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종교와 나

만공스님

應觀 2015. 7. 17. 03:52
1937년 3월 11일 조선총독부에서 회의가 열렸다. 참석자는 조선 13도지사와 31개 본산(本山) 주지, 주제는 '조선 불교 진흥'이었다. 허울만 그럴듯했지 한국 불교를 처(妻)를 끼고 고기까지 먹는 일본 불교처럼 만들어 우리의 민족정신을 말살하겠다는 흉계였다.

불교의 내선일치(內鮮一致)를 장황하게 외치는 미나미지로(南次郞) 총독 옆에 경무총감이 눈을 부라리고 있었다. 독립운동가들에게 '저승사자'로 불린 치안 책임자가 불교 진흥을 논하는 자리에 나타난 것은 여차하면 잡아넣겠다는 무언의 협박이었다.

이때 수덕사 주지 만공(滿空·1871 ~1946) 대선사의 일할(一喝)이 침묵을 깼다. "청정(淸淨)이 본연(本然)하거늘 어찌하여 산하대지(山河大地)가 나왔는가." 수행법이 나라마다 다른데 1500년 역사의 한국 불교를 일본 불교와 합칠 순 없다는 것이다.

스님의 불호령은 계속됐다. "전 총독(데라우치)은 조선 승려들을 파계시킨 죄인이다. 그는 지금 죽어 무간아비지옥에 떨어져 한량없는 고통을 받고 있을 것이다. 조선 불교를 진흥시키려면 수행을 통해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수밖에 없다. 총독부는 간섭하지 말고 우리에게 맡기는 것만이 유일한 진흥책일 것이다!"

총독과 경무총감은 식은땀을 흘렸고 다른 본사 주지들은 얼굴을 붉힌 채 고개를 숙였다. 박해당 서울대 규장각 연구원에 따르면, 31개 본사 주지 중 끝까지 창씨개명에 저항한 이는 만공뿐이었다. 얼마 뒤 만해(卍海·한용운) 스님이 만공을 찾아와 화두를 던졌다. "나는 조각은 어느 곳에 떨어졌는가." 만공이 받았다. "거북털과 토끼의 뿔이로다." 만해가 웃으며 말했다. "장하도다. 사자후(獅子吼)여, 총독의 간담을 떨어뜨렸구나. 한번 할(喝)을 하매 여우 새끼들의 간담이 서늘하였도다. 그런데 한 방망이 후려침이 더 좋지 않았을까?" 만공이 껄껄대며 대꾸했다. "이 사람아, 곰은 방망이를 쓰지만 사자는 일갈을 사용한다네."

졸지에 미련한 곰이 된 만해가 웃으며 돌아간 지 얼마 뒤 만공에게 시 한 수가 도착했다. "남아가 이르는 곳마다 내 고향인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손님처럼 근심하며 지냈던고/ 한소리 큰 할에 삼천대천세계를 깨뜨리니/ 눈속에 복사꽃 조각조각 날리네."

이때 일제가 받은 충격의 강도를 보여주는 문건이 최근 발견됐다. '조선총독부 시정(施政) 30년사'에 나오는 대목이다. "조선 불교의 진흥을 위해 노력했지만 기대한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 보고서가 나온 지 1년 후 만공은 일제에 치명타를 날린다. 1941년 일본의 식민 불교 정책에 맞서 한국 불교의 고수 투쟁을 선언한 선학원(禪學院) 고승대회를 만공이 주도한 것이다. 이때 남긴 유명한 게송이 지금도 전해진다. "망(亡)에 망이 없으면 망이 곧 진(眞)이요, 진에 진이 있다면 진이 곧 망이로다!"

만공 대선사를 수발하던 동자승 진성(眞性)이 2008년 열반에 든, 훗날의 수덕사 방장 원담(圓潭)이고, 여제자가 김일엽이다. 김일엽의 '나를 찾는 공부'라는 말에 문득 깨닫고 수덕사로 와 머리 자른 청년 옹산(翁山·전 수덕사 주지)과 40년 사제의 연을 맺은 이가 원담 스님이니 만공과 옹산은 사손(師孫) 관계가 된다.

그 옹산 스님이 마지막 불사(佛事)를 일으키고 있다. "만공 스님을 독립 유공자로 모시려 하는데 어려움이 많습니다. 투옥되거나 복역한 기록이 있어야 독립 유공자가 된답니다. 그럼 독립 유공자 1만6000명을 새롭게 정립하겠다는 대통령 말씀은 뭔지…."

4월 경허(鏡虛)-만공선양회장으로 추대된 옹산 스님은 올 5월 신청서를 국가보훈처에 냈고, 국회의장·국회정무위원장·보훈처장·독립기념관장에게도 지원을 요청했지만 만공 스님의 업적 자체가 잊힌 것에 놀랐다고 했다. "성의없는 응대야 바쁘니까 그렇다 치고, 섭섭한 것은 만공 스님의 가치 자체를 모르는 이가 많다는 겁니다. 이렇게 역사를 잊어서야. 그렇다면 만공 대선사께서 쓰신 저 휘호는 뭡니까?" 수덕사 담장에는 '世界一花(세계일화)' 네 글자가 곳곳에 있다.

세계는 인종과 국력과 빈부 차이가 없는 한울타리라는 뜻의 세계일화는 만공이 무궁화꽃에 먹을 찍어 쓴 글이다. 만공이 인도 마하트마 간디에 앞서 비폭력 독립운동에 나선 인물이며, 일제의 만행을 정신력으로 제압했음을 의미한다.

"수덕사 인근에 윤봉길 의사 생가가 있지요. 백야 김좌진 장군도, 의병장 최익현 선생도 부근 출신이시고. 그런데 그들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못하지 않은 만공 스님이 구속-복역이라는 형식 때문에 독립 유공자로 인정되지 않는다니 도무지 이해를 못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