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8월 18일 11시 서삼릉 효릉
고양문화원 이남무 원장의 초청을 받아 참석했다.
무더운 날씨라 주최측에서는 옷이 다 젖은 상태로 제를 올렸다
제향이 끝나고 인근에 있는 만두전골식당에서 점심을 했다
1544년(중종 39년) 11월 14일, 아버지 중종이 전위의 뜻을 밝히고 넘겨주고 그 다음날 승하하였다.
1주일 후인 11월 20일, 창경궁 명정전에서 다음 왕위에 올랐다.
인자하고 학문을 좋아하는 성격의 소유자답게 유학에 바탕을 둔 선한 정치를 펼치려 노력했다.
기묘사화 때 죽은 조광조를 신원하고 현량과를 부활시키는 등 중종 때 좌절된 성리학에 입각한
도학(왕도) 정치를 재현하려 노력했는데 실제로 인종이 왕위에 오르자 그동안 압박받던 사림들이 환호했다.
사간원의 건의를 받아들여 사관이 자신을 기록하는 사초(실록의 원본)에
이름을 써넣지 않아도 된다는 옛 규정을 부활시켰다. 다만, 몸이 약했고 계모였던 문정왕후의
도를 넘은 압박 때문에 고생해야 했다. 야사 등에서는 문정왕후가 인종을 늘 괴롭혔다고 하는데
경원대군과 함께 편전[19]에 들어서 "우리 모자를 언제 죽일 거냐. 죽이려거든 지금 죽여라."라고
포악을 부렸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정작 그는 문정왕후를 어머니로 극진히 우대했고
나이 차이가 거의 아들뻘(19살 차이)인 이복동생 경원대군과도 친밀하게 지냈다고 한다.
1545년 6월 26일 인종은 40도가 넘는 고열에 시달리며 혼절하는 등 몸 상태가 급격하게 나빠졌다.
6월 29일에는 대역죄인과 강상죄 등 국가 중대 범죄를 저지른 자들을 제외한 모든 잡범들의 죄를 용서하고
사면한다는 교서를 내렸다.[20] 그날 밤 병세가 점점 악화되어 위독해지자 19살 아래의 이복 동생인
경원대군에게 왕위를 선위한다는 뜻을 밝혔다.[21][22] 그러나 결국 8개월만인 1545년 7월 1일
경복궁 청연루(景福宮 淸讌樓) 소침(小寢)에서 세상을 떠났다.
능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에 있는 효릉(孝陵)이다. 서삼릉을 구성하는 조선왕릉 가운데 하나이다.
왕비 인성왕후와 나란히 묻혀 쌍릉을 이루고 있으며, 조선왕릉 중 현재 유일하게 일반에 비공개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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