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상병 특집 : 4월 28일 오늘의 역사
1993년 오늘, 귀천(歸天)의 작가 천상병 별세
이외수 그리고 중광과 함께 우리나라 문단에서 가장 기이한 행적을 가진 3대 시인 중 하나로 꼽히는 천상병. 그는 1930년 일본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경남에서 "꽃" 그리고 "새"의 작가 김춘수의 제자로 시를 배웠다.
어느 대학을 갈 것인지 결정하려고 종이비행기를 열서너 개 만들어 옥상에서 날렸다. 제일 멀리 날아간 비행기를 잡아서 봤더니 서울대 상대였다.
그래서 합격했다. 그리고 문학동아리에서 열심히 활동을 했다.
성적도 전교 5등 안에 들어 당시 최고 인기 직장이던 한국은행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내가 거기 왜 가야 해?" "시인은 가난해야 해"라며
스스로 고생을 선택한 사람. 그리고 자유롭게 살다가 엉뚱하게도 1967년 동백림 사건에 연루된다.
당대의 지식인들을 모두 한 데 모아 간첩으로 몰아 세운 동백림 사건. 그는 이때 지독한 학대와 전기고문까지 당해 당해 아기를 낳을 수 없는
불구가 되고 온 몸은 만신창이가 된다.
그리고 동가숙서가식으로 보내던 나날들. 마침내 1970년 중반부터 그는 종적을 감추고. 사람들은 그가 죽었다고 믿고서는
돈을 모아 죽어서라도 호강하라고 호화장정의 유고시집 "새"를 출판해 주었다.
하지만 1971년 어느날 병원에서 발견된 천상병.
지독한 영양실조와 술, 그리고 물고문과 전기고문으로 망가져 버린 정신과 몸. 심각한 자폐증까지 닥친
그에게 나타난 천사는 바로 젊은 시인을 열렬히 따르던 5살 어린 처녀 목순옥.
그녀의 지극한 사랑과 헌신은 40kg의 보잘 것 없는 남자를 60kg까지 살찌우고. 정신도 덩달아 피어나고.
성불구자임을 알면서도 사랑하고 결혼하고 평생을 지원 해준 아내. 귀한 여인. 귀한 사랑.
인사동의 작은 카페 귀천. 사랑하는 아내가 먹고 살 수 있도록, 아니 아내가 천 시인을 후원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카페.
일화도 많다. 천시인이 귀천하자 친구들이 부조금으로 800여 만원을 모아줬단다.
목여사는 이 귀한 돈을 친정 어머니께 보관을 부탁했고, 어머니는 잘 감춘다고 '레루'식 연탄 아궁이 아래에 넣어두었다.
그런데 평생 고생만 한 남편의 저승길이라도 따뜻하라고, 아내는 옆집에서 연탄불을 얻어다가 불을 피웠다.
당연히 돈도 활활 피워올랐고. 살아서 돈 복 없는 그가 죽어서도 있을 턱이 없었겠지.
장례식 후 재를 다 모아서 한국은행에 가지고 갔더니 500여만원을 한국은행이 돌려주었다고 한다. 착한 한국은행.
1. 천상병의 천사 목순옥과 귀천 카페 http://blog.chosun.com/eggbadung/707018
2. 故 천상병 시인 20주기 추모행사(동영상) http://news.tv.chosun.com/site/data/html_dir/2013/04/26/2013042690371.html
천상병의 시 한 다스
1. <편지>
점심을 얻어 먹고 배부른 내가
배고팠던 나에게 편지를 쓴다.
옛날에도 더러 있었던 일.
그다지 섭섭하진 않겠지?
때론 호사로운 적도 없지 않았다.
그걸 잊지 말아 주기 바란다.
내일을 믿다가
이십년!
배부른 내가
그걸 잊을까 걱정이 되어서
나는
자네한테 편지를 쓴다네.
2. <나의 가난은>
오늘 아침을 다소 행복하다고 생각는 것은
한 잔 커피와 갑 속의 두둑한 담배,
해장을 하고도 버스값이 남았다는 것.
오늘 아침을 다소 서럽다고 생각는 것은
잔돈 몇 푼에 조금도 부족이 없어도
내일 아침 일도 걱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가난은 내 직업이지만
비쳐오는 이 햇빛에 떳떳할 수가 있는 것은
이 햇빛에서도 예금통장은 없을 테니까......
나의 과거와 미래
사랑하는 내 아들딸들아,
내 무덤가 무성한 풀섶으로 때론 와서
괴로웠을 그런대로 산 인생 여기 잠들다, 라고,
씽씽 바람 불어라......
3. <바람에도 길이 있다>
강하게 때론 약하게
함부로 부는 바람인 줄 알아도
아니다! 그런 것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길을
바람은 용케 찾아간다
바람길은 사통팔달(四通八達)이다.
나는 비로소 나의 길을 가는데
바람은 바람길을 간다.
길은 언제나 어디에나 있다.
4. <새>
외롭게 살다 외롭게 죽을
내 영혼의 빈터에
새날이 와 새가 울고 꽃잎 필 때는,
나가 죽는 날,
그 다음날.
산다는 것과
아름다운 것과
사랑한다는 것과의 노래가
한창인 때에
나는 도랑과 나뭇가지에 앉은
한 마리 새.
정감에 가득찬 계절
슬픔과 기쁨의 日
알고 모르고 잊고 하는 사이에
새여 너는 낡은 목청을 뽑아라.
살아서
좋은 일도 있었다고
나쁜 일도 있었다고
그렇게 우는 한 마리 새.
5. <나는 행복(幸福)합니다>
나는 아주 가난해도
그래도 행복(幸福)합니다.
아내가 돈을 버니까!
늙은이 오십세 살이니
부지런한 게 싫어지고
그저 드러누워서
KBS 제1FM 방송의
고전음악을 듣는 것이
최고의 즐거움이오. 그래서 행복(幸福)
텔레비전의 희극을 보면
되려 화가 나니
무슨 지랄병이오?
세상은 그저
웃음이래야 하는데
나에겐 내일도 없고
걱정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걱정하지 말라고 했는데
어찌 어기겠어요?
행복은 충족입니다.
나 이상의 충족이 있을까요?
6. <잠모습 아내>
어이없게 어이없게 깊게 짙게
영! 영! 여천사 같구나야!
시간 어이없게 이른 새벽!
8월 19일 2시 15분이니
모름지기 이러리라 짐작되지만
목순옥 아내는
다만 혼자서 아주 형편없이 조그만
귀천 찻집을 경영하면서
다달이 이십만원 안팎의 순이익 올려서
충분히 우리 부부와 동거하고 있는
어머니(사실은 장모님)와 조카
스무 살짜리 귀엽기 짝없는 목영진
애기 아가씨와
함께 네 사람 생활, 보장해 주고
또 다달이 약 오 만원 가량
다달이 저금하니
우리 네 가족 초소시민층 밖에 안 되도
그래도 말입니다!
나는 담배 - 그것도 내 목구멍에
제일 순수한 담배 골라 피울 수 있고요!
술은 춘천 의료원 511호실에서
보낸 날수로 따져서 말해요!
1월 20일에서 1월 17일까지니
담배 더러 피우긴 했었지
그러니 불법적으로
피우긴 했어도
간호원이나 기분 언짢고
그래서 지금 금연중이고
소설가인 이외수씨와
이름잊은 제수씨가 퇴원 때
집에 와서
한 달 동안 자기들 집에서 머물러 달라고
부부끼리 간청했지만......
다 무시하고
어머니와 영진이가 있는
의정부시 장암동으로 직귀했습니다!
아내야 아내야 잠자는 아내야!
그렇잖니 그렇잖니
7. <강 물>
강물이 모두 바다로 흐르는 까닭은
언덕에 서서
내가
온종일 울었다는 그 까닭만은 아니다.
밤새
언덕에 서서
해바라기처럼, 그리움에 피던
그 까닭만은 아니다.
언덕에 서서
내가
짐승처럼 서러움에 울고 있는 그 까닭은
강물이 모두 바다로만 흐르는 그 까닭만은 아니다.
8. <행복>
나는 세계에서
제일 행복한 사나이다.
아내가 찻집을 경영해서
생활의 걱정이 없고
대학을 다녔으니
배움의 부족도 없고
시인이니
명예욕도 충분하고
이쁜 아내이니
여자 생각도 없고
아이가 없으니
뒤를 걱정할 필요도 없고
집도 있으니
얼마나 편안한가.
막거리를 좋아하는데
아내가 다 사주니
무슨 불평이 있겠는가.
더구나 하느님을 굳게 믿으니
이 우주에서
가장 강력한 분이
나의 빽이시니
무슨 불행이 온단 말인가!
9. <나는 행복(幸福)합니다>
나는 아주 가난해도
그래도 행복(幸福)합니다.
아내가 돈을 버니까!
늙은이 오십세 살이니
부지런한 게 싫어지고
그저 드러누워서
KBS 제1FM방송의
고전음악을 듣는 것이
최고(最高)의 즐거움이오. 그래서 행복(幸福).
텔레비젼의 희극(喜劇)을 보면
되려 화가 나니
무슨 지랑병(炳)이오?
세상은 그저
웃음이래야 하는데
나에겐 내일도 없고
걱정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걱정하지 말라고 했는데
어찌 어기겠어요?
행복은 충족입니다.
나 이상의 충족이 있을까요?
10. <소릉조(小陵調)>
- 70년 추일(秋日)에
아버지 어머니는
고향 산소에 있고,
외톨배기 나는
서울에 있고,
형과 누이들은
부산에 있는데
여비가 없으니
가지 못한다.
저승 가는 데도
여비가 든다면
나는 영영
가지도 못하나?
생각느니, 아,
인생은 얼마나 깊은 것인가
11. <내가 좋아하는 女子>
내가 좋아하는 여자의 으뜸은
물론이지만
아내 이외일 수는 없습니다.
오십둘이나 된 아내와
육십 살 먹은 남편이니
거의 無能力者이지만
그래도 말입니다.
이 시 쓰는 시간은
89년 오월 사일
오후 다섯시 무렵이지만요-.
이, 삼일 전날 밤에는
뭉쿨 뭉쿨
어떻게 요동을 치는지
옆방의 아내를
고함지르며 불렀으나
한참 불러도
아내는 쿨쿨 잠자는 모양으로
장모님이
"시끄럽다-. 잠좀 자자"라는
말씀 때문에
금시 또 미꾸라지가 되는 걸
草者는 어쩌지 못했어요-.
12. <아가야>
해뜨기 전 새벽 중간쯤 희부연 어스름을 타고 낙심을 이리처럼 깨물며 사직공원길을 간다.
행도 드문 이 거리 어느 집 문밖에서 서너 살 됨직한 잠 옷 바람의 앳된 계집애가 울고 있다. 지겹도록 슬피운다.
지겹도록 슬피운다. 웬일일까? 개와 큰집 대문 밖에서 유리 같은 손으로 문을 두드리며 이 애기는 왜 울고 있을까?
오줌이나 싼 그런 벌을 받고 있는 걸까? 자주 뒤돌아보면서 나는 무심할 수가 없었다.
아가야, 왜 우니? 이 인생의 무엇을 안다고 우니? 무슨 슬픔 당했다고, 괴로움이 얼마나 아픈가를 깨쳤다고 우니?
이 새벽 정처없는 산길로 헤매어가는 이 아저씨도 울지 않는데......
아까야, 너에게는 그 문을 곧 열어줄 엄마손이 있겠지. 이 아저씨에게는 그런 사랑이 열릴 문도 없단다.
아가야 울지 마! 이런 아저씨도 울지 않는데.
천상병 >>-----------------------
• 1930년 1월 29일 이본 효고현 히메지시 출생
• 1945년 중2 때 귀국하여 마산 중학 2년에 편입
• 1951년 서울대 상대 입학. 송영택, 김재섭과 동인지 <처녀>지 발간
• 1952년 <문예> 1월호에 시 <강물>이 유치환에 의해 추천
• 1971년 동백림 사건으로 체포. 물고문과 전기고문의 후유증과 음주, 영양실조로 쓰러짐. 행려병자로 서울 시립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
사망으로 추정되어 유고시집 <새>를 친구들이 발간. 이렇게 하여 살아있는 사람의 유고시집이 발간되는 일화가 생김.
• 1972년 영양실조와 심한 자폐증으로 시달림. 한 열성 팬이자 친구의 동생이었던 1935년생 한 처녀의 극진한 간호로 병세가 호전.
결국 그 처녀(목순옥 여사)와 결혼하여 가난, 소박, 단아하게 삶.
• 1993년 4월 28일 오전 11시 20분 의정부 의료원에서 숙환으로 귀천. 진짜 유고시집 ‘나 하늘로 돌아가네’ ‘날개 없는 새 짝이 되어’ 모음집 발간
• 2010년 8월 26일 목순옥 여사 강북삼성병원에서 귀천
- ▲ 귀천의 작가, 천상병과 그의 아내, 목순옥. 젊은 시절 단란한 한 순간을 카메라에 담았다. 사진=김영관, 영상=한용호.
그리움은 입으로 토해내는 것이다. 아무리 견디려 해도 참을 수 없다. 구토처럼 틀어막은 입을 비집고 나오는 것, 그게 바로
그리움이다. 기자는 어느 시인의 늙은 아내로부터 그 사실을 배웠다.
칠순이 지난 아내는 여전히 남편을 이야기했다. “그 사람은 술을 무척 좋아했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고왔다. 늦은 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성우의 목소리는 사람을 취하게 하는 마력(魔力)이 있다. 나이 든 아내의 목소리가 그랬다.
“어린 아이 같은 그 사람은 누구에게나 큰 소리로 말했죠. ‘난 내 마누라가 좋다!’ 그게 그렇게 듣기 좋았어요.” 아내는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서 작은 카페를 운영한다. 카페엔 남편의 사진과 그가 남긴 글들이 널려 있다. “그 사람의 글이 너무 좋아서….” 아내는 수줍게 남편의 글 솜씨를 자랑했다.
“그 사람을 기억하는 이들이 자주 찾아와요.” 아내는 다시 남편 이야기를 꺼냈다. 그리고 긴 시간 동안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그녀의 남편은 이 세상에 없다. 그는 이미 하늘로 돌아갔다. 이른바 귀천(歸天). 떠난 남편의 이름은 천상병, 남겨진 아내의 이름은 목순옥이다. 그녀의 나이는 72세다.
- ▲ 목순옥(72) 여사는 남편 천상병에게 15년째 편지를 보내고 있다. 그동안 쓴 편지는 50여통. 그녀는 편지를 모아 연말쯤 '하늘에 띄우는 편지'라는 제목의 책을 발간할 계획이다. 사진=김영관, 영상=한용호.
◆ 남편 천상병, 아내 목순옥
천상병은 소풍을 마치고 하늘로 돌아간 시인으로 기억된다. 병과 가난에 시달리면서도 해맑은 동심과 웃음을 잃지 않은 사람. 그의 대표작, 귀천은 그런 천상병을 잘 설명하고 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 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 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나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천상병은 1930년 일본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소년은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자랐다. 아버지의 잦은 사업실패 덕분이다. 소년은 몸이 약한 대신 감수성이 예민했다. 마산중학교 재학 시절, 국어교사는 시인 김춘수였다. 스승은 소년의 재능을 눈여겨봤다. 1년간 혹독한 습작의 시간을 보냈다. 1950년, 소년은 스승과 유치환 시인의 추천으로 등단했다. 문학잡지가 청소년의 마음을 사로잡던 시절. 중학생이던 소년은 전국구 스타가 됐다. 그리고 전쟁이 터졌다.
1951년, 부산으로 옮겨진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에 입학했다. 전쟁은 감수성 여린 소년에게 현실을 바라보는 눈을 선물했다. 대학에서는 평론가로 유명했다. ‘나는 거부하고 저항할 것이다’라는 다소 과격한 제목의 평론은 지금도 회자(膾炙)되는 유명한 글이다. 아내는 기억한다. “시 쓸 때와 평론할 때, 남편은 전혀 다른 사람이었어요. 아주 독하게 평론을 했답니다. 그의 매를 맞지 않으면 유명한 문인이 아니란 말이 나돌았어요. 때문에 은근히 남편의 평론에 오르내리길 바라는 분들이 많았죠.”
대학을 졸업하면서 한국은행에 입사할 기회가 주어졌다. 하지만 그는 거부했다. “시인은 배가 고파야지.” 그는 홀연히 대학을 떠났다. 그 시절, 아내는 고등학교 1학년 학생이었다. 아내의 오빠가 시인의 친구다. 가끔 커피숍에서 만나는 시인은 그녀의 우상이었다. “그 시절엔 문인들이 함께 어울렸어요. 오빠 덕분에 시인을 만났어요. 당시엔 큰 소리로 잘 떠드는 분이셨죠. 가끔 술집에도 따라갔는데 시인은 제 자리에 술잔이라도 올려지면 당장 치웠답니다. ‘미스(Miss) 목은 술 마시면 안돼.’ 이러면서 말이죠.”
1967년, 시인에게 큰 시련이 닥쳤다. 동베를린간첩단 사건에 연루된 것. 대학동기에게 술값을 빌린 게 간첩으로 몰린 이유였다. 중앙정보부에서 전기고문을 세 번 받은 뒤 풀려났다. 시인은 몸이 극도로 쇠약해졌다. 잦은 폭음도 그의 건강을 해쳤다. 부산 형님 댁에 내려갔다 1년 만에 돌아왔다. 서울에 도착한 천상병은 그 길로 친구의 동생을 찾아갔다. “얼굴이 까맣게 변했더라구요. 커피숍에서 문학 이야길 하다 내일 보자며 헤어졌어요. 그런데 사라지신 거예요.”
그날 시인은 길에 쓰러졌다. 술에 취해서였다. 서울시립정신병원에 실려갔다. 천재 시인이 행려병자로 바뀐 것이다. 목순옥을 비롯해 시인의 친구들이 그를 찾았다. 허사였다. 그들은 울면서 친구의 유고 시집 ‘새’를 발간했다. 그의 죽음은 신문에도 실렸다. 병원장이 놀라서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천상병은 살아있습니다.”
목순옥은 매일 병문안을 갔다. 그녀의 뒷바라지 덕분에 시인의 몸무게는 40㎏에서 60㎏으로 불었다. 병원장이 말했다. “저 사람이 글을 쓰고 못쓰고는 당신에게 달렸습니다. 두 분이 결혼하면 어떨까요?”
- ▲ 천상병의 아내, 목순옥(72) 여사는 아직도 남편을 그리워한다. 서울 인사동의 작은 카페 귀천에서 아내는 남편의 호흡을 맡고 있다. 사진=김영관, 영상=한용호.
◆ 남편의 재능을 사랑한 아내
둘은 부부가 됐다. “그냥 돌봐드려야겠다는 마음이 들더라구요. 깊이 들어가면 그게 사랑이겠죠?” 가진 것은 병과 가난 뿐인 남자. 그런 이를 사랑한 아내는 말했다. “나이가 드니까 잔소리가 늘었답니다. 지하철을 타고 가다 꼭 껴안은 젊은 남녀를 보면 잔소리를 합니다. ‘너무 붙어있지 마라. 빨리 뜨거워지면 금새 식는다.’ 서로 툭툭 치는 젊은 남녀를 봐도 지나치질 못해요. ‘서로 배려해야지. 함부로 대하면 안된다.’ 나이가 드니까 그런 것이겠죠?”
시인과의 결혼 생활은 힘들었다. 그래도 아내는 좋았다. 특히 시인의 아내만 즐길 수 있는 특권에 마냥 기꺼워했다. “시인이 정말 아이 같았어요. 가끔 집에 들어오면 다 써놓은 시를 베게 옆에 가지런히 놓고 잠든 척 했답니다. 저는 가장 먼저 시인의 글을 읽는 사람이 된 것이죠. 좋았냐구요? 그야 물론 너무 좋았죠.”
그녀의 남편 자랑은 이어졌다. “시인은 가만히 앉아 있다 제목을 정하면 한달음에 시를 썼어요. 단 한번도 다시 고치는 걸 보지 못했어요. 정제된 단어가 속에서 쏟아져 나오는 거죠. 그럼 시를 툭 보이면서 자랑했답니다. ‘이것 봐라, 아내야.’ 천재였던 거죠.”
그럼, 남자 천상병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천재 천상병을 사랑한 것 아닌가. “그랬을 지도 모르죠. 하지만 모든 걸 제게 의지하는 시인이 계셔서 행복했습니다. 사랑이란 가슴에 담아두기도 하고, 상대방을 이해하기도 하고, 내가 줌으로써 기뻐해야 하는 것 아닐까요?” 그녀는 시인에게 동생이고, 친구이고, 애인이고, 아내이고 동시에 스승이며 어머니였다. 하긴 그것이 사랑이다.
◆ 남편의 유산(遺産)
천상병은 1988년부터 만성간경화증으로 고생했다. 친구가 의사로 재직하던 춘천의료원에 입원했다. 그래도 시인은 여전히 유쾌했다. “배가 산처럼 불러서 병원에 갔어요. 복수(服水)가 찬 것이죠. 일반인이라면 죽음을 앞두고 많이 두려웠을 거예요. 병원에 도착하니 친구인 정원석 선생님이 야단을 치시더군요. ‘야, 이 놈아. 배가 왜 이리 불렀냐?’ 시인이 대뜸 받아쳤어요. ‘내가 말이다. 임신을 했다, 임신을 했어.’ 그만큼 낙천적이었어요. 덕분에 많이 웃었죠.”
병원에서 아침을 먹이고 서울로 돌아와 카페 문을 열었다. 일이 마치면 다시 춘천으로 향했다. “춘천으로 가는 길이 참 예뻤답니다. 차 안에서 매일 기도했어요. 5년만 더 살게 해주세요. 딱 5년만.”
시인은 거짓말처럼 병을 털고 일어났다. 그리고 5년 뒤. 다시 거짓말처럼 세상을 떠났다. “이른 봄이었어요. 방금 헤어져서 카페 문을 열고 물을 끓이고 있는데. 병원에 실려갔다는 전화를 받았죠. 마음이 덜컥 하더군요. 매일 춘천으로 갈 때, 5년이 아니라 10년을 살게 해달라고 빌 것을….” 시인의 나이 63세였다.
남편이 떠난 지 15년. 아내는 추억을 먹고 산다. 매년 의정부, 산청 등지에선 천상병을 기리는 문학제가 열린다. 시비(詩碑)도 세워졌다. 작은 카페엔 여전히 남편의 친구와 팬들이 찾아온다. 아내는 남편의 기념관을 세우고 억울하게 고문을 받은 간첩사건의 진실을 찾는데 여생을 보낼 예정이다. 그녀에게 의지했던 남편은 세상을 등지고도 아내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모양이다.
“제게 남겨진 일, 모두 마무리하고 저도 떠나야죠. 하늘에서 다시 만나면 큰 소리를 칠 거예요. 제가 다 처리하고 왔다고 말이죠.”
남편의 그리움은 시가 됐다. 아내의 그리움은 이제 별이 되려 한다. 그들 부부가 서로를 그리워함은 여느 청춘의 사랑에 못지 않다. 문득 남편의 은사인 김춘수의 ‘구름과 장미’가 떠올랐다. 그의 시를 마지막으로 소개하는 것은 그런 까닭이다.
저마다 사람은 임을 가졌으나
임은 구름과 장미되어 오는 것
눈 뜨면
물 위에 구름을 담아 보곤
밤엔 뜰 장미와
마주앉아 울었노니
참으로 뉘가 보았으랴?
하염없는 날일수록
하늘만 하였지만
임은
구름과 장미되어 오는 것
'공부 > 각종자료및스크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소금과 커피의 생활속의 지혜 (0) | 2014.06.07 |
---|---|
컴퓨터 포멧하는 방법 (0) | 2014.06.07 |
雜木 盆栽/ 희귀종 꽃/ 푸켓섬과 피피섬 (0) | 2014.04.24 |
동대문디자인플라자파크(DDP) (0) | 2014.04.09 |
老人之三反 (0) | 2014.03.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