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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산 환벽정과 관악산

應觀 2021. 6. 13. 10:46

환벽정은 바위 절벽 위에 있다. 기운이 뭉쳐 있는 곳임을 한눈에 알 수 있다. 큰 바위가 놓여 있고, 이러한 바위들이 반도처럼 약간 돌출되어 있으면 풍수적으로 기운이 뭉쳐 있다고 판단한다. 원래 이 자리는 '연천대意天臺'라는 자리였다. 하늘에 연출을 날리는 자리라는 의미다. 앞으로 보이는 산봉우리들의 모습도 아름답다. 환벽정 좌측으로는 군자산君子山이 자리 잡고 있다. 멀리서 군자산을 바라보면 삼각형 모양의 문필봉文筆峰으로 보인다. 그 지역에 문필봉이 포진하고 있어야만, 인재가 나온다. 인재는 덕이 높은 학자를 가리킨다. 학자가 나와야 인물이 나온 것이다. 돈이야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지만, 한 번 학자가 나오면 수백 년간 그 명성이 전해진다. 퇴계나 율곡은 그 이름이 5백 년간 이어지고 있다. 군자산은 학식 높은 군자가 나올 법한 모양을 지니고 있다.

환벽정의 정면 앞으로는 병풍처럼 여러 개의 자그마한 봉우리가 일렬로 포진해 있다. 옥녀봉玉女峰이라는 봉우리다. 이 옥녀봉이 좋다. 환벽정의 정면을 적당한 높이로 막아주는 안산案山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앞에 막아주는 안산이 존재해야만 기운이 밖으로 빠지지 않고 그 터를 감싸게 된다. 옥녀봉은 적당한 높이다. 너무 높지도 않고 낮지도 않다. 정자에 섰을 때 가슴에서 눈높이 정도의 높이가 가장 이상적이다. 옥녀봉의 전체 모습도 궁궐에 걸려 있는 일월오봉도日 月圖에 나오는 형태와 비슷하다. 해와 달이 있고, 수화목금토의 다섯 개 봉우리를 압축시켜 그린 그림이 일월오봉도이다.

 

관악산

관악산은 이름에 관이 붙어 있다. 관은 갓, 또는 관례의 관을 뜻한다. 면류관超振冠이라고 할 때도 이 관 자를 쓴다. 관세음보살이 머리에 쓴 관을 보관이라고 한다. 관은 임금, 벼슬, 위엄을 나타내는 상징이다. 경기도 과천의 관악산은 그 이름 자체에서도 이러한 위엄과 벼슬의 의미를 담고 있다.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벼슬제일 관악산'이다. 이름이 지닌 풍수도참 때문일까. 서울대학교가 관악산 밑에 자리 잡고 있는 것도 관악산이 내뿜는 지령과 무관하지 않다.

관악산의 형상을 관의 모양과 관련 있다고 전제하고 보면, 산 정상에 솟아 있는 암봉岩峰들이 바로 관의 모습과 연관된다. 관은 벼슬이고, 벼슬은 주작, 공작, 닭의 볏이 여기에 해당한다. 보다 더 범위를 좁혀 보면 연주대가 앉아 있는 바위 모습이 닭볏과 같다. 연주대를 옆에서 찍은 사진이나 바로 옆 전망대에서 바라보면 바위의 형상이 선명하게 들어온다. 뾰족뾰족하게 솟아있는 바위 위에 축대를 쌓고 암자를 앉힌 모습이 꼭 닭볏 위에 앉아 있는 모습이다. 크게 보면 관악산 전체의 바위 형태가 변이기도 하지만, 좁혀 보자면 연주대의 바위가 닭 모양인 것이다.

서울 도성에서 바라볼 때 관악산은 남쪽에 위치한다. 경복궁에서 보면 관악산은 화체火體의 형태이다. 남쪽은 불의 위치이다. 경복궁 앞의 해태는 멀리 남쪽에 바라다 보이는 관악산의 화기를 누르기 위한 비보상징神補象徵이라고 전해진다. 남대문을 숭례문崇禮門이라고 이름 붙인 것도 오행사상에서 남쪽이 예에 배당되기 때문이다. 동아시아의 오래된 종교적 상징물인 사신수四神獸 가운데 남쪽을 담당하는 신수는 날짐승인 주작朱雀이다. 주작은 공작 비슷한 새이다. 공작을 줄이면 닭이다. 모두 머리에 변이 있다. 닭은 인간 세계의 벼슬을 가리킨다. '닭 비슬'이라고 하지 않던가! 서울에서 볼 때 남쪽 방향을 대표하는 산인 관악산, 그 정상에 뾰족뾰족 솟아 있는 바위 봉우리들은 주작, 공작, 닭의 머리에 있는 벗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관악산이라는 이름을 이 산에 붙였던 옛날 도인들도 틀림없이 정상의 바위 봉우리들을 주작죽기 아니면 살기, 의상 대사의 공부터

연주대는 관악산 정상 닭볏 위에 자리 잡고 있다. 관악산이 해발 630m |정도 되니까 연주대는 600m 높이 즈음에 자리 한다. , 그러니까 벼슬 바위들 사이에 축대를 쌓아 세웠다. 는 보통 언덕을 가리킨다. 그러나 연주대는 깎아지른 바위 절벽 속에 자리 잡고 있다. 밑에서 보면 아슬아슬한 위치이다. 600m나 솟아 오른 바위산에서 그리고 그 바위산을 기단으로 하여 바위 절벽 최정상 부위에 독수리 집 같이 자리 잡고 있는 기도터가 바로 연주대이다. 불가에서 말하는 백척간두百尺竿頭의 자리가 연주대이다. 한 발 앞으로 내딛으면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자리이다. 백척간두 자리는 목숨 걸고 승부를 보는 수행처이다. 도를 통하지 못하면 떨어져 죽어버리겠다는 결기를 가진 수행자들이 머물렀던 수도터였던 것이다.

부안 변산에서 목숨 걸고 수행했던 진표 율사의 공부터 부사의 방不思義勝도 낭떠러지 위에 있다. 진표 율사는 공부가 신통치 않자 절벽 밑으로 뛰어 내렸고, 지장보살이 떨어지는 진표 율사를 받아 올렸다고 삼국유사에는 기록되어 있다. 금강산 보덕암도 바위 절벽 위에 있다. 해남 달마산의 도솔암 또한 비슷한 지형에 자리 잡고 있다. 가파른 절벽 위에 자리 잡은 암자들은 보통 사람들이 접근하기 어려웠던 난공불락의 요새 같은 지형이다. 외부와 단걸하고 죽기 살기로 내면세계로 침잠하기 위해서는 외부세계와 철저한 격리가 필요하다. 절벽 위가 최고인 것이다.

연주대는 원래 신라의 의상 대사가 공부하던 터라고 전해진다. 그러니까 677 무렵이다. 원래 이름은 의상대였는데, 후대로 내려오면서 연주내도 이름이 바뀌었다. 의상은 성품이 원효와는 달랐던 것민적인 성품으로 시장바닥에서 많이 교화를 했다면, 의상은 고결한 성품으로 소위 엘리트 층에 감화를 주었다. 원효는 방대한 저술을 남긴 대 저술가이기도 하지만, 의상은 박사논문 격인 법성게 만 간단하게 남겼다. 법성게 한권에 그의 핵심 사상이 모두 담겨 있다. 의상의 아주 간결한 성품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두 사람이 공부를 했던 수행터를 보아도 노선의 차이가 나타난다. 원효는 평지에도 많이 있었지만, 의상은 높은 절벽 위나 고고孤高한 터를 선호하였다. 의상대(연주대)가 바로 그러한 대표적인 터이다. 2000년 무렵 방문한 중국 서안西安 옆 종남산終南山에도 의상이 공부했던 터인 천공대天供臺가 있었다. 의상이 당나라에 유학을 갔을 때 당나라 수도가 서안이었고, 서안과 가까운 지점에 붙어 있는 명산이 바로 종남산이다. 의상은 당나라에 갔을 때 종남산에서 공부를 했다. 신라 출신들이 당나라에 유학을 가면 주로 종남산에 많이 머물렀다. 동시대의 신라 인물인 김가기도 종남산에서 수도하였다. 김가기는 불가가 아닌 선가仙家의 인물이다. 의상은 종남산의 바위 절벽 위 아슬아슬한 지점에 수행공간을 마련했다. 그 터가 천공대이다. 의상이 하늘의 선인들로부터 공양을 받았다고 해서 천공대이다. 종남산의 천공대 터나, 관악산의 의상대나 모두 난공불락 절벽 위의 독수리 집터라는 공통점이 있다.

연주암 주지인 탄무 스님 말에 의하면 관악산에서 능선을 타고 3시간 반 가량 걸어가면 삼막사三寺가 나타난다고 한다. 삼막사는 안양시 삼성산三聖山에 있지만 산자락으로 따지면 관악산과 연결되어 있다. 삼막사는 천막이 3'라는 뜻이다. 신라시대 의상, 원효, 윤필거사가 이곳에서 천막을 쳐놓고 공부를 했다고 하여 삼막사다. 짐작컨대 3명의 성인'이라는 의미를 지닌 삼성산의 이름도 원효, 의상, 윤필이 수행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 듯하다. 이 세 사람은 콤비이다. 죽이 맞았던 모양이다. 죽이 맞다는 것은 서로 보완적인 관계라는 말도 된다. 보완이 되어야 오래간다. 서로 상충하면 피곤하고 에너지 소모가 많기 때문에 같이 못 다닌다. 원효는 털털하고 민중적인 기질이었던 것 같고, 의상은 깔끔하면서도 초연한 태도를 유지하는 귀족적인 스타일이었고, 윤필 거|사가 아마도 그 중간 즈음의 스타일이 아닌가 싶다. 성격과 스타일의 차이는 선호했던 수행 터에서 차이가 나타나기 마련이다. 삼막사에서 같이 수행하던 중에 의상은 관악산 정상에 있는 연주대 터를 눈여겨보았던 것 같다. 다른 사람이 쉽게 접근할 수 없고, 바위의 형태도 독특한 데다가, 터에서 품어져 나오는 기운도 강력한 지점, 의상의 성격에 딱 부합 되는 곳이었다. 독립적으로 내면세계에 몰입할 수 있는 곳. 다른 사람들의 방해를 받지 않고, 그러면서도 백척간두 깎아지른 절벽이 주는 절박함도 배어 있다. 그 절박함이란 '죽기 아니면 살기'라는 심정이 아니겠는가.

 

연주암에서 연주대까지는 걸어서 10여분 남짓 거리이다. 돌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연주대가 나온다. 연주대는 연주봉 정상의 거대한 화강암 암반의 한쪽에 자리 잡고 있다. 바위의 종류에 따라 그 기운이 달라진다. 한국은 화강암이 많다. 네팔 히말라야에 가장 많은 암석은 운모석이다. 운모는 아라비아어로 '진주'라는 의미이다. 운모는 불에 강하다. 우리나라 방바닥 구들장에 까는 돌이 운모석인데, 운모석 또한 기운이 매우 강하다. 히말라야 도인들은 대개 운모석 기운을 많이 받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한국의 화강암은 운모석보다 더 강도가 높다. 강도가 높다는 것은 품어져 나오는 기운도 단단하다는 뜻이다. 유럽에는 석회암이 많다. 그리스의 신전 터에는 석회암이 많이 깔려 있다. 석회암은 화강암에 비해 훨씬 부드럽고 약하다. 또 대리식도 많이 파묻히 있다. 대리석은 물렁불령하다. 석수장이기 방치로 다듬기에 좋은 돌이다. 대리석이나 석회암에서 품어져 나오는 기운도 화강입과는

다르다. 화강암이 훨씬 강하고, 불기운이 강하게 올라온다.

연주대가 의지하고 있는 연주봉은 거대한 화강암 덩어리다. 흥미롭게도 암반 꼭대기 즈음에 둥그런 구멍이 패여 있었다. 지름 40cm 깊이는 20정도, 산 정상 부위 암반에 오목하게 나 있는 이런 구멍들은 사람이 인공적으로 판 것이다. 문화인류학에서는 이를 컵 마크Cup Mark'라고 부른다. 선사시대 기도를 드리던 터에 이런 구멍들이 발견된다. 미국 애리조나에 있는 바위 꼭대기에서도 이 컵 마크를 보았고, 우리나라 곳곳에서도 발견된다. 속리산 문장대 정상 바위 암반에도 세숫대야 크기만 한 구멍이 여러 개 있다. 월출산에서 가장 영험한 기도터로 알려져 있는 봉우리가 구정봉九井峰이다. 9개의 구멍이 파여 있다 하여 구정봉이다. 지름 30, 20cm 크기의 구멍이 9개가 있다. 비가 오면 구멍에는 빗물이 고인다. 북한산 인수봉 정상 부위에도 컵 마크가 있다. 이곳 역시 선사시대 사람들의 기도터였던 것이다.

부산의 금정산金井山도 마찬가지이다. 은 우물이란 뜻이다. 금정산 바위 봉우리 꼭대기에 구멍이 파여 있다. 비록 지름이 30~40에 불과하지만 비가 오면 구멍에 물이 고인다. 이 작은 구멍 속의 물을 우물로 본 것이다. 중국도 예외가 아니다. 중국의 5악 중에서 가장 바위가 많고 험한 산이 서악인 화산이다. 화산도 2,000m가 넘는 화강암 산이다. 화산 역시 정상 부근에 세숫대야 크기의 컵 마크가 여러 개 파여 있다. 도관이 들어오기 전부터 이미 화산은 고대인들의 기도터였던 것이다. 연주봉에 있는 컵 마크도 이곳이 오래 전부터 영험한 기도터였음을 증명한다. 적어도 3,000년에서 1만년 전의 종교 시설물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고대인들은 왜 바위 암반에 구멍을 정성스럽게 파놓았을까. 물이 고이기 때문이다. 기도를 하려면 물이 있어야 된다. 물은 기운을 응집시키는 작용을 한다. 바위에서 불기운이 나오는 것을 물이 잡아주어야 한다. 산꼭대기에 물이 어디 있겠는가. 물병도 없을 때였으니 물을 가지고 갈 수도 없었다. 인공으로 구멍을 파놓는 수밖에 없다. 비가 오면 물이 고인다. 우리 조상들은 정한수寒水를 떠놓고 기도했다. 장독대 위에 물 한 그릇을 떠놓고 기도한다는 것은 상식이다. 왜 정한수인가. 비록 한 사발의 물이지만, 물은 기도를 드리는 사람의 염파를 모아주고 응집시키는 작용을 하기 때문이다. 이런 각도에서 보면 백두산과 한라산이 민족의 영산으로 꼽히는 이유도 납득이 된다. 산꼭대기에 거대한 호수가 있는 것이 백두산 천지이고, 한라산의 백록담이다. 상상력을 키워 생각하면 천지와 백록담은 거대한 정한수에 해당한다. 천지가 정한수의 빅 사이즈라면, 한 사발의 정한수는 스몰 사이즈이다. 연주봉의 컵 마크도 이런 맥락에서 보면 눈여겨볼 문화유적이다.

몇해 전 서울 숭례문에 화재가 났다. 화재의 거시적인 원인으로, 관악산의 화기를 누르지 못해서 생긴 것이라는 다분히 민속학적인 해석이 있었다. 서울 경복궁에 큰 화재가 발생하는 것은 남쪽 불의 방향에 있는 관악산의 화기 때문이라는 게 조선시대 오행적인 사고방식이었다. 관악산이 불에 해당하는 산이라는 나의 신문칼럼을 읽은 어느 독자가 제보를 해주었다. 관악산정상에 가보면 세숫대야 크기의 구멍이 있습니다. 거기에 물이 차 있고요. 아마 이것이 불을 제압하기 위한 어떤 조치가 아닌가 싶습니다.

나는 그때 언젠가 한번 그 컵 마크를 눈으로 봐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인생에서 이떻게 손을 써볼 수 없는 상황에 부닥치면 어떻게 할 것인가? 보통 사람은 이때 자살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여기에서 두 갈래로 선택이 갈린다. 한쪽은 죽음을 택하고, 다른 한쪽은 기도를 시도한다. 죽느냐 사느냐의 갈림길에서 기도를 해본 사람만이 지니는 독특한 길이가 있다. 내 어머니는 평생 새벽마다 부엌에서 대접에 찬물 한 그릇 떠놓고 칠성기도를 드렸다. 칠성기도를 하는 모습을 보면서 자식은 많은 것을 생각할 수밖에 없다. 무엇을 위해서 저렇게 기도하는가에서부터 시작해 과연 저렇게 기도한다고 해서 효과가 있는가? 마지막에는 인간이 저렇게 간절하게 기도하여 사는 삶도 나지 않다'는 생각으로 변한다. 어느 종교이든 상전없다. 인생에서는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있느냐가 더 중요하다.

이번 답사에서 직접 목격하니 희열이 솟았다. 내 짐작이 맞았다는 기쁨이다. 그러나 컵 마크는 서울이 도성이 되기 이전부터 있었던 것이므로 꼭 화기 제압용이라고 볼 수는 없다. 성스러운 기도터의 표식을 해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간절한 기도에서 오는 삶의 기쁨, 그리고 베품

연주대에서 전후좌우 바라보는 풍광은 일품이다. 날이 맑으면 멀리 서해 바다가 보인다. 서울 시내는 물론이다. 경복궁도 보인다. 동생 세종에게 왕위를 양보한 효령대군이 연주대에 와서 한양 도성을 바라보면서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을 하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 연주대總主臺이다. 여기에서 주는 임금이다. 동생인 세종을 사모했다는 의미인데, 동생이 잘 되라고 사모하는 감정도 물론 있었겠지만, 저 자리가 원래 내 자리인데' 하는 한도 품었다고 봐야 하지 않겠는가. ''은 복잡한 감정이 함축되어 있는 표현이다. 원래 의상대가 연주대로 바뀐 것은 효령대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연주암은 국내에서 손꼽히는 기도터이다. 내가 보기에 국내에서 손꼽히는 설악산 봉정암, 남해 보리암, 팔공산 갓바위, 선운사 도솔암 급에 속한다. 장점이 있다. 수도 서울에 있다는 점이다. 봉정암이나 보리암을 가려면 12일 일정이 필요하다. 연주암은 서울에서 곧 바로이다. 1,500만 수도권 인구가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거리이다. 물론 산 밑에서 2시간은 걸어 올라가야 하지만 말이다. 연주대의 주 기도는 시험합격과 벼슬이다. 시험에 합격해야 승진도 할 수 있고, 비슬도 할 수 있다. 일단 시험합격이 관문이다. 공교롭게도 70년대 서울대학교가 관악산 자락으로 이사를 왔다. 우리나라 벼슬아치의 50%는 서울대 출신이 차지하고 있는 현실이다. 벼슬아치 양산 대학이 서울대학교이고, 서울대가 비슬산인 관악산 밑으로 자리

잡았다는 것도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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