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법연화경 강좌 제8강-1
- 교육원 불교전문강당 2009. 09. 22 -
一心頂禮 盡十方三世 一切諸佛 一心頂禮 盡十方三世 一切尊法
一心頂禮 盡十方三世 一切賢聖僧 我弟子等 講論三藏 唯願三寶
爲作證明
南無本師釋迦牟尼佛 南無本師釋迦牟尼佛 南無是我本師釋迦牟尼佛
無上甚深微妙法 百千萬劫難遭隅 我今聞見得受持 願解如來眞實意
지난 시간에 제15품 종지용출품 시작 좀 하고 중단이 되었는데요.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법화경은 28품인데요.
그것을 前 14품. 後 14품으로 나눠서 전 14품은 迹門(적문)이라고 하고, 후 14품은 本門(본문)이라고 한다. 이렇게 대개 천대학에서 그렇게 교판을 하고 있습니다. 꼭 두부모를 자르듯이 그렇게 탁 내용이 나누어지는 것은 아닌데, 대체적으로 비중이 아무래도 전 14품은 迹門의 내용이 많고, 후 14품은 本門의 내용이 많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가 있지요.
迹門이라고 하는 것은 자취ㆍ흔적. 법화경을 푸는 열쇠가 제일 중요한 것이 그 것입니다. 迹門과 本門이라고 하는 그 두 개의 열쇠인데요.
迹門은 자취ㆍ흔적ㆍ현실ㆍ역사적인ㆍ사실적인 것ㆍ이런 것들을 자취 迹자를 써서 迹門이라. 적문의 세계라. 이렇게 하면, 그러면 예를 들어서 이 찻잔도 迹이 있을 수가 있고 本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뭐 지금 찻잔을 논하고 마이크를 논하고 무슨 책상을 논하고 하자는 것이 아니고, 요컨대 우리들 자신. 이 세상의 근본인 우리들 자신을 어떻게 이해 할 것인가? 어떻게 파악 할 것인가? 하는 것이 불교의 과제입니다.
특히 법화경의 과제가 우리들 인간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파악 할 것인가? 잘 이해하고 잘 파악했을 때 그것을 제대로 활용한다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서 마이크를 잘 이해하고 잘 파악했을 때 마이크를 우리가 잘 사용할 수 있듯이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있을 때,
인간을 잘 활용할 수 있다. 그런 뜻이지요. 여기서는 흔히 迹佛ㆍ本佛(적불 본불). 이런 식으로 해서 부처님을 일단은 거론을 합니다.
하지만 지난번에 보여드렸듯이 迹人ㆍ本人(적인 본인). 우리 인간으로 돌아왔을 때, 내 개인으로 돌아왔을 때는 적인과 본인. 이렇게 나눠서 생각을 하면 현상으로서의 나. 또 궁극적인 차원. 또는 본래의 나로서의 나. 이런 양면을 가지고 있는데 그 양면을 우리가 정확하게 이해를 하면 나를 어떻게 대접하고 나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하는 것이 저절로 드러나는 것이지요. 불교의 경전이라고 하는 것은 대개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보살의 입장에서도 迹化菩薩(적화보살)ㆍ本化菩薩(본화보살).
이런 말을 썼어요. 그래서 여기는 종지용출품에서 특히...
그 동안은 흔적으로써, 또는 역사적인 그런 보살을 주로 알고 있다면, 그야말로 뜬금없이 땅 속에서 무수한 보살들이 올라온다. 그 보살들은 과연 누구냐? 그것은 本化菩薩을 의미 하는 것이다. 본래로 교화되어있는 보살이다. 우리 각의 입장에서 본다면 本覺(본각). 本覺이라고 하는 말이 있지요. 본각의 입장이고, 또 사람으로 본다면 본래인의 입장이다. 그런 것입니다. 그것은 영원한 것이고ㆍ생사를 초월한 것이고ㆍ옳고 그른 것을 초월한 것이고ㆍ남녀를 초월한 것이고ㆍ모든 상대적인 현상을 초월해 있고ㆍ그러면서 그 모든 상대적인 것을 다 수용하는, 수용할 줄 아는 그런 본체로서의 나를 이야기하는 것이고, 본체로서의 부처님을 이야기하는 것이고, 본체로서의 보살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또 컵을 두고 이야기하더라도 어떤 눈에 보이는 현상보다는 본질적인,
그것이 흙이라면, 본래 흙이 컵이 됐다면 그 자체로서의 어떤 의미를, 말하자면 本門의 입장이다. 컵을 두고 이야기할 때는 그것을, 本門의 입장에서는 이것은 본래 흙이다. 그런 흙을 가지고 컵을 만들 수 도 있고, 물병을 만들 수 도 있고, 화병을 만들 수 도 있고 온갖 것 다 만들 수가 있겠지요.
그러면 그것을 흔적내지 자취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런 것을 本門이라고 이렇게 보는 것이지요. 모든 존재는 공히 그런 양면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지요.
여기는 본화보살들이 땅으로부터 솟아올랐다 하는 그런 내용을 소개를 했습니다. 솟아올랐는데 예를 들어서 6만 항하사 보살이 각각 6만 항하사의 권속을 거느렸다. 그런데 혹은 5만 항하사의 권속ㆍ4만ㆍ3만ㆍ2만ㆍ1만 항하사의 권속ㆍ내지 1항하사의 권속ㆍ반 항하사ㆍ4분의1항하사ㆍ1000만억 나유타분의 1항하사ㆍ이렇게 해서 100으로ㆍ10으로ㆍ5로ㆍ4로ㆍ3으로ㆍ1로ㆍ내지 況復單己(황부단기). 그랬어요. 자기 혼자만의 그런 보살도 있더라.
그렇습니다. 토굴에서 혼자 사는 사람도 있고, 한 사람의 시자. 또는 도반을 같이 더불어 같이 사는 두 사람만 사는 사람도 있고, 세 사람ㆍ네 사람ㆍ다섯 사람ㆍ여섯 사람ㆍ그 사람의 폭이 어떠하냐? 마음의 폭이 어떠하냐에 따라서 많은 사람을 수용하면서 서로 용납하면서 배려하면서 사는 그런 인생이 있고, 아무도 배려하지 못하고 그저 오직 자기 혼자만 살 수 있는 그런 작은 그릇. 아주 정말 소승적인 그런 마음으로 사는 그런 사람도 있고요. 그런 것들을 전부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는 것이지요.
4 부처님을 찬탄함
是諸菩薩(시제보살)이 從地出已(종지출이)에
各詣虛空七寶妙塔(각예허공칠보묘탑)의 多寶如來(다보여래)와
釋迦牟尼佛所到已(석가모니불소도이)하고
向二世尊(향이세존)하사 頭面禮足(두면예족)하며
及至諸寶樹下(급지제보수하)의 師子座上佛所(사자좌상불소)하야
亦皆作禮(역개작예)하고 右繞三帀(우요삼잡)하며
合掌恭敬(합장공경)하사 以諸菩薩(이제보살)의
種種讚法(종종찬법)으로 而以讚歎(이이찬탄)하고
住在一面(주재일면)하야
欣樂瞻仰於二世尊(흔락첨앙어이세존)하며
是諸菩薩摩訶薩(시제보살마하살)이 從地涌出(종지용출)하사
以諸菩薩(이제보살)의 種種讚法(종종찬법)으로
而讚於佛(이찬어불)하대 如是時間(여시시간)이
經五十小劫(경오십소겁)커늘 是時釋迦牟尼佛(시시석가모니불)이
黙然而坐(묵연이좌)하고 及諸四衆(급제사중)도
亦皆黙然(역개묵연)하사 五十小劫(오십소겁)을
佛神力故(불신력고)로 令諸大衆(영제대중)으로
謂如半日(위여반일)케함이라 爾時四衆(이시사중)이
亦以佛神力故(역이불신력고)로 見諸菩薩(견제보살)이
徧滿無量百千萬億國土虛空(변만무량백천만억국토허공)이러라
是諸菩薩(시제보살)이, 이 모든 보살들이
從地出已(종지출이)에, 땅으로부터 나온 뒤에
各詣虛空七寶妙塔(각예허공칠보묘탑)의 多寶如來(다보여래)와,
각각 허공 칠보묘탑의 다보여래와 釋迦牟尼佛所到已(석가모니불소도이)하고, 석가모니부처님 처소에 이른 뒤에 向二世尊(향이세존)하사, 두 세존을 향하사 頭面에 禮足(두면예족)하고, 及至諸寶樹下(급지제보수하)의 師子座上佛所(사자좌상불소)하야, 그리고 또 모든 보수하의 사자좌상 부처님처소에 이르러서 亦皆作禮(역개작예)하고,
또한 다 예를 짓고
右繞三帀(우요삼잡)하며, 오른 쪽으로 세 바퀴를 돌며
合掌恭敬(합장공경)하사 以諸菩薩(이제보살)의 種種讚法(종종찬법)으로, 모든 보살의 種種 찬탄하는 법으로써 而以讚歎(이이찬탄)하고, 찬탄하고 住在一面(주재일면). 한 쪽으로 가서 머물러 있어서
欣樂瞻仰於二世尊(흔락첨앙어이세존)하며, 아주 기쁜 듯이 두 세존을 우러러보고 있으며, 是諸菩薩摩訶薩(시제보살마하살)이 從地涌出(종지용출)하사, 또 모든 보살마하살이 땅으로부터 솟아올라서
以諸菩薩(이제보살)의, 모든 보살이 種種讚法(종종찬법)으로,
찬탄하는 법으로써 而讚於佛(이찬어불)하대, 부처님을 찬탄하되
如是時間(여시시간)이, 이와 같은 시간이 經五十小劫(경오십소겁)커늘, 50소겁이 걸렸다. 그랬어요.
워낙 보살이 많다보니까 그 보살들이 순서대로 부처님을 찬탄하는데, 정말 무수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是時에 釋迦牟尼佛(시시석가모니불)이, 석가모니부처님이
黙然而坐(묵연이좌)하고, 묵연히 앉아 있고 及諸四衆(급제사중)도, 그리고 모든 사부대중도 亦皆黙然(역개묵연)하사, 또한 묵연히 있으면서 五十小劫(오십소겁)을 佛神力故(불신력고)로, 부처님이 神力을 쓴 까닭으로 令諸大衆(영제대중)으로, 여러 대중들로 하여금 謂如半日(위여반일)케함이라. 半日. 이를테면 반나절 지나간 것처럼 그렇게 됐다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을 찬탄하는데 그 찬탄하는 말씀. 그 찬탄하는 詩가 얼마나 아름답고 멋있었는지 모두 그저 반나절 지나는 정도 밖에 걸리지 않은 것처럼 여겨지더라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법문 잘 하면 두 시간, 세 시간이 그냥 잠깐 지나가는 것 같지만, 뭐 별로 교훈도 안 되고, 이익도 없고, 또 재미도 없고 그러면, 그러면 한 시간이 왜 그리 긴지 그것은 인지상정입니다. 그렇게 되는 것이지요.
爾時四衆(이시사중)이, 그 때에 사부대중들이 亦以佛神力故(역이불신력고)로, 또한 佛神力을 쓴 고로 見諸菩薩(견제보살)이, 모든 보살이 徧滿無量百千萬億國土虛空(변만무량백천만억국토허공)이러라.
무량 100천 만억 국토 허공에서 가득 차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더라.
5 사도사(四導師)의 문안
是菩薩衆中(시보살중중)에 有四導師(유사도사)하니
一名上行(일명상행)이요 二名無邊行(이명무변행)이요
三名淨行(삼명정행)이요 四名安立行(사명안립행)이라
是四菩薩(시사보살)이 於其衆中(어기중중)에
最爲上首唱導之師(최위상수창도지사)러라
在大衆前(재대중전)하야 各共合掌(각공합장)하고
觀釋迦牟尼佛(관석가모니불)하사 而問訊言(이문신언)하사대
世尊(세존)하 少病少惱(소병소뇌)하시며
安樂行不(안락행부)잇가
所應度者(소응도자)는 受敎易不(수교이부)잇가
不令世尊(불령세존)으로 生疲勞耶(생피로야)잇가
爾時四大菩薩(이시사대보살)이 而說偈言(이설게언)하니라
世尊安樂(세존안락)하사 少病少惱(소병소뇌)하시며
敎化衆生(교화중생)에 得無疲倦(득무피권)하시며
又諸衆生(우제중생)은 受化易不(수화이부)잇가
不令世尊(불령세존)으로 生疲勞耶(생피로야)잇가
사도사의 문안이라 그랬습니다.
여기의 이 많고 많은 종지용출한 보살. 땅으로부터 솟아오른 그 本化菩薩(본화보살). 이것은 말하자면 기존의, 어떤 제도권 안에서의 어떤 종교인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제도권을 벗어나서 사는, 제도권과 아무 상관없이 사는. 불교를 배웠다. 어느 절에 나간다. 나는 이와 같은 불교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 하는, 그런 어떤 기존의 불교 상식과 관계없이 본래로부터 아주 순수한 그런 인간성을, 예를 들어서 종지용출의 보살이라고 한다면, 거기의 지도자는 네 명인데, 말하자면 보살로써 세상에 존재하려면
바로 이러한 네 가지의 원칙은 가지고 있어야 된다 하는 그런 뜻이 됩니다.
여기 是菩薩衆中(시보살중중)에, 이 모든 보살대중 가운데에
有四導師(유사도사)하니, 네 명의 도사. 인도하는 리더가 있었다 이 말이지요. 一名上行(일명상행)이요 二名無邊行(이명무변행)이요
三名淨行(삼명정행)이요 四名安立行(사명안립행)이라.
是四菩薩(시사보살)이, 이 네 보살이 於其衆中(어기중중)에,
그 대중들 가운데서 最爲上首(최위상수)하야 唱導之師(창도지사)러라.
唱導. 리더하는 사람. 이끌어 가는 사람. 그런 사람이라는 뜻이지요.
그런데 이것이 어떤 의미가 있느냐하면,
上行이라고 하는 것은 대개 옛날부터 해석하기를,
佛道無上誓願成(불도무상서원성). 우리 四弘誓願(사홍서원)이지요.
사홍서원이야말로 말하자면 우리불자, 우리불자들의 불자로써의 어떤 삶을 유지 해주는 말하자면 하나의 틀이 됩니다. 불자는 네 가지 서원이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행사를 하든지 행사 끝에는 사홍서원을 읊조리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여기서 上行. 하는 것은 불도가 아무리 높다고 하더라도 맹세코 우리가 이루겠다하는 그런 의미로서의 上行이라고 하는 것이고요.
無邊行(무변행)이라고 하는 것은 法門無量誓願學(법문무량서원학).
법문이 아무리 많다 하더라도 맹세코 배우리다 하는 그런 서윈이지요.
그 다음에
淨行(정행)은 煩惱無盡誓願斷(번뇌무진서원단). 淸淨(청정)이라고 하는 淨行하고 煩惱無盡誓願斷하고 맞춰보면 딱딱 잘 맞아요. 그 다음에
安立行(안립행)이라고 하는 것은 衆生無邊誓願度(중생무변서원도)라는 것입니다. 중생이 아무리 많다 하더라도 내가 맹세코 다 제도 하겠다하는 이 네 가지 서원이 사실은 우리불자들의 기본정신입니다.
이것이 있어야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 정신으로 그 많고 많은 종지용출한 무수한 보살들을 이끌어 가고 있다. 이런 뜻입니다. 그럼 그 무수한 보살들이 보살들로써 어떤 보살행을 할 수 있는 것은 이 네 가지 서원이 갖춰져 있다. 이런 말입니다. 이 네 보살들이 어떻게 그 많은 사람들을 예를 들어서 지도하겠습니까? 6만 항하사 보살이 각각 권속만 6만 항하사 보살들을 거느리고 있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 되는데 그 모든 사람들은 한결같이 이 네 가지의 견고한 서원으로써 보살행으로 세상을 살아간다. 그런 뜻입니다. 그런 뜻으로 이 내용이 해결이 되는 것이지요. 그래 법화경이 어렵다고 하는 점이 바로 이런 점입니다.
在大衆前(재대중전)하야, 대중 앞에서 各共合掌(각공합장)하고,
각각 합장하고 觀釋迦牟尼佛(관석가모니불)하사, 석가모니불을 관찰하사 而問訊言(이문신언)하사대, 물어 말씀하기를
世尊(세존)하, 세존이시여, -안부를 묻는 것입니다.
少病少惱(소병소뇌)하시며, 병도 없으시고 괴로움도 없으시며
安樂行不(안락행부)잇가? 안락하게 행하십니까?
所應度者(소응도자)는, 응당히 제도해야 할 사람들은
受敎易不(수교이부)잇가? 가르침을 쉽게 받아들입니까?
不令世尊(불령세존)으로 生疲勞耶(생피로야)잇가? 세존으로 하여금 피로하게 하지는 않습니까?
爾時四大菩薩(이시사대보살)이 而說偈言(이설게언)하니라.
그 때에 四大菩薩들이 게송을 설해 말했다.
世尊安樂(세존안락)하사 少病少惱(소병소뇌)하시며, 병도 없으시고 괴로움도 없으시며 敎化衆生(교화중생)에 得無疲倦(득무피권)하시며,
중생들을 교화함에 피곤함이 없으십니까? 又諸衆生(우제중생)은 受化易不(수화이부)잇가? 또 모든 중생들은 교화를 받아들임이 아주 쉬웠습니까?
不令世尊(불령세존)으로 生疲勞耶(생피로야)잇가? 세존으로 하여금 피로를 내게는 하지 않습니까? 피로하게는 하지 않습니까?
이런 의례적인 안부를 물었습니다.
6 세존의 답변
爾時世尊(이시세존)이 於菩薩大衆中(어보살대중중)에
而作是言(이작시언)하사대 如是如是(여시여시)니라
諸善男子(제선남자)야 如來安樂(여래안락)하야
少病少惱(소병소뇌)니라 諸衆生等(제중생등)은
易可化度(이가화도)요 無有疲勞(무유피로)니
所以者何(소이자하)오 是諸衆生(시제중생)이
世世已來(세세이래)로 常受我化(상수아화)하며
亦於過去諸佛(역어과거제불)에 恭敬尊重(공경존중)하고
種諸善根(종제선근)이라 此諸衆生(차제중생)이
始見我身(시견아신)하며 聞我所說(문아소설)하고
卽皆信受(즉개신수)하야 入如來慧(입여래혜)니
除先修習學小乘者(제선수습학소승자)라 如是之人(여시지인)을
我今亦令得聞是經(아금역령득문시경)하고
入於佛慧(입어불혜)호라
그러니까 세존도 “그렇다.”내용은 거기에 대한 답변입니다.
爾時世尊(이시세존)이 於菩薩大衆中(어보살대중중)에,
그 때에 세존이 보살대중 가운데에서 而作是言(이작시언)하대,
이러한 말을 하되. 如是如是(여시여시)니라. 그렇다, 그렇다.
諸善男子(제선남자)야 如來安樂(여래안락)하야, 모든 선남자야, 여래는 편안하다. 少病少惱(소병소뇌)니라. 諸衆生等(제중생등)은 易可化度(이가화도)요. 모든 중생들은 쉽게 제도한다.
無有疲勞(무유피로)니, 아무 피곤함도 없다.
所以者何(소이자하)오? 是諸衆生(시제중생)이, 왜 그런가 하면, 모든 중생이 世世已來(세세이래)로 常受我化(상수아화)하여,
항상 나의 교화를 받았으며 亦於過去諸佛(역어과거제불)에,
또한 과거 모든 부처님에 恭敬尊重(공경존중)하고 種諸善根(종제선근)이라. 여러 가지 선근을 심었다. 此諸衆生(차제중생)이 始見我身(시견아신)하며, 이 모든 중생들이 비로소 내 몸을 보며
聞我所說(문아소설)하고, 내가 설한 바를 듣고
卽皆信受(즉개신수)하야, 곧 다 믿고 받아서 入如來慧(입여래혜)니,
여래의 지혜에 들어갔으니,
除先修習學小乘者(제선수습학소승자). 먼저 소승을 닦고 배운 사람들은 제외한다. 그랬어요. 소승을 공부한 사람은 제외한다. 소승공부한 사람 말고는 모두 내말 잘 듣고 내가 가르치면 잘 받아들이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이 법화경에 가끔 나오지요. 왜 소승을 이 법화경에서 이토록 배제를 하는가 하면, 그야말로 이 법화경이 결집된 당시가 정말 새로운 불교. 부처님의 정신에 정말 제대로 맞는 불교. 그것이 곧 대승불교 운동이거든요. 진정 부처님의 정신으로 돌아가자고 하는 운동이 대승불교운동입니다.
그러면서 그것은 그 당시로서는 아주 파격적이고 새로운 운동이었어요. 그 제도권 속에서, 어떤 짜여 진 틀 속에서, 벌써 500년이라는 세월을 거치면서 말하자면 어떤 불교라고 하는 그것이 딱~ 아주 세상에서 어떤 권위 의식을 가지고, 출가자들 중심으로의 어떤 교단의 권위를 너무 내세우고, 그러면서 정작 세상에는 크게 보탬도 되지 않고, 세상에 하는 바도 없고 하는, 그런 어떤 불교에서, 그것은 본래 부처님의 정신이 아니다 하는 그런 뜻 있는 사람들의 운동에 의해서 일어난 운동이 대승불교운동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법화경은 대승불교운동의 선언서다. 이런 표현도 합니다. 그래서 정말 너무 자기 아집에 떨어져있고, 교단 중심의 어떤 권위의식에 떨어져있고요.
그 전에 어떤 동국대학교 교수가 태국에 갔다 와가지고 강의를 하면서, 제가 직접 들었어요. 그 때 자기는 한국에 있을 때 중노릇 하다가 동대 교수로 있는데, 자기도 승려생활 할 때 그랬었지만 동대 교수로 있으면서 승려들 하는 모습을 보니까 영 마음에 안 차는 겁니다.
공부도 별로 하지도 않으면서 그저 아만 내세우고 잘 났다고 하고, 그저 출가인 이라고 하는 그런 권위의식만 가지고 있고, 그래서 계속 못 마땅하게 생각 했다는 겁니다. 그러다가 태국에 가서 태국불교를 가만히 며칠 간 보고 나서는 ‘야~ 한국 스님이 참 훌륭한 스님들이다. 참으로 좋은 스님들이다.’이것을 느꼈다는 겁니다. 그것을 우리한테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돌아가셨으니까 누군가 깨놓고 이야기할 수가 있습니다.
홍경식씨라고 법화경을 번역하는데 가장 아름답게 번역한 교수가 홍경식씨입니다. 그 분이 본래는 마곡사 스님인데요. 공부 참 많이 하신 분입니다. 돌아가셨으니까 이야기해도 괜찮겠지요? 그 분이 태국 갔다 와서 우리에게 하는 소리가 그 것입니다. 태국에 가서 사찰에서 참배를 하는 것을 보니까 청소도 안 되어 있고, 또 담도 무너져 있고, 법당도 형편없고요. 그러면서 거기 스님들이 담배를 피우면서 절을 하더라는 겁니다.
담배 피우는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것이 말하자면 경전에 없는 이야기니까요. 한국불교는 대승불교이기 때문에 뜻으로, 모양으로써 아니다 싶은 것은 딱 못하게 해요. 처음, 요즘 생긴 것이라도...
어떤 계율에 무슨 마약 하지 말라는 소리... 마약 있어야 마약 하지 말라 하지요? 그렇지만 그것은 해서는 안 되는 것이 상식이거든요. 담배도 출가인이 피우는 것이 모양이 아닌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법조문에, 계율조문에 없다고 그 사람들은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서, 담이 무너졌는데 왜 담을 저대로 두고, 청소도 안 됐는데 청소를 아니 하느냐고 그러니까, 이 사람들 하는 소리가 신도들이 와서 하지, 출가인은 저런 것. 일하면 지옥 간다고... 그래서 우리는 그것 만지면 안 된다고... 일하면 안 된다. 라고 이런 생각에 떨어져 있더라네요. 제가 그 얘기들은 것이 한 40년쯤 됩니다. 그러면 신도는 지옥가도 좋고 중은 지옥가면 안 되느냐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교단을 위주로 한 출가자의 어떤 권위의식이 오랜 세월동안 이렇게 내려오면 그렇게 굳어져버립니다. 그렇게 굳어져가지고 그것이 옳은 줄 알아요. 사람 생각이라는 것이 참 희한해요. 그래가지고는 탄복을 하고 와가지고는 내가 그 동안 생각한 것이 잘못 했다고 한국 스님들이 참 훌륭한 스님들이라고 내가 참회 한다고 하면서, 강의하면서 그렇게 말하더라니까요.
옛날에 중앙교육원 이라고 하는 것이 있었어요.
그 때 중앙교육원 제1기생으로 제가... 그 때 청담스님이 총무원장을 할 땐데 어쩌다보니 33명이 중앙교육원 1기생으로 들어가서 공부할 때인데, 그 때 그 분이 아주 뛰어난 교수라고 해서 우리가 초빙을 해서 강연을 들었는데요. 참회 한다고 토로 하면서 그런 말을 하더라고요.
그 동안 내가 한국 스님들에 대해서 잘못 생각하고 있었고, 태국이 제일 훌륭한 불교이고, 태국스님들이 정말 아주 이 지구상에선 제일 훌륭한 스님들로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니더라는 것이지요.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제가 아주 생생하게 듣고 기억을 하고 있습니다.
출가인의 교단 중심으로 이렇게 내려오면 이상하게 어떻게 그렇게 굳어져버려요. 하나의 그 권위의식에 사로잡혀가지고... 지금 우리 출가인들도 약간 그런 것이 있긴 있어요. 옛날에 천주교 같은데도 그런 것이 있지 않습니까? 무슨 면죄부를 팔아가지고 그 돈 받는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예를 들어서 그 면죄부를 돈을 주고 사면 “죄가 면해진다?” 그것이 도대체 무슨 이치에 맞는 거냐고요. 그래가지고 소위 일어난 것이 그 새로운 종교운동. 독일에서 일어난 그 신교가 그래서 비로소 생긴 것 아닙니까? 그래서 그 신교가 이를테면 어떻게 보면 지금 기독교인데요.
기독교가 대승불교하고 비슷한 겁니다. 그 운동이 일어나서 새로운 기독교로 탄생 된 것을 볼 것 같으면요.
그 형식은 비슷하게 그렇게 됐어요. 그러니까 옛날에 사람들이 모두 어리석고 고지식할 때, 출가자의 교단에 어떤 고정된 권위의식만을 고집하고 그러면 신도들은 맹목적으로 그렇게 또 따르는 습관이 수백 년 흘러오면 그만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서 소승을 이렇게 사정없이 비판하는 내용들이 법화경 안에 자주 있는 것도, 법화경이 말하자면 출현할 당시 어떤 교단의 행태를 보면, 너무 이것이 부처님 사상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이것이 부처님 본래의 뜻이 아니다. 부처님 본래의 뜻으로 돌아가야 된다. 부처님 본래의 뜻은 만 중생을 평등하게 보는 것인데, 어찌 그 출가한 교단 중심으로 불교가 그렇게 존중 받아야 되느냐? 그것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소승은 제외한다. 이런 말입니다.
除先修習學小乘者(제선수습학소승자). 먼저 소승을 修習해서 공부한 사람들은 제외한다. 그 사람들은 먹혀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如是之人(여시지인)을, 이와 같은 사람들은
我今亦令得聞是經(아금역령득문시경)하고, 내가 지금에 또한 이 경전을 얻어 듣게 하고 入於佛慧(입어불혜)호라. 부처의 지혜에 들어가게 하노라. 세존의 답변이 그렇게 됐습니다.
7 보살들의 수희(隨喜)
爾時諸大菩薩(이시제대보살)이 而說偈言(이설게언)하니라
善哉善哉(선재선재)라 大雄世尊(대웅세존)이시여
諸衆生等(제중생등)을 易可化度(이가화도)시며
能問諸佛(능문제불)의 甚深智慧(심심지혜)하고
聞已信行(문이신행)일새 我等隨喜(아등수희)하노이다
於時世尊(어시세존)이
讚歎上首諸大菩薩(찬탄상수제대보살)하사대
善哉善哉(선재선재)라 善男子(선남자)야
汝等能於如來(여등능어여래)에 發隨喜心(발수희심)이로다
爾時諸大菩薩(이시제대보살)이 而說偈言(이설게언)하니라.
그 때에 모든 보살들이 게송으로써 설해 말하되,
善哉善哉(선재선재)라 大雄世尊(대웅세존)이시여, 큰영웅인 세존이시여, 이래서 우리가 세존을 모신 곳을 大雄殿(대웅전. 하는 이유도 이런 데에 있습니다. 법화경 같은데서... 우리가 대웅전, 대웅전. 大雄世尊이거든요.
세존을 모셨으니까요. 諸衆生等(제중생등)을, 여러 중생들을
易可化度(이가화도), 쉽게 가히 교화하시며,
能問諸佛(능문제불)의 甚深智慧(심심지혜)하고, 능히 제불의 甚深智慧를 묻고는, 또 聞已에 信行(문이신행)하고, 또 설해 주면 그것을 듣고 나서는 믿고 행할세. 我等隨喜(아등수희)하노이다. 우리들이 따라서 기뻐합니다. 於時世尊(어시세존)이, 그 때에 세존이
讚歎上首諸大菩薩(찬탄상수제대보살)하사대, 여러 큰보살들을 찬탄하사대 善哉善哉(선재선재)라 善男子(선남자)야 汝等이 能於如來(여등능어여래)에, 능히 여래에 發隨喜心(발수희심)이로다. 따라서 기뻐하는 마음을 내었구나.
隨喜心. 이것도 참 중요한 말이지요. 다른 사람이 잘나고 훌륭하고 좋은 점. 이것을 따라서 기뻐해주는 마음. 따라서 기뻐해주기만 해도 큰 복이 되는데, 우리는 그것을 못해요. 그러니까 이것은 돈도 안 들고 무슨 수고할 일도 없고 무슨 노력도 안 드는데 마음하나 딱 제대로 쓰면 큰 복이 되는 것을 우리는 이것을 쉽게 하지 못하는 것.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 隨喜心이 얼마나 큰 복이 되는데... 그런 것들도 우리가 평소에 일상에서 챙겨야할 일이지요.
그 다음에 의문을 갖다 해서 이것이 본래 보면, 본문 과목에서 序分(서분)이 두 가지인데, 湧出序(용출서)가 있고 疑念序(의념서)가 있어요. 땅에서 솟아오른 것도 하나의 새로운 서장이 되고, 그 다음에 그런 데에 대해서 의문을 갖는 것도 하나의 서장이 됩니다.
차토보살들의 의문이라 그랬어요. 기존의 보살들.
二 의문을 갖다
1 차토보살들의 의문
爾時彌勒菩薩(이시미륵보살)과
及八千恒河沙諸菩薩衆(급팔천항하사제보살중)이
皆作是念(개작시념)하대 我等(아등)이 從昔已來(종석이래)로
不見不聞如是大菩薩摩訶薩衆(불견불문여시대보살마하살중)이
從地涌出(종지용출)하사 住世尊前(주세존전)하야
合掌供養(합장공양)하고 問訊如來(문신여래)라하더니
時彌勒菩薩摩訶薩(시미륵보살마하살)이
知八千恒河沙諸菩薩等(지팔천항하사제보살등)의
心之所念(심지소념)하며 幷欲自決所疑(병욕자결소의)하니라
合掌向佛(합장향불)하사 以偈問曰(이게문왈)
無量千萬億(무량천만억) 大衆諸菩薩(대중제보살)은
昔所未曾見(석소미증견)이라 願兩足尊說(원양족존설)하소서
是從何所來(시종하소래)며 以何因緣集(이하인연집)이닛고
巨身大神通(거신대신통)이며 智慧叵思議(지혜파사의)라
其志念堅固(기지념견고)하고 有大忍辱力(유대인욕력)하며
衆生所樂見(중생소락견)이라 爲從何所來(위종하소래)닛고
一一諸菩薩(일일제보살)이 所將諸眷屬(소장제권속)의
其數無有量(기수무유량)하대 如恒河沙等(여항하사등)하며
或有大菩薩(혹유대보살)은 將六萬恒沙(장육만항사)하대
如是諸大衆(여시제대중)이 一心求佛道(일심구불도)하며
是諸大師等(시제대사등) 六萬恒河沙(육만항하사)가
俱來供養佛(구래공양불)하고 及護持是經(급호지시경)하며
將五萬恒沙(장오만항사)하대 其數過於是(기수과어시)하며
四萬及三萬(사만급삼만)과 二萬至一萬(이만지일만)이며
一千一百等(일천일백등)으로 乃至一恒沙(내지일항사)하며
半及三四分(반급삼사분)과 億萬分之一(억만분지일)이며
千萬那由他(천만나유타)인 萬億諸弟子(만억제제자)와
乃至於半億(내지어반억)이 其數復過上(기수부과상)하며
百萬至一萬(백만지일만)과 一千及一百(일천급일백)과
五十與一十(오십여일십)으로 乃至三二一(내지삼이일)하며
單己無眷屬(단기무권속)으로 樂於獨處者(낙어독처자)가
俱來至佛所(구래지불소)하대 其數轉過上(기수전과상)하며
如是諸大衆(여시제대중)을 若人行籌數(약인행주수)하대
過於恒沙劫(과어항사겁)토록 猶不能盡知(유불능진지)하며
是諸大威德(시제대위덕) 精進菩薩衆(정진보살중)을
誰爲其說法(수위기설법)하야 敎化而成就(교화이성취)하며
從誰初發心(종수초발심)하고 稱揚何佛法(칭양하불법)이며
受持行誰經(수지행수경)하고 修習何佛道(수습하불도)닛고
如是諸菩薩(여시제보살)의 神通大智力(신통대지력)으로
四方地震裂(사방지진열)하고 皆從中涌出(개종중용출)하니
世尊我昔來(세존아석래)로 未曾見是事(미증견시사)라
願說其所從(원설기소종) 國土之名號(국토지명호)하소서
我常遊諸國(아상유제국)하대 未曾見是衆(미증견시중)하며
我於此衆中(아어차중중)에 乃不識一人(내불식일인)이라
忽然從地出(홀연종지출)하니 願說其因緣(원설기인연)하소서
今此之大會(금차지대회)에 無量百千億( 무량백천억)
是諸菩薩等(시제보살등)이 皆欲知此事(개욕지차사)하노니
是諸菩薩衆(시제보살중)의 本末之因緣(본말지인연)을
無量德世尊(무량덕세존)이시여 惟願決衆疑(유원결중의)하소서
爾時彌勒菩薩(이시미륵보살)과 及八千恒河沙諸菩薩衆(급팔천항하사제보살중)이, 그 때에 미륵보살과 8000항하사 모든 보살대중들이
皆作是念(개작시념)하대, 다 이런 생각을 하되
我等(아등)이 從昔已來(종석이래)로, 우리들이 옛날로부터 오므로
不見不聞(불견불문).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했습니다. 무엇을?
如是大菩薩摩訶薩衆(여시대보살마하살중)이 從地涌出(종지용출)하사, 이와 같은 대보살마하살대중들이 땅으로부터 솟아올라 오사,
住世尊前(주세존전)하야, 세존 앞에 머무셔서
合掌供養(합장공양)하고 問訊如來(문신여래). 여래에게 이런저런 안부를 묻는 것을 한 번도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했다. 라고 하더니
時彌勒菩薩摩訶薩(시미륵보살마하살)이, 그 때에 미륵보살마하살이
知八千恒河沙諸菩薩等(지팔천항하사제보살등)의 心之所念(심지소념)하며, 8000항하사 보살들의 마음에 생각하는 바를 아시고,
幷欲自決所疑(병욕자결소의)하니라. 또 자신이 의심하는 바도 해결하고자 合掌向佛(합장향불)하사 以偈問曰(이게문왈). 합장하고 부처님을 향해서 게송으로써 물어 가로되,
無量千萬億(무량천만억) 大衆諸菩薩(대중제보살)은 昔所未曾見(석소미증견)이라. 이와 같이 많은 보살들은 옛날에 일찍이 보지 못했다.
그러니까 우리는 절에 다니고, 절에 회비내고, 무슨 교양대학 다니고 뭐 하고 하는 이 사람들만 불자라고 보는 겁니다. 미륵보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사람들만 눈에 들어왔어요. 저 많고 많은 길거리에 걸어 다니는 저 많은 사람들이 보살이라고 하는 사실. 궁극적으로 부처라고 하는 사실에 눈이 어두운 것이지요. 미륵보살도 바로 그 겁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어요. 땅에서부터 솟아올라왔다 라고 하는 말은 일반 민중입니다.
願兩足尊說(원양족존설)하소서, 원컨대 양족존께서는 설하소서.
是從何所來(시종하소래)며, 이들은 어디로부터 왔으며, 또
以何因緣集(이하인연집)이닛고? 무슨 인연으로 이렇게 모였습니까?
巨身大神通(거신대신통)이며, 몸도 크고 큰 신통을 가졌으며
智慧叵思議(지혜파사의)라. 지혜가 불가사의하다.
其志念堅固(기지념견고)하고, 그들의 뜻과 생각은 견고하고
有大忍辱力(유대인욕력)하며, 대 인욕의 힘이 있어.
衆生은 所樂見(중생소락견)이라. 중생들이 즐겨 보고자 하는 바라.
爲從何所來(위종하소래)닛고? 어디로부터 온 것이 됩니까?
一一諸菩薩(일일제보살)이, 낱낱 모든 보살들이
所將諸眷屬(소장제권속)의, 거느린바 모든 권속들의
其數無有量(기수무유량)이라. 그 숫자가 한량이 없다.
如恒河沙等(여항하사등)하며, 그래서 항하강의 모래수와 같으며
或有大菩薩(혹유대보살)은 將六萬恒沙(장육만항사)라. 6만 항하강사라. 앞에 나왔던 내용 그대로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중송 태기예요.
중송이라고는 하지 아니 했지만 중송 태기니까 이것은 생략을 하고요.
넘겨서 타토보살들의 의문이라. 다른 국토 보살들의 의문이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2 타토보살들의 의문
爾時釋迦牟尼佛(이시석가모니불)의 分身諸佛(분신제불)이
從無量千萬億他方國土來者(종무량천만억타방국토래자)가
在於八方諸寶樹下(재어팔방제보수하)의 師子座上(사자좌상)하사
結跏趺坐(결가부좌)하니 其佛侍者(기불시자)가
各各見是菩薩大衆(각각견시보살대중)이
於三千大千世界四方(어삼천대천세계사방)으로
從地湧出(종지용출)하사 住於虛空(주어허공)하고
各白其佛言(각백기불언)하사대 世尊(세존)하
此諸無量無邊阿僧祗菩薩大衆(차제무량무변아승지보살대중)이
從何所來(종하소래)닛고 爾時諸佛(이시제불)이
各告侍者(각고시자)하사대 諸善男子(제선남자)야
且待須臾(차대수유)하라 有菩薩摩訶薩(유보살마하살)하니
名曰彌勒(명왈미륵)이라
釋迦牟尼佛之所授記(석가모니불지소수기)니
次後作佛(차후작불)하리라 已問斯事(이문사사)일새
佛今答之(불금답지)니 汝等(여등)도
自當因是得聞(자당인시득문)하리라
爾時釋迦牟尼佛(이시석가모니불)의, 그 때에 석가모니부처님
分身諸佛(분신제불)이 從無量千萬億他方國土來者(종무량천만억타방국토래자)가, 무량 1000만 억 국토로부터 온 사람들이
在於八方諸寶樹下(재어팔방제보수하)의 師子座上(사자좌상)하사
8방. 여러 보배나무 밑 사자좌에 結跏趺坐(결가부좌)하니,
가부좌를 맺고 앉아 있으니 其佛侍者(기불시자)가, 그 부처님의 시자가
各各見是菩薩大衆(각각견시보살대중)이, 각각 모든 큰대중들이
於三千大千世界四方(어삼천대천세계사방)으로, 삼천대천세계의 사방으로부터 從地湧出(종지용출). 땅으로부터 솟아 오른 것을 보사,
住於虛空(주어허공)하고, 허공중에 있으면서
各白其佛言(각백기불언)하사대, 각각 그 부처님께 고해 말하되
世尊(세존)하, 세존이시여 此諸無量無邊阿僧祗菩薩大衆(차제무량무변아승지보살대중)이, 이 무량무변 아승지 보살대중들이
從何所來(종하소래)닛고? 어디로부터 왔습니까?
爾時諸佛(이시제불)이, 그 때에 모든 부처님이
各告侍者(각고시자)하사대, 각각 시자에게 고하사대,
諸善男子(제선남자), 모든 선남자야
且待須臾(차대수유)하라. 잠깐 기다려라.
有菩薩摩訶薩(유보살마하살)하니, 보살마하살이 있으니
名曰彌勒(명왈미륵)이라. 이름이 미륵이라.
釋迦牟尼佛之所授記(석가모니불지소수기)니,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수기하신 바라. 次後作佛(차후작불)이라. 다음에 부처를 지으리라.
已問斯事(이문사사)라. 이미 그 문제에 내해서 미륵보살이 물었지 않느냐? 조금 기다리면 될 텐데 왜 그리 성급하게 묻느냐? 이런 말입니다.
佛今答之(불금답지)니, 지금 부처님께서 그 문제에 내해서 답 할 거야.
汝等(여등)도 自當因是得聞(자당인시득문)이라. 스스로 마땅히 이로 인해서 들을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렇지요. 그런데 또 재미있게 그 화신부처님 시자들이 각자 자기가 모시고 있는 부처님이 있으니까요. 자기가 궁금한 것은 자기 스승에게 묻는 것이 또 도리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모신 부처님에게 가서 묻는 그런 내용을 여기다 살짝 삽입을 시켜놨어요. 그런데 그 석가모니화신부처님들은 자기 시자들에게 “야 가만히 있어라. 금방 미륵보살이 궁금해가지고 물었지 않느냐? 좀 있으면 어부지리로 그 답을 듣고 우리도 이해하게 될 텐데 뭘 그렇게 급하게 나한테 묻느냐?” 이런 식입니다.
그래서 아주 인간적인 그런 면을 여기다 삽입을 시켜서 삽화로써의 역할을 아주 멋지게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시간이 많으면 법화경을 하나, 하나 이런 내용들도 짚어가면서, 분석해가면서 그렇게 공부하면 참 재미있을 것인데 할일은 많고 시간은 없고 그러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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