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종교와 나

극락암과 경봉 대선사(鏡峰大禪師)

應觀 2018. 7. 5. 09:21


 


      “믿음, 거기서 모두가 이루어진다” 
                                          / 경봉 스님
      항상 말하지만 
      법문은 종사가 법상에 오르기 전에 다 됐고 
      법문을 들으려는 대중이 자리에 앉기 전에 다 마친 것이다. 
      부처님이 49년간 설법을 했는데 
      나중에 영산회상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꽃 한 송이를 인천대중(人天大衆)에게 들어보였다.        
      거기에 무슨 말과 글이 필요하겠는가. 
      우리가 이렇게 살아가고 있지만 
      이 몸을 얼마나 유지하고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겠나 하고 한 번쯤 생각해봐야 한다. 
      이 법회에 승속(僧俗)이 많이 모였는데
      많은 대중이 100년만 지나면 서로가 다 어디에 가 있는지 
      행방조차도 알 수 없고 얼굴 또한 볼 수 없게 된다. 
      이렇듯 우리의 일상은 늘 덧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이 몸을 꿈과 같고 허깨비 같고 물거품 같고             
      풀끝의 이슬과도 같고 번갯불과 같은
      참으로 허망한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이 허망한 가운데 허망하지 않은 것이 하나 있다. 
      무엇이 허망하지 않은 물건인가. 
      옛 조사가 말했다. 
      “한 물건이 사람 사람에게 있는데 
      머리도 없고 꼬리도 없으며 
      명자(名字)도 없고 위로는 하늘을 버티고 
      아래로는 땅을 버티며 천지보다 더 크고 해와 달보다 더 밝으며 
      검기로는 칠통보다 더 검은데
      이러한 물건이 우리의 행주좌와(行住坐臥)와 
      어묵동정(語默動靜)의 
      일상생활하는데 있으니 이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러니 하루 24시간 가운데 9시간 일하고 6시간 잠자고 
      5시간 놀면 4시간이 남는데, 
      이 4시간 남는 시간을 정신을 통일하고 집중해서 
      이 알 수 없는 것을 참구해야 한다. 
      이것이 처음에는 잘되지 않는 어렵고 힘든 일이지만 
      물 흘러가듯 자꾸만 생각이 끊임없이 이어지면 
      정신을 통일하는 묘를 자연히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사바세계를 무대로 삼고 
      한바탕 멋들어지게 연극을 하다 가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멋들어지게 하는 것인가. 
      가령 연극배우가 비극의 배역을 맡았다고 하자. 
      그 배우가 마음 가운데 딴 생각을 비우고 자신이 
      그 극중배역과 혼연일치가 되는 연기라야 사람들이 감동한다.
      사바세계에 와서 우리가 맡은 배역대로 
      연극을 잘 하려면 우선 물질에 대한 지나친 애착과 
      삶에 대한 애착을 비워야 한다. 
      물질 아니면 사람 때문에 가슴이 아프고 머리가 아프다. 
      우리가 사바세계에 나온 이유는 
      머리 아프고 가슴 아프려고 나온 것이 아니다. 
      빈 몸 빈손으로 옷까지 훨훨 벗고 나왔는데, 
      공연한 탐욕과 쓸데없는 망상으로 
      모두 근심걱정이 시작되는 것이다. 
      어릴 때는 누구를 해칠 생각도 근심걱정도 없었다. 
      그런 천진난만한 동심으로 돌아가야 한다. 
      진실대로 자기 정성대로 노력하기만 하면 
      세상은 될 만큼 되는데, 망상이란 도둑놈 때문에 
      근심걱정을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일본에 대산청만(大山靑巒)이라는 문학박사가 있다. 
      그 사람에게는 늙은 하녀가 있었는데 
      병자를 앉혀놓고 뭐라고 중얼거리기만 하면 병이 금방 낫곤 했다. 
      박사가 생각하니 신기하기도 하고 가관이었다. 
      그것이 미신인 것만은 분명한 듯한데 병이 완쾌되니 말이다. 
      그래서 하루는 하녀를 보고 무엇을 이르냐고 물었다. 
      하녀는 “오무기 고무기 오소고고 오무기 고무기 이소고고”라 
      한다고 대답했다. 
      이 말을 듣고 박사가 생각해보니 
      ‘오무기’는 보리요 ‘고무기’는 밀, ‘이소고고’는 
      두 되 다섯 홉이란 말이다. 
      ‘보리 밀 두되 다섯 홉’이란 말에 병이 나을 까닭이 없는데 
      병이 잘 낫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일본에서 문학박사가 되자면 불교를 모르고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불교경전에는 문학과 관련 깊은 철학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어느 날 그가 〈금강경〉을 보다가 경 가운데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 
      즉 ‘응당 머무름 없이 그 마음을 낸다’고 하는 구절을 보게 됐다. 
      육조 혜능대사도 다른 사람이 "금강경"을 읽을 때 이 구절을 듣고 
      도를 깨달았다고 하는 이 구절의 일본 발음이 
      ‘오무소주 이소고싱’. 
      아마도 하녀는 누가 이 말을 하는 것을 듣고 잘못 외어 
      ‘오무기 고무기 이소고고’라는 말을 늘 외운 것이다. 
      박사가 하녀에게 외우는 것이 잘못됐으니 
      다시 외우라고 고쳐주었다. 
      하녀는 그런가보다 하고 다음부터 환자들에게 제대로 된 
      금강경 구절을 외워줬는데, 진짜지만 병이 낫지 않았다. 
      그래서 ‘오무기 고무기 이소고고’라고 
      또 다시 바꿔서 읽으니까 그제야 병이 나았다. 
      이유가 어디에 있느냐 하면 
      박사가 말해준 것은 진짜이지만 많이 외우지도 않았고 
      또 이렇게 하면 정말 병이 나을까, 
      이것이 옳은가 그른가 하는 의심이 나서다. 
      "화엄경"에 믿음은 도의 근원이요 공덕의 어머니라. 
      모든 성현의 법을 길러낸다고 하였다. 
      믿음, 거기서 모두가 이루어진다.” 
      한 물건이 있는데 천지보다 먼저요, 
      형상이 없어 본래 고요하도다. 
      능히 만상에 주인이 되고 
      사시절을 따라 마르지 않는데 
      장부에겐 누구나 하늘을 찌를 듯한 기개가 있거니 
      북두(北斗)와 남성(南星)을 등을 지고 보아라.
      


극락암 본전

경봉대선사(鏡峰大禪師)는 1932년 통도사 불교전문강원 원장에 취임했으며, 1935년 통도사 주지, 1941년 조선불교

중앙선리참구원(朝鮮佛敎中央禪理參究院 지금의 선학원) 이사장을 거쳐 1949년 다시 통도사 주지에 재임되었고,

1953년 극락호국선원(極樂護國禪院) 조실(祖室)에 추대되어 입적하는 날까지 설법과 선문답으로 법을 구하러

찾아오는 불자들을 지도한 곳이 바로 극락암이다.

 

 



 

극락암에 모셔져있는 경봉대선사 영정과 위패(位牌)
 


경봉(1892∼1982) 스님은 근세에 가장 존경받는 선승 가운데 한 분이셨다. 스님은 시·서·화 삼절에, 선과 차까지

두루 갖춰 오절(五絶)로 불렸다. 1982년 7월 17일 시자가 '어떤 것이 스님의 참모습입니까'라고 여쭈니 스님은

웃으시며 "야반삼경(夜半三更)에 대문 빗장을 만져 보거라"라는 임종계를 남기고 세수 91세, 법랍 75세로 열반에

들었다. 상좌로는 돌아가신 벽안스님(전 동국대 이사장)을 비롯해 명정스님(극락선원 선원장), 경일스님(동국대

전강원장), 활성스님 등이 있다.

 



 

통도사성보박물관에서의 경봉대선사 영정


이름 김정석(金靖錫). 법명(法名) 원광(圓光), 경봉은 법호(法號). 밀양 출생.

1907년 경남 양산(梁山) 통도사(通度寺)의 성해(聖海)에게서 득도하고,

 청호(淸湖)를 계사(戒師)로 하여 사미계를 받은 뒤, 1910년 양산의 명신학교를

나와, 이듬해 해담(海曇)으로부터 보살계와 비구계를 받았다.


이 후 1914년 양산 통도사의 불교전문강원 대교과(大敎科)를 수료한 뒤, 1918년 마산

포교당(布敎堂)의 포교사를 지내고, 1932년 통도사 전문강원장, 1935년 통도사 주지,

1941년 조선불교중앙선리참구원(朝鮮佛敎中央禪理參究院) 이사장 등을 역임하고,

 1942년 대선사 법계(法戒)를 받았다. 1953년에 통도사 극락호국선원 조실(極樂護國禪院祖室)이 되고,

1973∼1982년에는 매월 정기법회를 열어 설법하여

 

불교계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저서에 《법해(法海)》 《선문흑일점(禪門黑一點)》 《속법해(續法海)》

《원광한화집(圓光閒話集)》 《화중연화소식(火中蓮華消息)》 《삼소굴일지(三笑窟日誌)》 등이 있다.



 

경봉스님의 일기


 
경봉 스님은 18살 때부터 85살까지 67년동안 매일 일기를 썼으며, 일기에는 당시의 사회상과 한국불교의

근현대사가 그대로 담겨있고, 사찰에서 화장실을 지칭하는 해우소(解憂所)라는 말을 만들었는데 내력은 다음과 같다.


6 - 25전쟁이 끝난 뒤 통도사 극락암에 머물던 스님은 큰일을 보는 대변소는 '근심을 푸는 곳'이라는 뜻의 '해우소'

 

소변을 보는 곳은 '급한 것을 쉬어가게 하는 곳'이라는 뜻의 '휴급소'라고 이름붙였다. 
휴급소에 가서 다급한 마음 쉬어가고, 해우소에서 근심걱정 버리고 가면 그것이 바로 도를 닦는 거지

 



 


 

 

경봉스님이 50여년 거처했던 삼소굴


 


올해는 바로 스님 열반 30주기, 탄생 12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에 통도사 성보박물관은 '경봉 선사 열반 30주기

특별전-삼소굴(三笑窟)'을 열었다. 열다섯 살에 출가한 스님은 1935년과 1949년 두 차례 통도사 주지를 지낸 바 있다.

극락암 '삼소굴'은 경봉 스님이 50여 년간 거처한 방문 앞에 내건  현판 이름이다. 이곳에는 方丈 뿐만 아니라

극락암 입구에 있는 如如門도 경봉스님 글씨이다.

 



 

근대 영남 문인화의 대부 석재(石齋) 서병오(徐丙五)의 글씨 삼소굴(三笑窟) 현판

 

성품이 청정하고 꼿꼿하기가 댓가지 같은 출가자의 올곧은 모습을 보였던 경봉 스님은 자신이 거처하는 방문 앞에

삼소굴(三笑窟)’이라는 현판을 붙여놓았다.


경봉 스님은 삼소굴에 대해 “삼소의 ‘삼’은 우주의 극수인 3이요, ‘소’란 염주를 목에 걸어놓고 이리저리 찾다가

결국 목에 걸린 것을 발견하고는 허허 웃는 것”이라고 일러주었다.


 삼소굴은 경봉 스님이 50여 년을 머물면서 ‘선과 차는 하나’라는 선다일미(禪茶一味)의 가르침을 설파했던

곳으로 이름 높은 곳이며, 삼소굴은 虎溪三笑란 고사에서 따온 이름이다. 호계삼소는 儒-佛-道의 진리가 근본에

있어 하나라는 것을 상징하는 말로 쓰인다. 지난 2004년 보수공사 과정에서 1백43년 전의 상량문이 발견되어

삼소굴의 본래 이름은 `영봉헌`이라는 사실이 확인됐다.

 




 


통도사성보박물관(관장 범하)에서는 2012년 7월 16일(월) 경봉선사 열반 30주기 추모다례회를 맞이하여

2012년 7월 13일(금)부터 9월 23일(일)까지 (특별전 삼소굴)을 개최되고 있다. 친필 유묵, 달마도를 비롯

약 350여점의 유품과 작품을 통해 경봉대선사의 삶과 흔적을 살펴보며 재조명할 수 있는 귀중한 기회라고

평가받고 있다.


 

경봉 스님 탄신 120주년과 열반 30주년을 맞이해 <참 생명을 찾는 경봉스님 가르침>이 출간됐다.

스님의 유발상좌인 김현준 원장(불교신행연구원)이 펴낸 책에는 선지식 경봉 스님의 참 생명을 찾는

공부와 도에 대한 가르침, 무상하고 꿈 같은 인생 실체에 대한 가르침, 참선 수행을 통해 참된

주인공을 찾고 진짜 보배를 찾는데 대한 가르침, 부부의 도ㆍ자녀 교육ㆍ자연 속에서 화해롭게 사는

 법 등이 다양한 이야기와 함께 담겨 있다.
 
열반 30주기를 맞아 되살아난 되살아난 경봉대선사(鏡峰大禪師)의 선풍(禪風)이 사바세계를 정화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면 얼마나 좋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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