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종교와 나

어째서 자신의 업보가 가장 두려운가.

應觀 2015. 3. 9. 22:15

백성욱

 
▲ 1976년 부천 소사본당에서 수행하던 스승, 도반들과 함께. 왼쪽부터 이선우, 백성욱, 남창우, 김동규.

나는 조부모와 고모, 아버지까지 열댓 명의 대식구가 모여 살던 시골의 유복한 집안 출신이다. 특별한 종교가 있는 집안은 아니었다. 때문에 어려서는 불교와는 가까이 지내지 못했다. 다만 어머니의 위패를 모신 홍성의 절에 가끔 갔던 기억은 난다. 수학여행으로 자주 수덕사를 찾아가 만공스님을 친견하고, 일엽스님의 말씀을 듣기도 했다. 그땐 불교를 잘 모르던 시절이었지만 그래도 절이, 스님이 좋았다.

인생에 대한 괴로움에 빠져있던 나는 가족 그 누구에게도 그 괴로움을 토로할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삶의 고민을 짊어지고 가출을 했다. 서울에서 친척집과 친구 집을 전전하다가 조계사로 발길이 닿았다. 몇 달을 조계사에서 보냈다.

조계사에서 기도 정진을 했지만 내가 가진 문제들은 전혀 해결이 되지 않았다. 당시 무진장 스님과 친분이 있었는데, 스님이 동국대 대학원에 다니던 시절이었다. 스님은 같이 공부를 하자고 했는데 나는 출가를 결심했다.

1966년 즈음이다. 9월1일에 출가를 하려고 마음을 먹고 신변정리를 하고 있었다. 출가를 앞두고 친척집에서 머물렀다. 그날 꿈에 하얀 운동화를 신고 툇마루에 앉은 신사가 나를 보고 부드럽게 웃는 것이 아닌가. 이마에 커다란 점이 마치 백호처럼 보이는 신사였다. 처음 보는 사람이 꿈에 나와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그날 김재웅씨라고 친구를 만났다. 나중에 포항 금강경독송회를 이끌던 사람이다.

중앙극장 앞에서 고행하다시피 돈을 벌어 여동생 학비를 대던 부지런한 이인데, 출가하겠다고 인사를 하며 꿈 이야기를 해주니 바로 백 박사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닌가. 이미 몇 년을 공부하고 있었다는데 나한테는 생전 말을 해주지 않더니, 꿈 이야기에 바로 이야기를 해준 것이다.

   
▲ 백성욱 박사.
소사에서 도장을 열어 공부를 하고 있으니 한번 찾아가보라고 했다. 그 길로 소사로 찾아갔다. 동네 맨 위 한적한 곳에 ‘응작여시관(應作如是觀)’이라고 쓰인 문패가 달린 집이 보였다. 문을 두드리니 “누구얏!”하고 부엌서 나오셨는데 꿈에서 본 그 모습 그대로가 아닌가.

“뭐하러 왔어요?”하고 물어보시는데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 했더니 바빠서 안 된다고 너 같은 사람 만나줄 시간이 없다고 돌아가라고 하셨다.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조계사에서 지낼 때는 스님께 3배를 하고 인사를 올리면 스님들은 모두 반갑게 반겨주셨다. 선생님처럼 저렇게 매몰차게 대하는 분은 없었다. 돌아 나오는데 다시 들어오라고 하셨다.

삼배를 올리니 절을 받기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제도 발원을 해주신다. 선생님을 찾아가면서 질문 세 가지를 품고 갔다. 어떡하면 삼라만상 가운데서 중생을 제도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남북통일이 되어 불국토를 만들 수 있을까? 나는 어떻게 깨달을 수 있을 것인가?

그런데 막상 삼배를 하고 마주 앉으니 머리가 하얘지는 것이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질문을 만들어온 것은 기억이 났는데, “누구얏!” 하는 선생님의 목소리에 질문 내용은 다 잊어버린 거다.

마치 맞은 것처럼 온 몸이 노곤했다. 아마 호법신장이 내 자만을 질타하며 후려친 것이 아닐까? 선생님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가 갑자기 “출가자와 재가자는 어떻게 다릅니까?” 하는 질문을 던졌다. 갑자기 왜 튀어나온 질문인지도 몰랐다. 갑작스런 질문에 선생님은 “출가자는 생각이 부처를 향하고, 재가자는 생각이 세상을 향하는 것이 차이”라고 설명해주셨다.

이 얼마나 간결한 설명인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앉아 있다가 또 할 말이 없어 “가겠습니다” 하니 선생님이 앉으라하시곤 금강경 강의를 30분 해주셨다. 그리고 나서야 가라고 하셔 3배를 하고 나오다가 선생님께 “한 달에 한두 번 시간을 내주실 수 있겠습니까?”하고 여쭈었다. 선생님은 “금강경만 읽으면 언제든지 시간을 내주겠다”고 하셨다.

처음에는 그렇게 매몰차던 분이 말이다. 그때 든 느낌이 ‘아, 이게 선지식을 만나는 절차구나’하는 생각이었다. 덕산스님의 방, 조주스님의 할처럼.

   
▲ 백성욱 박사.
선생님과의 인연은 이렇게 신묘했다. 선생님은 독립운동가이자 불교수행자, 정치가, 교육행정가의 삶을 사셨다. 1917년 동국대학교의 전신인 불교중앙학림에 입학해 학생 신분으로 3.1 만세운동에 동참했던 선생님은 이후 상해 임시정부에서 독립운동 자금조달을 하다가 프랑스와 독일로 유학을 했다. 프랑스와 독일 유학을 떠나 철학박사를 받았는데, 우리나라 불교학 1호 박사이다. 광복 후 건국운동에 참여한 선생님은 대한민국 제4대 내무부장관, 동국대 제2대 총장을 역임했다.

소사로 한 달에 한번 찾아뵙던 것이, 일주일에 한번이 되고 결국 아예 들어가 살았다. 선생님은 안쪽 방에서, 우리는 바깥방에서 방석 하나 깔고 참선을 하며 살았다. 물론 수행만 한 것은 아니다.

선생님은 혼자 계셨다. 그 집에는 우사가 있어 소를 여섯 마리 키우고 있었다. 우사 안에 숙직실 같은 방이 있었는데 나는 거기서 머물렀다. 파리가 날아다니고 냄새 또한 말도 못했다. 나중에는 면역이 되었지만. 그런 열악한 환경에도 떠날 생각이 없었던 것을 보면 인연은 인연인가보다.

늘 참선만 할 수는 없었기에 선생님은 평소에는 미륵존여래불을 가르치셨다. 일상에서 항상 외며 걸을 때도, 일을 할 때도 미륵존여래불을 외우라 하셨다.

소사에서의 삶은 녹녹치 않았다. 농기구로 산을 개간하고, 아침에는 소젖을 짜는 것이 일과였다. 해보지 않은 농사로 손등이 다 팅팅 부었다. 소젖을 짜다가 꼬리에 맞거나 뒷발질 당하는 것도 예사였다. 화가 나서 소를 때리기라도 하면 선생님은 그걸 다 아셨는지 혼을 내셨다.

선생님과 함께 살면서 상식적으로 이해 못할, 신기한 일이 많았다. 선생님은 모르는 게 없으셨다. 비오는 날이라야 나도 쉴 수 있었다. 하루에 두 끼를 먹었다. 세시쯤 점심을 먹고 나면 저녁은 먹지 않고 물만 먹었다. 한 보름은 뱃가죽이 등에 달라붙어 고생이 많았다.

이런 고된 삶은 스님들도 버티지 못했다. 선생님의 명성을 듣고 찾아온 스님들도 일이 고되니 하루 이틀 넘기지를 못하고 떠나기 일쑤였다. 선생님은 우리가 복을 지은 것이 없어서 몸으로 지어야 하기 때문에 이렇게 일을 해야 한다고 하셨다. 복과 혜가 겸해져야 지혜가 나오는 법이다.

선생님은 모든 일어나는 생각을 부처님께 바치라고 하셨다. 이미 열반하신 부처님은 형체가 없으니 밝은 우주의 광명으로 몸을 보이신다고 했다.

선생님과 함께 지내면서 서른이 넘은 어느 날. 중신이 들어왔다. 한때 출가를 생각했던 나였기에 중신은 버거웠다. 선생님을 찾아갔다. 방에서 참선을 하고 계셨다. 절을 하고 “서울 구경을 가겠습니다”하고 나왔다. 나오니 어디 갈 데가 있나. 친척집과 친구 집을 전전하며 지냈다.

목동 노릇을 하고 살았으니 옷도 제대로 맞는 게 없었다. 허름한 꼴을 보고 친구가 옷을 줬다. 얻어 입고, 얻어먹으며 지냈다. 그러다 친구 하나가 퇴계로에서 결혼을 한다고 해서 갔다가 친구어머니를 만났다. 선생님께 가서 공부를 하는 분이셨다. 친구어머니는 백 선생님이 오라하셨다며 나를 꼭 붙잡는 것이 아닌가.
얼른 돌아갔다. 그렇게 중신에 얽힌 나의 방황은 끝이 났다. 돌아가니 선생님께서는 나를 앉혀놓고 중신이 들어온 여성과 과거 중국에서부터 인연관계를 쭉 설명해주셨다. 그러면서 “장모하고 집사람이 널 따라다니는데 도망 다니기만 하면 언제 해탈하느냐?”고 물으셨다. 실제 생활, 행위 속에서 해탈하는 것이지, 속세를 떠나 무언가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말씀에 그대로 결혼준비가 진행됐다.

5.16이 나고 자유당 때 장관을 지냈던 선생님은 집행유예 1년을 받았다. 그 후로 소사로 들어가 외출 한 번 하지 않으시던 분이 서울에서 열린 내 결혼식에는 참석하셨다. 그만큼 선생님은 나를 아껴주셨다. 6월6일 현충일에 결혼을 했는데 선생님과 같이 사진을 찍을 수 있어서 영광이라는 생각을 했다.

신접살림은 노량진에 차렸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이 살던 집인데 200여 평 규모의 집이었다. 나는 별채서 공부를 하며 지냈다. 선생님께서는 “내가 너희 집 가서 《금강경》 강의를 해야겠다”시며 100일 동안 《금강경》 강의를 해주셨다. 방이며 거실까지 실내에 한 60명 정도가 앉을 수 있었는데, 사람이 워낙 몰려와 마당에 스피커를 연결해 마당에서 강의를 듣는 사람도 많았다. 그때가 선생님이 일흔 하나쯤 되셨을 때다.

   
▲ 김동규 (사)금강경독송회 이사장.
특별한 인연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으면 개인의 집에서 이렇게 강의를 해주실 수 있었을까. 그리고 이것이 선생님의 마지막 강의가 됐다. 이후 선생님은 건강이 안 좋아지셔서 소사를 떠나 서울로 오셨다. 아현동과 동부이촌동에서 아파트를 얻어 생활하셨다. 제자들이 선생님을 찾아뵈면 참 반가이 반겨주셨다.

돌이켜보면 선생님은 과거 현재 미래가 없는 분이셨다. 숙명통이 터져 모든 걸 훤히 보고 계셨던 분이다. 부처님이 성도하신, 마음을 깨닫게 해준 것이 바로 《금강경》이라며 우리에게 열심히 강의해주셨던 목소리가 지금도 귓가에 생생하다.

선생님은 나에게 “오는 사람 잘 가르치고, 가는 사람 잡지마라, 인연에 따라 가르치면 된다”고 말씀해주셨다. 그 말씀대로 찾아오는 사람에게만 《금강경》 강의를 한다. 요즘도 서울과 대구를 오가며 강의를 하는데 금강경독송회 회원들은 수는 적어도 공부는 영글어 있는 이가 많다. 그렇게 후학들은 선생님을 닮아가고 있다.

-김동규 이사장 (사)금강경독송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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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테이블
시대 현대/현대
유형 인물
출생 1897년
사망 1981년
직업 교육가, 정치가
성별
분야 종교·철학/불교

1897∼1981. 승려. 교육가·정치가로 활약하였다.

[개설]

서울 연지동에서 윤기(潤基)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901년곤동학교(壼洞學校)에 입학하였고, 1904년 서숙(書塾)에 들어가 한문을 수학하였다.

[생애 및 활동사항]

1910년 봉국사(奉國寺)에서 최하옹(崔荷翁)을 은사로 하여 득도하였다. 1919년경성불교중앙학림(京城佛敎中央學林)을 졸업하였고, 3·1운동 때에는 상해임시정부에 참여하여 독립운동을 하였다.

1920년 프랑스 파리의 보배고등학교에 입학하여 독일어 등을 공부한 뒤, 1922년 독일의 벌츠불룩대학 철학과에 입학하여 고희랍어와 독일신화사(獨逸神話史) 및 문명사와 천주교의식 등을 연구하였다.

1925년 벌츠불룩대학에서 철학박사학위를 취득한 뒤 귀국, 불교지 등에 많은 논문을 발표하다가 1928년 중앙불교전문학교 교수로 취임하였다. 또한 이 때에 금강산안양암(安養庵)에서 단신수도에 들어가 ≪대방광불화엄경 大方廣佛華嚴經≫을 제창하면서 많은 논문을 남겼다.

1930년 많은 사람들과 함께 금강산지장암(地藏庵)으로 옮겨 회중수도(會衆修道)를 8년간 계속하였으나 1938년 일본경찰의 압력으로 그만두었다. 1939년부터 서울 돈암동 자택에서 좌선수도하다가 1945년 광복과 동시에 애국단체인 중앙공작대(中央工作隊)를 지도하여 민중계몽운동을 하였으며, 또 군정을 종식하고 이승만에게 정권을 양도하라는 연판장을 만들어 재동경점령군사령관 및 재한미군사령관에게 보내었다.

1946년부터는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건국운동에 참여하였고, 1950년 건국운동에 참여한 공로로 내무부장관에 임명되었으나 뜻과 같지 않음을 개탄하여 5개월 만에 사임하였다. 1951년 한국광업진흥주식회사 사장으로 취임하였고, 1952년에는 부통령에 입후보하기도 하였다.

1953년 8월 동국대학교 총장에 취임하였고, 1954년 5월 동국학원 이사장에 취임하였으며, 1955년 대광유지(大光油脂) 사장에 취임한 뒤 동국대학교 대학원에서 ≪금강삼매경론 金剛三昧經論≫·≪보장론 寶藏論≫·≪화엄경 華嚴經≫ 등을 차례로 강의하였다.

그 뒤에도 광업진흥주식회사 사장, 경기학원 이사장, 고려대장경보존동지회 회장 등을 역임하면서 불교의 전포 및 학교의 발전에 기여하다가 태어난 날인 8월 19일에 입적하였다.

다비하여 경기도 양주군대승사(大乘寺)에 사리탑과 비를 건립하였다. 조명기(趙明基)·김갑수(金甲洙)·박동기(朴東璂) 등 전국으로 흩어진 700여 명의 제자들이 금강경독송회(金剛經讀誦會)를 조직하여 그의 유지를 이었다.

   

 

깊은 산속에는 두려운 것도 적지 않다.

 

당시 금강산에 호랑이도 종종 출현하였는데,

사람이 살지 않는 빈 암자를 보면

호랑이가 자주 다니는 길목에 있는 암자임을 알게 되었다.

 

산속에서 공부하는 수행자들은

수도 중 발견하는 귀신의 존재를 두려워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가장 두려운 것은 호랑이도 아니요, 귀신도 아니요,

바로 자신의 업보다.

 

어째서 자신의 업보가 가장 두려운가.

 

처음 안양암에 머물 때는 잘 모르겠더니

시간이 흐를수록 차츰 그곳이 두려워지기 시작하였다.

물론 호랑이나 귀신이 두려운 것이 아니었다.

 

나는 공부하던 중 목 없는 귀신이 나타난 것을 본 적이 있었다.

그럴 때에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너 목이 없으니 골치 아플 일이 없겠구나" 하였다.

그랬더니 목 없는 귀신은 곧 사라지는 것이었다.

공부하던 도중 배 없는 귀신이 나타난 적도 있었다. 

그때도 두려워하지 않고 "너는 배가 없으니 배 아플 일도 없겠구나" 하였다.

그 소리와 함께 귀신들은 곧 사라지곤 한 것이다.

 

그러나 어느 때부터인지 문소리만 바스락 소리가 나도 기절할 정도로 두렵게 되었다.

담대한 자신을 생각하면 도대체 어찌된 영문인지 알 수 없었다.

 

두려운 마음에 대고 대방광불화엄경 공부를 계속하자

차차 두려운 생각이 소멸하며... 두렵게 되는 이유가 알아졌다.

 

생에 어느 때, 나는 생불 같은 훌륭한 스승을 만나 수도를 하고 있었다.

그 스승은 나에게 말하였다. "도통을 하려면 부처도 죽이고 스승도 죽여야 하느니라."

 

이것은 달마 대사의 살불살조(殺佛殺祖)의 가르침을 말씀한 것이었다.

그때 나는 그 말씀을 잘못 알아들었다.

'이 스승을 죽이면 바로 도통이 되는구나' 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단순했던 나는 단매로 스승을 때려죽이고는 바로 그 자리에 묻었다.

그 묻은 자리가 지금 수도하는 안양암 자리였던 것이다.

 

스승을 때려죽인 후 잘못인 것을 깨닫고 바로 참회하였으나 여러 생 고통을 받았고,

결국은 그 스승을 만난 뒤에야 죄의 사함을 받았는데,

죽였다는 생각을 완전히 해탈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 생각이 되풀이되어 나타날 때면

아무 이유없이 두려워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업보가 가장 두려운 것이다.

그리고 가장 좋은 것 또한 업보이다.

 

죄와 복은 주기적으로 순환하는 것이다.

 

 

 

 

백성욱 박사 말씀 _ 김원수 글

                                            「 붓다가 되신 예수님 」 中에서

우리 시대의 道人] 세상 모든 것은 허상 그것을 알게 되면 괴로움도 사라진다   2013.04.01 이범진 차장대우 

‘무상보시’ 김원수 박사


"우리의 마음속에는 욕망, 편견, 고집 같은 온갖 감정이 가득 차 있습니다. 사람들은 화가 나고, 답답하고, 막막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좌절하고, 실망하고, 괴로워합니다. 막막하고 괴로운 이 마음은 누가 만들어낸 것일까요? 정말 존재하는 걸까요? 혹시 막막하지 않은데, 막막하다고 스스로 착각하는 건 아닐까요?”

지난 3월 27일 경기도 고양시 원당의 ‘바른법연구원’에서 만난 김원수(70) 박사는 이렇게 물었다. 홍익대 교수(금속공학)로 2008년 정년퇴직한 김 박사는 재직 중이던 2003년 전 재산을 사회복지법인 바른법연구원에 기탁했고, 서울 마포구 망원동 자택에 무료 급식소를 차렸다. 이후 뜻을 같이하는 봉사원들과 함께 원당의 지하 100m에서 길어올린 생수와 천연조미료만으로 국수를 끓여, 가난한 이웃에게 무료로 제공해 왔다. 그게 올해로 10년째다.

김 박사는 “하루에 300~500분가량 오신다”며 “급식을 시작할 때는 막막했다”고 했다. “내가 이걸 할 수 있을까, 괜히 마음만 앞서서 서두르는 건 아닐까. 번민도 많았습니다. 그럴 때마다 부처님에게 제 마음을 바쳤습니다. 저 자신을 차분히 들여다봤다는 말입니다. 계속 그렇게 하다 보니 스스로 답을 얻게 되었습니다. 내가 이 일을 할 수 있다, 혹은 할 수 없다는 대답을 명백하게 얻게 됩니다.”

독실한 불교 신자인 김 박사는 “부처의 가르침대로 살고 싶다는 마음을 늘 갖고 있었다”고 했다. “대학(서울대 금속공학과 61학번)을 졸업하고 군복무(ROTC 3기)를 마친 뒤, 부천 소사로 갔습니다. 백성욱 박사님의 가르침을 얻기 위해서였죠. 그분은 제 스승으로, 당시 동국대 총장을 마치고 부천 소사에서 목장을 하며 수행에 전념하고 계셨습니다. 그분 밑에서 제대로 한번 불교를 공부해보고 싶었습니다.”

백성욱(白性郁·1897~1981) 박사는 1925년 우리나라 최초로 독일에서 철학박사(뷔르츠부르크대학) 학위를 취득한 사람이다. 1919년 경성불교중앙학림(京城佛敎中央學林)을 졸업하고, 3·1운동 때 상하이임시정부에 참여해 독립운동을 한 그는, 귀국한 후 금강산 안양암(安養庵)에서 출가, 10년간 단신수도 끝에 득도했다고 전해진다. 1945년 세상에 나와 애국단체인 중앙공작대(中央工作隊)를 이끌며 민중계몽운동과 건국운동을 전개, 1950년 내무부 장관에 임명됐지만 “뜻과 맞지 않는다”며 5개월 만에 사임했다. 이후 1951년 한국광업진흥주식회사 사장, 1953년 8월 동국대학교 총장, 1954년 5월 동국학원 이사장을 역임하며 불교 포교와 수행에 힘썼다.

김 박사는 “당시 백성욱 박사 밑에서 공부했던 사람 중 한 명이 출판사 김영사를 세운 김정섭 전 사장”이라고 했다. 김 전 사장은 1989년 당시 32세였던 직원 박은주를 사장으로 임명한 뒤, 훌쩍 수행처로 떠나갔다.

“나라는 존재는 본래부터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에, 내 것이란 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내 것이라는 생각만 있을 뿐이지요. 고통, 슬픔, 분노, 좌절, 막막함…. 이 모든 것은 허망한 것입니다. 욕망과 아집에 눈이 가려져 그 허망함을 보지 못할 뿐이지요. 만약 이 모든 것이 허상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면, 자기를 에워싼 고통과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됩니다. 모든 것이 착각이란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지요. 그것이 금강경(金剛經)의 가르침(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입니다.”

김 박사는 “이 모든 것이 허상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나와 너, 옳은 것과 그른 것, 좋은 것과 싫은 것을 구분하는 분별심(分別心)이 사라지게 된다”고 말했다. 그는 “깨달음의 세계란 이 같은 세계라고 들었다”면서 “이 같은 분별심이 사라질 때, 비로소 참다운 지혜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 부처의 가르침”이라고 말했다.

“누구를 미워하거나 싫어하는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사람이 못된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못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내 마음 때문에 내가 그를 미워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다른 사람들도 다 나처럼 그를 싫어하는 것이 아니잖습니까. 문제는 내 눈에 씌워 있는 색안경, 그를 미워하는 마음을 갖고 있는 나 자신입니다. 그러니 내 마음을 바꾸면 그를 미워할 이유가 사라지게 되죠. 그러면 마음이 평화로워집니다.”

그는 “불가(佛家)에서는 눈을 가리는 3가지로 탐욕, 성냄, 어리석음을 뜻하는 탐진치(貪瞋癡)를 꼽는다”고 했다. 김 박사는 “탐진치 자체가 본래부터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 깨달음이라고 한다”며 “자신의 눈을 가린 탐진치를 버리는 가장 좋은 방법이 금강경을 독송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올해 칠순인 김 박사는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108배를 한 뒤, 금강경을 7번 정독한다. 지난 50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금강경을 독송해온 그는 ‘마음을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크리스찬과 함께 읽는 금강경’ ‘붓다가 되신 예수님’ ‘성자와 범부가 함께 읽는 금강경’ 등의 책을 내며 수행에 힘쓰고 있다. 그와 함께 공부하길 원하는 사람은 누구든 원당 ‘바른법연구원’(031-963-2872)에서 강의를 듣고 수행할 수 있다. 비용은 무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