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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대폰 판매원에서 세계적인 스타 가수로

應觀 2015. 9. 12. 20:40
  • 휴대폰 판매원에서 세계적인 스타 가수로①

    2007년 3월 17일 영국 카디프 밀레니엄센터에 청중 수천 명이 모였다. 평범한 영국인의 숨은 재능을 발굴하는 프로그램 ‘브리튼스 갓 탤런트(Britain’s Got Talent)’의 오디션장이었다. 한 지원자가 쭈뼛거리며 무대에 등장했다. 작달막한 키에 살집이 있는 남성이었다. 재킷은 품이 좁아 단추가 채워지지 않은 채였고 소매가 너무 길어 우스꽝스러웠다. “뭘 보여주실 거죠?” 심사위원의 질문에 그는 “오페라를 부르겠다”고 했다. 다른 심사위원의 얼굴에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이 스쳤다.

그가 선택한 곡은 푸치니의 오페라 ‘투란도트’ 중 아리아 ‘공주는 잠 못 이루고(Nessun Dorma)’였다. ‘사라져라 밤이여, 새벽이 되면 나는 이기리, 이기리, 이기리~’ 승리를 다짐하는 마지막 가사가 끝나기도 전에 박수와 함성이 쏟아졌다. 한 심사위원은 감동한 듯 눈물을 흘렸다. 미국 오디션 프로그램 ‘아메리칸 아이돌’에서 날 선 촌평으로 악명을 떨친 심사위원 사이먼 코웰마저 “정말 대단하다”고 말했다. 휴대폰 판매원 폴 포츠(45·사진)가 세계적인 유명 가수로 다시 태어나는 순간이었다.

그 후 8년, 스타가 된 폴 포츠는 세계 각국을 돌아다니며 노래를 들려준다. 오는 19일 경기도 파주 임진각 평화음악회, 대구, 대전 등 5개 도시 공연을 위해 방한한 그를 지난 6일 서울 서초구 방배동의 한 녹음 스튜디오에서 만났다.

◇휴대폰 판매원에서 세계적인 가수로

스튜디오에 들어선 폴 포츠는 가곡 ‘그리운 금강산’을 부르겠다며 헤드폰을 쓰고 마이크 앞에 섰다. 반주에 맞춰 입을 떼며 노래를 시작했다. ‘누그으 쥬졔러가~(누구의 주제런가)’. 어눌하지만 분명한 한국어였다. 내달 방영될 TV 프로그램 ‘불후의 명곡’ 조수미 편에서 한국어로 ‘그리운 금강산’을 부르기 위해 맹연습 중이다. “한국어를 꽤 잘한다”고 했더니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한국어 공부 면에서는) 바보”라며 쑥스러워했다. 한국 지인들과 술자리에 가면 ‘소맥 주세요’라고 말하고, 앙코르 요청을 받으면 ‘한 번 더?’라고 말할 줄도 안다.
2007년 영국 오디션 프로그램 ‘브리튼스 갓 탤런트’에서 우승하며 휴대폰 판매원에서 스타가 된 폴 포츠는 “한국을 제2의 고향”이라고 부른다. 가곡 ‘그리운 금강산’을 한국어로 부르기 위해 연습 중인 그가 지난 6일 서울 서초구 방배동의 한 녹음 스튜디오에서 웃고 있다. 사고를 당해 보기 흉했던 그의 치아는 우승 이후 치료돼, 다시 시작한 그의 인생만큼이나 밝고 환해졌다. /사진=이태경 기자, 그래픽=김성규 기자
2007년 영국 오디션 프로그램 ‘브리튼스 갓 탤런트’에서 우승하며 휴대폰 판매원에서 스타가 된 폴 포츠는 “한국을 제2의 고향”이라고 부른다. 가곡 ‘그리운 금강산’을 한국어로 부르기 위해 연습 중인 그가 지난 6일 서울 서초구 방배동의 한 녹음 스튜디오에서 웃고 있다. 사고를 당해 보기 흉했던 그의 치아는 우승 이후 치료돼, 다시 시작한 그의 인생만큼이나 밝고 환해졌다. /사진=이태경 기자, 그래픽=김성규 기자
폴 포츠는 ‘공주는 잠 못 이루고’를 불렀던 첫 오디션을 거쳐 그해 ‘브리튼스 갓 탤런트’에서 최종 우승했다. 그의 오디션 영상은 유튜브에서 1억4000만 번 재생됐다. 데뷔 앨범 ‘원 챈스(One Chance)’는 500만 장 팔렸으며, 한국을 포함한 15개국에서 앨범 판매 순위 1위를 차지했다. 고든 브라운 총리가 “영국 최고의 수출품”이라고 할 정도로 국제적인 유명 인사가 됐다.

그의 노래만큼이나 인생도 화제였다. 폴 포츠는 영국 항구도시 브리스톨에서 태어났다. 4남매 중 둘째. 아버지는 버스 운전사, 어머니는 수퍼마켓 계산원이었다. 초등학교에 입학해서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18살 때까지 그는 ‘왕따’였다. 별명이 ‘패배자(loser)’, ‘후줄그레(saddo)’였다. 이름이 캄보디아 독재자인 폴 포트(Pol Pot·1928~1998)와 비슷한 것도 내내 놀림감이 됐다.

12살 때 동급생이 그를 학교 샤워장 바닥으로 밀어 넘어뜨린 후 벌거벗은 등을 밟으며 “폴 포츠는 죽었다”고 외쳤다. 주위에 있던 아이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손뼉을 쳤다. “왜 날 미워하냐”고 물었더니 아이들은 “네가 폴 포츠라서 싫다”고 했다. “나는 폴 포츤데, 폴 포츠라 싫다니.” 그 후 그 자신도 스스로를 미워하고 부정하게 했다.

어찐 된 일인지 잊을 만하면 겪게 되는 각종 사고로 골절과 타박상을 입는 게 일상이었다. 한때 폴 포츠가 스스로를 비하해 ‘프랑켄슈타인’이라고 부르게 만든 사고도 있었다. 밤길을 걷다가 수리 중인 건물의 철심에 부딪혔는데, 앞니 두 개가 잇몸을 뚫고 입천장과 비강 사이로 들어가 치아 배열이 흉하게 일그러졌다. 그래서 그의 결혼식 사진엔 입을 벌리고 환하게 웃는 모습이 없다.

따돌림으로 점철된 고등학교 시절을 가까스로 벗어나 세인트 마크 앤드 세인트존 대학에 진학해 철학과 신학 등을 공부했다. 같은 대학 응용신학 석사 과정에 진학했으나 등록금이 부족했다. 대학 다니느라 은행에서 빌린 돈 중1500파운드(약 280만원)도 갚지 못한 채 남아있었다. 교회에서 경비로 일하며 돈을 벌어 공부했지만 그 일자리마저 잃게 돼 석사 과정은 1년 만에 그만뒀다. 불황이라 그런지 일자리라고는 몸으로 하는 일뿐이었다. 차라리 실업 수당을 받을까 생각도 해봤으나, 그래도 일을 놓지는 않았다. 가축 농장과 음식 공장에서 잡일을 했고, 혼다자동차 부품 공장에서도 일했다. 1994년 10월 대형마트 테스코에 비정규직으로 들어갔다. 6주 계약으로 시작했던 아르바이트였는데 거기서 10년을 일했다.

 


사고는 끈질기게 이어졌다. 길을 건너다 자동차에 치여 척추에 금이 가고, 자전거를 타고 가다 마주 오던 자전거와 정면충돌해 인대 절반이 끊어졌다. 2003년 10㎝ 크기 종양이 발견돼 수술을 받기도 했다. 퇴원 4일 후 자전거 사고로 쇄골이 부러졌다.

오디션에 참여하기 전 4년은 몸과 마음이 온통 망가져 유일한 희망인 노래조차 부를 수 없는 날들이 계속됐다. 몸이 좋지 않아 가까운 테스코 지점으로 옮기려 하니 야간 당직 자리밖에 없었다. 생활비를 벌기 위해 낮에는 백화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러다 휴대폰 소매업체인 카폰웨어하우스에 매장 관리인으로 들어갔다.

오디션 지원 기회는 캄캄한 동굴 속에서 웅크리고 지내던 그에게 갑자기 내려친 벼락 같은 것이었다. 매장 판매 통계를 내려고 컴퓨터 작업을 하는데 갑자기 팝업창이 떴다. 꺼버리려 했는데 클릭을 잘못해 창이 최대화됐다. 그의 인생을 바꾼 오디션 광고창이었다. ‘왜 나를 뽑겠어? 못생겼지, 뚱뚱하지, 늙었지. 그들이 절대로 찾지 않을 사람이야.’ 노래를 부를 기회를 잡고 싶었으나 자신이 없었다. 그는 10펜스 동전에 운명을 걸었다. 앞이 나오면 신청, 뒤가 나오면 잊기로 했다. 던진 동전은 여왕의 옆모습이 새겨진 앞면을 보여줬다.

오디션 이후 모든 것이 변했다. 현재 그의 자산은 500만파운드(약 100억원)로 추정된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그의 삶은 지난해 영화 ‘원 챈스’로 만들어져 개봉됐다. 그의 콘서트 일정은 이미 내년까지 잡혀 있다. 인생 역전의 상징, 희망의 아이콘인 그를 보고 싶어 하는 이들이 여전히 많다.
2009년 독일 에코뮤직상 수상 파티에 참석한 폴 포츠와 그의 아내 줄리-앤. /Corbis/토픽이미지
2009년 독일 에코뮤직상 수상 파티에 참석한 폴 포츠와 그의 아내 줄리-앤. /Corbis/토픽이미지
―오디션 프로에서 우승한 후 8년이 지났다. 그동안 무엇이 가장 달라졌나.

“나이를 8살이나 더 먹었다. 하하…. 내가 지금 여기 있다는 사실이 가장 큰 변화다. 한국에 오게 될 거라고 생각이나 했겠나.”

―백만장자가 됐다. 사람의 근본을 흔들 수도 있는 거액인데….

“우승한 후에 수많은 사람들이 찬사를 보내줬다. 자꾸 듣다 보니 ‘이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버리면 내가 나를 잊어버리겠구나’ 싶었다. 내가 우승할 수 있었던 것은 나 자신에게 진실했기 때문이다. 난 여전히 나일 뿐이다. 앞으로도 계속 노래를 부르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잊지 않으려 한다.”

폴 포츠는 첫 오디션 때 입었던 재킷을 지금도 옷장에 걸어두고 있다. 대형마트 테스코에서 35파운드(약 6만4000원) 주고 샀다. 그 후 몸무게가 늘어 더 이상 입진 못하지만 그때 그 순간의 자신을 기억하기 위해 간직하고 있다. 그 재킷 속엔 울지 않기 위해 분투했던 많은 날들이 스며 있다.

―오디션 프로를 통해 스타가 되고 나서 무엇이 가장 좋았나.

“내 노래를 좋아해주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오디션은 나 자신으로부터 나를 구했다. 내가 겪었던 어둡고 어려운 시간이 내 삶을 규정하지 않게 된 것이 가장 기쁘다.”

―첫 오디션에서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우승을 예상했나.

“잘한 것 같지 않았다. 도망가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노래를 부르고 나서는 이제 다시는 노래할 일이 없겠구나 싶어 절망했을 정도니까.”

―‘공주는 잠 못 이루고’를 선택한 이유가 있나.

“짧은 시간에 강한 인상을 줄 수 있는 노래니까. 끝부분에 ‘이기겠다’는 가사가 상징적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8년째 어딜 가나 ‘공주는’을 신청받는다. 지겹기도 할 텐데.

“아마 몇 만 번 불렀을 것이다. 내가 진정한 나로 다시 시작하게 도와준 노래다. 내게 기회를 준 노래가 지겨워지면 고마움을 잊는 것이다. 한 번도 똑같이 부른 적이 없다. 늘 조금씩 느낌을 달리해 부른다.”

그는 인터뷰 중 ‘너 자신이 돼라(Be You)’는 말을 수차례 강조했다. 백만장자 폴 포츠는 아직도 중고 벤츠를 몰고, 우승 전 살던 소도시 포트 탤벗에서 산다. 집만 약간 넓은 곳으로 이사했다. 수억원 레코드 계약을 맺은 후에도 호텔 세탁비를 아끼려고 세면대에서 바지를 직접 빨다가 뒷주머니에 들어 있던 여권이 젖어버려 수건걸이에 걸어놓고 말린 적도 있다.

그의 아내 줄스도 명품과는 거리가 멀다고 했다. 폴 포츠는 10살 연하의 아내를 인터넷 채팅으로 만났다. 인터넷에서는 그도 유머가 넘치는 남자가 될 수 있었다. 한 달간 매일 채팅하던 두 사람은 직접 만나 2년 후 결혼했다.

그는 자신의 진실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면서, 어떤 인터뷰에서도 사전 질문지를 받지 않는다. “미리 계획된 답변을 하기 싫다”는 이유다. 사진 촬영 때는 ‘웃어달라’는 요청에도 한동안 굳은 표정을 풀지 않았다. “잘 웃는 건 내가 아니다. 사진에서도 나는 나의 모습으로 남고 싶다.” 30분 넘게 그와 대화를 나누며 마음을 열고서야 밝은 웃음을 보여줬다.

―다니던 휴대폰 판매 회사를 우승 9개월 후에야 그만뒀는데.

“우승한 게 꿈만 같았다. 아침에 일어나면 꿈이 깨버릴 것 같아서 직장을 그만둘 수가 없었다. 2008년 3월 미국 투어에 들어가면서 사표를 냈다.”

지난 7월 독일 TV 생방송에 출연한 폴 포츠(가운데)가 사회자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Corbis/토픽이미지
지난 7월 독일 TV 생방송에 출연한 폴 포츠(가운데)가 사회자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Corbis/토픽이미지
원래 수줍음을 많이 탄다는 폴 포츠는 인터뷰 중 낮은 목소리로 웅얼거리거나 눈을 내리깔며 답할 때가 많았다. 그러면서도 가끔 예상치 못한 유머를 던져 놓고 먼저 너털웃음을 터뜨려 주위 사람들을 절로 따라 웃게 했다. 우승 전의 폴 포츠와 우승 후의 폴 포츠가 묘하게 공존하는 느낌이었다.

―어릴 때 따돌림을 당하면 그 마음의 상처가 어른이 된 후에도 남아 있다고 하지 않나.

“그냥 버텼다. 버티다 보니 시간이 갔다. 인생은 직선이 아니다. 때로는 내가 아무 잘못을 하지 않았는데도 나쁜 일이 생긴다. 누구도 탓할 수 없다. 그저 그런 일도 생긴다고 받아들여야 했다.”

그는 잘 뛴다. 때리려고 달려드는 동급생들을 피하려면 달려야 했다. 그는 “덕분에 달리기 실력이 엄청나게 늘었다”며 웃었다. 모두에게 따돌림받고 미움받던 시절, 그는 자해할 생각도 했다고 한다.

“자살은 생각해보지 않았지만, 계단 아래로 몸을 던져 자해해야겠다는 생각은 했었다. 내가 다치면 친구들이 조금이라도 미안해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나를 좋아하는 것까지는 바라지 않았다. 제발 미워하지만 말았으면 했다.”

◇노래만이 유일한 친구… 파바로티도 만나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할 때나, 학비를 벌기 위해 노동판을 전전할 때나 변함없는 유일한 친구는 자신의 목소리였다. 노래를 잘하고 좋아해서 어릴 때부터 교회 성가대에서 노래를 불렀다. 풍부한 성량 덕에 어떤 노래를 불러도 주목받았다. 노래는 그를 다른 사람으로 만들었다. 모임에 가서 한구석에 존재감 없이 앉아 있다가도 노래 한 곡만 부르면 박수 세례를 받았다. 폴 포츠는 “노래할 때만은 내가 특별하다고 느꼈다”고 했다.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미움받으면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성가대 덕분”이라고도 했다.

성가대 지도교사에게 배운 실력으로 지역 음악 경연 대회에서 수차례 대표로 뽑혔다. 특히 클래식 선율이 좋았다.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지휘하는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연주로 차이콥스키의 교향곡 6번 ‘비창’을 LP판이 닳도록 들었다. 음악에 취해 자신도 모르게 어머니 뜨개바늘을 지휘봉 삼아 휘두르며 가상의 오케스트라를 지휘했다. 지역 오페라단에서 배역을 맡기도 했다.
지난 2010년 3월 인천 송도 컨벤시아에서 열린 제6회 미스터월드 선발대회에서, 영국 외판원 출신의 세계적인 오페라 가수 폴 포츠가 멋진 목소리로 열창하고 있다. /조선일보DB
지난 2010년 3월 인천 송도 컨벤시아에서 열린 제6회 미스터월드 선발대회에서, 영국 외판원 출신의 세계적인 오페라 가수 폴 포츠가 멋진 목소리로 열창하고 있다. /조선일보DB
그의 인생에도 짧으나마 안정된 시기가 있었다. 1994년 입사한 테스코에서 정규직 직원이 된 후 지역 정치에도 관심을 갖게 됐다. 양친과 남동생이 자유민주당 당원이었다. 1996년 5월 브리스톨 시의회 최연소 시의원으로 당선돼 2003년까지 일했다. 직장과 공직을 모두 가졌지만 여전히 노래에 대한 열정은 식지 않았다. 2001년 그는 과감하게 무급 휴직을 하고, 이탈리아 리미니라는 작은 도시로 떠났다. 성악과 이탈리아어를 동시에 가르치는 수업에 등록해 6개월간 다녔다.

그곳에서 그는 전설의 테너 루치아노 파바로티를 만났다. 상급반 수업에 파바로티가 지도하는 마스터 클래스가 있었다. 폴 포츠는 “내 영화(원 챈스)에서는 파바로티가 내게 재능이 없다고 질책하는 걸로 묘사되지만 실제는 정반대였다”며 “학생들 중 파바로티에게 ‘한 곡 더 불러보라’는 말을 들은 사람은 내가 유일했다”고 말했다.

그의 노래는 완벽하지 않다. 때로 호흡이 흔들리고 발성은 불안정하다. 그런데도 대중은 그의 노래를 들으며 눈물을 흘린다. 희망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가장 큰 영감을 준 사람은 누구인가?

“테너 호세 카레라스다. 백혈병을 앓고 나서도 노래하는 모습에 감동했다. 그의 노래가 아프고 난 뒤에도 완벽했기 때문이 아니다. 계속 노래를 불렀다는 점이 중요하다. 어떤 상황에서도 계속하는 것(keep going), 그것이 보통 사람의 인생도 특별하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과거의 어두운 폴 포츠와 작별했나.

“아직도 내가 좋은 사람인지, 이런 성공을 누릴 자격이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든다. 군중 속에 서면 나는 여전히 힘들다. 구석에 숨고만 싶다. 그런 욕망과 싸우기 위해 억지로라도 사람들 속으로 나를 밀어넣는다. 이렇게 계속해온 것이 폴 포츠다. 나는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밀고 갈 것이다.”

―당신이 생각하는 성공이란 무엇인가.

“자신의 일을 사랑하는 사람이 성공한 사람이다. 무슨 차를 모느냐, 집이 몇 평이냐는 상관없다. 자신이 하는 일을 사랑하는 것이 성공의 첫걸음이다.”

폴 포츠가 2010년 10월 19일 경기도 군포 서울소년원에서 소년원 학생들을 위해 노래를 부르고 있다. /오종찬 기자
폴 포츠가 2010년 10월 19일 경기도 군포 서울소년원에서 소년원 학생들을 위해 노래를 부르고 있다. /오종찬 기자
◇한국은 제2의 고향

폴 포츠는 어지간한 국내 톱가수도 채우기 어려운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3000석을 매진시키는 인기 스타다. 지난 8일 용인 콘서트 1200석도 매진이었다. 각별한 한국 팬의 사랑을 익히 알고 있는 폴 포츠는 “한국이 제2의 고향”이라고 말했다.

―한국에서 유달리 인기가 많다. 왜 그렇다고 생각하나.

“내가 평범하니까 그런 것 아닐까. 사람들은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이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내가 가장 나다울 때 꿈을 이룰 수 있다. 그런 점을 내게서 발견한 게 아닌가 싶다.”

―페이스북에 한국 풍경 사진을 자주 올리는데.

“서구에서는 한국이라고 하면 삼성과 현대밖에 모른다. 내가 본 아름다운 해안과 산을 보여주고 싶다. 한국 사람을 만나거나 노래를 들으면 절실한 그리움이 강하게 느껴진다. 남북이 분단돼 그런 게 아닐까. 통일에 대한 갈망 때문인 것도 같다.”

―한국에서도 오디션 프로그램이 인기다. ‘한국의 폴 포츠’로 불리는 우승자도 나왔다. 오디션 지원자들에게 조언을 해준다면?

“성공을 자신의 밖에서 찾으려고 하면 백전백패다. 네가 가진 최고의 너를 보여주면 된다. 일단 무대에 서면 즐겨라. 그렇지 않다면 온갖 비판과 고통을 왜 겪어야 하겠나.”

폴 포츠는 자신에게 희망을 주는 애송시(詩)라며 영국 시인 러디어드 키플링의 ‘만일(If)’을 소개했다. “나의 길을 벗어나거나 뛰어넘는 것이 아니라, 가던 길을 계속 가면서 나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 참된 인생이라는 메시지가 가슴에 와닿는다”고 했다.

인터뷰를 마치며 그가 시 일부를 암송했다.

‘If you can dream― and not make dreams your master;
만일 네가 꿈을 갖더라도― 그 꿈의 노예가 되지 않을 수 있다면
If you can think- and not make thoughts your aim;
만일 어떤 생각을 하더라도― 그 생각이 유일한 목표가 되지 않을 수 있다면
If you can meet with Triumph and Disaster
인생의 길에서 성공과 실패를 만나더라도
And treat those two imposters just the same;
그 둘을 같은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마무리는 폴 포츠가 자신의 메시지로 끝맺었다.
“No matter what life throws at you, Be You(어떤 일이 닥치더라도 여러분 자신이 되세요).”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