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종교와 나

경허스님과 그 문하의 만공,일엽스님

應觀 2015. 9. 1. 08:32

 

예산 수덕사에는 근현대사 과정 속에 기억할 만한 세 분의 스님이 계셨다.

 

  1) 경허 스님


  경허 성우(鏡虛 性牛, 1849∼1912)선사는 조선말기 침체된 불교계에 새로운 중흥조로 출현하여 무애자재로운 생활속에서 전등의 법맥을 이으며, 선불교(禪佛敎)를 진작시킨 선의 혁명가이자 대승(大乘)의 실천자였다.

 

  스님의 법명은 성우(性牛), 법호는 경허(鏡虛)이다. 9세 때 경기도 과천 청계사로 출가하여 계허 스님의 제자가 되었으며 절에 와있던 어느 거사에게서 사서삼경을 배우고 기초적인 불교교리를 익혔다.

 

  이후 동학사의 만화강백에게 천거되어 불교경론을 배우니 그는 불교의 일대시교(一代時敎)뿐 아니라 유서(儒書)와 노장(老莊)등의 사상을 고루 섭렵하였다. 어느날 전염병이 돌고 있는 마을에서 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보고 문자공부가 죽음의 두려움을 조금도 없애주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 후 오로지 영운선사의 "나귀 일이 끝나지 않았는데 말의 일이 닥쳐왔다"는 화두를 들고 정진하던 중 "소가 되어도 고삐 뚫을 구멍이 없다는 것이 무슨 말인가?" 라는 한 사미의 질문에 모든 이치를 깨달았다.

 

  이때부터 육신을 초탈하여 유유자적하였다. 그후 천장암에서 1년간 보림 후 활연대오하니 생사에 자재(自在)하였으며 56세에 만공에게 전법계를 전할 후 비승비속(非僧非俗)의 생활로 말년을 보냈던 스님은 1912년 4월 25일 함경도 갑산 웅이방 도하동에서 입적하니 세수 64세, 법랍 56세였다.

 

  경허 스님은 전국 곳곳에 선원과 선실을 개설하여 불교계에 선수행의 풍토를 조성, 선풍을 진작시켰고 스님의 문하에는 만공(滿空), 혜월(慧月), 수월(水月)등이 있다.

 

 

 

 

 

 


허공(虛空)은 마음을 낳고,
마음은 인격(人格)을 낳고,
인격은 행동을 낳나니라

  2) 만공 스님


  만공 월면(滿空 月面,1871∼1946)선사는 근대 한국 선의 중흥조인 경허의 제자로 스승의 선지를 충실히 계승하여 선풍을 진작시킨 위대한 선지식이다. 스님의 법호는 만공, 법명은 월면이다.

 

  1883년 13세 되던 해 김제 금산사에서 불상을 처음보고 크게 감동한 것이 계기가 되어 공주 동학사로 출가하여 진암문하에서 행자생활을 하다가 이듬해,경허스님을 따라 서산 천장사로 와서 태허스님을 은사로 경허를 계사로 사미십계를 받고 법명을 월면이라 하였다.

 

  경허스님의 법을 이은 스님은 덕숭산에 와서 금선대를 짓고 수 년 동안 정진하면서 전국에서 모여든 납자들응 제접하며, 수덕사,정혜사,견성암을 중창하고 많은 사부대중을 거느리며 선풍을 드날렸다. 

 

  스님은 일제강점기 선학원의 설립과 선승들의 경제적 자립을 위한 선우공제회운동에 지도자로 참여하였으며, 조선총독부가 개최한 31본산 주지회의에 참석하여 조선총독 미나미에게 직접 일본의 한국 불교정책을 힐책하였다.

 

  이는 일제치하의 치욕스러운 불교정책을 쇄신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러한 만공의 사상은 생사를 초탈한 선사의 가풍이라 할 것이다. 말년에는 덕숭산 정상 가까이 전월사라는 초가집을 짓고 지내다가 입적하니, 1946년 10월 20일 그의 나이 75세, 법랍 62세였다. 

 

  그 뒤 제자들이 정혜사 아래에 만공탑을 세우고 진영을 경허·혜월 스님과 함께 금선대에 봉안하였다. 덕숭문중의 법맥을 형성하여 많은 후학을 배출한 그의 문하에는 비구 보월·용음·고봉·금봉. 서경·혜암·전강·금오·춘성·벽초·원담등과 비구니 법희·만성·일엽등 당대에 뛰어난 제자들이 있다.

 

  3) 일엽 스님

 

  일엽스님(1896-1971)은 출가하기 전에 속세에서 신여성으로, 문필가로 이름을 날리던 이였다. 속성이 김씨요, 본명은 원주였는데 서울 이화 학당에서 공부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수학하였으며 화가 나혜석과 함께 대담한 행동과 필설로 여자의 사회활동을 선구적으로 보여주고 일깨웠다.

 

  1920년에 문학활동을 시작해 문예지 '폐허'의 동인으로 참가하고 우리 나라 최초의 여성잡지인 '신여자'를 간행하기도 하였으며 1962년에 나온 수상록 '청춘을 불사르고'가 많이 알려져 있다.

 

  20세 이전까지는 기독교 신자이였으나 1933년에 수덕사에 입산하여 만공의 제자가 되었다.

   (자료: http://bgs.hs.kr/dapsa/choongnam/sooduksa.htm)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만공 스님 일화]

 

  어느 날 제자와 함께 고갯길 산마루를 오르고 있었는데 제자가 다리가 아파 더는 못 가겠다고 하자, 만공이 마침 길가 밭에서 남편과 함께 일하던 아낙네를 와락 끌어안으니 그 남편이 소리를 지르며 좇아오는 바람에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고개를 훌쩍 넘었다. 나중에 제자가 "스님, 왜  그런 짓을 하셨습니까?" 하자, "이 놈아, 네가 다리 아파 못 가겠다고 했지 않느냐? 덕분에 여기까지 다리 아픈 줄도 모르고 오지 않았느냐"했다고 한다.

 

  이 일화는 스승 경허의 일화라고도 하는데, 계율에 얽매이지 않고 호방하며 마음을 중시한 경허와 만공의 선풍을 대변하는 이야기다.

 

  또 하나의 일화가 있다.

 

  1930년대 말, 만공 스님이 충남 예산의 덕숭산 수덕사에 주석하고 계실 때의 일이었다. 당시 만공 스님을 시봉하고 있던 어린 진성사미(오늘의 수덕사 원담 노스님 이라는 설도 있다)는 어느 날 사하촌(寺下村)의 짓궂은 나뭇꾼들을 따라 산에 나무하러 갔다가, 재미있는 노래를 가르쳐줄 것이니 따라 부르라는 나뭇꾼의 장난에 속아 시키는 대로  ‘딱따구리노래’를 배우게 되었다.

  저 산의 딱따구리는
  생나무 구멍도 잘 뚫는데
  우리집 멍터구리는
  뚫린 구멍도 못 뚫는구나.


  아직 세상물정을 몰랐던 철없는 진성사미는 이 노랫말에 담긴 뜻을 알 리 없었다. 그래서 진성사미는 나중에 절안을 왔다갔다 하며 구성지게 목청을 올려 이 해괴한 노래를 부르곤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진성사미가 한창 신이 나서 이 노래를 부르고 있는데 마침 만공 스님이 지나가다 이 노래를 듣게 되었다. 스님은 어린 사미를 불러 세웠다.

“네가 부른 그 노래, 참 좋은 노래로구나, 잊어버리지 말거라.”
“예, 큰스님.”

  진성사미는 큰스님의 칭찬에 신이 났다. 그러던 어느 봄날, 서울에 있는 이왕가(李王家)의 상궁과 나인들이 노스님을 찾아뵙고 법문을 청하였다. 만공 스님은 쾌히  승낙하고 마침 좋은 법문이 있은니 들어보라 하며 진성사미를 불렀다.

“네가 부르던 그 딱따구리 노래, 여기서 한 번 불러 보아라.”

  많은 여자 손님들 앞에서 느닷없이 딱따구리 노래를 부르라는 노스님의 분부에 어린 진성사미는 그 전에 칭찬받은 적도 있고 해서 멋들어지게 딱따구리 노래를 불러제꼈다.

“저 산의 딱따구리는 생나무 구멍도 자알 뚫는데….”

  철없는 어린사미가 이 노래를 불러대는 동안 왕궁에서 내려온 청신녀(淸信女)들은 얼굴을 붉히며 어찌할 줄을 모르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이 때 만공스님이 한 말씀했다.

 “바로 이 노래 속에 인간을 가르치는 만고불력의 직설 핵심 법문이 있소. 마음이 깨끗하고 밝은 사람은 딱따구리 법문에서 많은 것을 얻을 것이나, 마음이 더러운 사람은 이 노래에서 한낱 추악한 잡념을 일으킬 것이오. 원래 참법문은 맑고 아름답고 더럽고 추한 경지를 넘어선 것이오.
  범부중생은 부처와 똑같은 불성을 갖추어 가지고 이 땅에 태어난 모든 사람은 뚫린 부처씨앗이라는 것을 모르는 멍텅구리오. 뚫린 이치을 찾는 것이 바로 불법(佛法)이오. 삼독과 환상의 노예가 된 어리석은 중생들이라 참으로 불쌍한 멍텅구리인 것이오. 진리는 지극히 가까운데 있소. 큰 길은 막힘과 걸림이 없어 원래 훤히 뚫린 것이기 때문에 지극히 가깝고, 결국 이 노래는 뚫린 이치도 제대로 못찾는 딱따구리만도 못한 세상 사람들을 풍자한 훌륭한 법문이 것이오.”

  만공 스님의 법문이 끝나자 그제서야 청신녀들은 합장배례했다.

  서울 왕궁으로 돌아간 궁녀들이 이 딱따구리 법문을 윤비(尹妃)에게 소상히 전해 올리자 윤비도 크게 감동하여 딱따구리 노래를 부른 어린 사미를 왕궁으로 초청, ‘딱따구리’노래가 또 한 번 왕궁에서 불려진 일도 있었다.

  만공 스님은 다른 한편으로는 천진무구한 소년같은 분이었다.

  특히 제자들이 다 보는 앞에서 어린애처럼 손짓발짓으로 춤을 추며 ‘누름갱이 노래’를 부를 때는 모두들 너무 웃어 배가 아플 지경이었다고 한다.

  오랑께루 강께루
  정지문뒤 성께루
  누름개를 중께루
  먹음께루 종께루


  한국 불교계에서 첫째 가는 선객, 만공 스님은 타고난 풍류객의 끼도 지닌 분이셨다.

  1946년 어느 날 저녁, 공양을 들고 난 스님은 거울 앞에 앉아 "이 사람 만공, 자네와 나는 70여년을 동고동락했는데 오늘이 마지막일세. 그 동안 수고했네"라는 말을 남기고 열반에 들었다고 한다.

 

 

 

◈ 일엽스님이 백성욱에게 ◈
               일엽스님이 옛 애인 만공스님에게 보낸 편지

원망스럽던 이가 선지식이었소
인생의 전환점 된 옛 연인에게 보낸 자유인의 감사글


아아! 한 생각 돌리게 한 당신에게 나는 어떻게
보은(報恩)해야 하오리까.
무념(無念)에 들게 한 은혜는 사랑의 배신과 상쇄되고도
멀리 남는 진리를 몰랐던 지난날을 이 순간 남김없이 청산하였나이다.

이제 나는 보은할만한 완전한 인간이 되기 위하여,
남을 구제하기 위하여, 미래세가 다하고 남도록 정진과 노력의 쌍수적 길,

곧 인간의 정로(正路)로 정로로만 매진할 것이외다.

그리하여 구경(究竟)은 갈 길과 가는 사람이 하나로 화하고,

받고 주는 상(相)이 끊어져야 유위의 생활,

곧 현실에서 무위락을 얻은 대자유인이 될 것이 아니오이까.

1962년 5월 고희를 바라보던 일엽(一葉, 1896~1971)은
『청춘을 불사르고』라는 인생회고록을 세상에 내놓았다.
몸속에 활화산이라도 품고 있는 양 불꽃 같이 살았던
한 사람의 인생유전 앞에 대중들은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목사의 딸로 태어나 이화학당에서 신학문을 배우고 동경 유학까지 다녀온

인텔리 여성. 화가 나혜석과 더불어 ‘자유연애론’과 ‘신정조론’을 외치며
개화기 신여성운동을 주도했던 선각자.

12세의 나이에 이미 육당 최남선보다도 1년 앞서 국문시
‘동생의 죽음’을 발표함으로써

한국문학상 신시의 효시가 됐던 여류문인. 동거, 결혼, 이혼을 반복하다
33세의 나이에 홀연 불문(佛門)에 들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던 출가 수행자.

이렇듯 파란만장한 길을 걸어왔던 이력의 소유자가 들려준 인생론이었기에
그 울림이 더 크고 깊었는지 모른다.

불탄 송아지 같이 날뛰던 청춘을 불살라 버리고
영원한 청춘! 길이길이 싱싱하게 되어 시들지 않은 청춘을 증득하기 위해 입산했다던 일엽.

그는 이 책에서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던 옛 연인 백성욱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의 글을 통해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고 있다.

한국의 대표적인 여류문사로 명성이 자자하던 일엽이

백성욱(1897~1981)을 만난 것은 1926년 무렵이었다.

당시 일엽은 사랑에 구원이 있다는
믿음으로 절대적인 사랑을 찾아 떠돌고 있었다.

그러나 사랑은 그를 끊임없이 절망케 했고 고통의 나락으로 밀어뜨리기를 반복했다.

이때 절망의 밑바닥에서 구세주처럼 나타난 게 훗날

 내무부 장관까지 역임하는 백성욱이었다.

독일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고 돌아온 그는

이제껏 만났던 사람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해박한 지식과 고고한 인품.

중앙불교전문학교 교수로 재직하던 그와의 만남을 통해 일엽은

비로소 불교를 알게 됐었고, 깨달음이 대자유인이 되는 길이라는 사실도 알았다.

일엽은 그가 좋았고 그가 들려주는 불교가 좋았다.
이제까지의 고난이 그를 만나기 위한 산고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러나 얼마 뒤 백성욱은
‘인연이 다 하여서 다시 뵙지 못하겠기에…’
라는 편지 한 통을 남기고 금강산으로 훌쩍 떠나갔다.


일엽이 백성욱에게


아아! 한 생각 돌리게 한 당신에게
나는 어떻게 보은(報恩)해야 하오리까.
무념(無念)에 들게 한 은혜는 사랑의 배신과 상쇄되고도
멀리 남는 진리를 몰랐던 지난날을 이 순간 남김없이 청산하였나이다.
이제 나는 보은할만한 완전한 인간이 되기 위하여,
남을 구제하기 위하여, 미래세가 다하고 남도록 정진과
노력의 쌍수적 길, 곧 인간의 정로(正路)로 정로로만 매진할 것이외다.
그리하여 구경(究竟)은 갈 길과 가는 사람이 하나로 화하고,
받고 주는 상(相)이 끊어져야 유위의 생활,
곧 현실에서 무위락을 얻은 대자유인이 될 것이 아니오이까.
**
1962년 5월 고희를 바라보던 일엽(一葉, 1896~1971)은
『청춘을 불사르고』라는 인생회고록을 세상에 내놓았다.
몸속에 활화산이라도 품고 있는 양 불꽃 같이 살았던
한 사람의 인생유전 앞에 대중들은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목사의 딸로 태어나 이화학당에서 신학문을 배우고
동경 유학까지 다녀온 인텔리 여성. 화가 나혜석과 더불어
‘자유연애론’과 ‘신정조론’을 외치며 개화기
신여성운동을 주도했던 선각자. 12세의 나이에 이미
육당 최남선보다도 1년 앞서 국문시 ‘동생의 죽음’을
발표함으로써 한국문학상 신시의 효시가 됐던 여류문인.
동거, 결혼, 이혼을 반복하다 33세의 나이에 홀연
불문(佛門)에 들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던 출가 수행자.
이렇듯 파란만장한 길을 걸어왔던 이력의 소유자가 들려준
인생론이었기에 그 울림이 더 크고 깊었는지 모른다.

불탄 송아지 같이 날뛰던 청춘을 불살라 버리고 영원한 청춘!
길이길이 싱싱하게 되어 시들지 않은 청춘을 증득하기 위해
입산했다던 일엽. 그는 이 책에서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던
옛 연인 백성욱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의 글을 통해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고 있다.

한국의 대표적인 여류문사로 명성이 자자하던 일엽이
백성욱(1897~1981)을 만난 것은 1926년 무렵이었다.
당시 일엽은 사랑에 구원이 있다는 믿음으로 절대적인
사랑을 찾아 떠돌고 있었다.
그러나 사랑은 그를 끊임없이 절망케 했고 고통의 나락으로
밀어뜨리기를 반복했다.
이때 절망의 밑바닥에서 구세주처럼 나타난 게 훗날
내무부장관까지 역임하는 백성욱이었다.
독일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고 돌아온 그는 이제껏 만났던
사람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해박한 지식과 고고한 인품. 중앙불교전문학교 교수로 재직하던
그와의 만남을 통해 일엽은 비로소 불교를 알게 됐었고,
깨달음이 대자유인이 되는 길이라는 사실도 알았다.

일엽은 그가 좋았고 그가 들려주는 불교가 좋았다.
이제까지의 고난이 그를 만나기 위한 산고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러나 얼마 뒤 백성욱은
‘인연이 다 하여서 다시 뵙지 못하겠기에…’라는
편지 한 통을 남기고 금강산으로 훌쩍 떠나갔다.
그런 일을 예기치 못했던 건 아니었지만 일엽은 절망했다.
울다 지쳐 잃어버린 사랑을 달래려 또 다른 사랑을 찾았지만
백성욱 같은 사람은 다시없었다.
그는 마음을 바꿔 불교를 공부해볼 것을 결심했다.
또 불교 잡지에 지속적으로 글을 쓰는 동시에 수행에도 매진했다.
이때 수덕사 만공으로부터 한통의 서신이 날라들었다.

‘공부를 하자면 별 경계가 많사오니 그러한 경계를 대할 때에
좋은 생각도 내지 말고, 언짢은 생각도 내지 말고,
담연화로만 생각하면서 한 생각도 없는 중 자연 화두로 지리
계속하여 나가기 시작하면 공부가 순숙할 증조올시다’

만공의 편지를 받은 일엽은 얼마 후 출가의 길을 선택했다.
‘당신은 나에게 무엇이 되었삽기에 살아서 이 몸도 죽어서
이 혼까지도 그만 다 바치고 싶어질까요.…’
출가하기 석 달 전에 쓴 그의 시에 나타나듯 일엽은
날이 갈수록 불교에 깊이 매료돼 갔기 때문이다.

1928년 7월, 연인 백성욱이 그랬던 것처럼 일엽은
금강산 마하연의 실림암(實林菴)에서 삼단 같이
고운 머리를 싹둑 잘랐다.
그해 9월 서울 선학원에서 만공을 계사로 사미계를 받은
일엽의 삶의 태도는 완전히 바뀌었다.
스승 만공의 당부대로 이후 30여 년간 붓을 꺾었으며
오직 화두참구에만 매진했다.
그리고 훗날 ‘고인(古人)의 속임수에 헤매고 고뇌한
이 예로부터 그 얼마인가. 큰 웃음 한소리에 설리(雪裏)에
도화(桃花)가 만발하여 산과 들이 붉었네.’라는
오도송을 부를 수 있었다.

팔만 사천 번뇌를 모두 털어버리고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된 일엽.
젊은 시절 그토록 원망했던 연인이
오늘날 자신이 있도록 해준 참다운 선지식이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으면서 일엽은 백성욱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먼 훗날 백성욱도 일엽을 떠났던 이유가 세속적인
사랑이 아니라 대아적인 사랑에 있었음을 담담히 밝히고 있다.

‘외롭고 서글픈 때 정을 주셨던 스님에 대한 생각은
마치 조강지처를 그리는 것 같은 심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스님을 여의고 출가한 후로는 여인의 접촉을 금하고
일심으로 수도하였습니다. 이미 20여 년 전부터,
세상에서는 본능이라하여 어쩔 수 없다는 남녀의 성문제에
대해 별도의 감각이 따로 가져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본능을 좌우할 수 있고 천성을 임의로 고칠 수 있는
그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내 사랑! 내 부모! 내 자식만 아는 상대적인
그 사랑은 장차 원수가 되는 날이 있게 됩니다.
그런 단계를 뛰어 넘은 지혜적 동지는 헤어져 얼굴을 대하거나
아니 대하거나 서로 지혜를 탁마하며 지혜를 길러가게 되고,
혹시나 타락하려 하면 천만 목숨도 아끼지 않고
서로 제도하더라도 조건을 붙이지 않게 됩니다.
그게 대아적 사랑이요, 평등적 자비인 것입니다.’

이러한 백성욱의 뒤늦은 고백이 아니더라도 일엽이
어찌 그것을 몰랐을까. 세수로 환갑을 넘긴 일엽은
이후 비구니 총림 건립 등 여성수행자의 위상 재고를 위해
혼신의 노력의 기울였다. 그리고 1971년 1월 28일 새벽 1시
“일년은 춘하추동 사계절이 있는 것처럼 생에는
생로병사의 사계절이 있는 법이다.
나는 그 맨 마지막 계절인 죽음의 계절을 당하였다.
이것이 되풀이 되풀이 될 뿐 나는 불법을 여의지 않을 것을
확정하며 생과 사가 둘 아님을 안다. 그러나 월송아,
누구나 한번 씩은 다 당해야 하는 일이니 방일하지 말고
부지런히 공부하여라.”란 말을 남기고 큰 '한 잎새'는
마침내 지고 말았다.

일엽과 백성욱, 한 시대를 풍미했던 두 사람의 사랑이
아름다운 건 욕망과 번뇌의 차원에서 머물지 않고
깨달음으로 승화시켰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일을 예기치 못했던 건 아니었지만 일엽은 절망했다.

울다 지쳐 잃어버린 사랑을 달래려 또 다른 사랑을 찾았지만

백성욱 같은 사람은 다시없었다.
그는 마음을 바꿔 불교를 공부해볼 것을 결심했다.

또 불교 잡지에 지속적으로 글을 쓰는 동시에 수행에도 매진했다.

이때 수덕사 만공으로부터 한통의 서신이 날라들었다.

‘공부를 하자면 별 경계가 많사오니 그러한 경계를 대할 때에 좋은 생각도 내지 말고,

언짢은 생각도 내지 말고, 담연화로만 생각하면서 한 생각도 없는 중

 자연 화두로 지리 계속하여 나가기 시작하면

공부가 순숙할 증조올시다’

만공의 편지를 받은 일엽은 얼마 후 출가의 길을 선택했다.

‘당신은 나에게 무엇이 되었삽기에 살아서 이 몸도 죽어서 이 혼까지도 그만

바치고 싶어질까요.…’ 출가하기 석 달 전에

그의 시에 나타나듯 일엽은

날이 갈수록 불교에 깊이 매료돼 갔기 때문이다.

1928년 7월, 연인 백성욱이 그랬던 것처럼

일엽은 금강산 마하연의 실림암(實林菴)에서 삼단 같이 고운 머리를 싹둑 잘랐다.

그해 9월 서울 선학원에서 만공을 계사로 사미계를 받은

일엽의 삶의 태도는 완전히 바뀌었다.

스승 만공의 당부대로 이후 30여 년간 붓을 꺾었으며

오직 화두참구에만 매진했다. 그리고 훗날
‘고인(古人)의 속임수에 헤매고 고뇌한 이 예로부터 그 얼마인가.

큰 웃음 한소리에 설리(雪裏)에 도화(桃花)가 만발하여 산과 들이 붉었네.’
라는 오도송을 부를 수 있었다.

팔만 사천 번뇌를 모두 털어버리고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된 일엽.

젊은 시절 그토록 원망했던 연인이 오늘날 자신이 있도록 해준 참다운 선지식이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으면서 일엽은 백성욱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먼 훗날 백성욱도 일엽을 떠났던 이유가 세속적인 사랑이 아니라

대아적인 사랑에 있었음을 담담히 밝히고 있다.

‘외롭고 서글픈 때 정을 주셨던 스님에 대한 생각은 마치

조강지처를 그리는 것 같은 심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스님을 여의고 출가한 후로는
여인의 접촉을 금하고 일심으로 수도하였습니다.

이미 20여 년 전부터, 세상에서는 본능이라하여
어쩔 수 없다는 남녀의 성문제에 대해 별도의
감각이 따로 가져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본능을 좌우할 수 있고 천성을 임의로 고칠 수 있는 그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내 사랑! 내 부모! 내 자식만 아는 상대적인 그 사랑은
장차 원수가 되는 날이 있게 됩니다.

그런 단계를 뛰어 넘은 지혜적 동지는 헤어져 얼굴을 대하거나 아니 대하거나

서로 지혜를 탁마하며 지혜를 길러가게 되고, 혹시나 타락하려 하면
천만 목숨도 아끼지 않고 서로 제도하더라도
조건을 붙이지 않게 됩니다.

그게 대아적 사랑이요, 평등적 자비인 것입니다.’

이러한 백성욱의 뒤늦은 고백이 아니더라도 일엽이 어찌 그것을 몰랐을까.

세수로 환갑을 넘긴 일엽은 이후 비구니 총림 건립 등 여성수행자의 위상 재고를 위해

혼신의 노력의 기울였다. 그리고 1971년 1월 28일 새벽 1시 “

일년은 춘하추동 사계절이 있는 것처럼 생에는 생로병사의 사계절이 있는 법이다.

나는 그 맨 마지막 계절인 죽음의 계절을 당하였다.
이것이 되풀이 되풀이 될 뿐 나는 불법을 여의지 않을 것을 확정하며 생과 사가 둘임을 안다.
그러나 월송아, 누구나 한번 씩은 다 당해야 하는 일이니 방일하지 말고

부지런히 공부하여라.”란 말을 남기고 큰 '한 잎새'는 마침내 지고 말았다.

일엽과 백성욱, 한 시대를 풍미했던 두 사람의
사랑이 아름다운 건 욕망과 번뇌의 차원에서
머물지 않고 깨달음으로 승화시켰기 때문일 것이다.

 

일엽스님 어록

 

“나는 이 몸이나 이 혼의 의존이 아닌 불출구(不出口)의 나다. 두려울 것은 없다.

 우주가 무장을 하고 대든다 해도 나를 이길 수 있는 인간은 그 생기기 이전에

 있었다. 천당과 지옥은 상대적인 것, 설사 지옥에 가서라도 내 마음을 내가 부리면

 이에서 독립하여 초월할 수 있다.”

 

“누굴 믿으나 극치를 이루면 각(覺)이 되어 구원을 얻게 된다.

 백척간두의 낭떠러지에서는 나를 생각지 말아야 한다.

 나를 던짐으로써 모든 것을 완전히 잊는 무아의 경지가 불심이 아니겠는가.

 우선 인력(人力)으로 못할 일이 현금적(現今的)으로 이루어질 때 믿음이 는다.

 믿음의 성장이 정신력이고 정신력이 바로 삶의 바탕이며 인간의 본체인 것이다.”

 

“내가 할 도리라면 나를 흙이나 걸레처럼 아낌없이 쓰련다.

 흙은 아무리 써도 단단해지고 걸레는 더러운 것을 훔쳐내므로

 그 자리는 언제나 깨끗하게 남아있다.”

 

찬탄과 공경

 

“한 잎사귀 조각배가 험한 바다 헤쳐가서 고해를 다 건너 피안에 다달았네.

 돌아가고 오는 것이 사바세계의 일이니 언제나 중생을 제도하여 부처의 은혜를

 갚으리.” (전 조계종 종정 청담 스님)

 

“날을 맞도록 보고 싶고 밤이 다하도록 보고 싶고 일생이 다하도록 보고 싶었던

 것이 대해노니 한 마디 할 것 없소. 이것이 일엽 스님의 본래 면목이로다.

 필경에 여(如)하오. 무(無)…” (전 망월사 주지 춘성 스님)

 

“청춘이 모두 꿈임을 홀연히 깨닫고 바른 생각 굳건히 지켜 자기 사(事)를 밝히셨

 네.  만 가지 인연을 한꺼번에 쉬어 스스로 태평을 찾으니 한 잎사귀 봄 광명,

 눈(眼) 가운데 살았네.”(덕숭총림 방장 원담 스님)



http://cafe.daum.net/kjminhak/6F6K/211--광주민학회

 

 

△ 만공 선사가 깨달음을 펼치며 사자후를 토했던 덕숭산 금선대에서 바라본 산하대지

 

 

수덕사 방장 원담 스님은 출가한 12살 때부터 만공 스님이 열반할 때까지 그를 시봉하며 일거수일투족을 보았다. 만공은 인근 홍성이 고향인 청년 김좌진과 친구처럼 허심탄회했다. 김좌진은 젊은 시절부터 천하장사였다. 만공 또한 원담 스님이 “조선 팔도에서 힘으로도 우리 스님을 당할 자가 없었지”라고 할 정도였다.

“둘이 만나면 떨어질 줄 몰라. 어린 아이들처럼 ‘야, 자’하곤 했어. 앞에 놓인 교자상을 김 장군이 앉은 채로 뛰어넘으면 스님도 그렇게 했지. 언젠가는 둘이 팔씨름을 붙었는데, 끝내 승부가 나지 않더라고.”

김좌진은 훗날 독립군 총사령관으로 청산리대첩에서 대승을 거뒀다. 만공 또한 출가한 몸이었지만 서산 앞바다 간월도에 간월암을 복원해 애제자 벽초와 원담으로 하여금 해방 직전 1천일 동안 조국 광복을 위한 기도를 올리도록 했다.

이에 앞서 일제의 힘 앞에 굴종을 강요받던 1937년 3월11일 만공은 총독부에서 열린 31본산 주지회의에서 마곡사 주지로 참석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선사 가풍의 기개를 보여준 바 있었다. 총독 미나미가 사찰령을 제정해 승려의 취처(아내를 둠)를 허용하는 등 한국 불교를 왜색화한 전 총독 데라우치를 칭송했다. 이때 만공은 탁자를 내려치고 벌떡 일어나 “조선 승려들을 파계시킨 전 총독은 지금 죽어 무간아비지옥에 떨어져 한량없는 고통을 받고 있을 것이요. 그를 구하고 조선 불교를 진흥하는 길은 총독부가 조선 불교를 간섭하지 말고 조선승려에게 맡기는 것”이라고 일갈한 뒤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조선불교 간섭 말라’ 일제에 호통

이날 밤 만공이 안국동 선학원에 가자 만해 한용운은 기뻐서 맨발로 뛰쳐나오며 “사자후에 여우 새끼들의 간담이 서늘하였겠소. 할도 좋지만 한 방을 먹였더라면 더 좋지 않았겠소”했다. 이에 만공은 “사자는 포효만으로도 백수를 능히 제압하는 법”이라며 껄껄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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