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종모임/한고회

한고회 전주지역 봄 야유회 20190430

應觀 2019. 5. 1. 09:52

 한고회 봄 야유회

 

 참석인원 : 남:21명,여 여:13명 계34명

 둘러본 곳 : 한옥마을,경기전

                 한국관 점심 만찬

                 모악산 금산사

                 익산 미륵사지

  신록으로 우거진 숲과 개울의 물소리

  아름다운 꽃들이 향연을 이루는 봄 날 친구들과 함께 여행을 하며 행복한

  하루를 보냈다.

  어려운 여건에서도 지회장과사무국장이 수고를 해주어 많은 친구들이 즐겁고

  행복한 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

  친구들 건강하시게

  수고들하셨네


_2010년 전주는 국제슬로시티연맹으로부터 세계 최초 도시형 국제슬로시티로 선정되었고,

 2016년 재지정되었다. 또한 2012년 유네스코 음식 창의 도시로 선정되었고,

 2016년 론리플래닛이 선정한 ‘1년 안에 가봐야 할 아시아 10대 명소로 선정되었다






















일제 강점기였던 당시 통감부는 전주에 새 길을 내기 위해 풍남문 성벽을 헐었는데

보두네 신부가 그 성벽의 돌들을 가져다 성당 주춧돌로 사용했다고 한다.

성당 지하에는 당시 썼던 주춧돌이 성당을 탄탄히 떠받치고 있다.

공사는 중국인 벽돌공 백여명이 동원돼 전주성을 헐은 흙으로 벽돌을 구웠고,

석재는 전북 익산의 황등산의 화강석을 마차로 운반해 왔다.

목재는 치명자산에서 벌목해 사용했다고 한다.

전동성당은 완전한 격식을 갖춘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동서양이 융합된 모습이어서

어머니의 품처럼 따스함을 느끼게 한다.

호남지방의 서양식 근대건축물 중 규모가 가장 크고 오래된 것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윤지충과 관련된 권상연(야고보)이 참수형을 당한 한국 최초의 천주교 순교터이며,

호남의 모태 본당이 된 전교의 발상지이다.

두 성인이 순교한지 1백년이 지난 1891년 봄, 순교터에 본당 터전을 마련해 전교를 시작했다.

초대 주임신부인 보두네 신부가 순교 1백주년을 기념해 1908년 건축을 시작,

서울 명동성당을 설계한 프와넬 신부의 설계로 1914년 완공됐다.

 착공에서 성전봉헌까지 무려 23년이 걸린 것이다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의 본사이다.

1635년에 기록된 금산사사적 金山寺事蹟에 의하면 600(백제 법왕 2)에 창건되었다고 전한다.

1492년에 씌어진 금산사5층석탑중창기에 의하면 과거불인 가섭불 때의 절터를 중흥한 것이라 하여

오랜 불연(佛緣)이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여러 기록을 종합해 보면 금산사는 신라 경덕왕 때인 762년에서 766년 사이에 진표율사(眞表律師)에 의해 중창되어

대찰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으며 이후로 법상종의 근본도량이 되었다.

진표 이후에 후백제 견훤에 의해 부분적인 보수가 이루어졌다고 하나 확실치 않다.

고려초 1079년에 법상종의 대종사(大宗師)인 혜덕(慧德)왕사가 주지로 부임해 간경·법석(法席)을 주관하는 장소인 광교원(廣敎院)을 설립하는 등 창건 이래 가장 큰 규모의 도량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이전의 기록은 모두 소실되어 삼국유사삼국사기등을 인용하여 사적기(事蹟記)가 만들어졌는데,

금산사의 창건은 599(백제 법왕 1)에 왕의 자복(自福)사찰로 세워진 것이라 하나 확실하지는 않다.

지금까지 전하는 바는 진표(眞表)762(신라 경덕왕 21)부터 766(신라 혜공왕 2)까지 4년에 걸쳐 중건(重建)하였으며,

1069(문종 23) 혜덕왕사(慧德王師)가 대가람(大伽藍)으로 재청하고,

그 남쪽에 광교원(廣敎院)이라는 대사구(大寺區)를 증설하여 창건 이래 가장 큰 규모의 대도량(大道場)이 되었다.


































*4월30일 복원 작업을 마치고 제막식이 있었습니다

 

善化公主主隱(선화공주주은)

他密只嫁良置古(타밀지가량치고)

薯童房乙(서동방을)

夜矣卯乙抱遣去如(야의묘을포견거여)

 

선화공주님은

남 몰래 정을 통해 두고

맛동(서동) 도련님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

 

신라 진평왕 때 백제 무왕이 지었다는 향가. 4구체. 향찰 ( 鄕札 )로 표기된 민요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 노래는 삼국유사 기이(紀異) 2 무왕(武王)조에 수록되어 있는 서동설화(薯童說話)에 끼어 전한다.

이 설화에 의하면, 이 노래는 백제 무왕이 소년시절에 서동으로서 신라 서울에 들어가

선화공주를 얻으려고 지어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서동설화를 여러모로 분석 · 검토한 결과 그 설화의 역사적 주인공은 무왕이 아니라

백제 동성왕이라는 주장이 나왔는가 하면, 또한 동성왕도 아니고 신라의 원효 ( 元曉 )라는 주장까지 나왔다.

 

최근에는 이 서동설화를 익산미륵사연기전설(益山彌勒寺緣起傳說)로 취급하면서

그 역사적 주인공은 백제의 무령왕이지만, 그 설화상의 민담적 주인공은 서동(薯童)이라는 주장도 나왔다


왕궁리 유적

 

백제 궁성과 사찰의 신비익산시 왕궁면 왕궁리 왕금마을 뒷산 구릉지대를 지역 주민들은 모질메라고 부르는데,

 이 곳은 예로부터 마한 혹은 백제의 궁궐자리로 알려진 곳이다.

위치는 금마산에서 남으로 약 3km쯤 떨어져 야트막하게 전주행 국도변에 자리하고 있는 대지이다.

이 성은 구릉지를 일부 깎아내리고 주변은 흙으로 쌓아올려 세단으로 나누어 평지를 조성하고

 그 안에 건물을 배치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일명왕궁평성’,‘왕궁리토성이라고 불리는

이 성은 1976년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의 발굴결과 남북의 길이는

450m, 동서의 폭이 약 230m의 반듯한 장방형을 이루고 있음이 밝혀졌다


_33금당 동양최대의 사찰 미륵사지는 백제 최대의 사찰로 30대 무왕(600641)에 의해 창건,

 17세기 경에 폐사_미륵사지가 발굴되기 이전에는 백제 창건당시에 세워진 미륵사지 서탑(국보 11) 1,

 그리고 석탑의 북 쪽과 동북쪽 건물들의 주춧돌과 통일신라시대에

 사찰의 정면 양쪽에 세워진 당간지주 1(보물 236)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_미륵사는 신라의 침략을 불교의 힘으로 막기 위한 호국 사찰로써 성격을 띠고 세워졌던 것으 로 여겨지 고 있다.

 미륵사는 백제가 망할 때 까지 왕실 사찰로 혹은 호국 사찰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사찰 이었다.

 

*카메라가 넘어져 렌즈의 손상으로 미륵사지탑을 촬영하지 못한점 양해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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