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 및 여행/국내여행

경북 영주를 찾아서20230330

應觀 2023. 4. 1. 20:45

2023년3월 30일  목요일
야탑-영주 대강막걸리 양조장- 봉현사과농원-정도너츠-부석사-
순흥전통묵집-소수서원-무섬마을외나무다리-배추전

오늘의 여행은 고향이 영주인 삼봉님의 제안에 따라 관주와 나 3명이 야탑역에서 만나
하루의 영주관광 일정을 시작했다
 

 

부석사는 조선시대 억압과 전란으로 인한 손상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도 신앙과 일상적인 종교적 실천의 중심 장소로 역할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승원의 기능을 잘 보존해 온 것이 높이 평가되어 2018년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특히 부석사는 우리나라 화엄종의 본찰로 의상대사와 그 전법 제자들에 의해 전승되어 온 중요한 사찰입니다. 부석사는 신라의 삼국통일 시기인 676년에 의상대사가 창건한 절입니다. 화엄종의 본찰인 부석사는 신라 하대에는 대선단 위에 세워진 거대한 가람으로 많은 대중이 생활하고 승려가 되기 위해 처음 출가하는 곳으로 널리 알려졌습니다. 국가민속문화제 제278호

 

여기서 ‘삼판서’는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걸쳐 한 집에서 연이어 판서라는 높은 벼슬을 지낸 영주출신의 세 사람 (정 운경, 황유정, 김담) 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판서判書란 오늘날 장관長官에 해당하는 관직으로 삼판서 중 첫 번째 판서는 고려 공민왕 때 형부상서 (조선의 형조판서) 를 지낸 정운경으로, 조선개국 1등공신인 삼봉 정도전의 아버지이며, 두 번째 판서는 조선 태조에서 태종에 걸쳐 공조판서, 예조판서, 형조판서를 지낸 황유정으로 첫 번째 판서인 정운경의 사위입니다.  세 번째 판서는 조선 세조때에 이조판서를 지낸 김담으로 두 번째 판서인 황유정의 외손자입 니다. 그리하여 세상 사람들은 한집에서 연이어 판서에 오른 이 세분을 ‘영주의 삼판서’라 부르게 되었고 세분이 차례대로 거주하던 옛집을 「삼판서 고택」이라 불렀습니다.

무섬마을은 마을의 삼면을 내성천이 감싸듯 휘감아 돌아나가서 육지 속의 섬처럼 보이는 물돌이 마을이다.  
풍수로 보면 매화꽃이 떨어진 모습을 닮은 매화낙지(梅花落地) 또는 연꽃이 물 위에 떠 있는 
연하부수(蓮花浮水) 모양의 지형으로서, 명성과 덕망이 높은 자손이 많이 나온다는 명당으로 꼽히는 곳이다.  
마을 이름인 물 위에  떠 있는 섬을 뜻하는 수도리(水島里)의 우리말이며, 원래 물섬이라고 불리었다.
이 마을은 조선 시대인 17세기에 박수가 병자호란 후 출사를 단념하고 충절과 은둔군자의 선비정신으로 
건축하여 입향 후, 박수의 증손녀와 혼인한 김대가 들어와살면서 만들어진 마을로, 반남 박씨 가문과 
선성 김씨 가문 사람들이 모여 사는 집성촌이다. 
조선 시대에는 수많은 선비와  관리를 배출하고 부자가 많이 살았던 마을이었고, 대한제국 시기에도 
120여 가구에 500명 이상이 살았을 만큼 마을이 번성하였다.
일제 가점기인 1934년에 큰 홍수로 마을의 절반 정도가 사라지는 시련을 겪었지만 해방 전까지는 
100여 가구가 사는 큰 마을이었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는 많은 주민이 도시로 떠나가면서 한때 마을이 사라질 위기에 처하였으나 이후 
명맥을 이어오다가 2000년대에 전통 마을로 지정되고 정비가 이루어지면서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현재에는 약50가구에 50여 명의 주민이 살고 있으며 40여 동의 전통 가옥이 있다. 
무섬마을은 자연과 어우러진 전통 마을의 모습을 잘 간직한 곳으로, 
조선 시대에 만들어진 다양한 구조와 크기의 전통 가옥이 많이 남아 있다.  
흥선대원군의 친필 현판이 있는 해우당(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92호), 
조선 현종 7년(1666)에 박수가 지은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한옥인 만죽재(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93호)등이 
대표적이다.
무섬마을은 지리적으로 고립되어 있었다. 마을과 외부를 이어주는 외나무다리가 폭이 좁아서
 긴 장대에 의지하여 건넜다. 
과거에는 장마 때마다 다리가 물에 떠내려가서 매년 새로 외나무다리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사상은 자유로웠던 마을이다. 
조선 시대에는 양반과 농민이 함께 공부하였고, 일제 강점기에는 
항일 운동의 본거지로 양반과 상민, 남녀노소의 구별 없이 민족교육을 실시했던 아도서숙(亞島書塾)이 있었다. 
 6.25전쟁 때에는 좌익과 우익이 공존한 마을이었다.  
면적 대비 전국에서 가장 많은 항일 독립 운동가를 배출한 마을로도 유명한데 독립 유공자만 5명에 이른다

삼봉님 덕분에 영주를 세밀히 살필 수 있었습니다
근래에 이렇게 맛좋은 사과를 처음 먹었구요, 대강막걸리 사가지고 와
집에서 고기를 안주 삼아 마시니 이 또한 특별한 맛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음식 중 하나인 묵밥을맛있게 먹은 것 오랜동안 기억에
남을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