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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죽음을 원하십니까?

應觀 2021. 11. 10. 09:20

결실과 소멸의 교차로인 늦가을, 죽음을 생각한다. ‘철학을 한다는 건 죽는 법을 배우는 일이다’라는 명언의 주인공 몽테뉴는 살면서 늘 죽음에 관해 생각하라고 했다. 그렇게 하면 낯설기만 한 죽음의 공포도 잠재워질 것으로 보았다. 그런데 아이러니가, 철학적 사유는 문제 해결에 별 도움이 안 되었고, 아무 두려움 없이 담담하게 잘 죽는 사람은 정작 생각하지 않는 이들(가령 농부들)이었다. 그들은 가까운 이의 죽음을 두려워할지언정 자신의 죽음은 걱정하지 않았으며, 죽음 자체보다는 사후 처리 문제(신부의 기도, 관, 무덤의 십자가 등)를 염려했다.

 

16세기 프랑스 시골 농부를 통해 몽테뉴가 깨달은 바, 죽음의 공포를 물리치는 진짜 힘은 깊은 사색이나 용기가 아니었다. 자연의 흐름에 따라 꿋꿋하게 수용하며 살 줄 아는 사람은 그렇게 죽을 줄도 아는 것이었으니, 그저 삶의 방식 그대로가 곧 죽음의 방식이었다. 그래서 우리의 사색가는 평소 살아온 대로, 은둔과 고립 속에서 침착하고 고요하고 외로운 죽음을 맞고자 작정한 후, 20년간 머물던 탑 꼭대기에서 미사곡을 들으며 최후를 맞이했다. 편도선염으로 말을 못 했던 덕에 그의 고독은 끝내 온전할 수 있었다.

 

죽음은 일생일대의 실종 사건이다. ‘나’라는 알맹이-의식이 온데간데없고, 물증으로 남은 껍데기-육체는 알아볼 길 없는 변화를 일으킨다. 무척이나 낯설고 두려운 일이라서, 문명사회는 일찍부터 죽음을 평온하고, 신비롭고, 장엄한 사건으로 ‘길들여’ 왔다. ‘영원한 안식’ ‘달콤한 잠’ ‘천사의 모습’ 같은 은유적 표현은 모두 낭만주의 시대가 상투화한 ‘아름다운 죽음’의 잔재이며, 오늘날 부음 기사에 흔히 등장하는, ‘사랑하는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온하게 눈을 감았다’ 식의 표준 문장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위대한 작가의 시선은 상투성 너머를 향하는 법이어서, 죽음을 다시금 낯설게 한다. 작품 안에서뿐 아니라, 실제 삶에서도 그렇게들 한다. 대표적인 예가 독일 요양지에서 폐결핵으로 죽어간 체호프. 작가이자 의사였던 그는 ‘나는 죽소(Ich sterbe)’라고 독일 의사에게 말한 다음, 산소통 대신 샴페인을 주문해 한잔 천천히 비우고는 침대에 몸 눕혀 영면했다. 마치 연극 장면처럼 생의 막을 내렸다. 그런가 하면, 일생 병적일 정도로 죽음에 집착했던 톨스토이는 마지막 순간까지 죽음과 직면했다. 당시에는 최후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모르핀을 처방하는 것이 상류층 관례였으나, 그것도 거부한 채 죽음의 실체에 집중했다. 시골 역에서 폐렴으로 죽어가던 일주일 동안 띄엄띄엄 남긴 말 중에 이런 게 있다. ‘신은 무한한 전체이고, 인간은 자신이 그 전체의 유한한 일부임을 안다. 인간은 시간과 공간과 물체로서 드러난 신의 모습이다.’ 또 이런 말도 했다. ‘그러나 농부들… 농부들은 어떻게 죽는가?’

 

여기서 ‘농부’란 문명사회의 허위와 탐욕에 물들지 않은 하층민을 의미한다. 자연 이외에는 아무 혜택도 누리지 못했던 탓에 오히려 진리와 가까울 수 있었던 그들을 톨스토이는 이상화했다. 그의 작품 안에서 농부, 농노, 하인, 떠돌이 부랑자 등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불평하지 않는다. 극심한 고통에도 불구하고, 죽음은 마땅한 일이며, 마지막엔 용서를 빌어야 한다는 원칙이 체질화되어 있다. 흥미로운 점이, 가난한 농부도 자신의 사후 처리만큼은 신경을 썼다. 죽음을 기다리는 동안 주고받을 것을 정확히 계산하고, 소지품을 나눠 주고, 장례식 비용을 준비하고, 종부성사 때 사제에게 줄 헌금도 마련해놓고, 정 가진 것이 없을 땐 장화를 벗어 주면서라도 나중에 묘석을 세워달라 부탁했다. 그것이 평생의 고단한 삶에 대해 그들이 보여준 마지막(어쩌면 최초의) 예의였다. 러시아 문학에는 죽음의 존엄을 기리는 장면이 많다.

 

물론, 아무 의식 없이도 존엄하게 죽어가는 것은 자연이다. 톨스토이는 귀족 부인과 늙은 마부와 우람한 나무의 죽음을 대조하는 ‘세 죽음’이란 단편을 썼다. 죽지 않으려 발버둥치던 귀족 부인도 죽고, 병든 마부도 외롭게 죽고, 그 마부의 초라한 비석이 돼주기 위해 한 그루 나무도 죽는다. 그런데 나무가 쓰러지자, 작은 새가 날개를 파닥이며 하늘 높이 날아오르고, 주변의 다른 나무들은 ‘새로 생긴 넓은 공간’에서 더없이 기뻐한다. 아침 햇살은 밝고, 새들은 행복하며, 숲은 평온하다. 살아 있는 나무들은 ‘죽어 땅바닥에 누워 있는 나무를 굽어보면서 천천히, 그리고 장엄하게 몸을 흔들었다’고 되어 있다. 이것이 자연의 추도식이다.

 

톨스토이 영지였던 야스나야 폴랴나 한적한 숲길에 작가의 무덤이 있다. 아무런 표지 없는 직사각형 흙 무덤인데, 그곳에 봄여름이면 풀이, 가을이면 낙엽이, 겨울이면 눈이 쌓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