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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군 별서 석파정

應觀 2021. 1. 24. 20:58

석파정 서울에는 많은 정자가 있었다.

조선 왕조의 도읍지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세도가, 명망가, 풍류문사, 재자가인이 600년을 두고 줄곧 이어졌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던

서울의 정자는 원래 모습과 크게 달라진 몇몇을 제외하곤

세월의 힘 앞에 속절없이 사라져갔다. 그런 가운데 변하긴 했어도

옛 모습을 유추하기에 모자람이 없는 정자가 흥선대원군의 석파정(石坡亭)이다.

석파정 전경 석파정 전경 서울에 있던 수많은 정자 중 아직까지도

그 모습이 크게 변하지 않은 몇몇 중 하나이다.

석파정은 원래 철종 때 영의정까지 지낸 김흥근(金興根, 1796~1870)의 별서였다.

그때는 집 뒤에 ‘三溪洞’(삼계동)이라고 새긴 커다란 바위가 있어서 ‘삼계동정사’(三溪洞精舍)로 불렸다 한다.

그러다가 대원군이 집권하면서 그의 소유가 되었으며 이름마저 석파정으로 바뀌었다.

렇게 이름붙인 까닭은 앞산이 모두 바위[石] 언덕[坡]이기 때문이며,

‘石坡’라는 대원군의 아호도 여기서 유래한 것이라 한다.

일설에는 석파정의 소유가 바뀔 때 대원군이 빼앗았다는 말이 전하는데,

황현의 『매천야록』(梅泉野錄)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전한다.

“김흥근은 북문 밖 삼계동에 별장이 있었는데, 장안의 으뜸가는 명원(名園)이었다.

대원군이 그 별장을 팔라고 하였으나 흥근은 거절했다.

대원군은 다시 청하길 ‘하루만 놀이에 빌려달라’고 했다. 

그무렵 별장이나 정자를 가진 사람은 남들이 놀이에 빌려달라고 하면 부득불 허락하는 것이

한양의 풍습이어서 흥근은 마지못해 허락했다.

대원군은 마침내 임금께 한번 행차하기를 권해 (임금을) 모시고 갔다.

흥근은 임금께서 임했던 곳을 신하의 의리로는 감히 다시 쓸 수 없다

하여 다시는 삼계동에 가지 않았으므로 (삼계동정사는) 마침내 대원군의 소유가 되었다.

” 대원군 이후 석파정은 왕실 후예들에게 차례로 대물림되었는데

한국전쟁 뒤로는 가톨릭에서 운영하던 콜롬바 고아원으로 사용되다가 지금은 개인 소유가 되었다.

석파정은 도성의 승경지로 손꼽히던 자하문 밖, 지금은 자하문터널을

드나드는 자동차가 일으키는 소음이 끊임없이 하늘로 퍼져오르는 부암동 산자락에 있다.

석파정은 이미 옛 모습을 많이 잃었으나 서울에 아직도 이런 곳이 있었나,

하는 가벼운 놀라움이 이는 곳이다. 집 앞으로는 잔돌 하나 없이

그대로 얕은 계곡의 바닥을 이루고 있는 펑퍼짐한 너럭바위가 산자락으로 이어진다.

지금은 물이 말라 비가 많이 올 때나 흐른다지만 사철 물이 흘러내리던 모습을 그리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너럭바위 위로 포개진 커다란 바위 단면에는 ‘巢水雲簾菴’(소수운렴암: 구름 발 드리운 물 위의 암자)이란 글씨가 멋지게 새겨져 있다. 노론의 영수 송시열의 수제자인 권상하(權尙夏)의 글씨라고 한다. 사랑채 옆으로는 보호수로 지정되었을 만큼 늙어서 휘어진 노송이 너른 그늘을 드리우고 있으며, 그 뒤로는 ‘三溪洞’이란 글자가 크고 깊게 새겨진 바위가 뿌리를 내리고 있고, 집 뒤 언덕으로는 키 큰 소나무들이 듬성듬성 운치 있게 자리잡고 있다. 이런 분위기에 감싸여 예닐곱 채의 골기와집이 남향하여 해바라기하듯 밝은 햇빛을 받고 있는데, 집들은 조선 말기 건물이라 그런지 약간 가벼운 느낌은 있으나 간결하고 소박하여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아 보인다. 특이한 건물은 집 왼편 계곡 위에 걸쳐진 ‘유수성중관풍루’(流水聲中觀楓樓: 흐르는 물소리 속에서 단풍을 바라보는 누각)이다. 긴 이름과는 대조적으로 장난감처럼 작은 이 누정은 서양식 건축 기법이 더해지고 사모지붕에도 기와 대신 동판을 덮어 조선 말기 서세(西勢)가 동점(東漸)하던 시대적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공예물 같은 집이다. 유수성중관풍루 유수성중관풍루 서양식 건축 기법을 더해서 지은 집으로 지붕에 기와 대신 동판을 덮었다. 아마도 석파정에서 가장 큰 변화라면 사랑채1)의 이건(移建)일 것이다. 원래 ‘三溪洞’이란 각자가 있는 바위 앞에 있던 이 집채는 서예가 소전 손재형(素筌 孫在馨)에 의해 1958년 세검정 삼거리 부근 그의 집 뒤뜰 바위 언덕으로 옮겨졌다. 석파정의 사랑채 석파정의 사랑채 석파정의 사랑채로 알려져 있는 대원군의 별장이다. 1958년 지금의 자리로 이건된 후 현재는 석파랑이라는 음식점의 부속채로 쓰이고 있다. 현재는 석파랑(石坡廊)이라는 한정식집의 부속채가 되어버린 이 건물은 11평 정도밖에 되지 않지만 무척 사랑스럽다. ┏형의 평면에 북향한 이 집은 가운데에 대청이 있고 그 양옆과 북쪽으로 꺾인 부분에도 방을 꾸미고 앞뒤로는 좁직한 툇마루를 둔 단순한 구조이다. 이 집은 특이하게 양옆의 벽과 꺾인 부분의 벽을 회색 벽돌로 곱게 쌓아올려 마감했는데, 서쪽 벽에는 둥근 만월창(滿月窓)을, 북면한 벽에는 반월창(半月窓)을 낸 모습이 자못 이국적이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이 건물이 석파정에 있을 때 대원군 자신은 큰방을 쓰고 손님은 건넌방을 사용토록 했으며, 대청은 대원군이 난초를 칠 때 이용했다고 한다. 사랑채 건물은 우리의 전통식과 중국식 건축 기법이 조화롭게 만나고 있는 아담한 건물이다. 석파정 사랑채의 만월창 석파정 사랑채의 만월창 중국식 건축 기법으로 만든 사랑채답게 우리 건축에서는 볼 수 없는 둥근 창이 독특하다. 한겨울에도 햇볕이 이곳만을 비춰주는 듯 밝고 따사로운 분위기를 간직한 석파정은 자연경관과 조선 말기의 건축 기법이 자연스럽게 만나고 있는 대표적 별장 건축으로 꼽힌다. 집에는 살고 싶은 집이 있고 보기 좋은 집이 있다. 석파정은 보기 좋은 집이면서 살고 싶은 집이다. 현재의 석파정은 일괄하여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6호이며, 이건된 사랑채(대원군 별장)는 별도로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3호로 지정되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석파정 (답사여행의 길잡이 15 - 서울, 초판 2004., 5쇄 2009., 한국문화유산답사회, 김효형, 한미자, 김성철, 유홍준, 최세정, 정용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