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1년(순조 1) 천주교 신자들이 모진 탄압을 받고 있을 때였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의 형제들도 끌려가 몽둥이찜질을 받았다. 강진에서 18년 동안 귀양살이를 했다. 오랜 귀양살이 중에 《목민심서》, 《경세유표(經世遺表)》, 《흠흠신서(欽欽新書)》 등 많은 저술을 남겨 이 땅의 첫손 꼽히는 개혁사상가가 되었다.북한강과 남한강이 갈라지는 양수리 위쪽 마재는 정씨들의 세거지였다. 이 마을 목사의 막내아들이 바로 우리의 위대한 스승이요 세계적인 학자인 정약용이다. 정약용이 태어날 즈음에는 비교적 나라가 평온했다. 비록 때때로 흉년이 들고 역질이 돌았지만 영조의 탕평책으로 당쟁이 그리 심하지 않았고 외침도 별로 없었다.이런 시대에 태어났으니 그의 생애가 평탄했을 법도 하고 또 뛰어난 재주와 인품을 지녔으니 출셋길이 탄탄했을 법도 했다. 그러나 세상일은 점칠 수 없는 법이다. 상식과는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그는 세 형들 밑에서 여러 지식을 넓혔고 좀 더 자라서는 강 건너 양평에 사는 권철신에게 가서 학문을 익혔다.그리고 광주에 사는 이가환에게서 학문의 깊이를 다지기도 했다. 권철신이나 이가환은 모두 당시의 쟁쟁한 실학자들이었고 성호 이익의 제자들이었다. 정약용은 이들에게서 성호학(星湖學)에 접근해 이익의 실학적 사상을 사숙하기 시작했다. 정약용의 실학정신은 이익을 사숙함으로써 단초를 열어가게 되었다.소년시절에는 아버지 정재원이 지방수령으로 다니자 아버지를 따라 진주지방에서 살기도 했는데, 이때부터 지방행정을 몸소 겪었다. 스무 살 때 과거에 합격해 성균관의 유생이 되었다. 정조는 성균관의 유생들에게 늘 시험을 보였는데 이때 그에게 《중용》을 내려주고 이를 강의하게 했다. 정약용은 임금 앞에서 막힘없이 강의했고 정조는 크게 감탄했다. 호학의 군주 정조는 이때 정약용을 앞으로 중용하리라고 마음먹었다.다음해에 그는 형수의 초상을 치르고 한강에서 배를 타고 서울로 들어오면서 이벽에게서 처음으로 서학에 관한 말과 서양의 과학지식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그는 수표교 옆에 사는 이벽의 집에서 많은 서양서적을 접하고 상당한 과학지식을 쌓기도 했다.정약용은 1789년(정조 13) 마침내 알성시에 급제해 첫 벼슬길에 나섰다. 그는 사헌부 지평, 사간원 정언 등의 언관이 되어 임금에게 여러 정책을 상주하고 간언을 하는 소임을 맡았다. 정조는 젊고 재기발랄한 정약용을 측근에 두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자문을 구했다.정조는 원통하게 죽은 아버지(사도세자)를 찾아 매년 몇 차례에 걸쳐 수원의 능행길에 올랐는데 이때 한강에는 배다리가 놓였다. 정약용은 이 배다리 설치를 맡게 되었고 이 일을 훌륭히 해냈다. 이어 사도세자를 기리기 위해 수원성을 쌓을 적에 설계도와 기구를 만드는 일 또한 그가 맡았다. 그는 일꾼들이 무거운 돌을 힘겹게 지고 올리는 것을 보고 기구의 발명에 골몰했다. 또한 기하학적 방법으로 성의 거리, 높이 따위를 측량해 가장 튼튼하고 단단한 성을 쌓기 위해 연구했다. 마침내 그는 거중기와 활차(滑車, 도르래), 고륜(鼓輪, 바퀴달린 달구지) 따위를 발명해 성의 역사에 써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