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법연화경 강좌 제6강-1
- 교육원 불교전문강당 2009. 09. 09 -
一心頂禮 盡十方三世 一切諸佛 一心頂禮 盡十方三世 一切尊法
一心頂禮 盡十方三世 一切賢聖僧 我弟子等 講論三藏 唯願三寶
爲作證明
南無本師釋迦牟尼佛 南無本師釋迦牟尼佛 南無是我本師釋迦牟尼佛
無上甚深微妙法 百千萬劫難遭隅 我今聞見得受持 願解如來眞實意
오늘은 법화경강의에 들어가기 전에 여러분 앞에 나눠드린
“사는 즐거움” 이라고 하는 이 책에 대해서 잠간 말씀드리겠습니다.
여기 지금 나와 계시는 스님은 법련사 주지스님입니다. 보경스님이고, 주지스님이 이번에 아주 좋은 책을 냈어요. 지금 주지보경스님은 제가 교육원장 할 때, 교육원에서도 국장으로 일을 했고, 또 여기 불교 강당에 2기생 졸업입니다. 그래서 사실 알고 보면, 막역한 인연이 있는 그런 관계인데요.
모두 각자 생활에 바쁘다 보니까 여러분하고 대면할 기회도 별로 없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이번에 이 책이 나와서 제가 보니까 내용도 충실하지만, 책도 아주 좋은 출판사. 웅진 출판사에서 수작으로 아주 잘 만들었습니다. 표지만 봐도 아주 편안하게 정말 사는 즐거움 같이 그렇게 아주 편안하게 잘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스님이 여러 공부하는 스님들이나 재가불자들에게 법공양을 올렸습니다. 우리가 공부해서 표현하는 것이 예를 들어서 바로 실천수행. 몸으로 보여주는 표현이 있고, 설법. 우리 같이 말로써 이렇게 표현하는 방법이 있고, 그 다음 또 글로써 표현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 세 가지 중에서 무엇인가 표현해야 됩니다. 자기 공부하는 사람은 많은데 사실은 그것을 실천수행으로 표현하는 사람도 흔하지 않고, 또 말로 표현하는 사람은 요즘 더러 있지요. 그리고 글로 표현하는 이것도 쉽지가 않습니다. 저는 웅진 출판사에서다 원고 줘도 받아주지도 않아요.
그런데 이 스님원고는 받아 줘가지고 이렇게 좋은 책을 만들었는데요.
아주 참 이번 기회에 우리가 이런 글도 한번 읽을 수가 있게 됐고, 또 ‘나도 한번 이런 글을 써봐야 되겠다.’ 하는 그런 용기도 한번 가져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마침 주지스님시간이 있어서 제가 이렇게 나오라고 했어요. (잠간 인사말 한마디 하시지요.)
방금 큰스님께서 과찬의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큰스님은 제가 항상 여러 가지로 理와 事에 스승으로 항상 받들어 모시는 僧寶(승보) 이시고, 또 무엇보다도 이번에 제가 부끄럽게 책을 한권 냈지만, 인터넷에 열 댓번수없이 나오지만 염화실 인터넷 방송이라 해서 그 몸이 불편하시고 한데도 수고를 하시는 것을 볼 때마다 제 스스로 경책을 하고 제가 은사님으로 보실 때 스님께서 말씀하시던 그런 것을 실천하는 자세로 항상 촉발하고 제 스스로 경책을 삼고 그래서 이런 소중한 하나의 결실도 모든 것이 다 큰스님께 배우고 경책 받았던 결실이라 하겠습니다.
또 마침 이번에 큰스님께서 법화경강의를 하시고요. 그래서 큰스님께 공양을 올리는 것이고, 큰스님께서 여러분에게 베풀어 주시는 것이고, 소중히 좀 잘 봐주시고 또 경책을 해주시면, 부처님의 말씀을 일반 모든 사람들이 보고 배울 수 있는 소중한 가르침이 되도록 앞으로도 계속 정진에 임하도록 하겠습니다. 큰스님하고 여러 스님들도, 재가 불자께서 다시 한번 ??? 부끄럽지만 소중히 받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
고맙습니다. 잘 볼게요.
공부한 것을 스님들은 포교일선에서 전문 포교는 하지 않더라도, 또 스님들 경우는 어쩔 수 없이 불법을 전해야 하는 것이 의무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떤 상황에서도 자기가 공부한대로 부처님이 어떤 분이다. 부처님의 사상은 어떤 것이다. 또 경전은 무엇이다. 어떤 경은 어떤 것이다. 이런 것들을 설명해 줄 의무가 있습니다. 그래서 설명해 주는데 말로도 할 수가 있고, 글로도 할 수가 있어요. 그래서 글로 적어보면 말하는 것도 정리가 됩니다. 저도 글을 쓰는 것을 누구한테 제대로 지도를 받지는 않았습니다만, 글 쓰는 책은 여러 권 읽었습니다.
옛날부터 아주 여러 가지 글 쓰는데 대한 어떤 기법을 가르치는 책들이 아주 많거든요. 찾아보면 그런 데에 대한 책이 많습니다.
그래서 읽은 책이 많은데, 그런 것을 그냥 읽어서 저 나름대로 터득을 해서 글을 쓰는 정도입니다. 그런데 글을 쓰다 보면 그냥 적당히 알고 있던 것이 더욱 분명해지고, 그냥 말로 할 때보다 글을 쓰면서 말을 하면 훨씬 그것이 조리정연하고, 또 앞뒤가 잘 맞아 떨어지는 그런 것을 할 수가 있습니다. 글은 서론ㆍ본론ㆍ결론. 그 다음에 수식해야 할 것.
그 다음에 인용해야 할 것. 이런 것들을 골고루 이렇게 반찬을 어울러 가지고 그래서 한편의 글을 완성하게 되니까요. 그러다 보면 여러분이 어디서 강의를 한다든지 설법을 한다든지 할 때, 그 하는 기법이 금방 늘어요.
확실하게 달라집니다. 그래서 상당히 이득이 많아요. 글을 써 보면 이득이 상당히 많습니다.
예를 들어서 저 한테 법화경을 몇 시간 공부했다 그러면, “무비스님은 법화경에 빠진 사람이다.” 이런 제목으로 쓸 수도 있어요. 그래 가지고
그 동안 몇 시간 이렇게 그렇게 들었던 것. 그리고 내 혼자 여기에 법화경에 심취하고 있는 것. 법화경에서 제가 꼬집어서 중요하다고 하는 사상을 들추어서 이야기한 것. 그런 것을 법화경도 인용하고 여기서 들은 어떤 그 광경도 설명해가면서... 그럼 한 편의 글이 되는 겁니다.
그렇게 하면 나중에... 요즘 법화경을 배웠는데 법화경에 대해서 어디 가서 30분이든지 한 시간이든지 강의할 수가 있게 되면, 그러면 글을 쓴 것하고 글 쓰지 않고 말한 사람하고 그 말의 질이 전혀 달라집니다.
그리고 자료가 벌써 갖춰지니까, 말할 자료의 준비가 착 되어버리니까 그래서 말하기가 참 좋고 말하는데 상당한 도움이 됩니다. 그런 것을 꼭 해야 됩니다. 창작이 어려우면 우선 번역부터 하는 것이 좋습니다.
번역을 하다보면 글을 만드는 것도 상당히 도움이 되거든요.
번역을 해보면 그 다음에 거기서 좀 더 발전해서 다른 글을 창작도 할 수가 있게 되고, 간단한, 원고지 열장 스무 장 30장정도 되는 리포터 같은 것. 이런 것들도 쓰게 되고 그러지 않습니까? 요즘 포교사 시험 같은 것 치는데도 그런 정도 리포터는 으레 써야 되니까요. 그런 것들도 자기가 공부한 것을 표현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꼭 필요한 것이다 하는 그런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오늘은 법사품 어제에 이어서, 제불의 비밀하고 요긴한 법장 이렇게 제목을 달아 봤습니다. 여러 부처님에게서 가장 비밀하고 요긴한,
秘要之章(비요지장)이라고 이렇게 표현하는데요. 이것은 정말 보통 누구나 다 알아도 될 그런 이야기 같으면 비밀하고 요긴한 법장이라고 표현하지 않겠지요. 그러나 이 법화경만은 정말 비밀하다고 할 만치 제 1급 가르침이다 하는 그런 뜻이겠지요. 이것이 비밀하다고 누구는 알아야 되고 누구는 몰라야 되는 그런 것은 없습니다. 그런 것은 없지만, 그 만치 중요하다. 하는 그런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五 제불의 비밀하고 요긴한 법장
爾時佛(이시불)이
復告藥王菩薩摩訶薩(부고약왕보살마하살)하사대
我所說經典(아소설경전)의 無量千萬億(무량천만억)을
已說今說當說(이설금설당설)이어니와 而於其中(이어기중)에
此法華經(차법화경)이 最爲難信難解(최위난신난해)니라
藥王(약왕)아 此經是諸佛秘要之藏(차경시제불비요지장)이라
不可分布(불가분포)하야 妄授與人(망수여인)이니
諸佛世尊之所守護(제불세존지소수호)라 從昔已來(종석이래)로
未曾顯說而此經者(미증현설이차경자)는 如來現在(여래현재)에도
猶多怨嫉(유다원질)이어든 況滅度後(황멸도후)리요
藥王當知(약왕당지)하라 如來滅後(여래멸후)에
其能書持讀誦供養(기능서지독송공양)하고
爲他人說者(위타인설자)는
如來卽爲以衣覆之(여래즉위이의복지)하며
又爲他方現在諸佛之所護念(우위타방현재제불지소호념)이라
是人有大信力(시인유대신력)과 及志願力(급지원력)과
諸善根力(제선근력)하나니 當知是人(당지시인)은
與如來共宿(여여래공숙)이며
則爲如來手摩其頭(즉위여래수마기두)니라 藥王(약왕)아
在在處處(재재처처)에 若說若讀(약설약독)커나
若誦若書(약송약서)하며 若經卷所住之處(약경권소주지처)는
皆應起七寶塔(개응기칠보탑)하야
極令高廣嚴飾(극령고광엄식)하고 不須復安舍利(불수부안사리)니
所以者何(소이자하)오
此中已有如來全身(차중이유여래전신)이니라
此塔應以一切華香瓔珞(차탑응이일체화향영락)과
繒蓋幢幡(증개당번)과 伎樂歌頌(기악가송)으로
供養恭敬(공양공경)하며 尊重讚歎(존중찬탄)이니
若有人(약유인)이 得見此塔(득견차탑)하고
禮拜供養(예배공양)하면 當知是等(당지시등)은
皆近阿耨多羅三藐三菩提(개근아뇩다라삼먁삼보리)니라
藥王(약왕)아 多有人在家出家(다유인재가출가)에
行菩薩道(행보살도)하대
若不能得見聞讀誦書持供養是法華經者(약불능득견문독송서지공양
시법화경자)면 當知是人(당지시인)은
未善行菩薩道(미선행보살도)요
若有得聞是經典者(약유득문시경전자)면
乃能善行菩薩之道(내능선행보살지도)니라
其有衆生(기유중생)이 求佛道者(구불도자)로
若見若聞是法華經(약견약문시법화경)하고
聞已信解受持者(문이신해수지자)는 當知是人(당지시인)은
得近阿耨多羅三藐三菩提(득근아뇩다라삼먁삼보리)니라
藥王(약왕)아 譬如有人(비여유인)이 渴乏須水(갈핍수수)하야
於彼高原(어피고원)에 穿鑿求之(천착구지)하대
猶見乾土(유견간토)하면 知水尙遠(지수상원)이나
施功不已(시공불이)하야 轉見濕土(전견습토)하고
遂漸至泥(수점지니)하면
其心決定知水必近(기심결정지수필근)이니
菩薩亦復如是(보살역부여시)하야 若未聞未解(약미문미해)하며
未能修習是法華經(미능수습시법화경)하면 當知是人(당지시인)은
去阿耨多羅三藐三菩提尙遠(거아뇩다라삼먁삼보리상원)이요
若得聞解(약득문해)하야 思惟修習(사유수습)하면
必知得近阿耨多羅三藐三菩提(필지득근아뇩다라삼먁삼보리)니
所以者何(소이자하)오
一切菩薩阿耨多羅三藐三菩提(일체보살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皆屬此經(개속차경)이니라 此經開方便門(차경개방편문)하고
示眞實相(시진실상)이니 是法華經藏(시법화경장)은
深固幽遠(심고유원)하야 無人能到(무인능도)어늘
今佛敎化成就菩薩(금불교화성취보살)호려하야
而爲開示(이위개시)니라 藥王(약왕)아 若有菩薩(약유보살)이
聞是法華經(문시법화경)하고 驚疑怖畏(경의포외)하면
當知是爲新發意菩薩(당지시위신발의보살)이요
若聲聞人(약성문인)이 聞是經(문시경)하고
驚疑怖畏(경의포외)하면
當知是爲增上慢者(당지시위증상만자)니라
爾時佛(이시불)이, 그 때에 부처님이 復告藥王菩薩摩訶薩(부고약왕보살마하살)하사대, 다시 약왕보살마하살에게 告하사대, 我所說經典(아소설경전)의, 내가 설한 경전의 無量千萬億(무량천만억)을, 已說ㆍ今說ㆍ當說(이설금설당설). 이미 설했고 지금 설하고 앞으로 설할 것이거니와,
而於其中(이어기중)에, 그 가운데서 此法華經(차법화경)이 이 법화경이
最爲難信難解(최위난신난해)니라. 가장 믿기 어렵고 이해하기 어렵다.
이것 우리가 四聖諦ㆍ八正道(사성제 팔정도) 그런대로 이해합니다.
그리고 空(공)이다 라고 하는 것, 緣起(연기)다. 無我(무아)다 하는 그런 것들도 그런대로 이해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말하자면 실천하는 것도 그런대로 자기 한 사람의 해탈ㆍ자기 한 사람의 열반ㆍ자기 한 사람의 편안함을 위해서 어디 산 중에서나 어디서나 조용히 온갖 세속적인 번뇌를 잠재우면서 살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利他行(이타행)을 앞세우고 남을 위해서 헌신한다고 하는 것은 어려운 겁니다. 자기 개인 공부를 위해서 30년ㆍ40년ㆍ50년. 선방에 앉아 있을 수는 있습니다. 사실은 그것은 쉬워요. 하지만 남을 위해서, 아니 할 말로 자기가 가진 돈, 만원이 됐든지 10만원이 됐든지 100만원이 됐든지 그 돈을 어떤 보람 있는 일에 쓰라고 선뜻 내놓기는 어렵습니다.
10년 참선은 할 수 있어도 돈 10만원 내놓기는 어려운겁니다.
바로 그 점입니다. 그래서 이 법화경은 보살의 수준에 오른 사람을 위해서 설한 것이다. 라고 하는데요. 실질적으로 실천하는 면에 있어서 자기 개인 공부는 20년ㆍ30년 할 수 있어도 남을 위해서 헌신한다고 하는 것은 그렇게 어렵다. 그래서 이것이 難信難解입니다.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에게는 이것은 아주 이해가 안 되는 겁니다. 전혀 이해가 안 됩니다.
절에다 보시하고 예를 들어서 시주하고 하는 것. 그것 전혀 이해 못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저것 뭐하려고 하는가? 그렇게 하면 복이 된다는데 복이 도대체 뭔데? 바로 눈앞에 것만 계산해 버릇해온 사람들은 복이 된다든지 돕는다든지 하는 그런 것을 전혀 이해 못하는 사람들이 사실은 의외로 많이 있습니다. 세계가 전혀 다른 겁니다.
그래서 이 불교 안에서도 개인 수행을 위한 것은 그것이 수행이 되는지 어쩐지도 모르면서 많은 세월, 30년ㆍ40년ㆍ50년 아니, 평생 그렇게 사는 사람들은 많지만, 정말 세상을 위해서, 그리고 남을 위해서 헌신적으로 돈이면 돈ㆍ시간이면 시간ㆍ아니면 육체적 능력이면 능력ㆍ그 모든 자기가 갖고 있는 힘을 어느 정도 남을 위해서 정말 조건 없이 베푼다고 하는 것은 정말 쉽지 않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이 難信難解라는 겁니다. 무슨 이치가 어렵고... 사실 色卽是空 空卽是色(색즉시공 공즉시색)보다는 쉬워요. 말은 쉽습니다. 그렇지만 정말 몸소 그것을 실천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하는 것이지요.
藥王(약왕)아 此經은 是諸佛秘要之藏(차경시제불비요지장)이라.
이 경은 諸佛秘要之藏이라. 여기 나오네요. 모든 부처님의 비밀하고 요긴한 법장이다. 不可分布(불가분포)하야 妄授與人(망수여인)이니,
함부로 나눠가지고 망령되게 사람들에게 줄 것이 아니다 이 말입니다.
함부로 주지 말라 이 뜻이지요. 諸佛世尊之所守護(제불세존지소수호)라.
모든 부처님이 지키고 보호하는 바다 말이여, 함부로 들어오지도 못하고, 함부로 나가지도 못하도록 모든 부처님이 지키고 보호하는 것이다.
從昔已來(종석이래)로, 옛날부터 지금까지 未曾顯說而此經者(미증현설이차경자)는, 함부로 이 경전을 드러내놓고 말하지 아니한 것은, 이 뜻입니다.
함부로 말하지 아니한 것은 如來가 現在(여래현재)에도 猶多怨嫉(유다원질)이어든, 여래가 지금 현재에도 오히려 원망과 질투가 많다 말입니다. 원망과 질투가 많아... 이것은 순전히 남을 위해서, 利他行을 위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라야 비로소 모든 사람이 부처라고 하는 이것이 이해가 되지, 이타행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모든 사람이 부처라고 하는 그런 것을 제대로 받아들일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소리 들으면 원망과 질투가 있는 것이지요.
‘아이고 어떻게 해서 부처가 되냐?’ 고, ‘삼아승지겁을 닦아도 될까 말까 하는데 그런 일이 어디 있느냐?’ 고 말하자면 이런 것이 難信難解이고, 이런 것이 원망과 질투가 많다는 것입니다. 불교TV에 법문하는 것을 가만히 들어보면 원로라고 하는 그런 스님도, 원로면 우리 종단에서 최고의 수행자. 그야말로 더 이상 나아갈 데 없을 정도로 僧臘(승랍)이라든지 수행이라든지 공부라든지 불교이론이라든지 이런 것이 최고 수준에 오른 사람이다. 일단은 이렇게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원로.
그런데 정말 이 人佛思想. 법화경의 이러한 정신을 전혀 이해 못하고 엉뚱한 이야기 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래 저는 아주 무슨 기독교방송이나ㆍ카톨릭방송이나 이런 것들도 많이 듣지만 불교TV도 많이 듣습니다.
그 가운데는 배울 점도 상당히 많기 때문에요. 그런 것이 다 공부지요.
현재에도 원망과 질투가 많은데 況滅度後(황멸도후)리요. 하물며 멸도 후리요? 부처님이 열반한 뒤에는 더 말할 것이 있겠느냐? 이 것이지요.
얼마든지 비방하는 사람이 많다. 藥王當知(약왕당지)하라. 약왕아 마땅히 알아라. 如來滅後(여래멸후)에, 여래가 멸도한 후에 其能書持讀誦供養(기능서지독송공양)하고, 그가 능히 書ㆍ持ㆍ讀ㆍ誦ㆍ供養하고ㆍ 爲他人說者(위타인설자). 다른 사람을 위해서 설하는 자는 如來가 卽爲以衣覆之(여래즉위이의복지)하며, 부처님께서 옷으로써 덮어준다. 옷으로써 덮어준다.
잠들어 있는 정말 사랑하는 사람에게 혹시 감기 들세라 자기 외투를 벗어서 덮어준다. 우리 광경을 우리가 많이 보지요? 말하자면 부처님이 우리 중생들에게 이렇게 법화경을 쓰고ㆍ가지고ㆍ읽고ㆍ외우고ㆍ공양하고ㆍ남을 위해서 설하는 소위 오종법사.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은 부처님이 정말 가장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부처님이 옷을 벗어서 그 사람을 감싸고 덮어주고 싶어 하는 그런 정도입니다.
又爲他方現在諸佛之所護念(우위타방현재제불지소호념)이여.
또 저~기 타방, 지금 다른 지방에서 모든 부처님이 역시 護念하는 바이다.
보호하고 아끼는 바이다. 是人有大信力(시인유대신력)이라. 이 사람은 큰 믿음이 있고 또 及志願力(급지원력). 큰 뜻과 원의 힘이 있고, 또 이 사람에게는 諸善根力(제선근력)이 있어요. 그러니까 이 믿음이라든지 뜻과 원,
願力이라든지, 善根이라든지 이것은 정말 가장 정상적인 그 어떤 불자로써, 불교인으로써 제대로 된 사람.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이 법화경을 受持ㆍ讀ㆍ誦ㆍ書寫ㆍ解說하는 사람은 불자로써 정말 제대로 된 사람이다. 그 사람은 신심이 있어야 되고, 뜻과 원이 있어야 되고, 선근이 있어야 되니까요.
當知是人(당지시인)은, 마땅히 알아라. 이 사람은
與如來共宿(여여래공숙)이여. 여래로 더불어 한 방에 같이 자.
共宿. 부처님하고 한 방에 같이 자는 사람이다 이 겁니다. 이 보다 더 가까울 수는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이 법화경을 제대로 이해하고, 법화경 정신에 말하자면 젖어있는 사람은 그야말로 부처님하고 함께 잠 잘 수 있을 정도의 사람이다. 則爲如來手摩其頭(즉위여래수마기두)니라. 곧 여래가 그의 머리를 손으로 만져준다. 쓰다듬어 준다 이 겁니다.
藥王(약왕)아 在在處處(재재처처)에 若說若讀(약설약독).
곳곳에 인연 따라서 자기가 처한 어느 곳이든지 만약 설하거나, 만약 읽거나 若誦若書(약송약서). 만약 외우거나, 만약 쓰면 또
若經卷所住之處(약경권소주지처)는, 그럴 것 같으면 이 經卷이 머무는 바, 곳은 皆應起七寶塔(개응기칠보탑)하야, 마땅히 7보탑을 세워가지고서 極令高廣嚴飾(극령고광엄식)하고, 지극히 높고 넓게 아주 장엄을 잘 하게 하고, 그것도 아주 최고로, 極이라는 말은 그런 뜻이지요.
不須復安舍利(불수부안사리)니, 더 이상 사리를 안치하지 말라.
부처님 사리 친견한다고 “불지사리” 저 중국까지 가가지고 사리 모셔오고 야단법석 떨고 그러고 지나갔는데 그것이 어쨌단 말입니까?
사실 그런 야단법석이 법화경 한 구절 제대로 이해하고 그 사상에 심취해서 그것을 우리가 실천수행 하려고 한 것만 같지 못한 겁니다.
얼마나 떠들어 댔습니까? 이것이 한국불교의 대다수의 수준이라고 할 수 있는데 보십시오. 不須復安舍利. 모름지기 다시 더 이상 사리 안치할 필요 없다. 사리필요 없다 이 겁니다. 이 법화경이야말로 진짜 사리입니다. “法身舍利(법신사리)” 그래요. 法身舍利. 진리의 사리다 이 겁니다. 진리의 사리.
이것을 법신사리라고 그래요. 진리의 사리라고 그래요.
법화경이 있으면 사리, 그것 필요 없다 이 겁니다. 사리, 그것 유골이지 별것입니까? 사실 그것 크게 중요하게 생각할 일이 아닙니다.
물론 석가모니부처님은 위대한 성인이니까 성인의 유골은 말하자면 우리가 敎祖(교조)를 모시고 숭배하는 입장에서 우리가 그것을 높이 받드는 것은 좋은 자세지요. 좋은 자세지만, 그렇게 야단법석 떨 일은 아닙니다. 여기는 법화경이 있으면 사리가 필요 없다 이 겁니다.
사실은 법화경의 정신을 우리가 제대로 이해하는 것. 그것이 바람직한 것이지요.
유명한 바카리 경이라고 하는 경 있지 않습니까?
바카리 라고 하는 비구가 나이 들고 병들어서 막 죽을 때가 됐는데,
부처님을 한 번 뵙고, 부처님에게 절을 한 번하고 눈을 감는 것이 소원입니다. 그런데 부처님계신 곳으로 가다가 다 가지를 못하고 어느 신도님 집에서 임종을 하게 됐어요. 그래서 그 신도님에게 부탁을 하는 겁니다. “내가 갈 수가 없으니 부처님한테 이 말 좀 전해주세요.” 그러니까 부처님은 그 말을 듣고 왔어요. 자기 제자가 다 죽어 간다고 하니까요. 그래 와서 보니까 정말 제대로 일어나지도 못하는 그런 처지거든요.
그래서 어떻게 견딜만하냐? 죽은 먹었느냐? 숨이라도 제대로 쉬느냐? 이렇게 위로를 하는데 이 바카리 라고 하는 비구가 그 다 쓰러져가는 몸뚱이로 겨우겨우 일어나가지고 가사장삼을 입고 부처님한테 마지막 절을 한 번하고 눈을 감으려고 그렇게 아등바등 애를 쓰니까 부처님이 아주 정색을 하면서 그만 둬라. 그 썩어가는 몸뚱이를 가지고, 내 이 썩어가는 몸뚱이에게 절을 한 번 더 한들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 너도 지금 썩어가고, 나도 지금 썩어간다. 썩어가는 몸뚱이가, 썩어가는 몸뚱이 지수화풍에게다가 절한들 그것 무슨 의미가 있느냐? 나 라고 하는 존재가 뭐냐? 진리의 가르침을 펴는 사람이 곧 나다. 그러니까 나는 법이다 이 것이지요.
그래서 유명한 말이 있지요. 법을 보는 자는 여래를 보고 여래를 보는 자는 법을 본다. 네가 그 노력 들여가지고 내 정신ㆍ내 사상ㆍ내가 가르친 법을 이해하고 깨달으려고 노력해야지 내 몸뚱이 한 번 더 보고, 몸뚱이에게 절 한 번 더한들 그것 무슨 의미가 있느냐? 아주 매정하게 그래버렸어요. 법을 보는 자는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자는 법을 본다. 여태 이, 그야말로
凡所有相 皆是虛妄(범소유상 개시허망)이고,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약견색견아 이음성구아)하면 是人行邪道(시인행사도)라고 했거든요. 삿된 도를 행하는 것이라고 그렇게 했는데, 아직도 그것을 모르고 그런 되지도 않은 짓을 하느냐? 아이, 죽음이 임박 했으면 눈 감고 죽으면 그 뿐인 것이지, 그래서 부처님이 아주 우리에게는 큰 교훈을 남겼지요.
부처님의 그런 법문도ㆍ그런 행적도 우리에게는 아주 큰 법문입니다.
그리고 법의 중요성을 강조 하는 것이지요. 여기도 마찬 가집니다.
사리. 그까짓 것 필요 없는 거예요. 바로 법화경이야말로 더 이상 위대할 수가 없는데, 그런 데에 혹해 있지 말라는 것이지요.
안목을 높여주는 것입니다. 사실 공부를 해야 안목이 높아지는 거예요. 공부를 아니 하면 안목이 높아지지 않습니다. 계속 제 자리 걸음 하지요. 공부라고 하는 것은 우리보다 훨씬 월등한, 월등히 뛰어난 성인들의 가르침입니다. 그 성인들의 가르침을 우리가 배우는 것이 공부 아닙니까? 그러니까 우리안목이 자꾸 높아질 수밖에 없는 겁니다.
所以者何(소이자하)오? 까닭이 무엇인가?
此中에는 已有如來全身(차중이유여래전신)이니라. 그래놨네요. 여기에는, 이 경전에는 이미 있다. 如來全身이 있다. 여래전신이 있는데 그까짓 것, 조그마한 뼈 부스러기 하나 그까짓 것 모셔놓고 사리라한들 그것이 비교나 됩니까? 법화경. 이것은 곧 如來全身인데요.
此塔應以一切華香瓔珞(차탑응이일체화향영락)과, 이 탑은, -법화경이 있는 곳에 칠보탑을 세우라고 했으니까요. 이 탑에는 응당히 일체 꽃ㆍ향ㆍ瓔珞ㆍ繒蓋ㆍ幢幡(영락증개당번)과ㆍ伎樂ㆍ歌頌(기악가송)으로써 供養恭敬(공양공경)하고 尊重讚歎(존중찬탄)할지니라.
若有人(약유인)이, 만약에 다시 어떤 사람이 得見此塔(득견차탑)하고, 이 탑을 得見. 보고 禮拜하고 供養(예배공양)하면, 禮拜供養當知是等(당지시등)은, 마땅히 알아라. 이러한 이들은 皆近阿耨多羅三藐三菩提(개근아뇩다라삼먁삼보리)니라. 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이미 가까워졌느니라.
최상의 깨달음에 이미 가까웠다.
藥王(약왕)아 多有人在家出家(다유인재가출가)에, 많은 사람들이 在家나 出家에 菩薩道를 行(보살도행)하대, 若不能得見聞讀誦書持供養是法華經者(약불능득견문독송서지공양시법화경자)면, 만약에 능히 이 법화경을 보고ㆍ듣고ㆍ독하고ㆍ송하고ㆍ書=쓰고ㆍ가지고ㆍ공양하지 아니할 것 같으면
當知是人(당지시인)은, 마땅히 알아라. -이 법화경에 대해서 보지도 않고ㆍ듣지도 않고ㆍ읽지도 않고ㆍ외우지도 않고ㆍ쓰지도 않고ㆍ가지지도 않고ㆍ공양하지도 아니할 것 같으면, 이 말입니다. 그럴 것 같으면 未善行菩薩道(미선행보살도)요, 마땅히 알아라. 이 사람은 보살도를 행한다고 말 할 수가 없다.
법화경을 모르는 사람. 법화경과 인연을 맺지 못한 사람은, 보살도를 행한다고, 아무리 지가 보시를 많이 하고 선행을 많이 한다 하더라도 그 사람은 아직도 보살도를 잘 행한다고 말 할 수가 없다.
若有得聞是經典者(약유득문시경전자)면, 만약 어떤 사람이 이 경전을 얻어 들은 사람이라면, 乃能善行菩薩之道(내능선행보살지도)니라.
이에 능히 善行菩薩之道니라. 보살의 도를 잘 실천하는 사람이다.
보살도도 여기에 있고, 부처님사리를 위한 것도 바로 여기에 있고요.
在家 出家를 막론하고요.
其有衆生(기유중생)이, 어떤 중생이 佛道를 求하는 者(구불도자)로서
若見若聞是法華經(약견약문시법화경)하고, 만약에 이 법화경을 만약 보거나 만약 듣고 聞已信解受持者(문이신해수지자)는, 듣고 나서 믿고 이해하고 받아 가지는 사람은 當知是人(당지시인)은, 마땅히 알아라. 이 사람은
得近阿耨多羅三藐三菩提(득근아뇩다라삼먁삼보리)니라.
최상의 깨달음에 가까워진 사람이다.
藥王(약왕)아 譬如有人(비여유인)이, 비유하자면 어떤 사람이
渴乏須水(갈핍수수)에, 목이 말라가지고 물을 찾으려고 하는데
於彼高原(어피고원)에, 저 高原에, 높은 언덕에서 穿鑿求之(천착구지)라. 높은 언덕에서 우물을 파기 시작한다 이 말이지요.
猶見乾土(유견간토)여, 높은 언덕에서 파니까 한참 파도 마른 흙만 보이게 되는 겁니다. 猶見乾土.= 마른 흙. (乾:건=하늘. 乾:간=마르다. 마른.)
그러면 뭐라고요?
知水尙遠(지수상원)이나, 물이 오히려 아직도 멀리, 아직도 한참 더 파야 물이 있다고 하는 것을 알게 되지요. 그러나
施功不已(시공불이)하야, 그래도 자꾸 파는 겁니다. 자꾸 흙을 팔 것 같으면 轉見濕土(전견습토)야. 전전이 濕土를, 젖은 흙을 보게 된다.
그래서 遂漸至泥(수점지니)하면, 드디어 점점 진흙. 점점 진흙에 가까워지면
其心決定知水必近(기심결정지수필근)이니, 그 마음이 결정코 知. 알게 된다. 무엇을? 물이 반드시 가까이 있다고 하는 것을 알게 된다 이 말입니다.
그렇지요. 처음에는 마른 흙. 나중에는 젖은 흙. 그 다음에는 진흙. 이렇게 하면, 진흙이 나오면 그 다음에는 물이 얼마 안 남았다 이 것이지요.
菩薩亦復如是(보살역부여시)하야, 보살도 또한 다시 이와 같아서
若未聞未解(약미문미해), 만약에 이경을 듣지도 못하고 이해하지도 못하며, 未能修習是法華經(미능수습시법화경)하면, 능히 修習하지도 못할 것 같으면 當知是人(당지시인)은, 마땅히 알아라, 이 사람은
去阿耨多羅三藐三菩提尙遠(거아뇩다라삼먁삼보리상원)이요,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가기가 오히려 멀고,
若得聞解(약득문해)하야, 만약에 듣고 이해해서
思惟하고 修習(사유수습)하면, 이 思惟라는 말 중요합니다. 思惟修習.
한 구절 이렇게 들으면요? ‘아 그것이 무슨 뜻일까? 무슨 의미로 이야기 했을까?’이것을 머릿속에서 곰곰이 이리저리 생각해 보는 것. 이런 자세가 필요합니다. 한 번 그냥 쓱 지나가 버리면 그것, 머리에 오래 남아 있지도 않고, 또 이해가 깊어지지도 아니해요. 그래서 되지도 않은 화두 들고 씨름하느니 좋은 구절, 한 구절 가지고 이리저리 깊이 사유해 보는 그런 명상. 그런 좌선이 오히려 훨씬 소득이 있고, 불교이해에 도움이 되는 것이지요. 思惟修習할 것 같으면 必知得近阿耨多羅三藐三菩提(필지득근아뇩다라삼먁삼보리)니, 반드시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가까이 온 줄을 알게 것이다.
所以者何(소이자하)오? 一切菩薩阿耨多羅三藐三菩提(일체보살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일체보살들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다 이 경에 속했다. 그랬지요. 모든 최상의 깨달음은 전부 皆屬此經(개속차경)이라.
다 이 경전에 속해있다. 此經開方便門(차경개방편문)하야, 이 경은 開方便門하야 示眞實相(시진실상). 법화경의 대의를 會三歸一(회삼귀일)이다.
회삼승하야 귀일승이라. 그렇게 하는데, 저는 이 구절을 가지고 법화경의 대의를 삼고 싶어요. 開方便門 示眞實相, 방편의 문을 열어가지고서 진실상을 보이는 것. 그러니까 예를 들어서 우리 저기 출입문 있잖아요?
출입문을 방편 문 이라고 하면, 출입문을 활짝 열면 우리가 여기서 공부하고 있는 모습을 보이게 되는 것이지요.
그와 같이 그 동안 불교가 전부 방편으로 이루어 졌는데, 그 방편은 하나의 통과 문입니다. 통과의례라고요. 그 통과의례의 문을 활짝 젖히고 나면 진실한 모습을 보게 된다 하는 것입니다.
是法華經藏(시법화경장)은 深固幽遠(심고유원)이라. 깊고 견고하고 아주 그윽하고 아주 멀다 이 것이지요. 아주 깊숙하다 하는 뜻입니다.
법화경의 의미는요. 정말 아주 의미심장합니다.
無人能到(무인능도)어늘, 능히 이르는 사람이 없거늘
今佛敎化成就菩薩(금불교화성취보살)호려하야, 지금 부처님께서 보살들을 교화하고 成就하게 하기 위해서 而爲開示(이위개시)하였느니라. 열어서 보이나니라.
藥王(약왕)아 若有菩薩(약유보살)이, 만약에 어떤 보살이
聞是法華經(문시법화경)하고, 이 법화경을 듣고서
驚疑怖畏(경의포외). 아주 놀라고 두려워 할 것 같으면
當知是爲新發意菩薩(당지시위신발의보살)이요, 마땅히 알아라, 이 사람은 新發意菩薩이요, 처음 막 발심한 사람이다. 처음 발심한 사람이, 예를 들어서 “사람이 그대로 부처님이야.” 이 소리 한 번 딱 들었다 할 것 같으면 “아이고 그게 무슨 소리냐?” 고, “어디 그런 수가 있냐?”고 이렇게 驚疑怖畏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렇게 될 것이고,
若聲聞人(약성문인)이 만약에 성문인이 聞是經(문시경)하고,
이 경을 듣고 驚疑怖畏(경의포외)할 것 같으면 當知是爲增上慢者(당지시위증상만자)니라. 마땅히 알아라, 이 사람은 增上慢인이다.
聲聞人. 성문인은 공부 많이 했다는 사람이지요. 그래도 아직 생각이 소승입니다. 자기 공부에만 빠져있지 남을 생각할 줄 모르는 그런 보살심은 전혀 없는 그런 사람들이 만약에 이 경을 듣고 놀라고 두려워 할 것 같으면 이 사람은 잘 난체하는 사람이다. 增上慢인이다.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저 앞에서 증상만인 5000명이 이 법화경 자리에서 물러난 그런 사건이 있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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