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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자 오토 클렘페러

應觀 2013. 2. 24. 12:38

 

 

지휘자 오토 클렘페러

 

두꺼운 뿔테안경에 파이프 담배를 물고 생각에 잠겨있는 모습. 지휘자 오토 클렘페러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다. 초창기에는 빠른 템포로 지휘하고 급진적인 현대들도 무대에 올렸지만, 우리에게 기억되는 클렘페러의 음악은 엄격하고 유장한 템포로 서둘지 않고 음악의 모든 요소들을 음미하게끔 견고한 구조에 담아낸 만년의 녹음들이다. 그가 해석한 독일 고전과 낭만음악은 늘 각별한 가치를 띠고 있었다.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가 된 이후, 즉 1950년대 중반 이후 만년의 녹음을 들어보면 클렘페러의 음악세계는 앙상블이나 음색, 감정표현 등 표면적인 아름다움을 강조하지 않는다. 그 대신, 느리고 엄격한 템포로 악곡의 형식과 느낌을 구축하는 스타일이다. 중음역이 두텁게 도드라진 클렘페러 사운드는 어떻게 보면 인공적이라고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확대경을 들이댄 듯 또렷이 들리는 지저귀는 목관과 총주에서 밀어붙이는 금관악기의 활약은 엄격한 형식의 큰 캔버스 안에서 대비와 대조를 거듭하며 생명력을 얻는다. 스케일 큰 음악. 그가 ‘지휘대의 거인’이라 불렸던 건 단지 198cm의 키 때문만이 아니었다. 온갖 역경을 겪었음에도 그 때마다 일어섰기에, ‘지휘대의 불사조’라는 그의 별명이 무척이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말러의 추천이 길을 터주다

오토 클렘페러(1885년 5월 14일~1975년 7월 6일)는 중부 유럽 실레지아 지방의 브레슬라우에서 태어났다. 현재 폴란드의 브로츠와프로, 당시는 독일 영토였다. 프랑크푸르트 음악원에서 음악을 공부한 클렘페러는 베를린의 슈테른 음악원에서 한스 피츠너를 사사했다. 1905년 클렘페러는 말러의 [교향곡 2번 ‘부활’] 중 무대 밖에 위치한 금관악기군을 지휘하다가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와 조우했다.

클렘페러는 말러의 음악세계에 깊이 경도돼 있었고 말러 [교향곡 2번] 스코어를 피아노 독주용으로 편곡하기도 했다. 이 스코어를 보고 감탄한 말러는 선뜻 추천서를 써 주었다. 거기엔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다. “저 구스타프 말러는 오토 클렘페러씨를 추천합니다. 그는 젊은 나이에 이미 뛰어난 음악가이고, 지휘자로 활동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나는 그가 음악감독으로서의 직무를 완수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또한 저는 클렘페러씨에 관한 질문에 대해 무엇이든지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당시 말러는 빈 궁정오페라(지금의 빈 슈타츠오퍼)의 음악감독이었으며, 명성과 영향력이 높았다. 이러한 말러의 추천으로 클렘페러는 프라하에서 독일 오페라 담당 지휘자가 되었다. 클렘페러는 자신을 추천하는 말러의 메시지가 담긴 작은 카드를 평생 동안 간직했다고 한다. 그 뒤 1910년, 클렘페러는 말러 [교향곡 8번 ‘천인교향곡]’의 초연 무대를 함께 준비하며 말러를 도왔다. 그런데 말러의 도움을 받고 그에게 배운 클렘페러가 말러 교향곡 전곡을 남기지 않은 것(2, 4, 7, 9, ‘대지의노래’를 녹음했다)은 좀 이상하다. 물론 클렘페러에게 말러의 작품은 매우 중요한 레퍼토리였지만 일부 작품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견해를 언급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말년의 오토 클렘페러의 지휘모습

그 예를 보자. 클렘페러는 말러 [교향곡 1번]같은 경우는 “4악장(마지막 악장)이 너무 현란한 목소리로 바뀐다”고 했는가 하면 [교향곡 5번]에서는 “3악장 스케르초가 너무 길다”고 비판했고, 4악장 아다지에토는 “마치 살롱 음악 같다”고 꼬집었다 한다. 그래서인지 클렘페러의 말러 연주는 말러 직계 제자였던 브루노 발터에 비해 상대적으로 평가절하되는 경향이 있었다. 클렘페러가 해석하는 말러 연주의 성격에서도 이유를 찾을 수 있다. 그의 해석은 말러의 영향을 받았으면서도 말러적이지 않다. 그는 늘 냉정할 정도로 복잡한 감정 표현을 엄격하게 거부하고 고전적인 양식의 범주에서 해석한다. 다시 말해 진하고 드라마틱한 음악을 추구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단 클렘페러의 남긴 말러 연주는 하나같이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크리스타 루드비히프리츠 분덜리히 등 명가수를 맞이해 녹음한 [대지의 노래]는 페리어와 파착을 기용한 발터의 음반과 더불어 이 작품을 대표하는 명반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진취적이었던 독일 시대

다시 말러 덕을 본 젊은 시절의 클렘페러로 이야기를 돌리자. 그의 지휘봉을 원한 곳은 많았다. 함부르크(1910~1912)와 바르멘(1912~1913), 스트라스부르 오페라(1914~1917), 쾰른 오페라(1917~1924), 그리고 비스바덴 슈타츠오퍼(1924~1927)에서 일이 끊이지 않았다. 쾰른 오페라 시절이었던 1919년, 쾰른 극장의 오페라 가수 요한나 가이슬러와 결혼한 클렘페러는 1921년에는 베를린 필을 지휘하며 베를린에서도 널리 호평을 받았고 1927년에는 운터 덴 린덴 국립 오페라 극장에서 제공하는 크롤 오페라 극장의 감독으로 취임했다.

클렘페러의 명성은 만년에 EMI와의 녹음을 통해 널리 알려진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그를 ‘대기만성형 지휘자’라고도 부른다. 하지만 그는 일찍이 독일 시절부터 이미 고전음악뿐 아니라 동시대의 음악에 대해서도 뛰어난 해석을 선보인 지휘자로 알려져 있었다. 특히 크롤 오페라 극장에서 활동하던 시절에는 자체 예산이 없고 인원도 제한된 상황에서, 무명의 곡목과 동시대의 음악을 적극적으로 공연했다. 단 12음 기법에 의한 무조음악은 제외되었다. 1927년부터 1931년까지 베를린 크롤 오페라에서 클렘페러가 공연한 곡들을 보면 레오슈 야나체크의 [죽은 자의 집으로부터] 아르놀트 쇤베르크의 [기대 Erwartung],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의 [외디푸스 렉스], 파울 힌데미트의 [카르디야크 Cardillac] 등 다수의 동시대 음악 초연이 포함돼 있었다.


현대음악의 스페셜리스트로서의 명성을 높인 그는 유명한 곡에 대해서도 새로운 현대적인 연출을 시도하는 등 과감한 시도로 많은 호평과 반발을 동시에 불러 일으켰다. 특히 바그너 오페라를 상연했을 때는 나중에 빌란트 바그너가 확립한 ‘신바이로이트양식’을 연상시키는 연출을 감행해 많은 바그너 숭배자들에게 격렬한 항의를 받았다. 크롤 오페라 시절 독일 경제가 급속도로 악화되고 있는 가운데 1933년, 나치가 권력을 잡자, 독일 복고주의가 대두되었고, 유대인이었던 48세의 클렘페러는 독일을 떠나 스위스를 거쳐 미국으로 망명했다. 원래 클렘페러는 가톨릭으로 개종했었으나 만년에는 유대교 신자가 되었다.


베를린 크롤 오페라에서 지휘할 당시 1930년의 클렘페러 초상 <출처: wikipedia>

불운했던 미국 시대 – 몸의 부분적 마비


미국에서 클렘페러는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LA 필)의 음악감독으로 임명됐고, 1937년에는 미국 시민권자가 되었다. LA에서 그는 나중에 클렘페러 음악세계의 핵심이 되는 정통 독일 레퍼토리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특히 베토벤, 브람스, 말러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하지만 현대음악도 연주도 계속했다. 함께 LA에 거주했던 아르놀트 쇤베르크의 작품을 LA 필과 초연하기도 했다. 클렘페러의 지휘 아래 LA필의 실력은 급성장했다. 이 시기 클렘페러는 피츠버그 심포니등 다른 미국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기도 하고 영국과 호주를 비롯해 여러 나라를 연주여행했다. 오케스트라는 그의 리더십에 잘 반응하는 연주를 펼쳤지만, 클렘페러는 남부 캘리포니아에 쉽게 적응하지 못했다. 심각한 조울증이 반복되면서 상황은 점점 악화됐다. 조증과 울증의 극과 극을 오가는 괴로운 나날들이 계속됐다.


1939년 할리우드 볼에서 LA 필의 여름 시즌을 마치고 보스턴의 병원을 방문해서 건강검진을 받은 클렘페러는 뇌종양 진단을 받았다. 이것은 잘못된 진단이었다. 이후 뇌수술을 받은 클렘페러의 몸은 부분적으로 마비가 됐다. 중풍이 온 것이다. 그는 우울한 심리상태로 요양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클렘페러가 병원을 나와 잠적했을 때, 뉴욕타임스는 클렘페러가 실종됐다는 내용의 커버스토리를 실었다. 나중에 클렘페러가 뉴저지에서 발견됐을 때 헤럴드 트리뷴지는 요양원 안에 갇혀있는 클렘페러의 사진을 실었다.


이 사건 이후에도 클렘페러는 LA 필을 가끔씩 지휘하기는 했지만, 음악감독직을 상실하고 말았다. 더구나 조울증은 더욱 악화되고 예측할 수 없는 클렘페러의 불규칙적인 습성으로 인해 미국 오케스트라들은 그를 ‘불편한 손님’으로 여기게 되었다. 클렘페러가 만년에 지휘자로서 전성기를 활짝 꽃피운 곳이 대부분 미국이 아닌 다른 나라였던 사정에는 이러한 이유가 있었다.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라는 날개를 달다

제2차세계대전이 끝나고 유럽으로 돌아온 클렘페러는 62세 때 부다페스트 국립오페라 극장(1947~1950)에서 지휘하게 되었다. 그동안 악단의 기틀을 착실히 다졌지만 이른바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강요하는 헝가리의 공산주의 법에 넌더리가 난 클렘페러는 한 곳에 머물지 않고 세계 각지에서 지휘하는 길을 택한다. 그리하여 그는 덴마크 왕립 오케스트라, 몬트리올 심포니, 쾰른 방송교향악단, 암스테르담 콘세르트허바우 오케스트라,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등을 객원지휘했다. 그러면서 미국 복스(Vox)사와 음반 녹음을 계속 진행했다. 런던에서 지휘할 때 EMI 프로듀서 월터 레그의 눈에 띈 클렘페러는 1952년 EMI와 음반 계약을 체결했다. 그런데 이 계약은 다른 의미도 있었다. 당시 EMI 소속이던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도이치 그라모폰으로 이적한 것에 대한 레그의 대항 조치로도 볼 수 있다.

1954년, 런던의 프로듀서 월터 레그는 자신이 조직한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의 지휘를 69세의 클렘페러에게 맡겨 베토벤, 브람스 등 작곡가들의 수많은 명곡들을 녹음하기 시작했다. EMI에서 맞은 전성기의 신호탄이었던 이 시기는 클렘페러의 경력에 있어 하나의 전환점이라고 할 수 있었다. 1959년 레그는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의 초대 수석지휘자 자리를 클렘페러에게 맡겼다. EMI와의 종신 녹음계약도 함께 체결했다. 이 시절 클렘페러는 스위스에 자리를 잡았다. 그는 런던의 로열 오페라 하우스 코벤트 가든에서 지휘했고, 때때로 지휘뿐만 아니라 무대 연출을 담당하기도 했다. 1963년 리하르트 바그너의 [로엔그린]이 클렘페러의 연출작 중 하나였다. 그는 코벤트 가든에서 모차르트 [마술피리]를 지휘하기도 했다. 클렘페러와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의 관계는 1964년 이 오케스트라가 뉴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로 새롭게 출범한 이후에도 변함없이 계속되었다.


원래 영국 EMI에서 녹음 전문 오케스트라를 목표로 월터 레그가 결성한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는 EMI를 떠나며 이 오케스트라의 해산을 선언했다.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라는 이름도 쓰지 못하게 된 단원들은 ‘뉴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라는 이름으로 자체 운영을 시작하고 클렘페러를 이 오케스트라의 회장으로 모셨다. 지휘자와 오케스트라는 뉴필하모니아 시절 필하모니아 시절보다 더 많은 라이브 콘서트를 가졌다. 고집불통에다가 기인같은 성격의 클렘페러였지만 그는 사실 많은 음악가들을 마음으로부터 존중했고, 단원들은 클렘페러와 연주하는 것을 기쁨으로 생각했다 한다. 뉴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는 그 뒤 1977년 원래의 이름인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의 이름을 되찾았다.


런던 코벤트 가든 오페라 가수들과 악보를 보고 있는 클렘페러의 모습

한편 작곡가로서의 클렘페러의 역량은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클렘페러는 상당한 양의 작품을 남겼다. 그 가운데는 6곡의 교향곡, 한 곡의 미사, 9곡의 현악 4중주, 다수의 독일 가곡(리트)과 오페라 [Das Ziel]이 있다. Das Ziel 은 독일어로 ‘목적지’나 ‘종착점’을 의미한다(영어로 번역하면 ‘The Goal’). 작곡가 클렘페러 자신이 말하길 “죽음을 은유하는 뜻을 담았다”고 했다. 이 오페라 중 ’명랑한 왈츠‘는 클렘페러의 작품 가운데 가장 유명한 곡으로 꼽힌다. 클렘페러는 여간해선 자작곡을 직접 지휘하는 일이 없었고, 그의 죽음 이후 이 작품들은 잊혀지다시피 했다. 그러나 가끔씩 클렘페러의 작품들이 음반으로 발매되기도 했다.

플레이보이 기질과 화재 사고에 관한 일화

클렘페러의 일화는 수없이 많다. 그것들은 대개 두 가지로 나뉜다. 첫째는 플레이보이로 유명했던 그의 여자관계에 관한 것이고, 둘째는 수없이 당했던 신체 사고와 관련된 것이다. 함부르크에서 지휘할 무렵 클렘페러는 유부녀였던 소프라노 엘리자베트 슈만과 불륜 관계였다. 어느날 슈만과 오페라를 공연하고 돌아올 때 불륜에 화가 나 있던 슈만의 남편이 기다리다가 그를 곤봉으로 내려쳤다. 그 후 머리에 붕대를 감고 오케스트라 피트에 나타난 클렘페러에게 청중들은 야유를 퍼부었다. 클렘페러는 객석을 향해 고함 쳤다.

“내 음악이 듣고 싶지 않은 놈들은 나가라!”

클렘페러가 여자에게 작업을 거는 방식을 일러주는 일화가 있다.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를 지휘할 무렵 여자 첼로 주자가 마음에 든 클렘페러는 자신이 작곡한 피아노 트리오곡 초연을 연습하자며 호텔로 그녀를 불렀다. 피아노 트리오 편성이고, 다른 남자 바이올린 연주자도 동시에 초대했기 때문에 그녀는 안심하고 초대에 응했다. 막상 3명이 연주를 시작할 무렵 피아노 앞에 앉은 클렘페러가 남자 바이올리니스트에게 악보를 전달했다. 거기엔 이렇게 씌어있었다. “바이올린 파트는 아직 미완성이오. 당신은 집에 돌아가도 좋소.”


무대에서 떨어져 척추가 골절된 바 있는 클렘페러는 일생동안 많은 사고를 당했다. 몬트리올을 방문했을 때 공항 트랩에서 넘어져 다리와 허리뼈가 골절되는 등 심각한 부상을 입은 클렘페러는 의자에 앉아서 지휘해야 했다. 1958년 9월, 클렘페러는 침대에서 파이프 담배를 물고 자다가 이불에 불이 붙었다. 불을 끄려고 가까이에 놓인 액체를 집어 던졌는데 그것이 기름이었다. 심각한 화상을 입은 그는 일년 가까이 치료에 전념하게 됐다. 1959년 8월 위에 언급한 EMI와 종신 레코드 계약을 체결한 뒤 곧 회복하여 연주 활동에 복귀했다.

1954년 쾰른 라디오 심포니 오케스트라 단원들과 악보를 보고있는 클렘페러의 모습 <출처: Unterberg, Rolf ar de.wikipedia>

클렘페러가 건강 문제로 고통받았을 때 그의 곁에는 딸 로테 클렘페러가 있었다. 그녀는 지칠 줄 모르는 헌신과 흔들리지 않는 의지로 클렘페러의 어시스턴트 역할을 훌륭히 수행했다. 딸 로테가 없었으면 오늘날 우리가 아는 클렘페러는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아들인 베르너 클렘페러는 유명 배우였다. 클렘페러의 마지막 콘서트 투어 장소 중 하나에는 예루살렘이 있었다. 클렘페러는 이스라엘이 독립을 선언하기 전 팔레스타인에서 연주를 했었다. 그리고 1970년 이스라엘 방송 당국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지휘해 두 개의 콘서트를 이끌었다. 이때 프로그램은 [브란덴부르크협주곡] 전곡과 모차르트 [교향곡 39번]과 [4번], [41번]이었다. 이 투어기간동안 클렘페러는 이스라엘 시민권을 얻었다. 1972년 지휘대에서 은퇴한 클렘페러는 1973년 취리히에서 88세로 사망했고 취리히에 묻혔다.

클렘페러의 음반

클렘페러의 명반들은 대부분 EMI 레이블에서 나왔다. 최근에는 EMI의 음원을 발매하는 테스타먼트 라벨이 스튜디오 레코딩 음원 뿐만 아니라 방송 녹음들을 발굴해 출시하고있다. 1950년대 초기 음원들은 Vox에서 다수 발매되었는데 차츰 저작권이 만료되는 초기 음원들과 방송녹음들은 Tahra, Medici, Naxos 등 다양한 레이블에서 CD로 발매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루어지고 있다. 수많은 클렘페러의 음반 가운데서도 꼭 들어봐야 할 녹음은 바흐 B단조 미사(EMI), 모차르트 오페라 ‘마술피리’(EMI), 베토벤 교향곡 전곡(EMI, Testament), 멘델스존 ‘한여름 밤의 꿈’(EMI), 멘델스존 교향곡 3번, 4번(EMI), 브람스 교향곡 전곡(EMI), 말러 교향곡 2번, 4번, 7번, 9번, 대지의 노래(EMI), 브루크너 교향곡 4번, 6번, 7번(EMI) 등이다. 클렘페러가 지휘한 협주곡 녹음 중에서는 다비드 오이스트라흐를 반주한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EMI)과 클라우디오 아라우를 반주한 베토벤 협주곡 3번, 4번, 5번(Testament)이 우선 생각난다

 

연표
1907 프라하 독일 극장 악장으로 데뷔
1910 함부르크 오페라 지휘자
1912 바르멘 오페라 지휘자
1914 스트라스부르 오페라 지휘자
1917 쾰른 오페라 지휘자
1923 쾰른 음악 총감독
1924 비스바덴 오페라 지휘자
1927 크롤 오페라 지휘자
1931 베를린 슈타츠오퍼 지휘자
1933~1939 나치에게 추방, LA 필 상임 지휘자
1947 부다페스트 국립극장 음악감독
1951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지휘
1954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수석 상임지휘자
1959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종신 상임지휘자
1964 뉴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회장 취임
1972 지휘 은퇴 선언
1973 취리히에서 사망

[출처] 오토 클렘페러|작성자 jazz1966

 

"브루노 발터는 인격자고 도덕가요.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아."
오토 클렘페러가 만년의 인터뷰에서 농담처럼 던진 이 한마디는 곧잘 음악팬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얼핏 보면 별 내용도 없는 말 같지만, 그의 '인간'을 이처럼 간명하게 보여주는 말은 드물다.

분명 그는 발터의 따스한 인간미를 풍기지 못하는 종류의 사람이었다. 무뚝뚝하고 괴퍅했으며 단원들에게는 엄했고 때론 쌀쌀맞기까지 해서 접근이 쉽지 않았다. 연습중 실수하는 단원은 밖으로 쫓아내는 일도 다반사였다.

그러나 예컨대 푸르트벵글러라면 '나는 도덕가가 아니다'라는 말을 입밖으로 툭 던질 수 있을까? 고고하고 도취적인 푸르트벵글러라면 '자신의 부족함을 드러내는 발언은 필요없다'고 느꼈을 것이다. 토스카니니라면? '지휘는 인격으로 하는 것이 아니오'라고 일갈했을 지도 모른다.

여기서 역으로 클렘페러의 인간미가 나타난다. 그는 괴퍅했으나 꾸밈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일생 동안 갖은 개인적 불행을 겪었으며 인간의 생 자체에 내재된 비극성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아픔을 생 밖으로 몰아내려 하지 않았으며 생의 한 요소로 껴안고 살았다. 이런 면모는 그의 음악에서도 마찬가지다.

그가 지어낸 음의 건축물은 발터만큼 온기있고 푸근하지 않다. 푸르트벵글러처럼 지엄하지 않고, 토스카니니처럼 엄정하지 않다. 만년으로 갈수록 한없이 느려지는 템포는 모순적으로 느껴질 때도 많으며, 악기군 사이의 음량배분도 때로 그러하다. 그러나 그의 음악에서는 태생적으로 불완전한 존재의 인간이 장애를 극복하고 완성을 지향해 나가는 웅대한 투쟁이 느껴진다. 그의 음악이 베토벤에서 가장 빛을 발한다고 이야기되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일지도 모른다.

오토 클렘페러는 1885년 현재 폴란드의 브레츠와프가 된 브레슬라우(당시 독일령)의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프랑크푸르트에서 이반 크노르에게, 베를린 샤르벤카 음악원에서 제임스 크바스트에게 배운 뒤 작곡가로 알려진 한스 피츠너에게서 작곡과 지휘교습을 받았다.

1905년 스무 살의 젊은 지휘자 클렘페러는 인생의 큰 전기가 되는 만남을 갖게 된다. 구스타프 말러의 교향곡 2번 '부활' 공연에서 무대 뒤편 금관을 지휘하는 역할을 맡게 된 것이다. 청년 클렘페러는 말러의 정열과 집중력, 거대한 스케일의 음악관에 매료되고 만다. 말러는 흔히 신경질적인 면모가 두드러진 까다로운 인물로 알려져있지만, 그의 음악이 그의 인간에 감화된 브루노 발터, 오토 클렘페러라는 두 인물에 의해 유지 승화되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클렘페러의 정식 지휘자 데뷔는 그보다 1년 늦게 이루어지는데 운이 좋아서인지 무대가 컸다. 베를린 노이에(新)극장에서 열리는 오펜바흐 '지옥의 오르페우스'(천국과 지옥)에서 원 지휘자 오스카 프리트의 뒤를 이어 뒷부분 공연을 지휘하게 된 것이다. 공연의 평판은 훌륭했고, 1년 뒤 그는 당시 오스트리아령이던 프라하 도이치극장의 합창 지휘자로 임명된다. 프라하 사정을 잘 알고 있던 말러의 추천이었다. 곧 그는 같은 극장의 음악감독이 되어 베버 '마탄의 사수'로 데뷔 무대를 장식한다.

오늘날과 달리 당시 독일계통 지휘자들의 성공 코스는 작은 오페라극장으로부터 시작, 차츰 명망있는 큰 도시 가극장을 옮겨가며 명성을 키우는 것이었다. 클렘페러 역시 함부르크, 바르멘, 스트라스부르 (당시 독일령 슈트라스부르크) 등을 거치며 20대를 보냈다. 함부르크 재직 시절 중 유부녀인 소프라노 엘리자베트 슈만과 염문을 일으켜 쫓겨나는 곡절을 겪기도 했지만, 1918년 쾰른 가극장의 지휘자로 임명되었을 때 그의 명성은 이미 동년배 독일 지휘자중에서 압도적인 것이 되어있었다.

이어 비스바덴 가극장의 상임을 거쳐 그는 자신의 일생 중 가장 독특한 지위를 갖게 된다. 우리가 흔히 그 중요성을 잊고 지나치기 쉬운 그 자리란 바로 베를린 크롤 오페라극장의 예술감독 직위였다. 크롤 극장은 비교적 소규모의 극장으로 베를린 오페라극장이 직영으로 운영하는 일종의 산하단체였는데, 진보적인 바이마르 공화국 정부는 베를린 오페라가 기존의 오페라 레퍼토리를 공연하는 데신 크롤 극장이 현대 오페라 레퍼토리의 산실 역할을 하도록 역할부여를 했던 것이다. 이곳에서 그는 스트라빈스키의 '외디푸스 왕', 힌데미트의 '오늘의 뉴스', 야나체크의 '죽은자의 집', 쿠르트 바일의 '네 라고만 말하는 사람'등 수없이 많은 문제작을 무대에 올렸다. 당시의 크롤 오페라는 기존의 오페라를 혁신적인 연출에 따라 무대에 올리기도 했는데, 예를 들어 1929년 공연한 바그너 '방황하는 홀란드인'은 뒷날 빌란트 바그너가 바이로이트에서 행한 파격적 연출의 전범이 되기도 했다.

크롤 극장이 당대의 문화계에 기친 혁신적 추동력으로서의 힘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다만 뒷날 나치의 철저한 말살 정책으로 녹음자료와 화보 등을 비롯한 당시의 자료가 거의 사라진 점이 유감이다. 유감스럽게도 크롤 극장은 1931년 재정확보의 어려움으로 문을 닫았지만 클렘페러는 모기관인 베를린 오페라에서 지휘를 계속했다.

2년뒤 나치당이 정권을 장악했다. 유태계인데다가 나치가 그토록 증오하는 현대음악과 진보적 이념을 대표하는 것으로 여겨졌던 클렘페러는 당연히 설 자리가 없었다. 1933년 4월 그는 미국으로 이주한다.

48세, 지휘자로서 한창의 나이에 그가 신대륙에서 새로 맡은 역할은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니의 상임지휘자였다. 뉴욕 필과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도 지휘하고 피츠버그 교향악단의 재건에도 참여하는 등 왕성하게 활동하던 그에게 그러나 첫 번째 육체적 시련이 찾아온다. 1939년 뇌종양이 발견되어 수술을 받은 것이다.

다행히 종양은 더 이상 확대되지 않았으나 말은 어눌해졌고 몸을 놀리는 것도 부자연스러워졌다. 그는 대부분의 지휘활동을 중단하고 정양할 수 밖에 없었다.
다소 상태가 호전된 그는 1947년 그리던 유럽으로 되돌아간다. 해방된 헝가리의 부다페스트에서 그는 오페라극장의 음악감독이 된다. 그러나 공산당 독재체제가 굳어지고 레퍼토리에 대한 간섭까지 심화되는 상황에서 더 이상 머무를 의미를 찾기는 힘들었다. 1951년 그는 미국으로 되돌아온다. 그러나 제 2의 육체적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연주를 위해 찾은 몬트리올 공항에서 트랩을 내려오던 그는 불편한 몸 때문에 발을 헛딛어 그대로 트랩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그는 의식을 잃고 목뼈와 대퇴골에 심각한 손상을 입었다. 몸을 지탱하기 더더욱 힘들어졌지만 그는 기적처럼 다시 일어났다. 몸이 불편한 그이지만 일생 중 가장 풍요한 결실의 시간이 기다리고 있었다.

1955년 베를린필 상임지휘자인 푸르트벵글러가 타계하자 음악계는 일약 전환기를 맞게 됐다.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베를린에 안주할 자리를 마련했다. 그가 가장 많은 시간을 바쳐 일하던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에도 새 수장이 필요했다. EMI의 명 프로듀서로 이름을 날리던 월터 레그가 런던에서 1945년 창단한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는 그 젊음과 신선함, 기능적 우수성으로 한창 약진중이었다. 이 악단을 간간이 지휘하며 단원과 청중 양쪽으로부터 존경받고 있던 클렘페러가 새로운 선택이었다. 푸르트벵글러도 없고 때맞춰 토스카니니도 은퇴한 상황에서 클렘페러는 세기전환기 오스트리아 독일음악의 풍요한 전통을 체험으로 증명하는 유일한 노거장이었다. 그는 월터 레그의 풍요한 녹음 레퍼토리를 채움으로써 역할을 제대로 수행했다.

필하모니아 재직 시절 클렘페러는 그의 오래된 정형적 사운드를 최고도의 공고함으로 쌓아올릴 수 있었다. '클렘페러 사운드'라고도 일컬어지는 그의 독특한 사운드는 '목관의 우위'라는 간단한 표현으로 대강 설명될 수 있다. 목관은 대개의 작곡가들이 독특한 색채를 가미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지만 전체 합주에서는 현 및 금관의 압도적 음향에 묻혀 제 색깔을 내기 힘들기가 일쑤다. 클렘페러는 이 목관을 전면으로 부상시켰다. 그 결과 작곡가가 의도한 세부의 색상이 살아나게 된다. 그러나 현을 강화하며 금관을 기능적으로 강조하는 현대적 경향에서 볼 때 그의 '목관우위'는 '장작개비 춤 같다'는 비난을 종종 듣기도 했다.

필하모니아와 함께 황금시절을 구가하던 그에게 1958년 세 번째 육체적 타격이 닥쳤다. 어처구니 없는 사건이었다. 침대에서 파이프 담배를 문채 잠이 들었다가 그만 이불에 불이 붙은 것이다. 불을 끄려고 얼결에 뿌린 물약의 알콜이 불길을 확산시켰다. 그러나 사고와 횡액의 끊임없는 장난도 그의 의지력을 시험했을 뿐 꺾지는 못했다. 전신에 화상을 입은 그는 의자에 앉아 몸을 약간 비틀어 등받이에 기댄 특유의 자세로 다시 팬 앞에 나타났다.

1961년부터는 그의 젊은시절 주활동무대였던 오페라극장으로 다시 눈을 돌렸다. 런던 코벤트 가든에서 베토벤 '피델리오', 바그너 '로엔그린' 등을 무대에 올리며 오히려 더욱 풍성해진 레퍼토리와 여유로와진 음악성을 과시했다.

그에게 가해진 마지막 시련은 1963년 닥친 뇌졸중이었다. 그러나 그는 다시 일어났다. 1964년 EMI가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를 석연치 않은 이유로 해산하자 단원들은 클렘페러를 회장으로 추대하고 단원지주회사로 재출범시켰다. '인격자가 아니'라는 그를 단원들이 얼마나 마음깊이 정신적 버팀목으로 여겼는지를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병마가 거듭되고 몸의 운신이 불편해지면서 그의 음악은 서서한 전환을 맞게 된다. 그것은 전시대의 크나퍼츠부쉬와 쌍벽을 이룬다고 평가되는, 때로 '악명높게' 묘사되는 특유의 느린 템포다. 60년대를 거치면서 그의 음악은 점점 더 느려졌다. 그러나 느린 템포 속에서도 긴장을 흐트러뜨리는 합주력의 이완은 한치도 허용되지 않았다. 느린 템포와 불분명한 비트는 그의 지휘를 따라가는 단원들을 극한의 긴장감 속으로 몰아넣었지만 그런 고행이 오히려 다른 지휘자들에게서 엿볼 수 없는 특유의 집중력을 그의 음악속에 불어넣었다. 그의 '느림'은 흔히 '힘든 벼랑을 기어오르는 등반가의 투쟁'으로 비유되었다.

유려한 선율, 투명한 사운드를 그의 음악에서 찾아보기는 힘들다. 감각적 흥분을 자아내는 템포의 약동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의 음악에는 집중력과 의지로 투철하게 무장된 일종의 '이상주의적 긴장감'이 시종 배경에 깔려 있다. 느린 템포마저도 일종의 투쟁이었다. 그 투쟁을 받아들이려는 자에게는 '환희에의 찬가' 가사와 같은 엘리지움 (신화속의 낙원)이 펼쳐지지만 이 낙원은 중간과정인 '투쟁'을 생략하려는 자에게 결코 문을 열지 않는 낙원이기도 했다.
1973년, 88세로 타계할 때 까지 연주의 회수는 적어졌지만 그는 끝까지 지휘봉을 놓지 않았다. 1973년 6월, 취리히의 집에서 그는 잠들었다가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평생 병마와 싸워온 거인의 마지막으로서는 평화롭다 할 만했다.


 

글: 유윤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