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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경영'의 힘 SK 최종건과 최종현

應觀 2015. 9. 1. 00:04

'형제경영'의 힘 SK 최종건과 최종현

최종건은 1926년 1월 30일 경기도 수원 평동에서 유생인 아버지 최학배, 어머니 이동대의 8남매 가운데 첫째아들로 태어났다. 세 살 아래인 둘째아들 최종현은 1929년 11월 21일 태어났다. 이재에 밝았던 최학배는 평동에서 대성상회를 열어 수원잠업시험장에 볏짚과 왕겨 등을 납품하고, 인천의 미곡거래소와 거래하면서 착실히 재산과 농토를 불려나갔다. 최종건은 48년 짧은 생애 동안 용기와 집념, 끈기와 열정, 결단력과 추진력, 시대 흐름과 기업의 사회적 기여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SK를 창업, 발전시킴으로써 한국 경제 발전에 큰 발자취를 남긴다.

최종건은 신풍초등학교 졸업 뒤 스스로 경성직업학교 기계과에 진학, 졸업하고 아버지 주선으로 선경직물㈜에 입사했다. 선경직물은 일본 기업인 선만주단(鮮滿綢緞)과 경도직물(京都織物)이 합작해 세운 회사였다. 그는 성실성과 능력을 인정받아 18세 어린 나이에 생산부 2조장 자리에 올라 100여명의 종업원을 이끌며 생산계획과 품질관리까지 도맡았다.

1945년 광복이 되자 생산부장 자리에 오른다. 선경직물은 1946년부터 정상 가동되기 시작하여, 직물업계 호황을 바탕으로 생산활동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그 무렵 최종건은 실질적인 공장장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6·25전쟁이 일어나 모든 공장이 불에 타 잿더미로 변해 공장 건물은 형체만 남았고, 보유 직기 100여대 중 수리해 쓸 수 있는 것은 겨우 30대도 채 되지 않았다. 전쟁이 끝난 뒤 정부에서는 선경직물을 민간에 매각하려 했으나 망한 것이나 다름없었기에 아무도 사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최종건은 달랐다. 그는 오히려 이것을 기회로 여겼다.
SK그룹의 창업자 고 최종건 회장(가운데)과 박정희 전 대통령. /주간조선
SK그룹의 창업자 고 최종건 회장(가운데)과 박정희 전 대통령. /주간조선
최종건은 관재청에서 나온 선경직물의 ‘귀속재산 매각통지서’를 받았다. 매각 대금은 130만환으로 그때로서는 거금이었다. 하지만 이런 막대한 자금이 없었던 최종건은 고민 끝에 아버지를 찾아 자금을 빌려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나 아버지 최학배는 동생 최종현의 유학비라며 거절한다. 그는 또다시 고민 끝에 시집간 첫째누나 최양분을 찾아가 아버지 몰래 땅문서를 훔쳐 달라고 하고, 이 소식을 들은 아버지는 아들의 사업 재건에 대한 신념에 마음이 움직여 마침내 자금을 마련해 준다.

최종건은 1953년 10월 1일을 ‘선경직물 창립일’(현 SK네트웍스 창립기념일)로 공식 선포했다. 계약서에는 매수대금을 10년간 분할 상환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1956년 3월 매수대금 잔액을 일시에 납부, 자본금 500만환 규모 선경직물㈜을 출범시킨다. 이때 ‘선경’ 상호는 일제강점기 선만주단과 경도직물의 앞글자를 따서 지었으나, 이제 그 뜻은 전혀 다른 빛날 ‘선(鮮)’과 클 ‘경(京)’의 크게 빛날 ‘선경’을 나타낸다. 최종건은 선경직물을 인수해 전쟁의 상흔으로 고통받던 고향 주민들에게 일자리를 되찾아 주겠다는 신념으로 혈혈단신 공장 재건에 힘썼다. 그는 창업 첫 목표로 직기 20대를 조립·설치했다. 그 무렵에는 직기 20대가 최소 경제운영단위이기도 했다. 마침내 1954년 7월에 제1공장을, 1955년 7월 제2공장 복구를 완성한다.

선경직물은 ‘닭표(Rooster)’ 안감이 국내 양복 안감 시장을 석권하면서 섬유업계 새로운 강자로 떠올랐다. 닭표 안감은 다른 인조견들과는 달리, 재단 전에 물에 빨아서 다림질하는 작업을 하지 않고도 바로 재단해서 쓸 수 있어 획기적이었으며, 조직이 조밀하고 표면이 매끄러워 양복 안감으로는 최고로 꼽혔다. 닭표 안감이 얼마나 유명했는지, 유사상품 수십여 종이 잇따라 출시되었다. 가짜 닭표 안감이 활개를 치자, 동대문시장의 직포 도매상들은 정부와 선경직물 측에 단속을 요구할 정도였다. 닭표 안감은 1955년 10월 ‘해방 10주년 기념 산업박람회’에서 인조견 부문 최우수상을 받았다. 이를 계기로 선경직물은 3만달러 외환을 배정받고 산업은행으로부터 500만환 기업육성자금을 융자받게 되었다. 최종건은 이 돈으로 선경직물 매수대금 잔금 완납, 소유권 이전 등기 완료, 1956년 7월 제3공장을 마련해 대량생산체제를 구축했다. 또한 1958년에 생산된 ‘봉황새 이불감’이 대성공을 거두어 선경직물의 이름을 드높였다.

5·16군사정변이 일어나고 박정희 대통령의 리더십에 기초한 수출 주도형 산업화 전략이 추진되었다. 창립 7년이 넘어선 선경직물은 그동안 다진 기반으로 새로운 환경에서 눈부시게 성장할 수 있는 계기를 맞았다. 박정희는 열정과 집념으로 기업의 성장에만 온 힘을 기울이는 최종건을 눈여겨보았다. 1961년 9월 박정희는 선경직물 수원공장을 돌아보며 최종건과 직원들을 격려하고, 대통령이 된 뒤 1964년 10월에도 다시 한 번 방문한다. 이 일은 선경에 대한 국민의 신뢰도를 높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홍보에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 동행했던 육영수 여사에게 선물한 한복 옷감은 ‘청와대 갑사’라 불리며 널리 알려져 큰 성공을 거두었다. 최종건은 수출시장을 뚫어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나아가 정식으로 무역회사를 차리기로 마음먹었다

 1962년 8월 최종건은 선경산업㈜을 설립했다. 첫 수출 뒤 홍콩 광흥공사와의 거래가 이어져 그해 4만6000달러의 실적을 올렸다. 이어서 1963년 8월 최종건은 선경직물을 대표해서 한국 직물업계 발전에 기여하고 직물업계 최초로 홍콩에 수출한 공로를 인정받아 금탑산업훈장을 받았다. 이는 민간기업 대표로는 건국 이래 최초 수훈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1964년에 이르러 최종건은 한국직물공업연합회 회장을 맡았다. 이 무렵 그는 방일영 조선일보 회장과 각별히 지냈다. 최종건은 그와 ‘형님 동생’ 하는 사이로 친형제나 다름없이 지내며 1950~1960년대 어려운 시기를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며 이겨냈다.

최종건은 수출 상품 개발에 박차를 가한다. 인견사 한 품목만으로는 수출에 한계가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크레폰(1963), 앙골라(1964), 조제트 ‘깔깔이’(1965) 등 여러 제품 개발에 진력했다. 1972년 ‘10월유신’ 뒤 최종건은 1972년 11월 ‘서해개발’을 설립, 이듬해 조림사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승승장구하는 기업에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선경그룹의 주요 회사 서울사무소들이 입주해 있던 퇴계로 입구의 대연각호텔이 화마에 휩싸여 모든 서류가 불에 타버린 것이다. 피해는 막심했지만 선경은 신용제일주의 영업방침을 지향해 온 덕에 자진해서 거래관계를 성실히 신고해온 거래처가 많았다. 여기에 1972년 정부에서는 워커힐을 민간기업에 불하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최종건은 이를 대연각 화재로 인한 손해를 보충하는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으며 워커힐 인수에 들어간다. 그는 워커힐을 정부의 내정가격보다 비싸게 인수하겠다고 선언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세계에서 으뜸가는 호텔로 만들어 달라”면서 이를 수락했다. 1973년 3월 최종건은 ‘선경개발㈜ 워커힐’을 설립, 정식으로 호텔 업무에 착수한다.

1973년 초 일본의 ‘데이진’과 ‘이토추상사’는 공동투자 형식으로 1일 생산 15만배럴 규모의 정유공장을 설립하기로 선경과 합의, 1973년 7월 선경석유㈜가 설립되었다. 선경석유의 설립은 정유업계로 진출하기 위한 전초전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날의 창립 기념사는 최종현 부사장이 대신할 수밖에 없었는데, 최종건은 워커힐을 인수한 직후 폐암 진단을 받았기 때문이다. 설상가상 1973년 10월 제4차 중동전 발발 때문에 제1차 석유위기가 닥쳐 원유 가격이 몇 배로 올랐다. 끝내 최종건의 거대한 야심인 정유사업은 불발로 끝나고 마는가. 아니, 오히려 그것은 시작일 뿐이었다.

‘창업보다 수성이 어렵다’는 말처럼, 무릇 기업을 일으키기는 쉬워도 국민경제에 이바지하는 알찬 기업으로 키워내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 뒤로 최종건의 유지를 최종현은 훌륭하게 이루어 나간다. 최종현은 1950년 5월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화학과에 입학한다. 그리고 바로 6·25전쟁이 일어난다. 그는 한국에서는 공부를 계속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서 미국에 가서 더 많은 공부를 해 훌륭한 칼럼니스트가 되거나 또는 무역업계에 진출하기로 결심한다. 최종현은 서울대학교 3학년 때 미국 유학을 떠났다. 그는 1954년 6월 위스콘신대학 생화학과 3학년에 편입해 1956년 6월 이 대학을 졸업하고 시카고대학 대학원에 진학하여 경제학을 전공한 뒤 1959년 3월 시카고대학원에서 경제학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1962년에 들어서며 선경직물은 창업 이래 가장 심각한 경영난을 겪는다. 누적적자가 쌓이는 가운데 종업원들의 체불임금이 늘어났다. 창업 10년에 이른 선경직물은 직기 160여대, 종업원 400명을 헤아리는 규모로 성장했지만 거듭되는 공장 증축과 생산설비 증설로 극심한 경영난에 허덕였다. 최종건은 특유의 저돌성과 자금조달 능력으로 위기를 극복해 왔지만 그것도 이미 한계에 다다랐다. 이는 선경직물이 질적 변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최종건은 동생 최종현의 귀국을 종용했다. 마침내 최종현은 유학생활을 접고 귀국, 1962년 11월 곧바로 선경직물 부사장으로 취임한다. 형의 저돌적인 추진력과 아우의 치밀한 기획력의 결합은 이때부터 시작된다.

최종현은 가장 먼저 회사 운영 전반에 대한 브리핑을 들었다. 그때 선경직물의 월 매출액이 3000만원인 데 비하여 부채총액 3200만원은 과중했다. 매출액 3000만원도 생산원가를 무시한 업계의 치열한 판매경쟁으로 그 이윤 폭은 10%를 밑돌았다. 공장의 직기는 300여대가 되었으나 가동 중인 것은 160대쯤이고 나머지 낡은 직기들은 새 직기로 대체 중이었다. 최종현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 경영평가를 해본 결과, 약 6500만원의 자산규모는 최악의 경우 부득이 부도수표를 내더라도 부도 총액이 자산규모의 절반을 넘지 않아 파산하지는 않을 것으로 예상했다. 이처럼 최악의 경우 대비책은 물론 회사를 살릴 비상수단 전략을 형제가 함께 모색했다.

최종현은 정부 방침에 따라 수출상품 생산체제로의 전환을 형에게 권한다. 1963년 1월 정부는 수출진흥책 일환으로 외화수입을 증대하는 한편, 소득의 누출현상을 가져오는 비생산적인 수입을 억제하고 수출입의 역조현상을 방지할 목적으로 수출실적에 국한해서 수입을 허가하는 이른바 수출실적 링크제 실시를 발표했다. 수출하는 만큼 수입하게 한다는 정책이었다. 최종현은 그해 3월 홍콩으로 가서 한 달 동안 현지에 머물며 끈질긴 상담 끝에 레이온 능직 300만마를 수주하는 데 성공했다. 300만마는 선경이 전년도에 수출한 10만마의 30배에 달하는 물량이었다.
古 최종현 회장. /조선일보 DB
古 최종현 회장. /조선일보 DB
수출단가도 마당 14.2센트로 일제 레이온 능직 단가 15센트에는 다소 못 미치는 가격이었으나, 선경의 전년도 수출단가인 11.3센트에 비하면 2.9센트가 높은 것으로서 수출계약 총액은 전년도 실적의 무려 37배가 넘는 42만6000달러에 달했다. 10만달러 인견사 수입공매물 매입과 구상무역에 의한 9만달러 상당의 나일론 원사 수입으로 일거에 8000여만원을 벌어들인 최종현은 그동안의 체불임금을 비롯한 누적부채 2000여만원을 해결하고, 이때 한국 재계 중심지였던 소공동에 자리한 북창빌딩 3층에 선경산업 서울사무소를 열었다. 최종건 회장이 1963년 8월 15일 금탑산업훈장을 받은 일과 선경이 그처럼 오랜 경영난에서 헤어나와 업계의 샛별로 떠오르기 시작한 것은 아우 최종현의 경영능력과 형 최종건의 뚝심에서 비롯하였다고 평가된다.

1966년부터 1970년까지는 선경의 원사생산시대 도약기로 대규모 섬유기업집단으로 떠오른 시기이다. 이 무렵 최종현은 국내 922개 직물공장 사장들이 감히 생각하지 못한 원사 제조업체의 꿈을 안고 원사공장 건설에 필요한 유능한 인재들을 남몰래 찾고 있었다. 이때 선경은 아세테이트공장 건설 착공, 선경합섬 설립, 폴리에스테르 원사공장 건설 착공 병행추진, 민간기업 최초 외환자금 융자 실현 등으로 마침내 원사 제조업체 선두주자로 나아간다.

선경직물은 부사장 최종현을 중심으로, 1966년 일본 데이진 측과 폴리에스테르 제조기술을 이전받기 위해 접촉을 시도했다. 처음에 데이진은 소규모 업체인 선경을 그리 신용하지 않았다. 이에 친분 있는 일본 기업가들과 최종현의 측근들도 모두 데이진은 포기하고, 차선책으로 도요보사(社)와 기술제휴를 해보라고 권했으나 최종현은 자신의 결심을 바꾸지 않았다.

“폴리에스테르 기술에 관한 한 세계적 업체인 데이진이 아니면 안 됩니다. 당장 급하다고 해서 아무 기술이나 살 수는 없어요. 기업의 생명은 내일의 전망에 달려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뜻밖에 데이진에서 기술이전 협의를 해보자고 연락이 왔다. 곧바로 일본으로 간 최종현은 데이진과의 기술이전 협의서에 서명하는, 믿어지지 않는 일을 해내고 말았다. 더욱이 그때 데이진은 친분이 있던 다른 한국 업체와 기술이전 협의를 하던 상황이었다. 데이진의 계약 당사자였던 이나가키 전무는 이렇게 말했다.

“기업의 장래를 생각하고 기술 수준을 선별하는 혜안의 경영자와 파트너십을 맺고 싶어서 어려운 결정을 내렸다.”<

이 일은 최종건 뚝심경영의 대표적 성공사례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가 결심한 경영계획과 정책은 성공적이었다. 거기에 최종현의 뛰어난 경영능력과 자금동원능력이 더해져 선경은 마침내 한국 원사제조업체 일인자 자리에 올랐다. 1969년 7월 1일 선경 폴리에스테르 원사공장이 선경화섬으로부터 분리, 선경합섬으로 출범했다. 이처럼 원사 제조업체인 선경합섬·선경화섬을 비롯, 선경직물과 울산직물 및 완제품 생산업체인 해외섬유와 선산섬유로 이루어진 선경그룹은 일찍이 한국 기업사(企業史)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수직적 기업 결합을 이룩한 국내 유일한 섬유기업집단이었다. 그 무렵 선경의 발전은 기적으로 일컬어지는 한국의 경제성장률과 속도를 훨씬 앞질렀다. 선경의 기적 같은 성장은 형 최종건 회장의 추진력과 아우 최종현 부사장의 뛰어난 지략이 한데 어우러져 무에서 유를 이루어낸 조화의 집대성이라고 볼 수 있다.

1970년 12월 30일 선경산업을 선경직물에 흡수·합병하고 최종현 부사장을 사장으로 임명했다. 최종현은 선경직물의 경영 정상화를 위해 뼈를 깎는 아픔을 각오하고 먼저 종업원의 감원조치를 단행할 것을 결심했다. 경영진단 결과 인건비 비중이 너무 커서 적자요인이 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력정비위원회를 구성하여 2300명을 1200명으로 감축했다. 이 결과 생산성 향상률을 30% 이상 제고하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그리고 공장의 작업 분위기와 공장 조직의 재편으로 공정관리에 체계화가 이룩되었으며, 감원에서 제외된 우수한 인력들이 생산성 향상에 분발해 적자가 흑자로 전환되는 경영합리화가 성공적으로 진전되었다.

1973년 11월 15일 최종건 회장이 48세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그러나 선경의 멈춤 없는 전진을 위하여 같은 달 24일 선경직물 최종현 사장이 선경그룹 회장으로 경영 대권을 인수한다. 새로 그룹 총수가 된 최종현 회장은 ‘석유에서 섬유까지’의 수직계열화라는 원대한 목표를 세우고 이를 위한 장기적 포석을 펼쳐나갔다.

1960년대를 지나 1970년대로 접어들면서 한국 기업들은 경영규모에 따르는 인력관리가 당면과제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기업들은 인적자원 개발에는 눈을 돌리지 않았다. 이와 달리 최종현은 인적자원 개발만이 우리의 자산이며, 선경이 경영경쟁시대에 이길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1975년 3월 7일 한국 최초로, 기업 경영능력과 인재개발을 위한 사원교육 요람인 SK연수원을 개원한다. 이는 선경이 국제적 대기업으로 발돋움하려는 구체적 시발점이었다.

1976년 11월 23일 선경㈜은 종합무역상사로 지정(상공부 고시 제10607호)받았다. 최종현은 선경의 종합무역상사 진출은 한국 경제성장 과정의 필연적 귀결이었다고 말했다. 선경은 완구 및 운동용구, 가정용 통신기기, 동·식물성 원료, 기계부품 생산업체를 계열화하는 한편, 해외지사망을 16개로 확장하는 등 총력전을 펼친 끝에 그해 종합무역상사 지정요건을 충족할 수 있는 1억1000만달러 수출실적을 올리고, 선경합섬에서도 8226만달러 수출실적을 올렸다.

종합무역상사로 출범한 선경은 1977년 전년 대비 89%가 증가한 2억1469만달러 수출실적을 올렸다. 이는 곧 선경이 국가 수출목표의 50분의 1을 차지하는 것으로서, 한국 경제 성장에서 선경의 기여율이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인지를 입증하는 것이라 하겠다. 특히 1977년 수출금융이 감축되고 신규대출이 억제되는 등 정부의 잦은 금융지원정책 변동으로 가중되는 자금압박 속에서 이루어낸 성과로, 이로써 최종현의 뛰어난 수출전략 방안을 감지할 수 있다. 선경의 수출대상국은 80개 국가에 달했으며, 특히 수출취약지역으로 다른 6개의 무역상사가 꺼리던 중동지역 수출에서 전년대비 180%의 높은 신장률을 기록하고, 중남미 지역에서도 전년대비 689%의 수출신장을 이룩하여 업계를 놀라게 했다. 그는 “불가능이라는 것은 없다, 치밀한 수출전략 아래에서 신용과 품질제일주의로 밀고 나가면 반드시 목표 이상의 수출실적이 달성된다”는 신념을 보여준 좋은 사례를 남겼다.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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