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종교와 나

법화경8-2 종지용출품

應觀 2013. 1. 12. 06:13

 

 

묘법연화경 강좌 제8강-2

- 교육원 불교전문강당 2009. 09. 22 -

그 다음에 제불 삼력장(三力章)이라. 제가 제목을 그렇게 붙였는데

諸佛(제불)은 세 가지 힘이 있습니다. 그 힘을 여기다 표현을 우정 했어요. 여기서 부터 本門(본문). 본문의 正宗分(정종분)이 됩니다.

사실은 경을 공부하면 과목을 제대로 쳐가며, “과목을 친다.” 그래요.

과목을 쳐가면서 공부를 하는 것이 전통 공부방법입니다.

우리 어릴 때는 강사스님 앞에 딱 가면, 강사스님이 한 마디도 하기 전에 학인이 과목을 처음부터 쭉~~ 밟아와요.

오늘 여기까지 왔으면 과목을 어떤 식으로 밟아오느냐? 여기 법화경을 근거로 하면, “법화경을 크게 두 과목으로 나누니, 하나는 迹門(적문)이요, 하나는 本門(본문)이라.” 적문은 이제 끝났지요? 그러면 끝난 것은 제쳐놓는 겁니다. 그럼 본문에 와서 “본문에 셋이 있으니...” 적문에도 셋이 있었어요. 이것은 아주 기본적인 세 가지입니다. 뭐냐? 서분ㆍ정종분ㆍ유통분. 다 아시지요? 그것은 서론ㆍ본론ㆍ결론ㆍ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는 본문이니까 본문에 들어와서, 정종분에 들어와서, 서분은 이제 끝났어요. 본문에서 서분ㆍ정종분ㆍ유통분이 있는데, 본문의 서분은 끝났어요. 서분에 두 개있었지요? 湧出序(용출서). 疑念序(의념서). 그렇게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서분은 끝나고 그 다음에 두 번째 정종분에 들어왔어요.

정종분에 들어와가지고 본문에서 정종분인데, 정종분에 제불의 삼력장이다. 이렇게 딱 밟아오면 그러면 전체의 흐름을, 그 과목 외우는 것을 듣고는 전부 되살려요. 지나간 것 까지도 삭~~, 공부한 것 전체를 전부 과목을 통해서 되살릴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스토리가 연결이 되는 것 아닙니까?

어디서 공부 하더라도 그 이야기줄거리연결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때부터 강의가 시작되는 겁니다. 그것을 만약에 외워오지 못하면

그날 강의 아니 해요. 그냥 일어나서 가버려요. 그것을 더듬더듬 거린다든지 못 외운다든지 틀리게 한다든지 하면 그냥 일어나서 가버려요.

그래 그 다음 날 아침에 다시 시작하는 겁니다. 그러면 과목을 잘 외워 오겠지요. 능엄경 같은 것은 과목을 아주 세분화 해가지고, 외우기가 상당히 까다롭게 되어있습니다. 그래도 우리가 과목을 외워야, 과목을 잘 쳐야 말하자면 전체 줄거리를 파악하는데 아주 제일 지름길이 됩니다.

그런 공부도 그 동안 강원에서는 전통적으로 있었습니다.

여기본문에 있어서 서분ㆍ정종분ㆍ유통분인데, 서분은 끝났고 여기서부터는 정종입니다. 의문을 제기 했지 않습니까?

의문을 그 동안 제기 했으니까 그 다음에 답이 나올 것 아닙니까?

답이 쭉~~ 이렇게 한참 내려갑니다. 다음 품 까지도 내려가요.

이 품 뿐이 아니고 다음 품 까지도 한참 내려가요.

여래수량품까지도 전통적으로는 그렇게 내려가게 되어있습니다.

三 제불 삼력장(三力章)

爾時釋迦牟尼佛(이시석가모니불)이

告彌勒菩薩(고미륵보살)하사대 善哉善哉(선재선재)라

阿逸多(아일다)야 乃能問佛如是大事(내능문불여시대사)로다

汝等當共一心(여등당공일심)으로 被精進鎧(피정진개)하고

發堅固意(발견고의)니라

如來今欲顯發宣示諸佛智慧(여래금욕현발선시제불지혜)와

諸佛自在神通之力(제불자재신통지력)과

諸佛師子奮迅之力(제불사자분신지력)과

諸佛威猛大勢之力(제불위맹대세지력)하노라

爾時世尊(이시세존)이 欲重宣此義(욕중선차의)하사

而說偈言(이설게언)하니라

當精進一心(당정진일심)하라 我欲說此事(아욕설차사)하노니

勿得有疑悔(물득유의회)니라

佛智叵思議(불지파사의)라 汝今出信力(여금출신력)하야

住於忍善中(주어인선중)하니 昔所未聞法(석소미문법)을

今皆當得聞(금개당득문)하리라 我今安慰汝(아금안위여)하노니

勿得懷疑懼(물득회의구)니라 佛無不實語(불무불실어)

智慧不可量(지혜불가량)이라 所得第一法(소득제일법)

甚深叵分別(심심파분별)일새 如是今當說(여시금당설)하노니

汝等一心聽(여등일심청)하라

爾時釋迦牟尼佛(이시석가모니불)이, 그 때에 석가모니부처님이

告彌勒菩薩(고미륵보살)하사대, 미륵보살에게 고하사대

善哉善哉(선재선재)라 阿逸多(아일다)야 乃能問佛如是大事(내능문불여시대사)로다. 이에 능히 부처님의 이와 같은 큰일을 묻는구나.

汝等當共一心(여등당공일심)으로, 그대들은 마땅히 함께 일심으로

被精進鎧(피정진개)하고, 정진의 갑옷을 입고

發堅固意(발견고의)니라. 견고한 뜻을 발할지니라.

如來今欲顯發宣示諸佛智慧(여래금욕현발선시제불지혜)와,

여래는 지금 제불지혜와 諸佛自在神通之力(제불자재신통지력)과 諸佛師子奮迅之力(제불사자분신지력)과 제불 사자분신의 힘과 또 諸佛威猛大勢之力(제불위맹대세지력). 제불위맹대세의 힘을 顯發해서 宣示하고자 하노라. 顯發宣示. 앞에 있지요? 드러내서 여러 사람에게 보여 주고자 하노라. 爾時世尊(이시세존)이, 그 때 세존이 欲重宣此義(욕중선차의)하사 而說偈言(이설게언)이라. 그것은 중송이니까 넘기고요.

개개인의 본래성불. 것은 제대로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사실 본론은 여래수량품이 본론입니다. 앞서도 말씀 드렸지만 前 14품 적문에는 방편품이 눈이고, 後 14품 본문에는 여래수량품이 눈입니다.

그 두 품이 법화경의 아주 要(요) 품으로 옛날부터 지목받고 있지요.

四 개개인의 본래성불

1 장문으로 설하다

爾時世尊(이시세존)이 說此偈已(설차게이)하시고

告彌勒菩薩(고미륵보살)하사 我今於此大衆(아금어차대중)에

宣告汝等(선고여등)하노라 阿逸多(아일다)야

是諸大菩薩摩訶薩(시제대보살마하살)이

無量無數阿僧祗(무량무수아승지)로 從地涌出(종지용출)하니

汝等昔所未見者(여등석소미견자)라

我於是娑婆世界(아어시사바세계)에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已(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이)하고

敎化示導是諸菩薩(교화시도시제보살)하야

調伏其心(조복기심)하며 令發道意(영발도의)호라

此諸菩薩(차제보살)이

皆於是娑婆世界之下(개어시사바세계지하)의

此界虛空中住(차계허공중주)니라 於諸經典(어제경전)에

讀誦通利(독송통리)하야 思惟分別正憶念(사유분별정억념)이니라

阿逸多(아일다)야 是諸善男子等(시제선남자등)이

不樂在衆(불락재중)하야 多有所說(다유소설)하고

常樂靜處(상락정처)하야 勤行精進(근행정진)하대

未曾休息(미증휴식)하며

亦不依止人天而住(역불의지인천이주)하고

常樂深智(상락심지)하야 無有障礙(무유장애)하며

亦常樂於諸佛之法(역상락어제불지법)하고

一心精進(일심정진)하야 求無上慧(구무상혜)니라

爾時世尊(이시세존)이 說此偈已(설차게이)하시고 告彌勒菩薩(고미륵보살)하사, 그 때에 세존이 이 게송을 설해 마치시고 미륵보살에게 고하사대, 我今於此大衆(아금어차대중)에, 내가 지금 대중들에게

宣告汝等(선고여등)하노라. 대중 앞에, 너희들에 대해서 宣告하노라. 베풀어 고하노라. 阿逸多(아일다)야 是諸大菩薩摩訶薩(시제대보살마하살)이. 모든 큰보살 마하살이 無量無數阿僧祗(무량무수아승지)라.

從地涌出(종지용출)하니, 그들이 땅으로부터 湧出했으니

汝等昔所未見者(여등석소미견자)라. 그대들은 옛날에 일찍이 보지 못한 사람들이다.

我於是娑婆世界(아어시사바세계)에, 내가 이 사바세계에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已(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이)하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고 나서 敎化示導是諸菩薩(교화시도시제보살). 敎化하고 示導했다 이 모든 보살들을 교화하고 보여주고 인도해서 調伏其心(조복기심)하며, 그들의 마음을 조복했으며 令發道意(영발도의)호라. 도에 대한 뜻을 발하게 했노라. 此諸菩薩(차제보살)이 皆於是娑婆世界之下(개어시사바세계지하)의 이 모든 보살들이 다 사바세계 밑에, 이것 중요합니다.

此界虛空中住(차계허공중주)니라. 사바세계 밑에, 이 세계 허공 가운데 머물러 있었다. 그랬어요. 이것은 불교를 이해하는데 무조건 어떤 本質(본질), 모든 존재의 본질ㆍ근본ㆍ궁극은 空性(공성)이다. 하는 것입니다.

공성에서 바탕을 두고 이룩된 것이 현상이다. 그런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익히 아는 色卽是空 空卽是色(색즉시공 공즉시색).

그것은 현상을 이해하는 데는 아주 상당히 좋은 가르침이지요.

於諸經典(어제경전)에, 모든 경전에 讀誦通利(독송통리)해서 思惟分別正憶念(사유분별정억념)한다. 阿逸多(아일다)야 是諸善男子等(시제선남자등)이, 이 모든 선남자들이 不樂在衆(불락재중)하야, 대중에 있어서 多有所說(다유소설)하고, 많이 설한 바 있음을 좋아하지 않고,

常樂靜處(상락정처)여. 대중들 하고 이렇게 시끄럽게 모여가지고 공부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 것이지요. 그 대신에 常樂靜處. 고요한 곳을 항상 좋아해. 그리고 勤行精進(근행정진)이여. 그러면서도 열심히 정진해서

未曾休息(미증휴식)하며 亦不依止人天而住(역불의지인천이주)하고,

또한 天人을 의지해서 머물지 않고

常樂深智(상락심지)여, 딴 사람, 누구에게 듣고 그런 것이 문제가 아니고, 깊은 지혜를 常樂. 좋아한다. 이겁니다. 그래서

無有障礙(무유장애)라. 장애가 없으며

亦常樂於諸佛之法(역상락어제불지법)하고, 亦常樂. 상락이 세 번 나왔어요. 제불의 법을 항상 즐겨서 一心精進(일심정진)하야 求無上慧(구무상혜)니라. 그러니까 어떤 세속적인 그런 그 생활습관. 이 모임 저 모임, 그런 데에 쫓아다니면서 시끄럽게 그렇게 세월 보내는 것이 아니고,

常樂靜處ㆍ勤行精進ㆍ常樂深智ㆍ無有障礙고요.

亦常樂諸佛之法 一心精進 求無上慧. 이것이 불자들의 삶의 태도다. 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본래부터 이렇게 살아온 사람들이다. 그런 뜻입니다.

그 다음에 게송 중송은 생략하고요.

2 게송으로 거듭 설하다

爾時世尊(이시세존)이 欲重宣此義(욕중선차의)하사

而說偈言(이설게언)하니라

阿逸汝當知(아일여당지)하라 是諸大菩薩(시제대보살)이

從無數劫來(종무수겁래)로 修習佛智慧(수습불지혜)니

悉是我所化(실시아소화)하야 令發大道心(영발대도심)이니라

此等是我子(차등시아자)依止是世界(의지시세계)하야

常行頭陀事(상행두타사)하며 志樂於靜處(지락어정처)하야

捨大衆憒鬧(사대중궤료)하고 不樂多所說(불락다소설)이라

如是諸子等(여시제자등)이 學習我道法(학습아도법)하며

晝夜常精進(주야상정진)하야 爲求佛道故(위구불도고)로

在娑婆世界(재사바세계)下方空中住(하방공중주)니라

志念力堅固(지념력견고)하야 常勤求智慧(상근구지혜)하며

說種種妙法(설종종묘법)하대 其心無所畏(기심무소외)니라

我於伽耶城(아어가야성) 菩提樹下坐(보리수하좌)하야

得成最正覺(득성최정각)하고 轉無上法輪(전무상법륜)하고는

爾乃敎化之(이내교화지)하야 令初發道心(영초발도심)일새

今皆住不退(금개주불퇴)하고 悉當得成佛(실당득성불)이니라

我今說實語(아금설실어)하노니 汝等一心信(여등일심신)하라

我從久遠來(아종구원래)로 敎化是等衆(교화시등중)호라

3 보살들의 의문

爾時彌勒菩薩摩訶薩(이시미륵보살마하살)과

及無數諸菩薩等(급무수제보살등)이 心生疑惑(심생의혹)하야

怪未曾有(괴미증유)하야 而作是念(이작시념)하대

云何世尊(운하세존)이 於少時間(어소시간)에

敎化如是無量無邊阿僧祗諸大菩薩(교화여시무량무변아승지제대

보살)하야 令住阿耨多羅三藐三菩提(영주아뇩다라삼먁삼보리)리

요 卽白佛言(즉백불언)하사대 世尊(세존)하

如來爲太子時(여래위태자시)에 出於釋宮(출어석궁)하사

去伽耶城不遠(거가야성불원)에 坐於道場(좌어도량)하야

得成阿耨多羅三藐三菩提(득성아뇩다라삼먁삼보리)하시고

從是已來(종시이래)로 始過四十餘年(시과사십여년)이어늘

世尊云何(세존운하)로 於此少時(어차소시)에

大作佛事(대작불사)하대 以佛勢力(이불세력)과

以佛功德(이불공덕)으로

敎化如是無量大菩薩衆(교화여시무량대보살중)하사

當成阿耨多羅三藐三菩提(당성아뇩다라삼먁삼보리)이시닛고

世尊(세존)하 此大菩薩衆(차대보살중)을

假使有人(가사유인)이 於千萬億劫(어천만억겁)에

數不能盡(수불능진)이라 不得其邊(부득기변)이리다

斯等久遠已來(사등구원이래)로

於無量無邊諸佛所(어무량무변제불소)에 植諸善根(식제선근)하야

成就菩薩道(성취보살도)하고 常修梵行(상수범행)일지니

世尊(세존)하 如此之事(여차지사)는 世所難信(세소난신)이니다

爾時彌勒菩薩摩訶薩(이시미륵보살마하살)과,

그 때에 미륵보살마하살과 及無數諸菩薩等(급무수제보살등)이 心生疑惑(심생의혹)하야, 마음에 의혹을 내어서 怪未曾有(괴미증유)라.

일찍이 있지 않던 것을 괴이하게 여겨서, 그냥 찬탄하는 정도가 아니라, ‘야~ 이거 이상하다? 정말 괴이한 일이다.’ 이렇게 여기는 겁니다. 왜냐? 땅에서 솟아올라왔으니까요. 전혀 듣도 보도 못한 불자들이니까, 보살들이니까요.

而作是念(이작시념)하대 云何世尊(운하세존)이 於少時間(어소시간)에, 아주 짧은 시간에 敎化如是無量無邊阿僧祗諸大菩薩(교화여시무량무변아승지제대보살)하야, 이와 같은 무량 무수 아승지 제대보살을 교화해서 令住阿耨多羅三藐三菩提(영주아뇩다라삼먁삼보리)리요.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머물게 했으리요. 그러니까 부처님 역사 빤 한데, 기껏해야 40여년 밖에 안 지났는데, 그 때 출가해서 부처님에게 귀의해서 부처님한테 법문 듣고 한 사람들 내가 빤히 다 안다 이겁니다.

아 부처님 출가 때부터 다 알아. 그리고 누가 어떤 신도가 오고, 누가 출가해서 제자가 되고, 불명은 어떻게 되고 거의 불교계 이름들 다 알고 있다 이겁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도대체 뭐냐? 이런 뜻입니다.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상당히 중요해요.

우리는 제도권 안에, 이미 불교 안에서 절에 다니고 또 승복입고 승적에 어떤 등록이 되어있고, 그 다음에 무슨 사미다 비구다 종사다 뭐다 이렇게 딱 어떤 제도 속에, 어떤 틀 속에 딱 이렇게 선정이 되어있는 그것만 불교라고 하는 겁니다. 그 사람들만 불자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요즘은 신도들도 무슨 신도등록 해가지고 그런 제도도 있지요?

말세가 되면 될수록 자꾸 그런 식으로 엉터리로 나가는 것이지요.

왜냐? 중생들의 사고로 만들어내지 깨달은 사람의 그 어떤 툭 터진 지혜로써 만들어낸 제도가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아무리 만들어봐야 꽉꽉 막힌 중생들의 좁은 소견으로 제도를 자꾸 만드는 겁니다. 세속 법은 더 말할 것도 없고요. 그러니까 자꾸 만든다는 것이, 좋게 만든다고 하면서 결과적으로 엉터리가 되는 겁니다.

그것이 이 세상은 조직사회이고, 그래서 스님들은 말할 것도 없고 불자들도 말하자면 등록을 하고, 그래가지고 누고누군지 파악이 되고, 신도가 몇인지 파악이 되고 그렇게 되어야 그것이 좋은 줄로 알고 있지요.

요즘 또 포살이다 해가지고 결제 때나 한 철에 한 번씩 와서 포살하고 가서 등록하고, 그것이 제대로 되는가 와서 얼굴만 내밀고 사진만 찍고 와서 사인만 하는 겁니다. 내 왔다. 출석했다 이 겁니다. 포살은 관심 없어요.

이것이 그런 형식적인 포살을 하는 겁니다. 그것이 좋은 줄 아는 겁니다.

그런 식으로라도 묶어가지고 어떤 그 형식으로써 이끌어 가는 것이 좋은 제도인줄로 아는 겁니다.

그것이 여기서는 미륵보살 같은 이들도 그런 것만 머릿속에 있었어요.

그런 것만 머릿속에 있었는데 알고 보니 아니에요. 그런 데에 전혀 관계없고, 등록 한 번도 안 하고 절에 한 번도 안 오고, 초파일에도 안 오는 사람인데도 아주 기가 막힌 보살, 기가 막힌 불자가 너무 많다 이 것이지요.

그런 데에 눈을 돌릴 줄 알아야 된다고 하는 것. 이런 메시지를 여기서 던져주고 있습니다. 이런 것도... 여기도 이제 보면 여러 번 나와요.

아이, 부처님이 어떻게 짧은 시에, 少時間(소시간)에 그랬잖아요.

어찌하여 세존이 少時間에, 짧은 시간에 이와 같은 사람들을 제도했는가?

그러니까 개개인의 본래성불을 여기서 전부 인정하고 나오니까,

본래성불이라고 했잖아요? 개개인의 본래성불을 인정하는 입장이니까 이것은 불자다. 비불자다. 하는 그런 차원이 아닙니다. 그런 차원을 훨씬 뛰어넘는 내용이지요. 그래서 無量阿僧祗諸大菩薩(무량아승지제대보살)이라고 하는 것은 본화 보살이고요. 본래인이고 본래의 부처라는 그런 의미입니다. 그것이 어디 절에 다닌다. 교회 다닌다. 그걸로 어떻게 그것을 분별할 수 있습니까? 교회 다닌다. 절에 다닌다. 이것 가지고는 따질 일이 아닌 겁니다. 법화경은 차원이 그런 차원입니다. 대단한 것이지요?

여기 보면

卽白佛言(즉백불언)하사대 世尊(세존)하, 세존시여,

如來爲太子時(여래위태자시)에, 여래가 태자가 되었을 때에

出於釋宮(출어석궁)하사, 석씨 궁에서 출가를 해서

去伽耶城不遠(거가야성불원)에, 가야성에서 멀지 아니한 곳에 가가지고, 坐於道場(좌어도량)이라. 도량에 앉아서, -보리수하에 앉았지요? 그래서 得成阿耨多羅三藐三菩提(득성아뇩다라삼먁삼보리)하시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得成. 얻어 이루시고, 우리가 아는 부처님의 생애. 그대로입니다.

從是已來(종시이래)로, 그로부터 지금까지

始過四十餘年(시과사십여년)이라. 기껏해야 40년이 지났다.

법화경은 말하자면 72세. 전통불교 설법 연도로 보면 성도해서 45년간, 보통 그렇게 이야기하는데 49년을 치거든요. 49년간 설법하신 걸로...

여기서 법화경그대로입니다. 49년으로 치면 출가해서 성도하고 72세가 지나서 법화경의 이치를 8년간 설한 걸로 됩니다. 72세가 지나서 74~5세가 됐을 때니까요. 그러니까 여기 始過四十餘年이어늘,

世尊云何(세존운하)로, 세존께서는 어찌하여 於此少時(어차소시)에, 少時에, 작은 시간에 大作佛事(대작불사)하대,불사를 짓되 以佛勢力(이불세력)과, 부처님의 세력과 以佛功德(이불공덕)으로 敎化如是無量大菩薩衆(교화여시무량대보살중)하사, 이와 같은 무량 대보살을 교화하사 當成阿耨多羅三藐三菩提(당성아뇩다라삼먁삼보리)이시닛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루게 했습니까? 그 입니다.

또 하나 이해해야 할 것은 大作佛事. 법당 크게 지었다는 것을 대작불사라고 하지 않고, 무슨 공원묘지 크게 해가지고 계속 광고 한다고 그것이 대작불사가 아니고, 중생 교화한 것. 여기는 그런 말 한 마디도 없어요. 불상을 천개 만개 만들고, 요즘 백만 불 불상 만들어서 부처님 창고, 불상창고 만드는 것이 그냥 대 유행입니다. 그런 것이 불사가 아닙니다. 제발 알 것은 알고, 하더라도 그렇게 알고 해야 됩니다. 이것이 중요한 겁니다. 정말 우리는 삼보에 귀의하잖아요. 삼보에 귀의한다는 말이 뭡니까? 부처님께 귀의하고 법에 귀의한다는 말은 저기 해인사에 있는 8만 대장경. 그 법보를 공부한다는 뜻이잖습니까? 그 다음에 승단을 받들어 섬긴다는 뜻이고요.

三歸依(삼귀의)가 法寶(법보)를 공부한다는 뜻입니다.

법보에 귀의하면 어쩐다는 겁니까? 법보에 귀의한다는 말이 뭔 말입니까?

“거룩한 가르침에 귀의합니다.”가 뭡니까?→ 공부한다는 뜻입니다. 공부한다는 뜻. 공부 아니하고 귀의한다고 말만 귀의하면 그것이 무슨 귀의가 됩니까? 공부하는 이것이, 그야말로 이 앞에서 法門無量誓願學(법문무량서원학). 四弘誓願(사홍서원)도 그렇고요. 삼귀의도 그렇고요. 시종일관이 우리 불자는 공부하는 것으로써 원칙을 삼도록, 그리고 본분을 삼도록 딱 정해져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진짜 불사라것입니다. 大作佛事. 정말 그것이 진정한 불사다. 우리가 그렇게 못 실천하더라도 알 것은 정확하게 알고, 자신 있을 때 어디 가서도 양심껏 이야기하고요. 당당하게 자기 소신을 가지고 이야기할 줄 알아 됩니다. 그것이 중요합니다. 그냥 소신껏 이야기 아니 하고 주지 눈치보고...

“지금 현대의 불교사정을 감안 해볼 때 어디 안 그런데가 있나?” 해대고, 그렇게 하면 그만 거기에 야합을 해서 자기할 소리를 당당하게 못하는 겁니다. 그러면 그런 바른 소리는 점점 없어져버려요. 없어지는 거예요.

그러면 모든 사람들... 그야말로 한 사람의 맹인이 여러 사람맹인을 이끌고 낭떠러지로 같이 떨어져 가는 겁니다. 경에서 표현했듯이 딱 그렇게 되는 것이지요. 대작불사라고 하는 말이 여기 보십시오.

무슨 불상을 만드는 일을 이야기합니까? 절 지은걸 이야기합니까?

법당 크게 한 것을 이야기합니까? 이런 것들도 이 대승경전을 통해서 우리들이 불자의 그 어떤 삶을, 또는 불교수행을 늘 교정해나가야 돼요.

바로잡아 나가야 돼요. 삐뚤게 가고 있는 것을 또 바로잡아 주고, 또 삐뚤게 나가면 또 바로잡아 주고, 이런 것을 끊임없이 해야 되것입니다.

어떻게 해서 이렇게 많은 보살들을 아뇩보리를 이루게 했습니까?

世尊(세존)하, 세존이시여 此大菩薩衆(차대보살중)을, 이 모든 보살을

假使有人(가사유인)이, 가사 어떤 사람이

於千萬億劫(어천만억겁)에, 100천 만억 겁을 헤아린다 해도

數不能盡(수불능진)이라. 다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不得其邊(부득기변)이라. 그 끝이 어딘지를 도저히 알 길이 없습니다.

斯等久遠已來(사등구원이래)로, 이 사람들은 옛날부터 지금까지

於無量無邊諸佛所(어무량무변제불소)에서 植諸善根(식제선근)하야,

모든 선근을 심어서 成就菩薩道(성취보살도)하고, 보살도를 성취하고

常修梵行(상수범행)일지니, 항상 범행을 닦을지니

世尊(세존)하 如此之事(여차지사)는, 이와 같은 일은

世所難信(세소난신)이니다. 세상에 믿기 어려운 바니다.

법당에 부처님은 정말 부처님 같이 여법하게 한 분 딱~ 모시고,

많아야 三尊佛(삼존불). 부처님보다는 보처보살을 모시는 것이 좋고요.

그렇게 해서 삼존불을, 1불 2보살을 탁~ 이렇게 모시면... 그리고는 불상을 모시지 말아야 돼요. 그렇게 모셔놓고 옆에 또 불상을 그냥 수백 개를 모시고 개 수천 개를 모셔놓으면 그럼 뭐를 어쩌자는 입니까? 전부 곳곳에 불상인데... 그것 참 너무 이상하잖아요. 그것이요. 불상을 모시는 그런 의미가 완전히 퇴색돼 버리고 사라져버리고 없어지잖아요. 부처님을 한 분 딱 중앙에 모시고 두 보처보살을 딱 이렇게 모셔놓으면, 정말 그것은 우리 교주이신 부처님을 대접하는 그런 분위기가 되는데, 막 그냥 첩첩이 쌓아요. 다 못 쌓으니까 뒤로 첩첩이 쌓으는 겁니다. 얼굴 한 번 쳐다볼 수도 없고 하는 그런 불상을 만들어서 하는데 그것은 참, 문제가 있는 겁니다. 그렇게 안 하고 불사를 못하면 불사 하지 말아야지요. 꼭 그렇게 해야만 불사가 된다면 불사 하지 말아야지요.

그런 마음이 값진 마음입니다. 불상 창고를 만들어서 큰 대작불사를, 큰 법당을 짓고, 큰 절을 하는 것 보다는 정말 그렇게 안 하고는 이 시대에 불사를 할 수 없다. 그렇게 되면, 그냥 빈 땅에 사는 그 사람이 진짜 훌륭한 사람이고, 정말 불교를 제대로 행하는 사람이지요. 그런 어떤 우리의 소신이 제대로 공부를 해서 바로 서 됩니다. 공부를 아니 해서, 우리가 삼귀의, 삼귀의 하면서도, 부처님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말만 해놓고는 하루에 경전 한 줄도 안 보니 그것을 알 턱이 있나요? 모르니까 그냥 그렇게 그것이 불교인양으로 모두 그렇게 흘러가는 겁니다.

공부하는 기회가 많아지고 그래서 바로알고 해야 그것이 제대로 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여기에 비유가 하나 있어요.

4 부소자노(父少子老)의 비유

譬如有人(비여유인)이 色美髮黑(색미발흑)한

年二十五(년이십오)가 指百歲人(지백세인)하야

言是我子(언시아자)어든 其百歲人(기백세인)도

亦指年少(역지년소)하야 言是我父(언시아부)라

生育我等(생육아등)이라하면 是事難信(시사난신)이니다

佛亦如是(불역여시)하야 得道已來(득도이래)가

其實未久(기실미구)니다 而此大衆諸菩薩等(이차대중제보살등)은

已於無量千萬億劫(이어무량천만억겁)에 爲佛道故(위불도고)로

勤行精進(근행정진)하야

善入出住無量百千萬億三昧(선입출주무량백천만억삼매)하사

得大神通(득대신통)하며 久修梵行(구수범행)하고

善能次第(선능차제)로 習諸善法(습제선법)하며

巧於問答(교어문답)하야 人中之寶(인중지보)라

一切世間(일체세간)에 甚爲希有(심위희유)니라

今日世尊(금일세존)이 方云得佛道時(방운득불도시)에

初令發心(초령발심)하야 敎化示導(교화시도)하사

令向阿耨多羅三藐三菩提(영향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하시니

世尊(세존)하 得佛未久(득불미구)에

乃能作此大功德事(내능작차대공덕사)닛고

我等(아등)은 雖復信佛隨宜所說(수부신불수의소설)하사

佛所出言(불소출언)은 未曾虛妄(미증허망)이며

佛所知者(불소지자)는 皆悉通達(개실통달)이나 然(연)이나

諸新發意菩薩(제신발의보살)이 於佛滅後(어불멸후)에

若聞是語(약문시어)하면 或不信受(혹불신수)하야

而起破法罪業因緣(이기파법죄업인연)하리니

唯然世尊(유연세존)하 願爲解說(원위해설)하사

除我等疑(제아등의)하시며 及未來世(급미래세)에

諸善男子(제선남자)가 聞此事已(문차사이)하고

亦不生疑(역불생의)케하소서

譬如有人(비여유인)이, 비유하자면 어떤 사람이

色美髮黑(색미발흑)이야. 얼굴은 아주 아름다워요. 그리고 머리카락도 새카마요. 年二十五(년이십오)가, 나이가 한 25살 쯤 돼 보여요. 그런데

指百歲人(지백세인)하야, 그 사람이 100세 먹은 사람보고 가리키면서

言是我子(언시아자)어든, 이 사람이 내 아들이다. 하고

其百歲人(기백세인)도. 100살 사람도 亦指年少(역지년소)하야,

그 소년을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言是我父(언시아부)라. 이 사람은 나의 아버지다. 아 이렇게 엇바뀌게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生育我等(생육아등)이라하면, 내가 낳아서 키웠다 이렇게 한다면

是事難信(시사난신)이다. 이 일은 믿기 어렵다.

佛亦如是(불역여시)하야, 부처님도 또한 그와 같아서

得道已來(득도이래)가 其實未久(기실미구)라. 부처님 도 깨달아 성도한 것이 기껏해야 40여년밖에 안 됐다. 其實未久다. 실로 오래되지 아니했다. 而此大衆諸菩薩等(이차대중제보살등)은, 그런데 어찌하여 이 모든 보살등은 已於無量千萬億劫(이어무량천만억겁)에, 이미 무량 1000만 억겁에 爲佛道故(위불도고)로, 불도를 위한 까닭으로 勤行精進(근행정진)해서 善入出住無量百千萬億三昧(선입출주무량백천만억삼매).

무량 100천 만억삼매에 잘 들어가고 잘 삼매에서 나오고 또 잘 삼매에서 머물기도 하사,

得大神通(득대신통)하며, 大神通을 얻으며

久修梵行(구수범행)하고, 오래 동안 범행을 닦고

善能次第(선능차제)로, 잘 능히 차례대로

習諸善法(습제선법)하며, 모든 선법을 수습해 닦으며

巧於問答(교어문답)하야, 또 문답에 익숙하며

人中之寶(인중지보)라. 사람 가운데 보배라.

一切世間(일체세간)에 甚爲希有(심위희유)니다. 일체세간에 매우 희유한 것이 됩니다.

今日世尊(금일세존)이, 바야흐로 말하기를

方云得佛道時(방운득불도시)에, 불도를 얻었을 때에

初令發心(초령발심)하야, 처음 하여금 발심하게해서

敎化示導(교화시도)하사, 가르치고 보여주고 인도하사

令向阿耨多羅三藐三菩提(영향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향하게 했다 하시니, 世尊(세존)하 得佛未久(득불미구)에,

부처가 된지 오래지 아니 했음에 乃能作此大功德事(내능작차대공덕사)닛고? 어떻게 하여 이에 능히 이와 같은 큰 공덕의 일을 지었습니까? 이런 말입니다.

여기 보면요?

世尊이 바야흐로 말하기를 方云得佛道時(방운득불도시)에, 했어요.

불도를 얻었을 때에 그로부터 이렇게, 이렇게 가르쳤다. 그렇지요.

부처님이 불도를 이루지 아니 했으면 가르칠 수가 없지요. 그런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래봤자 기껏 불도를 얻고 40여년밖에 안 됐는데 했느냐?

이것은 40년 걸릴 것도 없어요. 불도를 이루자 그 찰나에 모든 사람들은 전부 부처입니다. 모든 세계는 전부 부처의 세계입니다. 그런 뜻이 포함되어있습니다. 한 사람이 성불하면 모든 사람이 다 성불한다.

一人(일인)이 發眞歸元(발진귀원)하면 十方虛空(시방허공)이 悉皆銷殞(실개소운)이라. 능엄경에도 그런 말이 있거든요. 한 사람이 도를 이루면 시방허공이 전부 다 부처의 세계가 된다. 또 선요에도 그런 말이 있지요?

禪要(선요)의 開堂普說(개당보설)에 법문하는데, “오늘 이렇게 개당보설, 조실이 돼가지고 첫 법문을 하는데 무슨 상서가 있습니까?”라고 하니까

온갖 유정무정이 전부 성불했느니라. 이것이 상서라는 겁니다.

참 좋은 표현이지요. 이것 하고 똑 같은 내용입니다. 선요의 그것 하고...

선요의 첫 법문에 보면 그러거든요. 고봉스님께서 도를 이뤄가지고 오늘 처음 법문을 하시는데, 조실이 돼서 처음 법문하는데, “이것이 무슨 祥瑞(상서)가 있습니까?” 하니까 산하대지와 삼라만상과 유정무정이 悉皆성불이니라. 그랬어요. 모두 모두 성불이니라. 그러니까 이 사람이, 학인이 “학인은 어찌하여 성불하지 못했습니까?” 그렇게 해서 질문이 한참 오고가잖아요. 참 재미있는 형식으로 짜여져 있거든요.

성불한 사람에게는, 말하자면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일체동물, 저 산하대지 산천초목이 전부 부처의 세계입니다. 다 성불이라고요. 부처의 세계...

이것도 그대로 아닙니까? 그러니까 고봉스님도 그렇게 말한 겁니다.

산하대지와 산천초목과 유정무정이 悉皆성불이니라. 그렇게 말했어요.

여기도 보면 처음 불도를 얻었을 때에, 得佛道時(득불도시)에 初令發心(초령발심)하야, 처음 발심하게해서 敎化示導(교화시도)했다.

敎化했다. 하는 말은, 말하자면 부처님이 성도한 그 순간 모든 사람이 이미 다 부처로 보이더라. 화엄경에도 여래 출현품에 똑 같은 소리 했어요.

부처님이 성도하고 나서 가만히 살펴보니까 사람들이 전부 여래의 지혜와 덕성을 갖추고 있더라. 그래 奇哉奇哉(기재기재)라. 신기하고 신기하여라. 어찌하여 이 많은 새카만 중생들이... 저 동물보다도 못하게 보이는 그 인도 천민들, 불가촉천민들. 그것도 2600년 전에, 지금도 가보면 저것이 동물인지 사람인지 분간하지 못할 정도로 그렇게 수십 년 한 번도 빨지않은 담요 떼기 둘둘 감고 누워서 자는지 죽었는지 모를 정도로 그렇게 살고 있거든요. 그런데 2600년 전에 그 천민들 삶이 오죽 했겠습니까?

그런 사람들을 하나, 하나 살펴보니까 전부 여래의 지혜와 덕성을 저대로 고스란히 갖추고 있더라. 야~ 신기하고 신기하다.

당신은 태자의 출신으로, 정말 귀족출신으로 호의호식하다가, 머리도 아주 총명하고 처음부터 종교성도 뛰어났고, 그리고 거기서도 부족해서 6년간 피나는 고행을 했고, 많은 스승을 찾아다니면서 배웠고 그리고 正覺(정각)을 이루었어요. 그 동안 투자한 것이 너무 많아요. 그런데 눈을 뜨고 보니까 정말 수행이라는 수자도 모르고, 출가라는 출자도 모르고, 아무것도 모르는 불가촉천민 그 사람, 한 사람 한 사람도 자기하고 똑 같더라 이 겁니다. 자기하고 똑 같아요. 궁극적 차원의 그 모습은 자기하고 하나도 다를 바가 없더라.

그러니까 이 사람이 신기하고 신기하다.

부처님의 삶은요? 너무 고급스런 삶을 살았기 때문에 신기한 것이 없었어요. 아무것도 신기한 것이 없습니다. 촌사람에게 신기하지 태자에게 뭐가 신기한 것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 사람은 신기하고 신기하다.

사람들의 내면을 들여다보니까 하나, 하나가 그대로 부처거든요.

그대로 부처니까 그것이 신기한 겁니다. 그래서 신기하고 신기하여라.

화엄경 여래 출현품에 그런 말을 했었어요. 그것하고 똑 같은 겁니다.

고봉스님의 법문이나 여기 법화경의 법문이나 화엄경의 그 법문이나 한결같습니다.

그러니까 예를 들어서 강아지에게는요? 왕도 강아지의 세계에서 하나의 존재일 뿐이지 왕이고 뭐고 아무것도 없어요. 강아지의 눈에는 어떤 산천초목도 강아지 세계의 그냥 어떤 무엇일 뿐입니다. 누가 가도 마찬가지입니다. 깨달은 사람의 세계는 일체 것이 깨달은 사람의 세계의 존재입니다. 말하자면 그것을 성불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깨달은 사람의 안목에는 전부 깨달음으로써의 어떤 수용을 하는 것입니다. 마찬 가지입니다. 우리도 전부 각자의 수준이 어떠하냐? 각자의 지혜와 안목이 어떠하냐에 따라서 내 안목만치 살아가는 겁니다.

내 안목만치 이 세상을 받아들이고 수용하고 사는 것이지요.

내가 보니까 여래가 처음 깨닫고 나서 敎化示導했다.

가르치고 이끌어주었다라고 하는 말은, 그대로 깨닫고 나니까 전부 그 때 이미 본래 교화된 보살이다. 본래 부처더라. 이것이 그 뜻입니다.

것을 이해하는 것이 제일 어려운 것이고, 법화경에서의 제일 큰 아주 중요한 점이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여기 보면 어찌하여 이런 큰 공덕을 지었습니까?

我等(아등)은 雖復信佛隨宜所說(수부신불수의소설)하사, 비록 다시 부처님의 편의를 따라서 설한바, 佛所出言(불소출언)은, 부처님이 내놓는 말씀은 未曾虛妄(미증허망)이며, 일찍이 거짓말이 없어. 거짓말은 하지 않을 것이다 이 말입니다. 佛所知者(불소지자)는, 부처님이 아는 것은

皆悉通達(개실통달)이라. 함을 믿는이 말입니다. 우리들은 다 믿습니다. 부처님이 하신 말씀을 다 믿습니다. 然(연)이나, 그러나, 그러나

諸新發意菩薩(제신발의보살)이, 막 이제 발심한 보살들이

於佛滅後(어불멸후)에, 부처님이 열반한 뒤에

若聞是語(약문시어)하면, 이러한 이야기. 부처님이 눈을 뜨니까 세상 사람이 전부 눈뜬 사람들이더라. 말하자면 조실이 돼서 오늘 처음 법문하는데,

산천초목과 산하대지와 유정무정이 일체 다 성불이다. 하는 이런 이치를 어떻게 이해하겠느냐? 불멸후에 이러한 말을 누가 믿고 받아들이겠느냐?

或不信受(혹불신수)하야, 혹 믿고 받아들이지 못해서

而起破法罪業因緣(이기파법죄업인연). 법을 깨뜨리는 罪業因緣을 일으킬 것이리니, “아~이고 이거 엉터리 소리다. 아, 어떻게 그 많은 보살들을 부처님이 40년 동안에 교화했단 말이냐? 말도 아니다. 아니, 고봉스님이 상당 법문하는 그 인연이 산천초목과 유정무정이 다 성불이라는 말이 그게 말도 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학인은 어찌하여 성불하지 못했습니까? 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지. 그래서 그것은 돼도 않는 소리다.” 하는 破法罪業因緣(파법죄업인연)을 짓게 된다 이 것이지요.

唯然世尊(유연세존)하,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願爲解說(원위해설)하사, 원컨대 해설하시사

除我等疑(제아등의)하시며, 우리들의 의심을 제거해 주시고, 그리고

及未來世(급미래세)에 諸善男子(제선남자)가 聞此事已(문차사이)하고, 이야기를, 이 사실을 듣고 亦不生疑(역불생의)케하소서.

또한 의심을 내지 않도록 좀 잘 설명 해주십시오. 이런 말입니다.

중요한 부분이고 그 동안도... 저는 전체를 이해를 하고 법화경의 종지가 무엇이라는 것을 말씀을 수시로 드려왔지만, 사실 이것은, 우리가 불교를 전혀 모르고, 또 제가 그런 법화경의 종지를 미리미리 언급하지 않고 그대로 글자대로만 밟아왔다면, 이런 이야기 정말 믿기 어렵지요.

본문ㆍ적문. 또는 우리 인간의 궁극적 차원. 본래적인 차원. 이런 표현을 써가면서 이해시키려고 말씀을 여러 번 드렸으니까 그런대로 이해가 되지만, 안 그러면 여기 破法因緣. 법을 깨뜨리는, 법을 비방하는,

破法이라는 말은 법을 깨뜨린다 하니까, 법을 비방하고 법을 또 믿지 않고 하는 그런 罪業因緣을 짓게 된이 말입니다. 얼마든지 생각할만한 그런 내용입니다. 그 다음에는 중송이니까...

5 게송으로 거듭 설하다

(1) 개개인의 본래성불

爾時彌勒菩薩(이시미륵보살)이 欲重宣此義(욕중선차의)하사

而說偈言(이설게언)하니라

佛昔從釋種(불석종석종)하사 出家近伽耶(출가근가야)

坐於菩提樹(좌어보리수)하시니 爾來尙未久(이래상미구)

此諸佛子等(차제불자등) 其數不可量(기수불가량)

久已行佛道(구이행불도)하야 住於神通力(주어신통력)하며

善學菩薩道(선학보살도)하야 不染世間法(불염세간법)하대

如蓮華在水(여연화재수)從地而涌出(종지이용출)하사

皆起恭敬心(개기공경심)하야 住於世尊前(주어세존전)하니

是事難思議(시사난사의)云何而可信(운하이가신)이릿가

佛得道甚近(불득도심근)하고 所成就甚多(소성취심다)하시니

願爲除衆疑(원위제중의)하사 如實分別說(여실분별설)하소서

(2) 비유를 들어 밝히다

譬如少壯人(비여소장인)年始二十五(연시이십오)

示人百歲子(시인백세자)髮白而面皺(발백이면추)하대

是等我所生(시등아소생)이라하니子亦說是父(자역설시부)라하면

父少而子老(부소이자노)擧世所不信(거세소불신)이니다

世尊亦如是(세존역여시)하사 得道來甚近(득도래심근)하고

是諸菩薩等(시제보살등)志固無怯弱(지고무겁약)하야

從無量劫來(종무량겁래)而行菩薩道(이행보살도)하며

巧於難問答(교어난문답)하사 其心無所畏(기심무소외)하며

忍辱心決定(인욕심결정)하야 端正有威德(단정유위덕)하며

十方佛所讚(시방불소찬)이라 善能分別說(선능분별설)하며

不樂在人衆(불락재인중)하고 常好在禪定(상호재선정)하며

爲求佛道故(위구불도고)於下空中住(어하공중주)니다

我等從佛聞(아등종불문)하와 於此事無疑(어차사무의)이노나

願佛爲未來(원불위미래)하사 演說令開解(연설령개해)하소서

若有於此經(약유어차경)生疑不信者(생의불신자)

卽當墮惡道(즉당타악도)리니 願今爲解說(원금위해설)하소서

是無量菩薩(시무량보살)云何於少時(운하어소시)

敎化令發心(교화령발심)하야 而住不退地(이주불퇴지)닛고

종지용출품. 이것이 말하자면 이야기하려고 하는 序章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나오는 여래수량품. 이것이 우리 개개인의 궁극적 생명ㆍ궁극적 본체ㆍ우리 인간의 본래 모습우리 인간의 참 얼굴ㆍ본래면목 이라고도 하고 그러지요. 선문에서는 본래면목 이라고도 하고 그러는데, 그것을 여래수량품. 如來의 壽量. 생명의 그 연대가 얼마나 오래고 기냐? 하는 그런 내용을 여래수량품에서 이야기하게 되겠습니다.

從地湧出品 第十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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