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종교와 나

만공 스님은 왜 숭늉그릇을 박살냈을까?

應觀 2019. 9. 28. 19:43

한 그릇

당나라 때 보화 스님이 있었습니다. 그는 종종 시장통 네거리에서 법문을 했습니다. 대중을 모으는 방법도 독특했습니다. 보화 스님은 길거리에 서서 요령을 마구 흔들었습니다. 그럼 “딸랑 딸랑”하는 소리를 듣고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보화 스님은 그들을 상대로 법문을 펼쳤습니다. 그런 식의 법문을 수십 년째 하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법문을 하다가 보화 스님이 엉뚱한 말을 했습니다. “이제 내가 딴 길을 가려고 하오. 누가 나한테 옷을 한 벌 시주하시오.” 그 말을 듣고 사람들은 좋은 천으로 짠 옷을 가져왔습니다. 그 동안 스님께 들은 귀한 법문에 비하면 옷 한 벌은 오히려 소소한 것이니까요. 그런데 사람들이 가져온 옷을 본 스님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꾸짖었습니다.
“나에게 이런 옷은 필요 없다. 다시 가져오시오!”
그 말을 내뱉고는 벽을 향해 돌아앉았습니다. 사람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정성을 다해서 옷을 지어왔는데, 아니라고 하니 말입니다. 이 괴팍한 상황에 대한 소문이 쫙 퍼졌습니다. 동시대를 살았던 임제 선사가 이 소문을 들었습니다. 임제는 뭔가 짚이는 게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자에게 이렇게 일렀습니다.
“너는 마을 목수에게 가서 관(棺)을 하나 짜도록 해라.”
며칠 후에 임제 선사는 관을 가지고 보화 스님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 그대를 위해 새 옷을 한 벌 마련했소!”
그 말을 듣고 보화 스님은 호탕하게 웃었습니다. 그리고 “임제가 내 마음을 안다”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물음을 던집니다. 보화 스님은 처음부터 “관을 하나 짜라”고 말하지 않고, 왜 “새 옷을 하나 지어달라”고 했을까요. 거기에는 어떤 메시지가 담겨 있을까요.
 
두 그릇

조선 말이었습니다. 끊기다시피 한 선(禪)불교의 맥을 다시 살려낸 경허 선사에게 제자가 셋 있었습니다. 수월과 혜월, 그리고 만공입니다. 하나같이 법에 대한 안목이 뛰어난 이들이었습니다. 하루는 방에서 수월이 만공과 마주 앉았습니다. 수월 스님은 느닷없이 숭늉 그릇을 하나 쭉 내밀었습니다. 그리고 만공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게, 만공. 이걸 숭늉그릇이라고도 하지 말고, 숭늉그릇이 아니라고도 하지 말고. 어디 한 마디 똑바로 일러보소!”
이 말을 들은 만공 스님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수월이 내민 숭늉그릇을 낚아채 방 밖으로 나갔습니다. 마루에 서더니 숭늉그릇을 마당으로 ‘휙!’ 던져버렸습니다. 숭늉그릇은 ‘와장창!’하고 깨졌습니다.
그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방으로 와서 앉았습니다. 그걸 본 수월 스님의 반응도 뜻밖이었습니다. 자신이 건네 숭늉그릇이 박살이 났는데도, 화를 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잘혔어, 참 잘혔어!”하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수월은 왜 그런 물음을 던졌고, 또 만공의 행동에 박수를 쳤을까요. 거기에는 또 어떤 가르침이 숨어 있는 걸까요.

세 그릇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수월 스님이 지금 여러분의 눈 앞에서 숭늉그릇을 내밀며 똑같은 물음을 던집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숭늉그릇이라고 할 수도 없고, 아니라고 할 수도 없으니 답답해 질 겁니다. 마치 창문도 방문도 없는 방에 갇힌 느낌이겠지요. 그렇다면 다시 생각해 보세요. ‘수월 스님의 물음을 듣고서 나는 왜 답답해 졌을까.’ 이유가 있습니다. 그건 수월 스님이 내민 패러다임(생각의 틀)을 나도 모르게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숭늉그릇도 아니고, 슝늉그릇이 아닌 것도 아니다’는 틀 속에 갇혀버린 겁니다. 그 틀 속에서 답을 찾으려니 꼼짝달싹 못하게 됩니다.

그럼 만공 스님은 왜 숭늉그릇을 던져 버렸을까요. 산산조각 박살을 내 버렸을까요. 사실 만공 스님이 깨버린 건 단순한 숭늉그릇이 아닙니다. 수월 스님이 씌워버린 ‘생각의 틀’을 부수어버린 겁니다. 그 틀을 없애버렸으니 만공은 이제 자유로워집니다. 이제부터는 “숭늉그릇”이라고 해도 괜찮고, “숭늉그릇이 아니다”라고 해도 괜찮은 겁니다.

네 그릇

보화 스님의 선문답 일화도 똑같습니다. 스님께선 자신의 죽음을 소재로 우리에게 패러다임(생각의 틀)을 깨버릴 것을 주문합니다. 어떤 패러다임이냐고요? 다름 아닌 ‘이 몸뚱이가 곧 나’라는 생각입니다. 이 몸뚱이가 죽으면 나도 죽는다는 생각입니다. 보화 스님은 그걸 부수어버리라고 말합니다. 왜 그럴 까요. 그 틀이 ‘진짜 나’를 가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틀을 부수어야 ‘진짜 나’를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내가 입고 있는 옷을 ‘나’라고 믿고 평생을 산다면 어떨까요. 억울하지 않을까요. 착각 속에 살다가는 세월이 안타깝지 않을까요. 그 착각으로 인해 치러야 하는 온갖 희로애락이 너무 아쉽지 않을까요. 그래서 보화 스님은 “몸뚱이는 하나의 옷에 불과하다”고 일깨우는 겁니다. 죽고 나서 갈아입는 ‘관(棺)’도 하나의 옷에 불과하듯이 말입니다.

그럼 이제 사람들이 묻습니다. “이 몸뚱이가 하나의 옷에 불과하고, 죽고 나서 들어가는 관도 하나의 옷에 불과하다면 ‘참 나’는 어떻게 찾는 건가. 그건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건가?” 이렇게 묻고, 이렇게 따집니다. 그런데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여러분은 이미 들었습니다. 그게 어디에 있냐고요? 다름 아닌 ‘만공이 깨버린 숭늉그릇(생각의 틀)’에 있습니다.
우리가 부수어야 할 ‘생각의 틀’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내가 가진 고집, “이건 이래야만 돼”라고 하는 고정된 잣대, “나는 ○○○야, 그것만이 나야”라고 여기는 고정 관념. 이런 것들이 모두 ‘생각의 틀’입니다. 불교식으로 말하면 ‘아상(我相)’입니다. 부처님도  『금강경』에서 ‘참 나’를 찾는 방법을 일러주었습니다. “상(相)이 상(相)이 아닐 때 여래를 보리라!” 요즘 식으로 말하면 “생각의 패러다임이 더 이상 패러다임이 아닐 때 여래를 보리라”가 됩니다.

궁극적인 깨달음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한 걸음씩 나아가도 좋습니다. 일상에서 마주치는 나의 고집을 하나씩 꺾어 보세요. 그렇게 생각의 틀을 하나씩 부수어 보세요. 지금까지 누리지 못했던 자유, 맛보지 못했던 지혜를 누구나 만나게 될 겁니다. 우리 안의 부처가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자유와 지혜입니다. 그러니 ‘참 나’를 찾기 위해 우리가 할 일은 간단합니다. 그걸 가리는 틀만 부수면 되니까요.

백성호.

중앙일보 종교담당 기자, 저서 『흔들림 없이 두려움 없이』 『만약 마음을 마음대로 쓸 수 있다면』 『인문학에 묻다, 행복은 어디에』 『생각의 씨앗을 심다』『이제, 마음이 보이네』『현문우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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