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2)전주식당-7
조철봉이 자리에 앉았을 때 경윤은 심호흡을 하고 열기를 식혔다.
“갑자기 웬일이야?”
여전히 웃음띤 얼굴로 조철봉이 묻자 경윤은 눈을 치켜떴다.
“걔 말이야, 오세은이.”
“어, 그래서?”
“정말 나까지 걔한테 망신시킬거야?”
“어? 무슨일인데?”
“도대체 어떻게 한거야.”
그러다가 경윤은 자신도 일조를 했다는 세은의 말을 상기하곤 말을 바꿨다.
“나만 망신 당했잖아?”
“누구한테?”
“오세은이지 누군 누구야?”
“무슨 망신을 당했다는거야?”
“당신이 저질이래. 늘어놓는 거짓말도 구역질이 나고, 저하고는 격이 맞지 않는 상대라고 하는데.”
그리고 경윤이 어금니를 물었다가 풀었다.
“조철봉씨, 재주가 고작 그것뿐이야? 기껏 뭘 만들어주면 나까지 망신시키고 끝내는거야?”
“나, 이것 참.”
얼굴을 굳힌 조철봉의 시선이 옆쪽으로 비껴갔다가 돌아왔다.
“그렇다면 한가지만 묻자.”
정색한 조철봉이 경윤을 보았다.
“네가 그 여자를 나한테 소개시켜준 진의만 알려줘, 그것만 말해주면 돼.”
그러자 경윤의 표정도 굳어졌다. 그러나 아직 어금니를 문 채 입을 열지는 않았다. 조철봉이 재촉했다.
“그것이 중요해. 그러면 다 풀리게 되어 있어.”
“좋아, 말하지.”
어깨를 부풀렸던 경윤이 길게 숨을 뱉고 말했다.
“그 기집애 너무 잘난 체 하는 것이 꼴 보기 싫었어. 그것이 그 기집애를 소개시켜준 첫번째 이유야.”
“아주 못된 심보로군. 그래서 오세은이 나한테 당하고 질질 짜도록 만들고 싶었단 말이지?”
“그래.”
경윤이 똑바로 조철봉을 보았다.
“그 기집애는 눈이 높아. 하지만 엉뚱한 부분도 있어서 당신하고 조금 어울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나를 생각하셨다?”
“그래, 오세은과 결합하면 손해는 아니잖아? 내 체면도 서고.”
“그래서 내가 너하고 가끔 만난다는 이야기도 해주었군.”
“그 기집애가 재미있다고 해서 결국 내가 넘어갔어.”
조철봉이 그때서야 다가온 종업원에게 커피를 시키더니 의자에 등을 붙였다. 이제는 표정이 부드러워져 있다.
“그럼 네가 여기 온 목적을 말해줘. 화가 나서 잔소리하려고 온 것은 아니겠지?”
“그래, 걔는 고3때 강간을 당해서 섹스 기피증이 있어. 죽은 남편하고도 거의 섹스를 하지 않았어.”
“네가 어떻게 알아?”
“내가 그 남편한테서도 들었거든.”
“그놈까지 만난거야?”
“시끄러.”
정색한 경윤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욕구는 있어서 나한테도 언제나 그런걸 물어봐. 체위나 강도까지 말이야. 그러다가 막상 기회가 닥치면 굳어진다는 거야.”
“입만 살아있는 기집애군.”
입맛을 다신 조철봉이 머리를 저었다.
“야, 쌔고 쌘 여자중에서 석녀를 골라 뜨겁게 만들라는 것 같은데, 내가 미친 놈이냐? 아서라 말아라. 돈이고 뭐고 제 분수나 알고 떠들라고 해.”
그러고는 경윤을 돌려보냈지만 세은에 대한 조철봉의 심사가 뒤틀린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솔직히 석녀인지 목녀인지 그런것이 흠이 되지는 않는다. 회사로 돌아온 조철봉이 자리에 앉았을 때는 오후 6시가 되어갈 무렵이었다.
퇴근하고 돌아갈 가정이 있다가 없어지면 굉장한 공황상태가 된다. 그것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전혀 이해할 수가 없다. 단순하게 있다가 없어진 정도가 아닌 것이다. 그 가정에는 모든 것이 들어 있다. 인적인 요소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닦아온 과거와 미래의 꿈까지 다 섞여 있어서 가정을 빼앗긴 사람은 대부분 혼자 지탱하기 어렵다.
경윤과 헤어져 혼자 있게 되었을 때 조철봉은 밤마다 나이트클럽을 순회했다. 그렇지만 한달이 못가 지쳐 떨어졌는데 술로 위까지 상해서 겹으로 고생을 했다.
조철봉이 인터폰을 누르자 곧 유진경이 대답했다. 진경은 영업부 차장으로 지금도 중고차 매매를 담당하고 있다. 곧 문이 열리더니 진경이 들어섰는데 긴장한듯 얼굴은 굳어 있었지만 눈빛은 또렷했다.
조철봉과 시선이 마주쳤어도 진경의 눈동자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동안 피부는 더 윤기가 났고 몸매는 더 튼실해졌다. 납치범같던 남편 전태성은 지금도 시골의 정신병원에 갇혀 있었지만 이제는 오줌, 똥도 가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부르셨어요?”
진경이 묻자 조철봉은 머리를 끄덕였다.
“오늘 저녁에 갈테니까.”
“저녁 집에서 드실거죠?”
“응, 그래.”
“그럼 먼저 갈게요.”
얼굴이 환해진 진경이 몸을 돌리다가 생각난듯 말했다.
“기뻐요.”
조철봉은 진경이 몸을 돌렸으므로 웃음띤 얼굴을 보여주지 않아도 되었다. 그만큼 진경은 신경을 쓰게 만들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서울에 도착한지 닷새째인 오늘에서야 찾아가는데도 진경은 투정은커녕 기쁘다고 하는 것이다.
조철봉이 진경의 아파트에 들어섰을 때는 저녁 8시경이었다. 손에는 진경의 다섯살짜리 딸에게 줄 커다란 인형과 전자 장난감 박스를 들고 있었으므로 현관 앞은 어수선해졌다. 이제는 조철봉에게 친숙해진 딸이 목을 감아 안고 뽀뽀까지 해주었기 때문이다.
영일에게도 받아보지 못한 대접에 조철봉은 감격했다. 진경의 딸 유나가 돈 가치를 알고 있다면 지갑에 있는 돈을 다 주었을 것이다. 아파트에는 진경의 친정 어머니와 동생까지 있었으므로 분위기가 화목했다. 유나가 딸이라 붙임성이 더 있기 때문인지 아니면 어미가 시켰는지 알 수 없었지만 조철봉은 이 곳이 가정같았다.
진경의 어머니는 장모같았고 동생은 처제처럼 느껴졌다. 찌개에 구이, 갖은 나물까지 준비한 저녁을 마친 조철봉은 진경의 어머니와 나란히 앉아 TV를 보았다. 자꾸 주방으로만 가려는 어머니를 끌어온 것이다.
“어머니, 겨울에 옷 한 벌 사 입으시고 어디 여행이나 다녀 오시지요.”
그러면서 조철봉이 주머니에 넣어둔 봉투를 꺼내 진경의 어머니 손에 쥐어 주었다.
“아니, 이 사람아.”
진경의 어머니가 질색을 하며 봉투를 밀어냈지만 조철봉이 정색했다.
“그럼 제가 서운합니다. 제 성의를 그렇게 무시하시면 어떻게 합니까?”
“어디, 얼마 들었나 보자.”
어느새 진경이 다가오더니 어머니 손에서 봉투를 채갔다. 그러고는 놀라 눈을 크게 뜨고 소리쳤다. 물론 분위기를 띄우기 위한 과장도 조금 섞였다.
“어머나, 오백만원이네.”
돈으로 다 되는 세상은 아니다. 그러나 돈을 잘만 사용하면 처우가 180도 달라진다. 처우뿐만이 아니라 인생까지 달라질 수가 있는 것이다. 아등바등 돈을 모아서는 친구들 모임에서까지 갖은 수모를 당하면서도 밥값 한번 내지 않다가 비명에 세상을 떠난 사내가 있었다. 수백억 재산을 남겼지만 상갓집은 텅 비었다.
그런 사내가 처자식한테 후덕할 리가 없어서 시신이 아직 식기도 전에 아들, 딸, 처까지 나뉘어 재산을 찢어발기려고 아귀가 되어 있었다. 업보이다. 살아서도 주위 사람들에게 온갖 수모와 경멸을 당하면서 악착같이 돈을 모으다가 죽었다. 세상에 이렇게 고통스러운 삶이 있을까? 돈이 차곡차곡 쌓이는 희열을 만끽할 여유가 있었을 리가 없다.
먹어도 먹어도 허기가 지는 걸귀같은 인생을 살다가 갔을 뿐이다. 진경이 다시 어머니에게 봉투를 내밀었다.
“엄마, 받아.”
“받으세요, 지금까지 변변한 선물도 사드리지 못했습니다.”
“어서.”
그러면서 진경이 어머니 손에 봉투를 쥐어주었다. 그날밤 모두 제 방으로 돌아갔을 때 진경이 침대에 누워있는 조철봉의 옆으로 다가왔다. 밤 12시가 넘어있어서 주위는 조용했다.
“고마워요.”
가운 차림의 진경이 조철봉을 내려다 보았다. 금방 샤워를 하고 난 진경의 얼굴은 반들거렸다. 가운만 벗으면 알몸이 드러날 것이었다.
“엄마는 그런 큰 돈을 처음 받아 보았을 걸요? 엄마는 감동 먹었어요.”
“이리 와.”
조철봉이 말하자 진경은 선 채로 가운을 벗었다. 그러자 미끈한 알몸이 드러났다.
젖가슴은 아직도 단단했고 아랫배는 군살이 없는 데다 허벅지의 살집은 충실했다. 아직 불을 환하게 켜놓은 터라 조철봉은 눈앞에 펼쳐진 진경의 알몸을 보았다.
“어때요? 좋아요?”
진경이 한쪽 다리를 조금 벌리면서 눈웃음을 쳤다. 그러자 숲속의 골짜기가 드러났다.
“으음, 좋구나.”
조철봉이 감탄한 표정으로 머리를 끄덕였다. 진경은 분위기를 끌어올리려고 의도적인 연출을 하고 있었지만 조금도 어색하지 않았다.
“이대로 더 있어요?”
하면서 진경이 몸을 더 비틀었을 때 조철봉은 빙긋 웃었다.
“그만 됐어.”
따라 웃은 진경이 시트를 들치고 옆으로 다가오더니 조철봉의 철봉을 손으로 쥐었다.
“금방 할 것 같아요.”
“그럼 안 되지.”
“내가 위에서 먼저 해요?”
조철봉이 머리를 끄덕이자 진경은 조철봉의 몸 위에 앉았다. 정면으로 보며 앉은 것이다.
“난 흘러요, 그러니까 넣을 게.”
진경이 철봉을 쥐면서 말했다. 그냥 넣을 수 있는 데도 그렇게 말하는 것은 분위기를 띄우려는 것이다. 섹스는 그야말로 천차만별이다. 30년동안 마누라하고만 섹스를 해도 매번 다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마음 먹기에 따라서 섹스는 모두 달라질 수가 있는 것이다.
조철봉은 물론이고 진경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서로 배려하고 성의를 보이면 된다. 조금만 노력해도 잠자리에서 얼마든지 새로운 느낌을 받을 수가 있는 것이다. 진경은 말대로 흐르고 있는 샘에 철봉을 넣었다.
조철봉과 최갑중이 전주식당에 찾아간것은 다음날 점심 때였다. 전주식당은 주차장도 넓은데다 주차요원까지 있어서 그들은 금방 식당 안으로 안내되었다.
식당은 홀과 방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12시가 조금 지났을 뿐인데도 홀은 벌써 손님이 가득찼다.
“예약 하셨습니까?”
한복 차림의 종업원이 다가와 물었을 때 조철봉이 불쑥 말했다.
“사장한테 직접 예약했는데, 나, 조철봉이라고 해요.”
“예, 잠깐만요.”
종업원이 서두르듯 몸을 돌리더니 옆쪽 방안으로 들어갔다.
“장사 잘되지 않습니까?”
그것보라는듯이 갑중이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을 때였다.
“오셨어요?”
방에서 분홍색 한복 차림의 오세은이 나왔다. 환하게 웃는 모습이다.
“특실로 안내해드려.”
종업원에게 이른 세은이 갑중에게도 머리를 숙여 보이더니 다시 웃었다.
“미리 전화라도 해 주시지.”
“내가 무슨 대단한 사람이라고.”
종업원을 따라 조철봉은 복도 끝방으로 들어섰다. 조철봉의 저고리를 받아 옷걸이에 건 세은의 표정은 밝았다.
“상 차려 올게요. 한정식으로 하겠어요.”
세은이 방을 나갔을 때 갑중이 말했다.
“괜찮은데요. 형님?”
“네 눈에는 다 괜찮겠지. 물론 하기전에 말이지만.”
조철봉이 빈정대듯 말했지만 생기를 띠고 있는 것을 갑중이 모를 리가 없다. 이윽고 종업원 둘이 양쪽에서 교자상을 들고 방안으로 들어섰는데 과연 산해진미였다. 뒤따라 들어온 세은은 상 옆에 앉아 시중을 들었다.
“모두 전라도 음식이에요.”
세은이 젓갈과 전을 하나씩 설명해주면서 말했다.
“담가서 보내오지요.”
“맛있군.”
조철봉이 감탄했고 갑중도 머리를 끄덕였다.
“과연 소문대로군요.”
“점심은 제가 사는 것으로 할게요.”
세은이 말했을 때 조철봉이 눈을 크게 떴다.
“그래? 내가 얻어 먹기만 하면 되겠어요? 내가 오늘 저녁에 술을 사지요.”
된장찌개를 한모금 삼킨 조철봉이 느긋한 표정으로 세은을 보았다.
“내가 이렇게 맛있는 점심은 난생 처음 먹어보는거요. 오늘 밤에 한잔 단단히 사겠습니다.”
“그러죠, 뭐.”
세은도 선선히 동의했다.
“오늘 밤에 조철봉씨하고 데이트를 하죠, 뭐.”
세은이 방을 나갔을 때 갑중은 이맛살을 찌푸린 얼굴로 조철봉을 보았다.
“왠지 두 분 분위기가 조금 이상한데요.”
“뭐가 말이냐?”
갑중이 머리를 한쪽으로 비틀었다.
“들뜬 분위기여야 정상인데 어쩐지 두분 눈치가 딱딱하게 느껴져서 말입니다.”
“살벌해?”
“예, 제 느낌이.”
“내가?”
“아닙니다. 저여자도.”
“저게 석녀란다.”
불쑥 말을 뱉은 조철봉이 주위를 둘러보고는 목소리를 낮췄다.
“그런데 몸은 따라주지 않지만 마음은 굴뚝인 모양이야. 그래서 서경윤이가 나한테 붙여준 것인데, 아예 안될줄 알고.”
조철봉이 입만 딱 벌리고 있는 갑중을 향해 쓴웃음을 지어보였다.
“아주 고약한 여자가 걸렸단 말이다.”
“얘, 왔다 갔어.”
조철봉과 갑수가 식당을 떠났을 때 오세은이 핸드폰에 대고 말했다.
“오늘 저녁에 술 산댄다.”
“그래?”
수화구에서 울린 목소리의 주인공은 서경윤이다. 경윤이 궁금한듯 물었다.
“어디서 만나기로 했는데?”
“문라이트 호텔 바에서.”
“응, 그곳 분위기 괜찮지.”
경윤의 목소리가 은근해졌다.
“여자 술먹이고 바로 방으로 끌고 들어가기 좋은 곳이야.”
“그럼 어떻게 하지?”
“네가 알아서 해야지, 이젠.”
“겁이 나.”
“이것아, 그럼 왜 나한테 소개시켜 달라고 그런거야?”
경윤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잘 나가다가 마지막 순간에 틀어버리면 어떡해? 한번 부딪쳐나 봐야지.”
“글쎄 조철봉은 내 스타일이 아니라니까 그러네, 저질이야.”
“그래?”
“아무래도 오늘 보디가드를 두 명 데려가야겠어.”
“마음대로 해.”
경윤의 목소리가 지친듯 낮아졌다.
“보디가드를 두 명 데려가든 세 명 데려가든 말이야.”
그날 저녁 8시가 되었을 때 세은은 문라이트 호텔의 바로 들어섰다. 20평쯤 되는 바 안은 어둑했지만 안쪽에 앉아있는 조철봉은 금방 눈에 띄었다.
“바 안이 환해지는것 같군.”
세은이 다가왔을 때 눈을 가늘게 뜬 조철봉이 감탄한 표정으로 말했다. 세은은 진주색 투피스 차림이었는데 미끈한 몸매에 잘 어울렸다. 조철봉의 시선은 아교처럼 끈적여서 찝찝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성적 자극이 전해져 오는 것이다. 탁자 위에는 이미 양주와 안주 접시가 놓여 있었으므로 조철봉은 세은의 잔에 술을 채웠다.
“뭐, 다 아는 처지니까 이젠 터놓고 이야기합시다.”
조철봉이 잔을 쥐고 말했다.
“난 솔직히 당신을 처음 만났을 때 어떻게 한번 해보려고 마음을 먹었었는데 지금은 포기했습니다.”
한모금에 양주를 삼킨 조철봉이 빙긋 웃었다.
“이유를 말씀드리지. 지난번에 내가 여자 경험이 없다고 한 건 거짓말이었습니다. 당신의 경계심을 풀어주려는 유치하지만 간단한 방법이었는데 실은 내가 여자 경험이 많아요.”
그러고는 조철봉은 번들거리는 눈으로 세은을 보았다.
“여자를 두어번만 보면 그 여자의 몸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경지는 되었지요. 자, 듭시다.”
다시 술잔을 채운 조철봉이 건배하자는듯 잔을 들어 보이더니 한모금 삼키고는 말을 이었다.
“그런데 당신은 필이 오지 않아. 마치 조화에다 향수를 뿌린 것 같은 느낌이 온단 말이오. 만날수록 성적 충동이 작아지더니 지금은 전혀 느낌이 없어.”
조철봉이 눈을 가늘게 떴을 때 세은은 자신도 모르게 들고 있던 양주를 한모금에 삼켰다. 그러자 눈 주위가 금방 화끈거렸다. 조철봉이 머리를 한쪽으로 기울이며 말했다.
“왜 그럴까하고 곰곰이 생각해도 영문을 모르겠어. 이런 느낌은 처음이니까 말이오.”
그때 잔에 다시 술을 채운 세은이 쓴웃음을 지은 얼굴로 조철봉을 보았다.
“그럼 오늘밤은 안심해도 되겠네.”
조철봉은 잠자코 세은을 보았다. 세은은 지금 양주를 석잔째 마시고 있다. 양주를 몇 잔 마시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세은은 벌써 마셔버린 것이다. 조철봉은 지금까지 한번도 이런 수단을 써보지 않았다. 별놈의 사기를 다 쳤지만 여자는 이런 방법으로 유혹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예외였다. 사기가 먹히지도 않는데다 이미 전력이 다 밝혀져서 여자는 선입견을 갖고 방어막을 쳐놓았다. 더구나 시간 여유가 없는 상황이다. 세은이 흐린 눈으로 조철봉을 보더니 웃었다.
“조철봉씨, 달아오르지 않아서 다행이라구.”
바 안은 어둑한데다 서너팀의 외국인 남녀가 떠들썩해서 조금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조철봉은 느긋한 표정으로 술잔을 들었다.
“그래, 다행이야.”
그러나 세은은 이미 흥분제를 마셨다.
세은이 오기 전에 세은의 잔에다 물에 녹인 흥분제를 발라 놓았던 것이다. 그래서 세은은 술에 섞인 흥분제를 깨끗이 세번이나 행궈 마셨다.
“아아암.”
갑자기 세은이 어깨를 비틀면서 손으로 입을 가렸다. 하품을 한 것이다.
“아이, 피곤해.”
“그래?”
조철봉이 은근한 시선으로 세은을 보았다.
“남자 만날 때 피곤하다면서 하품하는 건 실례야, 알고 있어?”
“흐흥, 알아.”
그러면서 세은이 다시 손으로 입을 가리더니 하품을 했다. 눈이 조금 감기면서 다시 상체가 비틀렸다.
“내가 부축해줄까?”
조철봉이 몸을 일으켜 세은의 옆 쪽에 앉았다. 그러고는 허리를 당겨 안고 낮게 말했다.
“이봐, 정신차려. 술 석잔 마시고 왜 이래?”
“글쎄, 내가, 왜.”
그러다가 퍼뜩 머리를 든 세은이 눈을 치켜떴다.
“아, 미치겠어.”
“방에서 조금 쉬었다 가지 그래?”
“미쳤어?”
내쏘듯이 말했던 세은이 번쩍 손을 들었다. 그러자 입구쪽에 앉아있던 세 사내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다가왔다.
“예, 사모님.”
“나, 갈거예요.”
“예, 사모님.”
보디가드였던 것이다. 두 사내가 세은의 양쪽 팔을 부축하고 자리에서 일어섰으므로 조철봉은 의자에 등을 붙였다. 세은은 바를 나오자 머리를 흔들었다. 그러자 조금 정신이 나는 것 같았다.
“사모님, 방에서 잠시 쉬었다 가시는 것이.”
앞장섰던 보디가드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세은을 보았다. 그러나 다시 세은이 머리를 떨구자 보디가드는 결심한 듯 두 사내를 보았다.
“너희들 여기서 기다려.”
세은은 사내의 목소리를 귀에서 아련히 들으면서 두 사내에게 부축 당한 채 복도에 서 있었다. 머리는 몽롱했지만 온몸은 뜨거웠다. 이런 기분도 처음이다.
양팔을 쥐고 있는 두 사내의 손가락 감촉도 생생하게 느껴지고 있다.
“미안해요.”
머리를 떨군 채 세은이 겨우 말했을 때 사내 하나가 대답했다.
“아닙니다, 사모님. 과음하신건데요, 뭐.”
더운 숨만 뱉는 세은에게 사내는 말을 이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사모님. 저희들이 문 앞에서 지키고 있겠습니다.”
그때 다른 사내의 목소리가 울렸다.
“키 가져왔습니다. 조금 쉬고 가시지요.”
방으로 들어선 세은은 먼저 옷부터 벗어던졌다. 온몸에서 열이 났기 때문이다. 팬티와 브래지어 차림이 된 세은은 침대에 쓰러지듯 엎어졌다. 머리가 지끈거리면서 입으로는 뜨거운 숨을 뱉어내고 있었다.
양주를 석잔 마셨을 뿐인데도 이런 현상이 오는 것에 아직 이상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다만 뭔가 아쉽고 허전했다. 조금전에 자신을 양쪽에서 부축했던 경호원들의 억센 손가락 감촉이 지금도 팔에 생생하게 남아 있는 것이다. 눈을 감은 세은은 온몸을 비틀었다. 그러자 열기가 뻗쳐지면서 저도 모르게 가는 신음이 터져 나왔다.
“아아, 미치겠어.”
천장을 향하고 누운 세은은 브래지어를 거칠게 벗겨내고는 젖가슴을 두손으로 감싸안았다. 젖꼭지는 이미 팽팽하게 곤두서 있어서 건드리면 소리가 날 것만 같다. 세은은 젖꼭지를 손가락으로 애무했다.
그러자 엉덩이가 치켜 올라가면서 하체가 꼬였다. 눈을 감은 세은은 곧 조철봉의 얼굴을 떠올렸다. 조철봉이 거대한 남성을 마치 창처럼 내세우고 다가왔다. 세은은 팬티를 벗어던지고는 샘에 중지를 넣었다.
“으으음.”
신음을 뱉은 세은의 손가락 움직임이 빨라졌다.
“힘껏 해줘. 더 세게.”
세은이 비명같은 외침을 뱉었다.
“어서, 여보.”
그때였다. 바로 머리위에서 낮은 헛기침 소리가 났으므로 세은은 눈을 떴다. 그러고는 기절할듯 놀라 입을 딱 벌렸다. 눈앞에 조철봉의 얼굴이 떠 있었기 때문이다.
“아악”
정말로 비명을 지른 세은이 벌떡 상반신을 일으켰지만 그것은 마음 뿐이었다. 조철봉의 팔에 어깨를 눌린 세은이 다시 침대위로 눕혀졌다.
“뭐. 다 보았으니까 부끄러울 것 없어.”
이제는 하반신을 비틀며 세은이 일어나려고 했으므로 조철봉의 손이 허벅지를 눌렀다. 그순간 세은은 허벅지를 덮은 조철봉의 손바닥 촉감에 굳어져 버렸다.
“화를 낼 것도 없어. 필요없는 에너지만 낭비될 뿐이니까.”
조철봉이 정색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계속하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렇게는 안될 것 같으니까 대신 내가 해줬으면 하는데.”
“당신, 정말.”
얼굴이 빨개졌다가 금방 하얗게 된 세은이 헐떡이며 말했다. 조철봉이 침대 끝에 걸터앉아 있었으므로 세은은 겨우 시트를 당겨 가슴과 샘만 대충 덮었다. 어떻게 이곳에 들어왔느냐 또는 이게 무슨 짓이냐는등 해댈 말이야 얼마든지 있겠지만 이런 상황에서 조철봉의 말마따나 에너지만 소모될 뿐일 것이다. 조철봉이 시트 속으로 손을 넣더니 세은의 젖꼭지를 부드럽게 만졌다.
“황홀한 몸이더군.”
조철봉이 낮게 말했을 때 세은은 눈을 감았다. 저절로 어금니가 물려졌지만 젖꼭지에 짜릿한 자극이 오면서 순식간에 발가락 끝까지 내려가 발끝을 잔뜩 안쪽으로 오무리게 만들었다.
“경호원 생각은 잊는게 나을거야. 내가 매수해서 벌써 돌아갔으니까.”
조철봉이 한손으로 아랫배를 쓸어내리면서 말했다. 세은은 낮게 신음하면서 하체를 비틀었다. 온몸의 피부에 거머리가 달라 붙은 것 같은 느낌이 오면서도 손길을 떨치기가 싫은 것이다. 그러고는 아랫배를 맴돌고만 있는 조철봉의 한쪽 손이 더 밑으로 내려가 주기를 간절하게 원하고 있다. 세은은 거칠게 몸을 흔들었다.
세은이 마신 이른바 최음제는 2인분이었다. 최갑중한테서 얻은지 3년쯤 된 것인데 한꺼번에 술잔에 넣어 버렸으니 세은은 즉 2회분을 한번에 마신 셈이 될 것이다. 조철봉으로서는 최음제를 여자한테 먹여본 경험이 없다. 범법 행위이기 이전에 비겁한 짓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강간이나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세은의 사연을 듣고, 그러고는 이중적인 행동을 겪고나서 최음제는 이런 경우에 사용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즉 세은에게 최음제는 지난날의 악몽같은 기억을 제거해주는 역할과 함께 그것 때문에 파생된 현재의 부자연스러운 행동을 바로잡는 명약이 될 것이었다.
조철봉의 얼굴은 세은의 머리 위쪽으로 30센티쯤의 거리에 떠 있었으니 가장 영향력이 있는 간격이었다. 배를 쓰다듬던 조철봉의 손길이 세은의 도톰한 아랫배로 조금씩 미끄러져 내려갔다.
“다 잊어버려, 그저 내 손끝만 느끼면서 다음 행동을 상상해보란 말이야.”
조철봉의 낮고 굵은 목소리가 마치 신내림을 받은 영험한 무당처럼 방안에 울렸다. 세은은 다시 눈을 감았다. 그렇지 않아도 조금 전에 조철봉의 얼굴을 떠올리며 손끝으로 샘을 건드렸던 세은이다.
“너는 나를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는거야. 지금 네 샘은 가득차고 싶어서 몸부림이 일어난다.”
조철봉이 낮게 말했을 때 세은은 신음을 뱉으면서 몸부림을 쳤다. 바로 샘 위까지 내려왔던 조철봉의 손끝이 맴돌기만 하고는 샘에 다가오지 않는 것이다. 조철봉이 머리를 숙이더니 세은의 젖꼭지를 입안에 넣었다. 그순간 화들짝 놀라 눈을 떴던 세은이 조철봉의 혀가 젖꼭지를 감아 돌렸을 때 저도 모르게 신음했다. 이런 느낌은 처음이다. 마치 뱀같이 유연한 혀가 끈적이며 젖꼭지를 친친 감는 느낌이 든 것이다.
“아아, 넣어줘.”
세은이 마침내 비명처럼 말했다.
“뭐해? 나, 미치겠어.”
그러나 조철봉의 손가락은 샘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가파르게 오르내리는 세은의 아랫배만 왕래하고 있을 뿐이다.
“너는 느낌만으로도 절정에 오를 수가 있을 거야. 넣을 필요까지는 없어.”
젖꼭지에서 입술을 뗀 조철봉이 더운 숨을 가슴에 뱉으면서 말했다. 그러고는 두손으로 세은의 겨드랑이에서 허리로 그리고 무릎까지 천천히 훑어내려갔다. 마치 도자기를 마지막으로 쓸어 만드는 도공처럼 손길이 부드러웠고 조심스러웠다.
“너는 이미 절정에 올라왔어. 더이상 길게 하면 오히려 느낌이 나빠져.”
조철봉이 말하자 세은이 눈을 떴다.
“싫어, 넣어줘.”
“넌 감당할 수가 없을 거야.”
그러면서도 조철봉은 몸을 일으키고는 옷을 벗어던졌다. 세은의 시선을 받은 채 셔츠와 팬티까지 벗고 금방 알몸이 된 조철봉이 물었다.
“네가 날 만족시킬 수가 없을 것이라는 말이야.”
세은은 눈을 크게 뜨고는 눈앞에서 건들거리는 조철봉의 검붉은 철봉을 보았다. 이런 경험은 처음이다. 아직도 몸이 비비 꼬이는 상황이어서 눈앞에 떠있는 거대한 철봉을 보자 맹렬한 갈증같은 욕망이 일어났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두손을 뻗쳐 철봉을 감싸쥐었다.
“해줘.”
세은이 헛소리처럼 말했다.
“내가 만족시켜 줄거야.”
“그만둬.”
조철봉이 한걸음 물러서자 빈손이 된 세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조철봉이 되지도 않는 말을 길게 뱉으면서 세은의 애간장을 태우는 것은 서경윤으로부터 들은 정보 때문이다. 세은은 고등학교 때 강간을 당한 후에 석녀가 되었다고 했는데 마음은 굴뚝같지만 막상 행위 때가 되면 굳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질질 끌면서 기회를 노리는 중이었지만 최음제 효과 때문인지 세은의 반응은 보통 여자와 다르지 않았다. 조철봉이 한발짝 물러서자 가슴이 내려앉는 표정을 지으면서 상반신을 일으키는 것을 봐도 그렇다.
“너, 정말 자신있어?”
철봉을 건들거리면서 조철봉이 묻자 세은이 머리를 끄덕였다. 열심인 표정이다.
“자신있어.”
“날 만족 시킬 수가 있단 말이야?”
“있어.”
21세기에 이른 작금에 있어서 이런 대화가 어디에서 오가겠는가? 5백년 전에 왕이 후궁한테도 이렇게 물어보지는 못했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야말로 눈이 뒤집힌 세은이 절실하게 약속했고 조철봉은 다가갔다. 침대에서 세은을 안았을 때 조철봉이 부드럽게 말했다.
“그럼 정상위로 시작하지, 어때?”
세은이 엉겁결에 머리만 끄덕이더니 편하게 엉덩이를 잘 붙이고 자세를 만들었다. 천하의 조철봉으로서도 잘하고 자시고의 기준은 상대방의 분위기와 반응에 따라 정답이 여러 개가 나올 때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여자가 자신을 만족시켜 주었느냐 어쩌느냐 따위를 평가한 적은 단 한번도 없다. 말할 필요도 없이 세은의 샘은 진즉에 넘쳐나서 밖은 식어가는 중이었으므로 준비작업도 필요 없었지만 조철봉은 신중했다. 무릇, 남녀를 불문하고 섹스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을 순서대로 꼽으라면 첫번째가 처음에 철봉을 삽입할 때의 순간이 될 것이다.
그것은 첫 섹스의 첫 순간일 때의 감격에서부터 시작하여 30년간 같이 산 마누라하고의 섹스에서도 그 첫 순간은 언제나 아름답고 벅찬 것이다. 그래서 조철봉은 그 첫 순간을 나름대로 만끽하는 습성을 길러왔고 그것이 여자에게도 상당한 효과를 거두었다.
조철봉은 정상위의 자세를 취하고 있는 세은의 샘에 철봉을 붙이고는 잠시 움직임을 멈췄다. 아까부터 헛소리까지 섞어 철봉을 찾던 세은은 철봉이 닿는 순간 감전이나 된듯이 몸을 굳혔는데 숨까지 죽였다.
그러자 다음 순간에 철봉은 샘 주위를 산책하기 시작했다. 양쪽 골짜기를 타고 오르내리더니 샘 위쪽의 작은 바위에도 몇번 머물렀다가 다시 내려왔다. 그러자 세은의 샘이 다시 넘쳐나기 시작했다. 세은은 어느덧 두손으로 조철봉의 목을 감아 안고 있었는데 철봉의 산책에 발걸음 하나까지 예민하게 감시하며 반응했다.
철봉이 골짜기 위쪽의 작은 바위에 몇번씩 미끄러지며 오르내렸을 때에는 숨이 끊어질듯한 신음을 뱉다가도 아래쪽으로 내려오면 기대감에 온몸이 굳어지는 것이었다.
“아, 좋아.”
조철봉의 목을 힘껏 안은 세은이 귀에 대고 허덕이며 말했다.
“이렇게 좋은 줄 몰랐어.”
“너만 좋으면 안되지.”
조철봉이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했을 때 세은이 갑자기 손을 내리더니 철봉을 움켜쥐었다.
“이제 그만 넣어줘.”
세은이 간절하게 말하면서 철봉을 샘안으로 끌어들였다. 그러자 조철봉이 허리를 들어 철봉을 빼내었다. 이제 세은이 석녀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해졌다. 그러나 주도권은 아직 이쪽에 있는 것이다.
“기다려, 난 아직 준비 안됐어.”
세은은 지금처럼 간절하게 철봉을 기다린 적이 없다. 조철봉이 떨어져 나갔을때 세은의 가슴은 다시 절망으로 내려앉았다. 약기운은 이미 최고수준으로 상승되었으며 조철봉이 쓸고간 온몸에는 아직 거머리들이 달라붙어 꿈틀거리는 중이다.
“오늘은 너 혼자서 즐겨봐.”
“조철봉이 세은을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평소에 해온 것처럼 말이야.”
““아니, 왜?”
서로 홀딱 벗고 있는 마당에 체면을 따진다면 위선자거나 정신병자일 것이다. 눈을 크게 뜬 세은이 상반신을 일으켰다. 풍만한 젖가슴이 출렁이며 흔들렸다.
“정말 왜 그래? 날 이렇게 만들어놓고.”
“내가 널 어떻게 만들었다고 그래?”
“다 계획적이잖아?”
세은이 젖가슴도 가리지 않고 침대에 앉아서 조철봉을 보았다. 달아오른 얼굴에 눈동자가 번들거리고 있어서 요염한 모습이었다.
“내 술에다 약까지 탔잖아?”
“알고 있었구먼.”
놀란듯 조철봉이 눈을 치켜뜨자 세은이 아랫입술을 물었다가 풀었다.
“다 알고 있어. 내가 고용한 경호원도 매수했다면서? 다 계획적이잖아? 그런데 왜 그만둬?”
“그래, 정상적인 상황에서 해보려고 그런다, 왜?”
“지금 해.”
“아직 약기운이 남아있는 모양인데.”
“그까짓 것 상관할 필요없어.”
그리고 세은이 번들거리는 눈으로 조철봉의 철봉을 노려보았다.
“하고 싶어, 지금 당장.”
“난 기분이 안나. 비록 철봉이 내 의지와는 다르게 흔들거리고 있지만 말이야.”
쓴웃음을 지은 조철봉이 힐끔 흔들거리는 철봉에 시선을 주었다.
“다음에 하고 싶을 때 연락해. 그때는 두말 하지 않고 널 안을테니까.”
방바닥에 널린 팬티와 셔츠를 주워입은 조철봉이 3분도 되지 않아서 양복 차림이 되더니 멀쩡한 모습으로 세은을 다시 보았다. 그때는 세은도 침대에 다시 누워 시트를 목밑까지 끌어올리고 있었는데 천장을 향한 표정은 차분했다.
“오늘은 서로 벗고 상견례를 한 것으로 치자구. 아주 화끈했어.”
조철봉이 세은의 옆모습을 보면서 말을 이었다.
“너한테 마음은 있지만 그렇게 절실하게 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는 걸 오늘 겪어봐서 알았을거다.”
그리고 조철봉이 히죽 웃었다.
“남자가 물건을 세우면 곧장 밀고 들어간다고 생각하는 건 오산이야.”
세은이 힐끔 시선을 주었을 때 조철봉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다음에 기회가 오면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편하게 섹스를 할게. 오늘은 너하고 나 사이에 액땜 굿을 한 것으로 치자고.”
“잠깐만.”
세은이 불렀으나 조철봉은 몸을 돌렸고 방문을 나올 때까지 더이상 부르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계획적으로 세은의 호텔방까지 따라간 것은 사실이다. 약을 먹인 후에 미리 경호원 셋을 매수해서 호텔방의 키까지 넘겨받고 방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그러나 막상 약에 취한 세은이 몸부림치는 모습을 보고나서 섹스 과정은 보류했다. 이것이 조철봉의 진면목인 것이다. 섹스는 서로가 원할 때 이루어지면 아름답다. 서로 사랑하는 관계라면 더 아름답다. 약에 취한 여자에게 철봉을 넣는 것은 하급이다.
다음날 아침 조철봉이 회사에 출근했을 때 어김없이 서경윤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어떻게 되었어?”
경윤이 대뜸 물었으므로 조철봉은 쓴웃음을 지었다. 경윤이 관심을 보이는 것은 조철봉과 세은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냉정히 분석하면 조철봉은 계륵이다. 먹자니 먹을 것도 없고 버리자니 아까운 닭갈비 같은 존재일 것이다.
“이야기 해줄테니까 나와라.”
“그래, 어디로?”
“극동호텔.”
그러자 경윤이 숨 한번 쉴동안 가만있다가 대답했다.
“알았어.”
“그럼 11시에 커피숍에서.”
어젯밤 일을 오세은이 이야기했다면 제정신을 가진 여자가 아닐 것이다. 따라서 경윤은 세은으로부터 신통한 이야기를 듣지 못하고 전화를 했을 가능성이 많았다. 조철봉이 커피숍으로 전화를 했을 때는 11시5분이다. 커피숍에다 전화를 해서 서경윤을 찾은 것인데 전화를 받은 경윤의 목소리는 그럴 줄 알았다는듯이 퉁퉁거렸다.
“나 807호실이다. 일루 와.”
조철봉이 대뜸 말하자 경윤은 대꾸도 없이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러더니 정확하게 7분이 지났을 때 문에서 벨소리가 났다. 조철봉이 방문을 열자 경윤은 시선도 주지않고 방으로 들어오더니 소파에 앉았다. 조철봉이 웃음띤 얼굴로 경윤을 보았다.
“우리는 이런 관계가 어울리는가 보다.”
“시끄러.”
했지만 경윤의 기색도 크게 불편하거나 불쾌한 것 같지가 않다. 앞쪽에 앉은 조철봉이 지그시 경윤을 보았다.
“내가 네 남편이었을 때보다 지금이 더 멋있게 보일거야, 그렇지?”
“남의 말 하고 있네, 제가 그러는 것 같구만.”
“간통전문이란 말이야.”
그러자 퍼뜩 눈을 치켜떴던 경윤이 흐흥하고 웃었다.
“우린 같은 부류란 말이지?”
“같이 살면 백발백중 어긋나지만 각각 임자를 만나면 누구 못지않게 잘 사는 인생이 되지.”
“그래서 난 임자를 만났으니까 당신이나 어서 잡아봐.”
정색한 경윤이 조철봉을 보았다.
“그래서 어젯밤에 어떻게 되었어?”
“먼저 한잔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선 조철봉이 냉장고로 다가가며 물었다.
“뭘 마실거야?”
“오렌지주스.”
냉장고에서 오렌지주스 캔을 꺼낸 조철봉이 경윤 앞에 놓인 빈잔에 주스를 따르고는 자리에 다시 앉았다.
“어젯밤 호텔방에 데리고 들어 갔어.”
조철봉이 말하자 경윤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정말? 빠르네, 재주도 좋아.”
“그래?”
“계속해봐.”
주스를 두어모금 삼킨 경윤이 재촉했다.
“그래, 했어?”
“진하게 했지.”
“걔, 괜찮아?”
“뭐가?”
“뭐긴 뭐야?”
갈증이 나는지 경윤이 남은 주스를 단숨에 삼키고는 조철봉을 노려보았다.
“어떻게 했느냐니깐?”
“여자가 달아오르더구만.”
“달아올라?”
경윤의 이맛살이 찌푸려졌다.
“석녀가?”
“당연하지.”
조철봉이 심각한 표정으로 경윤을 보았다.
“석녀가 아니라 철녀라도 달아오르게 되어 있었어. 걘 말 두마리가 발정날 만큼의 흥분제를 먹었거든.”
“뭐야?”
소스라치게 놀랐던 경윤이 곧 상반신을 반듯이 세웠다. 두눈이 번들거리고 있었다.
“그, 그러면 흥분제를 먹였단 말야?”
“그래. 모르게.”
“그래서 어떻게 되었어?”
“호텔방으로 데려갔지.”
“흥분제 먹이면 그냥 따라와?”
“그래, 온몸을 비비 꼬면서 얼른 해달라고 정신이 없어.”
“어머, 어머, 어머.”
“그래서 방으로 데려갔지.”
경윤이 다음말을 기다리며 침을 삼켰을때 조철봉은 소파에 등을 붙였다.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오세은이는 옷을 벗어 던지더구만.”
그러고는 조철봉이 생각났다는 듯한 얼굴로 경윤을 보았다.
“아침에 연락해 봤어?”
“응, 했는데.”
침을 삼킨 경윤이 몸을 비틀면서 겨드랑이를 긁었다.
“바쁘다면서 조금 있다 전화해준다고 하고는 연락 안왔어.”
“뭐, 할 이야기도 없겠지.”
“그냥 했어?”
“뭘?”
“아니, 그거 말야.”
경윤이 붉어진 얼굴로 조철봉을 보았다.
“빨리 말해 봐.”
“홀랑 벗은 채 누워서 빨리 넣어달라고 하더구만.”
조철봉이 눈을 가늘게 뜨고 경윤을 보았다.
“실습해보게 너도 한번 누워볼래?”
“미쳤어 ”했지만 경윤이 붉어진 얼굴로 침을 삼켰다. 그러고는 이번에는 허리를 긁었다.
“너도 하고 싶지?”
그러면서 조철봉이 자리에서 일어나 먼저 바지부터 벗었다. 그러자 치솟아 오른 팬티가 드러났고 곧 조철봉은 팬티까지 벗어던졌다.
“내가 이러고 서 있으니까 오세은이가 해달라고 울더구만.”
조철봉이 허리에다 힘을 주자 철봉이 저격수가 겨눈 총구처럼 위 아래로 흔들렸다.
“애원을 했어, 넣어달라고.”
그때 경윤이 다시 몸을 비틀더니 침을 삼켰다. 그러나 시선은 조철봉의 철봉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어때? 벗지 않을거냐? 너한테는 넣어줄테니까 벗어.”
조철봉이 말하자 경윤이 홀린듯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고는 스커트와 블라우스를 바닥으로 떨어뜨리며 벗었고 곧 브래지어와 팬티까지 벗어던진 알몸이 되었다. 경윤이 조철봉에게 물었다.
“누워?”
“그래.”
경윤은 다소곳하게 침대로 다가가 누웠다. 그러고는 열기띤 눈으로 다가온 조철봉을 보았다.
“어서 해줘. 미치겠어.”
“기분이 어때?”
“당신 말 한마디마다 온몸이 떨려. 온몸이 근질거려 미치겠어.”
경윤이 두팔을 벌려 조철봉의 목을 감아 안았다.
“그냥 넣어줘, 어서.”
그러고는 허리를 불끈 올렸으므로 하마터면 철봉이 샘에 빠질 뻔했다. 조철봉은 심호흡을 했다. 경윤의 잔에도 흥분제를 바른 것이다. 이번에는 말 한 마리분이다.
조철봉이 이번에도 먼저 와 기다리면서 주스잔에다 흥분제를 발라 놓은 것은 약을 먹은 상대방의 반응을 알아보려는 의도였다. 그래서 일회분만 발라 놓았는데 효과는 좋았다. 여자가 다급하게 재촉하는 상황이 되었을 때 균형감각을 제대로 갖춘 남자일 경우에는 대개 차분해지는 법이다. 그래야 밸런스가 맞지 않겠는가? 서둔다고 재촉하는대로 덥석 넣었다가 끝났을 때 귀싸대기를 맞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여자가 정상적인 조건일 때의 균형감각이었다. 조철봉의 철봉이 진입했을 때 경윤의 입에서 터져나온 신음은 한번도 듣지 못한 것이었다. 그만큼 크고 굵어서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을 정도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조철봉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졌다. 경윤의 몸도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우선 철봉을 감아 죄는 탄력이 달랐고 운동이 새로웠다.
“아앗”
조철봉이 서너번 움직였을 뿐인데도 경윤의 몸은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다. 샘은 강렬하게 수축 작용을 반복했으며 신경 세포는 최대한으로 예민해진 상태여서 다시 조철봉이 서너번 더 움직였을 때 폭발해버렸다. 경윤은 절규같은 신음을 뱉으면서 온몸을 굳혔는데 만족도는 최상인 것이 분명했다. 온몸이 활처럼 굽어졌다가 곧 새우처럼 웅크린 자세를 두어번 반복하더니 마침내 조철봉의 몸을 빈틈없이 팔다리로 휘감고는 앓는 소리를 냈다.
“대단하다.”
조철봉이 경윤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이쪽은 허리운동을 십여번 밖에 하지 않아서 숨도 가쁘지 않았다. 경윤이 앓는 소리를 내며 헐떡이다가 한참만에야 허리를 비틀었다. 그러더니 아직 철봉이 샘 안에 있는 것을 느끼고는 다시 신음했다.
“나, 이렇게 좋기 처음이야.”
경윤이 앓는 소리로 말했다.
“정말 오늘 내가 왜 이러지? 밑의 감각도 다른 것 같아.”
“흥분한 모양이다. 오세은이 이야기 듣고 말이야.”
“그것도 그렇지만.”
다시 허리를 비틀어 철봉을 느껴본 경윤이 신음했다.
“오늘 그것이 더 커진 것 같애.”
“네 샘이 더 예민해진 것 같은데.”
“그것도 그래.”
경윤이 다시 허리를 흔들더니 숨소리가 더 가빠졌다.
“또 해줘. 이번에는 내가 위에서 할게.”
그러더니 몸을 비틀었으므로 조철봉은 밑으로 누웠다. 경윤이 상반신을 세우더니 턱을 치켜들었다.
“아아, 좋아.”
한낮이어서 창문을 통해 햇살이 환하게 비치고 있었지만 아무도 상관하지 않았다. 경윤은 승마를 하듯이 천천히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늘 왜 이렇게 좋은지 모르겠어.”
신음과 함께 경윤이 띄엄띄엄 말을 뱉었다.
“너무 좋아, 자기야.”
조철봉은 다시 경윤이 절정으로 솟아오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약효는 이것으로 증명이 되었다. 여자의 성감도를 높여줌으로써 절정에 빨리 오르게 하는 것이다. 이쪽에는 거의 피해가 없다. 갑자기 경윤의 신음이 높아지더니 털썩 상반신이 엎어졌으므로 조철봉은 허리를 움켜쥐었다.
“이봐, 한거야?”
그러나 경윤은 대답하지 않고 몸을 늘어뜨렸다. 그 순간 조철봉은 눈을 부릅떴다. 이건 무엇인가? 이것도 복상사인가?
“이것봐, 일어나.”
경윤을 밀치고 일어선 조철봉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그러나 경윤은 벌거벗은 몸을 침대 위로 기묘하게 웅크린 채 움직이지 않았다. 조철봉은 경윤을 반듯하게 눕히고는 가슴에 손바닥을 대었다. 그러나 당황한 터라 오른쪽 젖가슴 위에 짚었다가 다시 왼쪽에 붙였다. 경윤의 가슴에서 박동이 잡혀지지 않았다.
“큰일났다.”
경윤은 숨도 쉬지 않고 있는 것이다. 자리를 차고 일어선 조철봉이 전화기를 손에 쥐었다가 내려놓았다. 우선 옷부터 입어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아, 이거.”
얼굴이 하얗게 굳어진 조철봉이 팬티를 찾아 꿰면서 혼잣소리를 했다. 그러고는 다시 경윤에게 다가가 어깨를 흔들었다.
“이봐, 이봐.”
그러고는 언뜻 영화에서 본 장면이 떠올랐으므로 가슴을 두 손바닥으로 누르기 시작했다. 10번쯤 누르고나서 경윤의 입에 대고 숨을 불어넣었다. 그러나 기대를 갖고 하는 행동은 아니다. 세번쯤 그렇게 반복하고나서 조철봉은 몸을 일으켰다.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돼 있는데다 이제 불안감으로 가슴이 터져나갈 것 같았던 것이다.
조철봉은 다시 전화기를 쥐었다. 그러고는 다이얼을 눌렀을 때였다. 뒤쪽에서 신음소리가 들렸으므로 조철봉은 소스라쳤다. 머리를 돌린 조철봉은 경윤의 늘어졌던 손이 침대 위에서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어.”
전화기를 내동댕이친 조철봉이 경윤에게로 덤벼들었다. 경윤이 눈을 뜨고 조철봉을 올려다 보았다.
“야, 깼어?”
“응?”
경윤이 무슨 말이냐는듯 가늘게 묻더니 어깨를 웅크렸다.
“아이구, 추워.”
조철봉이 시트를 당겨 경윤의 알몸을 덮었다.
“왜 그래?”
경윤이 덤벙대는 조철봉에게 물었다.
“나한테 무슨 일이 있었어?”
“니가 갔잖어?”
와락 말을 뱉었던 조철봉이 힐끗 경윤의 눈치를 보았다.
“홍콩에 말이야.”
“내가 아까 위에서 했던 건 기억이 나는데.”
경윤이 눈을 깜박이며 조철봉을 올려다 보았다.
“그후부터는 기억이 안나.”
“글쎄 홍콩에 갔다 왔다니까.”
“그럼 내가 기절한거야?”
눈을 크게 뜬 경윤이 시트로 가슴을 감으며 다시 물었다.
“하다가 기절했어?”
“그렇다니까?”
조철봉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것 하다가 기절해버리는 경우는 처음 당했다, 정말 황당하네.”
“내가 숨도 안쉬었어?”
“글쎄 죽은줄 알았다니까.”
조금 여유가 생긴 조철봉이 손을 뻗어 경윤의 샘에 넣었다.
“얼마나 좋았으면 하다가 그냥 가버리는 거야? 완전히 복상사하는 줄 알았네.”
“여자가 복상사를 해?”
경윤이 다리를 꼬아 조철봉의 손을 샘안에서 잡고 말했다.
“오늘 정말 좋았어. 자기야.”
“나도 좋은 경험했다.”
정색한 조철봉이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모두 네 덕분이야.”
앞으로는 세상없어도 흥분제는 사용하지 않을 것이다. 좋은 경험이다.
전주식당 오세은은 그날 이후로 일주일이 지나도록 연락이 없었고 조철봉 또한 전화도 걸지 않았다.
서경윤으로부터도 어떤 언질이 없었으므로 조철봉은 이렇게 시간이 지나가다 잊히는 것이라고까지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오세은에게 연락해서 만날 생각도 일어나지 않았다.
인연은 억지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인연은 아주 우연히 일어나며 그래야 오래 지속된다. 흘러가는대로 놔두는 것이 좋은 인연을 위한 방법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8일째가 되는 날 저녁무렵 최갑중이 찾아와 전주식당을 가자고 하는 바람에 둘 사이의 공백이 허물어졌다. 내막을 모르는 갑중이 전주식당 음식맛을 보고 싶다면서 조철봉을 데려간 것이다.
오세은은 조철봉과 갑중을 반갑게 맞았는데 아무일도 없었던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러고보면 그날 실제로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므로 조철봉도 금방 태연해졌다.
“오랜만에 뵙네요. 그동안 내부 수리도 하고 바빴어요.”
세은이 방으로 안내하며 조철봉에게 말했다.
“그러지 않아도 오늘쯤 전화를 드리려고 했는데.”
잠자코 세은의 검은 눈동자를 보면서 조철봉은 대답하지 않았다. 흥분제 2회분을 한꺼번에 먹고 해 달라면서 몸부림을 치던 여자같이 보이지 않았다.
그동안 베트남에 다녀온 갑중이 방에 둘이 남았을 때 은근한 시선으로 조철봉을 보았다.
“두 분의 분위기가 나아진 것 같은데요.”
“같이 호텔방에 갔었으니까.”
“역시.”
“하지만 안했다.”
“역시.”
“역시라니?”
이맛살을 찌푸린 조철봉이 갑중을 흘겨보았다.
“인마, 벗겨놓고 해달라고 사정하는데도 안했단 말이다.”
“그러니까 눈빛에 미련이 담겨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고는 갑중이 머리까지 끄덕였다.
“역시 형님은 남다른 곳이 있으신 분입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안하시다니.”
“야, 소름끼친다.”
조철봉이 입맛을 다셨지만 나쁜 기분은 아니다. 그러나 세은과 얽힌 사연은 갑중에게 말해주지 않았다. 흥분제를 사용한 것이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종업원 둘에게 상을 들린 세은이 다시 방으로 들어섰으므로 그들의 관심은 음식으로 돌려졌다. 세은은 조철봉의 옆에 앉아 시중을 들었는데 자연스러운 분위기였다.
“저녁 드시고 다른 약속 있으세요?”
게장을 찢어주면서 세은이 조철봉에게 물었을 때 갑중이 대신 대답했다.
“없습니다. 어디 술집이라도 갈 작정이었는데요.”
“그럼 제가 한잔 살게요.”
세은이 웃음띤 얼굴로 갑중을 보았다.
“좋은 곳 아시는데 있으세요?”
“그럼 나이트에 가시지요.”
흘끗 조철봉에게 시선을 준 갑중이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주 분위기가 좋은 곳이 있습니다.”
“어딘데요?”
“용궁 나이트클럽.”
“아, 이야기는 들었어요.”
세은의 얼굴이 밝아졌다. 용궁은 바로 조철봉의 단골 클럽이다. 잠자코 젓갈을 씹으면서 조철봉은 갑중의 말을 들었다.
“어쨌든 저는 그곳에서 한 건 올려야겠습니다. 저만 혼자 놀 수는 없으니까요.”
하긴 용궁만큼 자빠뜨리기 좋은 분위기의 클럽은 드물다. 여자들은 대부분 자빠질 준비들을 하고 오기 때문이다.
나이트라는 곳은 이제 만인의 사교하는 장소로 인정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0년전만 해도 이러지 않았다. 20년 전에는 그곳에 들락이는 남녀는 세균 덩어리 취급을 받았다. 작금은 인터넷에서 스와핑 동호회원을 모집하고 이혼이 전혀 부끄럽지 않은 세상이 되었다. 세상은 변한다. 미풍양속만 따지고 있다가는 소외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도 일어난다.
조철봉이 용궁에 처음 발을 디딘 것은 5년 전이었는데 그때와 비교해도 지금은 세상이 달라졌다. 자주 오면서 맞춰가는 사람들은 덜 느끼겠지만 오랜만에 오면 감동을 받게 된다. 이제 나이트는 사교의 장소로 당당하게 인정을 받게 되었다.
조명도 밝아졌고 손님들의 모습도 전과는 달라졌다. 어색하거나 멋쩍은 태도는 찾아볼 수가 없는 것이다. 조철봉이 용궁에 들어섰을 때는 저녁 9시반이었다. 9시반이면 조금 늦은 시간이었지만 예약을 해놓은 터라 조철봉은 이층의 룸으로 안내되었다. 물론 오세은과 최갑중이 동행이다.
“나만 신경쓰면 돼.”
자리에 앉자마자 갑중이 웨이터에게 말했다. 갑중도 안면이 있는 웨이터 100번은 경력이 20년인 노장이다.
“오늘밤 찐하게 노실 겁니까?”
100번이 정색하고 묻자 갑중의 표정도 진지해졌다.
“학생이 어떻게 되는데?”
“3학년이 두 명 있는데 오늘 2차가 가능합니다. 하지만 그쪽 테이블 술값은 내주셔야 되겠는데요.”
“그까짓.”
“양주 비싼 것으로 두병 마시고 있습니다.”
“그거 술꾼들 아냐?”
“아닙니다. 제가 보장합니다.”
“그리고 다른 학생은?”
“4학년이 서너팀 있는데 물이 좋습니다.”
“좋아, 그럼 선부터 보고.”
신바람이 난 갑중이 호기있게 말하더니 흘끗 조철봉을 보았다.
“저한테 신경쓰지 마시고 노십시오.”
“이놈이 물만난 개구리처럼 노는군.”
입맛을 다신 조철봉이 옆에 앉은 오세은의 어깨를 자연스럽게 감싸 안았다.
“어디 너 노는 꼴이나 보자.”
“방해는 하지 말아 주십시오.”
갑중이 정색했다.
“사장님하고 같이 와서 좋은 꼴 본 적이 별로 없습니다.”
그때 웃기만 하고 있던 세은이 불쑥 조철봉에게 물었다.
“자주 오시나 봐요.”
“가끔.”
조철봉이 웃음띤 얼굴로 세은을 보았다.
“이곳에 오면 활력이 느껴지지, 욕망을 대부분 드러내놓고 있으니까.”
“자극이 있어요?”
“물론이지.”
그때 100번이 방으로 들어서더니 곧 여자 둘이 따라 들어왔다. 얼핏 보기에도 세련된 차림의 미인들이다.
“자, 여기 앉으시지요.”
갑중이 서둘러 옆쪽 자리를 권했고 100번은 술잔에 술을 따라 여자들 앞에 놓느라 부산했다.
“혼자세요?”
여자 하나가 갑중에게 묻고도 흘끗 조철봉과 세은에게 시선을 주었다. 자기들은 둘인데 갑중 혼자냐고 묻는 것이다. 그때였다. 세은이 상반신을 세우더니 여자에게 말했다.
“아니, 여기 둘이에요. 저는 곧 갈 거니까 신경쓰지 마세요.”
“아니, 그런.”
당황한 갑중이 조철봉의 눈치를 보더니 100번에게 손을 저어 보였다. 여자들을 보내라는 신호였다.
“에이, 바꿔, 오늘 주빈이 누군데.”
여자들이 일제히 일어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찬바람을 일으키며 여자들이 방을 나갔을 때 세은이 먼저 이맛살을 찌푸렸다.
“왜 그러세요? 둘 다 괜찮은데.”
“아니, 그보다 나은 여자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렇게 말한 것은 100번이다. 100번이 주름진 얼굴을 펴고 웃었다.
“잘 보내셨습니다. 제가 다른 여자를 데려오지요.”
100번이 방을 나가자 조철봉이 웃음띤 얼굴로 세은을 보았다.
“곧 갈거라니 무슨 말이야? 그래서 갑중이나 100번이 놀란 것 아닌가? 가만 있었다면 둘이 잘 수습을 했을텐데.”
그러고는 조철봉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우리도 나가서 춤이나 추자구. 기분전환도 할겸.”
세은이 잠자코 따라 일어섰으므로 그들은 아래층 플로어로 내려왔다. 마침 플로어에서는 블루스곡이 연주되는 중이었고 10여 쌍의 남녀가 엉켜 돌아가고 있었는데 붐비지는 않았다. 세은의 허리에 팔을 두른 조철봉이 두어발짝 발을 떼고나서 말했다.
“잘 추는군.”
“거기도.”
세은이 바짝 몸을 붙이면서 웃었다. 두어발만 떼고나면 상대방의 실력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조철봉은 세은을 부드럽게 리드하여 플로어 안쪽으로 이동했다. 안쪽은 어두웠고 기둥이 있어서 외부의 시선이 닿지 않는 사각지대가 있는 것이다. 기둥 옆으로 왔을 때 세은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능숙하시네요.”
그순간 조철봉은 머리를 숙여 세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세은이 눈을 감으면서 몸을 붙여왔다. 그러고는 혀를 내밀어 조철봉의 입안을 휘저었다. 뜨거운 반응이었다. 조철봉은 기둥에 세은의 몸을 붙였다. 춤을 추던 한쌍이 다가왔다가 그들의 등을 스치고 사각지대를 빠져나갔다. 조철봉이 허리를 흔들자 철봉이 세은의 샘 주위를 문지르고 지나갔다.
“으음.”
조철봉의 허리를 당겨 안은 세은이 신음했다. 세은의 숨소리는 가팔랐고 뜨거웠다.
“못 참겠어.”
세은이 헐떡이며 말했을 때 조철봉이 다시 철봉으로 밀었다.
“이곳에서 해보는 것이 어때?”
“미쳤어” 했지만 세은이 조철봉의 철봉을 받아들이려는 듯이 두다리를 벌렸다. 조철봉이 철봉으로 세은의 하반신을 천천히 문질렀다.
“강한 쾌감을 얻게 될거야.”
“싫어, 방에서 해.”
“넌 그런 방법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것 같던데.”
“내가 왜?”
퍼뜩 눈을 치켜떴던 세은이 곧 철봉이 부딪쳐 왔으므로 다시 헐떡였다.
“다 젖었어.”
서경윤은 세은이 불감증 환자라고 했다. 고등학교 때 성폭행을 당해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전남편 하고도 성생활에 문제가 많았다고 했는데 지금 형편을 보면 정상인이나 같다. 지난번의 행태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방으로 가. 응?”
조철봉의 하반신에 몸을 딱 붙인 세은이 숨가쁘게 말했다.
“지난번처럼 사람 감질만 나게 하지 말고, 응?”
마침내 조철봉이 머리를 끄덕였다.
“좋아. 방으로 가자.”
방으로 돌아왔을 때 갑중은 보이지 않았다. 파트너를 만나 나간 것이 분명했다. 자리에 나란히 앉았을 때 세은이 먼저 조철봉의 철봉 위에 손을 얹었다. 환한 불빛을 받은 두눈이 번들거렸고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다.
“미치겠어.”
세은이 입술만 달싹이고 말했을 때 조철봉은 어깨를 당겨 입술을 붙였다. 기다렸다는 듯이 세은이 두 팔로 조철봉의 목을 감아 안으며 입을 벌렸다. 다시 세은의 젤리같이 달콤한 혀가 조철봉의 입 안으로 빨려 들어왔다. 세은의 호흡이 더 가빠졌고 몸은 더욱 밀착되었다. 그때 조철봉이 입술을 떼고 세은에게 속삭였다.
“섹스한 지 얼마나 되었어?”
“몰라.”
“말해봐, 참고로 할테니까.”
“뭘 참고로 해?”
세은이 몸을 비틀면서 말했을 때 조철봉은 스커트를 들치고 팬티 속으로 손을 넣었다. 그러자 곧 질퍽하게 젖은 세은의 샘과 만났다. 너무 젖어서 팬티는 이미 흥건했고 샘 주위까지 번져나와 있었다. 조철봉이 팬티를 벗겨 내었을 때 세은은 다리를 들어 벗겨 내는 것을 도왔다. 이미 두눈은 초점을 잃었고 호흡이 가빠져 제 정신이 아니었다.
“여기서 할까?”
조철봉이 묻자 세은은 대답대신 혁띠를 두손으로 푸느라 허둥대었다.
“좋아.”
마침내 조철봉은 앉은 채 바지를 벗어 내리고는 세은을 위에 앉혔다. 그 동안 세은이 조철봉의 목을 안은 채 몸을 맡겼는데 철봉이 샘 끝에 닿는 순간 움칫했다. 조철봉이 세은의 허리를 당겨 안으면서 낮게 말했다.
“네가 위에서 해야 되는거야, 알지?”
“몰라.”
세은의 대답이 간단했으므로 조철봉은 쓴웃음을 지었다. 조철봉은 철봉을 세은 샘 안으로 천천히 진입시켰다. 그러자 세은이 신음소리를 뱉으면서 두 손으로 조철봉의 어깨를 움켜 쥐었는데 어느덧 상반신이 굳어져 있었다. 조철봉은 세은의 허리를 당겨 안았다. 그것은 세은의 샘 안에 더 깊게 들어가려는 의도였다. 그순간 세은의 입에서 더 큰 신음이 터졌다. 그러나 세은은 조철봉의 어깨를 움켜쥔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봐, 움직여.”
조철봉이 세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네 샘은 기뻐서 철철 넘치고 있단 말이다. 어서 움직여 달라고 아우성을 치고 있단 말이야.”
그러고는 세은의 허리를 두 손으로 들어올렸다가 내려놓자 신음소리가 다시 일어났다. 그러나 아직 세은은 움직이지 않았다. 뚝 그친것 같았던 숨소리가 배나 가빠지면서 조철봉의 어깨를 움켜쥐고는 있었지만 샘은 대못이 박힌 것처럼 요지부동이다. 그때 조철봉이 다시 세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난 다 안단 말이다. 네 샘 주위의 모든 세포가 지금 좋아서 날뛰고 있단 말이야. 네가 억지로 움직이지 않고 있는 것을 저주하고 있다니까.”
“무서워.”
갑자기 세은이 훌쩍이며 말했으므로 조철봉이 다시 허리를 들어 올렸다가 내려놓았다. 그러자 세은이 신음을 뱉었고 샘 안의 세포가 수천마리의 거머리처럼 꿈틀거리며 반겼다.
“네가 움직여.”
조철봉이 차갑게 말하자 세은이 엉덩이를 들었다가 놓았다. 그러고는 신음을 길게 뱉더니 다시 엉덩이를 들었다. 어느덧 숨이 다시 가빠지고 있었다.
다시 엉덩이를 내려놓은 세은이 신음을 뱉더니 조철봉의 목을 두 팔로 감아 안았다.
“안되겠어.”
세은이 울음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움직일 수가 없어.”
“거짓말.”
세은의 허리를 움켜쥔 조철봉이 입술을 비틀었다.
“네 몸은 끓어오르고 있는데도 네 입은 거짓말만 늘어놓고 있어.”
“하지만 몸을 움직일 수가 없어.”
비명처럼 세은이 말했을 때였다. 문이 열리더니 갑중이 들어섰다.
“어이구, 형님.”
놀란 갑중이 엉겁결에 형님이라고 부르더니 엉거주춤 자리에 앉으려는 시늉을 했다. 갑중은 테이블 밑으로 가려진 조철봉과 세은의 하반신이 엉켜져 있는것을 아직 모른다. 그러나 방안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눈치 채고는 조철봉을 보았다. 그때였다. 세은은 문을 등지고 조철봉의 다리위에 앉아 있었는데 갑자기 엉덩이를 들었다가 놓는 것이었다.
“어어.”
놀란 탄성은 갑중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세은이 엉덩이를 드는 서슬에 하반신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형님, 그럼 저는 나갔다가 오겠습니다.”
갑중이 서둘러 말했을 때 세은이 다시 엉덩이를 들었다 내려놓으면서 이번에는 신음을 뱉어내었다. 그때 조철봉이 손을 흔들며 갑중에게 말했다.
“괜찮아, 여기 있어도 된다.”
“하지만 형님.”
“다 아는 사이에 괜찮다니까.”
그 사이에도 세은은 세번이나 엉덩이를 움직였고 신음은 더 높아졌다. 조철봉이 갑중을 향해 한쪽 눈을 감았다가 떴다.
“끝날 때까지 여기 앉아 있어라.”
“아니, 형님, 형님이야 괜찮으실지 모르지만 저쪽은.”
“아니 오히려 이쪽이 더 바라는 것 같다.”
그 사이에 세은의 움직임은 더 격렬해졌다. 상반신을 들어올리는 폭이 커졌으며 부딪치는 강도도 더 거칠어졌다.
“아아, 좋아.”
신음같은 탄성과 함께 세은이 소리쳤다. 그때서야 갑중이 눈치를 채고는 번들거리는 눈으로 세은의 뒷모습을 보았다. 갑중은 테이블 건너편에서 세은의 등을 바라보며 앉아 있는 것이다.
“그렇군요. 이제 알겠습니다.”
“아아, 미치겠어.”
세은의 흥분은 더 고조되었다. 움직임도 더 커졌고 신음도 높아졌다. 소리치듯 말한 세은이 격렬하게 몸을 흔들었을 때 갑중이 감탄한듯 말했다.
“오늘 진짜루다가 좋은 구경을 하게 되었습니다. 형님.”
그순간 세은이 절정에 올랐다. 샘이 수축되면서 몸이 경직되기 시작했으므로 입을 딱 벌린 채 경련이 일어났다.
“홍콩으로 가신 모양이군요. 형님.”
세은의 뒷모습을 노려본 채 갑중이 말했을 때 조철봉은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갑중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세은은 엉덩이를 더이상 들지도 않았을지도 몰랐다. 그렇다고 체위를 바꿔 이쪽에서 했다고 해도 세은이 호흡을 맞춰 주었을지 알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요행히 갑중이 들어온 순간부터 세은의 성감은 정상으로 되돌아왔다. 노출증인지 또는 전에 겪은 경험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갑중이 등 뒤에서 중얼거릴수록 세은은 더 흥분했다. 조철봉은 품에 안긴 채 늘어져있는 세은을 내려다 보고는 머리를 들었다. 그러고는 갑중과 시선이 마주치자 차갑게 말했다.
“너, 이제 나가봐.”
갑중이 다시 방을 나갔을 때 조철봉은 늘어진 채 숨만 몰아쉬고 있는 세은의 몸을 추슬러 세웠다.
“그만 일어나.”
“으응.”
가늘게 신음을 뱉고난 세은이 머리를 들고 조철봉을 보았다.
“나 기운이 하나도 없어.”
“그럼 눕혀줄테니까.”
세은을 들어 옆자리에 눕힌 조철봉은 차분하게 옷을 입었다. 그러고는 물수건으로 세은의 하반신을 닦아 주었다. 소파에 길게 누운 세은은 조철봉이 몸을 닦아주자 눈을 조금 떴다가 다시 감았다.
세은이 눈을 뜬 것은 그로부터 10분쯤이 지난 후였는데 그동안 조철봉은 양주를 두잔 마셨다.
그러나 아직 갑중은 돌아오지 않았다. 방에서 열을 받고 나갔으니 다른 곳에서 일을 저지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 아까 처음으로 했어.”
상반신을 세운 세은이 수줍은 시선으로 조철봉을 보며 말했다.
“난생 처음이야.”
“처음 좋아하네.”
조철봉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네 샘에 들어가 보니까 마치 설악산 바위처럼 여러명 이름이 써 있더만 그래.”
“웃겨.”
풀썩 웃은 세은이 눈을 흘겼다.
“내 그곳에 들어온 사람도 지금까지 다섯명 미만이야.”
“일주일에 다섯명이라면 믿지.”
“정말이야.”
정색한 세은이 조철봉의 팔을 잡아 당겼는데 애교가 넘쳤다.
“난 한번도 절정에 올라본 적이 없어.”
그러고는 세은이 조철봉의 옆에 바짝 붙어 앉았다.
“아까는 정말 좋았어. 죽는줄 알았어.”
“네가 어떻게 해야 절정에 오른다는 건 알았다.”
조철봉이 말하자 갑자기 세은의 눈 주위가 붉어졌다. 세은이 눈을 크게 뜨고 조철봉을 보았다.
“나, 변태야?”
“변태라고까지는.”
“갑자기 그 사람이 방안에 들어왔을 때 굳어졌던 몸이 풀렸어.”
“그것 참 신기하군.”
“나도 그래.”
“그럼 앞으로 저놈 데리고 다녀야겠다.”
“미쳤어” 했지만 세은이 손을 뻗어 조철봉의 바지 위를 손바닥으로 쓸었다.
“난 남편하고 한번도 절정에 올라보지 못했어. 삽입만 되면 몸이 굳어져 버리는 통에.”
“글쎄, 샘은 철철 넘쳐나고 있던데 몸이 움직여지지 않는단 말이야?”
“그렇다니까.”
길게 한숨을 뱉은 세은이 상기된 얼굴로 조철봉을 보았다.
“몸이 굳어지면서 자연히 샘도 말라버리는거야.”
“그렇다면 넌 섹스할 때 셋이 필요하군.”
조철봉이 머리를 끄덕였다.
“이제 알게 되었으니까 돈 싸들고 남자 둘씩 사서 하면 되겠다.”
“시끄러.”
눈을 치켜뜬 세은이 바지 위로 철봉을 잡았으므로 조철봉의 몸이 오그라졌다.
“이제 내가 어떻게 하면 절정에 오르는 줄 알았으니까 앞으로 자기가 책임져.”
“얼씨구.”
“난 자기만 쫓아다닐테니까.”
세은이 이렇게 된 것은 성폭행을 당한 것이 원인일 것이다. 서경윤 덕분에 조철봉이 알게는 되었지만 이런 방법으로 절정에 오를 줄은 전혀 우연이었다. 백날 연구해서 될 일도 아니었다.
다음날 오전 10시경에 세은은 경윤의 전화를 받았다. 물론 상황이 궁금했기 때문이지만 경윤은 세은에게 조철봉을 소개시켜준 당사자다. 세은이 조철봉과 나이트를 간다고 보고까지 해준 터라 그 결과를 물어볼 만했다.
“어젯밤 어떻게 되었어?”
경윤이 대뜸 물었을 때 세은은 준비하고 있었던 것처럼 금방 대답했다.
“그저 그랬어.”
“나이트가?”
“응.”
“그냥 나이트에서 놀았니?”
“그럼.”
“에이, 시시해.”
그러고는 경윤이 혀까지 찼다.
“나이트까지 갔으면 당연히 2차로 옮겨야 정상 아냐?”
“그럴 필요도 없었어.”
“왜?”
“진이 다 빠져서.”
“에이, 내가 다 김이 빠진다. 얘.”
했지만 경윤의 말투는 밝다. 본인은 가라앉히려고 노력했겠지만 저도 모르게 밝아진 것이다. 그러자 세은이 말을 이었다.
“어쨌든 고맙다, 경윤아. 신경써줘서.”
“그럼 그 사람 앞으로 안 만날거야?”
“봐서.”
세은의 말투가 내용과는 다르게 밝았으므로 경윤의 가슴은 가벼워졌다. 경윤에게 조철봉이란 존재는 들고 있자니 불편하고 버리자니 아까운 존재인 것이다. 그때 세은이 힘들게 말했다.
“나, 피곤해. 이만 전화 끊어.”
“어, 그래.”
측은해진 경윤이 얼른 전화를 끊었지만 세은의 말을 제멋대로 해석했을 뿐이다. 세은이 진이 다 빠졌다고 한 것을 김이 빠졌다고 들었다. 방에서 난생 처음으로 홍콩에 갔기 때문에 진이 빠졌다고 한 것이다. 그리고 세은은 경윤이 조철봉을 소개시켜 주었지만 버리자니 아까운 존재라는 것을 안다.
따라서 세은은 오늘부터 경윤과 철저하게 벽을 쌓고 지내게 될 것이었다. 그 예로 경윤이 명랑한 기분으로 청소기 코드를 꽂았을 때 세은은 조철봉에게 전화를 했다. 금방 경윤에게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피곤하다고 할 때와는 전혀 다른 맑고 높은 목소리였다.
“자기야? 나예요.”
우선 그렇게 부르고나서 조철봉이 우물쭈물하자 금방 말을 이었다.
“저기, 조금 전에 경윤이한테서 전화가 왔는데 날더러 어젯밤 어떻게 되었느냐고 묻는 거 있지?”
“그래서?”
겨우 호흡을 맞춘 조철봉이 묻자 세은이 먼저 큭큭 웃었다.
“그래서 별일 없었다고 했더니 되게 좋아하는 거 있지? 그 기집애 심보가 그래. 그러니까 자기도 걔가 물으면 그렇게 대답해. 알았지?”
“응. 알았어.”
조철봉의 얼굴에도 웃음이 떠올랐다.
“네 앞에서는 철봉이 일어나지도 않았다고 할게.”
“어머, 그러면 안돼.”
놀란듯 세은의 목소리가 굳어졌다.
“섰는데 내가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고 하는게 나아.”
“제기, 내 철봉만 미안하게 만드는군.”
“그렇게 해야 돼, 알았지?”
“알았어.”
전화를 내려놓은 조철봉은 어깨를 들썩이며 소리없이 웃었다. 곡절은 있었지만 이것도 해피엔드다. 사연이 길어지면 꼭 비극이 된다. 그러니 적당한 시기에 조절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 글 이원호
(623)첫사랑-1
유유상종이란 말이 있듯이 같은 종류끼리는 서로 왕래하며 사귀게 된다. 따라서 사귀는 친구를 보면 그 인간의 수준을 대충 알 수 있다. 어렸을 적 소꿉친구라고 다 친구로 끝까지 남는 경우도 드문 것이 세파에 시달리면서 환경이 달라지면 그 조건에 따라 흩어지게 된다. 환경이 달라지면 왕래가 뜸해지게 마련이며 결국은 헤어져야 정상이다.
조철봉은 어렸을 적 소꿉친구 서너명이 시골에서 상경하자 모처럼 생색을 내며 룸살롱으로 데려가 2차까지 보내준 적이 있다. 그런데 웃기는 것은 놈들이 오입까지 해놓고서 뒷소리를 하는 것이었다.
아가씨 한명의 팁만 가지고도 실컷 배부르게 마실 수 있었는데 조철봉이 허세를 부렸다는둥 낭비를 했다는둥 하는 뒷소리가 들려왔다. 그렇다면 놈들의 분위기에 맞춰서 시장통의 시끌벅적한 식당에 가서 냄새를 뒤집어 쓰면서 술을 마시라는 말인가?
겸손할 것이 따로 있지 내가 술 산다는데 룸살롱에 가면 어떻단 말인가? 그렇게 해서 조철봉과 시골 소꿉친구들의 관계는 소원해졌다.
그런데 오늘 조철봉에게 찾아온 친구는 초등학교 동창으로 졸업한지 20년만에 처음 만나는 입장이라 형편을 모른다.
갑자기 오전에 전화를 받고나서 어디에다 알아볼 새도 없이 찾아왔기 때문에 조철봉은 조금 꺼림칙했다. 대부분 이런 경우의 동창은 뭔가 부탁하는 경우였기 때문이다.
“나, 중학교때 이민갔었어.”
소파에 마주보고 앉았을 때 김영우가 먼저 입을 열었다. 김영우는 조철봉과 단짝이었다.
“지금 결혼해서 LA에서 살고 있는데 난 치과의사야.”
“어, 그래?”
조철봉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치과의사라면 미국에서도 연봉이 가장 많은 계층이라는 것은 알고 있기 때문이다.
“너 출세했구나. 미국에서 치과의사가 되다니.”
“나보다도 네가 더 출세했구먼 그래.”
영우가 사무실을 둘러보는 시늉을 하고는 흰 얼굴을 펴고 웃었다.
“미국에 한번 놀러오면 내 골프장에서 골프는 실컷 치게 해줄게.”
“뭐? 네 골프장이 있어?”
“그래, 호텔도 있어.”
번쩍이는 금딱지 롤렉스를 찬 팔을 들어 머리를 쓸어올리면서 영우가 정색하고 말했다.
“난 부동산 투자나 해볼까 하고 한국에 와본거야. 네가 좋은 물건 있으면 소개해줄래?”
“좋은 물건이라.”
눈을 가늘게 뜬 조철봉이 영우를 보았다. 흥미를 느끼는 표정이었다.
“얼마 정도나 투자할건데?”
“5백만불정도는 당장이라도 되고, 물건이 좋다면 1천만불까지는 만들 수 있어.”
“으음.”
조철봉이 감탄한듯 눈을 가늘게 뜬 채 머리를 끄덕였다.
“너, 돈깨나 벌었구나.”
“아버지한테서 받은 유산이 대부분이야. 아버지가 골프장을 세웠거든.”
“그런가?”
“호텔하고 골프장은 전문 경영인이 맡아서 관리하고 나는 따로 치과병원을 하고 있어.”
“대단하구먼.”
“난 엠파이어호텔 특실에 있는데….”
영우가 롤렉스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약속이 있어서 가봐야겠다. 저녁때 시간 있으면 식사나 같이 할까?”
“그러지 뭐.”
조철봉이 서슴없이 대답했다.
세상 물정을 모르는 것은 김영우였다.
한국 물정을 모른다고 해야 될 것이다. 영우가 방을 나갔을 때 조철봉은 즉각 최갑중을 시켜 뒷조사를 의뢰했다. 지금은 LA가 아니라 바그다드에서 살고 있다고 해도 몇시간이면 뒷조사가 끝난다.
LA에 있는 대리인에게 조사비를 송금하면 하루에 맥주를 몇병 마시는 것까지 보고가 되는 세상이다. 갑중이 팩스로 보내온 자료 앞에 조철봉이 앉았을 때는 오후 4시였다.
“조사비로 2천불 들었습니다.”
갑중이 불편한 기색으로 말하며 자료를 조철봉 앞에 내려놓았다.
“사기꾼입니다.”
조철봉은 잠자코 자료를 읽었다. 갑중이 한마디로 표현한 것처럼 김영우는 사기꾼이었다. 한마디 더 추가한다면 저질 사기꾼이었다. 영우는 치과대학은커녕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나서 차량 절도에서부터 마약밀수까지 저지른 전과 4범이었고 6년을 연방교도소에 수감되었다가 3년전에 출옥했다. 그러고나서 골프장 청소부, 호텔 주차장 관리인, 치과병원 경비원 등의 직업을 전전하다가 한국에 온 것이다. 이윽고 자료를 내려놓은 조철봉이 눈을 가늘게 뜨고 벽을 보았다.
“초등학교 때는 얌전한 놈이었는데. 말도 없고 내성적인 것 같았는데….”
“저도 초등학교 땐 별명이 순둥이였지요.”
갑중이 입끝을 비틀며 말했다.
“어쨌든 이놈은 한탕하러 서울에 온 겁니다. 그리고 이놈도 나름대로 형님 뒷조사를 했겠지요. 그러니까 덥석 형님한테 온 것이 아닙니까?”
“쥐새끼 같은 놈.”
“임자를 제대로 만난 것이 되겠습니다.”
정색한 갑중이 조철봉을 보았다.
“아예 껍질을 다 벗겨버리지요.”
“이놈이 하필 나한테 찾아온 것이 불쾌하구먼. 내가 목표가 된 것이 말이야.”
“동창중에서 형님이 제일 성공했다는 소문이 났기 때문이겠지요.”
“그래서 미국에서까지 원정을 왔단 말이냐?”
쏘아붙였던 조철봉이 생각난듯 자료에 시선을 주고 말했다.
“엠파이어호텔 특실이면 하루 숙박비만 1백만원이 넘는 방인데 이놈이 사기를 치려고 무리를 하는구먼.”
“오늘 같이 가보시지요.”
갑중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배울 점이 있으면 배우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서 오후 7시가 되었을 때 조철봉은 갑중과 함께 엠파이어호텔 특실로 들어섰다.
“아, 어서 와.”
실크셔츠 차림으로 조철봉을 맞는 영우의 얼굴에는 여유있는 웃음기가 떠올라 있었다.
“이쪽은 우리 회사 전무야.”
넓고 화려한 특실 응접실로 안내되었을때 조철봉이 갑중을 소개했다.
“아직 경험이 모자라니까 많이 가르쳐 주십시오.”
명함을 내밀며 갑중이 정중하게 인사하자 영우가 활짝 웃었다.
“오히려 제가 부족합니다. 어쨌든 잘 오셨습니다.”
소파에 셋이 앉았을 때 영우가 생각났다는 듯이 조철봉에게 말했다.
“조금전에 국무총리 비서실장한테서 전화가 왔어. 너, 알지? 김일규 실장.”
“모르겠는데.”
“올해 초에 총리가 미국 들렀잖아. 그때 우리 골프장에서 공 쳤거든. 그래서 내가 왔다는 말을 듣고 전화를 해온거야.”
그러자 갑중이 감탄한 표정으로 영우를 보았다.
아이고, 그러십니까? 그렇다면 국무총리도 잘 알고 계시겠군요?”
“잘 알기는요, 뭘. 그저 얼굴과 이름만 아는 사이지요.”
그러고는 영우가 정색하고 조철봉을 보았다.
“내가 이번에 온 건 청와대 수석으로 있는 내 와이프 사촌오빠가 오라고 했기 때문이야.”
“뭐? 청와대 수석?”
이번에는 조철봉이 놀란듯 눈을 크게 떴을 때 영우가 머리를 끄덕였다.
“너, 경제수석 유동택씨 알지?”하고 물었지만 조철봉은 머리만 비틀었고 갑중이 대신 대답했다.
“예, 압니다. 그분이 친척되십니까?”
“와이프 사촌오빠요. 그 양반이 나한테 신세 좀 졌지. 미국에서 빌빌거릴 때 내가 생활비를 다 댔으니까.”
그러자 조철봉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뭐때문에 오라고 한거야?”
“아침에 너한테 말한 투자문제로.”
그러고는 영우가 빙긋 웃었다.
“그이상은 말하기 곤란하이.”
뜸을 들이려는 수작이었고 그것을 조철봉과 갑중은 두르르 꿰고 있었지만 똑같이 아쉬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저녁을 먹으려고 아래층 일식당에 내려갔을때 영우의 쇼는 절정을 이루었다. 방에 들어가 주문을 하고 나자 영우의 휴대전화가 울린 것이다. 전화를 귀에 붙인 영우가 앞에 앉은 조철봉을 향해 한쪽 눈을 감아보였다.
“아, 형님, 접니다.”
영우가 정색하고 말했다.
“지금 청와대 계시다고요? 아아, 예.”
그러고는 몇번 대답을 하더니 휴대전화 덮개를 닫았다.
“대통령하고 저녁 약속이 있다는군. 내일 점심때 보자는 거야.”
“경제수석님이십니까?”
갑중이 존경스러운 표정으로 묻자 영우는 머리를 끄덕였다.
“박사학위 받고도 빌빌거리던 양반이 출세했지.”
“그런데 그분이 너한테 뭘 해주겠다는 거냐?”
조철봉이 궁금해서 미치겠다는 표정을 짓고 묻자 영우가 시치미를 떼었다.
“해주기는 뭘, 요즘이 어떤 세상인데.”
“야, 답답하다. 내가 입 다물고 있을테니까 말해봐.”
“별거 아냐. 나중에 일 끝나면 말해줄게. 오랜만이니까 우리 술이나 한잔 하자.”
“글쎄 술은 내가 살테니까.”
정색한 조철봉이 영우를 보았다.
“경제수석이면 일국의 경제지도를 훤하게 내다보는 사람이야. 사람 하나 부자 만드는 건 쉬운 일이라고. 그렇지 않냐?”
“그럼요.”
갑중이 맞장구를 쳤다.
“하다못해 신도시개발 정보만 받아도 수천억을 벌어들일 수가 있지요.”
“너도 돈좀 벌었다는 소문이 났던데 과연 보통이 넘는구먼.”
마침내 쓴웃음을 지은 영우가 조철봉을 보았다.
“대충 감을 잡고 있는 모양인데, 맞아. 내가 아침에 말한 부동산 때문이야.”
“그러면 그렇지.”
조철봉이 얼굴을 펴고 웃었다.
“네가 미국에서 그냥 왔을리가 없다고 생각했어. 나한테 부동산 정보나 얻으려고 온 놈이 아니었어.”
“나아 참.”
쓴웃음을 지은 영우가 의자에 등을 붙였다.
“이거 어쩌다보니 말려들었구먼.”
그러자 조철봉와 갑중이 동시에 빙긋 웃었다.
마지못한 척하면서 끌려가는 경우는 사기꾼들이 가장 좋아하는 방법중의 하나였지만 고도의 조작이 필요한 것이다. 조철봉은 물론이고 갑중도 영우의 다음 수작이 궁금한 모양인지 눈을 빛내고 있었다. 그때 문밖에서 인기척이 들리더니 가벼운 노크소리가 울렸다.
“아아, 참.”
영우가 생각났다는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서며 조철봉을 보았다.
“너, 윤지나 알지? 우리보다 2학년 아래였던 애.”
그 순간 조철봉의 얼굴이 굳어졌고 영우는 몸을 돌리면서 말했다.
“걔, 오라고 했다.”
그러고는 영우가 문을 열더니 반갑게 말했다.
“어서 들어와, 철봉이 와있어.”
조철봉이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방안으로 여자 하나가 들어섰다. 따라 일어선 갑중은 마치 흰 백합꽃으로 방안이 가득 차버린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만큼 분위기가 화사하면서도 깨끗했기 때문이다.
“철봉오빠.”
하면서 여자가 배시시 웃었을 때 조철봉의 표정은 아직 풀리지 않았다.
“어, 오랜만인데.”
우물거리며 말한 조철봉의 시선은 여자와 부딪치지 않았다. 당황한 것이다.
“자, 앉지.”
영우가 지나를 자신과 조철봉의 사이에다 앉게 하더니 웃음띤 얼굴로 말했다.
“철봉이가 놀란 모양인데.”
“오빠 오랜만이네요.”
지나가 조철봉에게 다시 인사를 했을 때 갑중은 저도 모르게 이맛살을 찌푸렸다. 조철봉의 기색이 정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불안정했고 뭔가에 쫓기는 것 같은 분위기까지 느껴졌다. 그때 영우가 지나에게 갑중을 소개했다.
“이쪽은 철봉이 회사 전무로 계신 최갑중씨고.”
“처음 뵙습니다.”
갑중이 앉은 채로 인사를 하자 지나는 환하게 웃으며 답례했다.
“윤지나예요. 여기 계신 철봉오빠, 영우오빠하고 초등학교 동창입니다.”
“철봉이 첫사랑이지.”
영우가 불쑥 말을 받았을 때 갑중이 저절로 머리를 돌려 조철봉을 보았다. 그때 조철봉이 쓴웃음을 지었지만 눈 밑이 붉어져 있는 것을 갑중은 보았다.
“영우오빠는 참.”
지나가 웃음띤 얼굴로 영우에게 눈을 흘겨보였다.
“그때 우리가 뭘 알았다고 그런 이야기를 해요?”
“아냐, 난 철봉이한테서 직접 들었어.”
영우가 정색하고 말했다.
“철봉이가 널 얼마나 좋아했다구.”
“그런데.”
조철봉이 마침내 어색한 분위기를 깨뜨려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듯 지나를 보았다.
“그동안 어디 있었어?”
“참, 오빠는 모르고 계셨구나.”
정색한 지나의 얼굴은 전혀 다르게 변했다. 눈빛이 더 강해졌고 엷은 듯한 입술은 딱 닫혀져서 균형잡힌 얼굴이 더욱 돋보였다. 미인이다. 그것도 조철봉의 기호에 딱 맞는 용모였다. 소리죽여 숨을 뱉은 갑중의 시선이 조철봉에게로 옮겨졌다. 조철봉은 지금까지 첫사랑인 윤지나를 기준으로 여자를 선택해온 것이다.
그때 윤지나의 말이 이어졌다.
“난 미국에 있어요. 뉴욕에, 이번에 영우오빠하고 같이 왔어요.”
“그랬군.”
조철봉이 머리를 끄덕였을 때 갑중은 그의 어깨가 몇센티는 내려가 있는 것을 보았다. 그렇다면 윤지나는 영우와 한팀인 것이다
갑중은 여러번 조철봉의 눈치를 보았지만 한번도 시선이 마주치지 않았다. 음식이 들어오자 영우와 지나가 번갈아 떠들면서 분위기를 돋웠으나 조철봉은 다섯마디에 한마디 정도만 입을 열었고 갑중은 그 반도 안되었다.
조철봉의 그런 태도가 영우와 지나에게는 어색해서 그런 탓으로 보였을 것이었다. 지나가 묻지도 않았는데 신상 이야기를 꺼냈다.
“오빠, 난 뉴욕에서 슈퍼마켓을 하고 있어요. 이번에 집안일 때문에 온거야.”
“슈퍼마켓이 백화점 수준이지.”
영우가 거들었다.
“지나도 뉴욕에서 성공한 한국인 사업가야.”
“허어, 그래?”
감탄한듯 조철봉이 눈을 크게 떴을때 갑중은 어깨를 늘어뜨리며 길게 숨을 뱉었다. 그때서야 조철봉이 정상으로 회복된 것 같았기 때문이다. 조철봉의 표정을 본 영우가 말을 이었다.
“거기에다 맨해튼에서 유명한 한식당을 경영하고 있어. 뉴욕시장이 한식당 단골손님이야.”
“대단하구먼.”
조철봉이 머리를 끄덕이며 지나를 보았다.
“그럼 네 남편은 지금 뉴욕에 있겠구나?”
그러자 영우가 소리내어 웃었다.
“지나는 지금 혼자야. 이혼하고 혼자 산다.”
“아, 그래?”
“그동안 연락 한번 없었으니까 당연한 일이죠.”
지나가 웃음띤 얼굴로 말했다.
“어쨌든 철봉오빠, 만나서 반가워요. 오빠가 잘 되었다는 소문은 이곳에 와서 영우오빠한테 들었어요.”
“잘 되기는 뭘. 아직 조그만 중소기업 수준인데.”
“한국에 실버타운에다 자동차 판매주식회사, 거기에 중국의 공장에다 사업체, 그리고 베트남에도 운송회사를 차리셨다면서요?”
“허어, 자세하게 조사했네.”
“동창들한테도 소문이 다 나있던데요, 뭘.”
그때 갑중이 갑자기 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내더니 두손으로 지나에게 내밀었다.
“제가 인사가 늦었습니다. 여기 제 명함입니다.”
“고맙습니다.”
갑중의 명함을 받은 지나가 머리를 갸웃거리며 웃었다.
“죄송해요, 저도 명함을 드려야 하는데 준비해오지 않았거든요.”
“아니, 괜찮습니다.”
그때 조철봉이 다시 지나에게 물었다.
“그럼 이번에 한국에 온건 집안일 때문인가?”
“네, 그런데 영우오빠가 투자할 곳이 있으면 같이 해보자고 해서.”
지나가 힐끗 영우에게 시선을 주고는 이맛살을 찌푸려보였다.
“저 오빠는 요즘 잘 나가는 것 같아요. 와이프 오빠가 청와대 수석이라고 미국 동포사회에 소문이 쫙 났어요.”
“내가 이래서 동창들을 만나지 않는다니까.”
이맛살을 찌푸린 영우가 혀까지 찼다.
“나는 가만 있는데 주위에서 떠들어 대거든. 난 경제수석 이야기는 오늘 처음으로 철봉이한테 했단 말이야.”
“소문이란 다 그런거죠. 한국 사회에서는 금방 퍼져나가요.”
지나가 정색하고 말하더니 조철봉을 보았다.
“오빠, 영우오빠가 한건 잡으면 우리셋이 같이 투자해요. 나도 5, 6백만불쯤은 투자할 수가 있으니까요.”
지나의 눈빛이 요염하게 번들거렸다.
“좋아.”
머리를 끄덕인 조철봉이 지나의 눈을 똑바로 보았다.
“지나가 한다면 나도 하지.”
“흥 너희들 마음대로?”
영우가 눈을 치켜뜨고는 조철봉과 지나를 흘겨보는 시늉을 했다.
“20년만에 만나 30분도 안되어서 서로 호흡이 맞는 모양이구나.”
“야, 말은 그렇지만 우리가 널 믿고 뛰는 것 아니냐?”
조철봉이 얼른 영우에게 아부를 했다.
“삐치지 마. 네가 하라는 대로 할게.”
“신중해야 돼.”
금방 정색한 영우가 목소리를 낮췄다.
“그리고 비밀을 지켜야 되고, 잘못되면 우리 사업뿐만 아니라 청와대 유수석 입장이 곤란해져.”
“우리가 어린애냐? 걱정하지 마.”
머리를 끄덕인 조철봉이 술잔을 들었다.
“자, 건배다. 우리 사업을 위해서”
“나는, 만남을 위해서”하면서 지나가 술잔을 들었으므로 영우가 피식 웃었다.
“역시 여자는 아무리 사업가로 출세해도 어딘가 다르다니까.”
“영우 오빠는 아직도 한국식이야. 난 사업은 사업이고 로맨스는 로맨스라구.”
양주를 두잔밖에 마시지 않았는데도 얼굴이 달아오른 지나가 영우를 쏘아보았다.
“난 벌만큼 벌었어. 그래서 큰 욕심없어.”
“얼씨구.”
영우가 눈을 크게 떠보였을 때 지나가 머리를 돌려 조철봉을 보았다.
“오빠도 꽤 벌었지?”
“뭐, 그저.”
“이번에 얼마나 투자할 수 있어?”
“글쎄.”
조철봉이 옆쪽에 앉은 갑중을 보았다.
“최전무, 투자 여유가 얼마나 될까?”
“글쎄요.”
이맛살을 찌푸린 갑중이 머리를 기울이더니 정색하고 말했다.
“2백억쯤은 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순간 영우의 콧구멍이 벌름거렸고 지나의 꾹 닫친 입술 끝이 아주 미세하게 떨렸지만 조철봉은 다 보았다.
영우가 먼저 입을 뗀 것은 지나보다는 감정조절에 자신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좋아. 그렇다면 내일 청와대에 들어가서 투자 규모를 조정해야겠군.”
“그래? 너희들 규모는 얼마나 되는데?”
조철봉이 정색하고 묻자 지나가 먼저 대답했다.
“난 아까 5, 6백만불이라고 했는데 손을 쓰면 1백억 정도까지는 돼, 오빠.”
“난 150억에서 2백억 정도야. 그러면 모두 450억에서 5백억대 투자 규모를 정해야겠다.”
술잔을 옆으로 밀어놓은 영우가 굳어진 얼굴로 조철봉을 보았다.
“신도시 정보를 얻어서 바로 투자하면 투자한 자금의 몇십배는 먹는다. 지금 한국에서 재벌 소리를 듣는 놈들은 모두 부동산 투자로 돈 번 것이라고 들었어. 그렇지 않아?”
“그렇지.”
“이번에는 우리한테 기회가 온거다.”
“다 네 덕분이지.”
조철봉이 다시 영우를 추켜세웠다.
“너만 믿는다.”
“오빠, 나 술 한잔 줘.”
지나가 술잔을 내밀었으므로 말을 그친 조철봉이 술병을 들었다.
“돈 이야기만 하니까 재미없어. 나하고도 이야기좀 해.”
“그러지”했지만 조철봉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자 영우가 지나를 나무랐다.
“야, 너희들은 나중에 시간을 따로 내.”
조철봉이 식당에서 나왔을 때는 밤 11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오빠 전 하이트호텔에서 묵고 있어요.”
지나가 식당앞에서 조철봉에게 악수를 청하면서 말했다.
“시간있으면 연락해요.”
“야, 내가 듣지 않는 곳에서 말해라.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줘야 하는 것 아녀?”하면서 영우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정말 노골적으로 노는구먼, 그래.”
“내가 데려다주지.”
조철봉이 말하자 갑중이 서둘러 주차장에 대기시켜 놓은 차를 불렀다. 물론 오늘은 기사가 딸린 벤츠600을 끌고 온 것이다. 차가 현관 앞에 서있는 그들앞에 멈춰서자 영우가 조철봉의 어깨를 가볍게 쳤다.
“그럼 내일 저녁때 보자.”
“응, 그래.”
머리를 끄덕인 조철봉은 뒷좌석에 지나를 태우고 옆에 올랐다. 갑중은 운전석 옆자리에 탔다. 하이트호텔도 역시 특급호텔이다. 차로 5분거리밖에 안되었으므로 큰길로 들어서자마자 앞쪽에 불을 환하게 밝힌 하이트호텔이 보였다.
“오빠, 정말 반가워.”
지나가 낮게 말했다.
“오빠 생각은 자주 했지만 이번에 만날 줄은 전혀 예상도 하지 못했어.”
“그랬어?”
“응, 여기 와서야 오빠 소문을 듣게 되었어. 미국에서는 동창들하고 연락을 못했거든.”
“그랬구나.”
그때 지나가 슬쩍 손을 뻗쳐 조철봉의 손을 잡았다.
“오빠도 혼자 산다면서?”
“그 소문도 들었어?”
“그럼.”
지나의 손에 힘이 실렸다.
“오빠, 내 방에서 커피 한잔 마시고 가지 않을래?”
“응, 그런데….”
조철봉이 지나의 손을 힘주어 잡고는 턱으로 앞에 앉은 갑중의 뒤통수를 가리켰다. 거북하다는 표시였다.
“일이 조금 있어서.”
“응, 그래.”
지나가 이해한다는 듯이 가볍게 말을 받더니 다시 조철봉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그때 벌써 차는 하이트호텔의 현관 앞에 멈춰섰다. 갑중이 먼저 차에서 내렸으므로 조철봉은 지나의 어깨를 껴안고 현관 앞쪽으로 갔다.
“내가 내일 전화할게.”
조철봉이 서두르듯 말했다.
“지금은 조금 거북해서 그런다.”
“오빠는 참….”
눈웃음을 친 지나가 몸을 바짝 붙였다.
“그럼 이따 저 사람 보내고 내 방으로 와. 내 방은 1808호실이야.”
“서두를 것 없어.”
따라 웃은 조철봉이 은근한 시선으로 지나를 보았다.
“오늘만 날이냐? 일 끝나고 얼마든지 여유있게 즐길 수 있어.”
“하긴 그래.”
선선하게 머리를 끄덕인 지나가 몸을 돌리더니 갑중에게 공손히 절을 했다.
“그럼 전무님, 안녕히 가세요.”
“아, 예, 안녕히 주무십시오.”
따라서 절을 한 갑중의 시선이 분주하게 조철봉에게로 옮겨졌다. 그러다가 조철봉이 혼자서 이쪽으로 다가오는 것을 보더니 안심한 듯 어깨를 폈다. 다시 차에 오른 그들은 호텔을 떠나 한참을 달릴 때까지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밤 11시반이 되어가고 있었다. 차가 강남의 번화가를 지날 때 조철봉이 입을 열었다.
“여기서 차 세워.”
운전사에게 퇴근하라고 지시한 조철봉은 갑중과 함께 가까운 카페로 들어섰다. 분위기가 썩 좋은 곳은 아니었지만 조용하긴 했으므로 그들은 자리에 앉고 나서 술을 주문했다.
“하이트 호텔에 연락하면 미국 이름이 나올 겁니다. 제가 여권까지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갑중이 조철봉의 눈치를 보면서 말했다.
“지금이 뉴욕 시간으로는 아침 10시쯤 되었으니까 형님이 주무시고 나면 내일 아침에 그 여자의 내력을 다 알게 되실 겁니다.”
“…….”
“거짓말 조금 보태서 그 여자가 몇 놈을 거쳤고 지금까지 그 짓을 몇 번 했는가도 알아낼 수가 있습니다, 형님.”
“뉴욕이 아닐지도 몰라.”
오히려 조철봉이 더 차분해진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내 예상이지만 LA에서 같이 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요. 그럴 가능성이 많지요. 뉴욕은 그냥 폼 잡느라고 말했을 겁니다.”
“둘이 손발을 잘 맞췄다.”
“배도 여러번 맞추지 않았겠습니까?”
즉시 그렇게 말을 받았던 갑중이 다시 눈치를 보더니 헛기침을 했다.
“아까도 형님을 호텔방으로 끌어 들이려고 했습니다. 프로 같습니다.”
“프로?”
쓴웃음을 지었던 조철봉이 곧 앞에 놓인 술병을 쥐었다.
“프로 같지는 않다. 프로라면 우리 눈에 금방 들통이 날 리가 없지.”
“우리가 누굽니까?”
갑중이 정색하고 조철봉을 보았다.
“프로 10단이라도 우리 눈을 속일 수가 없단 말씀입니다, 형님.”
“어쨌든.”
저도 모르게 긴 숨을 뱉고 난 조철봉이 말을 이었다.
“연놈들의 하는 꼴을 끝까지 보기로 하자. 그러고는 마지막 순간에 뒤집는다.”
“당연한 말씀입니다.”
“껍질을 벗기든지 경찰에 넘기든지 인정사정 볼 것 없다.”
“그렇게 말씀 해주시니까 부담이 없어졌습니다.”
갑중이 얼굴을 펴고 웃었다.
“저는 형님이 인정에 끌리셔서 어영부영하시면 어떻게 하나 하고 걱정을 했습니다.”
그러자 조철봉이 앞에 놓인 술잔을 집더니 한모금에 양주를 삼켰다.
“윤지나가 내 첫사랑은 맞다.”
얼굴을 굳힌 조철봉이 갑중을 똑바로 보았다. 긴장한 갑중이 몸을 굳혔을 때 조철봉의 말이 이어졌다.
“초등학교 시절이었지만 지금도 그때의 감동이 새롭다. 지나가 다가오면 온 세상이 달콤해지고 환해졌다.”
“으음.”
신음같은 헛기침을 뱉은 갑중이 넌지시 조철봉을 보았는데 꼭 환자의 상태를 점검하는 의사같은 표정이었다. 눈을 가늘게 뜬 조철봉이 갑중의 머리 뒤쪽을 보았다.
“물론 지나도 내 감정을 의식하고 있었지. 아직 어렸지만 말이야. 그래서 내가 다가가면 몸으로 교태를 부렸다.”
“으으음.”
“샐쭉거리거나 곁눈질을 했고 다리를 꼬기도 했지. 또는 화난 것처럼 입술을 삐죽거렸고.”
“으음.”
“지나의 영상은 아주 오래 남았다. 지금도 남아 있는 것 같다.”
그러자 갑중이 마침내 참지 못한듯 말했다.
“이 기회에 개꿈 박살을 내시죠.”
다음날 오전 10시도 안되었을 때 갑중은 조철봉의 방으로 들어섰다. 자금담당전무를 세워놓고 중요한 자금 상황을 보고받던 조철봉이 갑중을 보더니 서류에 사인을 해버렸다. 전무가 방을 나갔을 때 갑중이 소파의 끝쪽에 앉았다. 이맛살을 조금 모으고 눈을 좁혀 뜬 인상이어서 꽤 심각한 표정을 연출하고 있다. 그것을 본 조철봉이 코웃음을 쳤다.
“청승 떨지말고 말해.”
“예, 사장님.”
갑중이 눈을 치켜뜨고 조철봉을 보았다.
“윤지나의 미국 이름은 헬레나 윤입니다. 여권에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3천5백불 들었습니다. 같은 사립탐정을 시켰는데 이놈이 이번 건은 돈을 더 내라고 해서.”
“김영우보다 1천5백불이나 많이 든 이유가 뭐야?”
“그놈들은 중량급에 대해서는 요금을 더 받습니다. 헬레나 윤, 하고 컴퓨터에 입력해보니까 이건 대박이 터진거죠. 그래서 3천5백을 부른겁니다.”
“윤지나가 중량급이라구?”
“윤지나에 비교하면 김영우는 플라이급입니다, 사장님.”
“말해.”
눈썹을 세운 조철봉이 목소리를 높였을 때 갑중이 그때서야 가슴 주머니에서 서류를 꺼내 내밀었다.
“전과 6범입니다. 사기, 횡령, 마약뿐만이 아니라 살인미수도 있고 또.”
조철봉이 서류를 읽기 시작했지만 갑중의 말은 멈추지 않았다.
“이혼 경력도 3회 있습니다. 그런데 뒤쪽 두번은 나이든 노인하고 결혼했다가 헤어졌더군요. 계약 결혼인 것 같다고 탐정이 말했습니다.”
“대단하구먼.”
“예, 대단합니다. 그래서 교도소에는 6개월도 살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베벌리힐스의 풀장까지 있는 저택에서 살고 있는데 세번째 이혼한 노인한테서 위자료로 받은 것입니다.”
“뉴욕에서 식당을 한다는 건 거짓말이었구먼.”
“예. 김영우하고 팀이 아니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뉴욕에서 왔다고 한 것 같습니다.”
“김영우하고의 관계는?”
“그것이.”
이맛살을 찌푸린 갑중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이번 작전의 주역은 청와대 경제수석을 팔고있는 김영우가 아닌 것 같습니다. 김영우는 윤지나를 거느릴 그릇이 아닙니다, 사장님.”
“과연 그렇다.”
머리를 끄덕인 조철봉이 들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았다. 학력이 중요한 것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윤지나는 대학을 졸업했으며 증권회사에서 3년간 근무한 경력도 있는 것이다. 고등학교 중퇴 수준의 영우가 복잡한데다 치밀하고 전문지식까지 갖춘 사업에 나서기는 힘들 것이었다.
그렇다면 영우는 행동대이자 보조원역할이다. 지나의 이력이 적힌 서류가 그 증거였다. 지나는 사기 전문이었다. 8년전에 3백만불이 넘는 보험 사기를 쳤다가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되었다고 기록에 나와있다. 어지간한 두뇌로는 감당도 하지 못할 작업이다. 조철봉이 머리를 들고 갑중을 보았다.
“윤지나가 나에 대해서 철저하게 조사해 놓고 찾아왔을 것이다.”
“그렇습니다.”
정색한 갑중이 머리를 끄덕였다.
“틀림없이 치밀하게 작전까지 세워놓고 왔을 것입니다.”
“바쁘더구먼.”
김영우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말했다.
“나하고 같이 점심을 먹는 동안에도 경제부총리, 산자부장관, 거기에다 한국은행 총재한테서까지 전화가 오는거야. 그래서 나중에는 휴대전화 전원을 꺼놓더라니까.”
“당연하죠.”
갑중이 절절한 시선으로 영우를 보면서 말했다.
“경제수석이 실세거든요. 대통령 바로 옆이 실세인 겁니다.”
조철봉은 잠자코 커피잔을 들었다. 저녁 7시에 그들은 다시 영우의 호텔방을 찾았고 지금 경제수석 이야기를 듣는 중이었다. 영우는 오늘 점심때 청와대에 들어가 경제수석과 점심을 먹고 나온 것이다. 소파에 등을 붙인 영우가 길게 숨을 뱉었다.
“조금 피곤해, 나도.”
한손으로 이마를 짚은 영우가 입맛까지 다셨다.
“하도 긴장을 해서 말이야.”
“그렇겠지, 청와대가 아무나 들어가는 곳이냐?”
조철봉이 정색하고 말했을때 갑중이 맞장구를 쳤다.
“그럼요, 바로 옆에서 만날 TV에 나오는 무슨 수석이니 대변인이 오락가락하는데 긴장이 안되겠습니까?”
“그런 긴장이 아녀, 최형.”
쓴웃음을 지은 영우가 자리를 고쳐앉았다. 그리고 눈을 가늘게 뜨더니 목소리를 낮췄다.
“정부의 신도시 계획을 알아냈어. 그래서 긴장이 되는거야.”
“어, 그래?”
“아이구.”
동시에 탄성같은 외침을 뱉은 조철봉과 갑중이 바짝 다가앉았다.
“그게 어딘데?”
조철봉이 묻자 영우가 눈을 둥그렇게 뜨고는 이상한 사람을 보는 시늉을 했다. 그것을 본 조철봉이 금방 쑥스럽게 웃었다.
“알았어, 내가 경솔했다.”
“내년초에 발표될거야.”
“그런가?”
다시 긴장한 조철봉과 갑중이 목을 늘였을 때 영우는 목소리를 낮췄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지역이지. 하지만 아하 하고 무릎을 치게 되는 곳이야.”
“어쨌든 일은 시작되었다.”
정색한 조철봉이 영우를 보았다.
“그럼 너, 토지 매입할거지?”
“물론이지.”
영우도 정색했다.
“경제수석이 신세를 갚는다고 자신의 목을 걸고 국가기밀을 말해주었는데 가만 있는 놈은 미친 놈이지.”
“그럼 나도 참가할테니까 잘 부탁한다.”
조철봉이 앉은 채로 영우에게 머리를 숙여 보였다.
“내가 신세는 잊지 않겠다.”
“뭐, 같이 하는 건데. 그리고 큰 덩어리는 자금을 모아야 할테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덤덤하게 말한 영우가 조철봉과 갑중을 번갈아 보았다.
“그렇다면 그쪽 자금은 얼마 정도야? 난 조금전에 체크해보니까 85억 정도인데 말이야.”
“아, 나는 150억 정도.”
조철봉이 주저하지 않고 대답하더니 말을 이었다.
“50억 정도는 더 낼 수 있어.”
“그렇다면 400억 정도구먼. 지나가 100억 정도라니까 말이야.”
영우는 400억을 400만원처럼 태연하게 말했다.
오늘은 저녁만 먹고 일찍 헤어졌으므로 조철봉과 갑중은 9시가 되었을때 강남의 조용한 카페에서 어젯밤처럼 마주 앉았다.
“경제수석 유동택씨는 사촌 형제가 7명 있는데 그중 여자는 3명입니다. 그런데.”
갑중이 웃음띤 얼굴로 말을 이었다.
“여자 나이가 모두 40대 후반이란 말씀입니다. 그렇게 되면 김영우는 10살 이상이나 나이가 많은 마누라하고 살고 있는 셈이지요.”
조철봉은 잠자코 양주잔을 들어 한모금을 삼켰다. 오늘 저녁에 윤지나는 김영우의 호텔방으로 찾아오지 않았다. 그대신 조철봉은 영우를 만나기 전에 지나의 전화를 받았다. 오늘밤에 방으로 커피 마시러 오라는 초대였다. 갑중이 흘끗 조철봉을 보았다.
“이런 사기는 직접 당사자에게 확인을 하기가 거북한점이 함정입니다. 그래서 능숙하면 성공 확률이 높지요.”
“저놈은 어떠냐? 능숙한 편인가?”
조철봉이 묻자 갑중은 정색하고 머리를 저었다.
“초보 수준을 겨우 벗어났습니다. 우리하고 비교하면 아마추어 수준이죠.”
“년놈들이 다음에는 어떻게 나올것 같나?” “먼저 사장님한테 돈을 내라고 할겁니다. 돈을 받고나서 신도시를 알려 주겠지요.”
“그렇지, 내가 정보만 받고 혼자서 뛰어나갈수도 있으니까 당연히 그래야겠지.”
“토지 계약금 4백억을 준비했다면서 신도시 예정지역을 며칠 돌아다니겠지요.”
“그러다가 슬쩍 내 돈만 찾아서 도망치겠군.”
“간단합니다.”
“네 계획은?”
“년놈들한테 돈을 내도록 하는겁니다.”
“저놈은 거지아닌가?”
“여자가 물주입니다.”
은근하게 웃은 갑중이 조철봉을 보았다.
“호텔에 체크해 보았더니 저놈 호텔비 계산도 윤지나 카드로 예약이 되어 있었습니다. 윤지나가 양쪽 호텔비 계산을 다 하고 있는 것입니다.”
“봐라, 내가 뭐랬어? 윤지나가 보스라고 하지 않았느냐 말이다.”
“저도 그랬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윤지나 껍질을 벗겨야겠군.”
“어떻게든 현금을 보여서 우리한테 신뢰를 얻도록해야 될겁니다.”
“그래야지?”
쓴웃음을 지은 조철봉이 다시 양주를 삼키고는 팔목시계를 보았다.
“오늘밤에 초대를 받았다.”
“작전에 대단히 중요한 밤입니다.”
얼굴을 굳힌 갑중이 조철봉에게 말했다.
“성패가 오늘밤의 일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배가 아픈 표정같은데 너는.”
“참, 잊었습니다.”
상반신을 세운 갑중이 조철봉을 보았다.
“LA의 탐정이 이번에는 돈을 받지도 않고 보너스로 정보를 보내왔었는데 미처 사장님한테 보고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별로 중요하지 않은것 같은데.”
“중요합니다.”
갑중이 자라처럼 턱을 치켜들었다.
“탐정이 김영우와 윤지나의 사진을 갖고 몇군데에다 확인을 한결과 둘이 현재 깊은 관계라는 것을 밝혀냈습니다. 만일 둘 사이를 조사하라면 사용한 콘돔숫자까지 알아낼 것입니다.”
“그럴 필요는 없다.”
자리에서 일어선 조철봉이 웃음띤 얼굴로 갑중을 보았다.
“걱정하지 마라.”
하지만 갑중은 찌푸려진 얼굴을 펴지 않았다.
“오빠 왔어?”
문을 연 윤지나가 웃음띤 얼굴로 조철봉을 보았다. 지나는 분홍 가운 차림이었다.
“이거 내가 조금 늦은 것 같은데.”
조철봉이 민망한 표정으로 말했을 때 지나가 비켜섰다.
“상관없어, 들어와.”
밤 11시가 넘어 있었으므로 이 시간에 호텔방에 찾아온 손님을 가운 차림으로 맞아들인다면 볼장은 다 본 것이다. 방으로 들어선 조철봉이 소파에 앉자 지나가 부산을 떨었다. 양주를 이것저것 세병이나 가져왔고 마른 안주도 탁자 위에 가득 벌여 놓았다.
특실이어서 선반에 진열된 술병이 수십 종류였다. 조철봉의 잔에 양주를 따른 지나가 술잔을 들고 소파에 등을 붙였다. 물론 한쪽 다리를 꼬고 앉았으므로 벌려진 가운 자락 사이로 허벅지의 맨살이 드러났다.
“오빠가 뉴욕에 왔다면 날 만날 수 있었을텐데.”
지나가 부드러운 시선으로 조철봉을 응시한 채 말했다.
“뉴욕에 있는 한국 사람들은 대부분 나를 알거든.”
“그런가? 난 미국에 간 적이 없어서.”
“이 일 끝나고 나하고 같이 가.”
“시간 봐서.”
“시간 내면 되지않아?”
정색한 지나가 한모금 술을 삼켰다. 가운의 가슴께도 느슨해져서 젖가슴의 일부분이 드러나 있다. 조철봉은 소리죽여 숨을 뱉었다. 지나는 첫사랑이다.
초등학교 시절에 여자가 무엇인지 모르면서도 지나가 옆으로 다가오면 가슴이 뛰었고 얼굴이 달아올랐다. 손도 잡아보지 못하고 헤어졌지만 그 추억은 20년이 넘도록 머릿속에 박혀 있었다. 아니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더 미화시켜온 것 같다. 그때 지나가 술잔을 내려놓더니 눈을 가늘게 뜨고 조철봉을 보았다.
“오빠, 오늘밤 여기서 자고 가.”
“그러지 뭐.”
“나, 오빠 사랑해.”
“나도 그렇다.”
주저없이 말을 뱉은 조철봉이 저고리를 벗어 옆으로 던졌다.
“난 20년이 넘도록 네 생각을 해왔어. 한번도 널 잊은 적이 없다.”
그러자 자리에서 일어선 지나가 조철봉의 옆으로 다가오더니 바짝 붙어 앉았다. 지나에게서 짙은 향수 냄새가 났다. 그때 갑자기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으므로 조철봉은 왈칵 술을 삼켰다. 향수 냄새 때문만이 아닐 것이다.
“오빠. 나, 안아줘.”
조철봉의 허리를 두 손으로 감아안은 지나가 몸을 바짝 붙이더니 턱을 치켜들었다. 키스를 해달라는 몸짓이었다.
“시간은 충분해, 천천히.”
지나의 어깨를 가볍게 안은 조철봉이 부드럽게 말했다.
“서둘 것 없어. 난 이 황금같은 시간을 천천히 즐기고 싶다.”
그리고 조철봉은 지나의 이마에 입술을 붙였다.
“천천히. 이 밤이 새도록 널 안을테니까.”
“아아, 오빠.”
지나가 젖가슴을 문지르며 몸을 붙였다. 헝클어진 잠옷 가운 밑에 팬티 하나만 입고 있어서 알몸이 거의 드러났다. 지나의 젖가슴은 컸다. 그리고 팽팽해서 마치 잔뜩 바람을 넣은 고무풍선 같았다. 성형 유방이다. 다시 소리죽여 심호흡을 한 조철봉이 지나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아름답다.”
입에서는 전혀 반대의 말이 표현되고 있었지만 열이 오른 지나는 모른다.
윤지나가 나타난 순간부터 조철봉의 첫사랑에 대한 추억은 산산조각이 났다고 봐도 될 것이다. 그것은 지나가 어떤 상태로 나타났건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첫사랑의 상대는 죽을때까지 만나지 않는 것이 낫다. 사랑했던 상대도 그렇다. 기회가 오더라도 피하는 것이 현명하게 사는 방법이다.
희망없이 사는 인간은 시체나 같다. 시체라는 표현이 조금 심하다면 짐승이나 마찬가지이다. 인간에게는 희망이라는 제2의 에너지가 있다. 현명한 인간은 그 희망이나 꿈까지도 조절한다. 그래서 고난의 시기를 더 오래 버티기도 하고 강한 충격에 견디기도 하는 것이다.
“나 씻고 올게.”
지나가 달아오른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섰을때 조철봉은 건성으로 머리를 끄덕였지만 곧 난감한 표정이 되었다. 지나를 본 순간 성욕이 달아나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 거절한다면 의심하게 될 것이었다. 다른 여자 같다면야 눈 딱 감고 얼마든지 육체만을 즐길 수 있으며 역겹더라도 내색하지 않을 수 있다.
한동안 욕실을 바라보던 조철봉은 차분한 얼굴로 옷을 벗었다. 첫사랑의 여자가 사기꾼이 되어서 나타난 것이다. 어렸을 적 처음 가슴에 새겨넣었던 여자였다. 그래서 그후에 만난 모든 여자는 지나를 기준으로 평가했다. 지나의 외모는 물론이고 지적 수준까지도 제멋대로 조립해 놓았던 것이다. 순식간에 알몸이 된 조철봉은 욕실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어머”
샤워기 밑에 서있던 지나가 놀란 듯 두 손으로 음부를 가리더니 곧 활짝 웃었다. 물줄기를 받은 지나의 알몸은 풍만했다. 허리가 조금 굵었고 조철봉의 시선을 받고나서 배에다 힘을 주어 아랫배를 납작하게 만들었지만 군살이 옆으로 벌어졌다. 그러나 조금 전에 보았던 성형 유방이 컸고 허벅지의 살집도 육감적이었다. 서양인이 좋아할 글래머 스타일이다. 샤워기 밑으로 다가간 조철봉이 지나의 허리를 안았다.
“으음.”
지나가 조철봉의 목을 두 팔로 감아 안더니 허리를 붙이면서 낮은 신음을 뱉었다. 그러고는 키득 웃었다.
“오빠, 벌써 성났어?”
“그래. 네 안에 들어가고 싶어서 야단이다.”
조철봉이 철봉으로 허벅지를 문지르며 말하자 지나의 숨이 가빠졌다.
“그럼 넣어, 오빠.”
“너하고는 첫 섹스인데 그렇게 싱겁게 넣으면 되나?”
“그럼 어떻게 해야돼?”
“인사부터 해야지.”
그러고는 조철봉이 철봉을 지나의 샘 주위에 문질렀다. 이번에는 둘이 샤워기의 물을 맞고 서 있었으므로 자세가 불안정하기는 했다.
“으으음.”
허리를 더욱 붙이면서 지나가 신음을 뱉었다.
“오빠, 그냥 넣어줘.”
지나가 허덕이며 말했지만 조철봉은 샘과 양쪽 계곡만 맴돌았다. 조철봉은 지나의 허리를 움켜쥐고 선채 앞쪽의 벽을 노려보았다. 첫사랑으로 공인을 받았지만 실은 짝사랑이었다. 혼자서 온갖 칠을 하면서 쌓아온 감정이 이렇게 하루아침에 허물어져버렸다.
“아아, 미치겠어.”
지나가 조철봉의 철봉을 손으로 움켜쥐더니 자신의 샘에 붙였다.
그때 조철봉은 자신의 눈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지만 곧 샤워기의 온수를 얼굴에 받는 바람에 눈이 씻겨졌다.
철봉을 샘에 넣은 윤지나는 곧 두다리를 조철봉의 허리에 감아 안은 자세로 매달렸다. 그러더니 허리를 들썩이기 시작했는데 익숙한 동작이었다. 조철봉은 먼저 손을 뻗어 샤워기의 손잡이를 돌려 물을 잠갔다. 그러고는 지나를 그 자세 그대로 매단 채 욕실을 나와 욕실의 문까지 닫았다.
그동안 지나는 동작을 계속하며 신음을 뱉었다. 조철봉이 침대끝에 걸터 앉았을 때 지나의 자세도 편해졌다. 두발로 침대를 밟고는 엉덩이를 흔들 수가 있게 된 것이다. 지나의 샘은 풍성했다. 그러나 그 여유로움이 조철봉을 편안하게 해주지 않았다. 그것은 조철봉의 입술이 지나의 젖꼭지에 닿았을 때 분명해졌다. 지나가 손으로 조철봉의 머리를 밀었기 때문이다.
“오빠, 거긴 건드리지 마.”
지나가 헐떡이며 말하더니 덧붙였다.
“꼭지가 너무 민감해서 그래.”
성형수술한 부분이라 거칠게 취급되었다가는 터질 수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조철봉이 입술을 떼었을 때 지나의 움직임은 끝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두 손으로 조철봉의 어깨를 움켜쥐어서 젖가슴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 시킨다음 하반신을 맹렬하게 흔들어 자극을 극대화 시켜가는 것이었다. 거친 숨소리와 신음이 거침없이 터져 나왔고 방안에는 질펀한 정액과 땀냄새로 덮여졌다.
“허니이, 허니, 허니, 허니.”
절정에 오른 지나의 단말마 같은 신음내용이 이랬다. 턱을 잔뜩 치켜들어서 시선을 천장에 향한 자세로, 그래서 탱탱한 젖가슴은 보호된 채 우람하게 출렁거렸으며 하체는 빈틈없이 밀착되어 세포의 진동까지 감지되고 있었다.
“허니, 허니, 허니.”
온몸을 떨면서 지나가 부르짖었다. 천장을 향한 두눈은 부릅떠져 있었고 악문 이사이로 절규같은 신음이 이어졌다.
“오, 마이 갓, 갓, 갓.”
조철봉은 어금니를 물었다. 철봉에 닿는 세포의 반응을 보면 지나가 절정에 올랐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이때처럼 마음과는 다르게 반응하는 철봉이 불쌍하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
“아아, 다아링.”
하면서 지나가 조철봉의 목을 두팔로 감더니 온몸을 늘어뜨렸다. 조철봉은 몸을 비틀어 지나의 몸을 내려놓고는 그 서슬에 일어섰다. 지나가 몸을 비스듬히 눕히더니 만족한듯 긴 숨을 뱉으며 말했다.
“오빠, 좋았어.”
“나도 그래.”
조철봉이 허리를 굽혀 지나의 엉덩이에 입술을 붙였다.
“이렇게 황홀했던 적은 처음이야.”
“정말?”
“정말이야.”
“다음번에는 오빠가 위에서 해줘.”
“그러지.”
욕실로 들어간 조철봉은 다시 샤워기의 스위치를 올리고는 머리끝에서부터 냉수를 맞았다. 그 순간 눈앞에 보이는 물체를 부숴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으므로 이를 악물었다. 지나와의 섹스에서는 배설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입술끼리 붙여 키스를 하지도 않았다. 몸만 다가서는 섹스에 이골이 난 조철봉이었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다.
샤워를 마친 조철봉이 침실로 들어섰을 때 지나는 네활개를 펴고 잠이 들어있었다. 시트로 하반신은 덮었지만 거대한 유방이 호흡 때마다 출렁거렸고 화장이 지워진 얼굴은 추했다. 아련하게 머릿속에 담아두고 있었던 윤지나 하고는 전혀 다른 짐승이 이곳에 누워있는 것이다. 눈을 치켜뜬 조철봉은 지나의 옆에 누웠다.
“영우가 저렇게 출세 했을지는 몰랐어.”
조철봉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을때 지나가 감았던 눈을 떴다. 천장을 향하고 누운채 조철봉이 말을 이었다.
“동창이네, 친척이네 하면서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아서 나는 동창회에도 거의 나가지 않았거든.”
“나도 영우오빠 만난지 며칠밖에 안돼.”
지나가 메마른 목소리로 말하더니 몸을 틀어 조철봉의 가슴에 볼을 붙였다.
“LA에 들렀다가 우연히 만난거야.”
“저자식 그만큼 재력이 있나?”
“응, 그건 확실해.”
조철봉의 가슴에서 머리를 뗀 지나가 눈을 크게 떠 보였다.
“대단해, 영우오빠. 나도 내 눈으로 직접 보고 놀랐어.”
“흥, 그래.”
쓴웃음을 지은 조철봉이 지나의 허리를 당겨 안았다.
“난 사업을 오래 하다보니까 현금 외에는 안믿는다.”
지나의 시선을 받은 조철봉이 말을 이었다.
“영우도 나한테 현금 동원 능력을 보여줘야 할거야. 청와대 경제수석 할아버지가 사촌동생 남편이라고 하더라도 말이지.”
그러고는 조철봉이 제 말이 스스로도 우스운지 풀썩 웃었다.
“그건 내가 이만큼이라도 사업을 성장시킨 비결이다. 돈이 먼저야, 현금이 있으면 나머지는 자동적으로 붙게 되어있어. 권력부터 내세우는 놈들은 사기꾼이 많아. 물론 영우는 예외가 되겠지만.”
조철봉이 여전히 웃음띤 얼굴로 지나를 보았다.
“영우가 말한대로 1백억을 내놓지 않으면 난 같이 일 안해. 영우의 현금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말이야.”
“….”
“하지만 넌 봐줄게.”
손을 뻗어 지나의 엉덩이를 문지른 조철봉이 말을 이었다.
“넌 나중에 돈을 내놓아도 돼.”
“영우 오빠는 자금 동원 능력이 있을 거야. 신경 안써도 돼. 오빠.”
지나가 부드럽게 말하더니 조철봉의 철봉을 손에 쥐었다. 조철봉은 심호흡을 했다. 갑자기 철봉이 대견했기 때문이다.
지나와 미묘한 사안을 말하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철봉은 전혀 구애받지 않고 또다시 굳건하게 일어서 있었던 것이다. 철봉이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조화시킨 셈이었다. 조철봉이 혼잣소리처럼 말했다.
“내일 영우한테 먼저 자금을 입금 시키라고 하겠어. 그러고나서 다시 상의 하자고 말이야.”
“오빠가 알아서 해.”
몸을 바짝 붙인 지나가 조철봉의 가슴에 대고 말했다.
“난 오빠가 자금 넣고나서 바로 넣도록 하지 뭐.”
다음날 오후 3시경이 되었을때 조철봉은 영우의 전화를 받았다.
“아, 나, 김영우인데.”
영우가 의젓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자금문제 말이야.”
“어? 그래서?”
시치미를 뗀 조철봉이 물었을때 영우가 가볍게 말을 이었다.
“내가 오늘 먼저 50억 가져왔어. 지금 시티은행에 입금시켜 놓았는데.”
“어, 그래?”
“곧 나머지도 입금 시킬거다.”
그러고는 영우가 짧게 웃었다.
“오늘 아침에 지나한테서 연락이 왔더구만, 나부터 먼저 돈을 내라고 말이야. 하긴 그말도 일리가 있더라. 그래서.”
전화기를 귀에 붙인 조철봉은 쓴웃음을 지었다.
아직 조철봉은 영우한테 자금을 먼저 입금 시키라고 말하지도 않았는데 지나가 어젯밤 분위기를 전달해준 것이다.
“알았어. 그럼 나도 자금을 준비해 놓아야겠구만.”
조철봉이 말하고는 앞쪽에 앉은 최갑중을 향해 눈짓을 했다.
“신도시 계획이 새나가기 전에 빨리 서둘러야 될거야.”
수화구에서 영우의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자금이 모이면 바로 행동에 들어가기로 하자.”
“그러자구.”
전화기를 내려놓은 조철봉이 긴장한 표정으로 갑중을 보았다.
“시티은행에 50억을 입금시켰다는 거다. 확인해봐.”
“LA의 탐정한테 용역비가 꽤 나가고 있습니다. 형님.”
자리에서 일어선 갑중이 전화기를 집어 들면서 말했다.
“50억이면 4백만불이나 되는 거금이니까 금방 체크가 될겁니다.”
“아마 윤지나의 돈일거다.”
“그렇겠지요. 노인들한테서 위자료로 받은 돈이 한국까지 넘어온 것입니다.”
힐끗 조철봉의 눈치를 살핀 갑중이 입을 다물더니 전화버튼을 눌렀다. 갑중은 어젯밤 조철봉이 윤지나의 호텔방에서 자고 나온줄을 알면서도 내색하지 않았다. 다른 여자 같았으면 꼬치꼬치 상황을 물었을 것이었다. 부하 직원에게 지시를 마친 갑중이 조철봉을 보았다. 긴장한듯 굳어진 표정이다.
“사장님, 내키지 않으시면 지금부터는 제가 혼자서 진행하지요.”
갑중이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사장님은 그저 전화나 한두통 해 주시면 됩니다.”
“내키지 않다니?”
머리를 든 조철봉이 갑중을 보았다.
“그렇게 보이더냐?”
“어쨌든 그 여자는 사장님 첫사랑 아닙니까? 곧 껍질을 홀라당 벗길텐데 형님 마음이 약해지시면 작업에 차질이 생길수 있습니다.”
“날 그렇게 보았어?”
쓴웃음을 지은 조철봉이 의자에 등을 붙였다.
“난 어젯밤에 다 털어 내었다. 이제는 사기꾼 여자만 남아있을 뿐이야.”
“과연 형님다우신 말씀입니다.”
갑중이 이제는 형님 호칭을 붙였다.
“그렇다면 작전을 말씀해주시지요.”
“그것들이 은행에서 돈을 찾게 만드는 거야. 그러고는 가로챈다.”
던지듯이 말한 조철봉의 두눈이 번들거렸다.
“물론 그때는 우리가 빠진다. 전혀 다른 상대가 나서도록 하는 것이지.”
“그것이 정석이지요, 형님.”
“철저하게 준비를 해놓도록.”
“알겠습니다, 형님.”
신바람이 난 갑중이 서둘러 방을 나갔으므로 조철봉은 다시 의자에 상반신을 붙이고는 길게 숨을 뱉었다. 윤지나가 20년만에 서울로 날아온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자신을 짝사랑했던 사내를 만나 사기를 치려는 것이었다. 그것도 치밀하게 계획을 세워놓고 날아왔다.
“그래, 거지로 만들어주마.”
조철봉이 혼잣소리로 말하고는 눈을 부릅떠 앞쪽을 노려보았다.
“나쁜년 같으니, 상대가 없어서 나를 노린단 말이냐?”
그때 전화벨이 울렸으므로 조철봉은 상반신을 세웠다. 전화기를 집어 귀에 붙였을 때 곧 지나의 목소리가 울렸다.
“오빠야? 지금 뭐해?”
지나하고 저녁 약속을 해놓은 것이다.
다음날 아침, 조철봉이 회사에 출근했을 때 갑중은 먼저 와 기다리고 있었다.
“어젯밤에 연락이 왔습니다.”
자리에 앉은 조철봉에게 갑중이 서둘러 보고했다.
“예상했던 대로 자금은 LA의 헬레나윤 계좌에서 김영우의 계좌로 송금된 것입니다.”
“윤지나의 자금력이 대단한데.”
“보험 사기에다 노친네들 한테서 위자료를 엄청 받아냈겠지요.”
그러고는 갑중이 긴장한 표정으로 조철봉을 보았다.
“백억원이 든 통장을 준비해 놓았고 행동대도 대기시켰습니다.”
“완벽하게 해야돼.”
“한치의 오차도 없도록 진행하겠습니다.”
“어젯밤 윤지나를 만났더니 오늘이나 내일중으로 행동으로 옮길것 같다.”
“이제는 빠를수록 좋습니다.”
조철봉과 시선을 마주친 갑중이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아마 저쪽도 마찬가지일테니까 서로 호흡은 맞는 셈이지요.”
“그렇군.”
쓴웃음을 지은 조철봉이 갑중을 보았다.
“오늘 낮에는 청와대에 들어가기로 했어. 영우가 경제수석을 만나게 해준다는 거다.”
“마지막 작업이지요. 오늘로써 확인 작업을 끝내고 확실하게 믿도록 해주려는 것입니다.”
“아마 청와대 영내에서 만나 경제수석은 갑자기 대통령한테 불려 갔으니까 기다리자고 하겠지.”
“지금은 청와대 출입이 자유로워졌으니까요. 먼저 들어가서 기다리고 있으면 초대받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고는 경제수석이라면서 전화를 해올 것이다. 나한테 말이야. 대통령과의 면담 때문에 청와대로 초대해놓고 만나보지도 못하게 되었다고 말이야.”
“그렇겠군요.”
“그리고 나같으면 사람 시켜서 청와대에 온 기념으로 기념품을 보내 드리겠다면서 물건을 보내겠다.”
“그렇습니까?”
“배지나 기념품들을 매점에서 팔거든. 그것에다 경제수석 사인을 해서 보내는 거야.”
“백발백중 속아 넘어가겠습니다. 경제수석 전화에다 사인이 든 기념품을 받게 되니까요. 더구나 청와대 영내에서 말이지요.”
“완벽하게 속아 넘어가는 것이지.”
“그래야 우리 작업도 수월해집니다.”
갑중의 말에 조철봉이 커다랗게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다. 그래서 김영우의 작업이 먼저 완벽해지기를 기대하도록 하자. 그래야 그놈이 스스로 만족해서 제 주변에는 신경도 쓰지 않을테니까.”
그때 전화벨이 울렸으므로 조철봉은 표정을 굳히고 전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아, 나, 영우야.”
영우가 들뜬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오늘 청와대에는 지나도 같이 간다. 수석한테 말 했더니 같이 들어오라고 해서.”
“어, 그래?”
“그럼 11시반에 청와대 안에서 보자.”
“알았어.”
전화기를 내려놓은 조철봉이 다시 쓴웃음을 지었다.
“윤지나도 같이 간다는군.”
“옆에서 반주를 맞추려는 것이지요.”
함께 초대하면 여러 사람 눈치가 보이니까 이쪽은 관광객처럼 청와대에 들어가도록 되어있는 것이다. 그야말로 감쪽같다.
청와대 영내에는 관광객이 많았으므로 얼핏보면 관광지 같았다. 권부의 중심지여서 삼엄한 경비에 둘러싸인 위압적인 분위기를 연상했던 조철봉은 조금 긴장이 풀어졌다. 조철봉이 춘추관 앞에 도착했을 때는 11시20분이었다. 시골에서 상경한 한무리의 관광객들과 동행이었으므로 조철봉은 뒤쪽에서 다가온 윤지나를 미처 못보았다.
“오빠, 일찍 오셨네.”
화사한 분홍색 정장 차림의 지나가 웃음띤 얼굴로 조철봉을 보았다.
“영우오빠는 저기 있어.”
지나가 눈으로 옆쪽을 가리켰다.
“어, 왔구나.”
커다랗게 말하면서 영우가 다가왔는데 말쑥한 양복 차림이었다.
“곧 올거야.”
다가선 영우가 팔목시계를 내려다보는 시늉을 했다.
“30분쯤 전에 나하고 통화했거든.”
그때였다. 사내 하나가 그들을 향해 서둘러 다가왔다.
“아니, 강비서관님.”
먼저 사내를 발견한 영우가 눈을 둥그렇게 뜨고 말했다.
“여긴 웬일이십니까?”
“수석님이 저를 보내셨습니다.”
다가선 사내는 40대 중반쯤으로 깔끔한 외모에 옷차림도 세련되었다. 조철봉과 지나에게 눈 인사를 한 사내가 조금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대통령께서 수석님을 또 찾으시는 바람에 수석님은 나오시지 못할 것 같습니다.”
“허, 이런.”
영우가 난색을 짓더니 불평하듯 말했다.
“아, 그렇다면 초대를 하지 말아야지. 친구까지 불러놓고 이게 무슨 망신인가?”
“대통령께서 수시로 찾으시거든요.”
머리까지 조금 저어보인 사내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서 청와대 방문 기념으로 기념품 몇개하고 수석님이 쓰신 책을 가져왔습니다.”
사내가 들고있던 비닐 봉투를 영우에게 건네 주었다. 그때 영우가 주머니에서 전화기를 꺼내 들었으므로 주위의 시선이 모여졌다.
“아, 예, 접니다.”
전화기를 귀에 붙인 영우가 대답했다.
“그런데 어떻게 된 겁니까? 바쁘신 줄은 알지만 모처럼 친구한테 생색까지 냈는데 말입니다.”
“야, 야. 그만해.”
당황한 표정으로 조철봉이 손까지 저었을 때 영우가 전화기를 내밀었다.
“전화 받아라.”
“내가?”
했다가 조철봉은 서둘러 전화기를 귀에 붙였다.
“여보세요.”
“아, 안녕하십니까? 나 유동택입니다.”
사내의 굵은 못소리가 수화구를 울리자 조철봉은 몸을 반듯이 세웠다.
“예, 수석님 안녕하십니까?”
“이거 영우하고 점심을 같이 하기로 했는데 정말 미안합니다.”
“아닙니다. 수석님.”
“바쁘다보니 개인적인 시간을 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럼요. 이렇게 전화 해주신 것만 해도 영광입니다. 수석님.”
“그럼 다음 기회에 꼭 뵙고 세상 이야기나 듣기로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수석님.”
전화가 끊겼으므로 조철봉은 길게 숨을 뱉고나서 전화기를 영우에게 내밀었다.
“야, 밥만 먹으면 대수냐? 바쁘신 분한테 불평하지 마라.”
조철봉이 오히려 영우를 달랬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최갑중이 묻자 조철봉은 소파에 등을 붙였다. 오후 3시반이 되어가고 있었다. 청와대에서 돌아온 조철봉은 사무실에서 갑중에게 사건을 설명해주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 비서관의 배웅을 받고 청와대를 나온거다.”
“그 비서관이란 놈도 가짜입니다.”
“당연하지.”
쓴웃음을 지은 조철봉이 탁자위에 놓인 기념품과 책을 보았다. 여러가지 기념품들은 청와대 앞의 매점에서 얼마든지 구입할 수가 있는 것들이었다. 그리고 유동택이 출간했던 경제서적도 시중 서점에서 구입한 후에 위조 사인을 했을 것이었다.
“최소한 두명의 공범은 오늘 확인한 셈이 되었다. 유동택이라고 전화를 해온 놈하고 비서관 행세를 한놈까지 말이야.”
“어쨌든 청와대 영내까지 불러들이다니 배짱이 대단한 놈들입니다.”
“모두 윤지나의 지휘를 받고 있는거야.”
정색한 조철봉이 갑중을 보았다.
“곧 윤지나가 50억을 입금시키기로 했고 나도 1백억을 내기로 했다. 그러면 자금은 모두 2백억이 된다.”
“그렇다면 부동산 업자로 나타나는 놈이 있겠군요.”
“그렇지, 부동산 사기가 될테니까.”
머리를 끄덕인 조철봉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신도시의 부동산 업자로 가장한 놈과 토지 주인까지 만들어 놓았을거야.”
“흥미진진합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으므로 둘은 긴장했다. 전화기를 집어든 조철봉이 심호흡부터 했다.
“여보세요.”
“오빠, 나야.”
윤지나였다. 지나가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빠, 지금 입금 확인했어. 50억이 들어왔으니까 나하고 영우오빠는 일단 1백억은 만들었어.”
“어? 그래? 빠르구나.”
“50억인데 뭘, 며칠후에 다시 1백억쯤 더 만들려고 해.”
“네 자금 능력이 대단해.”
“오빠한테 비교하면 새발의 피지.”
“그럼 나도 오늘중으로 1백억 만들어 놓을테니까 내일 영우하고 같이 개발지역으로 가보기로 하지.”
“그래, 알았어. 오빠.”
“그런데 참.”
조철봉이 정색하고 말했다.
“오늘밤 어때? 괜찮니?”
“아이, 참.”
지나의 목소리가 갑자기 간드러졌다.
“오빠, 오늘이 그날이야.”
“그날이라니?”
“아이참, 그날 있지않아?”
“아, 알았다.”
입맛을 다신 조철봉이 실망한듯 목소리를 낮췄다.
“그럼 일 끝나고 만나야겠구만.”
“이틀이면 끝나, 오빠.”
“알았어.”
“그럼 내일 봐.”
그러고는 지나가 속삭이듯 말했다.
“오빠, 사랑해.”
“나도 사랑해.”
전화기를 내려놓은 조철봉이 갑중을 보았다. 갑중은 조철봉이 통화하는 동안 딴전을 피우고 있었는데 시선을 받자 마침내 머리를 들었다.
“왜요? 형님.”
“날 사랑한단다.”
“형님도 눈한번 깜짝 하지 않고 사랑한다고 대답하시더군요.”
그러자 조철봉의 얼굴이 다시 일그러졌다.
“내가 피눈물이 나오도록 만들어주마.”
다음날 오후 2시경에 조철봉은 판교의 부동산 사무실로 들어섰다.
물론 최갑중이 동행했고 김영우와 윤지나까지 넷이 온 것이다. 태양부동산은 영우가 며칠 전에 한번 들러서 안면을 익혔다고 했는데 사장 김천복은 대통령 일행처럼 그들을 맞았다.
그들이 자리잡고 앉았을 때 아예 문을 안에서 걸어 잠그고는 회의실에 여직원의 출입도 금지시켰다. 김천복은 50대 초반쯤으로 보였는데 웃음띤 얼굴이 호감이 가는 인상이었다.
“우선 이 지도를 보시지요.”
천복이 벽에 걸린 지도 옆에 서서 마치 사단장에게 보고하는 중대장처럼 말했다. 지도는 판교 인근의 지도였다.
“이쪽땅 5만평은 매입이 가능합니다. 모두 임야거나 전답이기 때문에 평당 15만원 정도로는 거래가 될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75억원이다. 조철봉은 천복이 손으로 짚은 지도를 보았다. 모두 임야나 논밭이었는데 이곳이 신도시가 들어설 지역이라는 것이다. 천복이 지도의 아래쪽을 손으로 짚었다.
“이곳은 현재 개발지역으로 평당 1백만원 정도가 됩니다. 하지만 매입자가 드물어서 지금 당장이라도 1만평 정도는 매입할 수가 있습니다.”
아파트 공사 현장 근처의 토지였다. 평당 1백만원에 1만평이면 1백억원이다. 그러면 합이 1백75억원 정도가 된다. 힐끗 조철봉에게 시선을 준 영우가 천복에게 말했다.
“세사람 명의로 공동 구입을 해야겠는데, 거래는 언제 끝날 것 같습니까?”
“사흘, 아니, 이틀만 여유를 주십시오.”
대번에 흥분한 천복의 얼굴이 상기됐다.
“소유주가 10여명 됩니다만 매입하시는데 조금도 지장이 없습니다. 매물로 내놓은지 오래되었거든요.”
“그래요? 그리고.”
정색한 영우가 눈을 가늘게 뜨고 천복을 보았다.
“이 일이야 어차피 알려지겠지만 거래가 끝날 때까지 비밀로 해야 됩니다. 아시겠지요?”
“제가 어린애인줄 아십니까?”
천복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바로 옆 땅 주인도 모르게 진행하겠습니다, 사장님.”
“서류는 완벽하게 확인해야 될겁니다.”
“당연한 일이지요. 사장님, 눈곱만한 하자도 없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가격 말인데요.”
이번에는 지나가 입을 열었으므로 긴장한 천복이 시선을 들었다. 지나가 말을 이었다.
“평당 단가를 낮춰보세요. 단가가 조금 높은 것 같아요.”
“그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사모님.”
천복이 열렬하게 말했다.
“각자 사정이 있을테니까 최대한 낮춰서 흥정을 하겠습니다. 맡겨주시면 절대 후회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절차상 까다롭지는 않겠지요? 세무서라든가.”
“대한민국은 민주국가입니다.”
천복이 제가 법무장관이나 된 것처럼 정색하고 말했다.
“제 돈내고 땅 사는데 죄가 됩니까? 절대로 불이익을 받으시는 일이 없습니다. 그리고.”
목소리를 낮춘 천복이 은근한 표정을 짓고 말했다.
“만에 하나의 경우에 무슨일이 있으면 다 빠져나갈 길이 있는 법입니다. 그건 사장님들께서 더 잘 알고 계실겁니다.”
“됐어.”
마침내 조철봉이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 양반한테 맡기면 되겠구먼 그래. 어서 서둘러 보시오.”
“김천복은 공문서위조, 사기, 횡령 등으로 전과 5범입니다. 김영우는 적임자를 찾아낸 것이지요.”
오후 7시가 조금 넘었을 때 조철봉과 만난 갑중이 김천복에 대한 보고를 했다. 천복과 헤어지고 나서 갑중은 즉각 뒷조사를 해온 것이다.
“교도소에 세번 들어갔는데 6년 7개월동안 수감 생활을 했습니다.”
갑중이 쓴웃음을 지은 얼굴로 조철봉을 보았다.
“그리고 태양부동산은 김천복이 운영하는 곳이 아닙니다. 몇시간 동안만 김천복이 빌려서 부동산 사장 행세를 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당연하지. 부동산 사무실을 한번만 사용하면 될테니까.”
“또 있습니다.”
“말해.”
“천복은 지난달에 LA에 가서 20일 동안이나 체류했습니다. 그때 김영우와 윤지나를 만나 작전을 짰겠지요.”
“상당히 공을 들였군.”
“따라서 방심하면 안될 것 같습니다.”
정색한 갑중이 조철봉을 보았다.
“이제 다시 땅 주인이라는 놈들도 몇놈 더 나타날 것이니 일당이 모두 10명이 넘을 것 같습니다.”
“준비는 다 해놓았지?”
“예. 이번에는 대작전이니까요.”
조철봉의 관점에서 보면 사기를 당하지 않으려면 먼저 사기를 쳐야만 하는 것이다. 사기꾼으로 둘러싸인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어쩔 수가 없는 일이다.
그날밤 10시경에 김영우가 투숙한 호텔 객실에는 7, 8명의 사내가 모였는데 홍일점으로 지나도 끼었다. 모두 긴장한 표정들이어서 방안의 분위기는 무거웠다.
“자, 그럼 정리를 해볼까.”
영우가 주의를 환기시키려는 듯이 사내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내일이 디데이야. 착오가 있으면 안돼. 시간을 정확하게 지키고 조금이라도 빈틈을 보이면 안돼.”
“이미 99%는 끝나있는 겁니다.”
부동산업자 행세를 하고 있는 김천복이 말했다.
“은행에 1백억이 들어와 있는 것이 확인된 이상 그 돈은 이제 우리것이지요.”
“이것봐요, 김씨.”
정색하고 천복을 제지한 사람은 지나였다. 지나가 눈을 크게 뜨고 천복을 보았다.
“조철봉도 만만치가 않아요. 온갖 편법에 익숙한 작자란 말예요. 그렇게 호언장담하지 말아요.”
“압니다.”
머리를 끄덕인 천복이 흘끗 지나의 옆에 앉은 사내를 보았다. 지금까지 한번도 공식석상에 나타나지 않았던 사내였으므로 천복도 초면이었다. 지나가 말을 이었다.
“내일 오후에 작전을 끝내면 우리는 모르는 사이가 되는 겁니다. 아셨죠?”
“물론입니다.”
나머지 사내들이 대답했고 천복도 얼굴을 펴고 웃었다.
“두번 다시 뵐 기회도 없겠지요. 그쪽분들은 미국으로 떠나실 테니까 말이죠.”
그때 지나의 옆에 앉은 사내가 천복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김선생은 안양 아주머니께 당분간 가시지 않는 것이 낫습니다. 무슨 말씀인지 아실겁니다.”
그순간 천복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굳어졌다. 안양 아주머니는 천복과 내연의 관계인 여자를 말하는 것이다. 철저하게 비밀로 감춰졌던 천복의 사생활이 드러났다. 그만큼 그들이 배후를 조사해놓고 있다는 위협이나 같다.
서교동의 서서울호텔 커피숍에는 테이블 두개를 붙여놓고 사내들이 둘러앉았는데 모두 8명이었고 거기에다 여자도 한명 끼어서 합이 9명이었다. 그 9명의 면면을 보면 조철봉과 최갑중, 김영우와 윤지나 넷에다 부동산업자 역할의 김천복, 거기에다 각양각색의 사내 넷이 포함되었으니 이 넷이 곧 땅 소유주였다.
다시 말하면 땅 소유주 역할인 것이다. 따라서 현재까지만 계산을 해도 지나와 영우가 동원한 인력은 눈앞의 다섯에다 아직 목소리만 나온 경제수석 유동택 역할, 그리고 청와대에서 만났던 비서관까지 합하면 7명이 되었는데 앞으로 더 얼마나 나타날지 알 수가 없다. 오늘 모임의 사회 역할까지 겸한 것은 물론 부동산사장인 천복이다. 천복은 앞에 높이가 20센티는 되어 보이는 서류뭉치를 쌓아놓고 있었는데 모두 부동산 관련 서류였다. 천복이 입을 열었다.
“서류는 완벽합니다. 관계기관의 확인도 모두 거쳤고 등기이전 서류도 다 갖춰져 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가격 합의인데요.”
머리를 든 천복이 조철봉과 영우, 지나의 얼굴을 차례로 보았다.
“북쪽 임야나 전답은 평당 14만원 이하로는 안된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개발지역은 평당 97만원입니다.”
땅 소유주 네명중 둘은 임야 소유주였고 둘은 개발지역이었다. 조철봉이 넷의 얼굴을 훑어보고는 영우에게 말했다.
“나하고 잠깐 이야기 하지.”
그러고는 지나에게도 눈짓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들을 커피숍 구석자리로 데려간 조철봉이 정색하고 말했다.
“14만원, 97만원이면 적정가격이야. 그 이상은 어렵고 또 며칠 지나면 금방 소문이 퍼질테니 땅 임자가 마음을 바꿀지도 몰라.”
“하긴 그래.”
입맛을 다신 영우가 힐끗 땅 임자쪽을 보았다.
“내년초에 신도시개발 발표가 되면 땅값이 최소한 10배는 뛸테니까 말이야. 나도 가슴이 조마조마하다.”
“그래요.”
지나가 맞장구를 쳤다.
“저 부동산업자만 하더라도 아직 영문을 모르고 있으니 망정이지 만일 알았다가는 제가 매입하려고 나설테니까요.”
“그럼 그 가격으로 매입하지.”
영우가 결심한듯 말했을때 조철봉이 물었다.
“우리 공동자금이 얼마나 되지?”
“현재로서는 178억이야. 내가 50억, 지나가 어제 28억을 입금시켰기 때문에, 거기에더 네가 100억을 넣었고.”
“그럼 지금 모두 인출해 와야겠군.”
“그래야지.”
영우가 머리를 끄덕였다. 토지 대금이 170억 가깝게 되는 것이다.
“내가 은행에 다녀오지요.”
그렇게 말한 지나가 조철봉을 보았다.
“오빠도 누구를 보내셔야죠.”
“최전무가 갈거야.”
정색한 조철봉이 말하고는 길게 숨을 뱉었다.
“그럼 이제 끝났군. 돈이 올때까지 사우나나 하고 있어야겠다.”
“같이 하자.”
들뜬 표정이 된 영우가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조철봉의 어깨를 가볍게 손으로 쳤다.
“오늘 계약 끝나고 저녁에 술이나 한잔 하자.”
“좋지.”
그때 옆에 있던 지나가 조철봉의 팔을 꼬집었다. 저녁 약속을 하지 말라는 뜻이다.
억짜리로 나눠 주십시오.”
최갑중이 말하자 윤지나가 웃음띤 얼굴로 지점장을 보았다.
“저두요.”
“알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선 지점장이 서둘러 밖으로 나갔을 때 갑중이 지나의 옆에 앉은 사내에게 물었다.
“고향이 어디시오?”
“예, 부산입니다.”
“아, 그래요?”
특별한 용건은 없고 그저 지나의 동행이어서 인사치레로 물은 것이다. 그것을 사내도 아는터라 표정이 느긋해졌다. 지나는 보디가드를 데리고 온 것이었는데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으므로 조철봉은 못보았다.
그러나 조철봉이 사내의 목소리를 들었다면 머리를 기울였을 것이었다. 경제수석 유동택의 목소리를 냈던 사내였기 때문이다. 대한은행 서교동 지점의 지점장실 안이었다. 지점장이 들어섰을 때는 그로부터 10분쯤 후였다. 봉투2개를 들고온 지점장이 지나와 갑중에게 하나씩을 내밀면서 웃었다.
“거금이 나가면 항상 서운합니다.”
갑중이 1억자리 수표 100장을 확인했을 때 지나도 수표를 다시 봉투에 넣는 참이었다. 지점장실을 나온 그들이 은행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을 때 곧 그들이 타고온 승용차가 다가와 섰다.
“아니?”
운전석을 내려다본 갑중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모르는 사내가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뒤쪽에서 나타난 사내들이 그들을 둘러샀으므로 갑중이 주춤 물러섰다. 모두 네댓명이나 된다.
“당신들 누구야?”
갑중이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을 때 사내들이 덮쳐왔다.
“사람살려”
그렇게 소리친 것은 지나였다. 그러나 다음 순간 지나의 입이 사내의 손바닥에 막혔고 경호원은 쇠뭉치에 머리를 맞고 주저앉았다. 갑중도 주먹으로 배를 맞은 후에 입이 막혔는데 곧 테이프가 붙여졌다. 그러고는 그들 앞으로 다가온 벤에 짐짝처럼 실려졌다. 그로부터 2시간이 지난 오후 4시경에 사우나에서 나온 조철봉과 영우는 제각기 이맛살을 찌푸린 채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커피숍의 구석에는 천복과 땅주인 네명이 둘러앉아 있었는데 가끔 이쪽을 힐끗거렸다.
“두시간이나 지났는데 어떻게 된거야?”
조철봉이 짜증난 표정으로 말했을 때 영우가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이상한데, 전화를 받지 않는단 말이야, 혹시.”
“혹시라니?”
퍼뜩 눈을 치켜뜬 조철봉이 묻자 영우가 머리를 저었다.
“그럴리는 없겠지. 누가 그런 거금을. 그리고 경호원까지 따라갔는데.”
“무슨 말이야?”
“사고가 생겼나 해서.”
“그럴리가 있나?”
했다가 조철봉이 다시 핸드폰을 들었을 때 벨이 울렸으므로 흠칫 놀랐다. 발신자 번호를 본 조철봉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왔어, 최전무야.”
그러고는 조철봉이 핸드폰을 귀에 붙였다.
“왜 이렇게 늦어?”
대뜸 꾸짖듯 물었던 조철봉의 얼굴이 다음 순간 굳어지기 시작했으므로 앞에 앉아있던 영우는 숨을 삼켰다.
“뭐라구?”
조철봉이 비명처럼 묻더니 침이 잘못 넘어간듯 재채기를 했다. 그러고는 소리쳤다.
“강도를 당했어?”
“아니, 뭐라구?”
앞에 앉아 있던 영우의 얼굴도 대번에 하얗게 굳어졌다. 그때 조철봉이 눈을 치켜뜨고 소리쳤다.
“지나도 같이?”
“뭐야?”
영우가 벌떡 몸을 일으킨 순간 핸드폰이 울렸다. 쥐고 있던 영우의 핸드폰이다.
“여보세요.”
정신없이 핸드폰을 귀에 붙인 영우가 응답했을 때 커피숍의 구석쪽에 앉아 있던 천복과 네 사내가 모두 이쪽으로 몰려오더니 둘러섰다.
“강도를 당했어.”
초점없는 눈동자를 굴리면서 조철봉이 말했다.
“놈들은 벌써 수표를 현금으로 찾아가 버린거야. 이거 어떻게 하나?”
그때 통화를 끝낸 영우가 넋이 나간 얼굴로 조철봉을 보았다.
“도대체 이런일이.”
조철봉이 어깨를 늘어뜨렸다.
“어디서 정보가 샌거야.”
영우는 방금 윤지나의 전화를 받은 것이다.
갑중과 함께 납치되었던 지나는 강도 일당이 수표를 현금으로 다 바꾸고 나서 풀려난 것이다.
“아니, 이럴수가 있습니까?
옆에 멀뚱하게 서서 눈만 굴리고 있던 김천복이 거칠게 한마디 했다.
“아무래도 이상합니다. 어떻게.”
“그래서.”
갑자기 머리를 든 조철봉이 천복의 말을 잘랐다.
“경찰에 신고를 했다니까 우린 이곳에서 기다립시다. 돈 액수가 커서 경찰청 특수부에 신고를 했다는거요.”
그러고는 조철봉이 이를 악물었다가 풀었다.
“곧 특수부 형사들이 이곳으로 온다니까 조금만 기다립시다.”
“아니, 잠깐.”
영우가 눈을 치켜뜨고 조철봉을 보았다.
“최전무가 신고를 했어?”
“그래, 어떻게든 돈은 찾아야 할것 아닌가? 특수부가 움직이면 돼. 그래서 말인데.”
조철봉이 정색하고 영우에게 말했다.
“경제수석이 밀어주면 적극적으로 수사가 될 것이다. 수석한테 지금 연락을 해. 이러고 있을 때가 아냐.”
“아니, 그것은.”
“지금 이것저것 따질 때가 아니란 말이다. 그렇지 않아?”
목소리를 높인 조철봉이 눈을 부릅뜨고 천복과 네명의 땅 주인을 둘러보았다.
“무슨수를 쓰더라도 돈은 찾아야 된단 말이다.”
“알았어. 그럼.”
핸드폰을 쥐고 자리에서 일어선 영우가 커피숍의 구석으로 갔다. 그때 탁자 위에 놓인 조철봉의 핸드폰이 울렸다. 조철봉이 핸드폰을 귀에 붙였을 때 천복과 네 사내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여보세요.”
반쯤 정신이 나간 표정으로 응답했던 조철봉의 눈에 초점이 잡혔다.
“예, 내가 조철봉입니다.”
그러고는 조철봉이 이를 악물었다가 풀었다.
“그렇습니다. 지금 서서울호텔 커피숍에 있습니다.”
조철봉의 시선이 천복과 네 사내를 훑고 지나갔다.
“그런데 누구라고 하셨지요? 특수부 김경위님이라구요?”
거칠게 묻고난 조철봉이 뱉듯이 말했다.
“여보시오, 돈 찾으려면 내가 무슨 짓이든 못하겠어? 그돈이 어떤 돈이라고. 기다릴테니까 오기나 하시오.”
그때 다가오던 영우가 그 소리를 듣고는 이를 악무는 것이 보였다.
영우는 경제수석에게 전화를 한다고 해놓고 지나한테 했던 것이다. 그러고는 갑중이 경찰청 특수부에 신고를 했는가를 확인하고 왔다. 머리를 든 조철봉이 영우에게 물었다.
“수석한테 말했어?”
“지금 회의중이야.”
“그, 시발, 만날 무슨놈의 회의라고.”
눈을 부릅뜨고 말한 조철봉이 팔목시계를 보는 시늉을 했다.
“할 수 없지. 그런데 이 새끼들은 왜 안오는거야?”
“누구 말이야?”
영우가 묻자 조철봉의 시선이 커피숍 입구로 옮겨졌다.
“누구긴 누구야? 특수부인지 지랄인지 하는 놈들이지.”
“그런데 그들이 돈을 찾을 수 있을까?”
“아니, 너, 지금 무슨 말을 하는거야?”
조철봉의 목소리가 컸으므로 커피숍이 울렸고 손님들이 흘끗거렸다.
“그러면 우리는.”
마침내 김천복이 찌푸린 얼굴로 영우를 보면서 말했다.
“괜히 경찰에 불려가 조사받을 필요는 없겠지요. 그래서 먼저 가는 것이 낫겠는데.”
“아니, 이것 보시오.”
와락 눈을 부릅뜬 조철봉이 엉거주춤 일어서며 천복에게 말했다.
“어쨌든 당신들은 모두 거금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아는 분들이고 이 일과 연관이 있지 않습니까? 먼저 가시면 어떻게 합니까?”
“아니, 우리가 왜?”
땅주인 하나가 버럭 언성을 높였다가 천복의 제지를 받고 물러났다. 천복이 일그러진 얼굴로 조철봉을 보았다.
“조사장님이 우리를 범인으로 보시는 것이 아니라면 빼 주시지요. 경찰 조사를 받게되면 괜히 서로 입장만 난처해지게 될 것 같은데요.”
“그건 맞아.”
갈라진 목소리로 말한 영우가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천복에게 말했다.
“김사장이 다 모시고 나가시오. 우리 둘이 남아있을 테니까.”
“그럼.”
건성으로 머리만 끄덕여보인 천복이 땅주인 넷을 이끌고 바람처럼 커피숍을 나갔다. 둘이 되었을 때 영우가 오래된 종이 색깔이 된 얼굴로 조철봉을 보았다.
“경찰청 특수부면 강도 일당을 잡을 수 있을까?”
“그래도 대형 사건만 취급하는 정예라고 알려져 있으니까.”
커피숍 입구쪽에 시선을 둔채로 조철봉이 열에 뜬 표정으로 말했다.
“돈을 찾으려면 무슨 짓이든 할거다.”
“야, 조사장. 이성을 찾자구.”
“이성을 찾자니?”
머리를 돌린 조철봉이 핏발선 눈으로 영우를 보았다.
“세상에서 돈 1백억을 순식간에 강탈당하고 제 정신이 온전하게 박혀 있는 놈이 있을까?”
“그거야 그렇지만.”
“난 지금 눈이 뒤집혔다. 말리지 마라.”
“야, 하지만.”
영우의 표정이 이제는 절실해졌다.
“경찰에서 그 돈이 무슨 돈이냐고 물으면 어떻게 할거냐?”
“돈만 찾게 된다면야 무슨 말이든지 할테다.”
“너, 경제수석 이야기를 하면 안돼. 부동산 이야기도, 그래서 그 사람들을 돌려보낸거야.”
“내가 정신이 없다고 해도 그렇게까지 하겠어?”
그때 커피숍 입구로 사내 두명이 들어섰다.
두 사내는 영락없는 형사였다. 둘다 스포츠형 머리에 캐주얼 양복을 입고 노타이 셔츠 차림이었는데 눈매가 매서웠다. 특히 앞장선 40대 사내는 대번에 조철봉과 영우를 알아보고는 거침없이 다가와 섰다.
“조금 전에 저하고 통화하신 조사장님이 여기 계십니까?”
“예, 접니다.”
조철봉이 대답하자 사내가 주머니에서 신분증을 꺼내 보였다. 붉은 줄이 2개 빗금으로 그어져 있고 사진위에 특수부라는 글자가 보였다.
“특수부 김성만 경위올시다.”
앞쪽 자리에 앉은 사내가 옆의 일행을 소개했다.
“수사관 이경사요.”
“이쪽은 김사장입니다.”
조철봉이 영우를 눈으로 가리켰다.
“이사람도 50억을 강탈당한 겁니다.”
“들었습니다.”
머리를 끄덕인 김경위가 힐끗 영우를 보았다.
“아무래도 윗선에 보고를 해야될 것 같습니다. 원체 대형 사건이라서요.”
김경위가 정색하고 말을 이었다.
“최전무님이 신고할적에 비밀로 해달라고 신신당부를 했지만 비밀로 한다고 사건이 빨리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 어렵게 될 수가 있어요.”
“돈을 찾을 수만 있다면 어떤 방법을 쓰든 상관 없습니다.”
영우의 시선을 한쪽 볼에 받으면서도 조철봉이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신문에 내 얼굴이 손바닥만하게 나와도 상관없습니다.”
“그런데 그 돈은 어떤 용도로 사용하실 계획이었습니까? 100억이나 되는 거금을 말입니다.”
“보관하려고 했던 겁니다.”
자르듯 말한 조철봉이 의자에 등을 붙였다.
“해외 투자에 대비해서요.”
“사장님은 어떻습니까?”
김경위가 묻자 영우는 눈의 초점을 잡았다.
“예, 나도 그렇습니다. 여기 조사장하고 같이 해외에 투자하려고.”
“제가 이곳에 오면서 조회를 해보니까 미국에서 2차례에 걸쳐 송금된 금액은 한화로 각각 50억, 28억이었는데 모두 헬레나 윤의 미국 계좌에서 이곳으로 송금되었더군요.”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낸 김경위가 눈을 가늘게 뜨고 펼쳐 보았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2개의 계좌로 나뉘어서 입금되었습니다. 하나는 김영우씨가 개설한 계좌이고 또 하나는 헬레나 윤 본인의 계좌고요.”
수첩에서 시선을 뗀 김경위가 영우를 보았다.
“맞지요?”
“예. 맞을 겁니다.”
그때 조철봉이 영우에게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지나가 네 계좌로 돈을 보내다니?”
“일단 내 돈을 지나 계좌로 넣었다가 이쪽으로 보낸 거야.”
귀찮다는 표정으로 말한 영우가 갑자기 길게 숨을 뱉더니 김경위에게 물었다.
“컨디션이 좋지 않은데, 우리가 언제까지 이렇게 죄인처럼 조사를 받아야 됩니까?”
“오늘은 기초조사만 하겠습니다. 하지만 내일은 경찰청에 나와주셔야만 되겠는데요.”
김경위가 부드러운 시선으로 조철봉과 영우를 보면서 말했다.
“어쩔 수 없습니다. 정식으로 조사를 하고 처리를 해야될 것 같아서.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원체 거금이 되어서요. 아마 언론에도 정보가 나갔을 것 같습니다.”
오후 7시가 되었을 때 영등포의 로얄호텔 라운지는 모처럼 활기가 띠어졌다. 항상 손님이 드물어서 라운지를 가라오케로 바꿀까 망설이고 있는 호텔 주인이 오늘 저녁 분위기를 본다면 마음이 변할 것이었다. 라운지 안쪽에는 십여명의 사내가 둘러앉아 있었는데 그 중앙에는 조철봉과 최갑중이 앉았다.
둘러앉은 사내들의 면면을 보면 40대에서 20대까지 다양했고 차림도 달라서 공통점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그것도 그럴 것이 앞쪽 두 사내는 특수부의 김성만 경위와 이경사였고 그 옆은 갑중과 지나를 납치했던 납치범들이다. 그리고 오른쪽 세 사내는 미행과 연락을 맡았던 갑중의 후배들이었다.
사내들은 모두 입은 열지 않았지만 눈동자는 생기있게 반짝였고 동작이 민첩했다. 누가 어깨라도 슬쩍 건드리면 웃음을 터뜨릴 것 같은 표정의 사내도 있었다. 이윽고 조철봉이 입을 열었을 때 사내들의 시선이 일제히 집중되었다. 그것은 마치 기대하던 선물을 받으려는 아이들의 표정과 똑 같았다.
“10분전에 윤지나와 김영우는 홍콩행 캐세이패시픽을 타고 인천공항을 떠났습니다. 이것으로 작전은 종결된 셈이오.”
조철봉이 정색하고 말했으므로 사내들은 아무도 표정을 풀지 않았다. 사내들을 둘러본 조철봉이 말을 이었다.
“모두 여러분이 빈틈없이 작업해준 덕분에 작전은 성공했습니다.”
그리고는 조철봉이 얼굴을 펴고 웃었을 때였다. 둘러앉은 모든 사내들이 제각기 다른 모습으로 웃었다. 짧게 소리내어 웃는 사내도 있었고 눈웃음만 치는 사내도 있었지만 분위기는 더 밝아졌다. 윤지나와 김영우는 서둘러 호텔을 체크아웃하고 나서 공항으로 달려나가 한국을 가장 먼저 떠나는 비행기를 탄 것이다.
그것이 홍콩행이 되었다.
“아마 홍콩에서 내일 아침 한국 방송을 듣거나 신문을 구해 보려고 하겠지요.”
김경위 역할을 한 사내가 웃음띤 얼굴로 조철봉에게 말했다.
“언론에 발표가 되지 않으면 무척 궁금해할 것입니다.”
“눈치챌 수도 있지만 이미 끝난 일이니까.”
정색한 갑중이 자르듯 말하고는 조철봉을 보았다.
“그럼 수당을 지급하겠습니다.”
머리를 끄덕인 조철봉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곳으로 모이게 한 것은 수당을 지급하려는 것이었다.
“수고들 했어요.”
조철봉이 다시 치하하자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했다. 이제 각자 갑중으로부터 거금을 받게 될 것이었다. 혼자서 라운지를 나온 조철봉은 호텔 앞에 주차시킨 차에 올랐다.
“시청앞으로 가자.”
조철봉이 불쑥 말하자 김경복은 잠자코 차를 출발시켰다. 김경복도 갑중의 후배로 이번 작전에 투입되었다. 차가 시내로 진입했을 때 조철봉이 생각난듯 물었다.
“넌 이번 일에 얼마 받기로 했지?”
“예?”
놀란듯 백미러를 보았던 경복이 어깨를 움츠려 보였다.
“예, 천만원 받기로 했습니다.”
“돈 욕심이 나지 않더냐? 우리가 강탈한 돈은 내 원금을 빼고 78억이나 되는데.”
“그럴리가 있습니까?”
정색한 경복이 백미러를 향해 머리까지 저었다.
“그런 욕심 부렸다간 골로 갑니다. 제 분수를 알아야지요.”
조철봉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변해질 것이었다.
그 시간에 홍콩을 향해 비행하는 캐세이 퍼시픽 항공의 일등석에 김영우와 윤지나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창가에 앉은 지나는 눈을 감은 채 의자를 눕히고 누워 있었지만 영우는 지금 위스키를 석잔째 마시는 중이었다.
“빌어먹을.”
술잔을 쥔 채 영우가 다시 혼잣소리로 욕설을 뱉었다. 두눈이 붉게 충혈되어 있어서 스튜어디스가 아까부터 훔쳐보고 있다.
“마지막 순간에 강도를 당하다니, 분명히 정보가 샌 거야.”
“그만해.”
그때 눈을 뜬 지나가 내쏘듯 말했으므로 영우가 흠칫했다.
“다 끝난 일이야, 그리고.”
지나가 차가운 시선으로 영우를 보았다.
“거긴 일달러도 손해본 것 없지 않아? 그만 징징거리라구.”
“아니, 뭐야?”
이제는 영우가 눈을 부릅떴다.
“징징거리다니? 그리고 내가 손해본 것이 없으니까 입 닥치고 있으라는 말이냐?”
“실제로 그렇지 않어?”
의자를 세운 지나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러나 주위의 시선도 있는터라 목소리는 낮췄다.
“난 6백만불이 넘는 돈을 강탈 당했단 말이야. 그 돈이 어떤 돈인 줄 알아? 미국에서도 한평생을 호강하면서 지낼 만한 돈이라구.”
“글쎄 누가 뭐래?”
“경호원을 잘못 고용했어.”
지나가 마음속에 담고 있었던듯 쏟아내듯 말했다.
“그 놈들은 강도가 덮쳤을 때 손한번 쓰지못하고 당했다구.”
입맛만 다시는 영우를 향해 지나의 불만이 이어졌다.
“김천복이도 믿을 만한 놈이 아니었어. 정보가 샜으면 그놈한테서 샌 거야.”
“그것은.”
‘시끄러워.”
그러고는 지나가 머리를 돌렸으므로 영우의 두눈이 치켜 올라갔다.
“너, 어떻게 할 거야?”
영우가 거칠게 묻자 지나가 눈만 가늘게 떠 보였다. 입술을 비튼 영우가 다시 물었다.
“철봉이한테 어떻게 할 거냐구? 우리가 이렇게 도망 나온 걸 알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겠어?”
“난 그 자식까지 생각해 줄 여유가 없어.”
뱉듯이 말했던 지나가 쓴웃음을 지었다.
“하긴 그 자식도 1백억을 빼앗겼으니까 반쯤 미쳐 있겠구만.”
“청와대로 찾아갈지 몰라.”
“그랬다간 교도소로 끌려갈지도 모르지. 돈 빼앗기고 교도소까지 가게 될 거야.”
그때서야 지나의 뒤틀려졌던 얼굴이 조금 풀어졌다. 맞는 말이다. 경제수석 유동택은 난데없이 나타난 사내가 김영우를 내세우며 돈을 강탈 당했으니 도와달라고 사정한다면 경찰에 넘길 것이었다. 지나가 혼잣소리처럼 말했다.
“조철봉은 그렇게 멍청하지 않아. 청와대로 찾아가거나 해서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을 거야. 그래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테니까.”
“그럼 경찰 특수부는 사건을 덮을까?”
“조철봉이만 조사하고 끝내겠지.”
길게 숨을 뱉은 지나가 다시 눈을 감으면서 말했다.
“운이 없었어. 나나 조철봉이나.”
“조철봉이 네 첫사랑은 맞아?”
불쑥 영우가 묻자 지나는 눈을 감은 채로 웃더니 말했다.
“웃겨, 그건 조철봉이 생각이지 난 아냐.”
(651)애정의 전화-1
조철봉과 최갑중이 안내된 방은 응접실겸 대기실인 모양이었다. 다섯평쯤 되어 보이는 방에 여자 세명이 앉아 있었는데 모두 후줄근한 차림새에다 얼굴에 그늘이 덮여 있다. 거기에다 조철봉과 갑중을 보더니 세명 모두가 경계의 기색을 띠면서 불안해하는 것이다.
“잠깐 여기서 기다리시죠. 원장님이 상담중이시거든요.”
여직원이 상냥하게 말했지만 목소리만 그렇지 얼굴 표정은 전혀 달랐다. 주로 전화 업무를 오래하는 사람들이 자신도 모르게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웃는 목소리가 나오는 얼굴이 찌푸려져 있는 터라 놀랄수도 있다.
“형님, 도대체 여기는 왜.”
하고 갑중이 옆에 앉은 조철봉에게 낮게 물었다.
“원장님을 아십니까?”
조철봉은 머리만 흔들고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곳은 ‘애정의 전화’사무실 안이었는데 사무실 건물은 골목 안의 단층 주택을 임차한 것이었다. 학대받는 여성을 위한 전화상담이나 보호소를 운영하고 있어서 가끔 언론에도 소개가 되었기 때문에 갑중도 이름은 들었다.
“형님.”
다시 갑중이 불렀다. 조철봉은 영문도 말하지 않고 이곳으로 갑중을 데려온 것이다. 그때 안쪽 문이 열리더니 정장 차림의 여자가 응접실로 들어섰다. 화장기가 없는 얼굴 피부는 윤기가 흘렀지만 머리는 백발이었는데 입가에 부드러운 웃음기가 떠올라 있었다.
“전화하셨던 조사장님이시죠? 제가 애정의 전화 원장인 임윤자입니다.”
자리에서 일어선 조철봉과 갑중에게 눈인사를 한 원장이 자리를 권하더니 서로 마주보고 앉았다. 그 사이에 불안한 모습으로 방안에 있던 세 여자는 직원에게 불려 방을 나갔다. 원장의 시선이 조철봉에게 옮겨졌다. 먼저 무슨일로 찾아 왔느냐고 묻지 않는 것도 수없이 상담자를 만난 경험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원장의 시선을 받은 조철봉이 헛기침을 했다.
“우연히 애정의 전화에서 하시는 일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광고도 하지 않고 공식적인 지원도 받지 않습니다.”
원장이 낮고 듣기좋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저 알음알음 몇몇분들이 도와주셔서 운영하고 있지요. 여기 근무하는 직원 10여명도 모두 자원봉사자들입니다.”
원장에게 조철봉같은 손님은 드물었던 것이 틀림없었다. 생기있는 표정으로 원장이 조철봉을 보았다.
“조금전에 이곳에 계셨던 여자 세분을 보셨죠? 그분들은 남편의 폭행에 시달리다가 결국 가출한 분들입니다. 우리가 숙소를 제공해준 후에 상담을 하고 필요하면 법적 수속까지 해 드립니다.”
“좋은 일을 하십니다.”
조철봉이 감탄한듯 크게 머리를 끄덕였다.
“제가 지원해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러자 원장이 정색하고 조철봉이 건네준 명함을 보았다.
“사업하시는 분이시군요.”
“예, 그렇습니다.”
“솔직히 지원자가 필요하긴 합니다. 이집도 월세가 밀려 있어서 곧 쫓겨날 형편이었거든요.”
쓴웃음을 지은 원장이 가늘게 숨을 뱉었다.
“그런데 갑자기 천사처럼 사장님이 나타나셨네요. 지금은 몇만원이라도 필요한 상황이거든요.”
그러자 조철봉이 얼굴을 펴고 웃었다.
“좋은 일을 하시니까 복을 받으시는 거죠.”
그때 갑중이 제법 크게 헛기침을 했다. 그러고는 시치미를 뚝 떼고 딴전을 피웠는데 조철봉에게 못마땅하다고 시위를 하는 것이었다. 미국에서 날아온 사기꾼의 등을 치느라 회사일이 밀려있는 판에 뜬금없이 이곳으로 끌려온 이유를 알고나니 짜증이 날 만했다.
“그럼.”
그때 원장이 옆에 놓인 인터폰을 누르며 조철봉을 향해 웃었다.
“관리부장을 부르겠습니다. 이곳의 재정을 담당하는 직원인데.”
그러고는 원장인터폰에 대고 짧게 말하더니 허리를 폈다. 단정한 태도였다.
“운영자금에 항상 쪼들려서 제일 고생을 많이 하는 사람이죠.”
그때 문에서 노크 소리가 나더니 곧 문이 열리면서 직원 하나가 들어섰다. 시선을 먼저 들었던 갑중은 숨을 들이켠채 멈추고는 저도 모르게 머리를 돌려 조철봉을 보았다.
조철봉도 뒤늦게 머리를 들고 방으로 들어선 여자를 보았다. 여자는 30대 쯤으로 보였고 셔츠를 팔꿈치 밑까지 걷어올린데다 바지차림이었다. 화장기가 전혀 없는 얼굴에 긴 머리는 아무렇게나 뒤쪽에서 말아 올려 고무줄로 묶었는데 그래서 셔츠 깃 위로 목이 다 드러났다.
“부르셨습니까?”
맑고 조금 낮은 목소리로 물은 여자가 원장 옆으로 다가와 섰을때 갑중이 소리죽여 긴 숨을 뱉었다. 지금까지 조철봉의 곁에서 수십명의 여자가 지나간 꼴을 역력하게 보아온 갑중이다. 따라서 조철봉과 여자와의 인연을 예상한 것이다.
그때 조철봉의 어깨가 보일듯 말듯 늘어지고 있는 것을 갑중은 볼 수 있었다. 조철봉도 길게 숨을 뱉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조철봉도 감동을 받았다는 증거였다. 감동을 받았다면 절대로 그냥 넘어간 적이 없는 조철봉이다.
“응, 저, 조사장님.”
원장이 조철봉에게 말했다.
“우리 관리부장 손세현씨입니다. 이분은 오성자동차의 조사장님.”
“안녕하십니까?”
손세현이 공손하게 인사를 했을 때 조철봉이 자리에서 일어섰으므로 갑중도 따라 일어서야만 했다.
“반갑습니다.”
머리를 숙인 조철봉이 시선은 손세현한테 그대로 두고 손으로만 옆의 갑중을 가리켰다.
“여긴 저희 회사 전무입니다.”
“예, 저는 최갑중입니다.”
갑중은 세현에게 시선도 주지 않은채 인사를 했다. 셋이 다시 자리에 앉았을 때 원장이 세현에게 말했다.
“조사장님이 지원금을 희사하시겠다는구나. 이렇게 고마울수가.”
“고맙습니다.”
힐끗 조철봉에게 시선을 준 세현이 다시 머리를 까닥여 인사를 했다. 그리고는 3초쯤 방안에 정적이 덮였다. 조철봉이 지원금 액수를 말할 차례인 것이다. 그때 갑중이 가볍게 헛기침을 한 것은 다분히 경고용이었다. 조철봉에게 오버하지 말라는 신호였던 것이다. 조철봉도 헛기침을 하고는 입을 열었다.
“먼저 운영자금으로 1억을 지원하겠습니다. 여기 1억이 있습니다.”
조철봉이 가슴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더니 수표 한장을 집어 세현 앞에 놓았다. 세현은 온몸을 굳힌 채 눈썹 한올도 까닥이지 않았으며 원장은 숨도 끊어진 것 같았다. 그때 조철봉의 말이 이어졌다.
“그리고 이 사무실이 좁은 것 같은데 관리부장님이 나하고 같이 사무실을 구해 봅시다. 넓고 깨끗한 곳이 있을 겁니다.”
그런 눈으로 날 보지마라.”
돌아오는 차 안에서 조철봉이 갑중을 흘겨보며 말했다.
“내가 즉흥적으로 애정의 전화 사무실에 찾아간 것이 아니야. 이틀동안이나 수백군데를 알아본 후에 결정한 것이다.”
“나아, 참.”
흘끗 택시 운전사의 뒷모습에 시선을 준 갑중이 이맛살을 찌푸리고 말했다.
“형님은 자선사업을 못해서 안달이 난 사람같아 보이더만요. 지금까지 그런 일을 해오셨다면 조금 이해가 가겠지만.”
갑중의 목소리가 더 낮아졌다.
“갑자기 안하던 짓을 하시니까 이상하게 보이는 겁니다. 도대체 왜.”
“왜라니?”
눈을 치켜뜬 조철봉이 으르렁거리듯 물었다.
“지금 돈이 얼마나 남아 있는 거냐?”
“무슨 돈 말입니까?”
했다가 갑중이 얼굴을 굳히고는 조철봉을 보았다.
“70억이 조금 넘습니다.”
조철봉이 윤지나한테서 강탈한 돈을 물었던 것이다. 갑중의 시선을 받은 조철봉이 입술만 달싹이며 말했다.
“난 그 돈을 자선사업으로 다 뿌릴테다. 너도 그렇게 알고 있도록.”
“형님.”
“왜? 불만이냐?”
“아닙니다.”
갑중이 머리를 저으면서도 입맛을 다셨다.
“불만이 있을리가 있습니까? 다 형님이 주도하신 일인데요. 하지만.”
“하지만 뭐야?”
“자선사업이 아니더라도 다른 좋은 용도로 쓰일 곳이 있을 것입니다.”
“그럼 너도 찾아봐.”
기분이 조금 풀린듯 조철봉의 얼굴도 밝아졌다.
“난 그 돈을 쥐고 있지 않을테니까.”
조철봉의 의중을 알아챈 갑중은 더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윤지나로부터 강탈한 78억은 은행 주차장에서 빼앗은 즉시로 다시 현금으로 바꾼 다음 보관하고 있는 것이다. 그중에서 작전에 참가한 요원들에게 나눠준 수당이 3억 가깝게 되었으니 나머지는 고스란히 남아있는 셈이었다.
“관리부장이 마음에 들더구먼.”
불쑥 조철봉이 입을 열었다.
“너도 눈치를 챈 것 같던데.”
“윤지나보다는 나았습니다.”
“흥.”
쓴웃음을 지은 조철봉이 등을 붙이고 앉더니 곧 정색하고 말했다.
“마음을 비우면 꼭 그런 기회가 온다. 명심하고 들어.”
웃으려던 갑중이 조철봉과 시선을 마주치더니 입을 꾹 다물었다. 조철봉의 표정이 진지했기 때문이다. 조철봉의 말이 이어졌다.
“내가 손세현을 만난 것도 마음을 비우고 있었기 때문이야. 하나를 잃고나면 꼭 다른 하나가 찾아온다는 신념이 있었기 때문이지.”
“같이 사무실을 얻으러 다니실 겁니까?”
“내가 약속을 했으니까.”
“제가 손세현씨에 대해서 조사해 놓을까요?’
“닥쳐.”
운전사에게 시선을 준 조철봉이 낮게 꾸짖었다.
“그럴 필요는 없으니까 넌 더이상 신경쓰지 마라.”
“알겠습니다.”
심호흡을 한 갑중도 등을 붙이고 편하게 앉았다. 조철봉의 컨디션이 갈 때와는 다르게 밝아져 있었기 때문에 갑중도 기운이 났다. 이것은 손세현 덕분이다.
“엄마, 나 피아노 안할래.”
하고 민지가 말했을때 손세현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니, 왜?”
눈을 둥그렇게 뜨고 묻자 민지는 찌푸린 얼굴로 한쪽 어깨를 조금 쳐드는 시늉을 했다. TV에서 인기 가수가 쓰는 제스처를 흉내낸 것이다.
“짜증나서 그래.”
“얘가.”
하고는 머리를 돌렸던 세현은 주방에 서있던 어머니의 시선과 마주쳤다. 민지가 방으로 들어갔으므로 세현이 가늘게 숨을 뱉으며 어머니 장여사에게 물었다.
“엄마, 쟤가 왜 저래?”
“몰라서 묻니.”
혀부터 찬 어머니가 세현을 흘겨보았다.
“민지가 얼마나 속이 깊은지 너도 알지 않어? 피아노 교습비 낼 날이 다가오니까 미리 걱정이 되어서 그런거야.”
세현도 짐작하고 있었던 터라 기운이 빠져 털썩 소파에 앉았다. 민지는 초등학교 2학년이었지만 알건 다 안다. 어머니가 무보수로 학대받는 여자를 위한 단체에 나가 일을 하며 외삼촌이 한달에 50만원씩 외숙모 몰래 보내주는 돈으로 생활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는 것이다. 어머니가 다가와 앞에 앉았는데 오늘은 붙잡고 이야기를 할 심산인것 같았다. 오늘은 일요일이었다.
“너, 민지를 위해서도 이렇게 살면 안된다.”
어머니가 굳어진 얼굴로 서두를 꺼냈다.
“네 앞가림도 못하면서 불쌍한 여자를 돕는다니. 기가 막힌다.”
“엄마.”
세현이 눈을 크게 떴다.
“또 시작이야?”
“결혼 하고나서도 그 일은 얼마든지 할 수 있어. 그때는 네 마음도 변하겠지만.”
어머니가 장담하듯 말했다.
“내일이라도 네가 강사장을 만난다면 잔소리 안하마.”
“그만해.”
강사장은 중학생 아들이 하나있는 이혼남으로 화곡동의 제법 큰 슈퍼마켓 사장이다. 어머니는 중매 아주머니와 함께 강사장을 몇번 만난후에 홀딱 반해서 세현을 반강제로 데리고 나가 만나게 했던 것이다.
그러나 세현은 두번 다시 강사장을 만나지 않았다. 싫다기보다 재혼할 생각이 없는 것이다. 첫남편 안성호는 알코올 중독자에다 술에 취하면 세현을 상습적으로 구타했다. 대학때 만나 3년동안 연애를 하다가 안성호와 결혼한 세현은 민지가 두살이 될때까지만 해도 행복한 주부였다.
그러나 성호가 직장에서 실직을 당하고나서부터 모든 것이 변했다. 결혼 생활은 지옥이었다. 결국 민지가 네살때 세현은 빈몸으로 도망쳐나와 성호와 이혼했다. 지금 성호는 정신병원에 수용되어 있지만 민지에게는 죽었다고 말해주었다.
“벌써 5년이다.”
어머니가 넋두리하듯 말했을때 세현은 길게 숨을 뱉었다.
“네 나이도 벌써 서른다섯이야. 올해 넘어가기 전에 결정을 해야돼.”
이렇게 어머니가 서두는 가장 큰 이유는 경제적인 문제 때문이다. 어린 민지가 돈 걱정 때문에 피아노 교습을 받지 않는다고 말한 것도 어머니의 가슴을 찢어놓았을 것이다. 그때 어머니가 마침 세현이 마음속으로만 품고있던 말을 꺼내었다.
“난 더이상 민지가 궁색하게 사는 꼴을 못보겠다. 어린것이 걱정 안시켜 준다고 피아노 안배우겠다니. 아이그.”
그때 전화벨이 울렸으므로 세현은 서둘러 전화기를 들었다. 가만 있는 것이 불안했던 참이었다.
“여보세요.”
세현이 응답 했을 때 사내가 물었다.
“손세현씨?”
“네, 그런데요.”
“나, 조철봉입니다. 지난번에 들렀던.”
지난번에 들른 남자가 한두명이 아니었지만 세현은 금방 누군지 알았다. 거금 1억을 운영비로 지원한 후원자는 애정의 전화 17년 역사상 처음이었던 것이다. 더구나 그는 사무실을 구해 주겠다고까지 했다.
“어머, 조사장님. 여긴 어떻게.”
저도 모르게 굳어졌던 세현의 얼굴이 어머니의 시선을 받더니 대번에 붉어졌다. 그때 조철봉이 짧게 웃었다.
“제가 연락 드린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오늘이 일요일이라 쉬시는데 방해한 것은 아닙니까?”
“아녜요.”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실은 나도 일요일밖에 시간이 없어서요.”
“아, 그러세요.”
“그럼 사무실에 가보실까요? 지금 기다리라고 했습니다만.”
“어머, 사무실을.”
“예, 한번 먼저 보시지요. 그러고는 회장님과 상의하시고 입주를 결정하시면 되겠습니다.”
“그럼 사무실을 구해 놓으신 건가요?”
“그렇습니다.”
“어머나.”
“지금 나오실수 있습니까?”
“네, 나가죠.”
“그럼 가까운 곳으로 모시러 가지요.”
“아녜요, 저는.”
“아니, 지금 가는 중입니다.”
그래서 세현은 허겁지겁 세수를 하고 옷을 갈아 입었는데 그동안 어머니는 눈을 가늘게 뜨고 주시하고만 있더니 현관에서 신을 신을 때 물었다.
“누구냐?”
“사무실 구했다고 해서.”
“같이 일하는 사람이야?”
“응.”
어머니가 의심쩍은 시선을 주었지만 세현은 서둘러 집을 나왔다. 조철봉은 아파트에서 두 블록 떨어진 생명보험회사빌딩 옆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차의 비상등을 켜놓고 있어서 금방 찾아 내었다.
그리고 조철봉은 차종을 말하지않고 검정색이라고만 했는데 검정색 벤츠 600이다. 벤츠 600이면 차값만 2억이 훨씬 넘는다는 신문기사를 언젠가 읽은 적이 있는터라 세현은 다가가는 동안 두번이나 뒤를 보았다. 누가 볼까 괜히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세현이 다가갔을 때 차에서 보고 있었던지 운전석에서 조철봉이 내리더니 웃음띤 얼굴로 맞았다.
“어서오십시오.”
그러고는 운전석 옆쪽 문을 열어 주었다.
“타시지요.”
세현은 볼이 탱탱하게 긴장되는 것을 느끼면서 옆자리에 올랐다. 문이 닫히고 조철봉이 앞쪽으로 돌아 운전석으로 오는동안 지나치는 행인들이 차 안을 흘끗거리는 것을 볼수 있었다. 그러자 온몸이 짜릿해지면서 갑자기 오줌이 마려웠다. 운전석에 오른 조철봉이 부드럽게 차를 발진시키면서 말했다.
“제가 며칠후면 중국 출장을 가야하기 때문에요.”
핸들을 쥔 조철봉이 흘끗 세현을 보았다.
“사람을 시켜도 되겠지만 제가 직접 사무실로 안내하고 싶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우선 그렇게 인사부터 한 세현이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심호흡을 했다. 차는 달리고 있었지만 너무 조용해서 가슴뛰는 소리까지 들릴것 같았다. 세현은 벤츠 600은커녕 60도 타보지 못했던 것이다.
瑁뗐떵응?차를 세운곳은 애정의 전화 사무실에서 차로 30분 거리밖에 안되는 주택가의 3층 건물 앞이었다. 주위는 고급 주택가여서 조용했고 건물은 벽면을 유리로 장식했는데 외관이 중후했다. 그들이 차에서 내렸을때 경비원이 다가오더니 조철봉을 향해 경례를 올려붙였다. 조철봉이 그에게 머리를 끄덕이며 웃는것을 보면 안면이 있는 눈치였다.
“들어가시지요.”
조철봉이 앞장서서 건물의 현관으로 들어서며 말했다. 유리문을 밀고 들어서자 곧 대리석이 깔린 20평쯤 넓이의 로비가 나왔고 안쪽은 사무실이었다.
“2층과 3층은 각각 60평 규모의 사무실과 대기실, 그리고 식당으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1층을 안내한 조철봉이 앞장서서 계단을 오르며 말했다. 건물안은 텅 비어 있었지만 사방의 유리창을 통해 밝은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기 때문인지 분위기가 밝았다.
건물은 먼지 한점 보이지않을 정도로 깨끗하게 청소가 되어 있었는데 사무실에 책상만 갖다 놓으면 당장에라도 업무를 계속할 만했다. 조철봉이 3층의 응접실 소파에 먼저 앉더니 손으로 앞쪽 의자를 가리켰다.
“앉으십시오.”
건물을 둘러보는 동안 세현은 기가 질려 계속해서 입을 벌렸다가 침만 삼켰고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누지 못했다. 세현이 조심스럽게 앞쪽에 앉았을때 조철봉이 얼굴을 펴고 웃었다.
“이 건물은 얼마전에 내가 구입한 것입니다. 따라서 건물주는 바로 납니다.”
엄지를 구부려 자신의 얼굴을 가리켜보인 조철봉이 말을 이었다.
“애정의 전화에서 이 건물을 사용할 의사가 있다면 무료로 임대해 드리겠습니다. 어떻습니까?”
“저는 결정권이 없는데.”
그렇게 입을 열었다가 세현은 상기된 얼굴로 조철봉을 보았다.
“그렇게만 해 주신다면 모두 사장님께 고마워할 거예요. 이런 사무실은 꿈도 꾸지 못했던 우리들이었거든요.”
“그렇습니까?”
“모두 행복해 할거예요.”
“그럼 됐군요.”
머리를 끄덕인 조철봉이 자리에서 일어나 옆쪽에 놓인 냉장고를 열었다. 그러자 세현은 안에 음료수에다 과일까지 가득차 있는 것을 보았다.
“뭘 드시겠습니까?”
“제가 할게요.”
서둘러 일어선 세현이 냉장고로 다가왔기 때문에 둘의 거리는 한뼘도 안되게 가까워졌다가 떨어졌다. 그때 조철봉은 세현으로부터 옅은 향내를 맡았다. 비누에다 체취가 섞인 여자의 냄새였다.
“오렌지 주스로 주십시오.”
자리로 돌아와 앉은 조철봉이 낮게 말하고는 허리를 굽힌 세현의 등과 엉덩이의 곡선을 보았다. 조금전에 냉장고 앞에서 세현과 번개불처럼 시선이 마주쳤을때 조철봉은 희망을 읽었다. 호의라고 표현할수도 있는 눈빛이었으며 그것은 조금만 더 발달되면 추파도 될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흙속에 묻힌 고려청자를 파 내는것처럼 조심해야만 한다. 눈빛 한번만 잘못 움직여도 수억짜리 청자가 한순간에 부서지는 것이다. 주스잔이 놓여지고 다시 세현이 앞에 앉았을때 조철봉이 부드럽게 말했다.
“세현씨는 좋은일을 하고 계십니다. 난 이렇게라도 도와드리는 것이 기쁩니다.”
조철봉이 은근한 시선으로 세현을 보았다. 두다리를 가지런히 모으고 앉은 세현의 알몸이 눈앞에 떠올랐고 샘과 골짜기의 숲도 보였다. 이때가 제일 행복한 순간이다.
세현이 시선을 들었으므로 검은 눈동자와 정면으로 마주쳤고 그순간 조철봉은 다시 감전이나 된 것처럼 온몸이 짜릿해졌다. 아름답다. 화장기가 없는 맑은 피부와 숲속의 호수같은 눈, 야무지게 닫혀졌지만 그 안에는 꿀같은 침과 영원히 닳지않는 젤리같은 혀가 감춰져 있는 것이다. 조철봉은 고인 침을 삼키고는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청소부 일곱명이 사흘동안 건물 청소를 했지요. 그래서 이렇게 깨끗해진 겁니다.”
영문을 모르는 세현이 눈만 둥그렇게 떴을 때 조철봉이 정색하고 세현을 보았다.
“모두 세현씨를 맞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겁니다.”
세현의 볼이 조금 붉어지면서 눈빛이 강해졌다. 눈에 열기가 모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현은 경솔하게 왜냐고 묻지 않았다. 그때 조철봉의 말이 이어졌다.
“사무실에서 세현씨를 처음 보았을 때 가슴이 내려앉았습니다.”
그러면서 조철봉이 손바닥으로 가슴을 두번 쳤다.
“난 전생의 인연을 믿는 사람입니다. 세현씨와의 인연이 우연하게 이루어졌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전생은 커녕 오늘 만난 인간도 믿지 않는 조철봉이었지만 이런 경우에는 무엇이든 끌어다 붙여도 그럴 듯하게 포장이 될 것이었다. 맨정신으로 멀리 띄워놓고 보면 아주 유치한 수작인 줄 금방 드러나겠지만 지금은 다르다. 이래서 생각하는 동물인 인간은 이런 경우에 함정으로 빠져드는 것이다. 조철봉이 열기띤 시선으로 세현을 보았다.
“이 건물 안에는 지금 나하고 세현씨 둘 뿐입니다. 그것이 무슨 의미인 줄 아십니까?”
모르겠는데요, 하면 세현이 한방에 조철봉을 날려버릴 수가 있겠지만 짐승이라면 모를까, 생각하는 동물인 인간으로서 그렇게 나갈 확률은 희박하다. 조철봉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둘이 있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저, 조사장님.”
하고 마침내 세현이 입을 열었을 때 조철봉이 손을 저어보이며 일어섰다.
“압니다. 놀라셨겠지요.”
“저는.”
따라 일어선 세현이 황당한 표정을 짓고 조철봉을 보았다.
“저는 조금.”
“난 혼자 삽니다.”
조철봉이 눈을 치켜뜨고 세현을 보았다.
“지금까지 여자에 대해서 이런 감정이 일어난 건 처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황당한 모습을 보여드린 것 같습니다.”
그순간 조철봉의 부릅뜬 눈에서 두줄기 눈물이 주르르 흘러 내리는 것을 세현은 보았다. 놀란 세현이 온몸을 굳히고는 조철봉의 눈물을 보았다. 남자의 눈물이다. 술도 안마시고 실직도 당하지 않은 남자, 벤츠 600을 타고 1억짜리 수표를 만원권처럼 내놓으며 수십억 가치의 건물을 선뜻 무상으로 임대해주는 남자가 쏟는 눈물인 것이다.
세현은 저도 모르게 겹으로 숨을 들이켰다. 저 눈물의 원인 속에 자신이 포함되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감동을 받은 것이다. 조철봉이 갑자기 정신이 든 듯이 손등으로 눈물을 닦더니 가라앉은 시선으로 세현을 보았다.
“난 말재주도 없고 기교도 모릅니다. 그래서 이렇게 직선적으로 가슴에 품은 말을 내놓습니다.”
그리고는 조철봉이 희미하게 웃었으므로 세현이 따라 웃었다.
“놀랐지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세현의 눈빛과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조철봉은 세현의 시선을 잡은 채 머리를 끄덕였다.
“용기가 납니다.”
그러고는 조철봉이 다시 쑥스러운 표정으로 웃었다.
“난 요즘 몇년동안 여자하고 둘이 있어본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천방지축인 것 같은데.”
“아녜요.”
세현이 머리를 저었는데 진지한 표정이었다.
“전혀 그렇지 않아요.”
“그럼 안심했습니다.”
어깨를 늘어뜨린 조철봉이 길게 숨까지 뱉었다. 조철봉이 3층의 계단 앞에 섰을 때 생각난 듯 몸을 돌려 뒤를 따르는 세현을 보았다. 건물안은 조용했고 오후의 햇살이 유리창을 통해 안으로 환하게 쏟아지고 있었다. 세현과 시선이 마주쳤을 때 조철봉이 침부터 삼켰다.
“세현씨.”
“네.”
“손 잡아도 되겠습니까?”
그러자 세현이 풀썩 웃었지만 반걸음쯤 뒤로 물러섰다.
“싫어요.”
“내가 싫습니까?”
“우린 오늘로 두번째 만났고 서로에 대해서 거의 모르고 있어요.”
“역시 난 기교가 부족하군요.”
난감한 표정이 되었던 조철봉이 곧 머리를 끄덕였다.
“영화 같은데서는 자연스럽게 손을 잡고 껴안던데.”
“그건 영화니까 그렇죠.”
하면서 세현이 한걸음 다가왔을 때였다. 조철봉이 몸을 틀면서 한손으로 허리를 감아 안았고 다른 손으로는 목을 뒤에서 받치면서 상반신을 바짝 붙였다. 그 어떤 영화에서도 볼 수 없었던 완벽한 자세였으나 세현은 오직 꼼짝할 수 없다는 것만 느꼈다. 그들은 3층의 계단 중간쯤에 서 있는 중이었다.
“엄마.”
하고 세현이 외마디 비명을 지른 다음순간 조철봉의 입술이 입을 막았다. 세현의 입술에서는 살구맛이 났다. 두쪽 입술을 한입에 넣은 조철봉이 갈증 난 것처럼 빨아들였을 때 세현이 두손으로 어깨를 밀었다. 그러나 빈틈없이 감싸안은 조철봉의 품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조철봉이 잠깐 입을 떼었을 때는 20초쯤이나 지난후였는데 그때는 이미 세현의 몸이 무거워져 가는 중이었다. 그것은 세현이 몸의 힘을 빼고는 조철봉에게 안겨 있다는 표시였다.
호흡을 조절한 조철봉이 다시 세현의 입술을 빨았을 때였다. 세현이 두 팔을 들어 조철봉의 목을 감아 안았다. 그러고는 입을 벌려 혀를 만나게 해주었다. 조철봉은 조심스럽게 세현의 혀를 빨아들였다. 다이아 세공사처럼 귀퉁이부터 아주 세심하게 닦고 문지르는 동안에 세현의 호흡이 가빠졌다.
“이제. 그만요.”
겨우 입술을 뗀 세현이 헐떡이며 말했을 때 조철봉이 하반신을 바짝 붙였다. 그들은 이제 계단의 벽에 붙어서 있었는데 아래 위층이 다 보였다.
“아이.”
하면서 세현이 하반신을 비튼 것은 조철봉의 철봉이 그곳을 정통으로 눌렀기 때문이다.
“이제 그만요. 응?”
하고 세현이 조철봉을 보았는데 두눈이 번들거리고 있었다. 그러자 조철봉이 세현의 하반신에 철봉을 문질렀다.
“여긴 우리 둘뿐입니다.”
3층 빌딩에 둘뿐인 것이다. 넓고 환한 빌딩이 둘을 위해서 텅 비어졌다. 이런 환경에서 자극을 받지 않는다면 목석이다.
“나중에.”
조철봉의 철봉이 문질러오는 동안에 세현은 달아올랐다. 그러나 입은 마음과 다른 소리를 뱉는 것이다.
“나중에요, 응?”
만일 말대로 나중을 기약하고 물러난다면 백발백중으로 실패한다. 이것은 조철봉의 경험에서 얻은 교훈이다. 이런 상황에서 나중에요는 지금이요로 해석해야 낙오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조철봉의 입술이 세현의 목으로 내려왔고 몸은 더 엉켜졌다.
“세현씨.”
조철봉이 헐떡이며 불렀다. 세현이 눈만뜨는 시늉을 했다.
“우리 2층 응접실로.”
“싫어요.”
“그곳 소파는 큰데.”
“싫어요.”
했지만 조철봉이 번쩍 안아 들었을 때 세현은 두 팔로 목을 감아 안았다. 이층 응접실로 한걸음에 들어선 조철봉은 먼저 세현을 소파 위에 내려 놓았다.
“아이, 참.”
하면서 세현이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몸을 세워 앉은 순간 조철봉은 불쑥 바지부터 벗어던졌다. 팬티까지 함께 벗어버린 것이다.
“어머머.”
세현이 비명 같은 외침을 뱉으면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러나 손가락은 부챗살처럼 펴져 있었다. 조철봉이 벌떡 일어선 철봉을 건들거리면서 다가섰을 때 세현은 피하지 않았다. 열이 오른 몸이 굳어져 버린 상황이 된 것이다. 조철봉이 세현의 바지 지퍼를 차분하게 풀어 내리는동안 응접실안은 가쁜 숨소리만 들릴 뿐 조용했다. 지퍼가 풀리고 바지가 끌러내려질 때 세현은 외면한 채 엉덩이를 들어 벗겨지는 것을 도왔다.
햇살이 환하게 응접실을 비치고 있어서 불을 끄라 자시라 할 것도 없고 커튼도 없다. 조철봉은 세현의 흰색 팬티만 입은 하반신을 보자 저도 모르게 신음했다. 세현의 하반신은 미끈했다. 피부는 매끄러운데다 건강한 갈색이었고 군살도 없다. 팬티 앞쪽의 도톰한 동산은 더욱 자극적이었으며 양말은 한쪽만 벗겨져서 균형 잡힌 발가락도 육감적이었다. 조철봉은 여유를 주지 않고 세현의 팬티를 벗겨 내고는 곧 소파 위로 쓰러뜨렸다. 이제 세현은 벗은 하체를 보이는 것이 더 부끄러운 듯 오히려 조철봉이 밀자 먼저 쓰러졌다.
“세현씨.”
몸을 겹치면서 조철봉이 불렀으나 세현은 가쁜 숨만 뱉으며 대답하지 않았다. 이미 눈을 감았고 얼굴은 상기되어 있는데다 두 손으로 조철봉의 어깨를 단단히 움켜쥐고 있다.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조철봉은 손을 뻗어 세현의 샘을 부드럽게 훑었다. 그러자 곧 샘이 넘쳐나고 있는 것을 알수 있었다. 심호흡을 한 조철봉이 몸을 올리면서 세현의 귀에 대고 속삭이듯 물었다.
“세현씨, 해도 돼?”
안된다고 하면 어떤 미친 놈이 안하겠는가? 이 황홀한 순간을 조금이라도 더 연장시키고 싶은 수작일 뿐이다. 세현이 대답 대신 몸을 비틀면서 샘 주위를 철봉에 비볐으므로 조철봉은 곧장 철봉을 겨누고는 진입했다. 그순간 세현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나왔다. 응접실이 울리는 꽤 큰 탄성이다.
“소리쳐도 돼.”
조철봉이 하반신을 격렬하게 움직이며 말했다.
“이 건물에는 우리 둘 뿐이야.”
그러자 세현의 신음이 더 높아졌다. 세현도 이 상황을 충분히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세현으로서는 이런 자극은 생전 처음이었다. 전 남편과의 섹스는 6년도 더 전인데다가 술냄새에 덮여진 분위기에 끈적한 느낌으로만 전해졌던 그것은 아예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았던 추억이었다. 따라서 백주 대낮에 텅빈 빌딩안의 모든 문을 활짝 열어놓고 둘이 알몸이 되어서 마음껏 쾌락의 신음을 뱉는다는 장면은 꿈도 꾸지 못했던 것이다. 더욱이 자신이 그 주인공이 되어있는 상황이다.
세현은 자신의 신음을 제 귀로 듣고는 더 흥분했다. 그래서 무아지경으로 빠져든 다음 곧장 폭발해버렸다. 조철봉은 세현이 금방 절정에 오른 것을 보고는 차분하게 수습해 나갔다. 늘어져가기 시작하는 세현을 빈틈없이 감싸 안은채 충분하게 여운을 즐기게 한 다음에 다시 시작했다. 그때서야 세현이 놀란듯 눈을 뜨고는 바로 눈앞에 떠있는 조철봉의 얼굴을 보았다. 그러자 조철봉이 세현의 눈에 가볍게 입술을 붙였다.
“다시 시작하는 거야.”
“또?”
했지만 세현이 벌써 두팔을 올리더니 조철봉의 목을 감았다. 그러고는 붉어진 얼굴로 눈을 흘기는 시늉을 했다.
“나 몰라. 대낮에 이게 뭐야.”
“이런 상황에서는 더 흥분이 되지.”
몸을 붙이면서 조철봉이 세현의 귀에 대고 더운 입김을 뿜었다.
“아까는 빌딩이 떠나갈 것처럼 신음을 지르더구먼 그래.”
“나 몰라.”
하면서도 세현은 두 다리를 벌려 조철봉의 몸을 받으려는 시늉을 했다. 서두는 것이다. 이런 분위기에서 주고받는 대화가 때로는 대단한 영향을 준다. 대부분의 내용이 쓰잘 것 없지마는 서로를 감질나게 만드는 효과를 내며 결정적인 순간의 폭발력을 증대시키는 것이다. 이윽고 철봉이 샘안에 진입했을 때 세현은 환희의 탄성을 뱉으며 맞아들였다. 온몸을 활처럼 구부려 올리면서 빈틈없이 받아 들였다가 곧 하체를 떨어뜨리면서 두 다리로 조철봉의 몸을 감는 것이었다.
“여보, 나 죽겠어.”
목을 뒤로 꺾으면서 세현이 울부짖었다. 조철봉은 세현의 모든 신경이 자신의 몸을 받아들이는 데에 집중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여보, 나 죽어.”
세현이 다시 울부짖었을 때 조철봉은 벌려진 석류 같은 입술을 막았다. 갑자기 세현이 애처롭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조철봉의 경험에 의하면 세현의 기교는 아주 미숙했다. 허리를 움직이는 동작도 호흡이 맞지 않았고 단순했다. 그러나 성감은 발달되었다. 조철봉은 오늘 이순간 세현이 성의 기쁨을 처음으로 맛보고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뒤로.”
허리를 들어 올리면서 조철봉이 말했을 때 갑자기 허전해진 세현이 눈을 떴다. 그러나 초점 잃은 시선만 보낼 뿐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한 것이다.
“엎드려.”
조철봉이 세현의 허리를 옆으로 밀면서 말했다.
“뒤에서 하겠다는 말이야.”
“싫어.”
세현이 몸을 비틀면서 말했지만 곧 몸을 세우더니 소파위에 웅크리듯 엎드렸다.
“난 그쪽은 처음이야. 아프게 하지마.”
하면서도 조철봉이 두 다리를 벌리자 순순히 따랐다. 세현은 오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다음 순간 조철봉의 철봉이 후배위로 진입해왔을 때 놀람과 기쁨이 범벅이 된 신음이 토해졌다.
“아아, 여보.”
“거시기.”
다음날 아침, 사무실로 들어선 최갑중이 먼저 그렇게 말했다. 조철봉의 시선을 받은 갑중이 책상앞에 다가와 섰다.
“형님께선 가만 있으라고 하셨지만 제가 사람들을 시켜서 손세현씨에 대해서 조사를 했습니다.”
헛기침을 한차례 뱉은 갑중이 시선을 내리고는 말을 이었다.
“나이는 36세, 국제대학 국문과를 졸업했습니다. 학교 선배인 안성호라는 놈하고 결혼했는데 그놈은 알코올중독자에다 무능력자였습니다. 그래서 구타를 당하고 살다가 5년전에 이혼을 했습니다.”
조철봉의 표정에 호기심이 보인다고 느꼈는지 갑중의 목소리가 굵어졌다.
“여자 아이가 하나 있는데 지금 아홉살 되었습니다. 초등학교 2학년이지요. 그런데 생활비로 오빠가 월 50만원씩 지원을 해주고 있지만 빠듯합니다. 애정의 전화에서는 무보수로 일하고 있거든요.”
“그것뿐이냐?”
“아닙니다.”
정색한 갑중이 흘끗 조철봉을 보더니 앞쪽 소파로 다가가 앉았다.
“손세현은 그동안 불우한 사람들을 위해 일을 했습니다. 그동안의 남자관계는 밝혀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갑중이 은근한 시선으로 조철봉을 보았다.
“집에서 어머니가 손세현의 재혼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는 소문이 퍼져 있습니다.”
“당연한 일이지, 혼자 살수는 없을테니까.”
“괜찮은 여자입니다, 형님.”
“나도 안다.”
조철봉이 헛기침을 했을때 갑중이 딴전을 피우면서 말했다.
“어제 청담동 빌딩에 손세현하고 다녀 가셨다고 들었습니다.”
“경비가 네 정보원인 모양이군.”
“그 빌딩을 빌려주실 생각이십니까?”
“좋은일 아니냐? 거저 주는것도 아니고 그냥 무상으로 임대 해주는거야”.
“계약 기간은 정해 놓으셔야겠지요?”
“그래야겠지.”
“제가 결정하겠습니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선 갑중이 눈을 좁혀뜨고 조철봉을 보았다.
“형님이 그 돈을 사회사업에 투자 하실 작정인것은 압니다. 하지만 조심하셔야.”
진실성이 떠올라있어서 조철봉은 눈만 크게떠 보였지만 갑중이 방을 나갔을때 곧 전화기를 들었다. 다이얼을 누른 조철봉은 심호흡을 했다.
“여보세요.”
세현의 목소리가 수화구에서 울렸을때 조철봉의 얼굴에 웃음기가 떠올랐다.
“아, 나야.”
“어머, 안녕하세요.”
사무실이어서 세현이 반가움을 절제하려는 분위기가 역력하게 느껴졌다. 조철봉은 눈을 가늘게 뜨고 앞쪽의 벽을 보았다. 어제 낮에 텅빈 빌딩에서 벌였던 육체의 향연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고 곧 온몸에 열기가 덮여졌다.
“나, 보고싶지 않아?”
불쑥 조철봉이 묻자 세현이 숨을 한번 마시고 뱉을동안 가만 있더니 낮게 대답했다.
“그래요.”
“그래요가 무슨말이야?”
“그렇다니까요?”
“보고싶다는거야?”
“네.”
세현이 주위의 눈치를 보느라 쩔쩔매는 모습이 눈에 선했으므로 조철봉은 얼굴없이 웃었다.
“난 안고 싶어, 네 환희에 찬 신음을 다시 듣고 싶단 말이야.”
그렇게 말했을때 전화가 끊겼다. 세현이 놀라 전화기를 내려놓은 것이다.
오후 7시가 되었을때 손세현은 정확하게 일식당 아진의 밀실로 들어섰다. 아진은 특급호텔 크라운의 지하 식당으로 가끔 TV에도 소개가 되는 곳이었다.
“내가 미리 음식을 시켰어.”
탁자위에 놓인 요리 접시를 가리켜 보이며 조철봉이 웃음띤 얼굴로 세현을 맞았다. 저녁을 같이 먹기로 약속을 하고는 30분이나 먼저 와 있었던 것이다. 종업원이 시중을 들고 나갔을때 조철봉이 눈썹을 좁힌 얼굴로 세현을 보았다.
“이집은 유명하기도 하지만 음식값이 무쟈게 비싸지. 오늘 우리가 먹는 음식값도 백만원 정도는 될거야.”
세현이 눈을 크게 떴지만 놀란 표정은 아니었다. 젓가락을 든채 조철봉을 빤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조철봉이 말을 이었다.
“나도 이집이 처음이야. 진즉부터 오고 싶었는데 오늘에야 기회를 잡은것이지.”
“왜요?”
그 표정 그대로 세현이 물었을때 조철봉의 얼굴은 더 진지해졌다.
“가끔 잘난 척을 하고 싶어져, 그런데 마땅한 상대가 없더란 말씀이야. 그러다 세현을 만나게 되었고 불쑥 이곳에 데려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
“흥.”
세현의 얼굴에 희미한 웃음기가 떠올랐다.
“나한테 잘난 척하고 싶었어요?”
“그래.”
정색한채 머리를 끄덕인 조철봉이 금가루를 입힌 생선회를 한점 집어 입에 넣었다.
“널 호강시켜 주고 싶었어.”
“왜요?”
“고생을 많이 한것 같아서.”
“흥.”
했지만 세현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조철봉이 음식을 권하자 세현은 곧 젓가락을 들었다.
“나에 대해서 아세요?”
회를 몇점 삼킨 세현이 날씨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물었을 때 조철봉도 그런 표정으로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 네 전남편이 알코올중독자에다 구타를 일삼던 무능력자라는 것도.”
“흥.”
“네가 이런 말에도 동요하지 않는 걸 보면 그만큼 진절머리를 내고 있었다는 증거 같은데.”
그러자 세현이 새우튀김을 맛있게 씹고 나서 생선회를 세점이나 더 먹었다. 그러고는 된장국을 한모금 마시더니 시선을 들고 조철봉을 보았다. 웃음띤 표정이었다.
“아, 맛있다.”
그러더니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우리가 만난건 분명히 우연이죠?”
“그건 분명해.”
조철봉이 커다랗게 머리를 끄덕였다.
“우리는 운명적으로 우연히 만난거야.”
“그럼 날 어떻게 호강시켜 줄건데요?”
“다 해주지.”
“난 그 대가로 당신의 섹스 파트너가 되는거죠?”
그순간 조철봉이 상반신을 펴고는 표정을 굳혔다. 아직도 웃음띤 얼굴이었던 세현의 표정도 스르르 굳어졌다.
“섹스가 싫던가?”
조철봉이 낮게 묻더니 곧 제가 말을 이었다.
“난 억지로 섹스는 안해. 해본 적도 없고.”
정색한 조철봉이 똑바로 세현을 보았다.
“이건 내 식으로 당신을 사랑한다는 표현이었어. 대가 따위는 염두에도 두지 않았었다구.”
거짓말이다. 그러나 이런 분위기에서 이렇게 열변을 토하면 진실로 보인다. 어디 이런 경우가 한두번 이었던가?
조철봉이 얼굴을 펴고 웃었다.
“그만큼 바쁘다는 뜻이야.”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까 내 옆에 있어줘요.”
“알았어.”
“보채지 않을테니까.”
“알아, 네 성격.”
“엄마한테도 말하겠어.”
상반신을 세운 세현이 정색하고 조철봉을 보았다.
“당신하고 살겠다고, 하지만 식 따위는 올리지 않겠다고 말야.”
그러고는 세현이 조철봉의 손을 마주 쥐었다. 가는 손의 악력이 세었다.
(664)사업확장-1
조철봉이 서울을 떠난 것은 이틀후였으니 세현과의 약속은 지키지 못하게 되었다. 갑자기 칭다오에서 김성산이 만나자는 연락을 해왔기 때문이다.
칭다오의 로얄호텔 라운지에서 김성산과 만났을 때는 오후 3시였다. 인천에서 비행기로 한시간 거리인데다 시간이 한시간 빠른 지역이어서 언제나 서쪽으로 날아올 때는 제자리 걸음을 한 기분이 든다.
라운지의 커피숍에는 김성산과 처음 보는 중년 사내가 기다리고 있었는데 조철봉과 최갑중을 보더니 환하게 웃었다. 김성산은 그들에게 사내를 소개했다. 북한 당중앙위원회 비서국의 경제담당 비서 김기복이라는 것이다. 북한 체제의 조직에 대해서 거의 문외한이나 다름없는 조철봉이 눈만 껌벅이자 성산이 설명했다.
“비서국은 당의 모든 부서를 지도, 감독하는 기관이고 각 분야에 책임 비서가 있소. 김기복 비서는 경제사업에 대한 책임자로 직접 지도자 동지의 지시를 받는 분이시오.”
“아, 그러십니까?”
조철봉이 다시 정중하게 머리를 숙였다. 그러나 곧 성산을 향해 묻는듯한 시선을 주었다. 아직 성산으로부터 아무런 이야기를 듣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성산과의 합작사업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으므로 문제가 될 일은 없다. 그때 김기복이 입을 열었다.
“조선생은 아주 유능한 사업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만나뵈어서 반갑습니다.”
“제가 영광입니다.”
조철봉이 공손하게 대답했지만 슬슬 불편해졌다. 5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김기복은 피부가 매끈했고 옷차림도 세련되었다. 셔츠와 넥타이는 파리의 유명 브랜드 제품이었다. 조철봉의 기색을 눈치챘는지 성산이 끼어들었다.
“조사장, 좋은 일이니까 마음 편하게 들으시오.”
“예, 알겠습니다.”
그때 김기복이 안경테를 손끝으로 올리고는 조철봉을 보았다.
“조선생, 연태에 있는 공장을 증설한다고 들었습니다만. 그렇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조철봉이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부도난 공장을 인수했던 연태의 공장은 이제 5천명의 근로자가 연간 1억불의 제품을 수출하는 우량기업이 되었고 곧 생산시설을 2배로 증설할 예정이었던 것이다.
인수한지 1년반 만에 이룬 성과였는데 그 원인은 간단했다. 조철봉은 전문경영인에게 경영을 맡기고는 일절 관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경영자는 물론 한국인 간부사원 전원에게 성과급 제도를 적용해서 내 회사라는 인식을 심어 주는 것이 성공했다. 그러고는 자금만 댄 것이다. 김기복이 다시 입을 열었다.
“조선생, 북한에다 공장을 증설하시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적극 협조해 드리겠습니다.”
얼굴을 굳힌 김기복의 말투에 열기가 섞였다.
“평양 외곽의 공단부지를 무상으로 드리고 건물도 지어 드리지요. 원부자재, 기계 통관은 당연히 무료이며 송금 규제도 없습니다. 전기료, 세금도 가동후 5년간 무료이며 5년 후부터는 한국과 비교해서 30프로만 받겠습니다. 기타 사항도 북한 정부가 보장한다는 합의서를 작성해 드리지요.”
놀란 조철봉이 시선을 돌려 성산을 보았다. 그러자 성산이 빙그레 웃었다.
“조사장이 시범 케이스로 선정이 되신 것이오. 영광으로 생각하시오.”
“그렇습니까?”
아직 얼떨떨한 조철봉이 옆에 앉은 갑중을 보았다. 대단한 특전이긴 했다.
최갑중은 멍한 표정으로 눈만 크게 뜨고 있었으므로 조철봉이 김기복에게 물었다.
“저만 선정된 것입니까?”
“10여개 업체가 일차로 선정되었는데 이런 말을 할 필요도 없겠지만.”
기복이 웃음띤 얼굴로 말을 이었다.
“아직 거절한 업체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모두 승낙을 했지요.”
“그렇습니까?”
조철봉의 시선이 이제는 김성산에게로 옮아갔다. 성산은 자신에게 해로울 일을 권할 사람이 아닌 것이다.
“잘 알겠습니다. 며칠만 생각할 여유를 주십시오.”
조철봉이 말하자 기복은 커다랗게 머리를 끄덕였다.
“중국보다 훨씬 좋은 조건으로 해 드릴테니까 회사측에서 보면 대단히 유리한 조건이 될 것입니다.”
그러고는 기복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조철봉에게 손을 내밀었다.
“곧 김성산 동지를 통해 연락을 주시오.”
“예, 비서님.”
인사를 마친 기복이 바쁜듯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라운지 입구까지 배웅을 하고 돌아온 성산이 다시 자리에 앉더니 차분한 시선으로 조철봉을 보았다.
“이번 평양외곽 공단의 입주업체는 모두 엄격하게 선정된 것이오. 섬유류로는 오성산업이 유일합니다.”
동방산업을 인수하여 다시 오성산업으로 회사명을 바꾼 것이다. 목소리를 낮춘 성산이 말을 이었다.
“이번 기회가 조사장에게 인생의 새로운 전기가 될 겁니다. 추진하시오.”
보통 때와는 다르게 성산이 정중하게 권했고 이윽고 조철봉이 머리를 끄덕였다. 중국 투자 열풍이 아직도 가라앉지 않고 있었지만 차츰 후유증도 나타나고 있는 상황이다. 어떤 좋은 조건이건 간에 한번 투자를 해놓고 나면 이미 발을 적신 꼴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맑은 물이건 오물이건 간에 같이 뒹굴어야 되며 그때서야 현실이 제대로 드러나는 경우도 있다.
“좋습니다. 하지요.”
결심한듯 분명하게 말한 조철봉이 정색한 얼굴로 성산을 보았다.
“마침 연태 공장을 두배로 증설하기로 했으니 그 시설만큼 평양에 투자하기로 하지요. 하지만.”
조철봉의 얼굴에 웃음기가 떠올랐다.
“기계 도입에 북한 정부에서 보증을 서 주셨으면 합니다.”
그러자 쓴웃음을 지은 성산이 조철봉을 보았다.
“건의해보지요.”
그렇게 되면 이쪽은 오더만 쥐고 들어가 모든 것을 얻어내는 셈이었다. 공장부지에다 건물, 전기공급과 세금면제, 거기에다 생산시설 도입에도 북한정부의 보증을 받으면 외상으로 들여올 수가 있는 것이다. 머리를 돌린 조철봉이 갑중을 보았다.
“서울에 연락해서 사업팀을 불러들이고 연태의 김사장하고 공장장, 관리부장한테도 연락을 해.”
“예, 사장님.”
긴장한 갑중이 기운차게 대답하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갑중이 라운지를 나갔을 때 성산이 말했다.
“조사장은 우리 북조선과 가장 좋은 관계를 맺고 있는 기업가로 인정받고 있소.”
“모두 김사장님 덕분입니다.”
“우리 둘이 서로 필요한 때 만난 것이지.”
“한국에서는 운이 맞았다고 합니다.”
“난 조사장에 대해서 잘 압니다.”
성산이 조철봉의 시선을 받더니 빙긋 웃었다.
“물론 조사장도 짐작하고 계셨겠지만 말이요.”
중국으로 쏟아져 들어간 한국 기업체의 절반만 북한땅으로 옮겨 갔다고 해도 북한 경제는 비약적인 발전을 했을 것이다. 또한 이른바 시너지 효과라는 것도 있다. 남북한이 주고 받으면서 발전해 나갔다면 중국이 20년 걸려서 이룩한 경제수준을 북한은 5년쯤에 달성할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조철봉은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못한 이유를 조철봉은 모른다. 10여년전 대학 동기들이 민주화 투쟁으로 갖은 고생을 할 적에도 조철봉은 남의 일처럼 방관했었다.
그렇다고 그들에게 죄지은 기분이 드는 것은 절대 아니다. 자동차 영업사원부터 시작하여 열심히 돈을 벌어 자금을 대한민국에 유통 시켰으며 국가 경제가 성장하는데 몇백만분의 일의 공헌을 했다. 그래서 경제활동은 눈곱만큼도 안한 민주화투쟁 동지들의 의식주 공급에 일조했다는 것까지는 안다. 지금 굶주리고 있다면 부처님이 정권을 잡고 있다고 해도 다시 반정부투쟁이 일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최갑중은 하루만에 서울에서 프로젝트팀을 불러들였는데 이미 중국과 베트남에까지 해외사업에 진출한 경험이 있는터라 모두 노련했다. 외주팀이었지만 철저한 프로페셔널들인 것이다.
조철봉이 투자팀과 함께 평양에 도착했을 때는 사흘후였다. 투자 승낙을 하고나서 협상은 일사불란하게 진행된 것이다.
평양시 서쪽의 공단부지까지 둘러본 조철봉이 일행과 숙소인 고려호텔에서 늦은 점심을 마치고 방에서 쉴 때였다. 문의 벨소리가 울렸으므로 조철봉은 문으로 다가가 물었다.
“누구요?”
“예, 안내원입니다.”
문을 열자 안내원 김종안이 서 있었다.
김종안은 30대 중반으로 용모가 수려했고 경제지식도 해박했다. 김일성대학 경제학부 출신이라면서 자신을 소개했는데 비서국에서 근무한다니 최고급 안내원일 것이다. 방으로 들어선 김종안이 정색하고 조철봉을 보았다.
“오늘 저녁에 비서동지께서 식사를 같이 하시자고 하셨습니다.”
“그러지요.”
조철봉이 선선히 대답하자 김종안은 한걸음 더 다가섰다.
“조사장님 혼자 가시는 겁니다. 제가 여섯시에 모시러 오겠습니다.”
“어디로 가는 겁니까?”
“예, 초대소에.”
“알겠습니다.”
이제 내일 아침에 합의서에 서명만 하면 되는 것이다. 조철봉은 공단에 20개 라인이 들어가는 대규모의 공장을 가동시키기로 북한 당국과 합의했는데 근로자는 6천명이 되었다. 그리고 조철봉이 요구한대로 생산시설 일체는 북한 정부의 보증으로 한국의 공장에서 들여오기로 합의를 한데다 기숙사비까지 보조를 받게 되었다. 프로젝트팀이 가능한한 최대로 유리하게 협상을 한 것인데 실제로 이쪽에서 내놓은 것은 오더뿐일 정도였다. 중국보다 월등하게 유리한 조건이었다.
“그런데.”
긴장한 표정으로 김종안이 조철봉을 보았다. 김종안이 맨 넥타이는 프랑스제 유명 상표였다. 조철봉의 시선을 받은 김종안이 혀로 입술을 축이고 말했다.
“오늘 저녁 식사 때 위원장 동지께서 참석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위원장이라면.”
되묻던 조철봉이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다. 갑자기 눈앞이 흐려진 조철봉이 눈을 가늘게 떴다. 죄를 많이 지은 작자는 대개 이런 경우에 어지러운 법이다.
“그 양반이, 아니. 위원장께서 왜?”
김종안이 국방위원장의 흉중을 알리가 있겠는가? 방을 나갔던 김종안은 6시 정각에 다시 나타났고 호텔 정문앞에 대기시킨 검정색 벤츠에 조철봉을 태우더니 평양시내를 달려 초대소에 도착했다.
거리의 교통량이 적었기 때문에 거침없이 30분 가깝게 달린터라 꽤 멀리 왔다고 느껴졌을 때 강가의 대저택에 도착한 것이다. 담장이 높아서 안은 보이지도 않았는데 넓은 잔디밭과 서너동의 건물이 사방에 켜진 보안등 빛에 환하게 드러나 있었다.
조철봉이 안내된 곳은 중앙 건물의 아래층 응접실이었다. 응접실에는 이미 10여명의 손님이 모여 있었는데 서로 이야기를 나누기는 했지만 무거운 분위기였다. 조심스러운 분위기라고해도 맞는 표현이 될 것이다.
“여어, 조사장님. 이쪽으로.”
안내원 김종안은 응접실입구에서 돌아간터라 혼자 주춤대며 들어선 조철봉을 김기복이 맞았다. 김기복이 옆자리를 가리켰다.
“이리 오시지요. 식당으로 가기전에 손님들을 소개시켜 드리겠습니다.”
조철봉은 응접실에 모인 손님들을 소개받았는데 한국에서 온 대기업 경영자가 세명이었고 나머지는 북한 고위층이었다. 소개가 끝난 지 얼마되지 않았을 때 그들은 옆쪽의 식당으로 들어섰다. 식당에는 커다란 원탁에 이미 갖가지 음식이 놓여져 있었고 각자의 좌석이 지정되어 있었다.
“지금 위원장동지께서 오십니다.”
문 옆쪽에 선 사내가 낮게 말했으므로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기다렸다. 그러자 곧 문이 열리더니 김정일 위원장이 들어섰다. TV에서 본 모습과 똑같았지만 웃음띤 얼굴이었다.
“자, 앉읍시다.”
위원장이 자리에 앉으면서 말했다. 조철봉은 참았던 숨을 소리죽여 내뿜으면서 자리에 앉았다. 지금까지 한국의 장관은커녕 무슨 부의 국장하고도 마주앉아 본적이 없는 조철봉이다. 그런데 오늘 북한의 최고 지도자와 한 테이블에서, 그것도 두사람 건넌 자리에 앉게 된 것이다.
그러니 산해진미가 눈앞에 놓여져 있었지만 제대로 보일 리가 없고 입맛이 일어날 리도 없다. 그저 건성으로 젓가락질을 하는 시늉을 하면서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위원장은 옆에 앉은 한국의 대동건설 회장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밝은 표정이었다. 그래서 차츰 긴장이 풀린 조철봉이 눈앞의 요리를 훑어 보았을 때였다.
“거기, 조철봉사장.”
위원장의 목소리가 울리는 바람에 조철봉은 숨을 들이켰다.
“예, 위원장님.”
몸을 굳힌 조철봉이 대답하자 위원장은 웃음띤 얼굴로 물었다.
“조사장은 놀새라고 들었는데, 놀새가 무슨 말인지 아시오?”
“예, 압니다.”
“그럼 말해보시오.”
위원장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짙어졌고 주위의 사내들도 싱글거렸다. 조철봉이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북한과의 교류가 많아진 덕분에 TV에서 들은 것이다.
“예, 바람둥이입니다.”
“뭐? 바람둥이?”
되물은 위원장이 짧게 소리내어 웃었고 주위에서도 웃음소리가 일어났다. 위원장이 머리를 젓고 말했다.
“바람둥이라는 뜻도 조금 있겠지만 남조선의 말로 바꾸면 한량이나 건달, 또는 멋쟁이라는 뜻도 포함되었을거요.”
조철봉의 체면을 세워주려는듯 덧붙여준 위원장이 갑자기 풀썩 웃었다.
“조사장이 진짜 바람둥이인 모양이군. 그래, 난 멋쟁이로 알았는데.”
조철봉도 자신을 애국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중의 하나였다. 나라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선두에서 무슨 운동을 이끌었고 매스컴을 많이 탔다고 말없이 호응해준 대중을 무시하는 사람들이 간혹 있다. 그들에 대해서 조철봉은 어떤 구체적 제재 수단을 구상한 적도 없었지만 어느날 보면 눈앞에서 사라져 있었다. 만일 조철봉이 북한에서 태어났다면 지금 이 시점에서는 열렬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받들어 모시는 인민이 되어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조철봉은 대부분의 보통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최상이라고 배워왔다. 세뇌되었다고 해도 좋다. 군사독재 정권과 민주화 투쟁 기간을 겪었지만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기본은 확실하게 물들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정반대 체제의 최고 지도자가 바로 1미터 옆에서 자신을 향해 웃어주는 분위기에 이르러서는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가 되었다. 만일 김정일 위원장이 내가 그대에게 인간적으로 호의를 느끼고 있으니 나한테 충성하라고 한다면 거부할 확률은 1%도 안되었다.
나중에 가서 후회할지는 모르지만 이런 영예가 어디 있겠는가? 그래서 거부한다고 당장 나라가 뒤집힐 것도 아니라고 스스로 자위하고는 제의를 받아들일 확률이 99%였다. 그런 방법으로 간첩이 되고 국가정보가 유출된 경우도 많을 것이었다.
그러나 위원장이 머리를 돌렸으므로 그렇게 될 가능성은 일단 사라졌다. 저녁식사에 곁들여저 술이 나왔는데 북한산으로 여러 종류였다. 모두 난생 처음 마시는 술이었고 건배를 서너번 하고 났을 때 조철봉의 몸은 취기가 배어 뜨거워졌다. 그 때였다.
앞쪽의 국제전자 회장과 이야기를 나누던 위원장이 머리를 돌려 조철봉을 보았다. 술좌석이 무르익어가는 분위기였다.
“조사장, 지금 분위기를 맛으로 친다면 국에 소금을 치지 않은 맛 같지 않소?”
위원장이 불쑥 묻자 앞쪽의 북한군 대장이라고 소개받은 사복차림이 짧게 웃었다. 모두의 시선이 다시 조철봉에게 모여졌는데 웃음띤 얼굴들이었다. 아무리 정신이 없다지만 조철봉이 그 말뜻을 모르겠는가? 조철봉이 상반신을 세우고는 정색했다.
“예, 그렇습니다, 위원장님.”
“앙꼬없는 찐빵이라고도 할 수 있지?”
“예, 그렇습니다.”
“그럼.”
머리를 끄덕인 위원장이 문쪽을 바라보았을 때 곧 문이 열리더니 그야말로 눈이 번쩍 뜨일 미모의 여자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이미 분위기는 고조되어 있는 터라 여자들은 자연스럽게 받아 들여졌다. 오늘 주연은 공단에 입주할 기업체들의 환영식을 겸한 것이었다.
“전 유정심입니다.”
조철봉의 옆에 앉은 여자가 맑은 목소리로 인사를 했다.
“조사장님을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아니, 나를.”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던 조철봉이 심호흡을 하고는 흘끗 위원장을 보았다. 술잔을 든 위원장도 마침 이쪽을 보고 있었으므로 조철봉의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다. 그때 위원장이 술잔을 들어 올리면서 말했다.
“조사장, 즐기시라구. 한국의 카바레 분위기보다는 나을 테니까.”
“예? 예.”
조철봉의 볼이 금방 굳어졌다. 위원장은 자신이 신사동의 동궁 카바레에 자주 나갔다는 것도 보고 받은 것이 분명했다. 그 때 유정심이 손을 조철봉의 허벅지 위에 올려놓았으므로 정신이 들었다.
“조사장님이 좋다고 하시면 전 따라 나갈 수 있어요.”
유정심이 낮게 말했지만 주위에 신경쓰는 것 같지 않았다. 그 증거처럼 당당한 표정으로 조철봉을 보았다. 조철봉은 유정심의 검은 눈동자 안에 자신의 얼굴이 홀쪽한 모양으로 들어가 있는 것을 보았다. 볼의 살이 빠진 모습의 자신이 이쪽을 보고있는 것이다.
“연회가 파하고 같이 나가시겠어요?”
“그거야.”
헛기침을 하는 척 말을 그쳤지만 불감청고소원(不敢請固所願)이 아닌가? 감히 청하지 못하고는 있지만 진즉부터 원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그러자 정심이 흰이를 드러내고 소리없이 웃었다.
“그럼 따라 갈게요.”
“그런데 몇살이야?”
그렇게 물으면서 조철봉의 가슴은 내려앉았다. 왜 항상 이렇게 멋대가리없는 질문으로 대화를 터야만 한단 말인가? 왜 멋진 대사가 튀어나오지 못하는 것일까? 그때 정심의 표정이 다소곳해졌다.
“스물다섯입니다.”
정심은 둥근형의 얼굴에 눈이 컸지만 쌍꺼풀이 아니었다. 콧날은 반듯하게 섰고 콧망울 크기도 적당했으며 입술은 얇지도 도톰하지도 않고 적당했다. 한국 미인의 전형적 모습이 어떤 형상인지 조철봉으로서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옛 그림을 보면 눈매가 가늘면서 끝이 솟은데다 입술은 앵두와 같고 콧날이 상큼한 얼굴형이 자주 등장했다.
르네상스 시대에 풍만한 여자를 미인의 첫째 조건으로 쳤던 것처럼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옛 그림의 미인은 미인축에 들지 못할 것이었다. 그러나 정심의 얼굴은 두번 보고 세번 보는 동안에 가슴의 고동이 더 커졌다. 정심의 얼굴을 어디선가 본적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기 때문이다.
방안의 분위기는 더욱 고조되어서 웃음소리가 커졌고 이제는 한국측 인사들의 긴장도 거의 풀어졌다. 그것은 김정일위원장이 그렇게 유도했기 때문일 것이었다. 연회가 끝났을때는 밤 11시경이었다. 연회의 사회자격인 김기복이 자리에서 일어섰을 때 이미 위원장은 방에서 사라진 후였다.
“자, 여러분 안내원이 여러분을 안내해드릴 것입니다.”
김기복이 말하더니 여자들을 둘러보았다.
“잘 모시도록.”
그러고보면 한국측 인사들은 모두 여자들과 같이 가게 된 모양이었다. 조철봉이 일행과 함께 식당을 나왔을 때 옆으로 다가온 정심이 팔짱을 끼었다.
“이층입니다.”
정심이 조철봉의 팔을 끌며 말했다. 어느덧 연회 참석자들은 사방으로 흩어지고 있었는데 모두 여자와 함께였다. 양탄자가 깔린 계단을 올라 이층 복도에 섰을때 정심이 복도 안쪽의 방을 손으로 가리켰다.
“저 방입니다.”
푹신한 붉은색 양탄자가 덮여진 복도에는 그들 둘 뿐이었다. 정심의 안내로 방에 들어선 조철봉은 숨을 멈췄다. 방안은 얼핏 보아도 50평도 넘었는데 지금까지 보아온 어느 특급호텔의 특실보다 더 장식이 세련되었기 때문이다. 어느덧 술이 깨어버린 조철봉이 신음처럼 말했다.
“멋있군.”
“장군님의 배려이십니다.”
“고맙군.”
조철봉이 지그시 정심을 보았다. 정심도 이 방이 처음인 모양이었다. 방 복판에 우두커니 서 있다가 조철봉의 시선을 받더니 금방 얼굴이 붉어졌다. 조철봉의 고맙다는 인사가 무엇에 대한 것인지는 아직 모르는 눈치였다.
이윽고 조철봉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나, 먼저 샤워하고 나올테니까….”
몸을 돌린 조철봉은 저고리를 벗어 소파 위에 걸치고 곧 셔츠와 넥타이도 차례로 벗었다. 정심이 다가와 옷가지를 챙기다가 조철봉이 바지를 벗을 적에는 몸을 돌렸다. 욕실로 들어선 조철봉은 화려함에 다시 눈을 크게 떴다.
욕조는 다섯명이 들어갈 수 있을 만큼 큰 데다 안쪽에는 스팀 사우나실까지 만들어져 있었던 것이다. 욕조에 물을 채우는 동안 조철봉은 먼저 사우나를 했다. 긴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술기운도 어느덧 사라졌다. 사우나에 들어간 조철봉이 5분짜리 모래시계를 한번 뒤집었을 때였다. 욕실문이 열리더니 정심이 들어섰다. 그런데 정심은 브래지어와 팬티 차림이었다. 욕실 안을 둘러보던 정심이 곧 조철봉을 보더니 거침없이 다가와 사우나실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었다.
“등 밀어 드리려고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시선을 내린 정심은 조철봉의 옆에 앉았다. 사우나실은 한평 정도의 넓이로 한쪽 벽에 길이 1미터 정도의 나무 의자가 놓여 있을 뿐이었다. 조철봉은 짙은 안개처럼 덮인 스팀 사이로 뻗어있는 정심의 몸을 보았다. 건강한 체격이었다. 허벅지는 단단했고 종아리도 튼튼했다. 그리고 대리석 바닥을 밟고 있는 두 발도 자연미가 넘쳐흘렀다.
그러나 사우나실 안까지는 대담하게 들어왔지만 그것이 정심의 한계인 것 같았다. 시선을 내린 채 온몸을 굳히고 있어서 스팀의 더위를 느끼는 것 같지도 않았다. 모래시계를 다시 한번 뒤집은 조철봉이 정심을 보았다.
“덥지 않아?”
“아닙니다.”
정심이 바닥만 본 채 대답했지만 얼굴에서는 땀방울이 비오듯 흐르고 있었다.
“5분 더 있을까?”
“네.”
조철봉은 알몸이었다. 그렇지만 두손을 나무의자에 짚은 채 아무것도 가리지 않았으므로 하반신 부분도 다 드러났다. 다시 무겁고 열기 띤 시간이 흘러갔다. 초침이 오른쪽으로 돌아가는 시계를 보는 것보다 가는 모래가 흘러 쌓이는 모래더미를 보는 것이 시간이 가는 것을 더 실감케 해주고 있었다. 쌓인 모래는 흘러가 찌꺼기가 된 시간이었다. 찌꺼기가 절반쯤 채워졌을 때였다. 조철봉이 머리를 돌려 정심을 보았다.
“사우나실 안에서 해본 적 있어?”
“네?”
하고 물었던 정심이 눈을 크게 떴다가 곧 시선을 내렸다. 알아들은 것이다.
“스팀이 자욱한 곳에서 제법 분위기가 나겠구먼 그래.”
“저는 잘 모릅니다.”
“그럼 내가 알려주지.”
조철봉이 손을 뻗어 정심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내가 벗겨줄까?”
“제가 벗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선 정심이 브래지어와 팬티를 벗어내리자 곧 알몸이 드러났다. 건강한 알몸이다. 허리는 조금 굵은 편이었지만 군살이 늘어지지 않았고 보기만 해도 탄력이 느껴졌다. 육중한 엉덩이는 마르고 올라붙은 엉덩이보다 훨씬 육감적이었다. 조철봉은 어느덧 입안에 고인 침을 삼킨 뒤 정심의 엉덩이를 천천히 쓸었다.
“어떤 자세가 나을 것 같나?”
조철봉이 묻자 정심이 돌아섰다. 그러자 앉은 자세의 조철봉은 정심의 아랫배와 정면으로 마주쳤다. 정심의 짙은 숲과 붉은 계곡이 바로 눈앞에 떠있는 것이다. 그때 정심이 메마른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위에 앉을게요.”
폭이 30센티 정도에 길이가 1미터인 나무 벤치 하나만 달랑 놓여진 사우나실이었으니 그 방법 뿐이다. 그러고는 정심이 다가섰는데 주춤거렸다. 스팀이 피어오르고 있었으므로 땀에 젖은 정심의 나신은 마치 안개속에서 떠오르는 것처럼 신비롭게 느껴졌다.
조철봉은 정심의 팔을 끌어 무릎위에 앉혔다. 정심이 조철봉 위에 쪼그리고 앉는 자세로 두발을 벤치위에 굳히더니 곧 몸을 붙여왔다. 조철봉은 철봉이 사우나실 실내보다 더 뜨거운 늪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아아.”
정심이 신음을 뱉더니 두팔로 조철봉의 등을 껴안았다. 억센 힘이었다. 그러고는 힘차게 상하운동을 시작했다.
“으음.”
저도 모르게 신음을 뱉은 조철봉이 정심의 허리를 움켜쥐었다. 정심의 몸놀림은 강하고 열정적이었다. 기교는 부족했지만 조철봉은 이렇게 힘차고 탄력적인 몸과 부딪친 경우는 아주 드물었다.
“세구나.”
조철봉이 허리를 틀면서 말했을때 리듬에 맞추듯이 몸을 흔들던 정심이 신음처럼 말했다.
“좋아요.”
“나도 너같이 힘찬 여자는 처음이야.”
“더 세게 해드려요?”
“그만.”
쓴웃음을 지은 조철봉이 정심의 등을 손바닥으로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스팀열에 익은 등은 뜨거우면서도 미끈거렸다. 정심의 움직임이 약해지더니 헐떡이며 조철봉에게 물었다.
“그럼 어떻게요?”
“날 즐겁게 해주겠다는 생각부터 버려.”
그러자 정심의 움직임이 멈춰졌다.
“네? 무슨.”
“즐기도록 해봐. 내가 그렇게 만들어줄테니까.”
조철봉이 처음으로 정심의 젖꼭지에 입을 맞추면서 말했다. 정심의 젖꼭지는 땅콩알만 했다. 탱탱하게 곤두서 있었는데 혀로 굴리자 탄력있게 제자리로 돌아왔다.
“아아.”
정심이 다시 조철봉을 안은 두 팔에 힘을 주었다. 조철봉은 정심의 허리를 움켜쥐고는 옆으로 돌려 눕혔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정심이 엎드린 자세가 되었고 곧 다시 철봉이 샘안으로 찾아 들어섰다. 그순간 정심의 입에서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신음이 터져나왔다. 사우나실 안에서 이런 자세가 되기에는 수많은 경험이 축적되어 있어야만 가능할 것이었다.
좁은데다가 나무벤치는 벽에 붙여져서 도무지 그렇게 될 여유가 없게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철봉은 옆쪽 공간을 이용해서 능숙하게 자세를 만들었다. 정심은 조철봉의 몸이 부딪쳐 올 때마다 숨이 끊어지는 것 같은 신음을 토해내었다. 스팀에 덮인 온몸은 땀으로 번들거렸고 나무벤치를 움켜쥔 두 손등에 푸른 정맥이 돋아나 있다. 조철봉은 다시 힘을 늦추고는 마치 정심의 몸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듯이 밀어붙였다. 그러자 정심이 몸을 비틀면서 신음을 했다. 그러고는 안간힘을 쓰듯 말했다.
“좋아요. 그렇게 해줘요.”
조철봉은 정심이 만족하고 있는것을 알았다. 온몸의 수만개 신경세포가 오직 조철봉의 몸짓에 따라 일제히 반응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다음순간 조철봉은 거칠게 몸을 부딪치기 시작했다. 놀란 정심이 퍼뜩 머리를 들었다가 곧 리듬에 맞추면서 엉덩이를 움직였다. 그리고 신음이 더 격렬해졌다. 정심이 이제 극락으로 치솟아 오르고 있는 것이다.
다음날 아침 7시 정각이 되었을 때 침실의 전화벨이 울렸다. 그때는 이미 깨어 있었던 조철봉이 전화기를 들자 예상 했던대로 김종안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제가 7시반 정각에 현관 앞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알았습니다.”
“그럼.”
김종안이 잘 잤느냐는 인사조차 하지 않은 것은 어젯밤에 무슨일이 벌어졌는지를 알고 있다는 표시처럼 느껴졌다. 조철봉이 침대에서 일어섰을 때 역시 깨어 있었던 정심이 물었다.
“커피 드시겠어요?”
“그럴 시간이 있을까?”
“옷 입으시는 동안에 준비하겠습니다.”
그러고는 조철봉이 씻고 옷을 입는 사이에 정심은 커피를 끓여 탁자위에 놓고 기다리는 중이었다. 물론 정심도 말끔하게 옷을 갈아입은 차림이었다.
“거긴 어디로 가나?”
팔목시계를 내려다본 조철봉이 소파에 앉으면서 물었다. 7시 15분이 되어 있었다.
“전 늦게 떠나도 됩니다.”
“그래?”
건성으로 물은터라 조철봉이 커피잔을 들고는 한모금 마셨다. 커피는 진했으므로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 들었고 개운해졌다.
“사업이 잘 되시기 바랍니다.”
다시 정심이 말했을 때 조철봉은 정색하고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결심한듯 결연한 표정이 되더니 바지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었다. 조철봉이 지갑에서 달러를 꺼내어 세는 동안 앞에 앉은 정심은 눈을 깜박이며 그것을 보았다. 호기심이 일어난 표정이었다. 이윽고 달러를 손에 쥔 조철봉이 정심에게 말했다.
“내가 이걸 정심씨한테 주고 싶은데, 인사로 말이지. 2천달러야.”
그순간 정심의 두눈이 커졌으나 입은 열리지 않았다. 조철봉이 달러를 정심에게 내밀었다.
“선물로 생각하고 받아주었으면 내 마음이 개운해지겠어.”
“아닙니다.”
정심이 정색하고 머리를 저었지만 화를 낸 것 같지는 않았다.
“사례를 받을 수는 없습니다. 전 돈을 받고 일을 하는 여자가 아녜요.”
“그건 알아.”
쓴웃음을 지은 조철봉이 달러를 정심의 앞쪽 탁자위에 놓았다.
“난 어떻게든 고맙다는 인사는 하고 싶어. 여기에다 놓고 갈테니까.”
그러고는 조철봉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조철봉이 방을 나올적에 정심이 문 앞까지 따라 나와 인사를 했다.
“안녕히 가십시오, 조사장님.”
조철봉이 몸을 돌렸으나 정심의 시선은 이미 내려진 후였다. 복도를 걸어 계단을 내려가 아래층 로비로 나왔을때 조철봉은 현관 앞에 서있는 김종안을 보았다. 로비는 텅 비어 있었으므로 김종안이 멀찍이 선채 머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차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김종안의 목소리가 빈 로비를 울렸다.
조철봉은 김종안도 정심처럼 자신과 시선을 부닥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수 있었다. 현관 밖으로 나온 조철봉은 대기하고 있던 벤츠에 올랐다.
“호텔로 모시겠습니다.”
앞쪽 자리에 탄 김종안이 말했다.
“10시에는 김비서 동지께서 호텔에 오신다고 하셨습니다.”
그순간 조철봉은 김종안의 뒤통수를 보면서 그때서야 깨달았다. 김종안은 자신을 경멸하고 있는 것이다. 정심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또 있다.
김기복은 어젯밤 잘 잤느냐고도 묻지 않았다. 그저 눈인사만 하고는 업무 이야기를 꺼냈는데 이미 이쪽 조건을 다 받아들인터라 시작만 하면 되었다. 근로자 6천명이 고용된 대규모 공장이 세워지게 될 것이었다. 조철봉도 만족했지만 김기복 또한 표정이 밝았다. 그런데 그날 오후에 조철봉이 중국으로 떠날 때였다. 호텔 로비에서 기복이 다가와 귀에 대고 낮게 말했다.
“위원장동지께서 조사장님을 높게 평가하고 계셨소. 아마 김성산동지가 선전을 해주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제가 어디.”
당황한 조철봉이 얼굴까지 붉혔다.
“다 과장된 것입니다. 제가 조금 허세가 심하기도 하고요.”
“어쨌든 맨손으로 일어나 5년도 안되는 기간에 이만큼 성공했지 않습니까?”
“그것이.”
주위를 둘러본 조철봉이 목소리를 낮췄다.
“그게 조금 이상한 방법으로 자금을 모았거든요.”
“그렇습니까?”
그러면서 웃는 기복의 얼굴을 보자 조철봉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자신의 행적을 모두 알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철봉은 금방 어깨를 폈다. 이쪽은 알고 있다고 해도 상관이 없는 것이다.
“어쨌든.”
다시 바짝 다가붙은 김기복이 말을 이었다.
“이번 평양공단 사업을 시작으로 조사장 사업이 일취월장 하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조철봉으로서는 손해 볼 것이 거의 없는 계약이었다. 더구나 새로운 땅에서 사업가로서 인정을 받으며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다. 기운이 절로 난 조철봉은 옌타이에 도착하자마자 저녁시간인데도 회의를 소집했다. 왠지 조급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날 아침, 조철봉이 옌타이의 숙소에서 눈을 떴을 때는 오전 8시 반이었다. 침실의 인터폰이 울렸기 때문인데 아래층에서 운전사겸 경호원인 조선족 박용호가 연락을 한 것이다.
“사장님, 외부 전화가 왔었는데 주무신다고 했더니 30분쯤 후에 다시 연락을 한다는데요.”
용호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서울에서 온 홍사장이라고 하면 아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전화기를 내려놓은 조철봉은 침대에서 일어나 샤워를 했다. 조철봉이 홍경수와 마주앉은 것은 그로부터 한시간쯤 후였다. 응접실에는 홍경수와 동행한 30대 중반쯤의 사내까지 셋이 모였는데 먼저 홍경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평양에 다녀 오셨지요?”
“예, 어제.”
조철봉이 선뜻 대답했다.
“국방위원장도 만났습니다.”
“평양공단의 협상은 잘 되었다던데, 그렇습니까?”
“예, 그쪽에서 적극 협력해주고 있어서요. 오히려 중국보다 조건이 좋습니다.”
“허어.”
“국방위원장이 직접 애로사항을 해결해 주니까요.”
“저녁에 같이 술도 드셨다던데.”
홍경수가 웃음띤 얼굴로 조철봉을 보았다.
“귀빈 대접을 받으셨더군요.”
“아주 좋았습니다.”
눈을 가늘게 뜬 조철봉이 소파에 등을 붙였다.
“난생 처음으로 높은 사람한테서 인정을 받아서요. 초등학교 때부터 우등상 한번 못타본 처지라 머리가 핑 돌더만요.”
조철봉이 얼굴을 펴고 웃었다.
홍경수는 기관원이다. 소속은 알수 없었지만 정보를 관리하는 부처의 고위직이었고 지난번 김성산과의 사업을 조건으로 거액의 대출을 받는데 도움을 받기도 했다.
조철봉으로서는 경수가 원하는 정보를 감출 이유가 없었으므로 물음에 성실하게 대답해 주었다. 오히려 정보를 줄 수 있는 현실이 즐겁다는 표정까지 짓고 있어서 경수와 동행의 얼굴도 밝아졌다. 이윽고 허리를 편 경수가 조철봉을 보았다.
“그럼 다음번 평양에 가실 적에 김정일 위원장하고 만나실지도 모르겠는데, 그렇지 않습니까?”
“아, 그거야.”
“갑자기 초대를 하는 습성이 있으니까 알 수는 없겠지만 말입니다.”
“그렇긴 하죠.”’
“어젯밤 파티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김정일 위원장이 조사장님한테 상당히 호감을 품고 있는것 같다던데요.”
“벌써 그것까지 알고 계십니까?”
“아, 그거야 기본 아닙니까?”
경수가 빙글 웃었다. 아마 어젯밤 연회에 참석했던 한국측 경영자들한테서 들었을 것이었다. 허리를 편 경수가 다시 정색을 하고 조철봉을 보았다.
“저 혹시 말입니다. 조사장님.”
“뭡니까?”
“다음번에 김정일 위원장을 만나게 되었을 때 말입니다.”
“그래서요?”
“지나가는 말처럼 한번 물어봐 주시렵니까? 한국 방문계획이 없느냐고 말입니다.”
“아, 그건 정부측에서 물어보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것이 여러가지로 복잡해서.”
쓴웃음을 지은 경수가 조철봉을 보았다.
“잘 아시다시피 밀고 당기는 협상이 여러개 겹쳐 있어서요.”
“그건 그렇죠.”
“그 협상들 사이에 위원장 방문 카드가 나올 여지가 없단 말씀이지요. 저쪽은 그 카드로 큰 딜을 할 것이고 우리는 대비를 해야 되니까요.”
“그런데 제가 왜?”
“그냥 지나가는 말처럼 물어보시면 위원장이 불쑥 대답해줄 수도 있을거란 말씀이죠.”
“위원장이 실수 하기를 바라는 겁니까?”
“아니, 그라도 의도적으로 조사장님을 통해서 흘릴 수도 있지요. 작전에 노련하신 분이니까요.”
“그럴까요?”
“부탁합니다.”
“위원장이 서울을 방문하면 무슨 큰수가 납니까?”
그러자 경수가 활짝 웃었고 30대 사내도 따라 웃었다.
“상징적인 효과지만 곧 큰 영향이 오게 될 것입니다.”
“반대하는 사람들도 많던데.”
“그것을 감수해야 하겠지요.”
“평화가 정착되면 좋지요.”
마침내 조철봉도 그렇게 동조했다.
“기회가 오면 물어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경수가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손을 내밀었다.
“드디어 조사장님이 북한에서 한건 올리셨습니다. 축하합니다.”
그것이 유정심을 말하는 것 같았으므로 조철봉은 흘끗 경수의 눈치를 보았다. 그러나 경수의 웃음띤 얼굴에는 그런 눈치가 보이지 않았다. 경수 일행을 배웅하고 돌아온 조철봉에게 박용호가 말했다.
“사장님, 공장에 가실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렇군, 늦었다.”
조철봉이 서둘러 저고리를 집어 들었다. 요즘처럼 의욕적으로 일한 적은 드물었다.
한국에서는 공장을 하나 짓는데 도장을 2백 몇개나 받아야 한다는 신문기사를 조철봉이 읽은 적이 있다. 그만큼 규제나 간섭하는 부서가 많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래서 이번의 평양공단 입주에 대해서도 오성산업 실무진들은 걱정이 많았다. 북한은 중국과 달라서 경쟁적으로 외국 자본이나 공장을 유치해온 경력이 없는 것이다. 경쟁이 있어야 발전이 되는 법이다.
그것은 조직이나 회사는 말할 것도 없고 국가도 그렇다. 평양공단에 다녀온 김택현이 지친 모습으로 조철봉의 사무실로 들어섰다. 오성산업 옌타이공장 사장인 김택현은 평양공단 입주작업의 실무 책임자인 것이다. 김택현은 보름만에 돌아온 것이니 이미 공단 입주작업이 시작된지 보름이 지난 셈이었다.
“고생이 많은데.”
마주 앉았을 때 조철봉이 위로하자 택현은 싱긋 웃었다.
“보람은 있습니다. 공장 건설도 일정보다 빨리 진척이 되구요.”
공장 건물은 북한측이 지어주기로 되어 있었는데 건설회사는 한국의 대웅 건설이다. 그때 택현이 말을 이었다.
“그런데 급수 문제라든가 전력 문제, 그리고 회사 앞의 도로 포장 문제등 사소한 문제를 협의하는데 애로사항이 많습니다.”
조철봉의 시선을 받은 택현이 쓴웃음을 지었다.
“물론 공단 본부에서 총괄하고는 있지만 담당자가 바쁘다 보니까 며칠간 결재가 나지않고 또.”
“의욕을 내지 않는단 말이지?”
“그렇습니다.”
택현이 정색하고 조철봉을 보았다.
“열심히는 하는데 열의가 보이지 않습니다.”
“자신한테 직접적인 혜택이 없기 때문이지.”
당연한듯 말한 조철봉이 지그시 택현을 보더니 곧 인터폰을 눌렀다.
“예, 사장님.”
스피커에서 비서의 목소리가 울리자 조철봉이 최갑중을 들여보내라고 지시했다. 갑중도 옌타이에 와 있었던 것이다. 곧 갑중이 들어섰고 조철봉은 택현한테서 들은 상황을 간략하게 말해 주었다. 그러고는 갑중에게 지시했다.
“자네가 평양공단에 가서 김사장을 도와줘야겠어.”
택현이 옆에 있었으므로 조철봉은 갑중에게 반말을 하지 않았다.
“담당자들이 의욕을 내지않는 모양이야.”
“그럼 제가 어떻게 하란 말씀입니까?”
아직 눈치를 못챈 갑중이 머리까지 비틀며 묻자 조철봉은 혀를 찼다.
“방법이 있지 않아? 의욕을 내도록 하는 방법 말이야.”
조철봉이 아직도 눈만 껌벅이는 갑중을 흘겨보았다.
“봉투에다 100불짜리를 넣어서 건별로 먹이도록. 100불짜리 건에서부터 1000불짜리 건도 있겠지.”
“그, 그러면 뇌물을 먹이라는 말씀입니까?”
“뇌물 맛을 알면 의욕이 솟구치게 될것이야.”
“하, 하지만.”
“건설 본부에 있는 머리통 큰놈들은 조금 크게 먹여야겠지. 물론 상황을 봐서 말이야.”
“괜찮을까요?”
“괜찮다마다.”
혀를 찬 조철봉이 다시 갑중을 흘겨보았다.
“뇌물 안통하는 데가 어디있어? 걱정말고 준비하도록.”
그렇게 해서 최갑중이 다시 김택현과 함께 평양으로 떠난지 닷새째가 되는날 아침이었다. 조철봉은 택현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사장님, 어제 회사앞까지 고속도로가 건설되기로 합의가 되었습니다.”
택현이 밝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용수 문제도 해결되었고 기숙사도 6500명 기준으로 건설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쪽이 요구한 조건은 다 들어준 셈이었다. 만족한 조철봉이 얼굴을 펴고 웃었다.
“잘했군. 우리 계획대로 된 것 아닌가?”
“그렇습니다. 사장님.”
“최전무는 잘하고 있나?”
“예. 최전무님 덕분에 일이 잘되고 있습니다.”
“그래?”
전화상이어서 택현은 더 자세한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만해도 충분했다. 갑중의 뇌물작전이 성공했다는 말인 것이다. 흥이 난 조철봉이 기어코 한마디 했다.
“그래. 통하지 않는곳이 없다니까 그래.”
그동안 중국에만 머물면서 일에 매달려 있던 조철봉이다. 그에게 평양공단의 사업은 지금까지 추진했던 어떤 사업보다 더 신경이 쓰였고 규모도 컸다. 북한측이 공장을 무상으로 건설해줄 뿐만 아니라 여러가지 혜택을 주고 있었지만 조철봉으로서도 막대한 자금이 투입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어떤일에 몰두하면 침식을 잃다시피 하면서 끝장을 보는 것이 조철봉의 성격이다. 조철봉이 다시 평양을 방문한 것은 그로부터 10일쯤 후였는데 공장 건물은 순조롭게 세워지고 있었다. 1백만평의 공단 부지에서 5만평 정도를 차지한 오성산업 제2공장의 건설속도가 가장 빨랐다. 그리고 고속도로까지 공장앞으로 연결되었고 용수나 전력 문제도 가장 먼저 해결되었다. 공항에서 호텔로 가는 차 안에서 갑중이 조철봉에게 말했다. 갑중이 마중을 나왔던 것이다.
“형님. 오늘 저녁에 건설위원장을 만나 주셔야겠습니다.”
차 안에는 갑중의 심복인 운전사까지 셋 뿐이었지만 갑중은 목소리를 낮췄다.
“호텔에서 저녁식사 약속을 해놓았습니다.”
조철봉의 시선을 받은 갑중이 쓴웃음을 짓고 말을 이었다.
“저보다 형님이 하시는 것이 나을 것 같아서요.”
“무슨 일이야?”
“인사말입니다.”
그러자 조철봉은 잠자코 머리만 끄덕였다. 조철봉의 특명을 받고 평양에 온 갑중은 그야말로 종횡무진 봉투작전을 벌였던 것이다. 오성산업 공사현장에 얼굴을 내민 북한측 건설 지도위원은 모두 봉투를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간부급에 대한 인사는 확실해서 오성산업에 대한 배려는 각별했다. 따라서 오성산업 공사 현장이 가장 활기에 찼고 모범 케이스가 되었다. 중앙에서 시찰단이 내려오면 오성산업 건설 현장만 둘러보고 칭찬한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일석삼조였다. 뇌물 먹어서 좋고 공사 빨라서 좋고 칭찬 받아서 좋은 것이다. 조철봉의 표정을 살핀 갑중이 빙긋 웃었다.
“역시 형님의 생각이 맞으셨습니다. 북한 사람들이 봉투맛을 보더니 정신을 못차립니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다. 그게.”
기분이 좋아진 조철봉도 맞장구를 쳤다.
“그렇다면 오늘 저녁은 마무리 뇌물이 되는 셈이로군.”
“그렇습니다. 형님.”
건설위원장 김영조는 60대 중반으로 북한 정권의 실세였다. 당서열이 20위권이라는 것이다.
김영조는 60대 중반의 나이였으나 외모는 50대쯤으로 보였다. 흰머리가 하나도 없었고 피부는 팽팽하게 윤기가 흘렀다. 조철봉과는 구면인데다 쾌활한 성품이어서 식탁 주위의 분위기는 밝았다. 호텔 식당의 밀실 안이었다. 최갑중과 셋이서 식사를 했는데 주로 이야기는 김영조가 했다. 김영조는 다변인 편이었다. 식사와 함께 양주를 마셨으므로 셋의 얼굴은 모두 붉었다. 그중 갑중의 얼굴이 제일 붉었다.
“저, 잠깐 실례하겠습니다. 속이 거북해서.”
그러면서 갑중이 일어서 방을 나가자 방안에는 둘만 남았다.
“저 친구가 술이 약해서요.”
조철봉이 웃음띤 얼굴로 영조를 보았다.
“술 마시다가 잠이 들어버리는 버릇이 있지요. 오늘은 나은 편입니다.”
“그거 괜찮은 술버릇이오.”
영조가 말했을 때 조철봉이 의자 밑에 놓았던 검정색 가방을 들어 영조의 의자 옆에다 놓았다.
“가방에 10만불 들었습니다.”
조철봉이 음식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낮고 자연스럽게 말했다.
“한국식으로 인사 드리는 것이니까 부담 느끼지 마시고 받아주셨으면 합니다.”
영조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지만 조철봉은 여유있게 웃었다.
“뭘 더 봐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잘 해주셨고 바랄 것도 없습니다. 순수한 인사로 드리는 것입니다.”
“허, 이거 참.”
마침내 쓴웃음을 지은 영조가 술잔을 쥐더니 눈을 가늘게 뜨고 조철봉을 보았다.
“한국 기업가들이 뇌물 먹이는 것에 도통했다고 들었는데 내가 겪게 되는군.”
“이건 뇌물이 아닙니다, 건설위원장님.”
“뇌물이 아니고 인사란 말이지요?’
“그렇습니다. 설날이나 추석때 하는 인사 같은 것이지요.”
이제는 정색한 조철봉이 말을 이었다.
“한국에서는 명절때의 인사까지 규제하지는 않습니다. 알고 계시겠지만.”
“하지만 10만불은 거금인데.”
“인사도 격에 맞게 해야지요.”
“흠.”
머리를 한쪽으로 기울였던 영조가 손에 쥔 술잔을 들어 한모금에 삼키더니 내려놓았다.
“한국 정치인들이 이런 식으로 인사를 받았을까?”
혼잣소리처럼 영조가 말했을 때 조철봉이 긴장으로 치켜들고 있었던 어깨를 늘어뜨렸다.
“아마 이렇게 뒤탈이 없는 인사는 아무도 거절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럴까?”
“더구나 영수증을 써달라고 하지도 않았거든요.”
“그렇군.”
다시 쓴웃음을 지었던 영조가 팔목시계를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밤 10시반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만 가봐야겠습니다, 조사장.”
“아, 예.”
따라 일어선 조철봉은 영조가 의자 옆에 놓았던 가방을 집어드는 것을 보았다. 조철봉이 길게 숨을 뱉었을 때 영조가 말했다.
“고맙소 조사장.”
“아니, 천만의 말씀입니다.”
영조를 호텔 현관까지 배웅한 조철봉이 방으로 돌아왔을 때 곧 노크 소리가 울렸다. 갑중이다. 갑중이 문을 열자마자 물었다.
“가방 받았습니까?”
“당연하지.”
“이제 우리 손아귀에 들어왔군요.”
갑중의 표정이 환해졌다.
문에서 다시 벨소리가 울렸으므로 조철봉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아직 술이 덜 깼던 것이다. 눈을 뜨고 침대 옆 탁자에 붙은 전광시계를 보니 4시반이었다. 새벽이다. 그 순간 머릿속에 찬바람이 지나가는 것 같은 수상한 느낌이 든 조철봉은 자리를 차고 일어섰다. 그때 벨소리가 또 울리면서 이번에는 노크소리까지 났다.
“누구요?”
문으로 다가간 조철봉이 묻자 곧 굵은 사내의 목소리가 울렸다.
“문 여십시오.”
심호흡을 한 조철봉이 문을 열었다. 그러자 양복 차림의 두 사내가 조철봉을 어깨로 밀면서 방으로 들어섰다. 복도에도 한 사내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무슨 일입니까?”
이미 얼굴이 굳어진 조철봉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때 사내 하나가 표정없는 얼굴로 조철봉을 보았다.
“옷을 입으시지요. 같이 가셔야겠습니다.”
“아니, 어디를….”
“서둘러 주십시오.”
그러고는 사내가 눈을 치켜뜨더니 잇사이로 말했다.
“동무는 체포된 것입니다.”
그순간 조철봉은 숨을 삼켰다. 무릎에 갑자기 힘이 풀리는 바람에 하마터면 주저앉을 뻔했지만 휘청 하고 나서 겨우 섰다. 그러나 무엇때문에 체포되었느냐고는 얼른 묻지 못했다. 겁이 났기 때문이었다. 옷장에서 옷을 꺼내 입는 동안 사내들은 벽에 붙어선 채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것이 더 부담스러웠으므로 넥타이를 매고 난 조철봉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이제는 조금 각오를 한 것이다.
“무엇때문에 체포된 거요?”
“그건 모릅니다.”
사내 하나가 즉각 대답했다.
“가서 물으시지요.”
“어디로 간다는 겁니까?”
“그것도 말할 수 없습니다.”
저고리를 집어든 조철봉이 몸을 돌려 사내들을 정면으로 보았다.
“호텔에 있는 내 회사 동료한테 연락해도 되겠습니까?”
“안됩니다.”
예상했던대로 사내 하나가 차갑게 대답했는데 표정은 담담했다. 사내가 다가와 조철봉의 어깨를 밀었다.
“동무를 포승으로 묶지 않겠소. 자, 갑시다.”
조철봉은 어깨를 떨어뜨리고 방을 나왔다. 복도에서 기다리던 사내 하나가 앞장을 섰고 그들은 곧 호텔을 나왔다. 호텔 앞에는 검정 벤츠가 대기하고 있었는데 그들을 태우더니 거칠게 출발했다. 김영조에게 준 가방 때문이다.
조철봉은 이미 사내들의 얼굴을 본 순간부터 예상하고 있었다. 들통이 난 것이다. 아마 식당 밀실에 도청장치나 카메라장치가 되어 있어서 그 장면이 탄로 났는지도 모른다. 갑중이 주의깊게 살펴보았다고 했지만 경솔했다.
장소를 잘못 선택한 것이다. 아직도 어두운 평양 시내를 벤츠는 맹렬한 속도로 달려가고 있었는데 조철봉은 위치를 알 수가 없었다. 더욱이 뒷좌석에 양쪽 사내들 사이로 끼어앉아 머리를 옆으로 돌리기도 거북했다. 자신도 모르게 조철봉은 길게 숨을 뱉었다.
“이거 더럽군.”
혼잣소리처럼 말했지만 물론 차안에 있는 사내들에게 들으라고 한 말이다.
“이게 도대체 무슨 꼴이야? 이렇게 해가지고 어디 겁이 나서 사람들이 사업하려고 오겠어?”
조철봉이 이제는 제풀에 화가 나서 목소리가 높아졌다.
차가 멈췄을 때 조철봉은 앞에 가로막은 거대한 철문만 보았다. 철문이 소리없이 열리자 차는 다시 달려 곧 건물앞에서 멈췄다.
“자, 내리시오.”
사내들이 차에서 내리면서 조철봉에게 말했다. 차에서 내린 조철봉은 사내들에게 어깨를 밀려 건물의 후문쯤으로 생각되는 문안으로 들어섰고 곧 복도를 걸어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그동안 건물 안에서 사람들을 만나지 못했고 조철봉과 세 사내의 발자국 소리만 울렸다. 엘리베이터에 올랐을 때 사내는 버튼을 눌렀는데 놀랍게도 지하 5층으로 내려가는 것이었다.
버튼은 지하 8층까지 있었지만 지상층은 표시되지 않았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그들은 곧 복도 안쪽의 방에 조철봉을 밀어넣더니 아무말도 하지않고 사라졌다. 방은 10평쯤 되었으나 소파가 놓여졌을뿐 가구는 한점도 없었다. 물론 벽에는 창문도 없다. 조철봉은 소파의 한쪽 끝에 앉아 심호흡을 했다.
팔목시계는 아침 6시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곳은 보위부 아니면 군 소속의 건물인 모양이었다. 닫힌 문이 잠겨져 있는지 풀린 상태인지 알수 없었지만 조철봉은 방문 밖으로 나갈 엄두도 내지 못한 채 그 상태로 20분쯤 앉아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초조해지는 것은 당연했다. 심장이 강철로 되어있다고 해도 이곳이 어디인가? 그때 문 앞에서 인기척이 들렸으므로 조철봉은 긴장했다. 문이 열리면서 들어선 사내는 군복 차림의 사내였고 허리에는 권총을 찼다. 조철봉은 눈을 좁혀 떴다. 사내의 낯이 익었기 때문이다. 그때 다시 방안으로 또 한사람이 들어섰고 그순간 조철봉의 호흡이 멎었다.
김정일위원장이다. 위원장은 거침없는 걸음으로 들어서더니 소파의 상석에 털썩 앉았다. 조철봉에게 한번 흘끗 시선을 주었을뿐 차가운 표정이었다. 그러자 군복 차림의 사내가 위원장의 뒤쪽에 섰다. 위원장의 경호원이다.
장군 계급장을 붙인 이자를 지난번 연회장에서 본적이 있었던 것이다. 위원장을 본 순간 엉거주춤 일어섰던 조철봉은 몸을 굳힌 채로 서 있었는데 아직 입을 떼어 인사도 하지 못했다. 그때 위원장이 시선을 들어 조철봉을 보았다. 여전히 차갑게 느껴지는 표정이었다.
“조사장, 이곳이 어디인줄 아나?”
“모릅니다. 위원장님.”
“그래?”
위원장의 입술끝이 희미하게 비틀렸다.
“그럼 왜 호텔에서 끌려왔는지는 알고 있겠군. 그렇지?”
“예, 위원장님.”
“왜 끌려 왔는지 말해 보겠나?”
“제가 건설위원장에게 인사를 했기 때문입니다.”
“인사를 했다고?”
눈을 치켜뜬 위원장의 목소리가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10만불씩 주는 것이 인사인가?”
이미 진즉부터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위원장의 입에서 10만불이란 단어가 튀어나온 순간 조철봉은 심장이 위장쪽으로 털썩 떨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위원장이 대답을 기다리며 시선을 보내고 있었으므로 조철봉은 마른 침을 삼켰다.
“아닙니다. 위원장님.”
“그럼 뭔가?”
“뇌물이었습니다.”
“무엇에 대한 뇌물이야?”
“예, 앞으로 애로사항이 있을 적에 잘 봐달라고 미리 손을 쓰려는 의도였습니다.”
솔직하게 털어놓는 것이 사는 길이라는 것을 조철봉은 나름대로 판단했던 것이다. 지금은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황이니 그것도 모험이다.
“그런가?”
위원장이 그렇게 물었으므로 조철봉은 시선을 들었다. 조철봉의 가슴께에 시선을 준 위원장은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 같기도 했다. 이윽고 위원장이 입을 열었다.
“한국에서는 이런 일이 비밀비재하겠지?”
“예, 그것은.”
“많다는 말이지?”
“예, 그렇습니다.”
위원장이 한국 사정을 모를 리가 없다. 한국 TV도 다 본다는 소문이 있었으니 TV에 만날 보도되는 뇌물 사건도 다 보았을 것이었다. 고위급 정치인에서 말단 공무원까지 뇌물을 먹지 않은 놈이 없을 정도가 아닌가. 그때 위원장이 머리를 들고 조철봉을 보았다.
“뇌물을 먹이면 일이 잘 되던가?”
“예?”
했다가 조철봉은 어영부영한다면 작살이 나리라는 것을 예감했다. 바른대로 대답하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다.
“예, 그렇습니다. 위원장님.”
그렇게 대답하자 위원장이 정색하고 다시 물었다.
“뇌물을 거절하는 사람도 있던가?”
“별로 보지 못했습니다.”
얼른 그렇게 대답했던 조철봉이 다시 정정했다.
“제가 겪은 실무자들은 거의 다 먹었습니다, 위원장님.”
“먼저 먹였나?”
“예, 그렇습니다.”
“상대방이 먼저 달라고 하던가?”
“맹세코 없었습니다.”
얼굴을 굳힌 조철봉이 똑바로 위원장을 보았다. 그야말로 죽음을 각오한 표정이다.
“저희들은 요구하지도 않은 상황에서 먹인 것입니다.”
“그랬더니 일이 더 잘 풀리더란 말이지?”
“그렇습니다.”
“썩었다.”
위원장이 혼잣소리처럼 말했지만 조철봉에게는 뇌성벽력처럼 들렸다. 옆쪽의 벽으로 시선을 돌린 위원장이 말을 이었다.
“오염될까 두렵다.”
“하지만.”
조철봉이 기를 쓰고 입을 열었다가 위원장의 옆모습을 보고는 말 대신 침을 삼켰다. 그때 위원장이 조철봉을 보았다.
그야말로 서릿발 같은 시선이었다.
“하지만 뭔가?”
“한국의 기업 성장률은 세계 제일이었습니다, 위원장님.”
“흐흐흐.”
위원장이 입술 끝으로만 웃더니 물었다.
“이런 방법으로 말인가?”
“그것은.”
이마의 식은땀을 손등으로 닦아낸 조철봉이 마침내 어깨를 늘어뜨렸다.
“예, 저는 썩었습니다.”
그순간 조철봉은 절망감으로 목까지 메었다. 이것은 마치 고양이 앞에서 쥐가 변명을 늘어놓는 경우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어차피 죽는다. 그때 위원장의 목소리가 조철봉의 귀를 울렸다.
“동무는 남조선의 온갖 부정과 부패, 사기와 협잡의 대명사 같은 인물이야. 내가 이미 알고 있었다.”
숨을 죽인 조철봉이 초점없는 시선을 들었고 위원장의 말이 이어졌다.
“말하자면 동무는 남조선의 거울 같은 인물이었지, 나는 이번 일에 별로 놀라지 않았다.”
그러고는 위원장이 희미하게 웃었다.
“따라서 오염된 동무를 이용해서 남조선 사회의 실체를 파악할 수도 있을 것이다.”
위원장이 손을 들어 조철봉의 코끝을 가리켰다.
“반면교사라는 말도 있지.”
조철봉이 다시 호텔방으로 돌아왔을 때는 오전 8시반이었다. 옷을 벗어던진 조철봉이 샤워를 하고 나왔을 때 기다렸다는 듯이 문에서 벨이 울렸다. 최갑중이다.
“일이 잘 끝나서 개운한데요.”
방안으로 들어선 갑중이 개운한 표정으로 말했다. 김영조에게 무사히 뇌물을 먹인 것을 말하는 것이다.
“오늘 오후 비행기로 떠나실거죠?”
갑중이 묻자 조철봉은 머리를 저었다.
“아니, 며칠 더 있어야겠다.”
“공사는 예정보다 빨리 끝날 것이고 특별히 신경 쓰실 일은 없습니다.”
“오후에 약속이 있어.”
“누구하고 말씀입니까?”
“넌 몰라도 돼.”
그러자 갑중은 눈을 크게 떴지만 묻지는 않았다. 아마 여자하고 약속을 한것 쯤으로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오후 5시가 되었을 때 조철봉은 방으로 찾아온 안내원 두명과 함께 호텔을 나왔다. 지금까지 안내를 맡았던 김종안은 나타나지 않았다.
조철봉이 대동강 가에 위치한 별장에 들어섰을 때 응접실에는 이미 김영조와 경제담당비서 김기복, 거기에다 놀랍게도 중국에 있는 줄 알았던 동업자 김성산까지 와 있었다. 김기복과 김영조는 조철봉에게 은근한 웃음만 띄워 보였지만 김성산은 참을수 없었던듯 한마디 했다.
“아, 글쎄. 어쩌려고 건설위원장 한테까지 쥐약을 먹였단 말인가?”
그러고는 성산이 정색하고 혀를 찼다.
“다행히 건설위원장이 뱉아냈으니 망정이지 먹었다면 북조선은 머리 꼭지부터 썩을뻔 했지 안카서?”
당연히 조철봉의 얼굴은 붉어졌고 김영조는 쓴웃음만 지었으며 점잖은 김기복은 딴전만 보았다. 그때 방으로 사내가 한명이 들어서서 말했다.
“식당으로 가시지요.”
그들이 복도 끝쪽의 식당으로 옮아가자 방안의 원탁에는 이미 산해진미가 차려져 있었다.
“위원장 동지께서 오십니다.”
곧 문앞의 사내가 말했고 원탁 주위에 서서 기다리던 그들은 식당 안으로 들어서는 김정일 위원장을 보았다.
“어, 앉읍시다.”
위원장의 표정은 밝았다. 아침에 보았을 때보다 활기찼고 혈색도 좋았다. 원탁 주위에 둘러 앉았을 때 위원장의 시선이 조철봉에게로 옮겨졌다.
“자, 마음 푹 놓구 먹고 마시라구, 오늘 아침에 붙잡혀 온 일은 다 잊도록 해.”
“예, 위원장님.”
대답이야 막둥이같이 했지만 어찌 잊을 수가 있겠는가? 그리고 조철봉은 아직도 이렇게 불려온 이유를 확실하게는 모르고 있다. 그러니 몸이 굳어져 있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위원장은 김씨 일문들과 어울려 즐겁게 담소하며 식사를 했다.
식사와 함께 독한 술이 나왔고 몇번 건배가 있었으므로 모두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식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다. 위원장이 문득 생각났다는 표정으로 조철봉을 보았다.
“조사장, 한국의 자금을 북조선에 투자를 시키려면 어떤 방법이 가장 좋을것 같나?”
지나가는 말처럼 물었지만 조철봉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러나 대답을 망설일 수는 없다.
“투자가들이 홀딱 반하게 해야 합니다.”
조철봉이 저도 모르게 그렇게 말하고는 내친김이라는 듯이 말을 이었다.
“이번 평양공단의 조건도 좋습니다만 분위기 조성이 무엇보다도 중요하지요. 불안한 상태에서는 아무것도 안됩니다.”
눈을 크게 뜬 조철봉의 열변이 이어졌다.
“이익금을 얼마든지 언제든지 반출시킬수 있어야 안심을 할 것입니다. 세관이 까다로워도 좋지 않습니다. 공무원들이 원리원칙만 따져도 그렇습니다. 융통성이 있어야지요.”
“흥.”
술잔을 내려놓은 위원장이 쓴웃음을 지어보였다.
“뇌물도 먹어주는 융통성 말인가?”
“그것은 아닙니다.”
“평양공단은 그만한 조건은 갖췄지 않나? 지도원들은 헌신적이고 세관원도 친절하다. 이익금도 얼마든지 반출이 가능하고 임금은 중국의 절반 수준밖에 되지 않는다.”
위원장이 정색하고 조철봉을 보았다.
“어떤가? 최상의 조건 아닌가?”
“하지만.”
“하지만 뭔가?”
“밥만 먹고는 살수가 없습니다. 아니, 일만 하고 살수는 없습니다.”
“무슨 말인가?”
“유흥시설이 갖춰져야 합니다. 소비도시가 세워져야 합니다.”
“유흥시설?”
이맛살을 찌푸린 위원장이 조철봉을, 그러고는 김씨 세명을 차례로 보았다. 그러나 모두 눈만 껌벅일뿐 가만 있었으므로 위원장이 눈을 가늘게 뜨고 조철봉에게 물었다.
“동무가 자주 다니는 카바레 같은 곳 말인가?”
“가라오케나 노래방, 또는 빠찡꼬나 카지노, 그리고 숙박업도 있어야 합니다.”
조철봉이 열기띤 눈으로 위원장을 보았다.
“물론 나이트클럽이나 카바레가 세워지면 더 말할 것도 없이 좋겠지요.”
“허어.”
위원장이 다시 쓴웃음을 짓고는 의자에 등을 붙였다가 차츰 얼굴에서 웃음기가 가셔졌다.
“부패하고 타락한 남조선의 문화까지 들여와야 한단 말인가?”
“그럴 필요까지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고 건설위원장 김영조가 나섰지만 김기복과 김성산은 가만있었다. 그때 위원장이 정색한 얼굴로 조철봉을 보았다.
“그러면 남북한의 통행도 자유로워져야 되겠군?”
“세관 검색을 완화시키면 더 좋겠지요.”
“남조선의 사기꾼과 도둑놈이 다 이곳으로 몰려 오겠군.”
“하지만 경제특구 안에서만 놀테니까요.”
그러자 위원장이 앞쪽의 벽을 향한채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남조선의 기업가 누군가가 이런말을 했지, 기업은 오직 이윤 창출이 목적이라고, 그것이 결국은 기업은 물론이고 종업원, 나아가 국가 발전에 이바지하게 되는 것이라고.”
누군지 알수 없었지만 조철봉은 긍정했다. 그때 위원장이 말을 이었다.
“맑은 물에는 고기가 살지 못한다는 말도 했지, 맞는 말이야.”
머리를 든 위원장이 김기복을 보았다.
“김비서, 검토 해보도록.”
“예, 위원장동지.”
“카바레는 제일 나중에 짓는 것이 나을 것이야.”
그러자 김성산이 짧게 웃었고 눈치를 살피던 조철봉은 따라 웃지 못했다. 그러나 위원장의 시선이 옮겨져 왔을때 조철봉은 놓치지 않았다.
“위원장님, 서울 방문 계획이 없으십니까? 한번 가시는 것이 공단 분위기 조성에 큰 효과가 있을것 같습니다만.”
작심하고 말하자 모두의 시선이 모아졌고 위원장도 눈을 가늘게 뜨고 조철봉을 보았다. 마치 꿰뚫어 보는 것같은 시선이어서 조철봉은 헛기침을 했다.
그때 위원장이 차분하게 말했다.
“조국을 위해서는 내가 백번이라도 가지. 하지만 지금은 아냐.”
술잔을 내려놓은 위원장이 좌우를 둘러보았다.
“오늘은 유익한 저녁시간을 보냈구만.”
위원장의 시선이 조철봉의 얼굴에서 멈췄다.
“조사장의 조언이 많은 도움이 되었어. 앞으로 자주 만나자구.”
“영광입니다. 위원장님.”
당황한 조철봉이 머리를 숙였을 때 위원장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먼저 실례하겠네.”
위원장이 식당을 나가자 넷은 다시 자리에 앉았는데 모두의 시선이 조철봉에게 옮겨졌다.
“흐흐. 카바레를 공단에다 세운다고 했소?”
하고 먼저 성산이 웃으면서 말을 걸었고 김기복도 거들었다.
“조사장님이 그 방면에는 전문가이신 모양이오.”
그러나 김영조는 얼굴에 웃음만 띨뿐 조철봉과 시선을 마주치지 않았다. 10만불 뇌물사건 때문이다. 그때 어색한 분위기를 눈치 채었는지 김기복이 말했다.
“조사장님. 우리 김위원장은 청렴한 분이시오. 조사장님한테 감정이 있었던 것은 아니니까 그렇게 알고 계십시오.”
“아, 물론입니다.”
조철봉이 김영조를 향해 머리를 숙였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사과 드립니다.”
“돈가방은 내일 아침에 돌려 드리겠습니다.”
김영조가 웃음띤 얼굴로 말을 이었다.
“처음에는 불쾌했었지만 지금은 조금 이해가 되었습니다.”
“한국에서도 다 이러는게 아닙니다.”
불편한 표정으로 조철봉이 김영조를 보았다.
“제가 질이 나쁜 편입니다. 그래서 그렇습니다.”
“자, 남은 술이나 마십니다.”
김성산이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좋은 술이 많이 남았어.”
그날밤 조철봉이 호텔방에 돌아왔을 때는 12시 반이 되어갈 무렵이었다. 그야말로 좋은 술을 폭음해서 온몸이 늘어졌지만 정신은 맑았다. 그래서 샤워를 하고 나왔을 때 전화벨이 울리자 제법 분명한 억양으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저, 유정심입니다.”
그 순간 조철봉의 정신은 더 명료해졌다.
“아, 웬일이야?”
또렷하게 묻자 정심은 망설이는 듯 이초쯤 가만있다가 대답했다.
“지금 로비에 있는데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들어와.”
“감사합니다.”
정심이 그렇게 인사를 했으므로 전화기를 내려놓은 조철봉이 저도 모르게 입맛을 다셨다. 정심이 자의로 찾아 왔을 리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틀림없이 지난번에 준 2천불도 상부에 보고를 했을 것이었다.
잠시후에 문에서 벨소리가 울렸고 기다리던 조철봉은 문을 열었다. 정심은 베이지색 투피스 정장 차림이었는데 늘씬한 몸매에 어울렸다. 조철봉과 시선이 마주쳤을 때 환하게 웃었지만 어딘지 그늘이 덮여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방으로 들어선 정심이 조철봉에게 물었다. 물론 시선은 다른쪽으로 향해져 있다.
“제가 방해되지는 않겠어요?”
“아니. 천만에. 반가워.”
“정말이세요?”
“그럼. 내가 얼마나 기다렸다구.”
조철봉도 정심과 시선을 마주치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 눈을 뜬 조철봉은 먼저 꽃향기 같은 살냄새를 맡았다. 옅은 비누 냄새만 섞인 여자의 체취를 맡는 순간 지난 밤의 정사가 저절로 떠올랐고 곧 전신이 뜨거워졌다. 그리고 몸을 조금 비틀었을 때 유정심의 알몸이 피부에 닿았다. 몸이 닿았어도 정심은 고른 숨소리를 뱉으며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머리를 돌린 조철봉은 탁상시계가 아침 7시반을 표시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어젯밤의 정사에 지쳤지만 정심은 만족한 표정이었다. 이제는 조철봉의 몸을 익숙하게 받아들이면서도 아직도 수줍음을 지우지 못한 정심의 몸은 마치 잘 익은 과일 같았다. 싱그럽고 뒷맛이 개운했다. 조철봉이 침대에서 몸을 일으킬 때 조심했지만 정심을 깨우게 됐다.
“어머, 일어나셨어요?”
놀란 정심이 시트로 가슴을 여미면서 물었으므로 조철봉은 알몸인 채로 내려다보았다.
“그냥 누워 있어, 아직 7시반이야.”
“하지만.”
“난 신경쓰지 말고.”
조철봉이 정색하고 말했으므로 정심은 시트만 여민 채 그냥 누웠다. 조철봉이 창가의 의자로 다가가 앉더니 마침 옆에 걸쳐놓은 타월로 아랫도리를 덮었다.
“내가 물어볼 말이 있는데.”
조철봉이 정심에게 물었다.
“지난번에 내가 준 돈 말이야.”
긴장한 정심이 눈만 크게 떴고 조철봉은 목소리를 낮췄다.
“상부에다 보고했나?”
정심이 그 모습 그대로인 채 대답하지 않았으므로 조철봉은 쓴웃음을 지었다.
“보고해도 상관없어, 보고하지 않았어도 괜찮고, 그냥 물어보는 것이니까 편하게 대답하라고.”
“….”
“사실은 내가 어젯밤에 국방위원장님한테 불려갔거든. 내가 여러 사람한테 인사를 한 것에 대해서 위원장님이 대충 알고 계시더란 말이지, 그렇지만 보다시피 이렇게 무사히 돌아왔어.”
조철봉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내가 한국에서는 그런 인사가 관행이라고 말씀 드렸거든, 그러니 문화 차이를 뇌물을 준 것으로만 생각하면 안된다고 설명을 해드렸어.”
“….”
“그랬더니 이해하시더란 말씀이야. 그래서 내가 묻는 거야.”
조철봉이 누구인가. 위원장이 그냥 돌려보냈다고 감복만 하고 끝날 위인이라면 이만큼 사업을 일으키지 않았다. 위원장이 돌려보낸 사실을 우선 당장 이용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일단 북한 당국의 담당자들에게 뇌물을 먹인 것이 발각되어 버렸지만 벌을 받지 않은 것이다. 그것이 말을 잘했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믿을 만큼 순진한 조철봉이 아니다. 위원장도 한국측 관행을 어느 정도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따라서 지금 도청이나 화면에 담겨질지도 모르는 정심과의 대화에서 과감하게 지난번에 준 돈 이야기를 꺼내는 것도 계산한 행동이다. 이 장면을 보고 듣는 북한측 쫄따구들에게 위원장과 딜을 했다는 시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조철봉이 정색하고 정심을 보았다.
“위원장은 웃으셨어. 그러고는 맑은 물에는 고기가 살지 못한다는 사실을 이해하겠다고까지 하셨단 말이야. 자, 어때, 말해보지 않겠어?”
그러자 정심이 침대에서 상반신을 일으키고 앉았다.
“예, 보고했어요.”
“응, 그랬군.”
조철봉이 태연하게 머리를 끄덕였다.
“앞으로는 어렵게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조철봉이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욱이 정심이 한테 주는 인사는 뇌물과는 거리가 머니까 말이야.”
이로써 정심도 받은 돈을 상부에 보고 했다는 것이 밝혀졌다. 아마 갑중이 실무자에게 건넨 봉투도 모조리 보고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화장실에서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정심은 단정하게 옷을 차려입고 의자에 앉아 있었다.
“저, 가겠습니다.”
“잠깐 기다려.”
조철봉이 타월만 두른 채로 옷장으로 다가가 지갑을 꺼냈을 때 정심은 이미 문앞에 서 있었다. 문 손잡이를 쥔 정심이 머리만을 돌려 조철봉을 보았다.
“성의는 고맙지만 받지 않겠습니다.”
“이거 서운한데.”
“너무 돈만 내밀지 마십시오.”
정색한 정심의 얼굴빛이 하얗게 굳어져 있었다. 마음먹고 뱉은 말일 것이다.
“조사장님은 삭막하게 사십니다.”
“그런가?”
조철봉이 쓴웃음을 지었을 때 정심은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어렵구먼, 쟤는 어렵게 살아.”
지갑을 소파위에 던진 조철봉이 젖은 머리를 타월로 털면서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정을 주고 받자는 말인가? 순진하기는.”
조철봉이 혀까지 두들겼을 때 전화벨에 울렸다. 최갑중이다. 오전에 같이 평양을 떠나기로 한 것이다. 그날 오후 5시경에 조철봉은 옌타이시의 오성산업 사장실에서 홍경수와 마주보고 앉아 있었다. 조철봉이 옌타이에 도착하자마자 경수로 부터 만나자는 연락이 온것이다. 경수가 웃음띤 얼굴로 조철봉을 보면서 물었다.
“좋은 소식 없습니까?”
“아직은 시기상조라고 하셨습니다.”
금방 대답한 조철봉이 지그시 경수를 보았다. 여유있는 태도였다.
“내가 직접 위원장한테 서울 방문계획을 물었지요. 그랬더니 그렇게 말합디다.”
“아아, 그렇습니까?”
놀랍고 당황한 표정이 된 경수의 얼굴이 굳어졌다. 조철봉이 해낸 것이다.
“그렇게만 말하던가요?”
“조국을 위해서는 백번이라도 가겠지만 지금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아.”
“그리고,”
조철봉이 무표정한 얼굴로 경수를 보았다.
“위원장하고 자주 만나기로 했지요. 위원장은 경제 개발에 대해서 나한테 듣고 싶은 말이 많은 것 같았습니다.”
“그래요?”
눈을 가늘게 뜬 경수가 건성으로 머리를 끄덕였다. 믿지 못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경수는 조철봉의 내력을 훤하게 알고 있는 것이다. 기업가라기보다 사기꾼이라고 해야 맞는 조철봉이다. 어쩌다보니 여기까지 운좋게 왔지만 일국의 최고 지도자가 듣고 경청할 학식이나 경륜이 있을리가 없는 조철봉인 것이다. 경수에게 시선을 주었던 조철봉이 말을 이었다.
“내가 공단의 건설 관계자들한테 뇌물을 뿌렸지요, 건설위원장 한테도 10만불을 주었다가 들통이 났습니다. 놈들이다 불어버린 것이지요.”
그러자 대경실색한 경수가 입과 눈을 짝 벌렸고 조철봉의 말이 이어졌다.
“그래서 국방위원장한테 끌려가 직접 추궁을 받다가 그렇게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없는 말을 사실처럼 꾸미는 데도 선수인 터에 사실을 그대로 말하는데 실감이 안난다면 인생 헛 산 것이 된다. 이만한 사실이면 어떤 줄거리도 가능한 것이다.
“요컨대 국방위원장은 나를 통해서 한국 사회의 부패상과 비리, 부정 행위에 대한 대책을 세우려는 것이지요.”
조철봉이 단언하듯 말했다.
“그 머시냐. 반면교사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내가 그 대상인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마침내 경수도 인정한듯 정색하고 머리를 끄덕였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지만 내막을 들어보면 그렇게 해석하는 방법뿐이었다. 경수의 눈빛에서 이제는 진실감이 배어나오고 있었다.
“이해가 갑니다. 북한측은 남한의 경제 구조 이면의 상황에 대해서는 거의 모르고 있을 테니까요.”
“바로 그렇습니다.”
조철봉도 얼굴을 굳히고는 동의했다.
“내가 뇌물을 먹인 현행범인데도 살아남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위원장을 자주 만나게 된 이유도 오직 그것뿐입니다.”
“어쨌든 조사장님은 대단하시오.”
긴장을 풀려는 듯이 경수가 웃음띤 얼굴로 말했을때 조철봉이 다가앉았다. 아직도 표정은 그대로였다.
“그래서 말인데, 우리 회사가 남북경제협력기금을 융자받았으면 합니다만. 운영자금이 필요합니다.”
“아니, 기계도 우리가 담보를 서서 거의 공짜로 들어가게 되지 않았습니까?”
“운영자금이 필요합니다. 남북경제협력기금은 나같은 사업가한테 융자해줘야 되는 것이 아닙니까?”
조철봉의 눈빛이 강해졌다.
“앞으로 나만큼 국방위원장을 자주 만나게 될 기업가가 어디 있습니까? 솔직히 말씀 드리겠는데.”
이맛살을 찌푸린 조철봉이 마지못해서 털어놓는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난 평양에 가면 호텔방으로 여자가 꼭 옵니다. 그것은 위원장이 나한테 보이는 호의지요.”
“허어.”
감탄한 듯 경수가 탄성을 뱉었을때 조철봉은 입맛을 다셨다.
“위원장은 내가 강남의 어떤 카바레에 잘 나가는지, 내 담당 웨이터가 몇번인지도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때 연회에 참석했던 기업가들도 다 들었을테니 물어봐도 될겁니다.”
“알고 있어요.”
“2백억을 융자해 해주십시오. 조건은 10년 거치후에 10년간 무이자로 상환하도록 부탁합니다.”
그러자 경수가 눈을 껌벅이며 조철봉을 보았다.
“조사장, 그것은.”
“내가 알기로는 대동전자가 3백억을 7년거치 8년 상환 조건으로 융자를 받았습니다.”
“아시다시피 대동전자는 이번의 남북협력사업에서 핵심 역할을 하고 있어요. 오성산업하고는 다릅니다.”
“내 이용가치가 더 클텐데요.”
어깨를 편 조철봉이 경수를 노려보았다.
“10억을 드리지요. 흔적이 남지 않도록 외국은행에 예금하고 구좌 번호만 불러 드리겠습니다.”
“나아 참.”
쓴웃음을 지었던 경수가 곧 얼굴을 굳히더니 조철봉을 노려보았다.
“조사장, 왜 이러십니까?”
“15억을 드리겠습니다.”
“날 어떻게 보고 이따위 수작을 하는 거요?”
경수가 목소리를 높였을 때 조철봉은 어깨를 움츠리고는 이를 악물었다. 그러고는 다시 낮게 말했다.
“좋습니다. 20억을 드리지요. 이것이 마지막 가격입니다.”
그순간 경수가 어깨를 늘어뜨리면서 시선을 내렸다. 이맛살을 조금 찌푸리고 있었는데 지친 표정이었다.
“조사장, 경고합니다.”
경수가 한숨과 함께 말을 뱉었다.
“만일 그런 식으로 나한테 접촉하신다면 고발해서 법적 조치를 하겠습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으므로 긴장하고 있던 조철봉이 숨을 삼켰다. 경수가 이렇게 처신하는 건 예상 밖이었기 때문이다. 그러고보면 남북 양쪽에서 뇌물작전에 제동이 걸린 셈이었다.
“이건 호의로 말씀 드린건데.”
조철봉이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그러시다면 취소하겠습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대출은 검토해보지요.”
낮게 말한 경수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부탁합니다.”
경수를 배웅하러 사무실 밖까지 따라나오면서 조철봉이 간절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저 홍사장님만 믿습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조철봉은 경수가 곧 연락해 오리라는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이제 자신만큼 북한 고위층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사람은 드물게 된 것이다. 그날 저녁 조철봉은 최갑중과 함께 K-TV에 들렀다.
요즘은 바빠서 거의 들르지 못했기 때문에 분위기가 새로웠고 갑중은 들떠있었다. K-TV 5호점에 들어섰을 때 지배인과 마담이 그들을 맞았다. 이제 옌타이에는 직영 K-TV가 5개로 늘어났으며 총지배인은 5호점 지배인을 겸하고 있는 영준이다. 그들을 특실로 안내한 강영준이 자신있는 표정으로 말했다.
“한족 아가씨들로 모시겠습니다.”
그러고는 얼른 덧붙였다.
“한국어를 조금 배워서 의사소통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허어, 그래?”
눈을 좁혀뜬 조철봉이 조금 들뜬 표정인 영준을 보았다. 영준은 K-TV의 창립 공신중 하나였으므로 허물없는 사이였다.
“이곳에서 가르쳤단 말인가?”
조철봉이 묻자 영준은 정색하고 머리를 저었다.
“아닙니다. 대학생으로 한국어를 배우고 온 것입니다.”
“흠, 대학생이라.”
쓴웃음을 지은 조철봉이 갑중을 보았다.
“한국을 닮아가는구먼, 그래.”
“그럼 준비하겠습니다.”
영준이 방을 나갔을 때 갑중이 입을 열었다.
“마담들이 대학이나 직장에 다니는 한족 여자들을 골라오는 것도 한국에서 하던 방법을 그대로 씁니다.”
“그렇군.”
조철봉이 머리를 끄덕였다.
“조선족 여자들 만으로는 한계가 있을 테니까 말이야.”
당연한 일이었다. 이제는 수십만명이 된 한국인 손님을 맞기에는 조선족 여자들의 인력이 부족한 것이다. 그래서 잘나가는 K-TV에서는 적극적으로 한족 아가씨들의 영입을 도모하고 있다.
그때 방문이 열리더니 쟁반을 받쳐든 웨이터들이 들어섰고 뒤를 이어서 영준과 아가씨들이 따라들어왔다. 그런데 아가씨들 머릿수가 4명이다. 그러나 영준은 아예 조철봉과 시선도 마주치려고 하지 않고 아가씨 두명씩을 그들 옆에 앉혔다.
물론 조철봉은 아가씨들이 방안에 들어온 순간부터 용모를 세심하게 살폈다. 아가씨들은 수줍은 듯 시선을 내리깔고 있었지만 행동은 자연스러웠다. 그리고 미인이다. 몸매는 미끈했고 모두 빼어났다.
“저는 메이라고 합니다.”
오른쪽에 앉은 긴머리 아가씨가 또렷한 한국어로 먼저 자신을 소개했다. 시선이 마주쳤을 때 메이가 가지런한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갸름한 얼굴형에 입술은 방울 토마토만 했으며 상큼하게 세워진 콧날에다 초롱초롱한 눈까지 어느 한 곳 흠잡을 곳 없는 미인이다. 과연, 하고 절로 머리가 끄덕여질만큼 한족 중에서 골라낸 미인의 전형인 것이다. 그때 왼쪽 아가씨가 말했다.
“저는 영입니다.”
그러더니 역시 한국어로 덧붙였다.
“꽃부리 영자를 씁니다.”
머리를 돌린 조철봉은 먼저 검은 눈동자를 보았다. 눈동자 안에 자신의 얼굴이 오목렌즈에 박힌 것처럼 떠올라 있었다. 가깝게 있어서 초점을 조금 짧게 했을 때 여자의 얼굴이 한눈에 들어왔다. 이쪽은 숏커트한 머리에 동그란 얼굴형이었다.
그리고 역시 반듯한 외모에 전체적으로는 귀여운 인상이다. 과연 둘다 영준이 자신있게 권할만 했고 그것은 앞쪽 갑중의 양쪽에 앉은 두 아가씨도 마찬가지였다. 갑중은 이미 반쯤은 정신이 나간 표정으로 양쪽 여자를 번갈아 보면서 뭔가를 듣고 말하는 중이었다.
“훌륭하다.”
마치 자신있게 해온 숙제를 선생님께 내밀고 나서 칭찬을 기다리는 학생처럼 눈을 반짝이며 바라보고 있는 영준에게 조철봉이 말했다.
“애 많이 썼다.”
“감사합니다.”
활기차게 대답한 영준이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웃었다.
“그럼 밖에서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영준이 방을 나갔을 때 조철봉은 메이와 영의 어깨를 양팔로 감싸 안았다.
“어디, 소개들을 해봐라.”
그러자 이번에도 메이가 먼저 나섰다.
“저는 스물둘, 대학 영문과 3학년이고 고향은 톈진입니다.”
“지금도 대학 다니나?”
“톈진에서 다니다 지금은 휴학중입니다.”
“이곳은 어떻게 왔고?”
“아는 언니의 소개로.”
머리를 끄덕인 조철봉이 왼쪽으로 시선을 돌렸을 때 영이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입을 열었다.
“저는 스물하나이고, 대학에서 경제를 공부합니다. 2학년이고 옌타이가 고향입니다.”
“한국말 잘하는구나.”
“학교에서 배웠습니다.”
그러자 메이가 끼어들었다.
“저는 나온지 한달 되었고 이차는 한번도 나가지 않았어요.”
“허어, 그래?”
조철봉이 놀란 듯 눈을 크게 떴을 때 영이 나섰다.
“저도 그렇습니다. 나온지 20일 되었는데 총지배인님이 나가지 말라고 하셔서.”
“왜?”
“그건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수입이 적겠는데.”
“아닙니다.”
이번에는 메이가 대답해주었다.
“총지배인님이 매일 저희들 몇명한테는 비밀리에 특별수당을 주셨습니다.”
“정말이야?”
어느새 앞쪽 자리에서 메이와 영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갑중이 정색하고 물었으므로 분위기가 조금 긴장되었다. 갑중이 메이와 영을 번갈아 보았다.
“그런 아가씨들이 몇명이나 돼?”
“모두 6명인데 오늘 이방에 4명이 들어왔어요.”
그러자 갑중이 감탄한 얼굴로 조철봉을 보았다.
“강영준이 저놈, 대단한데요.”
당연히 그날밤 조철봉은 메이와 영을 데리고 호텔방으로 돌아왔다. 갑중도 호기를 부려 둘을 데리고 나왔지만 엘리베이터에서 헤어질 때의 얼굴은 불안하게 보였다. 이런 경우가 한두번이 아니었지만 방안에 셋이 있게 되었을때 조철봉도 긴장했다.
그래서 선반에 놓인 술병도 꺼내놓고 음료수와 마른 안주까지 권하는 수선을 피우다가 이윽고 지친듯 소파에 등을 묻었다. 그동안 여자들은 얌전하게 소파에 나란히 앉아 있었는데 오히려 조철봉보다 더 여유가 있어 보였다.
“씻고와.”
제풀에 화가 난 조철봉이 조금 거칠게 말했을 때 메이와 영은 재빨리 일어섰다. 그러고는 나란히 화장실로 들어섰다. 욕심이다. 욕정부터 앞서면 분별력은 물론이고 이성도 마비되는 법이다. 눈앞에 펼쳐진 욕정의 상대를 체력이 닿는 한도 내에서 낚아채고 싶은 것이 조철봉의 본성이었고 그것을 숨기지 않았다.
점잔을 빼거나 위선을 부렸다면 조철봉은 애시당초 이렇게까지 세상 밖으로 나오지도 못했다. 메이와 영이 화장실에서 나온 것은 20분쯤 후였다. 둘은 방에 비치된 두개의 욕실용 가운을 나란히 걸치고 있었는데 피부는 윤기가 흘렀고 화장기가 지워진 깨끗한 얼굴은 다시 가라앉았던 성욕을 발동시켰다. 조철봉이 둘을 훑어보며 만족한 얼굴로 웃었다.
“침대에서 기다려. 나도 씻고 올테니까.”
“빨리빨리.”
메이가 장난스럽게 말하자 영도 웃음띤 얼굴로 거들었다.
“얼른.”
따라 웃었던 조철봉의 얼굴이 머리를 돌린 순간에 찌푸려졌다. 모두 2차가 처음인 여자치고는 침실 매너가 세련되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강영준이 그에게 거짓말을 할리는 없다. 간단하게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메이와 영은 침대에 나란히 누워 있었는데 메이는 손에 리모컨을 쥐었다. 둘은 TV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들이.”
쓴웃음을 지은 조철봉이 수건을 소파위에 던지자 알몸이 드러났다. 아까부터 긴장이 풀리면서 마음이 조급해졌고 철봉은 열을 받았다. 그래서 우람한 철봉이 건들거리면서 위협적으로 메이와 영을 겨냥한 상태였다.
“와우.”
철봉을 본 영이 먼저 그런 괴성을 뱉더니 한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러나 크게 뜬 두눈은 철봉에서 떼어지지 않았다. 메이의 반응은 달랐다. 두눈을 활짝 뜨고 철봉을 노려보는 것까지는 같았지만 긴장으로 굳어져서 말을 뱉지 않았다. 조철봉은 침대로 올라 메이와 영의 사이로 들어갔다. 둘 다 가운은 벗었지만 브래지어와 팬티는 착용하고 있었으므로 조철봉이 던지듯 말했다.
“다 벗어.”
메이와 영은 고분고분 브래지어와 팬티를 벗어 각각 침대 밑에 내려놓았다. 둘의 알몸은 비슷했다. 젖가슴은 작은 종지 만했고 배는 홀쭉했으며 두 다리는 길었다. 엉덩이는 작고 단단했으며 어느 한곳 군살이 붙지않은 알몸이었다. 대체로 북방의 한족은 신체가 길고 날씬한 몸매를 지니고 있다.
천성적으로 타고난 몸매였으나 시대에 따라서 미인의 기준이 달라지는 터라 옛적에는 지금처럼 후한 점수를 받지 못한 적도 있다. 조철봉은 먼저 알몸이 된 메이와 영의 어깨를 당겨 안고는 길게 숨을 뱉었다. 이제 둘이 노련한가 신선한가의 구분도 잊었다. 그저 가슴이 벅찰 뿐이다.
그때 메이가 먼저 손을 뻗쳐 철봉을 조심스럽게 움켜 쥐었다. 마치 어린아이가 처음 보는 장난감을 쥔 것 같은 표정이었다. 영은 얼굴을 조철봉의 가슴에 묻고는 하체를 바짝 붙였는데 피부에 닿는 숨결이 벌써 뜨거웠다. 조철봉은 손을 뻗쳐 먼저 영의 샘을 더듬었다. 둘과 함께 있는 상황에서는 모든것을 한두단계 빨리 진행시켜야 호흡이 맞는다. 그래야 둘을 상대할 수가 있는 것이다.
영의 샘은 알맞게 젖어 있었지만 아직 차오르지는 않았다. 그러나 조철봉의 손끝이 파고 들어오자 신음을 뱉더니 온몸을 더욱 붙이면서 뒤틀었다. 전혀 의식적으로 보이지 않고 자연스러운 몸짓이었다. 그때 갑자기 메이가 몸을 일으키더니 조철봉의 몸위에 엎드렸다. 그리고 상체를 굽혀 철봉을 입안에 넣었으므로 조철봉은 저도 모르게 신음을 뱉었다. 메이의 테크닉은 익숙했다. 치아에 걸리지도 않고 깊숙하게 입안에 넣었다가 혀로 자극했다.
“그만.”
마침내 조철봉이 메이의 머리를 잡아 그치게 하고는 아래로 끌어내렸다. 그러고는 젖은 입에 입술을 댔다. 입술을 뗐을 때 메이가 헐떡이며 물었다.
“싫어요?”
“익숙하지가 않아서 그런다.”
메이가 알아들었는지 잠자코 몸을 붙였다.
사실이다. 지금까지 조철봉은 여자의 애무는 거의 받지 않았다. 엄밀히 말하면 여자의 서비스는 받지 않았다는 뜻이다. 아직도 조철봉의 손은 영의 샘안에 있었는데 그동안 샘이 넘쳐나고 있었다. 물론 메이나 영은 이것이 첫경험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둘이 한 남자를 상대한 경험은 없었던 것이 분명했다. 서로 호흡을 맞추려고 노력했지만 자주 팔다리가 부딪치는 것을 봐도 그렇다. 이런 경우에 둘이 있을 때보다 덜 자극을 받는 여자는 전문가가 틀림없다고 봐야 된다. 전문가는 부담을 반으로 덜고 즐기는 것이다.
그러나 초보라면 상황이 달라진다. 그때는 상대 남자는 물론이고 여자까지 의식하게 되는 터라 긴장과 자극을 두배로 받는다. 조철봉은 메이와 영의 반응을 보고는 만족했다. 80세 노인으로 입장을 바꾼다고 하더라도 지금은 초보를 선호할 것이기 때문이다.
“영, 네가 먼저.”
조철봉이 말하자 몸을 비비고만 있던 영이 번쩍 상반신을 세웠다. 그리고 서둘러 조철봉의 몸위로 올라갔는데 메이와는 시선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조철봉은 자유롭게 된 두팔을 벌려 옆에 누운 메이를 안았다. 그러고는 두 손으로 젖가슴과 샘을 애무하면서 영에게 말했다.
“영, 시작해.”
메이의 상반신을 비스듬히 가슴위에 올려 놓았으므로 누워있는 조철봉에게 영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조철봉이 메이의 뜨겁고 젤리같이 말랑한 혀를 빨아 들였을때 철봉이 죄어드는 것 같은 느낌이 왔다. 다음 순간 철봉의 모든 신경이 환호하듯 떨었다. 철봉이 용암이 분출하는 동굴 안으로 진입한 것이다. 그때 머리 위에서 낮고 억눌린 것 같은 영의 신음이 울렸다.
그순간 조철봉은 허리를 치켜들어 영의 몸을 받았다. 그러자 영의 비명같은 신음이 울리면서 움직임이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조철봉은 상반신 위에 엎드린 메이의 몸이 영의 반응에 따라 더욱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샘도 이미 넘쳐 흘렀고 온몸이 뒤틀리고 있었다. 조철봉은 만족했다. 이것이 바로 조철봉식 극락이다. 그때 영이 폭발하면서 온몸을 굳히고 신음을 뱉었다.
다음날 아침 호텔식당에서 만난 최갑중은 웃음띤 얼굴로 인사를 했지만 금방 표정이 일그러졌다. 뻔한 사연이었으므로 조철봉은 잠자코 식사를 했다. 좋은 밤을 보낸 얼굴이 아닌 것이다. 식사를 마칠 때까지 딴전만 펴던 갑중은 조철봉이 커피잔을 들었을 때 마침내 참지 못했다.
“저, 형님은 어젯밤에 잘 지내셨습니까?”
“날 보면 모르겠니?”
무슨 뚱딴지같은 말이냐는듯 조철봉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이렇게 쌩쌩하게 아침을 먹고 있지 않느냔 말이다.”
“형님. 저, 농담할 기분이 아닙니다.”
“네 기분 따위는 나하고 상관없다.”
그러자 갑중이 헛기침을 하더니 정색하고 조철봉을 보았다.
“저, 어젯밤에 형님은….”
“어쨌다는 거야?”
“잘 하셨습니까?”
“당연하지.”
“둘다 만족시켜 주셨냐고요.”
“글쎄 당연한 일 아니냐?”
그러고는 조철봉이 눈을 가늘게 뜨고 갑중을 보았다.
“넌 어떻게 되었어?”
“저야 뭐.”
“그냥 저 혼자서 싸버린 상통이구먼.”
혀를 찬 조철봉이 말을 이었다.
“하긴 너같이 수양이 부족한 놈으로선 당연할 일이지.”
“그게 잘 안되던데요.”
이제 체면이고 자존심이고 다 벗어던진 갑중이 절절한 표정으로 조철봉을 보았다.
“하나씩 하기에도 타이밍 잡기가 어려웠는데 둘을 한꺼번에 하기에는….”
“그래서 어떻게 되었는데.”
“애무를 했습니다.”
“네가 둘한테?”
“예, 정성을 다해서.”
“미친 놈.”
다시 혀를 찬 조철봉이 찌푸린 얼굴로 갑중을 보았다.
“그래서?”
“그랬더니 한놈이 해달라고 해서 올라갔다가.”
“금방 발사를 해버렸구먼.”
“분위기 때문에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개망신을 당한 거죠.”
“그러니 뱁새가 황새 따라 걷다 가랑이가 찢어진다는 것이다.”
“방법을 말씀해주십시오.”
“난 수업료로 수억을 썼다.”
“제가 앞으로 계속 술을 사겠습니다.”
그러자 조철봉이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둘이 있을 경우에는 첫째로….”
“예, 첫째로….”
“자잘한 애무 따위는 에너지만 손상된다. 최악의 방법을 사용한거야. 너는.”
“으으음.”
“단계를 과감하게 몇계단씩 건너 뛰고 조금 거칠게 나가야 한다.”
“예, 건너 뛰고 거칠게.”
“네가 리드를 해야 한단 말이지.”
“아아, 예.”
“여자가 애무를 해줘도 안된다. 네가 페이스를 잃을 우려가 있어.”
“아하.”
“그리고 철봉을 넣고나서 지장보살의 진언이나 금강경을 속으로 외우는것이 효과가 있다.”
“책방에 있습니까?”
“있을거야.”
“외우면 진짜 효과가 있습니까?”
“있다니까.”
눈을 흘긴 조철봉이 식은 커피를 한모금 삼켰다.
“다 공덕이 들어가야 되는거다. 그냥 되는 일은 아무것도 없는거야.”
오성산업의 평양공장은 순조롭게 건설되었고 예정보다 빨리 가동될 예정이었다. 김성산과의 인연으로 시작된 남북합작사업이 평양공단의 대규모 사업장까지 발전된 것이다. 더욱이 남북 양쪽에서 대출과 특혜를 받아 투자비도 대폭 절감할 수 있었으므로 조철봉에게는 일거삼득의 호기가 되었다.
서울로 돌아온 조철봉은 평양공장을 김택현에게 맡겨놓고 사업을 총괄했다. 이제 각 지역에 수십개의 사업체를 거느린 그룹 회사가 되어 있었으므로 평양공장에만 매달릴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김성산이 방문했을 때는 평양공장을 가동하기 일주일 전이었다. 오성자동차의 사장실로 들어선 성산은 활짝 웃었다.
“조사장, 언제나 바쁘시오.”
소파에 앉은 성산이 곧 정색하고 물었다.
“조사장의 사업체는 몇개나 됩니까?”
“28개가 되었습니다.”
조철봉이 어색한 표정으로 성산을 보았다.
“어떻게 하다 보니까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만하면 대그룹이군.”
“천만에요. 한국의 1백대기업 안에도 들지 못합니다. 중소기업 수준의 사업장들이거든요.”
“어쨌든 그 많은 사업장을 다 관리하려면 힘이 드시겠습니다.”
“아닙니다.”
쓴웃음을 지은 조철봉이 머리를 저었다.
“저는 회의나 주재하고 가끔 자금 결제만 할 뿐입니다. 일은 바쁘지 않습니다.”
성산의 시선을 받은 조철봉이 말을 이었다.
“제가 할 일은 새 사업의 구상이나 경영진의 배치 정도지요.”
“그럼 각 사업장은 모두 전문경영인에게 맡겨 놓으신 것이군요.”
“그렇습니다. 그들이 다 알아서 합니다.”
조철봉의 말에 열기가 띠어졌다.
“저도 처음에는 이곳저곳의 일에 간섭했지만 곧 그것이 질서를 파괴하고 회사에 전혀 득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내 일은 내가 찾아서 하기로 했습니다.”
“허어.”
“처음 얼마동안은 조바심이 났고 불안했지만 극복할 수 있었지요. 지금은 각 사업장의 전문경영인들이 제대로 자리를 잡은 것 같습니다.”
“과연.”
커다랗게 머리를 끄덕인 성산이 진지한 표정으로 조철봉을 보았다.
“조사장의 진면목을 알게 되어서 참으로 기쁩니다.”
“아니, 저는….”
“조사장이 이만큼 성공한 것도 다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군요. 감탄했습니다.”
“운이 따랐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내가 조사장을 만나러 온 것은….”
성산이 본론을 꺼냈으므로 조철봉은 긴장했다. 다시 성산의 말이 이어졌다.
“개성공단 문제로 상의할 것이 있습니다.”
조철봉이 잠자코 성산을 보았다. 개성공단은 남북간 경협사업이 시작되었을 때부터 개발시켰지만 아직 실적이 미미했다. 개성직할시 아래쪽 공단에 입주한 기업체는 몇십개 되지 않는 것이다. 그때 성산이 불쑥 말했다.
“조사장이 공단 개발의 적임자요. 맡아주시지 않겠소?”
“아니, 뭘 말씀입니까?”
“공단에 유흥시설을 만드는 것이오. 조사장이 지난번에 지도자 동지께 말씀드린 것처럼 술집, 호텔, 가라오케, 카지노를 세우는 것입니다.”
성산이 열기띤 눈으로 조철봉을 보았다.
“육로 관광길도 트인 상황에 조건이 좋지 않겠습니까? 조사장이 유흥시설의 설치를 맡아주시오.”
(693)개성공단 유흥구-1
“아니, 그렇다면.”
조철봉의 설명이 끝난 후에 둘러앉은 중역중에서 예상했던 대로 최갑중이 제일 먼저 나섰다. 갑중이 눈을 크게 뜨고 조철봉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사장님께선 개성공단 건설책임자가 되시는 겁니까?”
“건설 책임자가 아니야.”
조철봉이 답답하다는 표정을 짓고는 갑중을 흘겨보았다.
“엄밀하게 말한다면 유흥시설 설치 책임자다.”
“어쨌든 건설 아닙니까?”
“글쎄, 건설은 어느놈이 하는지 알 필요가 없고 나는.”
조철봉이 목소리를 높였을 때 하정규가 헛기침을 했다. 그는 작년에 영입된 전문경영인으로 오성자동차의 판매부문 사장이다.
“사장님께서는 북한 당국으로부터 개성공단의 유흥시설에 대한 프로젝트를 위임 받으신 것입니다. 따라서 기획, 설계에서부터 건설, 운영에 이르기까지 전권을 행사하실 수가 있는 것이지요. 그렇게 해석해도 되겠습니까?”
“하사장 말씀이 정확해요.”
머리를 끄덕인 조철봉이 다시 갑중을 흘겨보았다. 둘만 있었다면 무식한 놈 이라고 소리를 지르고도 남았지만 사람들 앞이라 체면을 고려해준 것이다. 그러자 하사장이 열띤 목소리로 말했다.
“대규모 프로젝트가 되겠습니다. 사장님이 이 일을 맡게 되셨다니 기쁩니다. 우리는 이 사업을 계기로 대도약을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장실 소속 기획실장 안상훈이 동의했고 자금부장도 머리를 끄덕였다. 만장일치인 것이다. 조철봉이 정색하고 중역들을 둘러보았다.
“이 프로젝트는 절대로 실패하면 안되는 사업이요, 내가 목숨이라도 걸어야만 하는 일이야.”
“가능성이 있습니다.”
자신있게 하사장이 말했고 조금 삐져있던 갑중도 그때서야 거들었다.
“한국 관광객만 유치시키면 성공은 문제 없습니다. 강원도 정선 카지노가 성공한 것을 보십시오.”
“우리가 카지노 운영권을 따내야 합니다.”
자금부장이 말했을 때 입맛을 다신 조철봉이 머리를 들었다.
“지금 그따위 얄팍한 계산을 하고 덤빈다면 아예 손을 대지 않는 것이 나아. 공단 유흥구의 사업이 성공할 수 있느냐가 우선이야.”
“그, 그렇습니다.”
무안을 당한 자금부장이 허리를 폈을 때 마침내 조철봉이 결심하고 말했다.
“좋아, 추진하겠어. 그리고 성공 시키겠어.”
그로부터 한시간 반이 지난 오후 4시반경에 사장실에는 다시 네 사내가 모여 앉아 있었는데 이번 손님 세명은 홍경수와 그의 일행이었다. 이번에도 조철봉의 설명이 끝날 때까지 방안에는 긴장과 흥분이 섞인 열기로 덮어졌다. 이윽고 조철봉이 입을 다물었을 때 경수가 시선을 들었다. 정색하고 있었지만 눈빛이 보통때보다 강했다. 흥분한 것이다.
“조사장님, 이 일은 북한측에서 조사장님을 통해 한국측에 프로젝트 통보를 해준 것이나 같습니다. 즉 비공식적인 남북합작 사업입니다.”
경수의 목소리는 결국 떨려나왔다.
“대단한 진전입니다. 조사장님이 유흥구 프로젝트를 맡게 되신 것보다 북한측의 그 발상이 말입니다.”
눈만 껌벅이는 조철봉을 향해 경수가 말을 이었다.
“한국 정부도 물론 적극 협조할 것이 분명합니다. 조사장님.”
조철봉의 장점이 있다면 제 분수를 안다는 것이 될 것이다. 거대한 프로젝트를 위임받았지만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나서지 않고 뒤에서만 움직였다. 전문경영인 서동수를 영입하여 프로젝트 일체를 위임한 것이다. 개성공단의 아래쪽 판문군에 위치한 유흥구는 1백만평의 대지에 남쪽은 서해 바다로 연결되어 있다.
유흥구에 대한 남북한 협상은 전례를 찾을 수 없을 만큼 신속하게 체결되었고 유흥구와 서울을 잇는 10차선 고속도로 공사도 시작되었다. 서울에서 유흥구까지 자동차로 한시간 안에 도착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또한 남북한의 현 상황을 고려하여 유흥구는 자유무역 지대로 분류시켰다.
무비자, 무관세 지역이 되었으며 이것은 북한측이 입출국시의 물품 검열을 전혀 하지 않고 신분증 확인만 하겠다는 것이었다. 홍콩이나 마카오보다도 더 자유롭고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따라서 유흥구 명칭을 개성과 홍콩의 한 글자씩 딴 ‘개콩’으로 지으면 어떻겠느냐는 의견이 북한측에서 대두되었지만 어감이 이상하다는 남한측의 첫 이의제기에 그것 한건만 결정이 보류되었다. 조철봉의 공식 직함은 개성공단 유흥구 건설위원장이었으니 한국 국적인이 북한의 고위직에 임명된 것은 첫 경우였으므로 언론의 주목을 받았지만 크게 보도되지는 않았다. 기관에서 손을 썼기 때문이다. 거대한 남북합작 사업의 남북한 총지휘를 맡게 된 사내가 어떤 짓을 하고 다녔나를 파헤쳐봐야 좋은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조철봉은 유흥구 건설 실무를 서동수에게 맡겼지만 수시로 열리는 건설위원회에는 위원장 자격으로 참가했다. 건설위원에게는 남북한 당국자가 반씩 소속되어 있었는데 서로 협조적인 분위기였다. 건설위의 북한측 선임자는 비서국소속 산업담당 비서 강중석이다. 강중석은 열성적인 공산당원인 동시에 지도자 김정일위원장의 충복이었다.
조철봉은 그와 자주 만나게 되었지만 한번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았으며 공사 현장에 나가면 몸을 사리지 않고 험한 장소까지 체크했다. 건설위원회의 제1차 공사는 1백만평 부지의 조성작업과 3개의 골프장, 5개의 호텔과 카지노, 그리고 2백미터 반경의 중심가였다. 중심가에는 식당과 사우나, 가라오케, 룸살롱등 본격적인 유흥업소가 늘어설 것이었다.
유흥구 건설현장 사무소의 3층 위원장실로 들어선 강중석은 오늘도 단정한 노동복 차림이었다. 50대 초반의 강중석은 육중한 체격에 용모도 준수했다. 자리에 앉은 강중석이 정색하고 조철봉을 보았다.
“위원장동지, 여성동무들을 서울로 보내는 문제는 잠시 보류시키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강중석이 조심스럽게 묻자 조철봉은 쓴웃음을 지었다. 예상하고 있었다는 표정이었다.
“서비스업에 종사하려면 교육을 충분하게 받아야 됩니다. 현장실습은 대단히 중요하지요.”
“하지만.”
말을 멈춘 중석이 조철봉을 보았다. 지도자 동지의 각별한 신임을 받고 있는 조철봉에게 따지고 들기가 부담스러운 것 같았다. 조철봉은 유흥구에 종사하게 될 북한 여성들을 서울로 보내 교육시키려는 것이다. 특히 카지노에 근무하게 될 직원들은 교육이 시급했고 호텔이나 식당 등의 종업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중석은 조철봉이 가라오케와 룸살롱에서 근무하게 될 여자들까지 서울로 보내려는 것을 보류시키자는 것이다. 서울 룸살롱에 파견시켜 현장 경험을 쌓게 할 계획이었다.
강중석의 우려는 당연했다. 유흥구에 근무하게 될 남녀직원은 모두 북한의 각지에서 선발되고 있었는데 그 숫자가 만만치 않았다. 1차로 선발된 남녀가 1만명이 조금 넘었으며 그중 접객업소에 근무하게될 여자는 6천명 정도였던 것이다. 조철봉이 부드러운 시선으로 강중석을 보았다.
“다 알고 계시겠지만 이번 실습생 파견은 실무를 익히는 목적도 있지만 한국 사회에 대한 광고효과가 클겁니다.”
“그거야.”
입맛을 다신 중석이 눈을 껌벅이며 조철봉을 보았다.
“룸살롱과 가라오케에 종사하게 될 여성동무는 6천명인데요, 그만한 인원을 서울에서 수용할수가 있을까요?”
그러자 이번에는 조철봉이 입맛을 다시고는 중석을 보았다. 정색한 표정이었다.
“6천명쯤은 모래밭에 물 스며들듯이 흡수될 겁니다. 비서동지.”
“그렇게 서울에 룸살롱이 많습니까?”
“곧 연락이 올겁니다.”
조철봉은 서울의 룸살롱연합회에 공문을 보내어 북한의 실습생을 받아들일 의향을 물었던 것이다. 중석이 별로 미덥지 않은 표정을 짓고 일어섰으므로 조철봉도 더이상 설명하지 않았다. 그러나 다음날 오전, 사무실에 앉아있던 조철봉에게 서동수가 찾아왔다. 서동수는 손에 팩스 용지를 들었는데 표정이 밝다.
“모두 받아들인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위원장님.”
팩스를 조철봉의 앞에 내려놓은 서동수가 말을 이었다.
“각 업체별로 분배도 되었습니다.”
“그러면 그렇지.”
만족한 조철봉이 팩스를 펴보면서 머리를 끄덕였다. 팩스에는 룸살롱의 상호에다 필요한 실습생의 숫자까지 모두 기록이 되어 있었는데 큰 업체는 1백명을 소화한 곳도 있다. 눈을 가늘게 뜬 조철봉이 서류에서 시선을 떼었다.
“저쪽 의향서는 받았으니까 이제는 우리가 심사를 해야지요. 룸살롱이나 가라오케가 건실한 업체인지 확인하고 나서 실습생을 보내야 합니다.”
“그, 그렇지요.”
“실습생을 등쳐먹으려는 놈들도 있을테니까.”
“아아, 예.”
“책임자를 보내 매일 확인을 해야 사기를 당하지 않아요.”
“당연히 그래야겠지요.”
서동수는 건성으로 머리를 끄덕였지만 이미 조철봉의 머릿속에는 책임자의 얼굴이 떠오르고 있었다. 고동수이다. 중국땅에서 K-TV 체인점을 만들어 성공시킨 고동수에게 맡기면 철저하게 관리가 될 것이었다. 각 업체는 북한 출신 실습생들에게 의식주는 물론이고 실습 기간동안 일정액의 수당을 지급한다는 조건이었으니 이쪽에서는 거의 경비가 들지 않는다.
그날부터 조철봉은 서울로 보낼 인력 공급건으로 바빴다. 이제는 강중석도 적극적으로 일을 도왔는데 상부의 지시를 받은것이 분명했다. 룸살롱연합회에서 보내온 공문에 적혀진 각 업체의 확인이 시작되었으며 이쪽에서는 정신교육이 병행되었다. 이탈자가 발생하면 일이 깨뜨려질수가 있는 것이다.
북한측은 서울에 관리사무소를 설치했으며 소장에는 보위부 소속의 당간부인 김남철이 임명되었다. 그리고 조철봉의 건의에 따라 김남철의 자문역으로 고동수가 파견되었는데 3개월간의 실습 기간동안 업체들을 감시할 것이었다. 업체 선정이 끝난것은 그로부터 열흘쯤이 지난 후였다. 373개의 룸살롱과 가라오케 중에서 10여개가 부실업체로 판정되어 바꿨을뿐 대부분의 업체는 건실했다.
실습생이 떠나기전에 받는 정신교육은 유흥구 위쪽의 인민학교 강당에서 실시되고 있었다. 조철봉이 강사로 초대된 것은 실습생이 떠나기 이틀전이었다. 예상치 못한 일이어서 당황한 조철봉이 통보해온 북한측 건설위원에게 사양했지만 바꿀 수 없다는 말에 마침내 강의를 맡기로 결심했다. 강사 선정을 한 것이 북한측 건설위원들보다 윗선이라는 것을 눈치챘기 때문이다.
오후 2시 정각이 되었을 때… 연단에 선 조철봉은 자신에게 향해져 있는 6천쌍의 시선에 먼저 압도되었다. 강당 안은 6천명이 모여 있었지만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정적에 덮여졌고 긴장감까지 감돌았다. 모두 조철봉이 누구인지 아는 것이다. 한국인으로 유흥구의 최고 책임자로 임명된 인물이며 지도자 동지의 각별한 신임을 받고 있는 거물이다. 또한 모두 자신들을 서울 유흥가로 실습을 보내도록 만든 장본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이윽고 조철봉이 입을 열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마이크에 입을 너무 바짝 붙여서 쇳소리가 났다. 머리를 뗀 조철봉이 강당에 운집한 여자들을 둘러보았다. 모두 골라 뽑혀온 미인들이었지만 초점이 흐려져서 얼굴은 한명도 선명하게 보이지 않았다.
조철봉이 말을 이었다.
“여러분이 얼마나 중요한 사업에 참여하게 되었는지는 이미 교육을 받으셨을테니까 나는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조철봉이 아직도 기침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강당안을 둘러보았다. 잘 교육된 여성들이었다. 그리고 모두 아름답다. 갑자기 가슴이 메인 조철봉은 심호흡을 했다.
“이제 여러분은 서울의 각 업체로 파견되어 실습을 하시게 됩니다. 물론 각 업체에서는 여러분들을 위해 준비를 다 해놓았고 유흥구의 서울 관리소에서는 여러분 모두를 보살펴 드릴테니까 다른 염려는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연탁위에 놓인 물잔을 들어 한모금 마신 조철봉이 말을 이었다.
“그렇지만 내가 여러분께 한가지만 주의사항을 말씀 드릴테니까 꼭 참고를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는 조철봉이 정색하고 강당안을 둘러보았다.
“여러분은 유흥구의 얼굴입니다. 친선대사와 같은 역할이지요. 한국인들은 여러분을 보면서 개성 유흥구를 연상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들에게 꿈을 심어주게 될 것입니다.”
조철봉의 목소리에 열기가 띠어졌다.
“따라서 여러분은 그들의 꿈을 깨뜨리면 안됩니다. 여자에 대한 남자들의 꿈이 어떻게 깨뜨려지는지 아십니까? 그것의 대부분은 쉽게 줘버렸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절대로 쉽게 주면 안됩니다. 주더라도 유흥구로 끌어들여 놓고 주십시오. 그것이 서로를 위한 길이며 결국은 조국을 위한 길이 될 것입니다.”
그때 강당안에 운집한 6천명의 아가씨들이 슬슬 동요하는 것이 조철봉의 눈에도 보였다. 해찰을 한다거나 잡담을 하는 것은 아니다. 아직도 강당안은 숨소리도 들릴만큼 조용했다. 그러나 여자들은 몸을 조금씩 비틀었으며 눈동자가 흔들렸고 얼굴이 달아 올랐거나 입술끝이 비틀려졌다. 조철봉이 목소리를 높이고 말을 이었다.
“여러분은 서울에서 수없이 이차 요구를 받게 되실 것입니다. 그것을 슬기롭게 극복하여 이곳까지 그놈들을 끌고 오는 것이 여러분들의 과업입니다. 그놈들을 화나게 하지 않고 기다리게 하는 방법을 연구해 보십시오. 그것이 여러분들이 해야 할 가장 큰 과제입니다.”
조철봉의 강의가 끝났을 때 책임부관이 녹음기의 버튼을 눌러 작동을 정지시켰다. 그러자 방안에는 무거운 정적에 덮여졌다. 주석궁의 소회의실 안이었다. 상석에는 김정일 위원장이 앉았고 좌우에는 경제담방비서 김기복, 그리고 김영조와 김성산 등 개성공단 유흥구와 관련이 있는 인사들이 둘러앉았다.
그들은 방금 공단에서 급송된 조철봉의 강의 내용이 담긴 녹음 테이프를 들은 것이다. 김정일 위원장은 입술을 꾹 다문채 앞쪽의 벽만 보았으므로 방안의 분위기는 점점 더 가라앉았다. 조철봉의 강의 내용은 파격적이었다. 그때 위원장이 시선을 돌려 먼저 김기복을 보았다.
“흥, 쉽게 주지 말라구? 그리고 개성까지 끌고 오란 말이지?”
위원장이 그렇게 묻고는 곧 얼굴을 펴고 웃었다.
“명언이다. 과연 놀새다운 놈이다.”
그러자 방안의 분위기가 대번에 밝아졌다. 김씨들은 모두 웃었으며 뒤쪽에 서 있던 책임부관도 입술은 꾹 다물었지만 웃음을 참느라고 콧구멍이 벌름거렸다. 위원장이 말을 이었다.
“탁상공론을 백번 내놓는 것보다 조철봉이처럼 실전 경험이 있는 놈의 계획이 도움이 된다.”
“그렇습니다, 지도자동지.”
김기복이 정색하고 동의했다.
“조철봉의 효용가치가 대단히 높습니다.”
“사기꾼이지만 내면은 선한 놈이야.”
의자에 등을 붙인 위원장이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
“외롭게 살다가 외롭게 죽을 놈이지. 내가 다 알아.”
그러자 모두 입을 다물었고 위원장의 말이 이어졌다.
“갈증을 때우려고 숱하게 여자들을 끌어 안지만 그것으로 해소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본인 스스로도 알고 있는거야. 하지만 그짓은 멈추지 못할 것이다. 멈추면 더 외롭고 허망해질테니까.”
위원장이 이만 보이며 소리없이 웃었다.
“그놈에게 당분간 유흥구 관리를 맡기자구. 제 경험을 토대로 열심히 할 것이다.”
“예, 지도자동지.”
둘러앉은 세 김씨가 삼구동성으로 대답했을 때 위원장이 혼잣소리처럼 말했다.
“그렇군. 카바레를 미리 유치하는 것도 영업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예?”하고 김기복이 반문했지만 해답을 알리가 없다. 그것은 김성산과 김영조도 마찬가지여서 눈만 꿈뻑이고 있다. 그들을 둘러본 위원장이 뒤에 서있는 책임부관을 보았다.
“조철봉을 바꿔라.”
“예, 지도자동지.”
책임부관이 개성 유흥구 현장에 있던 조철봉을 전화로 연결시킨 것은 10초도 되지 않았다. 통화 버튼을 누른 위원장이 가볍게 헛기침부터 했다.
“조위원장, 나 국방위원장이야.”
“예, 위원장님.”
놀란 조철봉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방안에 울렸다.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그래. 동무도 고생 많지?”
“예, 저는.”
조철봉의 목소리에 활기가 띠어졌다. 말한마디면 천냥빚을 갚는다고 했지만 조철봉에게 위원장의 격려 한마디는 엄청난 이용 가치가 있을 것이었다. 조철봉이 누구인가? 이 사실을 이용하여 수백억의 현찰을 대부받을 수도 있을 것이었다. 그때 위원장이 목소리에 힘을 넣고 말했다.
“내가 조위원장한테 물어볼 말이 있어서 전화한거야.”
“예. 말씀하십시오. 위원장님.”
조철봉의 목소리가 방을 울렸다. 그러자 위원장이 다시 헛기침을 했다.
“조위원장, 카바레 말인데.”
“예. 위원장님.”
“유흥구에 카바레를 세우면 어떤 효과가 있겠나? 말해보라.”
“예. 위원장님.”
기세좋게 대답한 조철봉이 미리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처럼 술술 말했다.
“고속도로가 개통되면 서울에서 개성유흥구까지 차로 한시간 거리가 됩니다. 위원장님.”
“그건 그렇지.”
“지금 서울에서 일산까지 차로 40분에서 한시간 거리인데 일산의 카바레가 손님으로 미어 터지고 있습니다.”
“허어, 일산이.”
“서울 여자들이 서울 외곽으로 빠져 나가는 것입니다.”
“드라이브를 하러 외곽으로 나온단 말이지?”
“아닙니다. 위원장님.”
조심스럽게 부정한 조철봉이 말을 이었다.
“서울 여자들이 외곽으로 빠져 나가는 것은 혹시 같은 서울에서 놀다가 제 남편이나 아는 사람들을 만나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어서 그런 것입니다.”
“흠. 그런가?”
“대신 서울 근처의 일산, 분당, 의정부, 안양, 구리 등 소도시의 여자들이 밤이면 서울 카바레로 원정을 옵니다. 위원장님.”
“흠. 서로 노는 장소를 바꾸는군.”
“그렇습니다. 위원장님.”
“그렇다면 유흥구의 카바레에는 서울은 물론이고 소도시의 여자들이 몰려 올 것이라는 것이군.”
“바로 그렇습니다. 위원장님.”
“모두 유부녀들이겠지?”
“예. 카바레에는 대부분이.”
“그러면 남자들도 몰려올 것 아닌가? 뒤죽박죽 섞이다가 제남편이나 아는 사람들을 만날 확률이 크지 않을까?”
“그래서 카바레는 한꺼번에 10개 이상은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도 얼마든지 손님을 채울 수가 있습니다. 위원장님.”
“흠. 그 정도로 남조선의 풍기가 개판인가?”
“저. 그것이.”
조철봉이 다시 헛기침을 하더니 목소리가 조심스러워졌다. 굳어졌다고 표현해도 될 것이다.
“개판이라고 하기보다 성문화가 많이 개방되었다고 말씀 드리는 것이 그들에게 적당한 표현이 될 것입니다. 카바레 같은 곳에서 모르는 남녀간에 만나 잠깐 즐기고는 씻은 듯이 잊어버립니다. 서로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개판 아닌가? 개들도 이름을 알고 그짓을 하던가? 암내를 내면 그냥 수캐가 올라 탔다가 헤어지지 않나?”
“예. 그렇습니다.”
엉겁결에 대답을 해버린 조철봉이 다시 헛기침을 했지만 말을 잇지는 못했다. 이을 말도 없었을 것이다. 그때 위원장이 정색하고 말했다.
“어쨌든 좋아. 남조선 세태가 그렇다면 그런 줄 알아야지. 장사만 잘 되면 그만이지. 그렇지 않은가?”
“예. 그렇습니다. 위원장님.”
조철봉의 목소리에 다시 힘이 붙여졌다.
“영업은 잘 될 것입니다.”
“그럼 카바레를 만들게. 내가 김비서한테 지시 하겠네.”
“예. 곧 계획서를 작성해서 보고 올리겠습니다.”
“남조선 유부녀들이 그 곳에서 돈 보따리를 풀도록 하라고.”
“예. 위원장님.”
“그럼 수고해.”
그리고는 버튼을 누른 위원장이 얼굴을 펴고 웃었다.
“이놈 하고는 말이 통한단 말이야.”
파격적인 발상이며 놀랄 만한 변화였다. 개성공단 유흥구는 발상에서 시작까지 며칠도 걸리지 않았으며 남북간 경협 차원을 떠난 북한 주도의 대변신이었다. 더구나 북한측은 한국에 자금 지원을 요청하지도 않았다. 유흥구의 건설자금 대부분은 북한 스스로 해결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은 서울에서 개성까지 10차로로 확장, 신설하는 공사만 책임지는 정도였다. 남북한은 다시 협의한 결과 개성 유흥구는 중립 지대로서 무관세, 무비자 지역으로 확정되었으며 한국인의 입출국은 여권도 필요없이 신분증 확인만으로 가능하도록 했다. 현금 입출은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보장이 되었으며 물품도 마약과 무기류만 제외하고 검색하지 않도록 했다.
그리고 외국인의 경우에는 여권을 제시해야 하는 것만 다르다. 한국인에게 개성 유흥구는 이제 한국땅이나 마찬가지가 될 것이다. 오히려 더 자유롭게 개방된 환락의 도시로 등장할 것이었다. 조철봉은 서울로 돌아갈 때 이제는 육로를 이용한다.
개성 유흥구에서 판문점을 거쳐 자유로를 달려 서울로 오는 것이다. 오늘도 조철봉이 탄 리무진이 판문점의 한국측 초소 앞에서 멈춰 섰을때 MP마크를 철모에 붙인 한국군 병장이 머리를 숙여 차 안을 보았다. 차에는 운전사 이복현과 최갑중, 조철봉, 셋이 타고 있을 뿐이다.
“안녕하십니까?”
경례를 올려붙인 병장이 이복현으로부터 통행증을 받아 살피더니 곧 건네주었다.
“통과하십시오.”
“고맙네, 병장.”
조철봉이 인사하자 병장은 방긋 웃었다.
“천만에요, 위원장님.”
병장은 조철봉이 누구인지 알고있는 것이다. 차가 속력을 내었을 때 갑중이 머리를 돌려 조철봉을 보았다.
“사장님은 이제 유명인사가 되셨단 말입니다.”
“그래서?”
“이제 캬바레 같은데는 가실 수가 없지 않습니까?”
“왜?”
조철봉이 눈을 크게 떴다.
“누가 뭐라고 한단 말이냐?”
“벌써 신문에 여러번 사장님 사진이 났습니다. 다 알아볼 텐데요.”
“부킹이 잘되겠군.”
“오히려 더 안됩니다.”
갑중이 머리까지 저었다.
“누가 사장님하고 같이 매스컴을 타려고 하겠습니까? 유부녀들이 말이죠.”
맞는 말이었으므로 조철봉은 입맛을 다셨다. 그래서 그날 밤에 자주 다녔던 동궁에 찾아간 것도 그것을 확인해 보려는 의도도 포함되었다. 물론 별로 내키지 않는 눈치인 갑중과 동행이다.
“아이고, 어서 오십시오.”
그동안 산천이 변해서 조철봉은 자동차 영업사원으로부터 시작하여 지금은 개성공단 유흥구의 건설위원장이며 28개의 기업체를 소유한 준재벌이 되어 있었지만 200번은 10년전과 같았다. 물론 그동안 200번은 딸이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직장인이 되었으며 아들은 결혼까지 시켰으니 내실이 없는 조철봉과는 다르다. 반가운 기색을 온몸으로 보이면서 200번은 그들을 아래층 구석 자리로 안내했다.
“오늘은 물이 좋습니다. 사장님이 오시는 날은 꼭 물이 좋다니까요.”
뻔한 아부였지만 그것도 듣기 좋았으므로 조철봉이 만족한 듯 웃었다.
“어디, 오늘 한번 잘 해봐.”
“염려하지 마십시오.”
200번이 바쁘게 사라졌다. 그러자 문득 200번을 유흥구로 데려가야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5분도 지나지 않았을 때 200번이 데려온 두 여자는 30대쯤으로 한눈에 봐도 세련되었다. 조철봉의 안목쯤 되면 홈쇼핑에서 39,900원을 주고 두벌을 산 원피스와 비록 똑 같지만 수백만원짜리를 분위기로 구별할 수 있는 것이다. 어쨌든 어떤 제스처로 어떤 연극을 한다고 해도 조철봉은 1분안에 구분해 낼 수 있다. 그런데 두 여자는 진짜였다. 내용물이야 어떻든간에 외장은 진짜였던 것이다. 갑중도 나름대로 안목이 있어서 여자들이 옆에 앉았을 때 만족한 표정으로 조철봉을 보았다.
여자들은 제각기 옆에 앉았지만 당당했다. 데려온 200번을 코끝으로 부리는걸 봐도 지금까지 행세깨나 했다는 것을 알수 있었다. 쌍방의 분위기를 파악한 200번이 재빠르게 사라졌을 때 조철봉이 옆에 앉은 여자의 옆모습을 보았다. 물론 조명발을 받았기 때문이지만 여자의 피부는 윤기가 났고 오똑선 콧날과 조금 벌려진 입술이 육감적이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정숙한 척 제스처를 부리고 있다면 달아오른 심신에다 물을 뒤집어 씌우는 것이나 같다. 입술도 조금 벌리고 있는 것이 낫고 눈매도 부드럽게 고쳐줘야 분위기나 예의에 맞는다.
“춤 한번 추실까요?”
조철봉이 묻자 여자는 머리를 끄덕이더니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키도 늘씬했고 군살도 없는 체격이었다. 마침 플로어에서는 블루스 음악이 시작되고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쏟아져 내려오는 중이었다. 디스코는 아무나 나가서 아무렇게나 흔들어도 박자에만 맞으면 어울리지만 블루스는 아니다. 공을 들여서 배워야만 하는 것이다.
플로어에는 이제 여유가 있었으므로 조철봉은 여자의 허리를 안고 안쪽으로 이끌었다. 여자의 손은 부드러웠으며 낭창하게 감겨오는 허리에 탄력이 느껴졌다. 그순간 조철봉의 머릿속에 여자가 보통이 아니라는 경고음이 한번 울렸지만 지나쳤다. 그것은 오히려 적당한 긴장감을 일으켜 줄 것이며 더 자극적이 될 것이었다. 서너 스텝만 밟으면 상대방의 춤실력은 알수 있는 법이다.
조철봉은 여자가 능숙하게 스텝을 밟고 있지만 자연스러움을 가장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경계하기 위하여 화난 표정을 짓고 있는 것과 정 반대의 현상이지만 원인은 같다. 자신감이 없기 때문이다.
“잘 추시는데.”
조철봉이 여자의 귀에 대고 낮게 말했다. 몸이 부딪치면서 속삭이는 이런 칭찬은 언제나 효과가 좋다. 더구나 귀에 더운 바람이 들어가면 여자의 느낌은 상승된다. 조철봉은 귀에 바람만 불어주고 샘이 흘러넘치게 만든 경우도 겪어본 것이다.
여자는 대답대신 턴하면서 언덕을 스치게 만들어 주었다. 물론 그것은 조철봉의 철봉을 자극하고 확인하려는 일거양득의 효과가 있다. 조철봉은 여자의 어깨 위에서 빙긋 웃었다. 진국이다. 모처럼 자극적인 상대를 만난 셈이지만 아직 성도 이름도 모르는 사이이며 여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200번은 그냥 확실하고 멋진 분이시니까 저만 믿고 가시자면서 데려왔을 것이었다. 조철봉이 이제는 철봉을 겨누고는 여자의 샘을 누르면서 턴했다. 그러자 여자가 숨을 들여마시는 것이 느껴졌다. 물론 턴하면서 부딪쳐온 철봉에 흠칫 놀라 몸을 떼었다가 다시 붙였는데 이것은 자연스런 동작이었다. 이런 상황이 되면 여자는 공자님 딸이라고 해도 가슴이 벌렁거리면서 호흡이 가빠지게 되는 것이다.
조철봉이 여자의 허리를 당겨 안았다. 여자의 샘이 차오르기 시작할 것이었다. 그것은 안봐도 알수 있다.
“댁도 보통이 넘는군요.”
조철봉이 여자를 구석으로 리드해 갔을 때였다. 아랫배를 붙인채 여자가 그렇게 말하더니 상반신을 조금 뒤로 젖히고는 조철봉을 보았다. 그러자 하반신이 더욱 밀착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철봉은 이미 여자의 다리 사이의 최상단에 끼워졌고 아랫배는 빈틈없이 붙여졌다. 조철봉은 여자의 적극적인 자세에 순간 압도되었지만 에너지는 상승했다.
“여기서 그냥 할 수도 있는데.”
조철봉이 불쑥 말했을 때 여자가 눈만 크게 떴다. 플로어에도 구석자리가 있는 법이다. 특히 플로어가 한쪽에 치우친 경우에는 조명의 사각지대가 있기 마련이고 기둥까지 있다면 은폐물은 충분하다. 조철봉은 여자를 사각지대의 기둥 옆으로 리드해 와 있었다. 이곳에서는 홀의 어느곳에도 보이지 않는다. 지나치는 남녀가 잠깐 훔쳐볼 뿐이다. 조철봉이 스텝을 멈추고는 여자를 당겨 안았다.
“2차를 갈 필요도 없는거지. 이 자리에서 끝낼 수가 있는 거야.”
“어머.”
놀란듯 여자가 낮게 외쳤지만 화난것 같지는 않았다. 하반신을 떼지 않는것이 그 증거였다.
“경험자 같이 말하네.”
“그래, 바로 이곳에서 해봤거든. 아주 자극적이었어.”
“말도 안돼. 어떻게 이곳에서.”
“선채로 하는거야.”
“그냥 이렇게?”
이제 여자도 끌려 들었다. 아직도 다리사이에 끼워진 철봉을 좌우로 잠깐 문질러 보이면서 여자가 웃었다.
“이렇게 비벅대기만 하는거야?”
“천만에.”
조철봉이 여자의 허리를 바짝 당기면서 이번에는 자신이 철봉을 흔들었다. 그러자 여자가 눈을 반쯤 감더니 입에서 옅게 탄성이 뱉어졌다. 이제 여자도 몰두하기 시작한 것이다. 조철봉이 여자의 상반신을 당겨 안고는 귀에다 대고 말했다.
“다음곡이 블루스로 계속되면 그걸 시작하는거야, 디스코로 바뀌면 할 수없이 테이블로 돌아가야지.”
“그런데 여기서 어떻게?”
“네가 기둥에 등을 붙이고 서.”
그러고는 조철봉이 여자를 돌려 기둥에 등을 붙여 주었다. 여자가 순순히 따르더니 뜨거운 숨결을 조철봉의 뺨에 뱉으면서 물었다.
“그러고는?”
이미 의향이 있다는 말이었다. 조철봉이 한손을 뻗어 여자의 스커트를 추켜올렸다.
“팬티를 벗어. 지금.”
“지금?”
“그래, 내가 갖고 있을게.”
그러자 무슨 뜻인지 눈치챈 여자가 꾸물대더니 한쪽 다리를 조금만 들고도 곧 팬티를 벗어 손안에 쥐었다. 한주먹도 되지 않는 부피였다. 조철봉이 여자의 손에서 팬티를 받아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그러고는 다시 여자를 기둥에 밀어붙였다. 그러자 철봉이 스커트만 걸친 여자의 샘에 닿았으며 뜨거운 숨결이 조철봉의 뺨에 더 강하게 풍겨졌다.
“다음곡이 시작되면 내가 지퍼만 내리고 철봉을 꺼낼거야.”
조철봉이 여자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그럼 넌 스커트 앞쪽만 올리고 내 철봉을 받아 넣는 것이지.”
다시 철봉을 세게 밀자 여자가 이제는 거침없이 탄성을 뱉었다.
“하지만 블루스 음악이 끝날 때까지 해야돼. 길어야 7분이야. 자신있어?”
“난 벌써 올라가 있어.”
여자가 헐떡이며 말했다.
다음곡이 블루스로 이어지기를 그들만큼 학수고대한 쌍은 없었을 것이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블루스곡이 이어졌으며 조철봉은 기둥을 침대로 삼아 행사를 치렀다. 이번 곡은 짧아서 5분도 되지않아 마무리가 되었지만 둘의 행사는 그보다도 일찍 끝났다. 호흡이 맞으면 1분 안에도 쌍방이 절정을 맛볼 수가 있다는 증명을 한 셈이었다.
여자는 자지러지면서 절정에 올랐는데 이를 악물고는 신음을 삼켰지만 몸을 굳히더니 덜덜덜 떨었고 그 순간에 샘이 위축되는 것까지 생생하게 전달되었다. 조철봉은 필사적으로 하반신을 붙이고있는 여자의 허리를 안으면서 길게 숨을 뱉었다. 이렇게 성도, 이름도, 아무것도 모르는 남녀간에 만나 10분만에 교접을 하고 헤어지면 둘다 섹스에 만족은 하더라도 쫓기는 것 같은 심사가 가라앉는 대신 허망해지는 것이다.
그들이 자리로 돌아왔을 때 갑중은 여자와 멀뚱하게 앉아 있었는데 둘의 표정이 마치 채권자와 채무자 같았다. 물론 이런 경우에는 남자가 대부분 채무자 형편이 된다. 틀림없이 플로어에 나갔다가 어긋났을 것이었다.
“왜 그러고 있어?”
하고 조철봉의 파트너가 묻자 대답은 갑중이 했다.
“아, 내가 춤이 서툴러서요.”
그리고는 갑중이 쓴웃음을 지었다.
“추다가 말고 내려왔지 뭡니까?”
머리를 든 조철봉이 갑중의 파트너를 보았다. 성형을 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콧날이 그린 것처럼 야무지게 오뚝선 데다 입술의 선도 단정했다. 전체적으로 날카로운 인상이었는데 조철봉의 시선을 받더니 눈을 가늘게 떴다. 버릇인지는 모르지만 오만한 태도였고 조철봉의 파트너에 비교하면 차가운 분위기였다. 그래서 수전산전을 다 겪은 200번이 그 여자를 갑중의 짝으로 만든 것이었다. 그때 조철봉의 파트너가 웃음띤 얼굴로 제 일행을 보았다.
“불편하면 바꾸지 그러니? 나 때문에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응, 너 돌아오기만 기다리고 있었어.”
머리를 끄덕인 여자가 흘끗 조철봉을 보았다.
“아무리 널 찾아도 없던데, 어디 있었던 거야?”
“아, 안쪽 기둥 옆에 있었기 때문에.”
조철봉이 대답하고는 지그시 갑중의 짝을 보았다. 이미 갑중은 똥 밟은 표정이 되어서 가만 있었으므로 조철봉이 말을 이었다.
“그곳이 섹스 하기에 적당한 곳이어서.”
주머니에서 여자의 팬티를 꺼내 펼쳐보인 조철봉이 정색했다.
“아주 자극이 있었지, 폭발 강도가 대단했어.”
그때였다. 갑중의 짝이 피식 웃더니 시선을 돌려 팬티 임자를 보았다.
“정말이야?”
“그래.”
처음에는 눈썹을 치켜 세웠던 조철봉의 짝이 머리를 끄덕였다.
“스릴이 있었어.”
“서서 한 거야?”
“그렇다니까, 난 기둥에 등을 붙이고.”
“사람들이 옆으로 지나갈텐데.”
“어두워서 잘 안보여. 그리고 나는 스커트 앞쪽만 올리고 있었거든.”
“흐흥.”
묘한 콧소리를 낸 갑중의 짝이 다시 조철봉을 보았다. 두눈이 번들거리고 있었는데 조금 전처럼 날카로운 분위기가 아니었다. 여자의 시선을 받은 조철봉이 시치미를 떼고 말했다.
“가 보시지, 가서 기둥에 등을 붙이고 있으면 분위기가 달라질 겁니다.”
그리고는 조철봉이 턱으로 갑중을 가리켰다. 진지한 표정이었다.
“이놈이 춤은 서툴지만 그 일 하나는 딱부러지게 해치우는 놈이지요. 따라 나가시면 절대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흐흥.”
다시 콧바람을 내며 웃은 여자가 눈을 좁혀뜨고 조철봉을 보았다.
“아저씨가 세실 것 같은데.”
그리고는 제 일행에게로 머리를 돌리더니 물었다.
“그렇지?”
“그래.”
조철봉의 짝이 거침없이 머리를 끄덕이며 웃었다.
“난 아직도 몸이 나른해.”
“가십시다.”
그때 갑중이 참지 못하겠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곧 블루스 음악이 나올 겁니다.”
“어디.”
하면서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섰는데 홀안의 조명이 어두웠지만 흥분된 기색이 여실히 드러났다. 그들이 플로어로 사라졌을 때 조철봉이 옆에 앉은 여자에게로 머리를 돌렸다.
“개성 공단에 유흥구 공사가 진행 중이라는 건 알고 계시지요?”
“그럼요.”
여자가 금방 머리를 끄덕였다.
“아주 작심을 하고 향락도시로 만들 것 같은데 한국 남자들은 살판 나겠어.”
“여자들도 좋지 않을까요? 수준높은 카바레나 카페 같은 곳이 많이 생기면 밀회 장소로 그만 아니오?”
“다 그 나물에 그 밥이지.”
시큰둥한 표정으로 여자가 말을 이었다.
“개성 유흥구로 놀러가는 연놈들은 뻔하다고요. 나도 카바레 돌아다니면 같은 연놈들을 자주 보게 되는 걸 뭐.”
“수요가 많지 않다는 말씀인가?”
“이런 식의 카바레를 개성 유흥구에 세워봐야 별 볼일 없을 것이란 말이죠.”
여자가 홀 안을 둘러보며 말했다.
“아무리 한시간 거리이고 북한땅이어서 분위기도 달라진다지만 거기까지 눌러 가기에는 부담이야. 특별한 이벤트가 없는 한 말이죠.”
“특별한 이벤트라.”
“한국 것을 그대로 옮겨가면 별 재미가 없을 것 같단 말예요.”
조철봉은 정색하고 머리를 끄덕였다. 일리가 있는 말이었던 것이다. 여자는 물론 조철봉이 누구인지 모른다. 조철봉이 매스컴의 인터뷰 요청을 거의 피해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얼굴도 알려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군, 그럼 어떤 이벤트가 나을 것 같소? 유흥구에 말이오.”
“내가 어떻게 알아요?”
했다가 여자는 생각 났다는 듯이 눈을 크게 떴다.
“아, 북한 남자들을 만나면 재미있겠다. 거기서 잠깐 놀고 오면 뒤탈도 없겠고.”
“흐음.”
“북한 여자애들은 6천명이나 한국에 와서 룸살롱 실습을 받는다던데 왜 남자들은 움직이지 않는 거지?”
“그럼 호빠 같은 곳에 말이오?”
“에이, 그런 건 싫어.”
이맛살을 찌푸린 여자가 머리를 저었다.
“유흥구에서 북한산 남자를 만나는 재미가 있다면 아마 한국 여자들이 몰려 갈 거야. 우선 나부터도.”
그리고는 여자가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세상 많이 달라졌어. 그죠?”
“그렇군.”
조철봉은 정색하고 머리를 끄덕였다. 유흥구 사업을 맡은 이상 어떻게든 번성하게 해야 된다. 흑자를 내야 하는 것이다.
“그럼 놀새 놈들을 유흥구로 끌어오란 말인가?”
김기복이 당치도 않는 말이라는 듯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보자보자 하니까 너무 하는군 그래. 그건 불가능한 계획이오.”
“글쎄, 김비서 동지, 우리 시간 여유를 갖고 토론해보십시다.”
그렇게 말한 사내는 김성산이다. 조철봉은 김성산에게 유흥구의 북한남자 투입건을 상의해왔지만 아직 공식 절차는 밟지 않았다. 유흥구 건설사무소의 회의실 안이었다. 김성산과 김기복 모두 50대 후반으로 갖은 격변을 다 겪었지만 유흥구 건설사업에는 경험도 없는데다 순발력도 모자랐다. 조철봉의 난데없는 제의에 번번이 놀라고 당황하면서도 무시하지는 못했다. 지도자 동지가 직접 관찰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성산이 말을 이었다.
“조사장의 의견에도 일리가 있어요. 한국 여자들한테 새로운 것을 보여줘야 해.”
“하지만 놀새놈들을 어디서 끌어옵니까? 그랬다간….”
유흥구가 개판이 될 것이었다. 그리고 한국 여자들을 상대할만큼 놀새놈들 규모가 많은 것도 아니다. 그때 성산이 은근한 시선으로 기복을 보았다.
“김동지, 놀새도 양성하면 되지 않겠소? 보위부나 무력부의 잘생긴 군관들이나 주체사상이 투철한 학생, 직장인 동무들을 선발해서 말이오.”
기복은 눈만 껌벅였고 성산의 말이 이어졌다.
“적응해야 됩니다. 무조건 구역질이 난다면서 거부반응을 보인다면 유흥구를 세우신 지도자 동지의 뜻에 어긋나는 행동이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자 질색을 한 기복의 얼굴이 하얗게 굳어졌다.
“김동지, 나는 그런 뜻으로 말한 것이 아니었소. 오해하고 계시오.”
“압니다.”
머리를 끄덕인 성산이 정색하고 기복을 보았다.
“조사장의 정식 제의를 받으면 우리도 그런 방법으로 남자들을 선발하여 교육하도록 하십시다. 아마 지도자 동지께서도 승낙하실 겁니다.”
“알겠습니다.”
기복이 동의했고 이로써 남자들의 공급계획은 수립되었다. 바람난 한국 유부녀들은 이제 풍부한 북한산 자원을 공급받게 될 것이었다. 조철봉이 압구정동의 룸살롱 아정에 들른 것은 그로부터 며칠후였다. 아정은 철저하게 예약 손님만 받는 특급 룸살롱으로 두당 50만원이 기본계산이었고 만일 고급 양주를 시킨다면 그것은 별도로 추가가 된다. 조철봉은 오늘도 갑중과 동행이었는데 그냥 놀러온 것은 아니다. 아정에도 실습생이 20명이나 파견되어 있었으므로 현장 확인 겸 상황 체크를 하러 간 것이다. 지배인의 안내로 방에 자리잡고 앉았을때 방안을 둘러본 갑중이 감탄한 표정으로 말했다.
“과연 한국 룸살롱은 품위가 있습니다. 타국에서 아무리 흉내를 내도 이런 분위기는 만들지 못하지요.”
그건 그렇다. 특급 룸살롱은 시설만 좋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아가씨는 필수조건 중의 하나일 뿐이고 종업원들의 매너, 복장, 복도에 깃든 향내까지 영향을 미친다. 조철봉은 잠자코 머리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아정의 분위기와 종업원들의 매너는 최고급이었다. 손님을 방으로 안내하고 나서 바로 마담이 들어와 인사하고 주문을 받는 매너도 자연스러웠다. 손님들을 편안하게 모시려는 노력이 티가 나지 않는 것이다. 세련되었다.
잠시후에 방문이 열리더니 먼저 쟁반을 든 종업원들이 들어섰고 술병과 안주를 내려놓고 나갔다. 그러고는 곧 마담의 안내로 아가씨 둘이 들어섰다. 북한산 아가씨들이다.
“어머나.”
아가씨중 하나가 얼굴을 환하게 펴더니 반색을 하고 조철봉을 보았다. 조철봉을 알아본 것이다. 다른 아가씨의 반응은 더 강도가 높았다. 눈물이 글썽해진 눈으로 조철봉을 응시한채 몸을 굳히고만 있는 것이다. 예약을 할 때 신분을 밝힌터라 마담은 그냥 웃기만 했다. 아가씨들이 자리잡고 앉았을 때 30대의 마담은 소리없이 나갔다.
분위기를 부드럽게하고 자시고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갑중은 우선 당장 아가씨들의 미모에 혹해서 딴 생각이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옆에 앉은 아가씨의 옆 모습을 홀린 듯이 바라보면서 이쪽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조철봉의 옆에 앉은 아가씨가 먼저 입을 열었다. 반색을 했던 아가씨였다.
“저, 임옥영이라고 합니다. 선생님.”
“뭐, 불편한 점 없어?”
“없습니다. 모두 잘해 주셔서요.”
“옷이 세련되었구나.”
조철봉의 시선을 받은 옥영이 단정하게 붙여진 무릎을 더 붙였다. 옥영은 분홍색 투피스 차림이었는데 잘 어울렸다.
가게에서 유명한 의상실 제품으로 구입해 주었을 것이었다.
“지금까지 일주일이 되었지?”
조철봉이 묻자 옥영이 머리를 끄덕였다.
“네, 선생님.”
“그동안 얼마나 벌었어?”
그러자 옥영의 볼과 귀가 순식간에 빨개졌다. 조철봉의 시선을 받은 옥영이 마지못한듯 대답했다.
“1백만원이 조금 넘었습니다. 1백5만원.”
“흥, 그래?”
“1백20만원이 되었는데 15만원은 구두하고 화장품 사는데 썼습니다.”
“잘했군.”
“손님들이 아주 잘해 주십니다.”
“물론 이차는 나간 적 없지?”
“네, 선생님.”
옥영이 다시 붉어진 얼굴로 조철봉을 보았다.
“선생님 말씀을 명심하고 있습니다.”
“잘했어.”
“이차 나가자는 손님이 두명 있었습니다. 그래서 개성 유흥구로 오시면 나가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야 돼.”
얼굴을 펴고 웃은 조철봉이 옥영을 보았다. 달덩이처럼 환한 얼굴이 바로 옥영의 얼굴을 두고 말하는 것이 될 것이었다. 박꽃같은 얼굴이라고 표현해도 어울렸다. 희고 둥근 얼굴형에 눈매는 서늘했고 콧날을 도톰했으며 크지도 작지도 않은 입술은 마치 앵두처럼 윤기가 흘렀다. 시대에 따라 미인형이 달라지고 있어서 지금은 마르고 갸름하며 길고 째진데다 높고 큰 모습을 제일로 친다. 조철봉의 시선을 받은 옥영이 수줍게 웃었다.
“하지만요, 선생님이 이차 가자고 하시면 나갈래요.”
“이런.”
입맛을 다신 조철봉이 정색하고 옥영을 보았다. 그순간 조철봉은 이마에 부딪치는 강한 시선을 느꼈지만 모른척 했다. 갑중의 애간장이 타는 시선이었다. 조철봉의 대답 여하에 따라서 그도 오늘밤에 행사를 결정할 것이었다.
“안돼.”
조철봉이 머리까지 저으며 말했다.
“나도 개성 유흥구가 영업을 시작할때까지 참을거야. 그때 다시 만나자구.”
방으로 들어선 홍경수는 테이블 중앙에 앉은 박기홍에게 먼저 절을 했다. 박기홍은 국정원장이다.
“어, 거기 앉아.”
박기홍이 정색하고 턱으로 앞쪽을 가리키더니 곧 둘러앉은 사내들을 소개했다. 통일부 차관에 외교부 차관, 기무사 참모장에 청와대의 안보보좌역까지 모여 있었는데 모두 홍경수와는 안면이 있었지만 점잖게 인사를 나누었다. 경수는 국정원의 대북관계 실무 책임자인 대공처장이다.
그러나 이렇게 함께 모여 앉기는 처음이다. 박기홍이 이번 개성공단 유흥구에 대한 대처방안을 협의하려고 특별히 소집한 회의였기 때문이다. 대충 인사말을 한 뒤 박기홍이 곧 본론을 꺼냈다. 박기홍은 허례허식을 싫어하는 성품이었다.
“지금까지 홍 처장이 조철봉을 관리해왔습니다. 그럼 홍 처장의 설명을 들읍시다.”
모두의 시선이 모아졌고 경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북한은 며칠전부터 남자들을 선발해서 특별교육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한국 여자들을 상대하게 하려는 계획인데….”
입맛을 다신 경수가 기홍만을 제외하고 다른 사람들의 얼굴을 둘러보았다. 이미 기홍에게는 보고했기 때문이다. 나머지 고위 공무원들은 모두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다. 경수가 말을 이었다.
“체격 좋고 잘생긴 놈들을 선발해서 댄스와 정신교육을 집중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다 그 뭣이냐, 섹스 테크닉도 가르칩니다.”
경수는 사내들의 시선을 받지 않으려고 테이블 위의 꽃병만 보았다. 꽃병의 장미는 시들어 있었다. 경수의 말이 이어졌다.
“한국 유부녀들을 공략하려는 것입니다. 이것은 조철봉으로부터 직접 들은 정보라는 것을 참조해주십시오.”
“허어, 참.”
먼저 외교부 차관 허웅민이 혀를 찼다. 허웅민이 찌푸린 얼굴로 경수를 보았다.
“그러다가 한국 유부녀들이 온전하게 남을 수 있겠습니까? 무슨 조처를 취해야 되지 않을까요?”
“아니.”
조금 차가운 표정을 짓고 있던 통일부 차관 고용성이 그의 말을 잘랐다.
“유흥구로 들어가는 여자들은 이미 바람이 난 여자들입니다. 온전한 여자들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차라리 그곳에서 북한 남자들하고 붙어….”
했다가 잠깐 숨을 멈추더니 말을 이었다.
“그곳에서 연애하는 것이 소문도 나지 않고 나을 것입니다.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는 그것이 더 바람직할지도 모릅니다.”
“그렇군.”
청와대 안보보좌역 이문수가 머리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 말씀도 일리가 있습니다. 어쨌든 지금 한국에서 교육을 받고 있는 6천명의 북한 아가씨들도 결국 한국 남자들의 상대가 될테니까요.”
그렇지만 북한은 남녀 모두가 교육을 받아 단련된 조건이라는 것이 모두의 가슴에 걸리는 것이다. 잠시 회의실에 정적이 깔린 것도 그 때문이다. 이윽고 박기홍이 정적을 깨뜨렸다.
“그래서 말씀인데….”
박기홍이 쓴웃음을 지은 얼굴로 모두를 돌아보았다.
“북한 당국은 어쨌든 지금 모험을 하고 있는 겁니다. 벌써 여자들 6천명에다 근무요원, 남자 교육생까지 포함해서 유흥구의 1만명 가까운 남녀가 자본주의 사회의 물이 들고 있단 말입니다. 이건 북한측으로서는 대모험이오.”
조철봉이 다시 유흥구에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사흘 후였는데 동행이 있었다. 바로 용궁 가바레의 고참 웨이터 200번이다. 양복 차림으로 한낮에 모습을 보인 200번 박영수는 50대 후반의 점잖은 신사였다.
유흥구는 초행 길이어서 눈동자가 조금 불안하게 흔들렸지만 30년이 넘도록 왕궁 카바레에 근무하면서 온갖 곡절을 겪은 관록이 온몸으로 풍겨나왔다. 조철봉은 그에게 카바레 공사고문(工事顧問)이란 직책을 주었던 것이다. 유흥구에 건설될 1차분 10개 카바레의 외관에서부터 내부장식, 종업원 선발과 교육, 운영에 대한 전반적인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자리였으므로 박영수는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는 여생을 남북간의 평화적 교류와 경제 협력의 일환인 유흥구 카바레 운영에 바치기로 결심한 것이다. 조철봉이 공사 현장을 둘러보고 사무실로 돌아왔을 때는 오후 6시가 되어갈 무렵이었다. 이미 일부분의 공사는 끝난 상태였고 호텔 카지노는 지난주부터 영업을 시작했는데 첫날부터 흑자를 기록했다.
남북한 당국은 여론을 의식해서 대대적인 유흥구 개업 행사는 삼간 대신 실속있는 광고 선전에 치중하는 방법을 택했다. 이미 유흥구의 입출국 절차는 협상한 대로 무관세, 무검문 통과가 되어있는 상태인 것이다. 사무실에는 경제담당 비서 김기복이 기다리고 있었으므로 조철봉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김기복은 김정일 위원장의 대리인이나 마찬가지인 인물인 것이다.
“갑자기 웬일이십니까?”
조철봉이 묻자 김기복은 먼저 빙긋 웃었다.
“격려차 온 것입니다. 조사장님도 뵐겸해서 말이지요.”
기복은 조철봉을 조사장이라고 불렀다가 어떤 때는 위원장이라고도 했다. 유흥구 건설위원장 직책은 북한 정부의 고위급 서열이긴 했지만 정식 관료는 아니다. 사무실의 소파에서 서로 마주보고 앉았을 때 기복이 부드러운 시선으로 조철봉을 보았다.
“조사장님, 이제 유흥구가 가동되기 시작했으니 더 바빠지시겠습니다.”
“아니, 저야 뭐.”
조철봉이 다시 기복의 눈치를 보았다.
기복은 그냥 격려차로 들를 인물이 아니다. 목적이 있을 것이다. 그때 기복이 입을 열었다.
“그래서 말씀인데, 조사장님이 유흥구 관리를 맡아주셨으면 하는데요. 이것은 물론 지도자 동지의 말씀입니다.”
긴장한 조철봉이 시선을 들었다.
“아니, 유흥구 관리는 개성공단 단장이 맡아야 되지 않습니까? 유흥구가 개성공단에 소속되어 있으니까 말입니다.”
“유흥구는 개성공단에서 분리시킬 예정입니다.”
정색한 기복이 말을 이었다.
“따라서 유흥구를 관리할 능력있는 분이 필요한 것입니다.”
“저는 능력이 부족합니다.”
조철봉이 머리와 손까지 저었다.
“제가 이 거대한 유흥구 사업을 관리할 자격이 없습니다.”
“천만에요.”
이번에는 기복이 손을 저어 조철봉의 말을 부정했다.
“유흥구를 설치한 것도 조사장의 제안을 지도자 동지가 받아들이신 것입니다. 유흥구를 책임지고 관리할 인물은 조사장뿐입니다.”
기복이 더이상의 사양은 듣기 싫다는 듯이 서둘러 말을 이었다.
“이것은 지도자 동지의 뜻이기도 합니다. 조사장이 받아들이셔야 합니다.”
조철봉에게 주어진 새 직책은 유흥구 총지배인이었다. 유흥구의 모든 업무를 총괄하고 권한과 책임을 함께 보유한 직책이었다. 그것은 유흥구 건설위원장에서 한계단 북한 정부 내부로 진입한 것을 의미했고 직급 상으로는 서너계단 상승한 것이 되었다. 조철봉 자신은 아직 감도 잡지 못하고 있었는데 한국의 정보기관에서 재빠르게 서열을 계산한 것이다. 그래서 한국 언론에 발표된 조철봉의 북한내 권력서열은 14위가 되었다. 이것은 한국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는데 조철봉이 여전히 한국인 신분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얼마전에 신의주 특구의 장관으로 임명되었던 중국계 인사가 며칠도 되지 않아 사기죄로 중국 당국에 체포되어 양국 관계가 불편해진 적이 있다. 그러나 지금은 한국측에서 조철봉에게 우호적인 분위기인 것이 다르다.
총지배인 조철봉은 유흥구의 행정수반으로 휘하에 비서실과 행정실, 2개실을 관리했다. 비서실은 당의 지시를 감사·평가하는 조직이며 행정실은 실무기관이다. 비서실장은 강중석 비서관이 임명되었으며 행정실장은 보위부 출신의 이경국 중장이 새롭게 전입되었다. 행정실에는 유흥구의 치안조직인 치안대가 구성되었는데 보위부 소속이었고 이경국이 치안대장도 겸임했다. 이경국이 총지배인실로 들어선 것은 임명된 지 사흘 후였으니 조철봉과는 서너번밖에 만나지 못했다. 40대 후반의 이경국은 장신에 군복과 어깨의 계급장이 잘 어울리는 잘생긴 용모의 사내였다. 그는 직속 상관인 조철봉에게 깍듯한 자세로 머리를 숙여 인사를 했지만 태도는 당당했다. 조철봉이 권한 자리에 앉은 이경국이 시선을 들고 물었다.
“총지배인 동지, 무슨 일로 찾으셨습니까?”
조철봉이 호출한 것이다. 이경국의 시선을 받은 조철봉이 정색했다.
“치안대에 대해서 상의 드릴 일이 있어서 오시라고 한 겁니다.”
긴장한 이경국이 눈만 치켜떴다. 유흥구 안에는 1개 여단 규모인 약 5천명의 보위부원이 근무하고 있는 것이다. 조철봉이 말을 이었다.
“5천명의 보위부원이 모두 총기를 휴대하고 유흥구 곳곳을 배회하거나 경비를 서고 있는 것이 살벌하게 보인다는 여론이 있습니다. 한국의 인터넷 여론조사에서 나온 내용입니다.”
이경국이 얼굴을 굳혔으나 아직 입을 열지는 않았다. 조철봉이 부드럽게 말했다.
“그래서 내 제안인데, 보위부원을 모두 사복 차림으로 하고 무기는 보이지 않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것은.”
마침내 이경국이 입을 열었다.
“상부에 보고한 후에 말씀을 드리지요.”
“공공기관 경비원 제복이나 사복은 유흥구에서 준비해 드릴 수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어깨를 늘어뜨렸던 이경국이 조철봉을 보았다. 잘생긴 얼굴에 희미한 웃음기가 떠올라 있다.
“나는 외부인보다 내부 관리가 더 큰 일입니다. 총지배인 동지.”
“내부 관리라니요?”
“보위부대원이나 파견 근무요원들 말입니다.”
다시 정색한 이경국이 말을 이었다.
“갑자기 자본주의 사회의 물질 공세에 휩쓸리면 타락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
“내가 러시아에 있어봐서 잘 알지요.”
“그렇습니까?”
겨우 조철봉이 말을 받았을 때 이경국의 목소리가 굳어졌다.
“틀림없이 물질의 유혹에 빠져 부패하고 타락하는 놈들이 나옵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치안대원 제복을 벗기고 사복을 입히라는 것입니다.”
이경국이 낮게 말했지만 눈빛이 또렷했다. 그는 달리는 차안에서 비서실장 강중석과 나란히 앉아있었다. 조철봉과 헤어져 마침 개성공단에 가는 중인 강중석에게 연락하여 동승하게 된 것이다.
“유흥구에 인민군복 차림의 인민군이 없어지면 그때는 깃발만으로 유흥구가 우리 공화국 영토인 것을 알 수 있겠습니다.”
비아냥거리듯 이경국이 말했을 때 강중석이 천천히 머리를 저었다.
“아니, 군복을 벗기고 사복차림으로 하자는 총지배인의 의견이 맞소, 그것은 당연한 조치요.”
강중석이 정색하고 말을 이었다.
“오히려 사복 차림으로 위장하고 있는 것이 불순분자를 적발해내기가 쉬울 것이오.”
“하지만 타락하기도 쉬울 것입니다.”
“그것에는 철저하게 대비하고 있어야 할거요.”
“총지배인부터 뇌물 먹이는 선수 아닙니까?”
불쑥 이경국이 묻자 강중석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들은 조철봉이 김영조에게 뇌물을 먹였다가 김영조의 고발로 발각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이다. 강중석이 혼잣소리처럼 말했다.
“각오하고 있었던 일이오. 모두 정신무장을 단단히 하고 있어야 돼요.”
모험이다. 그러나 모험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리고 철저하게 준비된 자세라면 그 모험은 좋은 결과를 맺을 것이다. 준비된 자세와 용기가 곧 희망찬 미래의 조건이다.
모험없이 진보는 없다. 그 시간에 조철봉은 최갑중과 나란히 이번에 준공된 호텔 베란다에 서서 아래쪽 산야를 내려다보는 중이었다.
“유흥구 인기가 좋습니다.”
갑중이 말하고는 힐끗 조철봉의 눈치를 보았다.
“형님 인기도 올라갔고요. 아마 국회의원에 출마하시면 당선은 틀림없습니다.”
“유흥구가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면 그만 둘거다.”
입맛을 다신 조철봉이 눈을 가늘게 뜨고 앞쪽을 보았다. 앞쪽은 남쪽이다. 한국 방향이다.
“도무지 신명이 나지 않아. 남북화해니 경제부흥 따위의 말은 나한테 어울리지 않고 감동도 주지 않는단 말이야.”
“당연한 말씀입니다.”
했다가 다시 조철봉의 눈치를 살핀 갑중이 말을 이었다.
“갑자기 형님이 애국자나 민족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셨다면 자던 소도 깨어나 웃을 테니까요.”
“이런 망할 자식이.”
“형님이 그렇게 털어놓으셔서 저도 까놓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러고는 갑중이 주위를 둘러보더니 목소리를 낮췄다.
“형님께서 눈만 한번 감아주시면 수백억이 들어올 수가 있습니다. 알고 계시지요?”
조철봉이 눈만 치켜떴고 갑중의 말이 이어졌다.
“유흥구 내의 유흥업소 분양이 이달말에 시작되면 한국의 부동산업자들은 다 몰려올 것입니다. 그때는 아마 가게 하나의 프리미엄이 3억은 되겠지요.”
앞만 보는 조철봉의 옆모습을 향해 갑중이 낮게 말했다.
“분양 예정 가게가 350개인데 공사가 끝나면 그때는 프리미엄이 10억은 된다는 소문입니다. 이건 가게 하나만 분양받으면 대박을 터뜨리게 되지요.”
갑중이 은밀하게 할 이야기가 있다는 것은 바로 이것인 모양이었다. 그래서 베란다로 조철봉을 끌고나온 것이다.
조철봉이 머리를 돌려 갑중을 보았다. 굳어진 표정이었다.
“닥쳐, 이자식아.”
조철봉이 낮으나 억센 발음으로 말했다.
“내가 애국자라면 개도 웃겠지만 이런 일로 사기는 안친다.”
눈을 부릅뜬 조철봉이 갑중에게 바짝 다가섰다.
“너도 정신차려, 유흥구 사업에서 돈을 벌 생각은 말란 말이다. 평양 공단에서 만들어도 충분해.”
“형님 생각이 그러시다면 알겠습니다.”
갑중이 정색하고 대답하더니 생각난듯 말했다.
“하지만 서울에서 온 손님 한분은 만나 보시지요. 지금 기다리고 있습니다.”
조철봉의 시선을 받은 갑중이 서둘러 말을 이었다.
“부동산업자인데 들어보시고 결정 하시지요. 국제 은행장의 추천서를 지참하고 있어서 만나기는 해야될 것 같습니다.”
그날 저녁무렵에 조철봉은 바닷가에 준공된 호텔 현관으로 들어섰다. 벌써 호텔 주차장에는 한국에서 달려온 손님들의 고급 승용차가 가득차 있었는데 카지노 손님들이 대부분이었다. 조철봉이 스카이라운지로 들어섰 을때 이미 먼저 와 기다리던 갑중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갑중의 일행 하나도 따라 일어서서 조철봉을 맞았다. 갑중이 말했던 서울에서 국제은행장의 추천서를 가져온 인사였다. 다가선 조철봉은 긴장했다. 그 인사는 여자였을 뿐만 아니라 젊고 미모였기 때문이다.
“총지배인님, 오셨습니까?”
갑중이 정중하게 조철봉을 향해 절을 했다.
“인사하시지요. 총지배인님 이십니다.”
“예, 저는 KT엔터테인먼트의 이숙현입니다.”
여자가 조금 굳어진 표정으로 인사를 하더니 명함을 내밀었다. 명함에는 대표이사 회장이라고 박혀 있었다. 자리를 잡고 앉았을 때 갑중의 지나가는 대화가 몇마디 있었지만 조철봉은 잠자코 이숙현을 보았다. 갑중의 설명으로는 숙현은 서울에 부동산만 수조원대를 보유한 재력가며 KT엔터테인먼트란 회사는 부동산 투자만 전문으로 한다는 것이었다. 조철봉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이윽고 숙현이 입을 열었다.
“유흥구 행정실의 부동산과에서 업소를 분양할 계획이라고 들었는데요. 그것은 비현실적이고 비경제적입니다. 총지배인님.”
또렷하게 말한 숙현이 조철봉을 정색하고 보았다. 유흥구에서 이미 발표한 분양 정책을 정면으로 비판한 것이다. 갑중은 놀라 눈만 껌벅였고 조철봉도 멍한 표정이 되었다. 그러나 숙현의 말이 이어졌다.
“이런 대규모 분양은 분양전문업체에 용역을 주어서 자유경쟁을 시켜야 몇배의 이익도 창출되고 분양 당사자들도 만족시킬 것입니다. 유흥구의 분양정책은 재고해야 됩니다.”
맞는 말이다. 행정실의 부동산과는 5명의 북한측 인력이 근무하고 있을뿐으로 그들은 부동산 분양에 대한 경험이 전무했다. 오직 시킨 일만 하는 것이 고작인 것이다. 조철봉의 눈치를 살핀 숙현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만일 분양 업무를 제 회사에 맡겨 주시면 지금까지 유흥구에 투자된 건설 자금을 모두 뽑아 드릴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투자자들도 모두 만족시켜 드릴 수가 있지요. 일거양득 아니겠습니까?”
“일거삼득이겠지.”
조철봉이 혼잣소리처럼 말하고는 빙긋 웃었다.
“댁 회사도 막대한 이익을 챙기시게 될테니까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리고 또 있다. 조철봉이나 숙현도 모두 알고 있는 일이지만 조철봉의 몫이다. 그러면 일거사득이 된다. 조철봉은 숙현이 보내오는 의미심장한 시선을 받고는 심호흡을 했다. 이런 유혹은 언제나 달콤한 것이다. 실제로 받고 챙기는 그 순간보다도 사기꾼 대부분은 작업 직전의 이 분위기에서 더 스릴과 쾌감을 느끼게 된다.
숙현이 아무말도 하지 않는것은 당연하다는 뜻도 되었다. 이득을 챙기는것은 당연한 일인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뛰어난자가 성공한다. 그것은 수단이 좋은자가 돈을 번다는 말과 상통한다. 그리고 그 수단의 정당성평가는 다른 문제가 된다. 다시 조철봉이 말을 이었다.
“다 좋은것이 다 나쁘게되는 경우도 보았어요. 아직 시간이 있으니까 검토해봅시다.”
“검토 해주시겠습니까?”
숙현이 말끝을 잡고 매달렸다. 어떻게 회장이 되었는지 알수없지만 녹록한 성품은 아닐 것이었다. 아직 30대의 나이에 수조원의 재력가인데다 국제은행장의 추천서까지 지참할 정도이면 로비력도 뛰어났다. 유흥구에서 한국측의 영향력이 있는 인사를 꼽으라면 정치인이나 관료보다 은행가가 앞순위가 되었기 때문이다. 숙현이 눈을 반짝이며 조철봉을 보았다.
“그럼 제가 오늘 저녁에 모셔도 되겠습니까? 이렇게 만나뵌 기념으로 말이지요.”
그러고는 얼굴을 펴고 웃었다.
“물론 유흥구의 매상을 올려주는 의미도 있겠지요.”
“어차피 저녁식사는 해야 될테니까.”
조철봉이 머리를 끄덕이자 헛기침을 한 갑중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저는 다른 약속이 있어서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아니, 최사장님도 같이.”
하면서 숙현이 만류하는 시늉을 했지만 갑중은 들은척도 하지않고 둘을 향해 머리를 숙여 보이더니 몸을 돌렸다.
“서운해서 어떡해요?”
갑중의 등뒤에 대고 숙현이 말하더니 덧붙였다.
“제가 연락 드릴게요.”
그동안 조철봉은 의자에 등을 기댄채 숙현의 옆모습을 보았다. 빼어난 미인이라고는 할수 없었지만 균형잡힌 몸에 윤곽이 뚜렷한 용모여서 시선을 끌기에 충분한 여건은 갖췄다. 그러나 숙현에게서 풍기는 매력은 분위기였다. 은근하면서도 마치 후광이 비치는 것처럼 보이는것은 젊은 나이에 수조원의 재력가가 되었다는 이유도 있을 것이었다.
바쁜 세상이어서 선입견은 인상에 큰 영향을 미친다. 겪지 않으면 그것으로만 끝나는 관계도 많은 것이다. 조철봉의 시선을 느낀 숙현이 머리를 돌리더니 빙긋 웃었다. 자연스런 웃음이었다.
“약속이 있다고 하지 않으셨는데.”
“우리 둘만 남겨 놓으려고 그런겁니다.”
조철봉이 정색하고 말을 이었다.
“저놈은 물러날때를 아는 놈이지.”
“그런가요?”
풀석 웃은 숙현이 다시 오만가지 사연이 담긴듯한 눈으로 조철봉을 보았다.
“뵙게 되어서 정말 반가워요. 총지배인님.”
숙현의 시선을 받은 조철봉은 이미 자신의 내력이 샅샅이 밝혀져 있다는것을 짐작할수 있었다. 다 조사했을 것이었다. 구질구질했던 사기 행각도 들춰졌을지 모른다. 따라서 그 수준에 맞도록 대처 방안도 준비해 왔을 것이었다. 조철봉은 빙그레 웃었다. 갑자기 전의가 끓어오른 것이다. 달리 표현하면 색욕(色慾)이라고 해도 될것이다. 숙현은 아마 그 준비까지 갖춰놓고 있을지도 모른다.
호텔 일식당으로 내려와 방에서 둘이 마주보고 앉았을 때 조철봉의 색욕은 고조되었다. 지금까지의 경험에 의하면 같은 공간 안에서 특정한 상대를 향해 일어난 색욕은 분명하게 전파가 되었다고 믿는 조철봉이다. 생선회에다 한국에서 공급된 소주를 곁들여 저녁을 먹으면서 조철봉은 숙현의 반응을 관찰했다.
“전 이혼녀예요.”
숙현이 묻지도 않았는데 털어놓았다.
“이혼한지 5년 되었지요, 결혼생활도 5년 되었구요.”
그렇다면 30대 후반으로 조철봉과 비슷한 연배가 된다. 소주를 거침없이 삼킨 숙현은 눈 주위만 달아 올랐을 뿐 목소리에 더 활기가 띠어졌다.
“전남편한테서 빌딩 3채를 위자료로 물려받아 그것이 사업 기반이 된 셈이죠. 결국 부동산만큼 쉽게 승부가 나는 장사가 없더라구요.”
“그렇습니까?”
조철봉이 지그시 숙현의 모양좋은 귓불을 보면서 물었다. 뜨거운 입김과 함께 혀가 밀어넣어지면 숙현은 자지라질 것이었다. 조철봉의 시선을 의식한 숙현이 손으로 귀를 슬그머니 쓸어내렸다.
“한국 부동산은 이제 거품이 꺼질 때가 되었다고 하던데, 어떻습니까?”
“그래요, 그런데 천운이 닿았는지 개성공단 유흥구로 숨통이 트인 것이죠.”
대뜸 대답한 숙현이 얼굴을 펴고 웃었다.
“유흥구가 개방되면 곧 개성공단 부지로 분위기가 옮아갈 것이 틀림없죠, 그러면 수천만 평의 부동산이 시장에 나오게 되거든요.”
“그런가?”
“총지배인님도 예상하고 계시면서 왜 그러세요?”
숙현이 눈을 흘기는 순간에 교태가 번쩍였다. 색욕을 전달받은 숙현의 반응이다. 그것은 화답이나 같다.
조철봉은 소주잔을 들어 한모금을 삼켰다. 지금까지 부동산 관계는 신경쓰지 않았다. 엄청난 이권이 걸려있는 사업인 줄은 물론 알고 있었지만 평양과 행정실 실무자에게 맡겨놓고 전혀 상관하지 않았던 것이다.
“만일에 말인데.”
술잔을 내려놓은 조철봉이 정색하고 숙현을 보았다.
“만일에 KT엔터테인먼트에서 부동산 분양용역을 맡게 된다면 어떤 이득이 있겠소?”
“그것은.”
숙현이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상체를 반듯이 세운 숙현의 두눈이 반짝이고 있었다.
“아까 말씀드린대로 유흥구의 건설비용은 충분히 만들어 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여세를 몰아 개성공단 부지까지 영역을 넓힌다면 수십조원의 자금 조성이 가능합니다. 한국에서 떠돌고 있는 부동산 자금이 대거 몰려올 테니까요.”
“흐응.”
“제가 총지배인님께 한 장을 드리지요.”
숙현이 둘째 손가락 하나를 곧추세워 보이더니 목소리를 낮췄다.
“계약 성사와 동시에 지급해 드립니다.”
“흐응.”
다시 코웃음을 친 조철봉이 웃음띤 얼굴로 숙현을 보았다.
“10억이요?”
“아닙니다.”
숙현이 정색하고 머리를 저었으므로 조철봉도 차츰 긴장되었다.
“그럼, 100억?”
“아니, 1000억입니다.”
그순간 숨을 들이켠 조철봉이 숙현을 보았다. 숙현의 검은 눈동자가 깜박이지도 않고 이쪽으로 향해져 있었다. 거금이다. 뇌물치고는 크다, 그러나 그보다도 이 여자의 통이 큰 것에 조철봉은 놀란 것이다.
조철봉은 헛기침을 했다. 이숙현은 작정을 하고 이곳에 온 것이다. 그렇다고 피할 생각은 없다. 정색한 조철봉이 숙현에게 말했다.
“어디 조용한 곳에 가서 이야기를 계속 할까요?”
“좋아요.”
거침없이 대답한 숙현이 얼굴을 펴고 웃었다. 기대하고 있었다는 표정이었다. 조철봉이 일식당의 계산을 치르고 호텔방 키를 받아 방으로 들어설 때까지 숙현은 마치 5년쯤 산 부부처럼 자연스럽게 따라왔다. 방으로 들어선 조철봉이 저고리를 벗어 소파에 던졌다.
“저, 씻고 올게요.”
역시 조철봉과 비슷한 태도로 블라우스를 벗어던진 숙현이 말하더니 욕실로 들어갔다. 욕실문이 닫혔을 때 조철봉은 지친 표정으로 소파에 앉았다. 숙현과 용역계약을 할 의사는 털끝만큼도 없다.
그러나 숙현이 매력이 있는 것만은 확실했다. 당당하다.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숨기지 않는다. 조철봉은 숙현과의 섹스에 대한 기대감으로 부풀어 올랐다. 숙현이 욕실에서 나왔을 때는 10분쯤 후였는데 딱 적당한 시간이었다. 간혹, 욕실에서 질질 시간을 끌었다가 분위기를 잡치는 여자가 있는 반면에 가방까지 들고 들어가 전화질을 해대는 꽃뱀류까지 다양한 여자를 겪었지만 조철봉은 욕실에서 딱 10분쯤 후에 나오는 여자를 좋아했다.
이곳 욕실에는 기운이 비치되어 있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래서 숙현은 알몸으로 모습을 드러냈는데 예상했던 대로 군살하나 없는 날씬한 몸매였다. 조철봉 또한 옷을 모두 벗어던진 채 침대 위에 누워있었는데 방에 불은 환하게 켜 놓았다.
“으음, 예상했던 대로군.”
조철봉이 감탄한듯 말했을 때 숙현은 빙긋 웃었다. 그러고는 조철봉의 2미터쯤 앞에 와 서더니 두다리를 조금 벌렸다. 짙은 숲과 샘까지 다 보이는 자세이며 각도였다.
“마음에 들어요?”
낮에는 정숙한 여자로 지내다가 밤에 이런 태도를 보이는 부류를 남자들은 대부분 좋아하긴 한다. 조철봉은 숙현의 태도에 대한 답례로 숙현의 숲과 샘에 시선을 주었다.
“음, 좋군.”
“당신 눈으로 나를 달아오르게 해봐요.”
숙현이 마치 조철봉의 시선을 화염방사기의 불꽃처럼 느끼는 듯 두다리를 더 벌리면서 몸을 틀었다. 상기된 얼굴에 두 눈은 이미 풀려 있었고 입술도 반쯤 벌어진 모습이었다. 조철봉은 두손을 벌렸다.
“이리 와.”
숙현이 한걸음에 다가와 조철봉의 옆에 눕더니 대뜸 두손으로 철봉을 움켜쥐었다.
“그대로 있어요. 내가 위에서 할테니까.”
쓴웃음을 지은 조철봉이 두팔을 늘어뜨렸을 때 숙현은 조철봉의 몸 위로 올라앉았다. 이제는 주도권이 숙현에게로 넘어간 것이나 다름없었다.
KT엔터테인먼트를 운영하는 이숙현이 개성공단 유흥구 총지배인 조철봉을 요리하는 자세가 된 것이다. 리더역할을 오래한 여자들은 대개 이런 자세를 선호했다. 숙현은 철봉을 잡아 망설이지도 않고 샘에 넣었지만 서툴렀다. 조철봉의 질감은 말할 것도 없고 숙현 스스로의 신경조직도 진입하는 쾌감을 제대로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아아.”
숙현의 탄성은 컸다. 그리고 다분히 조작적이었다. 조철봉은 턱을 치켜든 숙현의 목을 올려다 보았다. 이제 시작이다.
상위를 차지한 여자는 제 자신의 마음대로 쾌감을 조절할 수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조철봉의 경험에 의하면 거의 대부분을 상위체형으로 단련한 남자들보다 인내와 기교면에서 뒤떨어졌다. 숙현도 예외가 아니었다. 의욕적으로 진퇴를 서너번 반복했던 숙현은 쾌감의 강도가 기대했던 것보다 너무 강해졌는지 엉덩이를 뒤로 뽑았다가 철봉마저 빠져버렸다. 남자가 상위를 차지하고 있었다면 개망신인 사건이다.
허겁지겁 숙현이 질퍽이는 철봉을 잡아 자신의 샘에 넣더니 쾌감을 견디지 못하고 몸을 웅크린채 조철봉의 몸위로 엎드렸다. 이것으로 1회전은 끝이다. 만일 조철봉이 밑에서 몸을 틀어 움직여주었다면 숙현은 영락없이 1회전도 치르지 못하고 뻗었을 것이다. 조철봉이 손을 뻗어 숙현의 허리를 부드럽게 쓸었다. 섹스 도중에 맨허리를 손끝으로 쓸면 마치 전류가 흐르는 듯한 느낌이 온다. 전류를 받은 숙현이 자지러지듯 몸을 움츠렸을 때 조철봉이 낮게 속삭였다.
“자신없는 일은 나서지 말아야지.”
물론 숙현의 상위자세를 말하는 것이었지만 다른 뜻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이다. 숙현이 머리를 들고 조철봉과 시선을 맞추었다.
“무슨 말이에요?”
숙현이 묻자 조철봉은 상체를 일으키면서 남성 상위자세를 취했다. 숙현은 잠자코 따랐지만 민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조철봉은 천천히 하반신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미 숙현의 몸은 달아올라있어서 마치 폭발을 기다리는 연료와 같았다. 조철봉이 서너번 몸을 움직였을 때 숙현은 시키지도 않았는데 두 다리를 높게 치켜 들었다.
“아아아아.”
이번에 터져나온 신음은 누가 들어도 자연발생적인 탄성일 것이었다. 조철봉이 누구인가. 수많은 여자와의 정사를 거치면서 쾌감의 정도와 기술을 단련해오지 않았던가. 호흡이 긴 여자를 위해서 지장보살의 진언까지 외웠으며 급박할 때는 답답한 한국정치계를 떠올리면서 폭발을 늦춰왔던 조철봉이다.
그러나 우리의 위대한 이숙현 사장은 3분도 되지 않았을 때 화산처럼 폭발해버렸다. 온몸을 새우처럼 오그리면서 다급한 탄성을 숙현이 뱉었을 때 조철봉은 다만 호흡을 늦추었을 뿐이었다. 늘어졌던 숙현이 조금 정신을 차렸을 때 조철봉은 다시 시작했다. 놀란듯 숙현이 감았던 눈을 힘겹게 뜨고는 조철봉의 어깨를 밀듯이 움켜쥐었다가 곧 다시 당겨안았다. 그러고는 두번째로 절정으로 달려올라가기 시작했다.
이제는 신음도 비명처럼 들렸는데 이것이 숙현의 본색일 것이었다. 네번의 절정을 맛본 숙현이 시체처럼 쓰러져 자고 나서 눈을 뜬 것은 다음날 오전 9시쯤이었다. 10시간 가깝게 꿈도 꾸지 않고 잔 것이다. 옆쪽 침대가 비어있었으므로 숙현은 침대에서 알몸을 일으켰다. 욕실에서도 조철봉의 기척이 들리지 않았다. 조철봉은 떠난 것이다. 나른한 몸을 일으킨 숙현이 겨우 소파끝에 앉았을 때였다. 전화벨이 울렸다. 서둘러 전화기를 집어든 숙현의 귀에 조철봉의 목소리가 울렸다.
“내가 깨운건가?”
“아니에요. 일어나 있었어요.”
숙현이 다소곳하게 말했을 때 수화구에서 조철봉의 짧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어젯밤 좋았어.”
숙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수없이 남자를 겪었지만 숙현이야말로 어젯밤같은 쾌락을 처음 맛보았던 것이다. 그때 조철봉이 말을 이었다.
“우리 인연은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 글 이원호
(715)사랑-1
서울로 돌아온 조철봉이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은 서경윤의 집이었다. 물론 서경윤과 이종학 두 부부를 만나러 간 것이 아니다. 자신의 자식이지만 이종학의 성씨를 붙여 이영일이 되어있는 아들을 만나러 가는 것이다.
오후 7시여서 이종학은 퇴근해 돌아와 있었고 영일은 눈만 끔벅이며 낯익은 방문객을 보았다. 조철봉과는 낯이 익은 것이다. 그러나 조철봉이 친부인지는 아직 알 리가 없다. 오늘도 조철봉은 초등학교 2학년이 되어 있는 영일의 수준에 맞춰 장난감을 잔뜩 가져왔다. 물론 공사가 다망한터라 이번에는 직접 선물을 고르지 못하고 비서를 시켜 준비했다.
“갑자기 웬일이십니까?”
선물 보따리를 받아 안은 영일이 제 방으로 들어갔을 때 종학이 머뭇대며 말했다. 종학의 사업은 여전히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어서 지난 달에도 최갑중은 현금 3억을 지원했다. 열이 오른 갑중이 차라리 종학을 집에 들어앉히고 이 돈을 생활비로 주자고 조철봉에게 건의할 만큼 사업은 장래성이 보이지 않았다.
이 사실을, 물론 경윤은 모른다.
“내가 아들도 못본단 말인가?”
힐끗 영일의 방쪽에 시선을 준 조철봉이 투덜대듯 말했다. 거의 1년만에 영일의 얼굴을 본것이다. 그때 오렌지 주스잔을 들고온 경윤이 종학과 나란히 앉았다. 경윤의 태도는 종학과는 대조적으로 당당했다.
“미리 연락이라도 해야될 것 아녜요?”
“문 앞에서 전화하고 오는 법이 어디 있어요?”
경윤이 쏘아붙이듯 말했을 때 이번에는 조철봉의 어깨가 꾸지람을 들은 아이처럼 늘어졌다.
경윤에게는 개성공단 유흥구의 총지배인 또는 20여개의 사업체를 거느린 대기업가 조철봉이 여전히 그게 그것인 남자로 보이는 것이다. 여자의 선입견은 그 어떤 것도 지우지 못한다. 더욱이 살을 맞대고 산 여자의 그것은 더욱 고약하다. 입맛을 다신 조철봉이 경윤과 종학을 번갈아 보았다.
“당신들 개성공단 유흥구로 이사올 생각 없어? 거기 꽤 좋은 사업체가 있는데 말이야”
조철봉이 정색하고 종학을 보았다.
“호텔사장을 해보지 않겠어? 한달에 만불정도는 받게 될테니까.”
그러자 종학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지만 대답은 경윤이 했다.
“우리가 왜? 미쳤어?”
경윤이 조철봉을 흘겨보았다.
“영일이 학교문제는 어떻게 하고?”
“공단에 외국인전용 학교가 세워졌어. 이곳보다 시설이 더 좋아.”
“안돼.”
자르듯 말한 경윤이 조철봉을 보았다.
“그리고 앞으로 이렇게 갑자기 찾아오지 말아줘. 영일에게 당신은 남이니까.”
한동안 경윤을 바라보던 조철봉이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나는 언제나 네 앞에서는 진실성이 없고 이중적 인격의 사기꾼일 뿐이구나.”
“아니, 그것은.”
하고 종학이 변명하듯 나섰을 때 조철봉은 어깨를 늘어뜨리며 길게 숨을 뱉었다.
“나에게 인연의 끈이 남아있는 곳은 이 곳 뿐이었다. 내가 성공하든 실패하든 모두 영일과 그리고 너.”
조철봉의 시선이 경윤에게 머물렀다가 종학에게로 옮겨졌다.
“그리고, 자네까지도.”
다시 숨을 뱉은 조철봉이 자리에서 일어섰을 때였다. 경윤이 따라 일어서며 말했다. 경윤도 정색하고 있었다.
“하긴, 마침 잘 왔어, 내가 소개시켜줄 여자가 있었거든, 이번에는 진짜야
이번에는 진짜라는 서경윤의 표현은 이번 여자야말로 진국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경윤의 시선을 받은 조철봉이 쓴웃음을 지었다.
“내가 부담스러운 것은 사실인 모양이군.”
“아니야, 당신한테 맞는 여자야.”
경윤의 말투는 단호했다.
“마침 잘왔어. 내일 약속시간 정할테니까 만나.”
그러나 조철봉은 잠자코 몸을 돌렸다.
지난번 경윤이 소개시켜준 여자가 있었지만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다. 다음날 오전 11시반이 되었을 때 조철봉은 국제호텔의 라운지로 들어섰다. 경윤이 소개시킨 여자를 만나려는 것이다. 호기심때문도 아니었고 경윤의 주장에 굴복한 것도 아니었다. 여자는 경윤의 고등학교 후배로 두살난 딸아이와 살고있는 이혼녀라는 것이다. 조철봉이 누구인가?
지금이라도 마음만 먹으면 당장 처녀장가를 갈 수 있는 능력자다. 바로 조금 전까지만 해도 올 마음이 없었던 조철봉이 마음을 바꾼 것은 경윤으로부터 무시당하고 있다는 분노 때문일 것이다. 도대체 어떤 여자가 나와 있을지는 궁금하지 않았다. 다만 그 여자를 만나 경윤에게 한마디를 전하고 싶었다. 대역은 필요없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조철봉이 선호하는 여자는 결코 경윤의 예상속에 들어가있지 않을 것이었다.
라운지로 들어선 조철봉은 멈춰서서 먼저 주위를 둘러보았다. 손님은 반쯤 차있었고 여자 혼자 앉은 테이블은 딱 한곳이었다. 창가의 좌석이다. 여자도 마침 조철봉을 보는 중이어서 둘의 시선이 부딪쳤고 그 순간 조철봉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여자는 10여미터쯤의 간격을 두고 있었지만 얼굴 윤곽이 뚜렷했다. 섬세하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짧은 머리에 진회색 투피스 차림으로 수수한 인상이었지만 눈빛은 강했다. 조철봉이 다가가 섰을 때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가 조철봉입니다.”
억양없는 목소리로 조철봉이 말했을 때 여자는 머리를 숙였다.
“임미선입니다.”
여자의 목소리도 단조로웠다. 화장기없는 얼굴이었지만 티 한점없이 맑았고 입술은 윤기가 흘렀다. 아름답다기보다 청초한 인상이었다. 앞쪽에 앉은 조철봉이 미선을 쏘아보았다. 아직도 알 수 없는 적의가 가시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경윤하고는 어떤 사이시죠?”
미선이 눈만 크게 떴을 때 조철봉이 다시 물었다.
“혹시, 돈 빌린 것 있습니까?”
조철봉의 시선을 받은 미선이 어금니를 문듯 볼의 근육이 드러났다가 지워졌다.
“무슨 말씀이신지…….”
그러자 조철봉의 얼굴에 웃음기가 떠올랐다.
“서경윤이 미선씨를 적극 추천한 이유를 알고 싶어서입니다. 서경윤 입장에서 보면 나는 돈 밖에 가진 것이 없는 놈이거든요.”
그때 미선이 머리를 끄덕였다.
“네, 제가 언니한테 돈을 좀 빌려 썼어요.”
시선을 내린 채 미선이 말을 이었다.
“아이가 아파서요.”
조철봉은 당황했다. 마치 그냥 던진 돌멩이에 지나가는 사람이 맞는 꼴이었다. 경윤에게 돈을 빌렸냐고 물은 것은 홧김에 던진 말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미선이 말을 이었다.
“언니가 선생님에 대해서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어요.”
미선이 묻는 듯한 조철봉의 시선을 받고는 낮게 말했다.
“외로우신 분이라고만 했어요.”
조철봉은 쓴웃음을 지었다. 예상하지 못했던 대답이었다.
“외롭다니, 나한테는 어울리지 않는 말같은데?”
“아니요, 제눈에도 외롭게 보여요.”
정색한 미선이 조철봉을 똑바로 보았다.
“화 나셨죠?”
“뭐가 말입니까?”
긴장한 조철봉이 물었을 때 미선의 시선이 부드러워졌다.
“애 딸린 가난한 여자를 소개받은 것에 대해서요.”
“나는 가난하다는 말은 처음 듣는데.”
그렇게 대답은 했지만 조철봉의 심사는 복잡해졌다. 분위기가 전혀 예정에도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여자하고 이렇게 이야기를 주고 받게 될 지도 예상하지 못했다.
“제가 경윤언니한테 600만원을 빌려 썼어요.”
미선이 긴장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1년이 지났는데도 갚지 못했어요.”
“그래서 빚갚는 대신 나를 만나라고 합디까?”
그러고는 조철봉은 길게 숨을 뱉었다. 또다시 이야기가 전혀 딴판으로 흘러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때 미선이 머리를 들고 조철봉을 보았다.
“선생님이 총지배인이라면서요? 어느 호텔에 계세요?”
조철봉이 눈과 입을 반쯤만 뜨고 벌린 채 미선을 보았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선의 시선을 한동안 받고 나서야 조철봉은 말뜻을 알아차렸다. 사람은 때때로 착각속에서 산다. 개성공단 유흥구 총지배인 조철봉은 그렇게 유명한 인물이 아니었던 것이다. 임미선은 유흥구 총지배인 조철봉이란 존재를 모르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조철봉은 헛기침을 했다.
“호텔이 아니라 어디 유흥단지 같은데서 일합니다.”
“아아.”
이해했다는듯이 미선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놀이공원같은데….”
“그렇죠.”
도대체 이게 무슨 꼴인가. 조철봉이 이제는 한숨대신 어금니를 물었다가 풀었다. 다 경윤의 농간이다. 이렇게 덜 떨어진 이혼녀를, 더욱이 600만원 빚까지 진 애딸린 여자하고 마주 앉아 이게 무슨 꼴인가, 천하의 개성공단 유흥구 총지배인 조철봉이 말이다. 그때 미선이 긴장한 표정으로 조철봉을 보았다.
“저, 전화 한통 해도 되겠어요?”
“아, 물론.”
그러자 핸드백에서 휴대전화를 꺼낸 미선이 다이얼을 누르고는 귀에 붙였다.
“여보세요? 엄마?”
미선이 정색하고 말을 이었다.
“엄마, 예림이 감기약 꼭 먹여요.”
그러고는 흘끗 조철봉의 눈치를 살피더니 목소리를 낮췄다.
“저 곧 들어가요. 일 다 끝났어요.”
휴대전화의 전원을 끈 미선이 조철봉을 보았다. 마치 종례시간에 담임선생을 바라보는 학생같았다. 그 순간 미선의 시선을 받은 조철봉이 덜렁 입을 열었다.
“같이 식사나 합시다.”
이것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말이었다. 그러자 미선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기쁜듯한 표정이었다.
“아래층 한식당 음식맛이 괜찮습니다.”
팔목시계를 내려다본 조철봉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미선도 따라 일어섰다.
“부탁이 한가지 있습니다.”
발을 떼면서 조철봉이 미선에게 낮게 말했다.
“앞으로 나하고의 일은 서경윤한테 절대로 보고하지 마시도록.”
한정식당에서 마주앉았을 때 조철봉은 미선의 얼굴을 주의깊게 살펴보았다. 그늘진 표정이었지만 미선의 눈은 맑았으며 태도는 자연스러웠다. 언행에 꾸밈이 없는 것이다. 지금까지 겪은 대부분의 여자들과는 다른 유형이었다. 푸짐한 한정식 요리가 놓여졌을 때 미선이 놀란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맛있겠네요.”
“많이 드세요.”
조철봉의 가슴도 차츰 가라앉았다. 이제는 스스로의 말에 새삼스럽게 놀라거나 무슨 꼴이냐는 듯 이맛살을 찌푸리지 않게 된 것이다. 맛있게 식사를 하는 미선을 보면서 조철봉은 차츰 궁금해졌다. 호기심이다. 여자에 대한 호기심이 일어난다는 것은 조철봉이 여자를 여자답게 본다는 의미가 된다.
“저, 거시기.”
조철봉이 입을 열었다.
“애 이름이 뭐라고 했지요?”
“예림이요.”
입안의 음식을 삼킨 미선이 긴장한듯 조철봉을 정색하고 보았다.
“왜 그러세요?”
“예쁩니까?”
“그럼요.”
머리를 끄덕인 조철봉이 젓가락으로 나물을 집어 입에 넣다가 반은 흘렸다. 아직도 미선은 조철봉에게 시선을 준 채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언제 한번 예림이를 데리고 나오시지.”
“왜요?”
아직도 긴장을 풀지않은 미선이 묻자 조철봉은 입맛을 다셨다.
“왜는 왜요? 그냥 한번 보자는 거지.”
그러고는 미선을 흘겨보았다.
“거, 말끝마다 왜요 왜요 하지 마시오. 분위기 깨는 겁니다.”
이제 조철봉이 분위기를 따지게 된 것이다. 시선을 내렸던 미선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애 아빠하고는 작년에 헤어졌어요. 들으셨겠지만….”
“뭘 말입니까?”
조철봉이 묻자 미선의 목소리가 더 낮아졌다.
“헤어진 이유요.”
조철봉은 잠자코 미선을 보았다. 미선의 남편이 죽었는지 헤어졌는지 관심도 없었던 조철봉이다. 미선의 말이 이어졌다.
“애 아빠는 여자가 있었어요. 이중생활을 한 것이지요.”
아예 젓가락을 내려놓은 미선이 식탁을 향해 희미하게 웃었다.
“그쪽 여자한테도 애가 있더라구요.”
“저런 빌어먹을.”
조철봉이 혀를 찼다.
“능력은 있는 친구로군.”
그러자 미선이 시선을 들어 조철봉을 보았다.
“경마에 미친 남자였어요. 돈을 다 날려서 저는 애하고 빈 몸으로 나왔다구요.”
“….”
“헤어진후 1년동안 양육비가 없어서 파출부일도 했어요.”
말의 내용과는 다르게 미선의 목소리가 또렷해졌다.
“지금은 아이들 가정교사 일로 엄마까지 세식구 생활은 돼요.”
“고생 많이 하셨군.”
덤덤하게 말한 조철봉이 지긋한 시선으로 미선을 보았다. 그동안 세파에 시달렸으면 유혹도 받았을 것이다. 이만한 용모에 몸매면 열에 아홉 놈은 그냥 두지 않았을 것이다. 조철봉의 시선을 받은 미선의 눈주위가 조금 붉어졌다. 왜요? 하는 표정이었지만 입을 열지는 않았다. 조철봉은 심호흡을 했다. 미선에게서는 색향이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식사를 건성으로 마친 조철봉은 숭늉그릇을 내려놓고 입을 열었다.
“나에 대해서 들으셨겠지만….”
조철봉의 표정이 가라앉아갔다.
“난 바쁜 사람입니다. 그래서 정상적인 가정생활을 할 수가 없는 형편이지요.”
본래 이런 이야기를 미선에게 할 의도는 없었지만 자신도 모르게 이렇게 되어버렸다. 조철봉의 말이 이어졌다.
“그래서 말씀인데….”
그순간 미선이 말을 받았다.
“결혼할 의사가 없으시다는 말이군요. 이해합니다.”
그러고는 미선이 얼굴을 펴고 웃었다.
“어쨌든 만나서 반갑습니다.”
시선을 돌린 조철봉이 낮게 말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조철봉의 가슴은 여전히 찜찜했다. 예상하고 있었던 것처럼 동요하지 않는 미선의 표정을 보자 뭔가 실수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는 서경윤이 순수한 호의만으로 미선을 소개해줬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틀림없이 복선이 있다. 그 여자가 100% 내가 잘되기만을 바랄 리는 없다. 뭔가 약점을 잡으려고 미선을 소개해준 것이다. 바로 그런 선입견이 미선에 대한 차가운 반응으로 연결되었을 것이었다. 그때 미선이 가늘게 숨을 뱉더니 정색하고 조철봉을 보았다.
“저, 그럼 가보겠어요.”
주춤대며 자리에서 일어섰을 때 조철봉은 엉겁결에 말했다.
“내가 모셔다 드리지요.”
“아니요. 괜찮아요. 저는 지하철 타고 가면 돼요.”
“아, 제 차가 있으니까.”
더이상 말을 듣기 싫다는 듯이 조철봉이 앞장서서 나가며 말했다.
“가십시다.”
사람의 심리란 묘한 것이다. 줄 것 같은 상대에 대해서는 숨기려는 심사가 일어나고 객관적으로 보면 호박인데도 튕기면 끌린다. 그러나 이것은 사후의 일로 현장에 임하는 남녀들에게는 거의 적용되지 않는다. 최고급 승용차의 뒷좌석에 나란히 앉았을 때 미선은 옆에서 보기에도 긴장해 있었다.
두다리를 꼭 붙이고 계속 창밖만 쳐다보고 있었는데 바깥구경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미선의 집은 영등포의 낡은 임대아파트로 바로 옆에는 시장이 있어서 어수선했다. 차가 아파트 현관 앞에 멈춰섰을 때 사람들의 시선이 모이는 것은 이런 고급차가 드물게 왔기 때문일 것이었다.
“저, 그럼.”
차에서 내렸을 때 미선이 어색하고 당황한 표정으로 시선을 내린채 조철봉에게 말했다.
“저는 이만.”
그때 조철봉이 또 불쑥 말했다.
“집에서 차 한잔 주시렵니까?”
그러고는 덧붙였다.
“이대로 헤어지기에는 왠지 섭섭해서….”
그러자 미선이 시선을 들고 조철봉을 보았다. 주위로 사람들이 스치고 지나면서 힐끔거렸고 아파트 경비원 한사람은 아예 5m쯤 좌측에서 뒷짐을 진 채 이쪽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참, 애가 있다고 했지, 예림이.”
하고는 반쯤 몸을 돌린 조철봉의 행동에 활기가 띠어졌다.
“집이 몇동 몇호요?”
눈만 크게 뜬 미선에게 조철봉이 말을 이었다.
“내가 뭘 좀 사가지고 갈 테니까.”
그러자 한동안 조철봉을 바라보던 미선이 결심한듯 말했다.
“17동 503호예요.”
미선의 목소리는 또렷했다.
조철봉이 17동 503호에 섰을 때는 그로부터 20분쯤 후였다. 물론 손에는 선물용 과자에다 과일세트까지 가득 들려 있었는데 미선은 긴장된 얼굴로 조철봉을 맞아들였다. 아파트는 15평형으로 방하나에 응접실과 주방, 화장실이 오밀조밀 연결되어 있어서 마치 장난감집 같았다. 응접실에 우두커니 선 조철봉에게 미선이 자리를 권하면서 웃었다.
“어머니가 예림이 업고 나가셨어요.”
조철봉의 시선을 받은 미선이 덧붙였다.
“집이 좁아서요, 그리고.”
어색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때서야 조철봉은 안심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응접실에 흔히 있는 소파가 없어서 방바닥에 깔린 방석에 앉았다. 그러나 집안은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마실것 드릴까요?”
벌써 냉장고의 문을 연 채 미선이 물었으므로 조철봉이 머리를 끄덕였다.
“냉수나 한잔.”
“오렌지주스도 있는데.”
“그럼 오렌지주스로.”
주스잔을 내려놓은 미선이 앞에 앉았을 때 조철봉이 정색한 표정으로 물었다.
“남자 없습니까?”
미선이 눈만 크게 떴고 조철봉이 다시 물었다.
“말하자면 남자친구 말입니다.”
대답을 기대하고 물은 것이 아니다. 그리고 설령 있다손치더라도 대답할 여자가 어디 있겠는가. 그저 분위기를 바꾸려고 물은 것뿐이다. 그때 미선이 똑바로 조철봉을 보았다.
“이혼하고나서 남자를 서너번 만났었어요.”
“……”
“휴대전화 가게 직원인데 너무 사람이 친절해서.”
“……”
“하지만 금방 그만두었어요. 알고보니까 그 남자도 유부남이더라고요.”
“유부남이라….”
입맛을 다신 조철봉이 쓴웃음을 지었다. 미선은 결혼상대를 찾으려고 했던 것이다. 주스를 한모금 마신 조철봉의 시야에 미선의 무릎과 다리가 들어왔다. 살색 스타킹을 신은 미끈한 다리였다. 조철봉이 입을 열었다.
“미선씨의 꿈은 뭡니까? 어떻게 살고 싶어요?”
그러자 미선이 긴장했다. 뭔가를 생각하는듯 눈동자가 조금 위쪽으로 떠졌다.
“잘살고 싶어요.”
“아주 즐겁게, 아주 잘.”
웰빙이구나, 요즘 너도나도 입만 열면 뱉는 웰빙이 미선의 입에서도 튀어나왔다. 조철봉의 얼굴에 희미하게 웃음기가 떠올랐다.
“나하고는 잘살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조철봉이 묻자 미선은 주저하지 않고 머리를 끄덕였다.
“잘살 수 있을 것 같아요. 언니한테서 이야기 들었을 때부터 많이 생각했어요.”
미선이 열렬하게 말을 이었다.
“선생님은 그럴 능력이 있으시거든요.”
“능력이라….”
입맛을 다신 조철봉이 공허한 시선으로 미선을 보았다.
당연히 서경윤은 조철봉의 재산과 사업능력에 대해서는 치켜세웠을 것이었다. 이제 차츰 미선의 성품과 서경윤과의 관계가 짐작이 갔으므로 조철봉은 목소리를 부드럽게 낮췄다.
“그렇다면.”
조철봉이 손을 뻗어 미선의 손을 쥐었다.
“우리가 잘살 수 있을지 한번 시험을 해보지 않겠습니까?”
식당에서 엉겁결에 말을 뱉은 순간부터 스스로 예상했던 제안이다.
그때였다. 조철봉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은 채 미선이 머리를 끄덕였다.
“하겠어요.”
“무슨 연습인지 알고 있는 거요?”
“대충은.”
자리에서 일어선 미선이 조철봉을 내려다 보았다.
“절 갖고 싶어요?”
메마른 목소리로 물은 미선의 두 눈가가 상기되어 있었다.
“짐작은 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어머니하고 아이를 내보낸건가?”
그러자 몸을 돌린 미선이 창가로 다가가 커튼을 쳤다.
“침대에 들어가 계세요. 씻고 들어갈 테니까.”
예상보다 빠른 진전이어서 조철봉은 할 말을 잃었다. 자리에서 일어선 조철봉이 안방으로 들어섰다. 방 하나에 가득한 침대의 시트는 깨끗했고 베개 두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지만 아직 머릿자국은 없다. 저고리만 벗어던진 조철봉은 침대 위에 팔베개를 하고 누웠다. 그러나 지금도 색욕은 일어나지 않았다. 미선에게서 성적 매력이 풍겨오지 않기 때문은 아니다.
아직 이쪽의 준비가 덜 되었다고 하는 것이 맞는 표현일 것이다. 그리고 절박한 상대 앞에서는 뒷걸음질치는 본성탓도 있다. 천장을 바라보던 조철봉이 옆쪽 벽으로 시선을 돌렸을 때 벽에 걸린 사진이 보였다. 부부가 갓난아이를 사이에 두고 찍은 사진이었다. 여자는 미선이었고 찡그린 표정의 남자는 이혼한 남편일 것이다. 마른 체격에 날카로운 눈매의 사내였다. 벽에 걸린 사진이야 다 이쪽을 쳐다보기 마련이지만 사내와 시선이 마주쳤을 때 조철봉은 입술을 비틀며 웃었다.
“그래도 걸려 있어서 다행이다.”
그러자 갑자기 아래쪽 철봉에 열기가 옮겨져왔다. 사내의 시선을 의식하면 할수록 철봉의 열기가 더 뜨거워질 것은 분명했다. 그때 안방으로 미선이 들어왔다. 흰색가운 차림으로 물에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감아올린 모습이었다.
“아직 벗지 않으셨네.”
미선이 10년쯤 산 부부처럼 말하더니 조철봉의 옆으로 다가와 누웠다.
“제가 벗겨드려요?”
미선이 조철봉의 혁대에 손을 대며 물었다.
“피곤해요?”
“좋아. 벗겨줘.”
아직도 팔베개를 하고 누운 채 조철봉은 눈을 감았다. 그러고는 이 과정도 서경윤으로부터 사전지식을 얻게 된 결과인지 궁금해졌다. 꾸물대며 미선이 바지를 벗겨 내렸다. 이어서 셔츠와 양말, 팬티의 순서로 벗겨 내었을 때 조철봉은 눈을 떴다.
“사랑해본 적 있어?”
불쑥 조철봉이 묻자 미선이 움직임을 멈췄다.
“사랑요?”
처음 듣는 말인 것처럼 미선이 눈을 둥그렇게 뜨더니 머리까지 갸웃거렸다.
“그건 왜 물으세요?”
“너무 삭막해서.”
“뭐가요.”
“우리 분위기가.”
않던 짓을 하면 이상해졌다고 하고 또는 죽을 때가 됐다고도 한다. 지금까지 조철봉은 오만가지 사연과 상대를 다 겪었지만 사랑 타령을 한 적은 한번도 없다. 또한 분위기가 삭막해서 섹스에 지장이 있어본 적도 없는 것이다. 그때 미선이 가운을 벗더니 알몸을 드러내었다. 윤기가 흐르는 상반신이 바로 조철봉의 눈앞에 떠 있는 것이다. 비스듬히 드러난 미선의 한쪽 젖가슴은 작은 밥공기만했고 젖꼭지는 이미 곤두서 있었다.
조철봉은 미선의 어깨를 당겨 안았다. 미선의 피부는 탄력이 있었고 물기에 젖어 끈적였다.
“저, 아직 서툴러요.”
미선이 조철봉의 가슴에 더운 입김을 뿜으면서 말했다.
“천천히 해주세요.”
서툴기 때문에 천천히 하라는 말인지, 아니면 천천히 하는 것을 좋아한다는 뜻인지 알 수 없었으나 조철봉은 잠자코 미선의 젖꼭지를 입에 넣었다. 입안에 넣은 젖꼭지를 혀로 굴렸을 때 미선의 입에서 낮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하체가 꿈틀거리면서 조철봉의 몸에 부딪혔고 두 팔은 이미 단단하게 감겨져 있다.
조철봉은 천천히 미선의 허리와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쓸어내렸다. 미선이 조철봉의 손길을 기다리는 듯 두다리를 벌리면서 하반신을 치켜들었다. 젖가슴에서 입을 뗀 조철봉이 미선을 보았다. 몽롱해진 시선을 든 미선이 허덕이며 말했다.
“어서요.”
이미 미선의 몸은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 있다는 표시였다. 상체를 일으킨 조철봉은 미선을 똑바로 내려다 보았다.
“천천히 하라면서?”
물론 마음에도 없는 말이다. 그러자 미선이 눈을 크게 떴지만 아직 초점은 없다.
“어서.”
다시 재촉하듯 미선이 말했을 때 조철봉은 거칠게 진입했다.
“아아아.”
거친 신음이 뱉어져 나왔으므로 조철봉은 움직임을 멈췄다. 신음과 탄성을 구분못할 조철봉이 아니다. 그리고 철봉이 받은 압박감이 강했던 것이다. 그 순간 조철봉은 자신도 모르게 신음했다. 미선은 이제 시체처럼 누워만 있었는데 호흡만은 거칠었다.
“천천히.”
다시 미선이 “천천히”라는 표현을 썼다. 그때서야 미선의 말뜻을 알아차린 조철봉은 다시 하체를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이를 낳았어도 샘이 처녀처럼 온전한 여자도 있는 것이다. 미선의 샘은 좁고 탄력이 있는 데다 깊었다. 그리고 차츰 조철봉의 철봉에 익숙해지자 친근하게 반응하기 시작했다. 샘안의 신경세포가 일제히 퍼뜩였으며 그 때마다 미선의 입에서는 탄성이 터져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아아, 좋아.”
미선이 소리쳤다. 두팔로 조철봉의 목을 감아안은 미선은 빈틈없이 하반신을 붙이는 순간마다 탄성이 터져 나오는 것이다. 조철봉은 미선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붙였다. 그러자 곧 미선의 혀가 뱀처럼 꿈틀거리며 뻗어나왔고 조철봉의 혀와 엉켰다. 조철봉은 천천히 미선을 끌고 올라갔다.
땀으로 범벅이 된 미선이 신음 같은 탄성을 뱉었을 때 조철봉은 문득 숨을 멈췄다. 갑자기 가슴이 메어왔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자신도 모르게 두눈에서 눈물이 흘러 떨어졌다. 간혹 있는 일이다. 언젠가도 이런 일이 있었던 기억이 난다. 가장 쾌락의 절정에 오른 순간에 이렇게 가슴이 미어지면서 눈물이 쏟아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알리가 없는 미선은 이제 허리를 치켜 돌리면서 조철봉의 철봉을 간절하게 기다렸다.
“어서요.”
미선이 비명처럼 재촉했다. 조철봉은 머리를 비튼 채 계속해서 눈물을 쏟았다. 외롭다. 뼈에 사무치게 외로움이 가슴을 쑤시고 있는 것이다.
“어서.”
이제는 간절하게 미선이 외쳤을 때 조철봉은 다시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미선이 절정에 오른 것은 잠시 후였다. 물론 여자마다 절정의 순간이 다르겠지만 미선의 절정은 유별났다. 숨을 딱 멈추더니 사지를 굳혀버린 것이다. 마치 석상처럼 굳혀진 채 몇초가 지났으므로 조철봉은 놀라 미선을 내려다 보았다. 그 순간 미선이 온몸을 늘어트리더니 흐느꼈다. 강렬한 절정이다. 그러나 조철봉은 함께 오르지 않았다. 오르는 시늉만 했을 뿐이다. 손등으로 눈물을 닦은 조철봉이 상체를 들어올렸을 때 미선이 눈을 떴다.
“좋았어요?”
저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은 조철봉이 머리를 끄덕였다. 이렇게 물은 것은 자신은 만족했다는 뜻이 될 것이다.
“좋았어.”
옆으로 몸을 누인 조철봉이 다시 길게 숨을 뱉었다. 텅빈 것 같은 가슴은 아직 메워지지 않았다. 그리고 이런 느낌은 점점 더 커질 것이었다. 천장을 보고 누운 조철봉이 불쑥 물었다.
“거기, 외롭다고 느껴본 적 없어?”
또 난데없는 질문이어서 미선은 가만 있었고 조철봉이 다시 물었다.
“세상에 혼자 남겨진 것같은 느낌을 받은 적이 없느냔 말이야.”
“다 그런거죠 뭐.”
미선도 천장을 바라본 채 말했다. 숨은 가빴지만 목소리는 가라앉아 있었다.
“인생은 그런게 아닌가요?”
조철봉이 천장을 똑바로 보았다.
“난 가끔 허전해.”
외롭다는 표현을 그렇게 말한 것이다.
“정말 나를 생각하는 사람이 필요해. 이를테면.”
머리를 돌린 조철봉이 미선을 보았다.
“나를 목숨처럼 사랑해줄 사람이.”
그러고는 조철봉이 풀썩 웃었다.
“아무 계산도 없이 말이야.”
“욕심이 많으시네요.”
천장을 향한 채 미선이 낮게 말했다.
“한번도 사랑을 해보시지 않은분 같기도 하고.”
조철봉은 소리죽여 숨을 뱉었다. 맞는 말이다. 지금까지 받는 것만 애타게 바랐을 뿐으로 주는 것은 인색했다. 오직 물질로만 내뿜었을 뿐이다. 인과응보이며 자업자득이다. 그러고 보면 지금까지 한번도 제대로 된 사랑을 해본 적이 없는 것이다. 그때 미선이 입을 열었다.
“마음을 열고 기다리면 찾아와요.”
미선이 손을 뻗어 조철봉의 얼굴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사랑은 억지로 만들어지지 않는답니다.”
“흥.”
조철봉이 코웃음을 쳤다.
“나는 지금까지 타산없는 사랑은 보지 못했다. 다 조건이 맞아야 사랑이 이루어지더구만.”
그러자 미선이 정색하고 조철봉을 보았다.
“그렇지 않아요. 그건 당신 눈으로 본 세상이에요.”
“글쎄, 내눈에 다른 세상이 보여야지.”
입맛을 다신 조철봉이 팔을 뻗쳐 미선의 엉덩이를 당겨 안았다. 그러자 철봉이 하반신에 닿은 미선이 엉덩이를 뒤로 뽑았다.
“다시 한번 홍콩에 갈래?”
“어머, 또?”
놀란척 미선이 눈을 크게 떴지만 싫은 기색은 아니다. 조철봉이 미선의 젖꼭지를 다시 입에 물었다.
“나는 외롭다.”
웅얼거리며 말한 조철봉이 손을 뻗어 미선의 샘을 어루만졌다.
“무서워.”
다시 혼잣소리처럼 말한 조철봉이 눈을 부릅떴다. 정말 겁에 질린 표정이었다.
믿음이다. 두번의 홍콩 왕복에 탈진한 미선이 죽은 듯이 쓰러져 잠이 들었을 때 조철봉은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사랑은 믿음이다. 믿음을 주는 것이다. 상대방에게 내 믿음을 주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 조철봉은 길게 숨을 뱉었다.
지금까지 한번도 남을 믿어본 적 없는 조철봉이다. 남자는 물론이고 여자도 마찬가지였다. 남녀간의 관계도 모두 거래행위였으며 대가가 꼭 있어왔던 것이다. 그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믿어왔던 조철봉이다. 미선이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한시간쯤 후였다. 그때까지 미선의 어머니와 딸은 외출에서 돌아오지 않았는데 오히려 조철봉이 초조해졌다.
“어머니는 언제 오시는 거야?”
조철봉이 묻자 미선이 피식 웃었다.
“근처 이모한테 가셨으니까 내가 전화해야 오실 거예요.”
“이거, 내가 미안하군.”
대충 옷을 차려입은 조철봉이 침대끝에 앉아 미선을 보았다.
“나하고 이렇게 되었다고 서경윤한테 보고할 건가?”
그러자 미선이 정색하고 머리를 저었다.
“난 어린애가 아니에요. 내 앞가림은 내가 해요.”
옷매무새를 여민 미선이 방바닥을 내려다 보았다.
“내가 좋아서 이런 건데 뭐.”
미선의 시선을 따라 방바닥을 내려다본 조철봉이 낮게 말했다.
“난, 바쁜 사람이야.”
“알아요.”
“그래서 가정생활에 어울리지 않는 놈이지.”
“그것도 들었어요.”
“하지만 가끔씩, 아주 가끔씩.”
“가정이 그립죠?”
그렇게 물은 미선이 반짝이는 시선으로 조철봉을 보았다.
“외롭고, 무섭고요.”
다시 시선을 내린 조철봉이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
여자하고 이런 이야기를 나눠본 적은 한번도 없었던 조철봉이다. 지금까지 만난 상대는 거의 목적이 있었으므로 계산적이었으며 조급했고, 또한 각박한 분위기였다. 더욱이 미선과의 섹스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기 때문이다. 머리를 든 조철봉이 미선을 똑바로 보았다.
“저, 말이야.”
조철봉이 미선의 화장기 없는 얼굴에 흘러내린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쓸어올렸다.
“잘들어.”
“네.”
미선이 말 잘듣는 학생처럼 대답했을 때 조철봉이 말을 이었다.
“난 아직 당신에 대해서 잘 몰라. 하지만.”
조철봉이 고인 침을 삼켰다.
“내가 믿어볼게. 당신을 말이야.”
그것이 사랑의 전제라고는 조철봉은 차마 이어 말하지 못했다. 물론 갑중을 시켜 미선의 사생활을 샅샅이 조사해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기본이다. 그때 미선이 입을 열었다.
“고마워요, 믿어주신다고 해서.”
미선이 손을 뻗어 옆에 앉은 조철봉의 손을 쥐었다.
“저도 당신을 믿을게요.”
“난 때로는 평범하게 함께 살다가 죽는 부부들이 부러워. 가난하지만 그런대로 행복을 느끼면서 말이야.”
“그건 얼마든지 할 수 있어요. 우리도.”
불쑥 그렇게 말했던 미선이 당황하는 듯 시선을 내렸다. 우리라는 표현을 냉큼 써버린 것이다. 조철봉이 미선에게 잡힌 손을 힘주어 쥐었다.
“그래, 노력해보자고.”
서경윤은 어김없이 다음날 오전에 전화를 해 왔는데 목소리는 차분했다.
“그래, 만났지?”
대뜸 그렇게 묻자 임미선은 착실하게 대답했다.
“그래요, 언니, 만났어요.”
“그럼 얘기좀 듣자.”
그러고는 서경윤이 만날 장소와 시간을 정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두 시간쯤 후에 서경윤의 집 근처 커피숍에서 둘이 마주 앉았을 때 경윤이 웃음띤 얼굴로 미선을 보았다.
“잘 된거니?”
서경윤의 시선을 받은 미선이 희미하게 웃었다.
“잘 모르겠어. 언니.”
“같이 밥 먹었어?”
“그래요.”
“그럼 같이 오래 있었겠구만.”
“그래요.”
그러자 서경윤이 눈을 치켜떴다.
“이것아, 이야기를 해봐. 그래요, 그래요만 하지말고.”
“별일 없었어, 언니.”
불쑥 그렇게 말한 미선이 시선을 내렸다.
“그래?”
경윤이 그 시선 그대로 미선을 보았다. 경윤이 미선을 소개시켜준 이유는 딱 한가지였다.
미선은 집안 형편도 어려운데다 성격이 모질지 못해서 고생을 사서하는 스타일이었다. 그러나 사람을 배신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어렸을 때부터 경윤이 미선을 겪어왔기 때문에 잘 안다. 만일 미선이 조철봉과 결합한다면 우선 물질적인 여유는 받게될 것이었다. 그것뿐이다. 착한 미선이 조철봉 때문에 마음고생을 할지 어쩔지까지는 생각해보지 않았다. 조철봉이 미선에 의해 가정의 행복을 찾으리라는 따위는 관심조차 없다. 경윤이 조금 실망스러운 표정으로 미선을 보았다.
“너, 혹시 이 상황에서 사랑 따위의 감정을 찾는 것은 아니겠지?”
미선이 눈만 깜빡이자 경윤의 말이 이어졌다.
“현실적으로 생각해야 돼. 우선 네 주변이 안정이 돼야 사랑이나 행복이 찾아온단 말이야?”
“알아요. 언니.”
다소곳한 표정으로 미선이 말을 이었다.
“조철봉씨도 나한테 사랑 이야기를 하데.”
“그래?”
깜짝놀란 경윤이 미선을 보았다.
“뭐라고 그래?”
“그냥, 사랑해봤느냐고.”
“흥.”
코웃음을 친 경윤이 자리를 고쳐 앉았다.
“내가 지금 너한테 이런 얘기를 하는 건 좀 웃기지만.”
정색한 경윤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너한테 그남자를 소개시켜준 이유는 경제적인 이유 때문이었어. 그 남자는 사랑의 ‘사’자도 꺼낼 자격이 없는 작자야.”
“어머, 왜?”
긴장한 미선이 묻자 경윤은 뱉듯이 말했다.
“감정이 없는 놈이거든. 평생 그자는 외롭게 살다가 갈거야.”
미선은 시선을 내리고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긴.”
벽쪽으로 머리를 돌린 경윤이 혼잣소리처럼 말했다.
“수없이 여자를 거친 작자가 너같은 애한테 관심을 가질 리가 없지.”
그러고는 힐끗 시선을 들더니 덧붙였다.
“오해하지마, 그 작자는 너같이 착하고 순수한 여자를 좋아하는 스타일은 아니라는 말이다.”
경윤이 결론을 짓듯 말했다.
조철봉이 미선을 불러낸 것은 다음날 오전이었다. 미선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금방 약속장소인 커피숍에 모습을 드러냈는데 조철봉을 보자 환하게 웃었다. 전혀 꾸밈이 없는 웃음이었다.
“기다렸어요.”
털썩 앞자리에 앉은 미선이 환한 얼굴로 말했다.
“전화해줘서 고마워요.”
“이런.”
조철봉이 입맛을 다셨다. 외상값 갚으려고 술집 마담을 불러냈을 때 이런 대화와 분위기가 있기는 했었다.
“어제 경윤언니 만났어요.”
미선의 말이 술술 이어졌다.
“궁금했던 모양이에요.”
“그렇겠지.”
조철봉이 쓴웃음을 지었다.
“내가 그여자 속셈을 다 알지.”
미선이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조철봉을 빤히 보았다. 차를 주문하고 났을 때 조철봉이 주머니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 미선앞에 놓았다.
“받아.”
“뭔데요?”
긴장한 미선이 봉투와 조철봉을 번갈아 보았다. 그러나 내용물이 뭔지는 대충 짐작한 모양이었다. 의자에 등을 붙인 조철봉이 정색하고 말했다.
“꺼내봐.”
한동안 망설이던 미선이 봉투를 열고 내용물을 꺼내었다. 그러고는 다음 순간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머나.”
당연한 일이다. 안에는 1억짜리 자기앞수표가 들어있었던 것이다.
“어머나, 이렇게.”
수표를 쥔 채 미선이 멍해진 얼굴로 말했을 때 조철봉이 씨익 웃었다.
“짐작하고 있었던 것보다 금액이 더 많은건가?”
“아니요. 그게 아니라.”
아직 수표를 쥐고는 있었지만 미선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저한테 왜?”
“우선 서경윤한테 진 빚을 갚아.”
상체를 앞쪽으로 기울인 조철봉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쪽 저쪽에도 외상값이나 널린 빚이 있겠지. 그것도 다 정리하고.”
“……”
“돈이 남으면 필요한 물건을 사. 엄마한테도 나눠드리고. 앞으로 생활비는 따로 줄테니까.”
그때 수표를 탁자 위에 내려놓은 미선이 눈물을 쏟았다. 두 눈으로 조철봉을 똑바로 응시한 채 쏟는 눈물이었다. 조철봉은 심호흡을 했다. 사람은 때로는 갑자기 눈물을 쏟는다. 외로울 때, 기쁠 때, 또는 무서울 때.
지난밤 미선과의 정사중에 쏟았던 자신의 눈물은 외로움 때문이었다. 여자와의 격렬한 정사중에 뼈저린 외로움을 느꼈던 것이다. 그때의 눈물은 지금 미선이 보이는 눈물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조철봉이 입을 열었다.
“우리 서로 믿기로 했지?“
“네.”
겨우 미선이 대답했을 때 조철봉은 턱으로 미선의 앞에 놓인 수표를 가리켰다.
“넣어 둬.”
시선을 돌린 조철봉이 말을 이었다.
“서경윤한테는 이 이야기를 하지 않는게 좋을거야. 혈압이 올라서 훼방을 놓으려고 들테니까.”
“알았어요.”
그때서야 정신을 차린듯 미선이 다소곳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말 안할게요.”
조철봉은 희미하게 웃었다. 이제 둘만의 비밀 하나가 만들어진 것이다. 믿음의 시작이다.
지금까지 조철봉은 수없이 많은 돈거래를 했지만 모두 대가가 있는 거래였다. 돈을 주고 여자를 산 것도 마찬가지가 될 것이다. 지금 미선에게 준 1억도 대가를 바라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조철봉의 형태로 보아 미친 짓이다. 미선이 수표를 조심스럽게 핸드백에 넣었을 때 조철봉은 입을 열었다.
“이제 주변환경이 하나씩 풀려가기 시작하면 눈 앞이 트이는 느낌이 올거야.”
조철봉이 미선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웃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의 입장이 다르다고들 하지.”
“전 안그래요.”
머리까지 저은 미선이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전 은혜를 잊지 않겠어요.”
“내가 좋아서 이런 것이니까 부담 느낄 필요없어.”
차분하게 말한 조철봉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 어디 가시게요?”
따라 일어선 미선이 당황한 표정으로 묻자 조철봉이 말했다.
“회사일이 바빠서 들어가봐야 돼.”
조철봉이 미선의 어깨를 손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내가 다시 연락할게. 오늘은 이만.”
“저기요.”
미선이 불렀지만 몸을 돌린 조철봉은 발을 떼었다. 커피숍을 나온 조철봉은 길게 숨을 뱉었다. 개운했다. 그러나 이것도 돈으로 거래하는 행위일 뿐이다.
미선에게 대가를 기대한다면 준 만큼은 받겠지만 가슴이 허전한 것은 마찬가지가 될 것이었다. 회사에 돌아왔을 때 비서 미스신이 메모지를 내밀었다.
“서경윤씨한테 전화왔습니다. 급하시다고.”
물론 미스신은 서경윤이 누구인지 모른다. 머리를 끄덕인 조철봉은 혼자되었을 때 전화기를 들었다. 신호가 두번 울리고 나서 서경윤이 전화를 받았다.
“왜 전화한거야?”
조금 거칠게 조철봉이 묻자 경윤은 먼저 흥흥 웃었다.
“그래, 미선이가 맘에 들지 않는단 말이지?”
경윤이 장난스레 물었다.
“데리고 놀기에도 시원치 않았어?”
“그것 물으려고 전화한거야?”
입술을 비튼 조철봉의 목소리가 차분했다.
“걔가 나한테 뭐가 맞는다고 생각했었니?”
“조철봉의 스타일과는 전혀 맞지 않았으니까.”
경윤의 말투가 차가워졌다.
“그래서 전혀 새로운 느낌으로 받아들일지 모른다고 생각했었지.”
“그렇군.”
“그랬더니 역시 예상대로 손도 대지 않은 모양이군”
“그렇게 예상을 했단 말이지?”
“그래 90퍼센트쯤.”
그러자 이번에는 조철봉이 흥흥 웃었다.
“역시 너는 날 잘 아는군.”
경윤이 만일 조금전에 조철봉과 미선이 만났다는 것을 안다면 얼굴이 노래질 것이었다. 그리고 미선에게 1억을 주었다는 것을 안다면 까무러칠지도 모른다. 통화가 끝났을 때 조철봉은 앞쪽의 벽을 정색하고 보았다. 이것으로 미선의 환경과 성품은 거의 다 알게 되었다.
미선 본인의 설명에다 경윤의 해설까지 곁들여진 셈이 된 것이다. 미선은 조철봉에게 전혀 예기치 않은 상대였다. 그것은 서경윤의 계산과 오기가 만들어낸 작품이라고 볼수 있었다. 사랑은 아주 우연한 기회에 온다. 계산과 흥정으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다. 조철봉은 지금까지 한번도 맨사랑을 한적이 없는 것이다.
그날 저녁 미선은 갈비를 두근이나 사서 구웠다. 그것도 한우갈비였다. 놀란 어머니가 눈치를 보더니 물었다.
“웬 갈비냐?”
“그럼 우린 갈비 못먹어?”
미선이 성난 표정으로 어머니를 보았다.
“앞으로 매일 저녁에 갈비 먹여줄게.”
“왜? 학생이 늘었냐?”
“흥.”
코웃음을 친 미선이 몸을 돌려 어머니를 보았다.
“이젠 가정교사 안해.”
“그럼 무슨 일로?”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던 어머니가 시선을 내리더니 입맛을 다셨다.
“엄마.”
어머니에게 다가선 미선이 허리를 끌어 안았다.
“이제 아등바등 살지 않아도돼. 내일 돈 줄테니까 엄마 시골 삼촌한테 다녀와.”
하나밖에 없는 외삼촌이 교통사고로 다리를 다쳐 병원에 누워있는데도 어머니는 여비가 없어서 찾아가지 못했던 것이다. 미선이 내친김에 가스불을 끄고는 가방에서 만원권 뭉치 하나를 꺼내들고 왔다. 백만원이다.
“엄마, 받아.”
돈을 내밀자 어머니의 눈이 둥그레졌다.
“아이구, 얘야.”
어머니는 아마 한번도 백만원 뭉치를 만져본적이 없을 것이다.
“차비쓰고 남은건 외삼촌한테 주고와. 난 돈이 또 있으니까.”
“아니, 너.”
“괜찮아. 도둑질한돈 아니야. 빌리지도 않았어. 이건.”
침을 삼킨 미선이 정색하고 어머니를 보았다.
“내 돈이야.”
아직은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마침내 돈을 받아쥔 어머니가 지폐의 무게에 질린듯 손을 떨어트렸다. 그러고는 황당한 표정으로 미선을 보았다.
“정말 별 탈 없는거지?”
“응, 걱정마.”
다시 몸을 돌려 갈비를 굽는 미선의 등을 향해 어머니가 말했다.
“아이구, 미선아. 고맙다.”
어머니의 목소리는 떨렸다.
“네 외삼촌이 얼마나 좋아할꼬.”
외삼촌뿐만이 아니다. 외숙모도, 외사촌 세명도, 그리고 외숙모의 형제, 자매, 그 자손들, 거기에다 동네 사람들도 모두 기뻐할 것이었다. 한사람의 선행은 일파만파로 번져 나가게 된다.
저녁상을 차리면서 미선은 조철봉의 얼굴을 떠올렸다. 물론 조철봉이 어떤 대가를 요구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조금 불안하긴 했다. 그러나 조철봉의 말마따나 1억을 손에 쥐고나자 모든 것이 달라졌다. 세상이 갑자기 밝아진 것이다. 어머니가 식탁에 다시 앉았을때 미선이 생각난듯 말했다.
“엄마, 친구들한테 빚이 얼마나 있어?”
그렇게 좋아하던 갈비에 손도 대지 않고 국만 떠마시던 어머니가 다시 놀란듯 머리를 들었다.
“응? 왜?”
“글쎄, 말해봐 지윤이 할머니하고, 또 누구있지?”
“글쎄 그것이.”
“얼른 말하라니까.”
다그치듯 미선이 묻자 어머니가 시선을 내렸다.
“82만 5천원이야.”
어머니는 다 외우고 있었던 것이다.
“지윤이 할머니, 성수엄마, 윤기 할머니, 민수 할머니한테, 그리고 가게 외상값 7만2천원까지 합쳐서.”
미선은 다시 어머니한테 백만원권 뭉치하나를 내놓았다. 이것이 행복이다.
한국에 있는 동안 조철봉은 동분서주했다. 외국에 여러개의 사업체를 벌여 놓았지만 결국 기반은 한국인 것이다. 그래서 매일 자금을 체크하고 현황을 보고받았는데 모두 전문기업인에게 맡겨 놓은 터여서 전체적인 윤곽만 파악하면 되었다.
그중 제일 신경이 많이 쓰이는 곳이 개성공단 유흥구였다. 조철봉이 룸살롱 화진에 들어섰을 때는 저녁 8시반경이었다. 화진은 유흥구에서 파견된 북한 실습생 20명이 근무하는 곳이다.
“어서오십시오.”
방으로 들어선 조철봉을 기다리던 최갑중이 맞았다. 갑중이 먼저 와 있었던 것이다. 자리에 앉은 조철봉에게 갑중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형님, 조금전에 김선생이 다녀갔습니다.”
조철봉은 잠자코 머리만 끄덕였다. 김선생이란 유흥구에 파견된 북한 감독관이다. 그리고 화진에서 근무하던 북한아가씨 두명이 숙소를 이탈한 사고가 일어난 것이다. 북한당국에서 우려했던 첫사고였다. 아직 이 사실을 남북한 당국에서는 비밀로 취급하고 있었지만 만일 노출된다면 실습생 체류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었다. 방문이 열리더니 지배인과 함께 아가씨 한명이 들어섰다.
아가씨는 화진에 파견된 실습생 대표였는데 조철봉과는 초면이다. 잠자코 문쪽자리에 앉은 아가씨가 먼저 입을 열었다.
“실습생들의 동요는 없습니다.”
눈을 크게 뜬 아가씨가 다부지게 말했다.
“제가 이 일은 책임을 지겠습니다.”
이미 감독관에게도 시달렸을터라 조철봉은 머리만 끄덕였다. 그때 지배인이 입을 열었다.
“알아봤더니 어제 가게에 있는 한국 아가씨들한테 돈을 빌려갔습니다. 현재 파악한 바로는 70, 80만원 됩니다.”
계획적이라는 말이었다.
“술이나 한잔하지.”
불쑥 말한 조철봉이 술잔을 들자 길게 숨을 뱉은 지배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미스민은 여기 앉아있어.”
“아가씨 하나 더 데려와야 할 것 아냐?”
조철봉이 거칠게 말하자 지배인이 서둘러 방을 나갔다. 잠시후에 들어선 아가씨도 북한 실습생이었다. 물론 빼어난 미인이다. 미스민은 조철봉의 옆에 앉았고 박이라는 아가씨는 갑중의 옆에 앉았지만 분위기는 밝을 리가 없다. 상황이 상황인터라 갑중은 아예 입을 열 엄두도 내지 못했고 오히려 조철봉이 떠들었다.
“자, 한잔씩 마시자.”
조철봉이 술병을 들며 말했다.
“이런일도 예상하고 있었어.”
아마 북한측도 마찬가지일 것이었다. 폭탄주를 석잔씩 돌렸을 때 실습생 둘의 분위기도 풀어졌다.
“저도 도망치자고 유혹하는 남자가 있었어요.”
미스민의 이름은 민경주라고 했다. 민경주가 붉어진 얼굴로 조철봉에게 말했다.
“매달 생활비를 주겠다면서.”
조철봉의 시선을 받은 경주가 아랫입술을 물었다가 풀었다.
“돈이면 다 되는 줄 아는 망종들.”
“그래?”
쓴웃음을 지은 조철봉이 경주를 지그시 보았다.
“어떻게 돈으로 유혹을 했지?”
“2차 나가면 백만원을 준다고 하더군요. 또 어떤 사람은 아파트를 얻어줄 테니까 살림을 차리자고도 했어요. 열명에 아홉명은 돈으로 유혹을 했단 말입니다.”
조철봉이 머리만 끄덕였을 때 경주의 말이 이어졌다.
“망종들. 돈으로 망할 놈들. 애들도 그놈들의 꼬임에 넘어간 것이란 말입니다.”
“그것 참.”
듣기가 거북한듯 갑중이 입맛을 다시고는 흘끗 조철봉을 보았다. 그러나 말을 잇지는 않았다. 머리를 든 조철봉이 경주를 보았다.
“여기서는 돈이 얼굴이야.”
정색한 조철봉이 손으로 방안을 가리켰다.
“너희들은 일한 만큼 대가를 받고.”
어느덧 긴장한 경주를 향해 조철봉의 말이 이어졌다.
“비행기 1등석을 타본 적이 있나?”
물론 있을 리가 없는 경주가 입을 다물었고 조철봉의 목소리가 방을 울렸다.
“큰 비행기에는 대개 1등석, 2등석, 3등석으로 나누어져 있지, 그런데 1등석 비행기 요금은 3등석의 두배가 넘어. 같은 비행기를 타고 같은 시간에 목적지에 도착하는데도 요금을 엄청나게 낸단 말이지. 그 이유가 뭔지 아나?”
한모금에 술을 삼킨 조철봉이 길게 더운 숨을 뱉었다.
“3등석 요금으로는 비행기 기름값도 안나오기 때문이지, 그렇다고 똑같이 1등석 요금을 받는다면 너무 비싸서 아무도 비행기를 안탈 거라고.”
조철봉이 경주의 앞에 놓인 잔에 술을 따랐다.
“그게 여기 세상이야. 여기서는 능력에 따라 1등석, 2등석, 3등석 비행기를 타도 서로 자연스럽게 여긴다고.”
“그렇지요.”
갑중이 거들었다.
“여기서 돈자랑 하는 것은 죄가 아니라고, 잘못된 일이 아니란 말이야.”
머리를 돌린 갑중이 경주를 쏘아보았다.
“자본주의 사회란 말이야. 머리 잘 써서 돈 많이 번 놈이 인정받는 사회라고.”
“자, 그만.”
술잔을 든 조철봉이 두 아가씨를 번갈아 보았다.
“유흥구에 가서도 한국 손님들을 받을텐데 돈자랑 하라고 내버려 두라고. 그래야 돈을 많이 풀 것 아닌가?”
시선을 내린 경주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직 이해한 것 같은 눈치는 아니었다. 조철봉은 연거푸 폭탄주를 마신 터라 취했다. 밤11시 무렵이 되었을 때 허리를 편 조철봉이 경주를 보았다.
“나하고 같이 나가지 않을테냐?”
순간 방안의 분위기가 굳어졌고 모두의 시선이 모였다. 조철봉이 빙긋 웃었다.
“물론 2차 말이야.”
그러자 경주가 술기가 가신 얼굴로 조철봉에게 말했다.
“저는 규칙상.”
“한국 손님들하고는 2차 나가지 못하도록 돼있단 말이지?”
가로채듯 말한 조철봉이 엄지를 구부려 자신의 얼굴을 가리켰다.
“내가 누구냐? 유흥구 장관이야. 너희들 책임자라고.”
취기가 서려 있었지만 조철봉의 목소리는 또렷했다.
“내가 2차비로 백만원씩 주겠다. 이건 특급 요금이야. 미친 놈 아닌 이상 이 이상은 주지 않는다.”
그리고는 조철봉이 손바닥으로 탁자를 쳤다.
“연습을 하라고, 이제 유흥구에 돌아가면 이런 식으로 돈많은 한국놈들이 제의를 해올 때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연습을 말이야.”
조철봉이 눈을 부릅뜨고 경주를 보았다.
“물론 무조건 받아들이란 말은 아니다. 선택을 하란 말이야. 네가 좋아하는 놈으로.”
그때 경주가 입을 열었다.
“좋아요. 나가겠습니다. 하지만 돈은 받지 않겠습니다.”
경주의 목소리도 단호했다.
조철봉의 차에 넷이 동승하여 근처의 호텔에 들어설 때까지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각각 방을 나눠잡고 갈라섰을 때 오직 갑중이 조철봉에게 안녕히 주무시라고 인사만 했을 뿐이다. 작은 호텔이었지만 방안은 깨끗했고 시설이 좋았다. 창가의 의자에 저고리를 벗어 걸쳐 놓은 조철봉이 몸을 돌려 경주를 보았다.
“2차는 물론 처음이겠지?”
“네. 그렇습니다.”
당연한 것을 묻는다는듯 경주가 정색한 표정으로 조철봉을 보았다.
“전 아직 처녀입니다.”
저도 모르게 조철봉은 소리죽여 숨을 뱉었다. 경주를 데리고 나온 것은 술김때문이기도 했지만 돈에 대한 거부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의자에 앉은 조철봉이 턱으로 의자를 가리켰다.
“앉아.”
경주가 다소곳한 표정으로 앉았을 때 조철봉이 말을 이었다.
“기회를 주도록해. 마음을 열 기회를 말이야.”
눈만 깜빡이는 경주를 향해 조철봉이 희미하게 웃었다.
“이쪽 사람들은 너무 바쁘게들 살다보니까 돈부터 내미는 경우가 많아. 마음은 그 다음이지.”
어깨를 늘어트린 조철봉이 소리죽여 숨을 뱉었다.
“그걸 이해하지 못하면, 또 그럴 시간을 주지 않으면 돈만 아는 놈들로만 보이겠지.”
바로 자신의 이야기인 것이다. 지금까지 겪은 여자 대부분에게 조철봉은 돈부터 먼저 내밀었다가 스스로 도망치거나 돌아섰다. 이미 상처를 받지 않겠다는 두려움 때문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때 경주가 입을 열었다.
“적응해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조철봉의 시선을 받은 경주가 눈만 구부리며 희미하게 웃었다.
“무슨 말씀인지 이해도 합니다.”
“내가 바로 그런 유형중의 하나거든.”
조철봉이 눈의 초점을 늦추고는 앞에 앉은 경주의 온몸을 한눈에 보았다. 단정하게 무릎위에 두손을 얹고 앉은 경주의 얼굴에는 이미 술기운이 가셔져 있었다. 조철봉의 시선을 느낀 경주가 무릎을 덮은 스커트를 끌어내리는 시늉을 했다.
“그냥 자. 난 조금 있다가 나갈테니까.”
자리에서 일어선 조철봉이 냉장고를 열고 음료수를 꺼내 들었다.
“뭐, 마실 것 줄까?”
머리만 돌리고 묻자 경주의 긴장한 얼굴이 보였다.
“아닙니다. 됐습니다.”
오렌지주스를 한모금 삼킨 조철봉이 풀썩 웃었다.
“글쎄. 나처럼 이렇게 2차 가자면서 데리고 나와서는 이야기만 하고 싶은 사내가 있었을지도 모르지.”
“사내는 겪어봐야 안다는 말씀이군요.”
“물론이지. 선입견을 버리고.”
주스잔을 내려놓은 조철봉이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더니 수표 한장을 꺼내 탁자위에 놓았다.
“이건 용돈이다. 그냥 따라나와준 대가야.”
몸을 돌린 조철봉이 발을 떼며 말을 이었다.
“필요한 것 사서 써. 도망친 애들 일은 다 잊어버리고. 잘 해결될 테니까.”
그때 경주가 소리치듯 말했다.
“잠깐만요, 선생님.”
다급해진 경주가 조철봉을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주무시고 가세요.”
경주가 정색하고 말했다.
문의 손잡이를 쥔 조철봉이 머리만을 돌려 경주를 보았다. 무표정한 얼굴이었으므로 당황한 경주가 시선을 내렸다.
“내가 유흥구 책임자여서 그냥 나가는 것이 아냐.”
그 자세 그대로인 채 조철봉이 낮게 말했다.
“널 데리고 나왔을 때는 욕정이 절반쯤은 있었지만 지금은 다 사라졌다. 솔직히 말하면 억지로 섹스를 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
“저는 진심입니다.”
서두르듯 경주가 말했을 때 조철봉은 쓴 웃음을 지었다.
“물론 좋아서 따라나오는 경우는 드물겠지만 대부분은 너처럼 그렇게 강한 거부감을 풍기지 않아.”
“선생님.”
“이차 나갈 때는 거부감을 지우도록 해. 노력을 하란 말이야.”
그러고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 조철봉은 길게 숨을 뱉었다. 이것은 교육을 통해서 터득되는 것이 아니다. 겪어서 경험을 쌓아야 자연스럽게 익혀지게 되는 것이다. 비싼 돈내고 눈에 살기까지 띠고 있는 아가씨에게 치근댈 한량은 없다.
조철봉이 임미선의 아파트단지 앞에 섰을 때는 밤 12시반이 되어갈 무렵이었다. 물론 서울에만 해도 살림 차려준 여자가 여럿이었지만 조철봉은 저도 모르게 이곳까지 왔다. 김유신 전기를 읽으면 주색에 빠져 지내던 자신을 벌하고자 말등에 앉아 조는 사이에 사랑하는 애인 집 앞으로 데려다준 말의 목을 대신 베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어렸을 적에는 그 이야기에 무조건 감동하여 김유신의 단호함을 존경했다. 그러나 차츰 나이가 들고 나서는 왜 죄없는 말을 죽여야만 했단 말인가? 하고 의문을 품었다. 그리고 집안에서 기다리다가 영문도 모르고 문 밖에 피투성이가 되어 떨어진 말 머리를 본 여자가 황당해할 것을 떠올리고는 씁쓸했다.
다른 방법도 있었을 것이 아닌가? 그러고는 나중에 그 이야기를 지어낸 작가를 경멸했다. 조철봉이 그 이야기를 쓴다면 술취한 김유신을 데려다준 그 말을 애인 집 기둥에 매어 놓고는 걸어서 집에 돌아가는 장면을 만들었을 것이었다.
어쨌든 조철봉은 택시를 타고 이곳에 왔고 본의였다. 호텔에서 나왔을 때 바로 미선이 얼굴이 떠올랐던 것이다.
“어머나.”
조철봉의 전화를 받은 미선은 놀란듯 짧게 외쳤는데 결코 불편한 기색은 아니었다.
“지금 어디세요?”
미선이 높은 목청으로 물었으므로 오히려 조철봉이 조심스러워졌다. 아파트 안에는 어머니가 함께 있을 것이었다.
“아, 나, 지금 아파트 앞에 있는데.”
“어머나.”
“너무 늦었나?”
“아녜요. 늦긴요.”
그때서야 미선이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10분후에 들어오세요. 어머니하고 같이 있어도 괜찮죠?”
“나야 상관 없지만.”
“어머니는 주무시니까 괜찮아요.”
“이거 미안한데.”
“미안하긴요. 기다릴게요.”
미선이 전화를 끊었을 때 조철봉의 기력은 되살아났다. 바로 이것이다. 이렇게 진심으로 반기면 남자의 가슴은 다 가져 갈 수는 없다고 치더라도 지갑은 가능할 것이었다. 조철봉이 아파트의 벨을 눌렀을 때 일초도 되지 않아서 문이 열렸다.
“어서오세요.”
그 사이에 미선은 엷게 화장까지 했다. 눈웃음을 친 미선이 조철봉의 팔을 끌었다.
“저녁은요?”
밤 12시가 넘어 있었지만 미선이 정색하고 물었는데 인사치레가 아니었다. 먹지 않았다면 당장에라도 밥상을 차릴 분위기였다.
“먹었어.”
집안을 둘러본 조철봉은 앞장서서 안방으로 들어섰다. 건넌방에는 어머니와 미선의 딸 예림이 있을 것이었다.
“술상 차려 드릴까요?”
따라 들어온 미선이 묻자 조철봉은 저고리를 벗어 건네주었다.
“됐어. 그냥 쉬고 싶어서 온거야.”
“씻으세요.”
저고리를 받아든 미선이 조철봉의 넥타이를 풀면서 말했다. 바짝 붙어 서있었으므로 미선에게서 옅은 향내가 풍겼다. 비누와 살냄새가 섞인 향내였다. 조철봉이 팔을 뻗어 미선의 어깨를 쥐었다. 그리고 눈을 반쯤 감고 깊게 숨을 들이켰다. 미선의 냄새를 한껏 맡으려는 시늉이었다.
“음, 좋군.”
낮게 탄성을 뱉은 조철봉이 혼잣소리처럼 말했다.
“이것이 가족의 냄새인가보다.”
“가족요?”
이제 조철봉의 셔츠를 벗겨 내리면서 미선이 물었다. 미선은 아직도 정색하고 있었다.
“난 국산 비누만 써요. 향수는 뿌리지도 않았는데.”
“너하고 섹스를 하면 편안해. 마치 10년쯤 같이 잔 마누라처럼.”
“나도 좋았어요.”
바지 혁대를 풀면서 미선이 낮게 말했다. 힐끗 시선을 준 미선의 눈가가 조금 상기되어 있었다.
“믿지 않겠지만 자기하고 할 때 처음 그것을 알았어.”
“그것이라니?”
“아이, 참.”
몸을 비트는 시늉을 한 미선이 조철봉의 바지를 벗기더니 팬티를 손으로 가볍게 쳤다.
“엄마는 밖으로 나오지 않을테니까 그냥 이대로 욕실로 가요.”
“주무시는거야?”
“오신 것 아니까 더 안 나오실거예요.”
“이거 미안하군.”
조철봉은 팬티 차림으로 안방을 나와 욕실로 들어섰다. 따라 들어선 미선이 샤워기를 집었다.
“내가 씻어드릴게요.”
팬티를 벗어던진 조철봉이 알몸으로 돌아서자 미선은 눈을 흘겼다. 조철봉의 우뚝선 철봉을 본 것이다.
“정말 뻔뻔해.”
샤워기의 온도를 조절하면서 미선이 말했다. 그러나 싫은 표정은 아니었다.
“오늘 오후에 경윤 언니한테 빌린 돈을 갚았더니 의심하는 눈치였어요.”
물을 조철봉의 몸에 뿌리면서 미선이 말했다.
“돈을 어디에서 구했느냐고 몇번이나 묻더군요.”
“그래서?”
“시골에 있는 삼촌한테서 얻었다고 했죠.”
“내가 삼촌이 되었군.”
“믿지 않는 것 같았어요.”
“믿거나 말거나.”
조철봉이 한걸음 다가서며 미선의 허리를 안았으므로 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어머나.”
놀란 듯 미선이 몸을 틀었지만 반항하지는 않았다. 원피스는 이미 물에 젖었고 미선은 조철봉의 품에 안겼다.
“우리, 여기서 한번 할까?”
조철봉이 미선의 귀에 대고 물었다.
?摹抉굼?두손으로 조철봉의 가슴을 밀었지만 반응은 약했다.
“팬티만 내려.”
귓밥을 물며 조철봉이 뜨거운 숨결과 함께 말했을 때 미선이 원피스를 걷어 올리더니 팬티를 끌어 내렸다. 물에 젖은 팬티가 금방 끌려 내려지자 조철봉은 미선의 엉덩이를 당겨 안았다. 샤워기가 흔들리면서 욕실 안으로 물줄기가 어지럽게 뿜어졌다가 겨우 고정되었다.
“아이, 방에 들어가서.”
벌써 달아오른 미선이 낮게 말했지만 이미 두손은 조철봉의 목에 감겨져 있다. 샤워기의 물줄기는 조철봉의 등판에 쏟아지고 있었지만 미선의 머리칼도 젖었다. 하반신을 딱 붙인 미선은 조철봉의 철봉을 다리 사이에 육중하게 느끼고 있는 중이었다. 조철봉은 미선의 한쪽 다리를 올려 받치면서 익숙한 동작으로 철봉을 샘에 넣었다.
“아앗.”
미선의 입에서 탄성이 뱉어지더니 상반신이 빈틈없이 붙여졌다. 매달려 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엉덩이를 뒤로 조금 뺀 것은 누가 시키지 않았어도 하체 운동의 공간을 만들어 놓으려는 본능적인 행위였다. 조철봉은 미선의 엉덩이를 당기면서 운동을 시작했다. 치켜 올리고 있는 미선의 한쪽 다리가 지렛대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아아, 여보.”
갑자기 미선의 탄성이 높아졌으므로 조철봉은 긴장했다. 3평 공간의 응접실을 지나면 바로 건넛방이었고 그곳에 미선의 모친이 계시는 것이다.
“나 죽여줘. 여보.”
미선이 엉덩이를 흔들면서 다시 소리쳤는데 이미 두눈은 풀려진데다 샘은 위축되기 시작했다. 금방 절정에 오르고 있는 것이다. 심호흡을 한 조철봉은 먼저 미선을 만족시키기로 작정을 했다. 미선이 욕실에서 이런 자세로 섹스를 한 적은 없을 것이었다. 분위기를 보면 알 수가 있다.
더구나 건넛방에는 어머니가 귀를 세우고 있는 상황이다. 긴장감과 흥분이 배가 된 미선의 몸은 자제력을 잃기 시작했고 곧 샘이 폭발하기 시작했다. 수천마리의 지렁이가 샘 안에서 튀어 나온듯이 꿈틀거렸으며 입구는 경직되었다.
“으아아.”
숨이 막힌 것같은 비명을 지르면서 미선이 온몸을 굳혔을 때 조철봉은 뒤쪽으로 손을 뻗어 샤워기의 스위치를 껐다. 샤워기의 물 흐르는 소리로써 미선의 소음을 희석시키려고 했던 것이다. 절정에 오른 미선은 조철봉에게 빈틈없이 매달린채 이제 온몸을 떨고 있었으므로 욕실 안은 한동안 정적에 덮였다.
“자, 나가자.”
조철봉이 미선의 귀에 대고 낮게 속삭였다.
“건넛방 어머니가 다 들으셨겠다.”
그러자 미선이 겨우 눈을 뜨더니 두팔로 감은 목을 더 세게 조였다. 아직까지 욕실의 타일 벽에 등을 붙이고 선자세의 조철봉이어서 중심을 잘 잡아야만 했다.
“나, 죽을뻔 했어.”
미선이 겨우 말하더니 그때서야 하반신을 떼어 내었다.
“자기야, 나 어떻게 하면 좋아?”
“어떻게 하다니?”
뻔한 소리였지만 조철봉이 정색하고 묻자 미선은 지친듯 욕조위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물에 젖은 원피스가 몸에 착 달라붙었고 머리와 얼굴도 흠뻑 젖었다. 육감적인 모습이다. 미선이 아직도 흐린 눈으로 조철봉을 보았다.
“나, 자기를 사랑해. 자기 없으면 못살 것 같아.”
다음날 아침, 조철봉이 회사에 출근한 지 얼마되지 않았을 때 방으로 최갑중이 들어섰다.
“여기 있습니다.”
소파에 앉은 갑중이 탁자위에 서류 봉투 하나를 내려놓았다.
“남자 관계는 없고 평판도 좋습니다. 다만 생활에 쫓기다 보니까 이곳저곳에 채무 관계가 걸려있을 뿐입니다.”
머리를 끄덕인 조철봉이 갑중을 보았다. 갑중은 임미선에 대해서 샅샅이 조사를 해온 것이다. 이미 이런 일에는 이골이 난터여서 미선이 사용하는 화장지 상표까지 알아놓았을 것이었다.
“네가 들으면 이상하게 생각할지 모르겠는데.”
조철봉이 운을 떼었을 때 갑중의 표정이 조심스러워졌다. 그때 조철봉의 말이 이어졌다.
“그, 임미선 말이야.”
“예, 말씀 하십시오.”
“성남에다 사놓은 저택으로 옮겨가게 했으면 좋겠는데.”
“성남으로 말입니까?”
갑중의 얼굴이 굳어졌다. 두달쯤 전에 조철봉은 성남 교외에 2층 양옥집을 구입해 놓은 것이다. 잔디밭 정원에다 뒷마당에는 작은 동산까지 있는 대저택이었다. 갑중의 시선을 받은 조철봉이 헛기침을 했다.
“어차피 빈집으로 놔둘바에야 사람이 살게 하는 것이 낫지 않겠나?”
“그렇다면, 형님.”
정색한 갑중이 조철봉을 똑바로 보았다. 빈집에 살게 해줄 사람은 미선이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임미선씨 가족 모두를 말입니까?”
“모두라야 셋뿐이다.”
조철봉이 손가락 셋을 펴보였다.
“어머니하고 두살짜리 딸하고 말이야. 그러니 그곳에서 살려면 가정부에다가 동네 사람으로 관리인도 고용해야 되겠지.”
“……”
“인테리어 업자한테 연락해서 집안 장식도 다시 해야 될 것이고.”
“형님.”
탁자위로 몸을 굽힌 갑중이 겨우 말을 이었다.
“임미선씨하고 같이 사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럼 그냥 살게 하는 것으로 알았어?”
“알겠습니다.”
머리를 끄덕인 갑중이 상체를 뒤로 물렸지만 개운한 얼굴이 아니었다. 흘끗 갑중에게 시선을 준 조철봉이 혼잣소리처럼 말했다.
“같이 살겠어, 부부처럼.”
“……”
“자식도 낳고 싶고, 내 자식 말이야.”
“……”
“서경윤이 낳은 영일이는 어쩐지 반만 내자식 같다. 그쪽에서 자꾸 정을 떼려고 했기 때문인지 이제는 가슴도 떨리지가 않아.”
“형님.”
“네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
손을 들어 갑중의 말을 막은 조철봉이 어깨를 늘어뜨리며 말했다.
“임미선은 아주 평범한 여자지. 지금까지 내가 겪은 여자 중에서 아마 가장 두드러지지 않은 여자축에 들 것이다.”
“형님, 그것이 아니라.”
“나는 이제 그런 여자가 편안하고 좋다. 그저 조그만 일에도 감사하고 행복해 하는 여자가 말이야.”
다시 눈만 껌벅이는 갑중을 향해 조철봉이 희미하게 웃어보였다.
“물론 언제 다시 변덕이 발동할지 모르지만 나는 임미선하고 같이 있으면 행복하다. 임미선은 나를 사랑한다고도 했고.”
최갑중에게는 임미선이 전혀 예상 밖의 여자였을 것이었다. 지금까지 숱한 여자를 겪어 오면서 조철봉은 한번도 결혼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자식을 다시 낳겠다는 말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갑중은 자신이 가타부타 나설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는 더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그날 저녁 미선을 밖으로 불러내어 같이 식사를 하면서 조철봉은 차분하게 말했다.
성남에 2층 양옥이 있어, 그곳으로 어머니하고 예림이 세 식구가 옮겨 왔으면 하는데.”
젓가락을 내려놓은 조철봉이 정색하고 미선을 보았다.
“간단하게 말해서 식은 나중에 올리더라도 먼저 같이 살자는 것이지.”
긴장한 미선도 움직임을 멈추고는 몸을 굳혔다. 그때 조철봉의 말이 이어졌다.
“난 미선씨하고 같이 있으면 편해. 안정이 되고. 나한테 이런 느낌은 아주 드문 경우야. 그래서 소중하다구, 놓치기 싫은거야.”
이만하면 조철봉으로서는 많은 표현을 한 셈이었다. 거기에다 진심에서 우러난 표현이다. 그러자 미선이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리 같이 살자는 건가요?”
“그렇지, 같이 사는 거지.”
조철봉이 머리를 끄덕였다.
“아이를 낳아도 되고.”
“아이를 낳아도 돼요?”
놀란듯 되물은 미선의 얼굴이 금방 붉어졌다.
“우리 자식을 갖고 싶어요?”
“그랬으면 좋겠어.”
“날 사랑해요?”
“좋아해.”
바로 말한 조철봉이 상체를 조금 뒤로 젖히고는 미선을 보았다. 사랑한다든가 좋아한다는 기준은 이런 상황이 되면 모호해지는 것이다. 사랑해야만 결혼 조건이 갖춰진다면 자격 미달이다. 미선과 같이 있고 싶은 가장 큰 이유는 외로움 때문이다. 그다지 조건을 따지지 않는 미선의 성품이 편해 보였고 쉽게 행복해지는 것을 깨닫고서 관리하기에 큰 부담이 없을 것 같다는 계산도 했다.
한 여자의 의지를 한 몸으로 받게 된다면 부담도 있겠지만 그만큼의 안정감도 갖춰질 것이었다. 그리고 역시 그정도의 외로움도 상쇄가 된다. 그때 시선을 내린 미선이 낮게 말했다.
“좋아요. 살겠어요.”
이를 악물었다가 푼 미선의 말이 이어졌다.
“식을 올리지 않아도 돼요. 자기가 원하면 자식도 낳겠어요.”
“그것은.”
침을 삼킨 조철봉이 당황한 표정으로 미선을 보았다.
“아이는 낳지 않아도 돼. 나는 말하자면 같이 사는데 아이도 있다면 더 어울릴 것 같아서.”
“사내 아이를 낳겠어요.”
눈을 크게 뜬 미선이 입술 끝을 올리면서 웃었다.
“자기 닮은 아이로.”
“딸도 상관없어.”
영일의 모습을 떠올린 조철봉이 어깨를 늘어뜨리면서 말했다.
“딸이 더 효도한다고 하던데. 뭐.”
“예림이도 있잖아요?”
“그렇지, 예림이도 내 딸이지.”
조철봉이 서둘러 긍정했다. 그러나 아이들 이야기를 꽤 길게 하고 있어도 아직 실감은 나지 않았다. 그것은 미선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다시 젓가락을 집어든 조철봉이 생선회를 한점 입에 넣었다. 일식당의 밀실 안에는 잠시 정적에 덮여졌다. 그러나 둘의 역사가 한토막 이곳에서 만들어졌다. 소중한 날이다.
임미선은 사흘후에 성남의 2층 양옥으로 이사했다. 양옥은 비어있었으니 몸만 옮기면 되었던 것이다. 물론 어머니와 예림이도 같이 옮겼다. 미선이 이사를 간 다음날 아침, 집안 청소를 하고 있던 미선은 서경윤의 전화를 받았다.
“어쩜 그럴 수가 있니?”
대뜸 경윤이 그렇게 물었을 때 미선은 입술 끝을 비틀어 올리며 웃었다.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머, 언니, 먼저 연락드리려고 했는데….”
미선이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집 옮기느라 정신이 없어서요.”
“그렇겠지.”
경윤의 목소리는 굳어져 있었다.
“어쨌든 넌 새 세상을 만났구나.”
미선은 대답하지 않았다. 조철봉을 소개해준 것은 경윤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오장이 뒤집힌 듯한 태도로 자신을 대하고 있다. 그때 경윤의 목소리가 수화구에 울렸다.
“어쨌든 잘 살아라. 그런데 식은 언제 올리기로 했니?”
“식 같은건 신경쓰지 않아요, 언니.”
“흥, 그래?”
“우린 애 낳기로 했어요. 아들이건 딸이건간에.”
그러자 경윤이 뚝 말을 끊더니 숨을 두번 쉬고 뱉을 때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언니, 듣고 있어요?”
마침내 미선이 물었을 때 저쪽에서 수화기를 내려놓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 전화냐?”
같이 청소하던 어머니가 다가와 물었으므로 미선은 허리를 펴고 일어섰다.
“응, 경윤 언니.”
“아이고, 그래? 일이 잘 되었으니 좋아하겠구나.”
어머니가 웃음띤 얼굴로 말했다. 경윤이 조철봉을 소개해준 것을 어머니도 알고 있는 것이다.
“응, 그렇겠지.”
건성으로 대답한 미선이 걸레를 다시 쥐었다. 인간의 심리란 묘한 구석이 있다. 더욱이 여자들의 심보는 미선 자신조차도 측량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경윤이 조철봉을 소개해주었을 때는 둘의 사이가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얼마쯤은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막상 이렇게 되자 경윤의 심보는 완전히 뒤집혀 버렸다. 둘 사이를 박살내버리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 차 있을 것이었다. 조철봉이 경윤의 전화를 받은 것은 그날 오후였다.
“응, 웬일이야?”
이미 미선으로부터 연락을 받은 터라 경윤의 심사를 알고 있었지만 조철봉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그러자 경윤이 낮게 말했다.
“식도 안 올리고 살기로 했다던데, 아주 간단하게 처리하셨군.”
“어쨌든 고마워. 아주 착하고 편한 사람을 만나게 해줘서 말이야.”
사무실 안이었고 앞에는 최갑중이 앉아 있었으므로 조철봉은 낮게 말을 이었다.
“이제 나에 대해서 신경쓰지 않아도 돼. 그리고 나도 불쑥불쑥 그쪽을 찾아가지 않을테니까.”
“애 낳기로 했다면서?”
싸늘하게 경윤이 묻자 조철봉은 짧게 웃었다.
“그래, 가정에는 아이가 있는 것이 낫지.”
“그럴까?”
서경윤이 튕기듯 물었지만 더이상 말을 잇지는 않았다.
“그럼 이만.”
전화기를 내려놓은 조철봉은 이것으로 경윤과의 인연이 끊어지리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경윤이 만들어준 인연으로 그렇게 된 것이다. 우연이다.
그날 저녁, 조철봉은 퇴근하자마자 성남의 임미선에게 돌아갔다. 어머니와 함께 미선은 저녁 준비를 했고 예림이를 재워놓은 세식구가 식탁에 둘러앉았다.
“난 몇주 후에는 다시 외국에 나가 있어야 돼.”
된장국을 삼킨 조철봉이 미선과 어머니를 번갈아 보았다.
“한달에 4, 5일 정도만 한국에 있게 될 거야.”
그러자 미선이 차분하게 머리를 끄덕였다.
“예, 알겠어요.”
“물론 내가 수시로 연락을 하겠지만.”
“네, 기다릴 게요.”
“필요한 것은 회사에서 다 알아서 해줄 테니까.”
“걱정마세요.”
어머니는 시선을 내린채 잠자코 식사하는 시늉을 했지만 표정이 부자연스러웠다. 오늘 저녁 식사도 조철봉이 어머니를 억지로 식탁에 모셔온 것이다. 조철봉이 정색하고 말을 이었다.
“난 평범하게 가정 생활을 할수 있는 상황이 아니야.”
이제는 미선이 눈만 깜빡였고 조철봉의 목소리가 방을 울렸다.
“남편으로서 부족한 점이 많은 사람이지.”
어머니에게 머리를 돌린 조철봉이 정색했다.
“어머니, 죄송합니다. 하지만 어머님이나 미선이를 배신하지는 않겠습니다.”
어머니는 여전히 입을 열지 않았지만 굳어있던 얼굴은 조금 풀어져 있었다.
“글쎄, 신경쓰지 마시라니까요.”
미선이 부드럽게 말했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미선은 조철봉이 자신을 의지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그날 밤 침실에서 둘만 있게 되었을 때 미선이 조철봉에게 말했다.
“사랑해요.”
조철봉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미선이 말을 이었다.
“난 행복해요.”
방안은 조용했다. 새로 산 침대시트에서는 엷은 방향제 냄새가 났고 거칠한 촉감도 산뜻하게 느껴졌다. 조철봉은 천장을 향하고 누운채 심호흡을 했다. 미선이 지어낸 말을 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도 지금 편안하고 행복한 느낌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의 감정 또한 길고 깊어야만 형성된다고도 믿지 않는다. 믿음 또한 그렇다.
“나도 미선이를 사랑해.”
미선의 어깨를 감싸안은 조철봉이 부드럽게 말했다.
“그리고 나도 행복해.”
지금까지 조철봉은 수없이 많은 사랑을 고백했고 행복하다는 표현을 써왔지만 모두 진심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다만 그 기간이 길고 짧은 것만 달랐을 뿐이다.
“이런 감정은 처음이야.”
지금부터는 거짓말이었지만 조철봉의 표정은 진지했다.
“나한테 이런 행복이 찾아올 줄은 몰랐어요.”
미선이 두팔과 다리로 조철봉의 몸을 감싸안았다.
“사랑해요, 여보.”
조철봉은 잠자코 미선의 브래지어와 팬티를 벗겨내었다. 방금 샤워를 마치고 나온 미선은 브래지어와 팬티차림이었던 것이다. 불을 환하게 켜놓아서 미선의 알몸은 환하게 드러났다. 두손으로 얼굴만 가린 미선은 잠자코 조철봉의 다음 행동을 기다리고 있었다.
조철봉은 미선의 손등 위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러고는 그순간 문득 미선도 자신만큼 외로웠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세상 사람들이 다 그럴지도 모른다. 열렬히 사랑하는 그 순간만 잠깐 지나고나면.
다음날 아침, 회사에 출근한 조철봉은 기다리고 있던 최갑중과 사무실에서 마주 앉았다. 갑중은 벼르고 있었던듯 정색한 표정으로 조철봉을 보았다.
“형님, 박사장한테는 들르시지 않을 작정입니까?”
갑중의 시선을 받은 조철봉이 입맛을 다셨다. 박사장이란 박희선이다. 고아원을 운영하다가 지금은 실버타운의 대표이사가 되어있는 희선 또한 조철봉만을 의지하고 있는것이다.
“갑자기 박사장은 왜?”
조철봉이 묻자 이번에는 갑중이 입맛을 다셨다.
“형님이 전화를 받지도 않으신다면서요?”
“내가 바빠서.”
하지만 그 변명을 갑중이 받아들일리가 없다. 그동안 조철봉은 임미선과 데이트를 즐겼고 이제는 살림까지 차렸기 때문이다.
“그래, 무슨일로 날 찾는다더냐?”
궁금한듯 조철봉이 묻자 갑중이 탁자앞으로 다가앉았다.
“요즘 많이 지친 것 같습니다. 회사일은 별 문제가 없지만요.”
희선이 대표로 있는 실버타운 사업은 개업 첫해부터 흑자를 기록한데다 지금은 연간 50억원대의 순이익을 올리고 있는 것이다.
“알았어. 내가 연락을 하지.”
마침내 조철봉이 갑중에게 말했다.
“나도 떠나기전에 연락을 하려고 했었다.”
“그러셔야죠.”
아직도 얼굴을 펴지 않은 갑중이 조철봉을 보았다.
“박사장같은 사람도 없습니다.”
갑중은 지금 희선과 임미선을 비교하고 있는 것이다. 갑중의 시각으로 보면 박희선이 용모나 사회적 위치 또는 능력면으로 봐도 미선과는 비교가 되지않는 것이었다. 갑중이 방을 나갔을때 한동안 벽을 바라보며 앉아있던 조철봉은 전화기를 들었다. 오전 9시가 조금 지난 시간이어서 희선은 사무실에 있었다.
“어머, 웬일이세요?”
조철봉의 목소리를 듣자 희선이 놀란듯 목소리를 높였다.
“여러번 전화했었는데.”
“내가 바빠서.”
하지만 그말은 희선이 믿지않을 것이었다. 전에는 세상없어도 입국한 다음날에는 희선을 만났기 때문이다. 그때 희선의 목소리가 차분해졌다.
“오늘 저녁에 저한테 오실래요?”
희선이 생각난듯 덧붙였다.
“보고싶어서 그래요.”
“그래, 가지.”
그러고는 조철봉도 생각난듯 덧붙였다.
“나도 보고싶었어.”
이것도 진심이다. 희선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부터 안고싶은 충동이 일어났으며 당연히 보고싶어졌던 것이다. 희선에게 연락을 하지 않은 이유는 물론 미선때문이었다. 미선을 안정시키려고 딴곳에 정신을 쏟을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미선은 성남의 양옥집에 자리를 잡았다.
“그럼, 저녁때 기다릴게요.”
밝아진 목소리로 희선이 전화를 끊었을때 조철봉은 숨을 들이마시고는 마음을 가라앉혔다. 미선에게는 중국에서 손님이 왔다고하면 될것이다. 아니 그럴것 없이 오후에 출국한다고 하면 뒤가 더 깨끗해질 것이다. 미선이 공항에다 출국확인을 할것도 아니니까. 그날 저녁 조철봉은 실버타운 내에있는 희선의 숙소로 들어섰다. 저녁 8시반이었으니 아직 이른 시간이었다.
“어서오세요.”
희선이 밝은표정으로 조철봉을 맞았다.
희선은 분홍색 원피스 차림에 다리는 맨살을 드러내고 있었는데 금방 씻었는지 피부는 반질거렸고 머리칼에 아직 물기가 배어있었다.
“언제 나가세요?”
조철봉의 저고리를 받아들며 희선이 물었다. 언제 출국하느냐고 묻는 것이다.
“며칠후에.”
미선에게는 오늘 오후에 출국한다고 했으므로 이제 그쪽은 정리가 되었다. 알리바이만 완벽하고 실수가 없다면 미선과의 사랑은 꽤 오래 지속될 것이었다. 희선의 숙소는 실버타운 건물의 최상층을 개조한 것으로 아파트 평수로 계산하면 80평형쯤 될 것이다. 가구나 전자제품도 조철봉이 최신형으로 구비해 주어서 집안은 고급빌라 수준이었다. 식탁에 둘이 마주 앉아 저녁을 먹는 동안 희선은 실버타운 이야기로 화제를 이끌었다. 갑중이 말했던 것과는 달리 밝은 표정이었다.
그러나 조철봉은 희선의 태도가 전과는 다르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방에 둘만 있었을 때 상대방의 느낌을 읽지 못한다면 그는 무딘 인간이다. 최소한 좋고 나쁘고 따뜻하고 찬 따위쯤은 읽을 수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 희선으로부터 오는 느낌은 답답하고 무디었다. 비록 이야기는 밝고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는데도 그런 것이다.
“저, 회사 그만 두겠어요.”
한창 주책바가지 노인 한명의 이야기를 하던 희선이 불쑥 그렇게 말했어도 조철봉이 놀라지 않은 것은 이미 그 느낌을 받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정색한 희선이 조철봉을 똑바로 보았다.
“이제 그만 쉬고 싶어요.”
희선의 시선을 받은 조철봉이 희미하게 머리를 끄덕였다.
“고생 많이 했어. 알고 있어.”
수저를 내려놓은 조철봉도 정색했다.
“일은 다른 사람한테 맡기고 앞으로는 편하게 지내.”
그러고는 조철봉이 얼굴을 펴고 웃었다.
“물론 대표이사직은 그대로 유지하고 말이야.”
지금까지 실버타운의 경영은 조철봉이 선임한 전문경영자인 부사장이 맡아서 해온 것이다. 희선은 실버타운의 얼굴 역할만 해왔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고 해도 지장은 없다. 그때 희선이 단호한 표정으로 머리를 저었다
“아니요. 사표내겠어요. 그리고 이곳을 떠나 시골로 가려고 해요.”
“아니, 왜?”
놀란 조철봉이 눈을 크게 떴다.
“무슨 일이 있는 거야?”
“지쳤어요.”
시선을 내린 희선인 잇사이로 말했다.
“혼자 있고 싶어요.”
“알았어.”
소리죽여 숨을 뱉은 조철봉이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고아원 사업을 할 때와는 달리 실버타운 경영은 직접 원생이나 노인들과 부딪칠 기회가 거의 없는 것이다. 희선은 실버타운 대표이사가 되어서 매일 대차대조표나 읽었고 공식행사에 참석하면서 경영만 해온 셈이 될 것이었다. 말하자면 삭막한 생활의 연속이었다. 그때 희선이 입을 열었다.
“날 어떻게 생각하고 계세요?”
창밖을 바라보고 선 조철봉은 검은 유리창에 비친 희선의 모습을 보았다. 희선은 자신의 등을 바라보며 앉아 있었는데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몸은 굳어져 있었다. 조철봉은 다시 소리죽여 심호흡을 했다. “난 희선이 너 하나뿐이야.”
몸을 돌린 조철봉이 정색하고 희선을 보았다.
“내가 사랑하는 여자는 너뿐이라구.”
조철봉은 희선에게 다가가 섰다. 시선을 비스듬히 내린 채 희선은 숨도 쉬는것 같지 않게 앉아 있었지만 표정만은 상기되었다.
“희선아, 난 널 사랑해.”
희선의 어깨를 쥔 조철봉의 표정이 간절해졌다.
“떠나면 안돼, 희선아.”
갑자기 희선이 떠난다는 말에 충격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조철봉에게 희선은 아직도 상관하고 있는 10여명의 여자들중 하나일 뿐이었다. 만나면 새롭게 뜨거워졌지만 헤어지면 금방 잊게 되는 관계인 것이다. 그때 희선이 말했다.
“오빠, 또 여자한테 살림 차려 주셨더군요.”
이제 조철봉은 창틀에 등을 붙이고는 희선을 정면으로 보았다. 태연한 표정이어서 희선의 말에 자극을 받은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희선의 표정은 필사적이었다. 지금까지 희선은 한번도 조철봉의 여자 관계에 대해서 상관한 적이 없다. 믿고 있었다기 보다도 초연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저도 이젠 정착할 상대가 필요해요. 가정을 갖고 싶은 거죠.”
희선이 한마디 한마디를 또박또박 말했다.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남편, 평생을 함께 살아갈 남편과 자식이 그리워요.”
“그렇다면 나하고 결혼식을 올리기로 하지.”
거침없이 말한 조철봉이 희선에게 다가가 두 손을 어깨 위에 얹었다.
“공식적인 내 아내가 되는거야, 너는.”
희선은 이런 조철봉의 반응을 예상하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눈을 크게 뜬 희선이 눈만 깜박였을 때 조철봉이 어깨를 당겨 안았다.
“그리고 우리는 자식을 낳는 거야. 아들 딸 하나씩은 어때?”
“….”
“결혼식은 중국에서 하는 것이 낫겠다. 그렇지. 근사한 휴양지를 찾아보도록 하지.”
“….”
“살림집은 서울 교외에 전원주택을 마련하면 되지 않을까? 희선이는 그곳에서 출퇴근을 하고 말이야.”
“오빠.”
마침내 조철봉의 가슴에서 머리를 뗀 희선이 입을 열었다.
“오빠, 마음에도 없는 말씀 하지 마세요. 저는 다만.”
“아니야.”
조철봉이 단호한 표정으로 머리를 저었다. “내가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릴 여자는 너 뿐이야.”
희선의 얼굴을 두손으로 감싸쥔 조철봉이 정색하고 내려다 보았다.
“네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줄은 몰랐어. 오히려 나는 네 말을 듣고 더 기쁘다. 왜냐하면.”
조철봉이 열렬한 표정으로 희선에게 말했다. “사랑한다, 희선아. 내가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여자는 너 뿐이다.”
희선과 시선이 마주쳤을 때 조철봉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조철봉이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말을 이었다.
“희선아, 오빠는 외로워,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딸꾹질을 한 조철봉이 짧게 흐느껴 울었다.
“그래서 이 여자 저 여자한테 살림을 차려주고 잠자리를 같이 했지만 그것으로 가슴이 채워지는 것이 아니었다.”
손등으로 얼굴을 훔친 조철봉이 허리를 펴고 상반신을 세웠다.
“희선아, 너한테만 내가 진심을 털어놓는 거다. 그런 여자는 너밖에 없어.”
절실한 표정이었고 대사였지만 모두가 거짓말이다. 다른 여자한테도 다 그랬다.
희선은 이런 결과가 오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었다. 그러나 감동을 받은 것은 분명했다. 남자가 여자의 눈물에 약하다는 말도 있지만 물론 상대적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 여자가 징징대면 그것만큼 보기 싫은 몰골도 없다. 남자의 눈물 또한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번 상황에서 조철봉의 눈물은 적절했다. 요즘 조철봉은 자주 눈물을 쏟았지만 적절한 기회를 선택한 것이다. 조철봉이 어깨를 잡아 일으켰을 때 희선은 잠자코 따라 일어섰다. 침실로 들어선 조철봉이 희선의 몸을 세우고는 입술을 포개었다.
“사랑해. 희선아.”
입술을 뗀 조철봉이 낮게 말했을 때 희선의 팔이 목을 감았다.
“사랑해요. 오빠.”
진심이다. 물론 조철봉의 지금 감정도 진심에서 우러난 소리인 것이다. 조철봉이 선채로 희선의 옷을 벗겨내렸다. 몸을 비틀어 옷이 벗겨지는 것을 도우면서 희선도 조철봉의 바지와 팬티를 끌어내렸다. 금방 알몸이 된 둘은 침대위로 뒤엉킨 채 쓰러졌다. 방안은 환했고 문은 활짝 열려져 있었지만 집안에는 그들 둘뿐이다.
“오빠가 불쌍해.”
젖은 목소리로 말한 희선이 조철봉의 철봉을 두손으로 감싸쥐었다.
“오빠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어.”
“네가 행복해하는 것이 바로 내 행복이야.”
희선의 젖가슴과 허리를 쓸어내리면서 조철봉이 신음하듯 말했다.
“오빠. 내가 위에서 해줘?”
허덕이며 상반신을 일으킨 희선이 조철봉의 몸 위로 오르면서 물었다. 전에는 희선이 이러지 않았다. 수동적이면서 부끄러워했고 성의 쾌감을 알면서도 폭발하기 전까지는 감추려고만 했던 희선이다. 조철봉이 머리를 끄덕이자 희선은 거침없이 철봉을 샘안에 넣었다. 전희가 거의 없었지만 희선의 샘은 이미 뜨겁게 젖어있었고 철봉이 진입하자 환호하듯 벽의 세포가 꿈틀대며 맞았다.
“아아.”
희선의 신음이 거침없이 터지면서 상반신이 번쩍 치켜져 올랐다가 내려졌다. 그러고는 조철봉의 움직임에 맞춰 하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조철봉은 희선의 몸이 익숙하게 자신과 맞춰져 있는 것을 느꼈다. 이것이 사랑이다. 몸과 마음이 일체가 되면 단 한두번의 움직임에도 환희가 오는 것이다.
“오빠. 행복해.”
기마 자세로 앉은 희선은 눈을 감은 채 턱을 반쯤 치켜들고 있었으므로 상반신이 환하게 드러났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젖가슴이 탄력있게 출렁거렸으며 팽팽하게 긴장된 아랫배는 단단했다.
“오빠. 오빠.”
다급하게 희선이 비명처럼 탄성을 뱉기 시작한 것은 5분도 되지 않았을 때였다. 벽의 세포가 강하게 압박을 시작했고 전체가 함몰될 듯 조여드는 것은 곧 희선의 몸이 폭발한다는 증거였다. 희선의 젖가슴을 두손으로 감싸쥔 채 조철봉은 낮게 탄성을 뱉었다. 성의 환희를 희선에게 알려준 남자는 바로 자신인 것이다. 희선이 뱉은 탄성 한마디, 움직임 하나까지 모두 자신의 작품이나 같다.
“아앗.”
마침내 희선이 온몸을 조철봉의 위에서 새우처럼 웅크리더니 비명을 질렀다. 그러고는 숨도 쉬지 않는 것처럼 굳어져 버렸으므로 조철봉은 손을 뻗쳐 희선의 몸을 감싸 안았다.
“오빠.”
그때 희선이 굳어진 채 울기 시작했다.
“사랑해. 오빠.”
조철봉은 심호흡을 했다. 행복했다.
다음날 아침, 10시경이 되었을 때 조철봉은 전화기를 들었다. 벨을 누르자 신호음이 두번 울리더니 곧 응답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서경윤이었다.
“나야.”
짧게 말한 조철봉이 심호흡을 했을 때 수화구에서 서경윤의 높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어머나, 웬일이야? 아침부터.”
“할 이야기가 있어. 점심때 블루호텔에서 만나, 점심이나 같이 하자구.”
그러자 서경윤이 망설이는 것처럼 한 호흡 뜸을 들이더니 곧 승낙했다. 예상했던 일이었다. 임미선에게 살림을 차려준 후에 경윤에게 연락을 끊고 있었으니 궁금하기도 할 것이다. 속이야 어떻든 미선을 소개시켜준 것은 경윤인 것이다. 12시 정각이 되었을 때 경윤은 블루호텔의 라운지로 들어섰는데 오늘은 1분도 늦지 않았다. 경윤은 분홍색 투피스 정장차림으로 입술에는 진홍색 루주까지 발랐다. 여자의 화장은 상대에 따라서 분위기가 달라진다. 미운 사람을 만나러 갈 때도 화장을 하는 것은 표정을 보이지 않으려는 속셈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앞에 앉은 경윤의 짙게 화장한 얼굴은 요염했다. 강한 향수까지 뿌리고 나와서 자극적이었다. 눈을 가늘게 뜬 조철봉이 경윤을 보았다.
“내가 미선이 살림차려준 것은 알고 있을 것이고.”
단조로운 목소리로 조철봉이 말을 이었다.
“뭐, 다 네가 날 생각해서 소개시켜 준 것이니까 말이야.”
“흥.”
가볍게 코웃음을 친 경윤이 흘끗 조철봉에게 시선을 주었다.
“어쨌든 따먹는 수단은 좋으셔.”
“그거야.”
입맛을 다신 조철봉이 정색했다.
“널 나오라고 한 것은 내가 뭔가 사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
경윤의 시선을 잡은 조철봉이 말을 이었다.
“이제 앞으로 서로 만날 기회도 드물것이고.”
“뭘 해줄건데?”
“네가 원하는걸 말해봐.”
“원하는건 다 해줄 거야?”
“내 능력이 닿는다면.”
그러자 경윤이 초점없는 시선으로 조철봉의 가슴께를 보았다. 뭔가를 생각하는 표정이 되었다. 그때 조철봉이 길고 굵은 숨을 뱉었다.
“넌 날 생각한다고 미선씨를 소개시켜줬지만 그것으로 내가 안정을 찾을 수 있을것 같더냐?”
경윤이 시선을 들었을 때 조철봉이 희미하게 웃었다.
“안돼. 어떤 여자도.”
“아니 그럼 왜?”
경윤이 물었지만 전혀 놀랍다거나 의아하다는 표정은 아니었다.
“그럼 왜 살림을 차려줬어?”
“미선한테 필요한 것은 우선 물질적인 안정이었으니까.”
“흥.”
했지만 경윤은 정색한 표정이었다. 맞는 말인 것이다. 그때 조철봉이 팔을 뻗어 경윤의 손을 쥐었다.
“경윤아.”
조철봉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난 너를 사랑해. 난 너밖에 없어.”
그때 갑자기 목이 메었으므로 조철봉은 헛기침을 했다.
“어떤 여자와 함께 있어도 내 가슴은 비어있는 느낌이야. 아무도 나를 안정시키지 못해.”
조철봉이 길게 숨을 뱉었다.
“너하고 있을 때만 가장 편안해.”
그러고 보면 조철봉은 이틀 반나절 동안에 세여자를 만나 사랑한다고 고백했으며 각각 너하고 같이 있으면 행복하고 편안하다고 말한 셈이 되었다. 그러나 우습지도 않게 조철봉은 세여자에게 진심을 말했다고 믿고 있었으며 전혀 이상하거나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이다. 경윤으로 말할 것 같으면 아마 이 세상에서 조철봉을 가장 잘 알고있는 여자였다. 그러나 지금 조철봉의 고백을 듣고나서 눈동자가 희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이남자, 웃겨.”
말은 그렇게 뱉었지만 경윤의 시선은 부드러워져 있었다.
“그 뻔한 거짓말은 귀가 닳도록 들었어. 이젠 레퍼토리 좀 바꿔봐.”
“경윤아.”
조철봉이 경윤의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이렇게 우리 둘이서만 가끔 밖에서 만나자. 그러면 네 남편한테도 부담이 적을 것이고.”
“시끄러.”
“너하고 상의할 일이 많아. 예를 들어서 여자들 문제라든가.”
“이 남자 미쳤네.”
“진심이야.”
“날더러 교통정리 하라구?”
그러자 조철봉이 어깨를 늘어뜨리며 길게 숨을 뱉었다.
“나한테는 믿을 만한 여자가 너뿐이야.”
“배고파, 밥부터 먹자구.”
정색한 경윤이 말했으므로 조철봉은 서둘러 일어섰다. 5분쯤후에 그들은 호텔 2층의 일식당 방에서 마주앉아 있었는데 분위기가 조금 부드러워져 있었다. 요리를 시킨 조철봉이 웃음띤 얼굴로 경윤을 보았다.
“일식당에 오면 언제나 네 생각이 나.” 경윤의 시선을 받은 조철봉이 은근한 표정으로 말했다.
“너 기억나니? 나하고 일식당에서 하던때 말이야. 그때 영일이는 옆에서 자고 있었지.”
“시끄러.”
“네 반응이 격렬했는데, 소리를 죽이려고 물수건을 입에다 물고 있었잖아?”
“기가 막혀.”
“네가 숨이 막혔었지.”
“이 구제불능의 사기꾼.”
조철봉은 더이상 말을 잇지 않았지만 방안의 분위기가 더워져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경윤이 오늘 나온 것은 궁금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남이 따간 감이 더 커보인다고 미선에게 조철봉을 소개는 시켜주었지만 막상 성사가 되자 배가 꼬인 것이다.
요리에 곁들여 둘은 낮술을 마셨고 점심을 마쳤을 때는 모두 취기가 올라 있었다. 이 나이쯤 되면 술을 마신 후에 어떤 상황이 되리라는 것은 짐작할 수가 있는 것이다. 조철봉이 엽차잔을 내려놓고는 은근한 시선으로 경윤을 보았다.
“너도 얼굴이 빨개졌는데 방에서 쉬었다 가지 그래?”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조철봉이 말을 이었다.
“뭐, 까놓고 말해서 우리가 같이 있은지도 오래 됐잖아?”
“미쳤군.”
“그래, 미쳤다.”
“미선이 한테나 가.”
“미선이 몸은 너에 비교하면 하급품이지.”
“흥.”
코웃음을 쳤지만 경윤은 불쾌한 표정이 아니다. 자리에서 일어선 조철봉이 경윤의 팔을 잡아 끌었다.
“자, 가자.”
그러고는 경윤의 허리를 두팔로 감아 안고는 재빠르게 입술을 덮쳐왔다.
침대에 경윤을 눕혔을 때 조철봉은 속삭이듯 말했다.
“아마 너도 나하고 할 때가 가장 좋을걸?”
“미쳤어.”
했지만 어느덧 경윤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다. 조철봉은 익숙한 손놀림으로 경윤의 옷을 벗겨내렸다. 순식간에 경윤을 알몸으로 만든 조철봉이 이제는 여유있게 서서 옷을 벗었다. 환한 불빛에 비친 경윤의 알몸은 아직도 팽팽했다. 허리와 허벅지에 약간 살이 붙었지만 그것이 오히려 더 육감적이다.
조철봉의 시선을 의식한 경윤이 두다리를 오므렸는데 짙은 숲이 솟아오른 것처럼 느껴졌다. 조철봉은 번들거리는 시선으로 경윤을 내려다 보았다. 어쨌든 이 여자와의 인연은 가장 질기다. 숱한 여자를 겪었지만 지친 몸으로 이 여자에게 돌아왔다가 떠날 때는 새 기분이 되는 것이다.
“뭐해?”
마침내 투정하듯 경윤이 반쯤 눈을 뜨고 말했을 때 조철봉은 침대 위로 올랐다. 경윤과는 온갖 자세로 즐겨보았지만 특별히 선호하거나 기피하는 스타일이 없다. 조철봉이 몸을 안았을 때 경윤이 상반신을 비틀면서 말했다.
“먼저 뒤에서 해줘.”
거절할 이유가 있겠는가? 경윤이 얼굴을 맞대기가 싫기 때문인지도 모르지만 조철봉은 거침없이 경윤의 등뒤로 몸을 옮겼다. 침대위에 낮게 몸을 엎드린 경윤의 자세는 더욱 자극적이었다. 밋밋한 등판위로 봉긋 솟아오른 두 엉덩이는 탄력있게 보였으며 시트를 움켜쥔 손등에는 이미 푸른 정맥이 돋아나 있었다.
음미하듯 경윤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조철봉은 이윽고 서서히 철봉을 진입시켰다. 무릇 난봉꾼 치고 이때의 느낌을 제1등으로 치지않는 사람이 있다면 난봉질을 헛한 것이 될 것이다. 미끈하며 축축한, 그리고 뜨겁게 열기를 품어내는 샘안으로 자신의 철봉이 천천히 진입하면서 벽에 붙여진 수만개의 세포와 교감을 이루는 것이다.
“으으음.”
신음은 먼저 조철봉이 뱉었다.
“아아.”
경윤의 입에서도 억제하지 못한 탄성이 터져나왔다. 그러고는 감질난듯이 엉덩이를 흔들어 조철봉의 몸에 밀착시켰다. 조철봉은 천천히 하반신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고서를 보면 강3 약3 또는 좌3 우3 등등 별놈의 수작이 다 나오지만 그것은 마치 여자 배위에 엎드려서 수학공식을 푸는 놈이나 같다.
여자의 몸이 모두 다르듯이 느낌도 다르기 마련이다. 공식대로 철떡거리다가 나온 놈치고 오래가는 꼴을 보지 못했다. 경윤은 불덩이처럼 뜨거워져 있었는데 신음을 거침없이 뱉어내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엉덩이를 당기면서 말했다.
“이젠 앞에서.”
얼굴을 맞대고 행사를 치를 준비가 된 것이다. 아니, 정신이 없어서 이것저것 따질 상황이 아닐지도 모른다. 조철봉은 경윤의 몸을 안은 채 그자세 그대로 전위형이 되었다. 철봉을 그대로 샘안에 둔채로 자세를 바꾼 것이다. 전위자세는 남녀가 가장 치밀하게 호흡을 맞출 수 있는 자세이기도 하다.
“아유, 죽겠어.”
마침내 경윤의 입에서 말이 튀어나왔다. 신음보다 말이 만들어져 나온다는 것은 그만큼 정신이 나갔다는 뜻일 것이다. 조철봉은 차근차근 경윤을 밀어올리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지장보살의 진언을 떠올렸으나 생각나지 않았다. 요즘은 쓸 기회가 적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경윤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관세음보살.”
/ 글 이원호
(746)인생-1
경윤은 침대위에 반듯이 누워 있었는데 시트로 아랫도리를 가리지도 않았다. 땀이 밴 이마에 젖은 머리칼이 달라붙어 있었고 닦지 않은 몸에는 물기가 번들거렸다. 조철봉은 침대 끝의 의자에 앉아 경윤의 몸을 물끄러미 보았다. 경윤의 거칠게 오르내리던 아랫배가 차츰 잠잠해지기 시작하면서 숨소리도 가라앉았다.
그러나 경윤은 아직 눈을 뜨지 않았다. 조철봉의 시선이 경윤의 젖가슴에서 발끝까지를 차근히 훑어내렸다. 영일에게 젖을 물렸지만 젖꼭지는 아직 단단하게 솟아있었고 물기에 덮인 샘은 싱싱하게 느껴졌다. 담배 연기를 길게 뱉은 조철봉이 입을 열었다.
“내가 사랑했던 여자는 너하나뿐이야.”
남은 담배연기와 함께 조철봉의 말이 경윤의 배위로 깔려졌다.
“내 방황은 너 때문에 시작되었어.”
그때 경윤이 눈을 떴다. 그러나 시선은 천장으로 향해져 있다.
“그렇다고 너한테 책임을 묻는다는 건 아니야. 다 원인은 내가 제공했으니까.”
“…”
“하지만 너를 안을 때는 행복해. 지금도 너를 사랑하고 있다는 확신이 들고.”
“흥.”
마침내 경윤이 낮게 코웃음을 쳤다. 그러고는 두 팔과 다리를 힘껏 뻗으면서 기지개를 켰다. 경윤의 입에서 낮은 탄성이 저절로 뱉어졌다. 조철봉은 경윤의 두발이 힘껏 뻗쳐지면서 발가락도 바깥쪽으로 굽혀지는 것을 보았다.
“아아, 좋아.”
이윽고 기지개를 그친 경윤이 밝은 표정으로 조철봉을 보았다.
“그건 인정해. 당신 기술이 완벽해졌다는 것을. 물론 수없이 많은 단련을 했기 때문이겠지만.”
그러고는 경윤이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그런데 관세음보살이 뭐야? 관세음보살이?”
“긴장을 풀려는 것이지.”
“하느님은 안찾나?”
“시끄러.”
입맛을 다신 조철봉이 정색했다.
“내가 마음먹고 말할 때는 좀 긴장해서 들으라구.”
“흥, 입만 열면 거짓말인 인간인데 뭘 긴장해서 들으라는거야?”
경윤의 시선이 처음으로 조철봉에게 향해졌다.
“딴 여자들은 그 사기에 넘어갈지 모르지만 난 안돼.”
“네가 내 고향같은 여자라는 말은 믿을 것이다.”
여전히 정색한 조철봉이 말을 이었다.
“다른 여자한테는 한번도 이런 적이 없었다는 것을.”
“흥.”
“나는 한번도 다른 여자에게 사랑한다는 고백을 한 적이 없어.”
“흥.”
“너 하나뿐이야. 내가 사랑한다고 말한 여자는.”
“그래, 잘해봐”
“그래서 말인데.”
조철봉이 침대로 바짝 다가앉자 그때서야 경윤이 시트로 하반신을 가렸다.
“앞으로 한달에 한번쯤은 네가 나하고 만나줘야겠어. 아무래도 이사장 사업문제도 얘기를 해줘야 할 것 같고.”
긴장한 경윤이 눈을 크게 떴고 조철봉의 말이 이어졌다.
“이사장 사업이 심각해. 우리가 돈을 여러번 쏟아 부었지만 밑빠진 독에 물붓기란 말이야.
약점없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조철봉이 누구인가? 이종학의 약점이 있는 이상 경윤은 조철봉의 인질이 되어야만 할 것이다.
조철봉이 말을 이었다.
“주위에서는 손을 털라고 하는데 만일 그렇게 한다면 열흘도 못가서 이사장은 부도를 맞게돼.”
입맛을 다신 조철봉이 말을 이었다.
“만일 그렇게 되면 이번에는 사기에다 횡령혐의까지 있어서 형을 오래 살게 될거야. 이사장이 나를 믿었는지 사업을 크게 벌였거든.”
“나한테는 사업이 잘 된다고 했는데.”
마침내 경윤이 혼잣소리처럼 말했다.
“또 나한테 사기치는거 아니야?”
“내가 그럼 손을 떼어볼까?”
정색한 조철봉은 경윤을 보았다.
“믿기지 않으면 네가 내일 우리 회사로 나와서 경리 담당자의 설명을 들어보든지. 그러면 이해가 갈테니까.”
“….”
“경영이 엉망이야.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야.”
기가 질린 듯 경윤은 더이상 입을 열지 않았고 조철봉은 담배를 찾아 입에 물었다. 이종학의 경영은 엉망이긴 했다. 그리고 실제로 며칠후에는 부도가 날 것이었다. 지금까지 이종학은 조철봉으로부터 10억이 넘는 자금을 빌려 써왔지만 제대로 흑자를 낸 적이 한달도 없었던 것이다.
이종학이 시작한 의류 납품업은 경쟁이 치열해서 마진이 박했고 사고가 여러번 나서 클레임이 밀려있는 상황이었다. 거기에다 이종학은 회사 공금을 유용했고 통관문서를 위조해서 관세환급금을 횡령했다. 조철봉이 보낸 감사역이 철저하게 조사해놓은 것이다.
그러나 모든 문제는 자금으로 해결이 된다. 5일후에 7억 정도의 자금만 지원받으면 회사는 순풍에 돛을 단 배처럼 나아갈 것이었고 공금 횡령과 사기혐의도 자연스럽게 벗겨지게 된다.
“그럼 어떻게 해?”
마침내 경윤이 그렇게 물었을 때 조철봉은 회심의 웃음을 띠는 대신 길게 숨을 뱉었다. 이제 다시 경윤의 목에 개줄(?)을 묶은 것이다. 경제적 시련을 한번 겪어본 사람은 두번 다시 반복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때의 고통과 수모는 죽는 것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경윤은 이종학과의 생활에서 이미 한번 그것을 겪었다. 물론 조철봉의 농간에 의해서였지만 종학이 감옥에 갔을 때 경윤은 비참한 생활에 눌려 여러번 죽음까지 생각했었다.
“방법은 자금 지원밖에 없는데 지금까지는 내 비자금에서 지출이 되었지만 앞으로는 곤란해. 그래서 회사 자금이 지원된다면 이사장은 경영에서 손을 떼야만 될거야.”
“….”
“우리가 보낸 관리인이 관리를 맡는거야. 하지만 곧 부도가 날 이사장 회사라 자금을 지원하고 관리를 해야만 할 명분이 없단 말이야.”
조철봉이 진지한 표정으로 경윤을 보았다. 다 거짓말이다. 자금은 조철봉의 개인 자금에서 나갈 것이었고 최갑중 외에는 이종학의 사업체에 대해서 아무도 모른다. 그때 경윤이 시트로 온몸을 여미고는 일어나 앉았다. 마치 로마의 원로원 의원같은 모습이었고 표정도 비슷했다.
“좋아, 내일 회사에 가서 경영상태를 보겠어.”
침을 삼킨 경윤이 말을 이었다.
“만일 그말이 사실이라면 그 사람을 사업체에서 손을 떼게 해줘, 마누라 전남편한테 자금 빌려다 차린 회사를 두번씩이나 망하게 하는 병신이니까.”
조철봉은 경윤의 눈빛에서 결연한 의지를 읽었다. 그것은 이종학에 대한 불신과 경멸까지 섞인 결과일 것이다.
최갑중이 회사로 찾아 왔을 때는 퇴근 시간이 되어갈 무렵이었다.
“한잔 하시지 않으시렵니까?”
소파에 앉은 갑중이 정중하게는 물었지만 눈빛이 강했다. 조철봉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는 것이 대답을 받고야 말겠다는 표시 같았다.
“너도 알다시피 내가 요즘 피곤하다.”
컴퓨터 전원을 끈 조철봉이 말하자 갑중이 정색하고 머리를 끄덕였다.
“압니다. 바쁘신지.”
갑중의 시선이 조금 비껴났다.
“내일 영일 엄마가 오시면 김부장이 완벽하게 수습을 할겁니다. 꾸밀 것도 없이 현실 그대로만 보여줘도 기절을 할 상태니까요.”
서경윤은 내일 오전에 회사를 방문하여 경리부 김부장을 만나 이종학의 사업체 현황에 대한 감사 결과를 보게될 것이었다. 조철봉의 의도를 알고 있는 갑중이라 완벽하게 준비를 해놓았다는 말이었다.
“좋아, 간단하게 한잔 하자.”
자리에서 일어선 조철봉이 말하자 갑중의 얼굴에 생기가 떠올랐다.
“오늘은 나이트에 가시지요. 잘나가는 곳입니다.”
“유흥구 실습생들이 있는 곳인가?”
“실습생들은 없습니다.”
사무실을 나온 그들은 조철봉의 승용차 뒷좌석에 나란히 앉았다. 유흥구의 실습생 두명이 도망친 사건은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 그래서 감시가 더 강화되었지만 북한측이 별도 조치는 하지 않았다. 그만큼 행동이 유연해진 것이다. 갑중이 조철봉을 안내한 곳은 서울시 외곽에 위치한 도로변의 빌딩 앞이었다.
빌딩에는 커다란 나이트클럽 네온사인이 휘황하게 번쩍이고 있었는데 9층 빌딩의 위쪽 2개층이 나이트클럽이었고 아래쪽 2개층은 룸살롱, 그 밑의 3개층이 호텔이었다. 그리고 1, 2층이 식당과 상가였으니 빌딩 안에서 먹고 사고 놀다가 자고 갈 수 있도록 다 갖춰 놓았다. 차에서 내렸을 때 갑중이 조철봉에게 말했다.
“이곳에 필리핀 가수와 러시아 아가씨들이 많습니다. 물이 좋기로 소문이 난 곳이지요.”
조철봉이 잠자코 머리만 끄덕였다. 갑중은 미리 예약을 해놓아서 지배인과 마담까지 로비로 나와 맞아들였는데 법석은 떨었지만 불쾌하지는 않게 둘을 특실로 안내했다. 지배인은 40대 초반쯤의 건장한 체격의 사내였다. 대개 이런 물에서 놀다보면 건달 분위기가 풍겨지기 마련으로 일부러 나타낼 필요도 없는 법이다. 그러나 조철봉은 지배인의 과시하는 듯한 태도가 거슬렸다. 웨이터들에게 지시를 하는 행동이 과장되어 있는데다 눈빛에 필요없는 힘이 들어간 상태였기 때문이다. 술과 안주를 시키고나서 방에 둘이 남았을 때 갑중이 입을 열었다.
“제가 며칠 전에 이곳에 왔었는데 아주 물이 좋았습니다.”
“파트너가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군.”
“러시아 아가씨였는데 아주 끝내줬지요.”
“그래?”
건성으로 대답한 조철봉이 방안을 둘러보았다. 그들은 나이트클럽 빌딩의 6층인 룸살롱 특실에 앉아있는 것이다.
한국 룸살롱이나 클럽에 러시아, 필리핀등에서 온 아가씨들이 일하게 된 것은 꽤 오래되었다. 조철봉도 여러번 그쪽 아가씨들을 파트너로 옆에 앉혔고 2차까지 나간 적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시큰둥한 표정으로 갑중을 보았다.
“나한테 러시아 아가씨를 소개시켜 주려는거냐?”
그때 방문이 열리더니 웨이터와 아가씨들이 들어섰다
아가씨들은 물론 러시아인이었고 그야말로 눈이 번쩍 뜨일 만한 미인들이었다. 뒤를 따라 들어선 지배인이 조철봉과 갑중의 눈치를 살피더니 곧 얼굴에 웃음기가 떠올랐다.
“최고급 러시아 아가씨들이죠, 모두 러시아에서 대학 나오고 발레단이나 직장에 다니다가 온겁니다.”
지배인이 2명의 아가씨를 조철봉과 갑중의 옆에 앉히더니 말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바꿔 드리지요.”
“아니, 됐어요.”
조철봉이 서둘러 말하자 지배인은 이를 드러내며 소리없이 웃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즐거운 시간을….”
지배인과 웨이터들이 방을 나갔을 때 갑중이 조철봉을 보았다. 갑중의 옆에 앉은 파트너도 미인이었다. 검은 머리에 눈동자도 검었지만 피부는 눈처럼 흰데다 매끄러웠다. 서구인의 피부는 대개 자세히 보면 거칠고 잡티가 섞인데다 털이 많은 편인데 이쪽은 전혀 아니다. 조철봉의 시선을 받은 여자가 희미하게 웃었다.
“형님, 이 여자는 제가 지난번에 옆에 앉혔습니다. 구면이지요.”
“글쎄, 그렇게 보이는군.”
입맛을 다신 조철봉이 힐끗 자신의 파트너를 보았다. 금발에 푸른 눈동자의 미녀는 시선을 받더니 생글 웃었다. 역시 가슴 고동이 빨라질만한 용모였다. 머리를 돌린 조철봉이 갑중을 향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그래, 2차 소감이 어떻더냐?”
“형님, 저는….”
갑중이 입맛을 다시더니 정색했다.
“같이 나갔지만 옷은 벗지 않았습니다.”
“이 자식이 지금까지 한 거짓말중 제일 지독한 거짓말을 하는구먼.”
쓴웃음을 지은 조철봉이 갑중을 노려보았다. 갑중의 파트너는 바로 조철봉의 이상형이었다. 지금까지 수백번 같이 다닌 터라 그것을 갑중도 알고 있을 것이었다. 그래서 거짓말을 하는 것이 분명했다.
“야, 인마, 괜찮아, 내가 바꾸자고 하지 않을테니까 마음놓고 즐겨.”
조철봉이 뱉듯이 말했을 때였다. 테이블 건너편에서 조철봉을 대각선으로 바라보는 위치에 있던 갑중의 파트너가 불쑥 말했다.
“정말이에요. 저, 같이 안잤어요.”
놀란 조철봉의 몸이 굳어졌다. 그것은 말의 내용 때문이 아니었다. 여자가 한국어를 제법 유창하게 했기 때문이다. 조철봉의 시선을 받은 여자가 다시 차분한 표정으로 말했다.
“우린 이야기만 했습니다. 그리고 사장님이 저한테 소개시켜주실 분이 있다고 하셨지요.”
“둘이 손발을 잘 맞췄군.”
조철봉이 감탄한 듯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만하면 됐다. 너희들 성의를 봐서 내가 술값과 팁을 내지.”
팔을 뻗쳐 옆에 앉은 금발 미녀의 어깨를 당겨안은 조철봉이 말을 이었다.
“이제 그쯤 해두고 화제를 바꿔.”
“예. 형님.”
여전히 정색한 갑중이 헛기침을 하더니 자리를 고쳐 앉았다.
“이 가게에는 러시아에서 온 아가씨가 20여명이 있고 필리핀 아가씨는 7, 8명이 있다고 합니다.”
“아녜요.”
갑중의 파트너가 다시 끼어들었다.
“러시아 아가씨는 정확하게 26명이고 필리핀 아가씨는 4명입니다. 어제 3명이 추방 당했거든요.”
그러고는 여자가 시선을 내렸다.
“물론 임금도 받지 못하고요.”
조철봉은 머리를 돌려 갑중을 보았다. 아가씨와 갑중이 손발을 맞춘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때 갑중이 입을 열었다.
“예, 형님. 실은 그 문제 때문에 형님을 이곳으로 모신 겁니다.”
“그 문제라니?”
“예, 아가씨들 문제인데.”
갑중이 말을 더듬자 조철봉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나아, 참. 알 수가 없군. 네가 아가씨들 임금 문제로 나설 위인도 아니고 말이야.”
“예, 그런데 실은.”
“이 자식이 오늘 왜 이래?”
마침내 조철봉이 눈을 부릅뜨자 갑중은 정색했다.
“예, 물론 형님도 제가 않던 짓을 한다고 생각하시겠지요. 하지만 내막을 듣고 보니 열이 받쳐서요. 도저히 혼자 묻어 둘 수가 없었습니다.”
“갑자기 성품이 변하면 죽는 법이야.”
“글쎄 이런 지독한 놈들이 있습니까? 여자들을 어떻게 착취하는지 아십니까? 들어보시지요.”
“듣기 싫어.”
자르듯 말한 조철봉이 술잔을 쥐더니 옆에 앉은 여자에게 내밀었다. 술을 따르라는 몸짓이어서 여자가 서둘러 술병을 쥐었다. 그때 갑중의 파트너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귀찮게 해드린 것 같습니다. 저희들 이야기는 하지 않겠습니다.”
그러자 조철봉의 눈치를 살핀 갑중도 입을 다물었고 방안은 잠시 무거운 정적에 덮어졌다. 조철봉은 파트너가 따라준 양주를 한모금에 삼켰다. 그리고 더운 숨을 뱉더니 갑중의 파트너를 보았다.
“어디, 들어보자고.”
외국인 노동자들이 한국에서 악덕 기업주를 만나 임금을 착취당하고 몸까지 상한 채 돌아간다는 이야기는 흔하다. 러시아에서 온 아가씨들이나 필리핀에서 온 연예인들에 얽힌 이야기도 조철봉은 자주 들었다. 그래서 카렌이라는 이름의 아가씨가 이야기를 시작할 때 별로 호기심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차츰 시간이 지나가면서 조철봉의 얼굴은 굳어졌다.
카렌은 두달전에 12명의 일행과 함께 이르쿠츠크에서 서울로 날아왔다. 물론 관광비자를 받았고 한국에서 공연을 할 계획이었다. 이르쿠츠크 시립 무용단의 3년차 무용수인 카렌에게는 한국에서 6개월간 공연하고 받게될 수익이 커다란 희망이었다. 한국인 대리인은 카렌과 일행들에게 한국에서 공연할 극장을 사진으로 보여주었으며 한달공연으로 각각 3천불씩을 보증한다는 계약서를 써주었다. 따라서 6개월간 공연후에 받을 금액은 1만8천불이 된다.
한국대리인측에서는 12명의 의식주 일체를 공연비와는 별도로 책임진다는 약속을 해준 것이다. 그러나 카렌은 입국 다음날부터 속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대리인측은 카렌 일행의 여권을 모두 압류했으며 숙소는 서울 교외 빌딩의 허름한 합숙소였다. 그리고 공연장은 극장이 아니라 나이트클럽이었던 것이다. 카렌은 눈을 크게 뜨고 조철봉을 똑바로 보면서 말을 이어갔는데 목소리는 조금 떨렸지만 또렷했고 한국어도 유창했다.
카렌은 한국인의 혈통을 받은 고려인이었던 것이다. 카렌의 아버지가 고려인 2세였고 어머니가 러시아인이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두달동안 카렌이 나이트클럽에서 일하면서 모은 돈은 8만5천원이라고 했다. 그동안 2차를 13번 나갔으며 거의 하루도 빠지지않고 술시중을 들었지만 지배인은 한푼도 돈을 주지 않은 것이다. 8만5천원은 옆에 앉았던 남자들이 팁외에 준 돈을 모은 것이다.
카렌이 이야기를 마칠 때까지 조철봉은 잠자코 귀만 기울였고 갑중도 거들지 않았다. 이제 카렌의 소원은 제대로 계산된 임금을 받고 나서 미련없이 이곳을 떠나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대리인과 업소측은 짜고 여권을 돌려주지 않은 채 윤락행위를 강요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들은 업소측의 철저한 감시를 받고 있어서 2차도 지정된 장소로 가야만 했다. 죄수보다 더 지독한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윽고 말을 그친 카렌이 시선을 떨구었을 때 조철봉이 갑중을 보았다.
“경찰에 신고하면 안돼?”
“그것은.”
입맛을 다신 갑중이 말을 이었다.
“이쪽도 불법행위를 했기 때문에 추방되어 버리거든요. 물론 놈들한테서는 벗어날 수 있겠지만 임금을 받을 수는 없다고 합니다. 윤락행위를 했기 때문이지요.”
“그렇겠지.”
“억울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래서 어떻게 하겠다는 거냐?”
“카렌이나 일행들이 일한 보수를 되찾게 하고 싶습니다. 그러려면 형님의 힘이 필요해서.”
“내 힘?”
조철봉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내가 무슨 힘이 있어?”
“아시는 분들한테 한 말씀만 해주시면.”
“로비를 해서 권력을 빌리라는 말이지?”
“형님이 뇌물을 챙기시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정색한 갑중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런 일에 나서는 건 전혀 부끄럽지가 않습니다. 오히려 한국 이미지를 위해서 누가 꼭 해야 할 일입니다.”
“네가 저런 미인을 모처럼 찾아 냈으니까 이렇게 흥분하는 거지.”
턱으로 카렌을 가리켜보인 조철봉이 쓴 웃음을 짓고 말했다.
“그렇지 않다면 벌써 잊었을걸?”
“도와주세요.”
그때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선 카렌이 두손을 모아쥐더니 조철봉을 향해 허리를 꺾어 절을 했다.
“사장님이 나서시면 다 해결이 될 것이라고 들었습니다.”
“난 그럴 능력이 없어.”
조철봉이 정색하고 머리를 저었다.
“그럴 시간도 없고.”
“어쨌든 넌 형님 옆으로 가.”
갑중이 말하자 카렌이 조철봉의 허락도 받지않고 다가와 옆에 앉았다. 왼쪽에 앉았던 금발의 안나가 갑중의 옆으로 옮겨 갔으므로 파트너가 순식간에 바뀌어졌다. 눈만 깜박이는 조철봉에게 카렌이 낮게 말했다.
“사장님, 불쾌하셨다면 용서해주세요. 전에 최사장님이 사장님 말씀을 해주셔서 처음 뵌 분 같지가 않습니다.”
“저놈이 너한테 어떤 사기를 쳤는지 모르지만 기대하지 마.”
조철봉도 낮게 말했다.
“어쨌든 저놈이 너한테 반한 모양이다. 흥분을 해서 나까지 끌어 들이려고 하는 걸 보니까 말이야.”
“근처의 업소까지 러시아 여자는 2백명이 넘고 필리핀인은 50명 가깝게 되었습니다. 모두 같은 상황이지요.”
“못받은 돈이 몇억도 넘겠구먼.”
“수십억이 됩니다.”
조철봉은 이제 옆에 앉은 카렌의 옆모습을 보았다. 흰 피부였지만 카렌의 용모는 섬세했다. 오뚝선 콧날 밑으로 얇고 야무진 입술이 꼭 다물려 있었는데 입술 위쪽과 콧등에 얇은 땀방울이 배어나와 있었다. 조철봉은 숨을 들이켰다. 갑자기 욕정이 치솟았기 때문이다. 욕정은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와 골탕을 먹인다.
“이차를 가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거야?”
불쑥 조철봉이 물었을 때 카렌은 눈만 둥그렇게 떴지만 갑중이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지배인한테 이차비를 주면 됩니다. 하지만 아래층 호텔을 이용해야지요.”
“같은 건물이라 감시하기 편리하겠군.”
“빠져나갈 구멍이 없습니다. 호텔 복도는 물론이고 빌딩 출입구에 모두 감시자가 있습니다.”
“감옥이군.”
“그리고.”
카렌이 긴장한 표정으로 갑중의 말을 이었다.
“호텔방에 감시 카메라가 있습니다. 그래서 섹스 장면을 녹화한다고 들었습니다.”
“설마 그럴라구?”
이맛살을 찌푸려보인 조철봉에게 카렌은 정색해 보였다.
“제가 녹화된 필름을 보았어요. 관리인 방에서 우연히 본 것입니다.”
“왜 녹화한거야?”
“시장에다 파는 것 같습니다.”
“그것 참.”
쓴웃음을 지은 조철봉이 갑중을 보았다.
“그래서 네가 이차를 제대로 치르지 못한거냐?”
“그런 이유도 있습니다.”
비슷한 표정으로 웃은 갑중이 주위를 둘러보는 시늉을 했다.
“이곳에도 감시카메라가 있는 것 같아서 찜찜합니다.”
“여기까지 비싼 돈 들여서 감시할 필요는 없지요.”
다시 나선 카렌이 머리를 돌려 조철봉을 보았다.
“다른 곳으로 이차를 가시려면 매상을 2백만원 이상 올려야 되지요. 하지만 감시원이 따라옵니다.”
“그렇겠지.”
머리를 끄덕인 조철봉이 갑중에게 말했다.
“매상을 올려라. 그리고 이차로 갈 호텔에다 준비를 해놓도록.”
조철봉과 시선을 마주친 갑중의 표정이 굳어졌다. 말뜻을 알아차린 것이다. 그날 밤 12시 가깝게 되었을 때 조철봉과 갑중은 빌딩을 나왔다. 빌딩 앞에는 룸살롱에서 제공한 밴이 대기하고 있었으므로 조철봉은 타고 온 차를 따르게 하고는 밴에 올랐다. 밴에는 운전사와 또 한명의 사내가 타고 있었는데 감시역일 것이었다.
조철봉이 운전사에게 지시한 곳은 강남의 인터내셔널 호텔이다. 최고급 호텔인 것이다. 옆에 앉은 카렌은 외출복으로 갈아입었는데 진바지에 낡은 점퍼를 걸쳤지만 오히려 더 아름답고 세련되어 보였다. 화장을 지운 얼굴은 더 앳되어 보였으므로 조철봉은 손을 뻗어 카렌의 손을 쥐었다.
그러자 카렌이 주춤 몸을 굳힌 것 같더니 곧 조철봉의 손을 마주 쥐었다. 밴이 호텔 앞에 멈춰 섰을 때는 12시반 경이었다. 그들이 밴에서 내리자 제복을 입은 호텔 직원이 다가와 섰다.
“조사장님, 어서 오십시오.”
조철봉을 향해 정중하게 인사를 한 직원이 앞장섰으므로 그들은 뒤를 따랐다. 로비를 가로질러 엘리베이터 앞에 섰을 때 갑중이 머리를 돌려 뒤쪽을 보았다. 감시원 한명이 로비 복판까지 따라왔다가 호텔 직원들에게 제지당해 서있었다. 그들이 엘리베이터에 올랐을 때 감시원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미 기가 죽은 상황이라 말도 크게 하지 못했다.
“후문으로 가시지요.”
엘리베이터 안에서 제복을 입은 갑중의 부하가 조철봉에게 말했다.
“차를 대기시켜 놓았습니다.”
이곳은 놈들을 따돌리려고 온 것이다.
후문으로 나온 그들이 대기하고 있는 승용차에 올랐을 때 카렌의 표정이 달라졌다. 눈을 크게 뜨고는 감정을 억제하려는 듯이 아랫입술을 물었다가 풀더니 조철봉의 옆으로 바짝 붙어선 것이다. 그들이 다시 도착한 곳은 용인 근처의 모텔이었다. 한적한 도로가에 세워져 있었지만 신축 건물이었고 시설도 훌륭해서 호텔 못지 않았다.
방 두개를 잡아 놓았지만 조철봉은 자신의 방으로 넷을 모았다. 특실이어서 소파도 있었으므로 넷이 자리잡고 앉았을 때 시중은 갑중이 들었다. 냉장고와 선반에서 술과 안주를 꺼내 탁자 위에 벌여놓고 갑중이 떠들었다.
“스릴이 있지 않습니까? 오늘밤은 시간이 아깝겠습니다.”
새벽 2시가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조철봉이 카렌에게로 머리를 돌렸다.
“오늘부터 가게로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 내가 책임질 테니까.”
놀란 카렌이 눈을 둥그렇게 떴고 시선을 주고있는 안나를 향해 러시아어로 빠르게 설명했다. 그러자 입을 딱 벌렸던 안나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우는 것이다.
“숙소를 만들어 줄 테니까 내일 아침에는 그곳으로 옮기도록.”
카렌에게 말하고난 조철봉이 갑중을 바라보았다.
“숙소를 준비해야겠어.”
“문제 없습니다.”
커다랗게 머리를 끄덕이던 갑중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비어있는 연립주택이 있습니다. 방이 세개 짜리인데 가구도 다 갖춰져 있지요.”
“연립주택 한채로는 안돼.”
“예?”
의아한듯 갑중이 머리를 비틀었을 때 조철봉이 정색했다.
“카렌 일행에다 아는 러시아, 필리핀 종업원들을 다 빼내야 할 테니까, 모두 몇 명이나 될 것 같나?”
“저, 그것은.”
놀란 나머지 카렌은 말을 더듬었다. 그러고는 안나와 러시아어로 서둘러 말을 주고 받더니 상기된 얼굴로 조철봉을 보았다.
“러시아 종업원은 50명 정도이고 필리핀 출신은 7, 8명 될 것 같아요.”
“그럼 60명이 묵을 숙소가 필요하군.”
머리를 끄덕인 조철봉이 다시 갑중을 보았다.
“실버타운에 연락해서 별채를 사용하면 되겠다. 100명도 수용할 수 있을 테니까.”
“실버타운을.”
“그, 그렇군요. 별채는 신축하고 나서 아직 비어있습니다.”
“그곳에서 숙식하게 하는 거야, 그리고….”
정색한 조철봉이 다시 머리를 돌려 카렌을 보았다.
“그곳에서 새 직장에 다니는 거야.”
상황이 너무 빨리 진행되어서 카렌도 당황한 듯 눈만 깜박이고 있었으므로 조철봉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고는 술잔을 들더니 차분하게 말했다.
“다시 새 업소에 다니는 거야, 그곳에서 정상적인 보수를 받는 것이지.”
아직 카렌은 입을 열지 않았지만 얼굴은 더 상기되었다. 말뜻을 알아차린 것이다. 한모금 양주를 삼킨 조철봉이 말을 이었다.
“내가 업소도 소개해 주겠어. 그곳에서는 정상적인 팁에다 이차비까지 한푼도 떼이지않고 받는 것이지.”
지금 유흥구 실습생들이 근무하고 있는 업소에 소개해 주면 될 것이다. 모두 쌍수를 들어 환영할 테니 누이좋고 매부좋은 꼴이다. 그때 카렌이 망설이듯 침을 삼키더니 입을 열었다.
“저, 어떻게 하시려고요. 경찰에 신고하면 업주나 대리인은 처벌 받겠지만 저희들은 추방되어야 해요. 모두 불법 체류에다 불법 취업을 했거든요.”
시선을 내린 카렌이 말을 이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신고도 못하고 있었어요. 여권을 업주가 보관하고 있어서 다른 곳으로 도망치지도 못하고요.”
“내가 다 알아서 해줄테니까.”
카렌의 말을 자른 조철봉이 갑중에게로 머리를 돌렸다.
“네 후배들 몇명 동원할 수 있지?”
“후배라니요?”
눈을 둥그렇게 뜬 갑중이 조철봉을 보았다.
“무슨 말씀입니까?”
“해결사 말이다. 조폭 출신이라고 했던가? 그놈들 고용할 수 있겠지?”
“그, 그거야.”
당황한 갑중이 침을 삼키더니 탁자위로 몸을 굽혔다.
“돈만 주면 지금 당장이라도 백명을 모을 수가 있습니다.”
“그럼 확실한 놈으로 스무명만 모아라. 돈은 달라는 대로 주고.”
“예, 형님.”
“각각 조를 짜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야 돼. 애들을 빼돌리고 업주들한테서 여권을 찾고, 행동대 놈들을 까부수는 조로 나눠서 말이야.”
“그거야 일만 맡기면 그들이 알아서 합니다. 형님.”
이제 진정이 된듯 갑중의 얼굴에도 웃음기가 떠올랐다.
“형님이 그런 수단을 쓰실 줄은 몰랐습니다.”
“그럼 어떤 수단을 쓸줄 알았어?”
“경찰 고위층에다 로비를 하든지 해서 놈들을 잡고 여자들을 빼돌릴 줄 알았지요.”
“이 방법이 더 깨끗해.”
“그건 그렇습니다.”
그때 자리에서 일어선 조철봉이 기지개를 켰다.
“자, 그만 쉴까?”
그만 제 방으로 돌아가라는 말이었으므로 갑중은 서둘러 일어섰다.
“그럼 형님, 안녕히 주무십시오.”
갑중이 안나를 끌고 방을 나가자 조철봉이 카렌을 보았다. 덩달아서 일어난 카렌은 우두커니 서 있다가 조철봉의 시선을 받더니 얼굴이 붉어졌다.
“피곤해서 사워하고 잘테니까 거기서 자.”
조철봉이 턱으로 창가의 침대를 가리켰다. 방에는 트윈침대가 놓여져 있었던 것이다. 몸을 돌린 조철봉이 욕실에 들어가 샤워를 하고 나왔을 때 방안의 불은 꺼졌고 탁자위의 작은 등만 켜져 있었다. 카렌은 창가의 침대에 누워 있었는데 이쪽에 등을 보인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피로가 몰려 왔으므로 침대에 누운 조철봉은 길게 숨을 뱉었다. 그러고는 시트를 당겨 덮었을 때였다. 카렌이 몸을 뒤틀더니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저, 씻고 오겠어요.”
“그러지.”
천장을 향하고 누운 채 조철봉이 말했다.
“난 잘테니까.”
“저어.”
이제는 카렌이 조철봉의 옆으로 다가와 섰다.
“씻고 옆에 누워도 돼요?”
“응?”
시선을 돌린 조철봉이 카렌을 보았다. 그러나 말뜻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조철봉이 희미한 등빛을 받은 카렌의 얼굴을 정색하고 보았다.
“내키지 않는데 억지로 그럴 것 없어.”
카렌이 눈만 깜박였으므로 조철봉은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서둘지 않아도 돼. 시간은 많아.”
그러자 잠자코 카렌은 몸을 돌렸다. 욕실로 들어선 카렌이 몸을 씻는 동안 조철봉은 우두커니 천장을 보았다. 이미 잠은 달아났고 머릿속이 맑아지면서 슬그머니 욕정이 치밀어왔기 때문이다.
카렌에게는 억지로 그럴 것 없다고 했지만 남자의 욕정은 짐승이나 같다. 조철봉은 어느덧 카렌의 나체를 그리고 있는 자신을 깨닫고 쓴웃음을 지었다.
구태여 옆으로 오겠다는데 거부하는 것은 위선이다. 지금까지 사랑의 감정 없이도 얼마든지 욕정을 발산했던 자신이 아니었던가? 이윽고 욕실문이 열리고 카렌이 나왔을 때 조철봉은 머리를 들었다.
대형타월로 젖가슴과 아랫배를 가린 카렌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는데 불빛을 뒤에서 받은 몸매는 그림처럼 미끈했다.
카렌이 침대 옆에 섰을 때 조철봉은 손을 뻗어 타월을 당겼다. 그러자 타월이 힘없이 벗겨지면서 카렌의 알몸이 드러났다. 부드러운 어깨의 곡선에서부터 잘록한 허리,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아래로 미끄러지듯 흘러내린 엉덩이와 허벅지, 그리고 두다리 사이의 검은 숲까지 눈앞에 선명하게 드러났다.
저도 모르게 낮은 탄성을 뱉은 조철봉은 상반신을 일으켰다. 그리고 손을 뻗어 침대 옆의 전기 스위치를 켰다. 그러자 방안이 밝아지면서 카렌의 알몸이 환하게 드러났다. 카렌이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가 곧 두손으로 샘을 가렸다. 그러나 얼굴은 상기되었고 입가에는 엷은 웃음기가 떠올라 있었다. 조철봉이 두손을 벌려 카렌을 안으려는 시늉을 했다.
“카렌, 이리 와.”
카렌이 주저하지 않고 조철봉의 옆으로 다가오더니 바짝 붙어 누웠다. 조철봉은 카렌의 봉긋한 젖가슴을 손바닥으로 감싸 안았다. 그순간 카렌이 머리를 들더니 조철봉의 볼에 입술을 붙였다.
“고마워요.”
“고마울 것 없어.”
카렌의 엉덩이를 끌어당긴 조철봉의 입술이 젖꼭지를 물었다.
“내가 이렇게 보답을 받고 있지 않아?”
혀끝으로 젖꼭지를 애무하자 카렌은 몸을 비틀면서 신음했다. 두손으로 조철봉의 머리칼을 움켜쥐고는 하반신을 들썩이는 것이다. 반응이 컸으나 과장한 것 같지는 않았다. 조철봉의 입술이 아랫배를 거쳐 샘에 닿았을 때 카렌의 반응은 절정에 이르렀다. 신음은 거칠어졌고 요동은 더 심해진데다 온몸은 땀으로 미끈거렸다.
“허니.”
열에 들뜬 목소리로 카렌이 영어를 썼다.
“허니, 허니.”
조철봉의 입술이 샘에 닿았을 때 카렌은 두 다리를 들어 올리면서 비명같은 신음을 뱉었다. 곧 온몸을 굳히더니 하반신을 힘껏 치켜드는 것이었다.
절정에 올랐다는 표시였다. 남자는 절정을 늦추려고 오만가지 수단을 다 행사하지만 반대로 여자는 빨리 절정을 맞으려는 연습을 한다. 그래야 호흡을 맞출 수가 있는데다 남자에게 만족감을 선사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같은 시간에 한번의 절정을 맞는 것보다 두번 또는 세번의 절정을 맞는 것이 여자 자신은 물론이고 남자에게도 더 강한 자극을 준다.
절정에 오른 카렌이 몸을 떨더니 가쁜 숨을 몰아쉬며 두 다리를 벌린 것은 이제 다시 시작해도 된다는 표시였다. 조철봉은 땀에 젖은 카렌의 이마에 입술을 붙였다가 떼었다. 카렌은 헌신적이었다. 빨리 달아올라 남자의 자부심을 세워주려는 노력이 몸에 뱄다. 이윽고 철봉이 카렌의 몸안에 진입했을 때의 반응도 격렬했다. 그러나 전혀 과장한 것 같지는 않았다.
조철봉은 수많은 여자를 겪었지만 단한번도 새롭지 않은 적이 없다. 같은 여자라고 하더라도 분위기가 어제 다르고 오늘 달랐다. 서경윤과 결혼생활을 할 적에는 느끼지 못했다가 혼자가 되었을 때 터득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터득한 진리가 또 있다. 인생이란 어차피 혼자서 지탱하고 수습해야 될 과제라는 것이었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 믿지도 말고 받으려고 기대도 하지말자. 그래야 떠날 때 홀가분하다.
그러나 능력이 닿는대로 아낌없이 주어라. 네가 떠날때 아쉬워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것이 네가 아쉬워하는 것보다 백번 건강에 이롭다. 조철봉은 가끔 혼자서 우두커니 앉아 있거나 식사를 할때, 또는 치열한 섹스를 마악 마치고 났을 때에도 뼈가 시린 것같은 외로움을 느낀 적이 있다. 냉수를 마시다가 목이 탁 막힌 것같은 느낌이 오면서 가슴이 메는 것도 외로움이었다.
그래서 혼자 있으면 무서웠다. 만일 병에 걸려서 누웠을 때 누가 옆에 있어줄 것인가를 생각하면 현기증이 났다. 누구를 꼽아보는 것조차 두려웠기 때문이다. 조철봉에게 바람이 있다면 사고로 순식간에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었다. 생각할 시간도 없이, 외로움이나 무서움을 겪지도 않은 채 떠나는 것이다.
카렌과의 섹스가 끝났을 때 조철봉은 시트에 얼굴을 묻고 엎드렸다. 갑자기 가슴이 허전해졌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이 자주 찾아오는 것은 아니다. 만족한 섹스를 끝냈을 때에도 가슴이 미어지듯 답답해지면서 외롭고, 나중에는 무서워지는 것이다. 이런 때에는 약도 없다. 얼른 움직이는 것이 상책이다. 대화도 움직이는 방법중의 하나다.
“허니, 좋았어요.”
조철봉의 등을 손바닥으로 쓸면서 카렌이 허덕이며 말했다.
“지금까지 한것 중에서 제일.”
그말이 사실인지는 알 수 없으나 카렌이 열성을 다하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카렌이 입술로 조철봉의 등판을 천천히 애무했다.
“허니, 내가 어땠어요? 좋았어요?”
“좋았어.”
카렌이 말을 걸어준 덕분으로 조철봉의 머릿속에서 무서움이 가셔졌다. 몸을 돌린 조철봉이 카렌을 보았다. 머리칼이 땀에 밴 이마에 붙어 있는데다 아직도 숨을 헐떡이고 있었지만 조철봉의 시선을 받은 카렌이 열심히 말했다.
“당신의 테크닉은 최고야. 그리고 내 그곳에 당신의 기둥은 꽉 찼어.”
“그래?”
“내 그곳의 신경이 모두 반응했어. 이런 경우는 처음이야.”
이제 조철봉은 카렌의 이야기에 말려들었다. 한국어에 유창한 카렌이었지만 샘을 그곳으로 표현했고 철봉은 기둥이라고 불렀다. 경황이 없는 중에도 카렌이 이 단어들을 여러번 사용했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나도 내 철봉에 네 샘안의 세포가 반응하는 것이 느껴졌다.”
“철봉이 뭐야?”
이제 카렌은 조철봉의 가슴에 턱을 고인채 천진한 표정으로 물었다.
“샘은 뭐고?”
“철봉은 영어로 아이론 스틱이야.”
조철봉이 짧은 영어로 설명했다. 그러나 샘의 단어를 모르는 바람에 카렌의 샘을 손으로 쓸면서 대신했다.
“이곳이 샘이고.”
“아아, 그럼 이것이 철봉.”
활짝 웃은 카렌이 조철봉의 철봉을 두손으로 감싸쥐었다. 조철봉은 길게 숨을 뱉었다. 이제 외로움도 사라졌다. 그래서 사람들은 복상사를 최고의 죽음으로 쳐주는 모양이었다.
물론 그날 밤부터 카렌과 안나는 업소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날 오후에 최갑중이 동원한 해결사 20여명은 카렌이 지적한 업소들을 기습해서 아가씨들을 빼내었다. 완벽한 작전이었고 예상했던 것보다 아가씨들이 10명 가깝게 더 많았다. 업소측은 반항했던 서너명이 순식간에 제압당하자 기가 질려 순순히 굴복했다.
그래서 카렌이 근무했던 업소 사장집을 습격했던 일부 해결사들이 금고에서 종업원들의 여권과 함께 1억 가까운 현금을 강탈해온 것이 유일한 실수였다. 기세가 오른 해결사들이 오버한 것이다. 계획했던 대로 아가씨들은 실버타운의 별채로 후송되었고 그날밤 안으로 안돈되었다. 별채는 그야말로 아가씨들이 기숙하기에는 안성맞춤이었기 때문이다.
카렌과 안나도 물론 별채로 옮겼는데 자연스럽게 카렌은 그들의 지휘자가 되었다. 갑중이 모든 것을 카렌과 상의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해결사들이 습격한 3개의 업소측중에 단 한곳도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다. 금고에서 돈까지 털린 카렌의 업소 사장도 신고를 하지 않은 것이다.
대충 정리가 끝난 다음날 오전에 갑중이 다시 실버타운의 별채를 찾아왔을 때 카렌을 중심으로 7명의 아가씨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70명이나 된 별채 아가씨들의 대표인 것이다. 휴게실의 원탁에 둘러앉아있던 아가씨들은 갑중이 들어서자 모두 일어섰다. 은인을 맞은 그들의 표정은 각각이었지만 방안의 분위기는 따뜻했다. 자리에 앉았을 때 갑중이 웃음띤 얼굴로 카렌을 보았다.
“이거 어색하군, 미인들한테 둘러싸여 있어서 말이야.”
“모두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제가 대표로 인사를 드립니다.”
카렌이 앉은 채로 머리를 숙여 보이자 정색한 갑중이 손까지 저었다.
“다 알면서, 난 심부름만 했을 뿐이야, 조사장님이 하신 일이지.”
“사장님은 안오세요?”
“곧 오시겠지.”
자리를 고쳐앉은 갑중이 말을 이었다.
“일할 업소들을 마련해 놓았어. 모두 특급업체로 그곳에는 북한에서 온 실습생들이 있지.”
갑중의 시선이 아가씨들을 훑고 지나갔다.
“그곳에서는 팁값, 2차비가 모두 당신들 몫이 된다. 10원도 떼지 않으니까 열심히 일한 만큼 벌 수 있을거야.”
7명의 아가씨들은 어느 정도 한국어를 이해하는 눈치였지만 카렌의 통역이 끝났을 때 얼굴들이 활짝 펴졌다. 그중에는 필리핀 아가씨도 2명 있었는데 갸름한 얼굴의 아가씨가 물었다.
“가수도 일할 수 있나요? 저희들 중에서 5명이 가수입니다.”
“물론이지.”
갑중이 머리를 끄덕였다.
“오후 5시에 다시 올테니까 모두 준비하고 있도록.”
모임이 끝나 모두 방을 나갔을 때 복도를 걷는 갑중의 옆으로 카렌이 다가왔다.
“조사장님은 언제 오세요?”
머리를 돌린 갑중은 카렌의 얼굴이 조금 상기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 갑중의 시선을 받은 카렌이 수줍게 웃었다.
“다시 오신다고 했는데, 저한테 연락처도 남기지 않고 가셨어요.”
“곧 오시겠지.”
“연락처 알려주실 수 없으세요?”
다시 갑중의 시선을 받은 카렌이 머리를 숙였다.
“귀찮게 하지 않겠어요.”
“그분은 바쁜 분이야.”
갑중이 걸음을 크게 떼면서 말했다.
“내가 알려 줄 수는 없어.”
최갑중으로부터 카렌이 찾는다는 말을 전해들은 조철봉은 잠자코 있었지만 한동안 초점을 잃은 시선으로 앞쪽을 보았다. 사무실 안이었다. 오후 6시가 되어가고 있었으니 카렌과 아가씨들은 새 직장으로 향하는 중일 것이다. 조철봉의 침묵이 부담이 되었는지 갑중이 말을 이었다.
“물론 기분 상하지 않도록 말해 주었습니다. 형님이 곧 외국으로 떠나실 것이기 때문에 바쁘셔서….”
“어디로 갔지?”
“예?”
“카렌이 어디로 배정 되었느냔 말이다.”
“아, 예.”
그러고는 갑중이 은근한 시선으로 조철봉을 보았다.
“역삼동의 진주클럽입니다. 최고급 룸살롱 중의 하나지요.”
“….”
“북한 아가씨도 최고급으로 선별해서 20명 정도 보내진 곳입니다. 손님들 수준도 높습니다. 그런데.”
입맛을 다신 갑중이 힐끗 조철봉의 눈치를 보았다.
“카렌은 오늘 일을 나가지 않았습니다. 별채에 혼자 남아 있지요.”
“왜?”
“컨디션이 나쁘다고 하던대요.”
머리를 끄덕인 조철봉이 자리에서 일어섰으므로 갑중은 말을 그쳤다. 그날밤 10시가 되었을 때 숙소에서 혼자 TV를 보던 카렌은 문이 열리는 기척에 머리를 들었다. 그러고는 소스라치며 일어섰다. 조철봉이 들어서고 있었던 것이다.
“숙소에 남아 있다고 해서.”
소파에 다가가 앉은 조철봉이 방안을 둘러보았다. 2인1실용 숙소여서 양쪽 벽에 침대가 하나씩 붙여졌고 안쪽에는 옷장과 서랍장이 갖춰진 구조였다. 문 양쪽에 욕실과 세탁실이 있어서 10평 규모의 원룸형과 비슷했다. 놀람이 가시고나자 카렌의 얼굴은 상기되었고 행동이 활발해졌다.
“마실 것 드릴까요? 오렌지주스하고 생수밖에 없지만.”
냉장고 앞에 선 카렌이 반짝이는 눈으로 조철봉을 보았다.
“오렌지주스를.”
카렌의 분위기에 말려든 조철봉의 얼굴에도 웃음기가 떠올랐다. 주스잔을 내려놓은 카렌이 앞에 앉았을 때 조철봉이 물었다.
“컨디션이 나쁘다고 들었는데, 이젠 좀 나았나?”
“네, 이젠 괜찮습니다.”
“그럼 내일부터는 일을 할수 있겠군.”
“아니, 저는.”
정색한 카렌이 조철봉을 보았다.
“저는 일을 하지 않겠다고 최사장님께 말씀 드렸는데요.”
조철봉이 눈만 크게 떴다. 갑중은 그런 말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때 카렌이 말을 이었다.
“쉽게 돈을 벌려는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이번 기회에 느꼈습니다. 그래서 힘들더라도 다른 직장을 찾으려고 해요.”
“어떤 직장인데?”
“러시아어 통역이나 발레 강습. 그것도 안되면 식당의 아르바이트라도 하겠습니다.”
“그것이 가능할까?”
“취업소개지에 나온 곳에다 전화를 하고 있었어요.”
입맛을 다신 조철봉의 시선이 탁자위에 놓인 소개지들을 보았다. 카렌은 이곳저곳에 붉은색 동그라미를 쳐놓았는데 ×표가 많았다. 저러다가 다시 잘못 될 수 있을 것이었다. 조철봉이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내가 일할 곳을 소개해 주기로 하지.”
실버타운 뒤쪽에는 작은 동산이 있고 산책로 주위는 짙은 숲이었다. 밤 10시가 넘어 있었으므로 주위는 조용했다. 이 시간이면 모두 방안에 들어가 있는 것이다. 조철봉과 카렌은 산책로를 나란히 걸었다. 드문드문 보안등이 켜져 있었지만 주위는 짙은 어둠에 덮여 길의 윤곽만 희미하게 드러났다.
매운 듯한 숲 냄새가 폐 안으로 가득 들어차면서 가슴에 시린 느낌이 왔다. 실버타운을 직접 건설했고 몇년째 운영을 해왔지만 산책로를 걷기는 처음이다. 지금 실버타운 대표이사로 근무하는 박희선과도 이곳에 오지 않았다. 조철봉이 머리를 돌려 옆쪽을 걷는 카렌을 보았다. 뒤쪽의 보안등 빛을 받아 얼굴의 윤곽만 드러났어도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카렌은 엷은 스웨터에 진바지 차림이었는데 약간 어깨를 움츠린 자세로 남자처럼 바지 주머니에 두손을 넣었다. 시선을 받은 카렌이 어둠속에서 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나무 냄새가 좋죠? 아침에 이 곳을 보았을 때 걷고 싶었어요.”
이 곳을 걷자고 한 것은 카렌이다. 조철봉이 머리만 끄덕이자 카렌은 말을 이었다.
“우스워요. 제 인생에서 지금 이 순간이 또 한번의 전환기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카렌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나무 기둥에 부딪쳐 선명하게 울렸다.
“저는 이 순간을 영영 잊지 못할거예요. 당신과 내가 이렇게 소나무 숲 사이를 걷고있는 장면을 말이에요.”
“카렌, 이 순간을 값지게 만들어줘서 고맙다.”
저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은 조철봉이 카렌을 보았다.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의미있게 보내지 못했거든. 그래서 기억에 남을만한 순간이 없어.”
“제가 옆에 있어 드릴게요.”
조철봉의 손을 쥔 카렌이 불쑥 말하더니 걸음을 멈췄다. 손에 끌린 조철봉도 멈춰섰을 때 카렌의 말이 이어졌다.
“당신이 원하신다면.”
“고맙다. 카렌.”
카렌의 볼을 두 손으로 감싸쥔 조철봉이 얼굴을 똑바로 보았다. 이 순간에 카렌이 품은 감정은 진실일 것이었다. 그러나 시간은 흐른다. 불같이 뜨거웠던 감정이 식었을 때 기억에서 지워졌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인간은 잊고 만드는 행동을 수없이 반복하다가 어느 순간에 영영 잊어버린다. 옛날 영화를 보면서 화면안에서 움직이는 인간들은 이미 모두 죽었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지금 이 순간이 값지게 느껴질 것이다.
“카렌, 넌 사랑스럽다.”
조철봉이 카렌의 입술에 입을 붙였다. 밤공기에 노출된 카렌의 입술은 서늘했고 살구 향기가 났다. 조철봉의 입술이 잇몸에 닿았을 때 카렌은 서슴없이 입을 열어 혀를 내밀었다. 곧 혀가 뱀처럼 꼬물대며 조철봉의 혀를 휘감았다.
“허니, 사랑해요.”
두 팔로 조철봉의 목을 감아안은 카렌이 신음처럼 말했다. 조철봉의 두손이 카렌의 젖가슴을 움켜쥐자 신음은 더 커졌다.
“허니, 여기서.”
허덕이며 말한 카렌이 바지 지퍼를 내리더니 허리를 비틀면서 바지와 팬티를 한꺼번에 벗어내렸다. 그러고는 서둘러 조철봉의 바지 혁대를 풀었다. 조철봉은 낮게 탄성을 뱉었다. 숲속에서 선 자세로 둘의 하반신은 알몸이 되어있는 것이다. 카렌이 조철봉의 등을 밀어 소나무 기둥에 몸을 기대게 하더니 두 다리로 하반신을 휘감고 매달렸을 때 조철봉은 다시 탄성을 뱉었다. 카렌은 능숙했고 그것이 흥분을 고조시킨 것이다.
소나무숲 사이로 부드러운 바람이 스쳐 지나면서 벗은 아랫도리가 서늘해졌다. 아까부터 귀가 울리고 있는 것은 풀벌레 소리인지 머리에서 진동이 일어났기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그만큼 주위가 조용해서 둘의 숨소리까지 숲을 울리고 있는 것이다. 조철봉은 카렌의 허리를 당겨 안았다.
“허니, 해줘요.”
매달려있던 카렌이 허덕이며 말하더니 엉덩이를 흔들었다. 이미 철봉은 세워져 있었지만 두팔로 조철봉의 목을 감아 안고 있는터라 겨냥이 잘 되지않는 것이다. 소나무 둥치에 등을 받치고 선 조철봉은 잠깐 한 손을 떼고는 철봉을 잡아 샘에 넣었다. 지금까지 수백번의 다른 상황하에서 섹스를 했지만 소나무 숲에서 소나무 둥치에 기대선 채 행사를 치르는 것은 처음이다.
“아아아.”
카렌의 입에서 거침없는 탄성이 터져 나왔으므로 조철봉은 당황했다. 그러나 카렌의 탄성은 더 높아졌다. 이제 조철봉의 귀울림은 사라졌고 숲속에는 카렌의 목소리만 울렸다. 조철봉의 목을 감아 안은채 하반신을 흔드는 카렌의 자세는 기묘했지만 쾌감은 더 강하게 전달되는 것 같았다. 카렌의 엉덩이를 두손으로 받쳐든 조철봉이 호흡을 맞춰 움직이자 둘의 몸은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허니, 해줘요. 지금.”
안간힘을 쓰면서 카렌이 말했으므로 조철봉은 눈을 크게 떴다. 그래보아도 앞은 검은 숲이어서 제대로 시야에 잡힌 물체는 하나도 없었지만 정신은 들었다.
“허니, 지금.”
카렌이 커다랗게 신음을 뱉으면서 다시 말했을 때 조철봉은 오히려 움직임을 멈췄다.
“카렌, 그럴것 없어.”
이제는 카렌도 조철봉에 바짝 밀착된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나 온몸으로 거칠게 숨을 뱉는다. 조철봉이 카렌의 엉덩이를 부드럽게 쓸었다.
“마음놓고 즐겨. 난 네 분위기에 맞출테니까 말이야.”
그러고는 조철봉이 카렌의 몸을 가볍게 흔들었다. 그러자 샘안에 있던 철봉의 모든 신경 세포가 반응했다. 그것은 카렌도 마찬가지였다. 샘의 신경이 자극을 받자 카렌은 신음했다.
“날 기쁘게 해주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단 말이야. 카렌.”
다시 카렌의 엉덩이를 흔들면서 조철봉이 귀에 대고 속삭이듯 말했다.
“서로 호흡만 맞추면 된다. 내 속도는 전혀 의식하지 않아도 돼.”
카렌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하반신의 움직임이 이제는 차분해지면서 강해졌다. 리듬까지 붙어져 강약과 고저의 구분도 확실하게 느낄수가 있게 되었다. 카렌은 자신이 좋아하는 체위를 스스로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 조철봉은 신음했다. 카렌의 성감은 지난번과도 다르게 느껴졌던 것이다. 그때는 절정을 빨리, 많이 맞는 것이 목적인것처럼 움직였고 조철봉도 만족했다. 카렌의 행동이 자연스러웠고 절정의 순간들도 과장된 느낌이 없었기 때문이다.
“으음. 좋군.”
저도 모르게 탄성을 뱉은 조철봉이 카렌의 몸을 더 강하게 당겨 안았다. 카렌은 몰두하고 있었다.
이제 탄성은 줄어 들었지만 하체의 움직임은 더 확실해졌다. 그리고 샘 벽의 모든 세포가 일제히 일어나 철봉과 교합하는 것이 느껴졌다. 이윽고 카렌이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그것이 신호라도 된 것처럼 샘이 위축되기 시작했다. 이것이 진정한 절정이다. 조철봉의 가슴은 벅찬 환희로 터질것 같았다.
다음날 아침, 회사에 출근한 조철봉은 숨도 고르기 전에 최갑중의 방문을 받았다. 갑중이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보고드릴 일이 있습니다.”
소파에 앉은 갑중이 조철봉의 앞으로 서류를 놓으면서 말했다.
“이사장에 대한 문제인데, 심각합니다.”
전처 서경윤의 남편 이종학에 대한 문제이며 곧 그가 운영하는 회사가 심각한 상태라는 말이었다.
잠자코 서류를 훑어본 조철봉은 입맛을 다셨다. 자금이 아무리 든든해도 경영을 잘못하면 회사는 거덜이 난다. 또한 성품이 정직하고 성실하다고 해서 그가 경영하는 회사가 잘 되지는 않는다. 이종학이 그 꼴이었다. 정직하고 성실한 성품인데다 자금도 넉넉하게 투입시켜 주었지만 반년도 되지않아 회사는 부도 직전에 몰려 있었다. 이유야 얼마든지 있다. 원자재 가격이 두달 사이에 30%가 올랐으며 거래선 하나가 부도를 내어서 어음 받은 것이 휴지가 되었다는 등 모두 그럴듯 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하며 근본적인 원인은 딱 하나였다. 이종학이 경영자 자질을 갖추지 못했다는 것이다. 경영자는 대세를 보는 안목이 있어야만 하는데 이종학은 사소한 일에 매달려 번번이 기회를 놓쳤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당좌 3억을 며칠후에 갚아야할 상황이 되었을 때에야 만사를 내던지고 허둥대고 있는 것이다. 조철봉이 서류에서 시선을 들었을때 갑중이 말을 이었다.
“형님, 부도를 내는 것이 낫습니다. 지금까지 투자한 금액이 아깝긴 하지만 이시점에서 손을 떼는 것이 저희들한테는 오히려 이익입니다.”
맞는 말이었으므로 조철봉은 희미하게 머리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이종학에게 투자된 금액은 10억이 넘었다. 그러나 이 상태로라면 앞으로 10억 정도가 더 투자되어야 하는데다 회사가 이익을 낼 가능성도 희박한 것이다.
“형님, 손을 떼시지요. 그리고 한동안 한국을 떠났다가 오시면 모두 해결이 되어있을 것입니다.”
“해결이 돼?”
불쑥 물었던 조철봉의 시선이 창쪽으로 옮겨졌다. 갑중식 해결이란 곧 회사가 부도를 내고 이종학이 망해 버리는 것이었다. 지난번 전력도 있는터라 이종학은 이번에도 구속될 것이 분명했다. 조철봉의 옆모습을 향해 갑중은 말을 이었다.
“물론 영일이하고 영일이 엄마는 형님이 맡으시는 거죠. 지금도 이종학이는 허수아비 아닙니까?”
그때 조철봉이 머리를 돌려 갑중을 노려보았다. 무슨 말이냐고 묻는 듯한 시선을 받자 갑중이 민망한 표정으로 입맛을 다셨다.
“다른뜻이 아닙니다. 형님. 그저 무능한 인간이라는 뜻으로.”
“그래도 그자가 있는 것이 낫다.”
조철봉이 입을 열었다.
“허수아비라도 말이야.”
“하지만 형님.”
“지난번에도 이종학을 구속시켰지만 결국은 내가 빼내고 다시 결합시켰지 않았느냔 말이야.”
어깨를 늘어뜨린 조철봉이 길게 숨까지 뱉었다. 조철봉에게 마음을 터놓고 말하는 상대는 갑중 하나 뿐이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런 식으로 말한 적은 없었으므로 갑중은 긴장했다. 시선을 탁자위의 서류에 둔채 조철봉이 말을 이었다.
“서경윤이를 혼자 놔두고 그때처럼 또 사내놈들을 만나게 할 수는 없어. 우선 내가 가정생활에 적합한 놈이 아니니까 말이야.”
그러고는 조철봉이 서글프게 웃었다.
욕심을 버리면 마음이 평온해진다고 하지만 중생들이 소화하기에는 어려운 숙제이다. 욕심은 곧 희망이며 미래로도 둔갑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경쟁사회의 중심에 위치한 현대인에게 그것은 포기와 좌절, 또는 패자의 합리화로 낙인 찍힌다. 그것을 감내하면서까지 버리고 평온해지기는 너무 힘들다.
죽자 살자 뛰다가 넘어져 버리는 것이 차라리 더 개운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드는 것이다. 그러나 조철봉은 가정에 대해서는 달관한 고승처럼 행세할 수 있었다. 물론 그것은 뼈아픈 시련을 겪은 후에 터득한 것으로 첫째 제 분수를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네 자신을 알라는 고상한 말을 절실하게 느끼려면 실제 경우마다 겪어봐야 한다. 중생중의 하나인 조철봉이 가정에 욕심을 부리지 않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그렇다면.”
갑중이 심각한 표정으로 조철봉을 보았다. 얼굴은 그렇게 꾸미고 있었지만 내심은 못마땅한 것이 분명했다.
“그럼 이사람 회사를 살려 주시겠단 말씀입니까? 도대체 그놈은.”
말을 그친 갑중이 침을 삼켰다. 이종학은 이제 뻔뻔해져서 조철봉한테서 자금지원을 받는 것에 익숙해졌다. 부끄러운 기색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것이 미운 갑중은 이 순간을 벼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때 조철봉이 입을 열었다.
“이종학이의 의존하는 버릇을 고쳐줄 필요도 있겠군 그래. 그럼 당분간은 내버려 두도록 하지.”
“그럼 사흘 후면 회사는 망합니다.”
“망하도록 놔둬.”
“알겠습니다.”
갑중의 말에 생기가 띠어졌고 얼굴에는 화색이 떠올랐다.
“놔두지요.”
“그렇게 되면 이종학이 어떻게 될 것같나?”
“당좌 3억 때문에 고발을 당할 겁니다.”
그러고는 사기혐의로 구속이 될 가능성이 큽니다.
“구속이 되도록 해.”
“예, 가능합니다.”
커다랗게 머리를 끄덕인 갑중이 덧붙였다.
“증거를 완벽하게 갖춰 놓지요. 사실 그대로를 펼쳐 보이는 것이라 아주 간단한 일입니다.”
“얼마동안이나 구속 될 것 같나?”
“담보도 없고 해결할 능력도 없는 상황이니까 1년 정도는 교도소에 들어가 있어야겠지요.”
“지난 번에도 그정도 있었던가?”
“1년 형을 받았는데 형님이 빼내주시는 바람에 6개월 살고 나왔지요.”
“그동안에 영일 엄마가 남자를 몇명 만났지?”
그러자 힐끔 조철봉의 눈치를 살핀 갑중이 입맛을 다시고는 말했다.
“네명 만났습니다.”
“한달 반에 한명 꼴이군.”
“처음부터 정보원을 고용했으면 몇명이 더 나타났을 겁니다.”
“그 여자는 남자 없으면 못살아. 외로움을 몹시 탄단 말이야.”
갑중이 다시 입맛을 다셨지만 거들지 않았다. 조철봉이 가늘게 숨을 뱉더니 정색하고 갑중을 보았다.
“갑중아.”
“예, 형님”
긴장한 갑중이 눈을 크게 떴다. 조철봉이 이렇게 이름을 부른적은 드물었기 때문이다. 갑중의 시선을 받은 조철봉이 멋쩍게 웃었다.
“이번에도 6개월만 살게하고 우리가 해결 해주도록 하자.”
조철봉의 말이 이어졌다.
“그동안 영일 엄마는 우리가 맡고.”
“회사 문제가 조금 있어.”
저녁을 먹고 소파에 앉아 TV를 보던 이종학이 억양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얼굴도 TV화면을 향하고 있어서 옆에 앉아 과일을 깎던 서경윤은 한 호흡이 지나서야 종학의 말을 알아들었다.
“무슨 문제?”
“자금 때문에.”
머리를 돌린 종학이 경윤을 보았다. 얼굴이 일그러져 있었다.
“심각해.”
“자금 지원을 받았잖아?”
포크를 내려놓은 경윤이 외면하고 물었다. 이런 이야기를 둘이서 하는 것은 처음이다.
“내가 알기로는 8억 이상을 받았던데. 그래도 부족해?”
“10억정도 받았어.”
“…….”
“내일까지 3억 당좌를 회수하지 못하면 부도가 나. 이건 지난번보다 더 심각해.”
“도대체 어떻게 관리를 했기에.”
얼굴을 굳힌 경윤이 종학을 쏘아보았다.
“그렇게 돈을 쏟아부었어도 그 모양이야? 밑빠진 독에다 물을 부은 꼴이잖아?”
“원자재 가격이 두달 사이에 30%나 올랐어. 거기에다 우진물산이 결제한 어음 2억이 부도가 났어. 그것이 치명적이야.”
“그래서?”
경윤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지금까지 회사 이야기로 이렇게 언성을 높인 적이 없는 경윤이다. 그리고 종학도 집에서는 회사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았다.
“날더러 어떻게 하라는거야?”
“글쎄, 상황이 그렇다는 거지.”
시선을 내린 종학이 그렇게 말했지만 세심한 성품이라 의도없이 말을 꺼냈을 리는 없다. 그때 영일이 방에서 나오더니 화장실에 들어갔으므로 둘의 대화는 끊겼다. 자리에서 일어난 경윤이 다시 영일을 재우고 왔을 때는 10분쯤 지난 후였다. 그동안 경윤은 마음을 가라앉혔는지 평온한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내일까지 3억 당좌를 막아야 한다고?”
옆에 앉은 경윤이 확인하듯 묻자 종학은 먼저 길게 숨부터 뱉었다.”
“막지 못하면 난 또 구속돼.”
“이 지경이 되도록….”
잇사이로 말하던 경윤이 입을 다물더니 TV를 노려보았다. 그러고는 음소거 버튼을 눌렀으므로 갑자기 집안은 무거운 정적에 싸였다.
“그래서 어떻게 할 작정이야?”
불쑥 경윤이 집안의 정적을 깨뜨리자 우두커니 앉아있던 종학이 어깨를 세웠다.
“그냥 알고 있으라는 말이야.”
“준비를 하고 있으라는 뜻이야?”
“그런 뜻도 있어.”
“그 사람한테 연락해봤어?”
마침내 경윤이 그렇게 묻고는 어금니를 물었다. 그리고 종학을 쏘아보면서 자신보다 그가 더 자존심이 아프기를 기대했다. 경윤의 시선을 받은 종학이 머리를 끄덕였다.
“했어.”
“그런데?”
“연락이 안돼.”
“무슨 말이야?”
“며칠 전에 외국에 나갔다는 거야. 최사장하고 같이. 그쪽에서 연락해오지 않으면 이쪽은 알 수가 없다는군.”
“…….”
“이번 한번만 지나가면 되는데.”
혼잣소리처럼 종학이 말했을 때 경윤은 다시 어금니를 물었다. 종학의 속셈을 이제야 알았기 때문이다. 종학은 경윤에게 구조 요청을 하고 있는 것이다. 조철봉 대신으로.
조철봉이 서경윤과 통화를 했을 때는 이종학의 회사가 부도를 낸지 이틀 후였다. 그 사이 경윤은 사흘 동안 스무번쯤은 회사에다 전화를 걸어 조철봉을 찾았지만 통화하지 못했다. 조철봉은 갑중과 함께 칭다오에 머물고 있었는데 경윤이 연락해온 시간까지보고는 다 받았다. 물론 종학의 회사가 어떻게 되어 가는지도 훤하게 알고 있었다. 집에 있던 경윤은 조철봉의 목소리를 듣자 반색을 했다. 종학은 지난번처럼 피신 중이었으니 불안할 것이었다.
“지금 어디야?”
대뜸 경윤이 물었으므로 조철봉은 전화기를 고쳐쥐었다.
“여긴 베이징이야.”
베이징이 칭다오보다 약간 멀다. 그러자 경윤은 감정을 억제한듯 낮게 말했다.
“저기, 회사가 부도났어.”
“응? 뭐라구?”
시치미를 뗀 조철봉이 목소리를 높였다.
“부도가 나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저기, 이사장 회사가.”
비위가 상하면 조철봉에게 종학을 영일아빠라고도 칭했던 경윤이지만 오늘은 그럴 입장이 아닐 것이었다.
“아니, 왜?”
조철봉이 계속 시치미를 떼자 경윤의 말이 조금 빨라졌다.
“갑자기 거래선이 부도를 맞아서 어음이 휴지가 되었어.”
“저런.”
“이 사람이 여러번 최갑중씨한테 사정을 이야기했다던데, 못들었어?”
“금시초문이야.”
“큰일났어, 어떡해? 3억 당좌가 부도가 나서 조금 전에는 경찰이 왔다 갔어.”
“이사장은 지금 어디 있는데?”
“지금 숨어있어.”
“이런, 참.”
혀를 찬 조철봉이 다시 물었다.
“얼마 부도를 낸거야?”
“3억 당좌였는데 지금 5억이 되었어. 해결하려면 6억은 있어야 될 것 같아.”
“….”
“어쩌면 좋아?”
말은 그렇게 물었지만 해결해달라고 강요하는 것이나 같았다. 조철봉이 쓴웃음을 지었지만 목소리는 신중했다.
“내가 사람을 보낼테니까 이사장하고 만나도록 해. 자세한 이야기는 들어야 할테니까.”
“그럴게, 그럴게.”
다시 반색을 했던 경윤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이 그렇게 도와주었는데 또 이 꼴이 되어서 정말 면목이 없어. 그 사람도 당신한테는 머리를 들지 못하겠대.”
“….”
“이번 한번만 더 도와주면 앞으로는 무슨일이 있어도 우리끼리 해결할테니까 부탁해. 영일이를 봐서라도.”
그순간 소리죽여 심호흡을 한 조철봉이 눈을 부릅떴지만 역시 경윤은 보지 못했다. 경윤의 말이 이어졌다.
“그럼 시간과 장소를 말해줘. 이사장을 보낼테니까.”
경윤에게 종학과 만날 약속을 해주고 난 조철봉은 곧 최갑중을 불렀다. 갑중이 사무실에 들어섰을 때 조철봉은 정색하고 말했다.
“영일 엄마하고 통화했다. 이번 한번만 더 도와달라고 하는데, 영일이를 봐서라도 말이야.”
갑중이 눈만 가늘게 떠 보이자 조철봉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서 이종학이하고 만나기로 했다. 만나서 자세한 이야기를 듣기로 말이야. 그러니까 준비해.”
이종학은 제 마누라 서경윤이 전남편 조철봉과 자주 만나는 것을 안다. 아니 오히려 결혼시절보다 더 친밀한 관계로 잠자리도 같이 하는 것까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처음 얼마동안은 당연히 그 사실에 분노하고 고민했던 종학은 시간이 흐르자 무덤덤해졌다.
더욱이 사업에 조철봉의 도움을 받게 되면서 더욱 감각이 둔해졌다. 지금같은 상황에서는 전남편 조철봉과 경윤이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 종학에게는 다행이었다. 입에서 손이 나올 상황이 되면 인륜이나 도덕심은 희미해지기 마련이다. 은신처로 사용하고 있던 시흥의 오피스텔을 나와 근처의 커피숍에 들어선 종학은 밝은 표정이었다.
커피숍 안에는 손님이 두 테이블뿐이었는데 동네 부동산업자들 같았다. 구석쪽 입구를 향한 자리에 앉은 종학은 손목시계를 보았다. 오후 4시 5분전이었다. 최갑중이 보낸 김 변호사는 종학도 안면이 있는데다 부담이 없는 상대였다. 종업원에게 커피를 시킨 종학은 의자에 등을 붙이고 앉아 조금 여유있는 시선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오후 2시쯤에 경윤의 연락을 받았을 때 순식간에 지옥에서 극락으로 날아간 기분이었다. 부도를 맞지 않은 사람은 그 심정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차라리 시한부 인생을 통보 받더라도 부도만은 벗어나고 싶어한다. 종학이 다시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을 때였다. 옆자리의 부동산업자가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종학의 앞에 섰다.
“이종학씨 맞지요?”
사내가 불쑥 묻는 순간 종학의 가슴은 덜컥 내려앉았다. 눈앞이 노랗게 된 종학이 입만 반쯤 벌렸을 때 사내의 손이 어깨위에 내려졌다.
“난 강서경찰서 안경환 수사관입니다. 같이 가주셔야겠습니다.”
그때 옆 테이블의 사내 하나도 자리에서 일어나 종학의 앞에 섰다. 일행인 것이다.
“아니, 잠깐만.”
정신을 차린 종학이 어깨를 흔들어 사내의 손을 뿌리쳤다. 김 변호사가 나타나 당좌만 풀어주면 만사는 해결되는 것이다.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여기서 사람을 만나기로 했으니까요.”
“우리가 당신 종업원이야?”
형사가 버럭 소리치더니 다시 종학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이번에는 손길이 거칠었다.
“자, 갑시다. 우리도 바쁜 몸이야.”
그순간 종학은 형사들이 어떻게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일어나면서 가슴이 다시 내려앉았다. 그때 종학의 분위기를 눈치챘는지 나중에 일어난 형사가 뱉듯이 말했다.
“변호사를 기다리는 모양인데, 김동일 변호사 말이야.”
형사가 누런 이를 드러내며 소리없이 웃었다.
“그 사람 이곳에 안와. 아마 경찰서로 직접 올거야.”
놀란 종학이 눈만 크게 떴을 때 형사가 주머니에서 수갑을 꺼내 보였다.
“갑시다. 이걸 채우지는 않을테니까. 순순히 연행되기만 한다면 말이오.”
종학이 어깨를 늘어뜨렸다. 김동일과 만난다는 정보가 사전에 누출된 것이다. 전화가 도청된 것이 분명했다. 그로부터 20분쯤 지났을때 칭다오의 사무실에 앉아있던 조철봉은 갑중의 보고를 받았다.
“이종학이 연행되었습니다.”
갑중이 표정없는 얼굴로 말했다.
“당분간 김 변호사한테 나타나지 말라고 했더니 영일 엄마가 난리를 칠테니까 외국이라도 다녀오겠다고 하더군요.”
이제 종학은 완전한 절망감에 휩싸이게 될 것이다.
“김변호사가 커피숍 앞에서 형사들한테 붙잡혔다고 하더군요.”
최갑중이 송화구에 대고 입맛을 다시는 소리를 냈다.
“형사들이 미행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이사장이 잡히게 되었는데.”
서경윤은 잠자코 있었으므로 갑중이 말을 이었다.
“지난번에도 김변호사가 이사장 일을 봐준 적이 있어서 감시하고 있었던거죠. 어쨌든 한번은 경찰 조사를 받아야 될 테니까 상관 없습니다.”
“그럼 곧 석방되겠지요?”
경윤이 묻자 갑중은 이번에는 소리없이 입술만 찌푸리고 웃었다.
“잘 될 겁니다.”
“조사장은 지금 어디 계세요?”
“어제 베트남에 가셨습니다. 급한 일 때문에요.”
“잘 부탁해요. 최사장님.”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정중하게 말한 갑중이 전화기를 내려놓고는 앞에 앉은 조철봉을 보았다.
“김변호사는 지금 옌타이에 있습니다. 영일어머니는 김변호사가 나타나지 않으면 난리를 칠 건데 어떻게 하지요?”
“그냥 놔둬.”
읽고 있던 신문을 테이블에 내려놓은 조철봉이 외면하고 말했다.
“나타나지 않으면 결국 눈치를 채겠지.”
“알겠습니다.”
머리를 끄덕인 갑중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떠올랐다가 금방 사라졌다.
“그럼 이종학이 구치소로 넘어갈 때쯤해서 귀국하라고 하지요.”
조철봉은 신문에 시선을 준채 대답하지 않았다. 일은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었지만 경윤이 안절부절못하는 꼴을 보게되자 심사가 뒤틀린 것이다. 경윤은 종학에 대해서 헌신적이었다. 사람은 위급한 상황이 되면 진면목이 드러나게 되는 법이다. 그날밤, 조철봉은 대취했다. 연거푸 폭탄주를 마셔대서 놀란 갑중이 만류했지만 듣지 않았다. 조철봉의 심복으로 눈만 움직여도 대번에 분위기를 알아챈 갑중이었지만 이번에는 영문도 모른 것이 분명했다. 오늘 밤에는 조철봉의 기분이 좋은지 나쁜지도 감을 잡지 못한 것이다. 둘은 이제는 30호점까지 확장된 KTV의 27호점에서 마시는 중이었는데 옆에는 중국계 아가씨 둘만 앉았다. 오늘은 조선족 아가씨를 통역으로 부르지도 않은 것이다. 그래서 걱정이 된 지배인이 자주 들락거렸다가 조철봉에게 야단을 맞고는 나타나지 않았다.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 터라 아가씨들은 열심히 몸으로 봉사를 했다. 안주를 자꾸 앞에다 날랐으며 입만 벌리면 넣어 주려는 시늉을 했다. 물론 둘의 옆에 앉은 두 아가씨는 눈앞이 환해질 만큼 깨끗한 분위기의 미인이었다.
“수술이나 할까?”
폭탄주를 열몇잔째 마시고난 조철봉이 혼잣소리처럼 말했을 때 갑중은 잘못 들었다. 그래서 제 나름대로 수습으로 해석하고는 대답했다.
“뭐, 간단한 일입니다. 형님.”
곧 구치소로 옮겨지게 될 이종학에 대해서 조철봉이 마음을 바꾼 것으로 해석을 한 것이다. 조철봉이 이렇게 폭탄주를 폭음하는 이유도 그일 때문이라고 생각한 것이 분명했다. 조철봉이 무슨 말이냐는 듯이 눈을 치켜떠 보였을 때 갑중은 말을 이었다.
“김변호사한테 전화 한통만 넣으시면 됩니다. 형님.”
그러자 조철봉이 혀를 차더니 눈을 가늘게 떴다.
“병신아, 수술할까 생각중이라고 했어, 내 철봉을 말이야.”
“예? 철봉을 말입니까?”
놀란 갑중의 얼굴이 하얗게 굳어졌다. 술기운이 다 달아난 얼굴로 갑중이 조철봉을 보았다.
“어, 어떻게 하시려고요?”
“이쁜이 수술.”
“아니.”
이제는 입까지 떡 벌렸던 갑중이 곧 입을 다물고는 침을 삼켰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갑자기.”
“베이징에 유명한 성형외과가 있다고 들었다. 물론 한국인이 원정을 와서 세운 병원이지만.”
소파에 등을 붙인 조철봉의 표정이 평온해졌다.
“그래, 결정했다. 내일 베이징에 가서 수술을 할 거다.”
“형님, 갑자기 왜? 그리고 형님 철봉은 그렇게 하지 않으셔도.”
“물론 그렇게 하지 않아도 훌륭하지.”
조철봉이 손바닥으로 사타구니를 쓸더니, 정색한 얼굴로 앞쪽의 벽을 보았다.
“지금도 내 철봉 만으로도 어떤 여자라도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가 있지.”
“그런데 왜 그러시려고?”
“더 큰 기쁨을 주려고.”
거침없이 말한 조철봉이 다시 폭탄주잔을 쥐고는 옆에 앉은 중국계 파트너를 보았다. 술을 따르라는 표시였으므로 파트너는 서둘러 폭탄주를 만들어 잔에 채웠다. 잔을 들어 단숨에 술을 삼킨 조철봉이 말을 이었다.
“내가 변할 곳은 그곳 뿐이야. 다른 곳은 아무 것도 없어.”
이제는 흐려진 눈으로 조철봉이 갑중을 향해 빙그레 웃었다.
“믿을 곳도 그곳 뿐이다. 내 철봉.”
“여자들이 까무러치겠군요.”
조철봉의 결심이 굳은 것처럼 보였으므로 갑중이 마침내 거들었다.
“형님 철봉만해도 대단했는데 거기에다 이쁜이 수술까지 하다니요.”
“한번 내 철봉을 맛본 여자들은 죽을때까지 잊지 못하게 될 거다.”
초점없는 시선으로 앞쪽의 벽을 향한 채 조철봉이 말을 이었다.
“그것 뿐이야. 다른 건 다 필요없어. 다 거짓이고 위선이다. 아침의 사랑은 저녁이면 식어진다. 그것이 인생이야.”
조철봉의 말에 열기가 띠어졌다.
“그렇지. 내가 차고 있는 철봉이 식어질 때 내 몸과 마음이 함께 끝나는 것이지. 그것이 내 인생이야.”
그순간 갑중은 숨을 들이켰다. 조철봉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옆에 앉은 파트너도 그것을 보더니 긴장한 채 몸을 굳히고만 있다. 조철봉이 갑중을 똑바로 보았다. 아직도 두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었으나 눈동자는 초점이 잡혀져 있다.
“이젠 누구한테도 기대하지 않는다. 아무 것도 바라지 않을테다.”
혼잣소리처럼 말한 조철봉이 시선을 돌려 앞에 놓여진 술잔을 보았다. 파트너가 서둘러 잔에 술을 채우려고 했으므로 조철봉은 머리를 저었다.
“이제 그만.”
한국어였지만 파트너가 금방 알아듣더니 움직임을 멈췄다.
“사람은 다 제 분수가 있는 거야. 분수에 맞지 않는 욕심을 내면 꼭 사고가 일어나지.”
조철봉이 팔을 뻗어 파트너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이제 눈물은 멈췄고 얼굴에는 엷은 웃음기까지 떠올라 있다.
“내일 베이징에 다녀올테니까 넌 이곳에서 기다리도록.
“예 형님.”
갑중이 정색하고 대답했다.
“수술 잘 끝내고 오십시오.”
서경윤이 테이블 앞에 섰을 때 수사관이 눈을 둥그렇게 떠보였다.
“아니 웬일이십니까?”
“어떻게 되었지요?”
경윤이 되묻자 수사관은 무슨 말이냐는듯 이맛살을 찌푸렸다.
“어떻게 되다니요? 오늘 오전에 구치소로 이송되었어요. 서류도 검찰로 넘겼고, 이제 경찰서에 오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순간 경윤의 얼굴이 굳어졌다.
“아니, 그러면 김변호사가.”
“김변호사인지 강변호사인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외면한 수사관이 혼잣소리처럼 말했다.
“변호사가 백명 나타나도 합의하지 못하면 형을 살아야 될겁니다.”
경찰서를 나온 경윤은 길가 건물의 그늘에 서서 길게 숨을 뱉었다. 김동일 변호사는 끝내 나타나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중국에 있다는 조철봉은 물론이고 최갑중과도 연락이 되지 않았다. 고립무원의 상황인 것이다. 그리고 조철봉이 약속한대로 종학을 구해줄 의사가 없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 이윽고 그늘에서 나온 경윤은 택시 정류장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조철봉에 대해 화가 나지는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만큼만 해준 것도 엄청나게 도와준 셈이었다. 택시 정류장에는 대여섯명이 기다리고 서 있었으므로 경윤은 뒤쪽에 섰다. 그러자 다시 긴 숨이 뱉어졌다. 아파트는 조철봉 소유여서 담보로 잡혀있지 않았지만 들어갈 상황이 못되었다. 당좌 3억만 메우면 될줄 알았는데 부도가 나자 연달아서 어음과 당좌가 밀려 들어왔기 때문이다. 현재까지 파악된 것만해도 8억5천이다. 아파트 앞에는 빚쟁이들이 진을 치고 있었으므로 경윤은 영일이를 데리고 몸만 빠져나와 지금 친구집 문간방에서 기식하는 중이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경찰서앞 택시 정류장에는 좀처럼 빈택시가 오지 않아서 줄은 줄어들지 않았다. 오후 4시였지만 태양의 열기는 아직 식지 않았다. 거의 한달째 가뭄이 계속되고 있어서 거리는 먼지로 꽉 차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죽어버리고 싶어.”
경윤이 앞에 선 여자의 살찐 등판을 노려보며 입술만 달삭이면서 말했다.
“다 귀찮아. 그냥 팍 죽고싶어.”
그러자 영일의 얼굴이 떠올랐다. 조철봉의 자식이다. 요즘은 미운짓을 많이 해서 정도 조금 떨어졌지만 자식은 역시 삶의 희망이다.
“병신같은 놈.”
그순간 저절로 욕설이 뱉어졌고 앞에 서있던 비만 체격의 여자가 머리를 돌려 경윤을 보았다. 목소리가 컸기 때문이다. 경윤은 외면한 채 어금니를 물었다. 갑자기 종학에 대한 원망이 터져나온 것이다. 처의 전남편에게 도움을 받아 연명하는 작자이니 어디에다 말을 꺼내지도 못할 입장이다. 더구나 그것이 어디 한두번인가? 지난번 부도가 났을 때도 전남편이 처리를 해주었지 않는가? 그때 핸드폰이 울렸으므로 경윤은 정신이 들었다. 핸드폰을 귀에 붙이자 곧 친구의 목소리가 울렸다.
“얘, 영일이가 너 찾으면서 우는데 좀처럼 그치질 않는구나. 어쩌면 좋지?”
친구의 목소리에는 짜증기가 역력하게 배어나왔다. 경윤이 어제부터 문간방 신세를 지고있는 친구였다. 핸드폰을 고쳐 쥐었던 경윤은 어금니를 물었다. 갑자기 왈칵 눈물이 쏟아졌기 때문이다.
“응, 지금 가는 중이야.”
손등으로 눈을 닦으면서 경윤이 말했다.
“영일이 좀 바꿔줄래?”
그순간 경윤은 영일에게 친아빠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능한 양아빠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대물이시군요.”
조철봉의 철봉을 내려다본 의사가 눈을 가늘게 뜨고 감탄했다. 아직 늘어져 있었지만 철봉은 검은 호스처럼 건들거리는 중이었다. 베이징 시내의 병원 안이었다. 넓고 호화스럽게까지 보이는 원장실 안에는 40대 중반쯤의 원장과 조철봉 둘뿐이다. 물론 원장은 한국인이다. 원장이 시선을 들고 조철봉을 보았다.
“여기에다 수술까지 하시면 그야말로 천하무적이 되겠습니다. 솔직히 제가 이 계통에 20년 가깝게 있었지만 선생님같은 대물은 아주 드물게 보았습니다. 10만명당 한명쯤 될까요?”
원장의 말이 쉴새없이 이어졌다.
“물론 연장마다 각각 특성이 있어서 모두 다르지요. 같은 연장은 하나도 없습니다. 헌데 선생님 연장은.”
다시 조철봉의 철봉으로 시선을 내린 원장이 눈을 더 가늘게 떴다.
“머리가 큰편이니 목 부분에다만 장식을 붙이면 명품이 될 것입니다.”
이제 원장이 손을 뻗쳐 철봉의 머리부분을 두 손가락으로 가볍게 쥐었다. 그러자 놀란 철봉이 불끈 일어섰고 원장이 흠칫하며 손을 떼었다.
“아하.”
감탄한 원장이 입맛까지 다셨다.
“정말 훌륭하십니다. 선생님.”
“꼭 장식을 붙이지 않아도 이것만으로도 모든 여자를 만족시켰지요.”
조철봉도 사람이다. 아주 평범한 보통사람이었으니 칭찬에는 약하다. 더욱이 철봉에 대한 칭찬을 듣고 기분이 좋아지지 않는 남성이 있다면 지구의 생명체가 아니다. 조철봉이 배에 힘을 주었을 때 철봉이 더 일어섰다. 그러고는 총구를 원장에게 겨누고는 거만하게 건들거렸다.
“으으음.”
이제는 감히 철봉을 쥐지는 못하고 원장이 다시 신음했다.
“그럼 어떻게 만들어 드릴까요? 여기 샘플 사진을 보시지요.”
원장이 옆에 놓인 사진첩을 조철봉의 눈앞에 펼쳐 보였는데 희한했다. 한장씩 원장이 넘길 때마다 실물 사진이 드러난 것이다. 철봉에는 갖가지 장식이 붙여졌고 어떤 놈은 살덩이가 흉측하기까지 했다. 원형이 거의 훼손된 놈도 있다.
“이놈은 본인의 요청에 따라 만들어 준 것이지만 바람직하지가 않죠.”
마침 원장이 머리보다 장식이 더 큰 연장을 손으로 짚으며 말했다.
“연장이 무거워서 힘이 떨어지면 일어나기가 힘듭니다.”
“미친 놈.”
저도 모르게 불쑥 말을 뱉은 조철봉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고는 바지를 올려 입은 다음 원장을 보았다.
“며칠 생각을 해봅시다.”
“그러시지요. 연락만 주시면 바로 수술을 해드릴 수가 있습니다.”
원장이 옆에 놓인 사진첩 하나를 조철봉의 앞으로 밀어놓았다.
“여기 사진 복사본이 있습니다. 돌아가셔서 차분하게 검토해보시지요.”
“고맙습니다.”
자리에서 일어선 조철봉은 원장의 배웅을 받으며 병원을 나왔다. 꼭 철봉을 더 강하고 멋있게 만들겠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요즘 들어 자주 외로움이 느껴졌고 그것이 기력을 떨어뜨리는 현상을 어떻게든 탈피해보고 싶었을 뿐이다. 조철봉에게는 철봉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다. 외로움도 무서움도, 또는 좌절감도 섹스로 때웠다. 섹스를 마쳤을 때 더 큰 외로움이 찾아왔을 경우도 있었지만 후련했다. 조철봉은 철봉만을 믿고 살아온 것이다.
조철봉이 서경윤과 통화를 했을 때는 이종학이 구치소로 이송된 일주일 후였다. 그동안 경윤은 구치소로 한번 면회를 갔을 뿐 변호사도 선임하지 않았다. 돈도 없었지만 그럴 마음도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경윤은 조철봉이 의도적으로 연락을 끊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화도 나지 않았다. 핸드폰에서 조철봉의 목소리가 울렸을 때 오히려 가슴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고생 많지?”
조철봉이 먼저 그렇게 묻자 경윤은 심호흡부터 했다.
“아냐, 괜찮아.”
“영일이는 어때?”
“잘놀아, 아직 물정 모르는 애인데 뭐.”
“그래?”
“다 알고 있지?’
경윤이 그렇게 물었다가 조철봉이 대답하지 않자 말을 이었다.
“다 괜찮아. 이해할 수 있으니까.”
“뭘 이해한다는 거야?”
“지쳤겠지. 그리고 어처구니도 없고, 당신이 우리한테 해준 일을 돌이켜보면 말이야.”
“….”
“그 사람도 재판받고 맘 편하게 지내겠다고 했어. 신경쓰지 않아도 돼.”
“…”.
“난 내일 시골 어머니한테 내려갈 작정이야. 영일이한테도 그곳이 나을 것 같아서.”
“영동에?”
“공기도 맑고 인심도 좋은 곳이야. 난 이제 그곳에서 살겠어.”
경윤의 친가는 충청북도 영동에 있는 것이다. 전화기를 고쳐쥔 조철봉이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경윤이 낙향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것이다. 그것은 이종학에 대한 인연을 끊었다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다.
“내가 오늘 귀국할테니까 저녁에 만나자.”
조철봉이 힐끗 앞에 앉은 최갑중에게 시선을 주고는 말을 이었다.
“날 만나고나서 내려가든지 올라가든지 결정하도록 해.”
“그 사람 일은 신경쓰지 말라니까.”
“글쎄, 그건 알겠어. 그러니까.”
“알았어, 그럼.”
통화가 끊겼을 때 전화기를 내려놓은 조철봉이 다시 갑중을 보았다. 갑중은 신문을 펼쳐들고 있었지만 이쪽 통화 내용만을 듣고도 상황을 짐작했을 터였다.
“충청도 친가로 내려간다는군. 영일엄마가 말이야.”
“들었습니다.”
신문을 내려놓은 갑중이 정색했다.
“이종학도 포기한 모양이지요?”
“그쪽도 마음 편하게 재판을 받겠다고 한다는군.”
“잘 되었습니다.”
“지금 한국으로 가야겠다.”
손목시계를 내려다본 조철봉이 갑중에게 말했다.
“비행기표 끊어놔. 가장 빨리 떠나는 비행기로.”
“어떻게 하실건데요?”
“만나봐야지.”
외면한 조철봉이 혼잣소리처럼 말했다.
“어디 그쪽일이 내 계획대로 된 적이 있더냐? 터지고 나면 그냥 수습했을 뿐이지.”
“나아, 참.”
입맛을 다셨지만 갑중은 잠자코 전화기를 들었다. 항공권을 예약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맞는 말이다. 서경윤과 영일이 관련된 일에서는 대부분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 먼저 선수를 쳤더라도 나중에는 끌려들어가 결론을 냈다. 갑중은 그것을 다 안다.
커피숍 안으로 들어선 서경윤은 조철봉을 보자 태연한 표정으로 다가와 앞자리에 앉았다. 아주 자연스러운 표정이었고 태도여서 오히려 조금 흥분해 있던 조철봉이 무안해질 정도였다. 옅게 화장을 한 경윤의 얼굴은 약간 수척해진 것 같았지만 눈빛은 전처럼 강했다.
“영일이는?”
조철봉이 묻자 경윤은 낮게 대답했다.
“유아원에 있어. 곧 데리러 가야 돼.”
“지금 어디에 묵고 있는데?”
“친구집.”
짧게 말한 경윤이 다가온 종업원에게 커피를 시키더니 조철봉을 똑바로 보았다.
“오전에 내가 이야기했지만 다 이해할 수 있어. 그러니까 신경쓰지 마.”
“네가 뭘 이해한다는 거야?”
정색한 조철봉이 경윤을 보았다.
“넌 아직 아무 것도 모르고 있어.”
경윤은 눈만 크게 떴고 조철봉의 말이 이어졌다.
“넌 내가 유일하게 사랑했던 여자이고 또한 내 유일한 혈육의 엄마야.”
“…”
“내가 비록 널 그자한테 넘겼지만.”
침을 삼킨 조철봉이 어금니를 물었다가 풀고는 경윤을 노려보았다.
“네가 내 가깝게 있다는 사실만으로 나에게 얼마나 위안이 되었는지 알아?”
이제 경윤은 눈도 깜박이지 않고 조철봉을 노려보았다. 조철봉의 부릅뜬 눈에서 어느덧 굵은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난 내 자신을 잘 알아.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너를 이사장과 다시 재결합시켰던 거야. 하지만.”
손등으로 눈을 닦은 조철봉이 경윤을 보았다.
“지금은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 네가 조금만 해준다면 하나씩 맞춰 나갈 수가 있을 것 같다.”
“어떻게 하자는 거야?”
그때 경윤이 낮게 물었는데 목소리가 떨렸다. 그러나 똑바로 뜬 두눈은 조철봉의 얼굴에서 떼어지지 않았다.
“뭘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거야?”
“네 남편, 그리고 영일이의 아빠 역할을 말이야.”
조철봉이 상반신을 탁자위로 굽히고는 낮지만 분명하게 말했다.
“우리가 노력만 한다면 누구 못지않게 행복한 가정을 꾸며 나갈 수가 있다고 믿어.”
“지금 거느리고 있는 여자들은 다 어떻게 하고?”
경윤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바로 얼마전에 살림 차려준 임미선이는 어떻게 하실 건데?”
“하나씩 정리를 하지.”
“내가 그 말을 믿을 것 같아?”
“믿어야지.”
조철봉이 팔을 뻗어 경윤의 손을 쥐었다.
“내가 이렇게 달려온 이유를 알고 있지 않아? 내가 너하고 영일이를 언제 버려둔 적이 있더냐? 항상 내 가슴속에 품고 있었던 거야.”
그러고는 조철봉이 다시 손등으로 눈을 닦았다. 두 테이블 건너 좌석에 앉은 손님들이 아까부터 이쪽을 흘긋거리고 있었지만 조철봉은 물론이고 경윤도 상관하지 않았다. 조철봉이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난 너밖에 없어, 경윤아. 그러니까 너도 영일이하고 나만을 의지하고 살면 돼. 내가 절대로 너희들은 고생시키지 않을테니까.”
그러고는 조철봉이 이를 악물었다가 풀더니 번들거리는 눈으로 경윤을 노려보았다.
“다 정리할테니까 믿어줘, 경윤아.”
진심이 가득 밴 얼굴이며 태도였다.
서경윤과 헤어진 조철봉이 사무실로 돌아왔을 때는 퇴근 무렵이었다. 조철봉이 자리에 앉자 방에서 기다리고 있던 최갑중이 잠자코 시선을 주었다. 경윤과 만난 결과가 궁금하다는 표시였다. 테이블 위에 놓인 서류를 대충 훑어보고 난 조철봉이 머리를 들었을 때까지 갑중은 참을성있게 기다렸다.
“영일엄마한테 아파트를 하나 얻어주도록, 조용한 서울 교외의 주택가가 낫다.”
조철봉의 말에 갑중은 대번에 머리를 끄덕였다.
“예, 형님. 일산에 구입해둔 주택이 있지 않습니까? 내일이라도 당장 옮길 수가 있습니다.”
“그럼 그 곳으로 옮기도록 해라.”
“가구도 내일까지 준비하겠습니다.”
“나도 당분간 그곳에서 살테니까 그렇게 알도록.”
“예에?”
놀란 갑중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리고는 한동안 눈치만 살피더니 겨우 입을 열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다시 결합하시기로 한 겁니까?”
“왜? 그럼 안되는 거냐?”
“아니, 그것보다도.”
침을 삼킨 갑중이 정신을 수습하고는 눈의 초점을 맞췄다.
“영일 어머니가 승낙을 하셨습니까?”
“이 자식아, 그러자고 했으니까 같이 사는 거지. 원, 별 실없는 자식 다 보겠군.”
“그럼 이종학이 하고는.”
“갈라서는 거지.”
“이혼한다는 것입니까?”
“그래야 되지 않겠어? 나하고 사는 이상 말이야.”
“그렇다면.”
헛기침을 한 갑중이 정색하고 조철봉을 보았다.
“다른 여자들은 어떻게 하실 작정입니까? 영일 어머니도 대충 알고 있을텐데요.”
갑중이 묻고 싶은 요점이 이것이다. 일단 경윤과 다시 결합을 하게 된다면 조철봉의 난봉질은 막을 내려야만 되는 것이다. 우선 경윤은 최근에 조철봉이 살림을 차려준 임미선부터 요절을 낼 것이었다. 조철봉이 마침 잘 물었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한국에서는 정리를 해야겠지.”
“발을 끊으신단 말씀입니까?”
“미친 놈.”
혀를 찬 조철봉이 이맛살까지 찌푸렸다.
“영일 엄마한테는 다 정리한다고 했지만 아마 그쪽도 믿지 않을 거다.”
“형님, 그렇다면 어떻게.”
“내 목적은 영일이야.”
눈을 부릅뜬 조철봉이 갑중을 노려보았다.
“이번 기회에 영일이에게 친부의 뚜렷한 모습을 심어줄테다. 제 어미가 두번 다시 딴 놈을 아비라고 하면서 나에게 상처를 주지 못하도록 말이지.”
“아아.”
건성으로 감탄사를 뱉은 갑중을 향해 조철봉의 말이 이어졌다.
“영일이가 나를 따르게 되면 서경윤은 힘을 쓰지 못해. 인질 작전도 통하지가 않는단 말이다.”
“아아, 예.”
이번에는 갑중의 감탄사에 진실성이 배어났다. 조철봉이 눈앞에 경윤이 있는 듯이 노려보았다.
“내가 눈물 콧물을 질질 흘리면서 애원을 하니까 결국 같이 살자고 합의를 하더군. 겉으로는 감동을 받은 표정이었지만 속으로는 목에서 손이 나올만큼 절박한 상황이었으니 못이긴 척 내 제의를 받아들인 거야.”
그리고는 조철봉이 쓴웃음을 지었다.
“우리 둘 다 연극을 그럴듯하게 한 거야.”
(773)인생-28
다음날 오전 서경윤은 일산의 대저택 앞에 섰다. 저택은 주택가에 위치해서 조용했고 이차로에는 차량 통행도 드물었다. 영일의 손을 잡고 저택 앞에 선 경윤은 심호흡을 했다. 꿈에 그리던 집이었던 것이다. 정원에는 잔디가 곱게 깔려있고 벽돌로 지은 이층 건물은 나무에 둘러싸여 있었는데 5백평도 넘어보이는 대저택이었다. 순식간에 기가 질린 경윤이 추춤거리고 있을 적에 뒤에서 인기척이 났다.
“들어가시지요.”
몸을 돌린 경윤은 뒤에 서있는 갑중을 보았다. 예의바르게 머리를 숙여보인 갑중이 손에 쥐고있던 리모컨의 버튼을 누르자 육중한 철문이 소리없이 열렸다. 갑중을 따라 저택 안으로 들어선 경윤은 압도되어서 한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이만한 저택이면 엄청난 가격이 될 것이었다.
“가구가 곧 도착합니다. 그리고 가정부와 경비원 겸 관리자도 오후에 올 겁니다.”
정원의 잔디밭을 앞장서 걸으며 갑중이 말했다. 그때 저택의 현관문이 열리더니 작업복 차림의 사내들이 제각기 연장을 들고 나왔다. 내부 청소를 하는 것 같았다.
“청소 끝났습니다.”
사내 하나가 갑중에게 말했다.
“이제 잔디밭 정리만 끝내면 됩니다.”
갑중의 뒤를 따라 현관 안으로 들어선 경윤은 다시 숨을 죽였다. 경윤의 손을 쥔 영일도 아까부터 놀란듯 눈동자만 굴리고 있다. 영일도 이런 큰집을 본 것은 처음일 것이다. 현관문 안은 30평도 더 되어보이는 로비겸 응접실이었다. 대리석 바닥 위에 양탄자가 깔려있고 천장에는 육중한 샹들리에가 매달려 있어서 마치 호화로운 궁전 같았다. 그때 갑중이 몸을 돌려 경윤을 보았다.
“외국 대사가 구입했다가 몇달 사용하지도 못하고 내놓은 저택이지요. 그래서 분위기가 유럽식입니다.”
“좋네요.”
겨우 그렇게 말한 경윤이 주춤 발을 떼더니 로비 구석쪽 소파로 다가가 영일과 나란히 앉았다. 갑자기 온몸에 맥이 풀려서 집을 둘러볼 기력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경윤은 조철봉이 속된 말로 돈깨나 벌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오늘 처음으로 실감하게 된 것이다. 부동산에 까막눈인 사람이라도 이만한 저택이면 최소한 1백억 가치가 된다는 것을 알 것이었다.
“집 구경 안하십니까?”
2층 계단으로 오르던 갑중이 발을 멈추고 물었으므로 경윤은 머리를 들었다.
“피곤해서요.”
저택 아래층 넓이는 1백평도 더 되어 보여서 목소리가 울렸다.
아래층은 로비와 응접실, 식당, 주방, 그리고 방이 2개, 화장실이 2개 있습니다.”
계단에 선채 갑중이 설명했다.
“이층이 조사장님과 사모님, 영일이의 생활 공간이 되겠습니다. 침실이 3개, 응접실과 서재, 베란다와 운동실, 그리고 대형 사우나실이 갖춰져 있습니다.”
“뒤뜰에는 숲에 가려진 야외 수영장이 있습니다. 여름에 휴식을 취하기에는 그만이지요.”
“최갑중씨.”
갑자기 경윤이 정색하고 이름을 불렀으므로 갑중이 긴장한듯 눈을 좁혀 떴다. 그때 경윤이 물었다.
“영일아빠가 나한테 이러는 건 정말 무엇 때문일까요? 최갑중씨는 알고 있지요?”
그러자 갑중의 눈이 더 가늘어지더니 입술 끝이 조금 비틀어졌다.
“형님이 외롭기 때문이지요.”
계단에 그대로 주저앉은 최갑중이 외면한 채 말했다.
“난 알고 계신줄 알았는데.”
“외롭다구요?”
경윤이 눈을 둥그렇게 떴지만 크게 놀란것 같지는 않았다. 시큰둥한 반응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때 갑중이 시선을 내린 채 말을 이었다.
“형님 가슴은 항상 비어 있습니다. 어떤 여자로도 채워지지가 않죠.”
“바람둥이는 다 그래요.”
“형님이 영일이 어머님한테는 진실했습니다. 제가 가장 잘 압니다.”
머리를 든 갑중이 경윤을 정색하고 보았다.
“제가 보기에는 형님만큼 순수하신 분도 없습니다. 언제 형님이 누구를 배신한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갑중이 머리까지 젓더니 길게 숨을 뱉었다.
“형님은 스쳐가는 여자들이 많았지만 마음은 항상 영일이와 영일이 어머님한테만 열려 있었지요.”
경윤은 잠자코 앞쪽 벽을 보았다. 최갑중이 조철봉의 분신과도 같은 심복이라는 것은 경윤이 잘 안다. 그리고 갑중이 조철봉에게 손해가 될 말이나 행동은 일절 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도 안다. 그러나 갑중의 말은 달콤했다. 다시 한번 반복해서 듣고 싶을 정도였다. 그때 영일이 지루했는지 자리에서 일어나 응접실의 유리문을 열고 베란다로 나갔다. 둘의 시선이 영일에게 모였다가 부딪쳤다.
“영일이를 위해서라도 어머님이 양보를 하셔야 될겁니다.”
불쑥 말을 뱉은 갑중이 놀란듯 눈을 크게 뜬 경윤의 시선을 외면했다.
“그것이 인생 아닙니까? 다 만족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형님이나 영일이 어머님이나 말이지요.”
“알고 있어요.”
마침내 경윤이 입을 열었다.
“그래서 나도 다시 함께 살기로 결심을 한 거예요.”
“잘 생각하셨습니다.”
“영일이를 위해서 욕심을 버리기로 했어요.”
“그렇게만 해 주신다면 문제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자신있게 말한 갑중이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부드러운 시선으로 경윤을 보았다.
“저는 이제 안심했습니다. 형수님이 그런 자세를 갖고 계신 줄은 몰랐습니다.”
갑중은 처음으로 경윤을 형수라고 부른 것이다. 이층으로 올라온 갑중은 베란다로 나와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다이얼을 누르자 곧 신호가 울리더니 조철봉이 전화를 받았다.
“형님, 지금 영일이하고 같이 있습니다.”
갑중이 보고했다.
“그런데 형수님이 영일이를 위해서 욕심을 버린다고 하십니다. 양보를 하겠다는 것입니다.”
“흥.”
가볍게 코웃음을 친 조철봉이 웃음띤 목소리로 말했다.
“인생사가 마음 먹은 대로 되는 것이 아니야. 곧 욕심이 일어나고 분란이 생길거다.”
“하지만.”
“지금은 위축되었지만 곧 빳빳하게 머리를 세우겠지.”
그러고는 조철봉이 짧게 웃었다.
“영일 엄마도 다 안다. 내가 오직 영일이 때문에 온갖 거짓말을 다 했다는 것을. 나나 영일 엄마에게 진실이 있다면 영일에 대한 부모사랑 뿐이야.”
조철봉의 말에 이제 웃음기가 가셨다.
“하지만 마음 먹기에 따라서 우리 모두 행복해질 수도 있겠지.”
775)색녀-1
조철봉의 관점에서 보면 색녀(色女)와 보통여자의 차이는 미미했다. 제아무리 날고 뛴다는 소문이 난 색녀를 겪어봐도 크게 다를 것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색녀는 대부분 접대부였기 때문에 얼마든지 자신의 표현을 과장할 수 있어서 남자들이 속은 경우도 많았다.
그래서 조철봉은 웨이터 200번이 은근한 표정으로 색녀가 있습니다 했을때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카바레에서 제일 듣기 좋은 소개말은 깨끗한 여자가 있습니다, 또는 세련된 미모입니다, 등이었지 색녀가 있다는 말은 쓰지 않는다. 200번이 조철봉을 훤하게 아는 터라 덜렁 그렇게 표현을 했지만 역시 실수한 것이다. 조철봉의 반응을 살핀 200번이 정정했다.
“섹시합니다. 몸매도 끝내주구요. 그리고 남자는 그 여자가 선택합니다. 괴짜지요. 올 때마다 파트너를 바꾸기 때문에 저희들이 색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인마, 색녀는 색을 잘쓰는 여자를 말하는 거야. 그렇다면 실제로 부딪쳐봐야 알고, 네가 해봤어?”
옆에 앉아있던 갑중이 준열하게 나무랐다.
“그리고 색녀라고 소개하면 제아무리 단단한 대포를 가진 놈이라도 긴장하게 되는 거야. 얀마, 비싼술 마시고 어떤 놈이 색녀한테 시달리려고 하겠냐? 넌 장사하는 법을 다시 배워야겠다.”
“저는 칭찬으로 한 말입니다만.”
“칭찬 좋아하네. 그 여자 앞에 가서나 그말을 해. 인마.”
밤 9시반이 되어가고 있어서 테헤란로의 카바레 사이판은 입추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만원이었다. 사이판은 근래에 개업한 카바레중 하나로 물이 좋다는 소문이 미국에까지 퍼져서 여자 손님중에 LA에서 온 사람도 있었다. 아예 태평양을 날아 원정을 온다는 것이다. 카바레는 경제가 불황일수록 영업이 잘되는 곳이다.
그러나 방에서 양주를 퍼마시고 노래방 기계를 틀면 룸살롱과 비슷한 가격이 나오는데다 여자들과 합석해서 그쪽 술값까지 뒤집어쓰면 한달 월급이 날아가는 경우도 있다. 조철봉이 아직도 무안한 표정으로 서있는 200번을 보았다.
“데려와 봐.”
“예, 사장님.”
“내 소개는 어떻게 했지?”
“그저 잘나가는 사장님이라구 했습니다.”
200번이 방을 나갔을 때 조철봉이 갑중을 보았다.
“저놈은 아마 나를 색남이라고 소개를 했을 거다. 물개라고 했든지, 색녀한테는 그런 파트너가 어울리는 법이지.”
“참, 별일 다 보는군요.”
갑중이 어깨를 들썩이며 헛웃음을 웃었다.
“색녀를 소개 받다니요. 아무래도 당번을 바꿔야 될 것 같은데요. 저렇게 해서 제대로 된 여자를 데려오겠습니까?”
“다른 때는 똘똘하던데 오늘은 어리버리하는 것 같다.”
“들어오면서 보니까 오늘 물이 좋던데 이러다 공치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저녁을 먹으면서 소주를 나눠 마신터라 갑중의 얼굴에는 이미 취기가 가득 했다. 뜻이 맞는 일행과 함께 카바레에 들어갔을 때처럼 안온한 때는 없다. 룸살롱에서 아가씨들을 기다리는 설렘과는 근본이 다른 것이다. 이곳은 인간대 인간으로 만난다.
설령 두마디 말끝에 차이게 되더라도 여운은 싱그럽다. 팁으로 아가씨를 사는 룸살롱과는 다른 것이다. 그때 방문이 열리더니 200번의 안내로 여자 두명이 들어섰다. 그리고 그순간 갑중은 물론이고 조철봉은 숨을 삼켰다. 앞장 선 여자는 그야말로 퀸카였기 때문이다. 깨끗하고 섹시하고 아름답고 날씬했다. 그리고 200번이 말한 색녀가 분명했다.
“어서오십쇼.”
서둘러 일어나 여자들을 반긴 것은 당번을 바꿔야겠다고 투덜대던 최갑중이었다. 눈치가 귀신같은 그는 이미 앞장선 색녀를 훑어보았음은 물론 제몫이 될 다른 여자 또한 보기드문 미모의 소유자라는 것을 인지한 것이다. 이만하면 대길이다.
“실례합니다” 하면서 색녀가 먼저 조철봉의 옆에 앉았고 일행은 자연스럽게 갑중의 파트너가 되었다. 방안의 분위기를 살핀 200번이 소리없이 사라졌을 때 조철봉이 먼저 입을 열었다.
“만나봬서 반갑습니다. 저는 미스터 조올시다. 이집 단골이지요.”
“전 박이에요.”
색녀가 웃음 띤 얼굴로 조철봉을 보았다.
“이집 단골이라고 하셨죠?”
“예. 5년이 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한번도 만나지 못했지요? 저도 1년이 넘었는데.”
“한달 평균 몇번이나 오십니까?”
“세번 정도.”
“저는 지난 1년동안 외국에 자주 나가 있어서 서너번밖에 오지 못했지요.”
“그래서 그렇구나.”
“그런 일만 없었다면 우린 진작 가까워졌을텐데.”
“그러게 말예요.”
대화는 그야말로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물 흐르듯이 진행되었다. 카바레에서는 처음 2분이 가장 중요하다. 인상도 큰 비중을 차지하지만 대화를 적절하게 이끌어야 한다. 어디서 왔느냐? 술 잘 마시느냐? 밥 먹었느냐? 따위의 대화로 첫 2분을 소비한다면 그날 작업은 성사될 가능성이 낮다고 봐야 된다. 조철봉은 색녀의 수준에 맞도록 조금 과감하게 베팅을 했고 그것이 대화의 윤활유 역할을 했다. 이 집 단골이라고 먼저 내지른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런데.”
정색한 조철봉이 색녀의 두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솔직하게 말씀해주셨으면 고맙겠는데.”
“뭔데요?”
색녀의 검은 눈동자가 조철봉의 시선과 부닥쳤다. 맑은 눈이었다. 콧날도 반듯했고 꾹 닫힌 입술은 단정해서 도무지 색녀의 이미지로는 어울리지 않는다. 조철봉은 심호흡을 했다. 문득 차가운 표정의 이 여자가 열락의 경지에 올라 아우성치는 장면을 상상했기 때문이다. 눈동자의 초점을 잃은 채 입을 딱 벌리고는 두 다리를 번쩍 치켜들고 발가락 끝이 찢어질 것처럼 바깥쪽으로 휘어져 있을 것이었다. 조철봉이 입을 열었다.
“웨이터가 저를 뭐라고 소개했습니까? 혹시 변강쇠나 물개라고 하지 않던가요?”
“흐흥.”
대번에 코웃음 소리를 낸 색녀가 눈을 가늘게 뜨고 조철봉을 보았다.
“은근히 자기 피알하시는 거죠? 그런 별명이 있나 보죠?”
그때 제 파트너하고 뭔가 속닥이고 있던 갑중이 정색하더니 거들었다. 그동안 이쪽에다 신경을 쓰고 있었다는 증거였다.
“웨이터 놈들이 그렇게 소개를 하면 여자들이 좋아할 줄 알고 그런 모양인데 사람을 봐가면서 해야지요. 안 그렇습니까?”
뒤집어서 말했지만 갑중과의 궁합은 언제나 이렇게 잘 맞는다. 그때 색녀가 입을 열었다.
“그랬어요. 선생님이 변강쇠라고. 선생님하고 파트너가 되었던 여자들이 모두 그렇게 말해 주었다는군요.”
조철봉과 갑중의 시선이 부닥쳤다. 그렇다면 색녀의 상대가 되었던 남자들이 웨이터에게 그렇게 말해 주었다는 말인가?
조철봉은 긴장한 표정으로 머리를 끄덕였다.
“그랬군요. 하지만 솔직히 기분 나쁘지는 않습니다. 여기선 그말이 칭찬이니까.”
잠자코 귀를 기울이는 여자를 향해 조철봉이 말을 이었다.
”만일에 웨이터가 박여사를 색녀라고 소개했다면 그것도 칭찬이 되겠지요. 물론 웨이터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지만 말입니다.”
“저를 뭐라고 소개했어요?”
궁금한듯 여자가 묻자 조철봉은 정색했다.
“특급 손님이라고 하더군요. 그것이 이곳에서는 최상의 조건을 갖춘 상대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흥, 설마.”
“내가 보기에도 그렇습니다.”
“어쨌든 저도 나쁜 기분은 아니네요.”
“그런데 변강쇠에 대해서 기대가 되십니까?”
불쑥 조철봉이 묻자 술잔을 들었던 갑중이 움직임을 멈췄다. 이쪽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는 증거였다.
“예, 기대가 돼요.”
여자가 거침없이 대답한 순간 조철봉은 빙긋 웃었다.
“대화가 통하는군요.”
“쓸데없는 말은 생략하는 것이 낫죠. 웨이터가 변강쇠라고 소개해준 남자를 찾아들어온 입장이니까요.”
“그렇군요.”
“난 섹스가 필요해요. 아주 절실하게.”
여자가 두손을 펴 보이면서 눈을 크게 뜬 순간 방안은 잠깐 숨이 막힐 듯한 정적에 덮였다. 갑중이 침을 꿀꺽 삼켰으며 옆에 앉은 여자는 외면했다. 조철봉은 헛기침을 했다. 수백번 카바레 출입을 했지만 이렇게 노골적이고 절실한 표현을 들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여자의 얼굴에는 진실성이 배어나왔다.
조철봉을 향해 여자가 쓴웃음을 지었다.
“이렇게 말하면 대부분의 남자들은 기가 질린 표정을 짓더군요. 기선을 제압당한 기분이 드는가 봐요.”
“아마 그렇겠죠.”
머리를 끄덕인 조철봉이 은근한 시선으로 여자를 보았다.
“결혼했습니까?”
“이혼해서 아이하고 둘이 살아요.”
여자가 이번에도 거침없이 대답하고는 흰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우습게도 애 아빠가 바람을 피워서 이혼을 했죠. 그때까지만 해도 난 정숙한 유부녀였지요.”
“섹스의 기쁨도 나중에 알게 되셨나?”
“그렇죠.”
머리를 끄덕인 여자가 차분해진 표정으로 술잔을 쥐었을 때 갑중이 파트너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섰다.
“형님, 우리는 플로어에 나가겠습니다. 필요하시면 부르시지요.”
다른 사람에게는 알쏭달쏭한 말이었지만 조철봉은 금방 알아들었다. 방에 둘이 있도록 자리를 피해 주겠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따로 방을 잡고 있을테니 무슨 일이 있으면 부르라는 것이다. 갑중과 파트너가 밖으로 나갔을때 여자가 한 모금 양주를 삼키더니 조철봉을 보았다.
“어떤 스타일이세요?”
시선을 받은 조철봉이 쓴웃음을 지었다.
여자는 지금 성행위의 자세를 묻고있는 것이다.
“여자에 따라서 자연스럽게 자세가 달라지던데.”
조철봉이 눈을 좁혀뜨고 진지한 표정이 되었다.
“물론 내 리드에 따르기를 원하는 상대에게는 내 식으로 시작하지만.”
여자는 보통이 아니다. 손도 대기 전에 먼저 대화로 분위기를 띄우려고 한다.
“난 선호하는 자세가 없어요.”
여자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리듬이 맞아야 해요. 물론 남자가 리드해야겠지만.”
“감정의 교감이 이루어지고 나서 섹스를 하는 것이 더 완성도가 높다고 생각합니까?”
“별로.”
머리를 한쪽으로 기울인 여자가 조금 생각하더니 좌우로 저었다.
“아니, 난 미지의 상대하고 하는 것이 더 자극이 커요.”
“그렇다면 강압적인 분위기도….”
“강간 당하고 싶다는 생각도 가끔 했지만 기회가 오지 않더군요.”
200번이 여자를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이만하면 색녀 자격은 충분했다. 조철봉이 감탄한 표정으로 머리를 끄덕였다.
“솔직한 분이시군요. 호감이 갑니다.”
“먼저 이곳에서 한번 해볼까요?”
술잔을 내려놓은 여자가 자연스럽게 물었으므로 조철봉은 심호흡을 했다. 여자는 마치 앞에 안주로 놓인 땅콩을 시식해보겠느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뭐, 그것도 나쁘지 않지요.”
역시 여자와 비슷한 표정이 된 조철봉이 머리를 끄덕였다.
“벗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그냥 앉아서 하십시다.”
“불을 끌 수도 없고 어색하니까 뒤에서 해주시죠.”
“그게 낫겠네요.”
“팬티만 내리면 되겠죠? 하면서 만지는걸 좋아하시면 브래지어도 풀까요?”
“아니, 그건 놔두십시오.”
상담은 일사불란하게 진행되었고 곧 자리에서 일어선 여자가 스커트 밑으로 팬티를 벗더니 단정하게 접어 핸드백에 넣었다.
“전 준비됐어요.”
그러면서 여자가 웃어보인 순간이었다.
조철봉은 철봉이 무섭게 팽창되는 것을 느꼈다. 여자의 분위기에 말려든 것은 분명했지만 조금도 불편하지 않았고 자극이 강하게 온 것이다. 조철봉은 여자를 정면으로 바라보면서 바지 혁대를 풀었다. 지퍼를 내린 다음 팬티와 함께 아래로 바지를 내렸을 때 여자가 눈을 한껏 치켜떴다.
“어머머.”
탄성을 뱉은 여자가 와락 달려들더니 조철봉의 앞에 서둘러 무릎을 꿇었다. 그러고는 두손으로 철봉 밑부분을 감싸쥐고는 입안에 철봉을 조심스럽게 넣었다. 미처 말리고 빼고 할 겨를도 없었으므로 조철봉은 가만 있었다. 여자는 곧 혀로 철봉을 애무하기 시작했는데 열성적이었다. 입안에 가득 철봉을 물고 있는 여자의 얼굴은 기묘하게 보였지만 그것 또한 자극적이었다. 조철봉은 다시 심호흡을 했다. 여자의 애무는 치밀해서 마치 샘 안의 세포가 자극을 주는 것 같았으며 가끔 입술로 죄어주는 느낌도 비슷했다. 이윽고 여자가 침으로 범벅이 된 얼굴을 들더니 입안에서 잠시 철봉을 빼고 물었다.
“강하시네요.”
“뭐가?”
“보통 남자들은 이 정도면 대포를 발사하던데.”
“난 조금 긴 편이지.”
“지금 첫방을 발사해두는 것이 본격적인 작업때 이롭지 않을까요?”
“아니, 천만에.”
쓴웃음을 지은 조철봉이 철봉으로 여자의 코끝을 건드렸다.
“그런 걱정은 하지 마시도록. 난 그따위 시험 발사는 하지 않은지 오래되었으니까 말이오.”
“그래요?”
머리를 끄덕인 여자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힐끔 문에 시선을 주었다.
“괜찮을까요?”
“부르지 않는 한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럼.”
여자가 몸을 돌리더니 소파를 두 손으로 집고 엎드렸다. 아직 스커트와 블라우스는 그대로 입고 있었지만 요염한 자세였다. 파마한 머리가 옆으로 쏠려져서 흰 목이 드러났으며 스커트 밑의 둥근 엉덩이의 곡선은 부드러우면서도 풍만했다. 저도 모르게 고인 침을 삼킨 조철봉이 여자 앞으로 다가가 섰다. 스커트만 들치면 알몸이 드러나는 것이다.
“난 이미 흘러 넘치고 있어요.”
엎드린 채 여자가 맑고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 그것이 들어오면 곧 절정에 닿을 것 같아요.”
물론 이것도 분위기를 고조시키려는 대사였지만 자연스러웠다. 조철봉은 여자의 스커트를 들쳐 올렸다. 그러자 둥근 엉덩이가 환하게 드러났으며 두 다리를 벌린 자세여서 뒤쪽이 다 드러났다. 조철봉은 거침없이 철봉을 샘에 넣었다. 그 순간 여자의 입에서 비명 같은 탄성이 뱉어졌는데 동시에 샘이 수축되었다. 강한 압박이어서 긴장한 조철봉이 철봉을 당겨 접촉 부위를 축소시켜야만 했다.
“으음.”
저도 모르게 탄성을 뱉은 조철봉은 여자의 어깨를 움켜 쥐었다. 승부욕이 발동된 터라 어금니가 물려졌으며 어깨를 쥔 손에도 힘이 가해졌다.
“아아앗.”
여자가 날카로운 탄성을 뱉은 것은 조철봉이 힘껏 철봉을 움직였기 때문이다. 마찰을 강하게 해서 예민해진 신경을 둔화시키려는 것이다. 따라서 샘의 조건에 구애받지 않은 채 철봉이 움직였으며 여자는 휩쓸려왔다. 그리고 예상했던대로 여자의 절정은 빠르고 강하게 몰려왔다. 샘의 벽이 잔뜩 위축되는 것을 신호로 온몸을 굳힌 여자가 두 손으로 소파 시트를 쥐어 뜯으면서 억눌린 신음을 토해낸 것이다. 조철봉은 이를 악물었다. 하마터면 여자의 분위기에 끌려 대포를 발사할 뻔 했기 때문이다. 여자가 이제는 앓는 소리를 길게 뱉으면서 몸을 늘어뜨리기 시작했다. 절정의 순간을 길게 만끽하려는 동작이다. 조철봉은 여자와 몸을 붙인 채 심호흡을 했다. 여자의 몸은 지금까지 겪은 어떤 여자보다도 예민했고 강했으며 호흡이 맞았던 것이다. 지금 샘안에 들어가있는 철봉이 여실히 그것을 느끼고 있다. 그 어떤 경우보다도 지금 이 순간이 황홀했기 때문이다. 그때 여자가 머리를 틀더니 조철봉을 보았다. 한쪽 얼굴만 보였지만 고혹적이다.
“자기야, 아직 안했지?”
대뜸 반말을 썼지만 자연스러웠다. 조철봉이 머리를 끄덕이자 여자가 엉덩이를 움직여 철봉을 샘에 더 넣었다.
“이번에는 앉아서 할래. 자기가 피곤할테니까 내가 위에서 움직일게.”
말을 하면서도 여자는 엉덩이를 움직여 철봉에 자극을 주었다. 조철봉은 여자의 샘이 다시 가득 차오르고 있는 것을 알수 있었다. 용암은 끊임없이 솟아오르고 있는 것이다. 조철봉은 몸을 틀어 소파에 앉았다. 그 사이에 잠깐 철봉이 외출을 했지만 곧 여자가 몸 위로 올라앉는 바람에 다시 채워졌다.
“잠깐만.”
여자가 블라우스 단추를 풀면서 말했다.
“이제는 젖꼭지를 빨아줘. 너무 세게는 하지 말고 혀끝으로.”
브래지어를 풀어 젖가슴을 내놓으며 여자가 말했다.
조철봉은 눈앞에 펼쳐진 여자의 젖가슴을 보았다. 아담한 사이즈에 젖꼭지도 작아서 마치 소녀의 몸 같았다. 여자가 엉덩이를 천천히 흔들면서 자신의 젖가슴을 옆쪽으로 감싸 안았다. 두눈을 지그시 감고 있어서 진중하게 무엇인가를 음미하는 표정이 되었다.
“빨아줘.”
여자가 속삭이듯 말했을 때 조철봉은 젖꼭지에 입술을 대었다. 작고 단단한 젖꼭지였다.
“아아.”
머리를 뒤로 젖히면서 여자가 탄성으 뱉었다. 그리고는 두손으로 조철봉의 양어깨를 움켜쥐더니 엉덩이를 강하고 거칠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좋아.”
헛소리처럼 탄성이 섞인 말이 뱉어졌을 때 조철봉은 자신의 철봉이 한껏 팽창되고 있는 것을 알았다. 다시 대포가 발사되려고 하는 것이다. 눈을 부릅뜬 조철봉은 문득 서경윤의 얼굴을 떠올렸다. 지금 경윤은 대저택에서 영일과 함께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었다. 그때 여자의 움직임이 더 거칠어졌지만 팽창된 대포는 그 상태를 유지한 채 버티고 있었다. 경윤을 등장시킨 것이 효과를 낸 것이다.
“아아, 나, 또.”
하면서 여자가 조철봉의 어깨를 힘껏 움켜쥐더니 온몸을 오그렸다. 그 순간 철봉에 잔뜩 압박감이 가해지면서 수만마리의 지렁이가 붙어 꿈틀대는 느낌이 왔다. 샘 안의 세포와 철봉의 세포가 부딪치는 느낌이 생생하게 전달되어 온 것이다. 여자가 다시 절정에 오르면서 일으킨 반응이었다. 조철봉은 여자가 입을 딱 벌리면서 숨을 멈추는것을 보았다. 비명도, 탄성도 뱉지 않은채 온몸이 굳어지고 있는 것이다.
조철봉은 완전하게 드러난 여자의 젖가슴을 입안에 넣고는 젖꼭지를 혀로 굴렸다. 경직되었던 여자의 어깨가 늘어지면서 샘의 압박감도 풀려지기 시작했다. 그대신 뜨거운 용암이 분출되었는데 여자는 아직도 머리를 뒤로 젖히고는 눈을 감은 자세였다. 조철봉은 여자의 허리를 두손으로 움켜쥐었다. 그리고는 여자를 소파위로 눕혔다.
“마무리를 해야지.”
조철봉이 말했을 때 누워있던 여자가 반쯤 눈을 떴다. 그리고는 겨우 손을 뻗쳐 조철봉의 철봉을 쥐었다.
“아직도.”
마치 탄식하듯 말한 여자가 앓는 소리를 내더니 눈의 초점을 잡고 조철봉을 보았다.
“당신같은 남자 처음 보았어.”
“나도 당신같은 명기는 처음이야.”
“해줘, 식기전에.”
여자가 두팔로 조철봉의 목을 감아 안으면서 말했다.
“죽여줘, 자기야.”
조철봉은 다시 샘 안으로 진입했다. 샘은 아직도 뜨거웠고 끊임없이 넘쳐나고 있었지만 이미 두번이나 전력을 다한 터라 강도는 조금 약해졌다. 그러나 이제는 조철봉이 마음껏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조건인 것이다. 정상위일 때 남자의 기능은 다른 체형일 때보다 훨씬 향상된다.
조철봉이 허리를 움직여 강약과 고저를 적당하게 조절하기 시작했을 때 여자는 빈틈없이 호응했다. 한치도 어긋나지 않게 온몸이 움직였으며 다시 환희에 찬 탄성이 쏟아졌다. 이번에는 너무 격렬해서 방안이 터져 나갈 것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다. 조철봉은 몰두했다. 이번에는 경윤도 떠올리지 않았으며 한국의 정치 상황, 북한 핵문제 따위도 내놓지 않았다. 그냥 리듬에 맡겨버린 것이다.
조철봉도 가끔 섹스를 마치고 수습하는 과정이 싫을 때가 있다. 더 자세히 표현하면 허탈감과 피로감, 그리고 정욕이 소진되었을 때 발생되는 무기력증까지 혼합되어 상대로부터 얼른 떨어지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합체가 되어 둘의 몸이 서로에게 녹았을 경우에는 행위를 마치고 나서도 떨어지기가 싫었다. 이 경우에는 나른하고 편안한 충족감과 함께 떼어지면 더 불안하고 불편해질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이번 여자와의 경우가 바로 그랬다. 행위를 마치고나서 둘이 시체처럼 포개진채 누워 있었을 때 그런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일어나야지.”
여자를 안은 채 조철봉이 혼잣소리처럼 그렇게 말했다.
“그런데 떨어지기가 싫구나.”
“조금만 더 그렇게, 자기야.”
여자가 앓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울어서 범벅이 된 얼굴이었지만 조철봉에게는 싱그럽게 보였다. 이번에는 함께 절정에 올랐던 것이다. 이윽고 조철봉이 몸을 떼었을 때 여자의 움직임이 민첩해졌다. 핸드백에서 휴지를 꺼내더니 조철봉의 철봉을 먼저 정성스럽게 닦아 챙겨 주었으며 팬티까지 올려주었다. 그러고나서 제 몸을 챙기는 것이다. 둘이 시치미 뗀 얼굴로 나란히 앉았을 때도 여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정말 좋았어. 내 인생에서 가장 황홀한 순간이었다면 믿지 않겠지?”
“믿어주지.”
술잔을 든 조철봉이 정색하고 여자를 보았다.
“내가 그렇게 느꼈으니까.”
“정말 굉장했어.”
여자가 감탄한듯 상기된 얼굴로 눈을 가늘게 뜨고 조철봉을 보았다.
“난 지금도 그곳이 화끈거려, 자기야.”
“네 몸도 대단했어.”
한모금 술을 삼킨 조철봉이 화답했다.
“그것은 너도 느낌으로 알거야.”
“내 이름은 박경선이야.”
여자가 처음으로 이름을 밝혔다.
“동대문에서 옷가게를 하고 있어.”
핸드백에서 명함을 꺼낸 여자가 조철봉에게 내밀었다. 명함에는 상호가 적혀있었으며 직함은 대표였다.
“다시 만나고 싶어.”
여자의 시선을 받은 조철봉도 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내 건네주었다.
“시간나면 연락해.”
“오늘밤 집에 갈거야?”
불쑥 여자가 물었으므로 조철봉이 머리를 들었다.
“왜? 무슨일 있어?”
“나하고 같이 있으면 안돼? 아직도 여운이 남아서 근질근질해서 그래.”
“본격적으로 하잔 말인가?”
“이번에는 따뜻하고 길게, 그리고 감미롭게.”
눈을 가늘게 뜬 여자가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알몸으로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내몸을 보고싶지 않아?”
“과연.”
말을 멈춘 조철봉이 침을 삼켰다. 과연 색녀라고 말할 뻔 했던 것이다.
“좋아. 가자.”
조철봉이 머리를 끄덕이자 여자의 얼굴이 환하게 펴졌다.
“아아, 신난다.”
두손으로 박수까지 친 여자가 바짝 다가앉았다.
“우리집으로 가, 나 혼자 살고 있으니까.”
“정말이야?”
“그럼.”
그때 문에서 노크 소리가 났다. 최갑중일 것이다.
문이 열리더니 예상 했던대로 최갑중이 들어섰다. 갑중의 뒤에 따라 들어선 파트너의 안색도 환해져 있는것을 보면 그쪽도 작업이 잘 돼가는것 같았다.
“마침 잘왔다.”
조철봉이 손목시계를 보는 시늉을 하면서 말했다.
“갈때가 되었어. 난 오늘밤 경선씨하고 같이 있을텐데.”
멍한 표정의 갑중을 향해 조철봉이 말을이었다.
“경선씨 아파트로 갈거야. 그러니까 내일 아침에 차를 보내도록.”
“알았습니다.”
대번에 눈치를 챈 갑중이 조철봉과 경선을 번갈아 보았다.
“그럼 아파트를 알아야 하니까 제가 모셔다 드리지요.”
“그래요.”
경선이 선선히 대답했으므로 조금 맥이 풀린 갑중이 헛기침을 했다. 험한 세상이어서 아직 실체도 불분명한 여자의 아파트로 갔다가 봉변을 당하는 경우도 많은 것이다. 일행이 밖으로 나왔을때는 밤 11시가 되어갈 무렵이었다. 조철봉과 갑중은 차를 보냈지만 경선의 차가 주차장에 있었다.
경선을 발견한 주차요원이 다른 손님보다 두배쯤 빨리 움직여 차를 대령 시켰는데 그 이유야 자명했다. 경선의 매너가 좋았기 때문이다. 즉 팁이 후한 것이다. 경선의 차는 국산 최고급 차종인 칸타나였다. 이만하면 주차요원에게 최고급 손님 대우를 받을만 했다. 경선을 언니라고 부르는 갑중의 파트너가 운전을 해서 그들은 밤길을 달렸다.
“야, 차 좋네. 사업 잘 되시는 모양입니다?”
앞좌석에 앉은 갑중이 앞을 향한채 말을 걸었다. 제 차는 벤츠 600이었지만 추어주는 것이다.
“시장에서 장사하는게 사업이라고 할수 있나요? 구멍가게지.”
차분하게 말을 받은 경선이 흘끗 조철봉을 보았다.
“이 차는 외국손님 접대용으로 산거예요. 그것도 최장기 할부로.”
“겸손하신데.”
정색한 갑중이 머리를 돌려 경선을 보았다.
“무슨 사업을 하시는데요?”
“옷가게를 해요. 주로 패션물을 외국인에게 넘기죠.”
“아하.”
“요즘은 중국 완제품이 좋아져서 손님을 많이 뺏기고 있어요.”
“저런.”
“하지만 디자인과 원단은 우리가 몇년 앞서있죠. 열심히만 하면 이태리처럼 고부가가치 상품으로 성장시킬수 있어요.”
“과연.”
처음에는 건성으로 맞장구를 쳤던 갑중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흘끗 조철봉에게 보낸 눈빛에도 괜찮은 여자인것 같다는 의미도 담겨져 있었다.
“참, 얘 소개를 했던가요?”
경선이 생각난듯 말하더니 운전석에 앉은 여자를 눈으로 가리켰다.
“내 학교 후배인데 내 가게에서 같이 일하고 있어요.”
“그건 들었습니다.”
갑중이 머리를 끄덕였다.
“같이 일한다고만 들었지 옷가게 이야기는 안했습니다.”
“잘 해주세요. 얘도 가엾은 팔자니까.”
“아니, 그렇다면.”
잠자코 듣기만 하던 조철봉이 경선을 보았다.
“당신도 가엾은 팔자란 말인가?”
그러자 경선이 희미하게 웃었다.
“나하고 비슷한 신세니까 그렇게 되겠네.”
박경선의 아파트는 목동에 신축된 대형 복합건물로 40층의 65평형이었다. 경선이 초대를 했기 때문에 아파트에는 갑중과 파트너까지 넷이 들어가게 되었다.
“이야, 야경이 괜찮구나.”
창가로 다가간 갑중이 탄성을 뱉었다. 강북의 야경이 화려하게 펼쳐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 정도면 아파트 가격이 15억은 간단하게 넘겠군 그래.”
“흥, 20억이 넘어요.”
경선의 후배가 정정했다. 마른 체격이었지만 젖가슴과 엉덩이는 커서 갑중이 좋아할 타입이었다. 응접실의 소파에 앉은 조철봉이 집안을 둘러보았다. 집기는 고급이었지만 화려하지 않았고 장식도 요란하지 않았다. 집은 가구를 둘러보면 거주인의 품격을 알 수 있다.
“술 한잔 더 하실까?”
경선이 물었으므로 조철봉은 시선을 들었다. 어느새 실내복으로 갈아입은 경선이 웃는 얼굴로 서 있었다.
“마음놓고 마셔도 돼요. 내가 잡아먹지 않을테니까.”
“나도 한잔만 하고 가야겠는데.”
대답은 갑중이 했다. 벽시계에 시선을 주었던 갑중이 소파에 앉았다.
“30분만 앉았다가 가겠습니다.”
“얘 집은 이 곳에서 5분 거리니까 걱정할 것 없어요.”
경선이 턱으로 후배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리고 얘 출근 시간은 오전 11시니까 시간도 넉넉해요.”
“그렇다면 사장님 허락까지 받은 셈이구만.”
이제 경계심을 풀어버린 갑중의 얼굴에 웃음기가 번졌다. 조철봉은 경선이 건네주는 양주잔을 받았다. 고급 양주였고 마개도 금방 딴 것이다.
“저쪽 방에 들어가 실내복으로 갈아입으세요.”
경선이 눈으로 옆쪽 방을 가리키며 말했다.
“맞는 사이즈가 있을 테니까.”
“허어, 참” 했지만 한모금에 술을 삼킨 조철봉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옆쪽 방으로 들어선 조철봉은 벽장문을 열었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벽장 안에는 남자옷이 가득 있었던 것이다. 셔츠에서부터 잠옷, 간편한 외출복까지 수백벌이 종류별로 걸려 있었는데 모두 라벨도 떼지 않은 새 것이었다.
“놀랐어요?”
그때 어느새 따라 들어온 경선이 뒤쪽에서 물었으므로 조철봉은 몸을 돌렸다.
“어느 날을 대비해서 이렇게 준비한 거야?”
“옷가게를 하니까.”
다가선 경선이 셔츠와 바지를 골라 조철봉의 몸에 맞춰보며 말했다.
“취미로 자꾸 가져다 놓은 거지, 뭐.”
“몇 놈이나 여기 와서 옷을 갈아 입었지?”
“자기가 처음이야.”
마침내 셔츠와 바지를 고른 경선이 조철봉에게 넘겨주더니 정색했다.
“물론 밖에서 섹스는 여러번 했지. 웨이터한테서 색녀 소리를 들을 정도로.”
조철봉과 시선을 마주친 경선이 눈웃음을 쳤다.
“하지만 아무도 내집에 데려오지 않았어. 자기가 첫 손님이야.”
“이것, 영광이군.”
조철봉이 옷을 갈아 입는 동안 경선은 옆에 서서 시중을 들었다. 벗은 옷을 받아 옷장에 단정하게 걸어놓은 것이다.
“자기야.”
옷을 갈아입은 조철봉을 뒤에서 경선이 껴안으며 불렀다.
“이렇게 자기가 옷을 갈아 입는 것을 보니까 기분이 이상해. 눈물이 나려고 해.”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목이 메어 있었다.
최갑중이 파트너와 함께 아파트를 떠난 것은 30분쯤 지난 후였다. 눈치 빠른 갑중이 파트너를 재촉하여 일어난 것이다. 둘이 남게 되었을 때 경선이 웃음띤 얼굴로 조철봉을 보았다.
“참, 이제 와서 묻는 건 속 보이지만 집에서 기다리는 사람 있어?”
“없어.”
조철봉이 한마디로 부정하자 경선은 바짝 붙어 앉았다.
“그럼 혼자 사는 거야?”
“5년 되었어.”
“심심한데 헤어진 이유나 말해줘? 그럼 나도 내 인생 이야기를 해줄게.”
“간단해.”
얼굴을 굳힌 조철봉이 머리를 돌려 경선을 보았다.
“죽었어, 교통사고로.”
“세상에….”
대번에 웃음기가 가신 얼굴로 경선이 어깨를 늘어뜨렸다.
“정말 안됐네.”
“뭐, 지난 일인데 이젠 괜찮아.”
경윤과 헤어졌을 때 하루에도 열두번씩 경윤이 교통사고를 당하거나 길을 걷다가 간판이 떨어져서, 또는 집안의 가스가 폭발해서 죽어 없어지기를 소망했었다. 경윤이 죽어 이 세상에서 없어지는 것만이 그 당시에는 유일한 해결책이었다. 그 해결책이란 물론 조철봉의 가슴이 편해지는 것을 말한다.
원인이야 어디에 있건 간에 경윤과는 악연이 되었고 그것을 해결할 가장 좋은 방법은 한쪽이 죽어 없어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 이쪽에서 감싸안는 적극적인 방법이 더 낫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때 경선이 다시 조심스럽게 물었다.
“몇년 살았는데?”
“3년.”
“애는 없고?”
“아들이 하나 있는데 지금 일곱살이야. 어머니가 키우고 있지.”
“재혼해야겠네.”
“자, 나는 이쯤 해두고.”
소파에 등을 붙인 조철봉이 경선을 보았다. 팔짱을 끼고 앉은 경선은 한쪽 다리를 꼰 자세였는데 떠있는 발을 조금씩 흔들고 있다. 가볍게 흔들면 경망스럽게 보이지만 이런 경우는 살아있는 느낌을 줄 뿐만 아니라 성적 충동까지 자극하는 효과를 낸다. 더욱이 경선의 가지런한 발가락과 살색 페디큐어를 칠한 발톱은 보기 좋았다.
“나도 이혼했어.”
경선이 TV 화면에 시선을 준 채로 말했다. TV의 음향을 잔뜩 줄여서 화면에는 그림만 흐르고 있다.
“애는 없고.”
“홀가분하겠다.”
“이혼한지 3년 되었어.”
“나이트에 나간지 3년 되었다는 말이군.”
“소개로 반년간 교제했다가 결혼했는데 그놈은 변태였어.”
“특별한 경우로구먼.”
침을 삼킨 조철봉이 소파에서 상반신을 뗐다.
“어디 사연을 듣자. 그놈은 뒷구멍파야?”
“양성애자라고 하나? 그놈은 남자 여자를 가리지 않았어.”
“어이구.”
“유산을 많이 받아서 매일 상대를 갈아치웠지. 후배라고 집에 데려오는 놈들은 모두 그놈의 애인이었어.”
“병을 조심해야할텐데”
“나, 검사받고 깨끗하다는 결과 나왔으니까 걱정마.”
길게 숨을 뱉은 경선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놈은 남자 여자와 함께 침대에서 뒹굴기도 했어.”
조철봉은 잠자코 그림만 나오는 TV를 보았다. 처음에 경선은 이혼해서 아이하고 둘이 산다고 했다가 금방 말을 바꿔 애가 없다고 했다. 물론 그냥 지나칠지도 모르는 상대에게 솔직할 필요는 없지만 신뢰감이 들지 않는 것은 사실이었다.
따라서 남편이 변태였다는 사연도 흥미로 들어줄 뿐이지 공감이 간다거나 동정심 따위는 추호도 일어나지 않았다. 조철봉은 동성애에 대하여 혐오증을 품고 있었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각자의 성애는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때 경선이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조철봉을 향해 야릇하게 웃었다.
“우리 그딴 이야기 그만하고 놀아볼까? 시간이 아까워서 그래.”
“좋아.”
조철봉이 따라 웃었다.
“그럼 마음껏 즐기기로 하지.”
“나, 벗을게.”
경선이 정면에 선 채로 옷을 벗어 던졌는데 조금도 조철봉을 의식하지 않았다. 금방 브래지어와 팬티 차림이 되더니 조철봉을 지그시 보았다.
“내 몸 어때?”
“괜찮아.”
괜찮은 정도가 아니었다. 흠잡을 곳이 없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허리의 곡선이 산뜻했고 엉덩이와 허벅지는 단단하고 건강했다. 다이어트로 살을 뺀 허벅지와 엉덩이를 보면 마치 집단수용소에 수용되었던 유대인이 떠올랐던 조철봉이다. 경선이 브래지어와 팬티를 차례로 벗어 던지자 이제 환한 불빛 아래 알몸이 드러났다. 바로 두발짝쯤 앞에 서 있어서 숲의 미세한 부분까지 다 보였다.
“흥분되지 않아?”
두 다리를 조금 벌리고 선 경선이 나긋한 목소리로 물었을 때 조철봉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젠 내 차례로군.”
조철봉이 거침없이 옷을 벗어 던지는 동안 이번에는 경선이 숨을 죽이고 섰다. 순식간에 팬티 차림이 된 조철봉이 경선을 향해 빙긋 웃었다.
“벗을까?”
“응.”
혀로 입술을 핥은 경선이 머리를 끄덕였다. 여성은 남성보다 시각적 충동을 덜 받는다. 물론 건강한 체격의 남성을 보면 성적 충동이 일어나긴 하지만 보편적으로 남성보다 덜한 것이다. 그러나 조철봉이 팬티를 벗어던졌을 때 경선은 숨을 들이마시고는 뱉지 못했다. 우람한 철봉이 건들거리며 서 있는 장면에 압도당한 것이다.
“어머, 어머.”
한참만에 경선이 그렇게 말했다.
“저놈이 아까 나한테 들어왔단 말이야?”
“실감이 안나는 모양이군.”
“더 커진 것 같아.”
“실제로 더 커졌지.”
“정말?”
고인 침을 삼킨 경선이 다가오더니 거침없이 바닥에 앉았다. 그러자 젖가슴이 출렁거렸으며 옅은 향내가 풍겨왔다.
“아아, 멋있어.”
두 손으로 철봉을 감싸쥔 경선이 볼에 대고 비비더니 조철봉을 향해 웃었다.
“나, 양쪽에 다 해줘.”
눈만 치켜뜬 조철봉을 향해 경선이 눈을 흘기는 시늉을 했다. 적당한 교태는 음식의 조미료와 같다. 과하면 느끼하고 적으면 너무 담백해진다. 조철봉이 머리를 끄덕였다. 양쪽은 샘과 샘 뒤의 또다른 샘을 말하는 것이다. 그쪽은 거름이 나오는 곳이다.
“나야 상관없지만 괜찮겠어?”
조철봉이 묻자 경선이 철봉을 세게 쥐었다.
“준비해놓은 게 있어. 괜찮아.”
집안에 둘 뿐이라는 의식이 작용되면서 조철봉도 가슴이 부풀었는데 경선의 비정상적인 요구를 듣자 자극이 배가 되었다. 지금까지 그쪽 샘에 대해서는 아주 드물게 경험했을 뿐으로 모두 조철봉의 호기심이 발동하여 치러진 일이었다. 그것도 상대가 하나 같이 고통을 호소하는 바람에 오래 머물지도 못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상대가 먼저 요구하는데다 준비까지 해놓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실험을 시켜줄게.”
철봉을 놓은 경선이 갑자기 일어나더니 정색하고 조철봉을 보았다.
“그, 양쪽 문이 서로 통한다는 증거를 보여줄게.”
“양쪽 문이라니?”
“바보야, 이곳.”
경선이 손끝으로 바로 조철봉의 코 앞에 떠있는 자신의 샘을 가리켰다. 갑자기 일어나는 바람에 경선의 샘이 조철봉의 눈앞에 놓여지게 된 것이다.
“양쪽 문이 통해.”
한쪽 다리를 소파 위에 올려놓은 경선이 샘의 골짜기를 한손으로 조금 벌려 보였으므로 조철봉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경선이 말하는 문이란 곧 샘이다. 양쪽 문이란 양쪽 샘을 말하는 것이다. 조철봉의 표정을 본 경선이 피식 웃더니 조철봉의 손을 끌어 당겼다.
“봐, 이 두 손가락을 양쪽 문 속으로 함께 넣어 봐, 그리고 힘을 줘서 두 손가락을 닿도록 해봐.”
경선이 엄지와 검지를 집게처럼 만들더니 두 손가락을 붙이는 시늉을 해 보였다.
“깊게 넣고 말이야. 알았지?”
마치 중학생에게 해부 실험을 시키는 생물 선생처럼 말하고 난 경선이 소파위로 엎드렸으므로 조철봉은 다시 숨을 삼켰다. 이제는 경선의 엉덩이가 눈앞에 커다랗게 떠있게 된 것이다. 더구나 다리까지 조금 벌린 상태여서 샘쪽 샘이 다 드러났다.
“자, 넣어봐.”
엎드린 채 경선이 재촉했다. 머리를 틀어 조철봉을 올려다본 경선의 표정은 진지했다.
“살살 넣어. 지금은 문 안쪽이 조금 말랐거든.”
그러더니 잊었다는 듯이 탁자 밑에서 둥글고 조그만 병을 꺼내더니 조철봉에게 내밀었다.
“이건 뒤쪽 문에 들어갈 손가락에 조금만 발라.”
“으음.”
저절로 신음 같은 탄성을 뱉은 조철봉이 약병의 뚜껑을 열었다. 바셀린이다. 검지에 바셀린을 바른 조철봉이 두 손가락을 집게처럼 구부리고 다가갔을 때 경선은 눈을 감았다. 옆쪽으로 얼굴을 눕힌 채 누워 있어서 표정이 다 보이는 것이다.
“살짝.”
경선이 낮고 기대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아주 천천히.”
조철봉은 경선이 시킨 대로 두 손가락을 양쪽 샘에 천천히 진입시켰다.
“아아앙.”
눈을 감은 채로 경선이 신음하더니 몸을 비틀었다. 그리고는 겨우 말했다.
“자기야, 두 손가락을 오므려바. 아까 말한대로 손가락이 마주 닿도록.”
시킨대로 했던 조철봉은 눈을 크게 떴다. 양쪽 샘 사이에는 엷은 막 하나만 놓여져 있을 뿐인 것이다. 두 손가락을 비비자 양쪽의 감각이 전해질 정도였다.
“아아아.”
경선이 다시 신음하더니 눈을 뜨고 말했다.
“어때? 막 하나만 놓여져 있지? 뒤쪽 문의 감각이 앞으로도 전해져 오는 거야.”
새로운 경험을 한 조철봉이 다음날 아침, 회사에 출근해 자리에 앉자마자 최갑중이 찾아왔다. 급한 결제를 받을 일이 있는 것처럼 분주하게 들어서더니 앞쪽 소파에 앉고 나서는 어깨를 늘어뜨렸다.
“잘 지내셨습니까?”
“이 자식이 새삼스럽게.”
눈을 가늘게 뜬 조철봉이 갑중을 똑바로 보았다. 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것이다.
“너 무슨일 있었어?”
“없었습니다”
“그런데 얼굴이 휴지없는 화장실에서 일보고 난 표정이야?”
“그년이 동성애자였다구요”
불쑥 갑중이 말을 뱉었으나 조철봉은 잠깐 못알아 들었다. 그래서 눈을 크게 뜨고 갑중을 보았다.
“뭐라고?”
“아, 동성애자 말입니다. 여자만 밝히는 여자.”
“그래서?”
“하긴 했는데 나무토막에다 비비는 것이 차라리 나았을 겁니다.”
“인마 그랬다간 네 것이 부러져.”
“나아 참, 재수가 없으려니까.”
“자초지종을 말해라.”
인터폰을 눌러 통화도 금지시킨 조철봉이 정색하고 갑중을 보았다. 그 여자는 박경선의 후배이며 직장 부하인 것이다. 레즈비언이라면 경선과 연관이 있을 지도 모른다. 그때 갑중이 입을 열었다.
“남자 역할의 동성애자였습니다. 집안에 별놈의 기구가 다 있더만요.”
“그, 남자용 기구 말이냐?”
“예, 그런데.”
“머리를 든 갑중이 정색하고 조철봉을 보았다.
“그 빌어먹을 남자역할 여편네의 여자역할은 누군지 아십니까?”
“내 파트너였겠지.”
“아시는군요.”
“인마 척, 하면 삼척이지.”
“이것들이 아주 대놓고 동성 섹스를 즐긴 모양입니다. 방에 별놈의 기구가 다 있는 데다 사진까지 가득 붙여져 있더라니까요.”
“레즈비언 애인들은 꽤 오래 사귄다.”
들은 풍월이었지만 조철봉이 아는체를 했다. “우리가 생각 하는 것보다 지저분 하지가 않아.”
“어쨌든 전 어젯밤 끔찍하게 보냈습니다. 그 여편네가 그런 여자인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단 말입니다.”
“그 여자도 양성애자로군.”
“양성애자라니요?”
“남녀 모두를 받아들인단 말이지. 어젯밤 너를 받아들인 것을 봐도 그렇다.”
“아, 글쎄, 나무토막 이었다니까요. 숨소리도 나지 않았고 눈을 똑바로 뜨고서 손끝하나 까딱않고 누워 있었습니다. 만화책이 없었기에 망정이지 그짓 하면서 만화책 읽고 껌 씹을 년이었다구요.”
“그래도 받아준 것이 어디냐? 감사를 드려야 마땅하다.”
“아니, 형님.”
마침네 갑중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형님 파트너가 시켰기 때문입니다. 그러지 않았다면 같이 있지도 못했다고 그년이 말했단 말입니다.”
“좋은 경험 한거다. 남들은 돈 주고도 그런 여자 못만난다.”
“그럼 형님이 한번 만나 보시지요.”
그러고는 갑중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무토막 같은 여자도 괜찮다면 말입니다. 아마 형님도 진저리를 치시게 될 겁니다.”
찌푸린 얼굴로 갑중이 방을 나갔을 때 조철봉은 전화기를 들었다. 경선에게 확인해볼 생각이었다.
“그래.”
조철봉의 말을 듣고난 박경선이 선선하게 시인했다.
“걘 내 남자 역할이었어. 그리고 우린 양성애자야.”
“그런데 그 여자는 여자 역할이 서툰 것 같군. 어젯밤 내 후배는 나무토막을 비비는것 같다고 했어.”
그러자 수화구에서 경선의 웃음소리가 낮게 울렸다.
“걘 남자 역할에 익숙해서 그래. 여자 역할은 아주 서툴러.”
“그렇다면 아예 성전환 수술을 하든가 해야지 남자 기죽이면 쓰나?”
“기를 죽이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그짓 하면서 만화책 읽고 껌 씹는 분위기의 여자하고 하룻밤 보내봐라. 아마 1년은 그짓 할 생각이 나지 않게 될테니까.”
“어머나.”
경선의 목소리가 굳어졌다. 정색한 표정이 눈앞에 선했으므로 조철봉도 차분하게 말했다.
“차라리 남자하고 섹스를 하지 않는 것이 자신이나 상대방을 위하는 일이야. 그따위 매너로는 말이지.”
“어젯밤은 내가 하라고 했어. 그리고 본인도 노력해 보려는 생각이었고.”
가라앉은 경선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우리는 더이상 관계를 갖지 않기로 결정을 했거든. 그래서.”
“….”
“저기, 혹시 후배 테크닉이 문제가 있는것이 아닐까?”
주저하면서 경선이 묻자 조철봉은 쓴웃음을 지었다. 경선이 앞에 있었다면 웃지 못했을 것이다.
“쓸데없는 소리. 그 놈은 내가 잘 알아. 테크닉도 괜찮은 놈이야.”
“설마 자기보다 나을라구.”
물론이다. 갑중의 실력을 뻔히 알고 있었으므로 조철봉은 대답하지 않았다. 갑중은 서두는 편이었다. 거기에다 애무에 서툴고 일방적이다. 그러나 한국인의 평균 수준 이상은 되었다. 1회 운동 시간이 7분대가 된다고 자랑했으니 한국인의 평균보다 1, 2분 정도 길다. 그때 경선의 목소리가 수화구를 울렸다.
“자기야, 듣고있어?”
“듣고있어.”
“오늘밤 우리집에 또 와주지 않겠어? 내가 저녁밥 맛있게 해놓을게.”
“매일밤 양쪽 문으로 들락거렸다가는 내가 진짜 조철봉이라도 며칠 못살거다.”
“도와줘.”
“나아 참 별소리 다 듣겠군.”
혀를 찬 조철봉이 전화기를 고쳐 쥐었다.
“도와달라구? 그짓 못해서 곧 죽을 일이라도 있어? 어젯밤에 진탕 했으면 하루쯤 쉬어야지.”
“내가 아냐.”
“그게 무슨 말이야?”
“미나를 도와달란 말이야.”
미나는 후배 이름이다. 이맛살을 찌푸린 조철봉의 귀에 경선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내가 오늘밤 미나를 부를게.”
“그래서.”
“미나한테 섹스를 가르쳐 줘.”
천하의 조철봉도 이 순간만은 말문이 막혀 눈만 껌벅였다. 그때 경선이 말을 이었다.
“우리 셋이 그걸 하면 미나도 몸이 풀릴거야. 걔 몸이 얼마나 뜨겁다구.”
“이런 빌어먹을.”
“내가 어젯밤 이야기를 해줬더니 미나가 뜨거워진다고 했어. 걘 절대로 나무토막이 아냐. 자기 후배가 제 테크닉이 모자란건 생각않고 남의 탓만 한거야.”
“….”
“자기야, 오늘밤에 한번 맛을 보여줘.”
남성간의 동성애 관계는 여성들의 관계보다도 짧은 것이 보통이다. 남성은 여성보다 더 쉽게 흥분되고 더 많은 성적 상대를 원하는데 비해 여성은 진실되며 정서적인 관계를 갈망하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게이들의 섹스는 환경에 관계없이 눈에 비치는 아름다움에만 집중하기 때문에 아주 짧게 끝날 수가 있다. 그러나 레즈비언들은 육체관계를 갖기 전에 사랑하는 관계를 설정하는 것이 보통이며 두 여성이 동거하는 경우에도 두 남성이 함께 사는 것보다 성적으로 더 충실하며 관계가 오랫동안 지속된다는 것이다. 경선과 미나가 레즈비언 관계였다는 것은 완전히 증명이 되었다. 미나는 물론이고 경선까지 조금도 거리낌없이 털어놓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 미나에게 여성만이 느낄 수 있는 성적 쾌감을 맛보게 해달라고 경선이 부탁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것은 경선이 아직도 미나를 동성애 상대로서 아끼고 사랑하기 때문인지 아니면 완전히 헤어지기 위한 방편이지 알 수 없었지만 조철봉에게는 엄청난 과제를 떠맡은 심정이었다.
그래서 가타부타 대답은 피한 채 경선과의 통화를 끊고는 인터폰을 눌러 갑중을 불렀다. 어젯밤 나무토막을 비비고 지낸 갑중도 아직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을 터였다. 예상 했던대로 갑중은 금방 나타났는데 얼굴 표정도 아직 풀리지 않았다. 건강한 섹스를 마친 사내와 그러지 못한 자의 다음 날은 이렇게 차이가 난다. 출세에 영향을 끼친다는 말도 결코 과장이 아니다.
“무슨 일입니까?”
찌뿌드드한 표정으로 물은 갑중을 향해 조철봉은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아직도 후유증이 남아 있는 거냐?”
“예. 며칠 갈 것 같습니다.”
입맛을 다신 갑중이 어깨를 비틀었다.
“몸의 뼈 마디 마다 어긋나 있는 것 같아서 안마라도 받아야 할 것 같아요.”
“도대체 어젯밤에 어떻게 했기에 그래?”
정색한 조철봉이 갑중을 보았다. 갑중을 부른 목적은 이것이다. 어젯밤 갑중의 행동을 기준으로 삼아 방법을 연구해 보려는 의도였다. 요즘 세상에서 자주 사용되는 반면 교사라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조철봉의 시선을 받은 갑중이 헛기침을 했다. 답답할 때는 누구한테든지 털어놓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는 법이다. 갑중에게 타이밍이 맞았고 조철봉에게도 의도대로 되었다.
“애무도 했습니다.”
갑중이 억울하다는 표정을 짓더니 말을 이었다.
“눕혀놓고 손으로, 나중에는 혀로 봉사를 했다니까요. 그런데 도무지 반응이 없더란 말씀입니다.”
“어디를 했는데?”
“예. 입술에서부터 가슴, 그리고 아랫배까지, 그 밑은 못하게 하더만요.”
“허, 그래?”
“반응이 없었어요. 키스할 때 혀도 내밀어주지 않았습니다. 무슨 원수를 만났는지 이를 악물고 있더란 말입니다.”
“웃기는 여자로구만.”
“아, 글쎄, 여자가 아니라니까요?”
다시 화가 치밀어 오르는지 갑중이 눈을 치켜떴다.
“남자란 말입니다. 지금 생각하니까 구역질이 난다니까요?”
“차근차근 말해봐, 순서대로, 그래서 그 다음은 어떻게 했어?”
“조금 짜증이 나서 곧 넣었지요”
“그냥 쑥?”
“아, 그럼 그냥 쑥 넣지 어디 다녀왔다가 넣습니까?”
갑중이 이제는 두 손을 벌리더니 초점없는 시선으로 앞쪽을 보았다. 어젯밤을 회상하는 얼굴이었다.
조철봉은 잠자코 최갑중의 목 부근에 시선을 준 채로 기다렸다. 갑중은 이미 반쯤 털어놓은 셈이었으니 나머지는 이쪽에서 재촉하지 않더라도 말하지 않고는 배겨내지 못할 것이었다. 예상했던 대로 갑중의 말이 쏟아졌다.
“쑥 넣었더니 움찔은 합디다.”
“허어, 그래?”
“그런데 그 다음부터는 마치 죽은 시체 같았습니다.”
“구체적으로 표현해라.”
“늘어져서 손가락 하나 까닥 하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그, 아래쪽 반응을 말해.”
“바닷가 모래밭이었습니다.”
“뭐라고?”
“모래밭 말입니다. 백사장요.”
조철봉이 눈을 가늘게 뜨자 갑중은 답답하다는 듯 입맛을 다시더니 말을 이었다.
“그, 왜, 여름에 형님은 그런 짓 안해 보셨습니까?”
“어떤 짓?”
“여름에 바닷가에서, 모래사장은 아직 뜨뜻하고, 파헤치면 약간 물기가 있지요.”
“그래서 어쨌단 말이야?”
“팬티 입은 채로 모래밭에 방아를 찧어보신 적 없습니까?”
“땅바닥에?”
“모래밭이죠.”
“미치고 불쌍한 놈.”
“꼭 그맛이었습니다.”
이제 눈썹만 찌푸린 조철봉을 향해 갑중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뜨뜻미지근하고 약간 습기는 있지만 퍼석퍼석한 느낌, 방아를 찧는 대로 허물어지지만 절대로 반응이 없는 모래밭, 그 정도면 비슷한 표현이 될 겁니다.”
“아따.”
눈을 더 가늘게 뜬 조철봉이 갑중을 노려보면서 머리를 끄덕였다.
“너, 시 써라, 표현 멋있다.”
“나아 참.”
“그래서 넌 쌌어?”
“쌌지요.”
버럭 화가 치밀어오른 듯 갑중이 눈을 부릅뜨고 말했다.
“모래밭에다가도 싼 접니다. 왜 안쌌겠습니까? 가차없이 쌌습니다.”
“그때 반응이 어떻더냐?”
“그때도.”
했다가 갑중이 말을 뚝 그치더니 눈의 초점이 몽롱해졌다. 어젯밤 일을 생각하는 것이다.
이윽고 갑중이 눈의 초점을 잡고는 조철봉을 보았다. 정색한 표정이었다.
“그러고 보니까 그때는 다시 움찔하는 것 같던데요. 두 다리가 말입니다.”
“숨소리는 어땠어?”
“글쎄, 숨소리도 크게 나지 않았다니까요. 두 팔과 다리는 늘어져 있었고요.”
“알았다.”
머리를 끄덕인 조철봉이 소파에 상반신을 기댔다.
“완전 석녀로군. 그리고 5년 재수없는 여자다.”
조철봉이 정색하고 갑중을 보았다.
“너, 오늘밤에 누구라도 데리고 잠을 자야 되겠다. 그대로 있다가는 신상에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나겠어.”
“예?”
놀란 갑중이 상반신을 세웠을 때 조철봉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얼른 액땜을 해야된단 말이다. 화끈한 여자를 찾아서 오늘밤을 질탕하게 보내야 뒤탈이 없어.”
“정말입니까?”
“글쎄, 내 말을 들어.”
조철봉이 심호흡을 했다. 이제 마음을 굳힌 것이다. 오늘밤 박경선의 집에서 미나를 만날 것이었다.
“난 안돼.”
황미나가 그늘진 얼굴로 머리를 저었다.
“내가 그게 됐으면 진작 언니를 떠났지. 난 내 몸을 알아.”
“글쎄, 네가 언제 진지하게 시도를 해봤니? 가끔 군것질을 하듯이 남자를 골라 놓고선.”
눈을 흘겨보인 박경선이 손으로 입을 가리고 하품을 했다. 오후 2시반이 되어가고 있어서 점심후의 나른한 시간이긴 했다. 그러나 어젯밤 진한 향락의 순간을 보낸 터라 경선의 몸은 마치 땅으로 꺼져들어갈듯 노곤한 상태였다.
“나 조금 누워 있을게.”
마침내 경선이 뒤쪽 소파에 누우면서 말했다.
“딱 30분만 누워있다가 일어나야겠다.”
“그냥 푹 자. 내가 손님 받을테니까.”
“어쨌든 넌 오늘밤 우리집에서 그 사람을 만나야 돼.”
경선이 다짐하듯 말하자 미나가 쓴웃음을 지었다.
“별꼴이야. 제 애인을 다 넘겨주고.”
“다 널 위해서야.”
그러자 미나가 경선의 옆으로 다가앉더니 무릎을 두 손으로 주물렀다. 가게 안쪽의 창고 겸 밀실 안이어서 둘은 가끔 가게 문을 닫았을 때는 이곳에서 성애를 즐기기도 했다.
“얘가 왜 이래?”
미나의 손이 허벅지쪽으로 옮아오자 경선이 다리를 오므리며 눈을 흘겼다.
“이러지 마, 나 어젯밤 너무 힘을 뺐어.”
“거짓말.”
미나가 손은 비켰지만 물러나지 않았다.
“내가 언니 성감을 다 아는데 거짓말 하지마. 언니는 남자한테서 쾌감을 느끼지 못하는 체형이야.”
“천만에.”
정색한 경선이 노곤한 기운이 달아났는지 상반신을 세우고 미나를 보았다. 정색한 표정이었다.
“아냐, 난 어젯밤 진짜 성의 쾌락을 알았어. 우리가 나누었던 쾌락은 애들 장난과 같았어. 정말이야.”
경선의 목소리가 높아졌고 표정은 더 진지해졌다.
“그래서 너도 겪어보라는 거야. 그러면 우리도 정상적인 여자가 될 수 있어. 내가 확신해.”
“그만해.”
“너나 나나 똑같은 여자야. 우리는 그동안 불쌍하게 지내왔다고.”
“언니, 제발.”
“내가 부탁 좀 하자.”
이제는 경선이 미나의 손을 움켜쥐었다.
“오늘 한번만 그 사람 만나보고 나서 다시 이야기를 하자. 내가 다시는 그런 이야기 안할게.”
“….”
“너도 언젠가 그랬지? 동성애는 자연스럽지 않은 것 같다고 말이야. 그리고 이성애를 한번 실컷 하고 싶다고도 했어, 그렇지?”
경선이 미나의 머리칼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동성애가 추하다는 의미는 아냐. 이성애보다 더 아름답고 깨끗한 동성애도 있어. 내가 더이상 부탁하지 않을테니까.”
“알았어.”
마침내 미나가 상반신을 똑바로 세우더니 말했다.
“오늘밤 그 남자 만날게. 그리고 언니 옆에서 그 남자하고 실컷 사랑을 할게.”
“저것 봐.”
경선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마치 나한테 화풀이를 하는 것처럼 말하는구먼 그래.”
“아냐, 화 안났어. 기대가 돼.”
했지만 미나의 얼굴은 여전히 굳어져 있다.
박경선의 전화가 온 것은 오후 6시쯤이었으니 퇴근시간이 되어갈 무렵이다.
“잠깐 시간을 낼 수 있지?”
대뜸 그렇게 물은 경선이 덧붙였다.
“30분만 이야기하고 집에 가서 기다리려고 그래. 아주 중요한 이야기거든.”
“무슨 이야긴데?”
“미나 이야기.”
“미나가 어때서?”
“오늘밤에 도움이 될 이야기야.”
대충 짐작이 갔으므로 조철봉은 30분쯤 후에 회사 근처의 커피숍에서 경선을 만났다. 조철봉이 마주 앉았을 때 경선이 지그시 웃었다. 가늘게 뜬 눈꺼풀 사이로 검은 눈동자가 반짝였고 입술은 닫쳐졌지만 양끝이 위쪽으로 치솟았다.
“자기야, 사랑해.”
맑은 목소리로 경선이 말했다.
“자기가 커피숍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사방이 환해졌어. 사랑하는 사람이 들어왔기 때문이야.”
“내 머리 위에 둥근 형광등 같은 것이 떠 있지는 않고?”
조철봉이 정색하고 물었지만 경선은 대답 대신 홀린 듯한 시선만 주었다. 그래서 민망해진 조철봉이 헛기침을 하고는 본론을 꺼내었다.
“그래, 어떤 정보를 준다는거야?”
“응, 참.”
그때서야 눈의 초점이 또렷해진 경선이 조철봉을 보았다.
“우리 셋이 함께 섹스를 하는 것이 나을텐데. 자기는 어때?”
조철봉이 입만 딱 벌렸을 때 경선의 말이 이어졌다.
“미나는 뒤쪽에다 하는 것에 익숙해. 항상 나한테 그렇게 해달라고 했거든.”
“뒤쪽에 말이야?”
“응, 기구로.”
“기구라면 섹스숍에서 파는.”
“응, 실제 물건과 비슷해. 자동이어서 몇시간이건 돌아가고.”
“이런 빌어먹을.”
눈을 치켜뜬 조철봉이 경선을 노려보았다.
“너도 그놈의 자동기계를 앞뒤로 넣었겠구먼.”
“응.”
경선이 정색하고 머리를 끄덕이더니 생각난 듯 덧붙였다.
“하지만 난 어젯밤 인간의 섹스가 얼마나 아름답고 황홀한가를 체험했어. 앞으로 기계로 맛본 섹스는 두번 다시 겪고 싶지가 않아.”
“그래서 어쩌란 말이야?”
“미나한테 뒤로 해줘.”
“그것뿐인가?”
미나는 남자하고 자본 적이 어젯밤까지 합쳐서 열번도 안돼. 처녀나 마찬가지라고.”
“기계는 수백번 출입했지 않아?”
“글쎄, 그건 세지 말라니까?”
눈을 흘긴 경선이 차분하게 말했다.
“셋이 함께 있으면 미나 긴장이 풀어질거야. 왜냐하면 내가 옆에 있거든. 그러면 자기가 미나부터 애무해줘. 걘 발동이 늦게 걸리는 편이야.”
“젠장, 어렵다 어려워.”
“하지만 나하고 할 때 미나는 뜨거웠어. 엄청나게 열정적이었다고.”
“기계가 들어갔을 때?”
“아니, 나한테 기계가 들어왔을 때.”
“남자 역할일 때 발광을 했군.”
머리를 끄덕인 조철봉이 의자에 등을 붙이더니 갑자기 풀썩 웃었다.
“내가 별 일에 다 말려들었구나.”
“이것도 인연인데 뭐.”
그러고는 경선이 손을 뻗쳐 조철봉의 손을 감싸쥐었다.
“자기야, 사랑해.”
그러고는 그것도 부족한지 덧붙였다.
“난 자기를 평생 잊지 못할거야.”
“자기 왔어?”
현관으로 들어선 조철봉에게 박경선이 마치 10년쯤 함께 산 남편을 맞는 것처럼 덤덤하면서 친근감있게 반겼다. 경선에게 과일 바구니를 넘겨준 조철봉은 응접실의 소파에서 일어서는 황미나를 보았다.
“안녕하세요”
하고 미나가 먼저 인사를 했지만 시선은 옆쪽으로 비켜 있었다.
“저녁 먹었어?”
어색한 분위기를 메우려는 듯 경선이 서둘러 물었다.
“저녁 먹었으면 술상이나 차리려고.”
“그래, 술이나 한잔 하지.”
조철봉이 소파에 앉았을 때 미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같이 술상을 차리려는 것이다.
“자기야, 씻고 옷 갈아입어.”
주방에서 경선이 소리쳤다. 이만하면 화목한 가정의 분위기와 다르지 않다. 가볍게 일어선 조철봉이 느긋하게 씻고 옷방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왔을 때 응접실 탁자에는 술상이 차려져 있었다. 그리고 좌석 배열은 상석에 앉은 조철봉의 좌우에 두 여자가 자리잡았으니 모두 경선의 세심한 배려일 것이었다. 술은 고급 양주로 한병에 수백달러짜리였다.
“흠, 준비를 단단히 했구먼.”
술잔을 든 조철봉이 눈을 가늘게 뜨고 경선을 보았다.
“그래, 실컷 먹여놓고 잡아 먹으려는 작전이라도 상관없어.”
“흥, 속으로는 좋으면서.”
“벌써부터 울끈불끈 하고 있는거 내가 다 알아.”
“허, 그래?”
“이런 호강이 어디있어? 언니하고 처제가 동시에 해주겠다면서 초대한 경우가 어디 있느냐고?”
“제기, 적선하는 척하네.”
“아마 미나를 한번 안고 나면 내 생각은 하지 않게 될 걸?”
“언니 그만해.”
마침내 미나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끼어들었다. 미나가 둘이서 분위기를 띄우려고 일부러 치고 받는다는 것을 모를 리가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을 뻔히 알면서도 넘어간다. 그래야 사람이다.
“저, 잘 안돼요. 알고 계시죠?”
조철봉에게 머리를 돌린 미나가 정색하고 물었으므로 방안이 조용해졌다. 경선은 잠자코 포도알만 입에 넣었으며 조철봉은 술잔을 든 채 무표정한 얼굴로 미나를 보았다. 미나의 말이 이어졌다.
“후배분한테서도 들으셨을거예요. 제가 석녀라고요.”
“난 금시초문인데.”
입맛을 다신 조철봉이 들고있던 술을 한모금에 삼키고는 미나를 보았다.
“내가 그런 것 물어볼 사람 같은가? 그리고 내 후배도 바빠. 밤일을 보고할만큼 한가하지 않거든.”
“하지만.”
“내 경험에 의하면 여자는 남자가 하기 나름이야. 물론 호흡도 맞아야겠지만 8, 90 퍼센트는 남자에게 달렸다고.”
“그래, 맞아”
그때 경선이 끼어들었다.
“자기 말이 맞아. 나도 어젯밤에 그걸 느꼈거든.”
“어쨌든 아직 단정지을 필요는 없어.”
조철봉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성은 조물주가 인간에게 베풀어주신 가장 큰 선물중의 하나야. 성기까지 결합한 순간 온갖 테크닉으로 상대를 즐겁게 해주려고 노력하는 동물도 인간뿐이야. 이것이야말로 아름다운 성이지.”
열띤 조철봉의 목소리가 방을 울렸다.
어깨를 부풀린 조철봉은 좌우에 갈라져 앉은 박경선과 황미나를 보았다. 지구상의 생명체 중에서 성을 나누기 전에 이런 자극을 맛보는 것도 인간이 유일할 것이다. 조철봉은 미나의 눈빛이 조금씩 열기를 띠어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섹스는 실제로 손이나 몸이 닿기 전부터 달아올라야 정상이다.
“그래서 말인데.”
조철봉이 얼굴을 굳히고는 경선과 미나를 번갈아 보았다.
“섹스를 장난삼아 하는 것은 내 체질에 맞지 않아. 자극을 강하게 받는다면서 떼로 몰려 있는 것도 싫어. 그건 조루 증상이 있는 놈들이나 즐기는 수작이야.”
술잔을 내려놓은 조철봉이 말을 이었다.
“그래서 미나씨가 자칭 석녀라고 했는데 먼저 미나씨한테 집중하고 싶어. 경선씨도 진정으로 미나씨를 위한다면 그렇게 기회를 만들어줘야 해.”
“어떻게 말이야?”
대충 짐작은 했으면서도 경선이 묻자 조철봉은 쓴웃음을 지었다.
“경선씨는 옆방에서 기다려. 내가 미선씨하고 일 끝내고 갈테니까.”
“난 후순위라는 말이군.”
“어차피 당첨은 되었으니까 초조하게 굴지 말라고. 입주는 할테니까.”
“좋아.”
머리를 끄덕인 경선이 조철봉을 향해 한쪽 눈을 감아 보였다.
“몸 성히 돌아와, 자기야.”
“걱정하지 말아.”
“편지 해.”
“야유, 그만해.”
경선에게 눈을 흘겨보인 미나가 조철봉을 보았다. 이제 얼굴에는 웃음기가 가셨고 다시 긴장감이 떠오르고 있었다.
“아저씨, 제 이야기는 들어서 아실 거예요. 아마 언니가 다 이야기했겠죠?”
잠자코 눈만 껌벅이는 조철봉을 향해 미나가 말을 이었다.
“그래요. 난 남자 역할만 했던 동성애자예요. 그래서 이성과의 섹스에서는 전혀 쾌감을 느끼지 못해요.”
“노력은 해봤어요?”
불쑥 조철봉이 묻자 미나는 머리를 끄덕였다.
“했어요. 남자가 해달라는 건 다 했어요.”
“어떻게?”
“별별 자세도 다 해봤고 별놈의 소리도 다 질러봤어요.”
“미친놈들만 만났군.”
“하지만 소용 없었어요.”
“얘.”
그때 경선이 정색하고 나서더니 미나를 쏘아보았다.
“네 말을 들으면 아주 이골이 나도록 섹스를 한 년 같은데, 너 지금까지 섹스를 몇번이나 했지?”
경선이 눈만 크게 뜨고 있는 미나의 코끝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열번도 안되잖아? 어젯밤에 한 것까지 합쳐서 말이야.”
“아니, 그래도.”
“노력을 했다니? 남자들이 시킨 대로만 했다고 그것이 노력을 다 한거야? 네가 스스로 네 몸에 불을 질러야지, 이것아.”
경선의 목소리가 높아졌을 때 조철봉은 심호흡을 했다. 백번 지당한 말씀이었다. 엉덩이를 두들겨주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지만 조철봉은 억제한 채 머리만 끄덕였다.
“어쨌든 너한테는 오늘밤이 아주 절호의 기회야. 이런 기회는 두번 다시 없단 말이야.”
다짐하듯 경선이 말했을 때 조철봉은 진지한 표정으로 미나를 보았다.
“미나씨, 긴장할 것 없어요. 미나씨는 오늘 틀림없이 여자의 기쁨을 맛보게 될테니까.”
조철봉과 황미나가 침실로 들어섰을 때는 그로부터 30분쯤이 지난 후였다. 박경선은 응접실에서 한잔 더 하겠다고 남았는데 기분 나쁜 표정이 아니었다. 조철봉을 향해 두 손가락으로 브이자를 만들어 보이는 것을 봐도 그렇다.
“씻고 올까요?”
침실 복판에 선 미나가 어정쩡한 표정으로 물었을 때 조철봉은 하마터면 실소를 할 뻔했다가 어금니를 물고 참았다.
생전 열번밖에 하지 않은 미나의 말투가 수천번은 한 여자와 비슷했기 때문이다. 아마 그런 소설이나 영화를 보고 익혔는지도 모른다.
“아니 괜찮아.”
침대 끝에 걸터앉은 조철봉이 셔츠를 벗어 의자 위로 던졌다.
“난 사우나를 하고 와서 또 물 묻히기 싫어.”
“저도 사우나 다녀왔어요.”
조철봉의 셔츠를 집어 옷걸이에 걸면서 미나가 말했다. 어느덧 표정이 조금 편안해져 있었다.
“언니한테 이야기 듣고 긴장이 되어서요. 가게에서 일찍 나와 사우나에 갔어요.”
“긴장할 것 없다니까.”
바지를 벗은 조철봉이 팬티 차림으로 서서 미나를 보았다. 미나는 아직 단정한 정장 차림이다.
“자, 우선 그쪽도 옷을 벗어야겠지?”
“그래야죠.”
금방 대답은 했지만 미나가 힐끗 조철봉을 보았다.
“불을 껐으면 좋겠는데, 어떠세요?”
“미나씨가 좋을대로.”
팬티까지 벗어버린 조철봉이 미나의 앞에 당당한 앞모습을 보이며 말했다. 시선을 내린 미나가 전등 스위치를 끄자 방안은 어두워졌다.
“세상에서 여자의 몸처럼 아름다운 생명체는 없지.”
침대 위에 알몸으로 누운 조철봉이 천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남자의 몸은 아무리 단련시켜도 자연 그대로인 여자의 몸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지. 여자의 몸은 신이 창조한 최고의 예술품이야.”
“흐흥.”
어둠 속에서 미나의 짧은 웃음소리가 울렸다. 미나는 지금 벽쪽에서 옷을 벗고 있는 중이다.
“내가 불을 끄자고 한 것이 서운했던 모양이죠? 그럼 불을 켜요?”
“아니, 됐어.”
팔베개를 한 조철봉이 부드럽게 말했다.
“내 시선이 거북하다면 그냥 둬.”
“내 몸을 보고 싶어요?”
“나중에 보면 돼.”
“봐야 흥분되지 않아요?”
“아까 보았지 않아? 난 이미 열 받았어.”
“조금 겁나요.”
“언니하고 할 때도 그랬어?”
“아뇨. 그때는.”
옷을 다 벗은 미나가 주춤거리며 침대 위에 오르더니 조철봉의 옆에 웅크리고 누웠다. 엉덩이를 조철봉쪽에 둔 채 옆으로 웅크리고 누운 것이다. 조철봉은 상관하지 않고 천장을 향해 물었다.
“그때는 어땠어?”
“서로 익숙해서요.”
“그렇겠지. 그래서?”
“그냥 자연스럽게.”
“만졌어?”
“그래요.”
“키스나 애무는?”
“서로 번갈아서.”
미나가 몸을 더 웅크리는 바람에 엉덩이가 뒤로 밀려 조철봉의 허리에 닿았다. 그 순간 미나가 움칠하더니 엉덩이를 떼었다. 과장된 동작은 아니었다.
“그럼 날 언니라고 생각하면 되겠군.”
조철봉이 느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언니를 안았을 때 언니를 만족시켜 주겠다는 생각은 했겠지?”
“항상.”
역시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한 황미나가 침을 삼켰다.
“난 만족을 하지 못한 경우도 많았어요.”
“저런.”
입맛을 다신 조철봉이 심호흡을 했다. 바로 3센티도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 알몸의 여자가 웅크리고 있는 것이다. 여자와는 섹스 합의까지 끝난 상태인데다 문밖의 응접실에는 응원단까지 대기한 현실이었으니 손만 뻗치면 된다. 그러나 다시 심호흡을 한 조철봉이 정신을 집중했다. 이 시점에서 미나의 몸위에 오른다면 다른 놈들과 다를 것이 없는 결과가 나올 것이었다. 분위기를 조성해야만 한다. 그 일차적 수단으로 대화가 이어져야 한다. 대화만으로 샘물이 터져 나오도록 만들었던 경험을 지금 이용하지 않으면 언제 하겠는가?
“그쪽 입장에서도 만족하는 경우가 드물었고 실제 여자로서 남자를 받아들였을 때도 그렇다면 이건 비극 아냐?”
“하지만 언니가 만족하는 걸 보면 좋았어요.”
“그건 억지야.”
어둠속에서 머리를 저은 조철봉이 문득 시선을 내려 아래쪽을 보았다. 일어서 있는 자신의 철봉을 보려는 것이다. 그러나 방안은 어두워서 보이지 않았고 배에 힘을 주자 철봉이 건들거리는 느낌이 전해져왔다.
“이것 보라고. 아니, 만져봐.”
조철봉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 철봉을 만져보라니까?”
“왜요?”
“글쎄, 먼저 만져보기나 해.”
“아까 보았어요.”
했지만 미나가 결심한 듯 몸을 반듯이 눕히더니 손을 뻗쳐 조철봉의 철봉을 슬쩍 건드렸다. 그러더니 질색을 하고 나서 마치 뱀에 접근하는 것처럼 손을 내뻗고는 망설이고만 있다. 조철봉이 미나의 손을 끌어다 지하철의 손잡이를 쥐는 것처럼 갖다 붙이고는 말했다.
“남자의 철봉은 여자보다 훨씬 단순해서 금방 대포를 발사할 수가 있지. 그래서 미나씨가 쥐고 있는 다섯 손가락 만으로도 절정에 오를 수가 있어. 그것을 오형제하고 놀았다고 하지.”
“흐흥.”
미나가 다시 짧게 웃고는 철봉을 쥔 손에 조금 힘을 주었다. 아니 고쳐 쥐었다고 하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철봉을 미나에게 맡긴 채 조철봉이 말을 이었다.
“따라서 여자보다 남자의 테크닉이 더 중요해. 금방 발사해버리면 여자의 문전만 어지럽히는 꼴이 되기 때문에 단련과 인내, 기교가 필요한 거야. 하지만.”
조철봉이 조금 뜸을 들였다가 말을 이었다.
“조금전에 언니가 만족한 걸 보면 좋았다고 했지만 그건 억지야.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둘이 같이 절정에 올라야돼. 그래야 진정한 섹스라고.”
그때 조철봉은 자신의 철봉에 압박감이 느껴졌다. 미나가 세게 쥐었기 때문이다.
“어떤 인내와 기교가 필요해요?”
미나의 목소리는 메마른 동굴에서 울려 나오는 것 같이 느껴졌다.
“말해줘요, 아저씨.”
“지금같은 경우도 포함되지.”
조철봉이 철봉에 힘을 주면서 말했다.
“이렇게 분위기를 잡는 상황말이야.”
“그러네.”
다시 미나가 짧게 웃었다. 점점 분위기에 빨려 들어가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조철봉을 포함하여 보통 남자에게 일상에서 가장 감미로운 순간을 꼽으라면 바로 지금이 그중 하나가 될 것이다. 본격 작업에 들어간 때보다 지금이 더 감미롭고, 가슴이 저리도록 만족감과 흥분이 교차되며, 기대감으로 심장은 터질 듯이 고동을 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순간을 연장시키는 여러가지 방법이 연구되고 있지만 개체마다 환경이 다른 터라 아직 정석은 정해지지 않았다. 조철봉은 자신의 철봉을 쥐고있는 미나의 부드러운 손바닥 촉감을 음미했다. 따스했다. 손바닥을 통해 자신의 철봉 핏줄로 울끈불끈 혈액이 보내지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따라서 미나도 그것을 감지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 정도가 되면 샘에 물이 고여야돼.”
조철봉이 낮게 말했을 때 미나가 시선을 주었다. 둘이 서로 반듯이 천장을 보고 누워 있다가 미나의 손이 철봉을 쥐는 바람에 이제는 조금 비스듬하게 조철봉을 향해 몸이 기울어졌다.
“샘에 물이 고이다뇨?”
했다가 금방 말뜻을 알아차린 미나가 철봉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가 풀었다.
“자기도 한번 만져봐요. 고였나 말랐나.”
“그래? 어디, 그럼.”
몸을 튼 조철봉이 손을 뻗쳐 미나의 샘끝 숲에 살짝 댔다. 조철봉으로선 처음으로 미나의 몸에 손이 닿는 순간이었다. 숲 끝에는 물론 신경세포가 연결되어 있지 않지만 흔들리는 촉감은 느낄 수가 있는 법이다. 조철봉의 손이 부드럽게 숲을 쓸다가 계곡 사이에 살짝 닿았을 때 벌써부터 긴장하고 있던 미나가 움칫했다. 이미 두다리는 저도 모르게 오무려져 있어서 계곡이 닫혔으니 샘은 보일 리가 없었다.
“이런, 샘이 없어졌잖아?”
입맛을 다신 조철봉이 손을 치우고 다시 벌렁 누웠다.
“뭐, 나도 목마르지는 않아.”
“봐요.”
그때 미나가 낮게 말하더니 다시 철봉을 힘주어 쥐었다.
“문 열었으니까.”
“그래? 그놈의 문이 자주 열리고 닫히는구먼 그래.”
정색한 조철봉이 손을 뻗쳐 계곡 사이에 있는 샘 윗부분을 가볍게 건드렸다.
“아야.”
샘 윗부분은 두레박을 걸어놓는 약간 돌출된 부분을 말한다. 짧게 신음을 뱉은 미나가 다리를 오무렸다가 재빨리 폈다. 조철봉은 아주 신중하게 중지 끝을 샘안에 넣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숨을 멈췄다. 샘에 물이 차있었던 것이다. 아니 차오르고 있다고 해야 맞다. 물론 지금쯤 보통 여자 같았으면 가득차 있었을 것이고 박경선의 경우라면 철철 넘쳐야 정상이다. 그러나 차오르고 있는 것만 해도 미나에게는 장족의 발전이었다. 어젯밤 최갑중은 모래밭에다 박는 것 같다고 하지 않았던가? 나무토막에 비비는 꼴이었다고도 했다.
“으으음.”
샘안에 중지를 머물게 하면서 조철봉이 탄성을 뱉었다.
“차오르고 있구나.”
“그렇죠?”
자랑스러운 듯이 미나가 묻더니 그때 처음으로 몸을 붙여왔다. 지금까지 철봉만 쥐고 있었을 뿐 둘은 약 2센티의 간격을 두고 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몸이 밀착되었을 때 조철봉은 다른 한손으로 미나의 어깨를 자연스럽게 감싸안았으며 미나 또한 한손으로 조철봉의 허리를 감았다. 이만하면 정상적인 준비 자세가 되었다. 모양이 아직은 어색하지만.
“미나, 네가 위에서 해줄래?”
그자세 그대로 조철봉이 속삭이듯 말했을때 미나가 놀란듯 시선을 들었다.
“내가?”
“응, 네가 위에서.”
그 순간 조철봉은 미나의 눈빛이 강해지는 것을 보았다.
“난 서툰데.”
하면서도 미나가 상반신을 조철봉의 가슴에 붙이면서 몸을 포개었다. 어느덧 얼굴은 상기되었고 가슴에 닿는 숨결은 뜨거웠다. 미나는 경선과 동성애를 할 적에 항상 남자 역할이었던 것이다.
“올라와.”
조철봉이 미나의 어깨를 끌어올리자 미나는 순순히 배 위에 걸터앉았다. 그러고는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저, 불을 켰으면 좋겠는데.”
“흐흥.”
저도 모르게 배를 들썩이며 조철봉이 웃는 바람에 걸터앉은 미나가 출렁거렸다.
“아까는 껐으면 좋겠다고 하더니, 마음이 바뀌셨나?”
“자극을 더 받고 싶어서 그래.”
“이게 형부한테 반말 하는 것 봐라.”
“치이.”
하면서 잠깐 몸을 뗀 미나가 전등 스위치를 켜더니 번개같이 돌아와 다시 배위에 걸터앉았다. 그러고는 시선이 마주치자 빙그레 웃었다.
“그럼 내가 리드해도 돼?”
밝은 불빛을 받은 미나가 부끄러운듯 젖가슴을 두손으로 가렸지만 시선을 떼지 않고 그렇게 물은 것이다.
“어디, 해봐.”
조철봉이 웃음띤 얼굴로 대답했다.
“여자끼리 하는 것 하고 크게 다를 것도 없어. 리듬에 맡기면 돼.”
“난 내 몸에 기계를 넣어본 적이 드물어.”
미나가 조철봉의 철봉을 손바닥으로 조심스럽게 주무르며 말했다.
“그래서 조금 떨려.”
“그럼 내 철봉을 네 것이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조철봉이 손을 뻗어 미나의 젖가슴을 부드럽게 쓸었다. 유두는 이미 발딱 서 있었는데 손끝이 닿자 탄력있게 튕겼다.
“천천히 넣어. 내가 남자라는 것도 잊어버려. 그리고 네 몸이 받아들이는 자극만 즐기도록 해.”
“그럼 넣을게.”
“벌써 넘쳐나고 있구먼 그래.”
“시끄러.”
하면서 미나가 엉덩이를 들더니 조심스럽게 샘을 철봉끝에 대었다. 이미 샘물이 넘쳐나고 있었으므로 조철봉은 잠자코 미나의 허리를 쓸면서 기다려 주었다.
“오빠.”
아직 철봉을 샘끝에 댄채 미나가 조철봉을 불렀다. 무릎을 꺾고 앉은 자세였으므로 상반신은 조철봉의 배 위에 떠서 철봉이 아슬아슬하게 샘 끝에 건들거리는 상황이 되어 있었다. 조철봉의 시선을 받은 미나가 혀 끝으로 입술을 핥았다.
“무서워.”
“무서우면 안해도 돼.”
차분하게 말한 조철봉이 미나의 젖꼭지를 손끝으로 애무했다. 무조건 비비거나 돌린다고 애무가 되는 것이 아니다. 감질나도록 해야한다. 손끝을 아주 섬세하게 운용시켜야만 하며 인내심을 발휘하여 한박자 손을 떼었다가 솜털을 건드리는 것처럼 만지면 잠자던 세포까지 모두 깨어나 진저리를 치면서 반기게 되는 것이다. 조철봉은 기다렸다. 지금 미나는 시간을 끌면서 자극을 더 극대화시키려는 수작이다. 흥분해서 그냥 넣었다가는 십년공부 도로아미타불이 된다.
식어진 용암이 떨어지는 것처럼 조철봉의 아랫배에 샘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조철봉에게는 10분이나 지난 것 같았지만 실제 시간은 10초쯤 되었을 것이다. 미나가 무릎을 구부렸으므로 철봉 끝이 샘의 두레박에 닿았다.
“아야.”
저도 모르게 미나가 놀란 외침을 뱉었지만 숨결이 가팔라졌다. 결국 인내력 싸움에서 미나가 진 것이다. 미나가 조심스럽게 철봉을 손으로 쥐더니 본격적으로 샘에 넣으려는 순간이다.
“잠깐만.”
조철봉이 허리를 비틀었으므로 미나가 쥐고 있던 철봉이 미끄덩 빠져나왔다.
“왜?”
당황한 미나가 묻자 조철봉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미나를 보았다.
“정말 괜찮아? 무섭다면서?”
“괜찮아.”
“내키지 않으면 내가 애무만 해줄게.”
“오빠, 나 달아올랐어.”
마침내 미나가 몸을 비틀며 말했다. 그러고는 손을 뻗쳐 철봉을 세게 쥐었으므로 조철봉은 낮게 신음했다.
“야, 그건 기계가 아냐. 살살 다뤄.”
“미안해 오빠.”
“그냥 넣으려고?”
“그럼 어떻게 해?”
눈 주위가 빨갛게 달아오른 미나가 엉거주춤한 자세로 조철봉을 보았다. 반쯤 엎드려 있어서 젖가슴은 동굴의 종유석처럼 원형 그대로 늘어졌으며 아랫배도 볼록해졌다. 그것이 조철봉에게는 더 감동을 주었으므로 철봉은 더 단단해졌다. 심호흡을 한 조철봉이 미나의 아랫배를 손바닥으로 부드럽게 쓸었다.
“먼저 철봉을 샘 주위로 살살 문질러. 그냥 쑥 넣지 말고.”
“문질러?”
“그래, 인사를 시키는거야.”
“이렇게?” 하면서 상반신을 조금 세운 미나가 철봉 밑부분을 쥐더니 샘 주위의 골짜기를 왕래시켰다. 그러자 미나의 입에서 낮은 탄성이 터져나왔다. 자연스런 탄성이다.
“아아 오빠, 좋아.”
상반신을 조금 더 젖힌 미나의 몸이 활처럼 굽혀졌다.
“이렇게 좋은 줄 몰랐어.”
“이건 아직 시작도 안한거야.”
미나의 젖꼭지를 손끝으로 애무하면서 조철봉이 부드럽게 말했다.
“네 샘은 끝없이 용암이 쏟아지게 될테니까 서둘지 마라, 천천히, 알았지?”
“오빠, 이제 넣으면 안돼?”
제가 그냥 주저앉으면 그렇게 될걸 가지고 미나가 허덕이며 물었다. 미나도 지금의 감질나는 분위기를 인내심을 가지고 즐긴다는 증거가 될 것이다. 조철봉의 손끝이 이제는 철봉의 끝과 함께 미나의 골짜기를 탐색했다. 철봉이 미처 탐색하지 못한 부분을 섬세하게 방문한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아휴, 미치겠어.”
미나가 온몸을 비틀면서 신음했다. 그러나 미나도 악착같이 철봉을 샘 안에 넣지 않는다. 허리를 돌려 철봉과 손끝의 마찰을 더 강하게 만들면서 미나가 이사이로 말했다.
“오빠, 나 미치겠어. 지금 넣을까?”
“아니.”
심호흡을 한 조철봉이 눈을 크게 뜨고 배위에 앉아있는 미나를 보았다. 미나는 몸을 잔뜩 뒤로 젖히고 있어서 젖가슴도 납작해졌고 배도 팽팽했다. 아름답다. 미나의 젖가슴과 아랫배를 한손으로 쓸어내리면서 조철봉은 갑자기 가슴이 메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바로 지금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일지도 모른다.
“오빠, 나 넣을거야.”
마침내 미나가 몸부림을 치면서 말했다. 그러고는 상반신을 굽히면서 천천히 철봉을 샘에 채웠다.
“아아아아.”
미나의 입에서 탄성이 뱉어졌다. 문 밖의 응접실까지 충분히 들릴 만한 탄성이었다. 이윽고 철봉이 끝까지 채워졌을 때 미나는 모든 기력이 빠진 듯이 조철봉의 몸 위로 엎드렸다.
“아이고, 죽겠어.”
미나가 허덕이며 앓는 소리로 말했다.
“오빠, 어떻게 좀 해줘.”
조철봉은 미나의 허리를 두손으로 감아안았다. 이런 경우는 아주 드물었으므로 조철봉의 신경도 극히 예민해져 있었던 것이다. 특히 샘 안에 들어간 철봉의 신경세포가 엄청난 자극을 받고있는 중이었다. 최갑중이 나무토막이며 모래밭이라고 표현했던 미나의 몸이 그야말로 화산이 폭발하고 용암이 쏟아져나오는 상황으로 바뀌었다. 조철봉은 지금이야말로 미나의 성이 원상으로 되돌아갈 기회임을 알 수 있었다. 몸위에서 엎드린 채 허덕이고만 있는 미나를 살그머니 옆으로 눕히고는 이제 위에서 내려다보았다. 아직 철봉은 샘 안에 있었지만 압박감은 조금 전보다 약한 때문인지 미나가 눈을 떴다. 몇분 사이에 눈이 쑥 들어간 얼굴이 되었고 초점도 잡히지 않아서 미나는 딴사람 같았다.
“오빠, 사랑해.”
미나가 입술만 달싹이며 말했을 때 조철봉은 잠자코 자세를 갖추었다. 지금 미나의 말은 진심일 것이었다. 바로 이 순간만큼은 기대감에 부풀고, 충만된 느낌으로 차 있으며 너무 벅차서 슬프기까지 한때가 그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나 조철봉은 미나의 말에 대답할 필요성은 느끼지 않았다. 미나는 지금 자신이 무슨 말을 뱉었는지 알 수 없는 단계에 와 있었으므로.
“아악”
미나의 입에서 비명같은 탄성이 터진 것은 그 다음 순간이었다. 그것은 조철봉이 천천히 상하운동을 시작했기 때문인데 정성을 기울였다. 간혹 잘난 체하기 좋아하는 호색가가 강3약4, 좌3우3, 거기에다 장2단3이며 고4저3 등등의 공식을 외워놓고 행여나 틀릴세라 허우적대는 경우가 있다지만 여자의 몸을 그렇게 다루려면 차라리 오형제를 부르는 것이 낫다. 조철봉은 한동작, 한순간에 정성을 쏟았으나 자유분망했다. 미나가 이제 몸을 활짝 열어 놓았으므로 함께 훨훨 날았다. 깊게 들어갔을 때에도 미나는 환호했고 옅게 부딪쳐도 애타는 신음으로 호응했다.
“오빠, 오빠.”
미나가 허리를 치켜세우면서 다급하게 조철봉을 부르기 시작했을 때는 철봉과 샘이 만난지 딱 8분30초가 되었을 때였다. 미나가 철봉을 샘에 넣은 순간에 조철봉이 벽시계를 본 것이다. 따라서 그 전에 문지르고 만진 시간 13분을 더하면 현재까지 22분 정도가 소비되었다.
“나, 터질 것 같아, 오빠.”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된 미나가 울먹이며 소리쳤다. 그러면서 허리를 흔들었는데 이번에는 호흡이 맞지?읍?철봉이 몇번 어긋났다. 조철봉은 허리에 힘을 주고 미나의 몸에 세게 부딪쳤다. 그러자 미나가 자지러지는 듯한 신음을 뱉더니 곧 흐느껴 울었다. 어느새 온몸이 낙지처럼 조철봉의 몸에 엉켜있었는데 한동안은 떨어지지 않았다. 미나는 극락을 경험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도 처음으로 여성의 극락을 체험한 셈이 될 것이었다. 조철봉은 미나의 몸을 안은 채 길게 숨을 뱉었다. 이쪽은 아직 안했다.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을 때는 그로부터 10분쯤 후였다. 그때는 겨우 정신을 수습한 미나가 떨어져 나가 죽은 듯이 늘어져 있었고 조철봉은 천장을 향하고 누워 마악 담배에 불을 붙이려는 참이었다. 물론 노크의 주인공은 박경선이었는데 방으로 들어서더니 번들거리는 눈으로 조철봉과 미나를 훑어 보았다.
“쟤, 했지?”
아직도 눈을 뜨지 않고 있는 미나를 턱으로 가리키며 경선이 물었다.
“밖에서 들으니까 요란하던데.”
조철봉이 천장을 향해 담배 연기를 길게 뿜었다.
“아주 예쁘게 했어.”
“흥.”
경선이 코웃음을 치더니 침대로 다가와 거침없이 위로 올랐다. 그러고는 미나의 반대편에 누웠다. 조철봉을 사이에 두고 경선과 미나가 누운 것이다. 그때 미나가 눈을 떴다. 미나가 눈만 감고 있다는 것을 조철봉은 물론이고 경선도 알고 있었다.
“언니, 왔어?”
“그래. 이제 목적을 달성했으니까 내가 끼어도 상관 없겠지?”
“그럼, 언니.”
미나의 목소리는 아직도 가라앉아 있었다.
“당연한 일인데 뭘 물어?”
“그나저나 너 한턱 내야 돼. 오늘부터 진짜 여자가 되었으니까 말이야.”
“그럴게.”
순순히 대답한 미나가 슬그머니 손을 뻗쳐 조철봉의 손을 쥐었다.
“고마워, 언니.”
하면서 미나가 조철봉의 손을 힘주어 잡고는 물었다.
“언니, 나 그냥 여기서 자도 되지?”
“그럼. 이젠 우리 셋이 한 몸이 되었는걸 뭐.”
“난, 아직 안했는데.”
담배 연기를 뱉고난 조철봉이 불쑥 말하자 경선은 대번에 몸을 붙여 왔는데 미나는 무슨 말인지 못알아 들었다.
“네? 뭘요?”
둘이 있을 때는 오빠라면서 반말을 하던 미나가 그렇게 묻자 경선이 키득 웃었다.
“응, 날 위해서 우유 남겨 놓았다는 말이야.”
“우유?”
했다가 그때서야 미나는 말뜻을 알아차리고는 쥐고 있던 조철봉의 손을 비틀었다. 그때 경선의 손이 거침없이 조철봉의 철봉을 쥐었다.
“미나야, 나, 여기서 해도 괜찮지?”
경선이 조철봉의 가슴에 턱을 얹고는 미나를 보며 물었다.
“너, 내가 해도 참을 수 있겠어?”
“언니, 난 몸을 움직이지도 못해.”
미나가 기진한 목소리로 말했다.
“언니 애인인데 내가 뭐라고 하겠어? 난 신경쓰지마.”
그러면서 미나가 다시 조철봉의 손을 비틀었다.
“어이, 한숨 자고나서 하자.”
조철봉이 입맛을 다시면서 말했지만 경선은 머리를 저었다. 그리고 이미 경선의 손에 잡힌 철봉은 기쁜 듯 건들거리고 있는 중이었다.
“아이구, 예쁜것.”
상반신을 세운 경선이 철봉에 입을 맞추더니 그 자리에서 가운을 벗어 던졌다. 그러자 순식간에 경선도 알몸이 되었다.
“나, 흥분했어.”
경선이 조철봉의 옆으로 바짝 붙으면서 말했다.
“밖에서 다 들었단 말야.”
그때 조철봉은 옆 쪽의 미나도 숨소리가 가빠지고 있는 것을 알았다. 당연한 일이다.
다음날 아침 조철봉이 출근한 지 5분도 안되었을때 최갑중이 찾아왔다. 두눈이 벌겋게 충혈되었고 땅을 딛는 다리는 허방을 짚는것 같았으므로 보기에도 위태위태했다.
“어젯밤에 시킨대로 한거냐?”
외면한 채 조철봉이 묻자 갑중은 입맛부터 다셨다.
“예, 그런데.”
“그런데 어쨌단 말이야?”
“별로였습니다.”
“별로라니?”
“그저 허리만 아픕니다.”
“도대체 어딜 갔는데?”
“룸살롱에 갔습니다.”
“그래서?”
“그중 괜찮은 파트너를 골라 곧장 이차로 갔는데.”
“이번에도 나무토막이었어?”
“그게 아닙니다.”
다시 입맛을 다신 갑중이 이번에는 길게 숨을 내뱉었다.
“파트너는 제법 허리를 돌려 주었지만 기분이 나지 않았습니다.”
“왜?”
“감동이 일어나지 않았어요.”
“미친놈.”
혀를 찬 조철봉이 눈을 가늘게 뜨고 갑중을 노려보았다.
“인마, 감동은 네가 만들어내는 거야. 상대방한테서 받으려고만 하면 안된단 말이다.”
갑중은 눈만 껌벅였고 조철봉의 훈계가 이어졌다.
“그리고 그 감동은 마음을 비워야 만들어진단 말이다. 욕심을 부리면 절대로 맛볼 수가 없어.”
“저는 도무지 무슨 말씀인지 이해가 안갑니다.”
이제는 갑중도 정색하고 조철봉을 보았다.
아직 술기운도 덜 빠진데다 온몸이 지끈거리는 판이어서 심기가 더 나빠진 것이다.
“아, 궁합이 맞으면 되는 것이지 마음을 비우고 자시고 할 것이 있습니까? 어쨌든 그제 밤 그 망할년을 만난 것이 문제의 시발입니다. 그때부터 재수가 없었다니까요.”
“그래?”
소파에 등을 붙인 조철봉이 갑중의 가슴께를 본 채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엄숙한 표정이어서 갑중은 조철봉이 자신의 말을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알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조철봉은 어젯밤 미나와의 정사를 다시 떠올리고 있었던 것이다. 미나를 옆에 두고 벌인 경선과의 향연은 자극적이었다. 경선은 그제 밤보다 더 광란의 늪으로 빠져들었으며 같은 시간대에 세번이나 폭발했다. 바로 옆에 미나가 누워 있었기 때문에 더 자극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조철봉은 극도의 인내심을 발휘하여 경선과의 정사 동안에도 분출하지 않았다. 아마 불경을 열번도 더 외웠을 것이고 약효가 떨어진 빈 라덴을 생각하다가 그만두었으며 결국에는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 문제를 떠올렸을 때에야 분출이 겨우 진정되었던 것이다. 그러고는 곧 늘어진 경선을 젖혀두고 미나를 안았다. 놀란 미나가 사양하는 척 가슴을 밀었지만 샘은 흘러넘치고 있었던 것이다.
이번에는 정상위로 배회할 것도 없이 샘안에 진입했어도 미나는 환성을 지르며 맞았다. 이제 미나는 완전히 정상 상태로 돌아온 것이다. 조철봉은 심호흡을 했다. 그것이 모두 인내의 결과이며 마음을 비웠기 때문인 것이다. 인내 끝에 얻은 열매는 값지며 달다. 그것을 갑중은 모르고 있는 것이다. 미나가 나무토막이라니, 조철봉은 저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결국 성(性)은 이성애거나 동성애거나 간에 만족감을 느끼는 강도는 행위자의 노력과 수단에 의해 좌우된다는 결론을 조철봉이 증명해낸 셈이 된 것이다. 그날 저녁에 조철봉은 회사 근처의 한식당에서 황미나와 마주앉았다. 미나가 저녁을 사겠다면서 회사 근처로 찾아왔기 때문인데 물론 미나는 박경선에게 조철봉을 만난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이것은 조철봉을 독점하고 싶다는 의미와 같으며 고금을 통하여 남녀사이에서 수백만번 발생해온 갈등의 한면이 일어난 셈이 된 것이었다. 따라서 미나와 조철봉은 질투하고 독점하려는 남녀간의 정상적인 관계가 되었다.
“저, 오늘은 끝까지 제가 쏠게요.”
하면서 눈웃음을 치는 미나의 자태에서 색기가 풍겨나왔다. 눈빛에 은밀함과 둘만의 비밀을 간직하고 싶다는 욕구가 노골적으로 떠 있는 것이다.
“집에 들어가지 않을테니까 오빠도 각오해야 돼요.”
“이거, 죽겠군.”
입맛을 다신 조철봉이 울상을 지어 보였지만 곧 웃었다. 밀실에 둘이서만 앉아있었으므로 미나의 교태는 노골적으로 되어갔다.
“오빠, 어젯밤 과로했지? 언니하고 나를 번갈아 만족시켜 주느라고.”
눈웃음을 치며 미나가 묻자 조철봉은 여유있게 웃었다.
“정상적으로 했다면 아마 난 며칠 못가서 링거병을 매달고 병원에 누워있게 될거야”
“그럼 정상적인 방법이 아니었어?”
“양기를 함부로 발산하지 않고 테크닉으로 너희들을 만족시켜 준 것이지.”
“그렇다면.”
정색한 미나를 향해 조철봉이 다시 웃어 보였다.
“내 몸을 보호하기 위한 방법이야, 상관없는 일이니까 신경 꺼.”
“알았어.”
선선히 머리를 끄덕인 미나가 다시 지긋한 눈빛으로 조철봉을 보았다.
“오빠, 내가 어젯밤에 처음으로 여자로서의 쾌감을 느꼈다는 것 알고 있지?”
“처음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런것 같기는 하더구먼.”
“저봐, 다 알면서도 시치미 떼는 것 봐.”
눈을 흘긴 미나가 식탁 밑으로 두다리를 뻗더니 발을 조철봉의 무릎에 붙였다.
“오빠, 오늘은 나하고 둘이서만 지내, 옆에서 자극을 받을 필요도 없이 둘만의 시간을 갖고싶어.”
“이제 원상으로 돌아온거야?”
“응.”
어린아이처럼 머리를 끄덕인 미나가 수줍게 웃었다.
“아까 오빠가 방으로 들어올 때부터 온몸에서 열이 났어. 그리고 그곳이 축축해졌어. 그만하면 정상이 된 것이지?”
“글쎄.”
머리를 한쪽으로 기울인 조철봉이 정색했다.
“내가 보기에는 비정상 같은데, 남자를 보기만 해도 질질 싸다니.”
“바보야.”
미나가 발가락을 오므려 조철봉의 무릎을 꼬집는 시늉을 했다.
“오빠니까 그런 거지. 내가 다른 남자를 보면 그럴 것 같아?”
“내가 요즘 색골들한테 걸려서 체중이 몇킬로그램 빠지겠군.”
“테크닉으로 커버한다면서?”
발가락으로 조철봉의 무릎에 문지르면서 미나가 몸을 비틀었다. 얼굴에 열기가 떠 있었다.
“오빠, 나 어떻게 좀 해봐, 오빠 몸이 닿고 나니까 열이 올라 미치겠어.”
조철봉은 은근하게 웃었다. 건강한 남자라면 이런 제의를 받고 나서 활력이 일어나는 것이 정상이다.
“오빠.”
다시 조철봉을 부른 미나가 몸을 비꼬는 시늉을 했다. 이제는 얼굴이 빨갛게 상기되어 있는데다 숨소리도 가빠져 있는 것이다. 입맛을 다신 조철봉은 힐끗 문쪽을 보았다. 물론 이 수작도 뜸을 들이려는 일환이다. 이미 음식상은 다 들여놓아서 종업원이 들락거릴 위험성은 없는 것이다.
“제기, 여기서 뭘 어떻게 하라는거야?”
이맛살을 찌푸린 조철봉이 미나를 보았다.
“오늘밤 얌전하게 둘이서 신랑과 신부처럼 놀자면서 왜 이렇게 보채?”
“그래도.”
미나가 투정을 부리듯이 어깨를 흔들었다.
“못참겠어. 오빠.”
“또 자극적인 환경을 만든 셈이군.”
조철봉이 벽에 등을 붙이고 앉더니 팔짱까지 끼었다. 팔짱을 끼는 것은 방어적 요소가 강하다. 그것을 잘 관찰하면 이용가치가 대단히 크다. 예를 들어서 남자끼리 말다툼이 일어나 곧 주먹질 일보직전의 상황이 되었을 때 문득 상대방이 팔짱을 끼었다면 거칠게 밀고 나가도 된다. 상대방은 겁을 먹은 것이다.
제아무리 입으로는 큰소리를 치고 있어도 팔짱을 낀 것은 겁이 난 마음이 무의식중에 표현된 것이라고 봐야 된다. 그러나 주먹질이 시작 되었을 때 이쪽이 이길 것이라고는 보장 못하니까 신중해야 될 것이다.
“오빠.”
하면서 미나가 마침내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조철봉을 내려다 보았다. 차마 식탁을 돌아 다가오지는 못하고 어정쩡하게 화가 난 표정이었다.
“좋아.”
마침내 조철봉이 팔짱을 풀고는 식탁을 앞쪽으로 밀었다.
“오늘은 내가 가장 빠른 시간에 만족하는 방법을 여기서 실습시켜 주기로 하지.”
“어, 어떻게?”
침을 삼킨 미나가 다가와 조철봉의 옆에 앉았다. 그러고는 손을 뻗어 거침없이 조철봉의 철봉을 바지 위로 움켜 쥐었다. 숨소리가 가빠져 있었고 콧잔등에는 가는 땀방울까지 맺혔다.
“내 철봉이 들어갈 때 절대 신음을 뱉지 말것. 알았어?”
“응. 알았어.”
미나가 바지위의 철봉을 쥐는 것이 양에 차지 않았는지 허리띠를 풀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팬티 속으로 손을 넣어 철봉을 쥐더니 만족한 듯 길게 숨을 뱉고는 물었다.
“오빠, 난 어떻게 해?”
“뭘?”
“나 지금 흘러.”
“내 철봉이 들어갔다고 상상을 해.”
“아이.”
하면서 다시 몸을 비틀었던 미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렇게 상상하려고 시도를 하는 것이다.
“뜨근뜨근하지?”
“조철봉이 묻자 미나가 건성으로 대답했다.
“어.”
“꽉 찬 느낌이 들지?”
“어.”
“더 깊게 넣어줄까?”
“어.”
“더 세게 넣어줘?”
“어.”
미나의 들뜬 목소리가 더 높아졌고 숨소리도 거칠어졌다. 한식당의 밀실에 나란히 앉은 둘의 자세는 기묘했다. 둘이는 똑같이 앞쪽의 벽을 바라보고 있었으며 어느새 조철봉은 다시 팔짱을 끼었다.
/ 글 이원호
(805)차거운 여자-1
“기가 막힌 여자였다니까요.”
최갑중이 그렇게 말했을때 조철봉은 머리도 들지 않았다. 오전 10시반, 중국과 개성의 업무를 화상 회의를 통해 마치고나서 자금 결재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는 중이었다.
“물론 우리 하고는 차원이 다르지요.”
그렇게 갑중이 말한 것은 조철봉의 심기를 건드려 보겠다는 목적도 있었을 것이다. 그래도 조철봉은 서류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갑중은 어제 오후에 실습생들의 여권 문제로 여행사에 다녀왔다. 조철봉의 오성그룹 업무를 맡은 여행사였는데 지금 그곳 사장이야기를 하고 있는 중이다. 서류에 사인을 한 조철봉이 시선을 주지도 않은 채 말했다.
“그렇다면 네가 해봐라. 너같은 놈한테는 그런 자극도 필요할테니까.”
갑중이 눈만 껌벅이자 조철봉은 의자에 등을 붙였다.
“잘난 여자를 겪어보면 네 등급도 덩달아서 올라갈 수도 있는거야.”
“형님.”
입맛을 다신 갑중이 조철봉을 노려보았다.
“그 여자 등급을 말씀드린게 아닙니다.”
“우리하고 차원이 다르다며?”
“여자 분위기가 달랐단 말씀입니다. 지적 수준 따위가 아닙니다.”
“분위기라니?”
그때서야 조철봉의 시선이 정면으로 갑중에게 향해졌다.
“네놈이 여자 분위기를 어떻게 분간한다는거냐? 줄것인가 아닌가 두개의 분위기만 따져왔잖여?”
“아니, 형님.”
다시 입맛을 다시고난 갑중이 어깨를 부풀렸다.
“저는 형님 생각을 해서 말씀드린 것인데 너무 심하시지 않습니까?”
“나, 요즘 피곤해. 어느 차원에서 날아온 여자도 흥미가 없어.”
그렇지 않아도 색녀 일당이 된 박경선과 황미나를 번갈아 만족시켜 주느라고 열흘 가깝게 집 밖으로만 돌았던 것이다. 그래서 사흘 전부터 영일이가 기다리고 있는 본가에 들어가 현재 수신제가를 하는 중이었다. 그때 갑중이 다시 입을 열였다.
“어쨌든 오늘 오후에 양사장이 이곳에 올겁니다. 계약서에 사인을 받으러 오는 겁니다.”
“네가 말하려는 요지는 뭐야?”
“그냥 두기 아깝다는 이유가 첫번째이고.”
갑중이 정색하고 말을 이었다.
“여자가 신비롭습니다.”
“머리 위쪽에 희고 둥근 형광등 같은 것이 떠 있더냐?”
“제가 뒷조사를 해 보았지요. 그랬더니.”
조철봉의 빈정대는 말을 무시한채 갑중은 정색했다.
“양미주는 3년전에 남편을 교통사고로 잃은후에 독신으로 지내왔습니다. 남자관계는 없습니다.”
“이 자식이 회사 돈으로 별걸 다 조사시켰군.”
“제 돈으로 했으니까 염려하지 마십시오.”
“그래서?”
이제는 조철봉이 귀찮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물었다.
“또 알아낸건 뭐야?”
“여자가 차갑습니다. 아주 인상이 싸늘해요. 하지만.”
“속이 뜨거운 것 같더냐?”
“아닙니다.”
머리까지 저은 갑중이 답답한듯 혀로 입술을 축였다.
“슬픈 분위기가 풍깁니다. 가슴이 답답할 정도로. 그래서 뭔가 위로를 해주고 싶다니까요.”
어느덧 갑중의 표정도 가라앉아 있었다.
오후 3시 정각이 되었을때 조철봉은 노크 소리를 들었다. 양미주일 것이었다. 차가운 여자, 최갑중의 표현대로라면 기가 막힐 정도로 분위기가 있는 여자, 또한 그여자를 보면 뭔가 위로를 해주고 싶다고도 했다. 조철봉이 대답하자 곧 문이 열리면서 갑중의 모습이 보였으며 뒤를 여자가 따라왔다. 남색 정장 투피스 차림이었고 스커트 밑으로 드러난 다리의 선은 수준급이다. 미끈하게 잘 빠진데다 발목이 가늘어서 날렵한 사슴이 연상되었다.
“사장님, 선지여행사 양사장이십니다.”
갑중이 말했을때 조철봉은 시선을 들어 양미주를 보았다. 시선이 마주친 순간에는 갑중으로부터 미리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인지 감동이 되지는 않았다. 다만 여자의 검은 눈동자와 정면으로 부딪친 순간 눈이 맑다고는 느꼈다. 용모는 평범했다. 적당한 콧날 밑으로 역시 적당한 크기의 입술이 다소곳하게 닫혀져 있다. 표정은 가라앉아 있었지만 갑중이 선전한대로 차갑거나 슬픈 분위기는 아니었다.
“앉으시지요.”
자리에서 일어선 조철봉이 앞쪽 소파를 권하면서 갑중을 흘끗 보았다. 별거 아니구나 하는 눈짓이었는데 갑중은 이쪽 시선을 받지도 않았다. 앞쪽 자리에 앉았을때 조철봉이 얼굴을 펴고 여유있게 웃었다. 갑중의 말을 듣고는 우스갯소리를 하면서 넘겼지만 실상은 긴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3시가 가까워졌을때 거울을 보면서 머리에 빗질을 했으며 화장실까지 다녀왔던 것이다.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조철봉이 먼저 인사를 했다. 선지여행사는 조철봉의 모든 계열사 직원들의 여행관련 대행사인 것이다. 작년에 회사의 여행 경비가 3억 가깝게 되었으니 선지여행사는 수수료를 포함해서 3천만원정도의 수익은 올렸을 것이었다.
“아뇨, 인사는 제가 드려야 하는데.”
두손을 공손하게 앞으로 모은 미주가 당황한 표정이 되었다. 두눈이 크게 떠졌으며 아랫입술을 한차례 물었다가 푼 동작이 바로 그것이다.
“자, 앉으십시다.”
미주에게 다시 자리를 권한 조철봉이 먼저 소파에 앉았다. 그때서야 갑중이 떠들썩하게 입을 열었지만 두눈의 초점이 잡혀있지 않았다.
“선지여행사가 베트남에 지사를 설치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베트남 관광이 인기가 있다는군요.”
조철봉이 건성으로 머리를 끄덕이며 다시 미주를 보았다. 미주는 시선을 탁자위에 두고 있었는데 그녀 또한 갑중의 말을 건성으로 듣고 있는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조철봉은 어깨를 부풀리며 숨을 가득 들이마셨다가 소리죽여 뱉어내었다. 미주도 이쪽을 의식하고 있는 것이다. 조철봉은 감정의 교류를 믿는 사람중의 하나였다. 그때마다 확인은 해보지 않았지만 이쪽에서 좋은 감정을 품고 있으면 상대방도 그것을 느끼며 부드러워진다고 믿었다. 특히 성욕에 대해서는 더 정확하게 감정이 교류되는 것이다. 이쪽이 성적 충동을 느낀다면 상대방은 반드시 알아차린다고 확신했다.
이른바 텔레파시이다. 시선을 부딪지 않아도 가까운 공간안에 서로 자리잡고 있다면 분명히 전달된다. 다시 심호흡을 한 조철봉은 시선을 앞쪽에 둔채로 미주의 알몸을 연상했다. 시선의 왼쪽 구석에 미주가 앉아 있었는데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때 갑중의 말이 이어졌다.
“우리 베트남 사업장에서 여행할때 도움이 되겠습니다.”
갑중은 아직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
“전생의 인연을 믿습니까?”
불쑥 조철봉이 물었을 때 미주가 시선을 들었다. 잔잔한 눈빛이었다. 바람 한점 없는 아침의 호수 같았다. 안개가 덮인 짙은 남색의 호수는 마치 젤리 덩어리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아뇨.”
짧게 대답한 미주는 웃지도 않았다. 조철봉이 머리를 끄덕였다.
“난데없는 말이라 놀라셨겠지요.”
이게 웬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린고 하니 조철봉의 가슴이 지금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는 표시였지만 그 누가 알겠는가? 십수년을 수족처럼 함께 지내온 갑중도 눈만 껌벅이며 조철봉을 바라볼 뿐이었다. 아마 그는 조철봉이 이번에는 전혀 다른 방법의 작업을 하는 줄로 알고 있을 것이었다. 호흡을 고른 조철봉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십여년 동안 스님 한분과 교류를 해오고 있는데 그 스님 말씀이 전생에 인연이 있으면 꼭 후생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때 조철봉은 갑중이 소리죽여 숨을 뱉는 것을 알았다. 그도 조철봉이 작업하는 것을 분명히 알았지만 방법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시일 것이었다. 아니 마음에 들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요즘 세상에서는 팔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어색한 작업일지도 모른다. 그때 미주가 입을 열었다.
“그럼 제가 전생에 사장님하고 어떤 인연이 있었을까요? 그 스님의 말씀대로라면 말이죠.”
“그렇겠죠.”
정색한 조철봉이 미주의 가슴께에 시선을 주었다.
“난 어디선가 본 것 같은 풍경이나 낯익은 사람을 대할 때 문득 그런 생각을 해왔고 이제는 버릇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양사장을 처음 본 순간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낯익은 얼굴이었고 아마 내 전생이나 그 몇번도 더 전생에서 인연이 있던 분이어서 내 영혼이 기억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이제는 갑중의 한숨이 조철봉의 귀에 들릴 만큼 커졌다. 미주는 눈만 크게 뜬 채 입은 꾹 다물었고 조철봉의 말이 이어졌다.
“인간의 수명이 연장되어 이제는 평균 수명이 70대 중반까지 늘어났지만 인생이란 것은 그야말로 눈 깜박하는 동안에 지나갑니다. 사람이 80세까지 산다고 해도 그것을 일수로 계산하면 3만일도 못됩니다. 3만일.”
조철봉이 미주를 똑바로 보았다.
“50년전쯤에 제작된 명화를 본 적이 있겠지요? 그 영화에 나오는 주연 배우들은 물론이고 엑스트라까지 지금은 모두 죽어서 땅에 묻혀있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있습니까? 우리도 곧 그렇게 되지요. 똑딱거리는 시계를 움직이지 못하게 해도 인간은 늙고 병들거나 사고로 죽어서 땅에 묻히게 됩니다.”
“…”
“그런데 영혼만은 살아서 계속 후생을 이어간다니 이 얼마나 위로가 되는 말입니까? 더구나 낯익은 풍경이나 사람을 만나게 될 적에 그 증거를 보는 것 같은 감동이 온단 말씀이지요.”
그때 미주가 아주 희미하게 머리를 끄덕였고 그것을 본 갑중이 침을 삼켰는데 부주의해서 마치 바가지에 담긴 물이 넘쳐나는 소리처럼 들렸다. 조철봉이 깊게 숨을 뱉었다.
“스님 말씀은 옷깃만 스쳐도 전생에 수백번 인연이 있었던 증거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마 그 이상이 되겠군요.” 그러면서 조철봉도 웃지 않았다.
양미주가 돌아간 것은 그로부터 30분쯤 후였다.
“난 도무지.”
“문밖까지 미주를 배웅하고 돌아온 최갑중이 힐끗 조철봉을 보며 말했다.
“전생이니 인연이니 하셨지만 저한테는 하나도 가슴에 와닿지 않습디다.”
그러자 짧게 웃은 조철봉이 머리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당사자가 아니어서 너에겐 그냥 빈말만 오가는 것으로 들렸을 것이다.”
“그럼 당사자이신 형님과 양미주 사이에는 무슨 교감이 있었단 말씀입니까?”
“있었지.”
자신있게 말한 조철봉이 눈을 가늘게 뜨고 앞쪽의 벽을 보았다.
“난 인연과 전생 이야기를 하면서 머릿속에 양미주의 나체를 떠올렸다. 양미주의 목소리를 듣고는 신음소리를 상상했고 몸을 움직일 때마다 몸부림치는 팔 다리를 연상했다.”
“으음.”
저도 모르게 신음을 뱉은 갑중이 소리내어 침을 삼켰다.
“그렇다면 형님이 십여년동안 스님 한 분과 교류를 하셨다는 말씀은.”
“거짓말이지.”
“후생이 있다는 말씀도.”
“그건 들었다.”
정색하고 말한 조철봉이 갑중을 보았다.
“믿고싶은 말이었어. 인간이 이렇게 백년도 못살고 땅에 묻혀버린다는 것은 너무 싱겁거든.”
그러자 갑중이 길게 숨을 뱉었다.
“어쨌든 이야기는 길게 이어졌지만 결과는 두고 봐야겠지요.”
“분위기가 좋았다.”
다시 조철봉이 느긋한 표정이 되어 앞쪽의 벽을 보았을 때 갑중은 헛기침을 했다.
“형님.”
“뭐냐?”
“제가 양미주를 형님께 데려온 이유를 아십니까?”
“알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네가 못먹는 떡이니 대신 내가 처리 해주기를 바란 것 아니냐?”
이제는 정색한 조철봉도 갑중을 보았다.
“그래서 네가 대리만족을 얻게되고 말이야, 다 이해한다.”
“양미주는 저를 벌레 보듯이 했습니다.”
심호흡을 한 갑중이 쓴웃음을 지었다.
“제가 몇번 시도를 했었지요.”
“그러면 그렇지.”
“형님 말씀이 맞습니다. 제가 고고하면 얼마나 고고한지. 수준이 높으면 얼마나 높은지 알아보고 싶었지요.”
“네가 저런 여자를 순순히 나한테 넘겨줄 놈이냐? 다 안다.”
“저 여자한테는 모든 수작이 다 들통날 것 같았습니다.”
“물론 내 수작도 대충 들통이 났을 것이다.”
소파에 등을 붙인 조철봉이 얼굴을 펴고 웃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몸의 상태가 변화되는 것을 느꼈겠지. 내가 기대한 것도 그것이었고.”
“양미주의 몸 상태가 변화된다고요?”
“내가 보낸 텔레파시가 닿은 것이지.”
“텔레파시라면.”
되뇌던 갑중이 입맛을 다시고는 머리를 돌렸다.
“아직 증명도 되지 않았지 않습니까?”
“그럼 어디 시험해 볼까?”
손목시계를 내려다본 조철봉이 탁자위에 놓인 전화기를 집어들었다.
“헤어진 지 이제 20분이 돼가는군. 지금쯤 열기가 다 퍼졌을테니까 말이야.”
핸드폰이 울렸을 때 양미주의 가슴은 철렁 내려앉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핸들을 꺾어 2차선을 달리던 차를 인도옆쪽으로 붙인 것은 통화를 신중하게 하겠다는 무의식적인 동작이었다.
“여보세요.”
차를 세운 미주는 차분하게 응답했지만 가슴이 뛰었다. 그리고 그것을 깨닫고는 아랫입술을 물었다가 풀었다. 자신의 행태에 불쑥 화가 났기 때문이다. 이런 일은 처음이다. 그 어떤 남자를 만났어도 이렇게 흔들리지 않았다.
“예, 조철봉입니다.”
예상했던 대로 조철봉이었지만 다음 순간에 미주의 양볼은 달아올랐다. 차 안에 혼자 있어서 다행이었다.
“아아, 네.”
미주가 어설프게 대답했을 때 조철봉은 짧게 웃었다.
“아까는 실례했습니다.”
“아녜요.”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미주는 문득 조철봉이 외면상 실수한 적은 없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그렇다면. 숨을 죽인 미주의 귀에 조철봉의 목소리가 울렸다.
“제 느낌이 전달된 것 같군요. 그렇지 않습니까?”
“무슨 말씀이신지.”
“제 느낌 말입니다. 열기 같은 것.”
“저는 무슨 말씀인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만.”
“그렇게 말씀하시는 건 당연하지요.”
조철봉의 목소리가 차분해졌다.
“인생은 짧습니다. 감정을 억제하거나 숨기고 지나기엔 흐르는 시간이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숨을 죽인 미주의 귀에 조철봉의 말이 이어졌다.
“좋은 사람을 적당한 조건하에서 만나게 되었을 때 나는 발산합니다. 행동으로 보이면 미친놈으로 취급받기 십상이어서 열기를 띄워 보내는 것이지요.”
“…”
“그것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하신다면 할말 없습니다.”
“…”
“아까는 이야기할 기회가 없었습니다만 난 별거중입니다. 와이프가 애인이 생겼기 때문에 떨어져 있어주는 것이지요.”
그러고는 조철봉이 짧게 웃었다.
“물론 자식이 하나 있어서 일주일에 한번씩은 집에 들릅니다. 겉으로는 문제가 없는 가정이지요.”
“…”
“가슴에 상처가 없는 인간이 어디 있습니까? 다 극복하거나 잊고 삽니다. 저처럼 말이지요.”
“…”
“와이프한테 애인을 집에만은 끌어들이지 말라고 했습니다. 내가 부탁한 것은 그것 하나뿐이지요.”
“사장님, 저는.”
“압니다. 이런 이야기 듣기가 부담스러우시겠지요.”
조금 빠르게 말한 조철봉의 목소리가 굳어졌다.
“어쨌든 말씀 드리고 나니까 시원해졌습니다. 그럼 조심해서 가십시오.”
그러고는 전화가 끊겼으므로 미주는 깊게 숨을 뱉었다. 아직도 볼이 화끈거리고 있었으며 저린 다리를 움직이자 하체가 갑자기 짜릿해졌다. 몇년만에 느껴보는 감촉이었다.
“별거 하신다고요?”
이쪽 사무실에서는 조철봉의 통화가 끝나자 다 듣고있던 갑중이 따지듯 물었다. 갑중은 두눈을 올려뜨고 있었는데 기가 막히다는 표정이었다.
“갑자기 신파 이야기는 왜 나옵니까? 눈물 없이는 들어주지 못하겠더만요.”
“병신같은 놈.”
쓴웃음을 지은 조철봉이 갑중을 흘겨 보았다.
“인마, 허점을 보여야 더 인간미를 느끼게 되는거야. 그것이 신파라도 상관없다.”
“영일 엄마 귀가 간지럽겠군요.”
“죽이지 않은것만 해도 다행이지.”
“어쨌든 효과가 있을까요?”
갑중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형님의 수단은 신의 경지까지는 아니지만 초인 정도는 됩니다. 새삼스럽지만 다시 제가 인정을 하지요. 그런데 앞으로 어떻게 하실 작정입니까?”
“넌 내가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저 차갑고 콧대높고 도도하고 초연한 척하는 양미주를 박살내 주십시오.”
“단단히 수모를 당한 모양이군.”
“벌레 취급을 당했다니까요. 자세한 말씀은 못 드립니다.”
“하청업체 사장한테 수모를 당하고 지낼 만한 놈이야. 너는.”
다시 눈을 흘겨보인 조철봉이 상반신을 세우더니 정색했다.
“여자한테 압박감을 주면 안된다. 가끔 당겼다가 놓아주는 테크닉이 필요해.”
그러고는 그로부터 닷새가 지날 때까지 조철봉은 일절 미주 이야기는 꺼내지도 않았으며 일에 몰두했다. 미주의 회신에서 발급해준 비행기표로 중국에 일박이일로 다녀왔어도 모른 척했으므로 갑중은 속이 탔다. 그렇다고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이냐고 물어본다면 미친놈이 별일에다 신경을 쓴다고 잔소리를 들을 것이 뻔한터라 눈치만 보았다. 그만큼 갑중은 미주로부터 상처를 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엿새가 되는 날 오전에 조철봉의 사무실에 들어섰던 갑중은 놀라 숨을 삼켰다. 미주가 소파에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어, 양사장이 비자 때문에 오셨다.”
조철봉이 시치미를 뗀 얼굴로 말했으므로 갑중은 호흡을 고르면서 옆쪽에 앉았다. 미주는 오늘따라 연두색 정장 차림에다 얼굴에 정성들여 화장한 흔적이 드러났다. 여자는 관심이 있는 남자를 대할 때 화장에 정성을 기울인다는 정도쯤은 갑중도 안다.
“양사장이 오신 김에 너한테 사과를 하신다는구나.”
조철봉의 말에 갑중이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너무 갑작스런 말이어서 갑중의 머리끝이 쭈뼛 곤두서기까지 했다.
“사, 사과라니요?”
“죄송합니다. 최사장님.”
미주가 앉은 채로 갑중을 향해 공손히 머리를 숙여 절을 했다.
“제가 생각이 부족했었습니다.”
“무, 무엇이 말입니까?”
더듬대며 갑중이 묻자 조철봉이 대신 설명했다.
“내가 네 건강에 대해서 설명해 드렸다.”
“건강에 대해서라니요?”
“이제 그 이야기는 그만하자.”
“정말 죄송해요. 최사장님.”
다시 미주가 머리를 숙여 보였을 때 조철봉이 말머리를 돌렸다.
“그럼 오늘 저녁에 식사나 같이 하십시다. 물론 최사장님도 함께 말이지요.”
“네, 알겠습니다.”
선선히 대답한 미주가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머리를 숙여 보였다.
“제가 시간과 장소는 곧 알려 드리지요.”
“네, 사장님.”
미주가 방을 나갔을 때 엉거주춤 일어서 있던 갑중이 조철봉을 보았다.
“형님, 제 건강이 어떻다는 겁니까?”
“응, 별거 아니야.”
건성으로 대답한 조철봉이 책상으로 가 앉더니 서류를 뒤적이는 시늉을 했다,
“네가 성 불능이라고 했다.”
그날 저녁 7시 정각이 되었을 때 조철봉은 밀튼호텔 2층의 일식당으로 들어섰다. 종업원의 안내를 받아 예약된 방문을 열자 다다미방에서 기다리던 양미주가 일어섰다.
“일찍 오셨는데.”
조철봉이 눈을 크게 떠보이자 미주는 희미하게 웃었다.
“저도 방금 왔습니다.”
일식당은 방으로 나눠져 있는데다 둘만의 공간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 장점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마주보고 앉았을 때 미주의 시선을 받은 조철봉이 정색하고 말했다.
“최사장은 약속이 있어서 오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말을 멈춘 조철봉이 미주를 향해 쓴웃음을 지어보였다.
“설령 약속이 없더라도 양사장을 보기가 부끄러울 것입니다.”
“저도 사과는 했지만 얼굴 뵙기가 민망했어요.”
미주가 시선을 내린 채 말했다.
“어쨌든 사과하고 나니까 가슴이 조금 개운해진 것 같아요.”
“최사장도 금방 잊을테니까 신경쓰지 마십시오.”
종업원이 들어왔으므로 요리를 주문한 조철봉은 흘끗 미주의 모습을 보았다. 갑중은 5년전에 교통사고를 당해 성불능이 되어있는 것이다. 그래서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면 끊임없이 시도를 했지만 아직 성사가 되지 못했다. 겉은 멀쩡했고 의학적으로도 아무 이상이 없는데도 불능 상태이니 애가 탈만도 했다. 조철봉은 멀쩡한 갑중을 그렇게 성불능으로 만들어 미주에게 설명을 해준 것이다.
“어쩌면 그 정도로 끝난 것이 잘된 일인지도 모릅니다.”
다시 둘이만 되었을 때 조철봉이 입을 열었다. 미주의 시선을 받은 조철봉이 말을 이었다.
“만일에, 만일에 말입니다. 미주씨가 최사장한테 잘 대해줬다면 최사장은 더 큰 욕심을 낼 것이 틀림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아니, 그건.”
당황한 미주가 말을 잘랐지만 조철봉은 말을 이었다.
“그렇게 되었을 때 최사장은 더 큰 상처를 받게 될 가능성이 크지요. 아니, 그렇게 될겁니다. 지금까지 그렇게 되어 왔으니까요.”
미주는 다시 시선을 내린 채 입을 열지 않았다. 뛰어난 장사꾼은 주변의 모든 환경을 거래에 이용하는 것이며 사기꾼은 그 몇배의 노력이 필요하다. 자신이 졸지에 성불구자가 되었음을 알게 된 갑중이 어찌 이곳에 함께 올 수 있겠는가? 지금쯤 갑중은 룸살롱이나 나이트에서 속을 가라앉히고 있을 것이었다. 조철봉이 길게 숨을 뱉었다. 갑중을 성불구자로 만든 것은 일석삼조의 효과를 내고 있다. 첫째 미주의 호기심과 동정심이 경계심을 허물어뜨린 효과를 내었으며 둘째는 갑중은 성불구지만 조철봉은 아니라며 상대적 우위를 드러내는 효과가 있다. 마치 친구가 죽었을 때 겉은 동정하며 슬퍼하지만 나는 안죽었다고 속으로 안도하는 심보나 같다. 그리고 마지막 세번째는 가장 중요한 것으로서 사건해결의 열쇠가 될 것이었다. 즉 성에 대해서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끌어 갈 수 있는 분위기가 바로 그것이다.
“그놈을 회복시켜주기 위해서 내가 별짓을 다 했지요. 하지만 모두 실패했습니다.”
조철봉이 탄식하듯 말했다. 성에 대한 이야기는 무진장하다. 밤이 새도록 해도 끝나지 않을 것이다.
양미주, 33세, 이혼 경력이 있고 현재는 독신이며 여행사를 운영하는 미모의 여성, 여행사는 흑자를 내고 있으며 재산 정도는 부동산 가격만 20억 정도, 여행사 직원들의 평은 원칙에 충실하고 융통성이 없으나 결단력이 강하다고 함. 조철봉이 양미주에 대해 알고있는 정보는 이 정도였다. 시간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이성 관계나 성품을 조사하지는 못한 것이다. 식사를 하는동안 미주는 거의 입을 열지 않았다.
조철봉이 묻는말에 대답을 할 뿐이었는데 그렇다고 불편한 기색은 아니었다. 미주가 잠깐 시선을 내렸을때 곧은 콧날과 윤기 흐르는 입술을 바라보던 조철봉은 심호흡을 했다. 갑중이 표현한대로 미주는 차가운 여자였다. 분위기가 차가워서 보통 남자들은 접근하기도 불편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차가운 모습이 묘한 마력을 품고 있어서 사내들의 애간장을 태워왔고 그 증인이 갑중이다. 놈은 별놈의 수작을 다 부렸다가 실패하고는 이쪽으로 넘긴 셈이 되었다.
“여자들을 성적 대상으로만 취급하는 남자들이 있죠.”
문득 미주가 입을 열었으므로 조철봉은 시선을 들었다. 조철봉의 시선을 받은 미주가 가지런한 이를 보이며 웃었다.
“물론 사장님은 예외시구요.”
그러고는 미주가 말을 이었다.
“그런 남자들이 접근할때는 마치 발정난 짐승처럼 보입니다. 입으로는 온갖 딴소리를 해도 목적은 단 하나, 여자와의 성교지요.”
조철봉은 저도 모르게 입안의 침을 삼켰다. 지금까지 초면의 자리에서 이만큼 과격한 표현을 구사한 여자는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상대는 고고한척 초연한 척 내숭을 떨어온 여자였다. 어금니를 물었다 푼 조철봉이 애써 눈빛을 속이고는 미주를 보았다. 조금 무시받은 기분도 들었기 때문이다. 그때 미주가 다시 빙긋 웃었다.
“최사장님 이야기를 하셨는데, 저는 조금도 감동이 되지 않아요. 쉽게 말하면 자극이 오지 않는다는 말씀이죠.”
“그렇습니까?”
겨우 물은 조철봉이 헛기침을 했다. 그렇다면 애써 지어낸 갑중의 사연도 아무 소용이 없어졌다는 말이었다.
“그렇다면 내 목적도 간파 당했으니 성교할 기회는 사라졌군요.”
조철봉이 작심하고 말했을때 미주가 금방 차가워진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렇겠지요.”
“성교를 죄악시 하시는것 같은데.”
“부정한 성교는 그렇죠.”
“성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계시기나 한겁니까?”
술잔을 내려놓은 조철봉이 정색하고 미주를 보았다.
“내말은 성의 기쁨을 알고 계시느냐는 겁니다. 겪어 보셨습니까?
“그럼요.”
미주가 당연한 것을 묻는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제 몸은 정상이에요.”
“그렇게 보이지 않는데.”
이맛살을 찌푸린 조철봉이 머리를 가볍게 저었다.
“내 경험에 의하면 기쁨을 겪어본 여자는 그렇게 차가운 분위기를 만들지 않습니다. 그리고 남자들에 대해서 그런 선입견을 갖고 있지도 않지요.”
조철봉이 자신있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물론 양사장의 몸은 정상이겠지요. 하지만 신이 인간에게 선사해주신 절정의 쾌감은 한번도 맛보지 않은것 같습니다.” 이것은 모험이다. 조철봉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뱉은 말이었다.
그때 양미주가 입을 열었다.
“저, 이런 대화가 싫군요.”
조철봉의 시선과 마주치자 얼굴을 굳힌 미주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절정을 맛보거나 말거나 제발 화제를 바꿔주시지 않겠어요? 듣기 거북해서 그럽니다.”
“그러지요.”
머리를 끄덕인 조철봉이 다시 술잔을 집었다. 미주는 함정에 끌려들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고 포기할 조철봉인가? 식사를 마칠 때까지 조철봉은 화제를 바꾸었다. 회사 이야기부터 환율과 기름값 이야기를 차례로 꺼냈는데 미주는 겉으로 활기있게 응대했지만 마치 배우가 연기하는 분위기였다. 표정이 순식간에 변하는 것을 봐도 그렇다. 웃으며 끄덕였다가 시선을 돌려보면 어느새 차가운 표정으로 돌아가 있는 것이 배우의 연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분위기를 바꿔 한잔 하십시다.”
식사를 마친 조철봉이 제의했을 때 미주가 손목시계를 보는 시늉을 했다. 저녁 8시반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죠.”
약 3초 후 미주가 그렇게 대답했지만 조철봉이 미주와의 역사를 기록한다면 이때의 3초가 가장 긴장된 순간이었다고 회상하게 될 것이었다. 미주는 여자를 성적 대상으로만 취급하는 남자들이 있다고 했는데 그 원조가 조철봉이다. 그러나 미주는 그런 부류를 경멸하고 있었지만 조철봉은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경멸하거나 말거나 미주가 오늘 저녁에 나와준 것은 성적 호기심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겉으로는 앙큼을 떨지만 자신도 모르는 내면이 끓는다. 그것을 들춰내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전문가가 할일이었다. 일식당을 나온 조철봉이 미주를 안내해 간 곳은 나이트클럽이었다.
조철봉에게 가장 익숙한 클럽으로 웨이터 200번은 나이가 60 가까운 고참이었으며 역시 전문가였다.
“아이구, 사장님.”
조철봉과 미주를 일별한 200번이 반색하더니 대뜸 앞장서서 룸으로 안내했다. 9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어서 룸예약이 다 되어있을 것인데도 200번은 거침없었다. 이런 웨이터는 단골이 줄을 서게 되는 법이다. 방으로 들어선 조철봉과 미주가 자리에 앉았을 때 200번이 정색하고 말했다.
“술과 안주를 올리지요.”
조철봉은 머리만 끄덕였고 200번은 소리없이 물러갔다.
“여기 자주 오시나봐요?”
미주가 물었으므로 조철봉은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클럽 현관에서부터 미주는 두리번거리며 촌티를 냈는데 나이트클럽이 처음인 모양이었다. 홀을 지나 룸으로 오는 동안 만난 여자들의 화려한 차림새에 자주 시선을 주었고 플로어에서 춤을 추는 군상들을 보다가 의자에 몸이 걸려 넘어질 뻔도 했다.
“가끔 옵니다. 스트레스를 풀기에 적당한 곳이어서.”
“이런 곳은 처음이에요.”
“그렇게 보이는군요.”
그러고는 조철봉이 정색하고 미주를 보았다.
“느낌이 어떻습니까? 말로만 듣던 카바레에 온 소감이 말입니다.”
“요란해요.”
“이곳도 선입견이 있으셨을텐데.”
“난잡하고 지저분한 곳인 줄로 생각했는데 화려하고 깨끗하네요.”
미주의 표정이 밝아져 있었으므로 조철봉의 얼굴에도 다시 웃음이 떠올랐다. 그때 200번이 보조와 함께 술과 안주를 들고 들어왔다. 200번은 둘의 대화를 방해하지 않으려고 머리도 들지 않았다.
200번이 보조와 함께 방을 나갔을때 조철봉은 미주에게 술잔을 내밀었다. 지금까지 미주는 일식당에서 청주 한잔을 마셨을 뿐이다.
“자, 한잔 하시고 같이 플로어에 나가시지요.”
“전 춤을 못추는데.”
잔은 받았지만 미주가 당황한 표정으로 조철봉을 보았다.
“한번도 저런 곳에 나간 적이 없어요.”
저런 곳이란 플로어를 말하는 것이다. 조철봉이 머리를 끄덕였다.
“춤을 못춰도 됩니다. 내가 리드하면 되니까, 그저 나한테 맡기시고 마음 편하게 즐기세요.”
“그래도.”
“어두워서 누가 보지도 않습니다.”
위스키를 한모금 삼킨 조철봉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나가시죠.”
그러자 미주가 일어섰으므로 조철봉의 가슴이 뛰었다. 계산은 하지 않았지만 이 단계까지 진입했다는 것은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봐도 거의 성사가 된 것이나 같다. 플로어에 나갔을 때 조철봉은 미주의 손을 자연스럽게 잡았으며 다른 팔로는 허리를 감아 안았다. 블루스 음악이 잔잔하게 흐르기 시작해서 플로어에는 북적대던 군상이 반쯤 빠져나가 있었다.
“자, 이쪽으로.”
조철봉이 허리를 당겨 안으면서 안쪽으로 이끌자 미주는 부드럽게 이끌려왔다. 발놀림이 가벼웠으며 기본 스텝을 익힌 자세여서 호흡이 맞았다.
“잘 추시는데 뭘.”
미주의 귀에 입술을 붙인 조철봉이 낮게 말했다. 그들은 이제 안쪽의 기둥근처에 서 있었는데 이곳은 시각의 사각지대로 조철봉이 즐겨찾는 장소였다.
조철봉은 하반신을 조금씩 흔들면서 미주의 몸과 접촉하기 시작했다. 춤이 밝고 건전한 사교의 수단으로 장려되고 있지만 조철봉에게는 그야말로 전희의 과정일 뿐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한번도 실패해본 적이 없는 확실한 방법이었다. 조철봉의 철봉은 이미 힘차게 곤두서 있어서 하체를 조금만 움직여도 미주의 하반신을 들쑤셨다. 아무리 둔감하여 경험이 일천한 미주라고 하더라도 이곳저곳을 쿡쿡 쑤셔대는 그 물체가 무엇인지 모를 리가 있겠는가?
음악은 잔잔하게 심금을 울렸으며 서로 포옹한 채 리듬에 따라 흔들리는 둘의 몸은 마치 딴 세상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것은 물론 조철봉만의 주관적 견해이다. 거기에다 기둥 옆의 어두운 공간은 마치 둘만의 은밀한 공간에 있는 것처럼 여자의 간덩이를 키워주는 효과를 냈던 것이다. 조철봉은 미주의 허리를 감아안은 채 좌우로 하반신을 비틀었다.
그것은 철봉이 미주의 하반신을 다각도로 찌르는 효과를 냈는데 상반신은 균형을 잡은 채로 흔들리지 않았다. 이것은 미주를 안심시키는 효과를 내는 것이다. 음악이 끝나고 다시 한곡이 시작되었을 때 조철봉은 미주의 분위기가 조금 달라져 있다는 것을 알았다. 첫째로 귀에 닿는 숨결이 더워진데다 가빠져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두번째로 미주의 스텝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철봉은 이제 규칙적으로 미주의 허벅지 좌우를 번갈아 찌르고 있었는데 세번에 한번꼴로 미주의 골짜기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물론 의도적이다. 그때 미주가 흠칫하면서 엉덩이를 뒤로 뺐는데 횟수가 거듭되자 빼는 정도가 약해졌다. 그러더니 이제 골짜기가 철봉을 당당하게 받아 부딪치고 있는 것이다. 조철봉은 앞쪽의 어둠을 향해 회심의 웃음을 띠어 보였다.
조철봉은 미주의 허리를 조금 더 강하게 당겨 안았다. 그러자 당연히 철봉이 닿는 강도도 강해졌다.
“춤을 잘 추시는데.”
미주의 귀에 대고 더운 입김을 불어 넣으며 말한 것은 분위기를 더 띄우려는 수작이다. 미주는 겨우 발을 떼는 수준이었지 결코 잘 추는 여자가 아니었다.
그때 음악이 끝나가고 있는 것을 깨달은 조철봉이 낮게 속삭였다.
“우리 그만 나갑시다.”
그러고는 미주가 미처 뭐라고 하기도 전에 하반신을 떼고는 팔을 끌고 플로어 밖으로 나왔다. 미주에게 아쉬움을 남기려는 작전이었다. 이층 방으로 돌아온 그들은 다시 술잔을 들었는데 아까보다는 분위기가 더 부드러웠다. 미주도 조철봉이 권하는 위스키를 한모금에 삼켰지만 방으로 돌아온 후에 조철봉과 정면으로 시선을 마주치지 않았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맞혀보세요.”
미주가 그렇게 물었을 때 조철봉은 마악 술을 삼킨 참이었다. 아직도 미주는 테이블에 시선을 준 채로 머리를 들지 않았는데 눈 밑이 붉었다. 술기운 때문만은 아닐 것이었다.
조철봉은 빙긋 웃었다.
“표정을 보니까 나쁜 생각은 아닌 것같고, 혹시.”
상반신을 미주쪽으로 굽힌 조철봉의 목소리가 은근해졌다.
“인생이 아름답다는 생각이 드신 것 아닙니까?”
물론 억지 소리였지만 그때 미주가 머리를 들고 조철봉을 보았다.
“비슷해요. 인간이 참 단순한 개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요?”
“나도 어쩔 수 없는 암컷이고.”
“아니, 무슨 말씀을.”
“이런 분위기에서는 그 누구도 당해내기 힘들 것이라는 생각도 들더군요.”
미주가 입술끝을 구부리며 희미하게 웃었다.
“어쨌든 그 순간은 자극적이었어요. 모든 것을 잊어버릴 정도로.”
당연한 일이다. 만일 미주가 자극을 받지 않았다면 사람이 아니다. 철봉이 쿡쿡 찔렀을 때 싫고 역겨우면 귀쌈을 갈기고 떠나든지 아니면 즐기든지 두가지 방법밖에 없는 것이고 미주는 후자를 택했다. 조철봉은 미주의 웃음을 맞받아 비슷한 모양으로 웃었다. 미주의 갈등은 이해할 수 있었지만 드문 일은 아니었다. 그리고 이 과정만 벗어나면 다 똑같이 된다. 오히려 더 날뛰는 여자도 있다.
“노래나 한곡 부를까요? 아니면 음악을 틀 수도 있습니다.”
자리에서 일어선 조철봉이 앞쪽에 세워진 노래방 기계로 다가가며 말했다. 룸마다 노래방 기계가 배치되어 있는 것이다. 미주가 잠자코 있었으므로 조철봉은 블루스 음악을 틀었고 벽에 붙여진 방안의 조명등을 조절해서 약간 어둡게 했다. 그러자 방안 분위기가 달라졌다.
“자, 한곡 추십시다. 플로어에서보다 분위기가 조금 달라질테니까요.”
조금만 달라진 것이 아니다. 이곳은 이제 침실 분위기가 된 것이다. 플로어에서 전희를 했다면 이곳에서는 메인 게임이 벌어져야 조철봉의 순서에 맞는다. 미주가 잠자코 조철봉이 내민 손을 잡더니 앞쪽 공간으로 끌려 나왔다. 조철봉은 소리죽여 숨을 뱉었다. 이제 성공 확률은 99% 정도가 될 것이다. 온갖 것으로 무장된 여자라도 이런 분위기에서는 다 잊는다. 미주 말대로 단순한 개체가 되어 말초신경의 자극에 흥분하고 간절하게 다음 순서를 기다리게 되는 것이다. 조철봉은 미주의 허리를 당겨 안았다.
그때 미주가 물었다.
“누가 들어오면 어떻게 해요?”
“걱정 놓으시지요.”
느긋하게 말한 조철봉이 미주에게 하반신을 바짝 붙였다. 이미 철봉은 다시 환호하며 서 있었으므로 미주는 움칠했다. 철봉이 강하게 골짜기를 찔렀기 때문이다. 조철봉은 플로어에서보다 더 거칠게 미주를 이끌었다. 하체를 더욱 밀착시켰으며 좌우 이동의 폭을 크게 했으므로 미주가 더 강한 자극을 받는 것은 당연했다.
“아아, 가만.”
미주를 안고 옆으로 크게 돌았을 때였다. 낮은 신음같은 목소리가 울린 것은. 미주가 상기된 얼굴로 속삭이듯 말했다.
“안되겠어요. 하반신에 힘이 풀려서.”
“나한테 매달리면 됩니다.”
조철봉이 자신있게 말하고는 다시 미주의 몸을 반대쪽으로 틀었다.
“아아.”
이제는 미주의 입에서 노골적인 탄성이 흘러나왔다. 조철봉의 철봉이 미주의 골짜기를 정통으로 찌르고 비껴갔기 때문이다. 물론 스커트와 팬티로 보호되어 있지만 골짜기는 충격을 받아 자극되어 있을 것이었다. 조철봉이 미주의 귀에 입술을 붙였다.
“상상해봐, 내 철봉이 그곳으로 들어가는 장면을 말이야.”
더운 숨과 함께 귀에 대고 속삭인 조철봉이 다시 몸을 틀었다. 그러자 철봉이 이번에는 샘을 문지르고 비껴났다.
“아이그.”
미주가 온몸을 오그리는것 같더니 두팔로 조철봉의 목을 감아 안았다.
“나, 쓰러질것 같아.”
이제 미주도 말을 놓았다. 붉게 상기된 얼굴은 조철봉의 가슴에 딱 붙여져 있었지만 위쪽을 바라보는 두눈의 초점은 잡혀있지 않았다.
“아이야, 미치겠어.”
조철봉이 하체를 다시 흔들었을 때 미주의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그리고는 하반신을 제쪽에서 딱 붙이더니 두서없이 비벼대었다.
“으응, 으응, 으응.”
이 소리는 뭔가 보채는 의미가 내포되었다. 끝 부분이 조금 올라가 있어서 반복되자 떼를 쓰는 것 같은 분위기가 되었다. 빨리 해달라는 표시였다.
“응? 뭘?”
조철봉이 선채로 하체를 계속 비비면서 물었다. 물론 시치미를 뗀 수작이다. 그때 미주가 이제는 상반신까지 딱 붙이더니 말했다.
“나, 젖었어. 해줘.”
“여기서?”
응. 아무도 오지 않는다면서?”
“아니. 그래도.”
하면서 조철봉이 손 하나를 내려 미주의 스커트를 치켜 올렸다. 그 손이 팬티 속으로 들어갔을 때 미주는 하체를 떼더니 두다리를 조금 벌려주었다. 손이 들어갈 수 있도록 공간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미주의 골짜기로 들어간 조철봉의 손은 금방 흠뻑 젖었다. 팬티에서부터 젖어 있었고 샘 주위는 홍수가 난듯이 물이 흥건했던 것이다. 조철봉은 거침없이 손을 샘 안에 넣었다가 빼었다. 이것은 애무의 동작이 아니었다. 샘이 젖은 것을 확인하려는 것이다.
“응, 젖었구나. 엄청난데.”
손을 빼낸 조철봉이 놀란듯 말했을 때 미주가 다시 온몸을 붙여왔다.
“어서, 응?”
“가만, 그럼 먼저 팬티부터 벗어.”
조철봉이 못이긴 척 말했다.
“그래야 뭘 할것 아냐?”
노래방 기기에서 어느새 노래가 끊겨있었지만 아무도 그것을 의식하지 못했다. 미주가 선 채로 팬티를 벗는 동안 조철봉은 허리를 껴안은 채 기다렸다. 밖의 소음이 희미하게 들려왔지만 방안의 분위기는 뜨겁고 긴박했다. 미주의 거친 숨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다리 한쪽을 들어 팬티를 벗어낸 미주가 힐끗 조철봉을 보았다. 번들거리는 눈동자가 야릇한 광채를 띠었고 상기된 얼굴은 전혀 차가운 분위기의 여자가 아니었다.
“어떻게 해?”
다음 순서를 묻는 것이다. 그러자 조철봉이 미주의 손을 잡아 자신의 바지에 붙였다. 바로 철봉 윗부분이다.
“내 철봉을 꺼내.”
“여기서?”
미주가 건성으로 묻더니 곧 서둘러 바지 지퍼를 내리고는 팬티 안의 철봉을 쥐려고 했지만 단추에 걸렸다. 그래서 바지 혁대를 풀고 나서야 손에 철봉을 쥘 수 있었다. 그동안 조철봉은 느긋하게 기다렸지만 미주는 조바심을 쳤다.
“어떻게 해?”
미주가 다음 순서를 재촉하듯이 물었을 때 둘은 방 가운데 서 있었는데 가관이었다. 조철봉의 바지는 무릎까지 흘러내렸다가 다리를 벌리자 더이상 떨어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미주가 마치 애를 받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두손으로 철봉을 쥔 채로 엉거주춤 서있는 것이다. 더구나 어쩔 줄 모르는 미주의 표정이 장면을 더욱 가관으로 만들었다. 그때 조철봉이 미주의 어깨를 의자 쪽으로 밀며 말했다.
“저기 의자 위에서.”
“의자 위에서?”
들뜬 목소리로 되물은 미주가 의자쪽으로 밀렸지만 쥐고 있는 철봉은 놓지 않았다. 의자로 다가간 조철봉은 몸을 돌려 먼저 의자에 앉았다. 바로 며칠전에도 이런 자세로 박경선을 죽여주었던 것이다. 그순간 스커트를 들춰올렸을 때 미주의 하체가 그때서야 눈부시게 드러났으므로 조철봉은 저도 모르게 신음했다. 미주의 하체는 건강했다. 적당하게 살집이 붙어 있는데다 짙은 숲 사이의 붉은색 계곡은 불빛을 받아 번들거리며 윤기를 내었다. 가득 습기를 품고 있는 것이다.
“으으음, 아름답다.”
조철봉의 감탄은 인사치레가 아니었다. 진심에서 우러나온 탄성이었다.
“아이, 그만 봐.”
차가운 여자 미주가 허리를 비틀면서 두 다리를 붙였지만 조철봉의 눈길을 털어내려 스커트를 내리지는 않았다. 그때 조철봉이 미주의 허리를 잡아 뒤쪽으로 조금 밀며 말했다.
“내 철봉을 봐.”
그러자 미주가 뒤로 밀려난 공간 사이로 솟아오른 조철봉의 검은 철봉을 보았다. 송이버섯 같기도 했고 죽순 같기도 한 철봉이 건들거리고 있었으므로 미주는 숨을 죽이고 그것을 보았다. 두눈에 광채가 났고 반쯤 벌어졌던 입이 닫히더니 침 넘어가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전희 과정에서 만지는 것 이상으로 시각적 효과도 큰 것이다. 잘만 이용하면 젖꼭지를 백번 주무르는 것보다 이렇게 한번 보여주는 효과가 더 클 때도 있다.
“아아, 미치겠다.”
미주가 혀로 마른 입술을 훑고나서 갈라진 목소리를 냈다.
“나 어떡해?”
그러면서도 시선은 철봉에서 떼지 않았다. 그때 조철봉이 미주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내 무릎 위로 올라와.”
그러자 미주가 기다렸다는 듯이 신발을 신은 채로 의자위로 올라와 조철봉의 무릎에 앉았다.
“이제 어떻게 해?”
무릎에 앉은 미주는 이미 스커트를 젖히고 있어서 맨살이 조철봉의 몸에 닿았다. 눈앞에서 건들거리는 철봉을 보면서 그렇게 물은 것은 미주도 전희를 즐기고 있다고 봐도 될 것이다. 조철봉은 미주의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바로 눈앞에 펼쳐진 블라우스의 단추를 차근차근 풀었다. 푸는 속도가 느렸는지 미주가 제 손으로 아래쪽 단추 두개를 풀어젖혔을 때 블라우스로만 가려진 상반신이 드러났다. 조철봉이 손을 뻗어 뒤쪽의 호크를 풀자 곧 알맞게 솟아오른 유방이 드러났다.
“아아이.”
미주가 하체를 들썩이더니 참지 못하겠다는 듯이 두손으로 철봉을 쥐었다. 그러고는 하체를 반짝 치켜들었는데 철봉을 곧장 넣을 태세였다.
“서둘지마.”
마치 끓는 솥위에 뚜껑을 덮듯이 한쪽 손바닥으로 미주의 샘을 덮은 조철봉이 느긋하게 말했다. 그러고는 눈앞에서 출렁거리는 미주의 한쪽 젖을 입안에 넣었다. 그리고 혀로 젖꼭지를 굴렸다. 젖꼭지에서는 약한 신맛이 느껴졌다. 땀맛일 것이다.
“아유.”
미주가 상반신을 비틀면서 신음하더니 하체를 마구 비벼댔다. 그러나 손바닥 위에 비벼댄 꼴이 되었고 금방 손바닥이 흥건해졌다.
“나 죽겠어, 자기야.”
차가운 여자 미주가 마침내 조철봉을 자기야라고 불렀다. 그것도 아직 시작도 안한 상황에서 그런 것이다. 조철봉은 미주가 절정에 오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오로지 샘을 덮은 손바닥의 마찰만으로 달아오르고 있다는 것이다.
“아유, 나죽어.”
두손으로 조철봉의 목을 조이듯 감아안은 미주가 비명같은 신음을 뱉었을 때가 절정이었다. 아직 미주의 샘 안 상황도 알 수 없었지만 솥뚜껑 역할을 한 손바닥이 샘 바깥 상황을 감촉으로 느끼게 만든 것이다. 샘물은 넘쳐나고 있었으므로 조철봉은 손바닥을 기울여 아래쪽으로 흘려 내보내야만 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이제는 끙끙대며 앓는 소리를 내던 미주는 늘어져 버렸다. 두손으로 조철봉의 목을 감은 채 몸무게가 갑자기 늘어난 것처럼 느껴졌다.
“이봐, 허리를 펴.”
조철봉이 미주의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그러고는 솥뚜껑 역할을 하던 손가락 하나를 구부려 미주의 두레박을 처음으로 건드렸다.
“아야.”
늘어져 있던 미주가 번쩍 머리를 들고는 두다리를 와락 좁혀왔다. 그러더니 손가락을 깊게 받아들이려는 듯이 상반신을 굽혔다. 미주의 몸이 갑작스럽게 다시 깨어난 것이다. 조철봉은 손가락을 빼고는 철봉을 내밀었다.
“이리 와.”
조철봉이 낮게 말하자 눈을 크게 뜬 미주가 무릎으로 일어서더니 바짝 다가앉았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샘을 철봉 끝에 댔는데 무섭게 긴장한 모습이었다. 조철봉은 철봉 끝을 미주의 골짜기 주위로 천천히 문지르기 시작했다. 아주 여유있는 움직임이었지만 미주의 몸은 떨리기 시작했다.
“아아, 미치겠어.”
미주가 하체를 흔들면서 소리쳤다. 조철봉의 허벅지 위에 엉거주춤 무릎으로 서 있는 자세로 철봉의 움직임에 맞춰 하체가 흔들리고 있었다. 두팔로 조철봉의 어깨를 짚은 미주가 와락 소리쳤다.
“어서 넣어줘?”
전 지구상에서 인간만큼 전희를 중요시하고 또한 즐기는 생명체는 없다. 조개나 낙지가 인간이 탐색하지 못하는 방법으로 전희를 하는지 알 수 없기는 하다. 그러나 만물의 영장이라 스스로 칭해온 인간 만큼 사고(思考)하며 체계적으로 인내하면서 전희를 하지는 않을 것이다.
전희는 곧 자신보다 상대방을 위한 배려가 근본이다. 특히 인간의 수컷 입장에서 볼작시면 대포를 조준하여 발사하는 것으로 끝나는 그야말로 단순한 체제의 기능을 연장시키려는 작업이 바로 전희인 것이다. 따라서 그것을 즐긴다는 표현은 어지간한 전문가 경지가 돼야만 감히 사용할 수가 있을 터였고 바로 조철봉이 그러했다. 피눈물나는 연습과 고행에 가까운 수련의 세월이 따라야 이룰 수 있는 경지다.
그래서 조철봉의 철봉이 미주의 샘과 골짜기 근처를 조랑말이 경주장을 돌아다니 듯이 빙빙 맴돌기만 했을 때 미주가 아우성을 치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조철봉이 그 상황을 즐기고만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이미 핏발까지 일어선 철봉은 샘안으로 들어가고 싶어서 터질 듯이 팽창한 상태였으나 조철봉이 기를 쓰며 억누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신은 고통을 받지만 상대방이 만족감으로 반쯤 미쳐가는 것을 보면서 얻어내는 즐거움, 그것이야 말로 만물의 영장다운 태도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아이고, 엄마.”
아직 철봉은 진입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조철봉이 마지막 순간에 옆으로 미끄러뜨렸기 때문인데 그때 미주가 벽력같은 실망의 외침을 뱉은 것이다.
“나 죽는단 말야”
이미 조철봉의 허벅지 위는 물벼락을 맞은 듯이 질펀했다. 미주가 엉덩이를 들었다 놓았다 하는 바람에 빗길을 장화 신고 걷는 소리가 자주 났다.
“얼른”
미주가 아우성을 치더니 곧 훌쩍였다.
“제발, 자기야.”
조철봉은 심호흡을 했다. 때가 된 것이다. 이만하면 전희는 최대치가 되었다. 미주의 허리를 두손으로 감싸쥔 조철봉이 상체를 세웠을 때 방안이 갑자기 긴장감에 휩싸였다. 철봉이 진입하려는 것이다. 미주는 숨소리가 거칠었지만 일순 행동이 이초쯤 정지되면서 몸이 굳어졌다. 그때 철봉이 천천히 샘 안으로 진입했다.
“아유우.”
미주가 그렇게 탄성을 뱉었다. 이미 방안으로 누가 들어오고 자시고는 상관하지 않게 되었으므로 거침없는 부르짖음이었다.
“아아아악.”
철봉이 다 진입했을 때 미주가 조철봉의 몸에 빈틈없이 붙으며 비명같은 외침을 뱉었다. 두눈은 부릅떠져 있었고 입가에서 침이 흘러나왔다. 조철봉은 미주의 몸을 조절하기 시작했다. 미주가 정신없이 상체를 움직였기 때문이다. 천천히 들었다가 놓으면서 미주의 절정감을 배가시킨 것이다. 이제 미주는 입만 딱 벌린 채 신음도 뱉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조철봉이 허리를 움직이는 대로 열심히 따르면서 끊임없이 앓는 소리만 냈다. 미주의 샘에서는 수만개의 세포가 환호하며 엉켰고 그것이 철봉에 그대로 전달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미주가 폭발했다. 마치 단말마의 신음처럼 숨이 탁탁 막히는 것 같은 외마디 소리가 터져나오더니 미주는 울었다. 그리고 철봉을 감싸안은 샘 주변의 세포가 일제히 굳어졌다. 그순간 조철봉도 신음했다. 자신도 억제하지 못하고 대포가 발사되었기 때문이다. 이 순간의 만족감을 그 무엇과 비교할 것인가? 바로 극락이다.
최갑중이 사무실로 찾아왔을때는 다음날 오후였다. 갑중은 결산관계로 양미주가 운영하는 여행사에 다녀온 길이었는데 안색이 좋지 않았다.
“별일 다 봤습니다.”
털썩 소파에 앉은 갑중이 투덜거렸다.
“양미주 말입니다, 어떻게 며칠 사이에 사람이 그렇게 달라질 수가 있지요?”
“무슨 일인데 그래?”
이맛살을 찌푸린 조철봉이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었다. 미주와는 어젯밤에 나이트에서 진한 정사를 나눈 후에 밤 12시가 넘어서야 헤어졌다. 탈진하여 온몸이 늘어진 미주를 집 앞에까지 데려다주고 서경윤에게 돌아갔을 때는 새벽 1시 반이었다.
“나아, 참.”
입맛을 다신 갑중이 정색하고 조철봉을 보았다.
“얼굴에서 빛이 납디다.”
“새로 개발된 로션을 발랐나보다.”
“마구 웃어요.”
“네가 유머가 많은 놈이지.”
“형님.”
갑중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제가 농담하는거 아닙니다.”
“나두 그렇다.”
“형님이 양미주 만나셨습니까?”
“내가 왜?”
시치미를 뗀 조철봉이 정색하고 갑중을 보았다. 물론 갑중의 청으로 미주에게 접근했지만 세상에서 제일 못난놈중의 하나가 여자 따먹었다고 자랑하는 놈이다. 그런놈의 대부분은 제 연장이나 테크닉 자랑을 일삼는데 열에 아홉은 거짓말이다. 실전에서 죽을 쒀놓고는 그에 대한 보상 내지는 반발 차원으로 과장해서 떠벌리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그러나 조철봉이 딴청을 부리는 이유는 조금 달랐다. 갑중의 자존심을 고려한 것이 첫째 이유였고 둘째는 미주와의 감미로운 추억을 혼자서만 간직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난 형님이 그 여자를 만나신줄 알았는데.”
갑중이 의심쩍은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
“그래서 손을 한번 대신줄로 알았단 말입니다.”
“손을 대다니? 그게 무슨 소리냐?”
“다 아시면서.”
“내가 요즘 바쁘다. 어젯밤에는 정부 관계자를 만났어. 개성공단 관계로.”
“그럼 그 여자를 그냥 놔 두시고 있다는 말씀입니까?”
“내가 꼭 손을 볼 이유가 없지.”
“그렇다면.”
다시 이맛살을 찌푸린 갑중이 머리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도대체 무슨일로 그 여자가 그렇게 변했을까? 이거 미치겠군.”
“이 자식아. 일이나 해.”
정색한 조철봉의 시선을 받은 갑중이 어깨를 늘어뜨리면서 일어섰다.
“그래야지요.”
“내일쯤 해서 술이나 한잔 하자.”
“좋습니다.”
“양미주한테는 더이상 신경쓰지마. 얼굴이 환해졌건 검어졌건 내버려두란 말이다. 자꾸 찔벅거리면 네 체면만 깎이게 된다.
“이제 찾아가지 않을랍니다.”
“그래, 잘 생각했다.”
조철봉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리고, 너, 차가운 여자라고 괜히 신경을 더 쓸 필요가 없어 다 똑같은 여자란 말이야.”
모니터로 시선을 옮긴 조철봉이 말을 이었다.
“양미주는 차가운 여자가 아닐지도 몰라. 우리들의 선입견으로 여자가 차갑거나 뜨겁게 보이는거야. 선입견을 버려야돼.”
그러나 남녀관계는 불가항력적 측면이 있다. 오왕 부차가 월왕 구천이 보낸 서시에게 빠져들었을 때 그것이 피땀흘려 일으킨 대업의 몰락을 가져올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서시의 찡그린 얼굴이 환해지는 것을 보려고 노력하면서 부차는 행복했을 것이다. 그것이 남녀 관계이다.
조철봉에게 대답은 막둥이처럼 하고 나왔지만 최갑중의 머릿속에는 양미주의 웃음띤 얼굴이 지워지지 않았다. 혹시 갑중의 전생이 오왕 부차이며 양미주가 서시인지도 모른다. 우선 회사 밖으로 나온 갑중은 제 차안에 들어와 앉고 나서야 조금 걱정이 되었다. 그러고서 심호흡을 대여섯번 했을때 슬슬 가슴이 희망으로 부풀었다.
그것은 조철봉이 미주에게 손을 대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냈기 때문이다. 사람은 대개 제 자신의 기분으로 상대방을 판단한다. 만일 갑중이 조철봉의 입장이 되었을때 미주를 먹었(?)다면 그 즉시로 갑중에게 알려줄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갑중은 조철봉의 말을 믿었다. 가슴이 조금 더 가라앉자 갑중은 핸드폰을 꺼내 다이얼을 눌렀다.
“여보세요.”
미주의 목소리가 수화구에서 흘러 나왔을 때 갑중은 침을 삼켰다.
“나, 최갑중입니다.”
“어머, 최사장님.”
아까도 그랬지만 미주의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배어 있었다.
“또 웬일이세요?”
또라는 말이 거슬렸지만 갑중은 긴장한 채 말했다.
“양사장님, 오늘 저녁에 좀 뵙시다.”
“무슨 일인데요?”
“그냥 식사라도 같이 하자는 말입니다.”
“어쩌나, 저녁에 약속이 있는데.”
미주가 안타깝다는 듯이 말끝을 흐렸다.
“어떡하죠?”
“그쪽 약속을 연기하면 안됩니까? 내가 드릴 말씀이 있는데.”
갑중의 표정은 필사적이 되었다. 밖의 사무실이거나 넓은 공간에서라면 이렇게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갇혀 있는 것 같은 차 안의 분위기가 그를 저돌적으로 만들었다.
“중요한 일입니다. 양사장님.”
“사업 관계인가요?”
마침내 한풀 꺾인 미주가 그렇게 물었을 때 갑중은 전화기를 움켜쥔 채 머리를 끄덕였다.
“예, 사업문제로.”
미주는 조철봉이 경영하는 오성그룹의 여행 대행업무를 맡고있는 것이다. 오성그룹의 제2인자인 갑중이 사업 문제를 이야기하자는데 거절한다는 것은 간이 배밖으로 나온 사람이나 할 짓이다.
“예, 알겠습니다. 그럼 제 약속을 다음으로 미루지요.”
고분고분 미주가 대답했을 때 갑중은 소리죽여 숨을 뱉었다.
“그럼 저녁 8시에 밀튼호텔 2층 일식당에서 뵙죠.”
갑중의 목소리가 여유를 찾아 차분하게 이어졌다.
“제가 방은 예약 해놓겠습니다.”
통화를 끝낸 갑중은 다시 심호흡을 했다. 이것으로 절반은 성공이다. 물론 이 비율은 조철봉의 기준이다. 조철봉도 여자와 일식당의 방에 둘이서 마주보고 앉게 된다면 50%는 성공한 것이라고 했던 것이다. 눈을 크게 뜨고 앞쪽을 노려보다 갑중은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오늘은 철저히 조철봉 식으로 밀고 나갈 것이었다. 10여년을 함께 지낸터라 조철봉이 어떤 수작을 부릴지는 그 표정까지도 두루 꿰고 있는 자신이다. 갑중은 저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그놈 끈질기군.”
전화기를 귀에 붙인 조철봉이 쓴웃음을 지었지만 양미주는 모를 것이다. 조철봉이 말을 이었다.
“어쩔수 없지, 약속을 했다면 만나야 하지 않겠어?”
“나 어떡하면 좋아.”
어리광 부리듯이 미주의 목소리에 비음이 섞여 있었다.
“회사일이라고 해서 거절도 못했어.”
최갑중과 통화를 끝낸 미주가 바로 조철봉에게 전화를 해온 것이다. 그때 조철봉이 차분하게 말했다.
“잘 들어,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오늘 저녁 부드럽게 끝낼 테니까.”
“어떻게?”
미주의 콧소리가 계속되었다. 겉으로는 짜증을 내는 척하지만 속으로는 약간 즐기고 있다는 증거도 될 것이다.”
“잘 들어.”
조철봉이 정색하고 말을 이었다.
“그놈이 일식당에서부터 치근거릴 거야, 아마 술을 권하겠지.”
“그럼 어떻게 해?”
“못 이기는 척 받아줘.”
“어머머.”
놀랍고 기가 막힌 듯이 미주가 외마디를 뱉더니 목소리를 높였다.
“날 뭘로 보고? 내가 몸 파는 여자야? 난 못해.”
“이봐, 내말 끝까지 들어.”
“못 이기는 척 받아주라며?”
“누가 몸을 주라고 했나? 치근거리는 수작을 받아주는 시늉을 하란 말이야.”
혀를 찬 조철봉이 말을 이었다.
“분위기를 달아오르게 만들어, 술을 권하면 마시고 그놈한테도 따라줘서 마시게 해.”
“난 술이 약해.”
“몇잔만 마시면 돼.”
“그러고나서 어떻게 해?”
이제 미주는 조금 고분고분해졌지만 아직 목소리에 불안한 기색이 지워지지 않았다. 조철봉이 차분하게 말했다.
“그때 기회를 봐서 그놈 술잔에 약을 넣어. 한알만 넣으면 3초면 녹으니까 아주 쉽다고.”
“무, 무슨 약인데?”
“수면제.”
“난 약이 없어. 그리고 어떻게 구해?”
“내가 지금 퀵서비스로 보낼 테니까, 30분이면 받게 될 거야.”
“나, 싫어.”
“그 방법이 가장 간단해.”
“수면제 먹으면 바로 자게 되는 거야?”
“그렇지, 온몸이 나른해지면서 기분좋게 잠이 들지, 눈치도 채지 못해.”
“그 방법밖에 없을까?”
“가장 간단한 방법이야, 뒤탈도 없고.”
미주가 잠자코 있었으므로 조철봉이 말을 맺었다.
“그럼 지금 내가 보낼 테니까. 슬쩍 술잔에 한알만 넣으라고, 알았지?”
“오늘밤 뭐해?”
“그놈이 일식집에서 누워 자면 나한테 연락해.”
“기다리고 있을 거지?”
“그렇다니까.”
“그럼 됐어.”
미주의 목소리가 활기를 띠었다.
“밀튼호텔 근처에서 기다려, 자기야.”
그러고는 통화가 끊겼으므로 조철봉은 입맛을 다셨다. 갑중의 끈기는 대단했다.
집념이라고 표현해도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랑이 아니다. 승부일 뿐이었다. 서로 상대방의 의중을 탐색하고 뒷다리를 걸려는 음모가 횡행한다. 한동안 눈만 껌벅이고 앉아있던 조철봉은 문득 잊고 있었다는 듯이 전화기를 들고 다이얼을 눌렀다.
양미주가 방으로 들어서자 최갑중은 활짝 웃었다. 어린애의 웃음처럼 밝고 천진한 모습이었으므로 미주의 가슴이 조금 불편해졌다.
“어서 오십시오.”
자리에서 일어선 갑중에게서 은근한 향수 냄새가 맡아진 순간 미주의 마음은 또 변했다. 어서 재우고 떠나는 것이 속이 편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미 식탁에는 밑반찬이 가득 놓여졌고 메뉴판을 보며 건성으로 뒤적거리던 갑중이 결국 회와 술을 시켰다. 이곳은 회 한접시에 수십만원이다. 종업원이 방을 나갔을 때 갑중이 은근하게 웃었다.
“마침내 이렇게 둘이 있게 되었군요.”
미주가 마지못해 머리를 끄덕였으나 속이 느글거렸다. 갑중은 나름대로 세련되었지만 안정감이 부족했다. 따라서 상대하는 입장도 불안해지는 것이다. 너무 느긋하면 그것도 느끼하지만 적당히 편안하고 알맞게 긴장된 분위기가 필요한 것이다. 요리가 놓여질 때까지 갑중은 이야기를 늘어 놓았는데 재미는 있었다. 몸짓이나 표정이 눈에 익어서 머리를 갸웃거렸던 미주는 한참만에야 그 이유를 깨닫고 어깨를 늘어뜨렸다. 갑중의 분위기는 조철봉을 닮아 있었던 것이다.
갑중은 제가 한잔 마시면 미주에게 잔을 권했다. 술은 위스키를 시켰으니 취하기로 작정을 한것 같았다.
“조사장님은 내 사부지요.”
눈밑이 붉어진 갑중이 다시 술잔을 들면서 말했다.
“나는 그 양반한테서 모든 것을 배웠습니다. 그 양반은 내 인생의 교과서 역할을 해왔지요.”
그러고는 갑중이 한모금에 위스키를 털어넣더니 미주에게 잔을 내밀었다.
“자, 양사장도 한잔.”
“아이, 저는 벌써 취했어요.”
했지만 미주는 잔을 받았다. 갑중이 잔에 위스키를 채우면서 정색하고 말했다.
“내가 이렇게 거래선의 여자분하고 만난 것은 처음입니다.”
물론 거짓말이다. 갑중은 거래선은 물론이고 회사 안에서도 반반한 여자를 보면 어김없이 치근거렸다. 미주의 시선을 받은 갑중이 말을 이었다.
“솔직히 양사장만큼 내 가슴에 감동을 준 여자는 내 인생에서 처음입니다.”
이것도 거짓말이었는데 대사 내용은 조철봉이 예전에 사용했던 것이었다. 그때 미주가 갑중의 잔에 술을 따르며 말했다.
“제 인상이 차갑죠?”
물론이지요 하고 말할 뻔했다. 갑중이 침을 삼키고는 한호흡 진정했다. 그러고는 천천히 머리를 저었다.
“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다르겠지만 굉장히 이지적으로 보이십니다. 차가운 분위기는 아녜요.”
“어머, 그래요?”
미주가 희미하게 웃었으므로 갑중의 가슴이 뛰었다. 차가운 표정에서 웃음기가 감도는 얼굴로 바뀔 때면 마치 동토에서 꽃이 솟아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한모금에 위스키를 삼킨 갑중이 빈 잔을 내려놓았을 때 미주는 방바닥에 내려놓았던 자신의 위스키 잔을 슬쩍 식탁위로 올려놓았다. 잔에는 이미 수면제가 녹아 있었으므로 이제 술만 채우면 되는 것이다.
“제가 한잔 드릴게요.”
수면제가 녹아있는 잔에 위스키를 채우면서 미주가 다시 웃음띤 얼굴로 갑중을 보았다.
“여기요.”
갑중은 미주가 건네준 잔을 받으며 이미 붉어진 눈으로 따라 웃었다.
“우리 오늘 실컷 취해 보십시다.”
갑중은 우리라는 단어를 강조했다.
한모금 위스키를 삼킨 최갑중이 문득 제 앞쪽에 술잔이 두개 놓여있는 것을 보더니 빈잔에 술을 채웠다. 그러고는 양미주에게 내밀었다.
“자, 양사장님도 한잔.”
서로 잔을 바꾼 셈이었다. 잔을 받은 미주가 한모금에 술잔을 비우자 갑중은 만족한 표정으로 웃었다.
“오늘은 술맛이 납니다. 술은 분위기로 마셔야 된다는 말이 과연 맞군요.”
그로부터 두시간쯤 후에 밀튼호텔 일식당에 119대원들이 들어섰다. 그들은 밀실에서 늘어진 두 남녀를 거침없이 들것에 싣더니 5분도 안되어서 호텔을 떠났다. 방으로 들어갔던 종업원이 두 남녀가 제각기 쓰러져 있는 것을 보고 지배인에게 보고를 했던 것이다. 지배인은 둘을 깨우려고 노력했지만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것을 알아차렸다.
이런때는 즉각 신고를 하는것이 뒤탈이 없다. 한바탕 소란했던 홀이 다시 평온해졌을때 지배인이 양복 소매를 터는 시늉을 하면서 주방장에게 말했다.
“이런 경우는 아주 드물지만 신기한 일은 아냐. 내가 부산 럭키호텔에서 근무할때도 비슷한 일이 있었지.”
주방장은 잠자코 초밥만 주물럭거리며 만들었고 지배인은 말을 이었다.
“그때는 여자가 나중에 뻗었어. 남자를 싣고간 후에 뻗어버렸는데 결국 작업은 실패했지. 여자 가방을 뒤져보니까 남자한테서 훔친 시계까지 다 나오더라구.”
“허어.”
그때서야 주방장이 머리를 들고 지배인을 보았다.
“그렇다면 이번 경우는 누가 늦게 뻗었을까? 동시에 그러지는 않았을거 아녀?”
“119에서 경찰에 연락을 한다고 했으니까 조사하면 나오겠지.”
“하긴 술잔까지 다 걷어 갔으니까 금방 알수가 있겠구만.”
“멀쩡하게 생긴 것들이 서로 껍질을 벗기려고 약을 먹인거야. 그러다 제가 먹을줄은 생각도 못했겠지.”
“그것참 생각할수록 웃음이 나오네.”
초밥을 다 만든 주방장이 누런 이를 드러내고 활짝 웃었다.
“둘이 같이 자빠져 버리다니 말이야.”
갑중도 미주의 잔에 약을 탄 것이다. 물론 갑중은 조철봉이 지도를 받지 않은 독자적인 행동이었다. 다음날 아침 회사에 출근한 조철봉에게 갑중은 물론이고 미주도 연락해오지 않았다.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하긴 했지만 조철봉은 그쪽에서 연락해오기까지 기다렸다. 갑중의 전화가 온 것은 오후 3시경이었다.
“형님.”
갑중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저, 지금 경찰서에서 나왔습니다.”
“뭐라구?”
놀란 조철봉이 눈을 크게 떴을때 갑중의 말이 이어졌다.
“그 시발년이 저한테 수면제를 먹였단 말입니다. 아주 독한 놈이어서 경찰은 한국에서는 구하기 어렵다는 겁니다.”
“….”
“한방에 나간 것이죠. 당했단 말입니다. 하지만.”
숨을 고른 갑중이 말을 이었다.
“저도 그 약을 준비해 갔거든요. 그년하고 서로 주고 받고 한 셈인데, 나아, 참.”
갑중이 입맛을 다셨다.
“그래서 둘이 거의 동시에 뻗어버려서 119로 실려갔단 말입니다. 오늘 아침에 깨어나서는 경찰 조사를 받구요.”
“저런.”
“내막을 말해 주었더니 경찰이 웃습디다. 쪽팔려서 혼났어요.”
그러고는 갑중이 길게 숨을 뱉었다.
“나는 왜 이렇게 일이 안풀리지요?”
“난 이런 일은 첨이야.”
오후 7시가 되었을 때 회사 근처로 찾아온 양미주가 하얗게 굳어진 얼굴로 말했다.
“조서를 받는데 세시간이나 걸렸어. 경찰들은 마치 내가 그 사람을 약 먹이고 도둑질을 하려다가 만 것처럼 몰아붙였어.”
“에이. 설마.”
쓴웃음을 지은 조철봉이 벽에 등을 붙였다. 그들은 한정식집의 방에 들어와 앉아있는 것이다. 조철봉이 웃음띤 얼굴로 미주를 보았다.
“최사장 말을 들었는데 그 약이 어디서 났느냐고 캐물었을 뿐이라던데 뭐. 내막을 알고나서 모두 웃었다면서?”
“아이 창피해.”
“넌 창피할 것 없지. 안주려고 약 먹인 것이니까. 그렇게 말했지?”
“응.”
“최사장이 쪽팔려서 혼났다고 하더라.”
“그 사람은 당해도 싸지.”
“그런데 그놈이 약까지 먹이려고 하다니 나도 예상하지 못했어.”
“나아 참.”
혀를 찼던 미주가 조철봉과 시선이 마주치더니 참지 못하고 풀썩 웃어버렸다.
“기가 막혀서.”
“신문에 날 일이야.”
정색한 조철봉이 미주를 보았다.
“두 남녀가 서로 약을 타 먹이고는 뻗었다고 말이야.”
“시끄러.”
“어쨌든 이것으로 일단락이 되어졌으면 좋겠군. 같이 경찰서까지 들어갔다가 나왔으니까 말이야.”
“최사장이 그럴 것 같아?”
“몰라, 아무리 우리 사이지만 배꼽 밑의 일은 서로 상관하지 않아서 말이야.”
“나한테 원한이 쌓였겠지?”
“그건 너도 할말이 있으니까 비긴거야.”
“아, 피곤해.”
식탁위의 음식은 거의 손도 대지않은 미주가 어깨를 올리더니 기지개를 켰다. 그러고는 조철봉을 흘겨보았다.
“나, 오늘밤 어디에 좀 데려가.”
“이
물론 처음 인상과 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여자도 조철봉은 자주 보았다. 그러나 양미주만큼 큰 변화를 일으키는 여자는 처음이었다. 미주는 색에 굶주린 여자처럼 덤벼드는 것이다. 최갑중의 표현대로라면 얼음같이 차가운 분위기의 미주였다. 조철봉이 처음 보았을 때도 찬바람이 씽씽 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도무지 따스한 구석은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다. 대번에 하반신은 알몸이 되었지만 일어나 조철봉에게 다가올 만큼 미주가 뻔뻔하지는 않았다.
“이리와.”
미주가 식탁 건너편의 조철봉을 불렀다. 얼굴은 이미 상기되었고 숨소리는 가빠져 있었다.
“이런 빌어먹을.”
입맛을 다신 조철봉이 자리에서 일어나 미주의 옆으로 옮겨 앉았다.
“사람 안들어 올까?”
조철봉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미 다 저질러놓고 걱정하는 체 하는 것일 뿐이지 사람이 떼거지로 들어온다고 해도 미주는 작업을 감행할 것이었다.
“그럼 간단하게 하자.”
바지 혁대를 풀면서 조철봉이 정색하고 말했다.
“너, 이렇게 맛 들이면 큰일나.”
“상관없어.”
조철봉을 도와 바지와 팬티를 내려주면서 미주가 건성으로 말했다.
“내가 올라갈게.”
하체가 알몸이 되었을 때 앉은 채인 조철봉의 무릎위로 오르면서 미주가 서둘렀다. 이제는 익숙해져 있는 것이다.
“그냥 할거야.”
달아 올랐으니 그냥 넣겠다는 말이었다. 미주는 지난번 오랜 동안 전희로 감질이 났던 기억이 있는 것이다. 물론 그래서 더 큰 폭풍을 맞게 되었지만 온몸이 오그라드는 것 같은 그 긴 시간을 생각하면 지금도 침이 마른다. 그래서 미주는 무릎위에 올라 주도권을 잡은 위치가 되었을 때 철봉을 움켜쥐더니 대뜸 샘속으로 넣어버렸다.
“아이고.”
저도 모르게 미주의 입에서 놀람과 경탄이 뒤섞인 외침이 터져 나왔다.
“으음.”
조철봉의 입에서도 신음이 뱉어졌다. 미주의 샘은 이미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지난번처럼 넘치지 않았다. 적당하게 습기가 배어 있을 뿐이었으므로 철봉은 샘 주위에 돋아난 신경 조직과 가장 강하게 밀착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아아, 좋아.”
엉덩이를 들었다 내리면서 미주가 탄성처럼 말했다.
“나 죽겠어.”
이제 미주는 방안으로 사람이 들어올 걱정 따위는 잊었다. 두팔로 조철봉의 목을 감싸안은 미주가 거칠게 엉덩이의 상하 운동을 시작했다.
“이봐, 리듬을 맞춰.”
조철봉이 주의를 주었지만 미주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어느덧 저혼자 걱정에 휩싸여버린 것이다. 미주의 동작은 거칠었고 리듬을 무시하긴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조철봉은 야릇한 쾌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유연하고 치밀한 테크닉보다 자극이 더 강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긴 했다. 기교를 부린다는 것은 곧 폭발 강도를 더 증가시킨다는 목적과 함께 행위 시간을 늘리려는 것이 아닌가? 따라서 지금처럼 강해질 수는 없는 것이다.
“아이고.”
머리를 잔뜩 뒤로 젖힌 미주가 목청껏 탄성을 뱉었을 때 조철봉은 정신이 들었다. 그리고 옆방이 조용해져 있다는 것을 그때서야 깨달았다.
봐, 난 처자식이 있는 몸이야. 함부로 나대면 안돼.”
“어젯밤 잘 쉬었지 않아?”
식탁 밑으로 다리를 뻗은 미주가 조철봉의 무릎을 건드렸다.
“침대에서, 부드러운 분위기에서 하고 싶어, 자기야.”
“이 차가운 여자가.”
다시 쓴웃음을 지은 조철봉이 어이 없다는 표정으로 미주를 보았다.
“어떻게 이렇게 변할 수가 있지?”
“다 당신이 만들어 놓은거야.”
미주가 발가락을 오므려 조철봉의 다리살을 꼬집었다.
“당신의 눈빛만 봐도 온몸이 비틀려진단 말이야.”
“뜨거운 여자가 되었어.”
“난 이미 젖었어.”
몸을 비튼 미주가 붉어진 얼굴로 조철봉을 보았다.
“갑자기 쏟아져. 난 몰라.”
“네가 모르면 내가 어떻게 알아?”
혀를 찬 조철봉이 식탁위에 놓인 휴지를 집어 내밀었다.
“닦아, 어서.”
“지금 여기서 안돼?”
흘끗 방문쪽에 시선을 둔 미주가 목소리를 죽이며 물었다.
“스릴이 있을 것 같아. 그지?”
“미쳤구나, 너.”
“그래 너 때문에 변태 다 되었다.”
그러더니 미주가 앉은 채로 몸을 틀어 스커트를 벗어던졌다.
“그냥 간단하게 해줘. 이곳에서는.”
팬티를 끌어내리면서 미주가 말했다.
그 순간이었다.
“거, 조용히 할 수 없소?”
옆방에서 누군가 버럭 소리쳤고 이어서 다른 사내의 목소리가 울렸다.
“뭐야, 이게? 여기가 호텔방이야?”
그때 양미주가 움직임을 멈추더니 조철봉을 보았다. 눈동자는 흐렸고 입으로는 거친 숨을 뱉는 중이었다.
“어떻게 해?”
빼면 되는 걸 가지고 이렇게 묻는 것은 미련이 있다는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조철봉이 미주의 허리를 들었다가 놓았다. 그것이 미주에게 자극을 준 것은 물론이다.
“그냥 해.”
조철봉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미주는 다시 엉덩이를 흔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입은 앙다물었으므로 신음은 터져나오지 않았다.
“더 스릴이 있구나.”
조철봉이 미주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아마 놈들은 귀를 곤두세우고 있을거야.”
그순간 미주의 몸놀림이 격렬해졌다. 더 자극을 받은 것이다. 옆방에서 귀를 곤두세우고 있을 수컷들을 연상하자 온몸이 오그라드는 것 같은 긴장감과 함께 성욕은 배가 되었다. 조급증도 일조를 했을 것이다.
“어휴, 나 죽어.”
거친 숨소리에 섞여 미주가 속삭이듯 말을 뱉었는데 정말로 죽어가는 여자처럼 사지가 굳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미주는 폭발했다. 그 순간에도 옆방을 의식하고 있는 터라 이를 악문 채 온몸을 경직시켰는데 참을수 없이 터져나오는 신음을 막으려고 눈앞에 보이는 조철봉의 어깨를 물어뜯었다. 다행히 조철봉은 양복 상의까지 걸치고 있었으므로 살점이 떼어지지는 않았다.
온몸을 밀착시킨 미주가 절정의 여운을 즐기는 동안 조철봉은 물끄러미 앞쪽의 벽을 보았다. 이제 귀를 벽에 붙이고 있을지도 모를 옆방 사내들은 신경이 쓰이지도 않았다. 미주가 가쁜 숨을 고르느라 가슴에 붙인 얼굴을 이리저리 돌렸을 뿐 둘이는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이윽고 미주가 얼굴을 떼었을 때는 10분쯤이나 지난 후였다. 호흡은 가라앉았지만 아직도 얼굴은 붉게 상기된 미주가 이제는 초점이 잡힌 눈으로 조철봉을 보았다.
“오늘 지독했어.”
시선이 마주치자 미주는 빙긋 웃었다.
“옆방에서 소리친 후에 온몸에 전기가 흐르는 것 같으면서 그곳에 자극이 더 강해졌어.”
“변태가 될 가능성이 있군.”
입맛을 다신 조철봉이 식탁에 놓인 물수건을 집어 하반신을 닦았다. 몸을 뗀 미주도 이쪽에 하반신을 드러낸 채 팬티를 찾아 입었다. 그때서야 옆방에서 두런거리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그들도 원상으로 돌아간 것이다. 다시 식탁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앉았을 때 조철봉이 정색한 얼굴로 말했다.
“나는 그저 스쳐가는 남자야, 앞으로 좋은 남자 만나서 잘 지내.”
미주가 눈만 크게 떴으므로 조철봉은 빙긋 웃었다.
“난 한두번 만나는 것으로 족한 남자라는 뜻이지. 더 이상은 곤란해.”
그래도 미주는 머리를 조금 기울인채 듣기만 했고 조철봉이 말을 이었다.
“요컨대 나는 진실성이 없는 남자지, 섹스를 하기 위해서만 여자를 만난단 말이야, 그것으로 끝이라고.”
“알아.”
마침내 미주가 짧게 말하더니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그런 말 하는 것이 오히려 더 진실성이 있어 보이네, 하지만 걱정마, 떠나줄 테니까.”
최갑중이 사무실에 들어섰을 때는 오후 2시반이었다.
“몇시 비행기입니까?”
“5시반이니까 30분쯤 후에는 출발해야겠다.”
벽시계를 올려다본 조철봉이 턱으로 앞쪽 소파를 가리켰다.
“앉아라.”
조철봉은 중국으로 출장을 가려는 것이다. 자리에 앉은 갑중이 정색하고 조철봉을 보았다.
“형님, 저도 며칠후에 가겠습니다.”
조철봉이 잠자코 머리만 끄덕여 보였다. 중국의 사업장 점검차 떠나는터라 급한 용무는 없다. 그때 갑중이 헛기침을 하더니 말을 이었다.
“형님, 오늘 아침에 전화가 왔습니다.”
조철봉의 시선을 받자 갑중이 어색한듯 쓴웃음을 지어보였다.
“저, 양미주한테서.”
“어, 그래?”
놀란듯 조철봉이 눈을 크게 떠 보였다. 둘이서 서로 약을 먹이고 119에 실려간것이 닷새전이다. 물론 갑중은 조철봉에게 그 사건을 말해주지 않고 시치미를 떼었다.
“물론 업무 전화는 아니겠지?”
조철봉도 시치미를 떼고 묻자 갑중이 씨익 웃었다.
“그러믄요, 업무 이야기라면 제가 이렇게 보고 드리겠습니까?”
“그렇다면 만나자는 전화냐?”
“예, 어쨌든 그렇게 되었으니까요.”
소파에 등을 붙인 갑중의 표정이 더 느긋해졌다.
“역시 남녀관계는 어른 말씀이 맞구만요. 당기면 물러나고 물러나면 끌려 온다니까요.”
“그렇지.”
“며칠간 연락을 끊었더니 이렇게 전화오는것좀 보십시오.”
“그렇구나.”
눈을 좁혀뜬 조철봉이 머리를 끄덕이며 물었다.
“그런데 오늘 만나서 어떻게 할 작정이냐?”
“바로 그것 때문에 형님께 말씀드린 겁니다. 오늘 어떻게 해야 됩니까?”
갑중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바짝 상반신을 굽힌 갑중이 조철봉을 보았다.
“오늘 실수를 해선 안됩니다. 형님.”
지난번 실수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이지만 갑중은 자신의 말이 이상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조철봉은 모른척하고 말했다.
“뭐, 약같은 것 먹일 생각일랑 하지마라.”
“그, 그럴리가 있습니까?”
깜짝 놀란 갑중이 손등으로 이마의 땀을 닦는 시늉을 했다.
“약, 약을 먹이다니요? 저는 그런 스타일이 아닙니다.”
“일단 저쪽에서 먼저 연락을 해왔으니 서두르지 않아도 될거야.”
“그렇지요.”
“분위기를 봐서 교외로 나가도록 해. 용인 별장이 좋겠다.”
“용인 별장 말씀입니까?”
갑중의 눈이 커졌다. 조철봉의 용인 별장은 그야말로 숲 속의 그림같은 집이었다. 특히 이층 베란다에서 올려다보는 하늘은 가슴이 미어지도록 신비롭다.
“내가 별장집사한테 네가 올지도 모른다고 연락을 해 놓지.”
“고맙습니다, 형님.”
“네가 성사가 된다면야 그쯤 아무 것도 아니다.”
“꼭 성사 시키지요.”
갑중이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쨌거나 갑중에게 차가운 여자 양미주는 서시같은 존재였다. 오왕 부차는 서시가 웃는 모습을 보려고 별짓을 다했다.
그날밤 용인으로 달리는 차 안에서 양미주가 머리를 돌려 최갑중을 보았다.
“그날, 약 먹이고 나서 어떻게 하려고 했죠? 솔직하게 말해봐요.”
“아, 그거야.”
입맛을 다신 갑중이 차의 속력을 떨어뜨리더니 쓴웃음을 지었다. 커피숍에서 만난 미주에게 용인 별장까지 드라이브나 하자고 했더니 선선히 승낙한 참이어서 속으로는 만세 삼창을 열번도 더 했던 것이다. 그러고는 둘다 그날 약먹인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갑중이 흘끗 미주를 보았다.
“나야 뭐, 그냥 미주씨를 한번.”
“약 먹이고 늘어진 나를 어쩌려고요? 그냥 그 식당에서 한번 하려고?”
“에이, 어떻게 그럴수가?”
“그럼 호텔방으로 데려가려고 했어요?”
“아무래도 그래야겠지.”
“차암, 내.”
미주가 눈을 흘겼을 때 갑중이 속력을 더 떨어뜨리면서 물었다.
“그럼, 미주씨는 날 약 먹여서 어쩌려고 했습니까?”
“그냥 도망치려고 했죠. 눈치가 뻔하게 보였으니까요.”
“도대체 그 약은 어디서.”
“글쎄, 얻었다니까요. 친구한테서.”
경찰에서 조사받을 때 둘은 서로 시선도 마주치지 않았지만 상대방의 진술내용은 다 들은 것이다. 갑중은 미주에게 약을 먹인 것은 피로해 보였기 때문에 친구한테서 얻어서 보관하고 있던 피로회복제를 먹였다고 했으며 미주는 지금 말한 것처럼 도망치려고 했다고 진술했다.
“어쨌든 그날 개망신당했어.”
앞쪽을 바라보며 다시 입맛을 다셨던 갑중은 번쩍 머리를 들었다. 미주가 갑자기 손을 뻗쳐 갑중의 사타구니를 쥐었기 때문이다.
“어어.”
눈을 둥그렇게 뜬 갑중이 엉겁결에 브레이크를 밟아 길가에 차를 세웠을때 철봉을 쥔 손에 힘이 가해졌다. 바지위로 쥐었지만 정통으로 갑중의 철봉이 손아귀에 들어간 것이다.
“어, 이거.”
“아직 늘어져 있는거죠?”
미주가 그렇게 묻자 갑중은 저도 모르게 머리를 끄덕였다.
“그, 그거야 물론.”
“긴장하고 있어요? 이것이 말예요” 하면서 미주가 이번에는 바지 지퍼를 내리더니 손을 안으로 집어넣었다. 그러자 긴장하고 있었던 철봉이 번쩍 머리를 세우더니 미주의 손에 잡혔다.
“바지 벗어봐요.”
미주가 낮게 말했으나 갑중은 엉덩이를 번쩍 쳐들더니 바지와 팬티까지 함께 벗어 내렸다. 그러자 철봉이 힘있게 건들거렸다.
“그렇게 나하고 하고 싶었어요?”
철봉을 두손으로 감싸안은 미주가 묻자 갑중은 신음했다.
“으음. 여, 여기서.”
“여기서 해줄까요?”
머리를 든 미주가 상기된 얼굴로 물었다.
“차 안에서는 안해봤어.”
“그, 그러면.”
갑중이 미주의 어깨를 잡아당겼다.
“이리 와.”
“내가 위에서 하는거지?”
“응, 어서.”
팬티를 내린 미주가 운전석으로 옮겨올 때 갑중은 이미 좌석을 눕히고는 누워 기다리고 있었다.
“난 위에서 하는 것도 처음이야.”
갑중의 다리위로 걸터앉으면서 미주가 수줍은 듯 말하더니 철봉을 쥐었다.
“어어, 이렇게 큰 물건도 처음이야.”
최갑중이 양미주가 무릎 위에 앉아 방사를 치르는데 요즘 이골이 난 상태라는 것을 알리가 있겠는가? 차가운 여자 미주의 변신에 오직 황망하고 황송해서 몸만 굳히고 있었다. 두손으로 갑중의 철봉을 감싸쥔 미주가 엉덩이를 조금 들더니 조심스럽게 샘안에 넣었다.
“아유, 죽겠어.”
멀쩡한 상태라면 미주의 똑바른 눈빛이라든지 숨소리가 아직 가빠지지도 않았다는 것을 알수 있겠지만 갑중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미주의 죽겠다는 탄성에 화들짝 흥분한 갑중의 눈이 뒤집혔다.
미주의 허리를 두팔로 부둥켜안고는 엉덩이를 들려고 했다가 그것이 여의치 않자 허덕이며 소리쳤다.
“엉덩이를, 엉덩이를.”
“어쩌라고?”
“들어줘.”
그러자 미주가 엉덩이를 들었다가 거칠게 내려놓았고 갑중의 신음이 터졌다.
“어이구.”
“이렇게?”
미주가 묻자 갑중은 대답 대신 앓는 소리를 내었다. 두 손으로 갑중의 어깨를 짚은 미주도 턱을 치켜올리더니 탄성같은 신음을 뱉었다.
“아유우, 나 죽어.”
그러고는 미주가 다시 엉덩이를 들었다가 내려놓는 순간이었다.
“아앗, 저, 저.”
눈을 와락 치켜뜬 갑중이 미주의 허리를 움켜쥐더니 곧 낭패한 표정이 되었다. 자신도 모르게 대포가 발사된 것이다. 만물의 영장인 인간만이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짐승 수컷은 정액을 발사하면 설령 그것이 1초밖에 걸리지 않았다고 해도 이렇게 낭패해하지는 않는 것이다.
“에이, 참.”
하고 갑중이 투덜거렸지만 누구 탓을 하겠는가? 철봉이 샘에 들어간지 10초도 걸리지 않았으니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쌌어?”
아주 무지막지하게 미주가 그렇게 묻는 순간 갑중은 자신의 몸이 이제 쓰레기더미 위로 던져지는 느낌을 받았다. 미주가 샘 안에서 대포가 발사된 것을 왜 모르겠는가.
“응, 나도 모르게.”
갑중이 허둥대며 대답하고는 미주의 허리를 당겨안았다. 다행스럽게도 대포를 발사한 철봉은 아직 시들지 않았지만 이미 온몸의 열기는 다 식었다. 어서 몸을 떼고 싶은 심정으로 가득차 있는 것이다.
“그럼 뺄 게.”
그러더니 미주가 엉덩이를 들어 올렸을때 그곳에서 코르크 마개가 뽑히는 소리가 났다. 소리가 제법 컸지만 갑중은 눈만 껌벅였고 미주는 외면했다.
“이봐, 조금만 쉬었다가 다시.”
갑중이 겨우 그렇게 말했지만 미주는 팬티를 입으면서 대답하지 않았다.
“다음 번에는 잘할 게.”
이제는 갑중이 사정했다. 바지를 올린 갑중이 미주의 어깨를 잡았다.
“너무 흥분해서 그랬어. 난 이런 일이 첨이야.”
“나도 그래.”
머리를 돌린 미주가 표정없는 얼굴로 갑중을 보았다.
“나도 10초도 안돼서 끝낸 적은 이번이 첨이야.”
“야, 사람 기죽이지 마.”
갑중이 눈을 부릅떴을 때 미주가 입맛을 다셨다.
“당신은 기본이 덜 돼있어.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10초가 뭐야? 10초가.”
미주의 표정과 목소리는 차갑게 변해 있었다.
(831)운명-1
조철봉이 연길을 방문한 것은 중국에 온지 사흘째가 되던 날이었다. 연길은 옌볜(연변) 조선족 자치주의 정부 소재지로서 옌지라고 부른다. 지린성(길림성)안에 위치한 자치주에는 조선족이 50%이상 거주하고 있어서 한국의 소도시에 온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시내 중심가에 위치한 고려호텔에 투숙한 조철봉이 아래층 로비로 내려왔을 때 기다리고 있던 사내들이 다가왔다. 조철봉의 수행원인 김영만과 옌지의 사업장 현지 사장인 오태복, 그리고 처음 보는 40대쯤의 사내였다.
“사장님, 이 분이 오성중학교 교장이신 이경석선생이십니다.”
오태복이 초면의 사내를 소개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이경석이라고 불린 사내가 조철봉에게 허리를 90도 가깝게 꺾어 절을 했다. 검정색 양복을 단정하게 다림질하여 입고 있었지만 목 윗부분의 깃과 소매 끝부분이 해어졌고 셔츠 목부분도 그랬다. 그리고 구두도 깨끗했지만 앞쪽 창이 벌어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사장님이 보내주신 칠판은 아주 훌륭한 선물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감사를 드리려고 찾아왔습니다.”
이경석이 말하자 조철봉은 그저 멋쩍은 웃음만 띠었다. 칠판 다섯개는 오태복이 회사 이름으로 오성중학교에 기증한 것이다. 그것도 옌지에 사업장을 진출시킨 인사치레로 그중 가격이 싼 칠판을 동포들의 자녀가 다니는 학교에 기증한 것이었다. 경석이 다시 말을 이었다.
“갑자기 찾아와 놀라셨겠습니다만 언제든지 저희 학교를 방문해 주시면 영광으로 생각하겠습니다.”
“예, 그렇게 하지요.”
조철봉도 공손하게 말했다.
“꼭 한번 찾아 뵙겠습니다.”
그러고는 호텔 현관 앞에서 경석과 헤어진 조철봉은 일행과 함께 사업장에 들렀다. 사업장은 빠찡꼬와 안마, 목욕탕, 사우나에다 룸살롱과 노래방까지 들어찬 5층건물이었다. 한국인 관광객을 상대로 한 유흥시설이었고 두달전에 개업을 했는데 첫날부터 흑자를 내고 있는 것이다. 사업장을 둘러본 조철봉이 밖으로 나왔을 때는 오후 2시경이었다. 점심도 사업장 건물의 한식당에서 마친 조철봉이 옆을 따르는 김영만과 오태복을 보았다.
“시간이 남았는데 오성중학교나 가볼까?”
김영만과 오태복이 의외인지 서로의 얼굴을 보았다. 그들은 조철봉이 건물안의 안마실에서 두시간짜리 풀코스 안마를 받은후에 사우나를 하고 그다음에는 저녁을 먹고나서 룸살롱의 순서를 밟을 줄로 예상을 했던 것이다.
“가지.”
조철봉이 발을 떼며 말하자 그들은 서둘렀다. 오태복은 소리쳐 차를 불렀으며 김영만은 오성중학교의 전화번호를 찾느라 분주했다. 그들이 탄 BMW가 오성중학교 교문 안으로 들어선 것은 그로부터 20분도 안되었다. 중학교는 2층의 일자형 건물로 교실이 10여개 정도였는데 유리창을 땜질한 것이 여러곳이었고 문의 귀퉁이는 낡아 틈이 벌어졌다. 그러나 현관앞에 서서 그들을 맞는 이경석의 얼굴은 환했다.
“어서오십시오, 사장님.”
이경석이 두손으로 조철봉의 손을 쥐면서 반겼다.
“와주셔서 영광입니다.”
그러고는 이경석이 옆에 선 둘을 가리켰다.
“수업시간이어서 교감선생과 음악선생이 남아 계시다가 인사하러 나오셨습니다.”
교감은 40대쯤의 남자였고 음악선생은 여자였다. 조철봉은 음악선생과 시선이 마주친 순간 숨을 삼켰다.
지금까지 수많은 미인을 겪어본 조철봉이다. 서울의 강남에 가면 그야말로 동양 최고의 미인들을 만날 수가 있는 것이다. 근래에 들어서 동양 여러곳을 여행해본 조철봉이 느낀 것은 한국 여자의 미모가 최고라는 것이었다. 용모뿐만이 아니라 피부나 체격조건도 그렇다. 그것은 조철봉뿐만이 아니라 타국의 남자들도 대부분 인정하는 사실이었다. 이윽고 조철봉은 참았던 숨을 뱉으면서 음악선생에게서 시선을 떼었다. 그러나 음악선생의 검은 눈동자는 아직도 눈앞에 떠 있었다.
“자,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교장 이경석의 목소리가 들렸으므로 조철봉은 정신을 차렸다.
“백선생이 차 좀 준비해 주시지요.”
이경석이 음악선생에게 말했다. 음악선생의 성이 백씨인 모양이었다. 조철봉 일행이 교장실의 소파에 앉았을때 이경석은 학교의 연혁과 상황을 설명했는데 시설이 낡아서 개조, 보수비용이 필요하다는 눈치를 드러냈다. 그러나 전혀 비굴하게 부탁하는 자세가 아니었고 오히려 당당했다. 옆에 앉은 교감도 비슷한 태도여서 그것이 조철봉의 마음을 오히려 가볍게 만들었다.
“제가 어떻게 도와드리면 됩니까.”
이경석이 한숨 돌리는 사이에 조철봉이 그렇게 묻자 교장실 안은 금방 조용해졌다. 이쪽에 등을 보인 채 차를 준비하던 음악선생도 순간 움직임을 멈췄다. 그러자 얼굴을 굳힌 이경석이 말했다.
“우선 창문과 문 보수비가 필요합니다. 제가 계산해보니까 5500위안 정도가 있어야 할것 같습니다.”
“저희들이 1만위안을 기부하지요.”
“감사합니다.”
이경석이 자리에서 일어났고 교감도 따라 일어서더니 조철봉을 향해 허리를 굽혀 절을 했다.
“또 필요한 것 있습니까?”
조철봉이 묻자 이경석과 교감은 동시에 머리를 저었다.
“없습니다. 이제 충분합니다.”
이경석이 정색하고 말했을 때 조철봉의 시선이 음악선생에게로 옮겨졌다.
“음악선생님은 뭐 필요하신 것 없습니까?”
그순간 당황한 여자가 시선을 내렸고 두볼이 순식간에 빨개졌다. 조철봉은 그때서야 자신이 그녀를 처음 본 순간에 가슴이 내려앉는 것 같은 충격을 받은 이유를 알았다. 여자를 어디선가 본 것 같은 느낌 때문이었다. 낯이 익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곳은 옌지이고 난생 처음 와보는 이국땅이다. 비록 같은 민족이긴 하지만 이 여자하고는 어떤 인연도 없다. 그렇다면 전생에서 인연을 맺은 관계인지도 모른다. 불교에서는 전생에서 수천번 인연을 맺은 사이어야 만난다고 하지 않는가? 그때 교감이 나섰다.
“음악선생, 사장님께 인사를 드리셔야죠. 아직 인사도 드리지 않았는데.”
그러더니 자기가 먼저 인사를 했다.
“저는 교감 안형규입니다.”
“전 백주영입니다.”
음악선생이 가는 목소리로 말했지만 아직 시선은 들지 않았다.
“백선생님, 필요하신 것 있으면 말씀해 보시지요.”
조철봉이 다시 말했을 때 백주영이 머리를 들었다. 검은 두 동자가 똑바로 조철봉에게 향해져 있다.
“없습니다.”
“아, 그래요?”
그러자 이경석이 혀를 찼다.
“오르간이 다 낡아서 소리도 나지 않는데 왜 그러시오?”
머리를 돌려 조철봉을 바라본 이경석이 쓴웃음을 지었다.
“백선생은 수줍음을 잘 타서.”
“그렇습니까?”
머리를 끄덕여보인 조철봉이 옆에 앉은 김영만과 오태복을 보았다.
“오르간을 하나 사드리도록.”
“예, 사장님.”
그들이 동시에 머리를 숙였을 때 조철봉의 시선이 백주영에게로 옮아갔다.
“피아노는 필요하지 않습니까?”
“네?”
조철봉의 시선을 받은 백주영의 얼굴이 순식간에 상기되었다. 백주영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조철봉이 다시 머리를 끄덕였다.
“그럼 피아노도 한대 사드리지요.”
“고맙습니다.”
인사는 이경석과 안형규가 했다. 들뜬 표정이 된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보았다. 그때 백주영이 입을 열었다.
“피아노보다는 국악 연습을 하도록 북과 장구를 구해 주십시오.”
“아, 그렇지.”
이경석이 맞장구를 쳤다.
“국악반이 악기가 부족해서 해산되었지.”
“그렇게 하지요.”
“사장님께 학교를 보여 드리겠습니다.”
잊고 있었다는 듯이 경석이 서둘러 일어섰다.
“곧 사장님께 감사장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아니, 그건.”
쓴웃음을 지은 조철봉이 사양하다가 곧 입을 다물었다. 학교를 둘러보는데는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다시 교장실 앞에 섰을 때 조철봉이 경석에게 말했다.
“오늘 저녁에 제가 묵고있는 호텔로 와 주시지요. 그때 약속한 것을 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얼굴을 환하게 편 경석이 대답했을 때 조철봉이 시선을 돌려 백주영을 보았다.
“선생님도 같이 오시지요. 그때까지 악기가 몇개 필요한가, 가격이 얼마인가를 조사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네, 사장님.”
이제는 긴장이 풀렸는지 주영이 또렷하게 대답했다. 그들의 배웅을 받으며 학교를 나왔을 때 조철봉이 옆에 앉은 오태복에게 말했다.
“한국에서 온 관광객이나 기업가들이 학교를 자주 방문했겠지?”
“예, 그렇습니다.”
조선족인 오태복이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학교측에서 적극적으로 기부금을 모으고 있으니까요.”
“학교 시설에 기부자 이름이 쓰인 물건들이 많더군.”
“그런 지원이 없으면 학교 운영이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머리를 끄덕인 조철봉이 쓴웃음을 지었다.
“교장, 교감이 상사원들 같아서 보기가 안쓰러웠어.”
혼잣소리였으므로 오태복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날 저녁 7시가 되었을 때 호텔 아래층 커피숍으로 내려온 조철봉은 기다리고 있는 교장 이경석과 음악교사 백주영을 보았다.
“호텔 식당을 예약해 놓았으니까 저녁을 같이 드시면서 이야기하시지요.”
조철봉이 제의하자 그들은 두말 없이 따라나섰다. 오태복은 회사일 때문에 나오지 못했으므로 조철봉은 김영만과 둘이서 그들을 맞았다. 한식당의 방에 넷이 자리잡고 앉았을 때 경석이 방안을 둘러보는 시늉을 했다.
“옌지에 살면서도 이곳은 처음입니다. 우리같은 사람에겐 이곳 하루 방값이 월급보다 많거든요.”
그때 조철봉은 주영의 시선이 퍼뜩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강한 눈빛이었다.
식사를 하면서 교장 이경석은 학교운영 상황을 설명했는데 기부금이 없으면 존속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역사가 1백년이 넘는 학교이고 이곳에서 배출된 독립운동가만 3백명이 넘습니다.”
경석의 목소리가 흥분으로 떨렸다.
“그런데 정부 지원금만 갖고는 학교는 반년도 지탱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돌아다니고 있지만.”
그러고는 갑자기 어깨를 늘어뜨린 경석이 길게 숨을 뱉었다.
“물론 한국에서 오신 기업가나 관광객이 조금씩 도와주시고는 있지만 일회성 기부가 대부분이어서요.”
“이해합니다.”
정색한 조철봉이 머리를 끄덕이고는 경석에게 소주를 권했다. 식사를 하면서 반주로 소주를 마시고 있었는데 경석은 이미 두병 가깝게 마셨다. 다시 한모금에 술을 삼킨 경석이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조철봉에게 말했다.
“실례하겠습니다. 잠깐.”
화장실에 가겠다는 몸짓이었다. 경석이 방을 나갔을때 지금까지 시선도 들지않고 음식만 먹던 주영이 낮게 말했다.
“저, 오늘 식사 끝나고 제가 혼자 사장님을 뵐 수 있을까요?”
그순간 앞쪽에 앉아있던 김영만이 커다랗게 재채기를 했다. 먹던 음식이 기도로 들어간 모양이었다. 흘끗 그쪽에 시선을 주었던 주영이 이제는 똑바로 조철봉을 보았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좋아요.”
조철봉도 주영을 똑바로 보았다.
“교장선생 모르게 저를 만나신다는 것 아닙니까?”
“네, 그렇습니다.”
“그럼 10시쯤 내 방으로 오시지요.”
그때 기침을 참으려고 앓는 소리까지 내었던 영만이 다시 재채기를 계속했다. 주영이 흘끗 문쪽에 시선을 주더니 서두르듯 말했다.
“지원금은 아직 주시지 말아주세요.”
조철봉이 머리만 끄덕였고 주영의 말이 이어졌다.
“사정이 있거든요. 그래서.”
“알았습니다. 그럼 10시에 뵙지요.”
영만의 재채기가 계속되었으므로 조철봉은 쓴웃음을 지었다. 어색한 분위기가 재채기 때문에 많이 희석되었기 때문이다. 그때 경석이 방으로 들어섰고 그들은 이제 지원금 내역을 상의했다. 그러나 조철봉은 학교의 상황만 듣고는 구체적인 지원 내역은 결정하지 않았다.
며칠 검토한 후에 말씀 드리겠다고 하자 경석은 실망한 기색을 띠웠지만 그로서는 강요 할 수도 없는 입장인 것이다. 저녁식사를 마친 그들이 한식당을 나왔을 때는 오후 9시 경이었다. 호텔 앞까지 그들을 배웅한 조철봉이 로비를 걸을때 영만이 주저하며 물었다.
“사장님, 백주영의 신상 조사를 해 놓을까요?”
영만은 최갑중으로부터 일을 배운 심복이어서 머리회전이 빠르고 입이 무겁다. 영만의 시선을 받은 조철봉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러나 10시까지는 한시간밖에 여유가 없는 것이다. 엘리베이터에 탔을때 조철봉이 영만에게 불쑥 물었다.
“무슨 일로 음악선생이 나를 은밀하게 만나자고 하는지 짐작이 가나?”
“혹시 교장의 비리를 말하려고 그러는 것이 아닐까요?”
생각하고 있었다는 듯이 영만이 바로 대답했다.
“눈치가 그런 것 같았습니다.”
“그래?”
머리를 기울인 조철봉은 생각하는 시늉만 했다.
밤 10시5분이 되었을 때 문에서 노크 소리가 났다. 문 옆에 벨이 있는데도 노크를 한 것이다. 방문을 연 조철봉은 두손을 마주잡고 서있는 백주영을 보았다.
화장기가 없는 맨 피부는 굳어져 있었고 말라 갈라진 입술은 꾹 닫쳐졌지만 두눈은 또렷했다. 조철봉의 시선을 받고서도 흔들리지 않는다.
“들어오시지요.”
조철봉이 비켜서며 말하자 주영은 옅은 비누냄새를 풍기며 앞을 스치고 지나 방안으로 들어섰다.
“자, 앉으세요.”
조철봉이 창가의 의자를 가리키며 얼굴을 펴고 웃어보였다.
“마실걸 드릴까요? 커피? 아니면 주스로 하실까요?”
“저, 냉수를 조금.”
“그러지요.”
백두산에서 나온다는 생수를 따라 주영앞에 내려놓은 조철봉은 앞자리에 앉았다. 주영은 흰색 블라우스에 검정 스커트를 입었지만 잘 어울렸다. 늘씬한 몸매여서 어떤 옷을 입어도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철봉은 시선을 비스듬히 둔채로 여유있는 표정을 짓고는 기다렸다. 이쪽이 서둘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때 생수를 한모금 삼킨 주영이 잔을 내려놓더니 상반신을 세웠다.
“교장선생님은 억지를 부리시는 것입니다.”
불쑥 말을 뱉은 주영의 검은 눈동자가 번들거렸다. 물기에 젖어있기 때문이다. 잠자코 주영의 목 부분에 시선만 준채 조철봉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자 주영의 말이 이어졌다.
“저희 오성중학교 학생수가 격감해서 두달 후에는 폐교 처분이 됩니다. 그렇지만 교장선생님은 아직 미련을 버리시지 못하고 학교 비품이나 시설을 보완하고 구입해서 정부의 폐교처분이 취소되도록 운동을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능합니까?”
조철봉이 묻자 주영이 머리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주 당국의 고위층이 움직이면 되겠지요. 하지만 교장선생님은 그럴 능력이 없으십니다. 오직 학교 현황을 설명한 진정서만 보내고 계실 뿐이지요.”
“….”
“교감선생님도 교장선생님과 같이 뛰시지만 불가능한 일입니다. 학교에 남은 다섯명의 선생님은 모두 그것을 알고 있지요.”
“그렇다면 지원금을 내어도 소용이 없겠다는 말씀이군.”
“폐교가 될 학교에 악기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제가 농악용 악기를 구해달라고 한 것은 재주있는 학생 몇명에게 나눠주려고 했던 것입니다. 학교가 폐교가 되면 다른 학교로 전학이 될테니 그곳에서 연습을 하도록 말이지요.”
“그렇다면 지원금은? 현금으로 지원될 금액은 어떻게 처리가 될 것 같습니까?”
“그건 모릅니다.”
머리를 젓던 주영이 어깨를 늘어뜨리면서 가늘게 숨을 뱉는 것을 조철봉은 보았다. 조철봉은 크게 숨을 뱉고 나서 물었다.
“혹시 교장이나 교감선생님이 그 현금으로 로비를 하실 작정일까요?”
주영의 시선을 잡은 조철봉이 빙긋 웃었다.
“한국에서는 그런 일이 보통인데, 그래서 묻는 겁니다.”
“그건 잘 모릅니다.”
주영이 시선을 내리자 긴 속눈썹이 그늘을 만들었고 금방 분위기가 어두워졌다. 그순간 조철봉은 숨을 들이켰다. 갑자기 가슴을 해머로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이 왔고 눈앞이 흐려졌다. 그래서 한동안 영문을 모른채 주영만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이윽고 백주영이 머리를 들었을 때 조철봉은 소리죽여 숨을 뱉었다. 지금 느낀 감정이 감동이라고 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그러나 이 감동은 얼마만인가? 지금까지 수백, 수천의 여자를 만났으며 수백명과는 깊은 관계로까지 발전하였지만 이런 감동을 받은 적은 없는 것이다. 아주 드물게 가슴이 뛰거나 머리가 띵해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은 적이 있지만 이런 충격은 처음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운명이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으므로 조철봉은 흐려진 눈으로 주영을 보았다. 주영은 영문을 모른채 눈을 깜박이며 이쪽을 바라보는 중이었는데 긴장한 표정이었다.
“알겠습니다.”
우선 그렇게 대답을 하고난 조철봉은 심호흡을 하고 가슴을 진정시켰다. 지금 이 감동을 주영에게 전달해 준다면 미친놈 취급을 당할 것이 분명했다. 남녀의 감정은 서로의 교감이 선행되어야만 한다.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런데.”
조철봉이 눈의 초점을 잡고 주영의 얼굴을 똑바로 보았다.
“학교가 폐교되면 백선생님은 어떻게 되십니까? 다른 선생님들은요?”
“전 임시 교원이기 때문에 직장을 잃습니다. 다른 선생님들중 한분만 빼고 나머지는 저하고 같은 처지가 되지요.”
차분하게 말한 주영이 혀로 마른 입술에 물기를 묻혔다. 그것을 본 순간 또 조철봉의 가슴이 거칠게 뛰기 시작했다. 갑자기 입안이 바짝 마른 느낌이 들면서 머리에 열이 올랐으므로 조철봉은 눈을 감았다. 그러고는 심호흡을 했을 때 주영의 목소리가 귀를 울렸다.
“괜찮으세요?”
“예, 머리가 조금 어지러워서.”
눈을 뜬 조철봉이 주영을 향해 희미하게 웃어보였다. 지금 객관적으로 비교할 수는 없지만 주영이 빼어난 미인이라고 볼 수는 없다. 조철봉이 겪어온 수백의 여자 중에서 주영보다 용모가 뛰어난 상대도 여럿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느낌을 받은 적은 없다. 그 누구한테서도.
“저, 피곤하신 것 같은데, 제가.”
주영이 엉거주춤 상반신을 세우면서 말했으므로 조철봉은 질색을 하고 손을 저었다.
“아닙니다. 그대로 앉아 계십시오. 내가 할 이야기도 있습니다.”
다시 주영이 자리에 앉았을 때 조철봉은 정신을 차렸다.
“백선생님의 희망은 뭡니까? 앞으로 뭘하고 싶습니까? 꿈이라도 좋으니까 말씀해 주시지요. 듣고 싶습니다.”
조철봉이 어리둥절한 표정이 된 주영을 향해 부드럽게 웃는다는 것이 자신이 느끼기에도 일그러진 모습이 되었다. 그러나 내친 김이다. 조철봉의 목소리에 열기가 띠어졌다.
“백선생님은 이렇게 나를 만난 것이 우연이라고 생각합니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이건 운명입니다. 내가 옌지까지 와서 이렇게 백선생님과 둘이 마주앉게 되었다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말을 그친 조철봉이 거칠어진 숨을 고를 적에 주영이 입을 열었다.
“사장님은 돈이 많으시죠?”
“예?”
했다가 주영의 맑은 눈동자와 시선을 부딪친 조철봉이 다시 정신을 차렸다.
“조금은 있는 편입니다.”
“아주 부자시라고 들었습니다. 교장 선생님한테서 들었지요.”
“아, 그래요.”
“전 한국에 가고 싶어요.”
주영이 불쑥 말한 순간 조철봉의 가슴도 아예 내려앉았다.
“한국에는 왜?”
조철봉이 겨우 그렇게 물었을 때는 숨을 세번쯤 마시고 난 후였다. 물론 조선족 동포 대부분은 임금이 비싼 한국에 가서 돈을 벌어 오는 것이 꿈이었다. 그러나 백주영까지 그런 꿈을 꾸고 있으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때 주영이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돈벌어서 잘 살아 보려고요.”
“돈벌어서.”
말을 잇지못한 조철봉이 침을 삼키고는 주영을 보았다. 주영의 두눈이 생기에 차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돈벌면 잘 사는 겁니까?”
“그래요.”
거침없이 머리를 끄덕인 주영이 덧붙였다.
“돈이면 다 되는 세상이에요. 여기서도 그래요. 돈이 많으면 존경을 받아요.”
“그래서.”
조철봉이 정색하고 물었다.
“한국에 가려고 어떻게 노력하고 있습니까?”
그러자 주영이 멍한 표정으로 조철봉을 보았다. 정신이 든 표정같이도 보였다.
“노력하고 있다니요?”
되물었던 주영이 어깨를 늘어뜨리더니 희미하게 웃었다. 이제 두눈에 생기가 가셔지면서 흐려졌다.
“비자받는데 돈이 많이 들어서 진즉 포기 했어요.”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한 주영이 팔목시계를 보는 시늉을 했으므로 조철봉의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래서 서두르듯 물었다.
“내가 도와드릴까?”
“네?”
“내가 비자받는 것을, 아니 돈을 벌도록 도와드릴까?”
“어, 어떻게요?”
조철봉은 주영의 표정에서 호기심과 불안감이 절반씩 섞여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호기심이 불안감을 곧 제압했다.
“어떻게 도와주신다는 거죠?”
다시 주영이 묻자 조철봉은 얼굴을 굳히고 대답했다.
“돈벌어서 잘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먼저 구체적으로 말해봐요.”
“돈 벌면 먼저 시내에 멋진 집을 사겠어요. 이층집으로.”
“시내에 이층집이라.”
“가구는 고급으로, 피아노에다 대형 TV, 냉장고도 큰놈으로.”
“피아노, TV, 냉장고 큰놈.”
“자가용도 사야겠죠. 한국산 소나타 정도로.”
“소나타.”
“일정한 수입이 있어야 할테니까 가게를 차려야 해요. 식당이나 선물가게, 또는 옷가게도 장사가 잘 되더군요.”
“식당이나 선물가게, 또는 옷가게.”
“그렇게 되려면 2백만위안은 있어야 돼요. 한국돈으로 3억쯤 되죠.”
“그렇군.”
“서울에서 한달에 3백만원씩 모으면 10년쯤 걸리겠죠. 한국 신문을 보니까 룸살롱 아가씨는 한달에 5백도 번다고 한던데 그보다 빨라질 수도 있겠네요.”
그러자 조철봉이 심호흡을 하고는 외면했다. 주영의 말이 이어졌다.
“제 동네 언니는 한국에서 결혼했다가 이혼하면서 위자료 5천만원을 받았어요. 그돈으로 옌지에다 식당을 차렸어요.”
“…”
“다 부질없는 짓이에요. 폐교가 될 학교의 음악교사 노릇도, 미친 사람처럼 뛰어다니는 교장이나 교감도.”
불쑥 주영이 말했을 때 정신이 든 조철봉이 눈을 바로 떴다. 그순간 조철봉은 주영의 두눈에 고인 물기를 보았다. 주영은 눈물을 글썽이고 있는 것이다.
그때 주영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너무 늦었습니다, 그럼.”
머리를 숙여보인 주영이 몸을 돌렸는데 조철봉과 시선을 마주치지 않았다. 그날밤 조철봉은 잠을 설쳤다. 주영이 한국에 가서 돈을 벌고 싶다고 한말은 진심이 아닌 것이 분명했고 그렇다면 그렇게 말한 이유가 있을 것이었다. 이층집과 가구, 쏘나타에다 가게까지 말했을 때의 주영은 꿈을 꾸는 표정이었고 조철봉은 깜박 넘어갔던 것이다. 아침이 되었을 때 조철봉은 보좌관 김영만을 불렀다.
“백주영 선생에 대해서 조사를 해, 오늘 오후까지.”
이런 일은 최갑중에게 시켜왔으므로 조철봉은 시선을 돌린 채 말을 이었다.
“개인 신상에서부터 가족관계까지, 다.”
“예, 사장님.”
영만이 군말하지 않고 돌아서더니 오후 5시가 되었을 때에서야 조철봉 앞에 나타났다. 그동안 조철봉은 옌지 사업장의 오태복과 바쁜 척 일을 했지만 정신이 산란해서 같은 말을 두번 하기도 했고 말도 잘못 알아 듣기도 했다. 사업장 사무실에 둘이 있게 되었을 때 영만이 입을 열었다.
“백주영 선생은 26세로 3년전에 옌지사범대학 음악과를 졸업했습니다. 졸업 성적은 상위권이었습니다.”
영만이 조철봉을 외면한 채 말을 이었다.
“사범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단둥의 중학교에 1년간 근무했는데 그곳에서 같은 학교에서 근무하는 홍경태를 사귀게 되었습니다. 학교는 물론 집안에서도 다 알게 될 만큼 둘 사이는 가까웠다고 합니다.”
“….”
“그런데 홍경태는 다른 여자와 결혼했고 백주영선생은 단둥을 떠나 톈진, 칭다오 등을 떠돌다가 다시 옌지로 돌아온 것은 8개월쯤 전입니다. 이곳 오성중학교에 임시교사로 채용된 것은 7개월쯤 전이 됩니다.”
조철봉은 머리만 끄덕였고 영만의 말이 이어졌다.
“홍경태가 결혼한 여자는 단둥에서 무역업을 해서 부자가 된 조선족 동포의 딸입니다. 그런데.”
영만의 시선이 처음으로 조철봉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런데 홍경태는 단둥에서 이곳 옌지로 옮겨와 시내에서 살고 있습니다.”
“옌지에서 말인가?”
조철봉이 묻자 영만이 몸을 똑바로 세웠다.
“예, 사장님.”
“혹시 이층집에서 살고있지 않나?”
“예? 예, 그렇습니다. 사장님.”
놀란듯 영만이 머리까지 끄덕이자 조철봉은 쓴웃음을 지었다.
“집에 자가용이 있지? 쏘나타인가?”
“예, 그렇습니다. 사장님.”
“그리고 홍경태는 학교 그만두고 식당이나 선물가게, 혹시 옷가게를 운영하고 있지 않나?”
“예? 예.”
너무 놀란 영만이 손등으로 이마의 땀을 닦았다.
“예, 홍경태는 개장국 집을 운영하고 홍경태 처는 옷가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장사는 잘돼?”
“요즘은 경기가 좋지 않습니다. 하지만.”
“자본이 든든해서 걱정없다는 말이지?”
“예, 홍경태 장인이 단둥에서 꽤 큰 섬유공장을 운영하고 있어서요. 물론 한국에서 떨어진 주문을 하청받고 있습니다만.”
“알았어.”
심호흡을 한 조철봉의 얼굴에 다시 웃음기가 번졌다.
“수고 많이 했어.”
“저사람이 홍경태입니다.”
김영만이 눈으로 주방 옆에 서있는 사내를 가리키며 말했다.
“흰 셔츠를 입은 사람입니다.”
머리를 끄덕인 조철봉이 다가온 종업원에게 보신탕 이인분을 시켰다. 홍경태가 경영하는 보신탕 식당 안이었다. 이곳에서도 손님 대부분이 남자였는데 오후 7시여서 저녁시간이 되었는데도 테이블은 삼분지 일도 채우지 못했다. 조철봉은 머리를 돌려 다시 홍경태를 보았다. 키도 크고 흰 피부에 귀공자형 용모를 갖추고 있었지만 어딘지 부족한 곳이 있는 분위기였다. 물잔을 든 조철봉은 눈을 가늘게 뜨고 홍경태를 다시 훑어보았다. 그러자 홍경태가 주방 앞에 서 있으면서 쉴새 없이 몸을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가만히 서 있는 것 같았지만 발끝을 희미하게 흔들었고 눈동자가 끊임없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그때 영만이 헛기침을 하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홍경태에 대해서도 조사를 해볼까요?”
그순간 조철봉의 시선을 받은 영만이 황급히 머리를 숙였다. 최갑중의 소개로 조철봉의 수행원에 임명된지 두달째가 되었지만 이렇게 둘이 출장을 나온 것은 처음이다. 그리고 조철봉으로부터 오더를 받은 것도 이번이 처음인 것이다. 그래서 의욕은 넘치고 있었지만 아직 조철봉이 어려운 입장이었다. 조철봉이 머리를 끄덕였다.
“좋아, 내일중으로 조사해놓도록.”
“알겠습니다. 사장님.”
“내가 보기에는 신경질적인 성품같은데, 조금 경망하고.”
“예? 예.”
흘끗 홍경태에게 시선을 주었던 영만의 표정이 신중해졌다.
“백주영 선생한테 한짓을 보면 차갑고 매서운 기질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군.”
조철봉이 잊었다는 표정을 짓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 성품도 있겠구나.”
이런때에 최갑중 같았으면 조철봉에게 백주영에 대한 감상을 꼬치꼬치 물었겠지만 영만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보신탕은 맛이 있었으므로 둘은 국물도 남기지 않고 깨끗이 비웠다. 조철봉이 물잔을 들었을때였다. 카운터에 있던 홍경태가 다가와 조철봉 옆에 섰다.
“한국에서 오셨지요?”
머리를 든 조철봉이 얼굴을 펴고 웃었다.
“티가 납니까?”
“그러믄요, 대번에 알아볼 수가 있습니다.”
따라 웃는 홍경태가 옆쪽 테이블의 빈 의자에 앉았다. 가까운 곳에서 보게되자 이목구비가 더 뚜렷한 미남이었고 목소리도 굵어서 듣기 좋았다. 홍경태가 말을 이었다.
“요즘은 한국 관광객이 베이징이나 산둥성쪽으로 몰리는 바람에 조선족 자치주 장사가 덜됩니다. 아무래도 나도 업종을 바꿔야 할 것 같습니다.”
“아니, 보신탕이 맛있던데, 무슨 업종으로 바꾸려고 하시오?”
“내 안사람이 옷가게를 하는데 칭다오쪽으로 옮겨가서 제법 큰 옷가게를 하려고 궁리 중입니다.”
“음, 칭다오에 한국사람들이 많지. 한 10만 된다고 하니까.”
조철봉이 정색하고 홍경태를 보았다.
“자본은 넉넉합니까?”
“예, 그것은.”
여유있게 머리를 끄덕인 홍경태가 얼굴을 펴고 웃었다.
“집안에 여유가 조금 있어서요.”
처가 집안이라고 해야 맞는 말이 될 것이지만 조철봉은 잠자코 물잔을 들었다.
조철봉이 칭다오와 옌타이 사업장을 둘러보고 다시 옌지로 돌아왔을 때는 그로부터 일주일 후였다. 그동안 김영만은 옌지에 남아 있었는데 조철봉이 호텔방에 혼자 있을 때를 기다렸다가 보고했다.
“저, 홍경태에 대한 보고를 드리겠습니다. 사장님.”
“아, 그래.”
조철봉이 잊고 있었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대답했다.
“내가 잊고 있었구먼.”
영만을 옌지에 남겨둔 것도 그일 때문이었던 것이다. 영만이 입을 열었다.
“홍경태는 애인이 있습니다. 한족 여자인데 시외에 집을 얻어서 살림을 차려주고는 일주일에 세번은 들릅니다.”
조철봉의 눈치를 살핀 영만이 말을 이었다.
“홍경태는 2남2녀중 장남으로 부모는 룽징 근처에서 농사를 짓고 삽니다. 가족 모두가 홍경태에게 의지하고 있는 상황이지요.”
“흥, 그런데도 배신을 해?”
쓴웃음을 지은 조철봉이 묻자 영만은 여전히 정색하고 대답했다.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홍경태는 처가 재산을 빼돌려 애인한테 자가용을 사주었고 룽징의 부모한테는 땅과 집을 사주었습니다. 하지만 철저하게 감추고 있어서 장인과 처의 신임을 받고 있는 것 같습니다.”
“칭다오로 옮긴다는 계획은?”
“예, 그동안 홍경태는 칭다오에 다녀왔는데 시내에 1백평이 넘는 옷가게를 계약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뭐야?”
“홍경태의 처 윤정숙은 무남독녀입니다. 그래서 윤정숙은 아버지의 사업장을 물려받게 되어있지요.”
“그런가?”
“윤정숙의 아버지 윤봉학은 자수성가한 조선족입니다. 사업장 규모도 커서 근로자가 1천명이 넘습니다.”
“그 사업장도 곧 홍경태의 차지가 되겠군.”
“칭다오의 옷가게 차리는 자금도 윤봉학이 내는 것입니다. 사업장에서 생산한 제품을 가게에서 판매하려는 계획이지요.”
머리만 끄덕인 조철봉에게 영만이 긴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홍경태는 장인 윤봉학의 신임을 받고 있습니다. 이제 칭다오 사업장을 기반으로 곧 윤봉학의 사업장을 넘겨받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 착실하게 순서를 밟아 진행하고 있군.”
쓴웃음을 지은 조철봉이 소파에 등을 붙이고 영만을 보았다.
“그러나 사기꾼들한테는 허점이 있기 마련이지. 내 눈에는 그놈의 머릿속이 훤하게 들여다보여.”
그러고는 조철봉도 정색했다.
“그동안 백선생은 어떻게 지냈나?”
“예, 백선생님은….”
이제는 익숙해질만도 했지만 어색해진 영만이 시선을 내리더니 말을 이었다.
“학교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럼 집에서 쉰다는 말인가?”
“아닙니다.”
머리를 든 영만이 조철봉을 보았다.
“친지와 친척을 찾아다니고 있었습니다.”
“왜?”
“돈을 빌리려는 것입니다.”
“돈을?”
긴장한 조철봉의 시선을 받은 영만이 헛기침을 했다.
“예, 하지만 빌리지 못했습니다. 원체 거금이었거든요. 한국 비자를 받으려고 5만위안을 만들려는 것입니다.”
그날밤 조철봉은 김영만, 오태복과 함께 옌지 시내의 룸살롱에 들렀다. 중국에서는 룸살롱을 K-TV라고 부르지만 한국인 손님만을 전문으로 받는 곳은 아예 간판에 한국어로 버젓이 룸살롱이라고 붙여 놓는다. 그들이 찾아간 ‘애모’룸살롱도 그런 곳이었다. 물론 주인에서부터 일하는 마담이나 남자 종업원 모두 조선족이었지만 아가씨들은 80%가 한족이었다. 조선족 아가씨가 20%밖에 되지않는 것은 당연히 공급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옌지에 조선족이 절반쯤 산다고 하지만 예쁜 조선족 아가씨는 진즉 베이징이나 상하이 등 대도시로 튀었다는 것이다. 그곳에 돈많은 한국인 손님이 더 많으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조철봉 일행 셋도 마담의 극진한 대접을 받았지만 옆에 앉은 조선족 아가씨들의 수준은 보통이었다. 옌지에 기반을 둔 오태복이 안내를 맡은 터라 조철봉의 눈치를 살피며 좌불안석했지만 어디서 만들어 오는 것도 아니었으니 도리가 없다. 그리고 경험있는 룸살롱 단골들은 마담이 첫번째 데려온 아가씨들이 제일 낫다는 것을 안다. 두번, 세번 바꿔보고 난 후에 그래도 처음 아가씨가 낫다면서 다시 불러달라고 했을 때, 마담이 그 아가씨는 이미 방에 들어갔다며 ‘쪽’을 주는 경험을 한두번쯤 쌓아야 진정한 룸살롱 단골이 된다. 그래서 조철봉 일행은 처음 들어온 조선족 아가씨 셋을 그냥 옆에 앉혔는데 김영만과 오태복은 긴장한 나머지 제 파트너 얼굴은 보지도 않았다. 그들은 조철봉과의 이런 좌석이 어렵기만 한 것이다.
“집이 어디야?”
1백명중 98명은 먼저 그렇게 묻는다고 룸살롱 손님 조사에서 나왔다는 질문을 던졌을 때 조철봉의 파트너가 다소곳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네, 단둥입니다.”
“옌지에서는 방을 얻어서 살겠구나.”
“그렇습니다.”
“핸드폰은 있어?”
“예, 있습니다.”
이름이 박순심이라고 했으니 가게용 이름을 짓지 않은 것은 신통했다. 가게용 이름이 순심일리는 없기 때문이다. 조철봉이 파트너와 대화에 열중하자 김영만과 오태복이 그제서야 제각기 머리를 돌려 제 짝을 보았고 술잔을 들었다.
한모금 술을 삼킨 조철봉이 다시 물었다.
“하긴 옌지 아가씨가 옌지 룸살롱에 나오기는 어렵겠다. 손님 중에 아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말이야. 그렇지?
“아닙니다.”
의외로 대답은 앞쪽에 앉은 김영만의 파트너가 했다. 단발머리인 그녀가 조철봉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제가 옌지에 사는데요, 제가 아는 사람은 이런 데에 못옵니다.”
“그래?”
“어떻게 두달 월급, 석달 월급을 하룻밤 술값으로 날립니까? 한국 사람들이나 그렇게 하지요.”
“그렇군.”
입맛을 다신 조철봉이 단발머리를 흘겨보았다.
“날 비꼬는 것 같구먼 그래.”
“아닙니다.”
당황한 단발머리의 얼굴이 금방 하얗게 굳어졌다.
“그런 뜻으로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농담이야.”
조철봉이 팔을 뻗어 순심의 허리를 안았다. 굵고 단단한 허리였다. 그러고보니 어깨도 넓고 과일을 옮겨놓는 손가락도 억세어 보였다. 그러나 순심은 조철봉이 안기 편하도록 큰 엉덩이를 움직여 옆으로 바짝 붙어앉았다.
“여기 나온지 얼마 되었어?”
룸살롱 파트너에게 100명중 100명이 다 그렇게 묻는다는 질문을 했을때 순심은 여전히 다소곳이 시선을 내리고 대답했다.
“예, 두달이 되어갑니다.”
“그 전에는 뭘했고?”
“단동에서 공장에 다녔습니다.”
“무슨 공장인데?”
“지퍼 만드는 공장입니다.”
“한국사람이 운영했겠군.”
“예, 사장님.”
“월급은 얼마 받았는데?”
“8백위안 정도.”
“핸드폰 사려면 그 월급 가지고는 어려웠겠지.”
“핸드폰 사려고 가게에 나온것이 아닙니다.”
웃고 넘기면 될것을 순심이 정색하고 말한것을 보면 역시 순진한 구석이 남아 있었다. 조철봉의 시선을 의식한 순심이 머리를 더 숙였다.
“그럼 가게에 나온 이유는 뭐야?”
“돈 벌어서 동생 공부시키고, 또.”
“또 뭐야?”
“어머니 아버지 고생좀 면하게 해드리고.”
“또 있어?”
“가게나 하나 차리고.”
“결혼은 안하고?”
“그까짓건 안합니다.”
조철봉은 머리를 끄덕였다. 1970년대에 한국에서 룸살롱에 다닌 추억이 있는 사람들은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소리라고 할것이다. 70년대, 그리고 80년대까지 한국의 룸살롱 여종업원 대부분은 생계를 위해 가게에 나왔다. 그러나 지금은 달라졌다. 명품을 사려고, 흥청망청 긁고 난 카드빚을 갚으려고, 그리고 쉽게 벌려는 방편으로 가게에 나오는 아가씨가 많아진 것이다.
잔을 든 조철봉은 한모금에 가짜 한국산 위스키를 삼켰다. 순심의 세대가 지나면 중국의 성장속도로 봐서 7, 8년 안에 명품을 사려고 가게로 나오는 미녀들이 쏟아질것은 당연한 일이다. 시대의 흐름이라기보다 인간의 본성이 그렇다. 인간은 배가 부른 후에는 향락의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다. 결코 멈춘적이 없다. 10년쯤 후에 순심이 가게 주인이 될지는 알 수 없지만 그때는 지금의 순정을 까맣게 잊고 있을 것만은 분명했다. 조철봉은 빈잔에 술을 채우는 순심의 투박한 손가락을 보면서 백주영을 떠올렸다. 순심이나 주영이나 추구하는것은 같다. 돈을 벌어쓰겠다는 것이다.
조철봉은 문득 주영이 룸살롱으로 흘러 들어올 경우를 떠올렸다가 머리를 흔들어 지웠다.
“그래서 지금 얼마나 모았어?”
불쑥 다시 묻자 순심이 처음으로 머리를 들고 조철봉을 보았다.
“5천위안쯤 모았습니다.”
“그렇다면 팁만 가지고는 그렇게 모으기는 힘들었겠는데, 그동안 생활비도 나갔을테니까, 핸드폰도 샀고,”
“예, 집에 3천위안도 보내 주었거든요.”
그렇다면 순심이 2차를 여러번 나갔다는 말이 된다. 팁값 2백위안으로 두달동안 꼬박 손님을 받았다고 해도 6천위안밖에 되지 않는다. 하룻밤 2차비가 1백불, 또는 8백위안으로 산동성, 흑룡강성, 요녕성이 동일하니까 최소한 20번 가량은 2차를 나갔다는 계산이 된다. 조철봉이 정색하고 머리를 끄덕였다.
“솔직하게 말해줘서 고맙다.”
“제가 속일 이유가 뭐가 있겠습니까.”
“어쨌든 넌 성실하고 순진한 여자다.”
그러고는 조철봉이 손을 뻗어 순심의 풍만한 젖가슴을 살짝 쥐었다.
“몸도 좋고.”
그러자 순심이 몸을 비틀었다.
룸살롱을 나왔을 때는 밤 11시반 쯤이었다. 조철봉은 박순심과 함께 나왔지만 김영만과 오태복은 사양했다. 조철봉도 한번 권하고는 그만두었는데 어렵기만 한 사장과 같이 2차를 갈 기분이 나지 않았을 것이었다. 순심은 고분고분 따라왔지만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호텔방 안에서 둘이 되었을 때는 앉지도 못하고 우두커니 서 있는것이 안쓰럽기까지 했다. 옷을 벗은 조철봉이 알몸에 가운만 걸치고 나서 순심에게 물었다.
“어때? 난 샤워할텐데, 같이 할거야?”
조철봉이 순심의 눈을 똑바로 보았다.
“내 등 좀 밀어주지 않을래?”
순심의 눈이 조금 커지더니 결심한 듯 얼굴이 굳어졌다.
“예.”
그러고는 돌아서서 옷을 벗기 시작했으므로 조철봉은 먼저 욕실로 들어섰다. 샤워기의 물을 틀어놓고 머리끝부터 물을 맞고 서있던 조철봉은 욕실 문이 열리는 기척에 시선을 들었다. 순심이 들어서고 있었다. 예상했던대로 순심의 몸은 굵고 컸다. 어깨도 사내처럼 넓었으며 허리와 허벅지도 굵어서 육중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순심의 풍만한 젖가슴과 짙은 숲을 본 순간 저도 모르게 조철봉은 욕정이 불끈 솟아올랐다.
지금까지 날씬하고 섬세하며 연약한 유형의 여자만을 미인의 기준으로 삼아왔던 조철봉이었고 실제로 현시대의 미인형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래서 언젠가 우연히 중세의 유럽 미인도에서 풍만한 나머지 아랫배가 이겹살 내지는 삼겹살이었으며 팔목과 허벅지가 지금 여자들의 허리통만한 여자들을 보고는 도무지 이해가 안간 적도 있었다. 그러나 순심의 몸은 풍만했지만 건강했다. 아랫배가 나와 있었어도 군살이 아니었다.
“음, 몸이 좋구나.”
탄성을 뱉은 조철봉이 이미 뻗친 철봉을 감추지도 않고 정면으로 섰을 때 순심은 두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등 밀어드릴게요.”
수줍게 손바닥 사이로 순심이 말하자 조철봉은 얼굴을 펴고 웃었다.
“아니, 가슴부터 밀어.”
그러자 순심이 한걸음 다가와 섰다. 그리고 샤워기에서 뿜어나오는 물줄기를 맞으며 조철봉의 가슴을 손바닥으로 문지르기 시작했다. 조철봉은 자연스럽게 순심의 허리를 두팔로 안았다. 그러자 철봉이 순심의 아랫배에 닿았고 미끄러지면서 숲을 건드렸다.
“넌 성의 재미를 알아?”
조철봉이 탱탱한 순심의 젖가슴을 두손으로 움켜쥐며 물었다. 꼭 알고 싶어서 물은 것은 아니다. 어색한 분위기를 해소하기 위해서 건성으로 물은 것인데 순심은 정색했다.
“예, 조금 압니다.”
“조금 알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알것 같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오르가슴은 느껴 보았겠군.”
“예, 몇번.”
“상대는 누구였어?”
“손님이었습니다.”
고분고분 대답하는 순심의 분위기에 조철봉은 저도 모르게 빠져들었다. 주무르고 있는 순심의 젖꼭지는 이미 나무토막처럼 단단해졌고 입에서는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조철봉이 몸을 바짝 붙이자 순심은 욕실 벽에 등이 닿았고 철봉이 아래로 미끄러져 골짜기에 밀착되었다.
“그래, 그 손님이 누구였는데?”
“예, 한국사람.”
“그놈 철봉, 아니 연장이 컸어?”
“아닙니다.”
순심이 머리까지 저었다.
“사장님 것보다 작았습니다.”
박순심이 말하자 조철봉은 얼굴을 펴고 웃었다. 지금까지 수백명의 여자와 섹스 전후에 수많은 대화를 나눴지만 이렇게 물어본 적은 없다. 가장 물어보고 싶었던 것 중의 하나였지만 자존심이나 체면 때문에 참고 넘긴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조철봉은 순심의 손을 잡아 철봉을 쥐어 주었다. 그러자 주저하던 순심이 철봉을 꽉 쥐었다. 샤워기의 물줄기는 조철봉의 등판에 쏟아졌고 욕실 안은 흰 증기로 덮어지는 중이었다.
“어때? 내 철봉이?”
“좋습니다.”
“좋다니?”
“크고 실합니다.”
“흠.”
이 세상에서 듣는 칭찬 중에 공부 잘하고, 마음씨 좋고 등등의 수많은 사례가 있지만 지금 조철봉이 들은 내용만큼 가슴 뻐근하게 만들어주는 내용도 드물것이다. 그때 순심이 조철봉으로서는 가장 듣기 좋은 단어를 한마디 덧붙였다.
“이런 물건은 처음입니다.”
“그래?”
심호흡을 했던 조철봉이 아주 잠깐 망설였다. 그것은 순심의 남자 경험이 적었을 경우와 많았을 경우를 그순간 따져 보았기 때문이다. 남자 경험이 여남은 명밖에 안된다면 여남은 명 중에서 철봉이 가장 크고 실하다는 말이 될 것이다. 수백명 중에서 제일 낫다는 표현이 당연히 더 낫겠지만 그때는 순심에 대한 신선도가 떨어진다.
“좋아.”
조철봉은 복잡한 계산은 버렸다. 순심의 허리를 당겨 안은 조철봉이 귀에 대고 말했다.
“자, 넣어봐라.”
“여기서 말입니까?”
“그래, 다리 한쪽을 들고.”
“이렇게 말입니까?”
순심이 육중한 다리 한쪽을 들어올렸을 때 골짜기와 숲에 가려졌던 붉은색 샘이 환하게 드러났다. 그 순간 조철봉도 숨을 삼켰다. 이렇게 선명하게 붉은 샘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으음.”
탄성을 뱉은 조철봉이 순심의 올려진 다리 사이에 팔을 넣어 받치고는 바짝 붙었다. 어느덧 열중한 조철봉은 모든 것을 잊었다. 이렇게 달아오른 경우도 조철봉에게 아주 드물었던 것이다.
“넣어.”
조철봉이 순심의 귀를 가볍게 물면서 속삭였다. 그러자 순심이 허덕이며 말했다.
“너무 크니까 천천히 넣어 주세요.”
아주 예쁜 말만 골라서 해주는 바람에 조철봉은 더 달아올랐다. 조철봉의 경험에 비추어 본다면 순심과는 전희도 별로 하지 않았다. 그것은 순심이 경험이 별로 없는 데다가 순진하게 보였기 때문에 조철봉도 몸이 가는 대로 움직인 것이다. 계산을 하지 않은 터라 몸은 더 달아올랐다. 순심이 조심스럽게 철봉을 쥐더니 샘에 붙였다. 그러고는 문득 철봉에서 손을 떼더니 조철봉의 목을 두팔로 감아 안았다.
“넣어주세요.”
조철봉은 다시 신음했다. 순심의 풍만한 몸이 휘감고 있었으므로 안정감까지 느껴졌다. 이윽고 조철봉이 허리를 움직여 천천히 순심의 몸 안으로 진입했다.
“아이고, 엄마.”
순심이 조철봉의 목을 감은 팔에 힘껏 힘을 주면서 소리쳤다.
“나죽어.”
욕실을 울리는 순심의 외침을 들으면서 조철봉은 이제 힘껏 철봉을 넣었다. 그때 순심의 탄성이 더 높아졌다.
서서 기묘한 자세로 작업을 했다가 순심의 반석같은 몸위에 올라 가장 안정된 자세로 철봉이 진입했을 때 조철봉은 저도 모르게 커다란 탄성을 뱉었다. 순심의 샘은 뜨거웠으며 샘물이 넘쳐나고 있었던 것이다.
“으음 좋구나.”
조철봉이 순심의 귀에 대고 헐덕이며 말했다가 곧 입술을 빨았다. 그러자 순심이 입을 열더니 혀를 내밀어 주었다. 그동안 철봉은 샘 깊숙하게 진입했다가 천천히 상하운동을 시작하고 있었다.
“나 죽어.”
잠시 입을 뗀 순심이 비명같은 탄성을 뱉었다. 그러고는 힘껏 허리를 치켜 올리는 바람에 조철봉의 몸이 허공에 떠올랐다가 떨어졌다.
“으윽.”
“아악.”
정통으로 제자리에 몸이 떨어졌으므로 조철봉과 순심의 입에서 동시에 신음이 터져나왔다. 조철봉은 희열로 몸을 떨었다. 지금까지 수백명의 여자와 함께 밤을 지냈지만 순심처럼 힘찬 상대는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힘만 좋은것이 아니다. 순심의 몸놀림은 전후좌우, 그리고 강약까지 조절하면서 움직였는데 그것은 경험에 의해 단련된 동작이 아니었다. 동작이 거칠어서 어긋나고 깊어졌다가 빠지기까지 했지만 마치 월척 붕어가 튀는 것처럼 신선했다. 그러면서 순심은 점점 절정으로 상승되어갔다.
“아이구, 아이구.”
이제 몸을 흔들면서 순심이 단발마의 비명을 질렀는데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다른 때의 조철봉이라면 이런 때 체위를 바꿨을 것이다. 그래서 잠시 숨을 돌리면서 여자의 성감을 더 높이려는 시도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그럴 여유도 없다. 진퇴의 쾌감이 갈수록 증폭되어 순심의 비명이 높아지는 것과 호흡을 맞추는 것이 고작이었다
“아아악.”
마침내 순심이 폭발했다. 그 힘찬 팔다리를 좍 폈다가 온몸을 오그리면서 조철봉을 부둥켜 안았는데 그순간 샘이 강하게 수축되었다.
“어억”
샘이 수축된 순간이었다. 조철봉도 힘차게 대포를 발사했는데 그 쾌감이야말로 지금까지의 섹스가 우습게 여겨질만큼 폭발적이었고 지금까지 한번도 이런 강한 자극을 받은 적이 없다. 온몸의 수분이 몽땅 빠져 나가는 것 같았다가 다음순간 머리가 티 한점없이 맑아진 것을 깨닫고는 조철봉은 눈을 크게 떴다. 처음 겪는 상태인 것이다. 쾌감에 신음을 뱉던 조철봉은 이윽고 탈진 상태가 되어 순심의 넓은 가슴위에 누워 눈을 감았다. 편안했다. 그리고 가슴 가득히 무언가가 차올랐다. 그것이 희망인지 만족감인지 알 수 없었지만 갑자기 조철봉의 뇌가 무슨 작용을 한 것은 분명했다. 와락 조철봉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기 때문이다. 조철봉은 순심의 양푼만한 젖가슴 사이에다 얼굴을 묻고 울었다. 행복했지만 외로웠다. 만족했지만 왠지 슬펐던 것이다. 그때 앓는 소리를 내던 순심이 무겁게 팔을 들어 조철봉의 머리를 가만가만 쓸었다.
“이대로 있어주세요.”
순심이 어린애 달래는 것처럼 말했다.
“빼지 말고.”
조철봉은 눈물이 흐르는대로 내버려둔 채 가만 있었다. 모두 온몸에 물을 끼얹은 것처럼 땀이 흐르고 있어서 순심은 조철봉의 눈물을 눈치채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아, 좋아.”
순심이 앓는 소리처럼 말하고는 다시 진저리를 쳤다. 그러자 철봉이 다시 조여졌다.
다음날 아침, 눈을 뜬 조철봉은 먼저 향기에 섞인 체취를 맡았다. 박순심의 냄새였다. 그 다음에 눈의 초점이 맞춰지면서 창가 의자에 앉아있는 순심의 모습이 보였다. 순심은 옷을 다 갖춰입고 있어서 금방이라도 나갈 것 같았다. 탁자에 붙여진 전광시계는 오전 7시10분을 가리키고 있었으니 아직 이른 시간이다. 상반신을 일으킨 조철봉은 하품을 했다. 어젯밤 순심과는 두번 정사를 나누었는데 두번째는 더 진했던 것이다. 첫번째와는 다르게 조철봉의 지도로 체위를 여러번 바꾸었고 순심은 절정에 올랐을 때 기절했다. 그러고는 한동안 깨어나지 않았으므로 당황한 조철봉이 얼굴에 물을 뿌리는 소동까지 일어났던 것이다.
“어, 왜? 벌써 가려고?”
조철봉이 묻자 순심의 얼굴이 금방 붉게 상기되었다.
“사장님 일 하셔야죠. 어젯밤 말씀 들으니까 직원을 여덟시에 방으로 오라고 하시던대요.”
“그랬던가?”
김영만을 오라고 한 것이지만 특별한 용무는 없다. 전화로 시간을 늦추면 되는 것이다.
“저, 그럼 갈 게요.”
자리에서 일어선 순심이 말했을때 조철봉은 손을 뻗쳐 잡는 시늉을 했다.
“잠깐만 앉아 있어.”
침대에서 일어선 조철봉이 알몸인 채로 옷장으로 다가가 바지 주머니에서 지갑을 들고 나왔다.
“이차값 줘야지.”
“어젯밤 받았습니다.”
질색을 한 순심이 손을 저었다.
“돈 주실 필요 없습니다.”
“그랬나? 그렇다면.”
쓴웃음을 지은 조철봉이 지갑을 내려놓고는 정색하고 순심을 보았다.
“내가 여기서 며칠 더 묵을 텐데.”
조철봉이 손으로 방을 가리켰다.
“그동안 나하고 같지 있지 않겠나? 가게 나가지 말고 말이야.”
“그건.”
침을 삼킨 순심이 무릎 위에 놓인 두손을 움켜쥐었다.
“저어, 그것은.”
순심이 말을 더듬자 조철봉이 다시 웃었다.
“물론 계산은 해주겠어. 하루 일당을 얼마로 계산하면 되지?”
“그것은.”
“얼마야?”
“전 아직 그렇게 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잘 모릅니다. 그래서.”
“얼마 주면 되겠어?”
그러자 이제는 얼굴이 하얗게 굳어진 순심이 겨우 머리를 들고 조철봉을 보았다.
“이차비만 주십시오.”
“그럼 하루에 1백불인가?”
순심이 머리를 끄덕이자 조철봉이 다시 정색했다.
“알았어. 그럼 내가 일하고 돌아올 동안 여기서 쉬든지 아니면 밖에서 놀다가 저녁 8시까지는 돌아와. 내가 열쇠를 주고 갈 테니까. 알았지?”
“알았습니다.”
순심이 고분고분 대답하자 조철봉이 지갑을 다시 들고는 지폐를 꺼내 내밀었다.
“이건 5백불이야. 일당 외에 내가 밥사먹고 쇼핑하라고 주는 돈이야. 받아.”
“아닙니다. 저는.”
순심이 몸까지 뒤로 물러서면서 사양하자 조철봉이 웃었다.
“받아. 이럴 때는 당당하게 받는 거야. 그리고 너는 그럴 자격이 있어.”
“누구세요?”
미랑이 묻자 밖에서 사내의 목소리가 울렸다.
“관리실에서 왔습니다. 전기요금 고지서가 나왔어요.”
“잠깐만요.”
옷 매무시를 가다듬은 미랑이 홍경태를 향해 웃어보였다.
“조금만 기다려.”
그리고 살랑거리는 걸음으로 현관으로 다가갔다. 미랑은 스물셋이었지만 스물일곱인 윤정숙보다 더 세상 물정에 밝았고 사교적인데다 착한 성품을 지녔다. 거기에다 170㎝ 가까운 신장의 늘씬한 체격이었고 빼어난 미모여서 지난번 베이징에 함께 놀러 갔을 때 사람들의 시선을 모았던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홍경태의 가슴이 뛴다. 그때 현관쪽에서 미랑의 목소리가 크게 울렸으므로 홍경태는 침대에서 상반신을 일으켰다.
“어머, 누구세요?”
미랑의 목소리는 놀람으로 끝이 떨렸다.
“누구신데 이렇게….”
다시 미랑이 다급하게 말했을 때 발소리가 어지럽게 들리더니 반쯤 열려 있던 방문이 왈칵 젖혀졌다.
“아앗”
그것은 침대에 엉덩이만 걸치고 앉아있던 홍경태의 입에서 터져나온 외침이었다. 그의 눈앞에는 장인 윤봉학과 처 윤정숙, 그리고 처외삼촌 김달성이 서있었기 때문이다.
“어허, 이 개자식 좀 보소.”
거칠기로 소문난 김달성이 눈을 치켜뜨고 잇사이로 말했으나 윤봉학은 입만 딱 벌리고 있는 것이 아연한 표정이었다.
“설마 했더니 이놈이 이렇게 놀아나고 있었구먼.”
“아, 아니.”
침대에서 일어난 홍경태가 입을 열었다가 현기증이 나는 바람에 침대 모서리를 잡고 겨우 몸을 가눴다.
“이것 보세요.”
이제 상황을 눈치챈 미랑이 뒤쪽에서 가늘게 말했다가 김달성이 눈을 부릅뜨고 돌아보는 바람에 기겁하고 입을 다물었다. 홍경태는 팬티에 러닝셔츠 차림이었고 한낮이었지만 막 미랑과 정사를 나누려던 참이었다.
“이집 살림이 모두 매형 재산을 빼돌려서 차린 것이겠지.”
방안을 둘러본 김달성이 다시 잇사이로 말했다.
“밖의 자가용도 이놈이 사주었겠지. 그리고 이놈 집안에도 돈을 빼돌려 보냈겠고, 이 더러운 놈.”
“저놈을 잡아라.”
이윽고 윤봉학이 메마른 목소리로 말했다.
“저놈을 잡아가자.”
“예, 매형.”
호기있게 대답한 김달성이 밖에 대고 소리치자 사내 세명이 신발을 신은 채로 집안으로 달려들어왔다.
“이놈을 잡아.”
사내들이 홍경태에게 달려들었을 때였다. 입만 꾹 다물고 서있던 윤정숙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데려가서 뭘 하게요?”
“아니 왜?”
김달성이 묻자 윤정숙이 매몰차게 말했다.
“이 짐승을 내 집에 들여 놓는단 말이에요? 아예 이곳에서 죽이든지 병신을 만들든지 해요.”
“그래, 그것이 낫겠다.”
윤봉학이 머리를 끄덕이더니 홍경태와 미랑을 번갈아 노려보았다.
“여기서 이 연놈들 문제를 끝장을 내는 것이 낫겠다.”
그때 미랑이 조선말을 알아 들었는지 두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울었다.
앞자리에 앉은 정복동이 웃음띤 얼굴로 백주영을 보았다. 옌지 시내의 커피숍 안이었다. 오후 5시여서 거리에는 그늘이 덮여지고 있었는데 오늘은 날씨가 추워서 행인이 드물었다. 커피숍 안에도 손님은 그들 둘 뿐이다.
“그래, 그동안 별일 없고?”
전화로도 물어 보았던 복동이 또 물어보았다. 복동은 주영과 단둥의 중학교에서 같이 근무한적이 있다. 그러고는 옌지로 옮겨왔다는 말만 들었을뿐 만난적은 없다. 나이차가 10여년이나 나는데다 평소 능글능글한 성격의 복동을 주영이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갑자기 복동이 오후에 전화를 해온 것이다. 상의할 것이 있으니 만나자는 내용이어서 마침 학교도 쉬고 있던 참이라 나오긴 했지만 꺼림칙했다. 복동이 분위기를 눈치챈듯 넓은 얼굴을 펴고 다시 웃었다.
“이상하게 생각하지마, 백선생. 내가 갑자기 연락을 해온건 학교 문제 때문이야.”
그러고는 복동이 눈을 가늘게 뜨고 주영을 보았다.
“지금 오성중학교 임시교원으로 있지? 내가 교감 안형규씨한테서 들었어. 그사람이 나하고 조금 친하거든.”
“아, 그러세요.”
주영이 머리를 끄덕였는데 조금 마음을 가라앉힌 표정이 되었다. 복동이 말을 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지금 내가 근무하는 대광중학교에 음악선생 자리가 비어있어. 지난달에 음악선생이 장사를 한다고 베이징으로 가버려서 말이야, 그래서 내가 우리 교장한테 말을 넣으면 될것 같은데.”
“아아, 예.”
“우선 임시교사 발령을 받고 곧 정식교사 임명을 받는거야. 그것도 내가 손을 쓰면 문제없어.”
복동의 표정이 단호해졌다.
“그렇다고 내가 뭘 바라고 이러는 것이 아냐, 그냥 호의야. 오해하지 말라구.”
“고맙습니다, 선생님.”
“그럼 할 의향이 있는거지?”
“조금 생각을 해 보구요.”
시선을 내린 주영이 아랫입술을 물었다가 풀었다. 지금까지 한국행 비자를 브로커한테 사려고 돈을 빌리러 다녔던 주영이다. 갑자기 복동의 제의를 받고 머리가 혼란스러워진 것은 당연했다. 그때 복동이 말했다.
“교직에 있는 사람은 한 우물을 파야돼. 다른 사업을 해서 성공한 예가 드물어. 참, 백선생은 홍경태 선생을 잘 알겠구만 단둥에서 같이 근무하던 선생말이야.”
긴장한 주영이 시선만 들었다. 홍경태와의 연애는 비밀로 했기 때문에 소문은 나지 않았던 것이다. 주영의 시선을 받은 복동이 먼저 길게 한숨부터 쉬었다.
“그사람, 부잣집 딸을 만나 이곳 옌지에서 떵떵거리고 잘살았지 않어? 식당을 경영하고 자가용도 굴리고 말이야.”
“…”
“그런데 순식간에 거지가 되어서 쫓겨났다는군. 바로 어제 말이야.”
복동이 번들거리는 눈으로 주영을 보았다.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으려고 애를 썼지만 신바람으로 콧구멍이 벌렁거리는 작용은 억제하지 못했다.
“글쎄, 그사람이 한족 여자하고 은밀하게 살림을 차렸다는군. 처가에서 빼돌린 재산으로 아파트에다 자가용까지 사주고 말이야, 그러다가 바로 어제 장인하고 처한테 현장을 들켰다는 거야.”
“…”
“그래서 재산 모두 빼앗기고 지금 사기죄로 고발 당해서 공안에 잡혀가 있다는거야. 신세 완전히 망쳤지. 망쳤어.”
그로부터 두시간쯤이 지난 오후 7시 반쯤이 되었을 때 정복동은 옌지 시내에서 가장 비싼 식당중의 하나인 서울관으로 들어섰다. 종업원의 안내를 받아 밀실 문을 열었을 때 안에 앉아있던 두사내가 머리를 들었다. 조철봉과 비서 김영만이었다.
“제가 조금 늦었습니다.”
허리를 굽혀 절을 한 복동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백선생이 꼬치꼬치 물어서요.”
자리에 앉은 복동의 말이 이어졌다.
“조선족 사회에서는 벌써 소문이 쫙 퍼졌을테니까 금방 확인이 되겠지요. 어쨌든 백선생은 굉장히 놀라는 눈치였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영만이 말하고는 주머니에서 흰 봉투를 꺼내어 복동의 앞에 내려놓았다.
“여기 5천위안 들었습니다.”
“아이구, 제가 한일도 별로 없는데.”
하면서도 복동이 얼른 봉투를 집어 들더니 입구를 벌려 안의 내용물을 확인하고는 멋쩍게 웃었다.
“감사합니다.”
“그럼.”
그만 가보라는 말이었으므로 복동은 자리에서 서둘러 일어섰다. 그는 물도 한모금 마시지 않은 것이다. 복동이 방을 나갔을 때 조철봉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럼 내일 하루는 백주영이 홍경태 상황을 확인하도록 내버려 두자고. 소문이 좍 퍼졌으니 확인하기도 쉽겠지.”
“예, 사장님.”
“모레 만나도록 하겠다.”
“알겠습니다. 사장님.”
물론 홍경태가 딴 살림을 차린 것에서부터 제 본가로 돈을 보내어 치부를 한 것까지 처가측에 모두 알려준 것은 복동이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영만으로부터 5천위안을 받기로 하고 심부름을 한 복동인 것이다. 다음날 오전, 주영은 시내에서 친구 유성자와 만나고 있었는데 둘의 분위기는 심각했다. 그러나 자세히 관찰한 사람이 있다면 둘의 눈빛이 반짝였고 낮고 느린 말투가 갑자기 흥분으로 높아지면서 빨라지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었다. 성자는 옌지 시내에서 주영과 경태의 러브스토리를 알고 있는 유일한 친구였다. 성자가 눈을 반짝이며 말을 이었다.
“사기죄로 고발을 했으니 홍경태는 제 본가에다 보낸 돈까지 다 게워내지 않으면 풀려나지 못할거야. 윤봉학씨가 공안한테도 손을 써 놓았다고 하니까.”
식은 커피를 한모금 삼킨 성자가 말을 이었다.
“자동으로 이혼이 되는 것이고 공안에서 풀려나오면 이제 빈손으로 다시 시작해야 되겠지. 더러운 놈. 천벌을 받은거야.”
“…….”
“나도 놀랐어. 한족 애인한테 집 사주고 자가용으로 쏘나타까지 사주다니 말이야. 세상에, 처가 돈으로 그럴수가 있니? 나쁜놈, 너한테 한일을 생각하면.”
했다가 성자는 꿀꺽 침을 삼키고는 말을 멈췄다. 경태는 주영의 첫사랑이었고 첫 몸을 가져간 사내인 것이다. 주영은 경태에게 헌신적이었다. 그것을 성자는 다 알고 있는 것이다.
“홍경태의 처는 집에서 홍경태의 옷가지하고 쓰던 물건을 모두 꺼내 쓰레기로 버렸다는거야. 여자가 독한 마음을 먹으면 그렇게 돼.”
그러고는 성자가 손끝으로 주영을 가리키며 웃었다.
“너처럼 말이야. 그렇지?”
“미친 것.”
쓴웃음을 짓던 주영이 곧 머리를 끄덕였다.
“맞아. 어쨌든 속이 다 시원하다.”
“세상 일이 다 마음먹은 대로 되는 건 아니지.”
사무실 창가에 선 조철봉이 창밖을 내다보면서 말했다. 오전 10시가 되어가고 있었는데 건물 안은 조용했다.
“세상에는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이 부지기수이고 한을 품은 채 저세상으로 간 사람도 많아.”
혼잣소리처럼 말했지만 조철봉의 목소리는 방을 울렸다. 뒤쪽에 선 김영만은 숨도 죽인 채 듣기만 했다. 조철봉이 말을 이었다.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으려면 주지 않으면 된다. 마음이건 재물이건 제 몫을 챙기고 내놓지 않으면 되는 거야.”
영만은 조철봉이 지금 백주영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 속을 열어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영의 주변 조사에서부터 홍경태를 궁지로 몰아 치명상을 입히는 것까지 작업 지시를 해온 터라 조철봉의 의도를 대충 짐작했던 영만이다. 몸을 돌린 조철봉이 영만을 정면으로 보았다.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백주영이 이번 홍경태의 일에 속이 시원해 할까?”
“예? 예, 그것은.”
긴장한 영만이 부동자세로 섰다.
“어제 백주영씨는 홍경태가 살림을 차렸던 한족 애인의 집에서부터 홍경태의 본가까지를 답사했습니다.”
영만은 어제도 주영을 미행한 것이다. 조철봉이 눈만 껌벅였고 영만의 말이 이어졌다.
“백주영씨는 친구 유성진씨와 동행해 하루 종일 홍경태의 주변만 체크한 것입니다. 오후에는 홍경태가 경영했던 식당에도 들러 보았습니다.”
“그래?”
“그것은 곧 백주영씨가 홍경태에 대해서 아직도 마음을 정리하지 못했다는 증거가 되겠습니다. 따라서.”
조철봉의 시선을 받은 영만의 얼굴이 더 굳어졌다.
“지금 백주영씨의 입장을 분석한다면 안쓰럽고 고소한 마음이 반반씩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흐흐흐.”
갑자기 조철봉이 굳어졌던 얼굴을 허물어뜨리면서 웃었으므로 영만의 어깨가 늘어졌다.
‘안쓰럽고 고소하다고? 흐흐흐.”
이제는 턱을 올리며 소리내어 웃은 조철봉이 영만을 보았다.
“그럼 홍경태에게 복수하려고 돈을 벌려던 계획은 어떻게 될 것 같나?”
“급하게 서둘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럴까?”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면 포기할 것입니다.”
“복수할 상대가 없어졌으니까 말이지?”
“예, 사장님.”
머리를 끄덕인 조철봉이 손목시계를 보는 시늉을 했다. 10시30분에 사무실에서 주영을 만나기로 한 것이다.
“만나면 알 수 있겠지.”
조철봉이 웃음 띤 얼굴로 영만을 보았다.
“그래, 상처를 받지 않으려면 기대를 하지 않는 거야. 욕심을 부리지 않으면 된다.”
영만이 눈만 크게 뜬채 대답하지 않았고 조철봉은 혼잣소리처럼 말을 이었다.
“세상 일이 마음 먹은대로, 계획 세운대로 되는 것이 아니니까.”
본래의 계획은 주영이 홍경태에게 철저한 보복을 하도록 하는 것이었지만 주영은 그럴 만한 성품이 못되었다. 그저 제가 돈을 벌어 잘사는 것이 홍경태에 대한 복수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따라서 지금 주영의 입장은 만나 봐야 자세히 알게 될 것이었다. 그것이 이제 10분 남았다.
방안으로 들어선 백주영은 조철봉이 권하는 자리에 앉았는데 차분한 표정이었다. 검은색 스커트에 흰 블라우스 차림으로 화장기가 없는 얼굴은 창백했다.
“요즘 학교를 쉬신다고 들었는데.”
조철봉이 말하자 주영은 시선을 내렸다. 주영은 휴직계를 내었지만 다시 복직하기는 어려울 것이었다.
“어떻게 지내고 있지요? 다시 학교에 돌아가실 계획인가?”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시치미를 떼고 묻자 주영이 시선을 들어 조철봉을 보았다.
“저, 집에서 농사나 짓겠어요.”
주영이 눈만 크게 뜬 조철봉을 향해 희미하게 웃어보였다.
“돈벌려고 한국에 갈 계획이었는데 그것도 포기했어요.”
“아니, 왜? 무슨 일 있었습니까?”
“아뇨.”
주영이 가볍게 머리를 저었다.
“다 부질없는 일 같아서요.”
“그래요, 하긴.”
정색한 조철봉이 주영을 똑바로 보았다.
“돈은 쓸 만큼만 있는게 낫죠. 적어도 문제지만 많아도 사고가 납니다.”
“…”
“그런데 말이죠.”
조철봉이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난 그동안 백주영씨 생각을 많이 했고 오늘은 제의를 하려고 오시라고 한건데.”
그러자 주영의 얼굴이 굳어졌다. 무릎위에 놓인 두손을 깍지 껴서 쥐고 있었는데 손등에 푸른 정맥이 돋아났다. 조철봉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백주영씨, 내가 2층집을 한채 선물하지요. 멋진 새 집이오.”
“…”
“자가용도 준비해 놓았어요. 쏘나타보다 비싼 그랜저로.”
“…”
“가게도 마침 어제 내놓은 식당이 있어서 인수를 해놓았는데, 장사가 잘 되는 곳이었는데 주인한테 일이 생겨서 급하게 매물로 나온 것을 운 좋게 인수한거요.”
“…”
“주인이 조선족 동포인데 처갓집에서 돈을 빼돌려서는 중국 여자하고 살림을 차렸다나? 그래서 장인이 그사람 가게를 빼앗아 팔아버린 것이지.”
“…”
“어때요? 내가 다 드리지. 물론 내 조건을 들어준다면 말이오.”
“…”
“백주영씨가 내 애인이 되는 것이지. 자세하게 말한다면 내 현지처가 되는거야. 물론 예상은 하고 계셨겠지. 조건없이 이런 짓을 할 미친 놈은 없을테니까.”
그러고는 조철봉이 소파에 등을 기대고 주영을 보았다. 대답을 기다리는 것이다. 주영이 조철봉의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머리를 숙였다. 그래서 조철봉에게는 콧날만 보였는데 갑자기 주영이 번쩍 머리를 들고 말했다.
“하겠어요.”
주영이 또렷하게 말했다. 두눈이 반짝였고 볼에는 홍조까지 띠었다.
“그런 제의를 거절한다면 진짜로 미친 년이 되겠죠. 할래요.”
“팔려간다고 생각하지 않아도 돼. 명의를 모두 옮겨줄테니까 내가 싫으면 다 팔아먹고 도망을 치라고.”
조철봉이 주영을 향해 빙긋 웃었다.
“그 식당 주인은 처가 신세를 지고 살면서 아무것도 제 명의로 한 것이 없었다더군. 그래서 처가에서 쫓겨난 순간에 거지가 되었어.”
그러고는 조철봉이 혀를 찼다.
“주영씨가 그렇게 되어서는 안되지.”
차에서 내린 조철봉과 백주영은 저택의 현관 앞에 섰다.
“문이 열려 있을 거요.”
조철봉이 턱으로 현관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주인이 먼저 들어가시지.”
그러자 아랫입술을 물었다가 푼 주영이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섰다. 옌지 교외의 저택은 주위가 낮은 구릉이었고 아래쪽 마을이 훤하게 내려다보였는데 국도는 마을을 관통하고 지나갔다. 정부고관의 별장이었던 저택을 이번에 구입한 것이다. 집안은 말끔하게 단장되어 있는데다 가구도 모두 새것이었으므로 주영은 신선한 가죽 냄새를 맡았다. 아래층 응접실은 20평도 더 되어 보였고 주방과 식당도 넓었다. 그리고 앞쪽의 복도 옆에는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었다.
“이층에도 응접실이 있고 방과 서재가 있어.”
응접실 소파에 앉은 조철봉이 말했다.
“나는 한달에 2, 3일 묵고갈 뿐이니까 가족들을 이곳으로 옮겨오도록 해도 되겠군.”
아래층 이곳저곳을 구경하는 주영의 등을 향해 조철봉이 말했다.
“불편하면 난 이곳에 오지 않을 테니까 말이야. 내가 옌지에 왔을 때는 주영씨가 내가 묵고있는 호텔로 와도 돼.”
“이층에 올라갔다 올 게요.”
조철봉의 말에는 대꾸도 않고 주영이 이층의 계단을 오르면서 말했다. 쓴웃음을 지은 조철봉이 입을 다물었다. 주영은 얼굴에 활기를 띠고 있었던 것이다. 눈이 생기있게 반짝였으며 걸음은 가벼웠다. 소파에 머리를 기댄 조철봉은 눈을 감았다. 이렇게 뭔가를 해 주었을 때의 기쁨은 겪어본 사람만이 이해한다. 특히 선물을 받은 여자가 감동을 받는 순간을 보게 된다면 그것은 행운이다. 더욱이 그 여자가 마음에 드는 상대라면 말할 필요도 없다. 주영이 아래층으로 내려왔을 때는 10분이나 지난 후였다. 발 소리에 눈을 뜬 조철봉은 계단 난간에 허리를 붙이고 기대선 주영의 웃는 모습을 보았다.
“좋아요.”
주영이 들뜬 표정으로 말했다.
“꿈만 같아요.”
“저기.”
조철봉이 턱으로 옆쪽 창문을 가리켰다.
“창가로 가면 옆쪽에 세워진 그랜저가 보일 거야. 그게 주영이 차라고.”
조철봉이 이제는 주영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창가로 서둘러 다가간 주영이 상체를 기울이며 옆쪽을 보았다.
“어머머.”
주영의 입에서 탄성이 터지더니 곧 몸을 돌린 주영이 밖으로 달려나갔다. 차를 보려는 것이다. 다시 눈을 감은 조철봉은 길게 심호흡을 했다. 이곳까지 수행해온 김영만은 눈치 빠르게 운전사와 함께 아래쪽 마을로 내려갔으므로 저택 안에는 그들 둘뿐이다. 오전 12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어서 아직 태양은 중천에 떠 있었지만 언제 시간과 장소를 가렸던 조철봉이었던가? 다시 한참이나 지났을 때 현관문이 열리더니 주영이 들어섰는데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멋있어요.”
주영이 우선 그렇게 말하고는 다가와 조철봉의 어깨를 움켜쥐고 흔들었다.
“색깔도 마음에 들고.”
“다행이군, 마음에 들었다니.”
“고마워요.”
“천만에.”
주영이 바짝 다가서 있어서 허리가 바로 눈앞 십센티 거리에 위치한 상황이다. 거기에다 옅은 향내까지 맡아졌는데 독특했다. 체취가 섞였기 때문일 것이다. 조철봉은 고인 침을 삼켰다.
“자, 그럼 집 구경을 했으면 이제 식당을 보러 갈까?”
백주영의 허리에서 시선을 뗀 조철봉이 물었다.
“주인은 바뀌었지만 영업은 하고 있을거야. 종업원도 그대로 고용하기로 했으니까 말이야.”
“아뇨, 거긴 나중에.”
머리를 저은 주영이 갑자기 어깨를 늘어뜨리더니 조철봉에게서 떨어졌다. 두발짝쯤 물러난 주영이 조철봉을 보았다. 어느덧 정색한 표정이다.
“저는 평범한 여자예요.”
조철봉과 시선이 마주치자 주영은 외면했다.
“실망시켜 드릴까봐 걱정이 돼요.”
“뭘 말이야?”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그렇게 물은것은 마치 제 지갑에 넣어진 돈을 다시 세어보고 싶은 충동과 비슷할 것이었다.
그러자 주영이 굳어진 표정으로 조철봉을 보았다.
“저한테는 너무 과분해요. 이 모든 것이.”
“천만에.”
조철봉도 정색하고 머리를 저었다.
“세상을 봐. 주영씨보다 못나고 더 자격도 없는 인간들이 얼마나 으스대며 살고 있는가를 말이야.”
“…”
“운명이야. 내가 이곳까지 와서 당신을 만난것도, 나는 만족해.”
조철봉이 내세우는 것은 물질이다. 지금까지 만난 대부분의 여자들에게 조철봉은 물질부터 내밀었는데 그것이 편리한 방법이긴 했다. 나름대로 정직한 수단도 되었다. 편력의 초창기에 여자를 이용하고 사기를 친 적도 있었지만 그것은 영업 때문이었지 목적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기업군을 거느린 작금에 이르러서는 운명이건 우연이건 부딪친 여자들에게 먼저 뭔가를 내놓는 것이다. 주영한테도 예외가 아니었는데 머리를 썼다면 비용을 절감할수는 있었을 것이었다.
“그래.”
조철봉이 주영을 응시한채 천천히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
“쉽게 말해서 처음에 주영씨를 본 순간부터 마음에 들었어. 그러고는 어떻게 접근해볼까 생각해 보기도 했지.”
“…”
“그러다 주영씨의 장래 꿈 이야기를 듣고 마음을 정한거야. 내가 주영씨의 이상형 남자는 아닐지 모르지만 그 꿈을 이뤄줄 능력은 있었으니까.”
그때 조철봉의 머릿속에서 식당에서 만났던 홍경태의 모습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물론 여자마다 기호가 다르고 이상형 남자가 다르겠지만 조철봉은 어떤 면에서든지 홍경태보다 뒤떨어졌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조철봉의 시선을 받은 주영이 입을 열었다.
“선생님은 그 어떤 사람보다도 훌륭하세요. 제가 만난 그 어떤 남자보다도.”
열기띤 목소리로 말한 주영이 한걸음 다가와 섰다.
“저를 그렇게까지 좋게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최선을 다할게요.”
“이봐, 이제 거북한 분위기는 그만 끝내자구.”
“조철봉이 웃음띤 얼굴로 주영을 보았다.
“지금 면접시험을 보고 직원 채용을 한것 같은 분위기가 되었지 않아?”
그러자 목구멍을 울리고 웃은 주영이 한걸음 더 다가오더니 조철봉의 옆자리에 앉았다. 바짝 붙어 앉아서 허벅지의 감촉까지 느껴졌다. 지금까지의 주영의 태도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으므로 조철봉은 긴장했다. 그때 조철봉의 시선을 볼에 받으면서 주영이 낮게 말했다.
“저, 행복해요.”
조철봉은 옆에 붙어앉은 백주영의 얼굴을 찬찬히 보았다. 그때 문득 박순심의 모습이 떠올랐고 자기도 모르게 어깨가 늘어졌다. 지난번 옌지를 떠날 때 조철봉은 10만위안을 건네주었는데 그 돈으로 조그만 가게도 하나 차릴 수 있을 것이다.
“원하는 것이 있으면 말해. 가능하면 내가 들어줄테니까.”
조철봉이 말하자 주영은 머리부터 저었다. 두눈에 물기가 고여 있었고 볼은 빨갛게 상기되어서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다.
“아뇨, 싫어요.”
“그래도 이 집에서 생활하려면 생활비가 있어야지, 식당이 현상유지를 한다고 해도 여유자금이 있어야 할 것이고.”
조철봉인 팔을 뻗어 주영의 어깨를 가볍게 안았다.
“운전면허 취득할 때까지 저 차를 집에 세워둘 수만은 없을테니까 운전사도 고용해야 될 것이고.”
주영이 얼굴을 가슴에 묻었으므로 심호흡을 한 조철봉이 말을 이었다.
“이 집에도 가정부를 고용해야 될 거야. 그러니까 생활비로 내가 우선 30만위안을 주지, 필요하면 또 줄테니까.”
“아뇨, 저는.”
마침내 주영이 울먹이며 말했고 한줄기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30만위안이면 한화로 4천5백만원쯤이 되겠지만 물가 수준이 한국의 10분의1 정도였으니 가치는 4억5천만원이 넘을 것이었다. 조철봉은 주영을 안은 팔에 조금 힘을 주었다. 그러자 어깨와 상반신의 탄력이 느껴졌고 체취가 섞인 향내가 더욱 강해졌다. 주영이 어깨를 비비적거리더니 조철봉의 가슴에 더 편안하게 안겨왔다.
“내가 돈으로 주영이를 유혹하는 것 같아서 오히려 거북해.”
조철봉이 주영의 보기좋은 귀에 입술을 붙이면서 말했다.
“하지만 지금부터 잘 지내면 되겠지.”
“잘 할게요.”
“지금 나한테는 주영이뿐이야.”
“저두요.”
주영이 두손으로 조철봉의 허리를 감아안으며 말했다.
“저도 조선생님 뿐이에요.”
조철봉은 주영의 숨소리가 조금 거칠어져 가고 있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숨결도 더웠다.
“주영이.”
귓볼을 가볍게 입술로 물면서 조철봉이 부르자 주영은 가슴에 얼굴을 비비는 것으로 대답했다.
“얼굴을 들어줄래?”
조철봉의 말에 주영은 얼굴을 들었다.
무슨 뜻인지 알아챈 터라 두눈을 감고는 입술을 조금 내밀고 있다. 조철봉은 주영의 입술에 키스했다. 그러자 주영의 입술이 석류처럼 벌어지면서 흰 치아사이로 혀가 내밀어졌다. 두손으로 주영의 얼굴을 감싸쥔 조철봉은 갈증이 난 사람처럼 주영의 혀를 빨아들였다.
“아아음.”
주영이 신음했다. 어느새 주영은 소파에 두 다리를 올려놓아서 묘한 자세로 몸이 비틀려져 있다. 조철봉이 상반신을 숙이자 주영은 몸을 눕히면서 자연스럽게 한쪽 다리가 허공으로 솟아 올랐다.
“선생님, 나, 어떡해요.”
조철봉이 입술을 떼었을 때 주영이 헐떡이며 말했다. 소파의 팔걸이에 머리를 눕힌 주영의 두눈에는 초점이 잡혀있지 않았다.
“그냥 해주세요. 선생님.”
주영이 조철봉의 어깨를 쥐면서 말했다.
?摹溶翎돛?어깨를 안아 일으킨 조철봉은 먼저 스커트부터 벗겨 내었다. 그러자 흰 팬티가 드러났고 미끈한 하반신이 눈앞에 펼쳐졌다.
“나 몰라.”
두손으로 얼굴을 가린 주영이 소파위에 반듯이 눕혀졌다. 조철봉은 서둘러 바지 혁대를 풀고 지퍼를 내렸다.
“아이, 나 몰라.”
다시 주영의 떨리는 목소리가 손가락 사이로 흘러나왔다. 그순간 조철봉은 움직임을 멈췄다. 아직 이글거리는 시선은 주영의 팬티 한복판에 화살처럼 꽂혀 있었지만 어금니를 꽉 문 모습이었다.
“그래, 한낮에 이러는 것도 부끄럽다.”
다시 바지 혁대를 매면서 조철봉이 말했다. 그러자 주영이 얼굴을 덮은 손가락을 쫙 펴고 조철봉을 보았다. 그러고는 재빠르게 몸을 굴려 소파에서 내려오더니 스커트를 찾아 입었다.
“아끼고 싶어서 그래.”
외면한 채 조철봉이 말했으나 주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머리를 돌린 조철봉은 얼굴이 새빨개진 주영이 두다리를 꼭 붙인 자세로 소파 귀퉁이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시선은 방바닥에 꽂혀 있다.
“보다 더 좋은 분위기에서 주영이를 안고 싶은거야.”
다시 조철봉이 부드럽게 말했다. 달래듯이 말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사실이다. 지금 당장 소파에서 주영의 몸을 안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 같았지만 참은 것이다. 주영을 보면서 운명까지 생각했던 조철봉이다. 전생에 대단한 인연이 있었기 때문에 이곳 중국땅 외진곳까지 와서 만나게 되었다고 믿었던 것이다. 수많은 경험을 쌓았기 때문인지 근래에 들어서는 여자로부터 거의 감동을 받지 못했던 조철봉이었다. 그러다가 주영을 만난후에 전생의 인연까지 생각하게 되었으니 아낄만한 일이었다.
“우선 내가 시킨대로 이 집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는거야.”
조철봉이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이 목소리를 높였다.
“가구도 필요한 것 있으면 더 들여놓고, 부모님도 모셔오고 말이야.”
그때 주영이 시선을 들고 조철봉을 보았으나 입을 열지는 않았다. 그러나 눈빛에 생기가 살아나고 있었다.
“오늘중으로 미스터 김이 30만위안을 가져올 테니까 받아 두도록 해. 알았지?”
조철봉이 다짐하듯 말하자 주영이 머리를 끄덕였다.
“운전면허도 따 놓고, 알았지?”
“네, 선생님.”
“앞으로 선생님이라고 부르지마. 어색하니까.”
“네.”
“뭐라고 부를지도 연구해봐. 알았지?”
“네.”
“이리와.”
조철봉이 두손을 내밀며 부르자 주영이 말 잘듣는 아이처럼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다가왔다. 조철봉은 주영의 팔을 끌어 자신의 무릎위에 앉혔다.
“삐지지 않았지?”
조철봉이 주영의 무릎을 손바닥으로 부드럽게 쓸면서 물었다.
“네, 삐지지 않았어요.”
주영이 팔로 조철봉의 어깨를 감아 안아 몸의 균형을 잡으면서 말했다.
“오히려 아껴주셔서 고마워요.”
“나도 당장 주영이를 이곳에서 안고 싶어. 그런데 절제한거야. 더 큰 기쁨을 위해서 말이야.”
무릎을 쓸던 조철봉의 손이 스커트 안으로 들어가 팬티의 도톰한 부분을 쓸었어도 주영은 몸만 비틀 뿐 거부하지 않았다.
그러나 조철봉은 또다시 절제했다. 백주영의 팬티 윗부분을 몇번 손끝으로 쓸었을 때 축축한 물기가 배어나온 순간이었다. 조철봉이 손을 빼내자 주영은 긴 숨을 뱉더니 두 다리를 붙였다.
“미안해.”
조철봉이 주영의 볼에 입술을 붙이면서 말했다.
“내가 며칠 청도에 다녀 올테니까 그동안 집안 정리나 해.”
“언제 가시는데요?”
“오늘 오후에.”
무릎 위의 주영을 옆에 앉힌 조철봉이 웃음띤 얼굴로 말했다.
“닷새쯤 걸릴거야.”
“기다릴게요.”
조철봉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주영이 응석을 부리듯이 말했다.
“그때는 달아 오르게만 만들고 빠져 나가면 싫어.”
“주영이는 섹스에 대해서 잘 아는 편인가?”
웃음띤 얼굴로 조철봉이 묻자 주영이 눈을 크게 뜨더니 탐색하는 듯한 시선이 됐다.
“전 잘 몰라요.”
“그런것 같지 않던데.”
조철봉이 주영의 허벅지 위에 손을 올려 놓았다.
“몇번 언덕을 만졌더니 물이 흥건하게 나왔잖아?”
“아이, 몰라.”
몸을 비틀어보인 주영이 눈을 흘겼다.
“물은 많은 편인가?”
“아유, 싫어요.”
주영이 조철봉의 허벅지를 가볍게 꼬집었다.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으므로 조철봉의 가슴이 다시 뛰었다. 이미 철봉은 또 다시 탱탱해져서 바지를 뚫고 나오려는 중이다.
“말해봐.”
조철봉이 이번에는 팔을 돌려 블라우스 위로 주영의 젖가슴을 만지면서 말했다.
“성감대가 어디야? 여기 젖가슴도 물론 그중 하나일테고.”
“아유, 그만요.”
주영이 몸을 비틀어 조철봉의 손을 떨어내려는 시늉을 했지만 상반신은 더 붙였다. 조철봉이 이제는 블라우스 사이로 손을 넣었다.
그리고 브래지어를 들추고 젖가슴을 움켜쥐었다. 젖가슴은 밥공기만 했는데 단단했고 젖꼭지는 이미 떨어져 나갈듯이 탱탱하게 곤두서 있었다.
“아아.”
다시 주영이 아픈듯이 신음을 뱉더니 갑자기 두손으로 조철봉의 철봉을 바지 위로 움켜 쥐었다.
“아아, 선생님.”
“선생님이라고 부르지 말라니까.”
“저, 죽겠어요.”
“나도 하고 싶어서 미치겠다.”
“그럼 해줘요.”
“아냐, 아끼고 싶어.”
“싫어.”
주영이 세게 철봉을 움켜쥐었으므로 조철봉은 낮게 신음을 뱉었다. 이것은 마치 고양이가 쥐를 던지며 어르는 행동이나 같다. 뱀이 또아리 속에 쥐를 가두고 노는 것과도 비슷하다고 조철봉은 생각했다. 어릴적에 맛있는 과자를 손에 쥐었을 때 그 행복감에다 아끼고 싶은 마음까지가 지금과 비슷할 것 같았다. 조철봉은 주영의 손목을 쥐어 철봉에서 떼어 내었다.
“넌 나한테 소중한 여자야. 나는 이 순간을 실컷 즐기고 싶어. 섹스를 하기전의 이 순간을 말이야.”
조철봉은 솔직하게 털어 놓았다. 주영이 이해를 하건 못하건 염두에 두지 않았다. 하지만 아낀 만큼 그 대가는 클 것이었다.
“너를 만난 것은 운명이야.”
조철봉이 주영의 옆얼굴을 찬찬히 보면서 말했다.
“여자를 만났을 때 지금처럼 감동을 느껴본 적은 없어.”
주영은 얼굴을 굳힌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나 아직도 볼은 붉게 상기되었고 호흡은 거칠었다.
“마치 꿈을 이룬 것 같은 기분이야.”
자리에서 일어선 조철봉이 길게 숨을 뱉으면서 말했다.
“나에겐 바로 네가 꿈이란다. 주영아.”
그때 주영이 조철봉을 뒤에서 안았다. 두팔로 조철봉의 허리를 단단하게 안은 주영이 볼을 등에 붙이고 말했다.
“행복해요.”
“그렇다면 고맙다. 기쁘고.”
“이제 새로 시작할 거예요.”
“내가 도와줄게.”
조철봉이 주영의 손등을 부드럽게 쓸었다.
“그것이 바로 내 행복이다.”
그리고 그날 오후에 조철봉은 청도로 떠났다. 비행기로 한시간 거리인 청도에는 이미 최갑중이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옌지에서 많이 바쁘신 모양이군요.”
저녁을 함께 먹을 때 갑중이 지나는 말처럼 했는데도 조철봉은 퍼뜩 머리를 들었다. 갑중은 덤덤한 표정이었다.
“왜?”
그렇게 묻자 갑중이 눈을 껌벅이며 조철봉을 보았다.
“왜라니요? 옌지에 저택도 구입해 놓으셨지 않습니까? 조선족 자치주에서 사업을 확장하시려는 것 아닙니까?”
조철봉은 시선을 내리고 입안의 음식을 천천히 씹었다. 갑중이 백주영을 빗대어 한 말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왠지 허전해진 것이다. 갑중은 조철봉의 분신이나 다름없는 인물이다. 조철봉의 여자 편력을 거의 알고 있는 유일한 인물이며 조력자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번 백주영과의 사업에서는 일 때문에 같이 있지 못해서 김영만이 도와주었다.
“내가 옌지에서 여자를 만났다.”
수저를 내려놓은 조철봉이 말하자 갑중은 여전히 덤덤했다. 지금까지 조철봉이 만난 여자가 어디 하나둘인가? 놀라는게 오히려 이상할 것이었다. 심호흡을 한 조철봉이 정색했다. 갑중을 만난 순간부터 주영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놓고 싶어서 온몸이 근지러운 느낌이 들 정도였던 조철봉이었다. 그것은 자랑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갑중은 그것을 들어줄 상대라는 것만으로도 조철봉의 심복이자 회사의 2인자 노릇을 할 가치가 있는 인물이었다. 조철봉이 입을 열었다.
“이것은 운명이다. 운명적 만남이야.”
갑중이 소리죽여 긴 숨을 뱉었지만 정색했다. 물론 조철봉도 갑중의 그 꼴을 보았지만 말을 이었다.
“나는 그 여자를 본 순간에 가슴이 내려앉는 것 같은 감동을 받았다. 이것이 운명적 만남이 아니고 무엇이냐?”
그러고는 조철봉이 눈을 좁혀뜨고 갑중을 보았다.
“전에 내가 이런 말 한 적이 있냐?”
“없었습니다.”
“감동을 받았다는 말은 했지?”
“하셨을걸요?”
“운명적 만남이란 말은 처음이지?”
“그런 것 같습니다.”
“확실하게 대답해, 인마.”
“예, 처음입니다.”
“인연이 있었던거야. 전생에서 여러번 내 마누라로 살았던 여자일거야.”
“형님이 정말 단단히 감동을 받으신 모양이군요.”
“그래서 내가 그 여자한테 집을 사 주었다. 차하고 식당도 하나. 그리고….”
조철봉이 헛기침을 했다.
“생활비도 주고 왔다.”
“그거야 뭐.”
갑중은 당연한 일이라는 듯이 머리를 끄덕였다. 조철봉이 살림 차려준 여자가 하나둘이 아닌 것이다.
“여자 이름이 백주영이야.”
조철봉의 목소리에 생기가 띠어졌다.
“옌지 대성중학교 음악선생이었지.”
백주영을 학교에 찾아갔다가 만난 장면에서부터 오전에 저택에 데리고 갔을 때까지를 단숨에 이야기한 조철봉이 빠뜨린 것이 있다. 다른 건 다 이야기했지만 김영만을 시켜 주영의 뒷조사를 시킨 것과 홍경태와의 사연, 거기에다 홍경태가 망한 이야기는 다 뺐다. 조철봉의 두 눈이 번들거렸다. 지금부터 가장 중요한 본론을 말해 주려는 것이다.
“오늘 오전에 저택에 둘이 있었지만 난 손을 대지 않았어. 여자가 해 달라고 했는데도 말이야.”
갑중의 시선과 부딪친 조철봉이 히죽 웃었다.
“넌 이해할거다. 내 기분을 말이야. 나한테 그런 감동을 준 여자를 그냥 아무데서나 할 수가 있겠느냔 말이다.”
“그렇죠.”
정색한 갑중이 머리를 끄덕였다.
“아끼고 싶으시겠죠. 하지만.”
“하지만, 하기는 해야지.”
“그렇죠.”
“사흘후에 여기 일 마치고 돌아갈거다. 그때까지만 참으면 돼.”
“저도 한번 뵙고 싶은데요.”
“같이 가자.”
“알겠습니다.”
“너도 그런 여자를 만나야 할텐데. 하긴 네놈은 감정이 무디어서.”
제가 말하고는 금방 제가 결론을 낸 조철봉이 혀를 찼다.
“무조건 여자한테 찌르려고만 하지 말고 감정을 느껴보란 말이다. 필이 통하면 섹스도 더 진해진다고 내가 몇번이나 말을 했지 않아?”
“노력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인내하고 기다리는 자세도 필요하단 말이다. 그러면 그 결과는 더 폭발적이야.”
“명심하겠습니다.”
갑중과 저녁을 마친 조철봉이 호텔방에 돌아왔을 때 곧 핸드폰이 울렸다. 핸드폰을 귀에 붙인 조철봉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주영의 전화였던 것이다.
“식사하셨어요?”
주영의 목소리는 밝았다.
“응, 그래. 넌 지금 어디에 있어?”
“부모님하고 같이 있어요.”
“어, 그래.”
“내일은 부모님하고 친척집에 다녀오려구요.”
“그래, 다녀와.”
“언제 오실거죠?”
“3일후에.”
“기다릴게요.”
“그래. 보고싶다.”
“저두요, 그럼.”
통화가 끝났을 때 조철봉은 쓴웃음을 지었다. 뭔가 미흡했고 아직도 서먹한 것은 곧 해소가 될 것이었다. 몸이 섞이고 나면 백발백중 풀리게 되는 것이다. 남녀관계는 육체적 결합이 가장 확실한 접근 방법이다. 조철봉의 경험에 의하면 그것은 남녀관계의 최종 단계이자 시작이었다. 샤워를 마친 조철봉이 가운 차림으로 소파에 앉았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옆방에서 갑중이 전화를 한 것이다.
“형님, 저녁 8시반밖에 안되었는데요.”
갑중이 불쑥 그렇게 말했으므로 조철봉은 입맛을 다셨다. 어디가서 한잔 하자는 것이다.
“인마, 그냥 자.”
전에는 이러지 않았다. 이것도 주영 때문이다.
조철봉과 최갑중이 옌지 공항에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사흘이 지난 오후 4시경이었다. 공항에는 김영만이 마중을 나와 있었으므로 그들은 차에 올라 시내로 향했다.
“음, 호텔로 가지.”
앞좌석에 앉은 김영만이 묻지는 못하고 흘끔거리자 조철봉이 말했다.
“우선 호텔에서 쉬고나서 일을 보겠어.”
그러자 김영만이 운전사에게 목적지를 지시하고는 마음을 놓은듯이 자세가 안정되었다. 그때 갑중이 흘끗 조철봉을 보았다.
“아니, 저택으로 가시지 그러세요? 전 호텔로 갈테니까요.”
갑중이 낮게 묻자 조철봉은 머리를 저었다.
“친척집에 간다고 했으니까 집이 비었을 거야.”
역시 낮게 대답한 조철봉이 헛기침을 하고는 김영만에게 말했다.
“백주영씨 한테 내가 도착했다고 연락해.”
“예, 사장님.”
그러자 갑중이 회사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으므로 조철봉은 마음이 편해졌다. 갑중과 함께 있으면 이렇게 어색한 분위기도 금방 바꿔지는 것이다. 호텔방에 도착한 조철봉이 샤워를 마치고 룸 서비스로 커피를 시켜 먹을때에 갑중이 방으로 찾아왔다. 오후 6시가 되어 있어서 저녁을 먹자고 온 것이다.
“그런데 형수씨는 지금 어디 계십니까?”
갑중이 물었는데 옌지에 따라온 가장 큰 이유가 조철봉이 만난 운명의 애인을 보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친척집에 간다고 했는데 곧 연락이 오겠지.”
그때 문에서 벨소리가 울렸으므로 갑중이 서둘러 나가 문을 열였다. 그러자 김영만이 들어섰다.
“사장님, 저.”
조철봉의 앞에 선 김영만이 단정한 모습으로 입을 열었다.
“백주영씨가 전화를 받지 않습니다. 핸드폰이 꺼져 있는데요.”
조철봉이 눈만 크게 떴고 김영만의 말이 이어졌다.
“집에 연락을 해봤더니 집에도 들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럼 저택에 있나?”
“아닙니다. 저택에는 어제 고용한 가정부 아줌마만 있습니다.”
“친척집에 간다고 했는데, 사흘전에 말이야.”
소파에 등을 붙인 조철봉이 얼굴을 펴고 웃어보였다.
“연락해봐, 난 여기서 기다릴테니까.”
“예, 사장님.”
김영만이 서둘러 몸을 돌리자 갑중이 일어서며 말했다.
“저도 잠깐 나갔다 오겠습니다.”
잠깐 나갔다 오겠다던 갑중이 다시 방에 들어섰을 때는 세시간쯤이 지난 밤 9시 경이었다. 소파에 기대 앉았다가 깜박 잠이 들었던 조철봉이 갑중과 영만을 번갈아 보았다. 갑중과 영만은 함께 들어온 것이다.
“어디 다녀온 거냐?”
조철봉이 묻자 갑중이 선채로 말했다.
“사장님, 백주영씨가 도망친 것 같습니다.”
퍼뜩 시선을 든 조철봉을 향해 갑중이 쏟아붓듯 말했다.
“미스터 김하고 같이 확인을 했더니 이틀전에 30만위안을 탄 후부터 종적을 감춘 것입니다. 그리고.”
헛기침을 한 갑중이 말을 이었다.
“홍경태가 어제 석방이 되었는데 그놈도 종적을 감췄습니다. 행여나 하고 그놈 뒷조사를 했더니 백주영이 공안 사무실로 찾아왔다고 공안이 말해주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조철봉이 눈을 떴을때는 8시반이 되어가고 있었다. 어젯밤 술을 마시지도 않았는데 늦잠을 잔 것이다. 9시가 조금 넘어서야 조철봉은 아래층 커피숍으로 내려가 오렌지주스를 마셨다. 입안이 써서 식욕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 계셨습니까?”
주스를 반쯤 마셨을 때 옆에서 최갑중의 목소리가 들리더니 웃음띤 얼굴이 드러났다. 앞쪽 자리에 앉은 갑중이 외면한 채 말했다.
“사업장에 가 보시겠습니까?”
“아니, 쉬겠어.”
“아아, 예.”
금방 대답한 갑중이 외면한 채 헛기침을 했다.
“조선족 한사람을 만나 백주영을 찾으라고 부탁했습니다. 찾는다면 백주영이 갖고 도망친 돈을 다 가져도 좋다고 했더니 눈에 불을 켜고 뛰어나갔습니다. 정보통이라니 곧 잡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조철봉이 눈을 치켜뜨고 갑중을 보았다.
“이 자식이 그냥.”
“아니 왜 그러십니까?”
갑중이 정색하고 조철봉을 보았다.
“그년을 잡아야 할 것 아닙니까?”
“누가 잡으랬어?”
“아니, 그럼 그냥 내버려 두시겠단 말입니까?”
“…”
“그런 배은망덕한 악질을.”
“누가 배은망덕했단 말이냐?”
이맛살을 찌푸린 조철봉이 물었다. 주위 좌석은 비어 있었지만 조철봉은 목소리를 더 낮췄다.
“걘 제 감정대로 행동한거다. 나도 내 기분대로 했고, 그러다가 서로 어긋난 것이지.”
“나아 참, 기가 막혀서.”
갑중도 호락호락 물러서지 않았다. 눈을 크게 뜬 갑중이 조철봉을 똑바로 보았다.
“형님 창피하시니까 그냥 덮어두시려는 마음은 다 이해합니다. 하지만 제 앞에서는 그러지 마십시오.”
“…”
“그보다 더한 창피도 당하셨지 않습니까? 제 앞에서요.”
“…”
“우선 잡고 보십시다. 잡아서 공안에 넘기지는 않더라도 돈 빼앗아서 두 연놈이 그 돈으로 행복하게 사는 꼴은 보지 마십시다.”
그러자 길게 숨을 뱉은 조철봉이 의자에 등을 붙였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갑중의 말 대답 하나하나가 가려운 곳을 긁어 주는 것처럼 시원했던 것이다. 조철봉에게 이렇게 대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갑중밖에 없다. 시선을 든 조철봉이 갑중을 보았다.
“여자가 언제부터 마음이 변했을까? 처음부터 도망갈 생각은 아니었을 것 아니냐?”
“홍경태가 공안에 잡힌 후겠지요. 그리고 손에 거금이 들어오고, 형님은 옆을 떠나 주셨으니 와락 흔들린 것이지요.”
갑중도 차분하게 말했다. 그도 주영의 변심에 대해서 연구한 것이 분명했다.
“홍경태에 대한 증오심 바닥에는 미련이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이란 참으로 치사한 것이지요.”
“너가 뭘 안다고.”
했다가 입을 다문 조철봉이 다시 길게 숨을 뱉었다.
“내 주제에 무슨 운명적 만남이 어쩌고 저쩌고 하다니 정말 부끄럽구나.”
조철봉은 입맛을 다셨다.
“병신이 육갑했어. 운명 좋아하네.”
(862)사랑을 위하여-1
조철봉에게 장점이 있다면 영양가 없는 일들은 금방 잊는다는 것이었다. 부끄러운 일, 타인에게서 받은 감상적 상처, 남에게 사기나 등을 쳤을 때의 죄책감 등은 얼른 지우고는 새 일을 시작해온 조철봉이다. 언제까지나 그런 일들을 머리에 담고 있다가는 아무 일도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날 오후 비행기로 베이징에 도착했다.
최갑중이 옌지에서 할 일이 있다고 해서 혼자 떠난 것이다. 물론 갑중이 할 일이란 뻔했다. 주도면밀하고 끈기가 강한 갑중은 돈을 더 들여서라도 백주영을 찾아낼 것이었다. 베이징에서 하룻밤을 자고 다음날 오후에 조철봉은 다시 호치민행 비행기에 올랐다. 호치민의 사업장에서 할 일도 있었지만 기분 전환이 주 목적이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수엔이 있다. 수엔은 호치민시 교외의 궁전같은 저택에서 살고 있었는데 순수했다. 순진하다는 표현도 맞을 것이다. 과거도 없고 그러니 홍경태같은 거머리도 붙지 않는다. 조철봉이 주영한테서 받은 상처는 수엔에 의해 치료가 될 것이었다. 영문도 모르는 수엔은 기뻐할 것이고 조철봉은 그 활기와 신선한 기운을 거미처럼 빨아들이고는 원기를 보충할 것이었다.
“제 자리가 그쪽인 것 같은데요.”
좌석에 앉은 조철봉이 안전벨트를 매고 있는데 다가선 여자가 말했다. 한국항공이어서 한국인 손님들이 많았고 여자도 한국인이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여자는 싱긋 웃었다.
“하지만 괜찮아요. 그냥 계세요.”
그러고는 통로쪽 자리에 앉았으므로 당황한 조철봉이 티켓을 다시 보았다. 여자 말대로 자리를 바꿔앉은 것이다. 여자가 창쪽 자리에 앉아야 맞다.
“아니, 바꿔드리지요.”
조철봉이 서둘러 일어섰다.
“내가 실수했습니다.”
“괜찮은데.”
“아닙니다. 어서.”
그래서 자리를 바꿔 앉았는데 그동안 조철봉은 여자가 30대이며 미모에 세련된 옷차림을 했고 특히 엉덩이의 곡선이 육감적이란 것까지 관찰했다. 이런 행운은 복권에 당첨되는 것만큼이나 힘든 것이다. 고속버스에서부터 열차, 비행기에 이르기까지 수백, 수천번의 옆자리 임자가 등장하지만 평생 동안 한번도 이런 경우를 겪지 못한 사람도 많다. 조철봉은 어느덧 백주영은 물론이고 곧 만날 수엔까지 다 잊었다. 베이징에서 호치민까지는 다섯시간 가까운 비행이다. 심호흡을 한 조철봉이 의자에 상반신을 기댔을 때 비행기는 힘차게 활주로를 달려가기 시작했다.
“호치민시는 자주 가세요?”
창에서 시선을 뗀 여자가 불쑥 물었으므로 조철봉은 상반신을 세웠다.
“예, 그런 셈이지요, 사업체가 있기 때문에.”
“어머, 그러세요.”
여자의 검은 눈동자가 똑바로 조철봉에게 향해졌다. 이지적이다. 많은 경험 덕분으로 조철봉은 몇마디만 나누면 여자의 수준을 안다. 혼자서 비행기 일등석을 탈만한 여자는 흔치 않은 것이다. 어떤 재벌은 근검 절약이 몸에 배어서 일반석을 애용한다지만 그것은 특별한 경우이다. 여유가 있으면 일등석을 타야 항공사 재정이 든든해지고 그래야 일반석 손님의 기내식 수준도 나아지는 것이다.
“저도 호치민시에서 사업을 하고 있는데.”
여자가 웃음띤 얼굴로 말하더니 앞에 꽂아놓은 손지갑에서 명함을 꺼내더니 내밀었다.
“전 송윤지라고 합니다.”
명함을 내려다본 조철봉은 여자가 무역회사 사장인 것을 알았다.
“예, 저는 조철봉입니다.”
조철봉도 저고리 윗주머니에 넣은 명함을 꺼내 내밀었는데 이것은 지나치는 사람용이었다. 그래서 서울의 오성자동차 사무실 전화만 적혀져 있을 뿐이다. 명함을 받아쥔 송윤지가 조철봉에게 물었다.
“자동차 관련 사업을 하세요?”
“예, 그런 셈이지요.”
“전 호치민시에서 인형 공장을 운영하고 있어요.”
“인형 공장을.”
“꽤 커요. 공원이 6백명이니까요.”
“크군요.”
“공장에서 생산된 제품은 모두 미주와 유럽으로 수출되지요. 돌비 브랜드라고 들어보셨어요?”
“그건 잘.”
“우리 회사 브랜드예요. OEM 방식이 아니라 모두 자체 브랜드로 수출이 됩니다. 연간 수출액이 2천만불 정도 되지요.”
“대단하군요.”
“조사장님도 호치민시에 공장을 운영하고 계신가요?”
“예. 저는 자동차 공장을.”
그러고는 조철봉이 눈만 끔벅였으므로 윤지가 머리를 끄덕였다. 굳이 말하고 싶지 않으면 그 정도로 되었다는 표시 같았다. 그러나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윤지가 자부심이 강하며 상당한 규모의 무역회사를 운영하는 사업가라는 것이 드러났다. 조철봉의 경험에 의하면 이런 부류의 여자들은 대부분 성생활이 활기롭지 못하다. 거의 잊고 살거나 한다고 해도 형식적이다. 성생활을 즐기는 여자는 보지 못한 것이다. 조철봉은 창문쪽을 보는 척하면서 시선끝에 윤지의 드러난 다리를 보았다. 매끄러운 무릎살 밑으로 두 다리는 탄력이 느껴졌다. 운동은 열심히 하고 있을 것이다.
골프는 물론이고 테니스, 수영, 요가까지 배우는지도 모른다. 이런 부류는 스트레스를 운동으로 푼다.
“호치민시에서 숙소는 어디로 정하셨습니까?”
조철봉이 묻자 윤지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자 귀염성 있는 얼굴이 되었다.
“공장안에 제 숙소가 있어요. 아주 편리하죠.”
“그렇군요.”
“조사장님은요?”
“저는 호텔 생활을 합니다.”
눈앞으로 저택에서 기다리고 있는 수엔의 모습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오늘 저녁에 제가 묵는 호텔에서 식사나 같이 하실까요?”
조철봉이 정색하고 물었다. 조금 더 기다렸다가 할 수도 있었지만 윤지의 귀염성 있는 얼굴을 보자 불쑥 말이 뱉어진 것이다. 그러자 윤지가 금방 머리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런데 어느 호텔에 묵으세요?”
“옴니 사이공.”
“그곳 식당이 괜찮죠.”
윤지가 웃음띤 얼굴로 조철봉을 보았다.
“그런데 조사장님은 결혼하셨어요?’
“예, 했습니다. 그런데.”
정색한 조철봉이 윤지를 똑바로 보았다.
“지금은 혼자 삽니다.”
“그럼.”
말을 멈춘 윤지가 시선을 들었다가 내렸다. 긴 속눈썹은 인조가 아니었다. 윤지는 이유를 묻고 있는 것이다. 조철봉이 차분하게 말했다.
“3년전에 와이프가 교통사고로 죽었지요. 그래서.”
놀라 머리를 든 윤지의 얼굴을 보면서 조철봉은 심호흡을 했다. 서경윤은 여러 번 죽었다.
“그런데 송사장님은? 결혼하셨습니까?”
이번에는 조철봉이 묻자 윤지는 머리를 저었다.
“전 미혼인데요.”
“아, 그렇군요.”
“사업에 바빠서요.”
비행기는 이제 3만피트 상공에 올라 그냥 떠 있는듯이 항진하고 있었다. 윤지는 아직 조금 전의 놀람이 가시지 않은듯 조철봉을 똑바로 보지 않았다. 교통사고에 대해서 더 듣고 싶은 눈치였지만 차마 물어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조철봉은 의자에 등을 붙이고는 조금 뜸을 들였다. 교통사고는 가장 흔한 사고여서 영화나 소설에도 너무 자주 사연으로 쓰인다. 그래서 튀지는 않지만 신빙성이 있어 보이는 것이다. 조철봉이 입을 열었다.
“그때 와이프는 임신 중이었지요. 나하고 만나려고 회사로 오는 길이었습니다.”
윤지가 숨을 죽였고 조철봉은 짧게 말을 맺었다. 길면 감동이 줄어드는 것이다.
“트럭하고 충돌했지요. 졸음 운전을 하던 트럭 운전사가 중앙선을 침범한 겁니다.”
“어머나.”
“뭐, 흔한 사고였습니다.”
“아니, 세상에.”
“그런데 그 회사는 송사장이 세우신 겁니까?”
슬쩍 화제를 바꾸는 것도 감동을 진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 진이 다 빠질 때까지 사고 이야기를 하면 뒷맛이 찝찝해지는 것이다. 그러자 퍼뜩 시선을 든 윤지가 정신이 난듯이 대답했다.
“아뇨, 아버지한테서 물려 받았어요. 제가 운영한지는 5년째가 됩니다.”
“그렇군요.”
“제가 설립할 정도로 유능하진 못해요. 회사는 25년전에 아버지가 설립하셨어요.”
“아하.”
“제가 무남독녀이기 때문에 물려 받은 거죠. 하지만 5년전과 비교하면 매출액이 두배로 늘어났습니다.”
“유능하십니다.”
“시간 여유가 있으시면 제 공장을 구경 시켜 드릴게요. 시내에서 차로 40분 거리에 있거든요.”
“그럼 구경시켜 주시지요.”
그러고는 조철봉이 안쪽 주머니에서 다른 명함을 꺼내 건네었다.
“여기 호치민시에 있는 내 회사 주소하고 전화번호입니다.”
이것은 곧 조철봉이 정식으로 작업을 하겠다는 표시였으나 윤지는 알리가 없다.
“어머.”
명함을 들여다본 윤지가 감탄했다.
“운송회사까지 경영하고 계시네요.”
“나도 송사장님한테 회사 구경을 시켜 드리지요.”
“보여주세요.”
윤지의 눈빛에 교태가 섞여졌다. 이 정도의 눈빛이면 작업은 반이상 성공했다고 봐도 될 것이다. 비행기가 호치민시에 도착했을 때는 저녁 6시경이었는데 공항에는 양쪽 회사의 직원들이 차를 갖고 마중나와 있었다.
“그럼 호텔에서 만나기로 하지요.”
입국 대합실에서 조철봉이 말하자 윤지가 웃었다.
“그렇게 해야겠네요. 마중나온 직원하고 할 이야기도 있어서요.”
다섯시간동안 친숙해진터라 회사 직원이 옆에 없었다면 손이라도 잡을 것같은 태도였다. 조철봉은 차에 올라 호텔로 향했다. 마중나온 회사 직원이 보고를 했지만 건성으로 들으며 머리만 끄덕였다. 백주영을 만났을 때 운명을 찾았지만 지금 송윤지의 경우에는 작업만 떠올리고 있다. 차라리 지금이 개운했다.
송윤지가 호텔 식당에 들어섰을 때는 저녁 8시반이 되어갈 무렵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자리에서 일어선 조철봉이 눈을 둥그렇게 뜨고 놀란 표정을 해보였다. 윤지는 은색의 실크드레스 차림이었는데 잘 어울렸고 날씬한 몸매의 곡선이 그대로 드러났다.
“잘 어울리십니다.”
조철봉이 감탄한 표정으로 말했다.
“마치 온몸에서 빛이 나는 것 같습니다.”
“칭찬 고맙습니다.”
윤지가 자리에 앉으면서 환하게 웃었다.
“몇개 안되는 즐거움 중의 하나가 바로 그런 칭찬을 받을 때 거든요.”
“성적 매력이 풍긴다고 해도 기분 나쁘지는 않으시겠지요?”
“분위기에 따라서 느낌이 달라지더군요. 요즘은 그런 말이 칭찬이라고 해도 어쩐지 어색해요.”
“대단한 성적 매력이 있습니다.”
그러자 윤지가 시선을 내리고는 웃었다.
“이제 그만요.”
마침 종업원이 주문을 받으려고 다가왔으므로 그들은 말은 그쳤다. 한식당이어서 종업원은 한국어로 주문을 받고 돌아갔다. 조철봉의 수준쯤 되면 여자의 눈빛만 봐도 진전 가능성을 체크할 수가 있고 십중팔구는 맞아 떨어진다. 확률이 8할 내지는 9할인 것이다.
“송사장은 운명을 믿으십니까?”
조철봉이 묻자 윤지가 정색했다.
“운명요?”
“예, 운명. 이를테면 남녀의 만남이나 이별이 이미 정해져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글쎄요.”
윤지가 심각한 표정으로 머리를 기울였다. 난데없는 질문이었지만 조철봉의 무거운 분위기에 끌려들어가기는 했다.
“갑자기 왜 그런.”
조심스럽게 윤지가 물었을 때 조철봉이 심호흡을 했다.
“난 지금 중국 옌지에서 오는 길이죠. 그런데 그곳에서 우연히 여자 하나를 알게 되었어요.”
“….”
“중학교 교사였는데 처음 본 순간에 가슴이 내려앉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어디선가 많이 만났던 것 같고 그것이 전생에서 인연을 맺었기 때문이라고 믿어지더군요.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겁니다.”
윤지는 진지한 표정으로 조철봉을 본 채 입을 열지 않았다. 다시 심호흡을 한 조철봉이 말을 이었다.
“그 여자도 내 분위기에 휩쓸려든 것 같이 느껴졌지요. 그런데.”
엽차잔을 들어 한모금을 삼킨 조철봉이 쓴웃음을 지었다.
“마지막 단계에서 난 도망쳐 나온 겁니다. 그 여자하고 더 깊은 관계가 되기 전에 말이지요.”
조철봉이 호기심으로 눈을 크게 뜬 윤지를 향해 다시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겁이 났기 때문입니다. 또다시 상처를 입을까봐 겁이 났지요. 차라리 가볍게 만나 즐기고 헤어지는 관계가 낫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비겁한 수작이지만 한번 상처를 받으면 본능적인 방어 행위가 일어나는 것 같습니다.”
조철봉은 눈을 가늘게 뜨고 윤지 머리 뒤쪽의 벽을 보았다. 새빨간 거짓말이었지만 사기꾼은 모든 경험을 이용할 줄 알아야 한다. 백주영한테 뒤통수를 맞고 시쳇말로 발가벗겨져서 도망쳐 나오는 길이라고 누가 알겠는가? 괜찮은 소재인 것이다.
“그렇다면.”
송윤지가 시선을 들고 조철봉을 보았다. 윤지의 눈동자는 짙은 갈색이었다.
“그 여자분은 지금.”
“기다리겠지요.”
의자에 등을 붙인 조철봉이 한숨과 함께 말을 이었다.
“가슴이 떨려서 떠난다는 말도 못했습니다. 그 여자의 목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흔들릴 것 같아서요.”
“아무리 그래도.”
“겪어보지 않으면, 아니, 아무도 내 지금 심정을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조철봉이 처연한 표정으로 윤지를 보았다.
“만나서 사랑하고, 그리고 또 갈라서는 아픔을 겪기가 겁이 나는 겁니다.”
그러고는 조철봉이 다시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같은 일을 두번 겪을 수는 없지요.”
“그래요.”
머리를 천천히 끄덕이며 윤지가 식탁에 시선을 준 채로 말했다.
“이해할 수 있어요.”
그때 음식이 나왔으므로 조철봉은 소리죽여 숨을 뱉었다. 이만하면 분위기는 되었다. 이제 너무 무겁게만 이끌지 않으면 윤지는 경계심을 풀고 따라줄 것이었다. 주방장이 한국 출신인 모양으로 한정식 요리는 한국에서 차려낸 것보다 더 맛이 있었고 젓갈도 세종류나 되었다. 한동안 잠자코 식사를 하던 윤지가 입을 열었다.
“저도 이 나이가 되도록 남자와의 사연이 없다면 비정상인이 되겠죠.”
국을 한모금 삼킨 윤지가 말을 이었다.
“남자가 있었어요. 그것도 3년 동안이나 같이 지냈던 남자.”
머리를 든 윤지가 조철봉의 표정을 보더니 희미하게 웃었다.
“제 나이가 몇으로 보이세요?”
“20대 후반정도.”
그렇게 말은 했지만 여자를 많이 겪은 조철봉은 윤지를 30대 초반쯤의 나이로 짐작하고 있었다.
“아녜요, 서른셋이에요.”
조철봉의 말을 들은 윤지가 웃음띤 얼굴로 말했다.
“그 남자하고는 2년전에 헤어졌지요. 그런데 그 남자가 지금 어디 있는지 아세요?”
그러더니 윤지가 금방 제 말에 제가 대답했다.
“이곳 호치민시에서 여행사를 하고 있어요. 한국인을 상대로 하는 선물가게도 한 곳 운영하고 있고.”
“…”
“그리고 지금도 나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지요. 아마 오늘 내가 도착한 것도 알고 있을테니까 전화를 해오겠지요.”
“…”
“사기꾼이에요. 그것도 전과 3범. 사문서 위조 1번, 사기 1번, 횡령 1번, 그래서 모두 3년반동안 교도소 생활을 했죠. 거짓말을 밥먹듯이 하지만 막상 들으면 진실같이 느껴져요. 그러니까 사기꾼이죠.”
“…”
“숨을 쉬는 것까지 거짓으로 느껴지더군요. 도무지 진심이 없는 인간 같았고, 그래서 헤어졌어요.”
어깨를 늘어뜨린 윤지가 가늘게 숨을 뱉었다.
“처음 만났을 때는, 아니 만나고 3년이 될동안 난 감쪽 같이 속았던 것이죠. 학력, 경력, 가족관계, 그리고 나에 대한 감정까지.”
조철봉은 눈을 가늘게 뜨고 앞쪽 벽을 다시 보았다. 어떤 놈인지는 모르지만 참으로 병신이었다. 들통나면 병신이다.
“정말 사람은 겪어봐야 안다는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조철봉이 정색하고 말했다.
“그동안 마음 고생을 많이 하신 것 같군요.”
송윤지가 지적한 한마디 한마디가 꼭 자신에게 퍼붓던 서경윤의 대사와 너무나 흡사해서 잠깐 지금 서경윤과 마주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착각했던 조철봉이다. 물론 이놈은 더 추잡하고 더 바닥까지 간 놈이긴 했다.
전과 3범으로 기록되어 교도소 생활을 세번이나 했다니 기록이 깨끗한 자신과는 외견상 천양지차가 난다. 심호흡을 한 조철봉이 곁눈으로 윤지를 보았다. 조금 전부터 전의가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었는데 그것은 곧 색욕으로 연결되었다. 진심으로 투정하는 이 욕구불만 덩어리를 잔인하게 눌러 터뜨리고 싶은 충동으로 목까지 메어온 것이다. 열락의 소용돌이에 던져 넣고 터질 듯한 신음을 뱉으며 매달리는 꼴을 봐야만 후련해질 것 같았다.
“난 그날 이후로 여자를 가까이 한 적이 없습니다.”
조철봉이 시선을 내린 채 말했다.
“내 모든 것이 그날 여자와 함께 떠나갔지요. 그래서 난 지금 허깨비나 다름없는 인간입니다.”
빌어먹을, 조철봉은 속으로 투덜거렸다. 신은 역시 전능하시다. 이 여자에게 똑같은 솜씨를 부딪치게 한 것을 봐도 그렇다. 숨을 쉬는 것까지 거짓으로 느껴진다니, 그말은 서경윤이 했던 말과 억양까지 똑같았다. 윤지의 시선을 받은 조철봉이 잇새로 말했다.
“왜 죽고 나서야 소중함을 깨닫게 될까요? 왜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그렇게 그리워질까요?”
그순간 두줄기의 눈물이 조철봉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머리를 들면서 조철봉이 손등으로 눈을 씻었다.
“미안합니다. 추태를 보여서.”
“아녜요, 전.”
가늘게 숨을 뱉은 윤지가 낮게 말했다.
“그분을 사랑하셨군요.”
“글쎄, 사라지고 나서야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더라니까요.”
눈물로 가득찬 눈으로 조철봉이 웃어보였다.
“이렇게 넋두리를 하는 것도 처음입니다.”
“저는 감동했어요.”
“갑자기 진심을 이야기하시는 바람에 와락 가슴이 답답해져서.”
길게 숨을 뱉은 조철봉이 말을 이었다.
“그 남자분은 현명하신 것 같습니다. 그렇게 처신하시면 최소한 당사자가 상처를 받지는 않겠지요.”
윤지의 시선을 받은 조철봉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난 그후로 사업에만 몰두했지요. 그래서 어느 정도 기반은 굳혔습니다.”
“그러시군요.”
머리를 끄덕인 윤지가 부드럽게 말했다.
“이제 조사장님 분위기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렇습니까?”
“저도 그 남자와 헤어지고 나서 2년동안 남자 근처에도 가지 않았어요. 남자라면 진절머리가 났지요.”
“…”
“이런 분위기를 만든 것도 2년만에 처음이에요.”
“영광입니다.”
조철봉은 손목시계를 보는 시늉을 했다. 이 여자는 나이트에서 만난 상대하고 같은 방법으로 작업할 수가 없는 것이다. 뜸을 들여야 한다. 감동을 시켜야 되고 믿음을 주어야 하는 것이다. 고진감래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기다렸다가 먹는 감이 맛있다는 말인가?
그날 저녁 조철봉은 송윤지와 식사를 마치고 나서 헤어졌다. 조금도 미련을 보이지 않은 채 돌아선 것이다. 그러고는 호텔방으로 돌아와 최갑중에게 전화를 했다. 옌지에 있던 갑중은 조철봉의 전화를 받더니 묻지도 않았는데 보고부터 했다.
“찾을것 같습니다. 고선생한테서 내일중으로 좋은 소식이 있을 것이라는 연락이 왔거든요.”
조철봉이 가만히 있었지만 갑중은 말을 이었다.
“두연놈이 베이징으로 튄겁니다. 하지만 튀어야 벼룩이죠. 고선생이 꼬리를 잡은 것 같습니다.”
가만두면 ‘기뻐해 주십시오’라는 말이 나올것 같았으므로 조철봉은 헛기침을 해서 갑중의 말을 잘랐다.
“네가 조사할 일이 있어.”
그러자 갑중이 의아한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여자 문제다.”
“아아, 예.”
갑중에게 송윤지의 명함에 적힌 회사주소와 전화번호를 불러준 조철봉이 사무적인 분위기로 말했다.
“가족 관계에서부터 사생활까지 조사하도록. 내일 오후에 결과를 듣고 싶다.”
“내일 오후라면 바쁘겠는데요” 했다가 갑중이 곧 말을 이었다.
“알겠습니다. 지금 즉시 서울에 연락을 하지요.”
갑중은 무슨일 때문이냐고 묻지 않는다. 전화기를 내려놓은 조철봉은 소파에 등을 붙이면서 풀썩 웃었다. 두번 다시 백주영 사건과 같은 실수는 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운명이네 뭐네 하면서 감상에 들뜨는 바람에 개망신을 당해버렸다. 그러나 그 사건에서 얻은 교훈도 있다. 기회는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기회가 왔을 때 가차없이 작업을 하되 사전 준비는 완벽해야 한다. 다음날 오후 5시가 되었을 때 갑중의 전화가 왔다. 비용은 많이 들었겠지만 갑중이 의뢰한 정보회사는 언제나 만족할만한 자료를 보내는 것이다.
“송윤지는 호적상 미혼입니다.”
먼저 갑중이 제일 중요한 부분부터 보고를 했다.
“하지만 남자가 있었지요. 3년쯤 같이 지냈는데 2년전에 헤어졌습니다.”
맞다. 심호흡을 한 조철봉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때 갑중의 말이 이어졌다.
“그런데 그 놈씨가 호치민시에 있군요. 송윤지씨 공장도 그곳에 있고 말입니다.”
“그렇게 말하더군.”
“송윤지는 무남독녀이고 그 회사의 실질적인 사주입니다.”
“그것도 맞아.”
“그 놈씨가 호치민시에서 여행사와 선물가게를 운영하고 있다는군요.”
“정확하군.”
“그런데 말입니다.”
“그 놈씨의 경력이 화려하지?”
조철봉이 미리 갑중이 할 말을 앞질러 말했다. 얼굴에 웃음기가 떠올라 있었다.
“그 놈씨가 전과 3범 아니냐? 사문서 위조, 사기, 횡령을 각각 한번씩 말이다. 맞지?”
“예?”
놀란듯 갑중이 볼멘 목소리로 묻자 조철봉이 풀썩 웃었다.
“모두 합쳐서 3년반을 교도소에서 살았고, 그렇지?”
“아니, 형님.”
수화기에서 입맛 다시는 소리가 들리더니 갑중이 말했다.
“교도소에서 산 건 송윤지라고요. 전과 3범도 송윤지가 맞습니다.”
그 순간 조철봉은 눈을 껌벅이며 앞쪽의 벽을 보았다. 분위기를 알아챈 갑중도 입을 다물었으므로 그들은 한동안 전화기를 귀에 붙이고만 있었다. 이윽고 조철봉이 입을 열었다.
“계속해 봐.”
“예, 형님.”
갑중이 긴장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송윤지 회사의 직원과 가정부, 친구한테서 모은 정보입니다. 송윤지는 지난달에 혼인빙자간음 혐의로 서동규란 자를 고발했다가 2억을 받고 합의를 했습니다. 그것은 고소장이 접수된 경우라 파악이 되었는데 친구 이야기를 들으니까 그런 경우가 셀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
“가정부 말을 들으면 송윤지 성격이 독하고 인정머리가 없어서 일년에 서너명씩 가정부가 바뀐다는군요.”
“…”
“그런데 형님.”
“왜?”
“괜찮으시죠?”
“건드리지 않았으니까 신경꺼.”
“알았습니다.”
마음을 놓은듯 갑중의 말소리에 여유가 띠어졌다.
“그리고 그곳 호치민시에 있는 놈씨 말인데요.”
“왜?”
“그놈은 계속해서 송윤지의 밥이 되고 있더군요. 헤어진지 2년이 되었어도 송윤지는 자주 돈을 뜯어내고 있습니다.”
“…”
“결혼해서 돌이 된 아들하고 세 식구가 호치민시에서 살고 있는데 송윤지가 찾아가 공갈 협박을 한다는 겁니다. 놈씨가 마음이 약해서 당하고만 있다는데요.”
“병신.”
“어떻게 그런 여자를 알게 되셨습니까?”
마침내 갑중이 그렇게 묻자 조철봉은 입맛을 다셨다.
“비행기 안에서.”
“조심하십시오.”
“그래서 내가 조사를 시킨 것 아니냐?”
“제가 이곳 일은 수시로 보고드리겠습니다.”
“알았어, 수고해라.”
전화기를 내려놓은 조철봉은 길게 심호흡을 했다. 그러고는 문득 요즘은 일이 잘 풀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새옹지마다. 나쁜일이 일어나면 틀림없이 다음에는 좋은일이 온다. 나쁜일은 좋은일이 일어나도록 액땜용으로 발생한 것이다. 그날 저녁, 조철봉은 마키와 함께 국제여행사의 사무실로 들어섰다. 시내 중심가에 위치하고 있었지만 국제여행사는 10평쯤 되는 사무실에 현지인 직원 둘이 앉아있을 뿐 한산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현지인 여직원이 묻자 조철봉은 사무실을 둘러보는 시늉을 했다.
“사장님은?”
“잠깐 옆쪽 가게에 가셨는데요.”
여직원이 서툰 한국어로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누가 찾아 오셨다고 전할까요?”
“손님이라고 전해요.”
사무실을 나간 여직원이 일분도 되지 않아서 한 사내와 함께 들어섰다.
“안녕하십니까?”
먼저 조철봉을 향해 머리를 숙여보인 사내는 장신에 미남형의 용모였다. 흰 얼굴에 이목구비가 섬세했고 웃음띤 얼굴은 매력적이다.
“아, 처음 뵙습니다.”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한 조철봉이 소파에 다시 앉았을 때 은근한 시선으로 사내를 보았다.
“사업은 잘 되십니까?”
“네, 그런데.”
어설프게 대답한 사내가 조철봉에게 물었다.
“무슨 일로 오셨는지요?”
“송윤지씨에 대한 일인데요.”
정색한 조철봉이 주위를 둘러보는 시늉을 했다.
“어디 조용한 곳에 가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러지요.”
이미 송윤지의 이름을 들은 순간부터 얼굴이 하얗게 굳은 오정구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사내의 이름은 오정구, 나이는 38세이며 고향은 충청북도 영동이다. 갑중이 오후에 팩스로 다시 자세한 내용을 보내온 것이다. 조철봉과 오정구는 사무실 옆쪽의 조그만 가게에서 둘이서 마주 앉았는데 마키는 여행사에 남았다. 정구의 시선을 받은 조철봉이 물었다.
“요즘 송윤지씨는 자주 만나십니까?”
“그건 왜 물으십니까?”
경계하는 표정으로 정구가 반문했으므로 조철봉은 쓴웃음을 지었다.
“알고 계신지 모르지만 난 지난달에 송윤지한테 혼빙간음 혐의로 고발당해서 2억을 주고 합의한 서동규란 놈의 형님됩니다.”
그러자 정구가 놀란듯 눈과 입을 동시에 딱 벌렸다. 정구의 표정을 주시하면서 조철봉이 말을 이었다.
“처음부터 계획적인 함정에 빠진 것이지요. 알고 계시는지 모르겠네.”
“내가 어떻게 그 일을 알겠습니까?”
금방 얼굴이 붉게 상기된 정구가 다시 반문하더니 머리를 저었다.
“난 금시 초문입니다.”
“듣기로는 전남편으로 송윤지하고 자주 만나는 사이라던데요.”
“아니, 그런.”
“그래서 이곳 호치민시에서도 같이 사업을 하시는 것 아닙니까?”
“그건 오해입니다.”
목이 탔는지 물잔을 들어 서너모금을 삼키고 난 정구가 헛기침을 하고 말했다.
“난 그 여자하고 결혼한 것도 아닙니다. 몇년 사귀다가 이곳으로 온 것인데 그 여자가 물귀신처럼 따라온 것이지요.”
“그래요?”
조철봉이 머리를 비틀어 보이자 정구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아주 지독한 여자라고요. 지금도 날 괴롭히고 있단 말입니다. 결혼해서 아이까지 낳고 사는 나를 말입니다.”
“이건 도무지, 들은 말하고는 전혀 딴판인데.”
입맛을 다신 조철봉이 정색하고 정구를 보았다.
“내가 그 여자한테서 듣기로는 오형이 그 여자를 계속해서 괴롭히고 돈을 뜯어간다던데, 오형이 전과 3범이라고도 했습니다. 그래서 배후에 오형이 있다고 과시하는 상황이었단 말이오.”
그러자 정구가 이를 악물었고 조철봉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 여자가 오형을 괴롭힌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이해가 안갑니다. 이곳 호치민시에서 그런 일을 처리하는 것은 쉬운데 말이오.”
조철봉이 눈을 가늘게 뜨고 말을 이었다.
“호치민시의 해결사 조직한테 돈 몇푼만 쥐어주면 그런 일은 금방 처리가 된단 말입니다. 오형 말을 믿을 수가 없어요.”
“정말 그런 조직을 알고 계신다면 소개시켜 주십시오. 이젠 진절머리가 납니다. 아니, 끔찍합니다.”
정구가 번들거리는 눈으로 조철봉을 보며 말을 이었다.
“해결하는데 얼마나 듭니까? 그리고 뒤탈은 없겠지요?”
“이건 도무지.”
입맛을 다신 조철봉이 굳어진 얼굴로 정구를 보았다.
“어느쪽 말을 믿어야할지 정신이 멍해지는구만 그래.”
“내가 오죽하면 베트남 해결사를 산다고 했겠습니까? 그 여자는 지구상에서 없어져야할 악질입니다.”
“내가 오형을 만나러 온 이유를 알고 계시지요?”
“압니다.”
머리를 끄덕인 정구가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
“내가 그 여자 뒤에서 사주한 놈인줄 알고 오신거죠.”
“그 여자가 그렇게 소문을 냈기 때문인데.”
“내가 그럴만한 놈으로 보입니까?”
“그 여자 한테서 오늘 전화가 왔습니다.”
이를 악문 정구의 말이 이어졌다.
“내일 밤에 만나자고 하더군요. 나오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어떻게 가만두지 않겠다는 겁니까?”
“그 여자 회사에 행동대 노릇을 하는 한국 건달들이 몇놈 있습니다. 한국에서 사고를 치고 도망왔다고 소문이 난 놈들인데 흉악한 놈들이지요.”
“그래서요?”
“그놈들이 행패를 부립니다. 어떻게 기관에 손을 썼는지 신고를 해도 유야무야 돼버리는 바람에 그놈들 세상이 되어있지요.”
“그 여자가 그놈들을 믿고 그러는건가?”
“이곳에서도 그 여자가 만든 함정에 빠져서 큰돈을 뜯긴 한국사람이 있어요. 내가 알기로도 두명이 있는데 아마 더 있을지 모릅니다.”
정구가 열기띤 눈으로 조철봉을 보았다.
“그래서 이곳의 한국인들 한테는 그여자가 살모사라는 소문이 났습니다. 한번 알아보세요.”
“그래요?”
그제서야 조금 믿음성이 간다는듯이 조철봉이 정색하고 머리를 끄덕였다.
“하마터면 실수할 뻔했는데.”
“베트남을 잘 알고 계십니까?”
정구가 묻자 조철봉은 쓴웃음을 지었다. 운송회사 명함을 보여주면 정구는 깜짝 놀랄 것이었다.
“예, 조금 아는 편이지요.”
“이곳에 오래 있는 사람치고 그 여자를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의자에 등을 붙인 조철봉은 다시 머리를 끄덕였다. 이제 송윤지의 진면목은 완전히 드러났다. 이곳의 한국인들 한테도 소문이 나서 사업을 할 수가 없었으므로 뜨내기나 초짜를 목표로 정했을 것이었다.
“이거, 따지러 왔다가 머리만 어지럽군.”
입맛을 다신 조철봉이 손목시계를 보는 시늉을 했을때 정구가 바짝 다가앉았다.
“저, 아까 말씀하셨는데, 해결사 조직을 잘 아십니까?”
조철봉이 머리만 끄덕이자 정구는 침을 삼켰다.
“아까 제가 한 말은 진심입니다. 오늘밤에도 그 여자를 만나주지 않으면 그놈들 행패를 부릴겁니다.”
“… …”
“얼마를 내면 되겠습니까?”
그러자 조철봉이 똑바로 정구를 보았다.
“얼마를 내다니요?”
“그 여자를 없애 버리는데 말입니다.”
“없애 버린다. 그러면.”
심호흡을 한 조철봉이 다시 물었다.
“죽인다는 말인가요?”
“예, 지구상에서 없애야 할 여자라니까요.”
그 순간 조철봉은 숨을 삼켰다. 그것은 정구의 두 눈에 가득 물기가 고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30분 쯤이 지난 저녁 7시경에 조철봉은 오정구와 함께 근처의 클럽 밀실에 앉아 있었는데 앞에는 술과 안주가 놓여 있었다.
“서형 입장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내가 이렇게 당하고 있으니까요.”
위스키를 연거푸 석잔을 마시더니 정구가 입을 열었다. 정구는 조철봉을 서동규의 형으로 알고 있는 것이다.
“나도 처음부터 혼인빙자로 끌려 들어갔지요. 그렇게 3년을 시달리다가 2억원을 주고 겨우 그 여자하고 합의를 했는데 이곳까지 따라온 겁니다.”
“글쎄 난 이해를 못하겠는데.”
머리를 기울인 조철봉이 정구를 보았다.
“그렇게 호구처럼 당한다는 것이 말이요.”
“당해보지 않으면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쓴웃음을 지은 정구가 길게 숨을 뱉었다.
“끈질겨요. 하루에도 백번이 넘게 전화를 합니다. 그놈들을 시켜 마누라 자동차를 부수고 집에 돌을 던져서 위협을 합니다. 우리는 열번도 넘게 신고를 했지만 오히려 우리가 미친놈 취급만 받았습니다.”
정구의 두 눈이 다시 번들거렸다. 위스키를 다시 한잔 삼킨 정구의 말이 이어졌다.
“다른 남자들도 거의 똑같이 당했을 겁니다. 거머리처럼 달라붙어서 독하게 나오면 당할 장사가 없죠.”
“흥.”
“그 여자하고 이곳 인형공장에서 동거하는 남자가 있지요. 그놈을 한번 보았는데 폭력배가 분명합니다. 그 여자의 행동대들도 아마 그놈의 부하인 것 같습니다.”
“….”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공갈단이지요. 한번 걸리면 끝장입니다.”
그러고는 정구가 조철봉을 정색하고 보았다.
“아까 말씀하신 해결사 말인데요. 소개시켜 주십시오. 급합니다.”
정구가 탁자 위로 몸을 굽혔다.
“이렇게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습니다.”
간절한 표정이었다. 조철봉은 소리죽여 숨을 뱉었다. 한박자 늦추고 최갑중에게 송윤지의 뒷조사를 시켰으니 망정이지 그냥 일을 저질렀다면 시끄럽게 될 뻔했던 것이다. 옌지에서 백주영에게 당한 상처가 아직 아물지도 않은 상황이다. 다음날 오후 2시경이 되었을 때 사무실로 마키가 들어섰다. 마키는 어제 오정구를 만나러 함께 갔으므로 대충 내막은 안다. 그러나 마키의 동생 수엔이 조철봉의 현지처 노릇을 하고 있는 터라 송윤지에게 딴마음을 먹었다면 어제 동행하지도 않았다.
“송윤지는 단독주택에서 한국 남자하고 같이 살고 있습니다.”
마키가 보고했다. 그는 송윤지의 이곳 생활을 조사하고 온 것이다. 옛 사이공인 호치민시에서 태어나 자란 마키인터라 이곳 물정을 훤하게 안다. 마키가 말을 이었다.
“한국 남자 5명이 100미터쯤 떨어진 주택에서 단체로 살고 있는데 송윤지하고 같이 살고 있는 남자의 부하인 것 같습니다.”
“그놈이 이곳 관리들하고 친한 것 같던데, 알아 보았어?”
“그럴리가 없습니다. 그쪽 지역 경찰 간부나 실무자들은 그자들을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놈들이 한국인들만을 상대로 행패를 부렸기 때문인가?”
“신고를 안하면 모를 수도 있습니다. 사장님.”
그리고 마키가 힐끗 조철봉의 눈치를 보았다.
“약점을 잡히고 있다면 신고했다가 더 골치아파질 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아름다워요.”
목걸이를 쥔 수엔이 활짝 웃는 얼굴로 조철봉을 보았다.
“이런 보석은 처음 보았어요.”
백금에 다이아몬드가 박힌 목걸이는 조철봉이 중국에서 사온 것이다. 더 비싼 제품도 있었지만 5천달러 짜리를 산 것인데 수엔이 좋아하는 모습을 보자 조철봉은 후회가 되었다.
“다음에는 더 좋은 것으로 사주지.”
“아녜요, 이제 그만요.”
이제는 한국어에 익숙한 수엔이 질색을 하고는 손까지 저었다.
“사주신 것만 해도 너무 많아요.”
그러나 4백, 5백달러 짜리가 대부분이고 이번에 산 목걸이가 제일 비싼 보석이다. 조철봉은 침실의 소파에 온몸을 파묻고 앉아 수엔을 보았다. 수엔은 목걸이를 목에 걸고 거울에 비쳐보는 중이었다. 크림색 실크 잠옷을 걸친 수엔의 날씬한 몸매가 바로 눈앞에 펼쳐져 있었으므로 조철봉은 입안에 고인 침을 삼켰다. 수엔은 언제 봐도 새롭게 느껴졌고 침실에서는 점점 무르익은 몸이 되어간다. 조철봉의 시선을 의식한 수엔의 표정이 긴장되어가고 있었다. 호치민시에 도착한 지 오늘로 사흘째가 되었지만 수엔이 기다리는 저택에는 처음 온 것이다. 그것은 송윤지에 대한 작업 때문이었지만 수엔한테는 사업 관계로 호텔에 있어야 한다고 거짓말을 했다.
“수엔.”
조철봉이 낮게 부르자 수엔이 경대 앞에서 몸을 돌려 앉았다. 두볼이 조금 상기되었고 기대에 찬 두눈이 반짝였다. 제일 아름다운 순간이다. 두 몸이 합쳐지기를 기대하는 사랑스러운 여자의 눈빛처럼 아름다운 것은 없다. 조철봉은 수엔의 시선을 받자 심호흡을 했다.
“수엔, 나는 이곳에 오래 있지 못해. 한달에 한번정도, 이삼일 머물다가 가는 것이 고작이야.”
수엔의 실크 가운의 가슴 부분이 깊게 파여 있어서 양쪽 젖가슴의 절반 가량이 드러났다. 전에는 수엔의 옷차림이 그렇지 않았다. 조철봉의 시선을 의식한 수엔이 가운의 가슴 부분을 여미었지만 부질없는 동작이었다. 그러자 옷이 몸에 밀착되면서 어깨와 허리의 곡선이 드러났다. 조철봉이 말을 이었다.
“수엔, 네가 떠나고 싶다면 언제든지 보내줄테다. 그리고 네가 평생 여유있게 살 만큼의 몫을 떼어주마.”
그순간 수엔이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조철봉의 앞으로 바짝 다가섰다. 수엔의 가슴이 조철봉의 얼굴에 닿았으므로 향내와 함께 체취가 전해져 왔다. 그리고 부드러운 젖가슴의 촉감이 얼굴에 느껴졌다.
“싫어요.”
조철봉의 머리를 두팔로 감싸안은 수엔이 부드럽게 말했다.
“일년에 하루라도 좋아요. 그럼 그 순간이 더 기쁘고 중요할 테니까요.”
수엔의 한국어는 유창했고 조금도 어색하지 않았다. 수엔의 젖가슴을 얼굴로 문지르며 조철봉은 숨을 들이켰다. 행복했다. 기다려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가슴을 든든하게 만드는가? 더구나 수엔은 거의 조건없이 기다려 주겠다고 한 것이다.
“고맙다.”
조철봉이 수엔의 허리를 감아 안으면서 말했다.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서울에도, 중국에도, 베트남에도 이렇게 기다리는 여자를 만들어 놓고 사는 날까지 악착같이 살아갈 것이었다. 그중에서 여러가지 상황에 의해 깨지는 경우도 몇개 있을테니 능력이 닿는 한 많이 걸쳐 놓는 것이 낫다. 그래야 안전하다. 조철봉은 수엔을 침대로 이끌었다.
“누구세요?”
문 앞으로 다가간 송윤지가 묻자 밖에서 베트남어가 들렸다.
“누구야?”
이번에는 윤지가 영어로 물었다. 그러자 문이 거칠게 흔들리더니 사내가 영어로 외쳤다.
“경찰이야.”
그순간 윤지는 몸을 돌렸다. 그때 응접실 소파에 드러누워 있던 강찬구도 일어나 앉아있었는데 긴장한 표정이었다.
“문 열어”
이제는 사내가 계속해서 영어를 썼다.
‘어서!”
그때 강찬구가 윤지 옆으로 다가와 섰다. 단독주택이었지만 마당 건너편의 대문이 언제나 열려 있었으므로 현관까지 들어올 수가 있는 것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야?”
강찬구가 다급한 표정으로 물었을 때 문을 주먹으로 두드리는듯 요란한 소음이 울렸다. 찬구가 이를 악물었다. 경찰이라면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문의 3중 자물쇠를 푸는 동안 찬구는 심호흡을 하고 대비했다. 문 옆쪽 창문으로 밖이 보였는데 정복을 입은 경찰이 3명이나 서있었기 때문이다. 문이 열리자 경찰들이 쏟아지듯 들어서더니 그중 하나가 그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신분증.”
“우린 한국인이야.”
윤지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곳에서 공장을 운영하고 있다고!”
물론 영어로 말한 것이다. 그러나 경찰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손을 윤지의 코앞에 내밀었다.
“신분증, 빨리!”
이를 악문 윤지가 여권을 찾아 사내에게 내밀자 사내가 찬구를 보았다.
“당신도.”
그로부터 20분쯤 지났을 때 강찬구는 경찰들과 함께 집을 나와 차에 탔다. 당황한 윤지가 말도 안되는 영어로 장황하게 떠들어댔지만 경찰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찬구는 얼굴이 하얗게 굳어져서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실제로 찬구의 여권은 비자 유효기간이 지난 상태였기 때문이다.
찬구가 끌려가고 나서 정신을 수습한 윤지가 전화를 한 곳은 집에서 바로 1백m 거리에 있는 찬구 부하들의 숙소였다. 그러나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았으므로 다급해진 윤지는 슬리퍼를 신고 집을 나왔다.
부하들의 숙소로 달려간 윤지는 문앞에 몰려 서있는 사람들을 보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때 낯익은 베트남인 옆집 여자가 윤지를 보더니 다가와 말했다.
“경찰이 모두 데려갔어요.”
여자가 영어로 말을 이었다.
“다섯명 모두.”
윤지는 몸을 돌렸다. 지금까지 경찰은 한번도 가택 수색을 하거나 검문을 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윤지의 인형공장은 투자기업이었고 찬구와 부하들은 공장의 관리인 행세를 해왔기 때문에 당당했다. 그들의 목표는 한국인들이었지 베트남인들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 한순간에 모두 체포되어 버렸다.
윤지는 몸을 웅크리고 걸었다. 오전 8시여서 출근시간이 되어 있었지만 공장에 갈 의욕도 일지 않았다. 다시 집에 들어온 윤지는 우선 대사관에 연락해야 되겠다고 생각했지만 꺼림칙했다. 강찬구와 그의 부하들 모두 전과자들이었고 몇명은 수배중이었기 때문이다. 대사관에서 도와줄지도 의문이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으므로 윤지는 소스라쳤다. 빈집에 울리는 전화벨소리는 유난히 컸다.
전화기를 집어든 송윤지는 심호흡을 했다.
“여보세요.”
“아, 송윤지씨.”
반가운 듯 밝은 목소리가 귀를 울렸으므로 윤지는 눈을 크게 떴다. 한국어였지만 누군지 생각이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구세요?”
“나, 조철봉입니다.”
“아아.”
“아직 출근하지 않으셨군요. 지금 바쁘십니까?”
“아뇨.”
심호흡을 한 윤지는 문득 이 사내가 이번 일에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 의지할 사내들이 모두 떨어져간 상황이니 다급한 마음이 들었기 때문에 가릴 처지도 아니었다.
“저 괜찮아요. 그런데 웬일이세요?”
마음을 가라앉히고 차분한 목소리로 묻자 조철봉이 주저하듯 물었다.
“오늘 점심이나 같이 하실까요? 시간 있으십니까?”
“점심 말인가요?”
조금 뜸을 들이고난 윤지가 승낙했다.
“그러죠. 그럼 어디서 뵐까요?”
시간 약속을 하고난 윤지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강찬구는 폭력배 출신으로 든든하긴 했지만 격이 떨어져서 오래 데리고 있을 생각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곳에서 몇건 더 챙긴 후에 찬구와 그 일당들과 결별할 작정이었는데 그 시기가 빨리 왔다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머리 회전이 빠른데다 맺고 끊는 것이 정확한 성품의 윤지다.
화장대 앞에 앉은 윤지는 차분해진 표정으로 화장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차츰 전후가 분명해졌다. 찬구와 그 일당들은 피해를 당한 한국인들로부터 신고가 들어간 것이 분명했다. 지금까지 그들은 호치민시에서 사업을 하고 있는 한국인들을 상대로 협박과 공갈을 해서 돈을 갈취해왔던 것이다.
물론 윤지와 함께 함정에 빠뜨리고 나서 거금을 빼앗은 사업가도 세명이나 있다. 윤지가 조철봉을 만난 것은 12시 정각이었는데 장소는 시내의 중국 식당이었다. 윤지가 장소를 정한 것이다.
“이곳 중국요리가 맛이 있어요.”
윤지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지만 사실은 한국인들이 모이는 한국식당이나 일식당은 피하려는 것이다. 요리를 시키고 나서 윤지가 웃음띤 얼굴로 조철봉을 보았다.
“조사장님, 혹시 베트남 정부 관리중에 아시는 분 없으세요?”
“정부 관리 말입니까?”
정색한 조철봉이 머리를 기울이더니 문득 생각이 났다는 듯이 눈을 빛냈다.
“아, 내무장관을 압니다. 몇번 만나서 식사를 했지요. 하지만 친한 사이는 못됩니다. 그저 인사차 만난 것이라서.”
“아, 그러세요.”
“그분은 아마 제 이름도 기억하지 못할겁니다.”
“아아, 예.”
“그런데 무슨 일로? 정부 관리에게 뭘 부탁 하실 일이 있습니까?”
“아녜요.”
“필요하시면 제가 나서보지요. 내무장관도 만나자고 하면 만나줄 겁니다.”
“아녜요. 그런 일 없어요.”
완강하게 머리를 저은 윤지가 곧 웃었다.
“그냥 여쭤본 말이에요.”
이로써 윤지가 강찬구와 그 일당을 포기한 것이 분명해졌다. 같은 사기꾼 입장에서 판단하면 강찬구는 이제 용도 폐기시켜야 마땅한 놈이었다. 조철봉이 지그시 윤지를 보았다. 물론 찬구 일당이 체포되도록 꾸민 것은 조철봉이다. 그래서 윤지의 마음속을 다 읽을 수가 있다.
식사를 마쳤을 때 송윤지가 손목시계를 보는 시늉을 하더니 물었다.
“오늘은 마침 시간이 있어요. 조사장님, 시간 있으시면 구치터널이나 구경가보실래요?”
“아, 구치터널 말입니까?”
반색을 한 조철봉이 머리를 끄덕였다.
“전부터 가보고 싶었습니다. 오늘 오후는 비워놓고 나온 겁니다. 가십시다.”
구치터널은 월남전때 베트콩이 구 사이공인 현재의 호치민시 근방에 파놓은 수백㎞의 지하터널을 말한다. 마치 개미굴 같은 터널 안에 거대한 지하도시가 건설되어 있다는 것이다. 식당을 나온 그들은 조철봉의 승용차에 올라 교외의 구치터널로 향했다. 승용차 운전사는 베트남인으로 조철봉의 운송회사 직원이다.
“힘들어요.”
차가 모터사이클 무리에 갇혀 서행하고 있었으므로 창밖을 내다보던 조철봉에게 윤지가 혼잣소리처럼 말했다.
“혼자 살아가는 게요.”
그러고는 반대쪽 창으로 머리를 돌렸으므로 조철봉은 소리죽여 숨을 뱉었다. 멋진 대사였고 근사한 동작이었다. 단지 동거남 강찬구하고 떨어진 지 아직 5시간도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조철봉이 알고 있다는 것이 문제일 뿐이다. 모르는 놈들 같았으면 감동 받았으리라. 그러나 조철봉은 낮고 부드럽게 답했다.
“그렇죠, 이해합니다.”
“외로워요.”
그러면서 윤지가 어깨를 붙여오자 조철봉은 편안하게 받아들였다. 그것에 기운을 얻은 윤지가 이번에는 손을 뻗어 조철봉의 손을 쥐었다.
“요즘은 갑자기 집안이 쓸쓸해졌어요.”
“혼자 살면 가끔 그럴 때가 있지요.”
“솔직히 가끔 남자도 그리워요.”
윤지가 이젠 허벅지까지 붙여오면서 말했다. 조철봉은 코에 스며드는 윤지의 체취가 섞인 향내를 맡으면서 지그시 눈을 감았다. 이번 작업은 예상했던 것과 한치도 어긋나지 않았다. 윤지는 이쪽에서 손가락을 까닥할 필요도 없이 허물어져 올 것이며 몸을 섞고나서 거머리처럼 달라 붙을 것이다. 그때 윤지의 다른쪽 손이 다리사이의 철봉을 쥐었으므로 조철봉은 긴장했다.
“절 안아줘요.”
윤지가 몸을 비틀며 말했다. 이미 상반신은 거의 포개듯이 붙어 있었고 다리 한쪽은 조철봉의 다리 위로 겹쳐진 데다 한손으로 철봉까지 쥐었으니 기괴한 자세였다. 윤지의 숨소리는 가빠져 있었다.
“구치터널 가기 전에 깨끗한 호텔이 있어요. 거기에서 쉬었다 가요.”
윤지가 철봉을 바지 위에서 쓰다듬으며 말했다.
“얘도 쉬고 가고 싶다고 하잖아요.”
그리고 상기된 얼굴로 웃었는데 그야말로 선정적이었다. 이 분위기에서 빠져나갈 남자는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남자 중에서는 없을 것이다.
“좋아.”
머리를 끄덕인 조철봉이 윤지의 스커트 밑으로 손을 넣으며 말했다.
“이런 유혹을 뿌리치는 놈은 남자가 아니지.”
“당신 물건이 너무 커.”
윤지가 다리를 벌리면서 말했다.
“너무 아프겠어.”
“다 들어가게 돼있어.”
“정말?”
그러면서 윤지가 스스로 팬티를 끌어내리더니 조철봉의 손을 제 샘에 붙이면서 말했다.
“봐, 내건 너무 조그맣잖아.”
말이 안되는 소리도 이런 때는 다 통한다.
“저기요.”
송윤지가 그 와중에서도 앞좌석을 손바닥으로 치면서 운전사에게 지시했다.
“다음 사거리에서 오른쪽으로, 그러면 1백미터 거리에 아시아 호텔이 있어.”
제법 유창한 영어를 썼고 운전사는 긴장해서 차를 오른쪽으로 붙였다. 아시아호텔은 새 건물이었으나 중급 수준이었고 거리 안쪽에 박혀 있어서 밀회하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차가 호텔 현관 앞에 멈춰서자 윤지가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오해 말아요. 난 이곳이 처음이니까.”
“누가 뭐래?”
가볍게 말을 뱉은 조철봉이 윤지의 엉덩이를 한대 치고는 먼저 차에서 내렸다. 프런트에서 키를 받아 쥐는데는 1분도 걸리지 않았다. 엘리베이터 앞에 섰을 때 윤지가 조철봉의 팔을 끼었다.
“자기야, 나, 흥분돼.”
“아까 보니까 샘이 넘쳐 나오던데.”
“아이, 싫어.”
몸을 비틀어보인 윤지가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단둘이 되자마자 조철봉의 목을 감아 안고 매달렸다.
“키스해줘.”
입술을 바짝 붙인 윤지가 눈을 감은 채 말했다. 조철봉은 입술을 쭈욱 내민 윤지를 마음놓고 내려다 보았다. 감은 눈 사이로 오래 쓴 칫솔같은 인조 속눈썹이 붙어 있었다. 조철봉은 핏빛 립스틱을 바른 윤지의 입술을 빨았다. 그러자 선지 맛이 느껴지더니 윤지가 입을 벌리면서 혀를 내밀 때에는 뜨거운 순대가 들어오는 느낌이 들었다. 조철봉이 순대를 가볍게 물자 윤지가 코맹맹이 소리로 신음을 뱉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그들은 떨어졌다.
“자기야, 나 급해.”
윤지가 조철봉의 팔을 끌면서 말했다.
“미치겠어.”
503호실에 들어간 그들이 옷을 벗은 시간도 역시 1분도 안걸렸다. 순식간에 알몸이 된 윤지가 손가방을 쥐더니 조철봉을 보았다.
“나, 씻고 올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빨리와. 나 한잔 마시고 있을테니까.”
“많이 마시지 마.”
눈 하나를 감아보인 윤지가 의도적으로 다리를 벌려 보였으므로 짙은 숲속에 감춰져 있던 선홍색 샘이 환하게 드러났다.
“으으음.”
알몸으로 침대에 누운 조철봉이 신음했다.
“대충 씻고 와.”
“알았어. 5분만 기다려.”
윤지가 화장실로 들어서자 조철봉은 침대에서 몸을 솟구치며 일어섰다. 그때 화장실 안쪽에서 버튼을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윤지가 화장실 문을 안에서 잠근 것이다. 쓴웃음을 지은 조철봉은 소파에 걸쳐놓은 바지 주머니에서 액체가 든 작은 병 한개를 꺼내 선반에 놓인 맥주잔과 양주잔에 각각 한방울씩을 떨어뜨렸다. 물론 자신이 마실 맥주잔 한개만은 빼놓았다.
눈을 크게 뜨고 잔을 살펴본 조철봉은 흔적이 남지 않은 것을 보고는 만족한 표정으로 잔과 맥주병을 들고 침대로 돌아왔다. 윤지가 나온 것은 그로부터 5분쯤 후였으니 빨리 나온 셈이었다.
“어머, 술 많이 마시지 말라니까.”
눈을 흘겨보인 윤지가 알몸인 채 사뿐사뿐 다가왔는데 매혹적이었다.
“한잔 줄까?”
조철봉이 묻자 윤지는 힐끗 맥주병에 시선을 주더니 선반으로 다가갔다.
“딱 맥주 한잔만 할래.”
윤지가 새 맥주병의 뚜껑을 열면서 말했다. 그리고 새 잔에 맥주를 붓더니 갈증난 사람처럼 단숨에 들이켰다.
“아, 시원해.”
입가에 묻은 맥주를 손등으로 닦은 송윤지가 알몸으로 다가왔다. 환한 대낮이었고 커튼도 내리지 않아서 윤지의 알몸은 남김없이 드러났다. 미끈한 몸이었다. 그 어떤 남자도 이런 몸과 분위기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
“해줘.”
침대에 털썩 알몸을 올려놓은 윤지가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조철봉의 앞에 벌떡 누웠다.
“어서.”
조철봉은 정색하고 윤지를 내려다 보았다. 윤지는 침대에 몸을 올려놓는 순간부터 눈이 풀려 있었던 것이다. 드러누운 윤지가 조철봉을 보았으나 두눈은 초점을 잃었고 더이상 말도 하지 못했다.
“이봐.”
조철봉이 낮게 불렀을 때 윤지는 스르르 눈을 감더니 가볍게 코를 골기 시작했다.
“어이, 자는 거야?”
이번에는 조철봉이 소리쳐 불렀지만 윤지는 늘어진 채 더 크게 코를 골았다. 윤지는 강력한 마취제를 마신 것인데 마키의 설명대로라면 시체처럼 되어서 3시간동안 깨어나지 못할 것이다. 침대에서 일어난 조철봉은 차분하게 옷을 찾아 입었다. 옷을 다 입고 약을 떨어뜨린 잔까지 화장실에서 모두 씻어 제자리에 올려 놓았을 때 바지 주머니에 넣어둔 휴대전화가 진동을 했다.
“사장님, 방 앞에 두놈이 있습니다.”
휴대전화를 귀에 붙였을 때 마키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문을 열려고 하다가 둘이 수군거리고 있는데요. 아마 안에서 문을 열어주기로 했던 것 같습니다.”
“이 강도는 지금 약을 먹고 쓰러졌다.”
“알겠습니다. 그럼 문 앞에 있는 두놈을 처치하고 들어가겠습니다.”
다시 소파에 앉은 조철봉이 TV를 보았다. 이런 상황에서 윤지가 섹스를 즐길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않았다. 윤지는 방으로 자신을 유인하고 나서 결정적인 순간에 폭력배들을 끌어들여 돈을 뜯어낼 작정이었던 것이다. 동거남과 그 부하들이 아침에 모두 연행되었지만 연락이 닿는 폭력배가 또 있었던 모양이었다.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린 것은 그로부터 30분쯤 후였는데 마키는 베트남 사내 두명을 데리고 들어섰다.
“이 사람들은 경찰입니다.”
마키가 사내들을 소개하더니 힐끗 침대에 누워있는 윤지를 보았다. 그때는 조철봉이 윤지에게 대충 옷을 입혀 놓아서 볼썽사납지는 않았다.
“잡힌 놈들은 방안으로 들어가 사장님을 납치할 작정이었다고 자백했습니다. 각각 1천불씩 받기로 했는데 선금 3백불을 받았고 잔금은 일을 끝낸 뒤 받기로 했다는군요.”
그때 경찰들이 윤지에게 다가가 어깨를 흔들어보더니 마키를 보았다. 그러자 마키가 베트남어로 설명했다. 경찰들이 머리를 끄덕이고는 둘이 윤지를 떠메고 방을 나갔다.
“저 여자는 어떻게 될 것 같나?”
조철봉이 묻자 마키가 금방 대답했다.
“추방될 겁니다. 앞으로 베트남에는 발을 딛지 못하게 되겠지요.”
“인형공장이 있는데 안됐군.”
“사람 시켜서 정리하겠지요.”
뛰는 놈 위에는 꼭 나는 놈이 있는 법이다. 하루 아침에 수족을 다 잃은 윤지는 마지막 한탕을 할 작정이었고 그것을 예상한 조철봉은 마키와 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기꾼은 사기꾼의 심사를 안다. 조철봉이 쓴웃음을 짓고 말했다.
“구치터널에 가자면서 여러명을 잡은 것 같다.”
최갑중의 전화가 온것은 다음날 오전 11시경이었다.
“형님, 찾았습니다.”
대뜸 그렇게 말한 갑중이 극적 효과를 높이려는지 조금 뜸을 들이고나서 말을 이었다.
“두년놈을 잡아놓고 있습니다. 물론 돈도 다 빼앗았구요.”
백주영과 홍경태를 잡은 것이다. 조철봉이 잠자코 있었으나 갑중의 말은 더 활기를 띠었다.
“지금 단동에 있습니다. 와 보시겠습니까?”
“인마, 내가 왜?”
전화기를 고쳐쥔 조철봉이 짜증난 목소리로 말했다.
“돈 회수했으면 그만 놔두고 돌아가라고 해.”
“아니, 그사람은 그럴 것 같지 않은데요.”
“그게 무슨 말이야?”
“본래 그들의 처분을 강선생한테 맡긴다고 했거든요. 그랬더니.”
“그랬더니?”
“홍경태 본가가 조금 살만 하거든요. 그건 홍경태가 처가 재산을 그쪽으로 빼돌렸기 때문인데.”
“…”
“강선생은 홍경태를 잡아놓고 본가 재산을 가로챌 것 같습니다.”
“그럼 그 강선생이란 놈은 강도아냐?”
“패거리가 여럿입니다. 하지만.”
조금 망설이던 갑중이 말을 이었다.
“형님, 그놈이 어떻게 되건 우리하고는 상관없는 일 아닙니까? 차라리.”
갑중은 차라리 잘 되었지 않는냐고 하려다가 말았을 것이다. 헛기침을 한 조철봉이 물었다.
“그, 여자는 지금 어떻게 되었어?”
“아, 강선생이 같이 잡아놓고 있다니까요.”
“…”
“강선생 말을 들으면 둘이 신혼살림을 차려놓고 살더랍니다. 방 세개짜리 단독주택을 이쁘게 단장해놓고 이웃 사람들한테는 베이징에서 온 부부라고 소개를 했답니다.”
“…”
“그 여자는 강선생 일당이 들이닥치니까 울고 불고 난리를 치더랍니다. 반항을 하지 않는 홍경태하고는 대조적이라고 했습니다.”
“…”
“나쁜년이죠, 제 잘못을 뉘우치지 않는 겁니다. 형님한테는 조금도 미안한 감정이 없는 것이죠.”
“시끄럽다.”
“그 여자는 집안에서도 나올 것이 없어서 강선생이 그냥 내보낼 수도 있었는데 여자 쪽에서 홍경태 옆에 붙어서 떨어지려고 하지 않는답니다. 그래서.”
“그래서 어떻게 한다는거야?”
“여자는 일이 끝날때까지 잡고 있다가 강선생이 처리 한다고 했습니다.”
“…”
“그건 우리가 몰라도 되는 일이지요.”
“…”
“형님, 시원하시지요? 당연히 그러셔야 합니다. 그렇지요?”
“전화 끊는다.”
“저, 형님.”
갑중이 무슨 말을 하려고 했지만 조철봉은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머리를 든 조철봉은 창 밖으로 환한 햇살이 쏟아지는 회사 앞마당을 보았다. 사이공은 한때 동양의 진주라고 불렸던 아름다운 도시였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고 30년간 평화가 찾아왔지만 도시는 아직도 전쟁의 상처를 털어내지 못했다. 지금도 전쟁의 폐허가 복구되지도 않는 것이다. 자리에서 일어선 조철봉은 방을 나왔다. 방안에 앉아있을 기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조철봉은 눈을 떴다. 차는 단둥 시내를 빠져나가 길가에 건물이 드문드문한 교외로 달려가는 중이었다.
“10분쯤만 가면 됩니다.”
옆에 앉은 최갑중이 말했다. 오후 4시가 조금 넘었지만 흐린 하늘에 가린 태양이 보이지 않아서 저녁무렵 같았다. 승합차 안에 무거운 정적이 덮였고 조철봉은 다시 눈을 감았다. 어제 오후에 호치민시를 떠나 베이징을 거쳐 이곳에 오는데 꼬박 하루가 걸린 것이다. 백주영을 만나 어떻게 하겠다는 생각도 없이 날아온 터라 다가갈수록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러나 얼굴이 보고 싶기는 했다. 차가 속력을 줄였으므로 조철봉은 눈을 떴다. 덜커덩거리던 차는 곧 오른쪽 샛길로 들어섰는데 부근은 새로 지은 주택가였다.
“다 왔습니다.”
갑중이 고쳐 앉으면서 말했다.
“백미터쯤만 가면 됩니다.”
갑중도 긴장하고 있는 것이다. 옌지에 있던 갑중은 조철봉을 맞으면서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그것이 조철봉의 심사를 다 이해한다는 표시여서 다른 때 같으면 아무렇지도 않게 넘길 일인데도 이번에는 불편했다. 그 분위기를 갑중이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고 따라서 오는 도중 내내 차 안의 대화는 허공에 떠 있었다. 그러나 끝까지 조철봉은 백주영을 만나러 온 이유를 말하지 않았고 갑중도 묻지 않은 것이다. 차가 골목 끝쪽의 아담한 단독주택 앞 공터에 멈춰섰을 때 대문이 열리더니 사내 하나가 나왔다. 그러고는 차에서 내린 조철봉과 갑중을 향해 꾸벅 인사를 했다. 미리 연락을 한 것이다.
“어서 들어오시지요.”
강선생으로 불린 강재만의 부하다. 대문 안으로 들어선 조철봉과 갑중은 20평쯤 되는 마당을 건너 본채 현관문을 열었다. 그러자 넓은 응접실의 소파에 앉아있던 사내 하나가 일어섰다. 강재만이다.
“어서 오십시오, 사장님.”
강재만은 40대 후반쯤의 조선족으로 한때 중국 공안으로 근무했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래서 공안에 관한 일을 맡아 처리했고 사건 브로커로도 활약하는 중이다. 조철봉과 악수를 한 강재만이 웃음 띤 얼굴로 물었다.
“먼저 여자를 만나 보시렵니까? 지금 뒷방에 가둬 놓았는데요.”
눈으로 안쪽을 가리킨 재만이 입술을 비틀어 보였다.
“생긴 건 곱상한 것이 여간 독종이 아닙니다. 밥도 세끼 꼬박꼬박 먹고 제남자까지 챙겨 먹인다니까요.”
갑중이 강재만에게 조철봉의 돈을 주영이 사기쳐 도망쳤다고만 설명해주었으나 그말을 그대로 누가 믿겠는가? 산전수전 다 겪은 강재만은 내막을 두르르 꿰고 있을 것이었다.
“아니, 조금 있다가 보지요.”
앞쪽 소파에 앉은 조철봉이 집안을 둘러보는 시늉을 했다.
“집이 꽤 크군요.”
“한국 평수로 60평형이지요. 얘들은 월세로 들어왔습니다.”
재만이 턱으로 가구들을 가리켰다.
“가구들만 구입했는데 알뜰하게 중고시장에서 샀더군요.”
“어쨌든 찾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조철봉이 인사를 하자 갑중이 힐끗 시선을 주었다.
“수고비는 제대로 빠졌나 모르겠네요.”
“충분합니다.”
웃음 띤 얼굴로 재만이 대답했다.
“애들 네명을 데리고 왔는데 그애들 수당도 넉넉하게 줄 수 있습니다.”
부드러운 분위기여서 얼핏 들으면 사업가들의 사업 이야기 같았다.
“자, 그럼 만나볼까요?”
조철봉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하자 강재만은 기다렸다는 듯이 앞장섰다. 그리고 한걸음에 안쪽 방문 앞으로 다가서더니 문을 열었다.
“오신다는 말씀을 듣고 둘을 떼어놓았지요. 남자놈은 지하실에 있습니다.”
조철봉이 방 안으로 들어서자 재만은 밖에서 문을 닫아 버렸다. 백주영은 안쪽 침대 옆의 의자에 앉아 있었는데 조철봉을 똑바로 본 채 일어서지 않았다. 진바지에 긴팔 셔츠를 입고 머리는 뒤로 묶은 차림이었지만 화장기 없는 피부는 윤기가 났고 눈빛은 또렷했다. 조철봉은 잠자코 다가가 앞쪽 의자에 앉았다. 방은 꽤 커서 침대와 의자 두개를 낀 탁자가 놓여있고 안쪽은 화장실인지 문이 붙어 있었다. 방안을 둘러보던 조철봉이 먼저 입을 열었다.
“세상 일이 다 뜻대로 되는 것이 아냐. 이렇게 되어서 유감이다.”
주영은 잠자코 시선만 주었는데 담담한 표정이었다. 조철봉이 온다는 것을 듣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조철봉도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 남자를 사랑하고 있었던 모양이구나. 하긴 사랑을 위해서는 한국에서도 별짓을 다 하지.”
“…….”
“돈에 몸을 파는 것 같은 나하고의 경우와 비교하면 훨씬 깨끗하지. 그런데….”
눈을 좁혀뜬 조철봉이 희미하게 웃었다.
“너는 네 사랑을 위해서 사기를 친 것이지, 네가 네 돈으로 홍경표하고 이렇게 도망쳐 나와야 깨끗한 사랑이고 모두가 박수를 쳐줄건데 말이야.”
그리고 조철봉이 입을 벌리며 소리없이 웃었다.
“너, 큰일났다. 저 사람들이 널 인신매매 시장에 내놓을 것 같은데 난 모른척하고 있지만 그렇게 되는 것이 속으로 후련하게 생각되니 말이야.”
“…….”
“홍경표는 제 본가로 빼돌린 재산까지 다 게워내게 한 다음에 처치할 모양이더라. 너희들의 꿈같은 생활은 이제 끝난 것이지.”
지금까지 말하는 동안 조철봉은 주영의 표정을 보지 않았다. 의자에 등을 붙인 조철봉이 다시 혼잣소리처럼 말했다.
“내가 왜 여기로 왔겠니? 너한테 미련이 있어서? 천만에.”
머리까지 저은 조철봉이 그때서야 똑바로 주영을 보았다.
“나를 배신한 네가 철저하게 찢어지는 걸 보려고 온 것이지. 솔직히 그런 장면을 보는 것에 쾌감을 느끼게 되거든.”
“…….”
“난 보통 인간이야. 그래서 오지랖이 넓지 못해.”
자리에서 일어선 조철봉이 어깨를 치켜세우고 두팔을 잔뜩 벌려 기지개를 켜는 시늉을 했다.
“이렇게 보고 나니까 후련해졌다. 너한테 사기당한 돈은 이제 아깝지 않아.”
가볍게 말한 조철봉이 몸을 돌리면서 말했다.
“에이 속이 다 시원하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올 때까지 주영은 입도 뻥긋하지 않았으므로 조철봉 혼자 중얼거리다가 나온 셈이었다. 응접실에서 기다리던 갑중과 재만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 끝나셨습니까?”
그렇게 갑중이 물었고 조철봉의 눈치를 살피던 재만도 이어서 물었다.
“살려달라고 매달리지 않던가요?”
소파에 앉은 조철봉이 쓴웃음을 지었다.
“당연하지요.”
그러자 재만과 갑중이 동시에 머리를 끄덕였다.
“그런데.”
조철봉이 정색하고 강재만을 보았다.
“저 여자는 어떻게 처리하실 작정입니까?”
그러자 재만이 얼굴을 펴고 웃었다.
“마침 톈진에서 여자 장사를 하는 중국인 친구가 데려간다고 했습니다.”
“아아.”
“저런 나쁜 년은 그곳에서 썩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없어지도록 해야 됩니다.”
“어떤 곳인데요?”
“사창가지요.”
힐끗 안쪽의 방에 시선을 준 재만이 목소리를 낮췄다.
“좋은 가격으로 거래가 되었습니다.”
“….”
“5만위안으로 합의가 되었는데 실물을 보고나면 8만위안까지는 받아낼 자신이 있습니다.”
그러고는 재만이 눈을 빛내며 웃었다.
“죗값을 받아야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때 최갑중이 손목시계를 보는 시늉을 하더니 조철봉에게 말했다.
“가실 시간이 되었는데요.”
“그렇군.”
머리를 끄덕인 조철봉이 집안을 둘러보고는 재만에게 물었다.
“어디 조용한 곳 없습니까? 잠깐 우리 둘이서 이야기를 했으면 좋겠는데요.”
그러자 재만이 현관 바로 옆쪽에 붙은 문을 손으로 가리켰다.
“저 방을 쓰시지요. 애들 숙소로 사용한 방이어서 지저분합니다만.”
“그럼.”
먼저 자리에서 일어선 조철봉이 문을 열고 들어서자 갑중이 따라왔다. 방은 컸지만 침구도 정돈돼있지 않았고 환기가 되지 않아서 담배 냄새가 짙게 깔려 있었다. 창문을 연 조철봉이 창가에 놓인 프라스틱 의자에 앉았을 때 갑중이 잠자코 다가와 섰다. 갑중은 정색한 표정이었다. 낮게 헛기침을 한 조철봉이 갑중을 올려다보았다.
“저 기집애가 울면서 부탁을 하는데, 잘못했으니까 살려달라고 말이야.”
갑중의 표정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고 조철봉이 말을 이었다.
“그놈을 증오했으면서도 미련을 갖고 있었다고 솔직하게 말하는구나. 저도 모르게 그놈과 함께 도망쳤다고 말이야.”
“….”
“그리고.”
다시 헛기침을 한 조철봉의 시선이 옆쪽으로 옮아갔다.
“물론 거짓말이겠지만 지금도 나에 대한 감정은 변하지 않았다고 하더구나.”
“….”
“날 사랑한단다, 기가막혀서.”
조철봉이 쓴웃음을 지어 보였지만 갑중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어깨를 늘어뜨린 조철봉이 말을 이었다.
“아, 글쎄. 내 손으로 저를 죽여달라고 하면서 우는데 짜증이 나더구먼.”
“….”
“에이, 더러운 년.”
“….”
“그래야 속이 편하겠다면서.”
“형님.”
처음으로 입을 연 갑중이 조철봉을 내려다보았다. 미간이 조금 좁혀져 있었다.
“어떻게 해드릴까요?”
“뭘 말이냐?”
“저 년을 말입니다. 풀어줄까요?”
이번에는 조철봉이 입을 다물었고 갑중의 말이 이어졌다.
“저한테는 거짓말하지 마시고 얼른 대답만 하십시오.”
그러자 조철봉의 눈에서 닭의 물똥같은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그러고는 악다문 잇새로 짧고 굵은 울음소리도 났다.
조철봉의 분신이나 다름없는 최갑중이다. 사기꾼으로 성공하려면 제 자신까지 속이라는 말도 있지만 심중을 읽어주는 갑중 같은 심복이 있다는것은 조철봉의 복이다. 갑중 앞에서는 부끄러움도 잊고 자존심을 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머리를 든 조철봉이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갑중을 보았다.
“그년을, 아니, 그여자를 놓아줘라.”
딸꾹질을 하며 말했을 때 갑중이 여전히 찌푸린 얼굴로 조철봉을 노려보았다.
“강재만이 8만위안까지 받아낼 작정이라고 했는데 놓아준다면 그 돈까지 물어줘야 할텐데요.”
“물어줘.”
“한마디만 물읍시다. 형님.”
그러고는 정색한 갑중이 심호흡을 했다.
“저는 형님처럼 복잡한 사람이 아니어서 이해가 잘 안됩니다. 도대체 왜 이러시는 겁니까?”
“뭘?”
“왜 또다시 돈까지 게워내서 저년, 아니 저걸 놓아 주느냐구요.”
“글쎄.”
이번에는 조철봉이 심호흡을 하더니 손등으로 눈물을 닦았다.
“인연이 있었기 때문인 것 같어.”
“인연요?”
기가 막히다는 듯이 헛웃음을 웃은 갑중이 눈살을 찌푸렸다.
“또 전생의 인연 타령을 하실랍니까? 전생에서 저 여자가 형님의 누님이라도 되었다는 겁니까?”
“시끄러 자식아.”
마침내 눈을 부릅뜬 조철봉이 상체를 곧게 세웠으므로 갑중이 찔끔했다. 조철봉이 잇새로 말했다.
“물론 저년은 인연 따위는 없다고 말하겠지. 운명이라고 말하면 웃을 것이고.”
“……”
“하지만 인간사가 다 제 뜻대로 된다더냐? 저년이 어떻게 생각하건 내가 그렇게 믿으면 돼.”
조철봉이 엄지를 구부려 제 콧등을 가리켰다.
“나 혼자만 그렇게 믿어도 된단 말이여. 난 저 여자하고 인연이 있었어. 그리고 지금도 사랑하고 있다.”
“……”
아주 가슴이 저리도록 말이여.”
“형님.”
갑중이 나서려고 하자 손을 들어 가로막은 조철봉이 말을 이었다.
“내가 베트남으로 날아간 것도 저 여자를 잊으려고 간 것이지만 웬 날강도를 만나 당할 뻔했지.”
“……”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지고 어쩐다는 이상한 말도 있던데 난 그게 아녀, 난 내 몸보신을 하려고 그러는 거여.”
“저여자를 사창가로 보내면 난 두고두고 가슴을 앓게 돼, 그러면 내가 손해를 봐. 그냥 놓아주면 돈이야 깨지지만 곧 잊게 돼, 가슴이 든든해지고, 왜냐하면 저 여자가 나한테 고맙다는 감정을 품게 될 것이거든.”
“천만예요.”
하고 갑중이 나섰지만 조철봉이 다시 손을 들어 막았다.
“이새끼야, 그래서 나 혼자 생각이라고 했지 않어? 사람은 다 그렇게 제가 좋아하는 방향으로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거다.”
“편리한 생각이지요.”
“뭐라고?”
“아닙니다.”
길게 숨을 뱉은 갑중이 체념한 얼굴로 조철봉을 보았다.
“그럼 형님, 저 여자를 다시 만나 보실랍니까?”
갑중이 묻자 조철봉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니, 안보고 떠난다.”
조철봉을 배웅하고 돌아온 최갑중이 다시 소파에 앉았을 때 강재만이 궁금한듯 상체를 세웠다. 그러나 묻지는 않고 시선만 보내고 있다.
“아, 사장님하고 잠깐 이야기를 했는데.”
괜히 손목시계를 내려다본 갑중이 헛기침을 했다.
“저 여자 말입니다.”
“아, 예.”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이 재만이 머리를 끄덕였다.
“말씀하시지요.”
“사창가에 판다고 하셨던가요?”
“예, 8만 위안은 받습니다. 5만 위안까지는 전화상으로 약속이 되었으니까요.”
“후환은 없을까요?”
“무슨 말씀이신지.”
“아, 저게 도망쳐 나와서 우리를 공안에 고발을 한다든가 하면 골치 아파질 것 아닙니까?”
“그건 염려 마십시오.”
손을 들어보인 재만이 얼굴을 펴고 웃었다.
“중국땅이 얼마나 넓은지 알고 계시지요? 기차로 열흘을 가도 중국땅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물론 비행기를 타면 휙휙 다니겠지만 보통 사람들은 아직 비행기를 탈 형편이 아니죠.”
재만이 힐끗 안쪽으로 시선을 주고는 목소리를 낮췄다.
“멀리 보낼 테니까 이쪽 땅은 두번 다시 밟지 못할 겁니다.”
“그럼 안심이 되는구먼.”
자리에서 일어선 갑중이 재만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사장님께서 그걸 알아보라고 하셔서요.”
“걱정하지 마시라고 전해 주십시오.”
“그럼.”
악수를 마친 갑중은 재만의 배웅을 받고 집을 나왔다. 갑중이 조철봉이 기다리고 있는 시내의 식당에 도착했을 때는 그로부터 30분쯤 후였다. 단고기집이어서 수육 안주에다 한국산 소주를 시켜놓은 조철봉은 그동안 혼자서 소주 한병을 거의 다 비워 놓았다.
“형님, 다 끝냈습니다.”
앞쪽 의자에 털썩 앉은 갑중이 길게 숨을 뱉으며 말했다.
“제가 마침 7만 위안 정도를 갖고 있어서요. 강재만한테 주고 그 여자를 풀어주었습니다.”
조철봉이 잠자코 술잔을 들어 소주를 한모금 삼켰을 때 갑중이 말을 이었다.
“그 여자하고 같이 나왔는데 인사도 없이 가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잔에 술을 채운 갑중이 한모금에 목구멍으로 털어넣더니 목소리를 높였다.
“그래서 불렀지요. 그래, 저사람이 널 사창가에 팔려고 하는 것을 우리가 불쌍하게 여겨서 7만 위안이나 주고 다시 빼낸 거다. 그러면 우리 형님한테 인사라도 전하라고 하는 것이 도리 아니냐? 그랬더니.”
“….”
“저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그냥 몸을 홱 돌려 가더란 말입니다. 천하에 싸가지 없는 개같은.”
침을 삼킨 갑중이 흥분으로 붉어진 얼굴을 들고 조철봉을 보았다.
“그냥 사창가에 넘기도록 놔둘 걸 그랬습니다, 형님.”
“….”
“돈이 아깝더라니까요. 형님 심정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지만 말입니다.”
조철봉이 잠자코 머리만 끄덕였으므로 갑중이 이번에는 혀를 찼다.
“어쨌든 이것으로 끝냈습니다.”
그때 머리를 든 조철봉이 문쪽을 보더니 낮게 말했다.
“저기 오는군.”
머리를 돌린 갑중이 기겁을 했다. 문안으로 백주영이 들어서고 있었기 때문이다.
곧장 다가온 백주영이 조철봉을 향해 조금 머리를 숙여 보이더니 잠자코 최갑중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동안 갑중은 침을 두번이나 삼키고는 얼굴이 붉어졌다가 하얗게 되었다. 주영이 시선을 테이블 위의 수육 접시에 두고는 입을 열었다.
“이제 미련 없어요.”
주영이 낮지만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다 해 보았으니까요. 집에 그 남자를 두고 나오면서 조금도 허전하지도 미련이 남지도 않았어요.”
조철봉은 듣지도 않는 것처럼 잔에 소주를 따르고 있었는데 주영은 계속해서 말했다.
“불쌍한 인간이죠. 저하고 열흘간 같이 살면서 빼앗긴 부와 미래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가 없는지 매일 매일을 술로 지내더군요. 저는 옆에서 그것을 지켜 보았어요.”
이제는 갑중도 정신을 차리고는 눈썹을 찌푸리고 옆에 앉은 주영을 훔쳐보았다. 조철봉이 소주 한모금을 마셨을 때 주영의 말이 이어졌다.
“매일 야위어 갔어요. 저하고도 거의 대화를 나누지 않았고 저도 물론 말할 기분이 아니었죠.”
“…”
“그럼 왜 그 남자하고 이곳으로 도망을 쳤느냐고요? 그것은.”
주영이 테이블 위의 수육 접시를 향해 서글픈 표정으로 웃었다.
“사랑을 위해서요. 제가 바쳤던 사랑을 위해서 최선을 다한거죠.”
“…”
“나하고 같이 도망치자고 했더니 그 줏대없고 허약하고 비열한 사내는 주인을 잃고서 굶주리던 개처럼 따라오더군요. 그때 가슴이 미어지면서 지금까지 응어리가 져있던 가슴이 풀리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죠.”
“…”
“그야말로 후련하게 앙갚음을 한 기분이 들더군요.”
“한잔 마실래?”
불쑥 조철봉이 말을 끊고는 소주병을 들자 주영이 갑중 앞에 놓인 빈 술잔을 들고 내밀었다.
“주세요.”
“후련하다고 그랬어?”
“네, 사장님.”
“뭐가 뭔지 복잡해서 모르겠지만 어쨌든 후련하다니까 다행이다.”
“죄송해요.”
한모금에 소주를 삼킨 주영이 물을 마신 듯한 얼굴로 조철봉을 보았다.
“믿으시지 않아도 상관 없지만 며칠만 더 있다가 옌지로 돌아가려고 했어요.”
“…”
“물론 돈을 그 남자한테 다 주고 갈 작정이었죠.”
“이것봐요.”
그때서야 기회를 찾은 갑중이 끼어들었다. 헛기침을 한 갑중이 주영을 똑바로 보았다.
“그건 말도 안돼. 그럼 왜 우리한테 전화 연락도 안했습니까? 그랬으면 우리가 사람을 고용하지도 않았을 것 아닙니까? 이렇게 되고 나니까 그런 말을 하는 것 아니오?”
“이해하지 못하실 것 같아서요.”
주영이 낮게 말했지만 표정은 당당했다. 그때 조철봉이 시선을 들고 갑중을 보았다.
“내가 강사장한테 너를 통해 7만위안을 보낸다고 했으니까 네가 지금 가서 주고 와야겠다.”
조철봉이 정색하고 말을 이었다.
“강사장이 네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을테니까 얼른 다녀와.”
?矛斂㈐像?식당을 나갔을때 조철봉은 쓴웃음을 지었다. 갑중은 주영이 들어서자 마치 귀신을 보는 것같은 표정을 지었다. 놀란 것은 당연했다. 갑중에게 뒷일을 맡기고 집을 나왔던 조철봉은 식당에서 강재만에게 전화를 했다가 상황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예감이 이상해서 전화로 확인해본 것인데 갑중에게는 전혀 예상밖의 일이었을 터였다.
“저, 용서해 주실건가요?”
주영이 물었으므로 조철봉은 시선을 들었다. 소주 몇잔에 두볼이 붉어진 주영이 조철봉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장님 생각 많이 했어요.”
“그래?”
조철봉이 어설프게 대답하자 주영의 눈빛이 강해졌다.
“사장님을 사랑할 수 있을것 같아요.”
“…”
“이젠 그런 실수는 두번다시 하지 않을 테니까요.”
“…”
“용서해주세요.”
주영이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을때 조철봉은 술잔을 들었다.
“알았으니까 이제 그만.”
조철봉이 눈을 크게 뜬 주영을 향해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나도 네 덕분에 깨우친 것이 많아.”
“뭔데요.”
“내가 요즘들어 긴장이 많이 풀렸다는 것, 배가 불러서 그래.”
“…”
“절대로 여자한테서 뭘 바라지 않는다고 다짐해놓고 너한테서 대가를 은근히 바라고 있었어.”
“…”
“이제 다시 깨우쳤으니까 괜찮아.”
“저, 아직도 좋아하세요.”
불쑥 주영이 묻자 조철봉은 망설이지도 않고 머리를 끄덕였다.
“그럼.”
“아직도 제가.”
“운명 따위는 이제 안믿어.”
그러고는 조철봉이 쓴웃음을 지었다.
“결국은 혼자 살다가 혼자 죽는 것이 인생이야. 아무도 함께, 똑같이 느끼고 나눌 수가 없다구. 인생은 시작부터 끝까지 외로운것이 정상이야. 별 지랄을 다해도 소용 없는거야.”
“…”
“사랑의 감정도 식기 마련이야. 영원한 것은 없어. 뜨거웠다가 식고, 더럽혀지고 닳아 없어지는 거야. 따라서 그따위 감정에 일희일비할 필요가 없다구.”
그러고는 조철봉이 눈을 가늘게 뜨고 주영을 보았다.
“한가지만 묻자. 그놈하고 도망쳐 나와서 섹스를 몇번이나 했니?”
“한번요.”
주영이 대번에 대답했다. 얼굴 표정도 당당했다.
“도망친날 밤에요.”
“한번?”
“예. 그날밤에 한번.”
“그것으로 끝이야?”
“예. 그남자도 요구하지 않았고 저는 더욱 생각도 없었으니까요.”
“불쌍했어?’
“잡으러 온 사람들이 들이닥치니까 벌벌 떨더군요. 그래서 오히려 제가 챙겨줘야 했어요.”
“섹스다.”
심호흡을 한 조철봉이 강한 시선으로 주영을 보았다.
“난 원점으로 돌아왔다.”
“네?”
“넌 섹스 좋아해?”
조철봉이 정색하고 말했다.
“우리는 앞으로 이런 대화를 나눠야돼.”
단둥 시내의 국일대반점 호텔은 여관 수준이었지만 깨끗하고 방이 넓었다. 조철봉이 단둥에서 하루 쉬어 가겠다고 하자 백주영은 잠자코 따라 왔는데 전혀 어색해 하지도, 그렇다고 천연덕스러운 태도도 아니었다. 마치 3년쯤 사귄 사이처럼 자연스럽게 처신했는데 엘리베이터 안에서는 소리죽여 길게 숨까지 뱉었다. 방으로 들어서서 단둘이 있게 되었을 때 조철봉이 말했다.
“나는 내가 원하는 상대하고만 섹스를 했어. 충동적으로 생리적 욕구를 발산하려고 섹스를 한 적은 한번도 없다.”
정색한 표정으로 말했지만 새빨간 거짓말이다. 조철봉이 지금까지 한 섹스는 98% 정도가 충동적이며, 욕구 발산적이며, 이용하기 위해서, 또는 존재 확인용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2%도 절대로 내용이 순수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한번도 여자를 순수한 목적으로 만나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이런 분위기에서는 어떤 거짓말도 그럴듯하게 들린다는 사실을 조철봉은 경험으로 알고 있다.
“난 네가 절실하게 필요해. 네 몸을 절실하게 원한단 말이다.”
바지를 벗어 던지면서 말했을 때 주영이 몸을 돌리더니 방안의 불을 껐다. 저녁 무렵이어서 밖은 어둑해져 있었는데 불을 끄자 밖의 불빛에 방안의 사물은 윤곽만 보였다.
“저, 씻고 올게요.”
주영이 여느 여자처럼 그렇게 말했으므로 조철봉은 대답하지 않았다. 화장실로 주영이 들어서자 조철봉은 알몸인 채 침대에 올라 시트를 덮고 누웠다. 이렇게 누워서 여자가 씻고 나오기를 기다릴 때가 남자의 일생에서 가장 기대감으로 벅찬 순간일 것이었다. 이보다 더 벅찬 순간은 없다. 있다면 그 남자는 성인의 반열에 오를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 앞으로 다가올 쾌락의 순간을 기대하며 든든하게 세워진 철봉을 느끼면서 화장실에서 흐르는 물소리를 듣는 이 순간은 오히려 섹스 그 자체보다도 더 자극을 주는 것이다. 가끔 과음을 했을 적에 누워 기다리는 동안 철봉이 시들지나 않을까 걱정되는 경우가 있다. 그런 경우만 제외하고는 오직 기대감으로 부푼 순간이다.
이때는 부도로 쫓기는 신세일지라도, 가슴에 큰 상처를 받은 상황이라고 하더라도 다 잊는다. 정상적인 신체 구조를 가진 사내는 다 잊고 기다리는 것이다. 주영이 화장실을 나왔을 때 흘러들어온 불빛을 받아 몸의 윤곽이 드러났다. 대형 타월을 커튼처럼 가슴에서부터 아래로 내리고 있었지만 알몸의 어깨와 한쪽 허리, 그리고 맨 다리가 선명하게 보였다. 주영이 침대로 다가오더니 타월을 내리면서 시트 안으로 파고들었다.
“추워요.”
주영이 웅크리며 조철봉의 가슴으로 파고 들었다. 물기를 다 닦지 않아서 주영의 알몸은 찼다. 그러나 그것이 더욱 신선하게 느껴졌으므로 조철봉은 팔을 들어 주영의 허리를 당겨 안았다. 주영이 다리 한쪽을 벌려 조철봉의 하반신을 감아 안았으므로 둘의 몸은 8개의 팔다리로 빈틈없이 엉켰다.
“사랑해요.”
조철봉의 가슴에 입술을 붙인 주영이 더운 숨을 뱉으면서 말했다.
“진정이에요.”
이렇게 진정이라고 강조한 경우는 처음이었지만 조철봉은 주영의 몸을 힘차게 당겨 안았다.
“나도 사랑해, 진정이야.”
이미 철봉은 힘차게 뻗어 있었고 가슴은 열락의 기대로 거칠게 뛰었다. 그때 주영이 두손으로 철봉을 쥐었다.
“살살 해주세요.”
철봉을 두손으로 움켜쥔 주영이 허덕이며 말했다. 아직 애무도 시작하지 않은 상황이었으므로 조철봉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비틀고 웃었다. 남자의 생리 구조는 단순하다. 성기의 마찰과 압박만으로 절정에 올라 사정을 하면 끝인 것이다. 따라서 남자는 자위행위 만으로 배설 욕망을 처리할 수가 있으며 오히려 그편이 더 담백하고 뒤가 깨끗한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 그냥 넣고 금방 마찰을 일으켜 대포를 발사하는 남자가 있다면 언어와 사고가 아직 시작되지 않았던 인류 초기 시대의 유인원이나 같다. 조철봉은 상체를 일으키고는 주영의 목에서부터 천천히 아래쪽으로 입술을 비벼 내리기 시작했다. 이것은 말하자면 입가심이다. 정식 코스를 먹을 때 입맛을 돋우려고 야채 샐러드를 씹는 것이나 같다.
“아아.”
조철봉의 입술이 젖가슴에 부딪쳤을때 주영의 입에서 첫 신음이 터졌다.
“아아아.”
입술로 젖꼭지를 물었을 때 주영은 허리를 들썩이면서 조금 더 높은 신음을 뱉었다. 젖꼭지는 이미 탱탱하게 세워져 있어서 입술로 굴리자 떨어져 내릴 것 같았다.
“해줘요, 응?”
젖꼭지를 서너번 더 입술로 굴렸을 때 주영이 조철봉의 어깨를 두손으로 당기면서 말했다. 숨소리가 가빴고 목소리는 떨렸다. 그러나 조철봉은 대답하지 않았다. 상체를 더 구부려 입술이 젖가슴에서 내려와 아랫배에 닿았을 때였다. 주영이 조철봉의 어깨를 이번에는 밀었다.
“이제 그만요.”
그때까지 조철봉의 두손은 침대를 짚은 채 주영의 몸에 닿지 않고 있었다. 그것은 한꺼번에 여러가지 작업을 하면 받아들이는 상대방의 집중력이 떨어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조철봉은 주영의 두 손을 뿌리치고는 입술을 더 아래로 내렸다. 주영의 숲에 입술이 닿았을 때였다.
“아.”
짧고 놀란 외침이 일어나더니 주영의 온몸이 경직된 것처럼 느껴졌다. 두 다리를 딱 붙였으므로 조철봉의 머리가 다리 사이에 낀 셈이 되었다. 그때 조철봉이 두 손으로 주영의 다리를 벌렸다. 처음에는 힘을 주며 버티던 주영이 이윽고 다리를 벌렸을 때 조철봉의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주영은 이제 모든 것을 열어준 것이다. 조철봉의 입술이 샘에 닿았을 때 주영은 이제 거침없는 신음을 뱉었다. 샘을 뜨겁게 넘쳐나고 있었는데 주영은 몸을 비틀어 조철봉의 입술을 더 깊게 받아들였다.
“아아, 여보.”
주영이 헛소리처럼 외쳤으므로 조철봉은 그 상황에서도 다시 쓴웃음을 지었다. 주영이 부른 사내가 홍경태인지도 모르는 것이다. 갑자기 주영의 신음이 더 커지더니 온몸의 비틀림도 더 심해졌다.
“아아아.”
이윽고 주영의 허리가 활처럼 휘어지면서 마치 단발마의 외침같은 신음이 뱉어졌다. 절정에 오르는 것이다. 애무만으로 주영은 절정을 맛보고 있다. 신음이 더 높아지면서 주영의 몸은 굳어지기 시작했다. 휘어졌던 몸이 마침내 털썩 침대 위로 떨어지더니 이제는 조철봉의 온몸에 엉키면서 흐느껴 울었다. 가쁜 호흡을 뱉으면서 오열하는 이 순간은 무의식 상태일 것이었다. 조철봉은 주영을 함께 안은 채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주영의 절정은 격렬했다. 몸의 움직임이 컸고 어쩐지 어색했다. 그것은 이런 절정이 처음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좋아하는 여자가, 또는 스쳐 지나갈 여자라고 해도 상관없다. 그 여자가 품에 안겨 절정에 오르는 것을 확인했을 때 남자는 쾌감을 느끼는 것이다. 그 쾌감이 대포를 발사할 때의 느낌 이상이 되었다면 그 남자는 성인은 못되더라도 고수(高手), 또는 도인(道人)의 경지에 올랐다고 봐도 될 것이다. 조철봉은 안고있던 주영의 몸이 차츰 나긋해져 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가팔랐던 숨소리도 가라앉으면서 주영은 조금씩 몸을 꼬물거렸다. 제 정신이 돌아온 것이다.
“자, 그럼.”
그때 조철봉이 주영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지금부터야.”
그것이 무슨 말인지 주영이 모르겠는가? 조철봉이 상체를 세웠을 때 주영은 두다리를 벌려 맞을 채비를 했다. 이제 살살 하라는 등의 말은 꺼내지 않았고 꺼낼 필요도 없는 것이다. 조철봉의 철봉이 천천히 샘안에 진입했을 때 주영은 입을 딱 벌렸지만 신음을 뱉지는 않았다. 그러나 샘의 벽이 밀착되면서 수만개의 신경세포가 꿈틀거리는 것이 느껴졌는데 그것들이 일제히 탄성을 뱉는 것 같았다.
“으으음.”
탄성은 조철봉 쪽에서 뱉었다.
“좋구나.”
어떤 여자는 샘 안에 수백마리의 지렁이를 키우고 있는 것 같은 명기(名器)를 갖고 있으며 또 누구는 소시지를 자를 정도로 죄는 힘이 강하다는 등 오만가지 진기명기에 대한 사연이 많지만 조철봉의 경험에 의하면 명기는 주인을 잘 만나야 빛을 본다. 그것은 곧 명기는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말과도 같다. 그냥 넣고 발사만 하는 놈들에게는 명기나 요강이나 마찬가지이며 진실로 인류를 위하며, 여자를 존중하는 사내라면 소시지를 자르는 샘 안에 들어가도 끄덕없이 버티며 여자를 행복하게 해줄 것이다.
따라서 주영의 샘은 보통과는 달랐지만 조철봉은 당황하지 않았다. 철봉이 한번 꽂힐 때마다 주영은 숨만 들이켜면서 조철봉을 끌어당겼지만 샘안은 난리가 났다. 압박감과 마찰, 꿈틀거림, 뜨거움과 솟구침, 그 모든 것이 혼합된 느낌이 철봉을 통해 온몸으로 전달되면서 뇌에서는 어서 이것으로 끝내자고 아우성을 치는 것이다. 즉 대포를 힘차게 발사해버리자는 간절하며 절박한 욕망이 숨이 막히도록 누르고 있는 것이다. 조철봉도 다시 철봉을 내려꽂으면서 이를 악물었다. 이미 눈은 부릅떠져 있다. 한때 지장보살의 진경을 외우기도 했으며 혼탁한 정치를 생각하면 마찰느낌이 약해지면서 잠깐 시간을 늦출 수가 있었다. 북한의 핵도 생각했었고 경제 상황도 시간 늦추는데 써먹었다.
“아, 좋아요. 여보.”
다시 한번 꽂았을 때 주영이 잇새로 말했다. 숨이 가팔라서 목소리는 억양이 불분명했고 몸은 굳어져 있다. 조철봉은 다시 이를 악물었다. 이 조건에서 아마 1분을 견디는 장사도 드물 것이었다. 그, 홍경태는 어떻게 했을 것 같은가? 틀림없이 10초 전후에서 끝냈을 것이다. 조철봉은 다시 철봉을 밀어 넣으면서 문득 자신의 미래를 생각했다. 당장의 내일보다 3년후, 5년후를 떠올려본 것이다. 그러자 온몸의 피부가 서늘해지면서 어깨에 소름까지 돋아났다.
“아아악”
그때 주영이 커다란 탄성을 처음으로 뱉으면서 하반신을 비틀었다. 그러자 철봉이 강하게 수축되면서 전류가 흐른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철봉은 끄덕하지 않았으므로 조철봉은 더 힘있게 움직였다.
그때부터 주영의 몸은 신이 오른 것처럼 느껴졌는데 허리를 솟구치며 몸을 치켜들 때는 위에 엉킨 조철봉의 몸이 번쩍 들릴 정도였다. 주영은 끝이 보이지 않는 절정으로 치솟았고 조철봉은 그것을 샅샅이 느낄 수 있었다. 화음이 맞는다는 표현이 어울릴 것이었다. 조철봉의 미세한 몸짓 하나도 주영은 놓치지 않았으며 다음 동작을 위하여 호흡을 맞춰 나갔다.
이윽고 조철봉은 주영의 세번째 폭발과 함께 분출했다. 실로 엄청난 장면이었으나 그렇다고 지진이 일어나거나 화산이 터진 것 같은 소동은 아니다. 하나가 된 두 몸이 엉키면서 이 세상에서 겪을 수 있는 쾌감 중 가장 진하고 가장 격하며 가장 자극적인 순간을 맛보게 된 것이다. 가쁜 숨을 뱉으며 조철봉은 주영을 내려다보았다. 땀으로 범벅이 된 채 주영은 눈을 감고 있었는데 숨을 뱉을 때마다 옅은 신음소리가 났다. 아직도 쾌락의 여운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조철봉이 주영에게 가볍게 입을 맞췄다.
“좋았어.”
이제는 주영의 귓불을 입술로 물면서 조철봉이 말했다.
“이렇게 뜨거울 줄은 상상하지도 못했어.”
그때 주영이 눈을 뜨더니 조철봉을 보았다.
“저도 처음이에요.”
주영이 더운 숨을 조철봉의 볼에 뱉으면서 말했다.
“이렇게까지 되는 줄 정말 몰랐어요.”
“그래?”
“한번도 이런 느낌을 받지 못했어요.”
“아무하고도?”
“전 지금까지 두 사람밖에 겪지 못했어요. 사장님 하고.”
또 하나는 홍경태라는 말이었다. 몸을 굴려 옆에 누운 조철봉이 천장을 향해 길게 숨을 뱉었다. 갖은 곡절을 겪고나서 이제 한몸이 된 것이다. 남자는 일단 몸을 섞고나면 긴장이 풀리게 된다. 그 다음에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상대방 여자에 대한 신비감이 벗겨진다. 그것이 지나치면 대포를 발사한 순간부터 도망갈 생각을 하는 놈도 있다. 그것이 서로 좋은 감정을 가진 사이에서도 일어나는 현상인 것이다. 조철봉이 팔을 뻗어 주영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옌지로 돌아가서 예전처럼 지낼 수 있겠지?”
낮은 목소리로 묻자 주영이 머리를 끄덕였다.
“이제 다 털어내었어요. 앞으로는 사장님만 바라보고 살 거예요.”
“난 한달에 한번 정도밖에 오지 못해. 그래도 견딜 수 있어?”
“얼마든지.”
주영이 몸을 비틀어 조철봉의 가슴에 얼굴을 붙였다.
“얼마든지 견딜 수 있어요.”
“집은 아직 비어있어. 자동차도.”
“주영의 허리를 당겨안은 조철봉이 말을 이었다.
“네가 원하는 건 다 해주마.”
“안아주세요.”
주영이 조철봉의 가슴에 얼굴을 비비면서 말했다. 하체가 서로 밀착되어 있어서 철봉이 주영의 허벅지를 건드리고 있는 중이다.
“다시 한번만.”
철봉을 두 손으로 움켜쥔 주영이 더운 숨을 뿜으며 서둘렀다.
“이번에는 그냥 짧게, 그래도 난 기절할 것 같아요.”
조철봉은 주영의 어깨를 잡아 일으켰다.
“내 위로 올라와.”
그러자 주영이 거침없이 조철봉의 배 위로 올라왔다. 단 한번의 섹스로 이렇게 서로 익숙해진다
891)실업자-1
다음날 오후에 조철봉은 서울 회사의 사무실로 출근했다. 단둥에서 옌지를 거쳐 서울로 돌아온 것이다. 물론 백주영과는 옌지에서 헤어졌는데 옌지 사업장의 오태복에게 뒤처리를 맡겨 놓았다. 밀린 결재 서류를 살펴보던 조철봉은 전화벨 소리에 정신이 든 것처럼 벽시계를 보았다. 오후 6시반이 되어 있었다. 전화를 들어 귀에 붙였을 때 곧 이기백의 목소리가 울렸다. 이기백은 일년에 한두번 정도 만나는 동창이었지만 서로 호흡이 맞는 사이였다. 건설회사에 근무하다가 강남 요지에 땅을 사놓고는 그곳에 빌딩을 지어서 아직 마흔이 안된 나이인데도 빌딩에서 나오는 임대료만으로도 외제 자가용을 굴리고 사는 놈인 것이다.
“야, 오늘 왔다면서?”
대뜸 그렇게 물은 기백이 이쪽 대답도 듣기 전에 말했다.
“오늘 저녁 8시에 아정에서 보자. 내가 한잔 살테니까.”
“야. 나, 오늘은 피곤해서.”
“인마, 내가 열흘을 기다렸어. 오늘은 안돼.”
그러더니 기백의 목소리가 은근해졌다.
“아주 물 좋은 곳이 있단 말이다. 네가 실망한다면 내가 네 아들이다.”
“이 자식이 아직도 정신을 못차렸군.”
“내가 너보다는 낫지.”
“야, 오늘은 안돼.”
“잔소리 말고, 8시다.”
그러고는 전화가 끊겼으므로 조철봉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나쁜 기분은 아니다. 오늘은 서경윤에게 찾아가 영일이도 볼 계획이었지만 내일로 미뤄도 될 것이다. 거기에다 기백이 말한 물 좋은 곳이 어딘가 궁금해졌다. 친구라고 하면 고등학교 동창을 최고로 치는데 그것은 사춘기 시절부터 인격이 형성되어 가는 과정을 함께 부대끼며 성장했기 때문일 것이다. 대학시절의 교우관계는 이미 앞뒤를 재는 타산이 작용되는 데다 함께 있는 시간도 적고 사회생활을 앞둔 경쟁관계가 시작되어서 각박한 환경이다. 그러나 고등학교 시절에 그야말로 목숨을 함께 한 친구 사이였다고 해도 사회에 나간 후에 다른 환경으로 떨어진다면 서먹해진다. 오히려 같은 환경에서 지내는 사회 친구가 더 격의없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기백은 고등학교때 별로 친하지 않다가 사회에 나오고 난 후에 친해진 경우라고 볼 수 있었다. 그것은 첫째 둘의 경제 수준과 씀씀이가 비슷했으며 둘째로 둘 다 여자를 밝히기 때문일 것이다. 거기에다 기백도 몇년 전에 이혼했는데 딸을 전처가 기르고 있는 것도 같았다. 서로 자식에 대해서 말은 안했지만 동병상련의 감정도 느끼고 있을 것이다. 그날 저녁, 조철봉은 한정식집 아정에서 기백을 만났다. 기백은 앞머리가 약간 대머리였지만 체격도 좋았고 호남형의 인상이었다.
“야, 어서와.”
이미 한정식상을 받아놓은 기백이 반색을 하고 조철봉을 맞았다.
“중국에서 재미 좀 봤냐?”
조철봉의 잔에 소주를 따르면서 기백이 은근한 표정으로 물었다.
“중국 북방 애들이 괜찮다던데, 엉덩이가 위로 딱 붙고.”
“엉덩이가 위로 붙으나 아래로 처졌거나 다 똑같아.”
“이 자식이.”
눈을 흘긴 기백이 술잔을 들더니 한모금에 삼키고는 정색하며 말했다.
“내가 밥 먹고 네 놈을 좋은 곳에 데려가 주지. 내가 그동안 개발해 놓은 곳이니까 형님한테 고맙다고 해라.”
이기백이 조철봉을 데려간 곳은 식당에서 차로 10분 거리에 있는 노래방이었다. 요즘은 룸살롱보다 노래방에서 부르는 여자들이 더 낫다는 소문을 들은 터라 조철봉은 잔소리를 뱉지 않았다. 노래방은 시설이 좋지도 않았고 종업원들이 친절한 것도 아니었지만 손님이 많았다. 방마다 손님이 들어차 있었고 문틈으로 간드러진 여자들의 노랫소리가 들렸는데 노래 솜씨가 프로였다. 도우미들인 것이다. 방으로 안내되었을 때 기백이 웃음띤 얼굴로 말했다.
“이곳은 20대 초반에서 30대 초반의 유부녀 도우미만 온다. 네가 실망하는 일이 결코 없을 테니까 마음 놓아라.”
그때 종업원이 방으로 들어서자 기백은 양주와 안주를 시켰다. 종업원과 낯이 익은지 농담을 주고 받았는데 오늘은 특별한 손님을 모시고 왔으니 실수하면 안된다고 당부를 했다.
“내가 이곳에 대여섯번 왔지만 한번도 실망한 적이 없어.”
기백이 다시 장담했다.
“너도 보면 놀랄거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얼마든지 바꿀 수 있어. 물론 전화로 불러야 하기 때문에 시간은 조금 걸리지만 말이야.”
“룸살롱에서 이런 곳으로 원정을 나온다고 하던데. 안마시술소나 미아리에서도.”
“떽.”
정색한 기백이 조철봉을 노려보았다.
“얀마, 내가 그걸 구분 못하겠냐? 너도 보면 알 것이다.”
“나야 알지만 넌 똥 오줌을 못가리는 놈이라서 그런다.”
물론 장난이지만 조철봉이 기백을 씹기 시작했다.
“요즘은 건수한테 자주 안들르냐?”
조철봉이 묻자 기백은 입맛만 다셨다. 박건수는 피부과 전문의로 고등학교 동창인데 기백이 자주 성병 치료를 받으러 들렀기 때문이다. 기백은 건수에게 비밀로 하라고 신신당부를 하지만 무슨 병이고 증세가 어떻다는 것까지 모두 조철봉에게 보고가 되었다.
“그렇게 잘 가리는 놈이 병을 달고 다녀? 몇달 전에도 파이프가 샜다며?”
“시끄러 이 자식아. 그, 건수 자식을 그냥.”
그때 방문이 열리더니 술병과 안주를 받쳐든 종업원이 먼저 들어섰고 뒤를 여자 두명이 따라왔다. 룸살롱과 똑 같았다.
“어떠십니까?”
종업원이 술병을 내려놓으면서 묻는 것도 룸살롱의 마담 역할이다. 조철봉은 여자들이 방안에 들어설 때부터 시선을 주고 있었는데 집중한 표정이었다. 앞쪽에 앉은 기백도 비슷한 표정이다.
“좋아.”
이윽고 기백이 말했다. 그러더니 머리를 돌려 조철봉을 보았다.
“어쩔래?”
조철봉이 머리를 끄덕이자 기백이 내처 말했다.
“네가 먼저 골라.”
그러자 조철봉이 손을 들어 왼쪽에 서있는 여자를 가리켰다.
“거기가 이리로.”
조철봉의 손짓을 받은 여자가 무표정한 얼굴로 다가오더니 옆에 앉았다.
“어때?”
나머지 여자가 옆에 앉기도 전에 기백이 물었다. 여자들에 대한 평을 묻는 것이다. 조철봉은 심호흡을 했다. 지금까지 룸살롱은 물론이고 나이트를 작은집 드나들 듯했어도 오늘처럼 눈이 번쩍 뜨이는 여자들을 만난 것은 처음이었다. 물론 선입견도 작용했겠지만 첫째로 분위기가 신선하다. 용모도 빼어난데다 옷차림도 수수해서 영락없는 초짜 유부녀다.
“전재영이라고 합니다.”
옆에 앉은 여자가 먼저 자신을 소개했다.
“서른살이고 세살짜리 딸이 하나 있어요.”
조철봉의 시선을 받은 여자가 조금 엷은 듯한 입술 끝을 올리며 웃었다.
“6개월전 남편이 실업자가 되고 나서 이혼을 했죠. 여기서 알바한 지는 일주일 되었구요.”
“난 조철봉이라고 하는데.”
조철봉도 소개했다.
“서른일곱에 일곱살 짜리 아들이 하나 있고 이런데 와서 마시고 놀 만큼은 벌지. 더 덧붙일 것이 있다면.”
여자에게 은근한 시선을 준 조철봉이 말을 이었다.
“언제나 괜찮은 여자를 찾으려고 헤매고 다니는 잡놈이지. 그것이 내 유일한 취미라고 할까?”
“흐흥.”
가볍게 웃은 재영이 힐끗 앞쪽을 보았다. 앞쪽 자리에서도 이기백이 여자와 이야기를 나누느라 여념이 없다. 술병의 마개도 따지 않았고 노래방 기계에서 마이크도 빼지 않았다.
“솔직하시네요.”
“난 거짓말은 못하는 성격이야.”
“요즘 같은 불황에 사업이 잘 되시는가 보죠?”
“다 안되는 건 아니지, 불황이 기회인 사람도 있으니까.”
“어떤 사업을 하시는데요?”
“중고차 판매.”
“요즘은 차도 잘 안산다던데.”
“내가 사들이는 거야.”
“아아.”
재영이 눈을 크게 떴다. 관심이 있는 표정이었다.
“그러니까 중고차를 구입해서 다시 판다는 말씀이세요?”
“그렇지, 외국으로.”
“아아.”
“요즘에는 싼 가격으로 구입이 되지. 외국은 불황이 아니니까 잘 팔리고.”
“그렇겠네요.”
“어때? 우리 오늘밤 이차 나갈까?”
“어머.”
그때 정신을 차린 듯 재영이 고쳐 앉더니 쓴웃음을 지었다.
“우린 아직 술도 한잔 안마셨어요.”
“이야기할 건 다했지. 거긴 내 눈이 번쩍 뜨일 만한 여자야. 분위기가 가슴을 치고 있다니까.”
조철봉이 손을 뻗어 재영의 손을 쥐었다. 재영이 손을 잡힌 채 가만있었으므로 조철봉은 바짝 다가앉았다.
“정말 오랜만에 찾아낸 물건이지.”
그러고는 조철봉이 재영을 잡은 손에 힘을 주고 웃었다.
“미안해, 칭찬으로 받아들여줘.”
“어디가 마음에 들어요?”
“그 얼굴.”
조철봉이 재영의 얼굴을 정색하고 보았다. 재영은 갸름한 얼굴형이었으나 눈은 가는 편이었고 코끝은 조금 위로 치켜 올라갔으며 입술은 작고 엷었다. 그렇지만 눈꼬리가 치켜 올라간 두눈은 다부진 분위기에 일조했으며 입술 끝도 야무지게 닫혀 있어 얼핏보면 날카로운 인상이었다. 조철봉의 시선을 받은 재영이 다시 흐흥 웃었다.
“그래요? 난 미인은 아닌데.”
“섹시해.”
“성적인 충동을 느껴요?”
“당연하지. 느끼지 않는 놈은 병신이 분명해.”
조철봉의 시선이 재영의 상체에서 하체까지를 천천히 훑어내렸다.
“몸도 훌륭하고.”
하지만 재영은 바지 차림이다.
그때 이기백이 자리에서 일어나 노래를 시작했으므로 조철봉의 행동은 더 자유롭게 되었다.
“까놓고 말해서.”
조철봉이 당장에 담판을 짓겠다는 표정으로 재영을 보았다.
“우리, 필요없는 중간 과정을 생략하고 본론으로 들어가지. 난 당신하고 하고 싶어서 아까부터 몸이 근질근질한 상태이고 당신은 이왕 돈을 벌러 나온 입장이니까 결단만 내리면 돼. 어쩌구 저쩌구 할 것 없이 하느냐 마느냐로 말이야. 만일 하겠다면 당신은 흥정을 할 수가 있어. 제시하기가 거북하다면 내가 부를테니까 마음에 들면 머리만 한번 고상하게 끄덕여 주면 돼.”
“흐흥.”
그러자 재영이 또 한번 짧게 웃었다. 들창코가 조금 벌렁거렸으며 가는 눈이 더 가늘어지면서 한쪽 볼에 보조개가 패었다. 볼수록 귀여운 인상이었다.
“간단하네요.”
“우리는 허례허식에 둘러싸여 인생을 참 복잡하게 살고 있지.”
그때 기백은 파트너의 허리를 감아안고 나훈아의 사랑 2절을 부르는 중이었다. 재영이 잠시 탁자위의 술잔을 내려다 보더니 머리를 들었다.
“불러봐요.”
2차값을 불러보라는 말이었으므로 천하의 조철봉도 가슴이 뛰었다. 이번 협상에서 큰 기대를 걸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분위기를 가볍게 해주는 효과 정도나 기대했을 뿐이었고 조금 더 공을 들여야 본론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던 것이다. 정색한 조철봉이 재영을 보았다. 이 여자는 보통내기가 아니다. 그러나 또라이 시늉을 한 순진녀일 가능성도 있다.
“백만원.”
조철봉이 경매의 첫손님처럼 불렀을 때 재영이 퍼뜩 시선을 들었다. 눈꼬리가 치켜 올라간 두눈의 검은 눈동자가 반짝였다. 그러나 재영은 머리를 끄덕이지도 흔들지도 않은채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앞쪽에서 나훈아의 사랑이 끝나고 기백의 파트너가 패티 김의 이별을 부르기 시작했다. 재영의 시선을 받으면서 조철봉은 갈등했다. 2차에 1백만원이면 크게 부른 것이다. 보통 이곳에서 눈이 맞았을 때 20만원에서 30만원이 기준이며 정 급한 경우에는 50만원까지 주었다는 잡놈들의 이야기를 들었지만 1백만원이면 과하다. 특급 룸살롱의 탤런트 뺨칠 정도의 영계도 그 정도면 데리고 나간다. 그러나 마침내 조철봉이 어깨를 늘어뜨리면서 입을 열었다. 기세 싸움에서 진 것이다.
“좋아, 2백.”
그때 재영이 아랫입술을 깨물더니 조철봉의 옆으로 바짝 붙었다. 기백의 파트너가 잔뜩 음정을 높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재영이 조철봉의 귀에 대고 말했다.
“3백으로 한달동안 날 가져요.”
그순간 조철봉은 숨을 삼켰다. 재영은 연거푸 이쪽을 놀라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조철봉이 손익 계산을 하기도 전에 재영의 말이 이어졌다.
“한달동안 이런 알바 안하고 살려고 그래요. 그 대신 자기는 원하는 대로 날 갖고, 어때요?”
“좋아.”
조철봉이 머리를 끄덕이고는 재영의 허리를 당겨 안았다. 군살이 잡히지 않는 탄력있는 허리였다.
“오늘밤부터야.”
“우리 집으로 가요.”
재영이 말하자 조철봉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전에 여자 따라갔다가 팬티 바람으로 도망쳐 나온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노래방에서 나왔을 때는 밤 10시가 조금 지났을 무렵이었는데 조철봉은 노래를 한곡도 부르지 않았다. 이기백도 제 파트너와 이야기가 된 모양이어서 빚쟁이하고 헤어지듯이 밖으로 나오자마자 조철봉과 갈라섰다. 길가에 선 전재영이 추운듯 어깨를 웅크리고 조철봉을 보았다.
“어때요? 우리집에 갈래요?”
“집이 어딘데?”
“사당동. 택시로 20분밖에 안걸려.”
“가자.”
“오늘밤 자고 갈거야?”
“봐서.”
지나가는 택시를 세운 그들이 사당동의 연립주택 앞에 도착했을 때는 재영의 말대로 정확히 20분 후였다.
“여기야.”
재영이 붉은색 벽돌 건물인 이층 연립주택을 눈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딸은 지금 친정 어머니가 데려갔어. 내가 노래방에 가면 맡겨 놓거든.”
이층 계단을 오르면서 재영이 손가락을 입에다 붙이고는 소곤거렸다.
“쉿. 아래층 여자가 말이 많아서 조심해야 돼. 소문나면 골치 아프거든.”
마치 도둑처럼 현관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서자 재영이 얼굴을 펴고 웃었다.
“휴우. 진땀 나. 남자 데리고 오는건 처음이거든.”
“정말이야?”
“믿거나 말거나.”
“집안이 아담하군.”
소파에 앉은 조철봉이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20평형의 집 안은 깨끗했고 가구는 단정하게 놓여져 있었다. 세살짜리 아이가 있는 집 같지 않았다.
“뭐 마실거야? 맥주는 있는데.”
재영이 묻자 조철봉이 머리를 끄덕였다. 아직 경계심이 가시지 않아서 작업을 시작할 기분이 아니었던 것이다. 방으로 들어간 재영이 옷을 갈아입고 나왔는데 원피스 차림이었다. 허리를 끈으로 묶은 헐렁한 면 원피스여서 움직일 때마다 허리와 엉덩이의 곡선이 드러났다.
“긴장 풀어.”
쟁반에 맥주와 안주를 담아오면서 재영이 말했다.
“저고리라도 벗고.”
“벗고 있다가 누가 들어오는 건 아니지? 말하자면 어머니라든가.”
“엄마는 지금 주무실거야.”
앞자리에 앉은 재영이 잔에 맥주를 따르면서 말했다. 재영의 얼굴은 편안한데다 전혀 긴장하고 있지 않아서 조철봉의 가슴도 차츰 진정되었다.
“내가 6개월전에 이혼했다고 했지?”
재영이 물었으므로 조철봉은 술잔을 든채 머리만 끄덕였다.
“남편, 그러니까 전남편이 실직한지 6개월만에 이혼한거야.”
“6개월씩이구만. 이혼한지 6개월만에 나를 만났고.”
“흐흥.”
버릇처럼 짧게 웃은 재영이 한모금 맥주를 마시더니 조철봉을 보았다.
“노래방에 일주일간 나가면서 매일 손님들의 유혹을 받았어. 별 놈자들이 다 많더구만.”
“꼬시지 않으면 놈자가 아니지. 그런데 정말 한번도 이차 안 나갔다구?”
“정말이야. 난 거짓말 안해.”
“왜 안 나간거야?
“왜 자기 따라 나왔느냐고 물어봐.”
“그래. 왜 날 따라 나왔니?”
“첫째 제일 크게 불러서.”
“그럴줄 알았어. 대개 20, 30 정도겠지.”
“50 짜리도 있었어.”
그러고는 재영이 다시 풀석 웃었다.
“둘째로 자기 섹스가 강해 보여서. 난 섹스 안한 지가 1년 가까이 됐거든.”
조철봉은 맥주를 한모금 삼키고는 앞에 앉은 전재영을 보았다. 다리 한쪽을 무릎 위로 올려놓아서 허벅지까지 맨살이 드러났는데 피부가 매끈하고 윤기가 났다. 재영의 피부는 알맞게 탄 갈색이었다. 조철봉이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난 이렇게 남의 집에 들어온 건 처음이라서 말이야.”
물론 거짓말이다. 수없이 아파트에다 연립주택, 빌라를 섭렵해온 조철봉이다. 그러나 항상 긴장이 된다. 호텔방 같으면야 진즉 벗고 작업을 시작했겠지만 이곳은 함정일 수도 있는 것이다.
“조금 긴장이 되는군.”
“바아보.”
재영이 바보를 바아보라고 부르더니 눈을 흘겼다. 몸을 한쪽으로 조금 비틀었으므로 허벅지가 더 드러났다.
“걱정마, 아무도 안오니까.”
“아니, 그것보다도.”
정색한 조철봉이 말을 이었다.
“이런 분위기는 처음이라 그래.”
“어쨌든 나하고 계약할 거지?”
“당근이지.”
이미 약속했지만 돈이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낸 조철봉이 수표를 꺼냈을 때였다. 재영이 얼굴을 굳히고는 조철봉을 보았다.
“지금 뭐하려고 그래?”
“계산하려고.”
“싫어.”
머리를 저은 재영의 표정이 더 굳어졌다.
“우리 페어 플레이해.”
“페어 플레이라니?”
“먼저 한꺼번에 주지 말란 말이야.”
“아니, 그러면?”
“먼저 계약금으로 10퍼센트만 줘.”
재영이 똑바로 조철봉을 보았다.
“그리고 한달 계약이니까 보름이 되는 날 계약금의 절반을 주고.”
“??”
“한달이 되는 날 나머지 절반을 주면 돼. 그래야 그쪽도 안심이 될테니까.”
“안심은 무슨.”
“아직 서로 믿지 못하는 사이에서는 그렇게라도 하는 것이 서로에게 좋아.”
“그것 참.”
쓴웃음을 지었던 조철봉은 가슴이 차츰 가벼워지면서 경계심이 풀려나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재영이 이것도 정략적으로 말했다면 할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이런 고단수의 상대에게는 당하는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좋아.”
조철봉이 다시 지갑에서 10만원권 수표 세장을 꺼내 내밀자 재영이 두손으로 아주 공손하게 받았다. 그러고는 머리까지 숙여 인사를 했다.
“고맙습니다.”
그순간 조철봉은 숨을 들이켰다. 감동한 것이다. 돈을 소중하게 다루는 사람은 돈을 모으게 된다. 옛말에 밥을 복스럽게 먹는 사람은 식복이 따라 잘산다는 말도 있는데 절대 빈말이 아닌 것이다. 그것은 운 따위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소중하게 다룬다는 것은 곧 아끼고 귀하게 여긴다는 뜻이며 복스럽게 먹는 것 또한 소중함을 알기 때문이 아닌가?
“나, 씻고 올께.”
돈을 쥔 재영이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조철봉을 향해 웃었다.
“이렇게 돈을 받으니까 조금 어색해서 그래.”
“어색하긴.”
“안방 옷장에 남자 파자마 있을거야. 전남편 것인데 갈아 입으려면 입어. 기분나쁘면 그냥 두고.”
“알았어.”
몸을 돌린 재영이 화장실로 가다가 주춤 멈추더니 말했다.
“긴장하지 마.”
이제는 되었다. 전재영이 화장실로 들어섰을 때 조철봉의 가슴 속에서 그런 말이 터져나왔다. 물론 속으로 터진 말이다. 지금까지 떠보고 재보고 하느라고 욕정이 일어날 여유가 없었는데 재영이 화장실에 들어간 순간부터 아랫도리에 불끈 힘이 실렸다. 모처럼, 참으로 오랜만에 왕건이가 걸린 것이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은 바로 이런 때 쓰이는 말이다. 그동안 중국과 베트남을 오가면서 백주영과 송윤지 사이를 맴돌다가 우여곡절 끝에 백주영을 안게 되었지만 그쪽은 마치 피투성이의 전쟁을 치르고 나서 얻은 전리품 같아서 심신이 피로했다. 그러나 이쪽은 어떤가? 우연히 발길을 돌려 새 땅에 들어섰는데 날씨는 화창했으며 잔디 깔린 정원에 새와 나비가 날고있는 별천지 같다.
조철봉은 마침내 소파를 박차듯이 일어나 안방으로 들어섰다. 안방은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는데 옷장을 열자 한쪽 구석에 잘 접힌 남자용 잠옷이 보였다. 재영의 전 남편이 입던 잠옷이었다. 옷을 갈아입은 조철봉이 다시 소파에 앉았다가 일어섰다. 슬슬 마음이 조급해져가고 있어서 가만히 앉아 기다릴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화장실로 다가간 조철봉이 문고리를 비틀어 보았을 때 문이 밀렸다.
“어머, 왜?”
안에서 문 열리는 소리를 들었는지 재영이 놀란듯 높은 목소리로 물었다.
“나, 같이 샤워해도 돼?”
조철봉이 문틈으로 말했다.
“내가 등 밀어줄게.”
“싫어, 부끄러워.”
“네 몸을 보고 싶어서 그래, 부탁이야.”
그러자 잠시 망설이는 듯 재영이 가만 있다가 말했다.
“들어와.”
“고맙다.”
감지덕지한 목소리로 말한 조철봉이 번개가 치는 것처럼 옷을 벗어던지고는 화장실로 들어섰다. 재영은 샤워기 앞에서 이쪽에 등을 보이며 서 있었는데 세상에서 그보다 더 자극적인 자세는 없을 것이다. 샤워기의 물은 재영의 어깨와 옆구리로 쏟아지고 있었으며 물에 젖은 재영의 알몸은 눈이 부셨다. 조철봉은 잠깐 재영의 뒤에 서서 뒷모습을 음미했다.
“으음, 훌륭하구나.”
조철봉이 탄성을 뱉자 재영이 두손으로 가슴을 감싸안은 자세로 어깨를 더 움츠렸다.
“싫어, 그만해.”
“뭘? 내가 어쨌다고?”
“그만 보란 말이야.”
“알았어, 그럼 만져주지.”
“어머나.”
이런 말장난을 누가 들으면 아주 유치하다고 하겠지만 두 당사자에게는 천상의 복음보다도 더 아름답고 심금을 울리는 대화인 것이다. 조철봉은 심호흡을 했다. 재영의 뒷모습은 예상했던 대로 미끈했다. 엉덩이는 단단하게 위로 올라붙어 있었고 허리는 잘록하게 들어갔다가 완만한 곡선을 그리면서 엉덩이와 허벅지로 내려갔다. 조철봉은 재영의 뒤쪽으로 바로 다가섰다. 그러자 재영의 몸이 눈에 띌 정도로 굳어졌다.
“아름답다.”
재영의 허리를 감싸안은 조철봉이 귀에 대고 속삭였다. 샤워기의 물이 어깨로 쏟아졌고 몸이 밀착되자 철봉이 성을 냈다. 조철봉은 뒤에서 재영의 허리와 허벅지, 그리고 어깨까지의 선을 부드럽게 애무하기 시작했다.
“아아.”
재영이 머리를 뒤로 젖히면서 입으로 뭘 찾는 시늉을 했다. 그것이 무슨 표시겠는가
?瑁뗐떵응?머리를 숙여 전재영의 입술을 덮쳤다. 반쯤 입을 벌리고 있던 재영은 조철봉의 입술이 덮쳐지자 두손을 올려 목을 감았다. 그러자 젖가슴이 환히 드러났다. 검붉은 젖꼭지는 이미 발딱 세워져 있었는데 샤워기의 물줄기를 맞아 흔들렸다.
“아아.”
재영이 숨가쁜 목소리로 신음했다.
“좋아, 자기야.”
신이 오른 여자에서부터 석녀까지, 사기꾼에서 천사같은 자선사업가까지 두루두루 섭렵한 조철봉이었지만 여자는 언제나 새로우며 신비스러운 존재인 것이다. 조철봉은 재영을 돌려 세우고는 이제 정면에서 안았다. 재영도 조철봉의 목을 감아 안고는 온몸을 빈틈없이 붙이고 있다. 조철봉이 재영의 젖가슴을 손으로 애무했을 때였다.
“아야야.”
재영이 몸을 비틀면서 커다랗게 신음을 뱉었으므로 조철봉은 쓴웃음을 지었다.
“거기가 그렇게 예민해?”
“응.”
몸을 비비면서 재영이 헐떡였다.
“거긴 아주 예민해.”
조철봉은 다시 재영의 입술에 키스했다. 재영은 겪을수록 감칠맛이 나는 여자였다. 제스처가 자연스러웠고 과장되지 않아서 부담이 없는 것이다.
“자기야, 우리 침대로 가.”
재영이 조철봉의 철봉을 손으로 쓸면서 말했다.
“자기 물건이 너무 커.”
“그래?”
“응, 이렇게 큰 건 처음이야.”
남자는 대부분, 아니 백명이면 백명 다 자신의 성기가 크고 강하다는 칭찬 받기를 좋아한다. 그만한 칭찬과 비교되는 칭찬이 없을 정도로 좋아하는 것이다.
조철봉이 철봉을 재영의 다리 사이에 끼우면서 물었다.
“네 전남편 것하고 비교하면 어때?”
“두배는 돼.”
“흐응.”
“겁나. 무서워.”
하면서도 재영이 몸을 비틀어 다리 사이에 철봉을 더 깊게 끼웠다.
“자기야, 우리 나가 응?”
“그러지.”
샤워기를 끄고 욕실을 나온 그들은 물에 젖은 몸을 닦지도 않았다. 재영이 서둘러 조철봉을 이끌고 침대로 오르더니 물에 젖은 몸 그대로 누운 것이다. 방에 불을 환하게 켜 놓아서 반듯이 누은 재영의 알몸이 눈부시게 드러났다. 알맞게 솟은 젖가슴은 밥공기만 했으며 홀쭉한 배와 단단한 허벅지 사이의 짙은 숲, 그리고 숲사이의 붉은 골짜기도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아이 엄마 같지않은 몸이었다.
“자기야, 나 섹스 정말 오랜만이야. 일년이나 되었어.”
누운채 재영이 번들거리는 눈으로 조철봉을 바라보며 말했다. 조철봉은 재영의 몸 위에 엉거주춤 서서 몸매를 내려다보는 중이었다. 재영이 두팔을 벌리면서 말했다.
“자기야, 그만 보고 안아줘.”
조철봉이 몸을 숙이자 재영이 목을 감아 안았다.
“나 벌써 흘러.”
재영이 앓는 소리처럼 말했다.
“자기가 그곳을 바라보기만 해도 뭐가 찌르는 것 같아서.”
조철봉은 저도 모르게 신음했다. 재영이 의도적으로 이런 말을 한 것 같지는 않았다. 분위기를 띄우는 천성적인 재주가 있는 것이다. 세상에 이런 말에 달아오르지 않는 남자가 있겠는가?
전재영은 화장실에서부터 달아올라 있었으므로 더이상의 애무는 필요하지 않았다. 다른때 같았으면 손끝과 입만으로 상대를 절정에 올려놓은 후에 다시 본격적인 작업을 했겠지만 이번에는 그러지 않은 것이다. 조철봉이 정상위 자세를 취했을 때 재영은 다리를 벌리면서 맞을 채비를 했는데 벌써 호흡이 가팔랐다. 두눈을 감은 채 얼굴은 상기되었고 기대감에 터질 것 같은 분위기가 온몸으로 퍼져나온 것이다. 조철봉이 머리를 숙여 재영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할게.”
재영이 대답대신 목을 감은 팔에 힘을 주어 당겼는데 하체도 들썩였다. 조철봉은 철봉을 슬쩍 골짜기의 우물끝에 대었다. 그러자 재영의 하체가 찔끔 놀라면서 저절로 위로 솟구쳤다. 그러고는 아직 철봉이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재영의 입에서 옅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진국이다. 누구 말마따나 석달 열흘을 달이고 달아 진국인 것이다.
길게 숨을 뱉은 조철봉은 마치 고려청자를 굽는 장인처럼 정신을 집중하고 철봉을 불가마 안에 천천히 넣었다. 철봉은 들어간 상태로는 의미가 벌써 반감된다. 철봉이 들어가는 과정과 순간이 금쪽 같이 소중하며 값진 것이다. 그 거리가 비록 이십센티도 되지 않지만 정성을 들인다면 이십리가 되는 것처럼 느껴질 수가 있다는 것을 범인(凡人)들은 깨우쳐야 할 것이다. 조철봉은 범인이 아니다. 그래서 철봉이 들어가는 동안 재영은 아주 길게 탄성을 세번이나 뱉었으니 이십리는 못되더라도 이킬로미터 거리가 들어간 듯한 쾌감을 느꼈을 것이다.
“나 죽어.”
재영은 대번에 열락의 경지로 치솟아 버렸다. 이미 분출하고 있던 욕망이 더 거칠게 솟았으며 온몸은 잔뜩 당긴 활처럼 휘어졌다가 튕겨지기를 반복했다. 그러고는 조철봉이 강약의 조절을 반복한 지 오분도 되지 않아서 폭발해 버렸다. 괴성과 함께 조철봉의 온몸에 매달리더니 샘이 굳어버린 것이다. 남녀의 섹스는 상대적이다. 조루 증세가 있는 남편과 살다가 보면 빨리 오르는 것이 미덕이 된다. 남편보다 빨리 함으로써 남편의 자존심을 세워주고 가정의 평화를 지키는 눈물겨운 희생정신인 것이다. 재영이 바로 그 짝이었다. 어떻게 생각하면 저만 먼저 천당에 올라가버리는 이기적인 행위가 되겠지만 아마 그것을 나무랄 남자는 백만명 중에 한놈도 없을 것이다. 남자는 늦게 싸는 여자를 증오한다고 쓰면 수능에 맞는 답이 된다. 그러나 조철봉은 기절한듯 너부러져 있는 재영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그렇게 빨리 하지마. 억제하고 억제했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터트려봐. 그러면 더 높게 올라갈테니까.”
그러자 앓는 소리를 내던 재영이 신음을 뚝 그치더니 눈을 떴다. 그러나 눈에는 아직 초점이 잡히지 않았다. 조철봉이 재영의 눈과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재영의 입에서 단내가 났다.
“빨리 하는 것이 버릇이 들었구나. 지금부터는 천천히, 나하고 맞춰.”
조철봉이 재영의 땀으로 축축한 배와 허벅지를 손바닥으로 쓸었다. 그러자 재영의 몸이 다시 꿈틀거렸다.
“자기야, 자기는 아직.”
“그래, 난 아직 멀었어.”
조철봉의 손끝이 샘에 닿자 재영이 상반신을 힘겹게 일으켰다.
“자기야, 나 닦고 올게.”
샘을 닦고 온다는 말이다. 재영이 비틀거리며 일어나 걷다가 마침내 화장실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다리에 힘이 풀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 장면을 본 순간 조철봉은 다시 한번 감동했다. 자신과 섹스를 한 상대가 다리에 힘이 풀려 걷다가 넘어진 장면을 본 남자라면 누가 감동하지 않겠는가? 사내로서의 자부심이 충만될 것이며 오래도록 머릿속에 간직될 일이었다. 화장실에 들어갔던 전재영은 금방 나왔다. 밑물만 하고 나온 것인데 그것 또한 이쁜짓이었다. 한번 이쁘게 보이자 눈위에 뭐가 씌워진 것처럼 하는 짓이 다 이쁘게 보이는 것이다. 알몸으로 서둘러 다가오는 자세도 오죽 이쁘겠는가? 침대위로 오른 재영이 조철봉의 가슴에 찰싹 안겼다. 몸에 서늘한 냉기가 덮여져 있었으므로 조철봉은 닭이 병아리를 품듯이 온몸을 부풀려 안았다.
“아이, 추워.”
재영이 파고들며 말했다.
“자기야, 나, 또 하면 죽을것 같애.”
“엄살은.”
“아냐, 나, 아까 처음 했어.”
“처음 하다니?”
“처음 그것을 알게 되었다니까?”
“그 거짓말, 정말이야?”
“바아보.”
다시 재영이 가슴에 파고 들면서 조철봉의 철봉을 두손으로 감싸 쥐었다. 철봉은 감미로운 대화에 힘입어 어느덧 철봉이 되어 있었으므로 재영은 마치 야구 배트처럼 쥐고 있다.
“너무 좋아.”
재영이 조철봉의 가슴에 더운 입김을 뱉으면서 속삭였다. 이런 대화는 밤이 새도록 나누어도 질리지가 않다. 침실에서의 대화에서 고상하고 격조높은 단어를 구사하는 놈자가 있다면 틀림없이 베푼적이 없는 기득권 세력일 것이다. 그사이에 조철봉의 손길이 몇번 재영의 몸 위로 오르내렸을 뿐인데 방안의 열기는 어느덧 뜨거워졌다.
“나, 흘러.”
조철봉이 이미 알고 있는데도 재영이 헐떡이며 말했다. 손끝이 샘 주위를 서너번 문지르기만 했을 뿐인데 용량이 풍부한 활화산처럼 용암을 내뿜는 것이다.
“어떻게 참지? 가르쳐 줘.”
재영이 그렇게 물었을 때 조철봉은 마침내 정상위의 자세를 갖췄다. 재영은 조철봉이 상반신을 세우자마자 온 몸으로 받아들일 자세를 갖췄다. 그때 조철봉이 말했다.
“뒤에서 하자.”
“응?”
벌써 눈빛이 아른아른 해져있던 재영이 놀란듯 눈을 크게 떴다. 조철봉은 재영의 허리를 비틀어 뒤집는 시늉을 했다.
“뒷쪽에서.”
“아이이.”
하면서도 재영은 금방 엎드렸다. 두손을 앞으로 쭉 뻗은채 엉덩이를 약간 치켜든 자세였는데 한쪽 볼을 침대에 붙이고 있어서 고혹적인 모습이었다.
“으으음.”
조철봉의 입에서 저도모르게 탄성이 배어 나왔다. 이런 순간에는 누구한테든지 감사를 드리고 싶은 심정이 되는 것이다.
“이런 자세 좋아해?”
엉덩이를 어루만지며 묻자 재영이 숨가쁜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 몰라. 좋을것 같아.”
조철봉의 경험에 의하면 절정에 오르는데 자세 자체는 별로 영향을 받지 않는다. 거꾸로 붙거나 뒤집혀 매달리거나 결국 샘과 철봉 부분의 마찰 강도에 의해 결정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둘이 영향을 받는 것은 자세를 바꾼다는 환경의 변화이다. 그것을 대화로써 자극하고 확인하면 효과를 배가 시킬수 있다. 그래서 조철봉은 재영의 엉덩이에 몸을 딱 붙이고 물었다.
“흥분돼?”
다음날 아침, 잠에서 깨어난 조철봉은 먼저 커피 냄새를 맡았다. 아침 커피 냄새는 참으로 오랜만이어서 머릿속이 맑아졌다. 그리고 그때부터 가동이 시작된 뇌가 이곳이 전재영의 집이란 것과 어젯밤 장면을 순식간에 펼쳐 주었다. 재영은 또다시 극락에 올랐는데 이번에는 천하의 난봉꾼 조철봉도 그런 반응은 처음 겪었다. 여자의 반응은 백인백색이어서 조철봉은 겪을수록 여자의 진가를 알게 되었지만 재영의 분위기야말로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것이었다. 재영은 온몸이 불덩이가 된 것처럼 타올랐다가 마치 조철봉의 품 안에서 재가 된 것처럼 사라진 것이다. 그리고 조철봉이 정신이 들었을 때 다시 태어나 품 안에 안겨 있는 것 같았다.
“일어났어?”
아직 눈앞이 흐린 조철봉이 눈을 깜박였을 때 머리 위쪽에서 재영의 목소리가 울렸다. 다시 서너번 눈을 깜박인 조철봉은 커피잔을 들고 서있는 재영을 보았다. 재영의 얼굴은 말끔했고 원피스 차림이었다.
“자, 커피.”
재영이 웃음 띤 얼굴로 커피잔을 내밀었다.
“마셔, 그리고 씻을 동안 내가 아침식사 준비할게.”
그러고보니 주방 쪽에서 국 끓는 냄새가 났다.
“나, 아침 안먹어도 되는데.”
커피잔을 받아든 조철봉이 상반신을 일으켰다. 조철봉은 아직 알몸이다. 벽시계는 아침 7시반을 가리키고 있었는데 창밖에는 환한 아침 햇살이 비치고 있었다.
“그래도 먹어야 돼, 어젯밤 무리했는데,”
주방으로 돌아가면서 재영이 맑고 높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뿐거리는 가벼운 몸놀림이었고 엉덩이의 흔들림도 유연했다.
“오늘은 고기가 없어서 고깃국을 못끓였지만 다음에는 꼭 끓여줄게.”
재영이 주방에서 말을 이었다.
“밤에 연애 하고 나면 아침 식탁에 반찬 수가 많아진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는데 지금 내가 그래.”
조철봉은 커피만 한모금씩 마셨고 재영이 계속해서 종알댔다.
“그때는 이해가 되지 않았거든, 내가 그런 경험이 없어서.”
“남편은 뭘 했는데?”
불쑥 물었던 조철봉이 정정했다.
“전남편 말이야.”
“무역회사 과장이었어. 중소기업.”
재영이 주방에서 힐끗 조철봉을 보았다. 그러나 표정은 아직도 밝다.
“그러다 회사가 부도를 맞고 망하자 실업자가 되었지.”
“저런.”
“회사가 어려워져서 월급도 석달째 안나오다가 망했는데 우린 그때부터 잠자리도 같이 안했어.”
“월급 가져오지 않은 달부터?”
“응.”
“안됐는데.”
“병신이지.”
시선만 든 조철봉을 향해 국의 간을 보면서 재영이 웃었다.
“월급하고 그것하고 무슨 관계가 있다고 안서?”
“그래도 남자 입장이 되면 안그래, 남자는 처자식 먹여 살려야 되는 책임감이 있는데다가 앞으로.”
“아, 듣기 싫어.”
재영이 목소리를 높였지만 아직도 눈웃음을 쳤다.
“정 그러면 그 불쌍한 실업자 취직이나 시켜주지 그래?”
그러더니 재영이 이번에는 코웃음을 쳤다.
“아직도 실업자로 빌빌대는 모양이던데.”
끓는 물에 라면을 넣던 유준수는 핸드폰의 벨소리를 듣고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렇게 결단이 필요한 순간이 오면 와락 짜증부터 나는 것이다. 라면을 넣고 전화를 받을 것인가 아니면 통화가 끝날 때까지 라면을 넣지 말 것인가를 결정해야 한다.
유준수는 가스 스위치를 돌려 불부터 껐다. 누구한테서 온 전화인지는 아직 모르지만 통화가 길어지면 라면이 불어서 못먹게 될 것이었다.
베개 옆에 놓인 핸드폰을 찾아 발신자 번호를 본 유준수는 머리를 기울였다. 전재영이 전화를 했기 때문이다. 이 시간에 전화를 해온 적이 없었으므로 유준수의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심호흡을 한 유준수는 핸드폰을 귀에 붙이기 전에 나쁜 소식이 아니기만을 빌었다. 원체 생각이 많고 소심한 성격이어서 무슨 일이건 그냥 지나친 적이 없는 유준수인 것이다.
“여보세요.”
유준수가 응답했을 때 곧 재영의 쨍쨍한 목소리가 귀를 울렸다.
“왜 이렇게 늦게 전화를 받아?”
“아, 뭘 하느라고.”
저절로 이맛살이 찌푸려졌지만 준수의 기세는 꺾였다. 누가 먼저 큰소리를 치면 기가 죽는 것이다.
“지금 어디야?”
재영이 묻자 준수는 어금니를 물었다가 풀었다. 뻔히 알면서도 묻는 것이다.
“오피스텔이야.”
“지금이 오전 열시반인데, 어디 안나가?”
“….”
“일자리 알아본 곳 있어?”
“….”
“그럼 말이야, 내가 한곳 알아봤는데.”
재영의 목소리가 빨라졌다. 화가 났을 때의 행동이었으므로 준수의 가슴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내 고등학교 동창 연주라는 애의 사촌오빠 되는 사람인데 큰 회사 사장이야. 어제 연주한테서 연락이 왔는데 지금 당장 이력서 써가지고 가봐.”
“연주가 누구야?”
“내 고등학교 동창이라니까.”
“처음 듣는데.”
“이 모자란 작자야.”
마침내 재영의 목소리가 높아졌으므로 준수는 핸드폰을 귀에서 뗐다. 그래도 재영의 목소리가 커다랗게 울렸다.
“처음 듣는 이름이라 취직 안할래? 그게 도대체 무슨 상관이야?”
“그것이, 나는.”
“너하고 나는 남남이야. 남남인데도 네 취직 걱정을 하고 있어. 내가 왜 그런지 알아? 네 인생이 가여워서 그런다.”
“….”
“만에 하나라도 너한테 내가 미련이 남아서 이런다고 오해하지 마. 나는 페어플레이 하는 것일 뿐이야.”
“….”
“어때? 갈거야, 말거야?”
“가지.”
준수가 어깨를 늘어뜨리면서 말했다.
“몇시에 어디로 가야돼?”
재영과 통화를 마친 준수는 서둘러 주방으로 가 가스를 켰다. 7평형 오피스텔이어서 집을 나올 때 가져온 세간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지만 깔끔하게 정돈돼 있었고 먼지 한점 떨어져 있지 않았다. 준수가 매일 청소를 하기 때문이다. 그날 오후 2시 정각에 준수는 신사동에 위치한 오성그룹 빌딩 안으로 들어섰다. 오성그룹은 국내외에 10여개의 계열사를 가진 대기업으로 그중 5개사의 주식이 상장되었는데 오성그룹의 대주주겸 회장은 조철봉이라는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조철봉은 오성자동차의 말단 영업사원에서부터 시작한 인물이라는 것이다.
“잠깐만 기다리시죠.”
사내가 부드러운 표정으로 말하더니 방을 나가면서 머리를 돌려 유준수를 보았다.
“차 드시겠습니까? 커피? 녹차?”
“아, 아닙니다.”
당황한 준수가 뒷머리에 손을 붙였다가 떼었다. 어쩔 줄 모를 때의 버릇이다. 사내가 방을 나가자 준수는 소파에 엉덩이의 반만 걸치고 앉았다. 대기실은 넓어서 소파가 3조나 있었고 벽쪽에는 장방형 테이블에 의자가 10여개나 놓였지만 잘 정돈되었다. 오성그룹은 올해 120명의 신입사원을 뽑았는데 경쟁률이 100대1을 넘었다.
준수로서는 나이가 33세에 학력도 지방대 출신인데다 대학 성적이나 어학 실력도 시원치 않았고 부도난 중소기업 출신인 것이다. 경력사원의 취업은 더 어려운 상황이었으므로 준수는 오성그룹을 쳐다보지도 못했던 처지였다. 준수는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심호흡을 했다. 재영의 고등학교 동창으로 연주라는 여자는 처음 듣는다. 어쨌든 재영 말마따나 그건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연주의 사촌오빠가 이곳에서 무슨 직책인지, 이름이 무엇인지도 재영은 말해주지 않았다. 무조건 2시까지 인사부 오창근 과장을 찾아 가라고만 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로비의 수위실에다 오창근 과장을 찾아왔다고 말했더니 금방 사내 하나가 로비까지 내려와 이곳 5층 대기실까지 안내해 주고 간 것이다. 연주의 사촌오빠가 인사부 오창근 과장이 아니면 그보다 더 높은 직위의 사내인 것 같았다.
허리를 반듯이 세우고 단정하게 앉아있던 준수는 방문이 열리자 자리에서 일어섰다. 방안으로 세 사내가 들어서고 있었는데 모두 태도에서 권위가 풍겨나왔다. 직장 생활을 7년이나 해온 준수여서 태도만 보아도 직급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셋은 모두 과장급 이상이었고 맨 나중에 들어선 사내는 부드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제일 상급자로 보였다. 부장쯤 될 것이다. 셋이 앞쪽에 앉을 때까지 준수는 서있었는데 사내 하나가 말했다.
“앉으세요.”
“예, 감사합니다.”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한 준수가 조심스럽게 앞자리에 앉았다. 회사가 부도난 후에 준수는 1년이 조금 넘는 기간동안 면접을 30번도 더 보았으므로 이골이 났다. 그래서 이쪽도 면접 담당관의 태도를 조심스럽게 살폈다.
“기정무역이라는 회사에 다니셨다고 적혀 있는데.”
오른쪽에 앉은 마른 체격의 사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가 이력서를 보더니 말을 이었다.
“어떤 회사였고 무역 규모는 얼마나 되었습니까?”
“예, 김치 통조림을 수출하는 회사였는데 수출 규모는 약 1백만불 가깝게 되었습니다.”
준수가 성실하게 대답했다. 그는 기정실업에서 자재를 담당하는 자재과장 이었던 것이다.
“회사가 부도가 났다고요?”
다시 사내가 물었다.
“얼마나 났습니까?
“예, 2억5천만원정도.”
준수가 마치 자기가 부도를 낸 것처럼 시선을 내렸다.
“제가 알기로는 그정도입니다.”
“결혼하셨나요?”
가운데 앉은 사내가 불쑥 물었으므로 준수는 와락 긴장했다. 그 사내가 셋중 상사인 것이다. 그리고 이력서에는 결혼란이 없기도 했지만 이혼했고 자식이 하나 있다는 내역을 빼놓았다. 잘못인가?
조철봉은 당황한 유준수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준수를 궁지에 몰려는 의도가 아니었으므로 조금 꺼림칙했지만 좌우에 앉은 인사부장과 과장은 궁금한 듯 정색하고 있었다.
“예, 했습니다. 하지만.”
얼굴이 빨개진 준수가 셋을 번갈아 보면서 말을 이었다.
“이혼했습니다. 예.”
“아니, 무엇 때문에?”
내친 김에 조철봉이 다시 묻자 준수는 손등으로 이마의 땀을 닦았다.
“예, 제가 실업자가 되어서.”
그러자 인사부장과 과장이 제각기 머리를 좌우로 돌려 조철봉을 보았다. 조철봉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요? 그 이유뿐입니까?”
“예, 그것이 원인입니다.”
준수가 이번에는 눈동자를 고정시키고 조철봉을 보았다.
“그래서 제가 배겨내지 못했던 것입니다.”
“뭘 배겨내지 못했다는 겁니까?”
“스트레스입니다.”
조철봉이 머리만 기울였을 때 준수가 말을 이었다.
“회사 자금사정이 악화되어서 제가 석달간 월급을 받지 못했거든요.”
“…”
“모두 가장인 제 책임이지만 가정을 꾸려 나가기가 어려웠습니다.”
시선을 돌린 조철봉이 머리를 끄덕이는 시늉을 했다. 준수는 제 책임이라고 말했지만 은근히 회사의 핑계를 대었다. 그의 말 대로라면 회사가 부도났을 때 가정이 깨지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부부도 있을 것 아닌가? 그때 옆에 앉아 있던 인사부장 장채식이 입을 열었다.
“자재를 맡고 계셨다고요?”
“예, 그렇습니다.”
화제를 바꾼 것이 반가운 듯 준수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주로 어떤 일을 했습니까?”
“예, 배추와 양념장을 구입하는 일입니다. 배추는 미리 경작지에서 밭떼기로 예약을 해놓지요. 그리고.”
준수의 말이 활기차게 이어지는 동안 조철봉은 어젯밤 폭발하던 재영의 몸을 떠올렸다. 재영이 뱉어내던 탄성도 기억해 냈다. 그러자 머리에 열이 오르면서 저절로 침이 넘어갔다.
재영에게 오늘 저녁에도 들른다고 했던 것이다. 그때 방안이 조용해졌으므로 조철봉은 정신을 차렸다. 채식이 조철봉을 바라보고 있었다. 물을 건 다 물었으니 어떻게 할 것이냐는 표정이었다.
“그럼 곧 연락을 해드리기로 하고.”
자리에서 일어선 조철봉이 준수에게 말했다. 서둘러 따라 일어선 준수가 열기 띤 시선으로 조철봉을 보았지만 입을 열지는 않았다.
“오늘은 이만.”
준수에게 머리를 끄덕인 조철봉은 몸을 돌렸다. 대기실을 나와 복도를 걷는 조철봉의 옆으로 채식이 붙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당신 생각은 어때?”
조철봉이 되묻자 채식이 입맛을 다셨다. 채식은 막강한 인사권을 쥔 간부지만 경영주인 조철봉의 인사 개입에 반발할 만큼 멍청한 인물이 아니다. 채식 또한 부도난 대기업 출신으로 3년전에 조철봉이 영입한 사연이 있는 것이다.
“자재관리 경험이 있으니 계열사중 한 곳에 발령을 낼 수는 있습니다만.”
목소리를 낮춘 채식이 말을 이었다.
“성실한 성격인 것 같습니다.”
그러고는 채식이 조철봉의 눈치를 보았다. 아직 조철봉과 준수와의 관계를 모르지만 취직시키려고 데려온 것 아니겠는가?
오성그룹이라는 여직원의 목소리가 귀를 울린 순간에 유준수의 심장은 박동을 멈췄다. 오전 9시 정각. 면접을 본 지 이틀 후가 되는 날이었다.
“예, 제가 유준수입니다.”
준수가 대답하자 여직원이 잠깐만 기다리라더니 곧 사내가 나왔다.
“여기 인사부인데, 오늘 11시까지 나오실 수 있지요?”
“예, 물론이지요.”
두 시간이나 남았으니 차가 없으면 뛰어서라도 시간안에 도착할 것이었다. 전화기를 내려놓은 준수는 심호흡을 했다. 면접을 보고나서 인사부로 나오라는 것은 합격이 되었다는 말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더욱이 떠오르는 태양과 같은 오성그룹에 합격한 것이다. 더더구나 정식 공채도 아닌 특채 형식으로 이렇게 되었으니 대통령 백이라도 힘들 것이었다. 준수는 서둘러 옷장문을 열고 옷을 꺼내다가 문득 움직임을 멈췄다. 그러고는 탁자위에 놓인 전화기를 다시 들고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전재영의 목소리가 울렸을 때 준수는 다시 긴장했다.
“나야.”
“응.”
재영은 자다 깬듯 목소리가 가라앉아 있었지만 대번에 준수의 목소리를 알아들었다.
“웬일이야? 이 시간에.”
“저, 말이야. 오성그룹에서 금방 전화가 왔는데 11시에 인사부로 나오라는데. 아마 취직이 된 것 같아서.”
“그래? 잘됐네.”
재영의 목소리도 밝아졌다.
“잘해. 어렵게 된 취직이니까.”
“고맙다는 말을 하려고.”
“아직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잖아?”
웃음 띤 목소리로 말한 재영이 덧붙였다.
“확실하게 되고 나서 인사해도 돼.”
“그런데.”
재영이 전화를 끊을 것 같았으므로 준수가 서두르듯 물었다.
“저, 당신 친구 연주씨 사촌오빠라는 사람의 직책이 뭐지? 이름이라도 알면 안될까? 인사라도 해야.”
“알 필요 없어.”
매몰차게 재영이 말하자 준수는 당황했다.
“아니, 내 말은 고마워서.”
“알면 그분 입장이 난처해져.”
“그, 그렇군.”
“그러니까 모른 척하고 일이나 잘해. 그러면 되니까 말이야.”
“알았어.”
“그럼 전화 끊어.”
“잠깐만.”
준수가 다시 서둘렀다.
“아현이 잘 있지?”
“지금 금방 놀이방 보냈어.”
“내가 다음달에 한번 들르면 안될까? 아현이 본 지도 오래 되어서.”
재영이 아무말도 하지 않았으므로 준수가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알았어. 다시 연락하지.”
그러자 저쪽에서 먼저 전화가 끊겼다. 아현이를 보러 가겠다는 말은 충동적으로 나온 말이었다. 오성그룹에 취직이 되었다는 감동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서둘러 옷을 입은 준수는 거울을 열번도 더 보고나서 오피스텔을 나왔다.
12월 초순의 바깥 날씨는 쌀쌀했지만 추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행인들의 표정은 밝았고 상가에서 울리는 크리스마스 캐럴도 제대로 귀에 들어왔다. 아직 시간이 한시간 반이나 남아 있었지만 준수는 서둘러 지하철역을 향해 걸었다. 사내에게 직장은 생명이나 같다. 살아있다는 존재의 확인이 되는 것이다.
“어서오세요.”
문을 열면서 전재영이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시선이 마주치자 얼른 외면하고는 조철봉이 들고 있던 과일 바구니를 받아 쥐었다. 이런 인사에 익숙지 못한 태도였다. 밤 9시 반이 되어가고 있어서 아이는 잠이 들었는지 집안은 조용했다.
“식사 하셨어요?”
조철봉이 소파에 앉자 재영이 뒤로 돌아 오면서 물었다.
“그럼, 지금이 몇신데.”
그러자 재영이 조철봉의 뒤에서 저고리를 벗겼다.
“벗고 씻으세요. 갈아 입으실 파자마도 새것으로 사 놓았어요.”
“아이는 자나?”
“응.”
“어머니는 다녀 가셨고?”
“네.”
재영이 조철봉의 앞으로 다가오더니 바지 혁대를 풀고 바지를 당겨 벗겼다.
“내가 등 밀어 드릴까요?”
“너도 씻으려고?”
“자기가 원한다면.”
쪼그리고 앉은 재영이 시선을 들어 조철봉을 똑바로 보았다. 정색한 표정이었다.
“자기가 원하는건 다 할게.”
“예, 했다가 응, 했다가 왜 이렇게 설렁대? 서비스도 극진해졌고.”
“나, 이렇게 하는건 처음이야.”
“그렇게 보인다.”
“행복해.”
“그것 할때 말고? 맨정신으로도?”
“응.”
그러고는 재영이 눈을 흘겼다.
“당신 같은 남자를 만난 건 행운이야.”
“얼씨구.”
“난 당신이 어떤 짓을 해도 사랑할거야.”
“맙소사.”
재영이 두손을 조철봉의 팬티 속으로 집어 넣었다.
“나한테 일주일에 한번, 아니, 열흘에 한번씩만 와줘도 당신만 바라보고 살거야.”
“이런.”
조철봉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계약금 3백에 겨우 사흘 재미보고 끝나면 내가 손해 아니냐? 너, 그 사이에 딴짓 하려는 거지?”
그러자 재영이 눈을 치켜떴다. 철봉을 두손으로 움켜쥐고 있다가 자신도 모르게 힘을 주는 바람에 조철봉의 입이 딱 벌어졌다.
“싫어. 농담이라도 그런말.”
재영이 낮게 말한 순간이었다. 조철봉은 입맛을 다셨다. 치켜뜬 재영의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 내렸기 때문이다.
“그래, 미안해. 그런말 안할게.”
손끝으로 재영의 눈물을 닦아주면서 조철봉이 부드럽게 말했다.
“너하고 오래 같이 있고 싶어서 내가 그런말을 뱉었나 보다.”
“씻으세요.”
팬티 차림이 된 조철봉의 두손을 잡아 당겨 일으키면서 재영이 말했다. 금방 목소리가 밝아졌고 얼굴도 개운해져 있다.
“나, 들어가?”
“응.”
“그럼 먼저 샤워하고 있어.”
조철봉은 가벼운 마음으로 화장실로 들어섰다. 지금까지 수많은 경험을 겪었으며 수백번 작업전 의식을 치렀지만 재영처럼 자연스러운 분위기도 드물었다. 반말과 존댓말을 섞어 쓰는 것도 신선감이 느껴졌다. 샤워기 밑에 서서 물을 맞고 있던 조철봉은 문이 열리는 기척에 머리를 돌렸다. 재영이 들어서고 있었는데 알몸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어느 한곳도 가리려는 몸짓도 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다가왔다. 그러자 탱탱한 젖가슴이 출렁거렸고 뱃살도 움직였다.
조철봉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신음소리가 뱉어졌다.
“으으음, 네 몸은 볼수록 섹시해.”
“흐응.”
몸을 비꼬는 시늉을 하면서 재영이 조철봉의 뒤로 돌아 허리를 감아 안았다.
“자기야, 나도 자기 몸만 봐도 온몸이 뒤틀려.”
샤워기의 몰이 쏟아지고 있는 터라 재영은 비누를 조철봉의 몸에 문질렀다.
“그렇게 말고.”
조철봉이 샤워기를 잠그고는 재영의 손에서 비누를 빼앗아 자신의 몸에 문질렀다. 그러고는 재영의 어깨에 두팔을 얹고 웃음띤 얼굴로 바라보았다.
“자, 이제 네 몸으로 문질러봐.”
그러나 재영이 눈을 크게 떴다.
“어떻게?”
“몸으로 문질러 거품을 내.”
그때서야 말뜻을 알아차린 재영의 두눈이 반짝였다.
“이렇게?”
앞에서 조철봉의 몸을 안은 재영이 온몸을 비벼대면서 물었다. 이미 몸은 물기에 젖어 있는 터라 비누질을 한 조철봉의 몸에 문지르자 미끈거리면서 피부끼리 부딪치는 쾌감이 짜릿했다. 조철봉은 재영의 엉덩이를 움켜쥐고는 잠자코 몸을 비볐다. 본래 이 방법은 마사지 하우스에서 침대에 반듯이 누운 남자를 상대로 여자가 문질러줘야 제대로 된다.
비누 대신 오일을 바르고 여자는 일절 손을 쓰지 않은 채 젖가슴과 배, 그리고 허벅지만을 이용하여 남자의 몸을 마사지하는 것이다. 정면을 비벼댈 때 남자가 참기 힘들다고 하면 여자는 그것을 해준다. 물론 철봉을 입으로 해주는 방법, 손으로 해주는 방법도 있지만 본격적으로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조철봉은 마사지 하우스에서 한번도 철봉 놀음은 하지 않았다.
마사지는 마사지만으로 즐겨야 제맛이 나는 것이다. 정면을 할 때 참지 못하고 철봉 놀음을 하면 뒤쪽을 할 때 쾌감이 반감된다. 정면이 끝나고 등 마사지를 하려고 침대 위에 엎드리면 역시 등과 엉덩이, 종아리에 오일을 바른 다음 마사지 걸은 등 위에 엎드린다. 그리고 젖꼭지로 목에서부터 엉덩이로 줄을 긋듯이 미끄러져 내려오는데 그 때의 쾌감은 온몸이 오그라지도록 강렬한 것이다.
그러나 욕실에 부둥켜안고 서서 비누질한 몸을 비벼대고 있는 조철봉과 재영의 쾌감도 비록 자세는 엉성했지만 고조되어가고 있었다. 특히 재영은 이런 상황이 처음이었는지 문지를 때마다 신음을 뱉어내고 있었다.
“아아, 죽겠어.”
했다가 자꾸만 조철봉의 철봉을 자신의 샘쪽으로 잡아 밀려는 시늉을 하면서 몸을 붙였다.
“자기야, 나 만져줘.”
재영이 허덕이며 말했으므로 조철봉은 움직임을 늦췄다. 지금까지 몸만 비볐고 조철봉은 손을 움직이지 않았던 것이다.
“거기, 만져줘.”
하반신을 비벼대면서 재영이 말했다. 철봉을 넣지 않으려면 대신 손으로 만져달라는 말이었다. 조철봉은 재영의 한쪽다리를 한손으로 받쳐 올리고는 샘 끝에 손을 붙였다. 그러자 넉넉해진 샘이 환하게 드러났다. 조철봉은 상반신을 문지르면서 손끝으로 재영의 골짜기를 자극했다. 이미 뜨겁게 달아오른 재영의 샘은 분출되고 있었는데 입에서는 격렬한 탄성이 뱉어졌다.
“아, 나, 죽겠어.”
이윽고 재영이 조철봉의 목을 감아 안고는 소리쳤다. 그러고는 빈틈없이 몸을 붙이더니 절정으로 치솟았다. 조철봉의 손끝을 샘으로 조인 상태로 치솟은 것이다.
조철봉은 재영을 번쩍 안아 들었다.
재영의 몸은 굳어진채 떨리고 있었는데 아직 조철봉의 몸에서 떼어지지 않았다. 욕실에서 나온 조철봉은 재영과 함께 침대위로 쓰러졌다. 둘의 몸은 비누로 범벅이 되어 있었지만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다. 이번에는 조철봉이 서둘렀다. 우선 욕실에서의 야릇한 분위기에 자극을 받은 것이며 둘째는 항상 여유있게 길게만 뺀다고 능사가 아니다. 체위를 바꾸듯이 분위기도 바꿔야 항상 새롭다.
“뒤로.”
조철봉이 짧게 말하자 늘어져있던 재영이 금방 몸을 비틀더니 엉덩이를 뒤로 뽑은채 엎드렸다. 이미 두 다리가 벌려졌고 엉덩이는 위로 조금 솟았으며 가슴은 침대위에 찰싹 붙였다. 조철봉은 만족한 표정으로 무릎을 꿇고 상반신을 세운 자세로 재영의 뒤에 붙었다. 그러고는 도톰하게 솟은 재영의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부드럽게 쓸었다.
“으응.”
그것 만으로도 재영이 엉덩이를 흔들면서 반응했다. 두 손은 미리 앞으로 쭉 뻗고 침대 시트를 움켜쥐고 있었는데 손등의 정맥이 돋아나 있었다. 한쪽 볼을 침대에 붙이고 있어서 얼굴은 한쪽만 드러났으며 머리칼이 이마와 볼을 덮었다. 육감적인 자세였다.
“흐응.”
조철봉이 조금 늦추는 기색을 보이자 재영이 다시 엉덩이를 흔들면서 재촉하는 시늉을 했다. 조철봉은 먼저 상반신을 굽혀 입술을 재영의 목덜미에 붙였다. 재영이 감전이나 된듯이 흠칫 몸을 굳혔을때 조철봉의 입술이 목에서 등골을 타고 천천히, 그리고 신중하게 내려오기 시작했다. 깊지도, 얕지도 않게, 가끔 자극을 확인 시키려고 입술을 떼기도 하면서 엉덩이 끝 부분까지 내려왔을때 재영은 신음을 스무번도 더 뱉었으며 사지를 마구 뒤틀었다. 그러나 조철봉의 행동에 방해는 되지 않도록 자세는 계속 유지했다. 조철봉은 이제 재영의 커다란 복숭아같은 엉덩이를 입으로 조금 거칠게 애무했다. 엉덩이 한쪽을 가볍게 물기도 했고 꿈틀거리는 발목을 비틀어 보기도 했다. 재영이 거침없는 탄성을 뱉더니 번쩍 머리를 들어 조철봉을 보았다. 두눈은 크게 떠져 있었지만 이미 초점은 잡혀있지 않았다.
“자기야, 어서.”
조철봉이 상반신을 세우자 재영은 재빠르게 자세를 갖췄다. 시트를 움켜쥔 두손의 정맥은 터져 나갈것 처럼 부풀었고 가쁜 호흡으로 어깨까지 들썩이고 있었다. 조철봉은 천천히 철봉을 재영의 샘에 넣었다. 철봉이 보유한 수만개의 신경 세포가 샘 안쪽 변에 닿는 느낌을 최대한 길고 깊게 맛보도록 그렇게 천천히 진입시킨 것이다.
“아아아아.”
절규같았다. 끝까지 들어가는동안 재영은 길고 높게 신음을 뱉었는데 마치 창에 꽂힌 아름다운 새가 비명을 지르는것 같았다. 그야말로 일격필살이다. 단 한번의 내지름으로 여자가 절정에 올랐다면 당장 기네스북 감이겠지만 지금 재영의 입장이 그것과 비슷했다. 조철봉의 철봉이 바닥까지 닿았을때 다시 절정으로 솟아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유우우.”
조철봉의 철봉이 다시 아까와 같은 속도와 리듬으로 샘을 빠져 나올적에 재영의 입에서 또 다른 절규가 터졌다. 이번에는 떠나려는 님을 한사코 잡으려는 안타까움과 애절함으로 샘은 기를 쓰고 위축되었다. 그러자 철봉의 세포가 반응하며 환호했다. 조철봉의 입에서도 탄성이 뱉어졌다.
성(性)은 아름답다. 조철봉의 짧다면 짧은 여성 편력의 세월을 반추해보면 어느 누구도 추하지 않았으며 모두 신비로웠다. 성에 몰두한 남녀는 아름답다. 성애(性愛)는 조물주가 인간에게 내려주신 특별한 은총인 것이다.
고등어가 호흡소리와 신음으로도 자극을 받고 손에서 발끝까지 온몸을 성의 도구로 이용하며 그것을 말과 글로까지 표현하면서 성애를 즐긴다는 소리를 들어보았는가? 어디, 타조가 그런가? 개가 그런가? 인간뿐이다. 그래서 만물의 영장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갈치는 갈치대로, 닭은 닭대로 성애를 즐긴다고 한다면 후생에는 그것으로 태어나시기를 바란다.
“나, 죽겠어.”
이윽고 재영이 안간힘을 쓰면서 그 한마디를 뱉더니 온몸을 경직시켰다가 곧 진이 다 빠져나간 것처럼 늘어져버렸다. 후배위의 자세를 취한 상태였으므로 엎드린 채 길게 뻗어버린 것이다. 조철봉도 이번에는 재영과 함께 폭발한 상태여서 그대로 엎어졌다. 대개의 경우는 폭발하고 나면 머리가 백지 상태가 된 것처럼 사고는커녕 의식도 작용하지 않다가 조금씩 회복된다.
가쁜 숨을 쉰 채 엎드려 있던 조철봉은 겨우 손을 뻗어 재영의 허리를 감아 당겼다. 의식이 돌아온 순간에 재영이 사랑스럽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쾌락의 극치를 겪고 나면 상대방에 대한 감정이 북받쳐오르는 법이다. 아직도 앓는 소리를 내면서 의식이 불분명한 상태인 재영이 몸을 굴려 조철봉의 가슴에 안겼다.
땀에 젖은 알몸이 바깥 공기에 식어 피부가 서늘했지만 빈틈없이 안기는 바람에 금방 찬기운이 가셨다.
“멋있었어.”
조철봉이 재영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나하고 궁합이 아주 잘 맞는다.”
재영의 몸은 특별했다. 다른 여자와 비교해서 샘의 신축력이 강했고 신경 세포가 몇배나 더 예민했으며 절정에 오르는 시간이 빨랐다. 거기에다 장점을 더 열거하면 몸매가 나긋해서 안으면 감기는 맛이 있었으며 반응이 자극적이었다.
여자의 신음과 탄성만으로도 남자는 대포를 발사할 수 있는 것이다. 재영을 안은 조철봉은 그렇게 다 말해주지는 않았다. 그저 궁합이 잘 맞는다고만 표현했는데 본능적인 장삿속이다. 그렇게 말해주어서 이쪽이 득될 일이 없는 것이다. 만일 자신의 진가를 재영이 알게 된다면 이쪽 가치가 떨어질 가능성이 많다.
“자기야.”
호흡을 가눈 재영이 조철봉의 가슴에 볼을 붙이고 말했다.
“난 이렇게 좋아본 적이 한번도 없었어. 자기가 처음 그것을 느끼게 해줬어.”
“전남편은 어땠는데?”
조철봉이 묻자 재영이 가슴에 볼을 문질렀다.
“넣으면 10초도 안돼서 쌌어.”
“으음.”
머리를 끄덕인 조철봉이 재영을 당겨 안았다. 재영의 샘을 겪어본 터라 이해가 갔기 때문이다. 유준수의 얼굴을 떠올린 조철봉이 쓴웃음을 짓고는 입맛을 다셨다. 유준수는 이제 칭다오 사업장의 자재부 과장이 되었다. 그래서 내일이면 중국으로 떠나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자기야.”
조철봉의 가슴에서 머리를 뗀 재영이 정색하고 말했다.
“그사람 취직시켜줘서 고마워.”
“고맙긴 뭘.”
“중국 사업장 자재과장이 되었다면서 좋아했어.”
재영이 조철봉의 목을 두팔로 감아 안았다.
다음날 아침, 식탁에 앉은 조철봉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찬이 풍성한데다 성의있게 차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김치는 어제 담근 듯한 겉절이였고 밑반찬도 집에서 만든 것이었다. 콩나물국을 밥그릇 옆에 놓으면서 재영이 말했다.
“사람 욕심은 한이 없다고 하지만 난 이렇게 산다면 더 바라지 않을거야.”
“뭘?”
국맛을 보면서 조철봉이 묻자 재영이 정색했다.
“생활비만 주면 자기 세컨드 노릇이라도 하겠어. 아니 서드도 좋아.”
“으음.”
하마터면 국이 기도로 들어갈 뻔했던 조철봉이 겨우 숨을 가누고는 앞에 앉은 재영을 보았다.
“그게 무슨 말이야? 세컨드, 서드라니?”
눈을 크게 떠 보았지만 조철봉의 가슴은 사람인 이상 조금 무거워졌다. 그렇게 따진다면 재영은 열 몇번째 살림차린 여자가 될것이다. 그러나 조철봉은 정색하고 말을 이었다.
“날 뭘로 보는거야? 난 그런 사람 아니라고.”
조철봉으로 말할 것 같으면 지금까지 거짓말을 밥먹듯이 해오면서 제 스스로 터득한 진리(?)가 있다. 그것은 여자에게 거짓말이 잘 통한다는 것이었다. 여자에게 있는 그대로 보여 주었다가 몇번 손해를 보고나서 그 진리는 더 굳어졌다. 조철봉이 밥을 떠 입에 넣고는 만족한 표정으로 씹었다.
“난 재영이가 첫 여자야. 처음으로 딴 살림을 차리는 것이란 말이야.”
“정말?”
“하늘에 대고 맹세할 수 있어.”
“정말이야? 당신같은 사람이.”
“나같은 사람이라니? 뭐가 어쨌다고?”
“당신같이 능력있는 사람이.”
“나, 참, 기가 막혀서.”
정색한 조철봉이 재영을 똑바로 보았다.
“난 사업하느라 바빠서 딴 짓을 할 여유가 없었어.”
그러자 재영이 머리를 끄덕였다.
“알았어. 미안해. 그냥 한 말이야.”
“날 다른 놈들처럼 보지 말라고.”
“알았다니까.”
“나도 와이프 빼놓고 네가 첫 여자야. 난 결혼후에 전혀 다른 여자를 넘보지 않았어.”
조금 오버한 느낌이 들었지만 거기까지 말하고 난 조철봉은 잠자코 식사를 했다. 이만하면 단속은 된 셈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쪽의 몸가짐을 확실하게 알려 준다는 것은 곧 상대방의 자세에 대한 요구가 되는 것이다. 식사를 마친 조철봉이 옷을 입고나서 문득 생각이 난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재영을 보았다.
“이젠 받을 수 있지?”
“뭘?”
눈을 크게 뜬 재영이 조철봉의 넥타이를 바르게 매어주면서 물었다. 재영의 머리칼에서 옅은 향내가 맡아졌다.
“바보야, 생활비.”
조철봉이 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어 재영의 손에 쥐어 주었다.
“내가 매월 초에 3백씩 줄게.”
“고마워. 여보.”
봉투를 받아쥔 재영이 처음으로 여보라고 불렀다. 그러더니 눈주위가 금방 붉어지며 멋쩍게 웃었다.
“괜찮아? 그렇게 불러도?”
“응, 듣기 좋은데.”
조철봉이 재영의 허리를 당겨 안고는 이마에 입술을 붙였다.
“사랑한다.”
“나도 사랑해, 여보.”
지금은 진심이다. 문을 나서면 흐려지겠지만.
회사에 출근한 조철봉이 서류 결재를 마쳤을 때 최갑중이 들어섰다. 갑중은 중국에서 어제 오후에 귀국한 것이다.
“중국 일은 잘 끝냈습니다.”
소파에 앉은 갑중이 활기찬 표정으로 조철봉을 보며 말했다.
“옌지도 안정된 것 같습니다. 혹시 전화 왔습니까?”
“아니.”
정색한 조철봉이 머리를 저었다. 옌지의 백주영을 말하는 것이다.
“내가 연락한다고 했다.”
“그럼 연락해 보시지요. 기다리고 있을텐데요.”
“그러지.”
“그런데 칭다오에 과장 하나를 채용 하셨더군요.”
“아, 그랬지.”
“누굽니까?”
“아는 놈인데 실업자가 되어서.”
그러자 머리를 끄덕였던 갑중이 정색하고 조철봉을 보았다.
“혹시 친척 아니십니까? 칭다오에 보낸 그분 말입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이야?”
“그런 소문이 퍼져서요.”
“소문?”
“예.”
그러고는 갑중이 눈을 가늘게 떴다.
“처가쪽 친척이라는 소문이 벌써 확 퍼져 있었습니다.”
“…….”
“사장님이 직접 지시하신 인사라서 간부들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작은 힌트만 있어도 대번에 소문이 퍼져 나가는 것입니다.”
“나, 참, 기가 막혀서.”
“정말 영일이 어머님과 관계가 없는 분입니까?”
“야, 인마, 영일 에미는 왜 갖다 붙여?”
버럭 목소리를 높였던 조철봉이 호흡을 고르더니 갑중을 똑바로 보았다.
“그 소문을 누가 냈는지 발원자를 찾아내, 오늘 당장.”
“금방 찾아낼 수 있습니다. 형님.”
“그놈을 해고해.”
“사실이 아니라면 유언비어를 퍼뜨렸으니 파면감이죠. 우리 회사는 노조가 없어서 이럴 때 다행입니다.”
“어떤 망할 놈이.”
“그럼 찾아내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선 갑중이 몸을 돌리다 말고 조철봉을 보았다.
“형님, 그분은 어떻게 아는 분입니까?”
“내 고등학교 동창의 동생 되는 놈이야. 어떤 자식이 그것을….”
“그렇군요.”
머리를 끄덕인 갑중이 혼잣소리처럼 말했다.
“자재과장 자리가 요직이어서요. 질투하는 놈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갑중이 방을 나가자 조철봉은 입맛을 다셨다. 그렇다고 갑중에게 여자를 하나 알게 되었는데 그 여자의 실업자 남편이 그놈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벼룩도 낯짝이 있지 금방 옌지에다 여자 하나를 살림 차려주고 와서는 또 하나를 만들었다고 하기는 천하의 조철봉으로서도 낯뜨거운 일이었다.
갑중이 다시 방으로 들어섰을 때는 오후 3시쯤이었는데 표정이 굳어져 있었다. 이맛살을 찌푸린 채 눈을 좁혀 뜨고 있는 것이 심각한 분위기였다. 잠자코 소파에 앉은 갑중이 조철봉을 똑바로 보았다.
“형님, 찾아냈습니다.”
“그래, 어떤 놈이야?”
긴장한 조철봉이 묻자 갑중이 헛기침부터 했다.
“본인입니다. 유준수 본인이 제 입으로 그랬답니다. 자신이 사장 처가쪽 친척이라고.”
조철봉이 입을 다물었고 갑중의 말이 이어졌다.
“칭다오 공장의 관리부장이 직접 들었다고 했습니다. 도대체.”
“제 입으로 직접 말했다고?”
“예. 그렇다니까요?”
“처가쪽 뭐가 된다고 했다더냐?”
“그것까지는 말 안했답니다. 그냥 처가쪽 친척이 된다고만.”
“…”
“형님.”
다시 정색한 갑중이 조철봉을 똑바로 보았다.
“그자는 누굽니까? 형님 동창의 동생이 맞습니까?”
“그놈이 아무래도 정신이상인 것 같구먼. 조철봉이 길게 심호흡을 했다.
“실업자 생활을 하더니만 머리가 돌아 버린 것이 틀림없어.”
그러나 갑중은 지그시 조철봉에게 시선을 준 채 기다리고 있었다. 조철봉이 헛기침을 하고는 외면했다.
“그놈은 이혼한 놈이다.”
“아하.”
갑중이 감탄사를 뱉은 것은 조철봉이 이실직고를 할 분위기를 보이자 격려 차원에서 한 행동이다. 그러자 그 속셈을 뻔히 들여다본 조철봉이 갑중을 흘겨보고 나서 말을 이었다.
“내가 한국에 와서 여자 하나를 만났거든, 그야말로 우연히 만났는데.”
“아하.”
“그 여자가 이혼한 전남편이 실업자로 빌빌거리고 있으니까 취직좀 시켜 달라고 해서.”
“그놈입니까?”
불쑥 말을 자른 갑중이 물었으므로 조철봉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다.”
“그렇다면 그놈 말이 맞는 것 같은데요.”
“뭐가 말이냐?”
“처가쪽 친척이라는 것이 말입니다.”
“뭐야? 얀마. 그놈하고 그 여자는 이혼을 했다니까 그러네.”
눈을 크게 뜬 조철봉이 목소리를 높이자 갑중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놈은 형님이 제 전처하고 그런 관계인 줄을 알고 있는 모양이군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던데.”
“누가 말입니까?”
“그 여자가. 내가 회사 사장이라고 말하지 않고 제 사촌오빠 친구가 이 회사에 있다고 그놈한데 했다던데.”
“어쨌든 알고 있으니까 그런 말을 한 겁니다. 이혼했건 어쨌건 제 여자의 남자니까 처가쪽 친척이 된 것이죠.”
“그 X는.”
“입사한 지 며칠 안되지만 내보내지요. 문제가 클 것 같습니다.”
“그래야겠군.”
그러고는 조철봉이 입맛을 다셨다.
“별 정신병자 같은 놈을 다 보았구먼.”
조철봉의 머릿속으로 면접을 보던 장면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때 그놈은 제 입으로도 이혼을 했다고 말했던 것이다. 갑중이 흘끗 조철봉을 보았다.
“형님.”
“뭐냐?”
“혹시 그 여자를 지금 만나고 계십니까?”
“그건 왜 물어?”
“그놈하고 그 여자가 아직도 혼인관계인지도 모릅니다.”
“제 입으로 이혼했다고 했어.”
“누구 입으로 말입니까?”
“둘 다.”
“제가 확인해 보지요.”
자리에서 일어선 갑중이 소리죽여 숨을 뱉더니 말을 이었다.
“어쨌든 그놈은 내보내겠습니다.”
전화벨이 울렸다. 유준수는 전화기를 들었다.
“예, 자재과장 유준수입니다.”
“나야.”
딱 한마디만 뱉었어도 준수는 전재영의 목소리를 알아들었다.
“어, 여기까지 웬일이야?”
반가운 목소리로 준수가 물었을 때 재영은 한 호흡 가만 있더니 차갑게 말했다.
“너, 도대체 어쩌려고 그랬어?”
“뭘 말이야?”
“네가 사장 처가쪽 친척이 된다고 그랬다면서? 그게 무슨 수작이야?”
“어? 누가 그래?”
놀란 준수가 묻자 이제는 재영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누구나 마나? 그렇게 말했어? 안했어? 그것만 말해”
“난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니고.”
주위에 직원들이 있었으므로 준수는 잔뜩 목소리를 낮춰다.
“조금 있다가 내가 전화할게. 여기는 사무실이라.”
전화를 끊은 준수가 두어번 심호흡을 하고 나서 주위 눈치를 살피고는 사무실 밖으로 나왔다. 준수가 다시 전화를 했을 때는 그로부터 10분쯤 후였다. 밖에서 핸드폰으로 전화를 한 것이다.
“됐어. 그런데 누가 그런 말을 해?”
준수가 다급하게 물었을 때 재영이 쏘아붙였다.
“네가 네 입으로 그랬다면서? 지금 소문이 다 나서 넌 회사 그만둬야 돼.”
“그만두라면 그만두겠지만 난 그렇게 말하지 않았어.”
격한 목소리로 말했던 준수가 목이 메었는지 헛기침을 했다.
“난 며칠 전에, 그러니까 중국으로 떠나기 이틀쯤 전에 네 집에 갔다가.”
그러자 재영이 입을 다물었고 준수의 말이 이어졌다.
“저녁이었는데 연주 보려고 집 앞을 돌아다니다가 어느새 밤이 되어 버렸는데, 미안해서 전화도 못하고.”
연주는 준수와 재영의 딸이다. 준수가 더듬대며 말했다.
“그런데 밤 9시30분쯤 되었을 때 그 사람, 그러니깐 날 면접 본 사람이 집으로 들어가더구먼. 난 그 사람이 사장인 줄은 그 다음날 알았어. 인사부장한테 물어봐서 말이야.”
“….”
“사장백으로 내가 채용이 되었더구먼.”
“….”
“그런데 여기 와서 관리부장이 어떤 연줄로 특채가 되었느냐고 묻기에 나도 모르게 처가쪽 친척의 소개로 채용이 되었다고 했어.”
“….”
“분명히 처가쪽 친척의 소개라고 했다고.”
“….”
“그것이 내가 사장의 처가쪽 친척이 된다고 바뀌어졌단 말이지?”
“….”
“내가 거짓말 못하고 주변머리가 없는 것 연주 엄마도 잘 알지?”
“….”
“그 사람, 아니 사장이 네 집에서 나오는 걸 보고도 눈 딱 감고 새 직장에서 일이나 잘하려고 이곳까지 온 거야. 내 인생을 다시 시작해 보려고 말이야. 그런데 그것이 이상하게 와전이 되어서 잘린다면 할 수 없지.”
그러고는 준수가 길게 숨을 뱉으면서 말했다.
“이젠 전화 끊어.”
준수가 먼저 전화를 끊은 것은 아주 드문 일이었다. 밖에서 한 시간이 넘도록 서성대다 돌아온 준수가 책상에 앉았을 때 자재부장이 다가와 섰다.
“유과장, 조금전에 사장님한테서 전화가 왔어.”
부장이 굳은 얼굴로 준수를 보았다.
“이 사람아, 사장님이 찾으시는데 안보여서 난리가 났네. 핸드폰도 꺼져 있더구먼.”
“죄송합니다.”
“곧 다시 전화가 올거야.”
이제는 얼굴을 편 부장이 부드럽게 말했다.
“뭐, 어려운 일 있으면 말해. 내가 도와 줄테니까.”
“아닙니다. 저는.”
곧 회사를 그만두게 될 것이라고 말하려다가 준수는 입을 다물었다. 사장은 전재영이 말했던 것처럼 추궁하려고 전화를 걸었을 것이었다. 그때 책상위의 전화벨이 울렸으므로 옆에 서있던 부장까지 같이 긴장했다. 숨을 들여마신 준수가 전화기를 들자 부장은 조심스럽게 제자리로 돌아갔다.
“예, 유준수입니다.”
준수는 이제 자재과장 직책도 붙이지 않았다. 곧 그만둘 입장이어서 어색했기 때문이다.
“아, 유과장, 나, 사장인데.”
예상했던 대로 사장이었다. 그러나 준수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예, 사장님”
“외국 생활이 처음이니 적응 하기가 쉽지 않겠군. 그렇지 않나?”
사장이 그렇게 물었으므로 준수는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러니까 그만 두라는 말이 이어서 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예, 사장님.”
이왕이면 원하는 대답을 해주고 정리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았으므로 그렇게 대답하자 사장의 말이 이어졌다.
“그런데, 자네가 자재과장으로 발령을 받은 것이 여러 사람한테 꽤 의외의 인사였던 모양이야. 그렇지 않은가?”
“예, 사장님.”
“참, 내가 현지 엄마 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면서? 그래서 내가 누구인지 알았다고 들었는데, 그렇지 않나?”
“예, 사장님.”
“내가 이런말 물어도 될까? 내가 사장인 것을 알게 되었을 때의 기분말이야. 괜찮다면 말해 주겠나?”
“예, 사장님” 해놓고서 준수는 손등으로 이마의 땀을 닦았다. 그러고는 몸을 굳히고 대답했다.
“처음에는 얼떨떨 했습니다.”
“응, 그렇군. 그렇겠지.”
“그러고는 곧.”
“곧 뭔가?”
“가슴이 든든해졌습니다.”
“든든해지다니?”
“제가 사장님의 배려로.”
주위를 둘러본 준수가 목소리를 낮췄다.
“회사에 입사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
“운을 잡았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
“실업자 생활을 해보면 직장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몸이라도 팔고 싶어집니다. 그런데 저는….”
“이제 됐네.”
조철봉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앞으로 말이야. 유과장.”
준수의 귀에 사장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날 처가쪽 친척이라고 해도 돼. 그렇게 소문이 난 모양이니까 아예 그렇게 해버려. 그리고 근무나 열심히 해.”
놀란 준수가 침만 삼켰을 때 사장이 부드럽게 말했다.
“참, 내 처의 성은 서씨야. 그것을 알고 있어야겠군. 별로 좋지 않은 관계지만 말이야.”
그러고서 전화가 끊겼지만 준수는 한동안 멍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915)애인만들기-1
조철봉은 성매매 금지법이 발동 된지도 몰랐고 알았다고 해도 근래에 들어서 돈과 성을 매매해본 적이 없었으므로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오늘 여의도를 지나다가 마스크를 쓴 여자들이 데모를 하는 것을 보고는 충격을 받았다. 그것은 그 여자들이 성매매 금지법에 대해 항의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몸을 파는 일은 유교 사상이 뿌리 깊은 한국은 말할 것도 없고 개방된 서구사회에서도 부끄러운 일로 여겨왔다. 그런데 그 당사자들이 백주에 거리로 나서서 항의하고 있는 것이다.
시대가 바뀌어서 이제는 성매매도 직업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은 분명히 아니었다. 차에서 내려 슬금슬금 그들 뒤쪽으로 다가가 구경을 했던 조철봉은 군중이 많은 이유를 알았다. 마스크를 쓴 그들 주위에서 같이 데모를 하는 여자들이 그들과 함께 공생하던 미장원, 식당, 가게의 주인과 종업원들이었고 요구르트 아줌마까지 섞여 있었던 것이다. 모두 지친듯 늘어져 있었지만 눈은 번들거렸다. 모두의 생존이 걸린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뒤에서 거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으므로 조철봉은 주춤 비켜섰다. 여자 한명이 서서 조철봉을 노려보고 있었는데 바지에 점퍼 차림이었지만 마스크는 쓰지 않았다.
“아저씨, 뭐하는 사람이야?”
여자가 묻더니 바짝 다가섰다. 단발머리에 두눈을 치켜뜨고 있었는데 화장기가 없는 피부는 맑았고 눈이 또렷했다. 많아야 스물 대여섯쯤 될까? 입술은 야무지게 앙다물었으며 두손을 양쪽 허리에 짚었다. 마침 주위에는 이쪽에 신경을 쓰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조철봉은 우선 안심했다. 떼거리로 달려들면 공자님이라도 당해내지 못한다.
“아, 나는 지나가다가.”
“구경거리가 생겨서? 왜? 오팔팔 여자들이 데모하는 것이 신기해?”
“아니, 그게 아니라.”
“가만 보았더니 뒤에서 슬금슬금 돌아다니는 것이 마치 동물원 구경 나온것 같지 않아?”
“어, 말이 심하지 않어? 나는.”
당황한 조철봉이 다시 주위를 둘러보고는 두어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여자가 바짝 다가섰다.
“아저씨 직업이 뭐야?”
“난 사업해.”
정색한 조철봉은 달래듯이 말했다.
“이봐. 신경이 곤두서 있겠지만 너무 그렇게 몰아붙이지 마라. 난 그저.”
“누가 신경이 곤두서?”
갑자기 여자가 이를 드러내고 웃더니 점퍼 주머니에 두손을 넣었다. 그러자 자세뿐만이 아니라 분위기도 전혀 다른 모습의 여자가 되었다. 웃는 모습이 어린아이 같았다.
“난 그런거 없어.”
금방 정색한 여자가 조철봉을 똑바로 보았다.
“난 내 직장을 지키려고 투쟁하는거야. 신경이 곤두설 일도 창피할 것도 없어.”
“어, 그래?”
머리를 끄덕인 조철봉이 아부하듯 말했다.
“직장이라면 지켜야지.”
“법안 통과시킨 국회의원중에 우리 손님으로 왔던놈을 찾아내고 말테야. 틀림없이 있을거야.”
“그렇지. 그렇구말구.”
이번에는 조철봉이 정색하고 끄덕였다.
“틀림없이 있을거야. 대한민국 남자 중에서 안간 놈이 있을라구?”
“과거사 규명을 한다면서? 그것도 포함시키자고 데모 할거야.”
“그렇지, 당연하지.”
조철봉은 다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앞쪽에서 몇명이 구호를 외쳤지만 분위기는 산만했다. 옆쪽에 방패를 세워놓고 서있는 전경들도 긴장한 것 같지 않았다.
“데모 언제까지 할거야?”
조철봉이 묻자 역시 주위를 둘러보던 여자가 머리를 저었다.
“몰라, 언제 끝날지.”
“밥은 먹었어?”
“아까 김밥 먹었어.”
“춥겠다.”
“오뎅 국물이 먹고 싶어.”
“응? 그래?”
번쩍 정신이 든 조철봉이 두리번거렸지만 백주에, 더구나 데모장 근처에서 포장마차를 찾을 수 있겠는가? 조철봉이 정색하고 여자를 보았다.
“가자, 내가 사줄게. 저 위쪽에 가면 일식집이 있어. 가서 뜨끈한 국물을 마시면 기운이 날거야.”
“정말?”
여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금방 이맛살이 찌푸려졌다.
“아저씨가 왜 나한테 그런 것 사줘?”
“왜? 안돼?”
조철봉이 여자에게 바짝 다가섰다.
“난 여자한테 잘 해주는 사람이야. 그런 줄만 알면 돼.”
“거기 방 있어?”
“무슨 말이야?”
“일식집에 방 있느냐고?”
“그럼 일식집에 방이 없어?”
“잘됐다.”
혼자서 머리를 끄덕이던 여자가 옆쪽에 고함을 쳤다.
“미라야 수지야”
그러자 사람들 사이에서 두 여자가 달려나왔다. 같은 또래였는데 하나는 머리가 길었고, 또 하나는 야구모자를 썼다.
“왜?”
달려온 하나가 묻자 여자는 조철봉의 팔을 끌었다.
“이 오빠가 오뎅 국물 사준대. 너희들도 같이 가자.”
“정말?”
둘이서 눈을 둥그렇게 뜨더니 곧 환하게 웃었다.
“이 오빠 처음 보는데.”
반대쪽에 선 긴머리가 묻자 여자는 냉큼 대답했다.
“내 단골이야.”
“어머, 어머.”
야구모자가 조금 앞장서더니 조철봉의 위아래를 훑어보았다.
“네가 이런 단골이 있었어? 세련됐는데, 옷도 잘 입었고.”
“어허.”
조철봉이 이맛살을 찌푸리고 나무랐다.
“까불면 못써. 바깥에 나왔을 때는 얌전해지라고 내가 몇번 말했냐?”
“흐흐흐.”
조철봉의 팔짱을 낀 여자가 밝게 웃었다. 그리고 조철봉의 귀에 입술을 붙이더니 속삭였다.
“오빠. 내 이름은 정아야. 민정아.”
머리만 끄덕인 조철봉의 귀를 잡아당긴 정아가 다시 속삭였다.
“난 청량리에서 왔고 우리 가게 이름은 행운옥이야. 알았지?”
다시 머리를 끄덕인 조철봉은 심호흡을 했다. 데모 대열에서 빠져나온 여자 셋 남자 하나는 사거리를 건너 식당거리로 들어섰다. 이곳은 국회의원들이 자주 들르는 고급 식당거리여서 일식당은 곧 찾아낼 수 있었다. 조철봉은 그중 깨끗하고 고급스럽게 보이는 2층 일식당으로 앞장서 들어갔다. 조금전까지만 해도 까불던 여자들은 얌전해져 있었는데 방으로 안내되었을 때는 모두 꿀 먹은 벙어리처럼 눈만 껌벅였다.
“자, 뭘 먹을까?”
원탁에 넷이 둘러앉았을 때 종업원한테서 메뉴판을 받아든 조철봉이 여자들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여자들은 메뉴판에 시선을 박은 채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그래서 조철봉도 다시 메뉴판을 보았다. 그러자 그때서야 여자들이 입을 열지 않은 이유를 알수 있었다. 가격 때문이다. 점심 특선의 정식이 1인당 12만원에서부터 초밥이 3만원, 회가 1인분에 8만원 등 4명이면 아무리 싼것을 시켜도 10만원이 훌쩍 넘어간다. 그때 정아가 메뉴판에서 시선을 떼더니 조철봉을 보았다.
“오빠, 너무 비싸.”
“뭐가?”
조철봉이 놀라는 시늉을 하자 정아가 메뉴판을 탁자위에 덮어 놓았다.
“다 비싸. 초밥 한그릇 값으로 다른곳에서 우리 넷이 배부르게 먹겠다.”
“이 근방은 다 그래. 자릿세가 있고 또 비싼 재료를 쓰니까.”
“나도 알아.”
정아가 조철봉에게 눈을 흘겼다.
“하지만 너무 비싸서 소화가 안될 것 같애. 그리고.”
“그리고 뭐야?”
“오빠한테 바가지 씌우는 것 같아서 싫어.”
“나아참.”
입맛을 다신 조철봉이 벨을 누르자 금방 방안으로 종업원이 들어섰다. 여자들은 입을 딱 다물고 있었으므로 조철봉은 회 4인분과 특별히 오뎅 국물 4인분을 부탁했다. 메뉴판에 적힌 계산 대로라면 32만원이 넘는 금액이다.
“오빠, 부자야?”
일식집에 들어선 후부터 온몸을 굳히고만 있던 야구모자 수지가 물었다. 수지는 까무잡잡한 피부에 이목구비가 야무졌다. 고양이처럼 민첩한 인상이었다. 조철봉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럭저럭 살아.”
“우리 동정하는거야?”
“그런 생각은 안해.”
머리를 저은 조철봉이 옆에 앉은 정아를 보았다.
“그냥 정아를 좋아해서 그런거야.”
“정아는 좋겠다.”
긴머리의 미라가 말했다. 미라는 수지와 대조적으로 흰 피부에 가는 체격이었다. 용모도 섬세해서 좋아하는 남자가 많을 타입이었다.
“나도 오빠 같은 애인이 있었으면 좋겠다.”
미라가 혼잣말처럼 말했을 때 정아가 눈을 흘겼다.
“망할년, 넌 한다스가 넘지 않아? 단골이 말야. 걔들 이리 오라고 하지 그래?”
“그것들이야 손님이지 애인이야?”
“맞아. 오빠 같은 사람이 진짜 애인이야. 이곳까지 찾아온 것 좀 봐.”
수지가 거들었다.
“정아한테 이런 오빠가 있을 줄은 정말 몰랐어.”
그때 방문이 열리더니 음식이 들어 왔다. 기본찬에 이어서 회가 놓여지고 튀김 종류에다 해물 전까지 상위에 가득 차려졌으므로 여자들은 한동안 먹느라고 입을 열지 않았다. 모두 맛있게 먹는 바람에 조철봉도 식욕이 일어났다.
“맛있다.”
정아가 회를 삼키고 나서 웃음띤 얼굴로 조철봉을 보았다.
“오빠. 너무 맛있어.”
“조금 있다가 매운탕에 밥 먹어.”
“응.”
머리를 끄덕인 정아가 흘끗 수지와 미라를 보더니 조철봉에게 물었다.
“오빠, 이 근방에 여관 없어?”
조철봉의 시선을 받은 정아가 정색하고 말했다.
“밥먹고 쉬었다가 가게.”
“그래, 쉬었다가 와.”
듣고있던 수지가 웃음띤 얼굴로 말했다.
“영등포 쪽으로 가면 낮거리하는 여관이 많아. 그쪽으로 가.”
정아가 묻자 조철봉은 머리를 저었다.
“오늘은 싫어.”
“왜? 컨디션이 안좋아? 그럼 내가 방에서 안마 해줄게.”
“아니, 그게 아니라.”
세 여자의 시선을 받은 조철봉이 헛기침을 했다.
“내가 뭘 바라고 밥 산게 아냐. 그러니까 부담 느낄 필요가 없다는 말이야.”
“어머나.”
하고 미라가 가늘고 흰 손으로 입을 가리고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조철봉을 보았다. 수지도 고양이처럼 까맣고 큰 눈을 깜박이지도 않고 조철봉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정아에게로 시선을 돌린 조철봉은 숨을 삼켰다. 정아는 식탁위로 시선을 내린 채 젓가락으로 회를 깔짝이는 중이었는데 두볼이 붉었다. 조철봉은 갑자기 찾아온 방안의 정적이 어색했으므로 헛기침을 했다.
“뭐, 좋아하는 사이에 그럴 수도 있는 것 아니겠어? 젠장.”
“오빠.”
수지가 조철봉의 팔을 손으로 쥐고 흔들었다.
“정아가 감동 먹었나봐. 아무래도 여관에 같이 가줘야겠어.”
“그렇다면.”
어깨를 편 조철봉이 세 여자를 둘러 보았다.
“내가 호텔방 하나를 얻어놓을 테니까 너희들 셋이 그곳에서 잠깐 눈좀 붙이고 가지 그래? 아무래도 농성을 오래 끌 것 같은데 방에서 샤워도 하고 말이야.”
“정말?”
먼저 수지가 반색을 했고 미라도 곧 머리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두 여자의 시선이 정아에게로 옮아갔다. 정아의 허락이 떨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때 머리를 든 정아가 수지와 미라를 번갈아 보았다.
“이 오빠는 내가 조금전에 이곳에서 처음 만났어. 난 이 오빠 이름도 몰라.”
그러나 수지와 미라는 눈만 깜박일뿐 놀란 것 같지 않았다. 정아의 말이 이어졌다.
“이 오빠한테 대가를 주지 않으면 오늘 맛있게 먹은 것이 체할 것 같아서 그래.”
“난 눈치채고 있었어.”
시선을 돌린 수지가 억양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정아 네가 애인이 있었다면 내가 몰랐을 리가 없어.”
“그것참 복잡하구먼.”
혀를 찬 조철봉이 끼어들었다. 조철봉이 찌푸린 얼굴로 세 여자를 번갈아 보았다.
“이봐, 호의를 그냥 호의로 받아들이면 어디가 덧나냐? 내가 동생들 같아서 그냥 밥사고 방 잡아주면 무슨 큰일이라도 나는거야?”
“그래, 큰일 나.”
수지가 조철봉의 말을 받았다. 정색한 수지가 조철봉을 똑바로 보았다.
“오빠, 우리는 사회생활을 하는 여자들하고는 달라. 그쪽에서는 호의인지 뭔지를 그냥 받아들이겠지만 우린 아냐. 그리고 싫어.”
그러고는 수지가 머리까지 저었다.
“꼭 갚아야돼. 고마워서가 아니라 그건 우리들한테 아주 어색한 일이어서 그래.”
“좋다.”
조철봉이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그럼 지금부터라도 애인이 되기로 하지. 어색하지 않도록 대가를 받는 애인.”
그러고는 조철봉이 정아를 보았다.
“그럼 호텔로 가자, 이 근처에서 가장 좋은 호텔.”
조철봉이 세 여자와 함께 들어선 곳은 만다린호텔이다. 응접실까지 딸린 스위트룸을 빌린 조철봉은 여자들과 함께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오빠, 방값이 얼마야?”
엘리베이터 안에는 그들 네사람뿐이었으므로 정아가 물었다. 프런트에서 키를 받을때 여자들은 뒤쪽에 멀찍이 물러나 있었던 것이다.
“응, 얼마 안돼.”
조철봉이 건성으로 대답했지만 정아가 바짝 붙어서며 다시 물었다.
“응? 얼마? 10만원? 20만원?”
“응.”
“20만원?”
“응.”
그때 엘리베이터가 멈췄으므로 조철봉은 곤경에서 벗어났다. 여자들의 앞장을 서서 701호실 앞으로 다가선 조철봉은 문을 열었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가 문을 잡고 기다렸다.
“어머나.”
제일 먼저 들어선 정아가 탄성인지 외침인지 외마디 소리를 뱉더니 멈춰섰다. 따라 들어선 미라와 수지도 입을 딱 벌리면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들 모두 호텔 스위트룸은 처음 들어와 본 것이 분명했다.
“비디오에서 본 것보다 낫네.”
미라가 혼잣소리처럼 말했을 때 그중 가장 당돌한 수지가 조철봉에게로 돌아섰다.
“오빠, 이 방이 그냥 방 아니지?”
“그래, 스위트룸이라고, 조금….”
“아, 들었어.”
머리를 끄덕인 수지가 알은 체를 했다.
“경원집의 세라가 일본 남자 따라갔다가 이런 방에서 잤다고 했어.”
“어머, 좋다.”
긴장이 풀린 정아가 이쪽 저쪽을 부산하게 다니면서 감탄사를 연발했고 미라는 정아의 뒤만 따라다녔다.
“화장실이 두곳이나 있네.”
정아가 안쪽 화장실 문을 열고 소리쳤다.
“난 여기서 샤워할거다.”
조철봉은 바깥쪽 응접실의 소파에 앉아 리모컨으로 TV를 켰다. 그러자 마침 뉴스 시간이었고 때맞추어 여의도에서 데모를 하는 윤락여성들의 모습이 비쳤다.
황급히 채널을 돌린 조철봉이 여자들의 눈치를 보았지만 셋은 아직도 방 구경을 하느라고 눈치 채지 못한 것 같았다.
“이제 그만 돌아다니고 씻고 푹 자.”
조철봉이 소리치자 여자들이 모여들었다. 셋은 소파에 앉더니 먼저 정아가 정색하고 말했다.
“오빠, 이 방 언제까지 빌렸어?”
“하루 빌렸으니까 내일 낮 12시까지 있어도 돼.”
“우린 데모하러 가야 되는데.”
미라의 말에 수지가 눈을 흘겼다.
“이것아, 안가도 돼. 번갈아서 쉰다고 했으니까 쉬고 내일 나가도 된다고.”
“그래.”
결심한 듯 정아가 머리를 끄덕였다. 오늘의 리더는 정아였는데 물론 조철봉 때문이다.
“오늘밤 여기서 쉬자.”
“좋아.”
수지가 야구모자를 벗어 팽개치더니 머리를 흔들었다. 그러자 물결치듯 파마한 머리가 보기좋게 흔들렸다.
“여기서 실컷 놀거야.”
“식사도 마음대로 시켜 먹어도 돼. 내가 쓴 김에 팍 쓸테니까.”
조철봉이 셋을 둘러보며 말했다.
“술 마시고 싶으면 말만 해라. 내가 사올테니까, 나이트에서 마시고 싶으면 지하실로 내려가면 되고.”
세 여자에게 씻을 동안 밖에 나갔다가 오겠다고 해놓고 조철봉은 방을 나왔다. 그러고는 로비의 커피숍에 앉아 커피를 마시면서 문득 쓴웃음을 지었다. 여의도를 지나다가 갑자기 차에서 내린 것이 사건의 발단이었다. 그러나 분위기는 신선했다. 성을 매매하는 상대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자신이 상대한 그 어떤 여자보다도 신선하게 느껴졌다. 오히려 다른 여자보다도 성욕이 덜 느껴졌던 것이다. 한모금 커피를 삼킨 조철봉은 문득 정아가 방으로 가서 대가를 치러야겠다고 주장한 것을 떠올렸다.
정아가 주겠다는 대가는 성(性), 즉 몸이었지만 조철봉은 그것이 전혀 더럽다고 생각되지 않았다. 깨끗하고 당당한 상품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정아는 성을 팔지만 전혀 더러운 여자가 아니다. 싸잡아서 매도하고 선입견으로 무시하는 사람들이 더 더럽고 나쁜 종자들인 것이다. 겉으로는 시치미를 뚝 떼고서 은밀하게 불륜을 저지르는 인종들보다 백배, 천배 당당할 자격이 있는 여자들이다. 그때 주머니 속의 핸드폰이 진동을 했으므로 조철봉은 생각에서 깨어났다. 핸드폰을 귀에 붙였을 때 맑고 높은 여자의 목소리가 울렸다.
“오빠? 나, 정아.”
정아에게 핸드폰 번호를 알려주고 나온 것이다.
“어, 다 씻었니?”
조철봉이 묻자 정아가 깔깔 웃었다.
“응, 내가 먼저 씻었어. 오빠 지금 어디야?”
“응, 밖이야. 호텔 근처.”
아래층 커피숍이라고 하면 금방 내려올 것 같아서 조철봉은 거짓말을 했다. 정아가 신선하게 느껴졌지만 아직 준비는 덜 되어있는 것이다. 정아가 준다고 대들면 어색해진다. 그때 정아가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오빠, 여긴 방이 두개인데, 애들은 응접실에 있으라고 하구 우린 안방에서 놀면 돼.”
조철봉이 가만 있는 것이 마음에 걸렸는지 정아의 목소리가 조금 급해졌다.
“오빠, 부끄러워서 그래? 그러면 애들 잠깐 밖에 나갔다가 오라고 하면 되지, 뭐.”
“아냐, 그런게.”
“그럼 우리 넷이 같이 놀아도 돼. 애들은 오빠 좋아하니까 오빠만 오케이하면 된다구.”
“그게 아니라니까 그러네.”
“그럼 어떻게 할건데?”
이제는 정아의 목소리도 딱딱해졌다. 정아가 말을 이었다.
“오빠가 다 싫다면 아까도 말했지만 난 받고만 있을 수 없어. 나 애들 데리고 나갈거야.”
“야, 정아야.”
“뭐?”
심술 부리듯이 정아가 묻자 조철봉은 입맛을 다셨다. 지금까지 여자가 준다고 하는데 사양해 보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너, 내 애인하겠다고 했지?”
“그랬어.”
“내 애인 하려면 내 스타일대로 한번 따라와 주라. 난 금방 먹는 스타일이 아니란 말이다.”
“….”
“아꼈다가 먹는 버릇이 있어, 나는. 그래야 정도 들고, 넌 안그래?”
“안그래.”
했지만 정아의 목소리는 힘이 실려있지 않았다. 그래서 조철봉은 서두르듯 말을 이었다.
“오늘만 날이냐? 우리 다시 만나자, 응?”
조철봉은 그렇게 마음을 정했다. 사람은 가끔 말을 하다가 결심을 하게 된다.
조철봉이 수지의 전화를 받은 것은 그로부터 일주일 후인 오후 3시 무렵이었다. 시간이 흐른데다 통화를 한 적도 없어서 수지라는 이름을 밝혔을 때 조철봉은 누군지 몰랐다가 정아 친구라고 했을 때야 기억해냈다.
“오빠, 저 기억하세요?”
수지가 조심스럽게 물었으므로 조철봉은 일부러 떠들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 그럼, 그날 잘 쉬었어?”
“네, 덕분에.”
얌전하게 대답한 수지가 곧 말을 이었다.
“정아는 제가 오빠한테 전화하는지 모르고 있어요.”
“어, 그래? 정아도 잘있지?”
“정아가 며칠전에 교통사고가 나서 입원했어요, 오빠.”
“어? 그래? 얼마나 다쳤는데?”
“다리를 다쳐서 열흘쯤 더 입원해야 할 것 같아요.”
“괜찮은거야?”
“네, 열흘 후에는 걸을 수 있다니까요.”
“병원은 어딘데?”
“오빠, 와주실래요?”
펄쩍 뛰듯이 반긴 수지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럼 정아가 얼마나 좋아할까요? 정아는 계속 오빠 이야기만 했는데.”
“그랬어?”
“오빠 전화번호는 정아 수첩을 뒤져서 찾아낸 거라고요. 오빠가 나타나면 정아는 기절할지도 몰라.”
“내가 저녁때 가지, 병원이 어디야?”
수지한테서 병원과 병실을 알아낸 조철봉은 정아의 얼굴을 떠올려 보았지만 윤곽이 분명하지 않았다. 그날 커피숍에 내려갔다가 떠난 후로 정아한테서 연락도 오지 않았고 이쪽도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저녁 6시반쯤이 되었을 때 조철봉은 운산대학병원 707호실로 들어섰다. 6인실 병실은 환자로 가득차 있었는데 조철봉은 정아의 자리를 금방 찾아냈다. 그것은 수지와 미라가 화사한 차림으로 병상 옆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어머, 오빠 오셨어”
먼저 수지가 호들갑스럽게 반겼고 미라도 활짝 웃었다. 조철봉은 침대에 누워 있던 정아가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뜨는 것을 보았다. 그러더니 금방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어, 잘들 있었니?”
수지와 미라에게 건성으로 끄덕여 보이며 조철봉은 정아에게로 다가섰다. 방안의 모든 시선이 집중되고 있었지만 뻔뻔스럽게 시합을 하면 1만명 중에서 100명 안에 들 자신이 있는 조철봉이다. 즉 100대 1의 경쟁을 뚫을 자신이 있다는 말이다.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은 채 정아 앞에 선 조철봉이 은근한 표정으로 물었다.
“괜찮아?”
“응.”
겨우 대답한 정아가 시선을 내린 순간에 속눈썹 밑으로 두줄기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여기 과일하고 꽃 가져왔다.”
조철봉이 커다란 과일 바구니와 장미를 100송이나 넣은 엄청나게 큰 꽃다발을 정아의 옆에 내려놓았다. 그것만으로도 병실 안을 압도하고도 남았다.
“뭐, 필요한 것 있니?”
조철봉이 묻자 옆에 서있던 수지가 대신 대답했다.
“오빠가 와준 것으로 충분해.”
그러자 별로 말이 없던 미라도 거들었다.
“그럼, 조금 전까지도 정아는 오빠 이야기를 했는데.”
“시끄러, 이년들아, 다 짜고서는.”
그때 정아가 눈물로 번쩍이는 눈을 흘기면서 그들에게 소리쳤다.
정아의 다리 상처는 경상이었지만 열흘쯤 병원에서 쉬었다가 나간다고 했다. 보험회사에서 다 지급해줄 예정이어서 장사도 안되는 터라 이 기회에 놀겠다는 것이다. 셋은 정아를 휠체어에 태우고 조용한 병원 베란다의 나무 벤치에 앉았다.
“그런데 이젠 데모는 그만하는 건가?”
조철봉이 묻자 먼저 수지가 코웃음부터 쳤다.
“이젠 안해.”
“그럼 어떻게.”
“어떻게 먹고 사느냐고?”
눈을 동그랗게 떴던 수지가 곧 웃었다.
“원정을 다녀.”
“원정이라.”
“오빠는 몰라도 돼.”
“아니, 그러다가.”
“잡히면 어떻게 될까봐?”
쓴웃음을 지은 수지가 눈을 가늘게 뜨고 어둠에 덮인 병원의 정원을 내려다보았다. 그때 잠자코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정아가 입을 열었다.
“오빠, 나, 이번 사고는 보험금 타려고 낸거야.”
놀란 조철봉이 눈을 크게 떴고 수지와 미라는 서로의 얼굴만 보았다. 정아가 말을 이었다.
“내가 횡단보도에 서 있다가 차가 지나갈 때 뛰어들었어.”
“이런.”
조철봉이 입맛을 다셨을 때 정아가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박씨한테 교육을 받은대로 했더니 조금 삐었을 뿐이야. 그런데 오늘 천오백으로 합의가 되었어. 운전하는 놈이 무면허였거든.”
“….”
“운이 좋지 뭐야? 박씨한테 삼백 떼어주고 천이백을 손에 쥐게 된단 말이야.”
“….”
“앞으로 다섯번만 더하면 5, 6천은 모을 수 있겠어. 그 돈으로 빚갚고 일본 갈거야.”
“일본은 왜?”
“일본 경기가 풀려서 장사가 잘된대. 그곳에서 3년만 일하고 돈 모아서 올거야.”
그때 심호흡을 한 조철봉이 수지와 미라를 번갈아 보았다.
“너희들은 친구라면서 가만 있었어? 얘가 이러고 다니도록 놔두었냔 말이다.”
정아를 옆에 두고 나무라자 수지가 쓴웃음을 짓고 말했다.
“말리면 저 기집애가 듣나?”
“아니, 그러면.”
“얘는 내 조수야.”
수지의 소매를 잡아당기면서 정아가 말했다. 정아의 얼굴에도 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내가 작업할 때 옆에 있었는 걸 뭐.”
그러고는 정아가 반대쪽에 선 미라의 엉덩이도 손바닥으로 두드렸다.
“얘도 같이 있었고.”
“나도 한탕 할거야.”
수지가 정색하고 말했다.
“미라도 할 것이고.”
“너희는 도대체.”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조철봉이 셋을 둘러보았을 때 정아가 먼저 대답했다.
“오빠, 그럼 우린 뭘로 먹고 살란 말이야? 마침 박씨가 그런 일을 알려주지 않았으면 우린 지금 거지가 되었을거야.”
정색한 정아의 목소리는 가라앉아 있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어? 아무리 찾아봐도 없었어. 말이 쉽지 직업소개소를 통하거나 직업훈련원에서 일 배워서 나간다는 것은 꿈같은 이야기일 뿐이야.”
정아가 마침내 손끝으로 눈을 씻었다.
“포주한테 착취당해서 빠져 나오고 싶은 애들도 있겠지만 우리 같은 애들도 있다고.”
정원을 향한 채 정아가 목멘 목소리로 말했다.
“우린 그일 아니면 못해.”
“그만해.”
정아의 어깨에 손을 얹은 조철봉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일단은 이번 일이 잘 끝났다니까 다행인데 또 했다가 만일.”
“다치면 어때?”
정아가 조철봉의 말을 자르더니 어둠속에 흰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울먹이더니 지금은 밝게 웃는 것이다.
“많이 다치면 더 많이 뜯어내는거지. 이번에 어디가 부러지거나 크게 다쳤다면 사오천은 뜯어낼 수 있었다고 박씨가 그랬어.”
“도대체 박씨가 누구야?”
눈을 치켜뜬 조철봉이 묻자 수지가 대답했다.
“가게 삼촌이야.”
“삼촌이라니?”
“가게 삐끼도 하고 경비도 서고, 일수놀이도 하는 사람인데 옛날에 놀았대.”
“응.”
“그리고 이번 일도 맡았단 말이지?”
“오늘 내 대신 합의를 했다니까 그러네. 우리가 나섰다가는 그렇게 못받았어.”
이번에는 정아가 나서서 변호했다.
“내일 돈 가져올거야. 그 돈 받으면 여기서 열흘쯤 쉬고 나서 애들하고 동해안 여행이나 다녀올거야.”
그러더니 정아가 반짝이는 눈으로 조철봉을 보았다.
“오빠, 우리 같이 가자. 이번에는 내가 쏠테니까.”
조철봉이 입맛만 다시자 정아는 옷자락을 잡고 흔들었다.
“응? 우리가 티 안내고 놀면 되지 않아? 우리가 메이커 제품으로 입고 나가면 룸살롱 애들보다 못할 것 같아?”
“알았어.”
조철봉이 정아의 손을 떼어내며 말했다.
“그래, 시간 내볼게”
“오빠.”
정아가 이번에는 조철봉의 다리 한쪽을 부둥켜 안으면서 불렀다.
“왜?”
“고마워.”
조철봉의 다리에 얼굴을 기대면서 정아가 말했다.
“걱정해줘서. 오빠는 좋은 사람이야.”
“내가 뭘.”
“오빠.”
“또 왜 불러?”
“저기.”
휠체어를 당겨 조철봉의 옆으로 더 바짝 붙은 정아가 말을 이었다.
“수지하고 미라는 내 친구야. 내 형제나 같은 친구야. 알지?”
“응? 응.”
“그런데 걔들은 애인이 없어. 오빠 같은 애인이 없다고.”
이제는 눈만 껌벅이는 조철봉의 허벅지를 정아가 두팔로 감아 안았다.
“오빠.”
“아, 글쎄. 왜?”
“얘들 애인도 돼줘.”
“무슨 말이야?”
눈을 크게 뜬 조철봉이 옆에 선 수지와 미라를 번갈아 보았다. 그러나 수지와 미라는 시선을 돌려 조철봉과 마주치지 않았다. 그때 정아의 말이 이어졌다.
“우리는 그렇게 하기로 했으니까 오빠만 오케이 하면 돼.”
다음날 회의를 마친 조철봉이 방으로 돌아왔을 때 책상위에 두고 나간 휴대전화에 정아의 전화번호가 찍혀 있었다. 오전 11시반이 되어가는 무렵이었다. 어제 저녁 베란다에서 헤어지면서 퇴원하고나서 동해안에 같이 가기로 했지만 이렇게 금방 연락이 오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리고 물론 정아가 제의한 수지와 미라의 애인이 되어 일인 삼역을 하는 문제도 마음에 걸렸다. 그 자리에서 바로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셋이 모두 진정으로 바라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에 부담이 되었던 것이다. 정아와 수지, 미라가 누구인가? 그 직업에 종사하는 당사자인 터라 애인이라면 곧 잠자리를 같이하는 친구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천하의 강안남자 조철봉이라고 하더라도 셋을, 그것도 친구 사이인 셋을 한꺼번에 애인으로 삼기는 벅찼다. 한꺼번에 셋의 잠자리 상대를 하기에 벅차다는 뜻은 아니다. 그런 식으로 한다면 열명이라도 애인삼아서 차례로 상대할 수 있다. 조철봉이 벅차다고 느낀 이유는 정아는 물론이고 수지, 미라 모두를 아끼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셋은 모두 순수했다. 그들을 보면 험한 바위틈에서 자라나 비바람에 찢기고 구부러진 야생화 같았다. 수많은 남자에게 몸을 팔았지만 전혀 역겹거나 추한 느낌이 들지 않았다.
당당한 셋의 태도를 보면 오히려 숨어서 불륜을 저지르는 여자들이 더 추했다. 성매매는 인류의 첫 상행위였음이 분명했고 특별한 국가가 아닌 이상 여타 지역에서 인류가 멸망할 때까지 존속될 것이었다.
조철봉은 휴대전화를 들고 정아의 번호를 눌렀다.”
“오빠.”
요즘은 목소리를 듣거나 이쪽을 밝히기도 전에 상대방이 제 전화기에 찍힌 발신자 번호를 보고 누군지를 안다. 정아가 대뜸 오빠라고 불렀는데 울먹이는 목소리였다. 그래서 조철봉은 다리 상처가 덧났나 하고 생각했다.
“어, 왜 그래?”
그러자 정아가 목멘 목소리로 말했다.
“나, 사기 당했어.”
“사기?”
“응, 그 박가놈한테.”
그순간 조철봉은 어깨를 늘어뜨렸다. 사기꾼은 사기꾼을 알아보는 법이다. 그래서 어제 박씨 이야기를 듣고는 왠지 찜찜했었는데 셋이 한꺼번에 애인이 되겠다는 문제에 휩쓸려 잊고 있었던 것이다. 조철봉이 잇사이로 물었다.
“그놈이 합의금을 가지고 도망쳤구나, 그렇지?”
“응, 내 치료비까지 다 타가지고.”
“내가 병원으로 지금 갈테니까 걱정할 것 없다. 내가 입원비 내줄테니까.”
“오빠.”
그러고는 이제 정아가 소리내어 울었다.
“오빠.”
겨우 울음을 그친 정아가 다시 조철봉을 불렀다.
“왜?”
“나, 입원비 내고 병원에서 나왔어. 걱정하지 마.”
“어? 그래? 네가 무슨 돈이 있다고.”
“입원비는 얼마 안돼.”
“지금 어디야?”
“가게.”
“가게는 뭐하러 가? 다리가 다 낫지도 않았는데.”
했다가 조철봉이 벽시계를 보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가 지금 네 가게로 가지.”
저녁 8시면 청량리 홍등가는 한창 손님으로 붐빌 시간이다. 근래에 들어서 조철봉이 성매매 금지법에 전혀 저촉되지 않는다고 점잔을 빼었지만 10년쯤 전에는 한 달에 최소한 두번은 다녔던 곳이다. 청량리는 말할 것도 없고 영등포 뒷골목, 용산역 앞, 서울역 주변, 지금은 다 없어졌지만 신촌 사거리 근처에도 갔었고 안암동, 응암동 등 안다녀 본 곳이 없다. 조철봉이야 아니지만 그 당시 총각 딱지를 그곳에서 뗀 놈이 거짓말 보태지 않고 열명중 일곱명은 되었는데 그 일곱명중 여섯명은 성병에 걸려 마이신을 달고 다녔다.
요즘 세대들에게 파이프가 샌다고 하면 무슨 말인지 모를 것이다. 그만큼 요즘세대는 고생을 모르고 자랐다. 그것이 도대체 누구 덕인가? 부모들은 변변한 약도 없어서 파이프가 새면 마이신 하나로 버티면서 생활을 했다. 조철봉의 친구 하나는 새는 파이프를 붕대로 동여매고 과 대항 농구시합에 출전했다가 농구 코트에 흰 번데기집이 떨어지는 바람에 남은 5학기 동안은 도서관에만 박혀 있어야 했다.
덕분에 놈은 고시에 패스했지만 지금도 별명이 번데기집인 것이다. 청량리 홍등가는 성매매 금지법이 시행된 후부터 썰렁해졌다. 환하게 불을 밝히고 대형 유리창 안에 섹시한 가운 차림으로 나란히 앉아있던 여자들은 오간데 없이 사라졌고 짙은 어둠만 덮여져 있었다. 행운옥은 한복판에 있었는데 옆쪽 쪽문이 열려진데다 다른 집과는 달리 안에서 불빛과 함께 인기척이 흘러나왔다. 조철봉이 쪽문 앞에 다가가 섰을 때였다.
“여보시오.”
뒤에서 발자국 소리도 들리지 않았는데 사내의 목소리가 울렸으므로 조철봉은 흠칫 놀랐다. 머리를 돌리자 경찰 두명이 서 있었다.
“지금 어디 가십니까?”
하나가 물었으므로 조철봉이 눈을 부릅떴다. 놀란 바람에 화가 난 것이다.
“어디 가기는? 여기 들어가지.”
“허어.”
그러자 다른 경찰이 기가 막히다는 듯이 입을 딱 벌렸다.
“뭐하러 가시오?”
“내가 떡치러 가는 것 같소?”
이번에는 조철봉이 되묻고는 어깨를 펴고 경찰들을 흘겨 보았다.
“이거 숨어있다가 뛰쳐나와 덮치는 것이 꼭 교통위반 차 잡는거 같구먼 그래.”
그러자 그중 계급이 높은 경찰이 입을 벌리면서 소리없이 웃었다.
“설마 놀러 가시는 건 아니겠고. 이곳이 문 닫았는지는 다 아실테니까 말이요.”
“내 동생이 사기를 당했다고 해서 가는 길입니다.”
이번에는 정색한 조철봉이 말하자 경찰들이 서로의 얼굴을 보았다.
“아, 민영옥이 말이구먼요. 교통사고 보상금을 사기당했다는.”
나이든 경찰이 말하고는 입맛을 다셨다.
“우리도 들렀다가 이야기 들었습니다.”
그러고는 조철봉에게 경례를 했다.
“그럼 얼른 일보고 가세요. 오래 계셨다가는 오해받을 수도 있으니까 말입니다.”
경찰과 헤어진 조철봉이 반쯤 열린 쪽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서자 한 사람이 겨우 다닐 수 있는 길이 안쪽으로 연결돼 있었다. 안에서 불빛이 흘러나왔고 여자들의 말소리가 울렸는데 가까이 다가가자 누군가 훌쩍이며 우는 소리가 들렸다. 조철봉은 문을 두드리려고 주먹을 쥐었다가 곧 손잡이를 당겨 열었다. 그러자 환한 방이 드러나면서 둘러앉은 대여섯명의 여자가 일제히 머리를 들었다.
“어머, 오빠.”
그때 그중에서 누군가가 소리쳤다.
“오빠, 왔어?”
하면서 튕겨 오르듯이 일어선 여자는 민정아였다. 얼굴은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는데 이제는 활짝 웃었다.
“오빠, 오셨어요?”
옆에서 수지와 미라가 따라 일어서며 반겼고 중년 아줌마 둘도 엉거주춤 일어섰다.
“애인 삼았다는 사람이냐?”
쌍꺼풀 수술자국이 선명한 중년여성이 묻더니 대답도 듣지 않고 머리를 끄덕였다.
“인상이 쓸만하네, 잘 골랐다.”
정아의 포주인 모양이었다.
“오빠, 뭐 하러 왔어? 다 끝났는데.”
조철봉의 한쪽 팔을 부둥켜안은 정아가 훌쩍이며 말했다.
“파출소에 갔다 왔지만 그놈은 주민등록도 말소된 놈이야. 찾을 수 없대.”
“그런데 네 이름이 영옥이냐? 문 앞에서 경찰을 만났더니 민영옥이라고 하던데.”
그러자 정아가 정색하고 머리를 끄덕였다.
“응. 주민등록에는 그렇게 돼있어.”
“거기 앉아.”
포주가 조철봉에게 마치 오랜만에 만난 친정동생처럼 허물없이 말했다.
“내가 술상 봐올테니까. 남원댁, 나가서 같이 술상 차리자고.”
포주가 중년여성 하나를 데리고 나갔으므로 방에는 여자 셋과 조철봉만 남았다.
“다리는 어때?”
아직도 붕대를 감고 있는 다리를 걱정스럽게 보며 조철봉이 묻자 정아가 서글프게 웃었다.
“목발 짚고 걸을 만해.”
“그놈이 사기친 돈이 모두 얼마냐?”
“치료비까지 천팔백이야, 오빠.”
대답은 수지가 했다. 수지는 오늘 기가 죽은 표정이었는데 눈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수지가 말을 이었다.
“그놈이 갈 만한 곳은 다 뒤져봤지만 없어. 처음부터 계획적으로 우리를 이용한 거야.”
머리를 끄덕인 조철봉이 다시 정아를 보았다. 정아는 이제 방바닥을 내려다본 채 시선도 들지 않았다.
“잊어버려. 그래야지 자꾸 생각하면 병난다.”
방안은 조용해졌고 조철봉의 말이 이어졌다.
“살아갈 일은 나하고 같이 상의해 보기로 하고.”
“정아 엄마가….”
그때 불쑥 미라가 입을 열었을 때 정아가 놀란듯이 머리를 들고 소리쳤다.
“미라야.”
미라가 입을 다물었지만 눈을 부릅뜬 정아가 쏘아붙였다.
“너 입 다물고 있어.”
“알았어.”
그때 포주가 남원댁과 상을 마주들고 방으로 들어섰는데 진수성찬이었다. 10분도 안되었는데 부글부글 끓는 찌개가 놓여 있었고 각종 젓갈에다 회, 갈비찜도 있었다. 술도 양주와 소주, 청주, 맥주까지 들고 왔다.
“아니, 이런.”
놀란 조철봉이 입을 쩍 벌리고 변변한 인사도 하지 못하자 포주가 시원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자네 이야기를 얘들한테서 다 들었어. 그래서 오늘 한턱 쓰는 것이니까 마음놓고 마셔.”
“아, 아니, 이거….”
“저것들 등쳐먹는 인간들도 있지만 자네같은 사람도 있으니까 사람들이 세상을 사는거지. 자, 뭐 마실거여?”
포주가 묻자 조철봉은 소주잔을 들었다. 그러자 포주가 소리쳤다.
“이년들아, 뭘해? 술 따르지 않고.”
정아가 먼저 조철봉의 잔에 소주를 따르더니 포주의 잔도 채웠다.
“나 이집 주인이야. 얘들은 이모라고 부르지만.”
술잔을 든 여자가 한모금에 소주를 삼키고는 조철봉에게 빈잔을 내밀었다.
“내 이름은 김복실이지만 편하게 누님이라고 불러.”
“저는 조철봉이라고 합니다.”
“이름이 좋군. 그게 철봉같다니.”
“감사합니다, 누님.”
조철봉이 웃지도 않고 대답하자 복실이 길게 숨을 뱉고는 물었다.
“정아를 데모할 때 만났다면서?”
“예.”
“괜찮은 애 잡았어. 하긴 얘들 둘도 괜찮지만.”
옆에 앉은 수지와 미라를 휘둘러 본 복실이 다시 채워진 술잔을 들었다.
“나도 온갖 풍상을 다 겪었지만 국회 앞에 가서 데모한 건 처음이야.”
“기운 내십시오, 누님.”
그때 정아가 조철봉의 앞에 놓인 술잔 하나를 집었다. 술잔이 두개 놓여 있었던 것이다. 복실의 시선을 받은 정아가 어색하게 웃었다.
“내가 마시려구.”
“어이구, 지 애인 생각해준다구.”
“부럽다.”
수지가 거들었을 때 복실이 정색하고 조철봉을 보았다.
“정아 엄마가 자궁암 수술을 해야 돼. 그래서 이번에 받은 돈으로 수술비를 내려고 했는데 큰일났어.”
“이모”
정아가 날카롭게 소리치자 복실이 더 큰 목청으로 외쳤다.
“이년아, 닥쳐!”
“이모.”
이제는 정아가 두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그러나 복실은 아랑곳하지않고 말을 이었다.
“저년은 보상 받으면 여행을 가네, 일본으로 돈을 벌러 가네 하고 헛소리 개소리를 해대지만 제 엄마 수술비 벌려고 뛰어든거야. 거기에다 동생 둘이 있는데 둘다 놀고 있어. 지금까지 제 집안 생활비, 동생 학비는 모두 저년이 몸팔아서 댄 것이지.”
그때 정아는 훌쩍이며 울었고 수지와 미라도 손끝으로 눈물을 닦았다. 다시 한모금 소주를 삼킨 복실이 길게 숨을 뱉었다.
“내가 쟤 엄마가 입원한 병원에 알아 보았더니 수술비에다 입원비까지 합쳐서 250이 든다고 해. 그래서 내가 150만원은 댈테니까 자네가 100만원만 보태. 내가 다 내고 싶지만 보다시피 나도 거지야.”
“이모.”
그때 정아가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들더니 복실을 보았다.
“이모, 도대체 왜 그래? 나 죽는꼴 보려구 그래?”
“이년아, 네 엄마부터 살려놓고 죽거라.”
복실이 눈을 부릅뜨고 소리쳤다.
“그래, 나도 눈이 뒤집혔다. 불쌍한 네년들 꼴 보느니 나도 죽을란다.”
그러고는 복실이 눈을 부릅뜬 채 주르르 눈물을 쏟자 수지와 미라가 동시에 울음을 터뜨렸다. 정아는 다시 어깨를 들먹이며 울었고 남원댁도 찔끔거렸으므로 방안은 울음바다가 되었다. 조철봉은 소주잔을 들어 한모금에 삼켰다. 그러고는 더운 숨을 길게 뱉었다.
“제가 다 내지요.”
술잔을 내려놓은 조철봉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러니 누님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다 알아서 할테니까 말입니다.”
조철봉이 누구인가? 매일 카바레에서 여자를 꼬시느라 지갑에는 100만원권 수표 3장에 10만원권 10장은 기본으로 넣고 다니는 위인이 아닌가? 카바레에서 카드를 긁어서 보조 팁까지 계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술잔을 내려놓은 조철봉이 지갑을 꺼내더니 100만원권 수표 3장을 모두 꺼내어 복실에게 내밀었다.
“여기 3백 있습니다. 누님.”
그러자 놀란 복실이 눈만 크게 뜨더니 받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순간 방안에는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정아는 물론이고 미라와 수지, 남원댁까지 숨을 멈추고는 눈도 깜박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싫어”
다음 순간 정적을 깨뜨린것은 정아였다.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정아가 주먹을 움켜쥐고 소리쳤다.
“안받어! 내가 거지냐!”
“이 미친년이.”
그때서야 숨이 돌아온듯 어깨를 부풀린 복실이 눈을 부릅떴다.
“주둥이 닥치지 못해!”
“못해!”
“에라이!”
그러고는 복실의 투박한 손이 바람을 일으키며 날아 정아의 뺨을 쳤다. 뺨을 맞은 정아의 몸이 옆으로 기울어졌고 그쪽에 있던 수지가 받아 안았다.
“이 썩을 년.”
복실이 분을 참지 못하겠다는듯이 무서운 기세로 몸을 일으켰다.
“이 기집애야. 너만 자존심이 있냐? 저 동생은 자존심이 없는줄 알어?”
그러고는 두손을 뻗어 정아의 머리칼을 움켜쥐었다.
“니가 그 지랄을 허먼 저 동생이 얼매나 쪽을 팔리겄냔 말이다. 그걸 생각이나 혀 보았어?”
복실의 입에서 사투리가 쏟아졌다.
“그럴 때는 가만이 있는거여! 받지 못하겄다먼 좋게 말허고! 니가 머가 잘났다고 소리를 쳐! 이 상년아!”
“누님, 진정 하시지요.”
자리에서 일어선 조철봉이 복실의 손을 뜯어 내었고 수지와 미라도 거들었다. 머리칼을 잡힌채 정아는 흔들리기만 하다가 풀려나자 곧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안았다.
“누님 이제 정아도 이해를 했을테니까 이제 진정하시고.”
조철봉이 이제는 복실의 손에 수표를 쥐어 주었다.
“제 성의올시다. 박가같은 사기꾼이 있으면 저같은 호구도 있는 것이 세상 아닙니까? 더구나 저는.”
헛기침을 한 조철봉이 정색하고 말을 이었다.
“정아를 처음 보았을 때부터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있는 수지나 미라도 동생 같아서요.”
“어쨌든 고맙네 동생.”
어느덧 어깨를 늘어뜨린 복실이 목멘 목소리로 말했다.
“동생은 복 받을거여.”
“저도 나쁜 짓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아이고, 이것들을 어떻게 할거나.”
갑자기 복실이 손바닥으로 방바닥을 치면서 울었으므로 조철봉은 놀라 입을 다물었다. 복실의 넋두리가 이어졌다.
“저년들을 어떻게 먹여 살릴거나, 줄줄이 딸린 식구들이 있는 저 불쌍헌 년들을. 어이고, 어이고.”
“에이 시끄러.”
하고 수지가 짜증을 냈지만 목소리가 젖어 있었다. 미라는 벌써 눈물을 쏟는 중이었고 정아는 얼굴을 가린 손바닥을 아직 내리지 않았다. 조철봉은 상에 놓인 소주잔을 들어 한모금에 삼켰다. 복실의 넋두리는 계속 되었다.
“오빠.”
뒤에서 부르는 목소리에 조철봉은 머리를 돌렸다. 어둠속을 뛰어오는 미라의 모습이 드러났다. 양쪽 가게들이 모두 문을 닫아서 가로등 빛만 비치는 거리에는 인적도 드물었다. 그래서 긴머리를 흩날리며 달려오는 미라의 자태는 두드러졌다. 숨을 헐떡이며 다가온 미라가 조철봉의 앞에서 멈춰섰다.
“오빠, 저기까지 데려다 드리려고.”
미라가 손으로 거리 끝쪽을 가리켰다.
“이모가 보냈어.”
“왜 널 보내?”
조철봉이 눈을 가늘게 뜨고 묻자 미라는 어색한 듯 시선을 내렸다.
“정아는 다리가 아프잖아? 그래서.”
“왜? 나는 다리가 없대냐? 괜히 심부름을 시키고 있어.”
투덜거리며 조철봉이 다시 발을 떼자 미라가 바짝 옆에 붙어 따랐다. 미라에게서 옅은 향수 냄새가 났다. 옆으로 지나가던 사내 두명이 흘끗거렸지만 조철봉은 개의치 않았다. 미라도 머리는 숙이고 있었지만 조철봉의 옆으로 더 바짝 붙었다.
“오빠.”
서너걸음 걸었을 때 미라가 흘끗 시선을 주면서 말했다.
“정아는 수지하고 오늘 엄마가 계시는 병원으로 갈거야.”
“….”
“거기서 잔다고 했어.”
“….”
“이모는 오빠가 준 돈에다 50만원을 더 보태서 350을 정아한테 줬어. 그리고 나하고 수지한테도 50씩 나눠 주었고, 참 좋은 이모야.”
“….”
“이모는 빚만 지고 있어서 자살하고 싶댔어. 우리들 때문에 죽지도 못한다고 했어.”
이제는 통행량이 많은 거리로 나왔으므로 조철봉은 걸음을 늦췄다. 밤 10시가 되어가고 있었지만 이쪽 거리는 아직 번잡했다. 그때 미라가 조철봉에게 낮게 물었다.
“오빠, 어디 갈거야?”
“가긴 어딜가? 집에 가야지.”
“오빠, 나, 싫어?”
불쑥 미라가 물었으므로 조철봉은 긴장했다. 조철봉의 시선을 받은 미라가 입술을 조금 비죽거리며 울상을 지었다.
“내가 창피해?”
“그게 무슨 개뼈다귀 같은 소리야?”
“나, 싫어?”
다시 미라가 묻자 조철봉은 입맛을 다셨다.
“그럴리가 있냐? 너, 예뻐.”
“그럼 나 데리고 가.”
“미쳤냐? 정아는 어떻게 하고?”
질색을 한 조철봉이 목소리까지 낮췄을 때 미라가 바짝 다가섰다.
“정아가 나더러 오늘 오빠한테 서비스하라고 했단 말야.”
“….”
“이모도 그랬고.”
“….”
“정아는 오늘 병원에 가서 엄마를 만나야 한다고 나한테 부탁했어.”
“….”
“우리 셋은 오빠를 애인 삼기로 했단 말야, 오빠.”
“너희들.”
길게 숨을 뱉은 조철봉이 미라를 보았다.
“너희들 마음은 다 알아. 그리고 나도 너희들을 다 좋아하고, 하지만.”
조철봉이 미라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나는 지금 그럴 기분이 아니다, 미라야.”
만일 왕궁 나이트에서 이런 경우가 닥쳤다면 조철봉은 조물주께 감사를 드리면서 감지덕지했을 것이었다.
그때 미라가 정색하고 조철봉을 보았다. 베이지색 코트 차림으로 허리끈을 질끈 동여 매어서 날씬한 몸매가 더 드러났는데 물결치듯 파마한 긴 머리는 어깨까지 늘어뜨렸다. 파리한 얼굴로 눈을 크게 뜬 미라의 분위기는 마치 워털루 다리에서 로버트 테일러를 기다리던 비련의 여인같았다.
“오빠.”
미라가 젖은 목소리로 조철봉을 불렀다. 옆으로 한떼의 술취한 남자들이 지나면서 미라를 노골적으로 보았다. 그러나 조철봉은 물론이고 당사자인 미라도 이제 주위의 시선을 무시했다.
“나 데려가.”
미라가 울먹이며 말했다.
“나 갈곳이 없어.”
갈곳이 없다는 말이 결정적이었다. 조철봉의 가슴을 찌른 셈이었다. 눈을 크게 뜬 조철봉이 미라에게 바짝 다가섰다.
“갈 곳이 없다니? 이모한테 가면 되지 않아?”
“그곳에서 못자.”
미라가 머리를 저었다.
“남원댁 혼자만 집을 지켜.”
“넌 집도 없어?”
“없어.”
머리까지 흔든 미라가 손끝으로 눈물을 닦았다.
“엄마하고 여동생은 식당 방에서 자는데 셋이 자기에는 좁아.”
“어느 식당?”
조철봉이 미라의 팔을 잡고 발을 떼면서 물었다. 그러자 미라의 목소리가 금방 밝아졌다.
“엄마가 대림동 시장에서 떡만두 식당을 해. 두평반짜리 식당인데 내가 작년에 얻어 주었어.”
미라가 조철봉의 팔을 끼더니 말을 이었다.
“하지만 요즘은 불경기라 석달 전부터 월세도 못내고 있어, 하지만 굶지는 않으니까 다행이지 뭐.”
“그런가?”
“식당 내놓으면 2천5백은 그대로 받을 수 있으니까 걱정없어.”
그러더니 미라가 조철봉의 팔을 당겼다.어느덧 그들은 택시 정류장 앞에 와 있었던 것이다.
“오빠, 택시 타자.”
조철봉은 머리를 끄덕였다. 어차피 차는 타야했던 것이다. 빈 택시가 금방 다가와 멈춰 섰으므로 그들은 뒷좌석에 올랐다.
“테헤란로로 갑시다.”
조철봉이 택시기사에게 말하고는 좌석에 등을 붙였다. 그때서야 가게에서 연거푸 마신 소주의 취기가 올라왔다. 복실이 계속해서 권하는 바람에 두병을 마신것 같았다. 택시는 밤거리를 속력을 내며 달렸다. 미라는 택시에 탄 후부터는 택시기사의 눈치를 살피면서 입을 열지 않았다. 셋중에서 미라가 제일 내성적인 성품 같았는데 오늘따라 들뜬 것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넌 앞으로 어떻게 할 계획이야?”
조철봉이 낮게 묻자 미라가 다시 힐끗 택시기사의 등에 시선을 주었다. 그러고는 머리를 젓더니 속삭이듯 말했다.
“아직 몰라.”
“수지는?”
“수지도.”
그러자 조철봉이 혀를 찼다.
“또 그따위 짓은 안하겠지?”
정아가 차에 뛰어든 짓을 말하는 것이다. 조철봉의 시선을 받는 미라가 꾸중 듣는 초등학생처럼 머리를 끄덕였다.
“응, 안해.”
그러더니 조철봉의 손을 찾아 쥐었다.
“오빠.”
미라가 어깨를 붙이면서 조철봉을 불렀다.
“나, 행복해.”
조철봉의 귀에 입술을 붙인 미라가 속삭이듯 말한 순간이었다. 갑자기 가슴이 소리를 내며 내려앉는 느낌이 왔으므로 조철봉은 심호흡을 했다. 그러자 심장의 빠른 고동이 느껴졌다. 감동을 받은 것이다. 지금까지 둘이 겹쳐서 그 일을 할때마다 듣던 말이었으니 수천번도 더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일을 하기도 전에 이렇게 맨정신으로 들어본 기억은 나지 않는다. 그렇게 말하고는 미라가 곧 떨어져 시치미를 뗀 표정으로 앞만 보고 있는 것도 조철봉에게 신선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이제는 조철봉이 미라의 손을 힘주어 쥐었다.
“미라야.”
“응?”
“나도 네가 좋다.”
그때였다. 조철봉은 미라의 두 눈에서 수도 꼭지를 금방 튼 것처럼 두줄기 눈물이 흐르는 것을 보았다. 그러더니 미라가 두눈을 크게 뜨고는 조철봉을 정면으로 보았다. 이제는 앞쪽 운전사도 의식하지 않았다.
“오빠, 정말?”
“그래.”
“날 할 수 없이 데려가는 건 아니지?”
“천만에 말씀이야.”
그러자 미라가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펴고 웃었다.
“아아, 신난다.”
미라가 조철봉에게 잡힌 손을 흔들었다.
“이제 안심했다.”
그러자 조철봉의 조금 불편했던 가슴도 가라 앉았다. 택시가 테헤란로에 들어섰으므로 조철봉은 그린힐 호텔에서 세웠다. 그린힐 호텔은 특급 호텔로 예약하지 않으면 방을 잡기 힘들었지만 조철봉은 VIP회원이다. 금방 키를 받아든 조철봉이 뒤쪽에 서있던 미라의 어깨를 안고 엘리베이터로 다가갔다. 자연스런 태도였지만 미라의 몸은 굳어 있었다. 엘리베이터에 올랐을 때 미라가 물었다.
“오빠, 여기 방값 비싸지?”
엘리베이터 안에는 둘 뿐이었지만 미라는 더 목소리를 낮추고 물었다.
“지난번 여의도의 호텔보다 더 비싸지?”
조철봉은 머리만 끄떡였다. 네배도 더 비싼 방을 빌린 것이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그들은 양탄자가 깔린 복도를 걸어 방앞에 섰다. 조철봉이 키로 문을 열고는 방안의 불을 켰다. 뒤를 따라 들어선 미라가 눈이 부신듯 두어번 눈을 깜박이더니 얼굴이 환해졌다.
“멋있다.”
방은 스위트룸이었던 것이다. 응접실에다 침실은 열평도 넘었으며 욕실의 욕조는 세명이 들어가도 남을 정도로 컸다. 주춤대며 방 구경을 하던 미라가 응접실의 소파에 앉아있는 조철봉의 앞에 와섰다.
“오빠.”
얼굴이 상기된 미라가 조철봉을 내려다 보았다.
“너무 좋아.”
“그래?”
조철봉이 미라의 코트 허리끈을 잡아 풀면서 웃었다.
“방이 이 방만 남아있다고 해서 빌린거야, 하지만 네가 좋다니 방값은 했다.”
코트가 벗겨지자 미라가 투피스의 자켓단추를 제 손으로 풀면서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조철봉이 스커트 지퍼를 내리려고 했기 때문이다.
“싫어, 내가 벗을게.”
그러고는 시선을 들더니 조철봉을 향해 수줍게 웃었다.
“정아한테 미안해, 내가 먼저 오빠하고 자서.”
자연스런 태도여서 조철봉은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때 미라가 뒷걸음으로 두어걸음 물러나더니 벽에 붙은 전등 스위치를 껐다. 그러자 TV화면의 빛만 비칠 뿐 침실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오빠, 괜찮지?”
옷을 벗으면서 미라가 물었는데 TV의 빛이 몸의 윤곽을 더 선명하게 드러나게 했으므로 조철봉은 침을 삼켰다.
“음, 괜찮아.”
“오빠한테는 부끄러워서 그래.”
“이해한다니까.”
“나, 절대로 앙큼 떠는게 아냐.”
“알고 있어.”
그러는 사이에 미라는 알몸이 되었다. 예상했던대로 잘 빠진 몸매였으므로 조철봉은 다시 침을 삼켰다. 누가 지금의 미라를 창녀라고 할 것인가? 오히려 어떤 다른 여자보다도 더 정숙했으며 더욱 매력적이었다. 조철봉은 그녀들을 처음 만나는 순간부터 지금까지 전혀 선입견을 품지 않았다. 창녀도 사랑을 할 수 있으며 어머니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불륜을 저지르거나 계산기를 열심히 두드려 자신의 미모나 몸의 가치를 남자의 재산이나 신분으로 바꾸려는 여자보다도 더 정직하고 순진하지 않은가 말이다. 알몸이 된 미라가 다가오더니 침대 시트를 들추고 옆에 누울 때까지 조철봉은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미라는 조철봉의 옆에 눕더니 온몸을 웅크렸다.
“오빠?”
미라가 낮게 조철봉을 불렀다.
“응?”
“나 안아줘.”
조철봉은 아직 손도 안 대고 있었던 것이다. 조철봉이 팔을 뻗어 미라의 어깨를 당겨 안았다. 그러자 미라가 얼굴을 조철봉의 맨가슴에 붙였다.
“오빠.”
“또 뭐야?”
“나, 오빠 만져도 돼?”
“아, 그럼.”
선뜻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조철봉의 가슴이 다시 세차게 뛰었다. 또 감동을 받은 것이다. 미라의 행동은 마치 경험이 없는 처녀 같았으며 그것이 전혀 가식적으로 보이지 않은 것이다. 미라의 손이 가슴을 쓸어내리더니 이미 성이 날대로 나있는 철봉에 닿았다.
“어머.”
미라가 짤막한 탄성을 뱉더니 철봉을 조심스럽게 쓸어 올렸다.
“나, 이렇게 만져보는 건 처음이야. 오빠.”
미라가 더운 숨을 조철봉의 가슴에 뱉으면서 말했다.
“오빠, 입으로 만져도 돼?”
“아니, 그건.”
하면서 조철봉이 잠깐 망설이다가 마음을 바꾸고 시트를 걷었다.
“해도 돼.”
그러자 미라가 냉큼 상반신을 일으키더니 조철봉의 몸위로 엎드렸다.
“으으음.”
조철봉은 낮게 신음했다. 미라의 입 안으로 철봉이 들어갔기 때문이다. 미라는 입 안에 든 철봉을 혀끝으로 정성껏 애무해주기 시작했다. 튀어나온 핏줄은 물론이고 신경세포 하나하나까지 혀로 감고 누르며 문질러준 것이다.
“미라야.”
미라의 긴 머리칼을 움켜쥔 조철봉이 신음처럼 말했다.
“이제 그만, 오빠는 됐어.”
“아냐, 싫어.”
미라가 입안에 든 철봉을 잠시 빼냈다.
“난 내가 좋아하는 남자를 이렇게 해주고 싶었어.”
숨을 헐떡이며 미라가 말을 이었다.
“오늘이 그날이야 오빠. 나 이렇게 하는건 처음이야.”
조철봉은 다시 미라의 어깨를 끌어 당겼다.
“미라야, 이제 그만. 이번에는.”
그러고는 조철봉이 상체를 일으키더니 미라를 눕혔다.
“내가 애무해주지.”
“싫어.”
미라가 깜짝 놀랄 만큼 큰소리를 내고는 몸을 비틀었다.
“나, 싫어. 오빠.”
“왜?”
움직임을 멈춘 조철봉이 미라를 내려다 보았다. 모로 누운 미라는 다시 온몸을 웅크리고 있었으므로 방어의 자세가 되었다. 미라가 얼굴을 시트에 묻은 채로 말했다.
“나, 한번도 애무당한 적이 없어.”
“…”
“나, 키스도 안해봤어. 오빠.”
“…”
“남자 손이 몸에 닿으면 소름이 끼쳐서 그래. 오빠.”
“내손이 닿아도?”
조철봉이 부드럽게 묻자 미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심호흡을 한 조철봉이 미라의 옆에 다시 누웠다. 가끔 그런 곳에서 놀다온 친구한테서 비슷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던 것이다. 여자에게 키스를 하려다가 거절을 당했다든가 만지려다가 혼났다는 이야기였는데 지금 자신이 겪게 된 것이다. 조철봉이 미라의 어깨를 당겨 안고는 부드럽게 불렀다.
“미라야.”
“응?”
“지금은 달라질거야.”
조철봉이 미라의 등을 손바닥으로 쓸면서 말했다.
“분위기가 다르고, 그리고 널 안고 있는 남자는 나야. 오빠란 말이다.”
“…”
“눈을 감고 가만 있어봐. 기다려보란 말이야.”
“싫어.”
미라가 머리를 저었지만 조금전보다는 반응이 약했다. 다시 상반신을 세운 조철봉이 먼저 미라의 이마에 입술을 붙였다가 떼었다.
“미라야. 좋지?”
“응.”
“네 몸은 뜨거워져 있어. 알고 있어?”
“몰라.”
“조금전에 보았더니 샘에서 물이 흘러 나오던데.”
“몰라.”
미라가 몸을 비트는 시늉을 했을 때 조철봉의 입술이 내려와 입술을 덮쳤다. 조철봉은 미라의 입술을 입술로 헤치고는 곧 벌려진 치아 사이로 혀를 넣었다. 그러자 미라가 놀란듯 혀를 움츠려지만 벌린 입을 다물지는 않았다. 조철봉은 혀를 뻗어 미라의 혀를 자극했다. 그러자 반응은 먼저 미라의 팔이 조철봉의 목을 감는 것으로 왔다. 몸을 붙인 조철봉이 손을 뻗어 미라의 젖가슴과 엉덩이를 부드럽게 애무했다. 젖꼭지는 이미 탱탱하게 발기되어 있었는데 엉덩이를 쓸던 손이 앞으로 돌아가 허벅지 사이를 만졌을 때 미라의 입에서 낮은 신음소리가 터져나왔다. 처음으로 뱉어진 신음이었다.
“아아, 오빠.”
그러고는 마침내 미라의 혀가 길게 뻗어 나오더니 조철봉의 입 안으로 들여밀어졌다. 조철봉은 미라의 골짜기를 조심스럽게 손끝으로 애무했다. 그러자 미라가 자꾸 두 다리로 조철봉의 손을 조이려는 시늉을 했다. 손이 조금더 안쪽으로 들어가 주기를 바라는 몸짓인 것이다. 그러나 조철봉은 서둘지 않았다. 미라의 몸이 처음으로 열리는 순간인 것이다.
미라는 이제 전혀 거부하는 몸짓을 하지 않았다. 조철봉의 입술이 목을 지나 젖가슴에 닿았을 때는 신음소리가 더욱 높아졌으며 온몸이 땀에 배어 끈적였다.
“오빠, 나 죽겠어.”
조철봉은 입안에 미라의 젖꼭지를 넣고 혀로 굴렸다. 미라는 한번도 입술은커녕 젖꼭지도 개방하지 않았다고 했다. 두손으로 조철봉의 머리칼을 움켜쥔 미라가 몸을 들썩였다. 이미 샘에서는 샘물이 넘쳐나고 있었는데 가쁜 호흡과 함께 신음이 계속해서 뱉어졌다.
“오빠, 빨리.”
마침내 미라가 애원하듯 말했을 때 조철봉이 머리를 들었다.
“미라야, 불을 켜자.”
놀란듯 미라가 움직임을 멈췄지만 조철봉이 말을 이었다.
“괜찮지? 네 몸을 보려고 그래.”
“빨리 해줘, 오빠.”
조철봉의 어깨를 당겨 안으면서 미라가 그렇게 말하는 것으로 승낙을 했다. 조철봉은 손을 뻗쳐 침대 옆의 전등 스위치를 켰다. 불이 켜진 순간에 미라는 시트를 당겨 몸을 덮으려는 시늉을 했지만 그렇게 안되었다. 시트가 몸에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조철봉은 들이켰던 숨을 길게 내뿜었다. 미라의 알몸이 눈앞에 환하게 펼쳐졌기 때문이다. 불을 껐을 때 윤곽이 선명하게 드러났던 몸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미라는 이제 두 다리를 오므리고 몸을 비틀어 옆 모습을 보이고 있었지만 배의 솜털까지 드러났다.
“아름답다.”
진심으로 말한 조철봉이 다시 입술을 미라의 젖가슴에 붙였다. 그러자 미라가 찔끔했지만 곧 조철봉의 머리를 두손으로 감싸 안았다.
“오빠, 빨리.”
미라가 투정하듯 말했을 때 조철봉의 입술은 배꼽을 지나 도톰한 아랫배로 내려왔다. 그러자 짙은 숲에 싸인 샘이 드러났다. 성욕이 일어났기 때문에 샘이 아름답고 황홀하게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샘에 대한 예찬을 회피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상적인 샘은 하복부가 넓으며 샘 끝의 지붕 부분은 약간 튀어나와 있으면서 숲이 나기 시작하는 곳에서부터는 살집이 좋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샘은 좁아야 하며 온전한 상태일 때는 축축하지 않고 만지면 부드러워야 한다. 열기를 내뿜되 나쁜 냄새를 풍기면 안된다고도 했다. 또한 샘은 탄력있는 허벅지와 엉덩이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집트에서는 아름다운 샘을 털없는 복숭아라고도 불렀는데 대부분의 남자는 복숭아 빠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조철봉의 입술이 샘으로 내려오자 미라는 본능적으로 다리를 오므렸는데 이미 몸의 방어감은 열기에 달아올라 무력해진 상태였다.
“아앗.”
조철봉의 입술이 샘끝의 지붕에 닿았을 때 미라는 커다랗게 탄성을 내질렀다.
입술이 그저 슬쩍 닿기만 했는데도 격한 반응이 온 것이다. 조철봉은 천천히 미라의 샘을 혀끝으로 애무하기 시작했다. 미라는 처음으로 이런 애무를 받는 것이다.
“아아아.”
미라가 온몸을 떨면서 조철봉의 애무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러고는 곧 폭발할 것처럼 신음이 높아졌고 호흡이 끊어질 듯 가팔라졌다. 이윽고 조철봉의 혀가 샘 안을 다시 한번 휘젓고 나왔을 때 미라의 몸이 폭발했다. 미라는 흐느껴 울면서 몸을 세차게 튕기더니 곧 경련을 일으켰는데 격렬한 절정이었다.
조철봉의 철봉이 샘 구경도 못한 상태에서 미라는 절정에 올라버린 것이다. 그러나 조철봉은 미라를 안은 채 가만있었다. 미라의 거친 숨이 가라앉을 때까지 등과 어깨를 부드럽게 쓸면서 기다렸다. 이윽고 미라가 조철봉의 가슴에 붙였던 얼굴을 떼었다. 땀으로 범벅이 된 얼굴이었지만 미라는 아름다웠다. 화장기가 전혀 없는 얼굴이 더 아름다운데도 본인만 모르고 있는 경우가 많다.
“오빤, 안했지?”
철봉이 찬바람만 쐬고 있었다는 것을 미라가 모를 턱이 없었건만 그렇게 묻더니 두손으로 조철봉의 허리를 감아 안았다. 강한 힘이었다.
“오빠, 나 오늘 처음 했어.”
미라가 하반신을 조철봉의 철봉 근처에 집중적으로 비비면서 말했다. 이미 한차례 절정을 겪은 미라의 얼굴은 환하게 밝아져 있어서 마치 자체에서 빛을 뿜는 것 같았다. 조철봉의 시선을 받은 미라가 이를 드러내고 소리없이 웃었다.
“그거 말이야, 홍콩 가는것.”
“그 거짓말, 참말이냐?”
“응.”
미라가 엉덩이를 뒤로 빼더니 철봉을 두손으로 조심스럽게 감싸쥐면서 말했다.
“내가 왜 거짓말을 하겠어? 난 오빠 혀만 받아 들이고는 뿅 갔다구.”
“흥, 그래?”
“천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고 몸이 붕 떴어. 그리고 그곳이 뒤틀렸고.”
“흥, 그래?”
“내말이 믿기지 않는가 보지?”
철봉을 쥔 손에 힘을 준 미라가 정색하고 조철봉을 보았다.
“난 지금까지 한번도 한 적이 없어.”
미라가 말을 이었다.
“그걸 할 적에는 다른 생각을 해. 만화책에 나오는 공주 생각을 하거나 영화 생각, 가끔 어머니 생각도 하고.”
“….”
“그러면 위에서 아무리 굴러도 느낌이 안와. 그냥 그곳만 조금 아플 뿐이지.”
“….”
“그러다가 신음 소리나 크게 내면 남자들은 싸 버리는거야. 내가 맘대로 했지. 대충 3분 안에 다 끝냈어.”
“하긴 그렇게 하지 않으면 몸이 상할테니까.”
조철봉이 맞장구를 쳐주자 미라는 쓴웃음을 지었다.
“우리도 인간이야. 왜 흥분하지 않겠어? 가끔 달아오를 때도 있었지만 싫었어. 몸만 따로 노는 것이.”
미라가 다시 조철봉의 철봉을 애무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난 한번도 마음과 몸을 함께 준적이 없었어. 그래서 한번도 아까처럼 홍콩에 가본 적이 없었던 거야.”
“그렇다면.”
조철봉이 미라의 몸을 반듯이 누이면서 말했다. 밝은 불빛이 비치고 있었으므로 밑에 누운 미라의 환한 얼굴이 그대로 드러났다. 기대에 가득 찬 얼굴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이제 본격적으로 해볼까?”
“응, 해줘. 오빠.”
자세를 만들면서 미라가 두팔로 조철봉의 어깨를 쥐었다.
“나, 이번에는 진짜 죽을것 같애.”
“죽여주마.”
“내가 넣을까? 오빠.”
“아니, 내가.”
“오빠, 천천히 넣어. 내가 다 느끼게.”
“그게 내 18번이다.”
조철봉은 미라의 붉은 샘 안에 철봉을 천천히 진입시켰다. 철봉의 세포 하나하나가 모조리 샘의 벽을 느낄 수 있도록 강하면서도 아주 천천히 넣은 것이다.
“아아.”
미라가 온몸을 굳히고 탄성을 뱉었다. 두손으로 조철봉의 어깨를 움켜쥔 채 두 무릎을 세워 침대를 단단히 발로 디딘 상태여서 철봉을 받아들이는 자세는 완벽했다.
“아아아아.”
철봉이 깊게 들어가면서 미라의 탄성은 더 높고 굵어졌다. 미라는 몸을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는데 그것은 철봉의 느낌을 티끌만큼도 빠뜨리지 않고 받아들이겠다는 의미였다. 조철봉은 철봉이 바닥까지 닿는 순간에 상반신을 밀면서 천천히 빼냈다. 여자마다 샘의 구조가 같지 않아서 미라는 밀면서 빼내야 느낌을 잃지 않을 것이었다.
“오빠.”
미라가 조철봉의 어깨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것은 철봉이 빠져 나가는 것에 대한 무의식적인 반응이었다.
“나 몰라.”
철봉의 깃봉 끝부분까지 나왔을때 처음으로 미라가 하반신을 들썩였다. 그것은 하반신을 올려 철봉을 잡아 두려는 행동인 것이다. 그러나 다음 순간 철봉이 다시 밀고 들어왔으므로 미라가 움직임을 멈추면서 환호했다.
“아아아아.”
미라의 샘은 벌써부터 넘쳐 흐르고 있었다. 뜨겁고 신선한 용암이다.
“오빠, 나 올라가.”
미라가 한손으로 조철봉의 어깨를 죄면서 말했다. 눈을 크게 뜨고 있었지만 먼 곳을 보는 것 같았고 입은 반쯤 벌어져 있었다. 맨정신으로는 절대 이런 모습을 남에게 보이지 못할 것이었다. 조철봉이 다시 철봉을 뺐다가 넣었을 때 미라가 두 다리를 들더니 허리를 감았다. 이제 몸이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증거였다. 차분하게 쾌감을 음미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그러자 조철봉의 움직임도 거칠어졌다. 이런 경우에는 거칠게 이끌어야 한다는 것을 수많은 실전 경험에 의해 터득한 조철봉이다. 빠르고 강하게 서너번 움직였을 때 미라는 숨이 넘어갈 듯한 신음을 뱉더니 벌써 몸을 뒤틀기 시작했다.
“아유우 오빠.”
미라가 조철봉과 몸을 맞춘다고 하반신을 들썩였지만 전혀 박자가 맞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것이 미라를 더 자극했다. 어긋난 순간에 가슴이 미어질 것같이 허전했다가 이번에는 예기치 않게 강하게 철봉이 샘 안으로 들어왔고 그때는 몇배의 자극이 왔다.
“오빠, 나, 나.”
균형을 잡은 조철봉이 다시 대여섯번을 더 움직였을 때 마침내 미라가 헐떡이면서 소리쳤다.
“나, 할거야.”
반듯이 누워서 만화책을 읽다가, 또는 껌을 짝짝 씹으면서 위에 올라타고 열심히 방아질을 하는 남자를 멀거니 보다가 바락 짜증을 내며,
“할거야? 말거야?”
했다거나, 또는 갑자기 머리를 돌려 문쪽에다 대고
“이모 화장품 아줌마 가지 말라고 해”
했다는 전설의 고향 이야기가 지금도 전해오지만 사람 사는 세상이니 사람 나름으로 겪지 않았겠는가? 지금 조철봉에게는 미라가 나, 할거라고 소리치고 있는 것이다. 조철봉이 다시 굵고 강하게 철봉을 넣는 순간에 미라는 했다.
“아우우.”
얼굴이 시뻘겋게 변한 미라가 온몸을 굳히면서 조철봉의 몸에 빈틈없이 매달리는 것으로 절정을 표현했다. 샘 안에 잡힌 철봉이 수축 작용으로 압박되었고 그순간 수만개의 신경세포가 반응하는 것까지 느껴졌다.
섹스, 즉 성교는 인간이 향유할 수 있는 가장 강렬하면서 감동적인 기쁨이 될 것이다. 그것을 애써 부정하면 할수록 조물주로부터 주어진 인간의 본능을 무시하는 셈이 된다. 그렇다고 윤리나 도덕, 또는 법을 무시하고 본능만을 추구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 모든 규제를 지키면서도 성의 기쁨은 진정 경탄을 자아낼만 한 것이다. 또한 인간은 그것을 표현할 기술도 발전시켰으니 금상첨화라고 할 것이다.
몸과 마음이 일체가 되어서 성교를 진행시킬 때의 장면은 아름답기까지 하다. 자세나 움직임, 또는 그때의 거칠고 다급한 언어가 역겹게 느껴진다면 표현의 잘못일 것이고 그것이 아니라면 선입견에 문제가 있을지도 모른다. 성은 아름답다. 인간은 성을 즐기기 위하여 이땅에 태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짧은 인생, 77세의 수명이면 924개월이며 2만8105일의 인생을 살 뿐이다. 2만8000일, 자고나면 하루가 줄어든다는 것을 생각해 보시라. 그중 반이상을 사셨다면 1만4000일, 또는 7000일이 남은 인생도 있을 것이다.
이른 아침의 공원에 가면 대부분이 노인인 산책객을 본다. 하루를 더 오래 지내려고 일찍 나선 그들의 얼굴에 경륜이나 여유보다도 외로움과 허무함이 더 묻어나온다. 인생의 희로애락을 다 겪고나서 이제는 북망산에, 요단강 넘어 갈 날만 기다리는 노년(老年), 자식들 다 분가해서 떠나보내고 가끔 선심 쓰듯이 전화를 해주거나 가뭄에 콩나듯이 찾아와서는 후닥닥 되돌아가는 그놈들에게 왜 미련을 둔단 말인가? 내리사랑이라 다 제자식 챙기는 것이고 저들도 노년이 되면 똑같은 똥밟은 처지가 될테니 억울할 것도 없다. 그러나 인간사가 자꾸 변하는 것이니 정신을 바짝 차릴 필요는 있다.
10년전만 해도 누가 핸드폰으로 은행일을 보고, 음성 녹음을 남기며, 빚쟁이인지 애인인지를 먼저 알 수 있을지를 예상이나 했을 것 같은가? 따라서 인간 수명이 77세에서 97세, 또는 135세로 늘어나게 될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에 대비해야 되겠는가? 황우석 박사등 수명연장에 기여한 위대한 과학자들에게 인사하는 것은 당연하고 그 다음에 우리는 성생활에 대한 준비를 해야만 한다. 다시 반복해서 말하지만 성은 아름답다. 만족한 성을 즐기는 노년의 표정은 밝아지지 않겠는가? 성기능 촉진제가 공공연하게 시판되는 작금에 이르러 이제는 70, 80대에도 성을 즐길 여건이 갖춰졌으니 시대에 적응한다면 아침 공원의 분위기 또한 달라질 것이다.
“오빠.”
늘어져 있던 미라가 겨우 눈을 뜨고 조철봉을 불렀을 때는 그로부터 10분쯤이나 지난 후였다. 미라가 한없이 가라앉은 시선으로 조철봉을 보았다.
“나, 오빠 애인 맞지?”
“아, 그럼.”
얼른 대답은 했지만 조철봉의 표정이 조심스러워졌다. 조철봉이 엎드린채 미라의 옆모습을 보며 물었다.
“갑자기 그건 왜 물어?”
“그냥, 오빠가 너무 좋아서.”
“싱겁기는.”
“우리 셋이 오빠를 똑같이 애인 삼기로 했지만.”
말을 멈춘 미라가 몸을 돌려 조철봉의 가슴에 얼굴을 붙였다.
“오빠를 애들한테 내주기 싫어.”
“이런.”
혀를 찬 조철봉이 미라의 벌거벗은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내가 물건이냐? 이것들이 정말.”
“내가 갑자기 욕심이 생겨서 그래.” 미라가 가슴에 볼을 비비며 말했다.
다음날 아침, 회사에 출근한 조철봉에게 최갑중이 찾아왔다.
“형님, 어제 저녁에 핸드폰을 꺼놓고 계셨더군요.”
앞쪽 소파에 앉은 갑중이 조심스런 표정으로 조철봉을 보았다.
“어제 역삼동 김회장한테서 연락이 왔었습니다.”
그러자 조철봉이 시큰둥한 얼굴로 물었다.
“김회장이?”
“예, 언제 식사나 같이 하자고 하더군요. 그래서 형님한테 연락을 했더니.”
“어젯밤에 바빴다.”
한마디로 자른 조철봉이 정색하고 갑중을 보았다. 역삼동 김회장은 빌딩을 10여채나 소유하고 있는 부동산 재벌이다. 꽤 큰 건설회사도 하나 운영하고 있었는데 통이 커서 관리는 전문경영인에게 맡기고 본인은 골프나 치러 다닌다고 했다. 조철봉은 김회장의 회사인 유경건설과 합작으로 천안 교외에 대규모 쇼핑몰을 건설할 계획이었지만 아직 사주인 김지현은 만나지 못했다. 이쪽도 업무는 전문경영인인 홍학규가 맡아서 진행시켰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다 되었으니까 형님하고 김회장이 만나서 악수만 하시면 됩니다.”
갑중이 말하더니 흘끗 조철봉의 눈치를 살폈다.
“김회장이 미인이라고 하던데요.”
“너한테서 그 이야기를 세번째 듣는데.” 이맛살을 찌푸린 조철봉이 갑중을 노려보았다.
“내 행적을 네놈이 속속들이 꿰고 있을테니 내가 요즘 여자 등이나 쳐먹고 사는 입장이 아니라는 것은 잘 알겠지?”
“압니다.”
“그렇다면 무슨 의도냐?”
“사업적으로 만나시라는 것입니다. 양쪽 사주가 만나서 인사를 할때가.”
“안만나면 사업이 안돼? 다 끝났지 않어? 내가 인사 안해도 사업이 시작될거 아니냐?”
“그건 그렇습니다만.”
헛기침을 한 갑중이 자리를 고쳐앉더니 조철봉을 보았다.
“형님, 김회장의 재산은 2조가 넘는다고 합니다. 2조가 얼마만한 돈인지 아십니까?”
“계산 안했어. 서울에서 부산까지 만원권으로 깔아놓는다더냐?”
“2조면 20억불입니다.”
“그래서?”
“더 쉽게 말하면 1억짜리 아파트 2만채를 살수 있는 돈입니다.”
“…”
“천억 다음이 조거든요. 억, 십억, 백억, 천억, 조 이렇게 나갑니다.”
“이자식이 정말.”
짜증이 난 조철봉이 목소리를 높였다.
“인마, 용건을 말해.”
“김회장이 혼자 살고있지 않습니까?”
작심하듯 갑중이 불쑥 말을 뱉더니 조철봉을 똑바로 보았다.
“이제는 형님이 달라지신것 압니다. 사람은 신분이나 상황에 맞게 달라져야 한다는 형님 말씀을 저도 지당하다고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뭐냐?”
“아깝습니다.”
“뭐가?”
“김회장이 말입니다.”
“이런 미친놈.”
그러자 갑중이 열기를 띤 눈으로 조철봉을 보았다.
“나이 40대 초반의 이혼녀에다가 몸매 괜찮고 미인입니다. 거기에다 2조원의 갑부 아닙니까? 놈씨들이 꼬시려고 줄을 서있는데 천하의 조철봉이 기회가 왔는데도 모른척 하시다니요? 저는 이해가 안됩니다.”
“그래서?”
이제는 조철봉도 정색했다.
“가만두기 아깝다면 내가 그 여자한테 사기라도 치란 말이냐?”
조철봉이 손끝으로 갑중의 콧등을 겨누었다.
“인마, 내가 수없이 사기를 쳤지만 여자 등쳐 먹은 적 있어? 오히려 여자한테 홍콩 구경이나 시켜주었지 돈 사기 친 적이 있느냐 말이다.”
“김지현은 호빠 단골입니다.”
갑중이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으므로 조철봉도 긴장했다.
“호빠 단골이라고? 그럼, 너.”
“예, 뒷조사를 했지요.”
조철봉의 시선을 잡은 갑중이 말을 이었다.
“잠실의 청자라는 호빠인데 애들 수준이 일급입니다. 김지현은 그곳 단골인데 모두 한번으로 끝냈습니다. 그래서 거기 나오는 놈들 중 반반한 놈들은 다 따먹었다고 합니다.
“흥, 재미있게 사는군.”
“그렇다고 보십니까?”
정색한 갑중이 머리를 저었다.
“불행하게 사는 여자지요.”
“이 자식이 요즘 이상해졌군.”
조철봉이 눈을 가늘게 뜨고 갑중을 보면서 혀를 찼다.
“너, 정신병원에 가봐라. 남의 일에 그렇게 신경 쓰는 것도 병이다.”
“형님, 김지현은 남자가 필요합니다.”
“호빠에 많다면서?”
“애인 말입니다.”
“아이구.”
어깨를 늘어뜨린 조철봉이 길게 숨까지 뱉었다.
“야, 그만해라. 나는 요즘 한꺼번에 애인이 셋이나 생겼다.”
그러자 갑중이 퍼뜩 시선을 들었다가 말을 이었다.
“김지현의 죽은 남편 오경택은 강남 제일의 부동산 재벌이었지요. 오경택이 52세때 김지현은 32세의 미국 유학을 마친 경제학 박사로 대학 강사로 있다가 결혼했습니다. 오경택은 재혼이었고 김지현은 물론 초혼이었지요.”
조철봉이 눈만 끔벅였고 갑중의 말이 이어졌다.
“오경택은 김지현을 아꼈다고 합니다. 전처한테도 재산을 나눠 주었지만 남아있는 거의 모든 재산을 김지현의 앞으로 넘겨주었으니까요.”
“당연하지. 그럼 저승에 갖고 갈건가?”
“오경택이 죽은 지 올해로 5년이 되는데 김지현은 올해부터 방황하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작년의 행적은 깨끗하거든요.”
이제는 조철봉이 지친 듯 의자에 등을 붙인 채 딴곳을 보았다.
“그런데 김지현이 지난 5월에 2백억가량 사기를 당했습니다.”
갑중의 말에 조철봉의 시선에 초점이 잡혔다.
“사기를 당해?”
“예, 그것도 아주 간단한 방법으로.”
조철봉이 관심을 기울이자 갑중의 목소리에 활기가 생겼다.
“건설회사의 경리부장이 현금 2백억을 통장에서 빼내어서 외국으로 도망쳐버린 것이지요. 가족과 함께 도망쳤는데 미국에 있다는 것만 알고는 그냥 덮어 버렸습니다. 쉬쉬하고 경찰에 신고도 하지 않은 것이지요.”
“….”
“그러니 이놈 저놈이 돈을 사기쳐 먹으려고 날뛰지 않겠습니까? 지금 건설회사는 물론이고 부동산 관리업체도 복마전이 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형님한테 나서라고 말씀 드리는 겁니다.”
조철봉은 마치 처음만난 사람을 보는 것 같은 표정으로 갑중을 보았다. 그러고는 한참 동안이나 입을 열지 않았다. 예전의 조철봉이었다면 두말할 필요도 없이 행동으로 나섰을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달라졌다. 자동차회사 영업사원에서 시작했지만 이제 중국과 베트남에 30여개의 사업체를 거느린 오너가 되어 있는 것이다. 조철봉의 장점중 하나가 제 분수를 안다는 것이었는데 그것은 기업경영에도 응용했다. 각 사업장의 경영은 전문경영인에게 맡겨 권한과 책임을 함께 주었지만 평가는 엄격했다. 오너랍시고 모르는 일에 나서서 전문경영인들의 의욕을 꺾은적이 없다. 실적으로써 평가를 하면 되는 것이다. 그때 조철봉의 심중을 읽은듯이 갑중이 다시 입을 열었다.
“형님, 유경건설의 박사장이 수상합니다. 경리부장이 2백억을 횡령해서 도망간것도 박사장의 묵인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었거든요.”
“….”
“그런데 박사장은 끄덕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흘끗 조철봉의 눈치를 살핀 갑중이 말을 이었다.
“박문길은 김회장의 형부가 됩니다. 유경건설에 오기 전에는 화장품회사 영업부장을 했지요. 건설의 건자도 모르는 놈이었습니다.”
“….”
“그러던놈이 건설회사 사장이 되더니 대번에 여자한테 딴살림을 차려 주었더군요. 제가 다 조사를 했습니다.”
“아. 시끄럽다.”
눈을 치켜뜬 조철봉이 벽시계를 보더니 턱으로 문쪽을 가리켜 보였다. 나가라는 시늉이었다.
“다음에 이야기 하자. 지금은 바쁘다.”
“그럼 점심때 뵙지요.”
자리에서 일어선 갑중이 정색하고 말했다.
“박사장이 또 해먹으면 유경건설과 합작으로 추진중인 쇼핑몰 사업도 타격을 입게 됩니다. 다 회사를 위한 일이란 말씀입니다.”
“넌 죽을때까지 사기꾼 노릇을 할 놈이야.”
조철봉이 말하자 몸을 돌렸던 갑중이 머리만 비틀고는 빙긋 웃었다.
“저는 죽을때까지 형님 보조원이자 왼팔입니다.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갑중이 방을 나가자 조철봉은 먼저 심호흡부터 했다. 처음에는 거부감을 보였지만 점점 호기심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갑중도 알고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때 핸드폰이 울렸으므로 조철봉은 생각에서 깨어났다. 핸드폰을 귀에 붙이자 곧 정아의 목소리가 울렸다.
“오빠, 어젯밤에 잘 놀았어?”
“아, 정아구나.”
해놓고는 조철봉은 소리죽여 입맛을 다셨다. 정아는 미라를 만났을지도 모른다.
“놀기는 뭘. 그냥.”
“미라가 내 옆에 있어.”
그러고는 정아가 키득 웃었다.
“오빠가 끝내 줬다면서? 미라가 지금도 꿈속에 있는것 같대.”
“너희들 정말.”
눈을 크게 떴던 조철봉이 이번에는 소리죽여 숨을 뱉었다.
“인마, 장난하지 마.”
“우리는 진심이야. 오빠.”
“다리는 괜찮니? 그리고 어머니는.”
화제를 돌리자 정아의 목소리도 진지해졌다.
“응. 괜찮아. 어머니도 내일 수술하시기로 예약 되었어.”
그러더니 정아가 얌전하게 말했다.
“정말 고마워, 오빠.”
“어머니 간병이나 잘해.”
조철봉이 말하자 정아가 물었다.
“오빠, 오늘 시간 있어?”
“왜?”
“나하고 데이트하게.”
그러자 옆에서 키득거리며 웃는 소리가 들렸다. 한명의 웃음소리는 아니다. 온몸에 찬기운이 덮여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으므로 조철봉은 눈을 크게 떴다.
“너, 옆에 누구 있어?”
“응, 미라하고 수지.”
정아가 웃음띤 목소리로 대답했다.
“얘들도 오빠 보고싶대. 미라는 오빠한테 푹 빠졌고.”
“너.”
했다가 말을 멈춘 조철봉이 심호흡을 했다. 그러자 정아가 말을 이었다.
“오빠, 저녁때 만나. 내일부터는 내가 엄마 옆에 있어야 하기 때문에 오늘 저녁밖에 시간이 없어.”
“오늘은 내가 약속이 있어.”
마음을 정한 조철봉이 애써 부드럽게 말했다.
“급한 일이어서 오늘 저녁은 곤란해. 다음에 만나자.”
“그럼 오빠.”
정아가 조금 서두르는 분위기가 되었다.
“내일은 시간 있지?”
“내일?”
“그래, 내일은 내가 엄마옆에 있어야만 하니까 수지가 오빠하고 데이트하면 어때?”
“수지가.”
“그래. 수지야, 됐지?”
하고 뒷말은 옆에 있는 수지한테 물었다. 그러더니 말을 이었다.
“오빠, 수지가 내일 저녁에 만나겠대. 괜찮지?”
“이봐, 나는.”
“오빠는 우리 셋의 애인이야. 나, 질투안해. 걱정마.”
“정아야.”
정색한 조철봉이 목소리를 높이자 정아가 놀란듯 웃음기를 지우고 대답했다.
“응? 왜? 오빠 화났어?”
“그래, 화났다.”
“아니, 왜?”
“정아야, 나는.”
다시 말을 멈춘 조철봉이 침을 삼키고는 말을 이었다.
“난 네 애인으로 만족해. 그렇게 미라나 수지까지 함께 있기는 싫단 말이다.”
“왜?”
“왜는 왜야? 어떻게….”
“어젯밤 미라하고 잘 놀았잖아.”
“그것은.”
“오빠.”
정아의 목소리가 차분해졌다.
“오빠 맘 다 알아.”
“알긴 무슨.”
“오빠는 애인하자면서 왜 친구들까지 끼워 넣느냐고 하는거지?”
“그거야.”
“오빠.”
“왜 불러?”
“오빠는 참 순진해.”
“이런 제기.”
조철봉이 이맛살을 찌푸렸을 때 정아의 말이 이어졌다.
“오빠, 우리는 우리 분수를 잘 알아.”
“…”
“난 오빠를 정말 좋아하지만 보통 애인들처럼 그렇고 그렇게 지낼 수 없는 처지란 걸 잘 안단 말이야.”
“…”
“그렇게 되면 오빠한테 짐만 될 것이고.”
그러고는 정아가 짧게 웃었다.
“그래서 수지하고 미라를 끼워 넣은거야. 오빠, 서로 즐기고 행복해지면 되는거 아냐? 그게 애인 아냐?”
조철봉은 핸드폰을 귀에 붙인 채 앞쪽의 벽을 멍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맞는 말이다. 정아는 오히려 이쪽을 세심하게 배려해 주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처지를 알고 하는 행동이었다니. 갑자기 얼굴이 달아올랐으므로 조철봉은 심호흡을 했다.
“정아야, 내일 다시 연락하기로 하자.”
“그래, 오빠.”
선선하게 대답한 정아가 잊은 듯이 한마디했다.
“사랑해, 오빠.”
그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조철봉이 미처 뭐라고 대답을 하기도 전에 통화가 끊겼다. 핸드폰을 내려놓은 조철봉의 얼굴에 저절로 웃음이 피어났다. 사람은 예기치 못했던 선물을 받을 때 즐거워진다. 그것이 짧으면서도 지루한 생의 활력이 된다. 그날밤 조철봉은 파라다이스 호텔 로비에서 김지현을 만났다.
미리 최갑중이 약속을 만들어 놓은터라 8시 정각에 로비로 들어선 조철봉은 안쪽 테이블에 앉아있는 김지현을 보았다. 김지현과는 초면이었지만 로비에 손님은 한쌍의 젊은 남녀와 그녀 뿐이었기 때문이다. 조철봉이 다가갔을 때 김지현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김회장님이십니까?”
“네, 조사장님이시군요.”
김지현이 웃음 띤 얼굴로 조철봉을 보았다.
약간 마른 체격에 얼굴 윤곽은 섬세한 편이었는데 엷게 화장을 했고 속눈썹이나 액세서리를 붙이지 않았다. 입술에 살색립스틱을 발라 조금 윤기가 흐르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마주보고 앉았을 때 지현이 다시 웃었다.
“말씀은 들었지만 젊으시네요.”
“김회장님도 젊으십니다. 제 또래로 보이시는데요.”
“그건 칭찬이 아니에요, 실례예요.”
그러나 지현은 싫은 기색이 아니었다. 어쨌든 김지현의 나이는 44세였으니 조철봉보다는 7살 연상이다.
“그리고 미인이십니다.”
조철봉이 시선을 준 채로 정색하고 말했다. 어느덧 머릿속은 지현을 향해 집중되어 있었는데 조금 전에 누구한테 귀뺨을 맞은 일이 있어도 다 잊는다. 그것이 조철봉의 집중력이다. 지현이 뭐라고 대꾸도 하기 전에 조철봉의 말이 이어졌다.
“이런 미인이신 줄 알았다면 진즉 만나뵙는 것인데.”
“그만요.”
이맛살을 조금 찌푸려보인 지현이 조철봉의 말을 막더니 다가온 종업원에게 차를 시켰다. 종업원이 사라졌을 때 지현이 정색하고 말했다.
“저도 진즉 인사를 드렸어야 했는데 바쁜 일 때문에 늦었습니다.”
“그건 저도 마찬가지올시다. 회사 일은 모두 홍사장한테 일임해 놓아서요.”
“어쨌든 대단하세요.”
지현이 감탄한 표정으로 말했다.
“젊은 나이에 그렇게 사업을 일으켜 놓으시다니요. 저는 부동산으로 불어난 것 외에는 제 손으로 성장시킨 사업이 없습니다.”
솔직한 표현이었으므로 조철봉의 표정도 진지해졌다. 지현의 말이 이어졌다.
“사장님에 대해서 듣고는 전부터 만나뵙고 싶었는데 정말 반갑습니다.
“제가 오히려 영광입니다.”
솔직히 조철봉은 별 기대도 없이 나왔다가 횡재를 한 기분이었다. 지현과 함께 마주보고 앉은 지 10분도 안되었지만 벌써 조철봉의 가슴은 욕망으로 가득 메워져있었다. 나이 차이 따위가 조철봉에게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미성년자만 아니면 된다. 어느덧 모든 것을 다 잊고 조철봉은 지현에게 말했다.
“오늘은 만난 기념으로 제가 모시지요. 좋은 곳으로 안내하겠습니다.”
그러자 지현이 분위기에 이끌린 듯 얼굴을 펴고 웃었다.
“좋은 곳이라뇨? 분위기 좋은 곳 말씀인가요?”
그때까지 조철봉은 아직 어디로 갈 것인지 결정하지 않았지만 지현의 말을 듣고 나서 마음을 굳혔다.
“예, 그런 곳이 있지요.”
조철봉이 정색하고 지현을 보았다.
“지금까지 우리 만남이 너무 늦었던 것을 금방 만회해줄 수 있는 곳입니다.”
“그런 곳이 있어요?”
“긴장을 풀면 그렇게 됩니다.”
“얼른 가보고 싶네요.”
지현이 호기심이 일어난 듯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검은 눈동자가 반짝였고 아직도 얼굴에는 웃음기가 감돌고 있다. 호텔 이층의 일식당에서 저녁을 먹는 동안 그들은 사업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결정할 사항도 없는 터라 분위기는 밝았다. 지현은 술도 사양하지 않았는데 소주를 시켜서 둘이 각각 한병쯤을 마시고 저녁을 마쳤다. 일식당을 나왔을 때는 9시반쯤이었다. 호텔 현관 앞에 섰을 때 조철봉이 지현에게 물었다.
“자, 그럼 그곳에 갈까요?”
“가요.”
지현이 머리를 끄덕이며 웃었다.
“가서 한잔 더 마셔요.”
차가 앞에 멈추었으므로 조철봉은 지현을 먼저 태우고 운전사에게 말했다.
“서울클럽으로 가자.”
그러자 지현이 머리를 돌려 조철봉을 보았다. 어떤 곳이냐고 묻는 표정 같았지만 조철봉은 시치미를 떼고 입을 열지 않았다. 서울클럽은 이른바 물이 좋은 나이트클럽이다. 나이트카바레라고 불러야 현실에 맞는 표현이 되겠는데 손님은 30, 40대로 백발백중 작업이 성사된다고 명성을 떨치는 곳이었다. 작업이 성사되려면 어느 한쪽의 정성만 가지고는 안된다. 삼위일체, 또는 네가지 조건이 다 맞아야 한다. 우선 남녀의 기호가 맞아야하며, 웨이터의 노력이 따라야 하고, 클럽의 분위기가 뒷받침해야 까탈스러운 손님들이 짝을 이루는 것이다. 클럽 앞에 도착했을 때 지현이 눈을 둥그렇게 떴지만 아무 말 하지 않고 차에서 내렸다. 현관으로 들어서자 웨이터가 은근한 시선을 주면서 지명 웨이터가 있느냐고 물었다.
“15번.”
“아, 예, 15번 김도성.”
조철봉이 지현과 함께 아래층 계단을 내려갔을 때 15번 웨이터 김도성이 기다리고 있었다. 15번은 잠자코 머리를 숙여 보이더니 그들을 구석쪽 소파로 안내했다. 칸막이의 한쪽만 플로어를 향해 개방된 자리였다.
“이런 곳은 말만 들었는데.”
자리에 앉았을 때 지현이 주위를 둘러보며 혼잣소리처럼 말했다.
“지난번에 언론에도 보도되었죠? 여자들이 젊은 남자들을 돈주고 파트너로 시중들게 했다고.”
“그런 곳은 아닙니다.”
조철봉이 정색하고 말했지만 만일 15번 웨이터한테 그런 주문을 한다면 15분 안에 코큰 대학생을 대령할 것이었다. 홀안은 이미 남녀가 가득차 있었고 블루스 곡이 흐르는 플로어에는 10여쌍의 남녀가 부둥켜안고 있었다. 주문을 받은 15번이 돌아갔을 때 조철봉이 웃음띤 얼굴로 지현을 불렀다.
“누님.”
지현이 놀란 듯 눈을 크게 떴을 때 조철봉이 부드럽게 물었다.
“누님이라고 불러도 되겠지요?”
그러자 지현도 곧 얼굴을 펴고 웃었다.
“좋아요. 어쨌든 내가 나이 많은 건 사실이니까.”
“고맙습니다. 누님.”
“이런 곳은 처음 와봐요.”
다시 주위를 둘러보며 지현이 말했다.
“조사장님은 자주 오시는 모양이죠?”
“가끔 들릅니다. 누님”
종업원이 다가와 테이블에 술과 안주를 내려놓았으므로 그들은 말을 멈췄다. 카바레는 조철봉의 건넌방이나 같은 곳이다. 삶에 부대껴 심신이 무기력해졌을 때 카바레에 들르면 청량제로 목욕을 한 것처럼 정신이 난다. 존재의 목적을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조철봉에게 존재의 목적이란 바로 성(性)의 확인이었으니까. 성적 자극과 즐거움을 동반하지 않는 인생은 차라리 존재하지 않는 것이 낫다고 생각해온 조철봉이다. 조철봉이 지현의 잔에 술을 따르면서 은근하게 웃었다.
“누님, 저기 플로어를 보시지요.”
턱으로 플로어를 가리킨 조철봉이 말을 이었다.
“껴안고 있는 남녀 말입니다. 행복하게 보이지 않습니까?”
“아뇨, 나는 전혀.”
그쪽에 시선을 준 채 지현이 천천히 머리를 저었다.
“어색하게 보이는데요.”
“선입견 때문이죠. 누님은 저들을 불륜의 남녀로만 생각하고 계시는 겁니다.”
지현이 그럼 뭐냐고 묻는 듯한 시선을 주었으므로 조철봉이 말을 이었다.
“이곳에서는 저런 분위기가 더 자연스럽지요. 시치미를 떼고 좋아도 싫은 척하는 사람은 곧 도태가 됩니다.”
“그런가요?”
그러자 한모금에 양주를 삼킨 조철봉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누님, 한곡 추실까요?”
마침 블루스 음악이 시작되고 있었다.
“아니, 저는.”
지현이 사양했지만 제스처가 강하지는 않았다.
“나가시죠.”
조철봉이 손을 내밀자 지현은 마지못한 듯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플로어로 나간 조철봉이 지현의 허리를 부드럽게 감아 안고는 두어발짝 리드해 보았다. 그러자 지현이 능숙하게 따라왔다.
“누님, 잘 추시는데요.”
허리를 당겨 안은 조철봉이 지현의 귀에 대고 말했다.
“부드럽습니다.”
“오랜만이라.”
조금 허리를 비트는 시늉을 하면서 지현이 수줍게 말했다. 조철봉은 지현이 사교춤을 정식으로 익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외국 유학까지 다녀온 지현인 것이다. 조철봉의 리드에 따르던 지현이 머리를 들고 말했다.
“조사장님도 잘 추시는군요.”
“리듬에 맞출 뿐이지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10년 가깝게 공을 들인 솜씨인 것이다. 카바레에서 놀려면 스텝만 익혀서는 안된다. 몸 전체로 움직여야 된다. 조철봉은 하반신에 부딪치는 지현의 몸이 차츰 거북하게 움직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몸을 비트는 순간에 주춤거리거나 아예 엉덩이를 슬며시 뒤로 빼는 것이다. 그것은 조철봉의 몸에 부담을 느끼고 있다는 표시로서 반응이 간다는 증거도 되었다. 조철봉이 머리를 숙이고는 지현의 귀에 대고 말했다.
“누님, 불편하십니까?”
“아뇨, 됐어요.”
지현이 금방 대답했다. 거북하긴 하지만 자극을 버리기에는 아까운 것이다.
/글 이원호
조철봉의 가슴은 기대와 흥분으로 뛰었다. 지현을 만나기 전에는 이렇게 될 줄은 전혀 예상하지도 못했던 조철봉이다. 지현을 이끌고 구석 쪽 기둥 옆으로 옮아갔을 때 조철봉의 온몸은 뜨거워져 있었다. 섹스에 대한 열망이 끓어오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본인 혼자의 열정만 가지고 어찌 일이 되겠는가? 상대가 호흡을 맞춰줘야 하는 것이다.
“누님.”
이제는 몸을 좌우로 가볍게 흔들기만 했는데도 조철봉은 지현의 몸이 그때마다 정면으로 부딪쳐 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어느덧 지현도 반응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지현이 시선을 들었을 때 조철봉이 귀에 대고 속삭였다.
“어때요? 즐겁지 않습니까?”
“그래요.”
지현이 머리를 끄덕이더니 상반신을 조금 붙여왔다.
“좋아요.”
그러자 조철봉이 하반신을 지현에게 밀었다. 그때는 철봉이 바지를 찢을 듯이 팽창되어 있어서 조철봉은 아직까지 정면으로 부딪치지 않았다. 옆으로 비틀 적에 뭔가 딱딱한 감촉만 느끼게 해주었을 뿐이다.
“아.”
단단한 철봉이 다리 사이를 깊숙이 찌른 순간이었다. 지현이 입을 딱 벌리더니 엉덩이를 뒤로 뺐는데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그러자 조철봉이 지현의 허리를 강하게 당겨 안았다. 그순간 다시 철봉이 지현의 스커트를 관통하듯이 밀고 들어가 샘 안까지 찌르고는 튕겨났다.
“어머.”
이번에는 지현이 놀란 듯한 비명을 지르더니 머리를 들었다. 이쪽은 조명이 들어오지 않아서 어두웠지만 크게 뜬 눈동자가 또렷하게 드러났다.
“조사장님.”
“누님.”
지현의 말을 막을 듯이 조철봉이 말했다.
“이야기는 그만.”
그러고는 다시 철봉을 내밀자 지현이 몸을 비틀었다.
“누님.”
조철봉이 이제는 지현을 기둥 쪽에다 대고 밀었다. 지현의 등이 기둥에 붙여진 순간 조철봉은 더 바짝 다가섰다. 이제 지현은 뒤로 물러설 수 없게 되었다.
“조사장님.”
지현이 가쁜 숨을 뱉으며 말했을 때 조철봉은 다시 철봉을 내밀었다.
이번에는 등을 기둥에 붙인 자세여서 철봉이 더 정확하게 지현의 다리 사이를 자극했다. 지현은 다리를 딱 붙이고 있었지만 피할 수는 없었다. 조철봉은 입술을 지현의 귀에 붙였다.
“누님도 지금 달아오르고 있어요.”
조철봉이 뜨거운 숨을 지현의 귀에 내뿜으며 말하고는 곧 입술로 귓불을 물었다.
“아아아.”
다시 철봉을 내지르면서 이번에는 좌우로 흔들자 지현의 입에서 탄성이 뱉어졌다. 조철봉은 소신대로 철봉을 힘껏 밀었다. 조철봉은 이제 지현의 허리를 두팔로 감아 안았다. 벽에 등을 붙이고 선 지현은 갇힌 자세가 되었지만 다른 면으로 보면 안정적이고 편안한 모습이 되었다. 지현이 가쁨 숨을 내쉬었다. 이미 몸이 성적 갈망으로 타오르는 중이었고 이성은 마비되어 가는 중이다.
블루스 음악이 끝나더니 빠른 디스코 음악이 울리면서 주위가 밝아졌다.
“누님, 나가지.”
정신을 차린 지현이 옷을 추스리고는 발을 떼다가 휘청하면서 하마터면 앞으로 고꾸라질 뻔했다. 다리에 힘이 풀려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방으로 옮길까?”
그러자 조철봉이 지현을 부축하면서 점잖게 물었다. 자리로 돌아왔을 때 지현이 양주잔을 들더니 한모금에 삼켰다. 그러고는 조철봉에게 말했다.
“우리 그만 가요.”
시선을 내린 채 지현이 정색하고 말을 이었다.
“너무 피곤해요, 어서요.”
그러자 조철봉이 웃음띤 얼굴로 지현을 보았다.
“30분만, 누님. 웨이터한테 조용한 방으로 옮기라고 할테니까요.”
그때 웨이터가 다가왔으므로 조철봉이 자리를 방으로 옮기라고 지시했다. 웨이터가 서두르며 사라지자 지현이 불안한 듯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더이상 입을 열지는 않았다. 룸으로 옮기면 당연히 룸 사용비와 노래방 비용까지 추가되며 기본으로 양주 한병을 시켜야 된다. 거기에다 룸 전용 웨이터가 들락거리면서 물수건 등 잔심부름을 해준답시고 팁이 또 붙는다. 다 그렇게 해서 나이트에 딸린 수백명의 식구가 먹고 사는 것이다. 웨이터가 득달같이 다시 달려와 룸 준비가 되었다고 보고를 했으므로 조철봉은 지현을 부축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현이 아직 노곤한 상황에서 깨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웨이터도 신바람이 났다. 왜냐하면 추가 매상이 대번에 육칠십만원 정도가 증가될 것이며 그렇게 되면 매상의 30%를 먹게 되니 조철봉한테서만 챙기는 소득이 사오십만원이 된다. 이층의 조용한 방으로 옮겼을 때 웨이터와 보조, 룸의 웨이터까지 합심하여 1분도 되지 않아서 술자리는 그대로 옮겨졌다. 조철봉이 피우다 놔둔 담배까지 술잔의 오른쪽에 그대로 놓여져 있되 재떨이는 새것인 것이다. 다시 둘이 되었을 때 지현이 정신이 든 것처럼 방안을 둘러보는 시늉을 했다.
“조용하네.”
지현이 혼잣소리처럼 말했다. 그리고 밝다. 소음방지 시설이 잘되어 있어서 밴드의 진동만 희미하게 느껴질 뿐 방안에서는 숨소리까지 들렸다.
“누님. 자, 한잔.”
조철봉이 지현의 잔에 양주를 채우고는 잔을 들었다. 그러자 지현이 따라서 잔을 들었지만 아직도 시선을 마주치지는 않았다.
“내가 보기엔 누님은 요즘 외로우셨던 것 같아.”
한모금 술을 삼킨 조철봉이 불쑥 말하자 지현이 머리를 들었다. 그러나 입을 열지는 않는다.
“그렇지 않아요?”
조철봉이 웃음띤 얼굴로 묻자 지현의 시선이 방으로 옮기고나서 처음으로 마주쳐졌다.
“조사장은 프로야.”
지현이 내뱉듯이 말했지만 화난 표정은 아니었다.
“정말 이럴줄 예상도 못했어.”
“나도 처음에는 이럴 생각이 아니었지.”
조철봉도 다시 반말을 썼다.
“누님을 보고나서 발동이 걸린거야. 그만큼 누님은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어.”
“정말 내가 그렇게 보여?”
정색한 지현이 묻자 조철봉은 웃음띤 얼굴로 대답했다.
“플로어에서 안았을 때 금방 느낄 수가 있었어.”
“어떻게?”
“처음에 굳어졌던 몸이 금방 풀리더군. 억제하려고 애썼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지. 그렇지?”
“말 지어내지 마.”
“내 철봉이 스치고 지날 때마다 몸을 꿈틀대면서 피하려고 했지만 금방 갈증이 난 것처럼 다음에 부딪쳐올 철봉을 기다렸지.”
“기가 막혀.”
지현이 눈을 흘기더니 한모금 양주를 삼켰다.
“근데 철봉이 뭐야? 철봉이.”
“내 이름이지. 조철봉. 그것이 철봉같이 되라고 아버님이 지어주신거야.”
“어머머.”
“그래서 이름값을 하느라고 철봉 하나는 믿을 만하지.”
“기가 막혀.”
이제는 지현이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조금씩 방의 분위기에 익숙해지면서 긴장이 풀리고 있는 것이다. 분위기 조성에 어떤 대사가 적당하겠는가? 영화나 소설을 볼작시면 명곡을 배경으로 깔고, 서로의 시선이 부딪친 후에 천천히, 또는 리듬에 맞춰 작업을 시작하지만 어디 현실이 그런가? 만난을 무릅쓰고 스스로가 개척해 나아가야만 할 것이다.
따라서 조철봉이 지금 철봉 운운하면서 난데없이 돌아가신 아버님까지 끌어들인 것도 나름대로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서였다.
지현이 조철봉보다 월등한 지적 수준을 갖추고 있겠지만 욕정에는 국경도, 남녀도, 나이도, 학력도 불문이지 않은가? 조철봉의 입장에서 보면 그런 지현을 자빠뜨리는 작업이야말로 성취감을 얻게 될 기회일 터였다. 조철봉이 은근한 시선으로 테이블 건너편에 앉은 지현을 보았다.
“누님. 아까는 나도 하고 싶어서 혼났어.”
“또, 또.”
지현이 질색하는 시늉을 하더니 눈까지 흘겼지만 조철봉은 정색했다. 그때 자리에서 일어선 조철봉이 테이블을 돌아 지현의 옆으로 다가가 앉았다.
“어머.”
지현이 놀란 척 엉덩이를 비척여 한뼘 쯤 옆으로 물러나는 시늉을 했다.
“정말 이러면 나, 갈거야.”
“가기 전에 이것이나 보고 가.” 하면서 조철봉이 앉은 채로 바지 지퍼를 내리더니 철봉을 불쑥 꺼냈다. 그때 지현은 조철봉이 무슨 짓을 하는지 눈만 껌벅이다가 시선을 아래쪽으로 내렸다.
“아앗.”
지현의 입에서 터져나온 외침소리가 그랬다. 눈을 딱 부릅뜬 지현이 테이블 위까지 솟아오른 철봉에 시선이 고정된 것처럼 한동안 떼지 못했다. 입도 딱 벌리고 있다.
“어머머.”
그 다음에 뱉은 이 소리는 마치 탄성 같았다. 그때 조철봉이 지현의 팔을 움켜쥐고는 철봉에 끌어 붙였다.
“어머낫”
철봉이 불방망이나 되는 것처럼 손에 닿는 순간 질색을 한 지현이 손을 떼었는데 그때는 얼굴이 새빨개졌다.
“왜, 왜이래. 정말.”
지현이 새빨개진 얼굴로 조철봉을 보았는데 육감적이었다. 고혹적이라는 표현을 붙여도 맞을 것이다. 또 다른 객관적인 시선으로 보면 황당한 표정도 될 것이다. 룸 안의 장면을 그대로 묘사한다면 이렇다. 사각의 방 위쪽에 노래방 기기가 있고 그 왼쪽의 작은 문은 화장실이다. 그리고 방문은 오른쪽에 나 있었지만 굳게 닫혀 있다. 열쇠는 채우지 않았어도 15번 웨이터 김도성의 보조가 청와대의 경호원처럼 문 앞을 굳게 지키고 있을 것이었다. 따라서 방 안에서 불만 나지 않는다면 밖에서 안으로 들어올 사람은 없다. 그렇다면 내부 장면을 더 묘사하도록 한다. 사각 테이블에다 벽에 붙여진 식으로 ㄷ자(字)형 소파가 놓여 있는데 조철봉과 김지현은 왼쪽 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그리고 조철봉은 붉은 소시지같은 철봉 끝자락을 쥐고는 김지현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그런데 턱을 조금 내밀고 눈을 가늘게 뜬 자세가 마치 번트를 대려는 1사(死)주자 3루의 4번타자 같았다.
“그거 치워, 정말.”
다시 말을 꺼낸 주인공은 지현이었다. 그것은 지현이 다급해져 있다는 표시도 되었다. 궁지로 몰린 표정까지 짓고 있었지만 이런 궁지는 백만번도 더 겪고 싶은 사람도 있다. 그러자 조철봉이 철봉의 뿌리를 쥐더니 정말로 야구 배트처럼 흔들었다.
“누님, 이놈이 집을 찾아 가고 싶대.”
“그러지말고 한번 만져줘.”
남이 귀만 내밀고 들으면 그냥 평범한 대사로 넘기겠지만 실제 장면을 두눈으로 보면 심장이나 비위가 약한 사람은 배겨나기 힘들 수도 있다. 그러나 둘은 진지했다. 조철봉은 아직도 철봉 뿌리를 쥐고 흔들었으며 지현은 만져줄까 말까 하고 진지한 표정으로 망설였다.
“어서, 누님.”
조철봉이 다시 철봉을 흔들자 지현의 마음이 흔들렸다. 이것이 아담이 사과를 받아 먹었을 때의 심정일 것이다. 지현이 주춤대며 손을 내밀었을 때였다. 조철봉이 지현의 손을 잡아 철봉의 중심 부분에 붙였다.
“누님, 쥐어.”
“아이.”
“어서 쥐라니까?”
조철봉이 정색하고 독촉하자 지현이 철봉을 쥐었다.
“어머머.”
이 비명같은 외침은 지현이 철봉을 쥐는 순간에 조철봉이 힘을 썼기 때문에 일어났다. 힘을 쓰자 철봉이 저절로 요동을 쳤기 때문이다.
“거봐. 기뻐서 그러는거야.”
“됐지?”
하면서 지현이 손을 떼려고 했다가 조철봉이 손을 감싸쥐는 바람에 못이긴 척 가만있었다.
“어때? 누님, 기분이.”
“이제 떼도 돼?”
그렇게 묻는 지현의 눈 주위가 벌겋게 달아오르고 있는 것을 조철봉은 놓치지 않았다.
“누님, 철봉을 밑에서부터 쓸어봐.”
조철봉이 부드럽게 말하자 지현이 홀린 것처럼 그대로 했다. 어느새 조철봉의 손이 떼어졌어도 지현의 손은 철봉에 붙어 있었다. 조철봉이 팔을 뻗어 지현의 어깨를 당겨 안았다.
“누님, 나도 만져줄까?”
그러자 지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지금까지의 행태로 보면 안돼, 싫어가 나와야 정상인데 가만 있는다는 것은, 어서, 빨리, 라는 의미나 같지 않겠는가? 조철봉이 지현의 어깨를 당겨 안았다. 그때도 지현은 성실하게 철봉을 쓰다듬고 있는 중이었다.
“나도 만져줄게.”
조철봉이 이번에는 일방적으로 통고하고는 지현의 다리 한쪽을 들어 자신의 무릎위에 올려놓았다. 그러자 지현의 하반신은 시옷(ㅅ)자 모양이 되어서 조철봉의 무릎 위에서 벌려졌다.
“아이.”
하고 지현이 몸을 비트는 시늉을 했지만 이것은 오히려 자세를 안정감있게 갖추려는 몸짓이었다. 조철봉은 이제 거침없이 지현의 검정 팬티를 끌어내렸다. 다리를 벌리고 있는 바람에 팬티가 늘어났다가 지현이 기술적으로 다리를 오므린 순간에 벗겨져 내려갔다. 팬티가 벗겨지자 지현은 다시 시옷자 자세를 취했는데 자신이 의식하고 있었다면 그렇게 했겠는가? 이제는 몸이 움직이는대로 따라갈 뿐이다. 이성은 마비되었다. 지현은 아직도 조철봉의 철봉을 쓰다듬고 있었는데 이제는 손을 떼면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동아줄마냥 쥐고 놓지 않았다. 팬티를 벗길때 그 어려운 자세에서도 끝까지 팔을 뻗쳐 철봉에서 손을 떼지 않은 것이다. 조철봉은 지현의 스커트를 걷어 올리고는 눈 앞에 펼쳐진 몸을 보았다. 무릎위에 지현의 하반신이 비스듬히 눕혀져 있어서 아랫배와 숲, 그리고 샘까지 환하게 드러났으므로 조철봉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누님, 아름다워.”
조철봉이 헛소리처럼 말하고는 지현의 아랫배에서부터 손바닥으로 천천히 애무했다.
“아아.”
지현이 하반신을 비틀면서 신음했다. 그러자 샘까지 움직였으며 눅눅한 습기까지 환하게 보였다. 조철봉은 신음했다. 색다른 경험이었던 것이다. 지현의 샘은 아름다웠다. 아담한 골짜기에 감춰진 샘은 선홍빛이었으며 지붕도 잘 덮여졌다. 조철봉의 손끝이 골짜기로 내려왔을때 지현이 몸을 붙이더니 철봉을 힘껏 쥐었다. 이미 호흡은 가팔라져 있었다.
“나, 해줘, 어서.”
지현이 헐떡이며 말했다. 반쯤 눈을 감은 지현이 다시 상반신을 비틀면서 철봉을 당겼으므로 조철봉은 신음했다. 이번에는 고통의 신음이다.
“이것 놔.”
조철봉이 지현의 팔을 쥐어 겨우 철봉에서 손을 떼어 내었다. 그러자 이제는 지현의 몸이 안정적으로 조철봉의 무릎위에 놓여졌다.
“해줘.”
지현이 이제는 조철봉의 무릎위에 하반신 전체를 올려놓더니 쪼그리고 앉는 시늉을 했다. 눈의 초점이 풀려있는데다 숨소리가 더 높아졌다.
“어서.”
조철봉은 더이상 시간을 끌면 역효과가 나리라는 것을 알수 있었다. 전희가 길다고 다 좋은것이 아니다. 무조건 길게 빼다가 귀쌈을 맞은 실존인물도 있는 것이다.
“누님, 내가 위에서.”
조철봉이 지현의 허리를 쥐면서 부드럽게 말했다.
“여기에 누워봐, 누님.”
그러고는 지현의 몸을 옆쪽 소파에 눕혔다. 지현이 말 잘듣는 학생처럼 얌전하게 소파에 누웠는데 폭이 좁아서 한쪽 다리는 아래로 내려졌다. 조철봉이 바지를 벗고 자세를 취했다.
조철봉은 눈을 감은 채 기다리는 지현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얼굴은 이미 붉게 상기되었으며 숨소리는 거칠었다. 인생에서 수많은 사연을 겪지만 이때보다 더 아끼고 기억하고 싶은 순간이 있을 것인가? 조철봉은 철봉 끝을 지현의 샘끝에 대었다.
“아.”
그저 끝에 대기만 했는데도 지현이 흠칫 몸을 떨더니 허리를 들어올리는 시늉을 했다. 조철봉은 다시 철봉 끝으로 지현의 골짜기 주위를 세번 문질렀다. 그러자 지현이 와락 조철봉의 목을 두팔로 당겨 안더니 신음처럼 말했다.
“자기야, 빨리.”
철봉 끝은 이미 샘에서 흘러나온 샘물에 젖어 있었으며 지현의 하반신은 요동을 쳤다. 그때 심호흡을 한 조철봉이 천천히 철봉을 진입시켰다.
“아으.”
지현의 입에서 마치 목을 조이는 것 같은 신음이 터져나온 순간이었다. 조철봉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샘 안으로 반쯤 진입했던 철봉이 더이상 나아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지현의 샘이 갑자기 위축되었기 때문인데 바로 이런 현상에서 복상사가 발생하는 것이다.
“아, 아, 아.”
지현의 입에서 계속해서 신음이 터져나오더니 샘은 더 위축되었다. 이제 지현은 눈을 치켜뜨고 있었는데 온몸이 한치의 빈틈도 없이 조철봉의 몸에 매달려 있다. 조철봉은 머리끝으로 피가 솟구쳐 오는 것을 느낄수가 있었다. 그리고 심장의 박동도 피부를 뚫고 나올 만큼 거칠어졌다.
“아, 아, 아.”
그러나 지현의 입에서 울리는 단발마의 비명같은 신음은 더 높아졌으며 몸에 엉킨 사지의 힘은 더 강해졌다. 조철봉은 다시 심호흡을 했다. 지금 철봉은 무섭게 흥분되어 있어서 지현이 조금만 몸을 꿈틀대도 대포를 발사할 것 같았다. 단 한번, 아니, 단 한번의 절반 정도만 들어간 상황에서 이렇게 굳어져 버린 것은 조철봉의 인생에서 처음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인생은 날마다 새롭다고 하지 않는가?
조철봉은 눈을 부릅뜨고 지현을 내려다보았다. 지현의 눈에는 초점이 없는데다 이미 열락의 문턱에 닿아 있어서 의식이 거의 나간 상태였다. 이렇게 끝내서는 안된다. 조철봉의 머릿속에 그런 단어가 떠올랐다. 필사적인 심정이 되어 있었으므로 이마에는 벌써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어, 어, 어.”
지현의 입에서 더 격한 신음이 울리더니 조이는 힘은 더 강해졌다. 그러자 그야말로 지독한 쾌감이 철봉을 통해 머릿속으로 전해지면서 조철봉도 거친 탄성을 뱉어내었다. 억제하지 못한 것이다.
“아아앗”
그때 지현이 하반신을 조금 흔들었으므로 조철봉은 철봉이 미끄러져 들어가는 느낌을 받고는 입을 쩍 벌렸다. 그 쾌감은 조금 전보다 더 강했던 것이다.
“으으윽”
그순간 조철봉은 필사적인 자세로 몸을 굳혔다. 하마터면 대포가 발사될 뻔했던 것이다. 발사를 참으려고 중생을 이롭게 하는 지장보살의 진언을 무의식 중에 외웠지만, 제대로 외웠는지는 알 수 없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애국가를 중얼거렸다가 조철봉은 다시 필사적으로 소리내어 말했다.
“백두와 금강과 태백과 지리.”
이것은 고등학교 교가 첫 소절이다.
그때였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이 맞았는지 철봉을 조이던 힘이 잠깐 풀렸으므로 조철봉은 숨을 멈췄다. 그러나 그것은 함정이었다. 압력이 풀려 한숨을 내쉰 바로 그 다음 순간에 조철봉은 머리끝이 곤두서는 느낌을 받았다. 충격으로 머리끝이 선 것이다. 그것은 그때서야 철봉 주위의 수만개 신경세포가 샘의 벽과 교감하면서 그 쾌감을 뇌에 전달해주었기 때문이다. 조철봉의 이마에서 땀방울이 주르르 흘러 떨어졌다. 압력이 강했을 때는 신경세포가 자극을 전달해주지 못했다가 잠깐 느슨해진 순간에 쾌감이 전달된 것이다.
“으으윽.”
다시 신음 같은 탄성을 뱉은 조철봉은 이를 악물었다. 그때 지현은 눈을 부릅뜬 채 숨을 몰아쉬고 있었는데 이제 절정에 닿을 것같은 분위기였다. 숨 한번 내쉴 때마다 신음이 뱉어졌고 얼굴은 땀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억만년 짙푸른 산둘레같이.”
다시 교가 이절을 외치다시피 말한 조철봉이 철봉을 힘껏 내지른 것은 바로 그 다음 순간이었다. 불은 불로 끈다는 말이 있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렇다. 유전의 화재는 더 큰 폭발을 일으켜 진압하는 방법도 있는 것이다.
“악”
지현이 단말마의 외침같은 신음을 뱉으면서 조철봉의 목을 다시 고쳐 쥐었지만 이미 늦었다. 깊숙하게 끝까지 진입했던 철봉이 다시 빠져나오면서 지현은 온몸이 자지러지는 듯한 신음을 뱉었는데 그것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는 단어였다. 사람의 음성 같지가 않다고 하면 이해하기가 더 쉬울 것이다. 잠깐 늦춰졌던 샘이 다시 와락 좁혀졌지만 이미 철봉은 한번 순환을 한 후였다. 그리고 그 느슨해졌을 때의 촉감을 그대로 만끽한 지현의 쾌감은 최고조에 도달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좁혀졌던 샘이 다시 느슨해졌을 때 철봉이 다시 한번 왕복을 했고 지현은 그때 절정에 올랐다. 방음장치가 되어 있었으니까 망정이지 그러지 않았다면 홀에 있던 모든 사람이 이쪽을 주목했을 만큼 격렬한 신음을 뱉더니 지현은 몸을 굳힌 채 떨었다. 조철봉은 지현의 몸위에 엎드린 자세를 그대로 유지한 채 절정의 여운까지 가셔지기를 기다렸다. 여운의 끝이 사라졌다고 느꼈을 때는 거의 10분이나 더 지난 후였다.
“누님, 뺄까?”
조철봉이 아직도 철봉으로 남아있는 철봉을 조금 흔들며 묻자 지현이 꺼져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응, 나 죽겠어.”
“죽으면 안돼.”
철봉을 천천히 뜨거운 샘 안에서 빼내면서 조철봉이 말했다.
“난 아직 하지도 않았어, 누님.”
“정말이야?”
그때서야 눈의 초점을 잡은 지현이 시선이 마주친 순간에 두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아이, 창피해.”
“누님같은 여자는 처음이야.”
조철봉이 지현의 스커트를 내려주면서 말했다.
“아주 좋았다는 말이야, 누님.”
“나도 오늘 같은 날은 첨이야.”
지현이 힘들게 상반신을 세우더니 머리를 소파에 기대고 다시 늘어졌다.
“나, 기운이 하나도 없어. 정말 죽는줄 알았어.”
“그나저나 난 어떻게 하지? 아직 내문제는 해결하지 않았는데.”
고등학교 교가까지 불러젖히면서 참았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고 이렇게 딴소리를 하는 것이 잡놈의 습성이다.
“어떻게 해? 더 하면 나 진짜 죽을 것 같은데.” 하면서 지현이 울상을 지었으므로 조철봉은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죽을 수는 없지. 하지만.”
차분한 표정이 된 조철봉이 지현에게 물었다.
“누님, 그거 말이야.”
“응? 뭔데?”
“누님 그거.”
“그거가 뭐냐고?”했다가 지현이 눈을 흘겼다.
“왜?”
“누님 그건 본래부터 그런거야?”
“무슨 말이야?”
“들어갈 때마다 그렇게 조이냐고.”
“난 그런 일 처음이라니까.”
정색한 지현이 조철봉을 보았다. 이제 머리를 세운 지현이 말을 하면서도 분주히 손을 놀려 팬티를 찾아 다리에 꿰었으며 헝클어진 머리와 옷차림을 매만지고 있었다.
“나도 이유를 모르겠어.”
옷의 주름을 펴면서 지현이 정색하고 말했다.
“자기 그것이 막 들어온 순간에 숨이 턱 막히면서 거기가 조여지는 것 있지? 나도 놀랐다니까.”
“글쎄, 난 누님이 일부러 그런 줄 알았다니까.”
“어떻게 그렇게 할 수가 있다고 그래?”
“거기로 맥주병 마개를 따는 여자도 있으니까 말이지.”
“어머머, 세상에. 말도 안돼.”
”실제로 봤다니까 그러네.”
“정말? 어디서?”
“미아리에서. 지금은 없어졌지만 옛날이 좋았지.”
“시끄러.”
“그런데 누님.”
다시 정색한 조철봉이 은근한 눈빛으로 지현을 보았다.
“다시 이야기를 계속하자고. 그럼 그렇게 조이는 건 진짜 이번이 처음이었어?”
“그렇다니까.”
그러고는 지현의 눈빛도 은근해졌다.
“자기 물건이 커서 그랬나 봐.”
“놀라서?”
“그런가 봐.”
“꽉 막혔을 때 나도 놀랐어.”
“하지만 그 상태에서도 쾌감은 상승되고 있었어.”
이제 반쯤 눈을 감은 지현이 손을 뻗쳐 조철봉의 바지위로 철봉을 쓸다가 깜짝 놀라는 시늉을 했다.
“엄머, 아직도 단단하네.”
“글쎄, 지금도 기다리고 있다니까.”
“그런데 갑자기 힘이 풀리더니 거기가 열렸을 때 정말 죽는 줄 알았어.”
“알아, 나도 그 느낌.”
“마치 내가 뜨거운 지옥불 속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어.”
“그런 것 같더군.”
“자기는 마술사야.”
그러면서 지현이 조철봉의 바지 지퍼를 내리더니 거침없이 철봉을 잡아 밖으로 끄집어내었다.
“어머머.”
바지 사이로 나온 붉은 철봉이 건들거리자 지현이 탄성을 뱉었다. 어느덧 다시 두눈이 번들거렸고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다.
“지금 뭐 하는거야? 다시 하면 죽을 것 같다고 하고선.”
“내 입으로 해주려고.”
그러고는 지현이 상반신을 숙이더니 입안에 철봉을 넣었다. 조철봉은 철봉을 핥는 지현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지현은 몰두하고 있었는데 반쯤 감은 눈이 고혹적이었다.
조철봉이 집에 돌아왔을 때는 새벽 1시가 다 되어갈 무렵이었다. 서경윤은 말똥한 얼굴로 기다리고 있었는데 영일은 이미 잠든 지 오래였다. 술기운이 낭자했지만 주정은 한 적이 없는 조철봉인 터라 경윤은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남자가 술기운을 빌려 힘을 쓴다고 유세를 하지만 결국은 제 발등을 제 도끼로 찍는 것이나 같다. 맨정신으로 그것을 본 안방마님이 그 유세와 비등하게 함부로 대하기 시작할 것이고 어느 정도 시일이 흐르고 나면 아차, 어느새 이렇게 되었구나 하고 꼭 후회하는 것이 남편인 것이다. 조철봉이 씻고 나왔을 때 경윤은 착실하게 탁자 위에다 얼음 냉수에 설탕을 탄 유리잔을 내려놓고 기다리는 중이었다. 할말이 있다는 표시였다.
“어, 피곤하다.”
가운으로 갈아입은 조철봉이 수건을 옆으로 던지고는 냉수잔을 들었다. 나이트에서 그만큼 진을 빼고 왔으니 피곤할 만했다. 경윤이 차가운 시선으로 조철봉을 보았다.
“어떻게 된 거야?”
“뭐가 말이야?”
그러자 경윤의 눈꼬리가 치켜올라갔다.
“잊어먹었군.”
그순간 조철봉의 가슴이 엘리베이터가 떨어지는 것처럼 내려앉았다. 지금에야 기억이 났기 때문이다. 내일이 1월20일이니 영일의 8세 생일이다. 그래서 발리로 가족여행을 가기로 했던 것이다. 물론 영일의 생일을 이유로 휴가를 가자는 경윤의 제안이었는데 여름에는 캐나다의 빙하를 보러, 겨울에는 남국의 바닷가로 휴가 여행을 떠나는것이 이제는 선진국이 된 한국인들의 풍속이기도 했다. 조철봉이 한모금 더 얼음냉수를 삼키고는 정색하고 경윤을 보았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잊어먹다니? 꼭 그렇게 시비조로 말을 해야 되겠어?”
“아니, 그럼.”
“내일 오후 비행기로 떠날 테니까 짐이나 싸놔.”
“그럼 가는 거야?”
“비행기표도 다 준비해 놓았으니까.”
“내일 몇시 비행기인데?”
“오후 2시.”
내일 비행기표를 사면 될 것이고 시간이 안맞으면 바꿨다고 하면 된다. 그러자 경윤의 얼굴이 풀어졌다.
“난 연락도 없고 며칠간 그 말을 안해서 잊어먹은 줄 알았지.”
그러고는 경윤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조철봉을 보았다.
“오늘 그냥 잘 거야?”
“그럼 자지. 왜?”
“그거 안해?”
경윤이 눈웃음을 쳤으므로 조철봉은 저도 모르게 소리죽여 숨을 뱉었다. 그러고보니 경윤과 잠자리를 안한 지가 열흘이 넘었다. 그동안 애인을 만든다면서 미라를 데리고 호텔에 들어갔으며 아직 수지와 정아에게 숙제가 밀려있는 상태인데다 오늘은 지현에게 대포는 발사하지 않았지만 땀 꽤나 뺀 처지였으니 심신이 지쳤다. 그러나 경윤의 시선을 받은 조철봉이 머리를 끄덕였다.
“해야지. 나도 오래 굶었는데.”
“거짓말.”
“정말이야.”
“하지만 나한테 들키지만 말고 하라고.”
그러고는 경윤이 입고있던 가운의 가슴 부분을 벌려 보였는데 놀랍게도 안은 알몸이었다. 경윤의 피부는 희고 풍만한 체격인데다가 특히 하체가 잘 발달되었다.
“어럽쇼, 이여자가.”
조철봉이 놀란듯 눈을 둥그렇게 뜨자 경윤은 몸을 돌려 침실로 앞장을 섰다.
서경윤이 누구인가? 조철봉과 두번 결혼한 관계로 그 사이에 두명의 남자가 개입되었다가 떨어져 나갔다. 지금은 서로 허물은 인정하며 자식을 중심으로 뭉쳐 있지만 인간사는 어떻게 굴러갈지 모르는 법이다. 조철봉은 경윤을 그들의 자식 영일의 엄마로는 믿었지만 아내로서는 지금도 불신했다. 그리고 경윤의 입장도 같을 것이라고 믿었다. 지금은 자신이 경제적 능력이 있는 상황이니 다소곳이 엎드려 있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가차없이 뛰쳐나갈 것이었다. 경윤이 두번째 남편 이종학을 떨구고 나간 것처럼 말이다. 따라서 조철봉은 경윤의 첫번째와 세번째 남편인 셈이었는데 첫번째일 때는 자동차회사 영업사원이었다. 그때 경윤은 이종학과 바람이 났던 것이다.
이종학은 성실한 성품이었고 경윤을 사랑했다. 경윤도 조철봉과 대조적인 이종학을 사랑했을 것이었다. 그러나 조물주는 인간에게 복을 다 내려주시지 않고 골고루 분배해 주신다. 물질을 풍부하게 베풀어준 인간에게는 가슴이 허하게 만드신다. 아무리 퍼 넣어도 계속 허기가 져서 고통을 받는 걸귀가 바로 조철봉이다. 방으로 따라 들어선 조철봉이 빙긋 웃었다. 경윤이 가운을 벗어 던졌기 때문이다.
“멋있구나.”
조철봉도 가운을 벗어 던지면서 말했다.
“몸이 이젠 알맞게 영글었어.”
“뱃살이 쪄서 미치겠어.”
경윤이 침대 옆에 정면으로 서서 조금 늘어진 아랫배를 손으로 쓸어 올리는 시늉을 하면서 말했다. 두 다리를 벌리고 서 있어서 튼튼한 허벅지와 짙은 숲, 그리고 붉은색 골짜기까지 선명하게 드러났다. 경윤도 시선을 들더니 조철봉의 나체를 유심히 보았다. 그러고는 건들거리는 철봉을 보더니 번들거리는 눈으로 눈웃음을 쳤다.
“언제 봐도 그놈은 멋있어.”
“그놈이라니?”
“나, 애무 말고 그냥 해줘.”
그러면서 경윤이 침대위로 덜썩 몸을 눕히더니 두다리를 쩍 벌렸다. 시트위로 누워버린 것이다.
“이런.”
경윤의 몸을 내려다본 채 조철봉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런 식으로 행동하다가 남편 철봉이 죽어 버린다는 이야기 들었지?”
“뭐? 신비감이 없어진다고?”
이제는 두 무릎을 세운 자세를 취하면서 경윤이 짧게 웃었다. 그러자 골짜기가 벌려지면서 샘의 안까지 드러났다.
“으음.”
저도 모르게 신음을 뱉은 조철봉이 침대위로 올라와 경윤의 몸위에 엎드렸다.
“넣기전에 열번만 돌려줘, 샘 주위로 말이야. 나는 그것이 좋더라.”
경윤이 두손으로 조철봉의 목을 당겨 안으며 말했다. 그것은 말고삐를 쥔 것처럼 조롱을 하려고 그러는 것이지 사랑하고 좋아서 안는 것은 아니라는 걸 의미했다. 조철봉은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철봉을 쥐고 경운의 샘 주의를 돌아다녔다. 샘은 이미 넘쳐나고 있었으므로 시트가 젖는 중이었지만 아무도 상관하지 않았다.
“아아아.”
경윤이 거침없이 탄성을 뱉더니 조철봉이 일곱번째 돌아다닐 때는 엉덩이를 들썩이며 철봉을 받아들이려는 시늉을 했다.
마누라하고 잠자리를 할 적에는 이런 게 좋은 것이다. 서로의 기호에 익숙해져 있어서 행동의 낭비가 없다. 그리고 합심해서 더 새롭고 자극적인 기쁨을 개발해낼 수가 있는 것이다. 그 방법은 무궁무진하다고 알려져 있다.
정확하게 열번을 산책하고 나서 철봉이 집안으로 들어간 순간 경윤은 와락 소리쳤다.
“아유, 나죽어.”
방사중에 오만가지 탄성과 신음소리가 있고 그중에는 정확한 발음으로 적절한 내용을 구사하는 초인(?)도 있었지만 경윤은 말이 많은 편이었다. 말이 많다는 것은 다변(多辯)이라는 의미보다 쉬지 않고 입이 열린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내용도 없고 뜻도 없는 단어들이 중구난방 끝도없이 이어지는 것이다.
“엄마, 엄마, 그러지마.”
했다고 행동을 바꾸면 큰일난다.
“자기야, 저기, 그것을.”
또는
“진우엄마, 옷가게, 카드.”
그러나
“영호씨, 내일 거기서.”
따위의 의심쩍은 단어는 절대로 튀어나오지 않았으니 그 와중에도 주의는 하고 있다는 증거가 될 것이었다.
“아이고, 피아노, 택배.”
조철봉이 다시 철봉을 넣었을 때 경윤이 그렇게 소리쳤다. 아무렇게나 내뱉는 말같지만 잘 엮으면 경윤의 요즘 일상이 드러나기도 한다. 그것은 어제 피아노를 집안에 들여놓았고 택배로 운반되었다는 말이었다.
“아이고, 엄마, 신촌.”
경윤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렇게 쉴새없이 말을 늘어놓는 이유는 절정에 닿는 시간을 연장시키려는 것 한가지뿐이다. 이것이 바로 안방마님이며 다년간 살을 맞대고 살아온 파트너의 권리인 것이다. 하룻밤 인연으로 스쳐가는 여자들이 언감생심 이런 특권을 누릴 수가 있겠는가? 절정에 닿기만을 바라며 그들은 오직 필사적으로 달려갈 뿐이다. 그 과정의 소중함과 즐거움을 만끽할 여유가 없다는 말이다.
“아악, 미나리, 고추.”
이것은 아마 오늘 시장 본 내역인 모양이었다. 조철봉은 몰두했다. 그러나 머릿속은 코드브레이커(암호해독자)처럼 경윤의 외마디 단어를 조합하여 풀어나가는 것에 집중했다. 그래야 절제가 되기 때문이다.
“엄마, 나리스, 70.”
이것은 홈쇼핑업체 나리스에서 70만원짜리 옷을 세일한다는 말일 것이었다.
“아악, 하지마, 하지마.”
마침내 경윤이 그렇게 소리쳤을 때 조철봉은 종착역에 닿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경윤의 샘은 철봉을 받는 순간 조이는 힘이 더 강해져서 신경 조직을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뜨거운 샘은 넘쳐났고 경윤의 힘은 최고조에 달하고 있었다. 이때의 힘이란 천하장사 타이틀의 씨름선수도 당하지 못한다고 하지 않는가?
“하지마 하지마!”
자기는 지금 막 하려고 하면서 이쪽에다대고 그러는 것은 이기심의 극치라고 할만했다. 자기가 끝까지 갈때까지 하지말고 기다리라는 말인데 그것은 곧 자기가 끝장을 보고나서 네가 하든지 말든지 맘대로 하라는 말이나 같다.
“으악!”
마침내 경윤은 집안이 떠나갈 것 같은 신음을 뱉으며 폭발했다. 거침없는 폭발이었고 그것과 맞춰 조철봉도 대포를 발사했다.
“악!”
대포가 발사되는 충격을 받을 때 절정에 올라있던 여자는 그순간 죽고싶을 정도로 행복함을 느낀다고 누군가 조철봉에게 말해준 적이 있다.
“아아.”
경윤이 온몸을 떨면서 조철봉에게 매달렸다. 만족하고 행복한 것이다. 죽고싶을 정도로.
다음날 아침 회사에 출근한 조철봉은 자리에 앉자마자 최갑중의 전화를 받았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사무실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조철봉의 허락을 받은 갑중이 1분도 안되어서 사무실로 들어섰다. 이렇게 득달같이 달려온 이유는 뻔했다. 김지현과의 어젯밤 사연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지현과의 만남을 적극적으로 주선한 인물이 바로 갑중이다. 소파에 앉은 갑중이 비스듬한 시선으로 조철봉을 보았다.
“형님.”
“뭐냐?”
“어젯밤 어떻게.”
“집에서 잘 잤다.”
“집에 들어가신 겁니까?”
갑중의 얼굴에 언뜻 실망의 기색이 떠올랐다가 지워졌다.
“그럼 집에서 자지, 어디서 자?”
“그러면 김회장하고는.”
“잘 놀았지.”
“어디서 말씀입니까?”
그러자 조철봉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 자식이 마치 종자돈 주인같이 노는구먼.”
“형님.”
정색한 갑중이 상체를 반듯이 세웠다.
“김회장 회사는 조사할수록 엉망입니다. 어제는 박사장이 하청공장을 통해서 공사비를 빼먹은 증거를 잡았습니다.”
“….”
“이대로 나가면 김회장 회사는 망하고 우리하고 합자해서 설립할 유통회사도 위험해집니다.”
“하긴 어제 회사일을 상의할 사람이 필요하다고 하더구먼. 날 놓치지 않는다고도 했다.”
“놓, 놓치지 않는다고 했단 말입니까?”
놀란 갑중이 말까지 더듬었다.
“형님을 말씀이지요?”
“그렇다.”
“어, 어디서 말입니까?”
“방에서.”
“으음.”
먼저 신음부터 뱉은 갑중이 다시 눈을 가늘게 떴다.
“물론 호텔방 안이겠지요?”
“마음대로 생각해.”
“그럼 됐습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으므로 조철봉은 수화기를 들었다.
“사장님, 유경건설 김회장이신데요.”
여직원의 목소리가 수화구에서 울리자 조철봉이 힐끗 갑중을 보고 말했다.
“바꿔.”
그러고는 조철봉이 전화기의 스피커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조철봉이 응답하자 곧 스피커에서 김지현의 목소리가 방안에 울렸다.
“조사장님, 나.”
“응 당신이야?”
조철봉이 말하자 갑중은 숨을 들이켰다. 그러고는 눈도 깜박이지 않고 조철봉을 보았다. 그때 지현의 목소리가 방안을 울렸다.
“자기야, 잘 잤어?”
“응, 하지만 하체가 무거워서 혼났어.”
“어머나, 왜?”
“뽑아내지 않아서.”
“아아, 참.”
“당신은 어때?”
“난 개운하게 잘 잤어.”
그러고는 지현이 키득 웃었다.
“미안해, 자기야, 나만 해서.”
“그럼 오늘밤에 내가 당신 집으로 갈테니까 준비하고 있어.”
“어머나, 정말?”
지현의 목소리가 반가움으로 높아졌다.
그때 조철봉이 의자에 등을 붙이더니 이번에는 지긋한 시선으로 갑중을 보면서 말했다.
“오늘은 둘이 홀랑 벗고 놀아보자구.”
“어머나, 싫어.”
그러더니 지현의 목소리가 조심스러워졌다.
“자기야, 지금 혼자 있어?”
그럼, 내 방에 혼자 있으니까 걱정마.”
“나두 혼자 있어.”
지현이 안심한듯 다시 키득 웃었다.
“어제 정말 진했어. 지금까지도 거기가 얼얼해.”
“오늘은 내일 아침에 일어나지도 못하도록 만들어 줄테니까.”
“싫어.”
지현의 목소리에 교태가 섞여 있었으므로 갑중은 고인 침을 조심스럽게 삼켰으나 마치 빈 양철통에 물이 떨어지는것 같은 소리가 났다. 놀란 갑중의 머리칼이 곤두섰지만 두 사람의 대화는 계속되었다.
“어쨌든 나도 그렇게 조이는 샘은 처음이야. 보통 소시지 같았다면 부러지겠더라구.”
“어머머.”
지현이 서두르듯 말했다.
“난 그런 일 처음이라니까 그러네. 전에는 그런적 없었어.”
“놀라서 그랬단 말이지?”
“자기것이 너무 커서 그랬다니까.”
그때 다시 갑중이 한움큼이나 고여 있던 침을 삼켰다가 이번에는 사레가 들려 기침을 참으려고 입을 딱 벌리고는 얼굴빛이 하얗게 되었다. 그러자 조철봉도 긴장해서 눈을 크게 떴다.
“정말이야, 자기 것 머리가 너무 컸어. 기둥도 굵었고, 그래서 내 그것이 놀라서 그렇게 된거야.”
지현의 방송이 계속되었다. 이것은 바로 폰섹스의 변형과 같다. 말하는 동안에 몸이 달아오른 지현의 숨소리는 가빠졌으며 조철봉은 옆에 시청자까지 두고 있는 상황이다. 책상으로 가려진 하반신은 이미 잔뜩 팽창되어 있었다. 겨우 기침을 진정시킨 갑중이 숨을 길게 내뿜었을 때 눈을 흘겨보인 조철봉이 말을 이었다.
“내 철봉이 깊게 들어갔을 때 느낌을 말해봐.”
“처음에는 죽는 줄 알았어.”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지현이 금방 대답했다.
“몸이 마치 뜨거운 불기둥에 꿰 뚫리는 것 같았어.”
“응, 그래?”
“하지만 시원하고 그대로 더 있고 싶었어.”
“나도 느낌이 좋더구만.”
“난 그 오르가슴의 순간을 떠올리면 지금도 몸이 오그라지는 것 같아.”
“아마 지금도 샘에서 물이 나올걸?”
“그래, 나와.”
“그럼 손가락을 그곳에다 대봐.”
“지금?”
“응, 중지를, 샘 끝에 대. 그것이 내 철봉이라고 생각하고.”
“아이.”
“어서.”
조철봉의 목소리가 엄격해졌다.
“대었어?”
“가만, 응, 대었어.”
그러는 지현의 숨소리가 가빠졌다.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해?”
“천천히 안으로 집어넣어.”
“응.”
“신음소리를 내도 돼.”
“아아아아.”
그때 갑중이 엉거주춤 일어서더니 탁자 위에 놓인 신문으로 바지 앞을 가리고는 어기적거리면서 방을 나갔다. 그때 지현의 신음이 다시 이어졌다.
그날 저녁에 조철봉은 김지현의 집에 가지 못했다. 갑자기 일이 생겼기 때문에 내일로 미룬 것인데 지현도 크게 실망한 눈치는 아니었다. 아침에 전화로 색다른 기쁨을 나눈 후여서 둘 다 느긋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저녁 7시경에 조철봉이 들어선 곳은 안암동의 춘향이라는 한정식 식당이었다. 식당의 방안에는 이미 조철봉의 동창인 백영배가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 옆에 여자 하나가 앉아 있었다.
“응, 이 식당 주인이야.”
백영배가 여자를 소개했다.
“송미선이라고 합니다.”
차분한 표정의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조철봉에게 인사를 했다. 키가 컸고 날씬한 몸매에 옷차림도 세련되었다. 캐주얼 투피스 차림이었는데도 우아한 분위기가 풍기는 여자였다.
“흠, 네가 이런 미인을 알고 있다니.”
감탄한 조철봉이 자리에 앉아 다시 미선을 보았다. 쇼트커트 머리에 부드러운 인상이었다. 미선이 웃음띤 얼굴로 조철봉을 보았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내 철봉 이야기 말씀이요?”
그러자 미선이 흰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자, 먼저 술 한잔 받아라.”
영배가 소주병을 들고 그들의 말을 잘랐다. 영배는 대기업의 중역으로 조철봉과 고등학교 동창이었지만 노는 물이 달랐다. 학창시절에도 품행이 단정하고 성적이 우수한 영배는 일류대학에 진학해서 순탄한 인생을 걸어왔는데 친구들 사이의 별명이 향기나는 남자일 정도로 주변이 깨끗했다. 그런 영배가 오늘 중요한 일이 있다면서 조철봉을 이곳으로 불러낸 것이다. 술잔을 받은 조철봉이 한모금에 소주를 삼켰을 때 영배가 입을 열었다.
“너, 사업이 잘 된다면서?”
“그거야. 그럭저럭.”
조철봉이 웃음띤 얼굴로 영배를 보았다.
“자식아, 무슨 일이냐? 네가 나한테 볼일이 뭐가 있다고?”
“여자 문제야.”
정색하고 말한 영배가 옆에 앉은 미선을 눈으로 가리켰다. 그때 미선은 다소곳한 표정으로 식탁위에 시선을 주고 있었는데 얼굴에 그늘이 덮여진 것처럼 느껴졌다.
“네가 눈치를 챘겠지만 내 애인이다.”
“그런 것같이 보이는군. 하지만.”
“하지만 뭐?”하면서 영배가 눈을 크게 떴고 미선도 긴장했다. 둘의 시선을 받은 조철봉이 빙그레 웃었다.
“아직 자연스러운 단계는 아닌 것 같은데.”
“자연스러운 단계라니?”
다시 영배가 정색하고 물었으므로 조철봉이 빈잔에 스스로 술을 채우고는 다시 한모금 삼켰다.
“알고, 두근거리는 단계를 지나 성숙한 단계, 그 다음이 자연스러운 단계다.”
“으음, 그렇구먼.”
“너희 둘은 지금 성숙한 단계의 초입에 있는 것 같은데.”
이제는 눈만 크게 뜨고 있는 둘을 향해 조철봉이 말을 이었다.
“그, 머시냐. 아직 몸을 부딪치지 않은 거냐?”
“그, 그건 어떻게 알아?”
놀란 영배가 묻자 조철봉의 시선이 미선에게로 옮아갔다.
“네 품행을 기준으로 해서 여기 미선씨의 분위기를 보고 판단한거다.”
그때 미선이 단정한 얼굴을 들고 조철봉을 보았다.
“그래서 제가 조사장님을 뵙자고 한거예요. 조사장님 말씀을 많이 들었거든요.”
송미선과 시선이 마주쳤을 때 조철봉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은 충격을 받고는 숨을 들이켰다. 3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미선의 몸은 인생에서 가장 원숙한 시기에 접어든 상황일 것이었다.
이 시기에 육욕을 참지못한 사고가 가장 많이 일어난다. 조철봉은 미선의 습기에 젖은 듯한 검은 눈동자가 반짝이는 것을 본 순간에 교감이 일어난 것처럼 느껴졌다. 그것은 색욕에 대한 텔레파시일 것이었다. 욕망을 품고 있는 상대로부터는 말을 하지 않아도 기운이 전달된다고 믿어온 조철봉이다. 하물며 눈이 마주쳤을 때는 말보다도 더 진한 대사가 얼마든지 오갈 수가 있지 않겠는가? 그때 백영배가 입을 열었다.
“까놓고 말해서 너한테 성 상담을 하려는거야. 물론 상담료는 후하게 내겠다.”
“그것 참.”
쓴웃음을 지은 조철봉이 영배와 미선을 번갈아 보았다.
“몇달동안 연락도 없던 놈이 갑자기 성 상담을 부탁하다니, 어지간히 급한 모양이군 그래.”
“그래, 급하다.”
영배가 정색하고 말했다.
“그렇다고 병원에 갈 수도 없고 해서 네 생각을 한거야. 그리고 미선씨도 승낙을 했고.”
“도대체 무슨 일이야? 가운데 있는 놈이 안 서?”
“하루에 열두 번도 더 서는데.”
말을 멈춘 영배가 흘끗 미선을 보았다.
“막상 하려는 순간에 그것이 죽는단 말이야.”
“엔진 오일은 충분히 넣었어?”
“엔진 오일이라니?”
영배가 눈을 둥그렇게 뜨고 물었을 때 미선이 대답했다.
“네, 충분해요.”
“라이트를 너무 오래 켜 놓았다가 방전이 되어서 시동이 안 걸리는 경우도 있는데.”
“그런 경우도 없어요.”
재깍재깍 대답한 미선이 이번에는 나서서 설명했다.
“둘 다 모두 정상이에요. 건강하고. 아마도 정신적인 문제 같아요.”
“그렇다면 정신과 의사한테 가 봐야.”
“자식아.”
얼굴을 붉힌 영배가 말했다.
“쪽팔리게 어떻게 간단 말이냐? 그리고 이건 아주 간단하게 풀 수가 있는 문제 같단 말이다. 예를 들어서 네놈 경험의 한자락만 풀어 준다면 그것을 참고로 해서 성사가 될지도 모른단 말이다.”
“그렇다면.”
한모금 소주를 삼킨 조철봉이 눈을 가늘게 뜨고 두 남녀를 번갈아 보았다.
“자세하게 읊어봐. 어떻게 시작했다가 어떻게 번데기가 되어서 끝났는지를 말이야.”
조철봉의 목소리가 엄숙해졌다.
“하나도 빼놓지 말고 읊어라, 처음부터.”
“처음이라면.”
이번에도 차분한 표정이 된 미선이 먼저 입을 열었다.
“딱 한달쯤 전이었어요. 우리가 그것을 시도하려던 때가.”
조철봉의 시선을 그대로 받으면서 미선이 말을 이었다.
“낮인데 우리는 호텔방으로 갔지요. 이 사람은 침대에서 기다렸고 난 샤워를 하고 나왔는데.”
“그때는.”
입맛을 다신 영배가 미선의 말을 이었다.
“정상이라고 봐도 돼. 난 이 사람과 처음이라 뭔가 보여준답시고 샤워를 하는 동안 한번 뽑았거든. 그래서.”
뽑았다는 것은, 즉 자위를 말한다.
“으으음.”
저도 모르게 조철봉의 입에서 신음소리가 울려나왔다. 백영배가 얼마나 송미선에 대해서 신경을 쓰고 있는가를 짐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영배는 대포를 발사하는 시간을 더 늦추려고 저장되어 있던 탄환을 미리 써버렸다. 그렇게되면 탄환을 만드는 과정이 길어져서 대포가 늦게 발사 되는 것은 당연했다. 그것은 20대 초반쯤에서 애인을 만족 시키려는 젊은 남성이 가끔 사용하던 수작이었으니 영배의 노력은 눈물겹다고 표현해도 될 것이었다.
“그래서?”
계속하라는 뜻으로 조철봉이 묻자 영배가 말을 이었다.
“그랬더니 그날 그것이 서질 않았어. 내가 실수를 한 것이지.”
“그날 이후에는?”
“지금까지 다섯번인데.”
숨을 뱉은 영배가 결연한 표정으로 조철봉을 보았다.
“철봉아, 너 웃으면 안돼.”
“안웃는다.”
“난 여자가 미선씨 하나뿐이다. 마누라 빼고 말이야. 지금까지 한번도 외도를 한 적이 없어. 룸살롱에서 이차도 나간 적이 없단 말이다.”
그 순간 조철봉의 얼굴이 놀람으로 굳어졌다.
“기가 막혀 아니, 지독한 놈.”
“그렇게 생각해도 상관없어.”
“넌 박물관에 가야 될 놈이다.”
“상관없어.”
눈을 치켜뜬 영배가 조철봉을 보았다.
“미선씨하고 할 수만 있다면.”
“도대체”
이번에는 조철봉이 심호흡을 하고는 물었다.
“그, 첫번째 말고 다섯번의 과정도 말해봐, 어떻게 되었는지.”
“안섰어. 미선씨가 별짓을 다해줬어도.”
“어떻게?”
“만지고 빨고, 나체쇼까지 했어.”
“….”
“다섯번째는 둘이 같이 포르노까지 봤어.”
“….”
“이상하단 말이야.”
술잔을 소리나게 내려놓은 영배가 아랫입술을 물었다가 풀었다.
“그짓하기 전까지는 연장이 땡땡하게 서 있거든? 미선씨 생각만 해도 불뚝 불뚝 선단말이야. 그런데 막상.”
“이제 그만해.”
손을 들어 말을 그치게 한 조철봉이 머리를 돌려 미선을 보았다. 미선은 그동안 다소곳한 표정으로 식탁을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조철봉의 시선을 느꼈는지 상반신을 세웠다.
“미선씨가 혹시.”
“안되는 것에 대해서 눈치를 주거나 짜증내지 않았어요. 그냥 끝까지 노력해 주었어요?”
미선이 차분한 표정으로 말했다.
“모르죠, 오히려 그런 태도가 영배씨한테 더 스트레스를 주었는지 말이에요.” 머리를 끄덕인 조철봉이 문득 영배에게 물었다.
“야, 너, 지금 섰어?”
“응.”
퍼뜩 시선을 든 영배가 얼떨결에 대답하더니 상반신을 오그렸다. 어색한 표정이었다.
“어느새 섰어.”
“그럼.”
조철봉이 정색하고 말했다.
“내가 문밖에 서 있을테니까 지금 미선씨하고 해봐라, 아마 지금 하면 될지 모른다.”
그러고는 조철봉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야, 철봉아.”
뒤에서 백영배가 불렀지만 조철봉은 방을 나와 문밖에 섰다. 여기는 복도 끝쪽의 방이어서 오가는 사람도 없었고 건너편은 빈방이었다.
“야, 빨리 해.”
조철봉이 뒤쪽의 방에다 대고 낮게 말했다. 미닫이 식인데다 창호지를 바른 한옥 구조여서 안에서 나는 소리는 다 들렸다. 밖에서도 마찬가지다.
“되냐?”
뒤에다 대고 조철봉이 묻자 영배가 낮게 대답했다.
“응, 아직 섰어.”
“그럼 바로 해.”
“하려고 해.”
그러더니 영배가 주저하며 불렀다.
“철봉아.”
“왜?”
“이야기를 계속해주라.”
“알고있어. 인마.”
쓴웃음을 지은 조철봉이 이제는 문에 등을 붙이고는 앉았다.
“야, 넣었냐?”
“지금 넣으려고 해.”
“미선씨는?”
“다 벗었어.”
“아랫도리만?”
“응.”
“니가 위쪽에서 할거냐?”
“그래야지.”
“아직도 섰어?”
“응, 아직도.”
“그럼 해. 어서.”
그때 방안에서 미선의 신음이 터져 나왔으므로 조철봉은 침을 삼켰다. 어느덧 조철봉의 철봉도 성이 나 있었던 것이다. 심호흡을 한 조철봉이 마음을 가라앉히고는 뒤에 대고 말했다.
“영배야, 속으로 교가를 불러라.”
만일 소리내어 불렀다가는 식당 안의 손님이 다 들을 것이었다. 지난번에 조철봉이 불러젖힌 곳과는 장소가 다르다. 미선의 신음이 점점 더 높아졌으므로 조철봉은 긴장했다. 영배는 아무소리를 내지 않았지만 아마 필사적일 것이었다. 눈을 부릅뜨고 속으로 교가 뿐만이 아니라 애국가까지 부르는 중일지도 모른다.
“아아, 나 죽겠어.”
마침내 그런 미선의 비명같은 탄성이 터져나왔을 때 조철봉의 가슴도 부풀었다. 미선은 이제 절정에 닿으려는 것이다. 기를 쓰고 여기까지 끌어올린 영배에게도 이 순간은 길이 기억될 것이 분명했다.
“야, 싸라. 싸.”
가만 있어도 자동으로 쌀 것을 조철봉이 참다못해 그렇게 한마디 한 것은 제가 흥분했기 때문이다. 참기 힘들었던 것이다. 그순간 영배가 끄응하면서 힘을 주는 소리가 들리더니 미선의 신음이 더 크게 났다.
“아유우, 나 죽어.”
소리가 컸으므로 머리끝이 곤두선 조철봉이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손님이 많아서 왁자한 홀의 소음 때문에 신음은 금방 묻혔다. 설령 옆쪽 방에서 들은 사람이 몇명 있다고 해도 발원지를 찾아다닐 미친 놈이 있겠는가? 조철봉이 어깨를 늘어뜨리면서 길게 숨을 뱉었을 때 방 안에서도 영배의 숨뱉는 소리가 났다.
“야, 나 갈란다.”
조철봉이 부스럭대면서 몸을 세우고 말했다.
“너희들 작업이 성사되었으니까 내일은 끝났어.”
“아니, 야, 철봉아.”
안에서 영배가 불렀지만 조철봉은 발을 뗐다. 영배는 관음중 따위가 있는 것이 아니다. 정상인데 환경만 바꾸면 성사되는 일이었다.
다음날 오전 10시쯤에 조철봉은 서경윤과 함께 인천공항의 출국장 안에 들어가 있었다. 물론 그들의 아들 영일과 함께였다. 경윤은 우중충한 날씨였는데도 선글라스를 썼고 조금전에 화장실에서 반팔 셔츠로 갈아입었다. 발리의 기후 조건에 맞춘다는 핑계였지만 들떠있는 것이다.
“자기야.”
게이트의 의자에 나란히 앉아 탑승을 기다릴 적에 경윤이 은근한 목소리로 조철봉을 불렀다.
“엄마가 진주목걸이는 가짜가 많아서 싫대. 선물 대신 돈으로 달래.”
“아마 그 돈으로 묻지마 관광을 가려나봐. 전에도 몇번 간 것 같아.”
“설마.”
따라웃은 조철봉도 경윤의 분위기에 끌려들었다. 경윤의 친정어머니는 대구에 살고 있었지만 올해 70세였는데도 정정했다. 20여년 전에 남편을 잃고 포목상으로 2남2녀를 길렀는데 지금은 막내딸과 함께 둘이 살면서 유복한 여생을 보내는 중이다.
“그렇다면 다녀와서 돈을 보내드려.”
조철봉이 정색하고 말했다.
“대전에도 조금만 보내드리고.”
대전은 조철봉의 본가를 말한다. 본가에는 부모 두분만 계셨는데 조철봉이 경윤 모르게 매월 생활비와 용돈을 보내드리고 있다.
“알았어.”
다른 때 같으면 잔소리는 안하더라도 시큰둥한 표정을 지어보였을 경윤이 밝은 얼굴 그대로 머리를 끄덕였다.
“잠깐, 나 화장실에.”
자리에서 일어선 조철봉이 말하고는 서둘러 화장실로 향했다. 그것은 바지속에 넣어둔 휴대전화에 진동이 왔기 때문이다.
화장실 옆의 구석진 곳에 섰을 때는 이미 진동이 꺼져 있었지만 통화 버튼은 누르자 곧 발신자 번호가 떴다. 그러나 모르는 번호였다. 다시 통화 버튼을 누른 조철봉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경윤과 함께 있을 적에는 휴대전화의 전원을 아예 꺼놓았고 통화 내역을 모두 지우는 작업을 빼먹은 적이 없다. 아무리 술에 취해 귀가했어도 그렇다.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는 그쯤 노고가 당연한 것이 아니겠는가?
“여보세요?”
신호음이 두번 울리고 나서 여자의 맑은 목소리가 울렸으므로 조철봉은 긴장했다.
“누구십니까?“
“저, 송미선이에요.”
“아아.”
어젯밤 백영배와 정사를 나누었던 송미선이다. 미선의 신음소리가 아직도 귀에 생생했으므로 조철봉은 고인 침을 삼켰다.
“그런데 웬일입니까?”
“제가 어제 인사를 드리지 못해서요. 고맙다는 말씀을 드리려고.”
“고맙긴 뭘.”
“아녜요. 정말 고맙습니다. 어제 그렇게 될 줄은 몰랐어요.”
“그렇게 될 줄 몰랐다니요? 기대하시지 않았다는 말씀 같은데.”
“네, 그래요. 그런데 조사장님의 처방이 먹혔군요.”
그러고는 미선이 짧게 웃었다.
“저도 더 흥분을 했고요.”
“환경을 바꾸면 그렇게 되지요. 그렇다고 자주 어젯밤 방법을 쓰진 마십시오.”
“제가 꼭 신세를 갚을게요.”
“그렇다면 미선씨 같은 여자분이나 하나 소개해 주시지요.”
그러자 미선이 대뜸 말했다.
“해 드릴게요. 아주 괜찮은 애가 있어요.”
발리에 도착했을 때는 오후 3시쯤이었다. 조철봉은 미리 현지 가이드를 수배해놓았으므로 공항에 마중나온 가이드를 따라 바닷가 빌라에 여장을 풀었다. 문만 열면 바닷가 모래사장을 밟을 수 있는 통나무 빌라였는데 내부 시설은 에어컨과 대형 벽걸이 TV 등 첨단기기로 장식돼 있었다.
“아아, 좋다.”
경윤의 입에서 연거푸 탄성이 터져 나왔으므로 조철봉의 얼굴에도 웃음이 떠올랐다.
“나, 바닷가에 나가도 되지?”
짐을 내려놓자마자 경윤이 수영복을 꺼내들며 서둘렀다.
“저녁 먹을 때까지 영일이하고 바닷가나 수영장에 있을테니까.”
그러더니 머리를 돌려 조철봉을 보았다.
“같이 안갈테야?”
“난 잠 좀 자야겠어.”
“아유, 멋대가리 없는 남자. 발리까지 와서 잠이나 자다니.”
“다녀와, 방 잊어버리지 말고.”
“여기가 34번 빌라지?”
경윤이 영일을 재촉해 빌라에서 나가자 조철봉은 테라스 의자에 앉아 둘의 뒷모습을 보았다. 백사장은 넓었고 한국의 유명 해수욕장과는 달리 사람이 많지 않았으므로 둘의 모습은 한눈에 들어왔다. 영일은 바닷가에 온 것이 기쁜지 한시도 가만 있지 않았다. 이리저리 내닫다가 몸을 구부려 뭘 줍기도 하면서 이쪽에 대고 손까지 흔들어 보였다. 하늘은 구름 한점 없이 파랗게 개어 있었으며 환한 햇살 아래 바다는 짙은 남색이었다. 그들이 멀리 떨어졌을 때 조철봉은 전화를 들고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신호음이 울리더니 곧 사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예, 김상길입니다.”
현지인 가이드였다. 호텔 본관의 로비에서 조철봉의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아, 난데요. 알아보았어요?”
“예, 사장님.”
가이드가 서둘러 대답했다.
“아주 물이 좋습니다. 사장님.”
“어떤 물인데?”
“예, 나이트에 가서 직접 고르실 수도 있고 제가 골라 드릴 수도 있습니다만.’
“나이트에서 말이오?”
“예, 그곳에는 세계 각국의 여자들이….”
“난 영어를 못하는데.”
“그러면 제가 옆에서 통역을….”
“그리고 또?”
“예, 제가 골라 드린다는 것은 여행자 중에서 사장님이 점을 찍으시면 제가 가서 주선한다는 말씀입니다.”
“어디에서 고른단 말이오?”
“예, 여기 호텔 로비에 오시기만 해도 여자들이 많습니다. 식당에도, 클럽에도.”
“으으음.’
저도 모르게 탄성을 뱉은 조철봉이 심호흡을 했다. 경윤과 영일에게는 대단히 미안한 일이었지만 조철봉이 가족만 끼고 다소곳이 5박6일의 발리 여행을 즐길 위인인가? 미리 서울에서부터 현지 가이드인 김상길에게 따로 주문을 해놓은 것이다. 마침내 조철봉이 마음을 굳혔다.
좋아, 먼저 현장 답사를 하지. 내가 그곳에 갈테니까 기다려요.”
“예, 사장님.”
화려한 색상의 셔츠에 선글라스를 끼고 반바지 차림의 조철봉이 로비에 나타난 것은 그로부터 5분쯤 후였다.
“사장님. 먼저 저쪽으로.”
조철봉이 VIP 고객임을 진작부터 알고 있던 김상길이 앞장 서면서 말했다.
“커피숍에 한떼가 있습니다.”
조철봉은 김상길의 얼굴을 똑바로 보았다. 40대 후반쯤으로 조철봉보다 10년쯤 연상인 상길은 이른바 산전수전 다 겪은 백전노장이었다.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삼아 나름대로 일가견을 갖춘 인물이 분명했다. 그래서 조철봉의 심복 최갑중이 추천해준 인물이 아니겠는가?
“두당 5백불이라.”
혼잣말처럼 말했을 때 상길이 진지한 표정으로 머리를 끄덕였다.
“예, 다른 곳에서도 그 가격으로 제의가 들어옵니다만 저는 서울 박사장한테서 특별히 부탁을 받은 터라.”
서울 박사장이란 갑중이 거래하는 여행사 사장이다. 조철봉의 시선이 다시 여자들쪽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제 여자들은 노골적으로 이쪽을 흘낏거리고 있었는데 그들도 점수를 매기는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신통하게도 조철봉이 찍어놓은 흰 셔츠와 꽃무늬 셔츠는 이쪽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좋습니다. 그러면.”
일단 승낙을 한 조철봉이 물었다.
“어떻게 연결시켜 주실거요?”
“그럼 두분 다 하실겁니까?”
상길이 먼저 확인하듯 물었으므로 조철봉은 어깨를 폈다.
“당연하지.”
“그럼 먼저 흰 셔츠를 오늘 저녁에 만나게 해드리지요.”
“두 여자한테 다 알려줄 겁니까?”
“그럴 수는 없지요. 그동안 꽃무늬 셔츠는 다른 남자를 만나게 할 것입니다. 물론 사장님보다 경쟁력이 휠씬 뒤떨어진 놈으로, 당연히 꽃무늬는 밥만 먹고 끝냅니다.”
“지금 내가 몇번째요?”
“여자들은 어제 도착했습니다. 하느님께 맹세코 사장님이 첫번째올시다.”
“오늘 저녁에 흰 셔츠는 어떻게 데려올겁니까? 그저 소개만 시켜주는거요?”
“5백불씩 받고 그럴 수는 없지요.”
쓴웃음을 지은 상길이 말을 이었다.
“여기서 차로 10분 거리에 로마클럽이라는 특급 클럽이 있습니다. 입장료가 1백불씩이어서 보통 관광객들은 들어갈 엄두도 내지 못하지요. 그곳에서 흰 셔츠를 만나시는 겁니다.”
“그렇군.”
“분위기가 좋은 곳이라 여자 앞에서 발작만 일으키지 않으면 성사가 된다고 봐도 될 것입니다.”
“나아 참.”
경황 중에도 조철봉이 쓴웃음을 지었지만 상길은 정색했다.
“생각해 보십시오. 거기까지 만나러 간 것은 이미 70%는 그럴 작정을 하고 있는 것이나 같습니다. 나머지 30% 중 사장님의 몫은 10%밖에 되지 않을 것입니다. 20%는 분위기가 먹어 줄테니까요.”
“통계가 정확하시군.”
“다 경험에서 빼낸 수치올시다.”
그러더니 상길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 여자들도 보셨고 그쪽에다 보여 주시기도 했으니 이젠 가시지요.”
상길을 따라 커피숍을 나온 조철봉이 심호흡을 하는 시늉을 했다.
“또 없습니까?”
조철봉이 묻자 상길이 웃지도 않고 대답했다.
“20대 여자들이 있습니다. 여행 모임으로 온 여자들인데 선을 보시려면 다른 호텔로 가셔야 됩니다.”
“그렇다면 내일 낮에는 그쪽 한명을 만나볼까? 밤에는 꽃무늬를 만나고 말입니다.”
그러자 상길이 걸음을 멈추더니 다시 진지한 표정이 되어 머리를 끄덕였다.
“그럼 미리 선을 보시지요.”
그러고는 상길이 휴대전화를 꺼내 들면서 말을 이었다.
“15분만 기다려 주시지요.”
그로부터 정확하게 20분후에 조철봉은 김상길과 함께 바로 옆쪽 호텔의 커피숍으로 옮아가 있었다. 이곳도 한국인 관광객이 많았지만 조철봉이 투숙한 호텔보다 급이 낮았다. 그러나 활기띤 분위기가 조철봉의 마음에 들었다.
“저기, 한국인 그룹 여행자들 중에서 골라 보시지요.”
상길이 눈으로 가리킨 곳은 7, 8명의 젊은 남녀가 모여앉은 곳이었다. 그들은 바다에서 방금 돌아왔는지 모두 수영복 차림이었는데 몸의 물기도 다 마르지 않았다. 상길이 웃음띤 얼굴로 말했다.
“직장인, 학생들입니다.”
“으음.”
조철봉의 입에서 흐뭇한 탄성이 뱉어졌다. 뱃살이 삼겹살인 여자도 보였고 용모가 영 아닌 여자도 있었지만 그럴수록 현실감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만일 미끈한 여자들만 있었다면 꾸며놓은 것으로 의심했을지도 모른다.
“훌륭하군요.”
“그렇죠?”
조철봉의 표정을 본 상길이 수협 공판장에서 가격을 좋게 받은 어부처럼 콧구멍을 벌름거리며 웃었다.
“제가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물이 좋다고요.”
“저기 검정 비키니.”
조철봉이 눈끝으로 일행을 가리키며 말하자 상길은 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과연 눈이 높으십니다. 대일은행 직원으로 친구들하고 휴가를 왔는데 사흘후에 떠나지요.”
“그 옆에 앉은 남자는 누굽니까?”
“예, 다른팀의 관광객인데 직접 꼬시려고 붙어있는 겁니다. 하지만 어림없는 수작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
“아니, 왜?”
“발목에 열쇠 매달고 있는 것 보셨지요?”
“아아.”
그쪽으로 머리를 돌린 조철봉은 반바지에 슬리퍼 차림의 사내가 발목에 목욕탕의 옷장 열쇠같은 물체를 차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때 상길이 말을 이었다.
“저놈은 지금 싸구려 여관에 묵고 있지요. 저 열쇠가 여관 키올시다. 일급 호텔에서는 저런 키를 안쓰지요.”
“으음.”
“이런 곳에 놀러오면 모두, 특히 여자는 가슴이 붕 뜹니다. 백마탄 남자를 만나고 싶은 거죠. 그래서 저놈이 아무리 잘생기고 수단이 좋다고 하더라도 저 발목의 열쇠 가지고는 안됩니다.”
“그렇군.”
“결혼할 것도 아니고 며칠 즐기고 끝낼 작정이니까요.”
그러고는 상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층 바에 가 계시면 제가 저 여자를 그쪽으로 보내지요.”
“아니, 벌써.”
“제 수당은 200불이 되겠습니다. 다만 피알은 잘 해드릴테니 바에 들어간 후부터는 사장님의 수단에 달렸습니다.”
“으으음.”
“자, 어서 일어서시지요.”
“그, 그럽시다.”
조철봉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상길은 그들을 향해 몸을 돌렸다. 서둘러 커피숍을 나오면서 조철봉의 가슴은 뛰었다. 이곳은 그야말로 생의 활력이 넘치는 곳이었다. 진작 이곳에 왔어야 했는데 늦었다. 그러나 지금부터 시작해도 너무 늦은 것은 아니다. 이층의 바에는 서양인 한팀만 앉아있을 뿐 조용했다.
종업원에게 10불이라고 적혀있는 주스 한잔을 시켜놓고 조철봉은 손목시계를 보았다. 서경윤이 바닷가로 간 지 아직 한시간도 되지 않았다. 그동안 자신은 작업을 두건이나 만들고 있는 것이다.
조철봉이 시큼한 맛이 나는 주스를 반쯤 마셨을 때였다. 바 안으로 비키니 아가씨가 들어섰는데 어느새 옷을 갈아입었다. 화려한 무늬의 원피스에다 맨발에는 샌들을 꿰어 신은 간편한 차림이다. 미끈한 맨다리가 드러나 있었으므로 서양인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쪽으로 모였다. 아가씨는 조철봉을 보더니 망설이는 기색도 없이 다가와 앞쪽 의자에 앉았다. 얼굴에는 엷은 웃음기까지 떠올라 있었다.
“가이드 아저씨한테서 말씀 들었어요.” 아가씨가 맑고 조금 높은 목소리로 말했다. 스물네댓쯤 되었을까? 짧은 머리에 둥근 얼굴이었고 조금 들린 듯한 코와 도톰한 입술이 귀여운 인상이었다. 그러자 조철봉도 웃음띤 얼굴로 말했다.
“만나서 반가워.”
“아저씨 와이프하고 같이 오셨다면서요?”
“그래.”
“여기까지 와서도 바람 피우시려구요?”
“그것도 그래.”
“흐흐흐.”
아가씨가 목안에서 구슬이 부딪치는것 같은 소리로 웃었다.
“재미있어, 아저씨.”
“뭐 해줄까?”
여전히 웃음띤 얼굴로 조철봉이 그렇게 물었다. 서론은 빼버린 것이다. 물론 여자가 그런 분위기로 유도한 일면도 있다. 그러자 여자가 눈을 가늘게 뜨고 조철봉을 보았다.
“아저씨, 제 이름은 이선아예요. 선아.”
“그래, 선아, 내 이름은 조철봉이다.”
“어머나.”
“외우기 쉬울거야. 철봉같다는 말로 생각하면.”
“흐흐흐.”
“그래, 내일 낮에 시간이 있는데.”
“몇시간요?”
“오후 2시부터 5시까지 세시간.”
“세시간?”
“그래 세시간이면 충분하지 않아?”
“어머머.”
다시 눈을 가늘게 뜬 선아가 풀썩 웃었다.
“아저씨는 이런 경험이 많으신가봐.”
“조건을 말해봐.”
정색한 조철봉이 남은 주스를 한모금에 삼키고는 선아를 보았다.
“얼마 줄까? 세시간에.”
“천불 주세요.”
선아도 이제는 정색하고 조철봉을 마주 보았다.
“아저씨가 방 잡아놓으면 그곳으로 갈게요.”
“천불이라.”
이번에는 조철봉이 눈을 가늘게 뜨고 선아를 보았다.
“좋아, 내가 김선일씨한테 연락을 하면 되겠지? 아니면 선아한테 직접 할까?”
“저한테 해주셔도 상관없어요.”
“연락처는?”
“제 휴대폰 번호 드릴게요.”
그러더니 선아가 유창한 영어로 웨이터를 부르더니 메모지와 펜을 부탁했다. 조철봉이 심호흡을 서너번 하는 동안 선아가 메모지에 전화번호를 적어 내밀었다.
“내일 아침까지 연락 주세요.”
“몇시까지?”
“응, 10시까지.”
“알았어.”
“그럼.”
자리에서 일어선 선아가 웃음띤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아저씨, 내일 봐요.”
“그래.”
선아가 바를 나가자 조철봉은 입맛을 다셨다. 아무래도 선아가 프로같은 것이다.
그로부터 정확하게 20분후에 조철봉은 김상길과 함께 바로 옆쪽 호텔의 커피숍으로 옮아가 있었다. 이곳도 한국인 관광객이 많았지만 조철봉이 투숙한 호텔보다 급이 낮았다. 그러나 활기띤 분위기가 조철봉의 마음에 들었다.
“저기, 한국인 그룹 여행자들 중에서 골라 보시지요.”
상길이 눈으로 가리킨 곳은 7, 8명의 젊은 남녀가 모여앉은 곳이었다. 그들은 바다에서 방금 돌아왔는지 모두 수영복 차림이었는데 몸의 물기도 다 마르지 않았다. 상길이 웃음띤 얼굴로 말했다.
“직장인, 학생들입니다.”
“으음.”
조철봉의 입에서 흐뭇한 탄성이 뱉어졌다. 뱃살이 삼겹살인 여자도 보였고 용모가 영 아닌 여자도 있었지만 그럴수록 현실감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만일 미끈한 여자들만 있었다면 꾸며놓은 것으로 의심했을지도 모른다.
“훌륭하군요.”
“그렇죠?”
조철봉의 표정을 본 상길이 수협 공판장에서 가격을 좋게 받은 어부처럼 콧구멍을 벌름거리며 웃었다.
“제가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물이 좋다고요.”
“저기 검정 비키니.”
조철봉이 눈끝으로 일행을 가리키며 말하자 상길은 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과연 눈이 높으십니다. 대일은행 직원으로 친구들하고 휴가를 왔는데 사흘후에 떠나지요.”
“그 옆에 앉은 남자는 누굽니까?”
“예, 다른팀의 관광객인데 직접 꼬시려고 붙어있는 겁니다. 하지만 어림없는 수작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
“아니, 왜?”
“발목에 열쇠 매달고 있는 것 보셨지요?”
“아아.”
그쪽으로 머리를 돌린 조철봉은 반바지에 슬리퍼 차림의 사내가 발목에 목욕탕의 옷장 열쇠같은 물체를 차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때 상길이 말을 이었다.
“저놈은 지금 싸구려 여관에 묵고 있지요. 저 열쇠가 여관 키올시다. 일급 호텔에서는 저런 키를 안쓰지요.”
“으음.”
“이런 곳에 놀러오면 모두, 특히 여자는 가슴이 붕 뜹니다. 백마탄 남자를 만나고 싶은 거죠. 그래서 저놈이 아무리 잘생기고 수단이 좋다고 하더라도 저 발목의 열쇠 가지고는 안됩니다.”
“그렇군.”
“결혼할 것도 아니고 며칠 즐기고 끝낼 작정이니까요.”
그러고는 상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층 바에 가 계시면 제가 저 여자를 그쪽으로 보내지요.”
“아니, 벌써.”
“제 수당은 200불이 되겠습니다. 다만 피알은 잘 해드릴테니 바에 들어간 후부터는 사장님의 수단에 달렸습니다.”
“으으음.”
“자, 어서 일어서시지요.”
“그, 그럽시다.”
조철봉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상길은 그들을 향해 몸을 돌렸다. 서둘러 커피숍을 나오면서 조철봉의 가슴은 뛰었다. 이곳은 그야말로 생의 활력이 넘치는 곳이었다. 진작 이곳에 왔어야 했는데 늦었다. 그러나 지금부터 시작해도 너무 늦은 것은 아니다. 이층의 바에는 서양인 한팀만 앉아있을 뿐 조용했다.
종업원에게 10불이라고 적혀있는 주스 한잔을 시켜놓고 조철봉은 손목시계를 보았다. 서경윤이 바닷가로 간 지 아직 한시간도 되지 않았다. 그동안 자신은 작업을 두건이나 만들고 있는 것이다.
조철봉이 시큼한 맛이 나는 주스를 반쯤 마셨을 때였다. 바 안으로 비키니 아가씨가 들어섰는데 어느새 옷을 갈아입었다. 화려한 무늬의 원피스에다 맨발에는 샌들을 꿰어 신은 간편한 차림이다. 미끈한 맨다리가 드러나 있었으므로 서양인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쪽으로 모였다. 아가씨는 조철봉을 보더니 망설이는 기색도 없이 다가와 앞쪽 의자에 앉았다. 얼굴에는 엷은 웃음기까지 떠올라 있었다.
“가이드 아저씨한테서 말씀 들었어요.” 아가씨가 맑고 조금 높은 목소리로 말했다. 스물네댓쯤 되었을까? 짧은 머리에 둥근 얼굴이었고 조금 들린 듯한 코와 도톰한 입술이 귀여운 인상이었다. 그러자 조철봉도 웃음띤 얼굴로 말했다.
“만나서 반가워.”
“아저씨 와이프하고 같이 오셨다면서요?”
“그래.”
“여기까지 와서도 바람 피우시려구요?”
“그것도 그래.”
“흐흐흐.”
아가씨가 목안에서 구슬이 부딪치는것 같은 소리로 웃었다.
“재미있어, 아저씨.”
“뭐 해줄까?”
여전히 웃음띤 얼굴로 조철봉이 그렇게 물었다. 서론은 빼버린 것이다. 물론 여자가 그런 분위기로 유도한 일면도 있다. 그러자 여자가 눈을 가늘게 뜨고 조철봉을 보았다.
“아저씨, 제 이름은 이선아예요. 선아.”
“그래, 선아, 내 이름은 조철봉이다.”
“어머나.”
“외우기 쉬울거야. 철봉같다는 말로 생각하면.”
“흐흐흐.”
“그래, 내일 낮에 시간이 있는데.”
“몇시간요?”
“오후 2시부터 5시까지 세시간.”
“세시간?”
“그래 세시간이면 충분하지 않아?”
“어머머.”
다시 눈을 가늘게 뜬 선아가 풀썩 웃었다.
“아저씨는 이런 경험이 많으신가봐.”
“조건을 말해봐.”
정색한 조철봉이 남은 주스를 한모금에 삼키고는 선아를 보았다.
“얼마 줄까? 세시간에.”
“천불 주세요.”
선아도 이제는 정색하고 조철봉을 마주 보았다.
“아저씨가 방 잡아놓으면 그곳으로 갈게요.”
“천불이라.”
이번에는 조철봉이 눈을 가늘게 뜨고 선아를 보았다.
“좋아, 내가 김선일씨한테 연락을 하면 되겠지? 아니면 선아한테 직접 할까?”
“저한테 해주셔도 상관없어요.”
“연락처는?”
“제 휴대폰 번호 드릴게요.”
그러더니 선아가 유창한 영어로 웨이터를 부르더니 메모지와 펜을 부탁했다. 조철봉이 심호흡을 서너번 하는 동안 선아가 메모지에 전화번호를 적어 내밀었다.
“내일 아침까지 연락 주세요.”
“몇시까지?”
“응, 10시까지.”
“알았어.”
“그럼.”
자리에서 일어선 선아가 웃음띤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아저씨, 내일 봐요.”
“그래.”
선아가 바를 나가자 조철봉은 입맛을 다셨다. 아무래도 선아가 프로같은 것이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로비로 내려왔을 때 김상길이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 아가씨는 어디 있습니까?”
“조금 전에 바에서 헤어졌는데.”
“그럼 이야기는 잘 되셨겠지요?”
“아, 물론이죠.”
“과연.”
그때서야 긴장이 풀린 듯 상길이 어깨를 늘어뜨리며 웃었다.
“그럼 오늘 저녁 작업부터 준비를 해야죠.”
상길이 조철봉과 함께 호텔을 나오면서 손으로 옆쪽 건물을 가리켰다.
“사장님께서는 저녁 8시에 저기 로마클럽으로 오시지요. 제가 그분을 그곳까지 모시고 갈테니까요.”
“8시까지.”
“예, 그곳에서 피터장을 찾으십시오. 그냥 문 앞에서 피터장이라고 하면 나와서 안내를 해드릴 겁니다.”
“한국사람입니까?”
“예, 제 친동생이나 같은 놈입니다.”
걸어서 호텔 앞에 도착했을 때 상길이 주춤거렸으므로 조철봉은 주머니에서 미리 준비 해놓았던 100불짜리 지폐 10장을 꺼내 내밀었다.
“여기 1천불 있습니다.”
“아이구, 이렇게 미리 주시지 않아도 되는데요.”
하면서도 상길은 손을 뻗어 돈을 받았다.
“오늘 저녁 작업은 잘 될겁니다. 여자가 저한테도 은밀히 부탁을 했으니까요.”
그러고는 상길이 은근하게 웃었다. 상길과 헤어져 방갈로로 돌아왔을 때는 오후 5시가 되어가고 있었지만 서경윤과 영일은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다. 샤워를 마치고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든 조철봉은 베란다로 나와 목제 의자에 앉았다. 바닷바람이 이제는 서늘했고 해는 수평선 위에 붉은 불덩이처럼 걸쳐져 있었다. 바로 앞쪽은 모래사장이었고 파도 끝이 밀려왔다가 돌아간다.
“술 마셔?”
뒤에서 경윤이 불렀을 때는 그로부터 한 시간쯤이나 더 지난 후였다. 경윤은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서 있었는데 행복한 표정이었다. 그 뒤쪽에서 영일이 고무 튜브를 던지며 놀고 있다.
“오다가 호텔 쇼핑센터에서 비치 가운하고 티셔츠 몇개 샀어. 샌들도.”
경윤이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방 번호 적고 사인했는데 괜찮지?”
“당연하지.”
“자기 남방셔츠도 샀어.”
“어디?”
자리에서 일어선 조철봉이 빌라 안으로 들어가 소파와 탁자 위에 쌓인 쇼핑백들을 보았다. 한두개가 아니고 10여개나 된다.
“이거 입어봐. 한국보다 싸.”
경윤이 외제 상표가 붙은 남방셔츠를 조철봉에게 내밀었다. 화려한 색상으로 조철봉은 한번도 이런 셔츠를 입어 본 적이 없었다.
“음, 좋구나.”
머리를 끄덕인 조철봉이 손목시계를 보는 시늉을 했다.
“저녁 먹을 시간이 됐는데, 호텔 뷔페로 가는 게 어때? 해산물 요리가 좋다고 했어.”
“그래, 샤워하고.”
경윤이 머리를 끄덕이더니 영일을 앞세우고 화장실로 들어가며 말했다.
“자기야. 나, 행복해.”
“나도 그래.”
조철봉은 경윤과 영일이 화장실로 들어서자 손목시계를 보았다. 오후 6시10분이다. 얼른 먹이고 재워야만 한다.
조철봉이 로마 클럽의 입구에 다가섰을때는 저녁 8시20분이 되어갈 무렵이었다. 서경윤과 영일을 데리고 뷔페식당에서 나온 것이 8시였기 때문이다. 경윤에게 운동 삼아서 바닷가를 걷겠다고 한 터라 남방셔츠에 반바지 차림이었다. 입구에 서있는 사내에게 피터장하고 한마디 외치자 곧 한국인으로 보이는 30대 사내가 나왔다. 건장한 체격에 호감이 가는 인상의 사내였다.
“조사장님이시죠?”
대뜸 그렇게 물은 사내가 조철봉을 클럽안으로 안내했는데 덕분에 경비원들이 지켜선 입구는 티켓도 끊지않고 무사통과했다.
“자, 여기 앉으시죠.”
사내가 안내한 자리는 벽쪽에 붙여진 원탁 앞이었는데 3면이 칸막이로 막혔고 플로어로 향한 한쪽 면만 트인 곳이었다. 특등석이다. 클럽 안에는 그런 자리가 10여개 있을 뿐이었고 나머지는 사방이 트인 좌석이었다. 이미 쇼가 시작되어서 어둑한 무대 위에서는 반라의 서양여자 둘이서 음악에 맞춰 선정적인 춤을 추고 있었는데 그 사이에 브래지어를 벗어던져 젖가슴이 통째로 드러났다.
“술은 꼬냑으로 가져오겠습니다.”
피터장이 머리를 숙이더니 조철봉의 귀에 소근대듯 말했다.
“계산은 5백불입니다. 물론 입장료까지 포함해서 말이죠.”
“그런데 여자는?”
조철봉이 묻자 피터장이 어둠 속에서 흰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곧 옵니다. 상길 형님이 모시고 온다고 했습니다.”
피터장이 사라지자 조철봉은 홀안을 다시 둘러보았다. 3백평쯤 되는 홀에 손님이 가득차 있었는데도 조용한 분위기였다. 손님의 대부분은 서양인들이었고 동양인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그것도 나이든 사람들이 많았다. 무대 위의 여자 둘은 이제 전라가 되어 서로 몸을 비벼대었고 음악 대신 교성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조철봉에게는 전혀 실감이 나지 않는 장면이어서 곧 머리를 돌렸다. 그때 옆쪽에서 한쌍의 남녀가 나타났다. 김상일과 오후에 찍어놓은 흰셔츠의 여자였다.
“사장님, 먼저 오셨군요.”
30분이나 늦었는데도 상길은 태연하게 말하더니 여자를 소개했다.
“저, 이분이 윤미정씨.”
“안녕하세요.”
여자가 웃음띤 얼굴로 머리를 까닥 숙여 보였을 때 덧니가 살짝 드러났다.
“조철봉입니다.”
“그럼 이만 저는.”
그때 상길이 앉지도 않고 한걸음 물러서더니 조철봉을 향해 말했다.
“피터장한테 잘 말해 놓을테니까 염려하지 마십시오.”
그러더니 곧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췄으므로 조철봉이 여자에게로 머리를 돌리며 웃었다.
“사라질 때를 잘 아는 사람입니다. 성공할겁니다.”
“빠져 나오는데 애 먹었어요. 친구들하고 나이트 가기로 했거든요.”
“나도 와이프 저녁 먹이고 겨우 산책간다는 핑계를 대고 나왔습니다.”
“방갈로 번호가 S-14시죠?”
“예.”
“그림처럼 만들어졌더군요. 바닷가에 나오면 잘 보여요.”
“와이프도 좋아하더군요.”
“그런데 죄책감이 느껴지진 않으세요?”
그때 피터장이 술과 안주를 가져왔으므로 둘은 이야기를 멈췄다. 조철봉은 심호흡을 했다. 여자는 죄책감을 물었다.
“느끼지 않는다면 인간이 아니죠.”
조철봉이 정색하고 머리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도 인간이 아니고 기계겠지. 내 생각이 그렇습니다.”
그러고는 조철봉이 입술을 비틀고 웃었다.
“그래서 매일 반성하고 삽니다.”
무대 위에서는 이제 마술이 펼쳐지는 중으로 마술사의 손에서 비둘기가 나왔다. 조철봉이 손목시계를 보았다. 8시45분. 여기는 한국의 카바레가 아니다. 그동안 경윤이 일찍 잠이 들었다면 다행이겠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그래서 말인데.”
꼬냑을 잔에 따르면서 조철봉이 윤미정을 보았다. 미정은 세로줄 무늬가 있는 원피스 차림이었는데 어깨의 선이 둥글었고 드러난 팔은 적당하게 탄력이 있어 보였다. 원숙한 체격이다. 30대 중반쯤 되었을까? 이 나이부터 성에 적극적이 된다. 시선을 받은 미정이 피하지 않았으므로 조철봉의 가슴이 뛰었다. 이것은 도전해 보겠다는 표시나 같다. 해볼테면 해보라는 표정이다. 한모금 꼬냑을 삼킨 조철봉이 입을 열었다.
“여러가지 방법을 생각했는데, 첫째는 호텔방을 잠깐 빌리는 방법.”
미정이 눈만 깜박였고 조철봉은 말을 이었다.
“두번째는 바닷가 으슥한 곳에다 타월을 깔고 밤하늘의 별을 보면서 하는 방법.”
그러자 미정이 풀석 웃더니 술잔을 들어 한모금을 삼켰다. 무대위의 마술사는 이제 여자를 벽에 세워놓고 칼을 던지는 중이었다. 조철봉이 미정의 잔에 꼬냑을 채웠다.
“내가 필요한 건 섹스고 당신도 마찬가지가 아니라면 우리는 만날 필요가 없는거야. 다른 조건이 있어야 한다면 그냥 이 자리에서 헤어지는게 나아.”
“흥, 솔직한 분이시네요.”
미정이 웃음띤 얼굴로 말하더니 머리를 끄덕였다.
“하긴 서로 시간에 쫓기는 상황에서 어설프게 무드 잡다간 판이나 깨겠죠.”
“내가 대뜸 별빛보고 할거냐 따위로 말을 꺼낸건 이유가 있어요.”
다시 정색한 조철봉이 말을 이었다.
“옥석을 가리려는 의도지.”
“그게 무슨 말이에요?”
“미정씨가 김상길씨에게 고용된 프로인가를 알아보려고.”
“흐응.”
다시 코웃음을 쳤던 미정이 이해가 간다는듯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러네. 가이드 아저씨가 장난을 칠 소지가 있겠네요.”
“혹시 김상길씨한테 소개비 주었습니까?”
“아뇨. 전혀.”
“부탁을 했지요?”
“네, 했어요.”
“어떻게?”
그러자 미정이 눈을 흘기는 시늉을 했지만 대답은 했다.
“멋있는 남자 소개시켜 달라고, 그랬더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데요.”
“나에 대해서는?”
“방갈로에 투숙한 잘나가는 사람이라고, 매너도 좋다고 하더군요. 방갈로 번호까지 말해 주었어요.”
조철봉이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이로써 윤미정은 김상길과 계약한 프로가 아니라는 것이 분명해졌다. 오후에 바에서 만났던 이선아와는 다른 것이다. 마음이 가벼워진 조철봉이 다시 손목시계를 보는 시늉을 했다.
“자, 그럼 결정을 하실까?”
조철봉이 미정에게 물었다.
“우리가 두시간쯤 즐길 장소를.”
그때 윤미정이 가볍게, 마치 산책이나 하자는 것처럼 말했다.
“바닷가로 가요.”
그러고는 덧붙였다.
“낮에 좋은 데를 봐뒀어.”
놀란 조철봉이 머리를 들고 미정을 보았다.
“밤에 하려고?”
“만일의 경우에.”
“이것 봐라.”
“거기 방갈로 S-14 근처야.”
“어렵쇼.”
“좋지 뭐. 일 끝내고 바로 처자식한테 돌아갈 수 있어서.”
그러고는 미정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 가요. 시간 낭비할 필요없어.”
세상에 이런 고마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가려운 곳 골라 긁어주는 것 같은 미정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감동한 조철봉이 서둘러 따라 일어섰다. 분위기 있는 클럽이라고 했지만 둘은 제대로 구경도 하지 못했다. 밖으로 나왔을 때 미정이 조철봉의 팔짱을 꼈다. 자연스러운 동작이었다.
“스릴이 있긴 해.”
미정이 몸을 붙이고 걸으면서 말했다.
“남극의 밤에 찬란한 별빛 밑에서 저지르는 불륜이.”
그러고는 짧게 목을 울리며 웃었다.
“더욱이 남자의 처자식을 옆쪽 방갈로에 두고 말이야.”
“도대체 어딘데? 그런 데가 어디있어?” 하고 조철봉이 제가 제 말을 들어도 멋대가리 없이 물었지만 미정은 대답 대신 팔을 당겨 안내를 했다. 호텔을 옆으로 돌아 바닷가로 나오자 서늘한 바람이 피부에 닿았다. 바닷가는 짙은 어둠에 덮여 있었고 드문드문 관광객이 왕래할 뿐 조용했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파도소리만 높아졌고 관광객은 더 드물어졌다. 그들은 이제 방갈로가 세워진 호텔 영역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저기야.”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적막해진 모래사장을 걷던 미정이 낮게 말하더니 턱으로 앞쪽을 가리켰다. 조철봉의 숙소인 S-14호 방갈로였다. 그때 미정이 조철봉의 팔을 조금 당겼다.
“방갈로 앞에 놓인 배.”
“으음.”
시선을 방갈로 앞으로 돌린 조철봉의 입에서 신음이 뱉어졌다. 폐선이다. 길이가 5미터쯤 되는 목선은 페인트를 칠했지만 바닥이 없다. 장식용으로 방갈로 앞쪽에 전시해놓은 것이다.
“어때? 근사하지?”
미정이 조철봉을 올려다보면서 하얀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밤에 방갈로에서 저 배까지 나오지는 않겠지?”
“그렇군, 잘 봐두었군.”
폐선으로 다가가면서 조철봉이 방갈로를 훑어보았다. 응접실의 불은 환하게 켜놓았지만 침실은 어두웠다. 서경윤은 잘 때 불을 끈다.
“하필 이게 내 집 앞에 있다니.”
폐선으로 다가가 선 조철봉이 쓴웃음을 지었다. 방갈로와의 직선거리는 약 30미터, 소리치면 다 들릴 것이다.
“여기가 좋아.”
폐선 옆의 모래 위에 앉으면서 미정이 조철봉을 올려다보았다. 방갈로에서 흘러나온 불빛에 눈동자가 반짝였다.
“여기는 방갈로 침실쪽에서 보이지 않을 거야.”
그러고는 미정이 물었다.
“어떻게 할 거야?”
조철봉은 깊게 숨을 마셨다가 뱉었다. 습기가 섞인 바다 공기가 폐에 가득 찼다가 뿜어졌다. 파도소리가 들리면서 흰 거품이 밀려왔다가 사라졌다.
조철봉은 머리를 돌려 다시 방갈로를 보았다. 응접실의 불을 환하게 켜 놓은 것은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표시인 것처럼 느껴졌다.
“싫어.”
이렇게 말한 조철봉이 덧붙였다.
“여기서는.”
“그럼 어디서?”
어둠 속이었지만 얼굴에 실망스러운 기색을 띤 미정이 묻자 조철봉은 머리를 저었다.
“다음에.”
그러자 눈치를 챈 미정이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에 묻은 모래를 털었다.
“그럼 갈게.”
“미안해.”
조철봉이 낮게 말하고는 폐선의 한쪽 끝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내가 미친 놈이긴 하지만 이렇게까지 하기는 싫어서 그래.”
그러나 미정의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이미 몸을 돌려 어둠 속으로 사라져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철봉은 그때서야 머리를 들고 밤하늘을 보았다. 아까 말했던대로 남국의 밤하늘은 맑았다. 별들이 떨어져 내릴 것처럼 가깝게 반짝이고 있었으며 바닷바람은 시원했다. 장소가 무슨 상관인가? 지금까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았던 조철봉이다. 그러나 그 빌어먹을 장소가 처자식과 30미터 거리의 모래밭이라. 미정에게는 자극이 될지 모르겠지만 이쪽은 머리끝이 곤두설 정도로 역겨운 일이었다. 그렇다고 구차하게 장소를 옮기기도 싫었다. 아무리 철면피로 살아왔지만 내 자식의 30미터 앞에서 짐승 노릇을 하다니, 정욕에 눈이 뒤집힌 미정이 장소를 잘못 골랐다.
“으음, 좋구나.”
이제는 몸을 반쯤 눕혀 밤하늘을 올려다 보면서 조철봉은 탄성을 뱉었다. 파도소리는 음악처럼 리듬이 있었으며 조금 습기가 밴 바다 냄새는 향기로웠다. 그러자 갑자기 가슴이 미어진 조철봉이 머리를 돌려 방갈로를 보았다. 응접실의 불만 환하게 켜진 방갈로는 조용했다. 한동안 그쪽을 바라보던 조철봉의 두눈에 물기가 고였다. 가끔 치열한 섹스 도중에 가슴이 텅 빈 느낌과 함께 눈물이 쏟아진 경우가 있었는데 지금이 그때와 비슷했다. 이윽고 두줄기의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으나 조철봉은 그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래, 난 걸귀다. 귀신붙은 놈이야.”
두손으로 폐선의 난간을 짚고 상반신을 비스듬히 눕히면서 조철봉이 혼잣소리를 했다. 상반신을 눕히자 밤하늘의 별들이 금방이라도 쏟아져 내릴듯이 바로 위에서 깜박였다.
“채우려고 채우려고 하다가 진이 빠져서 죽겠지.”
조철봉이 하늘에 대고 말했다.
“다 부질없는 짓이고 어떤 지랄을 해도 안된다는 걸 알아. 난 그런 놈이야.”
사람마다 인생이 다르다. 수양을 쌓은 사람이야 절제하고 노력해서 평정을 유지하며 욕심을 줄여 스스로 행복을 찾겠지만 어디 다 그럴 수가 있겠는가? 쫓기고 있는 것처럼 정신없이 내달리기만 하다가 기진해서 쓰러지는 사람도 많은 것이다. 그것이 열심히 살다가 간 것처럼 보일지는 몰라도 겪는 입장에서 보면 처절하고 무섭고 외롭다. 부질없는 줄 알면서도 다시 시작해야 그것들을 조금이라도 잊을 수가 있는 것이다. 그것이 걸귀 심성의 강안남자의 운명이다. 이윽고 손등으로 눈물을 닦은 조철봉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늘은 발리의 첫날밤이다. 침실로 들어가 서경윤을 안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바로 경윤의 코 앞에서 정사를 벌이려다 만 것을 경윤이 상상이나 하겠는가?
“왔어?”
조철봉이 응접실로 들어섰을 때 열려진 침실에서 서경윤의 목소리가 울렸다. 문을 소리없이 열고 닫았는데도 잠에서 깨어난 모양이었다. 밤 10시가 조금 덜 된 시간이었으니 늦은 시간은 아니다.
“어, 저쪽 백사장 끝까지 갔다 오느라고.”
침실에다 대고 조철봉이 말하자 경윤이 응접실로 나왔다. 티셔츠에 반바지 차림이었다. 멋을 부린답시고 배꼽이 드러나도록 짧은 셔츠에다 반바지는 팬티처럼 짧았다. 그러나 살집이 불어서 차마 밖으로는 나가지 못하고 집안에서만 입고 돌아다니는 것이다.
“어머, 10시밖에 안되었네.”
앞에 앉은 경윤이 두 팔을 치켜들고 하품을 하면서 말했다.
“아유, 잘잤다. 너무 피곤했던가봐.”
“하긴 비행기 타고 와서 곧장 바닷가로 뛰어가 서너시간이나 놀았으니까.”
“너무 좋아, 사람이 북적대지도 않고.”
“좋다니 돈 아깝지 않구먼.”
“그런데.”
경윤이 정색하고 조철봉을 보았다.
“무슨 고민 있어? 왜 얼굴에 수심이 끼었어?”
이것 봐라? 하면서 조철봉은 심호흡을 했다. 그러나 방갈로 앞에서 밤하늘을 쳐다보며 울었을 줄은 죽었다가 깨어나도 모를 것이다.
“내가 조금 피곤해서 그런가봐.”
“그럼 오늘밤은 안돼?”
“뭘?”
뻔히 알면서도 조철봉은 시치미를 뗀 얼굴로 경윤을 보았다. 이런 경우의 경윤은 컨디션이 최상이라는 증거였다. 지금도 들떠있는 것이다. 그러자 경윤이 눈을 흘겼다.
“한번 안할 거야?”
“이 여자가 이젠 뻔뻔해졌어.”
“하고 싶어.”
경윤이 다리 한쪽을 꼬고 앉았으므로 언덕 밑의 다리가 통째로 드러났다. 살집이 충실한 다리여서 성적 매력은 있다. 경윤이 웃음띤 얼굴로 조철봉을 보았다.
“와이프가 그러면 남편은 오히려 위축이 된다면서?”
“사람 나름이지.”
“나하고 하면 재미없지?”
“난 너밖에 없어.”
“턱도 없는 거짓말 말고 정직하게 대답해봐. 내가 뒷소리 안할 게.”
“이 여자가 유도 심문을 하는구먼. 난 너하고의 경험밖에 없어.”
“내 그건 큰편이야?”
“몰라.”
“당신 건 큰 편이야.”
불쑥 경윤이 그렇게 말했으므로 조철봉은 다시 심호흡을 했다. 경윤은 지금 분명히 비교를 한 것이다. 두번째 남편 이종학이나 대머리 학원 원장, 그리고 또 있을 것이다. 그때 경윤이 말을 이었다.
“당신 것이 제일 컸어. 그리고 기술도 제일 뛰어났고.”
“이런 망할.”
입에서 더 심한 욕설이 터져나올 뻔했지만 조철봉은 겨우 그렇게 말했다. 그러고는 쓴웃음을 짓고는 경윤을 보았다.
“어쩔 작정으로 그러는 거야?”
“다 당신이 아는 일이야. 그리고 내 말은 사실이고.”
이번에는 경윤도 정색을 하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할테면 들어와.”
그러고는 경윤이 엉덩이를 흔들며 침실로 향하더니 문 앞에서 멈춰섰다.
“난 떳떳해. 그래서 지난 일을 당당하게 말할 수 있어.”
머리만 돌린 경윤이 차분하게 말했다.
(975)인간의 조건-1
다음날 오전, 룸서비스로 아침을 시켜 먹은 세 식구는 바닷가로 나왔다. 오늘도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으며 비치 파라솔 밑의 그늘은 시원했다.
“아, 좋다.”
그늘 밑의 등나무 줄기로 만든 안락의자에 몸을 눕히면서 경윤이 탄성을 뱉었다. 영일이 엄마 흉내를 내어 옆쪽 의자에 누웠다가 몇초도 안돼 일어났다.
“행복해.”
두다리를 길게 뻗으면서 발가락을 기역자로 굽힌 경윤이 환해진 얼굴로 조철봉을 보았다. 어젯밤 경윤의 몸은 육체가 맛볼 수 있는 쾌락의 절정까지 닿았다. 조금도 아쉬운 느낌이 들지 않고 충만한 상태가 되었으니 그렇다고 봐야 할 것이었다. 만족한 밤을 보낸 경윤의 얼굴은 말 그대로 행복해 보였다.
“나, 한숨 잘래.”
경윤이 기지개를 켜면서 말했다.
“당신이 영일이 좀 봐줘.”
“그러지.”
선선히 머리를 끄덕인 조철봉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백사장에는 사람들이 꽤 있었지만 붐비지는 않았다. 더구나 영일은 일곱살이어서 제 앞가림은 한다.
“아빠, 나, 저기 가서 놀래.”
영일이 바다쪽을 가리키며 말하자 조철봉이 머리를 끄덕였다.
“멀리 가지 말아라.”
눈을 감은 경윤은 부드러운 표정을 짓고 옆에 누워 있었는데 금방 숨소리가 편안해졌다. 심호흡을 한 조철봉도 경윤의 옆에 놓인 안락의자에 몸을 눕혔다. 그때였다. 조철봉은 왼쪽 시야의 끝부분에서 얼쩡대는 한 사내를 보았다. 이쪽으로 반쯤 몸을 돌려 옆모습을 보이고 있었지만 김상길이다. 상길이 이곳까지 찾아온 것이다. 몸을 일으킨 조철봉이 힐끗 옆에 누운 경윤을 보았다. 경윤은 나른한 몸을 빈틈없이 눕히고는 잠이 든 것 같았다. 소리없이 일어난 조철봉이 그쪽으로 다가가자 상길은 발을 떼어 옆쪽 방갈로 앞까지 유인했다. 경윤의 시야에서 완전히 벗어나려는 의도였다. 조철봉이 다가가 섰을 때 바다쪽을 바라보고 선 상길이 입을 열었다.
“어제 그냥 보내셨더군요.”
“기분이 나지 않아서.”
예상하고 있었던 말이었으므로 조철봉이 금방 대답했다.
“내 방갈로 앞에서 그걸 하자고 해서 말이오.”
조철봉이 턱으로 폐선쪽을 가리켰다.
“그게 어디 사람이 할 짓인가? 처자식이 바로 코 앞에 있는데 말이야.”
“흐흐.”
짧게 웃은 상길이 머리를 돌려 조철봉을 보았다.
“그럼 오늘 꽃무늬 셔츠는 어떻게 하시렵니까? 어제 꽃무늬 셔츠도 남자를 찼더군요. 물론 그럴만한 놈을 붙여 주었지만 말입니다.”
“지금 어디 있어요? 그 여자.”
“연락하면 바로 옵니다.”
“오늘도 바쁘겠군.”
“이선아도 마음에 들지 않으셨던 모양이지요?”
“걔는 나중에 합시다.”
“마음대로 하시지요. 기회는 얼마든지 만들어 드릴 수가 있으니까요.”
그러자 힐끗 경윤이 누워 있는 곳에 시선을 준 조철봉이 이번에는 영일을 찾았다. 착한 영일은 경윤이 누워있는 곳에서 10미터쯤 떨어진 모래 위에 모래성을 쌓고 있었다.
“그럼 꽃무늬 셔츠를 만납시다.”
조철봉이 정색하고 말했다.
“점심 때 만났으면 좋겠는데 내 가족들을 방갈로에 넣고 말이오.”
조철봉이 바로 옆에 위치한 호텔의 라운지로 들어섰을 때는 오후 2시 정각이다. 그때는 서경윤과 영일이 다시 점심을 룸서비스로 시켜먹은 후에 식후의 포만감까지 겹쳐져 방갈로 밖에 나오지도 못하게 된 상황이었다. 그래서 오늘 낮은 마음에 여유가 있다. 조철봉이 산책하러 나간다고 하자 경윤은 천천히 놀다 오라고까지 말해준 것이다. 라운지 안에는 꽃무늬 셔츠가 이미 기다리고 있었는데 김상길은 보이지 않았다. 꽃무늬 셔츠는 오늘 흰색 바탕에 푸른 무늬가 들어간 원피스 차림이었고 잘 어울렸다. 조철봉과 시선이 마주치자 앉은 채 눈웃음을 쳐 보이는 태도도 자연스러웠다. 적당히 화장기가 있는 얼굴에 어깨까지 늘어뜨린 파마 머리가 화사한 분위기를 풍겨주고 있었다. 조철봉이 앞쪽 자리에 앉았을 때 여자가 웃음띤 얼굴로 말했다.
“어젯밤 윤미정이 사건 들었어요.”
놀란 조철봉이 눈만 크게 떴을 때 여자는 말을 이었다.
“미정이가 방갈로 앞에서 하자고 했다면서요?”
조철봉이 마침내 쓴웃음을 지었다.
“역시 내가 안하기를 잘했군. 그래서 점수를 딴 것 같은데.”
“전 박진화라고 합니다.”
“조철봉입니다.”
“미정이하고는 제일 친해요.”
“하지만 경쟁하는 관계겠지요. 그렇죠?”
“흐흐.”
짧게 웃은 진화의 표정을 본 조철봉이 심호흡을 했다. 불쑥 정욕이 솟구쳤기 때문이다. 이런 곳에서는 가식도 필요없고 쓸데없이 시간을 끌 이유도 없다. 서로 눈이 맞으면 이름만 아는 상태에서 몸을 섞는 것이다. 조철봉이 은근한 시선으로 진화를 보았다.
“이 호텔 방을 잡을까?”
“그래요.”
선선히 머리를 끄덕인 진화가 부드러운 시선으로 조철봉을 보았다.
“시간이 언제까지 있어요?”
“서너시간 정도. 저녁 먹기 전까지만 들어가면 되겠지.”
“충분하네.”
그러더니 진화가 한쪽 눈을 살짝 감았다가 떴다.
“세번은 하겠네.”
“지금까지 토끼들만 만난 모양인데.”
정색한 조철봉이 의자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나는 그 시간을 한번으로 때워. 그런 말은 나에 대한 모욕이라고.”
“어머나.”
눈을 크게 뜬 진화가 조철봉을 올려다 보았다.
“정말?”
“이따 겪어보면 알거 아냐?”
그러고는 조철봉이 몸을 돌리며 말했다.
“조금만 기다려. 내가 키 받아 올테니까.”
진화가 고분고분 맞장구를 치면서 호흡을 맞춰 주었지만 아직 어색한 분위기는 다 지우지 못했다. 눈 주위가 붉게 상기되어 있는 것도 그 증거가 될 것이다. 온갖 부류의 여자를 겪어본터라 조철봉은 몇마디 대화만 나눠봐도 그 여자의 전력을 대충은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진화는 겉으로는 전문가인 척 대꾸를 했어도 이런 경험이 별로인 풋내기가 분명했다. 어젯밤에 만난 미정과 친구 사이였지만 행실은 다르다. 조철봉이 아래층 프런트에서 키를 받아들고 왔을 때 진화는 그대로 앉아 있었지만 초조한 표정이었다. 초짜들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여유를 보이다가도 막상 닥치면 불안해한다.
방은 라운지 바로 밑층이었으므로 둘은 비상계단으로 내려가 양탄자가 깔린 복도로 들어섰다. 호텔 복도는 대개 붉은색이다. 푸른색이나 노란색 따위가 없는 것은 식당에 식욕을 돋우는 분홍색 종류를 배색해서 매출이 올랐다는 것과 같은 맥락이 될 것이다. 붉은색 양탄자가 깔린 복도를 걸어 방 앞에 섰을 때 조철봉이 키를 넣으면서 박진화를 보았다.
“어때? 내가 안고 방에 들어갈까?”
“싫어.”
어깨를 흔든 진화가 주위를 둘러보더니 문이 열린 순간 조철봉을 어깨로 밀면서 방으로 들어갔다.
“어머, 스위트룸이네.”
방안에 들어선 진화가 탄성을 뱉었다. 그러고는 창으로 다가가 커튼을 걷자 푸른 바다가 눈앞에 가득 펼쳐졌다.
“와아.”
베란다의 대형 유리문을 열면서 진화가 소리쳤다.
“멋있다.”
베란다로 나온 진화가 두 손을 위로 치켜들더니 심호흡을 했다.
“자기 멋있어.”
조철봉이 진화의 뒤로 다가가 뒤에서 허리를 감아 안았다.
“너도 볼수록 섹시한 여자다.”
하반신을 뒤에서 딱 붙이자 어느덧 딱딱해진 철봉이 진화의 엉덩이에 닿았다.
“분위기가 있는 여자라고.”
“흐응.”
진화가 상반신을 뒤로 젖히면서 머리를 틀어 조철봉을 보았다. 눈동자가 위로 치켜져 있는 모습이 요염했다.
“키스해줘.”
조철봉도 머리를 숙여 진화의 입술을 덮었다. 그러자 진화가 두손을 올려 조철봉의 목을 감아 안았다. 조철봉은 진화의 혀가 내밀려 온 순간 온몸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두손으로 진화의 젖가슴을 움켜쥐었던 조철봉의 가슴이 다시 내려앉았다. 진화는 브래지어도 차지 않았기 때문이다. 탄력있는 젖가슴이 두손에 가득 쥐어지자 조철봉의 입에서는 저절로 탄성이 뱉어졌다.
“으으음.”
진화의 젤리 같은 혀가 꿈틀대더니 이윽고 조철봉의 입에서 빠져나갔다.
“자기야.”
진화가 가쁜 숨을 고르면서 여전히 그 자세 그대로인 채 조철봉을 불렀다. 대답대신 조철봉이 젖가슴을 더 세게 움켜쥐자 진화가 몸을 비비면서 말했다.
“나, 거의 반년이 되도록 못했어.”
“그게 무슨 말이야?”
“나, 별거중이야.”
진화가 엉덩이를 세게 밀착시켜 조철봉의 철봉을 더 강하게 느끼면서 말했다.
“이혼 수속중이라고.”
“왜?”
“성격차이지 뭐.”
“음.”
“그리고 그것도 시원치 않고.”
그러고는 진화가 엉덩이를 다시 세게 비벼대었으므로 조철봉의 입에서 신음이 터져나왔다.
“으음.”
“나, 천천히 해줘.”
진화가 눈을 감으면서 말했다. 그러고는 몸을 돌려 조철봉을 정면으로 보았다.
“아주 천천히, 응?”
“그래, 일분에 한번씩 넣어주지.”
조철봉이 진화의 엉덩이를 당겨 안으면서 말했다.
“그런 염려는 하지마. 내가 알아서 할테니까 말이야.”
“그럼 침대로 가.”
진화가 몸을 떼면서 말했다.
“나, 씻고왔어. 그냥 해도 돼.”
침대로 다가간 박진화는 멈춰서더니 원피스를 벗었는데 놀랍게도 바로 알몸이 드러났다. 원피스 외에는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것이다. 밖은 벌건 대낮이었으며 커튼을 치지 않은 방안은 햇살이 환하게 비춰 떠있는 먼지까지 보였다. 알몸이 된 진화가 그래도 수줍은지 허리를 조금 굽히고는 두손으로 아래쪽을 가렸다. 다시 두 눈 주위가 붉게 물들었다.
“보지마.”
진화가 그렇게 말했지만 그것은 보라는 말이나 같다. 다가선 조철봉이 천천히 옷을 벗었다. 셔츠와 바지, 그리고 맨 마지막에 팬티를 벗어던질 때까지 진화는 그 자세 그대로 서 있었는데 눈도 깜빡이지 않고 조철봉의 몸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이윽고 알몸이 된 조철봉이 정면에 서자 진화는 입안에 고인 침을 삼키더니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크네.”
“이런 게 들어가본 적이 있어?”
조철봉이 묻자 진화는 머리를 저었다.
“없어.”
진화는 그때서야 정신이 든 듯 침대 위로 올라가 몸을 눕혔다. 그러나 시트로 몸을 가리지도 않았으므로 진화의 알몸은 더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조철봉은 열기띤 눈으로 진화를 내려다보았다. 초짜처럼 보였던 진화는 의외로 방에 둘만 있게되자 적극적인 분위기로 바뀌었다. 마치 홀린 것 같다. 침대에 오른 조철봉은 진화의 몸을 안았다.
“자기야.”
들뜬 목소리로 말한 진화가 두팔로 조철봉의 목을 감아 안았는데 이미 눈에 초점이 잡혀있지 않았다.
“아우, 미치겠어.”
반년 굶었다는 말이 사실이라면 성숙한 몸이 미칠 만했다. 조철봉은 서두르지 않았다. 진화같은 상황의 몸이면 딱 1분의 작업으로 절정에 오르도록 만들 수가 있는 것이다. 그것을 진화는 한시간이 지난 것처럼 느낄 것이었다. 조철봉은 머리를 숙여 진화의 젖가슴을 입안에 가득 넣었다. 그러고는 입안에 든 젖꼭지를 입술로 부드럽게 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손 하나를 뻗쳐 진화의 허벅지 사이를 문질렀는데 골짜기 쪽으로는 접근하지 않았다.
“아아아.”
진화의 반응은 금방 왔다. 허리를 치켜든 진화가 거침없는 탄성을 뱉어놓더니 몸을 비틀었다. 그러고는 두손으로 조철봉의 손을 잡더니 자신의 골짜기로 이끌었다. 그곳을 어떻게 해달라는 표시인 것이다. 그러나 조철봉은 서두르지 않았다. 진화의 손을 털어낸 조철봉이 다시 허벅지 사이를 문지르자 신음이 더 높아졌다.
“그만, 이제 해줘. 응?”
진화가 소리치듯 말하더니 조철봉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열에 들뜬 표정은 간절해져 있었다. 그때서야 조철봉은 진화의 젖가슴에서 입을 떼고는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입술이 배꼽을 거쳐 약간 볼록한 언덕에 머물렀을 때 긴장한 진화가 조철봉의 머리칼을 두손으로 움켜쥐었다.
“자기야.”
가쁜 숨소리에 섞인 진화의 목소리는 떨렸다.
“빨리 해줘, 응?”
그때 조철봉의 입술이 골짜기로 내려왔고 그순간 진화의 몸은 경직되었다. 마치 뜨거운 나무토막 같았다. 그러나 입에서는 천장까지 닿을 것 같은 숨소리에 가늘게 신음이 섞여 있다. 조철봉은 샘에 입술을 붙였다. 그러자 넘쳐나는 샘물이 얼굴까지 흠뻑 적셨다.
그 순간 박진화의 입에서 절규같은 신음이 터져 나왔으며 하반신이 번쩍 들렸다. 조철봉의 머리를 낀 채 하반신이 솟구쳐진 것이다. 조철봉은 이제 진화가 곧 절정으로 치솟아 오를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아, 아, 여보.”
별거중이라는 진화의 입에서 남편을 부르는 외침이 뱉어졌다. 그때 조철봉의 혀끝이 샘 안으로 파고 들었으며 놀란 진화가 두손으로 조철봉의 머리칼을 움켜 쥐었다가 폭발해버렸다. 절정에 오른 것이다. 세상에 사람이 많은 것처럼 절정의 표현도 각양각색이다. 지금까지 조철봉이 수백의 여자를 겪었지만 절정의 표현은 다 달랐다. 같을 리가 있겠는가? 신은 개체의 운명을 모두 다르게 창조하신 것처럼 그것도 마찬가지다. 진화가 갑자기 숨을 멈춘 것 같더니 곧 온몸을 굳히면서 길고 굵은 신음을 토해 내었는데 바로 절정의 순간이었다. 대개 이 순간은 30초에서 길어야 1분쯤 지속되는데 사람에 따라 10초 미만도 있으며 1분 이상도 존재한다. 이것은 조철봉의 경험에 의한 수치였으니 의학적인 통계나 근거는 없다. 만일 아니라고 하는 인물이 있다면 조철봉은 그에게 이렇게 답변할 것이다.
“잘 알았으니 당신이 이 길로 매진해 보시라고.”
그리고 시간이 있다면 덧붙일 것이다.
“스톱워치 들고 엎드린 당신을 상상해 보시라고. 그런 일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고.”
조철봉이나 되니까 절정의 시간을 재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 버려야 한다. 아무나 강안남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아이고오.”
이윽고 온몸을 늘어뜨리며 진화가 땅이 꺼질듯한 신음을 뱉었으니 이것은 절정에서 깨어나고 있다는 신호였다. 그와 동시에 숨이 가팔라지면서 온몸에서 땀이 솟아났다. 이것은 등산을 하면서 가파른 능선을 막 넘었을 때의 컨디션과 같다. 막 올랐을 때 정상에서 잠깐 혼절 상태에 있다가 깨어나면서 막혀있던 숨통이 터진 상황이랄까.
“아아아아.”
숨소리에 섞여 진화가 신음을 길게 뱉어냈는데 아직 절정의 여운을 느끼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때 조철봉이 상반신을 세우고 진화의 몸 위로 올라갔다. 정상위의 자세였다. 진화는 사지를 늘어뜨린 채 거의 정신이 나간 상태였으므로 조철봉의 행동을 의식하지 못했다. 조철봉은 진화의 몸 안으로 천천히 철봉을 넣었다. 샘은 이미 넘쳐 흐르고 있었는데 갑작스러운 충만감에 놀라 벽의 세포가 위축되면서 동시에 진화의 입에서 비명이 터졌다.
“아앗”
번쩍 눈을 뜬 진화가 두손을 들어 조철봉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철봉이 끝까지 들어간 상태였고 다시 진화의 입에서 신음이 터졌다.
“아아아.”
순간 머리끝이 곤두서는 것같은 쾌감이 느껴졌으므로 조철봉의 입에서도 억누른 신음이 뱉어졌다. 성관계에서 지금 이 순간이 가장 생생한 자극과 함께 쾌감을 실감케 되는 것이다. 첫 찌름, 또는 첫 합(合), 첫 부딪힘의 순간을 기억해 둘 수가 있다면 주말의 명화 따위를 보면서 시간을 죽이지는 않게 될 것이다. 본 영화를 또 보면서 천금같은 시간을 낭비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진화와의 첫 합은 감동적이었다. 샘물은 흘러 넘쳤지만 벽은 탄력이 있었으며 건강했다. 단한번 미끄러져 들어갔을 뿐인데도 그 사이에 수십번 교감이 일어났던 것이다.
조철봉이 철봉을 당기는 순간, 그렇다, 쉽게 말해서 빼는 순간이라고 하자. 그때 박진화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뱉었는데 그대로 적으면 이렇다.
“아유무르카빨.”
당연히 10개국어 동시통역사라고 해도 알아듣지 못할 말이었지만 조철봉은 이해했다. 빨리 넣어달라고 한것이다. 열에 들뜬 진화가 엉덩이를 치켜들며 마치 먹이를 달라는 새 새끼처럼 그러고 있었는데 지금의 강도는 조금 전보다 다섯배는 더 강했다. 따라서 이번의 절정은 조금전보다 몇배나 더 강력할 것이었다. 조철봉은 다시 철봉의 머리를 샘 끝에 대고는 3초쯤 기다렸다. 그동안 진화가 몸부림을 치면서 엉덩이를 치켜드는 동작을 반복했는데 철봉을 넣어달라는 시늉이었다.
“얼넝나죽요악.”
하고 진화가 땀 투성이가 된 얼굴로 소리쳤다. 얼른 넣지 않으면 죽는다는 말과 비슷하지 아니한가? 인간의 언어는 이렇게 생성이 되었다. 다급한 상황에서 멋대로 나온 말이 진화되어 언어가 되는 것이다. 조철봉은 천천히 철봉을 넣었다.
“아아아아.”
철봉에 두드러진 핏줄하나까지 피부의 수만개 세포와 모두 다 부딪쳐 교감을 이룬 것처럼 진화가 환호했다. 이제 진화의 입에서는 말도 튀어나오지 않았다.
빼고 넣고, 다시 빼고 넣고를 반복하던 조철봉이 문득 머리를 들었을 때 진화가 흐느껴 울고 있었다. 진화의 울음 때문에 머리를 든 것은 아니다. 이미 진화는 절정의 바로 직전 단계까지 접근해 있어서 샘의 벽은 무섭게 박동하는 중이었으며 철봉의 미세한 움직임에도 강하게 반응했다. 이런 상태라면 몇초 후에는 폭발할 것이었다.
“어어어어.”
하고 진화가 절규같은 탄성을 뱉더니 조철봉의 목을 두팔로 고쳐 감았다. 폭발할 준비를 하는 것이다. 조철봉은 숨을 들이켰다. 지금 같이 폭발하면 안된다. 강력한 흡인력으로 진화의 샘이 철봉을 빨아들이고 있었으므로 일순간만 방심해도 철봉은 대포를 발사할 것이었다. 안된다. 이를 악문 조철봉이 눈을 부릅뜨고 앞쪽의 벽을 보았다. 인간의 조건은 무엇인가? 바로 생각하고 억제할 수 있는 능력을 갖췄다는 것이 첫번째 조건이 될 것이다. 짐승이나 그냥 넣고 촐싹거리다가 쏘는 것이다. 쏘는 것만이 목적이니까. 그러나 인간은 다르다. 넣기 전에도 수만가지의 방법으로 감정을 고조 시킬 수가 있으며 넣는 방법도 그만큼이나 된다. 자세로 말할 것 같으면 36가지는 기본이고 조금 어렵지만 82가지 방법까지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생각한다. 개가 섹스를 하면서 생각을 하겠는가? 닭이 교미를 하면서 고등학교 교가를 생각하고 부르겠는가? 그것은 미친 닭이다. 아니, 닭이 고등학교를 다니지 않았을테니 그런일은 일어나지도 않는다. 조철봉은 철봉을 다시 힘차게 넣으면서 독도를 떠올렸다. 독도는 우리땅이라는 노래가 오래 전부터 유행 됐는데 그때도 일본과 독도 문제로 분쟁이 일어났었다. 그런데 지금은 일본의 시마네현이라는 곳에서 ‘다케시마의 날’이라는 조례를 정하고 독도를 제영토라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아유우우우.”
마침내 진화가 절정에 오르면서 머리를 힘껏 젖히고는 악을 썼다. 샘이 급작스럽게 위축되면서 철봉을 죄는 힘이 강혀졌으므로 조철봉은 이를 악물었다.
“안돼.”
이것은 일본 정부에 대고 조철봉이 뱉은 말이다. 그러자 발사되려던 대포가 보류되었다.
생각하는 동물인 조철봉이 인간으로서 성취감을 느낄 때 중의 한 장면이 바로 지금이다. 지금이 어느 때인고 하니 섹스를 나눈 여자가 쾌락의 정점에 닿고나서 늘어져 있는 때인 것이다. 그리고 본인은 대포를 발사하지 않았다. 인간으로서의 자긍심까지 함께 느낄 수 있는 상황이다. 아직도 한낮이다. 환한 햇살이 방안으로 질펀하게 비쳤고 침대 위에 네 활개를 펴고 늘어진 박진화는 아직도 가늘게 앓는 소리를 내면서 눈을 뜨지 않았다. 흰 시트 위에 펼쳐진 알몸의 아랫배가 아직도 가쁘게 오르내리는 중이었다. 조철봉은 소리없이 침대에서 일어나 욕실로 들어섰다. 샤워를 마치고 밖으로 나왔을 때 진화는 침대에서 일어나 앉아 있었는데 시트로 하반신만 가렸을 뿐이었다.
“자기야.”
시선이 마주치자 진화가 수줍은 표정으로 말했다.
“나, 재미 없었지?”
“그게 무슨 말이야?”
정색한 조철봉이 다가가 침대 끝에 앉았다. 그러고는 진화의 젖가슴을 부드럽게 움켜쥐었다.
“왜 그렇게 물어?”
“내가 내 욕심만 차린 것 같아서 그래.”
진화가 젖가슴을 움켜쥔 조철봉의 손을 덮더니 시선을 내렸다. 볼이 붉어져 있었다.
“자기한테는 신경을 못썼어.”
“난 좋았어.”
젖가슴을 가볍게 문지르면서 조철봉이 말했다.
“난 자연스럽게 부딪치는 것이 좋아. 맞추려고 억지로 노력하면 어색해져.”
“정말 좋았어?”
시선을 든 진화가 묻자 조철봉이 머리를 끄덕였다.
“특히 네 샘이.”
“서툴렀지?”
“아니라니까.”
“자기야.”
진화가 조철봉의 손을 마주쥐었다.
“떠나기 전에 다시 한번 만나줄거야?”
그러고는 얼른 덧붙였다.
“이거 하자고는 안할게. 그냥 같이 식사나 하든지, 술을 마시든지, 내가 살테니까.”
“만나지 뭐.”
조철봉이 진화의 젖가슴에서 손을 떼고는 허리와 엉덩이까지의 곡선을 두손으로 부드럽게 쓸었다.
“나도 한번 더 안고 싶으니까.”
“어머나.”
그때 조철봉의 하반신으로 시선을 돌린 진화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역시 알몸인 채 앉아 있던 조철봉의 철봉이 곤두서서 건들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섰어.”
갈라진 목소리로 말한 진화가 입안에 고인 침을 삼켰다. 그러나 시선은 아직도 철봉에서 떼어지지 않았다.
“미치겠네 증말.”
중얼거리듯 말한 진화가 손을 뻗쳐 철봉을 살짝 쥐었다.
“자기는 또 할 수 있어?”
“그럼.”
“아휴.”
길게 숨을 뱉은 진화가 머리를 저었지만 철봉은 놓지 않았다.
“난 또 하면 죽을 것 같애.”
“그런데 미련은 있구먼.”
쓴웃음을 지은 조철봉이 철봉을 쥐고 있는 진화의 손을 눈으로 가리켰다.
“쥐고 놓지 않는 걸 보니까 말야.”
“응.”
다시 침을 삼킨 진화가 아쉬운 표정으로 철봉을 놓았다. 조철봉이 대포를 발사하지 않은 것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초짜’다.
20대 아가씨 이선아가 김상길이 고용한 직업여성이란 것은 분명했다. 성을 매매하는 직업여성인 것이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사기꾼 조철봉의 감각을 속일 수는 없다. 그래서 다음날 아침에 상길이 전화로 넌지시 의사를 타진했을 때 조철봉의 표정이 굳어졌다. 물론 상길이 눈앞에 있었다면 이렇게 표정 변화를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상길은 이선아가 아직도 조철봉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어서 성사가 될 것이라고 말해준 것이다. 서경윤과 영일은 아직 일어나지도 않았지만 조철봉은 방갈로 밖으로 나와 휴대전화에 대고 말했다.
“글쎄, 호감을 가져주어서 고맙지만 일천불씩 내고 놀려니까 부담이 되는구먼. 김형한테도 사례비가 들고 말이오.”
“일천불이라고 했습니까?”
정색하듯 굳어진 목소리로 상길이 물었다.
“걔가 직접 그렇게 말했어요?”
“그랬다니까요.”
“허어, 참.”
“순진한 애 같았는데 깎아달라고 하기도 멋쩍어서 아무말 안했지요.”
“그 기집애가 증말.”
“내가 듣기로는 한국에서 장사가 안되니까 외국으로 원정나온 애들이 많다고 하던대, 혹시.”
“글쎄요.”
그러더니 상길이 뱉듯이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제가 이번에는 아주 색다른 팀을 소개해 드릴까요? 둘이 관광을 왔는데 아주 특급입니다. 세련된데다 있는 집 사모님들입니다.”
“둘이 왔어요?”
“예, 세라핀호텔 방갈로를 각각 하나씩 빌려 놀고 있는데 은근히 남자를 구하는 눈치가 보였습니다.”
“그래요?”
“제가 그분들 가이드를 맡고 있는데 소개해 드릴 수가 있지요. 물론 재주를 조금 부려야겠지만 말입니다.”
“괜찮아요?”
“뭐가 말씀입니까?”
“이보시오, 김사장님, 내가 묻는 건 뻔하지 않습니까? 내가 돈 뜯어내는 사기꾼입니까?”
“그, 그렇지요.”
조철봉의 기세에 밀린 상길이 당황한 듯 말을 더듬었다.
“아, 특급 수준이라니까요? 그래서 어지간한 남자는 붙이기가 어려웠지요. 하지만 사장님은 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럼 계획을 짜보세요, 내가 인사는 할테니까.”
“아예 지금 결정을 하시지요. 성사가 되면 5백불을 주십시오. 둘이 만나게 되셨을 때 말입니다.”
“만나게 되었을 때라고 했습니까?”
“예, 그것만 해도.”
“만나서 바로 차여도?”
“그럴리가 있습니까? 제가 침은 잔뜩 발라 놓을테니까요. 제 침값이 그렇게 됩니다.”
“나아 참.”
“제가 호텔방 안까지 데려다 드릴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둘이 있게 된다면 그건 50퍼센트 이상 성사가 되었다고 봐도 틀림없습니다.”
“좋아요.”
마침내 조철봉이 동의했다. 그순간 어제 격렬한 정사를 나눈 박진화의 얼굴이 눈앞에 떠올랐지만 새로운 상대에 대한 호기심을 누르지 못했다.
“가능하면 오늘 오후에 만들어봐요.”
“알겠습니다, 사장님.”
원기있게 말한 상길이 덧붙였다.
“그리고 그 젊은애, 안하시길 잘했습니다. 제가 듣기로는 5백불도 불렀다네요.”
그것이 상길과의 협정가격인 모양이었다.
서경윤과 6박7일의 발리 여행을 왔지만 그동안을 꼬박 처자식과 함께 붙어있을 조철봉은 아니다. 그리고 경윤 또한 길이 들었다고 할까, 습관이 되어서 조철봉이 쥐구멍을 드나들듯 나다녀도 이상하게 보지 않았다. 오후 1시가 되었을 때 조철봉은 밝은색 셔츠 차림으로 세라핀호텔의 라운지로 들어섰는데 상길이 약속대로 여자를 주선해 주었기 때문이다.
상길이 전화로 알려준 정보에 의하면 여자의 이름은 민수영, 회사 이름은 알 수 없지만 중소기업 최고 경영자이며 나이는 42세, 발리에는 5박6일 일정으로 휴가차 왔는데 일행인 오세희와 함께 비행기 일등석을 탔다는 것이다. 다른 일들은 대충 허세로 때울 수 있고 고급 외제차도 장기 할부판매가 되는터라 진짜 있는 사람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그러나 비행기 일등석은 다르다. 3등석보다 몇배는 더 비싼 일등석을 타려면 허세만 가지고는 버티기 힘들다. 실력이 진짜 있는 사람이어야 되는 것이다.
잠깐 걸음을 멈추고 라운지 안을 둘러보던 조철봉은 안쪽 테이블에 혼자 앉아있는 여자를 보았다. 안에는 서양인들이 많았는데 동양인 여자가 혼자 앉은 테이블은 그쪽 하나뿐이다. 조철봉이 다가가자 여자는 아까부터 시선을 주고 있으면서도 알은체를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시선을 떼지도 않는다. 김상길은 여자가 42세라고 했지만 3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얼굴이었고 기품이 풍겨났다. 당당한 태도라고 해도 될 것이다. 테이블 앞에 선 조철봉이 마악 입을 열려는 순간이었다.
“앉으세요.”
여자가 먼저 그렇게 말하는 바람에 조철봉은 열었던 입을 닫고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여자가 희미하게 웃었다. 짧은 머리가 살짝 안쪽으로 굽혀졌고 반소매 셔츠 밖으로 드러난 피부는 보기좋게 그을려 있었다. 여자의 시선을 받은 조철봉이 심호흡을 했다. 또렷한 눈과 야무지게 닫힌 입, 그리고 콧날은 곧았다. 단정한 미인이다.
“사업하신다고요?”
이번에도 먼저 여자가 물었으므로 조철봉은 머리부터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어떤 사업이신데요?”
“여러가지.”
조철봉이 정색하고 말을 이었다.
“공장이 몇개 있지요. 주로 중국에 있습니다만.”
“어떤 공장인데요?”
“섬유류.”
“어느 지역에?”
“칭다오와 옌타이에.”
“아아.”
머리를 끄덕인 여자의 얼굴에 웃음기가 떠올랐다.
“그 근처에 한국에서 투자한 섬유류 공장이 많지요.”
“그런데 그쪽은.”
“참, 우리가 아직 소개도 안했군요.”
놀란듯 눈을 크게 떠보인 여자가 먼저 자신의 소개를 했다.
“전 민수영이라고 합니다. 저도 조그만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는데 동성전자라고 들어 보셨는지요?”
“동성전자라면, 그 휴대전화 생산업체.”
조철봉이 묻자 여자의 얼굴에 다시 웃음기가 번졌다.
“예, 그래요.”
“듣다마다요. 떠오르는 기업으로 신문에 여러번 보도 되었지요?”
“그랬지만 과장된 점도 많아요.”
몇년쯤 전의 조철봉이었다면 대박을 잡았다는 생각에 가슴이 뛰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내가 대박인 것이다.
조철봉은 지그시 민수영을 보았다. 김상길이 어떤 사기를 쳤건간에 수영이 이곳에 나왔다는 사실은 무엇을 증명하겠는가? 바로 남자에 대한 호기심이다. 그것을 더 구체적으로 말할 필요까지는 없다. 조급해할 것 없다 하고 조철봉은 스스로에게 타일렀다. 기다려라 여유있게, 그렇지. 이럴때 어제 놀았던 박진화를 떠올리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또 만나기로 했지만 시간이 있을지 모르겠다. 이렇게 작업 건수가 쌓여서야 원. 그때 수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김선생이 피알을 대단하게 하시데요. 매너가 좋으시다고.”
“아하.”
조철봉이 정색하고 머리를 끄덕였다.
“건당 500불을 받기로 했는데 그쯤 피알이야 당연한 것 아닙니까? 혹시.”
눈을 가늘게 뜬 조철봉이 수영에게 물었다.
“민사장께서도 김선생한테 수수료를 주시기로 한 건 아니지요?”
“아녜요”
쓴웃음을 지은 수영이 머리를 저었다.
“여자한테는 받지 않았어요. 그런데 건당 500불이라면 꽤 큰 금액인데 소개만 시켜주는 대가로 말이죠.”
“영업이 잘 되는 것 같습니다.”
“몇 건이나 하셨어요?”
“민사장이 처음입니다.”
“자신이 많으시군요.”
물잔을 들고 한모금 삼킨 수영이 의자에 등을 붙이더니 한쪽 다리를 포개었다. 그러자 원피스가 무릎 윗부분까지 올라가 맨살이 드러났고 종아리는 바로 조철봉의 눈앞에 떠 있었다. 조철봉의 시선을 받은 수영이 말을 이었다.
“건당 수수료까지 폭로하시다니, 그것을 들은 제 반응이 어떨 것인지 예상은 하고 계셨겠지요?”
“사업을 하시는 분이라 김선생의 영업쯤은 짐작하고 계실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자 수영이 단정한 입술끝을 올리면서 엷게 웃었다.
“그래서 제가 크게 놀라지 않을 것으로 예상하신 건가요?”
“서로 알면서도 모른척 넘어갈 수도 있었지만 갑자기 마음이 변했습니다.”
그러고는 조철봉이 주위를 둘러보는 시늉을 했다.
“난 거짓말은 못하는 성품입니다. 그리고 연애 한번 하려고 꼭 거짓말을 할 필요가 있습니까? 눈만 돌리면 상대가 지천인데 말입니다.”
“그러네요.”
조철봉을 따라 라운지 안을 둘러보는 시늉을 하면서 수영이 말했다.
“이곳을 떠나면 어차피 두번 다시 만나지 못할 사이가 될테니까요.”
“섹스지요.”
이제는 조철봉도 의자에 등을 붙이면서 말했다.
“불같은 섹스,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만한 이국땅에서의 격렬한 섹스, 온몸이 불덩이처럼 타오르는 것 같은 섹스, 그 상대는 누가 되건 상관없지요. 어차피 헤어질 것이고 나중에는 얼굴도 이름도 기억나지 않게 될테니까요. 그저 섹스를 했다는 추억만은 남게 될겁니다.”
그때 수영은 창 밖으로 시선을 돌리고 있어서 옆모습만 보였다. 얼굴의 선이 고왔고 한쪽 속눈썹이 슬쩍 치켜 올라간 것도 선명하게 보였다. 조철봉이 말을 이었다.
“나는 섹스를 하면서 내 존재가치를 느낍니다. 나와 함께 있는 여자가 만족감으로 몸부림을 칠 때 바로 내가 인간으로서 가치를 인정받는 느낌이 든단 말입니다. 끝나고 나면 한없이 허무해질 때도 있지만 어쩝니까? 나에게는 새로운 여자와의 섹스가 인생의 활력소가 됩니다.”
맞는 말이다. 조철봉에게서 진실된 순간을 찾으라면 섹스에 몰두해 있을 때뿐일 것이다. 그때야말로 헌신적이며 진실되었다. 제 온몸을 던져 상대를 쾌락으로 인도한다. 이런 희생이 없다. 남자는 대포를 발사하는 것으로 성의 절정에 오른다. 그것으로 끝이다. 따라서 3초에 발사했더라도 남자는 성의 절정에 올라버린 것이다. 그러나 여자는 다르다. 남자들이 다 3초에 대포를 쏜다면 세상이 어떻게 되겠는가? 인간 세상은 지금처럼 안정이 되어있지 않았을 것이다.
첫째로 일부일처 제도가 분명히 존재하지 않는다. 참고로 물개떼들을 보라. 거대한 수컷 한마리가 수백마리의 암컷을 거느린다. 물론 그 수컷의 대포는 길어야 10초안에 발사된다. 그렇다고 인간 수컷이 그렇게 거느릴 수 있겠는가? 천만에. 진짜 총 한방이면 가는 걸 뭐. 따라서 남녀는 따로 살게 될 것이다. 필요하면 3초 동안만 만나면 된다. 러브호텔? 그런게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투표소처럼 칸막이만 만들어 놓으면 하루에도 수백명이 들락거릴텐데, 뭐. 아이는 당연히 여자가 기른다. 따라서 인간 세상은 모권사회가 된다.
여자는 아이들과 함께 집단을 이루며 필요할 때 3초용 전사들을 불러 대포를 쏘게 하고 엉덩이를 내질러 쫓아낼 것이다. 따라서 상대적으로 안정된 생활을 하는 여자들의 교육수준과 사고, 위치는 수십세기가 지나면서 월등해진다. 남자는 태어날 때부터 분리시켜 3초용 번식기로만 배양시킬테니까. 나중에는 과학의 발달과 함께 여자들이 남자를 아예 없애버리고 정자만 보관시킬지도 모른다. 번식을 하기 위해서 나눠 갖도록. 머리를 든 조철봉이 앞에 앉은 민수영을 보았다. 당당한 표정이다. 그것은 지금까지 수많은 여자를 절정으로 이끌어온 사내만이 만들 수 있는 얼굴이기도 했다. 그때 수영이 입을 열었다.
“그래요. 내가 이곳에 온건 남자에 대한 욕망이 있었기 때문이죠. 하지만.”
수영이 눈꼬리가 조금 치켜올라간 눈을 더 올려 떴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대뜸 그렇게 나간다는 것이 거북하네요.”
“그렇시겠죠. 이해합니다.”
선선히 머리를 끄덕인 조철봉이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 우리는 만난 지 10분도 안되었으니까요. 벌써 의기 투합이 되어 방으로 들어간다면 그야말로 짐승이지 인간입니까? 인간이면 인간답게 말이 안되는 말이라도 이렇게 서로 한동안은 주고 받다가 일어나야지요.”
그러고는 조철봉이 물잔을 들어 다시 한모금을 삼켰다.
“결론이야 다 알고 있지만 말입니다.”
“난 혼자 살아요.”
불쑥 수영이 말했으므로 조철봉은 상반신을 세웠다. 조철봉의 시선을 받은 수영이 다시 입술끝을 올리면서 웃었다.
“아직 미혼이죠.”
“그럼 결혼을 하지 않으셨단….”
“그래요.”
수영이 웃음띤 얼굴로 조철봉을 보았다.
“그리고 성 경험도 별로 없어요. 아니.”
말을 멈춘 수영이 숨을 한번 마시고 뱉더니 정색하고 말했다.
“믿지 않으시겠지만 없어요. 성경험이.”
“이런.”
그 뒷말로 ‘세상에’를 하려고 했다가 조철봉은 침을 삼키고 말았다. 만일 그 말이 사실이라면 만날 등산하던 산에서 백년된 산삼을 발견한 셈이 될 것이다. 아니 길가에서 국보급 문화재를 주운 꼴이 되었다고 할까? 그러나 충격이 가시고 나자 곧 걱정이 몰려왔다. 좋아할 일만은 아닌 것이다.
조철봉 주변에서는 찾아볼 수 없지만 가끔 언론에 그런 종자들이 보도될 때가 있다. 그것은 동남아 등 해외 여행을 간 관광객들이 미성년자인 숫처녀를 돈으로 사서 이른바 처녀를 따먹고 온다는 것이다. 그들 사이에서는 그것이 히말라야의 봉우리를 정복한 셈쯤이 될지 몰라도 조철봉에게는 천만에 말씀이다. 참으로 할 일이 없는 놈들이 돈으로 헛짓하는 꼴이다. 처녀와 관계하지 못해서, 다시 말하면 결혼 전부터 시작해서 결혼한 마누라는 말할 것도 없고 그후의 인생에서도 처녀를 한번도 만나지 못해서 한이 맺힌 놈들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고 외국에까지 원정을 떠나, 그것도 미성년자를 돈으로 사서 그짓을 한다는 것은 변태다. 천하의 조철봉도 지금까지 처녀와 관계를 가져본 적이 없었지만 한번도 바란 적은 없다. 여기서 말하는 처녀란 성관계 경험이 없는 여자를 말한다. 한번도 남자의 몸을 받아들인 경험이 없는 여자, 미개척지, 동남아 처녀 따먹기 원정단이 환장을 할 여자인 것이다.
조철봉은 민수영의 시선을 받으면서 심호흡을 했다. 이것은 행운인가? 아니면 조물주가 시험을 하시려는 것인가? 조철봉은 수영의 말을 믿었다. 이 상황에서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처녀니까 처녀라고 한 것이다. 마흔두살 먹은 숫처녀, 저도 모르게 고인 침을 삼킨 조철봉이 입을 열었다.
“난 처녀 좋아하는 인간은 아니지만 말씀을 듣고나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정색한 조철봉이 수영을 보았다. 스스로도 자신을 사기꾼으로 인정해온 조철봉이 이렇게 마음에 있는 말을 그대로 전달한 사례는 극히 드물었다. 수영이 얼굴을 굳힌채 가만히 있었지만 조철봉은 말을 이었다.
“나는 어느 정도 테크닉이 있는 상대를 좋아했거든요. 왜냐하면 그것이 서로 호흡을 맞춰 즐거움을 나누는데 적당했기 때문입니다.”
이것도 진심이다. 처음 철봉을 넣는다는 감개만으로 섹스를 하는 미친놈이 아닌 것이다. 인간은 인간다워야 한다. 법이나 도덕, 규율 등은 인간이 지켜야 할 도리를 정한 것으로 너무 많고 복잡해도 문제지만 처녀만 밝히는 놈들은 중형에 처하도록 해야된다, 특별법을 제정해서라도. 그때 수영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난 부끄럽지 않아요. 그렇다고 이 나이까지 처녀로 있다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지도 않지만요.”
수영의 얼굴에 조금 화색이 떠올랐다.
그러고보니 수영의 화장은 엷었다. 눈가의 실핏줄이 보일만큼.
“내가 부담을 드린 모양이죠?”
그렇게 수영이 물었을 때 조철봉은 숨을 들이켰다가 길게 뱉었다. 마음을 정한 것이다. 밀고 나가자, 그것도 서둘러서.
“그럼 가실까요.”
조철봉이 진지한 표정으로 수영을 주시하며 물었다.
“이거, 뭐. 이런 태도나 수작은 영 어울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만 저도 별 경험이 없다 보니까 이렇게 굳어지는군요.”
이제는 조철봉의 본색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여전히 진솔한 태도로 조철봉이 말을 이었다.
“나는 민사장을 만난 것만을 행운으로 생각합니다. 신체의 조건은 상관 없습니다.”
그러자 여전히 긴장하고 있던 수영이 풀썩 웃어버렸다.
“신체의 조건이라고 하셨어요? 내가 어디가 이상한 사람이라는 말로 들리네요.”
그러더니 수영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내 방갈로로 가요. 내 친구가 옆 방갈로에 있지만 방해하지는 않을테니까.”
민수영의 방갈로는 넓고 화려했다. 조철봉의 방갈로보다 위치도 더 좋았다. 조금 고지대에 위치해 있어서 내려다 보이는 바다 경치가 장관이었다. 방으로 들어선 수영이 조철봉에게 물었다.
“뭘 드시겠어요?”
“내가 꺼내 마시지요.”
냉장고로 다가간 조철봉이 주스캔을 꺼내 들었을 때 수영은 창가에 서서 바다를 내려다보는 중이었다. 조철봉이 옆으로 붙어 섰어도 수영은 움직이지 않았다. 수영한테서 옅은 향내가 맡아졌다. 방갈로 안은 조용해서 수영의 약간 빠른 숨소리도 들렸다. 조철봉이 팔을 뻗어 수영의 어깨를 부드럽게 안았다.
“침대로 가실까?”
수영이 아무 말도 안했지만 조철봉은 개의치 않았다. 이런 때 자신이 뱉고 있는 말도 수영은 건성으로 듣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저 분위기를 어색하지 않게 유지하려는 소리일 뿐이다. 조철봉은 몸을 비틀어 수영의 허리를 두팔로 껴안았다. 그러고는 입술을 수영의 목에 붙였다.
“아이.”
그때 수영이 몸을 비틀면서 약하게 거부하는 시늉을 했다.
“커튼을 치고.”
“아니, 그럴 필요 없어요.”
조철봉이 단호하게 말하고는 수영의 허리를 강하게 당겨 안았다. 그러자 수영과 하반신이 딱 붙었고 어느덧 단단하게 일어선 철봉이 수영의 아랫배를 눌렀다. 놀란 수영이 엉덩이를 뒤로 뺐지만 조철봉은 더 밀어붙였다.
“몸이 더워지지 않습니까?”
조철봉이 입술을 수영의 귀에 붙이고 물었다. 물론 더운 입김으로 수영의 귀를 간질이려는 수작이다.
“하반신이 근질거려야 정상인데,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요.”
마침내 수영이 조철봉의 목에 더운 입김을 뱉으면서 말했다. 늘어져있던 수영의 두손도 어느덧 조철봉의 허리춤을 쥐고 있었는데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진전이 된 것이다. 조철봉이 수영의 허리를 당겨 안은 채 하반신을 비틀었다. 그러자 철봉이 수영의 아랫배에서 허벅지 사이의 계곡까지 누르고 지나갔다.
“아아.”
수영이 다시 몸을 비틀며 신음했다. 정상이다. 지금까지 경험이 없다는 말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반응이 오는 것이다. 조철봉이 손 하나를 뻗쳐 수영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적당했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작은 밥공기만 했다. 그리고 물론 브래지어를 착용했지만 탄력이 느껴졌다. 탱탱하다.
“민감하군요.”
조철봉이 수영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무언가로 가득 채우고 싶은 욕망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응.”
이제 수영이 앓는 소리처럼 대답하면서 머리를 끄덕였을 때 조철봉도 입술을 붙였다. 수영의 입술에 입을 붙인 것이다. 그때 수영이 두팔을 뻗어 조철봉의 목을 감아 안았다. 그러고는 거침없이 입을 벌리고는 혀를 내밀었다. 조철봉은 놀랐지만 당황하지는 않았다. 뻗어나온 수영의 혀를 빨아 들이고는 자신의 혀로 감아 비볐다.
“으음.”
저도 모르게 조철봉의 입에서 탄성이 뱉어졌다. 수영의 긴 혀는 탄력이 있었으며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던 것이다. 거침없었고 유연했다. 어색하지가 않은 것이다. 하긴 키스 장면은 TV에서까지 매일 보여주니 실전도 필요없을 것이다.
이윽고 조철봉이 입술을 떼었을 때 민수영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우리, 해요.”
복음(福音)이다. 이보다 더 좋은 소리가 어디 또 있을 것인가? 더구나 상대는 무르익었으나 한 번도 더럽혀지지 않은 과일, 처녀, 신비로운 숲, 금단의 열매, 에덴 동산의 이브, 뱀. 그 순간 수많은 단어가 머릿속에서 명멸했으며 가슴은 기대감으로 요동을 쳤다. 그러나 조철봉의 기대감이 돈주고 미성년자의 처녀를 사는 놈들과는 다르다. 거기에다 상대 또한 다르지 않은가? 조철봉은 대답 대신 수영의 원피스 지퍼를 천천히 당겨 내렸다. 지퍼가 뒤쪽에 붙어 있었으므로 엉덩이까지 내려졌을 때 수영이 소매에서 팔을 빼내었다. 그러자 스르르 원피스가 바닥으로 흘러 떨어졌고 수영은 브래지어와 팬티 차림이 되어 서 있었다.
“으으음.”
조철봉의 입에서 탄성이 터졌다. 오후의 환한 햇살을 등에 받으며 서 있는 수영의 몸은 탄력이 넘쳐 흘렀기 때문이다. 젖가슴 밑으로 납작한 배와 배꼽이 드러났고 약간 도톰한 아랫배는 더욱 선정적이었다. 그리고 탱탱한 허벅지는 건강했다. 아랫배 밑으로 젓가락처럼 일자로 뻗은 하체를 좋아하는 남자는 드물다. 동서 고금을 통틀어도 그렇다.
“침대로.”
조철봉이 수영의 허리를 감아 안으면서 속삭였다.
“아름답습니다.”
침대로 이끌면서 조철봉이 수영의 귀에 대고 더운 숨결을 뱉으며 말을 이었다.
“눈이 부실 정도로.”
수영은 알아 들었는지 엷게 웃었지만 이미 눈동자는 열에 떠서 흔들렸고 숨소리는 가팔랐다. 침대로 간 수영이 브래지어와 팬티 차림으로 시트 안에 파고들자 조철봉은 천천히 옷을 벗었다.
“커튼을.”
머리끝까지 흰 시트를 끌어올린 수영이 말했지만 조철봉은 못 들은 척했다. 그러자 수영도 더이상 요구하지 않았다. 알몸이 된 조철봉이 시트를 젖히고 들어서자 수영은 몸을 웅크렸다. 그러나 조철봉이 허리를 감아 안고 당겼을 때 거부하지 않았다. 조철봉은 수영의 브래지어를, 그리고 팬티를 차분하게 벗겼다.
둘은 희고 엷은 시트 밑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는데 수영이 그 와중에도 기를 쓰고 시트를 머리 끝까지 올려 썼기 때문이다. 그러나 밖의 환한 빛이 시트안으로 비쳐 수영의 귀밑에 난 점까지 보였다. 둘이 태어난 순간처럼 알몸이 되었을 때 조철봉이 수영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하며 물었다.
“정말 처음이야?”
“응.”
수영이 머리까지 끄덕이며 말했다. 얼굴은 금방 긴장으로 굳어져 있었다.
“두렵지 않아?”
“무서워.”
“뭐가?”
그러면서 조철봉이 수영의 손을 잡아 철봉에 붙였다.
“만져봐.”
그 순간 수영이 질색을 하고 손을 뗐다가 조철봉이 다시 붙여주자 조심스럽게 쥐었다.
“이것도 첨이야?”
조철봉이 묻자 수영이 눈을 크게 떴다. 흰 시트 밑에서 수영의 얼굴은 더 선명하게 붉어져 있었다. 수영이 마른 입술을 혀로 핥더니 물었다.
“뭐가?”
“남자 철봉 잡아 보는 것.”
“응.”
수영이 철봉을 쥔 손에 조금 힘을 주었다
조철봉은 머리를 굽혀 민수영의 젖꼭지를 가득 입안에 넣었다. 그순간 수영이 움찔하면서 저도 모르게 철봉을 쥔 손에 힘을 주었으므로 조철봉의 입에서 신음이 뱉어졌다. 조철봉은 곧 입안에 든 수영의 젖꼭지를 혀끝으로 굴리기 시작했다. 그냥 굴리는 것이 아니다. 마치 혀끝으로 외줄 기타를 튕기는 것처럼, 그래서 길고도 감질나는 음악을 연주하는 것처럼 정성을 들인 것이다. 따라서 혀는 콩알처럼 단단해져서 발딱 선 젖꼭지를 가볍게, 강하게, 길게, 짧게, 튕기고, 누르고, 쓰다듬고, 비벼대는 오만가지 기법이 가미되었다.
“아아아.”
첫 경험이라지만 수영의 몸은 익을 대로 익어서 성감대는 다 제기능을 하고있지 않겠는가? 더구나 첫 경험에 대한 기대로 파장이 몇배나 강하게 울릴 것이었다. 물론 이것은 좋은 쪽으로 해석한 것이다. 수영이 턱을 치켜들고 신음을 길게 뱉어낸 것도 좋은 방향이라고 해석되었다. 첫 경험이랍시고 긴장된 몸이 굳어만 있으면 해동시키는데 힘이 더 들 것이었다. 조철봉은 입으로 기타를 튕기면서 이제 두손과 몸으로 수영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먼저 한손은 수영의 팔과 허리, 엉덩이와 무릎까지를 부드럽게 쓰다듬는 동작을 반복했으며 다른 한손은 하반신에 집중시켰다. 따라서 한손은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면서 균형을 잡는 역할이었으며 다른 한손이 비어있는 하반신을 집중 애무하는 것이다. 입술은 지금 상반신의 젖꼭지 두개를 번갈아 두드리며 튕기는 중이었는데 한손도 허벅지 사이를 문지르며 보조를 맞췄다.
“아아아.”
수영은 이미 가파른 산등성이를 구름을 타고 오르는 중이었다. 숨은 턱밑까지 차올랐지만 구름을 탔으니 피로할 리가 있겠는가? 눈앞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광채는 구름이 도착하는 종점일 것이었다. 몸을 비튼 수영은 어느새 쥐고 있던 철봉을 자꾸 자신의 샘쪽으로 당기려고 했다. 본능적인 동작이었으므로 본인은 그것을 의식하지 못한것 같았다.
“나, 죽겠어.’
하고 마침내 수영이 소리친 것은 구름을 타고 오르면서도 뭔가 허전함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었다.
“나, 해줘.”
수영이 다시 소리쳤지만 조철봉은 이번에도 못들은 척했다. 오늘은 수영의 인생에서 가장 기념할 만한 날인 것이다. 조철봉이 처녀 따먹는 인간들과 분명하게 다른 점이 바로 이것이다. 지금까지 조철봉은 여자를 기쁘게 해주는 것으로써 섹스의 의미를 찾았다. 그래서 가능하면 대포도 발사하지 않았다. 상대한 여자가 누구였건 기쁨의 절정에 오르도록 해주는 것으로 성취감과 여유, 또는 자부심을 느꼈으며 허무한 가슴을 채우기도 했다. 조철봉은 수영의 젖꼭지에서 입을 뗐다. 그러자 기대에 찬 수영이 두 다리를 벌리면서 고쳐 누웠지만 조철봉은 입술을 미끄러뜨렸다. 입술이 수영의 땀에 젖어 미끈거리는 아랫배를 문지르며 천천히 아래쪽으로 내려가자 수영의 신음소리가 더 높아졌다. 어느 사이에 시트는 뭉개져서 치워졌고 침대 위에는 알몸의 두 남녀가 오후의 햇살을 환하게 받은채 뒹굴고 있다.
“아앗”
수영이 높은 비명같은 외침을 뱉은 것은 조철봉의 입술이 이미 홍수가 난 골짜기에 닿았기 때문이다. 거의 반쯤 정신이 떠있던 수영은 사태를 분간하지 못한 채 엉덩이를 번쩍 치켜올렸다. 조철봉은 신음했다. 여기 처녀의 샘이 눈앞에 환하게 펼쳐져 있는 것이다.
그동안의 경험으로 예상하면 민수영은 곧 절정에 이를 것이었다. 물론 절정도 수만가지 경우가 있어서 모두 다르다. 즉, 여자는 일생동안 수천번의 절정을 맞는다고 해도 어느것 하나 같지 않다는 말이다. 한 여자가 한 장소에서 한 상대를 만나 세번의 절정에 올랐다고 해도 다 다른 것이다. 겉으로는 여자의 반응이 비슷하게 보이지만 느낌의 강도나 시간 또는 분위기까지 어느것 하나 같은 것이 없다. 절정은 무한하다. 노력할수록 저 광대한 우주처럼 끝도 없이 개척해 나갈 수가 있는 것이다.
“아유, 나.”
하고 조철봉의 입술이 숲을 훑고 지나갈 때 온몸을 오그리며 비명같은 외침을 뱉던 수영이 두손을 뻗었다. 그러고는 마악 수영의 샘에 혀끝을 댄 조철봉의 머리칼을 거칠게 움켜쥐더니 사지를 뻗었다.
“으아앗.”
조철봉의 혀가 샘 안으로 들어온 순간이었다. 수영은 온몸을 뻗으며 절정에 올랐다. 수영이 비록 성경험은 없다고 할지라도 다른 방법으로 쾌감을 느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같은 쾌감은 처음일 것이었다. 조철봉은 수영이 절정의 여운을 즐기도록 애무를 계속했다. 수영이 온몸을 굳혔다가 이윽고 늘어질 때까지 멈추지 않은 것이다.
“나 죽을 것 같아.”
늘어져 있던 수영이 겨우 눈을 떴을 때 뱉은 말이다. 땀 투성이가 된 아랫배가 가쁘게 오르내리고 있었는데 사지를 늘어뜨린 수영은 손가락 하나 까닥할 기력도 없는 것 같았다.
“자기, 안했지?”
그래도 정신이 조금 돌아왔는지 수영이 조철봉 걱정을 해주었다. 안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넣지도 않았는데 말실수를 한 것이 아니라 거기까지 정신이 돌아온 것이 아닌것 같았다.
“미안해.”
수영이 다시 말했을 때 조철봉은 상반신을 올렸다. 놀란 수영이 조철봉의 양쪽 어깨를 미는 것처럼 움켜쥐었다.
“자기야.”
이제 수영의 조철봉에 대한 호칭이 자기로 바뀌었다.
“나, 더이상.”
그때 조철봉이 철봉 끝을 수영의 샘에 붙였다.
“내가 알아.”
조철봉이 수영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당신이 앞으로 몇번이라도 더 할 수 있다는 것을 말이야.”
“아냐, 정말이야.”
“이것봐.”
그러고는 조철봉이 철봉으로 골짜기 주위를 문지르자 수영의 입에서 신음소리가 뱉어졌다.
“당신 몸이 벌써 기다리고 있어.”
“하, 하지만.”
“다시 몸이 뜨거워지고 기운이 솟아나는거야.”
“나, 처음이야, 자기야.”
“그래, 느껴봐.”
조철봉은 서두르지 않았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다. 생각하는 동물이기도 하다. 성관계중에도 끊임없이 생각하는 동물은 인간뿐일 것이다. 조철봉은 철봉과 함께 샘 주위를 맴돌면서 생각했다. 독도는 우리땅이다. 도대체 일본은 왜 그러는가? 한국인을 왜 그렇게 우습게 여기고 있는가? 왜 뻔한 사실을 갖고.
“아아, 자기야.”
그때 수영이 헐떡이며 외쳤으므로 조철봉의 일본에 대한 분노는 잠시 멈춰졌다. 수영이 이제는 조철봉의 목을 당겨 안았다. “자기야, 넣어줘, 얼른.”
조철봉은 심호흡을 했다. 깊게 마시고 길게 숨을 내뿜고는 철봉을 샘끝에 대면서 잠깐 정지했을 때 민수영이 온몸으로 기다리는 것이 느껴졌다. 정적, 약 일초 동안의 정적과 함께 둘의 몸은 똑같이 굳어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 철봉이 천천히 샘 안으로 진입했다. 수영에게는 42년만에 진짜, 리얼리, 오리지널 철봉이 들어오는 순간이었다.
“아, 아.”
턱을 젖혔으나 눈을 크게 뜬 수영이 입까지 딱 벌리고 바로 눈앞에 떠 있는 조철봉의 얼굴을 보았다. 조철봉은 순간 멈칫했다. 수영의 두눈에 초점이 잡혀 있어서 시선이 정통으로 마주쳤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때도 철봉은 진입을 계속하고 있었다.
“아아아.”
철봉의 속도는 당연히 느려서 서로의 신경 세포들이 접촉하는 시간이 길어졌으며 당연히 느낌도 길다. 수영은 샘벽에 꽉 찬 채 들어오는 철봉의 압력을 느끼면서 신음했다. 여전히 두눈은 크게 떠졌고 몸은 굳어져 있다. 이윽고 철봉이 끝까지 닿았을 때 수영이 그 얼굴 그대로 말했다.
“아파.”
조철봉은 허리를 들어 올리면서 다시 같은 속도로 철봉을 뽑았다. 샘 안은 뜨거웠으며 용암이 넘쳐 흐르고 있었으므로 아픈지 안 아픈지는 이쪽에서도 알 수가 있다. 수영은 안 아픈 상태였다. 그러나 사람의 표현에는 한계가 있는 법이다. 머릿속의 생각을 말로 다 뱉을 수는 없다. 그래서 지금 아프다고만 했을 것이었다. 그렇다고 너무 커, 또는 뻑뻑해, 또는 뜨거 따위의 생뚱맞은 말을 뱉을 수야 있겠는가? 책이나 드라마에서 자주 읽고 본 단어를 써먹는 것이 가장 무난한 것이다. 조철봉은 단 일합(一合)을 부딪쳤지만 수영과의 결전에 몸이 떨릴 만큼 감동을 받았다. 수영은 진짜 처녀의 몸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샘안에 자신의 철봉이 처음으로 입장한 것을 의미했다. 조철봉이 처녀 따먹기 동남아 관광객과 다른 점이 바로 이것이다. 행사를 한 만큼 책임을 느끼는 것이다. 첫 몸을 받는 수영에게 최상의 서비스를 해주겠다는 의욕이 솟구쳤으며 저절로 이가 악물려졌다.
“아이구.”
두번째로 철봉이 진입할 적에 수영이 조철봉의 목을 감아 안고 소리쳤다. 이제는 첫합(合)의 경험이 있기 때문인지 긴장으로 굳어져 있던 샘에 신축성이 느껴졌고 엉덩이가 흔들렸다.
“어마마.”
철봉이 깊게 들어갔을 때 이제는 감탄과 놀람이 섞인 신음까지 터져나왔다. 조철봉은 철봉을 압박하는 쾌감을 느끼려는 충동이 일어났으므로 이를 악물었다. 그랬다가는 오래지 않아 대포가 발사될 것이었다. 안 된다. 지금까지 수천번 경험을 쌓아오면서 한번도 빼먹지 않고 이 갈등이 찾아오는 것이다. 여기서 그냥 쏴 버리면 남자는 만족하고 끝난다. 그래서 남자들이 부담없이 쏘는 성매매 관계를 선호하는지도 모른다. 조철봉은 눈을 부릅뜨고 수영을 내려다보았다.
‘사나이로 태어나서 할 일도 많지만.’ 크게 말하면 수영이 미쳤다고 할 것이 틀림없었으므로 조철봉은 입술만 달싹이며 속으로 말했다.
‘우리는 나라지키는 영광에 살았다.’
“아유유.”
그때 철봉이 끝까지 들어간 후에 한번 좌우로 비틀렸으므로 수영은 방안이 떠나갈 듯한 신음을 뱉었다.
‘전투와 전투속에 맺어진 전우야,’
조철봉은 속으로 군가를 계속했다.
“아앗.”
철봉을 빼낸 후에 다시 진입을 시키고, 그것을 반복하면서 민수영은 날마다 새로운 것이 아니라 순간마다 새로운 느낌으로 매번 탄성을 뱉었지만 조철봉의 형편은 다르다. 군가는 산악훈련가에서 거의 잊어먹었던 유격대가까지 다 불렀다. 빨리 불렀기 때문에 시간도 별로 지나지 않았다.
“뒤로.”
상체를 세운 조철봉이 그렇게 말했을 때 자지러졌던 수영이 몸을 굳혔다. 수영의 상태는 사이드라인에서 치고 들어가는 이영표처럼 거침없이 하프라인쯤을 넘고 있었는데 남의 사정은 모르고 난데없었을 것이다. 수영이 눈을 크게 떠 보였으므로 조철봉은 엉덩이를 한쪽으로 밀었다. 그만하면 다른 여자들은 다 안다.
“뒤로.”
조철봉이 다시 말했을 때 수영이 초점을 잡은 눈으로 조철봉을 보았다.
“어떻게?”
수영이 갈라진 목소리로 헐떡이며 물었다. 땀에 젖은 얼굴을 보자 조철봉의 가슴이 더 세차게 뛰었다. 그냥 쏴 갈기고 싶은 충동이 일어난 것이다.
“엎드리란 말야.”
조철봉이 이제는 몸을 떼면서 말했다. 그러자 샘이 허전해진 수영이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얼른 행동으로 나서지는 않았다. 수영은 그 자세 그대로가 좋았던 것이다. 그래서 조철봉이 엎드리라고 한 것에 속도 모르고 조바심과 짜증이 났을 것이다.
“얼른.”
조철봉이 서두르듯 말했지만 이 모션으로 군가 두곡쯤은 벌었다. 찬바람을 쏘인 철봉도 따로 조금 진정이 되었을 것이었다. 수영이 마지못한 듯이 침대 위에 엉거주춤 엎드렸지만 자세가 영 덜 되었다. 마치 벌 받는 것처럼 무릎을 꿇고 앉았다가 엎드렸는데 부끄러운듯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다시 욕정이 끓어오른 조철봉이 뒤에서 수영의 몸을 고쳤다. 팔을 뻗게 하고 팔꿈치 놓는 자세까지 교정을 해주고 준비를 마쳤을 때 다시 군가 두곡은 더 벌었다. 그동안의 빈 시간에 수영의 몸이 식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이 시간도 철봉이 진입한 시간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이윽고 자세를 갖춘 조철봉은 수영의 옆구리를 가볍게 쥐고는 천천히 뒤에서 철봉을 넣었다.
“어어마.”
하고 그순간 수영이 커다랗게 소리를 질렀는데 지금까지의 어떤 소리보다 컸다. 거침없는 외침이었다.
“아아아아.”
다시 수영이 머리를 치켜들면서 외쳤고 조철봉은 이를 악물었다. 이제 곧 수영은 절정에 오를 것이었다. 수영에게 후배위를 사용한 것은 자세 변경으로 시간을 벌거나 그동안에 열을 식히려는 의도도 있다. 그러나 주목적은 마주보면서 부딪치는 것보다 방향을 돌리는 것으로 수영을 더 자연스럽게 만들려는 것이었다. 조철봉이 기획한 대로 수영은 한껏 소리를 지르더니 엉덩이를 거칠게 흔들기까지 했다. 첫 경험의 여자 같지가 않았다.
“아유우우.”
조철봉이 이제는 애국가를 3절까지 속으로 불렀을 때 수영이 절정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나 죽어.”
수영이 두 손으로 시트를 쥐어뜯으면서 소리쳤다. 그러나 죽는다면서 한사코 엉덩이는 들이밀었다. 이윽고 수영이 소리내어 울면서 얼굴을 시트에다 비벼대었다. 그러고는 온몸을 굳혔는데 엉덩이는 본드를 붙인 듯이 떼어내지 않았다.
민수영이 깨어났을 때는 그로부터 10분도 더 지난 후였다. 그때까지 조철봉은 민수영을 돌려안은 채 부드럽게 애무를 해주고 있었는데 솔직히 이런 일은 어지간한 정성 가지고는 하기 힘들다. 마음에서 우러나야 되는 것이다. 그러나 조철봉에게는 버릇이 된 일이어서 힘이 들지 않았다.
다 잘했다가 마지막 순간에 소홀했기 때문에 분위기를 잡친 경우가 어디 하나 둘인가? 남자는 쏘고 난 즉시로 얼른 빼고 싶은 것이 본능이다. 쏘고 나서도 더 있고 싶다고 하는 놈이 있다면 경계할 필요가 있다. 지구인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조철봉은 쏘지 않았기 때문에 본능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지금도 행위의 연속일 뿐인 것이다. 이윽고 수영이 눈을 뜨더니 숨을 가누면서 말했다. 두손으로 조철봉의 허리를 감았으며 둘은 마주보며 안고있는 자세였다.
“자기야, 고마워.”
조철봉이 눈만 크게 떠 보이자 수영은 얼굴을 가슴에 대고 비볐다.
“끝나고 이런 말 듣는 게 우습지?
“그렇구먼.”
“어쨌든 고맙다는 말부터 나와. 정말 고마워.”
“고맙긴 뭐가?”
수영이 조철봉의 허리를 감은 팔에 힘을 주었다.
“이렇게 좋은 것인 줄 정말 몰랐어.”
“그래?”
“자기가 잘해줬기 때문이야.”
“처음이라면서 어떻게 알아?”
“처음이라도 알아.”
조철봉의 가슴에 입술을 붙인 수영이 사근사근 말했다.
“날 끌어올리려고 애쓴 것.”
“조금 있다가 더 높이 올려줄까?”
“오늘은 그만.”
수영이 머리를 젓더니 조철봉을 보았다.
“다시 또 만나줄 수 있어?”
“당신이 원한다면.”
“원해.”
그러고는 수영이 눈웃음을 쳤다.
“내 몸을 열어준 첫 남자야, 자기가.”
“영광이야.”
조철봉이 손을 뻗어 수영의 등과 엉덩이를 부드럽게 쓸었다. 아직도 기세좋게 선 철봉은 수영의 허벅지 사이에 끼인 상태였다.
“당신도 좋았어.”
조철봉이 수영의 귀에 대고 말했다.
“특히 샘의 느낌이.”
“아이.”
몸을 비튼 수영이 갑자기 조철봉의 가슴에다 긴 숨을 뱉었다.
“이렇게 오래 있을 수 있다면 좋겠다.”
그때 조철봉이 수영의 손을 떼고는 상반신을 일으켰다.
“그만 가봐야 돼.”
“어머, 벌써 두시간이나 지났네.”
탁자에 붙은 전광시계를 본 수영이 놀라는 시늉을 하더니 따라 몸을 세웠다. 그러나 이제는 알몸을 가리려고 하지도 않았다. 조철봉이 화장실에서 씻고 나왔을 때 수영은 가운 차림으로 창가 의자에 앉아 있었는데 차분한 표정이었다.
“내 친구하고 같이 왔는데 난 내일 오후에 떠나야 돼.”
이맛살을 찌푸린 수영이 조철봉을 보았다.
“회사일 때문에, 하지만.”
수영이 어색한 듯 시선을 돌리면서 웃었다.
“서울로 돌아가서 만날 수 있을까?”
“나도 이렇게 끝내고 싶지 않아.”
정색한 조철봉이 다가가 수영의 뒤에서 어깨를 움켜쥐었다. 그러고는 어깨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수영이 떠난다면 친구만 남는다. 김상길이 주선을 해줄 것이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이 되었을 때 조철봉은 더이상 발리에서의 난봉질을 계속할 수가 없게 되었다. 서경윤의 친정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았기 때문이다. 오래 병석에 누워 계시면서 오늘내일해온 상태였지만 경윤은 울며불며 짐을 꾸렸다. 그래서 조철봉은 덴파사 공항에서 출국 준비를 끝내고 나서야 한숨 돌릴 수가 있었다.
“연락하시겠습니까?”
수속을 끝내준 김상길이 조철봉에게 물었다. 그들은 출국장 구석에 서 있었는데 경윤과는 멀찍이 떨어진 위치였다. 조철봉의 시선을 받은 상길이 희미하게 웃었다.
“민사장은 오늘 오후 비행기로 한국에 돌아갑니다. 연락처는 알고 계시지요?”
“알아요.”
“그런데 이곳에 남은 친구한테 어제 오후에 다 이야기를 해 놓았는데.”
상길이 난처한 표정으로 조철봉을 보았다.
“박진화씨도 기다리고 있을텐데요.”
“할 수 없지 뭐.”
쓴웃음을 지은 조철봉이 주머니에서 준비해온 봉투를 꺼내 상길에게 내밀었다.
“이거 수고비. 성사 안된 민수영씨 친구몫도 넣었습니다.”
“아니, 이런.”
상길의 얼굴이 순식간에 환해졌다. 전혀 꾸밈이 없는 표정이어서 조철봉의 가슴도 편해졌다. 봉투 안을 들여다본 상길이 감격한 듯 눈을 크게 뜨고 조철봉에게 사례했다.
“감사합니다. 사장님.”
“덕분에 잘 놀았습니다.”
“그러시다면 이것.”
하면서 상길이 바지 주머니에서 접혀진 종이를 꺼내 조철봉에게 내밀었다.
“저, 민수영씨 친구인 오세희씨 서울 연락처올시다. 이 여자도 진국입니다. 사장님.”
“아니, 서울 연락처를.”
“제가 잘 말해 놓을테니까 서울에 가서 만나시지요. 사흘 후에는 서울에 있을테니까요.”
“고맙습니다.”
쪽지를 받은 조철봉은 상길과 악수를 나누었다. 만일 사례를 하지 않았다면 오세희의 연락처는 받지 못했을 것이었다. 이런 부류의 인간들에게 조철봉은 손이 큰 편이었다. 중급 수준의 사기꾼만 되어도 사기를 칠 상대와 시기를 가릴 수가 있는 것이다. 똥오줌 못 가리는 초짜 사기꾼은 이렇게 대할 필요도 없고 건수를 만들지도 못했다. 상길은 중급 사기꾼이었고 조철봉의 수준을 알아 보았다. 그래서 서로 페어 플레이를 했다고 볼 수도 있다. 발리에서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조철봉은 잠만 잤다. 경윤과 영일도 검게 그을린 피부로 늘어져 자다 깨다 했는데 남들한테는 휴가 끝내고 돌아가는 유복한 가족처럼 보였을 것이었다. 인천 공항에서 내려 장모가 입원해 있는 병원으로 직행하면서 조철봉이 말했다.
“기운을 내, 영일엄마. 이럴 때일수록 정신 똑바로 차려야 돼.”
“알았어.”
초조한 표정으로 앞쪽을 보면서 경윤이 대답했다. 경윤은 장녀였고 밑에 여동생과 남동생이 하나씩 있다.
“내가 오늘은 병원에 있을까?”
손목시계를 내려다본 경윤이 혼잣소리처럼 말했다. 오후 6시반이 되어가고 있었는데 병원에서 어머니 간병을 하겠다는 말이었다.
“그럼 내가 영일이하고 집에 가지. 걱정하지 마.”
조철봉이 부드럽게 말했다. 그렇다면 집에서 마음놓고 통화를 할 수가 있다.
“사장님, 극동서비스에 가 보셔야겠는데요.”
최갑중이 태연한 얼굴로 말했지만 10년 가깝게 부대껴 온 사이인 터라 조철봉은 대번에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시선을 옆으로 돌린 갑중이 말을 이었다.
“지금 공장 문을 닫고 출입을 금지시켜 놓았습니다.”
“왜?”
눈을 치켜뜬 조철봉이 묻자 갑중은 헛기침부터 했다. 오전 10시반이 되어가고 있었다. 오늘은 발리에서 돌아와 첫 출근을 한 날이었는데 어젯밤에 서경윤이 병원에서 지내고 아침 9시에야 돌아왔기 때문에 조철봉도 늦었다. 그래서 갑중은 사장실 옆의 회의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저, 극동서비스 공장장이 직원한테 맞아서 병원에 실려갔습니다.”
갑중의 말에 놀란 조철봉이 움직임을 멈췄다.
“병원에 실려가? 아니, 도대체 왜?”
“싸움이 일어난 것인데.”
“인마, 그러니까 왜?”
“그것이.”
입맛을 다신 갑중이 흘끗 조철봉의 눈치를 보았다.
“조선족이 무시를 당했다고.”
“뭐라고?”
조철봉이 눈을 부릅떴다. 극동서비스는 계열사의 하나로 자동차정비업체인 것이다. 그래서 기술직 사원 외에 잡부로 조선족 근로자가 20여명 근무하고 있었는데 작년에는 30여억원의 순이익을 냈다. 그러나 독립채산제로 운영되고 있어서 자세한 관리 내막은 모른다.
“인마, 그런데 공장 문을 닫고 출입을 금지시켰다니 그건 무슨 말이야?”
조철봉이 소리치듯 묻자 갑중이 작심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조선족 근로자가 모두 공장 안에 들어가 농성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관리부장하고 사원 둘을 인질로 잡고 있는 겁니다.”
“뭐라고? 인질로?”
“예. 그래서 경찰에 신고를 하려다가 아무래도 문제가 커질 것 같아서.”
다시 입맛을 다신 갑중이 조철봉의 눈치를 보았다.
“사장이 지금 형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빌어먹을.”
조철봉이 잇새로 말했다. 극동서비스의 사장 박기술은 전문경영인으로 2년전에 영입한 인물이었다.
“전화 바꿔.”
손을 내밀며 조철봉이 말하자 갑중은 재빠르게 움직였다. 갑중이 전화기를 건네준 것은 그로부터 10초도 안되었다. 박기술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조철봉의 목소리를 들은 박기술이 묻기도 전에 상황을 설명했다.
“지금 협상은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놈들의 요구조건이 너무 많아서요. 그런데 잡혀 있는 인질들의 상태는 양호합니다. 해를 끼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이봐요, 박사장.”
조철봉이 중구난방 떠드는 박사장의 말을 잘랐다. 그러자 박사장이 추춤했다.
“예, 사장님.”
“왜 그런 일이. 그러니까 원인이 뭐요?”
“무시받고 대우가 적었다는 것입니다. 월급을 관리부에서 횡령했다고도 했지만 그 오해는 풀렸습니다.”
“그래서 공장장을 때려서 입원시켰어?”
“예. 놈들이 미리 계획을 세우고, 계획적인 반란입니다.”
“반란이라고?”
“예. 놈들은 모두 무기까지 준비해 놓았습니다. 지금 공장 셔터를 내리고 있어서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조철봉이 극동서비스에 도착했을 때는 그로부터 한시간쯤 지난 오전 11시반쯤이었다. 극동서비스는 철제 대문을 걸어 잠그고 휴업 팻말을 붙인 상태여서 회사 밖은 한산했다. 그러나 쪽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서자 사장 박기술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회사의 뜰에는 70∼80명의 직원이 웅성대고 있다가 일제히 머리를 돌려 이쪽을 보았다.
“사장님, 이쪽으로 오시지요.”
박기술과 간부급 직원 서너명이 조철봉과 최갑중을 맞았는데 모두 허둥대고 있었다. 그들은 공장 건물이 내려다보이는 이층 사무실로 들어가 앉았다.
“방금 김차장이 놈들을 만나고 나왔습니다. 사장님.”
박사장이 옆에 앉은 40대 직원을 눈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그런데 놈들은 강경합니다. 조금도 양보할 눈치가 아닙니다.”
“요구조건이 뭡니까?”
조철봉 대신 갑중이 짜증난 표정을 짓고 물었다. 그러자 김차장이라고 불린 사내가 대답했다.
“놈들은 월급을 한국인 기준으로 달라는 겁니다. 지금까지 일한 일수를 소급해서 계산해야 된다고 합니다.”
“그것 뿐이오?”
“퇴직금도 한국인 기준으로 정산을 해달랍니다. 그리고….”
“그리고 뭐요?”
“문제삼지 않겠다는 각서를 써달라고 합니다. 돈을 받을 때까지 잡고 있는 직원들을 놔주지 않겠답니다.”
그때 조철봉이 박사장에게 물었다.
“조선족 임금은 어떻게 계산했지요?”
“예, 일률적으로 월 95만원을 지급했습니다. 하지만 숙소 제공하고 하루 세끼 식사까지 먹였는데다 한달에 두번은 쉬게 해줬습니다. 그만하면 대우 잘 한 겁니다.”
“같은 일을 하는 한국인 수준은?”
그러자 박사장이 헛기침을 하더니 말을 이었다.
“한달에 180만원 정도지요. 출퇴근하기 때문에 하루 한끼 식사 제공했고 숙소 제공은 안했습니다. 그리고 공휴일과 국경일은 휴무였습니다.”
“그럼 별로 차이가 나는 건 아닌데요.”
하고 갑중이 조철봉을 바라보며 말했다.
“제가 전에 여기 숙소를 볼 기회가 있었는데 시설도 좋았습니다.”
그때 조철봉이 박사장에게 물었다.
“지금 맞아서 병원에 실려갔다는 공장장이 조선족 근로자들한테 심하게 대한 건 아니오?”
“그건….”
말을 그친 박사장이 옆에 앉은 김차장을 보았다. 그러자 김차장이 시선을 내리고 대답했다.
“예, 공장장 성질이 조금 급해서요. 저희들한테도 거칠게 대하지만 뒤는 없는 분이라….”
“조선족 근로자들한테 심하게 했군.”
조철봉이 단정하듯 말하자 김차장은 먼저 침부터 삼켰다.
“예, 유감이 조금 쌓였던 것 같습니다.”
그때 박사장이 거들었다.
“머리를 쇠뭉치로 맞아서 스무바늘 정도나 꿰맸지만 생명에 지장은 없다고 합니다. 사장님.”
조철봉의 시선을 받은 박사장이 말을 이었다.
“최악의 경우에 경찰에 알려서 진압하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공장에 있는 23명 중에 불법체류자가 7명입니다. 그놈들은 당장 구속될 것이고 나머지 놈들도 사람을 치고 인질극을 벌였으니 추방되겠지요. 우리는 세금 포탈한 것도 없으니 별일 없습니다.”
그때 자리에서 일어선 조철봉이 박사장에게 말했다.
“내가 만나서 해결을 하지.”
“아니, 사장님.”
놀란 박사장이 따라 일어섰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그리고 들어가신다면 제가.”
“사장님. 맞습니다.”
최갑중도 거들었다.
“박사장이 들어가야 합니다.”
“필요 없어.”
단호한 표정으로 조철봉이 말하자 갑중이 입맛을 다셨다.
“좋습니다. 그럼 저도.”
“제가 모시고 가지요.”
그래서 셋이 닫힌 공장문 앞에 섰을 때 밖에 있던 직원들이 그들을 둘러쌌다. 지금까지 박사장도 들어가지 않았던 것이다. 안에 연락을 하자 곧 철제 문이 조금 열리면서 사내들이 그들을 맞았다. 셋이 안으로 들어섰을 때 철문은 다시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닫혔다. 공장 안의 분위기는 살벌했다. 조선족 근로자 모두 손에 칼이나 쇠파이프, 또는 어디서 구했는지 낫까지 쥐고 있었고 기름 냄새가 코를 찔렀다. 휘발유를 사방에 뿌린 것이다. 그리고 인질로 잡힌 한국인 직원 세명은 공장 구석에 모여 앉아 있었는데 주위에 기름을 뿌려 놓았다. 직원들은 그들을 보더니 반기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입을 열지 못했다.
“본사 사장님이 오셨어.”
박사장이 커다랗게 말했지만 말끝이 떨렸다. 그로서는 조철봉 때문에 들어온 입장인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 좋게 해결하자고.”
주위를 둘러보며 박사장이 말했을 때 사내 하나가 앞으로 다가와 섰다. 40대쯤의 장신이었다.
“본사 사장님이 오셨구먼요.”
사내가 머리를 조금 숙여 보이더니 희미하게 웃었다.
“예상 밖입니다. 본사 사장님이 들어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여기 앉읍시다.”
조철봉이 플라스틱 상자 위에 앉으면서 말했다.
“서로 좋게 해결해야지요. 먼저 여러분의 사정을 들읍시다.”
그러자 사내를 포함한 세명이 앞쪽에 앉았다. 인질극의 주동자들일 것이다.
“양보할 수 없습니다. 월급하고 퇴직금을 주시오. 그리고 각서를 써 주시오.”
40대의 사내가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가 다른 놈들한테서 당한 수모는 이 자리에서 거론하지 않겠소. 방송이나 신문에 보도되면 당신들도 무사하지 못할테니까 말입니다.”
“잠깐만.”
조철봉이 정색하고 사내의 말을 받았다.
“다른 놈한테서 받은 수모라니? 공장장한테서만 당한 것이 아닙니까?”
“우리가 명단을 적어 놓았습니다.”
격앙된 표정으로 말한 사내가 목이 막혔는지 침을 삼켰을 때 옆에 앉은 사내가 말을 이었다.
“구타는 말할 것도 없고 사람 취급을 하지 않았소. 무식한 놈들일수록 더 심했습니다.”
그러자 다른 사내가 거들었다.
“물론 한국인 직원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악질 몇놈이 있는데 그놈들이 우리를 무시하고 학대했습니다. 하지만 다른 직원은 물론이고 여기 있는 사장도.”
사내가 손으로 박사장의 얼굴을 가리켰다.
“그것을 알고도 내버려두었소. 방조한 것이나 같단 말이오.”
“아니, 나는 몰랐습니다.”
박사장이 손까지 저었지만 목소리는 떨렸다.
그때 주동자로 보였던 사내가 정색하고 조철봉을 보았다.
“저는 임동철이라고 합니다. 한국에 오기전에는 중국에서 중학교 교사 노릇을 했지요.”
사내가 차분하게 말했으므로 분위기가 조금 가라앉았다. 임동철이 말을 이었다.
“저는 영어를 조금 합니다. 그래서 가끔 차 수리를 하러오는 근처의 영어학원 선생들을 가끔 만났지요.”
동철의 얼굴에 희미한 웃음기가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그런데 그 학원 선생중 몇명은 우리들처럼 불법 체류자였습니다. 그리고 그중 하나는 미국에서 식당 주방에서 접시를 닦던 놈으로 고등학교도 중퇴했다고 제 입으로 말하더군요.”
주위는 조용해졌고 동철의 말이 이어졌다.
“물론 제가 영어를 아니까 그놈은 저한테 자랑삼아서 말해준 것입니다. 제가 조선족으로 불법체류자 신세라는 것도 말해 주었더니 마음놓고 털어놓았겠지요.”
그러고는 동철이 조철봉을 향해서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그런데 그 미국놈은 조금도 경찰이나 단속반을 무서워하지 않더군요. 세번이나 경찰에 걸렸는데 영어를 지껄이면 그냥 보내더란 것입니다.”
“……”
“그 미국놈은 매일밤 한국여자 한명씩을 꼬셔서 잘 수 있다고 자랑을 했습니다. 영어를 지껄이는 백인이라면 여자들이 줄줄 따른다는군요.”
“……”
“그리고 여기서도 그렇습니다. 불법체류자지만 백인이 나타나 영어를 씨부렁거리면 모두 어려워합니다. 하지만,”
동철이 눈을 부릅떴다.
“동포한테는 약점을 쥐고서 짐승보다 못한 대접을 한단 말입니다. 이것이 한국놈들의 진면목이더군요. 강자 앞에서는 꼬리내린 강아지가 되고 약자한테는 잔인하고 말입니다. 특히 같은 말을 쓰는 동포한테는 더 잔인하고,”
이를 악문 동철의 두눈에 물기가 고였고 다시 주위에 정적이 덮였다. 조철봉도 심호흡만 했을 때 동철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지금 인질로 잡은 사원들은 그중 우리들한테 악질적으로 대한 놈들입니다. 공장장은 대놓고 우리를 차별한 대가로 아예 죽이려다가 살려서 병원으로 싣고 가게 한 것입니다.”
그때 조철봉이 머리를 들고 동철을 보았다.
“그럼 이렇게 합시다.”
모두의 시선을 받은 조철봉이 말을 이었다.
“공장에 근무하는 모든 조선족 직원에게 한국인 직원과 똑같은 월급을 지급하지요. 지금까지 근무기간을 계산해서 차액도 즉시 지급하겠습니다. 그리고.”
조철봉의 목소리가 높아졌고 이제는 멀찍이 떨어진 조선족 사내들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직접 손을 써서 불법체류자가 된 직원들의 여권을 갱신시켜 드리지요. 그것은 여러분중 원하시는 분이 있다면 이곳에서 계속 근무하도록 해 드리겠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동철이 침을 삼키더니 다시 헛기침까지 하고는 조철봉을 보았다.
“저희들 요구를 다….”
“다 들어줍니다. 아니, 그 이상으로.”
정색한 조철봉이 말을 이었다.
“임선생이 관리부장을 맡아 주시지요. 승낙하신다면 내가 지금 발령을 내겠습니다. 잘 알고 계시겠지만 이 공장은 내 소유니까요.”
공장의 인질극이 수습된 것은 그로부터 10분쯤이 지난 후였다. 조선족 근로자들은 인질로 잡고 있던 한국인 사원들을 풀어준 후에 공장 문을 열고 조철봉과 함께 밖으로 나온 것이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한국인 사원들은 미리 내막을 전해 들은 터라 모두 제 위치로 돌아갔다.
그러나 간부급 사원들은 사무실 2층의 회의실로 소집되었다. 회의실 안에는 인질극에 가담했던 조선족 근로자들까지 모여 있었으므로 40명이 넘는 직원이 둘러앉았다. 오늘의 회의는 본사 사장이 직접 주재하는 것이다. 본사 사장 조철봉은 극동서비스를 인수한 지 3년이 되었지만 한번도 간부 회의를 주재한 적이 없다. 모두 전문경영자에게 맡긴 채 일년에 한두번 잠깐 들렀다 간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오늘 상석에 앉은 조철봉의 기세는 위압감이 풍겨졌다. 좌우에 앉은 최갑중과 박기술이 굳어진 표정으로 눈만 끔벅였고 덩달아서 회의실 안은 무거운 정적에 덮여졌다. 이윽고 박기술이 더듬거리면서 임시 회의의 시작을 알리더니 본사 사장님의 말씀이 있겠다고 하고는 조철봉을 보았다. 그러자 조철봉의 거침없는 목소리가 회의실을 울렸다.
“인간은 인간다운 행동을 해야 인간 대우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주위를 둘러본 조철봉이 말을 이었다.
“내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영문을 모르시겠다는 분은 회사를 떠나 주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조철봉이 눈을 부릅떴다.
“오늘 일에 대해서 단 한마디라도 언급을 한다면 내가 내 모든 것을 투자해서 그 사람을 인권유린 또는 명예훼손, 또는 동족학대 등 갖다붙일 수 있는 온갖 죄명을 끌어다가 아예 패가망신을 시켜드리지요. 내가 약속합니다.”
갑중이 흘끗 시선을 주었지만 조철봉의 말은 막히지도 않고 이어졌다.
“내 동포의 약점을 잡아서 무시하고 학대하고, 돈까지 착취하는 놈은 인간이 아닙니다. 그런 놈은 인간 취급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인간이 짐승과 다른 점은 약자를 보살피고 약자 앞에서 겸손하며 다른 인간을 위해서 양보하고 희생한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갑중이 숨을 들이켰다가 한참동안이나 뱉지 않았다. 조철봉과 그렇게 오랜 기간을 같이 지냈어도 이렇게 유식한 말을 이렇게 알아듣기 쉽게 하는 것은 처음 들었기 때문이다. 그때 조철봉의 말이 다시 회의실을 울렸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여기 모인 조선족 동포 직원들과 새롭게 다시 시작하게 될 것입니다. 간부 직원 여러분은 내 말뜻을 이해하셨을 테니 적극적인 호응을 바랍니다.”
그러고는 조철봉이 옆에 앉은 사장 박기술을 돌아보았다.
“박사장이 이제 자세한 내막을 말씀 드릴 것입니다.”
회의실 안은 여전히 물벼락을 맞은 듯이 조용했지만 조철봉은 갑중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고는 왼쪽에 앉아 있는 임동철을 향해 머리만 끄덕여 보이고는 갑중과 함께 회의실을 나왔다. 박사장은 이제 곧 조철봉이 약속한 대로 처리를 해줄 것이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한동안 입을 다물고 있던 갑중이 참지 못하고 조철봉에게 물었다.
“형님, 조선족에 친척이 있으신거요?”
머리를 들었던 조철봉이 갑중의 말이 끝났을 때 눈을 흘겼다.
“없어, 이 자식아.”
갑중의 시선을 받은 조철봉이 이번에는 입맛을 다셨다.
“이 자식아, 사기꾼도 인간이다. 인간이 지킬 도리는 지켜야 돼.”
(1000)인연 만들기-1
조철봉이 오세희에게 연락을 한 것은 귀국한 지 일주일만이었다. 오세희는 민수영과 함께 발리에 왔었지만 조철봉과는 만나지도 통화를 하지도 않은 사이였다. 다만 중개업자 김상길이 중간에서 쌍방에 대한 소개를 해준 관계였는데 상대방을 직접 보지도 않았으니 확인도 안되었다. 그래서 오세희의 직장에 전화를 하면서도 조철봉은 께름칙했다. 만일 오세희가 모른다고 하면 그만인 것이다.
미리 건네준 사례비를 김상길한테 돌려달라고 하겠는가? 오세희는 디자이너라고 했다. 압구정동에 꽤 큰 가게를 운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저, 기억하실지 모르겠는데, 일주일 전에 발리에서 제가.”
오세희가 전화를 받았을 때 조철봉이 그렇게 말했다. 말하면서도 자신이 없어서 쓴웃음이 나오려고 했다. 매사에 철저하게 앞뒤를 재어온 자신답지 않은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수화기에서 오세희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 알아요, 조사장님.”
그러더니 오세희가 짧게 웃었다.
“민수영씨하고 데이트 하셨죠?”
그순간 조철봉의 가슴이 쿵 소리를 내는 것처럼 울리더니 전신에 활기가 돌았다. 이만하면 작업에 이상이 없다.
“이거, 기억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조철봉의 목소리도 밝아졌다.
“제가 시간이 없어서 발리에서는 못뵈었습니다.”
“오늘 시간 있어요.”
대뜸 그렇게 말한 오세희가 다시 키득 웃었다.
“내가 미쳤나봐, 그렇죠?”
“아니, 천만에요. 오히려 솔직하게 말씀하시는 매너가 존경스럽습니다.”
“아유, 소름이 일어나요.”
오세희가 맑고 높은 목소리로 말했다.
“다 아는 처지에 그렇게 내숭 떨지 말라니깐.”
“알겠습니다, 오사장님.”
“민수영씨한테서 이야기 다 들었어.”
그러고는 오세희가 또 웃었다.
“뻥도 조금 섞었겠지만 이야기만 들어도 난 후끈 달았다고.”
“제가 민사장이 모르는 비밀을 한가지 말씀 드릴까요?”
“응? 말해줘, 얼른.”
“제가 그때 안쌌습니다. 싸지도 않았다고요.”
“어머머.”
“민사장은 그것도 모르시는 모양이던데.”
“어머머.”
“역시 초짜이십디다. 제가 놀랐습니다.”
“어유우.”
앓는 소리를 낸 오세희의 목소리가 낮아지면서 수화기에서 숨결까지 들렸다.
“이봐요, 조철봉씨.”
“예, 세희씨.”
“민사장은 조철봉씨 전화를 기다리는 모양이던데, 전화 안했어?”
“아직 안했습니다.”
“나한테 먼저 한거야?”
“그런 셈이지요.”
“왜?”
“새 여자는 항상 신비스러우니까.”
“나 봤어?”
“아니.”
“그런데도?”
“목소리만 들어도 당신이 뜨거운 여자라는 건 알겠고.”
“또?”
“금방 달아오르는 체질 같은데.”
“두시간 반이라며?”
조철봉은 오세희가 전화로 자극을 받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아직 서로 얼굴도 안 본 사이였고 그것이 오세희를 더 흥분시키는 모양이었다.
“세시간도 할 수가 있지.”
조철봉이 이제는 느긋하게 대답했다. 이것은 사실이다. 어떤 놈은 이 말을 듣고 그냥 넣고 있기만 하는 게 아니냐고 묻는데 그건 그야말로 ‘초짜’들의 무지에서 비롯된 생각이다. 세시간 동안 쉬지않고 움직이는 것이다. 그때는 두몸이 일체가 되어 고공 비행을 하는 것이나 같다. 세시간짜리 비행, 인천에서 딱 세시간이면 홍콩에 도착한다. 그때 오세희가 길게 숨을 뱉었다. 숨소리가 하도 커서 조철봉은 귀가 더워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아유, 내가 미쳐.”
“누님.”
조철봉이 은근한 목소리로 불렀다.
“우리, 다 아는 처지에 이제 격식 떼고 이야기하지.”
“그래, 말해.”
세희가 서슴없이 말했을 때 조철봉은 의자에 등을 붙였다. 벽시계가 오전 10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우리는 아직 얼굴도 안보았어, 누님. 그렇지?”
“응.”
“하지만 이 분위기가 더 자극적인 것 같은데 누님은 어때?”
“그런 것 같기도 해.”
“물론 민수영씨한테서 내 이야기를 들었을테니까 신분이 확실하다고 인정되었을 것이고.”
“그건 그래.”
“누님.”
“왜?”
“나, 섰어.”
“뭐가.”
했던 세희가 다음 순간 말을 뚝 그친 것은 뜻을 알아차렸다는 표시일 것이다. 조철봉이 한발 더 나갔다.
“나, 지금 내놓고 있어.”
그때 수화구에서 침 삼키는 소리가 났다. 그만큼 입을 송화구에 잔뜩 붙이고 있었다는 증거도 될 것이다.
“내 철봉이 어떻게 생겼다고 민사장이 얘기 안해줬어?”
그러나 세희는 이번에도 가만있었다. 아직 이성이 감성을 누르고 있는 모양으로 바보같이 안해줬어 하기가 쑥스러웠을 것이다. 조철봉은 바지 안에 얌전히 누워있는 철봉에 힐끗 시선을 주고는 말을 이었다.
“길이가 이십오센티는 돼. 직경이 오센티 쯤이고. 상상해봐, 누님.”
“….”
“철봉 머리는 조금 더 커. 그, 버섯같은 부분은 직경이 육센티는 될거야.”
“….”
“거짓말 아냐, 곧 누님이 보게 될 텐데 내가 왜 허풍을 치겠어?”
“….”
“누님은 어떤 체위를 좋아해? 앞이야? 아니면 뒤야?”
“….”
“그게 기본형인데 옆이나 위나, 또는 식스나인 스타일은 양념이지. 한꺼번에 너무 많은 방법을 사용하면 온갖 양념을 다 넣은 비빔밥처럼 되어서 인상깊은 작업이 안돼.”
“….”
“누님은 샘물이 많이 나오는 편이야?”
“응.”
그때 처음으로 세희가 조철봉의 물음에 답했고 그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이 바지 속의 철봉이 꿈틀거렸다. 조철봉이 심호흡을 했다.
“그럼 뜨거운 여자군.”
그러고는 조철봉이 은근하게 불렀다.
“누님.”
“응?”
“하고 싶지?”
세상에, 얼굴도 안본 상대에게 이렇게 묻다니.
그때 오세희가 대답했다.
“그래.”
오세희의 목소리가 건조해진 것처럼 느껴졌다. 입안이 말라있을 것이었다.
“하고 싶어.”
“지금 혼자야?”
조철봉이 다시 물었다.
“방에 혼자 있냐고 물은 거야, 누님.”
“그래, 혼자 있어.”
“그럼 방문을 잠궈.”
그러자 4, 5초쯤 지난 후에 조금 맑아진 목소리로 세희가 대답했다.
“잠궜어.”
세희는 이미 조철봉이 어떤 수작을 부릴지 예상하고 있는 것이다. 조철봉은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이쪽도 긴장하고 있는 모습을 전해 주어야 한다.
“누님.”
“응?”
“얼굴도 안본 사이에 이러는 것이 더 자극이 되지 않아?”
“그러게.”
“내 이야기는 민사장한테서 들었다며?”
“응, 대충.”
“뭐라고 그래?”
“세다고, 두시간반을 했다고.”
“그리고?”
“홍콩에 세번인가 갔다왔다고.”
“그것뿐이야?”
“죽을뻔 했다고.”
“그리고?”
“거기 생각만 하면 몸에 열이 오른다고도 했어.”
“누님, 나도 솔직히 말해볼까?”
“말해봐.”
“난 민사장하고 할 적에 별 느낌이 없었어. 그저 만족시켜 주겠다는 생각밖에.”
“…….”
“난 초짜는 싫어, 익숙한 여자가 좋아, 적어도 내가 세번 때리면 한번 반응이 올 정도로.”
“어떤 반응?”
“몸놀림, 그리고 분위기.”
“으응.”
“누님은 절정의 느낌을 겪어보았지?”
“응, 하지만,”
“ 하지만 뭐야?”
“별로였어. 그냥 좋다가 만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남편이 시원찮았던 거야?”
“그것도 그렇고.”
“이런.”
조철봉이 수화기에 대고 혀를 찼다.
“아니, 요즘엔 왜 이런 사람들이 많지? 독도문제 때문인가? 아니면 교과서 왜곡 문제로 그런가?”
“흐응.”
하고 세희가 웃었을 때 조철봉이 정색하고 불렀다.
“누님,”
“응?”
“팬티 내려봐.”
“왜?”
“꼭 말끝마다 그럴 거야?”
언성을 높인 조철봉이 재촉했다.
“어서 내려.”
“내렸어.”
“내 철봉을 눈앞에 떠올려 봐.”
“아이.”
“내가 지금 달려갈 수는 없지 않아? 그러니까 우선 입가심으로, 어서.”
“그래, 떠올렸어.”
“건들거리고 있는 거야, 보여?”
“응, 보여.”
“누님 가운데 손가락으로 샘 끝을 살살 문질러봐, 살살.”
“살살?”
세희의 목소리가 다시 건조해졌다. 수화기에서 침 넘어가는 소리도 울렸다. 세희가 몰두하기 시작한 것이다.
조철봉의 경험에 의하면 성적 충동을 느낀 여자는 자극에 약하다. 오세희에게 이런 경험은 처음일 것이었고 그것이 흥분을 배가하는 효과를 냈을 것이었다. 물론 민수영이 떠벌린 내용이 분위기 조성에 일조를 하기도 했다.
조철봉이 전화기를 입에 딱 붙이고는 속삭이듯 말했다. 숨소리까지 들으라는 것이다.
“누님.”
“으응.”
“손끝을 샘 위쪽 뚜껑에 대.”
“이, 이렇게.”
“응, 그리고 살살 문질러봐.”
“이렇게?”
“더 살살.”
그러고는 조철봉이 수화기가 세희의 귀가 되는 것처럼 더운 숨을 크게 불어넣었다.
“손끝을 대었다가 떼어봐.”
“이, 이렇게?”
“응, 자주 대지말고. 잠깐 대었다가 오래 떼어. 될수록 오래.”
“이, 이렇게.”
그러더니 세희의 숨소리가 높아졌다.
“미치겠어, 정말.”
“자주 손을 대지 말란 말야. 감질나게 손을 대었다가 떼어.”
“으응.”
“참으란 말야. 힘껏 참았다가 손끝을 살짝 뚜껑에 대고 나서 얼른 떼어.”
“아아.”
“물이 흘러내리지?”
“으응.”
“그럼 손끝을 천천히 샘 안으로 집어넣어봐. 아주 천천히.”
“으응.”
물론 세희가 대답만 막둥이처럼 해놓고서 실제로는 소 여물통의 사료 젓듯이 젓고 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설령 그런들 어떻고 저런들 어떠리? 서로 하나의 목표를 위하여 전진하고 있다는 것만으로 둘의 인연은 시작되었다.
“천천히. 천천히.”
“으으응.”
“지금 넣고 있지?”
“응.”
“너무 가늘지?”
“응.”
“내 건 그 열배는 되니까 지금 당장은 참아. 누님.”
“으응.”
“자. 끝까지 넣었으면 좌우로 흔들어봐.”
그때 수화기에서 낮고 무거운 신음소리가 뱉어졌다. 시키는 대로 했던 세희가 내지르는 탄성이었다.
“아아. 죽겠어.”
세희가 헐떡이며 말했다.
“자기야. 나, 이것으로 양이 안 차.”
“나도 그래, 누님.”
“얼른 해줘, 진짜로.”
“지금은 안돼. 우선 이것으로 참아.”
“아유우.”
“내 철봉이 들어가 있다고 상상해. 뜨겁고 굵은 철봉이.”
“으으응.”
“마구 휘젓고 있다고 상상해봐.”
그때 다시 세희의 탄성이 터져나왔다. 제 손으로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
“누님.”
조철봉이 뜨거운 목소리로 불렀다.
“진짜로 하고 싶지?”
“응.”
“그럼 지금 핑크호텔로 와. 몇분이나 걸릴것 같아?”
“핑, 핑크호텔이면 40분 정도.”
“내가 먼저 가서 방을 잡아놓고 기다릴 테니까 호텔에 도착하면 내 휴대전화로 연락을 해.”
그러자 세희가 다급하게 말했다.
“알았어. 바로 나갈게.”
정확히 11시반이 되었을 때 호텔 방안의 탁자 위에 있는 휴대전화가 진동으로 떨었다. 오세희는 정확하게 38분40초만에 도착한 것이다. 조철봉이 휴대전화를 귀에 붙이자 세희의 목소리가 울렸다.
“나, 왔어.”
“1205호실.”
“알았어.”
그러고는 통화가 끊겼다. 세상사에서 이런식으로 인간들의 호흡이 맞는다면 무슨 놈의 회담이니, 협상 따위가 필요하겠는가. 북한 핵폐기에 대한 남북간의 대화도.
“폐기해?”
“그래 버려.”
“알았어. 양곡이나 내놔.”
서로 알만큼 알고, 머리통도 굵은 사이니만큼 그러고나서 뒷이야기를 길게 나눠도 좋으련만. 세희가 방문의 벨을 누른 것은 그로부터 5분30초 후였으니 달려온 시간에 비교하면 길었다. 인간들의 나쁜 습성이 여기서 또 나타난 셈이다. 제 주머니에 들어왔다 싶으면 거만해지고 잔인해지며 애를 먹인다. 그러다가 여러번 혼이 나고서도 그런다. 그러나 문을 연 순간 조철봉의 기분은 대번에 풀어졌다. 눈앞에 서 있는 오세희는 복도가 환해질 정도로 화사했다. 물결치듯 어깨까지 내려온 머리칼, 맑고 큰 눈에 오똑 선 콧날, 그리고 육감적인 입술을 보면 서양미녀 같았다. 물론 볼륨있는 몸매에 키도 커서 170 정도는 되어 보였다. 시선이 마주쳤을 때 세희는 붉은 입술을 구부려 희미하게 웃어 보였지만 말을 하지는 않았다.
“누님, 들어와.”
조철봉이 비켜서면서 말했다.
“역시 내가 상상했던 대로군.”
그러자 방안으로 들어섰던 세희가 머리를 돌려 조철봉을 보았다.
“어떻게 상상했는데?”
“섹시한 용모에 글래머로.”
“어떤 유형을 좋아하는데?”
“바로 누님같은 스타일.”
그러고는 다가선 조철봉이 세희의 허리를 두 손으로 부드럽게 안았다. 세희는 크림색 원피스 차림이었는데 허리의 곡선이 미끈했다. 드러난 두 다리는 날씬했고 무릎 위쪽의 허벅지는 단단하게 느껴졌다.
“누님, 아직도 난 서있어.”
조철봉이 그 자세 그대로 시선을 내려 아래쪽 철봉을 가리켜 보였다. 무의식중에 조철봉의 시선을 따라 그곳을 보았던 세희가 침을 삼켰다. 벌써 두 눈밑이 붉어져 있었다. 바지를 치고 올라온 철봉이 삼각형 텐트를 만들어놓은 상황인 것이다.
“누님은 그 기분 가라앉은 거야?”
“아, 아니.”
당황한 세희가 머리까지 저었을 때 조철봉이 바짝 다가섰다. 그러자 철봉이 세희의 배꼽 주위를 찔렀다.
“어디, 체크를 해볼까?”
손을 뻗은 조철봉이 세희의 스커트를 들치고는 팬티속에 손을 넣었다. 그러더니 얼굴을 펴고 웃었다.
“그렇군, 아직도 젖어있군.”
“나, 먼저 씻고.”
허리를 비튼 세희가 말하자 조철봉은 머리를 저었다.
“무슨 소리, 그대로 해, 누님.”
“아이, 지저분해.”
“뭐가?”
정색한 조철봉이 원피스 뒤쪽의 지퍼를 내리면서 말했다.
“말도 안되는 소리, 뭐가 지저분하다는 거야?”
그순간 원피스가 벗겨졌고 조철봉의 입에서 탄성이 뱉어졌다.
“으음, 멋진 몸이야. 누님.”
조철봉에게는 첫사랑이 없다. 지나가는 남자를 아무나 붙잡고 첫사랑이 있었느냐고 묻는다면 아마 십중 팔구는 그렇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감정을 느껴보지도 못하고 늙어간 사람들도 의외로 많다. 거기에다 첫사랑을 겪었다고 말한 인간 중에도 꾸미거나 거짓으로 말한 비율도 적지 않을 것이다. 짝사랑 따위의 어설픈 순간을 첫사랑으로 미화시킨 경우도 있을 것이고 몇번 편지를 주고받고 나서 그것을 혼자 과장해 버린 경우도 있을 것이며 심지어는 얼굴도 못본 상대를 자기 마음대로 갖다 붙여놓고 꾸며 말한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첫사랑에 대한 정의조차도 불분명한 것을.
조철봉식 첫사랑이란 몸과 마음이 합일이 된, 즉 일체가 된 남녀의 사랑을 말한다. 그리고 덧붙인다면 감정은 물론이고 몸이 완벽하게 승화되어야 한다. 즉 성적으로도 만족해야만 된다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조철봉은 성장기는 물론이고 결혼한 후까지 그런 경지에 닿지 못했다. 조철봉이 성의 진면목을 깨닫게 된 것이 이혼한 후였으니 햇수로는 5년이 조금 넘었지만 지금까지 한번도 정신과 육체가 환해지도록 일체감을 느껴본 적이 없는 것이다. 즉, 이것은 전처이자 재혼한 처이기도 한 서경윤이 이혼의 사유로 주장했던 조철봉의 이중성, 달리 표현하면 사기성이 원인일지도 모른다. 지금도 그렇다. 이제 옷을 홀라당 벗은 오세희가 침대 시트 안으로 몸을 들이밀었을 때 조철봉의 온몸은 기대감으로 충만했지만 사랑의 감정 따위는 눈을 씻고 보아도 없다. 일 마치고 나서 오세희가 호텔 복도에서 객사를 해도 병원에야 실어 나르겠지만 그 다음날에는 까맣게 잊어 먹을 것이었다.
“어디, 한번 볼거야.”
조철봉의 허리를 두팔로 감아 안은 오세희가 벌써부터 가쁘게 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나, 죽여봐.”
오세희가 젖가슴을 출렁이면서 상반신을 일으켰다. 조철봉의 시선을 받은 오세희가 얼굴을 펴고 웃었다.
“어떻게 해줄거야?”
조철봉은 오세희의 어깨를 두팔로 감아 안고는 다시 침대 위로 눕혔다. 침대에 올랐을 때 이렇게 적극적인 자세가 되는 여자들이 간혹 있다. 이런 부류의 여자들은 대개 서둘렀다가 일을 망친다. 성은 화합이다.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한다. 지금까지 여자가 이끄는 대로 한 적도 없을 뿐만 아니라 만일 그렇게 했다면 안한 것보다 못한 꼴이 되었을 것이었다.
“기다려. 나하고 호흡을 맞춰야 돼.”
조철봉이 세희를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성경험이 많고 나름대로 수많은 절정을 경험했다고 해도 조철봉이 보기에는 세희는 초짜였다. 기본도 모르는 초짜인 것이다. 조철봉은 저도 모르게 가늘고 긴 숨을 뱉었다. 그러고는 그 숨소리를 의식한 순간 몸을 숙여 세희의 젖가슴을 입에 넣었다. 젖꼭지가 혀끝에 닿았고 세희가 몸을 꿈틀거렸다. 시작이다. 흘끗 시선을 옆쪽 탁자에 부착된 디지털 시계에 주고 난 조철봉이 자세를 갖추었다. ‘어디, 얼마나 견디는가 보자.’ 물론 이것은 속으로 한 말이다. 애무로 일차 절정에 오르게 한 후에 느긋하게 후식을 먹는 기분으로 몸을 합하는 것이 조철봉의 기법이다. 그것이 또한 상대방에게 여유와 만족감을 가져다 주는 것이다.
“아아.”
세희가 젖가슴만 애무하고 있는데도 꿈틀거리며 탄성을 뱉었다. 두손을 뻗쳐 세희의 온몸을 더듬으면서 성감대를 찾는 조철봉의 자세는 진지했다. 유전 탐사대도 이보다 더 집중하지 못할 것이다.
다음날 아침, 회사에 출근한 조철봉에게 최갑중이 보고했다.
“어제 저녁에 개성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개성 공단에 입주한 공장에서 연락이 왔다는 말이었다. 갑중이 말을 이었다.
“공단위원회에서 형님을 만나자고 한다는 겁니다.”
“위원회”
이맛살을 찌푸린 조철봉이 갑중을 보았다.
“위원회에서 왜?”
“이유는 모르겠다고 하던대요.”
“무슨 문제가 있나?”
“체크해봤지만 꼬투리 잡힐 일은 없다고 합니다.”
“언제 보자는 거야?”
“오늘 중으로 들어오셨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이거, 찜찜한데.”
입맛을 다신 조철봉이 노골적으로 싫은 내색을 했다. 지금 공단에는 중국에서 옮겨간 공장이 가동중이다. 아직 정상 가동을 못하고 있는데도 근로자 600명에 공장의 건평이 7000평이나 된다. 정상 가동이 된다면 근로자 3500명에 공장 건평 2만5000평의 대형 섬유업체가 개성 공단에 입주하게 될것이다.
“위원회 위원장이 누구랬지?”
조철봉이 묻자 갑중은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 들었다.
“이명철입니다. 52세, 당 경제비서 출신이고 실력자라고 소문이 났습니다.”
“좋아, 가자”
마침내 조철봉이 결심하고 말했다. 지금까지 개성공단을 위해서 중국 공장을 이전했으며 경제특구가 될 가능성에 대비해서 유흥업소 종사자들도 교육해 보내지 않았는가? 아직 경제특구 건설은 지지부진이지만 위원회에 책잡힐 일은 없는 것이다. 오후에 조철봉과 갑중은 승용차 편으로 개성공단에 들어섰는데 자유로 소통이 원활해서 도착하기까지 한시간반밖에 걸리지 않았다. 공장에 들어서자 사장 김동만이 현관 앞에서 조철봉을 맞았다. 동만은 전문경영인으로 성실하고 차분한 성품이다.
“조금 전에도 위원회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사장실로 조철봉을 안내한 동만이 보고했다.
“오신다고 했더니 위원장이 언제든지 방문하시라면서 기다린다고 했습니다.”
“용건은 말하지 않던가요?”
갑중이 묻자 동만은 머리를 저었다.
“예, 그것은.”
“제기랄.”
입맛을 다신 갑중이 힐끗 조철봉을 보더니 투덜거렸다.
“왜 오라 가라 지랄이야? 용건도 말해주지 않고.”
그러자 조철봉이 동만에게 말했다.
“연락하세요, 지금 가겠다고.”
“예, 사장님”
살았다는 듯이 동만은 전화기를 쥐었고 갑중이 정색한 얼굴로 조철봉을 보았다.
“제가 모시고 가지요.”
마치 감옥에 따라가겠다는 표정처럼 보였으므로 조철봉은 풀석 웃었다. 위원장 이명철과는 처음 만나는 것이다. 지난번 위원장 강석민은 목표 달성을 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좌천되었다고 했다. 지금은 함경도의 탄광 부지배인으로 가 있다는 것이다. 동만까지 조철봉을 수행했으므로 일행 셋이 탄 승용차가 공단 중심부에 위치한 위원회 건물 안으로 들어섰을 때는 오후 4시쯤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미리 연락을 해서인지 현관 앞에서 차가 멈췄을 때 기다리고 있던 서너명의 사내가 일행을 맞았다. 그중 하나가 일행을 둘러보며 말했다.
“제가 위원장입니다.”
위원장 이명철이 현관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놀란 조철봉이 다가가 인사를 했다.
“제가 오성상사의 조철봉입니다.”
“어서오십시오. 이명철입니다.”
악수를 나눈 명철이 조철봉을 안으로 안내했다. 위원장실의 소파에 조철봉 일행과 마주보고 앉았을 때 이명철이 웃음띤 얼굴로 말했다.
“저희들한테는 조사장님 같은 인재가 필요합니다. 적극적이고 순발력과 임기응변력이 강한 이른바 상사맨이 절실한 입장이지요.”
“그렇습니까?”
이제는 당황한 조철봉이 좌우에 앉은 김동만과 최갑중을 보았다. 그러나 그들도 의외인 듯 눈만 끔벅이는 중이다. 그때 명철이 말을 이었다.
“제가 갑자기 뵙자고 해서 죄송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숨을 고른 명철이 정색하고 조철봉을 보았다.
“개성공단의 발전에 조사장님의 협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조철봉의 긴장된 시선을 받은 명철이 목소리를 낮췄다.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려는 의도일 것이다.
“자동차부품 공장을 옮겨오실 의향은 없으십니까? 조사장님이 결정만 하신다면 적극 협조해 드리겠습니다.”
마침내 명철이 본론을 꺼내었다. 조철봉이 운영하고 있는 사업체를 공단 위원회에서는 모두 파악하고 있을 것이었다. 자동차부품 공장은 지금 베트남의 호찌민시에서 운영되고 있다. 한국의 대성자동차에 전량 납품되는 조건이어서 장래성도 밝고 수익도 좋은 업종이었다. 조철봉은 심호흡을 했다. 만일 호찌민시의 부품공장을 옮겨온다면 자금이 이중으로 소요된다. 차라리 개성공단에 새 부품공장을 신설하는 것이 나을 것이었다. 베트남 정부도 호찌민시의 오성 부품공장을 적극 지원해주고 있는 실정이기 때문이다.
“검토해 보겠습니다.”
마침내 조철봉이 긴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가능성이 없는 것도 아니다. 떠밀려서 하는 사업 같아도 역으로 생각하면 이것이 절호의 기회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역경이 닥치면 이것이 좋은 일이 일어나기 위한 바탕이 될 것으로 믿었고 그것도 맞지 않으면 액땜을 한 것으로 치부해온 것이 조철봉의 인생관이다.
재물에 대한 큰 욕심이 없는 것도 그것에 일조를 했겠지만 낙관적이며 긍정적인 인생관이야말로 성공의 기회가 되는 것이다. 사기꾼 조철봉이 자동차 영업사원에서 4년만에 현재의 위치에 오른 것도 바로 그것 때문이다. 회사를 인수하면 경영은 전문경영자에게 맡기고 자신은 새 사업을 구상했다. 자신의 능력을 아는 것이다. 최고경영자는 마음을 비워야 한다.
이것이 조철봉의 경영자론이었다. 다시 말하면 사주가 아는것이 많을수록 사고가 많이 일어나고 기업이 위축된다는 것이다. 전문지식이 없는데도 수박 겉핥기식 지식만 갖고 사주랍시고 사사건건 상관하면 경영자는 소신있게 일을 하지 못한다. 그리고 또 있다. 전문경영자에게 일을 맡기면 어지간한 부정이 있어도 이윤이 발생하는 한 못본 척한다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재물 욕심이 있다. 그것이 과하면 문제가 되지만 그것을 적절하게 이용하는 것도 운영의 방법이다. 미끼를 먹이는 셈 치는 것이다. 물론 내막은 파악해야 된다. 조철봉은 명철의 극진한 환대를 받으며 위원회 건물을 나왔다. 갑중과 동만은 짐을 진 것 같은 표정들이었지만 조철봉의 표정은 밝았다. 이쪽에서 역이용하면 된다.
개성에 돌아온 조철봉은 그 다음날 오전에 중국 청도행 비행기에 올랐다. 산동성 청도는 인천공항에서 비행기로 한시간 거리밖에 되지 않는다. 공항에는 K-TV의 총사장 고동수가 기다리고 있었는데 얼굴에는 반기는 기색이 역력했다. 가까운 거리인데도 넉달 동안이나 들르지 못한 것이다. 고동수는 한국에서 룸살롱 지배인을 했지만 지금은 산동성과 조선족 자치주인 연길에까지 중국식 룸살롱인 K-TV 17개를 운영하는 총사장인 것이다. 공항에서 시내로 달리는 차 안에서 조철봉이 말했다.
“중국에서 번 이익금을 개성 공단에다 재투자할 계획이야.”
앞쪽자리에 앉은 동수가 눈만 끔벅였고 조철봉은 말을 이었다.
“여기 오전무하고 둘이 상의해보도록.”
조철봉이 옆에 앉은 오정만을 눈으로 가리켰다. 정만은 투자 전문가로 지금까지 조철봉의 해외사업을 관리해왔다. 물론 동수와는 서로 잘 아는 사이였으므로 둘은 손발이 맞을 것이었다. 그때 동수가 입을 열었다.
“사장님, 며칠 전에 새로 오픈한 17호점을 방문해 주셨으면 합니다만.”
조철봉의 시선을 받은 동수가 정색하고 말을 이었다.
“지금까지의 경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스타일의 K-TV를 설립한 것입니다.”
“그래?”
쓴웃음을 지은 조철봉이 힐끗 정만을 보았다.
“오전무한테도 도움이 되겠군 그래. 가보도록 하지.”
정만은 조철봉이 고용하기 전에 대기업의 기획조정실에서 수십년간 실무를 익혀온 전문가인 것이다. 그날 저녁 8시가 되었을 때 식사를 마친 조철봉과 일행은 청도 바닷가에 위치한 K-TV 17호점 안으로 들어섰다. 17호점은 7층 빌딩 전체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자체 건물이다. 현관 앞에는 17호점 지배인과 마담들이 도열해 있어서 마치 대통령을 맞는 것 같았다. 로비로 들어선 조철봉이 주위를 둘러보고는 만족한 표정으로 머리를 끄덕였다.
“잘했군.”
장식이 화려하지도, 그렇다고 초라하지도 않았지만 품위가 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고급 손님은 이런 분위기를 좋아한다. 조철봉의 눈치를 살피던 동수의 얼굴에도 웃음이 떠올랐다. 건물 1층은 커피숍과 스탠드바 형식이었는데 벌써 손님들이 많았다.
“이곳에서 한잔 마시고 위층으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동수가 엘리베이터로 조철봉을 안내하면서 말했다. 건물 2층에서 4층까지는 룸살롱이었고 5층에서 7층까지는 호텔인 것이다.
“원스톱 서비스로군.”
조철봉이 4층의 VIP룸으로 안내되면서 말했다. 동수가 크게 머리를 끄덕였다.
“예, 그렇습니다, 사장님. 손님들의 욕구를 이 건물 안에서 다 채워 드리도록 만들어 놓았습니다.”
“잘했다.”
“감사합니다.”
동수가 안내한 방 안으로 들어선 조철봉의 얼굴에 다시 웃음기가 떠올랐다. 방안은 깨끗했다. 바닥과 벽면이 나무 재질이었고 소파는 가죽으로 티 한점 묻지 않았다. 연한 향내가 풍기는 방안을 둘러본 조철봉이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분위기를 잘 맞췄구나.”
“그렇습니다.”
정만이 정색하고 맞장구를 쳤다.
“장사가 잘 되겠습니다.”
조철봉의 옆에 앉은 아가씨는 긴 머리에 빼어난 미모였지만 젖가슴이 작았고 전체적으로도 마른 몸매였다. 그러나 지금까지 조철봉은 룸살롱에서 파트너 타박한 적이 한번도 없다. 파트너 타박해서 일이 제대로 된 적이 없다는 사실을 오래 전에 깨달았기 때문이다.
단골집에 예약을 하고 갔을 경우 담당 종업원은 백이면 백명 파트너를 미리 대기시켜 놓는데 그 첫번째 파트너보다 더 나은 아가씨는 못찾는다. 그래서 서너번 아가씨들 선을 보고 나서는 결국 첫번째 파트너를 다시 찾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그 첫번째가 가만히 기다리고 있겠는가? 또 설령 기다리고 있다손치더라도 쓸개빠진 여자처럼 도로 가겠는가? 룸살롱에 예약을 하고 갔을 경우에는 마담이나 담당이 대기시킨 파트너를 점잖게 받아들이는 것이 이롭다. 마담 이연숙은 먼저 조철봉에게 술을 따랐는데 매너가 은근했다. 세련된 자세여서 미국에서 석사학위까지 받았다는 것이 사실로 믿어졌다.
“인사해야지.”
연숙이 부드럽게 말하자 아가씨들이 차례로 일어나 인사를 했다. 조철봉의 파트너는 이름이 양명심이었는데 본명 같았다. 흑룡강성이 고향이며 조선족으로 24세, 학교는 대련에서 대학 영문과를 나왔다는 것이다.
“오늘 사장님이 첫손님이십니다.”
연숙이 눈으로 명심을 가리키며 말했다.
“사장님께서 좋아하실지 알수 없습니다만 처녀라고 합니다.”
“허어.”
놀란 조철봉이 눈을 둥그렇게 뜨고는 연숙과 고동수까지 번갈아 보았다.
“고사장, 너도 내가 처녀 따먹는 취미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나?”
“아닙니다.”
정색한 고동수가 상체를 세우고 대답했다.
“어쩌다보니 그렇게 되었을 뿐입니다. 저는 사장님이 오신다고만 했지 별도 지시를 한 적이 없습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연숙도 정색하고 말했다.
“명심이가 처녀라고 해서 그렇게 말씀드렸을 뿐이지 이차 준비하라는 말도 아직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됐어.”
조철봉이 얼굴을 펴고 웃었다.
“난 그런 것 찾는 놈들은 딱 질색이야. 오전무는 어때?”
그러자 잠자코 눈만 끔벅이던 오정만이 깜짝 놀라 대답했다.
“예, 저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조철봉이 다시 머리를 돌려 연숙을 보았다.
“내가 온다는 말을 듣고 수백명 아가씨 중에서 명심이를 고른 이유는 뭐지? 역시 처녀라고 했기 때문인가?”
“아닙니다.”
여전히 긴장한 연숙이 머리를 저었다.
“얘가 이야기를 해 보았더니 똑똑했습니다. 그리고 명심이는.”
말을 멈춘 연숙이 시선을 내린 채 몸을 굳히고만 있는 명심을 힐끗 보더니 결심한 듯 조철봉을 보았다.
“명심이는 고향이 흑룡강성이 아닙니다. 학교도 대련에서 나오지 않았구요.”
조철봉의 시선을 받은 연숙이 말을 이었다.
“명심이는 평양이 고향이고 지금도 가족이 모두 평양에 있습니다. 그리고 학교도 그곳에서 나왔구요.”
“그럼 탈북자란 말인가?”
그러자 옆에 앉아있던 명심이 대답했다.
“아닙니다. 저는 대외무역부 직원이고 중국에는 일 때문에 온 겁니다. 여기는 제가 밤에만 일하려고 취업한 것이구요.”
양명심이 맑은 눈으로 조철봉을 똑바로 보았다.
“마담언니하고는 흑룡강성 출신의 조선족 행세를 하기로 했습니다만 사장님께 밝혀드린 것입니다.”
“위에서 알면 처벌을 받나?”
조철봉이 묻자 명심이 머리를 저었다.
“아닙니다. 상부의 승낙도 받았습니다.”
“하긴 우리 K-TV에 북한에서 파견된 아가씨들이 수백명이다. 모두 외화벌이 일꾼들이지.”
분위기가 차츰 부드러워졌으므로 고동수의 눈짓으로 연숙이 오정만의 잔에도 술을 채웠다. 술잔을 든 조철봉이 명심에게 다시 물었다.
“대외무역부에서 무슨 일을 하나?”
“저는 곡물수입 담당입니다. 주로 중국에서 곡물을 들여갑니다.”
“회사는 어디에 있지?”
“본사는 베이징에 있고 저는 칭다오 지사에서 근무합니다.”
“그렇군.”
이해가 간다는 듯이 머리를 끄덕인 조철봉이 한모금에 술을 삼키고 빈잔을 명심에게 내밀었다.
“한잔 마셔.”
“감사합니다.”
명심의 잔에 술을 따른 조철봉의 시선이 이제는 연숙에게로 옮아갔다.
“이 마담.”
“예, 사장님.”
“17호점은 고급 손님만을 받는 곳이라니 아가씨들 수준도 높겠는데.”
조철봉이 은근한 표정으로 연숙을 보았다.
“손님중에서 마담한테 이차를 나가자는 제의가 왔을 때 어떻게 할텐가?”
“그것은….”
연숙은 정색하고 조철봉을 보았다.
“마침 사장님이 잘 오신 것입니다.”
“그게 무슨 말이야?”
그러자 연숙이 거침없이 말했다.
“제가 사장님 내연의 여자로 알려지면 그런 제의는 없을 것입니다.”
“그, 그런가?”
당황한 조철봉이 옆쪽의 동수를 보았다. 그러나 동수는 재빠르게 머리를 돌린 후여서 시선이 마주치지 않았다. 조철봉이 이제는 정만을 보았지만 그쪽도 마찬가지였다. 시치미를 뗀 얼굴로 정만은 안주를 먹는 중이었다. 조철봉이 헛기침을 했다.
“그렇군. 그렇게 소문을 내도 상관 없겠다. 그렇게 하도록 해.”
“하지만….”
연숙이 여전히 조철봉의 시선을 잡고 말을 이었다.
“그게 헛소문이라는 건 금방 탄로가 납니다. 그래서….”
“그래서 뭔가?”
“괜찮으시다면 저를 불러주시지요.”
그러자 조철봉이 헛기침을 했다. 방으로 불러달라는 말이었다. 그러나 당당한 태도여서 일류 메이커의 애프터서비스 담당이 문제가 있으면 불러달라는 분위기와 비슷했다. 방안의 남녀는 제각기 딴전을 보고 있었지만 조철봉의 대답을 들으려고 귀를 곤두세우고 있었다. 이윽고 조철봉이 입을 열었다.
“그러지.”
정색한 조철봉이 문제가 없는데도 애프터서비스를 받는다는 소비자의 표정을 하고 말했다.
“오늘밤에 내 방으로 와.”
그리고 옆에 앉은 명심의 어깨를 한팔로 감싸 안았다.
“명심이 하고는 사업이야기를 할 것이 있으니까 내일 오전에 만나기로 하고.”
“알겠습니다.”
대답은 동수가 했다.
“제가 방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사장님.”
동수가 누군가? 한국의 룸살롱 지배인 출신이다.
그날밤, 조철봉은 혼자서 호텔 방으로 돌아왔다. 오정만은 파트너와 함께 나왔는데 기를 쓰고 사양했지만 조철봉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정만은 예쁘장한 파트너가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그러나 조철봉 앞이어서 룸에서는 손도 잡지 않았던 것이다.
“긴장을 풀려고 놀러온 것이니까 억지로 절제할 필요는 없어요.”
조철봉이 말했으나 정만은 대답도 못했다.
아직은 뱃심이 든든해야 사주하고 같이 외박을 나갈수 있는 것이다. 방으로 돌아온 조철봉이 샤워를 마치고 가운 차림으로 앉아 시원한 음료를 마실 적에 벨이 울렸다. 때맞추어 이연숙이 온 것이다.
안 되고 재수없는 일들은 꼭 안 좋을 때 일어난다. 예를 들면 재수없는 인간의 전화가 꼭 밥 먹을 때나 화장실에 들어가 있을 때 오는 것과 같은 이치다. 반대로 예쁜 인간은 이럴 때 찾아오는 것이다. 문을 열자 연숙은 크림색 투피스 정장 차림으로 서 있다가 얼굴을 환하게 펴고 웃었다. 자연스러운 태도여서 마치 집에 돌아온 마누라 같았다. 방으로 들어선 연숙이 주위를 둘러보는 시늉을 했다.
“어머, 방이 커요.”
스위트룸이어서 클 뿐만 아니라 별게 다 있는 방이었다. 베란다에는 운동기구까지 놓여 있다.”
“편하게 앉아.”
조철봉이 자리를 권하면서 말했다.
“마실 것 줄까? 뭘 마실 거야?”
“제가 꺼낼게요.”
냉장고로 다가간 연숙이 음료수를 꺼내다가 머리를 들고 조철봉을 보았다.
“술 한잔 더 하시겠어요? 가게에서는 서너잔밖에 드시지 않던데.”
“마시는 걸 세어 보았군.”
“그랬어요.”
연숙이 웃음띤 얼굴로 탁자 위에 놓인 가방을 눈으로 가리켰다. 꽤 큰 손가방이다.
“저기 마른 안주를 가져왔어요. 혹시 방에서 술 드실지 몰라서요.”
“준비성이 있군.”
“준비할까요?”
“양주 몇 잔 마실까?”
그러자 연숙이 재빠르게 움직였다. 먼저 가방을 들고 옆방으로 가더니 금방 행동하기 편한 원피스 차림이 되어서 나타났다. 그러고는 탁자 위에 술과 안주를 늘어놓았다.
“공부도 잘했겠어.”
연숙의 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않던 조철봉이 감탄한 얼굴로 말했다.
“빈틈없이 움직이는군. 행동에 낭비가 없어. 오가면서 꼭 들거나 놓는구먼.”
“잘 보셨네요.”
연숙이 따라 웃으며 앞쪽에 앉더니 술잔에 술을 채웠다.
“유학하면서 밴 습관이죠. LA에서 일을 하면서 학교에 다녔거든요.”
“으음.”
“식당 웨이트리스에서 안내원, 청소부, 골프장 캐디까지 했죠. 피아노 판매원도 했고 주유소에서 기름도 넣어 보았어요.”
조철봉이 술잔을 들더니 연숙에게 같이 마시자는 눈짓을 했다. 둘은 술잔을 들어 올리고는 동시에 술을 삼켰다.
“그러다가 한국사람 하나를 만나 결혼을 했죠. 3년만에 이혼을 했지만요.”
“그렇군, 그러면 그 남자는 지금도 LA에 있나?”
“아뇨, 한국에 돌아갔어요. 제 가족한테….”
조철봉의 시선을 받은 연숙이 다시 화사하게 웃었다.
“그 사람, 한국에 처자식이 있었거든요. 저하고는 이중 결혼을 한 셈이죠.”
연숙이 빈 잔에 술을 채우고는 말을 이었다.
“하마터면 아이도 낳을 뻔했지 뭐예요?”
머리를 끄덕인 조철봉이 유심히 이연숙을 보았다. 연숙의 밝은 표정 뒤에는 어두웠던 인생이 감춰져 있었던 것이다. 누구나 과거의 그늘은 있다. 그리고 그 과거를 기반으로 성장한다. 버릴 것은 버리고 붙일 것은 붙이면서 늙어간다. 인생 70년, 갑자기 죽지 않는 한 정신 차리고 앞날을 보았을 때 살아갈 날이 며칠되지 않는다.
30년이면 1만950일, 많이 남았다고? 실례지만 타고 다니시는 자동차 주행기록을 보시지 않겠는가? 차 산 지 얼마되지 않았는데 어느덧 2만이 되고 5만이 된다. 인생은 이보다 더 빠르고 1회용이다. 차는 새차로 바꿀 수 있지만 인생은 한번 쓰고 끝난다. 돌아가신 부모님을 떠올려 보시라. 시간이 있다면 부모님의 젊었을 때 사진을 보셔도 된다.
1950년대나 60년대에 제작된 대작(大作) 영화는 어떤가? 그 젊고 생기에 차 있던 부모님은 돌아가셔서 흙이 되어간다. 40년, 50년전의 대작 영화, 그 영화에 나온 모든 배우들, 엑스트라에서 짐승까지 다 죽었다. 인간이 생산활동을 할 수 있는 기간은 길게 계산해도 40년이다. 25세에서 65세까지를 잡은 것이다. 그 40년을 하루도 낭비하지 않고 생활했다고 해도 1만4천6백일, 숫자로 쓰면 14,600일이다. 이 기간에 별일이 다 일어나는 것이다. 성공하고 실패하며, 자식을 셋 낳았다가 하나가 먼저 죽고, 마누라하고 헤어져 원수가 된 후에 부도가 나서 거지도 되었다가 다시 일어난다. 그동안에 사고가 나서 죽는 경우를 제외하고 하는 말이다. 14,600일. 생각을 가진 인간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 그저 자손만 남기고 간다는 것으로는 뭔가 부족한 느낌이 드는구나. 게다가 애비 노릇을 변변하게 한 것도 아니면서. 연숙을 보는 몇초 되지않은 짧은 순간에 조철봉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 생각들을 정리해본 것이다.
뇌 용량은 두 주먹 만하지만 인간은 뇌의 몇 만분의 일도 활용하지 못하고 떠난다는 학설이 있다. 조철봉도 진즉부터 그것을 믿고 있는 사람중의 하나이다. 뇌는 쓰면 쓸수록 향상된다. 불가능이 없다. 예를 든다면 김제평야 한복판에 박힌 알짜배기 논을 대지로 용도 변경해서 평당 단가를 1백배 올려 팔아먹을 수가 있다. 연구하면 방법이 다 나오는 것이다. 뇌를 활용하라 불가능은 없다. 여자도 마찬가지. 조철봉이 입을 열었다.
“사업체를 갖는 것이 목표라고 했지?”
그러자 연숙이 긴장한 듯 얼굴을 굳히고 대답했다.
“예, 사장님.”
“K-TV를 운영하고 싶다고?”
“그것부터 시작하고 싶습니다. 우선 경험을 쌓아야지요.”
“그러고는?”
“체인점 형식의 기업을 만들고 싶습니다. 중국 시장이 크거든요.”
조철봉이 머리만 끄덕였고 연숙의 말에 활기가 생겼다.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자꾸 새로운 형식, 새로운 제품을 내놓아야 경쟁에서 이깁니다. 그리고 이겨야만 살아남습니다.”
“…….”
“돈을 얼마 모은다든가, 기업체를 몇개까지 소유한다든가 하는 계획은 의미가 없습니다. 수시로 계획이 변경되어야 할테니까요.”
“그렇다.”
마침내 조철봉이 정색한 얼굴로 연숙을 보았다.
“바쁘게 사는구먼 이마담.”
그러고는 조철봉이 그 표정 그대로 말을 이었다.
“내 내연의 여자 행세를 할만해. 자, 그럼 침대로 가실까?”
그러자 이연숙이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조철봉에게 물었다.
“불을 끌까요?”
“마음대로 해.”
“그럼 그냥 두겠습니다.”
그리고 연숙이 그 자리에 선 채로 옷을 벗었으므로 조철봉은 긴장했다. 원피스가 흘러 떨어지자 곧 연숙은 팬티와 브래지어 차림이 되었다. 연숙은 당당한 표정이었다. 둥근 어깨에 배꼽 근처의 아랫배는 볼록했는데 그것이 더 육감적이었다. 눈길을 내려 허벅지와 그 위쪽 삼각지를 본 조철봉은 침을 삼켰다. 한마디로 말하면 풍만했다. 두마디로 표현하면 탄력있는 몸매였다. 조철봉이야 몸매에 대한 구별없이 사랑을 나누는 성품이지만 사내들의 기호는 천차만별이다. 대개 키가 큰 사내는 작고 아담한 여자를, 마른 사내는 풍만한 여자를 밝힌다고 알려져 있다. 상대적이긴 하지만 조철봉이 좋아하는 타입을 굳이 고르라면 당당한 여자일 것이다. 지금 눈앞에서 브래지어와 팬티까지 벗어버린 연숙같은 여자가 바로 그렇다.
“으으음.”
조철봉은 연숙의 알몸을 보면서 자기도 모르게 탄성을 뱉었다. 여체는 언제 봐도 새롭고 신비스럽기조차 한 것이다. 지금까지 수백명의 여자를 상대했지만 모두가 다르다. 또한 같은 여자와의 섹스도 언제나 다르다. 그것은 수년을 함께 살아온 와이프 하고도 그렇다. 섹스가 한결 같다면 몇달이 못가서 모두 이혼하고 말 것이다.
“제가 벗겨드려요?”
알몸인 채 연숙이 다가와 물었으므로 조철봉은 생각에서 깨어났다. 조철봉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연숙이 조철봉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더니 가운을 벗겼다. 가운 밑에는 팬티만 입고 있었기 때문에 조철봉도 금방 알몸이 되었다. 그때 연숙이 두눈을 크게 뜨더니 조철봉의 철봉을 두손으로 감싸쥐었다. 그리고 머리를 들고 조철봉을 보았다. 어느덧 얼굴은 상기되었고 눈동자는 반들거렸다. 여자가 가장 아름다울 때의 모습인 것이다.
“해드려요?”
그것이 무슨 뜻인지 조철봉이 모르겠는가?
오럴 섹스를 말하는 것이다. 조철봉이 잠자코 있는 것을 연숙은 승낙으로 받아들였다. 연숙이 곧 철봉을 입안에 넣더니 혀끝으로 문지르기 시작했다. 중세 일본의 여자들은 어금니를 포함한 앞쪽의 치아 몇개를 빼내어 남자를 즐겁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치아가 오럴 섹스의 장애물이긴 하다. 잘못하면 치아에 긁히는 경우가 있고 그때는 만정이 떨어진다. 조철봉은 손을 뻗쳐 연숙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었다. 그러고는 연숙의 어깨를 잡아 일으켰다.
“그만, 침대로 가지.”
연숙이 놀라 머리를 들더니 순순히 따라 일어섰다.
“난 그것에는 익숙지 않아서.”
쓴웃음을 지은 조철봉이 연숙의 어깨를 감싸안고 침대로 가면서 말했다.
“서비스 받는 것에 말이야.”
“조금 보수적이시네.”
시트를 들치고 침대에 누우면서 연숙이 말했다.
“어떤 체위를 좋아하세요?”
“그것도 중요한 것이 아냐.”
연숙의 어깨를 당겨 안으면서 조철봉이 귀에 대고 속삭였다.
“달아오르면 내가 지금 어떤 체위를 하고 있는지도 잊게 될 테니까.”
조철봉이 손을 뻗어 연숙의 온몸을 쓸면서 말했다. 역시 탄력있는 몸매였다.
이연숙의 말대로라면 중국에서 조선족으로 태어나 미국 유학까지 다녀온 여자였으니 보기드문 인재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그동안의 고생은 오죽했겠는가? 학비를 벌려고 별 일을 다했다고 하지 않았는가? 더욱이 처자식 있는 한국놈에게 속아 결혼까지 했다가 실패한 적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흘러흘러 청도의 K-TV 마담으로 온 연숙의 과거사에 기록된 남자는 십단위가 넘을 것이 분명했다. 이 사실을 조철봉은 속으로만 짐작할 뿐이다.
연숙도 룸살롱에서 만났으니 하는 말인데, 룸살롱에서 파트너한테 맨먼저 묻는 말이 ‘너 여기 온 지 얼마나 돼?’일 것이다. 그러고는 온 지 며칠 안 된다는 답을 듣고는 백이면 백명의 남자가 흐뭇해한다. 그러면 파트너는 ‘여기 온 지는 며칠 안 되지만 ‘아정’에서는 3년, ‘로체’에서는 4년, 영등포의 ‘마리안’에서 일했던 2년까지 합쳐서 토털 9년이다 이놈아’하면서 속으로 웃을 것이다. 그러니 룸살롱 같은 곳에서 며칠 안된 아가씨(?)를 기대하는 남자는 웃음거리가 되어도 싸다.
조철봉이 몸위로 오르자 연숙은 다리를 벌렸지만 곧 눈치를 채고는 눈을 감았다. 조철봉의 입술이 목에서부터 가슴으로 옮아져 왔기 때문이다. 연숙의 젖가슴은 큰 편이었다. 요즘은 젖가슴 수술도 일상으로 해서 마치 풍선을 집어넣은 것 같은 형태를 자주 보지만 연숙의 것은 오리지널이었다. 오리지널이면서도 풍만했고 탄력이 넘쳤다. 조철봉의 입술이 젖꼭지를 감싸 물었을 때 연숙은 탄성을 뱉었다. 지어내는 탄성이 아니다.
“무릎이에요.”
연숙이 문득 헛소리처럼 말했지만 조철봉은 알아들었다. 성감대가 무릎이라는 말이었다.
“그리고 엉덩이쪽.”
헐떡이며 연숙이 말했을 때 조철봉의 손끝은 이미 골짜기를 더듬는 중이었다. 연숙의 골짜기는 숲이 무성했다. 짙고 검은 숲에 가려 샘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리고 손끝에 스치는 샘에서는 이미 뜨거운 샘물이 넘쳐나고 있었다. 젖가슴을 애무하던 조철봉의 입술이 아래쪽으로 내려왔을 때 연숙의 인내심은 한계에 도달한 것 같았다. 연방 신음을 뱉던 연숙이 하반신을 들썩이더니 조철봉의 허리를 두다리로 감았다.
“그냥 해줘요.”
연숙이 조철봉의 어깨를 끌어당기며 소리쳤다.
“나, 죽겠어.”
그러나 조철봉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입술이 배꼽을 잠깐 비비고는 아래쪽으로 미끄러져 내려갔을 때 연숙의 몸이 굳어진 것처럼 느껴졌다.
“아아앗.”
놀란 것 같은 신음도 터져나왔고 다리가 좁혀졌다. 조철봉은 혀끝으로 천천히 골짜기 주위를 더듬기 시작했다. 연숙은 이런 경험이 드문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긴장이 풀리면 지금까지 한번도 겪지 못한 기쁨을 맛보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두 다리가 열리려면 인내심이 필요하다. 인내심은 필수조건인 것이다. 조철봉의 입술이 몇번째인가 골짜기 주위를 왕복했을 때 낮게 울리던 신음이 점점 커지면서 연숙의 다리에 힘이 풀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깐 줄어든 것 같았던 샘물이 넘쳐 흐르고 있다.
“아아.”
마침내 연숙이 두 다리를 활짝 벌리면서 신음했다. 기쁨에 겨운 탄성이라고 해야 맞는 표현이 될 것이다. 조철봉은 연숙이 폭발하도록 더욱 파고들었다. 이제 입술이 샘의 끝부분에 닿았으며 연숙은 더욱 절정으로 치솟아 올랐다.
조철봉과 섹스를 나눈 상대는 백이면 백명 모두가 새로운 인연으로 태어난다. 그것이 조철봉의 유일한 재산(?)이자 장점이 될 것이다. 섹스로 인하여 만들어진 인연, 물론 인연이 있었으니까 섹스까지 하게 되었으나 관계가 더욱 공고해진다고 표현해도 될 것이다. 남녀가 합방하여 이른바 육체의 향연을 만끽하고 나면 가까워지는 것이 정상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조철봉은 마누라 서경윤을 포함한 극히 일부만을 빼고 섹스를 나눈 여자들로부터 적극적인 지지를 받았다. 그것은 모두 조철봉의 희생적인 기법 때문이다.
조철봉도 싸는(?) 것만이 능사였던 시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요즘은 거의 안싼다. 꾹꾹 눌렀다가 어쩌다 한번씩 쏘는 바람에 포탄 색깔이 오래된 어린이용 버스 색깔처럼 되어 있다. 그것이 건강과 정력에 좋다는 학설도 얼핏 들은 적이 있지만 조철봉이 건강 때문에 그러겠는가? 조철봉이 방사시에 쾌감을 느끼는 과정은 3단계로 나눠져 있다. 첫째가 애무만으로 절정을 맛보게 하는 때이다. 치밀하고 헌신적이어야만 그 과정에 도달할 수 있으며 그때 절정에 오른 여자를 보면서 느끼는 만족감은 그야말로 성취감의 극치가 된다. 두번째는 철봉을 샘 안에 넣기 전의 순간이다. 순간이라고 표현하는 것에 어폐가 있다. 조철봉의 그 순간은 조금 길기 때문이다. 거의 상반신을 세우고는 철봉으로 샘 주위를 산책(?) 또는 배회(?)하는 그동안 조철봉의 머리에는 항상 만감이 교차한다. 마치 K-2의 정상을 딱 두걸음 남겨놓은 등산가가 심호흡을 하면서 지난 고난의 세월을 음미하는 것이나 같다. 발만 들어 옮기면 정복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니 정복한 후의 허탈감보다 지금이 훨씬 낫다. 그래서 배회 시간이 길어지는 것이며 그럴수록 K-2 봉우리는 안달을 한다. 셋째는 철봉이 샘에 들어가는 순간이다. K-2 봉우리가 갑자기 샘으로 바뀌어서 헷갈리겠지만 그때와 지금은 분위기가 전혀 다르다. 철봉이 샘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이 제일 중요하다. 상대가 10년 룸살롱 경력에 이틀에 한번씩 이차를 나갔다고 해도, 아이를 셋낳은 결혼 17년차 여자라고 해도 그 순간은 조철봉에게 항상 첫 여자와의 첫 관계처럼 소중하다. 그래서 철봉이 들어가는 속도가 거의 없다. 그것을 굳이 표현한다면 모래 무덤, 아주 천천히 꺼져가는 모래 무덤에 철봉이 함몰되어 들어간다는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 그리고 파묻혀 들어가면서 철봉은 신경 세포에 닿는 모든 쾌락을 만끽하는 것이다. 그것은 당연히 상대방도 마찬가지가 된다. 어차피 남성의 섹스는 마찰에 의한 쾌감이 아니겠는가? 따라서 그 마찰을 놓치지 않고 천천히 음미한다는 것이다. 연숙이 절정에 오르고 난 후에 조철봉은 여유있게 상반신을 세웠다. 앓는 소리를 뱉던 연숙이 눈을 겨우 뜨더니 초점을 잃은 눈으로 조철봉을 보았다.
“해줘요.”
연숙이 헐떡이며 말했다.
“아주 죽여줘.”
조철봉은 연숙이 늘어져 있는 상황에서도 기대감으로 충만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누구나 그렇다. 둘의 몸이 합쳐졌을 때 더 큰, 더 강한 쾌락에 대한 욕구는 한도 끝도 없는 것이다. 조철봉은 지금까지 수백명을 겪었지만 한번 절정에 올랐다고 ‘이제 그만’하는 상대는 눈을 씻고 찾아도 없었다. ‘나 죽겠어’ 또는 ‘더 하면 진짜 죽을 것 같아’하면서도 받아들인다. 만일 그랬다고 빼고 물러난다면 병신보다 더한 소리를 듣는다. 그런 의미에서 연숙은 솔직했다. 적극적이기도 하다.
격정의 시간, 또는 열락의 순간이 지나고 나서 방안의 뜨거운 열기가 가라앉아갈 적에 남녀의 머리 속은 만감이 교차하게 마련이다. 한때 조철봉이 미숙했던 시기에는 싼 직후부터 빼고 싶은 욕망이 일어났는데 지금도 대부분의 초짜 심리는 이와 비슷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악습(?)은 훈련을 통해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다. 서로 살을 부딪치며 조물주가 내려주신 음양의 즐거움을 나눈 사이에 여자가 이 분위기를 눈치채지 못할 리가 있겠는가? 아무리 말과 표정으로 꾸며도 얼른 빼고 도망가려는 남자의 속셈을 여자는 안다. 그렇게 되면 한마디로 분위기가 깨진다. 식사를 마치고 나온 후식을 뒤집어 엎은 꼴이라고 할까? 따라서 조철봉은 마지막 후식의 과정에서도 인내와 희생의 자세를 습관처럼 만들었다. 습관이 되면 첫째로 힘들지가 않고 나아가 그 과정에서도 스스로 즐거움을 찾게 되는 것이다. 이윽고 마무리까지 마친 조철봉이 몸을 떼었을 때 이연숙이 가슴에 얼굴을 붙인 채로 말했다.
“사장님, 정말 좋았어요.”
조철봉은 이연숙의 말이 진심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연숙이 말을 이었다.
“이런 섹스는 처음입니다.”
“그런 칭찬이 내가 대포를 발사할 때보다도 더 나를 만족시키지.”
연숙의 성감대라는 엉덩이와 무릎을 부드럽게 쓸면서 조철봉이 말했다.
“남자의 쾌락은 순간이야. 3초나 길어야 5초쯤 될까? 따라서 그 순간만을 바라는 사내는 차라리 오형제 신세를 지는 것이 낫지.”
조철봉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연숙은 꿈틀거렸는데 성감이 다시 살아나고 있다는 표시였다. 탁자에 붙은 디지털 시계가 행위를 시작한 지 1시간25분이 경과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러나 연숙은 지금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를 것이다. 조철봉이 말을 이었다.
“나에겐 모든 여체가 신비롭다. 네 육체도 마찬가지야.”
조철봉이 뜨거운 숨결을 연숙의 귀에 불어넣으며 귓볼을 씹었다.
“자, 그럼 사업 이야기를 해볼까?”
“어, 어떤 사업이오?”
다시 달아오른 연숙이 조철봉의 철봉을 두손으로 쥐면서 물었다. 철봉은 이미 뜨거운 철봉이 되어있었던 것이다.
“난 당신같은 사람이 필요했어. 내 분신처럼 움직여줄 수 있는 사람이.”
조철봉이 더욱 몸을 붙이면서 말했다.
“어때? 내 제의를 받아들이겠나?”
“사장님이 지시하는 일은 다 하겠어요.”
연숙이 헐떡이며 말했다.
“어떤 일이라도.”
“최고의 대우를 해주겠어. 그리고 어느 정도 기간이 지나면 사업체를 떼어내 독립시켜줄거야.”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무슨 일이든….”
“지금 추진중인 일이 있으니까 기다려. 내가 곧 부를테니까.”
“기다리겠습니다.”
거친 숨을 뱉으며 말한 연숙이 다리를 벌려 조철봉의 하반신을 감싸 안았다.
“이제 넣어주세요.”
연숙이 철봉을 두손으로 감싸쥐고 헐떡이며 말했다. 그러나 제 손으로 직접 넣지는 않는다. 아무리 급하더라도 조철봉에게 리드를 맡기는 것이다. 조철봉이 상반신을 세우자 연숙이 긴장했다. 그리고 기대감에 가득찬 얼굴로 조철봉을 올려다보았다.
“좋아요.”
아직 철봉이 샘은 물론이고 골짜기 근처에 닿지도 않았는데 연숙이 속삭였다.
“지금 이 순간이.”
연숙도 분위기를 즐기고 있는 것이다.
다음날 아침, 이연숙이 방을 나간지 얼마되지 않았을 때 최갑중이 찾아왔다. 갑중은 어제 오후에 청도에 도착해 있었던 것이다.
“조건만 맞으면 될 것 같습니다만.”
갑중이 불쑥 말하고는 방안을 둘러보는 시늉을 했으므로 조철봉은 입맛을 다셨다. 응접실이 딸린 특실이어서 둘은 소파에 앉아 있었지만 어젯밤 연숙과 질탕하게 즐긴 흔적이 벌써 지워져 있을 리는 없다. 냉장고 위에 술잔이 두개 놓인 것도 그렇고 바닥에는 연숙이 벗어놓은 슬리퍼가 한쪽이 반쯤 뒤집힌 채 흩어져 있다. 갑중이 시선을 돌리더니 말을 이었다.
“김대식은 이미 재산 대부분을 빼돌려 놓고 종적을 감춘 상황이니까요. 공장의 생산량도 기준량의 10%밖에 안되는 데다 관리직 직원 중 남아있는 인원은 10명 정도입니다. 90%가 한국으로 돌아간 형편이라 당국에서 감독관이 나와있습니다.”
“근로자는?”
조철봉이 묻자 갑중은 들고온 서류 파일을 펼치고 읽었다.
“3750명 중에서 3200명 정도가 남아있습니다. 임금이 지급 안된 지 4개월째인데도 이렇게 많이 남아있는 이유는….”
“임금을 받으려고 기다리는군.”
“그렇습니다, 하지만.”
“김대식은 지금 어디 있나?”
“미국에 있는 것 같습니다. 가족들을 그곳으로 미리 보냈다니까요.”
갑중이 정색하고 조철봉을 보았다.
“형님, 극동기계를 인수하려면 3억 위안은 줘야 합니다. 한화로 390억원이 넘는 금액이란 말입니다.”
눈만 치켜뜬 조철봉에게 갑중이 열띤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차라리 베트남 공장을 이전하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이전 비용까지 합쳐 400억원이 훨씬 넘을텐데.”
“중국측 담당자가 누구라고 했지?”
“시 경제부장인 임광순이란 자인데 깐깐하다고 들었습니다.”
갑중이 찌푸린 얼굴로 대답했다. 지금 그들은 근대 자동차의 하청 공장이었던 청도 극동기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극동기계는 한국의 근대 자동차에 부속을 납품하는 공장으로 작년까지만 해도 연간 2000억원의 매출을 올렸지만 올해 초부터 급격하게 사세가 기울었다. 그것은 사주인 김대식이 회사 공금을 빼돌렸기 때문인데 그 금액은 무려 600억원이 넘었다. 2년반 동안 경리부장과 결탁해서 원부자재 공장의 대금 지급을 미루거나 본사인 극동 자동차의 가지급금까지 횡령한 금액이었다. 사건이 탄로난 것은 넉달 전이었는데 지금 중국 정부에서도 김대식을 찾고 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머리를 든 조철봉이 갑중을 보았다. 갑중은 차라리 베트남의 부속 공장을 개성 공단으로 옮기는 것이 낫다고 말하는 것이다. 400억원은 거금이다. 마침 북한측의 요청이 있다고는 하지만 극동기계를 인수해서 개성 공단으로 옮기는 작업은 무모하게 보일 것이었다.
“오 전무는 사업성이 있다고 판단하더구먼, 400억원을 투자해도 말이야.”
말을 멈춘 조철봉이 정색하고 갑중을 보았다.
“하지만 난 그렇게는 못한다. 다 넘어간 회사를 제값 내고 인수하는 병신이 어디 있어?”
“그, 그러면.”
갑중이 더듬대자 조철봉이 쓴웃음을 지었다.
“검은 고양이건 흰 고양이건 쥐만 잡으면 된다고 누가 말했지?”
당연히 갑중이 눈만 껌벅였고 조철봉도 다시 물었다.
“맑은 물에는 고기가 못산다고 누가 말했어?”
지난번에 조철봉은 북한 공단의 관리에게 뇌물을 먹였다가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다. 뇌물을 받은 북한 관리가 그것을 상부에 보고해 버렸기 때문인데 그때의 황당함을 떠올리면 지금도 온몸에서 소름이 돋는 것이다. 맑은 물에서는 고기가 못 산다는 말씀은 바로 이것을 두고 한 말이라고 조철봉은 믿었다. 북한의 경제발전 속도가 늦는 것은 바로 이런 경직성 때문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한국에서는 절대로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없다. 뇌물을 먹일 때의 기준만 잘 지키면 되는 것이다. 그 기준은 아주 간단하다. 즉 누이좋고 매부좋은 상황만 연출해주면 된다. 그러면 받는 놈의 입장도 편해지고 주는 놈의 분위기도 자연스러워지는 것이다. 얼마나 융통성이 풍부한 사회가 되겠는가? 모두 손잡고 화기애애, 서로 나눠서 잘 먹고 잘 살게 되는 나라, 못 먹고 못 사는 놈은 자유시장경제체제에서 낙오된 놈들로 치부하면 된다. 최갑중이 검은 고양이나 맑은 물 등의 말은 누가 했는지 몰라도 눈치 하나는 월등한 인간 아닌가. 곧 조철봉의 뜻을 읽고는 긴장했다.
“형님, 그렇다면.”
“그래.”
갑중의 시선을 받은 조철봉이 머리를 끄덕이면서 물었다.
“김대식이 중국에서 원부자재 대금을 떼어 먹은 금액이 얼마냐?”
“210억원이 조금 넘습니다. 극동기계의 인수 대금에서 가장 큰 몫을 차지하는 금액입니다.”
파일을 펼치며 갑중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근대 자동차에서 횡령한 금액이 130억원 정도이고 나머지 60억원이 시설자금, 임금 등입니다.”
“그렇다면 210억원은 중국 당국하고, 130억원은 근대자동차하고 타협을 해야겠군.”
“그, 그렇지요.”
“임금은 얼마나 밀렸지?”
“그중 제일 적습니다. 20억원 정도.”
“그럼 예산은 50억원 정도로 하지.”
“예?”
갑중이 눈만 크게 떴을 때 조철봉이 은근한 표정으로 웃었다.
“20억 임금만은 그대로 지급하고 나머지 30억은 뇌물로 쓰란 말이다.”
“30억을 말입니까?”
“그래, 10억은 중국 당국에, 10억은 근대자동차에, 그리고 5억은 리스회사, 나머지 5억은 비상금이다.”
“….”
“그럼 너는 뇌물 먹일 놈들을 지금부터 찾아내라, 정확하게 집어내야 돼.”
정색한 조철봉이 손가락을 권총처럼 만들어 갑중의 코끝을 겨눴다.
“엉뚱한 놈한테 먹였다간 지난번의 북한 짝이 날 수가 있단 말이다. 잘 골라내야 한단 말이야.”
“그럼 50억으로.”
“그렇다. 50억으로 극동기계를 먹는다. 그 이상은 안 돼.”
단호하게 조철봉이 말하자 갑중은 소리내어 침을 삼켰다. 극동기계의 시설물 가격만 해도 시가로 350억원이 넘는 것이다. 지금 부채가 약간 초과되어서 그렇지 기계만 처분하면 당장에라도 350억원은 받을 것이었다. 그러나 3억 위안, 즉 390억원을 지급하여 부채를 다 해결하고 극동기계를 인수하면 근대자동차의 일감을 계속해서 받을 수가 있는 것이다. 그것을 조철봉은 50억원으로 끝낸다니 갑중의 입이 벌어지는 건 당연했다.
“그리고 참.”
조철봉이 생각난 듯 말했다.
“너한테 보좌관을 붙여주마. 중국어와 영어에 능통한 조선족 여자야. 미인이고.”
바로 이연숙이다.
최갑중에게 책임을 맡긴 조철봉은 오후에 옌지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 앉아 있었다. 서울에서부터 동행했던 오정만은 최갑중의 휘하에서 이연숙과 함께 일하도록 해 놓았으므로 조철봉의 옆에는 양명심이 앉아 있었다. 양명심은 북한 대외무역부 소속 직원으로 K-TV에 밤에만 일하려고 나왔다가 조철봉을 첫 손님으로 만나게 된 것이다. 이것도 인연이다. 오후에 고동수의 지시로 조철봉의 호텔방을 찾아왔던 명심은 옌지로 함께 가자는 제의를 받자 별로 주저하지도 않고 따라왔다. 회사에 연락을 하겠다면서 잠깐 동안만 자리를 비웠을 뿐이다.
“우선 내가 일당은 계산해서 주도록 하지.”
조철봉이 창가의 의자에 앉아 창밖의 구름만 바라보는 명심에게 말했다. 명심이 조철봉을 보았지만 입은 열지 않았다.
“일당을 얼마나 줄까?”
조철봉이 묻자 명심의 볼이 조금 붉어졌다. 아마 이런 흥정은 처음일 것이다.
“전 모릅니다.”
“회사에서 월급은 얼마를 받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정색한 명심이 머리까지 흔들었으므로 조철봉은 입맛을 다셨다.
“계획이 있을 것 아닌가? 밤에 룸살롱을 나와 돈을 모으면 뭐 하려고 했어?”
조철봉이 계속해서 물었다.
“회사에서도 알고 있다면서? 밤에 일하는 것 말야.”
“룸살롱에 나가는 줄은 모릅니다.”
시선을 내린 명심이 낮게 말했다.
“한국 회사원들한테 중국어를 가르친다고 했기 때문에.”
“열심히 일해서 돈 버는 건 부끄러운 일이 아냐. 그리고 일의 귀천을 따지는 건 덜 돼먹은 놈들이나 하는 것이고.”
조철봉이 정색하고 말을 이었다.
“나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벌었어. 사기도 치고 뺏기도 했지.”
명심이 놀란듯 눈을 둥그렇게 떴으므로 조철봉은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착한 사람, 열심히 일하는 사람한테는 피해를 준적이 없어. 자, 말해보라고. 돈 벌어서 뭘 하려고 했는지.”
“아버지하고 오빠 가족 생활비를 대려고 합니다.”
시선을 내린 명심이 말을 이었다.
“아버지는 몸이 아프시고 오빠는 작년에 실직을 해서 다섯 식구가 먹고 살길이 막막합니다.”
“으음.”
조철봉이 머리를 끄덕였을 때 명심이 머리를 들었다. 크게 뜬 눈빛이 강했다.
“하지만 동정을 받기는 싫습니다. 일한 만큼만 대가를 주십시오.”
“룸살롱에서는 어떻게 하려고 했지?”
낮은 목소리로 조철봉이 묻자 명심의 볼이 다시 붉어졌다. 그러나 시선을 내리지 않고 대답했다.
“이차 나갈 각오도 하고 있었습니다.”
“팁이 얼마고 이차 나가면 얼마 받는다는 건 알고 있어?”
“예. 팁은 이백원이고 이차 나가면 미화로 일백불이나 팔백원. 그리고 이차 나가게 되면 팁은 안준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17호점은 고급 손님을 받게 될테니 그 이상을 받을 수도 있겠지.”
“마담언니는 손님이 주는대로 받으라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그래야겠지.”
다시 머리를 끄덕인 조철봉이 명심을 주의깊게 보았다. 물론 명심은 K-TV의 총사장 고동수가 조철봉을 위해 미리 준비시킨 여자일 것이었다. 이 세상에는 50억의 인구가 있고 그중 반이 여자라면 이렇게 만날 확률은 얼마나 되는가? 로또가 당첨될 확률보다 높지는 않을 것이다.
옌지 공항에는 박택규가 마중나와 있었는데 동행한 양명심을 보더니 조금 당황하는 눈치였다. 박택규는 옌지시 개발국장으로 정부 공무원이다. 조철봉과는 여러 번 만났지만 이렇게 여자를 대동하고 온 적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박택규는 곧 시치미를 떼고 조철봉을 향해 활짝 웃었다.
“어서 오십시오, 조사장님.”
“반갑습니다, 국장님.”
악수를 나눈 조철봉이 명심을 소개했다.
“통역으로 채용한 미스 양입니다.”
“아, 그렇습니까?”
명심을 향해 머리를 끄덕여 보인 택규가 대기시켜 놓은 승용차로 그들을 안내했다. 택규는 조선족으로 30대 후반에 시정부의 개발국장이란 고위직이 되었으니 능력과 경력이 출중한 것은 분명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조철봉의 경험에 의하면 운(運)도 중요한 작용을 한다. 공무원이라면 관운(官運)이 될 것이다. 시내로 달리는 차 안에서 택규가 옆자리에 앉은 조철봉에게 말했다.
“이제 합의서에 서명만 하면 됩니다. 북한측 대표가 내일 도착한다고 했으니까 내일이면 끝나겠습니다.”
택규가 다시 얼굴을 펴고 웃었다.
“그렇게 되면 백두산 관광은 오성관광에서 독점하게 될 것입니다.”
“모두 박국장께서 애써주신 덕분이죠.”
“저는 시킨 대로만 했을 뿐입니다. 모두 오성그룹의 계획이었지 않습니까?”
“어쨌든 지금부터 시작입니다.”
조철봉도 웃음 띤 얼굴로 말을 이었다.
“오성관광은 계속해서 옌지시의 지원을 받아야 할 테니까요.”
“최선을 다해서 돕지요.”
택규가 화답했고 차 안의 분위기는 더욱 화기애애해졌다. 호텔에 도착하자 택규는 저녁때 다시 오겠다면서 돌아갔고 특실의 방안에 둘이 남게 되었을 때 조철봉이 말했다.
“내가 아직 말 안했는데 우리 회사가 옌지시의 지원을 받아서 백두산 개발과 관광을 맡게 되었어.”
앞쪽에 앉은 명심은 잠자코 시선만 주었고 조철봉이 말을 이었다.
“금강산 개발과는 방법이 조금 다르지. 우리는 옌지시와 합작 법인이 되어서 중국쪽과 북한쪽 백두산의 개발권을 따낸거야.”
“그럼 한·중 합작 법인인가요?”
명심이 묻자 조철봉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런 셈이지만 실제 자본금은 모두 우리가 투자하는거야. 옌지시는 이름만 빌려주는 것이고, 만일 우리만 참여했다면 이렇게 쉽게 일이 될 수가 없었지.”
이번에는 명심이 머리를 끄덕였다. 금강산 개발은 민간기업 현대만의 사업으로 갖은 우여곡절을 겪었다는 것을 명심도 알고 있는 것이다. 조철봉이 말을 이었다.
“북한쪽 백두산에 호텔도 짓고 카지노도 개장할거야. 관광버스도 수십대 운행이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한국인뿐만 아니라 중국인 관광객도 몰려들겠지.”
그러고는 조철봉이 정색하고 명심을 보았다.
“내일부터 시 관리들을 여러명 만나야 돼. 북한측 사람들도 만나야 될 것이고. 명심이가 날 도와줘야겠어.”
“어떻게 말인가요?”
명심이가 묻자 조철봉이 대답 대신 팔목시계를 보았다.
“이 친구가 올 때가 되었는데.”
바로 그때 그 말을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문의 벨이 울렸다. 명심이 먼저 일어나 문으로 다가가며 물었다.
“누구세요?”
“예, 옌지사무소장 홍동표입니다.”
그러자 명심이 머리를 돌려 조철봉의 눈치를 보더니 문을 열었다.
방안으로 들어선 홍동표는 조철봉을 보더니 허리를 꺾어 인사했다.
“사장님, 준비되었습니다.”
그리고 들고온 가방 두개를 탁자 옆에 내려놓았다. 30대 중반쯤의 동표는 최갑중의 추천을 받아 입사한 경력사원이다. 동표가 옆에 서있는 양명심에게 시선도 주지 않고 말했다.
“사이즈는 거의 맞을 것 같습니다. 비슷한 체형의 직원이 사무소에 근무하고 있기 때문에 쉽게 고를 수 있었습니다.”
그러더니 동표가 명심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신발 사이즈는 어떻게 되십니까?”
“네? 저요?”
놀란 명심이 그렇게 묻더니 조철봉부터 보았다. 그러자 조철봉이 말했다.
“말해줘.”
“예? 저는….”
동표에게로 머리를 돌린 명심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240인데요.”
“맞혔군요.”
얼굴에 웃음을 띤 동표가 눈으로 탁자 옆에 놓인 가방을 가리켰다.
“240사이즈 신발이 3켤레 있습니다. 혹시나 해서 245사이즈도 두켤레 넣어 왔습니다.”
명심은 눈만 크게 뜬 채 있었고 동표의 말이 이어졌다.
“그리고 옷은 정장과 캐주얼로 각각 5벌씩 준비했습니다. 내의류도 넉넉하게 넣었습니다.”
“수고했어.”
머리를 끄덕인 조철봉이 그제서야 명심에게 동표를 소개했다.
“옌지 사무소장 홍동표 부장이야.”
명심이 머리만 숙여보이자 조철봉이 이번에는 명심을 소개했다.
“중국어 통역인 양명심씨, 북한 국적으로 현재 칭다오 주재 대외무역부 직원이지.”
“잘 부탁합니다.”
동표가 정중하게 인사하자 조철봉이 눈으로 가방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내가 칭다오에서 출발하기 전에 홍 부장한테 미스 양이 입고 신을 걸 준비해 놓으라고 했소.”
명심의 시선을 받은 조철봉이 부드럽게 웃었다.
“이곳에서 며칠 있어야 할 것 같고 미스 양도 여러 사람을 만나야 할 테니까 말이야. 그래서 준비시킨 것이니까 이상하게 생각할 것 없어.”
그리고 조철봉이 동표에게 말했다.
“박 국장은 오늘 저녁에 온다고 했는데 알고 있지?”
“예, 사장님.”
“내일 본사에서 기획팀이 올 테지만 그 일은 우리 셋이 처리해야 돼.”
“알고 있습니다. 사장님.”
긴장한 동표가 부동자세로 서서 대답했다. 동표가 방을 나갔을 때 아직도 굳은 표정으로 서있던 명심이 조철봉을 향해 돌아섰다.
“옷 준비를 하라고 하셨으면 가져올 수 있었는데요.”
“어려운 일 아니었으니까 신경쓰지 마.”
조철봉이 가볍게 넘겼지만 명심은 물러나지 않았다.
“제 차림이 보기 흉하신가요? 아니면 초라하게 보입니까?”
“그것도 아냐.”
정색한 조철봉이 명심을 똑바로 보았다.
“오직 상황설명을 하고 집에 가서 옷 가져오는 시간을 절약하려고 그랬던 거야. 가방 가지고 방에 들어가서 준비해.”
조철봉이 손목시계를 들여다보고 말을 이었다.
“오후 6시에 다시 내 방으로 오도록.”
오후 6시 정각이 되었을 때 다시 방으로 들어선 양명심은 전혀 다른 여자처럼 보였다. 물론 옷차림 때문이다. 홍동표가 준비한 옷은 모두 명품인 것이 분명했다. 지금 명심이 입고 나온 분홍색 투피스도 명품 마크가 붙어 있고 잘 어울렸다. 그러나 화사한 차림과는 달리 명심의 표정은 어두웠다. 불편한 기색도 내비치고 있었다. 명심에게 자리를 권한 조철봉이 잠자코 시선만 주었으므로 방안에는 한동안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명심은 혼란 상태인 것이 분명했다. 고동수의 지시를 받고 조철봉을 만나러 호텔에 갔을 때는 당연히 섹스를 예상했을 것이었다. 그러다가 영문도 모른 채 옌지까지 끌려와서 이런 일이 일어났으니 황당할 만했다. 이윽고 조철봉이 창밖을 바라보던 시선을 돌려 명심을 보았다.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멋있구나.”
“….”
“넌 어떤 옷을 입어도 어울려.”
“….”
“자존심 상한거냐?”
그래도 명심이 입을 열지 않았으므로 조철봉은 자리를 고쳐앉더니 말을 이었다.
“오늘밤에 박국장하고 부시장을 만나기로 했어. 그런데 부시장이 이번 일의 책임자지. 오성관광의 일을 중국쪽에서 협조해 줄 수 있는 실무 책임자격이야.”
그때서야 명심의 표정에 변화가 일어났다. 크게 뜬 눈을 두어번 깜박이면서 머리를 조금 앞쪽으로 기울인 것은 이야기를 관심있게 듣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조철봉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부시장은 중국인이야. 옌지시와 흑룡강성의 발전을 위해 외국 투자를 적극 유치하려는 노력을 하는 중이고 백두산 개발도 그 일환이지만.”
말을 멈춘 조철봉이 넌지시 명심을 보았다.
“네가 북한의 공무원격인 대외무역부 직원이라고 해서 이러는 건 아냐. 다른 사람한테도 다 약속을 받았겠지만.”
명심의 시선을 받은 조철봉이 정색하고 물었다.
“너, 나하고 이번 일에 대해서 비밀을 지켜줄 수 있어? 네 회사 상급자나 다른 누구한테도 말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해주겠어?”
“네.”
머리를 끄덕인 명심이 덧붙였다.
“조국에 누가 되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누라니?”
이맛살을 찌푸리며 되물었던 조철봉이 곧 웃었다.
“딱딱한 소리는 말자구. 이 일은 대충 짐작하고 있겠지만 북한에도 좋은 일이니까 말이야.”
“그럼 제가 할 일은 뭡니까?”
“그것보다 먼저 보수를 정하기로 하지.”
그러자 다시 긴장한 명심을 향해 조철봉이 물었다.
“일당으로 계산하는 것이 낫겠는데, 얼마를 받으면 되겠나?”
“일당 1백불을 주세요.”
“그러면.”
조철봉이 명심을 똑바로 보았다.
“밤에는 내 방으로 와주는 조건으로 하면 더 줘야겠지?”
그때 명심이 시선을 내리더니 입을 꾹 다물었으므로 조철봉이 다시 물었다.
“왜? 예상하고 있었을 것 아닌가?”
“….”
“그럴 각오도 하고 있었다면서?”
다그치듯 조철봉이 물었을 때 명심이 머리를 들었다. 크게 뜬 두눈에 물기가 고였고 닫힌 입술 끝이 희미하게 떨렸다. 명심이 입을 열었다.
“잠자리는 같이 안했으면 좋겠습니다.”
“좋아.”
조철봉이 선선히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지. 그러면.”
가슴 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낸 조철봉이 양명심에게 내밀었다.
“이건 5일간의 일당이야. 받아.”
명심이 봉투를 받더니 그냥 손가방 안에 넣으려고 했으므로 조철봉이 정색하고 말했다.
“그런건 받으면 세어 보는 것이 예의야. 나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 돈을 귀중하게 여긴다는 표시겠지.”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명심이 어떻게 하겠는가? 봉투를 꺼내 안에 든 내용물을 확인한 명심의 눈이 둥그레졌다. 백불짜리 지폐가 두툼하게 넣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50장이다.
“5천불이야.”
조철봉이 명심의 콧등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명심이 머리를 숙인채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루 일당을 1천불로 정했어.”
그러고는 조철봉이 쓴웃음을 지었다.
“물론 잠자리는 같이 안하는 조건이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때 명심이 머리를 들고 조철봉을 보았다.
“너무 많습니다.”
“아냐, 서울에선 통역이 이보다 더 받아. 두어시간 일해도 이만큼 받는 사람도 있어.”
“하지만 그분들은 전문 통역으로.”
“앞으로 며칠간 중요한 일을 하게 될거야. 미스양은 그만한 대가를 받을만해.”
조철봉이 말했을때 방문의 벨이 울렸다. 홍동표가 온것이다. 그로부터 한시간쯤 후인 오후 7시반경에 조철봉은 명심과 동표와 함께 중식당의 밀실에 앉아 있었는데 앞에 앉은 두 사내는 박택규와 옌지시 부시장 왕치산이다. 왕치산은 주름진 얼굴에 머리는 백발이었지만 거구였고 활달했다. 목소리도 커서 웃을때에는 방안이 울렸다. 독한 중국술을 다시 한모금에 삼킨 왕치산이 조철봉에게 물었다. 물론 중국어였다.
“금강산 관광구에서 카지노를 개장하려고 지금도 노력하고 있지요?”
명심이 통역하자 조철봉은 정색하고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아직 개장 계획은 없는 것 같습니다.”
명심의 통역을 들은 치산의 얼굴에 의미심장한 웃음이 떠올랐다.
“카지노만 개장이 되면 적자를 대번에 메우게 될텐데.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조철봉이 겸손한 표정을 짓고 말을 이었다.
“부시장님이 힘을 쓰지 않으셨다면 우리 백두산 관광구의 카지노도 개장을 못하게 되었겠지요. 모두 다 부시장님 덕분입니다.”
“내가 뭐 한 일이 있습니까? 여기 있는 박국장이 고생을 많이 했지요.”
박국장이 부시장님 덕분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덕담을 주고 받으면서 식사와 함께 술을 두병쯤 마셨을 때는 밤 10시가 되어 있었다.
“저는 집에 일이 있어서.”
자리에서 일어선 박택규가 손목시계를 보는 시늉을 하더니 조철봉과 왕치산에게 번갈아 머리를 숙였다.
“먼저 나가겠습니다.”
“어. 그러면 홍부장이 모셔다 드리도록.”
조철봉이 동표에게 말하더니 명심을 보았다.
“부시장한테 홍부장을 박국장 모셔다 드리도록 하겠다고 말해.”
그러자 명심이 유창한 중국어로 치산에게 말했다. 분위기가 어수선해졌다.
“아니, 나하고 같이 나가자고.”
왕치산이 말리는 시늉을 하면서 말했지만 박택규와 홍동표가 방을 나가자 곧 얼굴을 펴고 웃었다. 조철봉은 양명심이 그 말을 통역해주지 않았지만 눈치로 알았다. 치산은 같이 나갈 마음이 없는 것이다.
“그럼 조사장님하고 한잔 더 마시기로 하지요.”
치산의 말을 명심이 다시 통역했다.
“부시장님께 인사를 드리고 싶었습니다.”
정중하게 조철봉이 말하고는 명심을 보았다. 통역을 하라는 눈짓이었다. 명심이 통역하자 곧 조철봉의 말이 이어졌다.
“그래서 마침 이 기회에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그러고는 조철봉이 옆쪽 의자 옆에 놓인 검은색 가죽가방을 들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조철봉이 그 가방을 치산의 의자 옆에 놓는 3초가량의 순간은 긴장감이 느껴질 정도로 조용했다. 눈을 크게 뜬 명심은 입안에 고인 침을 소리가 날까봐 삼키지도 못하고 있었다. 치산은 조철봉이 가방을 옆에 놓았지만 반기지도, 그렇다고 말리지도 않았다. 늘어진 눈시울을 두어번 끔벅였을 뿐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자리로 돌아와 앉은 조철봉이 다시 입을 열었다.
“현찰로 50만불이 들었습니다.”
조철봉 또한 표정없는 얼굴로 억양도 없이 말했지만 명심의 목소리만 떨렸다.
“그리고 카지노가 개장되면 처음 1년 동안은 월 이익금을 약 7백~8백만불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해부터는 그 이상이 되겠지요.”
명심의 능력을 생각해서 그쯤 말을 끊은 조철봉이 통역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말을 이었다.
“이익금 규모가 어떻든간에 매월 이렇게 만나서 정산을 하고 이익금의 1%를 현찰로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때 치산이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
“좋습니다. 조사장.”
치산이 잘 통역을 하라는 듯 명심에게 시선을 주더니 말을 이었다.
“잘 쓰겠습니다. 내가 조사장을 신뢰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을 받는 겁니다.”
“알고 있습니다.”
얼굴을 굳힌 조철봉이 정중하게 대답했을 때 치산의 시선이 다시 명심에게로 옮겨졌다.
“이 통역은 믿을 수 있겠지요?”
그 순간 숨을 들이켠 명심이 얼굴을 굳히더니 조철봉을 보았다.
“저, 부시장님이 저를 믿을 수 있겠느냐고 물으시는데요.”
물론 한국어로 통역한 것이다. 그러자 조철봉이 얼굴을 펴고 웃었다.
“예. 믿을 수 있습니다.”
명심이 통역하자 조철봉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이 여자는 제 정부올시다. 앞으로 자주 뵙게 될 것입니다.”
그러자 명심이 얼굴을 굳히더니 침부터 삼켰다. 그러고는 조철봉에게 시선을 주고나서 말을 이었다.
“허어.”
명심의 통역을 듣고 난 치산이 니코틴으로 누렇게 변색된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그렇지, 몸을 섞은 사이는 더 믿을 수 있지.”
머리까지 끄덕이며 말한 내용을 명심이 통역했다. 조철봉의 시선을 받은 명심의 두 볼이 붉어져 있었다.
“조사장은 여복이 있으시오. 좋은 여자를 만났습니다.”
치산의 말을 명심이 다시 옮겼지만 시선은 내린 채였다. 그말을 들은 조철봉이 조금 전의 치산처럼 활짝 웃었다.
조철봉이 호텔로 돌아왔을 때는 밤 12시가 되어갈 무렵이다. 왕치산과는 중식당에서 헤어지고 양명심과 함께 돌아온 것이다.
“수고했어. 푹 쉬라구.”
호텔 로비에 들어선 조철봉이 명심에게 부드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내일 오전까지 쉬도록 해. 오후에 연락을 할테니까.”
“알겠습니다.”
“그리고.”
엘리베이터에 탄 조철봉이 정색하고 명심을 보았다. 늦은 시간이어서 엘리베이터 안에는 그들 둘뿐이다.
“이 사업은 북한하고도 연관이 된 사업이야. 알고 있지?”
“예. 압니다.”
“그래서 식당에서 부시장이 말했던 것처럼 비밀이 지켜져야만 된다구. 특히 식당에서 일어난 일이 새나가면 사업은 끝장이 나는거야.”
“….”
“그래서 명심이를 내 정부라고 부시장한테 소개했는데, 그러면 덜 불안해 할 것 같아서 말이야.”
“….”
“어때? 비밀 지켜주겠지?”
그러자 명심이 똑바로 조철봉을 보았다. 그때 엘리베이터가 멈췄으므로 그들은 복도로 나왔다. 명심이 조철봉의 옆모습에 대고 말했다.
“조국에 손해를 끼치지 않는다면 얼마든지 비밀을 지킵니다.”
“그런가?”
쓴웃음을 지은 조철봉이 문 앞에 서서 키를 꽂다가 머리를 돌려 명심을 보았다.
“나하고 이야기 좀 하고 가지 않겠나? 지금 공적으로 말하는거야.”
“네. 알겠습니다.”
선선히 대답한 명심이 조철봉을 따라 방으로 들어섰다. 소파에 마주보고 앉은 둘의 분위기는 딱딱했다. 어색하다는 표현도 맞을 것이었다. 조철봉의 얼굴에는 어느덧 술기운이 가셔 있었고 명심은 온몸을 굳힌 채 움직이지 않았다.
이윽고 조철봉이 입을 열었다.
“북한령 백두산에도 호텔과 가라오케, 카지노가 건설될거야. 따라서 중국령까지 포함한 백두산 관광지는 중국계 회사인 오성관광이 개발권을 획득했어. 왕치산은 이미 북한측으로부터 개발 허가를 받았는데.”
조철봉이 웃음띤 얼굴로 명심을 보았다.
“아마 우리가 전면에 나섰다면 금강산 관광이 되었겠지. 쉽게 안되었을거야.”
“….”
“오성관광은 겉은 중국 옌지시가 투자한 회사지만 내용은 한국계 조철봉의 회사야. 앞에 내세운 중국 관리들은 모두 내가 조종을 하고.”
“….”
“식당에서 보았겠지만 서로 상부상조하는 것이지. 부시장도 아마 국가에 손해를 끼친다는 생각은 하고 있지 않을거야. 속담처럼 누이좋고 매부좋은 일이거든.”
그러고는 조철봉이 정색하고 명심을 보았다.
“난 개성 공단에도 공장이 있고 북한고위층으로부터 개성 공단에 자동차 부품 공장을 이전시켜 달라는 요청을 받은 상황이야. 지금 청도에서는 그 작업을 진행중이라구.”
“….”
“게다가 백두산 관광개발건도 모두 북한 경제와 연결되는 일이지. 그러니까.”
“비밀 지키겠습니다.”
마침내 자르듯 말한 명심이 어깨를 올렸다가 내리면서 길고 가늘게 숨을 뱉었다.
“저는 믿으셔도 됩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오늘일은 발설 안하겠습니다.”
다음날 오전 10시쯤에 조철봉의 방으로 들어선 사내는 최갑중이었다. 갑중은 칭다오에서 날아온 것이다. 소파에 앉은 갑중이 땀도 나지 않은 이마를 손바닥으로 닦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먹일 대상은 찾아 놓았습니다. 이제 행동으로 옮기기만 하면 됩니다.”
뇌물을 건네줄 대상을 찾아 놓았다는 말이다. 조철봉은 잠자코 시선만 주었고 갑중이 말을 이었다.
“이연숙이 적극적인데다 수단이 좋은 것 같습니다. 잘 이용하면 성과를 내겠습니다.”
머리를 끄덕인 조철봉이 입을 열었다.
“이쪽도 어제 부시장한테 50을 주고 마무리를 했다. 칭다오에서 데려온 양명심이 통역을 잘 했지.”
“걔는 믿을 수 있겠습니까?”
조심스럽게 갑중이 묻자 조철봉은 슬그머니 웃었다.
“믿으라고 하더구먼. 절대로 발설하지 않겠다고 말이야. 그런데….”
조철봉이 천천히 머리를 저었다.
“난 안 믿는다.”
“그럼 어떻게 하시려고.”
“아직 약점 잡힐 일은 안 했어.”
갑중의 시선을 받은 조철봉이 다시 은근하게 웃었다.
“두고 볼거야. 어떻게 적응하는가를 말이야. 적응하지 못하고 덤빌 경우도 예상하고 있어야겠지.”
“잘 알아서 하시겠지만 조심하십시오.”
갑중이 말했을 때 문에서 벨소리가 울렸다. 자리에서 일어선 갑중이 문을 열고 옌지 사무소장 홍동표를 맞아들였다. 조철봉과 갑중에게 인사하고나서 동표가 자리에 앉더니 입을 열었다.
“오늘 오후에 북한의 백두산 관광개발국장 홍금철이 옌지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동표가 말을 이었다.
“저녁 8시에 왕치산 부시장과 박택규 개발국장이 홍금철과 베이징관에서 식사 약속을 했습니다.”
베이징관은 어젯밤 조철봉이 왕치산과 함께 저녁을 먹은 곳이다.
“홍금철은 북한의 실력자인 것은 확실하지만 정확한 신상 정보가 없습니다.”
말을 마친 동표가 조철봉의 눈치를 보았다. 홍금철은 앞으로 오성관광이 계속해서 신경을 써야할 VIP중의 하나였다. 중국측 실무 책임자가 왕치산이라면 북한측은 홍금철이다. 백두산 관광단지의 개발과 운영을 맡은 오성관광의 대표는 옌지시에 거주하는 조선족 동포인 이춘삼이란 사내였는데 이름만 빌린 것이다. 그때 조철봉이 입을 열었다.
“홍금철은 이춘삼의 배후에 우리가 있는 것을 알고 있을 거야.”
갑중과 동표의 시선을 받은 조철봉이 희미하게 웃었다.
“모르고 있을 리가 없어.”
“하긴 그렇지요.”
갑중이 머리를 끄덕였다.
“알고도 모른 척했을 겁니다. 문제는 백두산 관광단지 개발이고, 어쨌든 중국 정부가 후원하는 중국회사 이름으로 개발되니까요.”
“양명심을 불러.”
갑자기 조철봉이 말하자 동표가 벌떡 일어나 방을 나갔다. 명심을 데리러 간 것이다.
“형님.”
둘이 남았을 때 갑중이 조철봉을 불렀다. 눈을 가늘게 뜨고 조심스러운 표정이 되어 있었다.
“이연숙은 조선족으로 믿을 만하지만 양명심이 아무래도 걸립니다. 현역 북한 대외무역부 직원인 것도 그렇고, 여기 일도….”
그러자 조철봉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넌 침소봉대하는 경우가 많아.”
“침소봉대라니요?”
최갑중이 정색하고 되물었다.
“침실에서는 작대기가 커야 된다는 뜻입니까?”
물론 갑중도 대학물은 먹었다. 그러나 대학물을 먹었다고 다 유식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제 대한민국도 변했다. 학벌보다 능력이 우선이다. 그렇다고 해도 침소봉대란 한자 풀이를 침실에서 연장이 커야 장땡이라고 해석하는 대졸 학력의 심복 부하를 바라보는 조철봉의 심정은 착잡했다. 조철봉이 주머니를 뒤져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말했다.
“불.”
그러자 갑중이 서둘러 라이터를 켜 담배 끝에 대었다.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은 조철봉이 갑중을 보았다.
“어쨌든….”
조철봉이 말을 이었다.
“양명심은 나한테 맡겨.”
“알겠습니다.”
“물론 침대에서는 연장이 큰 것이 낫지.”
“그럼요. 그것이 만고의 진리지요.”
“만고의 진리?”
이번에는 조철봉이 눈을 치켜뜨고 물었다.
“그것은 무슨 뜻이냐?”
“확실하게는 모르겠지만.”
갑중이 어색한 표정으로 조철봉을 보았다. 침소봉대 해석을 할 때는 자신있게 말했지만 지금은 망설이며 대답했다.
“만고강산 유람할 때의 만고 같은데, 많은 사람들이 다 아는 진리라는 뜻일겁니다. 과일 망고는 분명히 아닙니다.”
“으음.”
“아아 맞을 겁니다.”
“하지만.”
다시 담배 연기를 내뿜은 초철봉이 갑중에게 주의를 주었다.
“뜻을 잘 모르면서 함부로 문자 쓰지마라. 내 앞에서는 괜찮지만 말야.”
“알겠습니다.”
그때 방문이 열리더니 홍동표와 양명심이 들어섰다. 명심은 갑중을 보더니 긴장한 듯 얼굴이 굳어졌다. 둘은 초면인 것이다.
“인사해, 본사 기획실장인 최갑중 전무야, 오성건설의 사장이기도 하고.”
조철봉이 명심에게 갑중을 소개했다. 갑중의 직책은 자주 바뀌었는데 어떤 때는 본사 부사장도 되었다. 인사를 한 명심이 조심스럽게 앞쪽에 앉았을 때 조철봉이 물었다.
“오늘 북한에서 백두산 관광개발국장 홍금철이란 사람이 이곳에 도착할 예정이야, 그 사람 이름을 들어보았어?”
조철봉의 시선을 받은 명심의 볼이 붉어졌다.
“예, 알고 있습니다.”
“물론 나도 알아볼 수가 있지만 양명심씨가 마침 옆에 있어서 묻는 거야, 그런데 홍금철씨에 대한 정보를 자세히 듣고 싶은데, 말해 주겠어?”
“그런데.”
침을 삼킨 명심이 조철봉을 똑바로 보았다.
“무엇 때문에 알려고 하십니까?”
“홍금철 국장이 우리 일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지.”
“….”
“그 사람이 협조해주지 않으면 일이 어렵게 돼. 중국측의 협조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홍금철 동지는 대외무역부장을 지내신 분으로 유능하고 철저하신 분입니다.”
“그렇군.”
조철봉이 웃음띤 얼굴로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서 잘 아는군, 마침 잘 되었다.”
머리를 돌린 조철봉이 갑중과 동표를 번갈아 보았다.
“봐라, 한국 사람들은 한다리 걸치면 다 인연이 있다니까.”
조철봉이 머리를 돌려 홍동표를 보았다.
“홍금철국장을 만나도록 박국장한테 손을 써 달라고 해.”
“예, 사장님.”
긴장한 동표가 물었다.
“사장님이 직접 만나시겠습니까?”
“오성관광의 사장 대리 자격으로 만난다.”
그러고는 조철봉이 쓴웃음을 지었다.
“내가 실제 경영자인 것은 이미 다 알고 있겠지만 말이야.”
“그럼 약속을 정하도록 하겠습니다.”
동표가 대답하자 조철봉의 시선이 최갑중에게로 옮겨졌다.
“자금을 준비해.”
“얼마를 말입니까.”
“다섯장.”
“알겠습니다.”
둘의 대화는 순식간에 끝났다. 비자금 50만불을 준비하라는 말이었다. 그날 오후 5시경이 되었을 때 다시 방에 돌아가 있던 명심은 전화를 받았다. 전화기를 귀에 붙였던 명심은 수화구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울리자 눈을 크게 떴다.
“양명심씨죠?”
“네, 그런데요.”
“전 사장님 비서 유경란입니다. 안녕하세요?”
여자가 사근사근한 말투로 말했지만 명심의 긴장은 풀리지 않았다. 그러나 대답은 했다.
“네, 안녕하세요.”
“사장님께서 부르십니다. 지금 방에서 기다리고 계시는데요.”
“네, 알겠습니다.”
전화기를 내려놓은 명심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여자의 서울말씨는 세련되었고 목소리도 고왔다. 지금까지 목소리가 맑고 고운 미인은 보지 못했지만 어쨌든 당장은 위축된 기분이 든 것이다. 명심이 조철봉의 방문 앞에 선 것은 그로부터 5분쯤 후였다. 벨을 누른 명심이 심호흡을 하고 났을 때 문이 열렸다.
“어서오세요.”
문을 연 여자가 환하게 웃는 얼굴로 명심을 맞았다. 그순간 명심의 가슴에서 무언가 철렁 내려앉았다. 유경란은 미인이었던 것이다. 서울 미인이다. 군데군데 갈색으로 염색한 파마 머리, 이것을 서울에서는 블리치라고 한다는 것을 명심은 최근에야 알았다. 그리고 갸름한 얼굴형에 이목구비가 뚜렷한데다 분위기까지 있는 미인이다.
“안녕하세요.”
경란에게 건성으로 인사한 명심이 안으로 들어서면서 옅은 향수 냄새를 맡았다. 경란한테서 풍기는 향내였다.
“어, 여기 앉아.”
소파에 앉아 있던 조철봉이 명심을 보더니 눈으로 앞쪽 자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서로 인사는 했지?”
“네, 사장님.”
조철봉이 물었을 때 먼저 경란이 대답했다. 경란의 태도는 자연스러웠지만 정중했다. 몸매도 ‘쭉쭉빵빵’이다. 우아하게 걸어 조철봉의 옆쪽에 앉더니 노트를 펼치고 메모할 자세를 갖추었다. 명심은 조철봉의 가슴께에 시선을 준 채 앉아 있었지만 경란의 일거수일투족에 집중했다. 자신도 모르게 그쪽으로 신경이 집중되고 있는 것이다. 그때 조철봉이 입을 열었다.
“오늘 저녁에 왕부시장하고 황국장과 같이 식사를 하게 되었어. 그래서.”
조철봉이 경란과 명심을 차례로 보았다.
“미스 양은 왕부시장을 맡고 미스 유는 황국장을 맡도록. 내 말은 접대를 하란 말이야.”
그러고는 조철봉이 명심을 향해 말했다.
“미스 유가 미스 양한테 자세한 이야기를 해줄거야. 실수가 있으면 안되니까.”
잠시후에 양명심은 유경란의 방으로 옮겨가 있었는데 아직도 굳은 표정이었다. 경란은 명심에게 마실 것을 권하고는 앞쪽에 앉았다.
“전 영문과를 나왔어요. 그래서 영어는 조금 하지만 아직 한번도 사장님 통역을 해보지 못했어요.”
살구색 매니큐어를 바른 손톱을 보이며 경란이 주스캔을 들어 한모금 삼켰다.
“회사에는 영어 잘하는 사람들이 많거든요. 그런데 중국어는 드물어요.”
그러고는 경란이 맑은 눈으로 명심을 바라보았다. 동성인 여자인데도 명심은 그순간 숨이 막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강한 매력이다. 남자라면 끌려 들어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면 언니.”
경란의 표정이 차분해지더니 말을 이었다.
“오늘 저녁에 접대하는 방법 아시죠? 언니 담당은 왕부시장인데 어제 저녁에 만나셨다면서요?”
“그래요. 그런데.”
이제는 명심도 정색하고 경란을 보았다.
“어떻게 접대를 하란 말인가요? 난 통역일을 맡았을 뿐인데.”
그리고 조철봉의 잠자리 상대도 안하기로 합의를 해놓은 것이다. 명심의 시선을 받은 경란이 여전히 차분한 표정으로 머리를 끄덕였다.
“제가 설명해 드릴게요.”
“….”
“이차가 무슨 말인지 아시죠?”
그러자 명심이 퍼뜩 시선을 들었다. 알다 뿐인가? 조철봉과 K-TV에서 처음 만나 이차에 대해서 열띤 대담까지 한 것이 바로 며칠전이다.
“알아요.”
명심이 짧게 대답하자 경란은 말을 이었다.
“아마 오늘밤 왕부시장하고 홍국장 둘을 우리가 맡아야 할 것 같아요. 이차를 나가야 될 것 같단 말이죠.”
“….”
“남자들이야 술한잔 마시고 부담이 없는 분위기가 되었을 때 생각나는 건 뻔하지 않겠어요?”
그러고는 경란이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
“그 사람들하고 이차 나가게 되면 작전은 성공한 셈이 되죠. 특히 내가 맡은 북한의 홍금철 국장을 먹게 된다면 말이죠.”
말을 멈춘 경란이 흰 이를 드러내며 소리없이 웃었다.
“남자들만 여자 따먹는게 아녜요. 여자도 남자 따먹어요. 특히 오늘같은 경우에는 말이죠.”
“….”
“홍국장을 먹게 된다면 제 주가는 높아질거예요. 그리고 수당도 받고.”
경란이 명심의 눈앞에 손가락 하나를 세워보였다.
“만불이에요. 오늘밤 내가 홍국장을 먹으면 받게 될 수당말이에요.”
“….”
“그렇게 되면 홍국장은 자주 날 찾게 되겠죠. 그건 자신있어요.”
“그러면.”
명심이 경란의 말을 잘랐다. 이제 명심의 표정은 다시 굳어져 있었다.
“내 역할도, 말하자면 왕부시장하고 이차를 나가라는 것이군요.”
“그렇죠. 그리고.”
경란이 다시 손가락 하나를 펴보였다.
“언니도 만불 받아요. 아마 그쪽은 나보다 일이 쉽겠죠? 구면인데다 왕부시장도 언니한테 관심을 보였다고 하더군요.”
“누가 그래요?”
명심이 묻자 경란은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사장님이 그러시더군요.”
1031)욕망-1
양명심은 외면한 채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분위기를 눈치챈 듯 유경란도 말을 그쳤으므로 방 안에는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명심에게는 난데없는 일이었다. 이윽고 머리를 든 명심이 경란을 보았다.
“저기요. 저는 사장님한테 그런 일을 하겠다는 합의를 한 적이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몸을 파는 일은 하지 않겠다고 했단 말입니다.”
경란은 눈만 크게 뜬 채 가만 있었고 명심의 말이 이어졌다.
“만불이 아니라 이만불도 싫습니다. 사장님께 다시 여쭤봐 주시지요.”
“그러면.”
긴장한 표정의 경란이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
“저는 모르는 일이니까 언니가 직접 사장님께 말씀드리시는 것이 낫겠네요.”
“……”
“그래서 오늘밤 작업에 차질이 없어야 될테니까요.”
“그럼.”
심호흡을 한 명심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사장님 뵙고 말씀드리지요.”
“잠깐만요.”
따라 일어선 경란이 전화기를 들었다가 내려놓고 말했다.
“제가 사장님께 여쭤보고 올게요.”
그러고는 서둘러 방을 나간 경란이 이분도 되지 않아서 돌아와 말했다.
“가보세요. 사장님이 기다리고 계세요.”
명심이 다시 조철봉의 방으로 들어섰을 때 조철봉은 소파에 앉아있다가 시선이 마주치자 빙긋 웃었다.
“왕부시장 접대를 하지 않겠다는 말이지?”
“네.”
조철봉의 앞에 다가선 명심이 머리를 숙인 채 말했다.
“죄송합니다. 저때문에 계획에 차질이 생기겠지만 저는 못하겠습니다.”
“내가 승낙도 받지 않고 일을 맡겼기 때문이야. 잘못은 나한테 있어.”
“저….”
머리를 든 명심이 정색하고 조철봉을 보았다.
“저는 자격이 없습니다. 절 돌려보내 주십시오. 그리고.”
들고온 가방에서 봉투를 꺼낸 명심이 조철봉의 앞쪽 탁자에 내려놓았다. 조철봉한테서 받은 수당이다.
“이 돈도 돌려드리겠습니다. 이 돈을 받을 이유도 없으니까요.”
“그런가?”
시선을 봉투에 둔 채 조철봉이 낮게 말했다.
“본인이 싫다면 할 수 없는 일이지만 강사장 의견을 들어봐야겠는데.”
조철봉이 이만 드러내며 소리없이 웃었다.
“강대균 사장 말이야.”
그순간 명심의 온몸이 굳어졌다. 강대균은 대외무역부 베이징 본사의 사장인 것이다. 까마득한 고위직이어서 명심은 지금까지 강대균의 얼굴도 보지 못했다. 조철봉이 명심의 표정을 보더니 미안한 듯 입맛을 다셨다.
“아침에 강사장한테서 무슨 일이든 협조해 주겠다는 약속을 받았어. 강사장은 미스 양한테 직접 전화를 하겠다고 했지만 내가 말렸어. 잘하고 있으니까 염려하지 말라고 했거든.”
“……”
“미스 양이 돌아가게 되면 강사장이 이상하게 생각할텐데. 내가 보낸 줄로 알테니 나도 사정을 말해야 될 것이고.”
이맛살을 찌푸린 조철봉이 명심에게 물었다.
“아파서 돌아갔다고 할까? 그 방법이 제일 낫겠는데 말이야. 미스 양은 어떻게 생각하나?”
“정말이십니까?”
명심은 불쑥 그렇게 묻고 나서 어금니를 물었다. 강대균 사장이 허락했다면 만사휴의인 것이다. 조철봉이 시킨 대로 해야만 한다. 그러자 조철봉이 힐끗 명심을 보더니 옆에 놓인 전화기를 들고 버튼을 눌렀다. 명심은 조철봉이 무슨 짓을 하는지 뻔히 알면서도 얼어붙은 것처럼 입을 떼지 못했다. 전화 연결이 되었는지 조철봉이 입을 열었다.
“강 사장님 계십니까? 난 옌지에 와있는 조철봉입니다. 아침에 연락을 드렸던 오성자동차의….”
그러더니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목소리가 높아졌다.
“아, 강 사장님, 저, 조철봉이올시다. 자주 연락을 드립니다. 그런데….”
옆에 서있는 명심에게 힐끗 시선을 준 조철봉이 다시 말을 이었다.
“양명심씨 때문에 다시 연락을 드린 것인데요. 갑자기 몸이 아프다고 해서 저는 쉬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입니다만, 본인은 꼭 과업을 하겠다는군요. 그래서….”
심호흡을 한 조철봉이 정색했다.
“강 사장님께서 만류해 주셨으면 합니다만, 부탁합니다.”
그러고는 전화기를 귀에서 뗀 조철봉이 명심에게 내밀었다.
“강 사장님이셔.”
굳어져 있던 명심이 두손으로 전화기를 받아 귀에 붙였다.
“예, 전화 바꿨습니다.”
“양명심 동무인가?”
굵은 목소리가 수화구에서 울리자 명심은 숨을 멈췄다.
“예, 사장 동지, 칭다오지사원 양명심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몸이 아프다고?”
“예? 예, 예, 사장 동지?”
“큰 과업을 수행 중인데, 견딜 수가 없단 말인가?”
“아닙니다. 사장 동지, 저는….”
“본인은 계속해서 과업을 수행하겠다고 했다는데, 정말인가?”
“예, 사장 동지.”
“동무, 잘 들어.”
사장의 목소리가 낮고 굵어졌으므로 명심의 몸은 더욱 위축되었다.
“예, 사장 동지.”
“오성자동차 그룹의 조철봉 동무는 지금 우리 북조선 경제 발전에 큰 역할을 하고 있단 말이야. 동무는 그 조철봉 동무를 돕고 있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해야 된다고.”
“예, 사장 동지.”
“백두산관광사업은 금강산관광사업 이상이 될 것이야. 거기에다….”
사장의 목소리에 열기가 더해졌다.
“조철봉 동무는 곧 개성공단에 대규모 공장을 이전할 것이야. 동무는 조철봉 동무를 보좌해서 조국 발전에 기여해야 될 것이다.”
“예, 사장 동지.”
“그럼, 일 하겠나?”
“예, 사장 동지.”
“몸 아픈 것은 참아낼 수 있겠나?”
“예, 참아내겠습니다.”
“그럼 믿겠다. 조철봉 동무를 바꿔라.”
“예, 사장 동지.”
절도있게 대답한 명심이 조철봉에게 전화기를 내밀었다. 그러자 전화기를 다시 받은 조철봉이 몇번 대답을 하더니 통화를 끝내고 명심을 보았다.
“그럼 어떻게 하나?”
조철봉은 명심의 말만 듣고서도 통화 내용을 파악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때 명심이 몸을 바로 세우더니 조철봉에게 말했다.
“예, 시키신 대로 하겠습니다.”
절도있는 태도였다. 그러자 조철봉이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
“그렇다면 몸을 바쳐 일할 수가 있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좋아.”
머리를 끄덕인 조철봉이 턱으로 탁자위에 놓인 봉투를 가리켰다.
“먼저 저 봉투를 다시 집어 넣도록.”
“네.”
양명심이 봉투를 집어 가방에 넣었을 때 조철봉은 말을 이었다.
“왕부시장 접대는 다른 사람한테 맡기기로 하지. 미스 양은 오늘 쉬도록 해.”
“네?”
놀란 명심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아닙니다. 제가 가겠습니다.”
“아니,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서 대역을 준비해 놓았어.”
“……”
“왕부시장은 이미 돈을 먹은 입장이라 그런 문제는 까다롭게 굴지 않을거야. 문제는 홍금철 국장이지.”
“……”
“짐작하고 있겠지만 오늘밤 홍국장 한테도 돈가방 한개를 먹일 계획이거든. 홍국장만 먹으면 일은 다 끝난 셈이야.”
“……”
“유경란은 이런 일에 익숙하지.”
그러고는 조철봉이 명심을 향해 희미하게 웃었다.
“전문가야. 영어로 프로페셔널이라고 하지? 우리끼리는 도사라고 불러.”
“사장님.”
눈만 크게 뜨고 서있던 명심이 조철봉을 불렀다.
“여쭤볼 말씀이 있습니다.”
“뭔데? 말하라구.”
“이 일은 베이징의 강사장님도 알고 계십니까?”
“짐작하고 계시겠지.”
거침없이 말한 조철봉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 이상은 말해 줄 수가 없어. 그리고 미스 양도 알 필요가 없는 일이고.”
“알겠습니다.”
심호흡을 한 명심이 시선을 내린채 말했다.
“그것도 모르고 제가 제 자존심만 내세워 일을 망칠뻔 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천만에.”
쓴웃음을 지은 조철봉이 머리를 저었다.
“내가 너무 서둘렀어. 그리고 미스 양에 대해서 사감을 품기도 했고, 내 가게에서 만난 사이여서 가볍게 생각했거든.”
그러고는 조철봉이 손목시계를 보는 시늉을 했다.
“준비를 해야겠는데 미스 양은 방에 들어가 쉬도록. 오늘밤은 별일이 없을 테니까 말이야.”
명심이 머리를 숙여 보이고는 방을 나갔을때 조철봉은 심호흡을 하고나서 탁자위에 놓인 전화기를 쥐었다. 버튼을 누르고나서 전화기를 귀에 붙였던 조철봉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나다.”
그러고는 조철봉이 담배를 꺼내어 입에 물었다.
“네가 지금 다시 한번 양명심한테 전화를 하는 것이 낫겠다.”
“어떻게 말입니까?”
그렇게 물은 사내는 최갑중의 심복 부하인 박동진이다. 전화기를 고쳐쥔 조철봉이 혼자 쓴웃음을 지었다.
“양명심의 방으로 전화를 해서 나를 도와 과업에 한치도 차질이 없도록 하라고 하란 말이야. 오늘밤 쉬라고 했는데 조바심이 나도록 만들어라.”
“예. 사장님.”
“그리고.”
조철봉은 눈을 가늘게 떴다. 박동진은 대외무역부 강대균의 역할을 했던 것이다.
돈을 먹이는 수단에 대해서는 조철봉도 도사급에 들 것이다. 조철봉의 관점에서 보면 한국에서 자수성가한 기업가 대부분이 돈을 먹이는 데는 도사였다. 그래야 사업이 불 일어나듯 성장하는 것이다. 돈을 잘 먹인다는 것은 곧 처세가 출중하다는 뜻이나 같다. 잘못 먹이면 체하고 당한다. 안 먹인 것보다도 못하다. 따라서 뒤탈 없게, 적소, 적기에 먹이는 것도 기술이다.
그런 의미에서 돈, 다시 말하면 뇌물은 경제활동의 윤활유 역할을 한다. 신바람나는 사회란 무엇인가? 이것도 조철봉의 관점이지만 서로 주고 받아서 신바람이 나는 사회이다. 주는 놈은 그 몇배로 돌아오는 이권 때문에 신이 나고 먹는 놈은 권세를 이용하여 들어오는 라면박스에 흥이 난다. 물론 라면박스 안에는 돈이 들었다.
누가 말하지 않았던가. 기억은 나지 않지만 맑은 물에는 고기가 못산다고. 또 검은 고양이건 흰 고양이건 쥐만 잡으면 된다는 말도 있다. 명언이다. 조철봉은 그 두 말씀을 금과옥조처럼 모셨고 실행에 옮겨왔다. 그리고 지금까지 돈 먹여서 안되는 일이 없었다.
옛적에 자동차 영업사원일 때에도 차를 구입하는 작자들한테도 먹였을 정도니까. 그것은 구매자에게 차를 팔면서 이쪽 리베이트를 나눠준다면서 몇십만원을 돌려주는 것이다. 다 제돈이 되돌아간 것이지만 그리고 판매가를 조금 올려서 이쪽 마진은 그대로인데도 좋아하는 꼴이라니. 그날밤, 조철봉은 옌지시의 룸살롱 대원각의 밀실에서 왕치산과 홍금철을 접대했다. 홍금철은 50대 중반쯤으로 보였지만 장신에 이목구비가 뚜렷한 미남이었고 옷차림도 세련되었다. 방 안에는 최갑중까지 남자가 넷에 여자도 넷이었다.
“자, 한잔 더.”
왕치산이 폭탄주 잔을 들고 다시 건배를 제의했다. 홍금철이 아직 서먹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므로 왕치산이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도 다 돈을 먹였기 때문이다. 치산도 오늘밤 조철봉이 무슨 일을 하려는지 짐작하고 있는 것이다.
돈을 먹은 자들은 동료의식이 강하다. 즉 주변에 같이 돈먹은 동료가 많으면 많을수록 동료애를 뿌듯하게 느낀다는 뜻이다. 물론 자신만 알고 다른 동료들은 자신을 모르기를 원한다. 그러나 돈 먹이는 놈들이 바보인가? 이놈한테는 너만 알고 있으라고 하고는 저놈한테도 똑같은 말을 해놓는 것이다. 돈을 먹일 적에 가장 효과적인 대사는 ‘당신한테만, 말하는데 누구도 먹었다’라는 말이다. 그래야 안심하고 먹는다. 그러고나서 다음에 돈 먹은 놈들이 서로 만났을 때 마주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는 것이다. 그러면서 서로 속으로 말한다.
“자식, 너, 내가 왜 웃는지 알아? 너 조철봉이 돈 먹었지? 어허, 이것봐라. 또 웃네. 멍청한 놈. 내가 너한테 호감을 느끼고 웃는 것 같니? 이 자식아, 너가 조철봉이 돈을 시치미 뚝 떼고 먹은 것이 웃겨서 내가 웃는 거라고.”
아마 한자도 틀리지 않고 서로 그렇게 속으로 웅얼거릴 것이다.
“홍국장, 술 잘하십니다.”
치산이 다시 중국어로 말했고 옆에 앉은 조선족 파트너 김기숙이 통역했다.
김기숙은 대원각의 아가씨인데 옌지에서 대학까지 나온데다 얼굴도 미인이었고 몸매까지 아담해서 치산은 만족한 표정이었다. 치산의 칭찬을 받은 금철이 머리를 돌려 조철봉을 보았다.
“조사장님도 술이 세십니다.”
금철의 파트너는 물론 유경란이다.
조철봉이 호텔로 돌아왔을 때는 밤 12시가 넘었을 무렵이다. 물론 홍금철은 유경란과 함께 이차를 나갔는데 마지못해서 나가는 표정이 아니었다. 그러나 아직 돈가방을 건네지는 않았다. 뇌물을 먹일 적에는 주고 받는 당사자만 은밀하게 알도록 하는 것이 철칙이다. 받는 입장에서는 제일 먼저 주는 놈의 입이 무거운가를 살피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밤은 홍금철과 서로 우의를 다지는 단계가 되었다. 조철봉의 입장에서는 금철을 측량할 기회라고도 볼 수 있었다. 먹을 놈인지 아닌지는 술자리를 함께 해보면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쪽에서 마련해준 이차까지 선선히 받아들인 것을 보면 일은 절반쯤 성사되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금철은 러시아 유학까지 다녀온 인텔리라고 했으니 알건 다 알 것이었다.
김일성 주석께서도 무슨 속셈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맑은 물에는 고기가 살 수 없다고 하셨다지 않은가? 만번 지당한 말씀이다. 고기가 살려면 박테리아에서부터 먹이사슬이 층층이 있어야 된다. 미생물도 못사는 물은 약품이지 그게 어디 물인가? 그때 문에서 노크 소리가 났으므로 조철봉은 생각에서 깨어났다. 샤워를 마치고 가운 차림으로 앉아 있었는데 이 시간에 올 사람은 없는 것이다.
“누구요?”
소리쳐 물었지만 대답이 없었으므로 조철봉은 문으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아니.”
문을 연 조철봉이 눈을 크게 떴다. 양명심이 앞에 서 있었던 것이다. 시선이 마주쳤을 때 양명심은 금방 눈밑이 붉어지더니 뜬 목소리로 물었다.
“혼자 계세요?”
“그런데, 왜?”
“그럼.”
침을 삼킨 명심이 눈을 똑바로 뜨고 조철봉을 보았다. 마치 싸우려는 것 같은 표정이다.
“저, 들어가도 돼요?”
조철봉은 ‘왜’라고 묻고 싶은 충동을 이를 악물고 참고는 잠자코 옆으로 비켜섰다. 남자들은 다 그럴 것이다. 이런 충동을 느끼지 않는 사람은 초인이거나 철봉에 기운이 떨어진 사람중 하나이다. 그동안 명심이 얼마나 애를 먹였는가? 청도의 K-TV에서 조철봉에게 선택된 몸이면서도 몸만은 안된다면서 빼다가 이번에 홍금철의 시중도 안든다고 했다. 조철봉이 문을 닫고 돌아섰을 때 명심은 방 가운데에 멈춰서더니 조철봉을 바라보며 말했다.
“괜찮으시다면요.”
“뭐가?”
“제가 마음에 들지 않으시면 할 수 없는 일이지만요.”
“도대체 무슨 말이야?”
“저, 오늘밤 이곳에서 묵고 가도 돼요?”
조철봉을 바라보는 명심의 눈동자가 조금 흔들렸다. 그순간 조철봉의 가슴은 다시 뛰었다. 거절하고 싶은 충동 때문이다. 인간은 조금씩 가학적인 면모가 있다고 한다. 상대를 더 잔인하게 뭉개고 싶은 충동은 대개 머릿속 상상으로만 그치는데 실제 행위로 돌입하는 놈은 대부분 전과자가 된다. 조철봉이 심호흡을 하고 말했다.
“그래. 나, 피곤하니까 그만 자자고.”
그러고는 조철봉이 가운을 벗어던지고 침대로 올라갔다.
“불끄고 들어와.”
명심은 투피스 정장차림이었는데 얼굴에는 옅게 화장까지 했다. 씻고 들어오려면 한참이나 있어야 할 것이었다. 조철봉은 시트를 끌어당기고는 눈을 감으며 말했다.
“나 먼저 잘테니까.”
말은 먼저 잔다고 했지만 이런 상황에서 진짜 잠을 자는 남자가 있다면 국회로 보내야 한다.
대한민국 국회의원은 그런 남자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조철봉은 보통 남자이다. 아니, 보통 남자보다 오히려 여러면에서 함량 미달인 인간이다.
굳이 내세울 것을 꼽으라면 순발력과 임기응변력 등 사기꾼의 요소를 잘 갖추었으며 섹스에 대해서는 풍부한 식견과 아울러 테크닉이 일가견을 이루었다는 정도일 것이다. 조철봉은 눈을 감은 채 명심이 씻고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명심이 방의 불을 끄고 욕실로 들어갔기 때문에 방안은 어두웠다. TV도 꺼버렸으므로 주위는 조용했다. 귀를 기울이자 욕실에서 샤워기의 물이 떨어지는 소리도 들렸다.
명심은 알몸으로 서서 샤워기의 물줄기를 맞고 있는 것이다. 명심은 큰 키에 마른 몸매였다. 조철봉이 가만 보면 북한의 미인 기준은 이른바 복스럽게 생긴 형이었는데 르네상스 시절의 미인형을 기준으로 삼는 것 같았다.
르네상스 시절의 미인도를 보면 배가 삼겹살에다 허리가 굵고 팔다리가 절구통이다. 현대인의 눈으로 보면 비만형이다. 그러나 명심은 바로 요즘 한국인들이 추구하는 그런 신체 조건을 갖추었다. 말랐다. 그러나 적당히 말라서 허리와 엉덩이, 다리의 곡선은 뚜렷하게 살아 있었다. 젓가락 같지는 않다. 만족한 조철봉은 길게 숨을 뱉었다.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중의 하나로 지금 이 순간도 포함이 될 것이다. 쾌락에의 기대감으로 온몸이 달아오르고 있는 바로 이 순간, 갖은 곡절을 겪은 후에 마침내 여자가 품안으로 날아들어온 상황인 것이다. 천금을 주어도 바꾸지 않을 순간이다. 마침내 욕실의 문이 열리면서 빛줄기가 마치 신이 등장한 것처럼 방안으로 퍼졌다. 그리고 빛을 등에 받으면서 명심이 한걸음 방안에 들어서더니 곧 어두워졌다. 명심이 욕실의 불을 끈 것이다.
그러나 그 짧은 순간에 조철봉은 번쩍 눈을 뜨고 명심의 자태를 보았다. 명심은 욕실용 타월로 가슴과 아래를 가렸을 뿐이었는데 허벅지와 맨 다리가 다 드러났다. 상상했던대로 날씬하면서도 볼륨이 있는 몸이었다.
조철봉이 침을 삼켰을 때 명심이 다가와 침대 시트를 들추고 들어섰다. 찬 기운이 잠깐 조철봉의 피부를 스치면서 곧 명심의 몸이 닿았다. 침대가 출렁였으므로 조철봉은 몸을 뒤척이는 시늉을 했다. 그때 명심이 낮게 물었다.
“주무세요?”
자는 시늉을 하는 것도 멋쩍은 판이었는데 명심이 도와준 것이다.
“아.”
어물거리는 시늉을 하면서 조철봉은 자연스럽게 팔을 뻗어 명심의 어깨를 안았다. 물기가 배어있는 명심의 어깨는 차가웠다.
“내키지 않으면 싫다고 해.”
조철봉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마음에도 없는 말이 뱉어졌다.
못된 버릇이다. 명심이 제발로 찾아와주지 않았다면 조철봉은 언감생심 이런 말을 뱉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자 명심이 잠자코 몸을 틀어 얼굴을 조철봉의 가슴에 붙이며 안겨왔다. 이보다 적극적인 대답이 어디 있을 것인가. 조철봉이 다시 만족한 숨을 뱉으며 물었다.
“성 경험이 없다고 했던가?”
“네.”
조철봉의 가슴에서 잠깐 얼굴을 뗀 명심이 더운 숨을 뱉으면서 말했다.
“그렇습니다. 처녀입니다.”
“허어.”
입맛을 다신 조철봉이 명심의 몸을 감싼 타월을 벗겼다. 그러자 바로 알몸이다.
알몸이 드러났을 때 명심은 먼저 두손으로 가슴을 감싸안더니 두다리를 오무리고 잔뜩 몸을 웅크렸다. 본능적인 방어자세였는데 몸이 공처럼 둥글게 접혔다. 조철봉은 비스듬히 상반신을 일으키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준비가 덜 되었다면 그만두지.”
또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뱉으면서도 조철봉은 명심의 허리를 당겨 안았다. 명심이 조철봉의 몸에 다시 붙여지자 가쁜 숨을 헐떡였다.
“나한테 갑자기 찾아온 이유부터 들을까?”
명심을 안은 채 손으로 등과 엉덩이를 부드럽게 쓸면서 조철봉이 물었다.
“지시를 받은 건가?”
“아닙니다.”
놀란 듯 명심의 목소리가 또렷해졌다.
“제 의지로 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음이 변한 이유가 뭐야?”
“그것은….”
명심이 망설이자 조철봉은 바짝 허리를 당겨 안았다. 그러자 하반신이 붙으면서 철봉이 명심의 몸에 닿았다. 명심이 허벅지 사이에 낀 철봉을 의식하고 엉덩이를 뒤로 뺐지만 곧 단념한 듯 다시 몸을 붙였다. 조철봉은 머리를 숙여 명심의 목에서 가슴으로 천천히 입술을 이동했다. 명심의 숨소리가 더 가빠졌다. 경험은 없더라도 무르익을대로 익은 몸을 가진 명심이다. 조철봉의 입술이 명심의 젖꼭지에 닿는 순간에 짧은 신음이 뱉어졌다. 놀란 것 같은 외침이었고 잠깐동안 명심의 몸이 굳어졌다가 풀렸다. 명심은 사내의 입술이 젖꼭지에 닿은 것도 이번이 처음인 것이다. 조철봉은 작은 밥공기만한 명심의 젖가슴 한쪽을 입안에 가득 물었다. 그리고 혀끝으로 젖꼭지를 굴리기 시작했다. 이미 콩알만한 젖꼭지는 곤두서 있었는데 혀로 튕기자 마치 소리를 내는 것처럼 탄력있게 흔들렸다.
“아아.”
명심이 다시 신음했다. 이제 명심은 침대에 반듯이 누워 두손으로 조철봉의 어깨를 쥐는 자세가 되어 있었다. 자세가 안정되어 있는 것이다.
“처음이라니까 하는 말인데.”
조철봉이 잠시 젖가슴에서 입을 떼고 말했다.
“좋으면 좋다고 말해줘. 싫으면 싫다고도.”
명심이 가쁜 숨만 뱉었고 조철봉은 말을 이었다.
“그래야 하는 거야. 싫은데 억지로 참을 필요가 없어. 그러면 나도 기분이 좋지 않아.”
아주 그럴 듯한 말 같지만 현실성이 거의 없는 말이다. 그러나 명심은 조철봉이 그저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려고 이런 수작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리가 없다. 그 순간 조철봉의 손이 명심의 허벅지 안쪽을 쓸며 지나갔을 때 명심이 낮게 말했다.
“거기요.”
“응?”
놀란 조철봉이 움직임을 잠깐 멈췄을 때 명심이 부끄러운 듯 외면한 채 말했다.
“거기가 좋아요.”
“여기가?”
그제서야 눈치를 챈 조철봉이 손바닥으로 명심의 허벅지 안쪽을 다시 쓸었다. 바로 골짜기와 연결된 지역이었다. 조철봉은 이제 명심의 골짜기에 안개가 덮이고 가랑비가 내리고 있는 것을 알았지만 아직 들어가지 않았다. 손끝도 대지 않은 것이다. 대신 입술이 젖가슴으로부터 떨어져 아랫배에서 한동안 머물렀다. 명심은 조철봉의 입술이 아랫배를 더듬자 놀라 몸을 비틀었다가 마침내 단념하고 머리를 감싸 안았다. 그러더니 하반신을 들썩였다. 제대로 공부를 하고 있는 것이다.
양명심은 강대균의 역할을 한 박동진의 전화를 받고 충격을 받았을 것이었다. 강대균이 누구인가? 명심의 생사여탈권을 쥔 대외무역부의 총사장이다. 지금까지 명심은 강대균을 만나기는커녕 목소리를 들어본 적도 없었으므로 감쪽같이 속여 넘겼다. 그렇다고 명심이 확인을 할 수 있겠는가?
“아아아.”
갑자기 명심이 제법 긴 신음을 뱉었으므로 조철봉은 생각에서 깨어났다. 그러고는 자신의 손이 금방 명심의 샘 근처에 닿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입술은 어느덧 배꼽 밑으로 내려와 마악 언덕 아래로 미끄러지는 중이다. 명심의 숨은 이제 가빠져 있었으며 하반신은 수시로 들썩였다. 방안은 어둡다. 이미 시트는 제쳐 놓아서 침대 위의 두 알몸은 어지럽게 엉켜 있었지만 어둠이 어색함이나 수치심을 가려주었다. 만일 불을 켰다면 명심은 굳어져서 몸을 푸는데 쓸데없는 에너지가 소모되었을 것이다.
“그만요.”
갑자기 명심이 소리쳤을 때는 조철봉의 입술이 마악 샘 옆쪽 골짜기에 닿은 순간이었다. 명심이 조철봉의 머리칼을 움켜쥐고 말했다.
“거긴 그만요.”
부끄러운 것이다. 조철봉은 선선히 입술을 떼고 상반신을 세웠다. 부끄러워 싫다고 하는데 기를 쓰고 해서 득 될 것은 하나도 없다. 저만 좋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닌 것이다. 잠시 상반신을 세운 채 조철봉은 아래에서 가쁜 숨만 뱉고있는 명심을 내려다보았다. 이미 명심은 달아올랐다. 온몸이 땀에 젖어 미끈거렸고 얼핏 샘을 손으로 스쳤지만 넘쳐나고 있다. 명심은 조철봉의 손이 샘과 골짜기에 닿는 것도 몸을 틀어 피했던 것이다. 이윽고 조철봉이 낮게 물었다.
“어때? 준비되었어?”
그러나 명심은 대답하지 않았다. 설령 준비가 되었다고 해도 ‘예’하고 대답하겠는가? 시간 끌기 위한 조철봉의 헛소리일 뿐이다. 지금 이 순간에 내뱉는 소리는 다 헛소리다. 사랑한다는 말도 믿을 수 없다. 남자가 철봉을 내지르기 직전에 뱉는 말은 믿을 필요도 없고 대답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왜냐? 그 남자는 일을 치르고 나서 자신이 무슨 말을 뱉었는지 기억해내지 못한다. 상대방의 대답도 마찬가지다. 그것을 일일이 기억하고 있는 남자가 있다면 초인이다. 그 양반은 가히 철봉 하나로 천하를 제패할 만하다.
“그럼 넣을 테니까 아프면 말해.”
조철봉이 다시 말하자 그 말을 들은 명심이 긴장했다. 어느덧 조철봉의 어깨를 쥐고 있던 두 손에 힘이 들어가 있는 것을 봐도 그렇다. 조철봉은 샘끝에 철봉을 대고는 천천히 골짜기 주위를 산책시켰다. 이것은 조철봉이 상대한 모든 여자들의 여론 조사결과 조철봉이 가장 깊은 인상을 심어준 기법으로 꼽혔다. 가히 조철봉의 전매특허라고 불릴 만한 기법이다. 뜨거운 철봉이 골짜기와 샘 주위를 산책할 때 대부분의 상대는 애간장을 태운다. 끝 부분만 문지르는 것이 아니라 몸체도 가끔 눕혀 느끼게 하기 때문에 서너번만 주위를 산책하고 나면 상대방은 몸을 비꼬아 철봉을 받아들이려는 동작을 취하는 것이다. 그동안에 철봉은 어느덧 명심의 골짜기 주위를 세바퀴째 돌았다.
“으음.”
명심은 정상인이다. 요소요소에 성감대가 배치되었으며 느낌도 같다. 따라서 마른침을 삼키면서 애를 태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직 적극적인 자세는 보이지 않는다. 조철봉은 슬쩍 웃었다.
조철봉이 섹스중에 가장 역점을 두는 세가지 과정이 있다. 그것은 거창한 프로젝트가 아니라 아주 단순한 작업(?)으로 이른바 조철봉의 3대 특징이라고 불려도 무방할 것이다. 그 첫번째가 조철봉이 조금전에 행한 골짜기의 산책이다. 산책의 속도나 방법, 또는 걸리는 시간 등은 상대에 따라서 일정치 않지만 골짜기의 산책으로 인하여 칠팔할은 절정 직전에 오른다. 그 두번째의 과정은 지금 조철봉이 시행하려는 참이다.
“자, 그럼.”
하고 조철봉이 골짜기 중심의 샘 끝에 철봉을 댄 자세로 말했을 때 앓는 소리를 내던 명심이 다시 침을 삼켰다. 그동안 명심은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가쁜 호흡을 뱉으며 명심이 조철봉의 어깨를 움켜쥐었던 손을 풀더니 목을 감아 안았다. 이제는 받아들일 자세가 되었다는 표시였다. 그순간 조철봉의 철봉이 천천히 샘 안으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아아아.”
머리를 뒤로 젖힌 명심이 이제는 마음껏 신음을 뱉었다. 그리고 이 외침은 탄성이나 같다. 명심의 샘 안은 이미 넘쳐나고 있었으므로 철봉의 진입을 환호하며 맞는 증거일 것이다. 그러나 조철봉은 서두르지 않는다. 바로 이것이 조철봉의 두번째 과정이다. 정신을 집중한 조철봉은 철봉 표면에 닿는 명심의 피부를 감촉했다. 접촉, 바로 이것이 남녀간 섹스의 중심이 아니겠는가? 부딪치고 비비면서 섹스는 끝나는 것이다. 둘은 지금 중심에 파고들어 감촉을 느끼는 가장 최고의 순간을 맞고 있는 중이다.
“아유우.”
명심이 다시 애타는 탄성을 내질렀다. 그것은 철봉이 거의 1초에 1미리 정도의 속도로 하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다시 애가 탄다. 아까 산책시에 거의 칠할 이상까지 달아올랐던 쾌감은 철봉이 진입한 순간에 절정 바로 밑의 구할까지 접근했다. 그러나 철봉이 애간장을 녹이는 속도로 하강함으로써 절정의 기간은 늦춰진 대신, 폭이 넓어졌다. 마치 큰 지진을 일으키기 전에 강도 2내지 3의 여진으로 넓게 확산시키는 것이나 같다. 이윽고 철봉이 바닥까지 닿는 순간에 명심은 더이상 애를 태우지 않겠다는 듯이 목을 껴안은 손을 풀더니 대신 조철봉의 엉덩이를 감싸 눌렀다. 그러고는 그것도 부족한 듯이 두 다리로 조철봉의 하반신을 감아 안았다. 마치 낙지처럼 휘감긴 것이다.
“아아, 죽겠어요.”
명심이 숨이 넘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철봉을 단 한번 넣었을 뿐인데도 이러는 것이다. 조철봉은 엉덩이를 들썩여 철봉을 들어 올렸다. 온몸을 휘감고 있던 명심이 팔과 다리를 못이긴척 풀었는데 그것은 다가올 쾌락을 기대했기 때문이다. 누르고 있을 때보다 철봉이 진퇴할 적에 더 쾌감이 증폭된다는 것을 초짜도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것이다. 다시 조철봉은 천천히 철봉을 빼내었다. 안달을 낸 명심이 저 혼자 엉덩이를 치켜 올렸다가 내리면서 요동을 쳐서 마찰 쾌감을 느끼려고 했다.
“어서요, 어서.”
명심이 이제는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쾌감의 강도가 심해지면 이렇게 흐느껴 우는 상대가 많다. 조철봉은 심호흡을 했다. 그렇다. 바로 지금이 조철봉에게는 가장 행복하면서도 어려운 순간인 것이다. 수천번 섹스를 해왔지만 이 순간에는 언제나 갈등을 한다. 지금 바로 대포를 쏘고 만족할 것이냐? 아니면 상대를 더 행복하게 해줘야만 하느냐의 갈등.
그러나 이번에도 조철봉은 후자를 택했다. 즉 자신의 쾌락을 희생하고 상대를 만족시켜 주려는 것이다. 그러면 지금부터는 대오각성하고 용맹정진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이때 별놈의 수단이 다 나오는데 전에는 불경을 외웠다가 대자대비하신 부처님을 모독한 것 같아서 그만두었으며 혼탁한 정치, 어려운 경제, 때로는 불안한 북핵 문제까지 떠올리며 철봉에 닿는 느낌을 잊으려 갖은 신고를 겪었다. 그것도 약발이 약해지자 수십년 전에 졸업한 고등학교 교가까지 불러제꼈으니 가히 눈물겨운 노력이 아니겠는가? 조철봉은 다시 천천히 철봉을 진입시켰는데 이제는 명심도 그 움직임에 맞췄다. 성경험이 없다는 초짜가 단 두번째의 철봉 진입에 보조를 맞춘 것이다. 그러나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첫번째 삽입을 하는 동안에 보통 인간들은 열다섯번은 촐싹거렸을 테니까.
“어어억.”
명심의 입에서 격한 탄성이 터져나오더니 참을 수 없다는 듯이 하반신이 거칠게 요동을 쳤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주의를 해서 철봉을 이탈시키지는 않는다. 조철봉은 눈을 부릅떴다. 명심의 샘이 강하게 압박을 해왔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수많은 샘을 겪었고 그중에서도 샘 벽에 수만마리의 거머리가 붙어 있는 것같은 명품(?)도 있었지만 명심도 특별했다. 오히려 명품 이상이었다. 탄력이 있는데다 수축력이 강했으며 뜨거웠다. 더욱이 샘 전체가 움직여 철봉을 압박해온 것이다.
“으으음.”
저도 모르게 신음을 뱉은 조철봉이 이를 악물고는 철봉을 빼내었다. 이런 경우는 아주 드물어서 조철봉의 등이 저도 모르게 서늘해졌다. 그리고 명심도 철봉이 이번에는 빠른 속도로 빠져 나가자 날카로운 탄성을 뱉었다.
“아아앗”
속도가 빨랐으므로 쾌감이 증폭된 것이다. 이런 경우에는 조그만 변화에도 쾌감이 배가 된다. 그러고는 명심이 조철봉의 엉덩이를 두손으로 움켜쥐었다. 다시 그 속도로 진입해 오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명심은 이제 거의 절정에 닿고 있었다. 조철봉이 그 속도로 일분만 진퇴를 해주면 폭발을 할 것이었다. 그러나 조철봉이 두손으로 침대를 짚은 채 명심을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뒤로.”
그러나 눈을 감은 채 앓는 소리를 뱉던 명심은 아직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대신 재촉하듯이 조철봉의 엉덩이를 당겼다.
“엎드려.”
다시 조철봉이 말하고 나서야 명심이 겨우 눈을 떴다. 어둠속이었지만 명심의 흰창이 뚜렷하게 드러났고 반쯤 벌린 입에서는 가쁜 숨결이 뱉어졌다.
“뒤에서 할테니까.”
그러면서 조철봉이 명심의 허리를 옆쪽으로 밀었다. 몸을 돌리라는 표시였다. 그때서야 눈치를 챈 명심이 겨우 상반신을 일으키더니 침대위에 엉거주춤 엎드렸다. 그러나 무릎을 꿇고 앉은 자세여서 영 불안정했다.
“이렇게.”
조철봉이 자세를 고쳐주자 명심은 고분고분 따랐다. 체위를 바꾸는 방법은 쾌감의 강도를 높이기도 하지만 남자에게는 잠깐 진정시키는 효과를 준다. 조철봉은 지금 그것을 노린 것이다. 조철봉은 명심의 엉덩이를 두손으로 부드럽게 쥐고는 곧 철봉을 넣었다.
“아아.”
명심이 다시 탄성을 뱉었다. 새로운 자세여서 명심의 쾌감은 더 강해졌다.
다시 마음을 가다듬은 조철봉이 용맹정진, 번쩍 상반신을 세운 자세로 하반신만 부딪치면서 잇사이로 말했다. 두눈도 부릅뜨고 있다.
“과물해동 이산두백 고르마 록도닳.”
기를 쓰며 그렇게 외웠으나 끝의 ‘록도닳’ 세 글자는 혀가 돌아가지 않아서 두번이나 되풀이하여 맞췄다. 그동안에 철봉은 다섯번의 진퇴를 했으며 명심의 탄성은 아우성처럼 변했다.
“이님느하 사하우보 리우 세만라나.”
다시 염불처럼 어렵게 그렇게 외우며 진퇴를 여섯번 했을 때였다.
“엄마, 엄마.”
명심이 단발마의 외침처럼 숨이 넘어가는 목소리로 부르짖더니 갑자기 샘이 위축되었다. 그러고는 온몸이 따라서 경직되었는데 그 순간 조철봉은 찢어질 듯이 눈을 치켜떴다. 엄청난 쾌감이 밀려왔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겪은 그 어떤 것보다 강한 쾌감이었다. 그러나 조철봉은 온몸으로 진땀을 쏟으면서 다시 외웠다.
“화궁무 리천삼 산강려화….”
기를 쓰며 다시 일곱번 진퇴를 했을때 명심은 온몸을 떨면서 앞으로 엎어졌다. 입으로는 길고 굵은 신음을 뱉어내고 있었다. 넓고 깊은 지진, 억눌리고 억눌렸던 진도 10 정도의 지진이 몸에서 일어난 것이나 같을 것이다.
조철봉은 명심을 따라 엎드리면서 길게 숨을 뱉었다. 지금까지 수많은 성관계를 하면서 온갖 주문을 다 외웠지만 애국가를 거꾸로 부르기는 처음이다. 정신을 그것에 집중해야만 제대로 거꾸로 부를 수가 있었던 것이다. 조철봉은 함께 포개져 엎드린채 까무러친 것 같은 명심의 몸을 부드럽게 애무했다. 아직 철봉에서 대포가 발사되지 않았으므로 조철봉의 몸은 그대로였다.
“좋았어.”
조철봉이 명심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황홀했어.”
그러나 아직 이쪽은 대포를 발사하지 않았으니 남자로서의 절정은 맛보지 못한 상황이다. 따라서 조철봉은 다시 한번 작업을 할 에너지가 비축되어 있는 셈이다. 명심은 가쁜 숨만 뱉은 채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엎드려 있었다. 탈진해버린 것이다. 이윽고 조철봉이 몸을 떼었을 때는 그로부터 10분쯤이나 지난 후였다. 이것이 조철봉의 세번째 과정이다. 절정에 오른 상대를 여운이 완전하게 가실 때까지 도와주는 작업, 즉 전희와 마찬가지로 후희를 성의있게 해주는 것이다. 전희라면 얼마든지 하겠다고 나서는 작자들도 후희에선 소홀해지는 경우가 많은 법이다. 특히 대포를 쏴갈긴 순간부터 남자는 도망갈 궁리를 시작한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그러나 섹스의 성패는 후희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무리 요란뻑적지근하게 행사를 잘 치렀다고 해도 마무리를 못해서 잡친 남자도 많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할것이다. 지금까지 조철봉은 단 한번도 마무리에 소홀한 적이 없다. 대부분 대포를 발사하지 않은 터이라 아직 미련이 남아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사장님.”
죽은듯 엎드려있던 명심이 그렇게 불렀을 때 조철봉은 반듯이 누운채 마악 담배 연기를 천장으로 길게 내뿜은 참이었다. 명심이 머리만 돌려 조철봉을 보았다.
“저한테 잘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무슨말이야?”
조철봉이 묻자 명심이 또렷하게 말했다.
“저를 행복하게 해주셔서. 저, 이렇게 황홀한 것인지 정말 몰랐습니다.”
대담하다. 몸을 섞고 나면 이런 말도 한다.
다음날 아침 조철봉의 방으로 최갑중이 찾아왔다. 그들은 응접실 소파에 마주 앉았는데 양명심은 이른 아침에 자기방으로 돌아간 후여서 방안에는 둘뿐이었다.
“어젯밤 유경란이 홍금철 접대는 잘했답니다.”
갑중이 정색하고 보고했다.
“유경란은 조금 전에야 돌아왔습니다. 홍금철이 오늘밤에 다시 만나자고 했다는군요.”
“그렇다면,”
머리를 끄덕인 조철봉이 갑중을 보았다.
“내가 오늘 홍금철을 만나야겠다.”
“조심하십시오.”
갑중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지난번처럼 일이 꼬인다면 십년공부 도로아미타불입니다.”
“문자 쓰지 말라니까.”
이맛살을 찌푸렸던 조철봉이 정색했다.
“유경란을 불러와, 어젯밤 분위기를 들어야겠다.”
“알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선 갑중이 방을 나간 뒤 5분도 되지 않았을 때 경란이 들어섰다. 눈치빠른 갑중은 따라오지 않았으므로 다시 방안에는 둘뿐이었다. 조철봉이 앞쪽에 다소곳이 앉은 경란에게 물었다.
“어젯밤 수고 많았어.”
“아뇨, 제 일인 걸요, 뭘.”
경란이 웃음띤 얼굴로 말했지만 시선을 부딪치지는 않았다. 홍금철에게 조철봉의 비서로 소개했지만 경란은 한달쯤 전에 강남의 룸살롱 ‘마음’에서 픽업한 임시직원이다. 아니, 전문직 고용원이라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조철봉이 담배를 꺼내서 입에 물었다.
“그래, 어젯밤 홍금철씨한테서 들은 이야기라든가 분위기에 대해서 말해보지. 내가 오늘 만나야 될 테니까 말이야.”
“홍금철씨는 제가 사장님 비서가 아닌 걸 알고 있더군요, 저한테 프로페셔널이라고 했습니다.”
“뭐라고?”
놀란 조철봉이 눈을 크게 떴을 때 경란이 처음으로 시선을 맞추더니 눈웃음을 쳤다. 요염한 모습이다.
역삼동의 룸살롱 ‘마음’은 특급 룸살롱으로 아가씨들 수준은 어디에다 비교할 곳이 없다. 그만큼 높다는 뜻이다. 대부분의 종업원은 대졸이며 교양과 품위를 갖춘데다 몸매와 얼굴이 뛰어났으니 TV 탤런트나 배우들과 비교할 것인가? ‘마음’종업원 아가씨들이 전문직 종사자로서 자부심을 갖고 있는 것도 당연했다. 그때 경란이 말을 이었다.
“제가 대답을 망설였더니 홍금철씨는 괜찮다고 했습니다. 오히려 더 좋았다면서 오늘 다시 만나자고 하더군요.”
“그래서?”
“오후에 호텔로 연락을 한다고 했어요.”
“그래?”
경란은 갑중에게도 이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사람을 가려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정색한 경란의 말이 이어졌다.
“사장님께서 호의를 즐겁게 받는다는 말씀을 전하라고 했습니다.”
조철봉은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홍금철은 경란을 통해 메시지를 전한 것이다.
“수고했어.”
심호흡을 한 조철봉이 정중한 표정으로 경란을 보았다. 금철은 경란을 통해 이쪽의 호의를 받겠다는 메시지를 전해왔다. 그것은 하룻밤 섹스 상대인 경란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조철봉은 탁자 옆에 놓인 가방을 열고 만불짜리 뭉치 두개를 꺼내어 경란 앞에 놓았다. 계약했던 금액의 두배이다. 그러나 경란은 그 이상의 일을 했다.
“자, 받아.”
놀란 유경란이 눈을 크게 떴지만 경솔하게 입을 열지는 않았다. 조철봉이 부드러운 표정으로 유경란을 보았다.
“대충 눈치를 채고 있었겠지만 홍금철을 매수하는 것이 목적이야. 그자만 먹여놓으면 일은 다 된것이나 같지.”
“홍금철씨도 저를 통해서 사장님께 힌트를 드린 것 같은데요.”
“바로 그거야.”
조철봉이 웃음띤 얼굴로 머리를 끄덕였다.
“미스유 덕분이야.”
“그럼 오후에 저한테 전화가 오면 어떻게 할까요?”
“흑룡강호텔 801호실에서 내가 8시에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전해.”
“흑룡강호텔 801호실, 8시.”
외우려는 듯 경란이 따라 말했을 때 조철봉이 말을 이었다.
“오후의 전화는 나하고의 연락을 바라는 것일테니까. 그래야 제 정신인 인간이지.”
그날 저녁 8시 5분이 되었을 때 흑룡강호텔 801호실의 벨이 울렸다. 방에서 기다리던 조철봉이 문을 열고는 앞에 서있는 홍금철을 보았다.
“어서오십시오.”
홍금철은 눈인사만 하더니 잠자코 안으로 들어섰다. 스치고 지나간 금철에게서 코에 익숙해진 향수 냄새가 났다. 조철봉이 애용하는 유명 브랜드 향수를 금철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소파에 앉은 금철이 웃음띤 얼굴로 조철봉을 보았다.
“조사장님, 어젯밤 접대 고맙습니다.”
“아니, 천만에요.”
여전히 정색한 조철봉이 정중하게 말했다.
“여러가지로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조철봉이 목소리를 낮췄다.
“이렇게 뵙자고 한겁니다.”
“허어, 그래요?”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머리를 숙여보인 조철봉이 탁자 밑에 놓인 검은색 가죽가방을 들어 금철 앞에 놓았다. 부피가 컸고 묵직해서 조철봉은 두손으로 들어야 했다.
“이것.”
가방을 놓은 조철봉이 금철에게 말했다.
“미화로 50만불이 들었습니다. 혹시 외국은행계 예치하고 싶으시다면 즉시 비밀계좌를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금철이 눈만 크게 뜨고 있었으므로 조철봉이 말을 이었다.
“제 성의올시다. 그리고 이 돈은 어떤 기록도 남지 않습니다. 그리고.”
조철봉이 앉은 채로 저고리를 벗어 탁자위에 구겨 놓았다.
“녹음을 한다든지 어떤 장난도 하지 않았습니다. 국장님, 만일 그렇다면 저도 위험하게 될테니까요.”
“알았습니다.”
그때 금철이 입을 열었다. 그러고는 쓴웃음을 지은 얼굴로 조철봉을 보았다.
“남한에서는 뇌물 먹이는 것이 관행으로 되어 있다지요?”
“관행이라기보다도.”
당황한 조철봉이 저도 모르게 손으로 뒷머리를 만졌다.
“서로 상부상조한다는 분위기지요. 그렇다고 관행은 아닙니다.”
“내가 듣기로는 안먹는 사람이 병신 취급을 당한다던데.”
“그럴리가 있습니까?”
“말단 공무원이 수억을 먹었다가 들통이 난 사건도 있었지 않습니까? 남한신문을 보았는데 통장이 수십개라고 보도되었더군요.”
“그렇습니까?”
“어쨌든.”
상반신을 세운 금철이 정색하더니 앞에 놓인 가방을 쥐고 조철봉을 보았다.
“이 돈 잘 먹겠습니다.”
금철은 먹겠다는 표현을 썼다. 한국식이다.
“잘 먹겠단다.”
호텔로 돌아온 조철봉이 기다리고 있던 최갑중에게 거두절미하고 말했다. 저고리를 벗어던진 조철봉이 쓴웃음을 지었다.
“한국 사업가는 다 뇌물을 주는 놈들로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이야. 그래서 아주 부드럽게 건네 주었어.”
“그렇습니까?”
갑중이 따라 웃었다.
“그런 줄 알고 만나준다면 우리가 일하기가 쉽지요. 그럼 앞으로 북한쪽 일은 잘 되겠군요.”
“금강산 개발건도 이렇게 처리를 했어야지, 아마 그쪽은 남북한 양쪽 담당자들이 모두 꽉 막힌 놈들이었던 것 같아.”
“맞습니다. 맞아요.”
“이제 백두산 관광단지에 호텔과 카지노가 들어서면 이곳이 우리들의 자금원이 될 거다.”
어깨를 편 조철봉이 얼굴을 환하게 펴고 웃었다.
“홍금철 같은 고위층이 백명만 더 있다면 북한은 10년 안에 한국과 경제력이 비슷해질 거다.”
“그럴까요?”
“내가 장담하지.”
그때 전화벨이 울렸으므로 갑중이 전화기를 들었다. 그러고는 응답했던 갑중이 곧 눈을 크게 뜨더니 전화기를 조철봉에게 내밀었다.
“이 마담. 아니, 이연숙씨입니다.”
청도에 있는 이연숙한테서 온 전화였다. 전화기를 귀에 붙인 조철봉이 먼저 손목시계를 보았다. 밤 9시반이다.
“여보세요.”
“사장님, 이연숙입니다.”
“아, 웬 일이야, 이 시간에?”
“예. 극동기계 인수건에 대해서 보고드릴 일이 있습니다.”
연숙의 목소리가 활기를 띠고 있었으므로 조철봉은 긴장했다. 그때 연숙의 말이 이어졌다.
“잘 될 것 같습니다, 사장님.”
“아니, 그렇다면.”
“담당 관리자를 만났습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조철봉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어떻게 진행이 된 거야?”
“담당 관리자하고 책임자 두 명만 손을 쓰면 될 것 같습니다.”
“그래?”
“언제 오십니까? 될 수 있으면 빨리 끝내는 것이 낫겠는데요.”
“여기 일도 잘 끝냈으니까 내일 오전에 그곳에 도착하도록 하지.”
“그럼 기다리겠습니다.”
“수고했어.”
“아뇨, 제 일인 걸요.”
전화기를 내려놓은 조철봉이 상기된 얼굴로 갑중을 보았다.
“이연숙이 일을 성사시킨 것 같구나. 극동기계 인수건 말이야.”
그리고는 조철봉이 풀석 웃었다.
“담당자하고 책임자 두명 한테만 뇌물을 먹이면 된다는 거다.”
“그렇습니까?”
얼굴을 편 갑중도 목소리를 높였다.
“그 여자, 수단이 좋군요.”
“보상이 돌아오는 일이니까 당연히 최선을 다한 것이지.”
조철봉이 말하고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도 들뜬 표정이었다. 기계 값만 350억원이 넘는 극동기계를 단돈 50억원에 인수하려는 것이다. 밀린 임금 20억원만 치르고 나머지 30억원은 이곳 저곳에 뇌물로 먹일 계획이었다. 뇌물이 통하지 않는 곳은 없다.
“내일 아침 첫 비행기로 청도로 돌아간다.”
조철봉이 기운차게 말했다.
그날 밤 조철봉은 12시반이 되었을 때에야 잠자리에 들었다. 최갑중과 양주 한병을 나눠 마셨지만 취한 상태는 아니었다. 주량이 양주 한병 반 정도인데다 지금까지 한번도 술 마시고 이성을 잃어버린 적이 없는 조철봉이다. 아무리 과음을 해도 그렇다. 침대에 누운 즉시 시체처럼 되지만 그 직전까지의 상황은 모두 기억해내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은 침대에 누운 지 10분이 지나도록 잠이 오지 않았다. 이런 경우는 드물었으므로 조철봉은 1에서 100까지 두번이나 세다가 상반신을 일으켰다. 마음이 들떠있기 때문인 것이다.
마치 어릴 적 소풍가기 전날 밤에 잠이 오지 않는 경우와 같다. 홍금철에게 무사히 뇌물을 먹인데다 청도에서 연숙이 극동기계 일이 잘 될 것 같다는 연락을 해온 게 원인일 것이었다. 앞으로 백두산 관광단지에 카지노가 개장되면 돈을 쓸어담게 될 것이다. 중국과 한국에서 몰려온 관광객들이 하루에 수십억원을 쏟아 부을 것이다. 그리고 극동기계는 기계값만 350억원이 넘는 공장을 50억원으로 인수하게 되었다. 그 기계를 떼어다 북한의 개성공단에 장착하면 4000명의 노동자를 보유한 거대 공장이 설립되는 것이다. 꿩 먹고 알 먹는 경우란 이것을 두고 한 말이다. 누이 좋고 매부 좋다는 말도 비슷하다. 일석이조란 말도 있구나. 자리에서 일어선 조철봉은 탁자위의 전화기를 보면서 잠시 망설였다. 그리고 곧 결심한 듯한 표정을 짓더니 전화기를 귀에 붙이고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신호음이 두번 울렸을 때 전화기가 들리더니 응답소리가 났다. 유경란이다. 조철봉은 유경란과 양명심 둘중 하나를 고르려고 잠깐 망설였던 것이다. 둘다 지금 이 호텔에 투숙하고 있다.
“응, 나야.”
조금 긴장한 조철봉이 말하자 경란의 목소리도 굳어진 것처럼 느껴졌다.
“어머, 사장님.”
“내가 늦은 시간에 전화했나?”
“아녜요, 사장님.”
“미스 유 덕분에 일 잘 끝냈어.”
“어머, 그러셨어요?”
“홍 국장은 이틀쯤 이곳에 더 머물 것 같던데 미스 유도 같이 머물면서….”
“알겠습니다. 여기서 기다리죠, 뭐.”
경란의 목소리가 밝아졌다. 이미 조철봉으로부터 계약금의 두배인 2만불을 받은 터라 경란은 이틀쯤 더 묵는 것은 일도 아닐 것이었다. 조철봉은 전화기를 고쳐 쥐었다. 경란은 룸살롱 ‘마음’에서 픽업해왔지만 조철봉은 이곳에서 처음 만났다. 최갑중이 데려왔기 때문이다.
“이봐, 미스 유.”
“네, 사장님.”
“나, 지금 혼자 있는데.”
그러자 경란은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경란이 회사 직원이라면 조철봉은 이러지 못했다. 지금까지 조철봉은 회사 직원을 건드린 적은 없다. 숨 두번 마시고 뱉을 동안만큼 입을 다물고 있던 경란이 전화에 대고 큭큭 웃었다. 그 웃음을 듣는 순간 조철봉이 어깨를 늘어뜨렸다. 저도 모르게 긴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장님도 참, 미스 양은 어떻게 하고요?”
경란이 그렇게 물었다.
“눈치를 보니까 사장님 기다리고 있는 것 같던데요.”
“알고 있었나?”
“그럼요.”
“난 미스 유가 필요해.”
조철봉이 자르듯 말했을 때 경란이 다시 큭큭 웃더니 대답했다.
“그래요, 지금 갈게요.”
유경란이 방으로 들어선것은 그로부터 10분쯤 후였다. 반소매 티셔츠에 면바지 차림의 경란은 얼굴의 화장기도 말끔히 지워져 있어서 분위기가 전혀 달랐다. 화장을 지우면 전혀 다른 얼굴이 되는 여자들 한테서는 결점이 많이 발견된다. 그러나 경란은 지금이 더 싱싱하고 아름다웠다. 그것이 조철봉은 자신에 대한 봉사처럼 느껴졌다. 숨겨놓은 선물을 내놓은것 같은 기분이 든 것이다.
“참, 내, 사장님도.”
방으로 들어선 경란이 조철봉을 향해 가볍게 눈을 흘겨 보이고는 웃었다.
“저하고 노는것이 부담이 적으세요?”
“아니, 그보다도.”
“그럼 미스양이 재미가 없어요?”
말문이 막힌 조철봉이 눈을 치켜 떴지만 곧 쓴웃음을 지었다. 바로 이것이 ‘마음’에서 단련된 아가씨들의 기교일 것이었다. 경란은 어색한 분위기를 부드럽히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새침을 떨거나 눈치만 본다면 피곤해진다.
“나, 씻었어요.”
두손을 허리에 올려놓은 경란이 당당한 표정으로 조철봉을 보았다.
“그냥 침대로 들어가면 된다구요.”
“누가 뭐래?”
조철봉도 어느덧 경란의 분위기에 휩쓸렸다. 즐겁게 동참한 것이다.
“침대로 들어가.”
그 전에 한잔 드실래요?”
“미스유도 한잔 마실건가?”
“입안의 향을 위해 위스키를 한잔만.”
선반으로 향하면서 경란이 눈웃음을 쳐보였다.
“키스 할때를 위해서 말이죠.”
“그런가?”
“그리고 절 부르실때 미스유는 어색해요. 경란이라고 하세요.”
“경란이.”
“란이라고 끝자만 부르시던지.”
“란이.”
술잔 두개에다 위스키를 따른 경란이 조철봉에게 다가와 잔 하나를 건네 주었다.
“불러주셔서 고마워요, 사장님.”
“고맙다니?”
“그냥 있었다면.”
한모금 위스키를 삼킨 경란이 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삭막하게 지낼뻔 했어요.”
“왜?”
“그 사람을 매수 하기위한 도구로만 사용된 기분이 들었을테니까요.”
경란이 조철봉의 앞으로 바짝 다가서더니 한손으로 가슴을 쓸었다. 손바닥이 부드럽게 움직이자 묘하게도 가슴이 편안해지는 느낌이 왔다. 분위기 때문일 것이다. 그때 경란이 잔에 남은 위스키를 삼키더니 탁자위로 잔을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조철봉을 똑바로 보았다.
“벗을까요?”
조철봉이 머리만 끄덕이자 경란이 다시 눈웃음을 쳤다.
“제 몸 보시겠어요?”
“그래.”
“자세 취해 드려요?”
“그렇게 해준다면 더 좋고.”
“침대에서 벗고 보시는게 편하실텐데.”
“그럴까?”
마치 유치원 교사의 말을 따르는 유아처럼 조철봉은 서둘러 옷을 벗고 침대로 들어가 편하게 앉았다. 그러자 경란이 차분한 동작으로 옷을 벗기 시작했다. 먼저 티셔츠를 벗자 금방 알몸인 상반신이 드러났다. 브래지어도 차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제 몸 어때요?”
경란이 똑바로 서서 물었다.
“으음.”
조철봉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당당하게 서있는 유경란의 상반신은 흠 한점 없는 조각품 같았다. 둥근 어깨, 쭉 뻗은 두팔과 겨드랑이에서 허리로 흘러내려간 미끈한 곡선, 그리고 도톰한 아랫배 복판에 뚫린 배꼽에 시선이 닿았을 때 저도 모르게 침이 삼켜졌다. 그때 경란이 두손으로 젖가슴을 받쳐드는 것처럼 밑에다 붙였다.
“가슴이 작은 편이죠?”
다시 경란이 묻자 조철봉은 머리를 저었다.
“아니, 적당해.”
경란의 젖가슴은 작은 편이었다. 그러나 국그릇을 엎어 놓은 것처럼 아담한데다 몸매와 잘 어울렸다.
“흥, 북한 아저씨는 내 가슴이 작다고 하던데.”
바지 훅을 풀면서 경란이 말했다.
“그분의 취향은 살집이 있는 여자를 좋아하는 것 같았어요.”
“그럴 거야.”
“하지만 섹스는 형편없더군요.”
그 순간 경란이 면바지를 벗어 소파위에 걸쳐놓았으므로 하반신이 드러났다. 그러나 아직 손바닥만한 팬티는 걸치고 있었다.
“으음.”
다시 조철봉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경란의 하반신 또한 조각처럼 미끈했기 때문이다. 조각가가 정성을 들여 다듬어 놓은 작품처럼 곡선과 볼륨이 훌륭해서 또다시 침이 넘어갔다.
“두번 했어요.”
팬티차림으로 조철봉의 앞에 선 경란이 웃음띤 얼굴로 말했다.
“섹스를 말이에요.”
“그래?”
“시간이 얼마나 걸렸게요?”
“글쎄.”
조철봉은 경란이 분위기 조성을 위하여 어젯밤 사건을 꺼내고 있는지는 안다. 그러나 마음이 편치 않았다. 여자한테서 어젯밤 상대한 남자의 조루증을 전해듣고 희희낙락할 수가 있겠는가? 오늘 잘못했다가 내일 내가 그 짝이 날 수가 있는 것이다. 경란이 조금 오버하는 것 같았지만 조철봉은 웃음띤 얼굴로 물었다.
“그래, 얼마나 걸렸는데?”
“처음은 3분, 두번째는 5분.”
경란이 거침없이 말하더니 팬티를 벗어던졌다. 그러자 짙은 숲과 도톰한 골짜기가 환하게 드러났다. 조철봉의 시선을 받은 채 경란이 그 자리에서 한바퀴 돌아보더니 두 손을 머리위로 올리고 물었다.
“어떤 포즈를 좋아하세요? 엎드려 볼까요?”
“아니 됐어.”
“발레 자세를 해봐요?”
“이제 그만.”
그러자 경란이 피식 웃더니 똑바로 섰다.
“어떤 체위를 좋아하세요?”
“다 좋아해.”
“때리는 것 좋아하세요?”
“아니.”
“그럼 정상체위로만.”
“그런 셈이지.”
머리를 끄덕인 경란이 침대로 다가오더니 조철봉의 옆에 누웠다. 시트를 들치고 들어오지도 않는다.
“제가 위에서 해 드릴까요?”
경란이 물었을 때 조철봉은 몸을 돌려 어깨를 당겨 안았다.
“그만해도 돼. 이제 분위기는 다 무르익었으니까.”
그러고는 조철봉이 경란의 볼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넌 지금까지 서비스만 해왔구나.”
대부분의 남자는 서비스를 받기 원한다. 남자의 생리 구조상 성욕의 분출은 몇초간의 사정으로 끝난다. 시작과 과정이 제 아무리 웅장, 찬란하더라도 꽝, 하고 쏜 즉시로 끝나게 되어있다.
여운도 몇초밖에 되지 않아서 여자와 맞춘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따라서 비싼 돈내고 유흥가를 찾는 남자들이 각자의 기호에 따라 즐기는 것은 정상 아니겠는가? 10초에 싸건 5분에 싸건 싸는 것은 싸는 것이다.
사정의 쾌감은 다 같다. 다만 받는 사람의 입장이 다를 뿐이지, 그 받는 대상이 평생 같이 살 마누라거나 또는 마음에 드는 여자라면 남자는 신경을 써야만 한다. 마누라한테 10초만에 내갈기기 버릇했다가는 아마 십중 팔구가 갈라서게 될 것이고 그 상대가 마음에 둔 여자라도 마찬가지다.
어렵게 꼬셔서 10초 만에 끝낸다면 다음에 만날 기약은 없게 될 테니까. 그러나 유흥가에서야 그렇게 신경을 곤두세울 필요가 있겠는가? 아가씨들한테 10초짜리로 소문이 났다고 인기 떨어졌다는 남자 못보았다.
팁이 후하면 3초짜리도 왕자 대접을 받는 곳이 유흥가인 것이다. 따라서 홍금철이 두번에 각각 3분, 5분으로 합이 8분이라고 해서 웃을 일이 못된다. 제 마누라한테는 30분 이상이 될 수도 있을 테니까, 오히려 놀 때는 안면 몰수하고 노는 전문가일지도 모르는 것이다. 조철봉은 경란의 몸을 당겨 안았다.
그러나 나는 다르다. 나는 상대방을 감동시킴으로써 내 존재를 확인한다. 나는 누구인가? 사기꾼이자 위선자, 무식하고 뻔뻔하며 입에서 나오는 말중 8할쯤은 거짓말인 공허한 인간. 사기와 순발력, 부정한 방법으로 이만큼 기업은 이루었지만 언제나 갈증과 배고픔으로 허덕이는 걸귀. 그것을 메우고 잊는 단 한가지 방법이 바로 섹스, 방사인 것이다.
따라서 나는 섹스를 할 때만은 진실해지며 희생적이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여자가 기쁨으로 터져 나갈 때에 나는 비로소 이 땅에 뿌려진 존재의 가치를 맛본다. 이 때가 나에게 가장 인간으로서 보람을 느끼게 하는 순간이다.
“자아, 넌 가만 있어.”
경란의 귓불을 가볍게 씹으며 조철봉이 말했다.
“이제는 내가 서비스를 해 줄테니까.”
“어머, 사장님.”
몸을 비튼 경란이 말을 이으려다가 조철봉의 입술에 입이 막혔다. 조철봉은 경란의 벌린 입안으로 혀를 넣어 달콤한 동굴의 탐색을 했다. 경란이 처음에 말한 대로 위스키 한잔을 삼킨 입안에서 참나무 맛이 느껴졌다. 코로 맡아지는 경란의 숨결에서는 연한 박하냄새가 났다.
“으으응.”
마침내 경란이 조철봉의 목을 두 팔로 감아 안았고 두 다리는 하반신에 엉켰다. 그러자 수족이 모두 조철봉의 몸에 낙지처럼 붙여졌다. 조철봉은 뻗쳐 나오는 경란의 혀를 빨았다. 젤리처럼 부드럽고 고무처럼 탄력이 있는 혀가 조철봉의 혀에 엉켜졌다가 풀리면서 도망쳤다. 그러다가 다시 부딪쳤고 그때마다 향기로운 타액을 빨아 마셨다.
“아아, 좋다.”
잠깐 혀를 뺀 경란이 탄성을 뱉었다. 키스만으로 뜨거워지게 만들 수도 있는 것이다. 이미 엉킨 두 몸은 땀으로 끈적였고 조금만 움직여도 하반신의 철봉이 경란의 몸을 압박했다.
“으응.”
경란이 다시 재촉하듯이 하반신을 비틀었지만 조철봉은 서두르지 않았다. 그러고는 상반신을 세우더니 입술로 목에서 가슴을 향해 훑어가기 시작했다.
유경란은 양명심과 같은 나이였지만 태생도, 성격도, 그리고 몸의 반응도 다 달랐다. 명심은 수줍고 움츠렸다가 활짝 열리는 스타일이었지만 경란은 적극적으로 먼저 나서는 것이 버릇으로 굳어진 것 같았다. 조철봉의 입술이 젖꼭지에 닿았을 때 경란이 가쁜 숨을 뱉으며 말했다.
“혀로 돌려줘요. 살살.”
그러지 않아도 그러려던 참이었으므로 조철봉은 쓴웃음을 지었다.
“넌 네가 리드하면서 쾌감을 느껴온 것 같구나. 그렇지?”
조철봉이 묻자 경란이 초점이 잡히지 않는 눈을 크게 뜨고 대답했다.
“응. 그랬어.”
“남자 애무에 익숙지 않아?”
“응. 하지만 흥분돼.”
“받아들이겠다는 마음을 먹고 편하게 기다려.”
“응.”
“그러면 전혀 새로운 세상이 보일테니까.”
“응.”
머리를 숙인 조철봉의 혀가 젖꼭지를 튕기자 경란이 두손으로 조철봉의 머리칼을 움켜쥐었다. 경란의 입에서 연속적인 탄성이 뱉어졌다. 젖꼭지는 단단해져 있어서 마치 완두콩이 세워진 것 같다.
“자기야. 좋아.”
경란이 몸을 뒤틀면서 말했다.
“이제 그만하고 해줘. 응?”
“기다려.”
조철봉의 혀가 천천히 훑고 내려와 배꼽을 서너번 배회하더니 곧 언덕을 미끄러져 내려갔다.
“아아.”
긴장한 경란이 두 다리를 딱 오므리더니 두손으로 조철봉의 머리를 미는 시늉을 했다. 그러나 조철봉의 혀가 골짜기 끝에 닿는 순간에 두 다리의 힘은 어이없게도 풀려져 버렸다.
“해줘, 어서.”
혀가 골짜기 주위를 맴돌기 시작하자 경란이 몸을 비틀며 소리쳤다. 조철봉은 샘에서 넘쳐나오는 샘물을 마셨다. 그러고는 번쩍 머리를 들고 경란에게 말했다.
“자. 그럼 네가 해.”
그순간 경란이 벌떡 상반신을 세우더니 조철봉의 어깨를 밀어 침대 위로 눕혔다. 눈치를 챈 조철봉이 순순히 몸을 눕혔을 때 경란이 위로 올라왔다.
“아아아.”
어느새 철봉을 잡아 샘 안에 넣은 경란이 머리를 잔뜩 뒤로 젖히고는 짐승의 포효같은 신음을 뱉었다. 철봉은 경란의 샘 끝까지 진입했고 마치 붙잡힌 것처럼 조여왔다.
“으음.”
조철봉도 신음했다. 이번에 경란에게 늘 사용해왔던 골짜기 산책과 철봉진입의 과정을 생략했는데 어쩔 수 없다.
경란에게 리드를 맡겼기 때문이다. 경란은 이 방법으로 절정에 자주 오른 모양이었고 우선 그대로 둔 것이다. 경란이 쪼그리고 앉은 자세로 고쳐 앉더니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두 손으로 조철봉의 가슴을 짚었다가 떼는 동작을 되풀이했고 조철봉은 경란의 젖가슴을 두손으로 받치는 자세가 되었다. 경란의 움직임이 격렬해지더니 입에서 거친 신음이 뱉어졌다.
“아아, 나, 나,”
경란이 그렇게 소리쳤다. 두눈을 치켜뜬 경란이 초점없는 시선으로 앞쪽을 노려보면서 연거푸 신음했고 움직임은 더 빨라졌다. 이윽고 경란의 신음이 높아지더니 움직임이 멈췄다.
그러고는 온몸을 둥글게 굽힌 경란이 조철봉의 몸위에서 흐느껴 울었다. 조철봉은 철봉 주위의 세포가 수천마리의 거머리에게 뜯기는 것 같은 느낌을 받고는 신음했다.
다음날 오전, 청도에 도착한 조철봉은 공항에서 시내로 오는 차 안에서 이연숙의 보고를 받았다.
“극동기계의 처리 책임자는 기업국장 돈황이라는 자인데 뇌물을 먹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옆자리에 앉은 연숙이 말을 이었다.
“실무자는 두 명인데 이미 제가 손을 써 놓았습니다.”
“그럼 돈황이란 사람만 먹이면 된다는 말인가.”
조철봉이 묻자 연숙이 웃음 띤 얼굴로 머리를 끄덕였다.
“네, 가격까지 정했습니다.”
“얼마로?”
“미화로 50만불.”
“그럼 5억.”
“네, 처음에 10억을 불렀는데 5억으로 깎았습니다.”
“잘했군.”
조철봉의 시선이 앞자리에 앉은 최갑중의 뒤통수를 스치고 지나갔다. 비행기 안에서 갑중과 이야기할 적에 중국측에 먹이는 뇌물 액수를 10억으로 정해도 잘한 일이라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연숙은 5억으로 깎았다. 실무자 두 명한테는 그보다 훨씬 적은 금액을 먹였을 테니 예상했던 금액보다 적다. 연숙이 말을 이었다.
“실무자 두 명한테는 각각 5만불씩 10만불을 주었습니다.”
그렇다면 10억에서 4억이 남았다. 머리를 끄덕이던 조철봉이 다시 물었다.
“그럼 중국측 문제는 다 해결이 된 것인가?”
“소유주인 극동기계측 사람들은 모두 한국으로 도망쳐 버려서 중국측이 인수한 상태니까 이제 남은 건 노동자 임금 20억과 리스회사와의 법적문제입니다.”
“으음.”
“주문을 주던 근대자동차가 극동기계에서 받을 금액이 75억 가깝게 되지만 소유권이 중국정부측에 넘어간 상태여서 청구할 분위기가 안됩니다.”
“그런가?”
조철봉이 눈을 크게 떴고 갑중도 머리를 돌려 이연숙을 보았다. 그들은 근대자동차의 채무를 해결하려고 그쪽에다 먹일 뇌물도 준비해 두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근대자동차와의 부채가 해결된다면 다시 10억이 남는다. 이미 연숙이 절약한 4억과 합쳐 14억이다. 그때 연숙이 말을 이었다.
“어제 실무자들한테 리스회사의 기계대금을 해결할 방법이 없겠느냐고 상의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조철봉의 시선을 받은 연숙이 다시 붉은 입술을 벌리고 웃었다.
“방법이 있다고 합니다.”
“어떻게?”
“극동기계를 완전 파산처리해서 중국정부가 인수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정부가 극동기계를 위탁 관리하는 입장이 되어 있지만 파산처리하면 국가가 몰수하게 된답니다. 그러면.”
연숙이 반짝이는 눈으로 조철봉을 보았다.
“리스회사는 기계를 되찾아 갈 수도, 밀린 리스 대금을 청구할 수도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리스회사는 중국정부를 상대로 청구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으음, 그렇다면.”
“뇌물을 조금 더 쓰면 리스회사에 손쓸 필요도 없을 것 같습니다.”
조철봉의 입에서 다시 감탄사가 울려 나왔고 갑중도 머리를 끄떡였다. 리스회사에 줄 뇌물액을 5억 준비해 놓았으니 여기서 또 절약할 수 있게 되었다. 조철봉이 손을 뻗쳐 연숙의 손을 쥐었다.
“대단해. 먹이는 수단이 놀랍군 그래.”
조철봉도 뇌물을 먹이는 선수측에 들 것이었다. 지금까지 사회활동을 해온 십여년간 조철봉은 갖가지 난관에 부닥쳤지만 거의 뚫고 나왔다. 간혹 좌절한 경우도 있었으나 대부분의 경우는 해결이 된 것이다. 모두 뇌물 덕분이다.
뇌물은 모든 곳에서 통용이 되었다. 조철봉에게는 음식점에서 팁을 주는 것도 뇌물의 변형이다. 따라서 조철봉은 다 먹고나서 팁을 주지 않는다. 그것은 천만의 말씀이다. 조철봉은 음식이 나오기 전에 팁을 준다. 그러면 종업원이 주인 모르게 비싼 매운고추도 가져오고 특별 소님을 위해 보관한 젓갈도 내놓는다. 뇌물이다. 종업원이 주인 모르게 뇌물을 먹고 식당 재산을 축내는 상황이 된다.
경쟁사회에서는 남보다 빠르고 많아야 한다는 교육을 받는다. 1등이 아니면 죽는다는 각오를 품어야 한다고 지금도 가르친다. 그러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따질 겨를이 없다. 목적만 이루면 지난 과오가 다 상쇄된다는 것을 모두 두눈으로 봤기 때문이다. 뇌물은 자유시장경제가 발전되기 위한 윤활유 역할을 했다.
뇌물을 주고 받음으로써 서로의 가정이 윤택해지며 사업은 확장되었다. 그렇다면 뇌물을 못쓰고, 안쓴 작자들은 어떤가? 그렇게 해도 일이 잘 된다면 대단한 능력이 있는 인간이겠지만 여론조사를 해보면 아마 전체 인구의 3%정도밖에 안될 것이다.
그리고 그 3%중 95%가량의 인간이 사업 부진으로 욕보고 있을 것이다. 조철봉은 혈압이 높아져서 응급실에 달려갈 적에도 매점에 들러 음료수 박스를 사가는 인간이다. 그리고 그 박스를 응급실 의사한테 건네고 주저앉는 것이다.
그러면 제일 늦게 왔는데도 다들 알아서 해준다. 호적등본 떼러갈 적에도 동사무소 직원한테 도서상품권을 내밀고 아파트 경비한 테는 명절때 봉투에다 5만원쯤 넣어서 슬쩍 찔러준다. 밤늦게 술생각이 나서 편의점에서 소주 사올 적에도 따로 소주 한병하고 안주와 빵을 봉투에 담아 경비원에게 건네준다. 대통령이 따로 없다. 아니, 대통령 이상으로 대우를 받게 되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부자가 존경을 받아야 마땅하다. 그래서 모두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버는 것이 아닌가? 무조건 나눠주라고 소리치는 놈들은 모두 도적놈 심보들이다. 아마 자기 월급부터 반절쯤 쪼개서 못사는 사람에게 나눠주기로 한다면 그 말이 쏙 들어갈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인간들한테는 그런 제도가 적용되어야 한다. 쥐고 내놓지 않는 놈들이다. 수백억 재산을 쥐고도 20년된 똥차를 타고 다니는 놈, 제일 잘사는데도 술값 안내는 놈, 동사무소에서 음료수 한병 안내놓고 큰소리만 치는 놈, 아파트 경비한테 오만한 태도로 인사만 받는 놈, 돈은 돌아야 한다.
뇌물로 돌더라도 돌면 아무 상관이 없는 인간들한테도 콩고물이 떨어지게 되어있다. 상념에 잠겨있는 사이에 차는 호텔 현관앞에 도착했다.
“잠깐 내 방으로 같이 가지.”
로비로 들어선 조철봉이 연숙에게 말했다. 그러곤 뒤를 따르는 갑중을 돌아보았다.
“자네도 들어와.”
연숙이 긴장한 듯 시선을 내렸지만 곧 차분한 표정으로 말했다.
"돈황씨하고 내일 약속을 했습니다.”
“우린 이미 달러를 준비해 놓았어.”
조철봉이 시원스럽게 말했다. 방의 소파에 자리잡고 앉았을 때 조철봉이 머리를 들고 연숙을 보았다.
“내일 얼마를 먹이면 되겠나?”
그러자 연숙이 금방 대답했다.
“70만불이면 될 것 같습니다.”
“70만불.”
머리를 끄덕인 조철봉이 흘끗 옆쪽에 앉은 최갑중을 보았다. 갑중이 가져온 짐가방 안에는 2백만불 가까운 달러가 들어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색한 조철봉이 이연숙을 보았다. 연숙은 이미 예상 금액에서 14억이나 절약했다. 내일 70만불을 돈황에게 준다고 해도 12억이 남는다.
“내가 1백만불을 주지.”
조철봉이 말하자 연숙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만 크게 떴다. 그러자 조철봉이 이미 눈치를 채고 느긋하게 머리만 끄덕이는 갑중을 턱으로 가리켰다.
“최사장한테서 지금 돈을 받아 가.”
“예. 그런데 나머지 30만불은 어떤 용도입니까”
연숙이 물었으므로 조철봉은 마침내 얼굴을 펴고 웃었다.
“30만불은 이연숙씨한테 주는 보너스야.”
놀란 연숙이 입만 딱 벌렸을 때 갑중이 방구석에 놓인 짐가방을 끌고 왔다. 이것도 뇌물이다. 뇌물은 부하 직원이나 고용인한테도 통용되는 것이다. 이것이 조철봉의 방식이다. 그래야 신바람을 내며 일을 하게 되는 것이다. 언젠가 조철봉의 친구 하나가 찾아와 회사 구매부의 견적가가 다른 곳과 비교해서 상당히 높다고 조언을 해주었다. 무언가 흑막이 있다는 암시도 주었고 실제로 그럴 가능성도 많았다. 그러나 조철봉은 머리를 젓고 말했다.
“얀마, 생기는 것이 있어야 신나게 일을 하는 거다. 냅둬라. 어느 정도까지는 먹어도 된다.”
친구는 머쓱해서 입을 닫았지만 그 어느정도가 문제이기는 했다. 조철봉의 경험에 비춰봐도 바늘 도둑이 소 도둑이 되는 것은 일도 아니기 때문이다. 먹는 버릇이 들면 오늘 10만원에서 내일 1억이 되는 것은 순식간이다. 그래서 조철봉은 우선 감사 기능을 강화하는 한편으로 직원의 보수도 대폭 올렸다. 그러고 나서 먹은 것이 탄로난 직원 몇명을 가차없이 파면하고 고발했는데 조철봉은 그것으로 그 관행이 완전히 사라질 것이라고는 믿지 않았다. 갑중이 탁자 옆으로 가방을 끌고 오더니 만불짜리 뭉치 100개를 올려놓았다. 1백만불, 10억이다.
그중 30개, 3억이 연숙의 보너스인 것이다.
“자, 확인했으면 넣습니다.”
만불짜리 뭉치는 10개씩 묶어져 있어서 10만불짜리 큰 뭉치가 10개였다. 갑중이 빈 가방을 찾아 돈뭉치를 넣을 때에서야 연숙의 입이 열렸다.
“사장님, 저는 이렇게.”
무슨 말이냐는 듯 정색한 표정의 조철봉을 향해 연숙이 말을 이었다.
“너무 많습니다, 사장님.”
“아니, 천만에.”
머리를 저은 조철봉이 단호하게 말했다.
“30만불도 적어.”
“아닙니다, 사장님.”
“받아.”
자르듯 말한 조철봉이 소파에 등을 붙이고는 화제를 돌렸다.
“돈황씨가 극동기계를 파산 처리해서 리스 회사가 손을 못대게 만든다면 우리한테는 득이야. 다시 로비자금이 절약되지.”
리스회사의 간부에게 먹일 뇌물로 5억을 준비해 놓고 있었으니 그렇게 된다면 연숙은 도합 19억을 절약한 셈이다. 중국측 뇌물을 4억 절약했고 근대자동차에 줄 뇌물 10억을 안줘도 되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내용은 연숙이 모른다. 알면 이 감동이 반감될 것이니만치 알려줄 필요도 없는 것이다.
인간이 모두 제 분수를 지키고 산다면 평화로운 세상이 될 것이다. 범죄도 없고 전쟁도 일어날 이유가 없다. 핵이 무슨 필요가 있고 출자총액제한제가 왜 나오겠는가? 부부간 싸움도 없고 자식 교육 때문에 이민도 가지 않을 테니까.
그리고 바로 나같은 인간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을 것이다. 다음날 아침 서울로 날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조철봉은 그 생각을 했다. 갑자기 내 분수가 무엇인가 하는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자신의 능력, 또는 한계이다.
자동차회사 영업사원부터 시작해서 이제 기업군을 거느린 오너의 신분이 되었지만 욕심은 한도 끝도 없는 것이다. 눈앞에는 눈먼 돈이 무더기로 쌓여 있었는데 쉽게 말하면 먼저 줍는 게 임자였다. 법에 저촉되느냐 안되느냐를 따지다가 남한테 빼앗기는 병신 짓을 하겠는가? 먼저 가로챈 놈들이 끄떡없이 지내는 꼴을 보면 눈이 뒤집혔지 않는가?
물론 분수를 지키는 인간들에게는 그 돈무더기가 보이지 않는다. 나도 전에는 그랬으니까. 길게 숨을 뱉은 조철봉은 감았던 눈을 떴다. 일등석 의자는 편안했고 비행기는 파란 하늘 위를 마치 그냥 떠 있는 것처럼 비행하고 있었다.
“마실 것 드릴까요?”
다가온 스튜어디스가 물었으므로 조철봉은 시선을 들었다. 먼저 검은 눈동자가 시야에 들어왔고 갸름한 얼굴형에 잘 조화된 콧날 그리고 조금 얇은듯한 입술이 바로 50㎝쯤 앞쪽에 떠 있었다. 스튜어디스는 대부분 미인이지만 이 여자는 특별했다.
처음 시선이 부딪치고 얼굴 윤곽과 분위기가 머릿속에 박힌 순간에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여자보다 더 출중한 용모의 여자는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연분이라는 것이 있다. 인연이다. 누구는 전생의 인연이라고도 하는데 주위 상황이나 자신의 그때 입장과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겠지만 인간들은 이렇게 맺어진다.
“냉수 한잔.”
조철봉이 그렇게 대답하자 스튜어디스는 웃음띤 얼굴로 돌아섰다. 뒷모습을 보면 몸매가 드러난다. 엉덩이가 알맞게 탱탱했고 허벅지는 탄력이 있었으며 종아리는 미끈했다. 발 뒤꿈치가 엄지와 검지로 꾹 누른 것처럼 살짝 파여 있는 것도 보기 좋았다.
나이는 20대 후반쯤 되었을까? 다시 눈을 감은 조철봉은 가슴의 고동을 느끼면서 가늘고 긴 숨을 뱉었다. 나는 매일 희망을 품고 일어난다. 그것이 돈을 모으는 일이거나 또는 여자를 만나는 일이거나 간에 아마 죽는 날까지 그런 기대를 품고 일어날 것이다.
내 분수는 모른다. 심호흡을 한 조철봉이 가볍게 머리를 젓고는 다시 눈을 떴다. 내 분수는 갈수록 커진다. 그러다가 너무 바람을 넣은 풍선처럼 터져 버릴 수도 있겠지만 그 순간까지는 활기찬 인생을 살지 않겠는가? 그때 스튜어디스가 쟁반에 냉수가 든 잔을 받쳐들고 다가왔다.
“고맙습니다.”
스튜어디스가 건네준 물잔을 받으면서 조철봉이 인사했다. 그러고는 다른 손으로 저고리 위 포켓에 넣어둔 명함을 꺼내 내밀었다.
“나, 조철봉이라고 합니다.”
스튜어디스가 당황한 듯 얼굴을 굳혔지만 명함은 받았다. 이쪽은 좌우의 좌석이 비어 있어서 눈치를 볼 필요는 없다.
“시간 있으시면 연락해 주시지요. 같이 식사라도 하십시다.”
조철봉은 정색하고 여자를 보았다. 그 눈빛이 무엇을 말하겠는가? 여자는 안다.
마중나온 사람도 없었으므로 인천공항에서 조철봉은 시내로 가는 버스를 탔다. 회사에 연락을 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버스에 탄 지 10분도 안되어서 기획실장 홍재석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사장님, 회의 준비를 해도 되겠습니까?”
홍재석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것은 조철봉이 회사로 올 것이냐고 묻는 것과 같다. 홍재석은 청도에 연락을 해서 조철봉의 스케줄을 알았을 것이다.
“아니, 난 오늘은 좀 쉴 테니까.”
조철봉이 말하고는 손목시계를 보았다.
오후 4시반이었다.
“알겠습니다. 별일은 없습니다.”
홍재석은 비서실장 역할까지 하고있는 터라 조철봉의 주변에 대해서 두루 꿰고있는 편이다. 조철봉은 홍재석이 더이상 말을 잇지 못하도록 휴대전화의 덮개를 덮었다. 가만 두었다면 홍재석은 오늘 밤 조철봉이 어디에서 묵을 것인가도 알아내려고 했을 것이다. 그래서 아침에 그곳으로 차를 보내겠지만 조철봉으로서는 사생활에 간섭받고 싶지가 않은 것이다. 시시콜콜한 부분까지 신경을 쓰는 홍재석이 때로는 감시자처럼 느껴져서 짜증이 났지만 곧 눌러 참았다. 홍재석의 의도는 과잉 충성이 아니라 기업군을 거느린 대주주는 공인(公人)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조철봉에게 주입하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홍재석은 부도난 대기업 ‘태성’의 비서실 차장 출신이다. 태성의 사주였던 박준태가 어떤 처신을 해왔는지 속속들이 알고 있었으므로 그것을 반면교사로 삼아 조철봉을 선도하고 있는 것이다. 충고나 조언은 경청한다. 이것은 조철봉의 장점이다. 홍재석을 채용할 적에 먼저 조철봉이 그렇게 제의하기도 했다. 다시 휴대전화가 진동으로 떨었으므로 조철봉은 생각에서 깨어났다. 그러나 발신자 번호가 전혀 생소했으므로 머리를 기울이고는 휴대전화를 귀에 붙였다.
“여보세요.”
“저, 김민경인데요.”
맑은 여자의 목소리가 수화구를 울렸으므로 조철봉의 머리도 순식간에 맑아졌다. 누군지 아직도 기억나지 않았지만 좋은 일이 분명할 것이라는 예감으로 조철봉의 가슴은 뛰었다. 그때 여자가 금방 말을 이었다.
“오늘 비행기 안에서 만났던.”
“아아.”
조철봉의 입에서 탄성과 같은 놀란 외침이 뱉어졌다. 거의 기대도 하지 않았던 일이라 기쁨은 배가 되었다. 이것은 마치 떡밥도 뿌리지 않은 상태에서 빈 낚싯대를 던졌다가 고기가 문 것이나 같다. 그것도 월척으로.
“전화해줘서 고마운데.”
옆자리에 승객이 앉아 있었으므로 조철봉은 목소리를 낮췄다.
“지금 어디야?”
“저, 버스 안에 있어요.”
“아, 지금 서울 가고 있구먼.”
“네, 그런데.”
여자의 목소리가 조금 웃음기를 띠고 있다고 느꼈을 때 말이 이어졌다.
“제가 뒤쪽에 앉아 있거든요.”
그 순간 상반신을 세운 조철봉이 목에 힘을 주었다. 목이 뒤로 돌아가는 것을 막은 것이다. 조철봉은 우연을 믿지 않는다. 가끔 TV를 보면 주인공 남녀가 거리에서도 만나고 식당에서도, 또 다른 여자하고 몰래 데이트하는 순간마다 걸리는데 그런 일은 실제로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거의라고 그랬다. 그런데 그 몇백, 몇천분의 일의 확률이 자신에게 일어날 수도 있다. 바로 그때 아닌가? 조철봉은 숨을 깊게 들이켰다가 뱉었다.
“그럼 지금 집에 가는 길인가?”
여전히 앞쪽을 향한채 조철봉이 묻자 민경은 낮고 짧게 웃으며 대답했다.
“네, 그런데 비행기 안에서부터 계속해서 생각에 잠겨 계시는군요.”
“내가?”
“그래요.”
“그런데 이건 정말 우연인데.”
“왜요? 이런 경우는 많아요. 저한테는.”
민경이 말을 이었다.
“제가 공항에서 조금 일찍 나오면 같은 비행기를 탄 손님 한두명은 꼭 만나는데요. 뭘.”
“거기 말고 나 말이야.”
이제 조금 여유를 찾은 조철봉이 입맛까지 다셨다.
“나한테 이런 우연이 올 확률은 복권당첨이 되는 경우하고 비슷해.”
“어마나, 복권이나.”
“그래.”
의자에 등을 붙인 조철봉이 물었다.
“옆자리 비었어?”
“네.”
“그럼.”
자리에서 일어선 조철봉이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으면서 뒤쪽을 둘러 보았다.
민경은 조철봉의 뒤쪽 세번째 왼쪽 자리에 앉아 있었다. 시선이 마주치고 민경은 옅게 웃음을 띠어 보이더니 고쳐앉았다. 버스는 속력을 내며 달려가는 중이었고 절반도 안찬 승객들은 대부분 나른한 표정으로 이쪽에 무관심했다. 민경의 옆자리에 앉은 조철봉은 먼저 옅은 향내를 맡았다. 남자는 여자로부터 자극을 받는 순서가 있다. 첫번째가 시각이며 그 다음이 후각이다. 비중으로 따지면 청각은 그 다음이 될까? 점잖은 체면에 촉각은 예외이다. 그것은 미각과 함께 다른 카테고리에서 순서를 매겨야 될 것이다.
“그럼 약속한대로 내가 시내에 들어가서 저녁을 사지.”
옆에 앉은 조철봉이 말하자 민경은 이제 활짝 웃었다.
“바쁘지 않으세요?”
“오늘은 마침 쉰다고 했어.”
그때 민경이 손에 쥐고 있던 명함을 들어 보였다. 비행기 안에서 조철봉이 건네주었던 명함이다.
“저, 이회사 사장님 맞으세요?”
“그럼 내가 사기꾼 같나? 가짜 명함을 만들고 다니는.”
“아니, 그게 아니라.”
민경이 반짝이는 눈으로 조철봉을 보았다.
“베트남에서 이 회사를 보았거든요.”
“내가 만든 회사지.”
“어마나, 정말 그렇구나.”
놀란듯 민경이 눈을 크게 떴다.
“정말 영광이에요. 사장님.”
“내가 영광이야.”
조철봉이 정색하고 말했다.
“이렇게 민경씨를 만나게 되어서 말이야.”
“제가 베트남에 자주 가거든요. 그러면 시내에서 사장님 회사 차들을 자주 봐요.”
“그런가?”
머리를 끄덕인 조철봉이 지긋한 시선으로 민경을 보았다. 비행기 안에서도 이와 비슷한 시선으로 민경을 보았다. 그 시선을 받은 민경은 3초쯤 지났을때 머리를 돌렸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눈은 마음의 창이라는 말도 있지만 실제로 눈으로 대화도 된다. 조철봉은 그것을 믿는 인간이다. 물론 돈을 떼인 조철봉이 채무자를 바라보는 눈과 지금의 눈 자체는 같지만 눈빛은 오히려 전자가 더 강할걸? 그래서 옆에서 보는 사람들은 짐작할 수 가 없다. 오직 둘만이 눈빛으로 대화를 주고 받는 것이다. 지금 조철봉은 민경에게 널 갖고 싶다는 눈빛을 주는 중이다.
광화문에서 하차한 그들은 근처의 한국호텔 일식당으로 들어섰다. 아직 이른 저녁이어서 식당은 한산했고 빈 방도 많았으므로 그들은 아늑한 밀실로 안내되었다.
조철봉이 일식당을 애용하는 이유는 단 한가지, 비록 방음장치는 제대로 갖춘 곳이 드물지만 방이 있다는 것뿐이다. 물론 한식당이나 중식당도 방이 있지만 작업을 하기에는 불편하다. 중식당은 의자가 있고 한식당은 몇팀이 합석해야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방에 자리잡고 앉아 비싼 회와 술을 시키고 났을 때 김민경이 웃음 띤 얼굴로 말했다.
“사장님은 프로 같아요.”
“민경씨도 보통 수준은 넘는 것 같은데.”
제꺽 말을 받으면서 조철봉의 기력은 상승되었다. 이것이 바로 엔도르핀의 효과일 것이다. 그러자 민경이 짧게 웃었다.
“그럼 프로끼리 만났군요.”
“그런 셈인가?”
따라 웃은 조철봉이 다시 지그시 민경을 보았다. 민경은 순식간에 중간 과정을 생략해 버린 기술을 발휘했다. 단 두마디의 말로 분위기를 바꿔버린 것이다. 이것이 프로 아니고 뭔가? 과감한 생략, 그리고 자신만만한 태도는 프로의 필수 요건이다.
“저기요.”
민경이 앞에 앉은 조철봉을 똑바로 보면서 말했다.
“사장님은 집에서 누가 기다리지 않으세요?”
“기다리는 사람이야 있지.”
민경의 시선을 받으면서 조철봉이 차분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내가 오늘 귀국하는지는 몰라. 그래서 여유가 있는거야.”
“어마나.”
눈을 크게 뜬 민경이 이를 드러내며 소리없이 웃었다.
“나하고 똑같네. 본래 제 스케줄은 내일 오후에 귀국할 예정이었거든요. 그런데 일정이 바뀌어서.”
“그래서 민경씨도 오늘 여유가 있군.”
“그래요.”
“집에서는 누가 기다리는데?”
“남편요.”
금방 대답했다 민경이 덧붙였다.
“별거 중이긴 하지만.”
“저런.”
남의 불행은 바로 자신의 행복으로 연결이 되는 경우가 많다. 조철봉이 이맛살을 찌푸려 보였지만 가슴은 편안해졌다. 굳이 예를 들라면 면허증을 발급받았을 때의 기분과 비슷한 것이었다.
“그럼 따로 떨어져 살고 있는거야?”
“아뇨. 이혼수속 마칠 때까지 각각 방을 따로 써요.”
민경이 남의 일처럼 태연하게 말했다.
“밥도 각각 따로 먹고요. 밑반찬도 따로, 밥통도 따로, 설거지도 따로.”
젓가락을 든 민경이 장난스레 놀리면서 말했다.
“집 전세금이 빠지는 이달 말까지 수속 끝내고 돈 나눠서 갈라서기로 했으니까 앞으로 16일 남았어요.”
“그렇군.”
“지겨워요.”
“도대체 같이 얼마나 살았는데?”
“1년 반.”
그러고는 민경이 웃음 띤 얼굴로 조철봉을 보았다.
“하지만 같이 침대에서 잔 날은 6개월도 안돼요. 서로 스케줄 때문에.”
“그렇다면 섹스는.”
“6개월 중 1개월 정도나 될까?”
“그럼 30번인가?”
그러자 민경이 코웃음을 쳤다.
“그 30번중 좋은 날은 두번뿐이었다고요. 그것도 내가 겨우 맞춰서.”
“저런.”
조철봉이 호기심을 감추지 못한 얼굴로 김민경을 똑바로 보았다. 바로 이런 민경의 불운이 내 행운이나 같은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했기에 그런.”
민경의 남편이 마치 큰 범죄라도 저지른 것처럼 조철봉은 굳어진 얼굴로 물었다. 그러자 민경이 풀썩 웃었다.
“발기부전이에요. 열번 시도해서 한번 될까말까 해요. 그리고.”
“그리고?”
“이게 섰을때.” 하면서 민경이 둘째 손가락을 위로 세워 보였다. 손가락이 길고 예뻐서 전혀 철봉같이 보이지 않았다. 조철봉의 시선을 따라 자신의 손가락을 본 민경이 다시 입술끝을 비틀고 웃었다.
“이만하면 이쁘게요? 어쨌든 이게 서가지고 막상 안에 들어가면?”
그때 종업원이 회접시를 들고 들어섰으므로 민경은 손가락을 오므리고는 시치미를 떼었다. 호텔 식당이어서인지 음식은 깔끔했고 신선했다. 종업원이 방을 나가자 조철봉이 젓가락을 들면서 말했다.
“자, 먹으면서 이야기하자고. 그까짓것이 서든 말든 이젠 중요한 일도 아니니깐 말야.”
“하긴.”
쿡쿡 웃으면서 민경도 젓가락을 들었다. 이젠 분위기가 자연스러워져서 마치 서른번쯤 같이 잔 사이 같았다. 서로 분위기를 맞췄기 때문이다. 맛있게 회를 씹어 삼킨 민경이 다시 입을 열 때까지 조철봉은 느긋하게 기다리고 있다. 지성이면 감천이며 뿌린곳에 싹이 돋는 법이다. 민경은 저절로 굴러 들어온 복이 아니다. 행운은 기다리는 자에게 온다. 성공의 열쇠는 적극적이며 긍정적인 사고를 가진 자만이 쥔다. 바로 그 결과에 의하여 민경과 이렇게 마주앉게 된 것이다.
“있죠? 아까 이야기하다 말았던.”
“응, 그거.”
조철봉이 머리를 끄덕여 보였다.
“고추가 막상 안에 들어가서 어떻게 된다고 했지?”
“1분도 견디지 못한다고요.”
“너무 뜨거운 모양이군.”
“금방 흐물거리다가 빠져요.”
“놀라서 그래.”
정색하고 말했지만 조철봉의 가슴은 기쁨으로 뛰었다. 세상에 만난 지 세시간도 되지 않아서 아니, 실제로 둘이 마주앉은 지 30분밖에 되지 않았는데 고추가 흐물거리며 1분도 견디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주고 받다니, 이런 장면이야말로 모든 남자가 꿈에서나 그리던 것이 아니겠는가?
심호흡을 한 조철봉이 민경을 보았다. 민경은 발기부전에 조루가 겹친 사람을 만나 악전고투끝에 일년반만에 헤어질 지경이 되었다. 악전고투란 표현은 그만큼 민경이 참담한 나날을 보냈다는 것을 나타내려는 것이다. 보라, 이런 미모에 이런 젊음의 육체를 지니고서 1분의 밤을 보내야 했다니, 악전고투란 표현도 부족하다. 조철봉이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오늘은 나하고 내 별장으로 가지. 그곳이 조용하고 분위기도 나을 테니까.”
한모금 소주를 삼킨 조철봉이 말을 이었다.
“거기서 우리의 만남을 다시 자축하기로 하자고.”
“그래요. 가요.”
민경이 망설이지 않고 머리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얼굴이 환했다.
“여기서 멀어요?”
“청평이야.”
“한시간이면 가겠죠?”
눈을 반짝이며 민경이 묻자 조철봉은 다시 심호흡을 했다. 가슴이 벅찼기 때문이다.
김민경이 회 안주에 소주를 한병하고 절반 가량 마시면서 털어놓은 사연은 이렇다. 민경은 방년 29세였으니 조철봉의 짐작이 맞은 셈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항공사 승무원이 된 지는 올해로 5년째. 제법 경륜이 붙어 회사에서 인정을 받아 작년에 진급도 했지만 가정생활은 불운했다.
지금 별거중인 남편 서경훈을 만난 것은 2년전, 친구의 소개로 대기업의 촉망받는 인재인데다 용모 수려하고 매너까지 세련되어서 민경은 금방 빠져들었다. 그러고는 만난 지 반년만에 결혼을 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친구들의 충고를 듣지 않았던 것을 뼈저리게 후회한다는 것이다.
친구들은 민경에게 최소한 석달이라도 동거를 해본 후 식을 올리든지 수속을 밟으라고 충고를 했다. 이른바 몸맞추기 동거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민경은 그녀들의 말을 단호히 거부했다. 물론 민경은 처녀가 아니었다. 처녀라니? 지금 일제시대 이야기를 하는거야? 뭐야? 말하는 도중에 민경은 제가 제말에 성질을 내더니 조철봉을 노려보기까지 했다.
요즘 결혼해서 처녀 따지는 짜식이 있어요? 그런 놈은 기네스북에 올려야 돼요. 요즘이 어떤 세상인데? 각설하고, 민경이 그때 친구들의 건의를 일거에 묵살한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서경훈의 손이라도 닿으면 온몸이 감전이라도 된 것처럼 찌르르하고 떨렸기 때문이다. 키스까지는 했다.
그런데 그 키스만으로도 민경은 온몸이 뜨거워지는 경험을 했다. 보기 드문 일이었다. 이러니 몸맞추기 동거 같은 말에 코웃음을 치는 것이 당연했다. 서경훈은 신사였다. 몸이 부딪히게 되면 키스까지만 했고 절제했다. 아시죠? 하고 민경이 사설 도중에 조철봉에게 확인하듯 물었다.
“그 절제 말예요. 그 절제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를요.”
“그럼. 알다마다.”
그 절제란 인내다. 극기이며 희생, 여자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려는 남자의 의지. 뭐, 간단하게 속된 말로 해설하면 참고 늦게 싸는 것이지만 조철봉이 엄숙하게 머리를 끄덕였다. 잘된 나무는 떡잎부터 알 수 있다고 민경은 경훈의 절제에서 위대한 그릇을 느낀 모양이었다. 여자는 선수가 아니더라도 몇번 경험을 하고 나면 남자의 싹수를 대충은 안다.
그래서 민경은 결혼식을 올릴 때까지 경훈과 섹스를 하지 않았다. 키스 도중에 경훈의 고추를 바지위로 잡아본 적은 두어 번 있었다고 했다. 단단하고 긴 것 같아서 흐뭇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첫날밤, 여기서부터 민경은 눈을 치켜뜨고 호흡을 가누며 말했다.
“아세요? 그날밤 어땠는지?”
“내가 알리가 있나?”
“30초도 안 되었어요.”
“그런 사람 많아.”
“세상에.”
조철봉이 장단을 맞춰주지 않은 것에 심통이 났는지 민경은 눈을 흘겼다.
“기가 막혀서. 30초라니.”
“정확하게 시간을 잰 것도 아니잖아? 조금 짧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에 그런 것 아냐?”
“아뇨. 쟀어요. 탁자에 붙은 디지털 시계에 초까지 나타나 있었거든요.”
“이런 제기.”
“11시24분14초에 넣었다가 45초에 끝났다고요.”
“그럼 31초인데.”
“31초나 30초나.”
“30초에도 여자가 절정에 오르는 경우도 있다고.”
조철봉이 달래듯이 말하자 민경은 마침내 허탈하게 웃었다.
“내가 토끼인가? 난 인간이에요. 난 안돼.”
청평의 별장은 조철봉이 여자를 데리고 가끔 찾는 곳으로 호텔 대용이었는데 당연히 이곳도 서경윤이나 기타 살림 차려준 여자들에게는 비밀로 해두었다.
조철봉이 현재는 사기꾼 행각에 직접 나서는 경우가 드물어지기는 했지만 제 버릇을 개 주겠는가?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도록 하라.’이것도 사기꾼의 기본 상식의 하나가 된다.
따라서 가끔 언론에서 보도되는 모모 유명인사가 ‘내 목숨을 걸고 맹세하건대 이 일은 모르는 일이다.’ 또는 ‘천지신명께 맹세코 나는 그 돈 안먹었다’하고 발표했다가 며칠이 안가서 들통나는 경우가 바로 이것이다. 그들이 사기꾼의 기본에 충실했다고 생각하면 금방 이해가 될 것이다.
이 세상에서 이해 못할 일이 없다. 제 기준으로만 상대방을 평가해서는 안된다. 비난을 받는 당사자는 얼마나 억울하겠는가? 말이 빗나갔는데 청평 별장은 강을 내려다보는 위치의 2층 저택으로 관리인은 아랫마을에 사는 노부부였다.
농사짓는 틈틈이 별장 청소, 그리고 잔디 다듬는 일이나 하고서 두 노인은 매달 2백만원씩 월급을 받는 터라 정성이 지극했다. 불시에 별장에 찾아가도 언제나 집안에는 티끌 한점 없었으며 냉장고에는 바로 오늘 아침에 떠온 약수가 들어 있었다.
대문 앞에서 대절시킨 택시를 돌려보내고 섰을 때 연락을 받고 기다리던 두 노인이 서둘러 문을 열었다. 아마 기다린 지 오래 되었을 것이다.
“아이구, 두분이 다 나와 계시네.”
조철봉이 반색을 하면서 인사를 하자 두 노인이 허리를 굽혀 절을 했다. 모두 70이 넘었지만 아직 허리도 굽지 않았고 정정했다.
“사장님, 식사하셨는가요?”
할아버지보다 할머니가 조철봉에게 자주 말을 거는 편이었다. 할머니가 묻자 조철봉이 들고 온 비밀백을 내밀었다. 호텔에서 산 것이다.
“예, 했습니다. 이거 할머니 화장품하고 할아버지 양주 한병을 사왔는데. 받으시지요.”
“아이구, 우리가 왜 이런 것을.”
할머니가 질색을 하고 몸까지 뒤로 물렸지만 결국은 받았다. 넓은 정원을 지나는 동안 김민경은 감탄한 표정으로 주위만 둘러보았고 두 노인은 잠자코 뒤를 따랐다. 조철봉이 현관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이번에는 할아버지가 말했다.
“우리는 내려가 있겠습니다. 시키실 일 있으면 언제라도 인터폰을 해 주시지요.”
그러고는 그것도 부족한지 덧붙였다.
“우리는 잠이 없어서요.”
현관문이 닫히고 집안에 둘이 되었을 때 민경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좋아요.”
“뭐가?”
“이곳 분위기. 마치 고향집에 온 것 같애.”
“하긴 나도 그렇다.”
소파에 앉은 조철봉이 상의를 벗어 옆에 내려놓자 민경이 집어들었다.
“옷장이 어디예요?”
“저쪽.”
조철봉이 턱으로 거실쪽을 가리켰다.
“옷장에서 입을 만한 옷을 찾아서 입으라구. 마음 푹 놓고 말이야.”
여자가 머물고 간 후에는 그 물증을 철저히 지워놓은 터라 조철봉이 당당하게 말했다. 그리고 다시 찾아온 여자도 없다. 민경이 거실로 들어가더니 곧 조철봉의 셔츠로 갈아입고 나왔다. 셔츠가 길어서 허벅지까지 내려왔는데 하반신에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았다. 팬티 차림인 것이다. 그것을 본 조철봉이 빙그레 웃었다.
“응, 섹시하구나.”
그러자 민경이 두 다리를 오므리는 시늉을 했다. 교태를 부리는 것이다.
“이리와.”
조철봉이 두손을 벌리며 민경에게 말했다. 이 시점에서 분위기 잡을 일이 더 있겠는가? 더 길게 늘어지면 역효과가 날 우려가 있다. 그러자 민경이 다가왔으므로 조철봉은 허리를 안았다.
“마치 신혼여행 온 것 같아.”
조금 얼굴이 붉어진 민경이 말하자 조철봉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지, 그럼 이곳에서 다시 시작하기로 하자.”
자리에서 일어선 조철봉이 민경의 어깨를 감싸안고 옆쪽 침실로 들어섰다.
“와아.”
민경은 아직 침실 구경을 못했다. 침실로 들어선 민경이 눈을 둥그렇게 뜨고 탄성을 뱉었다. 넓은 침실은 안쪽에 대형 침대가 놓여 있고 한쪽 면이 유리로 되어 있어서 어둠에 덮인 창밖이 드러났다. 침대로 다가간 민경이 먼저 시트를 들추고 몸을 밀어넣더니 조철봉에게 말했다.
“불 꺼요.”
그러고는 덧붙였다.
“밖에서 다 보일 것 같아서 싫어.”
“하긴.”
조철봉이 선선히 스위치를 눌러 불을 껐다. 그 순간 창밖의 사물이 드러나면서 밤하늘에 뜬 별까지 보였다. 아래쪽 강표면은 희미하게 번들거리고 있다.
“으음, 좋아.”
상반신을 침대 머리에 기댄 민경이 심호흡을 하더니 물었다.
“달이 떴어요?”
“아니.”
“달이 뜨면 더 아름다울 것 같아.”
“그렇겠군.”
이년째 별장을 소유하고 있지만 달이 뜬 날 방안의 불을 끄고 감상한 경험은 없었으므로 조철봉의 대답은 애매했다. 그때 민경이 옆에 누운 조철봉의 허리를 두손으로 감아 안으면서 말했다.
“아저씨는 참 편안해.”
“어, 그래?”
“우린 오래 만난 사이같아.”
“나도 그렇다.”
그러나 남녀관계는 적당한 긴장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정신 건강에도 좋고 작업시에도 유리한 것이다. 조철봉은 민경의 어깨를 당겨 안았다. 민경을 약간 긴장시킬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민경은 짐작했던대로 셔츠 밑에는 브래지어와 팬티만 걸치고 있었는데 조철봉의 손길이 브래지어에 닿자 제가 먼저 손을 뻗어 후크를 끌렀다. 브래지어가 풀어졌고 곧 헐렁한 셔츠가 벗겨지면서 민경의 상반신은 알몸이 되었다. 조철봉은 먼저 머리를 숙여 민경의 젖가슴에 입을 붙였다. 민경의 젖가슴은 작은 반찬 그릇만 했는데 젖꼭지도 작았다. 덜익은 과일 같았다. 그러나 조철봉의 혀가 젖꼭지를 서너번 굴리자 마치 소리를 낼 것처럼 탱탱하게 곤두섰다.
“으응.“
민경이 상반신을 뒤틀면서 가벼운 신음을 뱉었다. 그러나 호흡은 아직도 정상이다. 조철봉은 팔을 뻗어 민경의 팬티도 끌어내렸다. 이제 민경은 알몸이 되었다. 젖가슴을 애무하던 조철봉의 입술이 아래로 내려와 배꼽 부근을 더듬었다. 민경의 숨소리가 점점 가빠졌고 하반신이 들썩이는 횟수도 많아졌다. 조철봉은 서두르지 않았다. 천천히, 그리고 끈질긴 자세로 이제 민경의 계곡까지 입술이 내려왔다. 민경의 남자 서경훈이 30초라는 소리에 이쪽은 자신감이 배가된 상황이다. 이것은 마치 미들급 복서가 막상 링에 오르고 보니 상대방은 플라이급 애들하고만 싸웠다는 것을 알게된 상황이라고나 할까? 강한 섹스의 기본은 자신감이다.
김민경은 서둘렀다. 굶주렸던 사람처럼 조철봉을 재촉했다. 성의 쾌락을 경험해본 민경인 터라 남편의 조루증세에 짜증이 났을 것이다. 짜증 정도가 아니다. 막상 겪으면 환멸을 느낀다고 한다. 쳐다보기도 싫고 손끝이라도 닿으면 몸서리까지 쳐진다는 것이다. 이쪽은 잔뜩 달아올랐는데 물건이 들어와 눈 깜짝할 사이에 빠져나간다면 그 허전함과 배신감은 필설로 표현이 안된다. 조철봉이 상반신을 세웠을 때는 민경이 한차례 온몸을 떨고 난 후였다. 뜨거워진 몸이 애무만으로 낮은 단계의 절정에 닿은 것이다. 아마 민경의 남편 서경훈은 이런 방식으로 절정을 만들어 주지도 못했을 것이었다. 자신감이 결여되면 여유가 일어나지 않는다. 따라서 차분하게 애무에 몰입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늘어졌던 민경이 눈치를 채고는 다리를 벌려 맞을 채비를 했는데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난 한번 했으니까 다시 금방 올라갈거야. 빨리 해줘요.”
조철봉은 저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민경의 신체 조건은 어느덧 그녀가 그렇게 싫어하는 서경훈에게 맞춰져 있는 것이다. 여자의 몸은 남자에 의해 단련이 된다는 말이 있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있겠지만 성에 적극적이며 능동적인 남자가 여자를 이끄는 한 그렇게 된다. 따라서 민경은 짧은 주기의 경훈을 기준으로 몸이 만들어져 있는 것이다. 조철봉은 철봉을 민경의 샘 끝에 붙이고 천천히 산책시키기 시작했다. 이미 흥건하게 젖은 민경의 골짜기는 뜨거웠고 철봉이 이쪽저쪽을 거닐 때마다 민경은 허리를 흔들었는데 점점 조바심을 내면서 탄성을 뱉었다.
“아유우.”
마침내 민경이 조철봉의 어깨를 움켜쥐며 소리쳤다.
“아저씨, 빨리. 응?”
참지 못하겠다는 말이다. 그러나 조철봉이 누구인가? 골짜기 산책은 조철봉이 가장 아끼는 순간 중의 하나가 아닌가? 조철봉은 잠자코 산책을 계속했다. 계곡을 오르고 샘도 지났다가 다시 돌아오고, 잠시 멈췄다가 힘차게 걷기 시작한다.
“아아.”
민경이 몸을 비틀면서 방안이 떠나갈 듯한 신음을 뱉었다.
“아저씨, 넣어줘. 응? 제발.”
다시 민경이 애원하듯 말했을 때 조철봉은 움직임을 멈췄다. 이제 때가 된 것이다. 민경은 지금 무르익을 대로 익었다. 절정이다. 지금 진입하면 30초가 아니라 10초만에 민경은 폭발한다. 그러나 민경의 남편 경훈은 죽었다 깨어나도 이런 분위기를 만들지 못할 것이다. 한번 주눅이 들면 몇배의 용기가 필요하다. 조철봉이 자세를 갖추자 민경이 그 순간 숨까지 죽였다.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아니, 열망하고 있다고 표현해야 된다. 조철봉은 천천히 철봉을 넣었다. 이것도 조철봉의 전매특허 아닌가?
“아아.”
갑자기 샘이 꽉 차게 된 민경이 온몸을 굳히면서 신음했다. 온몸을 굳힌 것도 철봉을 더 강하게 느끼려는 본능적인 행동인 것이다.
“아아아.”
철봉이 천천히 진입하는 동안 민경의 신음은 계속되었다. 조철봉은 민경의 샘 표면 신경세포들이 펄떡이며 환호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윽고 철봉은 민경의 샘 밑바닥까지 닿았다. 그곳까지 걸린 시간은 10초쯤 되었을까? 그 동안에 어느 놈은 열번 들어갔다 나왔겠지만 조철봉은 민경이 그 사이에 절정에 오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건 10초다.
(1062)은인-1
뇌물을 먹인 덕분에 조철봉은 백두산 관광단지의 호텔과 카지노 영업 허가를 받게 되었으며 부도로 넘어간 중국 공장을 십분의 일 가격으로 인수하게 되었다. 이제 공사만 끝나면 되는 것이다. 조철봉은 오랜만에 서경윤과 영일이 있는 집으로 돌아왔다. 초등학교 1학년인 영일은 조철봉을 따르기 시작했고 경윤도 전처럼 꼬리에 불이 붙은것 처럼 나내지 않는다. 저절로 사장 사모님 행세를 하는 것이다. 자리가 사람을 만들어준다는 말이 있기도 하지만 그 자리에 어울리는 행세를 해야 되는 것이 정상이다. 과장이 부장으로 진급하고서도 과장때 닦아놓은 돈줄(상납건)을 놓치지 않으려고 했다가는 오래 못간다. 과감하게 후임 과장한테 넘겨주고 부장 직급에 맞는 삥땅을 뜯어야 한다. 따라서 높은 자리에 올라갈수록 전문성은 떨어지지만 호인이 되어야 조직이, 세상이 평안해진다. 부하가 상급자 한테서 가장 듣기 좋아하는 말은 ‘네가 알아서 해’이다. 그리고 한단계 더 높인다면 다른 사람들 앞에서 상급자가 부하를 이렇게 평가해주는 것이다.
“이 사람이 전문가니까 이 사람하고 상의하십시오.”
물론 책임은 상급자가 진다. 그렇게 되면 투서를 하는 놈이 있겠는가? 어떤 배은망덕한 놈이 삥땅을 저 혼자만 차지하겠는가? 자고로 밑으로 갈수록 사나워지고 위로 갈수록 너그러워져야 정상이며, 조직도 제대로 굴러가는 법이다. 윗대가리가 혼자 성질내고 날뛰면 어쩔 수 없이 밑의 부하가 수습해야 되는데 그렇게 되면 인심이 밑쪽으로 흐른다. 그것을 안 윗놈은 질투심이 일어나 밑의 부하를 치고 부하는 또 반발하게 되는 것이다. 호랑이 이사에 부처님 사장이 되어야 한다.
어쨌든 경윤은 느긋한 사장 사모님 행세를 했는데 전과는 많이 달라졌다. 회사에 전화도 하지 않고 여자관계를 추궁하지도 않았다,
“오늘 중국 출장이야.”
아침에 옷을 입으면서 조철봉이 말하자 경윤이 힐끗 시선만 주었다.
“이삼일쯤 걸릴 것 같아.”
조철봉이 외면한 채 말했다. 출장은 내일이다. 오늘밤 친구들하고 약속이 있었고 십중팔구 외박할 가능성이 많았으므로 출장을 하루 당겨 말한 것이다,
“잘 다녀와.”
현관을 나서는 조철봉의 뒤에서 경윤이 말했다. 머리를 돌린 조철봉은 경윤의 무표정한 얼굴을 보았다. 조철봉의 시선을 받으면서도 경윤은 앞쪽의 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알았어, 뭐 사올 것 있어?”
조철봉이 묻자 경윤은 머리만 저었다.
아직도 시선을 마주치지 않는다. 조철봉이 머리를 돌렸을 때 금방 뒤에서 문 닫히는 소리가 났다. 엘리베이터를 탄 조철봉은 목운동을 하면서 자신이 거지가 된다면 경윤은 일초도 망설이지 않고 떠나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만일 자신이 병들어 눕게 된다면 그때도 마찬가지로, 장례식날에나 영일이를 데리고 나타나 줄까?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경비실 앞을 지나갈 때도 그 생각으로 조철봉은 쓴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러자 그것을 본 경비원이 따라 웃으면서 인사했다. 무슨 좋은 일이 있는 줄로 알 것이다. 아파트 앞에는 회사차인 벤츠가 기다리고 있었는데 운전사 백규식이 문을 열어주었다.
“신당동으로 가자.”
뒷자리에 오른 조철봉이 말하자 백규식은 잠자코 차를 출발시켰다. 신당동에는 오성자동차의 부품 창고가 있다. 오늘은 그곳으로 출근하려는 것이다.
창고는 3층 시멘트 건물로 한쪽 구석이 사무실로 쓰였는데 전체 건평은 2천평 정도였다. 조철봉이 사무실로 들어서자 관리소장 천경문은 굳은 표정으로 인사를 했다. 창고에는 백두산 관광단지로 보낼 건설자재가 가득 쌓여 있었으므로 분주했다. 트럭이 연락부절로 오갔으며 직원들의 표정도 활기에 차 있었다. 조철봉이 응접실 소파에 앉자 천경문이 보고했다.
“호텔 자재는 어제 보냈습니다. 그리고 카지노 자재는 5일안에 보낼 예정입니다.”
머리만 끄덕인 조철봉이 천경문을 보았다. 50대 중반의 천경문은 5년전에 대기업인 국일상사를 퇴직하고나서 사업체를 설립했다가 3년 만에 부도를 내고 이렇게 다시 직장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조철봉의 시선을 받은 천경문이 말을 이었다.
“카지노 자재는 오늘 중으로 모두 입고가 된다고 확인을 어제 받았습니다. 계획에 차질이 없도록 철저히 체크하겠습니다.”
조철봉이 다시 머리를 끄덕였다. 머리가 벗어진 천경문의 얼굴은 깊게 주름살이 패어 있었고 눈은 흐렸다. 지친 표정이었다. 작년초 천경문은 부도가 난 후에 사기혐의로 구속되어 6개월간 형을 살고 나왔다. 그러나 출감한 천경문은 그동안 어머니가 위암으로 수술도 받지 못하고 돌아가신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비극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천경문의 부인이 작년 말에 목을 매어 자살을 한 것이다. 생활고와 우울증 때문이었다는데 그것은 언론에도 보도되었다. 올해초에 경력사원을 모집할 적에 천경문은 1천여명의 응시자중 가장 나이가 많았다. 그래서 본인도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런데 그것이 화제가 되어서 최갑중이 조철봉에게 농담조로 이야기한 것이 천경문에게는 행운이었다. 조철봉이 당장 입사시키라고 했기 때문이다. 물론 천경문의 집안 사정은 입사하고 나서 갑중이 알아본 것이다.
“그런데.”
조철봉이 입을 열자 천경문은 긴장했다. 부동자세로 서서 조철봉을 보았다. 흐렸던 두 눈에 초점이 잡혔고 눈빛도 강해졌다.
“천 소장은 호텔 근무 경력이 있던데, 맞지요.”
“예. 사장님.”
정색한 천경문이 말을 이었다.
“국일호텔에서 15년간 근무했습니다, 사장님.”
“전무를 지냈더군.”
“그렇습니다, 사장님.”
머리를 든 조철봉이 앞에 서있는 경문을 보았다.
“우리 회사가 백두산관광단지의 운영을 맡게 된 건 알고 있지요? 그곳에 두개의 호텔과 카지노, 그리고 위락시설을 건설할 예정인데.”
조철봉이 말을 이었다.
“천 소장이 그곳을 맡아보지 않겠습니까? 관광단지의 건설에서부터 운영까지를 말이요.”
그 순간 경문은 숨도 쉬지않고 눈도 깜박이지 않았다. 그렇게 몇초쯤 지났을 때 이윽고 경문이 어깨를 늘어뜨리더니 입을 열었다.
“사장님.”
침을 삼킨 경문이 말을 이었다.
“저한테는 과분한 임무입니다.”
“내가 알아보니까 국일호텔의 설립에서부터 참여를 하셨던데.”
“예. 그렇긴 합니다만.”
그러고는 경문이 손등으로 이마에 배어나온 땀을 닦았다. 두 눈이 번들거리고 있었다. 생기를 띠고 있는 것이다.
“그럼 맡아서 하세요. 직책은 우선 관광단지관리사장으로 발령을 내겠습니다.”
조철봉이 다시 말하자 경문이 긴 한숨을 뱉더니 머리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필요한 인원에 대한 선발권도 맡기겠습니다. 전권을 위임한다는 말씀입니다.”
“예, 사장님.”
“백두산 관광단지가 남북한은 물론이고 아시아 최대의 명소가 되도록 만들어 보세요.”
“신명을 다 바치겠습니다.”
경문의 목소리에 열기가 느껴졌다. 얼굴까지 상기된 경문은 말을 이었다.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인간은 자신을 인정해준 상대에 대해서 커다란 부담을 지게 된다. 군인은 인정해준 상관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던지며 정치가는 정치가대로, 사업가는 사업가대로 그 보답을 하는 것이다. 그것이 정상적인 인간의 반응이다. 이윽고 자리에서 일어선 조철봉은 창고 사무실을 나와 건물의 현관 앞에 섰다. 조철봉을 따라나온 경문이 옆으로 다가서더니 낮게 말했다.
“사장님, 감사합니다.”
“아니, 오히려 제가 부탁드려야 할 일인데.”
조철봉이 웃음 띤 얼굴로 말했으나 경문의 굳어진 얼굴은 펴지지 않았다.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다시 낮게 말한 경문의 두 눈은 물기로 흐려져 있었다. 그날 저녁, 조철봉은 고등학교 동창 세명과 한정식집 ‘경원’에서 만났는데 경원은 이른바 고급요정이었다. 70년대에서 80년대까지의 20년간은 한국의 경제가 비약적으로 발전된 기간임과 동시에 접대 문화도 동반 성장을 했다. 전성기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경원’은 60년대부터 영업을 해온 명가(名家)로서 지금은 명성이 많이 쇠퇴했지만 나이 든 마담들의 기백이나 처신을 보면 조철봉은 옛날 기생들이 떠오르곤 했다. 오늘도 조철봉을 맞는 고마담은 표정은 담담하면서도 은근했다. 나이는 50대 중반이었으나 갸름한 얼굴은 아직도 성적 매력이 충분했으며 한복을 입었어도 몸매는 선정적이었다.
“모두 기다리고 계세요.”
고마담이 복도를 안내해 가면서 소곤소곤 말했다.
“파트너는 그냥 분위기 있는 애로 넣었어요. 됐죠?”
“아, 그럼요.”
조철봉도 사근사근하게 대답했다. 고순임이 누구인가? 80년대에는 국무총리나 장관, 거물정치인들만 상대해온 여걸인 것이다. 고순임 앞에서 잘난 체하는 것은 그야말로 부처님 손바닥 위에서 잔나비 손오공이 재주를 부리는 것이나 같다.
그래서 조철봉은 고마담 앞에서는 겸손했다. 조철봉도 누구인가? 겸손을 떨어도 위선인지 아닌지는 금방 표가 나는 터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성의를 보인 것이다. 그러면 대가가 온다. 고마담은 오늘 예약된 네명중 자신의 파트너를 제일 신경써 골랐을 것이라고 조철봉은 믿었다. 고마담이 복도 끝쪽의 문을 열었을 때 이미 술상 앞에 앉아있던 친구들이 반색을 했다. 모두 파트너와 둘씩 짝을 지었는데 여자 하나만 외톨이다. 조철봉의 짝이다.
“어, 어서 와라.”
누군가가 떠들썩하게 소리쳤고 모두의 시선이 모아졌다. 물론 네명의 여자들도 일제히 조철봉을 바라보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치 꽃밭 같다. 한복의 화사하고 풍성한 느낌이 가슴을 울렁거리게 만드는 것이다. 조철봉은 얼굴을 펴고 웃었다. 요정에 오면 언제나 이때의 분위기가 좋은 것이다. 설렌다. 그리고 파트너에 대한 기대로 가슴이 벅차오른다.
친구 세명중 둘은 자수성가해서 기업체 사장이 되었고 하나는 부모 유산을 받아 빌딩 임대업을 하는 터라 모두 비슷한 수준이다. 어릴 때 친구 중에서 고등학교 친구가 가장 많이 주변에 남아 있다고 하지만 환경의 영향을 받는다. 즉 현재의 환경이 다르면 어릴 적 죽마고우 사이도 멀어질 가능성이 많은 것이다. 따라서 학교 때 별로 친하지 않았더라도 현재 환경이 비슷하면 자주 어울리게 되는데 방에 모인 넷이 그런 경우였다. 조철봉은 비어 있는 아랫목 상석에 앉았다. 언제부터인가 이렇게 넷이 모일 때 조철봉은 자연스럽게 상석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떠들썩한 인사가 끝났을 때 조철봉이 머리를 돌려 옆에 앉은 파트너를 보았다.
“윤미라고 합니다.”
조철봉의 시선을 받은 여자가 머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짧은 머리에 피부는 약간 그을렸고 유난히 눈동자가 검었다. 방에 앉은 다른 세 여자도 모두 미인이어서인지 크게 두드러진 미모는 아니었다.
“윤미는 대학 졸업하고 지금 피아노 강사를 하고 있어요.”
하고 끝쪽에 앉은 고마담이 덧붙였다. 다른 세 여자는 이미 소개를 시켜줬는지 고마담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럼 즐겁게 노세요.”
“야, 철봉아.”
고마담이 나갔을 때 빌딩 임대업을 하는 장성만이 조철봉을 불렀다. 성만은 갸름하고 흰 얼굴의 파트너 허리를 바짝 끌어안고 있었는데 만족해하는 표정이었다.
“오늘 우리 단체로 오입하자. 어때? 여주의 내 별장으로 가는 것이?”
성만이 묻자 할인매장을 5개 소유하고 있는 유대봉이 동조했다.
“좋지. 가자구.”
“너, 어때? 갈래?”
그러자 옆쪽에 앉은 심기수가 조철봉에게 물었다. 기수는 신발회사의 사장으로 공장에서 하루에 4만켤레의 운동화를 생산한다고 했다. 아직 술을 한잔도 마시지 않은 상태에서 이차 결정을 해야 되는 경우는 처음이었으므로 조철봉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 자식은 꼭 자기 페이스로 분위기를 끌고 간단 말야.”
조철봉이 먼저 성만을 노려보고 나서는 옆에 앉은 윤미를 보았다.
“난 아직 결정하지 않았어. 내가 아니라 내 파트너가 말이야.”
“야, 니가 간다면 가는거지.”
성만이 눈을 치켜뜨고 소리쳤다.
“짜식이 오늘따라 안하던 짓을 하고 있어? 너, 파트너한데 점수 딸 일 있냐?”
하더니 성만이 윤미를 보았다.
“어쩔래? 이 자식 따라서 이차 나갈래? 안나갈래?”
“저는.”
윤미가 다소곳한 표정으로 그러나 또렷하게 말했다.
“아직 결정하지 않았어요.”
“머어?”
했지만 성만은 얼른 뒷말을 잇지 못했다. 예상외의 대답이었을 것이었다. 대개 이런 경우는 예, 아니오의 둘중 하나로 대답해야 된다. 물론 아니오일 경우에는 그럴듯한 핑계를 붙여야 하고 듣는 쪽에서도 그럭저럭 넘어가 줘야 되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 결정하지 않았다는 대답은 듣기에 따라서는 건방진 표현이 된다. 노는 꼴을 봐서 결정하겠다는 말이나 같은 것이다. 그때 조철봉이 짧게 웃었다.
“그러니까 나중에 보자구. 술 마시고 나서 말이다.”
그러고는 조철봉이 술잔을 들었다.
요정은 한국 고유의 기생집에서 유래된 접객업소로 역사와 전통을 갖춘 곳이지만 우후죽순 식으로 생겨나는 바람에 그저 방에서 한복입은 아가씨가 시중을 드는 곳으로 전락해 버렸다. 어디, 한복이나 제대로 갖춰 입었는가? 호황일 때는 보도방을 통해서 요정으로 아가씨들을 공급받기도 했는데 버선이 없어서 한복 치마 저고리에다 스타킹 양말을 신고 들어오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요즘도 고급 요정은 품위가 있다. 마담부터 관록이 넘치며 요정의 특징인 음식상도 정성이 들어있고 아가씨들의 수준도 고급이다. 바로 ‘경원’이 그런 곳이었다.
마담의 진가는 바로 아가씨들의 수준에서 드러난다. 지금 방안의 아가씨 네명은 모두 마담 고순임의 소속이었다. 파트너가 마음에 들때 술좌석의 분위기는 상승된다. 더욱이 멤버 전원이 같은 경우가 되었을 때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조철봉이 보아하니 셋은 대만족이었다. 세명 모두 경원은 처음이다. 돈이 억수로 많아서 한달에 용돈을 5천만원씩 쓴다는 장성만도 이곳은 말만 들었지 처음인 것이다. 돈만 많다고 다 되는 건 아니다. ‘경원’쯤 되는 곳의 손님이 되려면 단골인 사람과 함께 찾는 것이 순서인데 장성만은 제 주변에 그런놈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조철봉이 ‘경원’에서 만나자고 하자 펄쩍 뛰며 반겼었다. 그리고 지금은 희색이 만면한 얼굴로 파트너의 치맛속에 손을 넣고 있다.
“술, 드릴까요?”
옆에서 윤미가 물었으므로 조철봉은 시선을 들었다. 술병을 든 윤미가 시선을 마주친 순간에 수줍게 웃었다.
“응, 그래.”
빈잔을 든 조철봉이 윤미에게 내밀며 물었다.
“너, 피아노 강사라고?”
“강사 아녜요. 피아노 개인교습을 해요.”
“어쨌든 가르치긴 하는구먼.”
“초등학생요.”
“뭘?”
“초등학생들을 가르쳐요.”
“그래?”
건성으로 머리를 끄덕인 조철봉이 한모금에 위스키를 삼키고는 윤미를 똑바로 보았다. 윤미의 검은 눈동자가 바로 30센티쯤 옆쪽에 떠 있었다. 볼 한복판에 조그만 점이 있었고 그러고 보니 입술은 맨입술이다. 그런데 윤기가 흘렀고 윤곽이 또렷했다. 옆쪽에 앉은 심기수의 파트너는 대학 영문과를 졸업했다고 했다. 그리고 외국인 회사에서 이년쯤 근무하다 이곳에 온 지 석달째라는 것이다. 바로 옆에서 이야기를 하는 터라 저절로 다 듣게 되었다. 장성만과 유대봉은 저희들끼리 떠들고 있었는데 방안의 분위기는 밝고 활기에 찼다. 여자들의 표정도 밝다. 장성만이 처음부터 이차 이야기를 꺼낸 것이 분위기를 가속시킨 효과를 낸 것이다. 본의 아니게 놈이 히트를 쳤다.
“너, 오늘 이차 따라가지 않아도 돼.”
조철봉이 상체를 조금 숙이고는 윤미의 귀에 대고 말했다.
“나, 화 안낼테니까 당당하게 말해라.”
그러자 윤미가 정색하고 조철봉을 보았다. 다시 검은 눈동자가 반들거렸고 이번에는 조철봉이 윤미의 눈동자 안에 박혀있는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얼굴이 볼록렌즈에 뜬 것처럼 둥글게 오그라져서 남 같았다.
“알았어?”
조철봉이 제 얼굴을 들여다보며 확인하듯 물었을 때 윤미가 눈을 깜박였다. 그러자 길고 가지런한 속눈썹이 창문을 여닫는 것처럼 움직였다. 그러고보니 속눈썹이 길고 진짜다. 조철봉은 숨을 들이켰다. 얘는 대부분 진짜다. 화장도 안했다.
조철봉은 저도 모르게 머리를 뒤로 조금 젖히고는 윤미를 보았다. 윤미가 눈에 띄지 않았던 것은 전혀 꾸미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피부도 가무잡잡한 그대로였고 눈썹도 그리지 않았다. 다른 셋의 뽀얀 피부에다 선명한 입술, 짙고 부드러운 눈썹 선이 두드러진 것과는 대조적이다.
그러나 옅게 크림만 바른 얼굴은 윤기가 났고 눈빛은 또렸했다. 약간 엷은 듯한 입술은 단정하게 닫혀졌으며 그리고, 침을 삼킨 조철봉의 시선이 저고리 고름을 만지고 있는 윤미의 손에 머물었다. 가늘지만 건강한 손이었다. 요즘은 마른 장작개비처럼 건조하며 딱딱한 여자를 미인으로 치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은 전혀 남자의 바람이나 기준과는 상관없다.
일시적 유행에 의하여 만들어진 우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현실을 제대로 파악한 여자들이 조만간에 이성을 찾고 기준을 제자리로 돌려 놓을 것이다. 적당한 근육과 부드러운 곡선, 날렵하고 생기를 띤 몸매로 돌아가야 한다. 조철봉은 입안에 고인 침을 삼켰다. 윤미의 몸은 마치 갑옷에 싸여진 것처럼 얼굴과 손만 나와 있었지만 알몸을 상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신장은 168㎝정도, 몸무게는 52㎏, 오차 범위는 ±5% 미만이다. 뒤늦게 깨달았지만 윤미는 볼수록 빛이 나는 타입이었다. 오마담은 흙이 묻은 것처럼 보이는 진주를 던져준 것이다.
“오늘 무슨 일 있으세요?”하고 윤미가 되레 물었으므로 조철봉은 생각에서 깨어났다. 눈의 초점을 잡은 조철봉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이야?”
“댁에 들어가셔야 되나요?”
“아니, 그런 건 아냐.”
“저, 따라 나갈게요.”
윤미가 낮게 말하고는 곧 시선을 내렸다.
“아깐 당황했었어요. 이차는 처음이거든요.”
“정말이냐?”
주위를 둘러본 조철봉이 눈을 크게 떴지만 목소리는 낮췄다.
“네 파트너가 그 구절을 제일 좋아한다고 오마담이 알려주더냐?”
“아뇨.”
윤미가 정색한 얼굴로 머리까지 저었다.
“그런 말씀 안하셨어요.”
“이차가 처음이라면 이 가게에는 언제 왔는데?”
“오늘까지 일주일 되었고 손님 옆에는 세번째 앉아요.”
“그럼 처음 두번은 그냥 방에서 앉아있기만?”
“네. 손님들이 점잖으셔서요.”
“그럼 우리는.”했다가 조철봉은 입을 다물었고 당황한 윤미가 시선을 내렸다가 들었다.
“오해하지 마세요.”
“아냐, 괜찮아.”
조철봉이 술잔을 다시 쥐었을 때 성만이 물었다.
“어때? 이야기된 거냐? 이차말이다.”
“그래. 됐다.”
조철봉이 크게 대답하자 모두의 시선이 모아졌다.
“그럼 가자고.”
유대봉이 동조했고 심기수도 머리를 끄덕였다.
“오랜만에 단체로 이차 가자.”
“좋아.”
성만이 술기운으로 붉어진 얼굴을 펴고 만족한 듯 웃었다.
“오늘 모처럼 모두 뜻이 맞는다. 과연 경원이 명불허전이다.”
조철봉은 한모금 술을 삼키고는 더운 숨을 뱉었다. 그러자 윤미가 조심스럽게 안주 접시를 앞쪽으로 밀어놓았다. 어느새 윤미의 얼굴은 차분해져 있었다.
술값은 장성만이 계산했는데 모두 들떠서 너무 일찍 나왔다. 경원의 대문 밖으로 나왔을 때는 밤 10시반밖에 안되었다. 고 마담은 어느새 아가씨 넷을 싹 인솔하고 대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넷이 모두 차를 가져왔지만 운전사들을 모두 보낸 터라 경원에서 고용한 대리운전사들까지 준비되었다.
“그럼 내가 앞장 설 테니까 뒤따라와.”
성만이 활기띤 얼굴로 떠들었다.
“한시간이면 간다.”
조철봉이 윤미를 먼저 태우고 막 뒤따라 타려는데 고 마담이 다가와 불렀다.
“조 사장님.”
문을 다시 닫은 조철봉이 상반신을 세우자 고 마담이 소근대듯 물었다.
“윤미 어때요?”
“괜찮은데.”
“진국이죠?”
“그건 겪어봐야 알지.”
“제가 이 생활 30년이 되었지만.”
앞쪽 차가 움직이기 시작했으므로 고 마담의 말이 빨라졌다.
“저런 애 드물어요.”
“글쎄, 뭐가?”
“가엾은 애니까 스폰서해 주세요.”
“이런.”
그러자 고 마담이 어둠 속에서 싱긋 웃더니 조철봉의 어깨를 밀었다.
“어서 타세요. 겪어보면 알 테니까.”
조철봉이 차에 오르자 곧 네 대의 차량 대열은 밤거리로 들어섰다. 조철봉이 시트에 등을 붙이고는 힐끗 운전사의 뒤통수를 보았다. 모르는 사내였다. 이런 때 회사 운전사가 운전한다면 거북해서 분위기 깨진다. 머리를 돌린 조철봉이 윤미를 보았다. 고 마담의 칭찬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고 마담이 수십번 파트너를 딸려 보냈지만 오늘처럼 운을 뗀 적은 없다. 진국이며 저런 애가 드물고 가엾는 애라고도 했다. 그리고 마담들은 대부분 자신이 데리고 있는 아가씨들을 스폰서하라고 떼어주지 않는다. 스폰서 만나면 아가씨들이 대개 나가버리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고 마담은 윤미의 스폰서를 해 주라고까지 말한 것이다.
“왜요?”
조철봉의 시선을 받은 윤미가 낮게 물었다. 입은 꾹 다물고 있었지만 눈으로 웃는다. 차는 밤길을 부드럽게 질주하고 있었으며 알코올 기운이 알맞게 밴 육신은 가볍게 느껴졌다.
“부모는 다 계시냐?”
조철봉이 불쑥 그렇게 물었다. 생각없이 물은 것이다. 그러자 윤미가 얼굴을 굳히며 대답했다.
“다 돌아가셨어요.”
“저런, 언제?”
“제가 고1때.”
“두분이 다?”
“예, 같이 교통사고로.”
“저런.”
“형제는?”
“저하고 동생 둘.”
윤미가 손가락 두개를 펴 보였다. 차 안은 어두웠지만 거리의 불빛에 반사된 윤미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여동생 하나, 막내는 남동생.”
“아직 어리겠군.”
“여동생은 여상 나와서 직장 다니고, 남동생은 대학 1학년이에요.”
“동생들은 누가 키웠어?”
“제가.”
“네가 어떻게? 고1때 부모님이 돌아가셨다면서?”
“소녀 가장이었죠, 뭐.”
“흐음.”
“고생했지만 셋이 우애있게 살았어요.”
윤미의 표정은 밝았다.
조철봉은 다시 윤미의 얼굴을 찬찬히 보았다. 윤미의 표정은 밝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윤미는 또 눈웃음을 쳤는데 그 순간 조철봉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요즘은 첫눈에 가슴이 철렁이는 경우가 극히 드물어졌다. 그것은 영상매체의 발달로 말미암아 시각이 수없이 단련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감동은 여러가지가 뒤섞인 후에야 찾아온다. 그것도 아주 드물게.
“고1때 부모를 잃었다면 누가 너희 형제를 도와준거냐? 아니면 보험금을….”
“아뇨.”
윤미가 머리를 저었다.
“부모님은 뺑소니 사고로 돌아가셔서 그런 건 없었어요.”
“저런 개같은….”
“마침 32평짜리 아파트가 있었기 때문에 처분해서 방 두개짜리 전세로 옮겼죠. 그 차액하고 제가 아르바이트를 해서 살았죠. 여동생도 고등학교 졸업하고 바로 돈을 벌었고요.”
“넌 지금도 피아노 강사를 해?”
“초등학생 개인교습을 한다니까요. 집에 찾아가서.”
“피아노 전공했어?”
“경영학과 나왔지만 취직을 못했어요. 피아노는 어렸을 때부터 배웠죠.”
“그럼 취직할래?”
“아뇨.”
윤미가 주저하지도 않고 머리를 젓고는 풀썩 웃었다.
“경원에 다니다가 스폰서 만나면 그만두려고 해요.”
그 순간 조철봉이 눈을 딱 크게 뜨고는 움직임을 멈췄다. 잠깐 동안 숨도 쉬지 않았다. 당돌한 대답이다. 아니, 솔직한 표현이라고 해야 될 것이다. 고 마담도 윤미의 스폰서를 해주라고 하지 않았는가. 조철봉의 시선을 받은 윤미가 눈을 내리뜨며 말했다.
“가게에 오래 다닐 생각은 없거든요. 그래서.”
“스폰서를 만날 때까지만 다닌단 말이지?”
“네.”
“그렇다면 스폰서의 조건을 말해볼래? 참고로 듣자.”
“제 욕심이지만….”
힐끗 조철봉에게 시선을 주었던 윤미가 차분하게 말했다.
“제가 존경할 수 있는 분이면 좋겠어요.”
“존경이라….”
“네.”
“나이는?”
“상관 없어요.”
“늙었어도?”
“네.”
“조건이 또 있어?”
“다음에는 물론 경제적인 것.”
“말해봐.”
“한달에 500 정도면.”
“그것뿐이냐?”
“동거해도 상관없어요. 동생들만 자유롭게 만날 수 있게 해준다면.”
“그렇다면….”
조철봉이 눈을 가늘게 뜨고 윤미를 노려보았다. 앞쪽 운전사는 시선을 백미러로 돌리지 않고 있었지만 다 듣고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조철봉은 신경쓰지 않았다. 이제 대화에 몰두한 것이다. 윤미가 이런 식으로 털어놓고 말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놀랍기도 하고 신선한 충격이 오기도 했다.
“넌 네 자신의 장점이 뭐라고 생각하고 있어? 스폰서에게 내세울 조건 말이다. 네 미모냐? 아니면….”
조철봉은 여운을 남겨두었다. 고 마담의 말이 다시 떠올랐고 그것을 윤미의 입으로 직접 듣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때 윤미가 입을 열었다.
“전 아주 평범한 여자거든요.”
조철봉은 윤미가 ‘아주’라고 했을 때 숨을 멈췄다가 곧 길게 뱉었다. 윤미가 긴장한듯 굳은 얼굴로 조철봉을 보았다.
“가게에 나왔더니 저보다 예쁜 아가씨들이 얼마든지 있었어요. 마음씨 고운 아가씨들도.”
“….”
“전 특별한 게 아무 것도 없어요.”
“….”
“실망하셨죠?”
불쑥 윤미가 물었을 때 조철봉은 상반신을 세우고는 정색했다. 실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솔직한 표현에 가슴에 잔잔한 감동이 일어나는 중이다.
“아냐.”
머리부터 저은 조철봉이 부드럽게 말했다.
“내가 그렇게 물은 것이 잘못이다.”
조철봉이 눈만 깜박이는 윤미를 향해 웃어 보였다.
“어떠냐? 내가 네 스폰서가 된다면 받아 들일거냐?”
그러자 윤미가 웃음띤 얼굴로 머리를 끄덕였다.
“마담언니께서 조사장님 이야기를 해주셨어요.”
“고마담이?”
조철봉이 눈을 크게 떴다. 고순임은 윤미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해 주었다고는 말하지 않았던 것이다.
“뭐라고 했는데?”
“오늘 스폰서 되실 분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 하셨어요.”
“그렇게만 말했어?”
“사업을 크게 하신다고.”
“그리고?”
“오지랖이 넓으신 분이라고도 하셨어요.”
“그래? 오지랖이 넓다구?”
눈을 가늘게 뜬 조철봉이 앞쪽을 보았다. 그러고 보면 오히려 자신이 윤미에게 내세울만한 장점이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오직 돈뿐이다. 돈이면 다 된다는 세상이지만 자신이 너무 오만했다. 마치 사람을 물건 취급하듯 돈으로 흥정했다.
“사장님.”
조철봉의 침묵이 부담스러웠는지 윤미가 낮게 불렀다. 머리를 돌린 조철봉은 어두운 차 안에서 반짝이는 윤미의 눈동자를 보았다. 차는 어느덧 고속도로를 달려가는 중이다.
“저, 잘 할게요.”
윤미가 낮게 말했을 때 조철봉은 잠깐동안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그래서 눈만 껌벅였고 윤미의 말이 이어졌다.
“사장님이 싫증이 나시면 부담드리지 않고 떠날게요.”
“가만.”
그때서야 말뜻을 알아차린 조철봉이 윤미의 허벅지를 가볍게 두드려 말을 막았다.
“그런 이야기 할 필요없어.”
“네.”
“우리 편하게 지내자.”
“네.”
“내가 살림 차려준 여자가 한둘이 아냐. 전국구다. 아니, 외국에도 있어.”
이제는 윤미가 눈만 깜박였고 조철봉이 손을 펴고 꼽으며 말했다.
“중국에 둘, 아니 셋인가? 베트남에도 하나, 한국에는 몇이냐?”
조철봉이 손가락을 두번 오므렸다가 펴더니 머리를 흔들었다.
“손가락으로는 헷갈리는구먼. 적어야 계산이 되겠는데.”
“….”
“그러니까 나에게 넌 부담이 아니라는 말이다. 너하고 그걸 하면서 다른 여자 이름을 부를 수도 있어. 그런 경우가 자주 있단 말이다.”
“….”
“내 여자들은 그런 상황에 익숙하지.”
의자에 등을 붙인 조철봉은 소리 죽여 긴 숨을 뱉었다. 그러나 외롭다. 그렇게 소리내어 말한다면 미친 놈 지랄한다는 소리나 들을 것이다. 내막을 대충 아는 놈들이라면 욕심이 한도 끝도 없다고 욕을 할 것이다.
그러나 정확하게 아는 놈들은 아무도 없다. 아무도, 이 지랄을 하면 할수록 가슴이 더 허해진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여자들은 더 그렇다. 손가락으로 세지 못할 만큼 살림 차려준 여자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상처가 많다는 것이나 같다. 자꾸 덧나는 상처, 이윽고 머리를 돌린 조철봉이 윤미를 보았다. 윤미도 생각에 잠긴 얼굴로 옆쪽 창밖을 바라보는 중이었는데 검은 유리창에서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어때? 마음이 변하지는 않았어?”
조철봉이 유리창에 대고 물었다.
“나보다 더 돈 많고 더 성실한 스폰서가 많아. 고마담은 내일이라도 당장 다른 놈들을 네 앞에 대령시킬 수 있어.”
“….”
“난 불성실하고 진심이 없다. 내가 한번 이혼을 당했는데….”
이제는 조철봉이 반듯이 앉아 말했다.
“진실성이 없다고 이혼당했지. 위선자라는 거야. 그런데 지금은 더하면 더했지, 나아진 건 없다.”
윤미도 어느덧 앞쪽을 향한 채 앉아 있었지만 입을 열지는 않았다. 그러나 긴장한 듯 온몸을 굳히고 있다. 차 안에서는 한동안 엔진음만 들려왔다. 운전사도 다 듣고 있을터라 행동이 딱딱했다. 한번도 백미러를 올려다보지 않는 것이 그 증거였다.
조철봉은 눈을 감았다. 또 마음에도 없는 말을 했다. 그러나 이번은 앞뒤를 재고 목표를 정한 사기성 발언은 아니다. 그냥 뱉어져 나온 말이다. 마치 울음을 터뜨린 것처럼. 하긴 다른 여자 같았으면 이러지는 않았을 것이다.
윤미의 솔직하고 절박한, 그러나 밝고 순진한 분위기에 부딪치자 새삼스럽게 자신을 돌아보게 된 것 같았다. 차가 장성만의 별장에 도착했을 때는 그로부터 30분쯤 후였는데 그동안 둘은 거의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조철봉이 눈을 감고 있다가 깜박 잠이 들었기 때문이다. 성만의 별장은 2층 목조건물이었는데 길에서 백미터쯤 떨어져 있는데다 삼면이 짙은 숲이었다. 대리기사들을 보내고 별장에 네 쌍의 남녀만 남았을 때 성만이 벽시계를 보더니 은근하게 웃었다.
“어때? 딱 한잔씩 더하고 각자 방으로 가든지 말든지 맘대로 하기다.”
그러더니 턱으로 이층계단을 가리켰다.
“이층에도 방이 두 개 있고 아래층에는 세 개다. 방에는 화장실이 딸려 있으니까 일보러 나오지 않아도 될거야.”
“장성만이 과연 돈 많이 벌었구먼.”
유대봉이 주위를 둘러보며 감탄했다.
“집안에서 돈 냄새가 펄펄 난다.”
“돈은 조철봉이가 더 많을걸?”
심기수가 조철봉에게로 머리를 돌리며 말했다.
“사업체 규모로 보면 몇조가 될거야.”
“인마, 그게 다 내거냐?”
쓴웃음을 지은 조철봉이 힐끗 옆에 앉은 윤미를 보았다. 윤미는 다른 세 여자가 같이 집안 구경을 하며 돌아다니고 있는데도 끼지 않았다. 그렇다고 기가 꺾이거나 심상한 표정도 아니다.
“그럼 술상 차릴까요?”
윤미가 엉거주춤 일어서며 물었을 때 성만이 머리를 끄덕였다.
“주방 냉장고에 안주거리가 있을거야. 옆쪽 선반에 양주가 있고.”
“네.”
가볍게 몸을 움직여 윤미가 자리를 떠났을 때 성만이 조철봉에게 말했다.
“네 파트너가 젤 낫다.”
조철봉은 머리를 들고 장성만을 보았다. 성만의 파트너는 빼어난 용모에 몸매도 어느 한 곳 흠잡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너, 남의 떡이 커 보이는 거지?”
조철봉이 낮게 물었을 때 이번에는 심기수와 유대봉이 거의 동시에 나섰다.
“아냐, 성만이 말이 맞다.”
“철봉이 네 파트너가 제일 여자 같아.”
“뭐라구.”
눈을 크게 뜬 조철봉이 대봉을 보았다.
“여자 같다니? 그럼 너희들 파트너는 남자 같단 말이냐?”
“아니, 그게 아니라.”
머리를 저은 대봉이 목소리를 낮췄다. 이제 여자들은 주방에 모여 술안주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분위기가 밝았다. 웃음소리까지 들렸다.
“다른 애들은 가식적인 요소가 섞인 것 같은데 네 파트너는 아냐. 때묻지 않았어.”
손짓까지 하면서 대봉이 말을 이었다.
“티가 안나. 자연스럽고 깨끗하다.”
“화장을 옅게 해서 그렇게 보인 것 아냐.”
“얀마. 나도 이 계통은 너만큼은 안다. 이 자식아.”
대봉이 눈을 부릅뜨고 욕했다.
“네 파트너는 진국이여. 나는 첫눈에 알아보았어.”
“그래?”
입맛을 다신 조철봉이 주방으로 시선을 돌렸다. 윤미는 웃음 띤 얼굴로 같이 이야기를 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대봉은 물론이고 아무도 윤미가 다른 여자와 특별히 다른 특징은 찾아내지 못했다. 오직 분위기였고 본인의 감(感)이다. 감은 경험으로 단련된 것이기는 하지만 다분히 주관적이다. 기준도 모호하다. 선입견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예를 들어서 ‘경원’은 조철봉의 단골집이었으니 고마담이 조철봉의 파트너로 진국을 붙여주지 않았을 리가 없다는 따위의 선입견. 여자들이 술과 안주를 들고 다가왔으므로 분위기는 다시 떠들썩해졌다. 그러나 밤이 깊어진데다 다들 마음이 조급해져 있었으므로 술자리는 일찍 끝났다. 양주 두 잔을 마신 대봉이 먼저 파트너와 이층으로 올라간 것을 시작으로 금방 기수가 따랐고 뒤를 이어 성만이 일어섰다.
“넌 아래층 끝방을 써라.”
성만이 턱으로 안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럼 아침에 보자.”
파트너의 부축을 받은 성만이 옆쪽 방으로 사라지자 조철봉은 얼굴을 펴고 웃었다.
“모두 급하구나.”
옆에 앉은 윤미에게 한 말이다. 윤미의 시선을 받은 조철봉이 눈을 좁혀 뜨고 탐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너, 섹스 좋아해?”
“그냥 해요.”
주저하지도 않고 그렇게 말을 받은 윤미가 금방 덧붙였다.
“알아요.”
“뭘?”
“기쁨을.”
“언제부터?”
“2년 전이었으니까 스물 둘일때.”
“누가 가르쳐 줬어.”
“만나던 선배가.”
“애인이었군.”
“아뇨.”
윤미가 정색하고 머리를 저었다.
“그냥 선배요. 그리고 섹스도 세번밖에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도 깨우치다니.”
그러자 시선을 내린 윤미가 안주 그릇을 치우는 시늉을 했다. 그것을 본 조철봉이 윤미의 팔을 쥐었다.
“방으로 들어가자.”
방음장치가 잘 되어 있는지 집안은 조용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조철봉은 단 한번도 거저 받아 본 적이 없다. 받으면 꼭 대가를 치렀으며 당연히 주고 나면 대가를 받았다. 남녀의 관계도 마찬가지. 조철봉은 사랑이나 신의, 또는 믿음 따위의 감정을 전혀 믿지 않았다.
세상에 사랑이나 믿음만으로 남녀가 합쳐지다니, 조철봉에게 그런 인간들은 위선자였다. 단적으로 표현해서 사흘쯤 굶고 나면 눈앞에 먹을 것만 어른거리는 것이 정상이다. 그 상황에서 사랑타령하는 인간이 어디 제정신인가?
방으로 들어선 조철봉이 창가의 의자에 앉더니 차분해진 얼굴로 윤미에게 말했다.
“좋아, 내가 스폰서 돼주지. 하지만.”
조철봉이 윤미를 똑바로 보았다.
“살림은 차리지 않겠다. 가끔 만나는 것으로 하자.”
“알았습니다.”
윤미가 반듯이 서더니 두손을 모으고는 머리를 숙였다.
“고맙습니다.”
쓴웃음을 지은 조철봉이 손짓으로 앞쪽 자리를 가리켰다.
“여기 앉아.”
윤미가 자리에 앉았을 때 조철봉이 말을 이었다.
“한달에 5백을 주지. 그리고 네가 그 생활 그만하고 싶을 때는 언제든지 말해. 그 즉시로 정리해줄 테니까.”
“알았습니다.”
“다른 조건이 있다면 말해.”
그러자 머리를 든 윤미가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조철봉을 보았다.
“저어.”
“말해 봐.”
“2천만원만 가불해 주세요.”
“그러지.”
선선히 머리를 끄덕인 조철봉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일 주지.”
방 옆에 딸린 욕실에 들어가 샤워를 마치고 나온 조철봉이 윤미에게 말했다.
“난 피곤해서 먼저 잘 테니까 서둘 것 없어.”
그러고는 조철봉이 웃어 보였다.
“피곤해서 그런다. 그러니까 천천히 씻고 나와. 난 자고 있을 테니까 말야.”
“네.”
윤미가 다소곳이 대답은 했지만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빨리 씻고 나오라고 해야 정상인 것이다. 그러나 조철봉은 샤워하는 동안에 마음이 변했다. 윤미가 선금을 달라고 한 것 때문이다. 이런 행태는 예의에 어긋난다. 물론 스폰서로서 생활비나 용돈 등의 사항을 합의하는 과정을 거쳐야 하지만 여자측에서 당장 선금을 요구하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지금까지 살림 차려준 여자중 아무도 이렇게 굴지 않았다. 윤미가 욕실로 들어서자 조철봉은 방의 불을 끄고 침대에 몸을 눕혔다. 그리고 5분도 지나지 않아서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조철봉은 전화벨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집주인 장성만이 깨운 것이다.
“야, 일어나라. 나하고 너만 남았다.”
성만이 떠들썩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봉이하고 기수는 지 파트너 데리고 떠났어.”
탁자 위에 풀어놓은 시계를 본 조철봉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오전 8시반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알았다. 곧 나갈게.”
전화기를 내려놓은 조철봉이 머리를 돌렸을 때 욕실 문이 열리더니 윤미가 나왔다. 윤미는 어느새 말끔하게 옷을 차려입고 있었다.
“어서 씻으세요.”
윤미가 웃음 띤 얼굴로 말했다.
“곤하게 주무시기에 깨우지 못했어요.”
“그래?”
자리에서 일어선 조철봉이 윤미를 훑어보았다. 어젯밤에 윤미를 손끝 하나 건드리지 않았다.
서울로 돌아올 때는 조철봉이 운전을 했고 윤미가 옆자리에 탔다. 그런데 어젯밤 대리기사가 있었을 때보다도 오히려 분위기가 더 서먹했다. 물론 조철봉의 불편한 기색이 윤미에게 전달되었기 때문이다. 국도는 차량 통행이 많지 않은데다 잘 포장되어 있어서 조철봉은 차 속력을 내었다.
“저어”하고 윤미가 앞쪽을 향한 채 입을 열었다.
“기분 나쁘셨어요?”
조철봉이 흘끗 머리를 돌려 윤미를 보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윤미가 말을 이었다.
“돈 이야기를 꺼내 기분 나쁘신 것 같았어요. 죄송합니다.”
“…”
“흥정하시는 것 같아서 저도 부끄러웠습니다. 그 이야기는 없던 일로 해주세요.”
“…”
“처음에 말씀하신 조건대로 할게요.”
“그만.”
조철봉이 핸들 위에 놓인 한쪽 손을 들어 윤미의 말을 막는 시늉을 했다.
“그만하면 됐다. 그만해.”
그러자 차 안에는 다시 어색한 정적이 감돌았다. 차가 고속도로에 들어섰을 때는 그로부터 10분쯤 지난 후였다. 그때 조철봉이 입을 열었다.
“오늘 오후 3시에 서울호텔 커피숍에서 다시 만나기로 하자.”
조철봉이 눈만 깜박이는 윤미를 향해 웃어 보였다.
“그때 이야기하자구.”
윤미를 집에서 가까운 거리에다 내려주고 회사로 출근한 조철봉이 고순임의 전화를 받은 것은 12시가 거의 다 되었을 무렵이었다. 고순임은 손님한테 전화를 자주하는 스타일이 아니었으므로 긴장한 조철봉이 물었다.
“아니, 고마담. 웬일이쇼?”
“바쁘실텐데 전화해서 죄송해요.”
“바쁘기는 뭘, 이제 점심 먹으로 갈 참인데.”
“저, 다름이 아니라.”
고순임이 조금 서두르듯 말했다.
윤미 때문에 전화 드렸는데요.”
“아, 무슨 일로?”
어느덧 조철봉이 긴장했을 때 순임의 말이 이어졌다.
“조금 전에 윤미한테서 전화가 왔는데 오늘 3시에 만나기로 하셨다면서요?”
“아, 그런데요?”
“윤미가 사정이 생겨서 나가지 못하겠다고 저한테 말씀을 드려달라는군요.”
“…”
“자기는 미안해서 직접 말씀드리지 못하겠다고.”
“…”
“저, 사장님.”
“예.”
“어제 무슨 일 있었어요?”
“무슨 일은, 그냥.”
“걔가 실수하지는 않았습니까?”
“실수라기보다는, 아니.”
조철봉이 얼른 정정했다.
“그런 일 없었어요.”
그런 내막을 순임에게 말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이미 갈라진 상황이니 지금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미련이 있다는 표시밖에 되지 않는다. 그때 순임이 길게 숨을 뱉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걔가 마음이 조금 떠 있어요. 걔 남동생이 신장 이식수술을 받아야 해서요.”
“예?”
놀란 조철봉이 물었을 때 순임의 말이 이어졌다.
“수술비가 모자라나 봐요. 그래서 제가 스폰서를 서둘러 구해 준 것인데.”
오후 6시가 되었을 때 동생 정이가 병실로 들어섰으므로 윤미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너, 또 회사에서 일찍 나온거지?”
“괜찮아, 다 이해해줘.”
“내가 있잖아. 넌 회사 끝나고 와도 돼.”
정이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병상에 다가서더니 잠이 든 준의 얼굴을 보았다.
“준이 밥은 먹었어?”
“응, 반쯤 먹었어.”
“잠은 언제 들었는데?”
“10분쯤 전에.”
두 자매는 소곤대듯 말했다. 정이 큰 눈을 올려뜨고 윤미를 보았다.
“언니, 원무과에서 뭐라고 안해?”
“아직.”
그러자 소리 죽여 숨을 뱉은 정이 어깨를 늘어뜨리고는 잠이 든 준을 내려다 보았다. 준이 입원한 것은 석달전이었고 지금 입원비 칠백여만원이 밀려있는 상황이다. 거기에다 수술비용이 삼천이백만원, 이것저것 다 합하면 사천오백만원 가량이 필요했고 지금 두 자매가 준비할 수 있는 돈은 전세금을 빼어 월세방으로 옮겨가면서 발생할 차액 천칠백만원에다 정이 가불해올 퇴직금 팔백만원을 합해 이천오백만원이 전부였다. 수술비 이천만원이 모자라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아직 한푼도 없다.
“언니.”
옆쪽에 다른 환자와 가족들이 있었으므로 정이 목소리를 더 낮췄다.
“언니, 사채 빌릴까?”
윤미가 눈을 흘겼지만 정이 이를 악물었다 풀면서 말했다. 필사적인 표정이다.
“다음주에 스케줄이 취소되면 준이가 언제 수술을 받게 될지 알 수 없잖아? 먼저 목숨부터 살려놓고 봐야될 것 아냐?”
“그만해.”
“언니, 내 이름으로 빌릴거야.”
“제발 입 좀 다물라니까.”
안간힘을 쓰듯 말한 윤미의 눈에서 마침내 눈물이 흘러내렸다. 손등으로 얼른 눈물을 훔친 윤미가 머리를 숙이고 물었다.
“너, 사채업자 알아?”
“내가 아는 언니가 알고 있대.”
그렇게 서둘던 정이 막상 윤미가 묻자 주춤대며 대답했다. 막상 윤미가 나서자 와락 겁이 난 것이다. 그러나 절박하다. 다음주에 수술을 하지 않으면 위험한 것이다. 윤미가 다시 흘러내린 눈물을 손등으로 씻었을 때 뒤에서 인기척이 났다.
“저, 윤준씨 보호자님.”
놀란 정이 먼저 몸을 돌리고는 얼굴이 하얗게 굳어졌다. 며칠 전에 만난 병원 원무과장이다. 비대한 체격의 원무과장은 웃음띤 얼굴로 서 있었지만 며칠 전에는 입원비 계산을 이번 주말까지 하지 못하면 곤란하다고 했다.
“저, 잠깐 밖으로 나가실까요?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과장이 말하자 두 자매는 서둘러 병실밖 복도로 나와 섰다. 윤미와 정이 복도의 벽에 나란히 등을 붙이고 섰을 때 과장이 다가와 말했다.
“저기, 수술은.”
그러자 정이 번쩍 머리를 들더니 과장의 말을 잘랐다.
“다음주에 다 준비될거예요. 그러니까.”
정이 말을 그치고는 침을 삼켰을 때 과장이 머리를 끄덕였다.
“예, 오늘 오후에 수술비까지 사천오백오십만원을 제가 인수했습니다. 그래서 예정대로 다음주 초에 수술 들어간다는 말씀을 드리려고 왔습니다.”
그러고는 과장이 윤미와 정 자매를 번갈아 보았다.
“스폰서 되시는 분이 3시에 다녀 가셨습니다.”
과장은 두 자매중 누구의 스폰서인지 알고 싶은 눈치였다.
핸드폰의 벨이 울렸으므로 조철봉은 먼저 발신자 번호부터 보았다. 역시 윤미의 전화였다. 어제 저녁부터 오늘 오전까지 20번도 더 연락을 해온 것이다. 옆자리에 앉은 최갑중이 힐끗거리자 조철봉은 핸드폰을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오전 10시가 되어가고 있었는데 그들은 지금 인천공항으로 가는 중이었다.
“합의서도 작성되었으니까 이젠 기계를 옮기는 일만 남았어.”
조철봉이 다시 화제를 이어갔다. 부도가 난 극동기계를 아주 헐값으로 인수하게 된 것이다. 그 책임을 맡았던 이연숙은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여 예상보다도 훨씬 경비를 절약했다. 물론 절약한 몫에서 다시 연숙의 보너스가 지급되었으니 연숙은 만족할 것이었다. 이제 극동기계의 장비를 개성 공업단지로 옮기기만 하면 된다.
“이연숙의 로비 실력은 나보다 낫다.”
조철봉이 만족한 표정으로 웃었을 때 바지 속에 넣은 핸드폰이 다시 울렸다. 핸드폰을 꺼내 본 조철봉이 그냥 내려놓았을 때 갑중이 물었다.
“형님, 누굽니까?”
“넌 알 것 없어.”
“그런데 왜 전화를 받지 않으시죠?”
“글쎄, 알 것 없다니까?”
“문제가 있습니까?”
“없어.”
“여자지요?”
“이 자식이.”
마침내 눈을 부라린 조철봉이 갑중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앞쪽 운전사가 귀를 세우고 있었으므로 목소리는 낮췄다.
“별 일 아니니까 신경꺼.”
“비서실에도 오늘 오전에 세번이나 전화가 왔다는 겁니다. 형님이 전화를 받지 않으시니까 꼭 연락을 해달라면서 말입니다.”
“….”
“통사정을 하더라는데요. 비서실에서 황당해 가지고 저한테.”
“어떤 놈이 그래?”
“네?”
놀란 갑중이 눈을 둥그렇게 떴을 때 조철봉은 으르렁대듯 말했다.
“어떤 놈이 그런 말을 너한테 했느냐구? 그놈 회사 그만두게 해야겠다.”
“아니, 형님.”
“사장 사적인 문제를 아무 놈한테 털어놓고 상의를 해? 그게 어떤 놈이야?”
“아니, 형님. 제가 아무 놈입니까?”
목소리를 낮췄지만 갑중도 눈을 치켜떴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정말 서운하죠. 저는 형제나 같으니까 비서실에서 저한테.”
“형제가 아니라 부자간이라도 그렇다.”
“하지만 형님.”
그 때 다시 핸드폰의 벨이 울렸으므로 둘은 말을 그쳤다. 핸드폰의 벨소리가 유난히 컸다.
“이런 빌어먹을.”
이 사이로 말한 조철봉이 핸드폰을 바지주머니에 넣어 버리고는 등받이에 상반신을 기댔다.
“너도 로비를 좀 배우도록 해. 앞으로는 로비 실력이 좋은 놈이 인정을 받게 될테니까.”
다시 조철봉이 화제를 돌렸지만 갑중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한국에서는 먹이기가 힘들어졌지만 중국은 황금시장이야. 개발도상국은 로비로 살고 로비로 죽는다.”
조철봉이 자신있게 말을 이었다.
“공무원들이 돈 맛을 알아야 경제가 활기있게 돌아간단 말이다. 마치 기계에 기름칠을 한 것이나 같지.”
그때 핸드폰이 또 울렸으므로 갑중은 아예 창밖으로 머리를 돌렸고 조철봉은 헛기침을 했는데 무안한 표정이었다.
“중국 출장을 가셨단다.”
핸드폰을 내려놓은 고순임이 쓴웃음을 지은 얼굴로 윤미를 보았다.
“내가 그 양반은 조금 알지. 아마 병원에다 돈 낸 공치사를 받고 싶지 않았을거야.”
윤미는 시선을 내리고는 가늘게 숨을 뱉었다. 조철봉이 전화를 받지 않자 윤미는 고순임을 찾아가 자초지종을 털어 놓았는데 가만 있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조철봉에게 꼭 해야할 말이 있는 것도 아니다. 고맙다는 인사나 겨우 할 것이다. 고순임이 말을 이었다.
“조사장님이 열흘쯤 후에야 오신다니까 넌 동생 간병이나 잘 하고 있어. 돌아오시면 내가 연락을 할테니까.”
“네.”
“그 양반은 조건 없이 돈을 내주셨을지 몰라도 넌 그냥 받으면 안된다. 무슨 말인지 알지?”
“네.”
머리를 든 윤미가 다시 물기가 배인 눈으로 순임을 보았다.
“은혜를 잊지 않겠어요.”
“그것을 행동으로 보여 드려야해.”
“각오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부담을 드리면 안돼.”
주위를 둘러본 순임이 목소리를 낮췄다. 오후 3시 무렵이었는데 장충동의 커피숍은 한가했다. 손님이 두 쌍의 남녀 뿐이었고 멀리 떨어졌지만 순임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내가 경원에서 그분한테 여러명 파트너를 따라 보냈지만 지금까지 한번도 그분에 대한 나쁜 평을 듣지 못했다.”
“….”
“그건 매너가 좋다는 뜻도 되지만.”
순임이 은근한 표정으로 윤미를 보았다.
“내 경험에 의하면 여자한테 정을 주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정을 주는 사람들은 다 잘하지 않어. 그렇게 못해.”
“….”
“그분은 여자를 밝히지. 아주 그 기술이 뛰어나고.”
그러고는 순임이 낮고 짧게 웃었지만 윤미는 시선을 내렸다. 순임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점점 외로움을 탈거야. 여자를 밝히면 밝힐수록. 시간이 지날수록. 그건 그런 성품의 사나이한테는 숙명이지.”
“….”
“네가 욕심만 버린다면 그분하고 행복해질 수 있을거야. 어떤 욕심인줄 알고 있니?”
“네. 알아요.”
시선을 내린채 윤미가 금방 대답했으므로 순임의 입가에 미소가 번져졌다. 그러나 말은 조금 차갑게 했다.
“말해봐. 그것이 뭔지.”
“관심이나 사랑을 받겠다는 욕심요.”
“옳지.”
머리를 끄덕인 순임의 얼굴에 이제는 웃음기가 다 번졌고 목소리도 밝아졌다.
“잘 아는구나.”
“그분은 예민하세요.”
“그래? 눈치도 비상하지.”
“같이 있는 동안은 성실하게 대하겠어요.”
“난 네가 그 분하고 맞는다고 이미 예상을 했어.”
순임이 식은 커피잔을 들어 한모금을 마시더니 말을 이었다.
“어쨌든 내 이야기를 듣고나서 바로 병원으로 달려가 4천5백만원이나 되는 거금을 선뜻 내고는 돌아가 버린 조철봉씨가 멋지다. 내가 이 생활을 30년이 넘게 했지만 그런 사나이는 다섯명 정도밖에 안되었어.”
순임이 옛일을 회상하듯 눈을 가늘게 뜨고 벽쪽을 보았다.
“요즘은 사나이가 드물어졌어.”
이연숙에게도 조철봉은 은인이었다. 인간은 죽을 때까지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아인슈타인이나 에디슨, 또는 피카소나 미켈란젤로 등 업적과 명성을 이뤘다는 사람들마저도 그들의 능력을 다 발휘하지 못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흔히 신이 들렸다는 말을 쓰는데 이것은 무당이나 점을 치는 사람들에게 한정된 말이 아니다. 기업인, 학자, 기술자 또는 예술인 등이 자신의 일에 열중하면서 깜짝 놀랄만한 능력을 발휘하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자신도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나타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바로 이때를 말하는 것이다.
만일 아인슈타인이 그림을 그렸다든가, 피카소가 전기 기술자가 되어서 죽어라하고 제 일에 몰두했다고 해도 이름도 없이 땅에 묻힌 신세가 되지 않았겠는가?
옛적에 적성검사를 체계적으로 해서 넌 그림, 넌 발명, 하고 선택해주지 않았으며 우연히 소질을 계발하여 투신한 터였으니 그 위대한 인물들 모두는 운이 좋았다고 봐도 될 것이다. 자신의 잠재 능력을 발휘하여 그것이 인류의 업적으로 기록될 기회는 곧 운이 좌우했던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가 있다. 바로 열정이다. 잠재 능력과 하는 일이 맞았다고 해도 열정이 없었다면 이루지 못했다. 따라서 인생 1백년도 채 안되는 인간, 제 잠재 능력을 모른 채 지내는 불쌍한 인간들이 신이 내려주신 축복을 걷어차지 않는 단 하나의 방법이 있다면 바로 이 열정이다. 맡은 바 일에 열정을 쏟는 수밖에 없다. 고난과 시련 따위는 짧은 인생의 관점에서 보면 하찮다.
일하는 시간을 20세에서 70세까지 50년으로 친다고 해도 50×365는 얼마냐? 머리 나빠지니까 계산기 두드리지 말고 종이 위에다 곱셈을 하거나 암산을 하라. 18,250일이다. 하루살이 같지 않은가?
지구 나이는 50억년이다. 눈을 들어 하늘을 보면 수억광년의 거리에 있는 별이 있다. 수억광년이면 1초에 37만5천㎞를 뻗어나가는 빛이 수억년 동안 달려야 닿는 거리고 그러니까 수억광년 전에 쏘아진 빛이 지금 이 지구에 닿아 있는 것이다. 티끌만한 태양계, 먼지보다 작은 지구에서 그저 찰나같은 생명을 사는 인간들, 그 와중에 이 열정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주어진 일일지라도 열정을 쏟아야 한다. 그러면 신이 들린 것처럼 두뇌가 무섭게 팽창되는 느낌이 오면서 엄청난 결과가 눈 앞에 펼쳐질 수도 있다. 성과가 없다고 하더라도 찰나의 인생을 열심히 살다가 간다고 자위는 할수 있지 않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연숙은 능력을 계발할 계기가 지금 도래한 셈이었다. 자신의 잠재 능력과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맞는다는 것을 안 순간만큼 행복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연숙은 그 계기를 만들어준 조철봉에게 심복했다. 칭다오 공항으로 마중을 나온 연숙의 표정에서도 그것이 여실히 드러났다. 최갑중이 옆에 앉아있는데도 조철봉을 바라보는 눈빛이 반짝였다.
“극동기계의 기계를 다음달 초부터 개성 공단으로 옮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공항에서 시내로 달리는 차 안에서 연숙이 밝은 표정으로 보고했다.
“중국 당국에서 허락을 해 주었습니다.”
“잘됐군.”
조철봉이 만족한 표정으로 머리를 끄덕였다. 그것도 연숙이 로비를 한 것이다.
“그래서 제가 먼저 개성에 가서 준비를 할까 합니다만.”
다시 연숙이 말하자 조철봉은 이제 얼굴을 펴고 웃었다. 연숙은 마치 가려운 곳을 먼저 알아서 긁어주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다. 옆에 앉은 갑중보다 낫다.
호텔방 안에서 이연숙이 보고를 마쳤을 때는 밤 10시반이 되어갈 무렵이었다. 자금관계 일이었으므로 최갑중까지 셋이 저녁까지 시켜 먹으면서 끝낸 것이다.
“저는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서.”
먼저 자리에서 일어선 갑중이 손목시계를 보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저도 같이.”
연숙이 따라 일어서며 말했지만 갑중은 대꾸도 하지 않고 먼저 방을 나갔다. 그러자 연숙이 힐끗 조철봉을 보았다. 자신만만했던 조금 전까지와는 달리 주저하는 표정이었다.
“여기 있다가 가.”
조철봉이 말하자 연숙은 자리에 다시 앉았다. 그러고는 금방 편안한 얼굴이 되더니 물었다.
“그럼 최사장님이 일부러 자리를 피해 주신 것인가요?”
“그런 것 같군.”
“아이 창피해.”
“다 알고 있는 처지에 뭘 그래?”
“아무리 그래두요.”
그러는 연숙의 두볼이 조금 붉어졌다. 그 순간 조철봉의 목이 막히는 느낌이 들면서 욕정이 치솟았다. 연숙과의 섹스가 머릿속에 떠오르면서 철봉에 불끈 힘이 실렸다. 체력이 국력이란 말이 있듯이 성욕은 곧 존재의 상징이나 같다.
성욕은 곧 의욕인 것이다.
“저, 그럼.”
다시 자리에서 일어선 연숙이 이제는 시선을 마주치지 않고 말했다.
“씻고 올테니까 불 끄세요.”
“그냥 켜놓지, 뭘.”
조금 짓궂어진 조철봉이 웃음 띤 얼굴로 말했다.
우리가 오늘 처음 하는 사이도 아니지 않아?”
“그래도 일 하다가 갑자기 이렇게 되니까 어색해요.”
“난 더 자극이 오는데.”
“하긴 저도 그렇지만요.”
“오늘밤은 뜨거울 것 같구먼.”
“전에는 안그랬나요?”
이제는 연숙도 말을 받아 넘기면서 어색함을 털어내고 있었다. 재킷을 벗은 연숙이 셔츠 차림이 되더니 조철봉을 보았다.
“벗는 것 보실래요?”
“그러지.”
“다 벗어요?”
“그러고 싶은 것 같은데 그래.”
“제가 자극을 받고 싶어서 그래요.”
“그렇군.”
머리를 끄덕인 조철봉은 소파에 상반신을 기대고는 팔짱을 꼈다. 그러자 연숙이 차분하게 셔츠를 벗어 의자 팔걸이에 걸어 놓았다. 이제 연숙의 상반신은 브래지어만 남아 있었다.
“더요?”
연숙은 브래지어 호크를 풀었고 두손을 뒤로 젖히면서 그렇게 물었다. 조철봉이 눈만 빛냈지만 연숙이 브래지어를 풀었고 상반신은 알몸이 되었다.
“으음.”
조철봉은 낮게 탄성을 뱉었다. 연숙의 상반신은 완벽했다. 젖가슴은 팽팽하게 서있었으며 이미 젖꼭지는 단단했다.
“흥분되세요?”
눈을 가늘게 뜬 연숙이 스커트 호크를 풀면서 물었다. 두 손이 옆구리로 옮겨지면서 한쪽 젖가슴이 팔에 눌려 솟아 올랐고 그것이 조철봉을 더 자극했다.
곧 스커트가 발밑으로 흘러 내리자 연숙의 하반신엔 팬티만 남겨졌다. 손바닥만한 팬티여서 숲의 검은 부분도 드러났고 언덕과 골짜기도 선명했다. 조철봉은 심호흡을 했다. 행복하다.
“이리와.”
자리에서 일어선 조철봉이 침대로 향하면서 말했다. 이제 욕정으로 온몸이 끓어오르고 있어서 마음이 급해졌다. 조철봉이 침대위에 몸을 눕혔을 때 연숙이 거침없이 배위에 올라앉더니 옷을 벗겼다. 셔츠가 벗겨지고 팬티가 끌어내려져 알몸이 되었을 때 연숙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나왔다.
“어머, 굉장해.”
조철봉의 철봉에 대한 찬사였다. 찬사의 종류를 따지자면 수만가지가 있겠으나 남자의 사기를 올리는 점에 있어서는 철봉 칭찬이 제일이다. 철봉에 대한 자부심은 곧 만사(萬事)에 대한 자신감으로 연결이 되는 것이다. 역으로 밤일이 시원치 않은 인간이 큰소리 치면서 큰일하는 경우가 드물다. 물론 옛적 내시는 제외해야 될 것이다. 연숙이 건들거리는 철봉을 두손으로 쥐더니 번들거리는 눈으로 조철봉을 보았다.
“그때부터 밤마다 이것이 눈앞에서 어른거렸어요.”
조철봉이 웃음만 띠었고 연숙의 말이 이어졌다.
“제가 지금까지 한 섹스중에 가장 좋았거든요.”
“그런가?”
“그리고 가장 길었어요.”
“길기만 해서 좋은게 아냐.”
연숙의 말에 아부가 섞여 있는 것처럼 느껴졌으므로 조철봉은 손을 뻗쳐 젖가슴을 쥐었다.
“자, 네가 위에서.”
조철봉이 말하자 연숙은 자세를 잡고 앉았다.
“해요?”
그렇게 확인하듯 물은 것은 애무도 없이 대뜸 본진을 공격하느냐는 뜻이었다. 조철봉이 대답대신 하반신을 움직여 자세를 갖추자 연숙은 철봉을 쥐고 조준했다. 그러고는 곧 샘 중앙을 겨누고 철봉을 넣었다.
“아으.”
그 순간 연숙의 입에서 터져나온 신음이 그렇게 울렸다. 조철봉은 입을 꾹 다물고 있었지만 목구멍으로부터 낮은 탄성이 뱉어졌다. 연숙의 샘으로 진입한 철봉이 받는 압박감 때문이었다. 샘 벽은 습기만 끼어 있을 뿐이어서 철봉을 받아들이면서 피부의 모든 부분이 빠짐없이 신경 세포에 닿았다. 그 느낌은 바로 모골이 송연하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로 짜릿했던 것이다. 젖어 있을때보다 낫다.
“아악.”
당연히 연숙도 그와 비슷한 느낌을 받지 않았겠는가? 샘에 가득찬 철봉을 지금처럼 느껴보지 못했을 것이었다. 입을 딱 벌린 연숙이 다음 순간 턱을 잔뜩 뒤로 젖히더니 외치듯 말했다.
“못 움직이겠어.”
마치 드라큘라 백작이 몽둥이 십자가에 꽂힌 죄수처럼 연숙이 아우성을 쳤다. 조철봉은 연숙의 허리를 두손으로 움켜쥐었다. 그러고는 천천히 상반신을 들어올렸다.
“아아악.”
철봉이 빠져 나가는데도 연숙의 외침은 계속되었다. 이것은 안타까움과 아쉬움의 탄성일 것이었다.
“자, 이제는 내가.”
조철봉이 연숙의 허리를 옆쪽으로 밀면서 말했다. 정상위로 하겠다는 표시였다. 정신이 오락가락 하더라도 그런 신호를 놓치는 여자는 단 한명도 없다. 연숙이 대번에 몸을 눕혔을 때 조철봉은 상반신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연숙을 내려다 보았다.
“어서, 응?”
연숙이 혀로 입술을 빨면서 재촉했다.
지금까지 조철봉은 단 한번도 기구(?)를 사용해보지 않았다. 몇년전, 하면 할수록 걸신들린 것처럼 가슴만 더 허해졌으므로 철봉을 개조(?) 해보려는 계획을 세웠다가 그만둔적은 있다.
그러지 않아도 우람한 철봉에 갑옷까지 입히게 되었다면 그 결과는 상상을 초월할 것이었다. 어쨌든 기구를 쓰거나 개조를 하는 것은 다 저만 좋으라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철봉 주위에다 칫솔대를 갈아 끼우고 나섰던 옛적 장사(?)들은 여자들이 줄을 지어 따르는 꿈을 꾸었다고 했다. 간혹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그 철봉맛을 한번 본 여자는 다른 남자의 밋밋한 그것을 견디어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시절은 전설의 고향에나 나올 정도로 옛일이 되었다. 지금은 기구가 발달한데다 언론에도 그 효능까지 당당하게 선전이 되며 약국에서 구입할 수도 있는 것이다.
하긴 10여년전만 해도 초등학교 아이들이 휴대전화를 들고 다니며 사진과 비디오를 찍고, 인터넷으로 별짓을 다하며 비아그라로 70대 청년이 활보하고 황우석 박사가 배아줄기세포를 찾아내어 의학의 혁명을 일으키게 될 줄을 몇명이나 예상했겠는가?
조철봉은 철봉 개조 안하길 잘했다는 생각은 했지만 기구 사용에 대한 관심은 남아 있었다. 심복 최갑중은 이미 여러번 경험이 있었는데 별놈의 기구가 다 있다는 것이다. 착용감도 훌륭해서 어디까지가 내몸인지 구분도 안되며 안의 본체가 쪼그라들어도 빠져 나가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연숙과의 행위 도중에 조철봉이 이런 생각을 떠올린 이유는 지금 기구 하나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갑중이 오래전 선물한 것인데 잊어버리고 있다가 이번에 가져온 것이다. 조철봉은 가쁜 숨을 헐떡이며 간절하게 자신을 기다리는 연숙을 내려다 보았다.
연숙의 몸은 뜨거워져 있었으며 단 한번의 왕래가 있었을 뿐인데도 샘은 흘러 넘치는 중이었다. 그러나 연숙의 반응은 가식이 섞여 있다. 은혜를 갚겠다는 부담감 때문인지 행동이 과장되었다.
“아이, 어서, 응?”
그때 연숙이 몸을 비틀면서 조철봉의 철봉을 잡으려는 듯 손을 뻗쳤다.
“넣어줘요, 빨리.”
연숙이 말했을 때 조철봉은 마음을 정했다. 이런 상황에서 애국가를 4절까지 부르거나 고등학교 교가를 부르면서 인내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인내의 기쁨은 다른 때, 다른 상대한테서 느끼기로 하자.
“잠깐만.”
조철봉이 연숙의 귀에 입술을 붙이고는 낮게 속삭였다.
“더 기쁘게 해줄테니까 기다려.”
연숙이 눈의 초점을 맞추더니 조철봉을 보았지만 입을 열지는 않았다. 조철봉은 가방 안에서 기구를 꺼내 쥐었다. 기구는 고무 제품이었는데 철봉에 씌웠더니 딱 맞았다. 그러자 철봉은 머리 부분이 흉칙해졌다. 돌기가 여러개 솟아났고 아랫부분은 힘줄처럼 세로 줄이 뻗쳐졌다. 조철봉은 다시 연숙에게 다가가 볼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는 자세를 갖췄다.
“할까?”
조철봉이 묻자 연숙은 대답대신 목을 두팔로 감아 안았다. 심호흡을 한 조철봉은 천천히 샘 안으로 철봉을 밀어 넣었다. 그 순간이었다.
“아.”
번쩍 눈을 치켜뜬 연숙이 온몸을 굳히면서 외마디 신음을 뱉었다. 그러고는 하반신을 뒤로 물리려는 듯 몸을 움츠렸다가 다시 신음을 뱉었다.
“아이구.”
지금까지 조철봉은 섹스를 3개의 과정으로 구분했다. 서론, 본론, 결론 따위가 아니다. 이 3개의 과정에 각각 서론과 본론, 결론이 다 들어있는 것이다.
따라서 대개의 여자들은 이 3개의 과정을 거치면서 절정을 경험하게 되는데 중간 과정, 즉 두번째 과정에서 최대 4번까지 절정을 겪은 상대도 있었다. 따라서 그 여자는 한번의 섹스에서 모두 5번의 절정을 겪은 셈이었다. 즉, 첫번째 과정에서 1번, 두번째 과정에서 4번을 합해 5번이다. 그래서 그분은 세번째 과정을 생략할 수밖에 없었는데 늘어진 채 거의 의식을 잃었기 때문이다.
그 3번의 과정을 다시 설명하면 첫번째 과정은 철봉이 들어가기 직전까지의 기간이다. 어디서부터 시작하느냐는 옷을 벗었을 때부터든지 아니면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부터든지 분위기를 봐서 정해도 좋다. 어쨌든 이 첫번째 과정이 다른 모든 일처럼 중요하다. 시작이 중요한 것이나 같다. 두번째 과정은 철봉이 골짜기를 산책하다가 샘 안으로 들어가 머무는 과정이니 섹스의 중심 부분이지만 조철봉은 세 과정을 거의 똑같은 비중으로 취급한다.
세번째는 절정에 오른 여자를 이끌고 산에서 내려오는 과정인데 이때 작은 산을 또 하나 넘을 수도 있다. 따라서 이 과정은 조철봉이 가장 주의를 기울이는 과정이기도 하다. 에베레스트 등반팀에서 흔히 발생하듯이 정상 등정후에 긴장이 풀려 사고가 일어나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인내를 해야만 한다, 이때 다시 작은 산을 다시한번 넘는 보너스를 안겨 준다면 그 감동은 정상 등정 이상이다.
그러나 지금 조철봉은 기구를 낀 채 연숙의 몸 안으로 들어왔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연숙의 가식적인 반응이 조금 언짢았다고 해도 평소의 조철봉다운 행동이 아니다.
그러나 호기심은 있었다. 기구의 효능이 궁금했다. 기구란 본래 철봉 피부에 닿는 감촉을 막는 한편으로 형체를 변형해 쌍방이 모두 득을 보도록 만들어졌다. 따라서 남자 측에서는 감촉이 무디어지므로 대포의 발사 시간이 연장되는 효과가 가장 크다고 봐도 된다. 간단하게 말하면 ‘조루’ 소리를 듣지 않는려는 방법이다. 그걸로 여자가 줄줄 따른다면 기구 덕이긴 하지만 또 다른 효과도 포함해도 될 것이다.
어차피 고무 덮개를 씌우고는 직접 피부에 닿는 쾌감을 희생한 채 봉사(?)한 대가일테니까. 어쨌든 남자는 대포가 불발탄이건 오발탄이건 간에 한번 ‘뻥’하고 쏘면 끝나는 생리 구조를 갖췄다. 그것이 한번의 관통으로 발사가 되었든지 배꼽에 오조준되어 발사가 되었든지, 남자는 쏜 것으로 끝난다.
그러나 태초부터 그렇게 쏘았다가는 ‘인류는 진즉 멸종되었거나 침팬지 사촌쯤 되어서 나무 위에 올라가 있을 것이다. 생각하는 짐승인 인류는 그러지 못했다. 아니, 그러면 안되었다. 그냥 쏘다니? 불과 도구를 사용하는 한편으로 인류는 끊임없이 사고했다. 섹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문명인일수록 성에 대한 관심과 불만이 많은 것은 그것 때문이다.
‘아아악.’
다시 조금더 힘을 주었을 뿐인데도 연숙의 신음은 더 높아졌다. 조철봉은 아직 반도 집어넣지 않았다.
‘괜찮아?’
움직임을 멈춘 조철봉이 연숙의 귀에 입술을 붙이고는 조심스럽게 물었을 때였다.
‘으응.’
연숙이 조철봉의 엉덩이를 두 손으로 감싸 쥐면서 말했다. 이것은 행여나 몸을 뺄까봐 미리 움켜쥔 것이었다.
이연숙은 눈을 딱 치켜뜨고 있었지만 초점이 잡혀있지 않았다. 입도 반쯤 벌리고 있었는데 굵은 신음이 쉴새없이 터져나왔다. 조철봉은 다시 천천히 철봉을 진입시켰다. 아니, 지금은 기구라고 해야 맞는 표현이 될 것이다. 연숙의 반응은 격렬했지만 자신의 철봉은 어떤 감촉도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 나 죽어.”
다시 조금 진입했는데도 연숙이 두다리를 버둥대며 소리쳤다. 그때서야 철봉 윗부분에 조금 압박감이 왔지만 간에 기별도 안찼다.
“좋아?”
조철봉이 다시 기구를 조금 더 넣으면서 물었다. 전에 직접 철봉이 움직일적에는 별놈의 짓을 다 했다. 지금 아래에서 연출되는 연숙의 반응 수준을 상쇄시키려면 입으로 불경은 물론이며 애국가도 거꾸로 외웠어야 할 것이다. 머릿속에서는 한국의 혼탁한 정치에서부터 빈 라덴, 알카에다까지 생각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고무에 쌓인 철봉은 마치 딴 세상에 들어간 것 같다. 무미건조한 세상, 어둡고 감촉도 없는 공간, 끝없이 펼쳐진 허망한 우주, 시작도 끝도 없는 우주에 박힌 육신, 내 철봉. 그러나 조철봉은 기구를 더 넣었고 연숙의 신음은 더 높아졌다.
“아이구, 나 죽어.”
기쁨의 함성이다. 최갑중의 설명 대로라면 기구는 온도나 질감이 피부와 똑같도록 되어있어서 상대가 전혀 눈치채지 못한다고 했다. 조철봉은 이제 기구를 끝까지 다 넣었고 연숙의 함성은 절정에 닿았다. 이런 상황이면 앞으로 서너번만 더 왕복하는 것으로 절정에 이르게 될 것이었다. 심호흡을 한 조철봉은 이제 천천히 기구를 빼내었다. 그때 연숙이 함성을 지르더니 조철봉의 엉덩이를 아까 했던 것처럼 움켜쥐었다. 행여나 도망갈까 두려운 것이다. 그순간이었다. 조철봉은 엎드린 그 자세에서 얼굴을 시트에 묻고는 눈물을 쏟았다. 가슴이 텅 빈 것 같았으며 육신을 떠난 영혼이 검은 공간을 하염없이 날아가고 있는 느낌이 왔기 때문이다. 영혼은 아무 것도 느끼지 못했다. 목적지도 없다. 그때 연숙이 조철봉의 엉덩이를 움켜쥔 채 소리쳤다.
“어서요.”
조철봉은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얼굴을 시트에 붙인 채로 이제는 맹렬하게 허리를 움직였다. 눈 깜박하는 사이에 기구가 끝까지 들어갔다가 다시 나왔다.
“아아악.”
연숙이 두 눈을 다시 번쩍 치켜뜨더니 방안이 떠나갈 듯한 신음을 뱉었다. 조철봉은 감촉도 없는 공간을 부술 듯한 기세로 휘저었다. 이제는 인내도 필요없다. 따라서 인내끝에 맛보는 짜고 단 희열도 느낄 수 없을 것이며 성취감의 부푼 감동도 없을 것이었다. 그러나 연숙은 열광했다. 정신이 나간 것 같이 아우성을 치면서도 몸을 빈틈없이 붙이더니 곧 폭발했다. 죽는 것처럼 신음을 지르면서 절정으로 올라가 버렸다. 조철봉은 연숙의 몸이 굳어지면서 떨기 시작했을 때 몸을 빼내었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아아.”
늘어져 있던 연숙이 갑자기 떼어낸 허전함 때문인지 꿈틀거리면서 놀란 신음을 뱉었지만 다시 눈을 감았다. 조철봉은 몸을 비틀어 연숙에게 등을 보였다. 얼굴은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으므로 시트를 당겨 얼굴을 닦았다. 그러고는 앞으로 두번 다시 기구를 쓰지 않겠다고 스스로 맹세했다. 철봉이 늘어져서 물에 불린 오뎅처럼 되었더라도 그대로 쓸 것이다. 그것이 내 마지막 양심이다.
조철봉이 한국에 돌아온 것은 열흘 후였다. 그동안 백두산 관광단지와 개성공단까지 들렀다 온 것이다. 귀국한 다음날 아침, 회사에 출근한 조철봉이 회의를 마치고 사장실 책상에 앉았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휴대전화가 울린 것이다. 발신자 번호를 본 조철봉이 잠깐 망설이다가 전화기를 귀에 붙였다. ‘경원’의 고마담이었던 것이다.
“아, 고마담, 웬일이쇼?”
조철봉이 대뜸 묻자 고순임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렇게 전화드리는 건 실례인데 안할 수가 없어서요.”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오? 자주 연락을 해야 장사를 하지.”
“그래도요.”
“괜찮은 애 새로 왔다면 바로 가지요. 내가 내일은 시간이 있는데.”
“사장님.”
고순임이 불렀으므로 조철봉은 의자에 등을 붙였다. 아침부터 순임이 전화를 해온 것은 윤미 때문일 것이다, 뻔히 짐작하고 있으면서 엉뚱한 소리만 일부러 한 것은 이쪽도 어색했기 때문이다.
그때 순임이 말을 이었다.
“전화를 계속해서 받지 않으시다가 외국으로 나가시는 바람에 서운했어요.”
“전화 많이 했어요? 왜?”
“사장님도 참.”
웃음띤 목소리로 말한 순임의 말이 이어졌다.
“윤미 동생 수술 잘 끝났습니다. 사장님 덕분에요.”
“아아, 그래요?”
“사장님은 복 받으실거예요.”
“내가 무슨.”
“제가 어떻게 은혜를 갚아야 할지 모르겠어요.”
“마담이 왜?”
“윤미 대신에 인사를 드리는 거예요.”
“그럼 경원에 괜찮은 애 왔을 때 제일 먼저 나를 불러주면 돼요. 지금까지 고마담은 나한테 실수하지 않았으니까 만사 제쳐놓고 달려가지.”
“오늘 윤미 만나주세요.”
불쑥 순임이 말했으므로 조철봉은 심호흡을 했다. 윤미의 맑은 두 눈은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얼굴 윤곽은 흐렸다. 섹스를 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때 순임이 말을 이었다.
“그렇게 피하시면 안돼요. 조사장님, 윤미가 지금 불안하고 불편해서 어쩔줄 몰라하고 있어요.”
“….”
밥도 안먹어서 야위었어요. 그러니까 오늘 좀 만나주세요.”
“내가 바쁜데.”
“안돼요.”
순임의 목소리가 강해졌다.
“오늘 윤미한테 준비하고 있으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사장님이 저녁 7시에 프린스호텔 일식당으로 나오세요. 저하고 윤미가 나와있을 테니까요.”
“나아, 참.”
“사장님 마음 다 알아요. 돈 갖고 유세 부리는 것 같아서 어색하게 느껴지시겠지만 받는 사람 입장은 다르다고요. 그러니까.”
“알았어요.”
마침내 정색한 조철봉이 결심한 듯 말했다.
“나가지요. 그럼 거기서 봅시다.”
“고맙습니다. 사장님.”
순임의 목소리가 밝아졌다.
“기다리고 있을게요.”
전화기를 내려놓은 조철봉은 혼자서 쓴웃음을 지었다. 이것도 예상했던 일이다. 만일 윤미나 순임이 연락을 해오지 않았다면 찾아갔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어색한 척 했지만 내 근본은 사기꾼이다.
저녁 7시, 프린스호텔 일식당에 도착한 조철봉은 종업원의 안내를 받아 방으로 들어섰다. 방에는 이미 고순임과 윤미가 먼저와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순임이 반색을 하며 반겼고 조철봉은 멋적게 웃었다. 윤미는 조철봉과 한번 시선을 부딪고는 금방 얼굴이 빨개졌다가 몇초도 안되어서 하얗게 굳어졌다. 자리잡고 앉은 조철봉이 순임과 윤미를 번갈아 보았다.
“역시 고마담 명성은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니군요. 이렇게 아가씨들을 챙겨 주시는걸 보면 말이요.”
“별 말씀을.”
쓴웃음을 지은 순임이 듣기 거북하다는 듯 손까지 저었다.
“전 인사만 드리고 가겠어요.”
그러더니 앉은 자리에서 조금 몸을 물리더니 조철봉에게 방바닥에 이마를 붙이고는 큰절을 했다.
“사장님은 이 고순임이 한테도 은인이 되셨습니다.”
“이런.”
엉거주춤 맞절을 한 조철봉이 머리를 들었을 때 순임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저는 이만 가겠어요.”
“아니, 저녁이라도 같이.”
“가게에 가야 되거든요.”
그러고는 순임이 따라 일어선 조철봉의 손을 두 손으로 쥐었다.
“윤미한테 이야기 다 해놓았어요.”
조철봉이 방문 밖까지 순임을 배웅하고 들어왔을 때 기다리고 서있던 윤미가 말했다.
“저고리 벗으세요. 걸어 놓게요.”
“어, 그러지.”
윤미는 지금 처음 입을 연 것이다. 조철봉의 저고리를 걸어놓은 윤미가 자리에 앉더니 정색했다.
“사장님, 고맙습니다.”
“아, 이제 됐다.”
조철봉이 가볍게 손을 저었다.
“이제 그 이야기 그만.”
“동생은 다음주에 퇴원해요. 완치 된다고 해요.”
“그것, 잘됐다.”
“모두 사장님 덕분이에요.”
“네 복이지.”
“저, 이제 어떻게 해요?”
윤미가 묻자 조철봉이 눈을 가늘게 떴다. 이제 윤미는 조철봉을 똑바로 바라보는 중이다. 이윽고 조철봉이 입을 열었다.
“내가 아침에 고마담 전화을 받고 생각을 해본건데.”
“….”
“내가 대림동에 45평짜리 아파트를 한 채 갖고 있어. 세를 놓았다가 다음달 초면 비워질텐데.”
조철봉이 눈도 깜박이지 않고 있는 윤미를 향해 정색하고 말했다.
“다음달 초에 그 집으로 옮겨.”
“네, 사장님.”
“가구도 새것으로 사. 집 벽지도 새로 바르고, 내가 돈 줄테니까.”
“네, 그렇게 할게요.”
윤미가 금방금방 대답했다. 목소리는 생기에 차 있었으며 눈빛은 더 강해졌다.
“그리고.”
심호흡을 한 조철봉이 상체를 반듯이 세웠다. 종업원들은 부르기 전까지는 오지 않는다. 조철봉이 말을 이었다.
“동생들하고 같이 옮기는거야. 아파트에서 같이 사는거란 말이지. 에, 그리고.”
시선을 내린 조철봉이 서두르듯 말했다.
“너, 피아노 학원을 차려. 학원 건물하고 피아노도 내가 구해 줄테니까. 그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란 말이야.”
말을 그친 조철봉이 물잔을 쥐고 한모금을 마셨다. 그렇다. 다 해줄 것이다. 세 남매는 대림동의 45평형 아파트에 살면서 윤미는 피아노 학원을 운영하게 될 것이었다. 오후에 사람을 시켜서 조사해 보았더니 학원용 건물을 빌리고 피아노 들여놓는 비용에다 내부장식, 운영비 등을 합해서 3억5천이 예상되었다. 거기에다 아파트 가구와 내부장식에 필요한 자금이 5천, 모두 4억이다. 조철봉은 윤미를 바라보았다. 윤미는 이미 시선을 내린 채 다시 몸이 돌덩이처럼 굳어져 있었는데 숨도 쉬는 것 같지가 않았다. 헛기침을 한 조철봉이 말을 이었다.
“내가 피아노 학원을 알아보았어. 경비도 계산해 보았고, 그런데 아무래도 이건 너하고 상의하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네가 가르치는 학생들이 있는 동네가 학원 운영에 유리할 것 같고 말이야. 그래서.”
조철봉이 식탁위로 몸을 기울이고는 윤미의 얼굴을 밑에서부터 올려다 보았다.
“네가 알아보는 것이 낫겠다. 예산은 4억 정도, 그 정도면 되겠어?”
“저는.”
엉겁결에 입을 열었던 윤미가 시선이 마주치자 다시 외면했다. 그러고는 가늘게 말했다.
“싫어요.”
“내가 싫다는 말이냐?”
뻔한 소리를 아주 능청스럽게 하는 것도 사기꾼이 갖춰야 할 기본 자세중의 하나일 것이었다. 조철봉이 그렇게 묻자 윤미는 머리를 숙였다. 싫다고 할 리가 있겠는가? 그렇다고 이 상황에서 좋다고 하면 자존심도 없는 여자가 된다. 그때 조철봉이 자리에서 일어나 윤미의 옆으로 다가가 앉았다. 일어나서 식탁을 돌아 옆에 앉을 때까지 걸린 시간은 5초도 안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5초 동안의 조철봉에게는 지금까지 윤미와의 작업(?)에서 가장 매끄럽지 못한 순간일 것이었다. 남녀간의 작업중에는 이런 순간이 꼭 있기 마련이다. 이 순간을 잘 인내하고 넘기느냐에 따라서 작업의 승패가 좌우되는 것이다. 선수들은 작업중에 사소한 실수는 수없이 저질러도 결정적인 이런 순간에는 과감하다. 거침없는 동작으로 윤미의 옆에 앉은 조철봉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 난 네 보호자야. 스폰서란 말이다. 너도 합의했지?”
조철봉이 묻자 윤미가 머리를 들었다. 두 눈 둘레가 붉게 달아올라 있었지만 시선은 조철봉과 부딪쳤다.
“네.”
“쉽게 말하면 넌 내 애인, 내 정부, 내 숨겨둔 여자, 또는 살림 차려준 여자가 되는거다. 그렇지?”
“네.”
이번에는 윤미의 대답이 조금 가벼워졌고 흔들리던 눈동자도 중심을 잡았다. 조철봉이 손을 뻗쳐 윤미의 허리를 감아 안았다.
“너하고는 일주일에 한번 정도 내 별장에 가서 놀다가 오면 된다. 또 모르지. 네가 좋아서 일주일에 두번 데리고 갈지도. 그래도 좋아?”
“좋아요.”
이제는 윤미가 머리까지 끄덕이며 대답했다.
“세번도 좋아요.”
“그럼 됐다.”
조철봉이 윤미의 볼에 가볍게 입술을 붙였다가 떼며 말했다.
“동생들한테는 될 수 있는 한 서서히 우리 관계를 알리기로 하자. 그래야만 돼. 무슨 말인지 알겠어?”
윤미가 다시 머리를 끄덕였으므로 조철봉은 심호흡을 했다. 됐다. 윤미한테는 은인으로만 남는다. 몸은 지켜준다. 사기꾼 조철봉의 다른 면을 보여줄테다.
3년전만 해도 조철봉은 잔재주를 많이 부렸다. 목표로 정한 여자와의 섹스를 위하여 별 수단을 다 부렸다는 뜻이다. 그러나 차츰 세월이 흘러 물질에 여유가 생기게 되자 조철봉의 행동 양식이 달라졌다. 그것은 목표에 대한 의지가 약해졌다는 말이 아니다. 조급하지 않고 느긋해졌으며 스케일이 커진 것이다. 그래서 성사율은 오히려 더 높아졌다.
이성간에는 상대방이 안달을 부리면 뒤로 물러나는 습성이 있다. 반대로 이쪽에서 주춤대면 다가선다. 이것은 가장 보편적인 연애 공식이며 아마 수백만년전 인류가 탄생되었을 때부터 내려온 불변의 습성 중 하나일 것이다. 조철봉은 이제 그 습성을 적절하게 운용할 수 있는 경지가 되었다. 목표를 한번 정하면 느긋하게 즐긴다. 그것도 조철봉에게는 또하나의 낙이다. 마치 철봉이 골짜기를 산책하는 것과도 비슷하다. 조철봉은 윤미와 두 동생을 대림동 아파트로 이주시켰다. 가구도 새것으로 들여놓았으며 윤미는 손에 3억5천만원을 쥐고 지금 피아노 학원을 차리느라 정신이 없다. 물론 조철봉은 하루에 한번씩 전화를 했지만 아직 윤미의 손도 잡지 않았다. 이제 윤미도 조금 익숙해져서 조철봉에게 초조한 기색을 나타내지 않지만 기다리고는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 사이에 조철봉은 또 한명의 상대를 만나게 되었다. 우연한 기회였는데 호텔 지하층의 바에서 고등학교 동창을 만났다가 알게 된 여자였다. 여자의 이름은 이지윤, 40대 초반쯤으로 조철봉보다는 대여섯살 연상으로 보였는데 세련되었다. 몸매도 훌륭했고 첫째로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그날, 조철봉은 할인매장을 경영하는 유대봉을 고구려호텔 지하 바에서 만나고 있었는데 이지윤이 일행 둘과 함께 옆 테이블로 와 앉았던 것이다. 이지윤의 첫 인상은 화사했고 자신만만했다. 친구 둘도 미인이었지만 이지윤에 비교하면 공주를 따르는 시녀 같았다. 조철봉은 시선을 돌리고 있었어도 이지윤의 목소리를 들었다. 섹시했다. 그 목소리로 뱉는 쾌락의 신음을 연상하자 금방 열이 올랐다. 곁눈으로 바라본 이지윤의 두 다리가 잔뜩 구부러지는 것도 상상했다. 건성으로 유대봉을 상대하던 조철봉이 기회를 잡은 것은 이지윤이 화장실에 갔을 때였다.
조철봉은 자연스럽게 일어나 남자 화장실에 들렀다가 나와서 기다렸다. 이지윤이 화장실을 나왔을 때 조철봉이 앞을 가로막고 섰다.
“괜찮으시다면 합석하실까요?”
조철봉이 묻자 이지윤은 피식 웃더니 머리를 저었다.
“싫어요.”
“저는 조철봉이라고 합니다. 여기 자주 오는 편이지요.”
“그래서요?”
이지윤이 앞을 가로막고 선 조철봉을 눈을 가늘게 뜨고 보았다. 조철봉은 이제 한두마디밖에 여유가 없다는 것을 느꼈다. 이번 상대는 까다롭다.
“여기 제 명함을 드리지요. 오늘 힘들다면 다음 기회에 꼭 뵙고 싶습니다.”
조철봉이 명함을 내밀자 이지윤은 못이기는 척 받았다.
“기다리겠습니다.”
몸을 비낀 조철봉이 정중하게 말했다.
처음에는 이래야 한다. 제가 장동건이나 이병헌이 아닌 이상, 아니 그만큼 잘생겼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첫눈에 껌벅 가는 여자는 없다. 그러니 성심껏 대하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 눈빛이 어쩌고, 몇마디 말에 저쩌고 하는 이야기는 다 거짓말이다. 그러고나서 조철봉이 자리에 돌아왔을 때 분위기가 달라져 있었다. 옆쪽 여자들이 조철봉을 힐끗거린 것이다.
“무슨 일이냐?”
유대봉이 조철봉한테 그렇게 물었는데 옆 테이블의 세 여자가 조철봉에게 시선을 주면서 수군거리고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별거 아냐.”
그렇게 말했지만 조철봉은 조금 황당하면서도 화가 났다. 여자가 바로 제 일행한테 화장실 앞에서의 행각을 털어 놓은 것은 조금도 호감을 느끼지 않았다는 증거나 같았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는 일이 틀어졌다고 봐도 된다. 머리를 든 조철봉이 이지윤을 똑바로 보았다. 시선이 마주쳤을 때 이지윤이 먼저 말했다.
“내 친구가 합석하자는데, 괜찮겠죠?”
놀란 조철봉이 입만 딱 벌렸고 대신 유대봉이 즉시 대답했다.
“아, 그러면요.”
그래서 조철봉과 유대봉은 옆쪽 자리로 옮겨갔으며 각자 소개를 했는데 이지윤의 이름은 그때 알게 되었다. 합석을 하자고 권한 친구의 이름은 박은숙. 은숙은 조철봉의 옆자리에 앉았고 또 한명의 친구 오유정은 유대봉의 파트너가 되었다. 이지윤이 그렇게 배정한 것이다.
“우리 나이가 많으니까 지금부터 누님이라고 불러.”
자리 배정이 끝났을 때 이지윤이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술값은 내가 낼테니까 그렇게들 알고 있어.”
“아니, 누님.”
놀란 유대봉이 눈을 둥그렇게 떴지만 흡족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런 경우는 극히 드물다. 50만원이 넘는 이쪽 술값까지 계산해준다는 호구(?)가 나타났으니 두고두고 무용담거리가 될 것이었다. 그때 옆에 앉은 은숙이 조철봉의 귀에 입술을 가깝게 붙이더니 소근거렸다.
“나도 마침 거기하고 합석하고 싶었는데 잘 되었어.”
조철봉이 힐끗 은숙에게 시선을 주고는 머리를 끄덕였다. 은숙은 동그란 얼굴에 아담한 체격이었는데 눈웃음치는 모습이 귀여웠다.
“회사 사장이야?”
“응.”
은숙 옆에 앉은 지윤에게 시선을 주면서 조철봉이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때 은숙이 쥐고 있던 명함을 들고 자세히 보았다.
“중국에도 회사가 있네.”
“응.”
다시 머리를 끄덕이면서 조철봉은 그때서야 내막을 알 수 있었다. 은숙이 자신에게 마음이 있었고 지윤은 받은 명함을 은숙에게 준 것이다. 물론 자신이 은숙에게 호감을 느낀다는 따위로 말했을 것이다. 그래서 합석이 성사되었다.
“누님.”
조철봉이 몸을 기울여 은숙의 옆에 바짝 붙이면서 불렀다.
“누님, 오늘밤 시간 있지?”
“왜?”
은숙이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얼른 지윤의 눈치를 보았다. 지윤은 대봉과 유정의 이야기를 거들고 있었는데 웃음띤 얼굴이었다. 조철봉은 다시 불끈 치밀어 오르는 욕정을 누르고는 은숙에게 속삭였다.
“왜는? 뻔하잖아? 나, 오늘 누님을 갖고 싶어.”
“어머나.”
“아까부터 미치겠어.”
“엄마.”
“여기 좀 봐.”
하고 조철봉이 은숙과 시선을 맞추고는 자신의 아랫도리를 눈으로 가리켰다.
“섰어.”
은숙이 먼저 침부터 삼켰다.
(1089)그 여자의 인생-3
조철봉의 경험에 의하면 흥분한 상태의 여자는 대담해진다. 얌전한 여자가 깜짝 놀랄 만큼 변하는 경우도 보았다. 예전에는 조철봉이 잘못 짚어서 봉변을 당한 적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실수는 하지 않는다.
여자들은 제 이름만 알려주었고 신상에 대해서는 아직 입을 열지 않았는데 셋이 동창 같았다. 동창쯤 되어야 이런 합석이 자연스럽게 만들어진다. 학부모 모임이나 반상회 모임, 또는 직장이나 계모임 등의 팀과 합석하려면 뒷말이 두려워서 먼저 나서는 여자가 드물고 합석이 된다 해도 눈치만 살피다 끝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은밀한 작업이 필요한데 신경을 많이 써야만 하는 것이다.
그때 시선을 조철봉 아랫도리로 내렸던 박은숙이 숨을 들이켰다. 하도 크게 들이켜서 ‘헉’소리가 났다. 테이블 밑의 조철봉 바지가 텐트를 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이지윤이 머리를 돌려 은숙을 보았다. 그러나 곧 시선을 돌렸으므로 조철봉은 손을 뻗쳐 테이블 밑에서 은숙의 손을 쥐었다. 지금 대봉은 파트너인 유정에게 할인매장에서 상품을 가장 싸게 사는 방법을 알려주는 중이었다. 지윤의 시선도 그쪽으로 다시 돌려졌고 이쪽은 둘뿐이다. 조철봉은 은숙의 손을 자신의 솟아오른 철봉에 붙였다. 그 순간 은숙이 흠칫했지만 곧 못이긴 척 철봉 위에 손을 얹은 채 가만히 있었다. 조철봉은 소리 죽여 숨을 뱉었다. 이것으로 작업의 절반은 성사되었다. 그러나 가슴 한곳은 아까부터 텅 빈 것처럼 허전했다. 조철봉은 곁눈으로 다시 지윤을 보았다. 지윤은 실속없이 지껄이기만 하는 대봉의 말을 듣고 웃고 있었다.
“누님.”
조철봉이 머리를 기울여 은숙의 귀에 입술을 붙이고 말했다. 아직 은숙의 손은 철봉 위에 놓여 있었다.
“누님 휴대전화 번호를 알려줘. 여기서 헤어지고나서 다시 만나게 말이야.”
“아이, 오늘은.”
은숙이 난처한 표정으로 말했다가 조철봉이 손을 누르는 바람에 다시 흠칫했다. 이제는 은숙의 손이 철봉을 쥐고 있는 것처럼 되었기 때문이다. 바지와 팬티가 사이에 있지만 굵은 철봉의 맥박까지 느껴지고 있다.
“내가 오늘 시간이 있어. 누님, 내일부터는 바빠서 말이야.”
“남편한테 12시까지 들어간다고 했는데.”
“전화하면 돼. 한시간쯤 늦을거라고 말이야.”
“친구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해야지.”
그때 지윤이 머리를 돌리더니 조철봉에게 물었다.
“무슨 얘기를 하고 있어?”
“아, 내 사업이야기.”
조철봉이 정색하고 말했다.
“내가 중국에 공장이 몇개 있거든. 그 공장 이야기.”
“그래?”
쓴웃음을 지은 지윤이 머리를 끄덕였다.
“은숙이가 공장에 관심을 갖고 있는 줄은 몰랐네.”
“얘도, 참.”
은숙이 지윤에게 눈을 흘겼다.
“네가 회사 운영한다고 너만 사업에 관심을 가진 것 같니? 사람 무시하지 마.”
“흐응, 그래?”
지윤이 은숙에게 한쪽 눈을 감아 보였다.
“벌써부터 네 파트너 감싸고 도는 거야?”
“그럼 어때?”
조철봉은 지윤이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은숙은 물론이고 유정의 분위기를 만들어주려고 은근히 노력하고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조철봉은 지그시 어금니를 물었다. 두고 보자.
양주가 한병 비워졌을 때 조철봉은 세 여자의 신상을 대충 파악할 수가 있었다. 묻기도 했지만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스스로 밝혀주기도 했기 때문이다. 셋은 짐작했던 대로 대학 동창이었다. 명성대 영문과. 명성대면 일류 대학이다. 그리고 셋 모두 결혼을 했고 이지윤은 사업가이며 박은숙과 오유정은 가정주부였다. 그러나 셋은 모두 가정에 대해서는 함구했다. 아기가 몇인지, 남편이 무엇하는 사람인지는 알 수 없었다.
“자, 그럼 이만 끝내지.”
지윤이 정색하고 그렇게 말했을 때는 11시가 조금 넘었을 때였다.
“가정으로 돌아갈 시간이야.”
유대봉은 서운한 표정을 지었지만 조철봉은 선선히 머리를 끄덕였다.
“그럽시다.”
그의 주머니에는 이미 은숙한테서 받은 쪽지가 넣어져 있는 것이다. 물론 쪽지에는 은숙의 핸드폰 번호가 적혀 있었으니 오히려 이쪽은 술좌석이 얼른 끝나기만을 기다렸던 입장이다. 호텔 밖으로 나온 조철봉이 지윤에게 다가가 말했다.
“언제 다시 한번 만나지, 누님. 그때는 내가 살테니까.”
“그래.”
지윤이 웃음 띤 얼굴로 대답하더니 흘끗 뒤쪽에 서 있는 은숙에게 시선을 주었다.
“잘해.”
“뭘?”
“관리를.”
“무슨 관리?”
그러나 지윤이 몸을 돌렸으므로 대답은 듣지 못했다. 은숙은 친구들과 함께 택시를 타면서 조철봉에게 시선도 주지 않았는데 그것이 옆에 서 있는 유대봉한테는 괴이하게 보인 것 같았다.
“너, 싸웠냐?”
택시가 떠났을 때 대봉이 조철봉에게 물었다.
“난 연락처 받아 놓았는데 말야. 다음주 금요일날 만나기로 했어.”
“그래?”
건성으로 대답한 조철봉이 팔목을 들어올려 시계를 보았다. 11시10분. 은숙은 화장실에 간다면서 밖으로 나가 집에다 오늘은 지윤네 집에서 자고 내일 아침 일찍 돌아가겠다는 연락을 했다.
“잘 해봐라. 그럼 난, 이만.”
대봉에게 손을 들어보인 조철봉은 마침 다가온 택시에 먼저 올랐다.
“서교동으로.”
운전사에게 말한 조철봉은 시트에 등을 붙였다. 은숙과 서교동의 은하호텔에서 만나기로 한 것이다. 호텔 방을 잡아놓고 은숙에게 전화를 하면 될 것이다. 은숙의 집은 서교동에서 10분 거리인 마포였다. 눈을 감은 조철봉은 길게 숨을 뱉었다. 오늘밤은 은숙과 함께 지낼 것이었다. 그러고 보면 아담한 체격에다 귀여운 인상의 은숙은 성적 매력만 약하게 풍길 뿐이지 수준 이상이다. 오히려 그런 인상과 몸매의 여자가 달아올랐을 때 더 욕정을 일으키는 경우도 있었다. 조철봉의 감은 눈앞으로 지윤의 얼굴이 떠올랐다. 약간 마른 것 같지만 단단하고 탄력있는 하반신도 다시 눈앞에 확대되었다. 은숙 다음에는 지윤이다. 은숙과는 시범 경기를 치르고 메인 게임의 상대는 이지윤이다. 그때 주머니에 넣은 핸드폰이 진동을 했으므로 조철봉은 생각에서 깨어났다. 핸드폰을 꺼내 발신자 번호를 본 조철봉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처음 보는 번호였다. 은숙의 번호도 아니다. 스위치를 켠 조철봉이 응답했다.
“여보세요.”
그때 송화구에서 여자 목소리가 울렸다.
“나야, 이지윤.”
아니, 웬일이야?”
진짜로 놀란 조철봉이 상반신을 세웠다.
“내 전화번호는 어떻게 알고?”
“은숙이한테 주기 전에 외워 놓았어.”
이지윤이 웃음 띤 목소리로 말했다.
“왜? 놀랐어?”
“당연하지.”
“지금 어디야?”
“택시 안이야.”
“난 금방 애들하고 헤어졌는데.”
지윤의 말에 조철봉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조철봉이 누구인가? 지윤의 말뜻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그때 지윤이 소근대듯 물었다.
“우리, 오늘밤, 같이 있을까?”
그 순간 조철봉이 눈을 크게 떴다.
“뭐라구?”
“나하고 같이 오늘밤을 보내자구.”
지윤이 이제는 또박또박 말하자 조철봉은 먼저 침부터 삼켰다.
“어때?”
재촉하듯 지윤이 물었다.
“빨리 대답해.”
좋은 일이 겹치면 당황하게 된다. 이때 조심하지 않으면 신세 망칠수가 있다. 조철봉은 먼저 심호흡부터 했다. 지금 은숙은 지윤과 헤어져 내 전화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오늘 외박한다고 집에다 전화까지 해놓았다. 그런데 3초도 안되는 순간이었지만 조철봉의 머릿속으로 지윤의 벗은 알몸이 환하게 드러났다가 지워졌다. 쾌락을 참지 못한 지윤의 신음소리도 귓속을 울렸다가 사라졌다. 군계일학, 이지윤은 닭 무리 속의 학이었다. 박은숙은 닭이었다. 지금 학이 만나자면서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 조철봉은 입을 열었다.
“오늘밤은 안되겠어.”
그러자 지윤이 놀란듯 3초쯤 가만 있더니 억양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왜?”
“글쎄, 안돼.”
“왜 안되냐니까?”
조금 높은 목소리로 지윤이 물었을 때 마음을 굳힌 조철봉도 차분하게 말했다.
“약속이 있거든.”
“누구하고?”
“뻔하잖아? 은숙이 누나하고.”
“은숙이?”
“그래.”
“너, 은숙이 좋아해?”
“괜찮았어.”
“나보다 나아?”
그러자 조철봉은 저도 모르게 입맛을 다셨다.
“솔직히 말하면 아냐.”
“그런데 왜?”
“약속을 했거든.”
“약속?”
“그래.”
“그것 때문에 날 놓쳐도 돼?”
“할 수 없어.”
조철봉이 이제는 눈을 치켜뜨고 앞을 보았다. 말을 할수록 결심은 더 굳어졌다.
“난 은숙이 누나한테 상처를 줄 수는 없어. 날 믿고 기다리고 있을텐데 말이야.”
“….”
“은숙이 누나로 만족할거야.”
“….”
“미안해, 누나.”
그러고는 조철봉이 힐끗 택시 운전사의 뒤통수에 시선을 주고 나서 목소리를 낮췄다.
“또 한번 솔직하게 말한다면 난 오늘밤 은숙이 누나를 만나고나서 누나하고 메인 게임을 하려고 했거든. 그런데 이렇게 틀어지는 걸 보면 누나하고 안되는 운명인가봐.”
그러자 갑자기 수화구에서 지윤의 낮은 웃음소리가 울려나왔다.
“보기와는 달리 솔직하구나.”
지윤이 그렇게 말했다.
“신의도 있고 말야.”
“이봐, 누나. 난 지금 심각해.”
이왕 깨진 꿈이었으므로 조철봉은 털어놓고 말했다.
“누나도 알다시피 내 타깃은 바로 누나였거든. 그런데 이렇게 돼버린거지.”
“그래서 원대한 계획을 세우셨군. 은숙이 다음에 나를 먹기로 말야.”
“오늘은 그렇게 되었지 않아? 누나가 그렇게 만들고는 왜 이래?”
“은숙이는 어디서 만나기로 한거야?”
“은하호텔에 내가 방을 잡아놓고 연락하기로 했어.”
“….”
“은숙이 누나는 근처에서 내 전화를 기다릴거야.”
“….”
“오늘밤 집에 못들어간다고 연락까지 해놓았다고.”
“그 기집애가 단단히 미쳤군.”
지윤이 혼잣소리처럼 말하더니 또렷한 목소리로 물었다. 정색한 표정이 눈앞에 보이는 것 같았다.
“자, 선택해. 은숙이야? 나야?”
조철봉이 침을 삼켰고 지윤의 말이 이어졌다.
“나도 오늘밤 네가 필요해. 이런 기회는 두번 다시 오지 않는다는 걸 알아둬. 다만.”
지윤의 목소리가 이제는 조금 낮아졌다.
“오늘밤 날 만나고 나서 네가 은숙이를 어떻게 하든 난 모른척 하겠어.”
“….”
“하지만 오늘 은숙이부터 만난다면 나하고는 끝이야, 어때?”
조철봉은 기로에 서있는 자신의 입장을 깨닫고 전화기를 고쳐 쥐었다. 이제 열중하고 있어서 운전사의 반응에 신경을 쓸 여유도 없다. 지윤은 도망갈 구멍을 만들어 주기는 했다. 즉, 오늘 자기를 만나준다면 다음에 은숙을 어떻게 하든 양해하겠다는 조건이다. 따라서 이것은 지금 은숙에게 적당한 거짓말로 약속을 미뤄놓으면 다음에 충분히 기회가 있지 않으냐는 암시였다. 조철봉은 심호흡을 하고 나서 마음을 굳혔다. 닭을 먹을란다.
“난 은숙이 누나하고 만나겠어.”
일단 그렇게 말하고 났을 때 조철봉은 가슴이 개운해지는 한편으로 한쪽에 남아있는 찌꺼기를 뱉고 싶은 충동을 참지 못했다. 그래서 말을 이었다.
“은숙이 누나는 나하고의 섹스를 원하고 있어. 나도 마찬가지고. 우리는 이미 전희를 한 것이나 마찬가지야.”
“….”
“이젠 누가 끼어들어도 안돼.”
그때 전화가 끊겼으므로 조철봉은 의자에 등을 붙였다. 택시는 마침 은하호텔이 보이는 사거리를 통과하는 중이었다. 호텔에서 내린 조철봉이 키를 받아들고 방에 들어간 것은 그로부터 10분도 안되었다. 저고리만 벗어놓고 의자에 앉은 조철봉이 전화를 했을 때 은숙은 신호가 두번 울리고 나서 받았다.
“여보세요?”
은숙의 목소리가 떨리는 것 같았다.
“응, 누나, 나야.”
“거기 어디야?”
“어디긴 어디야.”
“방 잡았어?”
“응.”
“몇호실?”
“808호실.”
“그럼 내가 올라갈게.”
“빨리와, 누나.”
“응.”
은숙이 전화를 끊었을 때 조철봉은 가슴 가득히 숨을 들이켰다. 인생 77년 28105일. 그중 하루는 이렇게 행복하다.
박은숙은 15분쯤 후에 방으로 들어섰는데 조철봉과 시선을 마주치지 않았다. 가방을 든 채로 우물쭈물하다가 창가로 다가가 섰는데 얼굴은 굳어져 있었다. 조철봉이 은숙의 뒤로 다가가 섰다.
“누나, 긴장돼?”
창밖으로 머리를 돌린 은숙이 대답하지 않았으므로 조철봉은 두손을 뻗어 어깨를 부드럽게 쥐었다.
“흥분되지 않아?”
조철봉이 낮게 물었지만 은숙은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굳어진 것 같았다. 한걸음 다가선 조철봉이 은숙의 몸을 뒤에서 안고 다시 물었다.
“굳어진거야?”
“….”
“내가 풀어줄까?”
“….”
“어떤 자세가 좋아? 앞에서? 아니면 뒤에서? 그것도 싱거우면 내가 묶어줄까?”
그때 은숙이 몸을 비틀어 조철봉을 마주보았다. 조철봉이 허리를 감은 손을 잠깐 풀었으므로 이제는 마주보며 껴안은 자세가 되었다.
“싫어.”
은숙이 조철봉을 올려다보며 말했지만 눈의 초점은 잡혀 있지 않았다.
“뭐가 싫다는거야?”
조철봉이 하반신을 문지르면서 물었다. 그러자 철봉이 은숙의 허벅지 안쪽을 압박했다가 떼어지는 것이 반복되었다.
“묶는 것, 변태행위.”
은숙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는데 차츰 호흡이 가빠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알았어. 그럼 정상체위로 하지 뭐.”
머리를 숙인 조철봉이 은숙의 귀를 입술로 물면서 말을 이었다.
“누나는 한달에 몇 번씩이나 해?”
“다섯번. 아니, 두번.”
“진짜야?”
“아니, 한번.”
“한달에 한번?”
“아니.”
그때 조철봉이 귓불을 혀끝으로 건드렸으므로 은숙이 몸을 움츠렸다. 조철봉이 이제는 은숙의 목에 입술을 붙이고는 천천히 애무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한달에 한번도 아니란 말이야.”
“응.”
“그럼 뭐야.”
그러면서 조철봉은 손 하나를 뻗쳐 은숙의 스커트를 들치고는 팬티 속으로 거침없이 집어넣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과감하고 빠른 것이 낫다. 다 벗고 나서 애무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그러자 은숙이 다시 몸을 움츠리면서 엉덩이를 빼려는 시늉을 했다. 그 순간 조철봉의 손끝이 은숙의 골짜기를 덮었다.
“어머.”
은숙의 몸이 다시 굳어졌다. 그러나 조철봉은 망설이지 않았다. 중지를 뻗어 샘 안으로 반쯤 집어넣어 버린 것이다.
“어머.”
다시 놀란 외침을 뱉은 은숙이 이번에는 엉덩이를 더 뒤쪽으로 뽑았지만 조철봉이 당기는 바람에 다시 끌려왔다. 그리고 전투는 그것으로 끝났다. 이미 중지가 반쯤 들어간 터라 은숙은 가쁜숨을 허덕이더니 몸을 늘어뜨렸다. 조철봉의 경험에 의한 작전이다. 첫 만남에서 어색한 분위기가 계속될 때는 먼저 과감하게 시도를 해 버리는 것이 제일이다. 분위기 잡는다고 술을 마시거나 횡설수설대면서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보다도 이런 방법이 특효다. 이렇게 대번에 샘안으로 진입하면 그것이 손가락이 되었더라도 상대방은 무기력해져 버리는 것이다. 성문이 어쨌든 뚫렸으니까. 조철봉은 늘어진 은숙의 허리를 안았다.
“누나.”
조철봉이 불렀으나 박은숙은 대답하지 않았다. 은숙을 안고 침대로 다가간 조철봉의 가슴은 뛰었다.
“불꺼.”
조심스럽게 침대위에 눕혔을 때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은숙이 낮게 말했다. 조철봉은 즉시 방안의 불을 껐다. 그러자 창밖 도시의 야경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서둘러 옷을 벗어던진 조철봉이 은숙의 옆에 누웠다. 은숙은 정장차림 그대로였다.
“누나.”
은숙의 어깨를 당겨안은 조철봉이 먼저 스커트의 호크를 푼 다음 지퍼를 내렸다. 어디 이런 일이 한두번인가? 어둠 속이었지만 단 한번도 헛손질을 하지 않았고 스커트는 발 밑으로 끌려 내려갔다. 그 다음이 팬티였다.
조철봉의 손이 팬티에 닿았을 때 은숙이 주춤거렸지만 곧 엉덩이를 들어올려 팬티 벗기는 것을 도왔다. 그동안 조철봉은 은숙의 입술을 빨고 있었다. 키스는 가장 흔하게 사용되는 애무의 방법이지만 가장 자연스럽게 성감이 자극되는 곳이기도 한 것이다.
은숙의 입이 마침내 열리면서 혀가 끌려 나왔을 때 은숙은 마침내 알몸이 되었다. 브래지어 호크를 두번째에 풀거나 다섯번째에서야 풀거나 대국에는 거의 지장이 없다. 그러나 헛손질을 자꾸 하게 되면 리듬이 깨지며 세심한 작자는 조급해진다. 이것이 조루로 이어질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조철봉은 윗도리도 단 한번의 헛손질을 하지 않았다.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었지만 그야말로 매끄럽게 진행되었다.
“누나.”
알몸이 딱 겹쳐졌을 때 조철봉이 서로 마주 본 상태에서 은숙을 불렀다. 은숙은 가쁜 숨을 조철봉의 가슴에 대고 토해내는 중이었는데 대답 대신 몸을 더 붙였다. 이미 은숙의 몸은 달아올라 있었고 조철봉의 허벅지 한쪽이 뜨뜻했다. 은숙의 샘물이 넘쳐 흐르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해줄까?”
조철봉이 묻자 은숙이 손을 뻗어 철봉을 쥐었다. 지금까지의 태도에 비하면 과감한 변신이다. 조금 놀란 조철봉이 눈만 크게 떴을 때 은숙이 헐떡이며 말했다.
“그냥 넣기만 해줘.”
그러고는 조철봉의 몸을 위쪽으로 밀어 올리려는듯 어깨를 밀었다.
“어서.”
“나, 넣기만 해도 할 것같아.”
“천천히 해, 누나.”
“어서.”
“시간은 많다니까.”
“아이, 어서.”
은숙의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나, 미치겠다니까.”
조철봉은 못이긴 척 은숙의 몸 위로 올라갔다. 일부러 애를 태우려는 수작인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잠깐 애를 태우는 순간은 그야말로 천금과도 바꾸지 않을 만큼 소중하다. 은숙의 일생에서 이만큼 온몸이 저리도록 애단 순간이 과연 얼마나 있었던가? 내일 아침이면 잊게 될지라도 이 순간의 간절한 기다림은 삶의 보람으로 기록될 수도 있을 것이다. 다 저를 좋게 만들어 주려고 그러는데도 은숙은 원망스러운 표정으로 독촉했다.
“아아, 어서.”
조철봉은 은숙을 내려다 보면서 심호흡을 했다. 방은 어두웠지만 은숙의 상반신은 선명했다. 아담한 젖가슴은 마치 소녀같다.
“자기야, 어서”
은숙이 다시 조철봉의 철봉을 손으로 쥐면서 독촉했다.
조철봉은 박은숙의 골짜기에 철봉을 붙였다. 긴장한 은숙이 곧 받아들일 자세를 갖춘 채 기다렸지만 철봉은 골짜기 주위를 맴돌기 시작했다.
“아아.”
은숙이 아쉬움과 야릇한 쾌감이 섞인 탄성을 뱉었다. 샘에서는 샘물이 흘러넘치면서 방안은 터질 것 같은 은숙의 숨소리로 덮였다.
“빨리.”
은숙이 안타깝게 소리쳤을 때 조철봉은 더 이상의 산책은 적당하지 않다는 판단을 내렸다. 넘치면 좋지 않은 것이다. 조철봉이 다시 자세를 갖췄을 때 앓는 소리를 뱉던 은숙이 긴장했다. 느낌을 받았을 것이었다. 그순간 철봉이 천천히 샘 안으로 진입하기 시작했고 은숙은 포만감이 섞인 쾌감으로 입을 딱 벌렸다. 소리 질러 탄성을 뱉고 싶었지만 그 탄성의 와중에 쾌감의 느낌이 깎일까봐 음소거를 한 것이다. 그때 대신 조철봉의 입에서 신음이 뱉어졌다.
“으으음.”
은숙의 샘은 마치 꽃과 향기로 가득찬 데다 꿀물이 흐른다는 극락 같았다. 샘 안으로 진입한 철봉의 수만개 신경세포는 반겨 맞는 저쪽의 세포들과 엉켜 환희의 합창을 불렀으며 점점 더 강한 열락을 향해 함께 나아갔다.
“아유우우.”
은숙의 입에서도 마침내 쾌락을 참지 못한 탄성이 뱉어졌다. 이제 은숙은 조금 전의 수줍던 상태가 아니었다. 두 다리를 치켜들었다가 침대 위로 떨어뜨리는 동작을 반복하였고 두 팔로는 조철봉의 등을 악착같이 감싸안았다.
“더 깊게, 자기야.”
은숙이 전혀 다른 목소리로 재촉했다.
“아이고, 나 좋아.”
그렇게도 소리질렀고,
“터질 것 같아.”
했다가는,
“더, 더, 더….”
하면서 몸을 사정없이 들썩였다. 그것은 조철봉이 철봉을 겨우 서너번 진퇴하는 동안에 일어난 일이었다. 조철봉은 이제 곧 은숙이 절정에 오르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남녀 모두 마찰의 쾌감으로 절정에 닿게 되지만 결코 오래 한다고 더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는 것은 아니다. 분위기가 달아오르면 1분을 10분처럼, 10분을 한시간처럼 느껴지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조철봉이 하룻밤에 상대방을 최소한 서너번씩 절정에 끌고 올라가는 비법도 여기에 있다.
“아아.”
마침내 은숙의 샘이 좁혀지는 느낌이 오더니 입에서 굵은 탄성이 터졌다. 끝에 닿은 것이다. 조철봉은 그동안 수백명의 애인을 만났지만 그 느낌은 모두 달랐다. 단 한번도 같은 느낌을 받지 않았다. 신음이나 탄성의 소리가 한음절, 또는 두음절로 같았을지는 몰라도 그 탄력과 그 마찰, 그 압박감, 그 늪지에다 그 향내까지 어느 것 하나 같지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성은 신비롭다. 은숙이 몸을 뒤틀면서 숨을 딱 멈춘 것 같더니 곧 샘안에서 굵은 북채로 철봉을 두드리는 것 같은 느낌이 왔다. 샘이 좁혀지는 것이다. 그러더니 은숙이 긴 숨과 함께 탄성을 뱉어내면서 훌쩍였다. 그러고는 온몸을 늘어뜨리기 시작했다. 절정에 오른 모든 여자의 반응은 다 다르다. 조철봉은 은숙을 껴안고 귓불에 대고 뜨거운 숨을 뱉었다.
“자, 그대로 가만 있어, 누나.”
조철봉이 귀에 대고 속삭였다.
“다시 뜨거워질 테니까.”
그러고는 다시 철봉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은숙은 곧 다시 달아오를 것이고 그때는 노래를 거꾸로 불러야 될지 모른다.
박은숙과의 정사가 끝났을 때는 그로부터 한시간쯤 지난 후였다. 은숙은 그동안 네번 절정에 올랐다가 돌아왔는데 본인은 기억하지 못할 것이었다. 그것을 세고 있었다면 진짜 절정에 오른 것이 아니다. 조철봉이 세어본 것이다. 조철봉은 오늘 교가를 부른다든가, 애국가를 거꾸로 읽는 노력을 안 해도 되었다. 그것은 차츰 은숙에게 몰두하면서 냉정해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는 데에는 이지윤의 역할이 큰 몫을 했다. 지윤을 머릿속에 떠올리면 신기하게도 절제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은숙을 네번 절정에 올리면서 매번 지윤을 떠올렸고, 맨 마지막에 은숙이 거의 광란상태에 빠졌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지윤의 눈이 떠오른 순간 힘줄까지 튀어나왔던 철봉 안의 물줄기가 대번에 역류되었던 것이다.
은숙은 정사가 끝나고 나서 잠이 들더니 깨어나지 않았다. 조철봉이 정성스럽게 여운을 길게 품도록 애무를 해주자 그대로 잠이 들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조철봉은 침대에서 일어나 샤워를 하고 냉장고를 열어 음료수를 꺼내 이것저것 마셨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어느덧 시간은 새벽 3시반이 되어 있었다. 소파에 비스듬히 앉은 조철봉은 침대에 누워 잠든 은숙을 보았다. 스탠드의 불을 켜놓았으므로 은숙의 알몸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40대인데도 은숙의 몸은 군살이 거의 없는데다 육감적이었다. 키는 작아도 균형잡힌 몸매는 오히려 더 성적 매력이 돋보일 수 있는 것이다. 은숙의 납작한 아랫배가 호흡에 맞춰 고르게 오르내리는 것을 보던 조철봉은 들고 있던 주스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알몸인 채 사지를 아무렇게나 던져놓고 잠든 은숙의 자태는 지금까지의 어떤 자세보다 더 자극적이었다. 침대로 다가간 조철봉은 은숙의 옆에 누웠다. 그때 은숙이 잠에서 깨어났다. 본래 잠귀가 밝은 것 같았다.
“깼어?”
조철봉이 묻자 은숙이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곧 온몸을 오그렸다.
“잘 자더구먼.”
은숙의 어깨를 팔로 감아 안은 조철봉이 끌어 당기면서 말했다.
“어린아이처럼 말이야.”
“나, 오늘 같은 일 처음이야.”
조철봉의 가슴에 얼굴을 붙인 은숙이 낮게 말했다.
“정말 좋았어.”
“그런 것 같더군.”
손을 뻗은 조철봉이 은숙의 젖가슴을 부드럽게 애무했다. 그러자 아까부터 솟아있던 철봉이 자연스럽게 은숙의 허벅지 사이로 들어갔다.
“어머, 또.”
놀란 은숙이 엉덩이를 뒤로 빼는 시늉을 하더니 곧 다시 붙여왔다. 그러더니 허벅지 사이에 철봉을 끼웠다.
“너무 커.”
은숙이 더운 입김을 조철봉의 가슴에 뿜으면서 말했다.
“들어오는 느낌이 너무 좋아.”
“또 하고 싶은거야?”
“아니, 오늘은 그만.”
“그럼 다시 만나자는 말이군.”
“그럼 오늘로 끝내려고?”
머리를 든 은숙이 조철봉을 정색하고 보았다.
“나, 안 좋았어?”
“그건 왜 물어?”
“나하고 또 하고 싶은 생각이 없느냐고?”
은숙의 시선을 받은 조철봉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렇게 묻는 경우는 또 처음 겪는다. 그러나 어찌 하겠는가?
“왜 없어? 지금도 하고 싶은걸.”
조철봉은 박은숙의 어깨를 감싸 안은 채 잠자코 천장을 보았다. 은숙은 도합 다섯번의 절정에 올랐지만 자신은 아직 한번도 하지 않은 것이다. 장거리 기관차처럼 쉴새없이 이어지는 힘이 분출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대포를 발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 박은숙이 조철봉의 철봉을 손으로 감싸 쥐더니 뜨거운 숨결을 뱉으면서 말했다.
“여자가 이상한 남자하고 놀아나는 이유를 이제야 알겠어.”
은숙이 철봉을 잡은 손에 조금 힘을 주었다가 풀었다.
“이 맛에 빠지면 정말 남편이고 자식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 이제야 실감이 나.”
“그래.”
조철봉이 은숙의 어깨를 당겨 안았다.
“내일쯤이면 오늘밤 겪었던 일을 떠올리고 다리가 뒤틀릴거야.”
“나 몰라. 어떡해?”
“잘못하면 큰일 나겠군.”
“지윤이가 자기 조심하라고 했는데.”
그 순간 조철봉의 눈빛이 강해졌지만 은숙은 눈치채지 못했다. 은숙은 이제 조철봉을 자기라고 부르는 것이다. 몸을 돌린 조철봉이 은숙을 마주 보았다.
“날 조심하라고? 내가 왜?”
조철봉이 묻자 은숙이 눈웃음을 쳤다.
“자기가 여자 경험이 많은 남자 같다는 거야. 그래서 상처 받을 거라고.”
“오히려 그 사람이 남자 경험이 더 많을것 같아 보이더구먼 그래.”
“아냐.”
정색한 은숙이 머리까지 저었다.
“지윤이는 이혼 한번밖에 안했어.”
“이혼 한번밖에 안해?”
조철봉이 눈을 크게 뜨고 되묻자 은숙이 정정했다.
“결혼 3년 만에 이혼하고 혼자 산다고. 그리고 지윤이는 남자 안 밝혀.”
“그럼 여자 밝히나?
“아니래도.”
은숙이 이제 철봉은 놓았지만 조철봉의 가슴에 딱 안겼다. 두팔로 조철봉의 허리를 감아 안았고 두다리는 오므려 조철봉이 양 다리 사이에 곧게 뻗었다. 그 자세로 은숙이 말을 이었다.
“지윤이는 두살때 부모님이 이혼을 했어. 그래서 갓난아이때부터 친할머니가 지윤이를 키웠지. 그런데 지윤이가 초등학교 5학년때인가 아버지가 재혼을 하는 바람에 이번에는 외할머니한테 보내졌어. 그 사이에 어머니도 재혼을 해버렸거든. 지윤이는 외할머니하고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살았지.”
“싸가지가 없는 부모로군.”
“그런 부모들 많아, 요즘은.”
가볍게 조철봉의 말을 덮은 은숙의 말이 이어졌다.
“지윤이는 대학 다닐 때도 전혀 그런 내색을 하지 않았어. 대학 입학하고 나서 외할머니가 돌아가셔서 1학년때부터 혼자 살았는데도 우린 부모하고 같이 사는 줄로만 알았다니까.”
“….”
“독한 여자지. 그리고 한없이 약한 여자이기도 하고. 대학 졸업하고 직장 다니다가 남편되는 놈을 만났는데 그놈이 사기꾼이었어. 지윤이가 당한거지.”
어느덧 박은숙의 말에 열기가 올랐다.
“그 놈은 나도 잘 알아. 겉은 레오나르도 디캐프리오에다가 브래드 피트를 합성해 놓은 것처럼 잘 생겼지. 어지간한 TV 탤런트는 저리 가라야. 그런데 그놈은 주사가 있고 술 마시면 여편네를 두들겨 패. 그리고 사기꾼이야. 지금까지 제가 땀 흘려서 돈을 번 적이 없어. 모두 남의 등을 치거나 기생충처럼 붙어서 피를 빨아먹고 살아왔어.”
“요즘 세상에도 그런 놈이 있나?”
“있지, 바로 우리 눈앞에 있다니까? 지금도 그놈은 지윤이한테 한달에 한번씩 들러 용돈을 뜯어가지, 이혼한 지 10년도 넘었는데 말야. 지윤이가 왜 남자가 없는지 알아?”
그렇게 물었던 박은숙이 곧 제가 대답했다.
“그놈 때문이야, 그놈이 훼방을 놓는다고. 몇년 전에는 괜찮은 이혼남이 나타났는데 아이도 없고 중소기업 사장인데다 인품도 인물도 좋았어, 나이 차이도 세살 위였으니까 적당했고, 그런데 그놈이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지윤이가 그쪽 집안 어른들하고 인사를 하는 자리에 나타나 행패를 부린 거야, 그쪽 어른들이 기절을 하고는 끝났지, 그러고는 지윤은 아예 남자를 만나지 않는다고.”
“허, 그러면.”
은숙이 숨을 돌리는 순간을 이용해 조철봉이 물었다.
“지윤 누나는 처녀나 다름 없겠는데. 10여년 동안 남자 맛을 보지 못했을 거 아냐?”
“그래, 그건 확실해.”
자신있게 말한 은숙이 손을 뻗쳐 조철봉의 철봉을 조심스럽게 쥐었다.
“그놈 때문에, 그놈이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모르거든.”
“그놈 할일이 그렇게 없나? 지윤 누나만 쫓아 다니게?”
“경찰에 신고도 했었어, 그래도 안돼. 그놈은 두번인가 교도소에 가 있는 동안에도 사람을 시켜서 지윤이 뒷조사를 했으니까.”
“지독한 놈이군.”
“지윤이는 해결사를 고용했다가 오히려 그놈한테 고소당해서 혼이 났어. 그놈은 법에 대해서도 귀신이야.”
“지윤 누나는 무슨 일을 하는데?”
“강남에서 유명한 한정식 식당을 해, 들어보았어? 초원식당이라고.”
“처음 듣는데?”
“예약 손님만 받아, 한정식 1인분에 5만원인데도 일주일 전에 예약해야 돼.”
“별 이야기를 다 듣는구먼.”
조철봉이 기가 막힌다는 시늉을 해보이자 은숙이 덧붙였다.
“겪어보지 않으면 모른다니까? 나하고 친구들 몇명만 지윤이 사정을 알아. 그놈은 원수 이상이야. 업이라고, 업.”
“만나보고 싶구먼.”
혼잣소리처럼 말한 조철봉이 은숙의 허리를 당겨 안았다. 그러자 허벅지 사이에 끼여있던 철봉이 마침 골짜기를 건드리면서 샘을 찌르고 미끄러졌다.
“어머.”
놀란 지윤이 엉덩이를 비틀더니 머리를 들고 조철봉을 보았다.
“아까 그렇게 해놓고서도 아직도 왜 이렇게 단단해?”
“난 항상 그래.”
“난 한번만 더 하면 아주 죽어 버릴 것 같아.”
“한번 더 하자는 소리 같은데.”
“나, 축축해졌어.”
“그런 것 같구먼.”
그러자 침을 삼킨 은숙이 조철봉의 엉덩이를 당겨 안았다.
“한번만 해주면 안돼? 아주 간단하게.”
“간단하게?’
저도 모르게 풀썩 웃은 조철봉이 철봉을 은숙의 샘에 붙이고는 다시 물었다.
“어떻게 간단하게 하란 거야?”
“그냥.”
“그냥 넣기만 해?”
“응.”
이제 몇마디 대화로 분위기는 더 무르익었다. 애무보다도 이런 대화가 때로는 더 흥분시킬 수도 있는 것이다. 은숙이 반듯이 눕더니 조철봉의 어깨를 당겼다.
“어서 넣어줘.”
다음날 12시경 강남의 초원식당은 손님들로 붐볐다.
“야, 불황인데도 여긴 잘 되는구나.”
최갑중이 입을 딱 벌리고 놀라더니 조철봉을 보았다.
“일인당 5만원씩 계산하면 하루 점심 매상만 5백만원은 거뜬하게 올리겠습니다.”
그러더니 다가온 종업원에게 시치미를 뚝 떼고 말했다.
“오전에 예약했는데, 조철봉 사장님이쇼.”
“아아, 예.”
재빠르게 예약손님 명단을 훑어본 종업원이 앞장을 섰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종업원이 안내해 간 방은 복도 끝쪽 방이었다. 상에 좌석이 네개 만들어져 있었고 벽에는 동양화가 걸려 있었다. 운치있는 방이었다.
“그럼 상 준비해 올리겠습니다.”
종업원이 나갔을 때 갑중이 조철봉에게 물었다.
“이런 곳을 어떻게 알게 되셨습니까?”
“우연히.”
그랬지만 갑중은 미심쩍은 듯 얼굴을 펴지 않았다. 조철봉은 오전에 갑중을 불러 초원식당에 예약을 하라고 한 것이다. 물론 자신의 이름을 대라고 했다. 그때 가벼운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미닫이 문이 스르르 열렸다. 방으로 들어선 여자는 이지윤이었다.
“오셨어요?”
힐끗 갑중에게 시선을 준 지윤이 조철봉에게 존댓말을 썼다. 그러더니 갑중을 향해 머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이지윤입니다.”
“아아, 예. 저는 최갑중이라고.”
조철봉과 지윤을 번갈아보던 갑중이 건성으로 대답하고는 고쳐 앉았다. 대충 짐작이 간다는 얼굴이 되어 있었다.
“어제 잘 들어가셨어요?”
시치미를 뚝 뗀 얼굴로 옆쪽에 앉은 지윤이 물었으므로 조철봉도 비슷한 표정을 짓고 대답했다.
“아, 예. 잘 들어갔습니다.”
“갑자기 우리 식당에 예약을 하셔서 놀랐어요.”
“은숙 누님이 꼭 가보라고 하셔서.”
“그럴리가.”
“아니, 은숙 누님한테서 이야기 다 들었습니다.”
그러자 지윤의 표정이 굳어졌다.
“무슨 이야기를 해요?”
“다 해줍디다.”
그러고는 조철봉이 눈으로 옆에 앉은 갑중을 가리켰다.
“그래서 내 동생을 데려 왔습니다. 그런 일에는 전문가거든요.”
“무슨 일인데요?”
이맛살을 찌푸린 갑중이 끼어들었다.
“저는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습니다, 형님.”
그때 지윤이 잠자코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방을 나갔다.
“형님.”
갑중이 다시 부르자 조철봉은 어젯밤 은숙한테서 들은 지윤의 인생을 다 이야기해주었다. 열기를 띤 조철봉의 이야기가 다 끝났을 때 한번도 맞장구를 쳐주지 않고 듣기만 하던 갑중이 입맛을 다셨다.
“그런 인생 많습니다, 형님.”
조철봉의 시선을 받은 갑중이 말을 이었다.
“그보다 더 지독한 사연도 많아요, 형님.”
“그래서?”
김이 새다못해 배신감까지 들어버린 조철봉이 눈을 부릅떴다.
“어쩌자는 거야? 이 망할놈아. 잠자코 들어.”
그러고는 손끝으로 갑중의 코를 겨누었다.
“오늘 중으로 이지윤과 전남편놈에 대한 조사를 해와. 철저하게, 만사 제쳐놓고.”
이지윤의 전 남편 이름은 김기철, 사기와 폭력으로 두번씩 형을 살았으며 45세에 학력은 고교중퇴, 현재 천호동에서 자동차 매매업을 하고 있지만 최근 3개월간의 실적은 전무인 상태였다. 주거지는 천호동의 원룸 오피스텔, 주위의 평판은 의외로 좋다. 잘 다니는 식당과 사우나, 카페 종업원들은 하나같이 김기철을 매너 좋은 사장님으로 칭찬했다.
그러나 2개월 전부터 김기철은 경찰의 수배를 받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최소한 2년 이상의 형을 살게 될 것이었다. 왜냐하면 밀린 빚을 받아준다고 해놓고는 채무자를 납치, 폭행하여 돈을 강탈한 데다가 그 돈을 채권자에게도 넘겨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양쪽으로부터 고소를 당한 처지였다. 오후 7시가 되었을 때 최갑중이 서류를 탁자 위에 펼쳐놓고 보고했다.
“김기철 같은 놈은 요즘 세상에서 드문 종자지요. 이런 놈이 어떻게 지금까지 남아 있었나 할 정도로 말입니다.”
갑중이 쓴웃음을 지은 얼굴로 조철봉을 보았다.
“악질입니다. 비열한 놈이고요. 이런 놈은 강자 앞에서는 꼬리를 다리 사이에 넣은 개가 되었다가 약자한테는 잔인한 야수가 되지요.”
“흠.”
서류를 들춘 조철봉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지윤과의 결혼생활은 2년이 아니라 4년이야?”
“서류상에는 그렇게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정색한 갑중이 말을 이었다.
“당시 옆집에 살던 여자한테 물어 보았더니 2년쯤 살다가 이지윤씨가 집을 나갔다고 합니다. 2년동안 산 것은 맞습니다.”
“이혼 이유는?”
“김기철은 미국에서 대학을 나왔다고 사기를 쳤지요. 아마 2년쯤 살다보니 본색이 다 드러났기 때문일 겁니다.”
“요즘도 이지윤을 못살게 구나?”
“일주일에 한번씩 나타납니다.”
“그놈 배후는?”
“이틀만 더 시간을 주시지요.”
“좋다.”
“그런데.”
다시 정색한 갑중이 조철봉을 보았다.
“이지윤씨가 상속받은 유산은 대략 2천억원 가까이 됩니다.”
“뭐라고?”
놀란 조철봉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이냐?”
“아니, 모르고 계신 겁니까?”
이번에는 갑중의 이맛살이 찌푸려졌다.
“이지윤씨 생부가 작년에 죽으면서 부동산을 남겨준 겁니다. 강남 요지의 빌딩 6개 동인데 2천억원 이상이 될지도 모릅니다.”
“….”
“김기철이 눈을 까뒤집고 달려드는 이유가 이것 때문이죠. 그놈은 일주일에 한번꼴로 이지윤씨를 찾아와 행패를 부리고 간다는 겁니다. 못살게 굴면 뭔가 떨어질 것으로 생각하는 거죠.”
“….”
“이놈 때문에 이지윤씨 옆에는 남자들이 꼬이지 않습니다.”
그러고는 갑중이 입술을 비틀고 웃었다.
“이놈이 파리떼를 쫓는 역할은 해온 것이지요. 그럼 형님은 이놈만 넣으면 되겠습니다.”
“….”
“형님은 꿩 먹고 알 먹게 되시는 거죠.”
“꿩 먹고 알 먹다니?”
생각에서 깨어난 듯 조철봉이 눈의 초점을 잡고 물었다.
“야, 인마. 너, 조철봉이를 뭘로 보고.”
조철봉이 으르렁거렸지만 최갑중은 눈도 깜박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이야 오지랖이 넓은 자선가인 척하고 있지만 조철봉의 근본을 갑중만큼 훤히 꿰고 있는 작자도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틀 후가 되었을 때 갑중은 조철봉의 사무실에 다시 나타났다.
“형님, 김기철은 배후에 폭력배 몇 명을 이용하고 있지만 돈 관계로 사이가 나빠져 있습니다. 김기철이 약속한 돈을 주지 않았다는군요.”
소파에 앉은 갑중이 얼굴을 찌푸렸다.
“조사를 할수록 더러운 꼴이 점점 더 드러나 구역질이 납니다. 그리고.”
갑중의 말이 이어졌다.
“이놈은 중계동에 살고있는 이혼녀한테도 열흘에 한번 정도 찾아가고 있더만요. 여자는 이놈보다 네살 위인 49세인데 시장에서 옷가게를 합니다.”
조철봉의 시선을 받은 갑중이 어깨를 들썩여 보였다.
“그 여자한테서도 돈을 뜯어갑니다. 그런데 자주 구타를 해서 동네에 소문이 파다하게 났더군요. 병원에도 몇 번 실려 갔다고 합니다.”
“….”
“동네 사람들은 김기철이 남편인 줄 알고 신고도 안했답니다. 그리고 그 여자한테 어떻게 협박을 했는지 꼼짝 못하고 산다는군요.”
“더러운 놈이구먼.”
마침내 조철봉도 갑중에게 동조했다.
“이런 놈은 사회에서 매장해야 된다.”
“그런데 이런 놈일수록 귀신같이 법망을 빠져나간단 말입니다.”
갑중의 목소리가 열기를 띠었다.
“지금 수배 중인데도 2년 가깝게 활개를 치고 돌아니는 것을 보십시오. 저도 이놈 뒷조사를 하면서 한 번도 이놈을 목격하지 못했다니까요.”
조철봉은 잠자코 머리를 끄덕였다. 김기철은 용의주도한 성격일 것이었다. 앞뒤를 재고 행동하며 항상 사방을 경계한다. 짐승보다도 민감한 반사 신경을 갖추었고 감각도 뛰어나서 어지간한 함정은 금방 알아챈다. 조철봉은 김기철의 행태를 제 손금을 보듯이 알수 있었다. 왜냐하면 바로 자신이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날 저녁, 조철봉이 초원식당에 나타났을 때 이지윤은 눈만 깜박였다. 조철봉은 예약도 하지 않았으며 혼자였고 거기에다 저녁을 먹기에는 늦은 시간이었다. 저녁 9시가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웬 일이야?”
오늘도 손님이 많았으므로 문쪽에 자리를 겨우 만들어 조철봉을 안내한 지윤이 정색하고 물었다.
“혼자 온 거야?”
“아, 그럼.”
조철봉이 보고도 모르겠느냐는 듯이 쌀쌀맞게 대답하고는 지윤을 흘겨보았다.
“몇시에 끝나?”
“응?”
“아, 식당 몇시에 끝나느냐구?”
“왜?”
앞쪽에 어설프게 앉은 지윤이 건성으로 묻더니 주위를 둘러보는 시늉을 했다. 바로 옆상에서는 7, 8명의 사내들이 떠들썩하게 술좌석을 벌이는 중이었고 뒤쪽은 여자들의 계모임인 것 같았다. 50여평이 넘는 방안은 손님들의 소음으로 떠들썩했다. 조철봉이 다시 목소리를 높여 물었다.
“몇 시에 같이 나갈 수 있어?”
그러자 지윤이 머리부터 먼저 흔들었다.
“오늘은 안 돼.”
“왜 안 돼?”
“못 나가.”
그렇게 말하는 지윤의 표정은 차가웠다.
“글쎄, 왜 못 나가느냐구?”
다시 조철봉이 따지듯 물었을 때 옆쪽 자리에서 두어 명의 사내가 머리를 돌려 이쪽을 보았다. 그러자 지윤의 표정이 더 굳어졌다.
“오늘은.”
입을 열었던 지윤이 다시 주위를 둘러보더니 목소리를 낮췄다.
“일이 있어서 안돼.”
“약속이 있어?”
“그래, 약속이 있어.”
“남자하고?”
“그래, 남자하고.”
“애인이야?”
그러자 지윤이 눈을 치켜뜨고 조철봉을 올려다보았다. 입술이 꾹 닫쳐져 있었고 어금니를 물었는지 볼의 근육이 단단하게 드러났다.
“아냐.”
뱉듯이 말한 지윤이 자리에서 일어났으므로 조철봉은 입맛을 다셨다. 종업원을 불러 한정식 1인분을 시켜 소주를 반주로 마신 조철봉이 초원식당을 나왔을 때는 10시반이 되어갈 무렵이었다. 그동안 지윤은 모습을 보이지 않았는데 조철봉이 계산을 마치고 식당 밖으로 나왔어도 나타나지 않았다. 식당 앞에 선 조철봉의 옆으로 사내 하나가 다가와 섰다.
“가게 사장님은 지금 길 건너편… 골목안에 있는 흑마 카페에 계십니다.”
사내가 말을 이었다.
“카페 앞에도 두 명이 지키고 있습니다.”
“그놈은?”
조철봉이 묻자 사내가 어둠속에서 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아주 조심스러운 놈이더군요. 먼저 저쪽 식당에서 전화를 해서 가게 사장님을 식당 앞으로 오라고 한 다음에 카페로 함께 이동했습니다. 그리고 카페 안에는 경호원 한 놈이 입구 근처에 앉아 있습니다. 그놈이 식당에서부터 따라왔구요.”
쓴웃음을 지은 조철봉이 잠자코 머리를 끄덕였다. 지윤이 식당 안에서 불안한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던 것도 감시자 때문이었던 것이다. 사내가 팔목시계를 내려다보더니 이제는 혼잣소리로 말했다.
“이제 올 때가 되었는데요.”
그러고는 사내가 서둘러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더니 핸드폰을 꺼내어 귀에 붙였다. 전화가 걸려온 것이다. 몇 번 대답만 하던 사내가 핸드폰을 귀에서 조금 떼고 조철봉에게 말했다.
“강남서 강력계 형사들이 지금 막 카페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사내는 이미 경찰에 연락을 해놓은 것이다. 퇴직 경찰 출신으로 용역회사를 운영하고 있는 강수동은 최갑중의 소개로 알게 되었지만 조철봉의 사업에 꼭 필요한 인재였다. 물론 강수동에게 조철봉은 주거래선이었으니 빅 바이어가 된다.
“아, 지금 그놈을 잡고 밖으로 나왔답니다.”
카페 앞을 지키고 서 있는 두 명의 부하들로부터 중계방송을 듣는 강수동이 다시 보고했다.
“수갑을 채웠다는대요. 경호원은 놔둔 모양입니다. 그까짓 피라미를 잡아가야 귀찮기만 하죠.”
그들은 초원식당 건너편의 벽에 등을 기대고 서 있었는데 마치 한가하게 밤거리를 구경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때 수동의 중계가 이어졌다.
“그놈이 차에 탔다고 합니다. 결과를 확인하려고 제 부하 두 놈이 경찰서까지 따라갈 것입니다.”
그러자 머리를 끄덕인 조철봉이 발을 떼었다. 지금 이지윤은 혼자 있을 것이었다. 바로 길 건너에 있다.
조철봉이 길을 건넜을 때 바로 이지윤이 골목 밖으로 나왔다. 밤이었지만 이쪽 지역은 행인의 통행이 많았고 상점의 불빛이 환한 번화가였다. 조철봉이 다가가자 지윤은 시선이 마주쳤는데도 멍한 표정으로 바라만 보았다. 가깝게 다가선 조철봉은 지윤의 눈에 초점이 잡혀 있지 않은 것을 알 수 있었다.
“어이, 누님.”
조철봉이 불렀을 때 소스라치며 놀란 지윤이 그때서야 눈의 초점을 맞추고 조철봉을 보았다.
“아아.”
“누님, 나하고 같이 가지.”
다가선 조철봉이 지윤의 팔을 잡았다.
“어, 어디로.”
지윤이 잡힌 팔을 당겼으나 힘이 실려 있지 않았다. 조철봉은 지나는 택시를 잡아 지윤을 밀어 태웠다. 이제는 순순히 택시에 오른 지윤이 옆에 탄 조철봉에게 물었다.
“내가 여기 있는 줄 어떻게 알고 온거야?”
“보스턴 호텔로 갑시다.”
먼저 운전사에게 행선지를 말하고 난 조철봉이 지윤을 보았다.
“김기철이는 앞으로 3년은 나타나지 않을거야.”
숨을 들이켠 지윤이 얼굴을 굳혔고 조철봉의 말이 이어졌다.
“변호사한테 물어보았어. 그놈은 대법원까지 간다고 해도 3년은 틀림없다는군. 내기를 해도 좋다고 했어.”
“….”
“그러니까 누님은 3년동안 해방된 셈이지. 아니, 3년이 아냐.”
머리를 저은 조철봉이 정색하고 지윤을 보았다.
“3년후에 나와서 다시 괴롭히면 곧장 다시 잡아넣을 테니까. 그러면 또 몇년을 들어가 살게 되는거지. 내가 그놈이 나오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집어넣을 수도 있어.”
“어떻게 알았어?”
그때 지윤이 낮게 물었으므로 조철봉은 등받이에 상반신을 붙였다. 택시는 밤거리를 거침없이 달려가는 중이었다.
“김기철 그놈은 중계동에 사는 오금숙이라는 여자의 기둥서방 노릇도 하고 있어. 오금숙은 시장에서 옷가게를 하는데 여러 번 맞아서 정신과 치료도 받았어.”
조철봉이 낮게 말했지만 지윤은 이제 숨도 멈추고는 모두 들었다. 다시 조철봉의 말이 이어졌다.
“그놈은 여자의 약점을 노리고 집요하게 괴롭히는 악당이지. 아니 악마같은 놈일거야. 그런 놈은 사회에서 아예 제거해 버려야 된다고.”
“….”
“내가 조사를 했어.”
“….”
“이제는 마음 편하게 살라구.”
그 순간이었다. 지윤이 두손으로 얼굴을 감싸더니 어깨를 들먹였다. 당황한 조철봉이 입맛만 다셨고 지윤은 한동안 어깨를 들먹이며 울더니 이윽고 손으로 눈물을 닦고 말했다.
“고마워.”
“아니, 뭐.”
“정말 혹이 떼어진 것 같아.”
조철봉이 건네준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지윤이 말을 이었다.
“난 무서워서 경찰에 신고도 하지 못했어. 가만 안 둔다고 하는 바람에.”
“그런 놈 협박에 넘어가면 안된다고.”
“고마워.”
다시 말한 지윤이 길게 숨을 뱉더니 조철봉의 어깨에 몸을 기대왔다. 조철봉은 팔을 뻗쳐 지윤의 상반신을 안았다. 지윤에게서 옅은 체취가 맡아졌고 그 순간 조철봉의 가슴은 편안해졌다.
보스턴호텔은 조철봉이 자주 애용하는 곳 중의 하나로 조용한데다 시설이 깨끗했다. 이지윤은 호텔 방안에 들어설 때까지 거의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다만 방문이 닫히고 둘이 있게 되었을때 침대 끝에 앉아 폐에 공기가 10리터는 들어 있었던 것처럼 길게 숨을 내쉬었을 뿐이다.
“한잔 마실거야?”
냉장고를 열면서 조철봉이 물었어도 지윤은 머리만 저은 채 입을 열지 않았다. 조철봉은 캔맥주를 꺼내 혼자 마시면서 지윤을 곁눈으로 보았다. 지윤은 홀가분해진 표정 같게도 보였지만 반은 넋이 나간 것 같기도 했다.
“어이, 누님, 혹시 그놈이 잡혀간 것이 마음에 안좋아? 그래?”
조철봉이 묻자 지윤이 화들짝 놀라 상반신을 세웠다.
“내가 왜?”
“아직도 늘어져 있는 걸 보니까 말이야, 이젠 기운을 낼 때가 되었지 않아?”
“10년이 넘었어, 15년이야.”
입술만 달싹이고 말했던 지윤이 시선을 돌려 조철봉을 보았다.
“그게 몇시간에 풀릴 것 같아?”
“그날 말이야.”
한모금 맥주를 삼킨 조철봉이 지윤에게 물었다.
“나하고 처음 만났던 날, 내가 은숙이 누나하고 빠져 나가니까 날 나오라고 했지 않아?”
지윤의 시선을 잡은 조철봉이 정색했다.
“그때도 그놈이 뒤를 미행했을텐데 어쩌려고 그런거야?”
“부딪치게 하려고.”
망설이지도 않고 대답한 지윤이 다시 길게 숨을 뱉었다.
“지쳤거든, 그놈하고 철봉씨하고 싸우게 만들 생각이었지. 그놈은 나한테 노리는 것이 있었으니까 심하게 대하지는 못했을테니까.”
“그랬군, 하마터면 내가 당할 뻔했네.”
“철봉씨가 잘한거야.”
“그럼 그동안 그놈 때문에 다른 남자는 만나지 못했겠군.”
조철봉의 말에 지윤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까짓 것이 뭐가 중요하다고.”
“하긴 안하고 살아가는 사람도 많지.”
“피곤해.”
지윤이 어깨를 늘어뜨렸을 때 자리에서, 일어선 조철봉이 다가가 섰다.
“내가 샤워를 시켜줄게 일어서.”
“미쳤어.”
놀란 지윤이 조철봉의 몸을 밀었다.
“저리 가.”
“내가 온몸에 비누질을 해줄게. 머리 끝에서 발가락까지.”
“저리 가라니까.”
“어쨌든 샤워나 해.”
혀를 찬 조철봉이 지윤의 겨드랑이에 팔을 넣고는 일으켜 세웠다. 지윤이 몸을 비틀었지만 곧 포기한듯 조철봉의 가슴에 안긴채 말했다.
“놔, 내가 샤워할테니까.”
“오래 그걸 안해서 몸이 굳어진거야? 왜 이렇게 빼는거야?”
“그냥 싫어서 그래.”
“가만있기만 해.”
조철봉이 지윤의 블라우스 단추를 풀면서 말했다.
“내가 알아서 해줄테니까.”
“아, 글쎄.”
“그만.”
지윤의 블라우스를 벗긴 조철봉이 브래지어를 끌어내리자 젖가슴이 드러났다.
마치 처녀 젖가슴처럼 탄력이 있는데다 젖꼭지는 콩알만 했다. 지윤이 두손으로 젖가슴을 가리더니 몸을 비틀었다.
“저리 가, 보지마.”
조철봉은 바로 눈밑에 있는 이지윤의 둥근 어깨를 보았다. 피부는 윤기가 흘렀고 도톰하게 솟아오른 젖가슴을 본 순간에 한입에 넣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심호흡을 한번 하고서 절제했다. 지금부터 자신과의 싸움이 시작되는 것이다. 자신의 욕망을 누르면 누를수록 상대방의 쾌락은 증가된다. 만물의 영장인 인간만이 고뇌하고 인내하면서 상대의 쾌락을 위해 헌신하는 것이다. 개가 섹스를 하면서 인내와 고뇌를 하겠는가? 염소가 헌신한다는 생각을 하면서 섹스를 하겠는가? 역설적으로 말하면 생각할 수 있는 기능을 갖춘 인간이 제 욕심만 채우려고 그 짓을 한다면 개와 염소보다 못한 생물이 되지 않겠는가?
“저리 비켜.”
그때 지윤이 조철봉의 가슴을 밀었다. 잠깐 조철봉이 생각에 빠진 시간은 길어야 2초 동안이었지만 그것으로 리듬이 깨질 수도 있는 것이다. 조철봉은 비키는 대신 지윤의 스커트 후크를 풀었다. 그러고는 거침없이 지퍼를 내리자 스커트가 스르르 밑으로 흘러내렸다. 이제 지윤은 팬티 바람에 구두를 신은 차림이 되었다.
“누님.”
조철봉이 지윤의 허리를 당겨 안고는 귀에 대고 속삭였다.
“누님 몸은 그야말로 처녀로구만.”
“시끄러” 했지만 100만명의 40대에게 이렇게 말해준다면 비정상인 대상을 제외하고 100% 좋아할 것이었다. 오차범위도 없다. 조철봉은 지윤의 귓불을 입술로 씹었다가 곧 입술로 옮겨갔다. 그러자 지윤이 기다렸다는 듯이 두 팔로 조철봉의 목을 감아 안고는 상반신을 딱 붙여왔다. 남녀간 어색한 분위기는 서로 몸을 부딪고 나면 급속도로 가셔진다. 그것을 지윤도 알고 있는 것이다. 조철봉의 입술이 덮여왔을 때 지윤은 자연스럽게 입을 열어 받았다. 이 사이로 길고 축축한 혀가 나오면서 조철봉의 혀를 감았다. 조철봉은 지윤의 혀만을 느끼면서도 몸의 상태를 측량할 수 있었다. 지윤은 갈구하고 있었다. 갈증난 사람처럼 성급해져 있는 것이다. 벌써 숨소리가 가빠져서 목구멍으로 바람이 새는 것 같은 소리가 들리는 것을 봐도 그렇다.
“으응, 응.”
지윤이 이제는 조철봉의 혀를 빨면서 콧소리를 내었다. 그러면서 하반신을 딱 붙이고는 비비대었는데 이미 앞뒤 분간을 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어가고 있다.
“누님.”
조철봉이 팬티를 끌어 내리면서 불렀으나 지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숨소리가 더 가빠지면서 이제는 조철봉의 목을 자꾸 옆으로 당겼다. 옆쪽에는 침대가 있는 것이다.
“누님, 잠깐만.”
조철봉이 지윤을 안았던 두 손을 풀고는 한걸음 물러났다. 그러고는 옷을 벗어 던졌는데, 다 그렇지만 이때만큼 옷이 더디게 벗겨지는 때가 없다. 셔츠 소매 단추를 풀지도 않아서 소매가 뒤집혀져 벗겨지는 경우도 흔하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지윤이 달아오른 후였으므로 어색한 분위기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제정신을 차린 지윤이 제 꼴을 보면 한달쯤 얼굴을 들고 다니지 못하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홀랑 벗은 알몸에 구두를 한짝만 신었는데 아까 팬티가 벗겨지는 바람에 같이 벗겨진 것이다. 나머지 한짝도 벗으면 될 것을 한쪽 발을 뒤꿈치로 치켜든 채 서 있다. 이윽고 알몸이 된 조철봉이 지윤을 다시 안았다.
“자, 누님, 샤워하지.”
조철봉이 지윤을 욕실로 끌었다.
“아, 싫어.”
정신이 든 이지윤이 엉덩이를 뒤로 뽑았지만 조철봉에게 끌려 욕실 안으로 들어섰다. 조철봉은 지윤과 함께 샤워기 앞에 섰다.
“잠깐, 내 머리.”
그때는 지윤이 체념한 듯 두리번거리며 무언가를 찾았다. 그러더니 비닐캡을 찾아 머리 위에 덮어썼을 때 조철봉은 샤워기의 꼭지를 틀었다. 지금까지 조철봉은 수백명의 여자를 상대했지만 모두 달랐다. 크게 말해서 분위기에서부터 사소한 부분인 숨소리까지, 몸의 구조에서 반응에 이르기까지, 거기에다 살아온 인생까지 다 다른 것이다.
따뜻한 물줄기가 쏟아져 나왔으므로 지윤은 턱을 들고는 눈을 감았다. 그러자 상체가 조금 휘어지면서 젖가슴이 더욱 팽팽해졌고 도톰한 아랫배가 두드러졌다. 40대 초반의 나이였지만 20대로도 믿겨질 만큼 잘 빠진 몸매였다. 조철봉은 지윤의 어깨를 감싸안은 자세로 옆에 서서 물줄기를 맞았다.
“누님.”
조철봉이 지윤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지금 무슨 생각을 해?”
“그냥.”
눈을 감은 채 지윤이 몸을 조철봉에게 조금 더 기대었다. 표정이 편안해져 있었다.
“아무 생각 없어.”
“좋은거야?”
“응, 좋아.”
“이제 우리 둘뿐이야.”
“응.”
“아무도 방해하지 못한다구.”
“으응.”
지윤의 몸이 이제는 조철봉에게 완전히 기대어서 비키면 쓰러질 상태였다. 조철봉이 옆에 놓인 비누를 집어서는 지윤의 어깨부터 문질렀다. 샤워기의 물을 일단 끄고 나서 지윤의 어깨와 가슴, 허리와 엉덩이, 거기에다 짙은 숲까지 비누를 골고루 칠한 후에 두 손으로 문지르기 시작했다.
“으음.”
조철봉의 두 손이 젖가슴을 정성스럽게 문지를 때 지윤의 입에서 다시 신음이 울렸다. 조철봉은 마치 흰 조각품을 다듬는 조각가처럼 두 손으로 젖가슴을 쓸어 올렸다가 내렸다. 그러자 젖꼭지가 흰 비누거품 사이에서 발딱 솟아올랐고 지윤의 신음은 더 높아졌다.
“으으음.”
조철봉은 이제 지윤의 뒤에 몸을 붙였다. 그러고는 두 손으로 허리와 아랫배를 쓸어내리기 시작했다. 비누는 미끄러웠고 거품이 잘 일어났다.
“아아.”
지윤이 머리를 뒤로 젖히면서 조철봉의 어깨위에 올려놓았다. 그러더니 초점이 잡히지 않는 눈으로 조철봉을 보았다.
“아아, 좋아.”
“누님, 이런 느낌 얼마만이야?”
조철봉이 속삭이듯 묻자 지윤이 손을 뒤로 뻗어 철봉을 감싸 쥐었다.
“나, 처음이야.”
“정말이야?”
“응, 그래.”
지윤이 조철봉의 철봉을 조심스럽게 움켜쥐더니 허덕이며 말했다.
“너무 좋아.”
“그러면 서둘지마.”
이제 두 손으로 지윤의 골짜기를 문지르면서 조철봉이 말했다. 지윤의 숲이 마치 폭설에 덮인 것처럼 흰 비누거품으로 묻혀졌다.
“아아아.”
지윤이 몸을 비틀면서 탄성을 뱉었다.
“나, 못참겠어.”
이지윤의 몸은 눈처럼 흰 거품에 묻혀 있었다. 조철봉과 몸이 부딪힐 때는 서로 미끄러지면서 거품이 일어났는데 지윤은 그때마다 짜릿한 쾌감을 받았다. 지윤은 거품에 묻힌 뱀장어처럼 온몸을 뒤틀었다. 조철봉이 뒤에서 안고 애무하고 있었으므로 머리가 뒤로 제쳐졌고 다리 한쪽은 조철봉의 다리를 기묘하게 감았다. 거기에다 한손은 조철봉의 철봉을 뒤로 돌려 쥔데다가 다른 한손은 목을 감았으니 기괴한 자세였다. 이런 꼴은 지금까지 한번도 만들어본 적이 없다.
“아아.”
조철봉의 두손이 이제는 뒤에서 골짜기 안으로 좁혀 들어왔으므로 지윤은 마음껏 탄성을 뱉었다. 지윤은 엉덩이를 비틀며 배를 한껏 앞으로 내질렀지만 공허한 앞쪽을 느끼게 되자 더욱 안달이 났다.
“이제 그만.”
소리치듯 말한 지윤이 몸을 와락 돌리는 바람에 조철봉의 두손도 미끄럼을 타고 헛손질을 해버렸다. 지윤이 가볍게 몸을 돌려 조철봉과 마주보고 서게 된 것이다.
“넣어줘.”
조철봉의 목을 두손으로 감싸안은 지윤이 하반신을 붙인 채 문지르며 말했다.
그러자 곤두선 철봉이 사정없이 허벅지와 골짜기, 샘 입구까지 누르며 지나갔으므로 지윤은 목에서 탄성이 울려나왔다. 마치 고양이의 가르랑거리는 소리 같았고 두눈은 치켜뜨고 있었지만 한쪽 눈동자가 조금 비뚤어진데다 초점이 잡혀있지 않았다. 조철봉은 지윤의 허리를 감아 안고 귀에 대고 물었다.
“지금 해줘?”
“응, 빨리.”
지윤이 다시 붙인 하반신을 흔들더니 그르렁거렸다.
“여기서?”
“으응.”
“비누질한 채로?”
“아아, 빨리.”
이제는 견디지 못한 지윤이 조철봉의 철봉을 두손으로 움켜쥐었다. 그리고 서둘러 샘에 넣으려고 했으므로 조철봉은 엉덩이를 뒤로 뺐다. 미끄덩 하는 촉감과 함께 철봉은 힘센 뱀장어처럼 지윤의 손에서 빠져나왔다. 비누가 묻은 철봉은 뱀장어보다 더 미끄러워져 있는 것이다.
“아아이.”
애가 탄 지윤이 몸을 더 붙이더니 눈을 부릅떴다.
“자기야, 나 죽겠어.”
“조금만 참아, 누님, 더 끌어올렸다가 넣자고.”
“아아, 싫어.”
지윤이 와락 소리치더니 다시 철봉을 움켜쥐었지만 금방 또 빠져나갔다.
“지금 해!”
버럭 소리친 지윤을 바라본 조철봉은 숨을 멈췄다. 지윤의 눈에 가득 눈물이 고여 있었던 것이다.
“알았어.”
서둘러 말한 조철봉이 지윤의 한쪽 다리를 들어올리고 자세를 갖추었다. 둘이 마주보며 서있는 중이었으므로 그래야 자연히 조준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지윤이 바로 자세를 맞춰주었고 다음 순간 조철봉은 천천히 철봉을 진입시켰다. 비누 범벅이 된 철봉인데다 지윤의 샘은 넘쳐흐르는 중이어서 윤활유가 잔뜩 칠해진 셈이었다. 그러나 지윤의 입에서 고통을 참는 것 같은 억누른 신음이 터져나왔다. 그 순간 조철봉도 이를 악물었다. 그렇게 윤활유를 칠했어도 철봉은 힘들게 진입하고 있는 것이다
“뻑뻑하구먼.”
조철봉이 지윤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감촉이 좋아.”
분위기에 따라서 받아들이는 반응이 다르겠지만 조철봉이 지금 뱉은 표현은 찬사와 같다. 그리고 넋이 반쯤 떠있는 상태였어도 지윤 또한 그렇게 받아들였다. 철봉은 샘 안으로 천천히 미끄러져 들어갔지만 압력이 강했다. 그만큼 지윤의 샘이 신축성이 강했다는 표현도 된다.
“으음.”
이제 지윤은 빈틈없이 조철봉을 안은 채 온 신경을 샘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집중한 나머지 신음도 이를 악물며 참는 바람에 목구멍에서 울리는 소리만 났다. 조철봉이 끝까지 철봉을 밀어붙인 시간은 5초 정도였지만 지윤에게는 4백m 트랙을 한바퀴 돈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 5초 동안에 쾌락의 시작과 끝을, 자세하게 표현한다면 쾌락의 진면목을 확실하게 느낀 것 같았다. 인간은 죽는 순간에 인생에서 겪었던 모든 일들이 ‘팟’하고 스쳐 지나가며 그 1초도 안되는 순간에 그것을 다 본다고 한다. 인간은 지금보다 몇백만배 더 빠른 화면을 볼 수 있을지 모른다. 인간은 뇌의 몇백만분의 일 밖에 사용하지 못하고 소멸된다고 하지 않는가. 따라서 지윤은 철봉이 진입하는 그 5초 동안에 긴 여정을 겪었다. 그렇다고 지난 반생이 스쳐 지나간 것은 아니다. 철봉이 다시 빠져나오는 동안에 지윤은 절정으로 치달아 올랐는데 이번에도 소리를 못지르고 이를 악물며 참았다. 소리가 쾌락의 진미를 감소시킬 수도 있는 것이다. 샘 안의 세포 하나하나까지 감각을 느껴보려면 소리가 방해요소가 될까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시 목구멍에서 그르렁거리는 소리만 냈다.
“좋구먼.”
조철봉은 그 반대의 입장이다. 철봉을 조이는 샘의 압력으로 머리에 피가 몰려 폭발할 지경이 되어 있어서 식혀야만 하는 것이다. 여기서 그 감촉을 그대로 흡수했다가는 대번에 대포가 발사되어 버릴테니까. 나바론의 대포라도 발사하고 나면 38구경 권총이나 마찬가지 신세가 된다. 오직 발사하지 않았을 때가 더 위력적인 것이다. 끝없이 들어갔다 나오는 나바론의 대포. 그때는 권총으로 뭘 하느냐고 비웃어줄 수가 있다. 어쨌든 조철봉은 나바론의 철봉을 빼는 동안에 기를 써야 했다. 그래서 헛소리처럼 좋다고 했는데 그순간 하마터면 실수를 할 뻔했다. 지금 하는 동작과 유사한 발언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불길에다 기름을 붓는 꼴이 된다. 그래서 조철봉은 서둘러 말을 이었다.
“그렇지, 주가가 1천 포인트를 넘었더군.”
철봉이 그때 거의 다 빠져나왔고 지윤은 이를 앙다문 채 조철봉의 허리를 휘어 감았다. 목을 감고 매달렸던 자세에서 손을 내려 허리를 당겨 안은 이유야 뻔했다. 철봉이 빠져나간 허전함 때문에 무의식중에 이루어진 행동이다.
“아아아.”
그때는 지윤이 마음놓고 탄성을 뱉었다. 지윤은 폭발한 것이다. 그러나 아쉬움이 강했으므로 허리를 비비며 철봉을 다시 넣으려는 몸짓을 했다. 조철봉은 다시 철봉을 겨누고 진입하면서 중얼거렸다.
“땅을 사놓는 것이 나을까? 이정우가 그만 두었다는데 이제 좀 풀릴까?”
철봉이 천천히 반쯤 진입했을 때였다. 지윤이 이를 악물고 느낌을 음미하는 것 같더니 애를 낳는 것 같은 표정으로 신음했다.
“나 미치겠어. 터질 것 같아.”
지윤은 말로 제 분위기에 기름칠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상황을 가속화시킨다.
선 자세로, 더구나 둘의 몸은 비누질을 해서 거품투성이였고 미끈거렸는데 샤워기 밑의 벽에 이지윤의 몸을 밀어제치면서 작업을 하는 상황이었다.
“아냐, 그럴 리가 없어. 부동산으로 돈을 벌지는 못하게 한다고 했지 않아?”
하면서 조철봉이 다시 철봉을 1인치쯤 넣었을 때였다.
“아아, 나, 죽어, 여보.”
한쪽 다리로 바닥을 디디고 다른 다리는 조철봉의 허리를 감은 자세로 작업하던 지윤이 아예 한쪽 다리마저 다 들고 감아온 것이다. 그순간 중심을 잃은 조철봉이 휘청거리다가 겨우 샤워기 꼭지를 쥐고 넘어지는 것을 면했다.
“여보, 다 넣어 줘.”
열에 뜬 지윤이 흐느끼는 목소리로 외쳤다. 이제는 조금도 주변을 의식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과감해지는 것은 새로운 상황을 실감하기 때문일 것이었다.
“너무 좋아, 당신 것이 너무 좋아.”
헛소리처럼 지윤이 외쳤을 때 조철봉은 눈을 부릅뜨고 앞쪽의 타일 벽을 보았다.
“하지만 지방으로 분산 배치된 2백 몇십개 정부기관이 있잖아?”
잇사이로 말한 조철봉이 다시 철봉을 1인치쯤 더 밀어 넣었다.
“아아아악.”
지윤이 비명을 지른 순간 갑자기 샘이 수축되었으므로 조철봉의 머리끝이 곤두섰다. 그야말로 쭈뼛, 하는 느낌과 함께 이마의 근육에서부터 위쪽으로 치솟는 것 같은 충격을 받은 것이다. 조철봉에게 이런 경우는 자주 있는 건 아니지만 가끔 발생한다. 그러나 누구는 인생에서 단 한번도 이런 경우를 만나지 못한다고 하지만 조철봉의 입장에서 보면 그가 ‘만나지’ 못한 것이 아니라 ‘만들지’ 못했다고 해야 맞는 말이 된다. 즉 여자의 샘은 만들기에 따라서 얼마든지 명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 비근한 예로 정사를 끝냈을 때 철봉을 샘 안에 넣은 채 신경을 집중하면 알 수 있다. 철봉의 표면에 맥박처럼 신호를 보내는 샘 표면의 압력을 느낄 수가 있을 것이다. 그 강도만 조금 더 강해지고, 그 느낌을 정사 도중에 받는다면 그것이 바로 명품이며 명기인 것이다. 따라서 집중하면 된다. 집중하고 노력하라, 머리끝이 곤두섰던 조철봉이 그 다음 순간에 중얼거렸다.
“그 정부기관 주변의 땅값이 안 오르고 배기겠어? 왕창 오를 것 아닌가?”
“아아아아, 나 죽어.”
“아냐, 아냐, 대통령이 하늘이 두쪽나도 부동산 투기는 잡는다고 했어.”
“여보, 더, 더, 더 세게.”
“대통령 말을 믿어야지, 부동산 하나는 확실하게 잡는다고 했는데.”
“아유, 너무 좋아, 너무 커.”
“안 되겠어, 부동산은. 주식이나 해야지.”
“아, 아, 나, 할거야.”
“주식이 더 오를까?”
“아아아악”
“빠진다는 말도 있던데.”
“빼지마, 빼지마.”
빠진다는 말을 빼는 것으로 잘못 들은 지윤이 낙지처럼 엉켜붙은 사지에 더 힘을 주었다.
“그렇지, 더 오를 거야. 오를 건 그것뿐이지.”
조철봉이 기를 쓰고 말했을 때 지윤은 폭발했다.
“아아, 나 죽어.”
지윤은 온몸을 굳히면서 떨었다. 그리고 소리내어 울었다가 다시 떨었다. 샘은 더욱 좁혀져서 핏줄까지 느껴졌고 사방에서 박동을 했다. 조철봉은 심호흡을 했다. 철봉은 샘을 세번 왕복했을 뿐이다. 만일 정치 이야기를 시작하면 지윤을 다섯번쯤 극락에 올릴 수 있을 것이었다.
이지윤은 절정에 올라 몸을 떨고 있다. 여자는 절정에 머무는 시간이 상당히 길지만 남자는 포탄이 빠져나간 대포가 되어서 금방 허전한 신세가 된다. 사실 남자는 발사하는 순간부터 도망치려는 의식이 작용한다. 이것을 억제하고 가장해온 것이 만물의 영장 인류 남성인 것이다. 길을 막고 물어봐도 된다. 여론조사도 그 방식에 따라 크게 차이가 나는 만큼 이렇게 물어봐야 될 것이다.
“만일 그냥 싸시기만 해도 귀하는 어떤 불이익도 받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렇다면 오차범위도 없이 99%가 싸고 나서 바로 뺀다고 답할 것이다. 여자는 출산과 육아의 희생을 맡게 되었지만 남자는 성에서 인내와 희생을 맡도록 되어 있다. 분위기네, 전희네, 또는 갖가지의 기교는 그 싱겁게 끝나는 단방의 남성 성(性)구조를 보완하기 위하여 필사적으로 개량되어 왔지만 근본은 하나다. 남자는 ‘땅’하고 쏘고나면 끝이다. 쏠 때뿐이다. 그 발사시간은 길어야 5초. 그 시간이 지나면 남자는 절벽 위에서 떨어지는 것처럼 급격하게 성감이 감소된다.
따라서 여자의 여운을 지켜주려고 매달려 있는 남자의 자세는 가히 희생정신의 표상이라 할 만하다. 그때는 지금까지 애국가를 거꾸로 부르거나 하다못해 고등학교때 교가를 부르면서 발사시간을 늦췄던 자세와는 다르게 남자는 잊으려고 했던 여자의 신음과 탄성 그리고 관능적인 움직임을 필사적으로 떠올려야 되는 것이다. 왜냐? 포탄을 발사하고 난 대포가 급격히 식어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이러니 성의 기교에 뛰어난 남자는 머리가 좋아질 수밖에 없다. 임기응변력이 탁월해지며 따라서 출세도 빨라진다.
“여보.”
아직도 철봉은 샘 안에서 꿈틀거리는 중이었으며 샘 표면은 거칠게 철봉에 박동을 전해주고 있는 상황이다. 지윤이 신음처럼 조철봉을 불렀다.
“나, 정말 죽는 것 같았어.”
조철봉의 허리를 감았던 두 다리를 풀면서 지윤이 말했다.
“다리에 기운이 하나도 없어.”
지윤이 두 다리를 늘어뜨리더니 감았던 눈을 겨우 떴다. 그러나 아직도 숨결은 거칠었고 샘은 뜨거웠다.
“나 이렇게 좋은 느낌은 첨이야, 여보.”
“나도 그래.”
조철봉이 정색하고 대답했다.
“정말이야.”
이런 거짓말은 백번도 더 했지만 지금 분위기에서는 그 거짓말이 아주 어울린다는 장점이 있다. 조금 시간이 지나면 뻔한 소리라는 것을 알 수 있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돼지고기에 새우젓처럼 잘 어울린다. 조철봉이 철봉을 서너번 들썩이고는 말을 이었다.
“누님 여긴 정말 끝내줘. 난 이런 곳은 처음 들어와 보았어.”
“정말?”
지윤의 눈이 반짝였다. 이럴 때는 야한 표현이 식후의 숭늉처럼 구수한 맛을 풍기게 하는 것이다. 조철봉이 지윤의 땀에 젖은 젖가슴과 허리를 손바닥으로 부드럽게 쓸었다.
“특히 샘이 말이야. 아주 맛이 좋았어.”
“나도 그래.”
지윤의 눈이 다시 초점이 흐려졌다.
“너무 좋았어, 느낌이.”
“들어갈 때 좋지?”
“으응.”
그러고는 지윤이 엉덩이를 흔들어 철봉의 감촉을 다시 확인했다.
“좋아, 아주.”
이만하면 여운은 1백프로 즐기게 했다.
“그놈은 지금 경찰서에 있겠지?”
이지윤이 그렇게 물었을 때는 10분쯤이나 지난 후였다. 이제 숨소리도 가라앉았고 눈빛도 또렷했지만 얼굴은 아직도 상기되었다. 반듯이 누워 머리만 옆쪽으로 돌린 지윤은 여전히 알몸이다.
“철창안에 들어가 있겠지.”
조철봉이 가볍게 대답했다.
“아마 내일 아침부터 조사를 하고 바로 재판을 받게 될거야.”
지윤의 시선을 받은 조철봉이 쓴웃음을 지었다.
“정신이 들고 나니까 다시 그 작자 걱정이 된 모양이지?”
“끈질기고 지독한 놈이라 그래.”
“그런 놈은 나한테 밥이지.”
그러고는 조철봉이 엄지를 굽혀 제 얼굴을 가리켰다.
“내가 그런 놈 약점을 꿰고 있거든.”
“나, 동생만 믿고 있어도 되지?”
“믿으라구. 내가 책임질 테니까.”
“그놈이 내 재산을 노리고 있어.”
정색한 지윤이 몸을 돌려 엎드렸다. 그러자 미끈한 등과 아담한 엉덩이가 드러났고 그것을 본 순간 조철봉의 목이 막혔다. 아직 대포를 발사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시 와락 성욕이 일어난 것이다. 그때 지윤의 말이 이어졌다.
“부동산이 35억쯤 되거든.”
최갑중이 조사한 내역보다 많았지만 조철봉은 잠자코 들었다.
“5억만 주면 눈앞에서 사라져 준다고 했지만 그 말은 못믿어. 지금까지 나한테서 뜯어간 돈만 6억이 넘었으니까.”
길게 숨을 뱉은 지윤이 감정이 북받쳤는지 손등으로 눈물을 씻었다.
“법보다 주먹이 가깝다는 걸 정말 실감하고 살아왔어. 그놈을 막으려면 그놈보다 더 독해져야 했는데 그렇게 되지 못했고 나 대신 나서줄 사람도 없었어.”
“다 임자가 있는 법이라니까.”
조철봉이 의젓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게 바로 세상 이치라구. 그렇게 안된다면 무법천지가 되지.”
제가 지어낸 말이었지만 뱉고 보니 그럴 듯해서 조철봉의 말에 열기가 띠어졌다.
“그놈 임자가 바로 나였어. 누님도 마찬가지고 말이야.”
조철봉이 손을 뻗어 지윤의 등과 엉덩이의 부드러운 곡선을 천천히 쓸었다.
“우리 둘의 궁합도 맞았지. 그렇지 않아?”
“그래.”
지윤이 아직도 상기된 얼굴로 머리를 끄덕였다.
“너무 좋았어.”
“다시 한번 할까?”
“어머나.”
놀란 듯 눈을 크게 뜬 지윤이 조철봉을 보았다.
“또 하려고?”
“응. 누님을 보니까 또 하고 싶어졌어.”
“어떻게 그렇게 금방.”
“난 그래.”
싸지 않았다고 해도 될 것을 그렇게 말한 것은 순전히 치기였다. 여론조사에 의하면 남자들의 65%가 이렇게 치기를 부린다. 별 도움도 안 되는데다 순전히 으스대기 위해서 뱉는 거짓말이다. 그때 지윤이 정색하고 조철봉을 보았다.
“자기야, 나하고 같이 있어 주면 안돼?”
조철봉의 시선을 받은 지윤이 멋쩍은 듯 웃었다.
“나하고 같이 사는 것처럼 말야. 물론 자기 결혼생활에는 피해가 가지 않도록 노력할게.”
“그렇다면 어떻게 말야?”
“하루에 한번씩만 낮이라도 좋으니까 내 집에 들러도 좋고, 내 남편 행세를 해줘. 내가 아직도 불안해서 그래.”
지윤의 말에 진심이 배어져 있었다.
다음날 아침, 조철봉의 방으로 들어선 최갑중이 물었다.
“잘 끝내셨습니까?”
“그럼.”
당연하지 않으냐는 표정으로 갑중에게 시선을 준 조철봉이 턱으로 소파를 가리켰다. 갑중이 자리에 앉았을 때 조철봉은 탁자위에 놓은 서류를 그에게로 밀었다.
“여기 이지윤씨 부동산관계 서류가 다 있다. 나한테 맡겨놓은 것이니까 네가 잘 보관하도록.”
“아니.”
놀란 갑중이 서류를 들춰보더니 곧 입을 딱 벌렸다.
“이걸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보관하라니까.”
“형님한테 이것을 다.”
“내가 재산 관리인이 된거야.”
조철봉이 다시 입만 딱 벌리고 있는 갑중에게 말을 이었다.
“나한테 재산을 맡긴다고 했다.”
“그, 그러면.”
“부동산이 35억 가깝게 되더구만.”
갑중이 소리내어 침을 삼켰으므로 조철봉은 쓴웃음을 지었다.
“내 입에 저절로 들어온 먹이는 그냥 못 먹겠다. 물론 지금은 옛날과 다르기도 하지만 말야.”
“그렇지요.”
“지금까지 마음 편하게 살아본 기억이 별로 없는 여자다. 남자 잘못 만나서 말이지.”
“그거야.”
“내가 이지윤씨 남편 노릇을 해주기로 했어.”
“예에?”
“겉으로 말이야.”
서두르듯 말한 조철봉이 갑중의 반응이 못마땅한 듯 눈살을 찌푸렸다.
“보호자 역할을 하는 거란 말이다. 이지윤씨를 다른 놈들이 넘보지 말도록 하려는 거다.”
“아아.”
“그래서 이것을 모두 나한테 맡긴거야.”
“어쨌든.”
어깨를 늘어뜨린 갑중이 길게 숨을 뱉었다.
“형님은 대단하십니다. 하룻밤만에 이 35억 가까운 부동산을 모두.”
“이 자식아. 이건 내가 먹은 것이 아니라니까 그러네.”
답답한 듯 조철봉의 목소리에 짜증기가 배어 나왔다. 조철봉이 서류를 눈으로 가리켰다.
“내가 말한 대로 그냥 보관해주는 것이란 말이야. 내가 사기쳐서 먹은 것이 아니라니까?”
“알았다니까요?”
이제는 갑중도 정색하고 말을 받았다.
서류를 끌어당겨 갑중이 손에 쥐고는 조철봉을 보았다.
“제가 보관하지요.”
“은행 금고에 넣어라.”
“알겠습니다.”
“딴 수작 부리지 말고.”
“예, 형님.”
“앞으로 이지윤씨는 형수님이라고 불러.”
“예, 형님.”
“그놈이 어떻게 되었는가는 수시로 체크하고.”
“앞으로 2년은 세상 구경을 못한다니까요?”
“어쨌든 철저히 체크해.”
그러고는 조철봉이 두팔을 치켜들고 기지개를 켰다. 어젯밤 지윤을 세번 기절시켰는데도 대포는 끝까지 발사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직도 아랫도리가 무거웠다. 상대를 잘 만나야 빛이 나는 것이다. 지윤을 만난 조철봉의 감상이 그렇다.
(1113)미치코-1
조철봉에게도 일본이란 멀고도 가까운 나라였다. 지금까지 조철봉은 일본과 거래관계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제주도만큼 가까운 일본에도 아직 가보지 않았다. 일본에 대해서는 보통의 대한민국 사람들이 느끼는 만큼 조철봉도 느끼고 있다. 독도를 다케시마라고 일본인들이 주장하면 이맛살을 찌푸리며 욕설을 뱉었고 욘사마 배용준이 일본에 한국바람을 일으킨다는 기사를 보았을 때는 일본인에 대해서 호감을 품었다. 그러다가 고이즈미가 신사참배를 하는 장면을 보고 나서 다시 분위기가 바뀌었는데 지금까지 이런 일이 수십번 반복되었던 것이다.
어쨌든 일본이 한반도를 36년간 식민지배를 해온 침략자였던 것은 사실이다. 한일합방이 조선국과의 평화로운 조약이라면 임진왜란도 침략전쟁이 아니라 명을 치기 위해 조선국을 통과하다가 잠깐 마찰이 있었을 뿐이라는 말이나 같을 것이다.
각설하고, 조철봉은 아직 일본인과 접촉해본 경험이 없다. 그러나 일본인이 동양인 중에서 가장 한국인과 닮았으며 일본왕도 한국계라는 것쯤은 안다. 조철봉이 일본 여자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겠는가? 관광온 일본 여자들을 거리에서 만났을 때 조철봉은 유심히 관찰했고 언제부터인가 결론을 내렸다. 한국여자가 일본여자보다 두배는 더 낫다는 것이다. 여자에 대해서는 일가견이 있다고 자부해온 조철봉이다. 아직 일본여자와 잠자리는 해보지 않았지만 그것은 해보나마나다. 잠자리 분위기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니까. 얼굴과 몸매, 걸음걸이와 국어를 말하는 목소리 등으로 1차 평가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조철봉은 여러번 일본어로 기쁨의 탄성을 뱉는 일본녀와의 섹스도 상상해 보았다. 탄성이야 오대양 육대주의 모든 언어권 여자가 거의 같을테니 이를테면 “자기야, 나, 죽어”는 한국녀의 탄성이 된다. 그러나 일본말을 모르는 조철봉이어서 겨우 알고 있는 “곰방와, 아리가토, 소데스카” 따위의 단어로 탄성을 지르는 일본녀를 머릿속에 그리는 것이니 평점에 조금 차질이 있겠다.
조철봉이 그린호텔의 커피숍에 들어섰을 때는 오후 6시50분, 7시에 친구 장성만과 만날 약속이 있었기 때문인데 10분쯤 빨리 온 셈이었다. 그린호텔은 깨끗하고 가격도 비싸지 않았기 때문인지 관광객 전문 호텔이 되어 있었는데 특히 일본 단체 관광객이 많았다. 자리에 앉은 조철봉이 주위를 둘러 보았을 때 그날은 젊은 일본 여자들이 많았다. 직장인들 같았고 수준은 보통 이상쯤 되어 보였으므로 조철봉의 호기심이 발동되었다. 일본어를 모르는터라 작업은 불가능했지만 상상은 자유 아닌가? 지그시 여자들을 둘러보면서 괜찮은 여자가 눈에 띄면 벗은 몸을 상상했다. 옷으로 가리고 있어도 조철봉의 수준이면 한치의 차이도 없이 알몸이 드러나는 것이다.
마침 옆쪽에 눈에 띄는 여자가 있었으므로 조철봉은 그쪽에 집중했다. 그때 그 여자가 “와카리마셍” 했으므로 눈을 절반쯤 감은 조철봉은 여자가 몸을 활처럼 굽히면서 “와카리마셍, 와카리마셍”하고 허덕이는 모습을 떠올렸다. 물론 와카리마셍이 무슨 말인지는 모른다. 여자는 송곳니가 비뚤게 나 있었지만 귀염성있는 얼굴이었다. 철봉이 불끈 솟아 올랐으므로 조철봉은 다리를 꼬아 앉았다.
“아아, 와카리마셍”하고 여자가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다. 그때 앞쪽에 인기척이 났으므로 조철봉은 눈을 제대로 떴다. 웬 젊은 여자가 앞에 서 있었다. 미인이다. 커피숍에서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여자였다.
“실례합니다.”
하고 여자가 말했는데 발음이 이상했다. 그 순간 조철봉은 머리끝이 쭈뼛하면서 빳빳하게 서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여자는 일본사람인 것이다. 일본녀가 한국말을 한다.
“아아, 예.”
놀란 조철봉이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때 조철봉은 주위 테이블의 시선이 모두 이쪽으로 모여 있는 것을 알았다.
“저, 잠깐 시간을 내주시겠습니까?”
그렇게 여자가 물었으므로 조철봉은 머리부터 끄덕였다.
앞자리를 권한 조철봉이 진정하고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한국말을 이만큼 유창하게 하는 능력에 존경심도 일었다. 조철봉의 말에 여자는 환하게 웃었는데 송곳니가 멀쩡했다. 가지런한 치아가 유달리 눈에 띈 것은 일본녀의 송곳니에 대한 선입견 때문일 것이다. 마주앉은 여자가 입을 열었다.
“저, 저는 도쿄에서 왔는데요. 이름은 미치코라고 합니다.”
앉은 채로 머리를 숙여보인 여자가 정색하고 말을 이었다.
“나이는 스물넷이고 이나미유통이라는 회사에 다닙니다.”
“아아, 그래요?”
조철봉도 정색했다. 아직 무슨 용건인지 알 수 없었지만 옆 테이블의 시선이 이쪽으로 모여 있는 것도 부담이 되었다. 그때 여자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한국에서 남자 친구를 사귀고 싶은데요. 제 파트너가 돼 주시겠어요?”
살다 보면 별일을 다 겪게 된다고 하지만 천하의 조철봉에게 이런 복이 떨어진 것을 보면 조상의 음덕 때문이거나, 지금까지 선행을 쌓아왔기 때문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조철봉은 먼저 주위 테이블을 둘러보았다. 왼쪽 테이블의 여자들이 의미심장한 웃음을 띠고 있는 것을 보면 미치코의 일행 같았다. 그리고 아마 이곳으로 오기 전에 내기를 했거나 미리 통보를 했을 것이었다.
“친구들하고 내기한 거요?”
조철봉이 웃음띤 얼굴로 물었다. 긴장이 풀리면서 여유가 생겼기 때문인데 미치코의 긴장을 풀어주려는 의도도 있다. 그러자 미치코가 따라 웃었다.
“하이, 내기를 했습니다.”
“난 나이가 많은데, 서른다섯이야.”
그래도 세살을 줄였다.
“상관없습니다.”
이제는 정색한 미치코가 반짝이는 눈으로 조철봉을 보았다.
“10년밖에 안되는데요.”
“내가 유부남이라도 좋아?”
“선생님만 괜찮으시다면.”
“난 조철봉이야.”
“아, 조, 철, 봉.”
미치코가 조철봉의 이름을 머리 속에 박아 넣으려는 듯이 한자씩 또박또박 불렀다. 시계를 내려다본 조철봉이 미치코에게 말했다.
“미치코양, 내가 친구를 만나기로 했으니까 30분 후에 다시 이곳에서 만나면 어떨까?”
“좋습니다.”
미치코가 눈치 빠르게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다시 활짝 웃었다.
“파트너가 돼 주셔서 고맙습니다.”
“내가 오히려 더 기뻐.”
그때 커피숍 출입구로 장성만이 들어섰으므로 조철봉은 고쳐 앉았다. 다가온 장성만이 주위를 둘러보는 시늉을 했다.
“웬 일본 영계들이야?”
장성만과 오늘 저녁을 함께 먹기로 했지만 조철봉은 다음으로 미루기로 마음먹었다.
본래 조철봉이 먼저 연락을 해서 저녁을 먹자고 했던 것인데 급한 일이 있다고 핑계를 대자 당연히 장성만이 투덜거렸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차만 마시고 장성만이 먼저 나갔을 때 옆쪽 테이블에서 기다리고 있던 미치코가 냉큼 일어나 다가왔다.
“저 때문에 친구 보내신거죠?”
미리 연습을 했는지 이번 한국말은 유창해서 한국녀 같았다.
“할 수 없지 뭐.”
자리에 앉은 미치코를 향해 조철봉이 웃음띤 얼굴로 말했다.
“이 일이 더 중요하거든.”
“친구분이시면 제 친구를 소개시켜 드릴수도 있는데요.”
미치코가 눈으로 옆쪽 테이블을 가리켜 보였다.
“셋이 왔는데 하나는 몸이 아프고 하나는 파트너가 아직 없어요.”
“내 친구는 급한 일이 있어서 오늘밤에 시간을 못낼거야.”
정색한 조철봉이 말했다. 빌딩 임대업자 장성만은 시간이 남아돌아서 하루에 두번씩 사우나를 가는 놈이지만 미쳤다고 이런 행운을 거저 주겠는가? 옆쪽 테이블에 앉아 이쪽에 웃음을 보내고 있는 두 일본녀도 보통수준 이상은 되었다. 평소에 좋은 일도 안하는 장성만에게 저 둘중 하나를 넘겨주다니, 말도 안되는 소리였다.
“그럼 내가 저녁을 사지, 분위기 좋은 곳에서 말야.”
조철봉이 말하고는 옆쪽의 친구들을 눈으로 가리켰다.
“친구들을 데리고 가도 돼.”
“정말이세요?”
“좋아요, 감사합니다.”
하면서 미치코가 머리까지 숙여 보이더니 옆쪽 테이블로 뛰어갔다. 한국녀들과 다른 것이 의뭉을 떨지않는 점 같았다. 기쁜 표정을 조금 과장한 것 같았지만 그것이 상대방에 대한 배려나 겸손같게도 보였다. 미치코가 뭐라고 몇마디 하자 둘은 짧은 환성을 뱉더니 곧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왔다. 그러고는 일본말로 머리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고맙다고 인사하는 거예요.”
미치코가 통역했다.
“얜 후미코이고 얜 아라예요.”
“후미코, 아라.”
“둘다 예쁘죠?”
“미치코가 젤 낫다.”
한국어로 주고 받았으므로 후미코와 아라는 웃기만 했다. 넷이 합석을 하자 조철봉은 왠지 더 편안해졌다. 셋이 다 방글거렸고 이쪽이 눈짓 한번만 해도 대번에 반응을 보였는데 이런 분위기를 장성만같은 놈한테 떼어 주다니 말도 안되는 소리였다.
“내가 한정식을 먹여주지. 한국에 왔으니 한국 전통 음식의 맛을 봐야해.”
조철봉이 미치코에게 말했다.
“관광객들이 가는 곳하고는 다른 곳이야. 아주 고급이지.”
“정말이세요?”
놀란 미치코가 눈을 크게 뜨고 제 일행에게 다시 설명을 하는 동안 조철봉은 잘 가는 정읍식당에 예약을 했다. 이곳은 두당 7만원이나 받는 한정식집이지만 지금 돈을 아낄 상황이 아니다. 예약을 한 조철봉이 일본녀 셋을 데리고 현관에 나왔을 때 운전사 미스터 김의 눈이 둥그레졌다. 미스터 김은 조철봉이 친구 만나는 줄로만 알고 있었던 것이다.
“정읍식당으로 가자.”
조철봉이 말하자 미스터 김은 먼저 여자들에게 차 문을 열어 주었다. 벤츠600이다. 일본에서도 차가 그 사람의 인품일 것이었다.
정읍식당의 방에 넷이 둘러앉았을 때 미치코가 말했다.
“이런 곳은 처음입니다.”
관광객들이 이런 곳에 찾아 올 수는 없을 것이었다. 주택가 안에 위치한 정읍식당은 한옥 구조에 방은 대여섯개밖에 되지 않았고 예약 손님만 받았다. 오늘은 장성만과 밥을 먹으려고 예약을 해놓았는데 미치코 일행과 가게 된 셈이었다. 한국식 방의 아랫자리에 조철봉과 나란히 앉은 미치코가 말했다.
“비싸겠지요?”
미치코가 조심스럽게 묻자 조철봉은 부드럽게 웃었다.
“그런 건 물으면 실례야.”
“미안합니다.”
“괜찮아. 그런데.”
조철봉이 힐끗 앞쪽에 앉은 후미코와 아라에게 시선을 주고 나서 물었다.
“한국 남자를 친구로 사귀고 싶었다면 나보다 젊은 또래도 있을텐데. 비슷한 나이의 한국남자 말이야.”
미치코가 알아 듣기 쉽도록 조철봉은 또박또박 띄어서 천천히 말했다.
“미치코 같이 귀여운 여자라면 얼마든지 남자를 구할 수 있을텐데.”
“무서워서요.”
그렇게 대답한 미치코가 다시 귀엽게 웃었다.
“젊은 남자는 신분이 확실하지 않아서요.”
“확인할 방법도 있을텐데.”
“시간이 걸리거든요.”
“그래?”
머리를 비튼 조철봉이 엄지를 구부려 제 얼굴을 가리키며 물었다.
“나도 확인하려면 시간이 걸릴 것 아닌가?”
“확인했어요.”
“어떻게?”
“벤츠로.”
“그렇다면.”
“호텔로 오실 적에 타고 오신 벤츠로. 커피숍 안에서 보았거든요.”
“아아.”
“벤츠를 타고 오실 정도면 신분은 믿을만 하다고 봐야죠.”
“사기꾼도 있을텐데.”
“있겠죠.”
그러고는 미치코가 수줍게 웃었다.
“고급 사기꾼.”
“고급 사기꾼도 괜찮단 말인가?”
“할 수 없죠, 뭐.”
그때 방문이 열리더니 종업원 둘이서 음식을 들고 들어섰다. 전라도 음식은 풍성할 뿐만 아니라 맛도 일품이다. 특히 전주 음식은 한정식의 진수라 할 만하고 바로 이 식당이 그렇다. 미치코와 일행이 상 위에 놓이는 찬의 가짓수에 놀라 입만 딱 벌렸는데 또 종업원 둘이 들어섰다. 이번에는 찌개와 신선로 등을 들고 온 것이다. 일식도 나름대로 별미가 있으며 종류도 다양하겠지만 갖가지 젓갈로 양념을 한 한정식 찬의 깊은 맛은 세계 어느 곳에서도 따라올 수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미치코와 일행이 식사를 시작했을 때 조철봉이 지나가는 말처럼 물었다.
“파트너는 여러가지 뜻이 있어. 그래서 묻겠는데.”
젓가락으로 전을 집어 미치코의 앞에 놓인 그릇에 덜어주면서 조철봉이 정색했다.
“성적 파트너로 해석해도 될까? 난 지금까지 한번도 일본 여자하고 그 경험이 없어.”
그때 미치코가 움직임을 멈추더니 역시 정색한 얼굴로 조철봉을 마주보았다. 후미코와 아라는 저희들끼리 소곤대면서 먹는 데에 정신이 팔려 있다. 그때 미치코가 말했다.
“그래요, 그래도 돼요.”
“으음.”
조철봉의 입에서 저절로 탄성이 나왔다. 일본녀들과는 접촉해본 경험이 없는 터라 그렇게 물었지만 내심 불안했던 조철봉이다. 조철봉의 시선을 받은 미치코가 다시 수줍게 웃었다.
“호기심이 일어나는 건 나도 마찬가지거든요, 나도 한국 남자하고는 조상이 처음이에요.”
“아저씨라고 불러.”
“오빠라고 부르던데.”
“누가?”
“한국 남자 친구를 가진 내 친구가.”
“아저씨라고 해.”
“하이, 아저씨.”
“언제 귀국하는데?”
“사흘후에.”
“어디서 한국말 배웠어?”
“회사에서. 한국말 잘해요?”
“한국사람보다 낫다.”
조철봉은 길게 숨을 뱉었다. 만족한 것이다. 행운은 불시에 찾아온다는 건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한 말일 것이다. 광복 60년, 조철봉의 세대는 일제 강점기에 대해 오직 듣고 읽기만 해서 일본인에 대한 선입견이 적은 편이다. 더욱이 근래의 문화 교류로 인하여 지난 역사는 급격하게 잊어지는 중이다. 조철봉의 시선이 다시 미치코에게로 옮겨졌다. 다른 경우보다 더 큰 감동을 받고 있는 것은 분명 미치코가 일본녀이기 때문일 것이었다. 중국이나 베트남 여자가 이런 식으로 접근해왔다면 분위기가 달랐을지도 모른다.”
“미치코.”
“하이, 아저씨.”
“섹스 좋아해?”
그순간 섹스 소리를 들은 후미코와 아라가 움직임을 멈추더니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조철봉과 미치코를 번갈아 보았다. 그때 미치코가 일본어로 둘에게 무언가를 설명했는데 자세가 진지했다. 듣는 둘도 연방 머리를 끄덕이며 같은 자세였으므로 마치 대출을 상담하는 은행원과 고객 같았다. 이윽고 말을 그친 미치코가 조철봉에게로 머리를 돌렸다.
“다 이야기했어요.”
“뭘?”
놀란 조철봉이 눈을 둥그렇게 뜨고 묻자 미치코가 웃었다. 이번에는 손바닥으로 입을 가리고 웃었는데 저런 모습은 요즘 TV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섹스 이야기.”
그러자 후미코와 아라도 미치코와 똑같이 손바닥으로 입을 가리며 웃는 시늉을 했다. 당황한 조철봉에게 미치코가 말을 이었다.
“내 친구들도 오케이했어요.”
“뭘?”
“아저씨를 파트너로 하겠다고.”
“나, 나를?”
놀란 조철봉이 젓가락을 든 손으로 얼굴을 가리켰다가 하마터면 눈을 찌를 뻔했다.
“파트너라니?”
“섹스 파트너죠.”
미치코가 이번에는 웃지 않고 말했다.
“해주실 수 있죠?”
“그, 그것은….”
당장 속에 있는 말을 하라면 ‘당연하지’하고 했겠지만 조철봉은 먼저 침부터 삼켰다. 그리고 후미코와 아라를 힐끗 보았다. 저 정도면 평균 이상이다. 세상에 이런 복이 어디 또 있겠는가? 지금까지 해온 선행에 대한 보답일 것이다. 살림 차려준 여자가 몇이냐? 열심히 여자를 위해 봉사를 한 대가를 받는 것이다. 후미코와 아라도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으므로 조철봉은 입을 열었다.
“난 이런 경우가 처음이어서.”
조철봉이 말했을 때 미치코가 동시 통역사처럼 일본어로 통역했고 후미코와 아라는 같이 머리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런 미인들이 진심으로 요구하는 것 같은데 거절한다면 미친놈이지.”
그러자 둘은 똑같이 손바닥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조철봉이 미치코를 정색하고 보았다.
“하지만 미치코, 난 그룹 섹스같은 건 싫어. 하나씩 상대하겠어.”
그러자 먼저 미치코가 머리를 끄덕인 후에 통역을 했고 둘도 똑같이 머리를 끄덕였다. 마치 자동 인형 같았다.
“좋아, 그럼 식사나 하지.”
조철봉이 다시 수저를 들면서 말하자 미치코가 잠깐 둘과 이야기를 하더니 머리를 들었다.
“오늘밤 상대는 저고요.”
미치코가 손가락을 구부려 제 얼굴을 가리켜 보인 다음 말을 이었다.
“내일은 후미코, 그 다음날은 아라 순서로 했으면 좋겠어요.”
“좋아.”
“그리고.”
말을 멈췄던 미치코가 수줍은 표정으로 조철봉을 보았다.
“마지막 날은 다시 저하고요.”
“이건 마치.”
조철봉이 혼잣소리처럼 말했다.
대한민국에 남자는 나 혼자만 있는 것 같구먼, 세상에 이런 횡재가 있나?”
“우린 그래도 안전한 선택을 한 것이라고요.”
“그게 무슨 말이야?”
“아저씨가 나쁜 사람일 경우에 우린 공동으로 당하게 되거든요. 부담을 삼분의 일씩 나눠 갖게 되지요.”
“공동으로 대응을 할 수도 있고?”
“그럴 수도 있지요.”
“내가 기대에 미치치 못하면?”
“할 수 없지요. 선택을 잘못한 결과를 감수해야죠.”
“한국 관광을 계획하면서 한국 놈 맛을 보기로 한 건가?”
“하이.”
정색한 미치코가 망설이지도 않고 대답했다.
“호기심이 생겼어요. 멋질 것 같았거든요.”
“흐음.”
잠시 말문이 막힌 조철봉이 헛기침을 하고는 꾸물거리는 동안 미치코가 둘에게 대화 내용을 대충 말해주는 것 같았다. 조철봉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일본 남자들 하고는 자극을 느끼지 못한다는 말인가?”
“아뇨.”
머리부터 저으며 미치코가 눈웃음을 쳤다.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한국 남자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죠. 아마 욘사마 한류 열풍의 영향도 있는 것 같아요.”
“내가 배용준한테 고맙다고 해야겠군.”
다시 수저를 내려놓은 조철봉이 손목시계를 보는 시늉을 했다.
“미치코, 그럼 우리 둘은 다른 곳으로 가야되지 않을까? 그린 호텔에 갈 수는 없지 않겠어?”
“하이.”
미치코가 다시 정색했다.
“그렇습니다. 제가 따라가지요.”
“엠파이어 호텔로 갈 테니까 친구들한테 이야기를 해놔. 방 잡고 곧 방 번호를 알려주겠다고.”
“엠파이어 호텔.”
미치코가 호텔 이름을 복창하더니 둘에게 재빠르게 이야기를 하고 조철봉을 보았다.
“그렇게 안 하셔도 이젠 믿을 게요.”
“앞으로는 조심하라고 이러는 거야.”
조철봉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꼭 호텔 확인을 하고 따라가도록 해.”
그 말을 미치코는 친구들에게 통역하지 않고 혼자서 머리만 끄덕이며 들었다. 식당을 나왔을 때는 밤 9시반이 되어가고 있었으므로 조철봉은 서둘렀다. 후미코와 아라를 그린호텔에 내려주고 엠파이어호텔에 도착했을 때는 10시40분이었다. 미리 예약을 한 터라 곧장 키를 받아들고 15층의 스위트룸 안에 들어섰을 때 조철봉은 어깨를 늘어뜨리며 길게 숨을 뱉었다. 이런 경우에 서두르지 않는 놈자가 있다면 비정상이다. 조급해지는 것이 정상인 것이다. 이것은 마치 고기가 많이 붙은 뼈다귀를 입에 물게 된 개나 똑같다. 누가 따라 오지도 않는데 죽어라고 도망가는 것이 본능이다. 그러나 일단 방의 문을 닫은 순간부터 조철봉의 가슴은 진정이 되었다. 도망갈 때 개의 심정도 조철봉처럼 기쁨과 흥분으로 뛰었을 것이었다.
“방이 좋아요.”
방을 둘러본 미치코가 감탄한 듯 말하더니 창가로 다가가 섰다. 두 손으로 창틀을 짚고는 상반신을 조금 밖으로 내놓는 바람에 엉덩이와 두 다리가 비스듬하게 주욱 뻗쳤다. 미끈하다. 미치코의 알몸을 머릿속으로 떠올린 조철봉의 입 안에는 침이 고였다.
“술 한잔 줄까?”
냉장고로 다가가며 조철봉이 물었다.
“위스키? 맥주?”
“위스키 주세요. 온더록으로.”
미치코의 목소리는 가벼웠다.
“취하고 싶어요. 내일 일찍 일어나지 않아도 되니까.”
“좋아.”
잔 두개에 얼음을 채우고 위스키를 삼분의 일쯤 따른 조철봉이 미치코에게 다가가 잔 하나를 건네 주었다.
“고맙습니다.”
“술을 마시고 섹스를 하는 게 좋아?”
조철봉이 은근한 목소리로 묻자 잔을 받아쥔 미치코가 몸을 반쯤 돌리더니 눈웃음을 쳤다.
“아니, 그냥해도 좋아요.”
“섹스의 쾌감은 아는거야?”
“쾌감?”
“섹스의 즐거움.”
“아.”
이해가 간다는 듯이 미치코가 머리를 끄덕였다.
“할 때 좋았어요.”
“어떻게?”
“표현 잘 못해요.”
미치코가 수줍은 듯 시선을 내렸다.
“좋았어요.”
“지금까지 섹스경험이 많은 편이야?”
“으응” 하면서 눈을 조금 가늘게 뜬 미치코가 손가락으로 숫자를 세는 세늉을 했다. 그러더니 조철봉을 정색하고 보았다.
“남자 셋.”
“으응, 남자가 세명이라고?”
“하이. 그리고 섹스는 모두 열한번. 첫남자는 두번, 두번째는 네번, 세번째는 다섯번.”
“세번째는 다섯번?”
“하이.”
“그놈하고 다섯번째 한 것이 언제인데?”
“으응, 석달쯤 전에.”
“그놈은 몇살이고?”
“스물 셋. 나보다 한살 어려요.”
그렇다면 그놈하고의 관계가 궁금해졌으므로 조철봉은 시선을 들었다. 그때 미치코가 위스키를 한모금 삼키더니 다시 창밖을 보면서 말했다.
“그때 섹스를 하고 며칠 후에 헤어졌어요. 성격차이로.”
“으음.”
그러고는 미치코가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마마보이였거든요. 귀엽기는 했지만 아이였어요.”
조철봉에게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을 말해 보라면 바로 지금도 포함이 될 것이다. 기대에 부푼 가슴은 거칠게 뛰었고 품어나온 엔도르핀 효과 때문인지 온몸에 활력이 충만 되었으며 입가에는 수시로 미소가 떠올랐다. 이만한 기쁨이 어디 있겠는가? 내일 세상이 멸망한다고 가정했을 때 오늘밤 인간은 무엇으로 남은 시간을 때우겠는가? 사과나무를 심겠는가? 신에 의지하고 열심히 기도를 하겠는가? 책을 읽겠는가? 음식을 먹겠는가? 조철봉이라면 그때 섹스를 할 것이었다. 그 상대가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그 상대가 이렇게 미지의 여자로 로또복권 당첨된 것처럼 주어지지 않아도 좋다. 멸망의 순간까지 모든것을 잊어먹을 수 있도록 아주아주 황홀하게 시간을 보낼 것이었다. 물론 조철봉 혼자만이 아니다. 그 기쁨을 여자는 몇배 더 느낄테니까.
“아저씨.”
그때 미치코가 불렀으므로 조철봉은 생각에서 깨어났다. 조철봉의 시선을 받은 미치코가 다시 수줍게 웃었다.
“‘샤와’하실래요? 제가 씻겨 드릴게.”
“아, ‘샤와’.”
긴장한 조철봉이 머리를 끄덕였다. 한국녀라면 먼저 샤워하고 오라고 했을 것이었다. 그런데 이쪽은 씻겨 드린다면서 먼저 ‘샤와’를 하라고 한다.
“그러지. 그럼 같이 욕실에 들어갈까?”
“하이.”
선선히 대답한 미치코가 블라우스 단추를 풀면서 조철봉에게 말했다.
“제가 먼저 들어가서 물 받아 놓을게요.”
“아, 그래.”
“부르면 들어오세요.”
“그럼.”
소파 옆으로 다가간 미치코가 옷을 벗기 시작했으므로 조철봉은 숨을 멈췄다.
조철봉이 2미터도 떨어지지 않는곳에서 보고 있는데도 미치코는 차분한 동작으로 옷을 벗었다. 시선을 돌리는 것이 오히려 더 어색한것 같았으므로 조철봉은 소파에 등을 붙이고 앉아 미치코를 보았다. 블라우스를 벗은 미치코가 얌전하게 접더니 소파 위에다 놓았다. 브래지어 하나만 걸친 상반신은 그야말로 우윳빛 피부였지만 어깨와 팔의 윗부분에 살집이 많았고 아랫배가 두툼했다.
“으음.”
조철봉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탄성이 뱉어졌다. 지금까지 조철봉은 숱한 미인의 알몸을 보았으며 군살 한점 없는 몸매도 무수히 겪었다. 그들과 비교하면 미치코의 알몸은 살찐 편이었다. 아랫배는 이겹살쯤 되었다. 그러나 조철봉은 미치코의 몸매를 본 순간에 더 강한 성욕을 느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꾸밈없는 몸이었고 자세였기 때문이다. 그때 브래지어까지 풀어놓은 미치코가 조철봉에게로 몸을 돌리더니 또 웃었다.
“몸매가 안좋아요.”
그러나 알몸의 상반신은 당당하게 조철봉의 앞에 드러내었고 젖가슴을 가리려는 시늉도 하지 않았다.
“아냐.”
일단은 그렇게 부정하고난 조철봉이 입안에 고인 침을 삼켰다. 미치코의 젖가슴은 풍만했다. 국그릇 두개를 포개놓은 것만 했다. 그러나 젖꼭지는 팥알만 했고 아직 여물지도 않은것 같았다.
“멋있다.”
조철봉이 마침내 자리에서 일어나 미치코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아름답다.”
그러고는 조철봉이 미치코의 젖가슴을 두손으로 감싸 안았다. 마치 누가 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가리려는 동작이었다.
“이런 분위기는 처음이야. 섹시해.”
“이제 그만.”
조철봉의 팔목을 쥔 미치코가 몸을 뒤로 빼는 시늉을 했다.
“물 받아 놓을 게요.”
그 순간 조철봉은 자제했다. 심장이 거칠게 뛰었고 욕정은 끝까지 치솟았지만 참기로 작정한 것이다. 조철봉이 손을 떼자 미치코는 얼굴을 펴고 웃었다.
“고맙습니다.”
그러고는 몸을 돌린 미치코가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다시 소파로 돌아와 앉은 조철봉은 심호흡을 했다. 조철봉식 섹스가 남들보다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기다림을 즐긴다는 것이다. 보통 기다리게 되면 초조, 불안, 나중에는 부아까지 치밀었다가 탈진상태가 돼버리지만 섹스에서의 기다림은 그 기다림이 길어질수록 분위기가 더 끓어오른다는 특징이 있다. 기다리다가 김이 빠진다고 악담을 하는 사람은 전혀 그 경지에 가보지도 못한 사람이다. 틀림없다. 겪어본 사람이라면 그렇게 말 안한다. 기다리고 또 기다려서 어느 경지에 오면 자연스럽게 꽃이 피고 물이 흐르는 것이다. 그 절정의 시기는 몸이 알려준다. 조철봉의 경험에 의하면 그렇게 오래 기다린 것 같았는데도 막상 그치고 나면 꼭 조금 빠르지 않았나 하는 후회가 들었던 것이다. 넣지 말고 기다려라. 그냥 멍하고 앉아 기다리라는 말이 아니다. 끊임없이 달궈줘야 한다. 상대가 마른 입술을 몇 번이고 혀로 축이면서 사정을 해도 들어주면 안된다. 남자는 겨우 한번 사용하고 버리는 일회용 라이터를 갖고 있다고 보면 된다. 비록 30분쯤 후에 다시 불이 켜진다고 해도 남자는 그 한번에 필사적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불이 켜지기 전까지 기다리고 또 기다리면서 상대방을 이끌어야 한다. 철봉을 넣기 전에 애국가를 거꾸로 부를 경우도 있을 것이며 넣고난 후에는 더 그렇다. 기다림이다. 그리고 그 기다림을 스스로 즐길 수 있어야만 한다. 그 기다림은 아무리 길어도 넘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될 것이다.
“됐어요.”
욕실 문이 열리면서 미치코가 불렀으므로 조철봉은 생각에서 깨어났다. 옷을 순식간에 벗어던진 조철봉이 욕실 안으로 들어선 것은 그로부터 10초도 안되었다. 이런 경우는 기다림의 목록에 포함되지 않는 것이다.
“으음.”
안으로 들어선 조철봉의 입에서 신음이 터졌다. 욕조 앞에 선 미치코는 알몸이었던 것이다. 풍만하다. 하반신의 허벅지와 아랫배는 욕실 안에 가득 차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저, 살쪘어요.”
하면서 미치코가 두 손으로 아래쪽 숲을 가렸다. 머리에 흰 캡을 쓰고 있어서 긴 목이 드러났다.
“아냐, 훌륭해.”
머리를 저은 조철봉이 미치코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서서 말했다. 이미 철봉은 곤두서서 마치 다른 생물처럼 건들거리고 있는 중이었다.
“오머.”
하고 철봉에 시선을 주었던 미치코의 두 눈이 둥그레졌다. 그러고는 버릇인지 손으로 입을 가렸으므로 아래쪽 숲이 드러났다. 짙은 숲 복판에 붉은색 골짜기가 선명하게 나타난 것이다.
“커요.”
홀린 듯이 철봉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미치코의 두 눈이 번들거렸다. 욕실의 수증기에 얼굴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너무 좋아요.”
그러자 철봉이 대답이나 하는 것처럼 위 아래로 건들거렸다. 조철봉이 약간 배에 힘을 주었기 때문이다.
조철봉은 욕조로 다가가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물 속에 온몸을 담갔다. 머리만 내놓고 누운 조철봉이 미치코를 보았다.
“미치코, 들어와.”
미치코의 알몸이 바로 앞에 가득 펼쳐져 있었으므로 조철봉은 눈이 부신 듯 두 눈을 가늘게 떴다.
“하이.”
고분고분 대답한 미치코가 이제는 손으로 아무 것도 가리지 않고 욕조 안으로 들어왔다. 물이 넘치면서 조철봉과 미치코는 마주보며 앉은 꼴이 되었다. 조철봉이 두 다리를 뻗어 미치코의 몸을 감아 안는 자세를 만들었다.
“미치코, 섹스할 때 어떤 자세를 좋아하니?”
조철봉이 묻자 미치코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금까지 겪어본 바로는 미치코의 한국어는 유창했지만 들을 때 이삼초쯤 공백이 발생했다. 머리 속에서 분주하게 해석하는 모양이었다.
“아아.”
삼초쯤 지났을 때 미치코가 알아들은 듯 순식간에 볼이 빨개졌다. 그러나 시선은 내리지 않았다.
“정상위가 좋아요.”
미치코가 또박또박 대답하더니 덧붙였다.
“남자가 위에서.”
“미치코는 위에서 해본 적 없어?”
“없어요.”
머리를 저은 미치코가 반짝이는 눈으로 조철봉을 보았다.
“아저씨가 원한다면 제가 위에서 할 수도 있어요.”
“내가 원하는 게 아니라 미치코….”
조철봉이 손을 뻗쳐 미치코의 젖가슴을 부드럽게 움켜쥐었다. 그러나 젖가슴은 한 손에 가득 쥐어도 삼분의 일쯤이 남았다. 그만큼 큰 것이다.
“아이.”
미치코가 상반신을 흔들었지만 손을 떼려는 시늉은 아니다. 오히려 몸을 앞으로 기울여 조철봉을 편하게 해주었다.
“미치코.”
“하이.”
“넌 귀여운 여자야.”
“아저씨도 귀여워요.”
“으음.”
그런 표현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하려다가 조철봉은 참았다. 미치코는 지금 최선을 다하여 한국어를 하고 있을 것이었다.
“미치코.”
“하이.”
“내 철봉을 만져라.”
“철봉이 무엇입니까?”
“지금 네 눈 앞에 서있는 기둥 말이야.”
“기둥이 무엇입니까?”
정색하고 미치코가 묻자 조철봉이 누운 채로 허리를 들어올렸다. 그러자 핵잠수함에서 발사한 대륙간 탄도미사일처럼 철봉이 수면을 박차고 솟아올랐다.
“이거야.”
“오마.”
미치코가 두 눈을 크게 뜨더니 그냥 홀린 듯한 시선으로 철봉을 보았다. 그때 다시 철봉이 살아있는 생물처럼 꿈틀거렸다.
“만져봐.”
“감사합니다.”
미치코가 그 자세에서 머리를 숙여 절을 하더니 두 손으로 철봉을 조심스럽게 쥐었다. 그리고 혀로 입술을 축이더니 말했다.
“커요.”
“내건 보통이야.”
“오마.”
이것이 애국심일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겸손을 떤 것은 아니다. 조철봉이 일본녀를 만나기 전에는 제 철봉이 보통 수준이라고 말한 적이 없으니까.
섹스하기 전의 대화는 분위기 조성에 상당한 영향을 준다. 그러나 섹스가 끝나고나면 무슨말을 했는가를 대부분 기억하지 못한다. 만일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뇌 용량이 대단하거나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았던 사람중의 하나일 것이다. 이를테면 지금 조철봉이 미치코에게 하는 행태가 바로 그렇다. 한국어에 유창하다고는 해도 철봉을 금방 이해하지 못하는 수준의 미치코에게 자꾸 말을 거는 이유가 말로써 분위기를 달구려는 작전인데 조금씩 먹히고는 있다. 그러나 한국녀보다는 두배쯤 힘이 들었다. 미치코의 반응을 보면 알수가 있는 것이다.
“미치코.”
조철봉이 마치 신주 단지를 모시고 앉은 것처럼 철봉을 쥔채 굳어져있는 미치코를 불렀다.
“하이.”
시선을 든 미치코의 두눈은 번들거렸다. 이만하면 미치코는 달아오른 상태였으므로 철봉을 넣으면 금방 샘물이 넘칠 것이었다. 그러나 안된다. 국위선양을 위해서는 인내가 제일이다.
“지금 하고 싶어?”
조철봉이 은근하게 묻자 미치코가 머리를 끄덕였다.
“하이.”
“목욕탕 안에서 할까?”
“좋아요.”
그러고는 미치코가 욕조의 가득찬 물을 힐끗 보았다.
“괜찮을까요?”
“뭐가?”
“물이 가득찼는데.”
“괜찮아, 네가 내 위에서 하면.”
“그럼.”
하면서 미치코가 몸을 일으켰으므로 조철봉은 어깨를 눌렀다. 그냥 한말인 것이다.
“아니 그럴것 없이 나가서 하지, 침대위에서 하자.”
“하이.”
“물속에서 하면 몸이 가벼워진 느낌이 들지만 이곳의 자극은 줄어들지.”
조철봉이 손을 뻗쳐 미치코의 골짜기를 마치 들어 올리는 것처럼 만졌다.
“으음.”
미치코가 엉거주춤 엉덩이를 들어 올리면서 조철봉에게 상반신을 붙여왔다.
“좋아요.”
“물에서 하면 자극이 줄어들지.”
“그럼 나가서 해요.”
“네 샘은 이쁘구나.”
“샘이 뭡니까?”
“이거.”
조철봉이 손끝을 샘 안으로 조금 밀어넣었다.
“우리는 이걸 샘이라고 하지.”
“아아, 이것은 철봉이고.”
미치코가 손을 뻗어 다시 철봉을 쥐었다. 이미 호흡은 가팔라져 있었고 자세가 기우뚱 거렸지만 물속이어서 한팔로도 균형이 잡혀졌다.
“으으음.”
조철봉이 샘 주위만 부드럽게 애무 해주는데도 미치코는 하반신을 비틀며 신음했다.
“섹스해요.”
미치코가 조철봉의 목을 입술로 빨면서 허덕였다.
“섹스해요. 아저씨.”
“철봉을 넣어달라고 해.”
“철봉을 넣어주세요.”
이제는 미치코가 조철봉의 몸 위에 올라앉더니 철봉을 넣으려는 시늉을 했다. 조철봉은 미치코의 손을 쥐고는 욕조에서 몸을 일으켰다.
“미치코, 침대에서.”
그러자 미치코가 물보라를 일으키며 따라 일어섰다.
욕실에서 나와 침대로 누운 조철봉의 옆으로 미치코가 바짝 붙었다. 조철봉의 가슴에 볼을 붙이고는 온몸을 붙여온 것이다. 그러고는 허덕이며 말했다.
“아저씨.”
“응?”
“난 아저씨가 좋아요.”
조철봉은 미치코가 어떤 한국 영화를 보았는지 문득 궁금해졌다. 아마 한국남자 배우에게 누가 그렇게 말하는 장면이 있을지도 모른다.
“나도 미치코가 좋아.”
그렇게 말해주면서 조철봉은 문득 자신이 그 영화의 주연 배우가 된 것같은 기분이 들었다.
“철봉, 넣어주세요.”
미치코가 마른 목소리로 말했을때 조철봉은 정신을 차렸다. 색다른 분위기여서 정신이 오락가락 하고 있었던 것이다.
“좋아, 그럼 홍콩을 보내주지.”
미치코의 몸 위에 엎드린 조철봉이 낮게 말했지만 미치코는 들은 모양이었다.
“홍콩은 두번 가 보았어요.”
퍼뜩 머리를 든 조철봉은 미치코가 잘못 알아들은 것을 알았다. 미치코가 말한 홍콩은 진짜 홍콩, 즉 영국에서 반환된 홍콩이었다. 더이상 말할 필요가 없었으므로 조철봉은 입술과 손끝으로 미치코를 애무하기 시작했다. 먼저 입술로 미치코의 입을 열자 곧 혀가 빨려 나왔다.
“으으으음.”
잠깐 입에 숨길이 트였을때 가쁜 숨을 허덕이며 미치코가 신음을 뱉었다. 그때 조철봉의 손끝은 미치코의 허리를 쓸어 내린후에 골짜기를 더듬는 중이었다. 다시 조철봉의 입술은 목을 거쳐 젖가슴에 닿았다. 풍만한 젖가슴이 탄력있게 흔들렸고 젖꼭지는 이미 단단해져 있었다. 조철봉이 한입에 젖가슴 윗부분을 입에 넣고는 혀끝으로 젖꼭지를 굴리기 시작했다.
“아아, 아저씨.”
미치코가 조철봉의 머리를 두손으로 움켜쥐면서 신음했다. 그때 골짜기를 더듬던 조철봉의 손이 축축해졌다. 미치코의 샘물이 넘쳐나고 있는 것이다. 조철봉은 혀끝으로 젖꼭지를 아주 조심스럽게 튕기고 어르고 쓸었다. 그 혀끝의 작은 동작에 따라 미치코는 신음은 점점 더 높아졌는데 온몸은 이제 불덩이처럼 뜨거워졌다.
“아아.”
미치코가 몸을 비틀면서 조철봉의 어깨를 잡아당기는 시늉을 했다. 얼른 몸위에 올라와 채워 달라는 표시였다. 그러나 조철봉의 입술은 이제 젖가슴에서 떨어져 배꼽을 핥았고 점점 더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아, 아.”
미치코의 신음이 다급해졌다. 이제는 몸을 비틀면서 조철봉의 어깨를 움켜 쥐었지만 다음을 기대하고 있는듯 두 다리가 벌려졌다. 조철봉의 입술이 그쪽으로 내려오기를 무의식중에 기대하는 동작이다.
“아앗.”
조철봉의 입술이 아랫배를 거쳐 숲의 위쪽 끝에 닿았을때 미치코의 입에서 높은 외침소리가 울렸다. 그러더니 순간 온몸이 굳어졌다.
“아아아.”
조철봉이 가만 있는데도 미치코는 높고도 긴 신음을 뱉으며 온몸을 떨기 시작했다. 그때 조철봉의 입술이 골짜기를 더듬어 내려가면서 샘끝에 닿았다.
“으으음.”
이윽고 조철봉의 입에서 신음같은 탄성이 울렸다. 미치코의 샘에서는 뜨거운 용암이 넘쳐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사이에 미치코는 절정에 닿았던것 같았다.
조철봉은 상체를 일으켜 미치코를 정면으로 내려다 보았다. 가쁜 숨을 뱉으며 미치코는 눈을 감고 있었는데 이마와 코끝에 작은 땀방울이 맺혀 있다. 두팔로 침대를 짚은 조철봉의 호흡도 거칠었다. 얼굴도 땀투성이다. 그때 미치코가 눈을 떴다. 반듯이 누워있던 터라 서너번 눈을 깜박여 위쪽에 맞추더니 놀란듯 탄성을 뱉었다. 조철봉을 본 것이다.
“아아, 아저씨.”
그러더니 얼굴에 희미한 웃음기를 띠었다.
“아저씨, 나, 정상에 올랐어요.”
“정상에?”
“네. 끝에.”
“그래?”
조철봉이 머리를 숙여 미치코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렇다면 내 철봉을 넣을 필요가 없다는거야?”
그러자 이번에도 3초쯤 뜸을 들였던 미치코가 누운 채 머리를 저었다.
“아뇨. 아저씨도 오르셔야죠.”
“너는?”
“난 됐다니까요?”
“또 할 수도 있다는 걸 모르나?”
이번에도 미치코는 이초쯤 생각하더니 물었다.
“또 정상에 오른다고요?”
“그래. 다시 한번.”
“난 지금 몸에 기운이 없는데.”
“곧 기운이 나.”
조철봉은 이제 철봉을 넣을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대화 소통에 조금 문제가 있는데다 미치코는 아직 성 경험이 빈약했다. 지금까지 겪은 어떤 여자보다도 그 횟수에 있어서는 적은 편이었다. 모두 12번이라니, 세 남자를 겪었다지만 아직 숫처녀나 다름없는 몸인 것이다. 이런 미치코를 닳고 닳은 여자들과 같이 대할 수는 없는 것이다.
“자, 미치코.”
미치코의 두 다리를 벌리면서 조철봉이 소곤대듯 말했다.
“철봉 들어간다.”
“하이.”
미치코가 두팔을 들어 조철봉의 목을 감아안으면서 대답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철봉이 샘 주위를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으므로 숨을 멈췄다.
“아아.”
이미 젖어 넘쳤던 골짜기와 샘이 철봉의 압박을 받더니 생기를 띠기 시작했다.
“아아, 아저씨.”
허리를 꿈틀대면서 미치코가 조철봉을 불렀다. 그러고는 목을 감았던 두 팔을 풀더니 조철봉의 엉덩이를 두손으로 누르려는 시늉을 했다.
“아아, 아저씨. 그만.”
몸이 금방 뜨거워진 미치코가 이제는 애타게 소리쳤다.
“해줘요. 아저씨.”
이미 한번 정상에 오른 미치코다. 샘에서는 다시 뜨거워진 용암이 넘쳐 흘렀고 방안에는 가쁜 숨소리와 신음으로 가득 찼다.
“아앗!”
미치코가 비명 같은 신음을 뱉었을 때였다. 조철봉은 철봉의 산책을 멈추고는 샘을 향해 천천히 진입시켰다.
“악”
이제는 입을 딱 벌린 미치코의 입에서 그런 신음이 뱉어졌다. 철봉이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조철봉의 입에서도 낮은 신음이 울렸다. 미치코의 샘이 갑자기 수축되면서 철봉을 압박했기 때문이다. 조철봉은 이를 악물었다.
“아아악.”
다시 미치코가 단발마의 신음을 뱉었을 때 조철봉도 외쳤다.
“는도독 땅리우.”
명기(名器)다. 조철봉의 머리는 터져 버릴 것 같은 열기로 가득 차 있었고 입술은 바짝 말랐다. 미치코의 샘은 좁았다. 그러나 탄력이 엄청나서 철봉의 압박 강도가 무서울 정도였다.
“아아앗!”
철봉이 다시 조금 더 안으로 진입하자 미치코는 방안이 터져 나갈 것 같은 신음을 뱉었다. 신음이 아니라 탄성이라고 해야 맞다. 조철봉은 철봉의 모든 신경세포가 환호하며 반기는 것을 느꼈다. 뇌의 견제에도 불구하고 미쳐 날뛰고 있는 것이다.
“는도독 땅리우.”
정신을 집중하고 다시 큰소리로 외쳤지만 곧 끙하는 신음이 터졌다. 견디지 못하겠다는 반응이었다. 그때 철봉이 미치코의 샘 끝까지 닿았고 다시 탄성이 터졌다.
“아아아아.”
조철봉은 자신이 지금 절체절명의 위기에 봉착해 있는 것을 알았다. 철봉은 지금 발사되기만을 학수고대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윽고 눈을 부릅뜬 조철봉이 앞쪽을 노려보았다. 시선이 침대 머리에 닿았지만 조철봉은 이까지 악물었다. 지금처럼 마음을 다잡고 필사의 각오를 다진 적은 드물었다. 그만큼 미치코의 흡인력이 강했기 때문이다. 바꿔야 한다. 조철봉은 심호흡을 했다. 지금까지의 방법으로는 견디어 낼 수가 없는 것이다.
“아아아악!”
그때 미치코가 엉덩이를 치켜올리면서 신음했다. 철봉이 빠져나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순간 조철봉은 징용되어 끌려나간 선조들을 떠올렸다. 사진에서만 본 장면이었으므로 영상이 흐렸다. 그러나 철봉은 맹렬한 기세로 샘 안을 향해 진입했다.
“으악.”
놀란 미치코가 조철봉의 허리를 감아 안았다. 철봉이 단숨에 바닥까지 닿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조철봉은 위안부로 끌려간 할머니들을 떠올리며 빠르게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억.”
미치코는 입을 딱 벌린 채 이제 신음도 제대로 뱉지 못했다. 그러나 쾌감이 철봉의 빠른 움직임에 비례하여 증가하고 있다는 증거로 몸이 터질 듯이 부풀려졌다. 조철봉은 이를 악물었다. 속도가 빠를수록 감촉이 증가되면서 인내력이 더 요구되는 법이다. 그러나 조철봉에게는 빠르고 거친 움직임이 무아지경에 빠져 현실을 잊게 하는 방법이기도 했다.
“으음.”
거칠게 하반신을 움직이던 조철봉은 신음을 뱉었다. 철봉이 터져 나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거칠고 빠른 움직임이 더 자극을 주는 바람에 대포가 발사되기 직전이 되었다. 미치코는 이제 입만 딱 벌린 채 얼굴이 새빨갛게 되어 있었는데 질식해서 죽는 표정 같았다. 절정으로 급상승해 가는 얼굴이다.
“세.만.립.독.한.대.”
조철봉이 이를 갈아붙이면서 그렇게 말했다. 그 말이 끝날 때까지 철봉이 여섯번 왕래를 했으니 한 자마다 한 번꼴이다.
“아우우.”
마침내 미치코가 온몸을 웅크렸다가 좌악 펴면서 마치 거대한 문어처럼 조철봉의 몸에 붙었다. 그러나 희한하게도 엉덩이 부분만은 조금 여유를 만들어 주었다. 그 와중에도 철봉이 왕래할 공간을 내놓은 것이다.
“는.도.독.땅.리.우.”
다시 여섯 자를 외치면서 조철봉이 여섯번 왕복했을 때 미치코가 터졌다. 히로시마 원자탄처럼.
미치코가 가라앉은 것은 그로부터 10분쯤이나 지난 후였다. 아직 온몸은 나른했지만 정신이 들자 방안은 마치 여름날 더운 바닷가에 온 것 같았다. 습기 속에서 비린내가 풍겨오는 것이다.
“좋았어요.”
미치코가 조철봉의 가슴에 볼을 붙이면서 말했다.
“아저씨는 최고야.”
조철봉은 잠자코 미치코의 허리를 당겨안았다. 물론 아직 대포는 발사하지 않아서 약실에 탄환이 든든하게 장전되어 있는 상황이다. 따라서 철봉은 아직도 건들거리고 있다.
“아저씨.”
미치코가 턱을 들고 조철봉을 불렀다.
“응?”
“한국 사람들은 다 이렇게 강해요?”
조철봉은 ‘응’ 소리가 저절로 나올 뻔 한 것을 대신 침을 삼킴으로써 막았다. 말도 안되는 소리인 것이다. 주위에 3분, 1분, 30초짜리가 수두룩하다. 한국민의 자존심을 위하여 그따위 엄청난 거짓말을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미치코와 그 일행에게 특별한 취급을 받고 싶으며 그럴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 나는. 미치코의 샘에 들어가 3분이상 버틴 놈이 있다면 1억원은 말고 1천만원은 내겠다. 나는 그곳에서 45분을 머물고 나온 놈인 것이다.
“아냐.”
조철봉이 부드럽게 말했다.
“내 주변에는 3분짜리도 많아.”
“저는.”
조금 망설이던 미치코가 조철봉의 가슴에 다시 얼굴을 붙이더니 속삭였다.
“2분 이상은 해보지 않았어요.”
“2분?”
“네. 2분.”
“시간 재 본거야?”
“응. 우연히.”
“그래서 쾌감을 느끼지 못했니?”
“아뇨. 들어갈 때는 좋았죠. 하지만 절정에 오르지는 못했습니다.”
“으음.”
“그래서 끝나고 혼자 있을 때 자위를 해서 만족시켰죠.”
“그렇군.”
“전 오늘 네번 절정에 올랐어요. 한번에 말입니다.”
“세번이 아니고?”
“네번입니다. 맨 마지막에 터지기 5분쯤 전에, 아저씨가 관이라는 말을 크게 하실 적에도 한번 올랐어요.”
“관?”
“예. 관수유라고 하신 것 같아요.”
그러고는 미치코가 다시 얼굴을 들었다.
“그건 무슨 말이에요?”
조철봉은 심호흡을 했다. 순국 선열들께는 대단히 죄송한 노릇이지만 아까 미치코를 공격하면서 유관순 열사를 불렀던 것이다. 물론 거꾸로 순, 관, 유를 연거푸 제창했으니 미치코가 관수유라고 들은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건 힘을 내려는 구호야.”
“구호?”
“응. 기합.”
“기합?”
“신호라고 하자.”
그때 미치코의 손끝이 우연히 철봉을 스치고 지났다가 다시 돌아왔다.
“아라.”
놀란 미치코가 철봉을 움켜 쥐었다.
“아직도 살았네.”
“응.”
조철봉이 배에 힘을 주자 철봉이 꿈틀거렸고 미치코는 마른 침을 삼켰다.
“아저씨는 대단해.”
그러더니 생각난 듯 말했다.
“후미코하고 아라한테 빌려주기 싫어.”
다음날 오전 회사에 출근한 조철봉의 사무실로 최갑중이 들어섰다. 갑중은 중국에서 돌아온 것이다.
“사업장 정리는 거의 끝났습니다.”
소파에 앉은 갑중이 보고했다.
“이제 개성 공단만 정상궤도에 올려 놓으면 됩니다.”
“수고했어.”
머리를 끄덕이던 조철봉이 생각난 듯 물었다.
“그런데 백두산 관광단지에 카지노 허가는 아직 안난거냐?”
“예, 아직.”
갑중이 조철봉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두 곳만 해도 많다고 합니다.”
“누가?”
“그, 북한측 홍국장이.”
“시발놈.”
잇사이로 욕설을 뱉은 조철봉이 앞쪽의 벽을 노려보았다. 백두산 관광단지의 개발, 운영권을 획득한 오성관광은 중국 옌지에 본부를 둔 합작회사 형식이지만 조철봉이 100% 투자한 회사인 것이다.
오성관광은 현재 백두산 관광단지에 5곳의 호텔과 유흥시설 건설을 거의 마무리짓고 다음날 초에 오픈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오성관광이 북한측에 카지노 3곳의 추가 승인을 요청했지만 아직 허가가 나지 않은 것이다. 카지노는 물을 것도 없이 돈이 되는 사업이다. 이제 백두산 관광단지의 카지노가 개업하면 돈을 벌기 시작한 중국인들이 무더기로 몰려올 것이 분명했다.
“아무래도 형님이 가 보셔야겠습니다.”
갑중이 먼저 선수를 쳤다.
“양명심이나 이연숙이를 이용해서 미인계를 쓰는 것도 한계가 있거든요.”
“알았다.”
머리를 끄덕인 조철봉이 입맛을 다셨다.
“꼭 내가 나서야 일이 되는군.”
“죄송합니다. 오전무나 홍실장도 은근히 형님이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오전무란 해외사업 투자책임자인 오정만 전무였고 홍실장은 기획실장겸 비서실장 홍재석이다. 그들은 모두 백두산관광단지의 마무리 작업을 체크하려고 지금 옌지에 가있는 것이다.
“내가 모레쯤 가도록 하지.”
조철봉이 말하자 갑중은 살았다는 표정을 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그렇게 연락하겠습니다.”
갑중이 방을 나가자 조철봉은 소파에 등을 붙였다. 카지노의 추가 승인을 받는 일은 홍재석이나 오정만, 또는 갑중이 나서서 해도 될 것이다. 승인 권한이 있는 북한의 관광개발국장 홍금철을 매수하든가 압력을 넣든가 하는 방법을 그들도 얼마든지 찾을 수가 있다는 말이었다. 갑중이 그렇게 말한 것은 다분히 아부가 섞여있다. 그러나 최고 경영자라고 해서 항상 새로운 비전이나 일거리를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사람인 이상 능력에 한계가 있다. 따라서 부하가 적당한 일거리를 가져와 너 아니면 안되는 일이라면서 맡길 때면 기분이 좋아지는 것이다. 비록 제 회사지만 자신의 존재 가치를 재확인하게 되며 그렇게 만들어준 부하를 쓰다듬어주고 싶어진다. 조철봉은 테이블 위에 놓인 캘린더를 보았다. 갑중에게 모레 떠난다고 한 이유는 미치코 때문이다. 더 자세하게 말한다면 미치코와 후미코, 아라 때문인 것이다. 어젯밤 미치코와 밤을 지내고 나서 아직도 그 여운이 가시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은 후미코와 아라를 만나기로 한 것이다. 이윽고 심호흡을 하고 난 조철봉은 전화기를 들었다. 서경윤에게 연락을 하려는 것이다. 영일과 함께 사는 서경윤은 보고를 받을 자격이 있다.
“지금 어디야?”
연결이 되었을 때 서경윤이 대뜸 물었다. 목소리가 얼음 구덩이 속에서 나온 것 같다. 물론 어젯밤 외박의 핑계는 그럴 듯했다. 북한의 고위급 인사가 입국해서 밤 늦게까지 회식을 하고 청평의 별장에다 모셨다고 한 것이다. 아침 식사도 같이 하면서 상담을 해야 하므로 청평에 같이 있겠다고 했으니 온전한 사이의 와이프라면 당연한 일이라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조철봉과 서경윤의 사이가 온전하지 못하니까 문제인 것이다. 경윤은 조철봉이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지 않는다. 그래서 가끔 조철봉은 팥으로 메주를 쑨다는 식으로 경윤을 속여 넘길 때도 있다. 예를 들어서 여자하고 밤을 보내고 나서 경윤한테 거의 그대로 말해버리는 것이다. 물론 비슷하게 각색해서 사실에 접근하지 못하게 한다. 그러면 경윤은 방향을 돌려 다른 곳을 수색하는 것이다. 조철봉이 사실을 말할 인간이 아니라고 믿기 때문이다.
“회사지 어디야?”
조철봉이 대답했을 때 경윤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지금 며칠째 집에 안 들어오는지 알아? 중국 다녀와서 말이야.”
“글쎄.”
“열흘에서 닷새째야, 이 인간아.”
조철봉은 경윤이 인간이라고 불러준 것 에 문득 감사하는 마음이 일었다. 짐승이라고 했어도 가만 있었을 것이다.”
“너도 알다시피 내가 일이 많잖아.”
조철봉이 말하자 수화기에서 먼저 코웃음 소리부터 났다.
“일도 많고 여자도 많겠지.”
“내가 여자 끊은 지 오래다.”
“차라리 밥을 끊는다면 내가 믿겠다.”
“이게 미쳤군.”
“네가 미친 놈이지.”
이렇게 되면 이 상황에서 원점으로 돌리기는 어렵다. 서로 달아오른 상태라 원점으로 돌리려면 ‘아냐, 난 안 미쳤어’ 해야 할텐데, 대한민국에서 길을 막고 조사를 해도 99%는 그렇게 못할 것이다. 그러나 조철봉은 그 남은 1%에 들었다.
“이봐, 그만해.”
해놓고는 조철봉이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너 친정 어머니하고 여동생하고 같이 밥 먹겠다고 했지? 그래서 내가 준비를 했는데 영일이랑 네 식구가 같이 제주도에서 며칠 쉬었다가 오는 게 어때?”
“…….”
“성산포의 그 선샤인빌라 말이야. 네가 멋있다고 했지 않아? 방 세개짜리에다 수영장까지 딸린 빌라 말이야.”
“…….”
“내가 예약해놓았는데, 오늘 오후 2시 비행기로. 빌라는 닷새동안.”
“…….”
“에쿠스도 닷새간 빌려놓았어. 네 앞으로 어때? 어머니 모시고 모처럼 동생이랑 며칠 쉬었다 올래? 어머니가 좋아하실 것 같아서 내가 오래전부터 생각했어.”
“…….”
“난 모레쯤 일 끝나고 갈테니까, 기분전환이나 해라.”
“나한테 뭐 잘못한 것 있지?”
이윽고 경윤이 그렇게 물었지만 목소리는 따스한 봄날에 풀밭 위를 스치면서 나오는 것 같았다. 그러나 조철봉은 긴장을 풀지 않고 대답했다.
“너한테야 항상 미안하지. 항상 고맙고.”
“몇시 비행기라고?”
경윤이 그렇게 물었을 때 조철봉의 마음이 바빠졌다. 그래서 서두르며 대답했다.
“20분만 기다려. 내가 알려줄 테니까.”
아직 예약도 안 했지만 불가능은 없다. 다 말한대로 될 것이다.
저녁 8시여서 미도호텔의 스카이라운지는 손님들로 혼잡했다. 손님 대부분이 관광객들이었는데 요즘은 중국 관광객이 부쩍 늘었다. 도처에서 들리는 것이 중국어였다. 라운지 안으로 들어선 조철봉은 창가의 테이블에 앉아있는 세 여자를 보았다. 물론 일본녀들이다.
“어서 오세요.”
다가선 조철봉에게 미치코가 활짝 웃으며 반겼는데 후미코와 아라는 웃기만 했다. 그리고 제각기 시선을 내리면서 수줍은 듯한 시늉을 했다.
“우선 식사부터 할까?”
자리에 앉은 조철봉이 묻자 미치코가 머리를 끄덕였다.
“저녁은 저희들이 살게요.”
“그럴 수가 있나?”
“아녜요.”
정색한 미치코가 조철봉을 똑바로 보았다.
“저희들 셋이 사겠어요.”
조철봉의 시선을 잡은 미치코가 말을 이었다.
“그래야만 해요, 아저씨.”
“좋아, 그럼 저녁을 얻어 먹기로 하지.”
“일식도 괜찮겠습니까?”
“물론이지.”
그래서 그들은 곧 호텔 2층의 일식당으로 내려와 방에 다시 자리잡았다. 미치코가 예약을 해놓은 것이다. 음식을 주문하고 나서 넷이 되었을 때 미치코가 입을 열었다.
“오늘밤 순서는 후미코인데 혼자 들어가기가 무섭다고 해요.”
조철봉이 눈만 크게 뜨자 미치코는 눈웃음을 쳤다.
“제가 어젯밤 이야기를 해주었거든요.”
“그랬더니?”
“말도 통하지 않는데 죽으면 어떡하느냐고 해요.”
“하긴 그렇군.”
정색한 조철봉이 머리를 끄덕였다.
“섹스할 때도 힘들겠어.”
“그래서 후미코는 나한테 같이 있자고 하는데….”
그 순간 놀란 조철봉이 눈을 크게 떴다.
“둘이?”
“하이.”
후미코와 아라는 다소곳한 표정으로 둘의 대화를 듣고 있었는데 대충 감을 잡는 것 같았다. 조철봉의 입에서 섹스란 말과 둘이라는 말이 튀어나왔을 때 후미코는 깜짝깜짝 놀라기까지 했다. 머리를 돌린 조철봉이 후미코를 보면서 말했다.
“미치코, 후미코한테 통역해줘.”
“하이.”
“둘이서 한 남자하고 섹스를 한 경험이 있느냐고 물어봐줘.”
그러자 미치코가 빠르게 후미코에게 묻더니 곧 통역했다.
“없다는데요.”
“그런데 이번에는 미치코하고 둘이서 날 상대하겠다는 거야?”
“아니, 그게 아니고….”
미치코가 당황한 듯 손을 내저었다.
“저는 옆에서 통역만 하라고.”
그러자 조철봉이 정색했다.
“난 그렇게 못하겠다고 전해. 아니….”
머리를 저은 조철봉이 덧붙였다.
“후미코씨하고는 못하겠다고 전해.”
그러자 미치코가 얼굴을 굳히면서 말했다.
“아저씨, 후미코는 악의로 말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무서워서.”
“그러니까 못 하겠다는 거야. 난 그런 분위기 싫어.”
조철봉의 목소리는 낮아졌지만 표정이 더 굳어졌다.
“난 짐승이 아냐, 섹스 머신도 아니고. 그리고 변태는 더 아니라고.”
말은 그렇게 했지만 조철봉의 가슴은 쿵쿵 뛰었다. 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성욕은 본능이다. 사랑의 감정 없이도 얼마든지 일어난다. 그리고 섹스 자체만으로 똑같이 느낄 수가 있는 것이다. 둘이면 어떻고 셋이면 어떠냐? 능력만 닿으면 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더욱이 상대방이 원하고 있지 않는가? 조철봉은 가슴에 담긴 숨을 소리죽여 길게 내품었다. 거부하고 질색까지 한것은 미치코를 의식했기 때문이다. 물론 미치코는 거부감을 보이지 않은 채 후미코의 말을 전했지만 알 수가 없는 것이다. 그때 미치코가 입을 열었다. 미치코는 아직 후미코에게 조철봉의 반응을 말해주지 않았다. 다행이다.
“아저씨.”
“응?”
“그냥 즐겨 보세요.”
“뭘?”
“섹스를요.”
“누구하고?”
“후미코하고 아라, 그리고.”
미치코가 엄지를 구부려 제 얼굴을 가리키며 웃었다.
“저까지요.”
“글쎄, 그건 좋지만 말야.”
“뭐가 어때서요? 우리가 좋다는데.”
그러고는 미치코가 힐끗 제 친구들을 보았다. 후미코와 아라는 궁금해 죽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미치코는 아직 통역해주지 않았다. 미치코가 말을 이었다.
“우리 조금도 어색하지 않아요.”
“그것 참.”
마침내 조철봉이 쓴웃음을 지었다.
“미치코, 난 네가 순진한 여자인 줄 알았는데.”
“순진이란 무슨 말이죠? 처음 듣는데.”
“까졌다는 말의 반대말이다.”
“까졌다니요?”
“에이.”
짜증이 난 조철봉이 심호흡을 하더니 정색하고 미치코를 보았다.
“미치코, 네가 원한다면 그렇게 하자.”
“정말요?”
눈을 동그랗게 뜬 미치코가 그때서야 후미코와 아라에게 통역을 시작했다. 이번 통역은 꽤 길었는데 후미코와 아라는 숨을 죽이고 들었다. 이윽고 미치코의 말이 끝났을 때 후미코와 아라가 제 각기 몇마디씩 했다.
“고맙다고 해요.”
미치코가 통역했다.
“그리고 아라도 저하고 같이 있고 싶다는군요.”
“이런 빌어먹을.”
“얘들한테는 한번씩만 해주세요.”
“무슨 말이야?”
“높게 올라가는 것.”
“으음.”
“후미코하고 아라는 아직 그 경험이 한두번밖에 안돼요.”
미치코의 얼굴에 다시 웃음기가 떠올랐다.
“그래서 이렇게 무서워하는 거예요.”
머리를 든 조철봉이 이제는 노골적으로 후미코와 아라를 훑어 보았다. 둘다 미치코와 동갑이라니 스물넷이겠지만 후미코는 동그란 얼굴에 키가 작았고 아라는 갸름한데다 날씬했다. 미치코는 풍만한 스타일이었으므로 셋이 각각 특징이 있는 셈이었다. 조철봉의 시선을 받은 후미코와 아라의 얼굴이 동시에 붉어졌다. 경험이 일천하다고 해도 눈빛에서 색욕을 느꼈을 것이었다.
“좋아.”
다시 결심을 굳힌 듯 조철봉이 얼굴을 굳히고 말했다.
“해보자고.”
이것이 다 한국 배우들이 일으킨 한류덕분이겠지만 무임 승차를 해서는 안될 것이다. 국위 선양은 해야 된다.
밤 10시 반이 되었을 때 조철봉은 그린호텔 앞에서 멈춘 택시에서 내렸다. 미치코 일행과 헤어졌다가 다시 10시 반에 이곳에서 만나기로 했던 것이다. 조철봉이 호텔 현관의 회전문을 밀고 막 안으로 들어섰을 때 주머니의 핸드폰이 진동을 했다. 보나마나 미치코일 것이다. 발신자 번호를 보지도 않고 조철봉은 핸드폰을 귀에 붙였다. 10시 반에 미치코와 후미코가 이곳에다 방을 잡아놓고 전화를 해주기로 했던 것이다.
“여보세요.”
“조 사장님?”
수화구에서 굵은 사내의 목소리가 울렸으므로 조철봉은 질색을 했다. 핸드폰을 귀에서 떼었다가 다시 붙인 조철봉이 물었다.
“누구십니까?”
“아, 실례합니다. 저는 동양여행사의 가이드 이문길이라고 합니다만.”
“그런데요.”
이제 로비의 기둥 옆에 멈춰선 조철봉의 목소리가 조금 차분해졌다. 로비 안에는 중년남녀 둘이 창가의 의자에 앉아있을 뿐이어서 조용했다. 그때 사내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는 후미코씨 부탁으로 지금 통역을 해드리고 있는데요.”
“아, 그래요? 그런데 무슨 일로?”
“저, 혹시 오늘밤에 후미코씨를 만나기로 하셨습니까?”
조철봉의 이맛살이 찌푸려졌다. 예감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 분명했다. 미치코 대신으로 통역이 나타난 것부터가 수상하다. 그때 사내가 조철봉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말을 이었다.
“저, 지금 후미코씨가 제 옆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먼저 말좀 물읍시다.”
“예, 사장님.”
“미치코는 어디 있습니까?”
“예, 그것이.”
사내가 조금 뜸을 들인 것이 후미코가 옆에 있다면 상의를 하는 것 같았다. 5초쯤 지났을 때 사내가 대답했다.
“미치코씨는 지금 그린호텔 객실에 있을 거라고 하는데요.”
바로 이 호텔이다. 그리고 후미코하고 같이 있기로 되어 있었다. 바짝 긴장한 조철봉의 귀에 사내의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후미코씨와 저는 길 건너편의 오리엔트호텔에 있습니다.”
“이건 도대체.”
“아, 제가 내막을 말씀드리지요.”
조철봉의 짜증스러운 대꾸를 들은 사내의 말이 빨라졌다.
“저, 후미코씨는 오늘밤에 사장님이 미치코씨하고 셋이서 같이 있기로 하셨는지를 알고 싶다는데요.”
“뭐요?”
눈을 치켜뜬 조철봉이 앞쪽을 노려보았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아, 예, 셋이서 같이 그것을 말입니다. 그것을 하기로 하셨습니까?”
그것이라면 섹스다. 사내가 더듬대며 첫번째 말했을 때부터 알아들었지만 조철봉이 누구인가? 시치미를 딱 떼었다.
“난 무슨 말인지 도무지 모르겠는데. 셋이 고스톱을 친다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이제는 사내의 목소리가 또렷해졌다.
“후미코씨는 사장님하고 둘이 있고 싶다는 겁니다. 그런데 미치코씨가 사장님은 셋이 같이 있어야 된다고 하셨다는군요. 후미코씨와 둘이 있기는 싫다고 하셨다는데.”
그러고는 사내가 물었다.
“후미코씨는 그것을 확인하고 싶답니다.”
조철봉은 어깨를 부풀렸다가 길게 숨을 내뿜었다. 그렇다면 미치코가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닌가? 후미코와 아라가 혼자서는 죽어도 못한다고 했던 것이 아니었다. 그 반대였다. 다시 한번 숨을 내뿜고 난 조철봉이 말했다.
“맞습니다, 맞고요.”
조철봉이 말을 이었다.
“난 말도 통하지 않는 분하고 그냥 몸으로만 부닥치기가 싫어서 말입니다.”
“아아,”
“그건 꼭 짐승들이 하는 짓 같아서요. 그렇지 않습니까?”
“아아, 예.”
“그래서 미치코한테 함께 있자고 그런 건데 꼭 셋이 그것을 하려는 의도는 아닙니다.”
“아아, 예.”
“어쨌든.”
다시 심호흡을 한 조철봉의 목소리가 조금 굵어졌다.
“후미코씨는 둘이 있고 싶은 모양인데 난 사양할랍니다. 그렇게 전해 주시지요.”
“아아, 예 잠깐만요.”
사내가 당황한 듯 서두르더니 이번에는 10초쯤 지나고 나서 말했다.
“저어, 둘이서는 도저히 안되겠습니까?”
“예, 안 내킵니다.”
“그럼 잠깐만.”
하더니 5초쯤 지났을 때 사내가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알겠습니다. 사장님, 실례했습니다.”
그러고는 전화가 끊겼으므로 조철봉은 어깨를 늘어뜨렸다. 이제 후미코에 대한 기대는 사라진 것이다. 이어서 계획이 잡혀있던 아라도 마찬가지가 되었다. 그러면, 조철봉은 머리를 들고 천장을 보았다. 천장 샹들리에를 본 것이 아니라 위층 객실에 자리잡고 있을 미치코를 떠올린 것이다. 미치코는 아직 후미코와 이렇게 확인한 사실을 모를 것이었다.
그렇다면 후미코는 미치코에게 뭐라고 할 것인가? 머리끄덩이를 잡고 싸울 것인가? 아니면 시치미를 떼고 미치코와 합류하지 않을 것인가? 아니, 그것보다도, 머리가 복잡해진 조철봉이 발을 떼어 로비 구석에 놓인 소파로 가서 앉았다. 중년 남녀 둘은 어느새 사라져서 로비에는 그 혼자뿐이다. 미치코는 왜 그런 거짓말을 했을까? 친구들에게 넘겨주기 싫었기 때문이라면 얼마든지 다른 핑계를 만들 수 있었을 것이었다. 굳이 셋이서 같이 놀자고 할 필요가 없다. 그때 바지 주머니의 휴대전화가 진동했으므로 조철봉이 이번에는 발신자 번호부터 보았다. 호텔 번호가 찍혀 있는 것을 보면 미치코다. 조철봉은 번호를 노려본 채 한동안 가만 있었다. 그러다가 자동응답 기능으로 바뀌기 직전에 휴대전화를 귀에 붙였다.
“저, 방번호 알려 드릴 게요.”
응답소리를 들은 미치코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1212호, 1,2,1,2호, 오케이?”
“응.”
“빨리 오세요.”
“알았어.”
휴대전화를 귀에서 뗀 조철봉은 곧장 엘리베이터로 다가갔다. 밤 10시50분이 되어가고 있었다. 약속 시간보다 20분이나 늦은 것이다. 조철봉이 1212호실의 벨을 눌렀을 때 금방 문이 열렸다.
“어서 오세요.”
환한 웃음을 띤 미치코가 옆으로 비켜서며 말했다.
“방을 늦게 잡아서 연락이 늦었어요. 미안합니다.”
방 안으로 들어선 조철봉은 미치코 혼자뿐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자, 그러면 미치코는 뭐라고 둘러댈 것인가?
“후미코는?”
의자에 앉으면서 조철봉이 묻자 미치코의 얼굴에 엷은 웃음기가 떠올랐다.
“부끄러워서 싫다고 했어요.”
“그래?”
머리를 끄덕인 조철봉이 정색하고 미치코를 보았다.
“셋이 하는 건 부끄럽고, 둘이 있는 건 무섭고, 그런가?”
“그런 것 같아요.”
“그럼 할수 없지.”
“씻으세요, 제가 등 밀어드릴게.”
다가선 미치코가 상기된 얼굴로 조철봉을 내려다 보았다. 셔츠에 바지 차림이었지만 풍만한 곡선이 다 드러나 있어서 육감적이다.
“물 받아 놓았어요.”
“미치코.”
조철봉이 눈으로 앞쪽 의자를 가리켰다.
“거기 앉아. 할 이야기가 있어.”
미치코가 조철봉의 눈치를 살피더니 앞쪽에 앉았다.
“무슨 말씀인데요?”
“언제 귀국하나?”
애초에는 후미코한테서 전화가 온 이야기를 물으려고 했었는데 입 밖으로는 다른 말이 나왔다.
“하이, 모레 오후 두시 비행기로.”
“만나서 반가웠어, 미치코.”
“저도 그렇습니다, 아저씨.”
미치코가 정색한 얼굴로 조철봉을 보았다. 아직도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다.
“좋은 추억이 될것 같아요.”
“친구들도 그렇게 되었으면 해.”
“그럴 겁니다.”
“후미코한테서 전화가 왔었어.”
마침내 조철봉이 속에 품었던 말을 뱉고야 말았다. 눈만 크게 뜬 미치코를 향해 조철봉이 말을 이었다.
“여행사 안내원이 통역을 해주더구먼.”
“…….”
“후미코는 둘이 있고 싶었는데 내가 셋이 있어야만 한다고 한 것이 사실이냐고 물었어.”
조철봉은 여전히 시선만 주고 있는 미치코를 보았다. 전혀 표정의 변화가 없는 것이 못 알아들은 것처럼도 보였다.
“그래서 내가 사실이라고 했지. 말도 통하지 않는 남녀가 몸만 부딪친다는 것이 짐승처럼 보여서 싫다고.”
“…….”
“그랬더니 후미코가 통역을 시켜서 둘이 있으면 좋겠다는 거야. 그래서 싫다고 했지.”
“…….”
“후미코가 알겠다면서 전화를 끊더군. 그, 여행사 가이드가 말야.”
조철봉이 미치코를 똑바로 보았다.
“미치코, 왜 쓸데없는 짓을 했니? 다른 이유를 붙여서 후미코나 아라를 떼어 놓을 수도 있었지 않아? 걔들한테 내가 싫다고 해버렸다면 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아저씨.”
그때 미치코가 입을 열었다. 조철봉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고 있었지만 태연했다. 위축된 표정이 아니다.
“후미코하고 아라는 아무것도 몰라요.”
미치코가 차분하게 말하자 조철봉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모르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조금 전에 아저씨한테 전화한 남자, 그 여행사 가이드라는 사람, 내가 시켜서 전화한 겁니다.”
“뭐라고?
외마디 소리처럼 되받은 조철봉의 뇌가 빠르게 운동했다. 그렇다면, 조철봉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여행사 가이드의 옆에는 미치코가 있었단 말인가? 그러면 날 시험해 보았단 말인가? 이건 도무지.
조철봉의 표정을 본 미치코가 서두르듯 말을 이었다.
“걔들한테는 처음부터 그랬어요. 아저씨 말을 전혀 다르게 통역했어요. 셋이 자자는 말은 하지도 않았어요.”
“….”
“둘이 잔다는 말도, 걔들은 제가 아저씨하고 섹스했는지도 몰라요.”
“빌어먹을.”
앓는 소리처럼 욕설을 뱉은 조철봉이 미치코를 노려보았다.
“이봐. 도대체 왜 그런 거야? 왜 일을 복잡하게 만들어?”
“아저씨가 어떤 사람인지 연구해 보려고요.”
거침없이 말한 미치코가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조철봉 앞에 와 섰다.
“죄송합니다.”
미치코가 두 손을 앞으로 모으고는 머리를 숙여 절을 했다.
“저 혼자 섹스를 밝히는 것이 창피해서 친구들을 끌어들였습니다.”
“나아, 참.”
“그리고 아저씨가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지도 궁금했고요.”
“제기랄.”
“감격했습니다.”
“얼씨구.”
“여행사 직원은 여기서 전화를 했어요. 제가 시키는 대로만 했는데.”
“흥.”
“친구들한테 제가 거짓말 한 것을 덮어 주시더군요. 정말 남자이십니다.”
“이제 그만.”
손바닥을 펴보인 조철봉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런데 어쩌지? 나는 기분이 나빠졌는데? 난 기분이 나쁘면 여자하고 같이 있기도 싫거든.”
“아저씨.”
조철봉을 부르면서 미치코가 와락 다가섰다. 젖가슴이 조철봉의 몸에 닿았고 올려다보는 얼굴은 바로 턱 밑에 붙어 있다.
“제가 먼저 다 말씀 드리려고 했었는데 늦었어요. 기분 나쁘시다면 용서해 주세요.”
“말은 잘한다.”
“저, 실은 재일동포입니다. 한국 이름은 김분순이고요.”
“이런.”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서던 조철봉이 침대 모서리에 걸려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겨우 몸을 바로 세운 조철봉이 눈을 가늘게 뜨고 미치코를 보았다.
“김분순?”
“네, 아저씨.”
“그래서 한국말을 그렇게 잘했구먼.”
“네, 아저씨.”
미치코는 당당하게 대답했지만 조철봉의 깊은 속을 짐작이나 하겠는가? 요 며칠간 서경윤과 장모, 처제까지 제주도 여행을 보내놓고 조철봉은 들떠 있었다. 왜냐하면 처음으로 일본 여자를 자지러지게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속된 말로 하면 따먹었다고 하고, 조금 모양을 만들어서 말하면 태극기를 꽂았다고 한다. 그런데 이제 와서 재일동포라니, 지금 조철봉의 심사는 황당했다. 잘 먹고나서 주문한 음식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된 심사와 비슷했다. 그때 미치코가 웃음띤 얼굴로 조철봉을 보았다.
“독도는 우리땅, 맞죠?”
조철봉의 시선을 받은 미치코가 두손으로 허리를 감싸안았다. 힘이 세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우스웠어요. 그 말을 거꾸로 하셨죠?”
“….”
“그리고 유관순 열사도.”
조철봉은 어금니를 물었다. 이건 마치 한국 여자를 상대로 독립운동을 한 것이나 같다.
“좋아, 미치코. 아니, 분순이.”
조철봉이 입을 열었다.
“이제 독도가 우리땅이란 말을 제대로 해도 상관 없겠지만 말야.”
눈을 가늘게 뜬 조철봉이 미치코를 내려다 보았다.
“어쨌든 난 집에 가야겠어. 기분이 내키지가 않아서 그래.”
“아저씨.”
“왜?”
“오늘밤만 저하고 같이 있어 주세요.”
조철봉의 허리를 두 손으로 감아 안은 채 미치코가 애원하듯 말했다.
“부탁해요, 아저씨.”
미치코의 두 눈에는 어느덧 물기까지 반짝이고 있었으므로 조철봉은 가늘게 숨을 뱉었다. 마음이 흔들린 것이다. 일단 화는 났지만 따지고 보면 별것도 아닌 일이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진짜 일본녀인 후미코와 아라를 안지 못하게 된 것이지만 그건 미치코의 방으로 들어오기 전에 이미 단념한 것이 아니었던가? 어쨌든 손해 본 장사는 하지 않았다. 미치코의 시선을 받은 조철봉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좋아, 오늘밤은 한국여자 김분순하고 놀자구.”
그 순간 미치코의 얼굴이 환해졌다.
“고맙습니다, 아저씨.”
“고맙긴, 뭘.”
미치코를 떼어놓은 조철봉이 옷을 벗어 던지고는 욕실로 들어섰다. 욕조에는 이미 가득 물이 차 있었으므로 조철봉은 안에 들어가 누웠다. 그러자 온몸이 나른해지면서 머릿속도 맑아졌다. 그때 욕실로 미치코가 들어섰는데 몸에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았다. 풍만한 알몸을 거침없이 드러낸 채 미치코가 욕조 앞으로 다가와 섰다.
“아저씨, 등 밀어드려요?”
“아니, 됐어.”
“그럼 어깨 주물러 드려요?”
“아니.”
머리를 저은 조철봉이 바로 눈앞에 펼쳐진 미치코의 하체를 보았다.
“미치코. 아니, 분순이.”
“네, 아저씨. 미치코라고 불러주세요.”
“그래, 미치코. 네 부모님도 모두 재일동포이신가?”
“네, 두분 다 한국인이세요. 저는 재일동포 3세인 셈이죠.”
“그럼 너하고 만났던 남자도 모두 재일동포였나?”
“아뇨, 일본 남자였어요.”
“한국 남자는 내가 첨이란 말인가?”
“네.”
그러고는 미치코가 상기된 얼굴로 웃었다.
“그리고 제일 멋있었구요.”
조철봉의 시선이 골짜기와 숲 근처만 맴돌고 있었는데도 미치코는 수줍어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가깝게 다가와 섰다.
“으음.”
마침내 조철봉의 입에서 신음이 뱉어졌다. 달아오른 것이다.
“미치코, 이리와.”
“예, 아저씨.”
미치코가 고분고분 다가와 섰을 때 조철봉은 손으로 골짜기를 더듬었다.
“아아.”
손끝이 골짜기의 붉은 능선을 스치기만 했는데도 미치코의 입에서 높은 탄성이 터져 나왔다.
“아저씨가 보기만 해도 물이 넘쳐요.”
미치코가 한쪽 다리를 들어 욕조위에 올려 놓으면서 말했다. 숨결이 가빠져 있었다. 조철봉은 다리가 올려지는 바람에 눈앞에 더 확실하게 드러난 골짜기와 숲을 보고는 숨을 멈췄다. 기묘한 자세였고 이런 위치에서 샘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과연 수백만 가지의 자세와 변화가 있는 것이다.
조철봉은 눈 앞에 펼쳐진 미치코의 샘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눈 앞이 아니라 머리 위에 있다고 해야 맞는 표현이 될 것이다. 거리는 이제 30센티미터 정도, 불빛이 앞쪽에서 비치고 있었으므로 완벽하게 드러나 있다.
“으으음.”
조철봉의 입에서 다시 탄성이 나왔다. 지금까지 위에서 내려다 본 적은 많았지만 위에 떠있는 샘은 처음 보는 것이다.
“훌륭하다.”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며 조철봉이 말했을 때 미치코가 불렀다.
“아저씨.”
“응?”
“지금 해줘요.”
“천천히.”
“싫어요.”
미치코가 다리를 오므렸으므로 위쪽에 떠 있던 얼굴이 드러났다. 붉게 상기된 얼굴에서 물기를 머금은 두 눈이 번들거리고 있다.
“여기서요, 아저씨.”
“여기서?”
“응.”
그러고는 미치코가 욕조를 두 손으로 쥐더니 엉덩이를 내밀고는 두다리를 벌리면서 엎드렸다. 순식간에 자세를 만들어 버린 것이다.
“아저씨, 빨리.”
“급했구먼.”
“그냥 넣어줘요, 미치겠어.”
욕조를 움켜쥔 채 미치코가 애타게 말했고 조철봉은 마침내 욕조에서 일어섰다.
“미치코, 침대로 가자. 여긴 불편해.”
조철봉이 말하자 미치코는 엎드린 채 머리를 저었다.
“싫어요. 불편한 게 더 좋아.”
“뭐라고?”
“난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하고 싶었어.”
그 순간 미치코의 뒤로 돌아가 있던 조철봉이 눈을 크게 뜨고는 움직임을 멈췄다.
“뭐? 엘리베이터 안에서?”
“응, 열차 화장실 안에서도 하고 싶었고.”
“그래?”
“사람이 드물게 다니는 골목에서도.”
“허어.”
“난 중학교 때 처음 했어요. 열여섯살때.”
“뭐라고?”
“중학교 동창 남자애하고 걔네집 창고에서 했어.”
“…….”
“서서 했는데 10초도 안걸렸어. 들어갈 때 아프기만 하면서 세번인가 네번 쑤석대다가 끝났어.”
그때 조철봉이 철봉을 샘 끝에 붙였다. 철봉의 감촉을 느낀 미치코가 몸을 굳히더니 벌써부터 헐떡이며 말했다.
“아저씨, 천천히 하지마. 그냥 팍 넣어줘. 아주 아프게.”
“그래?”
했지만 조철봉은 미치코의 흰 엉덩이를 내려다 보면서 망설였다. 지금 미치코는 옛날 일을 회상하면서 그때의 장면을 재현해보고 싶은 것이다. 세상에, 10초 안에 서너번 쑤석대고 끝나다니, 조철봉은 그 와중에도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이보다 더 나은 주문은 없을 것이었다. 모든 사내가 좋아할 주문이다. 마치 5백점 만점 수능에서 20점 이상은 다 합격시킨다는 말이나 같다.”
“아저씨, 빨리.”
미치코가 이제는 그 큰 언덩이를 흔들며 재촉했으므로 조철봉은 주문을 받아 들이기로 했다. 변태는 아니지만 미치코는 색다른 자극을 탐내고 있다. 이윽고 조철봉은 철봉을 겨눈 다음 넣었다.
미치코의 주문대로 힘껏 넣어버린 것이다. 철봉은 마치 뚫고 나갈 것 같은 기세로 진입했는데 조철봉으로서는 드문 동작이었다.
“악.”
그순간 미치코가 짧게 비명을 지르더니 번쩍 머리를 들었다. 앞을 향하고 있어서 조철봉은 미치코의 뒷머리만 보았다. 그때였다. 조철봉은 안으로 파고 들어간 철봉에 가해지는 압박감을 느끼고는 긴장했다. 샘이 수축되고 있는 것이다. 조철봉은 미치코의 어깨를 두손으로 움켜쥐었다. 그러고는 엉덩이를 뒤로 물리면서 철봉을 빼내었다. 그순간 철봉에 가해지는 마찰감으로 온몸이 수축되는 것 같은 쾌감이 밀려왔다. 빠른 속도로 빼내었는데도 철봉의 피부 신경세포는 악착같이 그 감촉을 뇌의 기억세포에 전달시켜 준 것이다.
“아아아아.”
처음 넣을 때는 놀란 비명 같은 외침이 미치코의 입에서 터져 나오더니 나갈 적에는 긴 신음이 뱉어졌다. 분명한 탄생이다. 조철봉은 어금니를 물었다. 동작이 빠르다고 신경세포의 느낌을 둔하게 전달받는 것이 아니다. 바쁘게 달리면 건성으로 본다는 주마간산이란 옛말도 있지만 철봉은 안그렇다. 오히려 더 확실하게 느끼며 컨트롤이 어려워진다. 그래서 작업할 때 맨 나중에 움직임이 빨라지는 것은 ‘에라, 모르겠다’하면서 달려간다고 봐도 될 것이다. 이때는 불경을 외워도 힘들며 애국가를 거꾸로 불러도 어렵다. 아니, 그 빠른 동작속에서 거꾸로 외울 수가 없는 것이다. 만일 그런 놈자가 있다면 대선에 출마해도 될 것이다. 조철봉은 칼집에서 빠져 나온 것 같은 벌건 철봉을 다시 겨누고는 이번에는 더 힘차게 전진했다.
“아악!”
미치코의 비명이 더 크게 욕실에 울려 퍼졌다. 눈을 부릅뜬 조철봉은 문득 일제치하의 36년을 떠올리려 했지만 미치코가 재일동포라는 것이 바로 연상되었다. 그리고 실제로 겪지않은 36년의 효과는 미미할 것이었다. 그 생각을 하는 시간은 0.3초 정도였고 조철봉은 다시 빠르게 철봉을 빼내었다.
“아유우.”
미치코가 온몸을 비틀면서 신음했다. 그순간 조철봉은 철봉으로 몰려오는 뜨거운 열기를 느꼈다. 아랫배 깊숙한 곳에서 마치 지구의 핵에서 분출된 용암처럼 지표를 향해 뿜어져 나오고 있는 것이다.
“어어.”
자기도 모르게 조철봉이 놀란 신음을 뱉으면서 다시 힘차게 철봉을 내질렀다. 급한 상황이어서 철봉을 내지르는 힘이 더욱 세어졌고 속도 또한 빨랐다.
“아악!”
미치코의 비명이 다시 울렸다. 핏발선 눈을 부릅뜬 조철봉은 열중했다. 그야말로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의 속도로 철봉이 왕복했는데 이제는 브레이크가 고장 난 자동차가 되었다. 언덕길을 내려가는 자동차의 브레이크가 없는 것이다.
“악, 악, 악, 악.”
철봉의 진퇴가 빨랐으므로 미치코의 신음이 잘못 녹음된 배우의 입놀림처럼 한템포 늦게 들렸다가 다시 맞춰졌다.
“으악.”
그순간 조철봉의 용암이 지표를 뚫고 뿜어나왔다. 그 분출이 너무 강했으므로 조철봉은 온몸이 앞으로 쏟아져 나가는 느낌을 받으면서 신음했다.
“아아악.”
동시에 미치코가 온몸을 굳히면서 신음을 뱉더니 곧 떨기 시작했다. 10초라고 했는데, 조철봉의 머릿속에 그말이 떠올랐다. 나는 10초는 넘었겠지.
(1139)첫사랑-1
생활에 바쁜 인간들은 대부분 계절도 잊은 채 더위에 지쳐 지내다가 어느날 아침에 갑자기 추위를 느끼면서 가을을 맞게 된다. 그 때가 전에는 8월 중순이었다가 차츰 늦어져서 요즘은 9월 말에 가을을 느끼는 인간도 있다. 가을이다. 9월말의 아침에 모처럼 일찍 일어나 베란다로 나갔던 조철봉이 그렇게 가을을 맞았다. 9월 30일. 일년의 4분의 3이 지났으며 앞으로 석달이 남았다.
“빌어먹을.”
베란다의 난간에 두 손을 짚고 선 조철봉이 씁쓸해진 얼굴로 투덜거렸다.
“세월 잘 가는구나.”
그때 뒤쪽에서 서경윤의 목소리가 울렸다.
“뭐해?”
조철봉이 대꾸하지 않자 서경윤이 비웃었다.
“무슨 청승이야?”
이런 말을 듣고 분기를 일으키지 않는다면 치명적인 약점을 잡혔거나 모자라는 놈 일 것이다. 그러나 조철봉은 못들은 척 앞쪽의 아파트만 보았다. 조철봉에게는 그 따위 이유는 해당되지 않는다. 이제는 서경윤도 적응이 되어 있어서 부부간의 신뢰나 사랑, 미래 따위는 기대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서로 필요하기 때문에 산다. 서경윤은 물질과 원할 경우 제공되는 섹스, 거기에다 둘 사이의 자식 영일에게 아버지라는 간판과 보호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조철봉은 마지막으로 돌아가 자빠질 수 있는 집과 역시 영일에 대해서는 이하동(同)이다.
“추우니까, 문 닫아, 청승은 혼자 떨고.”
하면서 서경윤이 뒤쪽의 유리문을 닫아버렸으므로 조철봉은 베란다에 격리되었다. 그러나 갑자기 날씨가 더 쌀쌀해진 느낌이 들었다. 오전 6시20분, 아직 하늘은 잿빛이었고 해는 떠오르지 않았다.
“젠장, 사는 것이.”
조철봉이 또 혼자 투덜거렸다.
“이렇게 삭막해서야.”
입에서 흰 김이 품어져 나왔으므로 조철봉은 입을 딱 벌리고 숨을 서너번 품어 보았다. 그때 갑자기 눈에 눈물이 고이면서 코끝이 시렸다. 남이 보면 만날 오입질에 세계 곳곳에다 공장을 세워 놓고 사방 팔방으로 돌아 다니면서 활발하고 살맛나게 지낸다고 할 것이다. 거기에다 살림 차려준 여자가 하나 둘인가? 그런 작자가 인생이 삭막하다고 불평하다니, 그러나 여자를 겪으면서 그만큼 더 가슴이 메말라 가고 있다는 것을 조철봉만은 안다. 그러다가 진이 빠져 죽을 것이다. 다시 길게 숨을 뱉던 조철봉이 문득 머리를 들었다. 스물두살 때 그러니까 지금부터 18년 전, 대학에서 만났던 첫사랑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름도 잊어먹지 않았다. 고영민, 한 살 아래였으니 지금 37세가 되어있을 것이다.
“으음.”
눈을 가늘게 뜬 조철봉의 입에서 낮은 신음이 울렸다.
“고 영 민.”
한자씩 또박또박 이름을 불러본 조철봉이 허리를 펴고 섰다. 그때 동녘 하늘이 밝아져 있는 것이 보였다. 딱 6개월을 사귀다가 군에 가는 바람에 헤어진 첫사랑이다. 3년 군에 갔다왔더니 그 망할 년은 어느새 중학교 교사가 되어 있었다. 그러더니 2년쯤 후에 잘나가는 대기업 사원과 결혼했다는 소문만 듣고 그 후로는 잊었다. 그때 바람이 스치고 지나갔으므로 조철봉은 어깨를 움츠렸다. 베란다의 유리문을 열고 응접실로 들어서자 서경윤이 힐끗 시선을 주었다.
“가을 타는 거야?”
조철봉은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표정은 밝아져 있었다.
“고영민씨는 지금 성남에 삽니다.”
박경택이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시 변두리의 20평형 아파트에서 딸하고 둘이 살고 있습니다.”
소파에 등을 붙이고 앉은 조철봉은 잠자코 듣기만 했다. 오후 5시반, 앞에 앉은 박경택은 잔뜩 긴장하고 있었는데 조철봉의 오더를 직접 받기는 처음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요즘은 얼마나 빠르고 편리한 세상인가? 아침 9시에 오더를 주었더니 8시간 만에 고영민에 대한 모든 정보가 수집된 것이다. 지금까지 조철봉은 이런 일을 최갑중에게 맡겨왔다. 갑중은 조철봉의 지시를 받고 여러 곳의 용역회사에 오더를 주었는데 박경택은 갑중의 후배로 주로 여자 관계의 일을 처리해왔다. 조철봉의 눈치를 살피던 경택이 들고 있던 서류를 계속해서 읽었다.
“전 남편 홍문호씨하고는 5년 전에 생활비와 양육비를 받는 조건으로 이혼했는데 전 남편은 3년전에 미국으로 떠나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고영민씨는 2년전부터 학원 강사로 나갔지만 작년 말에 그만두고 지금은 집에서 컴퓨터 관련 일을 합니다.”
“…….”
“하지만 생활이 어렵습니다. 아이가 초등학교 5학년인데 학원도 제대로 보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
“하루에 한두 번 동네 슈퍼에 나오는 것 외에는 외출도 하지 않습니다.”
그때 조철봉이 시선을 들고 경택을 보았다.
“이혼한 이유는 뭐야?”
“예, 홍문호의 여자관계 때문에, 홍문호는 살림 차려준 여자가 있었습니다.”
“…….”
“그러다 회사가 위험해지니까 재산을 그 여자 앞으로 옮기고 나서 부도를 내고 이혼을 한 것이죠.”
“흥.”
“홍문호는 그 여자하고 같이 미국으로 도주했습니다.”
“고영민의 남자 관계는?”
“시간이 짧아서 깊게 알아보지는 못했습니다만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럴 리가 없어.”
정색한 조철봉이 머리를 저었다.
“도청을 해서라도 알아봐. 남자 없이는 하루라도 못살 여자다.”
“예, 사장님.”
“하루 더 시간을 줄 테니까.”
“알겠습니다. 사장님.”
“재산은 얼마나 되나?”
“예? 재산은.”
서류를 뒤적이던 경택이 머리를 들고 말했다.
“아파트도 월세입니다. 보증금 5백에 월 35만원씩.”
“흥.”
“그런데 집 주인한테 들었습니다만 다음달에 집 비우라고 했답니다.”
“흥.”
“아이 학교 문제도 있고 해서 옮기더라도 그 근처로 가야될 것 같은데요.”
“알았어.”
머리를 끄덕인 조철봉이 앞에 놓인 서류를 집었다.
“고영민의 남자 관계를 알아봐.”
“예, 사장님.”
“내일 이 시간에 다시 만나기로 하고.”
“예.”
“이 일은 자네하고 나만 아는 거야. 알겠지?”
“알겠습니다.”
다른 일 같으면 최갑중에게 시켰다. 그러나 이 일은 첫사랑에 관한 일이다. 자존심에 관계되는 일인 것이다. 첫사랑은 곧 신분증명서나 같으니까.
한때 조철봉은 고영민과의 관계가 과연 사랑인지 그저 한쪽의 일방적인 감정인지 구분을 하지 못했다. 지금도 사랑이란 양쪽의 분명한 입장이 서로 확인되어야 한다고 믿는 조철봉이다. 짝사랑은 사랑이 아닌 것이다. 따라서 고영민과의 관계는 수없이 만들어졌다가 싱겁게 부서져버린 짝사랑의 첫번째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고영민으로부터 한번도 확인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고영민과 섹스를 한 적이 없다. 어느날 밤, 그것도 고영민의 인도로 여관방에서 같이 잔 적이 있었는데 조철봉은 섹스를 하지 못했다. 그날 밤 품에 안기면서 하반신을 비벼대는 고영민에게 조철봉은 이렇게 말했다.
“산에 올라가는 건 목표가 있기 때문에 힘들지만 보람이 있어. 하지만 정상을 정복하고 나면 내려갈 일만 남는 거야. 난 싫어, 내려 가는 것이.”
목소리를 바닥에 깔고는 슬픈 눈을 만들고서 조철봉은 말을 이었다.
“난 널 아끼고 싶어. 될 수 있는 한 널 높은 곳에 두고 지켜줄거야. 그래서 널 빛내줄테야.”
그러자 고영민은 하반신을 떼었고 그날 밤은 무사히 넘어갔다. 다음날 아침 여관 앞에서 고영민과 헤어진 조철봉은 약국으로 달려가 테라마이신을 사서 먹었다. 왜냐하면 일주일쯤 전에 사창가에 갔다가 파이프가 줄줄 새고 있었기 때문이다. ‘높은 곳에 두고 지켜 준다고?’ 염병할, 임질에 걸렸기 때문에 그짓을 못한 것이다. 그날 이후로 고영민은 연락이 뜸하더니 만나는 횟수가 급격히 줄었고 그러다가 조철봉이 군에 입대하는 바람에 고무신을 거꾸로 신게 된 것이다. 그것이 조철봉의 첫번째 사랑이다. 그때를 생각하면 언제나 임질이 떠올랐기 때문에 기억에서 지우려고 노력했던 것이 효과를 보았는데 16년이 지난 가을날, 불현듯 찾게 된 것이다. 다음날 오후 성실한 박경택이 약속시간에 맞춰 나타났다.
“남자는 없습니다.”
고영민이 마치 제 누님이라도 되는 것처럼 얼굴을 편 경택이 대뜸 보고했다.
“주변 사람들, 친구, 친척들을 은밀하게 조사해봤는데 남자의 흔적은 전혀 찾지 못했습니다.”
“누가 표시내고 그짓 하나? 도청은 해봤어?”
“예, 사장님.”
경택이 탁자 위에 소형 녹음기를 꺼내놓더니 버튼을 눌렀다.
“15시간 도청을 해서 중요한 내용만 편집했는데 남자 이야기는 없습니다.”
그때 녹음기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네, 저로서는 능력이 안되니까요. 그래서 집 얻을 때까지 한달만 여유를 주시면 좋겠는데요.”
조철봉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고영민의 목소리였던 것이다. 16년 만에 듣는 목소리였지만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때 고영민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엄마, 애주를 두달만 맡아 주었으면 좋겠어. 학교는 거기로 전학시키고, 난 두 달 후에 엄마한테 갈게.”
고영민은 지금 제 엄마한테 전화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때 중년 여자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알았다. 그럼 다음달에 내려 오는거냐? 애주한테는 뭐라고 할래?”
여자의 말이 이어지기 전에 조철봉은 버튼을 눌러 녹음기를 껐다.
“수고했어.”
조철봉이 경택에게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자, 수고비야. 받아.”
가라앉은 표정이었으므로 경택은 몸을 움츠렸다.
성남 변두리의 우정 아파트는 지은 지 오래되어서 축대는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것 같았고 건물 벽은 거미줄처럼 갈라져 있었다. 아파트 옆의 공터에 콘테이너 박스가 한 대 놓였는데 재건축조합 간판이 붙어 있는 것을 보면 곧 철거가 될 모양이었다. 그러나 저녁무렵이 되자 놀이터는 아이들로 가득 찼고 아파트 현관은 오가는 주민들로 활기를 띠었다. 모두 젊다. 대부분이 20대에서 30대 주부였고 나이든 어른들은 드물었다.
조철봉은 짙게 선팅이 된 벤츠 600의 운전석에 앉아 있었지만 그것도 불안해서 선글라스까지 꺼내 썼다. 벤츠는 아파트 현관에서 백미터쯤 떨어진 우정슈퍼 옆의 주차장에 세워져 있었는데 위치가 좋았다. 슈퍼에 들어가는 손님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위치였다. 차에 장착된 시계는 저녁 7시1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아직 어둠이 덮이지는 않았지만 가게는 불을 켰고 가로등도 조금 전에 켜졌다. 의자에 등을 붙이고 앉아 아파트 현관을 주시하고 있던 조철봉은 하품을 했다. 오후 5시쯤 이곳에 도착해서 지금까지 두 시간이 넘도록 이렇게 앉아 있는 것이다. 최갑중이 이 꼴을 보면 바쁜 일도 많은 데 형님이 이제 완전히 정신이 나갔다고 할 테지만 지금 조철봉의 정신 상태는 근래에 들어서 가장 안정된 상태였다. 스스로 그것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안정이 되었다는 것보다 가라앉아 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웬일인지 아랫배에 몇십 킬로그램짜리 추를 넣은 것처럼 묵직한 상태가 되었으며 가라앉은 가슴에서는 조금씩 파도가 일어난다. 이것이 서글픔 비슷한 감정으로 연결이 되어서 가끔 저도 모르게 긴 숨이 뱉어지고 있다. 이런 상태라면 다섯 시간도 더 버티고 있을 것 같다.
조철봉은 지금 고영민을 보려고 이러고 있는 것이다. 만일 고영민이 잘 살고 있다면 이렇게 하지 않았다. 아예 안 보았을 것이다. 깨진 첫사랑의 여자가 잘 살기를 바랄 만큼 조철봉은 인간적으로 성숙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다. 고영민이 결혼에 실패하고 어렵게 살고 있다는 정보를 듣자 불현듯 세상 살 맛이 났다고 봐도 될 것이다. 그것을 애써 감출 필요도 없었으므로 낮에는 괜히 즐거워서 콧노래까지 불렀는데 이렇게 두 시간이 넘도록 기다려도 하나도 지치지 않았다. 조철봉이 다시 만족한 긴 숨을 뱉었을 때였다. 휴대전화가 진동했으므로 조철봉은 긴장했다. 옆에 놓인 휴대전화를 집어 귀에 붙이자 곧 박경택의 목소리가 울렸다.
“사장님, 지금 현관을 나왔습니다.”
경택이 현관 근처에서 지키고 서있었던 것이다. 숨가쁜 듯한 목소리로 경택이 말을 이었다.
“예, 지금 슈퍼 쪽으로 가시고 있습니다.”
간다고가 아니라 가신다고 했다. 경택은 고영민이 누구인가를 알고 있는 것이다.
“검은 바지에 흰 셔츠를 입으셨습니다. 머리는 뒤로 묶어 올리셨고요.”
착오가 있을까봐 경택이 인상착의까지 말해주었다. 휴대전화를 내려놓은 조철봉은 심호흡을 크게 하고는 선글라스를 고쳐 썼다. 그러다가 밤에 쓰고 있는 것이 더 이상하게 보일 것 같아서 벗었다가 다시 썼다. 그러는 동안에도 아파트 현관 쪽으로 향한 시선은 떼지 않았다. 그때 검은 바지에 흰 긴팔 셔츠를 입은 여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고영민이다. 아직 얼굴은 확실히 보이지 않았지만 조철봉의 가슴은 세차게 뛰었으며 입안이 말라왔다. 침을 끌어모아 삼킨 조철봉은 이를 악물고는 선글라스를 벗었다. 그러자 고영민의 얼굴이 희미하게 보였다. 진짜로 고영민이다. 옛날 그대로구나.
성남 변두리의 우정 아파트는 지은 지 오래되어서 축대는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것 같았고 건물 벽은 거미줄처럼 갈라져 있었다. 아파트 옆의 공터에 콘테이너 박스가 한 대 놓였는데 재건축조합 간판이 붙어 있는 것을 보면 곧 철거가 될 모양이었다. 그러나 저녁무렵이 되자 놀이터는 아이들로 가득 찼고 아파트 현관은 오가는 주민들로 활기를 띠었다. 모두 젊다. 대부분이 20대에서 30대 주부였고 나이든 어른들은 드물었다.
조철봉은 짙게 선팅이 된 벤츠 600의 운전석에 앉아 있었지만 그것도 불안해서 선글라스까지 꺼내 썼다. 벤츠는 아파트 현관에서 백미터쯤 떨어진 우정슈퍼 옆의 주차장에 세워져 있었는데 위치가 좋았다. 슈퍼에 들어가는 손님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위치였다. 차에 장착된 시계는 저녁 7시1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아직 어둠이 덮이지는 않았지만 가게는 불을 켰고 가로등도 조금 전에 켜졌다. 의자에 등을 붙이고 앉아 아파트 현관을 주시하고 있던 조철봉은 하품을 했다. 오후 5시쯤 이곳에 도착해서 지금까지 두 시간이 넘도록 이렇게 앉아 있는 것이다. 최갑중이 이 꼴을 보면 바쁜 일도 많은 데 형님이 이제 완전히 정신이 나갔다고 할 테지만 지금 조철봉의 정신 상태는 근래에 들어서 가장 안정된 상태였다. 스스로 그것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안정이 되었다는 것보다 가라앉아 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웬일인지 아랫배에 몇십 킬로그램짜리 추를 넣은 것처럼 묵직한 상태가 되었으며 가라앉은 가슴에서는 조금씩 파도가 일어난다. 이것이 서글픔 비슷한 감정으로 연결이 되어서 가끔 저도 모르게 긴 숨이 뱉어지고 있다. 이런 상태라면 다섯 시간도 더 버티고 있을 것 같다.
조철봉은 지금 고영민을 보려고 이러고 있는 것이다. 만일 고영민이 잘 살고 있다면 이렇게 하지 않았다. 아예 안 보았을 것이다. 깨진 첫사랑의 여자가 잘 살기를 바랄 만큼 조철봉은 인간적으로 성숙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다. 고영민이 결혼에 실패하고 어렵게 살고 있다는 정보를 듣자 불현듯 세상 살 맛이 났다고 봐도 될 것이다. 그것을 애써 감출 필요도 없었으므로 낮에는 괜히 즐거워서 콧노래까지 불렀는데 이렇게 두 시간이 넘도록 기다려도 하나도 지치지 않았다. 조철봉이 다시 만족한 긴 숨을 뱉었을 때였다. 휴대전화가 진동했으므로 조철봉은 긴장했다. 옆에 놓인 휴대전화를 집어 귀에 붙이자 곧 박경택의 목소리가 울렸다.
“사장님, 지금 현관을 나왔습니다.”
경택이 현관 근처에서 지키고 서있었던 것이다. 숨가쁜 듯한 목소리로 경택이 말을 이었다.
“예, 지금 슈퍼 쪽으로 가시고 있습니다.”
간다고가 아니라 가신다고 했다. 경택은 고영민이 누구인가를 알고 있는 것이다.
“검은 바지에 흰 셔츠를 입으셨습니다. 머리는 뒤로 묶어 올리셨고요.”
착오가 있을까봐 경택이 인상착의까지 말해주었다. 휴대전화를 내려놓은 조철봉은 심호흡을 크게 하고는 선글라스를 고쳐 썼다. 그러다가 밤에 쓰고 있는 것이 더 이상하게 보일 것 같아서 벗었다가 다시 썼다. 그러는 동안에도 아파트 현관 쪽으로 향한 시선은 떼지 않았다. 그때 검은 바지에 흰 긴팔 셔츠를 입은 여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고영민이다. 아직 얼굴은 확실히 보이지 않았지만 조철봉의 가슴은 세차게 뛰었으며 입안이 말라왔다. 침을 끌어모아 삼킨 조철봉은 이를 악물고는 선글라스를 벗었다. 그러자 고영민의 얼굴이 희미하게 보였다. 진짜로 고영민이다. 옛날 그대로구나.
고영민과의 거리가 10미터에서 8미터, 5미터로 가까워졌을 때 조철봉은 숨을 죽였다. 슈퍼의 네온간판이 환하게 비치고 있었으므로 영민의 모습은 뚜렷하게 드러났다. 화장기가 없는 영민의 얼굴은 조금 지쳐 보였다. 그러나 전혀 나이든 것 같지가 않았다. 그대로다. 나긋나긋한 몸매도, 다리를 약간 벌리고 걷는 모습도. 5미터까지 가까워졌던 영민이 왼쪽으로 몸을 돌리더니 슈퍼 안으로 들어섰고 조철봉은 참았던 숨을 길게 뱉었다. 그 순간이었다. 갑자기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으므로 조철봉은 몸을 굳혔다. 눈물은 볼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다.
“나아, 참.”
손등으로 눈물을 훔친 조철봉이 목멘 소리로 말했다.
“별일이네, 뜬금없이 웬 눈물.”
그러자 숨이 턱 막히면서 이번에는 어깨가 들썩였다.
“으으응.”
조철봉은 짧게 흐느껴 울고 나서는 눈을 부릅떴다.
“허무하구먼.”
저도 모르게 입밖으로 그렇게 말이 뱉어졌다. 그러고나서 조철봉도 제 귀에 들린 그 말을 되새겨 보았다. 허무할것 같기도 하다. 그러니까 저절로 그런말이 튀어나왔겠지.
“내가 왜 이러고 있지?”
하고 중얼거린 조철봉이 손으로 얼굴을 쓸었을 때 슈퍼에서 영민이 나왔다. 손에 비닐 봉투를 하나 들고 있었다. 영민이 슈퍼 앞에서 몸을 돌려 아파트를 향해 걸었으므로 조철봉에게는 뒷모습만 보였다. 조철봉은 점점 멀어져가는 영민의 뒷모습을 눈도 깜박하지 않고 바라보았다. 어둠이 짙어지고 있어서 영민이 아파트 현관 계단을 올라갈 때는 모습이 흐릿해졌다. 그때 옆 좌석에 내려놓은 휴대전화가 진동하면서 제자리에서 한바퀴 돌았다. 조철봉이 전화를 귀에 붙이자 경택의 다급한 목소리가 울렸다.
“사장님, 지금 들어오시는데요.”
“알고 있어.”
“그럼.”
“내버려 둬, 오늘은.”
“예, 알겠습니다.”
경택이 고분고분 대답했고 조철봉은 전화를 끊었다. 이렇게 싱겁게 만나기는 싫은 것이다. 그로부터 닷새가 지난 오후 세시경에 집에 있던 고영민은 손님을 맞았다. 손님은 아파트 주인인 최씨였다. 그러지 않아도 월세 보증금을 올려줄 형편이 안되어서 이달 말에 방을 빼줄 예정이었던 영민의 표정은 굳어졌다.
“저, 내가 사정이 급해서요.”
현관 앞에 선 채로 최씨가 힐끗거리며 말했다. 이 사람의 눈동자는 한시도 가만 못 있고 움직이고 있어 보고 있노라면 불안해진다. 이런 사람이 집주인이라니 영민은 볼 때마다 제 신세가 처량해졌다. 최씨가 곁눈질을 하면서 말을 이었다.
“이 아파트를 팔았어요. 그러니까 월세보증금은 집주인한테 받으시란 말입니다. 부동산에다 물어보면 알려줄 겁니다.”
“그러면.”
깜짝 놀란 영민이 최씨를 노려보았다.
“새로 산 집주인이 틀림없이 제 월세 보증금을 내주는 거죠?”
“그거야, 월세까지 안고 그 양반이 샀으니까 당연하죠. 우리가 거래했던 부동산 사무소가 중개했으니까 틀림없을 겁니다.”
그러자 영민이 어깨를 늘어뜨렸다. 그렇다면 집주인이 어떤 놈이라도 상관없는 것이다.
“알았어요.”
그러고는 영민은 최씨 코앞에서 문을 닫아버렸다.
“넌 첫사랑이 있어?”
불쑥 조철봉이 물었으므로 최갑중은 머리를 들었다. 베이징행 비행기 안이다. 비행기는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 위를 날고 있었는데 그냥 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첫사랑이 없는 사람도 있습니까? 다 있어요.”
갑중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어디? 말해봐라. 네 첫사랑 이야기를.”
조철봉이 정색하고 갑중을 보았다.
“어떤 사연이냐?”
“갑자기 왜 이러십니까?”
“궁금해서 그런다.”
“15년도 더 지난 일입니다. 스무살 때라 어렸고요.”
“글쎄, 말해보라니까.”
그러자 입맛을 다신 갑중이 주위를 둘러보는 시늉을 했다.
“재미 없는데.”
“알아. 차였겠지?”
“예? 어떻게 아십니까?”
“첫사랑은 다 차이는 거야.”
“나, 참.”
다시 입맛을 다신 갑중이 목소리를 낮췄다.
“스무살 때 미팅에서 만났죠. 상대는 같은 학년인 영대 미대에 다니던 애였는데 석달 사귀었습니다.”
“음, 석달.”
“서로 호흡이 맞아서 처음에는 잘 나갔는데 석달이 지나니까 시들해지더군요.”
“누가? 니가?”
“아니, 그 기집애가 말입니다.”
“으흠, 그렇지.”
“몇번 튕기기에 에이 하고 그만둬 버렸죠. 내가 손해 볼 건 없었으니까요.”
“그게 무슨 말이야?”
“볼장은 다 봤단 말입니다. 그 기집애를 만난 지 열흘만에 따먹었고 석달동안 스무번은 먹었으니까요.”
“개 같은 놈.”
“헤어지고 한달쯤 지났더니 다른 놈씨가 생겼더군요. 물론 저도 그동안에 하나 만들었지만 말입니다.”
“비슷한 종자들이군.”
“어쨌든 그게 제 첫사랑입니다.”
“역시.”
정색한 표정으로 조철봉이 머리를 끄덕였다.
“생긴 대로 논다고 그게 네 수준이로군.”
“그게 어쨌단 말씀입니까?”
이번에는 갑중이 정색하고 물었다.
“제 수준이 어때서요?”
“인마, 그게 사랑이냐? 그냥 개처럼 붙는 거지?”
그러자 갑중이 눈을 치켜떴지만 조철봉은 말을 이었다.
“첫사랑은 육체관계가 있으면 안 되는 거다. 순수해야 된단 말이야.”
“누가 그럽디까?”
“시끄러.”
눈을 부라린 조철봉의 목소리가 굵어졌다.
“절대로 있으면 안돼. 그래야 오래 남는 거야.”
“뭐가 남는단 말입니까?”
그러자 조철봉이 손을 권총처럼 만들어 제 옆머리에 댔다.
“여기에.”
“기억에 남는다고요?”
“그렇다.”
“그러지 않아도 남던데.”
“미련을 남겨두어야 되는 거야. 이 병신아.”
조철봉이 잇사이로 말했다.
“그래야 나중에 기회를 만들 수가 있단 말이야.”
임질 때문에 고영민을 먹지 못한 것이 얼마나 한이 되었는지 모른다. 그것을 그 누구에게 하소연할 수가 있단 말인가? 누가 동정하고 이해하겠는가? 아무도 없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는 수밖에.
베이징에는 조철봉이 투자한 K-TV 룸살롱이 7개나 있다. 이것만 해도 거대한 기업군이다. 왜냐하면 각 K-TV는 모두 룸이 5600개나 되는데다가 아가씨들을 포함한 종업원이 평균 3백여명이나 되기 때문이다. 뭐니뭐니 해도 물장사는 현금 회전이 잘되는데다 수익률이 높아서 일년만 잘하면 밑천을 뺀다고 한다.
그런데 조철봉이 중국땅에 K-TV사업으로 진출한 지 어언 4년, 산둥성 칭다오와 옌타이를 시작으로 뻗어나간 업체는 이제 40여개가 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기반이 잡혀 K-TV에서 올리는 수익금만 하루 수백만위안이 된다.
한화로 계산하면 수억이다. 베이징에서 K-TV 전체 운영회의를 마친 조철봉은 다음 스케줄이 백두산관광단지였으나 하루를 쉬었다. 최갑중을 먼저 백두산으로 보내고 호텔에서 쉰것이다. 그러나 객지의 호텔방에서 혼자 밤을 맞을 조철봉인가? 밤10시 정각이 되었을 때 문에서 벨소리가 울렸다. 문을 연 조철봉은 앞에 서있는 두 여자를 보았다.
“저, 고사장님이 보내셨습니다.”
오른쪽에 선 단정한 생김새의 아가씨가 한국어로 말했다.
“전 김윤희라고 하고 얜 리엔입니다.”
옆에 선 아가씨를 손으로 가리킨 김윤희의 얼굴이 조금 붉어진 것을 조철봉은 놓치지 않고 보았다. 고사장은 K-TV 전체를 관리하는 고동수를 말한다. 중국에서 첫 K-TV를 개업할 때부터 고동수는 조철봉의 오른팔이 되어서 지금의 업적을 이루어냈다.
“들어와.”
조철봉이 비껴서자 아가씨 둘은 방 안으로 들어섰다. 앞을 스치고 지난 두 아가씨의 냄새는 각각 다르다. 윤희한테서는 옅은 비누 냄새가 났고 리엔은 짙은 향내를 풍겼다. 서로 독특한 자극을 주는 것이다. 소파에 앉기를 권한 조철봉의 표정은 신중했다. 고동수는 최고 수준의 아가씨들을 이곳으로 보냈을 것이었다. 그런데 조선족과 한족의 둘을 보내다니, 앞자리에 앉은 조철봉이 윤희에게 물었다.
“둘을 내 방으로 가라고 하던가?”
“네, 사장님.”
“그러니까 내가 둘과 함께 있으라고?”
물어보나마나겠지만 만에 하나 착오가 있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러자 윤희가 시선을 내리면서 말했다.
“리엔이 한국어를 한마디도 못합니다. 그래서 제가 옆에서 통역을 해 주는 것이 낫다고 하셨습니다.”
“그럼 넌 통역인가?”
“네, 그런 셈입니다.”
“그런 셈이라니?”
통역도 겸하고 있다고 해야 맞는 표현이 될 것이다. 그것을 뻔히 알면서도 캐묻는 조철봉의 심보는 할듯 말듯 애를 태울 때와 똑같다. 조철봉의 시선을 받은 윤희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저도 같이 밤을 지내게 된 셈입니다.”
“그렇군.”
머리를 끄덕인 조철봉이 정색하고 윤희에게 말했다.
“그럼 리엔을 나한테 소개시켜준 이유나 듣자.”
“네?”
“고사장이 리엔을 추천한 이유 말이야. 리엔의 뭐가 대단한거야?”
“숫처녀라고 합니다.”
“숫처녀?”
“네, 스물한살인데 남자 경험이 없다고 합니다.”
시선을 든 조철봉이 옆에 그림처럼 앉아있는 리엔을 보았다. 아름답다. 나긋나긋한 몸매, 가는 목, 그리고 갸름한 얼굴형에 앵두같은 입술, 그야말로 그림같다.
조철봉이 리엔에게 물었다.
“넌 고향이 어디야?”
그러자 윤희가 통역했고 리엔의 입에서 맑고 높은 중국어가 울렸다.
“사천성이라고 합니다.”
“사천성.”
“내륙 먼 곳이죠.”
이건 윤희가 한 말이다. 이제 시선을 똑바로 든 윤희가 말을 이었다.
“사천성 명문 집안인데 베이징까지 오는데 일주일 걸렸답니다. 제가 가게에서 얘하고 이야기해서 압니다.”
“흐음, 도망나왔군.”
“돈을 벌러 나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숫처녀라는 증거는 있나?”
“가게 마담언니가 병원에 데려가서 확인증을 받아 왔습니다.”
“윽.”
조철봉이 갑자기 가슴이 막혔는지 심호흡을 하고 나서 윤희를 보았다.
“그럼 네 이야기를 듣자.”
윤희는 동그란 얼굴에 입술이 얇고 야무졌는데 눈도 또렷했다. 올려뜬 눈이 불빛을 받아 반짝였다.
“넌 가게에 나온 지 얼마나 돼?”
“석달 되었습니다.”
“손님을 여럿 받았겠구나.”
“네.”
당연한 일이 아니냐는 듯 머리까지 끄덕인 윤희가 말을 이었다.
“많이 받았습니다.”
“얼마나?”
“이틀에 한명 정도.”
“으음.”
“어차피 돈 벌러 나온 것이니까요.”
“그렇지.”
“그래서 즐기면서 일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으음.”
심호흡을 한 조철봉이 소파에 등을 붙였다. 윤희는 솔직했다. 그래서 이쪽 분위기를 편하게 해주는 역할을 했지만 윤희에게 쏠렸던 욕망이 식어가는 중이었다. 남자는 다 그렇다. 여자가 했어도 안 했다고 해주면 뻔히 알면서도 속아주고 싶어진다. 한 짓을 했다고 해버리면 김이 새는 것이다. 조철봉의 시선을 받은 윤희가 입술 끝을 보일 듯 말 듯 올리면서 웃더니 물었다.
“실망하셨습니까?”
“그렇게 보였나?”
조철봉이 되묻자 윤희는 머리를 끄덕였다.
“네, 대부분의 손님이….”
“그럼 슬쩍 거짓말을 해야지. 손님 자주 안 받는다고, 온 지 며칠 안 되었다고 하든지.”
그러자 윤희가 다시 그렇게 웃었는데 그 순간 조철봉은 퍼뜩 정신이 났다. 이런 방법으로 손님들을 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어중이 떠중이를 다 받아들였다는 아가씨하고 연애할 놈은 크게 굶은 놈 아니면 드물다. 더구나 고급 룸살롱 아닌가? 아가씨는 얼마든지 많은 것이다.
“어쨌든 좋아.”
마침내 머리를 끄덕인 조철봉의 시선이 리엔에게로 옮아갔다. 그림처럼 앉아있던 리엔은 조철봉과 윤희의 대화가 길어지자 차츰 불안한 기색을 띠었는데 시선이 자주 흔들렸다.
“오늘밤은 너희들하고 이야기나 하자, 첫사랑 이야기.”
조철봉이 말하자 윤희가 통역했다.
“나도 내 첫사랑 이야기를 해줄 테니까 말이야. 너희들도 해줘야 돼.”
윤희의 통역을 들은 리엔의 얼굴에 처음으로 희미하게 웃음기가 떠올랐다가 금방 지워졌다. 조철봉이 말을 이었다.
“씻고 침대로 들어와. 너희들 둘 다.”
더블베드는 셋이 나란히 누웠는데도 넉넉했다. 밤 12시반, 셋은 모두 가운 차림이었고 두 여자는 단정하게 가슴까지 여민데다 안에는 브래지어와 팬티까지 다 입었다. 거기에다 TV를 끄고 방안의 불은 환하게 밝혀놓아서 이야기에 집중할 환경도 조성되었다.
조철봉은 좌우에 얌전히 누운 윤희와 리엔을 보고는 얼굴을 펴고 웃었다. 두 여자 한테서는 이제 같은 비누냄새가 맡아졌는데 그것이 화장실 비누를 함께 사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자, 먼저 내 첫사랑 이야기를 해주지.”
베개 위에 팔을 베고 누운 조철봉이 천장을 향하고 말했다.
“옛날 옛적에.”
그러자 흐득 웃은 윤희가 중국어로 통역했다. 목소리가 밝고 맑다.
“16년전인데 말야, 난 그것이 첫사랑이라고는 지금도 생각하지 않아, 그냥 여자하고 첫 경험이었다.”
조철봉이 또박또박 말했고 윤희도 차분하게 중국어로 통역했다. 통역하는 동안 조철봉은 다음 말을 정리할 여유가 만들어져서 이야기가 조리있게 진행되었다. 임질 걸렸다는 내용만 빼고 만들어진 첫사랑 이야기는 그런대로 분위기가 있었다. 특히 여관방에서 하체를 붙여오는 고영민에게 점잖게 타이르는 장면은 두여자한테 감동을 준것 같았다. 통역하는 윤희의 목소리에 열기가 띠어졌고 리엔이 감탄사를 연발하는 것이 그 증거일 것이었다. 조철봉의 이야기가 끝났을때 윤희가 긴 숨을 뱉으며 말했다.
“아름다워요. 사장님.”
“그래?”
그때 리엔이 중국어로 말했고 윤희가 통역했다.
“리엔은 울고 싶대요. 그리고 그 여자가 나쁘다고 하네요.”
“으음.”
“그 여자분은 지금 잘 살고 있나요?”
하고 윤희가 물었으므로 조철봉도 긴 숨을 뱉고는 말했다.
“지금 아이하고 둘이 살고 있는데 말야.”
조철봉은 고영민의 상황을 설명해주고 나서 물었다.
“너희들이 그 여자 입장이라면 어떻게 하겠니? 내가 나타나면 놀라겠지?”
“그럼요.”
윤희가 대뜸 대답하더니 리엔의 의견을 묻고 통역했다.
“리엔은 부끄러워서 도망갈거라고 하네요.”
“그럴까?”
“아마 저도 그럴걸요?”
“내 도움을 받을까?”
“배신한 옛 남자의 도움을요?”
그렇게 되물었던 윤희가 리엔에게 묻더니 통역해주었다.
“리엔은 그런 여자는 도움을 받을것 같다고 하네요.”
“뭐?”
조철봉이 눈을 크게 뜨자 리엔에게 다시 물었던 윤희가 또박또박 말했다.
“리엔은 그런 여자면 틀림없이 사장님의 도움을 받을거라고 하네요. 그 여자가 돈 많은 남자한테 갔다면서요?”
“그렇지.”
“리엔은 그렇지만 저는.”
“넌 어떻게 생각해?”
“저는.”
조철봉에게서 시선을 뗀 윤희가 낮게 말했다.
“사장님이 그 여자분 앞에 나타나지 않는것이 서로를 위해서 좋지 않을까요?”
“……”
“지금 도움을 줘서 두분이 다시 전처럼 될수가 있을까요?”
맞는 말이다. 전처럼 되다니 택도 없다. 조철봉은 저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이제 고영민은 새로운 아파트 주인을 만나 월세 보증금을 받아야 할 것이다. 집을 비워야 할 날은 일주일 후로 다가왔고 그날 조철봉은 고영민을 만나게 된다. 왜냐하면 집 주인이 조철봉이기 때문이다.
“난 그렇게 되기를 원하지도 않는다.”
천장을 바라보며 조철봉이 낮게 말했다.
“그렇게 될 수도 없고 말야.”
최갑중에게도 이런 말은 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친구에게 하겠는가? 정신나간 놈이라고나 할 것이다. 그러나 혼자 삭이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사연 아닌가? 임질 때문에 어긋난 사랑을 한번 만회해 봐야 하지 않겠는가? 그동안 노소장단(老小長短)을 막론하고 미추(美醜)를 불문하며 귀천(貴賤)에 상관없이 숱한 여자와 관계를 가졌으나 천하의 조철봉이 이게 무슨 꼴인가? 첫사랑에 맺힌 원한은 풀어야 되지 않겠는가? 높은 곳에 두고 빛내 주겠다고 연설을 하고 난 아침에 약국으로 달려가 테라마이신을 사먹다니, 16년이 지난 지금도 그것을 떠올리면 머리끝이 곤두서고 얼굴에서 열이 나는 바람에 뜬금없는 말을 뱉어야만 한다. 예를 들어서 ‘오늘이 며칠이야?’라든가 ‘아, 허무하고만’이라든가 등인데 지난 번에 고영민을 보았을 때도 그렇게 헛소리를 한번 했다.
그때 리엔이 중국어로 상당히 길게 말을 했으므로 조철봉의 시선이 옮겨졌다. 리엔의 말이 끝났을 때 윤희가 통역했다.
“리엔은 19세 때 첫사랑을 했는데 그 남자하고 1년반을 사귀었지만 손만 잡았다고 하네요.”
“흐응.”
호기심이 난 조철봉이 상반신을 조금 일으켰고 리엔의 말이 이어졌다. 새가 재잘거리는 것 같다.
“그리고 작년에 그 남자하고 멀어졌다네요. 남자가 우유부단하고 장래성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래요.”
“그래?”
다시 리엔이 재잘거리고 나서 윤희가 말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립대요. 외로울 때는 자주 생각이 난대요.”
“저 중국 기집애가 일부러 내 비위 맞추려고 그러는 거 아냐?”
조철봉이 한국어로 묻자 윤희가 풀썩 웃었다.
“그럴 리가요. 그런 이야기를 꾸며낼 만큼 세파를 겪은 애는 아녜요.”
“그런가?”
“리엔이 아까 그런 때는 부끄러워서 도망 갈 것 같다고 한 것은 저 자신의 경우를 생각하고 말한 것이군요.”
“그렇군.”
“제 생각은 변함 없어요. 사장님은 그 여자분 앞에 나타나지 않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아요. 그래서….”
“응, 네 말도 일리가 있다.”
윤희의 말을 가볍게 자른 조철봉은 천장을 향해 길게 숨을 뱉었다. 그러자 좌우의 두 여자, 두 민족의 아가씨도 같이 입을 다물었으므로 방 안에는 한동안 정적이 덮였다. 현재 빈곤한 사람은 과거의 빈곤했던 시절을 떠올려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 법이다. 계속 빈곤한데 기를 쓰고 꺼낼 기력도 없는 것이다. 지금 살만 하니까 옛날에 못살았던 추억을 꺼내 이야깃거리로 삼는 것이 아닌가? 지금 첫사랑을 떠벌리는 조철봉의 심사가 바로 그렇다. 보라, 어려웠던 시절은 잊고 두 여자를 옆에 눕히고는 옛날 이야기를 꺼내는 것을. 임질 이야기는 죽어도 발설하지 않은 채 첫사랑 이야기는 점점 시적(詩的)으로 발전되어 갈 것이다. 그리고 이곳저곳에서 들은 조언을 품고 고영민에게 한걸음씩 다가간다.
“그렇지.”
천장을 향해 조철봉이 문득 말했을 때는 그로부터 5분쯤이나 지난 후였다. 계속되는 정적에 압박감을 느끼던 두 여자가 동시에 좌우로 머리를 돌려 조철봉을 보았다. 조철봉이 시선을 그대로 둔 채 말을 이었다.
“16년간 쌓여온 한은 풀어야지.”
“예?”
한국말이었으므로 윤희만 듣는다. 불쑥 물었던 윤희가 곧 무안한 표정을 짓고 입을 다물었을 때 조철봉이 혼잣소리로 말했다.
“그래야 내 머릿속에 쌓여온 쓰레기가 지워질 테니까, 그 빌어먹을 쓰레기.”
“….”
“염병을 할 테라마이신.”
그러고는 조철봉이 팔을 뻗어 두 여자의 어깨를 당겨 안았다.
“날 보여줄 테다.”
이제는 윤희도 묻지 않았고 대신 조철봉의 가슴에 찰싹 안겼다. 리엔도 안겼지만 조금 어색한 자세였다. 상반신은 어쩔 수 없이 붙였지만 엉덩이를 뒤로 빼고 있어서 하반신이 닿지 않았다.
“리엔한테 물어봐.”
조철봉이 두 여자를 안은 자세로 천장에 대고 말했다.
“만일 그 병신 같은 첫사랑 남자놈이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서 한 번 하자고 하면 해 주겠느냐고 말야.”
“네.”
대답한 윤희가 리엔에게 물었다. 그러자 리엔이 망설이지도 않고 재잘거렸고 윤희가 통역했다.
“상상하지 못하겠대요. 만일 그렇게 나온다고 해도 하기 싫대요.”
“왜?”
리엔에게 물어본 윤희가 대답을 듣더니 웃음 띤 얼굴로 말했다.
“그 남자한테서 전혀 성적 매력을 느끼지 못하겠다는군요.”
“으음.”
“리엔은 아직 경험이 없어서 그런가봐요. 섹스란 것이 지가 싫다고 되나요?”
윤희가 혼자 한 말을 들은 조철봉도 얼굴을 펴고 웃었다.
“그렇지. 넌 잘 아는구나.”
“사장님은 결국 그 여자분을 만나실 작정이시군요.”
“그래.”
“만나서 섹스를 하시려고, 그렇죠?”
“그래. 세상이 폭발하는 것 같은 즐거움을 만들어 줄 테다.”
“자신 있으세요?”
“내 철봉을 만져 봐.”
“철봉이 뭔데요?”
불쑥 물었던 윤희가 곧 눈치를 채고는 손을 뻗쳐 조철봉의 철봉을 팬티 위에서 쥐었다.
“어머나.”
놀란 윤희의 입에서 탄성이 울렸다.
“이게 다 사장님 거예요?”
“그럼 남의 것도 빌려다 붙인단 말이냐?”
“아니, 그게 아니라.”
“팬티 속으로 손 넣어서 만져봐.”
“만져도 돼요?”
“돈 안 받는다.”
그러자 조철봉의 팬티 안으로 조심스럽게 손을 넣은 윤희가 철봉을 쥐었다.
“어머나.”
다시 탄성을 뱉은 윤희가 크기를 재려는 듯 위아래로 쓸었다.
“왜 그러는 거야?”
“너무 커요.”
“그래?”
“기둥 소시지 같아요.”
“뭐라고?”
“대한당 식품의 3천원짜리 소시지.”
“염병.”
조철봉은 머리를 돌려 리엔을 보았다. 한국말은 알아듣지 못했지만 바로 옆에서 철봉을 주무르며 주고받는 분위기를 짐작 못할 리가 있겠는가? 시선이 마주친 리엔의 얼굴은 이미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윤희야.”
리엔에게 시선을 준 채로 조철봉이 윤희를 불렀다.
“네, 사장님.”
“넌 얘가 옆에 있는데도 섹스할 수 있어?”
그렇게 묻자 아직까지도 보물처럼 철봉을 쥐고 있던 윤희가 거침없이 대답했다.
“네, 할 수 있어요.”
“그럼 얘한테 물어봐. 너 있는데 나하고 할 수 있느냐고.”
그러자 윤희가 서두르듯 물었고 리엔이 가느다랗게 대답했다. 그때까지도 조철봉은 리엔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어서 꽃잎같은 입술이 벌어지더니 짹짹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사장님이 원하신다면 하겠대요.”
윤희가 통역하자 조철봉은 입맛을 다셨다.
“내 철봉을 한번 만져보라고 해.”
“네, 사장님.”
그러자 윤희의 통역을 들은 리엔의 얼굴이 더 빨개졌다. 조철봉은 그때 리엔의 어깨를 감아안은 팔에 조금 힘을 주어 당겼다. 그것을 재촉하는 것으로 판단한 듯 리엔이 손을 뻗었다. 그때까지도 윤희는 철봉을 쥐고 있었는데 리엔의 손이 내려오자 인계했다. 아니, 적극적으로 안내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윤희는 리엔의 손을 잡아 마치 바통 터치를 하는 것처럼 넘겨 주었으니까.
“아.”
그때 바통을 인계받은 리엔의 입에서 놀란 외침이 짧게 터져나왔다. 그러고는 바통을 쥔 손을 아주 잠깐 떼었다가 놓았는데 그 순간이 짧았는데도 조철봉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가 붙여졌다.
“소감이 어떠냐고 물어봐.”
조철봉이 다시 천장을 향한 채로 말하자 윤희가 통역했다. 그러자 짧게 지저귀는 소리가 들리면서 조철봉은 철봉을 쥔 리엔의 손에 힘이 쥐어지는 것을 느꼈다.
“크다고 하네요.”
윤희가 통역했다.
“그래?”
조철봉은 천장을 노려본 채 쓴웃음을 지었다. 리엔이 남자가 처음이라면 비교할 대상이 없는 것이다. 그것이 감동을 먹은 윤희의 태도와 좋은 대조가 되었다. 윤희는 다른 놈자들의 철봉과 비교를 했기 때문에 감동의 농도가 더 컸다.
“좋아.”
마침내 심호흡을 한 조철봉이 마음을 굳히고 말했다.
“윤희야.”
“네?”
“리엔한테 응접실에서 기다리라고 해.”
“네.”
윤희가 다소곳하게 대답하더니 리엔에게 통역했다. 그때 조철봉이 말을 이었다.
“아껴주고 싶어서 그런다고 해라. 그리고 첫 섹스는 이런 곳에서 만난 남자가 아닌 좋은 남자하고 하라고.”
“네.”
윤희가 다시 통역했고 조철봉의 말이 또 이어졌다.
“고사장한테는 내가 섹스를 했다고 할테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해.”
“네, 사장님.”
그러자 윤희의 통역을 들은 리엔이 상반신을 일으켰다. 순간 시선을 든 조철봉의 몸이 굳어졌다.
리엔의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윤희도 본 모양으로 조철봉에게서 몸을 떼었다. 리엔은 앉은 채 소리없이 운다.
“젠장.”
낮게 투덜거린 조철봉이 상반신을 일으키자 윤희도 따라서 일어나 앉았다. 그래서 셋이 나란히 앉은 셈이 되었다.
“왜 우느냐고 물어봐.”
조철봉이 윤희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리엔을 자극하지 않으려고 표정도 부드럽게 꾸미고 있다. 윤희가 짹짹거리며 묻자 리엔이 울먹이며 대답했다.
“그냥 돌아가지 못한대요.”
윤희가 그렇게 통역했으므로 조철봉이 리엔을 향해 쓴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러나 입에서 나온 말은 얼굴과 다르다.
“염병, 난 싫은 데 어떻게 하지? 난 오늘밤 신경쓰지 않고 섹스를 즐기고 싶단 말이다.”
“통역할까요?”
하고 윤희가 조심스럽게 물었으므로 조철봉은 머리를 저었다.
“그렇다면 내가 고 사장한테 이야기 해주겠다고 해, 걱정하지 말라고.”
윤희가 다시 통역을 했을 때 리엔이 이번에는 꽤 오래 대답했다. 말하면서 조철봉을 여러번 보았고 그때마다 표정이 절실했다. 이윽고 리엔이 말을 마쳤을 때 윤희는 길게 숨을 뱉었다.
“리엔은 고 사장한테서 3만위안을 받아 고향 어머니한테 보냈다는군요. 아버지가 공직자였는데 부패 사건에 관련되어서 처형당했다고 해요. 사장님이 한번만 안아주면 다 잘 될 것인데 왜 그러시냐고 하는군요.”
“얘는 날 개나 말로 아나?”
부드럽게 그렇게 말한 조철봉이 긴 숨을 뱉었다.
“나아 참, 별일도 다 있구만.”
“그럼 먼저 제가 나가 있을까요?”
윤희가 묻자 조철봉은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게 무슨 말이야?”
“먼저 쟤를 안아 주시면 되지 않겠어요? 한번 안아 주시기만 하세요.”
“하라고?”
“네, 솔직히.”
침을 한번 삼키고 난 윤희가 정색했다.
“저렇게까지 나오는데 어떤 놈 좋은 일 해주실 필요가 있나요?”
“좋은 일?”
“그럼요, 저런 미모에 몸도 끝내주던데, 더구나 처녀 아녜요? 아마 처녀 사냥꾼 잘 만나면 몇천도 받을 걸요?”
“이런 젠장.”
“제가 응접실에서 기다릴 테니까 한번 안아 주세요, 사장님.”
그러고는 윤희가 침대에서 일어났으므로 조철봉은 말리지도 못했다. 침대가에 선 윤희가 리엔에게 중국어로 말하더니 조철봉에게 통역했다.
“사장님이 안아 주신다고 했어요.”
그때 리엔에게 시선을 주었던 조철봉은 숨쉬기를 멈췄다. 리엔의 얼굴이 환해져 있었던 것이다. 환한 얼굴은 마치 막 피어난 연꽃 같았다.
“좋아.”
숨을 뱉은 조철봉이 결심한 듯 얼굴을 굳히고 말했다.
“손짓 발짓 하기 싫으니까 네가 먼저 통역을 다 해놓고 가.”
그러자 윤희가 멈칫 섰고 조철봉은 말을 이었다.
“먼저 옷을 홀랑 벗으라고 해.”
“지금요?”
윤희가 주저하며 묻자 조철봉은 머리만 끄덕였다. 그러자 윤희는 빠르게 통역했다.
조철봉은 외면한 채 리엔이 옆에서 옷을 벗는 동안 기다리고 있었다.
“사장님, 다 벗었는 데요.”
윤희가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을 때 조철봉이 입을 열었다.
“불 끄지 말고 나가.”
지금까지 조철봉은 대포를 발사하는것 자체보다 억제하고 인내하며 상대방을 끌어올리는 즐거움을 느끼는 것으로 성생활을 영위해왔다. 그것은 하잘 것 없었던 자신에 대해 스스로 재평가하는 기회가 되었으며 자연스럽게 자신감의 증가로 발전되었다.
본래 조철봉은 이런 거창한 목표를 염두에 두고 그랬던 것이 아니다. 7, 8년 전만 해도 자잘한 사기꾼에 불과했던 조철봉에게 여자를 꾀어내는 데 테크닉이 필요했던 것이 그 시작이 되었다. 그것이 승화되어 거창한 명분을 만들게 된 것이다.
인생이란 다 그렇지 않은가? 잘된 놈들은 전부터 싹수가 있었다면서 어떻게든 증거를 찾아낸다. 못된 놈은 제 아무리 기적 같은 짓을 저질렀어도 다 잊어진다.
조철봉은 윤희가 방을 나간 후 한참 동안 앞쪽 벽을 바라본 채 움직이지 않았다. 우연히 첫사랑의 여자 고영민을 떠올린 후부터 마음이 붕 떠있다는 것은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중국 출장을 마치고 돌아가면 고영민과 마주치도록 작전도 짜놓았다. 고영민이 월세로 살고 있는 아파트를 사놓았기 때문에 집주인과 세입자 신분으로 만나는 것 이다. 조철봉은 길게 숨을 뱉었다.
16년이 지난 지금도 고영민이 고무신을 거꾸로 신은 이유가 그날 밤 여관에서 그짓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먹었다면 양상이 다르게 전개되었다. 분명하다. 하다못해 왜 고무신을 거꾸로 신었느냐고 따져 묻기라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짓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물어보지도 못했다. 빌어먹을 임질.
그때 옆에서 리엔이 부스럭거렸으므로 조철봉은 생각에서 깨어났다. 여자를 벌거벗겨서 옆에 놔두고 딴 생각을 하다니, 문득 자신의 행태를 떠올린 조철봉이 만족한 듯 숨을 뱉었다. 이만하면 충분히 단련되었다. 고영민에게 두번 다시 실수를 하지는 않을 것이다. 머리를 돌린 조철봉은 자신을 올려다 보고 있는 리엔의 눈을 보았다. 시트를 턱밑까지 올려 몸을 덮고 있었지만 리엔은 지금 알몸이다.
“그래, 늦었어.”
리엔의 눈을 내려다보면서 조철봉이 낮게 말했다. 그러자 리엔이 시트를 벌리고 옆에 큰 공간을 만들었다. 들어오라는 시늉이었다. 조철봉은 리엔이 만들어준 공간 안으로 들어갔다. 흰 시트는 얇아서 밖의 불빛이 비쳤고 리엔의 알몸이 환하게 드러났다. 아름답다. 조철봉은 시트를 머리 끝까지 뒤집어 쓰고 한쪽 팔을 쳐들어 텐트처럼 만들었다. 그러자 둘은 텐트 안에 누워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고영민을 16년만에 먹는다고 해도 내 가슴은 채워지지 않아.”
조철봉이 말했을 때 리엔은 손을 뻗쳐 조철봉의 팬티를 끌어 내렸다. 팬티가 내려지자 철봉이 천막 지주처럼 건들거리며 솟아올랐다.
“다시 시작할 수는 없어.”
중얼거리듯 조철봉이 말하자 리엔은 손을 뻗쳐 철봉을 조심스럽게 쥐었다. 시트 안에서 리엔의 숨소리가 가빠져 있는 것이 들렸다. 밖에서 흘러들어온 빛에 리엔의 눈이 번들거리며 빛났다.
“그년은 내 첫사랑이 아냐.”
조철봉이 말했을 때 리엔이 어깨를 두손으로 움켜쥐더니 끌어 올리려는 동작을 했다. 위로 올라오라는 표시였다. 몸을 비튼 조철봉이 위로 오르자 리엔은 자연스럽게 두 다리를 벌렸다. 그리고 조철봉의 철봉을 두손으로 쥐더니 자신의 샘에 넣으려고 했다. 두눈이 번들거렸고 숨소리는 가빠져 있다. 그때 조철봉은 이를 악물었다. 갑자기 목이 메었기 때문이다. 가끔 이런다.
길게 숨을 뱉은 조철봉은 리엔의 샘끝에 철봉을 붙였다. 그러자 리엔이 눈의 초점을 잡고 바로 위에 떠있는 조철봉을 보았다. 눈은 번들거리고 있었지만 맑았다. 더운 숨결이 조철봉의 가슴에 품어지고 있었다. 이윽고 조철봉은 철봉을 넣었다. 그 순간 리엔이 입을 딱 벌리더니 목구멍을 울리는 신음이 새나왔다. 조철봉은 어금니를 물었다. 철봉에 전해지는 압력이 굉장했던 것이다. 샘의 압력은 천차만별이다. 지금까지 조철봉은 수백명의 샘을 방문했지만 모두 달랐다. 느낌에서부터 수축력, 탄력은 물론 깊이와 넓이, 표면의 굴곡까지 어느 하나 같은 샘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라면 이 느낌과 모양을 분명히 구분하고 표현해야만 한다. 그것이 도리이고 예의인 것이다. 그냥 짐승처럼 넣고 싼다는 의식, 몇번 마찰하고 나서 쏘는 건 다 마찬가지가 아니냐고 하는 놈자가 있다면 인간의 기본을 갖추지 못한 넘이다.
“아아아.”
그때 리엔의 입에서 신음이 터져나왔다. 조철봉의 철봉이 거침없이 바닥까지 진입해버렸기 때문이다. 그 0.5초도 안되는 짧은 순간이었지만 조철봉은 철봉에 닿는 모든 감촉을 생생하게 기억했다. 리엔의 샘은 아직도 철봉을 감싸쥐고 힘차게 요동을 치는 중이다. 조철봉은 리엔의 얼굴을 내려다 보았다. 리엔은 눈을 크게 뜨고 있었지만 눈의 초점은 잡혀있지 않았다.
“아아.”
리엔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다시 신음을 뱉었다. 철봉이 빠져나왔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리엔이 두손으로 조철봉의 엉덩이를 움켜쥐었다.
“왜?”
엉덩이를 위로 치켜든 자세로 조철봉이 그렇게 물었을 때 말을 알아 듣기라도 한듯이 리엔이 엉덩이를 끌어 당겼다. 눌렀다는 것이 맞는 표현일 것이다.
“안아파?”
했지만 이미 조철봉도 달아오른 후였다. 아파 죽겠다고 해도 철봉은 마찰의 쾌락을 고대하며 기를 쓰고 다시 들어가려는 참이었다. 철봉이 다시 진입했을 때 조철봉의 입에서도 신음이 터져나왔다. 리엔의 샘은 단단하면서 탄력이 있었다. 신축성이 있어서 철봉을 가득 받아들이고서도 꿈틀거리는 혈관의 반응을 느끼게 해주었다.
“아아앗.”
이번에는 리엔의 신음이 짧고 높아지더니 비음까지 섞였다. 조철봉은 이제 몰두하기 시작했다. 리엔에게 경험이 많은 여자를 대하는 방식을 사용하면 안되는 것이다. 첫 경험일 때는 모든 것이 다 생소해서 두려움의 대상이 된다. 지금 리엔의 샘은 달아올라 있었다. 아직 거칠기는 했지만 두번 진입을 했을 뿐인데도 벽에 습기가 배어났고 신축성이 강해지고 있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던 것이다. 조철봉은 철봉을 다시 빼낸 다음 이번에는 기차의 피스톤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면 쾌감을 음미할 수가 없는 대신 샘의 분위기를 어느 정도까지 올려놓는 효과가 있다.
“아, 아, 아, 아,”
리엔이 진입을 할 때마다 신음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어느덧 조철봉의 엉덩이를 움켜쥔 손이 움직임에 맞춰 힘이 들어갔다가 풀어졌다를 반복했다.
“아, 아, 아, 아,”
신음이 계속되면서 조철봉은 리엔의 샘이 뜨겁게 달아 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첫 경험이라고 할지라도 폭발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이끌어주는 남자에게 달렸다. 하물며 조철봉인데 오죽하랴.
이른바 길을 들인 것이다. 정신 못차리는 사이에 길을 낸다고나 할까? 어쨌든 그 짜릿한 느낌을 포기한 채 조철봉은 열심히 진퇴운동만을 했고 그것 만으로도 리엔은 자지러졌다. 폐가 터질 것같이 가쁜 숨을 뱉으면서 온몸은 땀으로 물 속에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되었고 입에서는 단말마의 신음이 끊이지 않고 터져나왔다. 그 신음이 고통에 의한 것만은 아니라는 첫 증거가 바로 아직도 조철봉의 엉덩이를 단단히 움켜쥐고 있는 것이었는데 이제 샘안의 반응으로 확실해졌다. 샘 벽에서 배어나온 용암이 철봉을 반기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리엔의 신음은 여전했다.
“아, 아, 아, 아, 아.”
이제는 옆방의 윤희를 전혀 의식하지 않고 뱉어내는 것이다. 이윽고 조철봉이 피스톤 운동을 그쳤을 때는 리엔의 숨이 끊어질 것처럼 가파르게 올라 있을 때였다.
그러나 리엔은 아직 절정에 오르지 않았다. 본인은 한번도 겪어보지 못한 경지였으니 지금 어떻게 돌아가는 판국인가 얼떨떨하기나 할테지만 이끌어가는 조철봉에게는 시간이 지날수록 어려운 과제가 되었다. 리엔은 자신이 첫남자인 것이다. 그때였다. 리엔이 조철봉의 엉덩이를 다시 당겼다. 계속하라는 표시였다.
“이런, 젠장.”
혼잣소리로 말한 조철봉이 이제는 천천히 철봉을 넣었다. 그러자 철봉은 용암이 흐르는 지표를 뚫고 핵을 향해 우직하게 진입했다.
“아, 아.”
리엔의 신음이 달라졌다. 낮고 길어진 것이다. 그러고는 처음으로 두 다리를 벌려 조철봉의 다리를 감았다. 시키지도 않았는데도 그런 것이다. 그것은 리엔이 마찰과 압박감으로 쾌감을 느끼고 있다는 증거였다.
“흥.”
쓴웃음을 지은 조철봉이 철봉의 각도를 바꾼 다음 다시 뺐을 때 리엔의 신음이 더 길어졌다.
“아아아아.”
이번에는 곡사 형식으로 리엔의 샘에 비스듬하게 진입해 들어가자 신음은 더 길어졌다. 그때 리엔의 두 다리는 어느새 위로 치켜져 있다. 마찰과 압박 강도를 이제는 제가 조절하면서 즐기기 시작하는 것이다. 리엔의 두 다리를 치켜들었던 조철봉은 문든 아래쪽에 시선을 주었다가 눈을 치켜떴다. 흰 시트에 선명하게 피가 번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순간에 빠져 나오는 철봉도 붉게 물들어 있다. 피다. 그 순간 숨을 들이마신 조철봉은 시선을 돌리고는 다시 섬세하게 진입했다.
“아아아.”
리엔의 신음이 더 높아졌다. 그러고는 뭐라고 중국어로 헛소리처럼 말했는데 이제 조철봉의 귀에는 탄성처럼 들렸다. 조철봉은 열중했다. 첫번째 경험이어서 체위를 바꾸면 다시 긴장이 될 것 같았으므로 정상위로만 끝내기로 했다. 그러나 정상위 하나로도 수십가지의 변형이 있다. 조철봉이 여러 각도로 시간차 진입을 시도하는 동안 리엔의 쾌감은 점점 절정으로 솟아오르고 있었다.
“그래, 지금이다.”
리엔이 허리를 활처럼 굽히면서 철봉을 받아 들일 적에 조철봉이 부드럽게 말했다.
“기억해 두어라. 네 첫 남자를 말야. 내 첫 여자는 날 잊었을테지만.”
“아아아악!”
리엔이 몸을 굳히면서 비명을 질렀을 때 조철봉은 다시 힘껏 철봉을 넣었다. 그때 리엔은 절정에 올랐다. 조철봉이 보기에도 완벽하게 올랐다. 그것도 첫번째에.
리엔은 늘어졌지만 아직도 조철봉의 허리는 단단하게 움켜쥐고 있었다. 놓으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정신이 다 나간 상태인데도 불구하고 놓지 않았다. 가쁜 숨을 들이쉴 때마다 목구멍에서 쇳소리가 났다. 온몸은 땀에 젖었는데 마치 물벼락을 맞은 것 같았다. 두 다리를 들어올릴 힘이 없었기 때문인지 하반신은 내동댕이치듯 벌어져 있었지만 조철봉은 지금 리엔이 뜨겁고 달콤한 여운 속에 묻혀 있다는 것을 안다.
조철봉은 맛보지 못했지만 이 여운의 기쁨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경험해온 것이다. 과정이 아무리 좋았다고 해도 이 여운, 즉 마무리에 실수를 해서 탈락한 놈자가 부지기수인 것이다. 물론 남자의 생리 구조는 ‘뻥’하고 대포를 발사하거나 ‘찍’하고 물총을 싸거나 그 시점에서 끝난다. 여운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놈자는 발사 즉시로 빼려는 본능이 있다. 전혀 철봉에 여운이 남아 있지 않는 것이다.
싸고 나서 뒷마무리에 성실한 놈자는 희생정신의 표상이다. 이 자세가 곧 조직과 국가를 발전시키는 원천이다. 물론 사기꾼과 제비는 빼고 말하는 것이다. 이윽고 조철봉이 몸을 비틀어 침대로 내려 왔을 때는 그로부터 10분쯤이나 지난 후였다. 그때는 리엔의 숨소리도 평온해져 있었고 정신이 들자 시트로 몸까지 가렸다. 그러나 아직도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다. 조철봉을 바라보는 눈은 반짝였으며 뭔가 기다리는 것 같게도 보였다. 그러나 중국어를 모르는 조철봉인지라 대화는 불가능했다.
“윤희 데려와라.”
조철봉이 엎드린 채 그렇게 말했다.
“니가 빽빽 소리쳐서 윤희가 다 들었겠다.”
그러자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것처럼 윤희가 시트를 움켜쥔 채 일어섰다. 그러더니 서둘러 옷을 입고는 문으로 다가갔다. 문의 손잡이를 잡은 리엔이 몸을 돌리더니 조철봉을 향해 머리를 숙여 보였다. 눈이 여전히 반짝였고 입가에는 옅게 웃음기까지 배어 있었다. 리엔이 나간 지 1분도 안되어서 윤희가 들어섰는데 조철봉과 시선을 마주치려고 하지 않았다.
“아유, 더워.”
혼잣소리로 그렇게 말하더니 창으로 다가가 창문을 반쯤 열고는 돌아와 침대 옆의 의자에 앉았다. 여전히 외면한 채 옆모습을 보이고 앉았는데 두손은 가운깃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 조철봉은 윤희의 동작을 눈도 깜박이지 않고 바라보았다. 그러나 입을 열지 않아서 방 안에서는 한동안 어색한 정적이 계속되었다.
“리엔이 시트를 버렸어.”
하고 조철봉이 턱으로 방의 구석을 가리켰다. 리엔이 시트를 끌어안고 일어나 옷을 입으면서 방 구석에 꽁꽁 숨겨놓은 것이다. 마땅한 곳이 없었으므로 휴지통 옆에다 잔뜩 압축시켜 놓았다. 리엔의 피가 번진 시트인 것이다.
“진짜 처녀인가 보다. 피가 많이 났어.”
조철봉의 말이 이어졌다.
“그런데 처음 하면서 홍콩으로 가버리는구만. 물론 내가 그렇게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지만 말야.”
“…….”
“괜찮았어. 테크닉은 없었지만 몸은 좋았어. 장래성이 있는 애야.”
그때 윤희가 시선을 돌려 조철봉을 보았다. 정색하고 있어서 화난 것 같았다.
“저, 어떻게 해요?”
“뭘 어떻게 해?”
“저, 침대로 들어가요?”
그렇게 물었던 윤희가 생각났다는 얼굴로 말했다.
“리엔은 집에 보냈는데요.”
“어, 그래?”
놀란 척 눈을 크게 떴지만 조철봉의 가슴은 느긋해졌다. 다시 리엔하고 일을 치를 계획이 없는 터라 잘 된 일이었다.
“음, 들어와.”
조철봉이 눈으로 옆쪽을 가리키자 윤희가 일어서며 말했다.
“시트 벗기게 일어서세요.”
“왜 그러는 거야?”
“기분 언짢아요.”
“나아, 참.”
투덜거리는 시늉을 했지만 몸을 일으키는 조철봉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떠올라 있었다. 조철봉이 침대 밖으로 나오자 윤희는 침대에 깔린 시트를 걷어내었다. 그러고는 이불까지 뭉쳐 구석에 쌓아놓더니 벽장에서 예비 시트를 꺼내 펼쳤다. 마치 10년쯤 같이 산 마누라가 침대 정돈을 하는 것처럼 의연한 표정이었고 익숙한 몸놀림이었다.
“자, 이제 오세요.”
먼저 시트를 들치고 침대에 들어간 윤희가 조철봉을 불렀다.
“허, 참.”
조철봉은 침대로 들어오면서 아까 리엔이 방을 나가고 나서 서둘러 걸쳤던 가운을 다시 벗어던졌다.
“씻으셨어요?”
조철봉이 옆에 누웠을 때 윤희가 물었다. 윤희는 아직 가운 차림이었는데 깃까지 여미고 있는 데다 눈빛도 또렷했다.
“응.”
건성으로 조철봉이 대답하자 윤희는 코를 조금 들더니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는 시늉을 했다. 조철봉은 씻지 않았다.
“왜?”
“아뇨.”
“너, 좀 까다로운 성격이냐?”
“아뇨?”
윤희가 정색하고 머리를 저었다.
“까다로운 성격이면 바깥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있겠어요? 꽥꽥대는 소리를 고스란히 들으면서요.”
“걔 소리가 좀 컸지?”
“일부러 저 들으라고 더 크게 소리지르는 것 같더라니까요.”
“설마, 그럴리가?”
“싸가지가 없는 계집애예요.”
“왜?”
“나한테 미안하면 그럴 수가 없죠.”
“저절로 소리가 나오는 걸 어떡해? 더구나 첫 경험인데 말야.”
“아무리 처음이라도 그렇죠.”
“넌 안 그랬어?”
“전 어떻게 했는지도 기억 안 나요.”
“설마.”
“30초도 안되어서 싸고 끝났으니까.”
“여기도 번개가 있군.”
“우리 또래는 그런 애들 많아요.”
“그건 그렇고.”
조철봉이 윤희의 가운 깃을 당겼다.
“이젠 벗어라.”
그러자 윤희가 가운 깃을 벌리더니 앉은 채로 순식간에 벗었다.
“으음.”
그 순간 조철봉은 입에서 탄성이 뱉어졌다. 윤희는 가운 밑에 아무 것도 걸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알몸이다. 불빛에 비친 윤희의 둥근 어깨가 반들거렸고 도톰한 젖가슴은 단단하게 솟아 있었다. 윤희가 몸을 가리려는 시늉도 하지 않았으므로 조철봉은 누운 채 한동안 홀린 듯이 상반신을 보았다.
“지금, 괜찮으세요?”
불쑥 윤희가 물었으므로 조철봉은 시선을 들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윤희가 수줍게 웃었다.
“아직 20분밖에 안 되었지 않아요? 사장님이 하시고 나서 말예요.”
윤희의 시선이 시트에 덮인 철봉쪽을 가리켰다.
조철봉은 언젠가 어떤 여자하고 섹스를 하면서 이야기를 오래했던 경험이 있다. 그것은 그 여자가 자꾸 말을 시켰기 때문이었는데 나중에 그 이유를 알았다. 그 여자의 남편이 섹스 도중에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었다. 아이들 학교 이야기도 했다가 뜬금없이 정치 문제로 화를 냈고, 시장 물가 이야기로 화제를 돌리기도 하면서 열심히 허리 운동을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조철봉이 애국가를 거꾸로 부르는 것과 맥락이 같다고 봐도 될 것이다.
하지만 조철봉은 혼자 말한다. 여자한테 말을 시키지 않는 것이다. 생각해 보라. 허덕이며 방아를 찧으면서 ‘저기, 요즘 배추 한포기가 얼마여?’ 하고 물으면 황홀감을 느끼려던 여자가 할 수 없이 정신을 차리고는 ‘응, 2500원’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 놈자는 어쨌거나 대포를 늦춰 발사하려고 배추값 물어본 정성은 인정받아야 한다. 그러나 잘못 생각한 부분이 있다. 지가 발사를 늦춘다고 여자를 끌고 갈 필요는 없는 것이다. 여자는 놔두고 저 혼자서 고독한 물소처럼 나가야만 한다. 외롭더라도 저 혼자 배추값 묻고 대답하든지, 6자회담 이야기를 하든지 하면서 나가라는 것이다. 그동안 여자는 혼자서 승천할 테니까.
윤희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문득 그 여자를 떠올린 것은 리엔하고는 한마디도 대화를 나누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섹스 도중의 대화에는 조철봉이 크게 관심을 갖지 않았지만 지금같은 분위기는 모두 좋아할 것이다. 조금전에 윤희는 조철봉의 철봉을 눈으로 가리키면서 괜찮으냐고 물었다.
“어디, 시트 들쳐봐”하고 조철봉이 말하자 윤희는 피식 웃었다.
“사장님도 참.”
“들쳐 보라니까.”
조철봉의 아랫도리를 덮은 시트는 평평했다. 윤희가 망설이자 조철봉은 시트를 젖혔다. 그러고는 철봉을 쥐고 있던 손을 놓았다.
“어머.”
놀란 윤희가 눈을 크게 떴다.
“벌써?”
곤두선 채 건들거리는 철봉을 홀린 듯이 바라보는 윤희의 눈이 번들거렸다.
“사장님은 대단하세요.”
윤희는 조철봉이 리엔에게 대포를 발사하지 않은 것을 모르는 것이다.
“나, 피곤하다.”
누운 채 조철봉이 엄살을 부렸다.
“경험없는 애를 끌어올리는 게 보통 힘이 드는 것이 아냐.”
“그냥 하시지 끌어올리실 필요 있어요? 몸 상하시게.”
그러면서 윤희가 손을 뻗어 철봉을 조심스럽게 만졌다.
“저, 이거 이렇게 똑똑히 보는 건 첨예요.”
이제는 두 손으로 감싸 안으면서 윤희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너무 커요, 이것이.”
“어떻게 다 들어가느냐구?”
“네, 정말.”
“다 들어간다.”
“무서워요.”
“속으로는 좋으면서.”
“저, 입 맞춰도 돼요?”하고 윤희가 묻더니 조철봉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입술을 철봉에 붙였다.
“으음.”
신음은 윤희의 입에서 터졌다. 알몸인 채 조철봉의 몸 위에 엎드린 윤희가 혀를 길게 뽑더니 철봉을 위에서 아래로 쓸었다. 번들거리는 눈에 어느덧 초점이 사라져 있었다. 아름답다. 조철봉은 숨을 삼켰다.
윤희의 표정은 진지했다. 얼굴을 정면으로 보이고 있어서 입가에 묻은 침까지 보일 정도였다.
“으음.”
마침내 조철봉의 입에서 신음이 뱉어졌다. 윤희가 철봉을 입 안에 넣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본 조철봉은 두 손을 뻗치면서 상체를 조금 일으켰다.
“그만.”
그러나 윤희가 듣지 못한 듯 입 안으로 철봉을 더 넣었으므로 조철봉은 일어나 앉았다. 그러자 윤희의 입에서 저절로 철봉이 빠져나왔다. 머리를 든 윤희가 조철봉을 보았다. 그 순간 눈의 초점이 모이더니 왜 그러냐고 묻는 표정이 되었다. 상기된 얼굴은 아름답다.
“난 괜찮아.”
조철봉의 입에서 엉겁결에 그런 말이 나왔다. 그러고는 윤희의 어깨를 밀어 침대 위로 눕혔다. 윤희가 선선히 눕자 이제는 둘의 머리가 반대 방향으로 모였다.
“내가 할 게.”
윤희를 내려다보면서 조철봉이 부드럽게 말했다.
“난 그런 것에 익숙지 않아서 그래.”
“좋아하지 않으세요?”
“왜 안 좋겠어?”
“그럼 해 드릴 게요.”
“글쎄, 난 익숙지 않다니까.”
그러고는 조철봉이 윤희의 볼과 목덜미에 차례로 입술을 붙였다. 입술이 목덜미에서 내려와 젖가슴 위를 배회하자 윤희가 두 손으로 조철봉의 머리칼을 어루만졌다.
“사장님, 왜 입술에는 안해 주세요?”
“그건 네가 원하면 해주지.”
“키스해 주세요.”
그러자 쓴웃음을 지은 조철봉이 몸을 세우더니 윤희의 입술을 빨았다. 윤희의 입술에서 사과맛이 났다. 곧 윤희의 혀가 내밀어지더니 조철봉의 입안으로 수줍게 들어왔다. 조철봉이 혀를 잠깐 빨고는 자신의 혀로 문질렀다.
“아, 좋아요.”
윤희가 두 다리로 조철봉의 허리를 감아 안으면서 말했다. 숨결이 가빴고 몸은 뜨겁다. 그리고 허리를 비틀어 곤두선 철봉을 문질렀는데 골짜기에 닿았다가 떼어지기를 반복했다.
“사장님, 이제 넣어주세요.”
잠깐 입술을 뗀 윤희가 두 손으로 조철봉의 목을 감으며 말했다.
“저, 애무 안해 주셔도 금방 올라갈 수 있어요.”
“흐음.”
자신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은 조철봉이 윤희를 내려다보았다.
“내 걱정을 많이 해주는구나.”
“리엔한테 너무 쏟으셨어요.”
“그런 것 같더냐?”
“걔 달아오르게 하느라고 애 쓰셨지 않아요?”
“뭐, 별로.”
“전 그냥 넣어도 돼요, 이미 거긴.”
하더니 윤희가 철봉을 한손으로 쥐고 샘에 넣으려는 시늉을 했다.
“잠깐만.”
엉덩이를 뒤로 뺀 조철봉이 윤희를 내려다보았다.
“내 걱정 안해도 돼.”
“저, 급해요.”
그러더니 윤희가 다시 하체를 붙여 왔으므로 조철봉도 심호흡을 했다. 윤희는 예쁜 짓만 골라 하는 것이다.
“그러자, 그럼.”
마침내 자세를 갖춘 조철봉이 철봉을 윤희의 골짜기에 붙였다. 아무리 급하더라도 골짜기 산책은 빼놓을 수 없는 것이다. 조철봉은 골짜기 산책을 시작했다.
상체를 거의 세운 자세로 철봉을 산책시키면 색다른 쾌감이 온몸을 짜릿하게 만든다. 촉감보다도 시각적인 즐거움이다. 행복감이라고 해도 맞는 말이 될 것이다. 윤희는 반쯤 눈을 감은 채 두 손을 조금 들어올린 자세로 침대에 누워 있었는데 지금 철봉의 진입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그때 조철봉은 철봉의 끝부분을 쥐고 산책을 시작했다. 골짜기 주위를 강약의 조화를 주면서 문지르는 것이다. 이것이 곧 철봉의 산책이다.
“아앗.”
놀란 듯 윤희가 눈을 크게 뜨더니 하체를 비틀었다. 그때 철봉은 골짜기를 지나 샘의 끝부분에 잠깐 닿았다가 떼어지는 참이었다.
“어머.”
반대쪽 골짜기로 철봉이 내려왔을 때 윤희의 입에서 다시 외침이 터졌다. 애가 타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그만요.”
허리를 비틀면서 철봉을 잡으려는 몸짓과 함께 윤희가 말했다.
“그만 넣어줘요, 그만.”
조철봉은 잠깐 골짜기 안으로 미끄러져 갔던 철봉이 용암에 적셔진 것을 느꼈다. 윤희는 이미 달아오를 대로 올랐다. 시기가 너무 지나도 역효과가 된다. 윤희는 보통보다 달아오르는 기간이 짧은 편인데다 지금은 서두르기까지 하고 있다. 조철봉의 몸을 걱정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조철봉은 철봉을 산책시키면서 여자를 관찰하는것이 취미의 하나가 되어 있었다. 쾌락으로 젖어들어가는 여자의 표정은 아름답고 인상적이다. 그리고 백인백태인 것이다. 여자마다 다르다. 어느 한 부분 같은 점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여자를 떠올릴 때 지금 이 장면을 머릿속에 넣어두면 절대로 잊히지 않는다. 이름은 잊을지언정 철봉을 산책시킬 때의 표정은 오래도록 머릿속에 남아있는 것이다.
“얼른요.”
하고 윤희가 헐떡이며 보챘으므로 조철봉은 아쉽게 산책을 마쳤다. 어쨌든 윤희의 모습도 머릿속에 입력된 상태였다. 조철봉이 상체를 조금 기울이자 윤희는 기대에 찬 듯 두 팔을 벌려 목을 감싸안았다. 그러고는 두 다리를 벌려 맞을 준비를 했다. 조철봉은 샘끝에 대고 있던 철봉을 천천히 진입시켰다.
“아아아아.”
윤희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길고 굵은 탄성이 뱉어졌다. 그러고는 번쩍 눈을 뜨더니 소리쳤다.
“여보, 너무 좋아.”
아직 철봉은 반도 들어가지 않았는데 윤희는 자지러졌다. 조철봉은 윤희의 샘이 단단하지만 탄력이 뛰어나고 수축성이 강한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용암은 목욕탕 안에 거인이 들어간 것처럼 넘쳐흐르고 있다.
“아악.”
철봉이 끝까지 닿았을 때 윤희가 턱을 치켜들면서 신음했다.
“아아, 죽을 것 같아.”
윤희가 다시 소리쳤다.
“터질 것 같아.”
조철봉은 심호흡을 했다. 과연 언어는 인류의 의사 소통뿐만 아니라 성생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면에서 공헌을 한다. 조금 전에 리엔과 가쁜 숨만 주고받으면서 신음을 토한 것에 비교하면 천양지차가 나지 않는가 말이다. 조철봉은 철봉을 빼내려다가 하마터면 대포를 발사할 뻔하고는 눈을 부릅떴다. 윤희의 샘이 수축되면서 철봉이 빠져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를 쓰고 철봉을 빼낸 조철봉이 이를 악물었다.
“는, 피, 꽃, 에, 섬, 백, 동, 이, 봄, 만, 건, 왔.”
마침내 조철봉의 입에서 몽골어가 터져나왔다. 한 글자 한 글자를 내뱉으면서 조철봉은 철봉을 진입시켰다가 기를 쓰고 빼는 동작을 반복했으니 위 몽골어 12자를 뱉으면서 12번 철봉이 들어갔다가 나온 것이다. 물론 그동안 윤희는 들어갈 때와 나올 때 두번씩 탄성을 뱉었으니 24번이나 되었다. 몰두한 조철봉의 표정은 엄숙했다. 윤희의 샘은 엄청난 수축력이 있어서 들어갈 때와 나올 때 모두 미칠 것 같은 쾌감이 솟구쳤기 때문에 몽골어에 집중해야 했다. 몽골어란 어느 여자가 조철봉이 말하는 것을 듣고는 몽골어로 뭐라고 하셨느냐고 물었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외국어에는 아주 깜깜한 조철봉이 몽골어를 알 리가 있겠는가? 지금 뱉은 12자는 ‘돌아와요 부산항에’의 첫 소절을 거꾸로 외운 것일 뿐이다. 조철봉은 계속했다.
“난, 떠, 제, 형, 에, 항, 산, 부, 만, 기, 매, 갈.”
다시 12자를 기를 쓰고 외웠을 때 마침내 윤희가 폭발했다.
“아유우, 나 죽어.”
윤희가 아우성을 치더니 눈을 까뒤집다시피 하고는 조철봉에게 매달렸다. 사지를 벌려 산낙지처럼 조철봉의 몸에 붙은 것이다.
“죽여, 죽여, 죽여, 죽여.”
이것이 윤희의 절정이었다.
“으으윽.”
조철봉의 입에서 짓이기는 듯한 신음이 터졌다. 폭발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것은 아랫배 깊숙한 곳에서 갑자기 생성된 용암 덩어리가 무서운 기세로 철봉을 향하여 돌진해오는 것으로 느낄 수가 있다. 안 된다. 분출해 버리고 싶은 간절한 욕망을 억제하면서 조철봉은 이를 갈았다.
“네, 우, 피, 슬, 만, 기, 매, 갈.”
그 8자를 악을 쓰며 외치면서 8번 진퇴를 했을 때 윤희는 까무러쳤다. 신음도 못 지르고 딱 붙어 있다가 두 눈으로 눈물을 쏟아내더니 온몸을 떨기 시작한 것이다. 그야말로 부들부들 떨었다. 샘 안에 있는 철봉이 그 진동으로 떨 정도였다. 마치 지진 같아서 조철봉은 아직 당해보지 않았지만 진도 5쯤은 되어 보였다.
“아아아.”
조철봉은 입을 딱 벌리면서 한숨과 같은 신음을 뱉었다. 철봉을 향해 돌진해오던 용암 덩어리는 간발의 차이로 철봉 밑부분에서 멈추더니 소멸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때 떨고 있던 윤희가 이제는 신음과 함께 울기 시작했다. 윤희는 절정에서 지금 내려가는 중이었지만 아직 정상의 9할 정도에 있다. 조금 전에 조철봉이 외쳤던 몽골어, 즉 ‘갈매기만 슬피우네”를 거꾸로 뱉었던 그 동안에 윤희는 절정에서 또 한계단 상승했을 것이었다. 조철봉은 철봉을 깊게 넣은 채 긴 숨을 뱉었다. 아직도 윤희의 상반신을 단단히 감싸 안은 채 위에 엎드린 자세였는데 이 상태로 10분은 더 있어야 될 것이다.
“응응응.”
그때 윤희가 휘감고 있던 팔다리를 스르르 침대 위로 떨어뜨리더니 흐느낌 소리가 더 커졌다. 온몸은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어서 얼굴의 눈물도 땀인지 분간이 안 되었다. 조철봉은 윤희의 귀를 입술로 물었다. 이렇게 윤희는 여운을 만끽하다가 개운한 몸이 되어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조철봉도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부르는 동안 철봉에 전해져오는 그 몸서리쳐질 만큼 강한 쾌감을 지웠다. 지우지 못했으면 벌써 대포가 발사되었을 것이다. 다시 심호흡을 했던 조철봉도 퍼뜩 눈을 크게 떴다. 자신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리없이, 마치 땀처럼 눈물이 난다. 왜 그럴까?
위선(僞善)이란 겉으로만 착한 체한다는 뜻으로 조철봉은 저 자신에게 딱 맞는 말이라고 믿어왔다. 그러나 가만 보면 위선 떨지 않는 사람은 드물었다. 껍질을 벗기면 금방 드러났다. 요즘은 더욱 그렇다. 겉으로는 먼지 한점 묻지 않은 것처럼 고고한 척하다가 조철봉에게 엉겨 갖은 기성을 뱉어내는 여사님들의 행태도 그렇다.
다음날 아침 서울행 비행기 안에서 조철봉은 문득 위선을 떠올렸다. 시치미를 뚝 떼고 일등석에 앉아있는 자신을 승무원들은 정중하게 대우해 주고 있는 것이다. 일등석 요금은 일반석의 두배 가깝게 된다. 똑같은 비행기에 앉아 같은 시간에 목적지에 닿는 데도 요금은 두배인 것이다. 비행기를 자주 이용하는 조철봉이었지만 지금까지 일등석과 일반석 구분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해보지 않았다. 처음에는 일등석이나 비즈니스석의 의자가 마사지받는 이발관 의자처럼 넓고 편한데다 승무원의 서비스가 좋다는 이유만으로 그냥 탔지만 요즘은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몇 년 동안 사업체를 운영해왔기 때문일 것이다.
처음 일등석을 탈 적에는 공항에서 티켓을 받을 때부터 주위에 신경이 쓰였다. 길게 늘어선 일반석 손님들의 시선이 곱지 않은 것 같다고 지레짐작하고서는 마음 졸였던 때도 있다. 일등석 손님은 붉은색 양탄자가 깔린 창구로 가서 금방 티켓을 받고 일등석 라운지로 들어가 쉬는 것이다. 그리고 비행기를 탑승할 때도 대접을 받는다. 비행기의 출입구는 대개 두 곳이 있는데 일등석은 앞쪽으로 들어간다. 좌석이 앞쪽에 있기 때문에 진동도 적고 타고 내리기에도 편하다.
어쨌든 조철봉의 지금 생각은 달라졌다. 당사자가 사기꾼이건 악덕 사채업자로 돈을 벌었건 간에, 또는 월세방에 살고 있으면서 순전히 허세로 일등석을 탔건 간에 그 일등석 손님은 돈 낸 만큼은 대우를 받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자본주의 사회, 또는 자유민주주의 사회의 법칙이다. 아니, 사회주의 사회도 마찬가지다. 옛 소련 시대의 아에로플로트 항공은 물론이고 공산주의 국가의 항공사도 다 일등석과 일반석이 구분되었다. 일등석은 많은 요금을 낸 승객이 탔고 일반석은 적은 요금을 낸 승객이 탔던 것이다. 일등석에 타고 좋은 대접을 받으면서 여행을 하려고 공산주의 사회의 시민들은 어떻게 했을 것인가? 돈 벌기가 마땅치 않았으니 당 간부가 되려고 했을까? 아마 공산주의 사회가 붕괴한 것에 비행기 일등석이 약간 공헌을 했을지 모른다고 조철봉은 생각했다. 일등석이 생긴 지 반세기가 지났을 텐데 그동안 없어지거나 말썽이 크게 일어나지 않는 걸 보면 돈 많이 낸 사람이 더 좋은 대접을 받아야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고 봐도 될 것이다. 그것에 가타부타하는 놈이 있다면 아주 악독한 놈이거나 미친 놈이거나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열심히 돈을 벌어서 세금 많이 내고 돈 낸 만큼 대우를 받는 것이 자유민주주의 사회인 것이다. 한 마디로 내가 내 돈을 쓰는데 어떤 시러베 아들이 상관을 한단 말인가? 세금 다 내고 내 돈 쓰는 데도 왜 눈치를 봐야 하는가? 그럴 필요는 없다고 조철봉은 깨달은 것이다. 그래야 경제도 살아난다. 돈 있는 놈들이 눈치 안보고 돈을 펑펑 써야 경제에 활력이 생긴다. 룸살롱이 잘 돌아가고 룸살롱 아가씨를 태운 모범택시가 바쁘고, 아가씨를 손님으로 하는 일수꾼들이 많이 생길 때가 태평세월이다. 정치가 별것인가? 등 따습고 배부르게 만들면 되는 것이다. 도둑놈이나 강도는 신라시대에도 있었다.
조철봉은 창밖의 구름을 내려다보면서 저도 모르게 긴 숨을 뱉었다. 강남에 아파트를 두채나 사놓았다가 이번에 작살났다. 정부의 부동산 정책이 발표되면서 억대의 손해를 본 것이다. 지금까지 부동산 사 놓았다가 이번처럼 피를 본 경우는 처음이다. 거기서 번 돈을 강남 룸살롱에 뿌리면 경제에 도움이 될 텐데, 경제정책 담당자들은 또 오산을 했다. 사기꾼의 돈은 돈이 아니냐? 돈을 풀어야 경제가 일어난다.
“어서 오십시오.”
자리에서 일어선 배 사장이 오늘은 웃음띤 얼굴로 맞았지만 고영민은 불안했다. 지난번에도 저렇게 웃으면서 집주인이 바뀌어 보증금이 나올지 모르겠다고 말했던 것이다. 목례만 하고 낡은 비닐소파에 앉은 영민에게 배 사장이 사근사근해진 목소리로 물었다.
“커피 드실래요?”
“아뇨, 됐습니다.”
손목시계를 보는 시늉을 하면서 영민이 사양했다. 오전 11시 5분전이다. 11시에 집주인하고 이곳 평화부동산 사무실에서 만나기로 한 것이다. 배 사장이 다시 말을 걸었다.
“집주인이 그 집을 창고로 사용할 모양이더군요. 집을 비우면 바로 내부 공사를 한답니다.”
“…….”
“내일까지 비우실 수 있지요?”
“네.”
영민이 짧게 대답했을 때 미닫이문이 열리더니 사내 두명이 들어섰다. 둘 다 30대 쯤으로 그중 하나가 상전인 것 같았다. 말쑥한 양복차림이었고 키도 컸는데 낯익은 얼굴이었다.
“아이구, 사장님이십니까?”
반색을 하며 일어선 배 사장이 앞장선 사내에게 다가서며 물었다. 배 사장도 초면인 모양이었다.
“아, 예, 청수 아파트 건으로.”하고 사내가 대답했을 때 영민이 조금 눈썹을 모으고는 사내를 보았다. 목소리도 많이 들은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예, 앉으시지요. 여기 세입자께서도 와 계십니다.”
배 사장이 영민을 가리켜 보이면서 사내에게 자리를 권했다. 그때서야 사내의 시선이 영민에게 옮겨 왔다.
“아.”
그순간 영님의 입에서 짧은 외침이 뱉어졌다. 그때서야 사내에 대한 기억이 떠오른 것이다. 조철봉, 조철봉이다. 입을 딱 벌린 영민이 하얗게 굳어진 얼굴로 조철봉을 보았다. 그때 영민의 시선을 받은 조철봉의 머리가 옆으로 조금 기울어졌다. 그러고는 눈썹을 모으더니 영민을 똑바로 보았다.
“어디서 많이 뵌 분 같은데요.”
조철봉이 머리를 기울인 채 말했다. 아직도 시선을 영민에게서 옮겨가지 않는다.
“저, 혹시 저를 아십니까?”하고 조철봉이 물었을 때였다. 갑자기 얼굴이 붉어진 영민이 아랫입술을 깨물더니 시선을 내렸다. 그때서야 자신의 입장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세입자와 집주인의 관계로 재회한 것이다. 그리고 이쪽은 5백짜리 월세 세입자였고 두달째 집세를 못내어서 70만원이 깎였다. 손에 쥘 돈은 4백30에다 관리비를 빼면 4백밖에 되지 않는다. 그때였다. 조철봉의 눈이 크게 떠지더니 목소리가 높아졌다.
“아, 고영민, 고영민씨 맞지요?”하고 조철봉이 물었을 때 영민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아, 저기.”하고 놀란 배 사장이 뒤에서 불렀지만 영민은 도망치듯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그러고는 어떻게 집으로 돌아왔는지 모른다.
“엄마, 어디 아파?”
오늘은 학교를 쉬고 이삿짐 꾸리는 것을 돕고 있던 애주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을 때에야 영민은 정신을 차렸다. 서둘러 화장실로 들어가 거울을 들여다보자 얼굴은 아직도 상기되었고 눈에는 핏발까지 서 있다. 영락없는 환자 얼굴이었다.
“으응응.”
거울을 보던 영민이 갑자기 소리내어 울었다.
“아시는 분인가요?”
배 사장이 주저하며 물었을 때 자리에서 일어선 조철봉은 아직도 열려진 부동산 사무실 문 밖으로 나왔다. 박경택은 잠자코 뒤를 따르고 있다.
“저, 제가 다시 불러올까요?”
하고 배 사장이 다시 물었을 때 몸을 돌린 박경택이 다가갔다. 그러고는 뭐라고 했는지 배 사장은 안으로 들어가더니 찍소리도 안냈다. 길가에 선 조철봉의 옆으로 박경택이 다가와 섰다.
“사장님, 7동 403호실입니다.”
낮게 말한 경택이 힐끗 눈치를 보았다.
“아까 보았더니 애도 집에 있었습니다. 이삿짐을 꾸리던데요.”
“….”
“애 이름은 홍애주입니다, 사장님.”
이윽고 머리를 끄덕인 조철봉이 발을 떼었다. 아파트를 향해 가는 것이다. 경택도 잠자코 뒤를 따랐지만 둘 사이의 분위기는 무거웠다. 부동산 사무실의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조철봉은 한순간에 영민을 알아 보았다. 영민이 미처 머리를 들기 전에 보았기 때문에 시선은 마주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영민을 본 순간 조철봉은 심장이 멎는것 같은 느낌을 받고는 심호흡을 해야만 했다.
심장이 다시 뛰는가를 확인한 것이다.
영민의 분위기는 초라했고 얼굴도 초췌했다. 머리는 생머리를 뒤에서 고무줄로 묶었는데 미장원에 갈 돈도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싸구려 스웨터에 바지를 입었는데 색상이 맞지 않았다. 요즘은 공사장 노동자도 바지와 저고리의 색상 조화에 익숙한 세상인 것이다. 그러나 얼굴은 변치 않았다 진남색의 눈동자도 그대로였고 곧고 귀여운 콧날도 여전했다. 입술은 말라 세로 주름이 잡혀 있었지만 모양에 지장을 주진 않았다. 잘 되었다. 그 다음 순간에는 아마 그런 느낌이 가슴에 퍼지면서 몸에 기운이 솟구친 것 같다. 물론 겉으로는 모르는 척하면서 어디서 많이 뵌 분 같다고 시치미를 떼었지만 말이다.
“사장님, 저는 여기서.”
벌써 아파트 현관 앞에 닿았으므로 경택이 말했다. 멈춰 선 조철봉에게 경택이 말을 이었다.
“여기서 기다리겠습니다, 사장님.”
머리를 끄덕여 보인 조철봉은 다시 발을 떼었다. 낡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403호실 앞에 선 조철봉은 다시 심호흡을 했다. 이제는 아니, 지금 뭐하는 짓이야? 하는 따위의 자성 분위기는 깨끗하게 사라졌고 오직 미래에 대한 욕망뿐이다. 그렇지, 중간 결산을 하는 것이다. 고영민을 만남으로써 지금까지의 내 여성사를 한번 정리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어쨌든 고영민으로부터 내 여성사는 시작되었으니까, 그 염병할 임질, 조철봉은 손을 뻗쳐 벨을 눌렀다. 3초쯤 기다려도 응답이 없었으므로 다시 눌렀다. 이번에는 조금 길게, 조철봉이 손을 떼었을 때 문이 열렸다.
반쯤 열린 문 사이로 영민의 모습이 드러났다. 조철봉을 똑바로 보고 있었는데 눈의 흰자위가 붉어졌고 조금 부은 것 같다. 울었구나.
“나야.”
하고 조철봉이 부드럽게 말했다. 그러나 시선을 떼지 않았다. 예전에는 그러니까 16년 전에는 이러지 않았다. 이 계집애의 진남색 눈동자와 부닥치면 언제나 내가 우물쭈물 시선을 돌렸다.
“들어가도 돼? 안에 누구 있어?”
조철봉이 차분한 표정으로 물었다.
“거기가 나하고 이야기하기 거북하다면 남편하고 만나게 하든지.”
그러고는 조철봉이 정색하고 기다렸다. 남편 이야기를 꺼냈으니 곧 반발을 할 것이다.
고영민은 조철봉을 똑바로 보았다. 조철봉도 영민의 시선을 맞받은채 물러나지 않았다. 그러고는 5초쯤 지났을때 영민이 말했다.
“들어와요.”
영민은 16년만에 조철봉을 상대로 말을 한 셈이었다.
“그럼 실례할까?”
하면서 조철봉은 아파트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손바닥만한 거실에 우두커니 서있는 여자 아이와 시선이 마주쳤다. 홍애주, 초등학교 5학년, 제 엄마를 빼닮은 얼굴이다.
“어, 너, 이쁘구나.”
하면서 조철봉이 웃음띤 얼굴로 말을 걸었다.
“이름이 뭐지?”
그러나 아이는 대답하지 않고 제 엄마 눈치부터 보았다.
“앉으세요.”
영민이 조금 안정이 된듯 가라앉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나 앉을곳이 마땅치 않았다. 두평쯤 되는 거실은 이삿짐 더미가 가득 쌓여서 발 디딜곳도 찾기 힘들었다. 조철봉이 책 더미를 옆으로 치우고 방바닥에 앉았을때 영민도 옷 보따리를 치우더니 마주보는 위치에 앉았다. 그 사이에 애주는 옆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참, 이렇게 만나게 되는군.”
조철봉이 거짓말을 시작했다. 거짓말에 이골이 난 조철봉이어서 이런때는 아주 정색을 하고 긴장된 표정을 짓지 않는다. 놀람의 강도가 높아지면 무덤덤해지는 것처럼 조금 정신이 나간것같은 행동이 이런때는 어울리는 것이다. 조철봉이 헛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아까는 내가 TV속에 들어가있는것 같더라니까? 왜? 그러잖아? TV 드라마 보면 맨날 우연히 만나잖아?”
그러고는 조철봉이 집안을 둘러보는 시늉을 했다.
“아이 아빠는 어디 가셨어?”
“없어요.”
영민이 짧게 말을 자르자 조철봉은 머리를 끄덕이고는 물었다.
“그런데 어디로 이사 가는거야?”
“그건 알것 없어요.”
“그래?”
쓴웃음을 지은 조철봉이 다시 물었다.
“집 주인과 세입자 관계가 어색해서 그러는 거야? 아니면 만나기 싫은 사람을 만났기 때문이야?”
이것도 미리 연습한 대사였으므로 술술 나왔다. 한달이 넘는 기간동안 준비해온 것이다. 영민이 지금 어디로 갈것인지, 그리고 가게 외상값이 얼마인지도 다 알고있는 조철봉이다. 조철봉의 시선을 받은 영민이 아랫입술을 물었다가 풀더니 대답했다.
“놀라서 그래요. 싫지도, 어색한것도 아녜요.”
“그럼 됐어.”
조철봉이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예상했던 대답중 가장 무난한 대답이었다. 16년전의 영민은 솔직하고 당돌했다. 자신만만한 성품이었다. 아빠가 은행 지점장으로 집안도 괜찮았다.
“내가 부동산에서 얼핏 들었는데 몇달 더 있게 해달라고 했다면서?”
다시 조철봉이 물었을때 영민의 눈 주위가 금방 붉어졌다. 옛날에도 이랬다. 그때는 화가 나면 이랬다. 그 눈을 똑바로 보면서 조철봉이 말을 이었다.
“갈 곳이 마땅치 않으면 나한테 말 해. 내가 도와 줄테니까.”
자, 이제 조철봉은 승부를 걸었다. 물론 패는 다 알고 있어서 영민이 어디로 뛰건 다 잡을 것이다. 그러나 조철봉의 가슴은 뛰었다. 영민이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조철봉은 스스로 내기를 걸었다. 고영민한테 그렇게 말했을 때 받아들일 확률에다 건 것이다. 사람은 변한다. 제 아무리 자존심이 강한 성품이라도 세파를 겪고 나면 타협하게 되는 것이다. 영민은 지쳤다. 그래서 손만 뻗으면, 아니, 머리만 끄덕이면 팔자가 변하게 되는 이 기회를 놓칠 리가 없다. 만일 받지 않는다면 영민을 그대로 놔둘 것이다. 손도 안대고 놔 둔다는 말이었다. 그러고는 앞으로 남은 평생도 고영민과 임질을 같이 떠올리면서 부끄럽게 살아갈 작정이다. 그때 영민이 시선을 들고 조철봉을 보았다.
“됐어요. 보증금이나 줘요.”
그 말을 들은 순간 조철봉은 심장이 뚝 떨어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으면서 목이 메었다. 그래서 얼른 눈을 치켜뜨고 천장의 형광등을 쏘아 보았는데 두개 중 하나가 시커멓게 죽어 있었다.
“그래?”
여전히 천장에 시선을 준 채로 말했던 조철봉이 헛기침을 했다. 목소리가 갈라져 있었기 때문이다. 주머니를 뒤져 봉투를 꺼낸 조철봉이 영민에게 내밀었다. 미리 준비한 5백만원이다.
“여기 있어.”
“고마워요.”
두손으로 봉투를 받은 영민이 2초쯤 망설이더니 봉투 안을 열고 수표를 확인했다. 그것을 본 순간 조철봉의 가슴에서 다시 투지가 일어났다. 떨어졌던 심장이 다시 붙더니 세차게 고동쳤다. 누가 돈의 위력을 당해 내겠는가? 다시 헛기침을 한 조철봉이 입을 열었다.
“방배동에 45평짜리 아파트가 한 채 있는데 비어 있어. 내가 부동산 가격이 오를 줄 알고 사놓았다가 이번에 부동산조치로 그냥 놔둔건데.”
이제 조철봉의 목소리가 정상으로 돌아왔다. 영민은 시선을 내린 채 가만있었고 조철봉의 말이 이어졌다.
“네가 괜찮다면 그 아파트에서 살아도 돼. 애 교육 환경도 좋을테니까.”
“….”
“내가 왜 이러냐고 물을 필요 없어. 네 가족 관계는 잘 모르지만 난 지금 혼자 살고 있으니까 내 문제는 신경 안써도 돼.”
“….”
“넌 자존심이 강한 여자였지. 당돌하고 똑똑했지.”
조철봉이 눈을 가늘게 뜨고 앞쪽의 벽을 향한 채 말했다. 그동안 머리를 숙이고 있던 영민의 시선이 세번이나 스치고 지나는 것을 조철봉은 감지하고 있었다. 조철봉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우리는 6개월 만나다가 순수하게 헤어졌지만 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그때만큼 아름다웠던 시절이 없었어.”
“….”
“솔직히 널 잊고 있었지. 그러다가 일년에 한번, 삼년에 한번쯤 널 생각하면 가슴이 평온해지는거야.”
거짓말이다. 영민을 떠올릴 때마다 그놈의 위선, 그놈의 임질, 아침에 영민과 헤어져 마이신을 사먹으려고 약국으로 뛰어갔던 그 추억이 전과 기록처럼 따라붙는 것이다. 그것이 지워진다면 몇억원도 아깝지 않다. 영민을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들끊고 얼굴이 화끈거린다. 그러나 조철봉은 평온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내가 사업체가 몇개 있어. 그래서 말인데 네 남편이나 네 직장을 만들어 줄 수가 있어. 내일 당장이라도. 그러니까 남편하고 내가 준 아파트에 살면서 직장에 나가. 그냥 받기가 싫다면 그 직장에서 벌어서 갚아. 애를 위해서라도 내 제의를 받아 들이는 게 어때?”
이만하면 넘어가지 않는 여자가 있겠는가?
그때 고영민이 머리를 들고 조철봉을 보았다. 눈빛은 예전처럼 맑았으나 당당하지는 않다. 그때는 이쪽에서 저 시선을 2초도 받아내지 못했다. 조철봉은 숨을 멈췄다. 눈이 마주친 순간은 3초쯤 되었을까? 이번에도 조철봉이 먼저 시선을 내렸지만 가슴이 막혔기 때문에 일부러 그런 것이다. 지금은 100초도 견딜 수 있다.
“철봉씨, 부자예요?”
영민이 그렇게 물었을 때 조철봉은 온몸에 찬 기운이 스치고 지나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머리를 든 조철봉은 영민의 두눈이 흐려져 있는 것을 보았다. 물기가 배어 있다. 그때 영민이 다시 물었다.
“돈 많이 벌었어요?”
조철봉은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어깨를 펴고 말했다.
“열심히 일했어. 그리고 운도 좋았고.”
정색한 조철봉이 말을 이었다.
“자존심 상하면 안돼. 그럴 필요가 없단 말이야. 나는….”
“그만요.”
가볍게 머리를 저은 영민의 얼굴에 희미한 웃음기가 떠올랐으므로 다시 조철봉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영민이 이제는 차분한 표정이 되더니 말했다.
“호의는 고맙게 받겠어요. 저는 이것으로 됐어요.”
방바닥에 내려놓은 봉투를 집어든 영민이 조철봉을 보았다.
“제가 월세 두달치를 안내서 70만원을 까야 하거든요? 그런데 500을 그대로 가져 오셨네요.”
“아아.”
“30분만 기다려주시면 제가 돈 바꿔서 드릴게요.”
“아니, 그건….”
“참, 내 정신 좀 봐.”
그제서야 생각이 난 듯 영민이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섰다.
“차 드시겠어요? 커피하고 녹차가 있는데요.”
“아, 난 커피로….”
“그럼 커피 마시고 계세요. 제가 은행에 가서….”
“아. 서둘지 말고.”
이맛살을 찌푸린 조철봉이 손을 저었다.
“그렇게 안해도 돼. 나중에….”
“그럼 계좌번호를 알려주시면 보내드릴게요. 제가 500 받았다는 영수증 써드리고 70을 보내드린다는 각서까지.”
“염병.”
마침내 조철봉의 입에서 평시와 같은 욕설이 터져나왔다. 짧고 낮아서 영민은 들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때 영민은 주방쪽으로 가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 욕설 한마디를 전환점으로 조철봉의 컨디션은 회복되었다. 말하자면 영민을 카바레나 노래방에서 만난 여자와 대등하게 취급하게 된 것이다. 아이는 방에 들어가서 나오지 않았으므로 조철봉은 주방에 서 있는 영민의 뒷모습을 마음 놓고 보았다. 허리는 아직도 가늘고 엉덩이는 탱탱했다. 서른여섯이면 한창 나이인 것이다. 성감이 가장 강렬한 시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영민은 순조로운 성생활을 하지 못했다. 30대 초반부터 거의 5년 동안 전남편과 사이가 좋지 않았으니까. 부부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은 양쪽 다 조금씩 문제를 품고 있는 경우가 많다. 남편뿐만 아니라 영민 또한 어떤 문제가 있는지 알 수 없다. 영민이 몸을 돌렸으므로 조철봉은 서둘러 시선을 옮겼다.
“저, 이혼했어요.”
커피잔을 들고 다가오면서 영민이 마치 남의 일처럼 말했다.
“그래서 아이하고 둘이 살아요.”
조철봉은 잠자코 머리만 끄덕였다.
“내 잘못도 있죠.”
조철봉 앞에 커피잔을 내려놓은 영민이 다시 입술끝을 살짝 올리며 웃었다.
“제가 변덕이 심하잖아요? 주부로서의 책임감도 부족했고.”
그랬다. 스물한살 때의 영민은 참 잘 변했다. 감수성 때문이었을까? 지금도 그 분위기가 조금 남아 있지만 울다가 금방 웃었다. 예민했다. 꽃피는 봄날이었다가 얼음같이 차가운 겨울이 되었다. 그것도 몇십분 사이에, 아무일도 아닌걸 가지고. 그런데 그것이 다 매력인 걸 어찌하랴? 그럴수록 더 애가 타고 더 간장을 녹이는 걸 어찌하란 말인가? 그때 먹었어야 했다. 지그시 영민의 콧잔등을 보면서 조철봉은 저도 모르게 어금니를 물었다. 그랬다면 눈에 덮였던 동태 껍질도 벗겨졌고 사물이 제대로 보였을 것이다. 또 그랬다면 그런 자신을 보고 영민도 함부로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염병을 할.
그때 영민이 다시 머리를 들었으므로 조철봉의 생각은 끊겼다.
“참 우연이죠? 우리 말예요.”
영민이 신통하다는 듯이 눈을 크게 뜨고 조철봉을 보았다.
“이렇게 만나다니요.”
“글쎄 말이야.”
쓴웃음을 지은 조철봉도 맞장구를 쳤다. 이제 영민이 현실로 돌아왔으니 더욱 긴장을 해야만 할 것이다. 영민이 이제는 시선도 내리지 않고 말했다.
“아까 부동산 사무실에서는 정말 땅바닥으로 꺼져 들어가고 싶었어요.”
조철봉의 시선을 받은 영민이 말을 이었다.
“전 철봉씨를 까맣게 잊고 있었거든요. 전혀 생각하지도 않았다가….”
“정말야?”
조철봉이 정색하고 묻자 영민이 멋쩍은 얼굴로 머리를 끄덕였다.
“네, 정말예요.”
“정말 서운하네. 난 매일은 아니지만 일주일에 한번쯤은 생각했는데.”
“거짓말.”
“정말이야.”
“그럼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도 알아보지 않았단 말예요?”
“알아보고 싶었지만….”
말을 멈춘 조철봉이 길게 숨을 뱉고 나서 영민을 보았다.
“날 떠난 여자를 찾아서 뭐 하겠어? 상처만 더 받을 뿐이지.”
“떠나긴 누가 떠나요?”
쓴웃음을 지은 영민이 말을 이었다.
“우린 깨끗한 관계였잖아요? 약속 한 것도 없고.”
그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조철봉이 시선을 내렸다. 그렇다, 사정 때문에 그건 못했다. 약속한 것도 없다. 그렇다면 깊은 관계였다면 약속도 만들어졌을 것인가? 그때 영민이 물었다.
“철봉씨 아까 말한 것 들으니까 혼자 살고 계시다던데, 왜 그렇죠?”
“왜라니?”하면서 조철봉은 영민의 얼굴을 똑바로 보았다. 거짓말을 할 때는 상대의 얼굴을 똑바로 보는 것이 조철봉의 습관이다. 언젠가 거짓말을 하는 자는 상대방의 얼굴을 똑바로 보지 못한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영민의 시선을 받은 조철봉이 정색하고 말했다.
“죽었어.”
차분하게 말한 조철봉의 머릿속에 서경윤의 얼굴이 떠올랐다. 오랜만에 서경윤을 죽이는 셈이었다. 전에는 자주 죽였는데 요즘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조철봉이 말을 이었다.
“애를 낳다가 죽었지. 애는 살았고.”
재수없게 영일이를 죽일 필요까지는 없다.
“어머나.”
고영민이 놀란 외침을 뱉더니 눈을 크게 떴다. 그 외침을 듣는 순간 조철봉은 목이 메는 느낌을 받으면서 손으로 앞을 가렸다. 사타구니를 가린 것이다. 전에는 안 그랬다. 영민의 목소리나 표정, 동작에 반응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어언 16년이 지난 지금, 귀에 익은 영민의 외침 소리를 눈앞에서 듣는 순간 전혀 예상치 못한 몸의 반응이 일어난 것이다. 그것은 철봉이 벌떡 곤두선 것을 말한다.
“어떡해.”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한 영민이 안쓰러운 표정으로 조철봉을 보았다. 그러고는 뒷말을 기다리는 것이다. 조철봉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애는 걔 이모가 키우고 있어, 그 이모는 이혼을 하고 혼자 살고 있기 때문에 마치 엄마처럼 키워주고 있지.”
졸지에 친모가 이모가 되었지만 잘 짜여진 스토리였다. 만에 하나 현장이 발견되더라도 문제가 생기지 않을 것이다. 또한 서경윤을 다시 살아나게 해서 양심에 걸리는 문제를 조금 해결하는 효과도 있다.
“그런데.”
조철봉이 눈으로 방쪽을 가리켰다.
“애는 수줍음을 타나? 왜 밖으로 나오지도 않지?”
“그래요. 저 애는 낯을 가려.”
하면서도 자리에서 일어선 영민이 방으로 들어가더니 곧 딸을 데리고 나왔다.
“인사해라, 아저씨다.”
영민이 딸에게 말했다.
“엄마가 대학다닐 때 친구였던 아저씨야.”
그러자 딸이 힐끗 조철봉을 보더니 다시 외면했다. 그 눈빛이나 행동이 예전의 영민을 떠오르게 했으므로 조철봉은 심호흡을 했다.
“얘 이름은 애주예요. 홍애주, 초등학교 5학년인데 벌써.”
이제 영민의 태도는 자연스러워졌다. 조철봉한테서 받은 충격으로부터 거의 회복된 것이다. 조철봉이 노렸던 것도 이 분위기였다. 먼저 경계심이나 자존심, 부끄러움 등이 가셔야 작업에 이롭다. 딸 이름이 홍애주이며 지금 학원비가 없어서 학원도 다니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미 조사해 알고 있는 조철봉이었지만 시치미를 뗀 얼굴로 머리를 끄덕였다.
“응, 엄마를 닮아서 예쁘구나. 앞으로 아저씨를 자주 보게 될 거다.”
조철봉이 외면하고 있는 애주에게 말했지만 실은 영민한테 하는 소리였다.
“아저씨가 피아노도 사주고 외국 구경도 시켜주마. 네가 하고 싶은 건 다 해주지. 왜냐하면.”
정색한 조철봉이 여전히 애주에게 시선을 준 채로 말을 이었다.
“네 엄마가 이 아저씨를 이렇게 만들어준 은인이기 때문이란다. 이 아저씨는 네 엄마를 떠올리면 기운이 났어. 뭔가 이루고 나서 네 엄마를 한번 봐야겠다는 꿈을 꿔왔지.”
“거짓말.”
영민이 조철봉의 말을 잘랐지만 얼굴에는 웃음기가 떠 있었다.
“철봉씨, 그동안 많이 변했어요. 어쩜 이렇게 능청스러워졌지? 전혀 딴 사람이 된 것 같아.”
“변한 게 아냐. 이게 내 참모습이야.”
여전히 정색한 얼굴로 조철봉이 머리까지 저었다.
“난 이제 놓치지 않겠어. 이렇게 다시 다가온 기회를 또 놓칠 수는 없어.”
영민이 어느덧 긴장한 얼굴로 눈을 크게 떴고 조철봉의 말이 이어졌다.
“신이 다시 만들어주신 기회야.”
(1169)열망-1
그 순간 조철봉은 고영민의 두눈이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 감동까지는 아니더라도 자극은 받았을 것이었다. 근래 들어서 이런 말을 누가 들려 주었겠는가?
한달 월세 35만원을 못내 두달이나 밀려 왔던 영민이다. 월세 보증금 430만원을 갖고 나가 애주는 친정 어머니한테 보내고 전쟁같은 생활고에 시달려야만 할 영민이 아니었던가?
잠깐 긴장을 늦추면 조철봉이 지껄인 몇마디 말은 꿀처럼 달고 오리털처럼 포근하게 들릴 것이었다. 그때 영민이 눈썹을 치켜올리면서 어금니를 물었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머리가 비틀어 올려지면서 당돌한 표정이 되었다.
16년 전에도 그랬다. 조철봉의 가슴이 다시 출렁이며 흔들렸다. 이번에는 그리움이 솟구친 것이다. 16년의 세월, 단 한번의 실수로 어긋난 사랑, 그래서 16년 동안을 잊어야만 했던 여인이여.
“생각해봐.”
정색한 조철봉이 몸까지 바로 세우고 앉으면서 말했다.
“집 바로 비울 필요도 없어. 그러니까 여유를 갖고 생각해도 돼.”
영민이 눈만 깜박였으므로 조철봉은 일어섰다. 오래 주저앉아 꾸물거릴 필요는 없는 것이다. 할말 다 했으니까 이제는 영민이 그 여운을 음미할 차례가 되었다.
“내가 내일 이 시간쯤 다시 올테니까.”
그러면서 조철봉이 주머니에서 꺼낸 명함을 영민에게 내밀었다.
“내 전화번호야, 그럼.”
엉겁결에 영민이 명함을 받아들었고 조철봉은 애주에게 손을 들어 보였다.
“애주야, 아저씨가 내일 다시 오마.”
그러나 애주는 힐끗 시선만 주고 나서 인사도 하지 않았다. 외모는 제 엄마를 닮았지만 싸가지가 없는 것은 제 아비 유전자의 영향인 것 같았다. 문 밖으로 나온 조철봉의 뒤로 영민이 따라나왔다. 등 뒤의 문을 닫은 영민이 조철봉을 올려다 보았다.
“애가 제 아빠하고 비슷한 연배의 남자들은 무척 경계를 해요.”
문에 등을 붙이고 선 영민이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제 아빠가 절 버렸다는 걸 알고 있어서 상처를 많이 받았거든요.”
“저런.”
입맛을 다신 조철봉이 어깨를 부풀렸다가 긴 숨을 뱉었다.
“애주를 위해서라도 엄마가 옆에 있어 줘야겠구먼.”
그러자 영민의 시선이 내려졌다. 애주를 친정 엄마한테 맡길 작정이었으니까. 박경택이 녹음해온 통화 내용을 조철봉은 직접 들은 것이다.
“이봐, 고영민.”
정색한 조철봉이 바짝 다가섰다. 그러자 영민의 몸에서 옅은 비누냄새와 화장품 냄새가 맡아졌다. 머리 냄새도 났다. 머리 감은 지 꽤 된 것 같았다.
“너하고 나하고 둘이야.”
조철봉이 손가락 끝으로 영민의 가슴께를 가볍게 찌르고는 엄지를 굽혀 제 얼굴을 가리켰다.
“우리, 긴장을 풀자, 응?”
“누가 긴장을 했다고.”
그러면서 영민이 머리를 들어 조철봉을 보았다. 눈이 바로 20센티쯤 앞쪽에 떠 있어서 조철봉은 눈동자에 박힌 제 얼굴을 보았다.
“나한테 기회를 줘, 영민아.”
조철봉이 입술만을 달삭이며 말했지만 복도에는 둘 뿐이어서 선명하게 들렸다. 그러자 영민이 눈을 더 크게 떴고 조철봉은 간절하게 말했다.
“난 16년을 기다렸단다. 영민아.”
다음날 아침 조철봉은 회사에 출근했지만 마음은 콩밭에 가 있었다. 조철봉의 심복이자 후배이며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약점을 잡히고 있는 최갑중이 마침 중국에서 돌아와 있었지만 부르지 않았다. 고영민에 관한 사항은 그 어떤 것도 나누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은 고민이 있으면 나누려는 본능이 있다. 그것이 혼자 삭이는 것보다 낫기도 하다. 병은 알릴수록 낫다는 말도 있으며 털어놓는 사이에 제 스스로가 방법을 찾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은 아니다. 고영민에 대한 모든 것은 그것이 무엇이 되더라도 혼자 품고 싶었기 때문이다. 기쁨은 말할 것도 없고 고통이나 수모, 희생, 다 혼자 겪을 것이었다. 그래서 그 모든 것을 혼자서 지근지근 씹으면서 견딜 것이었다. 조철봉에게는 영민으로부터 닥치는 모든 것이 새로운 역사가 될 것이었다. 누런 고름이 질금질금 나오던 밤, 달라붙어 안기는 영민에게 산에 올라가는 것은 쉽지만 내려올 때는 허무하지 않으냐는 개소리로 얼버무리면서 엉덩이를 뒤로 빼지 않았는가 말이다. 뭐? 너를 아끼고 싶다고? 개 같은 놈, 파이프만 새지 않았다면 네놈은 개침을 흘리면서 올라탔을 것이다. 만회를 해야만 한다.
결재 서류도 제쳐놓은 조철봉의 얼굴은 굳은 결의에 차 있었다. 이번에 만회하면 내 인생에는 새로운 그림이 그려질 것이다. 16년동안 기억에서 지우려고만 했던 내 첫사랑이여, 나는 16년 세월을 뛰어 건너 과거사를 새롭게 작성할 것이다. 그래서 친일파의 누명을 벗을 것이다.
인터폰이 울렸으므로 조철봉은 생각에서 깨어났다. 조철봉이 버튼을 눌렀을 때 스피커에서 비서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사장님, 박경택씨가 오셨습니다.”
“응, 들어오라고 해.”
그러자 곧 용역회사를 운영하는 박경택이 들어서더니 허리를 꺾어 절을 했다.
“앉아.”
눈으로 앞자리를 가리킨 조철봉이 시선을 주면서 기다렸다. 그러자 자리에 앉은 경택이 입을 열었다.
“고영민씨는 모레부터 천안에 있는 식당에서 일하기로 되어 있습니다.”
주머니에서 쪽지를 꺼낸 경택이 보면서 말했다.
“역앞에 있는 서울갈비집인데 숙식을 제공받고 월급 85만원을 받는다는 조건입니다.”
“…….”
“서울갈비집은 종업원이 30명 정도 되는 대형 갈비집으로 종업원용 숙소도 있습니다. 현재 숙소에는 조선족출신 여종업원 5명과 한국여자 3명이 들어가 있는데 사장 오덕팔씨는 서울갈비집을 14년째 운영하고 있습니다.”
“…….”
“고영민씨는 2층 경리를 맡기로 되었는데 지배인 유근수가 추천했기 때문입니다.”
힐끗 조철봉의 눈치를 살핀 경택이 말을 이었다.
“유근수는 고영민씨 사촌오빠의 친구인데 서울갈비집에서 9년째 근무하고 있습니다. 나이트클럽 웨이터를 하다가 옮겨왔지요. 지금은 사장 오덕팔의 신임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자 폐에 남아있던 숨을 길게 뱉은 조철봉이 입을 열었다.
“그놈의 갈비집에 못나가게 해.”
경택이 눈만 껌벅이자 조철봉의 표정이 굳어졌다.
“갈비집에 불을 지르든지, 사장한테 고영민이 도둑질한 경력이 있다고 찌르든지 해서라도 못가게 하라구. 무슨 수단을 써도 좋아. 어서 서두르라구.”
조철봉은 그야말로 난데없이 덮쳐왔다. 이것은 사건이다. 행운인지 불행인지 아직 감도 못잡겠고 지금 기분은 길을 가는데 어떤 미친 종자가 그냥 머리 위로 물을 쏟아버린 것하고 비슷했다. 날벼락처럼, 그것이 조금 시간이 지나니까 좋은 일 같기는 한데 아직 실감이 안난다.
그래, 조철봉의 말마따나 16년이나 되었다. 그런데 조철봉한테는 미안하지만 이쪽은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부동산사무소에서는 이쪽이 먼저 알아보았지만 말이다. 남자들은 다 그런가? 아니면 16년 세월이 지나면서 내 얼굴이 변했기 때문일까? 조철봉이 금방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 이유를 한동안 생각하던 고영민은 머리를 흔들고 잡생각을 떨어내었다. 오전 11시, 애주는 조금 전에 머리핀을 산다면서 2천원을 받아 가게로 갔다. 시골 할머니한테 함께 가는 줄로만 알고 있어서 애주는 오히려 더 좋아하고 있다.
“어떡하지?”
방 구석에 앉아 무릎 위에 턱을 고인 자세로 영민이 혼잣소리로 말했다.
“어떻게 하면 좋아?”
방안에 울리는 제 목소리를 제 귀로 듣고나서 영민은 어금니를 물었다. 자신의 목소리가 들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선택만 하면 공주같은 인생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45평 아파트에 풍족한 생활, 내가 내놓을 것은 아무것도 없다. 받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순간 영민은 자신의 볼이 붉어지는 것을 느끼고는 숨을 삼켰다. 그러자 곧 눈 주위도 화끈거렸다. 내놓을 것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몸이다. 조철봉은 아무말 안 했지만 결국은 그렇게 되지 않겠는가? 다시 무릎에 턱을 붙인 영민이 나란히 놓인 자신의 맨발을 바라보았다.
이제 기억이 난다. 16년 전의 그날밤. 여관방에 들어간 조철봉은 왠지 주춤거렸다. 전에는 기회만 엿보던 남자가 그날 밤에는 조심스러워졌다고 할까? 그렇지. 그말도 기억이 난다. 산에 올라가는 건 힘들지만 내려올 때는 허무하다고 했던가? 그말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는 것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헛소리는 분명한데 너무 심각한 면상을 하고 있어서 기억한다. 그리고 또 있다. 널 아껴주고 싶다고 했지. 항상 발정난 개처럼 침을 흘리던 작자가 갑자기 공자님 행세를 해서 기가 막혔었다. 그날은 주려고 마음을 먹었었는데, 그것이 계기가 되었는지 어쩐지 기억나지는 않는데 어쨌든 그날 밤이 지난 지 얼마되지 않아서 조철봉과 헤어진 것 같다. 그때 다른 남자가 생겼으니까. 오준영이든가? 아니면 김동철이든가? 다시 진정이 된 영민이 무릎에서 턱을 떼고는 두 다리를 길게 뻗었다. 명함에 커다란 회사가 여러 개였고 외국에도 사업체가 있는 걸 보니 조철봉은 사업가로 성공한 것 같았다. 그 얼뜨기가 이렇게 되다니. 다시 길게 숨을 뱉은 영민이 혼란스러워진 머리를 저었을 때였다. 휴대전화가 울렸으므로 영민은 서둘러 집어들었다. 발신자 번호를 보자 영민의 표정이 밝아졌다. 유근수의 번호였던 것이다.
“오빠.”
영민은 반갑게 전화를 받았다. 근수가 유일한 희망이었다. 그때 근수의 목소리가 귀를 울렸다.
“영민아. 너, 가게 나오는 거 안되겠다.”
더듬거리며 말한 근수가 길게 숨을 뱉는 소리가 들렸다. 한숨이었다.
“내가 가게를 그만두게 되었어. 사장이 뭔가 오해를 하고 있는 모양인데 이 일이 해결될 때까지는 너도.”
영민은 정신이 아득해지는 느낌을 받았다가 다음 순간 진정을 했다. 바로 조철봉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고영민의 집앞에 선 조철봉의 심사는 복잡했다. 그놈의 갈비집에서 영민을 어떻게 해보려던 지배인놈 목을 오늘자로 잘라버린 것은 일도 아니었다. 갈비집 사장의 친구되는 작자를 시켜 모함을 했기 때문인데 그 내막을 그놈이 안다면 기가 막혀서 죽을 것이었다. 이 세상은 선한 일만 하는 선한 사람도 있지만 더럽고 비열한 짓을 하면서도 잘만 사는 놈들도 많은 것이다. 조철봉은 유근수를 함정속에 처박은 것에 대해서 전혀 가책을 느끼지 않았다. 이제 영민은 궁지에 몰렸다. 그리고 머리만 끄덕인다면 밝고 찬란한 내일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심호흡을 한 조철봉은 벨을 눌렀다. 오후 2시반이었다.
“어서오세요.”
곧 문이 열리면서 영민이 조철봉을 맞았는데 뒤에는 애주도 서있다.
“안녕하세요.”
건성이었지만 애주는 인사까지 했다. 그러나 곧 몸을 돌리더니 방으로 뛰어 들어가 버렸다. 영민이 억지로 시켰기 때문일 것이다. 집안으로 들어선 조철봉이 주위를 둘러보는 시늉을 했다. 집안이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삿짐은 아무데도 보이지 않는다.
“방안에 쌓아 놓았어요.”
조철봉의 시선을 따라 눈길을 주던 영민이 외면하고 말했다.
“저기요.”
하고 영민이 불렀으므로 조철봉은 잠자코 시선을 주었다. 그러자 머리를 숙인 채 영민이 말을 이었다.
“저, 여기서 그냥 살게 해주시면 안될까요? 그러면.”
“아니, 왜.”
영민의 말을 막은 조철봉이 목소리를 높였는데 의도적이다. 분위기를 가볍게 만들려는 것이다.
“이왕이면 45평짜리 내 빈집으로 옮겨가라니까 그러네. 거기 교육환경도 좋고.”
“싫어요.”
영민이 머리를 저었다.
“여기만 해도 고마운데 그렇게까지.”
“아니, 정말 그렇게 계속 어색하게 할래? 제발 그러지 마.”
“그래도….”
“영민씨가 정 그렇게 하겠다면 일단은 여기서 살아. 하지만 그 아파트는 비워져 있으니까 언제든지 옮겨갈 수 있어.”
조철봉이 벽에 등을 붙이고 앉더니 다시 주위를 둘러보는 시늉을 하며 물었다.
“내가 여기 가끔 들려도 되지?”
“네.”
앞쪽에 앉은 영민이 조철봉의 시선이 닿기전에 서둘러 머리를 숙이면서 대답했다. 조철봉은 영민의 숙인 얼굴을 찬찬히 보았다. 그러고보니 영민은 얼굴에 옅게 화장을 했다. 입술에 연주황색 루즈도 발랐고 눈썹도 살짝 그렸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가슴이 서서히 벅차오른 조철봉은 어깨를 부풀리며 숨을 들이켰다.
“앞으로 날 의지하면 돼.”
조철봉이 정색하고 말했다.
“그렇게 해주면 나도 보람있는 인생을 살게 될거야.”
이번에는 커다랗게 소리내어 숨을 뱉은 조철봉이 말을 이었다.
“사업에 바쁘다 보니까 여자를 잊고 살았어. 가정도 거의 돌보지 않았어.”
“…….”
“웃겠지만 일년이 가깝도록 섹스도 하지 않았어. 그런데.”
조철봉의 목소리에 열기가 띠어졌다.
“영민이를 보고나서 다시 남자가 된 것 같은 느낌이야. 감동이 살아났고 가슴이 뛰어. 그리고.”
그리고 철봉이 오랜만에 섰다고 거짓말을 하려다가 참았다.
그때 고영민이 일어서더니 방에 들어갔다 나왔는데 손에 봉투를 쥐고 있었다.
“저기요.”
조철봉의 앞에 봉투를 내려놓은 영민이 어색한 듯 시선을 돌렸다.
“여기 5백이요. 여기 살도록 해주신다면 보증금은 도로 받아주셔야죠.”
“그래?”
봉투에 시선을 주고난 조철봉이 영민을 똑바로 보았다.
“이쯤 되었으니까 내가 마음 열어놓고 말해도 되겠지?”
영민이 시선을 들었다가 내렸지만 입을 열지는 않았다. 조철봉이 말을 이었다.
“너, 요즘 어려운 것 같은데 내 앞에서 그만 고집부리고 의지해줬으면 좋겠다. 그래서 말인데, 그 돈은 네가 써.”
“…….”
“그리고 다음달부터 내가 매달 생활비를 보내 줄테니까 그런 줄 알고 있어.”
“…….”
“한달 3백이면 두 식구 사는데 괜찮을까 모르겠네. 그리고.”
조철봉의 목소리가 시간이 지날수록 차분해졌다.
“내가 중형차 하나 신형으로 뽑아줄게. 마음에 드는 차종하고 색상을 말해. 요즘 사는데 차는 있어야겠더라.”
“…….”
“답답할 때 애 데리고 맑은 공기나 마시러 교외로 나가고 관광지 같은데 다녀오면 기분이 풀려.”
“…….”
“시간이 지나서 애주하고 조금 친해진다면 셋이 외국에 다녀도 좋고. 난 한 달에 절반은 나가 있으니까.”
“…….”
“내가 돈 벌어서 이런데 쓰지 무슨 일에 쓰겠어? 이게 바로 돈 번 보람이지 뭐겠어?”
영민은 시선을 내린 채 숨도 쉬지 않는 것 같았지만 조철봉의 기백은 하늘로 솟구쳤다. 제 말마따나 사나이가 돈 벌어서 이런 때 생색내지 않으면 언제 내겠는가? 지금처럼 돈 번 것에 대한 자부심을 느껴본 때가 언제 또 있었던가? 영민의 입장을 이쪽에서 측량해봐도 그렇다. 어떤 덜 떨어진 이혼녀가 이런 제의를 거절하겠는가? 자존심? 자존심 좋아하네. 만일 이런 제의를 말도 안되는 핑계를 대고 거절한다면 그 ×은 인간이 아닐 것이다. 돈 대신 바나나를 좋아하는 침팬지라면 이해가 간다. 그러나 일단 연립주택에 눌러 살게 해달라고 조철봉에게 손을 내민 이상 영민은 그것이 진흙 뻘이든지 젖과 꿀이 흐르는 강이든지 간에 한쪽 발을 넣은 상태였다. 한쪽 발은 넣고나서 다른쪽 발은 딴데를 짚는다? 그건 위선자다. 그런 성품이라면 상대하기 골치 아픈 부류니 냉큼 손을 떼는 것이 낫다. 영민이 아직 시선도 들지 않았지만 조철봉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빚쟁이도 아닌데 바로 대답을 독촉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어떻게 금방 네, 하고 대답을 하겠는가? 침묵은 곧 긍정이나 같다.
“참, 나, 내일 아침에 중국에 가서 며칠 있다가 와.”
조철봉이 생각난 듯 말했으므로 따라 일어서던 영민과 시선이 부딪쳤다.
“내 명함에 중국 공장 전화번호도 적혀 있으니까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해.”
그러고는 조철봉이 방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애주야, 아저씨 간다.”
그러자 영민이 몸을 돌리더니 애주를 불렀다. 애주가 방문을 열고 나왔을 때 조철봉도 소리죽여 숨을 뱉었다. 영민이 거부하리라고 예상하지도 않았지만 거부할 여유도 안주었다. 그리고 이번 기회를 자연스럽게 놓쳤으니 영민도 안도할 것이었다.
그날 저녁 조철봉은 이영철을 불러 저녁과 함께 술을 마셨다. 이영철은 조철봉하고 고등학교와 대학 동창으로 옛말로 말하면 죽마고우이다. 그러나 소싯적 친구가 나이들어서도 그때처럼 자주 어울리게 되지는 못한다. 각각 교육의 정도부터 성장 과정, 사회생활에서의 수준, 재력의 차이 따위가 부각되면서 친했던 친구가 떨어지고 동창인줄도 몰랐던 친구하고 친해지는 경우가 생기기 때문이다. 이영철은 건설회사 부장인데다 재산 축적을 잘해서 친구들 사이의 소문을 들으면 아파트가 5채에 땅이 수만평이나 되어서 100억이 넘는 재산가라고 했다.
그러나 본인은 질색을 하고 부인을 했는데 차도 15년된 똥차를 모는데다 지갑에 카드는 물론 없고 현금 2만원 이상을 넣고 다니지 않았다. 그래서 조철봉도 본인의 말을 믿었었는데 2년쯤 전에서야 그것이 새빨간 거짓말인것을 알게 되었다. 영철이 장인상을 당했다고 해서 찾아갔다가 안면이 있던 영철의 처남한테서 내막을 들은 것이다. 영철은 친구들이 말했던 이상의 재산가였다. 거기에다 와이프가 장인한테서 물려받은 수만평의 땅까지 보태면 수백억이 되었다. 영철은 장인의 땅 문제로 처남들과 소송중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날 이후로 조철봉도 영철과 거리를 두었다. 한마디로 재수없는 놈이었던 것이다. 수백억 재산가였으면서 15년된 똥차 타고 다니는건 괜찮다. 그러나 영철은 지금까지 한번도 술값은 커녕 밥값을 내본적도 없는 것이다. 한마디 더 보태면 거지같은 놈이었다. 그런데 오늘 조철봉은 다시 영철을 불러 내었다. 아직도 영문을 모르는 영철은 반색을 하면서 내달려 왔는데 오늘도 얼굴이 반지르르 했다. 만나면 꼭 룸살롱이나 나이트로 데려갔으니 여자들한테 잘 보이려고 조철봉과 약속을 하면 꼭 이발소나 사우나에 들렸다가 나오는 것이 놈의 버릇이었다. 물론 그것만 제 돈을 낸다.
“그런데 갑자기 웬일이냐?”
소주잔을 든 영철이 팔목시계를 들여다보는 시늉을 하면서 또 물었다. 저녁 8시반이었다. 놈이 시계를 보는 시늉을 하는 이유는 이렇게 일식집에서 귀중한 밤 시간을 때우는 것은 아깝지 않으냐는 표현이었다. 일찍 예약을 하지 않으면 룸살롱의 예쁜 아가씨는 다 놓치니까, 조철봉은 소주잔을 들고 한모금에 술을 삼켰다. 그러고는 영철의 반쯤 대머리가 된 이마를 노려보았다.
“너, 고영민 알지?”
그러나 영철이 눈을 가늘게 떴다. 놈을 2년만에 불러낸 이유는 이것이다. 대학시절에는 이놈과 아침 저녁으로 붙어다녔는데 둘 다 돈이 없었다. 그래서 이놈이 그런 놈이 될줄은 예상하지도 못했다.
“고영민?”
하면서 영철이 머리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그때, 고영민과의 사연을 가장 잘 알고 있는 놈이 이놈인 것이다. 이놈한테 임질 때문에 먹지 못했다는 이야기만 빼고 다 해주었다. 그리고 영민이 떨어져 나갔을때 이놈이 시키지도 않았는데 찾아가 이유를 물었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간단했다. 싫어서 떠났다고 했다.
“아아.”
하고 영철이 탄성을 뱉었으므로 조철봉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놈의 머리는 좋다. 공부도 꽤 잘했다.
“그 고영민 말이냐? 그 기집애?”
하고 묻는걸 보면 놈은 제대로 짚었다. 16년이나 지났는데, 그냥 이름 석자만 듣고서도, 조철봉의 눈빛이 부드러워졌다.
“그래, 그 고영민이다.”
“걔가 왜? 만났어?”
불쑥 영철이 그렇게 묻자 조철봉은 심호흡을 했다. 이놈한테 그대로 말해주면 안된다.
조철봉은 머리를 저었다.
“만나기는. 갑자기 생각이 나서 말야.”
“갑자기?”
의심쩍다는 듯이 이영철의 눈썹 사이가 좁혀졌다.
“인마, 갑자기 16년전에 차인 여자가 생각나? 그래서 2년만에 날 불러서 물어봐?”
“이 새끼한테는 말도 못하겠네.”
입맛을 다신 조철봉이 쓴웃음을 지었다.
“내가 며칠 전에 소문을 들었는데 걔가 죽었다고 해서.”
“뭐? 죽어?”
놀란 듯 영철이 눈을 크게 떴다. 그러더니 소리나게 혀를 차고는 앞에 놓인 소주잔을 들었다.
“아깝구만, 괜찮은 애였는데.”
“괜찮기는 뭐가 인마.”
“너야 차인 놈이니까 그렇게 말할 수밖에.”
“야, 인마. 지금 내놓으면 그까짓 기집애 손도 안 댄다.”
“야, 걔, 괜찮았어.”
정색한 영철이 소주를 한모금 삼키더니 조철봉을 보았다.
“내가 걔 찾아갔었지 않냐? 네가 차였다고 징징 울고 다닐때 말야.”
“울긴 내가 왜 울어? 이 미친놈이.”
“그래, 그때 네가 실성한 놈 같았지.”
여전히 정색한 영철이 옛일을 떠올리려는 듯 눈을 다시 가늘게 떴고 조철봉도 숨을 죽였다. 바로 이것이다. 놈한테 이런 이야기를 듣고 싶었던 것이다. 영민에 대해서 좋은 이야기를 해줄수록 놈의 대우는 좋아질 것이다. 그때 영철이 말을 이었다.
“지금에야 이야기하지만 그때 걔가 그러더라. 네가 남자답지 못하다고 말야. 그래서 내가 무슨 소리냐고 그랬지. 철봉이는 쌈도 잘한다고.”
“….”
“그랬더니 아니래. 용기가 없대. 뭣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더니 말을 안하더구만. 그래서 너한테는 걔가 그냥 싫다고만 하더라고 말해주었지.”
안 먹어서 그런 것이다. 그놈의 임질.
“아주 쌀쌀맞더라구. 너한테는 조금도 미련이 없더라구.”
“….”
“그런데 뭘로 죽었대냐?”
“교통사고로.”
“어허.”
“즉사를 했다는구만.”
“저런 쯧쯧.”
“그런데.”
다시 술잔을 든 조철봉이 지그시 영철을 보았다.
“걔 괜찮았냐? 객관적으로 봐서 말야.”
영철이 눈만 껌벅였으므로 조철봉이 다시 물었다.
“난 기억도 잘 안나서 그러는데. 걔, 지금 네 기준으로 말해봐라.”
“흥, 죽은 자식 나이 센다더니.”
쓴웃음을 지었지만 영철도 조철봉의 분위기에 이끌린 듯 진지해졌다. 술잔을 입에 대었다 뗀 영철이 입을 열었다.
“지금 생각해도 괜찮은 애야. 난 그때 속으로 너같은 놈한테 웬 복이냐고 질투가 났었으니까.”
“흥, 개자식.”
“성격도 괜찮았고 남자 관계도 깨끗했어. 너하고 헤어진 다음에는 어땠는지 모르지만 말야.”
“흥.”
“네가 차인 건 당연했지. 걔 수준이 너보다는 높았다. 미안하지만.”
“지랄.”
“어쨌든 죽었다니 아깝네.”
그러자 조철봉이 팔목시계를 보았다.
“나가자. 내가 룸살롱에서 한잔 사지.”
룸살롱으로 옮기자 이영철은 물 밖으로 나왔다가 다시 들어간 고기처럼 생기를 찾았다. 목소리는 더 활기를 띠었고 눈빛도 강해졌다. 늘 얻어먹는 놈들은 만성이 되어서 미안하고 고마운 줄도 모른다. 계산할 때만 잠깐 견디면 돈벌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영철은 지금까지 조철봉과 어울릴 적에 술값은 물론이고 팁값과 이차값까지 얹혀갔다.
조철봉이 대부분 계산을 한꺼번에 하는 바람에 그렇게 된 것이다. 이 친구의 팁값하고 이차값은 빼고 계산서 가져오라는 말은 차마 못한다. 조철봉의 약점을 노리는 것이나 같다. 거기에다 시간이 지나자 모략까지 했다. 조철봉과 룸살롱에 가기로 약속을 잡으면 미리 룸살롱에다 연락을 해서 괜찮은 아가씨를 찍어 놓는 것까지는 괜찮다. 그런데 룸살롱 마담이나 지배인에게 조철봉은 ‘내가 데리고 다닌다’는 분위기를 심어놓으려고 발광을 해왔던 것이다. 실로 피눈물 나는 노력이라고 아니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산전수전 다 겪은 룸살롱 마담이나 아가씨, 또는 지배인 등은 그냥 한눈이면 영철이 빈대라는 것을 간파한다. 그렇게 되면 당연히 술값 내는 조철봉 위주로 아가씨가 배분되고 영철에게는 남는(?) 아가씨가 들어오게 되는 것이다.
영철은 그것을 시정하려고 모략을 일삼아왔다. 단골 룸살롱 중 하나인 ‘수양’의 마담한테는 조철봉이 또 다른 단골인 ‘영원’에 가려는 것을 억지로 끌고왔다는 거짓말로 생색을 냈다. 또 ‘영원’의 마담한테는 오늘밤 술값은 제놈이 조철봉한테 빌려준 돈으로 지불하게 했으니까 알아서 저를 잘 모시라고도 했다. 나중에는 밑천이 떨어지자 약속 시간보다 한시간쯤 일찍 나와서는 대기시킨 아가씨들을 제가 먼저 선을 보고 우격다짐으로 조철봉의 파트너를 제 옆에 앉도록 만들기도 했다. 나중에는 학질을 뗀 룸살롱 마담들이 조철봉한테 다 일러바쳐서 내막이 밝혀졌던 것이다.
그래서 한번은 얄미워서 조철봉이 영철의 이차값을 계산에서 빼고 나갔더니 한참 공사를 진행할 적에 호텔방으로 전화가 왔다. 영철과 이차 나간 아가씨였다. 제놈의 이차값도 조철봉이 계산한 줄 알고 마음놓고 옷을 벗었던 영철이 아가씨가 돈부터 내라고 하자 전화를 걸게 한 것이다.
“여기 사장님이 이차값 정말 안내셨느냐고 물으시는데요?”
하고 아가씨가 말했을때 조철봉은 온몸에서 소름이 돋아났다. 만일 정말 안냈다고 확인해준다면 저놈은 어떻게 처신할지 몰라도 이쪽은 두번 다시 보지 말아야 될 것 같았다. 그러자 지금까지 저놈한테 퍼준 술값, 오입값이 수천만원은 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몇십만원 가지고 그것을 다 허물어뜨리다니, 하는 생각이 떠오르자 조철봉은 말했다.
“야, 계산은 이따 하고 넌 차비나 받아.”
다음날 알아보았더니 영철은 일 다 보고는 차비도 안주고 아가씨를 보냈다. 그러나 그런 놈이 다 잘 되겠는가? 지금까지 영철은 따라다니면서 얹혀 오입한 것 외에는 변변한 연애 한번 못해 보았다. 이차 나갔던 아가씨하고도 두번 다시 만나지 못했으며 나이트도 몇번 데려갔지만 단 한번도 성사가 되지 않았다. 다 그런 것이다. 수백억이 있으면 뭐 하는가? 거지 근성이 밴 놈은 금방 티가 난다. 놀아본 놈이 논다는 말이 틀리지 않는 것이다. 조철봉은 앞에 앉은 영철을 지그시 바라보면서 웃었다. 영철은 지금 옆에 앉은 영계에게 홀딱 빠져있었다. 하긴 조철봉이 아니면 누가 이런 곳에 데리고 오겠는가?
이놈은 2년 만에 처음 룸살롱에 온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흥분하고 있다.
“야, 기분 풀고 술이나 마시자.”
그때 히히덕거리던 영철이 불쑥 머리를 들면서 말했으므로 조철봉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영철은 2년만에 다시 룸살롱 출입을 하게 된 것이 고영민 덕분이라는 걸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영철의 시선을 받은 그 순간 조철봉은 결심했다. 오늘부터 이놈과는 또 결별이다.
“아직 젊은 나이에 죽다니 말이야.”
영철이 파트너의 허리를 당겨 안으면서 말했다. 긴 생머리에 갸름한 얼굴형의 파트너는 영철이 좋아하는 스타일이었다.
“교통사고로 즉사했다니, 나 참.”
그때 조철봉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 화장실에….”
화장실은 방 안에 있었으므로 조철봉이 한마디 더 했다.
“배가 아파서.”
밖으로 나온 조철봉이 따라나온 파트너에게 말했다.
“마담 불러줄래?”
잠시 후에 조철봉은 마담과 빈 방에서 마주앉았다. 파트너도 함께였다.
“왜요?”
긴장한 마담이 눈을 크게 뜨고 묻자 조철봉이 차분하게 말했다.
“오늘, 저 새끼 씌워.”
“씌우다뇨?”
“앞으로 저놈 안 만날테니까 껍질 벗기란 말이야.”
“어떻게요?”
놀란 마담의 얼굴이 굳어졌다. 조철봉이 이러기는 처음이다.
“저놈은 나쁜 놈이야. 제 첫사랑 애인이 죽었다면서 나한테 오입을 시켜달라는군. 저런 놈이 인간이야?”
“세상에.”
금방 눈썹을 치켜뜬 마담이 흥분했다.
“저도 지금까지 말을 안 하려고 했는데 조 사장님하고 저분은 격이 안 맞아요. 잘 생각하셨어요.”
“저놈이 이차 갈 모양인데 물론 오늘도 내가 낼 줄 알겠지만 난 안 내. 알았어?”
“네. 알았어요.”
“저놈 파트너 성깔 좀 있어?”
“성깔 없는 애가 어딨어요?”
금방 눈치를 챈 마담이 눈을 가늘게 뜨면서 지그시 웃었다.
“웨이터 애들을 방 앞에 대기시켜 놓을게요. 사장님은 전혀 모르시는 것으로 해놓을테니까 염려 마세요.”
“내가 이차값은 모르고 빠뜨린 것으로 해놔.”
“염려마시라니까요.”
그러고는 마담이 옆에 앉은 파트너를 눈으로 가리켰다.
“얜 괜찮죠? 오랜만에 오셔서 제가 신경 써서 불렀는데.”
“그래. 괜찮군.”
조철봉이 머리를 돌려 파트너를 보았다. 미인 아닌 룸살롱 아가씨가 있겠는가? 더구나 특급 룸살롱에서 마담이 특별히 고른 아가씨인 것이다. 조철봉의 시선을 받은 파트너가 단정한 입술 끝으로만 웃었다. 이름은 오은경. 23세. 올해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 준비중이라고 했다.
“너, 잘 모셔.”
마담이 파트너한테 다짐을 받더니 방을 나갔다. 조철봉이 은경과 함께 방에 들어섰을 때 영철은 혼자 앉아 있었다.
“어디 간거냐?”
마담한테 불려서 갔겠지만 조철봉이 모른 척 묻자 영철은 환한 얼굴로 대답했다.
“아, 화장실에.”
그러고는 영철이 시계를 보는 시늉을 했다. 이번에는 그만 나가자는 표시였다. 영철의 주량은 위스키 석잔이었다. 석잔 이상은 마시지 않는다. 섹스에 지장이 있기 때문이라지만 영철의 평균 기록은 5분이다. 조철봉은 다 듣고 있었다.
조철봉과 이영철은 양주 한병만 마시고 룸살롱을 나왔다. 이차가 목적인 이영철은 빨리 나올수록 좋아한다. 술도 못마시는데다 노래도 음치여서 노는 것에는 젬병인 놈이 그것 하나만은 밝히는 것이다. 그것도 공짜로. 지금까지 조철봉은 영철의 오입값을 백번도 더 댔을 것이다. 물론 술이야 조철봉이 마셨지만 그 돈까지 계산하면 수억이다.
“가자.”
영철이 턱으로 길 건너편을 가리키며 서둘렀다. 옆에는 생머리의 파트너 미스강이 얌전하게 서 있었는데 외출복으로 바꿔입은 자태가 더 돋보였다.
“어, 그래.”
심호흡을 한 조철봉이 앞장을 섰다. 길 건너편의 블루모텔은 룸살롱 손님들을 단골로 받아서 공생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룸살롱 장사가 안되면 모텔 장사도 마찬가지가 되는 것이다. 길을 건널 때 조철봉의 팔을 오은경이 자연스럽게 끼었다. 진 바지에 운동화 차림으로 바꿔입은 은경의 분위기도 신선했다. 모텔 안으로 들어서자 프런트에서 키를 받아쥐고 기다리던 웨이터에게 조철봉은 팁부터 주었다. 그러고는 키 두 개를 받아쥐고 프런트 직원에게 방값 계산을 했다. 영철이 조철봉에게 가자고 서두르고는 지금 뒤에 붙어 서있는 이유가 이것 때문이다. 이것도 마찬가지로 지금까지 영철은 이차 방값도 제가 내본 적이 없는 것이다.
“자, 들어가.”
조철봉이 키를 건네주었을 때 영철이 물었다.
“네 방은 몇번이야?”
“아, 이거.”
손에 쥐고 있던 키를 보이자 영철은 주의깊게 방 번호를 외웠다. 용의주도한 놈이다. 지난번에도 이차값 계산을 안했을 때 파트너 시켜서 방으로 전화를 했다. 만일의 경우에 대비하려는 것이지 다른 목적은 없다.
“그럼 난 먼저 간다.”
파트너의 팔을 끈 영철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라졌을 때 프런트 앞쪽 복도에는 웨이터와 조철봉, 은경 셋이 남았다. 다른때 같으면 웨이터는 진작 사라졌을 것이지만 우물쭈물거리며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럼 난 갈테니까.”
조철봉이 웨이터 미스터 고에게 말했다. 제복을 입고 있어서 그렇지 미스터 고는 30대 초반으로 경력이 10년 가깝게 된다. 찬찬히 보면 관록이 드러나고 눈매도 보통내기가 아니다.
“잘 해.”
다시 조철봉이 말하자 미스터 고가 잠자코 머리만 숙였다. 영철을 손봐주라고 한 것이다. 조철봉이 지갑을 꺼내 미스터 고와 은경이 보는 앞에서 10만원권 수표 5장을 차근차근 세어서 미스터 고에게 내밀었다.
“받아.”
“아니, 사장님, 저는.”
미스터 고가 당황한 척 했지만 2초쯤 지나자 허리를 굽히면서 두손으로 수표를 받았다.
“저놈 철저하게 망신을 시켜.”
조철봉이 다짐하듯 말하자 미스터 고의 얼굴에 결의가 배어났다.
“예, 사장님. 확실하게 하겠습니다.”
“두번다시 공짜 오입을 못하도록 아예 불능으로 만들어도 돼.”
말을 하다보니까 그렇게 나왔지만 이 친구들이 누구인가? 법에 걸릴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예, 알겠습니다.”
그러고는 미스터 고가 조철봉을 보았다.
“비디오로 찍어서 보고 하겠습니다. 사장님.”
그러고는 조철봉과 은경은 블루모텔을 나왔다. 이제 영철은 고립무원이 되었다. 웨이터들에게 팁 한번 줘본 적이 없는 영철이다. 미스터 고는 팁을 50만원이나 받자 비디오로 찍어서 보고하겠다고 했는데 순발력이 놀라웠다. 비디오 필름을 받을 때 다시 팁을 줘야만 할 것이다. 모텔에서 나와 대로를 한 블록쯤 걸었을 때 은경이 바짝 붙더니 팔짱을 낀 팔을 당겼다.
“저기요.”
은경이 조철봉의 시선을 받더니 수줍게 웃었다.
“제 오피스텔에 가시지 않을래요?”
“오피스텔?”
“네, 택시 타면 10분이면 돼요.”
“오피스텔에 사니?”
“네.”
그러고는 은경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사장님이 오피스텔에 처음 오시는 남자예요. 입주한 지 열흘밖에 안 되었거든요.”
“믿어주지.”
조철봉이 다가오는 택시를 향해 손을 들며 말했다.
“네가 처녀라고 해도 믿어주마, 오늘은.”
오피스텔은 길이 막히지 않은데다 신호도 잘 받아서 5분밖에 안 걸렸다. 대로에서 조금 안쪽에 위치한 신축 건물이었다. 텅 빈 엘리베이터를 타고 6층 복도에서 내린 은경이 조철봉의 손을 잡고 끌었다.
“이쪽으로.”
팔을 끼는 것하고 손을 잡는 것은 분위기가 엄청 다르다. 보드랍고 따스한 은경의 손에 잡혔을 때 조철봉은 어수선했던 가슴이 진정되는 느낌이 들었다. 은경은 끝쪽 방 앞에서 멈춰서더니 문을 열고 조철봉을 안으로 끌어들였다. 현관의 전등 스위치를 켜자 방 안이 환하게 드러났다.
“으음.”
조철봉이 방 안을 둘러보며 얼굴을 펴고 웃었다. 10평쯤 되는 방 안은 깨끗하고 단정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가구는 화려하지도 않았지만 값싼 제품도 아니었다. 조철봉의 시선이 안쪽 벽에 멈췄다. 벽 한쪽은 책장이었고 책이 가득 쌓여 있었던 것이다.
“그냥요.”
조철봉의 시선을 따라가던 은경이 어색하게 웃더니 다시 손을 끌었다.
“집에 있는 책을 가져온 것뿐이에요. 옷 벗으세요.”
은경이 조철봉의 뒤에서 저고리를 벗기면서 말했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죠? 씻으세요, 하나요? 비디오나 영화를 보면 남자가 먼저 씻던데.”
방 안에는 소파 대신 매트리스를 접어 놓았는데 더 그럴 듯했다. 조철봉이 잠자코 매트리스 위에 앉았을 때 은경이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더니 양말을 벗겼다.
“저는 어떻게 해야죠? 옷을 갈아입어야 해요? 아니면….”
“그냥 가만 있으면 돼.”
조철봉이 부드럽게 나무랐다. 시선이 마주쳤을 때 조철봉은 눈을 크게 떠 보였다.
“그러면 남자가 다 알아서 한단다. 뭐, 룰이 있는 게 아니니까 말이다.”
“하지만 어색해서 그래요.”
“그럼 계속해서 종알대든지.”
“저. 옷 갈아입어요?”
“또 벗을건데 뭐하러.”
“그럼 씻을까요?”
“그러든지.”
그러자 은경이 시선을 들더니 조철봉을 빤히 보았다.
“사장님. 저….”
“뭐?”
그때 은경이 정색하고 물었다.
“저하고는 그냥 오신거죠?”
불쑥 그렇게 물은 은경의 두눈이 번들거렸다.
“그냥 오다니? 무슨 말야?”
“그, 친구분 때문에.”
“그놈 때문이라니?”
그랬다가 조철봉이 쓴웃음을 지었다.
“아냐.”
머리를 저은 조철봉이 일어나면서 혁대를 풀었다.
“그럴리가 있니? 너같은 애를 그냥 보낸다는 건 있을 수가 없는 일이지.”
바지를 벗은 조철봉이 팬티 바람이 되어서 은경을 보았다. 그러나 은경은 잘 보았다. 은경을 데리고는 나왔지만 성욕이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오피스텔도 마치 이웃집에 놀러가는 것처럼 아주 자연스럽게 찾아왔다. 그것을 은경이 눈치챈 것이다.
“나, 씻을텐데 네가 등 밀어줄래?”
“네?”
“그런 장면은 비디오에 없었어? 같이 샤워하는 장면 말이다.”
그러자 은경이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먼저 들어가세요.”
“벗고 들어와.”
조철봉이 은경의 어깨위에 두손을 올려놓고 똑바로 보았다. 조금전부터 일어나기 시작한 욕정으로 심장의 박동이 빨라지고 있었으며 온몸에 열기가 뻗쳐지는 중이었다. 감정의 교류 없이도 인간은 얼마든지 성관계를 맺는다. 그걸 비판하는 인간은 진짜 인간도 아니다. 지금 조철봉의 시선을 맞받고 있는 은경도 알고 있겠지. 제가 좋아서, 또는 상대가 원해서 하는 섹스만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이차비를 받은 지금, 일단 의무를 갖게 된 상황이 되었으니 좋은게 좋다고 즐겁게 보내기를 바라는 것이겠지. 그래서 그렇게 물어본 것이겠지. 욕실에 들어오려면 옷이 젖을테니 당연히 벗고 들어올 것인데도 조철봉이 뜬금없이 왜 그렇게 말했겠는가? 한마디로 철봉을 달구기 위해서인 것이다. 이것은 조철봉식 분위기 상승 방법이다. 조철봉의 목소리가 은근해졌다.
“너, 샤워하면서 해봤어?”
얼굴이 빨개진 은경이 시선을 한곳에 두지 못한 채로 머리까지 저었다.
“욕조 안에서는?”
“여긴 욕조 없어요.”
“너, 몇번이나 해봤어?”
“몇번 안돼요.”
“애인 있어?”
“헤어졌어요.”
“그럼 그놈하고 한거야?”
“네.”
“몇번?”
“다섯번쯤.”
“전부 합쳐서?”
“네.”
그때 머리를 든 은경이 눈웃음을 쳤으므로 조철봉의 심장 박동이 더 빨라졌다. 이미 철봉은 달아올라 있었으며 머릿속의 번민은 지워졌다. 고영민의 잔상이 사라진 것이다. 다 영민 때문이었다. 그때 역 뒤의 희망집에 갔던 것이 결정적인 실수였다. 거기에서 만난 옥자가 임선생을 소개해주지만 않았다면 그날 밤 모텔에서 영민과 새 역사가 창조되었을 것이었다.
“그게 그렇게 중요해요?”
은경이 물었을 때 조철봉은 머리를 끄덕였다. 16년전과 지금은 환경이 다른 것이다. 그때 옥자는 5천번쯤 했던 여걸이었으며 그때의 영민은 오만하고 당당했다. 그런데 지금은 내가 양쪽을 다 이끌어가고 있다. 옥자보다 5백배는 더 나은 은경이 앞에 있으며 영민 또한 내 철봉을 기다리고 있지 아니한가?
조철봉이 샤워기의 물을 맞고 선 지 5분쯤 되었을 때 욕실 문이 열리더니 은경이 들어섰다. 은경은 알몸이었다. 조철봉은 분위기 돋우려고 그냥 한 말이었는데 은경은 그대로 따른 것이다. 한손은 젖가슴에, 다른 한손은 숲을 가린 자세로 다가온 은경이 조철봉을 보았다.
“어떻게 해요?”
어떻게 하다니, 그 순간 조철봉은 철봉이 곤두서는 바람에 아랫배에까지 충격이 전해졌다. 그때 은경이 놀란듯 눈을 크게 뜨더니 머리를 돌렸다. 조철봉이 은경을 향하고 서 있었으므로 곤두서는 철봉을 본 것이다.
“이리 와.”
등에 물줄기를 맞으면서 조철봉이 두손을 벌렸다.
“어서.”
그러자 은경이 주춤거리며 모로 선채 다가왔다. 은경은 몸이 마른 것 같이 보였는데 벗고 보니 아니었다. 젖가슴도 적당하게 도톰했고 배꼽 주위는 둥글고 유연했다. 허벅지는 팽팽했으며 가린 손가락 사이로 드러난 숲은 무성했다. 조철봉이 어깨를 잡고 당겨 안았을 때 은경은 얼굴을 가슴에 붙였다.
“예쁘구나.”
은경의 엉덩이를 움켜 쥐면서 조철봉이 말했다. 하체가 딱 붙여졌으므로 철봉이 은경의 허벅지를 찌르면서 미끄러졌다.
놀란 은경이 엉덩이를 뒤로 뺐지만 조철봉이 끌어당기는 바람에 더 붙여졌다. 조철봉이 은경의 귀를 입술로 깨물면서 말했다.
“내 철봉을 잡아.”
“네?”
알아듣지 못했는지 아니면 알고도 모르는 척하는지 머리를 든 은경이 눈만 크게 떴으므로 조철봉은 은경의 손을 잡아 철봉에 붙였다.
“잡으란 말이야.”
은경이 조심스럽게 철봉의 중간 부분을 쥐었는데 마치 뜨거운 쇠붙이를 쥔 것처럼 어정쩡했다. 그때 조철봉이 손을 뻗쳐 은경의 골짜기를 더듬었다. 더운 물줄기가 계속해서 쏟아지고 있었으므로 욕실 안은 수증기로 덮이는 중이었다. 은경이 다시 놀라 몸을 비틀었지만 조철봉의 손끝이 샘 안으로 들어오자 마치 꼬치에 꿰인 물고기처럼 꼼짝 못했다.
“아파요.”
은경이 더운 숨을 조철봉의 가슴에 뱉으면서 말했다.
“살살 해주세요.”
오랜만에 듣는 말이었으므로 철봉이 다시 불끈거렸다. 은경은 그 와중에도 철봉을 쥔 손을 놓지 않았다. 아니, 이제는 떼면 큰일이라도 나는 것처럼 단단히 쥐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쥐고만 있을 뿐이다. 조철봉은 은경의 요구대로 샘에 들어간 손가락을 천천히 왕복시켰다. 그것도 아주 조심스럽게 샘의 중간 부분까지만 넣었다가 뺐다.
“으음.”
가쁘게 숨을 뱉던 은경의 입에서 약한 신음이 새나왔다. 조철봉은 은경의 샘에 물이 차오르기 시작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자, 그럼 네가 쥐고 있는 걸 넣어봐.”
조철봉이 은경의 샘에 넣었던 손을 떼면서 말했다.
“이제 넣을 때가 되었다.”
“무서워요.”
은경이 허덕이며 말했지만 곧 철봉을 제 샘에 겨냥하고 넣었다. 그러나 마음뿐으로 자세가 불안정해서 허벅지 사이로 미끄러졌다. 철봉이 세번째 미끄러졌을 때 조철봉이 은경의 한쪽 다리를 팔로 감아 안고 번쩍 들어 올렸다. 그러자 은경은 한쪽 발만 짚고 선 자세가 되었다.
“자, 넣어.”
그 자세로 선채 조철봉이 재촉하자 은경은 철봉을 조심스럽게 샘에 붙였다. 조철봉은 수증기가 섞인 숨을 깊게 들이 마셨다. 이 순간은 언제나 새롭다. 이 순간의 벅찬 감정을 그 어떤것과 바꿀수가 있단 말인가? 돈? 명예? 사랑? 그 모든것을 합해도 이 순간만큼 벅차며, 자랑스럽지 못할 것이다. 또한 이 순간은 빈부, 강약, 대소, 동서, 남북, 좌우, 노사, 노소를 막론하고 공통으로 평등하게 만끽 할 수가 있는 것이다. 보수니까 보수적으로 넣고 진보니까 진보적으로 넣으라고 할 것인가? 다 같다.
조철봉은 그 자세로 5초정도 서 있었는데 은경 또한 철봉을 쥔채 움직이지 않았다. 한쪽 다리를 치켜든채 한쪽 발끝으로만 선 은경은 조철봉의 목을 한손으로 감았으며 한 손은 철봉을 쥐었다. 조철봉은 은경의 한쪽 다리를 치켜올리고는 다른 손으로 옆쪽 벽의 수건걸이를 움켜 쥐었는데 중심을 잡기 위해서였다. 마침내 길다면 긴 5초간의 벅찬 감동을 만끽한 조철봉은 철봉을 밀었다. 은경이 정확하게 조준을 해놓고 있었기 때문에 철봉은 아주 거침없이 진입했다.
“아.”
은경의 입에서 짧고도 굵은 외침이 터졌다. 탄성이다. 조철봉의 목을 감은 팔에 힘이 실려졌으며 허리가 비틀려진것은 무의식적인 행동, 즉 반사 작용일 것이었다. 조철봉은 철봉을 천천히, 그러나 힘있게 진입시켰다.
“아아.”
은경의 신음이 더 굵어졌다.
“으음.”
조철봉의 입에서도 탄성이 뱉어졌다. 이번에는 철봉을 끝까지 진입시켜본 것이다. 누워 있을때와 서 있을때는 각도가 달라 압박을 받는 부위가 달라진다. 물론 철봉과 샘의 구조가 또한 다르기 때문에 쾌감의 강도도 달라진다. 은경의 샘은 조금 아래쪽에 위치하고 있어서 아래쪽 부분의 압박감이 더 강한것 같았다.
“아유우.”
조철봉이 철봉을 빼냈을때 은경이 이제는 두손으로 목을 감아 안으며 신음했다.
“사장님.”
헐떡이며 은경이 불렀으므로 조철봉은 움직임을 멈췄다. 그러고는 잠자코 은경의 다음말을 기다렸다.
“저, 너무 좋아요.”
“그런것 같구나.”
조철봉이 다시 천천히 철봉을 진입 시키면서 말했다.
“네가 말 안해도 알아.”
“네에.”
“네 샘이 환호하면서 기쁘게 맞는것을 다 느낄수가 있어.”
“네에.”
“그럼.”
다시 철봉을 빼낸 조철봉이 은경의 다리를 놓고는 샤워기의 레버를 눌러 껐다. 화장실 안은 수증기로 가득차 있었던 것이다.
“침대로 가자.”
조철봉이 말하자 은경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앞장을 섰다. 수건으로 대충 물기를 닦고 침대로 올랐을때 은경의 수줍음은 많이 가셔져 있었다. 시트로 알몸을 가렸다가 조철봉이 걷어 치우자 은경은 몸을 조금 비트는 시늉만 했다.
“으음, 예쁜 몸이다.”
비로소 은경의 알몸을 위에서 내려다 보면서 조철봉이 감탄했다. 서 있는 몸과 누운 몸의 아름다움은 또 다른것이다. 조철봉은 마른 입술을 혀로 축였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아니, 본격적이다.
지금까지 조철봉은 숱한 여자와 즐거움을 나눴지만 분위기는 다 달랐다. 같은 느낌을 받은 적은 한번도 없다. 다 새로웠고 다 감동적이었다. 집중하고, 열과 성의를 다하면 상대방은 몰라도 자신은 그렇게 되는 법이다. 넣고 싸는 것은 다 같다고 말하는 놈이 있다면 그 놈은 오형제만 모시고 다니는 게 낫다. 한동안 은경을 내려다보던 조철봉이 속삭이듯 말했다.
“사랑스럽다.”
“네?”
어색한 듯 머리를 옆으로 돌리고 있던 은경이 바로 누우며 물었다. 조철봉의 얼굴이 눈 앞에 떠 있었기 때문에 은경의 눈이 가늘어졌다.
“나한테는 이 때가….”
말을 그친 조철봉이 머리를 숙여 은경의 이마에 입술을 붙이고는 건너 뛰어서 목으로 내려왔다. 입술을 찾지 않은 것은 은경에 대한 예의 또는 배려라고 봐도 될 것이다. 여자는 입술을 아끼려는 본능이 있다. 헤픈 여자나 정조 관념이 굳은 여자를 막론하고 입술은 함부로 주지 않으려고 한다. 조철봉은 은경의 젖꼭지에 입술을 붙였다. 은경에게 하다가 만 이야기는 나한테는 이때가 가장 행복하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이때만 여자를 믿으니까, 본능으로 달아오른 여자가 신음을 뱉으며 매달릴 때에야 조철봉은 여자가 자신과 일체가 되었다고 믿는 것이다. 맨정신일 때는 안 믿는다. 그때는 자신도 없다. 조철봉이 입 안에서 혀를 굴리자 은경은 몸을 비틀며 신음했다. 이제는 두 다리가 거침없이 벌려졌으며 환한 불빛에도 얼굴을 정면으로 들이대었다.
”엄마!”
은경이 놀란 듯 외쳤다가 곧 두 다리를 오므렸는데 조철봉의 손이 샘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욕실에서 이미 선 채로 철봉이 깊게 들어갔었는데도 새삼스럽게 이러는 것 또한 본능일 것이었다. 조철봉의 입술이 배꼽을 훑고 아랫배 밑으로 미끄러졌을 때 은경은 두 손으로 조철봉의 머리칼을 움켜쥐었다.
“아, 아저씨.”
당황한 은경이 이제는 아저씨라고 불렀다. 그러나 조철봉의 입술이 곧 샘 끝에 닿는 순간 감전이나 된 것처럼 온 몸이 굳어졌다.
“나, 몰라.”
조철봉의 혀끝이 샘을 문지르자 은경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도 몸을 굳힌 채 숨소리만 가팔랐다. 은경은 이런 애무에 익숙지 못한 것이다. 아마 처음인지도 모른다. 조철봉은 끈기있게 은경의 샘을 탐색했다. 두 손으로는 손끝에 닿는 모든 부분을 애무하면서 혀는 샘을 집중적으로 공략했다. 성감대가 여럿이지만 샘만한 부위가 없는 것이다. 샘은 중심이다. 샘 한 곳만 집중 공략해도 시간이 모자라는 판국에 이곳저곳 오지랖 넓게 신경쓰다가 망쳤던 경험도 여러번 있었던 터라 조철봉도 신중했다. 이윽고 은경의 몸이 풀리기 시작했다. 허리를 꿈틀대며 샘의 마찰 강도를 높이는 것 같더니 무릎을 오므렸고 조철봉의 머리칼을 움켜쥔 손에 힘이 실렸다.
“아이구, 엄마!”
은경이 마침내 엉덩이를 들썩이며 비명같은 신음을 지르더니 조철봉의 머리를 샘으로 잡아당겼다. 폭발한 것이다. 조철봉은 만족했다. 마치 단 한번에 운전면허증을 획득하게 만들어 준 것처럼 생색도 났다. 그러나 은경이 두 다리까지 비틀어 머리통을 조이는 바람에 안간힘을 써서 숨구멍을 터놓아야 했다. 이때가 바로 두 몸이 일체가 된 순간이다.
이윽고 조철봉이 머리를 들어 올리면서 마치 불구덩이에서 빠져 나오는 소방사처럼 상반신을 일으켰다. 은경이 아직도 앓는 소리를 뱉으며 여운 속에 파묻혀 있었으므로 움직임이 조심스러웠다. 은경의 늘어져 있는 두 다리를 벌려 자세를 만든 조철봉이 귀에 입술을 붙이고 물었다.
“할까?”
그러자 은경이 대답 대신 두팔을 들어 조철봉의 허리를 껴안았다. 조철봉은 언제나 그랬듯이 신중했다. 먼저 철봉으로 샘 주위를 천천히 산책하면서 은경의 감흥을 고조시켰다. 양쪽 골짜기도 넘나들고 밑의 으슥한 지역까지 오가면서 은경의 기대감을 증폭시켰다. 이 때가 조철봉에겐 가장 자극적이며 삶의 희열을 만끽할 수 있는 순간중의 하나이다. 보라, 열에 들뜬 미녀가 상기된 채 신음을 토하고 있는 모습을. 몽롱하게 뜬 두 눈은 이 쪽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천국이 눈 앞에 펼쳐져 있는 것처럼 부푼 모습이다. 이 세상에서 이만큼 아름다운 표정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참으로 애석하게도 여자 본인은 자신의 이 모습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지금은 모텔에 가면 사방에 거울이 달려있어서 여자도 제가 개구리가 태질 당한 것같은 자세로 놀고 있다는 것을 보지만 절대로 자신의 이 모습은 못본다. 이 모습은 초점이 없을 때 상대방 남자만 볼수 있기 때문이다. 해당 여자는 아무 것도 못본다. 그냥 흐린 영상만 눈 앞에 떠 있다는 걸 알 뿐이다. 조철봉은 또다시 감격했다. 이런 자리를 만들어주신 천지신명께, 이 자리를 만든 계기를 조금 제공한 이영철한테도.
“아이.”
하면서 은경이 허리를 비틀더니 조철봉의 철봉을 잡으려는 시늉을 했다. 참을 수가 없어진 것이다. 조철봉이 허리를 빼면서 다시 하던 일을 계속하자 은경이 이제는 노골적으로 보챘다.
“응, 응, 응.”
하면서 허리를 비틀어댔고 두 손으로 조철봉의 엉덩이를 잡아 눌렀다. 이미 은경의 샘에서는 용암이 넘쳐 흘러서 시트까지 적시고 있었다. 마침내 조철봉은 산책을 멈추기로 했다. 언젠가 너무 산책을 오래 했다가 나이든 여자한테 귀뺨을 맞은 적도 있는 것이다. 조철봉이 자세를 바로잡았을 때 눈치를 챈 은경은 숨까지 죽였다. 두 다리를 쫙 벌린 채 까닥하지도 않는다. 조철봉도 천천히 진입했다.
“아.”
이 신음은 공초 오상순선생께서 첫날밤 시에 적으신 그 ‘아’가 맞다. 처녀막 터지는 소리는 아니지만 ‘아’는 분명한 ‘아’다. 그러나 이 ‘아’는 수천 수만의 다른 음색이 있다. 모두 소리가 다른 것이다. 은경의 신음은 맑고 높았다. 그래서 놀란 외침 같았지만 끝이 떨려서 쾌감이 깃들어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조철봉은 천천히 철봉을 진입시켰다. 그러자 은경의 샘이 기쁘게 철봉을 맞으면서 샘 안쪽 벽에 붙은 수많은 세포가 퍼득이는 것까지 느껴졌다.
“아아.”
철봉이 밑까지 닿았을 때 충만감에 사로잡힌 은경이 길고 높은 신음을 토했다.
빈틈없이 들어찬 철봉은 은경의 세포와 화합하며 뒤섞였다. 조철봉은 심호흡을 했다. 문든 가슴이 허전해지면서 머릿속에 고영민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 반작용 때문인지 조철봉은 엉덩이를 들어 철봉을 뺐고 은경의 입에서 다시 신음이 터졌다.
“어서요.”
은경이 열에 뜬 목소리로 재촉을 했으므로 조철봉은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고영민의 얼굴은 지워지지 않았다.
가난은 겪어본 사람만이 그 서러움을 안다. 요즘에는 굶어서 죽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고 하지만 고영민은 굶주림도 겪어 보았다. 죽지는 않았어도 배가 고파서 물을 다섯컵이나 마시고 밖에 나간 적이 있다. 그것이 바로 작년이다. 그때는 눈에 보이는 것이 없었다. 몸을 팔라면 팔았을 것이다. 애주에게 라면을 끓여 먹이고 남은 국물을 숨어서 마시면서 얼마나 울었던가? 굶어 죽지 않고 이렇게 살아 남은 것이 영민은 행운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융통성이 없었기 때문에 그 고생을 한 것이다. 자본주의 시장경제 사회인 대한민국은 국민소득이 1만4천불에다 세계 제11위의 경제 대국이다.
돈 있는 곳이 얼마든지 있고 지금도 경제활동에는 눈곱만한 기여도 안한 자들이 세금만 축내면서도 떵떵거리며 살고 있지 않는가 말이다. 일하지 않고 먹고 사는 방도도 있다는 것을 영민은 알게 되었다. 그렇다고 영민이 그 길로 뛰어 들었다는 것은 아니다. 아마 가난과 시련을 겪고 몸에 배게 된 융통성이 조철봉의 제의를 받아들였을 것이었다.
“엄마, 갔다올게.”
가방을 든 애주가 밝은 목소리로 소리치며 방을 나갔다. 피아노 개인교습을 받으러 가는 것이다. 또래의 다른 애들은 마지못해서 학원에 가지만 애주는 다르다. 피아노에 소질도 있고 재미를 붙여서 제가 먼저 서두르는 것이다. 대학교수인 선생님께 월 50만원씩 주기로 하고 어제부터 교습을 시작했는데 애주는 갑자기 돈이 어디서 생겼느냐고 묻지 않았다. 바로 엊그제만 해도 월 7만원씩 내는 학원비를 못내서 다니지 못했던 것이다. 또한 어제 백화점에서 처음으로 브랜드 제품으로 옷과 신발을 사줬어도 애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좋다고 팔짝팔짝 뛰면서도 말이다. 애주가 집을 나가자 영민은 커피포트를 들고 잔에 커피를 따랐다. 고소한 커피향을 맡는 순간 갑자기 목이 메면서 눈에 눈물이 괴었으므로 영민은 쓴웃음을 지었다. 인간은 간사하다고 어머니가 입버릇처럼 말했었다. 그때는 무슨 말인지 귓가로 흘렸는데 지금 겪어보니 딱 맞는 말이다. 간사하다는 말은 적응력이나 융통성을 나타냈을 것이다. 나는 지금 행복하다. 영민은 가슴 속에서 말했다. 이 행복을 깨뜨리기 싫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전화기를 내려다보던 영민은 그것이 조철봉의 전화이기를 바랐다. 전화를 든 영민이 응답했을 때 기대했던 대로 조철봉의 목소리가 울렸다. 나흘 만이다. 조철봉은 나흘 동안 전화도 안 했다.
“응, 나.”
하고 조철봉이 부드럽게 말했다.
“저기 애주 피아노가 곧 도착할거야, 받아 두라구.”
“네?”
“응, 먼저 받고 나서 이야기하자.”
그러고는 전화가 끊겼으므로 영민은 당황했다. 그래서 서둘러 조철봉의 휴대전화 번호를 누르는데 현관 벨이 울렸다. 자리에서 일어선 영민이 현관 앞으로 다가가며 물었다.
“누구세요?”
“저기, 배달왔는데요.”
그순간 가슴이 덜컹 내려앉은 영민이 문을 열었다.
“피아노 배달입니다.”
인부 3명이 서 있었고 뒤에는 커다란 피아노가 아직 상자에 덮인 채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에는 동네 아줌마 둘이 구경하는 중이었다. 영민이 월세 산다고 무시했던 아줌마들이다.
“들어오세요.”
영민은 자신의 목소리가 높아져 있는 것을 들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고영민한테서 전화가 왔을 때는 오후 2시가 되어갈 무렵이었다. 피아노가 도착한 것이 오후 1시쯤이었으니 1시간쯤 후에 전화를 한 것이다.
“어, 그래.”
조철봉이 반가운듯 밝고 큰 목소리로 응답했을 때 영민이 물었다.
“언제 오세요?”
“응?”
조철봉은 앞쪽 벽을 바라보았다. 영민은 지금 피아노를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국산중 가장 좋은 피아노였다.
“아, 내가 요즘 바빠서….”
정색한 조철봉이 말을 이었다.
“내가 연락할게.”
“저기요….”
“응?”
“피아노 고마워요.”
“응, 애주가 좋아하겠지?”
“그럼요, 얼마나 부러워했는데요.”
“잘됐군.”
“그런데요.”
“응?”
“이렇게 받기만 하는 것이….”
“그게 어때서?”
“난 아직 아무것도….”
“내가 뭘 바라고 그런 게 아냐.”
“싫어요.”
그러더니 영민의 목소리가 단호해졌다.
“오늘 저녁에 오세요. 저녁 준비해 놓을테니까요.”
“…….”
“오늘 여기서 주무시고 가요. 애주 걱정은 마시구요.”
“아니, 난.”
“그러지 않으면 난 철봉씨 호의를 받을 수 없어요.”
“…….”
나 한번 안아라도 주세요. 내가 그럴 만한 가치가 없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당신한테 부담을 덜게.”
“이봐, 영민아.”
전화를 고쳐 쥔 조철봉이 창밖을 보았다. 그러자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두눈이 번들거리고 있었다. 드디어 영민이 제 입으로 저를 안아달라고 말한 것이다. 이제 다시 16년 전으로 되돌아갔다. 아니, 그때보다 더 확실하게 조성되었다.
“내가 그때 그랬잖아? 요즘 몇년간 사업에만 신경을 써서 그거 안한 지가 오래 되었다구 말이야.”
조철봉이 말을 이었다.
“참, 우리, 그때도 그랬지? 16년 전에 말이야. 넌 기억나는가 모르겠는데.”
“…….”
“너하고 같이 여관에 갔을 때 말이야. 난 그때 기다리고 기다리던 기회가 왔는데도 웬일인지 하기가 싫더라니까? 널 그냥 아끼고 싶더라고. 그냥 보물상자처럼 모셔놓고 싶었단 말이야.”
그러고는 조철봉이 다른 쪽 손바닥으로 뜨뜻해진 얼굴을 쓸었다. 아무리 조철봉이라고 해도 영민의 면전에서 이런 소리는 못한다. 양심이 있지. 파이프가 새서 못한 것을 어떻게 그렇게 대놓고 말한단 말인가? 그때 영민의 목소리가 수화구를 통해 귓속으로 파고 들었다.
“괜찮아, 철봉씨.”
영민이 다친 아이를 어르는 어머니같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냥 안아만 줘도 돼. 철봉씨.”
“아니, 그래도.”
“나도 안한 지 5년도 넘었어. 철봉씨, 우리 그냥 안고만 있어.”
그 순간 숨을 들이마신 조철봉은 손을 뻗어 혁대 밑으로 집어 넣었다. 철봉이 꿈틀거리며 일어섰기 때문이다. 안한 지가 5년이 넘는다니, 조철봉은 또 감동했다.
“그, 그런데 말야.”
조철봉이 서두르듯 말했다. 마주보고 앉아서는 절대로 이런 이야기 못한다. 전화기의 이점 중의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지금 둘은 몇마디의 통화로 단숨에 16년의 세월을 건너뛰어 서로 주느니 마느니 할 때보다 더 ‘진한’상태가 되었다. 물론 조철봉은 앞뒤를 다 재고서 영민을 갖고 노는 셈이었지만 말이다. 조철봉이 이제는 곤두선 철봉을 움켜쥐고 물었다.
“5년 동안이나 안 했다면 나하고 비슷한데, 나도 언제 그걸 했는지 기억이 안나.”
“….”
“하지만, 널 만나고 나서.”
“응?”
영민이 궁금한 듯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날 만나고 나서 뭘?”
“문득 문득 성욕이 느껴졌어.”
“….”
“널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그냥 성적 충동이 일어나더라니까, 그것 참.”
“그러니까 오늘 와.”
이제는 영민이 그런 계통의 여자처럼 말했다.
“남자가 너무 오래 참아도 안돼. 성불능이 된다고 들었어.”
“정말이야?”
“응, 책에서 읽은 것 같애.”
“넌 괜찮고? 5년이나 안했다면서.”
“난 생각이 안났어. 전혀.”
“그럼 오늘밤 날 안고서도 그러면 어떡할래?”
“나아, 참.”
“영민이 웃음띤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아, 철봉씨.”
“할 수 있어?”
“응.”
“영민아.”
“응?”
“나, 말이야.”
“뭔데.”
“너하고 이야기하는 동안 그것이 커졌어. 나, 이런 일 처음이야.”
“정말?”
“넌 어때?”
“나도 기분이 이상해.”
“그럼 말야.”
“응?”
“너, 집에 혼자 있어?”
“응.”
“너, 그럼 네 손가락을 네 그곳에다 넣어봐.”
“아이, 참.”
“그 손가락이 내 것이라고 생각하고 넣어봐, 응?”
“아이, 싫어.”
“넣어 보라니까, 내가 상상하게. 내 그것이 5년만에 섰단 말야.”
“아이” 했다가 영민의 말이 한동안 끊겼으므로 조철봉은 철봉을 문지르던 손을 멈췄다. 그때 영민의 목소리가 귀를 울렸다.
“했어.”
“손가락을 넣었어?”
반색을 한 조철봉이 묻자 영민의 가쁜 숨소리가 크게 들렸다. 전화기를 귀에 딱 붙이고 있는 것이다.
“응.”
“그럼 그 손가락을 네 그곳에 조금 넣어봐. 나도 내걸 만지고 있으니까. 자, 넣었어?”
“으응.”
“조금 더 깊게 넣어.”
“으응.”
“그럼 천천히 문질러.”
“으으응.”
조철봉은 번들거리는 눈으로 앞쪽을 보았다. 전화로 전희를 한 것이나 같은 것이다.
조철봉은 아직 마음을 정하지 않았다. 고영민을 어떻게 할 것인지를 아직 정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솔직히 16년 세월이면 제 아무리 심장이 떨어진 것 같은 상처를 받았더라도, 아니, 실제로 심장을 뗀 수술을 받았더라도 거의 다 아문 상황이 되어 있을 것이다. 세월만한 약이 어디 있는가? 더욱이 조철봉같은 강안남(强顔男), 즉 사기성이 농후한 이중적 인간들은 상처를 쉽게 잊는 기술을 터득하고 있는 것이다. 얼른 다른 모습으로 변하여 새로운 작업을 하려면 지난 일, 특히 상처 따위는 잊어야 한다.
그런데 참으로 갑자기 16년 세월 전의 잊었던 상처, 파이프가 새는 바람에 그걸 못하고 비운의 눈물을 뿌려야 했던 고영민을 떠올렸고 결국 이 지경까지 되었다. 여기까지는 좋다. 잘 나갔다. 계획대로 진행이 되었으며 반응도 만족할 만했다. 그러나 마지막 단계, 밑천이 부족한 조철봉에게는 섹스가 마지막 단계일 수밖에 없으므로 이것을 정해야만 한다. 할것이냐? 말것이냐? 후련하게 한번 해서 개운하게 16년전 사건을 덮어버릴 것이냐? 아니면 놔둘 것이냐? 그러나 놔둔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다. 어떻게 하면 심금을 울리는 섹스, 너도 울고 나도 울며 다른 넘들한테도 넌지시 자랑할 수 있는 장면을 연출할 것이냐가 조철봉의 속마음이다. 그래서 자나깨나 앉으나서나 방법을 궁리하면서 딴 여자들과 연습 게임으로 몸을 풀고 있다고 봐야 된다.
“으으으응.”
갑자기 수화구에서 영민의 신음이 더 높게 울렸으므로 조철봉은 생각에서 깨어났다.
“자기야.”
숨가쁜 목소리로 영민이 조철봉을 불렀다. 아아, 16년 만에 자기야 소리를 다시 듣게 되다니, 조철봉의 가슴은 벌럭벌럭 뛰었다.
“으응?”
조철봉이 물었을 때 영민이 헐떡이며 말했다.
“나, 미치겠어. 지금.”
이제 시동이 걸렸으니 가만 놔둬도 되지만 조철봉은 약간 더 가속기를 밟았다.
“더 깊게 넣어봐. 넣고 좌우로 흔들어, 영민아.”
“이렇게? 이렇게?”
“더 세게.”
“으응응 이렇게?”
“오빠건 그것보다 엄청 커.”
“으으응.”
“너, 내거 안봤지?”
“으으응.”
“큰 게 들어간다고 생각해봐.”
“응응응.”
조철봉은 철봉을 쥔 손을 떼었다. 아까부터 철봉은 화가 난듯이 늘어져 있었는데 지금 이게 무슨 꼴이냐고 나무라고 있는 것 같았다. 아무리 사장실에 혼자 있다고 해도 백주 대낮에 바지 사이로 철봉을 꺼내 흔들어대고 있으니 그럴 만했다. 오형제가 샘과 비교가 되겠는가? 그러나 8킬로미터쯤 떨어져 있는 영민은 지금 정상을 향해 숨가쁘게 달려 올라가는 중이었다.
“자기야. 나, 죽겠어.”
영민의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수화구에서 숨이 끊어질 것 같은 숨소리까지 울렸다.
“아이구. 아, 아.”
“그래, 엉덩이를 더 들어.”
철봉을 바지 안으로 집어 넣고 지퍼를 올리면서 조철봉이 말했다. 그러나 차분한 표정과는 달리 목소리는 숨가쁘게 조정했다.
“그래, 그래, 그렇지.”
그러자 영민이 조철봉과 맞춰 소리쳤다.
“아악, 악, 악.”
정상에 올라온 것이다.
그날 저녁 조철봉은 고영민에게 가지 않았다. 영민도 조철봉을 찾지 않았는데 폰섹스를 오지게 한 후라 부끄러웠을 것이다. 요즘은 화면 상으로 서로의 몸을 보면서 하는 섹스도 시장에 나와있었지만 그렇게까지 조철봉이 밝히지는 않았다. 조철봉이 집에 들어섰을 때는 밤 10시가 되어갈 무렵이었다. 그동안 수없이 외박을 해오면서 모두 확실한 이유와 증거를 대었지만 서경윤이 그것을 믿는 것 같지는 않았다.
믿는 확률은 절반쯤이나 될까? 그 이상이라면 조철봉의 수단이 걸출하다고 인정해줘야 될 것이다. 부부 사이에서 한번 불신을 받으면 만회하기는 타인보다 열배는 힘든 법이다. 심복 최갑중을 제외하고 조철봉의 약점을 가장 많이 알고있는 인물이 있다면 역시 서경윤이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경윤이 아들 영일을 데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조철봉이 경윤에게 기가 죽어서 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천만의 말씀이지, 부부 사이가 원만하지 못할 따름으로 경윤의 신상, 험하게 말하면 생사여탈권은 조철봉이 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영일이는?”
집안에 들어오면서 버릇처럼 그렇게 물었지만 나오지 않는 걸 보면 자는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경윤도 구태여 대답하려고 하지 않았다. 벗고, 씻고, 실내복으로 갈아입는 과정을 느리게 연출한 것은 경윤의 진을 빼려는 작전이다. 얼른 모습을 드러내면 강한 전의(戰意) 앞에 노출될 수 있는 것이다. 조철봉이 응접실의 소파에 앉았을 때는 11시가 조금 넘었다. 소파에 반듯이 앉아 기다리던 영민은 TV의 게그쇼에 끌려들어서 미친 여자처럼 혼자 웃고 있다가 퍼뜩 정색을 했다.
“나, 영일이하고, 엄마하고 제주도에 갔다가 올 게.”
경윤이 불쑥 말하자 조철봉은 먼저 숨부터 깊게 들이켰다. 마음 같아서는 얼굴을 활짝 펴고 웃고 싶었지만 그럴 수 있겠는가? 아무리 그래도 그것은 경윤에 대한 모욕이다. 그래서 콧구멍도 벌름거리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숨을 뱉었다. 얼굴은 구땡을 쥐고 다섯끗을 쥔 타짜처럼 포커 페이스가 되어있다.
“갑자기 제주도는 왜?”
힐끗 TV에 시선까지 주면서 묻자 경윤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영일이 방학 때 제주도 데려간다고 했어. 그래서 일주일쯤 쉬었다가 오려고.”
“아, 영일이 방학 했구나.”
“내일 떠날 거야.”
“그럼 내가 비행기표하고 호텔 예약을….”
“다 해놓았어.”
“허어, 그래?”
“어머니하고 같이 가니까 돈이 좀 더 들어.”
“그야, 당연하지.”
정색한 조철봉이 커다랗게 머리를 끄덕였다.
“호텔 좋은 곳으로 예약했지?”
“응. 성산포 월드호텔.”
“잘했어.”
“일주일 동안 잘 놀라구.”
“놀긴 뭘, 요즘 바빠 죽겠는데, 어디.”
“일주일간 외박하겠구만.”
“그럴 리가.”
혀를 찬 조철봉이 기지개를 켜는 시늉을 하고 나서 은근한 눈빛으로 경윤을 보았다.
“어때? 오늘 한번.”
“뭘?”
“일주일 동안 굶을테니 오늘 한번 하자.”
“웃기고 있네.”
했지만 눈을 흘기는 경윤의 자태에 교태가 섞여 있었다. 그것을 놓칠 조철봉이 아니다.
침대에 누웠을 때 서경윤이 불을 끄고 들어오지 않으면 마음이 있다는 표시였다. 간단하게 해석하면 된다. 불을 끄면 자빠져 잠이나 자자는 뜻인 것이다. 조철봉은 경윤이 불을 켠 채로 옆에 눕자 소리죽여 숨을 들이켰다가 역시 소리없이 뱉어내었다. 그러고는 경윤의 어깨를 끌어 안았다. 그때 경윤이 반듯이 누운 채 말했다.
“그냥 해.”
그냥 찌르기만 하라는 말이다. 그것은 또 찌르면 좋기는 하다는 말도 될 것이다. 하지만 심보가 뒤틀린 넘들은 마지못해서 주는 것으로 생각할 것이었다. 그러나 조철봉은 상관하지 않았다. 경윤이 시킨대로 고분고분 상체를 세우고는 이쪽도 팬티만 벗었다. 그러자 경윤도 누운 채 꾸물대면서 팬티를 끌어내렸다.
“불 끌까?”
괜히 서먹해진 조철봉이 그냥 그렇게 묻자 경윤은 천장을 노려본 채 대답했다.
“놔둬.”
그래서 조철봉은 경윤의 다리를 벌리고는 자세를 취했다. 경윤은 흰 실크 가운을 입었는데 그 와중에도 젖가슴 부분은 여미어 놓아서 하반신만 알몸이다. 그리고 조철봉 또한 위에는 셔츠에다 잠옷 상의도 입었다.
“넣을까?”
다시 이렇게 물은 것은 조철봉의 버릇이다. 운을 띄워서 샘에 물이 고이도록 시간을 끌자는 것이다. 그때 경윤이 와락 이맛살을 찌푸렸다.
“넣으라고 했잖아.”
세상에 이런 법은 없다. 울컥 가슴속에서 솟구친 뭉치가 목구멍까지 솟아 올랐지만 조철봉은 빙긋 웃었다.
“천천히 넣을까? 빨리 넣을까?”
그러자 이번에는 경윤이 씨근대면서 대답하지 않았다. 자리를 차고 일어날 것이냐, 놔둘 것이냐로 망설였다가 후자를 택했을 것이다. 그래서 조철봉은 철봉을 경윤의 샘에 붙이고는 천천히 넣었다. 이번에는 샘 주위의 산책을 하지 않았다. 경윤도 수없이 경험한 터라 별 효과가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넣는 것이 낫다. 누구 말마따나 꿰어놓고 보는 것이다.
“음.”
철봉이 진입했을 때 경윤의 입에서 희미한 신음이 뱉어졌다. 기분 좋은때 같으면 커다랗게 앓는 소리가 뱉어졌을 것이다. 조철봉도 서둘지 않았다. 일단 넣은 이상 핸들을 쥔 것은 자신이기 때문이다. 경윤의 샘은 예상한 것처럼 건조했다. 그래서 고통이 심한지 몸이 비틀려졌다.
“아, 아퍼.”
그리고는 저절로 아프다는 신음도 뱉어졌다. 자업자득이다. 그러나 이것도 조철봉에게는 분위기를 맞추는 음악이 된다. 호흡을 맞추며 뱉는 탄성보다 더 자극적이 될 수도 있다. 조철봉은 천천히 철봉의 진퇴를 거듭했다. 기교도 부리지 않고 강약 조절도 하지 않았다. 기차 피스톤이 똑같은 강도와 속도로 오가는 것처럼 반복했다. 그것은 오직 샘에 물이 고이도록 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그리고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았다. 철봉이 스무번쯤 왕복하고 났을때 샘은 환희하기 시작했다. 샘의 벽에서 생수가 뿜어져 나오면서 세포는 살아 움직이며 철봉을 맞았다.
“아, 아유, 아.”
경윤의 입에서 저절로 탄성이 터지더니 눈을 감으면서 머리를 옆으로 돌린다. 그러고는 슬그머니 팔을 뻗어 조철봉의 허리를 움켜쥐었다. 지금까지는 두 팔이 십자가가 아니라 침대에 박힌 것처럼 벌리고 있었다. 조철봉은 이를 악물었다. 우리는 짐승이다.
다음날 오후 3시경 고영민의 인내심은 한계점에 닿았다. 아침부터 조철봉의 전화를 기다리다가 오후가 되면서부터는 이쪽에서 해보려고 열두 번도 더 전화기를 들었다가 내려놓았던 것이다. 세상이 디지털 시대가 되어서 휴대전화로 입금을 하고 사진을 전송하는 작금에 이르렀지만 가장 기본적인 기능은 아직도 반석 같은 위치를 빼앗기지 않았다. 그것은 통화이다. 접촉이라고 표현해도 무방할 것이다. 2시경부터 벽시계를 보면서 큰 바늘이 숫자에 닿을 때마다 움찔대던 영민이 3시5분 마침내 전화기를 집어들고 귀에 붙였다. 그리고 번호판의 버튼을 누르고 있을 때였다. 탁자 위에 올려놓은 휴대전화가 마치 목이 비틀어진 풍뎅이처럼 빙빙 돌았다. 서둘러 전화기를 내려놓은 영민이 풍뎅이를 쥐고 발신자 번호를 보았다. 조철봉이다. 영민은 휴대전화를 쥔 채 심호흡을 두 번이나 하고 나서 귀에 붙였다.
“여보세요.’
“응, 난데.”
조철봉의 목소리가 울리는 순간 영민은 숨을 멈췄다. 지금까지 37년의 인생을 살면서 이렇게 남자의 전화를 기다려 본 적도, 남자의 목소리에 감동을 받은 적도 없는 것이다. 이번이 처음이다.
“지금 뭐해?”
조철봉이 묻자 영민은 정신을 차렸다.
“응, 일하다가, 빨래를….”
빨랫감을 산처럼 쌓아놓고 손도 안댔지만 이런 건 거짓말도 아니다. 아니 본인은 의식하지도 못한다.
“응, 그래?”
조철봉이 그렇게 대답하자 영민은 다급하게 덧붙였다. 바쁘니까 나중에 한다고 할까봐서다.
“지금은 쉬고 있어요.”
“그래? 그럼 잠깐 밖으로 나올래?”
“지금요?”
그순간 영민의 머리는 비상하게 빠른 속도로 회전을 했다. 인류가 하루에 한번씩 이런 식으로 머리 회전을 한다면 아인슈타인이 수백만명 탄생할 것이다. 자, 애주가 30분 후면 돌아올테니 그동안 화장하고 있다가 집 보라고 하고 나가면 된다. 저녁은 시켜 먹으라고 하고 돈을 줘야지. 그럼 더 좋아할 것이다. 약속은 5시로 하면 되겠다. 늦어도 11시까지는 돌아와야 하니까 다섯시간은 여유가 있다. 그것까지 생각한 시간이 3초 정도였으니 인간이 두뇌의 십만분의 일도 활용하지 못하고 떠난다는 말도 일리가 있는 것 같다. 그때 조철봉의 목소리가 귀를 울렸다.
“그냥 간단하게 입고 나와. 나, 지금 아파트 주차장에 있으니까.”
“네에?”
놀란 영민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주차장에요?”
“응, 그냥 나와. 내가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잠깐만요.”
“바로 나올 거지?”
“10분만.”
“알았어.”
서둘러 전화기를 귀에서 뗀 영민은 화장대 앞에 앉았다. 그러고는 아파트 주차장으로 나간 것이 20분쯤 후였다. 화장을 하고 옷을 갈아입었으니 20분이면 빠른 편이다. 영민이 주차장으로 들어섰을 때 구석에 서있던 조철봉이 웃음띤 얼굴로 맞았다. 주차장에는 그들 둘뿐이다.
“이런, 외출복 차림이네.”
쓴웃음을 지은 조철봉이 옆에 세워진 은색 중형차 문을 열더니 영민을 조수석에 태우고는 자신은 운전석에 탔다. 차는 금방 뽑았는지 가죽 냄새가 났고 백미러의 비닐은 아직 떼지도 않았다.
“저기 말야.”
조철봉이 핸들을 한손으로 가볍게 두드리며 고영민을 보았다.
“생일이 다음주던가?”
“엄마.”
놀란 영민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어떻게 아세요?”
“아는 수가 있지.”
“어떻게.”
그러자 입맛을 다신 조철봉이 쓴웃음을 짓고 말했다.
“저기, 부동산 계약서에 써 있는걸 봤어. 주민등록번호 말야.”
“아아.”
“그래서.”
조철봉이 핸들을 조금 세게 두드렸다.
“생일선물이야.”
영민이 눈만 크게 떴을 때 조철봉은 핸들을 더 세게 쳤다.
“이 차 말야.”
영민이 차 핸들을 보았다가 다시 조철봉의 얼굴을 보았다. 어느덧 얼굴이 하얗게 굳어져 있었다.
“이 차를요?”
겨우 입술만 달삭이며 그렇게 물었을 때 조철봉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 이 차를 생일선물로 샀어.”
“…”
“거기 앞쪽 캐비닛에 등록증하고 보험증, A/S서류가 다 들었어. 영민씨 명의로 일시불로 샀고 보험료도 냈으니까 마음놓고 타기만 하면 돼.”
“….”
“애주 태워서 학원에 데려다주고 가끔 놀러도 가야지. 그래야 애 사기 오른다고.”
“….”
“나, 일하다가 왔으니까 지금은 그냥 갈게. 이따 저녁때 와도 되지?”
그러자 그때서야 정신이 난듯 영민이 시선을 들고 조철봉을 보았다. 그러고는 머리를 끄덕였다.
“네.”
“8시쯤 올텐데, 저녁 줄거야?”
“그럼요.”
“그럼, 그동안.”
조철봉이 주머니에 넣었던 차 열쇠 꾸러미를 영민에게 내밀었다.
“차 시운전이나 해봐.”
영민이 망설이자 조철봉이 손을 잡아 손바닥에 주었다.
“설명서도 캐비닛에 있어. 모르는건 찾아보면 될거야.”
그러고는 조철봉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으므로 영민도 서둘러 따라 나왔다.
“저기.”
영민이 부르자 조철봉이 눈으로 물었다.
“저, 이걸.”
조철봉의 시선을 받은 영민의 얼굴이 갑자기 빨개졌다. 피아노를 받은 것이 바로 어제인 것이다. 그런데 오늘은 중형 승용차를 생일선물로 받았다. 그것도 가장 좋아하는 색깔로, 거기에다 신형 중형승용차 프라다는 지금까지 생산된 모델중 가장 세련되었다고 소문이 난 차였다. 이 후진 동네에서는 아직 어떤 연놈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후진 동네에 사는 것들이 없는 사람은 더 무시하는 것 같아서 지금까지 서러움을 꾹꾹 누르고만 살아온 영민이다.
“철봉씨.”
마침내 두눈에 물기가 고인 영민이 그렇게 부르기만 했다. 피아노까지 받은 주제에 이건 안된다고 할 기력도 염치도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금방 고맙다면서 희희낙락 하기에는 아직까지는 자존심이 걸릴 뿐만 아니라 너무 가볍다. 그때 다가선 조철봉이 영민의 어깨를 손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그냥 받아. 영민아, 니 맘 내가 다 알아. 그리고 난 지금 행복하다는 것만 알아줘.”
다시 회사로 돌아온 조철봉은 일을 했지만 건성이었다. 결재도 대충 했으며 회의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나중에는 외부 전화도 받지 않는다고 해놓고는 소파에 눕듯이 앉아 두 눈만 껌벅거렸다. 그러자 그때서야 차츰 가슴이 진정되면서 두서없던 사고가 정리되었다.
“자, 너, 도대체 어떻게 할 작정이냐?”
그때 첫번째로 떠오른 질문이 그것이다.
“너, 왜, 자꾸 뒤로 빼기만 하는 거냐?”
두번째는 힐난하듯 그렇게 묻는다.
“네가 16년전 그날 밤에 영민한테 했던 말처럼 올라간 후에 내려올 때의 허망함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아서 그러는 거냐?”
이번에는 질문이 꽤 길었다.
“너, 오늘 저녁에 영민한테 갈 생각이 없지?”
그렇게 스스로를 향해 반문해본 조철봉은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 나서 대답했다.
먼저 첫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어떻게 하기는 마, 먹어야지.”
간단하다. 잠시 두번째 질문을 떠올렸던 조철봉이 대답했다.
“빼기는 머, 잔뜩 기름칠을 하는 거지. 그런다고 걔(영민)가 도망치는 것도 아니잖아? 내가 꽉 쥐고 있지 않느냔 말이다.”
이때 조철봉의 두 눈에 생기가 번쩍였으며 입가에는 저절로 웃음이 떠올랐다. 조철봉은 세번째 질문을 머릿속에서 읽고나서 이번에는 신중하게 대답했다.
“아주 고상한 질문이다. 물으려면 이런 걸 물어야지 인사청문회에서 했던 것처럼 인기영합식으로 물으면 쓰나?”
그러고는 잠시 뜸을 들였다가 말을 이었다.
“마, 지금은 그 질문이 내 위치와 현실에 딱 맞는 질문이 되겠다. 과연 그렇다. 영민을 두시간, 또는 고등학교 교가까지 부르면 세시간 동안쯤은 천국과 극락, 홍콩을 교대로 왕복시킬 자신은 있다. 그러나 그 다음이….”
지그시 어금니를 물었던 조철봉은 어깨를 늘어뜨렸다.
“그 다음부터는 솔직히 자신이 없다. 왜냐하면….”
조철봉은 속으로 주고받고 있으면서도 누가 듣기라도 하는 것처럼 주위를 둘러보고 나서 말을 이었다.
“나는 지금까지 한번 먹는 것 위주로 살아왔기 때문이다. 먹을 때만 성취감을 얻었을 뿐 그 시간 외에는 아무도 믿지 않았던 것이다. 다시 그 행태가 영민에게까지 작용된다면 그것은 서로에게 비극이 될 것 아닌가?”
그순간 조철봉의 부릅뜬 두 눈에서 두 줄기의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눈물이 흘러내리도록 한동안 내버려 두고 나서 조철봉은 휴지를 집어 얼굴을 닦았다. 그러자 눈동자도 더 맑아졌고 얼굴은 생기를 띠었다.
“먹자.”
조철봉은 배달시켜 놓은 자장면을 먹자는 것처럼 간단하게 말했다.
“우선 먹고 보자.”
“그럼 오늘 저녁에 갈 거냐?”
하고 속에서 물었으므로 조철봉은 머리를 끄덕였다.
“가야지.”
심호흡을 한 조철봉은 탁자 위의 전화기를 집어들고는 버튼을 눌렀다.
“예, 사장님.”
신호음이 두 번 울렸을 때 박경택이 응답했다.
“응, 열심히 하고 있지?”
조철봉이 묻자 경택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예, 사장님.”
“철저히 하라구, 알았지?”
“예, 사장님.”
경택은 지금 제주도에 놀러간 서경윤을 감시하고 있다. 이 와중에도 조철봉은 경택을 격려한 것이다.
“어서오세요.”
문을 연 고영민이 그렇게 인사는 했지만 시선을 마주치지는 않았다. 옆을 스치고 들어서는데 옅은 향내가 맡아졌다. 향수다. 화장품 냄새는 아니다.
“애주는?”
들고온 컴퓨터 게임기를 영민에게 내주면서 묻자 영민이 여전히 시선을 내린채 대답했다.
“자요.”
저녁 9시20분이다. 조금 늦게온 셈이지만 이시간에 잔다는건 조금 이른 감이 있다. 억지로 재운것 같았다.
“씻으세요. 국만 데우면 되니까요.”
영민이 뒤로 다가와 저고리를 벗기면서 말했다. 분위기가 TV 드라마에 나오는 신혼부부 같았다. 왜 드라마를 대느냐하면 조철봉은 신혼부부 시절에 이런 분위기를 겪지 못했기 때문이다. 서경은은 한번도 뒤에서 옷을 받아 준적이 없다.
조철봉이 던진 저고리를 앞에서는 몇번 받았다. 그것도 엉겁결에.
“저기, 갈아 입으실 옷.”
하고 영민이 파자마하고 내의를 내밀었으므로 조철봉의 가슴이 철렁했다. 심장근처에서 무언가 쿵 떨어진 느낌이 온 것이다. 영민은 새 내의와 파자마도 준비해 놓은 것이다. 머리만 끄덕인 조철봉은 바지와 셔츠까지 벗어 영민한테 건네 주고는 화장실로 들어섰다. 그런데 발칙하게도 영민이 앞에 서 있었기 때문인지 바지를 벗었을때 철봉이 건들거리며 텐트를 쳤다. 그래서 황급히 파자마로 앞은 가렸지만 나쁜 기분이 아니었다. 철봉은 순수하다. 그러나 순수한 철봉만을 따르다가는 대부분 교도소에 간다. 욕조에는 가득 물을 받아 놓았는데 온도가 적당했다. 조철봉이 욕조에 들어가 누웠을때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20센티쯤 열렸다.
“저기요, 철봉씨.”
여전히 시선을 내린 영민이 그러나 또렷하게 말했다.
“저기, 그거 준비했는데.”
“뭘?”
조철봉이 묻자 영민이 얼굴을 더 뒤로 뺐으므로 문틈에서 목소리만 들어왔다.
“저기, 비아그라.”
숨을 들이켠 조철봉이 물속에 잠겨있는 철봉을 내려다 보았다. 그말을 들은것처럼 철봉이 건들거리고 있었다.
“아니, 비아그라는 왜?”
뻔히 알면서도 그렇게 묻는것은 테크닉이다. 이렇게 이어지는 대사는 인간관계의 맞물린 톱니바퀴에 칠해지는 기름같은 역할이 되며 지금같은 분위기에서는 전희 기능도 한다.
“아, 비아그라.”
하고 금방 알아듣는척, 잘난척 하는 놈은 십중팔구 조루일 것이었다. 그러자 문틈에서는 3초쯤 후에야 대답이 흘러 나왔다.
“저기, 그거 괜찮아요?”
조철봉은 빙그레 웃었다. 방금 욕조의 물속에서 잠수함의 잠망경같은 철봉이 벌떡 솟아 올랐기 때문이다. 인간의 행복은 언제 어디서나 마음만 먹으면 찾을수가 있는 것이다. 이틀쯤 굶었다가 라면 한개를 얻게 되었을때도 그렇고 이렇게 철봉이 기운차게 솟아 오르는것을 볼때도 그렇다. 그러고보면 있는 사람보다 없는 사람이 더 행복을 찾을 기회가 많지 않을까? 항상 서는 사람보다 가끔 서는 사람이 서는 기쁨을 더 누리게 될 것이다. 물론 조철봉같은 사기꾼은 한술 더 떠서 못선다고 거짓말을 했다가 이런 기쁨을 얻는 것이지만 말이다.
“응, 괜찮을것 같은데.”
일단 그렇게 대답은 해놓고 조철봉이 심호흡을 했다. 너무 괜찮아서 걱정이다.
샤워를 마친 조철봉이 파자마 차림으로 욕실에서 나왔을 때 식탁에는 술까지 곁들인 저녁상이 준비되어 있었다.
“으음.”
식탁에 앉은 조철봉이 만족한 표정으로 웃었다.
“맛있겠다.”
풍성하기보다는 깔끔한 차림이었다. 김치찌개에 겉절이, 고등어 구이에다 창란젓과 김, 미역국이 전부였는데 창란젓 한가지만 사온 것이다. 영민은 애주하고 먼저 식사를 했다면서 조철봉의 잔에 소주를 따라 주었다. 술 시중을 들어주는 것이다.
“애는 지금도 이모하고 같이 있어요?”
문득 영민이 물었으므로 조철봉은 시선을 들었다. 사기꾼의 실수가 가장 많이 발생되는 경우가 제가 한말을 잊어버렸을 때이다. 그것만 조심하면 실수의 반 이상은 덮어진다.
조철봉은 3초쯤 고민하는 시늉을 한 다음에 머리를 끄덕였다. 표정은 그렇지만 속은 한 말을 기억해낸 것이다. 영민에게 아들 영일은 제 이모가 키우고 있다고 했다. 물론 서경윤은 죽은 여자가 되었다. 사망원인은 교통사고, 즉사다. 암이나 백혈병 등 오래 끄는 것보다 쉽고 산뜻하게 저세상으로 보낸 것은 그만큼 호의를 베풀었다는 증거도 될 것이다.
“응, 이모가 엄마처럼 잘 해주니까.”
“이모도 혼자 살고 계시다고요?”
“응, 아이도 없고, 그래서 잘 된거지.”
“애는 자주 만나요?”
“응, 일주일에 한번정도. 지금은 이모하고 장모하고 셋이서 제주도로 놀러갔어.”
“따라 가시지.”
“내가 남편인가? 셋이 가는게 더 자연스럽고 좋아.”
“함께 사셔야 할텐데.”
“이제 그 이야기는 그만하고.”
술잔을 내려놓은 조철봉이 은근한 표정으로 영민을 보았다. 밥 한그릇을 다 비운데다 소주까지 한병 마신터라 배도 부르고 술기운까지 적당하게 올라왔다.
“상 치우고 방으로 갈까?”
“벌써요?”
금방 얼굴이 빨개진 영민이 벽시계를 보는 시늉을 했다. 밤 10시반이다.
“그럼 술 한잔 더 하지 뭐.”
자리에서 일어선 조철봉이 턱으로 방을 가리켰다.
“방에서 말야.”
“괜찮아요?”
“뭐가?”
“술 마셔도 그것.”
그러고는 영민이 시선을 피하지 않고는 눈웃음을 쳤다. 그순간 조철봉은 파자마바지 앞부분이 갑자기 솟아나왔으므로 얼른 몸을 돌렸다.
“글쎄, 잘 모르겠어.”
다행히 영민은 보지 못한 것 같았다.
“하지만 오늘 컨디션이 좋으니까 잘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어.”
“들어가 계세요. 술상 가져 갈게요.”
“얼른 들어와.”
“왜요?”
“그게 갑자기 서면 빨리 와 줘야해.”
“차암 내.”
하면서도 영민은 이제 이를 드러내고 환하게 웃었다. 시선을 피하지도 않는다.
“참, 그때는 잘 되었어?”
방으로 들어서다 말고 조철봉이 몸은 앞쪽으로 둔 채 영민에게 머리만 돌리고 물었다. 그러자 술상을 차리던 영민이 눈을 가늘게 떴다.
“언제요?”
“손가락으로 할 때 말야.”
“좋았어요.”
“그럼 오늘도 그렇게 하면 되겠다. 내가 잘 안되면 말야.”
조철봉의 가슴이 넉넉해졌다.
방으로 들어선 조철봉은 벽에 등을 붙이고 방바닥에 앉았다. 두 평쯤 되어 보이는 침실 분위기는 아늑했다. 벽지는 본래 크림색이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색이 바래 노랗게 되었고 두줄짜리 형광등 한 개는 양쪽 끝이 검게 타서 꺼지기 직전이었지만 고향 집에 온 것처럼 편안하게 느껴졌다. 10평 가까운 면적에 이탈리아제 가구를 널어놓은 서경윤의 침실은 이곳과 비교하면 드라마용 세트일 뿐이다.
그 망할 년은 섹스를 하면서도 지금 카메라가 돌아간다고 공상을 할지도 모른다. 손바닥만큼 열려진 문틈으로 주방에서 술상 차리는 소리가 들렸다. 달그락거리며 그릇이 부딪쳤고 고영민은 밝은 목소리로 혼잣말도 했다. 뭘 찾는 모양이다.
두 다리를 길게 뻗은 조철봉은 머리를 벽에 붙이고는 눈을 감았다. 섹스를 앞둔 이때가 가장 행복한 순간인 것이다. 심장은 평소보다 30%쯤 더 빠르게 뛰면서 기대감이 에너지를 생성시키고 있다. 그 에너지가 온몸으로 뻗어나가 활력을 일으킨다, 불끈불끈. 조철봉은 눈을 떴다. 지금까지 수백명의 여자를 섭렵해왔다. 별의별 여자를 다. 노소(老小), 장단(長短), 미추(美醜)를 불문했으며 귀천(貴賤) 따위가 어디 있는가? 나는 색귀(色鬼)다. 코끼리 위장에 개미 입이 붙여진 걸귀(乞鬼)가 지옥에 떨어져 고통을 받는 것처럼 나 또한 그렇게 벌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닐까? 내가 여자만 보면 열이 올라 덤벼드는 것도 그 때문이 아닐까? 나는 섹스할 때만 만족하며 그 시간 외에는 허전하고 외로운 데다 어떤 여자도 믿지 못한다.
물론 내 심성에도 문제가 있다. 나는 사기꾼, 내가 지어낸 거짓말을 내가 믿는 수준을 뛰어 넘어 그것을 비판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내 거짓말을 비판하는 나를 안 믿는 인류가 어디 있겠는가? 따라서 나에게 진심은 실종된 상태라고 봐야 될 것이다. 이 상황에서 정상적인 남녀 관계를 꿈꾸다니.
“술상요.”
하면서 영민이 술상을 들고 들어왔으므로 조철봉은 상반신을 세웠다.
“야아, 조오타.”
조철봉이 감탄했다. 소주에는 매운탕 안주가 입에 맞는 조철봉이다. 그런데 상 위에는 얼큰한 매운탕이 놓여 있다. 거기에다 돼지고기와 보쌈김치, 홍어회도 있다.
“술안주도 샀어.”
옆에 앉은 영민이 조철봉의 잔에 소주를 따르면서 말했다.
“홍어가 잘 삭았대, 먹어봐.”
영민이 말을 놓았지만 조금도 어색하지 않았다. 조철봉이 한 모금에 술을 삼키자 영민은 먼저 김치에 싸놓았던 삶은 돼지고기를 내밀었다.
“자, 아, 해.”
영민이 아, 하라면서 제 입을 벌린 순간 조철봉은 심장이 뚝 떨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내색하지 않고 뻐꾸기 새끼처럼 입을 짝 벌려 돼지고기 보쌈을 받아 먹었다.
“애주 학원까지 차 몰고 갔어.”
조철봉의 잔에 술을 채우면서 영민이 말했다. 그러나 시선은 들지 않는다.
“애주가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친구들 앞이라 아무 소리 않고 탔어. 계집애가 어른 같아.”
잔을 비운 조철봉이 영민의 잔에 소주를 따라 주었다. 그러고는 영민이 한 것처럼 돼지고기를 김치에 싸놓고 기다렸다. 영민이 홀짝 소주를 삼키더니 어깨를 흔들며 진저리를 쳤다.
“아, 해.”
조철봉이 보쌈 김치를 영민의 입에 내밀며 말했다. 그러자 영민이 입을 벌렸다.
“아.”
그순간 조철봉은 갈증이 났다. 욕정 때문이다.
고영민은 입에 가득 돼지고기 보쌈을 넣고 씹었다. 부풀려진 볼과 함께 움직이면서 조금씩 벌어졌다가 닫히는 입술을 보면서 조철봉은 숨을 들이켰다. 어느새 철봉이 곤두서 있었기 때문이다. 입이 바로 샘이었다. 입을 보면 샘을 연상할 수가 있는 조철봉이다. 그것이 맞는지 틀린지는 한번도 확인해보지 않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것이다. 확인까지 한다면 실성한 넘이다.
“술 많이 마셔두 돼?”
씹던 것을 삼킨 영민이 지나는 말처럼 물었지만 조철봉이 그 속을 모르겠는가? 조철봉이 옆에 앉은 영민의 허리를 당겨 안았다.
“걱정마.”
“설 수 있어?”
“응.”
“할 수 있어?”
“응.”
영민이 조철봉의 어깨에 머리를 붙였다.
“나, 지난 번에 전화로 할 때, 정상에 올랐어.”
“어, 그래?”
“그때부터 철봉씨하고 하고 싶어서 미칠 것 같았어.”
“나두 그래.”
“오늘 해줄거지?”
“그럼.”
“저기, 그거 만져봐도 돼?”
“응?”
조철봉이 미처 대답도 하기 전에 영민이 손을 뻗어 파자마 위로 철봉을 만졌다.
“엄마, 커.”
영민의 목소리가 떨렸다.
“잠깐.”
조철봉이 영민의 팔목을 잡아 떼어낸 동작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팔이 먼저 나간 것이다. 뇌가 지시를 하기도 전에 몸이 반사 작용으로 움직인 것이나 같다. 몸이 먼저 방어를 했다.
“영민아.”
조철봉이 의외인듯 눈만 크게 뜨고 있는 영민을 불렀다.
“응?”
“나는 5년 동안 섹스를 한번도 하지 않았어, 영민아.”
“나두 그쯤 돼, 철봉씨.”
영민의 목소리가 다시 떨려나왔다.
“널 아끼고 싶어.”
이 말도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던 말이었으므로 제 말을 제 귀로 듣고난 조철봉이 퍼뜩 머리를 들었고 다음 순간 얼굴 피부가 뻣뻣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고나서 팔과 등에 소름이 돋아났다. 그렇다. 16년 전에 그날 밤에도 이 말을 뱉은 것이다. 그런데 왜 갑자기 이 말이 튀어 나왔단 말인가? 영민이 머리를 들고 조철봉을 바라보았다. 이제는 입을 다물고 상체도 반듯하게 세워 차분해진 모습이었다.
“나는.”
다시 입을 떼었던 조철봉은 갑자기 가슴이 막히는 바람에 숨을 들이켰다가 방심했다. 그 사이에 눈에서 눈물이 쏟아져 내린 것이다. 갑자기 웬일인가?
“너를 사랑해, 영민아.”
그 눈물을 그대로 낭비할 조철봉은 아니다. 눈을 부릅뜬 조철봉이 눈물에 맞는 대사를 뱉었고 차분하게 마무리를 했다.
“그래서 아낄거야. 아주 오래오래 네 옆에 있으면서 아낄거야.”
“….”
“하지만 16년 전에 우리가 헤어졌던 것처럼 되지는 않을거야. 난 다른 남자가 되어 있으니까, 널 절대로 안놓쳐.”
“나두, 나두 안놓쳐.”
그때서야 영민이 서두르듯 대답했다. 조철봉은 이를 악물었다. 다른 여자들처럼 한번 하고 나면 감동이 없어질까봐 이런다고 어떻게 말한단 말인가? 다 업보다.
다음날 아침, 침대에서 눈을 뜬 조철봉은 먼저 구수한 된장국 냄새를 맡았다. 몇번 숨을 더 쉬었을 때 계란 프라이 냄새, 겉절이에 넣은 마늘 냄새까지 맡아졌다. 어젯밤에는 소주 세병을 둘이 나눠 마셨는데 한병쯤 마신 고영민은 침대에 눕자마자 자버렸다.
그래서 조철봉이 옷까지 벗겨줘야 했던 것이다. 술에 취했는지 취한 척했는지는 알수 없었지만 브래지어와 팬티만 남겨놓고 다 벗겨도 영민은 늘어진 채 움직이지 않았다. 불을 환하게 켜놓은 방안의 침대 위에 브래지어와 팬티 차림의 영민이 큰 대자로 누워 있었던 것이다. 영민의 몸은 고생을 한 때문인지 말랐다.
그러나 피부는 윤기가 흘렀으며 특히 아랫배 밑의 언덕이 탐스러웠다. 팬티에 가려져 있었지만 양쪽 끝으로 조금씩 삐져나온 숲을 보면서 조철봉은 여러번 심호흡을 했다. 그러자 숨을 들이쉴 때마다 심장에 감동이 차곡차곡 쌓이는 느낌이 들더니 마침내 시트로 몸을 덮어 주었을 때는 목까지 멨던 것이다.
“아저씨 깨셨나 보고 와.”
하고 영민이 말하는 소리가 들렸으므로 조철봉은 시트로 몸을 가렸지만 눈은 뜨고 기다렸다. 그때 방 안으로 애주가 들어섰는데 조철봉과 시선이 마주치자 눈웃음까지 쳤다.
“엄마, 아저씨 깼어.”
조철봉을 바라본 채 애주가 소리쳤다. 그러더니 조철봉에게 까닥 머리를 숙였다.
“아저씨, 안냐세요.”
“오냐.”
그러자 방문 앞으로 다가온 영민이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씻고 식사하세요.”
“어, 그래.”
“애주 학교 데려다 줘야 해요.”
“알았어.”
마치 10년쯤 같이 산 부부 같았고 애주도 전혀 내숭을 떨지 않았다. 그래서 회사에 출근한 조철봉의 기분은 그날따라 화창한 날씨처럼 맑고 밝았다. 조철봉은 비서실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들어온 박경택도 웃음띤 얼굴로 맞았다.
“어, 다녀왔어?”
“예, 사장님. 하지만.”
앞쪽에 앉은 경택이 조철봉의 눈치를 살폈다.
“오전 비행기로 다시 내려갈 예정입니다.”
“그래?”
“오늘은 중간 보고를 드리려고.”
경택이 가방에서 사진 뭉치를 꺼내 탁자 위에 놓았다.
“사모님이 남자를 만나고 있는 사진을 찍었습니다.”
“…….”
“남자는 같은 호텔에 투숙하고 있는데 김병문이라는 컴퓨터 판매점 사장입니다.”
“…….”
“나이는 33세이고 화곡동 천일아파트에 사는데 결혼했습니다. 세살짜리 아들이 있구요.”
조철봉은 한장씩 사진을 넘기면서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얼굴도 화보집을 보는 것처럼 큰 변화가 없다. 사진은 서경윤이 사내하고 같이 식사하는 장면 그리고 창 밖에서 망원렌즈로 찍은것 같은데 베란다에 둘이 어깨를 껴안고 서있는 장면도 있다. 경택의 말이 이어졌다.
“사모님은 영일이가 자면 옆방에 투숙하고 있는 이 놈한테 갑니다. 그러고는 아침에 돌아오지요.”
“…….”
“어제 낮에는 이 놈하고 같이 밖에 나갔다가 돌아왔습니다. 영일이는 할머니가 보구요.”
그 사진도 있다. 조철봉은 다시 심호흡을 했다. 이것도 업보다. 누구를 원망하랴?
(1199)야망 - 1
오후 3시가 되면 조철봉은 아무데서나 20분쯤 낮잠을 잔다. 소파에 기대 눕거나 사우나에서, 또는 차 안에서 잠깐 자고 일어나면 에너지가 충만되어 있는 것이 느껴지는 것이다. 그것이 이젠 습관이 되어서 밥 먹는 것하고 똑같이 빼놓으면 생체 균형이 깨질 정도가 되었다. 그래서 세상 없어도 낮잠을 잔다. 조철봉이 낮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3시40분이었다. 언제나 자기 전과 후에는 꼭 시계를 본다. 오늘은 25분을 잤다. 서경윤의 불륜을 보고받고 나서 조금 심란해졌기 때문인지 다른 때 같으면 2분쯤 후에 잠이 들었겠지만 오늘은 4분쯤 지나서야 잤다. 소파에서 일어난 조철봉이 몇번 목을 돌려본 후에 인터폰을 누르자 곧 미스 오의 목소리가 울렸다.
“네, 사장님.”
“최사장 기다리고 있나?”
“네. 기다리고 계십니다.”
“들어오시라고 해.”
최갑중이다. 갑중은 조철봉의 계열사중 3개의 사장을 맡고 있는데다 제 지분도 있어서 수백억 재산가가 되었다. 조철봉이 나눠주었기 때문이다. 조철봉의 장점이 있다면 비열한 방법으로 돈을 모았어도 돈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회장 타이틀을 싫어해서 여전히 사장이다. 잠시 후에 갑중이 방으로 들어섰는데 뭔가 들뜬 표정이었다. 10여년을 겪어온 터라 조철봉은 갑중의 눈빛만 봐도 좋은 일인지 그 반대인지를 안다. 이번에는 좋은 일 같다. 자리에 앉은 갑중이 말을 꺼냈다.
“사장님. 신의주 특구 아시죠?”
조철봉이 잠자코 시선만 주었지만 갑중은 기세를 떨어뜨리지 않고 말을 이었다.
“이번에 북한에서 신의주 특구를 완전히 자유무역지대로 개방한다는 겁니다. 제가 개성에서 김을수 비서를 만나 들었습니다.”
그때 마침 미스 오가 찻잔을 들고 방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갑중은 잔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조철봉은 이미 개성공단에 커다란 공장을 건설해놓은 상태였다. 중국 공장에서 기계를 떼어내 옮긴 것이다. 거기에다 백두산 관광단지의 독점개발업체로 선정되어 곧 호텔과 카지노가 오픈될 예정이었다. 그러니 신의주 특구에 신경을 쓸 여유가 있을 리 없다. 미스 오가 방을 나갔을 때 갑중이 눈썹을 모으고는 조철봉을 보았다.
“사장님, 신의주 특구의 장관을 한번 해보시지요. 김을수 비서가 밀어주겠다고 했습니다.”
“뭐야?”
조철봉이 눈을 치켜떴다. 김을수 비서는 비서국 소속의 경제담당 비서로 김정일 위원장의 최측근 중 하나인 것이다. 그가 밀어준다는 것은 곧 김정일 위원장의 내락을 받았다는 말이나 같다.
“야, 쓸데없는 소리 말아, 나 바쁘다.”
조철봉이 손을 저으며 말했다.
“장관이라면 정치를 해야 되는데 난 체질에 안 맞는다.”
“누구는 나면서 장관하라고 이마에 붙어 있습니까?”
굳어진 얼굴로 갑중이 반박했다.
“형님, 이런 기회가 또 올 줄 아십니까?”
“또 와도 안 해, 사람은 제 분수를 알아야 되는 거다. 난 이 정도면 끝까지 올라온 거야.”
“이 정도나 장관이나 같단 말입니다. 장관이 뭐 별거인 줄 압니까?”
“글쎄, 난 정치 못한다니까?”
“형님 스타일이면 정치 7단쯤은 될 겁니다. 누구처럼 9단은 못 되더라도 말이죠.”
“이런 젠장.”
했지만 조철봉은 나쁜 기색은 아니었다.
“신의주특구 장관이면 대한민국 장관보다 더 가치가 있단 말입니다.”
조철봉의 눈치를 살핀 최갑중이 말을 이었다.
“중립국 장관이 되는거죠. 대한민국하고 북한에다 양다리를 걸칠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러고는 갑중이 방안을 둘러보는 시늉을 하더니 목소리를 낮췄다.
“힘도 생기게 되구요. 그리고 또, 누가 압니까? 형님이.”
“내가 뭐?”
“남북한이 통일되면 형님이 통일 대통령 일순위가 되지 않겠습니까? 아마 형님 팬카페가 생기는 건 당근이고 형님책, 형님 노래가 나올 겁니다. 그리고.”
“야, 시끄러워.”
“누가 그랬습니다. 보이스, 비, 엠비시.”
“뭐? 엠비시? 엠비시에서 뭘 방송해?”
“아니, 그게 아니고 ‘보이들아 야망을 가져라’는 영어가 그렇습니다.”
“호텔 보이가?”
“아, 그 보이도 그렇고.”
짜증난 표정이 된 갑중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어쨌든 나쁜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개성공단의 공장도 그렇고 백두산 관광단지 사업도 걸려 있는 판국에 신의주특구 장관을 맡으면 여러모로 사업에 이득이 될 것 아니냐 그 말씀입니다. 더구나 김을수 비서가 밀어준다는데 사양한다면 말이나 됩니까? 형님답지않게 왜 이러십니까?”
“내가 무슨 장관을 하느냐 이 말이다. 내말은, 차라리 회장을 하라면 또 모르지만 말이야.”
“제가 형님 모시고 간다고 했습니다. 지금 개성에서 김을수 비서가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이 자식이, 내 허락도 받지 않고.”
“개성 공장도 보실겸 그냥 만나 보시지요. 그러고나서 결정하셔도 될 것 아닙니까?”
그래서 그날 오후 5시경에 조철봉은 갑중과 함께 자유로를 달려 개성으로 향했다. 자유로가 잘 뚫리면 개성은 신촌에서 한시간반밖에 안걸린다. 자동차 판매회사 영업사원에서부터 시작한 조철봉이다. 사기와 협박, 때로는 공갈에다 강도질까지 하면서 한걸음씩 목표를 향해 나아간 지 햇수로 7년, 7년 만에 중국과 베트남, 북한에까지 수십개의 사업체를 거느린 기업가가 되었으니 그야말로 입지전적인 인물로 불려도 될 것이다. 기업 경영에 대한 조철봉의 방식은 철저한 전문경영인에 의한 위탁 경영이었다.
회사를 인수하고 나면 전문 경영인을 선정해서 일체를 맡기는 것이다. 조철봉은 경영에 대한 나름대로의 신조가 있다. 그것은 자리에 맞는 처신을 한다는 것이다. 과장일 때, 부장일 때, 사장일 때의 사고와 행동이 달라져야 한다고 믿었으며 사장이 되면 부장때의 기득권을 과감히 버렸다. 그리고 빈 머리로 사장 직위에 맞는 일을 만들었다. 절대로 부장의 고유 업무를 건드리지 않았던 것이다.
수십개의 기업체로 나눠진 지금은 각 기업체의 사장에게 책임과 권한을 맡겨 놓은 상태다. 개성공단에 도착했을 때는 저녁 7시가 되어가고 있었다. 김을수에게 미리 연락을 해 놓은 터라 그들은 곧장 개성호텔의 한식당 ‘선죽교’로 들어섰다. 예약된 방에서 5분쯤 기다렸을 때 방문이 열리더니 김을수가 일행 한명과 함께 들어섰다.
“조사장님, 오랜만입니다.”
조철봉과는 구면인 터라 김을수가 웃음띤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그러고는 일행을 소개했다.
“이분은 정무원 경제담당 부총리 박훈 동무십니다.” 거물이다. 조철봉은 긴장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부총리 박훈이 조철봉에게 악수를 청하면서 웃었다.
“그런데 이제야 뵙게 되는군요.”
박훈은 50대쯤으로 보였는데 수려한 용모에 옷차림도 깔끔했다. 인사를 마치고 넷이 원탁에 둘러앉았을 때 음식이 나왔다. 한정식이다. 조철봉은 지금까지 먹어본 한정식으로는 전주의 한정식이 가장 좋았고 실제로도 그렇다고 들었다.
그런데 나온 한정식 상이 ‘전주 한정식’과 똑같았다. 전주에서 주방장과 음식을 수송해온 것이 분명했다.
“부총리 동무께서 조사장님 칭찬을 많이 하셨습니다.”
식사중에 먼저 김을수가 입을 열었다.
“조국에 꼭 필요한 분이시라고 말입니다.” 그 조국이 대한민국은 아닌 것 같았지만 조철봉은 고맙다는 표정을 지었다. 인정받는다는 사실이 확인되면 기분 좋은 것이다. 그때 박훈이 조철봉에게 말했다.
“조사장님, 우리는 신의주 특구를 싱가포르나 홍콩처럼 만들고 싶습니다. 아니, 세계 제1의 무역도시로 만들고 싶습니다.” 얼굴을 굳힌 박훈의 목소리에 열기가 느껴졌다.
“우리는 그럴 능력도 자신도 있습니다. 지도자 동지께서 적극 지원해 주신다고 한 이상 우리에게 불가능은 없습니다.”
조철봉은 막 좋아하는 게장의 게딱지에다 밥을 넣고 비빈 참이었다. 그런데 박훈의 열기에 몸이 굳어지면서 그 맛있는 것을 입에다 넣지 못하고 있다. 박훈의 목소리가 방을 울렸다.
“신의주 특구는 동서양을 잇는 무역, 금융의 허브가 될 것이며 민족의 자랑이 될 것입니다.”
염병하고, 속으로 중얼거린 조철봉이 마침내 수저를 내려 놓았지만 얼굴에는 감탄했다는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게딱지 안의 밥은 식어가는 중이다. 그때 박훈이 물었다.
“조사장님, 이 위대한 사업에 동참하실 의사가 있습니까?”
“저는 능력이 부족합니다.”
겸손한 표정이 된 조철봉이 머리까지 저으면서 말했다.
“저같은 인간은 그저 시킨 일이나 하고 지내는 것이 분수에 맞습니다. 부총리님.”
“우린 조사장님에 대해서 다 알아 보았습니다.”
박훈이 그렇게 말했으므로 조철봉이 머리를 들었고 최갑중은 긴장했다. 조철봉의 본색을 갑중만큼 잘 아는 인간도 없을 것이다. 박훈이 말을 이었다.
“맨손으로 단 5년 만에 이렇게 기업을 일으키신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조사장님이야말로 위대한 사업가이십니다.”
“저는.”
밥맛이 뚝 달아난 조철봉이 똑바로 박훈을 보았다. 박훈은 엄청난 오해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오해를 풀지 않으면 곤란하다. 위대한 사업가라니? 조철봉은 기대가 큰 만큼 실망도 비례한다는 사실을 체험해왔다. 만일 조금만 기대에 어긋나도 이 사람들은 더 크게 소동을 부릴 것이었다.
“부총리님, 제 본색이 사기꾼입니다.”
조철봉이 차분하게 말했다.
“별놈의 사기를 다 쳤지요. 공갈, 협박은 물론이고 강도질까지 해온 인간입니다, 제가요.”
엄지를 구부려 제 가슴을 가리켜보인 조철봉의 말에도 열기가 느껴졌다.
“그런 저를 위대한 사업가라뇨? 아주 엄청난 오해를 하신 겁니다요.”
그러나 요즘은 그런 사기는 치지 않는다. 조철봉이 누구인가? 제 거짓말을 비판할 수준의 사기꾼이다. 다 뒤가 있다.
그날 밤, 서울에 도착했을 때는 밤 12시가 되어갈 무렵이었다.
“형님, 어디 가실랍니까?”
차가 마포로 진입했을 때 최갑중이 물었다. 갑중은 서경윤이 지금 제주도에 가 있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왜?”
조철봉이 창밖에 시선을 준 채 묻자 갑중은 목소리를 낮췄다.
“저, 좋은 데가 있는데요.”
“뭐가?”
“거시기 말입니다.”
앞에 운전사 미스터 김이 앉아 있다고 해도 행동이 과장된 것 같았으므로 조철봉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거시기같은 소리하고 자빠졌네.”
“저기, 노래방입니다.”
“…….”
“요즘은 노래방이 끝내줍니다.”
“…….”
“일급 노래방은 일급 여자를 확보하고 있는데 수준에 맞게 파트너를 대줍니다. 한번도 실망시키지 않는다니까요.”
“너, 노래방 삐끼로 직업 바꿨어?”
“한시간만 놀다 가시죠. 형수님도 안계신데다 오늘은 기념할 만한 날 아닙니까? 곧 장관이 되실텐데.”
“시끄러워 짜샤.”
“장관이 되시면 그런 데도 함부로 못다니실테니까요.”
“내가 왜?”
“아무래도 그럴 것 아닙니까?”
“신의주 특구에서 룸살롱, 요정, 노래방 사업이 잘 될거다.”
조철봉이 화제를 바꿨다.
“그 사업은 대한민국을 따라갈 나라가 없지. 최고급 수준으로 만들어 놓으면 돈많은 중국인부터 일본인, 미국인들까지 몰려들거다.”
“그럼요.”
맞장구를 친 갑중의 목소리가 다시 은근해졌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한번 가보시죠. 일급 노래방인데 특구에 그렇게 해놓으면 장사 잘 될 겁니다.”
“그럼 가보기로 하지.”
“예, 형님.”
얼굴을 편 갑중이 미스터 김에게 지시를 했고 30분쯤 후에 차는 아현동 주택가 입구의 5층 빌딩 앞에서 멈춰섰다.
“이쪽으로.”
갑중이 앞장서서 빌딩 안으로 조철봉을 안내했다. 조철봉은 갑중을 따라 지하 계단을 내려가 청록이라고 씌어진 노래방 안으로 들어섰다. 노래방은 넓고 깨끗했다. 방음장치도 잘 되어서 밖으로 노랫소리가 흘러나오지 않았다. 카운터에 앉아 있던 여자가 갑중을 보더니 반색을 하고 일어났다.
“특 2호실로 가세요, 사장님. 모두 준비 해놓았습니다.”
조철봉은 잠자코 갑중을 따라 특 2호실로 들어섰다. 방은 룸살롱과 같았다. 벽에 대형 스크린과 노래방 기기가 붙어 있는 것이 더 화려했다. 소파는 진짜 가죽이었고 대리석 탁자 위에는 이미 양주와 안주가 가득 놓여 있었다.
“제가 몇번 왔지요.”
자리에 앉았을 때 갑중이 말했다.
“먼저 주인이 와서 고르라고 할 겁니다.”
그때 문이 열리더니 주인 여자가 들어섰다. 40대쯤으로 수수하게 차려 입었지만 세련되었고 몸매도 미끈했다. 조철봉의 시선을 받은 여자가 수줍게 웃었다. 웃는 얼굴도 매력이 있다.
“저, 오늘 여자들은 20대 후반의 주부인데 교양있고 날씬해요. 용모도 수준급이구요.”
주인여자가 말을 이었다.
“오늘은 좀 늦게 예약하셔서 걔들뿐입니다.”
주인여자가 방을 나갔을 때 조철봉이 최갑중을 보았다.
“주인여자가 괜찮군.”
그러자 갑중이 빙긋 웃었다.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조철봉의 시선을 받은 갑중의 목소리가 은근해졌다.
“이혼녀인데 고등학생 딸이 하나 있습니다. 손님들이 작업을 걸어도 넘어가지 않는다고 소문이 났습니다.”
“너도 그중 하나겠군.”
“에이, 저야.”
정색한 갑중이 머리를 저었다.
“제가 마담한테 껄덕거리지 않는 걸 형님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건 조철봉도 마찬가지다. 마담하고 친해지면 공급이 불성실해진다는 것이다. 프로 마담 같으면야 공과 사를 확실하게 구분하여 설령 손님하고 배를 맞췄다고 해도 파트너를 정성스럽게 골라 앉히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을 것이다. 좋아하게 된 남자 옆에 젊고 쭉쭉빵빵한 영계를 앉히려면 마담의 가슴이 찢어질 것 아닌가? 조철봉과 갑중은 그것을 염려했기 때문에 대를 위하여 소를 희생하는 심정으로 괜찮은 마담이 출현했을 때에도 인내심을 발휘해 온 것이다. 지금 갑중이 말한 내용이 바로 그것이다. 주인한테 당겼지만 앞으로 계속해서 공급되어올 파트너를 생각하고 작업을 걸지 않았다는 말인데, 조철봉의 줄기찬 시선을 받고 갑중이 마지못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예, 두어번 작업 걸었지요. 그런데 요리조리 핑계를 대고 빠져 나가더만요. 그래서 포기하고 파트너한테만 신경을 썼습니다.”
“이집 도우미가 좋긴 해?”
“예, 보시면 알겁니다.”
그때 방문이 열리더니 여자 둘이 들어섰는데 주인여자는 따라오지 않았다.
“여어.”
갑중이 반색을 하고 반겼으므로 조철봉은 멀뚱한 얼굴을 했다.
“어서 오시오.”
자리에서 일어나기까지 한 갑중이 여자를 맞았다.
“자, 앉으시죠.”
조철봉은 여자들이 수준급인 것을 대번에 알 수 있었다. 둘다 바지 차림인 것도 신선했고 금방 설거지를 마치고 온 것처럼 머리는 뒤로 묶은데다 화장하지 않은 얼굴에도 호감이 갔다. 갑중이 호들갑을 떠는 이유도 이해가 되었다. 이곳은 술집이 아니다. 거드름을 피우면서 서비스걸을 맞는 것처럼 자세를 잡으면 감점이 되는 것이다. 다소 과장을 하더라도 감탄하는 분위기를 조성하면 복 받는다. 여기서는 이차에 대한 주도권이 남자에게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주인의 영향력이 큰 것도 아니다. 그러니 괜찮다고 생각되면 잘 보여야 복 받는다. 조철봉의 옆에 앉은 여자는 갸름한 얼굴에 피부가 고왔고 섬세한 윤곽의 미인이었다. 미인의 기준이 시대나 나이, 개성에 따라 각각 달라서 조철봉의 눈에 미인으로 보인다는 말이다. 조철봉의 미인 기준은 적당한 체격, 마르지도 살찌지도 않은 몸매, 적당한 젖가슴, 둥글거나 갸름한 형의 얼굴, 반짝이는 눈, 앵두 같아도 좋고, 얇아도 좋은 입술이었으니 선택의 폭이 넓은 편이다. 그런데 파트너는 계란형 얼굴에 눈은 가는편에다 눈꼬리가 조금 솟았고 입술은 엷다.
“저, 이유진입니다”하고 여자가 자신을 소개했으므로 조철봉은 얼굴을 펴고 웃었다.
“나, 조철봉이요.”
이제 근심걱정은 다 달아났다. 신의주특구 장관도 다 필요없다.
노래를 부르면 스트레스가 풀린다고들 하지만 오히려 더 쌓일 때도 있다. 그 경우의 하나가 같은 노래를 반복해서 듣는 경우인데 바로 지금이 그렇다. 조철봉은 지금 갑중의 ‘돌아가는 삼각지’를 듣는 중이었는데 아마 수백번은 들었을 것이다. 처음에는 조철봉도 저 노래를 좋아했지만 갑중이 하도 불러 대는 바람에 지금은 삼각지로 지나가기도 싫을 정도가 되었다. 왜냐하면 갑중은 준음치쯤 되는데도 옆에서 충고하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인지 자기가 노래를 잘 부르는 줄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에 조철봉도 일조를 했으므로 지금 지적하면 갑중의 충격은 엄청날 것이었다. 조철봉이 머리를 돌려 옆에 앉은 이유진을 보았다. 유진은 갑중의 노래에 손뼉으로 박자를 맞춰주는 중이었다. 갑중의 파트너는 플로어에 나가 있었으므로 좌석에는 둘뿐이다.
“애는 어떻게 하고?”
불쑥 조철봉이 물었는데 그냥 해본 말이다. 아직 유진하고는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남편이 죽었는지 아이가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자 유진이 빙긋 웃었다.
“엄마가 봐주세요.”
“친정 엄마겠군.”
“네.”
다음 순서는 남편이고, 아이의 나이, 남편의 직장이 되겠지만 조철봉은 생략했다. 유진의 옆에 앉은 사내들은 모두 그것을 물어봤을 것이었다.
“거시기.”
조철봉이 흘끗 플로어의 갑중에게 시선을 주고 나서 유진에게로 돌아앉았다. 유진을 정면으로 보면서 조철봉이 물었다.
“노래 끝나고 이차 갈래?”
유진이 가만히 쳐다만 보았고 조철봉은 말을 이었다.
“딱 두시간, 유진씨가 좋다면 내일 아침까지.”
“…”
“물론 대가는 주고.”
그러자 유진이 다시 싱긋 웃었다. 플로어의 갑중은 ‘삼각지’의 이절을 부르는 중이었다.
“싫어요.”
“그래, 알았어.”
유진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머리를 끄덕인 조철봉이 상반신을 바로잡고 앉았다. 그러고는 술잔을 들었을 때 유진이 말했다.
“남자들은 꼭 그렇게 묻더군요.”
조철봉은 술잔만 보았고 유진의 말이 이어졌다.
“다 똑같아요. 나름대로 개성있게 말한다고는 하지만 내용이.”
“…”
“짐승 흥정하는 것 같아요.”
그러자 머리를 끄덕인 조철봉이 유진을 보았다.
“넌 남자의 그 기질 때문에 돈을 벌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그러고는 조철봉도 싱긋 웃었다.
“남자가 이차 욕심을 품고 있지 않다면 아예 여자 도우미를 부르지도 않을걸?”
“…”
“아마 부를 확률은 15% 정도일거야. 내가 장담한다. 여론조사를 해봐도 그 이상은 안될거야.”
“…”
“좀 친절하게 봐주지 그랬어? 대가를 물어봐 주기라도 했다면 분위기가 덜 서먹했을텐데. 하긴 그럴 만큼 여유가 있으면 아예 나가는 여자처럼 보일테니까 그것도 뭣 하겠구만.”
조철봉은 온몸에서 열기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끼고는 심호흡을 했다. 전의다.
“난 마누라가 교통사고로 죽고 나서 섹스를 3년동안 안했다. 이런 제의도 오늘 첨이다.”
그러자 이유진의 표정이 굳어졌다. 물론 고영민한테도 와이프 서경윤은 교통사고로 즉사를 했다고 말해 주었었다.
이번에 유진한테 또 경윤을 죽이게 되지만 죄책감은 없다. 대개 처음 만난 여자 앞에서 와이프에 대한 해설은 필수 코스의 하나라고 봐도 될 것이다. 나이살이나 퍼먹은 넘이 아직 미혼이라고 한다면 그 이유가 오히려 더 장황해지거나 잘못 손대면 한 것보다 못한 꼴이 되기 십상이다.
또한 지금은 남녀 불문하고 미혼이라고 해서 서로 개운하다는 시대가 아닌 것이다. 지금은 변했다. 즉 있어도 관계없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있다가 없는 인생으로 만드는 것이 일하기가 수월하다. 와이프가 죽었다면 제아무리 심장이 두꺼운 여자도 잠깐 눈길은 준다. 이혼은 쓸데없는 이야기가 길어질 가능성이 많다. 교통사고로 즉사한 것이 가장 간편하며 감동적이고 그 다음이 암이다. 빨리 죽는 암, 그래야 이야기가 빨리 넘어간다. 그때 최갑중이 노래를 마치고 돌아왔으므로 조철봉은 술잔을 들었다. 탐색전은 끝났다. 잽을 날려 거리도 측정했고 상대의 스텝도 봐 두었다. 시간은 넉넉하고 분위기도 내 편이다. 조철봉의 가슴은 투지로 끓어올랐다.
“형님, 노래를”하고 갑중이 권했지만 조철봉이 못들은 척 하고는 유진을 보았다. 그러자 눈치를 챈 갑중이 제 파트너를 재촉하더니 다시 같이 플로어로 나갔다.
이번에는 파트너가 노래를 부르고 갑중은 뒤에서 허리를 감싸 안았다. 이쪽에다 등을 돌린 자세인데다 스크린도 가로막고 있어서 방안은 어두워졌다. 갑중은 조철봉의 분위기를 만들어준 것이다. 파트너가 노래를 시작했을 때 유진이 머리를 돌려 조철봉을 보았다.
“제 남편이 4년전에 직장을 그만두었어요. 제가 노래방에 나온 건 석달 되었구요.”
조철봉이 머리만 끄덕였고 유진의 말이 이어졌다.
“석달동안 한번도 이차 안나갔어요. 그래도 한달 수입은 백만원쯤 되었죠.”
다시 끄덕인 조철봉을 향해 유진이 눈웃음을 쳤다.
어떤 손님은 백만원 줄게 이차 나가자고 하더군요. 제 손에 백만원짜리 수표를 쥐어 주면서요.”
“….”
“싫더군요.”
유진이 천천히 머리를 저어 보이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제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어요.”
“이해한다.”
길게 숨을 뱉은 조철봉이 그늘진 얼굴을 만들어 보이면서 말했다.
“그리고 난 그, 백만원짜리 수표를 너한테 쥐어준 그 남자도 이해한다.”
플로어에서는 파트너의 노래가 아직 일절도 안끝났고 조철봉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눈에 보이는게 없었겠지. 남자는 다 그래. 한번 싸고 나면 열놈이면 열놈 다 땅을 치고 후회를 하지만 말야.”
그러고는 조철봉이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테이블 위에 놓았다.
“나도 아까 그러려고 했거든. 너한테 이차 값으로 백만원 준다고 하려다가 말았다.”
“….”
“아마 나나 그 친구나 똑같은 심정일거다.”
조철봉은 소파에 등을 붙였다. 그러나 말과는 달리 유진에게 정나미가 떨어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지갑을 꺼낸건 쇼다.
조철봉은 이유진을 똑바로 보았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물욕이 있다. 위대한 인간 몇명을 빼고는 대부분 물욕에 굴복한다. 아니, 즐긴다고 표현해도 좋은 것이다. 모으는 재미, 꼭 재물만이 아니다. 우표나 수석, 또는 돈 안되는 조개껍질도 모은다. 자식도 모으고 책도 모으고 지혜, 기술, 조철봉이 입을 열었다.
“백만원이면 한달 일한 값을 몇시간만에 뽑는 셈이겠군. 이백이면 두달분을, 삼백이면 세달분을.”
그러고는 조철봉이 다시 길게 숨을 뱉었다.
“유진씨는 아직 세상 물정을 몰라서 그러는데 나같으면 자존심을 잠깐 버렸을거다. 그리고 기회를 잡는거지.”
“기회요?”
긴장한듯 얼굴을 굳힌 유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슨 기회 말씀이세요?”
“이곳을 벗어날 기회.”
“어떻게요?”
“이를테면 나같은 남자의 애인이 된다든가. 그래서 한달에 서너번 만나고 용돈을 받는거지.”
“…”
“이런곳에 나와서 매일 똑같은 노래 부르고 질벅이는 놈들 상대하다가 지쳐 돌아가는 것보다 백배 낫지.”
그러고는 조철봉이 쓴웃음을 지었다.
“물론 그놈을 만나는 동안 유진씨는 몸을 판다는 의식 때문에 자존심이 상하겠지만 내가 장담하는데.”
조철봉이 정색하고 유진을 보았다.
“여론조사를 해보자. 한달에 5백 받고 서너번 데이트를 할것인가, 아니면 한달에 스무번 노래방 나와서 백만원 벌것인가를 물으면 아마.”
말을 멈춘 조철봉이 술잔을 쥐었을때 갑중 파트너의 노래가 끝이 났다.
“형님, 저는 이차 가기로 했습니다.”
자리로 돌아온 갑중이 파트너의 어깨를 감싸 안으면서 호기있게 말했다. 다분히 의도적이다. 갑중이 누구인가? 조철봉의 분위기가 어딘지 지지부진해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호텔 예약 해 놓을까요?”
갑중이 물었을때였다.
“그러세요.”
유진이 대답 했으므로 조철봉은 눈을 크게 떴다. 그러나 유진은 시선을 마주치지 않고 조철봉의 잔에 술을 따랐다.
“그럼 그렇게 하지요.”
갑중이 힐끗 조철봉에게 시선을 주더니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노래 안하실거예요?”
하고 갑중의 파트너가 조철봉에게 물었는데 어색한 분위기를 때우려는 것이었다. 갑중의 파트너는 단정한 용모에 분위기도 차분했다. 용모는 유진에게 딸렸지만 보면 볼수록 점수가 높아지는 유형이었다. 갑중도 제법 여자 볼줄을 아는터라 만족한 표정이었다.
“자, 그럼 다시 내가 한곡.”
호텔 예약을 마친 갑중이 다시 파트너를 끌고 일어섰다. 이제 조철봉에게 마무리 작업을 하라는 표시였는데 오늘은 갑중이 고생을 하는 편이었다. 전에 이런적이 없는 것이다. 조철봉은 갑중이 플로어로 나갔을때 옆에 앉은 유진의 시선이 의식되었다. 지금 유진은 마지막 계약 확인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조철봉이 던진 조건은 월 5백에 서너번 만나는 것이었다. 조철봉이 머리를 돌렸을때 기다리고 있던 유진의 시선과 마주쳤다.
“어때? 조건을 말해봐.”
조철봉이 유진에게 먼저 제시 할것을 요구했다. 이것은 자존심을 버려야 말할 수 있는 내용일 것이었다.
“저, 말씀하신 대로 5백 주세요.”
이유진이 또렷하게 말했다. 조철봉에게 시선을 준 눈동자가 흔들리지도 않는다. 플로어에서는 갑중이 다시 ‘돌아가는 삼각지’를 부르고 있었지만 이번만큼은 지겹지 않았다. 노래를 구성지게 부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조철봉의 시선을 꽉 잡은 채 유진이 말을 이었다.
“한 달에 몇번 만날 것인가는 사장님이 정해 주세요. 그리고 외박은.”
잠시 생각하는 시늉을 했던 유진이 결심한 듯 말했다.
“한 달에 세번 정도만요. 그 이상은 곤란해요.”
“알았어.”
머리를 끄덕인 조철봉이 차분해진 얼굴로 유진을 보았다.
“그럼 계약은 내일 하기로 하지.”
그러고는 조철봉이 지갑에서 10만원권 수표 석장을 꺼내더니 유진에게 내밀었다.
“이건 수고비야 받아.”
수표를 받은 유진이 의아한 표정으로 조철봉을 보았다.
“저, 호텔은요?”
“취소하면 돼.”
“그럼 오늘은 그냥 가시게요?”
“내일 정식으로 계약하면 만나기로 하지. 지금은 싫어.”
조철봉이 흘끗 갑중의 등에 시선을 주고나서 말을 이었다.
“전화번호 남겨놓고 먼저 나가.”
“네.”
머리를 끄덕인 유진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그럼 먼저 나갈게요.”
유진이 방을 나갈 때 노래를 부르던 갑중이 보았다. 노래를 부르다 그친 갑중이 자리로 돌아오며 물었다. 노래방 도우미는 좀처럼 방 밖으로 나가지 않는 것이다. 더블은 거의 없다.
“형님, 무슨 일입니까?”
“보냈다.”
“저런.”
낭패한 표정의 갑중이 털썩 자리에 앉더니 옆에 앉는 파트너를 보았다.
“넌 그 분하고 같이 호텔에 가.”
“저, 혼자요?”
“그래, 이자식아.”
이맛살을 찌푸린 조철봉이 나무랐다.
“언제는 내가 없으면 못했냐?”
“그래도 저 혼자만.”
“너, 먼저 나가. 그리고 시간 남았으니까 주인 좀 오라고 해.”
“아아, 예.”
그때서야 감이 잡힌다는 듯이 갑중이 서둘러 일어섰다. 그러고는 파트너의 손을 쥐고 말했다.
“그럼 형님, 먼저 가겠습니다.”
“주인이나 빨리 보내.”
“예, 형님.”
갑중이 나가고 나서 10분쯤 시간이 지났을 때 주인여자가 들어섰다. 그 10분간 갑중이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 여자를 설득했으리라고는 조철봉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여자는 잠자코 앞쪽에 앉았는데 시선을 내리고는 어색한 듯이 얼굴에 엷은 웃음기가 떠올라 있었다.”
“부르셨어요?”하고 탁자를 내려다보며 묻는 순간, 조철봉은 목구멍이 막히는 느낌을 받았다. 욕정이다. 조철봉은 한 번도 이런 충동을 일으키는 여자를 놓쳐 본 적이 없다. 그리고 그 여자도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저기요.”
여자가 먼저 말을 열었다.
“아까 그 파트너, 그냥 보내신 거는 잘하셨어요. 걔가 아주 여우거든요.”
그때 여자가 시선을 들고 조철봉을 보았다. 입술이 단정하고 콧날이 귀엽다. 벌써 조철봉의 머릿속은 여자의 샘을 떠올렸다.
조철봉의 시선을 받은 여자가 웃음띤 얼굴로 물었다.
“혹시 백만원 이야기 하지 않던가요?”
“백만원? 그게 무슨 말이오?”
“예, 끝나고 이차 나가자면서 백만원짜리 수표를 주었다는 스토리요.”
“으음.”
“했어요?”
“하던데.”
그러자 여자는 짧고 맑게 소리내어 웃었다. 웃음소리가 지금까지 두시간 가깝게 소음으로 가득차 있던 방안에 쫙 퍼졌다가 사라졌다. 그 어떤 노래보다 감동적인 울림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셨어요?”
여자가 물었으므로 조철봉은 헛기침을 했다.
“정나미가 떨어집디다.”
“그러시겠죠. 그런데.”
웃음띤 얼굴로 여자가 말을 이었다.
“대상을 보고 그 가격이 높아졌다가 낮아졌다가 하거든요. 전 걔가 사장님한테 백만원 부를 줄 알았죠.”
“그렇다면.”
“사장님 수준을 최고급으로 본거죠. 세상에 이차값으로 백만원 이상을 내놓을 미친놈은 없거든요.”
“…….”
“제가 듣기로는 삼십만원에서 백만원이에요. 열번에서 일고여덟번은 흥정이 되어서 이차 나갔는데 오늘은 안되었네요.”
“…….”
“걔 나갈때 보니까 아쉬운 얼굴이던데. 이차 가시지 그랬어요? 백만원 다 안줘도 될텐데.”
“당신은 어때요?”
불쑥 조철봉이 묻자 여자는 소리없이 웃었다. 흰 치아가 고르게 드러났고 조철봉의 목이 메었다.
“지금 흥정 하시려는 건가요?”
“당연하지, 내가 내놓을게 뭐가 있다고? 그 방법이 가장 정직하고 간단하지.”
“얼마 부르실건데요?”
“당신이 불러봐요.”
“백만원.”
그러고는 여자가 다시 깔깔 웃었다. 웃음소리가 방음 장치가 잘된 방에서 메아리를 쳤고 여자는 말을 이었다.
“흥정 해보세요. 어서.”
“아니.”
머리를 저은 조철봉이 지갑을 꺼내 백만원권 수표 한장을 집어 여자에게 내밀었다.
“자, 받아요.”
“농담이었어요.”
여자가 상반신을 뒤로 물리는 시늉을 하면서 조철봉을 보았다. 얼굴에는 아직 웃음기가 가시지 않았다.
“죄송해요. 사장님. 장난쳐서.”
“그럼 여기서 해줘도 돼.”
수표를 내려놓은 조철봉이 정색하고 여자를 보았다.
“옷 다 벗지 않아도 돼. 내 얼굴 바로 보지 않아도 되고, 팬티만 내리면 내가 뒤에서 할테니까.”
“…….”
“당신도 엉덩이만 내밀고 엎드려서 노래 화면만 들여다 보면 돼.”
“…….”
“10분이면 끝날거야. 당신이 좋아한다면 한시간도 끌 수 있지만 말야.”
“저, 그만 나갈게요.”
하고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섰을 때 조철봉이 쓴웃음을 지었다.
“당신, 그 여자하고 똑같구만.”
여자가 몸을 굳히더니 눈만 크게 떴고 조철봉이 말을 이었다.
“아니 수준이 더 낮아. 몸도 그렇지만 행동까지. 말만 던졌다가 도망치는 위선자 같으니, 솔직히 당신은 백만원 가치도 안돼.”
“죄송해요.”
얼굴을 굳힌 여자가 문으로 다가가더니 손잡이를 쥐고 머리를 돌려 조철봉을 보았다.
“전 그런 흥정에 익숙하지 못해서요.”
“섹스는 잘 해요?”
“실례할게요.”
“하고 싶지는 않아요?”
조철봉이 다그치듯 물었을 때 문을 열었던 여자가 다시 닫았다. 그러고는 문에 등을 붙인 자세로 조철봉을 보았다. 이제는 긴장한 표정이었다. 입술은 굳게 닫혔고 눈초리가 조금 치켜 올라갔다.
“내가 혼자 산다고 무시하지 마요.”
여자가 또박또박 말했다.
“이런 일을 한다고 함부로 대하지도 마시고.”
“나도 와이프한테 이혼당하고 이런 일은 처음이오.”
이제는 조철봉도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가정에 불성실했고 바람까지 피우는 바람에 이혼 당했는데 5년 동안 혼자 살면서 나도 숱한 사연을 겪었지요.”
여자는 똑바로 조철봉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지금 하는 말을 빠뜨리지 않고 듣는 중이었다. 아무리 주의가 산만하고 머리가 나쁜 학동이라도 이런 분위기에서 이런 내용은 귀에 쏙쏙 들어오게 된다. 이번에는 이혼 당한 것으로 줄거리를 만든 것은 교통사고나 암보다 그쪽 분위기가 더 어울렸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순발력이 필요하다. 조철봉이 말을 이었다.
“내가 걔하고 이차 안나간 건 당신을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이오. 내가 당신한테 대뜸 흥정을 한 것도 무시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오히려 더 정직한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
“난 이 날 이 때까지 거짓말을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오. 내가 지금 한마디라도 거짓말을 했다면 돌아가신 아버지한테서 천벌을 받을 겁니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그러실 리가 있겠는가? 그러나 얼른 들으면 돌아가신 아버지와 천벌이란 단어가 입력되어 상당한 신빙성을 줄 것이었다.
“그래, 난 지금 섹스에 굶주린 상태요. 그래서 솔직하게 그렇게 말했죠. 하지만.”
“됐어요.”
말을 자른 여자가 눈을 크게 뜨고는 조철봉을 보았다.
“그럼 오늘밤 제 집에 갈수 있어요?”
“당연히.”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조철봉이 대답했다. 침까지 삼킨 조철봉이 지긋한 시선으로 여자를 보았다. 그야말로 예상밖이다. 오늘은 인상만 깊게 심어놓고 다음날을 기약할 계획이었는데 이것은 그야말로 돌아가신 아버지가 도와주신 것이 분명했다.
“갈 수 있지요.”
“비밀 지키실 수도 있지요?”
“지킵니다. 세상 종말이 올 때까지.”
“마침 아이가 한달간 어학 연수를 가서 혼자 있어요.”
그러더니 여자가 문의 손잡이를 다시 쥐면서 말했다.
“길 건너편에 ‘타임’이라는 카페가 있어요. 거기서 기다리세요. 20분쯤 후에 나갈테니까.”
“기다리죠, 밤이 샐 때까지라도.”
“흐흥.”
가볍게 웃은 여자가 아직도 테이블 위에 놓인 수표를 눈으로 가리켰다.
“그건 넣어 두세요.”
“이따 드리지.”
그러자 여자는 잠자코 방을 나갔다.
“감사합니다, 아버님.”
문이 닫혔을 때 조철봉의 입에서 저절로 나온 말이다.
꿩대신 닭이라는 말이 있지만 이 경우는 라면 먹으려다 한정식 상을 받은 꼴이 되었다. ‘타임’카페로 들어와 앉은 조철봉은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커피를 시켜 마셨다.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고 해도 이런 오늘밤이 있다면 그런 대로 지낼만은 할 것이다. 사과나무는 못 심는다. 조철봉의 기준에서 가장 행복한 죽음은 바로 복상사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우연히 읽었지만 미국의 부호 록펠러 가문의 넬슨 록펠러가 복상사를 했다는 이야기를 읽고는 얼마나 감동을 받았는지 모른다. 복을 받은 것이다. 죽고 나서 무슨 말을 듣는 건 다 필요없다. 조철봉이 커피를 다 마셨을 때 카페 입구로 들어서는 주인여자가 보였다. 바바리 코트 차림이었는데 조철봉과 시선이 마주치자 어색하게 웃었다.
“가요.”
다가선 여자가 앉지도 않고 말했다.
“피곤해요.”
새벽 두시 반이었다. 두 말 않고 자리에서 일어선 조철봉이 카페 밖으로 나왔을 때 여자가 팔짱을 끼었다.
“제 이름은 홍지숙이에요.”
여자가 앞쪽을 본 채 말했다.
“아아, 새벽 공기가 맑네, 시골 공기는 얼마나 맑을까?”
그순간 조철봉은 마음을 굳혔다. 이럴 때 기분을 내지 않으면 언제 내겠는가?
“그럼 시골 공기를 마시러 갑시다.”
조철봉이 지숙의 팔을 낀 채 이끌었다.
“내 별장이 용인에 있어요. 여기서 한시간 반 거리밖에 안돼.”
“별장요?”
하면서 지숙이 조철봉을 올려다 보았다. 가로등 빛에 반사된 지숙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그 자세로 3, 4초 동안 망설이던 지숙이 이윽고 머리를 끄덕였다.
“좋아요, 설마.”
“설마, 뭘?”
“날 납치하려는 건 아니죠?”
“최갑중이가 단골이라며?”
“최사장님요? 그렇죠.”
“그놈이 내 이야기 안합디까?”
“아까 가실 때.”
“뭐라고?”
“형님으로 모시는 거물이라고, 그룹 회장님이시라던데.”
“내가 거물이기 때문에 따라 나온 건가?”
“천만에요.”
그러면서 지숙이 팔까지 풀었다가 풀석 웃더니 다시 끼었다.
“필이란 게 있죠? 느낌.”
“내가 보기에는 당신이 색녀야.”
“색녀?”
눈을 동그랗게 떴던 지숙이 다시 풀석 웃었다.
“어째서요?”
“내 느낌이, 필이지.”
조철봉이 다가오는 모범택시를 세우고는 지숙과 함께 올랐다. 목적지를 말해준 조철봉이 옆에 앉은 지숙의 어깨를 당겨 안았다.
“난 요즘 섹스한 지가 오래 되었는데.”
지숙의 귀에 입술을 붙인 조철봉이 속삭였다.
“한 반년쯤 된 것 같은데.”
“거짓말.”
상반신을 비튼 지숙이 간지러운 듯 머리를 떼었다가 다시 붙였다,
“어떻게 반년이나 참아요?”
“지숙씨는?”
“여자는 오래 참을 수 있어요.”
“거짓말.”
조철봉이 지숙의 귓불을 입술로 물었다가 놓았다.
“하루에도 여러 놈이 유혹할 텐데.”
“내가 걔처럼 그렇게 헤프게 보여요?”
그러면서 지숙은 손을 조철봉의 허벅지 위에 올려놨다.
홍지숙이 손바닥으로 조철봉의 허벅지를 쓸었다.
“저도 꽤 되었어요. 한 일년쯤.”
손바닥이 허벅지 안쪽까지 밀려왔다가 돌아갔으므로 조철봉은 길게 숨을 뱉었다.
“생각은 났지만 참았죠. 매일 여자애들 노는 꼴을 보면 역겹기도 해서.”
“나하고 비슷한데요.”
조철봉도 손을 뻗쳐 지숙의 허벅지 위에 손바닥을 올려놓았다. 그러고는 코트를 젖히고 스커트까지 치켜 올리자 지숙이 몸을 비틀었다.
“아이, 저기.”
지숙이 눈으로 운전사를 가리켰다.
“참으세요.”
낮게 속삭였지만 운전사가 들은 모양이었다. 갑자기 라디오 볼륨이 높아졌으므로 조철봉은 빙긋 웃었다.
“좋아요, 참지. 하지만.”
조철봉이 지숙의 손을 잡아 자신의 철봉 위에 놓았다.
“어머.”
놀란 지숙이 손을 움츠렸지만 떼지는 않았다.
“만져봐요, 지숙씨.”
라디오 볼륨을 키운 차 안에는 노랫소리가 울리고 있었으므로 조철봉이 지숙의 귀에 대고 거침없이 말했다.
“지숙씨를 기다리고 있어.”
“어머, 커.”
지숙이 철봉을 끝부분까지 쓸어내리며 말했다.
“진짜 크네요.”
“그럼 가짜인 것 같아?”
“이게 어떻게.”
“어떻게 다 들어가느냐구?”
“아이. 참.”
지숙이 눈을 흘기면서도 철봉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전 남편 물건은 작았던 모양이지?”
조철봉이 귀에 대고 묻자 지숙이 상반신을 붙이더니 철봉을 꽉 쥐었다가 놓았다. 그때 조철봉의 손은 지숙의 팬티를 쳐들고 숲속을 향해 더듬으며 전진하는 중이었다.
“아.”
조철봉의 검지가 샘 끝에 닿았을 때 지숙의 입에서 짧은 신음이 터졌다.
“아아, 그만.”
하면서 지숙은 이맛살을 찌푸렸지만 몸은 반대로 나갔다. 손가락의 활동이 용이하도록 두 다리를 벌린 것이다. 몸이 반대로 움직였다. 덕분에 조철봉의 검지는 거침없이 샘 안으로 진입했다.
“응.”
하고 다시 지숙의 입에서 신음이 새나왔다. 차 안의 음악은 꽝꽝 울렸으며 친절한 운전사는 모처럼의 장거리 손님을 위하여 어느새 백미러도 뒤집어 놓고 있었다. 팁을 두둑하게 줘야 마땅한 행위였다.
“아유, 그만.”
지숙이 헐떡이며 말했을 때 숨결에서 단감 냄새가 났다. 조철봉이 좋아하는 냄새였다. 여자가 달아오르면 꼭 이 냄새가 나는 것이다. 샘 안으로 들어간 조철봉의 검지는 그야말로 주인 잘만나 호강하는 머슴 꼴이었다. 왜소한데다 머리통도 없는 주제에 노는 꼴은 귀동냥 눈동냥으로 배운 터라 좌우, 상하 뒤집기를 하는가 하면 깜냥에 강약과 고저, 시간차 공격까지 하려고 들었다.
“아아아아.”
그러나 이게 웬일인가? 그 왜소한 검지놈의 지랄 염병짓만으로도 지숙이 온몸을 오그리면서 올라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차는 아직 용인까지 가려면 멀었다. 심호흡을 한 조철봉이 친절한 운전사의 뒤통수를 보았다.
“기사님, 잠깐 여기서 섭시다.”
퍼뜩 머리를 든 운전사가 길가에 차를 세웠는데 이곳은 한적한 국도였고 차량 통행도 뜸했다.
“예, 손님.”
하고 나이든 운전사가 머리를 돌려 조철봉을 보았다. 수전산전 다 겪은 모범택시 운전사여서 시선은 아래쪽으로 내려가지 않았다.
“저기, 우리가 급해서 그러는데.”
조철봉이 정색하고 말하고는 지갑에서 10만원권 수표 한장을 꺼내 내밀었다.
“택시비는 별도고 이건 팁입니다. 그러니까 잠깐 자리를 비워 주실 수 있겠어요?”
“아, 그럼요.”
예의 바르게 대답부터 하고 난 운전사가 두손으로 수표를 받았다.
“히타 켜 드리지요. 그리고 실내등은 꺼 놓으시는 것이.”
운전사가 시선을 위쪽으로 한 채 말을 이었다.
“제가 뒤쪽에서 차 봐 드릴테니까 미등만 켜 놓으시면 됩니다.”
“이거 밖은 추울텐데.”
미안해진 조철봉이 다시 수표 한장을 꺼내 내밀었다.
“미안합니다. 나도 이런 일이 첨이라.”
“천만의 말씀입니다.”
시선을 올린 채 눈동자도 굴리지 않고 말하는 운전사는 마치 장님 같았다. 다시 수표를 받은 운전사가 말을 이었다.
“거시기 끝나시면 크락숑 울려 주십시오. 사장님.”
“그러지요.”
운전사가 실내등을 끄더니 밖으로 나가자 지숙이 큭큭 웃었다. 실내등은 껐지만 계기판의 불빛이 비쳤고 지나가는 차량 불빛이 들어와 지숙의 웃는 얼굴이 잠깐 드러났다가 지워졌다.
“챙피해 죽는 줄 알았네. 증말.”
“뭐가?”
“운전사한테 말야.”
지숙이 어느새 반말을 했다.
“세상에 어디 이런 법이 있어?”
“왜?”
“택시 타고 가다가 길가에서 운전사 내리라고 하고는.”
“급하면 버스도 세워놓고 할거다.”
“나아, 참.”
운전사하고 엄중한 상담을 하는 동안에 제각기 몸이 떨어져 있었으므로 조철봉이 먼저 지숙의 허리를 당겨 안았다.
“밑에만 벗어.”
“뒷자석에서 하게?”
지숙이 건성으로 묻더니 엉거주춤 일어나 스커트를 벗었다.
“어떻게 하려고?”
하면서 다시 팬티를 내렸는데 그때 차가 지나가면서 지숙의 아랫도리가 잠깐 비쳤다가 없어졌다.
“당신이 내 위로 올래?”
조철봉이 앉은 채 바지를 끌어 내리면서 물었다.
“이런 곳에서 이런 자세로 해봤어?”
“아니.”
어느새 하체는 알몸이 된 지숙이 조철봉의 위로 앉으면서 말했다.
“첨이야, 난생 첨.”
“흥분돼?”
“응, 막 떨려.”
하면서 지숙이 조철봉의 철봉을 두손으로 쥐었다.
“나, 지금 급해. 철봉씨, 넣어도 돼?”
“응, 운전사가 추워서 떨테니까.”
“나, 금방 할거야.”
지숙이 철봉을 넣으려고 엉덩이를 들면서 서둘렀지만 세번이나 빗나갔다. 서로 자세가 어긋났기 때문이다.
“내가 할테니까 가만 있어.”
조철봉이 말하자 지숙은 말 잘 듣는 아이처럼 가만 있었다. 꼼짝도 않는다.
조철봉은 두 손으로 지숙의 허리를 들어 올린 다음 철봉을 겨누었다. 그때는 지숙이 철봉에서 손을 떼고는 두 손을 뒤쪽 시트에 걸쳐 놓은 상태였다.
“어서.”
무릎으로 앉은 지숙이 혀로 입술을 핥으면서 말했다. 차 한대가 반대쪽으로 지나가는 바람에 지숙의 몸이 환하게 비쳤다가 지워졌다. 조철봉은 쥐고 있던 철봉을 지숙의 샘 끝에 붙였다. 정확하게 붙인 것이다. 그 순간을 학수고대하고 있던 지숙이 엉덩이를 내리면서 앉았으므로 철봉은 샘 안으로 진입했다.
“아악.”
신음은 지숙의 입에서 터져나왔다.
“아유 좋아.”
철봉이 반쯤밖에 진입하지 않았는데도 지숙이 소리쳤다.
“미치겠어.”
지숙의 샘은 마악 용암이 배어나오기 시작하는 단계였다. 그래서 느낌이 뻑뻑했지만 항상 넘치는 샘만을 만났던 조철봉에게는 신선한 감흥이 일어났다.
“아유, 여보.”
이제 엉덩이를 치켜들면서 지숙이 소리쳤다. 지숙은 이른바 말이 많은 유형이었다. 지금까지 수천번 섹스를 했지만 한번도 같은 느낌을 겪은 적이 없었던 조철봉이다. 같은 여자와의 섹스도 마찬가지, 같은 적이 한번도 없었다.
“아아아.”
빼는 동안에도 지숙이 비명같은 신음을 질렀다. 한번 들어갔다가 나오는 동안에 대여섯번의 말과 십여개의 단어를 뱉은 것으로 추정되었다. 조철봉은 지숙의 허리를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 알맞게 살이 오른 허리는 탄력이 있었고 살집이 움켜쥐기에 적당했다. 조철봉은 힘을 주어 지숙의 몸을 좌우로 비틀면서 내려놓았다.
“엄마.”
지숙의 입에서 그런 외침이 터져나왔다. 처음에는 차 안이라 신음을 가만가만 뱉더니 지금은 컸다.
“아유, 자기야, 나 죽어”하면서 지숙이 엉덩이를 마구 돌렸으므로 조철봉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건 개판이다. 이대로 둔다면 다 오르지도 못하고 터져버릴 것이다. 터지는 건 매일반 아니냐고 하는 넘이 있다면 고등학교부터 다시 다녀야만 한다. 그것은 오형제만 있으면 되지 않느냐고 하는 말이나 똑같다.
“가만.”
조철봉은 지숙의 허리를 힘주어 쥐면서 몸을 고정시켰다. 지숙이 헐떡이며 머리를 들고 물었다.
“왜, 왜?”
“이러면 안돼. 내가 할 테니까”하면서 조철봉이 지숙의 몸을 옆으로 눕혔다. 뒷좌석은 여유가 있지만 몸을 다 눕히는 건 무리다. 그러나 한쪽 다리를 아래로 내린 자세가 더 자극을 준다는 것을 알만한 사람은 안다. 조철봉은 비스름한 상위 자세가 되어서 이번에는 천천히 진입했다. 각도와 힘을 충분히 조정할 수 있었으므로 마음에 여유가 생겼다.
“아아아.”
지숙의 신음이 더 크고 높게 울린 것은 쾌감의 척도일 것이다. 샘은 이제 용암으로 넘쳐 흘렀으며 온몸은 열기에 떠 있다.
“아아, 너무 좋아”하고 지숙이 엉덩이를 또 들썩였다가 조철봉이 허리를 단단히 조이는 바람에 미수에 그쳤다. 조철봉이 익숙하게 지숙을 절정으로 끌어올렸다.
“아아.”
지숙의 신음이 이제는 짧고 굵게 변해진 것은 말할 여유도 없이 집중되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대저, 섹스 도중에 말을 주고받는 장면들이 가끔 멋진 분위기로 묘사가 되지만 조철봉의 기준에서 본면 불성실한 태도였다. 넣으면서 쌀값 물어보고 빼면서 배추값을 듣는다는 분위기는 바람직하지가 않은 것이다. 놈자가 혼자서 불경을 외거나 애국가를 거꾸로, 또는 교가를 부르면서 혼신의 노력을 하는 경우야말로 아름답다. 희생정신의 귀감이 아닌가?
모범택시 안은 신음과 열기로 가득차 있었다. 조철봉도 땀이 났다. 운전사가 친절하게도 히터까지 틀어놓고 나간 바람에 숨까지 막혔다.
“아유우.”
하고 지숙이 엉덩이를 치켜 올리면서 절정을 맞았을 때는 운전자가 나간지 10분쯤 되었을 때였다.
“나죽어.”
지숙의 절정은 물론 어느 다른 여자와도 달랐지만 유별났다. 얼굴이 눈물과 땀으로 범벅이 되었으며 울다가 까무러친 것처럼 늘어지기를 서너번이나 반복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한사코 조철봉에게 매달렸다. 몸을 떨면서 가쁜 숨을 뱉았으며 숨소리는 신음이 섞여 나왔다. 그러나 조철봉이 상위 체위로 바꿨을 때부터 말은 쏙 들어갔다. 조철봉도 몸을 떼지 않은 채 지숙이 여운을 즐기도록 기다렸다. 그 기다린 시간이 5분 정도나 되었다. 오른 시간에 비해 여운을 가라앉힌 시간이 상대적으로 긴 것은 곧 성급하게 올랐다는 결론이 될 것이다. 맛있게 섹스를 하면 주식과 후식의 비율이 6대1 정도면 된다. 즉 30분에 5분, 1시간이면 10분. 그런 경우에는 조철봉이 발포를 하지 않았어도 개운했다. 물론 지금도 조철봉은 포탄을 아껴놓은 상황이었다. 10분 운동에 발사라니 택도 없는 일이었다. 이윽고 지숙의 숨이 가라앉았을 때 조철봉은 몸을 떼고 옷을 입었다. 지숙이 꾸물거리며 일어났으므로 팬티를 찾아주었더니 외면하고 받았다. 그러나 어둠속이었지만 수줍은 기색이 역력했다.
“요란하게 하던데.”
마침내 조철봉이 한마디 했다.
“그런데 아주 서툴더구만.”
“아이.”
하면서 지숙이 조철봉의 어깨를 주먹으로 쳤다. 여자는 대개 이런 말을 좋아했다.
“그런 얘기 그만해.”
“섹스하면서 이야기 하는 버릇은 어떻게 배운거야?”
물으면서 조철봉은 창문을 열었다. 그러자 찬바람이 휘몰려 들어오면서 정신이 났다.
“어쨌든 여기서 준비운동은 했으니까 메인 게임은 별장에 가서 하자구.”
조철봉이 말하자 지숙이 놀란듯 눈을 둥그렇게 떴다.
“또?”
“또라니? 난 하지도 않았어.”
“그게 무슨 말야?”
“쏘지도 않았다구.”
그러고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 조철봉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운전사를 찾는 것이다. 그러자 길 아래쪽에서 반짝이는 불빛이 보였다. 담뱃불이다.
“기사님!”
조철봉이 소리쳐 부르자 운전사가 다가왔다. 와락 미안한 마음이 솟구친 조철봉이 머리를 숙여 절을 했다.
“죄송합니다. 그저 미친놈 보았다고 생각하시고 넘겨 주십시오.”
“아닙니다.”
나이든 운전사가 손을 저었다.
“저는 이보다 더한 꼴도 수없이.”
했다가 얼른 말을 바꿨다.
“사장님은 양반이십니다. 팁을 든든하게 주셨지 않습니까?”
다시 차에 올랐을 때 단정하게 앉아있던 지숙이 힐끗 조철봉을 보았다. 어둠속에서 눈동자가 반짝였고 입가에 희미한 웃음기가 떠올라 있다. 차가 다시 출발했을 때 지숙이 손을 뻗쳐 조철봉의 손을 잡았다.
“자기야.”
지숙이 조철봉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나, 진짜 좋았어.”
그러자 조철봉은 쓴웃음을 지었다.
별장은 부도난 회사 사주로부터 싼값에 구입했지만 조철봉은 자주 이용하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골짜기에 묻힌 2층 양옥이어서 낮에는 아래쪽 개울과 좌우의 숲이 그럴듯했지만 밤에는 하늘의 별만 보였다. 그것도 맑은 날 밤이어야 했다. 별장 아래쪽 민가에 사는 노인부부에게 관리를 맡겨놓아서 일년에 서너번 갈까말까해도 항상 안팎이 깨끗했는데 오늘은 새벽 세시가 넘어서 별장으로 출발한터라 연락도 하지 않았다. 노인들한테 미안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범택시가 노인네 민가 앞을 지나가는 기척에 깬 모양으로 조철봉이 별장의 불을 켰을때 전화가 왔다. 노인네였다. 내일 내려갈때 들리겠다고 해놓고 조철봉이 돌아섰을때 지숙은 집안 구경을 하는 중이었다.
“아유 좋아.”
지숙이 이층까지 올라갔다가 내려와서 말했다.
“여기선 둘이 연애하기 딱 알맞겠네.”
“그렇다니까.”
소파에 앉은채 조철봉이 셔츠를 벗어던지면서 말했다.
“차 안에서 하는것 하고는 분위기가 완전히 다르겠지?”
“그렇겠네.”
앞쪽 의자에 앉은 지숙이 눈웃음을 쳤다. “그래도 아깐 좋았어.”
“섹스 오랜만에 하는 티가 나더구만.”
“아니, 왜?”
“너무 서둘러, 그리고 너무 빨라.”
“어머머.”
지숙의 눈 주위가 금방 붉어졌다. 밝은 불빛 아래서보면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조철봉이 앉은채로 바지를 벗으면서 말했다.
“물론 색다른 분위기였기 때문일수도 있지.”
“너무 좋았어. 난 정말야.”
“그래? 난 하다가 말았는데.”
“어머머.”
놀란듯 지숙의 두눈이 둥그레졌다. 그때 조철봉이 지그시 시선을 주면서 말했다.
“벗어.”
“싫어.”
지숙이 힐끗 천장의 등을 보았다.
“너무 밝아.”
“밝은데서 해 보자구.”
“싫어.”
그때 조철봉이 팬티를 벗어버렸으므로 건들거리던 철봉이 솟아 올랐다.
“어머머. 너무 커.”
지숙의 놀란듯 손으로 입을 가리는 시늉까지 해 보였지만 시선은 철봉이 자석이나 된것처럼 붙어서는 떼어지지 않았다.
“우리 둘 뿐이야.”
건들거리는 철봉을 그대로 둔채 조철봉이 말했다.
“둘이 홀랑 벗고 소파에서, 이층 계단에서, 응접실 바닥에서, 베란다에서 해보자구. 밤 하늘의 별도 보면서 말야.”
“어머머.”
“멋있지않아? 둘이 그걸하면서 온집안을 뒹굴고 다닌다는게 말야.”
“나 몰라.”
“옛날에 아담과 이브가 그랬을까? 그때는 불켜고 자시고 할것도 없었을텐데.”
“그래도.”
하면서 지숙이 자리에서 일어섰으므로 조철봉은 시선을 들었다. 그리고 다음순간 얼굴을 펴고 웃었다. 지숙이 옷을 벗기 시작한 것이다. 코트는 이미 벗어놓은터라 재킷을 벗어 의자위에 걸어놓더니 곧 스커트를 벗었다.
“으음.”
조철봉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말을 하면서 이미 열이 올라 있었던 것이다.
지숙이 스커트를 벗고 브래지어와 팬티 차림이 되었을 때 조철봉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더 벗어?”
팬티에 손을 대면서 지숙이 물었는데 두눈이 번들거렸고 말은 건성으로 뛰었다. 열기가 올랐기 때문일 것이다.
“응, 벗어.”
말이란 중요하다. 특히 무드를 잡을 때 중요하다. 한창 작업을 할 때 대화를 자꾸 나누려고 시도하는 넘은 제 대포 발사를 늦추려다 상대의 무드를 깬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제가 참으려고 “그, 요즘 쌀값이 얼마지? 햅쌀이 말이여.”
하면 저는 발사가 늦춰진다고 하더라도 한창 올라가던 상대가 햅쌀값 생각하느라고 열이 식을 것 아닌가? 그래서 조철봉은 혼자 애국가를 부르는 것이다. 조철봉이 가만 있어도 발동이 걸린 지숙은 벗을 것이었다. 그러나 조철봉은 달리는 말에 더 가속이 붙도록 말을 이었다.
“음, 몸매 쥑이는데.”
“정말?”
하면서 지숙은 팬티를 벗더니 이젠 브래지어를 거침없이 끌어 내렸다. 그러자 둘은 진짜 아담과 이브가 되었다. 별장안은 환했다. 등이란 등은 다 켜놓아서 빛의 밝기만큼 자극이 더 강해질 것 같다고 조철봉은 느꼈다. 이곳에서 이렇게 밝게 해놓고 섹스하기는 처음이다.
“어디서 할거야?”
두 손을 허리에 짚은 지숙이 얼굴은 붉게 상기되었지만 똑바로 조철봉을 응시하며 물었다. 두 손이 더 번들거리고 있었다.
“가만 있어봐.”
조철봉이 지숙의 3미터쯤 앞으로 다가서며 말했다. 그 거리가 가장 확실하게 전체를 볼 수 있는 거리였기 때문이다. 지숙이 조철봉의 시선을 받더니 이맛살을 찌푸리는 시늉을 했지만 저도 조철봉의 건들거리는 철봉을 노려보았다.
“미치겠어.”
마침내 지숙이 혀로 입술을 핥으면서 말했다. 목소리가 거칠어져 있었고 아랫배가 빠르게 출렁였다. 조철봉은 지숙의 몸을 훑어본 채 아직 움직이지 않았다. 지숙의 몸은 적당했다. 마르지도, 살이 붙지도 않은 알맞은 몸매였고 젖가슴도 단단했다. 아랫배가 조금 볼록한 것은 오히려 더 성적 욕망을 일으키는 법이다. 여론조사를 해도 아랫배가 납작한 여자보다 통통한 여자가 72대 28의 비율로 더 성적 매력을 풍긴다는 통계가 있다.
“나, 해줘.”
지숙이 다시 말하고 참을 수 없었던지 한걸음 다가섰다.
“넣어줘, 자기야.”
이미 지숙은 몸이 허공에 뜬 것 같은 분위기였다. 그래서 한걸음 더 뗐을 때 바닥이 평평한데도 비틀거렸다. 조철봉은 지숙의 어깨를 두 손으로 잡았다.
“아아.”
손이 어깨에 닿았을 뿐인데도 지숙은 탄성을 뱉었다. 그러더니 조철봉의 철봉을 손으로 감싸안고 다시 탄성을 뱉었다.
“아아.”
조철봉은 지숙의 허리를 안고 응접실의 양탄자 위에 뉘었다.
“아아, 빨리 넣어.”
두 다리를 벌린 지숙이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 목소리도 컸다. 조철봉은 이제 군말하지 않았다. 지금은 애무도 필요없다. 밝은 불빛과 분위기가 그 이상의 효과를 내준 것이다. 조철봉은 철봉을 지숙의 샘 끝에 붙였다. 지금부터 산책이 시작된다. 극락을 향한 산책.
애를 태운 만큼 감동이 커지는 원리는 섹스에도 적용된다. 천상의 산책이 이보다 더 좋을까? 철봉의 압박이 골짜기 주변에 골고루 분포되면서 기다림은 점점 강해져서 목마름이 되고 안타까움이 된다. 지숙은 네 활개를 펴고 양탄자 위에 드러누워 산책을 즐겼다. 그러나 처음 얼마 동안은 즐겼는지 모르지만 곧 사지가 뒤틀렸다.
“아, 죽겠어.”
지숙이 날카롭게 외쳤다.
“아, 너무해.”
그러면서 철봉이 샘 끝에 닿았을때 하체를 들어올려 맞추려는 시늉을 했다. 이미 샘에서는 용암이 흘러내려 양탄자를 적시고 있다.
“자기야, 그만, 응.”
이제는 지숙이 두손을 휘저어 철봉을 쥐려고 하다가 팔을 조철봉에게 잡혔다. 조철봉은 이제 때가 되었다고 판단했다. 과한 것은 안한 것보다 못한 법이다. 산책을 그친 조철봉이 자세를 취하자 눈치를 챈 지숙이 움직임을 멈췄다. 긴장한 듯 몸이 굳어져 있다. 조철봉은 천천히 철봉을 진입시켰다.
“아아아.”
지숙의 입에서 터져나온 탄성이 응접실을 가득 메웠다.
“아유 좋아.”
차에서 할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 왔으므로 조철봉의 입에서도 낮은 신음이 나왔다. 각도의 문제도 있겠지만 지숙의 샘에서 받는 느낌이 생생하게 뇌에 전달되면서 철봉은 터져 나갈 것같이 팽창되었다.
“아이고머니.”
지숙이 그렇게 비명을 질렀다. 집안에 둘뿐이었고 외딴 집임을 알고서 그런 건지 그야말로 집안이 떠나갈 것 같은 외침이었다. 조철봉은 심호흡을 했다. 철봉은 이제 바닥에 닿았고 좁혀오는 샘 표면의 느낌을 더 강하게 받는 중이었다. 철봉은 이때가 가장 예민해진다. 철봉과 닿은 샘에서 수만마리의 지렁이가 꿈틀대며 부딪는 느낌도 가장 많이 받는 것이다.
“으음.”
조철봉이 크게 신음을 뱉었을 때 지숙이 하체를 격렬하게 좌우로 흔들었다.
“아아, 좋아.”
지숙이 다시 소리쳤다. 그때 조철봉은 고영민을 떠올렸다. 영민과는 아직 섹스를 하지 않았다. 그날 밤 술에 취한 영민을 안고 자면서도 건드리지 않았다. 대신 영민의 팬티를 내리고 검은 숲과 붉은색인 두개의 골짜기, 그리고 샘 위쪽에 귀엽게 뻗어나온 방울을 보면서 자위를 했을 뿐이다. 남들은 미친 놈 다 보았다고 웃겠지만 그것이 조철봉의 성품이다. 사랑하는 여자 앞에서는 한없이 약하고 자신감이 없어지는 것이다. 다른 여자처럼 섹스를 하고 나서 싫어질까봐 두려운 점도 있다. 영민은 마지막에 먹을 여자로 남겨두고도 싶다.
“아유우, 나, 터질 것 같아!”
지숙이 다시 아우성을 쳤으므로 조철봉의 생각이 끊어졌다. 그동안 철봉은 육중하게 세번을 왕복했는데 각각 각도를 다르게 해서 지숙을 열광시키고 있다. 조철봉은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철봉을 빼냈다.
“계단에서.”
“응?”
허전한 느낌에 입을 딱 벌렸던 지숙이 초점없는 눈으로 조철봉을 보았다.
“계단에서 하자구.”
그제서야 알아들은 지숙이 몸을 굴리더니 계단을 향해 기었다. 엉덩이를 이쪽으로 내놓은 자세를 보자 조철봉의 목이 막혔다. 강렬한 욕정 때문이다.
엉금엉금 계단으로 기어간 지숙이 머리를 돌려 조철봉을 보았다. 아직도 숨소리가 가팔랐고 눈동자는 흐렸다. 다가간 조철봉이 뒤에서 허리를 움켜쥐었을 때 지숙은 다리를 벌렸다. 계단 위에 상반신이 비스듬하게 걸쳐진 자세였지만 곧 철봉은 샘을 찾아 들어갔다.
“아아.”
지숙의 입에서 다시 터질듯한 탄성이 울렸다.
“아유 자기야, 나 할것 같애.”
겨우 두번을 더 문질렀을 뿐인데 지숙이 아우성을 쳤으므로 조철봉은 입맛을 다셨다. 너무 빠른 것이다. 가끔 이런 경우에 부딪치면 허탈해진다. 지숙은 빨리 하도록 길들여진 것이 분명했다. 길들여졌다는 표현보다도 적응되었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만날 배를 부딪치는 남편이 45초 만에 물딱총을 쏘아 버린다면 별수가 있겠는가? 그 45초에 맞춰 이쪽도 터지도록 적응해야 되는 것이다. 그래야 가정이 화목해진다. 만일에 45초를 원망하고 딴데서 뒤풀이를 한다면 그 가정은 깨지게 되어 있다.
“그래, 해.”
뒤로 방아를 찧으면서 조철봉이 소리쳤다. 천하의 조철봉이라도 이런 때는 별거 없다. 빨리 터진다는데 무슨 수로 막겠는가? 까놓고 말해서 빨리 터지는 여자를 싫어하는 놈자는 한놈도 없다. 놈자의 섹스에서는 철봉이 샘에 들어간 순간부터 마찰의 진미나 분위기, 냄새 또는 음향 등 다른 오만가지 작업은 잔가지일 뿐이며 대포를 발사할 때 쾌감을 얻는다. 전에 조철봉이 들은 바에 의하면 단 두번의 마찰만으로 물총을 발사한 놈자가 있다고 했다. 그 두번의 진퇴만으로 물총을 쏜 놈자와 두시간 동안 수천번의 진퇴를 치른 놈자와의 발사 쾌감은 똑같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발사하고 느끼는 쾌감은 동일하다는 것이다. 누구는 모악산까지 오르고 누구는 에베레스트까지 닿았다는 비교가 놈자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즉 싸는 것은 동일하다. 그러나 힘차게 지숙의 뒤에 대고 철봉을 넣으면서 조철봉은 탄식했다. 여자는 다르다. 여자는 하기 나름으로 즐거움을 얼마든지 늘릴 수가 있는 것이다. 격정의 순간, 오르가슴도 마찬가지. 그 절정은 얼마든지 커진다. 물론 서로 적응을 해야 되겠지만.
“아아악.”
힘차게 철봉의 진퇴를 거듭한 지 열번쯤이나 되었을까? 지숙이 까무라쳤다. 운동하는 동안 연속해서 격한 신음을 뱉던 지숙이 온몸을 비틀면서 계단 위에 널브러져 버린 것이다. 그러나 엉덩이만은 그 와중에도 한사코 치켜들고 있어서 철봉은 빠지지 않았다.
“아아아아.”
그저 온몸을 엎드린 채 구겨졌다고 표현해야 맞을 것이다. 사지를 내던진 지숙이 숨이 넘어가는 것처럼 신음을 뱉으면서 온몸을 떨었다. 이미 온몸은 땀 투성이였고 가파른 숨이 뱉어질 때마다 흐느낌같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지숙은 절정에 오른 것이다. 차에서 했을 때와는 또다른 모습이었다. 조철봉은 그 자세 그대로 엎드린 채 지숙의 격정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이제 됐어?”
엉덩이를 뒤로 물리면서 조철봉이 지숙의 귀에 대고 속삭이듯 물었다.
“다시 해줄까?”
“아유우.”
하면서 지숙이 머리를 저었는데 얼굴은 아직도 여운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조철봉은 지숙의 볼에 입술을 붙였다가 떼었다. 사랑스럽다. 지숙은 남자를 피곤하게 만들지는 않는 여자였다.
다음날 아침, 이층 침대에 누워있던 조철봉은 지숙이 흔드는 바람에 눈을 떴다.
“아랫층에 누가 있어. 자기야.”
지숙이 시트로 젖가슴을 가리면서 말했다. 오전 9시반이 지나 있었다. 상반신을 일으킨 조철봉이 입맛을 다셨다.
“관리인 노인들께서 오셨구만.”
아랫층에서 구수한 된장국 냄새가 맡아졌다. 참기름 냄새도 났다. 옷을 챙겨입은 조철봉이 아랫층으로 내려가자 노인내외가 반겼다.
“식사 차려놓고 나갈랑께 다 드시면 그냥 두시우.”
할머니가 열심히 말했으므로 조철봉은 허리를 굽히고 절을 했다.
“죄송합니다. 어르신들.”
“아유, 우리가 관리한답시구 매달 백만원씩이나 공돈을 받아서 어쩌.”
두 노인이 서둘러 밥상을 차려놓더니 위층에 있는 지숙이 내려오기도 전에 나간 것은 어색한 인사를 또 받지 않으려는 것 같았지만 조철봉은 조금 찜찜했다. 이곳에는 아직 서경윤도 데려오지 않았으므로 노인 내외는 누가 누군지 모를 것이었다.
“어머나, 맛있겠다.”
세수를 마치고 내려온 지숙이 식탁을 보더니 얼굴을 환하게 폈다. 지숙은 옷장에서 조철봉의 파자마를 입었는데 바지와 소매를 걷어 입은 자세가 귀여웠다. 화장을 지운 맨 얼굴도 40대로 보이지 않았다.
“노인네들이 눈치도 빠르시네. 식사 다 준비해주시고 내려가시다니.”
지숙이 수저를 들면서 말했다.
“베란다에서 보니까 사이좋게 내려가시데.”
“순박한 분들이셔.”
조철봉이 말하자 지숙이 눈을 가늘게 떴다.
“여긴 여자들 몇명이나 데려왔어?”
“당신이 첨이야.”
“거짓말.”
“정말이라니까.”
“흥. 거짓말이라도 기분은 좋네.”
맛있게 밥을 먹던 지숙이 시선을 들고 조철봉을 보았다.
“자기야. 나, 어젯밤처럼 좋았던 때 없었어. 정말 죽어도 좋을 것 같았어.”
“흥, 그래?”
“정말 자기는 프로야. 분위기 잡는 것도 그렇고, 기술도 뛰어났고.”
“그래?”
“나, 지금도 자기 얼굴만 보면 거기가 후끈후끈해.”
“미쳤군.”
“정말 미친 것 같아.”
그러더니 지숙이 상기된 얼굴로 조철봉을 보았다.
“여자가 그 맛에 미쳐서 집 나갔다는 말을 이제야 믿을 수 있을 것 같아.”
“밥이나 먹자구.”
조철봉이 된장국을 떠 넣으면서 말했다. 어젯밤 지숙은 두번 절정에 올랐다. 한번은 계단 위에서 엎드린 채 했고 또 한번은 이층 양탄자 위에서 했다. 그러나 두번 다 소요된 시간도 각각 10분 미만이다. 그래서 조철봉은 대포를 발사하지도 않았다. 저축 해놓은 것이다. 그래서 지금 지숙이 자극적인 말을 시작하자 테이블 밑의 철봉이 불끈거리고 있다.
“자기 언제 출근해?”
불쑥 지숙이 물었으므로 조철봉이 시선을 들었다.
“왜?”
“그냥.”
“오늘은 조금 늦게 나가도 돼.”
조철봉이 말하자 지숙의 두 눈이 반짝였다.
“그럼 나, 한번만 더 해주면 안돼? 나 금방 할 것 같은데.”
화창한 아침, 정원의 잔디는 노랗게 말라 있었지만 깔끔했고 하늘은 맑고도 푸르렀다. 인생 80년, 열심히 살았다는 것만으로는 어쩐지 부족하고 아쉬운 느낌을 받는 것이 인간사 아니겠는가? 아침에 일어나 목구멍으로 물을 넘기는 순간에 문득 내가 살 날이 몇년, 며칠 남았는가? 하고 생각하는 것이 인생이다.
그런 예상, 그런 준비가 없다면 인간답지가 않다. 인간은 살다가 지쳐서 죽는 것이라고 조철봉은 생각해왔다. 다 외롭고 쓸쓸하게 죽는다. 죽음은 경이롭고 경건하게 받아들여야겠지만 당사자는 외롭다. 정처없는 길을 간다. 조철봉은 언젠가 어떤 여자하고 섹스를 하면서 굉장히 낯익은 느낌을 받았다. 전에 전혀 인연이 없었는데도 냄새와 소리, 몸의 구조까지 익숙했다.
그래서 결국 이 여자하고는 전생에 인연이 있었던 것이라고 결론을 내고 만족했던 적이 있었다. 그 전생을 비약하여 영혼은 불멸한 것이라고 믿자 더 위로가 되었다. 영혼은 우주 공간까지 떠다니는 영적 존재인 것이다. 우주에는 수억, 수천억개의 영혼이 떠있다. 그리고 새 생명에 붙어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조철봉은 저 좋을 대로 인간은 인간의 영혼에만 붙는다고 믿었다. 인간 영혼이 개나 파리한테 붙으면 안되는 것이다. 어떤자가 성질나면 그런 악담을 하지만 그런 일도 없을 것이었다. 이것은 언젠가 아인슈타인이나 호킹같은 천재 과학자가 또다시 태어나 증명해낼지도 모른다.
“자기야.”
지숙이 부르는 소리에 조철봉은 생각에서 깨어났다.
“응?”
“기분 나빴어? 내가 미친년 같지?”
하고 지숙이 물었으므로 조철봉은 수저를 내려놓았다.
“인생은 즐기는 거야. 기회를 놓치면 안된다구.”
자리에서 일어선 조철봉이 바지를 벗었으므로 이미 곤두선 철봉이 건들거리며 드러났다.
“어머.”
조금 과장된 표정으로 손을 들어 입을 가렸다. 지숙이 따라 일어섰다.
“어떻게 해?”
“바지만 벗어.”
“바지만?”
하면서 지숙이 선 채로 파자마 바지와 팬티를 한꺼번에 벗어내렸다.
“어디서 해?”
지숙의 얼굴은 이미 열기에 떠 있었고 두눈은 철봉에서 떼어지지 않는다.
“저기.”
조철봉이 응접실의 소파를 눈으로 가리켰다.
“소파에 가서 엎드려.”
지숙이 소파로 다가가더니 엎드렸다. 그러자 파자마 상의에 가려졌던 흰 엉덩이가 통째로 드러났다. 거침없이 다가간 조철봉이 뒤에서 허리를 움켜 쥐었을 때 지숙이 머리를 돌려 조철봉을 보았다.
“자기야. 사랑해.”
“그냥 넣을까?”
“응. 빨리.”
조철봉은 산책도 생략하고 철봉을 진입시켰다. 이미 샘에서는 용암이 분출 중이었고 지숙은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아악.”
다시 지숙의 신음이 떠들석하게 집안을 울렸을 때 조철봉은 저도 모르게 긴 숨을 뱉었다. 지금 서경윤은 제주도에서 자신과 똑같은 짓을 하고 있을 것이었다. 다 업보다.
“자기야. 나죽어.”
지숙이 지르는 신음이 서경윤의 목소리처럼 들렸다.
박경택은 자신의 위치를 안다. 제 위치를 알고 있다는 것이 인간사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일 것이다. 경택은 요즘 자주 조철봉에게 불려가지만 방심하지 않았다. 일거수 일투족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것이 여실히 드러났다. 수고비도 주는대로 받았다. 조철봉이 수고비를 박하게 주는 스타일이 아니기도 했지만 사건 내용이 심각한터라 절대 돈 문제로 신경을 건드리지 않았다.
조철봉은 성격상 용역회사를 자주 이용하는 편이다. 그만큼 정보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다는 말인데 경택이 가져오는 정보는 동사무소나 은행 컴퓨터에 입력된 정도가 아니다. 조철봉은 목표로 삼은 상대방의 모든 것, 특히 감추고 싶은 치부를 더 알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오늘도 오후 3시경에 조철봉의 방에서 둘이 마주 앉았을 때 방은 별도 지시가 있을 때까지 출입금지, 통신금지 상황이 되었다.
“저, 그럼.”
하면서 경택이 탁자 위에 놓은 녹음기의 버튼에 손을 붙이면서 조철봉을 보았다. 조철봉이 머리를 끄덕이자 미사일을 발사시키는 전투기조종사처럼 경택이 버튼을 눌렀다.
“아, 아, 아.”
짧게 끊어지면서 내지르는 여자의 비명소리부터 방 안에 울렸으므로 조철봉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경택은 조철봉의 시선을 받지 않고 탁자 위에 놓은 재떨이만 보았다.
“아유, 아유, 아유.”
하고 여자가 조금 다른 신음소리를 냈을 때 조철봉은 이것이 쾌감 때문에 뱉는 신음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목소리의 주인공은 서경윤이다. 조철봉이 의자에 등을 붙였을 때였다.
“아아아.”
“어응.”
하고 여자와 남자의 신음이 동시에 들렸다. ‘어응’은 남자의 목청이다.
“쌌구만.”
조철봉이 박자를 맞추듯이 말했을 때 경택이 힐끗 시선을 들었다가 내렸다. 아마 그 전의 녹음 테이프는 줄여서 편집한 것 같았다.
“자기야, 언제 올라갈거야?”
하고 남자가 물었으므로 조철봉은 귀를 기울였다. 남자는 아직도 가쁜 숨소리를 내고 있었다.
“응, 일주일 예정이었지만 사흘만 더 있다가 가려고.”
서경윤이 헐떡이며 말하더니 가늘고 긴 신음을 뱉었다.
“아아, 개운해.”
“그래?”
남자가 반가운듯 되물었다.
“나, 잘해?”
“그럼, 자기하고 섹스하고 나면 개운해.”
“영일 아빠는 시원찮은 모양이지?”
“아냐, 그 자식도 전문가야.”
경윤이 매정스럽게 말했으므로 경택이 다시 찔끔 조철봉을 올려다 보았다. 그러나 조철봉은 연속극을 듣는 것처럼 얼굴에 웃음까지 띠고 있다.
“전문가? 그럼 잘해?”
남자의 목소리에 조금 시기하는 기색이 어려 있었다.
“잘하긴, 맞아야 잘하는 거지.”
경윤이 코웃음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나하곤 안맞아.”
“어떻게?”
“그걸 하기 전에 저는 흥분을 시킨답시고 제 물건을 내 거기다 붙이고 슬슬 문지르는데, 정말 지겨워.”
“왜?”
“난 그냥 팍팍 하는 것이 낫거든.”
“나처럼?”
“그래, 자기처럼.”
“그런데 그 자식은 슬슬 문지르기만 한단 말이지?”
“그래, 선심이나 쓰는 것처럼 눈을 게슴츠레 뜨고 말야.”
“그래서?”
“난 그냥 흥분한 척해주지만 구역질이 난다구. 아주 고역이야.”
그때 남자가 어디를 건드렸는지 경윤이 키득 웃었다.
“만지지마, 아직 안씻었잖아?”
그때 조철봉이 머리를 들고 물었으므로 박경택이 녹음기를 껐다.
“녹음이 몇분짜리야?”
“예. 5일간 중요한 부분만 편집했는데 약 2시간 정도 분량이 됩니다.”
경택이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일자별로 순서별로 정리해 놓았고 중요한 내용은 여기 기록해 놓았습니다.”
탁자위에 경택이 다시 서류를 내려 놓았는데 펜으로 쓴 것이었다.
“수고했어.”
“사모님은 사흘간 제주도에 더 머무실 것 같습니다.”
“녹음기에서도 들었고 아침에도 나한테 전화가 왔더구만.”
그러고는 조철봉이 빙긋 웃었다.
“그놈이 컴퓨터 판매점 사장이라는데, 장사가 잘 되는 모양이지? 특급 호텔에 같이 투숙한 걸 보면 말야.”
“그것이.”
경택이 시선을 내리고 대답했다.
“사모님이 그놈한테 현금을 주셨습니다. 그 내용이 녹음기에 녹음되어 있습니다.”
“그래?”
“5백을 주셨더군요.”
“흠.”
쓴웃음을 지은 조철봉이 다시 소파에 등을 붙였다.
“내가 준 돈으로 남자를 사는군. 그렇지?”
“그리고 사장님.”
조철봉의 물음에는 대답하지 않고 경택이 가방에서 다시 서류를 꺼내 조철봉의 앞에 놓았다.
“그놈, 김병문에 대한 조사를 했습니다.”
서류에 시선만 준 조철봉에게 경택이 말을 이었다.
“컴퓨터 가게는 장사가 안되어서 직원 두명 월급을 석달째 못주고 있는 상황입니다. 가게 월세는 6개월째 미루고 있지요. 김병문의 와이프는 생활비를 벌려고 식당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
“아이는 친정에다 맡기고 밤에 찾아가지요. 그런데 이놈은 맨날 나이트클럽에나 다닙니다.”
“….”
“사모님을 만난것도 나이트클럽에서 였습니다. 조사해보니까 천지 나이트클럽의 웨이터 장길산이 부킹해 준 것입니다.”
“….”
“김병문이 주위 친구들한테 호구 잡았다고 자랑하고 다닌걸 보면 그동안에 사모님한테서 상당히 많은 돈을 빼낸것 같습니다.”
“….”
“그런데 그놈은 와이프한테는 돈을 주지 않고 다른 여자한테 씁니다.”
“다른 여자?”
조철봉이 머리를 들자 모처럼 시선을 마주친 경택이 어색하게 웃었다.
“예. 젊은 여자한테, 25살된 대학원생인데 이 여자한테 차도 사줬습니다. 소형차지만요.”
“흠.”
“이 여자한테는 미혼에다 컴퓨터 관련 벤처업체 사장이라고 사기를 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조철봉이 정색하고 경택을 보았다.
“제주도에서, 그, 영일이 할머니는 이 사실을 알고 있나?”
“예. 알고있습니다.”
선뜻 대답한 경택이 먼저 조철봉의 눈치를 보고나서 말을 이었다.
“영일이가 엄마 찾으면 할머니가 이놈 방으로 와서 사모님을 데려간적도 있습니다.”
그러자 조철봉이 소리내어 웃었다.
“거, 참, 재밌네. 노는것이.”
박경택이 방을 나갔을 때는 그로부터 한시간쯤이 지난 후였다. 그러나 조철봉은 비서실에 연락해서 봉쇄를 풀지 않았다. 듣다가 만 녹음 테이프를 듣기 위해서였다. 조철봉은 담배를 자주 안피운다. 그렇다고 속이 상할 때나 머리가 아플 때 담배를 피우는 것도 아니다. 끊자고 작심을 하면 두달, 석달도 피우지 않다가 피운다. 그런데 오늘은 담배부터 꺼내 입에 물고나서 신중하게 녹음기의 버튼을 눌렀다.
“11월 7일, 밤 11시20분.”
하고 박경택의 목소리가 녹음기에서 울렸다. 마치 동물의 왕국 해설자 같은 분위기였다.
“섹스가 끝나고 나서.”
경택이 친절하게 설명했을 때 곧 경윤의 목소리가 울렸다. 숨을 헐떡이고 있다.
“아유, 자기야. 그렇게 다리를 꺾어서 하니까 나 죽는줄 알았다.”
“그래? 나, 자기 좋으라고 비디오 보고 배워 놓은거야.”
김병문도 헐떡이며 말했다.
“어때? 끝내줬지?”
“응, 자기 귀여워.”
“내가 내일은 다른 체위로 해줄게.”
“또 있어?”
“그럼, 앞으로 서너가지 더 남았어.”
“나, 미쳐, 정말.”
경윤이 웃음띤 목소리로 말하더니 병문의 어딘가를 꼬집는 것 같았다. 병문의 비명소리와 웃음소리가 연달아 났다.
“자기야, 나, 그거, 어떻게 됐어?”
웃음을 그친 병문이 조심스럽게 묻자 경윤이 가볍게 대답했다.
“서울 올라가서 해줄게. 3천이면 돼?”
“응. 이번만 메우면 난.”
“그만.”
경윤이 웃음띤 목소리로 병문의 말을 막았다.
“그런 얘기 안해도 돼.”
“고마워, 자기야.”
그러고는 잠시 빈 테이프가 돌아가더니 경택이 해설했다.
“11월8일, 밤 12시10분.”
경택이 말을 이었다.
“섹스가 끝나고 나서 한시간 쯤 후에.”
“그 자식은 위선자야.”
경윤의 목소리가 불쑥 울렸으므로 조철봉은 눈을 번쩍 치켜떴다. 그러나 경윤의 목소리는 가볍다.
“한번도 진실을 말해 준 적이 없지. 온몸이 거짓으로 똘똘 뭉쳐 있는 놈이지.”
“그래?”
병문의 목소리도 밝다.
“그런데 왜 살아? 위자료 듬뿍 챙기고 갈라서지.”
“그럴 작정이야.”
“계획을 세워. 내가 자기 도와줄게.”
“알았어.”
그러더니 경윤이 노래를 흥얼거렸다. 녹음기에는 잡히지 않았지만 TV에서 가수가 부르는 노래를 따라 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조철봉은 모르는 노래였다. 그때 병문이 말했다.
“무슨 노래 좋아해?”
“나? 으응.”
하고 경윤이 생각하는 것 같더니 곧 생기띤 목소리로 물었다.
“웨딩드레스 알아?”
“모르겠는데.”
“한상일의 웨딩드레스. 옛날 노랜데 우연히 듣고 좋아졌어, 들어봐.”
하더니 경윤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조철봉은 숨을 삼켰다. 자신의 18번인 것이다. 하긴 경윤이 그것을 알 리가 없다.
“당신의 웨딩드레스는 정말 아름다웠소.”
경윤이 거기까지 불렀을 때 조철봉도 다음을 따라불렀다.
“춤추는 웨딩드레스는 더욱 아름다웠소.”
그러고서 조철봉은 눈물을 쏟았다.
춘천식당은 아파트단지 입구의 상가에 있었는데 점심시간인데도 손님이 서너 테이블뿐이었다. 그런데 바로 옆집의 남원식당은 손님이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조철봉이 보기에도 민망했다. 식당 손님만큼 정확하게, 그리고 눈에 띄게 상품 판단을 내리는 구매자는 없다. 맛이 없는데 누가 먹겠는가? 가끔 마음에 들지 않는 옷을 입거나 숙소에서 잠을 잘 수는 있어도 싫고 맛없는 음식을 억지로 먹는 인간이 있겠는가? 그러나 조철봉은 춘천식당으로 들어가 앉았다. 벽에 붙은 메뉴는 한식에서 냉면류, 순대국과 해장국까지 다양했다. 옆집 남원식당이 추어탕 한 종류만 파는 것과 대조적이었다.
“뭘 드릴까요?”
다가온 종업원이 물었을 때 조철봉의 입에서 하마터면 최성희란 이름이 튀어나올 뻔했다. 식당 안에는 종업원이 7, 8명 있었는데 열심히 그들을 곁눈질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최성희는 김병문의 와이프다. 김병문은 지금 제주도에서 열심히 서경윤과 밤농사를 짓고 있는 놈이고, 지금 빤히 조철봉을 쳐다보고 서 있는 여종업원은 40대였다. 유니폼은 입었지만 이름표를 붙이지 않아서 묻든지 어림잡아 찾아야 한다.
“아, 설렁탕. 특으로.”
우선 그렇게 주문을 하고 나서 조철봉은 다시 식당안을 둘러보았다. 없다. 모두 40대쯤의 중년여자 종업원이었고 20대는 안 보였다. 박경택의 자료를 보면 최성희는 28세, 원향여고와 중문대 영문과 2년을 중퇴했으며 신장은 168정도, 고향은 대구였다. 그러나 사진은 없었으므로 이 고생이다. 손님이 없었기 때문인지 설렁탕은 금방 나왔다. 멀건 국물에 떠있는 고기가 종잇장 같아서 보자마자 입맛이 달아났으므로 조철봉이 찌푸린 얼굴로 수저를 들었을 때였다. 조철봉은 움직임을 멈췄다. 주방에서 검정 쓰레기 봉투를 들고 나온 여자가 20대였기 때문이다. 유니폼도 못 얻어입고 바지에 셔츠 위에다 비닐 치마만 둘렀다. 주방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보조인 것이다. 여자는 무거워 보이는 쓰레기 뭉치를 힘들게 들고 옆문으로 나갔다. 최성희다. 설렁탕을 반도 먹지 않고 식당을 나온 조철봉의 마음은 굳어져 있었다. 그날 오후 4시가 되었을 때 성희는 전화를 받았다. 직업소개소의 홍실장이다.
“최성희씨, 거기 잘 안된다며?”
오늘따라 홍실장이 부드럽게 물었으므로 성희는 한숨부터 뱉었다. 50대의 홍실장은 과부라고 했다. 그래서 만나면 제가 고생한 이야기를 끝도 없이 늘어놓았지만 수수료는 딴데보다 많이 떼었다. 그러나 요령이 좋아서 일자리는 잘 찾아 주었다. 이곳 춘천식당도 홍실장한테서 네번째 일자리로 소개받은 곳이다.
“오늘도 매상이 30만원도 안 될것 같아요.”
성희가 낮게 말하자 홍실장이 놀라는 시늉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어마, 어마, 저걸 어째. 식당만 커가지고 종업원이 여덟이나 되는데, 이거 거기서도 월급 못 받고 나오는 거 아녀?”
지난번에 있었던 식당도 장사가 안되어서 석달 있다가 이곳으로 옮겨온 것이다. 그곳에서 일한 한달반 분 월급도 아직 받지 못했다. 성희가 가늘게 숨만 뱉었을 때 홍실장의 목소리가 은근해졌다.
“이봐, 미스최. 오늘 저녁에 두시간만 알바 안할래? 좋은 손님이 있는데 말야.”
“싫어요.”
성희가 대번에 거절했지만 목소리는 약했다. 홍실장이 성희가 뻔히 애 엄마인 줄 알면서도 미스최라고 부를 때는 바로 이런 경우밖에 없다. 노래방 알바를 나가라는 경우인 것이다.
“곧 도착할 것입니다.”
박경택이 말하자 조철봉은 머리만 끄덕였다. 신림동의 노래방 ‘궁전’은 시장 입구여서 위치가 좋은데다 방이 15개나 되는 대형업체였다. 건물주의 동생이 노래방을 차린 것이어서 아주 마음먹고, 평생을 노래방 사업으로 먹고 살도록 잘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직업소개소 홍실장의 말이었다.
조철봉은 느긋하게 앉아 두리번거렸지만 경택은 좌불안석이었다. 일분에 한번꼴로 시계를 보았고 삼분에 한번식 나갔다 왔다. 아가씨들을 기다리는 시늉이었는데 그것이 더 불편했으므로 조철봉은 경택이 차라리 나가있는 게 더 낫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가씨란 바로 최성희이다. 경택이 홍실장한테 어떻게 거래를 했고 홍실장이 성희에게 무슨 제의를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조철봉으로서는 요즘 계속해서 노래방으로 출근을 하는 꼴이 되었다.
“오셨습니다.”
하면서 밖에 나가있던 경택이 들어섰으므로 조철봉은 긴장했다. 경택이 자리에 앉자마자 여자 둘이 들어섰는데 조철봉은 숨을 멈췄다. 성희는 식당에서 보았을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꽃무늬 원피스 차림의 성희는 아름다웠다. 무릎 밑으로 뻗은 두 다리는 미끈했으며 탄력까지 느껴졌다. 조철봉은 일초의 삼분의 일밖에 시선을 주지 않았지만 저 다리가 쾌감의 절정에 이르렀을 때 한껏 굽어지는 장면을 머릿속에 떠올릴 수 있었다.
“자, 앉으시지요.”
하면서 경택이 성희를 조철봉의 옆으로 안내하더니 저는 인형같은 여자를 데리고 갔다. 얼굴에다 콤팩트를 어찌나 두들겼는지 피부가 싸구려 인형 얼굴처럼 희었기 때문이다. 탁자 위에는 이미 술과 안주가 가득 쌓여 있었으므로 이제 여자는 그물에 걸린 고기였다. 못 잡으면 병신이다. 조철봉이 머리를 돌려 성희를 보았다. 긴장하고 있던 성희가 시선을 느꼈는지 머리를 들고 조철봉을 보았다.
“저, 최성희입니다.”
먼저 성희가 인사를 했다. 제 본명을 밝힌 것이다.
“난 미스터 조올시다.”
겨우 그렇게 말한 조철봉이 저도 모르게 심호흡을 했다. 긴장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만나서 반갑습니다, 최성희씨.”
“저두요.”
성희가 탁자 위에 시선을 준 채로 대답했다. 홍실장이 경택에게 전한 바에 의하면 성희는 지금까지 노래방 알바를 나가라는 온갖 유혹을 뿌리쳐 왔다는 것이다. 시간당 10만원씩 준다고 해도 안나갔다고 했다. 그런데 오늘은 어떤 조건을 받았는지 조철봉은 궁금해졌다.
“술 드실랍니까?”
양주병을 든 조철봉이 정중하게 물었을 때 성희는 머리를 저었다. 얼굴에는 미안한 듯 웃음기가 희미하게 배어났다.
“저, 술 못 마셔요.”
“조금도?”
“예, 얼굴이 빨개져요.”
“맥주는?”
“저.”
하더니 성희가 심호흡을 하고 나서 말을 이었다.
“아기 찾아와야 하거든요.”
“아기?”
“예, 친정 어머니가 봐주시고 계신데 제가 집으로 데려가야 하기 때문에.”
“…….”
“친정 어머니 집이 가깝긴 해요. 걸어서 5분 거리밖에 안되지만 애가 저 올 때까지 안 자고 기다리거든요.”
조철봉은 이를 악물었다. 개같은 놈, 이런 마누라를 두고 제주도에서 뭘 하는 거냐?
최성희는 조철봉의 굳어진 표정을 보고 오해한 것 같았다. 다르게 생각한 것이다.
“저, 하지만 맥주는 세 잔까지 마실 수 있습니다”하면서 성희가 맥주잔을 쥐었으므로 조철봉은 쓴웃음을 지었다.
“아니, 괜찮아요. 술 억지로 마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래두.”
“정말 괜찮습니다.”
정색한 조철봉이 말하고는 머리를 들고 앞에 앉은 박경택을 보았다. 경택은 제 파트너와 나란히 앉아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만 긴장한 것이 훤하게 보였다. 조철봉이 시선만 보냈는데도 대번에 알아차리고는 머리를 들었다.
“박 사장, 방 남았나?”
조철봉이 묻자 경택이 벌떡 일어섰다.
“알아보겠습니다.”
경택이 부리나케 나갔을 때 성희가 불안한 표정으로 조철봉을 보았다. 그러나 조철봉은 모른 척했다. 경택은 지금 빈방을 알아 보려고 나간 시늉을 했지만 이미 방 하나를 더 잡아놓은 것이다. 경택이 내막을 속속들이 알고 있다고는 해도 같이 있기가 좀 거북했기 때문이다. 나갔던 경택이 금방 들어오더니 제 파트너에게 눈짓을 하고는 조철봉을 향해 허리를 굽혀 보였다.
“저는 205호실에서 놀겠습니다.”
“한 시간이면 돼.”
“알겠습니다, 사장님.”
경택이 제 파트너를 끌고 바람처럼 나갔을 때 조철봉이 성희를 향해 웃어보였다.
“난 시끄러운 게 싫어서.”
“아, 예.”
긴장한 성희가 탁자 위에 시선을 내린 채 대답했다. 조철봉은 양주잔을 들어 한모금에 술을 삼켰다. 방 안은 조용했다.
방음장치도 잘 되어서 밖의 소음은 거의 들리지 않았다. 조철봉은 소파에 등을 붙이고는 소리없이 그림만 나오는 노래방 스크린을 물끄러미 보았다. 그러자 가슴이 착 가라앉으면서 저절로 길게 숨이 뱉어졌다.
‘지금 무슨 짓거리를 하는 거냐?’하고 가슴에서 남처럼 물었다.
‘도대체 어쩌려고 이러는 거냐?’하고도 물었다.
조철봉은 손을 뻗쳐 빈잔에 양주를 따랐다. 성희가 프로라면 벌써 빈잔을 채웠을 것이었다. 그렇지만 지금 성희는 분위기에 압도당한 듯 움츠러져 있다. 시선을 스크린에 고정시킨 채 딴데로 돌리지도 못한다.
‘복수?’
다시 조철봉의 가슴에서 비웃음 섞인 물음이 일어났고 동시에 얼굴은 쓴웃음으로 덮여졌다.
‘글쎄, 이게 복수가 될까?’
‘그까짓 놈한테 복수를 하면 또 뭐해?’
‘서경윤이 그년이 문제 아닌가?’
‘나쁜년.’
그때는 조철봉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순간이었다. 성희가 머리를 돌려 조철봉의 일그러진 얼굴을 보았다. 그러더니 불쑥 말했다.
“저, 저는 잘 놀지도 못해요. 노래도 못 부르고 신곡도 몰라요.”
“….”
“노래방 안간 지도 오래되어서요.”
“….”
“오늘 소개소에서 시간당 15만원씩 두 시간분 30을 받았거든요. 그냥 가만 앉아 있기만 하면 된다고 해서.”
“….”
“손님이 점잖은 분이시라고 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니까 제가 바보였어요.”
그러고는 성희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최성희는 직업소개소에서 시간당 15만원씩 계산해서 받았을테지만 세상사가 어디 그렇게 단순한가? 조철봉이 이십대중반 무렵, 아직 직장을 잡기 전이었는데, 을지로에서 문득 수많은 인파를 보고 놀랐던적이 있었다. 도대체 저 많은 입이 다 무엇을 먹고 살아가고 있는지가 궁금을 넘어 두려워졌기 때문이다.
저 무수한 입에 들어갈 쌀과 밀가루 분량은 엄청날 것이었다. 고기도 필요하고 배추도, 그렇다면, 하고 쌀가게와 고깃간을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금은방, 학원, 전자제품 대리점, 옷가게……. 그러자 조철봉은 기가 죽었다. 그래서 겸손해졌고 그것이 계기가 된것만은 아니지만 일자리가 고맙게 생각 되었었다. 어쨌든 성희의 옆에는 을지로의 금은방 돈이 쌀을 만드는 농부에게 가기전에 돌고 도는 것처럼 곁가지가 있다.
바로 소개소의 홍실장, 아마 홍실장은 박경택 한테서 시간당 30씩은 받았을 것이었다. 조철봉은 잠자코 성희에게 시선을 준채로 다음말을 기다렸다. 과연 이 여자는 세상을 얼마나 알까? 식당 주방에서 허드렛일을 하면서 꿈이나 품고 있을까? 이 여자는 남편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그때 성희가 불쑥 물었다.
“저, 어떻게 해드리면 되죠?”
“아니, 뭘?”
찔끔한 조철봉이 성희를 보았다.
“뭘 말입니까?”
“선생님 한테요.”
“글쎄, 뭘.”
했지만 그때는 성희의 말뜻을 알아차린 조철봉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예상 밖이다. 마치 허를 찔린 기분이었다. 성희가 먼저 이렇게 나올줄은 몰랐다. 시선을 내린 성희가 열심히 말했다.
“저, 두시간분 30만원 받았거든요? 그리고 그 돈이 저한테 꼭 필요해요. 아이기저귀도 사야하고 이유식도, 아직 30개월도 안되어서 간식도 꼭 필요하구요.”
“…….”
“친정어머니 한테도 용돈을 좀 드려야만해요. 이 돈으루요.”
“…….”
“그래서요, 선생님.”
성희가 손가락으로 탁자위에 조금 떨어진 물방울을 문지르며 말했다.
“저, 여기서 저 어떻게 하실 생각이시면 하세요.”
그순간 조철봉은 숨을 삼켰다. 여기서 하라니, 그럼 이 여자는 노래방 안에서 그것을 하란 말인가? 불끈 욕정이 솟구쳤지만 확인하고 싶은 호기심이 더 컸다. 그래서 조철봉이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여기서 하다니? 무슨 말입니까?”
“그거요.”
성희가 손끝으로 탁자를 더세게 문지르며 대답했다.
“노래방 안에서도 그걸 한다고 하던데요 뭐, 그래서 선생님이 같이 오신분을 다른 방으로 보내신거 아녜요?”
“아아.”
“같이 온 여자는 오늘 여기서 처음 만났어요.”
“아아.”
그때 성희가 머리를 들고 조철봉을 보았다. 스크린의 불빛에 비친 성희의 눈이 반짝였다.
“저, 이런일 처음이지만 아이 엄마죠, 그걸 못하지는 않으니까요.”
“아아.”
계속 탄성같은 외침을 뱉고난 조철봉이 이번에는 불쑥 물었다.
“남편한테 미안한 마음은 안들어요? 이런짓을 한다는 것에 대해서 말입니다.”
그때 성희가 정색하고 조철봉을 보았다. 놀란것 같기도 하고 뭔가 생각하는 얼굴 같기도 했다.
“아뇨.”
최성희가 머리까지 저으며 말했다. 표정도 단호했다. 얇은 입술은 꽉 다물어졌고 눈초리가 조금 솟은 눈매도 날카롭게 느껴졌다.
“지금 이혼 수속중이거든요.”
“이혼 수속중이라구요?”
조철봉이 정색하고 성희를 보았다. 하긴 박경택이 그것까지 알아낼 수는 없을 것이었다. 조철봉의 시선을 받은 성희가 낮게 말했다.
“네, 다음달이면 합의 이혼이 될거예요.”
“아니, 왜?”
묻고 나서 조철봉이 쓴웃음을 지었다.
“이거, 남의 가정사를 괜히 물었는데.”
“아뇨, 괜찮아요. 정상적인 가정 여자가 아닌 것이 덜 어색하죠, 뭐.”
“그런가?”
“하긴 멀쩡한 여자도 이런 데 나온다고 하지만요.”
“그렇구만.”
“아저씬 결혼하셨어요?”
그렇게 물었다가 성희는 풀석 웃었다.
“참, 나좀봐. 저도 남의 가정사를 괜히.”
“나두 괜찮아.”
그러고는 조철봉이 입을 벌렸다가 다시 다물었다. 버릇처럼 거짓말이 튀어 나오려고 했기 때문이다. 아마 서경윤을 죽였을 것이었다. 그것도 독하게 심호흡을 한 조철봉이 다시 입을 열었다.
“했어요. 그런데 아이하고 지금 외국에 가 있어. 와이프가 말야.”
“어마, 그럼.”
성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유학 보냈어요?”
“그, 그렇지.”
“그럼 아저씨도 기러기 아빠시네요.”
“그렇군.”
“외로우시겠어요.”
“그야.”
그러자 성희가 다시 조철봉을 정색하고 보았다.
“아저씨.”
“응?”
“저, 어떻게 하실건데요?”
“뭘?”
했다가 조철봉은 다시 심호흡을 했다. 아까부터 그렇다. 성희가 경계심을 풀고 접근해올수록 이쪽은 기력이 떨어지고 있는 것이다. 철봉은 괜찮다. 철봉 이외의 기력을 말한다. 성희의 시선을 받은 조철봉은 술잔을 쥐었다. 그럼 여기서 그걸 하란 말인가? 그럼 천상 밑에만 벗기고 뒤에서 해야겠지. 스크린을 같이 바라보면서 말이다. 싫다. 왠지 싫다.
“아저씨.”
그때 성희가 손을 뻗더니 조철봉의 허벅지 위에 올려놓았다.
“저, 돈 받은 값을 할래요.”
성희가 떨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한시간동안 절 어떻게 하셔도 괜찮아요.”
“…….”
“저, 누가 들어오지는 않겠죠?”
“아, 그거야.”
“그럼 하세요.”
“…….”
“그러려고 여자 부르신 것 아녜요?”
“…….”
“여기서는 싫으세요?”
하고 성희가 물었으므로 조철봉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러지마.”
“네?”
의아한 듯 성희가 눈을 크게 떴으므로 조철봉은 어금니를 물었다가 풀었다.
“오늘은 이렇게 얼굴만 익히기로 하자구, 그건 다음에.”
그러고는 조철봉이 성희의 손을 쥐었다.
“나한테 부담 느낄 것 없어. 난 성희씨를 좋아하니까 아끼려고 그러는거야.”
(1229)꿈을 깨다-1
방으로 들어선 박경택은 조철봉이 혼자 앉아 있는 것을 보더니 긴장했다.
뭔가 잘못된 것으로 생각한 모양이었다.“괜찮아, 그냥 보냈어.”조철봉이 온몸을 늘어뜨리고 앉아 경택을 보았다.“지금 합의 이혼 수속중이라는데, 다음달에 이혼한다는 거야.
”“아, 그렇습니까?”놀란 경택의 얼굴이 굳어졌다.“제가 그것까지는 파악을 못했습니다. 사장님, 죄송합니다.”“아냐, 죄송하긴, 이 사람아.”“조철봉이 경택의 앞에 놓인 빈잔에 술을 따라 주었다.
“여자는 순진했어.”혼잣소리처럼 말한 조철봉이 술잔을 들었다.“돈 받은 값을 해야겠다면서 나한테 여기서 하라는거야.”경택은 대답도 못했고 조철봉이 말을 이었다.
“막상 하라니까 못하겠어.”머리까지 저은 조철봉이 경택을 똑바로 보았다. 정색한 시선을 받은 경택이 당황해서 눈동자가 어지럽게 흔들렸다.“그렇게 보복하기는 싫더구만.
첫째로 그 여자한테 미안해서 말야.”“…….”“열심히 살고 있는 여자였어. 그런 여자한테 그놈이 지은 죗값까지 덮어 씌우려고 하니까 양심이 걸려서 말야.”“…….”“내가 양심 하나는 풍부한 놈이거든.”“…….”“하지만 다시 만나기로 했어.
여자는 꼭 전화하라면서 눈물까지 글썽이더군.”“…….”“그런데 제주도의 연놈들 감시는 지금도 철저히 하고 있겠지?”조철봉이 묻자 경택이 시선을 들었다.“예, 사장님. 지금도 녹음을 하고 있습니다.
직원 둘이 붙어 있거든요.”“잘했어.”상체를 세운 조철봉이 손목시계를 보는 시늉을 하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난 애주 엄마한테 간다고 연락을 해 놓았어.”“아아, 예.”놀란 경택이 따라 일어서며 조철봉에게 말했다.
“제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아냐, 택시타고 가면 돼.”“그럼 내일 아침에 차를.”“그렇지.”조철봉이 웃음띤 얼굴로 다가선 경택의 어깨를 손바닥으로 가볍게 쳤다.“8시에 데리러 와.”
“예, 사장님. 8시 정각에 현관 앞에서 기다리겠습니다.”경택 외에는 아무도 고영민의 거처를 모르는 것이다. 전에는 최갑중이 조철봉의 잔 심부름을 도맡았지만 지금은 머리가 커졌다.
이런 일에는 경택이 적격이었고 조철봉에게 부담도 덜 되는 것이다. 노래방 앞에서 경택과 헤어진 조철봉이 나홀로 첫사랑의 여인 고영민의 집안으로 들어섰을 때는 밤 10시반이 되어 있었다.
“어서 오세요.”영민이 환한 얼굴로 반겼는데 향수 냄새까지 맡아졌다. 그러고보니 얼굴에 옅게 화장까지 했고 가운도 새것이었다.
“애주는?”집안을 둘러보며 조철봉이 묻자 영민이 뒤로 돌아 옷을 벗기면서 대답했다.“지금이 몇신데. 자요.”“그래?”“술 한잔 하실거죠?”영민이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조철봉은 영민이 내주는 실내복으로 갈아입고 나서 느긋하게 샤워를 했다. 오늘은 영민을 안을 것이었다. 최성희 대신으로가 아니다. 지금까지 미뤄왔던 대역사를 오늘밤 끝내기로 작심을 한 동기가 최성희 때문이라는 건 맞다. 왜냐하면 막상 성희를 그냥 돌려보내고 났을 때 사무치도록 영민이 그리워졌던 것이다. 아니, 조금 더 솔직히 말한다면 외로워졌고 그것을 감당할 대상으로 영민이 떠올랐었다. 샤워를 마친 조철봉이 욕실을 나왔을 때 영민은 이미 안방에다 술상을 차려놓고 기다리는 중이었다.
“여기요.”
하고 안방에서 영민이 불렀을 때 조철봉은 저도 모르게 풀썩 웃었다. 안방에다 술상을 차린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바로 침대로 직행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강력한 암시, 아니 압력이다.
“으음, 안주가 좋구나.”
술상 앞에 앉은 조철봉이 탄성을 뱉었다. 영민이 정성을 다해 술상을 차렸다는 것이 역력히 드러났기 때문이다. 마른안주는 땅콩에서부터 건포도, 치즈, 육포, 잣에다 은행, 마른새우까지 놓였고 매운탕에 홍합국 그리고 굴에다 생선회까지 차려진 것이다. 어지간한 술집 정식 안주보다 낫다.
“자기 올 때 주려고 준비했던 거야 .”
영민이 이제는 감칠맛나는 반말을 했다.
“이 굴부터 먹어봐. 아, 해.”
하고 영민이 굴을 초장에 찍어 내밀면서 먼저 입을 아, 벌렸다. 조철봉은 입을 쩍 벌려 굴을 받아 넣고는 머리를 돌렸다. 갑자기 목이 메이면서 눈물이 핑 돌았기 때문이다.
“자기야, 매운탕 떠 먹어봐.”
영민이 이제는 손에 수저를 쥐어 주면서 말했다.
“먼저 안주부터 좀 먹고 마셔.”
“알았어.”
“애주는 아저씨 언제 오느냐고 매일 찾았어.”
“어, 그래?”
조철봉이 매운탕 국물을 떠 먹고는 입맛을 다셨다.
“맛있구나.”
“술은 좀 있다 마셔.”
“알았어.”
“나, 오늘 백화점에 갔다 오다가 하마터면 사고날 뻔했어.”
“어? 왜?”
“아, 글쎄, 어떤 계집애가 옆에서 바로 앞으로 끼어들잖아.”
“어? 그래?”
“그런데 전화를 하고 있는 거야. 그러면서 백미러도 보지 않고 깜박이도 안켜고는 그냥 앞으로 들어왔다니까.”
“통화하면서 말이지?”
“그렇다니까.”
“미친년이구나.”
“틀림없어.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그런 애들이 보험도 안들었다고 하더라. 재수없으면 다 뒤집어 써야돼.”
“차도 똥차였어.”
“글쎄, 그렇다니까.”
그러면서 초철봉이 술잔을 쥐자 영민이 양주를 따랐다.
“오늘은 말야.”
술잔을 입에 붙였다가 떼면서 조철봉이 말했다.
“오늘은 내가.”
“내가 뭘?”
영민이 궁금하다는듯이 눈을 크게 떴다. 그러자 조철봉이 손을 뻗어 영민의 허벅지 위에다 올려놓았다.
“오늘은 한번 해야겠다.”
“흐응.”
영민이 몸을 비틀더니 허벅지 위에 놓인 조철봉의 손을 끌어 당겼다.
인간의 적응력이 강하다는 것은 조철봉 스스로가 겪어서 안다. 자동차회사 영업사원이었을 때 몇 만원 남기려고 구매자로부터 갖은 수모를 겪었지만 지금은 수억이 왔다갔다 해도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는다. 근검이네 절약 정신과는 다른 맥락으로 말하는 것이다. 인간은 환경에 가장 잘 적응하는 부류이다. 또한 그 적응의 능력 여하가 자질과 비례한다.
부장이 되었을 때 과장 시절의 구태를 버리는 것이 적응이다. 익숙해진 과장 업무와 이권을 과감히 버리고 부장 위치에 맞는 일을 스스로 찾는 것이 바로 적응력이다. 인간이 제 위치에 맞는 일만 한다면 사회가 평온해지는 것이다. 이사가 부장 이권을 욕심내고 부장이 과장 권한의 일을 상관한다면 조직은 개판이 된다. 제 일을 즐기면서 하는 것을 보면 아름답기까지 하다. 현재의 환경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모습도 귀엽다. 바로 고영민이 그렇다. 한달 전까지만 해도 아파트 월세도 못내던 영민이 지금은 자가용을 몰고 백화점에 다니는 입장이 된 것이다. 그리고 그 환경에 기쁘게 적응하고 있다.
조철봉은 한모금에 양주를 삼켰다. 영민이 그 기집애의 똥차를 비웃은 순간에 조철봉의 가슴은 기쁨으로 뛰었다. 베푼 기쁨은 이런 때가 되지 않겠는가? 누구는 남 모르게 선행을 한다지만 어디, 조철봉이가 그럴 수야 있겠는가? 영민과 함께 그 기집애의 똥차를 씹는 순간이 바로 행복 그 자체다. 베푼 증표가 영수증처럼 이마빡에 딱 붙여진다면 더 생색이 날 것이다. 영민이 허벅지에 놓인 조철봉의 손을 쥐더니 아예 제 샘 위에다 붙였다. 그러고는 열기띤 눈으로 조철봉을 보았는데 습기를 머금은 눈이 불빛을 받아 번들거리고 있었다.
“자기야.”
영민이 샘 위에 놓인 조철봉의 손을 힘주어 누르면서 코가 막힌 목소리로 불렀다.
“응?”
“나 힘들었어.”
“뭐가? 왜?”
“참기가 말야.”
그러고는 이번에는 제 나머지 손을 뻗어 조철봉의 철봉 위에다 붙였다. 그래서 둘은 각각 서로의 샘과 철봉 위에다 손을 붙이고 있는 셈이 되었다. 영민이 조철봉의 단단한 철봉 위를 문지르더니 숨소리가 가빠졌다.
“자기야.”
영민이 가쁜 숨을 뱉으면서 물었다.
“술 더 마셔야 돼?”
“아니.”
“벌써 11시 반인데.”
“시간은 많아.”
“그래두”
“급해?”
그러자 영민이 조철봉의 바지 지퍼를 내리더니 서둘러 팬티를 헤치고는 철봉을 끄집어내었다.
“어머.”
감탄사를 뱉은 영민의 두 눈이 더 번들거렸다.
“자기야, 나.”
영민이 조철봉의 철봉을 두손으로 움켜쥐더니 헛소리처럼 말했다.
“해줘, 응?”
“글쎄, 한다니까.”
조철봉이 영민의 원피스를 들치고는 팬티를 끌어내렸다. 그러자 영민이 아예 일어서더니 서둘러 팬티를 벗어 던졌다. 서두는 바람에 팬티가 매운탕 냄비를 스치고 떨어졌는데 아마 국물이 묻었을 것이다.
“지금, 응? 술은 나중에 먹고.”
영민이 조철봉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조철봉은 이제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꿈을 깨야만 하는 순간이 도래한 것이다. 아끼고 아끼던 초콜릿을 먹어야 하는 기분이 이랬을까? 그 16년 전의 그날, 아침에 영민과 여관방에서 헤어지고 나서 약국으로 달려가 마이신을 사먹었을 때의 그 처절했던 심정은 지금도 생생하다. 머리를 시멘트 벽에다 박고만 싶었으며 과연 그 대가를 받았다. 그날 이후로 영민과 헤어지게 되었으니까. 그리고 지금, 조철봉은 어느새 알몸이 되어 침대 옆에 서 있었다.
“자기야.”
그때 브래지어마저 벗어던진 영민이 다가와 조철봉의 허리를 두손으로 감아 안았다. 둘은 알몸이다. 그리고 침실의 불은 환했다. 영민은 속삭였다.
“사랑해.”
이럴 때 사랑한다는 말은 그저 인사치레일 뿐이며 말하는 자나 듣는 자나 거의 부담도 느끼지 않을 뿐만 아니라 95%가 기억도 하지 못한다는 여론조사 결과가 나와 있다.
“자기야, 불은?”
침대에 오른 조철봉에게 영민이 물었다. 전기 스위치가 문 옆에 붙어 있었기 때문에 두번 걸음을 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침대에 누운 조철봉이 정면으로 서있는 영민의 알몸을 보았다. 젖가슴은 아직도 탱탱했으며 어깨와 허리의 선이 부드러웠다. 그리고 조철봉의 시선이 영민의 아랫배로 옮겨졌다. 약간 불룩한 아랫배는 도발적이다. 영민은 배에 힘을 주지 않은 채 자연스럽게 서 있었으므로 아랫배의 곡선이 두드러졌다. 조철봉은 입안에 고인 침을 삼켰다. 아랫배 밑의 검은 숲과 붉은색 골짜기까지 환하게 드러나 있었기 때문이다.
“불은 끄지마.”
조철봉은 자신의 목소리가 메말라 있는 것을 들었다.
“알았어.”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영민은 문쪽으로 다가가더니 안에서 문을 잠갔다. 그러고보니 집안에 애주가 있었던 것이다. 조철봉은 발끝으로 걸어 다가오는 영민을 뚫어지게 보았다. 대여섯걸음 거리밖에 되지 않았지만 영민의 두팔이 어색하게 흔들렸고 발도 부정확하게 디뎌졌다. 그래서인지 침대 앞에 닿았을 때는 와락 엎드려 버렸다.
“이리와.”
조철봉이 팔을 벌리며 말하자 영민이 다소곳이 안겼다. 가슴에 닿은 영민의 숨결이 가빴고 더웠다.
“자기야.”
영민이 조철봉의 가슴에 두손을 붙이더니 하반신을 비틀었으므로 철봉이 골짜기 옆으로 미끄러졌다.
“나. 행복해.”
조철봉은 먼저 영민의 입술에 키스했다. 지금까지 조철봉은 먼저 키스부터 하지 않았다. 그런 경우는 아주 드물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영민은 조철봉의 꿈이었다. 오늘밤, 꿈을 깨뜨리는 것이다. 입술이 부딪쳤을 때 영민은 금방 입을 벌리더니 혀를 내밀었다. 말랑한 혀가 저항없이 뽑혀 나오면서 조철봉의 입 안을 노닐었고 벌어진 입에서 거친 숨소리에 섞여 신음이 뱉어지기 시작했다. 조철봉도 손을 뻗쳐 영민의 등과 엉덩이, 그리고 무릎과 종아리까지 쓸어 내렸다. 손이 뻗치는 범위까지 정성을 들여서 마치 손끝에 눈이 붙어 있는 것처럼 쓸었다.
“아아.”
영민이 입을 떼면서 탄성을 뱉었다. 그러더니 두 손으로 조철봉의 목을 감싸 안았다. 그때 영민의 엉덩이를 쓸던 조철봉의 손이 젖었다. 뜨거운 용암에 젖은 것이다.
“자기야, 행복해.”
그때 영민이 헛소리처럼 중얼거렸으므로 막 가슴에 입술을 붙이던 조철봉이 시선만 들었다. 영민은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었지만 두 눈이 번들거렸다. 눈에 고인 물기가 반사됐기 때문이다. 숨을 들이켠 조철봉은 영민의 젖꼭지를 입에 물었다. 입으로 품었다는 말이 맞을까? 입안에 가득 젖가슴을 품고 혀끝으로 젖꼭지를 돌리는 순간이 되면 조철봉은 언제나 다 이뤘다는 성취감을 느끼곤 했다. 여자의 몸에서 젖가슴은 가장 기품있는 부분이었다. 대개 위쪽에서 애무를 시작하여 아래쪽으로 내려오게 되는데 솟아있는 젖가슴을 입으로 물었을 때 조철봉은 버릇처럼 여자의 얼굴을 보면서 성취감을 느꼈으며 존재의 확인까지 했다. 위치가 높았기 때문일 것이다.
“아아, 엄마.”
영민이 가늘고 높은 신음을 뱉으면서 두손으로 조철봉의 머리칼을 움켜쥐었다. 그러나 마구 헝클지는 않고 살살 다룬다. 아직 정신을 차리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젖꼭지를 굴리던 혀는 이제 아랫배쪽으로 내려갔다.
“자기야, 자기야.”
영민이 다급하게 조철봉을 불렀지만 행동을 방해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두 다리를 더 벌리고 엉덩이를 들썩여 몸을 조금 아래로 내렸다. 그동안 몸을 뒤척이는 바람에 위로 붙었기 때문이다. 조철봉은 오목한 영민의 배꼽을 혀로 핥다가 마침내 볼록한 아랫배로 내려갔다. 두손은 이미 콩알처럼 단단해진 영민의 젖꼭지와 무릎에다 발가락까지 쉴새없이 쓸고 튕기고 문지르는 중이었으므로 어느 한 부분도 쉬지 않았다.
“엄마, 나 죽어.”
마침내 영민이 열에 뜬 목소리로 비명처럼 외쳤다. 아직도 크게 뜬 눈이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었지만 초점이 없다. 붉게 상기된 얼굴, 반쯤 벌려진 입에서는 거친 숨소리와 함께 쉬지 않고 신음이 터져 나온다. 그러나 조철봉은 서두르지 않았다. 지금까지 수백명의 여자를 겪었지만 항상 최선은 다했다. 그러나 오늘, 나는 드디어, 마침내, 결국, 이윽고 영민을 안게 된 것이다. 조철봉의 입술은 드디어 아랫배의 언덕을 타고 넘어 영민의 골짜기로 내려갔다.
“아유, 엄마. 거기.”
하고 영민이 갑자기 발버둥을 쳤으므로 리듬이 조금 깨졌다. 조철봉의 입술이 막 영민의 샘에 닿으려는 순간이었다. 영민이 몸을 비틀었지만 하체에 붙어있는 조철봉의 머리는 떼지 않았다.
“거기 하지마. 자기야.”
영민이 허덕이며 말했다.
“거긴 싫어.”
“왜?”
뻔히 알면서도 조철봉이 그렇게 묻자 영민이 몸을 또 비틀었다.
“거긴 부끄러워.”
그때 머리를 숙인 조철봉이 영민의 골짜기를 빨았다. 영민이 이를 악물고 있더니 곧 신음소리가 터져나왔다. 거칠고 높은 신음이었다. 조철봉은 아까부터 영민의 샘이 넘치고 있는 것은 알고 있었다. 샘은 성감의 리트머스 시험지 같은 부분이다. 감추지 못하고 금방 터져 나온다. 조철봉의 혀가 골짜기 안팎을 휘젓고 다닌 지 얼마 되지도 않았을 때 영민은 폭발했다. 턱을 한껏 치켜들고 두 다리로 조철봉의 상반신을 감아안은 자세로 폭발한 것이다. 신음같은 탄성은 목구멍 깊숙한 곳에서 울려 나왔는데 치켜뜬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나왔다. 조철봉은 영민의 두 손을 움켜잡은 채 가만히 바라보았다. 행복했다.
고영민의 하반신을 껴안은 채 조철봉은 한동안 가만있었다. 거친 숨과 함께 앓는 소리를 뱉어내던 영민이 차츰 가라앉는 것을 노련한 외과의처럼 살피면서 기다리는 것이다. 조철봉은 감았던 눈을 떴다. 그러자 바로 눈 앞에 영민의 숲과 샘이 있었다. 그 자세 그대로인 채 영민은 절정에 올라가 버렸던 것이다. 그때 영민이 몸을 비틀면서 신음을 뱉었으므로 조철봉이 머리를 들었다.
“자기야.”
영민이 꺼져가는 목소리로 조철봉을 불렀다. 이제 영민은 눈을 감고 있었다. 절정에 오를 때까지 눈을 부릅뜨고 있다가 지금은 감은 것이다.
“나, 기운이 하나도 없어.”
영민이 말하더니 두손을 들어올려 안아달라는 시늉을 했다.
“하지만 자기는 안했지?”
“응?”
몸을 일으킨 조철봉이 영민을 안으면서 물었다.
“왜 묻는거야?”
“나만 했으니까 자기도 얼른 해.”
“너, 괜찮아?”
“괜찮다니까.”
“넣어도 돼?”
듣는 사람이 있다면 그걸 말이라고 씨불이느냐고 기가 막혀 하겠지만 이 곳에서는 쌍방이 진중했다. 이때는 어떤 거짓말도 다 통한다. 물론 끝나고 나면 그 거짓말 대부분이 다 머릿속에서 지워지지만.
“응, 넣어줘.”
영민이 여전히 두 눈을 감은 채 두 다리로 조철봉의 하체를 감았다. 그러자 철봉이 영민의 허벅지 사이에 끼워졌다.
“너무 커.”
영민이 허벅지를 비벼 철봉의 촉감을 더 넓게 느끼면서 놀란듯이 말했다.
“자기건 너무 커.”
“그래?”
바로 이 구절은 남자가 여자한테서 받는 칭찬중 10위권 안에 들 것이다. 이런 분위기에서 바로 이것만큼 남자의 사기를 진작시키는 칭찬은 없다. 조철봉은 영민의 얼굴을 내려다 보았다. 아직도 영민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으며 몸은 뜨거웠다. 영민이 지쳤다고 하지만 얼마든지 다시 절정으로 달려갈 수 있다는 것도 조철봉은 안다. 심호흡을 한번 하고 난 조철봉은 상체를 세웠다. 조철봉의 상체가 떼어지자 긴장한 영민이 눈을 떴다. 초점이 분명한 눈동자가 조철봉을 똑바로 올려다 보았다.
“자기야, 사랑해.”
영민이 얼굴에 가득 진정을 띠고 말했다.
“죽도록 사랑해.”
조철봉은 영민의 말이 마치 음악처럼 들렸다. 그 내용은 가슴을 치는 시였다.
“난 16년을 기다렸어.”
조철봉이 철봉을 영민의 골짜기에 붙이면서 말했다. 골짜기는 한바탕 홍수가 휩쓸고 지났지만 다시 생생하게 피어나는 중이었다.
“넌 내 꿈이었어, 영민아.”
떨리는 목소리로 조철봉이 말했을 때 영민의 눈가로 눈물이 흘러 떨어졌다.
“사랑해.”
영민이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때까지 철봉을 영민의 골짜기에 붙이고 있던 조철봉은 산책을 시작했다.
“아아.”
영민이 자극을 받은 듯 두눈이 크게 떠졌다. 그러더니 허리를 비트는 시늉을 했다. 철봉을 받아 넣으려는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그러더니 소리쳤다.
“자기야, 쑥 넣어줘.”
조철봉은 영민의 몸이 다시 끓어 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몇번이고 된다.
이제는 때가 되었다. 조철봉은 흐려진 눈으로 고영민을 내려다 보면서 그렇게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솔직히 그동안 잊고 있었지 않았더냐? 괜히 꾸물대다가 16년전 짝이 될 수도 있다.
“아유우.”
하면서 영민이 하반신을 비틀었으므로 조철봉은 생각에서 깨어났다. 지금 철봉은 골짜기 옆으로 산책하는 중이었다.
“자기야, 나 죽겠어. 그만좀 해.”
하고 영민이 실성한 여자처럼 외쳤을 때였다. 그순간 조철봉의 귀에 서경윤의 목소리가 울렸다.
“난 그냥 팍팍 하는것이 낫거든.”
섹스가 끝나고 김병문한테 했던 말이었다.
“그걸 하기전에 저는 흥분을 시킨답시고 제 물건을 내 거기다 붙이고 슬슬 문지르는데, 정말 지겨워.”
서경윤이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조철봉은 심호흡을 했다. 그러고는 산책을 멈추더니 곧장 샘 안으로 진입했다.
“아악.”
그순간 영민이 두눈을 번쩍 치켜 뜨더니 입을 딱 벌렸다. 외마디 탄성이 뱉어졌고 다음에는 두손을 뻗어 조철봉의 허리를 움켜 쥐었다. 조철봉은 영민의 샘이 환호하는 것을 느끼고는 온몸을 떨었다. 샘은 뜨거웠고 넘쳐나고 있었다. 철봉은 천천히 진입하면서 샘의 모든 부분을 감촉했다.
“아아, 여보.”
영민이 절규하듯 소리쳤다. 철봉이 바닥에 닿았을때 영민은 허리를 힘껏 치켜 들면서 더 깊게 받아들이려는 시늉을 했다. 그러더니 다시 신음했다. 조철봉은 터질듯이 팽창된 철봉을 의식하고는 이를 악물었다. 그렇다, 아무리 노련한 조철봉이더라도 이런 경우에는 억제하기 힘든 것이다. 영민이 보통여자인가? 나이트에서 만난 여자하고 같은가? 16년이다. 16년 연륜이면 일자무식도 시인이 되고 박사도 될 것이었다.
“아유우 아파.”
하면서 영민이 허리를 좌우로 흔들면서 쾌감을 맛보았으므로 조철봉은 눈을 치켜떴다. 이러면 안된다. 조철봉은 철봉을 천천히 힘을 주면서 빼내었다. 그냥 빼내는것 하고는 전혀 다른 운동이다.
“아아악.”
영민이 탄성을 뱉었을때 조철봉은 다시 각도를 바꾸어 밀고 들어갔다. 이번에는 힘있고 빠르게.
“아이고머니.”
영민이 조철봉의 어깨를 움켜쥐더니 비명같은 신음을 뱉었다. 그때 조철봉이 악문 잇사이로 말했다.
“의신당 딩웨 는스레드.”
그동안 다른 각도로 철봉이 두번이나 왕복을 했으며 영민의 신음은 더 굵고 길어졌다.
“말정 소웠다름아.”
이때는 두번이었지만 힘이 들어갔기 때문에 영민은 죽는것처럼 자지러졌다. 응접실 건넌방에 애주가 자고 있었지만 아랑곳하지 않는다.
“는추춤 딩웨 는스레드.”
조철봉은 눈을 부릅뜨고 더 강하게 영민을 압박했다. 이번에는 네번 진퇴를 했는데 영민의 신음은 열번도 더 넘었다. 영민의 몸은 이미 땀으로 젖었고 숨결에는 흐느낌까지 섞여져 있다. 조철봉은 이를 갈았다.
“욱더 소웠다름아.”
다시 힘차게 들어갔다 나오기를 두번을 했을때 영민은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샘이 만개하는 꽃처럼 벌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폭발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조철봉은 계속했다.
“가리우 던었울 은날난지.”
서경윤이 그놈하고 불렀던 노래인 것이다.
“와금지 니하각생 소었이랑사.”
다시 웨딩드레스를 이어 부르던 조철봉의 눈에서 주르르 눈물이 흘러 떨어졌다. 물론 웨딩드레스는 18번 노래이긴 했다. 그런데 왜 그 노래가 입에서 튀어 나왔단 말인가? 머릿속에 제주도의 호텔 방에서 서경윤이 그놈과 뒹굴다 흥얼거리던 웨딩드레스가 깊게 박혀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아아아아.”
그러나 그 순간 영민이 터져버렸다. 온몸을 오그렸던 영민이 길고 높은 신음을 뱉더니 땀 투성이가 된 몸을 떨면서 다시 조철봉의 몸에 빈틈없이 매달렸다. 그때 조철봉의 입에서도 신음이 울려 나왔다. 샘에 갇혀 있던 철봉에 무서울 만큼 강한 압박이 왔기 때문이다.
“으윽.”
이를 악문 조철봉은 칼끝같이 예민해진 철봉의 신경 세포를 무시하려고 웨딩드레스 노래 가사를 떠올렸다. 그러나 이어지는 가사가 생각나지 않았다.
“어어어어.”
다시 영민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오면서 철봉에 다시 압박이 왔다. 그 순간 조철봉은 철봉에 수천마리의 거머리가 붙어 꿈틀거리는 느낌을 받았다.
“으으윽.”
다시 신음을 뱉은 조철봉이 소리쳤다.
“그래, 놔주마, 맘대로 해.”
그 순간 가슴이 편안해진 것을 느낀 조철봉의 눈에 초점이 잡혔다.
“아아응.”
하면서 경민이 숨이 끊어질 것 같이 호흡을 하더니 조철봉을 끌어안고 있던 사지에 힘이 풀리기 시작했다. 절정에 머물던 기운이 내려가고 있는 것이다.
“나 죽겠어.”
거친 숨을 뱉으면서 그렇게 제대로 된 말을 하는 것도 그 증거가 될 것이다. 조철봉은 영민의 얼굴을 쏘아보았다. 눈을 감은 채 영민은 아이 주먹 하나가 다 들어갈 만큼 입을 벌리고는 앓는 소리와 함께 아직도 거친 숨을 뱉는 중이었다. 땀에 젖은 이마에 머리칼이 어지럽게 엉켜 있었고 출렁이는 젖가슴도 물에 빠진 것처럼 젖었다. 조철봉은 아직도 샘에 들어가 있는 철봉에 힘을 주어 보았다. 그러자 불끈 하는 느낌과 함께 거머리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으응?”
하면서 영민이 눈을 반쯤 뜬 것도 그때였다. 영민의 반응이 다시 살아나기 시작한 것이다. 조철봉은 다시 철봉의 진퇴를 시작했다.
“여보, 그만.”
늘어지려던 경민이 질색을 한듯이 두손을 겨우 들어 조철봉의 가슴을 밀었다. 그러나 철봉의 진퇴가 세번째 이어졌을 때 입에서 다시 신음이 울려나왔다.
“나 정말 죽을거야.”
하면서도 각도를 달리한 철봉이 밀치고 들어오자 영민은 두팔로 조철봉의 목을 감아 안았다.
“여보, 당신은.”
영민은 말을 잇지 못하고 격한 신음을 뱉기 시작했다. 샘에 가득찬 용암은 식다가 다시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조철봉은 이제 노래도 부르지 않았다. 마음이 탁 트인 느낌이 오면서부터 철봉도 자유로워진 것이다.
“그래, 너도 외로웠겠지.”
조철봉이 이제는 입술만을 달삭이며 말했다. 그때 영민의 입에서 다시 방 안이 떠나갈듯한 탄성이 뱉어졌다.
“아유우, 나죽어, 여보.”
“나같은 놈을 네가 어떻게 의지하고 살겠니? 다 이해하겠다. 야.”
이것은 서경윤한테 하는 말이다. 그때 영민이 미친 것처럼 몸부림을 쳤다.
고영민은 또 터졌다. 그리고 이번에는 조철봉도 함께 터졌다. 그 순간을 묘사한 수만개의 단어와 장면들이 있었으며 그때 그 순간이 다 조철봉에게는 각별했지만 지금같은 정성이, 지금같은 감개가 깃든 터짐이 어디 있을 것인가? 조철봉은 영민의 몸위에 포개진 채 오랫동안 그대로 있었다. 한덩어리가 된 둘은 가쁜 숨도 함께 뱉으면서 흘러가는 강물같은 여운을 즐겼다.
섹스는 대상마다 다 다르다. 그러나 일을 마쳤을 때 조철봉의 몸도 남과 다르지 않았다. 쾌감은 순식간에 빠져나간다. 마치 거대한 블랙홀이 바닥에 깔린 것처럼 그 쾌감 덩어리를 빨아가 버린다. 순식간에 빈 껍질만 남는 것이다. 그것을 의식하기 시작하면 발사하기 직전의 순간에도 그 블랙홀이 떠오르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차라리 안 쓰는 게 낫다. 그 의식이 점점 병균처럼 파먹고 들어와 나중에는 대포마저 망가뜨려 버릴테니까. 그러나 조철봉은 만족했으며 심신이 평온했다. 영민의 몸에 엎드려 호흡이 가라앉았을 때 이대로 더 있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고 그것을 의식한 순간 목이 메었다.
여자와 정사를 나눈 후에, 그것도 대포를 발사한 후에 이대로 더 같이 있고 싶다는 느낌을 주는 상대가 바로 여기 있었던 것이다. 고영민이다. 조철봉은 이마를 침대에 붙인 자세로 눈물을 떨구었다. 지금까지 온갖 감언이설로, 그래서 때로는 자신까지 속인 채 사람을 이용해 왔다. 섹스를 할 적에도 철저한 이중성과 가면이 상대방의 성감을 높여 절정에 닿게 하는 데 큰 기여를 했을 것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안 그랬다. 처음부터 계산하지 않았으며 주고 싶다는 감정으로만 시작했다. 섹스를 할 적에도 그렇다. 그저 만족시켜 주고만 싶었다. 다른 여자와 다른 점이 또 있다. 섹스가 끝났을 때를 이만큼 걱정해 보기도 처음이다. 혹시나 다른 여자들하고 했을 때처럼 쏘고 나서 도망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면 어쩌나 하고 걱정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편안하다니. 길게 숨을 뱉은 조철봉이 그때서야 몸을 굴려 영민과 떨어졌다.
“아아.”
그때까지도 단단하게 박혀 있던 철봉이 빠져나오는 충격 때문인지 영민이 가볍게 탄성을 뱉었다. 그러나 이제 숨소리는 고르다. 조철봉은 벗은 채로 천장을 향해 누웠다. 그러자 영민이 몸을 비틀어 조철봉의 가슴에 볼을 붙였다.
“여보.”
영민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간드러졌다. 사랑과 자랑, 만족감과 편안함이 그 두자에 다 들어가 있다.
“응?”
그만큼은 못 되지만 조철봉이 넉넉하게 물었을 때 영민이 손바닥으로 가슴을 쓸었다.
“나 이렇게 좋은 건 첨야. 나 하면서 계속 이대로 죽어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니까.”
“그 숨가쁜 순간에도 생각을 길게 했구나.”
“여보, 우리 두시간이나 했어.”
영민이 몸을 흔들더니 손을 뻗쳐 아직도 건들거리는 철봉을 건드렸다.
“이렇게 크고 센 건 정말 첨야.”
“처음도 많다.”
“한 남자를 이렇게 사랑한 것도 첨이고.”
그러더니 영민이 얼굴을 조철봉의 가슴에 꽉 붙였다.
“우리 이제 헤어지지 마, 여보.”
말문이 막힌 조철봉이 영민의 어깨만 당겨 안았다. 그때 영민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한달에 한번만 들러도 돼. 나, 질투 안할게. 한달에 한번 당신 보는 낙으로 살 거야. 여보, 약속해 줘.”
조철봉은 물끄러미 고영민을 보았다. 영민한테서 이런 말을 듣다니, 감개가 제방물 터지듯이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이제 떠올리기조차 싫었던 16년 전 첫사랑의 상처는 근사하게 복귀가 되었다. 이보다 더 멋진 회복이 있을손가? 파이프가 새어 작업을 하지 못한 그날밤의 뼈저린 추억은 대역전이 된 것이다. 조철봉은 영민의 어깨를 당겨 안았다.
“자주 올게. 넌 나와 함께 앞으로 16년을, 아니 남은 평생을 같이 지내야 돼.”
“고마워, 여보.”
“애주를 내 친 딸처럼 키울거야.”
“고마워.”
영민이 한치의 빈틈도 남기기 싫다는 듯이 조철봉의 몸에 바짝 붙었다.
“행복해, 여보.”
“나두 그래.”
“그런데, 자기야.”
“응?”
“너무 오래 안해도 돼.”
“왜?”
“난 너무 좋지만.”
“그런데?”
“자기가 너무 무리하는 것 같아서.”
“아니.”
“난 한번만 해도 되거든? 그러니까 길게 안해도 돼, 여보.”
“나아 참.”
하며 조철봉이 지그시 웃었다.
영민은 이미 오늘밤 두시간 동안의 쾌락을 맛보았다. 앞으로는 그 이상도 즐길 수가 있을 것이었다.
“알았어.”
그러고는 조철봉이 만족한듯 길게 숨을 뱉었다. 행복했다. 더 이상을 바란다면 나쁜놈이 될 것이다.
아침이 되었을 때 조철봉은 눈을 떴다. 벽시계가 오전 7시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박경택이 8시에 아파트 현관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이므로 조철봉은 서둘렀다. 파자마 를 걸치고 침실을 나왔을 때 먼저 애주가 인사를 했다.
“아저씨, 안녕하세요?”
“오냐.”
애주는 이미 단정하게 옷을 차려입고 식탁에 앉아 있었다.
“일어났어요?”
주방에 있던 영민이 머리만 돌리며 웃어 보였다. 계란 튀기는 냄새가 났고 가스레인지 위에는 냄비에 담긴 국이 끓고 있었다.
“씻고 오세요. 아침 다 되었어요.”
애주 앞이어서 영민은 깍듯한 존댓말을 썼다.
“음, 냄새 좋구나. 콩나물 국이야?”
“네, 해장국.”
“8시에 차가 오기로 했으니까 서둘러야 돼. 9시에 회의가 있거든.”
9시에 회의는 없다. 그냥 바쁘고 평범한 남편 흉내를 내본 것이다.
“알았어요. 하지만 시간이 얼마 안남았는데 어떡해?”
오히려 영민이 울상을 짓더니 애주에게 소리쳤다.
“애주야, 반찬 좀 식탁으로 날라. 그리고 여보.”
영민이 지금도 얼쩡거리고 서있는 조철봉한테도 소리쳤다.
“뭐해요? 빨랑 씻고 나오지 않고?”
조철봉은 어머니한테 야단을 맞은 아이처럼 서둘러 화장실로 들어섰다. 그러고는 화장실의 거울에 비친 제 얼굴을 보고는 히쭉 웃었다. 거울에 비친 웃는 모습이 조금 미친놈 같게도 보였지만 드물게 밝았다. 이것이 행복한 표정이라는 생각이 들었으므로 거울에 대고 또 웃어 보았다. 그때 밖에서 영민이 다시 소리쳤다.
“내복 문밖에 놓았으니까 갈아 입어요.”
서경윤이 제주도 여행에서 돌아온것은 그 다음날 오후였다.
“나, 왔어.”
하고 경윤의 당당한 목소리가 수화구를 울렸을때 조철봉은 이를 악물었다가 금방 풀었다. 만일 고영민이란 존재가 머릿속에 들어와 있지 않았다면 이렇게 가슴이 금방 회복되지 않았을 것이다.
“어, 그래.”
조철봉은 제 목소리가 평온하게 뱉어지는것을 듣고는 스스로 대견했다. 그래서 덧붙였다.
“푹 쉬었어? 스트레스는 확 풀고?”
“응, 잘 쉬었어.”
조철봉의 밝은 목소리에 기운을 얻은듯 경윤도 덧붙였다.
“아주 좋았어. 당신도 가봐.”
“나야 바빠서.”
“오늘 일찍 들어와. 비싼 전복도 사왔으니까.”
“어? 나 주려고? 그럼 내가 누구 다른 남자라도 있는줄 알아?”
경윤이 쏘아 붙이듯이 말했다. 이제 떠보기 단계가 지나자 바로 원상으로 돌아간 것이다. 강하게 나가야 약점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고 믿는 것이다.
“알았어. 오늘은 일찍 들어가지.”
하고 전화기를 내려놓은 조철봉은 입맛을 다셨다. 경윤이 돌아왔다고 연락하기전에 이미 박경택이 다녀간 것이다. 그리고 또 한개의 녹음 테이프를 가져왔다. 조철봉의 시선이 탁자위에 놓여진 녹음 테이프로 옮겨졌다. 심호흡을 한 조철봉은 손을 뻗쳐 녹음기의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곧 조금전에 들었던 서경윤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자기야, 그 자식 바람피는 증거를 잡기는 어려울거야. 외국으로 자주 나댕기는 데다가 밑에 놈들이 많아서 말야. 그러니까 다른 방법을 써야돼.”
“어떻게?”
김병문이다. 최성희의 남편, 이놈도 오늘 경윤이 끊어준 비즈니스 클래스를 타고 돌아왔다. 경윤이 성실하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조금씩 조금씩 그놈 재산을 빼돌리자구. 가랑비에 옷젖듯이 말야. 그 방법이 제일 나아. 만일 우리가 강수를 쓰면 그놈도 우리 뒤를 캘지 모르니까 말야. 그놈 수단이 보통이 아니거든.”
“차라리 사고로 없애 버리면 어때? 그럼 그작자 재산이 몽땅 자기 앞으로 넘어 오잖아?”
하고 병문이 말한 순간 조철봉은 이를 악물었다. 이놈은 지금 살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때 경윤이 대답했다.
“그래도 영일이 애빈데 그럴수는 없어.
“미련이 남은거야?”
그러자 경윤이 큭큭 웃었다.
“그럴 필요까진 없단 말야. 미련은 무슨.”
“간단해. 자긴 나한테 맡기기만 해. 내가 처리 해줄테니까.”
“어떻게?”
“사고로 끝낸다니까. 빈틈없이 처리해.”
“그래두.”
경윤의 목소리가 조금 흐려지자 병문이 서둘렀다.
“나한테 맡기라니까? 꼬리가 길면 밟힌다고 했어. 우리가 길게 끌다가 먼저 그놈한테 잡히면 똥 된다구.”
“…….”
“잠깐이야. 죽으면 금방 잊게 돼. 그리고 나서 우리가 정말 멋있게 사는거지.”
“…….”
“난 자기밖에 없어. 자기가 죽으라면 죽을거야. 난 절박하다구.”
“알았어.”
마침내 경윤이 말했을때 조철봉은 녹음기의 버튼을 눌러 끄고는 핸드폰을 들었다. 그러고는 한숨과 함께 버튼을 눌렀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눈을 부릅뜬 최갑중이 두번째 물었지만 조철봉은 탁자 위에다 시선을 준 채로 대답하지 않았다. 갑중은 지금 녹음된 내용을 다 들은 것이다. 그래서 두시간 반 동안 시발 소리를 백번도 더 했다.
“형님.”
이제는 상반신을 기울인 갑중이 조철봉의 앞으로 얼굴을 바짝 들이대었다.
“이 연놈들은 지금 살인 모의를 하고 있다구요. 당장에 이 테이프들을 경찰에 넘겨서 집어넣어야 됩니다. 영장 없는 도청이네 뭐네 따질 것 없단 말입니다.”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갑중이 목소리를 높이는 바람에 입에서 침까지 튀었다.
“그리고 오늘부터 집에 들어가시면 안됩니다. 그 시발년이 틀림없이 전복에다 약을 넣을 테니까요.”
“….”
“아니면 형님 주무실 때 그놈을 불러들여서 강도로 위장시켜 살인을 하거나 목을 졸라….”
“그만.”
이맛살을 찌푸린 조철봉이 갑중의 말을 막았다.
“좀 조용 조용 말 해, 인마.”
“아, 방음장치가.”
했다가 갑중이 눈을 또 치켜떴다.
“아니, 형님은 도대체 열이 나지도 않습니까? 꼭지가 돌지 않느냐구요?”
“돌긴 뭐가 돌아?”
“아, 여편네가 간부하고 함께 남편을 죽일 음모를 꾸미는데, 그 증거를 녹음해서 들었는데 머리가 돌지 않는 남편이라면 그놈이 미친 놈이죠.”
“그런가?”
“아니, 도대체….”
기가 막힌다는 듯이 갑중이 주먹으로 제 가슴을 두번 쳤다. 그러다가 잘못 쳤는지 캑캑거리며 기침을 하다가 머리를 들고 조철봉을 보았다. 이제는 눈을 가늘게 뜨고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조철봉을 보았다.
“형님, 무슨 계획이 있으신 거죠?”
“무슨 계획?”
“그 두 연놈을 역으로 죽일 계획 같은 것 말입니다.”
조철봉이 눈만 껌벅이자 갑중이 머리까지 끄덕이며 말했다.
“형님이 가만 계실 리가 없지. 천하의 조철봉인데, 그래서 날 부르신 거지.”
“….”
“무슨 일이든 시켜만 주십시오. 내 손으로라도 그 연놈들을 작살낼 테니까요.”
“….”
“이런 일은 다른 놈들 시키면 안됩니다. 약점을 잡히니까요. 저하고 형님 둘이서 해치우면 됩니다.”
“….”
“배에다 싣고 가서 바다 한가운데서 빠뜨리는 방법이 좋겠던데요. 다리에 시멘트나 철근을 묶어서 말이죠.”
“….”
“어떤 영화를 보았는데 아예 다리에다 시멘트를 부어서 굳혀 놓더만.”
“….”
“이건 그 시발놈을 처리하는 방법이고 그 시발년, 영일 엄마는 다른 방법을 써야 됩니다. 예를 들면 자동차 사고를 낸다든지, 아니면 길 가다가 머리 위로 공사장 자재가 떨어져서 즉사를 한다든지, 물론 이건 제가 던져야죠.”
“내가 오늘 집에 가서 잘테니까.”
조철봉이 불쑥 말했으므로 갑중은 말을 이으려다가 입만 벌린 채 가만 있었다. 갑중의 시선을 받은 조철봉이 말을 이었다.
“오늘 죽이지는 않을 거다. 그러니까 넌 대비만 하고 있어. 눈치 채지 못하게.”
문이 열렸을 때 조철봉은 앞에 서 있는 서경윤을 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경윤은 눈웃음을 쳤다.
“밥은 잘 먹었어?”
그동안 식사 잘 했느냐고 묻는 것이다.
“응.”
건성으로 머리를 끄덕이며 들어선 조철봉에게 영일이 달려왔다.
“아빠.”
영일의 관심은 조철봉이 들고 있는 게임기에 쏠려 있다.
“어, 잘 갔다왔어?”
게임기를 넘겨준 조철봉은 영일의 겨드랑이에 두손을 넣고 치켜들었다. 그러나 영일의 시선은 게임기에 가 있다. 영일의 볼에 입을 맞추고 내려놓았을 때 서경윤이 말했다.
“씻고 밥 먹어.”
저녁 8시가 되어 가고 있었다. 이 시간에 집에 온 날은 일년에 몇번 되지 않는다. 욕실로 들어간 조철봉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이맛살이 찌푸려졌고 눈은 흐렸다. 마치 상한 생선의 눈 같다. 바로 어제 아침에 고영민의 욕실에서 본 얼굴과는 전혀 다른 놈이었다. 어제는 미친놈처럼 거울을 보고는 힐쭉 웃었었다. 그때 문 밖에서 경윤이 물었다.
“술 마실거야?”
“어? 응.”
생각에서 깨어나는 바람에 조금 높게 대답한 조철봉은 다시 거울을 보았다. 그러자 거울속의 사내가 코를 실룩거리더니 두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 떨어졌고 상한 생선의 눈이 아주 썩은 것처럼 되어버렸다.
“응응.”
짧고 낮게 소리내어 운 조철봉이 눈을 크게 뜨고 사내를 노려보았다.
“넌 고영민이가 있잖아 인마.”
조철봉이 거울속의 사내를 위로했다.
“그리고 영일이는 인마, 크면 다 지 애비 찾아오는 거다.”
그러자 거울속의 사내가 조철봉에게 말했다.
“니가 영일이를 데려가 키워야 하는 것 아니냐? 시발놈아. 너 편하려고 영일이를 던져 놓고는 나중에 돌아오기를 기다려? 뻔뻔한 놈 같으니.”
“영일이는 상처를 받지 않아야 할 텐데.”
조철봉의 목소리는 낮았고 시선도 내려졌다. 거울속의 사내에게 기가 죽은 모습이다. 그때 거울속의 사내가 말했다.
“말도 안되는 소릴랑 말어. 넌 이미 상처를 주었어. 이젠 돌이킬 수가 없단 말이다.”
그러더니 거울속의 사내가 다시 눈물을 쏟았다. 조철봉이 욕실에서 나왔을 때 영일은 벌써 제 방으로 들어가 있었는데 경윤은 식사 준비를 다 해놓았다. 생선찌개에다 전복회, 그리고 제주도에서 가져온 밑반찬으로 식탁은 풍성했다.
“영일이는 아까 먹였어.”
하면서 앞쪽에 앉은 경윤이 양주병을 들더니 조철봉의 잔에 술을 채웠다.
“같이 한잔해.”
“좋지.”
술잔을 든 조철봉이 다시 식탁을 훑어 보았다. 청산가리나 양잿물 따위는 타지 않았을 것이었다. 경윤이 음식 따위에 그런 걸 넣을 성격은 아니다. 술도 같이 마시자고 하는 걸 보니 술도 괜찮다. 그러나 잔에 미리 약을 넣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헛기침을 하고는 머리에서 지웠다.
“제주도에 자주 보내야겠구만, 서비스가 좋아진 걸 보니 말야.”
술잔을 들면서 조철봉이 말하고는 경윤을 지그시 보았다. 저 몸뚱이는 밤마다 김병문과 엉켜 몸부림을 쳤던 것이다.
한모금에 술을 삼킨 조철봉이 수저를 들었지만 밥이 넘어갈리가 있겠는가? 생쌀을 씹는것처럼 서너 숫가락 떠먹고나서 전복회도 두어점 씹고는 수저를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술이다. 경윤도 조철봉이 두잔 마시면 한잔꼴로 마셨으므로 양주 병이 절반쯤 비워졌을때는 볼이 불그레해졌다.
“자기야.”
하고 경윤이 부른 순간이었다. 조철봉은 머리끝이 쭈뼛거리면서 온몸에 소름이 돋아 나는것을 느끼고는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금방 악문 이를 풀고는 눈치채지 못하도록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어?”
“모처럼 엄마하고 함께 있으면서 오래이야기를 했는데 말야.”
서론을 꺼낸 경윤이 말을 멈추더니 길게 숨을 뱉었다. 배경 음악을 까는것과 비슷했다. 그러더니 말이 이어졌다.
“엄마가 혼자 살면서 빚이 좀 있나봐, 자식들한테 이야기하지 못한채로 오래 전부터 진 빚이 말야.”
“허어, 그래서?”
조철봉은 김병문에게 갈 돈이 엄마 핑계로 만들어 진다는 것을 알아 차렸다. 그러나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가벼워졌다. 이렇게 돈을 만들어갈 작정이라면 당장 죽이지는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다시 한숨을 뱉은 경윤이 말을 이었다.
“그게 1억이 조금 못되는것 같애.”
“허어, 1억이나?”
“7천쯤 되었는데 이자가 늘어난것 같아. 그래서 엄마가 살고있는 연립주택을 팔아야겠다고 하지 않겠어?”
“그래서야 쓰나?”
이맛살을 찌푸린 조철봉이 머리까지 흔들었다.
“자식들이 나서서 해결해 드려야지, 형편이 되는 자식이 말야.”
그 형편이 되는 자식이란 서경윤뿐이다. 아니, 경윤의 남편인 둘째 사위 조철봉이라고 해야 정확한 지적이 될것이다. 큰딸은 경윤보다 세살 위인데 자매간 사이가 좋지 않아서 왕래도 없다. 지금은 부산에서 치킨 센터를 한다고 들었지만 혼자 산다. 남편이 도박에 미친 놈이어서 5년쯤 전에 이혼을 했기 때문이다. 경윤은 언니 하나밖에 없는 것이다. 그때 경윤이 지그시 조철봉을 보았다.
“그럼 자기가 돈 빌려 줄래? 엄마 돌아가시면 그 연립주택 팔아서 갚을테니까 말야.”
“그게 무슨 소리야?”
조철봉이 눈을 크게 떴다.
“어머니 돌아가시면 팔아 갚다니? 그런 말 말고 그냥 드려, 내가 돈 만들어 줄테니까 말야.”
“자기야, 고마워.”
“고맙기는, 당연한 일인데.”
길게 숨을 뱉은 조철봉이 다시 술잔을 쥐었을때 경윤은 재빠르게 술을 채웠다. 이렇게 재빠르게 움직인 점은 지금까지 없었다. 그러나 조철봉은 내색하지 않고 다시 한모금에 술을 삼켰다. 문득 이러다가 술에 취해 골아 떨어졌을때 목을 졸리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지만 1억을 받기 전까지는 그러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야 그만 마셔.”
경윤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조철봉은 머리를 들었다. 경윤이 반짝이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오랜만인데 오늘 한번 해.”
경윤이 눈웃음을 쳤다.
“나, 열흘이나 굶었단 말야.”
“어, 그래?”
눈을 크게 뜬 조철봉이 웃어 보이려고 했지만 이번에는 어쩔수없이 일그러졌다. 하긴 그곳이 굶든 먹었든 표가 나지는 않는다.
그때 서경윤이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식탁을 돌아 조철봉의 옆으로 다가와 섰다. 그러고는 조철봉의 팔을 잡고 끌었다.
“자기야, 술 그만 마셔.”
경윤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다.
“어, 가만”
했지만 조철봉은 엉거주춤 끌려 일어섰다. 그러나 술기운이 싹 가셔지면서 다리에 힘이 풀려 하마터면 주저앉을 뻔했다.
“나, 급하단 말야”
하면서 경윤이 조철봉의 팔을 끌고 침실로 향했다. 경윤과 몸이 밀착되면서 옅은 향내가 맡아졌으므로 조철봉은 숨을 멈췄다. 처음 맡는 향내였다. 침실로 들어선 경윤이 조철봉을 침대쪽으로 밀치더니 저먼저 옷을 벗기 시작했다. 가운을 벗어던지자 곧 브래지어와 팬티차림이 되었는데 풍만했다. 브래지어부터 벗은 경윤이 조철봉의 시선을 받더니 젖가슴을 두손으로 받치는 시늉을 하고는 배시시 웃었다.
젖가슴처럼 탐스러운 웃음이었다. 엉겁결에 그 웃음을 받은 조철봉은 입안에 고인 침을 삼켰다. 1억원짜리 웃음이다. 문득 머릿속에 그 말이 떠올랐고 그 때문인지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때 경윤이 천천히 팬티를 끌어내렸다. 정면으로 선 채 다리 한짝을 천천히 들어올리면서 팬티를 빼냈는데 짙은 숲과 붉은 골짜기가 역력히 드러났다.
“자기야, 다리 더 벌려볼까?”
이제 완전한 알몸이 된 경윤이 두 다리를 벌리고 서면서 그렇게 물었으므로 조철봉은 정신을 차렸다. 조철봉의 시선은 아까부터 경윤의 샘에 꽂혀 있는 것이다. 머리칼 끝이 쭈뼛거리고 있는데다 입안이 마르고 얼굴에 열기가 번진 상태가 되어서 조철봉은 머리만 끄덕였다. 그러자 경윤이 다리를 더 벌렸다. 거기에다 상반신을 뒤로 조금 젖히면서 한손으로 골짜기를 넓혀 보였다.
“으음.”
조철봉의 입에서 저절로 신음이 터져나왔다. 붉은 골짜기 안쪽이 환하게 드러난 것이다. 선홍빛 골짜기는 불빛을 받아 번들거리고 있었는데 그것을 본 순간부터 조철봉의 가슴은 무섭게 뛰었다. 경윤은 한번도 이런 적이 없다. 경윤의 선홍빛 안쪽 골짜기를 이렇게 본 것도 처음이다.
“아아아.”
그때 이번에는 경윤의 입에서 신음이 뱉어졌다. 그 자세 그대로인 채 경윤이 손가락 하나를 안으로 넣었기 때문이다.
“아아, 자기야.”
경윤이 상반신을 비틀면서 조철봉을 불렀다. 두눈이 번들거리고 있었다.
“어서 해줘.”
그순간 조철봉은 걸친 옷을 벗어던졌다. 상의도, 하의도, 마지막으로 팬티까지 벗어던지면서 이를 악물었다. 좋다, 해보자, 내가 질 것 같으냐? 경황중에도 문득 조철봉의 머릿속에 그 말이 떠올랐고 눈이 크게 떠졌다.
“이리와.”
조철봉이 철봉을 창처럼 곧추세우고는 경윤을 불렀다.
“얼른.”
그러자 경윤이 자세를 풀더니 다가왔다.
“자기야, 빨리해.”
조철봉을 스치고 지나 침대에 누우면서 경윤이 말했다.
“나, 급하단 말야.”
조철봉은 침대위에 반듯이 누운 경윤을 내려다 보았다. 팔 다리를 활짝 펴고 누운 경윤은 이제 눈을 감고 있었다. 조철봉은 다시 이를 악물었다. 바로 지척에서 마주보며 쇼하기는 힘들 것이었다
조철봉은 서경윤의 샘 끝에 철봉을 붙이고는 심호흡을 했다. 그때 녹음기에서 울리던 경윤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걸 하기 전에 저는 흥분을 시킨답시고 제 물건을 내 거기다 붙이고 슬슬 문지르는데, 정말 지겨워.”
그러자 그놈이 물었지.
“왜?”
“난 그냥 팍팍 하는 것이 낫거든.”
“나처럼?”
“그래, 자기처럼.”
“그런데 그 자식은 슬슬 문지르기만 한단 말이지?”
“그래, 선심이나 쓰는 것처럼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말야.”
“그래서?”
“난 그냥 흥분한 척해 주지만 구역질이 난다구. 아주 고역이야.”
그때였다. 철봉을 붙이고만 있는 것이 이상했던지 경윤이 눈을 떴다.
“뭐해?”
“응?”
놀란 조철봉이 철봉을 샘 끝에 다시 붙이더니 그냥 밀어넣었다.
“아.”
경윤의 입에서 놀란 것 같은 외침이 터졌다. 두 손으로 조철봉의 어깨를 쥔 경윤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아퍼.”
당연히 아플 것이었다. 경윤의 샘은 말라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철봉도 거친 샘벽을 훑고 내려가는 바람에 통증이 왔다.
“살살.”
경윤이 악문 잇새로 말했다.
“팍팍 하지마.”
그 순간 조철봉은 다시 어금니를 물었다. 팍팍 하는 것이 좋다고 해놓고는 딴소리를 하기 때문이다. 하긴 샘이 차 있을 때 다른 철봉에 대고 하는 말이었다. 조철봉은 경윤의 말대로 살살 철봉을 움직였다. 살살 빼었다가 살살 넣었다. 그러면서 또 문득 철봉이 대견스럽게 느껴졌다. 만일 철봉이 지금 머릿속의 생각과 함께 움직인다면 경윤이 눈치채게 될 것이었다.
“아아.”
살살 움직이기를 10번쯤 했을 때 조철봉은 샘 안에 물이 고이는 것을 느꼈다.
경윤의 숨소리가 가빠지면서 몸도 더 뜨거워졌다.
“아유, 죽겠어.”
70%는 과장이 섞였지만 경윤의 입에서 신음도 터져나왔다. 조철봉은 두 손을 침대위에 엎드려뻗쳐 자세로 놓은 채 경윤의 몸에는 철봉만 닿은 상태였다. 경윤도 조금 전에 어깨를 쥐었던 두 손을 떨어뜨려 벌리고는 네 활개를 펴서 샘만 철봉을 맞는다.
“아아앗.”
그래도 경윤의 몸은 점점 더 달아올랐고 이제 탄성은 50%쯤 진심이 섞여졌다. 조철봉은 열중했다. 각도를 자주 바꾸었으며 강약을 조절해서 경윤이 자극을 더 받도록 했다.
“아유, 자기야.”
경윤이 소리치면서 조철봉의 어깨를 움켜쥐었을 때는 그로부터 10분쯤이 지난 후였다. 그때 경윤의 샘은 넘쳐 흐르고 있었는데 탄성의 반응은 95%가 진실이었다. 조철봉은 묵묵히 철봉을 움직였다. 철봉에 닿는 자극이 짜릿했고 이쪽도 용암이 모이는 중이었다. 다시 10분이 지났을 때였다.
“아아, 자기야. 나, 죽어.”
하면서 경윤이 두 다리로 조철봉의 하반신을 감아 안으면서 아우성을 쳤다. 그 순간 조철봉은 이마를 침대에 붙이면서 눈물을 쏟았다. 그리고 짧게 흐느꼈지만 경윤은 눈치채지 못했다.
다음날 오후 5시 정각이 되었을때 서경윤은 압구정동의 샹젤리제 카페 안으로 들어섰다. 카페는 이름 그대로 프랑스식이었는데 벽에는 샹젤리제 대로 주변의 거리가 모자이크되어 붙여졌고 안쪽에는 샤를 드골광장과 개선문의 입체사진이 희미한 조명속에 떠 있어서 분위기가 살아났다.
“여기.”
서경윤의 모습을 보자 벽쪽 자리에 앉아 기다리고 있던 김병문이 반색을 하며 손을 들었다. 여기는 커피 한잔값이 만원도 넘어서 호텔보다도 비쌌지만 손님이 꽤 많았다. 경윤이 앞쪽 자리에 앉자 병문은 눈웃음을 쳤다.
“역시 자기는 눈에 팍 띄는구만.”
“뭐가?”
경윤이 머리를 조금 기울이며 물었다. 오늘 경윤은 우아한 크림색 투피스 차림이었는데 캐서린 강의 작품이었다. 캐서린 강의 정장은 최소가가 5백만원인 것이다. 거기에다 유명브랜드 가방에 신발은 이태리제 수제화를 신었으며 목에 건 목걸이는 1천만원이 넘었다. 이 정도는 압구정 사모님들의 평균 수준밖에 되지 않았지만 병문의 눈이 둥그레질만은 했다.
“나, 6시에 동창들하고 약속이 있어서 빨리 가봐야 돼.”
팔목시계를 내려다보는 시늉을 하면서 경윤이 말했다.
“자, 여기.”
가방에서 봉투를 꺼낸 경윤이 병문에게 내밀었다.
“1억이야, 다시 말하지만 자기는 우리 엄마한테서 이 수표를 받은거야. 엄마한테 빌려준 돈을 받은거란 말야.”
“글쎄, 알았다니까.”
희색을 감추려고 입술을 앙다물었지만 병문의 콧구멍이 벌름거렸다.
“여기 차용증 써왔어.”
이번에는 병문이 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 경윤에게 내밀었다.
“내가 빌리는 거야. 꼭 갚을게.”
“글쎄, 우리 사이에 이런건 필요없지만.”
하면서도 경윤이 봉투에서 차용증을 꺼내 꼼꼼하게 읽었다. 그 사이에 병문도 봉투 안의 수표를 확인했다.
“자, 됐어.”
차용증을 다시 봉투에 넣은 경윤이 지긋한 시선으로 병문을 보았다.
“내가 이걸 빼내려고 어젯밤 얼마나 봉사한지 알아? 마치 몸을 파는 기분이었다구.”
눈을 흘긴 경윤이 말을 이었다.
“그 작자는 정신없이 달려들었지만 난 그것 할때 자기 생각밖에 안났어.”
“정말 미치겠네.”
병문이 눈을 치켜뜨고 경윤을 보았다.
“내 앞에서 그런 이야기 할거야? 누구 가슴 터지는꼴 보려구 그래?”
“누가 그런데?”
“나한테는 그 자식하고 그짓 다시는 안한다고 했지않어?”
“그래두.”
쓴웃음을 지은 경윤이 눈을 가늘게 뜨고 병문을 보았다.
“그거 빼내려고 어쩔 수 없었어.”
“나, 이것 가져가기 싫어.”
병문이 아직도 탁자위에 놓인 돈 봉투를 노려보면서 말했다.
“내 기분이 어떤지 알기나 해? 마누라 돈 받고 팔아먹은 기분이라구.”
그 순간 병문의 두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 내렸다.
“어머.”
놀란 경윤이 가방에서 손수건을 꺼내 병문에게 건네주었다.
“자기야, 그만. 왜 그래?”
하지만 경윤의 두 눈에도 눈물이 맺혔고 목소리까지 떨렸다.
도로가에 선 김병문은 심호흡을 했다. 그러고는 주차장을 향해 발을 떼었는데 발에 날개라도 달린 것처럼 가벼웠다. 압구정동 거리는 서울에서 눈요깃거리가 가장 많은 곳 중의 하나이다. 쭉쭉빵빵한 아가씨들도 지천으로 널려 있었으므로 평소의 병문 같았으면 이쪽 저쪽 해찰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아니다. 서경윤을 방금 배웅하고 돌아선터라 아직도 가슴이 감동으로 먹먹한 상태였다.
카페 옆쪽 주차장으로 들어선 병문은 구석에 세워진 자신의 낡은 중형차를 보고는 먼저 차부터 바꿔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고나서 양연미한테 방 얻으라고 1500만원을 줄 작정이었다. 양연미의 얼굴이 떠오르자 병문의 가슴은 다시 뛰었다. 연미하고 4박5일쯤 해외여행을 다녀 오는 것도 기분전환이 될 것이다.
요즘 서경윤과 제주도에서 보내느라고 열흘 가까이 떨어져 있어서 연미는 삐친 상태였다. 차로 다가간 병문의 머릿속에 문득 와이프 최성희의 얼굴이 떠오른 것은 창문에 붙여진 경보장치 스티커 때문이었다. 경보장치를 부착하지도 않았는데 최성희가 스티커를 얻어다가 붙인 것이다. 갑자기 기분이 나빠진 병문은 입맛을 다시고는 차 문을 열었다.
집에 들어가지 않은 지가 두달 가깝게 되어서 아들녀석 얼굴도 가물가물했다. 경마장에서 만난 백씨 말마따나 안보면 자식이고 마누라고 다 정이 떨어져 나간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병문이 차에 타려고 엉거주춤 몸을 구부렸을 때였다. 뒤에서 인기척이 나더니 갑자기 목덜미를 잡혀 목이 들려졌고 다음 순간 뒤통수에 격렬한 충격이 왔다.
“껙!”
병문은 자신의 입에서 터져나온 신음을 제 귀로 듣고는 두 다리를 버둥거려 보았지만 생각대로 몸이 움직여주지 않았다. 그때 다시 뒤통수에 충격이 왔고 이번에는 신음도 뱉지 못한 채 병문은 늘어졌다. 의식을 잃어버린 것이다.
“여보쇼, 여보쇼.”
병문은 누군가 몸을 흔드는 바람에 정신을 차렸다. 그러고는 자신의 몸이 차앞좌석에 엎어져 있는 것을 알았다. 두 다리가 차 밖으로 나와 땅바닥에 늘어진 상태였다.
“아이고.”
머리를 들었던 병문은 뒤통수가 찢어질 것 같은 고통을 받고는 비명을 질렀다. 그러고는 손을 뻗쳐 뒤통수를 조심스럽게 만졌다. 뒷머리가 계란 두개를 나란히 놓은 것처럼 부어 있었지만 깨진 것 같지는 않았다. 피는 만져지지 않은 것이다. 그때 뒤에서 사내 하나가 물었다.
“괜찮으시오?”
그러자 겨우 머리를 돌린 병문은 둘러선 사람들을 보았다. 건물 경비도 섞여 있었는데 대여섯명이 된다. 그 순간이었다. 온몸에 전기가 온 것 같은 느낌을 받은 병문이 손을 뻗쳐 가슴 호주머니에 넣었다. 그러고는 입을 쩍 벌리고 소리쳤다.
“아이고, 내 돈!”
소리치자 뒷머리가 다시 터질 듯 아팠지만 머리를 치켜든 병문이 악을 썼다.
“내 돈! 내 돈!”
“무슨 말이여?”
사내들이 주춤 물러서더니 그 중 한 중년 사내가 경비원 하나에게 물었다.
“돈 잃어버린 거 아녀?”
“글씨.”
경비원이 반걸음쯤 더 물러서더니 입맛을 다셨다.
“차 안에 이상허게 엎어져 있어서 와봤더니 강도를 당헌 것 같구만.”
그러자 뒤에서 누군가가 말했다.
“뭐, 큰 돈은 아니겄지. 저런 똥차 타고 있는 주제에 말여.”
“여기 있습니다.”
최갑중이 탁자위에 구겨진 봉투 하나를 내려놓더니 외면한 채 말했다.
“형님 계좌에서 지급될 돈이니까 그 수표 찢어버리면 돈 굳히시게 되는거죠.”
봉투 안에는 서경윤이 김병문한테 생색을 내고 주었던 1억짜리 수표가 들어있는 것이다. 갑중이 말을 이었다.
“일은 박경택이한테 시켰습니다. 걔들이 믿을만 하거든요.”
“…….”
“수고비로 5백을 주었습니다. 어쨌든 1억을 다시 찾았으니까요.”
“…….”
“그, 영일 엄마가 다시 돈을 내라면 어떻게 하실랍니까?”
하고 갑중이 물었으므로 조철봉이 머리를 들었다. 갑중의 시선을 받은 조철봉이 못들은 것처럼 눈만 껌벅였다. 그러자 입맛을 다신 갑중이 말을 이었다.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여자 아닙니까? 그놈이 다시 졸라댈 것이고 말입니다.”
“…….”
“또 돈 주고 오늘처럼 또 뺏을까요?”
그러자 조철봉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자식이.”
“결정을 내리셔야죠, 이젠.”
갑중이 다그치듯 말했다.
“형님 답지않게 왜 이러십니까? 이렇게 질질 끌어서 어떻게 하실겁니까?”
“그, 영일이가.”
“이제 영일이는 형님이 키우세요.”
얼굴을 굳힌 갑중의 기세가 더 거칠어졌다. 상반신을 조철봉 쪽으로 굽힌 갑중이 잇사이로 말했다.
“유모에, 가정부까지 두고 말입니다. 더이상 그 여자한테 맡길 필요가 없습니다.”
“…….”
“우리가 확보한 테이프를 증거물로 제출하면 얼마든지 이혼이 됩니다. 그년은 영일이를 내놓아야 할 것이고 위자료도 받지 못하게 될겁니다.”
“…….”
“아, 불쌍하다고 생각하시면 얼마 떼어 주시든지요. 이렇게 살수는 없으니까 말입니다.”
“…….”
“오늘 돈 뺏겼겠다 눈이 돌아간 그놈이 그년한테 형님 죽이자고 할지도 모릅니다. 집에 들어가셨다가 내일 아침에 변사체로 나오실랍니까?”
“이 새끼가 정말.”
눈을 부릅떴던 조철봉이 곧 의자에 등을 붙이고는 길게 숨을 뱉었다. 그러고는 창밖을 내다보며 말했다.
“제주도에서 영일이 떼어놓고 연놈이 그 지랄을 하는 꼴을 보니 그년한테 영일이 못 맡기겠다.
“당연하지요.”
갑중이 커다랗게 머리를 끄덕였을때 조철봉의 말이 이어졌다.
“나는 당분간 출장이다.”
“예?”
놀란 갑중이 물었을때 조철봉은 길게 숨을 뱉었다.
“영일 엄마한테 말이야.”
“그, 그러면.”
“집에 안들어간다.”
“예, 그러셔야 됩니다.”
“준비 완벽하게 해 놓고나서 하루만에 끝내야 된다.”
어깨를 편 조철봉의 눈빛이 강해졌고 그에 비례해서 갑중은 약해졌다. 조철봉이 잇사이로 말했다.
“왜 하루만에 끝내야 되는고 하면 영일이한테 충격을 덜 줘야 되기 때문이다.”
“아아, 예.”
갑중이 건성으로 대답했지만 조철봉의 목소리는 더 강해졌다.
“영일이한테는 내색하지 않고 데려온다. 그러니까 준비를 철저하게 해야 돼.”
기가 막힌다는 표정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서경윤은 좀 독특했다. 입을 반쯤 벌리고는 코웃음을 치면서 머리를 좌우로 돌렸는데 앞에 앉은 김병문과는 시선을 마주치지 않았다.
“전문가 짓이었어.”
병문이 필사적으로 말을 이었다. 머리는 온통 붕대로 싸매었는데 뒤통수를 맞았다는 작자가 이마까지 흰 붕대로 감싸고 와서 마치 뇌 수술을 받은 환자 같았다.
“영일 아빠한테 말해서 그 수표가 돌아가는 것을 막아야.”
다시 병문이 말했을때 경윤은 입을 다물더니 시선을 들었다. 그러고는 싸늘하게 말했다.
“그럼 경찰에 신고하라고 할거고 자기가 진술을 해야 할텐데. 그럼 영일 아빠가 알게 될거아냐?”
만나기 전에 병문이 전화로 같은 소리를 했고 경윤의 대답도 같았다. 경윤이 똑바로 병문을 보았다.
“잘들어.”
경윤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1억은 날아간거야. 잊어먹은 것이라구. 그 이야기는 두번다시 꺼내지 마.”
“하지만.”
“나, 결심했어.”
얼굴을 굳힌 경윤이 말을 이었다.
“헤어지기로 말야.”
긴장한 병문이 눈만 껌벅였고 경윤의 말이 이어졌다.
“오늘부터 그 작자 뒷조사를 해서 자료 챙기겠어. 결정적인 물증을 잡은 다음에 한밑천 뜯어 낼테니까 그때까지 자기는 나한테 전화도 하지마. 알았어?”
“아, 그거야.”
침을 삼킨 병문이 번들거리는 눈으로 경윤을 보았다.
“내가 도와주고 싶은데, 믿을만한 용역회사 찾아볼까?”
“다 내가 할테니까 자긴 빠져.”
“그, 그럼 얼마나 걸릴 것 같아?”
“최소한 삼개월, 길면 반년정도.”
“그럼 그동안 우리 못만난단 말야?”
“참아야지.”
“난 못참아.”
병문이 머리까지 젓자 굳어져있던 경윤의 얼굴도 풀려졌다.
“나아 참, 기가 막혀.”
“비웃어도 좋아. 난 자기 없으면 못살아. 삼개월간 못보느니 차라리 죽는게 나아. 최소한 일주일에 세번은 해야 돼.”
“미쳤어? 정말 돌았네.”
“그래, 돌았어.”
“머리가 그 지경이 되어서도 그래?”
“아래는 멀쩡해.”
“나아 참, 기가 막혀.”
그러더니 경윤이 옆에 놓인 가방을 집어들고 일어서려는 차비를 했다.
“어, 어디 가려구?”
놀란 병문이 묻자 경윤이 눈을 흘겼다.
“집에 가지 어딜가? 정말 속상해 죽겠는데.”
“그럼 나하고 잠깐 쉬었다가 가.”
“미쳤어?”
그러더니 경윤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번져졌다.
“정말 그 생각이 나는거야?”
“난 자기만 보면 그래.”
커피숍안에 손님이 많았지만 그들 둘에게 신경을 쓰는 사람은 없다. 병문이 열기띤 눈으로 경윤을 보았다.
“나하고 두시간만 같이 있다가 가. 가는 시간까지 합해서 앞으로 세시간만.”
“이 근처에도 호텔 있어. 그러니까 두시간 반만.”
“그래, 두시간 반.”
병문의 목소리에 생기가 띠어졌다.
“나, 미치겠어. 당신을 죽여 줄거야.”
“나 미치겠어, 당신을 죽여줄거야.”
하고 김병문의 생기띤 목소리가 방안을 가득 메웠을 때 최갑중이 녹음기의 버튼을 눌러 껐다. 그러자 방안은 무겁고도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상석에 앉은 조철봉은 재미없는 영화를 본 관객처럼 입맛을 다셨으며 좌우에 앉은 최갑중과 박경택은 서로 외면했다. 그래도 역시 방안의 정적을 먼저 깨뜨린 사람은 조철봉의 영원한 심복 갑중이다.
“둘은 커피숍에서 나와 근처에 있는 핑크호텔 304호실에 들어가서 2시간40분만에 나왔습니다.”
갑중이 떠들썩한 목소리로 보고했다. 과장이 섞인 태도였다.
“박 사장이 직접 따라갔지만 제가 도청은 그만두라고 했습니다. 이만하면 증거 자료가 넘치니까요.”
그러고는 갑중이 정색하고 조철봉을 보았다.
“진행하겠습니다.”
조철봉이 머리를 끄덕였다.
“시골 할머니도 기다리고 계셔. 영일이 받을 준비는 다 되었다.”
조철봉의 어머니가 상경하신 것이다. 어머니는 지금 일산의 정원이 딸린 저택에서 기다리고 있다. 어머니는 조철봉이 서경윤과 갈라선다고 하자 또 지랄병이 도졌느냐고 하면서 들은 척도 않다가 영일을 데려온다는 말을 듣더니 두말도 더 않고 상경했다. 영일을 당신이 키우겠다는 것이다. 어머니와, 혼자 사는 이모에다가 집안 일을 거들게 하려고 먼 친척뻘 되는 아줌마까지 한꺼번에 셋이 몰려왔다. 그러나 철저히 입단속을 시켜놓았다.
“그럼 난 오늘부터 출장이다.”
심호흡을 한 조철봉이 전화기를 들자 둘은 다시 긴장했다. 버튼을 누른 조철봉이 곧 입을 열었다.
“응, 난데.”
지금 서경윤과 통화를 하는 것이다.
“나, 지금 출발해.”
조철봉이 말하자 경윤이 물었다.
“이번에는 며칠 예정이야?”
“글쎄, 삼사일 정도.”
“그럼 주말에는 돌아오겠네.”
“그렇겠군.”
“잘 다녀와.”
“응.”
“밥 잘 챙겨먹고.”
“알았어, 전화 끊어.”
“안녕.”
서경윤의 ‘안녕’할 때의 목소리는 밝았으므로 전화기를 내려놓은 조철봉이 쓴웃음을 지었다.
“나한테 바람피우지 말라는 말은 안하는구만.”
갑중과 경택을 둘러보며 말했지만 둘은 딴전을 보면서 응답하지 않았다.
“하긴 밥 잘 챙겨먹고 내가 건강해야 한 밑천 챙길 수가 있지.”
그때 경택이 전화가 온 모양인지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들더니 귀에 붙였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구석으로 다가가 듣고는 돌아와 앉았다.
“저, 조금전에 김병문이 경동용역에 일을 맡겼다고 합니다.”
둘의 시선을 받은 경택이 말을 이었다.
“경동용역 대표는 이수동이란 놈인데 직원 둘을 데리고 있지요. 돈만 주면 무슨 일이라도 하는 놈입니다.”
그 사이에 병문이 조철봉의 약점을 캐내려고 경동용역이란 업체에 일을 맡겼다는 말이었다.
“흐음.”
조철봉 대신으로 갑중이 코웃음을 쳤다.
“잘 되었다. 아주 뿌리를 뽑아 줄테니까.”
손목시계를 내려다보는 시늉을 한 갑중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형님은 가만 계십시오. 우리가 다 알아서 할테니까요.”
커피숍 안은 혼잡했고 시끄러웠다. 대학가 근처에 위치해 있었지만 손님은 중년 남녀로 대부분이 근처 부동산 사무소 직원과 손님들이었다. 저녁 7시5분. 조철봉은 지금 10분째 최성희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그동안 최성희한테서는 세번 전화가 왔지만 적당한 핑계를 대고 약속을 미루었다. 그런데 오늘, 서경윤과의 결별 작전을 시작하고 나서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고영민이 아니었다.
김병문의 처인 최성희였다. 조철봉이 연락을 하자 성희는 깜짝 놀라면서 반겼는데 지금 일하는 식당 근처의 이 곳으로 약속장소를 잡은 것이다. 조철봉은 미지근한 커피를 한모금 삼키고는 길게 숨을 뱉었다. 옆쪽 테이블에서는 부동산업자가 마주앉은 두 중년 부부를 사장님과 사모님으로 부르면서 상가를 설명하는 중이었다. 남편은 솔깃한 것 같은데 마누라는 부정적이었다. 그런데 마누라 주장이 더 강해서 일이 잘 안될 것 같았다.
“기다리셨어요?”
옆에서 말하는 소리에 조철봉은 머리를 들었다. 성희가 수줍게 웃음띤 얼굴로 서 있다가 시선이 마주치자 꾸벅 머리를 숙였다.
“죄송해요. 일하다가 나와서요.”
앞에 앉는 성희한테서 돼지갈비 냄새가 맡아졌다. 그러나 얼굴은 생기에 차 있었다.
“갑자기 생각이 나서.”
조철봉이 눈부신 듯한 표정으로 성희를 보면서 그렇게 말했다. 이런 표정은 여자 꼬일 때 항상 썼지만 오늘은 마음에서 우러나왔다.
“이거, 나 때문에 일도 못마쳐서 일당이 줄겠는데.”
“괜찮아요.”
성희가 웃음띤 얼굴로 대답했다.
“엄마한테 오늘 늦는다고 했어요. 애는 잘 자니까 걱정없구요.”
“잘됐네.”
“여기, 너무 시끄럽죠?”
주위를 둘러보는 시늉을 한 성희가 조철봉을 보았다.
“우리 나가요, 사장님.”
“그래. 그리고 말야.”
자리에서 일어선 조철봉이 지그시 성희를 보았다.
“지금부터는 날 오빠로 불러.”
“예, 오빠.”
성희가 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화장기가 전혀 없는 얼굴에 두 볼이 금방 상기되었다. 진국이다. 조철봉은 갑자기 가슴이 뛰었으므로 헛기침을 했다. 오늘 성희를 불러낸 것은 혼자 지내기가 싫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첫째 이유다. 그리고 같은 입장이라는것이 둘째 이유가 될 것이다. 김병문이한테 보복하려는 목적은 없다. 그러려면 진즉 해치웠다. 성희 옆에 있으면 뭔가 위로가 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커피숍을 나왔을 때 성희가 팔짱을 끼었으므로 조철봉은 약간 긴장했다. 그때 성희가 말했다.
“오빠, 저는 다 정리했어요. 그 작자하고 완전히 끝났다구요.”
“어, 그래?”
눈을 크게 뜬 조철봉이 성희를 보았다.
“잘 되었네, 그렇지?”
“그럼요. 그 작자가 웬일인지 막 서두르더라구요. 그제는 동사무소에 가서 신고까지 끝냈다구요.”
조철봉이 머리를 끄덕였다. 경윤하고 합치려면 그래야 할 것이다.
“오빠, 오늘은 좀 멀리 가요.”
성희가 조철봉의 팔을 끌었다.
“응?”
조철봉은 자신에게 향해 있는 성희의 두 눈을 보았다. 남자는 이런 때 행복하다.
그들이 용인 별장에 도착했을 때는 밤 10시도 안 되었을 때였다. 지난번에 최성희 대신으로 노래방 주인 홍지숙을 데려와 질탕하게 즐기고 간 후에 처음 온 것이다.
“와, 좋다.”
현관 안으로 들어선 성희가 응접실의 불을 켰을 때 다시 감탄했다.
“정말 빈 집이에요?”
성희가 주춤거리면서 물었다.
“아무도 안 살아요?”
“글쎄, 그렇다니까.”
쓴웃음을 지은 조철봉이 저고리를 벗어 탁자 위로 던지고 소파에 앉았다.
“이층까지 구경하고 와, 그럼.”
“그럴게요.”
성희가 아래층 거실 문부터 열고 들어서며 말했다. 오늘도 모범택시를 타고 왔으므로 아래쪽에 사는 관리인 부부가 별장에 오는 기척을 들었을 것이었다.
성희는 여기까지 오는 동안 쉴 새 없이 이야기를 했다. 제가 어렸을 때부터 김병문을 만난 이야기까지 하는 바람에 한시간 동안 조철봉은 그저 듣기만 했다. 그제 수속까지 다 끝났다면서 병문과 얽힌 사연을 길게 늘어 놓는 것은 아직도 가슴에 맺힌 게 많기 때문일 것이다. 미련은 사람이라는 증거도 된다. 미련없이 단칼로 인연을 자르는 인간이 어디 사람인가? 기계지. 적당한 미련이나 약간의 허점이 인간을 더욱 사람답게 만드는 것이다. 이야기를 하면서 성희는 여러 번 콧물 눈물을 뿌리는 바람에 지난번에 홍지숙하고 올 때처럼 뜨거운 분위기는 형성되지 않았다. 이층까지 조사를 마친 성희가 계단을 내려오다가 멈춰서더니 조철봉에게 말했다.
“이런 데서 살고 싶어.”
성희의 목소리가 굳어져 있었으므로 조철봉은 머리를 들었다. 계단 위에 선 성희가 내려다보고 있었다. 천장에 달린 샹들리에 불빛을 등에 받고 있어서 얼굴은 그늘이 졌고 표정도 어둡다.
“단 며칠만이라도.”
하고 성희가 말했을 때 조철봉이 머리를 끄덕여 보였다.
“그래, 내가 빌려줄 테니까 한 달이라도 여기서 살아.”
그러나 성희는 대답하지 않고 나무 계단에 앉았다. 차 타고 올 적에는 끊임없이 말하고 울고 코를 풀어서 정신없게 만들더니 지금은 착 가라앉았다. 감정변화가 심한 성품이다. 그리고 그 증세는 다분히 환경의 영향 때문일 것이다.
“오빠.”
무릎을 두 손으로 감싸쥔 성희가 턱을 무릎 위에 붙이고 조철봉을 불렀다. 조철봉의 시선을 받은 성희가 말을 이었다.
“나, 살 자신이 없어요.”
조철봉이 눈만 껌벅이자 성희가 입술끝만 조금 올리며 웃었다.
“오빠한테 폐 안 끼칠게 걱정하지 말아요. 오빠는 그냥 듣기만 해도 돼요.”
“…….”
“나, 처음에는 내가 잘사는 것이 그놈한테 복수하는 길이라고 이를 악물었지만 그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걸 금방 알게 되더라구요.”
“…….”
“이 세상은 참 불공평해요. 왜 열심히, 정직하게 사는 사람이 무시받고 손해를 봐야 하지?”
“…….”
“왜 김병문이 같은 사기꾼이 잘나가는 거지?”
“그것이 문제다.”
정색한 조철봉이 머리를 끄덕이고는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 성희를 똑바로 보았다.
“그런 세상이 되면 안돼. 사기꾼이 잘나가는 세상은 망한다.”
사기꾼의 제1조는 강안(强顔)남자가 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강안남자란 뻔뻔하고 얼굴이 두꺼운 남자를 말하는데 이는 곧 사기꾼이며 바로 조철봉이 그렇다. 조철봉이 지금 최성희를 똑바로 바라보는 이 장면을 보면 강안남자의 진면목이 그대로 드러난다. 당당하고, 정의감까지 배어나오는 것 같은 얼굴로 조철봉이 말을 이었다.
“난 지금까지 한번도 거짓말을 한 적도, 남한테 폐를 끼친 적도 없어. 오히려 피해만 입었지.”
그러고는 조철봉이 길게 숨을 뱉었다.
“피곤하다. 나, 샤워할 테니까.”
몸을 일으킨 조철봉이 셔츠를 벗으면서 욕실로 다가가더니 성희를 돌아보았다.
“잊어. 시간이 지나면 다 잊게 되겠지만 지금은 견디는 수밖에 없어.”
욕실 안으로 들어서던 조철봉이 생각난 듯 한마디 덧붙였다.
“그래서 내가 널 불러낸 것이지만 말야.”
옷을 벗어 밖으로 내던진 조철봉은 욕조의 물을 채우면서 샤워를 했다. 문득 성희가 자신과 병문과의 관계를 안다면 어떤 상황이 될지를 생각해 보고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틀림없이 병문에 대한 보복으로 이러는 줄 알 것이다. 하지만 병문은 지금 1억을 강도한테 뺏긴 후에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로 서경윤에게 매달려 있다. 욕조의 물이 다 찼으므로 조철봉은 욕조 안으로 들어가 누웠다. 그때 욕실 문이 열리더니 성희가 안으로 들어섰다. 어느새 옷장에서 조철봉의 헌 셔츠를 꺼내 입었는데 맨다리가 드러났다.
“제가 등 밀어 드리려구.”
시선을 내린 성희가 다가와 조철봉의 머리쪽에 섰다.
“일어나 앉으세요.”
“아니, 괜찮아.”
상반신을 세운 조철봉이 앞에 선 성희를 보았다. 셔츠가 허벅지까지 내려와 있었지만 무릎 위까지 드러난 피부는 매끈했고 탄력이 느껴졌다. 저도 모르게 입안에 고인 침을 삼킨 조철봉이 손을 들어 셔츠 끝을 들쳐 보았다.
“으음.”
조철봉의 입에서 신음이 울려 나왔다. 성희는 안에 팬티 하나만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분홍빛 팬티는 언덕 부근이 볼록하게 솟아났고 끝 부분에 숲에서 빠져나온 몇 가닥의 검은 가지까지 보였다.
“아이.”
하면서 성희가 셔츠 끝을 내렸지만 비누를 집어들고 조철봉의 등에 비누칠을 했다. 그때 조철봉이 몸을 틀어 성희의 팔목을 잡았다.
“벗고 들어와.”
그러면서 조철봉이 성희를 욕조 안으로 끌었다.
“어머.”
하면서 성희의 몸이 기울더니 한쪽이 물에 젖었고 곧 옷을 입은 채로 욕조 안에 주저않았다.
“벗어.”
얼굴을 펴고 웃은 조철봉이 이제 마주 보고 앉은 성희에게 말했다.
“네 몸이 보고 싶다.”
“싫어.”
성희가 눈을 흘기는 시늉을 했지만 곧 셔츠를 위로 들면서 위쪽으로 벗었다. 그러자 성희는 브래지어와 팬티만 입은 차림으로 욕조에 쪼그리고 앉은 자세가 되었다. 조철봉도 손을 뻗어 먼저 성희의 브래지어 호크를 풀어 벗겼다. 그러자 성희의 아담한 젖가슴이 드러났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가슴에 젖꼭지는 콩알만 했다. 성희가 조철봉의 시선을 받더니 두 손으로 젖가슴을 가렸다. 그때 조철봉이 성희의 다리를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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