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 및 여행/내가좋아하는길과산

화성시 무봉산 봉림사20210619홀

應觀 2021. 6. 20. 20:21

 

화성시청 현관으로 짛은지 얼마 않되어 보인다.

시청 주변도 몰라보게 발전했다

무봉리 들머리를 찾다가 화성시청옆에 위치한 묘가 있어 가보니 청풍김씨  신빈 묘이다.

후대의 평이 아주 좋아 관심을 가지고 묘 주변을 살피고 인사 드렸다.

본관은 청풍이며, 아버지는 김원이고 어머니는 삭녕고씨이다. 원래 내자시의 여종이었으나, 1418년(세종 즉위년) 13세의 나이로 원경왕후에게 발탁되어 소헌왕후의 궁인이 되었다. 훗날 세종의 승은을 입고 후궁이 되었고, 1427년(세종 9년) 장남 계양군을 출산하였다. 그 후 정2품 소의를 거쳐 1439년(세종 21년) 종1품 귀인에 진봉되었다. 당시 세종이 도승지 김돈에게 "김씨의 출신이 천하지만 13세부터 궁중에 들어와 행실이 바르기에 빈이나 귀인으로 삼고자 하는데 어떠하냐" 고 묻자 김돈이 신개 등과 의논해 귀인으로 승격시켰다.이후 정1품 신빈(愼嬪)에 책봉되었다.

그녀는 천성이 부드럽고 매사에 조심스러워 소헌왕후에게도 사랑을 받았으며, 소헌왕후는 그녀에게 막내아들 영응대군의 유모 역할을 맡기기도 하였다.[2] 또한 그녀는 평소에 불교를 신봉했었는데, 세종이 죽고나서는 아예 여승이 되어 살았다. 1450년(문종 즉위년)에 사망한 막내아들 담양군을 위한 경문 인쇄 비용으로 조정에서 쌀 500석을 하사받았으며, 1452년(단종 즉위년)에는 단종이 그녀의 아들 의창군의 청원에 의해 그녀에게 머리를 기르도록 명령하였지만 이를 거절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1464년(세조 10년) 음력 9월 4일 59세를 일기로 죽었으며, 세조는 쌀, 콩등 모두 70석(石)을 부의로 내렸다. 그녀의 묘 《화성 남양리 신빈김씨 묘역》는 경기도 화성시 남양읍 남양리에 있다. 묘 주위에는 세조 11년(1465)에 세운 묘갈(墓碣:무덤 앞에 별다른 장식없이 세우는 작은 비석)과 묘비, 불을 밝히기 위한 장명등(長明燈), 문인석 1쌍, 제물을 올리고 제사를 올리기 위한 상석(床石)이 있으며 묘 주위는 돌담으로 둘러 싸여 있다. 1994년 경기도의 기념물 제153호로 지정되었다.

무봉산 자락에 자리잡은 화성시청은 규모가 크고 깨끗하다. 오랜만에 찾았는데 주변이 엄청 발전했다
봉림사인데 스님의 불경소리만 들릴 뿐 신도들은 보이지 않고 코로나로 들어가기가 무엇해 망설이고 있는데 종무실 보살님이 들어가 인사하고 사진도 찍으라고 권해 부처님께 인사드리고 경내를 둘러보고 사진을 찍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의 말사이다. 신라 진덕왕대에 창건되었으며, 절 이름은 창건 당시 궁궐에서 기르던 새들이 절 근처의 숲에 앉은 데서 붙여졌다. 그뒤의 역사는 전하지 않으며, 현존 당우로는 대웅전·봉향각·망향루·범종각·요사채 등이 있다. 고려 말기에 제작된 불상(보물 제980호)이 대웅전에 봉안되어 있다.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봉림사목조아미타불좌상봉림사에 봉안되어 있는 고려시대 목조불좌상. 보물 제980호. 높이 88.5㎝.1978년 이 불상을 개금할 때 복장(腹藏)에서 여러 권의 사경과 함께 〈조성개금기 造成改金記〉가 발견되어 1362년(공민왕 11) 이전에 조성된 무량수불(無量壽佛), 즉 아미타불임이 밝혀졌다. 얼굴은 둥글고 살진 형으로 이목구비가 중앙으로 몰려 있으며 표정에 생동감이 줄어들고 경직되어 침울한 분위기를 드러내고 있다. 손 모양은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는 하품중생인을 했는데 오른손은 정면으로 들어올리고 있어 문수사(文殊寺) 금동불좌상(1346)과 장곡사(長谷寺) 금동약사불좌상의 자연스러운 하품중생인 표현과 차이가 있다.신체는 풍만한 편이나 목과 상체가 넓고 각진 점이 특이하다. 대의를 걸친 모습이 문수사의 불상과 같은 형식이나 왼쪽 가슴에 보이는 승각기 치레장식과 가슴에 두른 띠와 매듭이 없는 점, 어깨의 옷주름이 좀더 번잡스러워진 점이 다르다. 무릎에서 발목으로 향해 몰려 있는 주름이나 왼쪽 어깨와 배 앞에 몰려 있는 옷주름에서 과장된 표현과 도식화의 경향이 보인다. 이 상의 얼굴 모습, 신체비례와 자세의 변화, 조각기술의 쇠퇴에서 오는 옷주름의 형식화 경향 등은 조선시대 조각양식의 일면을 이미 보여주고 있다.따라서 이 상은 문수사 금동아미타불좌상이나 장곡사 금동약사불좌상과 비교해 여러 면에서 차이가 있으므로 고려말에서 조선초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불상양식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고개를 약간 숙이고 오른손은 가슴 부위로 올리고 왼손은 수평으로 들어 엄지와 중지를 맞댄 손 모습을 하고 결가부좌로 앉아 있다. 안정적인 신체비례와 당당한 체구, 머리와 경계가 없는 낮은 육계, 뚜렷한 이목구비, 양감 있는 가슴과 배가 특징이다. 얼굴은 이마가 넓고 턱 부분이 둥글고 갸름한 편이며 반개한 눈에 오똑한 콧날, 외곽선이 뚜렷한 입술로 부드러우면서도 위엄있는 표정이다. 착의법은 안에 편삼을 입고 그 위에 변형편단우견으로 대의를 걸친 변형통견식이다. 옷주름은 사실적인데 특히 대의가 왼쪽 어깨로 넘어가면서 형성된 좁은 잔주름은 이 불상의 특징으로 특히 13세기 여래상에 나타나는 표현이다. 또한 무릎 아래로 자연스럽게 흘러내린 옷자락과 왼쪽 무릎 위로 대의자락이 흘러내리면서 나뭇잎처럼 접힌 옷자락도 특징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