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종교와 나

경허, 만공, 일엽의 일화

應觀 2019. 12. 25. 19:49
 

 

 

 

 

 

  1) 경허 스님


  경허 성우(鏡虛 性牛, 1849∼1912)선사는 조선말기 침체된 불교계에 새로운 중흥조로 출현하여 무애자재로운

생활속에서 전등의 법맥을 이으며, 선불교(禪佛敎)를 진작시킨 선의 혁명가이자 대승(大乘)의 실천자였다.

 

스님의 법명은 성우(性牛), 법호는 경허(鏡虛)이다. 9세 때 경기도 과천 청계사로 출가하여 계허 스님의

제자가 되었으며 절에 와있던 어느 거사에게서 사서삼경을 배우고 기초적인 불교교리를 익혔다.

 

이후 동학사의 만화강백에게 천거되어 불교경론을 배우니 그는 불교의 일대시교(一代時敎)뿐 아니라 유서(儒書)와 노장(老莊)등의 사상을 고루 섭렵하였다. 어느날 전염병이 돌고 있는 마을에서 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보고

문자공부가 죽음의 두려움을 조금도 없애주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 후 오로지 영운선사의 "나귀 일이 끝나지 않았는데 말의 일이 닥쳐왔다"는 화두를 들고 정진하던 중 "소가 되어도 고삐 뚫을 구멍이 없다는 것이 무슨 말인가?" 라는 한 사미의 질문에 모든 이치를 깨달았다.

 

이때부터 육신을 초탈하여 유유자적하였다. 그후 천장암에서 1년간 보림 후 활연대오하니 생사에 자재(自在)하였으며 56세에 만공에게 전법계를 전할 후 비승비속(非僧非俗)의 생활로 말년을 보냈던 스님은 1912년 4월 25일 함경도 갑산 웅이방 도하동에서 입적하니 세수 64세, 법랍 56세였다.

 

경허 스님은 전국 곳곳에 선원과 선실을 개설하여 불교계에 선수행의 풍토를 조성, 선풍을 진작시켰고 스님의 

문하에는 만공(滿空), 혜월(慧月), 수월(水月)등이 있다.

 

  2) 만공 스님


 만공 월면(滿空 月面,1871∼1946)선사는 근대 한국 선의 중흥조인 경허의 제자로 스승의 선지를 충실히 계승하여 선풍을 진작시킨 위대한 선지식이다. 스님의 법호는 만공, 법명은 월면이다.

 

1883년 13세 되던 해 김제 금산사에서 불상을 처음보고 크게 감동한 것이 계기가 되어 공주 동학사로 출가하여

진암문하에서 행자생활을 하다가 이듬해,경허스님을 따라 서산 천장사로 와서 태허스님을 은사로 경허를 계사로

사미십계를 받고 법명을 월면이라 하였다.

 

경허스님의 법을 이은 스님은 덕숭산에 와서 금선대를 짓고 수 년 동안 정진하면서 전국에서 모여든 납자들응

제접하며, 수덕사,정혜사,견성암을 중창하고 많은 사부대중을 거느리며 선풍을 드날렸다. 

 

스님은 일제강점기 선학원의 설립과 선승들의 경제적 자립을 위한 선우공제회운동에 지도자로 참여하였으며,

조선총독부가 개최한 31본산 주지회의에 참석하여 조선총독 미나미에게 직접 일본의 한국 불교정책을 힐책하였다.

 

이는 일제치하의 치욕스러운 불교정책을 쇄신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러한 만공의 사상은 생사를 초탈한 선사의

가풍이라 할 것이다. 말년에는 덕숭산 정상 가까이 전월사라는 초가집을 짓고 지내다가 입적하니,

1946년 10월 20일 그의 나이 75세, 법랍 62세였다. 

 

그 뒤 제자들이 정혜사 아래에 만공탑을 세우고 진영을 경허·혜월 스님과 함께 금선대에 봉안하였다.

덕숭문중의 법맥을 형성하여 많은 후학을 배출한 그의 문하에는 비구 보월·용음·고봉·금봉. 서경·혜암·전강·금오·춘성·벽초·원담등과 비구니 법희·만성·일엽등 당대에 뛰어난 제자들이 있다.

 

  3) 일엽 스님

 

일엽스님(1896-1971)은 출가하기 전에 속세에서 신여성으로, 문필가로 이름을 날리던 이였다.

속성이 김씨요, 본명은 원주였는데 서울 이화 학당에서 공부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수학하였으며 화가

나혜석과 함께 대담한 행동과 필설로 여자의 사회활동을 선구적으로 보여주고 일깨웠다.

 

1920년에 문학활동을 시작해 문예지 '폐허'의 동인으로 참가하고 우리 나라 최초의 여성잡지인 '신여자'를

간행하기도 하였으며 1962년에 나온 수상록 '청춘을 불사르고'가 많이 알려져 있다.

 

20세 이전까지는 기독교 신자이였으나 1933년에 수덕사에 입산하여 만공의 제자가 되었다.

 

  [만공 스님 일화]

 

 어느 날 제자와 함께 고갯길 산마루를 오르고 있었는데 제자가 다리가 아파 더는 못 가겠다고 하자,

만공이 마침 길가 밭에서 남편과 함께 일하던 아낙네를 와락 끌어안으니 그 남편이 소리를 지르며 좇아오는 바람에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고개를 훌쩍 넘었다. 나중에 제자가 "스님, 왜  그런 짓을 하셨습니까?" 하자, "이 놈아, 네가 다리 아파 못 가겠다고 했지 않느냐? 덕분에 여기까지 다리 아픈 줄도 모르고 오지 않았느냐"했다고 한다.

이 일화는 스승 경허의 일화라고도 하는데, 계율에 얽매이지 않고 호방하며 마음을 중시한 경허와 만공의

선풍을 대변하는 이야기다. 

 

또 하나의 일화가 있다. 

1930년대 말, 만공 스님이 충남 예산의 덕숭산 수덕사에 주석하고 계실 때의 일이었다. 당시 만공 스님을 시봉하고 있던 어린 진성사미(오늘의 수덕사 원담 노스님 이라는 설도 있다)는 어느 날 사하촌(寺下村)의 짓궂은 나뭇꾼들을 따라 산에 나무하러 갔다가, 재미있는 노래를 가르쳐줄 것이니 따라 부르라는 나뭇꾼의 장난에 속아 시키는 대로  ‘딱따구리노래’를 배우게 되었다.

  저 산의 딱따구리는
  생나무 구멍도 잘 뚫는데
  우리집 멍터구리는
  뚫린 구멍도 못 뚫는구나.

아직 세상물정을 몰랐던 철없는 진성사미는 이 노랫말에 담긴 뜻을 알 리 없었다. 그래서 진성사미는 나중에 절안을 왔다갔다 하며 구성지게 목청을 올려 이 해괴한 노래를 부르곤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진성사미가 한창 신이 나서 이 노래를 부르고 있는데 마침 만공 스님이 지나가다 이 노래를 듣게 되었다. 스님은 어린 사미를 불러 세웠다.
“네가 부른 그 노래, 참 좋은 노래로구나, 잊어버리지 말거라.”
“예, 큰스님.”
진성사미는 큰스님의 칭찬에 신이 났다. 그러던 어느 봄날, 서울에 있는 이왕가(李王家)의 상궁과 나인들이

노스님을 찾아뵙고 법문을 청하였다. 만공 스님은 쾌히  승낙하고 마침 좋은 법문이 있은니 들어보라 하며

진성사미를 불렀다.
“네가 부르던 그 딱따구리 노래, 여기서 한 번 불러 보아라.”
많은 여자 손님들 앞에서 느닷없이 딱따구리 노래를 부르라는 노스님의 분부에 어린 진성사미는

그 전에 칭찬받은 적도 있고 해서 멋들어지게 딱따구리 노래를 불러제꼈다.

“저 산의 딱따구리는 생나무 구멍도 자알 뚫는데….”

철없는 어린사미가 이 노래를 불러대는 동안 왕궁에서 내려온 청신녀(淸信女)들은 얼굴을 붉히며

어찌할 줄을 모르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이 때 만공스님이 한 말씀했다.
“바로 이 노래 속에 인간을 가르치는 만고불력의 직설 핵심 법문이 있소. 마음이 깨끗하고 밝은 사람은 딱따구리 법문에서 많은 것을 얻을 것이나, 마음이 더러운 사람은 이 노래에서 한낱 추악한 잡념을 일으킬 것이오. 원래 참법문은 맑고 아름답고 더럽고 추한 경지를 넘어선 것이오.
범부중생은 부처와 똑같은 불성을 갖추어 가지고 이 땅에 태어난 모든 사람은 뚫린 부처씨앗이라는 것을 모르는 멍텅구리오. 뚫린 이치을 찾는 것이 바로 불법(佛法)이오. 삼독과 환상의 노예가 된 어리석은 중생들이라 참으로 불쌍한 멍텅구리인 것이오. 진리는 지극히 가까운데 있소. 큰 길은 막힘과 걸림이 없어 원래 훤히 뚫린 것이기 때문에 지극히 가깝고, 결국 이 노래는 뚫린 이치도 제대로 못찾는 딱따구리만도 못한 세상 사람들을 풍자한 훌륭한

법문이 것이오.”
만공 스님의 법문이 끝나자 그제서야 청신녀들은 합장배례했다.

서울 왕궁으로 돌아간 궁녀들이 이 딱따구리 법문을 윤비(尹妃)에게 소상히 전해 올리자 윤비도 크게 감동하여 딱따구리 노래를 부른 어린 사미를 왕궁으로 초청, ‘딱따구리’노래가 또 한 번 왕궁에서 불려진 일도 있었다.
만공 스님은 다른 한편으로는 천진무구한 소년같은 분이었다.
특히 제자들이 다 보는 앞에서 어린애처럼 손짓발짓으로 춤을 추며 ‘누름갱이 노래’를 부를 때는 모두들 너무

웃어 배가 아플 지경이었다고 한다.

  오랑께루 강께루
  정지문뒤 성께루
  누름개를 중께루
  먹음께루 종께루

한국 불교계에서 첫째 가는 선객, 만공 스님은 타고난 풍류객의 끼도 지닌 분이셨다.

1946년 어느 날 저녁, 공양을 들고 난 스님은 거울 앞에 앉아 "이 사람 만공, 자네와 나는 70여년을 동고동락했는데 오늘이 마지막일세. 그 동안 수고했네"라는 말을 남기고 열반에 들었다고 한다.

 

경허선사(鏡虛禪師) (1849∼1912)
원효스님이 신라불교의 새벽을 열었다면 경허스님은 서산대사 이래로 근대불교에서 선종(禪宗)을 중흥시킨

대선사(大禪師)였다. 다시 말하면, 거의 기진맥진 쓰러 졌던 조선불교의 끝자락에서

다시 화톳불을 켜신 분이다. '제2의 원효', '길 위의 큰 스님'이라고도 부른다.
성은 송씨. 속명은 동욱(東旭), 법호는 경허(鏡虛), 법명은 성우(惺牛). 전주출신. 아버지는 두옥(斗玉).
어릴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며, 9세 때 과천의 청계사(淸溪寺)로 출가하였다. 계허(桂虛)스님의 밑에서

물긷고 나무하는 일로 5년을 보냈다. 14세때 절에 머문 거사로부터 문맹을 거두었고,

그 뒤 계룡산 동학사의 만화강백(萬化講伯) 밑에서 불교경론을 배웠으며,

9년 동안 그는 불교의 일대시교(一代時敎)뿐 아니라 유학과 노장 등 제자백가를 모두 섭렵하였다.

그리고, 23세에 동학사에서 강백이 되어 전국에서 스님의 강론을 듣고자 학승들이 구름처럼 모였다.

1879년에 옛스승인 계허를 찾아 한양으로 향하던 중, 심한 폭풍우를 만나 가까운 인가에서

비를 피하려고 하였지만, 마을에 돌림병이 유행하여 집집마다 문을 굳 게 닫고 있었다.

비를 피하지 못하고 마을 밖 큰 나무 밑에 낮아 밤새도록 죽음이 위협에 시달리다가

이제까지 생사불이(生死不二)의 이치를 문자 속에서만 터득 하였음을 깨닫고 새로운 발심(發心)을 하였다.

이튿날, 동학사로 돌아와 학인들을 모두 돌려보낸 뒤 조실방(祖室房)에

들어가 용맹정진을 시작하였다. 창문 밑으로 주먹밥이 들어올 만큼의 구멍을 뚫어놓고,

한 손에는 칼을 쥐고, 목 밑에는 송곳을 꽂은 널판자를 놓아 졸음이 오면

송곳에 다치게 장치하여 잠을 자지않고 정진하였다.

석달째 되던 날, 제자 원규(元奎)가 동학사 밑에 살고 있던 이처사(李處士)로부터

"소가 되더라도 콧구멍 없는 소가 되어야지."라는 말을 듣고 의심이 생겨 그 뜻을 물어왔다.

그 말을 듣자 모든 의심이 풀리면서 오도(悟道)하였다. 그뒤 천장
암(天藏庵)으로 옮겨 깨달은 뒤에 수행인 보임(保任)을 하였다. 그때에도 얼굴에 탈을 만들어 쓰고,

송곳을 턱 밑에 받쳐놓고 오후수행(悟後修行)의 좌선을 계속 하였다.

1886년 6년 동안의 보임공부(保任工夫)를 끝내고 옷과 탈바가지, 주장자 등을

모두 불태운 뒤 무애행(無碍行)에 나섰다.

그 당시 일상적인 안목에서 보면 파계승이요 괴이하게 여겨질 정도의 일화를 많이 남겼다.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고, 문둥병에 걸린 여자와 몇 달을 동침하였고, 여인을 희롱한 뒤 몰매를 맞기도 하였으며

술에 만취해서 법당에 오르는 등 낡은 윤리의 틀로서는 파악할 수 없는 행적들을 남겼다.

'원효의 파계, 진묵의 곡차'이래 최대의 파격적 만행으로 숱한 무애행(無碍行)으로

범부들을 교화한 이적(異積)은 �날 그의 제자 한암스님은

뭍스님들에게 '화상의 법화(法化)는 배우데, 화상의 행리(行履)는 배우는 것은 불가하리니...

'라고 경책하였다. 이러한 이행(異行)은 크게 깨달은

스님과 같이 서투르게 깨달은 체하지 말라는 말이다.

그는 생애를 통하여 선(禪)의 생활화·일상화를 모색하였다. 산중에서 은거하는 독각선(獨覺禪)이 아니라

대중 속에서 선의 이념을 실현하려고 하였다는 점에서 선의 혁명가로 평가받고 있다.

법상(法床)에서 행한 설법뿐만 아니라 대화나 문답을 통해서도 언제나 선을 선양하였고,

문자의 표현이나 특이한 행동까지도 선으로 겨냥된 방편이요,

작용이었다. 그의 이와같은 노력으로 우리나라의 선풍은 새로이 일어났고,

그의 문하에 한암, 만공, 수월, 혜월 등 많은 선사들이 배출되어 새로운 선원들이 많이 생겨났다.

오늘날 불교계의 선승(禪僧)들 중 대부분은 그의 문풍(門風)을 계승하는 문손(門孫)이거나 간접적인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는 근대불교사에서 큰 공헌을 남긴 중흥조이다.

승려들이 선을 사기(私記)의 형식으로 기술하거나 구두로만 일러 오던 시대에 선을 생활화하고

실천화한 선의 혁명가였으며, 불조(佛祖)의 경지를 현실에서 보여준 선의 대성자이기도 하였다.

근대 선의 물결이 그를 통하여 다시 일어나고 진작되었다는 점에서 그는 한국의 마조(馬祖)로 평가된다.

만년에 천장암에서 최후의 법문을 한 뒤 사찰을 떠나 갑산(甲山)·강계(江界) 등지에서 머리를 기르고

유관(儒冠)을 쓴 모습으로 살았으며, 박난주(朴蘭州) 라고 개명하였다.

그곳에서 서당의 훈장이 되어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1912년 4월 25일 새벽에

'마음달 외로이 둥그니 빛이 만상을 삼켰구나. 빛과 경계를 함께 잊으니 다시 이것은 무엇인가.

' 임종게를 남긴 뒤 입적하였다. 나이 64세, 법랍 56세 이다. 저서에는 <경허집> <선문촬요> 등이 있다.


* 참고문헌: '황원갑의 고승과 명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부다피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