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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회암사(천보산-칠봉산)20210427느

應觀 2021. 4. 30. 09:18

2021년 3월 27일 화요일

덕정역-회암사 답사-회암사 주변 부도 참배-천보산-칠봉산-양주

회암사(檜巖寺) 창건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고려 명종 4년(1174년) 금나라 사신이 이 절에 들렀다는 기록은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12세기 중엽 이전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유명한 고승들과 왕실의 지원이 각별했던 회암사는 충숙왕 15년(1328년) 원나라를 거쳐 고려에 들어온 인도의 승려 지공(指空 · 1300?~1363)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인도의 나란다사(羅難陀寺)를 본떠 중창에 깊은 관심을 가졌었다고 전해진다. 회암사는 지공의 제자로서 중국에서 돌아온 나옹(懶翁)이 본격적인 중건불사를 했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제자들이 계속 중건한 것으로 전해진다 조선 초에는 무학(無學)이 주지로 재임했고, 이성계도 태종에게 왕위를 물려준 후 회암사에서 기거했다. 세종대왕의 형인 효령대군도 이곳에서 불도를 닦았다. 이런 이유로 조선조 건국이념인 숭유억불 속에서도 회암사는 왕실의 비호 아래 명목을 유지할 수 있었다. 고려 말 대학자인 목은 이색(牧隱 李穡)이 지은 <목은집(牧隱集)>에 ‘3,000여 명의 승려가 머무르는 대사찰로, 건물은 모두 262칸이며 16척의 불상 7구와 10척 관음상이 있다. 건물들이 크고 화려하기가 동국(東國) 제일이며 중국에서도 이렇게 큰 사찰을 찾기 힘들 것’이라고 기록했다. 회암사는 지공 이후로 보우가 거처하던 때까지 200년가량 번창하다가 문정황후 사후인 1566년(명종 21년)~ 1595년 사이 유생들에 의해 폐사된 것으로 보고 있다. 회암사지는 사적 제128호로 지정되어 있다. 회암사지 박물관에는 1977년부터 시행된 발굴과정에서 출토된 청동금탁(풍경의 일종), 청기와, 용문암막새, 봉황문수막새, 잡상(작은 조각 작품) 등이 전시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