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분함과 설렘이 공존하는 "연말 여행 1번지", 강진
이제 누구든 ‘남도 답사 1번지’로 강진을 꼽는다. 하지만 모든 이가 강진의 12월을 아는 건 아니다.
강진에는 한 단락을 깔끔하게 마무리 지을 수 있는 차분함과, 새로운 단락을 기분 좋게 펼칠 수 있는 설렘이 함께 흐른다.
연말의 강진은 그래서 더더욱 빛을 발한다.
일몰과 ‘첫 번째 역사‘가 어우러진 마량항
해가 진다. 주홍빛 석양이 한복 입고 큰절하는 여인네의 치마폭처럼 좌우로 사뿐히 깔린다. 아스라한 노을이 얼굴에 어려서일까.
일몰을 바라보는 사람들 얼굴에 만감이 스친다. 이윽고 저녁 해가 까막섬 상록수림 너머로 자취를 감춘다. 저마다 아쉬운 표정을 짓다가,
이내 밝은 얼굴이 되어 일행 곁으로 다가선다. 12월, 일몰을 보기 위해 굳이 남쪽 끝 강진 마량항까지 오는 사람들은 잘 알고 있다.
오늘의 해가 반드시 지듯, 내일의 해 또한 반드시 뜰 것이라는 사실을.
2017년이 어느새 결승점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한 해를 보내야 하는 시점이 오면 기쁨보다는 아쉬움이 먼저 떠오르기 마련이다.
이럴 때는 여행이 제격이다. 과거를 뒤로 하고 새로운 시작을 부추기게 하는 곳이 행선지라면 더할 나위 없다.
그래서 이맘때의 강진 마량항은 이토록 사람들이 몰리는가 보다. 감히 이야기하건대 마량항은 유홍준 교수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제1권을 통해 이야기한 ‘남도 답사 1번지’의 출발점으로 손색이 없다. 항구가 품은 역사에 귀 기울이고 있노라면
이 말이 절로 피부에 와 닿는다.
석양이 한복 입고 큰절하는 여인네의 치마폭처럼 좌우로 사뿐히 깔린다. 아스라한 노을이 얼굴에 어려서일까.
일몰을 바라보는 사람들 얼굴에 만감이 스친다. 이윽고 저녁 해가 까막섬 상록수림 너머로 자취를 감춘다.
저마다 아쉬운 표정을 짓다가, 이내 밝은 얼굴이 되어 일행 곁으로 다가선다. 12월, 일몰을 보기 위해
굳이 남쪽 끝 강진 마량항까지 오는 사람들은 잘 알고 있다. 오늘의 해가 반드시 지듯, 내일의 해
또한 반드시 뜰 것이라는 사실을.
2017년이 어느새 결승점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한 해를 보내야 하는 시점이 오면 기쁨보다는
2017년이 어느새 결승점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한 해를 보내야 하는 시점이 오면 기쁨보다는
아쉬움이 먼저 떠오르기 마련이다. 이럴 때는 여행이 제격이다. 과거를 뒤로 하고 새로운 시작을 부추기게 하는 곳이
행선지라면 더할 나위 없다. 그래서 이맘때의 강진 마량항은 이토록 사람들이 몰리는가 보다.
감히 이야기하건대 마량항은 유홍준 교수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제1권을 통해 이야기한 ‘남도 답사 1번지’의
감히 이야기하건대 마량항은 유홍준 교수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제1권을 통해 이야기한 ‘남도 답사 1번지’의
출발점으로 손색이 없다. 항구가 품은 역사에 귀 기울이고 있노라면 이 말이 절로 피부에 와 닿는다.
조선시대 이전의 강진은 탐진이라는 지명으로 불렸다. 삼국시대 무렵 지금의 제주도인 탐라의
사자가 조공에 나설 때 배가 항상 마량항 인근 구강포에 머물렀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마량항은 본토와 탐라를
잇는 해상 교통의 관문이었던 것이다. 고려시대의 마량항은 강진만 일대에서 만들어진
고품질의 고려청자를 개성까지 실어 나르던 뱃길의 기점이었다. 조선시대에는 한양으로 향하는 제주마들의
첫 번째 말먹이 장소였는데, 여기에서 마량이라는 항구 이름을 따왔다. 또한 경기도와 충청도,
전라도를 하나로 잇는 조선시대 최장 도로 ‘삼남길’도 마량항에서부터 뻗어 나갔다.
이처럼 다양한 구실을 하는 전략적 요충지였기에, 이순신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이곳에 거북선 한 척을 상시 대기시키기도 했다. 여기에 우리나라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일몰 비경까지,
이 정도면 강진의 첫 번째 여행지로 손색없지 않을까

정약용을 품은 강진, 그리고 다산초당
정조 승하 1년 뒤인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났다. 천주교도로 몰린 다산 정약용은 경상도 장기현을 거쳐
전라도 강진으로 유배됐다. 이곳에서 18년간의 모진 유배 생활을 겪었다. 그러나 그는 낙담하지 않았다.
제자들과 함께 『경세유표』를 비롯한 불세출의 저서를 남기며 조선 후기의 대표적 사상가이자
실학자의 표본으로 우뚝 섰다. 강진과 다산 정약용이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된 이유다.
정약용은 강진 유배 직후 8년 동안 정해진 거처 없이 이곳저곳을 전전했다.
이를 딱하게 여긴 그의 외가 해남 윤씨 집안의 도움으로 만덕산 한 귀퉁이 삼나무 숲 속에 다산초당을 마련했다.
떠돌이 신세로 지내다가 적을 두게 됐으니 얼마나 신났으랴. 정약용은 바위에 글자를 새기며,
우물과 연못을 손수 만들며 그 기쁨을 조촐하게나마 표현했다. ‘다산초당 4경’이라 일컬어지는 정석(丁石) 글자
, 약천, 석가산, 다조(차 부뚜막)는 이렇게 만들어졌다.
다산초당을 등지고 서면 오른편에는 서암이, 반대쪽에는 동암이 자리 잡고 있다.
다산초당을 등지고 서면 오른편에는 서암이, 반대쪽에는 동암이 자리 잡고 있다.
서암은 정약용의 제자들이 머물면서 수업 준비, 수업 후 내용 정리, 토론 등을 치열하게 펼친 일종의 공부방이다.
바로 이곳을 중심으로 500권이 넘는 ‘다산표 저서’들이 세상에 나왔다. 한편 동암은 정약용이 평소 기거했던 곳이다.
2천 권이 넘는 책을 쌓아놓고 연구에 몰두한 서재이자, 손님이 방문했을 때 맞이하는 사랑방 역할을 톡톡히 했다.
동암에서 조금만 나오면 천일각이 세워져 있는데, 누각 위에 서면 너른 강진만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동
암과 천일각 사이에 난 만덕산 오솔길을 따라나선다. 느린 걸음으로 30분 정도 걷다 보면 백련사가 지척이다.
정약용 유배 당시 백련사를 맡고 있었던 혜장선사는 그와 학식을 겨룰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친구였다.
정약용이 혜장선사의 묘비에 ‘『논어』와 성리의 깊은 뜻을 잘 알아 유학의 대가나 다름없다’고 적었으니,
정약용이 혜장선사를 얼마나 많이 아꼈을지 쉬이 짐작되고도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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