래적 차원ㆍ본성으로써의 차원. 이렇게 표현을 하지요. 그리고 이 세상에 드러난 이런 현실적인 차원은 그것을 迹門ㆍ자취ㆍ흔적ㆍ역사. 이런 입장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정리를 하면 뭔가 뚜렷하게 들어오지요? 정리가 안 됩니까? 전부 다른 경전도 그렇지만 특히 법화경 그 두면을 이해시키려고 하는 그런 내용입니다.
二 상서(祥瑞)가 나타나다
1 차토(此土)의 상서
爾時世尊(이시세존)을 四衆圍繞(사중위요)하야
供養恭敬尊重讚歎(공양공경존중찬탄)이러라 爲諸菩薩(위제보살)하사
說大乘經(설대승경)하시니 名無量義(명무량의)라
敎菩薩法(교보살법)이며 佛所護念(불소호념)이니라
佛說此經已(불설차경이)에 結跏趺坐(결가부좌)하시고
入於無量義處三昧(입어무량의처삼매)하사 身心不動(신심부동)이러라
是時天雨曼陀羅華(시시천우만다라화)와
摩訶曼陀羅華(마하만다라화)와 曼殊沙華(만수사화)와
摩訶曼殊沙華(마하만수사화)하야 而散佛上(이산불상)과
及諸大衆(급제대중)하며 普佛世界(보불세계)가
六種震動(육종진동)이러라 爾時會中(이시회중)에
比丘比丘尼(비구비구니)와 優婆塞優婆夷(우바새우바이)와
天龍夜叉(천용야차)와 乾闥婆(건달바)와 阿修羅(아수라)와
迦樓羅(가루라)와 緊那羅(긴나라)와
摩睺羅伽人非人(마후라가인비인)과 及諸小王(급제소왕)과
轉輪聖王(전륜성왕)과 是諸大衆(시제대중)이
得未曾有(득미증유)하사 歡喜合掌(환희합장)하고
一心觀佛(일심관불)하더라 爾時佛(이시불)이
放眉間白毫相光(방미간백호상광)하사
照東方萬八千世界(조동방만팔천세계)하야 靡不周徧(미불주변)하니라
爾時世尊(이시세존) 그때 세존이 四衆圍繞(사중위요) 사부사중으로부터 에워싸여서, 供養ㆍ恭敬ㆍ尊重ㆍ讚歎(공양공경존중찬탄). 이것이 중요합니다. 누구를 좋아한다면 공양 올려야 됩니다. 공경해야 됩니다.
그 다음에 존중해야 됩니다. 그리고 찬탄해야 됩니다. 이것이 따라야지
말로만 아~ 그 스님 어떻다 좋다 어쩌다 그러면 안 돼요 ㅎㅎㅎ 그거는, ㅎㅎㅎㅎㅎ 알았지요? ㅎㅎㅎ 공양 꼭 올려야 돼요. 어허허허허 허허허
爲諸菩薩(위제보살)하사 여러 보살들을 위하사 說大乘經(설대승경)하시니 대승경전을 설하시니, 세존께서요.
名無量義(명무량의)라. 이름이 無量義라. 무량의경이라는 것이 있어요.
법화삼부경이라고 해서 무량의경이라고 하는 것이 여기에 등장한다고 해서, 그래서 무량의경을 序經(서경), 서론적인 경. 이런 표현을 해서 무량의경을 법화부에서는 아주 상당히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그것도 敎菩薩法ㆍ佛所護念(교보살법 불소호념). 이것 여덟 자가 여러 번 나옵니다. 법화경도 그렇고 무량의경도 그렇지만, 특히 법화경이 敎菩薩法이라. 보살을 가르치는 법입니다. 그러니까 성문ㆍ연각ㆍ보살. 부처되기 직전. 그러니까 최고 수준에 오른 사람들. 그 최고 수준에 오른 사람들이라는 것이 무슨 박사학위를 여러 개 받고, 지식이 많이 쌓였다. 이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보살심이 얼마나 있느냐?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얼마나 있느냐? 하는 그런 사람을 불교에서는 수준 높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수준 높은 사람은 그런 사람을 말하는 겁니다.
지식이 쌓여가지고 하~ 경력이 화려하고 지식이 많이 쌓여있고 참선을 수십 년하고, 그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결국은 自利(자리). 자기만 이롭게 하는 길이기 때문에 그것은 外道(외도)라고 말해요. 참선을 수백 년 했더라도 남을 배려할 줄 모르고 남을 생각할 줄 모르는 그런 자기 이익만을 위한 그런 것은 外道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은 법화경이해하기가 어려워요. 보살심이 있는 사람이 법화경을 이해합니다. 이것이 참 중요한 것이지요. 선천적으로 보살심이 많은 사람이 또 있어요. 남 생각 잘 하고, 자기의 불행한 처지는 생각하지 않고, 그것은 제쳐 놔버려요. 그리고 자기보다도 훨씬 더 잘 사는데도, 그 사람을 생각하는 겁니다. 이렇게 보살심이 많은 그런 사람들.
불교는 결국은 보살행을 최고 이상으로 합니다. 그리고
佛所護念이라. 그래서 부처님이 상당히 마음속에 護念한다. 보호하고 아낀다. 늘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는 그런 내용이었다.
佛說此經已(불설차경이)에 부처님이 이 경을 설하고 나서 結跏趺坐(결가부좌)하시고 入於無量義處三昧(입어무량의처삼매)라. 삼매에 들어갔는데, 그 삼매 이름이 量義處三昧였다. 身心不動(신심부동)이러라
몸과 마음이 不動했다. 삼매에 들어갔으니까요. 몸도 마음도 다 寂靜(적정)했다 이 말입니다. 고요한 것이지요.
是時天雨曼陀羅華(시시천우만다라화)와 그 때에 하늘에서는 꽃비가 막 쏟아지는데, 그래도 꽃비도 꽃 이름이 다 있네요.
曼陀羅華ㆍ摩訶曼陀羅華(마하만다라화)ㆍ曼殊沙華(만수사화)ㆍ摩訶曼殊沙華(마하만수사화). 이러한 네 종류의 꽃들이 而散佛上(이산불상) 及諸大衆(급제대중)부처님하고 모든 대중들에게 막 쏟아지듯이 흩어져 내리더라.
한 번 상상해 보세요. 이런 네 종류의 꽃이 부처님과 대중들에게 그냥 꽃비가 내리고 있다. 이런 것들이 다 상서입니다. 꽃비가 내리는 것이요.
그 다음에
普佛世界(보불세계)가 六種震動(육종진동)이라. 온 세계가 六種震動이라.
경전에서 세계를 말 할 때 꼭 불 세계ㆍ불 세계 그래요.
또 불찰ㆍ불찰 그러기도 합니다. 그냥 세계입니다. 그냥 세계인데, 불교적인 입장에서 보면 “부처님이 세상에 계신다.” 라고 해서, 또는
“불법이 세상에 있다.” 라고 해서 그래서 불 세계ㆍ또는 불찰ㆍ불찰 이렇게 표현 합니다. 그냥 세계라고 보면 제일 쉬워요.
온 세계가 六種震動이라. 여섯 가지로 진동. 우르르 쾅쾅하면서 진도 1000도쯤 되는 강진이 그냥 울리는 것 같은 그런 震動이다. 六種震動. 왜 6종입니까? 7종도 되고 8종도 될 수 있을 텐데...
부처님께서 경전을 설해마치고 삼매에 들어갔다. 그리고 하늘에서는 꽃비가 내린다. 그 장소에 우리가 동참을 했다면 우리의 온몸. 六根이 전율을 할 겁니다. 이 세상의 아무리 발달한 과학의 내용들을 여러 가지로 잘 안다하더라도, 그렇더라도 이러한 광경을 우리가 몸소 경험하게 되면 온몸이 그야말로 전율을 일으킬 정도로 감전된 것과 같은 그런 느낌을 받을 것입니다.
그것이 六種震動입니다.
六根ㆍ六塵ㆍ六識(육근ㆍ진ㆍ식). 우리의 전 삶의 영역.
우리 삶의 전 영역이 하~~ 전율을 느끼듯이 그렇게 감동을 받는 것.
법화경에서 이런 것이 어렵습니다. 땅이 실지로 이렇게, 세계가 이렇게 크게 진동 했다면 그것 뭐 전부 지진이 그냥 몇 1000도씩 돼가지고 어디 남아나는 것이 있겠습니까? 이런 것은 “사실은 아니로되 진실이다.” 하는 겁니다. 사실은 아닙니다. 세계가 6종으로 진동 하는 것은 사실은 아닙니다. 그러나 진실입니다. 왜냐? 이러한 광경에 우리가 동참 했다고 하면 우리의 마음의 느낌은 최소한도 이럴 것이라는 뜻입니다. 경전을 이해하는데 이런 것이 어렵다는 것이지요.
爾時會中(이시회중)에 그 때 比丘ㆍ比丘尼(비구비구니)와
優婆塞ㆍ優婆夷(우바새우바이)와 天ㆍ龍ㆍ夜叉(천용야차)ㆍ乾闥婆(건달바)ㆍ阿修羅(아수라)ㆍ迦樓羅(가루라)ㆍ緊那羅(긴나라)ㆍ摩睺羅伽ㆍ人ㆍ非人(마후라가인비인)과 及諸小王(급제소왕)과 轉輪聖王(전륜성왕)과 是諸大衆(시제대중).
그리고 여러 대중들이 得未曾有(득미증유). 미증유를 얻었다.
그동안 보지 못하던 것. 그래서 歡喜合掌(환희합장)하고 一心觀佛(일심관불)이야. 야~, 신기하다. 신심이 그냥 넘치는 것이지요.
환희심이 막 나는 것이지요. 저절로 합장이 되고, 저절로 부처님을 우러러 보게 돼요. 一心觀佛이라. 야~, 이것이 어찌된 영문인가?
爾時佛(이시불)이 그 때에 부처님은 지금까지 보다도 더 어마어마한 상서를 펼쳤으니, 그것이 뭐라고요? 放眉間白毫相光(방미간백호상광).
미간백호상 으로부터 방광을 놓았다. 그래서 이 광명이 뭐라고요?
照東方萬八千世界(조동방만팔천세계)하야 靡不周徧(미불주변)이라.
동쪽으로, 동쪽으로 18000세계를 비춰가지고서 두루 하지 않은 데가 없다.
萬八千도 18계를 뜻하는 것이고, 우리들의 온 삶의 영역을 전부 다 지혜의 광명이 골고루 비친다. 광명은 지혜입니다. 지혜는 곧 부처님의 깨달음입니다. 그것을 우리말로 하면, 요즘 표현으로 하면 佛 敎라고 하는 것입니다. 佛敎! 佛 敎를 통해서 우리의 삶의 영역은 전부 지혜의 빛으로 충만해 간다. 충만해 져야 돼요. 이것이 그런 뜻입니다.
부처님은 당신의 부처로서의 표현을 뭐라고요? 지혜로써...
여기는 광명으로써 했고, 그것은 오늘 날 불교라고 하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다가와 있습니다. 불교라고 하는 것으로써 우리의 삶의 전 영역.
六根ㆍ六塵ㆍ六識. 18界. 이 모든 영역을 속속들이 비추는 겁니다.
속속들이 비춰서 어디 비추지 않는 곳이 없다. 靡不周徧이라.
그래야지 무슨 어디서 정말 “방광을 했다.” 누가 뭐 사리에서 “방광을 했다.” “어떤 스님이 열반할 때 방광 했다.” 잠깐 빛 났다한들, 잠깐 몇 초 동안 빛나고 사라진 것. 그것 무슨 소용 있습니까? 빛이 나려면 저 태양 한...
화엄경에서 猶如千日出(유여천일출). 천 개의 태양이 동시에 뜬 듯이 떠가지고, 한 석 달 열흘을 비추든지 그쯤하면 방광을 인정해주지요.
잠깐 뭐 이것이 진짠가? 가짠가? 어떻게 돼서, 햇빛이 어디에 반사돼서 비친 방광인가? 그런 방광 자꾸 선전해봐야 사실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것 별것 아닌 겁니다. 진정 방광의 의미는 이런 것입니다.
불교가 우리의 삶에 들어와서, 삶의 속속 들이를 다 불교의 영향으로 비친다. 그래서 부처님정신으로 살아가는 것.
2 타토(他土)의 상서
下至阿鼻地獄(하지아비지옥)하고
上至阿迦尼吒天(상지아가니타천)하며 於此世界(어차세계)에
盡見彼土六趣衆生(진견피토육취중생)하며 又見彼土(우견피토)에
現在諸佛(현재제불)하고
及聞諸佛所說經法(급문제불소설경법)하며
幷見彼諸比丘比丘尼(병견피제비구비구니)와
優婆塞優婆夷(우바새우바이)의 諸修行得道者(제수행득도자)하며
復見諸菩薩摩訶薩(부견제보살마하살)이 種種因緣(종종인연)과
種種信解(종종신해)와 種種相貌(종종상모)로
行菩薩道(행보살도)하며 復見諸佛(부견제불)이
般涅槃者(반열반자)하며 復見諸佛(부견제불)이
般涅槃後(반열반후)에 以佛舍利(이불사리)로
起七寶塔(기칠보탑)이러라
그 광명이 우리들의 이 세계 사람들에게만 비추는 것이 아니고,
저 세계, 저 먼 세계. 그 당시 인도에 가면 중국도 비추고 한국도 비추고, 동쪽으로니까요. 동쪽으로, 동쪽으로 동쪽은 뭡니까? 해가 뜨는 곳입니다.
또 모든 만물의 근원을 東 이라고 봅니다. 역학에서는요.
해가 뜨는 곳이고, 만물의 근원이기도 하고요. 그런데 그 빛이
下至阿鼻地獄(하지아비지옥)하고 저~~ 제일 밑에 있는 세계를 阿鼻地獄.
지옥의 삶에까지도 부처님의 불교가, 부처님의 이 법화경이 영향을 미친다. 上至阿迦尼吒天(상지아가니타천). 저~~ 위로는 阿迦尼吒天. 아무리 지식이 많고 생활수준이 높고 학식이 높고 돈이 많고 벼슬이 높은 사람들의 삶에까지도, 이 불교라고 하는 것은 전혀 다른 세계이기 때문에 그들에게까지도 크게 영향을 끼친다.
下至阿鼻地獄하고 上至阿迦尼吒天. 有頂天(유정천)입니다. 가장 높은 하늘. 그런데 불교에 하늘이야기가 많잖아요. 어느 하늘을 두고 하늘, 하늘 하는 겁니까? 33천이니 도리천이니 도솔천이니 야마천이니 하는, 그것이 어디 실제로 있어요? 실제 하지도 않으면서 어찌 그렇게 하늘 이름이 많습니까? 이것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전부 意成天(의성천). 그래요. 이런 것도 풀어져야 됩니다. 의식이 만들어 낸 하늘. 우리 의식이 만들어 낸 하늘.
또 意成身(신)도 있어요. 우리 몸도 그렇고 세계도 그렇고 하늘도 그렇고,
우리의식이 만들어 낸 것을 경전에서는 쭉~~ 나열합니다.
옛날에 선정이 깊어가지고, 그 선정이 깊이 들어간 사람들이 자기들 나름대로 만들어 낸 그런 하늘. 그래서 초선천ㆍ2선천ㆍ3선천ㆍ4선천.
선정을 이야기할 때도 그렇게 하늘 天자를 쓰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만치 선정이 높아졌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전부 세계에서 일어나는 이야기지 실제로 우리 다 가 봤잖아요.
오늘 나로호인가 뭐 올라갔지요? 어디 있어요?
무슨 저기 화성ㆍ금성ㆍ토성ㆍ명왕성ㆍ해왕성ㆍ그 외에 저 많고 많은 그런 은하계를 이야기하는 건가요? 아니잖아요. 그러면서도 무수한 하늘 이름이 있습니다.
이것도 우리가 사실은 충분히 해결해야 돼요. 그저 얼버무려 놓고,
“아이 경전에 그렇게 나와 있다.”고 이렇게 얼버무릴 일이 아닙니다.
意成天으로 알면 돼요. 이제 의성천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意成身ㆍ意成天.
전부 우리의식이 만든 겁니다. 저 기독교 같은데서 하나님은 정말 이건 순수하게 意成身ㆍ意成天입니다. 의식이 만들어 낸 神이고, 의식이 만들어 낸
하나님입니다. 실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래도 역사적인 부처님, 석가모니 부처님이 인도 역사에, 불교 빼버리고도 인도 역사에도 나오는 인물이니까 실재 했던 분이지요.
그렇지만 하나님이니 불교에서 천이니 하는 것은 전부 우리 의식이 만들어 낸 것입니다. 그래서 이름을 붙이는 것이지요. 의식이 만들어놓고 이름을 붙이는 것이지요. 그래서 여기서는 사실 속뜻은 어떤 저급한 삶을 살아가는, 지옥 같은 삶을 사는 사람에게도 불교라고 하는 것은 영향을 끼쳐야 되고, 혜택을 입혀야 되고, 아무리 고급 생활을 하는 사람에게까지 라도... 불교는 딴 세계니까요. 삶의 지혜를 가르치는 세계니까 그들에게까지도 영향을 미친다.
於此世界(어차세계)에 盡見彼土六趣衆生(진견피토육취중생)하며,
이 세계에서 = 於此世界에서 다 본다 = 盡見. 저~ 세계. 부처님이 방광해서 그 방광으로 인해서 비추는 그 세계에 있는 六趣衆生들을 다 본다.
又見(우견). 또 본다. 볼 見자가 지금 계속 나옵니다.
彼土(피토)에 現在諸佛(현재제불)이라. 부처님이 계시는 것도 보고,
及聞(급문). 또 듣는다. 諸佛所說經法(제불소설경법)이라. 경을 설하는 것도 듣고, 幷見(병견) = 또 본다. 彼諸比丘比丘尼(피제비구비구니) 저 모든 비구 비구니와 優婆塞優婆夷(우바새우바이)의 諸修行得道者(제수행득도자). 여러 가지 수행해서 도를 얻는 사람들도 본다. 이것은 우리 불교 역사상 쭉~ 부처님으로부터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불교 상식을 떠올리면 아주 간단합니다. 그대로 실지로 다 있었던 일들입니다.
復見諸菩薩摩訶薩(부견제보살마하살), 여러 보살마하살이 種種因緣(종종인연)과 種種信解(종종신해)와 種種相貌(종종상모)로써 行菩薩道(행보살도). 보살도행하는 것도 또 보인다. 지금 저기 양로원이라든지 고아원이라든지 무슨 복지회관이라든지 이런 데에, 또 개인적으로 독거노인들, 또는 무의탁 소년소녀 가장들, 이런 데 다니면서 보살행 아주 잘하고 봉사 잘하는 사람들 얼마나 많습니까? 種種因緣과ㆍ種種信解와ㆍ種種相貌로 行菩薩道한다. 바로 이 이야기입니다. 달리 보살도 있는 것이 아니잖아요.
復見.= 또 보인다. 뭐가요? 諸佛(제불)이 般涅槃者(반열반자). 열반에 든 부처님. 復見諸佛이 般涅槃後(반열반후)에 以佛舍利(이불사리)로써 起七寶塔(기칠보탑)이라. 부처님 사리로써 七寶塔 세우는 것까지도 다 보인다. 광명 속에...
그러니까 이것은 우리가 불교라고 하는 상식을 가지고 있으니까 이런 것 다 알잖아요. 부처님 불지사리가 중국에서 와가지고 어디서 친견법회를 한다. 또 저 미얀마는 불탑이 많다. 또 태국에 불탑이 하~ 얼마나 많다. 이런 것들이 불교라고 하는 상식을 가지고 있으니까 여러분은 T V만 틀면 그런 것만 눈에 보이는 겁니다. 그런데 비불교인은요? 전혀 모릅니다.
불교에 대한 세계 전혀 모릅니다. 우리가 기독교에 대해서 전혀 모르듯이, 그것도 안다면 여러분이 책을 통해서나 어려서 교회를 다녔거나 천주교를 다녔거나, 그 정도 상식이 있으니까 들어오지요.
만약에 그런 상식이 없다면 전혀 모릅니다. 특히 기독교인들은 불교에 대해서 전혀 아는 바가 없습니다. 그들은 공부하는 것이라든지 이런 것을 배제를 하니까요. 배타하니까 전혀 모릅니다. 아는 바 없습니다.
불교라고 하는 것을 통해서 이러한 사실들을 우리는 2천 몇 백 년 동안 불교가 걸어온 그런 모든 사실들을 환하게 알고 있다. 본다. 이것이 그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불교 총론입니다. 불교의 전반적인 것을 전부 다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법화경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여기에 “아란존자가 결집을 했다.” 이런 말씀을 드렸는데 우리는 늘 그렇게 생각을 하고 경전을 대합니다.
학자들과 강당에서 공부하는 우리 신앙인과의 차이점은, 학자들은 대승경전, 뭐 소승경전도 마찬가집니다만, 아함부 경전까지도 부처님이 열반하신지 300년 뒤에 결집이 됐다. 이것이 부처님 친설 인지 뭔지 알 바가 없다. 아함부까지도... 그런데 500년 600년 뒤에 결집이 된 대승경전이야 더 말할 것 있겠는가? 이렇게 경전 성립사적인 입장으로만 딱 이렇게 보고 이야기하는 이들은 학자들의 소견입니다.
그거 다 압니다. 여러분도 잘 알고 저도 그런 사실을 잘 알아요.
그것은 정말 틀림없어요. 하지만, 우리 신심을 가지고 이렇게 공부하는 전통 공부의 자세는 그런 사실이 500년 600년이 아니라, 얼마 전에 우리나라에서 편찬된 천지팔양경까지도, 우리나라에서 편찬된 것입니다 그것은... 또 중국에서 편찬된 목련경ㆍ지장경ㆍ부모은중경. 효도 사상에 맞춰서 편찬된 그런 것까지도 모두가 부처님이 설하신 것이라고 생각하고 읽습니다. 심지어 천지팔양경까지도 ‘부처님이 설하신 것이고 아란존자가 결집을 했다.’ 라고 하는 이 마음으로 우리는 읽는 겁니다.
신앙인은 그것이 다른 겁니다. 학자하고 우리 신앙인하고 다른 점은 그 겁니다. 그 차이... 그래서 그저 ‘이것은 부처님이 설했거니...’ 하고 그렇게 생각을 하고 경을 대하는 이 자세가 아주 중요합니다. 늘 그렇게 해야 합니다. 학자들이 이것은 부처님이 열반하신지 500년 600년 뒤에 어떤 사람이 지어낸 것이다. 그렇더라도, 그렇더라도 부처님이 설하신 것으로... 부처님이 설했다고 다 되어 있으니까요. 부처님이 설하신 것으로 생각하고 하나도 거기에 의심의 여지없이 생각하고 우리가 경전을 대하는 이 자세가 참 중요합니다. 꼭 그렇게 하셔야 됩니다.
학자들이나 교수들이 와가지고 뭐라고, 뭐라고 하~ 이거 뭐 육조단경도 어떤 소설가가 소설로 쓴 거야. 이런 식으로 하는 사람들 많잖아요.
그것 기껏 역사적인 사실. 역사쪼가리 하나 연구해가지고는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는데, 참, 신앙을 가진 사람과, 신앙을 갖지 않은 사람의 차이가 그런 데서 드러납니다. 우습지요? 누가 그걸 모르나요? 하지만 우리는 거기에 한술 더 떠서 그렇더라도 육조스님이 그렇게 설한 것을 곧이곧대로 적어 놓은 것이고, 이것은 부처님이 설하신 것을 곧이곧대로 그대로 적어 놓은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우리가 경을 읽는 겁니다.
누가 이익이 있겠습니까? 누가 소득이 있겠냐고요?
그것 몰라서 그런 것 아니라고요. 경전 발달사를 안 읽어보고 거기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어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 알지요. 알지만 경을 대하는 자세가 우리는 그래야 된다는 것...
七寶塔세우는 것까지도 다 보았다. 그 다음에
3 상서에 대한 의문
이러한 아주 신기한 상서가 일어나는데 여기에 의문이 없을 수가 없다 하는 것입니다.
爾時彌勒菩薩(이시미륵보살)이 作是念(작시념)하되
今者世尊(금자세존)이 現神變相(현신변상)하시니
以何因緣(이하인연)으로 而有此瑞(이유차서)하며
今佛世尊(금불세존)이 入于三昧(입우삼매)하시니
是不可思議(시불가사의)며 現希有事(현희유사)라
當以問誰(당이문수)며 誰能答者(수능답자)오
復作此念(부작차념)하대
是文殊師利法王之子(시문수사리법왕지자)는
已曾親近供養過去無量諸佛(이증친근공양과거무량제불)일새
必應見此希有之相(필응견차희유지상)하리니
我今當問(아금당문)하리라 爾時比丘比丘尼(이시비구비구니)와
優婆塞優婆夷(우바새우바이)와
及諸天龍鬼神等(급제천용귀신등)이 咸作此念(함작차념)하대
是佛光明神通之相(시불광명신통지상)을
今當問誰(금당문수)오하니라
爾時彌勒菩薩(이시미륵보살)이 그 때에 미륵보살이
作是念(작시념)하되 이러한 생각을 하되
今者世尊(금자세존)이 지금 세존께서 現神變相(현신변상). 신통 변화의 모습을 나타내시니, 以何因緣(이하인연)으로, 무슨 인연으로써
而有此瑞(이유차서) 이러한 상서가 있으며, 今佛世尊(금불세존)이 지금 세존께서 入于三昧(입우삼매) 삼매에 들어가셨으니,
是不可思議(시불가사의) 참 이것 불가사의한 것이다.
現希有事(현희유사) 또 희유한 일을 나타냈다.
當以問誰(당이문수) 마땅히 누구에게 물어야할 것이며,
誰能答者(수능답자)오 누가 또 능히 이러한 것에 대해서 해답을 할 것인가? 復作此念(부작차념) 또 이런 생각을 하되, 是文殊師利法王之子(시문수사리법왕지자) 여기에 계시는 문수사리법왕지자는,
已曾親近供養過去無量諸佛(이증친근공양과거무량제불). 이미 일찍이
親近하고 供養했다. 누구를? 과거무량 諸佛을 친근 공양했을 세.
必應見此希有之相(필응견차희유지상)하리니, 반드시, 응당히 이 희유한 모습들을 틀림없이 보았을 것이다. 應見 = 틀림없이 보았을 것이다.
‘저렇게 경험 많고 역사가 깊은 문수보살이야 다 알 것 아닌가?
문수는 뭐라고요? 智慧. 지혜가 뛰어나신 분이고, 지혜를 상징하는 분이니까 문수보살에게 묻고자 하는 그런 그 경전으로써의 안배가 아주 빼어납니다. 그래서 이미 일찍이 이러한 사실을 다 안다.
我今當問(아금당문)하리라 내가 지금 마땅히 그에게 물으리라.
爾時 = 그때 比丘ㆍ比丘尼(이시비구비구니)와 優婆塞ㆍ優婆夷(우바새우바이)와 그리고 모든 及諸天ㆍ龍ㆍ鬼神等(급제천용귀신등)이 咸作此念(함작차념)이라. 다 이런 생각을 했다. 是佛光明神通之相(시불광명신통지상)을
부처님의 광명과 신통의 모습을 今當問誰(금당문수). 지금 마땅히 누구에게 물어야 할 것인가? 대중들이 전부 그런 상서로움이 나타났는데,
이것을 좀 알아야 되겠다. 그런 궁금증은 누구나 다 가지고 있겠지요.
그런 마음이지요. 그런 상서에 대한 질문입니다.
4 상서에 대한 질문
爾時彌勒菩薩(이시미륵보살)이 欲自決疑(욕자결의)하며
又觀四衆(우관사중)인 比丘比丘尼(비구비구니)와
優婆塞優婆夷(우바새우바이)와
及諸天龍鬼神等衆會之心(등급제천용귀신등중회지심)하사
而問文殊師利言(이문문수사리언)하사대 以何因緣(이하인연)으로
而有此瑞神通之相(이유차서신통지상)하시며
放大光明(방대광명)하사
照于東方萬八千土(조우동방만팔천토)하시며
悉見彼佛國界莊嚴(실견피불국계장엄)이닛고
爾時彌勒菩薩(이시미륵보살) 그 때에 미륵보살이 欲自決疑(욕자결의)하며 스스로의 의심을 해결하기도 하고, 又觀四衆(우관사중) 또 사부 대중인 比丘ㆍ比丘尼(비구비구니)와 優婆塞ㆍ優婆夷(우바새우바이)와 及諸天ㆍ龍ㆍ鬼神等ㆍ衆會之心(등급제천용귀신등중회지심) 모든 衆會의 마음을 살피사, 그래서 而問文殊師利言(이문문수사리언) 문수사리에게 물어 말하되,
以何因緣(이하인연)으로 무슨 인연으로 而有此瑞神通之相(이유차서신통지상) 이와 같은 상서와 신통의 모습이 있습니까? 그리고
放大光明(방대광명) 큰 광명은 어째서 저렇게 놓습니까? 그리고
照于東方萬八千土(조우동방만팔천토) 동방으로 18000 국토를 저렇게 비추는데, 그리고 그 비추는데서 悉見彼佛國界莊嚴(실견피불국계장엄)이닛고
온갖 세계의 장엄을 다 볼 수 있게 되는데 이것이 어찌된 심판입니까?
이렇게 물은 겁니다. 그러면서 게송으로 거듭 설하지요.
상서에 대한 질문. 차토에 대한 상서. 타토에 대한 상서하는데 여기 자세한 내용들은 쭉~ 이렇게 많이 세세하게 소개 되어있습니다.
뭐 차토에 대한 상서는 그렇고, 타토에 대한 상서에 보면 그 동안 우리 불교사에서 쭉~ 걸어오면서 예를 들어서 어떤 법문을 설하시고, 또 누구는 보시를 하고 지계를 하고 인욕을 하고 하는 그런 내용들이 여기 게송으로, 중송이지만 게송으로 쭉~ 이렇게 됐습니다.
又見菩薩(우견보살)하니 또 보니 보살들은 勇猛精進(용맹정진)하고
고요한데 깊은 산중에 들어가 있기도 하는 사람. 또 참선하고 있는 사람.
경전을 읽는 사람. 외우는 사람. 또 경을 설하는 사람. 또 법의 북을 치는 사람. 별의별 그런 수행의 모습들. 이것은요. 책을 안 봐도 그 동안 불교 2600년 역사 속에 우리 불자들이 승속을 막론하고, 불자들이 불교에 의해서 살아온 모든 모습들. 이 뜻입니다. 불교에 의해서 살아온 모든 모습들을 여기에 게송에서 아주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알고 넘어갑니다.
5 게송으로 거듭 설하다
(1) 상서에 대한 질문
<1> 차토에 대한 상서
於是彌勒菩薩(어시미륵보살)이 欲重宣此義(욕중선차의)하사
以偈問曰(이게문왈)
文殊師利(문수사리)여 導師何故(도사하고)로
眉間白毫(미간백호)에 大光普照(대광보조)하시며
雨曼陀羅(우만다라)와 曼殊沙華(만수사화)하시며
栴檀香風(전단향풍)이 悅可衆心(열가중심)하니
以是因緣(이시인연)으로 地皆嚴淨(지개엄정)하며
而此世界(이차세계)가 六種震動(육종진동)하니
時四部衆(시사부중)이 咸皆歡喜(함개환희)하사
身意快然(신의쾌연)하야 得未曾有(득미증유)닛고
<2> 타토에 대한 상서
眉間光明(미간광명)이 照於東方(조어동방)
萬八千土(만팔천토)하사 皆如金色(개여금색)하시며
從阿鼻獄(종아비옥)하야 上至有頂(상지유정)히
諸世界中(제세계중)에 六道衆生(육도중생)의
生死所趣(생사소취)와 善惡業緣(선악업연)과
受報好醜(수보호추)를 於此悉見(어차실견)하며
又覩諸佛(우도제불) 聖主師子(성주사자)가
演說經典(연설경전)이 微妙第一(미묘제일)하며
其聲淸淨(기성청정)하야 出柔軟音(출유연음)하야
敎諸菩薩(교제보살) 無數億萬(무수억만)하며
梵音深妙(범음심묘)하야 令人樂聞(영인락문)하며
各於世界(각어세계)에 講說正法(강설정법)하며
種種因緣(종종인연)과 以無量喩(이무량유)로
照明佛法(조명불법)하야 開悟衆生(개오중생)하며
若人遭苦(약인조고)하야 厭老病死(염노병사)어든
爲說涅槃(위설열반)하야 盡諸苦際(진제고제)하며
若人有福(약인유복)하야 曾供養佛(증공양불)하고
志求勝法(지구승법)하면 爲說緣覺(위설연각)하며
若有佛子(약유불자)가 修種種行(수종종행)하야
求無上慧(구무상혜)하면 爲說淨道(위설정도)하시니
文殊師利(문수사리)여 我住於此(아주어차)하야
見聞若斯(견문약사)하며 及千億事(급천억사)가
如是衆多(여시중다)하니 今當略說(금당약설)하리다
我見彼土(아견피토)에 恒沙菩薩(항사보살)이
種種因緣(종종인연)으로 而求佛道(이구불도)하니
或有行施(혹유행시)하대 金銀珊瑚(금은산호)와
眞珠摩尼(진주마니)와 硨磲瑪瑙(차거마노)와
金剛諸珍(금강제진)과 奴婢車乘(노비거승)과
寶飾輦輿(보식연여)로 歡喜布施(환희보시)하야
廻向佛道(회향불도)하고 願得是乘(원득시승)의
三界第一(삼계제일)인 諸佛所歎(제불소탄)이며
或有菩薩(혹유보살)은 駟馬寶車(사마보거)와
欄楯華蓋(난순화개)와 軒飾布施(헌식보시)하며
復見菩薩(부견보살)은 身肉手足(신육수족)과
及妻子施(급처자시)하야 求無上道(구무상도)하며
又見菩薩(우견보살)은 頭目身體(두목신체)로
欣樂施與(흔락시여)하야 求佛智慧(구불지혜)니다
文殊師利(문수사리)여 我見諸王(아견제왕)이
往詣佛所(왕예불소)하야 問無上道(문무상도)하고
便捨樂土(변사낙토)와 宮殿臣妾(궁전신첩)하고
剃除鬚髮(체제수발)하야 而被法服(이피법복)하며
或見菩薩(혹견보살)은 而作比丘(이작비구)하야
獨處閑靜(독처한정)하야 樂誦經典(낙송경전)하며
又見菩薩(우견보살)은 勇猛精進(용맹정진)하야
入於深山(입어심산)하야 思惟佛道(사유불도)하며
又見離欲(우견이욕)한이는 常處空閑(상처공한)하야
深修禪定(심수선정)하야 得五神通(득오신통)하며
又見菩薩(우견보살)은 安禪合掌(안선합장)하야
以千萬偈(이천만게)로 讚諸法王(찬제법왕)하며
復見菩薩(부견보살)은 智深志固(지심지고)하야
能問諸佛(능문제불)하고는 聞悉受持(문실수지)하며
又見佛子(우견불자)는 定慧具足(정혜구족)하야
以無量喩(이무량유)로 爲衆講法(위중강법)하고
欣樂說法(흔락설법)하야 化諸菩薩(화제보살)하며
破魔兵衆(파마병중)하고 而擊法鼓(이격법고)하며
又見菩薩(우견보살)은 寂然宴黙(적연연묵)하야
天龍恭敬(천용공경)을 不以爲喜(불이위희)하며
又見菩薩(우견보살)은 處林放光(처림방광)으로
濟地獄苦(제지옥고)하야 令入佛道(영입불도)하며
又見佛子(우견불자)는 未嘗睡眠(미상수면)하고
經行林中(경행임중)하야 勤求佛道(근구불도)하며
又見具戒(우견구계)한이는 威儀無缺(위의무결)하대
淨如寶珠(정여보주)하야 以求佛道(이구불도)하며
又見佛子(우견불자)는 住忍辱力(주인욕력)하야
增上慢人(증상만인)이 惡罵捶打(악매추타)라도
皆悉能忍(개실능인)하야 以求佛道(이구불도)하며
又見菩薩(우견보살)은 離諸戱笑(이제희소)와
及癡眷屬(급치권속)하고 親近智者(친근지자)하야
一心除亂(일심제난)하고 攝念山林(섭념산림)을
億千萬歲(억천만세)하야 以求佛道(이구불도)하며
或見菩薩(혹견보살)은 餚饍飮食(효선음식)과
百種湯藥(백종탕약)으로 施佛及僧(시불급승)하며
名衣上服(명의상복)이 價直千萬(가직천만)과
或無價衣(혹무가의)로 施佛及僧(시불급승)하며
千萬億種(천만억종)인 旃檀寶舍(전단보사)와
衆妙臥具(중묘와구)로 施佛及僧(시불급승)하며
淸淨園林(청정원림)에 華果茂盛(화과무성)하면
流泉浴池(유천욕지)로 施佛及僧(시불급승)하대
如是等施(여시등시)가 種種微妙(종종미묘)를
歡喜無厭(환희무염)하야 求無上道(구무상도)하며
或有菩薩(혹유보살)은 說寂滅法(설적멸법)하야
種種敎詔(종종교조) 無數衆生(무수중생)하며
或見菩薩(혹견보살)은 觀諸法性(관제법성)이
無有二相(무유이상)이 猶如虛空(유여허공)하며
又見佛子(우견불자)는 心無所着(심무소착)하야
以此妙慧(이차묘혜)로 求無上道(구무상도)하니라
文殊師利(문수사리)여 又有菩薩(우유보살)은
佛滅度後(불멸도후)에 供養舍利(공양사리)하며
又見佛子(우견불자)는 造諸塔廟(조제탑묘)
無數恒沙(무수항사)하야 嚴飾國界(엄식국계)하대
寶塔高妙(보탑고묘)하야 五千由旬(오천유순)이며
縱廣正等(종광정등)히 二千由旬(이천유순)이라
一一塔廟(일일탑묘)에 各千幢幡(각천당번)이며
珠交露幔(주교로만)에 寶鈴和鳴(보령화명)하면
諸天龍神(제천용신)과 人及非人(인급비인)이
香華伎樂(향화기악)으로 常以供養(상이공양)하며
文殊師利(문수사리)여 諸佛子等(제불자등)이
爲供舍利(위공사리)하야 嚴飾塔廟(엄식탑묘)하면
國界自然(국계자연)히 殊特妙好(수특묘호)하대
如天樹王(여천수왕)이 其華開敷(기화개부)하니라
(2) 답변을 청하다
佛放一光(불방일광)하시니 我及衆會(아급중회)가
見此國界(견차국계)의 種種殊妙(종종수묘)하니
諸佛神力(제불신력)과 智慧希有(지혜희유)라
放一淨光(방일정광)하사 照無量國(조무량국)하시니
我等見此(아등견차)하고 得未曾有(득미증유)니다
佛子文殊(불자문수)여 願決衆疑(원결중의)하소서
四衆欣仰(사중흔앙)하사 瞻仁及我(첨인급아)니다
世尊何故(세존하고)로 放斯光明(방사광명)이닛고
佛子時答(불자시답)하사 決疑令喜(결의영희)하소서
何所饒益(하소요익)으로 演斯光明(연사광명)이닛고
佛坐道場(불좌도량)하사 所得妙法(소득묘법)을
爲欲說此(위욕설차)닛가 爲當授記(위당수기)닛가
示諸佛土(시제불토)에 衆寶嚴淨(중보엄정)하며
及見諸佛(급견제불)하니 此非小緣(차비소연)이니다
文殊當知(문수당지)하소서 四衆龍神(사중용신)이
瞻察仁者(첨찰인자)하나니 爲說何等(위설하등)이닛고
그리고 답변을 청하지요. 아까 산문 부분에서 있었습니다만,
문수보살에게 “무슨 인연으로 이런 것을 하십니까? 답을 좀 해주십시오.” 라고 간청을 해요. 그러니까 그 다음에 三 문수보살의 답변 해서,
생각으로 답변하다 해놨어요.
三 문수보살의 답변
1 생각으로 답변하다
爾時文殊師利(이시문수사리)가
語彌勒菩薩摩訶薩(어미륵보살마하살)과
及諸大士(급제대사)하사대 善男子等(선남자등)아
如我惟忖(여아유촌)컨대 今佛世尊(금불세존)이
欲說大法(욕설대법)하사 雨大法雨(우대법우)하며
吹大法螺(취대법라)하며 擊大法鼓(격대법고)하며
演大法義(연대법의)시니라
爾時文殊師利(이시문수사리) 그 때에 문수사리가
語彌勒菩薩摩訶薩(어미륵보살마하살)과 그리고 及諸大士(급제대사) 모든 大士. 여기는 보살을 大士로 바로 바꿔 놨네요. 大士에게 말하되,
善男子等(선남자등)아 如我惟忖(여아유촌)컨대 내가 생각하는 바와 같아서는, 내 생각과 같아서는 今佛世尊(금불세존)이 欲說大法(욕설대법)하사
雨大法雨(우대법우)ㆍ吹大法螺(취대법라)ㆍ擊大法鼓(격대법고)ㆍ演大法義(연대법의). 줄그어야 돼요.
今佛世尊이 欲說大法부터 이것은 밑줄 쫙~ 입니다.
지금 부처님 세존께서 큰 법을 설하고자 한다. 큰 법의 비를 막 퍼붓고자 한다. 큰 법의 소라를 막 불고자 한다. 큰 법의 북을 둥둥둥둥 말 울리려고 한다.
그리고 큰 법의 도리를 연설하려고 한다. 그것 밖에 더 있느냐?
부처님이 하실 일은 그 것 뿐이지 뭐 있느냐 이겁니다. 그런데 그 수식이 참 근사하지요. “결국은 부처님이 법문 하려고 하겠지.” 이렇게 한 마디 하면 될 것을, “부처님 할 줄 아는 것이 뭐 있어? 법문 밖에... 법문 하려고 하시겠지.” 이렇게 말 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아~! 근사하잖아요. 欲說大法하사
雨大法雨ㆍ吹大法螺ㆍ擊大法鼓ㆍ演大法義. 우리는 이런 것을 읽으면서 그냥 즐거워하고, 환희심이 그냥 넘치고 그래야 돼요.
뜻이야 뭐 법문 하시려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법화경의 법문은, 제가 처음부터 말씀 드렸지만, 다른 경전의 법문하고 다릅니다.
달라서 이렇게 수식을 할 수 밖에 없어요. 법화경의 내용을 안 이상은 이것 가지고도 부족해요.
큰 법의 깃발을 세우려고 하시는가 보다. 큰 법의 말뚝을 박으려고 하시는가 보다. 큰 법의 비행기를 아마 하늘에다 띠우려고 하시는가 보다.
큰 법의 배를 바다에다 띄우려고 하시는가 보다. 뭐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여러분도 한 번 지어내서 여기다 붙여 보세요.
경전의 맛이라고 하는 것. 또 경전을 이렇게 이해를 하면서 거기서 우리가 재미를 들이고, 신심이 나고 맛을 들이는 방법이 그런 겁니다.
그래서 사람, 사람마다 다 본래로 아주 뛰어난 그런 지혜의 뿌리가 여러분에게 다 있습니다. 곰곰이 생각하다가 읽다가 생각이 번쩍 떠오르거든 거기다 메모하세요. 메모해서 좀 더 깊은 뜻을 거기서 찾아내면 좋지요.
2 옛날 일을 간단히 말한다
생각은 그렇게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과거에 경험이 많은 분이다 보니까 옛날에 어떤 부처님도 이와 같은 사례가 있었다 이 말입니다.
그 사례를 여기서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이지요.
諸善男子(제선남자)야 我於過去諸佛(아어과거제불)에
曾見此瑞(증견차서)하니 放斯光已(방사광이)에
卽說大法(즉설대법)일새 是故當知(시고당지)하라
今佛現光(금불현광)도 亦復如是(역부여시)하야
欲令衆生(욕령중생)으로
咸得聞知一切世間難信之法(함득문지일체세간난신지법)일새
故現斯瑞(고현사서)니라
諸善男子(제선남자)야 我於過去諸佛(아어과거제불)에
曾見此瑞(증견차서)하니 일찍이 이러한 상서를 보았다.
放斯光已(방사광이)에 이 광명을 놓은 뒤에 卽說大法(즉설대법)일새 큰 법을 설했을 세. 是故로 當知(시고당지)하라 이러한 까닭에 마땅히 알아라.
今佛現光(금불현광)도 지금 부처님께서 광명을 놓는 것도 亦復如是(역부여시)해서 欲令衆生(욕령중생) 중생으로 하여금 咸得聞知一切世間難信之法(함득문지일체세간난신지법)일새 모두모두 모든 세상에서 믿기 어려운 법을 듣고 알도록 하기 위함일세. 故現斯瑞(고현사서)니라 그런 까닭에 이러한 상서를 나타내신 것이라고 본다.
이것이 難信之法입니다. 一切世間難信之法. 밑줄 그어야 됩니다.
왜 난신지법이냐? 세속적인 안목과 세속적인 가치관으로, 이것이 세속에 살든 출가해서 살든 관계없습니다. 여기의 대상은 1강-2 법회청중에서 보았듯이, 현상적으로 다종다양한 그런 차별은 무시합니다.
本來人. 사람ㆍ사람의 궁극적 차원을 두고 법화경을 설하니까요.
그래서 세속적인 가치관. 또는 세속적인 안목. 또는 세속적인 어떤 사고 가지고는 이해하기 어렵다. 뭐가 그렇게 이해하기 어려우냐?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법화경은 제가 편찬서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인불사상입니다. 사람이 그대로 부처님이다 하는 그런 사상을 법화경에 담고 있습니다. 여기는 참선도 권하지 않고, 염불도 권하지 않고, 주력이나 무슨 선정을 닦는 이런 것 절대 권하지 않습니다. 6바라밀도 권하지 않아요.
그런 것은 저 하수들이나 하는 것이다. 왜냐? 본래로 사람이 완전무결한데 더 할 것이 없다 이겁니다. 더 할 것이 없는 완전무결한 그 사실을 알면 끝이다 이겁니다. 공부 끝이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그 동안 공부 해온 불교. 그런 것 아니잖아요.
열심히 6바라밀 닦아야 되고, 계를 청정히 가져야 되고, 참선 열심히 해야 되고, 기도 열심히 해야 되고, 간경도 열심히 해야 되고,
저기 孤峯獨宿(고봉독숙). 높은 봉우리에 가서 홀로 자면서 용맹정진, 아주 難行苦行(난행고행)을 해야 되고, 이렇게 하고 온갖 욕심 다 버려야 되고, 貪ㆍ嗔ㆍ癡(탐진치)3독 말할 것도 없이 다 버려야 되는 줄 알고 가르치는 그런 불교를 지금 알고 있습니다. 우리 그 동안 그런 불교 배웠어요.
그래야 비로소 부처 저~~ 꼬리 끝을 조금 볼 수 있을까 말까다.
그래도 부처 몸통은 못 보고, 부처님꼬리 끝을 조금 볼 수 있을까 말까다. 수십 년 참선하고, 수십 년 기도하고, 수십 년 용맹정진 해야 그리고 온갖 貪ㆍ嗔ㆍ癡 3독과 번뇌 망상을 다 버려야 겨우 부처님꼬리 끝을 조금 볼 수 있을까 말까 할 정도라고 우리는 그동안 그렇게 알았잖아요. 그렇게 가르칩니다. 모든 불교는 다 그렇게 가르칩니다.
그러나 법화경 불교는 그것이 아닙니다.
법화경 불교는 현재 있는 그 모습 그대로, 조금도 뜯어고칠 것이 없고, 더 수행할 것도 없고, 닦을 것도 없고, 본래 이미 갖추고 있는 그 모습 그대로 완전무결한 부처의 삶이라고 가르치기 때문에, 그래서 一切世間難信之法(일체세간난신지법)입니다. 세속적인 가치관.
그것은 뭔가 하면 有爲法(유위법)입니다. 세속적인 가치관이라고 하는 것은 有爲法입니다. 참선을 해야 된다. 수행을 해야 된다. “해야 된다.”라고 하는 것은 전부 有爲法입니다. 이 유위법으로써만이 성불이 가능 하다고 이렇게 가르치는 것이 세속적인 가치관입니다.
이것이 세속적인 가치관입니다. 무슨 돈 좋아하고 명예 좋아하고 하는,
그것도 물론 세속적이지만, 여기서는 세속적인 것의 그런 차원은 그것은 이야기할 것도 없고요. 그것은 저~기 도덕 교과서에서나 하는 소리고요.
법화경에서 세속적인 가치관. 一切世間이라고 하는 이 세속적인 가치관은 有爲法(유위법)을 두고 하는 소리입니다. 수행해야 된다. 닦아야 된다.
참아야 된다. 욕심 부려서는 안 된다. 온갖 번뇌 버려야 된다고 하는 이런 有爲法을 두고 하는 소리입니다.
그런 상식에 떨어져 있는 불교인은 이해하기 어렵다. 법화경을 이해하기 어렵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어마어마한 법입니다. 이것이 놀랄만한 일입니다.
보통일 아니잖아요. 그동안 번뇌ㆍ貪ㆍ嗔ㆍ癡 3독 다 버려야 되고 닦아야 되고, 불교 라디오만 켜든지 T V만 켜든지 천하의 법사란 법사는 전부 그렇게 가르칩니다. 어디든지 가서 여러분도 그렇게 가르칠 겁니다.
번뇌를 없애야 된다. 삼독을 없애야 된다. 욕심을 없애야 된다.
그래서 답을 얻은 사람 있나요? 욕심 없는 사람 있나요? 그것이 누군데요? 그래서 성불한 사람 있나요? 한 번 살펴보세요. 없습니다.
그것은 답이 없는 문제일 뿐입니다. 답이 없는 문제입니다.
그런 문제만 내놓고 아무도 책임 못 져요. 참선해서 성불한다?
참선해서 성불한 사람 누가 있어요? 여름 한 철 동안 100개의 선원에서 2500명의 스님들이 참선을 해요. 프로만 그렇고, 아마추어는 만 명이 넘습니다. 요즘 시민 선방에서 아마추어 禪客(선객)도 만 명이 넘어요.
그러면 닭이 1000마리면 봉이 한 마리여야 되는데, 최소한도 한 철에 두 명씩은 깨달은 사람이 나와야 돼요, 프로에서는... 답이 어디 있어요? 50년을 제가 지켜봤지만 한 사람도 나온 적이 없어요.
그냥 할 뿐입니다. 하는 것뿐이라고요.
본래 부처입니다.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어요. 해서 달라지는 것 아무 것도 없어요. 이것은 분명히 법화경에 근거해서 하는 소리입니다.
그런 어마어마한 내용입니다. 그 동안의 기존의 불교하고는 법화경은 천지차이입니다. 그래서 법화경의 大義(대의)를 會三歸一(회삼귀일). 그러지요. 三乘(삼승). 온갖 다종다양한 삶의 모습을 三이라고 표현합니다. 저기는 성문ㆍ연각ㆍ보살을 三이라고 말하지만, 그 三은 무한대 三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런 각양각색의 모습들.
참선을 하든지 무슨 장사를 하든지 그런 것이 전부 저 三에 다 해당됩니다. 그 모든 다종다양한 삶의. 지옥의 삶도 저 三 속에 들어가요.
천상의 삶도 三 속에 들어가고요.
그런 다종다양한 삶의 모두가 一佛乘(일불승). 하나의 부처의 삶이라고 하는 것으로써 전부 귀결이 된다. 전부 감싸 안는 겁니다. 전부 포용 다합니다. 배척하는 것이 아닙니다. 너는 장사를 하니까ㆍ너는 도적질을 하니까ㆍ너는 사기나 치니까 아닙니다. 절대 배척 아니 하고 전부 감싸 안아서, 그래 너는 사기나 치는 부처님이야ㆍ너는 도적질 하는 부처님이야ㆍ너는 싸움을 하는 부처님이야ㆍ너는 아주 욕심꾸러기 부처님이야ㆍ명예만 좋아하는 부처님이야ㆍ돈만 좋아하는 부처님이야. 전부 부처님으로 귀결시키는 것이 會三歸一. 법화경의 도리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진정으로 내가 욕심이 많고 명예를 좋아한다.
그런데 진정으로 내가, 나는 욕심이 많은 부처님이요ㆍ명예를 좋아하는 부처님이요ㆍ돈 좋아하는 부처님이요. 진실로 그렇게 아는 사람은, 그렇게 아는 사람은 어떻게 되겠어요? 무슨 욕심 부리겠어요?
부처님이면 다지, 더 이상 무슨 세속적인 욕심 그렇게 부릴 까닭이 있습니까? 없어요. 문제가 자동해결입니다. 문제 자동해결. 모든 문제가 자동해결이지요.
그래서 여기서 大法螺(대법라)ㆍ大法鼓(대법고)ㆍ大法雨(대법우). 이런 표현을 할 만합니다. 법화경은요. 그런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법화경을 알아야 불교를 알지, 그 외에 그동안 공부해온 불교는요.
사실은 불교의 10분의1 불교도 안 됩니다. 결론을 못 얻었기 때문에, 결론에 도달하지 아니한 강론은 그것은 하나마나한 겁니다.
아무리 서론이 길어봐야 소용없어요. 마찬 가지로 이 법화경은 불교의 결론. 결론에 해당되는 것이고, 그 결론은 방편 불교를...
저 三乘은 전부 방편이잖습니까?
방편 불교를 다 감싸 안아가지고 포용을 해서 전부 부처의 삶으로 귀결시키는 그런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有爲法(유위법). 번뇌를 없애야 된다. 탐욕을 버려야 된다. 계행을 지켜야 된다. 뭐 어째야 된다.
그래야 성불 한단다 하는 그런 유위법으로써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
一切世間難信之法(일체세간난신지법). 믿기 어려운, 유위법으로써는 믿기 어려운 법이다. 그 이야기입니다. 그것이 쭉~~ 일관되게, 시종일관 그러한 내용으로 연결 될 겁니다. 그래서 법화경은 受記經(수기경)이라고도 해요. 受記經...수기가 많아요. 부처님이 열반을 앞두고...
뒤에 그런 말이 나오지만, 열반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하신 설법이 이 법화경입니다. 그럼 유언이에요. 그리고 늘 가슴속에 남겨 두었던 최후의 한 말씀입니다. 이 법화경이요. 그래서 이것이 쉽게 이해가 안 된다.
그래서 그러한 법을 설하려고 이러한 상서를 나타냈다 하는 그런 내용입니다.
묘법연화경 강좌 제1강-4
- 교육원 불교전문강당 2009. 08. 25 -
三 문수보살답변
3 옛날 일을 자세히 말함
(1) 최초의 일불(一佛)
諸善男子(제선남자)야
如過去無量無邊不可思議阿僧祗劫(여과거무량무변불가사의아승
지겁)에 爾時有佛(이시유불)하시니
號 日月燈明如來 應供 正徧知 明行足 善逝 世間解 無上士
調御丈夫 天人師 佛 世尊(호일월등명여래응공정변지명행족
선서세간해무상사조어장부천인사불세존)이라
演說正法(연설정법)하사대 初善中善後善(초선중선후선)이라
其義深遠(기의심원)하며 其語巧妙(기어교묘)하야
純一無雜(순일무잡)하며
具足淸白梵行之相(구족청백범행지상)이라
爲求聲聞者(위구성문자)하야 說應四諦法(설응사제법)하야
度生老病死(도생노병사)하고 究竟涅槃(구경열반)하며
爲求辟支佛者(위구벽지불자)하야
說應十二因緣法(설응십이인연법)하며 爲諸菩薩(위제보살)하야
說應六波羅密(설응육바라밀)하야
令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영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하야
成一切種智(성일체종지)니라
諸善男子(제선남자)야 예컨대
如過去無量無邊ㆍ不可思議ㆍ阿僧祗劫(여과거무량무변불가사의아승지겁)에 爾時有佛(이시유불)하시니 그 때에 부처님이 계셨으니,
이름이 뭐라고요? 號日 月 燈 明如來ㆍ應供ㆍ正徧知ㆍ明行足ㆍ善逝ㆍ世間解ㆍ無上士ㆍ調御丈夫ㆍ天人師ㆍ佛 世尊(호일월등명여래 응공 정변지 명행족 선서 세간해 무상사 조어장부 천인사 불 세존)이다.
日 月 燈 明如來. 日도 빛이요. 月도 빛이요. 燈도 빛이요. 明도 빛입니다. 뭡니까? 지혜의 빛입니다. 지혜의 빛을 말하는 겁니다.
그런 부처님이 계셔서 演說正法(연설정법)하사대 정법을 연설하사대,
初善中善後善(초선중선후선)이라 참~ 제가 좋아하는 말. 初善ㆍ中善ㆍ後善. 인간과 인간관계도 그렇고, 우리가 공부하는 것도 그렇고, 절을 짓는 것도 그렇고, 절 운영하는 것도 그렇고, 소임 사는 것도 그렇고 모두가 初善ㆍ中善ㆍ後善. 그래서 그것이 어려우니까 중간에 가면 해이 해지고, 사람의 관계가 소원 해지고하니까 “初心으로 돌아가자.” 초심이야기 참 많이 하지요? 初善ㆍ中善ㆍ後善이라. 부처님의 설법은 그렇다는 것입니다.
其義深遠(기의심원)이라. 그 뜻이 심원하며 其語巧妙(기어교묘)라.
그 말이 巧妙해요. 아주 능수능란해요. 그것을 巧妙라고 그래요.
우리가 알고 있는 교묘 라는 말 하고는 달라요. 아주 아름답고 능숙하다. 이 뜻입니다. “능숙하고 아름답다.” 그리고 純一無雜(순일무잡)이야.
純一無雜. 참 좋은 말이지요. 純一無雜. 법화경 공부할 때는 법화경 생각만 하지, 온갖 망상이 끼어들어 가지고 雜(잡)이 막 섞여버리면 공부가 제대로 안 되지 않습니까?
부처님의 설법은 그것 참, 저희도 가끔 딴 길로 헤맬 때가 있지만,
스님들 법문 하는 것을 가만히 들어보면, 처음에는 그럴듯하게 시작해놓고는 그냥 딴 데로 갑니다. 저기 가지에서 가지치고, 가지에서 또 가지 쳐가지고 그만 돌아올 줄 모르는 겁니다. 잡탕이 얼마나 많이 섞여버리는지 순수하지가 않아요. 그 주제대로 쭉~ 이야기가 걸어 나가야 할 텐데, “법화경” 하면 계속 법화경만 이야기되어야 되거든요.
그것이 純一無雜입니다. 스님들, 어디 법회 많이 하시지요? 법회 할 때도 그렇고, 시종일관 참 純一無雜. 좋은 말입니다. 그리고
具足淸白梵行之相(구족청백범행지상)이라. 淸白. 맑고 희고 청정한 범행을, 相을 구족해요. 爲求聲聞者(위구성문자)하야 성문을 구하는 사람을 위해서 說應四諦法(설응사제법). 그 사람들에게 맞추어서 四諦法을 설해서 度生老病死(도생노병사)하고, 생ㆍ노ㆍ병ㆍ사를 제도하고, 그래서
究竟에 涅槃(구경열반)케 하며, 爲求辟支佛者(위구벽지불자)하여,
벽지불을 구하는 자를 위해서는 說應十二因緣法(설응십이인연법).
十二因緣法을 맞추어 가지고서 설하고, 爲諸菩薩(위제보살)하야, 보살을 위해서는 說應六波羅密(설응육바라밀). 六波羅密을 설했다.
그래서 모두들 令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영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게 해서 成一切種智(성일체종지). 一切種智를 이루게 하니라. 그랬습니다. 이것이 최초의 일불. 日月燈明부처님 이야기입니다. 뭐라고요?
過去無量無邊ㆍ不可思議ㆍ阿僧祗劫전에, 아주, 아주 오래 수 억만 년 전에, 이렇습니다. 수 억만 년이 뭡니까? 이 지구의 역사가 얼마지요?
몇 백억. 생물의 역사. 생명의 역사는 60억. 인간의 역사는 기껏해야 3만 년. 지금까지 밝혀진 것으로 그 정도밖에 안 됩니다. 그런데 여기 뭐라고요?
無量無邊ㆍ不可思議ㆍ阿僧祗劫 전에 부처님이 계셨다. 이랬어요.
이것은 뭔가 하니, 궁극적 차원. 우리들의 궁극적 차원. 우리 本來人의 차원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생사를 초월하고 역사성을 초월하고, 지금 눈앞에 보이는 우리 각양각색의 얼굴의 모습을 초월한 세계입니다. 바로 그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잖아요. 근사하잖아요. 이것이 실제로 뭡니까? 無量無邊ㆍ不可思議ㆍ阿僧祗劫전에, 몇 년 전일까? 석가모니부처님께도 참 위대했었고, 학교에서 배우기는 인류의 역사는 기껏해야 6000년? 그 동안 그렇게 알았지요?
요즈음 무슨 뼈 같은 것이 많이 발굴 되어서 원시인의 뼈 발굴 된 것이 분석해보면 한 3만 년. 3만 년 전의 사람의 뼈가 더러 발견되기도 하잖아요. 기껏해야 3 ~ 4만 년입니다. 생명의 역사는 지구가 처음에 생겨가지고, 식고 그리고 비가 오고 그래서 물이 고이고 거기서 미물이 생기기 시작한 그런 역사는 한 60억 년, 그 정도밖에 안 되잖아요. 이런 말과 어떻게 풀어야 돼요? 세상에서 배운 우리 과학적인 지식하고요. 불교는 그것이 빗나가면 안 돼요. 틀림없이 이것은 그런 사실을 모른 사람이 설한 것이 아닙니다. 다 알고 설했는데 뭔가 의미하는 점이 있다 이겁니다.
뭔가 깊은 의미가 있다. 바로 그것입니다. 本來人의 차원을 두고 이해하면 이것이 다 풀립니다. 궁극적 차원. 부처라고 해도 좋고, 사람이라고 해도 좋고요.
그 다음에 중간의 이만불(二萬佛) 그랬어요.
(2) 중간의 이만불(二萬佛)
次復有佛(차부유불)하시니 亦名日月燈明(역명일월등명)이며
次復有佛(차부유불)하시니 亦名日月燈明(역명일월등명)이라
如是二萬佛(여시이만불)이 皆同一字(개동일자)시니
號日月燈明(호일월등명)이며 又同一姓(우동일성)이시니
姓頗羅墮(성파라타)니라 彌勒當知(미륵당지)하라
初佛後佛(초불후불)이 皆同一字(개동일자)시니
名日月燈明(명일월등명)이며 十號具足(십호구족)하시고
所可說法(소가설법)은 初中後善(초중후선)이니라
次復有佛(차부유불)하니 또 부처가 있었으니,
亦名日月燈明(역명일월등명). 또한 이름이 일월등명이다. 뭐라고요?
빛이다. 빛은 지혜다. 빛은 지혜란 말입니다. 그리고 부처님이름을 우리 한 번 봅시다. 석가모니는 인도 성씨니까 석가라고 할 수 밖에 없어요.
그런데 석가모니 부처님이 깨닫고 나서 부처를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 자, 서방정토를 관장하는 아미타불. 뭐라고요? 無量光입니다.
無量壽無量光입니다. 그럼 부처중의 부처는 뭐지요? 法身佛이지요.
淸淨法身毘盧遮那佛(청정법신비로자나불)인데, 비로자나불은 뭐라고요? 光明徧照(광명변조)입니다. 大日이라고도 합니다. 큰 태양. 전부 지혜의 빛을 상징하는 말입니다. 석가모니부처님의 스승은 燃燈佛(연등불)이지요. 수기 받은 부처님. 燃燈이 뭡니까? 등불을 밝히다. 지혜의 등불을 밝히다. 알고 보면 전부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이름을 아주 의도적으로 지은 겁니다. 아주 의도적으로... 깨달으신 분이 깨달음을 뭐라고 표현하는 것이 좋을까? 의도적으로 그렇게 빛을 넣어서 지은 것입니다.
그것이 머리에서 안 떠나는데 이름이 그렇게 나올 수밖에 없는 겁니다. 보십시오. 次復有佛(차부유불)하시니 亦名日月燈明(역명일월등명)이니라. 또 次復有佛(차부유불)하시니 또 부처가 있었으니, 亦名日月燈明(역명일월등명)이다. 如是二萬佛(여시이만불) 이와 같이 2만 불이 皆同一字(개동일자)시니, 號日月燈明(호일월등명)이다.
아니 천불ㆍ만 불ㆍ억만 불이 나와도 깨달음. 또는 불교. 그것은 빛이에요. 지혜의 빛입니다. 이것은 불교가 부처님과ㆍ깨달음과 동일시해서 보세요. 그 낱말, “불교라고 하는 것. 부처님이라고 하는 것. 깨달음 이라고 하는 것. 이것은 전부 지혜의 빛이다.” 그렇게 봐야 됩니다.
2만은 왜 2만입니까? 3만 해도 좋은데... 이것은 너와 나. 상대적인 뜻입니다. 너도 나도 모두가, 현상은 모두가 상대적으로 됐잖아요.
그런 상대적인 모든 것들은 전부가 깨달음. “불교” 하면 그것은 무조건 지혜의 빛이다. 日月燈明이다.
又同一姓(우동일성)이시니 姓頗羅墮(성파라타)라.
彌勒當知(미륵당지), 미륵아 마땅히 알아라. 初佛ㆍ後佛(초불후불)이 皆同一字(개동일자)시니 名日月燈明(명일월등명)이며 十號具足(십호구족)하시고 所可說法(소가설법)은 初中後善(초중후선). 초선 중선 후선이니라. 그들이 설한바 법문은 전부 초선 중선 후선이다. 저는 이 말 좋아요. 初佛ㆍ後佛이 皆同一字시니 名日月燈明이라. 처음 부처님도 깨달음이요, 두 번째 부처님도 깨달음이요, 마지막 부처님도 깨달음이요. 지혜의 빛입니다.
불교는 지혜의 가르침이다. 여기서는 끊임없이 그 이야기입니다, 지혜의 가르침. 그래서 진짜 성인하고 가짜 성인하고 나누는 방법이 간단해요. 모든 존재의 실상을 제대로 꿰뚫어 본 사람을 성인이라고 그래요.
모든 존재 중에서 다른 것은 다 제쳐놓고, 인간에 대한 실상. 인간이 근본이니까요. 인간에 대한 실상을 제대로 꿰뚫어 본, 인간의 가치. 인간의 지고한 가치를 제대로 꿰뚫어 본 사람이야말로 성인이다. 이렇게 봅니다. 불교에서 죄업 많은 중생ㆍ업장 많은 중생. 이런 말이 있는데 그것은 전부 방편입니다. 아니에요. 제대로 방편 없이 진실로 이야기한 법화경에서는 그대로 부처님이라고 하는 사실. 그리고 무슨 하나님의 종이니 뭐니 하는 이런 가르침은 정말 엉터리 가르침입니다.
인간에 대한 그 가치를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불교에서도 방편으로 이야기할 때는 업장 많은 중생ㆍ죄업이 많은 중생 이렇게 표현하지만 정말 깨놓고 이야기할 때, 불교를 그대로 사실대로 이야기할 때는 전혀 지금 그 동안 이야기해 왔듯이, ??히 완전무결한 존재. 본래인ㆍ궁극적 차원. 그것을 못보고, 그것을 드러내지 못한 사람은 성인이라고 할 수가 없어요. 그것은 가짜 성인입니다.
그래서 정말 깨달으신 조사스님들은, 부처님이외에 다른 조사스님들도 전부 제대로 깨달은 분은 한결같이 뭐라고요?
心卽是佛이다. 그대들 마음이 그대로 부처야. 사람이 마음이고, 마음이 사람이니까요. 마음하고 사람이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럼 여기에 대한 정말 소상한 이해와 확신이 서야 됩니다.
이것이 중요해요 확신. 우리가 이렇게 이야기하고 또 듣고, 경전에서 무수히 그런 것을 보지만, 거기에 대해서 확신 서기가 참 쉽지가 않습니다. 그래 그러한 증거를 여기 법화경에 넘어가면서 계속 이야기합니다. 성급하게 얼른 말씀드리면 여기 방편품에 가면요? 부처님 앞에 와서 손을 한 번 딱 들었다. 이것으로써 皆已成佛道(개이성불도)라 그랬어요.
다 이미 불도를 이뤄 마쳤다 그랬습니다. 손 한 번 드는 것이 무슨 수행입니까? 그것이 무슨 참선입니까? 무슨 정진입니까? 아니잖아요.
어린 아이들이 장난삼아 모래에다가 오줌을 싸가지고, 그 모래를 뭉쳐서 “이것이 불탑이야.”라고 장난을 쳐도 그것으로써 皆已成佛道라. 다 이미 불도를 이뤄 마쳤다. 이것이 이제 방편품에 나옵니다.
저녁에 가서 한 번 살펴보세요. 皆已成佛道라는 말이 여러 번 나옵니다.
꽃 한 송이 올린 것. 망상 부글부글 끓는 마음으로 부처님 앞에 와서 나무 불 한 마디 부른 것만으로 皆已成佛道. 이것은 무슨 뜻인가? 이것이 무슨 뜻이냐?
전부 그 동안 방편 불교에는 무진장한 노력을 하고, 하~ 무슨 寤寐一如(오매일여)를 해야 되고, 무슨 動靜一如(동정일여)ㆍ夢中一如(몽중일여). 그래가지고 툭 털어 자빠져야 비로서 見性成佛(견성성불)이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했지만, 진짜불교에서는 그런 이야기 아니 합니다.
손 한 번 든것 만으로 이미 불도를 이뤄 마쳤다. 이것은 무슨 말인가?
궁극적 차원에서, 인간의 궁극적 차원에서 본래로 부처님이다. 아무런 손색이 없다 이겁니다. 이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법화경이 끊임없이 그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전부 너도 부처야. 너도 부처야 하고 다 수기를 줍니다.
수기를 주는 데는 처음에는 이렇게, 이렇게 조건을 갖추어서 수기를 주지만 나중에는 조건 없이 수기를 막 줘버립니다.
이름도 그냥 똑 같이 500명을 보명 여래가 되리라. 2000명을 보상 여래가 되리라. 싸구려로 수기를 막 줘버려요. 그것이 무슨 뜻이냐?
수기가 싸서 주는 것이 아니라, 본래로 부처님이기 때문에 그 형식 밟으나 마나다 이겁니다. 형식 안 밟아도 부처님인데요 뭘. 굳이 여기 어리석은 아란존자나 라후라나 그 다음에 야수다라나 이런 이들이, 마하파사파제 비구니 같은 이런 이들이 딴 사람들은 이름 들먹거렸는데, 왜 우리의 이름은 안 들먹거리는가? 하고 좀 섭섭한 마음으로 얼굴빛을 지어요.
그러니까 ‘그래? 내가 앞에서 다 수기 줬건만, 꼭 네 이름을 안 불러준다고 네가 그런 표정을 짓느냐? 그래 좋다. 나도 네 이름을 불러 주마.’ 하고, 그때 또 이름을 불러서 수기 주는 그런 이야기까지 실려져 있습니다. 나중에는 상불경 보살이 떡 등장을 해가지고, 모든 사람을 전부 예배하고 다니잖아요. 참선도 아니 하고 경도 안 보고, 그 사람은 아무 것도 아니 해요. 그저 만나는 사람마다 전부 부처님으로 보이니까, 부처님으로 보이니까 경이고 참선이고 그것이 급한 것이 아니잖아요. 부처님한테 예배하기가 바쁘잖아요.
우리도 실지로 석가모니가 떡 나타났다 하면 무슨 무비 스님이 법화경 설하는 이까짓 것 아무 것도 아닙니다. 얼른 일어나서 부처님한테 예배해야 될 것 아닙니까? 상불경 보살 품에 그런 장면이 나옵니다. 그래서 예배하는 겁니다. 사람, 사람이 전부 부처님으로 보이니까 사람, 사람을 부처님으로 예배 공경하는 그런 이야기가 나오는 겁니다.
그것이 법화경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아주 중요한 메시지이지요. 인간의 궁극적 차원ㆍ本來人의 차원. 여기에 대한 깊은 이해와 확신을 가지고 당당하게 살라는 것입니다. 참선을 몇 년 못했다. 염불을 못한다. 기도를 못했다. 이것 아무 것도 아니니까 절대 거기에 갈등하지 말라. 절대 갈등하지 말라. 그대로 당당하게 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日月燈明이라고 하는 내용도 그런 뜻입니다.
(3) 최후의 일불
<1> 석가의 과거와 동일함
其最後佛(기최후불)이 未出家時(미출가시)에
有八王子(유팔왕자)하니 一名有意(일명유의)요
二名善意(이명선의)요 三名無量意(삼명무량의)요
四名寶意(사명보의)요 五名增意(오명증의)요
六名除疑意(육명제의의)요 七名響意(칠명향의)요
八名法意(팔명법의)라 是八王子(시팔왕자)가
威德自在(위덕자재)하야 各領四天下(각영사천하)러니
是諸王子聞父出家(시제왕자문부출가)하야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하고
悉捨王位(실사왕위)하고 亦隨出家(역수출가)하야
發大乘意(발대승의)하며 常修梵行(상수범행)하야
皆爲法師(개위법사)하대 已於千萬佛所(이어천만불소)에
植諸善本(식제선본)하니라
其最後佛(기최후불)이 그 최후의 부처님이 未出家時(미출가시)에
有八王子(유팔왕자)하니 여덟 왕자가 있었는데,
一名有意(일명유의)요 한 이름은 有意요. 二名善意(이명선의)요.
三名無量意(삼명무량의)요. 四名寶意(사명보의)요.
五名增意(오명증의)요. 六名除疑意(육명제의의)요. 의심을 제한다는 뜻. 그 다음에 일곱 번째는 七名響意(칠명향의)요.
여덟 번째는 八名法意(팔명법의)라. 是八王子(시팔왕자)가 이렇게 여덟 왕자가 威德이 自在(위덕자재)하고, 各領四天下(각영사천하)라.
각각 四天下를 다스려요. 각각 땅을 분할 맡아가지고 거기서 왕 노릇을 한다 이것이지요.
是諸王子가 聞父出家(시제왕자문부출가)하야 아버지가 출가해서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는 소리를 듣고,
悉捨王位(실사왕위)하고, 다 왕위를 버려 버리고, 보니까 꼭 그렇지요?
라후라도 자기 아버지가 성불했다는 소리를 듣고 자기가 계승할 가비라 국을 버려 버리고, 부처님제자가 되었지요. 이것이 그 이야기입니다.
모델은 석가모니입니다.
천하 없는 부처님이야기를 해도 그것은 꾸며낸 이야기이고, 우리에게 교훈을 주기 위해서 만들어낸 이야기지, 실지로 있었던 역사가 아니에요.
실지로 있었던 역사 같으면 역사가 전혀 다르지요.
다 달라야 돼요. 그런데 똑 같아요. 한결같이 석가모니가 모델이 되어가지고 거기서 조금만 변형을 해가면서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부처님은 아들이 라후라 한 사람이지요. 여기는 여덟 왕자가 있었다.
그저 이런 차이입니다.
悉捨王位하고, 亦隨出家(역수출가). 또한 따라서 출가를 했어요.
發大乘意(발대승의)하며, 대승의 뜻을 발하며,
常修梵行(상수범행)하야, 항상 범행을 닦아서
皆爲法師(개위법사)하대, 다 법사가 되었으되,
已於千萬佛所(이어천만불소)에서 植諸善本(식제선본)하니라.
온갖 부처님 처소에서, 온갖 사람이 사는 곳에서 그 사람을 상대로 해서 선의 근본을 심었다. 밥 줘야 할 사람은 밥 주고, 옷 줘야 할 사람은 옷 주고, 진리를 가르쳐야 할 사람에게는 진리를 가르치고, 그 사람의 경우에 따라서 온갖 선의 근본을 다 심었다.
<2> 석가의 현재와 동일함
是時日月燈明佛(시시일월등명불)이 說大乘經(설대승경)하시니
名無量義(명무량의)라 敎菩薩法(교보살법)이며
佛所護念(불소호념)이니라 說是經已(설시경이)하시고
卽於大衆中(즉어대중중)에 結跏趺坐(결가부좌)하사
入於無量義處三昧(입어무량의처삼매)하사
身心不動(신심부동)이러라 是時(시시)에
天雨曼陀羅華(천우만다라화)와 摩訶曼陀羅華(마하만다라화)와
曼殊沙華(만수사화)와 摩訶曼殊沙華(마하만수사화)하야
而散佛上(이산불상)과 及諸大衆(급제대중)하고
普佛世界(보불세계)가 六種震動(육종진동)이러라
爾時會中(이시회중)에 比丘比丘尼(비구비구니)와
優婆塞優婆夷(우바새우바이)와 天龍夜叉(천룡야차)와
乾闥婆阿修羅(건달바아수라)와 迦樓羅緊那羅(가루라긴나라)와
摩睺羅伽人非人(마후라가인비인)과 及諸小王(급제소왕)과
轉輪聖王等是諸大衆(전륜성왕등시제대중)이
得未曾有(득미증유)하야 歡喜合掌(환희합장)하고
一心觀佛(일심관불)이러라 爾時如來(이시여래)가
放眉間白毫相光(방미간백호상광)하사
照東方萬八千佛土(조동방만팔천불토)하야
靡不周徧(미불주변)하대
如今所見是諸佛土(여금소견시제불토)러라
彌勒當知(미륵당지)하라 爾時會中(이시회중)에
有二十億菩薩(유이십억보살)이 樂欲聽法(낙욕청법)이러니
是諸菩薩(시제보살)이 見此光明(견차광명)의
普照佛土(보조불토)하고 得未曾有(득미증유)하야
欲知此光(욕지차광)의 所爲因緣(소위인연)이러라
是時에 日月燈明佛(시시일월등명불)이 說大乘經(설대승경)하시니,
대승경을 설하시니, 名無量義(명무량의)라. 이것은 일월등명불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석가모니하고 똑 같다 이겁니다. 오늘 부처님이 무량의경을 설했는데, 그 때도 일월등명불이 무량의경을 설했다 이겁니다.
그것도 역시 敎菩薩法(교보살법)이며 佛所護念(불소호념)이여.
說是經已(설시경이)하시고, 이 경을 설해 마치시고 卽於大衆中(즉어대중중)에 대중 가운데 結跏趺坐(결가부좌)하사,
入於無量義處三昧(입어무량의처삼매)라. 저 앞의 글하고 똑 같네요.
글도 똑 같지요? 身心不動(신심부동)도 똑 같지요?
是時(시시)에 天雨曼陀羅華(천우만다라화). 하늘에서 꽃비가 내렸다.
曼陀羅華와ㆍ摩訶曼陀羅華(마하만다라화)와ㆍ曼殊沙華(만수사화)와ㆍ摩訶曼殊沙華(마하만수사화). 이것이 뭐라고요?
[無量無邊ㆍ不可思議ㆍ阿僧祗劫 이전에] 라고 했는데도 불구하고, 오늘 내린 그 꽃비하고 똑 같네요. 이놈의 꽃은 변하지도 않는가...
無量無邊阿僧祗劫전에, 지금 뭐 생태계가 변해가지고 몇 년 사이에 영 딴 생물이 생기고, 바다에도 다른 고기가 보이고 그런다고 하는데,
無量無邊阿僧祗不可思議劫전 일인데 오늘 이야기하고 똑 같다.
여기서 파낼 것이 참 많아요. 파서 드러낼 이야기들이요.
而散佛上(이산불상)과 及諸大衆(급제대중)하야
普佛世界(보불세계)가 六種震動(육종진동). 이것도 아까하고 똑 같네요.
爾時會中(이시회중)에 比丘ㆍ比丘尼(비구비구니)와
優婆塞ㆍ優婆夷(우바새우바이)와 天ㆍ龍ㆍ夜叉(천용야차)ㆍ
乾闥婆ㆍ阿修羅(건달바아수라)ㆍ 迦樓羅ㆍ緊那羅(가루라긴나라)ㆍ
摩睺羅伽ㆍ人非人(마후라가인비인)과 及諸小王(급제소왕)과
轉輪聖王等是諸大衆(전륜성왕등시제대중)이 得未曾有(득미증유). 이것도 내용이 똑 같고, 글도 그대로 갖다 놨는데 이것 컴퓨터할 때 이런 것이 참 좋아요. 그대로 복사해서 갖다 붙여 넣기만 하면 다 돼 버려요.
앞에 나온 글이니까요. 하하 그저 먹기지요.
歡喜合掌(환희합장)하고 一心觀佛(일심관불)했다. 이것도 똑 같은 글이고요. 爾時如來(이시여래)가 放眉間白毫相光(방미간백호상광). 이것도 똑 같은 것이지요? 照東方萬八千佛土(조동방만팔천불토). 어째 또 똑 같이 동방으로 비치누? 역시 만 8천 불토고요. 靡不周徧(미불주변)했다.
如今所見是諸佛土(여금소견시제불토)러라. 지금 보는 바와 같이, 지금 보는 바와 모든 세계가 똑 같더라.
彌勒當知(미륵당지)하라. 미륵아 마땅히 알아라.
爾時會中(이시회중)에, 그 때에 대중 가운데서 有二十億菩薩(유이십억보살). 20억 보살이 樂欲聽法(낙욕청법). 법 듣기를, 법문 듣기를 너무너무 즐겨하고 좋아했는데, 是諸菩薩(시제보살)이 見此光明(견차광명)의
普照佛土(보조불토)하고 그때 그 보살들이 이 광명이 온 세상을 환하게 비추는 것을 보고, 得未曾有(득미증유)해서, 未曾有를 얻어서
欲知此光(욕지차광)의 所爲因緣(소위인연)이러라.
이 광명이 하는 바의 인연을 알고 싶어 했더라.
이것이 오늘의 석가모니의 현재하고 과거 무수한 세월 이전에,
日月燈明佛 시대의 사건하고 동일하다.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무슨 말인가 하면 그때 그 부처님도 그러고 나서 결국 법화경을 설하더니, 오늘 석가모니도 그때하고 똑 같으니까 아마 법화경을 설할 것이다.
이런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지요. 사실 그렇게 됩니다.
법화경은 경중의 왕이고 이것은 언제 어느 시대에 결집이 됐든 상관없이, 부처님이 설하신 경전을 아란존자가 결집해서 우리에게까지 이르렀다 라고 하는 것을 생각하고, 정말 환희심과 신심으로 우리가 한 자, 한 자 대하고 한 구절, 한 구절 그러한 마음으로 읽고, 또 그 속에 담겨있는 무궁무진한 뜻을 잘 사유하면서 미처 드러내지 못한 것은 스스로 맛보고 드러내고, 깨우쳐야 할 줄 압니다.
그것을 깨우치는 열쇠가 바로 迹人ㆍ本人. 迹佛ㆍ本佛. 迹門ㆍ本門. 하는 迹과 本. 이 두 글자에 있다고 하는 것. 그것은 우리 인간의 현상적인 이렇게 각각 다른 차별된 모습. 이러한 차원이 있는가 하면, 내면으로 들어가면 男ㆍ女ㆍ老ㆍ少ㆍ僧ㆍ俗할 것 없이 동등하고 평등한 아주 위대한 그런 궁극적 차원이 있다고 하는 것. 바로 그 궁극적 차원이 우리의 본 얼굴이다. 본래의 우리다. 그것을 드러내고 거기에 대한 확실한 인식과 깨달음이 있으면 그러면 나만 소중한 것이 아니고, 모든 사람이 똑 같이 그러한 입장이니까 남을 또 그렇게 배려합니다.
그렇게 존중 하고요. 뭐라고요? 공양ㆍ공경ㆍ존중ㆍ찬탄하게 됩니다.
그러면 가정이면 가정. 단체면 단체의 행복이 바로 거기에 있고, 세계의 평화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정말 이 법화경은 가정의 행복과 사회의 평화와 세계의 평화의 유일한 열쇠입니다. 사람의 진정한 가치를 제대로 알아 가지고, 그 가치를 모두 다른 사람도 그렇게 인정해주고 배려해주고, 존중해주고 찬탄해주는 것. 그것 밖에 달리 다른 평화의 길이 없습니다. 그것 밖에 달리 가정의 행복이 없습니다. 다 위해주고 다 받들어주고요. 경력이 어떻다. 그것 아무 것도 아닌 겁니다.
본래 갖추고 있는 그 위대함에 우리가 조금 이해가 있고 믿음이 간다면 사람을 정말 존중 아니 할 수가 없고, 위하지 않을 수가 없고 그리 되어있습니다. 이것이 법화경의 대체적인 중요한 뜻이고 또한 결론이기도 하고, 또 시종일관 이러한 열쇠로서 법화경 전편을 열어갈 겁니다.
'공부 > 종교와 나'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불기2557년 부처님오신날 봉축법요식 참석 (0) | 2013.05.18 |
---|---|
풍수심리 (0) | 2013.03.06 |
법화경 1-1,2 (0) | 2013.02.08 |
법화경 2-1,2 (0) | 2013.02.08 |
법화경 3-3,4 /신해품 (0) | 2013.02.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