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9)신천지-1
“도장을 찍으시는 것이 낫습니다.”
변호사 최길수가 머리를 흔들면서 말했다. 이맛살이 잔뜩 찌푸려졌고 탁자 위에 놓인 녹음기를 마치 변이나 되는 것처럼 노려보았다. 그는 방금 1시간 반 분량의 녹음 테이프를 서경윤하고 같이 들은 것이다. 헛기침을 크게 하고 난 최길수는 말을 이었다.
“길게 끌수록 손해 봅니다. 내 경험상, 그러니까 내가 이혼 소송을 맡은 지 올해로 18년이 되었지만 이건 가장 심한 케이스요. 이거 잘못하면 구속됩니다.”
최길수의 시선이 옆에 앉은 이수동에게로 옮아갔다.
“여기 이 사장이 때맞춰서 나한테 이 사건을 가져오시지 않았다면 아주머니는 어물거리다 당하게 되셨을 겁니다.”
그러고는 최길수가 다시 머리를 저었다.
“여기, 김병문씨는 살인교사 혐의가 적용될 수가 있습니다. 이거 말씀드리기 뭣하지만 간통에다 살인교사 공모 혐의가 돼요. 그럼 아주머니는 적어도 5년은 사셔야 합니다. 김병문씨는 10년쯤 될까? 이거 아주 중죄지요.”
조철봉의 변호사 박규영이 문제의 녹음테이프를 가지고 온 것은 오늘 오전 10시경이었다. 박규영은 서경윤에게 녹음테이프와 함께 합의이혼 서류를 가져왔는데 내일 10시까지 결정을 하지 않는다면 바로 경찰에 고발한다고 했다. 서경윤으로서는 마른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진 것이나 같았다. 그래서 박규영이 돌아간 후에 녹음테이프를 틀어보고는 혼비백산했다. 정신이 나가서 오줌까지 찔끔 흘렸는데 이수동을 부른 것은 그로부터 한 시간쯤 지난 후였다. 당사자인 김병문한테는 연락도 하지 않았다. 도움이 될 인간도 아닐 뿐만 아니라 갑자기 놈과 엮인 현실에 화가 치밀어 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떠오른 인간이 조철봉의 약점을 캐라고 용역을 준 이수동이었던 것이다. 전세가 갑자기 역전이 되어서 이쪽이 먼저 약점이 잡히기는 했지만 상의 대상은 되었기 때문이다. 그 이수동이 테이프를 듣더니 이건 법적으로 검토를 해야 한다면서 힘센 변호사한테 가자면서 여기로 데려왔다. 그때 최길수가 말을 이었다.
“도장 찍으세요. 이 사건은 대통령이 나서도 안됩니다. 끌었다가는 큰일납니다.”
변호사한테서 이런 소리를 듣고 버틸 인간은 세상에 없다. 있다면 정신이 어떻게 된 인간이다. 마른 입안에 겨우 침을 모아서 삼킨 경윤이 입을 열었다.
“그럼 아이도 내놓으란 말인가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최길수가 거침없이 말했다.
“제주도에서 아이를 옆방에 두고 그런 일을 벌인 증거가 여기 있지 않습니까? 이건 사회적으로도 용납이 안되는 일이지요. 법관도 인간입니다. 이 녹음테이프가 불법으로 제작이 되었다고 해도 듣고 나면 분노할 테니까요. 그리고.”
다시 머리를 저은 최길수가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웃었다.
“만일 매스컴쪽에 이 테이프가 넘어가면 큰일납니다. 처벌을 받지 않더라도 한국땅을 떠나야 될 겁니다.”
경윤은 이를 악물었다. 처음 놀람이 가셔지면서 이곳에 왔을 때는 조철봉에 대한 분노로 살이 떨렸다. 그놈은 뒷조사를 해서 이런 테이프까지 만들어 놓고는 시치미를 뚝 떼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든 복수하고, 대항하고 싶었다. 영일이를 데려간다니, 말도 안되는 소리였다. 그런데 변호사의 말을 들으면서 슬슬 겁이 나기 시작했다. 이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이제야 실감이 났다. 이윽고 경윤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알겠어요. 그럼 변호사님이 알아서 처리해 주세요.”
매수, 횡령, 사기, 공갈, 협박 때로는 폭력까지 조철봉이 사용하지 않은 방법이 없다.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아온 것이다. 결과만 좋으면 그 과정은 무시되었으며 승자는 곧 선이었고 패자는 무대에서 사라진 것이 현실이다. 결국 역사도 승자의 기록이다. 승자는 전리품처럼 정의를 행사했고 불의는 패자의 몫이 되는것을 조철봉은 보아왔다. 인간 조철봉이 정의나 역사 따위의 의식을 품고 행동한적은 없다. 경쟁사회에서 살아 남으려고 발버둥을 치면서 익힌 권모술수에 탄력이 붙었을 뿐이다. 그래서 이번 서경윤과의 이혼 작전도 치밀하게 조작했다. 다음날 오후 3시가 되었을때 작전은 종료되었으며 이혼 수속도 완벽하게 끝났다. 조철봉이 한 일은 아파트 정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경윤이 데리고 나오는 영일을 안아온것 뿐이었다. 그러고는 영일과 함께 곧장 어머니와 이모, 친척 아주머니가 기다리고 있는 일산 저택으로 돌아왔다.
나머지는 최갑중이 변호사하고 다 알아서 처리했다. 경윤이 고용한 이수동과 변호사 최길수까지 갑중이 다 손을 써놓은 상태였던 것이다. 만일 경윤이 부르지 않았다면 이수동이 직접 찾아갈 계획이었으므로 함정에서 빠져나갈 길은 없었다. 이로써 조철봉은 경윤과 두번째 이혼을 했다. 이 이혼으로 경윤은 10억 상당의 아파트와 5억의 위자료를 받았다. 영일이가 성인이 되었을때 만날 수 있도록 배려도 해 주었다. 그러나 김병문은 조금 더 결과가 좋지 않았다. 병문은 다리를 걸치고 있던 두 여자하고 처참한 결말을 맞았는데 사진과 녹음테이프등 모든 자료가 두 여자한테 배달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두 여자에 대한 자료는 경윤에게도 배달되었으며 그 결과는 사진만으로도 충분할 것이었다. 경윤이 조금 정신을 차리고 병문의 행각에 대한 녹음과 기록을 듣게되면 그 배신감은 조철봉에 대한 것보다 더 클 것이 분명했다. 저택의 응접실에 일당이 둘러 앉았을때는 오후 6시경이었다. 상석에 앉은 조철봉의 양쪽으로 최갑중과 박경택, 그리고 변호사 박규영이 앉았는데 모두 큰일을 치른터라 홀가분한 표정이었다.
“앞으로는.”
불쑥 입을 열었다. 갑중이 조금 뜸을 들이고는 말을 이었다.
“사장님께서 집에 일찍 들어오셔야겠습니다. 그리고.”
작심을 한 듯 갑중이 어깨를 펴고는 조철봉을 똑바로 보았다.
“외박도 삼가시고 출장도 될 수 있는 한 줄이셔야 됩니다.”
조철봉은 눈만 껌벅였고 갑중의 목소리가 응접실을 울렸다.
“그리고 당분간 재혼은 안하시는 것이 낫습니다. 지금 결혼을 하시면.”
“알아.”
갑중의 말을 자른 조철봉이 입맛을 다셨다. 어색한 표정이다.
“걱정 안해도 된다. 그럴 생각 없으니까. 그리고 네 말대로 외박도 안할거다. 출장도 줄일 것이고.”
“그러셔야죠.”
경택과 규영은 잠자코 눈동자만 굴렸다. 그들한테는 거북한 화제인 것이다. 그때 응접실로 영일이 들어오더니 조철봉의 옆으로 다가왔다.
“아빠, 게임 해도 돼?”
“응, 된다.”
반갑게 대답했다가 조철봉이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섰다. 영일은 벌써 적응하고 있다.
“어디, 무슨 게임인가 보자.”
조철봉이 영일의 손을 쥐고는 생각난듯 사내들을 둘러보았다. 웃음띤 얼굴이었다.
“나, 잠깐 게임하고 올테니까 기다려.”
사흘후 아침, 조철봉과 어머니 박여사는 영일이를 저택 근처의 초등학교에 전학시켰다. 영일이는 조금 주춤거렸고 불안한 듯 자꾸 아빠와 할머니를 보았지만 엄마를 찾지는 않았다. 며칠간 할머니하고 지내면서 상황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담임 선생한테 영일을 부탁한다는 인사를 하면서 조철봉은 세번이나 이마의 땀을 닦았다. 집에서 나올 때 담임한테 주려고 10만원권 수표 10장을 넣은 봉투를 갖고 있었는데 학교에 도착하기 직전에 최갑중한테서 전화가 왔다.
“사장님, 저기.”
갑중이 망설이더니 작심한 듯 말했다.
“지금 영일이하고 학교 가시죠?”
“응, 다 왔다. 어머니도 같이 계셔.”
“그런데 말씀입니다.”
“뭔데? 빨리 말해.”
“거시기, 혹시 선생 주려고 봉투 준비하셨습니까?”
“아, 당근이지. 근데 백이면 될까?”
그러자 수화구에서 입맛 다시는 소리가 나더니 갑중의 목소리가 싸늘해졌다.
“내, 그럴 줄 알고 전화를 드린 겁니다. 그 봉투 주시면 안됩니다. 지금은 우리 때하고 달라서 문제가 있습니다.”
“왜? 선생은 모래로 밥 지어 먹나?”
“어쨌든 주지 마세요. 일단은.”
“일단이라.”
“예, 먼저 상황을 보시고, 잘못하면 역효과가 나니까요.”
“그러지, 그럼.”
조철봉의 눈치가 보통 사람하고 같은가? 선선히 대답한 조철봉은 결국 담임한테 봉투를 주지 않았지만 영일에 대해서 꽤 오래 이야기를 하는 동안 진땀을 흘린 것이다. 옆에 앉은 어머니가 거들어주지 않았다면 더 쏟을 뻔했다. 선생이 묻는 영일의 성격이나 취미, 학습 능력까지 아는 것이 전무한 상태에서 거의 대답을 못했기 때문이다. 영일의 담임은 30대 초반쯤으로 미모에 날씬한 몸매의 여자였다. 그러나 조철봉에게 이은지 선생은 전혀 여자로 보이지 않았다. 대통령 앞에서도 이렇게 얼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 선생, 참하게 생겼더라.”
돌아오는 차 안에서 어머니가 생각난 것처럼 말하더니 길게 숨을 뱉었다.
“너 같은 놈이 그런 여자를 마누라로 앉힐수가 있겠냐? 어림없는 짓이지.”
“나아, 참.”
이맛살을 찌푸린 조철봉이 어머니를 흘겨보았다. 어머니는 요 몇년 사이에 부잣집 마나님이 다 되었다. 체중이 5㎏이나 늘었다면서 70이 다 된 나이에 헬스에다 사교춤까지 배운다. 철마다 단체로 외국여행을 다니고 옷도 백화점에서 브랜드 제품만 산다. 그러면서 그렇게 만들어준 자식을 우습게 보다니….
“그 선생보다 백배는 더 나은 여자가 있어요. 어머니.”
그렇게 엉겁결에 말해버린 조철봉의 눈앞에 첫번째로 고영민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러나 딸자식 딸린 이혼녀를 어머니가 어떻게 대할지는 뻔하다.
“누구냐?”
어머니가 그렇게 물었을 때는 이미 조철봉의 마음이 변해 있었다.
“그런 여자를 찾을 수 있단 말이지요.”
“내가 매일 영일이 학교 데려다 주고 데려오면서 그 선생 알아봐야겠다.”
작심한 듯 눈까지 치켜뜬 어머니가 단호하게 말했다.
“영일이 담임이겠다. 아주 안성맞춤이여.”
“아이구, 제발 어머니.”
조철봉이 사정하듯 말을 이었다.
“좀 내버려 두세요. 당분간은.”
“이놈아, 영일이를 위한 일이여.”
어머니는 물러날 기색이 아니었다.
어머니와 함께 살게 된 후부터 조철봉은 퇴근하면 곧장 집으로 왔다. 해외 출장도 가지 않았다. 약속은 낮시간에 했으며 술도 낮에 마셨다. 섹스 충동이 일어났을 때도 마찬가지다. 낮에 다 했다. 고영민의 집에도 낮에 찾아갔으며 성남에서 분식집을 차린 최성희도 낮에 만났다. 낮에 할 건 다 한 것이다. 그리고 저녁에는 집에 돌아와 영일이와 함께 지냈다. 모두 영일이 때문에 이런 것이다. 그렇게 한달반이 지나자 초등학교 2학년인 영일이가 슬슬 아버지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할머니한테는 진즉 열었지만 이쪽의 시간이 더 걸린 이유는 서경윤 때문이었다. 경윤은 영일이를 붙잡고 아비되는 작자의 험담을 밤낮없이 늘어 놓았던 것이다. 오늘도 조철봉은 숙제를 끝낸 영일이와 마주 앉아 바둑을 두었다. 영일은 처음 시작할 때 질색을 했지만 본래 제 아비를 닮아 승부 근성이 있었다. 며칠 수를 배우더니 저 혼자 바둑책을 읽고 공부를 해서 지금은 조철봉한테 다섯점을 깔고 막상막하의 실력이 되었다.
“아차.”
호구에 잘못 둔 조철봉이 놀라 다시 알을 쥐었다.
“물리자.”
“안돼.”
영일이 소리치듯 말하더니 조철봉의 알쥔 손가락을 손으로 눌렀다. 눈을 치켜뜨고 있었다.
“일수불퇴야.”
“그런 말이 어딨어?”
“한번 둔 건 물릴 수 없단 말이야.”
“야, 이건 실수였어.”
“실수로 길 잘못 들었다고 역주행해서 나올 수 있어?”
“허, 누가 그런 말 해주데?”
“아빠가 지난 번에 해놓고선.”
“야, 봐주라.”
“안돼.”
그때 소파에 앉아 있던 어머니가 굽어보다가 혀를 찼다.
“어째 넌 잘하는 일이 하나도 없냐? 바둑도 어린 아들한테 지는구나.”
“아니, 내가 왜?”
조철봉이 어머니한테 대들었다.
“내가 잘하는 일이 없다니? 무슨 말씀을 그렇게 섭하게 하슈?”
“지금 바둑도 영일이한테 지고 있잖어?”
“내가 왜 져?”
“니가 이기면 내가 손에다 장을 지지마.”
그러고는 어머니가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주방에서 간식을 만드는 이모와 친척 아주머니한테로 갔다. 그때 힐끗 할머니의 뒷모습에 시선을 주었던 영일이 조철봉에게 슬쩍 말했다.
“아빠, 물러줄까?”
“응, 부탁한다.”
정색한 조철봉이 목소리를 낮췄다.
“내 체면 좀 봐주라, 인마.”
“어서 알 가져가.”
“고맙다.”
알을 집어내면서 갑자기 콧등이 시큰해진 조철봉은 숨을 들이켰다. 쇼다. 수를 잘못 둔 것이 아니라 일부러 둔 것이다. 그리고 어머니도 영일이 기 살리면서 제 아비를 측은하게 느끼도록 쇼를 했다. 어머니가 누군가? 조철봉을 세상 밖으로 끄집어낸 분이 아니신가? 그때 영일이가 차분한 얼굴로 물었다.
“아빠, 외국 출장 안나가?”
“응? 왜?”
“요즘 만날 집에만 있어서.”
그러더니 조철봉을 똑바로 보았다.
“나, 다 컸으니까 출장 다녀도 돼. 집에 할머니가 셋이나 있잖아.”
잠깐 말을 그친 영일이가 씩 웃었다.
“내 걱정은 마, 아빠.”
관음증(觀淫症)은 타인의 성행위 장면이나 몸을 엿보면서 성적 흥분을 느끼는 인간의 성적 행동이며 대부분의 인간이 이 증세가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엿보기가 성적 만족을 얻는 유일하거나 주요한 요소라면 비정상적인 행위로 간주되는 것이다. 조철봉에게도 물론 관음증이 있다. 그러나 호기심 차원일 뿐이지 일부러 엿본 적은 없다. 하지만 오늘, 고등학교 동창인 유종철이 초대한 이 모임에 참가했을 때는 긴장으로 온몸이 단단해져 있었다. 유종철은 고등학교 동창 중에서 가장 잡놈으로 불렸지만 본인은 상관하지 않았다. 조상이 유성에서 엄청난 토지를 소유한 지주 집안으로 유종철은 온천호텔과 식당 5개를 운영하면서 한달에 보름은 서울에서 지낸다.
“자, 오늘 메뉴가 이렇다.”
방에 모인 인원은 유종철과 조철봉을 포함하여 4명이었는데 나머지 둘도 동창이다. 유종철이 소파에 둘러앉은 동창들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생쇼가 두번 있고 그 다음은 자유로 뛸테니까 마시면서 즐기라구.”
그러면서 빙그레 웃었다.
“쇼 보다가 영 급하면 옆방으로 가서 전화로 불러내.”
둘러앉은 셋은 웃음만 띤 채 대답하지 않았다. 이 곳은 강남의 국일모텔 7층에 만들어진 유종철의 휴게실이다. 국일모텔은 유종철의 소유로 지하 2층에서 지상 2층까지 4개층이 안마와 사우나실이었고 3층에서 7층까지가 모텔이었다.
“이번에는 괜찮은 놈이 해야 할 텐데.”
조철봉의 옆에 앉은 이진수가 입맛을 다시면서 말했다.
“지난번 놈은 너무 짧았어. 두놈 다.”
이진수는 부동산업자로 중국에까지 지점을 차렸다고 했다. 조철봉과 시선을 마주친 이진수가 가는 눈을 더 가늘게 뜨면서 웃었다.
“계집애는 괜찮았지만 말야.”
그때 유종철이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자, 시작한다.”
그러면서 리모컨을 누르자 방 안의 불이 꺼지면서 앞쪽 벽을 가리고 있던 커튼이 좌우로 벌어졌다. 조철봉은 숨을 죽였다. 유종철의 화요모임은 관음 회원들의 모임인 것이다. 오늘 말로만 듣던 이 놈들의 모임에 처음 초대를 받았으니 긴장하는 것이 당연했다.
“오오.”
옆에 앉은 이진수가 방정맞게 소리를 쳐 흥이 조금 깨졌지만 조철봉은 앞에 펼쳐진 장면에 놀라 저절로 입이 딱 벌어졌다. 벽에 초대형 TV화면이 붙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화면에는 전라의 두 남녀가 마악 방바닥에 깔린 요 위에 앉는 중이었다.
“어떻게 해드려요?”
하고 여자의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렸으므로 조철봉은 찔끔했다. 그러자 이진수가 설명했다.
“아래층 안마받는 방이야. 저 여자애는 이 집에서 젤 잘나가는 애고, 이름이 미화던가? 물론 가명이겠지만.”
그때 남자의 목소리가 울렸다.
“위에서 해줘.”
“입으로 해드려요?”
“어, 내가 할게.”
남자는 조금 어색한듯 시선을 마주치지 않았는데 40대쯤으로 머리가 벗겨지고 비만형 체격이었다.
“저 자식 연장 좀 봐.”
하고 지금까지 가만있던 박윤태가 말했으므로 조철봉의 시선이 옮아갔다. 사내의 연장은 10센티미터쯤 되었다. 잔뜩 성이 났어도 그렇다. 박윤태가 큭큭 웃었다. 이 놈들은 관음 중독이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조철봉은 화면에 집중했다.
“가만.”
사내가 입으로 제 물건을 핥는 여자의 어깨를 누르며 말했다. 눈을 치켜뜨고 누워 있었는데 시선이 똑바로 이쪽을 보고 있어서 조철봉은 조금 거북했다. 카메라가 천장쪽에 장착되어 있는 모양이었다.
“왜요?”
하면서 얼굴을 든 여자의 얼굴은 앳되었다. 살결도 좋고 가늘가늘한 체격이어서 인기가 좋을만 했다.
“쟨 스물다섯이야.”
이진수가 화면에 시선을 둔채로 말했다.
“경력이 3년이라고. 도사가 다 되었지.”
그때 사내가 여자의 어깨를 당겨 요위로 눕혔다. 제가 위에서 하겠다는 표시였다.
“이거 싱겁게 되겠구만.”
입맛을 다신 박윤태가 말하더니 탁자위에 놓인 양주병을 들어 잔에 술을 채웠다.
“야, 볼륨 좀 높여라.”
박윤태가 주문하자 유종철이 리모컨을 눌러 소리를 높였다.
“아저씨, 살살.”
다리를 벌리고 누운 여자가 두려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프니까 살살 해주세요.”
“어쭈구리.”
이진수가 코웃음을 쳤다.
“지난번에는 저놈 물건보다 세배는 더 큰 놈이 들어갔어.”
그때 남자가 그냥 연장을 넣었으므로 여자가 비명을 질렀다.
“아야, 아퍼.”
여자가 남자의 살찐 등을 손바닥으로 두드렸다.
“아저씨, 아프단 말야.”
그러고는 여자가 이쪽을 보았는데 조철봉은 아무래도 카메라 렌즈를 보는 것 같았다.
“아유, 아퍼.”
여자가 두 다리로 사내의 다리를 감싸안으면서 신음했다.
“너무 커.”
“으하하.”
웃음소리는 박윤태가 냈다. 놈은 몇년전까지만 해도 정치를 한다고 했는데 지금은 뭘로 먹고 사는지 모른다. 박윤태가 웃으면서 말했다.
“하긴 물건 크다고 해서 싫어하는 놈 있겠냐? 하지만 저놈은 그런 소리 오늘 처음 들었을거다.”
박윤태가 커다란 콧구멍을 벌름거리면서 말을 이었다.
“크다고 하는 것이 저애 주특기거든? 지난번에도 그러더라고.”
그때 사내는 절정에 오르고 있었다. 몸놀림이 다급해지는 것을 보면 그렇다. 조철봉은 유심히 사내를 관찰했다. 둘의 행위를 보면서 흥분은 되었지만 하고 싶은 욕망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아으으.”
하고 사내가 여자를 짓누르면서 폭발했을 때였다. 조철봉은 이쪽을 보던 여자의 입가에 희미한 웃음기가 떠올랐다가 지워지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곧 여자는 입을 딱 벌리면서 화답했다.
“아유우, 나 죽어.”
“으으으.”
사내가 몸서리를 치면서 더 밀착시켰고 여자는 맞장구를 쳤다.
“자기야, 나 죽어. 나 죽을 것 같애.”
“제기.”
이진수가 입맛을 다셨다. 그도 여자가 억지 소리를 내고 있는 것을 아는 것이다.
“야, 배우 바꿔야겠다.”
이진수가 투덜거렸을 때 유종철이 머리를 끄덕였다.
“저것이 우리가 보는 걸 아는 모양이여.”
그때 박윤태가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방을 나갔다.
“저자식, 쟤한테 가는거야.”
박윤태가 방을 나갔을때 이진수가 턱으로 아직도 화면에 보이는 여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여자는 팬티를 입는 중이었는데 이쪽으로 엉덩이를 보이고 있다.
“지난번에도 윤태가 일 끝나고 쟤하고 놀았어.”
진수가 양주를 한모금 삼키면서 말했다. 그때 전화기를 들고 뭐라고 속닥이던 유종철이 머리를 들더니 그들을 보았다.
“야, 이번에는 이대일이다. 볼래?”
“그러지 뭐.”
냉큼 대답한 진수가 조철봉에게 다시 해설했다.
“여자 둘 데리고 노는거야, 힘깨나 있다고 자신하는 놈이거나 변태거나 둘중 하나다.”
“그럼 방마다 볼 수 있는거냐?”
조철봉이 묻자 유종철이 대답했다.
“아니, 방 네개에만 장착 해 놓았는데 들키면 작살 나는거다. 그러니 이짓도 목숨을 걸고 하는거야.”
“엄살은.”
진수가 쓴웃음을 짓더니 화면을 눈으로 가리켰다. 사내도 옷을 다 입었다.
“저놈들이 어떻게 대들겠어? 오히려 이쪽에서 필름갖고 협박 안하는걸 다행으로 여겨야지.”
그때 전화가 왔으므로 유종철이 전화기를 들고 대답하다가 그들을 보았다.
“왜?”
종철의 시선을 받은 조철봉이 물었다. 그러자 빙글거리던 종철이 입을 열었다.
“야, 윤태가 저 방에서 나간 미화를 불렀는데 말야.”
둘의 시선을 받은 종철이 한쪽 눈을 감아 보였다.
“그자식이 아래층 603호실에 있거든? 근데 그 방에다 바로 어제 장치를 해놓았단 말이지. 아주 최신식으로 말야.”
“흐흐흐.”
상황을 알아챈 진수가 히히덕거렸다.
“잘되었다. 윤태놈 하는 짓을 보자.”
“그자식이 얼마나 기술자인가 확인을 해야겠다.”
종철이 결심한듯 리모컨을 조작하며 말했다.
“이대일로 노는건 나중에 기회 생기면 보기로 하자.”
그순간 종철의 방안이 비춰졌는데 이곳은 모텔 방이다. 조금전의 안마 받는 방하고는 달리 침대가 놓여졌고 호텔식이다. 윤태는 이미 팬티 차림으로 침대에 누워 있었는데 얼굴이 기대감으로 상기되어 있었다. 지금 미화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저자식이 머리를 쓰는거지.”
다시 진수가 해설을 시작했다.
“조금전에 방에서 입가심만 한 미화가 몸에 발동이 걸린것을 노리는 거야. 그러면 처음 시작했을 때보다 힘이 덜들테니까 말야.”
“지난번에도 그랬어.”
종철이 말을 받았다.
“미화가 까무러쳤다고 자랑하더만 어디, 정말인가 보자.”
그러고는 종철이 쿡쿡 웃었다.
“저자식은 내가 장치한 방을 두루 꿰고 있지만 어제 모텔방에다 장치해 놓은걸 모르고 있단말야. 그리고.”
종철이 화면에 떠있는 윤태를 흘겨 보았다.
“하필 35개나 되는 방에서 딱 하나 장치한 방으로 기어 들어가냐? 지가 재수가 없는거지.”
그때 방으로 미화가 들어섰으므로 셋은 긴장했다. 물론 미화는 화면속의 방으로 들어선 것이다.
“안녕하세요.”
하고 미화가 인사했지만 박윤태는 이맛살을 찌푸린채 바라보기만 했다. 긴장한것 같았다.
“미화도 저 방에 장치해 놓은건 모르고 있어.”
유종철이 해설했다.
“마사지 받는 방에 장치한건 대충 알고 있을거지만 말야.”
“조용.”
하고 이진수가 주의를 주었으므로 셋은 입을 다물고 화면을 주시했다. 그때 미화가 입고있던 가운을 훌훌 벗어던지더니 순식간에 알몸이 되었다. 화면에 드러난 미화의 몸매는 흠잡을곳 없이 미끈했다. 모델보다도 낫다.
“으음.”
윤태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이리와.”
그러면서 윤태가 시트를 젖혔는데 어느새 팬티를 벗었는지 알몸이었다.
“어엇!”
이번에는 탄성같은 외침이 이쪽에서 울렸다. 진수였다.
“저자식 연장 봐라.”
진수가 소리치지 않았어도 이미 모두의 시선은 윤태의 두 다리 사이로 옮겨져 있었다.
“으음.”
조철봉의 입에서도 저절로 신음이 뱉어졌다. 윤태는 연장위에다 기구를 덮어씌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기구라는 물건이 괴상망측했다. 색깔이 투명한 푸른색인데다가 우둘투둘해서 다리사이에 도마뱀이 붙어 있는 줄 알았다.
“어머나.”
놀란 외침이 미화에게서도 터져나왔다. 눈을 둥그렇게 뜬 미화가 기구를 노려보더니 다가가 섰다. 눈썹이 치켜 올라가 있었다.
“아저씨, 이게 뭐예요?”
미화가 묻자 처음에는 자랑스럽게 빙글거리던 윤태의 얼굴이 어색하게 일그러졌다.
“뭐긴 뭐야? 널 홍콩가게 해줄 물건이야.”
“어이구 지겨워.”
그러더니 미화가 미처 말릴 사이도 없이 손을 뻗쳐 기구를 잡아 뽑았다.
“어엇!”
놀란 외침은 이쪽에서 터져나왔다. 진수와 종철이 거의 동시에 외친 것이다.
“어이구.”
윤태의 신음은 조금 늦었다. 두 손으로 연장을 감싸쥔 윤태가 허리를 굽히더니 미화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야, 이년아. 그렇게 잡아 뽑으면 어떻해?”
조철봉도 윤태의 연장이 떼어지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그냥 하자구요.”
손안에서 도마뱀처럼 능청거리는 기구를 내던진 미화가 침대위로 올라오더니 윤태의 두손을 연장에서 떼어내었다. 그러자 화면을 들여다보던 세 남자는 윤태의 진정한 연장을 보았다.
“아따, 저것좀 봐.”
하고 진수가 손까지 들어 화면을 가리켰다. 그의 손가락 끝은 윤태의 연장을 가리키고 있었다.
“으흐흐.”
종철이 잇사이로 웃었다. 윤태의 연장은 그야말로 조철봉의 새끼손가락만 했다. 그러나 발딱 서있어서 악착같게는 생겼지만 어쩐지 안쓰러웠다.
“가만 있어요. 아저씨. 내가 홍콩에 보내드릴게.”
미화가 윤태의 연장위에 엎드리더니 혀로 핥으면서 말했다.
“아저씨도 참, 크기만 하면 장땡인줄 알아요? 그냥 싸면 되는거야. 돈 내고 미쳤다고 여자 좋은일 시켜줘요?”
맞는 말이다. 저절로 머리를 끄덕인 조철봉이 유종철에게 말했다.
“그렇지, 쟤가 전문가다. 직업의식이 투철한 놈이야.”
“그럼 네가 한번 해보지 그래?”
하고 이진수가 나섰을 때 스피커에서 박윤태의 신음이 울렸다. 연장에서 기구가 뽑혀 나간 직후에는 세상이 끝난 것 같은 표정을 짓더니 어느덧 윤태는 눈을 가늘게 뜨고 늘어져 있었다.
“어이우.”
윤태의 신음소리는 그랬다. 초점이 없는 눈으로 이 쪽을 똑바로 보고 있어서 약간 민망했지만 천장에 붙어 있는 카메라를 치울 수가 있겠는가? 자세를 바꿀 때까지 마주보는 수밖에 없다.
“저 자식 곧 싸겠는데.”
금방 시들해진 진수가 입맛을 다시면서 조철봉을 보았다.
“저 물건을 미화한테 넣는다고 해도 뭐, 굴뚝에 쥐 다니는 꼴일테니 어디 기척이나 가겠냐? 괜히 입맛만 버리겠지.”
그러자 유종철이 거들었다.
“저 자식 저 연장 가지고 만날 뻥만 깠어. 왠지 나하고 같이 사우나를 안하더라니.”
그때 윤태가 허리를 번쩍 치켜들더니 벽력같은 고함을 쳤다. 일제히 머리를 돌린 셋은 윤태가 싸는 꼴을 보았다. 혀로 연장을 핥던 미화가 상황을 감지하고는 손으로 거칠게 마찰을 시켜주는 바람에 싼 것이다.
“자아식, 싱겁기는.”
다시 진수가 씹었을 때 종철이 조철봉을 보았다.
“철봉아 네가 미화를 데리고 가지 그래?”
“머? 어디로?”
불퉁스럽게 조철봉이 묻자 종철이 풀석 웃었다.
“자식아, 603호실하고 505호실 밖에 없어. 그러니까 맘 놓고.”
“얀마, 싫어.”
“미화 쟤 괜찮은 애다.”
“괜찮으나마나.”
“그럼 다른 애를 고르든지.”
그때 늘어졌던 윤태가 눈의 초점을 잡더니 미화를 보았다.
“야, 너 말야.”
“네, 사장님.”
씻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으므로 미화가 옷을 입으면서 윤태를 보았다. 시트로 번데기를 가린 윤태가 정색하고 미화를 보았다.
“너 다른 놈들, 그러니까 너희 사장한테라도 나하고 논 이야기 말어, 알았지?”
그러자 미화가 빙긋 웃었다. 윤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 들었다는 표정이다.
“네, 사장님.”
“여기.”
손을 뻗쳐 바지를 집어든 윤태가 지갑을 꺼내더니 만원권 몇장을 건네주었다.
“아니, 저 새끼.”
그 장면을 본 진수가 또 흥분했다.
“저 새끼, 5만원만 주네. 저런 빈대같은 놈 같으니.”
“야, 지난 번에는 3만원 줬어.”
종철이 쓴웃음을 짓고 말했다.
“그래서 내가 보태 주었다. 오늘도 그래야겠구만.”
“야, 저새끼, 없애.”
진수가 아직도 윤태가 나오는 화면을 턱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엄지손가락을 아래로 찍는 시늉만 한다면 로마 황제같은 태도였다. 그러자 종철이 리모컨의 버튼을 눌렀고 윤태는 사라졌다.
“자, 이제 발동이 걸렸으니까 슬슬 우리가 실전에 임해야 할 차례인데.”
종철이 조철봉과 진수를 번갈아 보면서 물었다.
“어떻게 할래? 아래로 내려갈래? 아니면 여기 더 있을래?”
알고 보았더니 이 일당들은 한달에 한두 번씩 정기적으로 이곳에 모여 놀았는데 대개 훔쳐보다가 발동이 걸리면 방으로 가서 끝냈다고 했다. 그러나 훔쳐보는 내용이 천차만별인 터라 언제 봐도 재미있었고 흥분이 되어서 질리지가 않는다는 것이다.
“우선 마사지를 받아야지.”
이진수가 말하더니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서며 조철봉을 보았다.
“철봉이 넌?”
“난 여기 있다가 나중에 정하겠어.”
조철봉이 말하자 유종철은 서둘러 계기를 조작하더니 새 리모컨을 내밀었다.
“이거로 해라.”
유종철이 리모컨의 버튼을 가리키며 조작법을 설명했다.
“엿보는 방이 5개다. 603호실과 505호실은 이제 안 돼. 박윤태가 알면 지랄할 테니까 접속을 끊었어.”
둘이 방을 나가자 조철봉은 두 다리를 탁자 위에 길게 뻗고는 먼저 방안의 불부터 껐다. 그러고는 5개 방 중에서 107호실의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화면 가득하게 방안의 풍경이 펼쳐지면서 동시에 여자의 신음이 이쪽 방을 메웠다. 지금 방 안에서는 남녀가 후배위의 자세로 맹렬하게 섹스를 하는 중이었다.
“아, 아, 아, 아.”
여자의 얼굴은 고통스러워 보였는데 뒤에 붙어선 비대한 체격의 40대 사내는 여자를 가볍게 들어올리면서 강하게 부딪쳤다.
“아, 아, 아, 아.”
여자의 악문 잇새로 비명같은 신음이 이어졌다. 조철봉은 지그시 남자를 노려보았다. 강한 체력의 사내였다. 부딪는 자세가 힘찼고 리듬까지 맞추고 있다. 가만 보니까 여자의 허리를 두손으로 움켜쥐고는 각도를 자주 변경시킨다. 여자는 그때마다 쾌감이 증가될 것이었다.
조철봉은 저도 모르게 머리를 끄덕이고는 사내를 주시했다. 여자는 30대 초반쯤으로 마사지걸이었다. 직업 여성이다. 따라서 수많은 남자를 겪었을 테니 당연히 테크닉도 뛰어날 것이었다. 이런 장소에서 손님과 어울릴 때 직업 여성은 절대로 힘을 쏟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분위기에 맞춰 절정에 오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만일 그랬다가는 정말 죽을 수도 있다. 그런데 지금 107호실의 마사지걸은 절정으로 올라가는 중이었다. 얼굴표정과 몸의 반응을 보면 알 수가 있다. 절대 가식이 아니다.
“아, 아, 아, 아.”
다시 여자가 비명을 지르면서 얼굴을 번쩍 들었을 때 조철봉은 보았다. 여자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는데 마악 터지기 직전이었다. 그때 사내가 여자의 허리를 치켜드는 것 같더니 온몸을 던지듯이 밀어 넣었다.
“아아.”
여자는 폭발했다. 조철봉은 몸을 붙이고 있던 여자가 절정에 닿는 것은 수없이 봐 왔지만 이렇게 세밀하게 전체를 본 것은 처음이다. 어느새 철봉은 무섭게 팽창되어 있어서 고통까지 느껴졌으므로 조철봉은 바지 지퍼를 내리고 철봉을 밖으로 꺼내 놓았다.
“아아아.”
여자는 절정의 여운을 간직하려는 듯 온몸을 오그리면서 신음했다. 그때 사내가 천천히 여자를 애무했다. 그 자세를 그대로 유지한 채 두꺼운 손바닥으로 여자의 젖가슴과 아랫배를 쓸었으며 허벅다리 안쪽까지 문질렀다. 노련하다. 조철봉은 경탄이 밴 시선으로 사내를 보았다. 자신만만한 저 태도를 보라. 놈은 숨도 가빠하지 않는다. 눈빛도 차분하다. 조철봉이 길게 숨을 뱉었을 때 사내가 여자한테서 몸을 떼었다. 몸을 뺀 것이다.
그때였다. 조철봉은 눈을 부릅뜨고는 숨을 멈췄다. 화면에 사내의 연장이 모자이크 처리도 되지 않고 떠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내의 연장은 조금 전에 보았던 박윤태 연장보다 조금 컸을 뿐이었다. 새끼손가락보다 조금 더 큰 가운뎃손가락 만했다.
“으음.”
조철봉의 입에서 저절로 탄성이 뱉어졌다. 사내에 대한 존경심이 배가된 것이다. 초인이다. 저 연장으로 저런 위업을 달성하다니. 그때 몸을 늘어뜨리면서 엎드렸던 여자가 말했다.
“사장님은 정말 쎄요. 난 참으려고 했지만 도저히 안돼.”
“미안하다.”
사내가 몸집과는 어울리지 않게 조금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 물건이 평균보다 작은 편이어서 기술을 연마한 덕분이지.”
그러고는 사내가 쓴웃음을 지었다.
“세상에 좆 큰놈만 행세하라는 법은 없단다. 크고 실속 없는 놈들이 의외로 많지.”
“정말이에요.”
맞장구를 치는 여자의 얼굴에 진심이 배어 있었다.
“큰 물건이 좋았던 적은 한번도 없었어요. 너무 뻑뻑해서 느낌이 적어요.”
눈을 가늘게 뜬 조철봉의 시선이 아직도 늘어지지 않은 사내의 물건으로 옮아갔다. 물건은 큰 인감도장만 했다. 리모컨을 집어든 조철봉이 다른 방의 버튼을 눌렀다. 이 곳은 특실같았다. 침대도 넓고 방도 크다. 그러나 방이 비어 있었으므로 조철봉은 리모컨의 스위치를 껐다. 다른 방도 더 있었지만 엿보기에 질린 것이다. 그러자 문득 관음증 환자를 이 곳에 데려다놓고 하루종일 방을 들여다보게 한다면 그 놈의 병의 치료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탁자 위에 놓인 전화벨이 울렸으므로 조철봉은 전화기를 들었다.
“철봉이냐?”
종철이 대뜸 말을 이었다.
“야, 그만보고 방문 잠그고 405호실로 내려와.”
“왜?”
조철봉이 묻자 종철은 혀를 찼다.
“왜는 왜야? 네놈 신입식 시켜주려고 내가 건수 하나 만들어 놓았단 말이다.”
그러고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조철봉이 405호실로 내려갔을 때 예상했던 것처럼 아가씨 한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침대 끝에 걸터앉아 있던 아가씨는 조철봉이 들어서자 서둘러 일어섰는데 키가 컸다. 흰 블라우스에 바지 차림으로 종업원 제복도 입지 않았다. 조철봉의 시선을 받은 아가씨가 주춤주춤 다가오더니 손을 내밀었다.
“저기, 옷을.”
“옷을 왜?”
“걸어놓게요.”
방에는 물론 화장실과 욕실까지 갖춰져 있었지만 대뜸 옷을 벗으라는 말을 듣자 조철봉의 심기가 불편해졌다. 잠자코 창가의 의자에 앉은 조철봉이 아가씨를 보았다.
“유사장이 보낸거야?”
“예.”
무안해진 여자가 시선을 내린 채 대답했다. 나이는 20대 중반 정도, 평범한 용모였지만 피부는 고왔고 체격도 날씬했다.
“거기 앉아.”
목소리를 부드럽게 한 조철봉이 눈으로 앞쪽 의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 근무한 지 오래되었어?”
“아뇨.”
여자가 머리를 저었다.
“오늘 첫 출근인데요.”
그순간 조철봉의 가슴이 편안해졌다. 불편한 기분이 가셔진 것이다. 순식간이다. 오늘 첫 출근이라는 말 한마디가 그렇게 만들었다. 흰 블라우스에 바지차림도 신선하게 보였으며 어리숙한 표정은 순진했기 때문이라고 믿어졌다. 룸살롱이나 요정에서 처음 만나게 되는 파트너가 열에 아홉은 나온지 얼마되지 않는다고 하는것을 숱하게 겪었어도 그렇다. 어떤 미친놈이 주인을 불러 그것을 확인하겠는가? 고객에 대한 서비스 차원에서 기분좋게 만들어주려는 선의의 거짓말인 것이다. 나온지 사흘 안이며, 이차는 나가지 않았고 성 경험이 거의 없다는 이 3대 기본 거짓말은 지구가 멸망할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몇살이냐?”
앞에 앉은 여자에게 조철봉이 물었다. 조철봉의 짐작으로는 20대 초반이다.
“스물셋이에요.”
맞다. 직업은 직장인이나 학생이다. 이것이 손님들이 반기는 업종이니까.
“직업은? 지금 뭘 하고 있어?”
“회사에 나가요.”
맞다. 머리를 끄덕인 조철봉이 눈을 가늘게 뜨고 여자를 보았다. 가장 많이 사용되는 직책은 경리다.
“무슨 일을 보는데?”
“경리요.”
조그만 회사다. 경리는 전화도 받고 차심부름에다 은행 출입도 해야한다. 문득 길게 숨을 뱉은 조철봉이 입을 다물었으므로 여자가 불안한 표정이 되었다.
“저기요.”
여자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제가 싫으시면 나갈까요?”
“응?”
조철봉이 정신이 난듯 눈을 둥그렇게 떴다. 이런 상황에서 ‘응. 가’하는 남자는 거의 없다. 지금까지 싫었더라도 그렇다. 대부분이 잡는다. 그 이유는 구차하게 열거할 필요도 없다.
“아냐. 싫은거 없어.”
달래듯이 말한 조철봉이 지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긴 훔쳐 보느라고 지치긴 했다.
“좀 피곤해서 그래.”
“제가 안마해 드려요?”
하고 여자가 물었다. 눈에 생기가 떠올라 있었다.
“안마 배웠어요.”
“좋아.”
조금 심술이 일어났던 마음이 다시 풀리면서 조철봉은 머리를 끄덕였다. 오늘은 하지 않았던 짓을 했기 때문인지 마음이 뒤숭숭했다. 자리에서 일어선 여자가 조철봉의 앞으로 다가와 섰다.
“그럼 벗고 침대에 누우세요.”
“홀랑 벗고?”
“네.”
조철봉의 시선을 받은 여자가 수줍게 웃었다.
“선생님이 제 첫 손님이세요.”
“정말이야?”
“그럼요.”
“홀랑 벗어도 정말 괜찮어?”
“괜찮다니까요?”
“넌?”
“전 가운 있어요.”
여자가 구석에 놓인 가방을 가리켰다.
“준비해 왔어요.”
“잠깐만.”
셔츠를 벗다 만 조철봉이 여자를 보았다.
“근데 유사장한테 어떻게 지시를 받은거야? 무슨 말이냐면.”
“훌 서비스를 하라고 하셨어요.”
“훌 서비스?”
“예. 다요.”
그러더니 여자가 다시 어색하게 웃었다.
“계산도 다 하셨어요.”
조철봉은 다시 옷을 벗었다. 셔츠와 양말, 그리고 마지막 팬티까지 벗는 동안 여자도 옷을 갈아 입었다. 벌거벗은 몸으로 침대에 똑바로 누웠을 때 여자가 다가와 옆에 앉더니 조철봉의 철봉 위에 수건을 덮었다.
“오일 마사지 해 드릴게요.”
옆에 오일병을 꺼내 놓으면서 여자가 말했다.
“돌아 누우세요.”
“아니, 그대로 해.”
본래 마사지에는 뜻이 없었던 조철봉이다. 그대로 누운채 말하자 여자는 조금 망설이는것 같더니 조철봉의 다리부터 오일을 바르기 시작했다.
“훌 서비스하면 어떤거야?”
조철봉이 천장을 바라보며 물었다.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물은 것이다. 그러자 여자가 오일을 바르면서 대답했다.
“다요, 섹스까지.”
“내가 첫 손님이라고 했지?”
“네.”
“섹스 잘하니?”
“그냥요.”
“그냥이라니?”
“남들 만큼은 해요.”
그때 여자의 손이 허벅지를 문질렀으므로 조철봉은 긴장했다. 어느덧 철봉이 수건을 천막 지주처럼 세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조철봉이 그대로 누운채 물었다.
“절정에 올랐을때는 어떤 기분이야?”
“그때요?”
하더니 여자가 수건을 젖히고는 조철봉의 철봉에도 오일을 문질렀다.
“으음.”
미끈거리는 오일이 손바닥과 마찰이 되면서 철봉에 짜릿한 쾌감을 주었으므로 조철봉은 신음했다.
“그땐 아무 생각이 없어요.”
여자가 두손으로 철봉을 문지르며 말했다.
“눈앞이 하얗고 온몸이 오그라드는 기분이 들때도 있어요.”
“으음.”
“선생님 물건 참 크네요.”
“크긴 뭘.”
“이렇게 큰 물건 첨이에요.”
“정말이야?”
“이렇게 큰 것이 어떻게 다 들어가나 몰라.”
여자가 혼잣소리처럼 말했지만 조철봉은 다시 신음했다. 여자는 분위기를 잘 맞추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흥분 안한다면 외계인일 것이었다.
“선생님.”
철봉을 주무르던 여자가 불렀으므로 조철봉은 시선을 들었다. 여자가 상기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하실래요?”
“뭘?”
“아이, 참.”
“너, 하고 싶니?”
“네.”
여자가 이번에는 부드럽게 철봉을 위에서 아래로 쓸었다. 철봉이 미끈거려서 마치 샘에 들어가 있는 것이나 같다. 조철봉이 다시 여자를 보았다.
“너, 조금 별난 여자구나.”
“첨이라 그래요. 내가 흥분했나봐.”
그러더니 여자가 엉거주춤 일어서서 짧은 치마와 팬티까지를 한꺼번에 벗었다. 조철봉은 숨을 멈췄다. 바로 눈앞에 여자의 미끈한 하체가 펼쳐져 있는 것이다. 밑에서 올려다보는 여자의 알몸 하반신은 신비롭게 느껴졌다.
“제가 위에서 해요?”
여자가 묻더니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조철봉의 몸 위에 앉았다.
“저, 지금 그냥 넣어도 돼요.”
관음회 모임에서 돌아와 집에서 잤다.
“내일 오기로 했다.”
뜬금없이 어머니가 말했으므로 조철봉은 머리를 들었다. 아침이면 집안이 수선스럽다. 영일의 등교 때문이다. 어머니는 영일을 키우는 재미로 이젠 사교춤도 끊었고 한달 동안 한번도 여행을 가지 않았다. 물론 대개가 당일치기 여행이었어도 그렇다. 어머니는 기사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영일이를 학교에 데려다주고 온 참이었는데 하교 때도 데리러 간다. 조철봉의 시선을 받은 어머니가 쌀쌀맞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내일 집에서 기다려야 된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나가면 안돼.”
“어머니.”
“내가 천신만고해서 만든 기회여. 네 맘에 들고 안들고는 나중 문제고 일단은 만나 보기나 해.”
“나, 정말.”
“내가 오죽 답답했으면 이러겠는가를 생각해봐라. 너도 양심이 있는 놈이라면 말이다.”
마침 이모와 친척 아주머니가 쓰레기를 버리러 밖으로 나갔기 때문에 어머니가 마음놓고 잔소리를 했다.
“영일이 에미 그 년은 인간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어미 노릇은 제법 했다. 애 가르칠 건 거의 가르쳤어. 물론 돈으로 떡칠을 했지만 말이다.”
만일 어머니가 서경윤이 영일을 옆방에다 두고 김병문과 그 짓을 해댄 걸 안다면 저 말도 쏙 들어갈 것이었다. 불쑥 그 충동이 일어났지만 조철봉은 침을 삼키면서 참았다. 어머니의 말이 이어졌다.
“내가 너무 서두는 것 같지만 연분이라는 것이 있어. 연분이 있으면 어떻게든 엮어지는 것이고 없으면 영일이 에미처럼 끝나게 된다.”
어머니에게 서경윤은 악연과 악녀, 악처의 교본이 되어있는 것이다. 무슨 좋지 않은 일이라도 생기면 경윤을 끌어다가 맞춰 말하면 그럴 듯해진다. 조철봉은 입맛이 달아난듯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아침 8시반, 어제 관음회에 나갔다가 밤11시쯤 들어왔기 때문에 어머니의 잔소리를 지금 듣는다.
“교육자 집안이라 믿을 만해. 거기에다 원숭이 하고 소는 잘 맞는다고 하더라.”
그동안 어머니는 궁합까지 본 모양이었다. 영일의 담임 이은지 선생은 32세에 소띠인 것이다. 요즘은 30넘은 미혼녀가 쌔고 쌨지만 어머니한테는 이은지가 혼기를 놓친 절박한 상황의 노처녀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어머니의 말을 들으면 이은지는 3년 전에 약혼까지 했다가 파혼을 하고는 그 뒤로 스캔들 하나없이 얌전하게 지냈다고 했다. 파혼 이유는 제약회사에 다니던 남자가 공금을 횡령해서 감옥에 들어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어머니는 이런 정보를 외가쪽으로 친척이 되는 아저씨한테 받았는데 조철봉은 군수사관 출신이라는 이 아저씨가 수상쩍었다. 그러나 60이 넘은 어머니 사촌동생이어서 눈을 감아주고 있는 상태였다. 그동안 어머니는 거의 매일 이은지를 만났다고 했다. 처음 만났을 때 인상이 좋았기 때문이겠지만 다음날부터 뒷조사를 하더니 영일이 핑계를 대고 점심을 세번이나 같이 먹었다는 것이다. 제 엄마와 헤어진 영일에게 담임 선생이 된 이은지가 어머니에게는 가장 바람직한 새 어머니상이며 믿음직한 보호자로 보였을 것이다.
“그럼 그 여자, 아니, 영일이 선생님은 어머니 속셈을 알아요?”
그때까지 딴전을 피우던 조철봉이 마침내 정색하고 어머니에게 물었다.
“어머니가 며느리 삼으려고 그런 공작을 하는지 알고 있느냐구요.”
그러자 어머니가 눈을 크게 떴다.
“그럼 요즘이 어떤 세상이라고 한달에 세번이나 점심을 같이 먹고 집에 초대를 해? 이선생도 다 알고 있다.”
“도대체 나에 대해서 뭐라고 말하신거요? 참고로 좀 들읍시다.”
“있는 그대로 말해주었어.”
어머니가 가늘게 뜬 눈으로 조철봉을 보았다.
“네가 회사를 열개쯤 갖고 있는데다가 북한땅 관광단지에다는 호텔까지 몇개 세우고 있다고 했지. 너만한 조건이면 미스코리아도 데려올 수 있어.”
“무슨 미스코리아.”
“의사도.”
“젠장.”
“박사는 너무 유식해서 내가 싫고.”
“제기.”
“어쨌든 그쪽도 마음이 있으니까 온다고 한거다. 만나볼수록 싹싹하고 차분하고 이쁘더라. 날보고는 이제 어머니라고 부른다.”
“둘이 알아서 잘 해보슈.”
“내일 점심먹고 탁 까놓고 이야기 해.”
“같이 살자고?”
“이 미친놈아. 한번 겪어봐야 할것 아니냐? 이 지지리 못난놈아.”
세게 혀를 찬 어머니가 어깨를 늘어뜨리면서 긴 숨을 뱉었다.
“그러고보면 돈도 다 필요없어. 전에 네 아버지랑 봉지쌀 사먹으면서 의좋게 살던때가 젤 가슴에 남는다.”
“…….”
“이놈아, 자식을 내놓았으면 책임을 져야 되는거다. 그리고 그 책임은 돈 만으로는 안되는 것이여.”
다시 말을 이으려던 어머니는 이모가 들어서는 바람에 입을 다물었고 그틈에 조철봉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 맞는 말이지만 인생이 어디 뜻대로 풀리던가? 어머니 말대로 인연이 되어야 엮어지는 것이다. 회사에 출근 했을때 기다리고 있던 최갑중이 사장실로 따라 들어서며 말했다.
“몰로토프씨가 어제 저녁에 또 연락을 해왔다고 합니다.”
잠자코 자리에 앉는 조철봉을 향해 갑중이 말을 이었다.
“그곳 아니더라도 투자 할곳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서둘건 없지요. 하지만 가부는 결정해야 될것 같습니다. 러시아쪽에서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영일이를 맡지 않았다면 조철봉이 진즉 러시아로 날아가 끝냈을 일이었다. 조철봉이 테이블 위에 놓인 달력을 보고나서 말했다.
“내일 집에 일이 좀 있으니까 모레 출발하자구.”
“예, 모레.”
몸에 생기를 일으킨 갑중이 상반신을 세우고 말했다.
“그럼 준비 하겠습니다.”
몰로토프는 러시아 하바로프스크 주지사로 외국자본의 투자 유치에 적극적이었다. 몇년간 러시아에 중고 자동차를 판매했던 조철봉의 오성자동차 서비스는 하바로프스크에 정비공장을 설립했는데 차츰 규모를 늘려 하바로프스크주에 8개의 정비소를 운영했다. 그런데 작년 말에 러시아 정부에서 매각하려고 내놓은 목재및 가구 공장을 오성이 인수하려다가 내부의 이견 때문에 조철봉이 보류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하바로프스크 주지사 몰로토프는 조철봉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었다. 갑중이 서둘러 방을 나갔을때 조철봉은 탁자 위에 놓인 영일의 사진을 보았다. 그러자 영일에게 새 엄마가 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퇴근하고 일찍 들어가는 것도 한계가 있다. 매일 이럴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자 처음으로 이은지를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관으로 들어선 이은지는 조철봉을 보더니 활짝 웃었다.
“안녕하세요.”
목소리도 맑고 밝다. 조금 당황한 조철봉이 어물거리면서 인사를 했지만 어머니가 떠들썩하게 맞는 바람에 들리지도 않았을 것이었다. 오늘은 일요일이어서 영일도 기다리고 있었는데 제 선생을 보더니 어려워하는 기색도 없이 환하게 웃는다. 그러고는 이은지의 손을 잡고 응접실로 앞장서 갔다. 뒤를 따르면서 조철봉은 은지의 몸을 보았다. 어쩔 수 없이 본것이지만 버릇이 되어서 알몸이 연상 되었다. 미끈한 종아리는 탄력이 넘쳤으며 걸음은 발이 조금 밖으로 벌려지면서 자신있게 걷는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응접실의 소파에 앉으면서 은지가 어머니와 조철봉의 중간쯤을 향해 머리를 숙여 예의 바르게 인사를 했다. 조철봉이 꾸벅 따라서 머리를 숙였을때 어머니가 길게 답사를 했다. 이모와 친척 아주머니는 은지의 초대 목적을 아는터라 대우가 더 극진했다. 어제는 손님 맞으려고 아줌마가 셋이 있는데도 도우미 셋을 더 고용해서 창고 바닥까지 닦았다. 은지 옆에 잠시 붙어있던 영일이 제 방으로 들어가 버렸고 어머니는 점심상 차린다면서 응접실을 나갔으므로 둘이 남았다. 그때 은지가 조철봉에게 말했다.
“어머님이 참 부지런하세요, 열성이시구요.”
그러고는 눈을 초승달처럼 만들면서 웃었다. 웃는 모습이 예쁜 여자가 있는 반면에 찡그리거나 새침한 표정이 매력적인 여자도 있다. 웃는 은지의 얼굴은 꾸밈이 없었고 그래서인지 보면서 편안해졌다. 은지는 머리를 짧게 잘랐는데 동그란 얼굴에 콧날의 선도 부드러운데다 눈꼬리가 약간 솟은 눈이 맑았다. 입술은 엷은 편이지만 단정해서 웃고나면 입끝이 빈틈없이 닫쳐졌다. 조철봉이 은지의 두눈을 똑바로 보았다.
“어머니는 하루라도 빨리 손주를 새엄마한테 맡기고 놀러 다니려고 그렇게 열성을 떠시는 겁니다.”
은지가 사고친 아이를 발견한 선생처럼 눈만 가늘게 떴고 조철봉이 말을 이었다.
“사교춤을 배우다가 말았고 영일이 때문에 해외여행도 미루고 있거든요.”
“설마.”
피식 웃은 은지가 조철봉을 보았다.
“손주보다 아드님을 더 생각 하시는거 같던데요. 머.”
“그게 그거죠.”
“바쁘시다고 들었어요.”
“영일이하고 이렇게 같이 있게된건 이혼한 후에 근래의 한달 뿐입니다.”
이제는 조철봉이 정색하고 말을 이었다.
“전에는 한달에 한번 얼굴 보고 이야기 할 정도였지요. 같이 살았어도 말입니다.”
“… ….”
“자식에 대한 책임감도 느끼지 않았습니다. 그냥 제 엄마한테 맡겨놓고 돈이나 던져주면 되는것으로 알았지요.”
“… ….”
“지금은 조금 느낍니다. 처음으로 내 혈육이라는 정도 배어납니다. 늦었지만 말이죠.”
그때 은지가 머리를 끄덕였다.
“어머님이 서두르시는것 같아서 저도 영일 아버님에 대해서 알아 보았어요. 그랬더니.”
은지의 눈이 조금 가늘어졌다가 원상으로 돌아갔다.
“자수성가하신 분으로 대단한 사업가시더군요. 놀랐어요.”
조철봉은 은지의 눈을 똑바로 보았다. 그렇다면 이제는 이쪽에서도 샅샅히 조사할 것이다. 은지의 팬티 색깔까지. 달거리 날짜까지 알아 낼수가 있다.
점심을 마쳤을 때 둘은 이층 베란다로 옮겨와 정원을 내려다 보면서 이야기를 계속했다. 4월 초순의 날씨는 따스했으며 담장가에 심은 진달래가 화사했다. 둘은 나란히 앉아 진달래와 앞쪽 동산의 노란 개나리, 마악 푸른 잎새가 돋아나는 정원의 잔디를 둘러보았다. 조철봉은 시가 15억7천짜리 저택에 대한 자긍심이 바탕에 있었지만 당연히 내색은 안했다. 겸손한 표정으로 진달래와 정원 구석의 개집에 매어놓은 6개월짜리 진돗개를 둘러보는 시늉을 했다. 월세집에서 이런 경치는 못보겠지만 기반이 든든해야 풍경 감상도 되는 것이다. 배가 불러야 제대로 사물이 보이는 이치와 같다. 이은지가 아이 딸린 남자 집안의 초대에 응한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15억7천짜리 저택뿐만 아니라 수백억대의 재산이 후광처럼 비치고 있기 때문일 것이었다. 그때 은지가 머리를 돌려 조철봉을 보았다.
“솔직히 영일이 아버님은 특급 남편감이에요. 요즘은 성품이나 용모보다도 재력을 우선으로 쳐 주거든요.”
은지가 차분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용모나 성품도 그만하면 뛰어나시고, 저한테는 과분한 분이시죠.”
그러고는 은지가 어색한 듯 한쪽 볼에 보조개를 만들면서 웃었다.
“하지만 어쩌죠? 전 결혼할 마음이 전혀 없거든요. 그냥 이대로 지내고 싶어요, 아이들 가르치면서.”
그럴 줄 알았다. 조철봉은 담장의 진달래로 시선을 옮기고는 머리를 끄덕여 주었다. 처음에 노골적으로 추어줄 때부터 맺어질 이야기가 대충 예상이 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나왔다가 결론에서 ‘하자’한다면 실성한 여자다. 조철봉은 힐끗 은지를 보았다. 제가 내린 결말에 스스로 감동을 받은 모양으로 은지의 볼은 조금 상기되어 있었다.
“영일 아버님께 이 약속은 해드릴 수 있어요. 영일이를 자식처럼 돌봐 드릴게요. 학년이 바뀌고 담임이 안되더라도 제가 신경쓰겠어요.”
“…….”
“마침 영일이도 절 잘 따르고, 애가 성격이 참 밝고 솔직해요. 누구한테라도 귀여움을 받을 만해요.”
그 순간 조철봉은 코가 막히는 것 같더니 눈이 흐려졌으므로 긴장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숨을 들이쉬면서 눈을 한번 끔벅이자 눈물 두 줄기가 주르르 볼을 타고 흘렀다. 그것을 은지가 보았다. 마악 입을 벌렸던 은지가 그 꼴을 보더니 입을 다시 닫았는데 눈은 동그래졌다. 조철봉은 개집을 노려보고 있었지만 은지의 반응을 샅샅이 감지하는 중이다. 다시 숨을 들이쉬면서 눈을 슬쩍 감았다가 떴을 때 눈물은 또 쏟아졌다. 구차하게 돌아간 어른이나 억울하게 잃은 돈 따위를 생각하지 않아도 마음만 먹으면 내리 쏟을 수가 있는 것이다.
“영일 아버님.”
하고 은지가 조심스럽게 불렀으므로 조철봉은 놀란 듯 머리를 들었다가 외면했다. 이럴 때 우는 얼굴을 정면으로 들이대는 게 아니다. 시청률 10%도 안되는 드라마에서나 그런다. 외면한 채 손바닥으로 얼굴을 닦은 조철봉이 은지에게 비스듬한 시선을 준채 말했다.
“아, 미안합니다.”
목소리는 차분하다. 시청률 10%대 드라마나 이럴 때 울먹이며 말한다.
“자, 그럼 산책이나 하실까요? 그러고는 제가 모셔다 드리지요.”
될 수 있는 한 길게 빼지 않는 것이 낫다.
왜냐하면 작업을 하기로 했으니까. 은지가 영일이의 성품을 칭찬할 때 감동이 오면서 그렇게 마음이 굳어졌다.
다음날 오후에 조철봉은 하바로프스크의 러시아 호텔에서 주지사 몰로토프와 마주앉아 있었다.
오후 3시가 조금 지난 시간이었는데 조금 열려진 창으로 들어온 바람결에 비릿한 물냄새가 맡아졌다. 창 밖으로 아무르 강이 내려다 보이는 것이다.
장방형 테이블 건너편의 중심에 앉은 주지자 몰로토프는 체격이 컸다. 회색 머리칼에 눈동자도 잿빛이어서 곰이 연상되었다. 그러나 몰로토프는 시종 웃었다. 조철봉과 시선만 마주치면 웃었는데 그것이 꾸민것 같지가 않았다. 그래서 성실한 인품으로 느껴졌다. 성실한 곰이다.
“아무르 산업의 고용원은 그대로 일하게만 해준다면 밀린 임금은 받지 않겠다고 합의를 했습니다.”
몰로토프가 열심히 말했고 고려인 통역이 한국어로 통역했다. 조철봉은 최갑중과 기조실의 김재석 상무, 그리고 팀장급 수행원 3명까지 동행이었고 몰로토프도 대여섯명의 보좌역과 함께였으므로 방 안에는 10여명의 인원이 둘러앉았다. 다시 몰로토프의 말이 이어졌다.
“그리고 아무르 산업에 시베리아 북부의 임야 2만㎢에 대한 벌채 허가권을 드리겠습니다. 거기에다.”
통역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몰로토프는 열심히 말을 이었다.
“토지를 임차한다면 연방정부의 승인을 받도록 도와드리죠. 그것도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자 조철봉이 머리를 돌려 김재석을 보았다. 김재석은 해외 투자 전문으로 러시아 사정에 정통했다. 조철봉의 시선을 받은 재석이 눈치빠르게 대답했다.
“임차기간은 대개 50년입니다. 기간 연장은 가능하고 석유나 가스 발굴도 되지만 이 경우는 당국의 허가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임차지 내에서의 공장 설립이나 상업 활동 등은 거의 러시아 당국의 구속을 받지 않습니다. 준 독립지역 형태로 운영이 되는 것입니다.”
조철봉은 머리를 끄덕였다. 지금 몰로토프는 아무르 산업의 원료로 쓰일 삼림의 임야 허가권 문제를 이야기 하다가 대지 임차 문제까지 설명해준 셈이었다. 그러나 골칫 덩어리로 남아있는 아무르 산업의 처리가 당면 문제였다. 이윽고 머리를 든 조철봉이 몰로토프를 보았다.
“좋습니다. 내일 오전에 이 문제를 결정하겠습니다.”
통역의 말을 들은 몰로토프가 활짝 웃더니 테이블 위로 몸을 숙여 손을 내밀었다.
“잘 부탁합니다, 미스터 조. 아무르 산업을 인수해 주시기만 한다면 적극 협력해 드리겠습니다.”
“노력해 보겠습니다.”
악수를 나눈 조철봉이 몰로토프 일행을 엘리베이터 앞까지 배웅했다. 방으로 돌아온 조철봉이 김재석에게 말했다.
“아무르 산업 인수와 함께 토지 임차를 추진해 보도록.”
“임야 벌채 허가권과 함께 말입니까?”
조철봉이 머리를 끄덕였다.
“임차지에 공장을 세우고 도시를 건설해 보겠다. 2만㎢면 한국의 1개도 만한 면적 아닌가?”
그러자 김재석이 대답했다.
“러시아 연방정부는 시베리아 북부에 15만㎢ 정도의 영토를 임차지로 공시했지만 아직 아무도 나서지 않았습니다. 한마디로 얼어붙은 땅입니다.”
15만㎢면 남한 면적보다 훨씬 큰 땅이다. 재석의 시선을 받은 조철봉이 결심한듯 말했다.
“가능한한 넓은 땅을 임차받도록.”
“예, 사장님.”
재석의 얼굴에도 생기가 떠올랐다. 이것은 모험이다.
“추위쯤은 아무것도 아냐.”
둘러앉은 수행원을 차례로 보면서 조철봉이 말했다.
“불모지도 상관없다. 땅만 있으면 돼.”
“사장님.”
정색한 최갑중이 조철봉을 불렀다. 임차지 문제는 갑중한테도 전혀 상의한 적이 없었던 일이었다. 갑중은 조철봉이 몰로토프의 호의에 흥분해서 충동적으로 임차지 문제를 결정한 것으로 보았다.
“아무르 산업에 필요한 목재는 조건이 좋은 임야 몇만 평방키로만 있어도 됩니다. 그만큼만 있어도 50년은 베어 쓸 수가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통장에 넣은 돈을 빼먹는 것 같군.”
조철봉이 다시 주위를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땅을 임차해준다는데 그 땅에다 공장 세우는 것이 낫지 않겠느냔 말이야. 땅을 50년 임차받으면 우리 다음 세대까지 주인 행세를 할 수 있지 않겠어?”
“그렇습니다.”
대답은 김재석이 했다. 긴장한 표정으로 김재석이 말을 이었다.
“임차지 안의 경제활동은 자유이며 연방정부에 기본세만 내면 됩니다. 임차를 받게 되면 주 정부보다 더 독자 권한이 있는 셈이지요.”
“조건은?”
조철봉이 묻자 재석이 서류를 펼쳤다.
“불모지여서 아직 아무도 나서지 않았습니다. 투자가로부터 외면을 받았지요. 그러나 임차하려면 임차지 운용계획을 제출해서 승인을 받아야 하고 담보금을 내야 합니다.”
그러고는 재석이 서류를 한장 빼내어 조철봉 앞에 놓았다.
“7개 구역중 서너개를 통합해서 임차해도 됩니다. 전체를 다 할 수도 있지요.”
서류에는 임차 예정지의 구역도가 그려져 있었는데 광대한 땅이었다. 시베리아 북부의 황무지여서 드문드문 마을만 표기되어 있을 뿐으로 제대로 된 도로도 없다. 그러나 아래쪽 한반도보다도 임차지는 더 컸다. 서류를 굽어본 갑중이 또 한마디 했다.
“이거 임차지를 할당받으면 길부터 닦아야겠구만. 어이구, 하바로프스크에서도 무지하게 머네.”
머리를 든 조철봉이 말했다.
“시베리아에 고려인이 몇명이나 살고 있는지, 그리고 우리가 임차지를 떼어 받아서 일자리를 만들었을 때 옮겨올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도 조사해 보도록.”
“예. 사장님.”
재석이 머리를 끄덕였다. 이제 조철봉의 결심이 굳은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조철봉이 갑중과 수행원들을 차례로 보았다.
“우리가 중국에서 조선족을 대거 고용했고 탈북자까지 받아들여서 사업에는 성공했지만 결국 중국땅만 기름지게 만들어준 형편이 되었어. 우리뿐만이 아니라 다른 한국 기업도 마찬가지야.”
조철봉이 턱으로 탁자위에 펼쳐진 시베리아 지도를 가리켰다.
“땅을 임차해준다니 외국에다 그냥 투자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어? 내땅에다 공장을 짓고 거리를 만들게 되는것이란 말야.”
“… ….”
“러시아 땅의 고려인들이 제 고향처럼 생각하게 될지도 몰라.”
“중국땅에서 조선족들이 몰려올 수도 있습니다.”
재석이 맞장구를 쳤다. 아까부터 재석은 조철봉의 반응에 호의적이었다. 정색한 재석이 말을 이었다.
“러시아 연방 각국으로 흩어진 고려인들도 지금까지 방황하고 있습니다. 임차지의 기반만 잡힌다면 그들이 몰려올 것입니다.”
재석의 목소리에 열기가 띠어 있었다.
사람은 겉만 보아서는 모른다. 겪어봐야만 한다. 겪을 여유가 없으면 알아보는 수밖에 없다. 조철봉은 지금까지 공사를 막론하고 대인 관계를 시작하기 전에 그 방법을 사용해왔다. 지금 박경택으로부터 이은지의 조사 보고를 들으면서 충격이 금방 가라앉은 것은 그런 경우를 수없이 겪었기 때문이다. 겉 인상과 속이 다른 인간이 여기 또 있다. 경택의 말이 이어졌다.
“이은지씨는 3년전 약혼을 했다가 파혼했습니다. 상대는 제약회사 자금부 대리였던 강명식으로 공금 5억을 횡령해서 경마로 날렸습니다. 2년형을 받고 작년에 출소했습니다. 그런데.”
경택이 머리를 들고 조철봉을 보았다.
“이 자가 직업없이 떠돌다가 바로 이틀전에 이은지씨의 아파트에 찾아왔는데요.”
그러더니 경택이 탁자위에 아직도 놓여져 있는 녹음기의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잠시후에 사내의 목소리가 울렸다.
“5천만 내놔. 그러면 네 눈앞에서 사라져 줄테니까.”
사내가 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사흘 여유를 주겠어. 그러지 않으면 넌 끝장이야.”
“정말 이러지마.”
은지가 사정하듯 말했다.
“내가 그런 돈이 어디 있다고.”
“이 아파트 전세금이라도 빼.”
“어떻게 사흘안에 빼란 말야?”
“전세금 담보로 빌리든지.”
“명식씨.”
이제 은지의 목소리에는 울음이 섞여 있었다.
“제발 그러지마. 부탁할게.”
“웃기고 있네.”
코웃음을 친 사내 목소리가 높아졌다.
“내가 지금 뵈는게 없단 말이다. 어머니 반지까지 빼다 팔아 먹은 형편이야. 그런데 네 비디오 필름이 박스 속에서 발견되었을 때 내 기분이 어땠는지 알아? 하느님이 도와주신 것 같았단 말이다. 하느님이, 야, 내아들 명식아, 이걸 갖고 그 매정한 년, 지 약혼자가 빵에 들어가자마자 약혼을 파혼해버린 이은지란 년한테 네가 일용할 양식을 받아 오너라, 하신 것 같았단 말이다.”
사내가 이젠 잇새로 말했다. 눈도 치켜뜨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이 진한 필름을 한 백개쯤 복사해서 네 학교 선생은 물론 학생들한테도 다 나눠줄거다. 인터넷에다도 올리고, 아예 길거리에서도 뿌릴테니까.”
그때 경택이 녹음기의 버튼을 눌러 끄더니 조철봉을 보았다.
“이놈하고 이은지씨의 섹스 장면을 찍은 필름 같습니다. 그리고.”
경택이 다시 버튼을 누르자 잠시후에 가라앉은 여자의 목소리가 울렸다.
“내 통장에는 2천5백밖에 없는데 그거라도 가져가.”
처음에 이은지와 정사를 나눴던 여자의 목소리였다. 여자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내가 다른 곳에다 알아볼게.”
“그러지마.”
은지가 만류했다.
“내가 처리할거야.”
“돈을 줘야 되잖어? 돈 준비되겠어?”
“전세금뿐야. 통장에는 몇백밖에 없어.”
“그럼 그 작자 말대로 전세금 담보로 빌리려구?”
“아니.”
“그럼 어떻게 하려고?”
“나 그만둘거야.”
“그만두다니?”
놀란 여자가 묻자 은지의 목소리가 더 차분해졌다.
“그 자를 경찰에 고발할거야. 학교에는 사표내고, 난 이 상태로는 애들 못 가르쳐.”
“생각 잘 한거야.”
박경택이 녹음기의 버튼을 눌러 다시 껐을 때 조철봉은 정색하고 말했다.
“당연히 그래야지. 저런 놈한테 끌려다니면 안돼.”
그러더니 입맛을 다시고는 소파에 등을 붙였다. 제 뒤가 구린 놈일수록 남의 허물에 더 민감한 법이다. 또한 사기꾼은 제가 써먹던 방법으로 제 등을 치려는 사기꾼을 보면 더 열을 받는 법이다. 조철봉이 잠자코 지시만 기다리는 경택을 보았다. “하지만 저놈 때문에 영일이 담임선생이 그만두면 안되겠지? 영일이도 제 선생을 좋아하는 모양인데 말야.”
경택이 감히 대답을 하겠는가? 눈만 끔벅이는 경택을 향해 조철봉은 말을 이었다.
“내 마음이 또 변했어. 손을 써야겠어.” 그러자 경택이 퍼뜩 머리를 들었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은 것이다. 그날 오후에 조철봉은 회사 근처의 일식당 동경에서 고등학교 1년 후배인 이대권과 식사를 했다. 이대권은 지난달에 대성전자의 상무로 승진했는데 발군의 영업실적을 올렸기 때문이다. 이대권은 물론이고 조철봉의 동기 중에서 대기업인 대성전자 수준의 상무가 된 케이스가 없는 것이다. 조철봉은 가끔 이대권과 만나 기업 경영과 처신, 또는 미래의 계획을 상의했는데 오늘은 러시아 임차지 문제로 부른 것이다.
“형, 지금까지 형이 해놓은 일 중에서 이번 일이 단연 압권이야.”
설명을 들은 대권이 열띤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까지 번 자금도 다 임차지에 투자한다니 됐어. 형은 그 기개만으로도 역사에 남을거야.”
예상밖의 과한 칭찬을 받은 조철봉이 조금 얼떨떨한 얼굴로 대권을 보았다. 대권 앞에서는 표정도 꾸밀 필요가 없는 것이다.
“네가 그렇게 말해주니까 힘이 나긴하는데.”
“신천지를 세우는 거야, 형.”
대권이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
“새로운 땅에다 말야.”
“그렇지, 신천지.”
조철봉이 머리를 끄덕였다. 이제는 어깨도 펴졌고 얼굴에는 웃음기가 떠올랐다.
“내 말이 바로 그거다. 신천지야, 너도 신천지라고 하는구나.”
“잘해 봐, 형.”
“그 임차지 이름도 만들어 놓았어.”
“뭔데?”
“한랜드.”
“으음.”
정색한 대권이 머리를 끄덕였다.
“난 철봉랜드가 아닐까 했는데 잘 지었네. 한랜드, 괜찮네.”
“그러냐? 그럼 한랜드로 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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