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종교와 나

慈悲로 세상을 구하겠다는 대만 자제공덕회

應觀 2015. 6. 4. 10:08

慈悲로 세상을 구하겠다는 대만 자제공덕회 활동 본떠 남산 숲길 천천히 걷다 보니
感官 잘 제어해 고통 지워낸 아라한의 得道 과정 연상돼… 마음공부 하며 布施 하시길


	월호 스님·행불선원 원장
월호 스님·행불선원 원장
얼마 전 이탈리아 로마를 방문하게 되었다. "로마는 하루아침에 세워지지 않았다"는 격언과 같이 과연 로마 시내에는 콜로세움을 비롯한 유적이 무수히 산재해 있었다. 일요일 바티칸 성 베드로 성당 앞 광장에는 수많은 사람이 몰려들어 창문에 나타난 교황 모습에 환호하였다. 많은 사람이 사진을 찍거나 가족과 함께 나들이를 겸해 즐기는 모습이었다. 자유분방한 광장 문화가 부러움을 자아냈다.

하지만 그 번잡한 틈을 노리는 소매치기도 많다고 했다. 필자 또한 조그만 가방을 메고 길을 걷다가 갑자기 가방이 가벼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얼른 돌아보니 두 남자가 바로 등 뒤에서 따라오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머쓱해서 손을 거두며 뒤로 슬쩍 물러났다. 얼른 가방을 앞으로 메고 살펴보니 이미 지퍼가 반쯤 열려 있었다. 다행히 없어진 것은 없었다. 잠깐 사이에 지갑과 여권을 잃어버릴 뻔한 것이었다. '아! 이래서 알아차림이 중요한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에 다른 곳에 한눈을 팔았거나 다른 생각을 하고 걸었다면 가방이 가벼워지는 것을 알아차리기 어려웠을 것이다. 온전히 걷는 데만 집중하고 있었기에 미세한 변화를 감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로마에 오기 직전 방문했던 대만에서 자제공덕회 설립자인 증엄 스님을 친견할 기회가 있었다. 접빈실에서 대기하고 있었는데 스님이 오신다고 해서 일어나 돌아보았다. 창문 밖으로 스님이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자그마한 체구에 가무잡잡한 얼굴이었지만 어딘가 위엄이 있었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걸어오는 모습이었다. 마치 허공을 내딛는 듯 우아한 걸음걸이로 아주 천천히 걸어오는 모습이 무언가 초탈한 느낌을 주었다. 백 마디 말보다 걸음 몇 발자국이 더욱 인상적이었다고나 할까? 세계 최대 구호·봉사 단체를 이끄는 힘이 걸음걸이에서 느껴졌다.

세상 어느 곳이든 재난이 있는 곳에 가장 먼저 출동해서 가장 나중에 철수한다는 자제(慈濟)공덕회는 이름 그대로 "자비로 세상을 구제한다"는 이념을 실천하고 있다. 게다가 비용은 봉사자들이 각자 스스로 부담한다고 하니 더욱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평상시에 지진이나 해일 등 재난이 자주 일어나는 나라이다 보니 동병상련의 아픔을 나누는 마음도 유별나다고 볼 수 있다.

필자도 이런 마음을 조금이나마 본받고자 지난달부터 '이웃 사랑 남산 걷기'를 실천하고 있다. 한 달에 한 번씩 둘째 주 일요일 오후에 서울 장충단공원에 모여 남산 산책로를 함께 걷는 것이다. 이때 모은 성금은 전액 이웃 돕기에 희사한다.


	[ESSAY] 함께 걸어요!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지난달에는 100명가량 되는 분이 함께 걸었다. 정신없이 빨리 걷는 것이 아니라 천천히 걷다 보니 숲이 그대로 느껴졌다. 새소리 바람 소리가 온전히 들리고 지천인 꽃과 나무가 온전히 눈에 들어왔다. 자신의 숨소리와 발바닥이 닿는 느낌까지도 온전히 와 닿았다. 아주 천천히 걷다 보니 그동안에는 보이지 않고 느껴지지 않던 것까지도 보이고 느껴지는 것이다. 문득 팔리어로 쓴 불교 초기 경전의 하나인 '바히야경(經)'이 떠올랐다.

바히야는 본래 배를 타는 선원이었다. 어느 날 무서운 풍랑을 만나 배는 난파하고 동료는 모두 죽었으며 그만 홀로 판자를 잡고 간신히 살아남아 항구 가까이에 표류해왔다. 망연자실한 바히야는 다 떨어진 옷 대신 나무껍질로 몸을 가리고 부둣가에 앉아 있었는데 사람들은 그에게 푼돈과 먹을 것을 주었다. 그 와중에도 바히야는 옷을 주면 절대로 받지 않았다. 나무껍질로 몸을 가리고 앉아 있어야 사람들이 더욱 많은 것을 준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좋은 옷을 갖다 주어도 받지 않자 바히야는 '도(道)를 깨달은 아라한'이라고 소문이 났다.

이를 부정하지 않고 있는 바히야에게 전생의 도반(道伴)인 범천이 나타나 타이르며 진정한 아라한이 현존해 계심을 알려주었다. 이를 알게 된 바히야는 사와티로 한달음에 달려가 부처님께서 탁발하고 계시는 것을 보았다. 부처님께서는 고요하고 평온한 마음으로 감관(感官)을 잘 제어하고 주의 깊게 깨어있으면서 걷고 계셨다. 다급한 마음에 바히야는 길거리에 선 채로 법문을 청해 듣게 되었다. 이에 부처님께서는 바히야의 마음이 가라앉기를 기다려 다음과 같이 법을 설하셨다.

"바히야여, 보이는 것을 보기만 하고, 들리는 것을 듣기만 하고, 느끼는 것을 느끼기만 하고, 인식하는 것을 인식하기만 한다면 그대는 그것과 함께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과 함께하지 않을 때, 거기에 그대는 없다. 이것이 고통의 소멸이다."

이렇게 간략한 가르침을 듣고 바히야는 즉시 모든 번뇌에서 해탈하여 아라한이 되었다. 그는 부처님의 모든 제자 중에서 가장 짧은 시간에 법을 깨달은 제자가 된 것이다.

'견문각지(見聞覺知)하면서 단지 견문각지할 뿐'이라면 고통은 소멸한다. 내가 견문각지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견문각지가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결국 내가 사라지므로 나의 고통이 더불어 사라진다고 하는 것이다. 걸을 때는 걸을 뿐! 함께 천천히 걸으면서 마음공부도 하고 보시복덕(布施福德)도 지을 수 있다면 이야말로 최상의 걷기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