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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병 시인/김동길 교수 서

應觀 2018. 11. 25. 08:41

김동길 인물에세이 100년의 사람들] (50) 천상병(1930~1993)

천상병 일러스트
일러스트= 이철원

천상병을 알고 친하게 지내게 된 것이 우연만은 아니다. 우리 역사에 드물게 나타나는 기인이라고 일컫는 인물들을 나는 그리워한다. 사육신이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삼각산에 들어가 글을 읽던 김시습이 책을 다 태워버리고 미치광이 짓을 하며 살았다고 들었다. '술 한 잔에 시 한 수'라는 한마디로 널리 알려진 김삿갓 또한 많이 흠모했지만, 그가 살았다는 유적지를 한번 둘러보았을 뿐이다.

1967년 속칭 동백림간첩사건이 터졌을 때 유럽 등지에서 혐의자들을 잡아오려고 혈안이 된 정보원들이 추태를 부리기도 하였다. 천상병의 이름을 그 사건을 계기로 기억하게 된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언젠가 그를 종로에서 마주친 것이 처음 만남이었다. 나를 알아보고 "선생님, 돈 가진 게 있으면 이백원만 주세요"라며 미소 짓던 그가 시인 천상병이라는 사실을 나도 알아보고, 그에게 천원 한 장을 건네준 것이 우리 만남의 시작이었다. 그는 동백림사건에 관련되었다는 혐의를 받고 6개월이나 고문을 당하고 겨우 풀려났지만, 그로 인하여 몸이 망가지고 정신이 혼미해져 앞으로 오래 살지는 못할 것이라는 소문도 자자하였다. 그는 나보다 두 살 아래였다. 좀 더듬기는 했지만 매우 교양 있는 말로 언제나 형님처럼 나를 대하여 주었다. 그를 초대한 것은 얼마 뒤의 일이었다. 내 집에 와서 그는 자기의 형편과 처지를 대강 알려 주었다. "선생님, 저는 전기 고문을 너무 심하게 받아서 정자가 다 죽었답니다. 그래서 결혼은 해도 애를 낳지는 못한답니다." 그는 투박하게 말을 이어갔다. 억울하게 짓밟힌 비참한 젊은 날을 살아야 했지만, 그의 마음은 순진하다 못해 순결하였다. 그는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다. 그러나 남들에게 신세 지는 것이 싫어서 천상병은 누구에게도, 심지어 잘사는 형제들에게도 손을 벌리는 일이 없었다. 그에게는 언제나 막걸리 한두 잔 살 수 있는 돈이면 족하였다. 나는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와 한잔 나누는 것도 못 하고 집에 있던 '조니워커' 양주 한 병을 그에게 선사하면서 "술을 몹시 좋아한다며?"라고 했더니 멋쩍은 웃음만 보여주고 대답은 하지 않았다. 천상병은 언젠가 이런 시를 읊은 적이 있다. 제목은 '저승 가는 데도 여비가 든다면'.

"아버지 어머니는 고향 산소에 있고/외톨배기 나는 서울에 있고/형과 누이들은 부산에 있는데/여비가 없으니 가지 못한다/저승 가는 데도 여비가 든다면/나는 영영 가지도 못하나?/생각느니, 아 인생은 얼마나 깊은 것인가." 이 시 한 수를 읽으면서 나는 겉으로는 웃었지만 속으로는 울었다. 그는 얼마 뒤에 내 집에 또다시 찾아와 서로 만나게 되었다. "선생님, 지난번 주신 양주는 제가 한 모금도 못 마셨습니다. 우리 집사람이 '이건 비싼 술이니 팔아서 막걸리나 마시는 게 옳다'고 하여 저는 맛도 못 보고 그 술을 아내가 팔았답니다."

그는 일본 효고현 히메지에서 태어나 거기서 국민학교를 마치고 중학 2학년 때 해방을 맞아 가족과 함께 귀국하여 마산에 정착하였다. 중학 5학년 때 유치환의 추천을 받아 '강물'이라는 시를 '문예'라는 잡지에 발표하였고 1952년에는 '갈매기'가 시인 모윤숙의 추천으로 또다시 '문예'에 게재되어 시인으로서의 추천받는 일이 완료되었다. 그는 전쟁 중에 서울상대에 입학하였지만 졸업은 하지 못했다. 학생 때부터 영어에 능하던 그는 미군 통역으로 일하기도 하였고 영어 서적들을 여러 권 번역하기도 하였다. 아마도 그가 정식으로 취직하여 직장을 가져 본 것은, 뒤에 서울시장이 된 김현옥이 부산시장이었을 때 그의 공보비서로 2년간 근무한 기간뿐일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 밀어닥친 동백림사건이라는 무서운 재앙은 그의 몸과 마음을 완전히 망가뜨려 그 아픔을 술로 달래다가 영양실조까지 겹친 술꾼이 되어 길거리에 쓰러진 채로 발견되기도 했다. 행려병자로 오인된 그는 서울시립정신병원에 수용돼 있었으나 그 사실이 전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아서 친구들은 그가 사망한 것으로 잘못 알고 멀쩡하게 살아있는 사람의 시들을 유고집으로 발간하였으니 웃을 수만도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천상병은 언젠가 나를 만나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선생님, 예수님은 매우 가난하셨지요. 저도 가난합니다." 태연하게 그런 말을 하던 천상병이 목사들보다 훨씬 예수의 제자다운 삶을 살았다고 생각한다.

어느 시인이 이보다 더 아름답고 눈물겨운 시 한 수를 남기고 이 세상을 떠날 수 있을까. 1993년 어느 화창한 봄날이었다. 천상병은 훨훨 날아 하늘에 올라가면서 '고얀 놈들아, 그래도 내가 다 용서한다'라고 웃으며 한마디 던지고 멀리멀리 구름 헤치고 저 하늘나라로 돌아갔을 것이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새벽빛 와 닿으 >면 스러지는/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나 하늘로 돌아가리라/노을빛 함께 단둘이서/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나 하늘로 돌아가리라/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해가 가장 짧다는 동지가 한 달 앞으로 다가와 가을날의 하루하루가 처량하게만 느껴지지만 천상병이 살고 간 이 땅이기에 봄은 반드시 온다고 나는 믿는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11/23/201811230181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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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대표 지성인이자 정치·시사평론가 김동길 연세대 명예교수가 '김동길 인물 에세이―100년의 사람들'을 연재한다. 올해 구순(九旬)을 맞은 김 교수는 거의 1세기에 걸쳐 대통령부터 코미디언까지 수많은 한국인과 직접 교류해 왔다. 김 교수는 매주 이들을 한 명씩 소개하며 한국의 지난 100년을 되돌아볼 예정이다.

한평생 만난 사람들 가운데 한마디씩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 이들을 골라서 내 의견을 짧게 적어 달라는 부탁을 예전부터 받아왔다. 도대체 내가 살아온 길을 돌이켜 볼 때 남기고 갈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아 그런 부탁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나의 이력서'니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이니 하는 제목의 글들이 쏟아져 나오는데, 내 생각에는 남길 필요 없는 이야기들이 태반인 것 같아서 그런 요청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나에게는 누님이 한 분 계셨는데 대학 총장 자리를 18년이나 지켰다. 그가 아직 임기가 남아 있는 그 자리에서 물러날 때 동생인 나에게 들려준 이야기가 있다. "총장 노릇을 한 학교에서 20년 가까이 하다 보니 어떤 교수가 총장실을 찾아와 무슨 얘기를 하건 내가 다 아는 이야기일 뿐, 별로 신통한 이야기로 들리지가 않았다. 이런 지경에 왔으니 이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이 옳다고 믿는다." 나는 누님의 그 말을 들으면서 총장 자리를 자진하여 물러나는 모습에 찬사를 보냈었다. 누님은 자서전을 쓰라는 요청을 거절하면서 이런 말도 했다. "과거를 돌이켜 보니 잘못한 일은 하나도 생각나지 않고 잘했다고 여겨지는 일들만 생각나니, 그런 일들을 적어서 남긴다는 것이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누님은 정말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홀연히 세상을 떠났다. 나도 남길 것이 아무것도 없는 인생을 살고 언젠가 그렇게 떠나갈 것이라고 믿는다.

인물평은 결국 역사가의 몫

내가 100년 가까이 살면서 만나 본 사람들은 많지만 그중에서 몇 사람을 골라 평한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내가 뭐라 해도 이미 세상 떠난 분들은 할 말이 없겠지만 아직 살아 있는 분 중에는 항의할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뿐 아니라 어떤 인물에 대한 평가가 나와 딴판인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게다가 "가까이 지낸 아무개 이야기는 왜 안 쓰십니까?"라고 묻는 사람이 있다면 대답하기 곤란하지 않을까?

나의 무례한 모습을 본 사람도 더러 있을 수 있지만 나는 한평생 예의를 지키며 살고자 노력했다. 선배나 후배에게 될 수 있는 대로 무례한 언행은 삼가면서 살아왔다. 그러니 이 나이가 되어 가까이 알던 이들에게 실례되는 말을 할 리가 없다. 그러나 인물에 대한 평가는 다를 수 있지 않은가. 바보를 철학자로 잘못 볼 수도 있고 한심한 졸장부를 영웅호걸로 잘못 알 수도 있다. 그런 의견 차이 때문에 나 자신을 궁지에 몰아넣고 싶지는 않다. 인물에 대한 궁극적인 평가는 한 시대를 같이 산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역사가들에게 맡겨야 한다고 믿는다. 그들은 보다 넓은 시야에서 보고 많은 사람의 의견을 듣고 판단하기 때문에 그들의 의견을 존중할 수밖에 없다.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은 무엇인가? 내가 만난 사람들에 대하여 느낀 바 또는 받은 인상을, 그들의 사람됨을 솔직하게 묘사해 보겠다는 말밖에는 할 수 없다. 제1차 세계대전에 대한 평가도 아직 제대로 하기 어렵다고 한다.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해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렇다면 이 시대를 함께 살아온 사람들에 대한 평이 매우 공정하다고 주장할 수는 없을 것이다.

민주주의 아닌 것과 싸워온 한평생

나의 조상은 대대로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살아왔다. 나의 본관은 풍천(豊川)인데 그 성을 가지고 조선조에 벼슬을 한 사람이 꼭 한 분 계셨다. 그렇게 보잘것없는 족보를 가지고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났다. 영국 시인 토머스 그레이의 말을 빌린다면 "보잘것없이 단순한 이력밖에 없는 사람들의 후손"이라고 하면 족할 것이다. 내가 자부심을 가지는 것은 나의 부모가 정직하게 살아온 선량한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이다. 나는 매우 평범한 후손일 뿐이다.

평범한 혈통에서 태어난 나는 특별한 재능을 타고나지 않았다. 90년을 살면서 역사에 남을 만한 일을 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해방된 조국 땅에서 지적으로 성장한 셈인데 김일성이 주도하던 속칭 공산주의가 숙청이라는 미명하에 수많은 동족을 가둬 창으로 찌르고 몽둥이로 때리며 잔인하게 다루는 현실을 보고 평양을 탈출해 3·8선 이남으로 월남한 사람이다. 나는 자유와 민주주의의 가치를 배우고 익히며 살아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나의 철학은 자유 아닌 것, 민주주의 아닌 것과 맞서 싸우는 것일 수밖에 없었다. 대한민국 정부가 서기 전에도 그러했고 정부가 수립된 뒤에도 그러했다. 6·25사변 때도, 9·28 수복 때도, 자유당이 장기 집권을 감행하던 때도, 군사 쿠데타가 벌어지던 때도, 18년 군사독재가 지속되던 때도 나의 철학과 가치관은 한결같이 자유를 숭상하고 독재를 미워하는 입장이었다.

그 때문에 나는 대학교수라는 신분에 유신헌법을 반대했다는 이유로 군사재판도 받고 징역 15년에 자격 정지 15년이라는 엄청난 형벌을 받기도 했다. 그런 정권을 상대할 이유가 없다고 믿고 항소를 포기하고 안양교도소에서 복역하다가 특별사면으로 출옥한 지식인 중 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내 가치 판단의 기준은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다. 즉 나의 인물평은 한결같이 민주적 시대정신에 입각하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다.

편견으로 비판하지는 않겠다

대통령 선거에서 어느 후보가 당선되어 대통령 자리에 오른다 해도 내 가치 판단의 기준으로 볼 때 대통령 자격이 없다고 판단되는 사람은 5년 동안 한 번도 그 이름 뒤에 대통령이라고 붙여서 불러본 적이 없다. 상식에 벗어난 일이라고 탓할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그렇게 살아온 사람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내가 평생 만난 사람들을 두고 무슨 소리를 어떻게 하게 될지 나 자신도 잘 모른다. 그러나 원칙 한 가지는 있다. 그가 살아 있건 이미 저세상에 갔건 편견 어린 비판은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내 마음대로 인물을 골라 평가하는 것이 아니고 여러 사람과 의논해서 결정하는 일이기 때문에 미리 무슨 말을 하기도 어렵다. 100년 가까운 세월을 살면서 아는 이가 많을 것이라는 신문사의 추측은 틀리지 않지만 깊이 있게 평가할 수 있을 만큼 친숙한 사람이 그리 많은 것도 아니다. 어찌 생각하면 노인이 기억을 더듬어 우리 사회에 조그마한 공헌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을 하면서 최선의 노력을 다할 생각이다.

거듭 강조하지만 인물에 대한 평가는 한결같기가 어렵다.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장군에 대해서는 엇갈린 의견이 있을 수 없지만 태종이나 세조에 대하여는 상반된 견해가 나올 수도 있다. 일제하 역사를 놓고도 안중근이나 이봉창이나 윤봉길 같은 의사들에 대한 평가는 엇갈릴 수 없지만 이승만과 박정희에 대한 평가는 엉뚱하게 다를 수도 있기 때문에 평하기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에 대해서도 무슨 말을 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내 입장도 그렇지만 신문사 입장이 난처해질 수도 있다. 예컨대 대통령을 지낸 전두환이나 노태우에 대해 좋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내 주변에도 많다. 김대중에 대한 견해도 그렇다고 말할 수 있다. 그들이 잘못한 일을 난들 왜 모르고 지냈겠는가? 그러나 지구 상 어떤 인물도 잘못한 일만 들추어내면 잘한 일은 단 한 가지도 밝혀내기 어렵다. 어떤 인물이 잘못한 일들을 지적해 달라고 하면 글 쓸 용기가 나지 않지만 내가 익히 아는 잘한 일들을 열거해 달라고 하면 응할 준비가 돼 있다. 고려 말 선비 이색이 어지러운 세태를 바라보며 "반가운 매화는 어느 곳에 피었는고/ 석양에 홀로 서서 갈 곳 몰라 하노라" 하고 탄식한 바 있는데 나의 심경이 바로 그런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런 생각 저런 생각 다 하노라면 한 줄의 글도 쓰기 어려울 것 같다. 그러나 그런 틈바구니에서라도 자기 의견을 털어놓고 하고 싶은 말을 해야 하는 것이 배운 사람의 책임이 아니겠는가?

백년 가까이 살고 보니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 중에 오늘도 매우 그리운 이들이 있고, 아직 살아 있어도 만나보고 싶지 않은 사람도 있다. 인간관계에도 '궁합'이 있어 맞는 사람이 있고 안 맞는 사람이 있는 것 같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남들도 다 좋아하리라고 생각할 수도 없고 내가 싫어하는 사람들을 세상이 다 싫어할 것이라고 믿을 수도 없다. 그렇다면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 사이에 어떤 넘지 못할 담이 있는 것도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이런 말을 구구하게 늘어놓는 이유는, 90이 되기까지 살고 보니 인생사가 모두 그렇고 그런 것 아니겠는가 느껴지기 때문이다. 너그럽게 읽어주시기를 감히 바란다.

김동길 단국대 석좌교수·연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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