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박물관, 탄생 300돌 특별전… 유작 대부분 한자리에
그림 그려달라 강요받자 제 눈 찌른 '조선의 고흐'
손가락으로 그린 지두화 등 시대 앞섰던 작품 볼 수 있어
어떤 귀인이 최북에게 그림을 부탁했다가 얻지 못했다고 한다. 어느 세도가가 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트집을 잡았다는 설도 있다. 최북은 화를 내며 "남이 나를 버리기 전에, 내 눈이 먼저 나를 저버린다"며 한쪽 눈을 스스로 찔렀다. 평생 오기로 살았다는 이 전설적인 화가는 '조선의 고흐'라는 이야기로 이리저리 떠돈다.국립 전주박물관에서 열리는 '호생관 최북(崔北)'전은 기행(奇行)과 일탈 대신, 작품으로 화가 최북(1712~1786년경)을 만날 수 있는 첫 전시다. 탄생 300주년을 맞아 열리는 이 특별전엔 최북이 그렸다고 알려진(傳稱作) 3점을 포함, 57점의 산수화·화조영모화가 나왔다. 최북이 남긴 유작은 100여점(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에서 최대 180여점(이원복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실장)까지 오르내리는데, 3분의 1 이상 한자리에서 볼 수 있게 됐다.
'붓 한 자루로 먹고사는 사람'이란 뜻의 '호생관'(毫生館)을 호로 쓴 최북은 조선 문화의 르네상스 시대인 18세기를 빛낸 전업화가다. '최산수' '최메추라기'로 불릴 만큼, 산수화와 메추라기 그림의 달인이었다. 대표작 '표훈사' 앞에 서면, 앞시대 선배인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가 떠오르고, 초봄부터 한겨울까지 풍경을 8장에 담은 '사시8경도첩' 가운데 눈이 쌓인 '설경산수'(雪景山水)는 운치가 그만이다.
최북은 조선통신사 일원으로 일본에 다녀왔고, 중국 구경도 한 글로벌 지식인이었다. 그러나 중인 출신인 그는 양반만 행세할 수 있는 조선의 아웃사이더일 수밖에 없었다. 금강산 구경을 갔다가 경치에 반해 구룡연 폭포에 뛰어들어 빠져 죽을 뻔했다는 일화는 뜻을 펼 수 없는 사회에 대한 항의로도 읽힌다. 문제는 그런 일화를 남긴 최북이 남긴 그림은 의외로 점잖고 차분해 그만의 독특한 개성을 찾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 ▲ 손가락에 먹을 묻혀 그린 게(26.0㎝×36.7㎝). 최북은 먹의 농담과 손가락의 강약을 조절해 생동감 있는 작품을 그려냈다. /선문대박물관 소장
최북은 18세기의 '얼리 어답터'(새 문명을 빨리 받아들이는 사람)였다. 서양의 정물화처럼 붉은 무와 가지, 배추를 즐겨 그렸는데 이는 청나라 화단의 유행을 소화한 것이었다. 손가락으로 먹을 찍어 그리는 '지두화'(指頭畵)도 앞장서서 실험했다.
이번 전시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제가화첩'(諸家畵帖), 당대 서화가 원교 이광사(李匡師)와 함께 만든 화첩, '탁영서첩'(濯纓書帖) 등 최북의 작품세계를 처음 선보이는 전시물도 많다. 눈보라 치는 밤, 돌아오는 사람을 그린 '풍설야귀인'(風雪夜歸人)이나 '여름날의 낚시'처럼 최북의 호쾌한 기상을 보여주는 작품이 포함되지 않은 것이 안타깝다. 소장자의 허락을 받지 못하거나, 소재를 찾지 못해서이다. 대표작으로 꼽히는 '공산무인'(空山無人)도 도록에는 실렸으나 개인소장가 허락을 얻지 못해 개막 직전에 빠졌다.
최북은 각별한 사이였던 벗 이현환(李玄煥)에게 이렇게 말했다. '세상엔 그림을 알아보는 사람이 드무네. 참으로 그대 말처럼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이 그림을 보는 사람은 그림을 그린 나를 떠올릴 수 있으리. 뒷날 날 알아줄 사람을 기다리고 싶네.'
전시는 6월 17일까지. (063)220-1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