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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기 연재소설 "강안남자"-1

應觀 2014. 6. 22. 21:07

(1259)신천지-1

“도장을 찍으시는 것이 낫습니다.”

변호사 최길수가 머리를 흔들면서 말했다. 이맛살이 잔뜩 찌푸려졌고 탁자 위에 놓인 녹음기를 마치 변이나 되는 것처럼 노려보았다. 그는 방금 1시간 반 분량의 녹음 테이프를 서경윤하고 같이 들은 것이다. 헛기침을 크게 하고 난 최길수는 말을 이었다.

“길게 끌수록 손해 봅니다. 내 경험상, 그러니까 내가 이혼 소송을 맡은 지 올해로 18년이 되었지만 이건 가장 심한 케이스요. 이거 잘못하면 구속됩니다.”

최길수의 시선이 옆에 앉은 이수동에게로 옮아갔다.

“여기 이 사장이 때맞춰서 나한테 이 사건을 가져오시지 않았다면 아주머니는 어물거리다 당하게 되셨을 겁니다.”

그러고는 최길수가 다시 머리를 저었다.

“여기, 김병문씨는 살인교사 혐의가 적용될 수가 있습니다. 이거 말씀드리기 뭣하지만 간통에다 살인교사 공모 혐의가 돼요. 그럼 아주머니는 적어도 5년은 사셔야 합니다. 김병문씨는 10년쯤 될까? 이거 아주 중죄지요.”

조철봉의 변호사 박규영이 문제의 녹음테이프를 가지고 온 것은 오늘 오전 10시경이었다. 박규영은 서경윤에게 녹음테이프와 함께 합의이혼 서류를 가져왔는데 내일 10시까지 결정을 하지 않는다면 바로 경찰에 고발한다고 했다. 서경윤으로서는 마른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진 것이나 같았다. 그래서 박규영이 돌아간 후에 녹음테이프를 틀어보고는 혼비백산했다. 정신이 나가서 오줌까지 찔끔 흘렸는데 이수동을 부른 것은 그로부터 한 시간쯤 지난 후였다. 당사자인 김병문한테는 연락도 하지 않았다. 도움이 될 인간도 아닐 뿐만 아니라 갑자기 놈과 엮인 현실에 화가 치밀어 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떠오른 인간이 조철봉의 약점을 캐라고 용역을 준 이수동이었던 것이다. 전세가 갑자기 역전이 되어서 이쪽이 먼저 약점이 잡히기는 했지만 상의 대상은 되었기 때문이다. 그 이수동이 테이프를 듣더니 이건 법적으로 검토를 해야 한다면서 힘센 변호사한테 가자면서 여기로 데려왔다. 그때 최길수가 말을 이었다.

“도장 찍으세요. 이 사건은 대통령이 나서도 안됩니다. 끌었다가는 큰일납니다.”

변호사한테서 이런 소리를 듣고 버틸 인간은 세상에 없다. 있다면 정신이 어떻게 된 인간이다. 마른 입안에 겨우 침을 모아서 삼킨 경윤이 입을 열었다.

“그럼 아이도 내놓으란 말인가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최길수가 거침없이 말했다.

“제주도에서 아이를 옆방에 두고 그런 일을 벌인 증거가 여기 있지 않습니까? 이건 사회적으로도 용납이 안되는 일이지요. 법관도 인간입니다. 이 녹음테이프가 불법으로 제작이 되었다고 해도 듣고 나면 분노할 테니까요. 그리고.”

다시 머리를 저은 최길수가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웃었다.

“만일 매스컴쪽에 이 테이프가 넘어가면 큰일납니다. 처벌을 받지 않더라도 한국땅을 떠나야 될 겁니다.”

경윤은 이를 악물었다. 처음 놀람이 가셔지면서 이곳에 왔을 때는 조철봉에 대한 분노로 살이 떨렸다. 그놈은 뒷조사를 해서 이런 테이프까지 만들어 놓고는 시치미를 뚝 떼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든 복수하고, 대항하고 싶었다. 영일이를 데려간다니, 말도 안되는 소리였다. 그런데 변호사의 말을 들으면서 슬슬 겁이 나기 시작했다. 이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이제야 실감이 났다. 이윽고 경윤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알겠어요. 그럼 변호사님이 알아서 처리해 주세요.”

매수, 횡령, 사기, 공갈, 협박 때로는 폭력까지 조철봉이 사용하지 않은 방법이 없다.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아온 것이다. 결과만 좋으면 그 과정은 무시되었으며 승자는 곧 선이었고 패자는 무대에서 사라진 것이 현실이다. 결국 역사도 승자의 기록이다. 승자는 전리품처럼 정의를 행사했고 불의는 패자의 몫이 되는것을 조철봉은 보아왔다. 인간 조철봉이 정의나 역사 따위의 의식을 품고 행동한적은 없다. 경쟁사회에서 살아 남으려고 발버둥을 치면서 익힌 권모술수에 탄력이 붙었을 뿐이다. 그래서 이번 서경윤과의 이혼 작전도 치밀하게 조작했다. 다음날 오후 3시가 되었을때 작전은 종료되었으며 이혼 수속도 완벽하게 끝났다. 조철봉이 한 일은 아파트 정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경윤이 데리고 나오는 영일을 안아온것 뿐이었다. 그러고는 영일과 함께 곧장 어머니와 이모, 친척 아주머니가 기다리고 있는 일산 저택으로 돌아왔다.

나머지는 최갑중이 변호사하고 다 알아서 처리했다. 경윤이 고용한 이수동과 변호사 최길수까지 갑중이 다 손을 써놓은 상태였던 것이다. 만일 경윤이 부르지 않았다면 이수동이 직접 찾아갈 계획이었으므로 함정에서 빠져나갈 길은 없었다. 이로써 조철봉은 경윤과 두번째 이혼을 했다. 이 이혼으로 경윤은 10억 상당의 아파트와 5억의 위자료를 받았다. 영일이가 성인이 되었을때 만날 수 있도록 배려도 해 주었다. 그러나 김병문은 조금 더 결과가 좋지 않았다. 병문은 다리를 걸치고 있던 두 여자하고 처참한 결말을 맞았는데 사진과 녹음테이프등 모든 자료가 두 여자한테 배달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두 여자에 대한 자료는 경윤에게도 배달되었으며 그 결과는 사진만으로도 충분할 것이었다. 경윤이 조금 정신을 차리고 병문의 행각에 대한 녹음과 기록을 듣게되면 그 배신감은 조철봉에 대한 것보다 더 클 것이 분명했다. 저택의 응접실에 일당이 둘러 앉았을때는 오후 6시경이었다. 상석에 앉은 조철봉의 양쪽으로 최갑중과 박경택, 그리고 변호사 박규영이 앉았는데 모두 큰일을 치른터라 홀가분한 표정이었다.

“앞으로는.”

불쑥 입을 열었다. 갑중이 조금 뜸을 들이고는 말을 이었다.

“사장님께서 집에 일찍 들어오셔야겠습니다. 그리고.”

작심을 한 듯 갑중이 어깨를 펴고는 조철봉을 똑바로 보았다.

“외박도 삼가시고 출장도 될 수 있는 한 줄이셔야 됩니다.”

조철봉은 눈만 껌벅였고 갑중의 목소리가 응접실을 울렸다.

“그리고 당분간 재혼은 안하시는 것이 낫습니다. 지금 결혼을 하시면.”

“알아.”

갑중의 말을 자른 조철봉이 입맛을 다셨다. 어색한 표정이다.

“걱정 안해도 된다. 그럴 생각 없으니까. 그리고 네 말대로 외박도 안할거다. 출장도 줄일 것이고.”

“그러셔야죠.”

경택과 규영은 잠자코 눈동자만 굴렸다. 그들한테는 거북한 화제인 것이다. 그때 응접실로 영일이 들어오더니 조철봉의 옆으로 다가왔다.

“아빠, 게임 해도 돼?”

“응, 된다.”

반갑게 대답했다가 조철봉이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섰다. 영일은 벌써 적응하고 있다.

“어디, 무슨 게임인가 보자.”

조철봉이 영일의 손을 쥐고는 생각난듯 사내들을 둘러보았다. 웃음띤 얼굴이었다.

“나, 잠깐 게임하고 올테니까 기다려.”

사흘후 아침, 조철봉과 어머니 박여사는 영일이를 저택 근처의 초등학교에 전학시켰다. 영일이는 조금 주춤거렸고 불안한 듯 자꾸 아빠와 할머니를 보았지만 엄마를 찾지는 않았다. 며칠간 할머니하고 지내면서 상황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담임 선생한테 영일을 부탁한다는 인사를 하면서 조철봉은 세번이나 이마의 땀을 닦았다. 집에서 나올 때 담임한테 주려고 10만원권 수표 10장을 넣은 봉투를 갖고 있었는데 학교에 도착하기 직전에 최갑중한테서 전화가 왔다.

“사장님, 저기.”

갑중이 망설이더니 작심한 듯 말했다.

“지금 영일이하고 학교 가시죠?”

“응, 다 왔다. 어머니도 같이 계셔.”

“그런데 말씀입니다.”

“뭔데? 빨리 말해.”

“거시기, 혹시 선생 주려고 봉투 준비하셨습니까?”

“아, 당근이지. 근데 백이면 될까?”

그러자 수화구에서 입맛 다시는 소리가 나더니 갑중의 목소리가 싸늘해졌다.

“내, 그럴 줄 알고 전화를 드린 겁니다. 그 봉투 주시면 안됩니다. 지금은 우리 때하고 달라서 문제가 있습니다.”

“왜? 선생은 모래로 밥 지어 먹나?”

“어쨌든 주지 마세요. 일단은.”

“일단이라.”

“예, 먼저 상황을 보시고, 잘못하면 역효과가 나니까요.”

“그러지, 그럼.”

조철봉의 눈치가 보통 사람하고 같은가? 선선히 대답한 조철봉은 결국 담임한테 봉투를 주지 않았지만 영일에 대해서 꽤 오래 이야기를 하는 동안 진땀을 흘린 것이다. 옆에 앉은 어머니가 거들어주지 않았다면 더 쏟을 뻔했다. 선생이 묻는 영일의 성격이나 취미, 학습 능력까지 아는 것이 전무한 상태에서 거의 대답을 못했기 때문이다. 영일의 담임은 30대 초반쯤으로 미모에 날씬한 몸매의 여자였다. 그러나 조철봉에게 이은지 선생은 전혀 여자로 보이지 않았다. 대통령 앞에서도 이렇게 얼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 선생, 참하게 생겼더라.”

돌아오는 차 안에서 어머니가 생각난 것처럼 말하더니 길게 숨을 뱉었다.

“너 같은 놈이 그런 여자를 마누라로 앉힐수가 있겠냐? 어림없는 짓이지.”

“나아, 참.”

이맛살을 찌푸린 조철봉이 어머니를 흘겨보았다. 어머니는 요 몇년 사이에 부잣집 마나님이 다 되었다. 체중이 5㎏이나 늘었다면서 70이 다 된 나이에 헬스에다 사교춤까지 배운다. 철마다 단체로 외국여행을 다니고 옷도 백화점에서 브랜드 제품만 산다. 그러면서 그렇게 만들어준 자식을 우습게 보다니….

“그 선생보다 백배는 더 나은 여자가 있어요. 어머니.”

그렇게 엉겁결에 말해버린 조철봉의 눈앞에 첫번째로 고영민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러나 딸자식 딸린 이혼녀를 어머니가 어떻게 대할지는 뻔하다.

“누구냐?”

어머니가 그렇게 물었을 때는 이미 조철봉의 마음이 변해 있었다.

“그런 여자를 찾을 수 있단 말이지요.”

“내가 매일 영일이 학교 데려다 주고 데려오면서 그 선생 알아봐야겠다.”

작심한 듯 눈까지 치켜뜬 어머니가 단호하게 말했다.

“영일이 담임이겠다. 아주 안성맞춤이여.”

“아이구, 제발 어머니.”

조철봉이 사정하듯 말을 이었다.

“좀 내버려 두세요. 당분간은.”

“이놈아, 영일이를 위한 일이여.”

어머니는 물러날 기색이 아니었다.

어머니와 함께 살게 된 후부터 조철봉은 퇴근하면 곧장 집으로 왔다. 해외 출장도 가지 않았다. 약속은 낮시간에 했으며 술도 낮에 마셨다. 섹스 충동이 일어났을 때도 마찬가지다. 낮에 다 했다. 고영민의 집에도 낮에 찾아갔으며 성남에서 분식집을 차린 최성희도 낮에 만났다. 낮에 할 건 다 한 것이다. 그리고 저녁에는 집에 돌아와 영일이와 함께 지냈다. 모두 영일이 때문에 이런 것이다. 그렇게 한달반이 지나자 초등학교 2학년인 영일이가 슬슬 아버지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할머니한테는 진즉 열었지만 이쪽의 시간이 더 걸린 이유는 서경윤 때문이었다. 경윤은 영일이를 붙잡고 아비되는 작자의 험담을 밤낮없이 늘어 놓았던 것이다. 오늘도 조철봉은 숙제를 끝낸 영일이와 마주 앉아 바둑을 두었다. 영일은 처음 시작할 때 질색을 했지만 본래 제 아비를 닮아 승부 근성이 있었다. 며칠 수를 배우더니 저 혼자 바둑책을 읽고 공부를 해서 지금은 조철봉한테 다섯점을 깔고 막상막하의 실력이 되었다.

“아차.”

호구에 잘못 둔 조철봉이 놀라 다시 알을 쥐었다.

“물리자.”

“안돼.”

영일이 소리치듯 말하더니 조철봉의 알쥔 손가락을 손으로 눌렀다. 눈을 치켜뜨고 있었다.

“일수불퇴야.”

“그런 말이 어딨어?”

“한번 둔 건 물릴 수 없단 말이야.”

“야, 이건 실수였어.”

“실수로 길 잘못 들었다고 역주행해서 나올 수 있어?”

“허, 누가 그런 말 해주데?”

“아빠가 지난 번에 해놓고선.”

“야, 봐주라.”

“안돼.”

그때 소파에 앉아 있던 어머니가 굽어보다가 혀를 찼다.

“어째 넌 잘하는 일이 하나도 없냐? 바둑도 어린 아들한테 지는구나.”

“아니, 내가 왜?”

조철봉이 어머니한테 대들었다.

“내가 잘하는 일이 없다니? 무슨 말씀을 그렇게 섭하게 하슈?”

“지금 바둑도 영일이한테 지고 있잖어?”

“내가 왜 져?”

“니가 이기면 내가 손에다 장을 지지마.”

그러고는 어머니가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주방에서 간식을 만드는 이모와 친척 아주머니한테로 갔다. 그때 힐끗 할머니의 뒷모습에 시선을 주었던 영일이 조철봉에게 슬쩍 말했다.

“아빠, 물러줄까?”

“응, 부탁한다.”

정색한 조철봉이 목소리를 낮췄다.

“내 체면 좀 봐주라, 인마.”

“어서 알 가져가.”

“고맙다.”

알을 집어내면서 갑자기 콧등이 시큰해진 조철봉은 숨을 들이켰다. 쇼다. 수를 잘못 둔 것이 아니라 일부러 둔 것이다. 그리고 어머니도 영일이 기 살리면서 제 아비를 측은하게 느끼도록 쇼를 했다. 어머니가 누군가? 조철봉을 세상 밖으로 끄집어낸 분이 아니신가? 그때 영일이가 차분한 얼굴로 물었다.

“아빠, 외국 출장 안나가?”

“응? 왜?”

“요즘 만날 집에만 있어서.”

그러더니 조철봉을 똑바로 보았다.

“나, 다 컸으니까 출장 다녀도 돼. 집에 할머니가 셋이나 있잖아.”

잠깐 말을 그친 영일이가 씩 웃었다.

“내 걱정은 마, 아빠.”

관음증(觀淫症)은 타인의 성행위 장면이나 몸을 엿보면서 성적 흥분을 느끼는 인간의 성적 행동이며 대부분의 인간이 이 증세가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엿보기가 성적 만족을 얻는 유일하거나 주요한 요소라면 비정상적인 행위로 간주되는 것이다. 조철봉에게도 물론 관음증이 있다. 그러나 호기심 차원일 뿐이지 일부러 엿본 적은 없다. 하지만 오늘, 고등학교 동창인 유종철이 초대한 이 모임에 참가했을 때는 긴장으로 온몸이 단단해져 있었다. 유종철은 고등학교 동창 중에서 가장 잡놈으로 불렸지만 본인은 상관하지 않았다. 조상이 유성에서 엄청난 토지를 소유한 지주 집안으로 유종철은 온천호텔과 식당 5개를 운영하면서 한달에 보름은 서울에서 지낸다.

“자, 오늘 메뉴가 이렇다.”

방에 모인 인원은 유종철과 조철봉을 포함하여 4명이었는데 나머지 둘도 동창이다. 유종철이 소파에 둘러앉은 동창들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생쇼가 두번 있고 그 다음은 자유로 뛸테니까 마시면서 즐기라구.”

그러면서 빙그레 웃었다.

“쇼 보다가 영 급하면 옆방으로 가서 전화로 불러내.”

둘러앉은 셋은 웃음만 띤 채 대답하지 않았다. 이 곳은 강남의 국일모텔 7층에 만들어진 유종철의 휴게실이다. 국일모텔은 유종철의 소유로 지하 2층에서 지상 2층까지 4개층이 안마와 사우나실이었고 3층에서 7층까지가 모텔이었다.

“이번에는 괜찮은 놈이 해야 할 텐데.”

조철봉의 옆에 앉은 이진수가 입맛을 다시면서 말했다.

“지난번 놈은 너무 짧았어. 두놈 다.”

이진수는 부동산업자로 중국에까지 지점을 차렸다고 했다. 조철봉과 시선을 마주친 이진수가 가는 눈을 더 가늘게 뜨면서 웃었다.

“계집애는 괜찮았지만 말야.”

그때 유종철이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자, 시작한다.”

그러면서 리모컨을 누르자 방 안의 불이 꺼지면서 앞쪽 벽을 가리고 있던 커튼이 좌우로 벌어졌다. 조철봉은 숨을 죽였다. 유종철의 화요모임은 관음 회원들의 모임인 것이다. 오늘 말로만 듣던 이 놈들의 모임에 처음 초대를 받았으니 긴장하는 것이 당연했다.

“오오.”

옆에 앉은 이진수가 방정맞게 소리를 쳐 흥이 조금 깨졌지만 조철봉은 앞에 펼쳐진 장면에 놀라 저절로 입이 딱 벌어졌다. 벽에 초대형 TV화면이 붙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화면에는 전라의 두 남녀가 마악 방바닥에 깔린 요 위에 앉는 중이었다.

“어떻게 해드려요?”

하고 여자의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렸으므로 조철봉은 찔끔했다. 그러자 이진수가 설명했다.

“아래층 안마받는 방이야. 저 여자애는 이 집에서 젤 잘나가는 애고, 이름이 미화던가? 물론 가명이겠지만.”

그때 남자의 목소리가 울렸다.

“위에서 해줘.”

“입으로 해드려요?”

“어, 내가 할게.”

남자는 조금 어색한듯 시선을 마주치지 않았는데 40대쯤으로 머리가 벗겨지고 비만형 체격이었다.

“저 자식 연장 좀 봐.”

하고 지금까지 가만있던 박윤태가 말했으므로 조철봉의 시선이 옮아갔다. 사내의 연장은 10센티미터쯤 되었다. 잔뜩 성이 났어도 그렇다. 박윤태가 큭큭 웃었다. 이 놈들은 관음 중독이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조철봉은 화면에 집중했다.

“가만.”

사내가 입으로 제 물건을 핥는 여자의 어깨를 누르며 말했다. 눈을 치켜뜨고 누워 있었는데 시선이 똑바로 이쪽을 보고 있어서 조철봉은 조금 거북했다. 카메라가 천장쪽에 장착되어 있는 모양이었다.

“왜요?”

하면서 얼굴을 든 여자의 얼굴은 앳되었다. 살결도 좋고 가늘가늘한 체격이어서 인기가 좋을만 했다.

“쟨 스물다섯이야.”

이진수가 화면에 시선을 둔채로 말했다.

“경력이 3년이라고. 도사가 다 되었지.”

그때 사내가 여자의 어깨를 당겨 요위로 눕혔다. 제가 위에서 하겠다는 표시였다.

“이거 싱겁게 되겠구만.”

입맛을 다신 박윤태가 말하더니 탁자위에 놓인 양주병을 들어 잔에 술을 채웠다.

“야, 볼륨 좀 높여라.”

박윤태가 주문하자 유종철이 리모컨을 눌러 소리를 높였다.

“아저씨, 살살.”

다리를 벌리고 누운 여자가 두려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프니까 살살 해주세요.”

“어쭈구리.”

이진수가 코웃음을 쳤다.

“지난번에는 저놈 물건보다 세배는 더 큰 놈이 들어갔어.”

그때 남자가 그냥 연장을 넣었으므로 여자가 비명을 질렀다.

“아야, 아퍼.”

여자가 남자의 살찐 등을 손바닥으로 두드렸다.

“아저씨, 아프단 말야.”

그러고는 여자가 이쪽을 보았는데 조철봉은 아무래도 카메라 렌즈를 보는 것 같았다.

“아유, 아퍼.”

여자가 두 다리로 사내의 다리를 감싸안으면서 신음했다.

“너무 커.”

“으하하.”

웃음소리는 박윤태가 냈다. 놈은 몇년전까지만 해도 정치를 한다고 했는데 지금은 뭘로 먹고 사는지 모른다. 박윤태가 웃으면서 말했다.

“하긴 물건 크다고 해서 싫어하는 놈 있겠냐? 하지만 저놈은 그런 소리 오늘 처음 들었을거다.”

박윤태가 커다란 콧구멍을 벌름거리면서 말을 이었다.

“크다고 하는 것이 저애 주특기거든? 지난번에도 그러더라고.”

그때 사내는 절정에 오르고 있었다. 몸놀림이 다급해지는 것을 보면 그렇다. 조철봉은 유심히 사내를 관찰했다. 둘의 행위를 보면서 흥분은 되었지만 하고 싶은 욕망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아으으.”

하고 사내가 여자를 짓누르면서 폭발했을 때였다. 조철봉은 이쪽을 보던 여자의 입가에 희미한 웃음기가 떠올랐다가 지워지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곧 여자는 입을 딱 벌리면서 화답했다.

“아유우, 나 죽어.”

“으으으.”

사내가 몸서리를 치면서 더 밀착시켰고 여자는 맞장구를 쳤다.

“자기야, 나 죽어. 나 죽을 것 같애.”

“제기.”

이진수가 입맛을 다셨다. 그도 여자가 억지 소리를 내고 있는 것을 아는 것이다.

“야, 배우 바꿔야겠다.”

이진수가 투덜거렸을 때 유종철이 머리를 끄덕였다.

“저것이 우리가 보는 걸 아는 모양이여.”

그때 박윤태가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방을 나갔다.

“저자식, 쟤한테 가는거야.”

박윤태가 방을 나갔을때 이진수가 턱으로 아직도 화면에 보이는 여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여자는 팬티를 입는 중이었는데 이쪽으로 엉덩이를 보이고 있다.

“지난번에도 윤태가 일 끝나고 쟤하고 놀았어.”

진수가 양주를 한모금 삼키면서 말했다. 그때 전화기를 들고 뭐라고 속닥이던 유종철이 머리를 들더니 그들을 보았다.

“야, 이번에는 이대일이다. 볼래?”

“그러지 뭐.”

냉큼 대답한 진수가 조철봉에게 다시 해설했다.

“여자 둘 데리고 노는거야, 힘깨나 있다고 자신하는 놈이거나 변태거나 둘중 하나다.”

“그럼 방마다 볼 수 있는거냐?”

조철봉이 묻자 유종철이 대답했다.

“아니, 방 네개에만 장착 해 놓았는데 들키면 작살 나는거다. 그러니 이짓도 목숨을 걸고 하는거야.”

“엄살은.”

진수가 쓴웃음을 짓더니 화면을 눈으로 가리켰다. 사내도 옷을 다 입었다.

“저놈들이 어떻게 대들겠어? 오히려 이쪽에서 필름갖고 협박 안하는걸 다행으로 여겨야지.”

그때 전화가 왔으므로 유종철이 전화기를 들고 대답하다가 그들을 보았다.

“왜?”

종철의 시선을 받은 조철봉이 물었다. 그러자 빙글거리던 종철이 입을 열었다.

“야, 윤태가 저 방에서 나간 미화를 불렀는데 말야.”

둘의 시선을 받은 종철이 한쪽 눈을 감아 보였다.

“그자식이 아래층 603호실에 있거든? 근데 그 방에다 바로 어제 장치를 해놓았단 말이지. 아주 최신식으로 말야.”

“흐흐흐.”

상황을 알아챈 진수가 히히덕거렸다.

“잘되었다. 윤태놈 하는 짓을 보자.”

“그자식이 얼마나 기술자인가 확인을 해야겠다.”

종철이 결심한듯 리모컨을 조작하며 말했다.

“이대일로 노는건 나중에 기회 생기면 보기로 하자.”

그순간 종철의 방안이 비춰졌는데 이곳은 모텔 방이다. 조금전의 안마 받는 방하고는 달리 침대가 놓여졌고 호텔식이다. 윤태는 이미 팬티 차림으로 침대에 누워 있었는데 얼굴이 기대감으로 상기되어 있었다. 지금 미화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저자식이 머리를 쓰는거지.”

다시 진수가 해설을 시작했다.

“조금전에 방에서 입가심만 한 미화가 몸에 발동이 걸린것을 노리는 거야. 그러면 처음 시작했을 때보다 힘이 덜들테니까 말야.”

“지난번에도 그랬어.”

종철이 말을 받았다.

“미화가 까무러쳤다고 자랑하더만 어디, 정말인가 보자.”

그러고는 종철이 쿡쿡 웃었다.

“저자식은 내가 장치한 방을 두루 꿰고 있지만 어제 모텔방에다 장치해 놓은걸 모르고 있단말야. 그리고.”

종철이 화면에 떠있는 윤태를 흘겨 보았다.

“하필 35개나 되는 방에서 딱 하나 장치한 방으로 기어 들어가냐? 지가 재수가 없는거지.”

그때 방으로 미화가 들어섰으므로 셋은 긴장했다. 물론 미화는 화면속의 방으로 들어선 것이다.

“안녕하세요.”

하고 미화가 인사했지만 박윤태는 이맛살을 찌푸린채 바라보기만 했다. 긴장한것 같았다.

“미화도 저 방에 장치해 놓은건 모르고 있어.”

유종철이 해설했다.

“마사지 받는 방에 장치한건 대충 알고 있을거지만 말야.”

“조용.”

하고 이진수가 주의를 주었으므로 셋은 입을 다물고 화면을 주시했다. 그때 미화가 입고있던 가운을 훌훌 벗어던지더니 순식간에 알몸이 되었다. 화면에 드러난 미화의 몸매는 흠잡을곳 없이 미끈했다. 모델보다도 낫다.

“으음.”

윤태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이리와.”

그러면서 윤태가 시트를 젖혔는데 어느새 팬티를 벗었는지 알몸이었다.

“어엇!”

이번에는 탄성같은 외침이 이쪽에서 울렸다. 진수였다.

“저자식 연장 봐라.”

진수가 소리치지 않았어도 이미 모두의 시선은 윤태의 두 다리 사이로 옮겨져 있었다.

“으음.”

조철봉의 입에서도 저절로 신음이 뱉어졌다. 윤태는 연장위에다 기구를 덮어씌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기구라는 물건이 괴상망측했다. 색깔이 투명한 푸른색인데다가 우둘투둘해서 다리사이에 도마뱀이 붙어 있는 줄 알았다.

“어머나.”

놀란 외침이 미화에게서도 터져나왔다. 눈을 둥그렇게 뜬 미화가 기구를 노려보더니 다가가 섰다. 눈썹이 치켜 올라가 있었다.

“아저씨, 이게 뭐예요?”

미화가 묻자 처음에는 자랑스럽게 빙글거리던 윤태의 얼굴이 어색하게 일그러졌다.

“뭐긴 뭐야? 널 홍콩가게 해줄 물건이야.”

“어이구 지겨워.”

그러더니 미화가 미처 말릴 사이도 없이 손을 뻗쳐 기구를 잡아 뽑았다.

“어엇!”

놀란 외침은 이쪽에서 터져나왔다. 진수와 종철이 거의 동시에 외친 것이다.

“어이구.”

윤태의 신음은 조금 늦었다. 두 손으로 연장을 감싸쥔 윤태가 허리를 굽히더니 미화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야, 이년아. 그렇게 잡아 뽑으면 어떻해?”

조철봉도 윤태의 연장이 떼어지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그냥 하자구요.”

손안에서 도마뱀처럼 능청거리는 기구를 내던진 미화가 침대위로 올라오더니 윤태의 두손을 연장에서 떼어내었다. 그러자 화면을 들여다보던 세 남자는 윤태의 진정한 연장을 보았다.

“아따, 저것좀 봐.”

하고 진수가 손까지 들어 화면을 가리켰다. 그의 손가락 끝은 윤태의 연장을 가리키고 있었다.

“으흐흐.”

종철이 잇사이로 웃었다. 윤태의 연장은 그야말로 조철봉의 새끼손가락만 했다. 그러나 발딱 서있어서 악착같게는 생겼지만 어쩐지 안쓰러웠다.

“가만 있어요. 아저씨. 내가 홍콩에 보내드릴게.”

미화가 윤태의 연장위에 엎드리더니 혀로 핥으면서 말했다.

“아저씨도 참, 크기만 하면 장땡인줄 알아요? 그냥 싸면 되는거야. 돈 내고 미쳤다고 여자 좋은일 시켜줘요?”

맞는 말이다. 저절로 머리를 끄덕인 조철봉이 유종철에게 말했다.

“그렇지, 쟤가 전문가다. 직업의식이 투철한 놈이야.”

“그럼 네가 한번 해보지 그래?”

하고 이진수가 나섰을 때 스피커에서 박윤태의 신음이 울렸다. 연장에서 기구가 뽑혀 나간 직후에는 세상이 끝난 것 같은 표정을 짓더니 어느덧 윤태는 눈을 가늘게 뜨고 늘어져 있었다.

“어이우.”

윤태의 신음소리는 그랬다. 초점이 없는 눈으로 이 쪽을 똑바로 보고 있어서 약간 민망했지만 천장에 붙어 있는 카메라를 치울 수가 있겠는가? 자세를 바꿀 때까지 마주보는 수밖에 없다.

“저 자식 곧 싸겠는데.”

금방 시들해진 진수가 입맛을 다시면서 조철봉을 보았다.

“저 물건을 미화한테 넣는다고 해도 뭐, 굴뚝에 쥐 다니는 꼴일테니 어디 기척이나 가겠냐? 괜히 입맛만 버리겠지.”

그러자 유종철이 거들었다.

“저 자식 저 연장 가지고 만날 뻥만 깠어. 왠지 나하고 같이 사우나를 안하더라니.”

그때 윤태가 허리를 번쩍 치켜들더니 벽력같은 고함을 쳤다. 일제히 머리를 돌린 셋은 윤태가 싸는 꼴을 보았다. 혀로 연장을 핥던 미화가 상황을 감지하고는 손으로 거칠게 마찰을 시켜주는 바람에 싼 것이다.

“자아식, 싱겁기는.”

다시 진수가 씹었을 때 종철이 조철봉을 보았다.

“철봉아 네가 미화를 데리고 가지 그래?”

“머? 어디로?”

불퉁스럽게 조철봉이 묻자 종철이 풀석 웃었다.

“자식아, 603호실하고 505호실 밖에 없어. 그러니까 맘 놓고.”

“얀마, 싫어.”

“미화 쟤 괜찮은 애다.”

“괜찮으나마나.”

“그럼 다른 애를 고르든지.”

그때 늘어졌던 윤태가 눈의 초점을 잡더니 미화를 보았다.

“야, 너 말야.”

“네, 사장님.”

씻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으므로 미화가 옷을 입으면서 윤태를 보았다. 시트로 번데기를 가린 윤태가 정색하고 미화를 보았다.

“너 다른 놈들, 그러니까 너희 사장한테라도 나하고 논 이야기 말어, 알았지?”

그러자 미화가 빙긋 웃었다. 윤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 들었다는 표정이다.

“네, 사장님.”

“여기.”

손을 뻗쳐 바지를 집어든 윤태가 지갑을 꺼내더니 만원권 몇장을 건네주었다.

“아니, 저 새끼.”

그 장면을 본 진수가 또 흥분했다.

“저 새끼, 5만원만 주네. 저런 빈대같은 놈 같으니.”

“야, 지난 번에는 3만원 줬어.”

종철이 쓴웃음을 짓고 말했다.

“그래서 내가 보태 주었다. 오늘도 그래야겠구만.”

“야, 저새끼, 없애.”

진수가 아직도 윤태가 나오는 화면을 턱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엄지손가락을 아래로 찍는 시늉만 한다면 로마 황제같은 태도였다. 그러자 종철이 리모컨의 버튼을 눌렀고 윤태는 사라졌다.

“자, 이제 발동이 걸렸으니까 슬슬 우리가 실전에 임해야 할 차례인데.”

종철이 조철봉과 진수를 번갈아 보면서 물었다.

“어떻게 할래? 아래로 내려갈래? 아니면 여기 더 있을래?”

알고 보았더니 이 일당들은 한달에 한두 번씩 정기적으로 이곳에 모여 놀았는데 대개 훔쳐보다가 발동이 걸리면 방으로 가서 끝냈다고 했다. 그러나 훔쳐보는 내용이 천차만별인 터라 언제 봐도 재미있었고 흥분이 되어서 질리지가 않는다는 것이다.

“우선 마사지를 받아야지.”

이진수가 말하더니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서며 조철봉을 보았다.

“철봉이 넌?”

“난 여기 있다가 나중에 정하겠어.”

조철봉이 말하자 유종철은 서둘러 계기를 조작하더니 새 리모컨을 내밀었다.

“이거로 해라.”

유종철이 리모컨의 버튼을 가리키며 조작법을 설명했다.

“엿보는 방이 5개다. 603호실과 505호실은 이제 안 돼. 박윤태가 알면 지랄할 테니까 접속을 끊었어.”

둘이 방을 나가자 조철봉은 두 다리를 탁자 위에 길게 뻗고는 먼저 방안의 불부터 껐다. 그러고는 5개 방 중에서 107호실의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화면 가득하게 방안의 풍경이 펼쳐지면서 동시에 여자의 신음이 이쪽 방을 메웠다. 지금 방 안에서는 남녀가 후배위의 자세로 맹렬하게 섹스를 하는 중이었다.

“아, 아, 아, 아.”

여자의 얼굴은 고통스러워 보였는데 뒤에 붙어선 비대한 체격의 40대 사내는 여자를 가볍게 들어올리면서 강하게 부딪쳤다.

“아, 아, 아, 아.”

여자의 악문 잇새로 비명같은 신음이 이어졌다. 조철봉은 지그시 남자를 노려보았다. 강한 체력의 사내였다. 부딪는 자세가 힘찼고 리듬까지 맞추고 있다. 가만 보니까 여자의 허리를 두손으로 움켜쥐고는 각도를 자주 변경시킨다. 여자는 그때마다 쾌감이 증가될 것이었다.

조철봉은 저도 모르게 머리를 끄덕이고는 사내를 주시했다. 여자는 30대 초반쯤으로 마사지걸이었다. 직업 여성이다. 따라서 수많은 남자를 겪었을 테니 당연히 테크닉도 뛰어날 것이었다. 이런 장소에서 손님과 어울릴 때 직업 여성은 절대로 힘을 쏟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분위기에 맞춰 절정에 오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만일 그랬다가는 정말 죽을 수도 있다. 그런데 지금 107호실의 마사지걸은 절정으로 올라가는 중이었다. 얼굴표정과 몸의 반응을 보면 알 수가 있다. 절대 가식이 아니다.

“아, 아, 아, 아.”

다시 여자가 비명을 지르면서 얼굴을 번쩍 들었을 때 조철봉은 보았다. 여자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는데 마악 터지기 직전이었다. 그때 사내가 여자의 허리를 치켜드는 것 같더니 온몸을 던지듯이 밀어 넣었다.

“아아.”

여자는 폭발했다. 조철봉은 몸을 붙이고 있던 여자가 절정에 닿는 것은 수없이 봐 왔지만 이렇게 세밀하게 전체를 본 것은 처음이다. 어느새 철봉은 무섭게 팽창되어 있어서 고통까지 느껴졌으므로 조철봉은 바지 지퍼를 내리고 철봉을 밖으로 꺼내 놓았다.

“아아아.”

여자는 절정의 여운을 간직하려는 듯 온몸을 오그리면서 신음했다. 그때 사내가 천천히 여자를 애무했다. 그 자세를 그대로 유지한 채 두꺼운 손바닥으로 여자의 젖가슴과 아랫배를 쓸었으며 허벅다리 안쪽까지 문질렀다. 노련하다. 조철봉은 경탄이 밴 시선으로 사내를 보았다. 자신만만한 저 태도를 보라. 놈은 숨도 가빠하지 않는다. 눈빛도 차분하다. 조철봉이 길게 숨을 뱉었을 때 사내가 여자한테서 몸을 떼었다. 몸을 뺀 것이다.

그때였다. 조철봉은 눈을 부릅뜨고는 숨을 멈췄다. 화면에 사내의 연장이 모자이크 처리도 되지 않고 떠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내의 연장은 조금 전에 보았던 박윤태 연장보다 조금 컸을 뿐이었다. 새끼손가락보다 조금 더 큰 가운뎃손가락 만했다.

“으음.”

조철봉의 입에서 저절로 탄성이 뱉어졌다. 사내에 대한 존경심이 배가된 것이다. 초인이다. 저 연장으로 저런 위업을 달성하다니. 그때 몸을 늘어뜨리면서 엎드렸던 여자가 말했다.

“사장님은 정말 쎄요. 난 참으려고 했지만 도저히 안돼.”

“미안하다.”

사내가 몸집과는 어울리지 않게 조금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 물건이 평균보다 작은 편이어서 기술을 연마한 덕분이지.”

그러고는 사내가 쓴웃음을 지었다.

“세상에 좆 큰놈만 행세하라는 법은 없단다. 크고 실속 없는 놈들이 의외로 많지.”

“정말이에요.”

맞장구를 치는 여자의 얼굴에 진심이 배어 있었다.

“큰 물건이 좋았던 적은 한번도 없었어요. 너무 뻑뻑해서 느낌이 적어요.”

눈을 가늘게 뜬 조철봉의 시선이 아직도 늘어지지 않은 사내의 물건으로 옮아갔다. 물건은 큰 인감도장만 했다. 리모컨을 집어든 조철봉이 다른 방의 버튼을 눌렀다. 이 곳은 특실같았다. 침대도 넓고 방도 크다. 그러나 방이 비어 있었으므로 조철봉은 리모컨의 스위치를 껐다. 다른 방도 더 있었지만 엿보기에 질린 것이다. 그러자 문득 관음증 환자를 이 곳에 데려다놓고 하루종일 방을 들여다보게 한다면 그 놈의 병의 치료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탁자 위에 놓인 전화벨이 울렸으므로 조철봉은 전화기를 들었다.

“철봉이냐?”

종철이 대뜸 말을 이었다.

“야, 그만보고 방문 잠그고 405호실로 내려와.”

“왜?”

조철봉이 묻자 종철은 혀를 찼다.

“왜는 왜야? 네놈 신입식 시켜주려고 내가 건수 하나 만들어 놓았단 말이다.”

그러고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조철봉이 405호실로 내려갔을 때 예상했던 것처럼 아가씨 한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침대 끝에 걸터앉아 있던 아가씨는 조철봉이 들어서자 서둘러 일어섰는데 키가 컸다. 흰 블라우스에 바지 차림으로 종업원 제복도 입지 않았다. 조철봉의 시선을 받은 아가씨가 주춤주춤 다가오더니 손을 내밀었다.

“저기, 옷을.”

“옷을 왜?”

“걸어놓게요.”

방에는 물론 화장실과 욕실까지 갖춰져 있었지만 대뜸 옷을 벗으라는 말을 듣자 조철봉의 심기가 불편해졌다. 잠자코 창가의 의자에 앉은 조철봉이 아가씨를 보았다.

“유사장이 보낸거야?”

“예.”

무안해진 여자가 시선을 내린 채 대답했다. 나이는 20대 중반 정도, 평범한 용모였지만 피부는 고왔고 체격도 날씬했다.

“거기 앉아.”

목소리를 부드럽게 한 조철봉이 눈으로 앞쪽 의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 근무한 지 오래되었어?”

“아뇨.”

여자가 머리를 저었다.

“오늘 첫 출근인데요.”

그순간 조철봉의 가슴이 편안해졌다. 불편한 기분이 가셔진 것이다. 순식간이다. 오늘 첫 출근이라는 말 한마디가 그렇게 만들었다. 흰 블라우스에 바지차림도 신선하게 보였으며 어리숙한 표정은 순진했기 때문이라고 믿어졌다. 룸살롱이나 요정에서 처음 만나게 되는 파트너가 열에 아홉은 나온지 얼마되지 않는다고 하는것을 숱하게 겪었어도 그렇다. 어떤 미친놈이 주인을 불러 그것을 확인하겠는가? 고객에 대한 서비스 차원에서 기분좋게 만들어주려는 선의의 거짓말인 것이다. 나온지 사흘 안이며, 이차는 나가지 않았고 성 경험이 거의 없다는 이 3대 기본 거짓말은 지구가 멸망할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몇살이냐?”

앞에 앉은 여자에게 조철봉이 물었다. 조철봉의 짐작으로는 20대 초반이다.

“스물셋이에요.”

맞다. 직업은 직장인이나 학생이다. 이것이 손님들이 반기는 업종이니까.

“직업은? 지금 뭘 하고 있어?”

“회사에 나가요.”

맞다. 머리를 끄덕인 조철봉이 눈을 가늘게 뜨고 여자를 보았다. 가장 많이 사용되는 직책은 경리다.

“무슨 일을 보는데?”

“경리요.”

조그만 회사다. 경리는 전화도 받고 차심부름에다 은행 출입도 해야한다. 문득 길게 숨을 뱉은 조철봉이 입을 다물었으므로 여자가 불안한 표정이 되었다.

“저기요.”

여자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제가 싫으시면 나갈까요?”

“응?”

조철봉이 정신이 난듯 눈을 둥그렇게 떴다. 이런 상황에서 ‘응. 가’하는 남자는 거의 없다. 지금까지 싫었더라도 그렇다. 대부분이 잡는다. 그 이유는 구차하게 열거할 필요도 없다.

“아냐. 싫은거 없어.”

달래듯이 말한 조철봉이 지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긴 훔쳐 보느라고 지치긴 했다.

“좀 피곤해서 그래.”

“제가 안마해 드려요?”

하고 여자가 물었다. 눈에 생기가 떠올라 있었다.

“안마 배웠어요.”

“좋아.”

조금 심술이 일어났던 마음이 다시 풀리면서 조철봉은 머리를 끄덕였다. 오늘은 하지 않았던 짓을 했기 때문인지 마음이 뒤숭숭했다. 자리에서 일어선 여자가 조철봉의 앞으로 다가와 섰다.

“그럼 벗고 침대에 누우세요.”

“홀랑 벗고?”

“네.”

조철봉의 시선을 받은 여자가 수줍게 웃었다.

“선생님이 제 첫 손님이세요.”

“정말이야?”

“그럼요.”

“홀랑 벗어도 정말 괜찮어?”

“괜찮다니까요?”

“넌?”

“전 가운 있어요.”

여자가 구석에 놓인 가방을 가리켰다.

“준비해 왔어요.”

“잠깐만.”

셔츠를 벗다 만 조철봉이 여자를 보았다.

“근데 유사장한테 어떻게 지시를 받은거야? 무슨 말이냐면.”

“훌 서비스를 하라고 하셨어요.”

“훌 서비스?”

“예. 다요.”

그러더니 여자가 다시 어색하게 웃었다.

“계산도 다 하셨어요.”

조철봉은 다시 옷을 벗었다. 셔츠와 양말, 그리고 마지막 팬티까지 벗는 동안 여자도 옷을 갈아 입었다. 벌거벗은 몸으로 침대에 똑바로 누웠을 때 여자가 다가와 옆에 앉더니 조철봉의 철봉 위에 수건을 덮었다.

“오일 마사지 해 드릴게요.”

옆에 오일병을 꺼내 놓으면서 여자가 말했다.

“돌아 누우세요.”

“아니, 그대로 해.”

본래 마사지에는 뜻이 없었던 조철봉이다. 그대로 누운채 말하자 여자는 조금 망설이는것 같더니 조철봉의 다리부터 오일을 바르기 시작했다.

“훌 서비스하면 어떤거야?”

조철봉이 천장을 바라보며 물었다.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물은 것이다. 그러자 여자가 오일을 바르면서 대답했다.

“다요, 섹스까지.”

“내가 첫 손님이라고 했지?”

“네.”

“섹스 잘하니?”

“그냥요.”

“그냥이라니?”

“남들 만큼은 해요.”

그때 여자의 손이 허벅지를 문질렀으므로 조철봉은 긴장했다. 어느덧 철봉이 수건을 천막 지주처럼 세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조철봉이 그대로 누운채 물었다.

“절정에 올랐을때는 어떤 기분이야?”

“그때요?”

하더니 여자가 수건을 젖히고는 조철봉의 철봉에도 오일을 문질렀다.

“으음.”

미끈거리는 오일이 손바닥과 마찰이 되면서 철봉에 짜릿한 쾌감을 주었으므로 조철봉은 신음했다.

“그땐 아무 생각이 없어요.”

여자가 두손으로 철봉을 문지르며 말했다.

“눈앞이 하얗고 온몸이 오그라드는 기분이 들때도 있어요.”

“으음.”

“선생님 물건 참 크네요.”

“크긴 뭘.”

“이렇게 큰 물건 첨이에요.”

“정말이야?”

“이렇게 큰 것이 어떻게 다 들어가나 몰라.”

여자가 혼잣소리처럼 말했지만 조철봉은 다시 신음했다. 여자는 분위기를 잘 맞추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흥분 안한다면 외계인일 것이었다.

“선생님.”

철봉을 주무르던 여자가 불렀으므로 조철봉은 시선을 들었다. 여자가 상기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하실래요?”

“뭘?”

“아이, 참.”

“너, 하고 싶니?”

“네.”

여자가 이번에는 부드럽게 철봉을 위에서 아래로 쓸었다. 철봉이 미끈거려서 마치 샘에 들어가 있는 것이나 같다. 조철봉이 다시 여자를 보았다.

“너, 조금 별난 여자구나.”

“첨이라 그래요. 내가 흥분했나봐.”

그러더니 여자가 엉거주춤 일어서서 짧은 치마와 팬티까지를 한꺼번에 벗었다. 조철봉은 숨을 멈췄다. 바로 눈앞에 여자의 미끈한 하체가 펼쳐져 있는 것이다. 밑에서 올려다보는 여자의 알몸 하반신은 신비롭게 느껴졌다.

“제가 위에서 해요?”

여자가 묻더니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조철봉의 몸 위에 앉았다.

“저, 지금 그냥 넣어도 돼요.”

관음회 모임에서 돌아와 집에서 잤다.

“내일 오기로 했다.”

뜬금없이 어머니가 말했으므로 조철봉은 머리를 들었다. 아침이면 집안이 수선스럽다. 영일의 등교 때문이다. 어머니는 영일을 키우는 재미로 이젠 사교춤도 끊었고 한달 동안 한번도 여행을 가지 않았다. 물론 대개가 당일치기 여행이었어도 그렇다. 어머니는 기사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영일이를 학교에 데려다주고 온 참이었는데 하교 때도 데리러 간다. 조철봉의 시선을 받은 어머니가 쌀쌀맞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내일 집에서 기다려야 된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나가면 안돼.”

“어머니.”

“내가 천신만고해서 만든 기회여. 네 맘에 들고 안들고는 나중 문제고 일단은 만나 보기나 해.”

“나, 정말.”

“내가 오죽 답답했으면 이러겠는가를 생각해봐라. 너도 양심이 있는 놈이라면 말이다.”

마침 이모와 친척 아주머니가 쓰레기를 버리러 밖으로 나갔기 때문에 어머니가 마음놓고 잔소리를 했다.

“영일이 에미 그 년은 인간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어미 노릇은 제법 했다. 애 가르칠 건 거의 가르쳤어. 물론 돈으로 떡칠을 했지만 말이다.”

만일 어머니가 서경윤이 영일을 옆방에다 두고 김병문과 그 짓을 해댄 걸 안다면 저 말도 쏙 들어갈 것이었다. 불쑥 그 충동이 일어났지만 조철봉은 침을 삼키면서 참았다. 어머니의 말이 이어졌다.

“내가 너무 서두는 것 같지만 연분이라는 것이 있어. 연분이 있으면 어떻게든 엮어지는 것이고 없으면 영일이 에미처럼 끝나게 된다.”

어머니에게 서경윤은 악연과 악녀, 악처의 교본이 되어있는 것이다. 무슨 좋지 않은 일이라도 생기면 경윤을 끌어다가 맞춰 말하면 그럴 듯해진다. 조철봉은 입맛이 달아난듯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아침 8시반, 어제 관음회에 나갔다가 밤11시쯤 들어왔기 때문에 어머니의 잔소리를 지금 듣는다.

“교육자 집안이라 믿을 만해. 거기에다 원숭이 하고 소는 잘 맞는다고 하더라.”

그동안 어머니는 궁합까지 본 모양이었다. 영일의 담임 이은지 선생은 32세에 소띠인 것이다. 요즘은 30넘은 미혼녀가 쌔고 쌨지만 어머니한테는 이은지가 혼기를 놓친 절박한 상황의 노처녀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어머니의 말을 들으면 이은지는 3년 전에 약혼까지 했다가 파혼을 하고는 그 뒤로 스캔들 하나없이 얌전하게 지냈다고 했다. 파혼 이유는 제약회사에 다니던 남자가 공금을 횡령해서 감옥에 들어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어머니는 이런 정보를 외가쪽으로 친척이 되는 아저씨한테 받았는데 조철봉은 군수사관 출신이라는 이 아저씨가 수상쩍었다. 그러나 60이 넘은 어머니 사촌동생이어서 눈을 감아주고 있는 상태였다. 그동안 어머니는 거의 매일 이은지를 만났다고 했다. 처음 만났을 때 인상이 좋았기 때문이겠지만 다음날부터 뒷조사를 하더니 영일이 핑계를 대고 점심을 세번이나 같이 먹었다는 것이다. 제 엄마와 헤어진 영일에게 담임 선생이 된 이은지가 어머니에게는 가장 바람직한 새 어머니상이며 믿음직한 보호자로 보였을 것이다.

“그럼 그 여자, 아니, 영일이 선생님은 어머니 속셈을 알아요?”

그때까지 딴전을 피우던 조철봉이 마침내 정색하고 어머니에게 물었다.

“어머니가 며느리 삼으려고 그런 공작을 하는지 알고 있느냐구요.”

그러자 어머니가 눈을 크게 떴다.

“그럼 요즘이 어떤 세상이라고 한달에 세번이나 점심을 같이 먹고 집에 초대를 해? 이선생도 다 알고 있다.”

“도대체 나에 대해서 뭐라고 말하신거요? 참고로 좀 들읍시다.”

“있는 그대로 말해주었어.”

어머니가 가늘게 뜬 눈으로 조철봉을 보았다.

“네가 회사를 열개쯤 갖고 있는데다가 북한땅 관광단지에다는 호텔까지 몇개 세우고 있다고 했지. 너만한 조건이면 미스코리아도 데려올 수 있어.”

“무슨 미스코리아.”

“의사도.”

“젠장.”

“박사는 너무 유식해서 내가 싫고.”

“제기.”

“어쨌든 그쪽도 마음이 있으니까 온다고 한거다. 만나볼수록 싹싹하고 차분하고 이쁘더라. 날보고는 이제 어머니라고 부른다.”

“둘이 알아서 잘 해보슈.”

“내일 점심먹고 탁 까놓고 이야기 해.”

“같이 살자고?”

“이 미친놈아. 한번 겪어봐야 할것 아니냐? 이 지지리 못난놈아.”

세게 혀를 찬 어머니가 어깨를 늘어뜨리면서 긴 숨을 뱉었다.

“그러고보면 돈도 다 필요없어. 전에 네 아버지랑 봉지쌀 사먹으면서 의좋게 살던때가 젤 가슴에 남는다.”

“…….”

“이놈아, 자식을 내놓았으면 책임을 져야 되는거다. 그리고 그 책임은 돈 만으로는 안되는 것이여.”

다시 말을 이으려던 어머니는 이모가 들어서는 바람에 입을 다물었고 그틈에 조철봉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 맞는 말이지만 인생이 어디 뜻대로 풀리던가? 어머니 말대로 인연이 되어야 엮어지는 것이다. 회사에 출근 했을때 기다리고 있던 최갑중이 사장실로 따라 들어서며 말했다.

“몰로토프씨가 어제 저녁에 또 연락을 해왔다고 합니다.”

잠자코 자리에 앉는 조철봉을 향해 갑중이 말을 이었다.

“그곳 아니더라도 투자 할곳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서둘건 없지요. 하지만 가부는 결정해야 될것 같습니다. 러시아쪽에서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영일이를 맡지 않았다면 조철봉이 진즉 러시아로 날아가 끝냈을 일이었다. 조철봉이 테이블 위에 놓인 달력을 보고나서 말했다.

“내일 집에 일이 좀 있으니까 모레 출발하자구.”

“예, 모레.”

몸에 생기를 일으킨 갑중이 상반신을 세우고 말했다.

“그럼 준비 하겠습니다.”

몰로토프는 러시아 하바로프스크 주지사로 외국자본의 투자 유치에 적극적이었다. 몇년간 러시아에 중고 자동차를 판매했던 조철봉의 오성자동차 서비스는 하바로프스크에 정비공장을 설립했는데 차츰 규모를 늘려 하바로프스크주에 8개의 정비소를 운영했다. 그런데 작년 말에 러시아 정부에서 매각하려고 내놓은 목재및 가구 공장을 오성이 인수하려다가 내부의 이견 때문에 조철봉이 보류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하바로프스크 주지사 몰로토프는 조철봉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었다. 갑중이 서둘러 방을 나갔을때 조철봉은 탁자 위에 놓인 영일의 사진을 보았다. 그러자 영일에게 새 엄마가 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퇴근하고 일찍 들어가는 것도 한계가 있다. 매일 이럴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자 처음으로 이은지를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관으로 들어선 이은지는 조철봉을 보더니 활짝 웃었다.

“안녕하세요.”

목소리도 맑고 밝다. 조금 당황한 조철봉이 어물거리면서 인사를 했지만 어머니가 떠들썩하게 맞는 바람에 들리지도 않았을 것이었다. 오늘은 일요일이어서 영일도 기다리고 있었는데 제 선생을 보더니 어려워하는 기색도 없이 환하게 웃는다. 그러고는 이은지의 손을 잡고 응접실로 앞장서 갔다. 뒤를 따르면서 조철봉은 은지의 몸을 보았다. 어쩔 수 없이 본것이지만 버릇이 되어서 알몸이 연상 되었다. 미끈한 종아리는 탄력이 넘쳤으며 걸음은 발이 조금 밖으로 벌려지면서 자신있게 걷는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응접실의 소파에 앉으면서 은지가 어머니와 조철봉의 중간쯤을 향해 머리를 숙여 예의 바르게 인사를 했다. 조철봉이 꾸벅 따라서 머리를 숙였을때 어머니가 길게 답사를 했다. 이모와 친척 아주머니는 은지의 초대 목적을 아는터라 대우가 더 극진했다. 어제는 손님 맞으려고 아줌마가 셋이 있는데도 도우미 셋을 더 고용해서 창고 바닥까지 닦았다. 은지 옆에 잠시 붙어있던 영일이 제 방으로 들어가 버렸고 어머니는 점심상 차린다면서 응접실을 나갔으므로 둘이 남았다. 그때 은지가 조철봉에게 말했다.

“어머님이 참 부지런하세요, 열성이시구요.”

그러고는 눈을 초승달처럼 만들면서 웃었다. 웃는 모습이 예쁜 여자가 있는 반면에 찡그리거나 새침한 표정이 매력적인 여자도 있다. 웃는 은지의 얼굴은 꾸밈이 없었고 그래서인지 보면서 편안해졌다. 은지는 머리를 짧게 잘랐는데 동그란 얼굴에 콧날의 선도 부드러운데다 눈꼬리가 약간 솟은 눈이 맑았다. 입술은 엷은 편이지만 단정해서 웃고나면 입끝이 빈틈없이 닫쳐졌다. 조철봉이 은지의 두눈을 똑바로 보았다.

“어머니는 하루라도 빨리 손주를 새엄마한테 맡기고 놀러 다니려고 그렇게 열성을 떠시는 겁니다.”

은지가 사고친 아이를 발견한 선생처럼 눈만 가늘게 떴고 조철봉이 말을 이었다.

“사교춤을 배우다가 말았고 영일이 때문에 해외여행도 미루고 있거든요.”

“설마.”

피식 웃은 은지가 조철봉을 보았다.

“손주보다 아드님을 더 생각 하시는거 같던데요. 머.”

“그게 그거죠.”

“바쁘시다고 들었어요.”

“영일이하고 이렇게 같이 있게된건 이혼한 후에 근래의 한달 뿐입니다.”

이제는 조철봉이 정색하고 말을 이었다.

“전에는 한달에 한번 얼굴 보고 이야기 할 정도였지요. 같이 살았어도 말입니다.”

“… ….”

“자식에 대한 책임감도 느끼지 않았습니다. 그냥 제 엄마한테 맡겨놓고 돈이나 던져주면 되는것으로 알았지요.”

“… ….”

“지금은 조금 느낍니다. 처음으로 내 혈육이라는 정도 배어납니다. 늦었지만 말이죠.”

그때 은지가 머리를 끄덕였다.

“어머님이 서두르시는것 같아서 저도 영일 아버님에 대해서 알아 보았어요. 그랬더니.”

은지의 눈이 조금 가늘어졌다가 원상으로 돌아갔다.

“자수성가하신 분으로 대단한 사업가시더군요. 놀랐어요.”

조철봉은 은지의 눈을 똑바로 보았다. 그렇다면 이제는 이쪽에서도 샅샅히 조사할 것이다. 은지의 팬티 색깔까지. 달거리 날짜까지 알아 낼수가 있다.

점심을 마쳤을 때 둘은 이층 베란다로 옮겨와 정원을 내려다 보면서 이야기를 계속했다. 4월 초순의 날씨는 따스했으며 담장가에 심은 진달래가 화사했다. 둘은 나란히 앉아 진달래와 앞쪽 동산의 노란 개나리, 마악 푸른 잎새가 돋아나는 정원의 잔디를 둘러보았다. 조철봉은 시가 15억7천짜리 저택에 대한 자긍심이 바탕에 있었지만 당연히 내색은 안했다. 겸손한 표정으로 진달래와 정원 구석의 개집에 매어놓은 6개월짜리 진돗개를 둘러보는 시늉을 했다. 월세집에서 이런 경치는 못보겠지만 기반이 든든해야 풍경 감상도 되는 것이다. 배가 불러야 제대로 사물이 보이는 이치와 같다. 이은지가 아이 딸린 남자 집안의 초대에 응한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15억7천짜리 저택뿐만 아니라 수백억대의 재산이 후광처럼 비치고 있기 때문일 것이었다. 그때 은지가 머리를 돌려 조철봉을 보았다.

“솔직히 영일이 아버님은 특급 남편감이에요. 요즘은 성품이나 용모보다도 재력을 우선으로 쳐 주거든요.”

은지가 차분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용모나 성품도 그만하면 뛰어나시고, 저한테는 과분한 분이시죠.”

그러고는 은지가 어색한 듯 한쪽 볼에 보조개를 만들면서 웃었다.

“하지만 어쩌죠? 전 결혼할 마음이 전혀 없거든요. 그냥 이대로 지내고 싶어요, 아이들 가르치면서.”

그럴 줄 알았다. 조철봉은 담장의 진달래로 시선을 옮기고는 머리를 끄덕여 주었다. 처음에 노골적으로 추어줄 때부터 맺어질 이야기가 대충 예상이 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나왔다가 결론에서 ‘하자’한다면 실성한 여자다. 조철봉은 힐끗 은지를 보았다. 제가 내린 결말에 스스로 감동을 받은 모양으로 은지의 볼은 조금 상기되어 있었다.

“영일 아버님께 이 약속은 해드릴 수 있어요. 영일이를 자식처럼 돌봐 드릴게요. 학년이 바뀌고 담임이 안되더라도 제가 신경쓰겠어요.”

“…….”

“마침 영일이도 절 잘 따르고, 애가 성격이 참 밝고 솔직해요. 누구한테라도 귀여움을 받을 만해요.”

그 순간 조철봉은 코가 막히는 것 같더니 눈이 흐려졌으므로 긴장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숨을 들이쉬면서 눈을 한번 끔벅이자 눈물 두 줄기가 주르르 볼을 타고 흘렀다. 그것을 은지가 보았다. 마악 입을 벌렸던 은지가 그 꼴을 보더니 입을 다시 닫았는데 눈은 동그래졌다. 조철봉은 개집을 노려보고 있었지만 은지의 반응을 샅샅이 감지하는 중이다. 다시 숨을 들이쉬면서 눈을 슬쩍 감았다가 떴을 때 눈물은 또 쏟아졌다. 구차하게 돌아간 어른이나 억울하게 잃은 돈 따위를 생각하지 않아도 마음만 먹으면 내리 쏟을 수가 있는 것이다.

“영일 아버님.”

하고 은지가 조심스럽게 불렀으므로 조철봉은 놀란 듯 머리를 들었다가 외면했다. 이럴 때 우는 얼굴을 정면으로 들이대는 게 아니다. 시청률 10%도 안되는 드라마에서나 그런다. 외면한 채 손바닥으로 얼굴을 닦은 조철봉이 은지에게 비스듬한 시선을 준채 말했다.

“아, 미안합니다.”

목소리는 차분하다. 시청률 10%대 드라마나 이럴 때 울먹이며 말한다.

“자, 그럼 산책이나 하실까요? 그러고는 제가 모셔다 드리지요.”

될 수 있는 한 길게 빼지 않는 것이 낫다.

왜냐하면 작업을 하기로 했으니까. 은지가 영일이의 성품을 칭찬할 때 감동이 오면서 그렇게 마음이 굳어졌다.

다음날 오후에 조철봉은 하바로프스크의 러시아 호텔에서 주지사 몰로토프와 마주앉아 있었다.

오후 3시가 조금 지난 시간이었는데 조금 열려진 창으로 들어온 바람결에 비릿한 물냄새가 맡아졌다. 창 밖으로 아무르 강이 내려다 보이는 것이다.

장방형 테이블 건너편의 중심에 앉은 주지자 몰로토프는 체격이 컸다. 회색 머리칼에 눈동자도 잿빛이어서 곰이 연상되었다. 그러나 몰로토프는 시종 웃었다. 조철봉과 시선만 마주치면 웃었는데 그것이 꾸민것 같지가 않았다. 그래서 성실한 인품으로 느껴졌다. 성실한 곰이다.

“아무르 산업의 고용원은 그대로 일하게만 해준다면 밀린 임금은 받지 않겠다고 합의를 했습니다.”

몰로토프가 열심히 말했고 고려인 통역이 한국어로 통역했다. 조철봉은 최갑중과 기조실의 김재석 상무, 그리고 팀장급 수행원 3명까지 동행이었고 몰로토프도 대여섯명의 보좌역과 함께였으므로 방 안에는 10여명의 인원이 둘러앉았다. 다시 몰로토프의 말이 이어졌다.

“그리고 아무르 산업에 시베리아 북부의 임야 2만㎢에 대한 벌채 허가권을 드리겠습니다. 거기에다.”

통역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몰로토프는 열심히 말을 이었다.

“토지를 임차한다면 연방정부의 승인을 받도록 도와드리죠. 그것도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자 조철봉이 머리를 돌려 김재석을 보았다. 김재석은 해외 투자 전문으로 러시아 사정에 정통했다. 조철봉의 시선을 받은 재석이 눈치빠르게 대답했다.

“임차기간은 대개 50년입니다. 기간 연장은 가능하고 석유나 가스 발굴도 되지만 이 경우는 당국의 허가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임차지 내에서의 공장 설립이나 상업 활동 등은 거의 러시아 당국의 구속을 받지 않습니다. 준 독립지역 형태로 운영이 되는 것입니다.”

조철봉은 머리를 끄덕였다. 지금 몰로토프는 아무르 산업의 원료로 쓰일 삼림의 임야 허가권 문제를 이야기 하다가 대지 임차 문제까지 설명해준 셈이었다. 그러나 골칫 덩어리로 남아있는 아무르 산업의 처리가 당면 문제였다. 이윽고 머리를 든 조철봉이 몰로토프를 보았다.

“좋습니다. 내일 오전에 이 문제를 결정하겠습니다.”

통역의 말을 들은 몰로토프가 활짝 웃더니 테이블 위로 몸을 숙여 손을 내밀었다.

“잘 부탁합니다, 미스터 조. 아무르 산업을 인수해 주시기만 한다면 적극 협력해 드리겠습니다.”

“노력해 보겠습니다.”

악수를 나눈 조철봉이 몰로토프 일행을 엘리베이터 앞까지 배웅했다. 방으로 돌아온 조철봉이 김재석에게 말했다.

“아무르 산업 인수와 함께 토지 임차를 추진해 보도록.”

“임야 벌채 허가권과 함께 말입니까?”

조철봉이 머리를 끄덕였다.

“임차지에 공장을 세우고 도시를 건설해 보겠다. 2만㎢면 한국의 1개도 만한 면적 아닌가?”

그러자 김재석이 대답했다.

“러시아 연방정부는 시베리아 북부에 15만㎢ 정도의 영토를 임차지로 공시했지만 아직 아무도 나서지 않았습니다. 한마디로 얼어붙은 땅입니다.”

15만㎢면 남한 면적보다 훨씬 큰 땅이다. 재석의 시선을 받은 조철봉이 결심한듯 말했다.

“가능한한 넓은 땅을 임차받도록.”

“예, 사장님.”

재석의 얼굴에도 생기가 떠올랐다. 이것은 모험이다.

“추위쯤은 아무것도 아냐.”

둘러앉은 수행원을 차례로 보면서 조철봉이 말했다.

“불모지도 상관없다. 땅만 있으면 돼.”

“사장님.”

정색한 최갑중이 조철봉을 불렀다. 임차지 문제는 갑중한테도 전혀 상의한 적이 없었던 일이었다. 갑중은 조철봉이 몰로토프의 호의에 흥분해서 충동적으로 임차지 문제를 결정한 것으로 보았다.

“아무르 산업에 필요한 목재는 조건이 좋은 임야 몇만 평방키로만 있어도 됩니다. 그만큼만 있어도 50년은 베어 쓸 수가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통장에 넣은 돈을 빼먹는 것 같군.”

조철봉이 다시 주위를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땅을 임차해준다는데 그 땅에다 공장 세우는 것이 낫지 않겠느냔 말이야. 땅을 50년 임차받으면 우리 다음 세대까지 주인 행세를 할 수 있지 않겠어?”

“그렇습니다.”

대답은 김재석이 했다. 긴장한 표정으로 김재석이 말을 이었다.

“임차지 안의 경제활동은 자유이며 연방정부에 기본세만 내면 됩니다. 임차를 받게 되면 주 정부보다 더 독자 권한이 있는 셈이지요.”

“조건은?”

조철봉이 묻자 재석이 서류를 펼쳤다.

“불모지여서 아직 아무도 나서지 않았습니다. 투자가로부터 외면을 받았지요. 그러나 임차하려면 임차지 운용계획을 제출해서 승인을 받아야 하고 담보금을 내야 합니다.”

그러고는 재석이 서류를 한장 빼내어 조철봉 앞에 놓았다.

“7개 구역중 서너개를 통합해서 임차해도 됩니다. 전체를 다 할 수도 있지요.”

서류에는 임차 예정지의 구역도가 그려져 있었는데 광대한 땅이었다. 시베리아 북부의 황무지여서 드문드문 마을만 표기되어 있을 뿐으로 제대로 된 도로도 없다. 그러나 아래쪽 한반도보다도 임차지는 더 컸다. 서류를 굽어본 갑중이 또 한마디 했다.

“이거 임차지를 할당받으면 길부터 닦아야겠구만. 어이구, 하바로프스크에서도 무지하게 머네.”

머리를 든 조철봉이 말했다.

“시베리아에 고려인이 몇명이나 살고 있는지, 그리고 우리가 임차지를 떼어 받아서 일자리를 만들었을 때 옮겨올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도 조사해 보도록.”

“예. 사장님.”

재석이 머리를 끄덕였다. 이제 조철봉의 결심이 굳은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조철봉이 갑중과 수행원들을 차례로 보았다.

“우리가 중국에서 조선족을 대거 고용했고 탈북자까지 받아들여서 사업에는 성공했지만 결국 중국땅만 기름지게 만들어준 형편이 되었어. 우리뿐만이 아니라 다른 한국 기업도 마찬가지야.”

조철봉이 턱으로 탁자위에 펼쳐진 시베리아 지도를 가리켰다.

“땅을 임차해준다니 외국에다 그냥 투자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어? 내땅에다 공장을 짓고 거리를 만들게 되는것이란 말야.”

“… ….”

“러시아 땅의 고려인들이 제 고향처럼 생각하게 될지도 몰라.”

“중국땅에서 조선족들이 몰려올 수도 있습니다.”

재석이 맞장구를 쳤다. 아까부터 재석은 조철봉의 반응에 호의적이었다. 정색한 재석이 말을 이었다.

“러시아 연방 각국으로 흩어진 고려인들도 지금까지 방황하고 있습니다. 임차지의 기반만 잡힌다면 그들이 몰려올 것입니다.”

재석의 목소리에 열기가 띠어 있었다.

사람은 겉만 보아서는 모른다. 겪어봐야만 한다. 겪을 여유가 없으면 알아보는 수밖에 없다. 조철봉은 지금까지 공사를 막론하고 대인 관계를 시작하기 전에 그 방법을 사용해왔다. 지금 박경택으로부터 이은지의 조사 보고를 들으면서 충격이 금방 가라앉은 것은 그런 경우를 수없이 겪었기 때문이다. 겉 인상과 속이 다른 인간이 여기 또 있다. 경택의 말이 이어졌다.

“이은지씨는 3년전 약혼을 했다가 파혼했습니다. 상대는 제약회사 자금부 대리였던 강명식으로 공금 5억을 횡령해서 경마로 날렸습니다. 2년형을 받고 작년에 출소했습니다. 그런데.”

경택이 머리를 들고 조철봉을 보았다.

“이 자가 직업없이 떠돌다가 바로 이틀전에 이은지씨의 아파트에 찾아왔는데요.”

그러더니 경택이 탁자위에 아직도 놓여져 있는 녹음기의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잠시후에 사내의 목소리가 울렸다.

“5천만 내놔. 그러면 네 눈앞에서 사라져 줄테니까.”

사내가 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사흘 여유를 주겠어. 그러지 않으면 넌 끝장이야.”

“정말 이러지마.”

은지가 사정하듯 말했다.

“내가 그런 돈이 어디 있다고.”

“이 아파트 전세금이라도 빼.”

“어떻게 사흘안에 빼란 말야?”

“전세금 담보로 빌리든지.”

“명식씨.”

이제 은지의 목소리에는 울음이 섞여 있었다.

“제발 그러지마. 부탁할게.”

“웃기고 있네.”

코웃음을 친 사내 목소리가 높아졌다.

“내가 지금 뵈는게 없단 말이다. 어머니 반지까지 빼다 팔아 먹은 형편이야. 그런데 네 비디오 필름이 박스 속에서 발견되었을 때 내 기분이 어땠는지 알아? 하느님이 도와주신 것 같았단 말이다. 하느님이, 야, 내아들 명식아, 이걸 갖고 그 매정한 년, 지 약혼자가 빵에 들어가자마자 약혼을 파혼해버린 이은지란 년한테 네가 일용할 양식을 받아 오너라, 하신 것 같았단 말이다.”

사내가 이젠 잇새로 말했다. 눈도 치켜뜨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이 진한 필름을 한 백개쯤 복사해서 네 학교 선생은 물론 학생들한테도 다 나눠줄거다. 인터넷에다도 올리고, 아예 길거리에서도 뿌릴테니까.”

그때 경택이 녹음기의 버튼을 눌러 끄더니 조철봉을 보았다.

“이놈하고 이은지씨의 섹스 장면을 찍은 필름 같습니다. 그리고.”

경택이 다시 버튼을 누르자 잠시후에 가라앉은 여자의 목소리가 울렸다.

“내 통장에는 2천5백밖에 없는데 그거라도 가져가.”

처음에 이은지와 정사를 나눴던 여자의 목소리였다. 여자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내가 다른 곳에다 알아볼게.”

“그러지마.”

은지가 만류했다.

“내가 처리할거야.”

“돈을 줘야 되잖어? 돈 준비되겠어?”

“전세금뿐야. 통장에는 몇백밖에 없어.”

“그럼 그 작자 말대로 전세금 담보로 빌리려구?”

“아니.”

“그럼 어떻게 하려고?”

“나 그만둘거야.”

“그만두다니?”

놀란 여자가 묻자 은지의 목소리가 더 차분해졌다.

“그 자를 경찰에 고발할거야. 학교에는 사표내고, 난 이 상태로는 애들 못 가르쳐.”

“생각 잘 한거야.”

박경택이 녹음기의 버튼을 눌러 다시 껐을 때 조철봉은 정색하고 말했다.

“당연히 그래야지. 저런 놈한테 끌려다니면 안돼.”

그러더니 입맛을 다시고는 소파에 등을 붙였다. 제 뒤가 구린 놈일수록 남의 허물에 더 민감한 법이다. 또한 사기꾼은 제가 써먹던 방법으로 제 등을 치려는 사기꾼을 보면 더 열을 받는 법이다. 조철봉이 잠자코 지시만 기다리는 경택을 보았다. “하지만 저놈 때문에 영일이 담임선생이 그만두면 안되겠지? 영일이도 제 선생을 좋아하는 모양인데 말야.”

경택이 감히 대답을 하겠는가? 눈만 끔벅이는 경택을 향해 조철봉은 말을 이었다.

“내 마음이 또 변했어. 손을 써야겠어.” 그러자 경택이 퍼뜩 머리를 들었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은 것이다. 그날 오후에 조철봉은 회사 근처의 일식당 동경에서 고등학교 1년 후배인 이대권과 식사를 했다. 이대권은 지난달에 대성전자의 상무로 승진했는데 발군의 영업실적을 올렸기 때문이다. 이대권은 물론이고 조철봉의 동기 중에서 대기업인 대성전자 수준의 상무가 된 케이스가 없는 것이다. 조철봉은 가끔 이대권과 만나 기업 경영과 처신, 또는 미래의 계획을 상의했는데 오늘은 러시아 임차지 문제로 부른 것이다.

“형, 지금까지 형이 해놓은 일 중에서 이번 일이 단연 압권이야.”

설명을 들은 대권이 열띤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까지 번 자금도 다 임차지에 투자한다니 됐어. 형은 그 기개만으로도 역사에 남을거야.”

예상밖의 과한 칭찬을 받은 조철봉이 조금 얼떨떨한 얼굴로 대권을 보았다. 대권 앞에서는 표정도 꾸밀 필요가 없는 것이다.

“네가 그렇게 말해주니까 힘이 나긴하는데.”

“신천지를 세우는 거야, 형.”

대권이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

“새로운 땅에다 말야.”

“그렇지, 신천지.”

조철봉이 머리를 끄덕였다. 이제는 어깨도 펴졌고 얼굴에는 웃음기가 떠올랐다.

“내 말이 바로 그거다. 신천지야, 너도 신천지라고 하는구나.”

“잘해 봐, 형.”

“그 임차지 이름도 만들어 놓았어.”

“뭔데?”

“한랜드.”

“으음.”

정색한 대권이 머리를 끄덕였다.

“난 철봉랜드가 아닐까 했는데 잘 지었네. 한랜드, 괜찮네.”

“그러냐? 그럼 한랜드로 정했다.”

다시 기분이 상승된 조철봉이 웃음띤 얼굴로 대권을 보았다.

“어때? 오늘 한잔할까? 오랜만인데.”

그러자 대권이 쓴웃음을 지었다.

“안돼, 형.”

“왜? 시간이 없어?”

“아니.”

“그럼 뭐야?”

“난 소변용 기구만 달고 다녀.”

“뭐가?”

했다가 조철봉의 이맛살이 찌푸려졌다.

“아니, 멀쩡했던 그게 왜?”

“스트레스 때문인가봐.”

“안서?”

“글쎄, 소변만 내놓는다니까.”

그러고는 대권이 길게 숨을 뱉었다.

“대기업 상무면 뭐해? 대포 쏘는 낙을 잃고 소변용 기구만 달고 다니는 신세가 되었으니.”

대권의 말끝이 떨렸다.

한마디로 성불능이라는 말이었다. 조철봉은 지그시 이대권을 보았다. 이대권 또한 조철봉에 대해서 속속들이 안다. 온갖 잡짓을 하고 다니는 조철봉의 행태 중에서 가장 중심이 성생활이라는 것도 안다. 조철봉의 시선을 받은채 이대권이 한모금 정종을 삼키더니 입맛을 다셨다.

“형, 폭탄주로 하지.”

“그러든지.”

대번에 동의한 조철봉이 벨을 눌러 양주와 맥주를 시켰다. 대권은 폭탄주를 즐겨 마신다. 소맥, 오십세주, 막걸리에다 양주까지 섞어 마시더니 요즘은 도로 위스키에 맥주로 되었다. 술이 들어왔고 금방 폭탄주를 제조한 대권과 조철봉은 건배했다.

“자, 내 소변기구를 위하여.”

술잔을 든 대권이 소리치자 조철봉은 입맛을 다셨다.

“염병.”

그러고는 둘은 단숨에 잔을 비웠다.

“형.”

술잔을 내려놓은 대권이 조철봉을 보았다.

“형에게 섹스는 뭐야?”

대권이 묻자 조철봉은 금방 대답했다.

“희망이지.”

퍼뜩 눈을 치켜뜬 대권에게 조철봉은 목소리를 낮췄다. 대권은 성불능이다.

“노곤한 오후에 섹스에 대한 상상을 하면 기운이 나는 법이지. 에너지의 원천이다.”

“흥.”

“내가 네 기구를 회복 시켜주지.”

그러면서 조철봉이 다시 폭탄주를 제조하고는 대권에게 내밀었다.

“본래의 용도로 돌려주겠단 말이다.”

“형이 무슨 재주로.”

“다 방법이 있어.”

“잘 한다는 병원도 여러곳 찾아가 보았고 한약도 반년이나 먹었지만 안돼.”

“다 방법이 있어.”

“뭔데?”

마침내 대권이 눈을 가늘게 뜨고 정색했다. 대권은 정통파다. 연장이 사용가(可) 상태였을때도 정상위만 했다. 오랄도 안했다.

“글쎄, 나한테 맡겨.”

자신있게 말한 조철봉이 다시 건배를 제의했다.

“네 연장을 위해서 건배다.”

“일어서기만 한다면.”

술잔을 쥔 대권이 비분강개한 표정으로 조철봉을 보았다.

“나는 무슨짓이라도 하겠어.”

그러고는 단숨에 술잔을 비웠다. 같이 잔을 비운 조철봉이 대권의 시선을 받고는 빙긋 웃었다. 대권은 지금 조철봉으로부터 어떤 언질이라도 듣고싶은 것이다.

“좋아. 내가 모레 러시아로 출발하기 전에 널 만들어주지.”

조철봉이 정색하고 말을 이었다.

“내일 다시 만나자.”

“만나서 어떻게 하려는거야?”

“글쎄 나한테 맡겨.”

“내일 저녁에 회장이 주최한 모임이 있지만.”

눈을 치켜뜬 대권이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형만 믿고 빠지기로 하지.”

“7시에 여기서 만나. 밥부터 먹고 시작하게.”

“뭘?”

“그건 나한테 맡기고.”

“알았어.”

다시 폭탄주를 만들면서 대권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희망에 찬 얼굴이다. 대권이 술잔을 들며 말했다.

“그래, 결과가 어떻게 되건간에 난 내일까지 희망을 갖게 되었군. 고마워. 형.”

방법은 없다. 이대권이 말한 대로 조철봉은 하루동안 희망을 품게 해주었을 뿐이다. 내일 저녁에 근사한 여자를 소개해 주기는 할 것이다. 그리고 여자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나서 성사가 되면 후사하겠다고 부탁도 할 것이었다. 대권과 헤어진 조철봉이 집에 돌아왔을 때는 저녁 9시 반경이었다. 조철봉으로서는 일찍 귀가한 셈이었다. 영일은 자지 않고 응접실에서 할머니들과 같이 있었다.

“아빠, 오셨어요?”

영일은 건성으로 인사를 했지만 조철봉은 감동했다. 전에는 한 달에 한두 번 정도나 영일을 보았고 그때마다 꼭 선물을 안겨 환심을 얻었다. 그런데도 영일한테서 제대로 인사를 받지 못했던 것이다. 옷을 벗고 나온 조철봉이 영일의 옆에 앉았다.

“친구 많이 만들었어?”

조철봉이 묻자 영일이 피식 웃었다.

“응. 친한 놈이 셋, 아니 넷이야.”

“집으로 데려오지 그래?”

“오늘도 둘 데려와 놀았어.”

“잘했다.”

“아빠, 방학 때 외국 데려갈 거지?”

“물론이지.”

방학은 아직 두 달이나 남아 있었으므로 조철봉은 자신있게 머리를 끄덕였다. 영일이 뭘 사달라고 할 때가 가장 부담이 없는 반면에 어딜 같이 가자고 하면 요즘은 겁부터 났다. 그때 TV를 보는 것 같았던 어머니가 나섰다.

“얘, 내가 오늘 영일이 선생을 만났는데.”

흘끗 영일에게 시선을 주었던 어머니가 목소리를 낮췄다.

“내일부터 사흘 동안 휴가를 냈다는구나. 얼굴이 안 좋아서 어디 아프냐고 했더니 아니라고 하더라.”

“…….”

“그런데 너, 어떻게.”

“저, 모레 러시아에 다녀올 테니까 어머니, 영일이 잘 부탁해요.”

조철봉이 화제를 바꾸자 어머니는 혀를 찼다. 그러나 출장에 면역이 된 터라 다시 TV로 시선을 돌렸다.

이은지가 휴가를 낸 것은 강명식 때문이다. 강명식이 요구한 돈 5천만원을 아직 만들지 못한 것이다. 조철봉은 팔을 뻗어 옆에 앉은 영일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내일 오후 1시에 이은지는 일산 교외의 식당에서 강명식을 만날 것이었다. 은지의 친구이자 애인인 조미선도 함께 휴가를 내었지만 이번 일에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아빠.”

영일이 불렀으므로 조철봉은 생각에서 깨어났다.

“선생님이 오늘 울었어.”

조심스럽게 영일이 말했으므로 조철봉만 겨우 들었다. 긴장한 조철봉이 흘끗 어머니에게 시선을 주고 나서 낮게 물었다.

“왜?”

“몰라. 내가 물으니까 배가 아프다고 했는데.”

“그래서?”

“운동장을 보면서 눈물을 흘렸어.”

“그래?”

“그건 나만 보았어.”

머리를 끄덕인 조철봉이 영일의 어깨를 당겨 안았다.

“너, 네 선생님이 좋아?”

“괜찮아.”

“자식은.”

심호흡을 한 조철봉은 입술을 일그리고 웃었다. 명식의 협박에 대한 압박감과 분노, 그리고 자신의 무기력이 복합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머리를 든 조철봉은 옆쪽에 앉은 어머니를 보았다. 은지의 애인이 같은 학교 여선생이라는 것을 어머니가 안다면 어떤 얼굴이 될까?

“웬일이신데요?”

조미선이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지만 표정은 사무적이었다. 박성용의 난데없는 연락에 의아해 하는 것이다.

“잠깐 드릴 말씀이 있어서.”

박성용이 버릇처럼 손바닥으로 이마를 쓸었다. 조미선이 지금 전세로 살고 있는 월하 오피스텔은 박성용의 부동산 사무실을 통해 거래가 되었다. 그리고 그 전에 살던 화정의 아파트도 박성용이 구해주고 매매까지 성사시켰으니 햇수로는 3년째 인연이며 나쁜 관계는 아니다. 오전 11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둘은 조미선의 월하 오피스텔 바로 건너편에 위치한 커피숍에 마주앉아 있었는데 박성용이 이곳까지 찾아온 것이다. 미선이 묻는 듯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으므로 성용은 헛기침부터 했다.

“저기,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린다고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네, 말씀하세요.”

손목시계를 내려다보는 시늉을 하면서 미선이 재촉했다. 휴가를 내고 오피스텔에 있었지만 그야말로 좌불안석이었다. 강명식과 이은지가 오늘 오후 1시에 만나기로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은지는 명식이 요구한 5천만원 중에서 겨우 1천2백만원을 만들어 놓았다. 명식은 한푼도 깎아줄 수 없다고 했는데도 은지는 미선의 도움마저 거절한 것이다. 그렇다고 미선이 잔액을 다 채울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수중에 있는 현금을 다 긁어모았지만 2천2백밖에 되지 않는다. 은지의 돈과 합해도 1천6백이 부족했다. 그때 성용이 말을 이었다.

“저기, 지난번에 제 사무실에 오셨을 때 사무실에 있던 제 후배를 기억하실는지 모르겠네요. 그때 서너 명이 함께 있었지만 제일 안쪽에 있던 친구인데.”

미선의 이맛살이 조금 찌푸려졌다. 성용의 사무실은 항상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그렇지만 어느 누구한테 시선을 준 적도 이야기를 한 적도 없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놈인지 기억이 날 리가 없다.

“모르겠는데요.”

“당연하지요.”

머리를 끄덕인 성용이 땀이 번진 이마를 손바닥으로 닦았다. 그 버릇 때문인지 성용은 반 대머리였다.

“그놈은 경찰인데 경위지요. 경위면 간부입니다. 특수수사 전문으로 사기, 협박범만 취급해 왔는데 우연히 제 사무실에 들렀다가 그때 선생님을 한번 보더니 저를 매일 들볶고 있습니다. 선생님을 소개시켜 달라는 거죠.”

“…….”

“나이는 서른일곱인데 아직 미혼입니다. 경찰대 출신에다 특수수사 전문이라 아주 장래가 양양합니다. 그놈이 잡아넣은 공갈 협박범만 1백명이 넘는다는군요. 우리하고는 상관이 없는 일이지만 말입니다.”

“…….”

“그놈이 오늘은 직장도 쉬고 지금 제 사무실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선생님을 한번 만나게 해 달라는 겁니다.”

“…….”

“우리 같은 서민이야 경찰 계통에 있는 인간들하고 접촉할 필요도 없습니다만 그 사람들도 남자고 감정을 가진 인간이죠. 선생님을 한번 보고 나서 애만 태우고 있다는 것만 봐도 그렇지 않습니까?”

“…….”

“이거, 역시 제가 기분만 상하게 해드린 것 같군요. 이럴 줄 예상도 했습니다만.”

쓴웃음을 지은 성용이 이마를 닦더니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쨌든 그놈한테 최선은 다했습니다.”

그때 미선이 머리를 들고 성용을 보았다.

“잠깐만요.”

전화기를 귀에서 뗀 조철봉이 앞에 앉은 이대권을 보았다.

“됐어. 이젠 네 차례야.”

“형.”

하면서 대권이 말을 이으려다가 조철봉에게 잘렸다.

“여자는 너한테 매달릴 거다. 제 친구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말야. 그럼 넌 뜸을 들이다가 승낙을 하는 거야.”

조철봉이 열변을 토하는 동안 대권은 이제 듣기만 했다.

“대신 조건을 하나 내놓는 거지. 너하고 하룻밤 같이 보내 달라고 말야.”

“형.”

이맛살을 찌푸린 대권이 조철봉을 쏘아 보았다.

“연장이 서지도 않는 판에 웬 하룻밤?”

“젠장.”

조철봉이 눈을 흘겼다.

“서는지 안 서는지 네가 해봤어? 그렇게 미리 기가 죽는게 네 연장 안 서는 것하고도 관계가 있단 말이다.”

“아니, 그리고.”

대권도 물러서지 않고 말을 이었다.

“내가 이래봬도 대기업 이사인데 경찰을 사칭하고 문제라도 되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내 목이 달아나는 건 둘째고 쇠고랑 차는거 아녀?”

“그건 나한테 맡기라니까 그러네.”

커피숍 안에는 둘뿐이었지만 조철봉이 목소리를 낮췄다. 이곳은 조철봉의 저택 건너편의 커피숍이다. 조철봉이 대권을 이곳으로 불러낸 것이다.

“자 그럼 다시 상황을 정리하자구.”

심호흡을 한 조철봉이 쿠데타 모의를 하는 장군처럼 비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 여자가 지금 불편한 상황에 몰려 있다는건 알고 있지? 제 절친한 친구가 협박을 당하고 있단 말이다. 그래서 휴가까지 냈어.”

“그건 알아.”

“너는 부동산 사장 박성용의 고향 후배가 되는 거지. 현직 경찰 특수수사 전문 경위이고, 넌 조미선씨를 부동산 사무실에서 한번 보았어. 그리고 그순간에 뿅 간거야.”

“그만큼 괜찮은 거야?”

“괜찮아.”

“어째 대답이 시원치 않네.”

“야, 내가 널 위해서 이 모든 것을 만들어 놓았단 말이다.”

조철봉이 정색하자 대권은 입맛을 다셨다.

“참, 내. 내가 졸지에 경찰이 되다니. 별짓을 다 하는구만.”

“성사시키려면 무슨 짓을 못해?”

“글쎄. 내가 그, 조미선인가 소미선인가 그 여자하고 된다는 보장이 있느냔 말이야. 내 말은….”

이번에는 대권이 정색했다.

“괜히 어렵게 트릭을 만들어 놓고 막상 벗고 누웠을 때 성사가 안 되면 말짱 도루묵이 아니냔 말이야. 내 말은….”

열을 받은 대권이 말을 이었다.

“차라리 아무 여자나 모셔다가 시험을 해 보는 것이 덜 부담이 된다는 말이야. 내 말은….”

그것을 조철봉이 왜 모르겠는가? 오늘 저녁 대권을 그렇게 해주려다가 어젯밤에 생각이 바뀐 것이다. 조미선을 대권과 엮어서 떼어내는 작업이다. 은지의 인생에서 미선을 떼어내는 것이다. 그러나 조철봉이 눈을 치켜뜨고 대권을 보았다.

“너, 온갖 약을 다 먹어도, 별놈의 수단을 다 썼어도 안 섰다면서?”

대권이 눈만 끔뻑였고 조철봉의 말이 이어졌다.

“너, 레즈비언, 그러니까 동성애자인 여자하고는 안 해봤지? 그런 여자하고 한번 기회가 온다면 네 기계가 가동될지도 모르잖아?”

펜을 내려놓은 이은지는 한동안 사직서를 내려다본 채 움직이지 않았다. 내일 학교에 사직서를 내 버린다면 강명식은 허를 찔린 셈이 될 것이다. 놈이 노리는 것은 이쪽의 체면일테니 학교에다 테이프를 뿌려 보았자 버스 지난후에 손을 든 것이나 같다. 길게 숨을 뱉은 이은지가 머리를 들고 벽시계를 보았다. 오전 11시20분이다. 약속시간은 1시였으니 시간은 많이 남았다. 이곳에서 택시로 20분 거리밖에 되지않는 것이다. 그때 핸드폰이 울렸으므로 은지는 긴장했다. 그러나 발신자 번호를 본 은지는 서둘러 핸드폰을 귀에 붙였다. 조미선의 전화였기 때문이다.

“응, 왜?”

하고 은지가 행동과는 다르게 무뚝뚝한 목소리로 응답하자 미선이 물었다.

“은지야, 너, 몇시에 나갈거야?”

“그건 왜 물어?”

“약속시간이 1시지?”

“글쎄, 왜?”

“대화동 에덴가든이고?”

다 알면서 묻는 말이었으므로 은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때 미선이 말을 이었다.

“내가 12시반에 다시 연락 할테니까 그때까지 꼭 집에서 기다려. 나가지 말고 말야.”

“왜?”

“글쎄, 내 말좀 들어.”

이번에는 미선의 목소리가 굳어져 있었다. 미선이 더 목소리를 낮추더니 또박또박 말했다.

“내가 연락 할테니까 절대로 너 혼자 나서지 말고 기다리란 말야. 제발 내 말대로 해.”

그러고는 전화가 끊겼다. 핸드폰을 내려놓은 은지는 다시 긴 숨을 뱉었다. 미선과 가까워진것은 아직 반년밖에 되지 않았다. 전에는 서로 동성이며 동료로서 호감을 느끼는 정도였는데 그날 은지의 방에 놀러온 미선과 술을 마시고나서 이렇게 발전된 것이다. 은지는 물론이고 미선도 마찬가지로 동성에 대한 성적 감정을 느낀적이 없었다. 미선은 그것이 잠재되어 있었던 모양이라고 말했지만 부담을 느끼는것은 분명했다. 그것은 은지도 마찬가지였다.

가끔, 한달에 한번이나 두번쯤 육체 관계를 맺을때는 몰두했지만 처음만큼 자극이 오지는 않았다. 미선이나 은지도 기구를 많이 사용하는 것을 꺼렸는데 그것은 두사람 모두 부자연스러운 방법으로 얻어지는 쾌락에 거부감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둘은 육체 관계를 서로의 유대감과 신뢰를 증진시키는 윤활유 역할 정도로 간주했고 그 결과는 만족할 만했다. 지금까지 둘은 이렇게 믿고 의지하며 애정의 함축된 동반자를 만난적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또한 둘은 이 관계가 서로의 빈 공간이 겹치게 됨으로써 발생 되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미선도 상처가 있는 것이다. 사랑했던 남자를 보다 더 좋은 조건의 상대에게 떠나보낸 경험이다. 따라서 둘은 적당한 때에는 이 관계가 청산될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지금은 동성애 관계가 대중매체에도 인정을 받는 단계였지만 둘은 그런 체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은지는 탁자위에 놓인 사직서를 집어들고 접어서 봉투에 넣었다. 그때 문득 조영일의 아버지 조철봉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날 집에 초대 받았을 때 자신이 조철봉에게 한말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어쩌죠? 전 결혼할 마음이 전혀 없거든요.”

그때 조철봉이 눈물을 쏟았었다. 남자의 눈물은 그때 처음 보았다. 그남자, 왠지 감동을 주었다.

“저기요.”

하고 조미선이 입을 열었을 때 이대권은 긴장했다. 미선과 마주앉은 지 10분쯤이나 지난 후였다. 지금 미선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으며 어떤 부탁을 해올지를 훤히 알고 있는 대권이어서 궁금하지는 않다. 그저 어서 진도가 나가기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미선이 말을 이었다.

“저기, 제 친구가 지금 곤란한 입장이 되어있는 데요. 도와 주셨으면 해서요.”

“아아, 그러십니까?”

대권은 박성용의 후배로 부동산 사무실에서 미선을 본 순간에 첫눈에 뿅 간 연기를 하도록 정해져 있다. 그래서 상대인 미선의 부탁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자연스러운 연기가 된다.

“무슨 일이신데요?”

제법 걱정스러운 표정까지 지은 대권이 미선을 찬찬히 보았다. 조철봉의 말대로 미선은 괜찮았다. 대권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별로 외모에 기대를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르지만 미선을 본 순간에 각본처럼 가슴이 뛰었던 것이다. 미선이 말을 이었으므로 대권은 정색하고 들었다.

“제 친구가 지금 전 약혼자한테서 협박을 받고 있거든요.”

하면서 미선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대권은 잠자코 들으면서 조철봉이 말해준 사실과의 차이점을 찾았지만 거의 비슷했다. 미선은 줄거리를 꾸미지 않은 것이다. 저하고 이은지가 동성애자 사이라는 것만 빼고는, 물론 그 이야기는 할 필요가 없는 것이기는 했다. 이윽고 미선은 그놈이 5천만원을 요구한 시간이 오후 1시라는 것까지를 말하면서 이야기를 마쳤다. 그 때 대권이 시계를 보았더니 12시15분이었다. 45분 남았다.

“알겠습니다.”

굳어진 얼굴로 머리를 끄덕인 대권이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섰으므로 미선은 눈을 크게 떴다.

“어, 어떻게 하시려구요?”

“처리해야지요.”

대권이 가볍게 말하더니 다시 손목시계를 보는 시늉을 했다.

“시간이 급한데 빨리 움직여야 되겠는데요. 장소가 대화동 에덴가든이라고 하셨지요?”

“그런데 어떻게.”

따라 일어선 미선이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대권의 표정이 단호해졌다.

“친구한테 말해서 약속시간에 그 놈을 만나라고 하세요.”

주위를 둘러본 대권이 목소리를 낮췄다.

“저한테 상의했다는 말을 하지 마시고 말입니다. 무슨 말씀인지 아셨습니까?”

“그럼.”

“그 놈이 눈치채지 못하게 해야 됩니다. 그래야 그 놈이 마음 놓고 떠들테니까요.”

대권이 서둘러 커피숍을 나왔으므로 미선은 바짝 따라붙었다.

“저기요.”

하고 미선이 불렀을 때 마악 핸드폰을 귀에 붙였던 대권이 잠깐만 기다리라는 시늉을 해 보이더니 조금 떨어져 섰다. 그러고는 핸드폰에 대고 말했다.

“형, 다 됐어. 나한테 다 털어놓았어. 그래서 나한테 맡기라고 하고는 같이 커피숍을 나왔단 말야.”

힐끗 미선에게 시선을 주고난 대권이 말을 이었다.

“형, 잘 되겠지?”

그러자 수화기에서 조철봉의 웃음소리가 먼저 울렸다.

“흐흐흐, 니가 그 여자한테 마음이 동한 모양이구나. 잘 되겠느냐고 묻는 걸 보니까 말야.”

그러더니 웃음띤 목소리로 말했다.

“야, 크게 말해. 조형사, 빨리 움직여, 하고.”

“조형사, 빨리 움직여!”

하고 이대권이 소리쳤으므로 조미선은 움칫 놀라 머리를 들었다. 미선의 시선을 받은 대권이 핸드폰에 대고 낮게 말하고는 귀에서 떼었다.

“작업 아니, 작전이 시작되었습니다.”

다가온 대권이 정색하고 말했다.

“저도 현장에 가봐야겠는데.”

하면서 대권이 몸을 돌리는 시늉을 하자 미선은 한걸음 다가섰다.

“저기요.”

미선이 주저하며 말했다.

“이 신세를 어떻게 갚죠?”

“하긴, 그렇죠.”

그러더니 대권이 미선을 똑바로 보았다.

“전 맺고 끊는 것이 분명한 성품이올시다. 이 일은 물론 범법자를 잡는 일이긴 합니다만 제가 미선씨를 좋아하기 때문에 발벗고 나서게 된 것이죠.”

대권은 심호흡을 하고나서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일이 잘 끝나면 제 부탁을 들어 주시겠습니까?”

“어떤 부탁인데요? 가능하다면 제가 다.”

“그럼 솔직하게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말씀하세요.”

그러자 손목시계를 내려다보는 시늉을 하고나서 대권이 말했다.

“하룻밤만 저하고 같이 지내주시죠.”

놀란 미선이 눈을 치켜떴을 때 대권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솔직히 저는 최근 이년동안 여자하고 같이 밤을 지낸 적이 없습니다. 그말은 성관계를 하지 못했다는 말씀이죠.”

그때 대권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사실인 것이다. 이년동안 갖은 수단을 다 써 보았지만 일어서지 않았다. 그래서 와이프는 성생활을 포기한 지 오래였다. 착한 성품의 와이프는 일년전부터 호스피스 간병인이 되어서 자원봉사를 하고 있었는데 대권의 불능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었다.

미선이 힐난하는 듯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지만 대권은 작심한듯 말을 이었다.

“미선씨를 처음 본 순간에 뜨거운 감정이 솟아 올랐는데 그것이 어떤 욕망인지는 지금도 판단을 못하겠습니다. 하지만 그날 이후로 매일밤 미선씨를 안는 꿈을 꾸었지요.”

그러고는 대권이 땅바닥이 꺼질 듯한 숨을 길게 뱉었다.

“비극이죠. 일에 몰두하다가 어느덧 불능이 된 현실이 말입니다. 어쨌든.”

몸을 돌린 대권이 서두르듯 말을 뱉었다.

“일은 끝내겠습니다. 내 부탁은 강제성이 없는 것이니까 크게 부담 느끼지 마십시오.”

그러고는 대권이 지나는 택시를 세우더니 타고는 시야에서 사라졌다. 거리에 버려진듯 서 있던 미선이 정신을 차린 것은 그로부터 1분쯤이나 지난 후였다.

서둘러 핸드폰을 꺼낸 미선은 현재 시간이 12시25분을 가리키고 있는 것을 보았다. 이은지가 집에서 연락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었다. 버튼을 누르자 신호음이 한번 울렸을 때 은지가 전화를 받았다.

“응, 나야.”

은지가 응답을 하기도 전에 미선이 서두르듯 말했다.

“지금 나가, 나가서 만나.”

은지는 대답하지 않았고 미선은 말을 이었다.

“난 네가 무슨 입장을 취하건간에 네 편이 될테니까 나서서 그놈을 만나.”

이어서 지금 경찰이 그곳으로 출동했다는 말이 목구멍안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참았다. 이대권 경위가 부탁한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작전을 방해하면 안된다.

(1289)개척자-1

강명식은 흰 피부에 콧날이 곧은 데다 짙은 눈썹 밑의 눈도 맑고 또렷했다. 1미터80이 넘는 신장에 날씬한 체격이었고 한마디로 준수한 용모였다. 에덴가든은 양식당 겸 커피숍이어서 벽쪽에는 앉으면 머리끝만 보이도록 좌석이 칸막이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명식은 맨 안쪽 구석의 자리로 다가가 앉았다.

“곧 손님이 오실 테니까 그때 주문하지요.”

뒤를 따라온 종업원에게 그렇게 말하고 난 명식은 손목시계를 보았다. 12시55분, 평일이기 때문인지 대화동 먹자골목의 거리는 한산했고 이곳도 마찬가지였다. 식당 안에는 손님이 대여섯 테이블뿐이었다. 명식이 다시 시계를 보았을 때 옆쪽에서 인기척이 나더니 안으로 이은지가 들어섰다. 은지는 분홍색 스웨터에 진바지 차림이었는데 머리는 뒤에서 끈으로 묶었다. 화장도 하지 않은 맨얼굴이었고 운동화를 신었다. 동네 가게에 나온 행색이었지만 명식의 가슴은 뛰었다. 용모에 대한 감동이다.

“흥, 학교에다 휴가를 내셨더군.”

명식이 눈을 치켜뜨고 말했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관계라는 사실이 머리를 친 순간 가슴의 충격은 분노로 바뀌었다. 은지가 잠자코 차분한 시선만 보내고 있는 것도 그의 화를 돋우었다.

“시발년, 니가 얼마나 잘 사는지 두고 볼거다. 그런데.”

명식이 은지의 주위를 살피는 시늉을 했다.

“돈 가져왔어? 5천만원.”

은지가 눈만 깜박였고 명식의 목소리는 더 또렷해졌다.

“5천에서 백원도 못 깎아준다. 내가 1억 부르지 않는 것만 해도 다행이야. 난 네 경제 규모에 맞춰서 아주 합리적인 가격을 제시한 것이란 말이다.”

“… ….”

“가져온 거야? 안 가져온 거야?”

“없어.”

은지가 짧게 대답했을 때 명식은 못 들은 것처럼 한쪽 귀를 내미는 시늉을 하더니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두 눈이 커지면서 번들거렸는데 전혀 다른 인상이 되었다.

“뭐? 없다구?”

확인하듯 물은 명식이 곧 이를 드러내며 소리없이 웃었다.

“좋아. 해보겠단 말이지?”

“해봐.”

“이 시발년. 그 테이프를 네 학교 앞에다 100장만 뿌릴 거다. 학생들, 선생들한테 나눠줄거야. 인터넷에다 올리는 건 물론이고 학생들 집으로 배달시킬 테니까. 내 얼굴은 지웠으니까 너 혼자만 뜨는 거지.”

그러고는 명식이 다시 씨익 웃었다.

“얼마나 배겨 내는가 보자. 난 이미 각오한 몸이야. 또 들어가도 상관없어. 하지만 널 끌어안고 가겠단 말씀이지.”

“… ….”

“네 인생도 종친 거야, 이년아.”

하고 명식이 목소리를 조금 높였을 때였다. 칸막이 안으로 세 사내가 쏟아지듯 들어섰는데 모두 체격이 건장했고 인상이 불량했다. 놀란 은지가 눈과 입을 딱 벌렸을 때 시내들이 명식을 둘러쌌다.

“자, 가실까.”

하면서 사내 하나가 주머니에서 꺼낸 무언가를 명식의 눈앞에 보이더니 말했다.

“강명식씨, 당신을 공갈 협박 혐의로 현장에서 체포합니다. 당신은 변호사를 선임할 권리가 있고 또.”

명식의 팔을 끌어 일으키면서 사내가 말을 이었다.

“주둥이를 닥치고 있을 권리도 있어, 임마.”

그날 저녁, 이대권과 조미선은 일산의 한정식집 남원정에서 식사를 했다. 물론 저녁 식사는 미선의 제의로 이루어졌는데 오늘 일이 잘 끝난 것에 대한 인사를 하는 셈이었다. 강명식은 이은지를 협박하던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현장에서 잠복중이던 일산경찰서 형사들은 명식의 말을 모조리 녹음해 놓았으므로 결정적인 증거도 확보한 것이다. 대권은 식사와 곁들여서 반주로 소주를 한병쯤 마셨는데 맨송맨송했다. 폭탄주 생각이 간절했지만 혼자 따라 마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미선은 이 쪽의 빈잔을 채워주면서 저도 반병쯤은 마셨을 것이다. 볼이 발그레해진데다 습기가 배인 눈이 번들거려서 딱 좋은 분위기였다.

이 정도의 상황이면 조철봉은 작업을 시작했을 것이었다. 그런데 이 쪽은 의욕은 충만했지만 연장이 제대로 작동해야만 되는 것이다. 미선이 저녁 대접을 하면서 오전에 이 쪽에서 꺼낸 제의를 언급하지 않는 것은 곧 승낙한 것이나 같지 않겠는가? 입 안에 고인 침을 삼킨 대권이 앞에 앉은 미선을 보았다. 에덴가든에는 가지 않았지만 어떻게 처리했는가는 조철봉한테서 들었기 때문에 다 안다.

명식을 체포해간 사내들은 실제로 일산경찰서 형사들이었던 것이다. 형사들은 협박을 하는 명식을 현행범으로 체포해갔다. 조철봉이 신고를 했기 때문이다. 형사들이 이대권이라는 경위의 지시를 받고 움직인 것으로 미선이 알고 있었지만 그런 오해는 죄도 아니다. 이대권 경위가 경찰 위상을 높였으면 높였지 폐 끼친 것은 없다.

“저기요.”

하고 미선이 운을 떼었을 때 대권은 바짝 긴장했다. 이제 대권은 미선의 말버릇을 안다. 중요한 이야기를 꺼낼 때는 꼭 ‘저기요’라고 먼저 서두를 붙인다는 것을. 대권의 시선을 받은 미선이 식탁 위를 내려다 보면서 말했다.

“저기, 오늘밤, 같이 있을게요.”

그 순간 대권의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된 것이다. 작업이 성공했다. 그러나, 심호흡을 한 대권이 머리를 들고 미선을 보았다.

“미선씨.”

“네.”

대답은 했지만 미선은 아직도 시선을 들지 않았다.

“제가 다음에 부탁드리면 안될까요?”

“네?”

그 때 머리를 든 미선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굳어졌다. 마치 호의를 참담하게 거부 당한 표정이었다. 그 시선을 받은 대권이 어금니를 물었다 풀고 대답했다.

“저는 불능입니다. 미선씨를 상대로 제 불능을 테스트하는 느낌이 들어서 그렇습니다.”

미선이 잠자코 시선만 주었고 대권의 말이 이어졌다.

“그리고 그동안에 미선씨한테 저 자신에 대해서도 더 알려드릴 필요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것은 거짓말이다. 오늘밤 미선을 벗겨놓고 나서도 연장이 일어서지 않을까봐 지레 겁을 먹었기 때문에 이렇게 이유가 긴 것이다. 그 때 미선이 차분한 표정으로 말했다.

“네, 마음대로 하세요.”

그러고는 미선이 소주잔을 들더니 한모금에 삼키고서 말을 이었다.

“성기능에 대해서 그렇게 집착하지 않으셔도 돼요. 얼마든지 방법이 있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그 순간 대권은 벼락을 맞은 듯이 몸이 굳어졌다. 아아, 레즈비언, 기구. 그동안 이 여자는 연장없이 기구만으로도 만족해왔지 않은가 말이다. 아아, 조철봉, 그래서 이렇게 이 여자하고 엮어 주었구나. 안되면 기구를 쓰라고.

그로부터 30분쯤이 지난 후에 이대권과 조미선은 모텔방에 들어와 있었는데 분위기는 서먹했다. 대권은 그것이 소변용 기구 역할만으로 사용되지 않았을 때는 이런 곳 출입을 가끔 했었는데도 처음 온 것처럼 어색해 했으며 미선은 또 어떤가? 수줍어하는 꼴이 마치 경험없는 처녀 같았다. 제가 주도적으로 이끌어 놓고서는 막상 둘이 있게 되자 굳어 버린 것이다.

“자아, 그럼.”

하고 간부회의를 주재하는 것 같은 표정이 되어서 대권이 입을 열었다.

“제가 먼저 들어갈테니까.”

조철봉이 들으면 어디를 벌써? 했겠지만 대권은 심각한 표정으로 말하고는 옷을 벗었다. 침대로 먼저 들어가 있겠다는 말이었는데 달리 또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절정의 인생을 구가해야 할 시기에 연장이 소변용 기구로만 전용된 이 입장을 어느 시러베아들놈이 이해를 하겠는가? 오후 3시면 노곤해지고 저녁과 밤의 휴식이 기다려지는 것이 인간의 자연스러운 심성이다. 그 기대감이 없는 인간이 있다면 아예 상종을 하지 않는 것이 낫다. 아침형 인간과 저녁형 인간을 막론하고 오후면 지치고 휴식을 꿈꾼다. 그 기대감 중에서 성욕이 인간 본성을 가장 잘 운용하는 욕망이지 않겠는가? 조철봉이 언젠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오후 3시의 성욕은 다가올 저녁과 밤에 대한 기대감으로 인간에게 활력을 준다. 내가 그 때 내 주변에 그 메시지를 보내면 모두 활기를 내뿜었다. 설령 그것이 성사되지 않더라도 그렇다.” 조철봉은 제 기준으로 한 말이겠지만 그 말을 들은 대권은 억장이 무너졌다. 서지 않는 입장에서 그 메시지를 받은 놈들은 다 그럴 것이었다. 어느덧 옷을 다 벗은 대권은 침대 시트를 들치고 누웠다. 다 벗었다고 표현했지만 팬티는 입었다. 그 사이에 미선은 몸을 돌리고 서 있었는데 대권이 침대에 들어가는 기척을 듣더니 문득 몸을 움직여 전등 버튼을 눌렀다. 방안이 어두워지자 대권은 저도 모르게 긴 숨을 뱉었다. 예상했던 대로 연장은 늘어져 있었다. 아니, 늘어져 있는 정도가 아니라 긴장으로 잔뜩 움츠러든 상태였다.

“저, 씻고 올게요.”

하고 어둠 속에서 미선이 말했으므로 대권이 대답을 하려고 입만 벌렸다가 말았다. 미선이 부스럭대면서 옷을 벗는 소리를 듣던 대권은 마침내 입 안에 고인 침을 삼켰다. 그러나 재수가 없으면 평소에는 잘만 되던 일도 안된다. 침이 기도로 넘어가는 바람에 세찬 재채기가 나왔고 네번을 계속하고 나서야 멈춰졌다. 그때 욕실의 불이 번쩍 켜지면서 잠깐 드러난 빛발 사이로 미선의 모습이 보였다. 대권은 숨을 멈췄다. 일초도 안되는 사이에 미선이 욕실 안으로 들어가 문이 닫혔지만 대권은 팬티와 브래지어만 걸친 알몸을 본 것이다. 미선의 뒷모습은 날씬했다. 엉덩이도 딱 적당했으며 허벅지도 단단했다. 대권이 좋아하는 스타일이다. 심호흡을 한 대권은 팬티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연장을 부드럽게 쓸었다.

“제발 부탁한다.”

대권이 연장을 주무르면서 입술만 달싹이며 말했다. 어둠 속이어서 그렇지 대권의 얼굴은 그야말로 필사적이었다.

“난 이제까지 누구 해꼬지한 적도 없고 그런 대로 베풀면서 살았지 않니?”

달래듯이 연장을 쓸어 올리면서 대권이 중얼거렸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이러는 거냐? 제발 서주라, 이 놈아.”

그놈이 시킨 대로 말을 들었다면 이 짓을 하겠는가? 잡놈으로 소문난 조철봉에게 하소연을 한 것도 물에 빠진 놈이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심정이었기 때문이다. 연장은 조미선이 욕실에서 나올 때까지 당연히 안 섰으며 오히려 주눅만 더 들었다. 이번에도 욕실 문이 열리면서 팬티와 브래지어만 걸친 미선의 알몸이 보였는데 이제는 정면이다. 어쩔 수 없이 대권은 미선의 봉긋한 젖가슴과 홀쭉한 아랫배, 그리고 팬티에 가렸지만 도톰한 그 부분을 보았다. 욕실 문이 닫히고 다시 방안에 어둠이 덮였지만 대권의 눈앞에는 아직도 미선의 알몸이 떠올라 있다.

“안 씻으세요?”

침대 위로 오르면서 미선이 물었으므로 대권이 침을 삼키면서 대답했다.

“저, 사우나 하고 왔습니다.”

거짓말이다. 연장이 제대로 기능을 발휘한다면야 그렇게 했겠지만 지금은 그럴 의욕도 없다. 씻어서 뭐 하겠느냐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옆에 누운 미선의 팔이 어깨를 스쳤다. 차갑지만 매끈했다.

“저기….”

하고 미선이 몸을 붙였으므로 대권은 긴장했다. 이제는 어깨와 팔이 다 닿았다. 무릎 한쪽이 미선의 허벅지에 닿았는데 떼기도 그래서 대권은 식은땀이 났다. 그때 미선이 손을 뻗어 대권의 배 위에 올려 놓았다. 손바닥은 따뜻했다.

“제가 만져 드려요?”

미선이 묻더니 대답도 듣지 않고는 대권의 배를 쓸기 시작했다. 배꼽을 중심으로 시계 방향으로 돌리더니 점점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손바닥이 팬티 끝에 닿았고 손가락 몇 개가 팬티 안으로 들어갔다가 나왔다.

“으음.”

대권의 입에서 가는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아랫배에 조금 힘을 주어 보았지만 물건은 아직 끄떡도 하지 않았다.

“거기 만져도 되죠?”

미선이 얼굴을 대권의 가슴에 붙이면서 묻더니 곧 물건을 건드렸다.

“으음.”

얼굴을 일그러뜨린 대권이 다시 낮게 신음했다. 물컹한 촉감을 느낄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물건은 전자동이다. 그러나 가만 있을 수는 없었으므로 대권도 손을 뻗어 미선의 엉덩이를 쓸었다. 그러자 미선이 말했다.

“저, 다 벗을게요.”

그러더니 순식간에 브래지어와 팬티를 벗어 던지고는 대권의 몸 위에 엎드렸다.

“거기도 벗으세요.”

미선이 팬티를 벗겨 내렸으므로 대권은 잠자코 엉덩이만 들어 주었다.

“젖가슴을 입술로 애무해줘요.”

대권의 머리를 가슴으로 끌어 당기면서 미선이 말했다.

“조금 거칠게 해도 돼요.”

미선의 젖가슴에 얼굴을 묻은 대권이 눈을 부릅떴다. 그러고는 미선의 젖가슴을 정성을 다하여 애무하기 시작했다.

“아아.”

미선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고 곧 대권의 물건에 거친 감촉이 왔다. 두 손으로 미선이 그곳을 주무르고 있는 것이다.

“기운 내세요.”

미선이 헐떡이며 말한 순간이었다. 대권은 하체에 뜨거운 기운이 괴는 느낌을 받고 이를 악물었다.

“응? 자기야?”

하고 미선이 그것에 대고 달래듯이 말했을 때였다. 대권이 신음을 뱉었다.

“으으음.”

미선의 손에 잡힌 연장에 힘이 실리고 있는 것이다.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어머, 돼요.”

하고 조미선이 방정맞게 소리치지만 않았다면 그날 밤의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그 외침을 듣는 순간에 대권은 미선의 손에 잡혀 있는 연장이 오그라드는 것을 느꼈다.

“어머나.”

다시 놀란 미선이 이제는 안타까운 탄성을 뱉었지만 이미 늦었다.

“어떡해.”

그렇게 안타까워 하면서도 미선의 호흡은 가빴다. 그 와중에도 대권의 애무가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경쓰지 마시고.”

대권이 가득 물고 있던 미선의 젖가슴을 잠깐 떼면서 말했다.

“미선씨나 어서.”

이미 미선의 허리를 당겨 안은 대권의 손은 샘과 골짜기를 탐색하는 중이었다.

“아아.”

신음을 뱉던 미선이 불쑥 상반신을 떼어 일으키더니 헐떡이며 물었다.

“저, 괜찮겠어요?”

“뭘 말이요?”

“제가 혼자 해도요.”

“아, 그럼.”

“그럼 제가 혼자 할게요.”

하더니 미선이 침대 옆 탁자에서 무언가를 집어 들더니 바로 누웠다.

“계속해서 제 젖가슴을.”

미선이 서두르듯 말했으므로 대권은 다시 하던 일을 계속했다. 연장은 이미 분위기에 전혀 구애받지 않았는데 가슴은 차츰 안정되는 중이었다.

“아아.”

하면서 미선의 신음이 커지더니 하체가 들썩였다. 지금 미선은 자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손에는 방금 탁자에서 가져온 기구를 쥐고 있는 것 같다. 대권은 미선의 젖가슴을 애무하면서 입끝으로 웃었다. 이게 무슨 꼴이냐 말이다. 불을 밝히고 두 남녀가 엉킨 꼬라지를 본다면 가관일 것이다. 남자는 여자 몸위에 십자가의 세로축처럼 엎어져 젖가슴에 코를 박고 있다. 그리고 여자는 두 손으로 기구를 움켜쥐고는 하반신을 비틀어대는 중이다.

“아유우, 나 죽어.”

마침내 미선이 엉덩이를 들썩이면서 고함을 쳤을 때 대권은 잠깐 시선을 들었다. 방안은 어두웠지만 시선이 창쪽을 향해 있어서 희미하게 사물 윤곽은 드러났다.

“아아, 자기야.”

하고 미선이 하반신을 솟구치면서 다시 외쳤을 때 대권은 얼굴을 들었다.

“어, 그래.”

화답하는 것이다.

“좋았니?”

“으응.”

“미선이 앓는 소리로 대답했다.

“너무너무 좋았어.”

“나도 좋았어.”

젖가슴에서 머리를 뗀 대권이 상체를 올려 미선의 입술에 키스했다.

“자기는 좋은 여자야.”

“아까 섰는데.”

가쁜 숨을 뱉으면서 미선이 말했다.

“우리 다시 해보자. 응?”

“아니, 괜찮아.”

“오늘밤 시간 많아, 자기야.”

미선이 대권의 허리를 당겨 안으면서 말했다.

“다음번에는 자기가 실감나게 이걸 갖고 해줘.”

그러면서 미선이 대권의 손에 묵직한 물체를 쥐어 주었다. 대권은 손에 쥔 물체를 그냥 쥐고만 있었다. 물체는 단단했고 뜨거웠다. 그리고 젖었다. 그 순간 대권의 이가 저절로 악물렸다.

김재석이 러시아 정부와 협상중인 임차지는 시베리아 북동쪽의 거대한 동토였다. 스타노보이 산맥이 아래쪽 경계선이었고 우측은 오호츠크해가 펼쳐져 있었는데 면적이 10만㎢정도나 되었다. 남한의 면적보다 넓다. 조철봉이 하바로프스크에 도착한 다음날 오전에 한국의 중견기업 오성상사와 러시아 정부간에 임차 계약이 체결되었다. 계약기간은 50년이었으며 ‘한랜드’라고 불리게 된 이 임차지의 개발은 오성상사에 위임되었다. 한랜드는 오성상사가 운영하는 땅인 것이다.

따라서 한랜드안에서 거주하는 주민과 공무원의 생활까지 오성상사가 책임을 져야만 했다. 오성상사는 임차보증금으로 러시아 정부에 1억달러를 15년동안 순차적으로 지불하기로 한 대신 세금은 5년후부터 당시 기준으로 30%만 납부하게 되었다. 대신 유전이나 자원개발 외의 공장 신설, 기타 개발은 모두 한랜드가 독자적으로 실행할 수 있으며 유입 인구의 증가에 따른 공공시설의 증설, 행정인원의 증원과 경비까지 모두 한랜드가 책임을 맡게 되었다.

러시아 정부는 적정선의 치안유지 인원을 배치시킬 것이었고 연락소를 운영할 것이지만 그들의 임금도 한랜드측에서 맡았다. 따라서 임차지인 한랜드는 특별 자치령이라고 했다. 러시아 측에서는 외국 자본을 끌어들여 산업을 개발하고 지역 경제를 활성화시키려는 목적이 분명했다. 그러면 오성산업의 한랜드 임차는 어떤 목적이 있는 것인가?

“한랜드라니까.”

누가 묻지도 않았지만 회의가 끝날 때쯤에서 조철봉이 그렇게 말을 꺼냈다.

“말 그대로 한랜드야. 한국인이 건설한 땅이란 말이지.”

김재석과 최갑중, 그리고 건설의 책임을 맡은 간부들의 시선을 받은 조철봉이 눈을 크게 떴다.

“지금 한랜드에는 러시아인, 원주민까지 합해서 인구가 2000명도 안되지만 곧 러시아 연방에 흩어진 고려인, 중국땅의 조선족, 그리고 탈북자들까지 모두 모이게 될거야.”

이미 김재석 등과 의논이 된 일이었지만 조철봉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또 모이게 될거야.”

바로 임차지 개발의 기획자이며 조철봉의 핵심 두뇌인 김재석이 눈을 가늘게 뜨고 경청하는 시늉을 했다. 그 이상은 의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 조철봉의 말이 이어졌다.

“한랜드가 개발되고 한민족의 땅으로 알려지면 북한은 물론이고 한국에서도 이민자가 쏟아져 들어올거야. 그리고 세계 각국에 흩어진 600만 한국인들도 한랜드로 옮겨 올지도 모른다.”

이것은 엄청난 비약이다. 조철봉이 힐끗 눈만 껌벅이는 재석을 보았다.

“한랜드는 새로운 한국땅이야. 이곳은 부정도, 부패도, 땅투기도, 독재도 없어. 또 좌파도 우파도 없고 정년도 없어. 하지만,”

말을 이으려고 입을 벌렸던 조철봉이 두어번 눈을 껌벅이더니 다물었다. 그러자 최갑중이 소리죽여 숨을 뱉었다. 조철봉의 밑천을 훤하게 알고 있는터라 말이 길어지자 조바심이 일어났던 것이다. 기반이 약한 인간은 말이 길어지면 틀림없이 실수한다. 바로 조철봉이 그렇다. 그때 조철봉이 다시 입을 열었으므로 갑중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하지만 룸살롱이나 가라오케, 노래방은 있어야 돼, 물론 요정도.”

그러고는 조철봉이 엄숙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두 멍한 얼굴이었다.

“돈을 벌면 쓰게 해야돼. 그래야 한랜드에 미인들도 많이 몰려온다고.”

다음날 조철봉 일행은 전세를 낸 헬리콥터를 타고 한랜드를 향해 떠났다. 김재석과 협상단은 여러번 한랜드를 탐사했지만 조철봉은 사진만 보았지 처음이다. 그만큼 빨리 협상이 진행되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러시아제 육중한 헬리콥터는 10여명의 일행을 싣고 무려 7시간이나 날아서 한랜드의 중심지인 고원에 착륙했다. 스타노보이 산맥이 뒤쪽에 병풍처럼 둘러선 이 곳은 눈에 덮인 동토일 뿐 나무 한그루 보이지 않았다. 끝없이 펼쳐진 평원은 오직 흰색이었고 하늘은 잿빛이다. 오후 5시가 되어가고 있었는데 기온은 영하 30도였다. 밤이면 영하 50도가 된다는 것이다.

“스키장은 잘 되겠다.”

평원을 바라보며 최갑중이 불쑥 말했다가 얼른 조철봉의 눈치를 보았다. 갑중은 조철봉의 기세에 밀려 대놓고 반대는 안했지만 한랜드 임차에 부정적이었다. 그로서는 모든 재산을 털어놓겠다는 조철봉의 의지를 아직도 납득하지 못했다. 조철봉은 바로 옆에 서 있었지만 못들은 척 눈을 가늘게 뜨고 지평선을 보았다. 그야말로 광활한 대륙이다. 헬리콥터로 날아오면서 툰드라 지역도 지났고 얼어붙은 강도 보았다. 그렇지만 인적은 못보았다.

“그래, 이 곳을 스키장과 유흥도시로 만드는 거야.”

이윽고 조철봉이 입을 열었으므로 갑중은 질색을 했다. 조철봉이 비꼬는 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자 재석이 나섰다.

“예, 제5지역과 이 곳 제3지역이 유흥도시로 적당합니다.”

이미 둘은 말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아연한 채 눈만 껌벅이는 갑중을 놔두고 조철봉이 옆쪽에 서 있는 건설 책임자 이동호를 보았다.

“그럼 제5지역으로 가볼까?”

“예, 사장님.”

이동호가 활기차게 대답했다. 제5지역은 이 곳에서 다시 4백킬로미터를 더 가야만 했으므로 갑중은 소리죽여 숨을 뱉었다. 그날밤, 제3지역의 동토 위에 세워진 임시 텐트 안에서 강상규가 조철봉에게 말했다.

“호텔과 카지노만 개설되면 손님은 끌어올 수 있습니다.”

강상규는 지금까지 백두산 관광단지의 카지노 개설과 운용을 맡아왔다. 조철봉의 시선을 받은 강상규가 말을 이었다.

“이 곳은 입지조건이 백두산보다 낫습니다. 만일 유흥시설까지 계획대로 준비된다면 세계 제일의 유흥도시를 만들 자신이 있습니다.”

그러자 잠자코 있던 김재석이 나섰다.

“사장님의 목표가 라스베이거스이십니다만 그보다 몇배나 더 크고 번창한 도시를 만들겠습니다.”

그 순간 갑중의 가슴이 또 철렁 내려앉았다. 머리를 돌린 갑중이 조철봉을 보았다. 재석의 말을 들은 조철봉이 잠자코 머리만 끄덕이고 있었다. 그렇군. 갑중도 따라서 머리를 끄덕이고 싶었지만 참았다. 조철봉이 벅시란 영화를 여섯번이나 보았다고 했던 말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래서 갑중도 어느날 그 비디오 테이프를 빌려서 보았다. 벅시(워런 비티)는 라스베이거스를 건설한 갱이었다. 호텔 공사를 믿고 맡긴 정부 버지니아(아네트 베닝)한테 공사대금을 횡령 당하고 나중에는 총에 맞아 죽지만 조철봉은 벅시에게 푹 빠졌다. 그런데 사막에다 호텔을 짓는 아이디어 따위에 빠진 것이 아니었다. 배신한 동업자 가슴에다 총을 네번 쏴 죽인 장면하고 또 한 놈은 개처럼 기어다니면서 짖게 만든 장면이 끝내준다고 했던 것이다. 그때 조철봉이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라스베이거스는 사막 위에 세웠지만 여긴 눈이야.”

그렇구나, 벅시가 원인을 제공했다.

그렇다면 현재 상황으로 봤을때 조철봉에게 아네트 베닝역의 여자가 달라붙어 있지는 않으니 약간 유리할지도 모른다고 최갑중은 생각했다. 그날밤, 영하 50도가 넘는 혹한 속의 텐트 안에 누워 밖의 바람 소리를 들으면서 갑중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지난날의 조철봉을 시간대별로 떠올려본 것이다.

조철봉은 지금도 스스로를 사기꾼이라고 갑중에게 말했지만 변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자꾸 변하는 인간이다. 대리에서 과장, 사장, 그리고 기업체를 수십개 거느린 작금에 이르기까지 마치 수십개의 얼굴을 가진 것처럼 변모했다. 그때의 위치에 맞도록 변한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훌륭한 사기꾼의 행태라고 한다면 할말은 없다. 그러나 지척에서 지켜본 갑중의 생각은 달랐다.

조철봉만큼 열심히, 성실하게 사는 인간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릇이 크다. 오늘에야 뼈가 저리도록 느꼈지만 라스베이거스를 건설한 벅시 이상이 되는 인물이다. 다음날 아침, 텐트 안에서 식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온 조철봉의 옆으로 갑중이 다가와 섰다.

“형님, 한랜드를 라스베이거스처럼 만들려고 하셨군요.”

갑중이 웃음띤 얼굴로 조철봉을 보았다.

“그렇죠, 벅시가 그 네가라 사막인가 거기에다 호텔을 짓는다고 할때 모두 미쳤다고 했지요.”

“뭐라고?”

정색한 조철봉이 물었으므로 갑중은 긴장했다.

“아니, 제말은 형님이 미쳤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 벅시, 그놈이, 저는 형님을.”

“너, 네 무슨 사막이라고 했어?”

“네가라 사막 아닙니까?”

“네바다여, 이 무식한놈아.”

“아, 그거나 저거나.”

조금 기분이 상한 갑중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 세상에서 이렇게 대놓고 무식한놈아 하는 인간은 조철봉 밖에 없다.

“너, 내가 벅시 보고 이런줄 아는 모양인데.”

눈을 가늘게 뜨고 지평선을 바라보면서 조철봉이 말했다.

“난 중국에 공장을 지을때부터 그런 생각을 했다. 그것이 금강산 관광지 개발까지 발전했다가 한랜드까지 온것이야.”

하늘은 구름 한점없이 푸르렀고 밖은 햇살이 반사된 대지의 흰 눈에도 티 한점 보이지 않았다. 조철봉의 말이 이어졌다.

“나는 비록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벌었지만 다 쓰고 갈거다. 보람있게 말이야.”

“형님은 이름을 남기실겁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야, 시끄러.”

조철봉이 눈을 흘겼다.

“난 내 주제를 잘 안다. 이름은 무슨.”

“저도 얼마 안되지만 제 재산을 투자하지요.”

“호텔하고 카지노를 세워라. 땅은 무상으로 줄테니까.”

“정말입니까?”

“네가 좋은 땅을 골라.”

“그럼.”

갑중의 눈이 번들거렸다.

“고맙습니다, 형님.”

“한랜드에서 땅 장사는 못해. 모두 한랜드 정부에서 배분해 줄테니까.”

“그렇군요.”

“한랜드에도 통치 기구가 필요하다. 그래서 운영위원회가 발족될 거야.”

“그럼 형님이 운영위원장이 되시겠군요.”

이제 조철봉은 한랜드의 통치 조직까지 구성해 놓으려는 것이다. 그것은 곧 정부 조직이나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벅시 따위와 어찌 비교가 될 것인가?

“정신이 어떻게 된 인간 같은데.”

신문을 턱으로 가리킨 재경부장관 이용섭이 물었다.

“도대체 이 사람 어쩌려고 이런답니까?”

“예, 부총리님.”

앞에 선 정책보좌관 박한규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오성상사쪽에 연락을 했더니 조철봉 사장은 아직도 시베리아 임차지에 있어서 기획실장이 서면 답변을 해왔는데요.”

박한규가 들고있던 서류를 이용섭 앞에 내려놓았다. 그러자 이용섭이 책상위에 놓인 신문을 치우고 서류를 들었다. 신문에는 ‘오성상사의 시베리아 토지 임차’라고 커다랗게 쓰여진 글자 밑에 조철봉의 사진까지 인쇄되어 있었다.

“흐음. 유흥시설을 세운다고? 아니 영하 50도가 넘는 허허벌판에 유흥시설?”

서류를 읽다 만 이용섭이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박한규를 보았다.

“이거, 외화 반출하려는 핑계 같은데, 임차비용이 1억불이라고 했지요?”

“예, 그런데 현재까지 실제로 지급한 금액은 500만불 정도입니다.”

“하지만 건설비 명목으로 엄청나게 돈을 빼내지 않을까요?”

“철저하게 감시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으므로 이용섭이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비서의 목소리가 스피커에서 울렸다.

“부총리님, 국민당 원내총무님께서 오셨습니다.”

“어, 들어오시라고 해.”

자리에서 일어선 이용섭이 박한규를 향해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저 양반들, 정말 귀찮아 죽겠구만.”

말은 그렇게 했지만 서둘러 문 밖으로 나간 이용섭이 국민당 원내총무 양성대를 맞아들였다. 여당인 국민당의 원내 총무 양성대는 보좌관과 동행이었다.

“이거, 바쁘신데 미안합니다.”

이용섭의 안내를 받아 소파에 앉은 양성대가 정중하게 말했다. 양성대는 3선의원으로 여권의 실세이다. 양쪽의 인사가 건성으로 끝났을 때 먼저 양성대가 본론을 꺼내었다.

“그, 오늘자 신문에 일제히 보도된 오성상사의 시베리아 임차건 말입니다.”

어느덧 이용섭은 긴장했고 양성대는 거침없이 말을 이었다.

“부총리께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언론 보도를 보면 대부분이 비판적이던데 말입니다.”

양성대가 두꺼운 눈시울을 들고 이용섭을 보았다. 국회 재경위원장이기도 한 양성대의 힘은 막강했다. 물론 삼권분립이 법으로 정해져 있지만 미국은 안그런가? 국민을 등에 업은 선출직 국회의원이 임명직 장관을 밀어붙이는 경우는 흔한 것이다.

“예, 그렇더군요.”

먼저 머리부터 끄덕인 이용섭이 정색했다. 오전에 양성대가 오성상사의 시베리아 임차 문제로 찾아오겠다고 해서 부랴부랴 자료 조사는 했다. 오성상사 기획실에서 보내온 서류도 금방 읽다가만 상황인 것이다. 그러나 경제 현안이 산적해있는 현 상황에서 오성인지 팔성인지 주먹만한 회사가 시베리아 땅을 임차 했다는 것은 문제도 아니다. 언론도 모두 가십성 기사로 보도를 했고 제일신문은 돈키호테식 발상이라고까지 표현을 했다. 그것이 이용섭의 생각과 일치한 표현이 될 것이다.

“그런데 무슨 일이신지. 오성상사에 어떤 문제라도 있습니까?”

그러나 이용섭은 자신의 속내를 비치지 않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래서 이용섭은 신중하고 사려가 깊다는 평을 받는다. 먼저 나섰다가 득 보는 일은 드물다.

그때 양성대가 입을 열었다.

“인터넷 들어가 보셨습니까? 오늘 언론에 보도된 지 두 시간 만에 인터넷에 한랜드 사이트가 1백여개나 생겼는데.”

그러자 이용섭과 박한규가 서로의 얼굴을 보았다. 아무리 인터넷 시대라고 해도 장관과 보좌관이, 더구나 근무중에 인터넷을 뒤지겠는가? 양성대의 말이 이어졌다.

“조회수가 백만이 넘어요. 모두 신선하고 신난다는 반응이지. 젊은놈들이란 이렇게 엉뚱하다니까? 내가 보기에는 미친 수작 같은데 요즘 세대의 시각으로 보면 멋지다는 거야. 한랜드 주식을 사겠다는 놈들도 있어요.”

이용섭은 아예 입을 다물었다. 이제 이야기의 줄거리는 뻔해진 것이다. 인터넷에서 폭발적인 호응을 얻은 이상 거스르는 행동을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이 정치다. 국민의 뜻을 따르는 것이 정치인들의 의무 아니겠는가? 이제 오성상사의 조철봉이 이상한 짓을 해서 그들의 눈 밖에 나지 않는 이상은 가볍게 건드릴 수가 없다.

“그래서 말씀인데.”

양성대가 눈을 가늘게 떴으므로 눈시울에 가려진 눈이 아예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한랜드에 대해 긍정적인 시각을 갖기로 했습니다. 답답한 현실에서 뭔가 돌파구를 찾으려는 대중의 욕망이 한랜드를 통해 분출되었다고 판단한 겁니다. 이건 월드컵의 열기하고도 다른 활기가 될 겁니다.”

열기를 띤 양성대의 목소리가 방을 울렸다.

“나도 처음에는 사기꾼 같은 중소기업 사장이 시베리아 나무를 베어 팔려는 사기 행각처럼 보였는데 네티즌의 반응을 보고서 이게 아니다 라는 생각이 드는 거야. 시베리아의 거대한 땅을 임차해서 그곳에다 신천지를 꾸미는 거야. 요즘 영하 50도가 별거야? 덕다운 한 벌만 입으면 견디는데.”

“…….”

“대기업도 다 외면한 그 눈만 쌓인 동토를 과감히 임차한 발상만으로도 조철봉씨는 칭찬 받아야 합니다. 참.”

그러고는 양성대가 쓴웃음을 지었다.

“이름도 웃기더군. 조철봉이 뭐야? 조자를 조금 강하게 발음하면 그것이 철봉 같다는 말이 되지 않습니까?”

그러고는 양성대가 큭큭 웃었으므로 어쩔 수 없이 이용섭도 따라 웃었다.

“그래서.”

양성대가 금방 정색하고 말을 이었다.

“우리는 네티즌들의 꿈을 깨뜨리지 않기로 했습니다. 오전의 당직자 회의에서 그렇게 결정했어요. 한랜드의 개발을 적극 돕기로 말입니다. 그러니까.”

시선을 든 양성대가 똑바로 이용섭을 보았다.

“부총리께서도 여러 모로 협조해 주셔야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이용섭이 머리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다. 그리고 어려운 일도 아니다. 조금전에 보좌관 박한규하고 나눈 말은 없던 것으로 하면 되었다.

“우리가 곧 한랜드를 방문할 계획입니다. 너도 나도 간다고 하는 바람에 인원을 조정해야겠어요.”

양성대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 그럼, 잘 부탁합니다.”

한랜드의 로비스트나 된 것처럼 양성대가 그렇게 인사를 하더니 방을 나갔다. 양성대를 배웅하고 돌아온 이용섭이 박한규를 향해 투덜거렸다.

“도대체 네티즌이 뭐기에 이 야단인지 모르겠네. 그놈의 인터넷.”

그러나 박한규는 맞장구치지 않았다.

조철봉이 귀국한 것은 그로부터 20여일이 지난 후였지만 인터넷의 한랜드 열풍은 더욱 강해져 있었다. 오성상사에서 직접 관리하는 한랜드 사이트는 등록회원만 1백만명이 넘는 바람에 최대 회원수를 기록했고 유사 카페가 5백개도 넘었다. 그래서 조철봉은 극비리에 일본을 통해 귀국했는데 영일이만 걱정되지 않았다면 한랜드에 눌러있었을 것이었다.

한달이 넘도록 영일과 떨어져 있었으므로 조철봉은 근래 며칠간은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하루에 두어 번씩 꼭 영일과 통화를 했고 어떤 날은 대여섯 번도 했지만 그것으로 안심이 되겠는가? 서경윤에게 살림을 맡겼을 때는 영일의 얼굴을 열흘에 한번 볼똥말똥했고 이야기를 나눈 기억도 없지만 지금은 다르다.

“거시기.”

인천공항에서 집으로 달려가는 차 안에서 조철봉이 입을 열었으므로 옆 좌석에 앉은 박경택이 몸을 돌렸다.

“예, 사장님.”

“영일이 선생님 말인데.”

“예, 사장님.”

경택이 긴장했다. 영일의 선생님이라면 이은지, 조철봉이 외국에 나가 있는 동안 경택은 한국에 남아서 이은지를 보호했다. 물론 조철봉의 명령이다.

“요즘도 그 여자 만나나?”

조철봉이 묻자 경택은 머리부터 저었다. 무엇을 묻는지 알아챈 것이다.

“아닙니다. 그날 이후로 그런 일 없습니다. 사장님.”

그날이란 강명식이 경찰관에게 연행되어 간 날을 말한다. 지금 강명식은 구치소에서 재판을 기다리고 있는데 최소한 6개월의 실형을 살게 될 것이다. 조철봉은 심호흡을 했다. 은지가 조미선하고 레즈비언 관계를 끊었다는 말이었다. 조철봉의 시선을 받은 경택이 힐끗 운전사에게 시선을 주더니 목소리를 더 낮췄다.

“조미선 선생한테 남자가 생긴 것도 그 이유 중의 하나가 될 것입니다.”

이대권이다. 대권이 미선과 함께 밤을 지내는 동안 소변용 기구가 본래의 기능을 찾았는지 어쩐지는 아직 모른다. 그날 이후로 대권을 만나지 못했고 전화로 물어볼 사항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선에게 남자가 생겼다는 것은 작업이 잘 진행되었다는 징조 같았으므로 조철봉은 희미하게 웃었다. 경택은 미선과 대권의 뒷조사까지는 하지 않았다.

“지금 이 선생은 어디 있지?”

“예? 지금.”

조철봉이 묻자 당황한 경택이 손목시계를 보았다. 밤 10시반이었다.

“아마 집에 계실 것 같습니다만.”

“알아봐.”

“예, 사장님.”

눈치를 챈 경택이 핸드폰을 들었을 때 조철봉도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버튼을 누르자 곧 신호음이 울렸고 어머니가 전화를 받았다.

“어머니, 접니다.”

“어, 도착한 거냐?”

어머니가 목소리가 밝고 크게 울렸다.

“예, 지금 가는 중입니다.”

“영일이가 기다리고 있다.”

“30분이면 도착할 겁니다.”

“알았다, 기다리마. 저녁은?”

“먹었어요.”

“또 먹어라. 영일이하고 같이.”

그러더니 어머니가 길게 숨을 뱉었다.

“영일이가 저녁에 네가 온다는 전화를 받더니 들떠서 저녁도 안 먹었다. 너 같은 놈도 영일이한테는 하나뿐인 아비니까. 에이그 불쌍한 것.”

어머니가 서너 번 혀를 찼다.

“아빠.”

문이 열리자마자 영일이 달려와 허리를 부둥켜안았으므로 조철봉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러고는 코 안이 맹맹해지면서 눈이 흐려지는 것이 아닌가? 아뿔사, 하고 눈을 부릅떴지만 늦었다. 눈물이 이렇게 자동적, 순간적으로 빨리 쏟아질 줄은 몰랐다. 눈썹 하나 치켜뜨는 것도 다 계산이 되어 있던 강안남 조철봉에게 전혀 상상하지도 못했던 반사작용이었다.

“어이구, 이 자식.”

하면서 영일의 어깨를 껴안고 눈물이 흐른 얼굴을 반대쪽으로 돌리느라고 조철봉의 자세가 어수선해졌다.

“어서 오너라.”

하고 다가선 어머니가 가방을 받아 들었다. 어머니의 신경이 면세품 백에 쏠려 있는 것이 조철봉에게는 다행이었다. 영일에게 전자 장난감을 건네준 조철봉은 옷을 갈아입고 응접실로 나왔다. 그런데 이제는 어머니와 함께 영일도 소파에 앉아 조철봉을 기다리고 있었다. 전에는 안그랬다. 장난감만 쥐어주면 먹이를 문 개처럼 제 방으로 들어가 문까지 닫았던 영일이다. 조철봉은 영일의 옆에 앉아 어깨를 당겨 안았다.

“너, 신문에 이따만하게 났더라.”

하고 어머니가 운을 떼었을 때 영일이 말했다.

“아빠, 나도 인터넷에서 한랜드 사이트 들어가 봤어.”

“어, 너도.”

“선생님도 한랜드 회원이래.”

“어어.”

“이 선생이.”

하면서 어머니가 끼어들었다.

“집에 여러번 놀러왔다. 와서 저녁도 같이 먹고 영일이하고도 놀아주고 갔어.”

그러고는 어머니가 만족한 표정으로 웃었다.

“다 내가 만들었다. 나같은 시어머니가 세상천지에 어디 있겠는가 찾아봐라.”

그 때 영일이 조철봉에게 물었다.

“아빠, 나, 한랜드에 가면 안돼?”

“응?”

놀란 조철봉이 눈을 크게 떴고 어머니는 질색을 했다.

“얘가 미쳤니? 그 추운 땅에 뭐하러?”

“한랜드 사이트에 들어가봐, 할머니.”

영일이 지지 않고 목소리를 높였다.

“스키장과 호텔, 놀이터에다 공기도 맑아서 살기 좋다고 했어.”

그뿐인가? 수백개의 한랜드 카페에서는 경쟁적으로 지구상의 유일한 낙원을 설계하고 있었다. 오성상사의 한랜드 사이트는 하루에도 수천개의 이상향에 대한 건의가 올라오고 있는 것이다.

“그래, 조금만 더 있다가.”

조철봉이 영일의 어깨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영일이가 다닐 학교부터 지을테니까. 그 때까지만 기다려라.”

“아빠, 몇밤 자고 가?”

하고 영일이 다시 물었으므로 조철봉의 가슴이 또 내려앉았다. 그래서 미리 얼굴부터 치켜든 조철봉이 어깨를 펴고 말했다.

“아니, 이번에는 오래 있을거다.”

“정말?”

“그래, 그러니까.”

그러자 어른처럼 머리를 끄덕인 영일이 일어서더니 제 방으로 들어갔다.

“저놈이 제 어미 이야기는 절대로 하지 않는다.”

영일의 방에 시선을 주면서 어머니가 낮게 말했다.

“요즘 애들은 애어른이여. 그 놈의 인터넷 때문인가 보다.”

조철봉은 길게 숨을 뱉었다. 지금이 제일 민감한 시기인 것이다.

밤 12시 10분전, 아파트 현관 밖으로 나온 이은지가 어깨를 움츠린 자세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보안등 밑에 서 있어서 은지의 자태는 어둠속에 선명하게 드러났다. 흰색 면바지에 같은색 티셔츠 차림이었고 운동화를 신었다. 머리를 짧게 잘라서 뒷목이 드러났는데 더 늘씬하게 보였다.

자연스러운 모습의 여자도 보기 좋지만 이렇게 누군가를 의식하면서 좀 긴장되어 있는 자세의 아름다운 여자를 보면 대가를 주고 싶어진다. 꼭 물질만 대가인가? 경의를 표해도 좋을 것이다. 조철봉은 놀이터의 그네 뒤쪽 그늘속에 파묻힌채 은지를 노려 보았다. 주위를 두리번 거리던 은지가 두어걸음 더 앞으로 나왔으므로 이제는 불빛이 등 뒤에서 비쳤다. 조철봉은 들고있던 핸드폰의 버튼을 눌렀다. 귀에 붙인 핸드폰의 신호음이 세번 울렸을때 이십미터쯤 앞에 서있는 은지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여보세요.”

“접니다.”

“어디세요?”

은지가 다시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아파트 현관 앞쪽은 벤치가 놓여졌고 관상수와 꽃으로 잘 정돈되었다. 늦은 밤이어서 통행인은 보이지 않았지만 환하게 불을 밝힌 아파트 창에서 영상이 움직였고 작게 소음이 새어나왔다. 밤 공기는 맑은데다 5월초의 기온은 적당하게 서늘했다.

“은지씨, 잠깐만 기다리세요.”

조철봉이 말하자 은지는 바로 앞쪽의 벤치로 다가가 앉았다. 그러자 조철봉에게는 은지의 비스듬한 옆모습이 눈 앞에 펼쳐졌다. 은지는 아파트 입구쪽을 향하고 앉아있는 것이다.

“지금 오시는 중인가요?”

은지가 아파트 입구쪽을 응시한채 물었다. 조철봉이 은지에게 전화를 한것은 20분쯤 전이다. 금방 도착했다는 인사를 하다가 잠깐 얼굴만 보고 가도 좋겠느냐고 묻자 은지는 선선히 그러자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조철봉은 놀이터 어둠속의 벤치에 앉아 있었다. 조철봉이 은지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예, 5분만 기다리시면.”

“네, 기다릴게요.”

은지의 말을 들으며 조철봉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고는 어둠 밖으로 나가려다가 멈칫 멈춰섰다. 그러고는 다시 뒷걸음질로 벤치로 돌아가 앉았다.

“은지씨.”

조철봉은 자신의 목소리가 갈라져 있는 것을 듣고는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네.”

은지가 대답하더니 한쪽 다리를 다른쪽 무릎위에 얹었다. 그러나 엉덩이 부분이 크게 드러났고 면바지가 터질듯이 팽팽해졌다.

“여러가지로 고맙습니다.”

낮게 말한 조철봉은 손을 뻗어 바지 지퍼를 열고 팬티 속에서 이미 곤두서 있는 철봉을 밖으로 꺼내 쥐었다.

“아니, 뭘요.”

은지가 은근한 목소리로 대답했을때 조철봉은 움켜진 철봉을 문지르기 시작했다. 주위는 어두웠고 밖으로 나가기 싫었다.

“은지씨.”

다시 조철봉이 불렀을때 은지가 핸드폰을 바꿔 쥐면서 대답했다.

“네, 말씀하세요.”

그순간 조철봉은 철봉이 분출 하는것을 느꼈고 이를 악물었다.

“으음.”

어쩔수없이 옅은 신음이 뱉어졌을때 은지가 물었다.

“어디 편찮으세요?”

그때 조철봉은 마지막 분출을 했다.

조철봉이 이은지 앞으로 다가섰을 때는 그로부터 5분쯤이 지났을 때였다.

“어머.”

놀란 은지가 벤치에서 일어섰지만 왜 엉뚱한 곳에서 나타났느냐는 따위의 쓸데없는 질문을 하지는 않았다.

“오랜만입니다.”

은지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그렇게 말한 조철봉도 아파트 입구와는 반대쪽에서 나타난 이유를 구태여 대지 않았다. 왜 그곳에서 나오세요? 예, 아파트 동을 잘못 알아서요. 아아, 예, 등등 따위의 말로 천금같은 시간을 낭비할 수 없는 것이다. 지금 나타난 현실이 중요하다. 그걸 물어서 뭐 한단 말인가?

“저기.”

다가선 조철봉이 그윽한 시선으로 은지를 보았다. 대기는 서늘했고 바람 한점 불지 않았다. 그래서 다가선 움직임이 대기에 파동을 일으켜 은지의 향을 조철봉의 코 끝까지 전달시켜 주었다. 깔끔한 향이다. 체취와 비누, 거기에다 약간의 향수까지 가미된 독특한 냄새였다.

“우리 저쪽에 좀 앉을까요?”

하고 조철봉이 조금 더 은근하고 으슥한 곳에 놓여진 벤치를 눈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놀이터와 가까운 위치였다. 은지가 잠자코 머리를 끄덕였으므로 둘은 그쪽 벤치로 옮겨가 나란히 앉았다. 그곳에서는 아파트의 밝은 불빛이 닿지 않았다. 옆면을 향해 놓여진 벤치였고 뒤쪽은 얕은 담장이다.

“한랜드 열풍이 대단해요.”

은지가 먼저 입을 열었다. 비스름하게 보이는 은지의 옆모습은 생기를 띠고 있었다. 그러나 조철봉의 가슴은 평온했다. 작업에 대한 조바심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로 7분쯤 전에 놀이터의 벤치에서 대포를 발사한 터라 행동은 차분했으며 여유까지 풍겨왔다. 이것을 은지도 안다.

“저도 회원으로 가입했어요.”

은지의 시선을 받은 조철봉이 빙그레 웃었다. 물론 인간은 제 위주로 분위기를 판단한다. 특히 남녀간의 작업 관계에 있어서 대놓고 말하는 경우가 거의 없는 여자를 상대할 때 그 분위기 파악이 최대의 관건이다. 그것으로 성패가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잘못 착각하고 작업을 걸었다가 따귀 내지는 구타, 또는 혀까지 잘리게 된 사연도 있다. 조철봉은 고수다. 따라서 어둠속에 반짝이는 은지의 두 눈을 보는 순간 지금이 어떤 상태인가를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손을 뻗어 은지의 어깨를 감싸쥐면 몸이 기울어질 것이며 그때 턱을 들어올려 입을 맞출 수도 있을 것이었다. 성사 확률은 오차범위 ±3%인 97%쯤 될 것이다. 그러나 조철봉은 의연했다. 벤치에 등을 딱 붙인 채로 은지의 시선을 받고는 차분하게 말했다.

“한랜드는 한국인의 이상향이지요. 젊은이들에게는 꿈의 세계가 될 것이고 나이든 분들에게는 마지막 안식처가 될 것입니다.”

한랜드 사이트에 나온 선전문이지만 그 한랜드의 대표자가 말하는 터라 더 값지게 들렸을 것이었다.

“그래요.”

은지의 두 눈이 더 빛났고 목소리는 감동으로 떨렸다.

“해외 동포에게는 새로운 조국, 남북한 국민에게는 이념 갈등을 벗어난 오직 한민족만의 세상.”

이것도 한랜드 사이트에 붙여진 선전문이다. 본래 한랜드 사이트에는 어떠한 선전문도 붙여 있지 않았다. 그러나 네티즌의 폭발적인 반응과 댓글이 넘쳐났고 그중 멋진 말들을 골라 붙였던 것이다. 조철봉은 어둠속에서도 밝아진 은지의 얼굴을 보면서 심호흡을 했다. 놀이터에서 뽑고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저기요.”

은지가 정색을 하고 조철봉을 보았다.

“좀 추워요. 집에 들어가서 커피 한잔 마셔요.”

“커피.”

눈을 가늘게 뜬 조철봉이 은지를 보았다. 이것은 무슨 말이겠는가? 밤 12시가 넘은 것은 둘째로 치고 지금 시선을 마주치고 있는 은지의 얼굴을 보라. 이 눈, 이 표정이야말로 나는 모든 것을 당신께 허락하겠다는 표시인 것이다. 조철봉이 은지의 시선을 잡은 채로 말했다.

“아니.”

그러자 은지의 눈이 조금 커졌다.

“너무 늦었어요.”

은지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일그러졌다.

“하지만 다음에.”

그러고는 조철봉이 손을 뻗어 은지의 어깨 위에 올려놓았다.

“다음에 꼭.”

조철봉은 가슴이 뛰는 것을 느끼고는 가늘게 숨을 뱉었다. 그 순간 하체에서 불끈 힘이 솟구쳤고 목이 멨다. 욕정이 분출될 때의 신호였다.

“은지씨.”

어깨를 조금 당기면서 부르자 은지의 몸이 자석에 붙는 것처럼 끌려왔다. 은지의 어깨가 가슴에 닿았으므로 조철봉은 한손으로 허리를 당겨 안았다.

“은지씨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조철봉이 은지의 귀에 대고 낮게 말했다. 이제 은지는 눈을 감고 있었는데 입술은 조금 벌어져 있었다. 키스를 기다리는 자세였다. 조철봉은 다시 하체의 철봉이 용솟음치는 것을 느끼고는 어금니를 물었다. 이미 한번 분출한 터라 은지와 엉키게 되면 애국가를 거꾸로 부를 필요도 없이 철봉은 한시간 반 정도는 마음놓고 운동할 수 있을 것이었다. 조철봉의 입술이 부딪쳤을 때 은지는 두팔을 벌려 목을 감았다. 그러자 상체가 빈틈없이 밀착되면서 자세가 더 편해졌다. 조철봉은 이미 벌어진 은지의 입 안을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진입했다가 곧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그것은 은지의 반응이 뜨거웠기 때문이다. 은지와는 첫 접촉이었고 첫 키스인 것이다. 조철봉은 은지가 서둘기만 했지 아직 미숙하다는 것을 곧 알 수 있었다. 혀가 자주 어긋났으며 이도 여러번 부딪쳤다. 그러나 그와 반비례해서 신선감은 높아졌다.

“아.”

하고 헐떡이면서 은지가 입을 떼었을 때는 5분쯤이나 지난 후였다. 은지가 손등으로 입가에 묻은 침을 닦더니 머리를 저어 보였다.

“이제 그만요.”

시선을 내린 채 그렇게 말했지만 잠깐 내렸던 손을 다시 조철봉의 목에다 감았고 몸은 그대로 붙이고 있다. 조철봉이 은지의 볼에 가볍게 입술을 붙였다.

“이번 토요일에 나하고 같이 있을까요?”

조철봉이 은지의 귀에 입술을 붙인 채 물었다.

“내 별장에 가서 일요일에 돌아옵시다.”

그러자 은지가 머리를 끄덕였다. 조철봉은 입술로 가볍게 은지의 귀를 물었다. 지금 이대로 은지의 집으로 들어가고 싶은 욕망이 솟구쳐 올랐지만 참았다. 놀이터에서 빼지 않았다면 참기 힘들었을 것이다. 오늘은 분위기를 조성해놓고 토요일에 은지에게 성의 기쁨이 무엇인지를 알려 줄 것이다. 동성애 관계에서는 결코 이 경지에 닿을 수는 없을 것이었다. 그 때 은지가 목을 감은 팔에 힘을 주더니 조철봉의 볼에 입술을 붙였다.

“기다릴게요.”

커피 마시자고 했을 때 따라 들어가 일을 치렀다면 이런 대우를 받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의 여유는 존경받는 법이다.

한랜드는 과연 어떤 땅일가? 한마디로 버려진 땅이다. 황무지, 동토, 또는 불모지로 불리는 대륙. 남한만한 면적에 인구가 원주민 2천명 정도였으니 얼마나 척박한 환경인지 설명이 될 것이다.

한랜드 동쪽면의 오호츠크해도 일년의 태반이 얼어붙어 있어서 해상로는 기대할 수가 없고 도로도 없다. 그것은 자원이 없기 때문이다. 원유나 가스, 또는 광물이 매장 되었다면 진즉 개발되었을 것이고 역설적으로 임차지로 내놓지도 않았다. 오직 약간의 삼림지대가 있어서 러시아 정부는 임차지의 미끼로 내 놓았던 것인데 한국의 오성상사가 덥석 물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19세기말에 제정러시아 정부가 알래스카를 미국에 팔아치운 전철을 두번다시 밟지 않으려고 치밀하게 노력한 흔적이 드러났다.

그때와 상황도 조건도 다 다른것이다. 양도가 아니라 50년 임차이며 그 기간동안에도 러시아 정부의 감독을 받고 세금도 낸다. 그러나 그들이 간과한 점이 있다. 바로 인터넷이다. 인터넷에서 품어진 네티즌들의 열띤 호응이 한랜드를 순식간에 지상 낙원으로 만들어 버리자 제일 먼저 당황한 쪽은 물론 오성상사였고 조철봉이다. 네티즌, 즉 한국인들은 설령 성사될 수 없는 꿈일지라도 그들앞에 갑자기 떠오른 새로운 목표에 열광하는 중이었다.

영웅도 시대가 만들어 준다고도 하지 않는가? 한랜드는 지치고 생의 의욕을 잃어가는 한국인들에게 이상향으로 떠올랐을 것이었다. 한랜드에는 그들의 바람이 다 있었다. 인간은 유일하게 생각하는 동물이며 그 생각을 자신 위주로 추진한다. 그들, 실패자를 포함한 모든 약자에서부터 더 갖추고 싶은 강한자에 이르기까지 한랜드는 각자의 빈곳을 채워줄 수 있는 꿈의 땅이 되었다. 한국인이 누구인가? 세계 최빈국에서 40년만에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으로 도약한 민족이다. 이제 그들은 새로운 도전의 땅을 찾은 것이다. 그것을 천하의 사기꾼 조철봉이 제공해준 셈이었다.

“그래서 말씀인데.”

하고 양성대가 말을 이었으므로 조철봉은 소리죽여 숨을 뱉었다. 양성대는 정계의 거물이다. 정치에 관심이 없는 조철봉도 양성대에 대해서는 안다. 여당인 국민당의 원내총무이며 국회 재경위원장인 정계 거물이 사무실을 방문한 것이다. 물론 오전에 예약은 하고 왔지만 조철봉은 오후 2시부터의 다른 약속은 줄줄이 뒤로 미뤄야 했다.

“야당 의원 중에서도 신청자가 많아서 그쪽은 네명을 넣었어요, 그래서 우리 여당 12명하고 의원만 16명인데.”

그러고는 머리를 돌려 옆에 앉은 보좌관을 보았다. 양성대의 시선을 받은 보좌관이 들고 있는 서류를 읽었다.

“보좌관과 비서관, 거기에다 보도진까지 합하면 모두 1백명이 조금 넘습니다. 방문시기는 열흘후인 5월 15일이 좋겠습니다. 2박 3일이면 될 것 같구요.”

보좌관은 탁자위로 서류 한통을 내려놓았다.

“방문 계획이니까 참조 하시지요.”

“모두 한랜드를 위한 일입니다.”

정색한 얼굴로 양성대가 말을 받았다.

“국민들에게 활력을 넣어준다는 의미도 있지만 그것은 결국 한랜드의 개발에 도움이 될 홍보효과가 극대화 될테니까 말입니다.”

조철봉의 시선을 받은 양성대는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

“조사장께선 큰일 하신거요. 국민들의 반응이 이렇게 좋은 것을 보면 한랜드의 장래가 양양합니다. 그리고 우리 정부에서도 적극 후원해 드릴테니까요, 그리고 내가 조사단장이 되었습니다.”

양성대를 배웅하고 돌아온 조철봉에게 최갑중이 물었다.

“방문단 경비는 누가 냅니까?”

그러자 조철봉이 풀석 웃었다.

“누가 내긴 누가 내? 저쪽에서 알아서 내야지.”

“가서 잘 곳도 마땅치 않은데.”

“건설단 숙소에서 자면 돼.”

“사장님도 같이 가실 겁니까?”

“난 안 간다.”

그러자 놀란 갑중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럼 누가 안내를 합니까?”

“건설 단장이 안내하면 돼.”

그러면서 조철봉이 입맛을 다시고는 소파에 등을 붙였다.

“방송사 세 곳이 다 가서 취재를 할 모양인데 내 얼굴이 TV 화면에 비치면 곤란하다.”

“아니, 왜요?”

“아니, 저 놈이… 하면서 내 얼굴에다 대고 손가락질을 할 여자가 어림잡아도 오백명은 될 것이다.”

“아아.”

“그리고.”

어깨를 늘어뜨린 조철봉이 말을 이었다.

“서울에 있는 동안 나이트에서 놀텐데 얼굴 팔리면 작업이 안 돼.”

“그렇지요.”

이제야 이해가 간다는 듯이 갑중은 커다랗게 머리를 끄덕였다.

“카바레에서는 얼굴 팔린 남자가 작업하기 힘들지요.”

“어쨌든 이번 일로 한랜드 작업에 탄력이 붙겠다.”

조철봉이 생기 띤 얼굴로 머리를 끄덕였다.

“정치인들의 순발력은 알아줘야 돼.”

“그럼.”

힐끗 벽시계를 올려다본 갑중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손님들 모셔오겠습니다. 그 양반들 때문에 한 시간이 넘도록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서둘러 방을 나간 갑중이 곧 한 무리의 손님들과 들어섰으므로 조철봉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거 처음 뵙겠습니다.”

그중 앞장선 사내 하나가 먼저 머리를 숙여 보이면서 인사를 했다.

“제가 요식업체 연합회장 이을삼입니다.”

조철봉과 악수를 한 이을삼이 손님들을 차례로 소개했다.

“이분은 룸살롱 연합회장 유미진씨.”

“이분은 요정 연합회장 박수동씨.”

“이분은 가라오케 연합회장 최만수씨.”

“이분은 마사지 연합회장 백기준씨.”

“이분은 호텔 연합회장 서경호씨.”

“이분은 나이트 연합회장 김무도씨.”

그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눈 조철봉이 자리에 앉았을 때 준비하고 있던 김재석이 곧 벽에 부착된 스크린에다 한랜드의 영상을 펼쳐 보였다. 눈에 덮인 황야였지만 근사했다.

“여러분, 이곳은 꿈의 대륙입니다.”

미리 외우고 있던 터라 재석의 대사는 유창했다.

“이곳은 세계 최대의 휴양지구가 됩니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인간의 진정한 쾌락이 무엇인지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라스베이거스보다 수천배 큰 규모의 휴양지구가 건립되는 것입니다….”

룸살롱, 요정, 가라오케, 나이트… 향락사업은 이제 새로운 도전의 땅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룸살롱이나 요정 등의 수준은 이미 한국이 세계 제일이다. 재석의 열띤 설명을 함께 들으며 조철봉은 손님들의 얼굴에서 배어나는 희망의 기색을 보았다. 그들은 이제 한랜드에 투자하게 될 것이다. 토지는 무상으로 제공될 테니 세금만 조금 더 내면 된다. 조철봉은 만족한 숨을 길게 내뿜었다.

토요일 오전 11시 정각에 조철봉은 직접 차를 몰고 이은지의 아파트 현관 앞에서 멈췄다. 오늘 조철봉이 운전한 차는 국산 최고급 승용차인 ‘봉수’였다. 근대자동차는 작년에 기술 개발에 뛰어난 실적을 올린 기술직 사원 박봉수의 이름을 차명으로 한 것이다. 처음에는 최고급 차에 어울리지 않게 촌스러운 이름이라고 하는 인간도 있었지만 곧 익숙해졌다. 봉수는 이제 최고급의 대명사가 된 것이다. ‘봉수’는 외국에서도 고급 브랜드로 인지되고 있는 중이었다. 기다리고 있던 이은지가 옆좌석에 탔는데 주위의 시선을 받았다. 30평형대 이 아파트에서 봉수를 타는 입주자는 드물 것이었다. 봉수는 벤츠보다 더 가격이 높다. 차가 아파트 입구를 통과했을때 은지가 어깨를 들썩이며 말했다.

“사람들이 다 봐요, 창피해.”

“창피하긴.”

조철봉이 웃음띤 얼굴로 은지를 보았다.

“내가 일부러 차를 앞에다 댄건데.”

“그래서 현관 앞에 서 있으라고 하신거군요?”

“그래요.”

“왜요?”

“은지씨 데려가는 남자가 봉수를 타는 사람이라고 소문 내려는 거지.”

“나아 참.”

“능력 있으면 써야 돼요, 그래야 경제가 살아나.”

가속기를 밟아 속력을 내면서 조철봉이 말을 이었다.

“안쓰고 감추는 사람들이 비정상이지.”

“어제도 또 언론이 크게 보도 하던데요, 정치인들이 한랜드 방문한다고.”

은지가 화제를 바꿨다. 여유가 넉넉했으므로 은지는 두 다리를 길게 뻗었는데 스커트 밑으로 드러난 피부는 윤기가 났다. 은지는 스타킹을 신지 않은 것이다.

“정부도 적극 지원해 준다면서요?”

“그렇게 해주겠답니다.”

앞쪽을 향한채로 조철봉이 말했다.

“고마운 일이지.”

“투자자들이 몰려 온다면서요?”

“토지는 거의 무상으로 제공 되니까요.”

그러나 투자자는 한랜드 당국으로부터 건물 위치와 외관에 이르기까지 허가를 받아야 한다. 업종별로 조정이 되는 것은 물론이다. 그래도 한랜드에 대한 투자신청은 아파트 청약이 시작되었을 때처럼 서버가 다운될 정도로 폭주했다. 한 달후에 투자자가 선발될 때는 업종별 경쟁률이 최소 1백대 1이 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한랜드는 한국의 알래스카라고도 하던데요, 관광자원의 보고라구요.”

은지가 다시 말했을 때 조철봉이 손을 뻗어 허벅지위에 올려놓았다. 그순간 은지가 몸을 굳혔고 입도 다물어졌다. 차는 미끄러지듯 달려가고 있었는데 소음장치가 잘 되어서 숨소리도 들렸다. 조철봉은 스커트로 덮여졌지만 허벅지의 탄력을 느낄 수가 있었다. 은지는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 허벅지를 비틀면 손이 미끌어질 텐데도 그렇다. 지난번에는 키스만 했다. 키스는 서툴렀어도 욕구는 강한 것처럼 느껴졌다. 물론 남자와의 경험이 있을 것이었다. 지금은 구치소에 주저앉아 있는 강명식이 몸을 부딪친 테이프를 갖고 있다지 않는가? 그렇다면 은지는 강명식과의 섹스에서 만족했을까? 그렇게 순식간에 생각이 스치고 지났으며 다음순간 조철봉은 손을 뻗어 은지의 스커트를 위로 젖혔다.

“아이.”

하고 은지가 허리를 비트는 시늉을 했지만 허벅지는 그대로 두었다. 조철봉도 거침없이 침을 삼켰다. 지금 차는 시내를 운행중이다. 이런 경우는 첨이다. 대낮에.

조철봉은 손을 조금 더 깊게 넣었다. 손가락이 허벅지 안쪽의 부드러운 피부에 닿았고 손등이 팬티의 탱탱한 촉감을 느꼈을 때 가슴이 뛰었다. 이 심장의 빠른 고동은 머릿속의 에너지가 급격하게 방출되면서 일어나는 성적 현상 중 하나일 것이었다. 그 의학적인 현상은 알 수 없었지만 조철봉은 이 때 몸의 모든 감각기관이 평상시 기준 이상의 기능을 발휘한다고 믿었다. 지금도 눈이 더욱 영롱해지면서 후각과 청각도 덩달아 예민해지고 있는 것이다. 보라, 은지의 보드라운 허벅지에 닿은 손바닥이 느끼고 있는 촉감은 또 어떤가? 그 때 은지가 양쪽 허벅지를 오므렸으므로 손이 끼였다.

“어머.”

화들짝 놀란 은지가 다시 다리를 벌렸지만 손이 끼였을 때의 느낌은 이미 뇌에 전달된 후가 아니겠는가? 방어 차원에서 허벅지를 오므린 것이 깊은 곳에 묵직한 물체를 넣은 느낌을 전달받게 된 것이다. 조철봉은 왼손으로 여유있게 운전을 했다. 신호등의 노란 표시에는 꼭 멈춰섰으며 서둘러 발진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번 은지의 허벅지에 얹은 오른손은 떼지 않았다.

“은지씨.”

조철봉이 은지를 불렀을 때는 손을 허벅지에 붙인 지 10분은 되었을 때였다. 차는 이제 고속도로 톨게이트를 향해 직진하고 있다. 은지가 상기된 얼굴로 조철봉을 힐끗 보았다. 시선은 금방 내렸지만 조철봉은 은지의 표정에서 기대감을 읽을 수가 있었다.

“난 은지씨가 필요합니다.”

허벅지에 붙인 손바닥에 땀이 배어 나왔으므로 조철봉은 부드럽게 문질렀다. 은지가 다시 다리를 오므리려고 했다가 허리만 의지에 붙이더니 가만있었다. 조철봉이 이제는 은지의 팬티에 손바닥을 붙였다.

“알고 계시지요?”

“네.”

하고 은지가 대답은 했지만 손을 들더니 조철봉의 팔을 쥐었다. 더 이상의 행동을 막으려는 시늉이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하던 짓을 멈출 조철봉인가?

“난 곧 다시 한랜드로 갑니다.”

앞쪽을 향한 채로 말하면서 조철봉은 은지의 봉긋한 팬티 앞부분을 움켜쥐듯 손바닥으로 덮었다.

“저기요.”

하면서 은지가 조철봉의 팔을 잡은 손에 조금 힘을 주었을 때였다. 조철봉의 손이 팬티 안으로 들어가 샘에 닿았다.

“아아.”

놀란 은지가 낮게 외쳤을 때 조철봉이 차분하게 말했다.

“은지씨, 부탁합니다. 가만히 계시지요.”

이게 무슨 말인가 하는 표정으로 은지가 다시 힐끗 조철봉을 보았을 때 손가락 끝은 이미 샘 안쪽에 진입했다. 조철봉이 말을 이었다.

“난 섹스한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아마 몇년 된 것 같아요.”

이대권한테서는 조미선과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아직 결과를 듣지는 않았다. 그러나 지금 하는 수작은 이대권과는 전혀 다르다. 이대권이 진실에 기반을 둔 사기를 쳤다면 조철봉은 완전 사기다. 그리고 그것이 어울린다. 은지가 몸을 굳혔을 때 조철봉은 천천히 샘 안에 진입한 손가락을 움직였다.

“그래서 부끄러운 말이지만 발기가 되지 않았어요. 그런데.”

조철봉의 손가락이 조금 깊숙하게 진입하자 은지의 두 다리가 붙여졌다. 그리고 샘 안이 뜨거워지면서 용암이 고이기 시작했다. 조철봉이 가늘게 숨을 뱉었다.

“은지씨 허벅지를 만지니까 그게 움직였습니다.”

여자한테 내 거시기가 서지 않는다고 고백하는 놈자의 수많은 경우가 있을 것이다. 이대권처럼 아예 이실직고를 하고서 회생의 기쁨을 함께 만끽하려는 경우도 있겠지만 지금 조철봉은 자신감에 바탕을 둔 사기를 치고 있다. 손가락 하나가 샘 안에 들어앉아 있는 것이 그것을 증명한다. 여자의 그 고귀한 샘 안에 손가락을 넣어본 수많은 경험이 조철봉을 이렇게 단련시켰을 것이다. 좀 성급한 수작이긴 한데 노래방이나 카바레 밀실에서 조철봉은 마치 리트머스 시험지처럼 손가락을 그곳에 넣었다가 빼었다.

그러나 리트머스 방식은 색깔의 변화를 봐야만 결과를 알 수 있으나 이 손가락 방식은 더 간단했다. 그저 넣은 것으로 끝나는 것이다. 넣었다면 된다. 적어도 조철봉한테는 그랬다. 손가락이 입장했다면 여유를 갖고 작업을 진행시켜도 되었던 것이다. 확률은 거의 1백퍼센트, 손가락 입장 후에 본체의 진입을 거부당한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차가 톨게이트를 빠져나갈 때 표를 뽑는 별도의 동작이 추가되는 바람에 조철봉의 오른손은 은지의 샘에서 빠져나왔다. 30분 가깝게 허벅지에서부터 샘 안까지 붙어있던 손이 떼어졌을 때 은지는 가늘고 길게 숨을 뱉었다.

“은지씨.”

이제는 두 손으로 핸들을 쥔 조철봉이 다시 은지를 불렀다. 조철봉은 지금 은지가 아쉽고 허전한 상태가 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은지의 샘은 젖어 가는 중이었던 것이다.

“내 거기 좀 만져 주실랍니까?”

조철봉이 말했을 때 은지가 머리를 들고 시선을 주었다.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조철봉은 잠자코 기다렸다. 금방 알아듣지는 못했더라도 듣기는 다 들었을 것이고 그것이 다시 뇌에서 해석이 되기까지는 몇 초면 충분했기 때문이다. 예상했던 대로 은지의 얼굴이 순식간에 빨개지더니 머리를 옆으로 돌렸다. 조철봉은 앞만 보고 있어서 얼굴이 빨개진 것은 못 보았지만 바로 앉는 것은 보았다.

“은지씨, 내 그것이 지금까지 서지 않았다가 조금 전에 선 것 같습니다.”

그러고는 조철봉이 길게 숨을 뱉었다.

“내가 너무 들떠서 그렇습니다. 며칠 전에 은지씨 아파트 앞에서 만났을 때만 해도 자신이 없었거든요. 쫓기듯이 일을 하다 보니까 여자 생각을 할 겨를도 없었지요. 그래서 은지씨 만나는 것도 부담이 되었습니다.

“…….”

“그런데 조금 전에 나도 모르게 은지씨 허벅지에 손을 대니까 뭔가 뜨거운 기운이 솟는 것 같더니.”

“그만요.”

하더니 은지가 조철봉의 허벅지 위에 손을 올려 놓고는 흔드는 시늉을 했다.

“그만 하세요.”

조철봉은 심호흡을 했다. 말로 해도 되는 것을 허벅지 위에 손을 올려놓은 의미가 무엇이겠는가?

“은지씨, 만져 보세요.”

하고 조철봉이 부탁했지만 은지는 가만 있었다. 그리고 당장 움직였다면 조철봉은 실망했을 것이다.

“은지씨 덕분입니다.”

다시 조철봉은 시작했다.

“성에 대한 감각을 다시 눈뜨게 해 준 겁니다. 은지씨가.”

“그만요.”

“만져 보세요. 지퍼부터 내리고.”

조철봉이 정색하고 말했다. 이미 철봉은 바지를 찢을 것처럼 곤두서 있다. 은지가 애용했던 고무 기구에 댈 것인가? 조철봉도 보았지만 강도나 크기가 형편없었다.

달아오른 상태에서는 사리 분간이 잘 안되는 법이다.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른 채 뱉는 경우도 있고, 맨정신으로는 때려 죽인다고 해도 못할 말을 거침없이 하기도 한다. 한마디로 정신이 나간다. 듣는 입장도 거의 비슷해서 다 듣기는 하지만 일이 끝났을 때는 머릿속이 모두 비워져 기억이 안 난다. 물론 이것은 둘 다 열중했을 때의 경우이고 계산기를 두드리는 인간은 다른 것이다. 지금 조철봉의 경우가 그렇다.

지퍼 내리고 만져 달라고 했지만 정신이 말짱했다. 그러나 은지가 달아오른 상태라고 믿는 터라 낯이 간지럽지도 않다. 은지는 이 말을 곧 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은지씨, 어서.”

다시 재촉하듯 조철봉이 말했을 때 은지의 손이 바지의 지퍼에 닿았다.

“아이, 참.”

하면서 멋쩍음을 표현했지만 지퍼가 내려졌고 팬티 안에서 압박을 당하던 철봉에 부담이 줄어들었다.

“자, 팬티를….”

지퍼가 다 내려진 순간에 팬티가 바지 밖으로 돌출되었다. 안에 든 철봉의 압력 때문이다. 이제는 은지의 손놀림에도 망설이는 기색이 사라졌다. 팬티의 구멍 부분을 재빨리 젖혔을 때 조철봉은 시원한 감촉과 함께 뻗어나온 철봉의 해방감을 느꼈다.

“어머.”

놀란 은지가 주춤 손을 오므리더니 곧 홀린 듯한 시선으로 철봉을 보았다. 그때는 조철봉도 머리를 돌려 은지의 모습을 살폈다. 은지의 번들거리는 두눈이 철봉에 꽂혀 있었다. 그리고 그 시선을 받은 철봉이 마치 별개의 생물처럼 건들거리는 중이었다.

“아, 섰군요.”

다시 앞쪽을 향한 채 조철봉이 탄성처럼 소리쳤다.

“모두 은지씨 덕분입니다.”

“아이, 참”

아직도 당황한 은지가 허둥대며 말했으므로 조철봉은 손을 뻗쳐 은지의 손을 잡았다.

“은지씨, 만져 주세요.”

은지의 손을 끌어 철봉에 붙인 조철봉이 차의 속력을 늦췄다.

“부탁합니다. 이제는 입으로도….”

은지가 몸을 옆으로 기울이더니 두손으로 철봉을 조심스럽게 쥐었다. 그리고 비싼 송이버섯을 다루듯이 조심스럽게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으음.”

조철봉이 눈을 크게 떴지만 입으로는 앓는 듯한 신음을 뱉었다.

“아, 이게 몇년만이야. 은지씨 덕분에.”

그때 은지가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안전벨트를 풀더니 철봉 위로 얼굴을 붙였다. 그리고 철봉을 혀로 애무하기 시작했다.

“으음.”

차의 속력을 더 줄인 조철봉이 마침 시외버스 정류장의 주차 공간을 발견하고 다가가 차를 세웠다. 토요일이었지만 주차 공간이 적은 이곳은 한적했다. 버스를 기다리는 승객도 없다. 그때 은지가 철봉에서 얼굴을 들었다. 얼굴이 상기되었고 입 주위는 물기에 젖었다. 조철봉은 심호흡을 했다. 아름답다.

“이제 그만요.”

하면서 은지가 상반신을 세웠을 때였다. 조철봉은 은지의 허리를 당겨 안았다.

“은지씨, 이곳에서….”

“안돼요.”

놀란 듯 은지가 눈을 크게 뜨는 시늉을 해 보였지만 이미 달아올라 있는 상황이다. 조철봉이 스커트를 젖히자 은지는 몸을 비틀면서 물었다.

“밖에서 안이 안 보이겠죠?”

“안보입니다, 전혀.”

조철봉이 자신있게 말했을 때 은지는 허리를 비틀어 팬티가 벗겨지는 것을 도왔다. 차에 선팅은 했다. 하지만 안했어도 작업엔 지장이 없었을 것이다. 은지는 서둘렀는데 오랜만에 작동한 조철봉의 철봉에 불안감을 느낀 이유도 포함된 것이 분명했다. 조철봉이 운전석 좌석을 뒤로 눕혀 장소를 만드는 동안에도 불안한 표정으로 철봉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것을 봐도 그렇다.

한낮이다. 차량들은 옆쪽으로 계속해서 지나가고 있다. 조철봉은 누운 채로 바지와 팬티를 벗어 내렸다. 그러자 건들거리며 솟은 철봉이 더 두드러졌다. 그 때 은지가 스커트를 젖히면서 조철봉의 몸 위로 올랐다. 시키지도 않았다. 조철봉이 눕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올라온 것이다. 은지가 양성애자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조미선과의 사연은 우연히 일어났고 호기심이 계기가 되었을 것이었다.

“해요?”

배 위에 올라온 은지가 그렇게 물었으므로 조철봉은 정신을 차렸다. 차 안에서 이렇게 분위기가 진전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하긴 작정을 하고 나면 물 흐르듯이 맡겨 놓는 것이 조철봉의 습관이었다. 언제, 어떻게, 하고 딱딱 스케줄에 맞춰 작업을 진행할수는 없는 노릇인 것이다. 이 작업도 리듬이 중요하다.

“살살.”

조철봉이 불쑥 그렇게 말하고는 갑자기 웃음이 터져 나올 뻔했으므로 어금니를 물었다. 그러나 은지는 긴장했다.

“네, 살살.”

복창까지 하더니 하반신을 천천히 붙여 밀었다. 조철봉은 자신의 몸 전체가 뜨거운 동굴 안으로 들어서는 느낌을 받으면서 신음했다.

“으으음.”

저도 모르게 긴 탄성이 터져 나왔고 동시에 은지의 입에서도 신음이 뱉어졌다.

“아아아.”

은지는 끝까지 몸을 밀고 나서 나중에는 상반신을 조철봉에게 빈틈없이 붙였다.

“아, 좋아요.”

헐떡이며 은지가 말했을 때 조철봉은 허리를 들어 올렸다. 힘이 들었지만 마찰감을 받은 은지가 신음했고 다시 차 안은 뜨거운 열풍으로 덮였다. 은지가 폭발한 것은 그로부터 5분쯤이 지났을 때였다. 길고 높은 탄성을 뱉으면서 은지는 온몸을 오그렸다가 곧 빈틈없이 조철봉에게 붙었다.

그러고는 다시 한참이 지나도록 그러고 있었다. 조철봉은 은지가 만족했다는 것을 알았다. 탄성이나 몸짓으로 절정을 가장했던 여자가 간혹 있었지만 조철봉은 속아 넘어가지 않았다. 지금도 마찬가지, 조철봉은 대포를 쏘지 않았다. 그것은 냉정을 유지한 채 상대의 반응을 면밀하게 체크하고 있었다는 의미나 같다. 따라서 은지가 온몸을 내던지듯 폭발했다는 것을 알수 있었던 것이다.

“나, 옮길게요.”

하고 은지가 말했을 때 조철봉은 상반신을 일으켜 주었다. 이제 은지의 숨소리는 가라앉았다. 은지가 겨우 몸을 굴려 옆자리로 가더니 스커트만 내려 하반신을 덮었다. 팬티를 찾아 입기에는 장소도 협소했고 거북한 것 같았다. 조철봉은 팬티와 바지를 올려 입고는 좌석을 제대로 맞췄다. 차들은 여전히 옆으로 쌩쌩 지나갔고, 앞쪽 시외버스 대합실은 텅 비어 있었다. 그 위쪽의 하늘은 푸르렀으며 이른 오후의 햇살은 맑았다.

“정말 몇년 만에 했습니다.”

차에 시동을 걸면서 조철봉이 말했다.

“그리고 아주 좋았어요”

그리고 은지는 그 이상일 것이었다. 다 안다.

거대한 환락의 도시, 인간의 모든 꿈이 성취되는 땅, 물질주의 문명이 도달할 수 있는 최후의 장소, 시베리아의 소돔과 고모라 등 아직 제대로 입주도 시작하지 않은 한랜드를 향해 매스컴은 갖가지 별칭을 만들어 내었다. 한랜드 건설 당국에서 향락산업 위주로 도시를 설계할 것이라는 발표를 한 후에는 반대 여론도 만만치 않게 일어났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대부분의 한국인에게 한랜드는 희망의 땅이었다. 한랜드 당국은 향후 5년간 250만개의 일자리를 창출해낼 것이며 1차연도에만 75만개가 될 것이라는 발표를 한 것이다. 한랜드의 임시 당국 역할인 건설본부를 통하여 지금까지 업종별로 35억불 정도의 투자 신청이 접수되었는데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규모였다. 비판적인 어느 언론 매체는 한국의 부가 모두 한랜드로 넘어가기 전에 규제를 해야 한다고까지 주장했다.

그러나 그 상황에서 한랜드를 방문한 여야 정치인들은 이곳이 한민족의 재도약에 적합한 땅이라는 결론을 내었다. 그때까지 투자를 망설이던 기업체와 투자가들에게는 그것만큼 확실한 보증이 없을 것이었다. 그후부터 투자 신청이 폭주했으므로 건설본부는 조정을 해야만 했다. 조철봉이 한랜드의 수도로 정한 뉴서울에 도착했을 때는 6월 중순경이었다. 여름이었지만 기온은 영하 20도 정도였고 대지는 여전히 흰눈에 덮여 있었다.

“예정대로 7월1일에 스키장 두 곳이 오픈됩니다.”

임시 건물이지만 목재 3층 저택의 응접실에 앉은 조철봉에게 건설본부장 이동호가 보고했다. 이동호는 두달 동안에 스키장과 호텔 두 곳을 건설한 것이다. 스키장이야 자연 조건이 다 갖춰진터라 별로 힘이 안들었지만 각각 1천여실의 객실을 갖춘 호텔 공사는 한국인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한국인 이동호는 두달만에 하바로프스크에서 공수해온 목재를 이용해서 멋진 방갈로식 호텔을 건설했다. 감탄한 러시아 연락관이 지금도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때 옆에 앉아있던 강상규가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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