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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헌공 김구 묘역

應觀 2016. 5. 14. 20:49

 

충헌공 김구 묘역

                                                    서울 송파구 방이동에 있는 조선 중기 문신인 충헌공 김구의 신도비. 1743년(영조 19) 건립. 총높이 406㎝.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59호.

 

 

충헌공 김구 묘역은 조선 후기의 문신 충헌공 김구金構의 묘역이다.

김구의 자字는 사긍士肯, 호는 관복재觀復齋이다.

본관은 청풍淸風으로 아버지는 전라도관찰사 김징金澄이며, 어머니는 함평이씨 참봉 이의길李義吉의 딸이다.

현종 10년(1669)에 진사가 되었고, 숙종 6년(1680) 대과에 급제하여 헌릉참봉獻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682년 장릉참봉章陵參奉으로 있을 때 정시庭詩에서 장원으로 급제한 뒤 사헌부 · 사간원과 예조 · 병조의 낭관郎官 등을

거쳐 경영관 · 수찬 · 승지를 역임하였고, 황해도 · 충청도 · 전라도 · 평안도관찰서를 거쳐

 대사간 · 강화유수 · 판결사를 지냈으며, 육조의 판서를 거쳐 숙종 29년(1703)에 우의정에까지 올랐다.

1704년 모친상으로 인한 지나친 슬픔으로 몸을 해쳐 그해 12월 18일에 55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사헌부와 사간원에 있을 때 노론과 소론의 격렬한 대립을 완화시키기 위해 힘썼고,

아무리 번거로운 송사訟事라도 앉은 자리에서 처리하고 오래도록 그것을 기억했다고 한다.

판결사判決使로 있을 때는 노산구魯山君(단종)의 복위를 극력 주장하여 복위하게 하였고, 아

울러 노산군 비妃 송씨宋氏의 묘를 능으로 추봉하게 하였다. 또 숙종 27년(1701) 장희빈張禧嬪에게

사약을 내린 신사대처분辛巳大處分 때에도 홀로 의연히 중론에 반대했을 정도로 임금을 충직하게 섬겼으며,

국왕의 위력에도 굽히지 않고 의리에 따라 처신하였다. 병서兵書와 도가류道家類에 정통했고 문장이 간결했으며 글씨가 힘찼다고 한다.

 신도비는 영조 19년(1743) 10월 건립되었는데, 화강암으로 만든 대좌臺座 위에 대리석 질의 비신碑身을 세우고, 그

 위에 화강암으로 지붕 모양의 개석蓋石을 얹은 형태이다. 대석에는 아무런 꾸밈이 없으나, 개석에는 서까래와 기왓골을 새기고

네 귀퉁이에 봉황을 새겼으며 용마루에 쌍룡을 새기는 등 조각 장식이 화려하여 조선 후기 석비 가운데 우수한 예이다.

비문에는 숙종 연간에 활약했던 그의 행적과 청렴하고 단정했던 그의 성품이 잘 기술되어 있으며, 끝에는 자손의 약력과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다.

비문은 영의정 이의현李宜顯이 짓고, 좌의정 서명균徐命均이 썼으며, 우의정 유척기兪拓基가 머리전서[頭篆]를 썼다.

서명균은 바로 충헌공 김구의 둘째 사위로 비문 글씨에 뛰어났고, 유척기는 전서 글씨로 유명했다.

당시 충헌공의 둘째 아들 김재로金在魯가 1740년 이미 영의정에 올라 있던 사실을 보면, 당시 삼상三相이 비문을 짓고 쓴 사연을 짐작하게 한다.

 신도비 북쪽의 묘소 주위에는 묘갈墓碣 · 망주석 · 석등 · 석양石羊 등의 석물이 있는데, 모두 조각 솜씨가 뛰어나다.

2008년 10월 30일 문화재 명칭을 '충헌김공신도비'에서 현재의 이름으로 바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