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5.03.05 03:00
탄생 100년 故 서정주에게 酒母 육자배기 떠올리게 하고
김용택에겐 傷心의 치유를, 구효서에겐 救援을 매개해 준 3~4월 만개하는 봄의 전령
그를 안 품어본 中年 있으랴
-
박해현 문학전문기자

미당은 1967년 고향인 전북 고창의 선운사를 떠올리며 이 시를 처음 쓴 뒤 퇴고(推敲)를 거듭했다. 시의 끝부분 '작년 것만 상기도 남었읍디다'는 여러 차례 수정됐다. 처음엔 '상기도'가 아니라 '아직도'라고 썼다. 나중에 '오히려'라고 고쳤다가, 새로 시집을 내며 '시방도'로 바꾸었다. 그러나 1974년 고창 주민들이 선운사에 서정주 시비(詩碑)를 세울 때 돌에 새긴 시엔 미당이 '상기도'로 바꾸었다. 국립국어원이 낸 사전엔 '상기'가 '아직'의 강원·함경 방언으로 적혀 있다. 미당은 말년에 민음사에서 시 전집을 새로 낼 때 '상기도'를 '오히려'로 고쳤다. 고운기 시인은 "미당이 고쳤을까? 자타가 공인하는 시의 장인(匠人)이 손댄 것 치고는 패착이 아닐 수 없다"라고 지적했다. "막걸릿집 여자의 쉰 목소리에서 희미한 기억의 지난 봄 동백꽃을 떠올리는 시인의 가슴을 '상기도'라는 말 이상으로 표현해 줄 단어가 없었을 텐데"라고 아쉬워했다.
시 해설집 '미당과의 만남'을 낸 평론가 이숭원은 "문맥의 어감으로 볼 때 '상기도'가 더 어울리지만 시집 '동천'에 실린 표기에 따라 '아직도'로 놔뒀다"고 했다. 인터넷의 '디지털 고창문화대전'은 '오히려' 판본을 올려놓았다. '오히려'가 문법적으로 부자연스럽지만 묘한 울림을 낳는다고 했다. 미당의 시에서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았는데 시인이 '작년 것만 오히려' 남았다면서 과거 동백꽃 핀 풍경을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 속에서 음미하게 한다는 것이다. 올해 미당 탄생 100주년을 맞아 스무 권짜리 전집이 은행나무 출판사에서 새로 나온다고 한다. 출판사 담당자는 "편집위원들이 '선운사 동구'의 시어(詩語) 선택을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고 전한다.
미당은 생전에 '선운사 동구'에 얽힌 슬픈 사연을 시 '아버지 돌아가시고'로 들려줬다. 1942년 시인은 부친이 세상을 뜨자 고향에 내려간 길에 선운사에 들렀다. 어느 이슬비 내리는 가을 오후에 '길가의 실파밭 건너 오막살이 주막'에 들어가 약주를 찾았다. '나이 40쯤의 꼭 전라도 육자배기 그대로의 여인'이 나와 '그렇잖아도 오늘은 한번 개봉해 볼까 하는 꽃술이 한 항아리 기대리고 있는디라우'라고 했다. 시인과 주모(酒母)는 한 도가니를 '눈 깜짝할 사이' 비워버렸다. 얼얼해진 주모가 육자배기를 들려줬다. 주모는 떠나는 시인에게 '동백꽃이 피거들랑 또 오시오 인이…'라고 했다. 시인은 그 '인이…'의 'ㄴ' 발음에 취해 독일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를 떠올렸다. '시악시 입맞추며 우리 독일말로 '이히 리베 디히'…그 소리 얼마나 듣기 좋은지 님이야 알라더냐? 했던 그 '이히 리베 디히'보다 몇 갑절은 더 이쁘게 들렸네'라고 감탄했다. 세월이 한참 흘러 시인이 그 주막을 다시 찾았더니 6·25전쟁 통에 그 주모와 가족이 빨치산에게 학살당했다고 한다. 빨치산 토벌에 나선 경찰들에게 밥을 지어 먹인 죄목으로 죽임을 당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선운사 동구라는 시에 그 육자배기 소리를 담아보았지"라고 했다.
-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선운사 동백꽃은 3월 말에서 4월 사이에 핀다. 때를 맞춰 동백꽃 보기가 쉽지 않다. 봄마다 동백꽃 보러 선운사에 꼭 들러야지 벼르지만 번번이 때를 놓친다. 설령 동백꽃을 안 보면 또 어떠하랴. 중년을 넘긴 사람이라면 미당의 시를 펼칠 때마다 목 쉰 육자배기 가락이 제각각으로 울릴 터이니 가슴속에 제 동백꽃 한 송이 피워보지 않은 경우가 어디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