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종교와 나

법화경 8-3 여래수량품

應觀 2013. 1. 12. 06:56

 

 

묘법연화경 강좌 제8강-3

- 교육원 불교전문강당 2009. 09. 22 -

제16 여래수량품입니다. 後 10품 本門(본문)중에 안목이라고 할 정도로 중요한 품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無量(무량)한 如來壽量(여래수량). 생명의 량. 그런 뜻이지요. 한 마디로 우리가 不生不滅(불생불멸)이라는 말을 익히 알고 있는데, 우리의 본 생명은 불생불멸이다.

현상은 생멸하지만, 그 궁극적 차원에 있어서는 불생불멸이다. 그런 뜻이지요. 그것을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사실 종이 한 장도요?

이 가벼운 종이 한 장도 새롭게 못 만들어냅니다. 우리가 아무리 신소재, 신소재해도 진정 신소재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뭔가 있는 것을 바탕으로 해서 거기서 어떤 화학적인 반응을 일으켜가지고 다른 모습으로 바꾸어 낼 뿐이지 진정 신소재는 없습니다.

그래서 이 종이 한 장. 아무리 미미한 어떤 물질하나라도 새로운 것은 없습니다. 그럼 뭐지요? 그것이 불생이지요. 생기지 않았다 하는 것입니다. 우리 육신도 마찬가지입니다. 육신도 마찬가지이고, 우리 정신세계, 마음은 더 말할 것도 없고요. 육신도 사실은 산천초목과ㆍ산하대지와ㆍ바람ㆍ구름ㆍ하늘ㆍ별ㆍ태양ㆍ이 모든 것들이 내가 됐고, 내가 그 모든 것과 서로 교류하고 있습니다. 죽은 뒤에 돌아가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죽은 뒤에 거기로 돌아가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지금 살아서도 사실은 모두 함께 공유하고 있습니다.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다 그래요.

예를 들어서 제가 여기서 토해내는, 우리가 呼ㆍ吸(호흡) 아닙니까?

호 하고 뿜어내는 것이 호입니다. 들이마시는 것이 흡이고요.

제가 호 하고 흡 해놓으면 여러분이 그것을 호흡합니다.

여러분이 호흡 한 것을 제가 호흡하는 겁니다. 전부 서로가 똑 같습니다. 여기 기둥ㆍ등ㆍ벽 할 것도 없이 모든 공간이 알고 보면 전부 함께 공유하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이 토해놓은 숨을 제가 마시고 제가 살아가는 겁니다. 제가 토해놓은 숨을 여러분이 마시고 여러분이 살아가는 겁니다. 산천초목과 산하대지와 나와의 관계도 똑 같아요.

그런 내용을 사실 알고 보면 뭐 우리가 一中一切多中一(일중일체다중일) 一卽一切多卽一(일즉일체다즉일). 늘 외우고 있는 그 염불 그대로입니다. 서로 이미 相卽相入(상즉상입)이 되어있어요. 시간적으로도 그렇고, 공간적으로도 그렇고요. 그래서 사실은 不生不滅입니다. 그런데 외형만 시간 따라서 변할 뿐이지요. 외형이 변하는 것은... 우리 여기 한 시간 앉아있는 동안에도 끊임없이 변해가고 있지 않습니까? 끊임없이... 한 시간 동안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1분 1초 동안 변해가고 있는 것이지요. 외적인 형태는 그렇지만 본질적인 입장에서는 모두가 동일하고 하나고 불생불멸이고 그런 이치입니다. 그런 뜻에서 보면 여기 여래수량이 숫자로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하지만 그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산수로써 계산되어지는 그런 숫자는 물론 아니니까 따지고 보면 불생불멸이고 영원하다. 영원하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결론만 말씀드리면 여래수량...

그것은 여래의 생명의 량이 그렇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우리 개개인의 생명의 량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우리 개개인뿐만이 아니고, 이 지금 나무 한 토막 잘라서 책상을 만들었지만, 이 책상이 어쩌다가 잘못되면 부엌에 갖다가 뗍니다. 그렇게 해서 예를 들어서 며칠 사이에 눈앞에서 생멸이 벌어지지만, 책상의 생멸이 눈앞에서 벌어지지만 사실 그것 본질에 있어서는 생멸이는 것이지요. 그저 다른 형태로 변했을 뿐이지요. 이 대기 속에 흩어져 있다가 또 다른 어떤 얼굴로, 또 다른 어떤 모습으로 늘 나타나는 것이지요.

책상하나도 그렇고, 마이크 하나도 그렇고, 우리 개개인그렇고요.

이것이 부처님을 우선으로 해놓고 부처님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들과 그리고 삼라만상의 존재를 그렇게 이해해 들어가야 된다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려운 대목이지요. 궁극적인 차원이니까요. 우리들의 궁극적 차원니까... 어떤 현상적 차원 같으면 그 사람 몇 년도 생이고 성씨는 뭐고 얼굴은 어떻게 생겼고 이런 식으로 해석하면 그런 것은 차라리 쉽지요.

그래서 적문보다 본문이 어렵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信解(신해)를 당부 하지요. 三戒三請障(삼계삼청장)이라고 제가 그런 표현도 하는데, 세 번 경계하는데 세 번 또 청합니다.

제16 여래수량품(如來壽量品)

一 무량한 여래수량(如來壽量)

1 신해(信解)를 당부함

爾時佛告諸菩薩(이시불고제보살)과

及一切大衆(급일체대중)하사대 諸善男子(제선남자)야

汝等當信解如來誠諦之語(여등당신해여래성제지어)니라

復告大衆(부고대중)하사대

汝等當信解如來誠諦之語(여등당신해여래성제지어)니라

又復告諸大衆(우부고제대중)하사대

汝等當信解如來誠諦之語(여등당신해여래성제지어)니라

是時菩薩大衆(시시보살대중)에 彌勒爲首(미륵위수)하사

合掌白佛言(합장백불언)하사대 世尊(세존)하

唯願說之(유원설지)하소서

我等當信受佛語(아등당신수불어)호리다

如是三白已(여시삼백이)하니라

復言唯願說之(부언유원설지)하소서

我等當信受佛語(아등당신수불어)호리다

爾時世尊(이시세존)이 知諸菩薩(지제보살)의

三請不止(삼청부지)하시고 而告之言(이고지언)하니라

爾時佛告諸菩薩(이시불고제보살)과

及一切大衆(급일체대중)하사대,

그 때에 부처님이 여러 보살과 일체대중들에게 고하사대,

諸善男子(제선남자)야 汝等當信解如來誠諦之語(여등당신해여래성제지어)니라. 모든 선남자야 그대들은 마땅히 如來誠諦之語를 信解하라 그랬어요. 믿고 이해하라. 如來의 誠諦. 성실하고 진실한, 성실하고 진실한 말을 믿고 이해하라. 復告大衆(부고대중)하사대, 또 여러 대중들에게 고하사대 汝等當信解如來誠諦之語(여등당신해여래성제지어)니라.

그대들은 마땅히 信解하라. 믿고 이해하라. 如來의 誠諦之語를. 성실하고 진실한 말을 믿고 이해하라. 又復告諸大衆(우부고제대중)하사대, 또 여러 대중들에게 고하사대 汝等當信解如來誠諦之語(여등당신해여래성제지어)니라. 그대들은 마땅히 여래의 성실하고 진실한 말을 믿고 이해하라. 信解할지니라. 이렇게 세 번 경계하는 것입니다. 三戒라고 그래요. 경계할 戒.

是時에 菩薩大衆(시시보살대중)에 彌勒이 爲首(미륵위수)하사,

미륵이 우두머리가 되어서 合掌白佛言(합장백불언)하사대 世尊(세존)하 唯願說之(유원설지)하소서. 예, 원컨대 설하십시오. 我等當信受佛語(아등당신수불어)호리다. 우리들은 마땅히 부처님말씀을 믿고 받아들이겠습니다.

如是三白已(여시삼백이)이라. 이와 같이 세 번이 고해 마치니라.

復言(부언). 다시 말하기를 唯願說之(유원설지)하소서

我等當信受佛語(아등당신수불어)호리다. 我等이 마땅히 부처님말씀을 신수하리다. 爾時世尊(이시세존)이, 그 때에 세존이 知諸菩薩(지제보살)의 三請不止(삼청부지)하시고, 모든 보살들의 세 번 청해가지고 그치지 아니함을 아시고, 而告之言(이고지언). 고해서 말씀하니라.

2 세간의 상식

汝等諦聽如來秘密神通之力(여등제청여래비밀신통지력)이니

一切世間(일체세간)에 天人及阿修羅(천인급아수라)는

皆謂今釋迦牟尼佛(개위금석가모니불)이

出釋氏宮(출석씨궁)하사 去伽耶城不遠(거가야성불원)에

坐於道場(좌어도량)하야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하니라

汝等은

諦聽如來秘密神通之力(여등제청여래비밀신통지력)이니,

여래의 비밀신통지력을 자세히 들을지니, 잘 들을지니,

一切世間(일체세간)에 天人及阿修羅(천인급아수라)는

皆謂今釋迦牟尼佛(개위금석가모니불)이, 다 이르기를, 皆謂. 다 말하기를, 사람이든 천신이든 아수라는 누구든 간에 다 말하기를, 오늘 우리들까지도, 석가모니부처님이 出釋氏宮(출석씨궁)하사, 석씨 궁에서 나와 가지고

去伽耶城不遠(거가야성불원)에,

가야성에서 가기가 멀지 아니한 곳에

坐於道場(좌어도량)하야, 도량에 앉아서 -보리수하지요? 부다가야...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하니라.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전부 그렇게 말한다.

하지만 선남자야 여래수량의 무량무변이라 그랬지요?

3 여래수량의 무량무변

然善男子(연선남자)야 我實成佛已來(아실성불이래)는

無量無邊百千萬億那由他劫(무량무변백천만억나유타겁)이니라

譬如五百千萬億那由他阿僧祗三千大千世界(비여오백천만억나유타

아승지삼천대천세계)를 假使有人(가사유인)이

抹爲微塵(말위미진)하야

過於東方五百千萬億那由他阿僧祗國(과어동방오백천만억나유타

아승지국)하야 乃下一塵(내하일진)하대

如是東行(여시동행)하야 盡是微塵(진시미진)이면

諸善男子(제선남자)야 於意云何(어의운하)오

是諸世界(시제세계)를 可得思惟校計(가득사유교계)하야

知其數不(지기수부)아 彌勒菩薩等(미륵보살등)이

俱白佛言(구백불언)하사대 世尊(세존)하 是諸世界(시제세계)는

無量無邊(무량무변)이라 非算數所知(비산수소지)며

亦非心力所及(역비심력소급)이라

一切聲聞辟支佛(일체성문벽지불)이 以無漏智(이무루지)로

不能思惟(불능사유)하야 知其限數(지기한수)며 我等(아등)이

住阿鞞跋致地(주아비발치지)라도 於是事中(어시사중)에

亦所不達(역소부달)이오니 世尊(세존)하

如是諸世界(여시제세계)는 無量無邊(무량무변)이니다

爾時佛告大菩薩衆(이시불고대보살중)하사대

諸善男子(제선남자)야 今當分明(금당분명)히

宣語汝等(선어여등)호리라 是諸世界(시제세계)에

若着微塵(약착미진)과 及不着者(급불착자)를

盡以爲塵(진이위진)하야 一塵一劫(일진일겁)이라도

我成佛已來(아성불이래)는

復過於此百千萬億那由他阿僧祗劫(부과어차백천만억나유타

아승지겁)이니라

然善男子(연선남자)야, 그러나 선남자야

我實成佛已來(아실성불이래)는, 내가 실로 성불한 이래는

無量無邊百千萬億那由他劫(무량무변백천만억나유타겁)이니라.

본래 성불이다 이것이지요. 그러니까 우리로 치면 2600여 년 전에 부처님이 출가해서 성도했다 라고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뭐라고요?

선남자야 내가 실로 성불한이래는 무량무변 백천 만억 나유타겁이니라. 인류의 역사가 얼마나 됐습니까? 이 지구의 역사를 60억년 그렇게 치지요? 생명의 역사는 한 40억년 정도 치나요? 그리고 사람의 역사는 한 2~3만년? 정도... 그렇게 칩니다. 여기 보십시오. 뭐라고요?

無量無邊百千萬億那由他劫. 겁이라고 했어요. 년도 아니고요.

年도 아니고 겁이라고 그랬어요.

譬如五百千萬億那由他阿僧祗三千大千世界(비여오백천만억나유타아승지삼천대천세계)를 비유하자면, 5백 천 만억 나유타 아승지 3천대천세계를, 三千大千世界는 지구라고 칩니다. 5백 천 만억 나유타 아승지 지구가 있다고 하자. 그것을 假使有人(가사유인)이, 어떤 사람이 抹爲微塵(말위미진)하야, 갈아가지고 抹爲微塵이라. 작은 먼지를 만들었어. 그래서

過於東方五百千萬億那由他阿僧祗國(과어동방오백천만억나유타아승지국)하야, 동쪽으로, 동쪽으로 지나가면서 그것을 하나씩 뿌리는데, 얼마나 지나가서 그 먼지 한 개를 떨어뜨리는가 하니, 동방으로 500천만 억 나유타 아승지국을 지나서 乃下一塵(내하일진)하대, 그때에 먼지 한 개를 내려놓고,

如是東行(여시동행)하야, 이와 같이 동쪽으로, 동쪽으로 가서

盡是微塵(진시미진)하며, 그 먼지가 다 할 것 같으면

諸善男子(제선남자)야 於意云何(어의운하)오? 모든 선남자야, 어떻게 생각하는가? 是諸世界(시제세계)를, 모든 세계를 可得思惟校計(가득사유교계)해서 知其數不(지기수부)아? 사유하고 헤아려서 그 숫자를 알 수 있겠는가?

彌勒菩薩等(미륵보살등)이 俱白佛言(구백불언)하사대, 미륵보살등이 함께 부처님께 고해 말하되, 世尊(세존)하 是諸世界(시제세계)는, 세존이시여, 이 모든 세계는 無量無邊(무량무변)이라 非算數所知(비산수소지)며, 산수로서 알바가 아니며 亦非心力所及(역비심력소급)이라. 또한 마음의 힘으로 미칠 바도 아닙니다. 一切聲聞辟支佛(일체성문벽지불)이 以無漏智(이무루지)로, 無漏智로써, 샘이 없는 지혜로서도

不能思惟(불능사유)하야, 능히 사유하지 못합니다.

사유해서 知其限數(지기한수)며, 그 한량을 알지 못하며

我等(아등)이 住阿鞞跋致地(주아비발치지)라도, 우리들이 阿毘跋致지혜에 머물지라도, 불퇴전 지위에 머물지라도 於是事中(어시사중)에, 이 일 가운데에서 亦所不達(역소부달)이라. 이 일을 또한 통달하지 못하오니 世尊(세존)하, 세존이시여 如是諸世界(여시제세계)는 無量無邊(무량무변)이니다.

爾時佛告大菩薩衆(이시불고대보살중)하사대, 그 때에 부처님이 대보살대중에게 고하사대, 諸善男子(제선남자)야 今當分明(금당분명)히,

지금 마땅히 분명히 宣語汝等(선어여등)호리라. 그대들에게 宣語. 선설해서 말하리라. 是諸世界(시제세계)에 若着微塵(약착미진)과, 만약에 먼지가 떨어진 곳이거나 及不着者(급불착자), 먼지가 떨어지지 않은 그 세계들을 盡以爲塵(진이위진)하야, 다시 전부 갈아서 먼지를 만들어서

一塵一劫(일진일겁)이라도, 그 먼지 한 개를 1겁을 친다하더라도

我成佛已來(아성불이래)는, 내가 성불한 이래는 復過於此百千萬億那由他阿僧祗劫(부과어차백천만억나유타아승지겁)이다. 다시 100천만 억 나유타 아승지겁을 더 지나간다. 그랬어요.

예를 들어서 저~기 설악산을 부숴가지고 먼지를 만들었다 합시다.

설악산 하나만도 큰 산이지요. 그런데 그 먼지 숫자가 얼마겠어요?

설악산은 고사하고 저 우리가 다 알고 있는 조그마한 남산. 남산하나를 부숴가지고 먼지를 만들었다고 칩시다. 먼지 숫자가 얼마겠어요?

그런데 여기에 표현하고 있는 이 500천만 억 나유타 아승지 삼천대천세계를 갈아가지고 먼지를 만들고... -뭐라고 표현할 수가 없지요.

또 동방으로 가면서 먼지가 아까워서 500천만 억 나유타 아승지국을 지나서 먼지 한 개를 떨어뜨렸다. 그렇게 해서 그것이 다하고, 그 다음에 또 먼지가 떨어진 곳이거나 먼지가 떨어지지 아니한 그 모든 세계를 다 갈아 가지고 먼지를 만들어서 그 먼지 한 개를 1겁으로 친다하더라도 내가 성불한 이래는 그 보다 더 지나간다.

그냥 지나가는 것이 아니고 뭐라고요?

100천만 억 나유타 아승지겁을 더 지나간다.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니까 지구의 역사가 60억년이고 생명의 역사가 40억년 이고 사람의 역사는 한 2~3만년 밖에 안 되는 이 우리 현실 속에서,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은, 것이 맞는 말입니다. 왜냐? 예를 들어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가 60억년이 됐고 100억년이 설사 됐다 손치더라도 어쨌든 우리는 여기서 생겼어요. 그리고 것이 어디엔가 우리가 존재할 조건이 되어서, 우리가 이렇게 존재합니다. 그리고 것은 그 근원의 역사를 따져 가면 또 조건이 될 어떤 이유에서 우리가 됐지만, 그 이전에 우리가 될 수 있는 다른 어떤 조건의 역사는 또 얼마나 오랜 역사인지 모릅니다. 이 우주 전체에서 우리가 생각한다면...

그럼 대기라고 해도 좋고요. 거기서 어떤 위성과의 충돌로 해서, 말하자면 거기서 하나의 지구가 생겼잖습니까? 지금 천문학적인 상식으로 우리가 이야기하면... 그럼 그 전에도 그런 어떤 대기 속에서 먼지로 있다가, 먼지가 하나 씩, 하나 씩 충돌하면서 그것이 쪼개지고 결합하고, 쪼개지고 결합하고 하는 그런 과정에서 하나의 위성이 생기지 않습니까? 모든 별들의 역사는 그렇게 이루어지거든요. 그렇지만 그렇게 될 이유가 다 있어요. 그럴 건더기가 이미 있었어요. 그리고 그것은 꼭 사람이어야 되는 것만은 아닙니다. 생명체라만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상식으로 생명체다. 아니다 그렇게 나누는 것이지 다른 어떤 통로와석 이라고 하는 소위 無情物(무정물). 그것이 생명체냐 아니냐 그것도 우리가 우리 상식으로, 보통 우리의 과학 상식으로 따져서 생명체다. 아니다 그러는 것이지, 엄밀히 따져보면 그것도 똑 같은 생명체입니다.

나의 어떤 기운이 거기에 스며들어있고, 그 기운을 받아서 내가 존재하고요. 어느 숲속을 거닐든지 아니면 멀리 떨어져 있든지 가까이 있든지 간에, 그 대기가 우리에게 주는 것을 통해서 나는 이렇게 살아가고,

나의 기운은 또 대기로 돌아가서... 이렇게 사실은 시간도 나눌 수가 없고, 공간도 나눌 수가 없는 그런 존재로써 내가 이렇게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가, ‘세상에 이런 비유가 어디 있느냐?’현대 상식으로 보면 그렇게 생각이 들지만, 이것이 사실은 맞는 말입니다.

지금 우리가 천문학이 크게 발달하지 못해가지고 천체 망원경으로

“몇 백억 광년.” 그러지요? 멀리까지 볼 수 있는 것을 “몇 백억 광년.” 빛의 속도로 몇 백 억년 동안 달려서 갈 수 있는 그 곳에 있는 별을 본다. 이러거든요. 그것은 천체 망원경이 그것 밖에 발달이 안 되어서 그런 겁니다.

예를 들어서 지금보다 백배, 천배 더 발달한 어떤 망원경을 가지고 본다면, 또 보다 더 멀리 떨어져있는, 더 멀리 떨어져있는 몇 백억 광년이 아니라, 몇 십조 광년 지나서 있는 그 곳의 어떤 별을 볼 수 있을 겁니다. 충분히 볼 수 있을 겁니다. 그런 세대가 아마 우리세대에 올지도 몰라요. 이 우주는 정말 무한한 것이고 영원한 것이고요.

공간적으로 무한한 것이고 시간적으로 영원한 것이지요. 이것 사실이에요. 그러니까 이런 이야기가 정말 깨달음의 안목. 투철한 깨달은 사람의 안목으로 볼 때, 우리 생명의 역사는, 궁극적인 차원에서 볼 때 우리 생명의 역사는 것이 맞는 표현입니다. 세상에 이런 비유가 어디 있느냐? 고 얼토당토 않는 그런 말이라고 생각이 들지 모르지만, 그것은 우리 좁은 상식이고요.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천문학의 어떤 상식이라든지 물리학의 상식이라든지 그것만 가지고도, 이런 이야기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야 되거든요.

사실은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불생불멸, 불생불멸하는 것이 뭡니까? 그것이 사실은 진리거든요. 보다 더 다른 차원의 눈을 가지고 보면, 모든 존재가 불생불멸이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이해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안목의 차원이 아직 그렇게 열려있지 못해서 그런 것이지요. 그래서 이런 깨달으신 분의, 성인가르침을 자꾸 접하고 그것을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세상 상식과 매칭을 시켜서 이것이 타당한가 안 한가 자꾸 비판도 해보고, 토론도 해보고, 스스로 따져도 보고 그래야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것이 옛날 소리다. 어처구니없는 소리다. 이럴 것이 아니라 이것은 정말 어찌하여 2600여년 전에 이렇게 깨달으신 안목으로 이런 사실을 보았는가? 모든 존재의 불생불멸과 모든 공간의 영원. 무한한 세계를 어떻게 이렇게 보았는가? 이것을 우리가 탄복할 뿐인 것이지요.

불교 TV에 그 전에 어떤 노 천문학자가 나와서 강의를 여러 시간 했는데, “아~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들이 천문학을 모르고 불교를 공부한다.” 고 아주 탄복을 해서 그렇게 통탄해하는 그런 강의를 제가 몇 번 들었거든요. 불교 TV 틀자마자 그 분이 나오니까 가끔 보는데...

그 천문학을 공부한 사람들은 불교에 이런 이야기하고 너무 잘 맞아 떨어지고 너무 신기하니까요. 어찌 이렇게 요즘 아주 발달한 천문학이나 물리학가지고 대단하다고, 대단한 발견이라고 하고 있는데, 아이 불교는 2600년 전에 벌써 그런 이야기 다 해놨으니... 오히려 지금 현대에 아주 발달한 물리학이나 천문학으로도 못 따라가고 있으니까요.

불교에서 말한 것을 쫓아오려면 어림도 없지요.

4 중생들을 위한 방편

自從是來(자종시래)

我常在此娑婆世界(아상재차사바세계)하야

說法敎化(설법교화)하며 亦於餘處(역어여처)인

百千萬億那由他阿僧祗國(백천만억나유타아승지국)에도

導利衆生(도리중생)호라 諸善男子(제선남자)야

於是中間(어시중간)에 我說燃燈佛等(아설연등불등)하며

又復言其入於涅槃(우부언기입어열반)호니

如是皆以方便分別(여시개이방편분별)이니라

諸善男子(제선남자)야 若有衆生(약유중생)이

來至我所(내지아소)어든 我以佛眼(아이불안)으로

觀其信等諸根利鈍(관기신등제근이둔)하며

隨所應度(수소응도)하야

處處自說名字不同(처처자설명자부동)과

年紀大小(연기대소)하며

亦復現言當入涅槃(역부현언당입열반)이라하고

又以種種方便(우이종종방편)으로 說微妙法(설미묘법)하야

能令衆生(능령중생)으로 發歡喜心(발환희심)케하니라

諸善男子(제선남자)야 如來見諸衆生(여래견제중생)이

樂於小法(낙어소법)하야 德薄垢重者(덕박구중자)하니라

爲是人說(위시인설)하대 我少出家(아소출가)하야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하니

然(연)이나

我實成佛已來(아실성불이래)는 久遠若斯(구원약사)언만은

但以方便(단이방편)으로 敎化衆生(교화중생)하야

令入佛道(영입불도)일새 作如是說(작여시설)이니라

諸善男子(제선남자)야 如來所演經典(여래소연경전)이

皆爲度脫衆生(개위도탈중생)이니 或說己身(혹설기신)하고

或說他身(혹설타신)하며 或示己身(혹시기신)하고

或示他身(혹시타신)하며 或示己事(혹시기사)하고

或示他事(혹시타사)하대 諸所言說(제소언설)이

皆實不虛(개실불허)니라 所以者何(소이자하)오

如來如實知見三界之相(여래여실지견삼계지상)하대

無有生死(무유생사)의 若退若出(약퇴약출)하며

亦無在世(역무재세)와 及滅度者(급멸도자)라

非實非虛(비실비허)며 非如非異(비여비이)며

不如三界(불여삼계)에 見於三界(견어삼계)니

如斯之事(여사지사)를 如來明見(여래명견)하대

無有錯謬(무유착유)언만은 以諸衆生(이제중생)이

有種種性(유종종성)과 種種欲(종종욕)과 種種行(종종행)과

種種憶想分別故(종종억상분별고)로

欲令生諸善根(욕령생제선근)하야 以若干因緣(이약간인연)과

譬喩言辭(비유언사)로 種種說法(종종설법)하야

所作佛事(소작불사)를 未曾暫廢(미증잠폐)니라

自從是來(자종시래)로 我常在此娑婆世界(아상재차사바세계)하야,

이로부터 옴으로 나는 이 항상 이 사바세계에 있어서

說法敎化(설법교화)하며 亦於餘處(역어여처)인, 또한 다른 곳곳인

百千萬億那由他阿僧祗國(백천만억나유타아승지국)에서도 導利衆生(도리중생)호라. 중생들을 導利. 인도하고 이익케 했노라.

諸善男子(제선남자)야, 모든 선남자야

於是中間(어시중간)에 我說燃燈佛等(아설연등불등)하며,

나는 연등불등을 이야기하며,

又復言其入於涅槃(우부언기입어열반)호니, 또 다시 말하기를 열반에 든 이야기도해. 如是皆以方便分別(여시개이방편분별)이니라. 이와 같은 것은 다 방편으로 분별한 것이니라. 연등불 아셨지요? 방편으로 분별해서 이야기한 것이다. 부처님의 과거 스승 하면 연등불이야기입니다.

연등불은 실재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인류의 역사가 기껏해야 2~3만년 밖에 더 됐냐고요? 사람의 역사가... 역사가 기록된 것은 기껏해야 5000년이고요. 무슨 화석이라든지 아니면 흔적. 사람의 어떤 뼈라든지 이런 것을 겨우 어떻게, 어떻게 발견해서 연구해보면 그저 5~6000년. 좀 오래된 것은 사람은 아니지만, 사람과 유사한 어떤 동물들은 2~3만년 된 것이 더러 발견되기도 하고 그렇지요.

燃燈佛이 과거에 있었다. 이것이 뭡니까? 전 번에 말씀드렸지요?

지혜의 등불을 밝히다 하는 뜻입니다. 연등불등도 이야기하기도 하고, 열반에 든 것도 이야기하기도해. 이러한 것들은 전부 방편으로 분별한 것이다. 諸善男子(제선남자)야, 모든 선남자야 若有衆生(약유중생)이 來至我所(내지아소)어든, 내가 있는 곳에 오거든 我以佛眼(아이불안)으로, 나는 부처의 눈으로써 그들의 觀其信等ㆍ諸根ㆍ利鈍(관기신등제근이둔). 믿음과 모든 근기가 영리한지 둔한지, 모든 이 영리한지 둔한지를 관찰하며, 隨所應度(수소응도)하야, 그들을 응당히 제도할 바를 따라서 處處自說名字不同(처처자설명자부동)과, 곳곳에서 스스로 말하기를 名字不同. 이름과 자가 같지 않게 하고, 또 年紀大小(연기대소).

나이가 많게도 이야기되고 적게도 이야기된다.

亦復現言當入涅槃(역부현언당입열반)이라. 또한 다시 드러내놓고 말한다. 마땅히 열반에 들것이다. 라고 現言. 드러내놓고 말하기를 마땅히 열반에 들것이다. 이런 말도 하고, 또 又以種種方便(우이종종방편)으로,

가지, 가지 방편으로써 說微妙法(설미묘법)하야, 미묘한 법을 설해서

能令衆生(능령중생)으로, 능히 중생으로 하여금 發歡喜心(발환희심)케하니라. 환희심을 내게 하나니, 諸善男子(제선남자)야 如來見諸衆生(여래견제중생)이, 모든 중생들이 樂於小法(낙어소법)하야, 小法즐겨하는 것을 보아서, 아주 작은 법. 중생들은 소견머리가 좁기 때문에 작은 법만 좋아하는 겁니다.

德薄垢重者(덕박구중자). 덕이 엷고 때가 무거운 사람을, 번뇌의 때가 무거운 사람을 보나니, 爲是人說(위시인설)하대, 이러한 사람들을 위해서 말하기를 我少出家(아소출가)하야, 내가 젊어서 출가해가지고서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 역사적인 사실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 역사적인 사실을 모든 사람들은, 상식적인 사람들은 다 그것에 잘 이해하는 겁니다.

아~ 부처님이 석가모니 족에서 태자로 태어나서 이렇게, 이렇게 했구나 하는 그런 팔상록 같은 이야기를 좋아하는 겁니다. 그것이 말하자면 소견이 너무 좁기 때문에 그런 것만 좋아하는 겁니다.

然(연)이나, 그러나 我實成佛已來(아실성불이래)는 내가 실로 성불한 이래는 久遠若斯(구원약사)라. 멀고 먼 것이 이와 같다. 무량한 생명. 아니 불생불멸의 생명. 그 근원부터 이미 부처였다. 이미 부처였다. 이미 고귀한 생명체였다. 그것을 부처라고 하든지 하나님이라고 하든지 신이라고 하든지 뭐라고 이름 붙여도 좋아요. 但以方便(단이방편)으로 敎化衆生(교화중생)하야, 다만 방편으로써 중생들을 교화해서 令入佛道(영입불도)일새,

불도에 들어가도록 할세. 作如是說(작여시설)이니라. 그래서 이와 같은 이야기를 말한다.

諸善男子(제선남자)야 如來所演經典(여래소연경전)이, 여래가 연설하는 바 경전이 皆爲度脫衆生(개위도탈중생)이니, 다 중생들을 度脫하기 위한 것이다. 或說己身(혹설기신)하고, 혹은 자기 몸에 대한 이야기도 하고, 或說他身(혹설타신)이야. 혹은 딴 사람 어떤 신상의 이야기도해.

或示己身(혹시기신)이야. 혹은 자기 몸을 보이기도 하고,

或示他身(혹시타신)이야. 혹은 딴 사람 몸을 보이기도 해.

或示己事(혹시기사)야. 혹 자기 일 이야기도하고

或示他事(혹시타사)야. 혹 남의 일 이야기도 자기 일 같이 하는 거여.

諸所言說(제소언설)이 皆實不虛(개실불허)니라. 이것은 모두가 사실은 아니지만 전부 진실이다. 근기 따라 소득이 있기 때문에 전부 실다운 것이고 허망한 것이 아니다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을 빌미로 해가지고 그저 거짓말하기 좋아하고, 방편쓰기만 좋아하면 그것은 안 되는 것이지요. 부처님은 거짓말을 한 번 해도 그 말을 통해서 중생들이 틀림없이 소득이 있어요. 예를 들어서 우는 아이는 호랑이 본 적도 없어요. 부모도 호랑이 본 적이 없는데도 대놓고 “호랑이가 밖에 왔다.” 딱 한 마디 함으로 해서 거짓말이지만 우는 아이 울음을 그치게 하는 겁니다. 그런 소득이 있다는 겁니다.

그것이 皆實不虛입니다. 다 실다워서 헛되지 않다.

所以者何(소이자하)오? 까닭이 무엇이냐?

如來가 如實知見三界之相(여래여실지견삼계지상)호대, 여실히 삼계의 모습을 보되, 無有生死(무유생사)가 若退若出(약퇴약출)하며, 生死에 물러가거나 나아가거나 함이 없으며, 亦無在世(역무재세)와 及滅度者(급멸도자)라. 세상에 있는 것과 또한 멸도 하는 것도 없다. 그러니까 불생불멸을 본다는 겁니다. 삼계의 모습을 여래는 如實知見한다. 사실대로 알고 본다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눈앞의 현상만 본다는 뜻이 아니고, 그 궁극적 차원까지도 본다. 연필. 연필 이전도 보고 연필의 현재도 보고, 연필의 미래도, 연필이, 연필이 아닌 미래의 어떤 상황까지도 다 함께 보는 겁니다.

우리는 딱 잘라가지고, 연필이 되었을 때만 딱 잘라가지고 그것만 보는 겁니다. 연필 이전에도 보고 연필 이후에도 볼 줄 알아야 됩니다.

참 이것 如來는 如實知見三界之相. 삼계의 모습을 如實히 知見한다.

중요한 말이지요. 그래서 生死의 若退若出. 생사에서 물러가거나 나아가거나 하는 것도 없고, 알고 보면요. 생도 아니고 사도 아닙니다.

여기서 우리가 죽었다. 그러면 어디서 태어나면 이것이 죽은 겁니까?

그 존재가 지금 태어난 것이요? 우리가 죽어서 태어난다고 그러잖아요.

그 태어난 입장에서 보면 태어난 것이지만, 죽은 입장에서 보면 죽은 겁니다. 딱 잘라서 이렇게 보면 이쪽에는 죽었고, 저쪽에는 태어났다고요.

그러나 그 실체는 죽음도 아니고 태어남도 아닙니다.

이쪽 방에 있다가 이쪽 방으로 통과했을 뿐입니다. 딱 문하나 사이입니다. 이 방에서는 죽었지만, 저 방에서는 태어났어요. 그럼 그것을 그 자체에서 보면, 조금 우리가 시각을 돌려서 자체에서 보면 이것은 죽음도 아니고 태어남도 아닙니다. 아, 이 방에서 사라졌다고 그 사람이 없나요? 저 방에 가 있는데요. 저 방에서 이 방에 누가 들어왔다 그러면 저 방에서는 없어졌지만, 여기 새로 생긴 사람이 아닙니다.

이 방에서 보면 새로 생긴 것 같지요. 이 방만 딱 잘라놓고 보면 새로 생긴 것 같지요. 아닙니다. 그 사람은 본래 있던 사람입니다.

생긴 것도 아니잖아요. 불생불멸입니다.

無有 若退若出이라고요. 그리고 亦無在世와 及滅度입니다.

세상에 있는 것도 없고 滅度. 죽은 것도 없다.

非實非虛(비실비허)여. 실다운 것도 아니고 허망한 것도 아니다.

非如非異(비여비이)라. 여여한 것도 아니고 또 다른 것도 아니다.

不如三界(불여삼계)에 見於三界(견어삼계)니, 삼계에서 삼계를 보는 것과 같이 아니 함이니, 이것이 무슨 말인가 하니 삼계중생들의 안목으로 삼계를 보는 것과는 같지 않다. 차원이 다르다 이 말입니다.

不如三界 見於三界. 이것을 번역하는 사람마다 다 다르게 번역을 했어요. 삼계라고 하는 차원에서 삼계를 보는 것도, 삼계는 뭡니까?

삼계는 중생세계 아닙니까? 중생으로서 중생을 보는 것과는 다르다 이 말입니다. 지 않다. 차원이 다르다 이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지금 눈앞에 것만 딱 잘라놓고 보면 죽었느니 살았느니 그렇게 하지만, 보다 더 다른 차원에서 보면 죽은 것도 아니고 산 것도 아닙니다.

육신도 마찬가지이고 정신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신도 마찬가지고 육신도 마찬가지고... 다른 모습으로 변했을 뿐입니다. 다른 형태로...

우리는 집착을 해서 아, 내가 이제 늙었다ㆍ죽었다. 우리 가족이 늙었다ㆍ죽었다ㆍ나에게서 떠나갔다ㆍ없어졌다. 이렇게 해가지고 그냥 울고불고 하잖아요. 그것만 딱 잘라놓고 보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사람을 두고 봅시다. 나에게서 떠난 사람. 나에게서 떠났으니까 나는 참 죽을 맛이지요.

떠난 그 사람은 딴 데 가가지고 릴리랄라 잘만 살아요. 멋있어요. 아주 좋아 즐겁기만 해요. 안 그래요? 아주 쉽게 이해하면 그와 똑 같은 겁니다.

우리 生死도 그와 똑 같다것입니다. 나에게서 떠나서 나한테는 죽을 맛이지만, 그 사람 자신은 정말 아주 기분이 좋기 이를 데가 없는 겁니다. 새로운 세상을 만났으니까요.

그와 같이 우리의 生과 死도 그와 똑 같다. 우리 안목의 한계가 있어서 그래요. 차를 타고, 특히 차를 타고 밖을 내다보면요? 빌딩이 막 삭삭삭 지나갑니다. 빌딩이 지나간다고요. 산도 지나가버려요. 山도요.

빌딩이가는 겁니까? 그 빌딩이 움직이는 겁니까? 산이 움직이는 겁니까?

빌딩도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산도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내가 생멸하니까, 생멸하는 안목으로, 다시 말해서 생멸하고 생사하는 안목으로 보니까 모든 것이 전부 생멸하고 생사하는 겁니다.

내가달리는 안목으로 보니까, 내가 변화하안목으로 보니까 빌딩도 지나가고 산도 지나갑니다. 그 빌딩과 산이 어디 는 겁니까? 가는 것이고 그대로 있는데도 내가 가니까 지나가는 것처럼 보이는 겁니다.

내가 안 가면 빌딩도 그 자리에 있고, 산도 그 자리에 있어요.

이런 비유, 좀 이해될까요?

그와 같이 모든 존재는 내가 생멸하는 마음으로 모든 것을 보면 불 생멸하는 것도 생멸로 보이고, 내가 생멸하지 아니하면, 내가 생멸하지 아니하는, 생멸을 초월한 안목으로 보면 모든 것은 전부 생멸하지 아니하는 것으로 보여요. 생멸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고요. 차를 타고 휙휙 달리면서 보면 산도 막 생멸해요. 이 산도 죽고 저 산이 살아나고, 이 빌딩죽고 저 빌딩 살아나고 막 그래요. 하지만 빌딩 앞에 딱 서서보면, 내가 움직이지 않고 보면 그냥 그대로 있어요. 우리 불생불멸을 이해하는 것을요? 그렇게라도 이해해야 됩니다. 그렇게라도... 참 그것 이해 안 되잖아요. 끊임없이 불생불멸, 불생불멸. 곳곳에 불생불멸이야기 하는데 우리가 사량 분별로라도 설명할 수 있는데 까지 설명하고, 이해할 수 있는데 까지 이해해야 됩니다.

그것이 사량 분별로라도 어느 정도 이해 가능한 것이거든요. 그것이요.

如斯之事(여사지사)를 如來明見(여래명견)하대, 여래가 밝게 보되

無有錯謬(무유착유)라. 그릇되거나 잘못됨이 없건만

以諸衆生(이제중생)이, 모든 중생들이

有種種性(유종종성)과 種種欲(종종욕)과, 종종욕망과 種種行(종종행)과 種種憶想分別故(종종억상분별고)로, 종종의 억상분별이 있는 고로 欲令生諸善根(욕령생제선근)하야, 모든 선근을 내고자 해서

以若干因緣(이약간인연)과, 여러 가지 인연과 譬喩와 言辭(비유언사)로써 種種으로 說法(종종설법)해서 所作佛事(소작불사)를 未曾暫廢(미증잠폐)니라. 짓는바 불사를 休廢(휴폐). 일찍이 그만두지를 않는다.

중요한 대목입니다. 중생들을 위한 방편이라고 제목을 그렇게 달았는데, 이안에 아주 정말 중요한 내용들이 많이 들어 있습니다.

5 여래의 진실

如是我成佛已來(여시아성불이래)는 甚大久遠(심대구원)이라

壽命無量阿僧祗劫(수명무량아승지겁)에

常住不滅(상주불멸)이니라 諸善男子(제선남자)야

我本行菩薩道(아본행보살도)하야 所成壽命(소성수명)이

今猶未盡(금유미진)도 復倍上數(부배상수)어늘

然今非實滅度(연금비실멸도)를

而便唱言當取滅度(이변창언당취멸도)라하니

如來以是方便(여래이시방편)으로 敎化衆生(교화중생)호라

所以者何(소이자하)오 若佛久住於世(약불구주어세)면

薄德之人(박덕지인)이 不種善根(부종선근)하고

貧窮下賤(빈궁하천)하야 貪着五欲(탐착오욕)하고

入於憶想妄見網中(입어억상망견망중)하며

若見如來(약견여래)이

常在不滅(상재불멸)이면 便起憍恣(변기교자)하야

而懷厭怠(이회염태)하고

不能生於難遭之想(불능생어난조지상)과

恭敬之心(공경지심)일새 是故如來(시고여래)가

以方便說(이방편설)이니라 比丘當知(비구당지)하라

諸佛出世(제불출세)는 難可値遇(난가치우)니

所以者何(소이자하)오 諸薄德人(제박덕인)이

過無量百千萬億劫(과무량백천만억겁)하야사

或有見佛(혹유견불)하며 或不見者(혹불견자)하나니

以此事故(이차사고)로 我作是言(아작시언)하대

諸比丘(제비구)야 如來難可得見(여래난가득견)이니라

斯衆生等(사중생등)이 聞如是語(문여시어)하면

必當生於難遭之想(필당생어난조지상)하야

心懷戀慕(심회연모)하고 渴仰於佛(갈앙어불)하야

便種善根(변종선근)일새 是故如來(시고여래)가

雖不實滅(수불실멸)이나 而言滅度(이언멸도)니라

又善男子(우선남자)야 諸佛如來(제불여래)도

法皆如是(법개여시)니 爲度衆生(위도중생)이라

皆實不虛(개실불허)니라

如是我成佛已來(여시아성불이래)는, 이와 같이 내가 성불한 이래는

甚大久遠(심대구원)이야. 아주 오래고 오래.

壽命이 無量阿僧祗劫(수명무량아승지겁)에 常住不滅(상주불멸)이라.

항상 있어서 멸하지 않는다. 靈山不滅鶴樹常尊(영산불멸학수상존). 이런 것은 법화경에 근거한 표현이지요. 법화경과 관계없이 모든 존재의 실상이 그렇다것입니다. 법화경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깨달음의 눈으로 보면 모든 존재의 실상이 그렇다.

諸善男子(제선남자)야, 모든 선남자야

我本行菩薩道(아본행보살도)하야, 내가 본래 보살도를 행해서

所成壽命(소성수명)이, 이룬바 수명이

今猶未盡(금유미진)도, 지금 오히려 다하지 아니함도

復倍上數(부배상수)어늘, 앞에서 비유한 그 숫자의 배나 되거늘

然今非實滅度(연금비실멸도)를, 그러나 내가 지금 非實滅度를, 멸도하지 아니한 것은 而便唱言當取滅度(이변창언당취멸도). 나는 사실 죽지 않았어. 죽은 바가 없어. 그런데 앞으로 나는 멸도 할 것이다. 내가 마지막 눈을 감으면서 이 법화경을 설하노라. 이런 소리 계속 해왔잖아요. 그렇게 하나니,

如來는 以是方便(여래이시방편)으로, 이러한 방편으로써

敎化衆生(교화중생)호라. 중생을 교화하노라. 그러니까 법화경속에도 방편이야기가 많이 있는 겁니다. 所以者何(소이자하)오? 까닭이 무엇인가? 若佛久住於世(약불구주어세)면, 만약에 부처가 세상에 오래 머문다면

薄德之人(박덕지인)이 不種善根(부종선근)하고, 박덕한 사람들이 선근을 심지 않고 貧窮下賤(빈궁하천)해서 貪着五欲(탐착오욕)하고,

오욕에 탐착하고 入於憶想ㆍ妄見ㆍ網中(입어억상망견망중)하며,

망상과 망령의 잘못된 소견의 그물가운데 들어가며, 또

若見如來(약견여래)가 常在不滅(상재불멸)이면, 만약에 여래가 항상 계셔서 소멸하지 않는다. 하는 것을 보게 될 것 같으면 便起憍恣(변기교자)라. 교만과 방자함을 일으켜서 而懷厭怠(이회염태)하고, 해태를 품게 돼. ‘아, 부처님이 계속 계실 텐데 걱정할 것이 있느냐?’ 고 그래서 해태를 품게 되고요. 不能生於難遭之想(불능생어난조지상)과 恭敬之心(공경지심)일새. 만나기 어렵다는 생각과 공경하는 마음을 내지 못할세.

是故로 如來(시고여래)가 以方便說(이방편설)이니라.

방편으로 설함이니라.

초심에 그랬지요. 배웠지요?

長起難遭之想하면 道業이 恒新(장기난조지상 도업항신)하고

常懷慶幸之心하면 終不退轉(상회경행지심 종불퇴전)하리라. 참 좋은 말이지요. 항상 長起難遭. 불법 만나기는 정말 어렵다 하는 생각을 계속 내는 겁니다. 아침마다 저녁마다 ‘아~ 이, 불법 만나기 쉬운 것이 아니다.’ 그럴 것 같으면 공부가 새록새록 자꾸 새로워져요. 정말 재미있어져요.

‘아~, 불법 만나기 어려운 것을 내가 이렇게 만났다.’ 이 생각을 아침저녁으로 하면요? 이 좋은 가르침인 경전을 손에서 떠날 시간이 없는 겁니다.

구절구절이 새로운 겁니다. 그래 道業이 恒新하다.

常懷慶幸之心하면, ‘참~ 나는 어찌하여 이렇게 중 복이 많은가? 경사스럽고 다행일이다.’ 하는 생각을 아침저녁으로 품게 되終不退轉이라.

그 사람은 결코 불법에서 물러서지 아니합니다. 결코 물러서지 않는다고요. 야~ 우리초심에 참 좋은 말이지요? 長起難遭之想하면 道業이 恒新(장기난조지상 도업항신)하고 常懷慶幸之心하면 終不退轉(상회경행지심 종불퇴전)하리라. 정말 감동적입니다.

比丘當知(비구당지)하라, 비구야 마땅히 알아라.

諸佛出世(제불출세)는 難可値遇(난가치우)니, 제불이 출세한 것은 만나기 참으로 어려우니 所以者何(소이자하)오 諸薄德人(제박덕인)이

過無量百千萬億劫(과무량백천만억겁)하야사, 100천 만억 겁을 지내서

或有見佛(혹유견불)하며, 혹 부처를 보게 되기도 하고

或不見者(혹불견자). 혹 그래도 100천 만억 겁을 지내도 보지 못하는 사람이 있어. 以此事故(이차사고)로, 이러한 사실 때문에

我作是言(아작시언)하대, 내가 이런 말을 하되,

諸比丘(제비구)야, 여러 비구들이여

如來는 難可得見(여래난가득견)이니라. 여래는 참으로 만나기 어렵다.

세상에는 정말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지금 생존해 있는 사람만 하더라도 60억이거든요. 그런데 제대로 안목을 가진 사람. 제대로 지혜의 눈이 열린 사람이 60억 중에서 도대체 몇이나 됩니까? 그리고 이 60억이라는 것이 지금 60억이지 이것이 예를 들어서 3000년 동안 전부 계산하면 수백 억. 수천 억 아닙니까? 그 많은 사람이 중에서 제대로 지혜의 안목이 열린 사람이 도대체 몇이나 되느냐? 정말 만나기 어려운 겁니다.

如來는 難可得見입니다.

斯衆生等(사중생등)이, 이 중생들이

聞如是語(문여시어)하면, 이와 같은 말을 들을 것 같으면

必當生於難遭之想(필당생어난조지상). 반드시 만나기 어렵다는 생각을 반드시 내어가지고서 心懷戀慕(심회연모)라. 마음에 연모함을 품을 것이다. 아~, 좋아하고 정말 부처님, 부처님. 불법, 불법. 불법을 공부해봐야 좋은지 어쩐지 알지 공부 안 하면 몰라요. 정말 공부를 자꾸자꾸 하면 할수록 정말 더 깊이 이해가 되고, 더 아주 소중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겁니다. 心懷戀慕. 연모하는 생각을 내는 겁니다.

渴仰於佛(갈앙어불)하야, 부처님을 목마른 듯이, 목마른 사람이 물을 그리워하듯이 그렇게 우러러서 便種善根(변종선근)일새. 곧 선근을 심을세. ‘아~ 내가 부처님을 위해서, 이 불법을 위해서 무엇을 할 것인가?’

불법이 나에게 무엇을 해줄 것인가? 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하하하하하하하 이것 누구 쓰던 말 같네요. 말해놓고 보니까... 내가 불법을 위해서 무엇을 할 것인가? 어떻게 하면 내가 불법에 공헌할 수 있을까?

便種善根일새. 是故로 如來(시고여래)가, 그런 까닭에 여래가

雖不實滅(수불실멸)이나, 비록 실로 멸하지 아니 했으나, 열반하지 아니하나 而言滅度(이언멸도)라. 죽는다. 내가 열반한다. 나는 머지않아서 눈감을 것이다. 라고 하나니라. 又善男子(우선남자)야, 또 선남자야

諸佛如來(제불여래)도 法皆如是(법개여시)니, 모든 여래도 법이 다 이와 같으니 爲度衆生(위도중생)이라 皆實不虛(개실불허)니라.

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것이다. 皆實不虛라. 모두 다 사실이야. 허망하지 않다. 거짓말 아니다 말이다. 진실이다. 진실하고 헛된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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