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적 합리성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자기 문화권의 합리성은 다른 문화권의 합리성과는 다르다.” 네덜란드 심리학자 호프스테드의 명언이다. 이는 중국이 가까운 이웃이긴 하지만 우리와는 다른 문화와 잣대를 갖고 있음을 일깨워준다. 중국 비즈니스 현장에서 중국 상인이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우리가 중국인 특유의 문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결과적으로는 맥없이 속게 되는 상황을 어떻게 하면 피할 수 있을까.
한·중 비즈니스 현장의 기현상은
서로 ‘속이는 사람’은 없다는데
‘속았다는 사람’은 계속 생기는 점
중국에서 속지 않고 사업하려면
중국식 화법과 실리, 체면 중시 등
중국 특유의 문화부터 이해해야
함축과 은유로 점철된 중국인 특유의 화법(話法)과 타인에게 무관심한 것으로 비치는 중국인의 실리주의, 그리고 중국인이 때론 목숨보다 소중하게 생각하는 체면중시 사상 등 이 세 가지만 제대로 알아도 많은 경우 ‘속았다’는 말은 하지 않게 될 것이다. 우선 중국인 특유의 화법을 보자. 중국에서 한국 회사를 떠나는 현지 중국 직원들은 조용히 떠나는 경우가 별로 없다. 대부분 회사 또는 상사의 약속 불이행을 이유로 들며 “나를 속였다”고 분노한다.
한국인 상사가 “당신이 중국인이지만 열심히 일하면 월급도 올려주고 사장이 될 수도 있다”고 ‘우리 식’의 일반적인 격려를 한 것을 진정한 ‘약속’으로 받아들이는 바람에 생기는 일이다. 반대로 중국인은 이미 할 말을 다했는데 우리가 못 알아듣는 경우도 많다. 중국인은 ‘화살을 당기기만 할 뿐 시위를 놓치는 않는다(引而不發)’는 중국식 화법을 많이 구사한다. 특히 이런 표현이 고사성어 등과 함께 어우러지면 더 어려워진다. 미·중 정상회담에서 있었다는 이야기 하나가 전설처럼 전해진다.
중국 최고 지도자가 ‘제멋대로 행동한다’는 말을 하고자 했다. 이를 중국식으로 에둘러서 ‘스님이 우산을 쓴다(和尙打傘)’고 했다. 그러면 상대방이 ‘머리카락도 없고 하늘도 없다(無髮無天)’고 말을 받으며 ‘제멋대로군’이라는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왜냐하면 스님(和尙)은 원래 머리카락이 없는데(無髮) 우산을 썼으니(打傘) 하늘도 가려졌다. 즉 하늘도 없는 것(無天)이 되기 때문이다. 나아가 머리 발(髮)과 법 법(法)은 중국어 발음이 같다. 머리카락이 없다(無髮)는 무법(無法)의 의미다. 그래서 ‘스님이 우산을 쓴다’는 말에 대한 대구(對句)는 “법도 없고 하늘도 없는(無法無天) 무뢰한”이 돼야 하는 것이다. 당시 통역이 이런 중국식 표현을 몰라 아주 황당한 대화가 오갔다고 한다.
문제는 중요한 대화일수록 중국의 함축적 화법이 더 많아지고 오해의 소지 또한 높아진다는 점이다. 따라서 중국 비즈니스에서 의도하지 않은 속임을 당하지 않으려면 중국인의 ‘말’보다는 ‘말귀’를 알아듣는 게 중요하다. 맥락(context)을 잘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남의 일엔 무관심한 중국인의 실리주의를 잘 알아야 한다. 중국 언론에 자주 등장하는 기사가 있다. 사람이 뺑소니 차에 치여 쓰러졌는데도 길 가는 사람들이 바라만 볼 뿐 누구 하나 나서지 않는 걸 한탄하는 내용이다. 이는 중국인이 흔히 이야기하는 “나와 상관없는 일은 절대 나서지 않는다(事不關己 高高?起)”의 전형적 행태다. 내 일이 아니면 나서지 않는 중국인의 무관심이 우리에겐 고의적인 거짓말로 비치는 경우가 많다. 중국에서 남자들은 절대 녹색 모자를 쓰지 않는다. “내 아내가 바람났다”는 표시이기 때문이다. 당(唐)나라 때 이웃 남자와 정분이 난 여자가 남편이 먼 길을 떠날 때 녹색 모자를 씌워 보낸 데서, 또는 원(元)나라 때 홍등가의 ‘기둥서방’이 녹색 모자를 쓴 데서 나왔다는 이야기 등이 있다.
한데 이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녹색 모자를 쓰고 다니다 웃음거리가 된 한국인 사업가가 있었다. 그것도 많은 사람이 참석하는 큰 행사에서 하루 종일 녹색 모자를 쓰고 다니는 실수를 범했는데도 그를 보좌해야 할 중국인 직원조차 녹색 모자의 의미를 알려주지 않았다. 중국인 직원이 나와는 상관없는 일로 치부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런 실수를 피하기 위해선 그 중국인의 ‘상관없는 일’을 ‘상관 있는 일’로 바꾸는 지혜가 우리에겐 필요하다. 어떻게 해야 하나. 중국인과 친구가 되면 된다. 모르는 사람이 가득한 강호(江湖)에서 살아남기 위해 중국인은 예부터 마음을 주고받는 사이의 친구를 가장 중요시했다.
중국 친구는 어떻게 사귀는 게 좋나. 여러 방법 중 필자는 “무조건 식사 자리에 참석하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중국인은 만나서 같이 밥 먹기를 좋아한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많은 이야기를 나눈다. “일이 없으면 밥이나 먹고 일이 있으면 일을 하자(沒事吃飯 有事辦事)”는 중국인이 흔히 하는 말이다. 식사 자리는 단순히 음식을 나누는 자리가 아니다. 서로의 정을 확인하고 사업을 도모하는 자리인 것이다.
세 번째는 체면에 대한 중국식 고려를 잘 이해해야 한다는 점이다. 사업을 위해 중국을 다녀간 사람들의 공통점 중 하나는 모두들 “귀인을 만났다”는 사실이다. “누구를 통해 어떤 이를 소개받았는데 이 사람이 무소불위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며 흥분한다. 한데 사업은 풀리기는커녕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꼬여만 간다. 왜 그럴까.
‘누구’를 만났다는 데 함정이 있다. 중국을 방문한 우리 사업가에게 중국의 거물급 인사가 나타나 사업을 논의 중인 중국 파트너를 가리켜 “이 사람은 나의 둘도 없는 친구” 또는 “내 조카” 등이라며 친분을 확인해 준다. 물론 사실일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이 중국의 ‘귀인’은 중국 파트너의 부탁을 받고 그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해 동원된 사람이다. 이때 중국 파트너가 우리를 속인 것일까. 그렇게만 볼 일은 아니다. 중국은 체면을 고려해 손님 접대는 후해야만 한다. 접대 시 손님을 위해 자신의 역량과 인맥을 자랑하는 건 자신의 체면과도 상관이 있다. 그래서 중국의 거물급 인사에게 부탁을 하게 되고 이 거물급 인사는 부탁한 이의 체면을 생각해 대수롭지 않은 역할을 해 주는 것이다.
다른 사례를 보자. 필자가 몸담고 있던 회사와 중국 파트너 회사 간의 중요한 미팅을 앞두고 회의에 참석하는 중국인 중역에 관한 신상을 본사에 보고할 필요가 있었다. 이때 필자와 함께 일하던 중국인 직원이 기본 보고서를 작성했는데 중국인 중역이 다리에 장애가 있다는 사실을 빠뜨렸다. 그래서 중국인 직원에게 왜 이 사실을 누락시켰는가를 물었더니 돌아온 답은 “중국인 중역의 장애는 그의 장점이 아니므로 그의 체면을 생각해서 보고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나름 중국식 배려였던 셈이다.
중국인은 체면을 중시한다. 이에 반해 우리 기업은 합리적이며 객관적인 정보를 중시한다. 중국인의 눈으로 보면 한국을 비롯한 외국 기업은 사실만 중시하고, 감정을 가벼이 보는 조직으로 비칠 수도 있는 것이다. 중국인과의 거래에서 공개적인 상황에서의 대화나 면담 내용을 액면 그대로 믿는다면 지혜롭지 못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심각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내 체면을 고려하는 동시에 상대방에 대한 체면이 손상되지 않도록 신경을 쓰기 때문에 공개적인 자리에서의 발언은 실속이 있기보다는 체면치레가 많기 때문이다.
“속으로는 알지만 공개적으로는 절대 이야기하지 않는다(心照不宣)”거나 “틀린다는 것을 알지만 말을 적게 한다(明知不對 少說爲佳)” 등은 중국인이 공개적인 자리에서 당연히 취하는 행동이다. 자연히 중국인은 “회의에선 말을 하지 않고 회의가 끝난 뒤 마구 지껄인다(會上不說 會後亂說)”는 말을 듣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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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니 중국 사업을 하다 보면 “지난번 만났을 때 문제없다는 말을 철석같이 믿었는데…” “그때는 아무 말도 안 하더니만 뒤에 가서 딴소리한다” 등과 같은 말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경우는 “중국인이 속였다”고 하기보다는 “중국인이 내가 알아듣게끔 분명하게 말해 주지 않았다”고 말하는 게 맞을 것이다. 알아듣는 건 어찌 보면 듣는 이의 몫이다. 특히 우리가 ‘갑’이 아닌 경우엔 더 그렇다.
한·중 관계에서 ‘속이는 사람’은 없는데 ‘속는 사람’만 생기는 이상한 현상을 없애려면 중국을 우리 식으로 해석하는 잘못을 범하지 말아야 한다. 중국인과 대화할 때는 중국의 문화를 고려한 화법과 상황을 만들어 보자. 그러기 위한 첫걸음은 기꺼이 현장에 발을 담가 보는 것이리라. “봄이 돼 강물이 따스해졌는가는 그 물가에 사는 오리가 가장 먼저 안다(春江水暖鴨先知)”고 하지 않았던가.
류재윤 BDO 이현 회계·세무 법인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