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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코룸하이웨이 1,000km 자전거 여행

應觀 2012. 11. 27. 08:07

[연재]ㅣ카라코룸하이웨이 1,000km 자전거 여행⑧] 느낀다! 심장에 남아 있는 순간의 감동과 직관의 깨달음을
중국 파미르고원에서 만난 신의 선물 같은 풍경

아침 9시쯤 게스트하우스에서 출국심사를 하러 나왔다. 아직 출경 사무소는 문을 열지 않았다. 문 앞에는 9시 30분부터 출국심사를 한다고 안내가 되어 있다. 30분 후 출국 수속을 위해 건물 앞으로 가니 몇몇 파키스탄 사람과 외국인 몇 명이 기다리고 있는 것을 빼고는 건물 앞이 한산하다. 시간이 되어서야 문을 여는 이들의 속성을 잠깐 잊고 있었다.

오늘은 아침부터 다소 흥분되었는데 파키스탄을 뒤에 두고 쿤자랍을 넘어 중국 측 파미르 고원으로 들어서는 날이기 때문이었다. 기대와 흥분으로 가득 찼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그 넓은 고원을 통과할 생각으로 심경이 복잡하다. 더구나 그 망망한 고원에 다시 텐트를 치고 밤을 새워야 한다는 생각에 조금 두렵기도 하고 가슴이 뭉클했다.


▲ 드디어 파키스탄을 지나 중국 파미르고원에 닿았다. 거대한 풍경 속을 홀로 달린다.
▲ 몽골리언 유목민 자녀들.
출국심사가 시작되자 파키스탄 출경 관리원이 열 지어 늘어선 사람들에게 일일이 짐을 풀라고 지시하고 내용물을 샅샅이 조사했다. 어떤 때는 송곳으로 가방 바닥을 찔러보기도 했으며 심지어는 조금만 의심이 든다 싶으면 가위로 자르기도 했다. 아마도 양국 간 마약거래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엄격한 검사가 이루어지는 것 같았다. 내 앞에서 검사를 받은 독일과 이탈리아 청년은 별반 조사를 받지 않고 그대로 통과했다.

마침내 내 차례가 와서 나도 그러려니 했는데 자전거와 배낭을 보더니 우선 내 위아래를 훑어보면서 배낭 안에 있는 걸 다 꺼내놓으라는 것이 아닌가? 찜찜한 마음에 나는 배낭을 풀었다. 하지만 배낭 안에 있는 게 뭐 별 것 있겠는가. 배낭 안에서 빨지 않은 옷들과 먹다 남은 비상식량 등 내용물에서 나는 구린 냄새가 역겨웠던지 얼굴을 옆으로 돌리며 빨리 짐을 싸라고 한 후 다음 사람을 불렀다.

밖으로 나와 자동차 좌석을 확인하고 자전거를 차의 지붕에 실었다. 여기서부터 국경이 있는 쿤자랍까지는 누구나 예외 없이 버스로만 이동해야 했다. 소스트에서 시작해 쿤자랍까지는 우리나라로 말하자면 비무장지대(DMZ) 같은 파키스탄과 중국 측의 국경 완충지대로서, 이 구역은 특별한 허가증이 없이는 통과할 수 없으며 반드시 지정된 차량으로만 이동해야 하는 구간이었다. 짐을 다 싣자 나를 도와준 파키스탄 사람이 가까이 오더니 손을 내밀었다. 짐 싣는 데 도와줬으니 돈을 달라는 얘기였다. 얼마냐 물으니 100루피라 했다. 평소 같았으면 무슨 100루피냐고 하면서 따졌겠지만 그동안 아껴 쓴 덕분에 루피도 많이 남았겠다, 덤으로 50루피를 얹어주었다.

쿤자랍 패스를 오르는 길은 곳곳이 붕괴되고 유실되어 어떤 곳은 모두 내려서 한참을 걸어간 후 다시 차에 타고 통과해야 했다. 멀리 산등성이에는 뿔이 긴 야생 마르코폴로 영양들이 풀을 뜯다가 우리가 지나가는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바람은 몹시 차가워 손이 시릴 정도로 추워졌다. 그도 그럴 것이 해발 4,300m 이상을 올라왔으니 기온이 내려가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산은 짙은 군청색 잉크를 엎질러놓은 것처럼 푸른빛이 유별났다. 원래 한 곳에 몰입하면 바보 같은 표정으로 변하는 나는 눈에 초점을 잃고 멍청한 모습으로 파노라마처럼 흘러가는 풍광을 지켜보았다.

고원은 8월 말이 되면 눈이 쌓이기 시작한다. 그렇다보니 이곳에서 유목을 하는 사람들도 8월 이후로는 서서히 짐을 챙겨 설선 아래로 이동해야만 한다. 중국 측 국경을 넘어서자 곧바로 중국 공안과 군인들이 합동으로 우리의 짐을 검사하기 시작했는데 파키스탄보다 한술 더 떴다. 대부분 파키스탄 사람들은 가지고 있던 큰 덩어리의 짐들을 모두 풀어헤쳐야 했다. 자전거 여행자인 내게는 예외적으로 간단히 배낭을 검사했다. 짐 검사는 장시간 계속되었으며 예전과는 달리 관광객이나 상인들이 국경 근처로 카메라 렌즈를 들이대는 것을 엄격히 제한했다. 디지털 카메라의 경우 하나하나 사진을 검사해 자신들이 생각하기에 보안상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진들은 모두 지워버렸다.

▲ 나들이 다녀오는 유목민 가족.
▲ 유목민들의 전통적인 난 굽기.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의 말을 이해하다

겨울 동안 고원에 쌓인 눈은 5월 초순이 되어서야 조금씩 녹기 시작하여 6월이 오면 비로소 평지의 눈이 완전히 녹고 풀들이 돋아나 초원의 면모를 갖춘다. 그러면 양들을 끌고 낮은 곳으로 내려갔던 유목민들이 높은 곳으로 양떼를 몰고 이동하기 시작하며 조금 낮은 지역에서는 경작지에 밀 씨를 뿌린다.

따라서 이곳을 지나던 상인들이나 구법승들은 5월 중순에서 9월 말까지만 이 구간을 통과할 수 있었다. 수년 전에 아프가니스탄의 발크를 들른 적이 있었다. 발크도 바로 파미르고원으로 오르는 길목인데 바로 그곳에서 구법승 혜초가 파미르의 눈이 녹을 때까지 머물렀다는 기록이 남아 있었다.

쿤자랍에서 서서히 낮아지는 고도는 4,000m에 근접해서는 고원이 끝나는 타클라마칸까지 거의 고도 변화가 없이 평원이 이어진다. 풀들은 이끼와 더불어 평원을 가득 덮고 작은 내를 따라 흐르는 물은 여러 지류들을 합하여 고원의 평원지대를 흐른다. 이 물들이 결국 한 데 합해져서 카라쿨에 이르러서는 커다란 호수를 만들고 다시 넘쳐 타클라마칸의 카슈가르로 달린다. 고원이 워낙 넓고 방대하다 보니 자전거로 달려서는 한참을 가도 유목민을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그 이유로 말하자면 초원을 지키며 유목이나 농사를 짓던 젊은이들이 힘든 유목생활 대신 쉽게 돈을 버는 방법과 문화생활을 동경한 나머지 너나 할 것 없이 도시로 내뺐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외진 곳의 유목민 가옥을 찾아가 보면 대부분 나이가 든 사람들이 초원을 지키고 있었다.

▲ 쿤자랍패스에서 바라본 고원의 봉우리들.
타슈쿠르간은 동서의 교역을 담당했던 엄청난 넓이의 초원을 간직한 파밀의 중요한 도시이다. 고대 왕국이 있었던 이곳에는 성곽이나 삶의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 있으며 아직도 넓은 초원지대를 중심으로 많은 위구르 유목민들이 살고 있다.

예부터 이곳 사람들은 겉으로는 대륙의 지배를 받았지만 워낙 독립심과 자립심이 강한 사람들이다 보니 실제적으로는 이곳 특유의 종교와 문화, 언어, 사는 방식 등을 지금까지 잘 보전하고 있다.

인종은 보기와는 다르게 매우 다양한데 이곳이 위구르의 터전임에는 분명하지만 현재 인종적으로는 타지키스탄인들이 더 많다고 한다. 다음으로 위구르와 몽골 계통이 뒤를 이으며 이들 다양한 인종들이 코란을 읽으며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는 지역이다. 또한 파키스탄으로부터 국경을 넘은 여행자들이 정식으로 중국 입경 스탬프를 받는 중국 변방의 최서단에 있는 군사적 요충지이기도 하다.

이따금 마을을 만나기도 했지만 음식점이나 상점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다만 민가에 들러 물 정도는 얻어 마실 수 있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초원이 보이다가도 그곳을 벗어나면 다시 황무지가 나타났다. 곳곳에 묘지들이 보였는데 최근에 생긴 묘지가 있는가 하면 아주 오래된 묘지들도 보였다. 이곳은 강수량이 적고 건조한 지역이기 때문에 흙으로 지은 구조물들이 수백 년을 가도 허물어지지 않고 그대로 보존된 경우가 많았다.