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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를좋아한다

應觀 2015. 10. 31. 09:46
걷는 것을 좋아한다. 
용인 수지에 살 때는 하루 보통 5㎞, 많을 때는 일주일에 100㎞를 걸었다. 
담배 한 갑을 살 때도 분당 서현동 시범단지까지 걸어가서 샀다.
왕복 세 시간이다. 건강을 생각해서 그런 건 아니다. 
유전자를 압도하는 습관은 없다는 것이 평소 지론이다.
 건강은 모르겠지만 수명은 운동과 무관하다고 믿는다. 
처음부터 걷기를 즐겼던 것은 아니다걷는 것을 좋아한다. 
용인 수지에 살 때는 하루 보통 5㎞, 많을 때는 일주일에 100㎞를 걸었다.
 담배 한 갑을 살 때도 분당 서현동 시범단지까지 걸어가서 샀다. 
왕복 세 시간이다. 건강을 생각해서 그런 건 아니다. 유전자를 압도하는 습관은 없다는 것이 평소 지론이다.
 건강은 모르겠지만 수명은 운동과 무관하다고 믿는다. 처음부터 걷기를 즐겼던 것은 아니다. 
산책 같은 건 칸트 같은 사람이나 하는 건 줄 알았다. 어느 날인가 머리가 너무 무겁고 생각이 뒤엉켜 터질 것 같았다. 
그래서 무작정 집 밖으로 나갔다. 30분쯤 걸었는데 정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머릿속 생각들이 하나씩 정리가 되더니 일의 순서가 잡히기 시작했다. 그 뒤로 막히면 무조건 나가서 걸었다. 
작은 문제에서부터 큰 문제까지 수월하게 풀렸다. 
그러니까 걷기는 내가 '시작'한 것이 아니라 '발견'한 것이었던 셈이다.

살다 보면 가끔 목적과 수단이 바뀌기도 한다. 수단이 목적이 되어 오래 걷기에 도전했다. 수지에서 강남운전면허시험장까지 걸어갔다. 대략 20㎞가 좀 넘는데 다섯 시간쯤 걸린 것 같다. 돌아올 때는 버스를 타고 왔다. 다리가 아파 도저히 걸을 수가 없었다. 걷는 것도 이런데, 이래서 마라톤은 인간이 할 운동이 아니구나 생각이 들었다. 하루 세 시간씩 걷는다고 했더니 고등학교 동창 하나가 물었다. "넌 그렇게 시간이 많니?" 바로 대답을 못했다. 시간이 많은 건 사실이었고 정상적으로 회사에 다니는 사람이 하루 세 시간을 걷는 것은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 그렇다고 그렇게 되받아칠 건 또 뭐 있나, 에이 야박한 놈. 걸을 때 이용한 게 탄천 산책로다. 그래서 경기 광주로 이사할 때 가장 아까웠던 것이 탄천 산책로를 놓고 나오는 것이었다. 내 것도 아니면서 무슨 당치 않은 욕심인지 모르겠다.

그렇게 십 년이 지나고 다시 분당으로 돌아왔다. 오자마자 제일 먼저 간 곳이 탄천이다. 졸업한 초등학교만 다시 가보면 작아 보이는 게 아니었다. 그렇게 멀게 느껴졌던 길들이 가깝고 금세였다. 십 년 동안 하천의 잉어들은 참 많이도 자라 있었다. 연신 입을 벌려 대는 걸 보니 식량난은 여전한 모양이다. 과자 부스러기라도 던져줄까 하는데 물고기에게 먹이를 주지 말라고, 면역력 등등이 떨어진다고 팻말에 쓰여 있다. 세월이 기개를 많이 버려 놓았다. '흥, 내가 주겠다는데도 주지 말라고 하는군' 하며 손을 거둬들인다.

하긴 천명(天命)을 아는 나이다. 달라진 게 있다. 예전에는 혼자 걸었는데 이제는 꼬맹이 둘과 손을 잡고 걷는다. 몇 번은 그냥 셋이 걷는 것이 달랐을 뿐인데 갑자기 맞잡은 손끝에서 고압 전류 같은 깨달음이 흘렀다. 내가 이 세상에 온 건 시시한 책이나 한심한 글을 쓰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바로 이 아이들을 남기려고 왔구나, 각성이 계시처럼 다가왔다. 한때 종(種)의 보전 말고는 별 의미가 없어 보이는 삶을 경멸한 적이 있다. 아아, 석고대죄급 그 오만을 어찌 회개할꼬…. 큰 깨달음이 이것이었다면 작은 깨달음은 걷기는 '운동의 영역'이 아니라 '사고(思考)의 방식'이라는 사실이었다. 인간은 생각하기 위해 걷는다. 연말에 동창 녀석을 만나면 똑같은 질문을 유도해 볼 생각이다. 그리고 이렇게 대꾸하겠다. "넌 생각할 게 그렇게 없니?" 하하하, 벌써부터 통쾌하다. 이 글도 산책 나갔다 와서 30분 만에 썼다. 가을바람이, 참 좋다. 
. 산책 같은 건 칸트 같은 사람이나 하는 건 줄 알았다. 어느 날인가 머리가 너무 무겁고 생각이 뒤엉켜 터질 것 같았다. 그래서 무작정 집 밖으로 나갔다. 30분쯤 걸었는데 정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머릿속 생각들이 하나씩 정리가 되더니 일의 순서가 잡히기 시작했다. 그 뒤로 막히면 무조건 나가서 걸었다. 작은 문제에서부터 큰 문제까지 수월하게 풀렸다. 그러니까 걷기는 내가 '시작'한 것이 아니라 '발견'한 것이었던 셈이다.

살다 보면 가끔 목적과 수단이 바뀌기도 한다. 수단이 목적이 되어 오래 걷기에 도전했다. 수지에서 강남운전면허시험장까지 걸어갔다. 대략 20㎞가 좀 넘는데 다섯 시간쯤 걸린 것 같다. 돌아올 때는 버스를 타고 왔다. 다리가 아파 도저히 걸을 수가 없었다. 걷는 것도 이런데, 이래서 마라톤은 인간이 할 운동이 아니구나 생각이 들었다. 하루 세 시간씩 걷는다고 했더니 고등학교 동창 하나가 물었다. "넌 그렇게 시간이 많니?" 바로 대답을 못했다. 시간이 많은 건 사실이었고 정상적으로 회사에 다니는 사람이 하루 세 시간을 걷는 것은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 그렇다고 그렇게 되받아칠 건 또 뭐 있나, 에이 야박한 놈. 걸을 때 이용한 게 탄천 산책로다. 그래서 경기 광주로 이사할 때 가장 아까웠던 것이 탄천 산책로를 놓고 나오는 것이었다. 내 것도 아니면서 무슨 당치 않은 욕심인지 모르겠다.

그렇게 십 년이 지나고 다시 분당으로 돌아왔다. 오자마자 제일 먼저 간 곳이 탄천이다. 졸업한 초등학교만 다시 가보면 작아 보이는 게 아니었다. 그렇게 멀게 느껴졌던 길들이 가깝고 금세였다. 십 년 동안 하천의 잉어들은 참 많이도 자라 있었다. 연신 입을 벌려 대는 걸 보니 식량난은 여전한 모양이다. 과자 부스러기라도 던져줄까 하는데 물고기에게 먹이를 주지 말라고, 면역력 등등이 떨어진다고 팻말에 쓰여 있다. 세월이 기개를 많이 버려 놓았다. '흥, 내가 주겠다는데도 주지 말라고 하는군' 하며 손을 거둬들인다.

하긴 천명(天命)을 아는 나이다. 달라진 게 있다. 예전에는 혼자 걸었는데 이제는 꼬맹이 둘과 손을 잡고 걷는다. 몇 번은 그냥 셋이 걷는 것이 달랐을 뿐인데 갑자기 맞잡은 손끝에서 고압 전류 같은 깨달음이 흘렀다. 내가 이 세상에 온 건 시시한 책이나 한심한 글을 쓰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바로 이 아이들을 남기려고 왔구나, 각성이 계시처럼 다가왔다. 한때 종(種)의 보전 말고는 별 의미가 없어 보이는 삶을 경멸한 적이 있다. 아아, 석고대죄급 그 오만을 어찌 회개할꼬…. 큰 깨달음이 이것이었다면 작은 깨달음은 걷기는 '운동의 영역'이 아니라 '사고(思考)의 방식'이라는 사실이었다. 인간은 생각하기 위해 걷는다. 연말에 동창 녀석을 만나면 똑같은 질문을 유도해 볼 생각이다. 그리고 이렇게 대꾸하겠다. "넌 생각할 게 그렇게 없니?" 하하하, 벌써부터 통쾌하다. 이 글도 산책 나갔다 와서 30분 만에 썼다. 가을바람이, 참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