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서예와주역

董其昌 에관하여

應觀 2019. 3. 24. 21:29

  현상(玄常), 董其昌         

       


동기창


동기창은 명나라 말기의 화가이자 서예가로, 명나라 시대 가장 뛰어난 예술가 중 한 사람으로 꼽힌다. 그는 시, 서, 화에 두루 능했을 뿐만 아니라 《화안(畵眼)》, 《화지(畵旨)》, 《화선실수필(畵禪室隨筆)》 등의 저술을 통해 중국화론을 정립했다. 그는 중국화를 북종화와 남종화로 나누고 그 계보를 정리하여 분석하면서 남종화를 문인화로 규정짓고 우대했다. 그리하여 이후 직업 화가들까지 양식적으로 문인화풍을 따랐다. 그의 화론과 문인화 양식은 조선에도 영향을 끼쳤으며, 중국화는 지금까지도 동기창이 정리한 방식으로 분류된다.

동기창은 명나라 말기였던 1555년 1월 19일에 강소성에서 태어났다. 자는 현고(元宰), 호는 사백(思白), 향광(香光), 시호는 문민(文敏)이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남에게 지는 것을 싫어한 성격으로 유명했는데 13세 때 향시에서 조카 동부서보다 글씨가 부족하여 2등으로 합격하자 17세 무렵부터 서예에 매진하여 위대한 서예가가 되었다는 일화가 대표적이다. 또한 그는 관직 생활과 서화가로서의 모습이 극명히 다른 인물로도 유명하다. 서화가로서의 그는 세속에 초탈하고 고고함을 유지할 것을 중시하며 문인화의 이상을 세웠다. 그러나 정치가로서는 야망이 컸으며, 부를 축적하는 데도 열심이었다. 수많은 그림 요청을 받아들이고, 대필을 서슴지 않았으며, 토지 겸병을 일삼았다고 한다. 또한 당대 명망을 떨치던 화가 서위가 죽었을 때 다른 사대부 화원들은 그의 전기를 썼으나, 누구보다 그림에 대해 해박한 이론가이자 화가였던 동기창은 화론을 쓸 때조차 서위를 언급하지 않았다.

동기창은 청년 시절 집이 가난하여 동네 서당에서 글을 가르쳐 생계를 꾸렸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23세 때부터로, 막여충, 육수성 등에게 배웠다. 초기에는 원말 사대가의 작품을 모방했으나 관직에 등용된 이후에는 저명한 수집가들을 비롯해 동료들의 집에서 고서와 명화를 보고 배웠으며, 송 대의 회화 기법을 주로 익혔다. 그는 그림 그리는 법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먼저 옛 사람을 스승으로 삼고, 다음으로 자기 스스로 노력해 발전해야 하며, 여기에서 더 나아가면 천지자연을 스승으로 삼게 된다.”

동기창은 35세 때인 1589년에 진사 시험에 급제해 한림원 서길사에 제수되었으며, 이후 승진을 거듭하여 남경예부상서, 태자태보까지 이르렀으나 관직 생활은 평탄하지 않았다. 왕세자 책봉이 잘못되었음을 아뢰는 상소 사건에 참여했다가 황제의 미움을 사 자진해 귀향한 적도 있었으며, 호북과 호남 지역을 감찰할 때 세도가들의 청탁을 받아 주지 않아 관직에서 물러난 일도 있었다. 또한 환관들이 정국을 좌우하면서 당쟁이 극심해지자 스스로 은거 생활에 들어가기도 했다.

동기창은 관직 생활 초기에 이미 서예와 그림의 대가로 정평이 나 있었다. 그는 서예와 그림을 체계적으로 공부하고 분류했으며, 감식에도 뛰어났다. 37세 때 《논서화법(論書畵法)》을 시작으로 화론을 집필하기 시작해 화론가로도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서예에서는 왕희지의 글씨체를 바탕으로 한 행서와 초서에 뛰어났는데, 글씨체보다는 내용을 중시해 당대 제일의 문인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림에서는 남종화를 대성하였고, 이후 중국 회화가 남종화풍으로 흘러가는 데 일조했다.

동기창의 초서체

그는 《화선실수필》, 《화지》 등에서 벗이자 동료인 막시룡이 제시한 바에 따라 중국화를 북종화와 남종화로 나누어 그 계보를 분류하고 각각을 정의했다. 남종화는 문인화라고도 불리는데, 화가의 내면 표현과 직관을 중시하며 추상성이 강하다. 반면에 북종화는 사실주의적인 경향이 강하며, 기교 표현이 중요하다. 동기창은 북종화는 주로 직업 화가들이 그린 것으로 내면의 본질을 표현하기보다 시각적으로 아름다운 화면을 만들고 기교에 충실한 반면, 남종화는 주로 시인과 문인화가들이 그린 바답게 직관적인 표현과 감수성이 풍부하게 담겨 있다고 평했다. 문인적 이상이 담겼다는 이유로 남종화를 북종화보다 우위에 두었으며, 서예 역시 개인의 진정한 본질을 추상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라 하여 우대했다.

이처럼 동기창은 화론에 있어 형식과 기교보다 표현과 해석을 중시했지만, 그는 누구보다 다양한 방식의 기교에 능한 화가였다. 필법과 묵법을 다양하게 운용하여 화면에 입체감과 변화를 풍부하게 했으며, 화면 한쪽에서 그려 나가는 기존 방식에서 탈피해 체계적으로 화면을 분할하고 적절히 통합하여 통일감 있는 구도를 취하기도 했다.

〈고일도(高逸圖)〉, 〈방장승요산수(仿張僧繇山水)〉에서는 선명하고 다양한 필법으로 대상을 표현하는 솜씨가 정교하기 이를 데 없으며, 〈방미가산수(仿米家山水)〉에서는 물로 먹의 농담을 조절하여 색이 지닌 느낌을 탁월하게 표현했다. 나이가 들수록 느슨한 필법과 묽은 색채를 자유롭게 운용하면서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그림을 그렸는데, 〈추경산수도(秋景山水圖)〉에서는 추상에 가까운 공간 배치와 여유로운 필치, 서정적인 주제가 돋보인다.

〈추경산수도〉

샌프란시스코 동양 미술관


동기창은 세속적인 속박에서 벗어나 천지만물의 근원을 탐구하고 표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문인의 이상 한가운데서 문인화의 전통을 일구었으며, 더 나아가 체계적인 연구를 토대로 내용과 형식 측면에서 고대의 화법과 새로운 화법을 융합했다. 그의 작품과 화론으로 문인화는 명말 청초 최고의 경지에 이른다.

동기창은 예부터 전해지는 진귀한 화첩들을 수집하고 정리해 간행했다. 뿐만 아니라 만력, 태창, 천계 세 왕조의 실록을 편찬하는 사업에도 참여하여 명나라 시기에 학술과 문화가 발전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80세에 이르기까지 관직 생활을 한 뒤 사직소를 올리고 정계에서 은퇴했다. 은퇴 후에는 고향으로 돌아가 약 2년간 은거하며 서화를 즐겼다. 그가 죽은 시기는  1636년 겨울 무렵으로 추정된다. 이듬해 태자태부에 추증되었으며, 1944년 문민(文敏)이라는 시호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