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광지해설_스페인 폴투갈.
1일 2018년 05월 10일 (목) [지역] 인천
인천 미팅시간 : 21:00 (예정) 미팅장소 : 인천공항 3층 M 카운터 25번 테이블 "참좋은여행" 피켓 인 솔 자 : 고객님의 출발일 2~3일 전에 안내드립니다.
00:15 EY873 인천 출발/아부다비 향발
인천공항 미팅장소 제 1터미널/M카운터(1~2번)
에티하드
아랍에미리트 연합의 국영 항공사인 Etihad Airways (에티하드 항공)은
월드트래블어워드 ‘2009~12 4년연속 최고항공사로 선정된 항공사입니다
1. 항공 업계 최고의 품질 기준인 스카이트랙스 선정 5성급 항공사
2. 아시아나 또는 대한항공 마일리지 1인 약_7,400마일리지 적립 (선택가능)
3. 세계에서 가장 넉넉한 공간과 인체공학적으로 설계된 좌석
4. 대부분의 항공기에 설치된 10.4 인치 터치 스크린
5. 좌석에 내장된 전원 콘센트
6 오디오/인터넷 연결 가능
7 인체공학적으로 편안한 자세를 찾아주는 요람과 같은 느낌의 안락 의자
8. 어린이 승객의 즐거움을 위한 패밀리 패키지 9. 항공 여행의 피로를 풀어주는 편안한 조명
여행일정표 호텔 APOGIA HOTEL CLASS 또는 일급 또는 투어리스트급
식사 조식 중식 석식 호텔식
2일 2018년 05월 11일 (금) [지역] 아부다비-두바이-아부다비
아부다비 05:45 아부다비 도착
두바이로 이동하여
파리 개선문 모양의 두바이 국제금융센터 에미레이츠 타워, 무역센터 조망 데이라와 부르두바이를 연결하는현지인들의 이동수단 "수상택시 아브라" 탑승 바스타키아 "21세기 바벨탑" 세계 최고층 828M 버즈 칼리파 외부 조망
모래 위에 세워진 '열망의 도시' 두바이
초고층 빌딩 분수 쇼, 사막의 석양, 인공섬…
꿈같은 하루가 간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金시장
소매점 300개… 곳곳이 '번쩍번쩍'
인공수로 주변으로 초고층 빌딩들이 들어선 두바이 마리나의 전경.
1년 내내 태양으로 이글대는 황금빛 사막 위 신기루처럼 솟은 도시가 있다. 중동의 뉴욕, 아랍의 베니스, 사막의 기적이라 일컬어지는 두바이다. 구름보다 높은 초고층 빌딩들은 찬란하게 빛나고, 바다 위에 그려진 갖은 모양의 인공 섬들은 세계 지도의 모양을 시시각각 바꾼다. 세계 최고, 세계 최대, 세계 최초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한 도시 한쪽에는 두바이의 과거가 담긴 또 다른 세상이 있다. 세월의 흔적이 가득한 부둣가에는 전통 배 수십 척이 물살에 삐걱대며 여행객을 기다린다. 시원한 바람이 살랑이는 물길을 건너면 시간은 한 세기를 훌쩍 거슬러 오른다. 구불구불 이어진 골목 사이사이마다 진주조개와 대추야자가 전부였던 소박한 지난날들이 알알이 박혀 있다. 두바이= 글·사진 고아라 여행작가 minstok@naver.com
창조적 상상력과 중동 자본의 합작품
두바이는 아랍에미리트(UAE)를 이루는 7개의
토후국 중 하나다. 수도는 이웃 국가인 아부다비지만 관광과 상업으로 따지자면 단연 두바이가 한 수 위다. 아랍어로 ‘메뚜기’란 뜻을 지닌 두바이는 19세기까지만 해도 맨손으로
잡은 진주조개와 대추야자를 수출하며 삶을 꾸려나가던 작은 어촌에 불과했다. 1958년 라시드 국제무역항
건설을 추진하며 중동의 허브로 발걸음을 내디뎠고 1966년 유전이 발견되면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하기
시작했다. 두바이의 현재는 단순히 석유가 안겨다준 거대 자본으로만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사실 두바이의 석유 매장량은 그리 많지 않다. 막강한 오일머니를
보유한 것은 아부다비다. 현 두바이의 국왕 셰이크 무함마드는 물질적 자원은 결코 무한하지 않음을 일찌감치
깨달았다. 석유가 고갈된 후에도 두바이의 가치가 사라지지 않도록 물류,
항공, 관광 인프라 구축에 과감한 투자를 단행했다.
인공섬을 만들어 해안선을 늘리고, 세계에서 가장 높은 빌딩을 세우고, 해저에 호텔을 짓는 것과 같은 꿈 같은 일들을 실현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니까
두바이는 창조적 상상력과 추진력, 그리고 이를 뒷받침한 중동 자본의 합작품이다. 두바이 중심을 가로지르는 셰이크 자이드 로드(Sheikh Zayed
Road)를 따라 달린다. 하늘에 닿을 듯 높이 솟은 도시의 마천루가 마치 심시티의 실사판을
보는 듯하다. 불과 20년 전만 해도 이곳이 모래바람 휘날리는
황무지였다는 사실이 좀처럼 믿어지지 않는 광경이다. 두바이의 신시가지는 세계 최초, 세계 최대, 세계 제일과 같은 화려한 수식어들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무대다.
두바이의 영원한 상징 버즈 알 아랍(Burj Al Arab)호텔, 아름다운 주메이라(Jumaeirah)의 해변, 전통시장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수크 마디낫 주메이라(Souk Madinat
Jumeirah), 인공수로를 따라 초호화 주거단지와 요트클럽 등이 모여 있는 두바이 마리나(Dubai
Marina)까지 발 딛는 곳마다 놀라움의 연속이다. 바다도 예외는 아니다. 초승달과 야자수 모양으로 만들어진 팜 주메이라(Palm Jumeirah)를
필두로 팜 제벨 알리(Palm Jebel Ali), 팜 데이라(Palm
Deira), 세계지도를 그대로 본떠 만든 더 월드(The World)와 같은 인공섬들이
두바이 앞바다를 스케치북 삼아 하나둘 그려지고 있다.
세계 최고층 빌딩에서 즐기는 분수 쇼
눈이 휘둥그레지는 별천지에서도 단연 눈에 띄는 것은 부르즈 칼리파(Burj Khalifa)다. 본래 두바이의 탑이란 의미의 부르즈 두바이(Burj Dubai)로
불렸지만, 개장 후 UAE 대통령의 이름을 딴 부르즈 칼리파로
명칭이 바뀌었다. 현존하는 세계 최고층 건물인 부르즈 칼리파의 높이는 약 828m, 서울 롯데타워 1.5배에 달한다. 고개를 한껏 꺾어도 한눈에 담기가 버거울 정도다. 바로 옆에는 두바이에서
가장 큰 쇼핑몰인 두바이 몰(Dubai Mall)이 있다. 축구장 50개 크기와 맞먹는 규모에 1200개가 넘는 상점과 200여 개의 레스토랑, 실내 아이스링크, 영화관은 물론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아쿠아리움까지 갖춰진 복합 문화 공간이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두바이 몰의 아쿠아리움. 마치 해저 속에 들어와 있는 착각이 든다.
라스베이거스의 벨라지오 분수 쇼, 바르셀로나의 몬주익 분수 쇼와 더불어 세계 3대 분수 쇼라 불리는 두바이 분수 쇼는 놓치지 말아야 할 볼거리다. 음악에
맞춰 부드럽게 춤추던 물줄기가 최대 150m 높이까지 치솟는다. 테라스가
있는 레스토랑에서 식사하며 감상하면 낭만은 두 배가 된다. 부르즈 칼리파 124층에 있는 전망대 앳 더 탑(At the Top)에 오르는 것도
잊지 말자. 두바이 최고 명소답게 언제나 인파로 북적대고 대기시간도 만만치 않지만 기다림이 헛되지 않다. 인간이 만든 가장 높은 건물에서 바라보는 두바이의 풍경은 상상 그 이상이다.
낙조 무렵에 찾는다면 주경과 야경을 동시에 볼 수 있어 좋다. 상공에서 내려다보는 두바이
분수 쇼는 색다른 즐거움을 선사한다.
두바이의 떠오르는 핫플레이스 알세르칼
알 쿠오즈(Al Quoz) 지역에 있는 알세르칼 애비뉴(Alserkal
Avenue)로 향한다. 이곳은 원래 공장과 카센터가 밀집해 있던 지역이었다. 2007년 투박하기만 하던 회색 컨테이너에 갤러리, 카페, 작업실, 공연장, 편집숍들이
들어서면서 예술 거리를 형성했고 현재는 중동 예술의 중심지로 떠올랐다. 세계적인 건축사 OMA가 설계를 맡은 콘크리트(Concrete)도 이곳에서 만나볼
수 있다. 네모난 건물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한국에서는 쉽게 접할 수 없는 예술가들의 작품과 트렌디한
숍들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알세르카 예술가들의 사랑방으로 통하는 A4 스페이스 카페, 중동 지역에서 나는 독특한 향신료를 섞어 만든
수제 초콜릿 가게 미르잼 초콜릿 팩토리, 친환경을 주제로 한 하피 카페(Hapi Cafe) 등이 유명하다.
중동 현대 예술의 허브 알세르칼 지구의 전경.
다운타운과 인접한 곳에 있는 해변 라 메르(La Mer)는 두바이에서 새롭게 떠오르는 핫플레이스다. 다른 관광명소에 비해 덜 알려진 편이라 여행객보다는 로컬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많다. 약 2.5㎞ 길이의 에메랄드빛 해변을 따라 수많은 상점이 늘어서 있다. 두바이 현지식부터 지중해식, 패스트푸드, 한국식 디저트 등 세계 각국의 음식을 파는 레스토랑과 푸드트럭까지 마련돼 있어 입도 즐겁다. 곱게 단장된 산책로를 따라 익살스러운 벽화와 해변을 주제로 한 아기자기한 조형물, 어린아이들이 뛰놀 수 있는 트램펄린까지 갖춰져 있어 남녀노소 모두 즐기기에 좋다.
전통시장 수크 마디낫 주메이라.
최첨단 도시로 거듭났다고 해서 두바이의 옛 얼굴이 완전히 지워진 것은 아니다. 페르시아만의
바닷물이 흘러들어 만들어낸 두바이 크릭 주변에 형성된 구시가지에는 도시의 100년 전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구시가지는 크릭을 중심으로 두고 데이라(Deira) 지역과
부르 두바이(Bur Dubai)로 나뉜다. 대부분의 역사
유적지는 부르 두바이에 모여 있는데 알 파히디 역사지구(구 바스타키야)가
대표적이다. 바스타키야(Bastakiya)는 무역업이 번성하던
시절 이란 남부 바스탁 지역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이 형성했던 마을이다. 60여 채의 전통가옥이 보존돼
있는데 현재는 갤러리, 게스트하우스, 카페, 레스토랑 등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곳의 건물들은 상부에 하나같이 네모난 탑을 달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언뜻 보면 굴뚝같기도
하지만 고온 건조한 사막성 기후를 극복하기 위한 아랍인들의 지혜가 담긴 윈드 타워(Wind Tower)다. 타워의 구멍을 통해 들어온 뜨거운 바람이 건물 하부에 저장된 물을 만나 차가운 공기로 변환되면서 건물 전체를
시원하게 만든다. 일종의 천연 에어컨인 셈이다.
황톳빛의 전통가옥 사이로 좁은 골목이 미로처럼 이어진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사진과 회화, 조각 등 다양한 예술작품들로 꾸며진 갤러리를 구경하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땅거미가 내려앉자 골목은 주황색 가로등 불빛에 물들기 시작한다. 기도시간에
맞춰 들려오는 아잔 소리, 이슬람 전통 의상을 입고 돌길을 거니는 아랍인들의 모습이 신비로움을 더한다. 데이라 지역으로 가기 위해 선착장으로 향한다. 단돈 1디르함(약 300원)을 내고 두바이 전통 목선인 아브라(Abra)에 올라탄다. 크릭에는 전 세계에서 몰려온 여행객과 상인들을 골고루 태운 아브라 수십 척이 둥둥 떠다닌다. 사공이 모터에 시동을 걸자 석유 냄새와 강바람이 뒤섞인다. 데이라
지역의 가장 큰 볼거리는 단연 전통 수크(Souk)다. 수크란
아랍어로 시장을 의미하는데 골드 수크(금 시장)와 향신료
시장이 대표적이다. 금의 도시라는 별명을 지닌 두바이답게 데이라의 골드 수크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규모를 자랑한다. 400여 개의 도매상과 300개의 소매점이
자리 잡고 있는데 시장 전체가 금, 은, 갖은 보석들로 번쩍번쩍
빛난다.
스릴 넘치는 사막 듄베이싱 그리고 황홀한 석양
두바이 국토의 98%는 사막이다. 휘황찬란한
빌딩 숲, 아름다운 해변, 역사 유적지도 좋지만 사막을 빼놓고는
두바이를 논할 수 없다. 사막을 즐기는 방법은 다양하지만 그중 가장 인기 좋은 것이 사막 사파리 투어다. 느지막한 오후 호텔로 픽업 나온 차를 타고 사막으로 향한다. 달린
지 채 30분도 되지 않아 현대 문명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주변은 온통 아득한 사막이다. 투어가 시작되는 장소에 도착하자 수백 대의 사륜구동 자동차들이 타이어에 공기를 빼느라 분주하다. 준비를 끝마친 자동차들은 모래바람을 휘날리며 사막 속으로 사라진다. 사막의
능선을 롤러코스터처럼 빠르게 타는 듄베이싱을 즐기고 나면 일몰을 감상할 시간이다.
두바이의 아름다운 황금빛 사막.
사구의 꼭대기에 자리를 깔고 앉아 뜨겁게 지는 석양을 만끽한다. 해가 지고 나면 베두인식
캠프로 향한다. 좌식 테이블과 두꺼운 방석이 마련된 캠프 주변에는 헤나, 전통 물담배인 시샤, 낙타 등을 체험하는 텐트들이 마련돼 있다. 베두인 전통음식으로 꾸려진 저녁식사가 차려지고 중앙에 마련된 무대에서는 공연이 시작된다. 밸리댄스를 추는 무희의 강렬한 춤사위에 여행객들의 어깨가 들썩이기 시작한다.
곧이어 남성 댄서가 치마를 연상케 하는 복장을 갖춰 입고 이집트 전통춤인 탄누라를 추기 시작한다. 끊임없이
회전하며 무아지경에 빠져드는 모습에 여기저기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온다. 공연이 끝나자 캠프를 밝히던
모든 조명이 꺼지고 고요의 시간이 찾아온다. 칠흑 같은 사막의 밤하늘에는 별이 총총하다. 두바이의 꿈같은 하루가 저문다.
두바이=글·사진 고아라 여행작가
minstok@naver.com
아부다비로 이동
바다 위에 떠있는 궁전으로 불리는 7성 호텔 에미레이트 팰리스 호텔 조망 세계 교육 문화의 허브로 만들어지고있는 SSADIYAT ISLAND로 이동하여 행복의 섬 프로젝트 전시관 관람 SSADIYAI ISLAND 홍보관 관람 세계에서 5번째로 큰 그랜드모스크 내부관람 후 (그랜드모스크 입장 시 여성은 긴 바지, 긴 치마 권장합니다.)
아부다비 Abu Dhabi |
아랍 에미리트 |
요약 아랍에미리트를 구성하는 7개 토후국 가운데 가장 큰 나라로 아랍에미리트 전체면적의 3/4 이상을 차지한다. 내륙과 페르시아 만에 유전이 많이 위치하고
있어 두바이와 함께 아랍에미리트에서 가장 번성한 토후국으로 손꼽힌다. 아부다비는 북쪽으로 페르시아 만에
접해 있다. 서쪽으로 카타르, 남쪽으로 사우디아라비아, 동쪽으로 오만을 경계로 하며 내륙으로는 두바이를 반쯤 둘러싼 채 샤르자와 짧게 국경을 맞대고 있다.
아부다비의 경제는 거의 전적으로 원유 생산에 바탕을 두고 있다. 과거 황무지였던 다스 섬은
활주로, 액화 가스 공장, 부속시설과 함께 유조선을 수용할
수 있는 항구를 갖추고 있다. 석유 수출은 1962년에 시작되었다. 아부다비의 총석유매장량은 세계 석유매장량의 거의 1/10을 차지한다.
아부다비
코니쉬 해변
국경선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 아랍에미리트를 구성하는 7개 토후국 가운데 가장 큰 나라로 아랍에미리트 전체면적의 3/4 이상을 차지한다.
내륙과 페르시아 만에 유전이 많이 위치하고 있어 이웃 두바이와 함께 아랍에미리트에서 가장 번성한 토후국으로 손꼽힌다. 아부다비 토후국은 북쪽으로 페르시아 만에 접해 있다. 해안선의 길이가 450㎞에 이르며 수많은 앞바다의 섬들을 포함하는 연안지역은 사람이 살지 않는 황무지로 염생습지들이 곳곳에 흩어져 있다. 서쪽으로 카타르, 남쪽으로 사우디아라비아, 동쪽으로 오만(옛 이름은 무스카트오만)을 경계로 하며 내륙으로는 두바이를 반쯤 둘러싼 채 샤르자와 짧게 국경을 맞대고 있다.
아부다비는 18세기 이후 바니야스족의 한 갈래인 알부팔라 일족의 영토가 되었다. 이들은 처음에 알리와(알지와) 오아시스 지역에 정착했으나 1761년 지금의 아부다비 시가 있는 해안지역에서 식수로 적합한 여러 개의 우물을 발견하고는 1795년부터 이 지역을 본거지로 삼았다.
전통적으로 라스알카이마·샤르자를 지배한 해적 가문인 카와심 왕조와 적대관계에 있었으므로 역시 이들과 적대 관계에 있던 무스카트오만 술탄국과 동맹을 맺었으나 19세기에 현재 사우디아라비아 왕조의 선조인, 나지드 지방의 와하비족이 세력을 넓히게 되면서 무스카트오만·와하비족·아부다비 사이에 영토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 상황은 국경문제로 비화된 채 아직까지 해결되지 않고 있는데, 가장 심각한 분쟁지역은 알부라이미 오아시스 지역이다.
해적국가는 아니었지만, 아부다비는 해적문제를 빌미로 영국이 주도하는 일반평화협정(1820)·해상휴전협정(1853)·영구해상평화조약(1853)을 맺고 1892년에 배타협정을 맺음에 따라 외교문제에 있어 영국의 통제를 받게 되었다.
셰이크 자이드 이븐 할리파(1855~1908 재위)가 통치하는 동안 아랍에미리트 연합국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로 부상했으나 20세기초 샤르자와 두바이에 자리를 내주게 되었다.
1968년 영국이 페르시아 만에서 철수할 것을 밝히자 바레인, 카타르, 트루셜스테이츠의 다른 토후국들과 함께 9개 토후국으로 이루어진 연합국을 세우기로 합의했다. 1971년 바레인과 카타르가 따로 독립해 나가고 영국이 이전에 트루셜스테이츠와 맺은 협정을 폐기한 후 아부다비를 중심으로 아랍에미리트가 성립되었다. 1971~76년 임시수도였던 아부다비 시는 1976년 7월 아랍에미리트 임시헌법과 함께 수도로서의 시한이 5년 더 연장되었다.
아부다비의 경제는 거의 전적으로 원유 생산에 바탕을 두고 있다.
1958년 움샤이프 해저 유전에서 발견된 석유는 해안에서 125㎞ 떨어진 수심 2,750m의 해저에서 해저 송유관을 통해 서쪽으로 약 32㎞ 떨어진 다스 섬으로 운반된다. 과거 황무지였던 다스 섬은 활주로, 액화 가스 공장, 부속시설과 함께 유조선을 수용할 수 있는 항구를 갖추고 있다. 석유 수출은 1962년에 시작되었다. 육지에서는 주로 무르반·바브아사브·부하사 유전을 중심으로 석유 생산이 이루어지고 있다.
해안에서 40~65㎞ 떨어진 토후국 중심부에 위치한 이들 유전지대에서 생산된 석유는 송유관을 통해 앗잔나(단나) 산 북서쪽 해안까지 운송된다. 아부다비 시 바로 북서쪽에 자리잡은 루크앗자쿰(라크앗자쿰) 뱅크에도 해저 유전이 있어 해저 송유관을 통해 다스 섬과 연결된다. 아부다비 시 북쪽 약 88㎞ 지점에 있는 페르시아 만의 파트흐(파테 또는 파타)에도 해저 유전이 있다.
아부다비의 총석유매장량은 세계 석유매장량의 거의 1/10을 차지하는 900억 배럴로 추산되며, 1980년대초 연간생산량은 약 5억 1,100만 배럴이었다. 석유세입으로 세계에서 1인당 국민소득이 가장 많은 나라 가운데 하나가 된 아부다비는 그 부를 국내의 현대화 사업에 사용하는 외에 아랍에미리트의 가난한 형제 국가들을 비롯, 다른 아랍 국가들과 타지역 개발도상국가들에 차관으로 제공한다. 아부다비 시 부근 앗사디야트에는 건조지대 연구소가 있어 채소재배법을 연구하고 있다.
아부다비
아부다비 아랍에미리트 및 아부다비토후국(土侯國)의 수도.
아부다비의 걸프해안
위치 |
아랍에미리트 및 아부다비토후국(土侯國) |
경위도 |
동경 54°22′, 북위 24°28′ |
면적(㎢) |
67 |
시간대 |
UTC+4 |
홈페이지 |
www.abudhabi.ae |
인구(명) |
621,000(2012년) |
아부자비(Abū aby)라고도 한다. 페르시아만(灣)에 면한 아부다비섬의 대부분을 차지하며, 본토와는 인공제방에 의해 연결되어 있다. 1958년 앞바다에서 매장량 5억t으로 추정되는 해저유전이 발굴되면서 정치적·경제적 지위가 높아졌다. 1968년에 시작된 5개년개발계획에 힘입어 현대식 관공서와 호텔·공영주택이 들어서고, 부근 섬에는 정유공장과 채소작물을 다량으로 생산하는 건조지대 연구소가 입지해 있다. 고속도로에 의해 북동쪽의 두바이, 동쪽의 아인 오아시스와도 연결된다.
아부다비 [Abu Dhabi] (두산백과)
호텔로 이동 후 휴식
호텔 RESIDHOTEL LE GRAND PRADO CLASS 또는 일급 또는 투어리스트급
식사 조식 호텔식 중식 현지식 석식 중국식
중동의 오아시스 두바이
두바이는 중동의 떠오르는 신흥 도시로 높은 화려한 건물들이 인상적이다. 전 세계에서 최고의 호텔로 인정받는 버즈 알 아랍과 우리나라의 삼성이 건설한 828m 높이의 버즈칼리파 등 신비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이와 더불어 중세의 아라비 안 생활상을 느낄 수 있는 재래시장과 두바이 박물관, 이슬람 문화를 느껴볼 수 있는 쥬메이라 모스크 등 다양한 볼거리가 넘쳐난다.
두바이를 대표하는 건축물 부르즈 칼리파는 최고 높이 828m를 자랑하는 가장 높은 빌딩입니다. 우리나라의 삼성물산에서 시공하였으며, 각종 TV 프로그램을 통하여 국내에도 잘 알려진 건물로써 특히 부르즈 칼리파의 123, 124층 전망대 에서 내려다보는 두바이의 전경이 아름답습니다. 인근에 대형 쇼핑몰이 자리잡 고 있어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입니다.
두바이의 역사
아랍에미리트 연방을 구성하는 7개국 중의 한 나라로, 전에는 트루셜오만의 구성국 중 하나였다. 두바이는 아랍어(語)로 ‘메뚜기’를 뜻하며, 아랍 일대 대상들이 모여드는 중계 무역기지였다. 고온 건조한 사막기후로 모래바람이 불어온다. 종교는 약 7세기 경 이슬람교가 전해진 이후 페르시아 문화의 영향을 받았으며 이후 무역으로 인해 유럽문화의 영향도 많이 받게 되었다. 16세기에는 아시아와 아프리카로 진출하려는 포루투갈과 영국, 독일, 프랑스 유럽 열강들의 각축장이 되었으며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1833년 알 막툼(Al Maktoums)이 약 800여 명의 부족을 이끌고 아부다비로부터 독립하여 두바이에 새롭게 정착하였으며 이후 악 막툼 계가 두바이를 통치하고 있다.
국제무역항으로 성장의 기반 마련
토후국 중 유일한 국제 무역항으로 발전하여 중계무역지가 되었다. 19세기 들어 영국과 협정을 맺어 보호속에 있었고 당시는 진주조개 잡이와 어업, 그리고 대추야자 정도가 주된 사업이었다. 하지만 이후 금(金)세공과 유통산업이 주된 사업으로 부상하였으며 지금까지도 금시장은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두바이는 1958년 셰이크 라시드 국왕이 추진한 중동의 유통기지와 중심도시로 부상하기 위해 1958년 두바이 중동 최대규모의 항구(라시드 항구)를 건설하였으며 1964년에는 석유가 발견되어 두바이의 발전은 더욱 탄력을 받게 되었다. 1969년부터 석유를 수출하기 시작했으며, 1971년에는 650만 톤의 원유를 수출하여 새로운 산유국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후 석유 수출로 인한 수입이 GDP의 대부분을 차지하였으나 다른 산유국에 비하여 매장량은 아주 적은 편이다. 셰이크 라시드 국왕이 사망하고 그의 아들 셰이크 모하메드 국왕(Mohammed bin Rashid Al Maktoum)은 두바이의 성장을 가속시켰다. 자유무역단지 조성 등에 힘써 물류·항공·관광 인프라를 갖춘 중계무역지로 발전하면서 '중동의 뉴욕'으로 불리게 되었는데 이런 명성을 얻기까지 겨우 60년 정도가 걸렸을 뿐이다.
세계 금융과 허브공항으로 발전
중동의 막대한 오일달러를 앞세워 적극적으로 투자하면서 중동의 금융중심지로 발전하였고, 세계 각 대륙과 나라를 연결하는 허브공항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바다를 매립하여 인공섬을 만들고 새로운 개념의 인공 도시인 팜 아일랜드(Palm Island)를 건설하고 있으며 두바이의 이러한 계획은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다. 팜 아일랜드 인공도시는 팜 데이라(Palm Deira), 팜 제벨알리(Palm Jebel Ali), 팜 주메이라(Palm Jumeira) 3개 섬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야자수 모양의 타운을 형성한다. 세계적인 부호와 유명인들이 두바이 호화 부동산을 분양받으면서 두바이의 새로운 기적을 이루어낸 도시로 주목받고 있다. 세계최고의 실내 스키장, 최대규모의 쇼핑몰(Dubai Mall) 등을 자랑하며 해마다 많은 관광객이 두바이를 찾는다. 하지만 자체 산업기반이 취약하고 부동산 개발을 중심으로 단기간에 과도한 투자와 개발이 이루어진데다가 2007년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에서 비롯된 세계적 금융위기가 겹쳐 투자 자본이 빠져나가면서 2009년 국영기업 두바이월드가 모라토리엄(채무지급유예)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두바이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찾고있는 비지니스와 휴양을 겸하는 도시이며 세계최고 수준의 호텔이 운영된다. 두바이가 새롭게 변모하면서 예전의 모습은 대부분 사라지게 되었는데 그 중 두바이의 역사와 전통 남아있는 바스타기야(Bastakiya)가 있다. 이곳에는 두바이 역사를 체험할 수 있는 곳이다. 두바이는 2020년 세계엑스포대회를 개최하는 도시로 선정되었고 세계적인 테마공원들이 건설될 예정이다. 세계 최고층(828m) 빌딩 부르즈 칼리파(Burj Khalifa)가 있다. 한국은 건설업체들이 많이 진출해있고 인천과 두바이간 에미레이트 항공사에서 매주 7회 A380항공기가 운항하고 있다. 시차는 한국보다 5시간 늦다.
두바이 [Dubai] (두산백과)
부르즈 칼리파
아부다비의 거대한 랜드마크, 그랜드 모스크
82개의 돔과 1천개의 기둥이 모두 이탈리아에서 직수입된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순백의 건축물이어서 햇빛을 받고 있는 모습이 너무나도 아름다운 그랜드 모스크는 단순히 관광지로만 쓰이는 것이 아닌 실제 사용하는 사원이어서 건물 내부에 코란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내부 또한 외관 못지않은 어마어마한 규모를 자랑하는데 4만 명의 이슬람인들이 동시에 기도 를 드릴 수 있고, 그곳에 당당히 자리하고 있는 세계 최대 규모의 샹들리에 또한 멋지게 빛나고 있습니다. 상상보다 훨씬 더 거대한 규모와 그 휘황찬란한 아름다움에 눈이 휘둥그레집니다. TIP. 그랜드 모스크 입장 시 여성분들은 머리에 두를 수있는 스카프도 지참해주셔야합니다.
부르즈 할리파 [Burj Khalifa]
아랍에미리트의 두바이에 건설된 인공 구조물이다. 전체 높이 829.84m이다.
부르즈 두바이
부르즈는 아랍어로 '탑'이라는 뜻이며, 할리파는 아랍에미리트(UAE) 대통령의 이름인 할리파 빈 자이드 알나하얀(Khalifa bin Zaid al-Nahayan)에서 땄다. 개장되기 전까지 '버즈 두바이(burj dubai)'로 불렸다.
아랍에미리트 두바이의 신도심 지역에 건설된 초고층 건물로, 전체 높이는 829.84m이다. 2004년 9월 21일 착공하여, 2007년 7월 141층, 높이 512.1m를
넘어섰다. 마지막 층인 160층은 2008년 3월에 마무리되었고, 착공 38개월만인 2008년 4월 8일 높이 630m에
도달하였다. 나머지 부분은 첨탑이다.
시행사는 두바이의 에마르이고, 한국의 삼성물산(주) 건설부문이 시공사로 참여하여 3일에 1층씩
올리는 최단 공기(工期) 수행으로 세계의 주목을 끌었다.
총 공사비 15억 달러를 소요하여 2009년 10월 완공되었으며, 2010년 1월 4일 개장하였다. 면적은 33만 4000㎡로, 상업 시설과 주거 시설, 오락 시설 등을 포함한 대규모 복합 시설로 이용된다.
부르즈 할리파 [Burj Khalifa] (두산백과)
3일 2018년 05월 12일 (토) [지역] 아부다비-밀라노-모나코-에즈-니스
아부다비 아부다비 공항으로 이동
02:50 EY081 아부다비 출발/밀라노 향발
밀라노 07:00 밀라노공항 도착
모나코 세기의 여황 그레이스 켈리의 모나코 공화국으로 이동 모나코 성당(외관), 광장, 그랑카지노, 구시가지 등 관광
에즈 향수 마을로 유명한 에즈로 이동 높은 전망에서 에즈 선인장 마을 및 푸른 바다 절경 감상
니스 니스로 이동
호텔 휴식
호텔 HOLIDAY INN MONTMELO CLASS 또는 일급 또는 투어리스트급
식사 조식 호텔식 중식 현지식 석식 한식
4일 2018년 05월 13일 (일) [지역] 니스-깐느-아를
니스 호텔 조식 후
해안을 따라 길게 뻗은 앙글레 산책로, 마세나 광장 등 니스 시내 관광
지중해 북쪽 겨울에도 봄날같이 따스한 바람이 부는 곳, 한폭의 그림처럼 아름다 운 세계에서 두번째로 작은 나라 모나코입니다. 모나코는 지중해에 면해있어 아 름다운 풍경과 따뜻한 기후로 많은 사람들이 찾는 관광대국이며 몬테카를로의 카지노, 세계 부호들의 요트, F1경기 등으로 유명합니다. 왕비였던 그레이스 켈 리(Grace Kelly)의 이미지로 하여금 전 세계 사람들의 기억속에 우아하고 품격있 는 나라로 남았습니다.
니스 [Nice]
요약 프랑스 프로방스알프코트다쥐르 레지옹(Région) 알프마리팀 데파르트망(Département)의 수도.
위치 |
프랑스 프로방스알프코트다쥐르 레지옹(Région) 알프마리팀 데파르트망(Département) |
경위도 |
동경 7°16′09″, 북위 43°42′10″ |
면적(㎢) |
71.92 |
시간대 |
CET (GMT +1) |
행정구분 |
6캉통(canton) |
행정관청 소재지 |
5, rue de l’Hôtel de Ville 06364 NICE cedex 4, La france |
홈페이지 |
http://www.nice.fr |
인구(명) |
337,891(2006년) |
모나코 공국 및 이탈리아에서 가까운 지중해의 항만도시로 '리비에라(Riviera)' 혹은 '코트다쥐르(Cote d'Azur)'라고도 불리는 지중해 연안에 있다. 연평균 15℃의 기온을 유지할 만큼 기후가 연중 고르게 온난하다. 별장·호텔·정원·산책지·카지노 등 위락시설이 정비되어 있고, 인접한 모나코·칸과 마찬가지로 각종 행사가 열린다. 화가들의 별장이 많았던 것으로 유명하며, 마티스미술관과 샤갈미술관이 있다. 해변가를 따라 3.5km 길이로 '프롬나드 데장글레(Promenade des Anglais: '영국인의 산책로'라는 의미의 프랑스어)'라는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다. 특산물로 꽃·향수·올리브 등이 있다. 이탈리아 통일의 영웅인 주세페 가리발디(Giuseppe Garibaldi)가 태어난 곳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니스 [Nice] (두산백과)
모나코
어느 곳에 시선을 두어도 그림이 되는 사랑스러운 마을 독수리의 두지처럼 동그랗게 자리잡고 있어 '독수리 둥지마을 이라고도 불리는 에즈빌리지는 고대에느 요새로 견고한 성벽으로 둘러쌓여있는 도시였으나 1700년대 왕위 계승전쟁당시 프랑스 루이14세 군대에게 정복되면서 많은 부분 의 성벽이 무너졌다고 합니다. 거리 곳곳의 소박한 아름다움과 예쁜 마을길, 꽃과 나무의 싱그러움은 에즈를 관 광하기에 충분합니다.
모나코 세계에서 두 번째로 작은 나라
모나코(Monaco)는 앙증맞다. 바티칸시국(Vatican)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작은 나라다. 프랑스에서 열차로 스쳐 지나온 남부 코트다쥐르의 도시보다도 아담하다. 작은 모나코지만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는 늘 신비롭고 호사스럽다. 모나코 몬테카를로 역에 내리면 한 여인의 흔적을 쫓게 된다. 마릴린 먼로와 쌍벽을 이뤘던 할리우드 스타 그레이스 켈리가 그 주인공이다. 모나코 전 국왕인 레니에 3세와 세기의 결혼식을 올렸던 그녀의 일화는 수십 년이 흘러도 잔영처럼 남아 있다.
모나코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작은 나라다. 항구를 중심으로 아담한 지중해 도시의 풍경을 만들어낸다.
“내 궁전은 혼자 지내기에는 너무 넓어요.” 당시 모나코 왕자였던 레니에 3세는 12캐럿짜리 다이아몬드 반지를 건네며 그레이스 켈리에게 이렇게 청혼했다. 훈훈한 러브스토리와 수만 명이 몰려든 웨딩마치는 프랑스 한 모퉁이의 소국을 화제 속에 몰아넣었다. 결혼식 이후 모나코는 미국 등 전 세계인의 주목을 받는 관광대국으로 급성장했다. 절세의 미녀와 관광수입을 한꺼번에 얻어낸 레니에 3세는 정치가이자 로맨티시스트였던 셈이다.
여행자들의 발길은 자연스럽게 모나코 빌로 향한다. 결혼식이 실제로 열렸던 왕궁과 부부가 잠들어 있는 성당이 있는 공간이다. 수도승으로 위장해 모나코를 탈환했던 프랑수아 그리말디(François Grimaldi)의 동상도 들어서 있다. 정오쯤 열리는 왕궁 앞 위병 교대식은 모나코의 인기 높은 이벤트 중 하나다. 왕궁에는 지금도 왕이 살고 있다. 밖에서 언뜻 봐도 왕이 혼자 살기에는 너무 넓은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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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파른 절벽 위에 세워진 모나코빌 성채. |
세기의 결혼식이 치러졌던 모나코 왕궁. |
절벽 위에 솟은 모나코 빌은 성채 같은 모습이다. 헤라클레스가 지나간 자리에 신전을 세운 곳이 모나코 빌이라는 전설도 내려온다. 오르는 길이 만만치 않지만 내려다보는 풍경만큼은 압권이다. 모나코 항구를 기점으로 하얀 요트들과 언덕을 가득 채운 부티크 빌라들이 촘촘히 늘어서 있다. 항구에서 시작된 은빛 물결은 짙푸른 지중해로 이어진다. 성채 위에는 왕이 살고 그 아랫마을에는 귀족(부호)들이 사는 듯한 낭만적인 구조다.
진정한 지중해의 휴양국가지만 그래도 바람 잘 날은 별로 없었다. 세기의 결혼식 후에도 스테파니 공주 등 모나코의 왕가들은 끊임없이 스캔들에 연루되며 화제를 뿌렸다. 현재의 왕(알버트 2세)은 독신이지만 아들과 딸이 있으며, 20년 연하의 남아공 여인과 결혼을 준비 중이다. 최근에는 그레이스 켈리의 손자인 안드레아 왕자의 인기가 급상승하고 있다. 신데렐라의 꿈을 실현시켜줄 보랏빛 천국으로도 모나코는 손색이 없다. | ||
왕가의 삶은 여인들에게는 색다른 로망을 심어준다. |
왕실 근위대의 근무교대식. |
아기자기한 레스토랑과 기념품가게로 채워진 골목. |
성채에서 내려서는 길은 단아하다. 반대쪽의 투박한 절벽과 달리 아기자기한 골목들이 늘어서 있다. 지중해풍의 레스토랑과 기념품 가게들도 옹기종기 모여 있다. 골목에서는 그레이스 켈리가 새겨진 우표도 판매된다. 모나코에서 부치는 엽서 한 장은 여행자들에게 꽤 인기가 높다.
모나코는 세금도, 군대도 없다. 물, 가스 등 생필품과 국정에 대한 일부도 프랑스에 의존한다. 어찌 보면 태평천국이다. 그런 모나코의 주 수입원 역할을 하는 게 F-1 자동차 경주와 카지노다.
매년 5월 열리는 F-1 경기를 위해 항구 일대는 봄부터 단장에 분주하다. 이곳 포뮬러-1 경주는 전용 트랙에서 열리는 게 아니라 일반 도로에서 펼쳐지는 게 특이하다. 바로 코앞이 항구고 지중해다. 별도의 관중석이 마련돼 있지만 빌라 옥상에서 맥주 한잔 즐기며 경주를 관람할 수 있다. 수려한 경관 속에서 폭음의 차들이 거리를 질주하며 대축제를 만들어낸다.
매년 5월이면 항구 주변으로는 F-1 경주 서킷이 마련된다.
항구 주변은 영화 속에서나 만나던 희귀한 요트들의 세상이다. 세금을 피해 모나코로 이사 온 부호들의 요트가 빼곡하게 정박해 있다. 호화로운 요트만 기웃거려도 흥미롭다. 요트 중에는 웬만한 빌라를 능가하는 수십억 원에 달하는 것도 있다.
항구를 끼고 몬테카를로 지역으로 접어들면 모나코의 그랑카지노다. 파리의 가르니에 오페라를 설계한 샤를 가르니에가 1878년 건축한 곳으로 유서도 깊고 외관도 아름답다. 늘 관광객들로 흥청거리지만 막상 자국민들의 입장은 금지돼 있다. 호사스런 모나코로 놀러 온 부자들의 주머니가 주요 관심대상이다. 입구주변에는 고급 차와 명품숍들이 즐비한데 여행자의 투박한 복장으로는 입장이 좀 어렵다.
모나코는 [미라보 다리]로 유명한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가 유년시절을 보낸 곳이기도 하다. 해양박물관, 열대 정원, 라흐보도 해변 등이 소소하게 둘러볼 만한 곳이다. 모나코빌에 오른 뒤 해안가만 거닐어도 모나코의 이국적인 정취를 느끼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모나코 - 세계에서 두 번째로 작은 나라 (세계의 명소)
코트다쥐르 바다 위 작은마을 '에즈'
프롬나드 데장글레 해안도로
여행일정표
깐느 세계적인 영화제가 개최되는 깐느로 이동 구항구, 자유의 길, 노트르담 데스페란스 성당(외관)등 간단한 시내 관광
니스, 칸
프랑스 차창에 비낀 바다는 쪽빛이다. 빛바랜 열차 안에는 세련된 프랑스어가 빠르게 흐른다. 1년 중 300일가량 햇살이 비친다는 리비에라의 지중해는 강렬하다. 니스, 칸을 품은 코트다쥐르 지방은 프랑스뿐 아니라 유럽의 대표적인 휴양지이다. 그 도시들에 반해 샤갈, 마티스가 여생을 보냈고, 해마다 5월이면 전 세계 스타들이 영화제가 열리는 칸(칸느, Cannes)으로 모여든다. 열차에서 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가슴은 빠르게 요동친다. 니스, 칸은 여행자들에게는 ‘본능의 도시’다.
니스의 해변은 운치 있는 호텔들과 여유로운 산책을 하는 사람들로 채워진다.
사색의 해변 '프롬나드 데 장글레'
본능은 테제베(TGV)보다 빠르게 전이된다. 파리를 두세 번 배회할 때쯤이면 니스, 칸은 또 다른 열망이 되고 마음은 벌써 코트다쥐르행 열차에 실려 있다. 니스역에서 해변이 가까운 것은 그래서 고맙다. 새로 생긴 매끈한 트램과 다운타운을 채운 가게들도 성급한 마음을 다독이지는 못한다.
골목을 달려 마주친 니스의 바다는 아득하다. 빼곡히 도열한 낮은 건물들의 꼬리와 파도의 포말이 수평선까지 맞닿아 있다. 이 해변을 사람들은 애완견을 끌고 더딘 산책으로 걷고, 자전거를 끌고 여유롭게 지난다. '프롬나드 데 장글레(Promenade des Anglais)'. 프랑스 남동쪽 끝 해변의 이름이 '영국인의 산책로'다. 예전 영국 왕족이 길을 가꾸고, 100여 세대의 영국인이 이곳에 정착해 살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먼 영국에서도 따사로운 햇살이 비치는 니스의 해변은 휴양을 위한 안식처였다.
봄의 문턱을 넘어섰을 뿐인데 해변은 햇살에 몸을 맡긴 이방인들로 채워진다. 파리의 골목에서 오랜 건물을 응시하며 카페를 메우던 파리지앵들의 단상과는 또 다르다. 이들은 해변 위 의자에 나란히 몸을 기댄 채 햇살에 부서지는 코발트블루의 바다를 본다. 그리고 바다만큼 깊은 상념에 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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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인의 산책로인 ‘프롬나드 데 장글레’ |
니스 구시가 골목골목에서 향기로운 카페들을 만날 수 있다. |
해변의 유혹에서 헤어날 쯤이면 니스가 간직한 다른 매력들에 시선이 담긴다. 니스의 구시가는 해변과 맞닿아 있다. 구시가 살레야 광장(Cours Saleya)에는 꽃시장과 벼룩시장이 들어서고, 골목마다 앙증맞은 레스토랑과 카페들이 수줍게 얼굴을 내민다. 낯선 가게에서 기울인 커피 한잔에는 바다향과 퀴퀴한 건물향이 녹아들어 있다. 힘겹게 오른 구시가 꼭대기의 콜린성(La Colline du Château) 공원은 니스 최고의 전망으로 화답한다.
니스는 발걸음을 뗄수록 다채롭다. 구시가와 신상품이 쏟아져 나오는 장 메드생 거리(Avenue Jean Médecin)는 지척거리다. 분수와 높게 솟은 동상이 인상적인 마세나 광장(Place Masséna)은 이국적인 풍경으로 니스의 중심이자 경계가 된다. 마세나 광장은 매년 니스 카니발이 열리는 화려한 공간이다. 샤갈, 마티스의 흔적도 도시에 묻어난다.해변 대신 고즈넉한 주택가에 자리 잡은 미술관에 서면 그들이 이 도시에 머물며 느꼈을 상념이 전해진다. 마티스는 ‘모든 게 거짓말 같고 참지 못할 정도로 매혹적이다'며 니스를 묘사하기도 했다.
스타들의 숨결이 담긴 ‘욕망의 칸’
니스에서 칸으로 이동하면 호흡은 더욱 빨라진다. 니스에서 칸까지는 열차로 불과 30분. 칸은 영화제의 도시답게 기차역부터 이질적이다. 플랫폼에는 영화 포스터들이 즐비하게 붙어 있고, 최초로 영화를 만든 뤼미에르 형제의 대형 사진도 그려져 있다. 임권택, 전도연, 박찬욱 등 한국 영화인들도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아 칸은 어느새 친숙한 도시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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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관련 각종 포스터가 붙어 있는 칸역. |
칸의 도심을 오가는 꼬마 열차. |
칸의 도로에는 영화제의 상징인 종려나무가 늘어서 있어 운치를 더한다. 가로수들은 붉은 꽃들로 단장 됐고 그 아래로 꼬마열차가 지난다. 부티크 숍들로 채워진 바닷가 크루아제트 거리는 니스의 해변보다는 북적임이 강하다. 그 해변 끝에 들어선 국제회의장에는 레드카펫이 깔려 있어 감정이입을 부추긴다. 이방인들은 과한 포즈와 길 한편에서 유명스타들의 핸드프린팅을 찾는 것으로 욕망을 대신한다. 칸에서는 쉐케르 전망대에 오르거나 생트 마르그리트 섬(Île Sainte-Marguerite)으로 향하는 유람선에 기대 숨 가쁜 도시의 정취를 여유롭게 음미할 수도 있다.
니스, 칸 - 프랑스 (세계의 명소)
아를 고흐가 사랑한 프로방스 마을 아를 이동
'별이 빛나는 밤', '밤의 까페', '반 고흐의 방' 등 고흐의대표작의 배경이 라마르틴 광장, 구시가지 등 아름다운 마을 관광
호텔 이동 및 휴식
호텔 RONDA II CLASS 또는 일급 또는 투어리스트급
식사 조식 호텔식 중식 현지식 석식 호텔식
5일 2018년 05월 14일 (월) [지역] 아를-지로나-토사 데 마르-몬세라트-바르셀로나
아를 호텔 조식 후
지로나 스페인의 떠오르는 핫플레이스, 스페인의 피렌체 지로나로 이동
니스는 세계적인 휴양도시답게 아름다운 해변과 해안도로가 펼쳐져 있는데 그 중에서도 중심대로인 '프롬나드 데장글레'는 니스의 해변에 위치한 3.5Km 거리 의 해안도로입니다. 앞 쪽으로 바다를 마주하고, 뒤 편으로 해변과 특급 호텔들 이 즐비하여 관광객들로 항상 붐비는 곳입니다. 해변은 누구나 입장이 가능하며, 해수욕을 즐기는 사람들로 가득 차 활기가 넘칩니다.
마세나 광장은 니스 최고의 중심번화가로써 세계에서 몰리는 관광객을 맞이하는 다양한 상점들과 니스 특유의 전통적인 레스토랑이 즐비해 있습니다. 거리마다 다양한 퍼포먼스가 연일 펼쳐지며, 활기로 가득찬 거리는 관광객들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해줍니다. 해변가를 향해 거리를 따라가면 루이뷔통, 샤넬, 아르마니와 같은 명품샵이 오픈되어 쇼핑을 즐길 수 있습니다. 단, 세계에서 수많은 관광객 들이 관광명소인 만큼 소매치기의 위험이 있기 때문에 개인 물건관리는 철저히 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마세나거리 [Massena Street] |
해외여행 > 관광지 |
지역 | |
유형 |
거리 |
주소 |
Massena, Nice |
가는방법 |
니스역에서 나와 Jean Medecin Av를 따라 해변쪽으로 걷다가 Boulevard Victor Hugo가 나오면 우회전을 한뒤 Rue de Longchamp에서 좌회전해서 Place Magenta를 따라 계속 직진한다. |
자동차가 차단된 보행자 천국인 마세나 거리는 니스 제일의 번화한 곳이다. 다채로운 물건을 파는 상점과 음식점들로 인해 언제나 관광객들로 북적인다. 이외에도 악기연주나 판토마임과 같은 즉석 공연이 열려 볼거리를 제공한다.
마세나 거리 [Massena Street] (저스트고(Just go) 관광지, 시공사)
마세나 광장
아를 여행은 고흐의 흔적을 쫒는 데서 시작됩니다. 그가 걸었을 론 강변, 해질 녘 의 카페 거리 등을 걸어서 호젓하게 둘러볼 수 있습니다. 그의 호흡이 닿았던 대 부분의 공간들은 캔버스 위에 담겼습니다. 밤의 카페 테라스의 배경이 된 카페 는 아를에 대한 추억과 휴식이 서려 있습니다. 카페 반 고흐라는 이름으로, 노란 색으로 치장된 채 여전히 성업 중입니다. 카페 골목은 해가 이슥해지고, 가로등 조명이 아련할때 찾으면 작품 속 장면처럼 더욱 운치가 있습니다. 카페와 술집 이 술렁이는 골목을 벗어나면 론 강으로 연결됩니다. 고흐가 [아를의 별이 빛나 는 밤]을 그려낸 낭만적인 공간입니다.
고흐가 사랑한 마을 아를
지로나
여행일정표
토사 데 마르 한없이 푸른하늘과 에메랄드 빛 바다가 반겨주는 토사 데 마르로 이동
몬세라트 몬세라트로 이동하여 기암절벽위에 세워진 몬세라트 수도원관광
몬세라트 [Montserrat] 대륙 | |
위치 |
스페인>카탈루냐스페인>칸타브리아 주 |
규모 |
몬세라트의 길이 : 6㎞최고 높이 : 1,238m보호구역의 면적 : 3,630㏊ |
저자 |
테레사 파리노 |
화석이 된 스테고사우루스처럼 생긴 문타냐 드 몬세라트는 연한 색의 역암질 기둥으로, 하늘을
찌를 듯 서서 바르셀로나 뒤로 펼쳐진 평원을 압도하듯 굽어보고 있다. 이 산을 찾는 사람들은 2,000개가 넘는 등산로를 찾는 등산객도 많지만 '라모레네타'라고 하는 검은 마돈나를 보기 위한 순례자들의 발길도 끊이지 않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이 작은 목각상은 성 누가가 만든 것으로 서기 50년에 성 베드로가 이곳에 가져왔다고 한다. 물론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법으로 이 조각상이 12세기에 만들어진
것임이 밝혀졌다. 이 조각상과 관련한 또 다른 종교적인 일화가 있다.
성 이그나티우스 로욜라가 그의 칼을 이곳에 내렸을 때 자신의 소명을 깨닫고 예수회를 창건했다고 전해져 온다. 이곳에서 서식하는 식물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그늘이 진 바위틈
사이로 랙스포텐틸라, 라몬다와 피레네초롱꽃이 자란다. 멸종
위기에 처한 이곳의 고유종인 바위떡풀류인 삭시프라가카탈라우니카와 세열유럽쥐손이류의 에로디움루페스트레도 이곳에 서식한다. 봄이 되면 산의 정상에는 야생 튤립, 노알수선화와 수많은 난초가
자라고 하늘에는 수염수리가 선회를 한다.
세계휴양지 1001 몬세라트 수도원 [Visit Montserrat Monastery]
대륙 |
유럽 |
위치 |
스페인 카탈루냐 |
가격대 |
무료 |
분류 |
문화, 산, 공원·정원, 자연 절경 |
저자 |
폴리 에반스 |
880년, 한 무리의 목동 아이들이 몬세라트
산 하늘에서 빛이 내려오는 것을 목격했다―천사들이 노래하고 아이들의 마음은 기쁨으로 가득 찼다. 천사들의
방문은 한 달 동안 계속되었으며, 산속의 동굴로 이어졌다. 마을
사제들은 이곳을 둘러보다가 동정녀 마리아의 이미지를 발견하였다. 훗날
11세기에 올리바 수도원장이 이곳에 작은 수도원을 세웠고, 오늘날에도 80명의 베네딕토회 수사들이 이 바위투성이 산을 찾는 순례자들을 환영하고 있다.
여기서 순례자란, 영적인 답을 찾아 수도원 문을 두드리는 모든 사람을 뜻하며, 몬세라트의 수도사들은 그들과 기도와 식사를 나눈다.
방문객은 박물관 투어도 할 수 있다. 박물관 건물은
"네 마리 고양이"라는 별칭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레스토랑 라 카사
마르티를 포함, 바르셀로나의 수많은 랜드마크를 설계한 조셉 푸치 카다파르크의 작품이다. 이 박물관에는 이집트의 석관부터 21세기 조각상에 이르기까지 1,300여 점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또 몬세라트 소년 합창단은
세계적으로도 유명하다(이곳에는 이미 14세기부터 음악 학교가
있었다).
몬세라트 산의 단층 지괴는 자연 보호 구역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산트 헤로니 봉까지 이어지는
하이킹 루트를 포함, 스펙터클한 바위투성이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산책로가 많다(Montserrat는 카탈루냐어로 "톱니 모양의 산"이라는 뜻이다). 대개는 바르셀로나에서 오는 당일치기 여행이지만, 좀더 오래 머물면서 이곳의 매력을 즐기고 싶다면 인근의 호텔 아바트 시스네로스나 아바트 마르세트 아파트를 예약하도록
하자.
몬세라트 수도원 [Visit Montserrat Monastery] (세계휴양지 1001, 2011. 1. 7., 마로니에북스)
바르셀로나 예술의 도시인 바르셀로나로 이동 후 호텔 휴식
호텔 TOCINA BUSINESS CLASS 또는 일급 또는 투어리스트급
식사 조식 호텔식 중식 현지식 석식 호텔식
6일 2018년 05월 15일 (화) [지역] 바르셀로나-시체스-발렌시아
바르셀로나 호텔 조식 후
두산백과 바르셀로나 [Barcelona]
요약 에스파냐 카탈루냐 자치지방(autonomous community) 바르셀로나주(州)의 주도(州都).
람블라 거리에스파냐 바르셀로나에서 가장 넓은 보행자 거리로 구시가지의 중심이다.
위치 |
에스파냐 카탈루냐 자치지방 바르셀로나주 |
경위도 |
동경 2°11′ 북위 41°23′ |
면적(㎢) |
100.4 |
시간대 |
CET(UTC+1) Summer: CEST(UTC+2) |
행정구분 |
10 distritos |
행정관청 소재지 |
Pl. Sant Jaume, 1, 08002 Barcelona |
홈페이지 |
www.bcn.cat |
인구(명) |
1,595,110(2007년) |
지중해 연안의 항구도시이며, 항만규모와 상공업 활동에 있어서는 에스파냐 제1의 도시이다. 교외지역을 포함한 바르셀로나는 비옥한 해안평야에 펼쳐져 있으며, 천연의
양항(良港)과 더불어 에스파냐 최대의 산업도시를 이룬다.
마르세유와 마찬가지로 페니키아의 도시를 기원으로 하며,
BC 3세기에 이 곳을 지배한 카르타고인이 바르시노(Barcino), 즉 바르카가(家)의 도시라고 명명하였다. BC
201년에 로마의 지배하에 들어갔으며, 아직도 구(舊)시가지의 중심부에 있는 고딕가(Gothic街:바리오·고티코스)에는 그 당시의 성벽이 일부 남아 있다. 8세기에는 무어인이 점령하였으나, 801년에 샤를마뉴(카를大帝)가 이를 해방하고 지배하였다.
12세기에는 카탈루냐 백작과 아라곤
여왕의 결혼으로 아라곤 왕국이 이루어졌고, 바르셀로나는 그 수도로서 해운·수공업·금융의 중심으로서 번영하였으며, 14세기에는
그 절정에 달하였다. 이 무렵에 지어진 고딕식 대성당(13세기
말)을 비롯하여 역사적 건조물들이 구시가 중앙에 많이 남아 있으며, 당시의
바르셀로나의 해양법(海洋法)인 콘술라도 데 마르는 오랫동안 그 권위를 유지하였다.
1469년에
아라곤과 카스틸랴의 통일로 지방도시가 되었으나, 고유의
카탈루냐어(語)를 가지고 있는 데다가 1550년에 창립된 대학을 중심으로 한 에스파냐의 선진지역으로서, 카탈루냐
문화에 대한 긍지와 진보적 시민자치의 전통 및 강력한 상공업을 기반으로 번번이 독립을 요구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다가 17∼19세기에는 프랑스군의 침공을 여러 차례 받았으며, 북부
카탈루냐 지방을 프랑스에 빼앗기기도 했다.
19세기 말부터는 에스파냐의 사회주의 및 무정부주의 운동의 중심이 되었고, 1936∼1939년의
에스파냐내란 당시에는 공화정부(인민전선정부)의 마지막 거점이
되었다가 1939년 1월에 프랑코군에 의해 함락되었다. 시가의 중심인 람블라로(路)에는
은행·상사(商社)·고급상품점이 줄지어 서 있고, 이 거리의 남단인 항구 부근의 푸에르타데라파스에는 콜럼버스의 기념상이 있다.
이 거리의 서쪽은 19세기까지 건물이 들어찼으며, 동쪽에
있는 중세까지의 도시지역을 포함하여 구시가라 부르는데, 그 주위를 론다스라고 하는 성벽 터전의 대로가
반원형으로 둘러싸고 있다. 그리고 그 바깥쪽의 직교상(直交狀)의 시가는 1860년의 도시계획으로 건설된 신시가이다.
바르셀로나의 공업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섬유공업(방적업)인데,
19세기 후반부터 발전하기 시작하여 그 영향으로 1845년에 14∼15만 명에 지나지 않던 인구가 1931년에는 100만 명을 돌파하였으며, 화학·금속공업도 가세하여 이베리아반도 제1의 도시가 되었다.
내란 후의 중앙집권화에 따라 한때 마드리드에 그 자리를 빼앗겼으나, 그 후 관개시설이
갖추어진 에브로강(江) 서부의 풍부한 농산물과 피레네의 수력(水力)으로 자동차·항공기 공업, 식품가공업
등이 활발해지면서 번영을 되찾고 있다. 카탈루냐 문화의 중심지답게 인쇄업도 활발하며, 지금도 문화·경제의 모든 면에서 카스틸랴의 중심인 마드리드에 대한 대항의식이 강하다.
시가는 료브레가트강(江)과, 베소스강(江)의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으며, 서부의 티비다보, 남부의 몬트후익등의 구릉지는
시민들의 행락지이다. 1992년 제25회 하계올림픽대회가
개최되었으며, 한국은 이 대회에서 금메달 12개를 획득, 종합순위 제7위에 올랐다.
[ë¤ì´ë² ì§ì백과] 바르셀로나 [Barcelona] (두산백과)
시체스 스페인 카탈루냐자치지방 바르셀로나주에 있는 자치시이다.
원어명 |
Sitges |
바르셀로나 남서쪽 약 35km지점에 위치하며 지중해에 면한 휴양도시이다. 도시의 면적은 43.85㎢이며, 거주 인구는 약 27,000명이다. 전통적으로 와인산업이 발달된 도시였으나 산업혁명 시기를 거치면서 관광 서비스업이 주된 수익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도시의 서쪽 능선에는 포도밭이 많이 분포한다. 관광도시도 주목받으면서 도시에는 많은 호텔들이 들어섰으며 대부분 고급 숙박지들이 많다. 그리고 도심 올드타운의 오래된 골목들 사이로 카페와 쇼핑상점 등이 이어져 있다. 해변가에 위치한 산트 바르토메우 성당(Sant Bartomeu)은 17세기에 건립된 것인데 시체스 해변을 상징하는 건물이며, 특히 결혼식 장소로 유명하다. 또한 매년 가을인 9~10월에는 세계적인 영화제인 시체스 영화제가 매년 열리는데 스릴러, 공포 등의 장르를 다룬다. 한국영화로는 2004년 《올드보이》, 2005년 《친절한 금자씨》가 시체스 영화제에 출품하여 호평을 받았다. 시체스 유럽에서 휴양지로 인기가 높은데 유명한 예술가들이 이곳에 별장을 두고 지냈다. 그 때문에 마리첼 뮤지엄(Maricel Museum) 등 갤러리가 많고 거리에는 독특한 조각품들이 많이 설치되어 있다. 세체스 해변의 특이한 점은 방파제로 해변을 구분해 놓았다. 17여 개의 해변은 각 해변마다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누드해변이 있으며 특히 동성애자를 위한 해변이 있어 많은 동성애자들이 시체스를 찾는다.
시체스 (두산백과)
발렌시아 [Valencia] 요약 에스파냐 동부 발렌시아 자치지방 발렌시아 주(州)의 주도.
위치 |
스페인 동부 발렌시아 주의 주도 |
경위도 |
동경 0°22′0″ 북위 39°29′0″ |
면적(㎢) |
134.65 |
시간대 |
CET(UTC+1) Summer: CEST(UTC+2) |
행정구분 |
18 district |
행정관청 소재지 |
Pl. de l'Ajuntament, 1 46002 Valéncia |
홈페이지 |
www.valencia.es |
인구(명) |
786,189(2015년) |
자연과 기후
스페인 동부 지중해의 발렌시아 만에 면한
도시이다. 2015년 기준 인구는 786,189명이다. 몬테스 우니베르살레스(Montes Universales)에서 발원하여
발렌시아를 관통해 지중해로 흘러나가는 투리아(Turia)강 하구에 위치한다. 구하도를 중심으로 연못, 노천 식당, 전시장, 예술센터 등의 다양한 문화 및 관광시설이 들어서 있다. 무더운 반건조지역으로 여름에는 28~34°C이고, 지중해성 기후와 푄(foehn)
현상으로 겨울에는13~20°C로 온화하다.
기원과 역사
지중해의 전략적 지정학적 중요성에 따라 로마인들이 기원전 138년 도시를 건설하여 이베리아반도로 진입하는 교두보 역할을 담당했다. 역사적으로는 그리스·카르타고·로마·고트·이슬람의 지배를 받아 왔으며, 1002년 알 안달루스(Al-Andalus)의 통치자 알만소르(Almanzor)의 사망으로 이슬람 세력이 분열하자 '발렌시아 타이파(Taifa)'라는 이슬람 소왕국으로 분리되었다. 1094년 엘시드가 수복하여 레콩키스타를 이루었으나, 그의 사후 다시 이슬람 세력이 집권하여 발렌시아 왕국의 수도로서 존속했다. 1238년 아라곤-카탈루냐 연합왕국이 탈환하여, 15세기까지 카탈루냐 지배 아래 지중해 무역으로 번성했다. 19세기 프랑스의 지배와 이에 대한 저항운동·시민전쟁을 거쳐, 20세기 스페인 내전기에 공화파의 저항으로 파괴를 겪었으나 복구의 노력으로 경제 부흥 시기를 맞이하여, 21세기 스페인 문화 관광의 도시로 성장했다.
경제와 산업
국토가 기름지고 관개시설이 잘된 농업지대로 쌀·목화·뽕나무·오렌지·올리브등이 재배되며, 투리아강 하구의 빌라누에바 델 그라오항(港)은 쌀·올리브 등의 농산물을 포함해 스페인의 20% 수출품이 출항하는 곳으로, 지중해에서 가장 물동량이 많은 컨테이너 항구이다. 그밖에 조선업을 비롯한 근대 상공업이 발달했다. 현재는 정치·군사·종교·교육·문화의 중심지로 스페인에서 마드리드, 바르셀로나에 이어 세 번째로 큰 자치 도시로 성장했다. 21세기에 건설과 관광 붐이 도래하여 통신과 교통의 확대를 가져왔으며, 서비스 산업에 종사하는 인구가 상대적으로 확대되었다.
문화와 관광
1990년대 중반 이후 빠른 속도로 관광 산업이 발전했다. 이슬람과 카톨릭문화가 공존하는 역사의 도시로 과거의 건축물과 예술작품들의 복원 및 재현작업이 시행되었고, 국제적 규모의 콘벤션 센터와 전시장이 들어서며 5성급 호텔들이 들어섰다. 주요 관광 지역으로는 후스티시아궁전·예술 및 도자기박물관·식물원·고생물박물관, 그리고 휴식 공간인 아윤타미엔토광장과 몽포르테정원 등 다채롭다. 도시 최대의 전통 축제는 성조셉을 기리는 ‘파예스(Falles)’로 매년 3월 개최된다. 2012년 버클리 음대가 ‘퀸소피아아트팰러스(Palau de les Arts Reina Sofia)’에 분교를 개교하여 인지도가 상승했다. 스페인어와 발렌시아어가 공식 언어인데, 후자는 카탈루냐어와 유사하다.
음식과 요리
스페인의 세계적인 요리 파에야의 기원지로 알려져 있다. 무어인들이 10세기에 쌀 농사를 시작했는데, 이후 발렌시아인이 쌀, 육류, 생선류, 해산물에 중동 향신료인 사프란을 넣어 스튜를 해먹었는데, 이것이 파에야의 기원이라고 한다. 곡창지대로 유명한 남쪽의 알부페라(Albufera)호수에서 생산된쌀과 물로 만든다. 초기 물쥐(water vole)로파에야를 만들기 시작하여 이후 토끼, 닭, 오리 등으로 식재료가 변천했다. 디저트로는 달콤한 전통 과자인 파르통(fartón)과 분욜(Bunyol)이 있고, 오렌지 산지로 유명하여 브랜디에 오렌지를 첨가한 ‘발렌시아’라는 달콤한 칵테일이 인기있다. 또한 추파(chufa)로 만든 오르차타의 탄생지이다.
발렌시아 위치
발렌시아 [Valencia] (두산백과)
천재건축가 가우디의 성가족성당(내부), 구엘공원(내부), 까사밀라(외관), 람블라스 거리 등 바르셀로나 시내 관광
두산백과 사그라다 파밀리아 [Sagrada Familia/Temple Expiatori de la Sagrada Familia]
요약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에 있는 로마가톨릭교의 성당.
사그라다 파밀리아에스파냐 바르셀로나. 높이 솟은 나선형의 돔과 포물선 지붕이 특징이다.
원어명 |
Templo Expiatorio de la Sagrada Familia |
국가 |
스페인 |
구분 |
성당 |
소재지 |
바르셀로나 |
건립기간 |
1882 ~ 현재 |
설계자/건축가 |
안토니오 가우디이코르네트(Antonio Gaudi y Cornet) |
건축양식 |
네오고딕식 |
규모 |
가로 150m, 세로 60m, 중앙 돔 높이 170m |
스페인의 세계적인 건축가 안토니오 가우디이코르네트(Antonio Gaudi y Cornet)가
설계하고 직접 건축감독을 맡은 로마가톨릭교의 성당(聖堂) 건축물이다. 사그라다 파밀리아는 '성(聖) 가족'이라는 뜻으로, 예수와
마리아 그리고 요셉을 뜻한다. 원래는 가우디의 스승인 비야르(Francisco de Paula del
Villar y Lozano)가 설계와 건축을 맡아 성 요셉 축일인 1882년 3월 19일에 착공하였으나, 비야르가
건축 의뢰인과의 의견 대립으로 중도 하차하고 1883년부터 가우디가 맡게 되었다.
가우디는 기존의 작업을 재검토하여 새롭게 설계하였으며, 이후 40여 년간 성당 건축에 열정을 기울였으나 1926년 6월 사망할 때까지 일부만 완성되었다. 건축 자금을 후원자들의 기부금만으로
충당하여 공사가 완만하게 진행되었으며, 스페인내전과 제2차세계대전
등의 영향으로 공사가 중단되기도 하였다. 1953년부터 공사를 재개하여 현재까지 진행중이며, 가우디 사후 100주년이 되는
2026년에 완공할 예정이다. 전체가 완성될 경우 성당의 규모는 가로 150m, 세로 60m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중앙 돔의 높이는 약 170m이다.
건축양식은 입체기하학에 바탕을
둔 네오고딕식이다. 구조는 크게 3개의 파사드(Façade;건축물의
주된 출입구가 있는 정면부)로 이루어져 있다. 가우디가 사망할
때까지 완성된 파사드는 그리스도의 탄생을 경축하는 '탄생의 파사드(Nativity
Façade)'뿐이며, 가우디가 직접 감독하여 완성하였다.
나머지 2개는 '수난의 파사드(Passion Façade)'와 '영광의 파사드(Glory Facade)'인데, 전자는 1954년에 착공하여 1976년에 완성되었고, '영광의 파사드'는 2002년이
되어서야 착공하였다.
3개의 파사드에는 각각 4개의 첨탑이 세워져 총 12개의
탑이 세워지는데, 각각의 탑은 12명의 사도(제자)를 상징한다. 모두 100m가
넘는다. 또 중앙 돔 외에 성모마리아를 상징하는 높이 140m의
첨탑도 세워진다. 재료는 석재인데, 1953년 건축을 재개하였을
때 석재가 부족하여 그 뒤에는 인조 석재와 콘크리트를 사용하고
있다. 탑의 모양은 옥수수처럼 생겼고, 내부의 둥근 천장은 나무처럼 생긴 기둥이 떠받치고 있다. 천장은
별을 닮은 기하학적 무늬로 가득 차 있다.
가우디 건축의 백미(白眉)로 꼽히며, 바르셀로나에서 가장 유명한 건축물이기도 하다. 가우디가 직접 건축에 참여한 사그라다 파밀리아의 '탄생의 파사다'와 예배실은 구엘 공원(Parque Güell), 구엘 궁전(Palacio Güell), 카사밀라(Casa Mila), 카사비센스(Casa Vicens), 카사바트요(Casa Batlló), 콜로니아
구엘 성당의 지하 예배실(Crypt in Colonia Güell)과 함께 '안토니 가우디의 건축(Works of Antoni Gaudí)'이라는
명칭으로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Sagrada Familia/Temple Expiatori de la Sagrada Familia] (두산백과)
유럽 정원 기행 구엘 공원 돌과 타일로 표현된 독특한 공원 [Güell]
요약 가우디 건축의 진수를 볼 수 있는 곳으로 돌을 쌓아올려 만든 울퉁불퉁한 기둥, 다리, 화려한 타일 문양 등이 어우러져 독특한 정원을 만들어냈다.
정원 평면도
스페인 바르셀로나(Barcelona)는 피카소와 가우디로 유명한 도시이다. 건축을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가장 먼저 가보고 싶은 곳이기도 하다. 아직도 완성되지 않은 가우디 성당을 비롯해 가우디(Antonio Gaudíy Cornet) 건축의 진수를 볼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가우디는 "자연에는 직선이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괴테의 자연론과 종합예술론의 영향을 받아 대담하고 환상적이며 독창적인 건축 양식을 완성했다.
구엘 공원 입구입구에는 애니메이션 주인공 스머프를 연상케 하는 집 두 채가 세워져 있다. 직선보다는 곡선으로 부드럽게 한 건축물이다. 찰흙으로 빚어 만든 것 같은 자연스러움과 곡선, 타일을 덮은 지붕이 독특하다.
가우디 건축과 구엘(Güell) 공원을 보면 어릴 적 애니메이션으로 본 스머프 마을이 연상되기도 하고, 모든 사람이 말하듯이 한스와 그레텔의 동화 속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한다. 곡선의 벤치와 돌을 깎아서 만든 것이 아니라 돌을 쌓아올려 만든 울퉁불퉁한 기둥, 다리, 그리고 화려한 타일 문양 등은 지금까지 접해왔던 건축과 구조물의 양식과는 별개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다양한 타일의 문양
자연석으로 난간을 쌓아올리고 외부에 타일을 붙였으며 아래로 식물이 자라고 있다.
구엘 공원이 자리 잡은 곳은 바르셀로나에서 비교적 높은 지역인 펠라다(Pelada) 산등성이로, 원래는 가우디의 후원자였던 구엘 백작이 아테네의 델포이를 재현시킨 전원 주택단지를 만들 것을 제안하여 60채의 주택이 들어설 예정이었다. 구엘 백작은 그곳에 고급 건축물을 세우고 엄격히 사생활이 보장되는 담을 쌓아 일반인과는 적절히 격리된 유토피아적 도시 공동체를 세우려고 하였다.
가우디는 이 단지 안에 바르셀로나가 위치한 카탈루냐(Cataluña) 지방의 전통적 건축미, 에덴동산, 파르나소스의 델포이 성전, 그리고 북유럽식 정원 모델, 심지어는 쿠바의 이국적인 풍경까지 넣으려는 상상을 하였지만 결국 이 주택단지를 조성하는 데 끝없이 돈이 투자되면서 사업은 실패하고 결국 공원으로 남게 되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게 되었으며 오늘날에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기에 이르렀다.
공원의 중앙에는 광장이 있으며 광장의 모서리를 따라 타일로 장식된 곡선의 긴 벤치가 자리 잡고 있다. 가우디의 상상력의 끝이 어디인지 감탄스럽기만 한 이 벤치는 투박한 돌에 타일을 붙여 직선이 없이 곡선만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마치 커다란 뱀이 살아 움직이는 듯 보인다.
광장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벤치
끊기지 않고 광장 둘레를 다 돌려놓아 길이가 만만찮게 길다. 타일의 문양 가운데 게 모양은 가우디 자신의 별자리를 상징하고 있다.
이 광장 밑으로 86개의 도리아식 기둥이 있는 방이 있는데 그것은 순수 도리아식 양식과는 좀 다르게 표현되었다. 그 방 밑에는 광장 위에서 떨어지는 빗물과 도리아식 기둥 안에 설치해둔 하수관을 통해 떨어지는 물을 모아두는 물탱크가 있다. 이 모아진 물은 왕들이 지나다니는 계단에 있는 세 개의 분수 중에 세라믹 재질로 된 용의 조각상의 입으로 토하듯이 나오게 된다.
카탈루냐 지방의 르네상스는 굉장히 종교적이었기 때문에 이 영향으로 왕이 다니는 계단의 세 번째 분수에는 아라곤 왕의 휘장이 표현되었다. 또한 가우디는 입구 쪽 건축물에 있는 탑의 가장 높은 곳에 네 개의 가지가 있는 십자가를 설치하였고, 중세 시대를 생각하여 칼바리오(Calvario) 산처럼 직접 돌로 산을 만들어 가장 높은 곳에 세 개의 십자가를 놓았다.
가우디는 정원의 곳곳에 상징적인 것들을 표현하고 있다. 입구의 쉘터(Shelter, 조경시설물의 하나로 휴식을 위해 잠시 쉴 수 있는 구조물)는 구엘이 어릴 적 책에서 보고 매료된 인도의 코끼리를 본떠 만들었고, 공원 벤치에 형상화된 게의 모양은 가우디 자신의 별자리를 상징하고 있다.
입구 계단의 도마뱀 조형물 등과 일련의 조각품들은 연금술을 상징하고 있다. 상층부에는 그리스 아폴론 신전에 있던 옴파로스(세계의 중심으로 여겼던 돌)가 놓여 있고 다음 계단에는 연금술사의 불도마뱀이 있어 물이 흐르며 생명의 변화가 잉태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화려한 도마뱀타일의 조각을 모아 디자인했다는 게 신기할 정도다. 연금술을 상징하고 있다.
계류 중앙의 조형물조형물 주위로 도너츠 모양의 경계부는 앉을 수도 있다. 이것은 일본을 비롯한 여러 곳에 응용되기도 했다.
벤치로 둘러싸인 광장 밑에는 순수 도리아식 양식과는 조금 다른 기둥이 광장을 받치고 있다.
용 조각상타일로 만들어진 조형물에서 물이 나오고 밑으로 자연형의 수반을 만들어 두었다. 이끼와 수초가 어울려 너무나 자연스럽다.
이 공원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모든 시설물에 타일을 이용하여 표면을 처리하고 문양을 새기고 있다는 것과 울퉁불퉁한 돌을 이용한 기둥과 벽, 자유로운 곡선을 이용한 집 등이다. 다른 공원에서는 볼 수 없는, 상상할 수 없었던 소재와 창의적인 디자인을 엿볼 수 있다.
광장 주변 휴게시설자연석으로 쌓아올려 기둥을 만들고 그 안에 작은 점포가 들어가 있다.
파도 동굴광장을 받치는 기둥을 지나 내려오면 마치 파도의 소용돌이 속에 있는 착각이 드는 곳이 있다. 파도 동굴이다. 지형을 살려 연출한 가우디의 아이디어가 돋보인다. 이것은 현대 스페인 건축가인 칼라트라바(Santiago Calatrava)가 발렌시아 과학 전시관에 응용하였던 것으로 유명하다.
구엘 공원은 자연에 가까운 공원(정원)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으며, 가우디의 자연주의와 곡선의 미학 그 자체를 보여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양한 모양의 기둥
경사지에 지었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기둥이 많이 필요하게 되었다. 하지만 인공적이기보다는 주변 지역의 돌을 이용하여 기둥을 쌓아올렸다. 아주 원시적이고 자연적으로 생긴 것처럼 보이나 인위적으로 자연미를 연출한 것이다. 기둥의 모양을 유심히 보면 코끼리의 정면 모습과 유사한 것도 있다. 이것은 구엘이 어릴 적 좋아하던 인도코끼리를 본떠 만들었다고 한다.
구엘 공원 [Güell] - 돌과 타일로 표현된 독특한 공원 (유럽 정원 기행, 2007. 3. 5., 대원사)
안토니 가우디-아름다움을 건축한 수도자 카사 밀라 [Casa Milá]
가우디의 명성은 날이 갈수록 높아졌다. 평소에도 가우디의 작품을 좋아했던 페드로 밀라 이 캄프스는 「카사 바트로」를 보고 한눈에 매료당해 주저하지 않고 가우디에게 공동주택계획을 의뢰하게 된다. '라 페드레라(La Pedrera, 채석장)'로 더 많이 알려진 「카사 밀라」는 마치 인공의 건축물들로 채워진 도시를 비난이라도 하듯 거대한 돌덩어리의 모습으로 우리들 앞에 서 있다. 어린 가우디에게 무한한 상상력을 제공해주었던 몬세라도 산이 가우디의 손을 통해 새롭게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거친 돌로 마감되어 있는 「카사 밀라」의 정면은 발코니 난간을 장식하고 있는 갓 뜯어온 듯한 해초 덩어리로 인해 더욱더 자연과 가깝게 느껴진다.
고색창연한 돌은 담쟁이덩굴, 발코니의 꽃들과 어우러져 풍부한 느낌을 전해주고, 이 저택에 끊임없이 다양한 색조를 준다.
「카사 밀라」의 거대한 덩어리는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끈다. 당시에 건축된 스페인 도시의 주택들은 대칭, 직선, 직각이 특징이었다. 이와는 달리 「카사 밀라」의 외관은 '멈추지 않는 선(Endless line)'으로 묘사될 정도로 물결치는 듯한 리듬을 건물 전체로 표현하고 있다. 흐르는 선은 외관뿐 아니라 각 층의 내부에도 이어져있으며, 잔물결이 일렁거리는 호수 면과 같은 천장은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금치 못하게 만든다. 커다란 비누방울 속에 작은 비누방울들이 모여 각 방을 이루고 있는 것 같은 「카사 밀라」는 그야말로 거대한 유기체의 모습을 하고 있다.
거대한 자연의 형상을 가진 「카사 밀라」
「카사 밀라」의 기괴한 외관은 옥상을 지키고 있는 여러 수호신들로 인해 더욱더 신비로워 보인다. 가우디는
지붕 위에 솟아오른 굴뚝 하나, 환기탑 하나도 그냥 두는 법이 없었다.
가우디에게는 굴뚝도, 환기탑도 표현할 수 있는 하나의 대상이었고, 그래서 그것들은 하나같이 「카사 밀라」를 지키는 수호신이 되어 우리를 초현실세계로 인도하고 있는 것이다.
건물이 완성되자 바르셀로나 시민들의 반응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인간의 손으로 만든 거대한
산'이나 '아주 조용히 숨을 내쉬는 돌로 된 폐'와 같이 「카사 밀라」가 가진 유기적인 형태나 조형성을 높이 평가하는 찬사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카사 밀라」에 대한 노골적인 비난과 조롱이었다. 많은
만화가들이 지방신문에 「카사 밀라」를 풍자하는 그림을 그려 떼돈을 벌었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한
아이가 부모에게 "엄마, 여기 지진이 일어났어요?"라고 묻는 모습을 그린 만화나 부활절에 「카사 밀라」와 같은 건물을 사달라고 조르는 아이를 표현한
풍자그림이 그려지기도 했다.
비행기 격납고와 고물상, 지저분한 동물이 가득한 노아의 방주의 모습을 한 「카사 밀라」는
이후 '말벌집', '고기파이' 등의 별명이 따라붙기도 했다. 시민들의 이러한 반응은 당시 어느
누구도 창조하지 못했던 건물에 대한 폭발적인 관심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카사 밀라」가 갖고 있는 가장 중요한 의미는 일반적인 건축방식에서 벗어나 어떠한 양식으로부터도 영향을 받지 않고 건축을 조각적인
측면에서 접근했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카사 밀라」는 평면적이고 장식적인 아르누보의 원리가 건물의
형태나 볼륨감뿐만 아니라 공간에도 적용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결과적으로 「카사 밀라」는 어떠한
건축이나 어떠한 예술품과도 비교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작품으로 평가되었고, 1984년 유네스코는 이
위대한 건축물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카사 밀라 [Casa Milá] (안토니 가우디, 2004. 9. 30., ㈜살림출판사)
저스트 고(Just go) 관광지 람블라스 거리 [Ramblas Street]
람블라스거리
분류 |
해외여행 > 관광지 |
지역 | |
유형 |
거리 |
휴관일 |
연중무휴 |
주소 |
Las Ramblas, Barcelona |
가는방법 |
지하철 3호선 Catalunya·Liceu·Drassanes 역 하차 |
바르셀로나의 북쪽 카탈루냐 광장에서 남쪽
항구의 포르탈 데 라 파우 광장까지 1km에 이르는 거리. 도로변에
플라타너스 가로수가 빽빽하게 수놓아져 있어 도심의 삭막함을 덜어 준다. 시민의 영원한 산책로로 서머셋
모옴이 '세계에서 가장 매력 있는 거리'라고 말했던 '람블라스(Ramblas)'의 뜻은 아랍어로 'Raml(강바닥)'을 의미한다. 피카소, 달리, 미로가 이 길을 자주 거닐었고, 파블라스 카잘스가 바흐의 무반주 첼로 조곡의 악보를 발견하기도 했다.
지금도 이 거리는 하루 종일 끊임없이 몰려드는 인파로 생동감이 넘쳐 난다. 특히 바르셀로나를
여행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이곳을 거쳐 가게 된다. 람블라스 거리를 가로지르면 바르셀로나의
중심지인 카테드랄을 비롯해 중세풍의 건축물과 미술관, 박물관, 시민의
휴식처인 시우타데야 공원 등이 몰려 있기 때문이다. 그 밖에도 서민적인 잡화점과 카페, 거리 예술가 등 우리가 연상하는 유럽의 거리 풍경이
그대로 펼쳐지는 곳이다.
카탈루냐 광장부터 걷기 시작하면 맨 처음 눈에 띄는 것이 색색의 꽃들이 화려하게 꽂혀 있는 꽃 가게와 새를 파는 가게이다. 노점 사이에 자리 잡은 테이블들은 거리 양편의 카페테리아에서 내놓은 것이다.
자리에 앉으면 웨이터들이 차도를 건너 주문을 받으러 온다. 하지만 관광객에게는 값을 비싸게
받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메트로 리세우역 부근의 산책로 바닥에는 후안 미로가 디자인한 다채로운 모자이크(1976년)가 깔려 있다. 주말에는 다양한 퍼포먼스를 펼치는 거리의 행위예술가
덕분에 눈요기하기에 좋다. 미로의 모자이크를 지날 무렵 오른쪽에는 유럽에서도 유수의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바르셀로나 최고의 오페라 전당, 리세우 극장이 보인다. 거리
중간쯤에 해당하는 리세우역 근처에는 바르셀로나 최대의 재래시장인 산 조세프 시장(현지에서는 보케리아
시장이라 부른다)이 있다. 싱싱하고 다양한 채소와 과일, 생선, 고기, 햄 등이
진열되어 있어 오가는 길에 허기진 배를 채우기에 안성맞춤이다.
계속 발걸음을 재촉하면 오페라의 전당인 레이알 광장과 구엘 저택이 나온다. 다양한 스타일을
추구하는 초상화가들도 만날 수 있다. 레이알 광장부터 람블라스 거리의 종점인 콜럼버스 탑이 있는 포르탈
데 라 파우 광장까지는 예전에 마약상들이 오가는 우범지역이었으나, 최근에는 경찰관들이 상주해 비교적
안전하다. 콜럼버스 탑 안의 엘리베이터를 타고 전망대로 올라가면 아름다운 시내 항구와 바르셀로나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바로 옆에는 지중해가 보이는 유람선 선착장이 있다.
왼쪽에 있는 다리를 건너면 영화관과 수족관, 쇼핑센터 등이 입점해 있는 마레마그눔으로 통한다.
람블라스 거리 [Ramblas Street] (저스트고(Just go) 관광지, 시공사)
한 장의 그림 지도 화려한 색채의 도시, 바르셀로나
후안 미로 광장
후안 미로(Joan Miro 1893~1983)는 굳이 토를 달 필요가 없을 정도로 유명한 화가다. 그의 천진난만한 원색은 현대미술에 관심 없는 사람에게도 꽤나 익숙한 이미지다. 그보다 더 유명한 화가로 들 수 있는 이름은 파블로 피카소 정도나 될까? 바르셀로나에서는 파블로 피카소, 후안 미로, 그리고 그들 못지않게 유명한 살바도르 달리를 쉽게 만날 수 있다. 그들이 모두 스페인을 대표하는 화가들이라니. 스페인의 저력이 도무지 가늠되지 않는다.
그중에서도 1893년 바르셀로나에서 태어나 특히 카탈루냐 사람들이 사랑한 후안 미로의 작품은 이 도시에서 쉽게 접할 수 있다. 후안 미로 미술관도 따로 마련되어 있고, 후안 미로 공원도 위풍당당하게 자리 잡고 있지만 여행자들이 더 손쉽게 만날 수 있는 그의 작품은 람블라스 거리 한가운데 있는 타일로 만든 후안 미로 광장이 아닐까. 관광의 메카라는 람블라스 거리 한복판에 이 작품이 가로누워 있는 까닭은 '바르셀로나에 온 관광객을 환영'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굳이 챙겨보지 않으면 밟고 지나치기 십상인 대가의 원작. 생각보다 초라하더라도 실망하지 말고 찬찬히 들여다보자. 유명한 작가의 원작을 발밑에 두고 이렇게 가까이서 살펴볼 기회가 흔치 않으니.
피카소 미술관 Museu Picasso
피카소,달리,미로는 바르셀로나가 자랑하는 3대 화가다.
파블로 피카소(Pablo Ruiz Picasso1881~1973)는 스페인 사람들이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한다.그렇기 때문에 피카소 미술관은 바르셀로나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찾는 미술관이다. 특히 피카소의 초기 작품들이 많은 곳이라 시기별로 변화하는 피카소의 작품세계를 한눈에 살펴보기에 이만한 곳이 없다.
피카소가 태어난 곳은 스페인의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에 있는 작은 도시인 말라가이다. 1881년에 태어난 피카소는주로 프랑스 파리에서 활동하는데, 그전에 바르셀로나에 머물며 이 도시의 공기를 맘껏 들이마셨다. 이곳 미술관은 그가 파리로 유학을 떠나기 전까지 살았던 14세기 경에 지어진 고딕 양식의 귀족 저택, 아길라르 궁전을 개조한 것이다. 1963년에 개관한 이 미술관은 피카소의 유년시절의 연필 습작품부터 과거의 유명작품들을 리메이크한 작품까지 무려 3,000여 개의 작품이 모여 있다. 13~15세기에 지어진 고풍스러운 귀족저택들이 늘어선 비좁은 몬까다 거리 한구석에 피카소 특유의 화려한 색채로 그려진 작품들이 가득 차 있는 미술관이 숨어 있으니, 그 골목길로 접어드시라.
투우경기장 Plaza de Toros Monumental
안은 선혈이 낭자하지만, 투우경기장의 외관은 상큼하다.
붉은 벽돌에 흰색과 푸른색의 타일로 앙증맞은 무늬를 그려 붙인 이곳. 탑 위에 둥글게 올라앉은 달걀 같은 지붕 위에도 푸른 무늬가 그려져 있어 스페인 사람들의 감각을 새삼 느끼게 한다. 사실, 바르셀로나는 투우가 금지되어 있다. 2004년에 '안티투우도시' 선언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바르셀로나에 유일하게 남은 투우 경기장인 이곳, 모누멘탈(Monumental) 이외에는 모두 문을 닫았고, 모누멘탈 역시변신을 기다리고 있다.
1914년에 엘 스포르트(El Sport)라는 이름을 달고 오픈했다가 1916년에 모누멘탈(Monumental)이라고 이름을 바꾼 이곳은 모데르니스모 건축양식으로 지어진 건물이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유럽에서 일어난 예술부흥운동인 모데르니스모는 프랑스식으로 '아르 누보'라고 하면 확실히 감이 잡힐 것이다. 이슬람 미술과 고딕 미술을 절충한 무데하르 양식, 장식성이 강한 독창성이 모데르니스모 양식의 특징이다. 이곳에서는 1960년 이후 투우시즌이 아닐 때는 콘서트가 열렸는데, 비틀즈, 롤링스톤스, 밥 말리 등 쟁쟁한 스타들이 소의 피로 얼룩진 무대에 그 이름을 올렸다.
단순하면서도 복잡한, 안토니 타피에스미술관 옥상의 설치작품 'Cloud and Chair'
바르셀로나에는 피카소도, 미로도, 달리도 있지만 안토니 타피에스(Antoni Tapies)도 있다. 1923년 바르셀로나에서 태어난 그는 바르셀로나 대학에서 법률을 전공하였으나 전공과는 무관하게 다양한 회화작업을 내놓으며 대가의 반열에 올랐다. 찢어진 캔버스, 편지, 못쓰는 물건들, 쓰레기들에 휘갈겨 쓰듯 드로잉을 한 그의 작품들은 선배 작가들에 비해 크게 유명해지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바르셀로나에 꼭 가야 할 미술관 중 하나에 자신의 이름을 올릴 만큼은 되었다.
그의 이름을 건 이 미술관은 타피에스의 전 작품을 볼 수 있는 곳이기며 도서관과 아트관련 전문서점을 갖추고 현대미술을 쉽게 접할 수 있도록 돕는 곳이기도 하다. 모데르니스모 건축가인 도메네크 이 몬타네로(Lluis Domenech I Montaner)가 설계하여 1984년에 지어진 이 건물은, 건물 자체의 아름다움보다 건물 옥상 위에 이고 있는 작품으로 인해 더 유명해졌다. 거대한 철사뭉치로 보이는 'cloud and chair'라는 이름의 이 작품은 바르셀로나의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명확한 간판 역할을 하고 있다.
카탈라냐 음악당 Palau de la Musica Catalana
숨이 막히는 경험을 하고 싶다면 카탈라냐 음악당의 천정스테인드글래스를 올려다보라
사실, 안토니 타피에스 미술관을 설계한 도메네크 이 몬타네로의 대표작은 카탈라냐 음악당이다. 그의 이름은 낯설지만 20세기 초반, 카탈루냐에서는 가우디만큼이나 명성이 높았다. 스물다섯살에 바르셀로나 건축학교 교수로 취임했을 정도로 천재적이었던 이 건축가의 '천재성'은 바로 이 음악당에서 확인할 수 있다. 가우디를 보러 왔다가 가우디를 못 보고 가도 아깝지 않을 아름다움을 가진 이 음악당은 수천 개의 채색유리를 사용하여 벽과 천정을 꾸미고 있다. 이러한 스테인드글라스와 샹들리에의 아름다움은 어떤 건물을 견주어도 전혀 주눅들지 않는다.
1905년과 1908년 사이에 지어진 이 건물은 가이드 투어로 내부를 관람할 수 있지만, 그보다 공연을 볼 때 제 아름다움을 빛낸다. 지금도 제일 유명하고 비싼 공연을 포함하여 수많은 공연이 열리는 '현역 공연장'이다.
달리미술관의 전경이야말로 '달리스러움'의 전형이다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 1904~1989)에 대해 또 다른 설명이 필요할까? 광인과 천재의 어디쯤에 자리 잡았던 그의 작품은 너무 유명해서, 그의 행적만큼이나 깊은 인상을 사람들에게 남겼다. 하도 기이하여 어디 하늘에서쯤 뚝 떨어진듯했던 그도 사실은 카탈루냐 북부의 작은 마을 피게라스(Figueras)에서 갓난아이로 태어나 같은 도시에서 84세의 나이로 죽은 평범한 사람이었다. 결국 그의 고향인 이곳에 달리 미술관이 세워지게 된다.
피게라스는 바르셀로나에서 버스로는 약 2시간 20분, 기차로는 약 2시간쯤 걸리는 곳에 자리하고 있다. 내란 중에 불탄 시민극장을 개조해서 1974년에 오픈한 이 건물은 선명한 붉은 계통의 색 벽에 빵 모양의 장식을 다닥다닥 붙이고 건물 꼭대기에 거대한 달걀을 옹기종기 이고 있다. 외양부터 '달리스러운' 이 건물은 다른 미술관들과는 달리 위층부터 보며 내려올 수 있도록 작품을 배치하였다고 한다. 약 600여 점의 달리 작품뿐 아니라 달리의 무덤도 이곳에 있다 하니, 달리의 팬에게는 성지순례의 경험을 안겨줄 듯.
구엘공원의 도마뱀은 바르셀로나의 상징이 되고 있다
바르셀로나의 색채를 이야기하면서 가우디를 빼놓을 수는 없다. 가우디의 어떤 작품을 이야기할까가 고민스러울 뿐. 곡선과 다양한 색깔을 써서 신비롭기까지 한 건물을 지어냈던 그의 작품은 바르셀로나 이곳저곳에 자리 잡고 그곳의 풍경을 바꾸고 있다. 그 중에서도 구엘공원은 색색깔의 타일조각, 독특한 기둥과 화려한 천정, 모자이크 분수, 조각품과 구불거리는 벤치로 가득 찬, 말 그대로 '가우디월드'라 할만한 곳.
구엘이 아파트단지를 짓기 위해 가우디에게 맡겼던 이곳은 14년간의 공사기간에도 불구하고 계획대로 이루어지지 못했고, 결국 구엘이 죽은 뒤 그 가족이 시에 땅을 기증하면서 구엘공원이 되었다. 가우디가 1906년에 이사 와서 죽기 직전까지 20년간 살았던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 오면 가우디 박물관도 둘러볼 수 있다.
바르셀로나는 가우디의 뒤를 졸졸 좇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둘러볼 수 있다. 아직 젊은 가우디가 건축가로서의 꿈을 가득 담아 지어 올렸던 카사 비센스(Casa Vicens), 구엘을 위해 지은 별장인 파베욘스 구엘(Pavellons Guell), 그리고 구엘 가족이 살았던 집, 팔라시오 구엘(Palacio Guell), 곡선으로 된 외관이 신기한 카사 바트요(Casa Batllo), 카사 밀라(Casa Mila) 아직도 짓고 있는 사그라다파밀리아(Sagrada Familia)...뿐이랴, 레이알 광장의 가로등도 가우디의 작품이다. 하지만 가우디에서만 만족한다면 바르셀로나가 아깝다. 이곳의 수많은 다른 건물들이, 가우디의 건축물이 개인적인 천재성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온몸으로 웅변하고 있다. 가우디에게 영향을 주었던, 가우디와 함께 발전하며 키를 높였던 건물들을 둘러보면 그를 낳은 도시, 바르셀로나의 전모가 짐작이 갈 것이다. 도메네크 이 몬타네로의 또 다른 작품인 산 파우 병원(hospital de sant pau), 호세프 푸이그 이 카다팔츠가 지은 카사 아마트예르(Casa Amatller)와 카사 드 레스 뿐세스(Casa de les Punxes), 가우디의 스승 호안 마르토렐이 지은 산프란세스크 데 살레스(Sant Francesc de Sales) 등. 그 땅에 붙박여 있는 건물들은 그 땅에 가지 않고서는 볼 수 없으니, 밟아보고 만져보고 걸어보고 기대보자.
지로나는 바르셀로나와 피게레스 사이에 위치한 역사 유적도시입니다. 중세시 대 모습을 간직하고 있으며 소박하지만 그렇다고 심심하지는 않은, 아기자기하 고 고풍스러운 멋을 간직한 근교의 작은 도시입니다. 마을 전체가 성벽으로 둘 러쌓여 있고 지로나의 과거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좁은 골목길을 걷다보면 아기 자기한 상점과 카페, 식당 등을 쉽게 만나볼 수 있습니다. 도시를 가로지르며 흐 르고 있는 강과 양옆으로 서 있는 알록달록 예쁜 건물들은 지로나의 아름다움을 더해주며 람블라 거리와 산타 클라라를 이어주는 지로나의 상징 ‘지로나 다리’는 꼭 한번 방문해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지로나와 가까운 휴양지로 지중해와 중세마을의 절묘한 조화를 이 루는 곳 입니다. 카탈루냐 지중해의 숨은 보석이라 불리우는 아름다운 도시인 '토 사 데 마르'는 CF나 영화 속에 나올법한 아기자기한 골목과 아름다 운 해안풍경 등 단연 돋보이는 장소입니다. 성 위로 올라 성벽을 따라 산책하듯 올라가면 토사 데 마르의 아름 다운 풍경을 보실 수 있습니다.
지중해의 숨은 보석 '토사 데 마르'
'나뉘어진 산'이라는 뜻의 몬세라트는 깍아지르는 듯한 기암절벽의 절경과 그 위 대한 자연환경을 극복하고 수도원을 건설한 까딸루냐 인들의 노력에 더욱 놀라 움을 금치 못하는 곳입니다. 바르셀로나에서 약 50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 으며, 공영철도와 산악열차를 이용하여 손쉽게 도달할 수 있습니다. 몬세라트 내 부에 위치한 몬세라트 대성당은 반드시 들러보아야 할 필수코스. 아름다운 자연 경치와 조화를 이룬 몬세라트를 꼭 한번 방문해보시기 바랍니다.
두산백과 토사 데 마르
요약 스페인 카탈루냐자치지방 히로나주에 있는 자치시이다.
원어명 |
Tossa de Mar |
위치 |
스페인 카탈루냐자치지방 히로나주 |
경위도 |
동경 2° 55′ 56″ 북위 41° 43′ 13″ |
면적(㎢) |
38.43㎢ |
시간대 |
CET(UTC+1) |
홈페이지 |
www.tossademar.com |
주도(州都) 히로나(Girona)로부터 남동쪽으로 30.5km 떨어진 거리에 있다. 평균 고도 12m에 위치하며, 아열대습윤기후에 속한다. 코스타브라바 해안의 소도시로, 요레트 데 마르(Lloret de Mar)가 서쪽으로 7.4km, 산트 펠리우 데
긱솔스(Sant Feliu de Guíxols)가 북동쪽으로
10.6km 떨어져 있다. GI-681 국도가 지난다.
주요 건축물로는 해변을 내려다보는 언덕에 위치한 토사 데 마르 성(Castillo de Tossa
de Mar)이 있다.
토사 데 마르 (두산백과)
몬세라트
자연경관 1001 몬세라트 [Montserrat]
대륙 |
유럽중동 |
위치 |
스페인>카탈루냐스페인>칸타브리아 주 |
규모 |
몬세라트의 길이 : 6㎞최고 높이 : 1,238m보호구역의 면적 : 3,630㏊ |
저자 |
테레사 파리노 |
화석이 된 스테고사우루스처럼 생긴 문타냐 드 몬세라트는 연한 색의 역암질 기둥으로, 하늘을
찌를 듯 서서 바르셀로나 뒤로 펼쳐진 평원을 압도하듯 굽어보고 있다. 이 산을 찾는 사람들은 2,000개가 넘는 등산로를 찾는 등산객도 많지만 '라모레네타'라고 하는 검은 마돈나를 보기 위한 순례자들의 발길도 끊이지 않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이 작은 목각상은 성 누가가 만든 것으로 서기 50년에 성 베드로가 이곳에 가져왔다고 한다. 물론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법으로 이 조각상이 12세기에 만들어진
것임이 밝혀졌다. 이 조각상과 관련한 또 다른 종교적인 일화가 있다.
성 이그나티우스 로욜라가 그의 칼을 이곳에 내렸을 때 자신의 소명을 깨닫고 예수회를 창건했다고 전해져 온다. 이곳에서 서식하는 식물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그늘이 진 바위틈
사이로 랙스포텐틸라, 라몬다와 피레네초롱꽃이 자란다. 멸종
위기에 처한 이곳의 고유종인 바위떡풀류인 삭시프라가카탈라우니카와 세열유럽쥐손이류의 에로디움루페스트레도 이곳에 서식한다. 봄이 되면 산의 정상에는 야생 튤립, 노알수선화와 수많은 난초가
자라고 하늘에는 수염수리가 선회를 한다.
몬세라트 [Montserrat]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자연 절경 1001, 2008. 1. 16., 마로니에북스)
국내에는 올림픽이 개최된 도시로 잘 알려진 바르셀로나는 사실 스페인 최대의 관광도시입니다. 수도인 마드리드와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도 과거와 현대가 조
바르셀로나
여행일정표
호텔로 이동 후 휴식
시체스 스페인의 산토리니 시체스로 이동하여 아름다운 해변 및 시내 관광
시체스 스페인 카탈루냐자치지방 바르셀로나주에 있는 자치시.
원어명 |
Sitges |
바르셀로나 남서쪽 약 35km지점에 위치하며 지중해에 면한 휴양도시이다. 도시의 면적은 43.85㎢이며, 거주 인구는 약 27,000명이다. 전통적으로 와인산업이 발달된 도시였으나 산업혁명 시기를 거치면서 관광 서비스업이 주된 수익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도시의 서쪽 능선에는 포도밭이 많이 분포한다. 관광도시도 주목받으면서 도시에는 많은 호텔들이 들어섰으며 대부분 고급 숙박지들이 많다. 그리고 도심 올드타운의 오래된 골목들 사이로 카페와 쇼핑상점 등이 이어져 있다. 해변가에 위치한 산트 바르토메우 성당(Sant Bartomeu)은 17세기에 건립된 것인데 시체스 해변을 상징하는 건물이며, 특히 결혼식 장소로 유명하다. 또한 매년 가을인 9~10월에는 세계적인 영화제인 시체스 영화제가 매년 열리는데 스릴러, 공포 등의 장르를 다룬다. 한국영화로는 2004년 《올드보이》, 2005년 《친절한 금자씨》가 시체스 영화제에 출품하여 호평을 받았다. 시체스 유럽에서 휴양지로 인기가 높은데 유명한 예술가들이 이곳에 별장을 두고 지냈다. 그 때문에 마리첼 뮤지엄(Maricel Museum) 등 갤러리가 많고 거리에는 독특한 조각품들이 많이 설치되어 있다. 세체스 해변의 특이한 점은 방파제로 해변을 구분해 놓았다. 17여 개의 해변은 각 해변마다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누드해변이 있으며 특히 동성애자를 위한 해변이 있어 많은 동성애자들이 시체스를 찾는다.
시체스 (두산백과)
발렌시아 오렌지의 도시 발렌시아로 이동
호텔 휴식
호텔 TRH MIJAS CLASS 또는 일급 또는 투어리스트급
식사 조식 호텔식 중식 현지식 석식 호텔식
7일 2018년 05월 16일 (수) [지역] 발렌시아-그라나다
발렌시아 호텔 조식 후
두산백과 발렌시아 [Valencia]
요약 에스파냐 동부 발렌시아 자치지방 발렌시아 주(州)의 주도.
위치 |
스페인 동부 발렌시아 주의 주도 |
경위도 |
동경 0°22′0″ 북위 39°29′0″ |
면적(㎢) |
134.65 |
시간대 |
CET(UTC+1) Summer: CEST(UTC+2) |
행정구분 |
18 district |
행정관청 소재지 |
Pl. de l'Ajuntament, 1 46002 Valéncia |
홈페이지 |
www.valencia.es |
인구(명) |
786,189(2015년) |
자연과 기후
스페인 동부 지중해의 발렌시아 만에 면한
도시이다. 2015년 기준 인구는 786,189명이다. 몬테스 우니베르살레스(Montes Universales)에서 발원하여
발렌시아를 관통해 지중해로 흘러나가는 투리아(Turia)강 하구에 위치한다. 구하도를 중심으로 연못, 노천 식당, 전시장, 예술센터 등의 다양한 문화 및 관광시설이 들어서 있다. 무더운 반건조지역으로 여름에는 28~34°C이고, 지중해성 기후와 푄(foehn)
현상으로 겨울에는13~20°C로 온화하다.
기원과 역사
지중해의 전략적 지정학적 중요성에 따라 로마인들이 기원전 138년 도시를 건설하여 이베리아반도로 진입하는 교두보 역할을 담당했다. 역사적으로는 그리스·카르타고·로마·고트·이슬람의 지배를 받아 왔으며, 1002년 알 안달루스(Al-Andalus)의 통치자 알만소르(Almanzor)의 사망으로 이슬람 세력이 분열하자 '발렌시아 타이파(Taifa)'라는 이슬람 소왕국으로 분리되었다. 1094년 엘시드가 수복하여 레콩키스타를 이루었으나, 그의 사후 다시 이슬람 세력이 집권하여 발렌시아 왕국의 수도로서 존속했다. 1238년 아라곤-카탈루냐 연합왕국이 탈환하여, 15세기까지 카탈루냐 지배 아래 지중해 무역으로 번성했다. 19세기 프랑스의 지배와 이에 대한 저항운동·시민전쟁을 거쳐, 20세기 스페인 내전기에 공화파의 저항으로 파괴를 겪었으나 복구의 노력으로 경제 부흥 시기를 맞이하여, 21세기 스페인 문화 관광의 도시로 성장했다.
경제와 산업
국토가 기름지고 관개시설이 잘된 농업지대로 쌀·목화·뽕나무·오렌지·올리브등이 재배되며, 투리아강 하구의 빌라누에바 델 그라오항(港)은 쌀·올리브 등의 농산물을 포함해 스페인의 20% 수출품이 출항하는 곳으로, 지중해에서 가장 물동량이 많은 컨테이너 항구이다. 그밖에 조선업을 비롯한 근대 상공업이 발달했다. 현재는 정치·군사·종교·교육·문화의 중심지로 스페인에서 마드리드, 바르셀로나에 이어 세 번째로 큰 자치 도시로 성장했다. 21세기에 건설과 관광 붐이 도래하여 통신과 교통의 확대를 가져왔으며, 서비스 산업에 종사하는 인구가 상대적으로 확대되었다.
문화와 관광
1990년대 중반 이후 빠른 속도로 관광 산업이 발전했다. 이슬람과 카톨릭문화가 공존하는 역사의 도시로 과거의 건축물과 예술작품들의 복원 및 재현작업이 시행되었고, 국제적 규모의 콘벤션 센터와 전시장이 들어서며 5성급 호텔들이 들어섰다. 주요 관광 지역으로는 후스티시아궁전·예술 및 도자기박물관·식물원·고생물박물관, 그리고 휴식 공간인 아윤타미엔토광장과 몽포르테정원 등 다채롭다. 도시 최대의 전통 축제는 성조셉을 기리는 ‘파예스(Falles)’로 매년 3월 개최된다. 2012년 버클리 음대가 ‘퀸소피아아트팰러스(Palau de les Arts Reina Sofia)’에 분교를 개교하여 인지도가 상승했다. 스페인어와 발렌시아어가 공식 언어인데, 후자는 카탈루냐어와 유사하다.
음식과 요리
스페인의 세계적인 요리 파에야의 기원지로 알려져 있다. 무어인들이 10세기에 쌀 농사를 시작했는데, 이후 발렌시아인이 쌀, 육류, 생선류, 해산물에 중동 향신료인 사프란을 넣어 스튜를 해먹었는데, 이것이 파에야의 기원이라고 한다. 곡창지대로 유명한 남쪽의 알부페라(Albufera)호수에서 생산된쌀과 물로 만든다. 초기 물쥐(water vole)로파에야를 만들기 시작하여 이후 토끼, 닭, 오리 등으로 식재료가 변천했다. 디저트로는 달콤한 전통 과자인 파르통(fartón)과 분욜(Bunyol)이 있고, 오렌지 산지로 유명하여 브랜디에 오렌지를 첨가한 ‘발렌시아’라는 달콤한 칵테일이 인기있다. 또한 추파(chufa)로 만든 오르차타의 탄생지이다.
발렌시아 [Valencia] (두산백과)
화를 이루면서 만들어진 기획도시, 또한 항만시설이 갖춰져있어 해외와의 물자 교류도 활발하여 수많은 관광객들이 몰리는 인기도시입니다. 스페인의 위대한 건축가 가우디의 흔적이 도심 곳곳에 남아있어 놀라운 볼거리를 다양하게 제공 하고 있습니다. 스페인을 방문하실 경우 바르셀로나는 필수관광 도시로 꼭 직접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바르셀로나의 북쪽에 위치한 구엘공원은 건축가 가우디의 흔적이 드러나는 독특 한 디자인의 공원으로 최초 주택지로 선정되었던 이 공원은 자금난에 부딪히면 서 가우디에 의하여 공원으로 재탄생되었습니다. 구엘공원 구석구석에 가우디의 손길이 묻어있으며, 톡톡튀는 디자인이 눈길을 끕니다. 특히 공원의 정상에서 바 라보는 바르셀로나의 전경이 아름다우며, 중심에 위치한 모자이크 타일의 도룡 뇽이 유명합니다.
구엘공원
성가족 성당은 세계적인 건축가 가우디가 설계하고 직접 건축 감독까지 맡은 최 대의 프로젝트 작품입니다. 그의 나이 서른 살 때인 1882년 3월 19일(성 요셉 축 일) 공사를 시작해 1926년 6월 죽을 때까지 교회의 일부만 완성했으며, 현재까 지도 계속 작업 중에 있고 교회 전체가 완성되기까지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릴지 는 알 수 없습니다. 가우디 건축의 백미(白眉)로 꼽히며, 바르셀로나에서 가장 유 명한 건축물입니다.
성가족 성당
사그라다 파밀리아(La Sagrada Familia, 1882~1926, 성가족 성당)
바르셀로나 마요르까 거리에 신 고딕양식으로 세워지고 있는 「성가족 성당」은 1866년에
처음 계획되었다. 기계화와 근대화로 점차 타락해져 가는 도시생활을 정화시킬 수 있는 것은 오직 '신의 집'뿐이라는 한 출판업자의 확신에서 출발한 「성가족 성당」은
명칭에서 의미하는 것처럼 가족들이 모여 기도할 수 있는 곳으로 계획되었다. 그래서 성당의 주제 또한
예수, 마리아, 요셉 세 사람의 성스런 가족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차가운 인간의 영혼을 정화시킬 성당의 건축비를 위해 성당건축위원회가 설립되었고, 공식적인
모금도 시작되었다. 1882년 설계를 부탁받은 건축가 빌랴르(F.
de P. Villar y Lozano)는 좋은 취지의 계획이었기에 돈을 받지 않고 50명의
노동자와 함께 성당을 짓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성당을 무조건 싸게만 지으려고 하는 교구의 자세에 빌랴르는
환멸을 느껴 결국 작업을 포기했고, 자신의 후임자로 제자인 가우디를 추천하게 되었다. 그렇게 가우디가 본격적으로 이 성당의 공사에 참여한 것은 1883년
지하의 납골당 기둥이 반 정도 건립될 무렵이었다.
젊은 건축가가 공사를 맡게 되었으니 건축비를 좀더 아낄 수 있을 것이라는 교구의 기대는 완전히 빗나갔다. 가우디가 공사를 맡으면서 빌랴르가 설계한 초기의 디자인은 폐기되고 완전히 새롭게 시작하였다. 이미 가우디의 머릿속에는 가장 성스럽고 가장 아름다운 성당이 그려지고 있었다.
가우디는 「성가족 성당」을 통해 카탈루냐의 정신을 제대로 표현하고 싶었고 또한 완벽한 가우디의 성격으로 인해 작업은 결코 '대충'될 수 없었다. 교구의
만성적인 적자는 공사를 종종 중단시키는 위기가 되기도 하였으나, 공사의 느린 진행은 오히려 가우디에게
종교적인 상징을 완벽하게 설계에 반영하고 충분히 검토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이 교회는 신이 머무는 곳으로, 기도하는 장소입니다. 여기에 모인 우리 모두는 로마의 카타콤베에 있는 초기 교회에서 기도를 드렸던 사람들과 같은 마음으로 기도를 드립니다.……크리프타 위에는 주 제단을 설치하고 평면도는 라틴 십자형으로 다섯 개의 회랑(回廊)과 바실리카 양식의 회랑 세 개를 만들 것입니다. 세 개의 정문을 갖추고 정면에는 마요르카 거리와 마주한 다섯 개의 회랑에 상응하는 다섯 개의 입구를 갖출 것입니다. 그리고 양 옆 문에는 다섯 개의 회랑에 상응하는 세 개의 입구를 만들 것입니다.……각 정문에 네 개의 탑이 설치되고 삼면에서 12사도를 표현해낼 것입니다.……교회는 돔에서 비추는 빛과 유리창을 통해 들어오는 빛이 조합되어 아름다움이 넘쳐흐를 것입니다. 영광된 빛이 교회 안의 색채를 밝게 비추겠지요.……이 교회가 세워지는 중요한 이유는 신의 집과 기도와 명상의 집을 만드는 것입니다.……이 교회는 종교를 올바르게 볼 수 있는, 넓게 열려진 공간이 될 것입니다.
갑부들의 저택을 건축할 당시 느꼈던 건축주들의 횡포와 독선은 가우디로 하여금 더욱더 종교적인 건축에 열의를 바치도록 만들었을지 모른다. 가우디는 「성가족 성당」을 통해 지금까지 자신이 쌓아 온 모든 경험을 모아 최고의 걸작품을 만들 것이라고 스스로
다짐했다. 가우디가 건축을 통해 혹은 조각을 통해 표현하고 싶었던 것들이 하나하나씩 가우디의 머릿속을
채워나갔다. 1906년 건물의 계획이 마무리되면서 가우디는 예수의 '탄생'과 '수난'과 '영광'을 의미하는 세 개의 정면 중 '탄생' 부분을 작업하기 시작하였다.
「성가족 성당」의 정면이 될 '탄생'은 하늘을
찌를 듯한 4개의 포물 첨탑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첨탑을
이루고 있는 돌 하나하나는 예수의 탄생을 의미하는 정교한 조각들로 이루어져 있다.
「성가족 성당」은 돌과 종교와 예술이 삼위일체를 이루는 작품으로, 가우디 스스로 속죄사원이라고
칭하면서 건축하는 과정을 자기희생의 과정으로 생각했다고 전해진다. 성당 전체는 '돌로 만들어진 성서'로서 장인들이 직접 손과 연장으로 성서에 기록된
장면들과 가르침 등을 장식과 상징들로 구체화시키고 있다. 가우디는 넘쳐나는 빛 속에 성스러운 조각들과
음악이 있는 성당이 되길 희망했으며, 그래서 모든 부분에 하나하나의 의미를 상징적으로 표현하려고 애썼다.
탑에 성스럽도다(Sanctus, Sanctus, Sanctus)라고 새겨진 세 글자는 각각 성부와 성자와 성령에게 봉헌한 말이다. 성부에게 바친 성스럽도다(sanctus)는 태양과 같은 노란색으로, 성령에게 바친 두 번째 글자는 오렌지색으로, 성자에게 바친 세 번째 글자는 순교자의 전례를 나타내는 진홍색으로 칠할 예정이다. 이 세 가지의 색상은 각각 대비가 되는 보라색, 청색, 녹색 바탕 위에 씌어지게 된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은 모두가 '성스럽도다'를 중얼거리며 성 삼위일체를 향한 찬미가를 부르리라. 그리고 찬미가가 사람들의 시선을 하늘로 인도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수난의 파사드(facade)가 전체적으로 돌출되어 보인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경외감을 나타내고 싶었다. 그 때문에 빛의 명암, 요철의 모티프, 비장미를 나타낼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사용하려고 한다. 그리고 건물 자체가 희생이 되어도 좋다고 생각한다. 아치를 파괴하고 열주를 쓰러뜨리더라도 희생의 피흘림을 상기시킬 수 있다면.
「성가족 성당」
1883년부터 1926년까지 43년간 가우디의 일생은 「성가족 성당」 공사에 전부 바쳐졌다. 특히, 마지막 10년은 작업실을 아예 현장 사무실로 옮겨 인부들과 숙식을 함께했다. 이 당시 가우디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차례로 잃는 극도의 슬픔을 이겨내야 했다. 속세에 미련을 버린 듯 성당을 건설하면서 가우디는 종교에 모든 것을 의지했고, 이런 성향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가우디의 모든 열정이 승화된 곳은 바로 그의 작업실이었다. 그러나 가우디는 살아있는 동안 「성가족 성당」을 완성할 수 없음을 스스로 알았고, 가우디 자신도 알지 못할 먼 훗날을 기약하며 설계와 시공을 해야만 했다.
나에게 점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다. 슬프게도 내 손으로 「성가족 성당」은 완성시키지 못할 것이다. 내 뒤를 이어 완성시킬 사람들이 나타날 것이고, 이러한 과정 속에서 교회는 장엄한 건축물로 탄생하리라. 타라고나 대 성당의 예에서 보았듯이 처음 시작한 사람이 마지막 완성까지 보았다면 그만큼 웅장함을 기대할 수 없었을 것이다. 시대와 함께 유능한 예술가들이 자신들의 작품을 남기고 사라져 갔다. 그렇게 해서 아름다움은 빛을 발한다. 대 제단, 사스토레스가(家)의 작은 교회, 성 테크라 교회에서는 여러 양식이 쓰였음에도 조화롭다. 많은 예술가들이 형태와 양식의 다양함 속에서도 통일성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우디가 죽은 지 3년 후에 그가 구상한 「성가족 성당」의 전체 도면이 확정 발표되었다. 그 후 「성가족 성당」은 가우디의 작업을 계승하는 건축가들의 기술적인 연구를 바탕으로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하나님은 가우디의 영원한 후원자로서, 가우디가 떠난 지금도 「성가족 성당」은 그의 보호 속에 여전히 지어지고 있는 것이다. 건축가 없이도 1년에 100만 명 이상의 방문객을 끌어들일 만큼의 관심 속에서 지어지고 있는 「성가족 성당」이 주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아마도 이는 스스로 가슴속에 울리는 소리에 귀 기울여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사그라다 파밀리아(La Sagrada Familia, 1882~1926, 성가족 성당) (안토니 가우디, 2004. 9. 30., ㈜살림출판사)
시체스(Sitges)는 스페인 카탈루냐 지방, 바르셀로나 주의 도시입니다. 매년 10 월 시체스의 해변에서는 영화제가 개최되며 해변에서는 이국적인 풍경을 만끽하 실 수 있습니다. 활기찬 분위기의 해변과는 달리 골목과 골목 안쪽으로는 조용함 과 여유로움을 즐기실 수 있어 현지인들에게 휴양지로 인기가 많습니다.
시체스 스페인 카탈루냐자치지방 바르셀로나주에 있는 자치시이다.
원어명 |
Sitges |
바르셀로나 남서쪽 약 35km지점에 위치하며 지중해에 면한 휴양도시이다. 도시의 면적은 43.85㎢이며, 거주 인구는 약 27,000명이다. 전통적으로 와인산업이 발달된 도시였으나 산업혁명 시기를 거치면서 관광 서비스업이 주된 수익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도시의 서쪽 능선에는 포도밭이 많이 분포한다. 관광도시도 주목받으면서 도시에는 많은 호텔들이 들어섰으며 대부분 고급 숙박지들이 많다. 그리고 도심 올드타운의 오래된 골목들 사이로 카페와 쇼핑상점 등이 이어져 있다. 해변가에 위치한 산트 바르토메우 성당(Sant Bartomeu)은 17세기에 건립된 것인데 시체스 해변을 상징하는 건물이며, 특히 결혼식 장소로 유명하다. 또한 매년 가을인 9~10월에는 세계적인 영화제인 시체스 영화제가 매년 열리는데 스릴러, 공포 등의 장르를 다룬다. 한국영화로는 2004년 《올드보이》, 2005년 《친절한 금자씨》가 시체스 영화제에 출품하여 호평을 받았다. 시체스 유럽에서 휴양지로 인기가 높은데 유명한 예술가들이 이곳에 별장을 두고 지냈다. 그 때문에 마리첼 뮤지엄(Maricel Museum) 등 갤러리가 많고 거리에는 독특한 조각품들이 많이 설치되어 있다. 세체스 해변의 특이한 점은 방파제로 해변을 구분해 놓았다. 17여 개의 해변은 각 해변마다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누드해변이 있으며 특히 동성애자를 위한 해변이 있어 많은 동성애자들이 시체스를 찾는다.
시체스 (두산백과)
시체스
여행일정표
그라나다 이슬람 문화의 향기가 그대로 남아있는 그라나다로 이동 이슬람 건축의 최고 걸작이자 그라나다의 상징인 알함브라궁전(내부), 헤네랄리페 정원,아랍인들의 마을인 알바이신 지구(조망)등 관광
호텔로 이동 후 휴식
호텔 GRAN SOLUCAR CLASS 또는 일급 또는 투어리스트급
식사 조식 호텔식 중식 현지식 석식 호텔식
8일 2018년 05월 17일 (목) [지역] 그라나다-미하스-론다-세비야
그라나다 호텔 조식 후
미하스 아기자기하게 하얀 집들로 이루어진 예쁜 미하스 마을로 이동 일본 관광객에게는 필수 코스로 알려져있는 하얀마을 관광
론다 투우의 발상지 론다로 이동 가파른 협곡위에 자리한 도시 론다 관광
스페인 땅에서 이슬람 문화의 흔적이 가장 뚜렷이 남아있는 곳 중 하나인 그라나 다. 700년 이르는 세월동안 스페인 땅을 지배한 이슬람의 세력의 중심지였기 때 문입니다. 그 당시의 모습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알함브라 궁전. 이 거 대한 성채를 보기 위해 수없이 많은 여행자들이 걸음합니다. 라틴 문명과 이슬람 문명이 충돌했던 현장이 바로 그라나다입니다. 그밖에 알바이신 지구와 헤네랄 리페 정원 등 다양한 관광포인트가 있으며, 스페인의 국영호텔인 "파라도르" 중 에서도 바로 이 그라나다 파라도르가 가장 유명합니다.
그라나다
두산백과 그라나다 [Granada]
에스파냐 남부 안달루시아 자치지방(autonomous community)의 그라나다주(州)의 주도(州都).
위치 |
에스파냐 남부 안달루시아 자치지방의 그라나다주 |
경위도 |
서경003°36′03″ 북위37°10′41″ |
면적(㎢) |
88 |
시간대 |
CET(UTC+1) Summer: CEST(UTC+2) |
행정관청 소재지 |
Palacio de los Córdova,Cuesta del Chapiz, 4, 18071 GRANADA |
홈페이지 |
http://www.granada.es |
인구(명) |
236,207(2007년) |
에스파냐(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자치지방(autonomous community)의 그라나다주(州)의 주도(州都)이다. 스페인어로 눈덮힌 산맥이라는 의미를 가진 험준한 산악지역인 시에라 네바다(Sierra
Navada) 산맥 북쪽에 위치한다. 과달키비르 강(江)의 지류인 베이로(Beiro) 강,
제닐(Genil) 강, 다로(Darro) 강이 합류하는 지점이며 해발 738m의 고지대에 위치하는
고대도시이다. 인구는 약 23만 7천명이 거주하며 스페인에서 13번째 크기를 가진 도시이다. 남서쪽이 지브롤터 해협에서 약 200km, 코르도바에서 동남쪽 130km, 수도 마드리드에서 남쪽으로 약 350km 떨어져 있다. 스페인의 주요도시와 철도와 정기노선 버스로 연결되며 페데리코 그라치아 로르카 공항(Federico Garcia Lorca Airport)이 있다. 공항은
도심의 서쪽 약 16km지점에 위치한다.
기후는 연평균 최고기온은 21.7도로 온화한 날씨이지만 한여름에는 35도를 오르내리는 더운 날씨를 보인다. 겨울철에는 영하로 내려가는
경우는 거의 없고 연평균 최저 기온은 약 8.7도를 나타낸다. 연평균
강수량은 361mm로 비가적은 건조한 날씨이며 10월부터 4월까지 월평균 약 40mm의 비가 내린다. 도시 주변에는 농업지대를 이루고 있는데 주로 곡물류·채소류·아마(亞麻) 재배와 양잠이 성하고, 포도주와 올리브유 생산이 많다. 피혁제품 등 이슬람 시대부터의 전통적인 수공업도 발달하였다.
이베리아 반도는 한나발의 포에니 전쟁 이후 로마에 정복되면서 히스패니아로 불렸으며
로마의 총독이 파견되어 이베리아 반도를 통치하였다. 로마가 멸망하고
711년 아랍계 무어인들이 북아프리카에서 건너와 이베리아 반도를 정복하면서 이슬람교가
급속하게 퍼져갔다. 무어인의 우마야드 왕조는 이베리아 반도의 대부분 지역을 점령했다. 하지만 왕국이 쇠퇴하자 이슬람 세력이 분산되어 군웅할거 시대가 되었다. 그라나다
왕국(1238~1492)은 11세기 경 무어인(Moors)들이 이베리아 반도에서 세웠던 왕국이었다. 당시 기독교
왕국이었던 카스티야 왕국, 아라곤 왕국, 나바라 왕국 등과 서로 전쟁과 경쟁을 반복하며 세력을 형성하였다. 점차 기독교
문명의 카스티야(Castilla), 아라곤(Aragon) 왕국의
세력이 강성해지자 로마교황은 기독교 왕국이 서로 전쟁을 멈추고 이베리아 반도에서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야 한다고 지시했다. 기독교 왕국은 연합하였고 이베리아 반도에서 이슬람 문명을
몰아내기 위한 레콩키스타(reconquista :국토 회복 운동)가
전개되면서 이슬람 세력권의 도시들이 점차 점령되었다. 이베리아 반도의 마지막 이슬람 왕국으로 남아있던
그라나다는 왕족과 귀족들 간 내분이 심화되어 쇠퇴하기 시작하였고 기독교 왕국인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와
카스티야 왕국의 이사벨이 결혼하면서 더욱 강력한 기독교 왕국으로 합병되었다. 마침내 1492년 그라나다는 아라곤 왕국에 의해 점령되면서 이베리아
반도에서 마지막 남은 이슬람문명은 사라지게 되었다.
현재 그라나다에는 이슬람 왕국의 요새와 궁전, 사원, 대학
등 많은 유적들이 남아있다. 북동부의 다로 강 좌측의 언덕 위에는이슬람 왕조의 왕궁이자 요새였던 알람브라(Alhambra) 궁전 요새가 있다. 13~14세기의 왕족의 별궁(別宮)으로 사용되었던 곳이며 세계적인 관광지로 명성이 높다. 그외 16세기의 수도원과 대학 및
16~18세기의 대성당 등 역사적인 건물들이 많다. 문화유적이 많아 스페인의 관광객 뿐만아니라
유럽과 아시아 등 세계 각국에서 많은 관광객들이 모여드는 관광도시이다. 또한 겨울철에는 시에라 네바다
산맥의 스키리조트에서는 세계적인 알파인 스키대회가 열리며 겨울 스포츠를 즐기는 관광객도 많아 1년 내내
관광객이 찾는 도시이다.
그라나다 [Granada] (두산백과)
그라나다의 상징이자 가장 귀중한 자산인 '알함브라 궁전'은 카톨릭 국가인 스페 인에 이슬람 사원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호기심을 일으키기에 충분합니다. 스페 인의 기독교 세력에게 쫓겨 최후의 보루로 세운 이 궁전은 지금도 전 세계 이슬람 문화권에서 최고의 걸작으로 손꼽힐 만큼 아름다움과 화려함을 자랑합니다. 알 함브라 궁전 위쪽의 언덕 기슭에 자리잡은 '헤네랄리페 정원'은 아랍 왕들이 더 위를 피하기 위한 휴식처로 이용했다고 하며, 꽃과 분수 그리고 화단의 조화가 멋진 관광명소입니다.
알함브라 궁전
알람브라 [Alhambra]
제작시기 |
1354년 |
건축가 |
나스르 왕조 |
위치 |
스페인 그라나다 |
양식 |
무어 이슬람, 르네상스 |
재료 |
석재, 목재 |
'알람브라'라는 이름은 아랍어로 '알 함라(Al Hamra)', 즉
'빨강'이라는 뜻으로, 그라나다의 무어 왕조가
세운 모스크, 궁전, 요새로 이루어진 복합 건물군이다. 알람브라라는 이름은 아마도 햇볕에 말린 벽돌의 색깔에서 유래한 듯하다. 대부분의
알람브라 건물들은 성, 궁전, 거주 지역이라는 삼중 구조의
전형적인 중세 기독교 성채를 닮아 있다. 1492년 기독교인들이 그라나다를 탈환한 후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로스 5세는 알람브라의 일부를 르네상스 스타일로 다시 지었다. 메수아르
궁이 기독교 예배당으로 바뀐 것처럼 몇몇 건물은 기능을 변경하였고, 어떤 것들은 카를로스 5세의 새로운 궁전을 짓기 위해 아예 헐어버리기도 했다.
새 궁전을 담당한 사람은 르네상스 건축가 페드로 마추카였다. 다른 곳에서는 무어 양식이
그대로 살아남았다. 코마레스 궁전이나 대사(大使)의 방은 이슬람의 일곱 단계 천국을 표현하는 원래의 삼나무 천장이 그대로 남아 있다. 모사라베스의 홀은 무어 양식을 응용한 기독교 건축가들을 부르는 이름에서 따왔다. 모하메드 5세의 궁전에는 하얀 대리석으로 조각한 열두 마리의 사자가
둘러싼 설화석고 수반, 일명 '사자 분수'로 유명한 사자의 정원이 있다. 이 사자들은 한때는 시계의 기능을
했는데, 매 시마다 어느 사자의 입에서 물이 뿜어져 나오는지를 보고 시간을 알 수 있었다고 한다. 이를 보고 완전히 마음을 빼앗긴 기독교인들은 이 분수를 분해하여 그 작동 원리를 이해하려고 했다. 당연히, 그 이후로 시계는 두 번 다시 작동하지 않았다.
"나이팅게일의
노래가 졸졸 흐르는 물의 상쾌한 오케스트라 연주와 뒤섞인다."
C. J. 림. 건축가
알람브라
알람브라
알람브라 [Alhambra]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세계 건축 1001, 2009. 1. 20., 마로니에북스)
및 헤네랄리페 정원
지중해가 내려다보이는 마을로 아기자기하게 꾸며놓은 기념품 가게들을 보느라 시간가는줄 모를만큼 예쁘고 그림같은 마을입니다. 짧은시간에 마을을 거의 둘 러볼 정도로 작은 도시이지만 이곳의 매력에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습니 다.
세계휴양지 1001 헤네랄리페 정원 [Visit the Generalife Gardens of Alhambra]
대륙 |
유럽 |
위치 |
스페인 안달루시아 그라나다 |
가격대 |
$1~100 |
분류 |
공원·정원, 물가, 자연 절경, 문화 |
저자 |
자키 패터슨 |
한 무어 시인은 그라나다에 있는 옛 알함브라 궁성을 가리켜 "에메랄드 속의 진주"라고 묘사하였다. 13세기 나스르 왕조의 술탄들이 살았던
이 호화로운 성채에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왕궁과 알카사바 요새가 포함되어 있다. 그 주위를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전통 이슬람 정원들이 둘러싸고 있다. 이슬람 생활 방식에서 정원은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사막의 뜨거운 열기를 피할 수 있는 휴식처로, 물은 정원 설계에서
특별히 중요하다. 흐르는 물은 마음을 가라앉혀 줄 뿐 아니라, 돌로
지은 건물을 서늘하게 해 주는 역할도 한다. 알함브라의 정원은
"헤네랄리페"라고 불리는데,
"낙원의 정원", "과수원",
"향연의 정원" 정도로 번역할 수 있다.
14세기에 지어진 파티오 데 라 아세퀴아는 정원의 심장이다. 길고 좁은 관개수로가 한쪽을
흐르며, 12개가 넘는 분수가 가느다란 물줄기를 공중으로 뿜어 올리고 있다. 파르티코 데 로스 시프레세스의 북쪽 포르티코로 넘어가면, 장방형의
인공 연못이 있고, 그 주위를 잘 정돈된 나지막한 생울타리가 에워싸고 있다. 인공 연못 안에 또 하나의 더 작은 연못이 있고, 그 한가운데에서
돌 분수가 물을 뿜는다. 예상치 못한 설계일 뿐만 아니라, 완벽한
대칭구조가 볼 만하다. 다른 정원도 대부분 이 같은 기하학적인, 질서정연한
느낌을 따르고 있다. 작은 탑 모양부터 삼각형, 완벽한 별
모양에 이르기까지 이국적인 모양으로 다듬어 놓은 박스형 생울타리도 볼 수 있다. 어디를 보아도 아름답다―어느
안뜰이나 아랍 예술과 건축의 멋진 예를 적어도 하나씩은 뽐내고 있다.
헤네랄리페 정원 [Visit the Generalife Gardens of Alhambra] (죽기 전에 꼭 가야 할 세계휴양지 1001, 2011. 1. 7., 마로니에북스)
미하스 에스파냐 안달루시아 자치지역(Comunidad Autónoma de Andalucía) 남부 말라가주(Provincia de Málaga)에 속한 도시.
원어명 |
Mijas |
위치 |
에스파냐 안달루시아 자치지역 말라가주 |
면적(㎢) |
148.5 |
인구(명) |
73,787(2009년) |
말라가주 남부 해안에 위치하며 주도 말라가에서
남서쪽으로 31km 떨어져 있다. 평균 고도는 428m이다. 말라가주에서
4번째로 인구가 많은 주요 도시로, 고대
타르테소스(Tartessos) 왕국의 말기에 해당하는 기원전 6세기경에
타르테소스인들이 세운 마을이 그 시초이다. 당시에는 이 마을을 '타미사(Tamisa)'라고 불렀다.
안달루시아 지방 고유의 정취를 그대로 간직한 아름다운 도시로, 흰색 벽과 갈색
또는 붉은색 기와 지붕이 특징인 안달루시아 전통 양식의 주택이 산 기슭부터 중턱까지 빼곡하게
들어찬 모습이 장관을 이룬다. 안달루시아 자치지역에 속한 일명 '백색의
도시' 중에서도 아름답기로 유명해 흔히 '안달루시아의
에센스'라는 애칭으로 불린다.
세계적인 해변 휴양지 코스타델솔(Costa
del Sol) 중심에 자리 잡고 있어 관광·휴양 도시로 잘 알려져 있으며, '코스타델솔의
보석'이라는 애칭도 있다. 또한 유럽 각국의 골프 애호가들이 가장 선호하는 도시 중 하나로, 에스파냐에서
가장 큰 골프 리조트인 칼라(La Cala) 골프장을 포함해 모두 7개의
대형 골프 코스가 있다. 손꼽히는 관광
명소는 없지만 도시 자체의 특별한 아름다움 때문에 세계 각국에서 많은 관광객들이 방문한다.
미하스 (두산백과)
론다
두산백과 론다
에스파냐 안달루시아 자치지역(Comunidad Autónoma de Andalucía) 남부 말라가주(Provincia de Málaga)에 속한 도시.
원어명 |
Ronda |
위치 |
에스파냐 안달루시아 자치지역 말라가주 |
면적(㎢) |
480.6 |
인구(명) |
36,827(2009년) |
말라가주 북서부에 위치하며 주도 말라가에서
북서쪽으로 113km 떨어져 있다. 평균 고도는 723m이다. 말라가주 전체 도시 중에서 2번째로 면적이 넓다. 기원전 6세기경 켈트족이 최초로 이 지역에 아룬다(Arunda)라는 이름의 정착촌을 세웠고, 이후 고대 페니키아인이 제법 큰 규모의 마을을 세웠다. 그러나 현재
도시의 시초는 기원전 3세기에 로마 제국의 장군이자
정치가인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Publius Cornelius Scipio Africanus)가 건설한 요새화된 마을이다. 기원전 1세기에는 로마 황제로부터 시의 칭호를 얻었다.
오랜 옛날부터 에스파냐 남부의 주요 도시였으며 현재도 말라가주를 구성하는 세라니아데론다 지구(Comarca de
Serranía de Ronda)의 중심 도시이다. 해발
750m급의 높은 산으로 이루어진 웅장하고 거친 산악 지대가 도시 주변을 둘러싸고 있다. 이
산악 지대는 이 지역 고유 종인 에스파냐 전나무(Abies pinsapo)의 자생지이다. 과달레빈강(Río Guadalevín)이 도시 한가운데를 흐른다.
특히 이 도시는 투우의 발상지로
국제적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1785년에 건설한 에스파냐에서
가장 오래된 투우장 중 하나인 론다 투우장(Plaza de Toros de Ronda)에서는 지금도
가끔씩 투우 경기가 열린다. 1793년에 건설한 대표적인 관광 명소 누에보
다리(Puente Nuevo)를 비롯해 많은 문화유산이 도시 곳곳에 남아 있다.
론다 (두산백과)
여행일정표
세비야 안달루시아의 대표도시 세비야로 이동
세계 3대 성당 중 하나인 굉장히 아름답고 웅장한 세비야대성당, 정 12각형으로 된 황금의 탑, 19세기때 만들어져시민들의 편안한 휴식처가 되고있는 마리아루이사공원등 관광 후
호텔 투숙 및 휴식
호텔 HOLIDAY INN MONTMELO CLASS 또는 일급 또는 투어리스트급
식사 조식 호텔식 중식 현지식 석식 호텔식
9일 2018년 05월 18일 (금) [지역] 세비야-메리다-까보다로까-리스본
세비야 호텔 조식 후
두산백과 세비야 [Sevilla]
요약 에스파냐 안달루시아 자치지방(autonomous community) 세비야주(州)의 주도(州都).
세비야 스페인 광장
위치 |
에스파냐 안달루시아 자치지방에 있는 세비야주 |
경위도 |
서경 05°59′, 북위 37°23′ |
면적(㎢) |
141.31 |
시간대 |
UTC+1/+2 |
행정구분 |
11 distrito |
홈페이지 |
http://www.sevilla.org |
인구(명) |
1,849,268(2007년) |
옛 이름은 히스팔리스(Hispalis)이다. 과달키비르강(江) 어귀에서 87km 상류 연안에 있다. 로마 시대에는 지방 중심지로 번창하고, 그 뒤 서(西)고트(5~8세기)·무어(8~13세기)의 지배를 받았고, 12세기에는 이슬람 문화의 정수를 모은 알카사르 궁전, 히랄다의 탑 등이 건조되었다. 1248년 페르난도 3세에 의해 다시 에스파냐에 속했고 15세기 말에는 신대륙무역의 기지로서 전성기를 맞아 에스파냐 최대의 성당과 대학 등이 설치되었다. 그러나 17세기에는 대형 선박의 출입이 편리한 카디스에 밀려, 점차 쇠퇴의 길을 걸었다. 그 뒤 세비야는 역사적인 도시가 되었으나, 여전히 보수적인 안달루시아 지방의 거점 도시로서 명맥을 유지해왔다.
대형 선박의 출입이 가능한 하항(河港)으로, 셰리주(酒)·과일·코르크·올리브유·광석 등을 수출한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조선업이 발달하였고, 그 밖에 담배·섬유·농기구·도자기 등 제조업이 활발하다. 한편 세비야는 화가 D.R.de S.벨라스케스의 출생지이며, 무리요가 활약한 곳이기도 하다. 이슬람풍(風)의 거리 모습과 건물, 성주간(聖週間)의 그리스도교 전례(典禮)와 투우(鬪牛) 등 관광적 요소가 풍부하다. 세비야 대성당은 유네스코의 세계유산목록에 수록되었다.
세비야 [Sevilla] (두산백과)
한 장의 그림 지도 열정의 도시 세비야
죽거나 죽여야 끝이 나는 쇼, 투우 - 또로스 델 라 마에스뜨란사
투우에 대한 의견은 오랫동안 분분해왔지만 어느 쪽이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그 열광적 에너지일 것이다. 소든 투우사든, 둘 중의 하나가 죽어야만 끝나는 쇼. 헤밍웨이는 투우에서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에너지를 발견하고 그에 대한 떨리는 기록들을 남겼다. 수많은 동물보호단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투우가 사라지지 않는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그 뜨거운 에너지 아닐까.
투우는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에서 시작되었다. 세비야는 론도와 함께 현대적 의미의 투우가 시작된 곳이다. 세비야에는 18세기에 지어져 아직도 투우경기가 벌어지고 있는 웅장한 투우경기장, 또로스 델 라 마에스뜨란사가 있다. 1761년에서 1881년 사이에 세워진 이 건물은 스페인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건축물 중의 하나로, 마드리드의 라벤타스 투우장과 쌍벽을 이루며 그 웅장함을 자랑한다. 1만 4천명이 한꺼번에 관람할 수 있는 규모로, 투우사들과 투우 비평가들 사이에서는 이곳에서 승리하지 못하면 진정한 투우사가 아니라는 말이 퍼져있다.
이곳에서는 투우박물관도 볼만하다. 투우사들의 초상화, 광고포스터와 의상 등이 진열되어있는데, 그중에는 피카소의 그림도 있다. 투우경기는 지금도 볼 수 있는데, 가장 바쁘게 열리는 달은 4월, 페리아 데 아브릴 축제가 열리는 기간이다. 거의 매일 볼 수 있는 4월이 지나면 5-6월과 9월에 3-4차례씩 열린다. 대부분은 일요일에 진행된다.
종교적 고난을 열정으로 재현하는 축제, 세마나 산타 _ 세비야 대성당
세비야 대성당은 극도의 호화찬란함과 예술성으로 유명하다.
세마나 산타(Semana Santa)는 세비야에만 있는 고유한 축제는 아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언덕으로 오르는 순간부터 부활하기 전까지의 고난을 고스란히 되살려내는 ‘고난주간’은 종교적인 행사로, 부활절 전의 일요일부터 일주일간 세계 곳곳에서 열린다. 하지만 세마나 산타가 가장 유명한 곳이 바로 세비야이다. 세비아의 세마나 산타는 열정이 넘친다. 이 시즌에 맞춰 세계에서 세비야로 향하는 순례자들의 발걸음이 바쁘다.
성모자상, 십자가의 그리스도상, 성모마리아상과 종교화들이 행렬하는 이동식 차량인 파소만도 백개가 넘게 거리로 쏟아져 나온다. 거대한 규모의 퍼레이드가 연일 줄을 잇는다. 일년간 준비해온 젊은 남자들은 가마를 짊어진다. 길고 뾰족한 두건을 쓰고 눈만 내놓은 사람들, 성경 속의 인물처럼 차려입은 사람들이 돌아다닌다. 사람들은 예수그리스도나 성모마리아를 찬양하는 노래, ‘사에따(Saeta)’를 부른다. 예수의 수난 연극이 상영되는가 하면 자신의 몸에 참회의 채찍질을 하는 사람들도 보인다. 화려한 장식을 한 마까레나의 성모와 뜨리아나의 에스페란사 성모상이 나오면 축제는 절정에 이른다.
세비야 한가운데에는 스페인 최대의 성당이자 유럽의 3대 성당의 하나인 세비야 대성당이 있다. 15세기에 이슬람을 정복한 기독교도들이 8세기에 건설된 모스크 위에 지은 성당이 바로 세비야 대성당이다. 고딕양식의 건물이지만 모스크였던 시절의 자취들을 품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이 바로 히랄다 탑이다. 무슬림들의 기도시간을 알리는 미나레트에 28개의 종을 달고 고딕식 지붕을 얹은 것.
지극히 종교적인 축제인 세마나 산타가 끝난 직후, 4월말에 벌어지는 축제가 바로 4월의 축제, 페리아 데 아브릴(Feria de Abril)이다. 그날이 오면 화려한 춤과 온갖 퍼포먼스가 야단스레 펼쳐지며 삶의 기쁨을 찬양한다.
성모마리아에 대한 강렬한 애정, 마까레나 성당
세비야의 성모사랑은 유난하다.
히랄다 탑과 함께 세비야의 또 하나의 상징으로 손꼽히는 마까레나 성당의 가장 큰 특징은 “눈물 흘리는 성모마리아”에 대한 강렬한 애정이다. 세마나 산타 기간이 아닐 때 그 축제의 분위기를 알려면 이곳으로 가면 된다고 할 정도로, 이곳에는 평소에도 열광적인 분위기가 감돈다. 유독 성모마리아에 대한 신앙이 독실한 스페인 내에서도 성모마리아 사랑이 돈독하기로 유명한 세비야 사람들의 경애를 엿볼 수 있는 곳이다. 그들의 사랑은 종교적 신앙과 옛날부터 내려오던 대지의 여신에 대한 민간신앙이 결합된 형태를 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마까레나 성당의 분위기는 다른 성당의 분위기와는 사뭇 다르다.
이곳은 1949년에 성녀 에스뻬란사 마까레나 동정녀를 위해 지어졌다. 에스뻬란사 마까레나는 투우사의 수호성녀이기도 하다. 신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진 이 성당에서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화려한 내부장식. 눈물 흘리는 성모마리아는 금은보화로 장식된 왕관과 호화찬란한 의상에 둘러싸여있는데, 매번 갈아입는 옷들이 다른 방에 진열되어있다. 성모마리아와 함께 수난의 예수상이 모셔져있는 이곳은 중요한 성지순례지이기도 하다.
정열과 변덕과 질투의 화신, 까르멘 _ 세비야대학
카르멘은 강렬하고 변덕스러운 사랑을 보여준다.
안달루시아의 여인들은 정열적이기로 유명한데, 그 이미지의 대부분은 ‘카르멘’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광기에 가까운 정열을 가진 여인, 카르멘에 대해서는 대부분 알지만 실제 그녀의 이야기를 아는 이는 뜻밖에 드물다.
1820년 세비야에서 있었던 이 요란한 연애담에서 카르멘이 돈 호세를 만나는 곳은 담배공장 앞이다. 그는 선량한 약혼자 미카엘라가 있는 군인 돈 호세를 유혹하여, 담배공장 내에서 일으킨 트러블로 연행당하던 자신을 구해줄 것을 부탁한다. 돈 호세는 그녀를 도망가게 하고 대신 자신이 두달동안 영창에서 지내게 된다. 그 사이에 미남 투우사 에스카밀로의 유혹조차 받아들이지 않으며 돈 호세가 나오기를 기다리던 카르멘은 결국 그와 함께 밀매업자들이 사는 산으로 들어가게 된다.
비극의 시작은 카르멘의 변심. 돈 호세에게 싫증을 느낀 그녀는 그에게 집으로 돌아가라 하고, 투우사 에스카밀로에게 향한 호감을 숨기지 않는다. 눈물로 호소하는 약혼녀 미카엘라를 차마 뿌리치지 못한 돈 호세는 훗날을 기약하며 병든 어머니가 있는 집으로 돌아간다. 결국 그들이 다시 만난 곳은 죽음의 장소가 될 투우장이었다. 에스카밀로의 투우가 있던 날, 그의 팔짱을 끼고 나타난 카르멘을 돈 호세는 결국 칼로 찔러 죽이고 만다. 그 역시, 마지막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격정과 질투와 사랑이 소용돌이치는 이야기다.
프랑스의 소설가 메리메의 소설을 바탕으로 조르주 비제가 작곡한 오페라 [카르멘]에서 이야기가 시작되는 왕립담배공장은 현재 세비야 대학의 일부분이 되어있다. 19세기, 유럽 전체 담배의 4분의3을 생산하던 이곳은 담배를 만드는 여공들만 무려 1만명에 달했다하니, 그 규모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화려함과 한의 예술적 만남, 플라멩코 _ 로스 가요스
화려하고 정열적인 춤과 음악인 플라멩코의 다른 얼굴은 슬픔과 한이 서린 비극적인 정서이다. 소외와 박해를 거듭 당해온 집시의 역사가 이 춤에는 녹아있다. 플라멩코의 기원은 단순하지 않다. 플라멩코는 자신이 생겨난 곳, 안달루시아의 수많은 민속음악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세비야에서는 정기적으로 플라멩코 비엔날레가 열린다.
안달루시아의 정서와 집시들의 감각이 만나면서 만들어진 이 장르에는 수많은 피가 섞여있다. 인도에 기원을 두고 유럽을 떠돌다가 안달루시아에 들어온 집시들의 피. 그리고 오랫동안 그곳에 있었던 땅, 안달루시아의 피.
세비야는 플라멩코의 본고장이다. 마에스뜨란사 공연장(Teatro de la Maestranza)에서 2년마다 플라멩코 예술 비엔날레가 열린다. 비엔날레 시즌에 방문하지 않았다고 훌륭한 플라멩코를 볼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이곳에서는 작은 바에서 대형 오페라극장까지 도시 전역의 다채로운 장소에서 플라멩코를 만날 수 있다.
산타크루스 거리를 중심으로 훌륭한 타블라오스, 즉 플라멩코 클럽들이 포진해 있는데 전문적인 공연은 식사와 함께 즐기는 '로스 가요스(Los Gallos)' 같은 타블라오스나 좀더 저렴하게 공연 위주로 진행되는 아우디토리오 알바레스(Auditorio Alvarez Quintero) 같은 곳에서 만날 수 있다.
플라멩코를 이루고 있는 것은 바일레 플라멩코(춤) 뿐 아니다. 칸테 플라멩코(노래)와 토케 플라멩코(기타)를 포함한다. 그중에서도 중심이 되는 것은 의외로 칸테 플라멩코. 그러므로 화려한 춤보다 심금을 울리는 노래에 먼저 귀를 기울여보는 것도 좋겠다. 칸테와 바일레, 토케를 맡은 예술가들을 각각 칸타오르, 바일라오르, 토카오르라 부른다.
바람둥이 돈후안은 어디에서 밀회를 했을까? 호스텔 델 로렐
사랑이 넘치는 바람둥이는 단순한 악인으로 취급하기에는 매력이 너무 많다. ‘카사노바’와 함께 바람둥이의 대명사로 불리는 돈 후안이 계속해서 문학작품들에 호명되는 이유가 그것일 것이다. 1630년 작품인 티르소 데 몰리나의 희곡 [세비야의 난봉꾼과 석상의 초대]에 처음 그 이름을 드러내기 전에도, 돈 후안의 이름은 민간에 떠돌았다.
돈 후안은 바람둥이의 대명사가 되었다
사실 그가 좇는 것은 ‘사랑’은 아니었다. 그의 목표는 정복. 직업과 외모 가리지 않고 수많은 여자들을 유혹했다 버린 그는 결국 지옥으로 떨어진다. 수많은 작품에 나온 만큼, 그의 성격도 작품마다 천변만화한다. 몰리에르의 [돈 후안], 모차르트의 [돈 조반니], 바이런의 [돈 주앙], 슈트라우스의 [돈 후앙] 등 그의 이름을 제목에 걸고 있는 작품들 외에도, 호프만, 메리메, 키르케고르 등 많은 이들이 그에게 관심을 보였다.
모차르트는 자신의 오페라에서 존 조반니의 하인 레포렐로의 입을 빌어 그를 이렇게 설명한다. "저희 주인님이 '작업'한 미인들의 기록은 이렇습니다. 이탈리아에서 640명, 독일 230명,프랑스 100명,터키에서 91명이고 스페인에서는 무려 1003명입니다. 이 중에는 시골처녀,하녀,창부,백작부인,공작부인 등 지위 계급 스타일 연령에 관계없이 모든 부류의 여인들이 있지요."
이쯤에서 궁금한 것. 그는 자신이 유혹한 여자들과 어디에 갔을까? 민간의 이야기로 떠도는 인물이니 실제 장소가 있을법하지 않지만 현재 세비야에 가면, 있다. '호스텔 델 로렐'은 산타크루즈 거리에 있는 작은 호텔로, 돈 후안이 귀부인을 유혹했던 무대로 알려지면서 1년간의 예약이 꽉 차있을 만큼 인기를 누리고 있다. 19세기의 극작가인 호세 소릴로가 돈 후안의 이야기를 다시 쓰면서 무대로 삼았던 이 호텔이 결국 돈 후안의 밀회처로 소문나게 된 것이다.
신대륙 발견의 열정-알카사르
페르난데스의 [항해자들의 성처녀]는 아메리카 발견을 거의 최초로 묘사했다.
세비야인의 열정은 인생을 즐기는 데서 그치지 않았다. 그들은 신세계를 향한 호기심을 참지 않았고, 그 산물을 누리는 데도 거리낌이 없었다. 15~16세기, 대항해시대의 무역항이자 아메리카 여행지의 출발점. 세비야 출신이 아닌 콜럼버스의 무덤과 기념탑이 이곳에 있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세비야의 본격적인 발전은 아메리카 발견 이후에 왔다. 바로 이곳에서 콜롬버스가 아메리카를 향해 떠났고, 이후 식민지의 모든 생산물들은 세비야로 집중되었다. 이곳은 카스티야 왕국의 유일한 독점무역항 지위를 보장받았다. 그러한 번영은 16세기 초 카디스항이 개항하면서 무너지기 시작했지만, 그 전까지 식민지 개척의 달콤한 열매는 세비야를 살찌웠다. 세비야 대성당의 제단 정면에 있는, 콜럼버스가 신대륙에서 가져온 금 1.5톤으로 만든 성모마리아의 품에 안긴 예수상은 이 모험이 가져온 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세비야에서 모험을 시작한 이는 콜럼부스 외에 마젤란이 있다. 그 또한 에스파냐 왕실의 후원을 받아 세계일주를 떠났다. 그는 결국 돌아오지 못했지만, 그의 탐험대가 인도네시아의 몰루카 제도에 도착하여 향료를 손에 넣고 돌아오면서 스페인의 식민지는 급격히 넓어졌다.
그러한 탐험가들이 항해를 위한 자금을 원조받기 위해 스페인 국왕을 알현하던 곳이 바로 알카사르였다. 알카사르에는 식민지 사업을 총괄하던 '카사 데 콘트라타시온', 즉 무역관의 교회당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곳은 당시 통치자들이 외교적인 만남을 자주 하던 곳이라, 식민지 개척에 관한 중요한 회합과 결정이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아메리카 발견을 거의 최초로 묘사한 작품인 알레 호 페르난데스의 [항해자들의 성처녀(The Virgin of the Navigators)]를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열정의 도시 세비야 (한 장의 그림 지도)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 말라가주에 위치한 론다는 가파른 협곡 위에 위치 하고 있어 그 경관이 뛰어납니다.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 의 배경지이기도 한 론다는 약 3만 5천명 정도 거주하고 있는 작은 시골 마을로 화려한 궁전이나 시끌벅적한 번화가는 보이지 않지만, 아찔한 협곡과 새하얀 집들 그리고 론다 최 고의 명물인 누에보 다리를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있는 곳입니다.
세비야의 상징인 '히랄다 탑'은 12세기 말 이슬람교도 아르모아드 족이 만들었습 니다. 원래는 이슬람 사원의 첨탑이었으나 헐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다가 16세기 에 기독교인들이 플라테스코 양식의 종루를 설치했습니다. 28개의 종과 신앙을 상징하는 여성상을 세워 풍향계 역할을 하게 했으며, 탑의 이름을 풍향계를 뜻하 는 히랄다라고 불렀습니다.
두산백과 세비야 대성당 [Sevilla Cathedral] 에스파냐 세비야주 세비야에 있는 성당.
세비야 카테드랄에스파냐 세비야.
유럽에 있는 성당 중 세번째로 큰 성당이다. 가장 큰 규모의 성당은 바티칸의 산 피에트로
대성당(San Pietro Basilica)이고 두번째는 런던의 세인트 폴 대성당(Saint Paul's Cathedral)이다. 대성당이 있는 자리에는 12세기 후반에 이슬람 사원이 있었던 곳이다. 이슬람 사원은 사라졌지만
넓은 폭의 형태는 메카에 가까울수록
좋다는 이슬람 사원의 영향이다.
1402년부터 약 1세기에 걸쳐 건축되었으며 오랜 시기에 건축된만큼 고딕·신고딕·르네상스양식이
섞여 있다. 이곳에는 세비야를 이슬람교도로부터 되찾은 산 페르난도 왕을 비롯하여 에스파냐 중세기 왕들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 남쪽 문 근처에는 콜럼버스 묘가 있는데, 에스파냐의
옛 왕국인 레온, 카스티야, 나바라, 아라곤을 상징하는 조각상이 관을 메고 있다. 이 관에는 콜럼버스
유골분이 안치되어 있다.
세비야 대성당 [Sevilla Cathedral] (두산백과)
히랄다 탑
세비야 대성당은 유럽에 있는 성당 중 세 번째로 큰 성당입니다. 가장 큰 규모의 성당은 바티칸의 대성당(San Pietro Basilica)이고, 두 번째는 런던의 세인트 폴 대성당(Saint Paul's Cathedral)입니다. 대성당이 있는 자리는 12세기 후반에 이 슬람 사원이 있었던 곳으로 이슬람 사원은 사라졌지만 넓은 폭의 형태는 메카에 가까울수록 좋다는 이슬람 사원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세비야 대성당은 1401년 착공하여 125년뒤에 완공되었으며 세계 3대 성당으로 불리우며 고딕과 신고딕, 르네상스 양식이 섞여 있습니다. 이곳에는 세비야를 이슬람교도들로부터 되찾은 영웅 산 페르난도 왕을 비롯하여 스페인 중세기 왕 들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습니다. 안치실 앞에는 무리요의 그림 <성모수태>가 있 는 회의실, 고야와 수르바란 등의 그림이 있는 성배실이 있습니다. 안쪽에는 성 령강림을 나타내는 스테인드글라스, 왕실 예배당을 둘러싼 철책, 15세기의 합창 대, 주 예배당에 있는 성화 장면이 조각된 황금색 목재 제단 등이 있습니다. 중앙 복도 오른쪽에 있는 콜럼버스의 묘에는 옛날 스페인을 다스린 네 왕(레온, 카스 티야, 나바라, 아라곤)이 관을 메고 있는 상이 있습니다.
세비야 대성당
여행일정표
메리다 스페인의 로마 메리다로 이동 후 시내 관광
까보다로까 유럽의 까보다로까(로까곶) 으로 이동
까보다로까 도착하여 해변 절벽위의 대서양을 관망
리스본 리스본 시내로 이동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제로니모스 수도원(외관), 테조강의 귀부인 이라고 불리우는 벨렘탑, 로시우 광장 등 관광
제로니무스 수도원 [Jerónimos Monastery]
대륙 |
유럽 |
위치 |
포르투갈>리스본 |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
1983년 |
저자 |
제이컵 필드 |
포르투갈의 탐험가들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화려한 건물
제로니무스 수도원은 리스본의 역사적인 구역 벨렘에 있으며, 이 도시에서 가장 훌륭한 역사
유적 중 하나이다. 이 수도원은 15세기의 왕 마누엘 1세의 이름을 따 마누엘린 양식이라 한 고딕, 이탈리아, 스페인, 플랑드르 디자인을 병합한 건축 양식의 걸작이다.
이 수도원은 탐험가 '항해가 엔리크'가 세운
오래된 종교 암자가 있었던 자리에 위치하고 있다. 1497년, 또
다른 탐험가인 바스쿠 다 가마와 그의 부하들이 인도로 출발하기 전 이곳에 머물렀다. 1499년 다 가마의
귀환을 기념하기 위해 마누엘 1세의 명에 따라 이 자리에 수도원이 세워졌다. 디오구 보이탁의 책임 아래 1502년 건축이 시작되었고, 1517년에는 스페인 건축가 조앙 데 카스틸류가 작업을 이어받아 계속했다. 프랑스
조각가 니콜로 샹테렌은 제로니무스 수도원에 르네상스 디자인의 요소를 첨가했다.
건축 비용은 동양에서 수입해 오는 특정한 향료에 매긴 세금 5퍼센트로 충당되었다. 마누엘 왕이 죽자 건축은 중단되었으나 1550년 재개되었다. 두 명의 포르투갈 왕, 마누엘과 조앙 3세가 수도원 부속 성당에 묻혀 있으며 바스쿠 다 가마도 마찬가지이다. 회랑이
있는 수도원이 성당과 이웃하고 있으며 히에로니무스 수도회 수사들이 살고 있다. 20세기의 시인 페르난두
피소앙이 회랑의 아케이드 중 하나에 묻혀 있다. 수도원은 1850년
한 차례 증축되었으며 고고학 박물관과 해양 박물관이 있다. 제로니무스 수도원 근처에는 '벨렘 탑'이 있는데, 이는 1515년에서 1521년에 걸쳐 바스쿠 다 가마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타호 강변에 세워진 커다란 탑이다.
제로니무스 수도원과 벨렘 탑은 1983년 '히에로니무스회
수도원과 벨렘 탑'이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이 수도원은 포르투갈이 '발견의 시대'를 이끌어갔을
때 누렸던 영광을 반영하고 있다.
제로니무스 수도원 [Jerónimos Monastery]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세계 역사 유적 1001, 2009. 1. 20., 마로니에북스)
스페인의 '작은 로마'로 불리는 스페인 최대의 로마 유적지입니다. 1만4천명을 수용할 수 있는 장대한 규모의 원형극장과 옛날과 변함없이 자리를 지키는 아름 다운 로마 다리등 로마의 흔적을 더듬어 볼 수 있는 도시입니다.
메리다
까보다로까는 유럽대륙의 서쪽 땅끝마을입니다. 포르투갈의 서사시인 카모잉스 (Camoes)는 이곳을 '땅이 끝나고, 바다가 시작되는 곳'이라고 표현했으며 관광 안내소에서 유럽대륙 서쪽 끝에 왔다는 기념증명서를 발급해주기도 합니다. 해 안가 근처라 급작스런 소나기가 오는 경우가 많지만, 날씨가 좋은 날에는 넓은 수평선과 함께 아름다운 꽃밭에서 낭만적인 추억을 남길 수 있는 곳입니다.
메리다
요약 에스파냐 남서부, 엑스트레마두라 자치지방(autonomous community) 바다호스주(州)에 있는 도시.
원어명 |
Mérida |
위치 |
에스파냐 남서부 엑스트레마두라 자치지방 바다호스주 |
경위도 |
서경 6°20′43″ 북위 38°54′54″ |
시간대 |
CET(UTC+1) Summer: CEST(UTC+2) |
행정관청 소재지 |
Plaza de España, 1. 06800 Mérida |
홈페이지 |
http://www.merida.es |
인구(명) |
54,894(2007년) |
유카탄주의 주도이다. 서쪽으로 흐르는 과디아나강(江) 북동 연안의 해발고도 221m에 있다. 살라망카와 세비야, 마드리드와 리스본을 연결하는 교통의 중개지점이다. BC 25년 로마인들이 건설하였으며, 당시에는 아우구스타 에메리타라 불렀고, 로마 속주(屬州) 루시타니아의 수도였다. 문화의 중심지로서 번영을 누렸으며, 중세에는 에스트레마두라 지방의 중심시장 거리로 발전하였다. 1950년대의 과디아나강 개발계획인 ‘바다호스 계획’의 실시로 관개답(灌漑畓)이 확대되었고 면방적(綿紡績)·맥주 양조·코르크 공장이 들어섰다. 다리[橋]·극장·원형투기장(수용인원 1만 4,000) ·주거지 등 로마시대의 유적이 잘 보존되어 있으며, 유네스코의 세계유산목록에 수록되어 있다.
메리다 (두산백과)
까보다로까
타호강 근처에 있는 벨렘 탑은 4층의 등대로서, 1515∼1521년 프란시스코 데 알 다가 가마의 업적을 추모하여 건물 모퉁이마다 감시탑을 세우는 형식으로 지었 습니다. 총 3층구조로 되어있는데 만조 때 물에 잠기는 1층은 19세기까지 정치 범 수용소로 사용되었으며, 2층은 포대, 3층은 망루 및 세관 역할로 사용되었습 니다. 포르투갈 특유의 마누엘 양식을 띠고 있으며, 1983년 유네스코에서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습니다.
벨렘 탑
석회암으로 된 제로니무스 수도원은 한변의 길이가 약 300m에 이르며 웅장하고 화려한 노르만 고딕양식을 띠고 있습니다. 제로니무스 수도원은 대항해시대의 선구자 엔리케 항해 왕자가 세운 예배당에 미누엘 1세가 제로니모스 파 수도사 들을 위해 수도원으로 건립하였으며 마치 스페인의 알함브라 궁전과도 같습니 다.
리스본의 제로니무스 수도원과 벨렝 탑 [Monastery of the Hieronymites and Tower of Belém in Lisbon]
요약 리스본 항구 입구에 서 있는 제로니무스(이에로니미테스, Hieronymites) 수도원은 포르투갈 예술의 백미로 꼽히는 건축물로서 1502년에 건설되었다. 수도원 부근에 있는 벨렝(Belém) 탑은 바스코 다가마(Vasco da Gama)의 원정을 기리는 기념탑이며, 현대 항로 발전에 기여한 위대한 발견을 기념하는 건축물이다.
국가 |
포르투갈(Portugal) |
위치 |
리스본(Lisbon) |
좌표 |
N38 41 30.984, W9 12 56.988지도 |
등재연도 |
1983년(2008년 수정) |
등재기준 |
(ⅲ), (ⅵ) *참고: 세계유산 등재기준 |
유산면적 |
2.66㏊ |
완충지역 |
103㏊ 리스본의 제로니무스 수도원과 벨렝 탑 [Monastery of the Hieronymites and Tower of Belém in Lisbon] (유네스코 세계유산, 유네스코한국위원회(번역 감수)) |
제로니모스 수도원
세계의 휴양지 1001 제로니모스 수도원 [See Jerónimos Monastery]
대륙 |
유럽 |
위치 |
포르투갈 리스본 |
가격대 |
$1~100 |
분류 |
문화, 도심 |
저자 |
주디 달리 |
리스본의 가장 인기있는 관광명소에서 가까우면서도, 조용하고 평화로운 곳을 원한다면 벨렘
지구에 있는 16세기 수도원보다 더 좋은 곳은 없다. 비록
대부분의 관광객들은 인근에 있는 안티가 콘페이타리아 데 벨렘의 저 유명한 패스트리를 먹기 위해 몰려가거나,
"발견의 기념비" 같은 드라마틱한 구조물을 보기 위해 타구스 강가로 가겠지만
말이다. 제로니모스 수도원은 그 고요함을 털끝만큼도 잃지 않고도 호기심 많은 관광객을 다 끌어안을 수
있을 만큼 넓다.
복도와 복도가 서로 얽히며, 시인 페르난두 페소아나 역사학자 알렉산드레 에르쿨라누, 그리고 수백 명의 예로니모회 수사들의 무덤이 있는 방으로 이어진다. 수도원의
지붕 꼭대기에서 눈을 들면 뾰족한 첨탑들이 떠받치고 있는 하늘만이 존재한다. 모든 벽은 순수한 하얀색의
돌로 만들어졌으며,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항해길에 나서는 선원들이 배에 타기 전에 기도를 올리기 위해
들렀다가 발휘한 상상력으로 장식되어 있다. 살아 돌아온 이들이 그들의 여정―타향에서 본 것과 꿈꾼 것―을
그린 멋진 회화로 감사를 표시했기 때문이다.
이 수도원은 이 용감한 모험가들의 정신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으며, 이들의 요정 이야기
중에는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는 장면도 있다. 노아의 방주가 좋은 예인데, 수많은 동물들이 뱃머리를 채우고 있는 고대 선박은 이들이 신세계를 찾기 위해 올랐던 배와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성당에서는 여전히 미사를 올리며, 신도석 뒷자리에
앉아 속삭이는 듯한 포르투갈어 기도문을 듣고 있다 보면 꿈결 같은 졸음에 빠져든다―그러다 진짜 잠들지 않도록 조심할 것. 이 마법 같은 공간에서 무슨 꿈을 꾸게 될지 누가 아는가?
제로니모스 수도원 [See Jerónimos Monastery] (죽기 전에 꼭 가야 할 세계휴양지 1001, 2011. 1. 7., 마로니에북스)
여행일정표
호텔 이동 및 휴식
호텔 H. INN EXPRESS MADRID AIRPORT CLASS 또는 일급 또는 투어리스트급
식사 조식 호텔식 중식 중국식 석식 한식
10일 2018년 05월 19일 (토) [지역] 리스본-똘레도-마드리드
리스본 호텔 조식 후
리스본 Lisbon
위치 : 포르투갈 타호 강의 삼각 하구 우안 | |
인구 : 517,802명 (2016 추계) | |
면적 : 84.8㎢ | |
유럽 포르투갈 |
요약
포르투갈의 주요항구이자 가장 큰 도시로 타호 강이 대서양으로 흘러드는 유럽 대륙 서쪽 끝에서 13㎞
상류에 있다.
리스본은 관광업과 상업을 바탕으로 성장했다. 새로운 위성도시들이 들어섰으며, 옛 모습을 유지했던 상업중심지 바익사는 현대식 10층 건물들이 들어섰다. 그러나 비교적 옛 모습이 많이 남아 있다.
바로크·로코코·로카유 양식으로 지어진 교회들은 대부분 1755년 대지진 이후 재건되었다. 그러나 14세기에 지은 카르모 교회는 파괴된 채 지붕이 없고 건물골조만
남았다.
타호 강 남쪽은 시멘트·강철·코르크 등을 생산하는 제조업 중심지이다. 곡물보관업도 발달했으며
정유공장도 있다. 철도가 항구뿐 아니라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여러 지역으로 뻗어 있다.
리스본(Lisbon)
포르투갈의 주요항구이면서 가장 큰 도시로 타호(테주) 강이 대서양으로 흘러드는 유럽 대륙의 서쪽 끝에서 13㎞ 상류에 있다. 타호 강은 리스본에서 넓어져 팔라 해(海)라는 폭이 11㎞인 만(灣)을 이룬다. 강 양안에는 약간 기복진 구릉지대가 있다.
평균기온은 17℃이며, 연평균강우량은 686㎜이다. 포르투갈의 가장 중요한 제조업 중심지인 타호 강 남쪽에서는 시멘트·강철·코르크·플라스틱 등을 생산하고 곡물보관업도 발달했다. 또한 비누·군수품·유리·전자제품 등을 생산하며 정유공장도 있다.
20세기에 들어서 리스본은 관광업과 상업을 바탕으로 복잡한 대도시로 성장했다. 도시의 서쪽과 북서쪽에 새로운 위성도시들이 들어섰으며, 서쪽 벨렘 쪽으로도 건물들이 들어섰다. 리스본의 도심이며 상업중심지인 바익사는 전혀 변모되지 않고 옛날 모습을 그대로 유지해왔다. 그러나 아베니다다리베르다데라고 했던 옛날에 지은 4층 건물과 거기에 부속된 아베니다스노바스 거리는 거의 찾아볼 수 없고, 보다 현대식으로 지은 10층 건물들이 들어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도시는 옛날의 모습이 대부분 그대로 남아 있다.
무어인(人)들이 지은 성벽의 흔적을 비롯해서 아베니다다리베르다데에는 종려나무 가로수길, 분수, 아름답게 꾸며진 호수와 함께 푸른 모자이크를 깐 넓은 보도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 이 도시 위쪽 끝에는 격식을 갖춰 꾸민 넓이가 8㏊인 공원이 있으며 옥외에 있는 몇 개의 카페가 운치를 더해주고 있다. 바로크·로코코·로카유 양식으로 지어진 교회들은 대부분 1755년의 대지진 이후 재건되었다. 그러나 고고학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는 14세기에 지은 카르모 교회는 파괴된 채 지붕이 없고 건물골조만 남았다.
리스본이 처음 세워졌던 언덕 위에 있는 상조르제 성(城)에서 도심을 한눈에 볼 수 있다. 벨렘 탑과 제로니모스 수도원도 뛰어난 건축물이다. 리스본대학교를 중심으로 고등교육이 이루어지며 고등기술 전문대학과 의과대학 부속병원이 있다. 여러 박물관에는 현대·고대·교회·장식·민속 예술작품이 많이 소장되어 있다. 대중교통수단은 지하철과 케이블카이며, 철도가 항구뿐만 아니라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여러 지역으로 뻗어 있다. 도심에서 북서쪽으로 7㎞ 떨어진 곳에 리스본 국제공항이 있다.
두산백과 리스본 [Lisbon] 요약 포르투갈의 수도.
제로니무스수도원포르투갈 리스본 벨렘 지구. 마누엘 1세가 엥리케 왕자의 위업과 바스코 다 가마의 항해를 기념하기 위해 16세기에 건립하였다.
위치 |
포르투갈 |
경위도 |
서경 9°8′21″, 북위 38°42′49″ |
면적(㎢) |
83.8 |
시간대 |
UTC+0 |
행정관청 소재지 |
Pacos do Concelho - Praça do Municipio - 1100-365 Lisboa |
홈페이지 |
http://www.cm-lisboa.pt/ |
인구(명) |
547,631(2011년) |
포르투갈어로는 리스보아(Lisboa)라고 한다. 테주강(타호강)의 삼각 하구 우안(右岸)에 위치한다. 이 나라 최대의 도시이며, 유럽대륙 대서양 연안 굴지의
양항(良港)이기도 하다. 일찍이
페니키아·그리스·카르타고 시대부터 항구도시로서
알려져 왔으며, BC 205년에는 로마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714년
이래 다시 이슬람의 지배를 받게 되면서 리사보나로 불리다가, 1147년 알폰소 1세에 의해 해방되었다. 1255년 코임브라로부터 천도한 뒤 수도로서
현재까지 이르렀으며, 15∼16세기 해외진출시대에는 유럽
유수의 상공업 도시가 되었다. 1755년의 지진과 그에 따른 화재·해일로 시가지의 2/3가 파괴되었기 때문에, 그 이전의 역사적인 건조물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동부의 알파마 지구에는 성(聖)조지성(城)이, 서부의 벨렝 지구에는 본래 성채였던 벨렝의 탑, 바스쿠 다 가마를
기념한 고딕양식의 수도원 및 아주다 궁전(현재의 외무성)·박물관
등 역사적인 건축물이 남아 있고, 1290년에 창립된 대학이 있다. 시가지는 3개 부분으로 나뉜다.
중앙부는 바이샤라고 부르는 저습지로 거의 전지역이 지진 후에 재건되어 상업·행정기관이 이곳에 집중한다. 동부는 본래 페니키아인·로마인의 거리였던 옛 시가지, 서부는 신
시가지이고 또 최근의 시가지 확장은 북부로 펼쳐 나가고 있다. 독·부두 등 항만시설은
테주강 우안을 따라 30km에 걸치고, 그 북동부에 곡물·냉장창고
및 시멘트·정유·철강·코르크제품
등 공장이 자리한다. 어항은 벨렝 서쪽에, 대서양 각지를
잇는 여객항은 시 중심부에 위치하나, 1966년에 테주강에 가로놓인 현수교(懸垂橋:2.3km)가 완공되어 강의 좌안(左岸)에도 철강·화학·조선 등 대공장이 건설되어 발전하고 있다. 유럽공동체(EC)는 1994년도의 유럽문화도시로 이곳을 지정했다.
리스본 [Lisbon] (두산백과)
똘레도 스페인의 중세모습이 그대로 간직된 똘레도로 이동 도착하여 시내관광 및 스페인 카톨릭의 총본산이 똘레도 대성당, 엘그레코의 걸작들이 전시되어있는 산토토메 교회등 관광 후
두산백과 톨레도 에스파냐 카스티야라만차 자치지방의 수도이자 톨레도 주(州)의 주도(州都).
톨레도스페인 톨레도. 도시의 3면이 타호강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중세시대의 분위기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마을 한가운데 우뚝 솟아 있는 건물은 알카사르이다. 1986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원어명 |
Toledo |
위치 |
스페인 카스티야라만차 자치지방 톨레도주 |
경위도 |
서경 4°1′30.40″, 북위 39°51′23.50″ |
면적(㎢) |
232.1 |
시간대 |
UTC+1, Summer: UTC+2 |
행정관청 소재지 |
Pza. Consistorio, 1 45071 - Toledo |
홈페이지 |
http://www.ayto-toledo.org/ |
인구(명) |
83,226(2015년) |
자연과 기후
이베리아 반도 중앙 카스티야라만차 평원의 언덕에 위치하는 역사적인 요새 도시로, 수도 마드리드 남서쪽 71km 지점의 타호강 연안에 자리한다. 인구는 2015년 기준 83,226명이고, 해발516mm에 위치한다. 내륙 지방의 전형적인 반건조기후 지역이다. 강우량은 적은 편으로 여름에 덥고, 겨울에 춥다. 2012년 8월 기록한 43°C가 최고 온도이고, 겨울 최저 온도는 2005년 1월 기록한 -9.1°C이다.
톨레도의 역사
로마 역사가 리비우스에 따르면, 로마 시대의 명칭 '톨레툼(Toletum)'을 성벽으로 둘러쌓인 요새로 묘사하면서 기원전 193년 로마가 당시 선주민(先住民)이었던 켈트족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여 로마 식민도시를 이루었다고 기록했다. 5세기 말 서로마 제국의 멸망 후 서고트 왕국의 수도로 기능하였고, 8세기 이슬람 사라센 제국에 점령되어, 10세기 코르도바 칼리프국의 북부 전진 기지가 되었다. 이슬람 세력의 분열에 따라 1010년 이슬람 소왕국 톨레도 타이파(Taifa) 시대가 도래했으나, 1085년 레온-카스티야 왕국의 알폰소 6세가 탈환하여 카스티야이레온 연합왕국의 수도가 되었다. 이후 카톨릭 왕국의 전초기지이자 카스티야 왕국의 문화·정치의 중심지로 눈부시게 성장했다. 이곳에 거주한 세파르디 유대인은 11~12세기부터 공동체를 이루어 금융, 공업, 상권을 소유하여 경제적인 부를 차지했지만, 1492년 이베리아 반도 전역에 대한 레콩키스타가 완결되자 이교도로 낙인 찍혀 추방된 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다. 1560년 스페인 통일 왕국 펠리프 2세가 수도를 마드리드 옮기면서 정치적 중심지로서의 지위를 상실하였으나, 오늘날 카톨릭, 이슬람, 유대교의 유산이 공존하는 역사 도시로 보존되었다.
경제와 산업
카스티야 왕국의 수도로서 정치 및 상공업 중심지로 성장하였다. 그중에서도 무기 생산으로 알려져 있는데, ‘톨레도의 칼날(TheToledo Blade)’은 세계적으로 유명하여 오늘날 면도기, 칼, 의료기기, 전자기기 등의 생산으로 이어졌다. 또한 섬유·도기 등의 경공업과 주변에서 산출하는 양·말 등의 가축, 곡물·포도주·과일 등의 농산물과 광산물의 집산지이다. 21세기에 들어 고용의 85% 정도가 서비스업에 밀집되어 있고, 나머지는 건설(7%), 산업(6%), 농목축업(2%) 종사한다.
문화와 관광
구시가지를 중심으로 도시의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알카사르(Alcázar, 성채)는 요새 도시로서의 면모를 보여준다. 로마 시대의 원형극장, 수로 시설부터 서고트족 교회, 중세의 카톨릭 고딕식 성당, 이슬람 무데하르 양식의 왕궁과 성벽, 유대교 시나고그 등 이색 건축물에서 18세기 바로크 유적까지 광범위한 예술적 업적의 종합체로 인정받아 1986년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무데하르와 고딕 양식이 혼합된 알카사르 내부의 '군사박물관'과 화가인 엘 그레코의 집으로 꾸며진 '엘그레코 박물관'이 대표적이다. 특히 산토 도메 성당에서는 그의 역작인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El Entierro del Conde de Orgaz, 1586년작)' 원본을 감상할 수 있다. 그리스인이라는 뜻의 엘 그레코는 본래 크레타섬에서 태어나 톨레도로 이주하여 생을 마감한 화가이다.
톨레도 (두산백과)
마드리드로 이동
마드리드 알카라 거리
위치 |
에스파냐 |
경위도 |
서경 3°41′, 북위 40°24′ |
면적(㎢) |
605.77 |
시간대 |
UTC+1 Summer: UTC+2 |
행정관청 소재지 |
PLAZA CIBELES 1, 28014 MADRID |
홈페이지 |
www.munimadrid.es |
인구(명) |
3,265,038(2011년) |
이베리아반도의 중앙부, 해발고도 635m의 메세타 고원에 위치하며, 만사나레스강(江)에 임한다. 유럽의 수도 중 가장 높은 곳에 있으며, 연강수량 419mm로 건조하다. 기온의 일교차가 크며 겨울 평균 기온은 -1℃∼7℃, 여름은 15℃∼30℃이다. 에스파냐의 정치·문화의 중심지일 뿐만 아니라 근래에는 산업도시로서의 중요성도 크며, 도로·철도 및 항공의 요충지이기도 하다. 인구상으로는 유럽 제4의 대도시이다.
마드리드는 10세기경 톨레도를 방어하기
위해 무어인이 세운 성채에서 비롯되었는데, 이때는 마헤리트라 불렀다.
이 성은 마드리드가 수도로 된 후에는 왕궁이 되었고, 동시에 이 도시의 중심이 되었다. 1083년 카스티야왕 알폰소 6세가 이를 탈환하였으나 이때는 국왕의
임시숙소에 지나지 않았다. 1561년 펠리프 2세가 당시의
강대한 왕국을 다스릴 중앙정부 청사를 건설하면서, 국토의 중앙에 위치한다는 이유로 톨레도에서 이곳으로
수도를 옮기고, 궁전도 바야돌리드에서 이곳으로 옮겼다. 17세기
초에 일시 궁전이 바야돌리드로 옮겨졌던 때를 제외하면, 마드리드는 그 후 일관해서 수도로서의 지위를
지켜왔다. 구(舊)시가는 17∼18세기에 건설되었다.
1808년에는 프랑스군에 점령되어, 고야의 그림 《1808년 5월 3일》로 유명한 5월 2일의 시민저항이 있었고, 다음날 프랑스군에 의한 보복이 있었다. 구시가의 중심은 라푸에르타델솔(태양의 문)이라 부르는 타원형 광장이며, 서쪽으로는 왕궁 및 부속 왕립 무기고와
통하고, 남서쪽으로는 17세기에 야외극장이었던 마요르 광장이
있다. 그 앞쪽의 세바타 광장에서는 아침에 채소와 식료품 시장이 열린다.
태양의 문 북쪽을 동서로 활처럼 휘어 뻗은 호세안토니오가(街)와 동쪽으로 뻗은 알칼라가에는 은행 ·호텔 ·클럽과 고급상점들이 집결하여 중심 상점가를 이룬다. 태양의 문 동쪽은 거의 남북으로 프라도가(街)가 뻗고, 그 동쪽에 프라도 미술관이 있다. 프라도가는 다시 레코르테스 ·카스티야 ·헤네랄리시모 등 여러 거리로 이어져 관공서와 고급주택지를 이룬다. 구시가를 둘러싼 신시가는 19세기 후반의 철도 개통을 전후해서 주택지
·공장 등이 들어서고 교통시설이 갖춰진 지역이다. 마드리드는 정치도시로서 궁전이 있었을 뿐 산업은 미미하였으나, 1936∼1939년의 스페인내란 후 에스파냐 정부가 내전에 의한
파괴의 복구 과정에서, 주변 농촌으로부터 많은 건설노무자를 받아들인 것이 마드리드의 성격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값싸고 풍부한 노동력과 정부의 지원으로 공장이 많이 들어섰고,
전기기계 ·항공기 ·오토바이 등의 기계공업과 식품가공 ·제지 ·화학 등의 여러 근대공업이 발달하였다.
정보산업으로서 출판 ·인쇄업종도 바르셀로나로부터 이전해 왔다.
마드리드의 발전 속도는 인구증가 과정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1875년 35만, 1910년 60만, 1930년 95만, 1950년 163만으로 계속 증가하고, 1981년에는 319만 명으로 바르셀로나를 능가하였다. 예전에 시주변이었던 동쪽의
유명한 레티로 공원과 북서쪽의 대학은 시에 포함되었고, 서쪽 교외에 있던 카사데감포 대공원도 지금은
시에 접한다. 교통기관으로는 지하철 ·노면전차 ·시내버스 ·트롤리버스 등이 있으며, 북역 ·남역 ·델리시아스역에서 국내 각지로 향하는 철도가 사방으로 뻗었다. 남쪽
교외의 바라하스에는 공항이 있다. 1738∼1764년에 건설된
왕궁은 높이 30 m의 건물로, 방이 1,800여 개나 되고, 내부는 고야의 그림, 티에폴로의 벽화, 많은 테피스트리로 장식되었다. 왕궁에 부속된 왕립 무기고는 갑옷과
무기의 컬렉션으로 유명하다. 프라도 미술관은 에스파냐가 세계에서 자랑하는 미술관으로, 1819년 에스파냐왕실의 수집품을 중심으로 개설되었다. 중세에서 18세기에 이르는 에스파냐 ·플랑드르 ·이탈리아의 그림이 많으며, 특히
에스파냐 3대화가인 엘그레코, 벨라스케스, 고야의 작품은 최고이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반 데르 바이덴의 《십자가
하강》, 보시의 《일락의 낙원》, 티치아노의 《음악을 즐기는
비너스》, 엘 그레코의 《오순절(五旬節)》, 벨라스케스의 《브레다 성(城)의 항복》 《궁녀들》, 고야의 《옷을 입은 마하》 《나체의 마하》
등 수없이 많다.
마드리드 [Madrid] (두산백과)
스페인을 대표하는 화가 엘그레코 고야의 작품들로 가득한 프라도 미술관, 마드리드 최고의 번화가이며 건물마다 르네상스 분위 기를 보여주는 그란비아거리, 마드리드 시민들의 휴식처 마요르광장, 스페인을 대표하는 세르반테스와 그이 동상이 세워져있는 스페인 광장 등 관광
중세의 느낌을 간직한 톨레도는 마드리드에서 약 70Km 떨어진 관광 도시입니다.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톨레도 대성당은 프랑스 고 딕양식 지어져 페르난도 3세가 1227년 건설을 시작하여 266년이 지 난 1493년에 완성되었습니다. 본당 우측의 보물실(Sala del Tesoro)에 있는 성체현시대(Custodia)는 전체가 금과 은으로 만들어졌고 5,000 개의 부품으로 이루어졌다고 하며 무게는 180kg이나 됩니다. 이 밖 에 프랑스 왕 생 루이가 기증한 <황금의 성서>도 보관되어 있습니 다. 본당 중앙에 있는 성가대실의 의자 하나하나에 새겨진 정교한 목 각 역시 고전적인 아름다움을 지니며, 대사원의 성가대실은 미술관 으로 되어 있어 엘 그레코와 고야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톨레도
마요르 광장은 마드리드의 수많은 광장 중 스페인의 전통적인 모습을 갖춘 광장 으로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다양한 행사가 열리던 장소입니다. 직사각형 모 양으로 4층 건물들이 광장을 에워싸고 있으며, 광장의 중심에는 펠리페 3세의 기 마상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마요르 광장 주변에 많은 레스토랑들과 까페가 즐비 하여 해마다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며, 바로 옆에 신선한 야채와 과일을 살 수 있는 산 미구엘 시장이 있어 볼거리가 많은 장소입니다.
톨레도 에스파냐 카스티야라만차 자치지방의 수도이자 톨레도 주(州)의 주도(州都).
톨레도스페인 톨레도. 도시의 3면이 타호강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중세시대의 분위기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마을 한가운데 우뚝 솟아 있는 건물은 알카사르이다. 1986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원어명 |
Toledo |
위치 |
스페인 카스티야라만차 자치지방 톨레도주 |
경위도 |
서경 4°1′30.40″, 북위 39°51′23.50″ |
면적(㎢) |
232.1 |
시간대 |
UTC+1, Summer: UTC+2 |
행정관청 소재지 |
Pza. Consistorio, 1 45071 - Toledo |
홈페이지 |
http://www.ayto-toledo.org/ |
인구(명) |
83,226(2015년) |
자연과 기후
이베리아 반도 중앙 카스티야라만차 평원의 언덕에 위치하는 역사적인 요새 도시로, 수도 마드리드 남서쪽 71km 지점의 타호강 연안에 자리한다. 인구는 2015년 기준 83,226명이고, 해발516mm에 위치한다. 내륙 지방의 전형적인 반건조기후 지역이다. 강우량은 적은 편으로 여름에 덥고, 겨울에 춥다. 2012년 8월 기록한 43°C가 최고 온도이고, 겨울 최저 온도는 2005년 1월 기록한 -9.1°C이다.
톨레도의 역사
로마 역사가 리비우스에 따르면, 로마 시대의 명칭 '톨레툼(Toletum)'을 성벽으로 둘러쌓인 요새로 묘사하면서 기원전 193년 로마가 당시 선주민(先住民)이었던 켈트족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여 로마 식민도시를 이루었다고 기록했다. 5세기 말 서로마 제국의 멸망 후 서고트 왕국의 수도로 기능하였고, 8세기 이슬람 사라센 제국에 점령되어, 10세기 코르도바 칼리프국의 북부 전진 기지가 되었다. 이슬람 세력의 분열에 따라 1010년 이슬람 소왕국 톨레도 타이파(Taifa) 시대가 도래했으나, 1085년 레온-카스티야 왕국의 알폰소 6세가 탈환하여 카스티야이레온 연합왕국의 수도가 되었다. 이후 카톨릭 왕국의 전초기지이자 카스티야 왕국의 문화·정치의 중심지로 눈부시게 성장했다. 이곳에 거주한 세파르디 유대인은 11~12세기부터 공동체를 이루어 금융, 공업, 상권을 소유하여 경제적인 부를 차지했지만, 1492년 이베리아 반도 전역에 대한 레콩키스타가 완결되자 이교도로 낙인 찍혀 추방된 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다. 1560년 스페인 통일 왕국 펠리프 2세가 수도를 마드리드 옮기면서 정치적 중심지로서의 지위를 상실하였으나, 오늘날 카톨릭, 이슬람, 유대교의 유산이 공존하는 역사 도시로 보존되었다.
경제와 산업
카스티야 왕국의 수도로서 정치 및 상공업 중심지로 성장하였다. 그중에서도 무기 생산으로 알려져 있는데, ‘톨레도의 칼날(TheToledo Blade)’은 세계적으로 유명하여 오늘날 면도기, 칼, 의료기기, 전자기기 등의 생산으로 이어졌다. 또한 섬유·도기 등의 경공업과 주변에서 산출하는 양·말 등의 가축, 곡물·포도주·과일 등의 농산물과 광산물의 집산지이다. 21세기에 들어 고용의 85% 정도가 서비스업에 밀집되어 있고, 나머지는 건설(7%), 산업(6%), 농목축업(2%) 종사한다.
문화와 관광
구시가지를 중심으로 도시의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알카사르(Alcázar, 성채)는 요새 도시로서의 면모를 보여준다. 로마 시대의 원형극장, 수로 시설부터 서고트족 교회, 중세의 카톨릭 고딕식 성당, 이슬람 무데하르 양식의 왕궁과 성벽, 유대교 시나고그 등 이색 건축물에서 18세기 바로크 유적까지 광범위한 예술적 업적의 종합체로 인정받아 1986년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무데하르와 고딕 양식이 혼합된 알카사르 내부의 '군사박물관'과 화가인 엘 그레코의 집으로 꾸며진 '엘그레코 박물관'이 대표적이다. 특히 산토 도메 성당에서는 그의 역작인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El Entierro del Conde de Orgaz, 1586년작)' 원본을 감상할 수 있다. 그리스인이라는 뜻의 엘 그레코는 본래 크레타섬에서 태어나 톨레도로 이주하여 생을 마감한 화가이다.
톨레도 (두산백과)
마요르 광장
'태양의 문'이란 뜻의 솔 광장은 마드리드 상업의 중심지로써 마드리드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으며, 이곳을 중심으로 10여개의 도로가 방사형으로 뻗쳐나가 마드 리드의 제로포인트가 되는 곳입니다. 지하철의 3개 노선이 교차하는 지점으로 언제나 수많은 인파들로 북적거리는 곳이기도 하며, 광장 앞으로 마드리드 자치 의회 건물과 마드리드 최대의 백화점인 El Corte Ingres(엘 꼬르떼 잉글레스) 가 이곳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관광객들은 마드리드의 기점이 되는 제로포인트에서 기념사진을 찍는 등 인기가 좋은 곳 입니다.
세계 역사 유적 1001 마요르 광장 [Plaza Mayor]
대륙 |
유럽 |
위치 |
스페인>마드리드 |
저자 |
캐럴 킹 |
이 거대한 광장은 축하 행사, 종교 의식, 처형 등을 거행해 온 풍요로운 역사를 지니고 있다
마드리드의 마요르 광장은 관광객들과 지역 주민들이 다 같이 즐겨 찾는 바, 카페, 상점 들이 들어선 분주한 광장이다. 매주 주말이면 이 광장에서는
야외 골동품 시장이 열리며, 이곳은 매년 마드리드 시의 수호성인 성 이시드로 축제가 열리는 곳이기도
하다. 한때는 시장터였던 마요르 광장은 16세기에 바로크
양식의 광장으로 탈바꿈했고, 가로 90m에 세로 109m의 넓이로 유럽에서 가장 큰 공공광장 중 하나이다.
광장을 세우자는 계획은 스페인의 펠리페 2세가 1561년
마드리드의 왕궁으로 옮겨온 후 1580년에 처음 시작되었고, 건축가
후안 데 에레라가 이를 실행했다. 데 에레라는 1590년대에
광장에 들어선 첫 건물인 두 개의 탑이 있는 '카사 데 라 파나데리아'(예전에는
제빵사 길드가 있던 곳)를 지었다. 현재 이 건물을 치장하고
있는 우화적인 벽화는 1992년에 그려진 것이다. 데 에레라의
제자인 후안 고메스 데 모라가 펠리페 3세 시대인 1619년에
광장을 완성했다.
1616년에 제작된 펠리페 3세의 청동 기마상은 1848년에
광장으로 옮겨와 그 중앙에 자리 잡고 있다. 1631년, 1670년, 1790년 세 차례에 걸친 화재가 광장에 피해를 입혔다. 마지막
화재가 일어난 이후 광장을 재건축하는 작업은 건축가 후안 데 비야누에바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주변의
건물에 층을 더 지어 현재의 5층 높이로 만들었고 아치형 포티코 여러 개를 설치했다. 이 재건축 작업은 그의 사후에도 계속되어 1854년에 마무리되었다.
마요르 광장에서는 투우, 가면무도회, 왕실 결혼식, 대관식 등의 행사가 거행되어 왔다. 그러나 이곳이 항상 단순한 사교적
중심지였던 것은 아니다. 이 광장은 아빌라의 테레사, 이시도르, 프란시스코 하비에르 등의 성인이 시성 받은 장소이다. 또한 17세기 스페인 종교 제판이 성행했을 때 이단자 등 유죄 판결을 받은 이들이 공개적으로 처형당하거나 자신의 신앙을
드러내 보였던 장소이기도 하다.
마요르 광장 [Plaza Mayor]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세계 역사 유적 1001, 2009. 1. 20., 마로니에북스)
솔 광장 (Puerta del Sol)
두산백과 푸에르타 델 솔 [Puerta del Sol] 에스파냐 수도 마드리드 중심지에 있는 지역.
푸에르타 델 솔 광장에스파냐 마드리드 중심지의 광장으로 항상 사람들로 붐빈다. '푸에르타 델 솔(Puerta del Sol)'은 '태양의 문'이라는 뜻이다.
푸에르타 델 솔은 '태양의 문'이라는 뜻으로 16세기까지 태양의 모습이 새겨진 중세시대 성문이 있었으나 현재는 없다. 마드리드의 주요 관광지가 주변에 위치하며 에스파냐 곳곳으로 통하는 9개의 도로가 시작되는 등 마드리드 관광의 거점을 이룬다. 주변에 에스파냐의 백화점 체인 엘 코르테 잉글레스(El Corte Ingles)를 비롯하여 상점, 음식점, 카페테리아가 많다. 광장에는 말을 탄 카를로스 3세의 동상이 있다.
푸에르타 델 솔 [Puerta del Sol] (두산백과)
여행일정표
호텔로 이동 후 휴식
호텔 SAME AS ABOVE 또는 일급 또는 투어리스트급
식사 조식 호텔식 중식 현지식 석식 한식
11일 2018년 05월 20일 (일) [지역] 마드리드-아부다비
마드리드 호텔 조식 후
마드리드 공항으로 이동
09:30 EY076 마드리드 출발/아부다비 향발
아부다비 아부다비 도착
22:20 EY876 아부다비 출발/인천 향발
호텔 기내박
식사 조식 호텔식 중식 기내식 석식 기내식 12일 2018년 05월 21일 (월) [지역] 인천
인천 11:45 인천 도착 ※ 현지사정에 의해 숙박지, 일정순서 변경 될 수 있습니다.
호텔
식사 조식 중식 석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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