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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정에 관한 글

應觀 2024. 4. 21. 09:56

우정은 왜 그렇게 어려운가


인터넷 뉴스에 나는 축의금을 이만큼 했는데 돌아온 축의금은 요만큼이라 고민 중이라는 기사가 가끔 눈에 띈다. 기사 밑에는 '손절이 답'이라는 댓글도 꽤 많다. '우정은 왜 그렇게 어려운가!'라는 제목의 칼럼을 읽다가 우리가 친구라고 믿는 관계의 절반 정도만 두 사람 모두가 서로를 친구로 생각한다는 문장을 봤다. 생각보다 우정이 일방적이란 뜻이다. 우정에 대한 더 암울한 전망은 2009년 버거킹 광고에서도 보인다. 페이스북 친구를 끊으면 와퍼 세트를 준다는 광고를 보고 무려 23만명이 친구 관계를 끊은 것이다. 그러자 버거킹은 '우정은 강하다. 버거킹은 더 강하다!'는 대대적인 광고를 펼쳤다.

친구의 재능이 아까워 관계자에게 자기가 출연하는 작품에 친구를 추천한 남자가 술 취한 친구에게 "네가 나를 동료로 생각해 경쟁하려 들지 않고 만만히 보기 때문에 나를 옆에 두려는 거잖아!" 하는 말을 들었다면 어떻겠는가. 내 호의가 너의 상처로 둔갑한다면 말이다.

친구가 되기보다 어려운 건 친구 관계를 오래 유지하는 것이다. 좋은 관계란 오해와 이해, 화해로 완성되기 때문이다. 우정의 정의가 사람마다 다른 것도 큰 걸림돌이다. 비가 오면 함께 맞아주는 걸 우정이라 믿는 사람이 있는 반면, 우산 가게를 알려주거나 가지고 있는 우산을 빌려주는 게 낫다고 믿는 사람도 있다.

박찬욱 감독은 가훈 숙제를 내민 초등학생 딸에게 "아니면 말고!"를 써준 것으로 유명하다. '아니면 말고'에는 인간사 노력해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뜻이 숨어있다. 우정도 마찬가지다. 손절이든 지속이든 힘써 보고 아니면 내려놔야 한다. 관계를 유지하며 계속 싸우기보다 보지 않는 쪽이 더 현명할 때도 있다. 관점에 따라 위기가 기회가 되는 것처럼 오랜 친구와 겪는 갈등이 오히려 어느 쪽이 진짜 내 편인지 가늠해주기도 한다. 또 종종 상처를 남기고 떠난 우정 덕분에 새롭게 다가오는 우정을 만나기도 한다. 관계에는 유효기간이 있을까. 당연히 우정에도 시절 인연이 있다.


'친구는 제2의 자신이다'



매달 한 번 친구들과 토요일 아침 모임을 한다. 조촐한 식사로 시작해 주변 공원과 천변을 걷다가 쉬다가 하면서 이야기꽃을 피운다. 대화 주제는 삼라만상을 망라한다. 우주의 블랙홀과 기업 경영 비사(祕史), 역사와 명사(名士)들 계보에 이르기까지 화제는 무궁무진하다. 다만 정치와 종교 이슈는 자제한다. 크게 다투기도 한 경험에서 나온 우리 나름의 지혜다.

세월이 흐르면서 재테크 얘기는 사라지고 건강한 노후 생활에 관심이 집중된다. 웰 다잉과 유서 쓰기, 부모님 묫자리와 풍수로 화제가 뻗어 나가기도 한다. 어느 날 금융계에서 퇴직한 친구가 불쑥 칸트의 선험적 주관성이 무어냐고 내게 물었다. 유튜브로 이것저것 공부하는 노익장 학구열이다.

그래서 모일 때마다 한 사람씩 자유 주제에 대해 '10분 강의'하고 토론하는 시간을 갖기로 했다. 지난가을 공원 벤치에서 드디어 내가 첫 테이프를 끊었다. 평생 철학사 강의한 가락을 살려 칸트 철학에 대해 열변을 토했건만 청중 반응은 미지근했다. 아리송하다는 표정들이었다. 나의 한계인지 칸트의 한계인지 알 수 없었다.

의대 병원장으로 퇴임한 친구가 공원 정자에서 조선 당쟁사를 설명하는데, 놀라운 기억력이었다. 예컨대 이 퇴계 사돈의 팔촌까지 그 학맥과 혼맥, 고향과 장지(葬地)를 연도까지 읊는 것이었다. 박람강기(博覽强記)임에도 요즈음 기억력이 감퇴했다고 툴툴대면서 우리를 은근히 기죽인다. 세무 사무소를 운영하는 다른 친구는 지난겨울 추사 세한도에 대해 일생 쌓아 온 공부를 풀어놓았는데 자료까지 출력해 오는 열성을 보였다. 그는 절판된 명저를 수십 권씩 사놓았다가 나눠주기도 한다. 이제 날이 풀렸으니 '월례 야외 10분 강좌'가 재개될 때가 됐다.

좋은 친구를 원한다면 내가 먼저 좋은 친구가 되어야 한다. 유용성이나 쾌락에서 나오는 우정은 곧 사라진다. 인간관계도 그렇거니와 우정에서도 받기보다는 베푸는 게 중요한 이유다. 우리 모임도 작게나마 그걸 실천한다. 신어 보니 시원하다며 한지(韓紙) 양말을 나눠준 친구와, 선크림이나 손수건을 주는 친구도 있다. 모임 때마다 재래시장에서 찹쌀떡을 사 와서 모두에게 안겨주는 친구도 있다. 그때마다 우리는 그런 선행(善行)을 격렬히 격려하고 기념사진을 남기며 폭소를 그치지 않는다.

일 년에 한두 번씩 이 친구들과 당일치기 기차 여행을 한다. 몇 년 전 전남 신안과 목포를 다녀왔는데 목포역 앞에서 출발하는 1004섬 신안 시티투어가 훌륭했다. 1인당 단돈 만 원에 한나절 동안 자은도·암태도·팔금도·안좌도 등을 버스로 둘러보고 점심까지 준다. 공무원 퇴직 후 문화 해설사로 봉사한다는 안내자의 재능 기부가 정겨웠다. 트로트, 판소리, 아나운서 성대모사로 향토애를 풀어내는 사투리가 구수했다. 진짜배기 고향 사랑이다.

한때 사진을 공부했다는 미명으로 촬영 권력을 독점한 친구 덕분에 우리 일행은 계속 모델 노릇을 해야 했다. 퍼플섬 다리 위에선 우리의 '여고 시절'(?)을 추억하는 숨바꼭질 단체 사진을 시연했다. 동심으로 돌아가 웃음꽃 만발한 하루였다. 장난기 어린 농담으로 하루 만에 한 달 치 웃음을 다 웃게 된다. 강릉·서해안·공주 여행에서도 비슷한 체험을 한다. 볼거리·먹거리에 정담(情談)이 더해져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경험이 된다. 그런 순간이 쌓여 삶을 이룬다.

우정은 오래 겪어보아야 단단해지고 성숙해진다. '우정은 소금 몇 말은 함께 먹어봐야 완수된다.' 수십 년 만에 만난 친구가 정다운 것은 기쁨과 슬픔의 시간을 함께 겪었기 때문이다. 진정한 친구는 알아주는 이 없어도 상대방이 잘되기를 바라는 그런 사람이다. 서로 다르면서도 동등한 관계에서 태어나는 게 우정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친구는 제2의 자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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