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명리

'일중체(一中體)

應觀 2015. 1. 21. 09:14

 

 

해남 대흥사 '대웅보전(大雄寶殿)' 현판은 이 절을 빛내는 보물 가운데 하나다. 조선 후기 문인 원교 이광사가 썼다. 180년 전 제주도 유배 길에 대흥사에 간 추사 김정희는 대웅전 현판을 보고 "원교의 글씨는 촌스러우니까 떼어내라"고 타박했다. 추사와 원교는 글씨를 보는 눈도 달랐고 당색(黨色)도 달랐다. 9년 뒤 유배에서 돌아오다 대흥사에 들른 추사는 자신의 교만을 깨닫는다. 원교의 글씨가 다시 걸렸다. 유배 생활이 추사를 겸허하게 한 것이다. 대흥사 대웅전 옆 요사채에는 '무량수각(無量壽閣)'이라는 추사의 현판 글씨가 걸려 있다. 대웅전 현판과 함께 대흥사를 지키는 또 하나 명물이다.

▶지방의 절이나 서원, 종가(宗家)에 갔다가 잘 된 현판을 보면 건물도 다시 보게 된다. 중국 위나라 때 궁궐이 완공돼 현판을 걸어야 했다. 그런데 목수가 잘못해 글씨도 쓰지 않은 나무판을 건물 정면에 걸고 못을 박아버렸다. 명필로 이름 높은 위탄(韋誕)이 나서게 됐다. 땅에서 25척 높이에 줄을 타고 올라가 매달려 세 글자를 쓰고 내려와 보니 머리털이 모두 희어져 버렸다. 현판 글씨 쓰기가 그만큼 어렵다는 걸 전해주는 일화다. 

만물상 일러스트

▶광복 후 애국선열을 기리는 비문(碑文)은 대부분 국학자이자 민족지사인 위당 정인보가 지었다. 유관순 열사비, 윤봉길 의사비, 충무공 기념비, 효창공원 백범 기념비…. 이것들엔 또 다른 공통점이 있다. 하나같이 일중(一中) 김충현(金忠顯)의 글씨다. 위당은 비문 의뢰가 들어오면 하나를 꼭 물었다고 한다. "글씨는 누가 쓰는가." 만약 다른 사람이 쓴다고 하면 "나는 일중 글씨가 아니면 짓지 않겠다"고 했다.

▶당시 일중은 20대 청년이었다. 안동 김씨 명문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 사서삼경을 떼고 열세 살에 초등학교에 들어갔다. 가문의 전통을 이어받고 고금(古今)의 서법을 깨쳐 '일중체(一中體)'를 완성했다. 김응현·김창현 두 아우와 함께 20세기 한국을 대표하는 서예가 삼 형제로 유명하다.

▶서울 인사동 백악미술관에서 일중의 현판 글씨만을 모은 특별전이 열리고 있다. 경복궁 건춘문·영추문, 사직단, 창의문, 녹동서원, 한강대교, 서울대…. '국필(國筆)'로 불린 명성에 걸맞게 중요한 현판을 참 많이 썼구나 싶다. 문기(文氣) 가득한 글씨가 건물을 살리는 시대가 있었다. 그런 걸 귀히 여기는 안목과 정신의 품격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일중의 현판 글씨들을 보며 우리 시대는 후세가 자랑스러워 할 만한 문화재를 얼마나 많이 남기고 있는 걸까 생각했다.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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